[번역] 퀴어 억압은 자본주의의 심장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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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번역] 퀴어 억압은 자본주의의 심장에 새겨져 있다

  • 강성윤
  • 등록 2026.04.19 22:25
  • 조회수 16,640

LGBTQ+ 억압은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 구조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사회주의만이 퀴어 해방, 나아가 모두의 성적 해방을 위한 토대를 만들 수 있다.

 

 

2004년에는 미국인의 60퍼센트가 동성 결혼에 반대했다. 지금[2019년]은 61퍼센트가 동성 결혼을 지지한다.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던 후보 중 한 명은 커밍아웃한 게이 남성이었고, 오늘날 젊은 세대의 절반 이상은 자신을 비이성애자로 정체화한다.

 

굉장한 변화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치 권력의 최상부에 올라선 이들과 여전히 억압으로부터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이들의 격차는 엄청나게 크다. 퀴어가 CEO가 되고 권력의 중심에 진입하는 바로 그 나라에서, 흑인 트랜스 소녀는 생존을 위한 성노동에 내몰리고 레즈비언은 ‘교정’이라는 이름으로 강간당하며 트랜스 여성 록사나 에르난데스는 이민자 구금시설에서 목숨을 잃는다. LGBTQ+ 억압의 위력은 여전히 무시무시하며, 트랜스, 유색인, 빈곤층에게 특히나 강력하다. 우리가 쟁취한 권리와 소수의 특권은 다수의 비참한 현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이 모순을 앞에 두고서 LGBTQ+ 해방은 사다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새로운 권리를 하나씩 쟁취할 때마다 퀴어는 해방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것일까? 아니면 LGBTQ+ 억압은 사회 구조 자체에 각인되어 있어서 자본주의 체제 전체를 깨부수지 않는 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일까?

 

노동 착취에 기반한 체제인 자본주의는 광범위한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열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LGBTQ+ 정체성 자체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산물이다. 그러나 이 체제는 자유, 해방, 정의라는 자신의 약속을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행할 수 없다. 퀴어에게 가해지는 LGBTQ+ 억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 모두의 산물이며, 특히 노동 소외와 핵가족이 요구하는 경직된 젠더 역할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LGBTQ+ 해방, 더 나아가 넓은 의미의 성적 해방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억압은 이 체제 안에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새겨져 있다. 반면에 사회주의는 LGBTQ+ 억압을 종식시킬 물적 토대를 제공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구성

 

어떤 인권 옹호자들은 LGBTQ+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으며, 우리는 “이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존 디에밀리오는 이 같은 입장을 “영원한 동성애자라는 신화”라고 부르는데, 현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동성 간 욕망과 젠더 유동성은 역사 전반에 걸쳐 전 세계 다양한 문화권에서 존재해 왔지만, 그것의 사회적 역할과 수용 정도는 시대에 따라 극적으로 달랐다. 어떤 문화에서는 동성 간의 성적 관계가 의례적 역할을 수행했고, 다른 문화에서는 논바이너리적 존재가 특별한 능력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이전 유럽 사회에도 “크로스 드레싱 금지법”과 수많은 남색(Sodomy) 금지법이 존재했지만, 봉건제 하에서는 공고한 LGBTQ+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았고 범죄화된 행위가 있을 뿐이었다. 디에밀리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 노동 체제야말로 “20세기 후반의 수많은 남성과 여성이 스스로를 게이라 부르고, 자신들이 유사한 남녀 공동체의 일원임을 인식하며, 그 정체성을 기반으로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런 이유에서, 역사를 되돌아보며 전혀 다른 맥락과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 LGBTQ+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 『역사에서 감추어진 것들(Hidden from History)』 서론에서 주장하듯이,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동성애자 역할은 근대에 발전한 것인데, 이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의 동성애자 역할은 아니다.”

 

역사적 고찰의 대상은 퀴어 정체성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근대적 가족의 형성, 근대적 젠더 역할, 이성애라는 개념 자체 역시 역사적 구성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구성물들을 낳는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젠더·섹슈얼리티·가족·사랑이 조직되는 방식은 상당 부분 인간의 생산 관계에 기반한다. 우리가 먹을 것을 확보하고, 공동체를 조직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쏟는 방식을 결정하는 그 관계 말이다.

 

엥겔스의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은 생산의 발전과 가부장적 가족의 발전을 연결하고, 사유 재산이야말로 남성에 대한 여성 종속에 기반한 가족 단위를 만들어 낸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엥겔스가 부정확한 인류학 연구를 바탕으로 삼은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의 흐름에 대한 전반적 성찰은 옳다. 가정 대신 작업장이 생산의 장이 되면서, 자본주의는 새로운 종류의 가족 관계를 탄생시킨다. 가족에게 필요한 재화가 한때는 가정에서 생산되었지만, 이제 다른 곳에서 생산되어 구매된다. 가정은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 단위로, 노동자를 먹이고 입히며 아이들을 노동자 계급의 일원으로 길러내는 장소로 남는다. 한편 남성은 원자화된 임금 노동자가 되어, 고향을 떠나 어디서든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게 되었다. 가부장제는 이 배치 속에 각인되어 있으며, 여성은 임금 노동이라는 짐을 지든 아니든 간에 가정 내 무급 노동을 떠맡는다.

 

이 사적 소유와 노동력 판매 체제로부터 근대 민주주의가 출현했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 노동 시장에서는 모든 이가 평등하며 누구에게든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자유”가 있다는 관념도 생겨났다. 존 디에밀리오가 주장하듯 자본주의의 선택 개념은 가족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파트너십은 점차 욕망과 친화성이라는 근대적 이상에 기초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선택”과 “자유”는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자본주의 역사 전반에 걸쳐 “만인을 위한 자유와 평등”이 의미하는 것은 곧 법에 새겨진 인종 차별, 성차별, 동성애·트랜스 혐오였고, 이것은 국가의 억압 기구에 의해 강화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학교, 가족, 교회 같은 사회 제도에 의해 제한되며, 이 제도들은 사람들에게 “허용 가능한” 성적·젠더 규범을 주입하려 한다. 선택의 자유는 경찰, 감옥, 법률 같은 억압적이고 인종주의적인 기구에 의해서도 제한되며, 자본주의의 경직되고 잔혹한 경쟁 구조 안에 가두어져 있다. 사회적 낙인과 억압 또한 자유를 제약한다.

 

식민주의는 젠더와 성적 역할을 가장 잔혹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강제했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원주민 공동체에 이식되었고 토지는 약탈당했으며 원주민은 값싼 노동력으로 사용되었다. 식민자들은 군대를 동원해 논바이너리 구성원들을 표적 공격하고, 원주민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제하고, 기숙 학교에서 원주민에게 규범적 성별 역할을 주입하는 등 집단 학살에 준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나 삶에서 선택할 권리에 관한 자본주의적 관념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동성 파트너십이라든가 출생 시 지정된 것과 다른 젠더를 “선택”할 가능성을 열었다. 존 디에밀리오의 주장에 따르면, “가구에서 경제적 자립을 박탈하고 섹슈얼리티와 출산의 분리를 촉진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일부 남성과 여성이 동성에 대한 성애적·감정적 끌림을 중심으로 개인의 삶을 조직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냈다.” 마찬가지로 수전 스트라이커(Susan Stryker)는 디에밀리오가 자본주의 체제의 “동성애자”에 대해 묘사한 것과 동일한 과정이 트랜스 구성원들에게도 적용되었다고 『트랜스젠더의 역사(Transgender History)』에서 주장한다. 사람들이 공동체 바깥으로 이주할 자유를 갖게 되면서 출생 시 지정되지 않은 젠더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전진하는 과정에서 피억압자들은 자본주의가 약속한 평등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불평등을 나타내는 명백한 법률적 지표 상당수는 피억압 민중의 운동으로 타파되었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여성과 유색 인종은 법 앞의 평등을 거의 완전히 쟁취해 냈다. 그러나 법적 평등이 곧 삶의 평등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구조 속에 새겨진 억압을 유지하면서도 형식적 평등은 기꺼이 양보하는 경우가 많다. 인종 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트랜스 혐오가 바로 그렇다.

 

자본주의적 재생산과 성적 비참함

 

자본주의에서 가족 단위는 선행하는 가부장적 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족은 이성애 규범적 젠더 역할에 기초하는데 이 역할은 “과학”과 “생물학”을 근거로 삼는다고 여겨진다. 여성은 요리, 청소, 육아, 빨래 같은 재생산 노동에 맞는 생물학적 성향을 지닌다는 것이다. 무급 가사 노동에서 “여성의 역할”은 자본주의의 톱니바퀴를 돌리는 데 필수적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성별 역할, 특히 가족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무급 육아와 가사 노동에 막대한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다. 자본가가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 비용을 직접 지불해야 한다면 이윤이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어머니이자 돌봄 제공자가 될 운명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동성 커플, 출산하지 않는 여성, 전업주부 아버지, 그 외의 비전통적 본보기들까지 우리 사회에 반례가 넘치도록 있는데도 끈질기게 지속되어 왔다. 자본주의 태동기부터 흑인 여성은 흑인 남성과 나란히 가장 혹독하고 가혹한 노동에 내몰렸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이 이데올로기는 지속되어 왔다. 오히려 이 사실은 흑인을 병리화하는 데 이용되어, 제도적 인종주의에 맞서 싸우거나 배상을 요구하는 대신 핵가족을 통해 흑인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 생겨났다. 여성 해방 운동과 LGBTQ+ 권리 운동 이후 가족과 젠더 역할이 좀 더 유동적으로 변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스–이성애 규범적 가족 모델은 여전히 건재하며 퀴어 억압을 재생산하고 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낭만적 가족 파트너십이 사랑을 바탕으로 선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생활비를 나누어 지불할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는 막대한 경제적 유인이 존재하여, 운 좋으면 지루하고 최악의 경우 폭력적인 관계에 매이게 된다. 이는 동일 노동에 더 적은 임금을 받는 여성에게, 특히 유색 인종 여성과 노동자 계급 여성에게 더욱 절박한 현실이다. 이 구조는 각 가족이 사회 전체의 최선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만의 최선을 위해 행위하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복무한다.

 

자본주의는 가족의 경제적 필요와 더불어 낭만적 가족 이데올로기를 퍼뜨린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올바른” 젠더 역할이 주입되며, 우리는 사랑하는 파트너가 자본주의의 소외를 치료하여 우리를 온전하고 완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세뇌당하는데, 이것은 특히 여성을 겨냥한 메시지다. 전통적 가족 단위는 소외되고 고립된 세계 한가운데에서 지지의 공간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일부일처제가 강제하는 성적 비참함의 단위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 성 연구자 빌헬름 라이히는 『성 혁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결혼 제도의 모순은 결혼의 성적 이익과 경제적 이익이 충돌하며 비롯된다…완전히 충족된 성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 결혼 도덕의 조건(평생 오직 한 명의 파트너)에 복종할 가능성은 낮으므로, 즉 성-경제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첫 번째로 요구되는 것은 성적 욕구의 고질적인 억압, 특히 여성에 의한 억압이다.

가족은 우리의 성적 욕망과 충돌하는 필수적 경제 단위다. 라이히의 설명처럼 가족 구조는 욕망을 억압하기 위한 구조이며, 여기에 나는 동성 간 욕망 및 젠더 탐색에 대한 억압을 덧붙이고 싶다.

 

그러나 모범적인 “전통적” 가족이란 노동자 계급 대다수에게 신기루에 가깝다. 노동자 계급은 물려줄 사유 재산이 없고, 노동 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여성에게는 경직된 성별 역할을 강제할 수 없으며, 너무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하거나 동생들의 부모 역할을 떠맡아야 하는 노동자 계급 아이들에게는 “순수한 어린 시절”이 없다. 대량 투옥, 추방, 서구 제국주의가 강제한 이주로 인해 해체된 가족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부유한 여성은 관리자 역할을 하면서 다른 여성들(대개 흑인, 갈색 피부, 이민자 여성)을 조직해 가정 내 가사 노동을 맡긴다. 여성 해방 운동이 전개되고 (남성의) 가족 임금이 해체되면서 점점 더 많은 여성이 노동 시장에 진입하는데, 이것이 자본가의 이윤 추구와 결합하면서 전통적 가족 단위는 무너지고 있는 듯하다.

 

자본주의가 핵가족 구조에 의해 떠받쳐지는 동시에 핵가족 구조를 파괴한다는 모순은 “가족 수호” 이데올로기가 출현하는 조건이 되는데, 이 같은 이데올로기는 대개 가짜 생물학적 결정론에 기반한다. 정치인들은 부모에게(보통 어머니 또는 흑인 아버지에게) 자녀와 더 긴 시간 함께하지 않는다고 훈계하고, 우파는 가족의 해체를 애도한다. 국가는 총기 난사, 부실한 교육, 아동 비만 증가 등 모든 사회적 병폐의 원인을 가족의 붕괴로 돌린다.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가족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도, 자본주의적 경제 조건은 언제나 가족을 잠식했으며 현재의 사회적 재생산 위기 또한 자본주의 위기의 직접적 산물이라는 사실은 외면한다.

 

LGBTQ+ 억압과 부르주아 가족

 

LGBTQ+는 가부장적 가족 단위의 근간을 이루는 생물학적 결정론이 틀렸음을 그 자체로 입증한다. 직업을 가진 여성들, 입양, 체외 수정 등의 사례가 이미 생물학적 결정론의 기만성을 입증하지만, LGBTQ+는 “전통적 가족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우파에 의해 특별히 표적이 되어 왔다.

 

그리고 어떤 차원에서는 그것이 사실이다. LGBTQ+는 출생 시 여성으로 지정된 사람이 반드시 여성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 여성인 사람이 반드시 남성에게 끌리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자녀를 보살피는 어머니일 필요도 없고, 집안을 돌보도록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존재도 아니다. 바로 이 불편한 사실들 때문에 자본주의에게는 LGBTQ+를 억압하고 주변화하면서 우리가 “정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수많은 제도들은 전통적 가족 및 젠더 모형에 특히 깊이 빠져 있고, 일부 동성 커플을 주변부에 받아들인 것만으로는 이 모형이 유의미하게 대체되지 않았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의류 매장의 아동용품 코너를 걷기만 해도 젠더 역할 고정 관념이 여전히 만연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독교는 가족 단위가 중요하다고 설교하고, 대부분의 교회에서 동성 관계는 죄악이다. 학교 역시 젠더 규범을 떠받치는 데 일조한다. 이를테면 학교가 정의한 남아와 여아 구분에 따라 화장실 앞에 줄을 서도록 요구하며, 많은 학교는 트랜스 아동들이 자신의 젠더에 맞는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류에 편입한 LGBTQ+ 구성원들은 가족을 파괴하지 않았다. 게이와 레즈비언 정체성이 부분적으로 정상화되었지만, 동성 간 욕망과 젠더 탐색을 억압하는 체계는 여전히 굳건하다. 물론 이 정상화는 게이 크루즈, 프라이드 깃발, 레인보우 아디다스 스니커즈에 이르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틈새 시장을 창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정상화는 근저의 시스-이성애-가부장적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한에서만 허락된다. 말하자면 가족 단위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구성 요소로 기능하는 한에서, 두 남성의 결혼도 허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선택적 정상화는, 경찰에 저항하는 스톤월의 뿌리로부터 급진적 퀴어 운동의 노골적 섹슈얼리티와 이성애 규범성 거부에 이르기까지 LGBTQ+ 운동의 가장 전복적인 측면들을 길들이면서 작동했다. 정상화는 또한 퀴어들의 사교를 위한 비상품화된 공간을 파괴하면서 진행되었다. 뉴욕의 더 피어스(The Piers)처럼 주로 유색 인종 퀴어들이 어울리고 유혹하고 섹스하던 장소들 말이다. 피어스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주로 유색 인종 퀴어가 모이던 공공 공간은 경찰의 단속과 젠트리피케이션의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자 장 니콜라가 주장했듯, “부르주아지가 게이에게 이성애자와의 형식적 평등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심지어 동성 커플을 제도화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해도—그럼으로써 게이 정체성의 환상은 강화된다—실질적 평등을 확립하기란 무한히 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사회 유기체 전체 내에 동성애적 구성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 텐데, 이는 남성적 지위와 남성성에 대한 너무나 급진적인 도전이어서 가족과 부르주아 문화 전체의 근본적 격변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LGBTQ+의 욕망과 젠더를 사회에 온전히 통합하려면, 일부 사회적 태도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 체제 자체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만드는 성적 비참함

 

그러나 LGBTQ+ 억압은 자본주의적 사회 재생산의 일부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에 새겨진 성적 비참함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 체제는 자기 몸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해 시장에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절대다수에 대한 착취에 의존한다. 이것이 인구 대다수의 소외와 성적 비참함의 물적 토대다.

 

마르크스가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설명하듯이, “노동은 노동자에게 외적이다. 즉, 노동은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속에서 자기를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소모시키고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이것이 소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 창의성, 생각을 부정하고 억누르고 무시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노동자는 자신의 몸과 정신을 회복 불가능한 방식으로 소진시키면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무엇보다 가장 고되고 소외된 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은 흔히 미등록 이주민과 유색 인종이다. 젠더적·성적 비참함은 이 같은 일상의 물적 조건에서 파생된다. 즉, 하루의 대부분을 바치는 소외된 노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외는 작업장에서 멈추지 않는다. 소외는 우리의 삶과 정신 전체를 지배하며, 섹슈얼리티 안으로까지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시간 부족 문제가 있다. 일하고, 쉬고, 아이를 돌보고, 성적 관계든 아니든 친밀한 관계를 맺기에 충분한 시간이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쾌락을 부정하면서 소외된 노동으로 점철된 하루를 보내고, 퇴근 후에 기진맥진한 몇 시간 동안 그 소외를 깨고 자기 자신이나 타인과 의미 있는 유대를 쌓기란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노동 시장은 우리 몸을 망가뜨리고 시간을 잠식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기구는 특정한 젠더 표현과 수행을 노동 시장의 요구와 결부시키며, 이를 생산적 시민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간단한 예시를 하나 들면, 다음 두 광고의 시간 차는 불과 10년이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1943년 J. 하워드 밀러가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을 위해 제작한 포스터다. 제2차 세계대전 한복판에서 여성 노동자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걸 여자도 열 수 있다고요?”는 1953년 알코아 알루미늄의 광고다.

 

첫 번째 광고는 수많은 남성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상황에서 산업 노동에 여성이 필요했던 역사적 시기를 반영한다. 두 번째 광고는 저가 상품의 대량 생산에 기반한 새로운 경제의 산물로, 노동 시장에서 축출된 여성에게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불과 10년 사이에 여성은 근육을 자랑하던 존재에서 케첩 병도 열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마찬가지로, 가족을 위해서 불평 없이 희생하는 남성 가장이라는 구성물은 자본주의에 막대한 이윤을 안겨 주었다. 이를테면 앨런 시어스(Alan Sears)가 『몸의 정치(Body Politics)』에서 설명하듯, 20세기 초 포드는 “부양 가족을 먹여 살리는 능력과 힘들고 고통스럽고 지루한 노동을 견디는 능력에 기반한 남성적 자부심”을 고취했다. 인종화된 젠더 구성물 역시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친다. 흑인 남성을 범죄자로, 흑인 여성을 강인한 존재로 구성함으로써 교도소 체제 안팎에서 극도로 착취당하는 노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젠더 역할에 순응하지 않는 것은 종종 LGBTQ+에 대한 사회적 징벌, 때로는 물리적 징벌을 의미했다. 이 경직되고 사회적으로 강요된 젠더 역할은 개인적 표현이나 탐색을 가로막는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특히 여성, LGBTQ+, 여성이자 LGBTQ+인 우리에 대해서 젠더적·성적으로 억압하는 체제의 일부다.

 

자본주의 특유의 자유와 억압의 혼합물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성적 비참함의 체계를 만들어 낸다. 1960년대 후반 장 니콜라는 “동성애자”에 대한 낙인이 퀴어를 노동 시장에서 축출하는 역할을 하며, 이 원리가 “동성애적” 욕망을 스스로 억누르는 “이성애자”로 정체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규율 효과를 갖는다고 썼다. 결국 사회가 규정한 협소한 역할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류 노동 시장에서 주변화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도 젠더 비순응적인 사람들은, 심지어 일부 게이나 레즈비언까지도, 특정 직종에서 배제되고 승진을 거부당하며 직장에서 계속 차별받는다. 사회적 기준에 맞지 않는 많은 이들은 일자리에서 완전히 거부당하는데, 수많은 유색 인종 트랜스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유색 인종 트랜스는 흔히 실업 또는 불완전 고용 상태의 산업 예비군으로 남는다. 이 사실은 모든 이의 욕망을 규율한다. 광범위한 젠더적·성적 경험이 인구 대다수에게 차단되고, 계속해서 LGBTQ+를 주변화함으로써 이러한 경험이 수치심과 비밀의 영역으로 밀려난다는 뜻이다.

 

사회주의와 성적 해방

 

LGBTQ+ 억압은 핵가족 단위와 근대 노동의 소외를 통해 강요되는 일반화된 비참함과 깊이 연관된다. 일부 게이 남성이(그리고 그보다 훨씬 적은 수의 레즈비언이) 기업과 정치의 영역에서 사다리를 오른다 해도, LGBTQ+ 주변화는 자본주의의 생산·재생산 관계에 각인되어 있으므로 점진적인 권리 축적만으로는 LGBTQ+ 해방에 불충분하다. 아무리 많은 법이 통과되더라도 LGBTQ+ 억압은, 더 넓게는 섹슈얼리티의 억압은, 이 체제 안에서 해결될 수 없다. 따라서 LGBTQ+ 해방을 위해서는 가족의 해체와 소외된 생산으로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해체가 모두 필요하다. 사회주의는 퀴어 해방의 필수 조건이다.

 

이미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족의 종식을 사회주의 정치의 중요한 부분으로 제시했다. 사회주의가 사랑이나 로맨스의 종말을 요구한다는 뜻은 아니다. 경제적·정치적 단위로서의 가족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누구의 생존도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좌우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가족의 종식이란 곧 파트너 없이도, 혹은 해로운 파트너를 떠나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물적 안전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볼셰비키는 온 힘을 다해 이 문제에 매달렸다. 그들은 새로운 물적 토대 위에 새로운 사회가 형성됨에 따라 가족이 국가처럼 차츰 소멸하기를 기대했다. 이런 의미에서 적어도 당이 스탈린화되기 이전까지의 볼셰비키는 부르주아 가족 구조를 구식으로 만들겠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그들은 진부한 가사 노동을 개인의 손에서 거두어 (이제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국가의 손에 맡기고자 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정치는 여성에 대해서든 LGBTQ+에 대해서든 볼셰비키의 정치와는 전혀 달랐다. 가족의 종식에 관해 쓴 니콜라이 크릴렌코(Nikolai Krylenko) 같은 이론가들은 체포되어 살해되었고, “남색”과 성노동은 범죄화되었다. 스탈린 정부는 전통적 성별 역할을 강제하기 시작했다. 1944년 스탈린은 “모성 영예 훈장(Order of Maternal Glory)”을 제정해 출산한 자녀 수에 따라 여성을 서열화했다.

 

볼셰비키당 내 좌익 반대파(Left Opposition)의 지도자 레온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이러한 비판은 제4인터내셔널의 형성 과정에서 명확히 표현되었다. 트로츠키는 『이행 강령』에서 이렇게 쓴다.

기회주의 조직들은 본성상 노동 계급의 상층부에 관심을 집중하며, 따라서 청년과 여성 노동자를 무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쇠퇴는 임금 노동자이자 가정주부인 여성에게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한다. 제4인터내셔널의 각 부문은 노동 계급의 가장 착취받는 층에게서, 즉 여성 노동자들에게서 지지 기반을 찾아야 한다.

트로츠키는 가족의 종식과 가사 노동 사회화를 인간 해방의 필수 조건으로 본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초기 볼셰비키들을 이어 주는 고리다. 이 같은 사회에서는 예컨대 누군가에게 저녁을 만들어 주는 일이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의 표현이자 하나의 선물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젠더 역할과 어쩌면 젠더 그 자체마저 물적 토대를 상실한다. 젠더 역할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사라지면서 다수의 젠더, 젠더의 부재, 유동하는 젠더, 이 유동성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생산 노동이 재조직되는 과정 또한 성적 소외의 종식에 기여할 것이다. 기술은 우리 모두가 더 적은 시간 일하면서도 모든 이에게 충분할 만큼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한다. 현재 실업 상태거나 수감 중이거나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를 고려하면 이 점은 더욱 명백하다.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더 이상 직장에서 질식당하지 않는 우리의 시간과 창조적 잠재력을 해방시킬 것이다.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이 같은 미래를 구상했다. “필요 노동에 전용되어야 하는 본능적 에너지의 양은 (노동 자체가 완전히 기계화되고 합리화되어) 매우 적어질 것이므로, 외부적 힘에 의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광범위한 억압적 제약과 변형이 붕괴할 것이다. … 생의 본능인 에로스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해방될 것이다.” 단축되고 덜 고된 노동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과 연결되었다고 느끼게 만들 것이며, 휴식하고 유혹하고 섹스할 시간을 줄 것이다. 완전한 성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결코 구경하지 못할 이윤을 위한 임금 노동의 폭정으로부터 우리의 시간이 해방되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생산과 재생산 영역에서의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다.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욕망 위에 세워진 사회는, 무의미한 노동 대신 하루 대부분을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에 쓸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모든 기술을 사용할 것이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주장하듯이 공산주의는 구속 없이 이것저것 해 볼 자유를 약속한다.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돌보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쓰지만, 사냥꾼이나 어부나 목동이나 비평가가 되지는 않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이 자유는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에도 적용되어, 낮에는 부치 다이크, 밤에는 드래그 퀸, 주말에는 도미나트릭스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의 폐지,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와 함께 젠더 역할이 불필요해지고 자유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남에 따라,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가능성, 우리의 젠더적·성적 해방의 가능성은 무한해진다.

 

사랑과 섹슈얼리티를 핵가족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우리는 연대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볼셰비키 지도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날개 달린 에로스에 길을(Make Way for the Winged Eros)』에서 이 발상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기심이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공동체적 사랑의 토대 위에 사회가 건설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쓴다.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는 동지애와 연대라는 원칙 위에 건설되고 있다. 연대란 공동의 이익에 대한 자각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집단의 구성원들을 잇는 지적·정서적 유대에도 달려 있다. 연대와 협력 위에 사회 체제를 건설하려면 사람들이 사랑과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노동자 계급의 모든 구성원이 같은 계급의 다른 구성원들의 고통과 필요에 응답하고, 타인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고 고무하고자 한다. 이 모든 ‘따뜻한 감정들’—섬세함, 연민, 공감, 호응하는 마음—의 원천은 하나다. 이 감정들은 협소한 성적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사랑의 여러 측면이다.

사랑과 욕망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이 미래 각본에서,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작동할까?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정체성들을 위한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될까? 아니면 이름 따위는 전혀 필요 없게 되고, 로자 룩셈부르크가 전망했듯이 “모든 인간이 사회적으로 평등하고, 인간적으로 다르며, 완전히 자유로운 그런 세계”에서 살게 될까?

 

레프트보이스(Left Voice)에 2019년 7월 5일 게재된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Tatiana Cozzarelli

번역: 강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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