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공허한 농담에 맞서서, 총회는 진정한 노동자 권력의 실질적 토대 역할을 수행한다. 총회는 노동자의 ‘의견 수렴’을 위한 전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극우와 대결하며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쟁취하는 데 필요한, 강력하고 민주적인 틀을 갖춘 전략 그 자체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인들과 주류 언론으로부터 “민주주의”에 관해 귀가 닳도록 듣는다. 불과 1년 전, 카멀라 해리스는 미국이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주장했다. 한편 트럼프는 두 번째 임기 취임 연설에서 자신이 복귀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자유가 회복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민주당은 트럼프가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외치면서, 자신들이 차악처럼 보이도록 트럼프를 이용하고 있다.
트럼프가 온갖 방식으로 민주적 권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트럼프 이전에는 노동자 계급과 피억압 민중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가 존재했다는 생각은 정말이지 가소롭다.
결국 우리 대다수에게 정치 권력과 진정한 민주주의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일터는 사실상 사장이 권력을 독점하는 독재 체제이며, 선거철마다 던지는 한 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의도된 설계다. 우리가 직장에서, 지역 사회에서, 국가 전체에서 경험하는 것은 실질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반민주주의이며, 블라디미르 레닌이 선언했듯이 “자본주의 하에서 언제나 제한적이고, 왜곡되고, 허위이며 위선일 수밖에 없는, 부자들에게는 천국이요 착취당하는 자들에게는 올가미이자 기만”인 체제인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헤게모니를 장악했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민주적 권리가 일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관대한 체제 덕분이 아니라 민권 운동 같은 계급 투쟁이 지배 계급의 손을 억지로 움직인 결과다. 바로 지금, 이 권리마저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극우 지도자들에게 공격받고 있다. 지배 계급에게 이익이 되기만 하면 이른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우리의 권리가 순식간에 위협받고, 공격당하고, 후퇴할 수 있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인민의 의지를 가장한 계급 지배 기구에 불과하며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대안은 무엇인가? 직접적이고 참여적이며 다수를 주체로 세우는 민주주의를 우리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 계급의 자기 조직화 형태, 바로 총회다.
총회라는 전통을 세움으로써 우리는 극우에 맞서서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정련하는 노동자 민주주의,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트럼프, 이민세관단속국(ICE),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 총회의 힘으로 우리는 개별 노조, 일터, 대학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요구를 쟁취하는 전투적 공동 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
총회란 무엇인가?
총회란 집단 토론, 의사 결정, 행동을 위한 열린 회의 공간이다. 대중 민주주의의 장이자 실질적 권력 기관인 총회는 대부분 투쟁 속에서 자생적으로 출현하며, 일터, 지역, 캠퍼스가 공동의 싸움으로 활성화될 때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폐쇄적 위원회나 의사 결정 기구와 달리, 총회는 해당 투쟁에 영향을 받는 공동체 전체에 열려 있어야 한다. 총회는 산업별·직종별·노조별로 노동자를 고립시키는 자본주의의 인위적 분할을 거부하며, 결과에 이해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을 한곳에 결집시킨다.
예를 들어 지역 총회는 주거, 치안, 상호 부조 문제 등을 다룰 수 있다. 학생들과 교육자들은 자신들의 구체적인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총회를 결성하곤 한다. 그리고 이 형태들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의료 투쟁에서 총회는 병원 노동자, 인근 지역 환자, 그들의 가족 구성원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의 문제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교사 총회에는 학부모와 학생이 당연히 포함될 수 있다. 교육을 위한 싸움은 곧 공동체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투쟁은 서로 중첩된다. 바로 이 점이 총회를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는데, 총회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인위적 분할을 허물고,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을 토론과 의사 결정의 장으로 초대하며, 모두가 각자 기여할 방법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총회는 지역 현안을 다루는 데 한정될 필요가 없다. 뉴욕시의 의료 노동자와 환자들의 총회가 푸드 스탬프 삭감에 항의하는 시위를 결의할 수도 있고, 파업 중인 스타벅스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를 결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층 총회들은 대의원 평의회, 즉 소비에트(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를 통해 힘을 연합해서 더 광범위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다. 여러 지역 총회에서 선출하고 즉시 소환 가능한 대의원들이 소비에트에 모여 시 단위, 지역 단위, 전국 단위로 사안을 조율한다. 이 구조는 기층의 직접적이고 민주적인 통제를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지역의 투쟁들을 결합할 수 있다. 모든 형태의 총회는 고립된 불만 사항들을 모아서 실질적 권력을 향한 집단 기획으로 전환하는 기제다.
총회는 그 밖에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
O 자유롭고 열린 토론
진정한 민주적 의사 결정을 촉진하기 위해, 총회는 보통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상 토론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다양한 정치적 입장, 경향, 분파들이 당면 주제를 둘러싼 토론 및 논쟁 과정에서 총회 전체에 생각과 견해를 제시할 수 있다. 토론의 목표는 단순한 다수결이 아니라, 설득과 논증을 통해 가장 효과적인 행동 방침에 집단적으로 도달하는 것이다.
O 위임을 활용하는 직접 참여
자본주의 하의 일터는 물론 대부분의 노조마저 위계적 조직 구조를 가진 경우가 흔하지만, 총회에서 최고 수준의 의사 결정권과 지도력은 기층 구성원에게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발언하고, 의견을 나누고, 행동을 제안하고, 주요 결정에 투표할 권리가 모든 구성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다는 의미다. 작은 목표를 수립하는 결정이든 파업 여부처럼 큰 결정이든 마찬가지다. 특정 회의(예를 들면 공장에서 사측과의 회의)에 참석할 사람을 총회에서 투표로 선출할 경우 선출된 이들은 총회를 대표하며, 자신의 독자적 판단에 따라 표결하지 않고 총회로부터 부여받은 위임 사항을 수행한다. 이는 관료적 지도부가 흔히 저지르는 밀실 거래를 방지한다.
O 소환 가능한 순환 대의원제
통제되지 않는 소수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떤 대의원이든 총회의 결정을 대변하지 못하거나 총회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경우 총회가 소환하고 교체할 수 있다. 이는 민주제 기층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시행하는 (사실상 과두제인) “대의 민주제”의 구조와 정확히 반대된다. 그리고 동일한 인물이 계속 지도부를 맡지 않도록 소환 가능한 대의원들은 순환 배치된다.
O 다수결 규율
충분한 토론을 거친 후 구성원들이 투표하면 다수의 결정이 총회 전체의 방침이 된다. 반대 의견을 가진 구성원들도 피켓 라인이나 집단 행동 등 공개 행동 중에는 다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기대가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입장을 계속 주장하고 향후 회의에서 다수를 자기 입장으로 설득할 권리를 가진다. 이 원칙을 확장하면, 총회는 자신이 속한 구조에 유기적으로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이를테면 특정한 일터, 학교, 지역의 노동자들이 총회에 참여하기 때문에) 총회의 모든 구성원은 집단적 결정이 “실행”되도록 책임질 뿐 아니라 자신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더 넓은 노동자 대중을 추동하는 역할도 맡는다. 이 같은 제도가 빚어 내는 노동자 대중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만들어 내는 것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헌신적이다.
총회는 혁명 조직이나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될 수 있다. 총회는 전술이 아니라 전략이다. 총회 내부의 민주적 절차는 구성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이들이 직접 참여하도록 설계된, 급진적 민주주의가 생명력을 얻는 공간이다. 겉보기에는 민주적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의사 결정 권한 부여를 위한 민주적 구조가 없는 타운홀 미팅과는 다르다. 이처럼 실질적 권한 없는 대표성이라는 허울이야말로 관료적 지도부가 바라는 것이고, 노조 지도부가 자신들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전술로 타운홀 미팅을 자주 활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 관료적 지도부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총회를 전용하며, 세력 관계를 뒤흔드는 조직화라는 총회 본연의 잠재력은 가로막히고 만다.
총회 구조를 통한 건설과 조직화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즉 반민주주의)로부터 진정한 민주주의,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혹은 노동자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행하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총회는 노동자 계급의 자기 조직화를 발전시키고 우리의 투쟁 방법을 개발하는 수단이다. 총회는 투쟁에서 계급적 독립성을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며, 우리를 인위적으로 분열시키고 투쟁을 가로채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제도로 돌려보내려는 부르주아 지도부 및 노조 관료들의 포섭에 저항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현실 세계의 총회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직접적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소비에트 국가를 통해 보여 주었다. 작가 존 리드가 기록했듯이, “러시아 전역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고도로 복잡한 정치 구조”가 출현했으며, 그것은 “절대다수 인민의 지지를 받았고, 역사상 그 어떤 신생 인민 정부 못지않게 잘 작동”하고 있었다. 이 구조 안에서 노동자, 병사, 농민의 평의회(즉 총회)가 일터와 지방 자치 차원에서 모두 존재하며 노동과 생활에 관련된 결정을 내렸다. 이 과정은 민주적이었고, 소수의 자본가가 아닌 다수를 위해 무엇을 생산할지 결정했다.
동시에 “지역 소비에트들은 대표자를 선출해서 전국 소비에트에 보냈고, 이 전국 소비에트는 볼셰비키 지도부가 외교 정책 등 전 러시아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으로 고심할 때 방향을 제시하며 힘을 보탰다.” 리드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발전한 이 같은 구조가 역사상 가장 민주적이고 대응력 있는 체제 중 하나였다고 기록한다.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대규모로 실현된 총회의 진정한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좋다. 하지만 그건 1917년 이야기 아닌가? 오늘날의 총회는 어떤 사례가 있는가?”
좀 더 작은 규모의 사례를 보자면, 2001년 아르헨티나 금융 위기 직후 노동자들은 사논(Zanon)이라는 세라믹 타일 공장을 점거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곳을 직접 관리·운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총회는 의사 결정의 장이 되었고, 늘 그렇듯 전투적인 평조합원을 포섭하려는 노조 관료의 시도에 맞서 싸우기 위해 활용되었다.
2006년에는 멕시코 오아하카에서 총회가 생겨났다. 교원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 경찰은 평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노동자들이 반격에 나서 경찰을 도시 밖으로 몰아냈다. 수개월 동안 “노동자 계급과 교원 노조를 포함한 지역 공동체 단위들이 오아하카 민중 총회(APPO)라고 알려진 광범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대규모 민주적 총회를 통해 도시를 운영했다.”
좀 더 최근인 2024년에는 뉴욕시립대학교 교직원 노조(PSC-CUNY) 소속 평교원 노동자들이 시티칼리지(CCNY) 가자 연대 캠프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캠프를 조직한 학생들의 다섯 가지 요구 사항을 지지할 것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학생, 교원, 지역 주민 모두가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에 맞선 조직화를 어떻게 진전시킬 것인지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논의할 수 있었다.
같은 해에 미국 최초의 약물 과다 복용 예방 센터인 온포인트NYC(OnPoint NYC)의 조직된 노동자들이 사측의 직장 폐쇄에 대응하여 건물 밖에 자체 진료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한 것도 부분적으로는 총회의 힘이었다.
최근 디트로이트에서는 “민중 총회”가 결성되어 수백 명의 사람들이 ICE와 트럼프 행정부에 맞설 전략을 토론하고 행동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왜 지금 총회인가?
오늘날 세계 정세는 요약하면 군사주의, 제국주의, 위기다. 극우가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병원에서 파업을 조직하는 간호사들이든 이탈리아에서 전국 총파업을 촉발한 항만 노동자들이든, 노동자 계급은 반격에 나서고 있다.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이 저항을 조직할 때 이들의 노력은 자본주의 정당들과 연관된 관료 조직에 의해 포섭되거나 축소되거나 왜곡되곤 한다. 총회를 통한 조직화는 진정으로 개방적인 정치적 토론, 논쟁, 민주적 의사 결정을 가능하게 만들어서 이 같은 포섭에 맞서 싸우는 핵심 수단이다. 민주적 방법을 통해 노동자 계급은 우리 모두를 해치는 체제에 맞서야 한다는 필연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며, 계급 투쟁을 조직으로 결집시킬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위기도 목격하고 있다. 유권자들이 더 이상 자신의 대표에게 대표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지배 계급 정당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는 미국 정당과 유권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계급 탈정렬 현상과 민주당의 위기에서 드러난다.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유기적 위기라 부른 것과 같은 위기는 체제를 약화시키고 전통적 정당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치 현상에 대응하도록 압박한다. 대중은 전통적 정당과 제도에 대한 신뢰를 계속 잃어 가고, “민주적”인 것으로 알고 있던 반민주적 제도 하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신뢰 상실로도 이어질 수 있는데,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그것은 “피억압자들이 몇 년에 한 번씩 억압 계급의 어떤 대표자가 의회에서 자신들을 대표하고 억압할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허용되는” 체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총회는 혁명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좌파 관료들의 주장처럼 전통적인 부르주아 (반)민주주의 구조를 보완하거나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구조에 맞서 싸우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완전히 대체하기 위해서다. 총회 구조는 전 세계적으로 진정한 노동자 계급 정당을 건설하는 토대가 된다. 자본주의 정당들이 끊임없이 대중을 배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지금, 노동자 계급에게 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자신만의 전투적 정당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그 어느 때보다 명백하다.
진정한 노동자 계급 정당이 있었다면 과연 조란 맘다니 같은 “사회주의자” 정치인이 시온주의자를 정책 위원으로 앉혔을까? 보편적 의료 보장 약속을 철회했을까? 지금 맘다니의 여러 지지자들은 그의 최근 행보에 분노하면서도 여전히 희망을 걸고 있다. 그가 학살에 가담하는 민주당의 일원인데도 말이다. 총회와 같은 자기 조직화 도구가 있다면 우리는 이미 배신을 시작한 인물에게 희망을 걸 필요가 없다. 대신 동료 노동자, 학생, 지역 주민과 함께 일어나 우리의 요구를 토론하고 함께 싸워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총회를 통해서, 우리는 정치에 관해 토론하고 논쟁하는 다수의 목소리를 구체화할 진짜 사회주의 지도자를 선출할 것이다. 노동자 계급 정당 내부에서 총회는 “혁명의 학교”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구성원들은 그 안에서 전략을 토론하고 집단적 결정을 내리고 지도부에 책임을 묻는 법을 배우게 된다.
노동자가 세계를 움직인다. 생산 현장에서 우리가 지니는 힘은 우리를 전략적 혁명 계급으로 만들고, 우리가 없으면 지배 계급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 총회는 우리의 노동력을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 것인지 혹은 사용하지 않을 것인지 집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하며, 자본을 전복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이고 민주적인 힘을 부여할 것이다.
자본주의 위기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세계에서 총회는 단순한 비판이나 대안 전술 이상의 것을 제시한다. 총회는 실천이다. 총회는 수동적인 스포츠 관전에 불과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삶과 투쟁을 능동적으로 설계하는 수단이다. 일터, 학교, 지역에서 개방적 토론, 직접 위임, 책임성의 구조를 구축함으로써 우리는 오늘의 싸움을 능동적으로 조직한다. 그리고 그 이상을 해낸다. 우리는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의 틀을 만들기 시작하며, 투쟁 속에서 착취 없는 사회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도구를 창조하는 것이다.
총회는 단순히 회의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쇠퇴하는 시대에 쟁취할 가치가 있는 미래의 토대다.
2025년 12월 26일, Left Voice에 게재된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Mike Pappas and Pola Posen
번역: 강성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