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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의 밤] "다음 투쟁을 위하여"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을 위해 싸워온 동지들께 인사드립니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은 2022년 창립 이후, 4년 간 △계급적 생존권 쟁취투쟁 △여성과 소수자 억압에 맞선 여성파업 △기후정의 계급투쟁 △반제반전 국제연대라는 4대 과제에 근거해 활동해왔습니다. 당면 세종호텔 투쟁, A학교 공대위 투쟁, 3.8여성파업 투쟁, 팔레스타인 해방투쟁 등에 적극 결합하여 함께 투쟁하고 있기도 합니다. 투쟁 과정에서 직면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이 2026년 3월 28일(토) 14시부터 22시까지 “다음 투쟁을 위하여 – 사회주의를향한전진 후원의 밤” 행사를 태성골뱅이신사 본점(을지로3길 35)에서 진행합니다. 동지들과 함께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많은 동지들의 참여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 티켓구매: https://forms.gle/xiY8nhvB7qoogYTL8 - 일시 : 3월 28일(토) 오후 2시~밤 10시 - 장소 : 태성골뱅이신사 본점 (중구 을지로3길 35, 3층) - 후원계좌 : 하나은행 217-910309-50807 임용현 -
[한노운사 연재 8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토대로 전투적·변혁적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총결집체로서 전노협이 1990년 건설됐다. 전노협을 와해시키려는 정권과 자본의 가공할 탄압에 맞서 노동자들은 1990년 5월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전국 총파업을 조직해 냄으로써 전노협을 사수해 냈다. 1991년 5월 군사파시즘의 부활을 모색하는 노태우 정권에 맞서 전 민중의 민주주의 투쟁이 1987년 6월 이후 최대 규모로 터져 나왔을 때, 노동자들은 조직적 대오로 참여해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전 편 보기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 1) 1990년 전노협 건설과 파상적 탄압 1989년이 지나는 동안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는 전국 단일조직 건설을 위한 논의를 꾸준히 진척시켰다. 마침내 1990년 1월 22일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구심으로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건설됐다. 전노협 건설에는 지노협 14개와 업종협 1개가 참여했다. 전노협은 600여 개 단위노조, 19만 3천여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며 출범했다.[1] 서울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전노협 창립대회는 대회장 주변을 중심으로 서울지역에 2만 5천여 명의 경찰이 원천봉쇄한 상황이었으며 시내 곳곳은 수시로 검문검색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창립준비위원회는 사전에 비밀연락체계를 구축하고 제2, 제3의 창립대회 장소를 선정하고 동시 준비를 진행했다. 또한 하루 전날부터 상경한 대의원들은 10~15명 단위의 조로 편제되어 엄격한 행동통일을 이루어냈다. 조별로 편제된 대의원들은 보통 두세 차례 수도권 일대를 돌면서 경찰의 미행을 따돌렸다. 그리하여 경찰의 추적을 완전히 따돌렸다는 판단이 선 전노협 창립준비위원회에서는 1월 22일 당일 아침 서울대에서 성균관대학교 수원캠퍼스 학생회관으로 장소를 변경하였고, 대기하고 있던 대회 참가자들도 일사분란하게 수원 성균관대학교로 오전 11시 50분경부터 속속 도착하기 시작해 1시간 만에 1,500여 명이 결집하였다. 12시 45분 인노협 조직국장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된 창립대회는 … 8백여 명의 대의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1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은 창립선언문에서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노사협조주의와 어용적, 비민주적 노동조합운동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가 탄생”되었음을 밝히고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과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노조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고 자주적 산별노조 건설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대의원들은 단병호 전노협 창립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전노협의 초대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전노협 강령 및 규약을 제정하였다.[2] 1987년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기세에 당황하며 일정한 전략적 후퇴를 감수했던 자본가계급은, 전노협 건설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사태로 받아들였다.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나날이 강도를 높여가면서 사무전문직과 대기업을 중심으로 절반 가까운 민주노조가 전노협 건설 과정에서 떨어져 나갔다. 지역별 연합조직들이 전체적으로 전노협에 참여한 것과 달리 업종별 연합조직 가운데 다수는 조합원들의 낮은 의식수준을 이유로 전노협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5월 30일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를 따로 결성했다. 또한 지역별 연합조직 가운데 대공장 노조가 밀집된 울산은 처음에 ‘울노협 준비위’로 참여했으나 정권의 탄압과 회유로 울노협 준비위가 무너지면서 실질적인 참여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전노협은 1987년 이후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민주노조들의 전국적 구심이자 총단결체였다. 노태우 정권이 엄청난 탄압을 퍼붓는 상황을 뚫고, 40여 년 동안 이어진 한국노총의 관료적 통제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20만 노동자를 포괄하는 600개의 민주노조들이 결집하여 전노협을 건설한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전노협이 결성된 바로 그날, 대통령 노태우가 이끄는 민주정의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이른바 ‘3당 합당’을 통해 국회의원 2/3 이상을 포괄하는 거대 보수대연합에 합의하며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기로 선언했다. 노태우 정권의 정치적 기반을 안정화하기 위한 이 정계개편의 동기 가운데 하나는 전노협 건설로 대표되는 노동자계급의 거침없는 성장에 놀란 자본가계급의 위기의식이었다. 전노협에 강력한 탄압을 퍼부어 와해시킬 수 있도록 노태우 정권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자본가계급은 공감하고 있었다. 실제로 3당 합당으로 권력을 집중시킨 노태우 정권은 전노협 건설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 버금가는 맹렬한 탄압을 퍼부었다. 전노협 건설 세 달 만에 중앙위원 51명 가운데 17명이 구속되고 12명이 수배되어 29명이 정상적 업무를 볼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전노협 사업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이 18차례나 이루어졌고, 전노협 탄압으로 구속된 노동자만 334명이나 됐다. 노동부는 전노협에 가입한 모든 노조를 상대로 업무조사에 나섰다. 안기부는 전노협 가입 노조 임원들을 상대로 전노협 탈퇴 공작을 집요하게 진행했다. 저렇게 전면적인 탄압을 뚫고 과연 전노협이 지탱될 수 있을 것인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2) 1990년 전노협 사수 전국 총파업 1990년 봄, 전노협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던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첫 포문을 연 것은 한국방송공사(KBS) 노동자들의 방송민주화 투쟁이었다. 불길은 울산 현대중공업으로 옮겨 붙었다. 정권이 현대중공업 파업에 즉각적으로 공권력을 투입하자 현대중공업노조가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하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자발적인 비공인파업에 나서면서 전국적인 연대투쟁이 솟구쳤다. 그 기세를 타고 전노협이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전국 총파업을 사흘 동안 조직했다. ◎ KBS 방송민주화 투쟁 KBS에 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은 1988년 5월이었다. 노동조합은 군사정권의 관제언론으로 기능해 왔던 KBS의 역사를 반성하며 권력에 대한 비판과 금기에 대한 도전을 확대해 나갔다. 1988년 11월 KBS 사장으로 선임된 서영훈은 이러한 노조의 노력에 비교적 협조적이었다.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정치적 기반을 강화한 노태우 정권은 KBS에 대해서도 통제의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2월부터 감사원이 KBS 특별감사를 진행한 뒤, 노사합의로 지급한 수당이 잘못됐다면서 서영훈 등 KBS 고위 간부에 대한 후속 조치를 공보처에 요구했다. 결국 KBS 이사회가 3월 8일 서영훈의 면직을 결정했다. KBS 노동조합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집회와 농성을 이어나갔다. 4월 3일 KBS 이사회가 서기원 서울신문 사장을 신임 사장으로 선출했다. 서기원은 정부기관지 사장으로서 노조 파업을 진압한 전력이 있었다. KBS 노동조합은 더욱 거세게 반발했다. 노동조합은 비상대책위원회를 확대 개편하고 ‘서기원 출근저지 특별감시조’를 편성해 11일 서기원의 출근을 저지했다. 12일 서기원은 실국장, 청원경찰, 백골단 등을 동원해 사장실로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 117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공권력 난입에 맞서 KBS 노동조합은 13일 조합원 4천여 명이 참여한 비상총회를 개최하고 방송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4월 13일, 남한강연수원에서 연수중이던 70여 명의 11기 사원들이 연수를 중단하고 조합원총회에 참석하는 등 총 4천여 명의 조합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비상사원총회’가 개최되었다. 총회 진행 중에도 백골단 220여 명이 5, 6층에 상주하고 있었지만 조합원들을 서기원이 퇴진할 때까지 무기한 제작거부와 농성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했으며, 교양국, 기획제작국, 라디오국 등을 비롯 당일 오후 6시를 기해 송출기술부를 제외한 제작자 전원이 ‘서기원 퇴진 및 구속자 전원 석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제작을 거부키로 결의했다. … 제작거부에 돌입한 조합원과 집행간부들 약 1천여 명이 철야농성에 참여했다. 30일 전경 3천여 명이 KBS 본관에 투입돼 조합원 333명을 연행했다. 5월 1일 문화방송(MBC) 노동조합이 KBS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며 연대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CBS노조도 제작거부에 동참했다. KBS노조 비상대책위원회도 거점을 MBC노조로 이동했다. 2일 KBS와 MBC 양 노조가 MBC에서 함께 ‘구속동지 석방 촉구 및 노태우 정권 규탄대회’를 개최했다. 4일 밤 MBC에도 경찰병력이 투입됐다. 결국 MBC노조가 7일에, KBS노조가 18일에 방송제작에 복귀했다. KBS노조원 11명이 해직됐다. ◎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 1990년 1월 19일 현대중공업노조는 128일 파업 이후 수습지도부 체제를 마감하고 새로운 민주집행부를 출범시켰다. 그런데 전노협에 대한 정권의 파상적 탄압이 현대중공업노조에도 거칠게 퍼부어졌다. 2월 5일 128일 파업지도부에 대한 부산고등법원의 항소심 공판에서 검찰이 1심보다 더 높은 형량을 구형했다. 현대중공업노조는 6일 긴급대의원대회를 거쳐 7일 오전 10시 전 조합원 조퇴 후 집회를 갖고 8일 선고공판에 전 조합원이 월차를 내고 참가하기로 결의했다. 그러자 경찰이 7일 밤 이영현 위원장을 전격 체포하고 우기하 수석부위원장을 수배했다. 노동조합이 8일 방청투쟁을 강행하자 9일 이영현 위원장이 구속됐고, 10일에는 완전무장한 사복경찰 200여 명이 노조 사무실에 난입해 압수수색을 벌였다. 대응방향을 둘러싸고 현대중공업노조는 혼란에 휩싸였다. 한편에는 총자본의 공세에 맞서 강도 높은 구속자 석방투쟁으로 민주노조를 사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더 이상 희생을 자초하지 말고 임금인상·단체협약 투쟁을 통해 노동조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정권의 탄압은 계속됐다. 권용목 현해협 의장, 윤재건 조직부장, 설남종 기획실장, 김남석 대의원 등이 계속 구속됐다. 4월 20일에는 우기하 수석부위원장마저 구속됐다. 마침내 21일 조선사업부 5분과에서 분노한 조합원들이 아래로부터 파업을 시작하면서 논쟁은 잠재워졌다. 22일 긴급히 소집된 대의원 간담회는 25일부터 전면파업 돌입을 결의했다. 23일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구성되고, 24일부터 대의원, 소위원, 선봉대, 기동대, 정당방위대 등 2천여 명이 텐트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자들은 투쟁의 의의와 방향에 대해 텐트별로 토론을 조직하는 한편, 공권력 투입에 대비해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정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텐트 주변에 ‘민주박격포’를 설치했다. 화염병을 제작하고 볼트·너트 등을 준비했다. 그런데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열기가 치솟는 것과 반대로 비대위 지도부가 극심하게 동요했다. 24일 진민복 비대위 의장이 잠적하면서 김영환 부위원장이 비대위 의장이 됐다. 그러나 26일 김영환 의장도 ‘정치파업은 못 하겠다’며 사퇴했다. 결국 이갑용 사무국장이 비대위 의장을 맡고서야 지도부가 안정됐다. 노태우 정권은 속전속결로 현대중공업 파업을 진압하고자 했다. 공권력 투입이 확실시되자 비대위 지도부는 82미터 높이의 골리앗 크레인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파업돌입 사흘 만인 28일 새벽 경찰병력 1만여 명이 다시 현대중공업에 투입됐다. 4월 28일 오전 6시 정각, 페퍼포그가 앞을 식별할 수 없도록 최루탄을 퍼붓는 속에서 이에 맞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민주박격포가 발사되었다. 정문 앞 바리케이드와 담장을 불도저로 밀어붙이고 백골단이 뛰어들기 시작했다. 73개 중대 1만여 명의 병력이 하늘(헬기를 통한 사전정찰, 상황지시, 선무방송)과 땅 그리고 바다(미포만에 군함을 상륙시킴)를 통해 달려들었다. 새벽 5시부터 헬기가 울산만 상공을 분주하게 날아다니더니 이윽고 6시가 되면서 불도저가 중공업 정문을 두드렸다. 그 뒤에는 페퍼포그차가 숨어서 수백 발의 지랄탄을 쏘아댔다. 구토나는 최루가스 속에서도 이들 침입자들을 저지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 전개되었다. 또다시 민주박격포가 작렬하였다. 그리고 화염병이 날았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또다시 지랄탄을 퍼붓는 페퍼포그와 함께 돌진해 오는 전경들에 의해 공격개시 7분 만에 3차 바리케이드까지 무너졌다. 30여 대의 민주박격포가 불을 뿜었지만 전경들을 잠시 우왕좌왕하게 하는 정도였다. 삽시간에 대오가 쪼개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눈물을 삼키며 조금씩 물러서고 있을 때, 골리앗 투쟁지도부의 지침이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골리앗 지도부가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동지들! 현 위치를 사수하라. 여기가 누구의 일터인가? 여기서 나가야 할 놈들은 바로 저들이다. 우리가 엄호할 테니 아래의 동지들은 마음껏 공격하라!” 그리고 함성소리와 함께 수백 개의 볼트가 날랐다. 전경의 방패가 깨지고 머뭇거리던 동지들이 대오를 갖추었다. 그러나 중장비까지 동원하고 조직된 무력 앞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골리앗 지도부에서 새로운 지침이 떨어졌다. “동지들! 투쟁하면서 퇴각하라! 공장을 빠져나가 야전지도부의 지도 아래 가두투쟁을 전개하라! 우리는 골리앗으로 간다. 골리앗은 결코 점령당하지 않는다. 투쟁하면서 퇴각하라! 동지들! 승리하는 그날에 만나자!” 조직적인 퇴각이 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8시 35분, 4도크와 5도크에서 항전하던 노동자들이 무장해제당했다. 그리고 용접봉, 장작, 볼트가 널부러진 도로 위를 따라 사복조들이 도열한 틈을 눈물을 삼키며 빠져나와야 했다.[3] ◎ 현대자동차 4·28 연대투쟁 현대중공업 파업 직후 공권력을 투입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발표되자마자 전국적인 연대총파업으로 맞서자는 논의가 마창노련과 서노협 등 전노협 일부에서 시작됐다. 노태우 정권의 광포한 노동운동탄압을 중단시키고 또한 전노협을 사수해 내려면 이제 전국적인 연대총파업으로 대응해야만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전노협 차원에서 미처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이 투입돼 버렸다. 바로 그 상황에서, 28일 새벽 공권력이 투입되는 길목에 있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머뭇거리는 노조 집행부의 지침을 기다리지 않고 아래로부터 스스로 파업에 들어가 전투경찰과 대대적인 가두전투를 펼치는 일이 벌어졌다. 철야농성 중이던 선봉대와 대의원이 시작한 싸움에 야간 조합원 전체가 공장을 멈추고 거리로 달려 나왔다. 돌과 화염병 그리고 최루탄이 새벽 공기를 가르며 격렬하게 날아다녔다. 몇 시간 동안 어쩔 줄 몰라 하던 노조 집행부가 뒤늦게 파업을 선언했을 때 이미 조합원들은 모두 거리에 나가 있었다. 날이 밝자 출근하는 주간 조합원까지 가세했다. 현대자동차 담벼락을 따라 4km 대로에서 기습을 당한 전투경찰은 발이 묶이고 심지어 무장해제까지 당했다. 새벽 4시경 어둠을 뚫고 경찰병력이 현대자동차 앞을 지날 때였다. 비상상황에 대비해 각 정문에 규찰을 서던 선봉대와 대의원들이 현대중공업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며 지나가던 전경병력을 바리케이드로 가로막고 투석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무거운 판스프링 등으로 도로가 차단되자 경찰은 야간작업 중인 현대자동차 공장 안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100만 평의 현대자동차 공장이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여기저기서 돌과 화염병이 날고 최루탄이 쉬지 않고 현장 안으로 날아들었다. … 노조의 공식 결정은 좀체로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조합의 방침과 관계없이 현장은 이미 조업이 중단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정문 쪽으로 몰려나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도로 쪽에 가까이 인접해 있던 노조 사무실에도 최루탄이 날아들어 사무실 안이 최루탄 가스로 꽉 차 있었다. 새벽의 미명이 뿌옇게 밝아왔을 때도 곳곳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조사무실에는 조합이 왜 지금까지 방침을 내리지 않느냐는 격렬한 항의가 잇따랐다. 주간근무자가 출근할 때가 다 되어서야 사무국장이 조업중지 결정을 내렸다. 위원장은 묵묵부답인 상태에서 할 수 없이 사무국장이 지침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정은 의미가 없었다. 이미 조업은 중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간조가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노동자의 숫자는 훨씬 많이 불어나 정문을 중심으로 도로를 점거하고 경찰과 계속 투석전을 벌이며 싸우고 있었다. 회사 앞 도로가 희뿌연 최루가스와 깨진 보도블록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경찰이 회사 안으로 최루탄을 쏘면서 허물어진 회사 담의 일그러진 모습이 격렬한 상황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이르러서야 중앙대책위원회가 소집되어 조합원들을 회사 안으로 철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조합원들을 회사 안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경찰과 격렬히 싸우던 상당수의 조합원들은 이를 거부하고 계속 도로에서 싸웠다. 집행부의 통제력은 상황이 벌어진 순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반가량 회사 안으로 들어오던 노동자들도 일시에 대열을 잃어버리고 밖의 상황으로 빨려들어 갔다. 이제 노조 집행부는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투쟁은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 일단의 전경들은 노동자 시위대에 포위당한 채 무장해제 당하고 방패, 철모 등은 모두 불태워졌다. 최루탄차와 페퍼포그차 등이 화염에 휩싸였다. 백골단에 쫓기던 노동자들이 부상당하고 정문 앞 신호등은 화염병에 맞아 오래도록 불타고 있었다.[4] 새벽 4시, 끝이 보이지 않는 경찰병력이 현대자동차 출고정문 앞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 철야농성을 전개하던 현대자동차 대의원, 선봉대, 야근조 조합원 등이 가세해 2천여 명으로 불어난 대오가 경찰병력을 막아섰다. 이들은 처음에는 야유와 돌 몇 개를 던지다가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대오를 가로막고 현장의 작업물품인 쇳덩이들을 지게차로 옮겨다가 도로를 차단하기까지 했다. 당황한 경찰병력은 최루탄과 지랄탄을 무차별로 발사했다. 최루탄 소리에 숙소에서 잠들어 있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달려와 가세하면서 후미의 경찰차 30여 대가 완전히 무장해제 당했고, 이로써 육·해·공 입체작전으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을 도망갈 구멍 없이 완전 봉쇄하려던 경찰측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공권력 투입도 한 시간 이상 지체됨으로써 불충분한 포위망을 돌파하고 조합원들이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경찰의 새벽진압 작전을 두 시간 연기시키며 치열하게 싸웠던 현대자동차는 아침 출근시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파업으로 이어졌고 전체 노동자가 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1만여 명의 가두투쟁 대오가 형성되어 현대자동차 앞 도로를 3~4km 점거한 채 경찰병력을 포위해 들어갔다. 워낙 대규모 인원인지라 한쪽에서는 싸우고, 한쪽에서는 구호를 외치며, 또 한쪽에서는 약식 집회가 열렸다. 10시 30분경 앞 대오가 150여 명의 전경을 무장해제 시키고 현대자동차 앞 주택가까지 무차별 최루탄을 쏘아대던 페퍼포그를 불태웠다.[5] ◎ 전노협 5월 총파업 현대중공업노조의 골리앗 파업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4·28 연대투쟁은 전국적인 연대파업 열기에 불을 붙였다. 4월 28일 … 현대중공업 공권력 진압 소식에 분노한 ㈜통일과 대림자동차 등 마창투본 노조들은 중식시간에 일제히 규탄대회를 열고 퇴근 후 경남대에서 약 3천여 명이 모여 집회를 가진 후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노동부 마산지방사무소 내부를 불태우고, 유리창을 모두 깨버렸다.[6] 서울에서는 4월 29일 경찰의 폭력적 원천봉쇄를 뚫고 ‘현대중공업 경찰폭력난입 규탄과 세계노동절 쟁취를 위한 수도권 노동자 결의대회’가 열렸다. 집회가 끝난 후 참석자들은 청량리, 신촌, 영등포, 종로 등지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 현대중공업노조 투쟁에 대한 전국 노동자의 지지연대를 과시했다. 또한 같은 날 부산(부산대)과 대구(경북대)에서도 노동자와 학생 1~2천 명이 현대중공업노조 연대투쟁을 전개하였다.[7] 4월 29일 … 오후 2시 53분경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기습적인 가두시위를 시작으로 약 5~6천 명이 노동부사무소 앞 종로대로를 완전히 점거하고 ‘해체! 민자당, 사수! 전노협, 퇴진! 노태우’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했다. 피카디리 앞에서 경찰차 3대를 화염병으로 공격해 전소시킨 시위대는 단성사 옆 파출소 1층을 불태웠으며, 노동부사무소 간판도 화염병에 맞아 불타올랐다. 약 30분간 피카디리 앞 사거리를 완전히 장악했던 시위대는 백골단에 의해 … 세운상가 쪽으로 밀려났다. … 밀려가던 시위대는 동대문 앞에서 2차 가두집회를 6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고 백골단과 공방전을 주고받으며 골목골목에서 가두시위를 계속했다.[8] 울산에서는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외에도 현대중장비, 현대종합목재, 현대정공이 28일부터 동맹파업에 들어간 가운데, 가두투쟁이 매일 전개됐다. 4월 29일부터 매일 부서별로 출근체크를 마친 노동자들은 다시 부서별로 나뉘어 동구 전역에서 치열한 가투를 전개했다. 가투가 시작되기 전 동구 일대의 작은 골목마다 가족들이 합동으로 쓰레기를 모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최루탄을 씻어낼 고무호스를 준비했다. 특히 128일 파업의 경험을 살려 가족 스스로가 팀을 짜 물품보급조, 구급조를 편성, 조직적으로 투쟁에 동참했다. 29일 현대중장비 앞에서는 최루탄이 다 떨어진 전경들이 시위대열에 밀려 현대중장비로 쫓겨 갔다가 점심도 못 먹고 하루 종일 갇혀 있기도 했다. 중학생들로 꾸려진 가투부대가 나타났고,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까지 돌을 나르고 있었다. 비록 끊임없이 밀리고는 있었지만 전선이 여기저기에서 형성되어 쫓고 쫓기는 투쟁이 쉴 새 없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9] 이런 상황에서 29일 전노협이 비상 중앙위원회를 열고 “전체 노동자의 생존권 수호와 노조활동의 자유를 위해” 5월 1일부터 전국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총파업의 요구는 크게 전노협 사수, 노동운동탄압 분쇄, 구속자 석방 등을 포함한 노동운동탄압 중지 요구와 민자당 해체, 노태우정권 퇴진 등의 정치적 요구, 그리고 물가폭등, 집값·전세값 안정 등 경제개혁 관련 요구들로 이루어졌다. 5월 1일, 전국 59개 노조 12만여 노동자가 총파업에 돌입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전국 총파업이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무임승차를 실시했고, MBC노조는 KBS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며 연대 제작거부에 나섰다. 5월 1일에는 현대자동차노조가 효문로타리와 염포검문소 등 2개 방향으로 평화대행진을 벌였고, 현대중공업노조도 조합원 참여율이 95%에 육박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오후 3시에는 만세대 민주광장을 전경들 손에서 완전히 탈환해 오후 5시 노동절 기념집회를 갖기도 했다. 현대종합목재, 현대정공노조 등도 1,500~2,000여 명씩 참여하는 대규모 가두시위를 계속했다.[10] 4월 30일, 전노협에서 선포한 총파업 투쟁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정부는 투쟁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마침내 KBS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이날 밤 11시 15분경 이종국 서울시경 국장의 진두지휘에 따라 19개 중대 3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 본관에 진입해 농성 중이던 333명의 조합원들을 강제연행했다. … KBS에 대한 제2차 경찰투입 직후 MBC노조는 비대위의 결의에 따라 5월 1일 10시 사원 비상총회를 열고 전면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 19개 지방 MBC도 비대위의 결의에 따라 이날 오전부터 비상총회를 개최하고 제작거부에 돌입, 전국 MBC가 일사불란하게 연대 제작거부에 참여했다. 한편 4월 23일부터 무기한 철야농성을 벌여왔던 CBS노조도 같은 날 MBC노조와 동시에 제작거부에 돌입,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음악만을 내보내기 시작했다.[11] 부처님 오신 날로 휴일인 2일을 건너뛰고 3일 총파업이 재개돼 전국 104개 노조 10만여 노동자가 파업에 나섰다. 4일에는 전국 149개 노조 12만여 노동자가 총파업에 참여해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당시 전노협은 정권의 집중탄압 대상이 되었고, ‘전노협 사수’는 전노협만의 문제가 아닌 정권과 전 민중이 대결하는 투쟁전선이었다. 전노협 소속 사업장들은 탄압을 각오하고 3일간 312개 노조 (연 인원) 34만 명이 참여하는 파업 투쟁을 벌였다.[12] 전국 총파업 투쟁에서 일반 국민의 묵시적 동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물론 그 첫째는 투쟁의 정당성을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대중공업 2만여 명의 노동자는 부당하게 구속된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쟁을 전개했고, 전노협은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 총파업 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노태우 정권의 언론장악 음모에 맞서 전개된 KBS 방송민주화 투쟁이 일반 국민의 묵시적 동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커다란 요인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KBS의 방송민주화 투쟁을 폭력으로 진압한 데 대한 대중적 반발이, 이른바 중산층까지도 5월 총파업을 지지하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민자당 출범 이후 일반 국민 사이에 팽배해진 실망감과 민자당 내부의 파벌싸움에 대한 염증도 노동자투쟁을 지지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인은 전·월세값 폭등과 물가폭등에 의해 날로 가중되는 일반 국민들의 생활난이었다.[13] 갑자기 치솟은 총파업에, 자본가계급은 당황했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져들지 않으려면, 민주노조운동과 전노협을 일단 현실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파업을 해체시키기 위해 인천지역 민주노조들에겐 요구안 100%를 수용한 제시안이 일시에 쏟아지기도 했다. 총파업 이후 노동운동 탄압의 기세는 잠시나마 눈에 띄게 약화됐다. 5월 총파업 투쟁으로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임금인상·단체협약갱신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유리한 돌파구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5월 총파업 투쟁의 와중에서 자본가들의 담합이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총파업 투쟁을 전개하며 가두로 진출하는 노동자들을 붙잡고 “제발 지금 당장이라도 교섭하자”면서 교섭을 애걸하는 자본가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고, 자기 사업장에도 총파업 투쟁의 물결이 밀려올 것을 우려한 자본가들이 노동조합의 요구를 거의 100% 받아들이는 선에서 서둘러 교섭을 타결짓는 모습 또한 곳곳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인천 지역에서는 총파업 투쟁을 전개했던 5월 4일 하루 동안 남일금속 1,800원, 경일화학 1,700원, 동신공업 1,800원 등 최초의 요구를 거의 100% 관철시키는 선에서 임금인상 투쟁을 마무리 짓기도 했다. … 5월 총파업 투쟁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투쟁의지를 강화한 것은 단지 우리 노동조합운동만이 아니었다. 전체 민족민주운동이 빠른 속도로 자신감을 회복했고, 투쟁의지를 강화했다. 그 결과 5월 9일에는 많은 학생과 시민이 운집하여 6월 항쟁 이후 최대의 가두집회와 가두시위를 조직해 내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동안의 탄압 일변도의 정세는 다소 유화되었고, 학생을 비롯한 제 민중들의 대중투쟁도 활성화되기 시작했다.[14] 총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은 전노협 사수를 둘러싼 계급투쟁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패배 이후 1981~82년 전두환 신군부에게 몰살당했던 민주노조는 불과 10년 만에 통쾌한 반격을 조직해 내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시민권을 확고히 구축했다. 이제 정권이 물리적 탄압을 퍼붓는다 해도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결집체가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수준까지 노동자가 올라섰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렇게 해서 전노협이 지켜졌고, 그 연장선에서 1995년 민주노총도 건설될 수 있었다. 계급적 연대투쟁으로 다부지게 전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성장과 발전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정부와 자본가들의 집중공격으로 많은 노동조합이 무력화되기도 했으며, 노동운동가들이 구속, 수배되기도 했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 민주노조 진영은 노동조합을 지키고 노동자의 생활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1987년 말 마창노련을 시작으로 지역별·업종별 협의회를 속속 건설, 이를 토대로 공동투쟁과 공동활동을 강화하여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였다. 그리고 지역과 업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하였으며, 전노협은 출범한지 불과 100여 일만에 5월 전국 총파업 투쟁의 주체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전국 총파업 투쟁은 민주노조의 상징이자 투쟁구심인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강고한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전노협 중앙위원회에서 총파업을 선언하기 전에 이미 현총련과 마창노련, 서노협에 의해 현대중공업 공권력 투입 시 연대파업에 돌입하겠다는 사전 결의가 있었기에 총파업이 가능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투쟁들을 전국 총파업 투쟁으로 발전시켜 낼 수 있었던 것은 전노협이라는 전국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100여 년에 걸친 우리나라 노동운동사 속에서 전국적 총파업은 해방 직후인 1946년 9월 총파업과 1947년의 3월 총파업 이외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무려 40여 년 만에 다시 전국적 총파업 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결국 성공적으로 수행해 냈다. 이것은 길게는 1950년 이후, 짧게는 1987년 7월, 8월, 9월 투쟁 이후 수많은 선배, 동지들이 온갖 탄압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싸워 온 투쟁의 산물이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성장, 발전의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었다. … 우리 노동조합운동은 1980년대 초반의 극심한 탄압을 뚫어내고 마침내 7월, 8월, 9월 노동자대투쟁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그 이후 꾸준히 성장, 강화되어 이제는 어떠한 탄압이 있다 해도 과거 1980년대 초반처럼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싹까지 말살당하지 않을 정도의 충분한 역량을 갖춰 왔다. … 1990년 5월 총파업 투쟁은 “탄압은 더욱 강력한 투쟁을 예고할 뿐이다”라는 역사적 진실과 수많은 선배 노동자들이 200여 년에 걸친 투쟁 속에서 체득해 온 경험적 진실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 5월 전국 총파업 투쟁을 통해 우리는 비약적인 노동자 의식의 성장과 강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노조의 파업투쟁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항의하여 지역과 산업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 동일한 요구를 내걸고 전국적 총파업 투쟁을 전개해 나가는 속에서 우리는 ‘노동자는 하나’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나아가 이번 투쟁의 성격이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선 ‘노동자의 항쟁’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노동운동 탄압하는 민자당정권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전국의 사업장과 거리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는 점에서, ‘노동해방! 인간해방!’이라는 노동운동의 궁극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과 싸워야 할 상대를 뚜렷하게 깨닫게 되었다.[15] ◎ 골리앗 파업의 마무리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은 전노협의 5월 총파업을 촉발했지만, 총파업이 끝난 뒤 홀로 남겨졌다. 특히 울산지역 연대투쟁의 주축이었던 현대자동차노조가 5월 3일 ‘7일부터 정상조업’ 방침을 결정하면서 연대투쟁의 흐름이 결정적으로 약화됐다. 연대투쟁에 적극 나섰던 현대종합목재, 현대정공 노동자들의 참여도 현대자동차노조의 연대파업이 중단되면서 급격히 줄어들었다. 5월 3일 {현대자동차노조} 중앙대책위원회 회의에서는 5월 4일로 시한부파업을 종료하고 단협, 임투로 총매진하기로 결정했다. 대책위원들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으나 이상범 위원장이 전술 변경을 결정함으로써 11:12로 임단협 투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본관 앞 잔디밭에서 열린 조합원 비상총회에서 5월 7일부터 정상조업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상범 위원장은 “단협과 임투를 무기한 연기할 수 없다. 5월 5~6일 휴무로 투쟁열기가 저하될 수 있으므로 투쟁목표를 재정립해야 할 시점이며, 중공업 사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므로 현대자동차도 장기투쟁 전술로 전환”한다는 생각으로 ‘노동조합의 장래’를 위한 결정을 내렸다. … 그러나 노조의 결정과 무관하게 민실노를 중심으로 한 현장조직이 주도하여 ‘현대자동차비상대책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현장 파업을 계속해 나갔다. 민실노는 전국 총파업 상황이 아직 사그라진 것이 아니며, 5월 9일 민자당 창당일에 맞춰 대규모 투쟁이 준비되고 있는 마당에 현자노조에서 깃발을 내린다면 투쟁전선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 보았다.[16] 울산지역 연대투쟁이 위축돼 가던 5일과 6일, 그러나 울산 동구에는 전국 각지에서 소중한 연대대오가 와서 가두투쟁에 동참했다. 전노협 선봉대였다. 1990년 4월 29일의 비상중앙위원회에서 결의한 ‘전노협 선봉대를 울산에 무제한 파견하겠다’는 방침과 함께 현대중공업노조에서도 전노협에 선봉대를 파견해 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즉, 현대중공업노조는 “인원수는 상관없다. 전노협에서 선봉대를 파견하여 울산의 조합원들이 전노협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던 것이다. 이에 ‘전노협 선봉대 울산파견 지침’을 곧바로 결정했다. … 전노협 선봉대는 총 6개 지역에서 114명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각 지노협에서 파견한 선봉대 외에 공개모집에 참가한 학생들을 포함하면 대략 200여 명가량이었다. 파견된 전노협 선봉대는 5월 5일에 이어 5월 6일 사천세대에서 전노협 깃발을 들고 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이들은 현대중공업 경찰 봉쇄선을 물리력으로 뚫고 전노협 깃발을 휘날림으로써 골리앗 농성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역시 전노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전노협 선봉대의 투쟁은 이후 울산 지역에서 전노협의 살아있는 연대정신의 표본으로 기록되었다. 다음은 전노협 선봉대가 울산 사천세대 앞에서 배포한 「골리앗은 결코 외로운 늑대가 아니다」라는 투쟁유인물의 일부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전노협 선봉대원들은 각 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의지를 모아 힘차게 투쟁할 것이며, 이후 각 지역으로 투쟁의 불씨를 안고 돌아가 오는 9일 민자당 창당일에 전 민중과 함께 투쟁의 불길을 지펴 올릴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만 노동자는 전노협의 기치 아래 굳건히 서고 노동해방을 향해 진군해 나갈 것이다.”[17] 9일 ‘민자당 해체, 노태우 퇴진 촉구 국민궐기대회’가 전국 곳곳에서 10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가두투쟁이었다. 이날 대회에서는 ‘골리앗 투쟁 계승하여 노동운동탄압 분쇄하고 민자당을 박살내자!’, ‘민주압살 민중탄압 민자당을 해체하라!’, ‘물가폭등 집값폭등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 같은 구호들이 널리 외쳐졌다. 10일 오후 2시, 51명의 ‘외로운 늑대’ 골리앗 대원들이 82미터 골리앗 크레인의 계단을 타고 한 명씩 내려왔다. 파업과 가두투쟁이 모두 중단된 상황에서 골리앗 농성만을 더 지속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골리앗에서 내려왔다. 14일 만에 자기 아이도 아버지를 몰라보고 아버지가 아니라며 울 정도의 처참한 몰골로 골리앗을 내려오던 날, 엔진부의 최성국 동지는 계단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죽어도 못 내려간다고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참고 참았던 우리도 울었다. 차라리 산소통을 끌어안고 죽자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그때 내 머리를 스친 것은 내려오기 직전에 보았던 미포만의 일출이었다. 바다가 마치 태양을 가슴에 품은 것처럼 발그스레 물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야 비로소 태양은 뜬다. 지금 노동해방의 저 드넓은 바다에 미명이 돋기 시작하는데 곧바로 태양이 뜨지 않는다고 절망할 수야 없지 않은가. 골리앗 위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바다를 보았고 하늘을 보았다. 야외 작업을 많이 하는 부서에 있으면서도 정작 눈앞의 바다를 눈으로라도 즐긴 기억이 별로 없었다. 바다를 보면 골리앗 크레인 작업 중에 떨어져 죽은 내 친구가, 또 이름은 모르지만 수많은 나와 같은 노동자들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가 골리앗에 있는 동안 또 하나의 불길로 타오른 이영일 열사의 남긴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 세상은 왜 우리를 조용히 살게 내버려두지 않습니까?” 그렇다! 우리 노동자들 가슴에는 세상이 만들어준 응어리가 있다. 용암처럼 터져 나올 분노가 끝도 보이지 않게 잠겨 있다.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라고 불리며 전국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우리들은 주변의 어떤 노동자와도 다를 바 없이 자라고 살아왔다. 집안은 가난했고 자기 인생을 마음대로 설계하고 의지대로 만들어갈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단 하나뿐인 삶을 사랑한다. 우리도 일한 만큼 얻고, 이웃을 사랑하고, 착한 자식, 좋은 남편, 훌륭한 아빠이고 싶다. 무엇이 그것을 가로막는가! 단 하나뿐인 우리의 삶을 피투성이로 만드는가! 나는 골리앗 위에서 그것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우리를 착취했던 그 거대한 착취도구 골리앗 위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는 전국의 수많은 노동자, 자본가, 노태우 정권을 보면서 나는 드디어 알아차렸다. 천만 노동자의 삶을 움켜쥔 자본가와 그들의 하수인인 국가권력을 타도하기 전에 우리 노동자의 삶은 결코 풍부하고 아름다워질 수 없다는 것! 뭔가 막연하게 뒤엎어지기를 바라며 골리앗에 올라갔던 나는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도 무슨 말인지 잘 몰랐던 ‘노동해방!’의 깃발을, 그 붉은 깃발을 확실히 움켜쥐고 내려왔다. 물론 우리는 패배했다. 인정한다. 그러나 아직 미포만에 태양은 뜨지 않았다. 최초의 정치투쟁의 깃발을 치켜 올리고도 우리가 끝내 골리앗을 울면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울산 노동해방투쟁의 현주소이다. 우리 노동자는 백무산 동지의 시처럼 여기까지 왔으나 아직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다. 우리는 일단 평가부터 하려고 한다. 작년보다 더 높이 서서 올해 우리가 달려온 지점이 어딘지,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새로운 일을 찾겠다. 어둠을 뚫고 솟구치는 저 드넓은 노동해방의 바다로 거침없이 달려가겠다. 감히 전국의 노동해방을 위해 싸우는 동지들에게 약속드린다. 다음에 우리는 분명히 더 높은 곳에 서 있을 것이다. 저 미포만에 붉은 태양이 바다 위로 솟구쳐서 허리 잘린 이 땅, 사천만 민중이 온통 그 붉은 햇살에 적실 때까지 나는, 우리 현대 노동자는 거침없이 달려갈 것이다. 동지들! 전국에서 우리 골리앗 투쟁을 이어 달라! 민자당 타도! 노태우 타도를 외치며 영웅적으로 투쟁했던 우리 현대 노동자의 투쟁을 이어 달라! 이번 파업투쟁 때 물결쳤던 노래가사처럼 우리가 저 자본가들의 국회를, 권력을 장악해야 하지 않는가![18]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전국 총파업을 실현시킨 노동자들은 1990년에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하반기에 대우조선, 포항제철, 만도기계, 대림통상, 아시아자동차 등 다수의 대기업 노조에서 새롭게 민주 집행부가 건설됐다. 전노협에 소속돼 있던 기존 대기업 노조들과 새롭게 민주집행부를 구축하게 된 대기업 노조들 16개가 모여 12월 9일 ‘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조회의’(대기업 연대회의)를 출범시켰다.[19] 전노협과 대공장 노조가 실질적인 연대를 발전시켜 가기 위한 모색이었다. 또한 1990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를 전노협과 업종회의가 공동으로 치르면서 민주노조 총단결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3) 1991년 5월 민중투쟁과 박창수 열사 투쟁 1991년 경기침체와 물가폭등으로 노동자·민중의 생활고가 가중된 반면, 재벌들은 독점지배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또한 땅값 폭등으로 대토지소유자들이 엄청난 불로소득을 챙겼다. 1990년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총액이 9조 1천억 원인데, 땅값인상 총액은 50조 7천억 원으로 다섯 배에 달했다. 한편 3당 합당으로 안정적 기반을 확보한 노태우 정권은 1990년 12월 27일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한 강경우파 노재봉을 총리로 임명해 내각제 개헌 등을 통한 정권 재창출을 목표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강도 높게 탄압하며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2월 22일 수서주택지구 개발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폭발 지경에 이르렀다. 한보그룹이 정부에게서 받은 기업정상화 자금 418억 원을 수서주택지구 개발에 투입해 427억 원이라는 엄청난 이득을 챙겼으며, 이를 위해 광범한 정치권 인사들에게 로비자금을 살포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던 4월 26일, 집회 후 교문으로 진출하던 명지대생 강경대가 백골단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사망했다. 강경대의 비통한 죽음은 노태우 정권의 살인적인 공안 통치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1987년 이후의 부분적인 민주화조차 되돌려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공안통치 종식’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의 대중투쟁이 전개되는 것과 함께 학생과 노동자 11명의 분신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20] 27일 제 민주단체들이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범국민대책회의)를 구성했다. 29일 연세대에서 열린 ‘국민 결의대회’에는 7만여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5월 1일, 전노협이 주도하는 ‘임금인상과 물가폭등 저지 및 노동기본권 수호를 위한 전국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전국투본) 산하 188개 노조 9만 5,663명이 전면 휴무에 돌입했다. 세계노동절 기념대회에는 수도권 3만 명 등 전국 6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4일 ‘백골단·전경 해체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가 열렸는데, 전국에서 20만 명이 참가하여 반민자당 투쟁이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그런데 6일 전노협 중앙위원이자 부산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이던 박창수가 안양병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창수는 2월 9~10일 대기업 연대회의 수련회를 경찰이 폭력침탈했을 때 다른 6명과 함께 구속된 뒤 안기부의 집요한 전노협 탈퇴 공작에 시달리고 있었다. 4일 ‘운동시간에 부상을 입어 안양병원으로 후송됐다’는 연락을 받고 가족이 달려갔을 때 박창수는 이마 34바늘을 꿰맨 뒤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6일 새벽 5시경 병원 건물 뒤쪽 어린이놀이터 시멘트 바닥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이었다. 정황상 안기부에 의한 타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검찰은 7일 백골단을 투입해 영안실 벽을 부수고 시신을 탈취하여 강제부검을 실시한 뒤 투신자살로 몰고 갔다. “7층에서 떨어졌다 하면 온몸에 상처가 다 났을 겁니다. 그런데 외상이라는 건 하나도 없고. 슬리퍼는 얇은 거. 그것이 떨어졌다면 사방으로 다 퍼졌을 겁니다. 근데 고거 한 1m 간격밖에 없는 거예요. 도저히 이것은 자살로 몬다는 건 우리는 조금도 용납 못해요.”(부친) … “내 아들은 자살이 아니고 요놈들이 죽여서 해 놓은 거니까 이걸 절대적으로 밝혀야 되고예. 밝혀야 우리 아들도 눈 감고 가고, 우리 아들이 눈을 못 감고 있습니다. 지금예.”(모친)[21] 노동운동 진영은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을 ‘노동운동 탄압의 집약적 표현’이라고 규정했다. 6일 한진중공업노조, 전노협, 대기업 연대회의, 업종회의, 전국노운협, 전국노련의 6개 노동단체가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노동운동탄압분쇄를 위한 전국노동자대책위원회’(전국노대위)를 구성하였다. 한진중공업노조가 소속된 부산노련을 시작으로 6일부터 각 지노협들이 농성 투쟁에 들어갔다. 9일 전국 87개 도시에서 50만 명의 시민과 노동자들이 길거리를 메우고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를 외치며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서울, 부산, 광주 등 대도시에서는 수만 명의 노동자, 학생, 재야단체 등이 조직대오를 갖춰 도심을 완전 점령하고 최루탄과 물대포로 맞서는 경찰을 포위, 곳곳에서 무장해제시키며 밤늦게까지 투쟁을 벌였다. 이날 전노협이 주도하는 전국투본은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해 규탄, 폭력통치 종식, 노태우 정권 퇴진’을 내걸고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 총파업에는 98개 노조 4만 8천 노동자가 참여했는데, 오후 3시 30분부터 2시간 파업을 단행하고 총회를 연 뒤 집단적으로 범국민 결의대회에 참가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또한 360개 노조 18만 노동자가 중식집회, 잔업거부, 동시퇴근 형태로 투쟁에 동참했다. 9일을 기점으로 노동자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되자, 그동안 학생들이 중심일 때 ‘백골단 해체, 노재봉 내각 사퇴’에 머물렀던 투쟁 요구가 ‘노태우 퇴진’으로 발전했다. 또한 사안별 대책기구로서의 범국민대책회의가 투쟁의 전국적·조직적 구심으로 강화되기 시작했다. 강경대 열사 장례 전후로 전개된 5, 6월 투쟁은 각 부문의 투쟁을 하나의 흐름으로 모아내면서 지역적, 전국적 공동투쟁을 통해 민족민주운동 진영에게는 모처럼 맞은 귀중한 정치적 공세기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옥중에서 억울하게 살해당한 박창수 한진중공업 위원장의 의문사로 인해 전국 노동자들은 조직적으로 정치적 파업투쟁을 전개하여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젖혔다. 5월 한 달 집회와 가투는 평균 5일마다 한 번씩 전개되었으며, 마창지역에서는 5월 9일 1989년 이후 최대 규모인 1만 5천여 명이 모여 반민자당 투쟁을 광범위하게 벌였다.[22] 5월 9일 울산에서도 ‘살인정권 민자당 1년 학정 심판 및 백골단 해체, 공안내각 총사퇴를 위한 울산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정공에서는 1공장에서 400여 명이 출정식을 마친 후 도보로 KBS방송국 앞을 지나 고수부지로 향했고, 2공장 인원 700여 명은 현대자동차 5,000여 명과 합류하여 학성공원을 거쳐 고수부지에 도착해 1만 5천 명의 울산시민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23] 서울에서는 구로공단의 9개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고 오후 2시 가리봉역에서 800여 명의 노동자가 가두집회를 갖고 시청 앞 국민대회에 참가하였다.[24] 11일에는 전국 14개 도시에서 5만여 노동자가 참여한 가운데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노태우정권 퇴진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서울지역의 노동자들은 건국대에서 3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집회를 개최하고 6시 30분경부터 종로·을지로·명동 일대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폭력정권 살인정권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 ‘해체 백골단! 타도 노태우!’, ‘전 민중의 연대투쟁, 타도 노태우!’ 같은 구호들이 외쳐졌다. 15일 전국투본은 업종회의, 대기업 연대회의와 함께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폭력통치 종식을 위한 전국노동조합 비상대표자회의’를 열어 18일 총파업을 결의했다. 이날 현주억 전노협 위원장 직무대행은 ‘전국 노동조합 대표자들에게 드리는 긴급 제안서’를 통해 “4천만 국민이 퇴진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데도 노태우 정권은 반동적인 탄압을 계속하고 있다”면서 “이 시점에서 노동자들이 투쟁의 중심에 서지 않는다면 현재 노태우 정권이 부딪히고 있는 위기는 곧바로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 진영의 위기로 돌아올 것”이라며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호소했다. 비상대표자회의에 참여한 350여 개 사업장 5백여 명의 대표자 및 간부들은 “노태우를 몰아내는 것만이 노동자가 갈 길”이라며 우레와 같은 박수로 18일 총파업 제안을 통과시키고 각 지역과 단위사업장별로 총파업의 결의를 밝혔다. 18일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폭력통치 종식을 위한 전국노동조합 총력투쟁’이란 이름 아래 전개된 총파업에는 156개 노조 9만 1천 400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파업에 돌입하지 못한 많은 노조들도 중식시간 집회 또는 잔업거부 후 동시 퇴근 형태로 총력투쟁에 나섰다. 이날 총파업 총력투쟁에 1,250개 노조 39만 명(전국공투본 산하 450개 노조 21만 명, 업종회의 800개 노조 18만 명)이 동참했다. 노동자들은 단위노조별로 가두행진을 벌여 ‘광주항쟁 계승 및 폭력살인,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 제2차 국민대회’에 조직적으로 참가했다. 강경대 열사의 장례식이자 광주 민중항쟁 11돌인 5월 18일, 현대자동차에서는 하루 휴무조치를 내렸으며 정공과 중공업에서는 점심시간에 규탄집회를 가진 뒤 성내삼거리에 모여 대회장소인 태화강 고수부지 쪽으로 거리행진을 벌이다 동천교와 명촌교 입구에서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돌과 보도블록을 던지며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25] 강경대 학생의 죽음과 박창수 위원장의 의문사를 계기로 폭발한 5월 투쟁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과 결합하여 그 구호가 ‘노동운동 탄압분쇄’와 ‘노태우정권 타도’로 발전되어 갔다. 5월 투쟁에서의 광범위하고 폭넓은 정치폭로는 조합원들의 정치적 경험과 정치의식을 높여 그동안 갖고 있던 연대투쟁에 대한 회의를 적지 않게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5월 투쟁은 주로 시내 중심에서 가두시위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구로공단에서는 지역 내 노동조합의 수천 명 노동자들이 5월 14일, 18일 2, 3공단과 가리봉 오거리를 중심으로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 페퍼포그와 전경들의 최루탄 공격에 노동자들은 투석전으로 맞섰다. 그야말로 공단 가두투쟁은 지역 내 노동조합 간의 연대의 힘과 필요성을 가르쳐주는 공단 정치학교와 같았다.[26] 강경대 열사의 장례식을 겸한 제2차 국민대회에는 전국적으로 40만 명이 참가했다. ‘시민학생 연대투쟁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민자당을 박살내자! 애국시민 일어섰다!’, ‘노동자가 앞장서서 노동해방 쟁취하자!’,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폭력정권 살인정권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같은 구호들이 외쳐졌다. 이날 집회를 계기로 범국민대책회의는 명칭을 ‘공안통치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로 바꾸고 10대 투쟁과제를 선포한 뒤 명동성당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투쟁은 하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8일 집회 이후 김대중이 이끄는 평화민주당을 비롯한 보수야당이 제도권 의회정치로의 복귀를 선언하며 전선에서 철수하고, 그 영향을 강하게 받던 학생운동 세력 또한 상당 부분 철수한 때문이었다. 보수야당을 전선에서 이탈시키기 위해 노태우 정권이 던진 미끼는 노재봉 총리 사퇴(23일)를 비롯한 부분 개각과 광역의원 선거 실시였다. 25일 제3차 국민대회가 전국 19개 도시에서 17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날 서울대회 진행 도중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최루탄에 질식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6월 2일 제4차 국민대회가 서울, 부산, 광주를 중심으로 5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날 투쟁은 특히 부산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6월 2일 부산에서는 부산지역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마산·창원·울산·대구·구미 등지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이 부산대 운동장에서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해 주범 안기부 해체, 91년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 투쟁 승리, 노태우정권 타도 전국노동자학생 결의대회’를 가졌다. 대회에 참석한 3만여 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은 집회를 마친 후 동래구 내성로타리에서 부산진구 하마정까지 ‘박창수 위원장 공작살해 안기부를 해체하라!’, ‘민생파탄 폭력살인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노동운동 탄압하는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밤늦게까지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27] 그런데 3일 정원식 국무총리에 대한 밀가루 세례 사건이 외국어대학교에서 발생하면서 정세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문교부장관 시절 1천 5백여 명의 교사를 해고하는 등 전교조 탄압을 진두지휘했던 정원식이 외국어대학교를 방문하자 대학생들이 밀가루와 달걀 세례를 퍼부었는데, 밀가루와 달걀을 뒤집어 쓴 정원식 총리의 모습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학생운동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기다렸다는 듯 즉각 범국민대책회의와 전대협, 전노협 등 지도부 80여 명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또한 대우정밀, 태평양화학, 세원, 동신공업, 제일교통, 파티마병원 등 파업사업장에 잇따라 공권력을 투입했다. 전국의 투쟁 열기는 급속히 냉각됐다. 8일 ‘공안통치 분쇄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제5차 국민대회’는 서울 1만 명을 비롯해 인천, 성남, 안양 등 전국적으로 3만 명이 참가했다. 이날 전체적인 참여 인원은 줄었지만,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참여는 오히려 두드러졌다. 서울에서 노동자들은 오후 4시 청계6가 홍인상가 앞에서 2,500여 명이 모여 전노협 깃발과 ‘박창수 살해주범 노태우 타도’ 등의 내용을 새긴 현수막을 선두로 동대문운동장, 퇴계로를 거쳐 대한극장 앞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노동자들은 이후 동대문 근처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과 오후 6시 서울역에서 만나 충정로, 아현동 일대를 휩쓸고 신촌로터리에서 대회 원천봉쇄 규탄대회를 가진 뒤 다시 시내로 진출,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투쟁을 전개하였다.[28] 29일 ‘6·29선언 파산선고와 노동운동 탄압 규탄 제6차 국민대회’가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열렸다. 동시에 29~30일 ‘고 박창수 위원장 전국 노동자장’이 안양과 부산에서 거행됐다. 정세가 가라앉고 노동자들만 전선에 남아 노태우 정권의 빗발치는 탄압을 견뎌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안타깝게도 박창수 열사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서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1991년 5월 투쟁은 3당 합당 이후 일방적으로 탄압받던 민중진영이 1987년 6월 이후 최대 규모의 반격을 조직해 내면서 노태우 정권의 전면적 공안통치와 정권 재창출 구상에 파열구를 냈다는 점에서 일정한 성과를 남겼다. 노동자계급이 1987년 6월과 달리 민주주의 투쟁 전선에 조직된 대오로 참가하면서 민중진영을 주도하고 요구 수준을 정권 퇴진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컸다. 그러나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중진영 상당수가 보수야당에게 이끌리며 전선에서 중도 철수하면서 5월 투쟁은 노태우 정권 퇴진을 관철하지 못한 채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1991년 5월 투쟁에서 공동 활동을 벌인 전노협과 업종회의는 그 성과를 토대로 전국노운협 및 전국노련과 함께 10월 9일 ‘ILO 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ILO공대위)를 결성했다. ILO공대위는 한국 정부의 국제노동기구(ILO) 가입 추진을 계기로 ‘자주적 단결권 확보를 중심으로 한 노동법의 실질적 개정’과 ‘민주노조 총단결 투쟁을 통한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발전’을 목표로 내건 한시적 공동투쟁체였다. ILO공대위는 11월 10일 서울 여의도 둔치에서 6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태일 정신계승과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또한 ILO에 한국 정부를 제소하여 민주노조 진영이 한국 노동조합의 일각을 대표하고 있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노동법을 개정하라는 권고를 이끌어 냈다. 4) 전노협 정신과 선진노동자들의 형성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토대로 1990~91년의 전노협은 한국 노동자계급 대중운동의 한 정점을 찍고 있었다. 전노협으로 결집한 민주노조운동을 꿰뚫은 정신은 한마디로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이었다. 전노협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속과 해고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노태우 정권의 입체적인 탄압을 전국 총파업으로 맞받아치며, 말 그대로 “투쟁을 통해 조직을 사수”해 냈다. 이처럼 단호한 기세를 바탕으로 전노협에 소속된 단위노조들은 임금인상·단체협약 투쟁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들을 쟁취해 냈다. 전노협은 그 깃발에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을 새겨 넣었으며, 산하 지노협 가운데 핵심이었던 마창노련의 강령은 “노동해방의 그 날까지 끝까지 투쟁”을 명시했다. 전노협 건설과 사수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현대중공업노조의 노동조합가는 “노동해방 선봉에 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을 후렴구로 가졌다. 전노협을 대표하는 구호는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였다. 민주노조 운동 역사상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전노협 시대만큼 현장이 살아 움직이고 연대의 정신이 넘쳐나는 시기는 없었다. 지금 보면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구사대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여성 노동자들만이 있는 사업장에 수백 명의 지역 노동자들이 교대로 출퇴근하면서 함께 철야농성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옆 사업장에서 구사대 침탈 소식이 들려오면 일하다가도 바로 일손을 놓고 수백 명이 달려가서 구사대를 격퇴하기도 했다. 마창노련의 경우 조합원 27,000명 정원에 25,000명이 운동장에 모여서 조합원 총회를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지역 집회를 하면 수천 명이 모이는 것은 보통이었다.[29] 동지들! 지난 시절 우리가 건설하고 지금까지 사수해 온 전노협은 자본과 권력에 야합함으로써 건설된 것이 아닙니다. 전노협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해마다 500여 명의 조합원이 구속당하고, 3,000여 명의 조합원들이 강제로 일자리에서 쫓겨날 때도, 전노협만 탈퇴한다면 수천만 원, 수억 원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던 자본과 정권 측의 매수공작에 맞서, 전세금을 뽑고 적금을 해약하면서 지켜온 것이 전노협입니다. … 동지들! 동지들도 91년 5월, 전노협 탈퇴 공작에 끝까지 저항하다 싸늘한 시체로 우리 곁에 돌아온 전노협 부위원장 박창수 동지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죽음을 딛고, 수많은 구속과 수배, 해고를 딛고 쓰러지지 않고 되살아났습니다. 우리는 되살아나 육해공군 4만의 군대가 물샐틈없이 봉쇄한 울산과 거제의 골리앗으로, 우리의 깃발과 우리의 선봉대를 실어 날랐고, 남은 모두가 그들이 되어 함께 싸웠습니다. 그리하여 전노협은 소외와 무권리에 의해 고통 받는 천만 노동자의 조직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30] (1절) 폭력과 탄압의 굴레를 뚫고 우뚝 선 현중의 형제여 가자, 가자, 달려 나가자! 노동자 해방으로! 가진 자들의 폭력이 판친다 해도 우리는 목숨 바쳐 싸워나가리! 해방 해방을 위해, 투쟁 투쟁을 위해 노동해방 선봉에 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2절) 미포만에 떠오른 태양, 어머님의 뜨거운 눈물, 가자, 가자, 달려 나가자! 민중의 해방으로! 동지여 기억하는가 89년도 우리는 목숨 바쳐 싸워나가리! 해방 해방을 위해, 투쟁 투쟁을 위해 노동해방 선봉에 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31] ◎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의 형성 1988년 이후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자연발생적 성격과 달리 1988년을 경과하면서 ‘노동해방’이 민주노조들의 보편적인 구호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그 직접적인 반영이었다. ‘노동해방’이라는 피로 쓴 플래카드를 내걸고 연세대에서부터 여의도까지 이어진 노동자의 행진대열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특히 울산, 마산창원 지역에서 올라온 노동형제들의 일사불란한 행진은 눈을 끌고도 남았다. 붉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보도가 쾅쾅 울리도록 발을 맞추어 나가는 노동형제들의 모습은 해방군대 바로 그것이었다. “노동해방사상이나 단체, 나라에 관련한 책을 읽고 싶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금서라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빨갱이가 되라면 돼야죠, 잘살아 보겠다는 것이 빨갱이라면 우리 모두가 빨갱이 아닙니까?”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노동해방이 북한이나 소련과 같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번 투쟁 때 사장이 빨갱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러니까 할 말이 없대요. 그땐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노동자들의 정당이 필요합니다. 민주당이나 평민당이나 그놈이 그놈입니다. 우리 후보가 나서야 합니다.” “전노협이 결성되면 아마 더욱 힘차게 싸울 수 있겠지요. 이제는 연대하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어요. 자본가들은 경찰까지 동원하여 우리를 탄압하고 있지 않습니까?” “복수노조는 인정돼야 합니다. 물론 회사 내에 두 개의 노조가 있으면 힘이 더 약해지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저희 회사에서는 그놈의 유령노조 때문에 계속해서 노조건설이 막히고 있습니다. 다른 현장 동지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아도 유령노조나 어용노조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복수노조가 인정되면 우리가 더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노협만으로는 안됩니다. 지역적으로 대응해서는 결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집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인터뷰에 매달렸다. 노동해방의 항목에 대한 노동형제들의 반응을 들으면서 빨갱이 공포증이 많이 녹아 내렸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1~2년 전만 해도 노동해방의 붉은 기치를 공공연하게 들어 올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엄청난 발전이었다.[32] 또한 노동자 계급의식을 갖춘 현장 활동가들이 엄청난 기세와 규모로 성장하면서, 집행부와 대의원이라는 노동조합 공식 체계를 넘어선 다양한 현장의 조직형태들이 노동조합 체계 안팎에 등장한다. 정당방위대·선봉대·결사대 등 다양한 명칭을 가졌던 행동대, 대우조선·현대중공업 등 대공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소위원회 등이 노동조합 체계 안에 형성됐다면, 다양한 수준의 학습모임, 부서별 활동가 모임, 어용노조가 지배하는 다수의 대공장에서 등장했던 노조민주화 추진체 등이 노동조합 체계 밖에 형성된다.[33] 마창지역에서는 정방대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선봉대는 1989년 벽두부터 피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그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다. 선봉대는 각 노조별 정방대와 마창노련 선봉대로 나뉘어졌는데, 정방대가 단위노조를 사수하는 단위노조 내 조직이라면, 선봉대는 마창노련을 사수하기 위한 마창노련 차원의 조직인 셈이다. 따라서 선봉대는 공권력이나 구사대로부터 마창노련을 사수하기 위해 지역 공동대처에 나서거나 점거농성 및 대외투쟁의 역할을 담당하는 타격대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연대의식과 정치의식, 그리고 정치투쟁력을 발전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두게 되었다. 선봉대는 각 노조의 정방대원 중 10% 인원(단사별 80명당 1명꼴)으로 선발되어 주로 상집간부, 대의원, 핵심조합원으로 구성되었다. (선봉대와 정방대는 조직적으로 이원화됨으로써 통제되지 못하였다. 특히 선봉대원 대다수가 단위노조 간부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선봉대 활동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나중에 가서 선봉대와 정방대는 일원화되어, 각 노조별 정방대 안에 선봉대, 규찰대, 경호대, 경비대로 재편성하였다.) 그에 비해 정방대원(약 1,500여 명)은 전체 조합원 중 10%의 조합원과 대의원들로 구성하였는데, 각 노조마다 지원자가 하도 많아 선발해야 할 정도로 정방대에 대한 대중적 참여는 아주 높았다. 각 노조는 규약을 통해 집행부는 바뀌어도 정방대는 상설기구로서 기능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정방대는 노조 안의 확고한 대중조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각 조합은 규약에 “구속자 적립금은 쟁의기금 중 30%로 항상 예치할 것, 생계비 지급할 것, 석방 후 완전복직” 등을 명시하여 정방대원들의 부담 및 걱정을 덜어주었다.) 이는 ‘정방대’가 흔히 알려져 있듯이 단순히 싸움만 하는 부대가 아니라 노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중추조직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정방대원은 준간부로서 현장에서는 비조합원들 앞에 모범을 보이고 투쟁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설득하며 강화해 나가는 사람들, 뭔가 이론적으로도 더 알고 있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허상식 마창노련 선봉대장(타코마노조 조직부장)은 “정방대는 노동자의식이 투철하고 선진적인 노동자들로 구성된다. 노조 집행부와는 별도로 노동자들 속에 존재하면서 노동조합의 민주성, 대중성을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튼튼한 중간 허리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정방대의 핵심 업무는 노조사수이며 구사대와 공권력 격퇴, 의장단 경호와 단상보호, 집회규찰, 가두행진 시의 선봉 역할, 그리고 인근 사업장의 투쟁을 지원 연대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각 노조는 임투를 앞둔 수련회나 교육 등을 통해 정방대의 취지와 목적, 임무와 역할 등에 대한 교육과 피티체조, 화염병 투척 연습, 구보 등의 체력단련과 무술훈련, 전략과 전술에 대한 훈련 점검을 실시하였다. 실례로 금성사노조는 꽃병투척 대회를 열어 사기를 높이는가 하면, 대림자동차노조는 정방대 안에 화염병투척반, 봉술훈련반을 따로 조직하고 회사 본관 앞에서 기합소리와 함께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봉술훈련을 하는가 하면 호를 파놓고 그 안에 들어가 사과탄을 투척하는 훈련을 감행하여 회사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특히 5지구 정방대는 금성사 1공장, 대림자동차, ㈜통일 등 17개 노조에서 400여 명이 정방대로 조직될 정도로 숫자로 보나 투쟁력으로 보나 단연 우세하였는데, 그 중 과반수인 200여 명을 거느린 ㈜통일노조 정방대는 마창노련을 살렸다고 할 정도로 가장 모범적이었다. 정방대원들은 가두집회와 타격전에 나갈 때마다 화염병, 각목, 마스크, 물안경 등을 준비하였으며 수출 1, 2지구의 여성 정방대원들은 망치 등을 가지고 보도블록을 깨거나 돌을 날라주기도 했다. 여성노동자들이 가두에서 남자들과 함께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거나 경찰을 향해 돌을 깨서 던지는 모습은 아마도 세계 어느 노동운동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광경일 것이다. … 마창노련 정방대는 구사대와 공권력으로부터 민주노조와 마창노련을 사수하고 이를 통해 마창노련의 연대의식, 정치의식과 투쟁력을 발전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34] 91년 투쟁 과정에서 지도부와 조합원들이 일치단결한 것은 현장토론의 활성화에 있었다. ‘임금인상투쟁 준비기-준법투쟁 및 부분파업 투쟁기-투쟁 마무리기-투쟁평가기’에 이르기까지 조합원 토론회에서 항상 의견을 통일하고 결의를 모아갔다. 이로써, 간부들의 조합원에 대한 지도력을 높이고, 동시에 조합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현장토론의 조직화 과정은 ‘구체적인 조합원의 실태파악 - 집행부의 토론안 수립 - 집행부의 조합원들의 문제의식 및 토론의제 공유 - 현장지도부(대별 소위원회)가 현장토론 실시 - 반론이 제기될 경우 집행부 재토론 - 조합원 재토론’의 수순을 밟아 진행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간부들은 스스로의 투쟁결의를 높임과 동시에, 밑으로부터 조합원들의 참여와 의견수렴을 통해 투쟁방향을 구체적으로 확보해 나갈 수 있었다. 조합원 토론의 활성화에 일등 공신은 91년 도입한 소위원제도였다. 해마다 나우정밀 노동조합은 투쟁 시기에 ‘임금인상투쟁 대책위원회’ 산하 현장조직을 대대별 체계로 운영해 왔다. 1공장은 1대대에서 5대대로 편제되어 있었고, 2공장은 6대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그래서 현장은 모두 6대대로 구성되어 모든 조합원이 각 대대에 소속되었다. 하나의 대대는 2~3개 라인으로 구성되고, 약 100명의 조합원들로 편성되었다. 각 라인에는 라인대표가 있었다. 각 대대장은 라인대표와 함께 활동했다. 91년 이전까지는 대대장의 책임하에 라인대표가 현장토론과 투쟁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91년 투쟁에서는 현장대대의 활동과 투쟁을 활성화하기 위해 대대별 체계 내에 소위원 제도를 도입하였다. 4월 7일 소위원 선출을 하였다. 소위원 제도는 대대별 각 라인에 3~4명의 소위원을 선출하여 만든 것이다. 90년까지 현장의 모든 활동은 대대별로 대대장과 라인대표가 총괄해 왔다. 그래서 대대장과 라인대표가 수십 명의 조합원을 지도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91년 투쟁에서 소위원제도를 도입함으로써, 현장지도력의 공백이 보강되어 보다 치밀하고 보다 민주주의적 현장지도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위원회의 활성화는 일상적 시기의 대의원의 역할을 맡을 선진적인 조합원을 배출하는 저수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대대별 소위원들의 선출로 대대장은 라인대표와 소위원들을 근간으로 현장조합원의 토론과 투쟁을 주도해 나갔다. 대대장을 중심으로 한 현장지도력의 강화는 조합원들과 투쟁지도부 간의 결합력을 높여 일사불란한 투쟁을 전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소위원을 선출할 당시 경험 있는 조합원이 많지 않아 투쟁을 진행하는 데 적지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은 전화위복이 되어 결과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의 새로운 지도력을 훈련시킴으로써,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강화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소위원제도가 그 힘을 발휘한 것은 5월 3일 쟁의발생신고 찬반에 관한 토론이었다. 라인별 토론이 시작되었을 때, 소위원들은 조합원들의 밑으로부터 제출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토론을 활성화시켰다. 따라서 조합원들 모두가 쟁의발생신고를 흔쾌히 동의하고 힘있게 결의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침으로써, 조합원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의한 투쟁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35] 가. 부서별로 산개되어 활동하거나 소모임의 형태로 활동하던 모임들이 모두 결집하여,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전 공장 현장조직의 형태인 ‘노조민주화 추진위원회’(노민추)를 건설하였다. 이들의 과감하고 헌신적인 투쟁은 조합원들의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형성해 냈다. 이 시기에 ‘노민추운동의 대중화’가 일어난다. 민주적 활동가들이 대의원에 대거 진출하거나 소위원회가 광범위하게 구성됐다. 이로써 노조민주화 투쟁은 집행부 장악에만 한정된 민주파들의 선거투쟁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의 대중적 저변을 확대하면서 활성화된다. 나. ‘노민추’ 건설 △기아자동차 : 대량해고와 구속 사태로 현장 내 활동력의 부재라는 공동의 과제를 껴안게 됨에 따라 현장 내 활동기반 복원 과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현장 내 다양한 소모임과 해고자들이 모여 결성함. △현대자동차 : 2대 집행부의 개량화에 대한 불신임투쟁을 통해 민주세력의 단일대오에 대한 고민을 현실화시켜 결성함. △현대중공업 : 128일 투쟁과 골리앗투쟁을 통해 현장이 공백상태를 맞자 새로운 지도력 구축의 필요성과 정치성과 계급성, 전국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각성을 통해 결성함. △대우조선 :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노조건설 공동대책위원회 활동에 대한 평가가 지역 내 중소사업장 노조와 민협위, 해대위 등에서 이루어지면서, 지역노조 활동의 핵심적 열쇠는 대우조선노조의 역할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러 준비모임을 거쳐 결성하게 됨. 다. ‘노민추’ 활동의 성과와 한계 이러한 ‘노민추’ 활동의 성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민주세력이 주도하여 세워낸 초기 집행부의 한계를 극복하고, 노조민주화 투쟁과 해고자복직 투쟁을 중심으로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여 민주집행부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당시 내용적 분화보다는 분열의 상태로 존재했던 각종 민주세력의 소모임들과 민주 대의원(소위원)들이 결합하여 단결된 조직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민주노조에 대한 대중적 열망의 수렴을 기반으로 대중과 결합하여 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대의원 선거에 단일한 공약과 선전과 선동으로 공동의 대응을 하고, ‘노민추’ 신문을 통하여 ‘노민추’ 활동내용을 선전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대중과 결합해 갔다. 이러한 활동의 성과에 반해 ‘노민추’ 활동의 한계를 살펴보자. 그것은 노조 수준을 넘는 활동 전망이 미약했다는 것이다. 이는 ‘노민추’ 조직의 존재조건으로부터 기인한다. 즉 ‘노민추’ 활동의 최대 목표와 활동의 중심은 노조 집행부 장악이었기에, 단사 내 노조문제 중심의 활동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로 민주노조 장악 이후 활동 방향을 발전적으로 바로 전환하지 못하며, 그리하여 활동의 공백이 생기게 된다.[36] 1987년 이전까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현장 노동자가 소수의 조직사건 관련자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던 것과 달리, 1990년에는 6월까지 구속된 노동자 437명 가운데 국가보안법 관련자가 101명으로 23%를 차지하였으며 그 가운데 대부분이 이적표현물 제작·소지로 구속되었던 것 또한 그 무렵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 전반의 급격한 정치의식 성장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 선진노동자들의 형성과 전노협 건설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역할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데서 사회주의 운동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먼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사회주의 운동의 비약적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80년대 중반,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이 가장 급진적인 흐름들로부터 사회주의 운동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할 때,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흐름이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 안에 나타나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37] 사회주의 운동이 초보적인 형성 과정에 있었기에 사상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유아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에, 주체사상은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 안에 존재하던 민족주의적 한계를 효과적으로 파고들었다. 1985년 하반기부터 등장한 주체사상파 흐름은 1986년을 거치면서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에서 다수를 장악했으며, 특히 학생운동에서는 강력한 주도권을 확보하게 됐다. 주체사상파는 이미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고 있던 한국 사회를 북한의 주장대로 ‘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규정했고 그에 따라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NL-PDR)을 당면 혁명의 과제로 설정했다. 또한 노동자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보지 않고 보수야당 즉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치세력을 포괄하는 민족통일전선을 혁명의 주체로 보았다. 나아가 남한의 혁명은 북한을 포함한 전 민족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면서, 혁명을 지도할 정당이 이미 북한에 있기 때문에 남한에서 독자적인 노동자계급 정당을 건설할 필요가 없고, 남한 노동자들은 북한 전위당의 영도에 따라 자주·민주·통일을 기치로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데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체사상파가 미친 악영향은 매우 컸다. 이들의 민족통일전선 노선은,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이 노동자·민중에 근거하여 민주화 투쟁을 혁명적으로 발전시키고 나아가 노동자계급에 근거하는 사회주의 운동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가로막았다. 대신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을, 군사파시즘 세력과 끊임없이 타협하고 동요하면서 자신들의 집권 기회만 노리고 있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의 영향력 아래로 끌고 들어갔다. 실제로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주체사상파는 노동자·민중의 혁명적 요구인 ‘군사파쇼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가 아니라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의 요구인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구호로 내걸었다. 주체사상파의 노선은 6월 민중항쟁에서 가장 조직적인 세력이었던 학생운동의 대다수가 ‘직선제 쟁취’와 ‘비폭력’을 주장하게 함으로써, 6월 민중항쟁의 혁명적 발전을 가로막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혁명운동에서 노동자들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축소시킨 주체사상파는 ‘노동자들도 민족자본과는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노동자들이 명확한 계급의식을 갖고 성장하는 데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사회주의 운동은 주체사상파 등장 이후 성장이 심각하게 지체된 까닭에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항쟁의 혁명적 발전을 추동해 낼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사회주의자들에게 강력한 확신과 영감을 불어 넣었다. 이제 현실의 노동자들 속에서 혁명적 운동의 가능성을 직접 확인한 사회주의 운동은 비약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1988년을 경과하면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원전을 비롯한 각종 사회주의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양한 수준의 사회주의 학습모임들이 대학생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빠르게 만들어졌다. 상당수의 학생출신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현장 노동자로 투신해 들어갔으며, 노동운동 경력이 많은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공개적인 노동운동 단체들이 전국 곳곳에 설립됐다. 이러한 사상 학습과 실천 활동의 성장을 토대로 크고 작은 다양한 사회주의 조직들이 잇달아 등장했다.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는 것을 반영하여, 상당수 현장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조직들 속으로 결합해 들어왔다. 비밀리에 또는 공개적으로 발행되는 수많은 정치신문과 이론지들이 넘쳐흘렀다. 사회주의 조직들 사이에 통합 작업도 활발히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백 명의 규모를 갖는 조직들도 등장했다. 다양한 사상적·실천적 경향을 가진, 크고 작은 사회주의 조직들이 십여 개 정도 형성됐다. 이렇게 성장해 간 사회주의 운동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노동자대중의 자연발생적 분출이었던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 불과 몇 년 만에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대규모로 형성되고 전투적·변혁적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총단결체로서 전노협이 건설·사수되는 도약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사회주의 운동은 민주노조운동에 뛰어든 현장 노동자들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성공적으로 결합했고, 이를 통해 계급의식을 가진 현장 활동가들을 빠른 시간 안에 엄청난 수로 배출시켜 냈다. 무엇보다 상당수의 학생운동 출신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제조업 현장 노동자로 투신해 들어갔다. 자본가들이 ‘위장취업’이라고 공격했던 이 현장투신의 흐름은 1980년대 중반부터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1980년대 후반까지 적어도 천 명 이상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현장 노동자로 들어갔다. 이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까지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끌어 내고 선진노동자들을 발굴하는 데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곤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급격한 성장은 이들에게 풍성한 활동 공간을 열어 주었다. 파업 투쟁과 일상적인 노동조합 활동 속에서 현장 노동자들과 날마다 부대끼면서, 이들은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 발전과 민주노조 운동의 성장을 촉진하는 데서 매우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대학생 등 지식인들이 노동현장 속으로 들어오면서 ‘활동가’니 ‘운동권’이니 하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는가 하면, 노동현장에 취업한 지식인들을 지칭하는 ‘위장취업자’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장운동은 지금까지의 노동운동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수혈운동으로까지 불렸다. 이들은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하고, 소모임을 만들어 학습과 실천활동을 통해 이 땅에 진정한 변혁을 도모하기 위해 온몸을 다 바쳤다. 감시와 고문, 투옥과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의 헌신과 학습지도 등으로 노동자들은 점차 사회현실에 눈을 뜨고 새롭게 인식을 전환하면서,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현장모임을 만들거나 조직과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38] {현대자동차} 노민추는 {1990년} 위원장 불신임 투쟁을 전개하면서 전 공장 조직을 포괄하게 되었다. 조직원도 15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확대되었고, 2개월 정도 활동을 거치면서 250명으로 늘었다. 당시 현장에는 70여 개에 달하는 소모임들이 있었는데, 그 구성원들이 공공연하게 조직원으로 참여했다. 1989년경 울산은 노동운동 진영의 관심대상으로 급부상하면서 학생출신 노동운동가들이 대거 이전했고, 1987년 대투쟁 이후 자생적으로 생겨난 여러 소모임들이 이들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학습했던 선들이 달랐어도 노조민주화라는 단일한 목적 아래 이견 없이 행동할 수 있었다. 조합원들도 민주와 어용이라는 두 개 흐름 외에는 구분 짓지 않았던 시기다.[39] 현장 밖에는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수준의 노동운동 단체들이 있었다. 임금·해고·산재 등 노동기본권에 관하여 일반 노동자들을 상대로 상담하는 단체, 노동조합 설립과 활동에 대한 지원이나 다양한 수준의 노동자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 노동법 개정이나 사회 민주화 등 기초 수준의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는 현장 노동자들로 구성된 회원 단체, 노래·풍물·연극·글쓰기 등 문예 활동에 주력하는 단체 등 다양한 단체들이 전국 각 지역에 수백 개가 설립되어 운영됐다. 이들 노동운동 단체들은 각 단체의 고유한 역할 수행에 덧붙여 1988년 6월 3일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국노운협)[40]를 결성하여 민주노조 운동과 공식적 관계를 갖고 지원과 견인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노동운동 단체들은 군사정권 아래서 공개적으로 활동한다는 제약 때문에 정치적 표현 수준에 상당한 한계를 둘 수밖에 없었지만, 그 속에 있는 활동가 가운데 상당수가 사회주의 활동가들이었다. 또한 군사정권의 엄혹한 탄압 때문에 철저히 비공개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크고 작은 사회주의 조직들이 있었다. 사회주의 조직들은 현장에 투신한 사회주의 활동가들, 공개 노동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 활동가들 대다수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비밀리에 정치신문을 발행하거나 소규모 학습모임을 운영하면서 가장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을 직접 이끌고 있었다. 독재와 자본에 맞선 비타협 투쟁의 시기에 현장은 비합 사회주의 운동 세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학습받고 훈련된 상당수의 활동가들이 배출되었다. … 지노협, 지역 노동단체에서 진행한 활동가 프로그램, 조합원 교육 등은 공개적으로 사회주의라는 말은 사용하지 못했지만 사회주의적 기초를 놓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노동조합조차 정권과 자본과의 전면전을 위해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대가라는 점, 교섭은 힘의 논리라는 점, 교섭으로 쟁취할 것이 거의 없으며 교섭은 투쟁에 종속돼야 한다는 점, 투쟁으로 쟁취한 작은 개량조차 노동해방 사회를 건설하지 못하면 자본의 공격에 의해 빼앗긴다는 점 등을 일상적으로 교육했고, 현장조직력과 투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분임토론 등 다양한 노동자 직접참여 노동자민주주의를 개발·강화했다. 정권과 자본에 맞선 연대투쟁은 활동가들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었다. 자본은 달라도 노동자들은 공장의 장벽을 넘어 하나였다. 정권의 노동운동에 대한 태도는 선동하지 않아도 스스로 총자본의 집행위원회임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중앙, 지역, 대공장들은 언제나 정세분석에 민감해야 했고 무엇을 할 것인지 결의해야만 했다. 노동3권 특히 파업과 연대투쟁을 가로막는 노동악법 철폐투쟁은 언제나 어겨서 깨뜨리는 것으로 나아갔다. 자기 사업장 현장에서부터 자본에 맞선 일상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현장을 자본의 통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일상 사업을 배우는 기초였다. 이렇게 활동가들은 몸으로 배우고 학습했다. 이렇게 활동가들이 배출되었다.[41] 다음 편 보기 [1] 전노협 결성에 참여한 지노협 14개는 서울, 인천, 부천, 성남, 경기남부, 대전, 전북, 광주, 마산·창원, 부산·양산, 대구, 진주, 포항, 울산이며, 업종협 1개는 민주출판노협이었다. 업종협 4개(전교조, 전문노련, 시설관리노협, 화물운송노련)는 전노협 중앙위원회에 참관하면서 전노협 사업에 사안별로 협력·연대하기로 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2권 1989년 -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논장, 187쪽) [2]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2권 1989년 -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논장, 190~191쪽. [3]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13~214쪽. [4]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67~269쪽. [5]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12~214쪽. [6]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281쪽. [7]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280~281쪽. [8]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29쪽. [9]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19쪽. [10]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19쪽. [11]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193쪽. [12]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114~115쪽. [13]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47쪽. [14]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50~251쪽. [15]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45~249쪽. [16]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115~116쪽. [17]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26~227쪽 [18] 김현종, 1990, 『골리앗 상공에서 쓴 비밀일기』, 노동문학사, 165~166쪽. [19] 대기업 연대회의에 참가한 16개 대기업 노조는 다음과 같다: 현대중공업, 현대정공(울산), 현대정공(창원), 현대중전기, 한진중공업, 대우조선, 대우자동차, 대우정밀, 포항제철, 풍산금속, 금호타이어, 아세아자동차, 기아기공, ㈜통일, 태평양화학, 서울지하철. [20] 4월 29일 전남대 박승희, 5월 1일 안동대 김영균, 3일 경원대 천세용, 8일 전민련 김기설, 10일 노동자 윤용하, 18일 천주교신자 이정순, 보성고생 김철수, 택시노동자 차태권, 22일 청년 정상순, 6월 8일 노동자 이진희, 15일 택시노동자 석광수가 ‘노태우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했다. [21] 노동자뉴스제작단, 201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영상) 3부. [22]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358쪽. [23] 현대차노조정공본부, 2001, 『정공노조 15년』, 91~92쪽. [24]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4권 1991년 - 죽음으로 사수한다! 전노협』, 논장, 172쪽. [25] 현대차노조정공본부, 2001, 『정공노조 15년』, 91~92쪽. [26] 나우정밀노동조합사 발간위원회, 1998, 『나우정밀 노동조합 10년사 - 영원히 꺼지지 않는 희망의 횃불로!』, 103~104쪽. [27]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4권 1991년 - 죽음으로 사수한다! 전노협』, 논장, 182~183쪽. [28]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4권 1991년 - 죽음으로 사수한다! 전노협』, 논장, 520쪽. [29] 김창우, 2006, 「전노협 청산에 관한 연구」. [30] 전노협, 1995, 『1995년도 사업보고』, 발간사. [31] 1989년 제정된 <현대중공업 노동조합가>. [32] 김미영, 1990, 『마침내 전선에 서다』, 노동문학사, 312~313쪽. [33] 대표적으로 1989년 128일 파업을 통해 막강한 현장조직력을 구축하며 민주노조 운동의 최선봉으로 우뚝 섰던 현대중공업노조는 파업 기간 동안에 소위원회를 노동조합의 공식체계로 신설하고, 상경투쟁을 벌였던 노동자들이 ‘자생란’과 ‘한목소리’를, 가장 전투적으로 싸웠던 특례보충역들이 ‘새벽깃발’을, 투쟁이 끝나고는 활동가들이 각 부서별로 ‘부서동지회’를 만든다. [34]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41~143쪽. [35] 나우정밀노동조합사 발간위원회, 1998, 『나우정밀 노동조합 10년사 - 영원히 꺼지지 않는 희망의 횃불로!』, 106~107쪽. [36]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7, 『현장조직운동의 과거·현재·미래』, 18~20쪽. [37] 특권 관료집단이 노동자계급 위에 군림하는 스탈린주의 체제가 북한에서는 더욱 극악한 모습으로 펼쳐졌다. 소련군의 무력을 등에 업고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 세력은 모든 경쟁 세력을 숙청한 뒤, ‘김일성 수령’에 대한 우상숭배를 강요했다. 심지어 ‘백두혈통’을 운운하며 봉건왕조를 연상케 하는 권력 세습으로까지 치달았다. 북한 사회가 철저한 가짜 사회주의인 것처럼, 수령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근간으로 하는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주의와 전혀 상관없는 반동적 사상이었다. [38]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25쪽. [39]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129쪽. [40] 나중에 전국노운협은 노선 차이로 내부 갈등을 겪게 되며, 전국노운협을 이탈한 단체들이 1991년 7월 14일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을 출범시킨다. [41] 정원현, 2006, 「현장파의 몰락 이후 전국 선진노동자들의 전국운동 조직화 과제와 임무」.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기고] Tạm biệt — 뚜안님 100일재에 동행하여 남기는 기록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뚜안님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여러 번 깨달을 때마다, 나는 우리 노동자 민중을 하나로 이을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각각의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는, 공통의 감각. 계속 되는 자본의 갈라치기와 대상화의 홍수 속에서, 범람하는 탈인간화에 나는 계속해서 우리가 사람임을 잊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두고 가야 하는 기억이 있다. 그런다고 나에게서 온전히 떨어뜨려 놓을 수 있는 순간이 되는 건 아니지만, 전부 짊어지고 살아가기에는 결국 침잠되어버리기에. 상실을 겪으면 나는 특히 그런 강박을 느낀다. 그 순간들을 따로 떼어두고 가지 않으면 내가 잡아먹힐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난 2025년 10월 28일,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폭력적 단속으로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뚜안님의 가족들도 그러한 마음이 아니었을지. 감히 짐작해 본다. 사건이 발생하였던 당시에 나는 개인적으로 두고 가야 할 오래된 기억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저 공교롭게 이 일에 함께 하게 되어, 개인 연대 시민의 자격으로 대책위가 주도한 거의 모든 투쟁의 순간에 자리했다. 1인 시위부터 100일재 참여까지 최선을 다한 동지들과 유족들이 있어 나 역시 그들과 심적으로 더 가까워지고 많은 걸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영적으로 민감한 편이라 망자와 관련된 일이나 종교 의식과는 거리를 두는 편이었다. 하지만 정리하고자 했던 오래된 기억 또한 망자에 대한 일이었기에, 사건들이 닥친 김에 직면하고자 좀 더 적극적으로 ‘죽음'을 들여다 봤다. 세상을 사랑할 줄 알던 이들의 이른 죽음,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고자 열망하던 날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당신을 압니다. 살아가는 일조차 허락받아야 하고 숨죽여 떨어야만 하는 삶을 알고 있습니다. 살아서 만난 적이 없어도, 나 또한 당신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의 하늘 아래에는 나만 남아 숨쉬고 있지만, 앞으로의 날들에는 누구도 이런 고통을 다시 겪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게요. 부디 편히 쉬시길.」 — 대구 출입국 사무소 앞의 뚜안님 분향소 방명록에 남긴 말 뚜안 대책위가 서울에서의 농성을 정리하던 날, 뒤풀이 자리에서 활동가인 태은 동지가 2월에 있을 100일재를 지내러 베트남을 가자는 말을 꺼냈다. 분위기에 취해, 그리고 뚜안님이 살던 곳이 궁금하여 같이 가고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렇다 해도 나는 대책위의 사람도 아니고 재정이 준비된 상태도 아니라 현실적으론 어려울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대구의 분향소를 정리하는 날에 금속노조 성서공단지역지회장 희정 동지에게 동행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으나 대책위 사람들 또한 갈 수 있을지가 불분명한 상태였다. 가능하면 좋겠지만 못가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1월의 어느 날 눈을 뜨기 전 아침, 꿈에 뚜안님이 등장했다. 이렇게 대화하게 되어 너무 좋다고, 소개시켜 줄 사람이 많다며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꿈에서 본 사람들은 그의 조상들이었던 거 같은데, 일어난 뒤에 신나서 돌아다니던 뚜안님을 떠올리니 아무래도 베트남을 가야할 성 싶어 결심이 섰다. 곧바로 희정 동지에게 동행하겠다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내고 여권을 만들러 밖으로 나갔다. 내란으로 정신없던 시기에 만료됐던, 돈도 시간도 여의찮아 해외 갈 일이 망연하다고 방치해 둔 여권이었다. 그 날이 뚜안님 아버지인 부반숭 동지의 생신이었다는 걸 저녁에 알게 되자, 뚜안님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초대를 했는데 안 간다면 정말 속상해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늘어가는 건 현실성 운운하며 따지고 재는 일과 발 빼는 일이라니 부끄럽다. 뚜안님은 먼저 도전하고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었을 거 같다.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 것도 그랬기 때문이었다고, 중간 보고회에서 그의 친구였던 혜인님이 말했다. 내가 나고 자란 이 대한민국이 그렇게 도전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곳인지 나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뚜안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겐 그랬던 모양이다. ‘어메리칸 드림’에 이은 ‘코리안 드림’이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허황된 꼴을 좋게 포장한 거 같아서 그런 표현을 듣는 마음이 불편했다. 호치민에서 만났던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에 호의적이라서 사실 더 괴로웠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한국인들은 어떻게 취급했는지. 그리고 제국이 되고 싶어하는 한국의 정부와 자본가들이 떠올랐다. 호치민 곳곳에 뿌리내린 한국 자본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미국이 한국전쟁 이후 원조한 방식을 그대로 써먹은 게 뻔했다. 베트남도 오래도록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내전으로 끔찍한 날들을 보냈다는 점에서 한국과 유사한 면이 많았다. 곳곳에 서양식의 건물이나 주변의 집들처럼 개방되어 있지 않은 ‘저택’들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기후가 따뜻해서 그런지 집들도 가게들도 1층은 벽보다 창문이나 문의 면적이 넓은 편이었다. 문이 있어도 대다수가 유리문으로 내부가 잘 보이는데, 저녁에는 대문을 닫는다 쳐도 생활하는 시간에는 대부분 문을 활짝 열어놓는 식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는 이제 일제 목조 건물이나 강점기 당시에 지어진 건물을 아직도 쓰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박물관이나 특수한 목적의 건물로 거의 보존해 놓는 편이라, 그 시대를 일상과 분리시킨 듯도 하다. 마치 과거의 편린은 박제가 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처럼, 혹은 옛날 일은 남 얘기인 것처럼. 유사한 맥락으로 한국에서는 빈자와 부자가 철저하게 분리되는 게 당연하다. 그런 부분들 때문인지, 나는 베트남 땅에서 어떠한 여유를 느꼈다. ‘사회주의 국가’라기엔 제국의 자본에 의존도가 크고 수도인 호치민시 역시 땅값이 비싼 곳이었지만, 그곳 사람들에게서는 한국에 만연한 조급함이나 짜증을 본 적이 없었다. 고작 며칠 머무른 걸로 하나의 나라를 다 파악했다 할 수는 없겠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소통이 어렵지 않았고 왠지 ‘괜찮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나는 가게와 집집마다 놓인 작은 재단 때문에 초반에 자주 어지러웠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종교를 가졌기 때문인지 그들에게서 선함과 거기에서 오는 여유가 느껴졌던 거 같다. 뚜안님이 고향을 그리워 하셨던 이유를 왠지 알 듯도 했다. 나도 그곳에서 어릴 적 살던 동네와 그 시간의 향수를 느꼈다. 단순히 저개발지라서 그렇다기 보다는, 뚜안님이 나고 자랐다는 동네에는 사람들이 서로 용인하고 신뢰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집집마다 걸린 화초나 여기저기 심어져 있는 풀과 나무를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집을 지을 때 먼저 심어진 나무를 베거나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희정 동지가 얘기해 줬다. 이런 걸 비롯해서 한국에선 어림도 없는 일들을 보고 들었더니, 험지에서 도대체 무슨 고생들을 사서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먹고 살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존엄이 그들에겐 더 싼 값이었을지. 아니, 그 누구도 자신의 존엄이 그렇게 싸게 팔릴 거라 예상하며 이주 노동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단지 거기까지 왔기에 버티기를 각오했을 뿐. 내가 일을 하기 위해 지역을 옮기며 그런 각오를 해봤어서, 감히 짐작한다. 비록 나에겐 이렇게 아늑해서 그립고 돌아가고픈 고향이 없어도 말이다. 비록 자본의 침식이 많이 진행되었지만, 부디 이 곳의 사람들은 한국이 간 끔찍한 제국의 길을 따라가지 않기를 바랐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온 나와 태은 동지를 공항 앞에서 부반숭 동지가 마중 나오셨다. 호치민에는 공항이 하나 뿐이었고, 공항 건물 내에는 공항을 직접 이용하거나 근무 등의 명확한 용건이 있는 사람만 출입이 가능했다. 그래서 몇 겹의 인파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다가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드셨다. 한국에서 뵀던 때보다 표정이 훨씬 좋아 보였고, 염색도 하셔서 더 젊어 보이셨다. 우리 짐을 계속 들어주려고 하셨어서 말리느라 애썼다. 뚜안님의 어머니 후옌님이 한 시간 뒤쯤 다른 동지들과 함께 도착한대서 공항 밖에 딸린 카페에 앉아 기다렸다. 반숭 동지는 날이 덥고 사람도 많은 데서 기다리게 해 미안하다는 말을 번역기로 써서 전하셨다. 우리 쪽으로 뚜안님의 외숙모 후에님이 오셔서 반숭 동지와 말을 나누시다가, 후에님이 우리를 먼저 숙소에 데려다 주라하여 반숭 동지가 택시를 불러 동행하셨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나서, 뚜안님의 외할머니와 다른 분들이 계시는 집으로 가서 동지들을 기다렸다. 호치민에서 뚜안님이 지내시던 외할머니 댁이라 들었다. 뚜안님의 외할머니 흐엉님은 딸인 후옌님과 확실히 닮으셨는데, 왠지 세월을 견뎌오신 듯한 무거움이 느껴졌다. 뒤에 동지들과 도착한 후옌님을 7년 만에 만나셨을 때 우는 딸의 손을 잡아주며 조용히 눈물을 훔치셨다. 인자하게 웃는 모습도 자주 보이셨지만 감정 기복이 크지 않으셔서, 집안을 지탱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뉴스민의 박중엽 기자님 기사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 자식들을 건사하셨다는 인터뷰가 실린 걸 봤다. 반숭 동지는 흐엉님의 집에서 접이식 밥상 상판 두께의 알루미늄 판을 네 개나 들고 나오셨다. 우리와 함께 투쟁했던 모습을 담은 사진 몇 장씩이 출력된 물건이었다. 그 중에 둘은 성서지회 사무실에 걸도록 가져가라 하셨다.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과 지인들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를 소개하셨는데, 투쟁의 순간들을 자랑스러워 하시는 듯했다. 유족이 직접 나섰기에 기존과는 다르게 좀 더 나은 결과가 있던 투쟁이라 생각했는데, 그가 투쟁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던 거 같다. 풀어낼 수 없는 커다란 감정들을 투쟁을 하면서 좀 더 감당하실 수 있게 됐을 지도 모른다. 후옌님은 도착하여 흐엉님을 붙잡고 울며 한참을 말씀하시다가, 2층에 올라가서 뚜안님과 외가 조상님들의 사진이 걸린 곳에서 또 한참을 울며 말씀하셨다. 향을 피우고 초를 켜둔(귀신들을 부르는) 곳이라 나는 가급적 빨리 나오고 싶었는데, 뚜안님의 영정 앞에 합장하고 선 후옌님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베트남어를 거의 모르지만 어떤 말을 했을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뚜안님을 마음에서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다는 말, 잘 되진 않을 지라도 노력할 거라는 말, 그리고 앞으로 뚜안님처럼 세상을 뜨는 사람이 없도록 할 거라는 말. 북베트남 사람인 다혜 동지가 통역하기로, 후옌님이 이제야 뚜안님을 보낼 마음이 들어 처음으로 편히 쉬라는 말을 꺼냈다고 했다. 그 날은 후옌님의 마음이 충분히 극복할 힘을 낼 수 있어 보이지 않아서 안쓰러웠다. 뚜안님의 남동생인 득안님은 오후 늦은 때 귀가했지만 낯선 손님들이 가득해서 안쪽 부엌에 들어가 혼자 식사했다. 얼굴이 뚜안님과 많이 닮아서 처음에 보고 깜짝 놀랐다. 같은 방을 썼던 태은 동지는 숙소에 돌아와서 그가 뚜안님과 너무 닮아서 속상했다 말했다. 내가 뚜안님의 부모라도 그를 볼 때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이 떠올라 힘들 거 같아 많이 공감했다. 해가 저물고 어두워지자 득안님은 반숭 동지와 함께 호치민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가는 거리로 우리를 안내해 줬다. 도시의 밤이 화려한 불빛으로 밝은 건 어디나 비슷하겠지만, 그곳은 여기저기에 꼬마 전구를 두른 장식이 많은 게 아기자기해서 예뻤다. 도로는 오토바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인도에도 사람들이 많아서 정신없어도, 활기찬 밤거리를 걷는 게 즐거웠다. 개인적으로는 사람이 많은 곳도, 화려하게 밝은 곳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누비던 뚜안님이 그 시간의 거리를 활보하던 모습을 상상하자, 마음이 아리면서도 흐뭇했다. 득안님이 뚜안님의 SNS에 게시된 적 있는 응우옌후에 거리로 데려가 줘서 넓은 공터에 멈춰 바람을 쐬었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보름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100일재를 지내는 날 즈음에 뜬 보름이라 한국 무속에서 보름달의 빛이 망자들을 이끌어 준다 믿는 게 떠올랐다. 휴대폰 카메라로 달 사진을 찍는 나에게 박기자님이 베트남에서 보는 달은 다르냐고 물었다. 별로 다를 게 없다고 대답하면서, 변함없는 어떤 걸 생각했다. 어디에서 보든 같은 달처럼, 어디에서 왔든 모두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낯선 거리에 가득 찬 낯선 사람들이 저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밤풍경이 새삼 소중했다. 옆에 나란히 선 동지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보름달처럼 차올랐다. 불교의 장례를 잘은 몰라도 49일재면 끝인 셈인데 100일재를 또 지내는 이유를 박기자님이 물어보니 저승에서의 심판을 잘 치르게 부탁드린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게 장례의 진짜 끝이라 앞으로는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일만 있다 들었다. 내가 느낀 바로는 뚜안님을 조상들이 다 잘 데려가셨고 일도 거진 마무리 되었기에, 100일재는 뒤풀이 같은 의식이었다. 그래서 첫 날부터 쏟아진 후옌님의 눈물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오체투지 날이나 서울 농성 해단식 날처럼 울진 않았던 거 같다. 첫번째 100일재는 유골함이 안치된 린손하이호이 절에서 이튿날에, 두번째 100일재는 그 다음 날 흐엉님의 집에서 치뤄졌다. 이틀에 걸쳐 두 번 하는 이유를 물어보니, 당일에 참여하지 못하는 친척들을 위해 집에서 한 번 더 하는 거라고 들었다. 린손하이호이 절이 숙소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서 동지들이 걸어 가자고 했다. 희정 동지는 가는 길에 뚜안님 영정 앞에 놓을 꽃을 사려고 꽃을 파는 곳이 있나 내내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 전 날에도 두바이 쫀득 쿠키가 한국 젊은 사람들 사이에 유행이란 걸 알고 하노이에서 사온 그 간식을 뚜안님 영정 앞에 올려 놓으셨다. 걸어가는 길은 인도와 도로의 구분이 모호하고 좁은 인도 여기저기의 시멘트가 깨져 있어서, 나는 거의 바닥만 보며 걸었다. 도로에는 쉴새 없이 오토바이가 다니고 가끔 군데군데 도로 보수 공사를 하는 노동자들이 보였다. 신호등은 고사하고 횡단보도 표시도 흐려 도보로 다니는 게 쉽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쉽게 보이는 지하 대공사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한국에서 지하 환풍구를 비롯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철망 위를 걸어다닐 때면 발밑의 빈 감각에 불안감을 느끼곤 했다. 그 때문인지 베트남의 길에서 되려 안정감이 느껴졌다.(물론 보도 경사에 미끄러져 한 번 거하게 넘어지긴 했다.) 비록 베트남의 절은 린손하이호이 한 군데 밖에 가보지 못했지만, 한국의 절 대부분이 산에 있거나 납골당의 접근성이 좋지 않은 것과 차이가 있어서 신기했다. 절의 규모가 비교적 작았는데, 바로 앞에 한국 대형 마트가 엄청 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게 거슬렸다. 호치민 땅값이 비싸도 거대 자본들은 과세의 치외법권인 거처럼 넓은 면적을 자랑했다. 빨간 바탕에 노란 낫과 망치 그림의 깃발이 황성적기와 함께 거리 곳곳에 나부꼈지만, 그 혁명의 색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때마다 속이 쓰렸다. 뚜안님을 비롯한 망자의 유골함이 봉안된 탑에 올라가 인사를 하고 내려와 법당에서 예불을 드렸다. 한국의 절이 대부분 목재로 지어진 것과 다르게 베트남의 절은 다른 건물들과 비슷한 대리석 바닥에 석조 건물이었다. 더운 지방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절에서 맨발로 다니는 게 문제되지 않아서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베트남어는 잘 모르지만 불경을 외는 말에서 익숙한 산스크리트어가 들렸다. 천수경을 읊고 반야심경도 읊고 관세음보살도 찾은 거 같다. 시간마다 드리는 예불과 달리 뚜안님의 가족들이 의뢰한 의식이라 그런지 반숭 동지와 후옌님, 흐엉님에게 스님이 불경을 읽는 도중에 향을 비롯해서 뭔가를 건네셨다. 한국의 절에서보다 사용하는 타악기의 종류가 많았던 거 같고, 금속 악기나 큰 북을 중간중간 자주 쳤던 거 같다. 예불이 끝나고 뒷편의 선대 주지 스님이셨던 것 같은 분들의 영정 앞에서도 인사를 드린 후, 봉안탑으로 올라가 뚜안님의 영정 앞에 차려진 상에서 제를 지냈다. 뚜안님의 유골함은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유골함과 다르게 생겼다고 태은 동지가 말했다. 둘러보니 정말 다른 유골함들은 연꽃 봉오리처럼 생겨서 녹색이나 흰색, 옥색같은 차분한 색에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뚜안님의 유골함은 분홍색인 데다 금색 펄이 들어갔는지 상당히 화려해서 눈에 띄었고, 사진이 앞에 놓여 있었다. 한국에서 아끼던 친구의 납골당을 갔을 때 본 바에 의하면, 한국의 유골함에는 가운데 이름만 새기고 이름표나 사진을 붙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디에서 장례를 치렀는지에 따라 유골함의 모습이 다르게 남는 걸 알았다. 뚜안님 부모님이 한국에서 꽤 비싼 돈을 주고 진공 유골함으로 골랐다는 얘길 희정 동지에게서 들었다. 가격을 듣고 판매자가 상당한 바가지를 씌웠다 싶었지만, 자식의 마지막 길에 구태여 돈을 아끼고자 셈을 할 분들은 아니란 생각이 들어 더 마음이 안 좋았다. 처음에 봉안탑에 올라왔을 때부터 눈물을 보이던 후옌님은 결국 의식 내내 우셨고, 뚜안님의 사촌 언니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뚜안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맨 앞에서 뭔가를 해줘야 했는데 득안님이 참여하지 못해 그 사촌 언니가 자리했다. 염불 외는 스님들 뒤로 두툼한 작업복을 입은 반숭 동지가 보였다. 예복같은 단정한 옷을 입은 다른 가족들과 차이나는 복장을 고집하신 이유는 뚜안님이 사준 옷을 입어서 그렇다고, 희정 동지에게 들어 마음이 아팠다. 제를 지내는 동안 우는 사람들이 늘어가더니 태은 동지도 온통 눈물에 젖은 얼굴로 향을 꽂았다. 참여한 사람들 모두 향을 하나씩 받아 향로에 꽂은 뒤 차려진 상 앞에 서서 음식을 한입 먹고 의식이 끝났다. 나도 마지막에 뚜안님의 사촌 언니와 나란히 서서 용과 한 조각을 뚜안님의 영정을 보며 먹었다. 망자와 함께 하는 마지막 식사라고 했다. 유족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뚜안님도 속상해서 같이 부둥켜 안고 우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더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 사람에 대한 마음은 슬프지만 생자도 망자도 각자가 가야 하는 길이 있다 생각해서 그런지 나도 함께 울지는 않았다. 뚜안님 또한 가족들이 계속 슬픔에 잠기는 걸 바라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 마음이 후옌님에게 잘 전달되었을지는 몰라도, 그 이후에는 눈물을 좀 덜 보이셨던 듯도 하다. 두고가야 하는 기억, 감정. 죽은 사람도 남은 사람도 자신 몫의 삶은 계속되는 걸 알고 있어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좀 고민되기도 했다. 봉안탑에서 내려와 상에 올렸던 것들을 마당의 소각장에서 태우는 모습을 보다가, 후에님이 안쪽에 상이 차려져 있으니 먹으라 하셔서 식사를 하러 자리에 앉았다. 절에서 마련한 음식이라 모두 채식이라고 했는데 한 상 가득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올라와 있어서 신기했다. 한국의 절 밥이라면 메뉴나 조리 방식이 거의 정해진 편이었지만 베트남의 절에서는 채소 전골에 콩고기조림, 볶음밥, 채소 모듬 무침 등의 여러 요리를 볼 수 있었다. 양도 많았는데 부처님이 주신 음식이라 남은 건 포장해서 가야 한댔다. 식사에 후식으로 수박까지 주셔서 나는 팔레스타인 티셔츠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엄청 많이 울던 사람들 모두 다행히 식사는 잘 했다. 반숭 동지는 한국에서의 굳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고 후옌님도 슬픈 표정이었다. 희정 동지가 한국에서 그들과의 첫 식사를 했을 때는 사고가 벌어지고 며칠 지나지 않은 때여서 한 숟갈도 뜨지 않고 계속 울었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럴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베트남에 온 두 분이 잘 먹고, 울더라도 많이 웃고, 가족들도 만나니 좀 나아 보여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뚜안님을 잃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던 반숭 동지의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그들의 마음에 난 구멍을 채워줄 수는 없어도,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인간일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상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일에 적응할 거 같아서, 그리고 그 과정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거 같아 안심됐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뚜안님의 가족들은 우리를 엄청 먹이려고 했다. 마치 뚜안님에게 먹이고 싶었던 걸 우리한테 먹이려는 듯이, 계속해서 뭔가를 대접해 주셨다. 한국에 가면 이런 거 못 먹는다며 먹일 수 있는 거의 모든 걸 다 내오신 거 같다. 후에님이 우리 식사를 다 감당하시느라 쉬지 못하시는 거 같아 죄송한 마음이 가득했는데, 가족 분들과 반숭 동지 친구 분들 또한 우리에게 뭐를 먹이는가에 대한 토론을 하는 걸 보고 약간 포기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우리에게 대접을 하고싶은 마음이 고생스럽고 귀찮은 것보다 큰 거구나. 누군가가 호의를 베풀 때 충분히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거도 필요한 일이라 나는 그 뒤로 불편한 마음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물론 뚜안님이 나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들어 그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 날에 반숭 동지의 친구인 홍님이 우리를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셨는데, 그 날 뚜안님이 본인이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시켜 줄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홍님이 식사를 하기 전에 잔을 들고 이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말씀을 하신 때 그런 생각이 들어, 이들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거도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라 느꼈다. 절에서의 일이 다 끝나고 동지들과 앞의 한국 대형 마트를 구경 갔다가 저마다 기념품이나 선물 등을 사서 귀가는 그랩 택시로 했다. 매장 안에는 한국어도 많고 한국에서 파는 물건에 베트남어 라벨만 붙은 채로 판매 되기도 했다. 마시멜로를 쓰지 않은 듯한 두바이 쫀득 모찌도 팔고 있었다. 마치 한국이라는 작은 왕국이 그곳에 있는 듯해서 기분이 묘했다. 게다가 섬유 제품들은 한국 가격의 반도 안되어서 자본이 값싼 노동력 어쩌고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이윤을 또 불리는지만 확인해 분노했다.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를 눈으로 확인하니 속이 답답했지만, 이 곳의 사람들은 만족하는 낯빛이라 한국어로 판촉 홍보를 하는 직원들에게 애매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K팝을 좋아한다는 뚜안님의 사촌 언니에게 그러했듯, 한국 그렇게 좋아할 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말을 몇 번이고 삼켰다. 식당이 많은 거리의 야외 테라스에 저녁식사 자리가 마련됐다. 고깃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요리가 있었고, 채식을 하는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있었다. 뚜안님의 가족들은 매 끼니마다 채식하는 나를 먼저 챙겨줬어서 고맙고 미안했다. 그래도 더러 채식하는 사람들이 있는 편이라 한국만큼 비건 음식을 구하기 어렵지는 않았다는 점이 그나마 나았다. 첫날에도 후옌님이 보름 때는 채식을 한다고 해서, 베트남 사람들은 종교적 이유로 채식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걸 알았다. 나는 락토오보 비건이라 생선도 먹지 않고, 채식을 하기 전에도 비린내 때문에 생선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운데 나온 흰 살 생선을 보니 되게 먹음직스럽고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먹고싶은 마음이 든 게 아닌 거 같아 혹시 뚜안님이 생선을 좋아하냐고 후옌님에게 여쭤보니 그렇다고 하셨다. 뚜안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걸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도 너무 많고 시끄러워 정신이 혼미했어서 집에 가고 싶었다. 득안님이 내 뒷쪽에 지나가다가 맥주를 쏟으며 잔을 깼는데, 그때 조금 정신이 들어서 옷에 술도 묻었으니 숙소로 돌아가고자 벌떡 일어났지만 반숭 동지는 우릴 보낼 생각이 없었다. 이윽고 비가 쏟아져 우리가 앉아 있던 야외석의 지붕에 굵은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굉장히 크게 났다. 나는 빗물에다 옷에 묻은 술을 씻길 겸 가겠다 했으나 여전히 그들은 우릴 보내고 싶지 않아 했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술 묻은 부분이라도 씻어내려 옷을 지붕 밖에다 휘둘렀다. 반숭 동지는 급기야 뚜안이 우리를 가지 말라고 해서 비가 내리는 거라 했다. 이 시기는 우기가 아니라 비가 오는 일이 흔치 않다는 거다. ‘제발’이라는 감정으로 ‘얼른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하며 옷에 빗물을 떨구었다. 숙소에 돌아와 태은 동지가 그 모습을 보고 내가 귀신을 쫓는 줄로 알았대서 아니라곤 못하겠다 대답하며 깔깔 웃었다. 하지만 망자가 생자와 너무 오래 어울리는 건 좋지 않고, 나는 그걸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반숭 동지에게 남은 미련이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 다음 날 오전, 스님들이 흐엉님의 집에 오셔서 더 많은 가족들과 2층의 영정이 있는 방에 모두 모였다. 이번에는 득안님도 참여하신 자리라, 그가 맨 앞에 앉아 어제 뚜안님의 사촌 언니가 했듯 뭔가를 받고 그릇에 수저를 꽂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며 한둘씩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결 나아진 거 같았다. 전날에도 그랬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스님들이 읽는 축문에 대구의 주소를 읋는 게 들려서 다혜 동지에게 물어보니 사망한 자리에 대한 주소가 들어간 거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생자의 거주지가 축문에 들어가는 게 생각나서, 이 곳의 사람들도 망자가 자기가 죽은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첫 날에 후옌님이 올라온 때 함께 있었을 때는 어지럽고 눈앞도 깜깜해졌었는데(그날 상당히 피곤했던 것도 맞긴 하지만), 스님들이 와서 제를 지내는 때엔 더 많은 사람들이 왔어도 꽤 괜찮았다. 물론 망자들도 많이 온 거 같았고, 왠지 뚜안님의 조상님들이 안전히 잘 데리고 간 느낌이었다. 다혜 동지에게 베트남에서도 죽은 사람을 조상들이 데려간다고 생각하냐 물으니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동아시아 문화권이 대부분 그렇다는 답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언어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제례의 대부분이 낯설지 않았던 듯하다(시작하기 전에 창문을 여는 것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축문과 경문을 읊는 일이 끝나고 스님들이 가족들을 위로하는 말을 전하고 떠나셨다.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사람은 모두 죽으니 적당히 슬퍼해야 망자도 자기 갈 길을 잘 간다는 얘기였다. 부처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이제 편안해졌으니 망자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슬픔을 잘 달래어 이겨내라는 말이 낯설지 않았다. 확실히 장례도 제례도 살아있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일이라, 가족들에게 이 모든 게 충분히 위로가 되었길 바랐다. 점심 식사는 육수를 쓰는 쌀국수 집에서 먹기로 얘기되어 채식하는 나는 제사 상에 올렸던 음식으로 식사했다. 흐엉님과 후에님과 그 아들인 바오, 딸 아이를 안은 뚜안님의 사촌 언니와 반숭 동지 친구 응우웯님과 함께 집에서 밥을 먹었다. 응우웯님은 한국을 좋아한다고 하셔서 번역기로 베트남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쓰며 단어를 서로 가르쳐 줬다. 나는 사랑하지 않는 내 모국이 그들에겐 좋은 대상이라는 걸 받아들이긴 어려웠지만, 애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 그에 부정적인 기색을 내비칠 수 없었다. 한국에 자주 간다는 응우웯님이 한국에서도 보자고 하셔서 좋다고 했다(이후 페이스북 메신저로도 서울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점심을 먹고 좀 쉰 뒤 저녁 식사 때가 되자 출장 식당 업체에서 상과 의자와 필요한 음식에 얼음 일체를 들고 흐엉님의 집에 왔다. 아침에 봤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들이, 그러니까 일가 친척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가 마련된 거다. 분위기는 잔치 같아서 큰 일을 치르고 난 뒤의 뒤풀이 같은 느낌이었다. 4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골목에까지 상을 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다들 데면데면한 게 하나도 없었다. 득안님도 사촌들과 대화를 하며 웃고 즐거워 해서 신기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10살 아이가 나와 대화를 하려 했는데, 네다섯 살인 바오가 이제 낯가림을 안하는지 계속해서 말을 했다. 그 사촌들이 기억하는 뚜안님은 어떨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사건 이후로 어플로 베트남어를 조금씩 배워봤지만 무슨 대화를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친척 가족들도 다 보내고, 반숭 동지의 친구 분들이 우리와 함께 놀러 나가자 하셨다. 태은 동지는 전날에 후에님한테 받은 아오자이를 입었고, 나도 응우웯님에게서 받은 아오자이의 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희정 동지가 이 사람들이 우리를 갖고 논다고 어처구니 없어 했지만 아무튼 신이 난 베트남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다. 한참 택시를 타고 나가 굉장히 넓은 야외 카페에서 어렵사리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예쁜 카페 다니는 걸 좋아하던 뚜안님이 왠지 확실히 좋아했을 거 같은 곳이었다. 연못도 있고 조화 나무도 있고 진짜 나무도 있고 정원 바위들도 있는 광활한 카페였으니, 이제 보니까 호치민은 자본가에게만 후한 거 같았다. 국가 자본주의에 분노하는 것도 잠시, 곧 그들은 한국의 다른 대형마트를 구경 가자고 한다. 나가는 길에 발견한 셀프 포토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자고 해서 열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 어떻게든 네 장에 한 번씩은 다 나오게 만들었다. 홍님이 우리에게 한 장씩 뽑아 주시고 다른 사람들은 사진을 링크로만 가졌다(물론 우리도 링크를 공유 받았다). 또 택시를 타고 가기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걸어가기로 했다. 근처에 있으니 가볼만 하다 싶어 가는 길이 전날에 절에 가며 걷던 동네 길이랑 달랐다. 신호등은 여전히 드물었지만 응우옌후에 거리를 다니던 때처럼 잘 닦여진 인도 곳곳에 2주 뒤의 중추절을 축하하는 큰 장식물들이 있어서 포토존 삼아 또 사진을 찍었다. 사실 나는 자본이 사람들이 실제 살아가는 삶보다 포장된 것을 보여주기 좋아하는 게 국가 불문 똑같은 거 같아서 한편으로는 맥 빠졌다. 후에님이 태워주는 오토바이도 타고 하면서 베트남의 번화가를 누볐다. 시간이 지나도 지치지 않는 것 같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마 그때부터 그들이 계속 내년(베트남에서는 음력 달력을 써서 아직 2025년이다.) 뚜안님의 기일에도 오라고 했던 거 같다. 홍님이 다음 날에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말을 전하자 희정 동지는 거절할 방법을 찾지 못해 골치 아파 했다. 그러나 ‘배불러서 더는 못 먹겠다’는 말이 가볍게 무시되는 거처럼, 우리의 거부 의사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던 거 같다. 갚을 길 없는 호의와 환대를 받아 부담스러워 하셨지만, 다혜 동지도 사실 베트남 사람들은 다들 정이 많아 이러는 게 보통이라고 말했다. 나도 홍님의 집에서 뚜안님이 우리가 뚜안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걸 원하는 거처럼 느꼈다고 말을 전하긴 했지만, 그의 마음에 쌓이는 부채감을 덜어주진 못했다. 결국 홍님의 동네를 구경 다니고 점심을 대접받은 뒤에야 우리는 풀려날 수 있었다. 희정 동지는 호치민에서 그래도 전쟁기념 박물관에는 한 번 가보는 게 좋다고 해서 마지막으로 동지들과 그곳을 들렀다. 한국에서 동지들이 상경 농성을 한 장소도 전쟁기념 박물관 앞인 게 떠올랐다. 게다가 거기에는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가담해서 학살한 주제에, ‘그들을 죽이는 게 당연하고, 절멸시켜야 한다’는 당시의 문구를 베트남어로 기재해놔서 한베 평화 재단이 시정 요청을 한 바가 있다. 도무지가 자랑스러울 법한 게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한국을 베트남의 전쟁 기념관에서는 전쟁을 도와줬다는 거처럼 포장해 놔서 구역질이 났다. 들어가면서 보이는 미군의 탱크나 무기 같은 것들을 전리품처럼 자랑스럽게 전시해 놨지만, 호치민은 전체적으로 사실상 미국의 꼭두각시인 한국을 선망하는 거 같은 느낌이라 비위가 상했다. 북베트남인 하노이 지역은 남베트남인 호치민과 분위기가 다른 편이라고 들어 궁금했다. 그러고 보면 반숭 동지도 흐엉님도 원래는 고향이 하노이 쪽이라고 들었다. 전쟁 이후 호치민이 산업화가 많이 되고 공장이 들어서며 일자리를 찾으러 이쪽으로 이동하는 사례가 흔했던 거 같다. 마지막 전시관이 전쟁의 아픔, 상흔 등의 얘기로 고엽제 피해자들과 그 자손들의 장애를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베트남의 정부 또한 베트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다고 느꼈다. 그들이 걸어놓은 낫과 망치 깃발이 별 의미 없는 것처럼, 학살당한 사람들을 애매하게 넘긴 그곳이 기묘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분명 그런 곳이 전쟁의 잔혹성을 기억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걸 텐데 아무도 그런 걸 기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더욱 공허하다는 생각이 든다. 방산 산업으로 야금야금 돈을 벌고 있던 한국. 전면적으로 시작된 침공에 치솟는 방산산업 주가. 자본의 개처럼 미쳐버린 제국 꿈나무인 나라를 호치민 사람들은 좋아해줬다. 그런 현실이 너무 끔찍하다. 도로에서 식탁을 펼친 가게의 반쎄오를 마지막 식사로,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반숭 동지와 홍님이 함께 나와 태은 동지를 데려다 주시고, 공항 안으로 같이 들어가지 못해 입구에서 사진을 찍었다. 한국에 돌아온 날은 하루 종일 자고, 그 다음 날에도 저녁쯤에야 겨우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베트남 땅을 밟자마자 들은 세종호텔 로비 농성 동지들의 연행 사건이 마무리되고 열린 체크인 집회에 자리했다. 반숭 동지에게 진수 동지가 땅으로 내려왔고 다른 사람들과 경찰에게 단체로 잡혀갔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진수 동지가 고공에 있을 때 반숭 동지에게 전화로 인사를 하다가 목이 메여 우시던 날이 생각나서 내내 마음에 걸렸다. 페이스북으로 베트남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 친구 요청을 했다. 논바이너리 젠더퀴어라서 ‘여성스러운’ 옷을 입지 않는 내가 그들과의 시간이 그리울 때면 응우웯님이 준 아오자이를 입어 본다. 태은 동지는 후옌님의 딸이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여유가 될 때 베트남어 기초 수업을 들어보기로 결심한다. 잃고 나서 얻게 되는 것, 살아있는 사람으로의 책임, 주어지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들에 대해 생각한다. 희정 동지가 농성 투쟁 때 하셨던 말처럼, 우리 노동자들은 서로 동등한 관계니까 나는 동지도 친구라고 해 본다. 친구의 말과 문화에 대해 알아보고자 어플로 좀 더 열심히 학습해 본다. 뚜안님의 사건을 처음 접했던 날처럼, 그의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서 베트남어를 공부하고자 했듯. 살아있는 사람이, 혹은 죽어서 떠난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가고자 그 투쟁에 함께했다. 또한, 애도하는 일의 감각을 알고 싶어서도 매번 자리했다. 그러한 결과로 나는 뉴스나 보도자료에 적히는 글자나 숫자가 아닌, 실재하던 인물을 느끼고 기억하는 일은 소식으로만 접하는 것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뚜안님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여러 번 깨달을 때마다, 나는 우리 노동자 민중을 하나로 이을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각각의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는, 공통의 감각. 계속 되는 자본의 갈라치기와 대상화의 홍수 속에서, 범람하는 탈인간화에 나는 계속해서 우리가 사람임을 잊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한사람 한사람, 각자의 우주가 더는 무너지지 않길 바라며 우리를 스쳐간 많은 목숨들에 조의를 표한다.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리포트] 가부장제,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맞선 3.8 여성파업대회3월 6일 여성 총파업 집회에서 수많은 노동자와 청년, 특히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모여 성차별을 당장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여성을 착취하고 억압하며 학살하는 가부장제,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기로 결의했다.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열린 여성파업 집회에 나와있습니다. 오늘은 파업을 하고 참여한 반도체 생산기업 KEC지회를 비롯해, 1366서울센터, 톨게이트지부, 학습지노조 등 다양한 노동조합의 여성노동자들,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와 민중들, 특히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모였습니다. 연차 휴가를 내거나 가사 노동, 교육을 중단하고 집회에 참여한 노동자와 학생들도 참여했습니다. 지난해 여성과 성소수자들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주장한 극우 윤석열 정부에 맞선 투쟁의 최전선에 섰습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를 끌어내린 후에도 억압받는 이들의 삶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재명의 민주당 정부 아래서도 여성들은 여전히 저임금과 불안정한 노동 조건에 시달리고 있으며, 정부는 노동유연화 확대를 추구하는 노동개악을 추진 중입니다. 이는 여성, LGBT,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불안정성을 심화시킬 것입니다. 또한 미국의 이란, 베네수엘라 공격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속적인 집단학살에서 볼 수 있듯 제국주의적 침략이 고조되는 가운데, 한국 정부는 제국주의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공모하며 전쟁 산업을 확대하고 이윤을 챙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현대중공업, 한화 등 한국 대기업의 기술과 장비를 이용해 팔레스타인 여성과 미성년자에 대한 학살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트럼프가 제안한 위선적인 ‘평화위원회’ 참여도 적극적으로 검토 중입니다. 이 모든 행위는 팔레스타인 여성과 미성년자를 죽이고 있으며, 중국과의 제국주의적 패권대권 아래 동아시아 전쟁의 미래를 열 것입니다. 여성과 성소수자를 착취·차별·억압·학살하는 이러한 가부장제,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맞서기 위해, ‘3.8 여성파업 조직위원회’는 일곱 가지 요구를 제기합니다. 1. 일터의 성차별 금지, 진짜 사장 책임 강화 2. 가사사용인/특수고용/프리랜서/플랫폼/장애인/이주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전면 쟁취 3. 돌봄 공공성, 돌봄 일자리 확대 4. 이주노동자 사업장 이동의 자유 보장, 강제단속/추방 금지 5. 포괄적 차별금지법 즉각 제정과 젠더차별 금지 6. 비동의강간죄 도입/포괄적 성교육 의무화/임신중지에 건강보험 적용 7. 팔레스타인 학살 지원 중단, 제국주의 전쟁 반대. 이러한 요구를 바탕으로 우리는 모든 여성과 LGBT,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계속해서 싸울 것입니다. 이를 위해 모든 노동자의 여성 파업을 계속 조직해 나갑시다. 투쟁!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스튜디오알(@studior2468)님의 공유 게시물 [English] Hi, I’m Dolmeng and I’m here at the rally of women’s strike, in the anniversary of 8 March. Today more than hundreds of workers and people, especially women, and LGBTs gathered, including many women workers on strike, from various unions, such as the union of KEC corporation, the semicondutor company, and also the unions such as call center, tollgate, and tutoring industry. There are also many workers and students, who participated the rally, using annual leave or stopping the domestic labor, or the education. Last year, women and the LGBTs were at the forefront against the far right Yoon government, which insisted that “there’s no systematic gender discrimination”. but after overthrowing the Yoon government, the life of the oppressed is still the same. in the new democratic party government of Lee jae-myeong, women are still suffering from low wage and precarious conditions, and the government is pushing the labor reform, which seeks to expand the so-called ‘flexibility’ of labor, which means the aggravation of the discrimination and precarity of the women, LGBT, and migrant workers. Also with the rising imperialist aggression, as we can see from United States’ attack on Iran, Venezuela, and ongoing Genocide on Palestine, the Korean government is actively being complicit with the imperialist countries, expanding and profiteering from war industry. Israel is sustaining the Genocide on Palestinian women and minors, using technologies and equipment of Korean large companies like HD Hyundai, and Hanhwa. and Korean government is now positively considering to join the hypocritic “Peace Board” proposed by Trump. All these acts are killing women and minors in Palestine, and will open the future of the war on East Asia, as a result of the imperialist confrontation with China. so to confront all these patriarchy, imperialism, and capitalism, that exploit, discriminate, oppress, and massacre women and minors, the women’s strike organizing committee has seven demands. 1. No sexual discrimination in the workplace 2. full labor right for all workers, including domestic worker, self-employed, Freelancer, gig worker, disabled, and migrants. 3. Full Public care system 4. Freedom of changing workplace for migrant workers, and No crackdown and deportation 5. ‘comprehensive anti-discrimination law’ right now, including such as healthcare for the gender transition 6. criminalizing the ‘rape without consent’, comprehensive sexual education and healthcare for abortion right 7. Stop complicit on Genocide on Palestine, No more imperialist war. with these demands, we will keep fight for all women and LGBT, and the oppressed. for that, Let’s keep organize the women’s strike of all workers. 투쟁! -
[기고] 3.8 여성의 날을 앞두고 들어본 반도체 노동자들의 목소리반올림·빵과장미의 ‘찾아가는 집담회’ 현장 스케치 2026년 2월 21일. 여성의 날을 앞둔 토요일 오후, 설 연휴의 들뜬 기운이 가시지 않은 거리와 달리 내가 향한 곳에는 조금 특별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매년 3월 8일 여성의 날을 앞두고 우리는 분노와 결의를 다지곤 하지만, 올해 내 마음 한구석은 유독 무거웠다. 초부터 화려한 AI 호황과 반도체 산업의 장밋빛 전망이 쏟아졌지만, 그 화려함 뒤에 더욱 잔혹하게 가려진 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문득 작년 9월 27일, 기후정의행진 현장에서 반올림 부스를 도우며 마주했던 영정사진 속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 생생한 모습들을 기억하며 묻고 싶었다. 모두가 찬양하는 반도체 산업의 그늘 아래, 여성 노동자들의 '오늘'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여성과 성소수자 노동자들의 진짜 목소리를 세상에 꺼내 놓기 위한 우리의 간절한 시도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반도체 자본과 성장을 강조하는 정부, 이들은 현장에서 일하고 퇴근해 다시 집으로 출근하는 여성 노동자의 이중굴레를 걷어내고 있을까? 더는 일터에서 아프지 않고 죽지 않는 노동안전의 성장이 찾아온다는 것일까? 오히려 경제, 전쟁, 체제 위기가 더해져 잘나가는 때에 저들은 여성 노동자의 이중굴레를 더 옥죄고 있기에,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투쟁으로 일어서는 것 아닐까. 1부: 왜 ‘여성파업’을 고민할까? 집담회는 '빵과장미’의 정은희 동지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사전 신청을 한 동지들이 하나둘 도착하며 반올림 사무실을 채웠다. 1부, 나는 발제자로서 사람들 앞에 섰다. 준비한 원고를 넘기며 내가 가장 깊게 고민하고 함께 나누고 싶었던 지점은 바로 ‘여성파업을 조직해야 하는 이유’를 되짚어 보는 것이었다. 다크램 인형권익위원회 동지의 발표 장면 빵과장미의 활동명 '광고판' 동지가 준비해 준 슬라이드를 보며 발제문을 준비할 때, 나는 밀려오는 분노로 마음이 힘들었다. 이재명 정부에서도 노동 탄압의 칼날은 멈추지 않았고, 그 칼날은 늘 가장 약한 곳부터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장하지 않는 반도체특별법은 지난 1월 본회의를 통과했고, 2월 2일에는 세종호텔에서 농성하던 동지들이 폭력적으로 연행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여전히 노동자를 탄압하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과 성소수자 노동자들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거나 더욱 깊은 소외로 내몰리고 있었다. 나는 이 비참한 현실을 단순히 '힘들다'는 하소연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겪는 이 부당함을 하나로 모아, 세상을 멈추는 강력한 힘인 ‘여성파업’으로 조직해 보자는 제안을 던졌다. 2부: 화려한 AI 호황 속 더욱 숨겨지는 노동자들의 현실 2부가 시작되기 전, 동지들이 함께 만든 반올림 마스코트 ‘진복이’ 영상을 보았다. 인형 진복이는 반도체 노동자들의 현실을 간결하면서도 날카롭게 짚어주었다. 짧은 영상이었지만 모두에게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어 반올림의 상임활동가 이종란 노무사님이 마이크를 잡았다. 슬라이드에는 그동안 외면당했던 산재 피해자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지나갔고, 이종란 노무사님은 눈물을 참으며 AI 산업의 화려한 전망이나 반도체 특별법 같은 이야기들이 정작 현장 노동자들의 생명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조목조목 짚어주었다. 이종란 노무사의 발표 장면 [이종란 노무사 발제문 발췌] “조혈기, 생식기, 정신질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 이미 2020년 정부실태조사로 밝혀졌음에도 예방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생식독성 피해로 인한 2세 질환 피해자들이 용기내어 산재신청을 했지만 정부와 국회의 외면속에 자녀산재법 개정이 계속 미뤄지고 있고, 우울, 수면장애, 아파도 출근하는 프리젠티즘 등의 정신건강 악화의 문제도 지속되거나 악화되었다. 2025년 3월 26일 삼성반도체 연구개발노동자 고 김치엽 님은 인력부족 속에 성과를 내기 위한 프로젝트팀에서 우울, 수면장애를 견디며 일하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이 초래되었다.” 국가가 경제 성장을 말할 때, 그 성장의 밑바탕이 된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건강은 철저히 지워졌다. 특히 반도체 고등학교까지 만들며 아이들을 현장으로 밀어 넣으려는 정부가 정작 그 아이들이 마주할 위험은 감추고 있다는 사실에 주먹이 쥐어졌다. 발제 내용 중 반도체 산업에 여성 노동자가 유독 많은 이유가 기억에 남는다. 아시아의 기업주들이 여성 노동자를 선호해온 이유는 ‘손이 날래고 참을성이 있어 단순 조립 업무에 적합하다’는 성별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임금이나 노동조건에 대한 기대 수준이 낮고 통제가 쉽다는 이유로 젊은 여성들을 채용해왔다는 사실을 마주하며, 지금의 반도체 호황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짓밟고 일어선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어서 전 삼성전자 노동자이자 산재 피해 당사자인 정향숙 활동가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활동가님이 직접 겪은 현장의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차별적이고 참담했다. 정향숙 활동가의 발표 장면 [정향숙 활동가 발제문 발췌] “개인적으로는 한 번의 계류 유산*을 경험했습니다. 당시에는 유산을 하게 되면 개인 월차를 사용해서 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 일을 일과 연결해서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돌아보면 유산이나 여성 질환을 겪는 동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일과 연결해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물질을 다루고 있었는지, 그것이 몸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깊이 이야기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산재라는 개념 자체가 저희가 일하는 곳엔 없었습니다. 저 역시 나중에 중재 협약에 유산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고 신청을 했고 보상을 받긴 했으나, ‘이러한 것도 보상을 해주는구나’였지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의 어떠한 문제 때문에 이런 걸 보상해 주지?’라는 생각은 못 했었습니다. 여성 노동자가 많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임신과 출산하는 여사원들이 많았습니다. 관리자였기 때문에 임신과 출산 그리고 복직 계획까지 관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막연하게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했던 ‘산재’는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삶 그 자체였다. 발제 중 “왜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개인의 문제로만 남았는지, 왜 그때는 질문하지 않았는지” 라는 발언에 특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남성 엔지니어들이 가진 ‘환경수첩’조차 지급받지 못했다고 한다. 사측은 이미 알고 있는 위험 속에 뻔뻔하게도 노동자들을 갈아 넣고 있었다. 3부: 남아있는 이야기 모든 발제가 끝나고, 3부는 참가자들의 소감과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미 현실을 어느 정도 알고 온 참가자들이었음에도, 생생한 증언 앞에서 더욱 뜨겁게 끓어오르는 분노가 느껴졌다. 특히 이주노동자가 반도체 산업 현장에서 겪는 차별을 묻는 한 참가자의 질문을 들으며, 우리가 가진 연대의 마음이 얼마나 더 넓어져야 하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아픈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그리고 그 너머의 아픔까지 먼저 들여다보고 힘을 합쳐 차별을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오늘 이곳에 모인 이유가 아닐까. 집담회는 마무리되었지만, 현장의 열기는 여전히 생생하다. 3월 6일 3.8 여성파업대회와 고 황유미 님의 19주기 추모제에 이어 이 불꽃이 세상으로 나와 더욱 타오르기를 기대하며, 다시 한번 여성의 날의 의미를 가슴 깊이 되새겨본다. *임신 20주 이내에 태아가 사망하고, 자궁 경부가 닫힌 채로 사망한 태아가 자중 내에 수일에서 수주 동안 배출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한다. -
2026년 3.8 여성파업의 요구와 의미2026년, 우리에게는 노동자민중의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2026년은 격동하는 세계정세가 전쟁과 위기의 시대로 명확한 다음 발을 내딛는 해였다. 가부장적 자본주의는 쇠퇴하는 자신을 연명하기 위해 유사한 위기마다 반복해 온 필승의 카드, 즉 전쟁을 꺼냈다. 어느 나라의 어떤 노동자민중도 이 거대한 체제의 리듬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졌다. 1985년 출간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발행 이후 숱한 세월 동안 제국주의의 가부장적 성격을 폭로하며 여성 운동의 주요한 관용구로 쓰였다. 그러나 작금의 세계를 둘러보자. 독일에서 누구보다 강경한 반이민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극우 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의 당수 앨리스 바이델은 레즈비언 여성이다. 유색인종 동성 파트너를 둔 레즈비언 여성 정치인에 의해 독일의 수많은 이주민 여성들은 길거리로, 더 불안정하고 위험한 일자리로, 때로는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극우 정당 이탈리아의 형제들 당수이며 우익 학생 운동가로 활동했던 19살부터 인터뷰지에 “무솔리니를 존경한다”고 답해 논란을 빚었던 조르자 멜로니는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총리다. “난민을 막기 위해 군대로 해상을 봉쇄하겠다”, “동성애자와 악수를 하든 토사물에 키스를 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토사물에 키스를 하겠다”, “이슬람 광신도와 테러리스트를 폭행하고 살해하는 시민에게 훈장을 수여할 것”이라는 발언 모두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총리가 공식 석방에서 발언한 말이다.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의 원내대표 마린 르펜 역시 마찬가지다. ‘프랑스 퍼스트’를 핵심 정신으로 내세운 마린 르펜은 누구보다 우익적 민족주의의 전면에 서서 프랑스 전역을 극우화의 파랑에 내던지고 있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비슷한 현상은 목격된다. 당선 후 초기에 일본 의회의 여남동수 내각 의지를 밝혀 한국 여성의당으로부터 환영사를 듣기도 했던 다카이치 사나에는 “유사시 대만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발언으로 아슬아슬하던 동아시아 정세를 제3차 세계대전 위기의 복판에 못 박았다. 뿐만 아니라 2026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을 거두며 방위비 국내총생산(GDP) 2% 이상 증액, 장거리 미사일과 핵추진 잠수함 도입, 자위대의 사실상 군대화 등과 같은 다카이치식 안보 청사진은 더욱 전면화하는 중이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억압과 차별은 노동자계급 여성을 더욱 가혹하게 강타하기 시작했다.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세계에 전쟁을 다시 호출했을 때 가장 먼저, 가장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것은 태반이 민간인 여성이었다. 팔레스타인에서 학살당한 수만 명의 민간인 사망자 중 2024년 UN 집계 기준 여성과 어린이는 무려 70%다. 학살이 1년 더 지속된 2026년 2월에는 얼마나 많은 여성이 가자지구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땅에서 전쟁 범죄에 의해 살해당했을지 차마 헤아릴 수도 없다. 일자리 측면에서도 유사하다. 한국 국가데이터처 보고에 따르면 2025년 3/4분기 기준 국내 노동시장에서 남성 일자리가 4만개 감소한 반면, 여성 일자리는 17만9000개 증가했다. 연령대별로는 60대 이상에서 22만 3천개가 증가하며 가장 큰 폭의 상승을 보인 데 반해 20대 이하(20대 포함)에서는 고작 12만 7천개, 30대는 8만 5천개였다. 왜 경제가 어려워졌는데. 노동자민중을 향한 자본주의의 착취가 심화하고만 있는데 여성 일자리는 늘어났을까? 지난 2월 26일 옥스팜코리아가 발표한 '2026 옥스팜 도넛 리포트'는 국내 여성 일자리의 확대가 임금 상승으로 직결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국에서 여성은 남성과 같은 연봉을 벌기 위해 130일을 더 일해야 한다는 사실. 결혼 후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남성 노동자보다 평균 8.9% 감소했고 첫 자녀 출산 후 10년이 지나면 임금 격차가 33.4%까지 확대됐다는 사실을 담은 이 보고는 짐짓 섬뜩하기까지 하다. 한국 자본주의는 위기를 전가할 대상으로 청년보다는 중/장년의, 남성보다는 여성의 노동자를 선택했다. 지난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리벳공 로지를 전면에 내세웠던,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을 전례 없는 헐값의 장시간 노동으로 군수, 농업, 운송 산업 등에 대거 인입했던 방식과 하나 다를 게 없는 상황이다. 2026 3.8 여성파업 요구안, 무엇을 다루는가 일터의 성차별 금지, 진짜 사장 책임 강화 : 세계1위 K-성별임금격차, 진짜 사장이 책임지고 채용부터 임금/업무/고용형태 등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의 일터의 성차별 금지 : 저임금/비정규직노동자에게 고용불안 및 임금격차 ‘보상수당’ 지급 : 성인지적 노동환경 조성과 노동재해 기준 개선 : 국제노동기구(ILO)의 ‘폭력과 괴롭힘 근절’ 190호 협약 즉각 비준 한국의 성별임금 격차는 집계를 시작한 이래 꾸준히 OECD 평균 하위권이었다. 한국의 끈질긴 노동자 투쟁으로 개정된 노조법 2·3조가 3월부터 실 시행에 들어간다. 2026년에는 임금 수준과 업무 내용, 고용 형태에 관계없이 원청 사장이 우리의 노동을 책임져야 한다. 왜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을 원청 사장이 책임지라는 구호가 무엇보다 여성 의제의 요구여야만 할까? 여성 노동자의 대부분은 비정규직 저임금 고용 관계에 얽매여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분석한 결과 2025년 8월 기준으로는 임금노동자 2241만 명 중 여성 비정규직(530만 명·50.7%)은 정규직(516만 명·49.3%)을 웃도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여성 비정규직 비율은 2022~2023년 49.7%에서 2024~2025년 50.7%로 꾸준한 상승세를 보여왔다. 보고는 아예 기간을 정한 일자리와 단시간 일자리가 여성 노동을 흡수하는 주요 통로가 되고 있다는 의미로 이 현상을 진단하기도 했다. 임금 격차 역시 어마어마했다. 남성 정규직 임금을 100으로 볼 때 남성 비정규직은 60.5%, 여성 정규직은 75.1%, 여성 비정규직은 39.0% 수준에 그쳤다. 여성의 노동은 한국에서 가장 밑바닥 노동 취급을 받고 있다. 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하청 노동자의 근로조건에 대해 실질적·구체적인 지배·결정권이 있는 자(원청)를 사용자로 인정하여 교섭 의무를 부여하는 것으로 노조법 2조가 개정된 지금, 필요한 것은 일터의 성차별 금지로 평등한 노동 환경을 조성할 의무와 고용불안 및 성별 임금 격차 등의 억압을 진짜 사장 원청이 해결할 책임을 부과하는 일이다. 가사사용인/특수고용/프리랜서/플랫폼/장애인/이주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전면 쟁취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 여성노동자의 이름을 빼앗긴 가사사용인, 특고, 플랫폼, 프리랜서, 5인미만 사업장, 장애인에게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돌봄 공공성, 돌봄 일자리 확대 : 모든 가사돌봄 분야 국가 책임, 공공성 강화, 돌봄 일자리 대폭 창출 : 임금삭감/업무과중/야간노동 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청년 일자리 확충하고 저녁있는 삶 보장 한국 사회에서 가사사용인·특수고용·프리랜서·플랫폼·장애인·이주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자’로 불리지 못한 채 법의 바깥에 방치돼 있다. 여성노동자의 이름을 빼앗긴 채 계약서 한 장으로, 사업자등록증 하나로, 플랫폼 앱 하나로 권리를 박탈당했다. 가사사용인과 돌봄 노동자,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 다수는 여성이다. 5인 미만 사업장, 호출형 플랫폼, 개인 위탁 계약이라는 이름 아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무권리 상태가 구조화되어 왔다. 근로기준법의 적용 제외는 곧 여성 노동을 ‘보조적’, ‘부차적’ 노동으로 취급해 온 역사와 맞닿아 있다. 그러므로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전면 적용하라는 요구는 단지 법 조항의 문제가 아니라, 성별에 따라 위계화된 노동구조를 해체하라는 요구다. 가사사용인·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장애인·이주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전면 쟁취는 여성 의제의 중심이어야 한다. 한국의 장시간 노동 구조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유급 노동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라다. 그 위에 가사와 돌봄이라는 무급 노동이 겹겹이 얹힌다. 쓰레기를 대신 분리수거해 주는 서비스, 새벽 배송, 세탁 대행, 방문 돌봄 서비스가 ‘라이징 산업’으로 성장했지만, 이는 여성의 이중 노동을 시장으로 전가한 결과일 뿐이다.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 노동자는 원치 않는 소비를 감내해야 하고, 그 산업에서 일하는 또 다른 여성 노동자는 플랫폼에 종속되어 헐값 장시간 노동에 내몰린다. 무급이던 가사·돌봄 노동은 값싼 외주 노동으로 전환되었을 뿐, 억압의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제 필요한 가사 및 돌봄 노동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노동이라면, 그것은 개인 여성의 희생이 아니라 공적 책임이어야 한다. 공공 돌봄 인프라의 대폭 확충, 가사·돌봄 노동자의 직접 고용과 안정적 임금 보장, 플랫폼 종속 구조의 규제와 노동자성 인정이 즉각 시행되어야 한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가사와 돌봄이 필요하다면, 그 책임은 여성에게 전가될 것이 아니라 자본과 정부에 부과되어야 한다.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전면 적용하라. 가사사용인·특수고용·프리랜서·플랫폼·장애인·이주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전면 보장하라. 가사와 돌봄을 시장에 떠넘기지 말고 국가가 책임져라. 여성 노동을 가장 밑바닥으로 밀어 넣는 구조를 해체하는 것, 그것이 올해 여성파업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정의 중 하나이다. 최저임금 확대 적용과 대폭 인상 : 특고 플랫폼 프리랜서 가사사용인 장애인 등 모든 노동자에게 최저임금법 적용 : 최저임금 ‘비혼단신노동자실태생계비’의 100%로 최저금액 적용, 물가연동제 시행 : 최저임금법 위반 사용자에게는 노동자에게 체불/위반임금 30배 보상 지급 및 벌금 부과 2025년 3월 30일 한국노동연구원의 ‘고령 저소득 노동 실태와 정책 대응’ 보고서를 보자. 이 보고는 55살 이상 고령 임금노동자 가운데 저임금 노동자 비중은 2019년 30.9%, 2021년 30.2%, 2023년 33.0%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고령 노동자 10명이 있으면 3명 조금 넘게 최저임금 미만 노동자인 셈이다. 개중에서도 성별로는 55살 이상 여성 노동자의 저임금 비중은 남성보다 2배 더 높았다고 보고는 나타낸다. 여성 고령 노동자 중 저임금 비중은 2019년 44.4%, 2021년 44.5%, 2023년 47.6%로 40%대를 유지했다. 한국의 여성 고령 노동자 10명이 있다고 다시 가정할 때, 그중 네 명은 무조건 최저임금 미만 노동자라는 뜻이다. 고령 여성이 과거 결혼 또는 임신, 출산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어 현행 연금 제도에서 소외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임을 고려할 때, 이들은 “강제할 방법이 없다”는 이재명 정부의 핑계 이면에서 죽어가고 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년 여성 역시 특수고용, 플랫폼, 프리랜서 등 고용 형태의 불안정 속에서 최저임금조차 보장받지 못하기는 매한가지다. 2024년 10월 발표된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병의원 종사자를 제외한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 등 소위 ‘비임금 노동자’는 2018년 604만2천288명에서 2022년 837만7천56명으로 233만4천768명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에서도 성별로 보면 전체 31.3%라는 적지 않은 수가 여성이었으나, 2022년 기준 남성 비임금 노동자의 연봉은 평균 1천312만원, 여성 비임금 노동자의 연봉은 평균 944만원이었다. 2021년 발표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연구는 이와 같은 특수고용, 플랫폼, 프리랜서 노동자의 증가세 속에서 여성 노동자에게 어떤 억압과 차별이 가해지는지를 빠르게 직관했다. 총 1015명을 대답으로 한 2021년 연구에서부터 이미 프리랜서 계약 미체결 비율은 전체 응답자의 절반(49.2%) 정도였고, 그중 노동시장에서 저소득 여성 노동자일수록 계약 체결 확률이 낮았다고 밝혔다. 여성에게는 최저임금이 필요하다. 이재명 정부는 한국의 저임금 현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질문에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올리는 대신 사업장별로 적정임금을 받도록”하겠다며 “정부가 제도적으로 (적정임금 지급을) 강제할 방법은 없다”고 변명했지만.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더 이상 그 변명을 들어줄 여유조차 없다. 한국의 여성 노동자에게 최저임금 확대 고용과 인상은 표현 그대로 생존의 문제다. 이주노동자 사업장 이동의 자유 보장, 강제단속/추방 금지 : 속헹와 뚜완에게 정의를! Free Job Change(프리 잡 체인지, 이주노동자 사업장 이동의 자유 보장) : 이주노동자 강제노동 금지, 미등록 강제단속 및 추방 금지 한국의 이주노동 정책은 오랫동안 통제와 단속을 중심에 두어 왔다. 노동은 필요로 하면서도, 그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의 권리는 체류 자격과 고용주에게 종속시켰다. 사용자를 떠날 자유가 없는 고용 구조는 사실상 복종을 강제하는 장치로 기능해 왔다. 이제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선택권과 이동권을 보장하는 것이 출발점이어야 한다. 임금체불과 폭언, 산업재해가 발생해도 쉽게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임노동 관계는 계약이 아니라 구속에 불과하다. 저임금·고위험 업종에 집중된 이주 여성 노동자들은 체류 불안을 빌미로 한 위협에 특히 더 취약하다. 신고하지 못하고, 옮기지 못하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구조 속에서 권리는 공백이 된다. 이동의 자유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인권의 최소선이다. 최근 이재명 정부 주도 아래 APEC 맞이 이주민 단속 과정에서 발생한 고 뚜완의 사망은 결코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제도의 귀결이다. 강제 단속과 추방을 전면에 세운 정책은 노동자를 지하로 밀어 넣고, 그 결과 더 위험한 현장과 더 긴 노동시간, 더 낮은 임금으로 내몬다. 반이민 담론은 ‘치안’과 ‘보호’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취약한 이들을 국가 폭력의 전면에 세운다. 그 과정에서 이주 여성들은 생계와 안전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요구는 분명하다.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 자유화. 고용주에 종속된 허가 구조 개편. 체류 자격을 이유로 한 강제단속과 추방의 중단. 강제노동을 낳는 제도적 장치의 폐기. 미등록 여부와 무관한 기본적 노동권 보장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정부의 의무가 됐다. 국제적으로 극우는 이주민 남성이 정주민 여성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적극 선전한다. 하지만 그들의 선전은 그 이주민 추방의 과정 속에서 이주민 여성들이 죽음과 공포로 내몰린다는 사실, 국가 폭력에 적극적으로 노출된다는 사실, 탄압을 피하기 위해 더 불안하고 위험한 노동으로 내몰린다는 사실을 철저히 배제한다. 국적과 성별은 권리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일할 권리, 부당한 일터를 떠날 권리, 폭력과 공포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는 모두에게 동일해야 한다. 통제가 아니라 권리로, 추방이 아니라 존엄으로 정책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제기하는 요구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즉각 제정과 젠더차별 금지 :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 장애, 국적과 인종 등 차별 금지 : 성별정정수술 건강 보험 적용 : 비수술 성별정정 제도화 세계 곳곳에서 성별을 둘로만 고정하려는 정치가 힘을 얻고 있다. 특히 트럼프 현 미국 대통령의 “내 정부가 인정하는 성별은 두 가지뿐”이라는 선언 이후 그 여파 속에서 트랜스 혐오는 국제 정세의 주요 쟁점으로 부상했다. 한국 사회 역시 그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차별은 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 장애, 국적과 인종을 이유로 한 차별을 방치하는 것은 또 다른 배제를 제도화하는 일이다. 일터와 학교, 의료와 주거에서 반복되는 배제는 개인의 ‘선택’이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선택이 아니라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정부와 국회가 책임지고 제정해야 하고, 나아가 아래로부터 조직한 우리 노동자민중의 힘으로 그들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제는 조금도 더 미룰 수 없다.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을 이유로 한 고용·의료·교육 차별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실효성 있는 구제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특히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삶을 가로막는 의료·법적 장벽을 제거하고, 성별정정수술에 건강보험을 적용하여 과도한 비용이 개인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하는 것. 무엇보다 트랜스젠더의 의료 접근성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시급하다. 비수술 성별정정 제도의 도입 역시 같다. 경제적 사정, 건강 상태, 개인적 신념 등 다양한 이유로 수술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성별정체성을 법적으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특정한 의료 행위를 거쳐야만 법적 성별을 인정받는 구조는 또 다른 강제다. 누구나 자신이 인지하는 성별로 호명되고 기록될 권리를 가져야 한다. 2026 3.8 여성파업의 요구는 분명하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즉각 제정하라.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 장애, 국적과 인종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전면 금지하라. 성별정정수술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라. 비수술 성별정정 제도를 제도화하라. 존재를 부정하는 정치에 맞서, 모든 사람이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토대를 지금 당장 마련해야 한다. 비동의강간죄 도입/포괄적 성교육 의무화/임신중지에 건강보험 적용 : 비동의강간죄 도입 : 학교와 일터, 군대 등 모든 사회기관에 포괄적 성교육 의무 도입 : 임신중지에 건강보험 적용, 유산유도제 도입 해마다 반복되는 성폭력 통계는 이 사회가 무엇을 외면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2024년 한 해에만 3만 건이 넘는 성범죄가 접수되었고, 피해자의 대다수는 여성이다. 그러나 법은 여전히 ‘폭행과 협박’의 존재를 중심에 두고 판단한다. 저항의 흔적이 없으면 의심받고, 관계가 있었으면 축소 해석된다.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피해자가 얼마나 버텼는지가 더 크게 다뤄지는 구조는 정의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비동의강간죄다. 핵심은 단순하다. 상대방의 명시적이고 자발적인 동의가 없는 성적 행위는 범죄라는 원칙을 법에 분명히 새기는 것이다. 관계의 지속 여부, 사적 공간인지 공적 공간인지, 이전의 친밀성 여부와 무관하게 동의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피해자가 “왜 저항하지 못했는가”를 설명해야 하는 현실을 끝내야 한다. 동의의 부재를 중심에 두는 법 개정은 피해자를 의심하는 문화를 바꾸는 첫걸음이다. 그러나 2024년 3월 총선 과정에서 비동의강간죄를 공약으로 제시했다가 당원의 항의가 제기되자 슬그머니 철회한 민주당의 태도는 이 문제가 얼마나 가볍게 취급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성폭력은 선거용 문구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2024년 한 해에만 3만 명으로 매해 늘어가는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법안 입법마저 민주당은 고작 실무적 실수로 압축하는 실정이다. 법 개정과 함께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과제는 포괄적 성교육의 제도화다. 동의의 의미, 성적 자기결정권, 젠더 권력 구조에 대한 이해를 학교에서부터 직장, 군대 등 모든 사회 영역에서 체계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성교육을 단편적인 생물학 지식 전달로 축소하는 한, 왜곡된 성 인식은 유지된다. 성폭력 가해 이후 엄벌만이 아니라 인식 형성 단계에서부터 우리 사회의 젠더 평등은 시작되어야 한다. 또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 지 7년이 지났는데도, 정부나 국회가 대체입법을 외면하며 권리공백 사태가 지속되고 있다. 정부와 국회의 직접적인 권리 침해로 인하여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의 고통이 이어지고 있고, 영아살해로도 내몰리고 있다. 최근에는 후기 임신중지를 했다는 이유로 살인죄로 기소된 권모씨가 미필적 고의가 있다는 이유로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의 처벌을 받았을 만큼 입법공백 속에서 사법적 제재까지 받고 있고 있다. 그러나 임신중지는보편적 권리다. 정부는 더 이상 임신중지를 외면하지 말고 건강보험을 받을 수 있도록 적용하고 유산유도제를 도입하라. 팔레스타인 학살 지원 중단, 제국주의 전쟁 반대 : 한국석유공사, HD건설기계, 한화 등 정부와 기업의 전쟁 산업과 협력 반대 : 국방비 예산 축소 가자 지구에서 이어지는 파괴와 학살은 단지 한 지역의 분쟁이 아니다. 무장한 하마스 전사들의 잔혹함을 매일같이 떠들어대는 이스라엘 매체들과 달리, 실상 팔레스타인 여성과 아이들이 가자지구 및 팔레스타인 일대 희생자의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전쟁범죄의 파렴치한 민낯을 드러낸다. 이스라엘의 허약한 핑크워싱과 제반 논리들이 가리지 못하는 것은 무고한 팔레스타인 노동자민중의 죽음과 삶의 터전이 제국주의에 의해 짓밟힌 현실이다. 한국은 더 이상 중립적 관찰자가 아니다. 폐허가 된 땅을 사업 구상으로 바라보는 것도 모자라 아예 적극적으로 고통 위에 이윤을 설계하겠다는 트럼프의 발상에 이재명 정부는 관찰이 아닌 동조를 택했다. 전쟁 범죄의 책임이 제대로 규명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평화’의 이름으로 참여하는 것은 사실상 질서 재편에 동참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 또한 군수·에너지·건설 부문에서 전쟁 경제와 맞물려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석유공사, HD현대건설기계, 한화 등은 글로벌 방산·중장비·에너지 시장과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민중을 살해할 때 쓰는 무기가 생산되고, 팔레스타인 노동자민중의 밭을 불태우고 집을 무너뜨릴 장비가 수출되는 동안 한국 기업들은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였다. 수익의 전제는 파괴였다. 한국석유공사, HD현대건설기계, 한화 모두 학살의 동조자였다. 여성파업의 정신은 제국주의자들의 총칼로 노동자민중의 삶을 파괴한 뒤 자본가계급이 그 위에 부를 쌓는 질서에 동의하지 않는다. 전쟁 경제에 복무하지 않겠다는 선언, 군사적 팽창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우선에 두겠다는 선택. 그것이 지금 2026 여성파업이 내놓는 분명한 입장이다. 싸우는 여성 노동자가 세상을 바꾼다! 2026 3.8 여성파업으로 모이자 2026년의 상황은 몇 가지 사실을 시사한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한다. 정확히는, 전쟁은 자본가계급을 지키고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의 얼굴이라도 불사한다. 여성, 남성, 노인, 중년, 청년, 백인, 비백인 유색인종,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에이 스펙트럼, 젠더퀴어 등 누구라도 적극적으로 파시스트가 될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외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에게는 노동자민중의 페미니즘이 필요해졌다. 다카이치 사나에가 내세운 일본 의원의 여남동수 내각 선언이나 마린 르펜이 내세운 '내셔널 페미니즘'(자국의 여성 보호 및 권리 증진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기조)는 마치 가부장적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모든 여성이 겪는 억압과 차별의 경험이 단일하며, 심지어는 자본가계급의 여성과도 그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노동자계급 여성과 정치적/실천적 연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처럼 꼬드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다. 한국 구미의 반도체 공장 KEC에서 수십 년을 근속하고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승진이 가로막혀야 했던 여성 노동자가 살아온 삶과 다카이치 사나에가 살아온 삶은 당연히 다르다. 현장에서의 안정이 보장되고 업무 중 성별/적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불안정 노동으로 내몰리고, 심지어는 통계로 세어지지도 않는 죽음의 위기에 노출되어야 했던 한국의 2030 여성-성소수자 청년들과 앨리스 바이델의 경험은 당연히 다르다. 핵심은 결국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다. 저들의 목숨을, 저들의 배를 불리는 체제를 하루 더 연명하기 위해 노동자민중을 갖가지 조건으로 세분화해 다양한 굴레를 매기는 시대. 우리는 그렇기에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무거운 쇠사슬 중 하나를 차고 있는 여성 노동자, 성소수자 노동자의 이름으로 뭉쳐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노동자계급 여성과 성소수자의 이름으로 이 가혹한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고, 전쟁 위기의 복판으로 우리의 목숨을 갈아 넣으려 하는 자본가들과 싸워야 한다.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가장 근원적 작동. 유급 노동(임노동)과 무급 노동(가사, 돌봄, 재생산 등)을 모두 멈춰 세우는 여성파업으로 말이다. 2026년의 여성파업의 수많은 의미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를 고르자면.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참조자료] 『급부상 중인 독일 AFD 총리 후보 알리체 바이델은 누구?』, 주간조선, 김택환, 25년 1월 26일. 『이탈리아 첫 여성 총리, 멜로니가 연 극우의 시대』, 한겨레, 김도훈, 24년 6월 22일. 『멜로니·르펜 이어 다카이치…'우파 스트롱우먼' 열풍 왜』, 중앙일보, 위문희, 25년 10월 9일. 『다카이치 ‘보통국가 일본’ 가속 페달…역대급 압승이 여는 군사대국의 문』, 아시아투데이, 구필현, 26년 2월 10일. 『2025년 3분기 임금근로 일자리 2,092만개…전년 대비 13만9천개 증가, 보건·사회복지 견인』, 데일리365, 김형근, 26년 2월 24일. 『'165년' 일해야 상위 0.1%의 연봉 번다…여성은 남성보다 '130일' 더 일해야』, 뉴시스, 정우영, 26년 2월 26일. 『프리랜서 노동실태와 특징Ⅱ - 일의 형태와 불안정성 -』, 김종진, 박관성, 21년 9월 15일. 『"특수고용·프리랜서 5년간 233만명↑…청·노년 증가율 커"』, 연합뉴스, 김치연, 24년 10월 1일. 『55살 이상 노동자, 열 중 셋은 최저임금도 못 받아…여성은 더 열악』, 한겨레, 김혜정, 25년 3월 30일. 『여성 비정규직 530만명… 남성보다 131만명 더 많아』, 서울EN, 이현정, 25년 12월 1일. 『경찰청_성범죄 발생 및 검거 현황』, 경찰청, 25년 11월 03일 갱신 자료 기준 참조하였음. -
[발언] 3월 6일 오후 12시 반. 서울역 광장에 여성파업의 대오로 모여주십시오! 동지들!안녕하세요. 2026 3.8 여성파업조직위원회에 소속되어있는 유지원이라고 합니다. 어제 여성파업을 앞두고 저희 학교에서 수다회라는 걸 열었습니다. 여성파업에 대해서, 혹은 여성의 날에 대해서 각자 기억을 꺼내보고 하고 싶은 말을 돌아가며 하는 자리였다고 생각해보시면 되겠는데요. 지금이 2026년이고, 저희의 나이가 이제 20대 초반에서 중반까지인데도 수많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학교에서 여성 인권에 대해서, 나 페미니스트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갖은 폭언과 폭력을 견뎌야 했다는 이야기, 82년생 김지영을 너무 읽고 싶어서 집에서 부모님 몰래 몰래 조금씩 다 읽었다는 이야기,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가정폭력을 당하는데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던 이야기. 어쩌면 이렇게 똑같나 싶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가진 20대의 여자들이 30대가 되면 자본주의 시장에 진출해 저임금 불안정 비정규직이 되고 결혼해서는 경력 단절을 맞게 됩니다. 2025년 3/4분기에 여성 일자리 17만 9000개 상당이 증가했지만 여전히 여성 노동자가 남성 노동자만큼의 돈을 벌기 위해서는 1년에 130일만큼 더 일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성은 자본주의가 양산하는 값싼 불안정 일자리의 담당자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정말 간절히, 제 친구들에게는 늘 돈이 없고. 우리는 같이 밥을 먹으러 가서 자리에 앉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소리가 돈이 없어서 무슨 메뉴를 먹어야 할 지 모르겠어. 여야 하고. 대학을 졸업해서도 어디서 일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하고. 일 년에 몇 명의 친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장례식에 가야 하는 이 굴레에서 제발 벗어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동시에 이런 생각도 합니다. 만약 제가 벗어날 방법을 찾는다면, 동지들. 그 방법을 노동자를 폭력연행한 이재명 정부와 함께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여당이 되자마자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입을 싹 닫은 민주당과 함께 찾겠습니까? 일본 자위대를 사실상 군대로 만들겠다는 일본 최초의 여성총리 다카이치, 이민자를 살해한 시민에게 직접 훈장을 주겠다는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총리 멜로니, 그 외에도 여성의 얼굴을 하고 손을 내밀면서 여성 노동자들을 제국주의 전쟁의 초석으로 소모하려고 하는 자본가, 정치가들과 찾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 길을 세종호텔에서 피땀 흘려 일하고도 짐짝처럼 내쳐진 여성노동자 허지희 김난희 동지,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고공에까지 올라야 했던 박정혜 동지, 지혜복 동지, 톨게이트지부, KEC지회, 학습지노조, 1366서울센터분회의 동지들과 찾고 싶습니다. 제가 동지라는 말도 그저 어색했고 파업가 가사도 제대로 몰라서 아는 척 해가며 부르던 23년 2월에 정확히 이 세종호텔 앞 문화제에 왔었는데요. 그날부터 지금까지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노동자가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것입니다. 자본가 정부가, 민주당이든 국힘이든 상관 없습니다. 천 번을 두드리면 우리가 만 번 강해지면서. 해방과 전진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 그렇게 믿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믿어도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여성해방 노동해방을 향한 제 믿음의 실체로 내일 나타나주십시오 동지들. 3월 6일 오후 12시 반. 서울역 광장에 여성파업의 대오로 모여주십시오 동지들. 하실 수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구호 하나 하겠습니다. 노동자 총단결로 여성해방 쟁취하자! -
[번역] 국제선언: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위하여!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전쟁을 타도하라!트럼프와 네타냐후가 자행하는 제국주의 전쟁행위에 대한 연속혁명경향(CPR)의 국제선언을 소개한다. 노동자계급과 반제국주의 운동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군사침략을 패배시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Left Voice에 3월 3일 게재된 영문판을 번역함.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상대로 벌이는 (공습과 여러 도시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는) 합동 군사 공격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이다. 우리는 트럼프의 전략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과거에 이란 핵 프로그램과 관련된 제한적인 목표에 집중했으나 이제 이란 민중을 완전히 패배시켜 백악관의 지시에 복종케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의 공동 책임자들인 워싱턴과 텔아비브가 벌인 합동 공격으로 이미 수백 명의 이란 민간인(이란 남부의 한 학교에서 사망한 수십 명의 여학생 포함)이 사망했고, 테헤란과 이란 전역의 기반 시설이 파괴되었으며, 아야톨라(최고 성직자) 겸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암살당했다. 또한 하메네이의 고문 알리 샴카니, 군 최고사령관 압돌라힘 무사비, 국방부 장관 아지즈 나시르자데, 혁명수비대 사령관 모하마드 파크푸르 등 정권의 정치·군사 지도부 일부도 제거되었다. 이는 예측 불가능한 사태 전개의 문을 열었다. 중동 전체를 잠재적 불안정으로 몰아넣는 심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지역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의 ‘공격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발언은 이러한 가능성을 더욱 뒷받침한다.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수도 베이루트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불과 몇 시간 만에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다. 한편, 헤즈볼라는 하메네이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유가가 10% 이상 상승함으로써 이 전쟁이 광범한 사회적 영향을 미칠 것임을 보여준다. 이번 공격의 초기부터 트럼프가 공언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군사적 수단을 통해 정권 교체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는 2000년대 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한 제국주의 전쟁에서 사용된 파괴적인 신보수주의 정책의 요소들을 차용한 것이다. 프랑스, 영국, 독일을 포함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종속적인 입장에 서서 트럼프를 지원하여 이란 공격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번 제국주의 침략은 미국의 무조건적 지원을 받는 네타냐후가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자행해 온 집단학살 및 민족청소 정책의 직접적인 연장선에 있다. 이란에 대한 공격은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해군을 배치한 위협 속에서 몇 주간의 협상을 벌인 끝에 단행되었는데, 그 명분은 이란이 완전한 군축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 해체뿐 아니라 이란의 유일한 실질적 방어수단인 탄도미사일 포기까지 요구했다. 이는 수십 년간 워싱턴의 가혹한 경제 제재로 억압받아 온 이란에게 완전히 항복하라는 요구였으며, 테러 국가인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군사적 지배력을 공고히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을 집단학살하고 서안지구에서 정착촌 확장을 통해 팔레스타인 토지를 강탈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자신들 뜻대로 지역 지도를 재편하기 위해 이란을 약화시키고 통제할 필요가 있다. 친제국주의적인 우호 정부를 수립하는 방식으로든 또는 시리아처럼 국가를 분열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든 말이다.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은 미국이 ‘서반구’에 대한 절대 지배라는 새로운 국가 안보 교리에 따라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식민주의적 자원착취 전쟁과 맥을 같이 한다. 이와 같은 제국주의적 호전성의 표현들은 기존의 자유주의 질서와 이른바 규칙기반 국제질서의 붕괴 속에서 가속화되는 미국의 패권적 쇠퇴를 되돌리려는 반동적 시도를 그 배경에 두고 있다. 이는 워싱턴의 명령에 도전하려는 세계 모든 이들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트럼프가 쿠바 경제를 압박하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쿠바에 대한 석유 보이콧을 선언한 미국은 이미 베네수엘라산 원유의 쿠바 수출을 금지하였고, 쿠바에 석유를 수출하는 국가들에 제재를 가했다. 이제는 이란산 원유의 쿠바 수출까지 줄이려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1959년 쿠바 혁명의 성과 가운데 남아있는 부분마저 소멸시키려는 의도이다. 트럼프는 또한 중국의 석유 공급망을 차단하여 아야톨라 정권과의 특별한 관계를 깨뜨리려 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이란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치적·군사적 패배를 위해 싸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면, 사회주의자라면, 혁명적인 좌파라면,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는 유럽 열강들의 패배를) 조건 없이 지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피억압 국가의 편에 서서 억압 국가에 맞서 싸워야 한다. 연속혁명경향(CPR)은 아야톨라 정권의 반노동자적이고 억압적이며 반동적인 체제로부터 절대적인 계급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이러한 반제국주의 입장을 옹호한다. 노동자계급, 여성, 그리고 이란 민중의 해방과 자유는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과 여전히 집단학살을 자행하는 이스라엘의 폭격과 개입으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다. 지금까지 알리 하메네이가 이끌어온 신정적이고 초보수적인 정치체제는 이란의 노동자와 빈민 대중에게 가차 없는 적이다. 이 체제는 (2022년 젊은 쿠르드족 여성 마흐사 아미니 살해 사건으로 상징적으로 드러났던) 여성 박해, 쿠르드족 탄압, 그리고 노동자 파업 탄압에 책임이 있다. 지난 1월, 하메네이는 빈곤, 기아, 그리고 국가 경제위기의 결과에 맞서 정당한 요구를 내걸고 시위하던 수천 명의 시위대를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실, 아야톨라의 신정 독재는 1979년 이란 혁명을 정치적으로 찬탈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혁명은 레자 팔라비와 미국을 몰아내고 노동자 평의회(쇼라)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다. 이 평의회들이 더욱 발전했더라면 이 지역에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계급 권력이라는 새로운 동력을 창출할 수 있었겠지만, 성직자 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 정권이 권력 유지를 위해 대중을 억압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이러한 행태는 이란 내에서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과 투쟁을 위한 준비를 체계적으로 방해해 왔다. 이란의 노동자, 여성, 청년들이 아야톨라 정권의 반동적인 탄압에 직면하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반혁명적인 세력들인) 미국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적 시온주의에 맞서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는 이란 정부와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성을 가질 때만 실현될 수 있다. 여러 분석가들이 지적했듯이, 이란은 베네수엘라와 다르다. 이란이 위치한 중동 지역은 미국, 이스라엘, 그리고 유럽 제국주의(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가 자행한 수십 년간의 파괴로 황폐해진 불안정한 지역이고, 난민 위기로 에워싸인 지역이며, 오랫동안 제국주의적 개입에 맞서 싸워온 역사를 가진 지역이다. 더욱이, 1979년 혁명 이후 미국의 가혹한 경제 제재로 압박받아 온 이란은 비록 2023년 이후 (특히 친이란 민병대의 경우) 약화되기는 했지만, 베네수엘라보다 더 큰 군사적, 지정학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이란은 이스라엘과 (카타르의 알 우데이드, 아랍에미리트의 알 다프라, 쿠웨이트의 알리 알 살렘, 이라크의 에르빌, 바레인의 제5함대 사령부 등) 여러 미군기지를 향해 탄도미사일을 발사했으며, 걸프만 원유 수송의 전략적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들을 공격했다. 이란의 미사일은 텔아비브의 건물들을 파괴하고 베이트 셰메시의 이스라엘인들과 미군 병사들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란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와 제국주의적 공격에 항의했고, 파키스탄, 이라크, 인도에서는 민간인들이 미국 대사관과 영사관을 공격했다. 다시 말해, 전쟁의 양상과 결과는 이란의 저항 수준과 지속적인 보복 여부에 달려 있다. 트럼프는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특히 중동에서는, 미국이 공습에만 의존해서 정권 교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례가 없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처럼 지상군을 투입한 곳에서도 역사적인 패배를 겪었고, 미국 주둔에 적대적인 세력을 만들어냈다. 이란에 대한 군사적 침공은 트럼프에게 간단한 선택지가 아니다.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이란의 광활한 영토, 전략적 요충지인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 내부 자원 접근에 대한 제한, 그리고 미국에 대한 지역적 적대감은 군사적 침공을 더욱 어렵게 한다. 미국 안에서도 공화당 지지층을 포함한 미국인 대다수가 군사적 침공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게다가 트럼프의 국내 입지는 약화되었다. 경제는 예상보다 부진한 성과를 보이고 있으며, 행정부는 이민세관집행국(ICE)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시위에 직면해 있다. 특히 미니애폴리스에서 일어난 경제적 셧다운은 트럼프 정부가 계급투쟁 영역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겪게 만들었다. 트럼프가 ‘모든 전쟁을 끝내겠다’고 약속해 놓고서 중동에서의 대규모 전쟁에 개입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꾼 것은 이러한 모순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좌파 세력(예를 들어 프랑스의 NPA-L'Anticapitaliste)은 제국주의 개입과 이란의 반동 정권을 동렬에 놓는다. 이러한 입장은 억압국과 피억압국의 차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칙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혁명가들은 그 지도부의 반동적 성격과 관계없이 피억압국의 편에 서야 한다는 의무 또한 간과하고 있다. 한편 미국의 민주사회주의자(DSA)와 같은 단체는 자국의 제국주의 정부와 이스라엘의 패배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고 단순히 전쟁 종식만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마치 트럼프의 제도적 갈취와 협박이 (워싱턴이 펼쳐 온 동일한 경제·정치 외교로 이미 수십 년간 억압받아 온) 이란 민중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인 것처럼 미국이 ‘외교’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위해, 피억압 이란의 승리를 위해, 이란 정권으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성이라는 기초 위에서, 중동과 전 세계의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의 국제적 운동을 시급히 발전시켜야 한다. 전 세계의 사회주의 좌파, 팔레스타인 연대운동, 그리고 반제국주의 운동은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행동으로 단결해야 한다. 이는 특히 (민중들이 트럼프에게 반이민 정책을 철회하도록 압력을 가한) 미국과 모든 핵심 국가들에서 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을 베네수엘라와 쿠바에서 축출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는 집단학살을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전쟁을 타도하라!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미군은 중동에서 철수하라!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집단학살을 타도하라! 전 세계 노동자계급과 청년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대규모 운동을 건설하라! 2026년 3월 2일 연속혁명경향-제4인터내셔널(CPR-FI) -
[발언] 저는 이제 동지들과 3.8 여성파업 현장에 서 있겠습니다[사진] 스튜디오 알 안녕하세요. 침묵보다 저항을 선택하며 오늘로 서울시교육청 앞 773일째 투쟁 중인 지혜복 교사입니다. A학교 성폭력 사안은 피해를 신고한 여학생들뿐만 아니라 가해자인 학생들까지 포함하여 성평등한 사회적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이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계기로 만들어지지 못했습니다. 하여 저는 이 학교 성폭력 사안이 온전히 해결되어 학교 안 성평등 문화가 구축이 되고 포괄적 성교육 교육 과정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며 지금까지 싸우고 있습니다. 이 투쟁의 과정은 참여한 동지들의 개개인의 피해 경험을 털어놓고 울고 웃으며 각각이 주체가 되어 나선 모두의 투쟁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1969년 캐롤 하니쉬의 글 제목에서 알려진 이 문장은 1960년~70년대 여성 운동에 등장한 핵심 구호입니다.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성폭력이 개인 탓, 집안 문제, 성차별은 개인 능력 문제, 우울, 좌절은 개인 성격 문제 등 여성들의 문제는 사적 영역의 일로 치부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성차별과 성폭력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와 권력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불안정한 일자리, 성별 임금 차별, 가사, 육아 등 이중 노동의 부담, 여성과 성소수자, 트랜스젠더의 성차별과 성폭력, 임신중지권 제한 등은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가 만든 구조적 문제입니다. 학교와 가정, 일터 등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에서 개개인이 겪는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각각의 구조적 특성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개인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은 사회적 권력 구조와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변화는 정치적 행동을 통해 가능합니다. 하여 우리는 정치적 행동을 통해 우리 삶을 바꾸기 위해서 여성 파업에 나섭니다. 개인적 경험으로 가두지 않고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만들기 위해 일손을 멈추고 38 여성 파업에 나섭니다. 3.8 여성파업을 통해 우리 존재의 사회적 역할을 드러내고 우리의 정치적 힘을 보여줄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여성은 가부장제와 지배 계급이 강요한 차별과 불평등에 저항해 왔습니다. 여성과 성소수자의 권리를 외면하고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도모하는 것은 모순이며,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여성 의제가 곧 노동자 계급 의제이며,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윤을 위해 자본주의 체제는 성별마저 노동자 계급을 분열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본의 분열과 착취, 억압에 맞서 노동자 계급 전체가 성차별에 맞선 단결 투쟁에 나섭시다. 여성들 간 또한 남성이 여성 억압에 맞서 투쟁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균열을 우리 모두가 막아내고 함께 승리합시다.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자본주의 모든 형태의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것입니다. 자본주의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 군사적 팽창은 여성에 대한 노동력 통제와 재생산 통제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제국주의 체제에서 여성은 인질, 인구 재생산 통제, 전복된 집단의 상징, 성폭력을 포함한 폭력을 과시하는 대상으로 간주됩니다. 여성은 제국주의 권력과 자국의 가부장제 체계 사이에서 침묵당하고, 결국 여성 대상 잔혹 행위는 공동체 전체를 굴복시키고자 행해집니다. 3.8 세계 여성의 날은 모든 여성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국제적 기념일입니다. 팔레스타인 전쟁뿐만 아니라 최근 미국의 이란 침공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앞으로 벌어질 전쟁 속에서 나타나는 여성 폭력은 개인이 아닌 사회 정치적 문제입니다. 3월 8일에 우리는 이 또한 조명하고 국제적 행동을 촉구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제 동지들과 3.8 여성파업 현장에 서 있겠습니다. 시교육청에 찾아온 연대 동지가 건넨 메리골드의 꽃말. 찾아올 행복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이 말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연결되는 꽃말입니다. 낙관적 전망을 가지고 동지들과 함께 거리에서 싸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사회주의 기초학습#11] 오늘날 세계정세: 위기·파시즘·제국주의·전쟁에 맞선 노동자 국제주의위기와 전쟁의 시대, 국경과 인종, 성정체성 등으로 노동자를 갈라쳐 지배하는 극우와 민족주의의 광풍 앞에서 노동조합을 혁명적 기관으로 재편하는 것. 그래서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는 계급투쟁을 조직된 노동자운동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것, 그래서 계급투쟁을 혁명으로 전진시키는 것, 이것이 오늘날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과제이며,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인간해방을 이루고자 하는 모든 투사들에게 제안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전략이다. ※아래 글은 2025년 10월 9일 강연을 위해 작성되어, 그 이후 전개된 사건들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 서론: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가 돌아왔다 1. 위기: 만성화된 자본주의의 장기불황 2. 극우와 파시즘의 성장 오늘날 극우세력의 특징 극우세력이 대안으로 부상하게 된 과정 ‘민주’정권과의 주고받기를 통해 성장하는 극우세력 3. 제국주의 패권대결, 전쟁과 학살 충돌하는 두 제국주의 국가: 미중 관계의 재편과정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를 열어젖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제국주의 진영 간 충돌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제국주의가 벌이는 가장 끔찍한 만행 트럼프 2기, 제국의 쇠퇴를 드러내는 강도적 패권행위 4. 폭발하는 저항: 계급투쟁의 시대가 돌아오다 계급투쟁의 귀환 계급투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전진시키기 위한 사회주의자의 과제 서론: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가 돌아왔다 11강은 오늘날의 세계정세를 다루는 시간이다. 그 전에 우리는 지난 9강과 10강을 통해, 자본주의 태동기부터 2021년까지의 시간을 살펴보았다. 9강과 10강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가 어떤 시기이든 자본의 이윤축적을 지상목표로 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 그러나 그 구체적인 작동양상은 계급투쟁의 성숙도, 착취와 수탈의 결합방식,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 등 여러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면서 끊임없이 달라져왔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자본주의의 작동양상 변화는 자본주의의 모순의 축적 정도와 연결된 일정한 패턴을 갖고 있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가 어떤 시대변화를 거쳐왔는지를 빠르게 훑어보자. [성장기: 자유경쟁과 부르주아 혁명의 시대] 봉건제로부터 출발해, 산업혁명 및 부르주아 정치혁명과 함께 태동한 자본주의는 역동성을 갖고 자신을 확장해왔고, 이는 자본가들의 자유경쟁과 주기적인 공황으로 표현됐다. 이 시기 아직 형성기에 있던 노동자계급은 거의 자기조직화하지 못했고, 따라서 하루 16시간 노동과 같은 무제한적인 자본의 착취가 벌어졌다. [모순 축적기: 독점과 제국주의 전면화의 시대] 19세기에 접어들며 노동자운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와 함께 노동자계급의 사상인 마르크스주의도 정립됐다. 19세기는 자본주의의 축적의 주된 모순 표현형태가 주기적 공황에서 식민지 확장이란 형태로 바뀌어간 세기이기도 하다. 주기적 공황을 되풀이하며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심화될수록 유휴자본이 늘어났고, 이에 자본주의는 국내에서 낮아지는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해 제국주의 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세기 말 무렵에는 전 세계가 자본주의 강대국의 식민지로 뒤덮였고, 더 큰 팽창으로 나아가야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은 다른 강대국의 식민지를 빼앗는 ‘식민지 쟁탈전’에 돌입했다. [모순 폭발기: 세계전쟁, 대공황, 노동자혁명의 시대] 식민지 쟁탈전의 끝은 결국 전쟁이었다. 그것도 자본주의 이전의 국지적 전쟁과 비교할 수 없는, 자본주의가 발전시켜놓은 생산력과 연결망을 토대로 한 광범위한 파괴가 가능해진 세계전쟁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 황태자에 대한 어느 세르비아인의 암살 시도를 계기로 시작됐지만, 그 사건은 이미 넘치는 화약을 터뜨린 성냥개비였을 뿐,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한 근본적인 동력은 전쟁이 아니고서는 더 큰 이윤축적을 달성할 수 없는 자본주의 모순의 축적이었다. 제국주의 패권대결로 세계가 조만간 전쟁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갈 것이란 건 단지 사회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세계정세를 분석하는 많은 이들에게 뻔히 보이는 사실이었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반동적인 전쟁을 막을 것이냐, 막지 못한다면 혁명으로 뒤집을 것이냐였다.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1907년 제2인터내셔널 대회(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전쟁을 막기위해 최선을 다하고, 전쟁이 터지면 계급투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투쟁한다”고 함께 결의했다. 그러나 막상 1914년 전쟁이 터졌을 때,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당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하며 무기력하게 민족주의 광풍에 휩쓸려버렸다. 로자 룩셈부르크 등을 비롯한 독일과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일부, 그리고 러시아 볼셰비키만이 이런 제2인터내셔널의 패배를 딛고 분명한 제국주의 전쟁 반대 구호를 내걸었다.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으로 뒤집자”는 구호 아래 실천을 조직했던 볼셰비키는 결국 1917년 러시아혁명을 성공으로 이끌며 세계 최초의 노동자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뒤이은 1919년 독일혁명과 이탈리아혁명이 패배하면서, 노동자국가는 러시아 일국으로 고립되어 버렸다.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대표되는 개량주의 노선은 이러한 혁명들을 패배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혁명가들은 뒤늦게 독일공산당을 만들며 계급투쟁을 혁명으로 전진시키려 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독일 사회민주당이 보낸 자유군단에 의해 살해됐다. 인류 최초의 노동자국가 러시아는 내전과 고립이라는 혹독한 조건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스탈린의 반혁명에 의해 1930년대 후반 파괴되고, 이후 소련은 ‘사회주의’라는 외피를 쓴 국가자본주의로 변모했다. 소련 내 스탈린주의 노선의 오류는 이후 등장한 혁명적 기회들을 패배로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26년 영국 삼각동맹 총파업의 패배, 1927년 중국혁명의 패배, 1930년대 초 독일 파시즘의 승리, 1936년 프랑스 혁명과 스페인 혁명의 좌절 등 주요한 혁명적 기회들이 차례대로 유실된 것은 코민테른의 ‘사회파시즘론’과 ‘인민전선’이라는 궤멸적 정책의 결과였다. 그리고 코민테른의 궤멸적 노선은 ‘소련의 일국적 생존’만을 우선시한 스탈린주의의 결과였다. 혁명이 분쇄된 자리에는 파시즘이 도래했다. 1933년 히틀러의 집권으로 결정적 기회를 얻은 파시즘은 노동자운동을 철저히 분쇄했다. 파시즘으로 노동자운동을 무력화시킨 자본주의의 다음 경로는 거침없는 대량파괴와 학살이었다. 자본주의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진행된 2차 세계대전은 전세계적으로 8천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낳았다. 끔찍한 학살과 파괴를 통해 자본주의는 그간 누적된 모순을 털어버리고, 청춘의 몸으로 돌아가 다시 이윤축적을 시작하게 되었다. [새로운 성장기: 전후호황과 개량주의의 시대] 세계대전과 대량학살을 통해 다시 청춘의 몸으로 돌아간 자본주의는 약 20여년 간 활기찬 성장(전후호황)의 시대를 구가했다. 그러나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훨씬 더 집중된 성장을 수행한 만큼, 이윤율 위기는 훨씬 더 빠르게 찾아왔다. 이는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불황과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모순 축적기: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 시대] 이에 대한 자본의 대응은 착취와 수탈을 획기적으로 강화해 이윤율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였다.[1]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로 착취와 수탈을 강화한지도 40여년이 지난 오늘날, 더 이상 신자유주의로도 해결하지 못하게 된 축적의 위기가 오늘날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다시 열어젖히게 됐다. [새로운 모순 폭발기: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 오늘날 세계정세의 특징은 무엇인가?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자유경쟁 자본주의 시절부터 독점과 제국주의 시기를 지나 세계대전을 벌일 때까지, 자본주의가 모순을 축적하고 대량파괴로 이를 털어버리는 첫 번째 순환을 지나왔다면, 그 이후에 펼쳐진 두 번째 순환이 이제 폭발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는 마치 1차 세계대전 이전, 더 이상 개척할 식민지를 찾지 못해 서로의 식민지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던 제국주의 패권대결의 시기와 그 어느 때보다 유사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을 핵심 축으로 하는 제국주의 패권국들은 세계에 대한 자기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경쟁하고 있고, 이는 보호무역 확대, 기술전쟁, 관세전쟁과 같은 경제적 경쟁은 물론, 군비증강, 대리전, 식민지·약소국 지배개입 강화와 같은 정치군사적 경쟁으로도 터져나오고 있다. 각국에서는 이 냉혹한 경쟁의 시대에 더욱 노골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고 맹세하는 극우세력들이 대중적 지지를 얻으며 성장해가고 있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그간 약속했던 안정적 질서가 깨지면서 노동자민중은 더욱 가혹한 생활조건의 하락과 생존의 위기를 강요받고 있고, 이는 각국에서 계급투쟁이 폭발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이번 장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의 면면을 살펴보고, 이 야만의 시대를 바꿔내기 위한 우리의 과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위기: 만성화된 자본주의의 장기불황 오늘날 자본주의는 거대한 위기에 빠졌다. 자본주의가 위기라는 건 무슨 뜻인가? 자본주의는 이윤 축적을 지상목표로 하는 체제다. 자본주의가 위기라는 건, 근원적으로 이윤 축적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왜 이윤 축적에 큰 문제가 발생했는가? 역설적으로 이는 자본주의가 너무 많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엄청난 속도의 대량생산이 가능한 자본주의는, 이전만큼 빠른 속도로 더 성장하는데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잇따른 기술혁신으로 생산성은 엄청나게 높아졌는데, 그 결과 왠만한 기술혁신으로는 더 이상 이윤율이 충분히 올라가지 않는다. 사실 이런 어려움에 봉착한지는 꽤 오래되었다. 이미 20여 년의 전후호황을 끝내던 무렵인 1970년대에 자본주의는 같은 이유로 근본적인 이윤율 하락 문제에 부딪혔다. 그 때 자본주의가 택한 해법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인데, 이 해법의 본질은 기술혁신이라기 보다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강화하는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하락하는 이윤율에 대한 근본적 처방이 될 수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자본주의가 봉착한 막다른 길은, 40여년 간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세계화를 통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윤율은 충분히 올라가지 않는 오늘날의 현실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2] 지난 40여년 간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와 수탈의 정도가 임계선까지 다가왔다는 것은 세계 곳곳에서 생존권 위기에 맞서 폭발하고 있는 계급투쟁의 존재를 통해서 드러난다. 착취와 수탈을 지금보다 더 강화시켰다가는 피지배계급이 혁명을 하겠다고 들고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술혁신을 통한 생산성 증대로 이윤율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야하는데, 이것도 큰 어려움에 봉착해있다.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 위기의 본질이다. 이 위기 앞에서 자본가계급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자본가계급은 사회적 위기가 얼마나 심각하건, 자기 이윤을 획득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다.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자본가들은 이윤을 벌어들일 수 있는 수단을 찾는다. 그래서 오늘날 자본가계급이 하고있는 주요한 선택 중 하나는 금융수탈의 지속이다. 이미 2008년 금융위기를 통해, 금융수탈이 어떤 파괴적인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전세계에 입증됐다. 그러나 자본가는 당장의 이윤을 포기할 수 없고, 생산적 투자에 돈을 쓰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높은 이윤율을 쉽게 보장해주는 금융투기에 열을 올린다. 금융위기가 대공황으로 이어지는 걸 막기 위해 취했던 양적완화와 초저금리 정책도 이를 부추겼다. 그 결과는,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더욱 심각해진 주식, 부동산, 가상화폐 등 금융시장의 거품이다. 금융시장의 어마어마한 거품 반대편에는 만성화된 장기불황이 있다. 금융수탈의 파괴적 속성이 2008년 금융위기로 터져나왔을 때, 자본주의는 초저금리와 양적완화를 통해 금융위기가 대공황으로 치닫는 것은 가까스로 막아냈다. 하지만 대공황 대신, 이전 시기와 같은 성장률을 회복하지 못하는 대불황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성장동력이 꺼져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더군다나 전쟁, 기후위기, 보호무역 등 경제위기가 야기한 정치, 사회 위기는 공급망에 충격을 주며 더 큰 경제위기를 부른다. 공급망 교란과 (금융화로 인한) 화폐가치 하락 등으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노동자민중의 생활조건을 하락시키고, 이는 계급투쟁을 촉발시키며 자본주의를 한층 더 위기로 내몬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로는 타개가 불가능해진, 만성적인 자본주의의 장기불황이 오늘날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규정하는 근원적 토대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는 오늘날 세계경제의 만성적 장기불황 상태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3] 미국 경제 전망조차도 많은 미국 측의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주목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코메리카 은행의 수석 경제학자 빌 애덤스는 “금리가 하락 추세에 있고, 휘발유 가격이 작년보다 낮으며, 소득이 인플레이션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1년 내 경기 침체 가능성은 2023년 초보다 낮아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경제학자들이 평균적으로 “2024년 미국 경제 성장률이 1%에 그칠 것으로 예상한다”며, 이는 “장기 평균 성장률의 절반 수준이며, 2023년 예상치인 2.6% 대비 상당한 둔화”라고 인정했다. 따라서 최상의 시나리오에서도 경기 침체는 아니지만, 2024년에는 사실상 정체 상태에 머무를 전망이다. 조지아 주립대 경제학자 라지브 다완은 “이는 경기 침체(Recession)라기보다 성장 정지(Growth Stop)에 가깝다”고 말했다. G7 나머지 국가들은 상황이 더 나쁘다. 독일 경제는 2023년 0.3% 감소했으며, 제조업이 전년 대비 6~7% 위축되면서 올해 더 큰 하락을 보일 수 있다. 프랑스와 영국 경제는 2023년 4분기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캐나다와 일본도 마찬가지이며, 이탈리아는 정체 상태다. 네덜란드, 스웨덴,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등 여러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미 경기 침체에 빠져 있다. 소위 신흥 경제국들 역시 2020년 팬데믹 침체 이후 2022년 회복세를 보였으나, 현재 상당수 국가에서 성장세가 크게 둔화되었다. ... 선진 자본주의 국가 대다수 국민에게 물가는 팬데믹 종료 이후 평균 20% 상승했으며(현재도 상승 중) 아르헨티나(150%), 터키(50%) 등 많은 빈곤국 및 중소득국에서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 결과 평균 가구의 실질 소득은 2019년 이후 감소했으며, 이는 사실상 수십 년 만에 가장 큰 생활 수준 하락이다. ... 세계은행은 최신 보고서에서 이를 요약했다. 미국에는 경기 침체가 없을지 모르지만, “세계 경제는 30년 만에 최악의 5년간 성장세를 기록할 전망이다”. ... 2024년 세계 무역 성장률은 팬데믹 이전 10년 평균의 절반 수준에 그칠 전망이다. 세계 상품 무역은 2023년 위축되며 지난 20년간 글로벌 경기 침체기를 제외한 첫 연간 감소세를 기록했다. 2021-24년 세계 무역 회복세는 지난 반세기 동안 글로벌 경기 침체 이후 가장 약한 수준으로 전망된다. 선진국 경제는 2023년 1.5%에서 1.2%로 성장률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됐다. 많은 개발도상국 경제는 “5천억 달러가 넘는 부채 부담”과 축소되는 ‘재정 여력’(즉, 정부가 사회 복지 수요에 지출할 수 있는 능력)으로 여전히 발목이 잡혀 있다. 식량 불안정은 2022년 급증했으며 2023년에도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4] 역사적으로 노동자에 대한 착취율을 끌어올리는 것보다 더 결정적인 자본주의의 성장동력은 기술혁신으로부터 나왔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착취율 강화는 절대적 한계가 명확하지만, 기술혁신을 통해 노동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통해 이윤율 하락을 만회했다. 그러나 2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술혁신은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를 부르고, 이는 결국 장기적인 이윤율 하락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AI기술이나 5G, 전기차 등 이른바 ‘미래 먹거리 산업’에 대해 4차 산업혁명이니 하는 과장된 담론이 오가지만, 실제 이러한 기술혁신이 개선할 수 있는 이윤율 회복은 제한적이다. “소위 '위대한 7사'라 불리는 하이테크·소셜미디어 기업들과 에너지 거물, 은행들이 막대한 이익을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경제 부문은 매우 낮은 이윤율을 경험하고 있다. 동시에 기업 부채는 매우 높고, 가계(모기지)와 기업(대출) 모두 차입 금리가 높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기업들은 가위날 두 개(낮은 이윤, 높은 금리) 사이에 끼인 상태다. 이윤과 금리라는 가위날은 경기 침체와 신용 경색의 위험을 내포한다. 특히 부채 수준이 은행 계좌가 아닌 소위 사모펀드와 '그림자 금융'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5] 만성적 장기불황을 생산성 증대가 아니라 수탈로 만회하려는 흐름은 사회적 불평등의 확대로도 표현된다. 옥스팜은 극단적 부와 극단적 빈곤이 25년 만에 처음으로 동시에 증가했다고 지적한다. “일반인들이 식량 같은 필수품에 매일 희생하는 동안, 초부자들은 자신들의 가장 과감한 꿈조차 뛰어넘었습니다. 불과 2년 만에 이번 10년은 억만장자들에게 역대 최고의 시기가 될 전망입니다—세계 최상위 부자들을 위한 '20년대 번영기'가 도래한 셈이죠,”라고 옥스팜 인터내셔널의 가브리엘라 부허 사무총장은 말했다. 2020년 이후 팬데믹과 생활비 위기 속에서 새로 창출된 부의 63%(26조 달러)는 상위 1%가 독점한 반면, 나머지 37%(16조 달러)는 전 세계 나머지 인구가 나눠 가졌다. 하위 90%가 1달러의 부를 창출할 때마다 억만장자는 약 170만 달러를 벌어들인 셈이다. 억만장자들의 재산은 하루에 27억 달러씩 증가했다! 이는 지난 10년간 억만장자의 수와 재산이 두 배로 증가하는 등 역사적인 증가세를 보인 데 이어 발생한 현상이다. 동시에 현재 최소 17억 명의 노동자가 임금보다 물가 상승률이 더 높은 국가에서 살고 있으며, 8억 2천만 명 이상(지구 인구의 약 10분의 1)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여성과 소녀들은 종종 가장 적게, 가장 늦게 식사를 하며 전 세계 기아 인구의 거의 60%를 차지한다. 옥스팜은 세계은행의 말을 인용해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글로벌 불평등과 빈곤 증가를 목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6] 대불황에 대응하는 자본가들의 또 다른 반응은 노동개악, 긴축정책, 구조조정 등 신자유주의 시기에 이어온 정책을 한층 더 공세적으로 펼치는 것이다. 연금개악, 복지축소 등 프랑스나 독일, 영국과 같은 기존 제국주의 국가에서는 개량의 성과들을 빼앗기 위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한편 올해 네팔,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 벌어진 부패와 불평등에 맞선 시위가 드러내듯, 지난 시기 개량의 성과를 공유하지 못했던 주변부 노동자민중은 대불황 아래 훨씬 더 큰 생존권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 최빈국들은 현재 부유한 채권국에 대한 부채 상환에 의료비보다 4배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전 세계 정부의 4분의 3이 향후 5년간 7조 8천억 달러 규모의 긴축 정책에 따른 공공 부문 지출 삭감(의료 및 교육 포함)을 계획하고 있다.[7] [네팔의 경제상황] 정치 계급이 부유해지는 동안, 일반 시민들의 삶은 끊임없는 투쟁이다. 실업과 불완전고용은 특히 젊은 층에서 만연하다. 추정치에 따르면 실업률은 20~30%에 달한다. 정규 경제는 매년 졸업하는 수십만 명의 학생들을 흡수할 능력이 없다. 수백만 네팔인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이주이다. 네 가구 중 한 가구는 카타르, 말레이시아, 아랍에미리트, 인도 등에서 종종 불안정한 조건에서 일하는 친척들이 보내는 송금에 의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재능과 젊은 에너지의 지속적인 유출이다. 지난해만 해도, 약 74만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찾아 국외로 떠났다. ... 현대 국가의 기둥이라 여겨지는 교육과 보건은 많은 이들에게 접근 불가능한 사치품이다. 공교육이 열악한 탓에 가족들은 질 좋은 사립교육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빚을 진다. 공공 의료 서비스는 불충분하며, 의료 비상사태는 가정을 영원히 파산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 이러한 불안정한 현실은 정치 계급과 그 추종자들의 사치스러운 삶과 극명히 대비된다. 여기서 네포베이비(영어로 ‘nepo-baby’, 즉 '친인척 우대주의의 산물(Nepotism)'이라는 용어에서 차용)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네팔에서는 특히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명백한 능력 없이도 의회 의석, 정당 지도부 자리, 국가 계약, 대사관 직위를 물려받는 권력 정치인의 자녀들을 가리킨다. 평범한 청년이 도하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기 위해 이민을 가야 하는 반면, 네포베이비들은 혈통만으로 특권과 권력의 삶을 누리며, 옛 체제 못지않게 특궈적인 현대적 정치 카스트 체제를 영속화한다.[8] 오늘날 자본주의가 노동자민중에게 얼마나 큰 위기를 전가하고 있는지는 한국의 현실을 통해서도 명징하게 알 수 있다. 한국은 1997년 IMF 위기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선도적으로 관철된 나라 중 하나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의 노동자계급의 분절은 전 세계 자본주의에서 배우고 싶어하는 훌륭한 초과착취 체제이다. 비정규직 제도가 30여년 간 지속되어온 결과는, 극단적으로 낮은 출생률로 표현되는 극심한 재생산 위기다. 자본주의가 체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사용한 해법이 또 다른 위기를 낳은 것이다. 2. 극우와 파시즘의 성장 앞서 살펴본 자본주의의 만성적 장기불황이 근원이 되어, 오늘날 여러 반동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정치적 측면에서는 위기관리에 실패한 기존 자본가 정치세력들을 대신해 새로운 대안으로서 극우세력이 부상하고 있다. 오늘날 극우세력의 특징 우선 오늘날의 극우가 현상적으로 어떤 특징들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 본질적으로 극우는 기존의 자본주의 위기를 훨씬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길 원한다. 노동자민중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훨씬 강화하고자 하고, 이를 위해 안티 페미니즘, 기후위기 부정 등 자본의 착취, 수탈 강화에 도움이 되는 문화전쟁, 이데올로기전쟁을 수행한다. 극우마다 양상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극우는 트럼프와 같이 민족주의, 국수주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자국의 위기비용을 타국에게 전가하려고 하며, 군사력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고자 하기 때문에 군비증강과 재무장을 추구한다. 노동자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억압하며 자본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특징은 스스로를 ‘무정부자본주의자’라고 호칭하는 아르헨티나 극우 밀레이에게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밀레이는 집권과 함께 △공공지출 대폭 축소 △공공사업 전면 유보 △에너지·교통보조금 삭감 △연방예산 동결 등 ‘경제비상조치’를 발표하고, 노동권, 임대차, 가격규제, 민영화, 교육, 연금, 관광, 위성인터넷 서비스, 의약품 판매, 무역, 외국인 토지매입 등 다방면에 걸친 대규모 규제완화를 위해 수백 개의 법률을 무력화하는 366개 조항의 ‘메가 대통령령’을 발표했다. 뒤이어 △공기업 사유화 △시위제한 명령권 △불법시위 처벌 강화 △환경규제 완화 △세금·연금·에너지·안보 관련 의회 권한의 대통령 양도 등이 포함된 664개 조항의 ‘옴니버스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특히 노동권과 관련해 ‘메가 대통령령’은 △미등록 고용에 대한 벌금·처벌 폐지 △수습기간을 3개월에서 8개월로 연장 △업무시간 중 노조활동 금지 △필수부문(의료·교육·수도·가스·전기·항공·통신 등)은 파업시 75% 업무유지 △중요부문(운송·식품가공·물류·광산·우편 등)은 파업시 50% 업무유지 △파업 도중 작업장점거·출입봉쇄·기물파손하면 해고 △사업장 단위 조합비 자동공제를 개별 동의로 변경 △기존에 노조가 운영하던 조합원 의료보험에 보험사 진입 허용 등을 포함하고 있다. 임대차 관련해서는 △2020년부터 시행돼 오던 임대차 기간 3년 보장과 임대료 인상 제한 폐지 △미국 달러로 임대료 납부 요구 허용 등을 포함하고 있다. 모든 가격통제와 가격규제도 폐지했다. 리튬채굴 등을 위한 외국인 토지매입도 전면 허용했다.[9] 이러한 급진적 초과착취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분열과 원자화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은 노동자계급의 여러 정체성을 활용한 차별과 갈라치기다. 미국과 유럽에서 이는 주로 이민자 혐오와 추방 정책 등으로 나타난다.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삶의 조건의 후퇴를 이민자 탓으로 돌림으로써, 노동자계급을 분절시키고 백인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획득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때로 극우는 이민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페미니즘의 언어를 차용하는 등 ‘유연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유럽에서 이탈리아 조르자 멜로니 총리는 종교와 가족과 모성의 복원을 얘기하며 임신중지권을 부정하는 철저한 가부장제 옹호자인데, 여성의 권리를 위협하는 이슬람 이민자들을 내쫒아야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 앨리스 바이델 독일 AfD(독일을위한대안. 급부상한 극우파 정당) 대표는 스스로 여성이며 여성과 동거를 하면서도, ‘LGBT사상’을 부정하고 이민자들을 내쫒아야한다고 주장한다. 국민전선 대표 마린 르펜은 무슬림 여성이 쓰는 히잡을 ‘가부장제의 상징’으로 몰아세우고, 이민자들은 ‘여성과 동성애자에 대한 무슬림의 공격’이라며 반이민정책을 펼친다. 이렇듯 페미니즘의 외피를 쓴 민족주의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제3세계 여성과 퀴어 노동자들이다. 이렇듯 때때로 페미니즘의 외피를 두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안티페미니즘, 안티LGBT가 오늘날 극우의 중요한 슬로건이다. 극우가 성장할수록 반페미니즘 경향 또한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가부장제를 강화하고 노동자의 분절된 상태를 공고히할 뿐더러, 특히 젊은 남성들을 극우정치로 인입시키는 문화적 수단이 되고 있다. 여성파업이 특히 강렬하게 벌어졌던 스페인에서도 안티페미니즘과 마초이즘이 극우의 핵심 슬로건이 되었다. 미국에선 보수 기독교의 문화전쟁과 연결된 극우파 운동의 성장과 함께, 트럼프가 임명한 대법관에 의해 (임신중지를 합법화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어졌고, 여러 주에서 임신중지권이 불법화되었다. 트럼프는 2기 행정부 집권 즉시 트랜스젠더의 스포츠 출전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수많은 반(反)트랜스 행정명령에 서명하여 트랜스 여성들을 남성 교도소에 수감하도록 강요하고, 트랜스 여성들의 여성 스포츠 참여를 금지하며, 성정체성 확인 치료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했다. 주 정부들은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성정체성에 맞는 화장실 사용을 금지하거나, 의사가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차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 등 자체적인 반트랜스 법안을 제정하고 있다. 최근 미국 연방 대법원은 테네시주의 미성년자 성정체성 확인 치료 금지법을 합헌으로 판결했다. 현재 의회에 상정된 예산 조정 법안(일명 ‘빅 뷰티풀 법안’)은 메디케어 기금으로 성정체성 확인 수술 및 호르몬 대체 요법(HRT)을 금지할 수 있어, 월 수백 달러의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지 않는 한 27만 5천 명의 미국 트랜스젠더들이 사실상 성전환을 포기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10] 기후위기 부정도 극우들의 중요한 공통점이다. 트럼프가 얼마 전 유엔 연설에서 기후위기를 전면 부정하면서 내세운 수사는 이들의 논리를 잘 보여준다. “탄소중립이니 하는 정책들은 국가경쟁력을 도태시킬 뿐이다. 어차피 다른 나라들은 화석연료를 쓰고 있고, 기후위기는 사기에 불과하고, 우리에겐 자국 경쟁력 강화가 우선이다”. 독일 AfD는 탄소중립 정책이 엘리트의 강요라 선동하며 파리협정 탈퇴를 주장한다. 브라질 보우소나루는 집권 이후 1년 만에 아마존 삼림 벌채를 22% 증가시켰고, 아르헨티나 밀레이는 “기후위기는 사회주의적 거짓말”이라 주장한다. 극우세력이 대안으로 부상하게 된 과정 다음으로 이런 극우세력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부상해온 과정을 살펴보자. 국가마다 편차는 있지만 큰 틀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자계급이 일정한 계급투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일정한 개량을 쟁취했던 강대국들에서는,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가 번갈아 집권을 이어왔다. 그런데 1970년대 위기를 겪은 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 된 뒤에는, 보수주의/자유주의 우파가 집권하든, 개량주의 좌파가 집권하든, 집권세력들은 모두 하나같이 신자유주의의 집행자 역할을 해왔다. 신자유주의를 집행한 정치세력은 노동자민중의 신뢰를 잃으면서 상대편 정당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그런 권력 주고받기를 몇십년 간 반복해오는 동안, 노동자민중은 누가 집권하든 신자유주의의 집행자 역할을 하는 기존의 정치세력 전반에 대한 분노와 환멸을 쌓아왔다. 그러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와 그 대응과정이 결정적으로 노동자민중의 삶을 망가뜨렸고, 그 결과 자본주의를 관리하던 집권세력들은 중대한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개량주의로 대표되는 우파/중도우파/중도좌파 정치세력이 모두 인기를 잃어버리면서, 그 자리를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세력들이 부상했다. 2010년대 이후 이른바 정치적 양극화가 일어난 것이다. 정치적 양극화는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진행됐다. 사실 극우파의 성장보다 더 빨랐던 건 왼쪽으로의 급진화였다. 2010년 프랑스 연금개악 반대파업, 2011년 아랍의 봄, 2011년 스페인 ‘분노한 자들’ 운동, 2011년 미국 월가점령운동, 2012년 그리스 긴축반대 총파업 등 2010년대 초반 1차 계급투쟁의 ‘귀환’을 타고, 기존의 집권블록 왼쪽에서 이른바 ‘신개량주의’ 좌파들이 성장했다. 이는 기존의 개량주의가 개량마저 포기하고 박탈하는 것에 맞서 개량이라는 목표를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독일의 좌파당, 프랑스의 불복프랑스, 스페인의 포데모스, 그리스의 시리자, 영국 노동당의 코빈, 미국 민주당의 샌더스 등이 이 범주에 포괄될 수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연성 좌파정권 물결을 뜻하는 핑크타이드로 나타났다. 그러나 신개량주의는 노동자계급이 아닌 고학력 지식인층이라는 소부르주아 대중을 기반으로 했고, 자본주의 철폐를 추구하지 않는 등 이념적 지향도 매우 소심했다. 특히 신개량주의의 대표격이던 그리스의 시리자가 2015년 집권한 뒤 이른바 트로이카(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11]의 압력에 굴복하여 긴축정책을 전면적으로 실행하면서, 세계적 차원에서 신개량주의의 기세가 결정적으로 꺾였다. 2010년대 계급투쟁의 물결과 함께 부상한 신개량주의 정치노선이 막다른 길을 보여준 것은 계급투쟁의 전진에 제동을 걸었고, 이후에는 정치적 양극화 중 오른쪽으로의 성장이 훨씬 두드러지게 됐다. 2010년대 중반부터 지난 10여 년 세계 정치를 뒤흔든 것은 집권블록의 오른쪽에서 등장한 극우 세력이었다. 2016년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결정적인 신호였다. 세계적으로 극우 세력의 핵심 구호는 보호주의와 이민자 추방이었다.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 기후위기 부정, 부정선거 음모론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말도 안 되는 거짓 대안을 내밀면서도, 많은 나라에서 극우 세력은 삶의 고통에 시달리는 노동자·민중들 속에서 상당한 기반을 구축해 왔고, 희망을 잃어버린 청년들 속에서도 기반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극우의 부상은 해를 거듭할수록 여러 지표에서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2010년대 중후반에 정치의 새로운 ‘돌풍’이라 소개되었던 여러 극우정당들이, 오늘날 제1당이 되며 권력을 쥐었거나, 권력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마린 르펜은 2014년부터 유럽연합 선거에서 세 번 연속 최다 의석을 확보했습니다. 그래서 큰 영향력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거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국민연합은 지역적 존재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국민연합은 영향력 있는 주류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자본가들도 국민연합에 거리를 두었습니다. 국민연합은 2017년 대선 결선투표에서 800만 표를 얻었지만 이어진 총선에서는 8명의 의원만을 당선시켰습니다. 기존 주류 정당에 유리한 프랑스의 비민주적인 선거 시스템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2년 전에 바뀌었습니다. 이제 장벽은 무너졌고 국민연합은 2022년 총선에서 의원 89명을 당선시킨 정당으로 성장했습니다. 올해 6월에 치러진 유럽연합 선거에서 국민연합은 프랑스의 100개 주 가운데 96개 주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지역에 깊이 뿌리내린 정당이 되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의회 해산 후 7월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국민연합이 126명의 의원을 확보했습니다. 공화당 출신 동조세력을 포함할 경우 142명의 의원을 확보했습니다. 국민연합의 부상은 마크롱에 대한 엄청난 증오의 결과입니다. 마크롱은 르펜을 자신의 적, 자신의 맞수로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르펜은 마크롱에 대한 차악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자본가들의 일부가 이제 르펜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12] 아래는 최근 유럽 주요국가들에서 약진하는 극우 정당들의 성장세를 정리한 표이다.[13] <최근 유럽 주요국에서 약진하는 극우 정당들> 대표 극우정당 현황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형제들 (FdI) 22년 9월 총선 1위(26.0%)로 집권: 멜로니(총리) 스웨덴 민주당 (SD) 22년 9월 총선 2위(20.5%) 스페인 목소리 (Vox) 23년 7월 총선 3위(12.4%) 네덜란드 자유당 (PVV) 23년 11월 총선 1위(23.5%): 연정배제 프랑스 국민연합 (RN) 24년 6월 총선 1차 1위(33.2%), 2차 3위(의석) 독일 독일을 위한 대안 (AfD) 25년 2월 총선 2위(20.8%) 영국 개혁당 (Reform UK) 25년 6월 여론조사 1위(29%) ‘민주’정권과의 주고받기를 통해 성장하는 극우세력 그런데 오늘날 극우세력은 ‘민주정권과의 주고받기’를 통해 자신을 강화해간다는 특징이 있다. 이 점을 좀 더 살펴보자. 아래는 최근 극우세력이 집권한 주요 국가들의 정권 변화 흐름이다. <미국의 정권 변화> 중도우파 우파 중도우파 극우파 오바마 (민주당) 2009~2017 트럼프 (공화당) 2017~2021 바이든 (민주당) 2021~2025 트럼프 (공화당) 2025~2029 <아르헨티나의 정권 변화> 중도좌파 중도좌파 우파 중도좌파 극우파 키르치네르(남) (정의당) 2003~2007 키르치네르(여) (정의당) 2007~2015 마크리 (공화당) 2015~2019 페르난데스 (정의당) 2019~2023 밀레이 (자유지상당) 2023~2027 <브라질의 정권 변화> 중도좌파 중도좌파 우파 극우파 중도좌파 룰라 (노동자당) 2003~2010 후세프 (노동자당) 2011~2016 테메르 (민주운동당) 2016~2018 보우소나루 (사회자유당) 2019~2022 룰라 (노동자당) 2023~2026 <한국의 정권 변화> 우파 우파 중도우파 극우파 중도우파 이명박 (한나라당) 2008~2013 박근혜 (새누리당) 2013~2016 문재인 (민주당) 2017~2022 윤석열 (국민의힘) 2022~2024 이재명 (민주당) 2025~2030 이를 보면 분명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른바 중도우파/중도좌파(‘민주’정권)가 집권한 뒤에는 우파가 집권하고, 서로 몇 차례 권력을 주고받는 과정을 거치며 극우파가 집권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큰 틀에서 이렇게 전개된다. ‘민주’정권은 권력을 쥐고서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이에 실망한 민중들이 우파에게 표를 던진다. 그러나 우파도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이고, 민중들은 다시 ‘민주’정권에 희망을 걸며 표를 던진다. 그러나 다시 ‘민주’정권에 실망한 민중들은 그 다음에는 더 화끈한 해결책을 약속하는 극우파에게 표를 던진다.[14] 다시 말하면, 인간의 얼굴을 앞세우지만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전혀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가중시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의 속성이 극우정권을 성장시키는 핵심 고리다. 한국의 사례에서 우리는 이 메커니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우경화된 정치지형으로 인해 중도좌파가 당선된 적은 없었지만, 87년 제한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쟁취한 이후, 우파(국민의 힘)와 중도우파(민주당)가 번갈아가며 권력을 주고받았다. 노태우, 김영상 정부는 주로 노동자들을 강경하게 탄압함으로서 노동개악이나 민영화 등의 조치를 통과시키려다가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그 시도가 좌절됐다. 반면, 김대중과 노무현은 노동자와의 ‘노사정 협의’와 같은 방식을 사용해가며 더 효과적으로 위기의 비용을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해왔다. 김대중 정부 때 정리해고제와 파견법 도입, 노무현 정부 때 비정규직의 제도화가 그 대표적인 성과다. 이른바 ‘민주정부’ 10년의 결과인 신자유주의 전면화와 비정규직 양산에 환멸을 느낀 민중들은, 경제성장을 약속하는 이명박 정부에게 표를 던진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시기 실상 재벌들을 위한 특혜와 민영화, 민주주의 탄압과 노동개악, 부정부패 등을 경험한 민중들은 박근혜 정부를 타도하고 다시 문재인 정부를 당선시켰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사상 최대의 부동산 폭등, 조국사태로 드러난 위선,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악과 특별연장근로 무제한 허용 등으로 다시 한 번 민중의 환멸과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윤석열 당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여기서, 극우정권과 ‘민주’정권이 실제 집행하는 정책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점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실 극우 정권이든, 그와 정권을 주고받는 중도좌파-중도우파-우파의 ‘민주’ 정권이든, 그들이 시행하는 정책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화와 관련해서는 일정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신자유주의와 긴축의 결합이 결국 그들 모두의 핵심 정책이다. 당연히 노동자·민중의 고통은 해결될 수 없고, 따라서 강한 환멸이 뒤따른다. 상대적으로 극우 정권에게는 파시즘 가능성에 대한 반발이 집중된다면, ‘민주’ 정권에게는 사회경제적 박탈에 대한 분노가 집중된다. 과거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서 중도좌파-중도우파와 우파가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며 정권을 주고받던 것과 매우 비슷하게 이제 중도좌파-중도우파-우파와 극우가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며 정권을 주고받는다.[15] 실상 트럼프 1기 이후 바이든의 집권도 ‘극우와 민주정권의 주고받기’를 한차례 더 진행하며 트럼프에게 더 큰 힘을 실어준 과정이었다. 바이든은 대중국 견제에 있어 트럼프의 제국주의적 정책기조와 다를바 없었고, 이민자와 유색인종을 향한 경찰폭력과 단속, 철도파업 금지령 발동 등 국내적으로도 위기의 비용을 노동자민중에게 떠넘긴다는 점에서 동일했다. 무엇보다 2023년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이 본격화되었을 때, 바이든 정부는 학살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제국주의 패권국으로서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바이든은 미국 노동자계급의 삶을 전혀 개선하지 못했고, 민주당의 ‘진보적’ 외피는 ‘학살자 조’라는 정당한 비난과 함께 끝장났다. 바이든의 이민정책, 기후정책, 트랜스젠더 권리를 둘러싼 몇가지 예를 살펴보자. 국토안보부는 미국-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기 위해 26개의 환경 보호법을 무력화했다. 트럼프 시대의 가장 악명 높고 상징적인 악행이 바이든 정부 아래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바이든이 무시한 법들 중 일부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행정부가 어떤 환경 보호와 인권을 희생하려 하는지 매우 명백히 보여준다. 여기에는 청정 공기법, 청정 음용수법, 아메리카 원주민 종교 자유법이 포함된다. “청정 공기”, “청정 음용수”, “종교 자유”는 바이든이 트럼프의 국경 장벽 건설을 계속하기 위해 무시한 보호 조치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바이든은 또한 국경에 도착한 베네수엘라인들을 대상으로 한 직접 추방 비행편을 재개하고 있으며, 동시에 정권 교체 노력의 일환으로 트럼프가 베네수엘라에 부과한 제재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이러한 공격적 정책은 양당 모두의 지지를 받았으며, 알렉산드라 오카시오 코르테즈 같은 진보적 민주당원들조차도 지지했다. ... 사실 이건 놀랄 일도 아니다. 아이들을 우리에 가두고 가족을 갈라놓는 것부터, 망명권 금지 조치를 유지하고 확대하는 것까지, 바이든은 꾸준히 트럼프의 이민 정책에 동의해왔다. 그는 소셜미디어에서 국경 순찰대 예산 증액을 지지한다고 자랑했으며, 미국-멕시코 국경 횡단 사상 최다 사망자가 발생한 해는 바로 그의 행정부 아래인 지난해였다.[16] 바이든 행정부는 현재 트럼프 행정부가 같은 시점에 발급한 것보다 더 많은 가스·석유 시추 허가를 승인했다. 취임 2년 차 기준 수백 건을 넘어선 수치다. 최근 바이든이 화석 연료 산업을 위해 취한 두 가지 조치—알래스카의 윌로우 프로젝트 승인 및 멕시코만 시추권 경매—는 대통령이 기후 공약을 결코 이행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시켜준다.[17] 4월 6일 바이든 행정부는 트랜스 청소년의 스포츠 참여와 관련된 타이틀 IX 규정 변경안을 제안했다. 이 규정 변경안은 공공 자금을 받는 모든 학교나 대학이 “전면 금지” — 모든 트랜스 청소년의 모든 스포츠 참여를 금지하는 조치 — 를 시행하는 것을 금지하지만, 학교가 종목별로 트랜스젠더 학생의 스포츠 활동을 금지하는 것은 허용할 것이다. 민주당이 이를 트랜스젠더 권리 승리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이는 소위 ‘진보적’ 정당이 트랜스젠더 친화적으로 보이려는 움직임을 제안하면서도 트랜스젠더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또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 트랜스젠더, 특히 트랜스젠더 아동에 대한 전례 없는 공격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민주당은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트랜스젠더 권리 보호를 위한 확고한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바이든과 민주당은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다른 언론 매체들과 함께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모호한 발언을 하는 한편, 반(反)트랜스 발언과 입법이 무분별하게 통과되도록 방치해왔다. 이번 개정안 제안은 또 하나의 사례다: 바이든과 민주당은 반트랜스 스포츠 입법에 대응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주장하며 좌파 성향 유권자들의 표를 모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어떤 실질적인 변화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선거 시즌이 코앞으로 다가온 만큼, 대통령은 공화당에 비해 포용성과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관심이 크다. 동시에 소위 ‘젠더 회의론자’ 성향의 중도층이나 민주당 유권자들의 표를 잃지 않도록, 이러한 반트랜스 공격에 대해 너무 강한 반대 입장을 취하지 않으려 한다. 트랜스젠더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면서도 반(反) 트랜스젠더 행동을 취하는 이 섬세한 균형은 특히 스포츠 분야에서 바이든에게 중요하다. 전국이 스포츠 경기에 열광하는 가운데, 스포츠에서의 트랜스젠더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중도 또는 우파 성향 유권자들을 소외시키는 것은 바이든의 득표율에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18] 지난해 12월 트랜스젠더 문제에 대한 여론이 우경화되자 조 바이든은 트랜스젠더 운동선수 보호 계획을 폐기하고 군인 자녀의 성정체성 확인 치료를 박탈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선거 운동 중 카말라 해리스는 트랜스젠더 권리 옹호 기회를 여러 차례 거절하며 단순히 “우리는 법을 따라야 한다”고 답변했다.[19] 이번엔 독일의 사례를 보자. AfD가 이번 총선에서 두 개의 주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이들은 자랑스럽게 “AfD는 효과가 있다”는 슬로건을 치켜들었다. 이는 ‘민주’정권인 기독교민주당, 사회민주당 등이AfD에서 내세우는 반이민, 재군사화 정책 등과 별반 차이가 없는 정책을 집행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구호다. 즉 오른쪽에서 AfD가 강력하게 ‘옳은’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중도세력들이 그 쪽으로 끌려오고 있다는 점에서 ‘AfD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민주’세력은 소심하고 부끄럽게 집행하는 정책들을, 극우세력은 대담하고 당당하게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선거 당일 밤 공영 TV 토론회에서 AfD의 베른트 바우만(Bernd Baumann) 의회 사무총장은 “AfD wirkt!”라고 선언했다. 이는 “AfD가 효과적이다”는 뜻으로, “BSW[20]와 CDU[21]가 이민 문제에 관한 우리의 핵심 요구를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사실이다: 모든 정당이 AfD의 정책을 받아들였다. 보수 정당인 기민당과 “좌파 보수” 성향의 BSW뿐만 아니라, 연방 정부 역시 추방을 더 많이 요구하며 AfD와 목소리를 맞추고 있다. 스스로를 “진보 연정”이라 칭하는 SPD[22], 녹색당, 자유민주당(FDP)[23]으로 구성된 연방 정부 역시 추방을 원한다. ... 이제 모든 정당이 망명법 개정과 심지어 헌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졸링겐 공격[24]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식에서 독일 연방 대통령은 이민 감소가 “앞으로 몇 년간 최우선 과제여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다른 솅겐 국가[25](즉, 거의 모든 국가)를 통해 입국한 망명 신청자에 대한 모든 지원금 지급을 중단하고 “침대-빵-비누”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이미 이 조치가 독일 헌법 제1조(인간의 존엄성 불가침)를 위반한다고 판결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헌법적·인도적 원칙들은 과시적 잔혹성에 대한 요구 앞에 희생되고 있다. CDU의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출신 모든 망명 신청자를 거부하겠다고 밝혔고, CSU[26]의 마르쿠스 쇠더는 헌법에서 망명권을 완전히 삭제하겠다고 주장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범죄 외국인” 추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독일 정치의 변방에 있는 네오나치 정당 NPD에 국한되었다. 오늘날에는 녹색당조차 추방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 수십억 유로를 추가로 지출하려 한다. “민주 정당”에 투표하고 “극단주의”에 반대하라는 끝없는 호소는 효과가 없었다.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 칭하는 모든 세력이 AfD의 극단적 제안들을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른 정당들이 AfD의 인종차별적 제안들을 모두 채택했다면, AfD가 대체 얼마나 나쁠 수 있겠는가? 많은 유권자들이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27] 그런데 극우정권과 ‘민주’정권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주고받는 이러한 현상은, 다른 한편으로 1930년대 파시즘이 완연히 성장했을 때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 그러나 이를 향해 성장하고 있는 오늘날 극우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오늘날의 극우 세력은 독일 나치당 같은 고전적인 파시즘 세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위기가 극심해진 결과물이며, 몰락하는 대중의 광적인 지지를 바탕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런데 오늘날 극우 세력이 위기와 고통의 주범이라고 지목하는 대상은 외국, 이민자, 자유무역, 세계화, 국제기구, 좌파, 주류 언론, 기성 정치인 등 상당히 혼란스럽다. 나라마다 편차도 크다. 노동자운동을 핵심적으로 겨냥했던 고전적인 파시즘과 크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노동자운동이 상당히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점의 반영이기도 하다. 또한 오늘날의 극우 세력은 고전적인 파시즘 세력과 달리 무장 돌격대를 체계적으로 구축해 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위기 전개가 국가의 총력 개입 때문에 1930년대 대공황과 달리 대불황이라는 슬로우모션의 형태를 띠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자본주의 위기에 따른 노동자·민중의 고통이 극심하지만 일거에 파산하는 대신 장기화된 불안정에 시달리는 양상을 띠는 것이다. 갈 곳 없는 퇴역군인들이 별로 없다는 점도 중요한 변수다. 극우 세력이 아직까지는 노동자운동을 핵심적으로 겨냥하지 않는 점과도 연결돼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의 극우 세력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 부정하고 위협하는 지점까지는 나아가지만, 정권을 잡아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끝장내지 못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선거로 집권했다가 그 선거로 정권을 잃고 다시 그 선거로 정권을 되찾는다. 그런데 이와 같은 쳇바퀴는 극우 세력에게 걸맞지 않다. 극우 세력은 ‘화끈한 해결’을 대중에게 약속했고, 실제로도 뭐가 됐든 화끈하게 저질러보려고 한다. 그러나 고전적인 파시즘 세력에게 ‘화끈한 해결’을 가능하게 했던 무장 돌격대가 오늘날의 극우 세력에게는 없다. 여기서 친위쿠데타를 통한 군사파시즘 도입이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시도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위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밑자락으로 부정선거 음모론을 활용하면서 말이다. 2021년 1월 미국의 의사당 폭동을 사주할 때 트럼프는 군부를 동원하지 못했다. 하지만 2023년 1월 브라질에서의 폭동은 쿠데타 요구 시위와 노골적으로 결합됐으며, 실제로 보우소나루-국방부장관-해군총사령관의 지휘 아래 쿠데타를 단행하려 했으나 육군총사령관의 거부로 실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25년 미국에서는 트럼프의 친위쿠데타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으며, 특히 6월 로스엔젤레스의 이민자단속 항의시위에 주방위군과 해병대가 투입됐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친위쿠데타 자락 깔기로 인식했다. 2024년 한국에서 발생한 12·3 친위쿠데타도 이러한 세계적 맥락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2023년 브라질의 친위쿠데타도 2024년 한국의 친위쿠데타도 실패했다. 트럼프가 친위쿠데타에 나설 경우 성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2025년 6월 로스엔젤레스 군대 투입 직후 미국에서 500만 명이 반트럼프 시위에 나설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세계적으로 극우 세력이 파시즘으로 진화할 방안을 찾기 위해 무척 애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친위쿠데타가 여의치 않으면, 극우 세력은 무장 돌격대를 부활시킬 방법이라도 찾아내려 할 수 있다.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권력 주고받기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민주’ 정권이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강화하는 만큼 극우 세력을 더욱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파시즘으로 진화하려는 극우 세력의 시도가 점점 더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28] 또한 한 곳에서 극우의 성공은 다른 곳의 극우를 자극한다. 예컨대 이스라엘 극우 네타냐후의 집단학살은 모로코 군주, 인도 모디 총리, 프랑스 군부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명백한 사례 중 하나는 모로코 군주국으로, 이스라엘이 서안 지구를 언급하는 방식과 거의 동일하게 서사하라를 논한다. 학살을 자행하는 이스라엘 국방군(IDF)과의 공동 군사 훈련을 조직하는 것 외에도, 텔아비브와 라바트 간의 경제적 유대, 특히 무기 계약이 번창하고 있다. 10월 7일 직전, 이스라엘은 사하라위 민족의 등 뒤에서 라바트와 스페인 제국주의 간 합의에 따라 1975년 병합된 전 식민지에 대한 모로코의 주권을 인정했다. 시온주의 정권의 급진화는 이로 인해 모로코 정권의 급진화를 더욱 부추겼으며, 왕정은 서사하라를 산업 및 에너지 허브로 만들려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전례 없는 지원을 계속 누리고 있다. 왕정은 따라서 사하라 난민들을 알제리나 모리타니로 되돌려보내는 방식으로 장벽 너머 영토의 20%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기 위해 잔혹한 작전을 벌일 유혹에 빠질 수 있다. ... “이스라엘의 방법”을 찬양하는 또 다른 국가는 물론 모디의 인도다. 시온주의는 힌두 우월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V.D. 사바르카르와 M.S. 골왈카르 같은 초기 이론가들의 사상과도 연관된다. 이들은 시온주의 식민화를 찬양하며 동남아시아 전역을 통치하에 통합할 “아칸드 바라트(분할되지 않은 인도)”를 구상했다. 이 힌두식 '대이스라엘'의 지지자인 모디는 식민 국가의 방식을 꾸준히 적용해 카슈미르 주민들을 탄압해 왔으며, 더 넓게는 국내 무슬림 소수민족을 억압해 왔다. 베린트 시스템즈 같은 대량 감시 전문 이스라엘 기업들과의 협력부터 2019년 8월 카슈미르 자치권 중단에 이르기까지, 인도는 체계적으로 “이스라엘 모델”을 식민지화된 영토에 적용하고 있다. ... 프랑스에서 이스라엘과의 연대는 이슬람 혐오와 팔레스타인 지지자 탄압을 결합하는 것을 넘어선다. 이는 모디의 인도와 또 다른 공통점이다. 이 연대는 군대에도 스며들어, 특히 카낙 지역 청년들이 정착민 식민주의에 반기를 든 뉴칼레도니아 식민지에서 군부 내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 초군국주의 잡지 르 그랑 콘티넨에 익명으로 기고한 한 프랑스 군 장교는 군사화 경쟁에 돌입한 프랑스 군이 이스라엘 군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훨씬 열악한 장비의 군대들도 현장에서 가시적 성과를 내고 있다. 상대적으로 작은 국가들(핀란드, 이스라엘)은 제한된 국방 예산으로 많은 유럽 군대보다 더 큰 전시 군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성과를 가능케 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전시 시 대규모 예비군 동원[29]과 군대 및 민간 사회 전반 간의 긴밀한 협력이다.” 프랑스 식민지 문제에 집착하는 한 군 장교에게, 이스라엘 내 만연한 인종주의로 인해 열 배로 증폭된 '현장에서의 가시적 효과'를 가진 이 학살적 군대의 위력은 의심할 여지없이 인상적이다.[30] 얼마 전 보우소나루는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대법원에서 27년 형을 받았는데, 트럼프는 즉시 이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며 보우소나루의 편을 들었다. 영국에서 얼마 전 벌어진 대규모 극우 집회에는 각국의 극우인사들이 참여했는데, 이처럼 미국과 서방의 극우파들은 일국적 단결을 넘어서 자신들의 인터내셔널을 구축하고 있다. 3. 제국주의 패권대결, 전쟁과 학살 지금까지 오늘날 자본주의 위기의 특징인 극우와 파시즘의 성장에 대해 살펴보았다. 자본주의 위기가 일국적 관계에서 드러나는 표현이 극우와 파시즘의 성장이라면, 국제관계에서는 제국주의 패권대결과 약탈, 전쟁과 학살이란 형태로 표현된다. 위기 앞에 놓인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라, 타국의 자본가들에게 손실을 떠넘기기 위한 시도에도 골몰한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대 제국주의 국가의 패권대결 아래, 지역적 패권국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라 각축전을 벌이는 국제질서의 재편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충돌하는 두 제국주의 국가: 미중 관계의 재편과정 먼저 오늘날 지정학적 경쟁의 핵심인 미중의 관계가 지난 40년 간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간략히 살펴보자. 신자유주의와 함께 미국의 헤게모니가 아직 굳건하던 1980~2000년대에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미중 파트너십은 냉전시기 소련을 고립시키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 결정 아래 진행됐고, 미국과 중국 모두 이 관계에서 이득을 보았다. ‘차이메리카’라는 용어는 중국의 생산과 미국의 소비가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구조로서 움직이던 당시 세계 자본주의 지형을 표현한다. 그러나 2000년대에 중국이 광폭성장을 하고, 2008년 금융위기로 미국이 휘청하면서 지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2010년대를 거치며 중국은 미국을 위협하는 명실상부한 세계 제2의 제국주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이와 함께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시도 또한 본격화했다. 2009년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고 2011년 “Pivot to Asia(아시아중심전략)”를 천명한 것을 시작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추진, 미 군사전력의 아시아 집중 및 동맹 강화 등 중국에 대한 견제를 시작했다. 2017년 트럼프 집권 이후에는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훨씬 더 노골적이고 강경한 대중국 정책을 펼쳐왔다. 2018년에는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 보조금, 무역 불균형을 문제 삼아 고율 관세를 부과하며 ‘무역분쟁’을 시작했다. 이어 화웨이, ZTE 등 중국의 5G와 통신인프라 기업을 미국 시장에서 배제하고, 중국 기업에 대한 반도체 장비와 소프트웨어 수출을 통제하고, 데이터안보 위협을 이유로 틱톡와 위챗 사용을 제한하는 등 ‘기술전쟁’을 벌였다. 경제적 견제와 함께 정치군사적 견제도 본격화했다. 오바마 시절에는 중국을 “파트너이자 경쟁자”로 호명했다면, 트럼프는 “전략적 경쟁자”라는 표현을 쓰며 오바마의 애매한 기조와 단절했다. 또 기존에 사용하던 ‘아시아-태평양(Asia-pacific)’이란 개념 대신 ‘인도-태평양(Indo-pacific)’이란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본, 인도, 호주와의 쿼드(Quads) 재활성화와 함께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담긴 표현이다. 그런데 중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달성한다는 목표는 바이든이 트럼프와 핵심적으로 공유하던 목표였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가 해오던 반도체와 첨단기술에 대한 통제 정책을 이어갔고, 미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고 10년 동안 중국투자를 포기해야 보조금을 지급하는 반도체지원법, 전기차-배터리 생산시설을 북미지역으로 이전해야 보조금을 지급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실행했다. 트럼프 1기 때 부과한 관세도 대부분 그대로 유지했다. 정치군사적으로도 쿼드 강화, (미국, 영국, 호주의 안보협력기구인) AUKUS 출범, (2023년 캠프 데이비드협정 등을 통한) 미일한 동맹 강화, 나토 강화 등 미국의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그 목표가 중국의 성장에 대한 대응임을 분명히 천명했다. 중국 또한 지난 십수년 간, 더욱 노골적으로 미국에 대한 도전의지를 드러내왔다. 중국의 핵심 슬로건 변화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1980~90년대 ‘도광양회’(“빛을 감추고 힘을 기른다”, 자신의 힘을 드러내지 말고 조용히 국력을 축적하라는 전략)로부터 2000년대 “화평굴기(중국의 부상은 타국을 위협하지 않고 평화롭게 상호이익을 중시하며 성장한다는 뜻. 중국의 2001년 WTO 가입과 맞물리는 슬로건)”와 “조화세계”(내부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조화로운 세계를 강조. 다자주의와 유엔 중심 질서에 대한 강조)를 지나, 2013년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몽”(과거 세계의 중심 역할을 했던 중국의 영광을 21세기에 되살리겠다는 것)과 “중국특색대국외교”(중국이 단지 ‘떠오르는 나라’가 아니라, 이제 ‘대국’으로서의 역할을 적극적을 수행하겠다는 것) “신형대국관계”(대국과 대국 사이의 새로운 형태의 관계, 즉 미국에게 협력적이면서도 대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와 같은 슬로건으로, 그리고 시진핑 2기 이후 이제는 일대일로 정책과 함께 “인류운명공동체”(미국의 우선주의 정책들과 차별화하며, 국제사회에서 헤게모니적 리더십을 발휘하겠다는 뜻)와 같은 슬로건을 사용하는 등 점차 노골적으로 미국의 패권을 넘보는 위치로 성장해왔다. 특히 그 과정에서 중국은 희토류 공급망 확보와 전기차, 재생에너지 등 미래 산업에 대한 공격적 투자로 미국에 대한 일정한 산업적 우위를 확보해왔다. 특히 중국은 십수년 간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대규모 투자를 통해 핵심광물에 대한 통제권을 늘려왔고, 오늘날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 생산량의 약 60%를 차지하고, 천연자원의 가공산업에서는 거의 90%의 점유율을 차지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에 관세를 부과한 지 며칠 후 중국 정부가 흑연과 텅스텐을 포함한 20개 이상의 핵심 광물에 대한 수출 규제로 반격한 것은, 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중국의 천연자원에 대한 우위가 얼마나 중요한 위협인지를 잘 보여준다. 아직 중국의 국방예산은 미국의 4분의 1 규모이지만, 중국의 해군력, 그리고 해군을 보강하는 조선 능력은 미국을 넘어섰다. 중국은 매년 7%이상 국방예산을 빠른 속도로 증액하고 있다. 미국도 이에 대응해 조선업 재건에 나서고 있는데, 특히 한국과의 관세협상에서 부각된 MASGA(“미국의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구호로 드러나듯, 한국과 일본을 조선업 재건과정의 주요한 파트너로 삼고 있다.[31]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를 열어젖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지금까지 미중 간 관계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런데 미중 간 제국주의 패권대결은 단지 두 제국주의 강대국만의 대결이 아니다. 제국주의 패권대결은 세계를 진영으로 가르고, 세계 곳곳에서 이와 연결된 충돌을 심화시키고 대리전을 발생시키고 있다. 이를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우선 러우전쟁은 제국주의적 팽창 야욕을 가진 서방과 러시아가 부딪히며 발생한 반동적 전쟁이다. 이 반동적인 대리전은 그 자체가 지난 시기 제국주의 팽창의 결과이다. 한 측면에서, 러시아의 반동적인 군사적 대응을 만든 건 NATO의 동진정책이었다. 1990년에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통일 독일에 나토군을 주둔시키며 “NATO는 동쪽으로 1인치도 더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공문구에 불과했고, NATO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회원구을 받으며 동진을 이어왔다. 1999년 폴란드, 헝가리, 체코가 NATO에 가입했고,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가 2002년 공식 가입 초청을 받았으며 2년 후 가입 절차를 완료했다.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는 2009년 가입했으며, 마케도니아는 2020년에 가입했다. 러시아와의 거대한 물리적 경계선인 우크라이나는 2008년 NATO 가입 과정인 Membership Action Plan(MAP)을 신청했으며, 유로마이단 이후인 2014년 가입 의사를 공식 목표화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연설에서도 제임스 베이커의 말을 인용하며, NATO의 지속적인 동진 위협을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했다. 실제로 NATO는 소련 해체 이후에도 동진을 거듭했고, 러시아를 상대로 한 군사적 위협을 증대시켜왔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정당화될 순 없으나, NATO의 지속적인 동진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푸틴의 반동적 반응을 낳은 것은 분명하다. 나토는 회원국을 잠재적 침략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방어적’ 동맹이라는 수사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그간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인도적 지원’과 ‘민간인 보호’등을 명목으로 적극적인 ‘공격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9년 코소보 전쟁, 2001~202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2011년 리비아 내전 개입이다. 이는 결국 미국과 유럽이 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적 팽창의 도구로서 나토를 활용했음을 드러낸다. 즉 신자유주의 시기 동안 이어진 미국의 제국주의 전략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일으킨 한 축이다. 그런데 러우전쟁을 발발시킨 다른 한 측면은 러시아의 팽창 야욕이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대러시아 제국 시기 오랫동안 러시아제정에 의해 억압받아온 민족억압의 역사를 가진 지역이다. 그래서 러시아혁명을 통해 제정러시아를 타도하고 노동자국가를 수립한 뒤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의 민족자결권을 철저히 옹호했다. 그러나 스탈린 반혁명 과정과 그 이후 국가자본주의 소련에 의해, 우크라이나는 민족문화와 언어의 박탈, 수탈로 인한 대기근, 정치적 숙청 등 체계적 민족억압을 경험했다. 푸틴은 이러한 역사를 잇는 대러시아 민족주의의 계승자로, 우크라이나를 자결권을 가진 국가가 아니라 ‘수복해야할 대러시아의 영토’로 규정하고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러우전쟁은 이전 시기 제국주의적 패권대결의 결과인 동시에, 제국주의 진영의 형성을 훨씬 더 가속화하는 촉매제로 기능했다. 러우전쟁의 결과의 한 측면은 나토의 부활과 강화였다. 트럼프 1기를 거치며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미국과 유럽의 전통적 동맹 관계가 느슨해졌고, 이에 따라 나토의 역할 또한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러나 러우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 그리고 러시아와 연결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바이든 행정부의 동맹강화 전략에 따라 나토는 다시 중요한 군사기구로 부활했다. 기존 유럽 동맹국과의 관계가 중심이던 나토에 한국, 일본, 호주 등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을 포함하여 중국을 포위한다는 구상이 노골적으로 전개됐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선 뒤 미국 우선주의 기조의 강화로 미국-서방 진영 동맹 내부의 갈등 또한 심화되고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트럼프가 동맹국들에게 나토방위비 분담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면서 각국의 재군사화가 더욱 촉진되고 있다. 얼마 전 나토의 GDP 5%로의 방위비 인상 결정은 이를 대표적으로 표현한다. 트럼프는 이제 나토에 이어 아시아 동맹국들에게도 GDP의 5%까지 국방비를 인상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한때 유명무실해질 것처럼 보였던 나토는 다시 미국과 서방진영을 대표하는 군사기구로서 작동하며, 각국의 군사화를 추동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러우전쟁 결과의 다른 한 측면은 (북한이 하위파트너로 포괄되는 과정을 포함한) 러시아와 중국 사이 확고한 동맹의 형성이다. 본래 러시아와 중국은 이른바 같은 ‘공산권’ 국가이지만, 두 국가의 관계가 마냥 굳건하지는 않았다. 1949년 중국혁명 이전에 스탈린의 소련은 마오쩌둥의 농민주도 혁명론을 무시했고, 오히려 국민당 정부와 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왔기에, 그 때부터 마오쩌둥 주도의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했다. 이 긴장은 중국공산당이 1949년 혁명으로 집권한 뒤, 1960년대 중소분쟁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32] 이후 1970년대에 들어서 중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먼저 손을 잡는 선택을 하게 된다. 중국이 미국과 손을 잡았는데, 소련과 관계가 좋을 수는 없었다. 그 뒤로 중소는 한동안 냉랭한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다 1985년 고르바초프 집권 후 소련이 개혁개방 노선을 취하면서, 1989년 고르바초프의 베이징 방문을 계기로 중소관계를 정상화하게 된다. 이후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와 중국은 ‘건설적 파트너십’ 관계를 이어갔고, 2000년대에는 2001년 ‘중러 선린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고 상하이협력기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협력을 점차 심화해갔다. 그러다 2010년 들어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서방제재를 받기 시작한 러시아가 중국과 경제, 외교적으로 더욱 밀착했고, 대규모 에너지 계약(‘시베리아의 힘 가스관’)과 군사협력 확대를 진행했다. 그리고 2022년 2월 베이징 올림픽 개막 직전에 시진핑과 푸틴은 공동성명을 내어 “중러 관계는 한계가 없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공동성명 직후 벌어진 러우전쟁은 중러관계를 훨씬 더 밀착시켰다. “3일 만에 수도를 점령한다”던 러시아의 예측과 달리 전쟁은 장기화된 소모전이 되었다. 서방의 강력한 경제제재를 견디고 러시아가 지금까지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중국의 지원으로부터 나왔다. 경제제재로 서방과의 무역로가 막힌 대신, 중국이 러시아의 가스와 원유를 사주고, 반도체칩 등 군사행동에 필요한 장비와 물자를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우전쟁 발발 이전에도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는 점점 밀착해가고 있었지만,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는 중국의 지원 없이는 독자 생존이 어려워졌고,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를 질적으로 도약시켰다. 한편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카드로 오랫동안 핵개발을 추진해왔지만, 2019년 트럼프와의 ‘하노이 노딜’을 계기로,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편입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는 전망이 결정적으로 불투명해지게 되었다. 그 뒤 북한이 찾은 생존전략은 중러동맹의 하위파트너가 되는 것이었다. 러우전쟁을 계기로 러시아로부터 각종 군사무기와 병력 등 ‘쓸모’를 인정받은 북한은 이 반동적 전쟁에 깊이 개입하며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고 있다. 얼마전 5월 러시아의 전승절에 푸틴과 시진핑은 굳건한 동맹관계를 과시했고, 9월에 열린 중국 전승절에는 김정은과 푸틴이 각각 시진핑의 좌우에서 열병식을 관람하며, 북중러 삼각동맹이 굳건히 형성됐음을 과시했다. 이것이 러우전쟁이 가져온 사태의 다른 측면이다. 이 두 가지 사태전개가 서로 대립하며,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보다 훨씬 더 격화된, 제국주의 패권대결의 양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한 축에서는 미국이 서방 및 아시아 동맹국과 동맹을 강화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선 중국이 러시아 및 북한 등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진영의 재편은 이들이 맞닿는 동아시아 지역을 위험한 화약고로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는 미중 간 패권대결 격화에 따른 열전의 중심지가 될 가능성이 높고, 그 핵심적인 격전지가 한반도가 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제국주의 진영 간 충돌 러우전쟁 만이 아니다. 미국서방진영과 중국러시아진영 사이의 충돌이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력 급증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영향력 퇴조와 맞물리며 아프리카 대륙에서 제국주의 세력관계가 재편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재작년 니제르에서는 군부 쿠데타로 친러정권이 수립됐는데, 이를 두고 서방제국주의를 대변하는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와 친러 군부세력이 장악한 말리와 부르키나파소가 대립하면서 군사적 충돌로 나아갈 뻔 했다. 올해 6월에는 이스라엘과 이란이 ‘12일 전쟁’을 진행했는데, 결국 트럼프의 휴전 압박 제스쳐에 일단 전쟁을 중단했지만, 이러한 사건들이 언제 우발적인 계기를 통해 또 다른 전쟁으로 나아갈지 모른다. 만약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이 터진다면, 이는 중동의 지역패권을 둘러싼 반동적 전쟁이자, 미중 간 제국주의 패권대결을 등에 업은 또 하나의 대리전이 될 것이다. 트럼프가 최근 ‘마약과의 전쟁’을 핑계로 라틴아메리카에 대규모 군사력을 배치하며 위협하는 것도 미중대결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은 최근 십여년 간 라틴아메리카에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고, 표면 상의 이유는 ‘마약과의 전쟁’이지만, 실제로는 베네수엘라나 브라질 등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정권에는 여차하면 군대를 보낼 수 있다는 위협을 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제국주의가 벌이는 가장 끔찍한 만행 제국주의 국가들이 서로에게 세계 곳곳에서 충돌하는 것이 제국주의 국가 간 모순이 격화된 표현이라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집단학살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국가 간 모순이 격화된 표현이다. 2020년 집권한 네타냐후 정부는 서안지구를 합병하고 이스라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매우 잔인한 방법을 채택하는 극우세력이다. 이들은 2020년부터 서안지구에서 학살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제닌 난민캠프를 공격하고, 알-아크사 모스크를 여러차례 공격했다. 2020년부터 이런 야만적인 행위가 극우 정부에 의해 매우 난폭하게 확대됐다. 물론 이스라엘의 식민점령은 1948년부터 77년 간 이어져오고 있고, 이스라엘 극우정부든 ‘좌파’정부든 변함없이 식민정책을 유지해왔다. 즉 이스라엘이란 식민국가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다. 그러나 2020년 네타냐후 극우정부의 출현으로 이스라엘은 더욱 ‘과격한’ 점령정책으로 나아갔다. 2023년 10월 7일의 공격은 2020년부터 이어진 이 모든 잔인한 폭력에 대한 대응이었다. 오늘날 가자에서는 매일같이 파괴와 폭격, 인위적 기근으로 인한 살해 소식이 실시간으로 이어진다. 네타냐후 정부는 가자학살을 멈출 계획이 없으며, 팔레스타인인의 절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네타냐후 정부는 서안지구를 완전히 병합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으며, 전례없는 속도로 정착촌을 확대하는 중이다. 이스라엘이 가자와 서안지구를 병합하고 ‘그레이터 이스라엘’을 향한 제국주의 팽창을 할 수 있는 것은 미국과 서방제국주의의 열렬한 지원 덕분이다. 특히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막대한 군사적 지원과 더불어, 집권세력에 관계없이 이스라엘의 자위권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보냄으로써 그들의 학살을 정당화해주고 있다. 트럼프 2기, 제국의 쇠퇴를 드러내는 강도적 패권행위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선 뒤, 트럼프는 강력한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동맹국들을 향해서도 깡패같은 약탈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것이 극적으로 드러난 하나의 사건은 올해 2월 트럼프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와의 회담이다. 이 회담에서 트럼프는 노골적으로 젤렌스키에게 모욕을 주었다. 출입기자와 부통령 J.D.밴스는 젤렌스키에게 정장을 입고 오지 않았다느니, 미국에 대해 충분히 고마워하지 않았다느니 무례한 말을 쏟아냈고, 트럼프는 젤렌스키에게 “너는 (협상할) 카드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며 미국에 대한 굴종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젤렌스키는 이날 화난 표정으로 광물협정에 서명하지 않고 회담장을 빠져나갔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5월 결국 광물협정을 통해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50%씩 출자해 ‘미국, 우크라이나 투자 재건펀드’를 만들어, 우크라이나의 광물과 에너지 자원 투자에 관여할 수 있게 됐다. 10년 간 광물산업 투자를 통해 얻은 순이익은 반반씩 나누되, 우크라이나의 재건을 위해 쓰기로 한다는 단서조항이 있지만, 실제 기반시설을 확충하고 광물산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려면 10년 이상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광물협정에 따라 앞으로 많은 이익을 가져갈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래에 미국의 미래 군사지원을 펀드 기여금으로 간주하자는 내용도 담겼다. 이어 지난 몇 달간 트럼프는 관세협정에서 이른바 동맹국들에게 무리한 조건을 강요하고 있다. 일본과의 협정에서 트럼프는 관세를 15%로 낮추는 대신, 5500억 달러의 대미투자를 강요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일본은 2029년까지 미국 측에서 일방적으로 추천하는 프로젝트에 무조건 투자해야한다. 일본이 원금을 회수하는 시점까진 미국과 일본이 50%씩 이익을 배분하고, 그 이후에는 미국이 90%를 갖는다.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일본이 그 비용을 치러야하지만,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더라도 돈을 댄 일본의 이익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현재 한국에도 일본과 동일한 투자조건으로 3500억 달러의 투자를 강요하는 중이다. 트럼프의 강도적 패권행위는 미국 제국주의의 쇠퇴를 반영한다. 위기에 빠진 군주는 폭군으로 변한다. 동맹국들을 향해 엄혹한 조건을 강요하는 것은 세계의 경찰을 자임했던 미국 제국주의가 더 이상 그런 헤게모니를 발휘할 수 없는 조건이 되었음을 뜻한다. 4. 폭발하는 저항: 계급투쟁의 시대가 돌아오다 계급투쟁의 귀환 지금까지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보여주는 현상들로서 자본주의의 만성적 장기불황, 극우와 파시즘의 성장, 제국주의 패권대결 격화와 이에 따른 약탈, 전쟁과 학살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여성, 소수자를 향한 전면적인 공격과 기후위기에 대한 무책임과 무능력 또한 오늘날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를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들이나, 분량을 고려해 이번 교육자료에선 위에 짤막하게 언급한 정도로 넘어가고자 한다. 자본주의의 심화된 모순은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을 다양한 형태로 맹렬히 공격하고 있고, 이에 맞선 저항도 다양한 형태로, 종종 폭발적인 봉기의 형태로 벌어진다. 그래서 ‘위기와 전쟁의 시대’는 다른 한편 계급투쟁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오늘날 주요한 계급투쟁의 전개양상을 모두 포착하기엔 너무 광범위하나, 주요한 몇가지 사건들과 함께 그 특징을 살펴보려 한다. 이미 위기와 전쟁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인 2018~19년 무렵부터, 신자유주의에 맞선 칠레 봉기, 홍콩의 민주주의 투쟁, 프랑스의 노란조끼 운동 등으로 대표되는 ‘2차 계급투쟁의 물결’이 시작됐다. 이는 공히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생존권위기에 맞선 폭발적인 투쟁이었다.[33] 이와 함께 여성파업 운동, 인종차별 반대운동, 기후정의운동 등 좁은 의미의 경제적 생존권을 넘어 사회적 차별과 억압에 맞서고, 사회 전체의 미래를 둘러싼 대중운동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러한 대중운동은 특히 수많은 청년들이 사회적 차별과 억압, 기후위기의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을 던지도록 했다. 곳곳에서 터져나오던 계급투쟁의 물결을 코로나 팬데믹으로 잠시 주춤하는 듯 했지만, 곧이어 팬데믹이 강요한 위기에 맞서 다시 폭발했다. 2020년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을 계기로 터져나온 미국의 인종정의 운동, 2022년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시에서 발생한 아파트 화재사고[34]로 시작된 중국의 백지시위 등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2010년대 초반 계급투쟁의 물결은 폭발적으로 진행됐으나, 시위대는 대체로 미조직된 상태에 남아있었고, 노동운동의 주도권이 그다지 발휘되지 않았다. 노동자계급 대신 ‘분노한 자들’ ‘1%에 맞서는 99%’ 같은 모호한 개념들이 이를 대신한 것은 이러한 사태전개의 반영이었다. 반면 최근 몇 년동안 이어진 물결에서는 노동자들이 조직된 주체로서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투쟁에 나섰던 민중들도 계급으로 자신을 조직화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예컨대 미국에서의 급진적 투쟁의 물결은 광범위한 노조가입 운동과 맞물리고 있다. 페미니즘, 기후정의운동, 인종정의운동으로 급진화된 미국의 청년들이 노동조합에 대규모로 가입하며 ‘Gen-U(노조세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35] 2018~19년의 교사파업 물결부터 이어진 노조운동의 부활 이후 2021년에는 스트라이크토버(Striketober)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2022년에는 철도파업이 벌어져고, 2023년에는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UAW(전미자동차노조)와 팀스터스 노조를 중심으로 한 파업투쟁이 벌어졌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2019년 칠레, 콜롬비아, 볼리비아 등의 격렬한 시위에 이어 2024년 아르헨티나에서 밀레이 정권에 맞선 총파업이 벌어졌고, 파나마에서는 2025년 트럼프의 노골적인 제국주의 개입에 맞선 총파업이 벌어졌다. 2020년 태국, 2022년 스리랑카, 2024년 방글라데시, 2025년 인도네시아, 네팔, 필리핀 등으로 이어진 아시아의 민중투쟁도 이러한 계급투쟁 물결의 연장선에 있다. 이는 부정부패로 얼룩진 권위주의 정권에 맞선 민주주의 투쟁이자, 오랫동안 주변부 국가들에게 전가되어온 심각한 생존권 위기에 맞선 투쟁의 성격을 가진다. 한국에서 2024년 말에 벌어진 내란 쿠데타에 맞선 민주주의 투쟁도 이와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2023년 10월 7일 이후로 세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맞선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집단학살이 시작된 직후부터 세계 곳곳에서 “즉각 휴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지난 2년 간 이어진 학살은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제국주의의 위선과 본질을 폭로하며, 이들을 급진화시켰다. 기후정의운동의 아이콘이었던 그레타 툰베리는 오늘날 가자로 향하는 선단에 몸을 싣고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맞선다. 현재는 44개국에서 조직된 글로벌 수무드 함대가 구호품을 싣고 가자로 향하고 있고, 이와 함께 이탈리아에서는 80개 이상의 도시에서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다. 앞선 사례들은 지난 몇 년간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을 축약한 일부에 불과하다. 생존권 위기, 극우화와 독재, 부정부패, 사회적 차별과 억압, 기후위기, 전쟁과 학살, 한마디로 오늘날 자본주의가 썩어가면서 만들어내는 온갖 야만적 행위에 맞선 투쟁이 전 세계에서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이 위기와 전쟁, 계급투쟁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앞으로도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되는 한, 분노한 노동자민중의 산발적인 봉기는 계속 터져나올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은, 이런 봉기의 물결이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도록 조직하는 것이다. 조직되지 않은 운동은 일순간 폭발적으로 터져나올 순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든다. 우리는 이러한 폭발적 순간들이 연결될 수 있도록, 다음의 폭발을 위한 진지를 적극적으로 조직해야한다. 계급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과제를 두 가지로 나누어 강조하고 싶다. 계급투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전진시키기 위한 사회주의자의 과제 첫 번째는 계급투쟁의 전진을 위하여 조직노동자운동을 ‘민중의 호민관’으로 재편하는 활동이다. 위기에 맞선 즉자적인 미조직된 노동자민중의 저항은 때때로 강렬하게 불타오르지만, 조직된 구심점이 없으면 금방 방향을 잃고 사그라든다. 거리에서 시작된 투쟁은 처음에는 지배계급은 국가권력을 향한 중대한 도전이 되지만, 거리에만 머무는 투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압될 수밖에 없다. 파업투쟁, 즉 거리에서 시작되곤 하는 격렬한 계급투쟁의 열기를 현장으로 전이시키는 것, 그래서 자본주의의 일상적 작동을 멈추는 것은 폭발하는 민중봉기를 승리로 나아가게 하는 핵심적인 전략이다. 지난 몇 년간 계급투쟁의 경험을 돌아보면, 조직노동자운동이 이러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경우에는, 운동이 훨씬 더 힘을 갖고 멀리 뻗어 나갔다. 반면 거리에서의 저항에 머무는 경우에는 당장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진압되는 경우가 더 컸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저항의 정신은 죽지않고 살아 봉기에 참여했던 민중을 급진화시킨다. 그리고 급진화된 민중이 계급으로 스스로를 자기조직화한다면, 다음 번 투쟁에서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조직노동자운동이 민중봉기와 결합하여 ‘민중의 호민관’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것은 계급투쟁의 발전에 핵심적이다. 지난 몇 년간의 계급투쟁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실천하고자 분투해왔다.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던 지난 경험들 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프랑스] 프랑스에서는 2023년 연금개악에 맞선 투쟁이 폭발적으로 벌어졌다. 연금개악의 핵심은 연금수령 개시연령을 62세에서 (2030년까지) 64세로 2년 상향하는 것이었다. 연금을 100% 수령하기 위한 기여 기간을 현행 42년에서 (2027년까지) 43년으로 연장하는 것도 포함돼 있다. 연금개악은 프랑스 노동자들이 쟁취해온 개량에 대한 공격을 상징했다. 이에 맞서 1980년대 이후 최대 규모의 총파업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엄청난 동력과 달리, 8개의 노총 지도부는 총파업의 힘으로 마크롱 정부를 타도하는 게 아니라, 의회에서 야당들이 마크롱과 협상하는 데 힘을 싣어주는 전략에 골몰했다. 그래서 노총연대가 주도하는 총파업 시위들은 대규모이긴 하되 과격하지는 않게 노동자들의 불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그리고 노총 지도부 연합은 연속적인 총파업이 아니라 2주 마다 하루씩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진행했다. 이는 마치 한국에서 민주노총이 1996~97년 총파업을 ‘수요파업’으로 전환하면서 동력이 끊어졌던 역사를 상기시킨다. 거리에서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과격해진 자본가들’에 대적하려면 경제를 마비시키는 게 필요했고, 즉 (하루짜리가 아닌) 총파업을 해야 했다. 프랑스 사회주의 조직 ‘연속혁명’은 ‘총파업 네트워크’를 조직해 연금개악 반대투쟁을 더 멀리 전진시키고자 했다. 총파업 네트워크는 (노총 지도부가 제기하는 하루짜리 단발성 파업을 넘어) 무기한 총파업에 동의하는 노조원과 활동가들을 최대한 모아내서, 무기한 총파업을 향해 각 부문의 투쟁을 조율하고, 최대한 많은 부문으로 무기한 총파업을 확산시키는 걸 목표로 한 조직이었다. 아래는 총파업 네트워크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에 대해, 사회주의를향한전진 2023년 정치캠프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자 아르뚜르가 발제한 내용의 일부이다.[36] 첫 번째로 총파업 네트워크는 요구의 확장(주로 임금과 연금문제의 결합)을 주된 목표로 내걸었다. 이주노동자, 저임금노동자, 청년노동자 등은 상대적으로 연금의 혜택을 덜 받는 처지에 놓여있는 노동자들과의 단결을 어떻게 실현할지에 관한 문제였다. 화이트칼라 노조, 계급화해적 노조까지 포함하고 있는 노총연합은 오직 연금개악안 반대라는 단일 의제로만 단결했다. 그 외에 다른 요구나 의제가 없었다. 문제는 연금개악이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정도는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많은 노동자들은 연금개악에 오직 최소한도로만 그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임금 문제는 노동자계급의 핵심이지만, 노총연합은 6월 전에는 임금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노총연합 지도부는 “너무 많은 요구 사항으로 운동을 분산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을 무기한 파업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정확히 저임금 문제였다. 그래서 총파업 네트워크는 요구를 확장하는 것을 투쟁의 우선사항 중 하나로 설정했다. 특히 철도 노동자와 쓰레기수거 노동자가 임금인상과 연금개악 반대를 동시에 걸고 무기한 파업을 진행했는데, 우리는 이를 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임금과 연금, 이 두 가지 요구의 결합이 무기한 파업의 핵심이었다. 두 번째로 총파업 네트워크는 탄압에 맞선 연대를 조직했다. 정부에 맞선 투쟁에서 송곳처럼 먼저 뚫고나오는 조직들은 정부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마치 윤석열 정부가 안전운임제를 걸고 파업에 나선 화물연대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내리고, 조선소 도크를 점거하는 파업에 나선 거통고조선하청지회에 군대 투입을 요구했듯 말이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파리의 쓰레기 수거노동자들, 그리고 정유공장 노동자들이 그런 탄압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파리에서 쓰레기 수거 노동자의 파업으로 쓰레기가 쌓이자,[37] 정부는 파업노동자들에게 업무복귀명령을 내렸다.[38] 징역형으로 위협하며 일에 복귀할 것을 강제했단 뜻이다.[39] 정유 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정유공장 파업은 파리 공항에 오직 이틀치의 등유만 남길 정도로 큰 타격을 입혔다.[40] 공항이 폐쇄되는 걸 막기 위해 정부는 파업중인 정유 노동자에게 업무복귀명령을 내렸다. 경찰은 노동자의 집에 찾아가 노동자를 일터로 데려갔다. 이 모든 탄압은 운동을 급진화시키는 요소였다. 그러나 현장과 거리에서 이 모든 탄압을 겪으면서도, 노총연합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업무복귀명령'은 국가가 무기한 파업을 무너뜨릴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노총연합은 "업무복귀명령"(Requisition) 이라는 말을, 말 그대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매일 라디오나 TV에 나와 말할 기회가 있었지만 한 번도 그 단어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노총연합 지도부에 끌려다니지 않고) 탄압에 대항할 조직화가 필요했고, 총파업 네트워크를 통해 이를 실행했다. 우리는 경찰서 바깥에서 시위를 조직했고, 집회 중 체포된 이들을 석방하라는 요구를 했다. 파리, 툴루즈, 보르도 등 중요한 도시들에서 이런 시위를 많이 벌였다.[41] 또한 업무복귀명령에 맞서, 총파업 네트워크를 활용해 우리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정유공장에 250명을 집결시켰다. 그날 경찰의 업무복귀명령을 막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경찰이 밤새 치워버린 파업 대오를 다시 세웠다. 물질적 패배였지만, 도덕적 승리였다. 정유노동자들은 이 투쟁 덕분에 또 다른 15일 동안 파업을 이어나갔다. 세 번째로 총파업 네트워크는 파업노동자들의 총회를 통해 노동자 민주주의를 재건하려고 했다. 총회를 통해 조합원들 스스로의 토론을 통해 투쟁의 방향과 전략을 결정할 기회를 갖는 것은 관료적 지도부의 일방적인 결정에 맞서는데 사활적으로 중요했다. 총파업 네트워크는 파업노동자의 자기조직화의 기반을 다지려 시도했다. 자기조직화에 기반한 파업투쟁의 전통은 프랑스에서 1990년대 이후 사라졌고, 파업중인 노동자들을 한데 모은 총회를 개최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파업노동자들 다수가 노총연합을 신뢰한 것도 자기조직화가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였다. 하루씩 고립된 파업을 하는 노총연합의 전략은 파업노동자들의 어떤 총회도 효과적이지 않게 만들었다. 총회를 해도 노동자들이 투쟁일정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철도와 정유산업에서 일하는 우리 동지들을 바탕으로, 총파업 네트워크를 통해 자기조직화의 예시를 제공하려 했다. 이와 함께 노총연합 지도부의 방침에 동의하지 않는 많은 노동조합 지도부와 활동가들을 결집시켰다.[42] 총파업 네트워크 조직화를 위해, 우리는 수 백명의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연서명한 두 개의 글을 주요 신문에 발행했다.[43] 그리고 여러 노조 대의원이 무기한 파업을 지지하도록 안내했으며, 파업을 지속하기 위해 파업 기금을 마련했고, 탄압에 맞서는 시위와 집회를 수없이 조직했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여러 부문의 파업노동자들이 전략적 토론에 함께 참여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총파업 네트워크는 150~200여 명의 사람들을 전국총회에 소집했다.[44] 그 중 대다수는 노동자들로, 정유, 철도, 쓰레기수거, 교사, 자동차, 화학, 금속, 파리 공항, 항공우주 산업, 원자력 발전소, 전력, 가스운송 부문이 참여했다. 관료주의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는 항만 노동자들을 제외하고, 무기한 파업에 참여한 모든 분야가 대표단을 보냈다. 그 중에는 (무려) 5,000명이 일하는 회사의 노동조합을 이끄는 노조 지도부도 참여했다.[45] 다수는 노동자들이었지만, 학생들과 활동가들도 많이 왔다. 2016년의 대중 운동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던 한 철학자도 네트워크를 지지했다. 아델 에넬이라는 배우도 총파업 네트워크를 지지했다. 아델 에넬은 영화 산업의 성폭력에 맞서 싸운 것으로 프랑스 페미니스트 운동에서 매우 유명한 배우이다.[46] 2023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은 이렇게 연금개악 반대투쟁에서 관료적 노조 지도부의 한계를 뛰어넘어 무기한 총파업을 건설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관료적 지도부의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뛰어넘지는 못했고, 당시 연금개악안은 마크롱이 의회를 무시하고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통과시키는 것으로 관철됐다. 그러나 당시 ‘총파업 네트워크’를 통해 분투하고 대안을 만들어내고자 실천한 만큼, 계급투쟁의 열기는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전망을 잃고 좌절하는 대신 새로운 운동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2025년 9월 현재 프랑스에선 다시 마크롱의 긴축정책에 맞서 백만명이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계급투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 다음으로 한국의 사례를 살펴보자. 윤석열의 집권과 극우화는 세계적으로 진전되는 극우세력 확산의 한 표현이었다. 한국 극우는 마가의 ‘부정선거론’과 ‘반중 담론’을 수용해 한국식으로 재구성했고, 이를 마가 쪽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키워왔다.[47] 윤석열 쿠데타는 그런 점에서 한 개인의 일탈적 행위라기보다 브라질 보우소나루 쿠데타와 이어지는 전세계 극우확산의 흐름에서 진행된 사건이었다. 이에 맞서 민주노총은 내란사태 초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월 24일, 전진에서 발표한 아래의 기사는 12.3내란에 대응하는 투쟁에서 조직노동자운동의 대표체로서 민주노총이 보여준 가능성과 한계, 과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12·3 이후 지금까지 투쟁에서 민주노총의 역할은 모순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상당한 역할을 해왔지만, 자신의 잠재력에 비해서는 매우 제한된 수준에 그쳤다. 민주노총은 12월 4일 새벽 3시를 기해 ‘윤석열 퇴진시까지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5일, 6일, 11일 세 번에 걸쳐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를 중심으로 5만에서 10만 정도가 참여하는 제한된 총파업에 그쳤다. 민주노총은 주말 집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았고 초기에는 상당수 조합원들이 주말 집회에 참여했다. 민주노총이 주말 집회에서 경찰 바리케이드를 밀어내고 길을 열어낸 모습은 광범한 미조직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농민투쟁단이 남태령을 넘는 순간에도 길을 여는 역할을 했다. 1월 3~5일 한강진의 내란수괴 윤석열 체포·구속 투쟁에서도 민주노총 확대 간부와 조합원이 광장 대중과 함께 투쟁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끌어내지 못했다. 민주노총이 위력적인 총파업을 조직해 냈다면, 폭발적인 광장투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을 텐데, 민주노총은 그런 역할을 회피했다. 민주노총은 광장 청년대오의 환호에 자족할 뿐 총파업을 조직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광장에 참여하는 조합원의 대오도 크게 줄어들었다. 반면 12·3 이후 광장에 쏟아져 나온 청년 미조직 노동자들은 계엄과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사의 주인으로 발돋움해 왔다.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와 섬뜩한 포고령은 대중을 심각한 충격과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대중은 잠시 위축됐던 감정과 불안을 금세 떨쳐냈다. 거듭되는 집회와 거리 투쟁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며 심리적 불안과 공포를 저항으로 승화했다. 계엄과 내란을 처음 경험한 청년 대중은 수천수만 노동자의 참여를 보며 심리적 안정감을 느꼈고 사회적 소수자와의 연대를 넓혀가며 자신감을 쌓아갔다. 저항의 날들이 더해질수록 지금껏 의심하지 않았던 자유민주주의 이념, 기존 보수정치가 쥐락펴락해 온 국가에 대한 의문을 싹 틔우며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에 대한 본능적 갈망을 분출했다. 광장의 청년 대중 다수는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와 실업자들이다. 이들은 한국 자본주의 체제에서 처음으로 부모 세대보다 가난해진 세대다. 온갖 형태의 비정규직과 실업의 굴레에 묶여 미래의 안정적 삶을 꿈꾸지 못하고 절망했다. 그러나 계엄과 내란 정세에서 역사의 무대로 뛰어나와 지금까지의 고통과 절망을 딛고 새로운 삶과 희망을 찾는 용기를 내고 있다. 광장의 청년 대중은 조직노동자에 대한 과거의 불신을 뒤로 하고 민주노총 조직노동자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구사대와 용역깡패를 동원한 한화오션의 악랄한 노동탄압에 맞선 거통고 조선하청노동자들의 투쟁에, 1년 넘게 먹튀자본 닛토덴코에 맞서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불탄 공장을 지키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들의 투쟁에, 어처구니없는 대법원 패소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에 맞서 장기투쟁을 벌이는 세종호텔 노동자들의 투쟁에, A학교에서 벌어진 성폭력 축소은폐에 맞서다 학교에서 쫓겨나고 해임당한 지혜복 교사의 투쟁에 ‘말벌 동지들’의 지지와 연대가 쇄도하고 있다. 극우세력의 부상과 준동을 멈춰 세우고 분쇄하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위력적인 총파업이고 그에 기초한 폭발적인 광장투쟁이다.[48] 지난 내란사태 때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은 총파업공동행동을 구성하고, 민주노총이 헌재를 기다리지 말고 총파업으로 윤석열을 타도해야한다고 선전선동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단 하나의 현장에서라도 실질적인 파업을 조직하기 위해 분투했다. 하지만 2월 말까지 이러한 주장은 민주노총 내에서도 큰 동의를 얻지 못했다. “내란·극우세력 청산! 사회대변혁! 노동자세상 총파업 조직화 공동행동”(이하, 총파업 공동행동)에 모인 민주노총 대의원들은 2025년 사업계획에 대한 수정동의안을 발의했다. 민주노총 대의원 34명이 수정동의안에 연명했고, 현장조합원 91명이 지지 연명했다. ... [수정동의안] 1. 민주노총은 윤석열 즉각 파면, 국민의힘 해체, 내란·극우세력 청산, 사회대변혁을 위해 3월 경고파업을 광장의 미조직 대중과 함께하는 사회적 총파업으로 전개한다. 이를 위해 2월 하순까지 민주노총 가맹 산하 전 사업장 교육을 진행하고, 임시총회 등의 방법으로 파업을 결의한다. 만약 헌법재판소 탄핵 기각 시 즉각 총파업에 돌입한다. 첫 번째 수정동의안은 민주노총 대의원 다수의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헌법재판소 탄핵 이전 경고파업, 탄핵 기각 시 총파업’을 금속노조 정기대의원대회 준비 토론자료에 싣고 현장토론을 조직한 금속노조 중앙집행위 성원들이, 앞장서서 ‘현장이 움직이지 않아서 파업할 수 없다’고 핑계 대며 수정동의안을 적극 반대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탄핵 이전 경고파업을 추진한다면서도, ‘헌법재판소 탄핵 전후로 더 강력한 총파업을 조직하자’는 수정동의안을 반대하는 금속노조의 진정성을 그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이토록 엄중한 정세에서, 민주노총이 3월 사회적 총파업에 나서야 한다는 수정동의안에 재석 985명 중 178명 대의원이 찬성했다. 부결![49] 그러나 3월 중순에 들어서 헌재선고가 기약이 늘어지면서, 총파업공동행동의 주장은 대중적 반향과 논쟁을 일으켰다. 결국 3월 27일 민주노총 총파업이 결정되었다. 승리의 열쇠는 우리 손에 있다 탄핵조차 위태로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힘,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여전히 광장에 나선 노동자 민중에게서 나온다. 윤석열 일당의 계엄 문건 어디에도 노동자 민중의 저항을 예상한 대목은 없었다. 화물연대, 건설노조 등을 악랄하게 탄압하며 자신감을 가졌던 윤석열의 머릿속에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미조직 노동자들의 저항은 들어있지 않았다. 제거 대상은 이재명, 한동훈 등 의회 테두리 내에 있는 반대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만 제거하면 끝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의 예상과는 달리 의회 바깥에서 노동자 민중의 힘이 번갯불처럼 나타나 내란 세력을 위협했다. 그 힘이 탄핵 가결을 이끌어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헌법재판소 일정을 쫓아다니지 말고 노동자 민중의 압도적 힘을 조직해야만 윤석열을 파면시키고 중단없이 사회대변혁을 밀어나갈 수 있다. ... 필사적인 도약은 가능하다! 민주노총은 3월 27일 총파업·총력투쟁을 선포했다. 금속노조는 전 조합원 2시간 이상 총파업을 결의했다. 헌재 판결이 지연되는 지금, 헌재를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이 모이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더 확대해야 한다. 물론, 어느 현장에서나 총파업을 조직하기 쉽지 않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관료주의가 넓게 퍼져 있고 임금인상, 고용안정 등을 위한 경제파업에서도 밀리고 있는 수많은 현장에서 윤석열 퇴진을 위한 정치파업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엄청난 격변을 마주하고 있다. 이 격변에서 밀리면 지금까지 쌓아온 노동자 민중의 모든 권리와 성과가 사라진다. 그래서 수많은 노동자가 절박한 마음으로 윤석열 퇴진을 열망한다. 너무나도 위급한 역사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다른 측면으론 너무나도 소중한 역사적 기회를 움켜쥐기 위해 우리 모두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현장을 조직하자. 3월 27일 하루 총파업을 도약의 계기로 만들자. 위로부터의 총파업 선언에 그치지 않기 위해, 실질적인 총파업 실현을 위해 현장 안팎에서 즉각적인 토론, 선전, 조직화 활동을 전개하자. 각 단위사업장 총회를 열고, 노동자 민중의 사회적 총파업으로 윤석열 타도를 결의하자.[50] 그러나 3월 27일 총파업은 힘있게 조직되지 못했고, 총파업공동행동도 관료적인 지도부를 뛰어넘어 현장에서 파업투쟁을 조직해가는 주도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이후 4월 4일 헌재선고가 잡힌 뒤, 민주노총은 4월 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헌재 기각 시 즉각 총파업’을 통과시켰다. 결국 4월 4일 헌재 선고 결과 윤석열은 탄핵되었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내란투쟁 전반에 걸쳐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함에 따라, 민주당이 이후 정세의 주도권을 잡았다. 대선시기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노동자 후보가 등장하지 못했을뿐더러[51], 민주노총 집행부는 선거기간에도 민주당 지지방침을 고집하며 ‘민주’적 자본가계급과 연합하는 인민전선 전략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 결과 이재명 당선 이후 노동자운동 전반에 이재명 정부에 대한 환상과 의존성이 자라났다. 윤석열이 정치적 세력관계를 오판하여 무리한 쿠데타를 벌였고, 이에 맞선 격렬한 민중항쟁이 벌어지면서, 내란에 맞선 투쟁의 결과로 윤석열은 감옥으로 갔고 민주당이 다시 집권했다. 허나 더욱 격렬한 계급투쟁은 잠시 유예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과 같이 노동자운동이 이재명 정부에 의존적인 상황을 계속 극복하지 못한다면, 노동자계급은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없으며, ‘민주’정권의 위선에 환멸을 느낀 민중들에게 ‘유일한 대안’처럼 보이는 더 성장한 극우파가 집권하게 될 것이다. 광장에 나왔던 수많은 미조직 노동자들은 본능적으로 조직된 노동자의 힘을 느끼고, “민주노총이 길을 연다” “금속노조가 선봉에 선다”는 구호에 환호하며 함께 했다. 다시 모순이 격화되어 그 다음 전면전이 벌어질 때까지, 노동자계급의 자기조직화를 얼마나 전진시키느냐에 따라 그 다음 한국의 계급투쟁의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이상 계급투쟁이 격렬히 벌어지던 순간에 조직노동자운동의 재편을 위해 분투했던 프랑스와 한국의 사례를 잠시 살펴보았다. 프랑스와 한국 뿐 아니라, 미국, 칠레, 아르헨티나 등 많은 최근의 계급투쟁의 사례에서 비슷한 패턴을 관찰할 수 있다. 자본주의 국가의 위기 전가로 특정한 계기를 따라 폭발적인 민중봉기와 계급투쟁이 발생한다. 하지만 개량주의적 전망에 갇혀있는 노동조합 지도부, 그리고 개량주의 정치세력은 대정부투쟁에서 조직노동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제한하고, (민주당 같은) 자본가 정당 혹은 개량주의 정당을 통한 의회에서의 협상에 의존한다. 이를 위한 협상카드로 조직노동자운동의 힘을 일부 동원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전망의 한계 때문에 부분적인 동원에 그치며, 폭발하는 계급투쟁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이러한 개량주의 노조관료에 맞서 아래로부터의 자기조직화를 활성화하고, 노동자 민주주의를 재건하고,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미조직 노동자들의 운동과 결합시키기 위해 분투한다. 이를 얼마나 전진시키느냐에 따라, 계급의 세력관계가 달라진다. 조직노동자운동을 계급투쟁을 이끄는 기관으로 재편하는 것은, 당면한 계급투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사회주의자의 첫 번째 과제다. 다음으로는 첫 번째 과제와 긴밀히 결합된 사회주의자의 두 번째 과제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과제와 결합된 두 번째 과제는, 계급투쟁이 발전과정에서 전망을 잃지 않도록, 분명한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를 세우는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의 정수는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아래와 같이 정리한 바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일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 그들은 전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특별한 원칙을 세우고 거기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짜 맞추려 하지 않는다. ... 그들은 프롤레타리아들이 각각 전개하는 다양한 국내 투쟁에서 국적과는 무관한 전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공동 이해관계를 강조하고 관철하는 한편,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부르주아지 간의 투쟁이 거쳐온 여러 발전 과정에서 항상 전체 운동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52] 사회주의자는 서로 다른 국가에서, 또 서로 다른 쟁점을 갖고 시작한 운동이, 실은 자본주의 체제라는 동일한 뿌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이를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공동의 투쟁으로 연결하고자 한다. 예컨대 여성파업 운동은 여성들이 당면한 차별과 억압에 맞선 투쟁이고, 기후정의운동은 기후위기에 맞선 투쟁이며, 팔레스타인 해방투쟁은 제국주의가 만든 식민억압과 학살에 맞선 투쟁이다. 윤석열의 내란에 맞선 투쟁은 극우정권의 민주주의 파괴에 맞선 투쟁이고, “이대로 살 수 없다”며 임금 30% 회복을 요구한 조선하청노동자의 파업투쟁은 생존권 투쟁이다. 그러나 가부장제, 기후위기, 제국주의, 극우파시즘, 비정규직 제도는 모두 자본주의라는 동일한 뿌리로부터 나온 위기의 표현들이다. 이 투쟁들을 하나의 투쟁으로 묶어내고 자본주의 체제를 향한 공동의 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의 전략이다. 이렇듯 모든 부분적, 단계적 투쟁에서 늘 ‘전체 운동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건 왜 중요한가? 자본주의가 계급투쟁을 완전히 뿌리뽑을 수 없을 때, 대신 일정한 틀에 계급투쟁을 가두고 종국에는 좌절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핵심적인 전략이 부분적 투쟁을 부분에 머물도록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포섭전략은 이에 순응하는 포섭된 노동계급의 일부에게는 일정한 ‘당근’을 제공하면서, 가부장제, 인종차별, 민족억압 등과 결합하여 더 주변화된 성과 인종, 민족을 우선적으로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사회주의자가 전체 운동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이러한 분열전략에 맞서 ‘모든 노동자의 이해관계’, 따라서 주변화되고 더욱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뜻이다. 특히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노동자들이 전개하는 다양한 투쟁에서 ‘국적과는 무관한’ 전체 노동자계급의 공동의 이해관계를 강조하고 관철해야한다고, 즉 다시 말하면 ‘노동자 국제주의’를 강조하는데, 이는 특히 오늘날 제국주의가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쟁은 극우의 성장과 함께 엄청난 민족주의의 광풍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적 정치의 여러 측면들 중 노동자 국제주의 관점의 중요성을 이번 글에서 좀 더 살펴보려 한다. 얼마 전 조지아의 현대차 공장 건설현장에서 벌어진 이주노동자 단속 사례로부터 노동자 국제주의의 중요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미국 이민단속국(ICE)은 지난 9월 4일 조지아의 현대차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서 한국인 노동자 300명을 포함한 475명을 체포, 구금했다. 이는 LA등지에서 벌인 잔혹한 인간사냥에 이어 트럼프가 지속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에게 대한 공격의 한 사례였다. 그런데 조직노동운동의 지도부는 이런 반이민정책에 맞서 싸우기는 커녕, 트럼프식 민족주의에 포섭된 한계를 드러냈다. 노동운동 내 일부 세력들은 트럼프 정부와 더 나은 조건을 협상하려는 의도로, 이민자가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으며 공공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우파의 허위 논리를 받아들였다. 팀스터스 노조(Teamsters, 미국 트럭운송노동조합)의 위원장 숀 오브라이언(Sean O’Brien)은 트럼프가 이민자들을 공격하는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반이민 정책과 노동개악, 미국우선주의 관세정책을 옹호하는 새 노동부 장관을 열렬히 지지했다. 전미자동차노조(UAW)의 위원장 숀 페인은 트럼프의 관세정책으로 미국에 공장이 신설되고 일자리가 늘어남을 찬양하며, 미등록 노동자들이 범죄자로 낙인찍히고 추방당하는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노동자들 간의 단결이란 허울좋은 공문구에 불과하니, 그런 있지도 않은 것에 힘빼지 말고, 자국 산업의 경쟁력을 키워서 ‘우리 이익’을 지켜야한다는 실리주의 정서의 확산이다. 자국 산업을 지켜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국방력의 강화’ 또한 중요히 여겨진다. 위기의 시대에 전쟁으로향하는 민족주의 광풍은 그렇게 불어오는 것이다. 아래는 전국금속노조 한국GM지부 자유게시판의 ‘UAW 전미 자동차 숀 페인 위원장의 이중성’이란 글과 거기 달린 댓글 중 일부이다.[53] [UAW 전미 자동차 숀 페인 위원장의 이중성] 글쓴이: 노동자 세상 2025-07-11 (금) 23:37 조회 : 1448 한국에온 UAW숀페인 위원장 일행은 금속노조와 한국지엠지부를 방문하여 연대를 표시했다. 그러나 그는 자국인 미국의 트럼프가 시장주의를 표방하는 자유무역체제를 붕괴를 시키면서까지 깡패처럼 관세폭탄을 때린것을 UAW의 승리라고 떠들며 오프 쇼어링(해외생산기지)를 중단할것이다.며 미국 노동자들의 일자리확보를 UAW의 승리라고 떠벌였다. 그래놓고 정작 한국에 와서는 지엠의 정비 폐쇄,부지매각 투쟁을 하는 한국지엠노조에는 연대의 제스처를 벌이는 아주 추잡한 노조 관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도 모르고 금속노조와 한국지엠지부는 대단한 우군을 맞이한것처럼 환대를 하는 모습이 참으로 우려스럽다. ID: 정신차리자 2025-07-12 (토) 07:48 UAW는 절대 연대 할 수 없는 경쟁상대일뿐이다. UAW가 한국에 오는 목적은 연대가 아닌 전기차,하이브리드 중,소형차생산을 어떻게하면 미국에 설치 할 수 있을까 빼앗기위해 생각하러오는 견학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는것.. 미국놈들이 얼마나 잔인한가? 전쟁을 유도하고 무기 팔아먹고 재건사업들어가서 이득챙기고,. 미국 국력강하다고 관세때리며 힘없는 국가들에게 깡패놈들처럼 뚜두려패며 돈뺏고 있다. UAW도 미국 국민일 뿐이며 얼굴에 가면하나 걸치고 한국지엠에 견학온것 뿐이란을.. 노동조합은 정신차리길 바란다. ID: 초청? 2025-07-12 (토) 08:37 글내용처럼 이미 많은 언론이나 조합원들도 알고있는 팩트입니다. 협력이아닌 경쟁 상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청?? 좀 아이러니 한 경우죠. 제조공장에 일감에 대해서는 양보란 없습니다. 결국 먹고사는 문제이고 존폐의 문제죠. ID: 오호 2025-07-12 (토) 16:14 UAW 는 미국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조합입니다. 자국이 우선시 되는거죠... 그걸 몰랐을리가 없을겁니다. 몰랐다먼 순진하게 당한거죠...미국노동자들을 위한 노조에 확실한 답을 준겁니다. 얘네는 한국GM 이 어떻게 되든 관심없습니다. 오로지 자국 노동자들만 관심있죠... 헥터나 브라이언에게 힘만 더 실어준 격이 된 듯 합니다. 미국이 관세정책과 반이민정책으로 전 세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고려할 때, 이에 대한 미국 노조관료들의 투항은 이미 노동자 국제주의에 매우 중대한 해악을 끼치고 있다. 특히 UAW 숀 페인 위원장의 사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그는 2023년에 이른바 ‘빅3(크라이슬러, 포드, GM)라 불리는 UAW의 대규모 자동차 공장에서 조합원들 사이의 민주주의를 활성화하고, 이중임금제 타파[54]를 주요 요구로 내걸고, 전투적으로 파업을 이끌면서 리더십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그는 UAW의 오랜 어용관료들의 지배를 타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현장조직 “UAWD”[55]의 지지를 받았다. 빅3를 넘어 노동조합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현대차, 폭스바겐, 혼다 등 무노조 사업장을 조직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이런 전투적인 노조 지도자가 왜 트럼프의 관세정책을 지지하는가?[56] 그의 시야가 ‘미국 노동자계급의 단결’, 또는 ‘미국 자동차산업 노동자의 단결’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오늘날과 같이 전세계를 상대로 강도적 패권행위를 벌이지 않는 시기에는, 협소한 조합주의를 넘어선 숀 페인의 ‘전투적 조합주의’ 전망만으로도 진보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쇠퇴하며 온갖 위기가 분출하는 시기에 국제주의 관점을 갖지 못한 노동운동은 반동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페인과 넬슨 같은 진보적 노동 지도자들조차 샌더스나 바이든 같은 민주당 정치인들을 지지하고 미국 제국주의에 찬사와 지지를 보내며 이러한 쇼비니스트적 정치를 재생산하고 있다. 넬슨이 2019년 정부 셧다운 종식을 위해 공항 노동자 파업 조직을 돕겠다고 위협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을 때, 그녀는 마치 미군이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것처럼, 지금 당장 우리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는 수많은 군인들이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마찬가지로, 바이든 방문 당일 연설에서 페인은 미 공군 B-24 폭격기 생산 공장을 “민주주의의 무기고”라고 칭했다. 페인은 또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가까운 동맹이었던 UAW 지도자 월터 루터를 본보기로 삼았다. 루터는 1940년 미군을 위해 UAW가 하루 500대의 항공기를 생산하는 계획을 자랑스럽게 감독했으며, 전쟁 중 파업 금지 조항을 옹호하여 무단 파업을 억제하고 전쟁 기계로부터 기업 이익이 계속 흘러들도록 했다. 따라서 루터를 지지했던 모든 노조 활동가들은 의도치 않게 5년 후 보잉이 제조한 다른 종류의 폭격기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수십만 일본 민간인을 학살한 바로 그 제국주의 국가의 안정성과 화력 증강에 기여한 셈이었다.[57] 숀 페인의 입장이 노동조합 내 전투적 조합주의의 한계를 보여준다면, DSA의 주요 정치인들이 보여준 한계는 개량주의 정치의 한계를 드러낸다. DSA의 버니샌더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OC)같은 정치인들은 ‘민주 사회주의’라는 슬로건 아래 지난 십여년 간 성장하면서, 미국 민주당 내에서 ‘사회주의자’의 영향력을 키워야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몇 년간의 계급투쟁 물결에서 성장한 개량주의 정치는 여러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그 중 이번 강의의 주제와 연관하여 살펴볼 결정적인 한계는 국제주의의 결여다. AOC와 샌더스 모두 팔레스타인에서의 학살을 위한 추가 자금 지원에 찬성표를 던졌다. 샌더스는 인권 단체들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국경인 미국-멕시코 국경의 군사화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트럼프와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샌더스와 AOC는 전국 공급망을 마비시킬 수 있었던 2023년 12월 잠재적 철도 파업을 무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몇 달 전 샌더스는 극우 성향의 전쟁광 정치인 마르코 루비오의 인준에 찬성표를 던졌다. “과두정권과 협력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어떻게 “과두정권과 싸울” 수 있겠는가?[58] 노동자 국제주의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미국의 정주노동자들은 현대차 사례를 포함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주노동자 단속에 강력하게 맞서 싸워야한다. 비록 조직노동운동 지도부를 장악한 노조관료들은 위와 같이 트럼프에게 투항해버렸지만, 미국 내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국제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내부투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실제 LA 대규모 이민단속 때에는 지역민과 노조원들이 이주노동자 납치와 추방을 막기 위해 자경단을 꾸리고 지역사회 단체 네트워크를 조직했다. 아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이자 SEIU(미국서비스노조) 조합원인 줄리아 월리스가 쓴 글과 발언의 일부이다. 하지만 주말 내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노동운동의 가시적 존재감이었다. 사람들은 “데이비드 후에르타를 석방하라”고 외쳤고, 내 SEIU 721 셔츠를 보자 주먹을 들어 올렸다. 군중 속 많은 이들이 노동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다른 SEIU 회원들은 현수막도 노조 셔츠도 없이 왔다. 우리는 파업 최전선에서 경찰과 맞서왔다. 이제 동료들을 집회로 이끌고 ICE로부터 방어하는 일도 우리 몫이다. 한 사람의 상처는 모두의 상처다.[59] 지역사회 단체들은 이민 단속 현장에 떼로 몰려가 추방을 저지했다. 오하이오에서 나치들이 시위를 시도했으나 무장한 흑인 커뮤니티가 그들을 경찰 뒤에 숨어 도망가게 만들었다. 심지어 전 트럼프 지지자들로부터도 반발이 일고 있다. 이는 트럼프에 맞선 다양한 계층과 분야의 저항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트럼프는 정당성을 상실했고, 이로 인해 속도를 늦추고 있다. 예를 들어 트럼프는 1,500명의 유학생 이민자에 대한 비자 취소 명령을 철회했다. 트럼프의 초기 위협에 그는 어느 정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 혁명적 좌파는 경제적 제국주의 통제 시도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국가 부르주아지에게도 정치적으로 굴복할 수 없다. 멕시코의 셰인바움 대통령처럼 트럼프에 대한 강력한 수사(修辭)를 펼치는 세력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중국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충성은 노동자 계급에 있으며, 유럽과 전 세계에서의 군사화 시도에 맞서는 데 있다.[60] 이러한 관점 아래 우리도 한국에서 할 일이 많다. 당장 얼마 전인 9월 16일, 울산에서 현대자동차 모듈화 단지 내 자동차부품업체 공장 안에서 대규모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이 벌어졌다. 태국 국적 노동자 42명 등 이주노동자들은 미란다원칙 고지도 받지 못한 채 사복경찰과 출입국관리소 단속 인력에게 체포되었고, 줄줄이 묶여 호송되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와 같은 인간사냥에 분노하며, 이주노동자들을 향한 단속과 추방에 맞서야 한다. 또한 지난 관세협상 과정에서 이재명 정부는 ‘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슬로건을 핵심적으로 내세웠다. 즉 한국의 조선산업 노동자들이 앞으로 미군의 해군력 증강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는 뜻이다. 이미 HD현대는 미국 ‘팔란티어’ 기업과의 방산협력을 논의하고 있는데, 팔란티어는 AI전쟁기술을 갖고 이스라엘 방위군(IDF)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있는 기업이다. MASGA 딜이 실현되는 과정은 미국이 강화된 해군력으로 중국과의 전쟁위기를 가속화하고,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한국의 자본가들이 더욱 깊이 연루되어 이윤을 버는 과정이 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은 1940년, 트로츠키는 ‘제국주의 쇠퇴 시대의 노동조합’이란 글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됐다. 그가 쓰던 초고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현시대의 노동조합은 자유 자본주의 시대처럼 단순히 민주주의의 기관이 될 수 없으며, 더 이상 정치적 중립을 유지할 수 없다. 즉, 노동계급의 일상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그칠 수 없다. 그들은 더 이상 무정부주의적일 수 없다. 즉, 국가가 민족과 계급의 삶에 미치는 결정적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은 더 이상 개혁주의적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객관적 조건이 진지하고 지속적인 개혁을 위한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노동조합은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하위 도구로서 노동자들을 종속시키고 통제하며 혁명을 방해하는 데 이용되거나,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의 도구로 변모할 수 있다. ... 노동조합의 중립성은 자유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함께 완전히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 지금까지 말한 바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노동조합의 점진적 퇴화와 제국주의 국가와의 유착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내에서의 활동은 그 중요성을 조금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모든 혁명 정당에게 이전과 마찬가지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한 과업으로 남아 있다. 핵심 쟁점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에 대한 영향력 쟁탈전이다.[61] -- 위기와 전쟁의 시대, 국경과 인종, 성정체성 등으로 노동자를 갈라쳐 지배하는 극우와 민족주의의 광풍 앞에서 노동조합을 혁명적 기관으로 재편하는 것. 그래서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는 계급투쟁을 조직된 노동자운동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것, 그래서 계급투쟁을 혁명으로 전진시키는 것, 이것이 오늘날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과제이며,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인간해방을 이루고자 하는 모든 투사들에게 제안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전략이다. 끝. [미주] [1] 1979년 영국 마거릿 대처의 집권, 1981년 미국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 1983년 칠레 피노체트 군부 쿠데타 등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장면들이다. 자세한 내용은 10강을 참조. [2] 그런데 사실 생산성이 더 이상 획기적으로 증대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이윤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는 것은 자본의 입장에서는 절망적인 사실일지 모르나, 사회적 필요의 관점에서는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 8강(기후위기와 민주적 계획경제)에서 논하였듯이, 우리에겐 급속한 탈성장이 필요한 부문과, 급속한 성장이 필요한 부문(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이윤에 도움이 별로 되지 않기 때문에 투자되지 않는 산업, 예컨대 돌봄과 의료산업 등)이 있다. 이윤의 축적이라는 목표로부터 자유롭게, 인류의 필요에 따라, 자연과의 공존을 고려한 계획적 생산체계를 구축하는 게 오늘날 경제의 핵심과제다. 이를 수행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자본가계급의 모든 권력을 박탈하는 것이다. [3] 정확히 말하면 이는 마이클 로버츠의 주장이 아니라, 다보스포럼, 세계은행 등 자본가계급 경제엘리트들의 분석을 요약한 것이다. [4] Michael Roberts, 2024, Davos and the melting world economy, https://thenextrecession.wordpress.com/2024/01/16/davos-and-the-melting-world-economy/ [5] Michael Roberts and Jason Koslowski, 2025, Is a Major Slump on the Way? An Interview with Marxist Economist Michael Roberts,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is-a-major-slump-on-the-way-an-interview-with-marxist-economist-michael-roberts/ [6] Michael Roberts, 2024, Davos and the melting world economy, https://thenextrecession.wordpress.com/2024/01/16/davos-and-the-melting-world-economy/ [7] 같은 글. [8] Redacción internacional, 2025, La rebelión de una generación contra la corrupción en Nepal, La Izquierda Diario, 양동민 역, 「네팔: 부패에 맞선 한 세대의 반란」,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269 [9] 양준석, 2024, 「아르헨티나, 극우정권의 초긴축 실험에 맞서 노동자의 반격이 시작되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702 [10] Ben Marenlensky and Hilda Frost, 2025, Why Are Trans Rights Under Attack and What Can We Do About It?,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why-are-trans-rights-under-attack-and-what-can-we-do-about-it/ [11] IMF,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을 뜻한다. 그리스가 2001년 유로존에 가입한 뒤 그리스는 독일의 가격경쟁에 밀려 제조업이 붕괴하였고, 그 대신 관광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유로화 부채를 빌려 건설업 과잉투자가 벌어졌는데,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트로이카는 그리스에 유로화 부채를 상환하라며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댓가로 긴축정책을 요구했다. 이는 자본주의로 인해 발생한 금융위기의 비용을 그리스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이 긴축요구를 받을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가 급진좌파연합(시리자) 집권 이후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10강 참조) [12] Joa Kim, 2024, 양준석 역, 「극우파 저지에 매몰돼 신인민전선을 지지한 프랑스노총(CGT) - 계급적 원칙을 저버린 잘못된 사례」,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003 [13] 양준석, 2025, 「세계적인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주고받기,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248 [14] 그런데 다른 대륙과 달리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선 이런 극우와 민주정권의 주고받기가 잘 관찰되지 않는다. 이는 이미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오랫동안 극우 정권이 집권하며 계급투쟁을 강력하게 억눌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제국주의 제2의 강대국인 중국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제약돼있고, 노동자들은 자주적인 노동조합 결성권도 없다. 이들 국가에서는 노동자들의 취약한 조직화 수준 때문에 심각한 착취와 수탈에도 불구하고 정치세력이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 코로나 봉쇄 당시 억압적인 정책에 맞선 백지시위, 최근 몇 년 간 아시아 여러 국가들에서 연이은 민중투쟁은 아시아의 권위적 극우 정권들을 위기로 몰고 갈 가능성을 드러낸다. [15] 같은 글. [16] Samuel Karlin, 2023, Joe Biden Is Building Trump’s Border Wall,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joe-biden-is-building-trumps-border-wall/ [17] M. Carlstad, 2023, Biden Won’t Stop Climate Change,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biden-wont-stop-climate-change/ [18] Charlotte White, 2023, Biden’s New Title IX Proposal Is a Move to Whip Votes, Not Protect Trans Kids,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bidens-new-title-ix-proposal-is-a-move-to-whip-votes-not-protect-trans-kids/ [19] Ben Marenlensky and Hilda Frost, 2025, Why Are Trans Rights Under Attack and What Can We Do About It?,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why-are-trans-rights-under-attack-and-what-can-we-do-about-it/ [20] ‘자라 바겐크네히트 동맹(Bündnis Sahra Wagenknecht)’이라는 정당으로, 독일 좌파당(Die Linke)에서 2023년 갈라져나왔다. 이른바 ‘좌파’로 분류되지만, 이민자를 반대하며 실상 독일 노동자계급‘만’의 권리를 옹호하는 반동적 민족주의 노선을 취하고 있다. [21]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hristlich Demokratische Union Deutschlands), 혹은 ‘기독교민주당’으로 불리는 우파 성향의 정당이다. [22] 독일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전통적 개량주의 중도좌파 성향의 정당이며, 2차 인터내셔널 당시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한 바로 그 사회민주당이다. [23] 독일 자유민주당(Freie Demokratische Partei),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중도우파 정당이다. [24] 2024년 8월 23일, 시리아 난민이 서독 졸링겐 지역의 공공 축제장에서 칼로 3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25] 1985년 솅겐 협정(Schengen Agreement)을 통해 유럽 각국은 공통의 출입국 관리 정책을 사용하여 국경 시스템을 최소화해 국가 간의 통행에 제한이 없게 한다는 내용을 담은 협정을 체결했다. 솅겐국가는 이 조약이 적용되는 국가들을 의미한다. 즉, 독일로의 이동이 자유로운 인접 국가들을 의미한다. [26]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hristlich-Soziale Union). 바이에른 주 지역정당으로, 기독교민주연합(CDU)과 유사한 정치성향을 가진 자매정당이다. [27] Nathaniel Flakin, 2024, Germany’s Center-Left Government Prepared the Victory of the Far-Right AfD,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germanys-center-left-government-prepared-the-victory-of-the-far-right-afd/ [28] 양준석, 2025, 「세계적인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주고받기,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248 [29] 필자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윤석열 정부 시기 예비군 훈련 교육영상에서도 ‘힘에 의한 평화’ 슬로건과 함께 이스라엘의 ‘전국민 군사화’에 따른 대규모 예비군 동원력을 본받아야할 점으로 강조했다. [30] Enzo Tresso, 2025, Israël, pointe avancée de la contre-révolution, Revolution Permanente, Translated by James Dennis Hoff,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israels-genocide-is-fueling-reactionary-politics-around-the-world/ [31] 추격국인 중국이 미국의 쇠퇴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이고 있지만, 중국 자본주의 또한 여러 위기에 봉착해있음을 지적하는 것 또한 필요하겠다. 즉 미국의 헤게모니가 추락하고 중국이 상대적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중국 또한 이미 쇠퇴적 양상을 여러 측면에서 보이고 있다. 오늘날 중국의 상황과 관련해서는 다른 기회를 통해 자세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32]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소련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과의 평화공존론을 내세우자 중국에서도 탈마오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의 대중봉기를 소련이 탱크로 진압하는 걸 보면서는 더욱 큰 위협을 느꼈다. 소련은 중국으로 하여금 농업생산에 집중하며 소련에게 종속된 하위파트너로서의 역할을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으로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중국 자체의 독자적인 공업발전의 의지를 표명했다. 1964년 첫 번째 원자폭탄 실험, 1970년대까지 지속된 삼선건설 프로젝트 등도 소련으로부터 독립적인 ‘일국사회주의’를 추구하려는 시도였다. [33] 아래는 2019년 당시 폭발하던 계급투쟁을 묘사한 글의 일부다. “알제리와 수단에서 수십만 명, 어쩌면 수백만 명이 제국주의 지배자들에게 봉사하는 끝없는 독재에 맞서 들고 일어나, ‘아랍의 봄’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15년간의 전쟁과 미국의 점령으로 황폐해진 이라크에서는 실업과 궁핍한 생활조건에 항의하는 대중시위가 벌어졌다. 백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시위는 나흘간 이어졌다. 레바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분노한 사람들이 하리리 정부의 퇴진을 요구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홍콩에서 수천 명이 몇 달째 시위를 이어왔다. 홍콩은 비즈니스 천국이지만, 인구의 압도 다수가 느끼는 사회적 불평등은 견디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 스페인의 카탈루냐 독립운동도 다시 활성화됐다. 거기서는 스페인의 반동적인 군주정에 맞서는 진정한 반란이 진행 중이다. 스페인 정부는 카탈루냐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부과하려 한다. 이런 저항의 물결이 라틴아메리카에 당도했다. 이는 정세의 변화를 보여주는 신호다. 푸에르토리코에서는 대중이 반란을 일으켜 정부를 무너뜨렸고, 미국의 식민지배에 도전했다.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아이티에선 조베넬 모이즈 정부에 대항한 반란이 일어나 몇 달째 지속됐다.” Claudia Cinatti, 2019, The Return of the Class Struggle, Left Voice, 오연홍 역, 2019, 「번역 | 계급투쟁의 귀환」, 노동해방투쟁연대(준), https://nht.jinbo.net/bbs/board.php?bo_table=online1&wr_id=499. [34] 희생자들은 중국의 엄격한 코로나19 제한조치로 인해 화재현장을 탈출하지 못했다. [35] Sybil Davis, 2022, Social Justice Unionism: How ‘Generation U’ Is Building Class Solidarity , Left Voice, 양준석 역, 2022, 「번역 I 사회정의 노동조합주의: ‘U세대’가 계급적 연대를 구축하는 방법」, 노동해방투쟁연대(준), https://nht.jinbo.net/bbs/board.php?bo_table=online1&wr_id=1143 [36] Arthur, 2023,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양동민 역, 「프랑스 사회주의자에게 직접 듣는 연금개악 반대 투쟁」, 2023 정치캠프 '위기·전쟁·혁명’ 자료집, 55p~83p,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513 [37] 3월 6일부터 수도권(일-드-프랑스, Île-de-France)에서 쓰레기 수거, 하수처리, 쓰레기 소각을 담당하는 청소노동자들이 갱신파업에 돌입했다. 3월 12일, 파리 시청은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만 5,400톤이라고 발표했다. [38] (연금개악에 반대해 온)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대표 마린 르펜도 쓰레기수거 업무복귀명령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학생, 은퇴자, 철도, 에너지 등 광범한 연대세력이 파업거점에 합류해 쓰레기수거 노동자들을 방어했다. [39] 업무복귀명령을 위반시 6개월 징역과 10만 유로 벌금(약 1억 4천만원)에 처해진다. [40] 3월 중하순, 정유공장 파업으로 공항의 연료가 2일치밖에 안 남아서 비행편 30%가 취소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41] 1월부터 3월까지 열린 많은 집회에서는 탄압이 크지 않았다. 집회는 대중적이면서, 매우 조직적이고, 또 매우 조용했다. 그러나 무기한 파업을 시작한 후, 특히 긴급명령권을 발동한 이후에 집회는 급진화했고, 탄압도 덩달아 심해졌다. 그래서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위해 많은 시위를 벌이는 게 중요해졌다. [42] 연속혁명은 2차 총파업이 1월 31일(화)로 잡힌 상황에서 정유·철도·교사 등 핵심 부문들에서 31일부터 이틀짜리로 파업을 시작하되 매일 총회에서 연장 여부를 결정하는 파업방식(갱신파업)을 제안했다. 또 모든 노동자들을 모아낸 총회 또는 기업간·부문간 연합총회(총파업 네트워크)를 통해 아래로부터 주도성을 건설해 파업과 시위를 급진화하기 위한 실천들을 제안했다. 아울러 핵심 부문들의 적극적인 역할 속에서 조직력이 취약한 부문의 노동자들을 투쟁에 끌어들일 방안도 모색할 것을 제안했다. [43] 1월 28일, 연속혁명 주도로 노조원들·활동가들·개인들 300여 명이 연서명하여 무기한 파업 준비를 호소하는 칼럼을 르 저널 드 디망쉬(Le Journal du dimanche)에 발표했다. https://www.lejdd.fr/politique/tribune-retraites-300-syndicalistes-intellectuels-et-militants-appellent-generaliser-la-greve-132085 [44] 3월 2일 파리에서 150~200여명이 모인 총파업 네트워크 미팅이 진행됐다. [45] 이후 3월 13일 총파업 네트워크 주최로 정유·에너지·항만·철도 등의 갱신파업을 전체 총파업으로 발전시킬 긴급한 필요성에 응답하기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정유, 공항, 철도, 청소, 학생 등 600여 명이 참여했고, 파업 중인 부문의 대표자들이 다수 참석해 강력한 투쟁 분위기를 형성했다. 3월 21일에는 총파업 네트워크 주최 3차 토론회가 개최됐다. 파리교통공단, 국영철도, 청소, 핵발전소, 전기, 공항, 교육, 제조업(에어버스, 사이델, 사프란, 스텔란티스, 사노피, 생고뱅 등), 학생 등 300여 명이 참여했다. 이 토론회에서 △탄압에 맞서기 위한 광범한 연대망 구축 △연행자 발생시 경찰서 앞에서 대중적 항의 조직 △업무복귀명령 강제하려는 경찰 침탈에 맞서 수많은 대중들로 입구 틀어막기 등 강화되는 탄압에 맞설 방안들이 토론됐고, △승리의 가능성이 열렸다 △연금개악 철회를 넘어 불안정노동 철폐로 나아가야 한다 △이주민 정책 개악에 맞서야 한다 등의 주장들이 제기됐다. 토론자들은 △파업의 확산 △탄압에 맞선 방어전선 구축 △전면적인 총파업을 위한 행동위원회 건설 호소를 결의했다. [46] 아델 에넬은 13세 때 《악마들》로 데뷔하였고, 《라폴로니드: 관용의 집》, 《수잔》, 《싸우는 사람들》, 다르덴 형제의 《언노운 걸》,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출연하였다. 아델 에넬은 현재 가자로 향하는 글로벌 수무드 함대에 승선해있다. [47]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1215620.html [48] 양준석, 2025, 「12·3 이후 극우세력의 준동과 노동자계급의 대응방향」,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137 [49] 김미옥, 2025, 「민주노총 82차 정기대의원대회 후기 - 수정동의안에 담긴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싸워나갈 것이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135 [50] 내란-극우세력 청산! 사회대변혁! 노동자세상 총파업 조직화 공동행동에서 2025년 3월 22일 발행한 「3월 27일 하루 총파업을 시작으로, 4월부터는 전면적인 사회적 총파업으로 윤석열 정권을 끝장내자!」 유인물 내용 중 일부이다. https://general-strike-network-korea.notion.site/3-22-1bda4691f4488057b28fe336047b5750?source=copy_link [51]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는 정의당보다 왼편의 세력, 즉 사회대전환연대회의 소속으로 출마해 완주했고, 34만 4,150표를 얻었다. 사회대전환연대회의가 민주당으로부터 독립적인 정치세력화를 표방했다는 점, 노동권 확대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등 권영국 후보가 제시한 공약이 큰 틀에서 진보적이라는 점, 권영국 후보가 투쟁현장을 찾으며 노동자계급과의 연대 의지를 드러낸 점은 노동자 계급정치 확대의 측면에서도 분명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권영국 후보의 한계 또한 분명했다. 과거 정의당의 민주당 종속성과 함께, 사회대전환연대회의 내 일부 세력의 민주당 종속성 역시 문제였다. 노동자의 희생을 통한 기업살리기에 민주노총을 동원하려는 시도였던 '코로나19 위기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안'을 문재인 정부와 손잡고 민주노총에 관철하고자 했던 세력이 버젓이 사회대전환연대회의에 포함된 상황은, ‘민주당과 독립적인 정치세력화’라는 후보의 의미를 퇴색시키기도 했다. 사회대전환연대회의 권영국 후보가 제시하는 공약 전반은 자본주의 안에서의 개혁, 그것도 불충분한 개혁에 머무르고 있으며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인식 또한 결여하고 있었다. 그 결과, 최저 출생률과 최대 자살률이 상징하는 삶의 위기 앞에서도 자본주의 그 자체에 맞선 투쟁이 아니라 증세와 제도개혁을 통한 분배 확대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자체에 문제제기 하지 않는 권영국 후보의 한계는, 노골적인 민족주의와 반생태적 내용으로 채워진 국방·통일·외교통상 공약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중에게 무엇인가를 분배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지불능력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민주의의 본질적 한계가 반동적으로까지 드러난 대목이다. 석유·가스·희토류 등 러시아 극동 자원개발에 참여한다는 공약은 노골적 추출주의(extractivism)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기후정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특히 '러시아 북극항로 개척'으로 조선·물류산업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은, 북극항로 자체가 기후위기로 인한 해빙으로 열렸다는 점에서 기후재난을 이윤축적의 기회로 삼겠다는 반생태적 발상이다. 나아가 북극항로는 미·중·러 열강이 격돌하는 지정학적 투쟁 공간이라는 점에서, 제국주의 열강투쟁 격화라는 시대인식 자체를 결여하고 있다. 이런 시대인식의 부재는 ‘한국형 모병제 도입으로 30만 정예 강군 달성’이라는 공약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모병제는 전쟁의 시장화다. 필요한 것은 대대적 군축이지 모병제 도입이 아니며, 그 목적 또한 ‘정예 강군’ 육성이 아니다. 이것도 모자라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신경제구상'을 계승하겠다는 공약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민주당으로부터의 독립성은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출발이나,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백종성, 2025, 「죽어야 할 것들이 살아남아 현실을 짓누른다 - 21대 대선이 드러낸 노동자계급의 과제」,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211. [52]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1948, 『공산당 선언』, 2018, 책세상, 이진우 역. [53] 「UAW 전미 자동차 숀 페인 위원장의 이중성」,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지엠지부 자유게시판, https://gmno.or.kr/bbs/board.php?bo_table=new2_03_1&wr_id=57549&sca=&sfl=&stx=&sst=&sod=&spt=0&page=30 [54] 일종의 미국식 비정규직 제도인데, 특정 시점 이후 입사자의 임금수준을 달리 책정하는 것이다. 실제 빅3 공장에는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노동자들이 여러 개의 등급(tier)으로 나뉘어져있고, 차등적인 임금을 지급받는다고 한다. 이중임금제는 UAW가 2007년 합의한 결과에 따라 도입되었는데, 숀 페인 집행부는 이를 핵심 문제로 내걸고, 실제로 일정하게 차별을 완화한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55] “Unite All Workers for Democracy”(민주주의를 위한 모든 노동자의 단결)의 약자이다. UAWD는 지난 2025년 4월, 조직 내 좁혀지지 않는 이견으로 인해 해산을 결정했다. 아마도 이러한 결정은 숀 페인 위원장의 트럼프 민족주의 지지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56] “전미자동차노조 위원장 숀 페인은 3월 26일 트럼프가 미국 시장에 들어오는 승용차와 트럭에 대한 주요 관세를 발표하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수십 년간 노동자 공동체를 파괴해 온 자유무역 재앙을 끝내기 위해 행동에 나선 트럼프 행정부를 환영한다.” 전미자동차노조는 자동차 관세가 ‘미국 내 생산 회귀를 이끄는 가운데, 일자리를 해외로 이전하고 지역 경제를 황폐화한 정책으로부터 손해 입은 블루칼라 지역사회를 회복시키는 조치’라 주장한다. 숀 페인은 북미에서 판매되는 폭스바겐 자동차의 75%가 멕시코에서 생산된다며 고율 관세로 매우 짧은 시간에 이 생산을 다시 미국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용덕, 2025, 「애국주의 물결에 휩쓸리는 금속노조 - 지배자들과 한배를 타고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킬 순 없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234 [57] James Dennis Hoff, 2024, Beyond Reform: The Limits of the New Labor Bureaucracy, Left Voice Magazine, April 2024, https://www.leftvoice.org/beyond-reform-the-limits-of-the-new-labor-bureaucracy/ [58] Julia Wallace, 2025, Julia Wallace: “Class Collaboration Is Working-Class Submission.”,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julia-wallace-class-collaboration-is-working-class-submission/ [59] Julia Wallace, 2025, “Selena Would Be Right Here with Us”: Dispatches from Los Angeles,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selena-would-be-right-here-with-us-dispatches-from-los-angeles/ [60] Julia Wallace, 2025, Julia Wallace: “Class Collaboration Is Working-Class Submission.”,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julia-wallace-class-collaboration-is-working-class-submission/ [61] Trotsky, 1940, Trade Unions in the Epoch of Imperialist Decay, Fourth International Vol.2, 1941, https://www.marxists.org/archive/trotsky/1940/xx/tu.htm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