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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운사 연재 7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1987년 대투쟁은 석 달 만에 사그라졌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88~89년 노동자들은 폭발적인 투쟁을 이어가며, 계급의식과 단결을 발전시켜 나갔다. 민주노조가 양적으로 크게 확대됐을 뿐만 아니라, 지역별·업종별 연합조직 건설을 통해 질적으로도 크게 발전했다. 노동자들은 특히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는 과정에서 지역 차원의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을 강력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사진: 1988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였다.) 이전 편 보기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 1) 지역별·업종별 민주노조 연합조직 건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수그러든 이후에도 한동안 노동조합과 조합원 수가 크게 늘어났다. 1987년 6월 2,742개이던 노동조합 수는 1987년 말 4,104개, 1989년 말 7,861개까지 늘어났다. 1987년 6월 105만 명이던 조합원 수는 1987년 말 127만 명, 1989년 말 193만 명(조직률 19.8%)까지 늘어났다.[1] 특히 1987년 노동자대투쟁 동안에 상대적으로 대공장에 노동조합 설립이 집중됐던 것과 달리, 1988~89년 동안에는 수많은 중소 사업장에서 노동조합 설립이 봇물처럼 이어졌다.[2] 1987년 6월 이후 1989년 말까지 5천여 개의 노동조합과 88만 명의 조합원이 추가됐지만, 그 모두가 민주노조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1989년 말을 기준으로 민주노조운동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사무전문직을 망라할 때 대략 1천 개의 노동조합과 40만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들 사이에 형성된 유대는 1988~89년을 거치면서 지역별 또는 업종별로 민주노조들의 연합조직을 건설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제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투적인 지역연대 투쟁을 주도한 민주노조들은 지역별 연합조직으로 결집했다. 1987년 12월 14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을 시작으로 진주, 서울, 인천, 성남, 전북, 대구, 경기남부, 광주, 부천, 부산·양산, 대전, 동광양, 구미, 울산, 거제 등 모두 16개 지역에서 ‘지역별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 형태의 민주노조 연합조직이 건설됐다. 각 지노협에서는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선 직접적인 연대투쟁이 조직의 결성과 운영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지노협 설립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 1987년 12월 14일 진주지역민주노동조합연합(진주노련) 1988년 4월 16일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 1988년 5월 29일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인노협) 1988년 6월 18일 성남지구노동조합총연합(성남노련) 1988년 6월 25일 전라북도노동조합연합회(전북노련) 1988년 8월 21일 대구경북지역노동조합연합(대경노련) 1988년 12월 7일 경기남부지역노동조합연합(경기노련) 1988년 12월 28일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광노협) 1989년 3월 5일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부노협) 1989년 7월 22일 부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부산노련) 1989년 9월 30일 대전지역민주노조협의회 준비위원회 1989년 말 거제지역노조탄압 공동대책위원회 구미지역노동조합대표자회의 동광양시민주노조협의회 울산지역노동조합협의회 준비위원회 실질적 상급단체의 필요성을 인식한 ‘청년노동자회’ 및 7·8월 대투쟁에서 급부상한 몇몇 노조대표자들은 1987년 11월 18일 ‘마창노련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적 조합운영과 조합활동을 위한 지역 연대조직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 추진과정에는 경노협과 같은 노동운동단체나 지역활동가, 해고노동자 등 선진노동자 역량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실제 마창노련이 다른 지역보다 빨리 지역연대조직을 결성할 수 있었던 특수성 혹은 유리한 점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결성주체들이 대중적 토대를 갖고 있었다는 점과 노동운동 활동가와 연결될 수 있었던 점일 것이다. … {1988년 초} 마창노련은 첫 대중 연대사업으로 임투 공동교육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마창노련은 사무실도 없고 상근자도 없는 달랑 이름 하나뿐인 단체였다. … 마창노련은 가입비가 없었기 때문에 위원장들이 각자의 호주머니를 털어 겨우 운영비나 경비를 충당할 정도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마창노련 초기 위원장들은 자발적, 적극적으로 나서 교육을 준비하였다. … 이러한 교육은 마창노련만이 아니라 마창지역 각종 단체들(경남노동자협의회, 가톨릭노동문제상담소, YMCA, 성공회, 남도민족교육원, JOC, 배움의 집 등)에서도 담당하였고, 어디나 신청자가 쇄도하여 선착순으로 짤라야 할 정도로 호응이 높았다. 단체에서의 노동자교육은 단지 임금교섭에 관한 지식이나 실무역량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의식향상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 공동임투교육이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끝나자 조합원들에게도 광범위한 교육이 실시되어야겠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리하여 1988년 2월 11일 <마창노련신문>이 창간되어 창간호 2만 부가 발행되었다. 노동자의 투쟁소식을 활자로 전달하는 신문이 거의 없었던 당시, <마창노련신문>은 단연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노동자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였고, 특히 마창노련 조합원들에게는 ‘우리 신문’으로서의 자랑과 긍지 그리고 각별한 애정의 대상이었다. … 마창노련 신문이 발행되자 각 노조에서도 교육지, 노보 및 소식지, 대자보, 속보, 그밖에 ‘부서지’와 ‘현장지’ 등을 잇달아 경쟁적으로 발행하고, 긴급 사안에 따른 유인물도 자체적으로 제작 배포하는 등 교육선전 활동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각 노조마다 경쟁적으로 내용의 질적·양적 수준을 높이기 위한 욕구가 높아짐에 따라 마창노련 편집교류회와 교육선전국 활동도 활성화되어 교육선전과 편집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교환하고 의식 향상을 위한 자체 교육이 날로 확대되었다.[3] 1989년 8월 마창노련은 39개 노조, 3만 2천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조직으로 급성장하였다. … 마창지역 전체 노조의 12.5%에 불과하지만 조합원 수로는 마창지역 전체 조합원 중 약 1/3을 결집하고 있는 높은 수치였다. 나아가 공단에서는 조직노동자의 40% 이상을 포괄하고 있어 마창노련의 조직력은 타 지역 민주노조협의회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또한 마창노련은 단위조합당 평균 조합원 수 약 800명으로 대공장이 조직의 기본축이었다. … 조합원 1천 명 이상인 노조도 11개(창원공단 4개)에 달했다. 여기에 마산과 창원 두 공단이 산업적 동일성이 뚜렷한 특성을 갖고 있어 공단 내의 광범한 중소부품업체를 하청계열화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마창노련 가입 노조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컸다. 마창노련은 마창공투본을 결성하면서 미가입 사업장들까지 견인하여 활동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 결과 공동 임투 기간 동안 공투본 소속 조합원들은 마창투본의 방침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경향을 보였고 급기야 마창노련 가입 여부가 노조의 성격을 민주냐 어용이냐로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어갔다. 이는 마창노련이 명실상부한 사실상의 마창지역 노동자의 상급단체로 자리를 굳힌 것을 의미하였다. 이렇듯 창립 이후 2년 사이에 마창노련의 조직확대 기반은 엄청나게 넓어졌다. 이에 따라 조합원들의 연대의식과 투쟁의식도 몰라보게 급성장하였다. 이는 마창공투본 결성으로 선진사업장과 그렇지 못한 사업장 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잦은 공동집회와 공동투쟁을 통해 각 노조와 간부들 간의 의식의 편차가 줄고 기본적인 수준에서 공동행동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대활동 자체가 노조의 일상활동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노조간부만이 아니라 일반조합원들까지도 기업별 조합주의를 뛰어넘는 연대의식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합원 중심의 조직력, 투쟁력이 강화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공권력을 상대로 한 직접적인 대중투쟁 과정에서 3자 개입 개념이 사실상 무력화되고, ‘공안합수부 해체’나 ‘노태우정권 퇴진’ 요구 등 정치권력의 계급적 속성을 인식하게 되자 조합원들의 정치의식 변화 역시 뚜렷하게 드러났다.[4]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는 1988년 5월 29일 서울지역의 45개 민주노조 1만 8,000여 명의 조직으로 출범하였다. 서노협은 몇몇 선진 운동가들의 논의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맥스테크사 위장폐업 철회투쟁, 청계피복노조, 인쇄노조, 제화노조 등 일련의 지역노조 합법성 쟁취투쟁, 그리고 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부당해고 철회에 맞선 지역 연대투쟁을 거치면서 탄생한, 그야말로 ‘투쟁을 통한 대중조직 건설’의 원칙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조직이었다.[5] 사무전문직과 서비스업을 기반으로 한 민주노조들은 대체로 업종별 연합조직으로 결집했다. 1987년 11월 27일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을 시작으로 출판, 화물, 언론, 병원, 시설관리, 지역의료보험, 교직원, 전문기술, 건설, 대학교직원 등 모두 11개 업종에서 ‘업종별노동조합협의회’(업종협) 형태의 민주노조 연합조직이 건설됐다. 각 업종협에서는 동일 직종의 유대감을 토대로 한 공동의 사업과제 모색이 중심 역할을 했다. 업종협 설립일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1987년 11월 27일 병원노동조합협의회(병원노련) 1987년 12월 12일 민주출판노동조합협의회(민출노협) 1988년 1월 19일 연구전문기술노동조합협의회 1988년 7월 16일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론노련) 1988년 11월 26일 전국건설노동조합협의회 1988년 12월 10일 외국인기업노동조합협의회 1988년 12월 11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1989년 5월 28일 전국대학교직원노동조합협의회 전국화물운송노동조합협의회 시설관리노동조합협의회 1987년 7·8월 이후 불과 1년여 사이에 결성된 180여 개의 병원노조는 신규노조로서의 어려움과 취약성을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1987년 12월 12일 ‘병원노동조합협의회’(병원노협)를 결성했다. 병원노협은 단위노조 간의 정보와 경험의 교류, 지원활동을 추진하며 전국에 지역협의회를 조직하여 전국적 조직체로 결집되었다. 그러나 탄압에 대한 공동대처와 위장 휴·폐업,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연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협의회에 대한 요구는 커지는 반면 공식적 상급단체가 아닌 점, 단위노조 지원에 대해 외부불순세력 혹은 제3자 개입이라는 탄압을 받고 있었다는 점, 단위노조 간부가 병원노협 임원을 겸임함으로써 집행력이 제대로 확보되지 못한다는 점, 재정적으로 병원노협 분담금으로는 활동이 어려운 점을 들어 ‘병원노동조합연맹’(병원노련)을 건설하게 되었다.[6] 1987년에 3,749건을 기록한 파업 건수는 1988년에 1,873건, 1989년에 1,616건으로 거센 흐름을 이어갔다. 힘차게 지속된 노동자들의 파업은 대부분 1987년 대투쟁 때처럼 전투적인 공장점거로 시작됐고, 많은 사업장에서 파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총회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작동했다. 자본가들이 노동조합 지도자를 매수해 직권조인으로 파업을 종결시키려고 자주 시도했는데, 많은 경우 노동자들이 매수된 지도자를 불신임하고 새로운 지도부를 세워 파업을 이어갔고 종종 결국 승리하기도 했다. 또한 자본가들이 구사대와 전투경찰을 동원해 파업을 침탈하고 탄압하는 데 대해, 노동자들은 정당방위대·선봉대 등을 조직하여 맞섰고 나아가 사업장의 경계를 넘어선 연대투쟁을 활발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노동자 투쟁은 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이었으며, 여기에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울산 지역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연대했다.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들이 1988~89년에 벌인 몇 차례의 지역연대 총파업도 두드러진 투쟁이었다. 그 밖에도 부천, 서울, 인천, 경기남부 등에서도 지역 총파업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2) 1988년 11월 최초의 전국노동자대회 1988년 10월 6일 전국의 민주노조들과 노동단체들은 노동악법 철폐가 노동자계급의 핵심적인 당면 투쟁과제임을 공유하고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를 결성했다.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의 결성으로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노동법개정 투쟁의 열기는 드디어 10월 9일 전국의 3대 명산을 노동악법 철폐의 함성으로 뒤덮으며 11월 13일 전국 노동자의 총궐기를 예고하였다. 전국의 1만여 노동형제들이 북한산, 화왕산, 대둔산으로 총집결하여 노동자를 억압하는 현행 노동악법을 완전 철폐하여 노동해방의 그날을 앞당길 것과 이를 위해 전국적인 노동법개정 서명운동에 돌입할 것, 11월 13일 여의도로 진군하여 노동악법을 옹호하는 망국 민정당과 전국경제인연합을 규탄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각 지역에서는 웅변대회, 노래대회 등 다양한 행사로 노동법개정의 열기를 높여나갔으며, 이런 지역단위 활동의 성과를 한데 모아 10월 29~30일 양일에 걸쳐 서울, 인천, 광주 등 전국 6개 지역 5,000여 노동형제들이 노동악법 개정을 요구하며 가두시위 등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10월 9일 이후 전국적으로 동시에 진행된 노동법개정 서명운동은 서명 개시 불과 한 달 만에 10만 명을 돌파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었다. 특히 11월 들어 시작된 가두서명은 전두환·이순자 구속처벌을 위한 서명운동과 결합되면서 폭발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아 서울에서만 5일간 14,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내는 성과를 이룩했다. 이러한 대중투쟁의 활성화에 힘입어 서울, 인천 등의 의장단은 11월 2~4일 간에 야3당 당사를 순회하며 야3당이 노동법개정 투쟁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요구하는 단식농성 투쟁을 벌였으며, 이러한 의장단의 헌신적인 투쟁에 대해 서노협 소속 노동자 2,000여 명이 국회의사당으로 집결, 노동법 개정을 요구하며 야3당의 기회주의적 작태를 규탄함으로써 11월 13일 전국 노동자들의 총투쟁을 향한 디딤돌 역할을 해냈다.[7] 1988년 11월 13일에는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자대회’가 전국에서 결집한 5만 노동자의 참여 속에 서울에서 열렸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전국노동자대회였으며, 지금까지 매년 11월 지속되고 있는 전국노동자대회의 출발점이었다. 대회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이렇게 전국의 노동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는 것은 크나 큰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인식했으며, “여기에 있는 우리 노동 형제뿐만 아니라 천만 노동 형제들의 가슴 속에 우리 전태일 선배님은 살아오고”[8] 있다면서 스스로를 전태일의 후예로 규정했다.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는 11월 12일 밤 연세대에서 전야제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저녁 8시에는 ‘전태일 노동상’ 시상식이 열려, 수상자인 권용목을 대신해 권처흥 아버님이 수상하였다. 밤 11시에는 조합원 2,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웅변대회’가 개최되었다. 서울, 인천, 부산, 울산, 부천, 전북 등 전국에서 선발된 9명의 연사가 참여한 이 대회에서는 인천지역의 허재호(인천 일용공노조 소속)가 1등인 노동해방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밤 11시에는 전국노동조합 대표자회의가 개최되어 전국 100여 곳의 단위사업장 위원장들과 20여 명의 노동운동단체 대표가 참여하여 11월 13일 대회전술과 투쟁방침을 확정지었으며, 11월 13일 새벽 2시에는 선봉대 발대식이 진행되었다. 또한 지방에서 상경한 대오가 계속해서 도착했는데, 새벽 3시경에는 마창지역 노동자들 800여 명이, 다음 날 아침 7시경에는 현대중공업 조합원 600여 명 등 각지에서 연세대로 속속 집결하였다. … 본 대회에 앞서 오전 10시에는 ‘노조탄압분쇄 전국노동자대회’가 사전 결의대회로 연세대 민주광장에서 5,0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본 대회 입장식은 한 시간 이상 소요되었으며 연세대 노천극장을 완전히 메웠다. 4만 명의 조합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노동악법 철폐하여 노동해방 앞당기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2시간에 걸친 집회를 마쳤다. 또한 집회를 마친 후, 녹십자병원을 비롯한 ‘위장폐업분쇄 공동투쟁위원회’ 소속 노동자들이 ‘노동해방’이라는 혈서를 쓰고, 그 혈서를 앞에 들고 여의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 30분부터 시작된 행진은 “악법철폐”, “민주쟁취”,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끝장내자”, “구속 전두환, 퇴진 노태우”, “해체 전경련, 타도 민정당”, “악법철폐, 노동해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2시간 동안 계속되었으며, 오후 6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 개정 촉구대회’에는 대오가 더욱 불어나 대략 5만여 명이 참가하였다. 오후 8시에는 전경련 앞에서 각 대오별로 ‘노동악법 개정 반대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가 개최되었고, 귀가하던 노동자들에 대한 백골단의 폭행에 맞서 영등포역 앞에서 가두투쟁이 전개되었다.[9] 일찍이 그 누가 노동자들의 이 엄청난 힘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보라, 저 끝없이 출렁이는 노동자의 물결을! …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말씀은 노동자들이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것이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노동3권 보장하라! 한다고 누가 보장해 줍니까? 야당이 노동3권 보장하지 못해요.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힘을 가지고 있으면 보장해 달라고 부르짖지 않아도 자연히 이루어진다고. 우리가 모든 것을 우리 힘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짜 위대한 노동자인 것입니다.” … 연세대 노천극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감격! 5만여 노동자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어깨들에서 자신의 힘을 느꼈다. 민중의례와 대회 경과보고, 전국교사협의회 투쟁보고, 투쟁선언, 지지연설에 이어 선봉대 결의로 이어지는 대회 내내 노동자들은 목이 터져라 ‘계승하자 열사정신! 철폐하자 노동악법!’,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열사정신 계승하여 노동해방 쟁취하자!’를 외쳐댔다. 두 팔을 치켜 올리고 목이 터져라 부르는 노래, 노동자가 부르는 노래, 노동노래를 처음으로 대중적인 모임에서 부르게 된 것이다. ‘전태일 추모가’, ‘파업가’, ‘동지가’, ‘광주출정가’의 울림은 어느 때보다도 처절하고 힘찼다. 선봉대 선서 후 선봉대원들과 인천 세창물산 노동자들이 나와서 흰 광목천에 ‘노동해방’ 혈서를 써내려 갔다. 그 숙연했던 분위기, 피로 쓴 ‘노동해방’을 단상 앞에 들고 다함께 노동해방을 외쳤다. 노동자의 단결, 연대, 투쟁. 바로 이것이 노동해방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행진을 시작했다.[10] 노동자들은 이날 발표한 투쟁 결의문을 통해 “지난해 7·8·9월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힘에 놀란 독재 정권과 독점 자본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5백여 개의 민주노조가 건설돼 단위 사업장을 뛰어넘는 강고한 연대가 구축되었다”고 밝히고, “여기 모인 4만여 노동자들은 노동악법을 기필코 개정하고 나아가 모든 노동탄압의 근원인 독재 정권을 타도하라는 1천만 노동자의 준엄한 명령을 받은 선봉으로서 독점재벌, 독재정권과의 투쟁을 가열차게 전개, 기필코 노동해방을 쟁취하고야 말겠다”고 선언하였다. 수만 명의 무장병력으로 연세대를 에워싸고 행진대열이 신촌 로타리에 이르렀을 때 행진 선두를 차단하려고도 했던 경찰은 노동자·시민들의 비장한 분위기와 위세에 눌려 곧바로 길을 열어주었으며, 신촌 로타리에 운집해 있던 시민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행진 대열을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내면서 합세, 선두가 서강대 앞을 지날 때는 행렬이 5만여 명으로 불어났다.[11] 연세대 본관 앞에서는 밤 11시부터 전야제가 시작되어 노래와 율동이 공연되었다. 그러나 13일 새벽 2시경에서야 연세대에 도착한 마창 노동자들은 애석하게도 공연을 관람하지 못한 채 내일의 집회를 위해 잠을 청해야만 했다. 연세대는 전국에서 모인 노동자들로 다리 뻗을 공간조차 없을 만큼 초만원이었다. “앉으면 침대요, 누우면 행복이라. 천장이 이불이요, 딱딱한 의자도 탁자도 모두가 잠자리다.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새우잠을 잔다. 한순간 고통을 영원한 소망의 이불로 감싸고 떠오를 노동해방,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희망에 부풀어 새우잠을 잔다.”(창원 현대정공노조 김종복 홍보부장의 전국노동자대회 참관기) 새벽 6시에 일어난 마창 노동자들은 일제히 ‘노동악법 철폐’ 머리띠를 두른 뒤 아침 9시부터 구보행진으로 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마창노련 깃발을 앞세우고 오전 10시부터 연세대 민주광장에서 열린 ‘노조탄압분쇄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5천여 명의 조합원들은 어깨를 마주 걸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힘차게 구호를 외쳤다. … 노천극장에는 전국에서 4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한마디로 감격 그 자체였다. …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본대회 입장식은 한 시간 이상이나 걸렸다. 얼굴은 상기되었고 웃음이 가득 번졌다. 깃발이 등장할 때마다 박수가 요란하게 울렸다. “처음 노천극장에 입장할 때 마창노련의 파란 깃발이 맨 앞에 들어가는 걸 보니까 괜히 눈물이 났다. 그때처럼 우리의 깃발이 자랑스럽고 감격스러운 적이 없었다. 그 깃발 아래 머리띠를 매고 입장하는 얼굴들 모두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는 87년 당시 구사대를 물리치고 얼싸안고 울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면서 아 이것이 동지구나 하는 걸 새삼 깨달았다.” 울긋불긋한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강철같은 노동자 대오의 위용이 역사 앞에 확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흥석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 위원장(마창노련 의장)의 추도사가 낭독되는 동안 장내는 숙연한 분위기였고,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2천5백만 우리 노동자와 가족들의 힘으로 노동악법을 뜯어고쳐 노동해방을 기필코 쟁취할 것”을 전국 노동자들 앞에 선언할 때는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500여 명의 노동자 선봉대의 출정 선서식이 끝나자 갑자기 40여 명의 노동자들이 연단 위로 뛰어나왔다. 그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기 시작했다. 장내는 숨소리도 멈춘 듯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얀 광목 위로 붉은 핏방울이 떨어지면서 ‘노·동·해·방’ 네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나갔다. 혈서 쓰기를 마지막으로 대회를 마친 노동자들은 “타도 민정당! 해체 전경련!”, “전두환·이순자 구속!”, “노동악법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열을 가다듬었다. … 3시 30분경부터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의 가두행진이 시작되었다. 행진의 맨 선두에는 붉은 피가 선명하게 찍힌 혈서 깃발을 가슴에 안은 투쟁본부 의장단이 앞장섰다. 그리고 이어서 “노동3권 쟁취하여 노동해방 앞당기자”, “노동악법 개정은 노동자의 힘으로” 등의 현수막과 만장을 든 500여 선봉대가 그 뒤를 따랐다. 1천여 명의 마창 노동자들은 21개 본대열의 최선두에 서서 마창노련 깃발, 단위노조 깃발, 현수막, 만장 등을 높이 치켜들고 연세대 정문을 향해 진군하였다. 차도에 나선 노동자들은 “노동악법 철폐”, “노동3권 쟁취”, “해체 전경련, 타도 민정당”, “구속 전두환, 처단 노태우” 등을 외치며 행진하였다. 서강대 앞을 지나 공덕동 로터리와 마포대교를 통과하여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진군하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은 시위대가 나누어준 선전물을 받아들고, 노동자 대오의 질서정연한 모습에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연세대 정문을 통과할 때나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나 마창 노동자들은 대열의 선두에서 저지하는 전투경찰에 맞서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당초 이날 행진을 봉쇄하려던 당국은 전국 노동자들의 엄청난 위력에 놀라 순순히 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과 백골단은 시종일관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가재걸음’으로 노동자들의 긴 대열을 뒤따라오다 몇 차례 얻어맞기도 하였다. … 시민들이 합세하여 5만여 명으로 불어난 강철 노동자 대오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피곤한 기색 없이 오후 6시경 노동자 대오는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하여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 개정 촉구대회’를 거행하였다. 부산 고려피혁 김준환 위원장은 오늘의 전국노동자대회는 “그동안 죽어가고 구속되고 해고된 선배 동지들이 투쟁한 결과”라고 말해 숙연한 감동을 자아냈고, 양제복 대구 대동공업 위원장은 “이번에 노동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국회의원들을 쓸어버리고 우리가 국회에 들어가 노동법을 통과시키자”고 말해 여의도가 흔들릴 정도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이어서 서노협 단병호 의장대행은 “오늘의 집회가 노동해방의 시금석이 될 것이며, 오늘의 집회에도 불구하고 민정당과 야권3당이 우리의 요구를 무시한다면 여당도 야당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면서 “노동자를 무시하고 천대하고 핍박하는 그 어떠한 세력과도 싸워나가자”는 굳은 결의를 밝혀 열띤 환호를 받았다. “야권3당은 개정시안을 타협 없이 관철시킬 것”을 촉구하는 투쟁본부의 야권3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 채택된 뒤 집회는 끝났다. 그러나 지방 노동자들이 귀향을 서두르는 가운데, 7시 30분 전경련회관 앞에서는 “노동악법 옹호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가 열려, 권처흥(권용목 현대엔진 위원장의 부친)의 독점재벌 규탄연설이 즉석에서 이어졌다. 한편 귀가하던 노동자들을 폭행하는 백골단에 맞서 성난 노동자와 학생들은 영등포역 앞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12] 현대중공업 민주파들에 있어서 11월 13일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자대회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11월 13일 대회에 452명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집회에 참여, 그 조직성과 규율성으로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자신도 집회에 모인 3만여 노동자들로부터 단결의 위력, 노동자의 전국적 연대에 대한 자각, 노동법개정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을 하여 사업장 내에 보고대회를 사업부별로 개최하고 12월 15일에는 현대중공업노조 주최로 태화강 고수부지에서 ‘노동법개정 울산지역 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13] 1988년 4월 총선으로 등장한 여소야대 국회는 1988년 하반기 노동자들의 노동법 개정투쟁 압력을 반영하여 1988년 12월 노동관계법을 개정했다. 6급 이하 공무원의 단결권·단체교섭권을 보장하는 ‘노동조합법 개정안’, 방위산업체 쟁의행위를 공익사업 수준으로 허용하는 ‘노동쟁의조정법 개정안’, 15인 이상에서 5인 이상 사업장으로 근로기준법 적용범위 확대, 부당해고 등에 대한 노동위원회 구제제도 신설, 기준 근로시간을 48시간에서 44시간으로 단축, 연차유급일수 확대 등을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1989년 3월 노태우 정권이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하여 폐기되고, 근로기준법만 개정됐다. 한편, 지역별·업종별로 결집한 민주노조들은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를 계기로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총결집을 향해 나아갔다. 1988년 12월 22일 지역별·업종별 연합조직들이 결집한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가 결성됐다. 그동안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자 조직의 전국적 결속에 대한 주장은 80년초의 ‘전민노련’ 사건에서부터 서·인노의 ‘전노’ 주장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의 강조점을 달리하고 상이한 포괄범위를 가지면서 꾸준히 전개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과 시도들은 민주노조의 건설이 허용되지 않았던 당시의 현실 속에서 의도했던 결과를 낳지 못한 채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87년 7, 8, 9월 이후의 가열찬 대중투쟁과 그 결산으로 이루어진 9개 지역노조협의회와 8개 업종별협의회는 ‘전노협’ 건설의 실질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고, 87년 이후의 노동운동탄압분쇄투쟁, 노동법개정투쟁 등의 공동투쟁을 수행해 오면서 연대의 폭과 깊이를 더해갔다. 따라서 88년 하반기에 제기된 ‘전노협’ 논의는 노동대중들의 투쟁과정에서 제기된 실천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이전에 제기된 ‘전노’ 논의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전노협 논의가 시작된 것은 88년의 노동법개정투쟁이 한창 진행되던 와중이었다. 노동법개정 투쟁은 지금까지 지노협에서 수행해왔던 사업장 지원활동 등의 연대투쟁과는 달리 비록 낮은 수준이나마 정치투쟁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고 전국적 투쟁의 범주였기 때문에, 지노협의 열성조합원과 간부를 비롯한 지도역량들은 자연스럽게 전국적 조직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개정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리기 직전인 12일 밤, 전국에서 모인 100여 명의 노동조합 위원장과 20여 명의 노동운동단체 대표자들의 연석회의 석상에서 최초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연락위원회’를 만들자는 제안(서노협)이 나오게 되었다. 이 제안은 당시 막연하게나마 그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던 노동조합 위원장들 사이에서 깊은 공감을 얻었고,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계속되었던 민주당사 농성투쟁 과정에서 한 차례 논의를 거친 후, 12월 22일 전주에서 1차 회의를 통하여 구체화되었다. 전주 회의에서는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를 상설화하고 그 산하에 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투본)를 설치하여 노동조합과 전국노운협의 단일대오를 형성하기로 합의함으로써 귀중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14] 3) 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 1988년 12월 12일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돼 1989년 4월 18일까지 128일 동안 전개됐다. 조합원 수가 1만 8천이 넘는 대규모 노동조합에서 벌어진 이 장기간의 공장점거 파업은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상징적으로 대표했다. 128일 투쟁은 20세기 한국사에 등장한 자본과 노동 간의 갈등을 상징하는 거대한 전쟁이었다. 128일 파업이 시작된 피상적 계기는 현대중공업 88년 단체협약 체결투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계기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그 저변에는 87년 이후 현대재벌과 국가권력이 자행한 노동자 탄압에 대한 강렬한 저항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 현대자본 측의 잔혹한 민주노조 탄압과 국가권력기관의 현대 노동자들에 대한 편파적인 태도는 현대 노동자들로 하여금 돈과 권력이 하나라는 정치적 각성을 분명히 하게 했고,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거대한 투쟁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15] 노동자들의 핵심 요구는 주 44시간 근무제 도입, 상여금 600%로 인상, 각종 수당 신설·인상, 퇴직금누진제 실시 등의 단체협약 쟁취와 해고자 원직복직이었다. 특히 해고자 원직복직은 단체협약 못지않은 뜨거운 쟁점이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현대중공업노조에서는 21명의 해고자가 발생했다. 회사가 일부 해고자들을 개인별로 회유하여 계열사로 선별복직 시켰지만, 10명이 이를 거부하고 원직복직을 주장하며 해고자로 남아 있었다. 특히 김진국 수석부위원장과 정영빈 여성부장은 1987년 대투쟁과 이후 지역연대 투쟁에서의 헌신적인 역할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돼 있었다. 12월 8일 노동조합은 운동장에서 집회를 열고 파업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재적 18,693명 중 14,703명이 참가해서 13,425명이 찬성했다. 재적 대비 70.9%, 투표 대비 91.3% 찬성이었다. 12월 12일 파업이 시작됐다. ◎ 직권조인에 맞선 파업지도부 건설 그런데 파업의 최대 걸림돌은 역설적이게도 노조 위원장 서태수였다. 애초에 그는 1988년 2월 전임 위원장의 추천을 받아 사측 후보들을 물리치고 3대 위원장에 당선됐다. 그러나 직후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장기간 입원을 했는데, 그동안 회사 중역들이 뻔질나게 병실을 드나든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합원들에게 불신을 받고 있었다. 오랫동안 노조를 비우고 있던 위원장은 노조가 파업을 결의하자 부랴부랴 복귀했다. 15일 아침에는 갑자기 회사측 최종안을 총회에 붙이겠다고 공고했다. 조합원들은 분노의 눈길로 위원장의 공고문을 바라보았다. 총회 회부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대의원 간담회가 열렸으나 노조에 몰려온 조합원들의 원성과 흥분된 분위기 때문에 거론조차 못하고 무산됐다. 17일에도 대의원 간담회를 열었지만 다시 무산됐다. 파업 6일째인 17일은 토요일이었다. 위원장은 15일 간담회 때 조합원 방청을 개방했다가 혼쭐이 난 경험을 살려 방청을 불허한 채 대의원 긴급간담회를 소집하고 회사측 최종안을 총회에 부치는 문제를 다시 들고 나왔다. 회의는 찬반이 팽팽히 맞서다 표결에 부쳐져 묘하게도 71:71 동수가 나왔다. 꼼짝없이 위원장의 캐스팅보트로 총회 회부가 결정될 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일군의 조합원들이 몰려와 “해고자 복직은 안중에도 없어? 이 ××들” 하며 투표함을 박살냈다.[16] 총회 회부가 가로막힌 위원장은 18일 호텔에서 회사측 안에 직권조인했다. 19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간다는 성명서를 남기고 잠적하기 직전 호텔에서 가진 TV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말 상여금이라든지 우리가 단체협상에서 따낸 생산 장려금 19만 원, 그다음에 급여, 이런 게 전부 다 못 나간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랬을 적에 투쟁도 좋고 뭐도 좋지만은, 우리가 지금 먹고 살기 위해서 회사 다니는데, 정말 상여금 안 나오고 격려금 안 나오고 급여 못 받으면, 사실 저희들이 노동운동이라는 건 실리와 권익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실리를 빼놓고 나면 뭐 있습니까?”[17] 19일 파업집회는 위원장에 대한 격렬한 성토장이 됐다. 대의원 간담회가 즉시 소집돼서 위원장의 잠적에 따른 유고 상태를 확인하고 위원장 권한을 이원건 조선부문 부위원장에게 부여했다. 이원건 위원장 권한대행은 파업계속 여부, 권한대행 체제 신임 여부에 대한 조합원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 총회를 소집했다. 20일 실시된 조합원총회 투표에서 13,840명의 조합원이 참가하여 10,716명이 찬성, 77.4%의 찬성으로 파업을 계속할 것을 결의하고, 76%의 찬성으로 권한대행 체제를 인정했다.[18] 회사측이 20일 협상에서 다시 제시한 최종안에 대해서도 조합원총회에 찬반을 물었다. 21일 실시된 사측안 수용여부를 묻는 투표에서 15,677명의 조합원이 투표에 참가, 11,834명이 반대표를 던져 회사안을 부결시켰다.[19] 조합원대중은 자본의 농간을 단호히 분쇄하고 해고자 원직복직과 단체협약 쟁취를 향해 계속 전진하기를 강렬히 원했다. 조합원들의 확고한 뜻을 확인한 이원건 권한대행 체제는 24일 쟁의대책위원회 체계를 비상수습대책위원회(비대위)로 개편·정비했다. 조합원들의 요구와 단결력을 파업지도부를 중심으로 다시 응집시켜 낸 6일간의 과정이었다. 1만 2천명의 파업노동자들은 현대중공업 사내에 있는 종합운동장에서 농성과 사내 시위를 하면서 ‘원직복직, 단협쟁취’의 투쟁열기를 더욱 더 뜨겁게 달구어갔다. 조합원대중 앞에 수많은 ‘방안’이 제시되었고,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고자 하는 수많은 시도가 이루어졌다. 어제 단상에 올랐던 노동자가 다음날에는 어용으로 몰리고, 오늘 단상에 올랐던 대의원 혹은 집행부가 다음날 다른 노동자에 의해 거부되었다. 조합원 대중들은 어느 누구의 말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파업투쟁의 정당성과 순수성을 행동 속에서 쟁취해 나갈 자신들의 대변자를 요구했다. 다양한 입장과 인물들이 대중들 앞에서 파업투쟁의 현장에서 검증되어져 갔다. 집행부의 임원이든 대의원이든 조합원이든 모두 ‘파업투쟁전선’에서 조합원대중들에 의해 검증되고 심판되어졌다. ‘원직복직, 단협쟁취’의 명제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거부될 수 없는 현대중공업 조합원 전체의 통일된 대의였고 갈망이었다. 이 대의에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기면 조합원 대중들에 의해 어용으로 낙인찍혀졌으며, 어떠한 절충도 타협도 용서되지 않았다. 어떠한 사적인 이해도 불순한 기도도 침투할 틈이 없었으며, 오직 단일한 계급적 이해=대의에 입각한 투쟁만이 조합원 대중들에 의해 승인되어졌다. 이 파업투쟁의 열기를 온 몸으로 안고 지도해 나갈 ‘투쟁지도부’를 노동자 대중들은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며칠간의 대립과 혼란 끝에 마침내 ‘단협쟁취, 원직복직’의 슬로건하에 현대중공업 내 민주대의원, 민주열성조합원, 민주집행부가 파업투쟁전선의 한복판에서 연합하여 대중적 파업투쟁지도부=비상수습대책위원회를 창출했다.[20] 조직구성을 완료한 비대위는 26일 <파업투쟁속보> 제1호를 발행했다. 또한 1만 2천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국회의원 노무현의 초청강연을 운동장에서 열었다.[21] 노무현은 1980년대 초중반 노동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부산에 기반을 두고 울산·창원·거제까지 해고노동자들을 지원한 경력이 있었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1월부터 생방송으로 진행된 5공 청문회에서 정주영을 비롯한 재벌들과 전두환 군사정권의 유착을 거침없이 공략하여 큰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여러분! 이번 여러분의 파업은 법률상 위법입니다. 그런데 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 산동네의 철거민들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도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해서 따뜻하게 등 눕힐 수 있는 구들장이 필요하고 그 사람들 자식들도 밥 먹던 상이나마 행주로 닦아 책 놓고 공부할 수 있는 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법에 위반되었다고 무허가라고 집을 뜯어 버립니다. 노점상들도 그렇습니다. 입에 풀칠을 하려고 나와 있는 노점상들을 도로교통법에 걸어 목판을 차버립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집에 불이 나서 다섯 가구가 몽땅 타버렸는데 피해액이 백만 원도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목판 하나는 전 재산입니다. 밥 못 먹게 하는 법,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여러분! 헌법에도 노동3권을 명시해 놓고 다만 방위산업체는 안 된다고 합니다. 입만 열면 안보, 전쟁 위협을 하면서 비행기로 3분 거리에 있는 서울에 왜 63빌딩을 짓습니까? 방위산업체 쟁의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을 콱 밟아버려라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에는 지키지 않아야 합니다. 또 말로만 하지 말고 악법은 국민의 손으로 철폐시켜야 합니다. … 노동자가 하루만 놀면 온 세상이 멈춥니다. 그 잘났다는 대학교수, 국회의원, 사장님 전부가 뱃놀이 갔다가 물에 풍덩 빠져 죽으면 남은 노동자들이 어떻게든 세상을 꾸려나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노동자가 모두 염병을 해서 자빠져 버리면 우리 사회는 그 날로 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 경제, 사회관계 등 모든 것을 만들 때 여러분이 만듭니까?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의 대표가 이런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오늘 한국의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입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 우리 다 함께 노력합시다.”[22] “이번 현대중공업 파업투쟁은 노동자 개개인이 물질적인 돈 몇 푼을 구걸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현대중공업 2만 4천 노동자의 자존심, 더 나아가 이 땅의 일천만 노동자의 자존심을 건 노동해방, 인간해방, 진심으로 이 땅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인간적인 대접을 받기 위하여 소수의 독점재벌, 악덕재벌과 맞붙어 싸우는 첫걸음입니다.”[23] 한편 15일부터 ‘해고자복직 결사대’가 서울 본사 앞에서 상경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6일에는 정주영 명예회장과 면담이 이루어졌지만, ‘개전의 정’과 ‘계열사 재입사’만 되풀이했다. 17일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과의 면담도 소득이 없었다. 그런데 면담이라도 응해주던 회사측의 태도가 19일부터 강경하게 변했다. 사옥 앞마당에 결사대가 붙여놓은 현수막과 대자보 등을 관리자를 동원해 철거했다. 몸싸움 시비도 빈번해졌다. 울산에서 조합원들이 서태수의 직권조인을 거부하고 파업을 지속하기로 결정한 여파였다. 그러나 결사대는 시민홍보전을 나가고 파업 중인 노조를 격려방문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갔다. ◎ 현대 자본의 잇따른 테러 바로 그 때 노태우 정권의 태도가 갑자기 공격적으로 선회했다. 노태우 정권은 9~10월 서울올림픽과 11~12월 5공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28일 청와대 당정회의에서 대통령 노태우가 “최근의 법질서 문란행위와 노사문제 민생치안 부재 등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정부는 각종 흉악범과 폭력 파괴 행동은 법에 의해 엄격히 단속함으로써 선량한 시민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도록 법과 질서를 확립할 것을 강력히 지시를 합니다.”[24] 이른바 ‘민생치안 특별지침’이 발표된 바로 다음날인 29일 현대중공업노조 상경 결사대가 공권력에 의해 전원 강제 연행당했다. 1989년 1월 2일에는 파업 중이던 풍산금속 안강공장에 공권력이 투입됐다. 다음 날에는 서울 모토로라코리아에도 공권력이 투입됐다. 현대중공업에도 공권력이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파업지도부는 조합원 대표성을 강화하고 불법파업 시비를 줄이기 위해 6일 다시 한 번 조합원 총회를 개최했다. 서태수 위원장을 불신임하고 새로운 합법적 노조위원장을 선출하기 위한 총회였다. 1월 6일, 17,000여 조합원들이 출근(출근율 90%)하였으나, 조합원 중 설계부서와 지원부서를 제외한 대다수의 생산직 노동자들이 투표에 참여(9,500명), 95%의 찬성으로 규약개정 및 서태수 위원장 불신임안을 통과시켰으며, 91%의 찬성으로 이원건 권한대행을 명실상부한 새로운 위원장으로 탄생시켰다.[25] 그런데 노태우 정권보다 회사측이 먼저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노조파괴 전문가를 고용하고 서태수 측근의 어용 대의원들을 동원해서 8일 현대그룹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현해협) 사무실 등을 폭력 침탈하는 테러를 벌인 것이다. 1989년 1월 8일 새벽 3시 20분과 5시 30분 현대중전기 조합원들이 수련회를 하고 있던 석남사 산장과 울산 ‘현대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현해협) 사무실에 복면을 하고 무전기·각목 등을 든 50여 명의 괴한이 습격해 권용목을 비롯한 23명의 조합간부 및 조합원, 해고노동자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달아났다. 석남사 산장, 현해협 사무실 두 곳을 차례로 습격한 괴한들은 고도로 훈련된 듯한 폭력을 사용해, 습격당한 노동자들은 타박상이 심한데도 외상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무전기를 통해 끊임없이 송수신을 하였고, 철수할 때에도 무전기를 든 자의 지휘 하에 미리 대기시켜 놓은 차로 일사불란하게 철수하였다.[26] 현해협은 1988년 2월 현대엔진과 현대중공업 해고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됐는데, 형식상으로는 현대그룹 산하 각 사업장에서 쫓겨난 해고자들의 조직에 불과했지만, 실제로는 어용화된 집행부들을 대신하여 각 사업장의 현장 민주세력들을 지원하고 연결하면서 대중운동의 구심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1987년 대투쟁 과정에서 현대엔진, 현대중공업, 현대중전기, 현대미포조선, 현대종합목재, 현대정공, 현대자동차 등 현대그룹 계열사들에 노동조합들이 속속 들어섰으나, 그 집행부 대부분이 회사측의 개량화 공작에 넘어가 몇 달 만에 민주적 성격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1989년 1월에도 현해협은 현장의 노동자들로부터 강력한 신뢰를 받으면서 현대중공업과 현대엔진의 파업을 왕성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당시 현해협에는 권용목 엔진 전 위원장과 고세흥 등 엔진 해고자와 김진국 전 중공업 수석부위원장, 정병모 전 쟁의부장 등 중공업 해고자, 천창수 중전기 해고자, 그리고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 3~4명이 중공업과 엔진 파업을 왕성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87년의 현대그룹노조협의회의 역할을 대신하며 지역 노동운동의 실질적인 구심역할을 하고 있던 현해협은 중공업, 엔진 노동자들로부터 거의 절대적 신뢰를 받고 있었다.[27] 테러 소식이 알려지자, 8일 현대중공업과 현대엔진 조합원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울산시내에서 광범한 홍보작업에 나섰다. 9일 오전에는 1만여 명의 조합원이 현대중공업 운동장에서 테러규탄대회를 열었다. 이른바 ‘노조파괴 전문가’ 재미교포 제임스 리(본명 이윤섭)가 배후인물임이 곧 드러났다. 15일에는 울산에서 1·8 테러를 규탄하는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자본가들의 잔인한 폭력성, 자본과 권력의 추악한 야합의 진면목을 보여준 1·8 테러는 전국 노동자들을 울산으로! 울산으로 몰려오게 하였다. 89년 1월 15일, 테러가 발생한 지 일주일 만에 울산 태화강 고수부지에 전국의 3만 노동자가 집결했다. ‘노동운동탄압 분쇄 및 현대테러 규탄 전국노동자대회’가 충천의 열기를 뿜으며 열리고 있었다. 문익환, 백기완, 이소선, 김근태, 이부영 씨 등 재야원로 및 지도급 인사들과 단병호 서울지역 노조협의회 의장을 비롯한 많은 전국 노조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대회는 1·8 테러로 부러진 오른팔에 깁스를 한 채 연단에 올라선 권용목 씨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탁월한 연설력을 유감없이 보일 때 절정에 달했다.[28] 파업 노동자들은 매일 운동장에 집결해 ‘폭력테러만행 규탄집회’를 열었다. 사내 시위와 시내 가두행진을 벌였고, 울산경찰서와 검찰청 앞에서 구속자 석방 촉구 항의시위도 조직했다. 규약개정 및 임원선출에 관한 변경신고서를 울산시청에 접수하며 법적 투쟁도 병행해 나갔다. 18~19일 노동조합은 3대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파업투쟁 대의원’을 선출했다. 조합원들은 상당수의 어용 대의원들이 1·8 테러에 직접 개입한 사실에 경악했다. “폭력대의원 축출하고 민주대의원 선출하자”, “민주대의원 선출하여 민주노조 강화하자”는 게 조합원들의 열화와 같은 목소리였다. 각 부서마다 파업의 선봉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조합원들이 대거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어용 대의원들을 축출하고 파업투쟁 대의원들로 대체하면서 노동조합 조직력이 크게 강화됐다. 또한 조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위원 제도를 적극 구축해 나갔다. 소위원들은 파업투쟁의 혈관과 같은 존재였다. 대의원 한 사람이 100명의 조합원을 일일이 챙기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각 반에 소위원을 두고 20명 단위로 추가선출된 소위원들이 대의원을 통해 모든 상황들을 부서 조합원들에게 자세히 알리고 단결을 도모하면서 파업투쟁의 조직력은 급격히 살아났다. 평소 한 작업장에서 십수 년을 함께 일해온 사람들로 조직화된 소위원 조직은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이 파업지도부에 전달될 수 있는 민주적 통로 역할을 충실히 했고, 조합원 전체가 파업에 적극 동참하는 고무적인 결과를 낳았다. 대의원들과 마찬가지로 소위원들에게도 소위원 명찰을 달게 하여 책임감을 부여하고, 소위원 자체의 조직화를 꾀해 발대식과 소위원회 임원진도 자체 선출케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소위원 조직의 자발적 동력을 형성했고 이 소위원 조직의 동력이 이후 구사대 폭력 등 폭력탄압에도 굳건히 파업대오를 유지시킨 128일 파업의 가장 견고한 힘이었다.[29] 노동조합은 파업기금 마련을 위해 일일찻집 행사를 열었는데, 조합원과 계열사 노동자들이 적극 호응해 약 3백만 원을 모아냈다. 노동조합 정상화 이후 변제한다는 약속 아래 1인당 5천 원짜리 파업채권을 발행해서 약 3천만 원의 재정을 마련했다. 1·8 테러 이후에는 전국의 노동자들이 지원금과 각종 지원물품을 보내왔다. 2월 12일에는 현해협을 중심으로 현대그룹 각 사업장의 현장 민주세력들이 현대중공업과 현대엔진의 파업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현대계열사 연대투쟁본부’를 결성했다. 그런데 21일 또다시 테러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백주 대낮에 대규모의 구사대가 무차별적으로 자행한 식칼테러였다. 1월 8일 살인적 폭력테러를 자행한 뒤에도 서태수 전 노조위원장을 계속 감싸고 돌던 현대그룹과 현 정권은 2월 21일 백주 대낮에 또다시 식칼까지 동원하여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게 살인적 만행을 저질렀다. 비폭력을 외치는 노동자들에게 회사관리자와 경비대 등 1천여 명은 닥치는 대로 식칼을 휘둘러 박원일, 진재원은 옆구리에 길이 10cm가량 찔려 중태에 빠지고 이우강은 눈을 다쳐 실명 위기에 처했으며, 백골단 등 전경 5개 중대는 회사측의 폭력만행을 지켜보며 방관했다.[30] 2월 21일, 현대독점재벌의 관리직 사원과 경비대로 구성된 2,000여 명의 구사대는 경찰 10개 중대 1,5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평화시위를 하고 있는 파업노동자들을 식칼로 찌르고, 쇠파이프로 두들겨 패고, 각목으로 무참하게 짓밟은 ‘식칼테러 만행’을 저질렀다. … 현대독점재벌의 폭력에 대한 분노보다도, 독점재벌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왔었다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분노가 오히려 더 현대중공업 파업노동자들을 치떨게 했다.[31] 1·8 테러에 이어 또다시 벌어진, 더 큰 규모의 2·21 식칼테러는 노동자들을 경악하게 했다. 21일 오후에 열린 집회는 사측에 대한 격렬한 분노의 분위기로 휩싸였다. 파업 지도부의 비폭력 원칙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여러 차례 터져 나왔다. 그런데 경찰은 이 사건 수사에 전혀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식칼이 난무하는 폭력이 자행되고, 사람들이 혼수상태에 빠지고, 옆구리에 칼을 맞아 전치 12주 이상의 중상을 당하는 폭력이 백주 대낮에 벌어졌음에도 경찰은 수사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언론 또한 사측의 명백한 테러폭력을 이른바 ‘노노싸움’으로 치부할 뿐이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파업 기간의 수많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경찰, 노동부, 시청 등 정부기관과 언론을 철저히 불신하게 됐지만, 특히 2·21 테러 사건에 대한 대응을 지켜보면서 그렇게 됐다. 잔인한 테러 소식은 칼에 난자당한 노동자들의 사진 포스터를 통해 급속히 가족들과 계열사 노동자들에게 번져갔다. 분노한 가족들의 파업집회 참가가 급증해 1천 명에 육박할 정도가 됐다. 가족들은 사장실로 몰려가 상여금 등 체불임금 지불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는가 하면 오좌불 숙소 앞에서 빈대떡 장사를 하여 파업기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족들의 적극적인 동참은 이후 공권력이 투입된 이후에 전개된 시가투쟁 때 가족과 주민들이 적극 나서 주먹밥을 만들고 이웃들의 성금을 모금하는가 하면 스스로 화염병을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나누어주는 ‘해방구 광주 아낙네’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2] 2·21 테러 직후인 23일 ‘상경 결사대’ 1진 491명이 정주영 명예회장과 담판을 짓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다. 계동사옥 앞에 텐트를 치고 농성에 돌입한 상경 결사대는 가두홍보를 통해서 파업투쟁의 정당성을 선전해 나갔다. 서울지하철노조 등을 방문하면서 연대활동도 강화해 나갔다. 서울 지역의 노동조합과 민주단체들의 지지방문도 끊이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정주영 회장은 쉽게 만나주지 않았다. 결사대는 일단 홍보작업에 주력하기로 하였다. 2·21 식칼테러를 알리는 홍보물을 작성하여 시내 곳곳을 헤매 다니며 시민들을 붙잡고 설명도 하고 호소도 하고 모금도 하였다. 갑자기 화려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온몸에 덕지덕지 구호와 사진을 붙인 검푸른 현대작업복의 노동자들 모습을 시민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 울산에서 올라온 2·21 식칼테러 고발 칼라포스터는 시민홍보에 큰 힘이 되었다. ‘국민의 양심으로 폭력테러 추방하자’는 제목의 이 포스터는 현대 구사대의 테러장면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진들과 테러에 희생당한 노동자들의 처참한 모습을 담고 있었는데, 시민들은 이 포스터를 몸에 붙이고 다니는 노동자들을 보고 “이것이 사실이냐”고 묻곤 했다.[33] 비에 흥건히 젖은 텐트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파업기금이 없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철거민들이 정성스럽게 지어준 주먹밥을 눈물겹게 먹으면서, 서울지역의 노동조합과 민주단체의 뜨거운 지원을 보고 겪으면서, 서울 결사대는 자신들의 투쟁이 다만 자신들의 이해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1천만 노동자를 위한 투쟁 그리고 자신들처럼 이 땅의 피억압계급인 도시빈민·농민들을 위한 투쟁이라는 점을 계동사옥 앞 투쟁의 한복판에서 뼈저린 자각에 자각을 거듭해 갔다. 노태우 정권에 의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1천만 노동자의 선봉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민중의 이해를 온몸으로 대변하여 투쟁해 나갈 투사로, 노동해방의 전사로 상경결사대 노동자들은 단련되어 갔다. 왜 노동자간의 연대투쟁은 필요하며, 왜 철거민과 농민들과의 연대가 필요하며, 왜 민주세력과 연대하여 노태우 정권과 독점재벌을 타도해야 하는지를 깨달아 갔다. 이는 87년 9월 상경 때에는 체험하지 못했던 자각이었다. 노태우 정권과 독점재벌에 대항하여, 천만 노동자의 선봉에 서서 투쟁하기에 우리들의 노동자로서의 의식은 얼마나 미약한가? 우리들의 조직은 얼마나 허술한가? 다시는 이러한 미약한 의식과 조직으로 노태우 정권과 독점재벌에 대항해서 투쟁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 투철한 노동자의식, 그리고 강력한 투쟁조직만이 우리 노동자를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서울 한복판에서 상경 결사대는 자각해갔다. 이러한 자각만으로도 이미 이번의 파업투쟁은 노동자들의 승리였다.[34] 마침내 3월 6일 정주영 회장과 면담이 이루어졌다. 오전 10시 강당에 모인 노동자들 앞으로 정주영 명예회장이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과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무대 중앙에 마련된 탁자에 앉은 그는 면담이라기보다 훈시에 가까운 자신의 얘기만 했다. 질문하는 노동자들의 이름과 부서를 일일이 확인하며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닌 자신의 방북 얘기와 6·25 얘기로 일관하던 그는 약 1시간이 지나 몸을 일으켰다. 그가 남긴 말 중에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대화라면 언제든지 하자”라는 것뿐이었다. 오후 4시에 다시 2차 면담이 성사됐다. 그러나 정주영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너희들이 내려가라고 해서 내려가고 올라오라고 해서 올라오는 사람이야? 재작년처럼 운동장에 세워놓고 날 능욕하려는 거야 뭐야? 지금 울산에는 사장이 있고 이사와 중역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현대중공업 파업을 충분히 잘 알고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일임을 다 했는데 내가 다시 내려간다는 것은 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 난 내려가지 않아. 그리고 너희들이 공산주의를 알아? 단체행동을 하는 건 좋은데 왜 빨간 띠를 매는 거야. 다른 좋은 색깔도 많잖아!” 면담은 “너희들은 조합원의 대표가 아니다”라는 정주영의 말과 함께 결렬됐다. “앞으로도 계속 얘기하자”는 그의 말이 공허하게 맴돌았다. 그리고 8일과 9일에 걸쳐 1천5백 명이 넘는 전경과 백골단, 관리자들에 의해 농성장이 침탈됐다. 258명이 연행되고 결사대 지도부 6명이 구속됐다. 연행을 피한 100여 명과 2진 결사대 50여 명이 민주당사와 평민당사에서 농성을 계속하며 현대그룹의 잔인한 노동자탄압을 서울 시민들에게 줄기차게 알려나갔다. ◎ 공권력 투입에 맞선 결사항전 상경 결사대의 정주영 면담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자, 파업지도부는 공권력 투입을 피하기 위한 최후의 방안으로 ‘임시총회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시청에 내기로 했다. 애초 1월 25일 노동부가 파업지도부를 찾아와 ‘임시총회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하라고 요구했었다. 노동조합이 1월 6일 조합원 총회를 통해 서태수를 불신임하고 이원건을 새 위원장으로 선출했음에도 노동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노동조합 지도부를 새로 구성하고 싶으면 법에 정한 절차를 밟으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한다는 것은 노동조합 스스로 1·6 조합원 총회와 이원건 위원장 체제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점, 그런 상태에서 (다른 많은 비슷한 사례에서처럼) 울산시가 조속히 소집권자를 지명하지 않을 경우 노동조합이 지도부 없이 표류하게 된다는 점 때문에, 노동조합은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거부했었다. 그런데 뚜렷한 협상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가운데 공권력 투입이 임박해 오자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내는 쪽으로 파업지도부가 선회한 것이다. 여기에는 울산시가 ‘3일 안으로 소집권자를 지명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야당 국회의원들의 전언도 영향을 미쳤다. 3월 13일 노동조합은 11,400명이 서명한 소집권자 지명요청서를 시청에 접수시켰다. 그러나 울산시는 25일에야 답을, 그것도 ‘반려한다’고 주었다. 서태수가 총회를 소집할 의사가 있다고 하니 소집권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논리였다. 결국 노동조합이 제대로 농락당한 셈이었다. 회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법지도부가 스스로 불법임을 인정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파업지도부와 절대로 협상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을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아울러 조속한 시일 내에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겠다고 했다. 이른바 ‘민생치안 특별지침’ 이후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강경하게 탄압하는 노태우 정권의 기조는 계속되고 있었다. 3월 16일에는 고건 서울시장의 교섭 거부에 맞서 파업에 돌입한 서울지하철에 바로 공권력이 투입돼 농성 조합원 2천 400명이 연행됐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해 오면서 지도부가 갈피를 못 잡는 것과 다르게, 조합원들은 이미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공권력에 맞선 장렬한 항전뿐이었다. 이 사회의 모든 지배세력이 시시각각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수천만 원의 성금과 쌀·라면 등 상상도 못한 엄청난 지원을 보내온 것에 눈물겨워 했지만, 그들이 공권력에 맞서 조합원들을 대신해 싸워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3월 21일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음을 신문방송이 연일 보도하는 가운데 현대중공업 파업이 100일째를 맞고 있었다. 8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공권력 개입 결사반대 및 소집권자 지명 촉구대회’를 열고 있었다. 이날 집회에는 울산대 총학생회와 대구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 및 민주단체들이 참여해 열기를 고조시켰고, 이날 성금만도 1천만 원에 가까운 많은 액수였다. 또한 광주 금호고등학교 학생들이 흰 손수건에 ‘노동자 형님들 힘내세요! 쟁취! 승리!’라고 피로 쓴 손수건과 함께 격려편지를 보내와 노동자들의 심금을 울려주기도 했다. 집회하는 동안 중공업 상공에는 몇 번씩 경찰 헬기가 정찰선회하며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음을 알려주었다.[35] 25일을 넘어서자 공권력 투입은 기정사실화되어 초읽기에 들어갔다. 파업노동자들도 이제 남을 사람만 남게 되어 약 3~4천 명만이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은 평화적 타결의 희망이 사라진 후에도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한 현대중공업의 진정한 투사들이었다. 그들의 평균 나이는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일 거라는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반수 이상이 40대를 전후한 장기근속자들이었다. 왜 중고등학교 다니는 자식을 둔 한 가정의 가장들이 해고나 구속, 심지어 죽을지도 모르는 최후의 공권력과의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떨쳐 일어섰는가. 이에 대한 답은 그들의 지난날의 삶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가 없다. 갑판 위에서 떨어져 죽어가고, 탱크 안에 갇혀 질식사하고, 대형 블록 밑에 깔려 노동에 찌든 몸이 오징어가 되고, 진폐에 걸렸음에도 회사에 탄로나면 해고될까 봐 눈치보며 생명줄을 이어가고, 여름이면 40도가 훨씬 넘는 철판 위에서 겨울이면 바닷바람 쌩쌩부는 야적장에서 하루를 벌어먹으며 감내해야 했던 천대와 멸시. 현대가 그들에게 남긴 것은 30~40만 원. 임금의 대가치고는 너무나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87년은 다시 태어나는 부활이었고, 민주노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나게 했던 노동조합이 거대한 자본과 권력 앞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과연 그들의 행동이 무엇이겠는가! 결사항전!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다시는 뺏기지 않기 위해 노동자들은 분연히 일어서 거대한 골리앗과 맞선 것이다.[36] 파업 109일째인 3월 30일 새벽 5시, 결국 현대중공업에 115개 중대 1만 5천 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됐다. 헬리콥터, 해상함정 8대, 화학소방차 6대 등 특수장비까지 동원된 육·해·공 삼면 입체 작전이었다. 공권력 투입 직전 파업지도부가 세운 전술은 조합원들을 현장에서 미리 빼내 가두에서 집요하게 투쟁을 이어간다는 것이었다. 파업대오는 새벽의 공기를 가르며 질서정연하게 전하동의 오좌불 숙소로 이동했다. 1만 5천 명을 투입한 진압작전은 술에 취해 텐트에 쓰러져 자고 있던 단 한 명의 노동자만을 체포한 채 허탈하게 끝났다. 그러나 새벽 라디오뉴스는 ‘현대중공업 파업근로자 전원 연행’이라고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 당황한 경찰은 정오를 기해 오좌불 숙소를 공격했다. 자연스럽게 현대중공업 조합원들의 가두투쟁도 시작됐다. 현대엔진노조가 파업을 단행하면서 1천 5백 명의 조합원들이 가두투쟁에 가세했다. 오후 들어 현대중공업 인근의 간선도로에서는 전경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최루탄·투석 공방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경찰이 퇴각하는 노동자들을 쫓아 밀집 주택지인 만세대아파트 깊숙이까지 최루탄을 쉴 새 없이 쏘아대자 주민들도 격렬한 항의에 나섰다. 공권력 투입 첫날부터 5월 광주를 방불케 하는 격렬한 시가전이 완강하게 전개됐다. 한일은행 앞 도로, 중전기 앞 도로, 동울산우체국 앞 도로 등이 노동자들에 의해 점거됐다. 현대계열사 노동자들이 점차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점점 더 불어났다. 공권력을 투입하면 파업이 종결될 것으로 기대했던 경찰과 회사는 번져가는 가두투쟁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오후 4시가 되자 시내에서 동구로 들어오는 길목인 성내검문소를 완전 차단하고 모든 차량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5시 반이 넘어서자 경찰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현대중공업 담 안쪽으로 밀려들어갔던 전경병력과 백골단들이 공격을 개시하면서 간선도로 곳곳에서는 양측 간의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가열됐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 전경버스 한 대와 회사차 한 대가 시위대에 의해 전소되었고, 전하파출소도 시위대의 공격으로 직원들이 모두 철수해야 했다. 저녁 8시가 되자 시위대가 만세대아파트 입구의 공터로 모여들었다. 공터 바로 옆에 현해협 사무실과 오좌불 숙소가 있었고, 인근에 동울산시장과 현대 노동자들의 집단거주지인 만세대아파트가 있었기 때문에 집회장소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몰라도 이곳이 ‘민주광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공권력 폭압진압 규탄집회는 곳곳에서 재채기 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뜨거운 열기로 시작되었다. 집회에 참석한 3천여 명의 노동자들의 얼굴엔 뿌듯한 긍지가 넘쳐흘렀다. 1만 5천의 경찰진압에 여지없이 깨질 것만 같던 파업이 오히려 보다 강력하게 가두에서 계속되었던 오늘 하루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내일 오전 8시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집회는 끝났다. 이날 하루 동안 연행된 노동자 수만 해도 697명이었다. 이날의 가두투쟁에는 현대자동차, 중전기, 미포조선, 정공, 종합목재 등 계열사 노동자들도 다수 참가했다. 현대중공업 공권력 투입으로 조업이 자연스럽게 중단되자 각 사의 노조활동가들이 자발적으로 노동자들을 모아 가두투쟁에 동참한 것이다. 비록 각 계열사 노조가 공식적으로 연대투쟁을 선언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지만 대신에 각사의 노조원들이 스스로 대열을 형성하여 중공업 인근의 가두투쟁 현장으로 행진해 와 매일 중공업 노동자들과 함께 공권력 철수투쟁을 전개한 것이다.[37] 31일 아침 출근시간이 되자 전날 약속한 대로 만세대아파트 민주광장에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가두투쟁 조직이 놀라운 속도로 형성됐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부서별로 인원을 파악했다. 계열사 노동자들도 사업장별로 대열을 정비했다. 노동자들은 현해협 지도부가 지시한 각각의 장소로 신속히 이동해서 오전의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현해협은 각 계열사 대표를 뽑아 임시지도부 체제를 갖추고 사무실에 상황실을 설치했다. 오토바이를 동원해 기동반과 연락병을 두었다. 가족들은 시위대의 식사를 담당했다. 지원단체들은 구호약품을 가지고 와 의료반을 만들었다. 50여 명의 대학생들도 지원투쟁에 나섰다. 영남지역 대학의 학생들이 현대중공업 파업이 공권력에 강제 진압되자 총학생회의 결의 아래 울산 현지에 결사대를 파견했고, 현대영업소를 타격하는 격렬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돕기 위해 내려온 학생들을 맞아 자신들의 작업복을 입히고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만인에 평등해야 할 법도, 경찰도, 언론들도 모두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위시한 민주화운동세력밖에 없었다. 파업 초기부터 수천만 원에 이르는 성금과 지원물품을 보내주고, 사회 곳곳에서 현대의 잔인한 테러탄압을 국민들에게 알렸던 민주화운동세력들의 도움은 파업을 지탱하는 데 커다란 힘이 되었다. 가두투쟁 현장에서의 학생들은 매우 용감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최루탄에도 끄떡하지 않고 노동자 시위대를 보호하고 백골단과 맞서 싸우는 모습은 노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백골단을 결코 겁내지 않았다. 백골단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무조건 도망만 하던 노동자들도 학생들을 보고 많은 것을 배웠다. 화염병 던지는 법도 터득했다.[38] 이틀째 가두투쟁은 전날보다 더 조직적이고 격렬하게 전개됐다. 전경과의 대치선이 한일은행 앞 도로, 동울산우체국 앞 도로, 중전기 앞 도로, 명덕시장 주변 등지에 형성됐다. 오전에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곳은 한일은행과 중전기 사이의 간선도로였다. 최루탄과 투석의 공방전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노동자 수가 불어나면서 간선도로 곳곳이 점거됐다. 간선도로의 한편은 약 4km의 현대중공업 담이고, 다른 한편은 주택가였다. 전경들은 시위대의 위세에 밀려 회사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그런데 미처 퇴각하지 못한 전경대가 시위대에 포위됐다. 노동자들은 전경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그 자리에 있던 전경수송차 2대와 전경 이동에 사용되던 현대 통근버스를 불태우고 현대중공업 정문을 향해 진격했다. 노동자들의 목표는 현장을 되찾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4천의 시위대가 1만 4천여 명에 달하는 전경들을 당할 수는 없었다. 백골단을 앞세우고 반격에 나선 전경들에 의해 시위대는 다시 간선도로 주택가 골목으로 밀렸다. 점심시간이 되자 시위대가 집결지인 민주광장으로 돌아왔다. 점심은 주먹밥이었다. 어느덧 현해협 사무실 앞에는 가마솥이 걸리고 20~30명의 가족들이 주먹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허기진 배를 주먹밥으로 때우고 노동자들은 다시 오후의 투쟁에 나섰다. 오후가 되자 노동자들의 숫자가 더욱 불어났다. 각 계열사가 동구 일대의 가두시위로 조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구의 유일한 입구인 성내삼거리의 교통이 통제되고 있었고, 일대에 깔린 최루가스와 격앙된 분위기로 노동자들은 일손을 잡을 수 없었다. 연대투쟁에 동참하려는 계열사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작업을 거부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계열사 노동자들이 합세한 시위대는 중전기 앞 도로를 점거하고 사내진입을 시도하여, 약 100여 미터까지 치고 들어가기도 했다. 이 때 노동자들은 도로를 향해 서 있는 회사 건물의 유리창을 모두 박살내기도 하고 일부는 인근의 민정당사 유리창을 깨기도 했다. 시위가 계속되면서 부상자의 숫자도 늘어만 갔다. 대부분 최루탄 파편 또는 백골단의 집단구타 때문이었다. 이날 가두투쟁에 참여한 인원은 약 8천 명에 이르렀다. 가두시위 3일째인 4월 1일은 토요일이었다. 오전부터 민주광장에 모인 2천여 노동자들이 간단한 출정식을 갖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오후가 되자 토요일 오후 근무를 거부하고 몰려나온 현대자동차 노동자 3천여 명이 동구를 향해 진출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성내삼거리에서 전경과 대치하다 인근 산을 넘어 동구로 진입한다는 소식은 시위대를 크게 고무시켰다. 대부분의 계열사가 토요일 근무를 휴무하거나 노동자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동구 일대는 검푸른 작업복의 현대노동자들로 빽빽이 들어찼다. 30일 공권력 투입으로 시작된 울산 동구의 가두시위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 조합원들도 ‘민주노조실천노동자회’(민실노), ‘민주노동자실천협의회’(민실협) 소속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지원투쟁을 다녔다. 현장조직들은 현대엔진노조 투쟁에 집행부의 동참을 호소하며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것에 반성하면서 집행부에 기대하기보다는 조합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4월 1일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친 3천여 명의 조합원이 가두로 진출했다. 염포검문소, 종합목재 앞에서 최루탄을 쏘며 평화행진을 가로막는 경찰과 대치한 후 만세대 시위에 합류했다. 종합목재, 미포조선, 중전기, 엔진 등에서 집단적으로 참여했고, 시위 대열은 2만여 명에 달했다. 4월 2일 만세대 투쟁 현장에서는 ‘현대자동차노동자협의회’(현자노협)를 결성했다. 현대중공업 연대투쟁에서 승리하고 다가올 임금인상 투쟁을 비롯한 각종 권익투쟁과 현자노조의 민주적 발전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 현자노협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방관하는 이영복 집행부를 비판하면서 7,0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하는 ‘노조 비공인 파업’을 벌이는 등 연대 지지 투쟁을 벌였다. …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현대중공업 투쟁에 참여하면서 연대투쟁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울산 전역이 전쟁터가 되어 싸움이 계속되는데도 꿈쩍 않고, 오히려 실익 없는 투쟁에 참여할 수 없다는 집행부 입장을 거부하며 투쟁했다. 한편, 연대투쟁을 주도했던 현장조직들은 조합원들의 신뢰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39] 도로 곳곳에서 격렬한 가두시위가 계속되다 오후 4시에 8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만세대 민주광장에 모여 ‘공권력 격퇴를 위한 현대노동자 출정식’을 가졌다. 이 집회에는 이부영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의장이 참석해 현대노동자들의 피어린 생존권투쟁을 지지하여 열렬한 박수를 받기도 했다. 집회를 마친 노동자들은 가두로 진출,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현대중공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은 민주노조운동 전반에 거센 규탄투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가장 선봉지역으로 꼽히던 마산·창원 지역에서의 규탄투쟁은 울산 못지않은 격렬한 가두투쟁 양상을 보여주었다. 수출자유지역 광장에 모인 5천여 노동자들이 심야까지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학생들의 지원투쟁 또한 뜨겁게 달아올랐다. 현지 지원 결사대를 울산에 급파하는가 하면, 전국에서 현대자동차 영업소 타격투쟁을 벌였다. 2일부터 백골단이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면서, 가두시위 양상이 복잡해졌다. 이전까지는 주로 도로를 경계로 대치하는 양상이었는데, 이제 백골단이 골목 안까지 진출하면서 소규모 대치전이 골목 여기저기서 전개됐다. 노동자들과 전경, 백골단이 얽히고설키는 산발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백골단들은 시위대를 쫓아 주택가 깊숙이까지 진출하여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는가 하면 시장 안쪽에 사과탄을 던지는 등 마치 점령지에 주둔한 군인들처럼 행세했다. 백골단들의 잔인한 행동은 지역 주민들을 가두시위에 적극 동참하게 만들었다. 지역 여론도 매우 험악해져 갔다. 백골단의 만행 소식은 동구 전역에 퍼졌고, 이를 분개하는 사람들의 소리도 높아졌다. 동구 전체가 백골단의 만행에 분개하면서 가족들의 참여가 놀랍게 변해갔다. 주로 현대중공업 파업지도부 가족들이 담당하던 시위대 식사를 주민들이 손수 지어 현해협으로 날라 왔다. 동네마다 성금을 모아 직접 현해협에 찾아와 전달했다. 울산 동구는 5월 광주를 급격히 닮아가고 있었다. 상황실의 전화는 주민들의 지원전화와 경찰병력 이동상황을 알리는 제보전화로 쉴 틈이 없었다. “여기 만세대 126동인데요. 지금 전경들이 125동 앞에 있는 시위대를 포위하려고 옆으로 이동하고 있어요. 빨리 도와주세요.” “4천세댄데요. 지금 사람들이 밀리고 있어요. 사람들을 빨리 보내세요.” “여기 명덕인데요, 빨리 오세요. 우리가 김밥과 돈을 좀 모았어요. 빨리 가져가 먹고 힘내세요.” “고생하네요. 학생들이 잠자리가 필요하다고 하던데 우리 집에 보내주세요. 만세대 114동 000호예요.” 이들 모두가 아주머니들의 목소리였다. 한번은 명덕에서 급하게 오라는 아주머니의 전화를 받고 기동대가 달려갔더니 여러 명의 아주머니들이 모여 세 상자의 박스를 내왔다. 안을 살펴보니 화염병이었다. 기동대원이 어떻게 만들었냐고 하니까 시위하는 사람 붙잡고 물어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비록 불량이 많아서 반 이상을 다시 손을 보아야 했지만 주민들의 동참은 이렇듯 시위대의 식사에서부터 성금모금, 빈병 수집, 화염병 제조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어느 아주머니는 ‘우리도 무기를 들어야 한다’는 말까지 하기도 했다. … 하루의 투쟁일과는 오후 7시경 만세대 민주광장에서 마무리 집회로 끝이 나는데 집회가 끝나기 10분 전부터는 현해협 사무실 앞에는 때아닌 십수 명의 아주머니들로 북적거렸다. 지원 나온 학생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재우려는 것이었다. 동구 일대는 낮에는 시위대의 수중에 있어 학생들이 안전했으나 밤이 되면 경찰의 통제로 들어가기 때문에 연행될 가능성이 많았다. 따라서 투쟁지도부는 학생들의 안전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주민들이 나서서 학생들을 재워주고 있었다. 삼삼오오 학생들을 데리고 가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현해협 간부들은 이 싸움이 비록 힘에 의해 멀지 않아 진압되겠지만 결코 패배한 싸움이 아니라는 확신을 확인하곤 했다.[40] 한편 회사측은 진압경찰에게 막대한 지원을 제공했다. 외국인 숙소가 경찰의 작전본부로 사용됐다. 1만 4천여 진압병력에게는 최고급 식사를 제공했다. 관리자들을 시위대 속에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한 뒤 경찰에 매일 넘겨주었다. 진압작전을 지휘하는 경찰 고위간부들에게는 수천만 원 대의 수고비를 찔러주었다. 기자들에게도 온갖 편의를 제공하면서 여론을 호도했다. 현대중공업 앞 다이아몬드 호텔의 객실을 기자들에게 제공하고 매일 회사측이 작성한 보도자료를 건네주면서 회사측의 일방적 입장만이 보도되게 했다. 한겨레신문을 제외한 모든 기사들은 회사측이 제공한 자료를 그대로 베껴 작성됐다. 정상조업률이 74%니 80%니 하면서 마치 절대 다수의 노동자들이 조업하고 있는데 일부 극렬세력만 시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여 노동자들의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의 이와 같은 보도 태도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광주 얘기를 꺼냈다. 직접 겪어보니 어떻게 해서 광주 시민들이 ‘폭도’가 되었는지 알겠다는 것이었다. 하루하루의 격렬한 투쟁을 겪으면서 노동자들과 주민들은 80년 광주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41] 2일 마무리 집회에 공권력 투입 이후 처음으로 파업지도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5천여 명의 노동자와 주민들이 모인 이날 집회는 이원건 위원장의 출현으로 동구가 떠나갈 듯한 열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파업지도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매일의 투쟁이 많은 부상자를 속출시키며 확대되고 있음에도 파업지도부 간부들의 모습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도부로서의 행동지침도 없었다. 정영빈 씨만이 <파업투쟁속보>를 지속적으로 발행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파업지도부가 맡아야 할 투쟁지도는 처음부터 권용목 씨 등 현해협 간부들이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42] 공권력을 투입하면 현대중공업 파업이 종결될 것으로 기대했던 노태우 정권과 현대 자본은 투쟁의 양상이 다르게 전개돼 가자 당황했다. 그런 와중에 정국은 다시 한 번 급변하고 있었다. 3월 26일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을 단호히 대처한다는 명분 아래 노태우 정권은 대대적인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4월 3일 안기부, 경찰, 보안사를 중심으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설치돼서, 재야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지도자 등 민주화 세력을 대대적으로 구속·수배했다. 4월 정국은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살벌한 분위기로 치달아 갔다.[43] 민주노조운동 또한 핵심 공격대상이었다. 정권은 “전국 각 지역 공안합동수사본부에 불법 노사분규와 배후조종자 신고센터를 설치해 불순배후세력과 파괴행위 주동자를 색출해 엄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노동자 투쟁을 봉쇄하기 위해 파업과 직장폐쇄 기간 중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게 하였고, 이를 따르지 않는 사업주는 지원 혜택을 규제하였다. “방위산업체, 기간산업, 병원, 운수업체 노사분규는 모두 불법”으로 규정했고, “3자 개입, 불법 폭력행위는 엄중 처벌”[44]하겠다고 선언했다. 정권의 공안통치는 울산의 투쟁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치안본부는 울산에 대규모 특공조, 체포조 형사대를 급파했다. 또한 울산 투쟁을 재야와 연계된 극렬투쟁으로 규정하고 오좌불 숙소와 현해협, 그리고 울산지역 임투지원본부, 울산사회선교협의회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는 한편, 지원 연설한 이부영 전민련 의장과 권용목 씨 등 울산지역의 핵심적 지도자들 20여 명을 공개수배했다.[45] 그러나 울산의 투쟁은 여전히 확대되고 있었다. 백골단의 횡포가 이제 전 주민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며 노동자들은 물론 가족들 심지어 어린 학생들과 노인들까지 손에 돌을 쥐게 만들었다. 연 인원 1만여 명에 가까운 시위대가 간선도로 곳곳에서 도로를 점거하고서 격렬한 시위를 계속했다. 3일 저녁에도 어김없이 민주광장에 5천여 명의 노동자와 주민들이 모여 마무리 집회를 가졌다. 투쟁지도부는 대규모 특공, 체포조 투입에 대응하여 자체적인 프락치 색출 작업을 실시했다. 우선 시위대 내에 침투한 프락치를 색출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잡힌 프락치는 전하2파출소 소속의 순경 손삼열이었다. … 노동자들이 중년의 사나이를 붙잡고 “이놈은 남부서 형사계장이다…”라며 질질 끌다시피 해 현해협 사무실로 데리고 왔다. … 잠시 후 또 한 사람이 잡혀 왔다. … 백골단 소속 정보원이었다. … 얼마 후 이번에는 중년의 아저씨가 끌려왔다. … 이번에는 그를 끌고 오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이 아니라 아주머니들이 다수인 주민들이었다. 이 사람은 낮에 시위대가 백골단에 쫓겨 여기저기 흩어지면 노동자들이 숨어 있는 곳을 백골단에 알려주어 여러 사람이 백골단에게 죽도록 얻어터지며 붙잡히게 한 자였다. 주민들은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 시위가 끝나자 그를 붙잡아 현해협까지 끌고 온 것이다. … 4일 저녁 집회 때에도 프락치 색출은 계속되었다. 30대 후반의 사람이 현해협으로 잡혀왔는데 신원을 확인하니 금강개발 총무과 직원이었다. … 이번에는 놀라운 자가 붙잡혀 왔다. … 몸을 뒤져보니 놀랍게도 그는 안기부 요원이었다.[46] 4일과 5일의 시위는 더욱 격화됐다. 백골단의 과잉진압은 주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며 투쟁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대다수 노동자들이 현장을 빠져나와 조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계열사들도 조업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울산의 시위가 민중항쟁의 양상으로 발전해 나가자 정권은 공안·노동 관계부처 차관회의를 열고 필요할 경우 울산에 위수령을 포함한 강력한 공권력을 행사할 것을 결의했다. 치안본부는 추가적인 공권력 투입을 검토했다. 5일 저녁 전경 병력이 민주광장을 점거하고 집회를 봉쇄했다. 노동자, 가족, 주민, 심지어 어린 학생들과 노인들까지 1만여 명이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동구 일대 곳곳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격돌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연행됐다. 6일 국무총리, 안기부장, 각 부처장관 전원이 참석한 ‘좌익폭력세력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른바 ‘좌익폭력세력’에 대해 범정부적 차원에서 총력을 집중하여 정면대응한다는 강경방침을 세우면서, 울산의 시위에 대해서도 강력 대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경찰의 공격이 더욱 강화됐다. 아침부터 민주광장을 전경병력이 완전히 점령해 버리면서, 사실상 투쟁을 이끌던 현해협 야전사령부가 공간을 잃고 거리를 헤매게 됐다. 구심을 잃은 시위대는 우왕좌왕했다. 시위대의 조직력도 현격히 떨어졌다. 시위현장에서의 자발적 지도에 의해 시위가 전개되는 양상으로 변해갔다. 이날 이후부터 시위는 화정동 자유광장에서 시작되었다. 민주광장 탈환작전이 전개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만세대 민주광장보다 주택가 안쪽에 위치한 화정동 공터를 ‘자유광장’이라 명명하고 끊임없이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광장마저 경찰에 뺏기고 급기야는 가마터가 있는 일산동 공터까지 밀려갔다. 이곳을 ‘평화광장’이라 이름붙인 노동자들은 최후의 일인까지 용감히 싸웠다.[47] 4월 10일이 넘어가면서 시위는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약 1천 5백여 명의 열성 노동자들이 연행됐다. 나머지 노동자들도 매우 지쳐 있었다. 시위 참가자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간간이 주민들의 항의농성이 전개되곤 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의 조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출근부에 사인만 하고 회사를 나오거나 작업장 근처에서 옹기종기 모여 앞으로의 일에 대한 얘기만 나누고 있었다. 그동안 시위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대의원들이 모여 ‘수습위원회’란 이름으로 정상조업을 결정했다. 그들의 수습방안은 서태수는 물론 이원건 위원장까지 불신임 처리하고 24일 위원장 선거를 위한 조합원 총회를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4월 18일, 128일 파업의 깃발이 공식적으로 내려졌다. 피신해 있던 이원건 파업지도부 위원장이 ‘이제 조업에 들어가자!’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현장조합원들이 지켜보는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경찰에 자진출두했다. 고난의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투쟁! 87년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민주노조의 깃발을 움켜쥐고 달려온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자존심이었던 128일 장기파업은 현대의 잔인한 테러와 가공할 공권력의 힘 앞에 무참히 짓밟히면서 또다시 현대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깊은 한을 남기고 그 막을 내리고 있었다.[48] 힘에 밀린 조합원들은 현장에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파업으로 투쟁 지도부 48명과 학생 8명이 구속되고 55명이 해고됐다. 무엇보다 해고자들을 복직시키려고 시작한 싸움인데, 되려 55명이 추가로 해고됐다. 그러나 현장으로 돌아간 조합원들의 가슴 속은 패배감보다는 자신감으로 흘러넘쳤다. 비록 해고자들은 복직시키지 못했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해고당한 동료의 복직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울 태세가 돼 있는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아,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구나. 1만 2천 파업대오가 이토록 서로를 끔찍하게 지켜낸다면, 당장의 승패를 떠나 장차 우리가 무엇인들 못할 게 있겠는가! 지도부를 잃은 상태였지만, 조합원 대중은 기가 죽지 않았다. 파업을 거치는 동안 탄생한 다양한 현장모임을 토대로 수백 명의 선진노동자가 기층 활동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파업대오가 갖고 있던 단결력은, 현장 복귀 이후에도 기층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강고하게 유지됐다. 파업 기간 조·반장을 통한 자본의 말단 관리체계는 완전히 붕괴했고, 현장 복귀 이후에도 형식만 복구됐을 뿐 도무지 권위가 먹히지 않아 실제로는 작동불능이나 다름없었다. 생산에 심각한 차질이 지속되자, 결국 자본은 조합원 대중을 달래기 위해 어느 정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몇 달 뒤 수습 지도부와 단체협약을 타결하면서, 현중 자본은 128일 파업 기간의 임금을 파업 참가일수를 기준으로 차등 지급하는 데 동의해야만 했다. 처절한 패배 속에서도 당당히 쟁취한 값진 승리였다. 128일 투쟁을 두고 누구도 패배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위대한 승리였다. 이러한 128일 파업투쟁은 많은 것을 남겼다.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 민주노조의 정당성을 온몸으로 체득하며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각성은 현장조직의 건설로 표출되었다. 거의 모든 부서에 ‘○○부서 동지회’가 조직되었다. 128일 투쟁이 공권력이라는 물리력에 여지없이 무너졌지만 투쟁이 지나간 현장의 분위기는 위축된 것이 아니라 파업 이전보다 훨씬 관리자들의 통제가 발을 못 붙일 정도로 민주화되어 있었다. 각 부서의 내부 문제는 부서원들과 사전 협의 없이는 거의 해결될 수 없었다. 128일 파업 이전에는 현대중공업에는 이렇다 할 현장조직이 없었다. 그러나 장기파업을 끝낸 현장에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조직들이 폭넓게 형성되면서 민주노조의 소중한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었다. … 해고자 복직문제는 해고기간의 임금이 전액 지급되고 해고기간도 근속연수에 산입 되었으며 전 조합원에게 지급되었던 파업기간 임금도 지급되면서 일단락 되었다. 87년 첫 해고자들을 계열사에 개별 복직시키고 이를 거부한 해고자에 대해서는 복직불가 원칙을 고수했던 것에 비해 획기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임금인상 역시 … 예년에 비해 많은 인상률을 보이며 총회에서 58.04%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또한 송명주 집행부는 서태수 집행부로부터 어이없게도 조합원 자격을 박탈당했던 파업지도부 간부들을 노조원으로 전원 복귀시키고 조합의 명예를 더럽힌 1·8 테러 가담자, 서태수 3대 집행부 임원 및 측근 상집위원들에 대해 조합원 자격을 박탈했다. 이러한 민주노조로서의 정상화 작업은 송명주 위원장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128일 투쟁의 성과였다. 투쟁 이전보다 수십 배 배가된 조합원들의 의식과 조직력은 사측으로부터 양보안을 쟁취하는 결정적 힘이 되었던 것이다.[49] 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은 현대중공업 내부적으로 민주노조가 조합원대중 속에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면서 거대 현대중공업노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고, 나아가 전국의 민주노조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기폭제가 됐다. 4) 1989년 마창노련의 창원대로 투쟁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1989년 3~4월 마창노련의 지역 연대투쟁이었다. 마창노련 8년의 역사 가운데 1989년만큼 역동적인 투쟁과 승리로 장식된 해는 없었다. 동시에 1989년만큼 구속, 수배, 해고, 폭력테러, 압수수색 등 탄압이 극심한 해도 없었다. 그만큼 1989년은 마창노련에 있어서 승리와 좌절이 명암처럼 엇갈린 한 해였다.[50] 창립 1주년을 갓 넘어선 마창노련은 1989년 2월 2일 ‘마산·창원 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투쟁본부’를 주도적으로 발족시켰다. 1989년 임금투쟁에서 개별 기업의 고립분산성을 극복하고, 중간노조들을 견인하며, 임금협상과 노동법개정운동을 결합하고, 지역 차원에서 공동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투쟁본부는 총 65개 노조를 포괄했는데, 마창노련 산하 노조가 38개, 바깥에 있는 노조가 27개였다. 투쟁본부 발대식에는 1만 2천 명이라는 기록적인 숫자의 조합원들이 참여했다. 투쟁본부는 임금인상 공동요구안 마련, 쟁의기금 확보, 정당방위대 구성, 조합간부 공동교육 등 임금투쟁 준비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단위노조들을 수출자유지역은 1·2지구, 창원공단은 3·4·5지구로 편제하여 지구별로도 활동하게 하였다. 그 성과가 3월 24일 ‘노조탄압 분쇄 및 89임투 전진대회’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마창지역 노동자들은 각 노조별로 집단조퇴를 결행하고 출정식을 거행한 후 전원 머리띠를 묶고 대열을 형성하고 나서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을 시작하였다. “같이!” 하고 한 간부가 선창하면 조합원들은 “죽자! 죽자! 죽자!”를 세 번 반복하였다. 그때마다 힘차게 허공을 향해 뻗쳐나간 팔뚝에서는 무쇠와 같은 힘이 넘쳤고 이를 본 시민들은 달리는 차 안에서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도도하고 거센 파도를 일으키면서 집회장을 향해 전진하는 노동자의 대열은 끝없이 이어졌다. “마창단결! 완전쟁취!” … 무엇보다 이날 집회의 특별한 감격은 마창노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전 조합원총회였다. 이승필 마창노련 조직국장(대림자동차노조 위원장)은 힘차게 조합원총회 성원을 보고하였다. “마창노련 전 조합원 3만 2천 명 중 오늘 참석한 조합원은 2만 5천 명입니다. 따라서 전 조합원 2/3 이상의 출석으로 총회가 성립되었음을 공표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역 노동자 연대집회이자 조합원총회가 힘차게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 마창노련 최초의 ‘조합원총회’. 1989년 3월 24일 수출지역 후문 옆 삼각공원에서 임투 전진대회를 겸해서 열린 마창노련 조합원총회, 2만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인 이날 집회는 마창지역 노동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연대집회이자 조합원총회였다.[51] 이렇게 마창노련이 힘차게 임투준비를 진행하고 있을 때, 정권과 자본은 3월 16일 서울지하철노조의 파업투쟁을 공권력으로 짓밟은 데 이어 또다시 3월 30일 현대중공업 파업투쟁에 1만 5천 경찰병력을 투입했다. 울산에서는 연일 가두투쟁이 벌어졌고, 서울과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도 현대중공업 탄압에 대항하는 집회와 가두투쟁이 격렬하게 이어졌다. 마창노련 노동자들도 격렬한 항의 투쟁에 나섰다. 창원 현대정공 조합원들은 3월 30일 출근과 동시에 파업에 돌입하여 가두진출을 저지하는 300여 명의 백골단과 전경에 맞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으며 마창 선봉대는 시내 파출소와 현대자동차 영업소, 리바트가구점 등을 타격하였다. ㈜통일노조 등 마창노련 조합원들도 중식시간을 이용, 규탄집회를 갖고 퇴근 뒤 자발적으로 수출지역 후문 앞 노동자민주광장에 2천여 명이 집결하여 폭력경찰의 무자비한 최루탄 난사에도 불구하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전투적인 가두투쟁을 벌였다.[52] 4월 3일과 4월 7일 이틀 동안 수출지역 후문 노동자민주광장과 창원대에서 각각 ‘마산창원 지역 및 현대중공업노조 탄압분쇄 결의대회’가 열렸다. 집회는 “노동운동 탄압하는 노태우정권 타도하자!”는 구호와 함께 가두투쟁으로 발전하여 돌과 화염병, 그리고 최루탄이 난무하는 공방전 속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4월 9일 일요일, 창원대 민주광장에서는 ‘현대중공업노조 탄압규탄 및 89 임투승리 전진대회’(전국 동시다발)가 1만여 마창 노동자의 참여 속에 열렸다. 집회를 마친 오후 5시부터 학생 등 1천여 노동자들은 파업 중인 부산산기를 향해 가두행진에 나섰고, 경찰차를 불태우며 투석전을 벌이는 등 격렬한 접전을 벌였다. 19명의 연행자가 발생하자 노동자와 학생 등 500여 명은 재집결하여 창원대 봉림관에서 농성을 벌인 끝에 결국 연행자 전원을 석방시켜 냈다.[53] 4월 10일에는 세신실업 구사대폭력에 맞선, 나중에 하나의 전설로 회자된 매우 인상적인 연대투쟁이 전개됐다. 세신실업(창원공장)노조는 1월 7일부터 단체협약 투쟁에 들어갔다. 회사측이 교섭요구를 묵살하고 2월 18일 공장폐쇄를 단행하자, 노조는 즉각 직장폐쇄 철회를 요구하며 파업농성을 시작했다. 회사측은 2월 21일 구사대를 투입해 폭력사태를 유발하고 정방대원 2명이 구속되게 했다. 이에 마창투본 제3지구는 2월 25일과 3월 9일, 각 2천여 명이 참석한 연대집회를 열고 세신실업노조의 파업투쟁을 격려·지원했다. 그런 상황에서 4월 10일 구사대가 다시 한 번 대규모로 투입됐다. 새벽 5시, 세신실업 조합원 50여 명이 농성장에서 곤히 자고 있을 때 구사대 200여 명이 농성장 건물 옆 철조망을 뚫고 침입하여 삽시간에 농성장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구사대들은 조합원들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무조건 닥치는 대로 개 패듯이 패고, 밧줄로 묶고, 콘크리트 바닥에 엎어놓은 채 워커발과 각목으로 구타하였다. 이들이 미친개마냥 휘두르는 몽둥이에 노조간부와 조합원, 그리고 아주머니까지도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게 되었다. … 구사대들은 노조사무실 집기들을 깡그리 부수고 서류를 강탈하거나 불태워버렸고, 조합원들을 강제로 끌고 가 식당에 감금하고, 노조간부 10명을 경찰에 넘겨버렸다. … 세신실업 구사대 난입 소식은 삽시간에 전 마창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부산산기에서 지원농성을 하던 마창노련 선봉대를 비롯하여 타코마노조 정방대가 들이닥쳤고, 대원강업 조합원 300여 명은 통근버스에서 이 소식을 듣자마자 버스를 그대로 돌려 달려왔고, 금성사2공장노조는 총회를 하던 중 소식을 듣자마자 조합원 200명이 달려왔다. 그밖에 대림자동차, ㈜통일, 삼미금속, 부산산기노조 등 순식간에 정방대원 700여 명이 속속 세신실업 앞으로 모여들었다. 현장은 엉망이었다. 현수막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고, 구사대 몇 명이 사내를 청소하러 왔다갔다 하는 가운데 본관 앞에는 조합원 몇 명이 무릎을 꿇린 채 각목과 쇠파이프로 계속 난타당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마창 노동자들의 눈에 불이 번쩍였다. “동지여, 내가 있다!” 700여 정방대원들은 대오를 짜고 ‘퍽!’ 하는 신호음(타코마 정방대가 가투 때 포획한 사과탄 5발을 터뜨리며 정문 돌파함)에 맞춰 정문으로 한꺼번에 돌진해 뛰어 들어갔다. 동시에 측면에서는 준비한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정방대원들은 정문을 돌파하였다. 당황한 구사대들은 마치 불을 만난 짐승들처럼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났고 경호대가 새총으로 위협사격을 하자 구사대 몇몇은 두려운 나머지 2미터나 되는 가시철망 담을 뛰어넘으면서 손이 찢기는 줄도 모르고 도망치기에 안간힘을 다했다. 정방대원들이 50여 명의 구사대를 체포하고 현장을 탈환하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식당에 감금되어 있던 농성 조합원들도 즉시 구출되었다. 붙잡힌 구사대들이 작성한 진술서를 통해 구사대 조직과 배경, 그리고 침투과정이 낱낱이 폭로되어 회사측의 노조말살 음모공작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세신실업 구사대는 창원공장 홍두식 공장장 외 20명과 양산 41명, 그리고 서울, 대구, 부산, 대전, 광주, 경기, 제주도 등 영업부 소속 사원과 영업소장 등 61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4월 8일 부산 애린 유스호스텔에 집결하여 영업부 교육을 빙자한 창원공장 노조 침탈훈련을 받았다. …) 구사대에게 구타당해 중경상을 당한 세신실업 조합원들을 생각하면 울분을 식히기 어려웠으나 마창노련 정방대는 훌륭하게 자제력을 보여주었다. 구사대는 지휘계통과 폭력행사에 따라 단순 가담자는 풀어주고 악질 구사대와 지휘자는 구분하여 남겨 두었다. 어느새 회사의 연락을 받고 전경버스 6대가 달려왔다. 전경들은 모두 진압복으로 갈아입고 세신실업 정문 앞에 도열하기 시작했다. 긴장이 감도는 순간이었다. 마창노련 정방대원들은 여성노동자와 일부를 돌려보낸 뒤 정예부대를 앞세워 경찰과 정면 대치하였다. 의장단은 경찰서장, 시장과 협상을 벌여 경찰에 강제연행된 세신실업노조 간부 10명과 구사대와의 교환문제를 논의한 끝에 우선 노조간부 6명과 구사대 10명과의 첫 번째 교환을 시도하기로 하였다. 오후 4시 30분경 먼저 구사대를 내보낸 뒤 노조간부를 기다렸으나 경찰에 대한 불신 때문에 초조감과 불안감은 더했다. 마침내 노조간부 6명이 당당하고 늠름하게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온 간부들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피투성이였고 온 몸은 피멍으로 물들었다. 구사대를 석방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간신히 분노를 참고 나머지 구사대 7명을 또다시 교환조건으로 내보냈다. 오후 7시 30분경 김명길 위원장과 사무장 등 간부 4명이 풀려남으로써 연행자 전원이 석방되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대로 구속시켜 버렸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만 해봐라. 동맹파업도 불사하겠다’며 대의원을 소집하고 그랬죠. 창원경찰서장이랑 한참 고민하더니 저녁때 다 풀어줍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창지역 노동자는 연대투쟁의 위력과 중요성, 그리고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아울러 마창노련 및 마창공투본을 중심으로 한 지역연대투쟁이 크게 활성화되면서 진짜 임투 분위기가 뜨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 이후 마창 노동자는 “구사대에게는 깨지지 않는다”는 ‘불패의 신화’란 자랑스런 명예를 얻은 대신, 회사측 관리자들 사이에서는 “구사대에 끼었다가 귓방망이나 얻어터지고 불명예나 뒤집어쓰느니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는 소신론이 파다해졌다는 일화가 전해졌다. 경찰은 세신실업 부위원장과 정방대원이 함께 잡혀오자 부위원장은 풀어주면서도 정방대원으로 밝혀진 일반조합원은 오히려 구속할 정도로 정방대를 두려워하고 경계하였다.[54]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앞세운 정권의 공격은 계속됐다. 4월 16일에는 단병호 전국투본 본부장이 구속됐다. 22일에는 (창원 ㈜통일 해고자인) 문성현 전국노운협 공동의장이 구속되고 (마창노련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경남노동자협의회(경노협) 사무실이 압수수색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창노련은 “구속자 석방, 공안합수부 해체, 고문경관 처벌”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까지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폭발적인 가두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했다. 그 정점에는 4월 하순 일주일 이상 매일 1만 명 이상의 조합원들이 창원을 가로지르는 창원대로 곳곳에서 전투경찰에 맞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한 ‘창원대로 대투쟁’이 있었다. 투쟁이 전개되는 동안 언론에서는 연일 마산·창원 지역의 투쟁을 대문짝만하게 보도했고, 항간에는 마산·창원 지역에 위수령이 발효될지 모른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했다. 마창노련 8년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규모가 큰 투쟁이었다. 그 전초전은 4월 19일 연행된 금성사 1공장 조합원 6명을 구출하기 위해 시작된 연대 가두투쟁이었다. 연행자가 38명까지 늘어났지만, 노동자들이 보여준 폭발적인 가두투쟁에 깜짝 놀란 경찰은 결국 연행자를 모두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파업 8일째인 4월 18일 금성사 1공장 2천 5백여 조합원은 ‘임금인상투쟁 결의대회’와 ‘구자경 럭키금성그룹회장 모의장례식’을 가진 뒤 만장, 상여, 허수아비 등을 앞세우고 회사 밖으로 진출, 회사 주위를 돌며 1시간 동안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면서, “임금 52.3% 인상”의 구호를 외치며 회사측의 성의있는 협상 자세를 촉구했다. 그런데 KBS(창원)가 금성사 임투 보도과정에서 회사측 보도자료만 인용하여 왜곡보도한 데 항의하여 다음날 4월 19일 금성사 1공장 조합원들이 KBS를 항의방문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 6명이 경찰에 불법 연행되자 분노한 금성사 1공장 1천 5백여 조합원은 연행자 구출을 위해 즉각 창원경찰서로 진출하였고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경찰의 거친 폭력진압에 밀린 금성사 조합원들은 ㈜통일 1공장 안으로 피신하게 되었고, 경찰은 ㈜통일 작업장 안에까지 들어와 최루탄을 쏘며 과잉진압을 하였다. 작업장에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자 격분한 ㈜통일 조합원들은 전원 작업을 중단하고 뛰쳐나와 돌과 화염병으로 폭력경찰과 맞서 투석전을 벌이면서 싸움은 격화되었다. 오후 5시경, 파업 중인 금성사 2공장 2천여 조합원과 인근의 효성기계, 대원강업, 루카스, 램트레이딩, 부산산기 등에서 조합원들이 뛰쳐나와 합세, 내동상가 쪽에서 경찰을 공격하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렇듯 내동상가 쪽과 창원대로 쪽 양쪽에서 노동자들이 양동작전으로 경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자, 당황한 경찰은 다연발탄 철갑차량 2대를 동원하여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지랄탄을 난사하고, 30여 명의 노동자를 폭력적으로 연행해 갔다. 투쟁은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로 바뀌었고 퇴근하는 노동자들까지 합세하여 불어난 노동자군단은 더욱 사기가 충천하여 전투는 점차 격렬해져 갔다. 결국 경찰은 노동자들의 격렬한 저항에 밀려 더 이상 진압능력을 상실한 채 오후 8시경 황급히 철수하게 되었다. 승리한 노동자들은 힘찬 진군가를 부르며 파업사업장으로 돌아갔다. 한편 경찰의 폭력진압 과정에서 광대뼈와 이빨이 부러지고, 넘어진 여성노동자까지 무참히 짓밟혀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금성사 1공장 조합원 6명을 포함한 연행자 38명은 자정 무렵 창원경찰서장과의 협상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이 투쟁을 통해 완전승리를 쟁취한 마창 노동자들은 끝까지 투쟁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55] 4월 24일은 창원대로 대투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이날 마산수출자유지역 후문 노동자민주광장에서는 ‘마창투본 쟁의결의 및 방산특위 발대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창원에서 마산으로 넘어가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서 집회 개최 자체를 방해했다. 경찰에 가로막힌 노동자들은 창원대로 전체를 사이에 두고 콜타르 드럼통에 불을 붙여 굴리면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벌였다. 이날 창원대로에서는 발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전 근무를 마치고 집단조퇴한 노동자들이 정문 밖으로 진출하려다가 행진도 시작하기 전에 경찰과 맞닥뜨려야 했다. 경찰은 아예 마산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를 향해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마구 난사하였다. ㈜통일 조합원들은 창원대로 앞에 있는 한국기계연구소 앞까지 나와 싸웠으나 점차 밀리게 되었다. 그때 마침 도로포장용 콜타르 드럼통을 발견한 몇몇 조합원과 정방대원들은 드럼통에 불을 지르자고 제안하였다. 드럼통에 불을 붙여보니 시키먼 연기가 솟아올랐고 좀 있으려니까 ‘펑’ 하는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파편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 솟구쳤다. 방심하고 있던 노동자 몇 명이 엄청난 폭발력으로 인해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비록 위험부담이 많긴 하지만 경찰병력과 대항하려면 이 정도의 무기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었다. 콜타르 드럼통의 위력적인 폭발력을 실감한 노동자들은 결국 콜타르 드럼통에 불을 붙인 후 굴리기 시작하였다. 대로를 향해 진군하려던 경찰은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하늘 위로 구름처럼 솟아오르자 혼비백산하여 도망쳤고, 이후 감히 창원대로 쪽으로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건너편 먼발치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펑펑펑’ 터지는 폭발음과 시커먼 연기와 함께 치솟는 화염기둥, 거기에다 최루탄의 매운 연기, 화염병과 돌의 난무 등으로 창원대로 전체는 화약과 폭탄으로 뒤덮인 그야말로 전쟁터 그 자체였다. 이날 하루 동안 무려 63개의 드럼통이 폭발하였다. 이로 인해 유사시 활주로로 활용할 수 있게 포장된 10차선 창원대로 전체가 차량통행이 완전 차단되었다. 차에서 내려 걸어 나온 시민들과 일반노동자들까지 합세하자 시위대는 더욱 불어났다. 창원대로를 가운데 두고 공단지역 쪽으로는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군대가, 일반 주거지역에는 전투복 차림의 경찰군대가 대치하면서 군사분계선을 형성하였다. 이따금 공단지역 안쪽에서 구호와 노랫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면 곧장 ‘따따따따’ 하면서 다연발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대답했다. 한 정방대원은 그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돌”이라고 말할 정도로 창원대로는 아스팔트가 아닌 돌길로 화했다. “돌이 무려 무릎 정도까지 쌓여 있었다. 보도블록은 다 깨뿌아 하나도 남은 게 없었고, 달리기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거기서는 아무도 달리지 못했다. 그 정도로 돌을 많이 던졌다.” 얼마나 격렬한 전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투쟁은 워낙 투쟁범위가 넓고 광범위해서 한 사람이 보고 겪은 것만으로는 전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창원대로와 그 이면 도로가 다 전투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창원공단 전체 노동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으며, 시간 역시 오후 1시경부터 시작된 전투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경찰은 창원대로가 막히자 바둑판처럼 이어진 공단길로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모든 공단길은 파업사업장이 막고 있어 진입조차 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경찰은 거의 무장해제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내동상가 옆 이면도로에는 예비군 훈련 때 쓰는 모래주머니로 방어벽을 쌓아 진지를 구축해 놓았는데, 방어벽은 하나가 아니라 3, 4단계 정도로 구축하여, 1차선에서 싸우다 밀리면 2차선으로, 3차선으로 계속 옮기면서 싸웠다. 도로가 완전 불바다였기 때문에 경찰은 멀리 창원대로 건너편에서 최루탄만 쏘아대곤 했다. ‘따따따따’ 하는 콩 볶듯한 최루탄 소리가 나면 노동자들은 재빨리 방어벽 밑으로 수그려 피했다가 다시 나와 싸우곤 했다. 완전 전쟁터였다. 또한 기아기공 앞 쪽은 기아기공, 대림자동차, 금성사 1공장 조합원들이 창원대로를 사이에 두고 경찰과 계속 밀고 밀리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워낙 불을 많이 질렀기 때문에 경찰은 도로까지 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노동자들은 베어링이나 볼트를 넣어서 쏘는 새총을 사용하여 멀리 있는 전투경찰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하였다. 또한 금성사 1공장에서는 1987년 대투쟁 때 지게차를 동원한 투쟁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경찰의 지랄탄을 막기 위해 방패용 철판을 부착한 지게차를 동원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현대정공에서는 탱크를 몰고 나가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위수령 발동’ 유언비어 및 경찰에게 빌미를 주지 말자는 점 등을 고려하여 포기하였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창원경찰서장이 직접 창원대로에서 진두지휘를 할 만큼 정권에게는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이다.[56] 24일 노동자들이 창원대로 가두투쟁에서 보여준 폭발적인 힘에 당황한 경찰은 연행자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전자봉으로 고문까지 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4월 24일 콜타르 드럼통 폭발로 부상당한 ㈜통일 조합원과 간호하던 노동자가 응급실에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강제연행 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상으로 응급실에 누워 있던 ㈜통일노조의 임종호는 탈출하여 연행을 면하였으나(이후 수배됨) 또 다른 조합원은 도망 중 산에서 연행되었다. 또한 금성사 조합원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보행진 중 세신실업 앞에서 전경의 불신검문 끝에 몸수색을 받고 새총 및 수상한 무기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렇게 연행된 조합원들은 경찰차 안에서부터 전경들에게 안전모, 워커발, 경찰봉 등으로 전신을 무수히 구타당한 뒤 또다시 창원경찰서 지하실에 끌려가 9시간여 동안 전신구타는 물론 전자봉 고문까지 당하게 되었다. 경찰은 창원대로 투쟁에서 받은 수모에 대한 보복으로 이같이 구타와 전기고문을 자행하면서 드럼통에 불을 붙인 사람의 이름과 새총 소지 목적 등을 진술하라며 무고한 노동자를 방화범으로 몰고 가려 했다. 그중 4월 26일 구속영장이 발부된 정택구 ㈜통일 조합원은 경찰이 무릎을 꿇게 한 후 턱과 팔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길이 1미터가량 되는 경찰 전자봉으로 팔과 허벅지, 어깨 등 온몸을 지져대 고통과 공포를 참다못해 전자봉을 빼앗아 도망 다니기도 했다. 불구속으로 석방된 금성사 조합원은 악몽 같은 고문과정을 이렇게 털어놨다. “입안에도 전자봉을 넣어 전신을 사시나무 떨게 하듯 하는 전기고문을 수십 회 반복했습니다. 또한 바늘침으로 등과 허벅지 등 전신을 고문하여 육중한 몸이 견디다 못해 지상에서 30센티씩 펄쩍펄쩍 뛰어오르기도 했습니다. 일행 11명 모두 이렇게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머리 전체와 목과 손을 흰 붕대로 감싼 처참한 사진과 함께, 전자봉 고문 소식이 퍼지자 마산·창원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마창투본 5지구 대표자회의는 ‘시가전적 가투’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26일 오후부터 격렬한 가두투쟁이 다시 시작됐다. 마창 노동자들은 폭력경찰을 처단하기 위해 창원경찰서로 향했다. 그러나 경찰서에 도착하기도 전에 금성사 앞, ㈜통일 앞, 현대정공 앞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금성사 1, 2공장, ㈜통일, 대림자동차 등의 노동자 1만 명은 ㈜통일, 한국기계연구소 앞, 창원대로에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창원경찰서로 진출을 시도하다 이를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경찰은 보복이라도 하듯 오후 5시 반 경부터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난사했고, 백골단을 앞세워 폭력으로 강제해산을 기도하였다.[57] 27일 오전 창원호텔에서 전기고문당한 조합원들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후 이흥석 본부장 등 마창투본 간부들과 정당방위대 40여 명이 민주당 진상조사단 및 기자들과 함께 창원경찰서로 향했다. 정문을 차단하고 민주당 진상조사단만 들여보낸 경찰은 갑자기 백골단 수십 명을 동원해 이흥석 본부장과 네 명의 간부를 집단폭행하며 연행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마창투본 본부장을 구출하기 위한 투쟁으로 더 크게 불타올랐다. 이흥석 본부장이 백골단에 의해 강제연행되는 한 장의 사진은 전 마창 노동자를 격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투쟁의 불길은 급속하게 구속자 석방투쟁으로 옮겨 붙었다. 4월 27일 마창투본 산하 40여 개 노조는 오후 2시경 임시총회, 집단조퇴, 작업거부 등 형태로 전원 가두로 진출하여 살인정권 타도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구호는 “공안합수부 해체하고 우리 동지 석방하라”, “전기고문 진상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에서 어느새 “살인마 노태우정권 퇴진하라”는 구호로 바뀌었고 투쟁은 격렬해졌다. 기아기공 등은 가음정동 일대에서, 5지구 금성사 1공장과 대림자동차 조합원 약 7천 명은 금성사 앞에서, 3지구는 ㈜통일 1공장 정문 앞에서, 그리고 효성기계, 금성사 2공장, 금성산전, 대원강업, 세신실업, 삼미금속 노동자 5천여 명은 내동상가 옆 도로를 완전 점거하였고, 현대정공 노동자 800여 명도 효성중공업 입구까지 가두진출하고, 각각 경찰의 최루탄과 다연발탄 철갑차량에 대항하여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연일 교통이 막힌 창원대로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뿌연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다. 한편 수출지역에서는 타코마노조를 중심으로 한 20개 노조 조합원 4천여 명이 수출지역 정문 쪽으로 진출하면서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구속자 석방”, “공안합수부 해체”, “노동쟁의조정법 철폐” 등을 외치며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정방대를 중심으로 가두로 진출한 노동자들은 노동자탄압에 앞장섰던 민정당 을지구 사무실과 수출 역내 파출소를 타격하고, 이번에는 불법구속에 항의하기 위해 검찰청으로 진출하던 중 또다시 경찰의 저지를 받자 남성동파출소와 자산동파출소에 돌과 화염병을 던져 각 파출소를 박살내기도 했다. “씨말리자 씨말리자 폭력경찰 씨말리자!”며 폭력경찰에 대항하는 구호를 외치던 노동자의 입에서는 어느새 “노태우정권 타도!”와 “노동자가 앞장서서 민주사회 앞당기자!”는 정권에 대항하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27일 오후 격렬한 가두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그 시각에 공안합동수사본부 요원 20여 명이 마창노련 사무실 압수수색에 나섰다. 그들은 사무실뿐 아니라 개인 소지품까지 낱낱이 수색하여 깡그리 압수해 싣고 갔다. 사무실 칠판에 적힌, “타도 노태우, 축출하자 미일외세” 같은 투쟁 구호들도 베껴 갔다. 이날 밤 늦게 마창투본은 세신실업노조 사무실로 장소를 옮겨 산하 40개 노조 대표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긴급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마창투본은 본부장의 구속과 사무실 압수수색에 대응하여 28일부터 각 지구 단위노조별로 시차적 동맹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했다. 마창투본 전체 대표자회의의 결의에 따라 마창투본 각 노조는 4월 28일 일제히 동맹파업에 들어간 뒤 곧바로 가두투쟁에 돌입하였다. 금성사 1공장과 대림자동차 노동자 2천 명은 회사 앞 창원대로를 차단하고 경찰과 대치,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최루탄에 맞서 투쟁하였다. 또한 효성중공업과 ㈜통일 노동자 4천 명은 회사 주변 일대의 도로를 점거하고 항의 농성하였고, 기아기공, 삼미금속 노동자 3천 명은 창원대로에서 고문경찰관 처벌을 요구하며 창원경찰서 쪽으로 나가려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투쟁했다. 또한 수출지역 내 타코마, 중천, 수미다 등 20여 노조에서 노동자 3천 명이 수출지역을 빠져나와 시내 진출을 시도하다가 경찰의 최루탄에 밀려 민주광장에서 연좌농성을 벌였고, 이 중 300여 명이 수출지역 후문 앞 양덕파출소와 관리사무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과 사무실 집기를 부수었다. … 4월 29일 총파업 이틀째였다. 수출지역 후문 민주광장에서 열린 ‘노동운동 탄압분쇄 및 노태우정권 퇴진 결의대회’에는 한국중공업 3천여 명과 타코마 1천여 명이 참가하는 등 열기를 더했다. 그러나 집회는 지리멸렬한 연설 일변도로 이어졌고 노동자가 당면한 문제들과는 동떨어진 내용으로 일관하여 많은 노동자들이 집회를 이탈하는 결과를 낳았다.[58] 28일과 29일 마창투본이 전개한 지역 총파업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 투쟁이었다. 특히 마창노련 미가입 사업장까지 포함된 마창투본 공식회의에서 시가전적 전투가 결의됐다는 점에서 그전의 자연발생적 투쟁과는 분명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연일 계속된 가두투쟁으로 인한 부상과 피로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지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확한 전술과 올바른 선전선동이 조직되지 못하면서 안타깝게도 투쟁력이 소진되고 말았다. 30일에는 세계노동절 기념 노동자대회가 마산수출자유지역 후문 앞 민주광장과 창원 세신실업에서 각각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공안합동수사본부에서 유포한 ‘5월 1일 총파업설’을 토대로 집회를 원천봉쇄했다.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들은 노조별 또는 지구별로 집회를 가진 후 가두로 진출하여 저녁까지 경찰에 맞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 창원대로 대투쟁을 마창투본은 이렇게 기록했다. 노동운동 탄압분쇄를 위해 4만여 명의 노동자가 연대하여 4월 24일 이후 1주일이 넘는 동안 실질적인 동맹파업을 결행(각 사업장마다 정상조업이 전혀 안 되는 상태)하고 그중 5천~1만여 명이 필사적인 규탄시위를 갖는 일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아울러 강제납치, 무더기 구속, 수색, 압수, 전기고문, 살인, 폭행, 대대적 공권력 투입 등 현재와 같은 노동운동의 전국적 탄압 또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59] 상반기 투쟁 이후 마창노련은 지도부와 간부 60여 명이 구속·수배당하면서 일시적 마비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속자 가족들도 구속자석방투쟁의 주체로 나섰다. ‘마산·창원 구속자석방 및 수배조치해제를 위한 가족대책위원회’(마창구가위)에 동참한 가족들은 5월 22일부터 25일까지 민주화가족협의회(민가협)와 함께 서울에서 평민당사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동시에 5월 23일부터 29일까지 마산에 있는 민주당 강삼재 의원 사무실에서도 점거농성을 벌였다. 원래 마산 농성은 서울 농성 일정에 맞춰 25일 해산할 예정이었으나 27일에서 다시 29일로 두 차례나 연장할 정도로 가족들의 참여와 호응이 높았다. 가족들은 점거농성 투쟁을 통해 괄목할 만한 의식의 변화와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구속자가족위원회 이가숙 회장은 남녀가 함께 ‘노동해방’을 위해 싸워나가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편의 구속이 삶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남편 직장(현대정공, ㈜통일, 기아기공, 삼미금속 등)을 견학한 뒤 훨씬 더 남편을 잘 이해하게 되었고 앞으로는 가족협의회를 노조의 한 부서로 만들고, 임금협상 때도 가족의 일원으로서 사장에게 직접 생활의 고충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발전시켰으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제로라도 노조에서 교육을 시켜 아내에 대한 고루하고 편협한 생각들을 남편들 머리에서 싹 없애버렸으면 한다.”[60] 마창노련이 창원대로 대투쟁을 전개하고 있을 때, 다른 지역에서도 노태우 정권의 노동탄압에 맞선 투쟁이 적극적으로 조직됐다. 부천지역에서는 4월 15일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지역총파업을 전개했다. 4월 9일 부천지역 노동자 2천여 명이 ‘노동운동탄압분쇄 및 부천지역 임금인상 완전쟁취 전진대회’를 개최한 후 행진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침탈로 20여 명이 연행됐다. 이에 10일과 11일 경찰에게 항의투쟁을 전개하던 부천투본 본부장과 상황실장이 연행·구속되고 많은 노동자가 구타를 당해 크게 다쳤다. 12일 저녁 부천지역 노조 간부 2백여 명이 모여 지역총파업을 결의했다. 15일 ‘구속동지 석방과 노조탄압 분쇄’를 내걸고 총파업을 결행한 49개 노조 4천여 명의 조합원은 백골단을 비롯한 경찰에 맞서 치열한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는 4월 14일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연행돼 16일 구속된 단병호 전국투본 본부장 겸 서노협 의장의 석방을 요구하며 20일 서울지역 총파업을 단행했다. 총파업에는 47개 노조가 파업, 총회, 잔업거부 형태로 가담했다. 저녁에 동아건설 창동공장과 구로공단에서 열린 집회에는 3천 5백여 명이 참여했다. 4월 30일 세계노동절(메이데이) 100주년 기념 전국노동자대회가 전국투본 주도로 준비되고, 진행됐다. 1959년 이승만 정권이 노동절을 메이데이에서 대한노총 결성일인 3월 10일로 바꾸고 1963년 박정희 정권이 그 명칭마저 ‘근로자의 날’로 바꿔버리면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노동절을 빼앗긴 상태였다. 1989년 세계노동절 대회를 통해 노동자들은 41년 만에 노동절을 되찾았다. 정부의 원천봉쇄 방침에 맞서, 노동자들은 연세대, 서강대, 한양대, 동국대 등에 분산 집결한 뒤 서울 시내에서 치열한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5월 28일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결성됐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의 집요한 탄압으로 교사 1만여 명이 노조탈퇴 각서를 써야 했고, 이를 거부한 교사 1,550명이 해직됐다. 전교조는 치열한 투쟁을 통해 1만 4천여 명의 조합원과 3만여 명의 후원회 조직을 사수해 냈다. 11월 12일, 전노협 건설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전노협을 건설하자!’, ‘악법 철폐! 건설 전노협!’의 구호가 전면에 내걸렸다. 1989년 한 해 동안 602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구속 노동자가 발생했지만,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노동자투쟁의 기세는 꺾지 못했다. 1989년 지역·업종별 구속 노동자 수 서울 인천 부천 성남 경기 광주 전북 청주 태백 전교조 55 52 53 49 31 3 3 1 18 70 부산 울산 마창 거제 진주 대구 포항 구미 계 30 61 95 25 2 28 24 2 602명 다음 편 보기 [미주] [1]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1989년 193만 명(조직률 19.8%)으로 정점에 올랐던 조합원 수는 이후 꾸준히 하락해 1998년 140만 명(조직률 12.6%)까지 떨어졌다. 이후 조합원 수가 점진적으로 회복돼 2015년 194만 명으로 26년 만에 1989년 수치를 넘어섰지만, 그 사이 전체 노동자 수가 크게 늘어 조직률은 10.2%에 불과했다. 박근혜 퇴진 촛불항쟁을 경과하며 2016~21년 조합원 수가 큰 폭으로 늘어 2021년 293만 명(조직률 14.2%)으로 새로운 정점을 찍었다. [2] 그럼에도 1991년 기준 노동조합 조직률은 3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60.0%, 100~299인 사업장의 경우 26.3%, 50~99인 사업장의 경우 9.5%, 5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0.1%였다. [3]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60~71쪽. [4]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94~195쪽. [5]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1권 1987~1988 -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논장, 407쪽. [6]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1권 1987~1988 -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논장, 454~455쪽. [7]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1권 1987~1988 -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논장, 482쪽. [8] 노동자뉴스제작단, 201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영상) 3부. [9]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1권 1987~1988 -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논장, 478~480쪽. [10] 노동운동역사자료실. [11] 박용수, 1989, 사진집 『민중의 길』. [12]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24~128쪽. [13]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16쪽. [14]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1989, 「전노협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공장에서 전국으로 전진하는 노동운동』, 61~62쪽. [15]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45~148쪽. [16]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58~159쪽. [17] 현대중공업노동조합, 1999, 현대중공업노동조합사 3부작 ‘미포만의 붉은 해’ 2부 <두 개의 파업>(영상). [18]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62쪽. [19]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62쪽. [20]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17~18쪽. [21] 훗날 대통령 노무현의 언행과 이날 그의 연설은 매우 상반된 관점을 보여준다. [22]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71~172쪽. [23]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21쪽. [24] MBC, 1988/12/28, <노태우 대통령, 고위 당정회의서 민생치안대책 마련 지시>. [25]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25쪽. [26]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2권 1989년 -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논장, 139~140쪽. [27]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75~178쪽. [28]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86~187쪽. [29]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89쪽. [30]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2권 1989년 -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논장, 140쪽. [31]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37쪽. [32]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04쪽. [33]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06~207쪽. [34]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40쪽. [35]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19쪽. [36]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25~226쪽. [37]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37쪽. [38]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39쪽. [39]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90~91쪽. [40]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42~243쪽. [41]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45쪽. [42]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45쪽. [43] 공안합동수사본부는 6월 19일까지 77일 동안 총 317명을 구속하고 126명을 불구속입건했다. [44] 노동자뉴스제작단, 201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영상) 3부. [45]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45~247쪽. [46]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46~248쪽. [47]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53쪽. [48]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55쪽. [49]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84~286쪽. [50]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39쪽. [51]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48~150쪽. [52]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54쪽. [53]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54~155쪽. [54]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56~159쪽. [55]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63~165쪽. [56]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67~170쪽. [57]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72쪽. [58]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75~176쪽. [59] 마산·창원 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투쟁본부, 1989/05/15, <마창투본소식> 제6호.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78쪽에서 재인용) [60]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92쪽.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토론회 자료집] 2026년 3.8 여성파업 제안 토론회: 지금 여기에 실질적 성평등을2026년 3.8 여성파업 제안 토론회: 지금 여기에 실질적 성평등을 ※아래 첨부파일에서 자료집을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1부 - 정세분석 사회: 조건희(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발제1 : 국제 정세와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권리의 후퇴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발제2 : 이재명 정권의 기조와 노동탄압 (배예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발제3: 여성파업의 의미와 요구 (유지원, 변혁적여성운동네트워크 빵과장미) 2부 - 지금 여기, 현장의 목소리로 여성파업을 조직하다 사회: 김지현 (학생사회주의자연대) 발제 1 : 이하나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저축은행중앙회통합콜센터 상담사) 발제 2 : 김현주 (공공운수노조 한국마사회지부 과천지회장) 발제 3 : 이지애 (보험설계사지부 조합원) 발제 4 : 김미진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발제 5 : 남지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사무국장) 발제 6 : 사루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성소수자노동권팀 공동팀장) 일시: 2026년 2월 27일(금) 17시 장소: 서울 중구 정동길 3 민주노총 15층 회의 토론회 영상 다시보기 -
3.8 여성파업 정세와 투쟁방향, 윤석열에 이은 이재명 정부의 구조적 착취와 억압윤석열에서 이재명으로 기울어진 운동장, 불평등의 기울기가 작아졌는가? 이재명 정부의 구조적 착취와 억압, 싸우는 여성 노동자의 힘이 필요하다! 광장에서 목이 터져라 외친 평등, 차별 철폐, 권리, 노동,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은 OECD 국가 중 성별 임금격차가 가장 높은 국가이자, 노인빈곤률과 고령여성 빈곤률 모두 가장 높은 국가다. 자살률은 가장 높고 출생률은 가장 낮은 국가다. 성소수자 권리는 최하위권이다. 이재명 정부 들어 젠더 불평등과 노동자 민중의 고통스러운 현실이 나아가졌는가? 기울어진 운동장, 불평등의 기울기가 조금이라도 줄어들었는가? 세계적으로 경제, 사회, 정치, 재생산, 기후 등 위기의 시대,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이재명 정부는 전략산업 육성과 노동개악, 사회적 대화-노사협조주의 강화, 남성 역차별을 해소하는 성평등, K-방산 등 성장 정책을 표방하며 2026년 성장하는 자본주의를 말하고 있다. 자본의 몫을 키우면, CEO가 아닌 여성과 성소수자의 권리가 보장되고 노동자민중의 고통이 줄어든다고? 이재명 정부와 자본의 이러한 행보는 노동과 권리, 여성과 성소수자, 평등을 지우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성장주의 정책의 핵심은 체제의 위기, 그 책임을 노동자 민중에게 더 노골적으로 전가하는 자본가 살리기다. 구조적 성차별을 없애려는 대책도 없다. 젠더평등의 기반을 허무는 이러한 행보는 윤석열을 비롯해 역대 정부 정책의 연장선이다. 평등은 정부와 자본에 맞서지 않고 진전될 수 없다. 정부, 자본과의 상생이나 기존 정당에 대한 투표하는 것으로 구조적 성차별, 여성의 이중굴레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수사에 현혹되지 않고 격화되는 위기와 책임 전가에 맞서고자 한다. 지금 바로 여기에 실질적 성평등이 필요하다. 그리고 싸우는 여성 노동자의 투쟁으로 쟁취하려 한다. 3월 8일 국제여성의날, 여성파업을 일으키는 투쟁. 절실한 요구로 절박한 투쟁에 나선다. 구조적 성차별 타파,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일소, 노동권 보장, 젠더 평등, 전쟁 종식, 노동자 민중의 단결을 위해 여성 노동자가 앞장선다. 함께 싸우자! 1. 불평등을 향한 투쟁에 힘입어 등장한 이재명 정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던 윤석열 정부는 광장에 나선 노동자 민중, 특히 여성과 성소수자의 힘으로 탄핵당했다. 윤석열 정부의 경제 및 노동정책의 핵심은 ‘전략산업 육성을 통한 경제 성장’과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한 효율성 제고’ 두 축이었다. 그리고 ‘여성가족부 폐지’로 상징되듯 젠더갈등과 백래시를 부추겼다. 반노동, 반여성, 반성소수자, 반공과 극우 이데올로기를 조장했다. 이를 통해 빈익빈 부익부, 비정규직, 성별임금격차, 일자리, 경력단절, 가난과 차별 등 불평등 사회에 가득 찬 분노와 저항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노동자 민중의 단결을 가로막고 저항을 무력화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이에 대한 반영으로 내란 광장에서 여성과 성소수자, 노동자 민중은 ‘평등’, ‘민주주의’, ‘차별 철폐’, ‘노동’, ‘권리’ 등을 강조하면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빼앗긴 노동자로, 여성으로, 성소수자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가 보장되는 평등사회를 간절히 외쳤다. 비록 조직된 노동자의 조직인 민주노총이 총파업에 나서지 못했지만, 4개월 동안의 투쟁이 윤석열을 탄핵시켰다. 이에 힘입어 조기 대선으로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이재명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현재까지 ‘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패권적 전쟁 위기 심화에 ‘도약과 성장’, ‘실용과 국익, 친기업’을 내세운다. 자본이 돈을 많이 벌어 성장하는 것으로 사회의 불평등과 빈곤, 비정규직, 실업, 차별과 혐오, 착취와 억압이 어떻게 해소된다는 것일까? 이전의 정부들과 무엇이 다른 걸까? 이재명 정부는 선거공약에서부터 ‘성평등’에 침묵했다. 취임 후 여성가족부 장관 잡음 끝에 원민경 여성인권 변호사 임명하고 고용노동부 장관에 김영훈 전 민주노총 위원장 임명하여 이전 정부와 차별성을 보여주려 하였으나 그렇지 않았다. 이후 10월 14일 국무회의에서는 ‘특정 영역 남성 역차별’을 여러 차례 언급하며 성평등가족부의 업무로 남성 역차별 해소를 주문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실종되었다. 광장의 노동자민중이 사회대개혁의 첫 번째 요구로 꼽은 것이 차별금지법 제정이었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거론조차 하지 않고 있다. 2025년 12월 11~23일 이뤄진 부처별 ‘2026년도 업무계획 보고’에서도 차별금지법은 거론되지 않았다. 한 언론사가 차별금지법 입법 계획을 질문하자 성평등가족부는 “법무부가 주관 부처”라고 말했고, 법무부는 “입법할 계획 없다”고 답변했다. 내란 광장에도 고공농성을 한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부의 약속에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A학교 투쟁, 현대자동차비정규직 이수기업, 서면시장 번영회, 기아차 청소노동자 부당징계 등 여러 투쟁사업장 문제도 마찬가지다. 건강보험고객센터 노동자들은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윤석열, 이재명 정부에 이르기까지 6년을 싸웠다. 그러나 이전 정부가 약속한 소속기관 정규직 전환이 여태 지켜지지 않아 김금영 지부장의 청와대 앞 단식농성이 진행 중이다. 노조법 2조, 3조가 개정되었다지만 진짜 사장인 정부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장애인·이주 여성 노동자의 생존권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이재명 정부의 민낯이라 부르기엔 지나친가? 2. 격화하는 미·중 제국주의 패권 경쟁 속에 한국 “우아한 위선의 시대가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왔다.” 본격적으로 이재명 정부의 정세를 살피기 전, 격화하는 제국주의, 미·중 패권 경쟁 속에 한국이 있다는 점을 짚어야 한다. 2022년 2월 러시아와 나토가 우크라이나에서 출구 없는 대리전을 시작하면서 세계자본주의는 다시 ‘위기·전쟁·혁명의 시대’로 들어섰다. 2023년 10월 이후 이스라엘이 가자의 팔레스타인 민중을 집단학살하면서 동시에 중동 곳곳으로 전쟁을 확산시켰다. 2025년 1월 이후 트럼프는 관세를 앞세워 세계 곳곳을 약탈하고 미국의 대도시들을 사실상의 계엄 상태로 몰아넣으면서 마치 조폭 깡패가 힘자랑하듯 제국주의 최강국의 힘을 휘둘렀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약화하는 세계 패권을 복원하려 베네수엘라 침공과 마두로 대통령 부부 납치, 그린란드 식민 지배와 캐나다 합병 주장, 이란에 대한 폭격 협박, 시리아 정부의 쿠르드족 집단 학살 지지, 쿠바 에너지 봉쇄, 가자 평화위원회 출범과 이사회 소집 등을 벌였다.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의 나라에서는 중국 정부의 경제 및 자원 수탈이 이어지고 있다. 미·중 패권 대결이 격화되면서 자신의 패권을 강화하려는 무차별적 시도들이 국제 노동자 민중을 비탄과 고통 속으로 내몰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가깝게는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멀게는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유지돼 오던 국제질서의 ‘규범’들이 하나둘 흔들리면서 세계는 점점 더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강대국 간의 충돌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고, 전쟁과 학살은 점점 더 세계인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쇠퇴기 자본주의 경제위기와 제국주의 패권 대결은 극우세력과 손잡으며 각 나라의 노동자 민중을 분열시키면서 저항을 약화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의 변화를 ‘우아한 위선의 시대가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왔다’[1]고 말한 한 교수의 표현이 요즘 세태의 정의가 되었다. 미·중 패권대결은 자본주의 만성적 축적 위기의 산물이자 축적의 위기를 가속화하는 요인이다. 2018년 미·중 패권대결이 본격화한 이후 미국은 우세한 힘을 갖고 중국을 압박하여 추가적인 성장을 차단하려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미국과 중국의 격차가 줄어들었다. 현재 달러 패권과 군사 패권이라는 결정적인 양 측면에서 미국이 분명한 우위를 갖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패권 대결은 군사적 긴장을 끌어올렸다. 쇠퇴기 자본주의가 경제, 사회, 재생산, 기후 위기에서 전쟁 위기로 빠져들며 미국의 해양세력과 중국의 대륙세력이 가장 직접적으로 가장 팽팽하게 맞부딪치고 있는 지역, 한국이 위치한 동아시아의 긴장도가 매우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의 한복판에 한국이 있다. 3. 전략산업 육성과 노동개악으로 ‘성장, 도약의 자본주의’ 표방한 이재명 정부 =코스피는 6000을 찍었는데, 내 지갑은? ‘우아한 위선의 시대가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에 이재명 정부의 경제는 최근 잘 나가고 있다. 노동자 민중의 살림살이는 나빠졌다. 제국주의 열강 투쟁이 무역장벽을 확대하면서 한편에서는 한국 자본의 위기로, 다른 한편에서는 거대한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2026년 한국경제 성장률 전망치는 1.8%(한국은행)~2%(정부)로, 2025년 0.97%에 비해 회복세다[2]. 내수 개선과 반도체산업 호조 등이 상승 전망의 근거다. 2026년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영입이익 전망이 각각 170조 원 이상에 달하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작년 6월 이후 코스피 지수 상승률은 글로벌 증시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건설, 석유화학, 철강 등 침체가 이어지고 있지만 일부 첨단산업 대자본이 심화하는 전쟁 위기 등을 기회로 막대한 이윤을 축적하는 것이다. 전반적 이윤축적 위기의 지속 가운데 일부 대자본의 약진이 이어지고 있다. 자본과 노동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해마다 경제는 성장하고 시중 유동성(M2)은 7~8%씩 늘어난다. 한국 상위 10% 자산 점유율은 전체 자산의 65%를 독식하고 있다. 하위 50%는 1%대다. 계급이 대물림되고 있다. 다주택자 상위 20%는 전체 주택 자산의 약 78%를 보유하고 있다. 급여생활자 중에 연봉이 1억 원이 넘는 사람이 140만 명을 넘었다. 소득이 올라 한국 임금노동자의 평균 연봉은 4500만 원이 됐다. 성장은 자본의 이야기다. 실제 노동자들을 소득순으로 나열해 제일 가운데 있는 사람의 소득인 중위 연봉은 3417만 원(월 284만 원)으로 확 줄어든다. ‘284만원’. 임금노동자는 사실은 한 달에 '284'만 원[3]을 번다. 불평등은 고착화되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기울기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자본을 위한 도약과 성장, 노동개악 말은 “국민 행복”인데, 성장 정책은 자본을 향한다. 힘없고 돈 없는 노동자 민중은 먹고살기가 힘들다. 제대로 된 일자리도 없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는 2026년 1월 21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도약과 성장’을 강조하며 2026년을 대한민국 대도약의 원년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주요 정책은 △반도체특별법 등 노골적 전략산업 지원과 전략산업 노동권 억압 △노동구조개혁TF 출범 등 전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노동개악 실행 △지역소멸에 대응 명분으로 자본 특혜를 확대하는 ‘5극 3특 국가균형성장전략’ 추진 △대중의 불만을 달래는 상법개정 등 대대적 주식시장 부양, △규제·금융·공공·연금·교육·노동 6대 핵심 분야에서 구조개악 등이다. 이중 전략산업 지원과 노동개악의 주요 내용은 △AI·반도체 등 전략산업 자본에 대한 노골적 특혜 지원과 규제완화 △전략산업 특별연장근로 확대 등 노동권 억압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 사용기간 3년 이상으로 확대 △직무급제 확대 등 평생 저임금 구조화, 서열 고착화 등으로 구성된다. 여기에 더해 △일자리는 벤처기업 창업으로 만들고 △저출생과 고령화는 일부 지원 재정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국가가 직접 챙기겠다고 한다. =정부, 자본과의 대화로? 특별법으로? 이재명 정부는 이러한 노동개악을 사회적 대화, 노사정 합의를 통해 관철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 대가로 ‘5인 미만 사업장 근기법 적용확대’ 등 일부 노동권 확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재명 정부의 첫 노동정책 사업이었던 노조법 2조·3조 개정은 권리를 축소하는 시행령 탄압과 함께 집행되었다. 이뿐 아니라 노동자이나 근로기준법조차 적용받지 못하는 특수고용, 플랫폼, 프리랜서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에 대하여 근로기준법 확대 적용, 최저임금법 확대 적용이 아닌 ‘특별법’을 들고나왔다. 김영훈 장관이 올해 노동절(5.1) 이전 입법을 함께 완료하겠다는 ‘근로자 추정제’는 "근로자 개념을 넓히는 것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하고[4] 있다. 정부는 자본의 요구에 응답해 특고·플랫폼 노동자에 대한 근로기준법 적용제외, 노동3권 박탈을 영구화하는 가짜 노동권 확대 정책을 펼쳐 열악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통제하고자 한다. =윤석열에 이은 이재명 이재명 정부와 자본은 역대 정부, 자본가계급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생산영역에서 노동자를 더 많이 착취하기 위하여 친자본 정책과 더불어 기존 노동법 개악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을 회피할 수 있는 지침과 시행령 정치로, 특별법으로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며 노동기본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사회 재생산에 대한 정부와 자본의 책임을 노동자민중에게 떠넘기고, 특히 여성에게 일터와 집에서의 이중굴레를 여전히 강요하고 있다. 탐욕으로 심화한 지역의 불균등성을 저출생, 지방소멸 대책은 자본에게 특혜를 주며 노동권과 노동자민중의 제반 권리를 침해하는 각종 규제 완화 특구 조성이다. 불평등의 구조를 강화하고 저항을 무력화하는 정책에 한국노총뿐 아니라 민주노총이 손잡고 있다. 자본가계급과 상층의 노조 관료가 손잡고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후퇴시키게 되면,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여성의 권리는 더 후퇴한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가 기울어진 운동장의 바깥으로 더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4. 여성 노동자의 이중굴레, 차별과 억압을 외면하는 이재명 정부 =깊은 구조적 성차별, 여성이 겪는 차별과 고통의 무게 한국의 구조적 성차별은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한국의 여성 노동자는 1,300만 명이 넘는다. 임금노동자는 1천만 명 수준이고 노동자의 이름을 빼앗긴 특수고용, 플랫폼, 프리랜서, 가사사용인 노동자가 최소 3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노동자 민중으로 살아가는 여성은 한 줌 자본가계급을 제외하고 세상의 절반이다. 그러나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에게 일터에서는 더 적은 임금의 초과 착취를, 집에서는 무급 가사돌봄 노동을 강요함으로 생산과 재생산 영역에서 더 차별받게 만들고 있다. -한국은 2024년을 기준으로 33년째 OECD 국가 중 남녀 임금 격차 1위다. 성별임금격차는 OECD 평균이 11%인 반면 한국은 30% 수준이다. 비유하자면, 남성 노동자가 284만 원(중위소득)을 벌 때, 여성 노동자는 199만 원(최저임금)을 버는 것이다[5]. 저임금노동자는 남성에 비해 여성이 2배나 많다[6]. 남성 노동자는 3명 중 1명이 비정규직이고, 여성은 2명 중 1명이 비정규직[7]이다. 소위 ‘여성이 하는 일’, 여성 다수 직종은 저임금이다. 노동자 2명 중 1명은 직장에서 성차별 경험[8]했다. 여성 노동자의 76% “직장 내 승진·배치 차별 있다”고 답했다. 경력단절을 보여주는 M자 곡선이 줄었다고는 하나, 여성 10명 중 6명 경력단절 경험했고, 결혼·출산을 주요 원인[9]으로 꼽았다. 맞벌이 부부라도 여성이 남성보다 집안일을 112분 더 한다. 여성은 노인이 되어서도 남성보다 40% 가난하다. 개인의 소득격차 원인 1위는 “성별”[10]이었다. 여성 3명 중 1명은 살면서 1번 이상의 여성폭력을[11] 겪는다. 딥페이크 성착취 등 사이버 성범죄는 전년대비 50%나 급증했다. 2021년에 낙태죄가 비범죄화되었는데도 아직 안전하고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임신중지가 허용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한국은 OECD 국가 중 아직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없는 두 나라 중 한 곳이다. 이러한 실상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성차별이 얼마나 깊고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하는 통계가 또 있다. 최근 세계보건기구(WHO) 사망통계 등을 분석한 연구의 의하면 한국 20~39세 여성의 자살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극우세력의 동시 성장으로 여성 혐오, 성소수자 혐오, 이주민과 장애인 혐오도 부추겨지고 있다. 여성이 겪는 고통은 숫자로 다 표현되지 않는다. 전쟁 때보다 낮은 한국의 출생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별 임금격차, 청년 N포 세대의 절망에 이재명 정부는 응답하지 않고 있다. 여성에게 착취와 억압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구조를 고치기는커녕 고착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남성 역차별 해소가 ‘이재명’표 성평등 민주주의? 이재명 정부의 젠더정책 1호는 ‘남성 역차별 해소’를 성평등가족부의 업무로 주문한 것이다. 윤석열이 ‘여성가족부 해체’하겠다는 논리나 여가부를 존속시켰지만, ‘남성 역차별 해소’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별반 다르지 않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일언반구도 없다. 사회의 차별을 인정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추구한다는 가치조차 법으로 명시하기를 외면하고 있다.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이 차이만 해도 현실에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성소수자의 97.1%가 한국 사회를 살기 좋지 않다고 느낀다. 성소수자 노동자는 4명 중 1명이 ‘일터 내 차별’로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이는 평균보다 4배나 높은 수치다. 성소수자는 노인이 되어서도 빈곤·질병·고독에 돌봄의 소외까지 일생을 차별받는다. ‘남성 역차별’ 언급부터 여성 혐오, 성소수자 혐오 선동을 부채질하는 이재명 정부는 AI는 강조하면서 날로 늘어나는 디지털 성착취 범죄에는 이를 막기 위한 지원책이 턱없이 부족하다. ‘디지털성범죄 피해 통합지원단’ 운영 예산은 쥐꼬리만 하다. 스토킹 범죄는 전년보다 12.3%나 증가했고 여성 10명 중 2명이 친밀한 관계의 폭력피해를 겪고 있다. ‘국민 행복과 안전’을 말하면서 비동의강간죄 도입, 포괄적 성교육 의무는 도입되지 않고 있다. A학교 지혜복 교육노동자가 아직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현실은 정부가 젠더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일터와 거리, 학교, 온라인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터의 성차별 해소 ‘하는 척’만 하는 정부 성별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한 고용평등 임금공시제를 500인 이상 민간기업에 2027년부터 도입한다고 밝혔다. 여성 노동자 2명 중 1명은 1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 종사한다. 정부는 성차별 임금 실태를 드러내는 것조차 제한한다. 일터의 성차별은 임금뿐 아니라 채용, 승진, 직무, 노동안전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있으나 이러한 현실을 감추려 한다. 고용노동부의 여성 일자리 등 성평등한 노동정책을 담당하는 부서인 여성고용정책과를 폐지했다. 일터의 성차별에 대해 다룰 유일한 부서를 정부가 없앤 것은 일터의 성평등을 노력할 의지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여성·노동단체들이 노동부 내 전담부서 마련을 촉구하는데도 변화는 없었다. 일터의 성차별에 대한 고용노동부 정책은 출산과 육아에 대한 약간의 지원 제도인데 현장에는 이러한 제도도 사용할 수 없는 노동자가 더 많다. 학교급식법 개정안이 지난 1월 통과되었다. 많은 여성노동자가 폐암으로 죽고 나서야 마련된 법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업장의 급식노동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여성 노동자의 건강권은 산재신청 신청과 보장 강화, 생리휴가 유급화, 산업안전의 성평등 기준 적용, 상병휴가와 수당 도입, 노조할 권리 보장 등으로 다양하게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정부 정책은 없다. 성평등가족부는 폐지되지 않았으나, 다른 부처에 비해 예산과 권한이 빈약한 건 그대로다. 예산은 전체 정부 예산의 0.2% 내외(2026년 2조 87억 원으로 0.27%)다. 그조차도 대부분(80% 이상)이 아이돌봄, 한부모 가족 지원, 청소년 등 '가족 및 청소년 정책'에 사용된다. 그러니 실제로 성평등과 여성의 권리 보장 등 여성 정책사업 비중이 작다. 성차별/성희롱 사건에 대한 부처의 실체적 조사권이 없다. 이제는 ‘남성 역차별’ 업무까지 떠맡았다. 성폭력 피해를 입었거나 한부모 가정 등 더 열악한 여성에게 일시적 지원 정책 등에 그치고 있다. 정부는 ‘ILO 190조 괴롭힘 협약’ 비준하겠다고 했지만 감감무소식이다. 190호 협약은 근로자의 계약 형태와 관계없이 일터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신체적ㆍ정신적ㆍ성적ㆍ경제적 해를 끼치는 행위와 관행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가사사용인,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여성 노동자를 포함해 일터에서 차별당하거나 괴롭힘 피해를 겪는 사안을 실질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등 노동법 개정 투쟁과 노조할 권리 보장과도 연결되니 정부는 이를 회피하고 일터법 제정 등으로 법적 실효성을 무력화하려 한다. 정부는 일터의 성차별에 대해 자본을 규제하거나 어떠한 책임도 지우지 않으려 한다. =이재명 정부의 돌봄은 ‘윤석열 정부의 돌봄산업화 AI 버전’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가사돌봄을 개인에게 떠맡기고 시장화하여 국가의 일정한 지원과 정책으로 이용 비용을 낮추는 방안만 찾고 있다. 노인이나 질환자 돌봄의 요양보호사에 저임금 이주노동을 투입하기 위한 시범사업을 진행 중이다. 가사사용인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게 계속 제외되어 있다. 서울시사회서비스원은 재설립되지 못하였다. 정부는 가사돌봄에 대한 공공성, 사회적 책임 강화와 공적 일자리를 마련을 외면하고 있다. 공공병원 설립과 공공 의료와 돌봄 강화, 건강보험 국고지원 확대 정책과 예산이 없다. 노인과 장애인으로 축소한 돌봄통합지원법을 4월부터 시행하는데 그마저도 국가 돌봄 책임 강화와 거리가 멀다. 국고 예산[12]과 지원인력이 빈약하여 말뿐인 정책이 되고 있다. 장애인은 시민으로 이동하는 권리를 외면당하고 있고 최저임금 적용에서 제외하는 근로기준법 7조는 바뀌지 않았다. 정부는 장애인건강권법 2017년 시행 이후 9년만에 최근 장애인건강보건관리 종합계획을 수립했으나 구체적으로 의료서비스를 종합할 체계가 없는 나열식 수사라는 평가다. 장애인의 삶과 노동, 돌봄을 연결하는 구상은 없다.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한국의 초저출생, 국가 소멸 예고에 이재명 정부는 인구 컨트롤타워 신설하고 대통령이 직접 위원장을 맡는 저출산·고령화 대책 기구(인구미래부)를 신설했다. 노동력 제공 인구를 확보하기 위해 이성애 정상가족 중심으로 출산과 육아에 일정한 경제적, 제도적 지원을 추가하는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여전히 구조적 성차별의 원인은 손대지 않고 있다. 일터의 성차별 해소, 비정규직 철폐와 최저임금 대폭 인상, 공공 돌봄 일자리 확충 등은 정책에도 예산에도 없다. 그저 주로 여성이 전담하는 무급노동이자 개인이 시장에서 거래하는 가사돌봄 정책, 저임금-무권리 저평가 정책이 유지될 뿐이다. 그러니 이재명 정부의 돌봄 정책이 ‘돌봄 로봇’이 추가된 걸 빼면 윤석열 정부 정책과 똑같다는 비판은 과할 게 없다. 로봇을 도입해 ‘공공 로봇 개’가 장애인이나 교통약자의 이동권을 지원하고, ‘공공 아틀라스’가 아이들의 통학길을 도와주겠다는 구상이 아니다. =전쟁과 기후위기 등의 반동적 정책으로 성차별 강화 한국의 국방비는 GDP 대비 세계 5위 수준이다. 전쟁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3.4%)에 이어 2.8%를 차지한다. 이는 영국, 중국, 일본보다 높은 수준이다. 그런데 정부는 2026년 국방비를 전년 대비 8.2% 증가 더 증액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협력하고, 가자 평화위원회 참가까지 저울질하면서 이재명 정부는 ‘실리 외교’를 내세워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가담하고 제국주의 전쟁의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전쟁은 구조적 폭력으로 노동자민중에게, 특히 여성에게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한다. 전쟁 무기로 돈을 더 벌어 한국의 GDP가 올라가면 젠더차별이 해소된다고 주장하는 건가. 이재명 정부는 기후정의를 내던졌다. 2025년 11월 11일 2035년 온실가스 53% 감축을 결정했다. 신규 핵발전소 2기 건설 추진을 발표했다. 이는 기후위기 완화와 온실가스 고배출 국가로서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이미 시작된 석탈발전소 폐쇄에 노동자들의 고용과 지역의 생존권 보장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 않다. 석탄발전소에 일하는 비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고용 문제는 대두되나, 급식과 청소일을 해온 여성 노동자의 고용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기후위기는 경제적 불평등을 더 심화하고 공공 서비스 축소로 인한 돌봄의 위기로 이어진다. 난민과 이주민 등에 인종화된 폭력, 기후위기 부정론을 선동하고 사회적 혐오를 부추기는 극우세력에 의한 민주주의의 위기, 강제 이주와 분쟁으로 인한 폭력과 성폭력 증가 등을 낳는다. 여성과 성소수자가 빈곤과 혐오에 가장 취약해지는 것이다. 자본가 살리기를 위한 탐욕의 기후부정의 정책은 구조적 성차별을 동시에 강화하고 있다. 5. 지금 바로 여기에 실질적 성평등을! 싸우는 여성 노동자가 세상을 바꾼다! 2023년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이 준비했던 최저임금 30%인상을 위한 여성 노동자 파업 시동은 2024년 3월 8일 국제여성의날, KEC지회와 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여성 노동자의 선도적 파업과 많은 여성 노동자, 여성 활동가, 성소수자 동지들의 단결로 한국에서 첫 여성파업을 이뤄냈다. 이후 내란 광장의 한복판에서 여성과 성소수자, 노동자, 미조직 청년 노동자의 윤석열 몰아내고 평등 세상을 만들자는 열망으로 2025년 여성파업을 일으켰다. 아직 여성파업의 힘은 작고, 노동자 민중의 구조적 성차별에 깨부수고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뒤엎기 위한 투쟁도 부족하다. 여성 노동자에게 권리, 민주주의, 평등은 여전히 멀리 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이 매일매일 우리는 투쟁으로 내몰고 있다. 가부장적 자본주의는 여성 억압의 가해자다. 이에 우리는 노동자로 살아가는 대다수 여성과 성소수자, 이주민, 장애인의 목소리로 저항한다. 모든 착취와 억압, 차별과 혐오에 반대한다. 절박한 우리의 삶은 선거로, 시혜로, 대화로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이 사그라들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증거다. 지금 바로 여기에, 실질적 성평등을! 착취와 억압으로 얼룩진 세상, 싸우는 여성 노동자가 세상을 바꾼다! 비록 작은 힘이더라도, 여성파업으로 이재명 정부와 자본의 착취와 억압에 함께 맞서자. 3월 8일, 단결의 힘을 보여주자. 여성 노동자가 앞장서서 2026년 정부와 자본에 맞선 투쟁의 포문을 열자. 평등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가자! [토론회 다시 보기] https://www.youtube.com/live/544nk3bGaFw [1]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이문영 교수 [2] 2025년 달러 기준 GDP는 0.9% 감소 예상 [3] 국세청, 2024년 귀속 근로소득 신고 자료 [4] 오민규, 노동자 개념 안 다룬 'K-근로자 추정제'…알맹이 빠진 제도 개혁의 함정([오민규의 인사이드경제] 유럽의 고용관계 추정제 vs 한국식 모방 입법, 프레시안26.02.20) [5]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국 정규직 여성의 중위소득은 남성보다 29.0% 낮다. [6]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성별 임금 격차 관련 성인지 통계(2025.08.31.) 한국 저임금노동자 비율은 지난해 여성 23.8%, 남성 11.1%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저임금 노동에 2배 이상 더 많이 종사한다. [7]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보고서 2025-16호(2025.12.01.)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2025.8)를 분석한 결과, 남자는 정규직이 796만 명(66.6%), 비정규직이 399만 명(33.4%)으로 정규직이 2배 많다. 여자는 정규직이 516만 명(49.3%), 비정규직이 530만 명(50.7%)으로 비정규직이 조금 많다. 남성 비정규직보다 여성 비정규직이 131만 명 많다. [8] 직장갑질119, 직장인 1000명 조사(2025.05.18) [9] 민주노동연구원, ‘고용상 성차별 경험과 성별 임금 격차 인식 관련 설문조사’(2025년4월) [10] 경제개발협력기구 OECD,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기회의 격차를 줄이는 방법’ 보고서(2025.09.22.) 가계소득에서 기회 불평등의 60% 이상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환경에서 비롯되었고, 개인 소득 차이를 설명하는 가장 큰 요인은 성별이었다. [11] 성평등가족부 ‘2024년 여성폭력 실태조사(2025.04.24) [12] 사업비가 91억 원(529억→620억)으로 최종 증액되었고 모든 지자체에 나누도록 결정됨. 지자체당 사업비(국고기준)는 평균 2억 9천만 원에서 2억 7천만 원으로 2천만 원이 줄어드는 꼴이 되었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성명] 미국 제국주의와 이스라엘은 이란 민중에 대한 공격을 즉각 중단하라!2월 28일,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란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가했다. 오늘 오전 이란 이슬람공화국 지배자 하메네이를 살해했다고 밝혔고, 이란 통신사도 하메네이의 죽음을 보도했다. 최소 200대 이상의 전투기가 참전했고, 500개의 표적을 향해 공격이 자행됐다. 미국은 공습의 목표가 이란의 핵시설 및 탄도미사일 체계 타격을 넘어, 정권교체임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테헤란 시를 비롯해 수많은 민간거주시설이 폭격당했다. 하메네이 외에도 이슬람 혁명수비대 사령관 모하마드 파크푸르, 국방장관 아미르 나시르자데, 하메네이 최고 지도자 측근인 알리 샴카니 등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 적신월사에 따르면 이번 공습 이후 이란 내 최소 201명이 사망했고, 747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란 31개 주 중 24개 주가 공격을 받았다. 수많은 민중들이 이번 공격에 살해됐다. 남부 호르모즈간 주 미나브에 위치한 여학생 초등학교를 겨냥한 공격으로, 다수의 초등학생을 포함해 최소 108명이 사망했다. 파르스 주 라메르드 시 체육관도 공격당해, 어린이들을 포함해 최소 15명 이상이 사망했다. 트럼프는 하메네이 살해 후 입장을 내며 뻔뻔하게도 자신이 이란 국민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다고 얘기하지만, 그는 중동에 대한 제국주의 야욕을 위해 어린이들마저 무참히 살해한 학살자다. 한국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제국주의 침공앞에 침묵하고 있다. 이미 한국정부는 트럼프가 만든 기만적인 ‘(가자) 평화위원회’에 지난 20일 옵저버로 회의에 참석하고, “가자지구 평화 증진을 위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주도적 노력을 지지해왔다”고 밝히며 미국의 중동 패권 강화 행보를 승인하고, 나아가 평화위원회 가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함께 가자를 폐허로 만들어놓고, 그 이름도 기만의 극치를 보여주는 ‘평화위원회’를 통해 팔레스타인에 대한 제국주의 수탈과 억압을 정당화하려 한다. 한국정부는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 앞에 침묵하고, 평화위원회 가입은 적극 검토하며 제국주의 학살과 수탈에 공모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긴급 외무이사회를 소집해 이란 정권의 이웃 국가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규탄했다. 캐나다는 성명을 통해 “미국이 취한 조치를 지지한다”고 밝혔고, 호주 총리는 SNS에 미국의 공격을 지지하는 글을 남겼다. 서구 제국주의 세력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제국주의 침략이 가져온 끔찍한 결과에 대해 동조하거나 침묵하며, 중동 전체를 전쟁으로 몰고가는 데 공모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군주국은 이란의 보복에 대해 응징할 권리를 보유한다고 밝혔다. 모로코 정권은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등 “형제 아랍국가들과 연대”하겠다며, 이 정권들이 이란에 취하는 모든 ‘정당한 조치’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아브라함 협정을 통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중동패권을 승인하는 댓가로, 모로코는 서사하라 민족들에 대한 식민지배를, 아랍에미리트는 유럽제국주의와의 긴밀한 연계 속에서 수단에 대한 지배와 수탈을 용인받았다. 이 반동적 아랍 국가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외면하며 이득을 얻고,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을 지속시키는 또 다른 공범들이다. 제국주의자들은 이란을 침공할 어떤 권리도, 자격도 없다. 이들은 침략의 구실로 이란의 반동적 신정체제를 들먹이며 ‘자유를 가져다주겠다’고 지껄인다. 그러나 미국은 모로코,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들이 전제적 정치체제를 갖고 자국민과 주변 식민지 민중들을 억압하는 것은 적극 지원한다. 이들의 목적은 오직 자신에게 굴종하는 정권의 수립일 뿐, 아랍 민중의 삶과 민주주의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올해 초 하메네이 정권에 맞선 대규모 파업과 시위에서, 이란 노동자민중들은 줄곧 “미국 제국주의는 이란으로부터 손 떼라”고 요구해왔다. 미국의 지배개입은 반동적 하메네이 정권의 폭력과 탄압에 구실을 제공하고, 이란 민중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제국주의의 멍에만을 강요한다. 이란의 반동적 신정체제를 무너뜨리고 해방사회로 전진하는 것은 오직 이란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을 통해 가능하다. 미국은 이란 정권교체를 통해 중동에서의 제국주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며, 그 최종 목적은 중국과의 패권대결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이번 이란 공격으로 미국 제국주의는 중국과의 전면전을 향해 한걸음을 더 내딛었다.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은 내일 동아시아에서의 전면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을 즉각 중단하라! 이란 정권과 독립적으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이란 노동자민중과 연대한다! 노동자민중의 국제연대로 트럼프 정권과 네타냐후 정권을 타도하고, 야만적인 학살과 전쟁을 중단시키자! 2026.03.01. 사회주의를향한전진 -
[후기]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단식농성 15일차, 계급적 연대로 직접고용 쟁취하자!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은 정규직 전환을 위해 6년간 투쟁해왔다. 건보공단의 비정규직화 정책으로 고객센터 노동자들은 십수 년간 불안정한 노동 조건에 시달려왔다. 이들의 투쟁은 한국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옥죄는 비정규직화와 여성 차별에 맞서는 것이다. 오늘(2월 24일)로 김금영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장의 단식 투쟁 15일째를 맞았다. 2월 10일,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 정규직 전환 쟁취 결의대회 이후 김금영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장이 단식농성에 돌입했고, 오늘로 15일 째 단식농성을 지속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은 십수 년간 매우 불안정하고 열악한 조건에서 일해왔다. 2000년대에 진행된 신자유주의 비정규직화의 흐름속에서, 건보공단 또한 2006년 고객센터 업무를 외주화했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연차에 따른 임금인상을 보장받았지만, 외주화된 고객센터 노동자들은 십년을 일해도 임금은 늘 최저임금 언저리였다.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콜수 경쟁을 강요했다. 노동자들은 경쟁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인센티브를 받으려면 가능한 한 빨리 전화를 끊어야 했다. 콜수 압박 때문에 고객에게 깊이 있고 친절한 상담을 제공하기 어려웠다. 외주하청 비정규직 구조는 노동자의 노동조건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의 이익에도 해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부터, 윤석열 정부, 현재 이재명 정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권이 온전한 정규직 전환을 거부하는 동일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외주하청 구조가 만연한 고객센터 산업의 노동자 대부분은 여성이다. 고객센터 산업은 외주하청이라는 중간착취 구조를 이용해, 여성 노동력을 초과착취하는 또 하나의 명백한 사례다. 공공기관인 국민건강보험공단(NHIS) 역시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여성노동자를 초과착취하는 데 동참해왔다. 현재 직접고용 협상 과정에서 정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노동자들이 근무해온 연차 인정을 거부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경력이 적은 일부 노동자들에게는 직접 고용을 위해 시험을 치르고 경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노조는 단 한 명도 소외되지 않도록 모든 노동자들의 직접 고용을 요구하고 있다. 김금영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장은 2월 11일부터 무기한 단식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을 쟁취 투쟁은, 고객센터 산업에서 초과착취당하는 모든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차별을 철폐하는 투쟁, 나아가 모든 비정규직 제도를 철폐하는 투쟁의 일부이다. 이 소중한 투쟁을 엄호하고 계급적 연대투쟁으로 비정규직 철폐, 여성차별 철폐로 나아가자! [English]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national Health insurance service customer center workers, has fought for 6 years for direct employment. they suffered for dozens of years of precarious working conditions, due to irreguarization by NHIS. their fight is to against this irregularization and discrimination on women, that shackles more than half of workers in South Korea. Today(24th Feb) is 15th day since the start of hunger strike by Union Leader Kim Keum-yeong. Hi I'm dolmeng and I'm here at the Rally for direct employment of national Health insurance service customer center workers, who has fought for 6 years, to abolish irregular working system and win the direct employment, since the previous democratic government. The Customer center workers of national health insurance service, NHIS, has worked for dozens of years at very unstable and precarious conditions. As NHIS has outsourced the job, the workers have got no increase of wage, and only got around minimum wage, even though they have worked for more than 10 years unlike other regular workers in NHIS. The company has forced workers to compete each other, lining them with the quantity of calls they receive. It also made workers difficult to counsel the client in depth and kindly, because workers feel pressured to hang up the call as fast as possible, to get the good grade at the competition, to get incentive bonuses. So this outsourced system is not only bad for working conditions but also bad for the social interest of people. The government, since the previous democratic government of moon jae in, and right wing government Yoon Seok yeol, to now Lee jae-myeong, another domocratic government, all the governments are holding the same position of refusing the direct employment. Most of the workers at customer center industries are women, and the outsourcing system is prevailing in this industry, and it's another obvious example of over-exploiting the women labor using the discriminate structure. NHIS, the public institution, is using the same mechanism to over-exploit women. Now in the negotiation process of direct employment, the Government and NHIS is refusing to acknowledge the years that workers has worked, and they're also insisting that some of the workers with relatively little experience should take exam and compete, to be directly employed. While the union is demanding the direct employment of all workers, leaving no one behind. Today union leader, Kim Keum-yeong, decided to go on hunger strike until the demands are achieved. winning the direct employment of these workers, and abolishing all the irregular working system will be the great step forward for the fight against all discrimination, especially for women irregular workers suffering precarious working condition in customer center industry. March to Socialism will also struggle together. 투쟁! -
[기고] ‘노동자는 혼자가 아니라 하나다’ GM부품물류센터 부당해고 철회 투쟁의 기억도무지 질 수가 없는 기세로 싸워냈던 약 70일간의 부당해고철회 투쟁을 돌아본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하나’라는 말이 약간 모순적인 듯 보이면서도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은 그 어느 순간에나 전체 노동자의 싸움일 수밖에 없으니, 당신들이 고립되거나 외롭고 힘겹게 싸우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거. 세종시 연기면 공단로 6에는 ‘한국지엠세종중앙물류센터’가 있다. ‘중앙’물류센터라고는 하지만 국내에 한국지엠 물류센터는 세종시에 있는 것 하나뿐이다. 그간 한국지엠이 차근차근 부품·물류센터를 통폐합해왔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정비 등에 필요한 부품들이 전국으로 보내진다. 미국 등 해외 수출 업무도 함께 담당하고 있다. 1차 하청업체인 우진물류에서는 120여 명이 일했다. 이 하청노동자들은 20년을 일해도 최저임금을 받을 정도로 열악한 현장을 바꾸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2025년 11월 파업을 전개했다. 한국지엠은 하청노동자들의 노조와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업체폐업, 집단해고라는 칼을 꺼냈다. 2025년 12월 31일부로 하청노동자들은 전원해고됐다. 정수유통이란 업체가 새로 왔지만, 노동자들의 고용승계는 한국지엠과의 계약서에 들어가지 않은 내용이므로, 고용승계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20여 년간 수차례 업체가 바뀌면서도 이어져 온 (투쟁을 통해 쟁취해온) ‘고용승계 관행’이 깨졌다. 그 뒤 부당한 해고를 거부하고, 외투 자본인 원청의 횡포에 맞서겠다고 선언한 96명이 물류센터에 남아 싸움을 시작했다. 지역사회를 필두로 한 공동대책위가 구성되었다. 그렇게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해고된 날로부터 현장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단 하루도 물류센터를 비우지 않았다. (1월 16일 저녁, GM와 정수유통의 불법 물량반출을 저지하기 위해 GM부품물류지회 노동자들이 대열을 갖춰 이동하고 있다. - 편집자 주) ‘도급계약 종료’라든가, ‘정리해고’라든가. ‘희망퇴직’도 그렇고, ‘발탁채용’이나 ‘바이아웃’[1]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무해한가. 자본의 언어는 언제나 본질을 흐린다. 해고는 해고일 뿐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일터라는 단어 옆에 삶터라는 단어를 놓는다. 하루 열 시간, 열두 시간 머무는 장소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노동이, 매일매일 만나고 관계를 쌓는 내 곁의 사람들이, 삶의 주요 구성요소가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 무엇보다 우리는 노동자다. 그래서 일터는 삶터고 해고는 살인이다. 학연, 지연, 혈연을 따져가며 관계를 맺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 리 없겠지만. 그럼에도 GM부품물류지회에 연대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지역의 일이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나는 평생 충청남도 이곳저곳을 오가며 살았고, 지금은 천안에 살고, 세종시 조치원읍에 있는 대학을 나왔다. 아무렴 120명이 집단해고 됐다는 데 ‘동네 주민’으로서 안 나설 수 없지. 늘 (서울을 포함한) 타지로 연대를 다니는 데 익숙한 내게 내 지역의 일에 결합하는 일은 새삼 낯설면서 또 기쁜 일이기도 했다. ‘찢겨진 노란봉투법을 정부로 보냅니다’라는 타이틀을 걸고 진행한 대정부 항의 행동도 한몫했다. 비록 우리 맘에 꼭 맞는 형태의 법안은 아니었지만, 또 나는 소위 ‘노동운동판’에 기웃대기 시작한 지 이제 일 년 갓 넘겼지만, 그간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이 피눈물을 흘려왔는지 알았기 때문에 너무 간절하고 또 너무 소중한 법이었다. 그럼에도 첫걸음이었다. 암만해도 노동해방 사회가 당장에 도래한다거나 할 수야 없겠지만, 오랫동안 기울어져 있던 무게추를 이제야 되돌려놓는 첫걸음. 원청 한국지엠 모 상무가 지난가을 파업을 준비하던 세종물류센터 노동자들을 만나 ‘진짜 사장 나오래서 나오지 않았으냐’고 말했다고 한다. 수의계약은 늘 해오던 것이니 올해도 정상적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삼 년 뒤에는 정규직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 ‘초치지 말라’고. 한달 뒤 한국지엠은 하청노동자 전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글로벌 자본에게 노란봉투법쯤은 무시해도 좋을 무엇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이십 명 노동자들의 삶도, 그들과 연결된 수백 명의 삶도, 고작해야 노동자의 삶이므로, 도무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는 표어를 문득 떠올린다. 저들은 하청노동자들의 마음속에 피어난 ‘노동조합’이라는 불길을 꺼트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건 해고가 아니라 ‘계약 종료’라는 말로, 다만 정 억울하면 ‘발탁채용’이나 ‘바이아웃’ 같은 방안도 고려해보겠다고, 선심 쓰듯 얼버무린 그 같잖은 언사들이 마음속 불꽃에 장작을 집어넣는 줄도 모르고. 작년 이맘때 나는 거통고(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동지들과 ‘무지개 조선소’에서 연대투쟁호를 만들고 있었다. 노동운동판, 이라는 곳에 본격적으로 기웃대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작업이었다. GM세종물류센터에 상징물 제작 전 사전답사를 온 신유아 동지를 마주쳐, 작업을 함께하잔 제안을 들었을 때 내가 떠올린 것도 무지개 조선소였다. 멋모르고 함께하겠다고 나섰다가 단단히 코가 꿰이고 말았던 그거. 아무렴 그리기나 만들기는 늘 좋아해 왔으니까, 좋아하는 행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데 즐겁지 않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물류센터이니만큼 상징물은 지게차가 될 거라고 했다. 동지·연대·고용승계·투쟁·단결·원청교섭·정규직 전환이라고 적힌 일곱 개의 상자를 얹은 지게차. 그리고 파지 골판지를 오려 만든, 백수십여 개의 지게차 모양 피켓들. 작업 기간은 딱 이틀이었다. 일고여덟 명이 이틀 내내 달라붙어 큰 지게차를 만들고, (물류센터 사수조를 제외한) 다른 조합원들은 오전에 시간을 내 피켓을 만들었다.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에서 주최하는 1박2일 집회에서 내보이는 걸 목표로, 일정이 빠듯하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무탈하게 완성했다. 피켓은 이틀 내내 꼬박 만들 것을 각오했는데, ‘오후 잔업’을 하지 않겠다는 조합원들의 결의로 순식간에 완성해버렸다. 조합원들이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 꾸미기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공대위 동지들을 포함해 모두가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 나는 주로 피켓과 상자 작업을 했는데, 작업을 좀 하다 뒤돌아보면 (조립식) 지게차가 순식간에 턱턱 만들어져있어서 깜짝 놀랐다. 바퀴를 달 때는 고생을 좀 했지만, 노련한 동지들이 이런저런 재료를 가져와 시도해보고, 타카를 박고 덧댈 목재를 자르고 칼집을 내고 스티로폼을 끼워가며 ‘각’을 맞추는 모습을 보면서, ‘일터의 노동자는 무적이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일터의 주인은 노동자, 라는 말을 이런 순간에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토지의 주인이든 건물의 주인이든. 계약서상 고용주든 실질적인 사업주든) 소위 ‘소유주’라고 불리는 그 누구를 데려와도 이런 일을 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자재의 위치와 용도, 목적과 쓸모를 기억하고 찾아내고 적절하게 배치하는 일. 각각의 자재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생각해내고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 무언가로 만들어내는 일. 자르고 썰고 잇고 붙이고 결합하고 조립하고 생산하는 일. ‘이렇게 일 잘하고 일 좋아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려 들다니’라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뱉으면서, 그 순간들에 함께할 수 있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우리 투쟁의 상징물이 곧 일터의 상징물이라는 거. 자본과 권력이 빼앗으려 했으나 우리 손으로 다시 만들어내서라도 손에 쥔 그거. 조명을 달아 반짝이는 그 주황색 지게차. (1월 16일, 불법 물량반출을 저지한 뒤 GM부품물류지회 조합원들과 연대자들이 지게차를 끌고 이동하고 있다 - 편집자 주) 비록 집회 당일 물량 불법 반출 문제로 또 한참을 싸우느라 우리 계획대로 대오 앞에서 짠하고 점등식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수십 명의 손길이 닿은 그 지게차가 얼마나 예뻐 보였는지. 고작 이삼일이었지만, 하루종일 붙어서 뭘 했다고 괜스레 친밀해진 기분이 드는 것도 좋았다. 점거농성 중이기 때문일까, 매일 동고동락하는 지회 동지들의 관계도 무척 끈끈해진 듯 보였는데 그들 틈에 슬그머니 자리 잡고 같이 웃고 있다 보면 제법 즐거웠다. 나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건 부담일까 위안일까. 노조법 개정안 시행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시작된 이 싸움, 여기서 지면 지난 수십 년 애써 만들어낸 노조법 개정안이 유명무실해질지도 모른다든가 하는 게. 때로 내가 힘들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내 옆의 사람이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끝까지 가볼 수밖에 없다는 게. 집단과 조직, 단체, 공동체의 조건에 대해서 종종 생각한다. 노동‘조합’은 그중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그리고 흔히 중앙 내지 본조, 사무처라고 부르는 기관들과 현장의 조직이 지녀 마땅한 성격 또한 다를 테고. 여하간에 나는 현장의 노동조합이 ‘이익집단’이 되지 않기 위해 중요한 건 공동체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규율과 규약, 원칙과 질서, 방향성…. 만큼이나, 우리가 ‘함께’ 싸우고 함께 승리하는 존재라는 자각이. 언젠가 모 대의원 동지가 발언으로 했던 말을 자주 곱씹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하나’라는 말. 어딘가 약간 모순적인 듯 보이면서도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은 그 어느 순간에나 전체 노동자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는 거, 그러니까 당신들이 고립되거나 외롭고 힘겹게 싸우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거. 지난 12월 말, GM부품물류지회와 공대위가 ‘고용노동부 장관 만납시다!’를 이야기하며 서울 고용노동청을 하룻밤 점거했을 때. 스튜디오 알 동지와 함께 점거 장소에 갔다가, 저녁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갔다가, 다음날 새벽녘에 일어나 출근길 선전전에 함께하러 다시 서울에 올라갔을 때. 노동조합을 만든 지 이제 다섯 달 되었다는, 그래서 노조 조끼가 아직 반들반들하고 깨끗한, 해고를 열흘 앞둔 그들을 만나러 가면서 나는 무엇을 생각했는가. 거기에 왜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나. 무엇도 아닌 나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금속노조도 하물며 민주노총도 아니고, 어디 정당이나 시민단체 소속도 아니고, 딱히 활동가라고 스스로를 칭하지도 않고, 이름 앞에 붙여 마땅한 그 어떤 수식어도 없이 나는 당신들의 싸움에 함께하고 싶었다. 나를 등 떠밀어 그들 앞에 데려다 놓은 것은 오직 양심뿐이다. 자본이 틀렸고 노동자가 옳다는 믿음이다. 이 싸움이 정당하다고, 그러니까 지면 안 된다고 말하기 위함이다. 명절을 약 열흘 앞두고 GM부품물류지회는 한국GM으로부터 해고 철회 및 이후의 고용승계 등을 담은 합의서를 받아냈다. 해고 직후 동지들이 외쳤던 구호가 있다. ‘1월의 어느 날에 현장으로 돌아가자’. 내가 들은 구호 중 제일 낭만적인 구호. 일주일 정도 넘기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다짐대로 현장으로 돌아갔다. 나도 얼떨결에 여기저기서 축하를 잔뜩 받았다. 내가 뭘 했다고 축하를 받나, 싶은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승리보고대회에서 지게차를 같이 만들었던 동지가 악수를 청해오며 ‘수연씨, 고생했어요’라고 말했을 땐 솔직히 코가 찡해졌다. 물론 이들의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1차전이 끝났으니 2차전을 시작하겠다’는 동지들의 말마따나, 턱없이 낮은 기본급을 비롯해 바꿔내야 할 현장의 문제들이 있고, 불법 파견 문제도 있고, 직영정비소 폐쇄 등 한국GM 철수설과 관련된 사안들에도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내 동지들은 잘 싸울 것이다. 도무지 질 수가 없는 기세로 싸워냈던 약 70일간의 부당해고철회 투쟁을 겪었으니까. 우리는 함께 싸우는 법을 알고, 함께 승리하는 법도 안다. GM부품물류지회 동지들이 가장 좋아했고, 가장 많이 외친 구호는 이거였다. 단결하는 노동자는 패배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호가 선언에 불과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냈다. 단결로 틔우고 연대로 지켜낸 불씨는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했다. [1] 바이아웃은 본래 주식시장에서 기업의 지분을 다량으로 인수하거나 아예 기업을 통째로 인수하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돈을 주고 통제권을 장악한다’는 의미가 파생하여 임대계약, 고용관계 등에서 돈으로 잔존권리를 사들여 임대기간을 조기종료하거나, 고용의무를 청산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도 쓰이게 됐다. 즉 GM부품물류센터의 사례에서 ‘바이아웃’은 돈을 주고 고용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뜻하며, 실질적으로는 희망퇴직과 동일한 의미이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한노운사 연재 6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폭발적 성장을 이어갔다.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지역별·업종별 연합조직을 건설하고 전노협을 건설해 냈다. 민주노조운동은 역동적인 연대투쟁과 지역·전국 총파업을 통해 스스로를 지켜냈다. 민주노조운동은 중소 제조업을 넘어 대기업과 공공부문으로 확대됐고, 마침내 1995년 민주노총을 건설했다. 그런데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전투적·변혁적 세력을 대신해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1996~98년 노동법을 둘러싸고 양대 계급의 대격돌이 펼쳐졌다. 민주노총의 위력적인 총파업이 한국사회를 한 달 동안 뒤흔들었으나 성과는 초라했다. 곧바로 닥친 IMF 외환위기를 빌미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마침내 도입됐다. 1996~98년의 대격돌에서 노동자계급이 패배하면서 비정규직 전면화로 가는 길이 열렸다. 이전 편 보기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한국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사회 체제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후반까지 10여 년의 과도기를 거쳐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이동했다. 이전 시기 30여 년 이상 한국 자본주의를 지탱하던 여러 요소들이 한꺼번에 큰 격변에 휩싸인 결과였다. 1989~91년 소련·동유럽 붕괴와 함께 세계적으로 냉전 질서가 해체되고 신자유주의 질서로 대체됐다. 국가 지원 아래 비대하게 성장한 독점재벌이 국가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세계 시장으로 진출했다. 1987년을 기점으로 노동자계급이 대규모로 진출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확산됐다. 이 과도기 동안 자본은 과거의 병영적 노동통제를 대신하여 신경영전략과 사회적 합의주의를 추진했다. 또한 신자유주의 질서로 본격 진입을 대비하며 대대적인 노동법 개악에 나섰다. 1997년에 닥친 IMF 외환위기는 신자유주의 질서로 이행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1) 냉전종식과 신자유주의 질서의 세계화 19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소련과 동유럽의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에 누적된 모순을 타개하고자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폈지만,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의 몰락을 피할 수 없었다. 1989년 8월 폴란드에 비공산당 정부가 들어섰고, 11월 동·서 베를린을 가르던 장벽이 무너졌으며, 1990년 10월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합됐다. 마침내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줄곧 지속되던 미국 주도 서방진영 대 소련 주도 동방진영의 냉전이 서방진영의 승리로 종식됐다. 미국은 세계의 유일 패권국가가 됐다. 미국은 냉전 시기 대척점에 서 있던 한국을 특별 관리했다. 한편으로 정치군사적 종속관계를 지속적으로 강요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특혜를 제공했다. 한국에게 유례없는 규모의 경제·군사원조를 제공했고, 한국 자본의 빠른 성장을 돕기 위해 자국 시장도 열어주었다. 그러나 냉전의 종식과 함께 이러한 특별대우도 끝났다. 한국은 냉전 체제에서 누렸던 지정학적 특권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다. ‘친미 쇼윈도’로 보호·육성되던 한국 자본은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에 냉혹하게 내던져졌다. 때로는 미국 정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과의 양자 협상에서, 때로는 GATT와 세계무역협정(WTO)의 다자 협상에서 압력이 줄기차게 전달됐다. 그 내용은 똑같았다. 세계를 뒤덮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여 한국 경제를 개방하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1997년 IMF 외환위기는 신자유주의 질서 정립을 위한 전면적 구조조정을 한국 사회에 강요했다. 한국도 이러한 전 지구적 전환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여러 신흥시장처럼 한국도 거대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갔다. 1990년대 내내 한국 정부는 경제를 자유화하라는 국제적 압력에 시달린다. 압력은 여러 방향에서 들어왔다. … 외부 세력이 요구한 경제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은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와 똑같았다. … 재정수지 적자를 GDP의 1~2 퍼센트 내로 운영 … 공공 지출을 친성장적 투자로 최대한 전환 … 금융시장을 탈규제화 … 환율에 경쟁 체제 도입 … 무역 자유화 …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 … 국공유기업들을 민영화 … 탈규제 … 소유권의 법적 보호 … 이러한 정책적 권고 사안들은 IMF가 1997년 위기 때 구제금융 조건으로 제시한 항목들과 거의 일치한다. 차이가 있다면, 1997년 이전에는 이러한 구조조정이 점진적으로 추진된 반면, 1997년 위기 이후에는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1] 2) 독점재벌의 비대한 성장 1980년대 말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5위 국가로 성장했다. 산업화가 시작되던 1960년대 초에는 가장 저개발된 국가 중 하나였지만, 이제 과잉 도시화와 농촌 공동화를 걱정하는 상황이 됐다. 그와 같은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은 동시에 거대한 자본축적과 독점자본 형성의 과정이었고, 그 결과 비대한 재벌들이 등장했다. 군사정권의 지원과 보호 아래 성장한 재벌들은 1980년대 중후반 국가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전망을 수립하고 이해관계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국가를 주도하려는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일차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재벌의 독자적인 연구기관 설립과 운영이었다. 재벌들의 결집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1967년에 설립됐지만, 1980년대 중후반 정부 산하 연구기관들과 별도로 독자적인 경제분석과 산업정책을 활발히 제시하기 시작했다. 재벌그룹별로도 앞 다투어 독자적인 연구기관을 설립했다. 대우경제연구소(1984년), 쌍용경제연구소(1985년), 삼성경제연구소(1986년), 현대경제사회연구원(1986년), 럭키금성경제연구원(1986년), 동양경제연구소(1987년), 기아경제연구소(1989년) 등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설립됐다. 비대한 재벌은 과거처럼 정부의 지시에 순응하지 않게 됐으며, 1980년대 은행의 민영화 이후 정책금융의 위력이 감소하면서 재벌을 통제할 수 있는 정부의 수단도 줄어들었다. 재벌은 각종 명목의 ‘준조세’뿐만 아니라 그동안 자신들을 육성하는 데 기여했던 보호와 규제조차도 거추장스럽게 여기게 됐다. 그리하여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미 민간주도형 경제로의 이행이 주장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말 이후 ‘규제완화’는 재벌의 제1의 슬로건이 된다.[2] 일부 재벌들은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직접 정치에 뛰어들기도 했다. 특히 현대그룹은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1992년 4월 총선에서 국민당을 창당하고 12월 대선에서 총수 정주영을 후보로 내세웠다. 대우그룹의 김우중도 정계 진출을 공공연히 모색했다. 정치의 전면에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재벌들은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크게 강화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대로 정부 정책을 견인하기 시작했다. 삼성그룹은 그 대표 주자였다. 비대해진 재벌은 1990년대 들어 세계시장 진출을 적극 추진했다. 1990년대 들어 도시화 속도가 현저히 둔화되는 등 한국 안에서는 신규 산업투자로 원활한 수익을 얻기가 훨씬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재벌들은 공격적으로 세계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동안 자신들을 선도하던 일본의 세계적인 제조업체들도 이제 경쟁상대로 인식했다. 1989년 대우그룹 총수 김우중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을 펴냈다. 1993년 삼성그룹 총수 이건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회의를 열고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꿔라”고 말했다. 이처럼 냉전 종식으로 세계질서가 변화하면서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에 뛰어들도록 강요당했을 때, 한국의 재벌들은 적극적인 세계시장 진출을 통해 능동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선진국 클럽으로 간주되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김영삼 정권 주도로 추진한 것은 그와 같은 한국 자본가들의 기세를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3] 그러나 1990년대 재벌들의 적극적인 세계시장 진출은 공격적 투자를 위한 과도한 차입, 무한경쟁에 따른 수익성 저하로 오히려 재벌들을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다. 결국 이는 한국의 외환보유고를 고갈시키며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불러오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4] 3) 노동자계급의 진출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확산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살인적인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고강도 착취체제를 붕괴시켰다. 민주노조의 폭발적 확산은 실질임금의 급속한 상승과 노동시간 단축으로 귀결됐다. 제조업 분야에서 1987~91년의 실질임금 인상률은 12.5%로 1982~86년의 5.4%에 비해 두 배가 넘었다. 병영적 노동통제에 입각한 일방적 노사관계가 대립적 노사관계로 대체됐다. 1987년 이후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꾸준히 확산됐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됐고,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했으며,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시행됐다. 김영삼 정권은 1993년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해체했다. 5공화국 시기 부정부패와 비자금에 대한 사법처리가 진행됐다. 1995년에는 민중들의 투쟁을 바탕으로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학살에 대해서도 사법처리가 진행돼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17년의 징역형이 선고됐다.[5]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1989), 환경운동연합(1993), 참여연대(1994) 등의 시민단체들도 속속 등장했다. 군사파시즘에 맞섰던 1987년 6월 민중항쟁은 군사파시즘을 온전히 철폐하지 못하고 절반의 승리만을 거둔 채 마무리됐다. 이후 노동자계급의 진출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확산은 군사파시즘의 요소들을 더욱 약화시켰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기무사, 안기부 등의 존재를 통해 군사파시즘은 완전히 척결되지 않은 채 부르주아 민주주의 속에 잔존했다. 따라서 한국의 정치체제는 일단 군사파시즘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 채 (자본가계급에 대한 온갖 특혜와 노동자·민중에 대한 사회경제적 대공세를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질서라는 또 다른 억압적 정치제제로 귀결됐다. 4) 자본의 대응 - 신경영전략, 사회적 합의주의, 노동법 개악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기존의 병영적 노동통제가 붕괴하자, 자본가계급은 이를 대체할 새로운 노동통제 체제를 구축해야 했다. 자본가들은 변화한 조건에 대응하는 기업 단위의 새로운 통제전략으로서 이른바 ‘신경영전략’을 추진했다. 이를테면 대우조선은 열심히 일하면 잘 살게 해주겠다며 ‘희망90S운동’을 들고 나왔고, 현대중공업은 반 단위 자율생산체계를 확립한다며 ‘두레활동’을 내세웠다. 1987년 이후 무너진 자본의 현장장악력을 회복하고 자본의 새로운 헤게모니를 구축하려는 전략적 실천이었다. 신경영전략의 주요 내용은 고용유연화, 작업조직 재편, 생산공정 합리화, 능력주의 인사·임금제도 도입, 기업문화 혁신 등이었다. 자본가들은 체계적인 노무관리를 실시하면서 노동조합의 현장 기반을 잠식해 들어갔다. 또한 노동조합과 파업의 기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파업기간 ‘무노동 무임금’ 적용, 노조간부 고소고발,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의 공세를 폈다. 김영삼 정권의 등장과 함께 사회적 차원에서 자본가계급이 꺼내든 새로운 전략은 ‘사회적 합의주의’였다. 민주노조운동은 1990년대 들어 자본가계급의 반격과 경기침체가 맞물리면서 여러모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상당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적 합의’라는 형식을 통해 격렬한 노자대립을 피하면서 생산성과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정권과 자본의 의도는 처음에는 1993~94년 경총과 한국노총의 임금인상 합의로 나타났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통제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한국노총과의 합의는 아무런 실익이 없었다. 오히려 민주노조운동은 한국노총에 대한 규탄 속에서 민주노총 건설의 동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자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민주노조운동 세력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한편 김영삼 정권은 1994년 11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순방길에 ‘세계화’를 선언했다. 1995년 1월에는 ‘세계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8월에는 ‘세계화의 비전과 전략’을 발표하면서, 한국 자본주의를 세계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 속에 편입시키기 위한 준비를 진행해 나갔다. 1996년 4월 김영삼 정권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악을 추진하면서 민주노총에 ‘사회적 합의’를 제안했다. 민주노총은 노동법 개정의 희망을 안고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에 참여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이 제안한 ‘사회적 합의’의 실체는 일방적으로 자본가계급을 편드는 내용에 노동자계급이 들러리를 서라는 것이었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합의’를 거부하고 노개위를 탈퇴했다. 1996년 12월 26일 김영삼 정권은 집권 신한국당을 통해 노동법 개악안을 국회에서 새벽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민주노총 총파업이 한 달가량 거세게 전개되자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대중이 이끌던 국민회의와 신한국당의 재협상 결과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 2년 유보 등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에서 극히 일부 내용만이 수정된 채로 재개정된 노동법이 1997년 3월 통과됐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포한 흐름은 1997년 말 IMF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사태로 한국 자본주의를 휩쓸고 들어왔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외채 상환 요구가 봇물처럼 밀려오자 유동성 위기에 빠진 한국 정부는 IMF에 긴급지원을 요청하여 1997년 12월 3일 IMF와 구제금융 지원에 합의했다. 구제금융을 계기로 한국의 경제정책 전반이 IMF의 관리체제 아래 놓였고, 이를 빌미로 신자유주의 공세가 대대적으로 시작됐다. 새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주도로 1998년 1월 15일 구성된 ‘노·사·정 위원회’는 자본가계급의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위한 이데올로기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수단이었다. 민주노총을 포괄한 노사정위원회는 1998년 2월 6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에 합의했다. 그런데 그 핵심 내용은 민주노총 총파업 때문에 2년 유보 상태에 있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즉시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다음 편 보기 [1] 박형준, 2013, 『재벌, 한국을 지배하는 초국적 자본』, 책세상, 320~321쪽. [2] 정성진, 2005, 『마르크스와 한국 경제』책갈피, 134쪽. [3] 한국은 OECD에 1996년 12월 12일 가입했다. OECD는 1961년 유럽과 북미의 선진 20개국을 포괄하며 출발했는데, 이후 일본(1964), 핀란드(1969), 호주(1971), 뉴질랜드(1973), 멕시코(1994), 체코(1995), 헝가리(1996), 폴란드(1996)가 한국보다 먼저 가입했다. 2025년 현재 38개국이 가입해 있다. [4]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30대 재벌 가운데 16개가 몰락했다. [5] 그러나 1997년 12월 대통령 김영삼은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의 건의를 받아 전두환과 노태우를 특별사면했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번역]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아직 더 발전되고 논의돼야 할 이론적 논쟁의 방대한 영역을 열어놓은 엥겔스의 저서는 분명히 비판적으로 읽혀야 한다. 그 내용 중 낡거나 흐릿해진 부분들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서로 상반되는 해석들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엥겔스의 시각은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어떤 본질주의에서도 벗어나 있으며, 정치적 함의를 지닌 결론을 내린다: 역사적으로 발생한 모든 사회적 과정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제도 폐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유언을 집행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1]. 이렇게 엥겔스는 1884년에 발행한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을 시작한다. 마르크스는 전년도에 사망했고, 그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엥겔스는 이후 상당 부분 미완성되거나 미발표된 상태로 남아 있던 (종종 엥겔스와 공동으로 수행된) 마르크스의 작업들을 복원하고 정리하며 발전시키려 했다. 엥겔스의 이 책은 루이스 모건의 인류학 연구서 『고대 사회』(Ancient society)에 대한 독해에서 비롯되었다. 7년 전 미국에서 출판된 이 책은, 엥겔스에게 있어 마르크스의 역사 유물론 이론을 “모건 만의 방식으로” 재발견한 것을 의미했다. 엥겔스는 자신의 작업이 “고인이 된 친구가 쓰지 못한 것을 그저 어느정도 대체할 수 있을 뿐”이라고 여기지만, 마르크스가 모건의 책에 남긴 주석을 활용하여 자신의 작업에 녹여낸다. (마르크스의 주석은 20세기에 『카를 마르크스의 인류학 노트』의 일부로 출판되었다.) 엥겔스는 당대의 여러 인류학적 이론들을 반박한 모건의 연구에 의지했다. 비판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엥겔스는 원시 사회와 현대 사회를 가로지르며 생산양식과 가족 조직 형태의 관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역사 유물론”의 관점에서 접근한 여성 억압 문제를 핵심 주제로 부각시켰다. 그 이후로 엥겔스의 저서는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여성 문제를 다룬 다양한 연구에서 - 항상 동의하기보다는 논쟁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 필수적인 참고 자료가 되어왔다. 또한 비非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이론들 역시, 적어도 논쟁을 위해서라도, 이를 이론적 이정표로 삼아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150년이 지난 오늘날의 적실성 > “아내의 정조를 보장하고, 따라서 그 자녀들이 아버지의 혈통을 확실히 잇도록 하기 위해 아내는 남편의 권력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한 것에 불과하다.”[2] 엥겔스가 여성의 상황에 대해 제기한 비판 중 일부는, 당시에도 급진적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소름끼칠 정도로 여전히 유효하다. 실제로 저자에게 있어 오늘날까지도 지배적인 일부일처제 가족의 확립은 “전 세계 여성의 역사적 대패배”였다: > “… 여자는 자기의 존귀한 지위를 상실하고 노비로, 남자의 정욕의 노예로, 순전한 산아도구로 전락했다. 여성의 이와 같은 굴욕적인 처지는 특히 영웅시대의, 특히 고전시대의 그리스 인들 사이에서 노골적이었는데, 나중에 점차 경감되어 그럴듯하게 꾸며졌으며, 때로는 조금 완화된 형태로 표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처지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다.”[3]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계급 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종속적 지위를 고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고, 당시 사회의 이중 도덕에 맞선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당시 사회는 여성들을 공장에서 초과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대열에 편입시키면서도, 그들을 편리하게 무성적 존재인 어머니로 묘사하거나, 또는 상업적으로 성적 대상화된 창녀로 묘사했다. 이미 『공산당 선언』에서 그들은(마르크스와 엥겔스는 - 역자)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이 ‘부인공유제’를 도입하려 한다’고 비난하는 부르주아적 가치의 옹호자들에게 이렇게 답한 바 있다: > “부르주아는 자신의 아내를 단순한 생산 도구로만 본다. 당연히 부르주아는 생산 도구들이 공동으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여성들도 똑같이 이 공동성의 운명에 빠질 것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부르주아는 단순한 생산 도구들로서의 여성들의 지위를 폐기하는 것,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4]” 엥겔스의 주장은 당시 다른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이 주제에 대해 수행한 연구들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베벨은 1883년 저서에서, 카우츠키는 1882-1883년 사이에 발표된 신문 기사에서, 여성 억압이 인류 최초의 사회 조직 형태부터 지속되어 왔다고 주장했다[5]. 엥겔스는 모건과 당시 다른 인류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러한 종속 관계가 특정 역사적 기원, 즉 사적 소유권이라는 사회적 제도의 출현에서 비롯되었다는 관점을 제시해 이들을 반박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공동체 조직 형태가 여성 억압을 전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평등주의적이며 심지어 모계 중심인 사회 조직이 선행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엥겔스는 스위스 인류학자 바호펜을 인용하며 “모계법”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한 사회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를 규제하는 법도 없었기에 이것이 문제적인 명칭임을 분명히 하면서 말이다). 그는 또한 책 말미에서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의 사상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분명히 밝힌다. 푸리에는 이미 일부일처제와 사유재산을 “문명”의 특징으로 지목했으며, 이를 “부자들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전쟁”이라 불렀다. 엥겔스는 이렇게 자신의 역사적 전제를 제시한다: > “유물론의 관점에 따르면, 역사를 규정하는 결정적 계기는 궁극적으로 직접적 생활의 생산 및 재생산이다. … 그 하나는 생활수단, 즉 의식주의 대상과 이에 필요한 도구의 생산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그 자체의 생산, 즉 종족의 번식이다.”[6] 이후 많은 이들이 “경제주의적”이라고 비판한(엥겔스의 관점이 문제를 제한한다는 점을 입증하기보다는,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비판이다) 이 접근법이 바로 엥겔스 분석의 참신함이다. 이는 여성 억압 문제를 사회적 생산의 이론적 차원으로, 즉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축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엥겔스에 따르면, 여성 억압은 사적 소유와 계급 분열을 사회 조직의 근간으로 정립하는 것과 동일한 과정에서 비롯된다. 이 과정은 축적된 부를 어떻게 상속할지 분명히 하려는 가족 형태, 그리고 새로운 계급 분열 및 소유 계급이 비소유 계급을 착취할 권리를 영속화하려는 국가 형태를, 수반하는 제도로서 형성한다. 즉, 인간이 만들어낸 다른 사회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수천 년에 걸친 여성 억압에는 ‘자연스러운’ 요소가 전혀 없다. 비평과 발전 사회주의적 관점을 공유하는 여러 저자들은 이 책이 몇가지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읽혀야 한다고 지적해왔다. 이 책에서 제시한 문제가 이미 새로운 인류학적 연구에 의해 극복되었다거나, 원시 모계 사회의 존재와 같이 역사적 과정의 일부 이정표를 단순화하거나 이상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를 들어 영국 SWP의 이론가 크리스 하먼은, 농업 사회 초기 단계의 성별과 혈통 조직은, 엥겔스가 제시한 “순진한” 관점보다, (실제로는 - 역자) 훨씬 복잡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또한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되기 시작할 때, 수세기 동안 그러지 않았던 남성들이 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재산권을 장악하고 상속권을 분명히 하고자 했는지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고 덧붙인다[7]. 스페인 페미니스트 셀리아 아모로스는 동일한 비판을 확장하며, 이러한 공백이 엥겔스의 “일정한 자연주의(cierto naturalismo)” 위험을 제기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사유화된” 가사 노동 형태와 유사하게, 여성에게 귀속된다고 충분한 설명 없이 간주되는 업무들의 사회적 가치 평가절하를 전제한다[8]. 반면 만델은 계급 출현 이전의 이 초기 성별 노동 분업이, 사회의 재생산 능력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을 특정 사회적 행위에 가두어둘 필요성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후 새로운 세대가 잠재적인 이익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이는 결국 여성을 경제적 탐욕의 대상물로 전락시켰다[9]. 엥겔스가 원시 사회에 대해 제시한 이러한 설명들은 새로운 인류학적 발견을 기다리며 여전히 논쟁에 열려있는 주제들이다. 그러나 아모로스 자신이 인정하듯, 여성의 종속성이 더 심한 사회는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사회이다. 이를 지적한 것은 엥겔스의 기여이며, 노동 계약과 결혼 계약 사이의 유사점을 규명한 것 역시 그러하다. 이 두 계약 모두 법적으로 동등한 두 당사자를 전제로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두 사람은 전혀 동등하지 않다. 이 책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차용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사이에 확립된 관계에 대해 다루며, 이 책과 마르크스의 『자본론』 사이의 관계를 가리킨다. 아모로스는 여성 노동자가 짊어지는 이중 노동 시간 문제를 지적한 엥겔스의 예민함을 옹호한다. 비록 해결 가능성에 대해선 순진한 낙관주의를 보인다고 평가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모로스는 자본주의가 누구를 착취할지에 대한 선호를 갖고있지 않으며, 필요할 때엔 여성과 아동을 거대한 노동자의 대열에 통합시켰음을 강조한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성별 분업이 이윤 축적을 위해 더 이상 기능하지 않으므로 의미를 상실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많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맞서 주장하듯이, 그(성별 분업의 - 역주) 지속이 남성 노동자들이 아내와 딸들에 대한 억압을 대가로 노동력을 저평가하여 착취 계급과 공모한다는 증거일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으로 알려진 비판을 덧붙일 수 있다. 이 비판에 따르면, 생산과 재생산의 구분을 제시한 엥겔스로부터 시작된 정의는 현실에서 분리되지 않는 '어머니'와 '여성노동자'를 이원론적으로 다루는 문을 열어놓는다[10]. 반대로,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엥겔스가 사회주의가 계급을 해체함으로써 성별 억압도 종식시킬 것이라고 내다보는 만큼,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해석들이 성별 문제를 계급 문제에 종속시켜 그 특수성을 흐리고 위계를 낮추었다고 비판해왔다[11]. 그러나 어떤 경우든, 엥겔스의 작업이 가진 가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구체적 관계를 탐구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그는 자본주의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온 성별 억압의 역사를 인식하면서도, 이를 사회적 부의 점유 형태라는 관점에서 설명함으로써, (고대의 가부장적 편견이 - 역자) 수많은 이전의 제도들 사이에서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왜 자본주의가 재생산/생산 이분법을 구축한 고대의 가부장적 편견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마르크스의 주석이 이 길을 함께한다: > “이름을 바꿈으로써 사물을 바꾸려는 것은, 그리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충분한 동기를 제공했을 때 전통의 틀 안에서 전통을 타파하기 위한 출구를 찾으려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도학자적 근성이다!”[12] 아직 더 발전되고 논의돼야 할 이론적 논쟁의 방대한 영역을 열어놓은 엥겔스의 저서는 분명히 비판적으로 읽혀야 한다. 그 내용 중 낡거나 흐릿해진 부분들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서로 상반되는 해석들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엥겔스의 시각은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어떤 본질주의에서도 벗어나 있으며, 정치적 함의를 지닌 결론을 내린다: 역사적으로 발생한 모든 사회적 과정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제도 폐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17년 5월 1일 La izquierda diario에 발행된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Ariane Díaz [1]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1884, 김대웅 역, 도서출판 두레, 2012, 7p. [2]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1884, 김대웅 역, 도서출판 두레, 2012, 97p. [3]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1884, 김대웅 역, 도서출판 두레, 2012, 94p. [4]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1848, 『칼맑스 프리드리히엥겔스 저작선집 제 1권』, 1991, 417p [5] Hunt, Marx´s general, New York, Metropolitan Books, 2009, pp. 303-5. [6]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1884, 김대웅 역, 도서출판 두레, 2012, 8p [7] “Engels and the origins of human society”, International Socialism 65, 2nd series, 1994. [8] “Origen de la familia, origen de un malentendido”, Hacia una crítica de la razón patriarcal, Barcelona, Anthropos, 1991. [9] Tratado de economía marxista, Tomo I, México, Era, 1969. [10] 이 비판은 리즈 보겔의 것으로, ‘Moore, Antropología y feminismo, Madrid, Cátedra, 2009, p. 66.’에서 인용됐다. 이 경향에 대해서는 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제24권 제2호, 2016년 특별호를 참조하라. [11] 엘사 드루카로프(Elsa Drucaroff)의 최근 저서 Otro logos(Bs. As., Edhasa, 2016)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의 이러한 논의들을 다수 검토한다. [12]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1884, 김대웅 역, 도서출판 두레, 2012, 94p.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노동개악 앞에서 노정협의체 참여, 민주노총 양경수 집행부는 스스로 무장해제하는가?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농성하던 세종호텔 노동자들과 연대 동지들이 집단연행 당하고 불과 9일 뒤, 민주노총 양경수 집행부가 2월 11일 이재명 정부의 노정협의체에 참여했다. 기간제 노동자 사용기한 2년에서 3년 이상으로 연장, 직무급제 확대, 전략산업 특별연장근로 확대, 지역 '메가특구' 노동시간규제 완화 등 이재명 정부의 노동개악이 본격화하는 지금, 이는 정부에 노동개악을 합의로 추진할 여지를 주는 위험천만한 선택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정협의체 참여를 철회하라. 민주노총-고용노동부 노정협의체 발족식 사진: 노동과 세계 이재명 정부에 대한 민주노총 양경수 집행부의 일관된 타협적 태도 시간을 1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2025년 6월, 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노총 내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시 지도부는 “진보정당과 연대·연합을 실현한 후보를 지지한다”는 안건을 중앙집행위원회에 상정했다. 그럴듯한 ‘연대’의 외피를 썼지만, 그 속내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기존 정치방침을 폐기하고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자는 안건이었으며, 민주노총을 민주당 2중대로 전락시키려는 시도였다. 애초 위원장이 제출한 이 안건은 강력한 반발로 부결되었다. 부결 후에도 양경수 집행부는 끝내 민주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방침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민주노총은 창립 이래 처음으로 ‘지지 후보 없음’ 방침을 결정했다. 이렇듯 이재명 지지 안건은 2023년 9월 민주노총 정치방침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었으나 양경수 집행부는 이를 밀어붙이는데 거리낌이 없었고, 이런 흐름은 대선 이후 이재명 정부에 대한 타협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세종호텔 노동자의 절규 위에 세워진 ‘노정 간 신뢰 회복’이라는 기만 지금, 민주노총 지도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이재명 정부가 ‘노정협의체’라는 손을 내밀자마자 이를 바로 받아들였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번 협의체 참여에 대해 “노정 간 신뢰를 복원하고, 노동 현안에 대한 실질적인 소통의 틀을 마련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자평했다. ‘신뢰’라니, 도대체 누구를 위한 신뢰인가?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정협의체 참여를 결정한 2월 11일로부터 불과 9일 전, 서울 명동 한복판 세종호텔 앞을 기억하는가?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은 이재명 정부의 경찰 병력에 의해 사지가 들려 끌려나갔다. 그들의 절규가 아직 길위에 남아있는데, 지도부는 그 폭력을 자행한 정권과 마주앉아 ‘노동의 미래’를 논하겠다고 한다. 투쟁하는 노동자를 짓밟는 정권과 악수하며 ‘파트너십’을 운운하는 것, 이것이 배신이 아니면 무엇인가? 어디 세종호텔뿐인가? 홈플러스 노동자들도 폐업으로 내몰리고 있고,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 노동자들도 이재명 정부를 규탄하며 청와대에서 농성하고 있다. 투쟁 현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은 자본가 정권의 본능이다. 그런데 민주노총 지도부가 그 칼날 앞에서 투쟁 대열을 정비하기는커녕, 칼자루를 쥔 자들과 “책임 있는 대화”를 하겠다고 나선 꼴이다. 이는 현장의 투쟁 동력을 약화시키고, 정권에는 ‘대화하는 정부’라는 면죄부만 쥐여주는 꼴이다. 2월 2일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폭력연행 사진: 세종호텔 공대위 이재명 정부는 이미 노동개악 추진을 본격화했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발표한 성명서는 더욱 심각한 우려를 자아낸다. 그들은 “미국의 관세 압박, 산업 전환, AI 확산 등 대전환의 시기”를 언급하며, 이것이 “노동자에게 재앙이 될지 기회가 될지는 정부의 선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순진해서 모르는 것은 아닐 테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위기가 닥칠 때, 자본가와 그들의 정부가 선택하는 ‘해법’의 본질은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것이다. 지도부가 언급한 그 ‘복합 위기’ 속에서 자본은 생존을 위해 비용절감을 부르짖을 것이다. 그 비용절감의 실체는 무엇인가? 바로 ‘고용 유연화’라는 이름의 손쉬운 해고, ‘임금체계 개편’이라는 이름의 임금 삭감, 그리고 노동시간 연장이다. 이재명 정부는 이미 노동개악 추진을 본격화했다. 1월 29일 ‘노동구조개혁 TF’ 출범이 알려졌고, 해당 TF는 기간제 노동자 사용기한 2년에서 3년 이상으로 연장, 직무급제 확대, 전략산업 특별연장근로 확대, 지역 '메가특구' 노동시간규제 완화를 논의하고 있다. 이는 정부가 밀어붙이는 ‘5극 3특 국가균형성장 추진전략’과 맞물려 대대적인 노동개악 관철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민주노총이 “위기 극복에 함께하겠다”며 협의체에 들어가는 순간, 정부는 이미 절반의 승리를 가져간 것이다. 이제 정부가 추진할 노동개악과 구조조정은 “민주노총과 협의를 거친 합리적 대안”으로 포장될 것이다. 지도부는 지금 노동자들을 지키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이 직면한 위기를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막아주는 ‘방패막이’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있어야할 곳은 투쟁하는 노동자 곁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지금 민주노총 지도부는 호랑이를 잡을 무기를 내려놓고, 호랑이의 먹잇감이 되기 위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성명서에 적힌 “책임 있고 성실하게 협의에 임할 것”이라는 다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누구에 대한 책임인가? ‘국가 경제’라는 명분으로 포장될 자본의 이윤 보장에 대한 책임인가? 진정한 노동조합의 책임은 자본가 정부와의 협조가 아니라, 그들의 착취와 탄압에 맞서 단결하고 투쟁하는 데 있다. 지금 지도부의 행보는 그 모든 원칙을 허물고 있다. 뻔히 보이는 노동개악과 구조조정의 불구덩이 속으로 120만 조합원을 끌고 들어가는 행위를 즉각 멈춰야 한다. 자본가계급과 한편이 되어 위기를 ‘관리’하려는 자들은 노동자를 대표할 자격이 없다. 민주노총이 있어야 할 곳은 따뜻한 정부청사 회의실이 아니라, 찬 바람 부는 세종호텔 농성장이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곁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즉각 기만적인 노정협의체 참여를 철회하라. “자본가 정권에 맞선 독자적 투쟁”의 깃발을 다시 들어라. 그것만이 다가오는 경제 위기의 파도 앞에서 노동자의 삶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한노운사 연재 5회] 1부 폭압과 저항(1970~1987) [4] 1987년의 대폭발1986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 경제는 저유가·저금리·저달러를 기반으로 유례없는 ‘3저 호황’을 누렸다. 1980년 배럴당 40달러 수준이던 유가가 배럴당 12달러까지 하락했다. 국가와 기업 모두 많은 빚을 안고 있던 상황에서 국채·회사채 금리가 공히 절반 이하로 하락했다. 1985년 1달러 260엔이던 엔-달러화 환율이 1달러 150엔 이하로 하락하면서 일본을 대신해 대미 수출이 급증했다. 그런데 3저 호황의 한복판이던 1987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대한 분수령이 됐다. 6월 민중항쟁으로 전국 곳곳에서 거대한 거리시위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끝에 마침내 군사정권을 부분적으로나마 무릎 꿇렸다. 7~9월 노동자대투쟁은 화산처럼 폭발한 노동자들의 파업물결을 통해 병영식 노동통제를 일거에 분쇄하면서 대중적인 노동자운동의 힘찬 출발을 선언했다. 이전 편 보기 1부 폭압과 저항 (1970-1987) [시대배경]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 [1] 민주노조운동의 태동 [2] 1980년의 분출 [3] 민주노조운동의 파괴와 재건 [4] 1987년의 대폭발 1) 1987년 6월 민중항쟁 1961년 5·16 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 군사정권이 1979년까지 지속됐다. 10·26으로 찾아왔던 서울의 봄은 5·17 쿠데타로 짓밟혔고 1980년부터 다시 전두환 군사정권이 지속됐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사정권 27년을 끝장내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고자 하는 민중들의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끄는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사실상 승리한 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운동이 대규모로 조직됐다. 민중운동 세력은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넘어 광범한 민주적 기본권을 실현하는 민주헌법 쟁취를 내세웠다. 1986년 7월 국회에서 개헌특위가 만들어졌지만, 집권 민주정의당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고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면서 공전됐다. 군사정권은 집권연장을 획책하며 1986년 하반기부터 더욱 광포한 탄압을 퍼부었다. 마침내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경찰)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2월 7일과 3월 3일, 박종철을 추모하고 고문을 규탄하는 집회가 조직됐지만 참가자가 아직 제한적이었다.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보다 두려움이 민중들을 억누르고 있었다. 자신감을 가진 전두환은 4월 13일 ‘임기 내 개헌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세우며 기존 헌법대로 차기 대통령을 간선제로 선출하겠다는 ‘호헌’을 선언했다.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를 다음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절차가 본격 시작됐다. 그러나 5월 18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조작이 폭로됐다. 가증스러운 군사정권에 대한 치 떨리는 분노가 두려움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민정당이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기 위해 6월 10일 전당대회를 예고하자, 같은 날 그에 맞선 대규모 거리시위가 예고됐다. 그런 상황에서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교문시위 과정에서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 민중들의 분노에 더욱 불이 붙었다. 6월 10일 민정당이 전당대회를 열고 있을 때, 전국 22개 도시에서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대회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거리에서 개최됐다. 30여만 명이 참여한 이날 거리시위는 군사정권이 시작된 이후 가장 거대한 규모의 대중투쟁이었다. “파쇼타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군사정권 타도와 민주헌법 쟁취가 핵심 요구였다. 시위대가 전투경찰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면서 경찰버스, 파출소, 민정당사를 습격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호응하고 동참하면서 수만 명의 경찰병력으로도 시위를 감당하지 못했다. 전투경찰이 거꾸로 시위대에 포위돼 무장해제당하는 상황도 속출했다. 10일 거리시위 이후 15일까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되면서, 서울 도심에서 사무직 노동자들이 대거 가두시위에 동참했다. 전국 곳곳에서 매일 같이 거리시위가 계속됐다. 전투경찰을 밀어내고 안전한 공간이 확보되면 거리에서 즉석 시민토론회들이 열렸고, 대중들은 자기 목소리를 쏟아냈다. 16일부터 22일까지 부산에서 가톨릭센터 농성이 전개됐다. 18일에는 ‘최루탄 추방대회’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26일에는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려 6월 항쟁 기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군사정권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피로써 진압한 것처럼 군대를 동원한 시위진압을 검토했으나, 자칫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이 군대 안에서의 반란 가능성을 우려하며 군사정권을 만류했다는 설도 있다. 결국 군사정권은 후퇴했다. 29일 노태우 민정당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실시, 시국사범 석방,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담은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롯한 자유주의 보수야당은 6·29선언을 환영하고 ‘승리’를 선언했다. 시위를 주도한 학생운동도 지도자 대부분이 자유주의 보수야당을 추종했기 때문에 가두시위가 급격히 중단됐다. 결국 6월 민중항쟁은 껍데기뿐인 ‘민주화’만을 쟁취한 채 멈춰서고 말았다. 완고하던 군사정권을 굴복시켰다는 점에서 민중의 승리이긴 했지만, 내용적으로는 빈약한 절반의 승리일 뿐이었다. 1987년 5월 27일, 노동·농민·빈민·청년·여성·교육 등 각계 대표 8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의 발기인대회 및 결성식이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국본은 6월 투쟁의 성격을 ‘개헌투쟁’으로 못박고 ‘4·13 헌법개정 반대조치’ 이후 전개되어 온 ‘민주헌법 쟁취운동’의 대중적 구심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이어 1987년 6월 10일, ‘고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는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범국민대회’를 개최함으로써 6월 항쟁의 포문을 열었다. 1987년 6월 10일의 ‘국민대회’는 전국 22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는데 가두시위는 물론이고, 연좌농성, 정치집회, 야간시위, 철야농성 투쟁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대부분의 지역에서 광범위한 대중들이 참여함으로써 시위대들이 경찰을 역포위하고 경찰력을 무력화시켜 무장해제 시키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사실상 군부정권을 지탱해 온 물리적 힘으로서의 경찰력은 통제를 잃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울에서는 6월 10일 대회 이후 명동성당을 근거지로 한 철야농성을 6월 15일까지 계속함으로써 6월 항쟁을 지속시켜 나갔다. … ‘국민대회’ 이후 경찰력은 사실상 무력화된 상태에서 그 이전처럼 공격적인 진압보다는 무자비하게 최루탄을 쏘아대어 해산시키는 전술을 선택함으로써 서울의 종로·을지로·광화문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전국의 주요 도시는 날마다 최루탄 가스 속에 뒤덮이게 되어 최루탄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점차 고조되어 갔다. 게다가 6월 9일 연세대에서 시위 중이던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등 최루탄에 의한 부상자가 속출하자 국본은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정하고 전국 16개 도시와 247개 지역에서 약 150만여 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펼치기도 했다. … 한편, 서울에서 촉발된 국민저항운동은 호남과 사북탄광의 강원 산간지역에까지 확산되어 갔고, 노동자·농민·도시빈민 등이 서서히 시위대의 중심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연일 경찰서·관공서·민정당사가 화염병에 의해 파괴되는 등 투쟁양상은 좀 더 적극적이고 과격한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최된 6월 26일의 ‘국민평화대행진’에는 택시 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였고, 생산직 노동자들도 차츰 개별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대중들의 투쟁이 점차 고조되어 가자 6월 25일, 미국은 ‘한국의 최근 사태에 대한 군부개입과 폭력시위 모두를 반대한다’는 기회주의적인 성명을 발표했고, 6월 28일에는 슐츠 미 국무장관이 “그동안의 미국 입장을 정리하여 전달하였으며, 한국정부는 정치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요한 사항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변경이 있을 것”임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전두환 군부파쇼정권은 마지막 정치적 선택으로 ‘6·29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1] 6·29 선언에는 군사파시즘[2]을 끝장내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서 필수적인 요소들, 다시 말해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12·12와 5·17 쿠데타 세력에 대한 단죄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권리 실현이 포함되지 않았다. 선언의 주체가 군사정권이라는 점에서 포함될 수도 없었다. 군사정권의 철권통치는 매우 심대한 타격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타도되거나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6월 민중항쟁의 최대 수혜자는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보수야당이었다. 이후 그들은 한발 후퇴한 군사파시즘 세력과 연합하면서 새로운 지배체제의 주역으로 올라섰다. 1987년 12월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주의 보수야당을 이끌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분열함으로써 노태우가 35.9%의 낮은 득표를 하고도 당선됐다.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군사파시즘 세력과 서슴없이 손을 잡았다. 김영삼은 1990년 노태우와 김종필로 대표되는 군사파시즘 세력과 연합하는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결성한 뒤 199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됐고, 김대중 또한 김종필과 이종찬을 비롯한 군사파시즘 세력 상당수와 손을 잡고 19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6월 민중항쟁이 절반의 승리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중항쟁 지도부 가운데 다수가 자유주의 보수야당을 추종했기 때문이었다.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의 혁명적 패배는 19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거대한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을 태동시켰으며, 그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부분들은 사회주의 운동으로까지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0~70년대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던 자유주의 보수야당은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에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중항쟁의 지도부 다수가 겉으로는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을 내걸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유주의 보수야당의 영향력 아래에 머무르면서 민중항쟁의 혁명적 발전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당시 학생운동과 민중항쟁의 지도부로서 자유주의 보수야당을 추종하며 민중항쟁의 혁명적 발전을 가로막았던 자들은 대부분 이후 순차적으로 김대중과 김영삼의 정치세력 휘하로 편입되어 전형적인 부르주아 정치인이 됐다. 그러나 비록 절반의 승리였지만, 6월 민중항쟁의 승리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어쨌든 승리감에 힘을 얻은 민중들에게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측면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투쟁들이 끊임없이 솟구쳐 올라왔다. 이것은 1987년 6월 이후 20여 년 동안 한국 사회 전반이 역동적인 변화를 거듭하게 하는 아래로부터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1987년 6월 이후 한국 정치의 형식적 민주주의는 제법 확대됐다. 철권통치로 한국 정치를 지배했던 군사파시즘 세력은 1996년 전두환과 노태우가 쿠데타와 광주학살을 이유로 중형을 선고받으면서 사실상 허물어졌다. 2000년대 이후에는 한국 정치의 오랜 특징이던 1인 지배 체제가 무너지면서 자본가정당들 내부에서조차 실질적인 경선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또한 조선 시대로부터 이어지는 유교 전통에 덧붙여 군사파시즘을 거치면서 극단화됐던 권위주의 문화가 한국 사회 전반에서 꾸준히 약화됐다. 한국전쟁 이후 극단적인 수준으로 유지되던 레드 콤플렉스[3] 또한 제법 약화됐다. 나아가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다양한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와 저항이 사회 전반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안기부(국정원)·보안사(기무사·방첩사) 등의 잔존이 상징하듯이 군사파시즘은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고, 형식적인 민주화 속에 스며든 채 언제라도 부활할 수 있는 상태로 지속됐다. 6월 민중항쟁에서는 노동자가 조직된 힘으로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계속되는 거리시위에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했지만, 조직되지 않은 개인으로서였다. 6월 민중항쟁에 적극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큰 자신감을 얻고 7월부터 전국을 뒤흔든 거센 노동자투쟁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6월 민중항쟁은 몇십 년 동안 숨죽여 지내던 노동자계급이 역사의 무대로 성큼 뛰어올라 자신의 혁명적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열어주었다. 6월 18일 이후 울산, 부산, 마산, 인천, 성남, 안양 등 노동자 밀집지역의 생산직 노동자들은 시위에 대거 참여하였으며, 운수노동자들 또한 시위를 확대·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 예로 경기도 성남시청에서 작성한 「6월 20일~21일 가두시위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6월 19일에는 연행자 80명 중 근로자 34명(42.5%), 대학생 8명(10%), 막노동자 6명(7.5%)이었으며, 근로자·막노동자·실업자 등이 다수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6월 20일부터 근로자들이 주동이 되었으며, 검거자 66명 중 68.8%가 근로자·막노동자·무직자들이었다.[4] 특히 남부 지방에서 노동자들은 더 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전투경찰이 정권 핵심부를 방어하기 위해 서울에 집중되면서 남부 지방에서는 진압 경찰이 부족해 시위가 더욱 격렬하게 분출했기 때문이다. 6월의 거리에서 상당한 자신감과 용기를 얻은 노동자들은 7월부터 현장을 바꾸기 위한 대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2)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 6·29 선언이 발표되자 거리에서의 민중항쟁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7월 중화학공업의 중심지 울산에서 시작된 노동자들의 파업 물결이 부산과 창원으로 퍼지더니 마침내 8월에 이르러 전국의 모든 지역으로 확산됐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세 달 동안 전국적으로 3,337건(하루 평균 40건)의 파업이 일어났으며, 최고조에 이르렀던 8월 29일에는 하루 동안에 무려 743건의 파업이 벌어졌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한국전쟁으로 궤멸됐다가 1970년부터 서서히 되살아나던 노동자 대중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오른 역사적 사건이었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122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종업원 10명 이상 사업체 노동자 333만여 명의 37%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특히 종업원 1,000명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75.5%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세 달 동안 일어난 파업 건수는 이전 10년 동안 일어난 전체 파업 건수의 2배를 넘었고, 파업 참가자 수는 이전 10년 동안 전체 참가자 수의 5배였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1960년대 이래 노동자를 강도 높게 착취해 온 한국 자본주의의 필연적 산물이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과 함께 등장한 민주노조운동은 가혹한 탄압과 처절한 패배들을 딛고 끈질기게 명맥을 이으며 성장해 온 끝에 마침내 거대한 대중투쟁으로 찬란히 꽃을 피웠다. 이전 시기의 노동자 투쟁이 주로 경공업(중소기업) 여성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는 중화학공업(대기업) 남성 노동자들의 주도 아래 모든 산업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게 됐다. 거대한 파업물결은 노동조합의 폭발적 증가로 이어졌다. 1987년 6월 이전까지 2,742개의 노조가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노동조합이라기보다 특수한 노무관리 부서에 가까운 이른바 어용노조였다. 그러나 세 달 동안 파업이 일어난 사업장의 55%에서 노조가 결성되어 1,162개의 노조가 새로 만들어지고 기존 어용노조들의 상당수도 민주화되어, 마침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진정한 노동조합, 즉 민주노조가 비로소 대중화되는 시대가 열리게 됐다. 파업은 특정 직종이나 고용 형태에 관계없이 사업장의 모든 노동자가 참여했기 때문에 파업의 결과로 건설된 민주노조에는 사업장 내 모든 노동자가 포함됐다. 따라서 1987년 대파업 물결은 군사정권과 자본가에 맞서, 또한 어용노조에 맞서 민주노조를 건설한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 물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자 민주주의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노동조합의 모든 주요 사안을 전체 조합원이 결정했다. 노동조합의 모든 활동을 조합원대중의 참여로 진행했다.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어용노조의 철저한 관료주의는 한국전쟁 이후 아래로부터의 노동자투쟁을 효과적으로 잠재우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거대한 파업물결 속에서 총회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전면적인 실현은 아래로부터 솟구치는 노동자들의 힘을 폭발적으로 분출시키며 40년 어용노조의 굴레를 한 방에 날려 버렸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이 주로 내건 요구는 인간적 대우, 임금인상, 차별적 임금제도 폐지, 민주노조 인정 등이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벌어진 파업은 대부분 노동법상의 절차를 무시한 ‘불법파업’이었다. 일부 노동자들이 파업을 선동하면서 공장을 순회하면 대다수 노동자들이 호응하면서 자연스럽게 공장이 멈춰 섰다. 노동자들은 본관 앞에 모여 대표를 선출하고 토론을 통해 요구 사항을 채택한 뒤 회사측에 전달했다. 회사측이 요구사항을 수용할 때까지 공장을 계속 점거했다. 교섭이 진행되면 노동자들이 그 건물 앞을 지키고 있었고, 종종 노동자들이 직접 지켜보는 상황에서 교섭이 진행되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규찰대나 선봉대를 조직해서 구사대나 전투경찰·백골단 등과 싸우기도 했다. 때때로 파업 노동자들이 거리로 진출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파업은 매우 전투적인 양상을 띠었다. ◎ 울산에서 불붙은 1987년 대투쟁 울산은 조선, 자동차, 기계, 석유화학, 화학섬유 부문의 대규모 사업장들, 특히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현대그룹의 주력 기업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열악한 작업조건, 심각한 산업재해 속에서도 울산은 오랫동안 민주노조운동의 무풍지대로 머물러 있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는 현대그룹의 무노조 방침과 머리·복장까지 철저히 규제하는 군사적 노동통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1987년 7월 5일 현대엔진에서 현대 계열사 최초로 노조가 만들어졌다. 노동자대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봉화가 솟구쳐 오른 것이었다. 현대엔진노조의 결성은 단지 6월 항쟁 이후의 좋은 정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권용목을 비롯한 선진노동자들의 몇 년간에 걸친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권용목은 1980년대 초에 고적답사회를 꾸려 매주 토요일 1박 2일의 야간 산행을 하면서 동료들 간의 우애를 다졌다. 그러다가 1986년 4월에 6인을 독서회로 따로 조직해 현장문제를 토론하면서 6개월간 노동법을 공부했다. 이들은 1987년 1월에 상여금 차등지급에 항의하는 몸벽보 시위에 500여 명을 조직할 수 있었다. 그리고 4월에는 노사협의회를 이용해 대중적인 임금인상 투쟁을 전개했다. 이런 투쟁성과를 바탕으로 이들은 ‘노조설립추진위’를 비밀리에 꾸리고 2개월 동안 준비를 하다가 6월 항쟁의 여운이 전국을 휘감고 있던 7월 5일 101명이 참가한 노조 결성대회를 성사시켰다. 노동자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열린 노조결성 보고대회에는 1천여 노동자들이 참석했고, 노조 설립 5일 만에 생산직 노동자 1천 500여 명 거의 전원이 노조에 가입했다. 7월 5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과연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 까닭 모를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며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울산시 옥교동 모 디스코텍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철저한 보안 덕분으로 오후 3시가 되자 101명의 노동자들이 사고 없이 도착했다. 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한시라도 늦게 되면 그만큼 회사가 정보를 입수할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문을 걸어 잠그고 결성대회가 시작되었다. 홀 중앙에는 ‘경축 현대엔진(주) 노동조합 결성대회’라는 커다란 글씨가 노동자들의 떨리는 가슴을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오종쇄 씨의 결성선언과 애국가 합창 순으로 시작된 결성대회는 위원장 권용목, 부위원장 신환영, 이재홍, 사무국장 사영운, 회계감사 장호철, 정흥룡 등을 임원으로 선출하고 2시간 만에 끝이 났다. 저 골리앗 현대에 맞서 노동자의 인간적 삶을 쟁취하기 위한 험난한 첫발을 내딛는 순간, 노동자들의 두 주먹은 불끈 쥐어져 있었다. … 결성대회를 무사히 마친 추진위 멤버들은 다음 날 보고대회에 사용할 유인물과 농성에 필요한 식량 등을 챙겼다. 이들은 야밤의 어둠을 틈타 미리 현장 안에 들어가기로 한 계획대로 회사 앞에 도착했다. … 출근시간이 되었는데도 회사는 조용했다. … 시청 신고서류접수 소식을 속타게 기다리던 이들에게 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든 것은 오전 10시 30분.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사전에 연락해 둔 까닭에 약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보고대회에 참석했다. 사회를 맡은 장호철 회계감사가 전날의 노조결성대회 경과를 보고하자 장내는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뒤덮였다. 권용목 위원장이 연단에 올랐다. 대회장은 흥분의 도가니 바로 그것이었다. 어디 감히 현대에서 노조를 만들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해냈다. 모두의 가슴에 격정의 파도가 몰아치고 얼굴들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된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상여금 차등제가 없어지고 공해수당을 받는다는 기대를 가져도 좋습니다. 이제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 깊이 잠든 노동자의 침묵을 단박에 깨뜨리는 그의 목소리가 원한 서린 노동자의 가슴에 불을 지피며 미포만에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 현대엔진노조의 첫 홍보물은 그들의 노동조합 결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강도 높은 장시간 노동, 열악한 근로조건, 산업재해 속에서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이윤추구의 도구로만 보는 가진 자의 온갖 횡포와 사회적 멸시 속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온 우리 노동자들은 이러한 악조건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으며 또한 다음 세대가 우리의 전철을 되밟지 않게 하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인간성 회복을 위해 전 근로자가 일치단결하여 현대엔진 노동조합을 탄생시켰다.” … 예상했던 사용자측의 대응은 의외로 강하지 않았다. 아니 노동자들이 너무 강력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노동조합은 매일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보고집회를 열면서 노동자들의 단결력을 하루가 다르게 고취시켰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큰 산이 되어갔다. 사측이 노조임원과 결성 발기인들에 대해 온갖 회유와 협박을 가하며 노조탈퇴를 강요했지만 단 한 사람도 노조를 탈퇴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사측의 행동은 오히려 노동자들을 격분시킬 뿐이었다. 노조설립 5일 만에 조합원 가입이 현장생산직 전원인 1,500명으로 늘어났다. 점심시간의 보고대회는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억압의 굴레를 훨훨 벗어던지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가 현대조선소 담안을 온통 휘젓고 있었다. 1,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중공업 쪽을 향해 진군을 시작하자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제발 그것만은 참아달라”며 애걸하다시피 하는 사용자들의 모습에서는 이전의 노예사냥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회사는 엔진의 이 파고가 중공업으로 옮겨갈까 봐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현대엔진의 노조결성 바람이 24,000명의 주력기업 현대중공업으로 옮겨지는 날엔 그들의 목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주영 회장의 결정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결국 회사측은 노조를 인정하겠다는 태도로 변하였다. 매일 여는 보고대회를 중지하면 노조설립 신고필증이 빨리 나오도록 사측도 힘쓰겠다는 약조를 했다. 드디어 7월 14일, 노심초사하던 노조설립 신고필증이 나왔다. 꿈에도 그리던 노동조합이 드디어 합법적으로 쟁취되는 감격의 날이었다.[5]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비로소 대중운동으로서 본궤도에 오른 한국 노동운동의 비약적 발전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현대엔진 노동조합 결성과정의 중요한 요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현대엔진 노동자들은 일상투쟁을 통해 역량을 축적하고 역량에 맞는 싸움을 집요하게 전개했으며, 대중투쟁의 기반 위에서 합법투쟁을 정력적으로 벌여왔다는 사실이다. 둘째, 부서별 모임, 취미모임, 친목회, 기별 모임 등 노동현장의 기본적 조직형태를 생산조직의 기본틀 속에서 강력히 조직, 대중의 단결을 강화하고 조직했다는 사실이다. 셋째, 창의적인 단체행동, 즉 몸벽보, 축구대회, 한 식당 이용 등을 통해 대중의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내고 대중 스스로 투쟁의 주인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넷째, 사용자의 아성인 노사협의회를 적극 노동자의 단결의 장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모든 협상과 상황진행에 대해 노동자들에게 전면적으로 공개하고 부서 단위의 직접토론을 조직하는 민주적 방식에 철저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대중투쟁 원칙에 철저한 지도부의 존재는 87년 7·8·9월의 현대 노동자 대투쟁을 끌어내며 현대그룹의 노동운동이 한국 노동운동의 메카로 일약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다.[6] 7월 15일에는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대회를 갖고 다음 날 보고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노조 설립신고서를 시청에 접수하려는 순간 회사 측이 이를 빼앗아 가버렸다. 비난여론이 빗발쳤고 결국 시청은 3일 만에 노조설립 신고필증을 내주었다. 이 ‘탈취사건’을 계기로 노조 결성이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열기가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현대엔진과 현대미포조선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던 현대자본은 이번에는 어용 한국노총 산하 금속노련과 한통속이 되어 21일과 24일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에 어용노조를 결성했다. 그러나 25일, 전날 결성된 어용노조가 결성 보고대회를 갖는 자리에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분노의 함성을 터뜨렸다. ‘어용노조 물러가라’며 자발적으로 형성된 시위대열이 공장을 한 바퀴 돌자 8천여 명으로 불어났고, 일시에 공장 전체를 마비시켰다. 이들은 폭우가 쏟아지던 상황에서도 농성을 계속하면서 임시총회를 열어 새로운 민주노조 집행부를 세우고 자본으로부터 ‘민주노조를 인정한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현대자동차에서도 어용노조가 만들어졌는데 … 이튿날 7월 25일 어용노조 집행부 30여 명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본관식당에서 노조결성보고대회를 갖기 위해 현수막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분노가 폭발했다. 대다수 노동자들이 어용노조라는 것을 알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한 노동자가 “어용노조 타도하자”라고 외치며 몸싸움을 벌였다. 이를 지켜보던 많은 노동자들이 가세하여 몸싸움을 벌여서 결국 이들을 쫓아냈다. 1,200여 명으로 불어난 노동자들이 어깨동무와 스크럼을 짜고 본관 앞을 출발해 대형→소형→주·단조→제2공장→공작생산부를 돌면서 시위를 벌이자 시위대는 불어났고 공장은 마비되었다. 오후 3시 15분경. 5~6,000으로 불어난 노동자들이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크와 앰프를 확보하여 농성을 계속하였다. 오후 4시 35분경 전체공장의 작업이 중단된 가운데 파업농성을 계속하면서 임시총회를 열어 민주노조위원장으로 이상범을 선출하였다. 파업농성 중에 자연스럽게 수많은 구호가 나왔는데 ‘한국노총 해체하라’ ‘어용노조위원장 정성규는 사퇴하라’ ‘유급휴가 실시하라’ ‘임금인상 실시하라’ ‘콘베어 속도 늦춰라’ 등의 구호에 노동자들의 속내가 드러나 있다. 이에 놀란 회사는 야간조에게 비상연락망을 통해 휴무를 통고했고 정문에 공고도 붙였다. 본관에서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은 야간조와 합치기 위해 정문으로 이동해 정문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농성 소식을 들은 현대엔진노조 간부와 미포조선노조 간부가 농성장을 찾아와 민주노조를 위해 투쟁하는 현자노동자들에게 격려를 보내는 농성장은 연대의 기운이 넘치면서 활기에 넘쳤다. 오후 7시부터 시작된 어용노조 퇴진문제를 포함한 협상에서 회사가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자 순조롭게 진행되던 농성이 오후 10시경, 몇몇 분노한 노동자들에 의해 유리창 몇 장이 깨지고 회사 중역의 승용차를 뒤집어버리는 불상사도 생겼다. 밤 11시경 본관 앞에서 농성을 계속하던 3,000명의 노동자들의 “부사장 나와라”는 항의에 부사장이 마지못해 나왔는데 “노조는 노동자들의 문제이니 당신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자동차는 계속 만들어야 한다. 만들면서 노조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 노동자들의 염장을 지르다 노동자들에게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협상에는 현대자동차 이상범과 현대엔진 위원장, 현대 미포조선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는데 긴 시간 협상 끝에 다음날 0시 20분에 합의서를 겨우 작성했다. 합의 내용의 큰 골자는 이렇다. △회사는 임원진의 사퇴를 종용하고 민주노조를 인정한다. △현 집행부의 신분을 보장하고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회사는 어용노조의 사퇴를 받아낸다. △오늘 근무 시간을 인정한다. △1개월 내에 총회를 소집하여 임원을 민주적으로 재선출한다. 합의서를 받아낸 민주노조 진영은 기다리고 있던 노동자에게 합의내용을 설명하고 회사측이 약속을 어기면 7월 29일부터 시작되는 휴가를 거부하고 투쟁하자고 제안하고 농성을 마쳤다. 하지만 회사는 어용집행부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해 몇 차례 협상이 결렬되는 우여곡절 끝에 7월 28일 04시에 어용노조집행부의 사퇴서를 받아내면서 마무리되었다.[7] 현대중공업에서는 노조결성을 준비해 오던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설립 소식을 듣고 ‘현대중공업노조 개편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대책위는 25일 중식시간에 노조의 어용성을 묻는 서명을 실시하여 3천 125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28일 대책위 주도 아래 1만 7천여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퇴진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단행했다. 29일부터는 2만여 노동자들로 파업대오가 확대됐다. 31일 대책위와 회사 간에 협상이 일차 타결돼 상여금 차등제 폐지, 하도급 직영화, 4일간의 파업에 대한 민형사상 면책 등을 쟁취했으나, 임금인상에 대해서는 민주적인 집행부가 정식 구성된 뒤로 미뤄졌다. 27일 밤, … 대책위원들이 정병모 씨의 집으로 속속 모여들어 내일의 결전을 위해 준비물을 챙겼다. … 조마조마한 마음을 다잡고 28일의 새벽 출근길을 향했다. 온몸에 플랭카드를 칭칭 감고 여기저기 유인물을 숨긴 채 드디어 정문 앞에 당도했다. 사전의 계획대로 3개 정문 바로 안쪽에서 플랭카드를 펼치고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어용노조 물러가라”, “임금 인상하라”, “상여금 차등지급 철폐하라.” 아!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일거에 합세해야 될 동료들이 힐끗힐끗 눈치만 보며 그들을 지나치고 있지 않은가. 대책위원들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끝장이다’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대책위원들이 방향을 틀어 현장 안으로 플랭카드를 앞세우고 걸어나가자 삽시간에 노동자들이 대열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몇 분 만에 수천 명으로 불어난 대열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노도로 변했다. 선두에 선 대책위원들의 눈가에 감격의 눈물이 맺혔다. 3개 정문에서 모여들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대열은 1만 명을 넘어섰다. 자연스럽게 사내행진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노동자 대열이 한을 품고 죽어간 동료들의 원혼을 달래기라도 하듯 굴종의 작업장 원한 서린 곳곳을 돌았다. 사내행진을 마친 노동자들은 운동장에 집결했다. 이미 17,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운집했다. 그들은 죽어간 동료들을 위한 묵념을 빼놓지 않았다. … 한순간에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분노를 식힐 필요를 느낀 회사는 대책위와의 협상을 통해 몇 가지 사항에 합의했다. 28일의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오늘 발생된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2. 이 보고대회에 대한 관계당국(경찰서, 보안대)은 절대 개입을 금한다. 3. 오늘 집회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인정한다. 4. 현 노조의 신고필증은 울산시에서 금일(28일) 오전 11시에 조합장과 회사측에 발송했다고 하니 접수 즉시 현 대책위원회에 준다. 5. 현 대책위원회 임원(11명)은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하고 제반 업무를 보도록 한다.” 그러나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군중은 그동안 억눌려왔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전날의 합의는 그들의 기대에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미흡한 합의사항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이 지도부의 지침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2만여 명이 출근과 동시에 운동장에 집결했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동력에 의해 거침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 노동자들은 어용노조 퇴진은 기정사실화하고 한발 더 나아가 임금인상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 2만여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25%를 내걸고 땡볕 운동장에서 불을 뿜고 있었다. 대책위와 회사 간에 협상이 재개되었다. 대책위는 임금 및 상여금 차등제 철폐를 포함한 17개 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두 차례의 연속된 협상은 부수적인 10개 항에는 쉽게 합의했으나 임금과 상여금차등제 문제에는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다음날 회사는 이춘림 회장의 명의로 배포된 유인물을 통해 노동자의 요구사항을 다음과 같이 수용한다고 발표하였다. “… 6. 하도급제는 현재도 직영화시키고 있으나 남은 부분도 점차 직영화한다. … * 임금조정 문제에 관해서는 앞으로 결성될 민주노조와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노조대표자와 진지한 대화를 통하여 결정토록 한다. * 인사고과 철폐문제는 등급단계를 완화하는 등 제도적으로 보완 개선해 나간다.” 협상이 난항을 겪자, 30일에도 2만 노동자들이 변함없이 운동장에 집결하여 파업농성을 계속했고, 대책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경과보고 유인물을 통해 입장을 천명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현중노조 개편대책위 경과보고 7월 28일(화)부터 뜨겁게 달아오른 민주노조의 열망이 전 노동자의 피끓는 함성으로 천지를 뒤흔든다. … 29일 19시 1차 협상에 들어갔으나 결렬되고 22시 2차 협상에서도 시간을 두고 해결하자는 회사측의 요구로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에 본 대책위원회에서는 전 노동자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집회를 계속할 것이며 대책위원 전원은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갈 것을 천명하는 바이다 …” 이제 투쟁은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전열을 가다듬은 노동자들의 대오는 어느덧 사무직과 여사원들마저 동참하고 있었다. 확대일로의 사태에 심각성을 느꼈는지 회사가 협상에 적극성을 띠고 나왔다. 31일 11인 대책위 전원과 회사측 회장 이하 10명의 중역들이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서 진일보된 합의가 이루어졌다. “1. 연말상여금 차등지급제를 없앤다. 2. 임금인상에 대하여(전 종업원) 1) 실시시기 : 1987년 9월 1일 (9월분 급료) 2) 인상률 : 현중노조 설립이 정식으로 구성된 후 상호 결정한다. 3. 현중노조를 가장 민주적인 방식에 따라 새 집행부를 구성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둔다. … 4. 단 금일(31일)의 집회를 본 합의 후 16시까지 종료하고 향후 이와 유사한 집회가 재발한 경우에는 상기 합의사항 및 7월 29일의 이춘림 회장이 약속한 10개 사항은 무효이며 단위 부서별 소규모 집회는 특별위원회가 구성될 때까지 현 대책위원회가 막는다. 5. 이번 4일간의 집회에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는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 노동자들은 ‘마음속에 무엇인가 허전함’을 떨치지 못하고 일단 대책위의 조업방침에 따랐다. 그러나 내면에는 미흡한 합의에 대한 불만이 충만해 … 있었다. 민주노조 건설과 파업의 불길은 울산 현대 계열사 전체로, 울산지역 전체로 번져갔다. 26일 현대중전기노조가 건설됐다. 27일 태광산업과 동양나일론[훗날 효성]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다. 30일 현대중공업과 현대중전기 노동자들이 연합 가두시위를 벌였다. 31일 이후 6개 버스업체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8월 1일 현대정공과 현대종합목재에 노조가 건설됐다. 8월 초 석유화학단지와 온산공단으로 파업농성이 확산됐다. 현대계열사 가운데 가장 열악한 노동조건에 허덕이던 현대정공 노동자들은 가장 폭발적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1천 200여 현대정공 노동자들은 붉은 페인트로 ‘민주노조 결성’이라고 쓴 회사버스를 타고 시가지를 누볐다. 사무실의 유리창을 박살내고 거리로 나아가 전투경찰에 맞서 간선도로를 4개의 컨테이너로 차단하고 시위를 전개했다. 파업파괴자들에 대해서 단호하게 응징했다. 요구사항을 민주적으로 토론해서 결정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조업재개 후 회사의 민주노조 보장 약속이 유야무야 되려 하자 6일 울산을 방문한 정주영 회장을 운동장으로 끌어냈지만 확답을 듣지 못했다. 7일 회사는 전면 휴업조치를 단행했고, 정주영은 ‘외부 세력’을 들먹이며 대책위와 대화 단절을 선언했다. 대책위는 노동자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노조를 건설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8월 1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간 현장은 그러나 ‘정상’일 수 없었다. 모든 노동자들이 민주노조 탄생을 갈망하며 약속된 회사의 후속조치를 기다리고 있는데도 회사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약속이 기만일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었다. 술렁이는 현장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인 8월 6일, 정주영 회장이 울산에 내려왔다. 6일 오전, 체육관에 조장급 이상의 관리자들을 모아놓고 정 회장의 훈시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책위는 정 회장과의 담판을 시도하기로 하고 집회를 열었다. 유야무야 안개에 싸여가는 회사의 민주노조 보장 약속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정 회장과의 담판이 더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 회장이 훈시하고 있는 체육관 주위를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에워싸고 “임금 25% 인상, 어용노조 퇴진” 등을 외치며 농성을 벌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정 회장이 “11명도 감당 못하느냐”며 격노하면서 후문으로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들에게 저지당했다. 현대왕국의 절대군주 정주영 회장과 현대노동자들의 숙명적인 만남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관리자만 만날 것이 아니라 직접 배를 만들고 현대를 국내 최대기업으로 키워온 현장 노동자들 앞에서 당당히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어느새 주위에는 2만여 노동자들이 운집해 있었다. 노동자들은 운동장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길게 길을 터놓고 그룹총수의 결단을 촉구했다. “회장님 운동장으로 가십시오! 회장님의 분명한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는 좀체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 이때 누군가 정 회장을 향해 흙을 뿌렸다. 마치 정 회장의 눈에 흙이 들어가게 만들어 민주노조를 인정하게 만들겠다는 심정으로! 상황이 다급해져 가는 것을 깨달았는지 무려 1시간의 실갱이 끝에 그가 서서히 운동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동장으로 향하던 정주영 회장도, 2만 노동자들도 대조립공장 벽에 커다랗게 박혀 있는 글귀를 읽었다. ‘회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길이며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 현대 노동자들이 15년 동안 매일같이 보아온 이 글귀가 오늘따라 가슴에 한이 되어 박혀온다. 허허뻘밭 백만 평의 대지에 조선소가 들어선 이래 회사는 얼마나 성장했는가. 중화학공업의 선두주자로 일취월장 성장한 회사로 말미암아 나라는 또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가. 그런데 노동자들은 어떠한가. 잘 되었는가? 그것은 정녕 ‘잘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불과하지 않는가. 자고 나면 누군가 탱크 안에서 죽어갔다는 끔찍한 소식에 치를 떨어야 했던 나날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 말을 끝까지 믿고 싶었다. 그래서 운동장에 모인 2만 노동자들은 힘차게 현대사가를 부르고 애국가도 불렀다. 연단에 올라선 정 회장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민주노조를 만드는 것이 여러분과 회사의 공동 목표”라고 호언하며 “그러나 합법성 있는 노조와 대화할 것임을 잊지 말라”고 천명하고 급하게 운동장을 빠져 나갔다. 담판은 이렇게 소득 없이 끝났다. 현대왕국을 맨손으로 건설한 살아있는 신화 그룹 총수를 운동장까지 모신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미 계획된 수순이었는지도 몰랐다. 오후 4시가 되자 회사는 전면 휴업조치를 단행했다. 이어 다음날인 8월 7일에는 정주영 회장이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현대중공업 사태가 ‘외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매도하면서 대책위와는 절대 대화하지 않겠다는 강경태도로 돌변했다. … 전면휴업을 내린 회사는 대책위와 전혀 대화할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제 대책위가 선택할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건설하자.” … 전열을 가다듬고 8월 14일 총선을 결정했다.[8] 8월 14일 현대중공업 노동자 1만 5천여 명이 임시총회를 갖고 어용 집행부를 99%의 불신임으로 몰아내고 직접 선거로 민주노조를 세웠다. 14일의 총선은 회사도 놀랄 만큼 질서정연하게 치러졌다. 사측이 불법집회라며 투표장인 운동장 입구에 포크레인과 관리자들을 동원하여 바리케이드를 쳤지만, 민주노조에 대한 노동자들의 열망 앞에 허망하게 무너졌다. 총선은 장대비 속에서도 투표장을 여러 번 옮기면서 열화와 같은 참여 속에 진행되었다. 비난의 표적 권오성 집행부를 99%의 찬성으로 불신임시키고 위원장 간선제의 노조규약을 직선제로 개정하였다. 이어 진행된 위원장 선거는 그동안 헌신적으로 투쟁을 이끌어온 11인 대책위 위원들이 출마를 포기한 상태에서 치러졌다. 대책위는 출범 당시 어용진영의 ‘위원장 야심에 불타는 작자’들이란 악의적 매도를 불식시키고 노동자들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위원장 불출마 선언을 한 바 있었기 때문에 이 확약을 굳건히 지키는 대신 대책위와 함께 열심히 투쟁하던 이형건 씨를 위원장 후보로 추천, 당당히 당선시켰다.[9] 자본가들의 번영을 상징하던 공업도시 울산은 이제 노동자들의 투쟁을 상징하는 도시로 탈바꿈해 갔다. ◎ 부산에서 불붙은 1987년 대투쟁 7월 중순에 벌어진 동아건설과 풍영 노동자들의 파업농성은 부산지역 노동자투쟁의 전초전이었다. 25일 시작된 대한조선공사[훗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28일 시작된 국제상사의 나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부산의 공장지대를 투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현대엔진에서처럼 대한조선공사에서도 선진노동자들이 있었고, 1987년 투쟁의 불길을 지피는 예열 과정이 있었다. 박창수는 1986년 여름 ‘우리는 개밥을 먹을 수 없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안전모 속에 숨기고 들어가 공장에 뿌리고 ‘도시락 거부투쟁’을 주도했다. 나흘간 벌인 이 투쟁으로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은 최초의 승리를 맛보았다.[10] 김진숙은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버스안내양을 거쳐 고무공장과 신발공장을 전전하다가 사내 직업훈련소를 거쳐 용접공으로 입사했다. 김진숙은 야학을 통해 민주노조를 알고 1987년 3월 ‘조공 노동자신문’이라는 필사본 유인물을 두 차례 만들어 탈의실 등에 뿌렸다가 발각돼 다른 3명의 동료와 함께 해고당했다. 그러나 현장 노동자들은 유인물에 실린 내용을 서로 이야기하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해고자들의 지속적인 투쟁은 노동자들을 뜨겁게 달구어 결국 1987년 7월의 폭발적 투쟁을 이끌어냈다. 마침내 내 운명의 기수를 ‘노동해방’으로 돌려놓은 한진중공업(당시 대한조선공사)의 용접공 생활이 1981년 7월 1일부터 시작된다. 용접불똥에 군데군데 타 들어간 작업복에 누런 테이프를 붙여 넝마가 된 누더기를 걸친 스물둘의 내 청춘도 산재에 작업에 그렇게 누더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 그러다 마침내 1984년쯤 근로야학이라는 델 찾아가게 되고, … 나한테 절실했던 영어단어나 수학공식보다는 근로기준법이 어떠니 노조가 어떠니 하는 일에 더 열을 올리던 … 강학 하나가 책 한 권을 건네줬다. 진숙 씨가 읽어보면 참 많은 도움이 될 거라면서. 사실 내 이름 뒤에 ‘씨’ 자를 붙여서 불러준 건 야학에서가 처음이었고 나한테 존댓말을 해 주는 최초의 사람들이 야학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야학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 전태일 평전』이라는 책이었다. … 그 책을 끝내 들추지 말았어야 했을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었다. 가슴에 큰 산 하나가 들어앉아 그 산에서 돌덩이가 와르르 쏟아져 양심에 돌팔매질을 해대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산 사람. 그러나 그 삶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끌어안고 뒹굴었던 사람. 난 뭘까. 그의 삶에 비한다면 내 삶은 뭘까. … 나와 함께 일하고 나와 같이 뒹굴며 그러나 끝내 내가 되지 못하고, 내가 그들이 되지도 못한 채 흘러갔던 수많은 아이들.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뒹구는 아무 데서나 오줌 누고 욕을 달아야만 말이 되는 이 아저씨들.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내가 곧 그들이라는 사실이 이제 더 이상 부끄럽지도 치욕스럽지도 않았다. 같이 살아야 된다는 생각. 내가 달라져야 그들이 달라진다는 생각. 그들이 딛고 선 땅이 변해야 내가 딛고 선 땅도 변한다는 생각. 눈물은 곧 다짐이 되었고 가슴 벅찬 환희가 되었다. 인간이 참 고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11] 조선공사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거리로 진출했다. 1천 500여 노동자들은 태종로 거리를 완전히 차단하고 노동조건 개선, 어용노조 퇴진 등 20여 가지의 요구조건을 외쳤다. 경찰과 구사대가 계속 폭력침탈하자 파업자위대를 구성해 맞서 싸웠다. 28일 자본과의 협상이 결렬된 다음에는 3천여 명이 지게차와 물탱크차를 앞세우고 쇠파이프와 쇠망치로 무장한 채 거리시위를 벌였다. 결국 연 300%의 상여금 지급, 어용노조 퇴진 등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휴가비 100% 확보’를 내걸고 시작된 국제상사 노동자들의 투쟁은 700명의 깡패가 휘두르는 쇠파이프와 각목 앞에 내던져졌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지원에 힘입어 깡패들과 맞서 보기도 했으나, 투쟁 대열은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고, 투쟁 공간도 회사 운동장에서 기숙사로, 다시 근처 성당으로 밀려나게 됐다. 하지만 국제상사 여성노동자들은 거리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연일 거리집회를 개최함으로써 부산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을 더욱 고무시켰고, 특히 부산에 밀집해 있는 화학, 신발업계 노동자투쟁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 마산·창원에서 불붙은 1987년 대투쟁 이미 1980년대 초부터 투쟁 전통을 갖고 있었던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들도 투쟁에 떨쳐 일어섰다. 여기서도 의식적인 활동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성현은 1980년에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를 거쳐 선반공으로 동양기계에 입사해서 차돌회라는 소모임에서 활동하다가 회사가 1982년 창원으로 이전하여 (주)통일로 합병될 때 창원으로 내려왔다. 문성현은 1983년 말 노조 사무장으로 당선돼 1984년 단협투쟁에서 유급휴일 확대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를 계기로 500여 명에 불과하던 조합원이 2천여 명으로 급속히 불어났다. 자본이 단협 투쟁에 대한 보복으로 문성현을 대학생 출신이라는 이유로 징계하려 하자 조합원 전체가 들고 일어나 징계를 철회시켰다. 노조는 1985년 임금투쟁에서 협상이 한 달 넘게 진행되는 동안 매일 출근시간과 점심시간에 집회를 열며 투쟁을 병행했다. 2천여 명의 조합원들은 마산·창원 지역 최초로 ‘단결’이라고 쓴 머리띠를 두르고 매일 빠짐없이 집회에 참가했다. 이런 투쟁 과정에서 소모임이 늘어나 1987년 초에는 통일에 소모임이 10개 정도 만들어졌다. 이런 굳건한 토대가 있었기에 마산·창원 노동자운동은 1987년 대투쟁에서 울산·부산 노동자운동에 이어 또 하나의 선봉이 될 수 있었다. 울산 현대정공 노동자들의 투쟁에 고무된 창원 현대정공 노동자들이 7월 30일 노조를 결성했다. 같은 날 한국중공업에서는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성토대회를 열었다. 31일 효성중공업에서는 500여 노동자들이 농성에 들어가며 어용노조 집행부 퇴진, 상여금 인상 등을 요구했다. 8월 6일과 7일에는 기아기공과 (주)통일의 노동자들이 어용노조를 통한 자본가들의 분열책동을 폭로하면서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노동자투쟁을 파괴하려는 자본가들의 음모는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규찰대 조직을 비롯해 다양한 방법으로 자본의 음모를 분쇄했다. 대부분의 파괴공작은 오히려 노동자들의 단결을 더욱 강화해 줄 뿐이었다. 특히 통일 노동자들은 ‘해고노동자 복직’을 으뜸 구호로 내세워 지도자를 되찾겠다는 강한 결의를 보여주었으며, ‘민주노조 쟁취 시범업체’라는 구호를 정문에 내걸어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에 서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실제로 통일 노동자들은 치밀하고 다양한 농성프로그램을 진행해 이 지역 노동자투쟁의 모범이 되었으며, 다른 노동자투쟁들을 적극 지지·지원함으로써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운동을 선두에서 이끌어 나갔다. 회사 안에서만 투쟁하던 노동자들은 8월 11일 금성사 노동자들이 가두시위를 벌인 다음 가두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대림자동차와 창원기화기 노동자들도 가두시위를 벌였고, 풍성전기 노동자들은 8대의 통근버스를 동원해 차량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때부터 창원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은 더욱 고양됐다. 창원 공단 안의 모든 노동자들은 동지였다. 다른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에 박수로만 연대의지를 표명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폭력경찰에 맞서 같이 싸우며 강철 ‘계급’으로 단련되어갔다. 8월 11일에는 각 사업장에서만 투쟁을 전개하던 노동자 수만 명이 지게차를 앞세우고 창원대로로 뛰쳐나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최루탄 속을 돌진하였다. 8월 11일 금성사에서는 철야농성 노동자 중 200여 명이 지게차 25대에 분승하여 공장주변 도로를 돌며 1시간 동안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에 대림자동차에서도 500여 노동자들이 정문을 박차고 나와 “인간답게 살고 싶다. 생활임금 보장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2시간 동안 가두시위를 벌였고 여기에 창원기화기 300여 노동자들도 가두시위를 전개하고 창원시청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그러자 풍성전기 400여 노동자들도 회사 통근버스 8대에 분승하여 창원 전 지역을 돌며 차량 가두시위를 벌였다. 오후 5시경이 되자 또다시 금성사 노동자 250여 명이 지게차에 분승하여 가두로 진출하였고, 뿌연 최루탄 연기 속에서 노동자들과 경찰과의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경찰의 최루탄 난사로 금성사 조합원 이상영이 머리에 부상을 입고 뇌수술을 받는 등 노동자 3명이 크게 다쳤다.) 금성사 노동자들의 가두 진출에 인근의 창원기화기 노동자 200명, 동우정기 노동자 100명, 풍성전기, 오성사, 동환산업 등 노동자들이 동조하면서 박수를 보냈다.[12] ◎ 전국을 투쟁의 불바다로 만든 8월 남부지방에서 집중적으로 타올랐던 투쟁의 불길은 8월 초순을 고비로 전국으로, 노동자가 있는 모든 곳으로 번져 나갔다. 창원공단 금성사 노동자들의 투쟁은 같은 업종의 전자업체가 몰려 있는 구미공단으로 옮겨 붙었으며, 일시에 구미공단의 중심적인 공장들이 투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특히 독점자본의 각 계열사들이 투쟁에 합류했고, 동종 업종의 노동자들은 경쟁적으로 투쟁의 불꽃을 당겼다. 인천, 서울, 성남 등 수도권지역 노동자들도 비로소 본격적인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8월 4일 창원공장 대우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에 고무된 인천공장 대우중공업 1천 500여 노동자들이 8일 파업투쟁에 나섰고, 이어 인천지역 대우 계열사인 대우자동차, 대우전자 노동자들이 투쟁에 가세했다. 이런 방식으로 남부 중공업지대에서 수도권과 전라도, 충청도,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투쟁이 거세게 확산됐다. 또한 업종별로는 이미 투쟁의 열기로 가득 찬 중화학공업 노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여성중심 제조업인 전자, 섬유부문의 노동자들도 투쟁에 떨쳐 일어섰다. 운수노동자들의 투쟁은 8월 7일 전주 택시기사의 총파업을 시발로, 9일에는 광주 시내버스 총파업, 12일에는 전주, 군산, 김제 시내·시외버스 총파업, 14일에는 대전의 버스·택시 총파업이 잇달아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를 뒤흔들었다. 또 부산, 포항, 성남, 춘천, 인천 등지의 운수노동자들도 운수노동자 전국 총파업의 기세로 전국을 굽이쳐 대중교통이 거의 마비상태에 이르렀다. 운수업은 공공서비스업이라는 이유로 언론의 집중공격을 받았으나, 운수노동자들은 무임승차와 같은 다양한 투쟁방식을 개발하고 다른 산업노동자들과 연대투쟁을 벌이면서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은 8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전면화하고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8월 7일 석탄공사 함백광업소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점으로 대성탄좌 문경광업소 노동자 1천 400여 명이 파업농성에 들어갔고,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석탄공사 도계·장성광업소 등 주요 탄광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합류했다. 언제나 그렇듯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은 초기부터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경찰과 대치한 상태에서도 거리투쟁을 계속 벌였고, 철도와 국도도 여러 번 점거했다. 특히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와 석탄공사 장성광업소 노동자들의 투쟁은 흡사 전투를 방불케 하고 지역 봉기의 맹아를 보여줄 정도로 규모가 컸다. 1980년 4월에 사북 항쟁을 벌였던 광산노동자들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압에 잠시 움츠렸지만, 자신의 힘을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과거로부터 배워 일보 전진했다. 요구 측면에서 과거에 주로 제기했던 임금과 상여금 인상 등에서 전근대적 임금제도인 도급제 폐지, 어용노조 퇴진, 위원장 직선제 등으로 한발 더 나아갔다. 투쟁방식도 광업소 내 점거농성에서 거리진출과 철도·도로점거 등으로까지 전진했고, 더 장기간, 더 치열하게 투쟁했다. 바야흐로 전국은 노동자 파업투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이제 노동자투쟁은 남부지역의 몇몇 대기업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전국에 걸쳐, 중소규모·대규모 공장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머리띠를 두르고 대열을 지어 움직이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한 공장에서 승리의 소식이 들리면 바로 옆 공장으로 투쟁이 번지고, 나아가 그 지역 일대가 투쟁의 불길로 휩싸이게 됐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바로 지금이 나설 때’임을 직감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이렇듯 노동자투쟁은 발전을 거듭해 나가 8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하루 평균 쟁의건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연합가두시위가 본격화된 17일부터 29일까지의 기간에는 전국적으로 하루 평균 150개의 공장에서 새롭게 투쟁이 벌어졌다. 1985, 86년의 각 1년 동안 일어났던 투쟁의 절반 이상이 단 하루 사이에 일어났다. 20일에는 하루 500건, 29일에는 743건이 되면서 노동자투쟁은 절정을 이루었다. 이 보름 동안 노동자들의 투쟁은 지칠 줄 모르고 거세게 타올랐다. 한편 이 기간 400여 개의 노동조합이 새로 결성됐다. 이는 비교적 노동운동이 고양되었던 1984년 한해 250개 노조설립과 비교해도 엄청난 것이었다. 투쟁의 양상은 더욱 폭발적이고 조직적인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파업농성 시 규찰대를 조직하고 구사대의 폭력에 대응해 각목과 쇠파이프로 무장하여 투쟁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투쟁방식이 됐다. 나아가 지게차와 같은 중장비를 앞세우고 가두시위를 벌여 자본가들에게 위력을 과시하고,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것이 점차 일반화돼갔다. 이러한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투쟁방식은 예전에는 지역적으로 고립돼 있고 협상 상대인 자본가가 서울에 거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광산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특히 중공업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일반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거제 대우조선에서는 협상에 무성의한 그룹 측에 맞서 노동자들이 거제도 일부를 장악하고 거리시위를 벌였으며 전투경찰과는 투석으로 맞섰다. 인천에서 경동산업 노동자들은 깡패들로 구성된 구사대를 격파한 다음 수차례에 걸쳐 거리시위에 나서 단결력을 과시하면서 인근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무했다. 부천의 경원세기 노동자들도 회사 앞 고속도로를 점거하는 등 격렬한 투쟁을 벌임으로써 요구조건을 완전히 쟁취했다. 이 시기에 발생한 파업은 모두 불법파업이었다. “노동위원회가 적법성을 심사한 뒤 일반사업장은 30일, 공익사업장은 40일이 지나야 파업을 할 수 있다”는 규정을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폭발적인 투쟁으로 악법을 날려버렸으며 ‘선파업 후교섭’을 통해 민주노조 건설, 노조 민주화, 생존권을 당당하게 쟁취했다. 이런 투쟁양상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꾸준히 발전해왔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타협이나 소극적인 청원이 아니라 오로지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노동자들은 이미 경험을 통해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울산 현대노동자들의 연합거리시위 노동자투쟁의 거센 불길은 8월 17~18일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현노협)가 주도했던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연합거리시위에서 절정에 달했다. 8월 들어 단위공장별로 임금협상을 벌이던 현대계열사 노동자대표들은 한결같이 ‘임금 결정은 그룹 차원의 문제’라는 자본의 태도에 부딪혔다. 이에 현대그룹 노동자들은 노동자도 그룹 차원의 노조협의회를 결성해 그룹 차원에서 해결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8월 8일 10만 현대그룹 노동자를 대표하는 현노협이 탄생했다. 그러나 현대 자본은 현노협이 불법단체라고 주장하면서 현노협이 제안한 세 차례의 협상에 모두 응하지 않았다. 현대자본의 응답은 16일의 현대중공업 폐쇄, 독신자 숙소 단전·단수 및 식사제공 중단, 17일의 그룹 전체 공장에 대한 무기한 휴업조치였다. 이제 한국 최대 재벌 현대자본과 10만 현대 노동자들의 정면대결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17일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3~4만에 달하는 현대그룹 노동자들이 현대중공업 운동장에 모였다. 그들은 ‘정주영 회장 화형식’을 가진 뒤, 대형 철구조물을 앞세우고 정문을 나와 길을 가로막는 전투경찰에 맞서 돌을 던지며 싸우다가 남목까지 행진했다. 18일 다시 6만여 노동자와 가족들이 모여 공설운동장까지 5시간에 걸쳐 거리시위를 벌였다. 시위대열 선두에서 오토바이 15대와 마이크를 장치한 1톤 트럭이 대열을 이끌었으며, 그 뒤에는 헬멧, 방진마스크를 착용한 500여 명의 선봉대가 따랐다. 또 샌딩머신, 덤프트럭, 소방차, 지게차 등 중장비 10대가 동원됐다. 6만의 노동자부대는 4Km나 되는 끝도 없이 긴 행렬을 이루며 분노의 행진을 벌였다. 마치 잘 훈련된 노동자군대의 행진연습을 보는 듯했다. 노동자 시위대의 당당한 시가행진 모습은 전국 노동자들에게는 가슴 벅찬 기쁨을, 자본가들에게는 몸서리 처지는 공포를 선사했다. 이런 대부대의 진군은 경찰도 감히 막을 수 없었다. 사태 전개에 경악한 정권은 18일 오후 노동부차관을 현지로 급파했다. 그리고 “현대중공업 이형건 집행부가 회사측과 공식적으로 단체협약에 임할 수 있도록 보장”, “임금인상은 9월 1일까지 타결될 수 있도록 정부가 보장” 등을 서둘러 합의하고 일단 투쟁을 수습했다. 출근시간이 되자 노동자들이 중공업 운동장으로 구름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4만 명이 넘는 현대 노동자들이 운동장을 꽉 메우고도 모자라 운동장 주위를 에워쌌다. 전날처럼 정문 앞에서 “시내로!”를 외치며 서성이던 노동자들도 보이질 않았다. 전날의 유인물 사건으로 분위기가 더욱 고양된 때문인지 3,000여 명의 가족들도 운동장으로 열을 지어 들어오자 집회의 열기는 하늘을 찌를 듯 고조되었다. … 지도부는 가두시위의 분명한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무저항 비폭력 행진, 즉 경찰의 제지로 행진이 막히면 공격하지 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연좌시위를 벌이고, 둘째는 질서 있는 평화행진을 하며 대오를 이탈, 질서를 문란케 하는 자는 행진을 파괴하려는 프락치로 간주, 엄단한다는 것이었다. 출정을 앞둔 집회의 마지막 순서는 정주영 회장 및 족벌체제 타도 화형식이었다. 지도부는 어제의 경험을 살려 보다 조직적이고 질서 있는 시위를 위해 본대를 2,000명 단위로 15개 대열로 나누고 사이사이에 질서대원을 배치시키는 한편, 대열의 선두에는 중장비 부대와 방진마스크 및 화이버로 자체 무장한 선봉대를 배치했다. 대열 최선두 중장비 대열 바로 뒤에 의장단 등 각사 노조 위원장들이 섰다. 회사가 오늘의 시위에 대비하여 중장비의 바람을 빼고 키를 회수했지만 노동자들은 솜씨 좋게도 덤프트럭, 소방차, 카고트럭, 지게차, 심지어 샌딩머신까지 끌어내 대열의 선두에 앞세웠다. … 이렇게 4만 가까운 노동자들이 중장비 수십 대를 앞세우고 질서정연하게 거리에 도열하자 노동자들은 사기충천했다. 이 순간, 자본가들은 ‘폭도’로 변한 노동자들의 무질서한 과격투쟁으로 매도하겠지만 그러나 노동자들은 온몸을 휘감는 분노 속에서도 그동안 현대에 빼앗긴 것들과 거꾸로 된 현실을 향해 보다 진지한 모습으로 전진하는 살아있는 인간으로 부활하고픈 강한 열망에 젖어 있었다. … 오전 11시 30분. 드디어 시위대가 거대한 용이 되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약 4킬로미터의 행진대열이 서서히 인간다운 삶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중공업 민주노조 인정”, “임금인상 즉각 실시”, “휴업철회”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고 ‘아리랑목동’의 노래가락이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4만의 노동자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대열들 속에서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장관을 만들고 있었다. 12개사 현대계열사 노동자들이 지나는 연도에는 시민들이 나와 열렬한 박수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을 떠다주고 수건을 건네주는 등 그들도 하나의 흐름 속에 일부가 되어 행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 도도한 흐름을 누가 막을 것인가! 대열의 선두가 남목고개 마루에 이르렀을 때 저만치 4,500여 명의 전경들이 닭장차로 도로를 차단한 채 포진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열이 전경과 약 100미터의 거리에 이르렀을 때 지도부가 시위대를 정지시켰다. 100미터를 사이에 두고 경찰과 노동자 시위대가 맞포진하고 정중앙 노상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의 협상이 이루어졌다. 도경국장과 안기부 소장, 그리고 권용목 의장이 고갯마루 대로 한복판에서 대좌했다. “권 의장 : 경찰병력을 철수하라! 도경국장 : 안 된다. 다시 회사로 철수해 회사 안에서 하라! 권 의장 : 이 상황에서는 대열에 연락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사람들은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집회를 갖고 해산할 수 있는 명분과 공간을 달라. 병력이 철수하면 편도를 이용하여 평화행진을 한 다음 공설운동장에서 반드시 해산하겠다. 도경국장 : 10분만 기다려 달라. 권 의장 : 좋다. 기다리겠다.” 권 의장은 협상결과를 시위대에 전달하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쉬도록 했다. 그런데 10분이 지나도 도경국장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시위대는 10분이 지났으니 밀어붙이자고 아우성이었다. 시위대는 고개까지 행진해 오는 동안 더욱 늘어 어느덧 5만 대군을 이루고 있었다. 노동부 등 여러 관계기관에서 중재를 시도했으나 상황은 중재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5만 군중의 힘, 그것이 발산될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할 뿐이었다. 앞에는 전경과 백골단, 뒤에는 성난 시위대, 그 중간 노상에서는 국내외 보도진 수십 명이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뒤에서 밀고 나오겠다고 아우성치는 긴박한 상황의 10여 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충돌은 엄청난 사상자만 낼 것이었다. 시위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지도부는 목이 터져라 설득하고 밀고 나가려는 시위차량 앞에서 가로막고 드러눕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그들을 깔아뭉갤 기세로 밀고 나오고 있었다. 참으로 피가 마르는 순간이었다. 중장비 경적 소리가 빵빵거리고 의장단이 “밀고 가려면 우리를 넘어서 가라”는 필사적인 설득의 일분 일분이 흐르고 있었다. 권 의장이 도경국장에게 어떻게 되었는지를 따져 묻자 국장은 “이 사람아! 그것을 내가 결정하나? 높은 데에 알아봐야 될 것이 아닌가”라며 허둥댔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협상이 아니라 담판이 필요했다. 권 의장은 철수요구를 다시 한 번 전하고 가부만을 묻기로 했다. 이 최후통첩이 내려진 5분 후 드디어 ‘높은 곳’에서 재가가 떨어졌다. 도로를 차단했던 전경차들이 방향을 돌리고 전경들이 철수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권 의장이 경찰병력이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하자 갑자기 거대한 시위대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경찰병력이 채 철수하기도 전에 노동자들이 앞으로 밀고 나갔다. 순간적으로 지도부의 통제가 무너졌다. 봇물이 터진 듯 밀고 나가는 노동자들의 눈에는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미처 차에 오르지 못한 전경들이 노동자들의 함성에 기겁하고 산으로 내달리고 시위대는 경주라도 하듯이 경찰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었다. 시위대는 안전모, 각목, 방진마스크 등 경찰의 공격에 대비해 무장했던 것들을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길가에 휙휙 날리고 한 걸음이라도 앞서가겠다는 일념으로 내닫고 있었다. 왜 가야 되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렇게 물밀듯 쏟아져 가는 것이 그들의 목표인 양 앞으로 내달을 뿐이었다. 지도부가 인간 사슬을 하고 막아보았지만 추풍낙엽이었다. 마침내 성내삼거리 평지에 다다르면서 시위대의 걸음이 잦아들고 대열이 질서를 잡기 시작했다. 고갯마루에서 성내삼거리 평지에 이르는 약 10분간의 시간은 지도부와 경호대가 질서를 잃고 쏟아져 내려가는 시위대와 철수하는 경찰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 진땀을 흘린 숨가쁜 시간이었다. … 성내삼거리부터는 왼편에 8km에 이르는 현대자동차 담과 오른편에 염포, 양정동의 주택가를 끼고 4차선의 평탄한 도로가 펼쳐져 있다. 지도부는 방송차량을 선두로 빼서 시위대열을 정비하고 질서를 잡아갔다. 연도의 주민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길가로 나와 시위대를 격려하고 더위에 지친 시위대에게 물과 수건을 건네주는 등 환호하였다. 시위대가 강관, 정공, 자동차를 지날 즈음에는 약 6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간간이 휴식을 취하면서 행진을 계속해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이 공설운동장에 이르렀다. 맨 선두의 선봉대열과 맨 마지막 가족부대까지 총 4km의 행렬이 16km의 대장정을 끝내고 공설운동장에 이르렀을 때의 시각은 오후 4시 25분. 중공업을 출발한 지 약 5시간만의 일이었다. … 운동장에 집결한 6만의 노동자들은 완전히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정주영은 물러가라”, “현중노조 인정하라”, “임금인상 단행하라.” 노동자들의 요구가 거대한 함성이 되어 울산을 뒤흔들고, 가족들이 나와 부르는 노랫가락은 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의 시름을 말끔히 씻어주고 있었다. 재주있는 노동자가 나와 솜씨를 보인 즉흥 원맨쇼는 6만 군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고조되어 가는 것과는 별도로 노동부 소장, 안기부 소장 등 관계기관과 막후협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책임성 있는 현대 측의 관계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이렇다 할 결과가 나오지 않자 노동자들은 정주영 회장이 직접 내려와 책임 있는 답변을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서울에 발이 묶여 있었다. 해결의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현대그룹의 책임자가 아니라 정부의 책임자가 등장하면서 교섭은 급진전되었다. 한진희 노동부 차관이 비행기를 타고 급파되어 현장에 나타났다. 정부가 직접 중재에 나선 것이다. 실무협상은 권용목 의장과 노동부 소장 사이에 이루어졌다. 협상진행 내용은 중간 중간 한진희 차관에게 보고되었고, 대강의 구두합의가 이루어졌다. 합의내용 발표는 차관이 직접 하기로 합의했다. 권용목 의장은 협상을 하면서 중요하게 두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나는 당시 전국적으로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이 격화되고 있던 상황을 고려해 정부가 현대측이 부인하고 있는 현대중공업노조를 인정하여 노조민주화 투쟁의 중대한 선례를 남김으로써 어용노조 시비에 돌파구를 여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실질적 사주인 정주영 회장의 경영일선 퇴진을 명백히 함으로써 전문경영인 체제를 현대에 정착시켜 각 단사의 협상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려에 의해 차관과의 합의가 이루어져 합의서에 양측이 서명했다. 현대 초유의 정부와 노동자 간의 역사적 합의내용은 다음과 같다. “합의서 1. 노동부 장관은 현대중공업 이형건 위원장이 이끄는 집행부가 회사측과 공식적으로 단체협약에 임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즉 현중 민주노조를 인정한다.) 2. 임금인상은 9월 1일까지 타결될 수 있도록 정부가 보장한다. 3. 정주영 회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각 계열사 사장들에게 전권을 위임했다는 내용을 보장한다. 4. 위 사항(세 가지)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울산시장 윤세달 노동부 소장 옥치현 안전기획부 소장 이찬희 노동부 차관 한진희 추서 : 지금까지의 모든 사태는 그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을 것이며 8·17 발생한 최루탄에 의한 부상자는 정부 측이 책임을 보장한다.” 그러나 합의내용이 발표되자 노동자들은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야유를 퍼부었다. 합의내용이 두루뭉술하고 분명한 임금인상률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 권용목 의장이 마이크를 잡고 노동자들 앞에 섰다. 집회 도중에도 간간히 연단에 서서 노동자들의 열띤 호응을 받으며 감동적인 연설을 한 바 있는 그는 17일과 18일 양일간의 대투쟁을 뛰어난 지도력과 결단력으로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이미 그는 현대 노동자들의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가 연단에 서서 “이 자리에서 경영실적이 사별마다 다른 실정에서 구체적인 인상률을 정부와 합의하는 것은 무리이다. 더구나 이제 정부가 현중노조를 인정하고 9월 1일까지 임금인상을 보장했으니 남은 것은 우리가 현대그룹과 투쟁을 통해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쟁취하는 것이다. 정부로부터 이러한 보장을 쟁취한 오늘의 투쟁은 우리가 이룩해낸 위대한 승리다”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자 분위기는 일변하였다. 작은 몸집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는 6만 현대 노동자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 어느덧 집회는 승리의 함성으로 밤늦은 울산을 뒤흔들고 있었다. 해산도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사위는 이미 어둠이 깔리고 천지를 뒤흔들던 6만 대군의 물결이 서서히 운동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인간답게 살고자 열망하는 노동자들의 강렬한 투쟁과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의 선두에 섰던 지도부가 이룩해낸 장엄한 투쟁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8월 18일은 현대 노동자들이, 아니 이 땅의 노동자들이 한을 딛고 오늘 이 땅의 주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위대한 탄생이었으며,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내일을 향한 장엄한 진군이었다.[13]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연합거리시위는 독점자본과 정권의 심장부를 강타했고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현노협은 10만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진정한 대표기구로 정착되지 못했다. ‘각 계열사별 임금교섭’이 합의의 기본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현노협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하지만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8월 대행진에 대한 감격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 정권과 자본의 반격 파업이 사업장 경계를 넘어서는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8월 18일 울산 현대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연합거리시위 직후, 정권은 파업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전투경찰이 전국 각지의 사업장에 파견돼 파업을 진압했다. 수백 명의 노동자가 체포되고 투옥됐다. 자본가들도 노동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업 내부에서 자본가들이 조직한 구사대들은 전투경찰의 도움을 받으면서 파업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공격했다. 파업을 주도하던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반격을 위한 정치파업으로 발전하지 못한 파업 물결은 빠르게 약화됐다. 노사 자율원칙에 입각해 개입을 억제하겠다던 전두환 정권은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연대거리시위를 계기로, 거리시위 초동 진압과 불순세력 개입 색출을 공언했다. 이에 따라 8월 19일 금성사 평택공장의 해고노동자 5명을 구속시켰고, 20일에는 마산·창원 지역 투쟁을 이끌던 경남지역노동자협의회(경노협) 의장 등 2명을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했다. 자본가계급의 반격은 노동자투쟁의 대의와 정당성을 훼손하는 데 일차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졌다. 언론은 노동자투쟁의 정당성을 훼손하기 위해 길길이 날뛰었다. ‘외부 불순세력이 개입하고 있다’, ‘파업이 과격 난동으로 번지고 있다’, ‘수출경제가 파괴되고 있다’, ‘실업자 대량발생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 ‘서민생계를 위협하고 있다’ 등등. 언론은 새빨간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전경련의 한 자본가가 “기아기공 근로자들이 부사장을 포클레인 삽에 싣고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위협했다”, “영창악기에서는 사장을 드럼통에 넣고 굴렸다”고 얘기하자 언론이 이를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기아기공 사측은 사실이 아님을 밝혔고, 영창악기에는 애당초 사람을 넣을 수 있는 드럼통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이런 이데올로기 공세에 제때에 정확하고 강력하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자본가계급의 의도대로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투쟁력이 점차 떨어졌다. 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와 함께, 정권은 물리적 탄압을 강화했다. 8월 22일 거리시위를 벌이던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가슴에 최루탄 파편들이 박혀 사망했다. 이석규 열사의 죽음은 투쟁에 떨쳐 일어섰던 노동자계급 전체에 대한 자본가정권의 도발이었다. 이제 사태는 자본가정권 대 노동자계급의 전면 대결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안양지역에서는 민주노조들이 파업 중인 한국제지 공장으로 결집해 7~800명 규모로 공동추모제를 지내면서 계급적 연대투쟁의 모범을 보였다. 하지만 울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는 이석규 열사의 죽음을 자본가정권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강력한 반격으로 전환시켜 내는 데 실패했다. 정권은 28일 이석규 열사의 시신을 탈취하고, 18개 도시에서 예정된 추모집회와 시위를 원천봉쇄했다. 933명을 연행하여 64명을 구속시켰다. 정권은 이석규 열사 장례투쟁을 계기로 폭력탄압을 전면화했다. 강원도 삼척탄좌 정암광업소에서는 완전무장한 경찰 700여 명이 가스차를 앞세워 최루탄을 뿜어대며 파업농성장을 덮쳤다.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같이 농성 중이던 여성과 어린이까지 마구 짓이기고 연행해갔다. 인천 한영알미늄의 100여 농성노동자들도 폭력 탄압의 제물이 됐다. 9월 2일 경찰까지 포함된 구사대가 최루탄을 쏘아대며 농성장에 난입했고 노동자들은 몰매를 맞고 짓밟히며 공장을 빼앗겼다. 열흘째 파업 중이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도 4일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고 135명이 연행됐다.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9월 2일 울산시와 현중자본의 약속파기에 분노해 시청을 점거하고 항의시위를 벌였으며, 럭키 울산공장 노동자들이 재파업에 돌입하기도 했지만 이런 투쟁기운은 부분적일 뿐 전체적인 하강세에 밀려 예전처럼 파급력을 가질 수 없었다. 4일 정권은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을 투입했고, 회사는 무기한 휴업조치를 내렸다. 정권과 자본가들 그리고 이에 편승한 어용노조들의 파업 진화작업이 눈부시게 이루어졌다. 정권은 공권력을 마구 휘둘러대며 노동자투사들을 짓밟았다. 자본가들은 구사대를 동원해 정권과 보조를 맞추는 한편, 온갖 회유와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어용노조를 부추기고 투쟁의 주역들을 해고·전출시켰으며, 감시망을 튼튼히 짜 다음 투쟁을 대비했다. 안절부절 못하던 어용노조들은 두드러진 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권·자본가·어용노조가 맹렬하게 쏟아 붓는 합동 융단폭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투쟁이 급격하게 식어갔다. 9월 1일 하루 쟁의발생건수 233건을 정점으로 하루하루 쟁의발생건수가 줄어들었다. 9월 20일을 전후해서는 불과 몇몇 공장에서, 그것도 아주 소극적인 방식으로 투쟁이 벌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의의 첫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한국전쟁 이후 30여 년 동안 숨죽이고 있던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다시금 역사의 전면으로 일거에 떠오르는 극적인 전환점이었다. 노동자계급은 1987년 대투쟁을 통해 세상의 주인이 노동자임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일손을 놓자 공장이 멈추고 세상이 마비됐다. 노동자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단 한 대의 차도, 단 한 대의 배도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자본가들이나 정부 관료들이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갈 수 있지만 노동자들이 없으면 세상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렇게 1987년 대투쟁은 ‘역사의 주인은 노동자’란 책의 문구를 살아있는 현실로 만들어냈다. 1987년 대투쟁을 통해 노동자계급은 역사의 무대에 당당히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됐다. 1987년 대투쟁은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반영했고, 또한 그것을 한층 강화시켰다. 노동자들은 1980년 광주항쟁 이후 1987년까지 여러 투쟁을 통해 자신감을 키워왔고, 이것은 1987년 대투쟁을 가능케 한 중요한 주체적 조건이었다. 그런데 1987년 대투쟁은 다시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의식을 비약적으로 키웠다. 노동자들은 대투쟁을 통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힘을 확실히 느꼈으며, ‘투쟁하면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투쟁을 통해 승리한 경험은 노동자들을 한없이 고무시켜 1987년 이후 수년간 계급투쟁이 왕성하게 벌어지도록 만든 원동력이 됐다. 노동자들은 1987년 대투쟁 이후 공장 안에서만이 아니라 바깥에서도 작업복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는데, 이것은 노동자들이 1987년 대투쟁을 계기로 자기 계급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둘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전투적이고 폭발적인 투쟁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한국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후발주자로서 자본의 집중성과 응집력이 대단히 강했다. 이것은 1960~70년대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된 울산·창원·포항·구미 등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자본의 높은 집중성과 응집력은 노동자투쟁의 폭발력을 그만큼 증폭시켰다. 그 결과 1987년 대투쟁은 세계를 놀라게 할 만큼 노동자계급의 감추어진 ‘혁명적 잠재력’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노동자들은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법 테두리를 뛰어넘어 공장을 점거하는 과감한 파업을 전개했다. 노동자들은 생산을 멈춰야 자본가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단호하게 공장을 멈춰 세우고 점거농성을 전개했다. 이런 공장점거파업은 “공장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전면에 제기했다. 이것은 조금만 더 전진하면 “이 사회의 주인이 누구여야 하는가?”로 상승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파업대오를 견결하게 유지하고 구사대·용역깡패나 폭력경찰의 침탈을 막기 위해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선봉대·규찰대·정당방위대를 조직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본가권력의 폭력에 맞서 싸우고 결국 노동자 자신의 권력을 건설할 풍부한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맹아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투쟁에서 이기기 위해 강력한 전술을 구사했다. 대기업의 제조업 노동자들은 거리낌 없이 중장비를 앞세우고 거리로 진출했는데, 조직된 부대의 투쟁대열이라는 점에서 노동자투쟁이 얼마나 위력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지 중요한 단서를 보여주었다. 또한 이러한 거리시위 등의 전술구사가 지도부와 대중이 함께 호흡하면서 창의적이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그리고 울산 등 여러 곳에서 노동자들은 시청 등 관공서를 타격하고 점거하기도 했으며, 철도와 고속도로를 점거하기도 했다. 셋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오랜 기간 노동자들의 투쟁을 가로막아온 노조관료제를 과감하게 무너뜨리고 대신 민주노조를 대규모로 건설해 냈다. 1987년 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은 투쟁이 일어난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그동안 자본과 정권의 지원을 받아 존재해온 한국노총이라는 어용 관료기구를 과감히 거부하고 새로운 노동조합들을 수립했다. 바로 민주노조였다. 민주노조는 총회민주주의로 표현되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전통을 기반으로 했다. 현장의 전체 노동자들을 하나로 단결시켰고, 이런 단결을 통해 형성된 노동자의 힘을 과감한 투쟁으로 남김없이 쏟아 부었다. 노동조합의 모든 활동이 철저하게 조합원대중의 참가와 결정에 의지해서 진행됐다. 1987년 대투쟁 이전에 민주노조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던 1970년대 민주노조들은 1981~82년 전두환 신군부에게 각개격파당해 사라졌다. 1984~85년에 세워진 소수 민주노조들도 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아 1986년이면 거의 작동불능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조는 사실상 존재하지 못했지만, 민주노조라는 개념은 노동자대중 속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정권의 탄압 때문에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어떤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잡을 수만 있다면 ‘공돌이·공순이’로 멸시받는 노동자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줄 무엇으로 민주노조를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해 가고 있었다. 1979년 YH 농성과 1985년 구로동맹파업 같은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수백수천의 노동자가 저렇게 얻어터지면서도 미친 듯이 달려드는 데는 분명 뭔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능적으로 느껴가고 있었다. 그래서 1987년 대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공장을 멈춘 뒤 가장 먼저 총회를 열어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1987년 대투쟁의 주요 요구 가운데 하나는 노동자 단결투쟁의 조직적 구심인 ‘민주노조의 건설·사수’였다. 물론 노동자들이 세운 노동조합이 다 민주노조가 되지는 못했다. 1987년에 1천 5백 개, 1989년까지 5천 개의 노동조합이 새로 건설되었지만, 그 가운데 민주노조로 자리 잡은 것은 대략 1천 개 정도였다. ‘민주노조’는 빠르게 대중적인 용어가 됐다. 민주노조는 기본적으로 어용 한국노총과 달리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노조를 뜻했다. 종종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투쟁에 동참하는 노조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빼앗긴 우리 피땀을 투쟁으로 되찾아’ 노동자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줄 노조라는 의미였다. 1987년 대투쟁이 민주노조라는 조직적 성과를 남긴 것은 그 투쟁이 일회성 분출로 끝나지 않고 거대한 사회적 변화로 이어지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행함으로써 노동자를 단결시켜 내고 그래서 노동자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민주노조를, 수많은 노동자들은 목숨처럼 사랑했다. 그래서 전노협과 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민주노조운동의 시대를 열어낼 수 있었다. 1987년 대투쟁의 역사적 경험은 노동자 민주주의를 획득함으로써 노동자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주면 주는 대로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을 감당하면서도 비천한 존재로 무시당하던 ‘공돌이·공순이’들은 1987년 대투쟁 속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움켜쥠으로써 당당한 역사의 주역 ‘노동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1987년 이후 몇 년간의 계급투쟁이 보여주듯이 한국 노동자계급은 민주노조를 발판으로 삼아 경제적·정치적 이익을 위한 투쟁으로 전진해 갔다. 1987년 대투쟁을 통한 민주노조 건설은 노동자계급이 본격적으로 단결해 투쟁하기 시작했음을, 앞으로 경제투쟁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정치투쟁 수준에서도 계급적으로 단결하고 투쟁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렇게 나아갈 것임을 강력하게 예고한 것이었다. 넷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자본가정권, 자본가언론, 보수야당, 중간계급의 계급적 본질을 낱낱이 폭로했다. 1987년 대투쟁은 초기에 ‘불개입’과 ‘중립’이란 위선의 장막을 쓰고 있던 자본가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6월 항쟁으로 입지가 약해진 정권은 노동자투쟁이 불붙기 시작한 직후에는 잠시 사태를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동자투쟁이 거세게 타오르자 숨겨둔 사나운 발톱을 휘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만히 놔둘 경우 노동자투쟁의 불길이 점점 더 자본주의 체제의 존립을 뒤흔들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정권은 맹렬하게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붓고, 폭력적으로 경찰을 투입해 노동자파업을 짓밟았다. 이를 통해 정부가 ‘자본가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자본가들의 집행위원회’라는 것을 만천하에 극명하게 드러냈다. 언론의 본질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노동자투쟁이 불붙기 시작한 처음에는 언론도 ‘노동자들의 처지가 그동안 너무 열악했으며 이런 조건에서 투쟁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노동자투쟁이 예상을 넘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매우 완강하게 진행되자 자본가계급의 스피커라는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전경련으로 대표되는 자본가와 정부, 경찰이 조작해낸 기사를 사실 확인 없이 그대로 보도했다. 온갖 특집·해설·사설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투쟁을 매도하는 이데올로기 폭격을 퍼부어댐으로써 노동자투쟁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노동자들의 사기를 꺾으며, 분열을 조장하고, 고립을 획책했다. 1987년 대투쟁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하던 자유주의 보수야당의 실체도 폭로했다. 이들은 군사정권 아래서 ‘야당’으로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와 억압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자본가계급의 한 분파임을 드러냈다. 이들은 ‘과격시위 자제’ 운운하면서 여당과 협력했고, 군사정권에 맞선 노동자투쟁 국면을 서둘러 대통령선거 국면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대투쟁은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했던 국민운동본부의 상층 중간계급 지도부의 계급적 한계도 폭로했다. 그들 역시 ‘선거혁명으로 민주사회를 건설하자’고 하면서 대파업에 대해 ‘과격 자제’ 운운했다. 그들은 군사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라는 떡고물을 던지자 사실상 투쟁을 포기하고 거리 청소 등 자본주의 질서를 깨끗하게 정돈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그들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둔 채, 선거를 통한 자신들의 지위 향상만을 희망했던 것이다. 이렇게 1987년 대투쟁이 각 계급의 본질을 선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노동자계급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섯째, 노동자가 역사의 주체로 다시 등장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 싸운 투쟁이기도 했다. 1987년 대투쟁이 터졌을 때 현대중공업에는 직영공 1만 5천 명과 사내하청 4천 명이 일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에서 사내하청이 시작된 것은 1973~74년 ‘위임관리제’라는 이름 아래 직영 기능공 73%가 사내하청으로 전환 당하면서였다. 1987년, 56일간 파업을 벌인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사내하청의 직영 전환을 쟁취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 스스로가 노동자대투쟁에 ‘하도급 철폐, 하청의 직영화’를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파업지도부 ‘민주노조개편대책위’는 17개 요구조건 가운데 12번째로 ‘하도급 직영화’를 명시했다. 1987년 이후 현대중공업은 하도급업체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1989년 5월 21일부로 모두 정리하였다. 이때 하도급 노동자들 중 끝까지 퇴사를 하지 않으려고 한 노동자들은 대체로 직영으로 전환되었다. 현대중공업이 하도급을 정리하고 노동자들을 직영으로 전환시킨 가장 중요한 이유는 노동조합의 등장 때문이다. 1987년 현대중공업에 노동조합이 결성된 이후 직영노동자 뿐만 아니라 하도급업체의 노동자들도 모두 하나의 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이들은 조합비도 내면서 하도급 노동자와 직영 노동자의 노동조건의 {차별} 축소, 나아가 하도급 노동자의 직영으로의 전환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회사로서도 한편으로 하도급을 이용하는 이점이 감소하고 다른 한편 당시 조선산업이 심한 불황에 허덕여 인원을 감축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신규채용을 중지하면서 하도급업체를 모두 정리한 것이다. 현재 전체 생산직 노동자 중 약 30~40%가 하도급 출신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중공업에서는 노동운동의 발전이 노동자에 대한 분할지배 제도를 폐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14] 현대종합목재에서는 직영공 60%, 사내하청(8개 업체) 40%가 일하고 있었다. 직영공과 사내하청이 하나의 노조를 건설했고, 초대 위원장으로 사내하청 노동자가 선출됐다. 현대종합목재에서도 사내하청이 직영으로 전환됐다. 현대종합목재에서는 1987년 당시 8개의 하도급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하도급업체는 현대중공업의 하도급업체와 성격이 거의 같은 것으로 현대종합목재에서 설립한 것이었다. 하도급을 운영한 이유는 노무비를 절감하고 인원정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하도급업체에 고용된 노동자의 전체 수는 현대종합목재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의 약 2/3 정도였다. 그런데 1987년 이후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하도급업체의 노동자들이 모두 본사 노동자들과 함께 하나의 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회사에서는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조이고 하도급업체 노동자는 별도의 법인체에 소속해 있으므로 하나의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노사 간의 의견이 대립되자 노동조합은 노동부에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노동부의 답변은 직영노동자와 하도급업체의 노동자가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노동을 하므로 하나의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제1대 노동조합 위원장이 하도급업체에 고용된 노동자 중에서 선출되었다. 하도급업체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직영으로의 전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회사에서는 더 이상 하도급을 이용하는 이점이 없어지리라고 생각하고 점차 하도급업체를 정리하여 1990년 미주가구의 통합을 마지막으로 하도급업체는 모두 없어졌다. 현재는 식당과 청소를 하청회사에 용역을 주고 있는데 하청 소속으로 일하는 노동자의 수는 23명이다. 그리고 임시 및 일용노동자는 거의 고용하지 않아 1991년 6월 현재 일용공만이 2명 있다. 이처럼 현대종합목재는 현대중공업과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의 발전이 회사에 의한 노동력의 분할지배제도를 철폐시켜 노동자의 기업 내의 동질화를 촉진시킨 사례라고 볼 수 있다.[15] ◎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한계 첫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격렬한 전투성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대중의 낮은 계급의식과 노동자정치의 공백이라는 점에서 결정적 한계를 드러냈다. 1987년 대투쟁은 평범한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일으킨 동시다발적인 파업 투쟁을 특징으로 했다. 그런데 이것은 자본가들을 섬뜩한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거대한 파괴력의 원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투쟁이 더 발전하지 못하게 만든 본원적 한계이기도 했다. 이것은 한국의 역사에서 비롯된 약점이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자본의 급속한 축적에는 군대 같은 작업장에서 가혹한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고통이 수반됐다. 이렇게 누적된 노동자들의 고통은 파업의 폭발성과 전투성을 높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각종 혁명 운동과 좌파 운동이 사실상 전멸한 상태였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주체적인 계급의식은 매우 낮았다. 거대한 파업물결 한복판에서 노동자대중을 이끌 능력을 갖춘 노동자정치세력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그룹들은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며 이제 막 태동하고 있던 상황이라, 이 거대한 파업물결을 상대하기에는 사상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아직 그 역량이 너무 미약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의식적·조직적·정치적 측면에서 뚜렷한 한계를 안고 있었고, 그 때문에 더욱 거센 기세로 뻗어나가지 못한 채 전두환 정권과 자본의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공세와 폭력적 탄압에 밀려 수그러들게 됐다. 1987년 대파업 당시 투쟁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전반적으로 임금인상, 민주노조 건설 등 경제적 이익을 위한 투쟁, 즉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 채 임금노예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만 아직 머물러 있었다. 이런 자생적 경제투쟁을 목적의식적 정치투쟁으로 이끌 수 있는 준비된 전략적 지도부도 없었다. 그 결과 1987년 대파업은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날카롭게 각성시키고 반격을 끌어내는 데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패배하고 절실했던 정치투쟁을 성공적으로 전개할 수 없게 되자 경제투쟁조차도 더 이상 제대로 밀고나갈 수 없었다. 둘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언론과 정권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정면으로 맞받아치지 못했다. 자본가계급은 물리적 탄압을 본격화하기 전에 먼저 이데올로기 공세에 주력했다. 원기왕성하게 전진하던 파업물결은 이데올로기 집중포화를 맞자 기세가 꺾여갔다. 자본가계급은 ‘국민경제 파탄’을 위협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민이란 크게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 쪼개져 있고,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을 착취하며 경제와 사회의 주인으로 군림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민경제란 실제로는 자본가들만을 위한 경제, 한마디로 자본가들의 이윤체제일 뿐이다.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고속 성장했지만, 그 성장의 결실은 모두 자본가들에게 돌아갔고, 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 산재의 고통만 쌓여갔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 자본가들이 강탈해간 노동자의 몫을 되찾기 위한 정당한 투쟁이었다. 파탄에 직면한 것은 자본가들의 경제일 뿐이었다.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불법폭력, 과격난동’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이란 경제적 강자인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표현할 뿐이다. 특히 한국 자본주의를 국가 주도로 고속 성장시키는 것이 자신의 과제였던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더욱 그랬다. 자본가들의 법은 아주 초보적인 노동권조차도 철통같이 봉쇄하면서 노동자들의 손발과 입을 꽁꽁 묶어두고 있었다. 따라서 법에 충실하겠다는 것은 곧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에 충실하겠다는 것, 다시 말해 저항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노예로 살겠다는 것을 뜻했다. 노동자계급이 단호한 투쟁으로 자본가법의 족쇄를 깨뜨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혹사시킬 때, 자본가정권이 선봉에 선 노동자투사들을 수배하고 잡아 가두며 고문할 때, 파업현장에 폭력경찰을 투입할 때, 노동자들이 자기방어를 위해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도 정의로운 정당방위 행위였다. 또한 노동자들의 폭력은 본질적으로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것이었다. 노동자투쟁을 파괴하기 위해 구사대의 각목과 쇠파이프,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이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올 때, 결코 물러서지 않고 굳세게 단결해 투쟁한 것, 포크레인과 지게차를 이끌고 노동자들의 거대한 힘을 과시한 것은 ‘낡아서 사라져야 할 것에 대한 단호한 저항’이자 ‘새로운 노동자들의 질서를 세우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자본가계급은 ‘외부 불순세력’과 ‘제3자 개입’을 운운하며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고, 피억압 민중들로부터 고립시키려 했다. 하지만 노동자는 하나이기에 내부 따로 외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끼리 제3자가 될 수도 없다. 자본가들이 분열시키려 하면 할수록 노동자계급은 더욱 굳게 하나로 결합해야 했다. 특히 자본가계급이 떠들어대는 ‘외부 불순세력’이란 사실은 가장 선봉에서 싸우다 해고된 노동자들이거나 헌신적으로 현장투쟁을 지원하는 노동단체들이었다. 또한 노동자계급은 피억압 민중들을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 동참시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그 투쟁의 선두에 설 때에만 완전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가계급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맹렬하게 전개하는 것이 노동자계급이 해야 할 일이었다. 셋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계급적 정치투쟁으로 과감하게 나아가지 못했다. 정권은 6월 항쟁으로 위축돼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7, 8월 노동자대투쟁이 폭발적으로 전개되는 동안 일정 시점까지는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정권은 노사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다. 물론 정권은 노동자투쟁을 거꾸러뜨릴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이석규 열사 장례투쟁을 계기로 정권은 자신의 야수적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자본가언론을 통한 이데올로기 공격을 대폭 강화했으며, 파업현장에 전투경찰을 무자비하게 투입했고, 노동자투사들을 대거 연행하고 구속했다. 이제 노동자계급은 자본가정권과 전면전을 벌이느냐 아니면 꺾이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정권이 전면에 나서기 전까지는 개별 자본에 맞선 개별 사업장 차원의 경제투쟁에서 거의 매번 승리했다. 이것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총노동에게 유리한 정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 총자본으로서 정권이 전면에 나서 탄압을 시작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하나로 굳게 결집해 이에 대항해야 했다. 하지만 노동자운동은 아직 계급적으로 단결해 ‘계급 대 계급’의 전면 대결로 나아갈 만한 의식적·조직적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자본가정권은 이데올로기 투쟁에서만이 아니라 정치투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노동자운동을 강하게 찍어 눌러서 제압해버렸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위협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굳센 각오로 단결해 일어선 총자본 앞에서 단순히 같은 시기에 비슷한 요구를 내걸고 싸웠을 뿐 사실상 개별적으로 주로 개별 자본가들에 맞서 싸웠던 파업물결은 점차 격파될 수밖에 없었다. 넷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단사주의 경향이 연대투쟁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한 족쇄로 나타났다. 1987년 대투쟁의 한계는 특히 조합주의의 한 변종인 ‘단위사업장주의’(단사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단사주의는 ‘제3자 개입’, ‘불순좌경세력의 개입’ 같은 정권과 언론의 선전공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른 공장 노동자들과의 연대투쟁이나 지역 노동단체의 지원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석규 열사 추모투쟁은 계급적 연대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도, 당시 파업 중이던 사업장에서조차 파업농성 과정에서 이석규 열사 추모 프로그램을 진행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파업물결 속에서 만들어진 민주노조들은 울산의 현대계열사 노조들을 빼면 1987년 대투쟁 동안에는 조직적 결집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파업에 참여한 평범한 노동자들의 의식 수준이 초보적인 권리의식과 연대의식을 넘어서지 못하여 ‘외부세력의 개입’, 즉 노동자들이 사업장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계급적으로 단결하고 투쟁하는 것을 불온시하는 정권과 자본의 논리를 과감하게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단사주의는 자본가정권이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강제한 것이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1980년 노동법을 개악하면서 기업별 노조만을 허용해 노동자들이 기업의 장벽을 뛰어넘어 계급적으로 단결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1985년 정권의 탄압에 맞선 구로동맹파업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1987년 대투쟁 당시에도 이데올로기 공세를 통해 노동자들을 기업의 울타리 안에 가둬두려 했다. 1987년 대투쟁 이후 단사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맹렬하게 전개됐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이 추구했던 방향이 훨씬 거대한 규모로 추진된 것이다. 지역 차원의 치열한 연대투쟁을 바탕으로 지역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들이 건설되고, 나아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건설됐다. 반면 이런 단사주의의 한계를 더 강화하고 고착화하기 위한 자본과 정권의 노력도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선봉에 서서 싸웠던 지도자들을 구속·해고하듯이 선봉 사업장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선봉에 서면 피 본다”, “우리 조합원들의 실리나 챙기자”는 단사주의 의식을 노동자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려고 혈안이 됐다. 다음 편 보기 [1]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2권 1989년 -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논장, 210~212쪽. [2] 파시즘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민주적 기본권(사상·양심·표현·신체·결사·집회·시위 등의 정치적 자유권과 사회적 생존권)과 형식(선거·다당제·삼권분립·자유언론 등)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지배세력의 입장과 이해관계만을 사회 전체에 폭력적으로 관철한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볼 때, 파시즘은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쟁취해 온 조직(노동조합·노동자정당)과 권리(노조결성권·파업권·생존권) 등 노동자운동의 모든 성과를 파괴하여 노동자계급을 원자화된 무기력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뜻한다. 군사정권(군부독재)이 파시즘의 한 형태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정과 노동자운동에 대한 전면적 억압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군사정권을 파시즘의 한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고전적인 파시즘은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혁명 근처까지 다다른 상황에서 이를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하며 몰락하는 소부르주아 대중의 야수적 능동성을 전면적으로 동원해 낸다는 특징이 있다. 즉 단지 폭력을 통한 강제만이 아니라 광기에 찬 대중의 동의를 통해 파시즘을 성립시키고 유지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군사정권은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미약한 상황에서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하며 군홧발의 폭력에 주로 의지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군사정권을 파시즘의 한 형태로 간주하기 어렵다. ‘군사파시즘’은 군사정권이 고전적인 파시즘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음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3] 레드 콤플렉스는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과장되고 왜곡된 공포심과 거부감을 말하며, 또한 그를 근거로 무자비한 인권 탄압을 정당화하거나 용인하는 사회적 심리를 말한다. [4] 김영수, 1999, 『한국 노동자 계급정치운동』, 현장에서미래를, 207쪽. [5]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48~53쪽. [6]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53~54쪽. [7] 정병모, 2005, 「조선소 노동자 정병모의 노동운동 야사」. [8]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63~71쪽. [9]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71쪽. [10] 박창수는 1990년에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이 됐다가 다음 해 옥중에서 안기부의 전노협 탈퇴 공작에 시달리던 중 의문사했다. [11] 김진숙, 2007, 『소금꽃나무』, 44~48쪽. [12]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46~48쪽. [13]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94~103쪽. [14] 정이환, 1992, 「제조업 내부노동시장의 변화와 노사관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11~112쪽. [15] 정이환, 1992, 「제조업 내부노동시장의 변화와 노사관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13~114쪽.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