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 개혁은 스페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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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성평등 개혁은 스페인처럼?

  • 오연홍
  • 등록 2023.01.20 17:05
  • 조회수 373

지난 한 해 동안 스페인에서 추진되고 있는 성평등 개혁 뉴스가 종종 전해졌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성 및 생식 건강과 자발적 임신 중지에 관한 법률: 정부 개정안이 20225월 스페인 국무회의에서 승인됐다. 16~17세 여성과 장애가 있는 여성이 법적 보호자의 동의 없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지할 수 있는 권리, 거주지에서 가장 가까운 공공병원에서 시술 지원, 숙려 기간 조항 삭제, 사후 피임약 무료 공급 등 광범한 내용이 포함됐다.

 

성전환자 성별 정정 간소화 법안: 16세 이상이면 의학적 소견이 없어도 성별을 바꿀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으로, 1222일 하원을 통과했다. 이 법안이 상원까지 통과하면 성 소수자 정체성을 질병으로 간주하는 전환 치료가 금지되고, 성 소수자를 겨냥한 공격도 처벌 가능하다고 한다.

 

생리휴가 법제화: 한국은 근로기준법에 따라 월 1회 무급 보건휴가가 가능한데, 스페인에서는 월 최대 3(애초 제안은 5)의 유급휴가로 추진하고 있다. 1215일 하원을 통과했다.

 

페미니스트 내각: 2020년 초 사회노동당과 포데모스가 함께 구성한 연립정부 내각에서 22명의 장관 중 11명이 여성이다. 2018년 사회노동당 정부의 내각은 17명 중 11명이 여성이었다. 평등부 장관은 스페인의 모든 새로운 법안과 정부 지출안은 페미니즘적이어야 한다고 선포했다.

 

개혁세력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구조적 성차별이라는 현실 자체를 부정하는 윤석열 정부의 행태와 비교해 보면 천지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역사가 오래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고, 포데모스는 2011년 경제위기와 긴축정책에 항의하며 광장점거 운동이 분출한 이후 2014년에 결성된 느슨한 범좌파 경향의 개량정당이다. 이들이 연립정부를 구성해 추진하는 성평등 조치를 보면서 한편에서는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역시 이런 개혁 세력에 힘을 실어줘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성급하게 그런 결론을 내리기 전에 살펴봐야 할 점들이 있다. 개혁적인 것처럼 보이는 스페인 정부의 조치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우선 페드로 산체스 총리 스스로 솔직하게 고백한 비밀이 있다. 201866일자 <가디언 The Guardian> 보도에 따르면, 산체스 총리는 성평등 문제에 관한 한 스페인의 역사는 2018년 여성 파업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며, “새 정부는 그 운동을 충실하게 반영한다고 말했다.

 

 

2018년 여성파업.jpg

2018년 스페인 여성 파업의 한 장면

 

 

스페인 여성 파업에서 노조들은 3.8 여성의 날에 2시간 파업, 24시간 파업, 대규모 집회와 행진 등의 방식으로 투쟁을 조직했고, 그 결과는 2018년과 2019년에 각각 530만 명과 600만 명의 참가자 규모를 기록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 당시 최대 인원이 230만 명이었다고 한다). 학교, 병원, 버스, 철도, 공항, 공장, 언론사, 콜센터 등 다양한 산업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성별 임금 격차를 비롯한 직장에서의 성차별, 가정과 거리에서의 성폭력을 규탄한 이 파업은 우리가 멈추면 세계가 멈춘다는 대표 구호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증명해 보였다. 정부 입장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이 거대한 대중적 열망에 응답하는 모양새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게다가 집권 사회노동당의 처지가 곤란했다. 대중을 들썩거리게 만든 근본적인 경제위기가 해소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기존의 우익정당들에 더해 복스(VOX) 같은 신생 극우 정당이 포데모스를 제치고 제3당으로 떠오를 만큼 빠르게 성장하는 추세를 보였다. 반면 사회노동당은 포데모스와 손을 잡아야 가까스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취약한 상태였다. 요컨대 개혁적인 성향의 조치를 대거 풀어놓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 기반을 보충하려는 것이다.

 

기만과 그 결과

 

그래도 어쨌든 이와 같은 성평등 개혁 조치는 환영할 만한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저런 조치 자체가 끈질기게 이어진 대중 투쟁의 성과인 만큼 이 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현 정부를 절대 신뢰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사회노동당과 포데모스 연립정부를 신뢰할 수 없는 것은, ‘페미니스트 정부를 자처하면서도 정작 여성들의 투쟁이 다시 터져 나오는 것을 결단코 억누르려는 그들의 기만적인 태도 때문이다.

 

20213.8 여성의 날을 앞두고 정부는 모든 집회와 시위를 금지했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다음 날 진보 성향의 스페인 매체 <엘파이스 EL PAÍS>에는 현 정부의 기만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실렸다. “[수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시장과 다수의 관중이 몰린 축구 경기장, 지하철 인파는 내버려 둔 채 오직 여성 집회만 통제했다는 얘기다. ‘노동 존중 정부를 자처했던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를 핑계로 핀셋 방역운운하며 노동자 투쟁만 핀셋처럼 콕 집어 억압했던 것을 빼닮았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긴축정책을 밀어붙이며 여성과 청년,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가했던, 그래서 2011분노한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광장점거 운동이 터져 나오게 만든 바로 그 세력이라는 점이다.

 

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정치는 다른 세상을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관리하는 또 하나의 절충적 방식을 지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절충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자본주의가 극심한 위기에 직면하면 결국 자본가들의 이윤 보호를 1순위에 놓고 노동자, 민중에게 손실을 전가하게 된다. 지금 사회노동당 정부가 보이는 개혁적인 겉모습은 2018년과 2019년 스페인을 뒤흔든 대규모 여성 파업의 위력에 압박을 느낀 결과일 뿐이다.

 

 

스페인 페미니스트 내각.jpg

여성 장관의 숫자가 늘어나면 자본주의 국가권력의 성격이 달라질까?

 

 

이런 성격의 정권이 어떤 말로를 걷게 되는가는 그리스에서 시리자가 먼저 보여줬다. 절망적인 경제위기와 폭발적인 총파업 운동의 분출에 뒤이어 긴축정책 폐기를 내걸고 2015년에 집권한 시리자는 그 이름(‘급진좌파연합이라는 뜻)과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지 못하는 어중간한 정치 전망에 머물렀고, 대중 투쟁의 압력이 가라앉은 상황에서 스스로 긴축정책을 집행하는 자본주의 위기관리 대리인으로 우경화하더니 결국 2019년 기존 지배 세력인 신민주당에 도로 정권을 내줬다.

 

이런 결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중 투쟁의 압력을 끌어올리는 것, 즉 계급투쟁을 조직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정부를 자처하면서 여성 집회를 봉쇄하는 스페인 사회노동당에 이를 기대할 순 없다. 광장점거 운동의 기세를 이어받아 탄생한 포데모스는 조금 다를까? 애초에 포데모스는 사회노동당 같은 특권 집단과는 손을 잡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극우를 저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안정적인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라며 대중 투쟁의 힘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정도로 우경화했다. 그들의 시야가 선거 정치에 완전히 함몰됐기 때문이다.

 

기만과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야

 

그렇다면 2018~2019년 여성 파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페미니즘 운동은 어떤 상황일까? 당시 여성 파업을 조직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스페인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호세피나 마르티네스는 이렇게 증언한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운동과 페미니즘 운동 같은 최근의 가장 중요한 사회 운동은 우익에 맞서 차악을 지지하자는 생각 때문에 활력을 잃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민주당을 지지하거나 스페인에서 사회노동당과 포데모스의 연립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대거 옮겨갔다.”

 

이 대목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스페인의 거대한 여성 파업 운동이 사그라든 데에는 코로나 사태가 조성한 압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투쟁이 활력을 잃은 본질적인 원인은 지금은 사회노동당과 포데모스 연립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타협적인 전망에서 찾아야 한다. 여전히 다수 여성이 더 높은 실업률과 임금 차별, 가사노동의 부담과 여성 살해의 위협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더 큰 투쟁을 조직해야 할 이유가 넘쳐나는데도 페미니즘 운동의 주류가 그런 타협적인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고, 일부는 정부와 직접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대중 투쟁의 고삐를 놓아버리는 방식은 결국 극우세력이 더 기세등등하게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준다.

 

 

스페인은 위력적인 여성 파업을 일으킴으로써 여성 억압, 성차별에 맞선 투쟁이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 보여준 중요한 사례다. 또한 그런 투쟁이 활력을 잃지 않으려면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도 보여준다. 지금 한국에서 여성운동의 주류가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시도에 맞서면서 민주당을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면 이 점은 특히 중요하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혁명적 페미니즘의 힘은, 개혁 간판을 걸고 노동자 민중을 농락하는 민주당 같은 자들과의 제휴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물결 속에서만 살아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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