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운동 법칙을 집중 탐구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생산양식이 어떻게 발생해 소멸해 가게 되는지, 그리고 이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경제적 생산양식이 무엇인지를 다룬 것이 바로 마르크스 경제학설의 내용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과학적인 대답이다.
(1852년 《펀치》지에 실린 만화 '콜레라 왕을 위한 법정'은 런던 내 도시노동자계급의 비참한 환경을 묘사하고 있다. - 편집자 주)
3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1. 생산력: 인류 역사 발전의 원동력
출발점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고통스럽고 불안정한 삶에 내몰려 있다. 이것은 결혼과 출산마저 기피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의 뿌리는 무엇일까? 바로 먹고사는 문제, 즉 안정적이고 충분한 생활임금을 주는 일자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다. 이는 경제 문제다. 마르크스 사상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마르크스의 사회 분석에서 출발점은 ‘생산’이다. 인간과 사회의 변하지 않는 제1의 필요는 다름 아니라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먹고사는 것을 만드는 것을 우리는 생산이라 부른다. 생산 방식은 늘 변해 왔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인간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생산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생산된 것을 어떻게 분배하느냐도 중요하다. 하지만 분배는 무언가 생산이 이뤄진 뒤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는다면, 분배 자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회가 변화 발전하는 방향은 우선 생산에 맞춰진다. 분배가 어떻게 이뤄지든,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사회가 생산하는 양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의 크기는 결국 ‘생산능력(생산력)’에 좌우된다. 인류의 역사적 발전 법칙은 바로 이 생산력을 가능한 한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산력은 진공 상태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생산은 생산 과정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맺는 사회적, 집단적 관계 속에서 이뤄진다. 이런 관계에는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관계, 생산물 사이의 교환관계, 생산물에 대한 분배관계 등이 있는데, 마르크스는 이것들을 종합해 ‘생산관계’라고 불렀다. 생산관계라는 형식 속에서 생산(능)력이 살아 숨 쉬는데, 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이 바로 ‘생산양식’이다.
그런데 생산력은 고정돼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 발전한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산력의 변화 발전이 일정한 수준, 단계에 도달하면, 이 생산력은 기존의 생산관계와 충돌한다. 내용(생산력)의 변화 발전은 기존의 고정된 형식(생산관계)과 충돌한다. 이것은 빠르게 성장하는 아이의 몸(생산력)과 그 아이가 입고 있는 옷(생산관계)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아이가 성장(변화 발전)하면, 그동안 아이의 몸에 딱 맞았던 옷이 아이의 몸을 조이기 시작한다. 결국 아이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작은 헌 옷을 버리고 큰 새 옷으로 바꿔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옷 때문에 아이는 고통받게 되며, 언젠가 아이의 몸은 헌 옷을 찢게 될 것이다. 물론 후자의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현명한 부모라면 그런 상황이 닥치기 전에 아이의 성장 속도에 맞게 더 큰 새 옷을 입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발전 과정, 즉 생산력의 발전 과정은 그것과는 달리 대단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생산력의 성장 단계에 발맞춰 기존의 생산관계를 새로운 생산관계로 대체하는 것을 결연하게 막아야 하는 반동 세력 즉, 인류의 사회적 발전을 가로막아야 하는 반동 세력 때문이다. 바로 기존의 생산관계 속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겨 왔던 낡은 지배 계급이다. 낡은 반동 지배 계급은 새로운 생산관계가 사회에 자리 잡아 인류의 생산(능)력이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돋움하는 것에 저항한다. 개인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 저항을 분쇄해 새로운 생산관계를 창조함으로써 인류의 진보에 길을 터 주고 촉진하는 것, 바로 이것이 ‘사회 혁명’이다. 인류 사회는 생산력의 성장에 족쇄를 채우는 낡은 생산관계를 버리고, 생산력 발전에 조응하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채택하는 방향으로 전진해 왔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규정한, 인류 사회의 혁명적 변화 발전의 뿌리였다.
생산력
옷, 쌀, 자동차, 배, TV, 컴퓨터, 휴대폰, 약, 학교 등 의식주를 비롯한 생존 수단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조건을 갖춰야 한다.
Ι. 토지, 원료, 기계, 도구, 작업장 ─ 즉 생산수단이라고 부르는 것.
ΙΙ. 노동력 ─ 생산수단에 자신의 힘과 기술을 사용해 유용한 것을 생산하는 노동자.
생산수단과 노동력은 생산력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두 요소다. 이 두 조건이 결합해야 비로소 생산이 이뤄진다. 생산수단만으로는 생산할 수 없다. 자동차 공장을 예로 들면, 아무리 우수한 작업 도구와 잘 정비된 조립 라인이 있더라도 노동자가 조립 노동에 나서지 않으면 즉, 노동(능)력이 결합되지 않으면 자동차를 만들 수가 없다. 이것은 노동자가 일을 멈추는 파업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노동력이 준비돼 있더라도, 작업장과 기계, 도구 같은 생산수단과 결합하지 못하면 자동차를 만들 수 없다. 이것은 해고돼 생산수단으로부터 강제로 격리된 노동자들이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것에서 드러난다.
가장 단순하게 접근하면, 생산이란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하는 것, 그래서 유용한 가치를 가진 생산물이 만들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모든 사회에 공통된다. 각각의 사회를 구분하는 것은 우선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질적 차이다. 돌도끼나 낫 같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사회와 거대한 컨베이어나 자동 선반 같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사회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된다. 원시인의 노동력과 잘 숙련돼 있고 여러 고급 기술과 기계를 사용하는 현대 노동자의 노동력 사이에는 거대한 질적 차이가 있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해 구성되는 생산(능)력의 질적 차이로부터 각각의 사회는 질적으로 구별된다. 더 진보한 사회과 덜 발전한 사회를 나누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산력의 질적 차이다. 크게 볼 때 인류 사회는 원시 공산제 생산양식, 노예제 생산양식, 봉건제 생산양식,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질적으로 이행해 왔다.
2. 소유관계와 분배관계
다음으로 각각의 사회를 구별하는 것은 생산관계의 상이성이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하는 것은 특정한 생산관계 아래에서 이뤄진다. 소유관계, 교환관계, 분배관계를 포괄하는 이 생산관계에서 일차적 규정력을 발휘하는 것이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관계’다.
가령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력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한편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유산자 계급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단지 노동(능)력만 갖고 있는 무산자 계급이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 아래에서는 생산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까?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자 계급인 자본가 계급은 다른 사람들을 임금노동자로 고용해서 자신을 위해 일을 시킬 권리를 얻는다. 반대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무산자들인 노동자 계급은 노동력 제공을 조건으로 해서만 비로소 생산수단과 결합할 기회 즉, 취업의 기회를 얻는다.
이렇게 생산수단은 자본가 계급이 소유하고, 노동력은 노동자 계급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해 생산이 이뤄지는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 경제 체제다. 이것은 생산 과정에 자신을 각인한다. 자본주의 소유관계에서 이뤄지는 생산 과정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가 가진 것은 단지 몸뚱이(즉 노동력만 가진 무산자)인 노동자를 마음대로 부려 먹고 착취하는 과정이 된다. 그 결과 생산 과정(노동 과정)은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해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자본가가 노동자를 쥐어짜서 잉여가치(이윤)를 창출하는 잔인한 착취의 과정이게 된다. 개별 소농민이 자기 소유의 밭에서 스스로 일하는 과정은 단순히 일(생산)하는 과정일 뿐이지만, 노동자가 자본가 소유의 작업장에서 일하는 과정은 생산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착취하는 과정이자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착취당하는 과정이다.
교환 과정과 분배관계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을 통과해 만들어진 생산물은 이제 자본주의적 교환 과정 및 분배 과정으로 들어간다. 자본주의 (상품)교환관계에서는 평등한 등가교환의 원리가 작동한다. 동일한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은 동등한 화폐가격으로 서로 교환된다. 시장에서 200만 원에 팔리는 200만 원짜리 오디오 1대를 가정해 보자. 200만 원을 손에 쥔 사장은 이걸로 200만 원 어치 부품, 재료를 다른 사장들로부터 구입할 수 있을 뿐이다. 때로는 더 싸게 구입할 수 있고, 때로는 더 비싸게 구입할 수도 있겠지만, 긴 기간 평균 가격을 따져 본다면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분배관계는 어떨까? 시장에서 판매된 생산물(상품)은 자본가 계급 수중에 화폐로 돌아간다. 이 화폐는 어떻게 분배되는가? 일부는 부품이나 원료, 설비, 도구 등을 다시 구입하는 데 들어간다. 그 뒤 남은 돈으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분배가 일어난다. 자본가는 노동력 공급자인 노동자와 계약을 맺은 돈을 임금으로 지급한다. 이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가 자본가의 이윤이 된다. 이렇게 노동력에 해당하는 가치(임금)와 이걸 제외하고 남은 자본가의 이익(이윤)이 자본주의 분배관계의 핵심이다. 노동자는 노동력의 가치를 임금으로 분배받고,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 낸 전체 노동의 가치 중 이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 가치를 이윤으로 챙긴다.
이런 분배관계의 결과는 무엇일까? 임금은 노동자 가족이 한 달 벌어 먹고사는 데 급급한 낮은 수준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약간 남은 돈은 질병이나 노후, 아이들 학비를 대비해서 모아 두어야 한다. 결국 노동자들은 임금노예의 지위를 넘어설 수 없다. 작업장, 기계 등 생산수단을 구입해 유산자가 되는 길은 봉쇄돼 있다. 한 달에 100만 원도 저축하기 힘든 노동자들이 어찌 수백억, 수천억, 수조 원의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될 수 있겠는가? 반면 기존의 거대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에 더해, 자본가들은 새롭게 확보한 이윤으로 추가 투자를 함으로써 갈수록 더 거대한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눈덩이처럼 커진, 거대한 생산수단을 노동자들이 소유할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닫힌다. 그래서 자본주의 소유관계는 더욱 확고해진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더욱 완전하게 자본주의 착취관계에 빨려들어 간다. 이것은 분배에서의 불평등을 더욱 가속화한다. 이렇게 소유관계 → 분배관계 → 소유관계 → 분배관계로 이어지는 확대 순환의 고리 속에서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더욱 탄탄해진다.
3. 잉여가치의 본질
잉여가치(이윤)는 어디서 발생할까? 어느 지점에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일어나고, 그 결과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창출하게 될까? 교환 과정은 아니다. 여기서는 하나의 상품이 동일한 교환가치를 가진 다른 상품과 화폐를 매개로 교환될 뿐이다.
그렇다면 분배 과정일까? 그렇지 않다. 정상적인 경우 분배는 계약에 의해 정당하게 이뤄진다.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맺은 임금계약에 따라서 임금을 분배받는다. 이 임금계약서는 계약한 임금을 정상 지급한다면, 나머지 이익금을 사장이 가져가는 것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임금계약은 내용적으로는 부당한 것이다. 동등한 두 주체가 맺는 계약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맺은 불평등한 계약이기 때문이다. 입사하는 노동자는 사장에게 ‘내가 일해서 창출한 가치만큼 전액을 임금으로 지급하라.’고 요구하지 못한다. 그러면 사장은 단번에 입사계약을 거부할 것이다. 계약은 전혀 다르게 진행된다. 몸뚱이, 즉 노동(능)력만을 소유하고 있는 노동자는 생산을 해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과 결합해야만 한다. 따라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사장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계약서를 내민다. “네가 노동을 통해 얼마만큼의 가치를 창출하느냐는 임금계약에서 결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네가 노동을 통해 창출한 가치 전체를 줄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면 나에게는 이익(이윤)이 남지 않는다. 나는 오직 네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수준의 임금만을 줄 것이고, 나머지는 내가 가져갈 생각이다. 이것에 동의하면 임금계약서에 사인해라. 그렇지 않으면 취업을 포기하라!”
실업자로 떠돌지 않으려면, 노동자는 이런 불평등한 계약서에 사인해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부당한 착취적 분배관계가 평등한 자유계약으로 둔갑한다. 이렇게 부당한 분배관계가 작동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생산의 두 요소 중, 생산수단을 전적으로 극소수 사장들이 독점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바로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 즉, 소유관계에 있다.
개별 노동자 수준에서 접근한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집단적 임금계약을 맺더라도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강력한 노동조합이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수행한 전체 노동의 가치를 임금으로 달라고 강제하기 어렵다. 단지 착취의 강도를 낮춰, 잉여가치를 줄이는 대신 노동자가 가져가는 임금 비율을 높일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잉여가치를 크게 줄여 버리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이유가 사라진 자본가들은 차라리 회사 문을 닫아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 체제는 그것을 구조적으로 강요한다. 잉여가치를 충분히 뽑아내지 못해서 자본 투자를 줄이는 자본가는 언젠가 경쟁에서 밀려 몰락할 것이고, 이것은 그 자본가와 계약을 맺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실업이라는 거대한 재앙을 선물한다.
이것은 모든 노동조합에 대한 근본적 압력이 된다. 그 결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개의 노동조합 투쟁은 착취 자체를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정상적인 임금이라도 강제하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것은 자본주의 철폐를 향해 단호하게 진격하지 않는 노동조합이라는 한계 내에서 그렇다. 노동자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착취를 철폐하려는 노동조합이라면, 자본주의 경쟁 압력을 뛰어넘어 전체 노동자 계급의 총단결을 추구해야 한다. 그 결론은 자본주의 소유관계를 모든 생산수단을 생산자 자신이 집단적으로 공동 소유하는 사회주의로 대체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전망이 모든 노동조합이 추구해야 할 미래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에게 임금 투쟁은 사활을 걸 만큼 중요하다. 임금 투쟁을 통해서만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정상 임금이라도 강제할 수 있으며, 다른 무엇보다도 자본주의를 철폐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 힘, 단결, 의식을 키워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지속적이고 전투적인 임금 투쟁을 통해서만, 그리고 임금 투쟁의 연장선에 있는 노동 시간 단축 투쟁, 노동 강도 완화 투쟁을 통해서만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를 향한 학습, 토론, 조직화를 이룰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 과정 ─ 노동자 착취 과정
내용적으로 볼 때 부당한 임금계약이 이뤄졌더라도, 그 자체로 잉여가치가 바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빼앗기 위해서는 먼저 빼앗을 것이 있어야 한다. 잉여가치 또한 생산 과정에서만 창조된다. 유산자와 무산자로의 분할이라는 자본주의 소유관계에서 출발한 ‘부당한 계약’은 작업장에서 이뤄지는 생산 과정에서 비로소 집행된다. 모든 가치가 창조되는 생산 과정에서 자본가들은 임금, 즉 노동력 재생산 비용에 해당하는 가치가 창출되는 노동 시간(이것을 마르크스는 ‘필요 노동 시간’이라고 불렀다)을 넘어서는 추가 노동을 하도록 노동자에게 강요한다. 이 추가 노동에 대해서 자본가들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자신이 챙긴다. 이것이 바로 이윤의 원천이다. 이처럼 노동자들이 공짜로 자본가들에게 갖다 바치는 추가 노동 시간을 마르크스는 ‘잉여노동 시간’이라 불렀다.
가령, 생산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자기 임금에 해당하는 가치를 창출하는 시간이 주 20시간이라고 하자. 그런데 취업계약서에 주 40시간이 명시돼 있다면, 나머지 주 20시간의 노동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서 노동자들은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노동하는가? 바로 자본가들을 위해서다. 이 공짜노동이 잉여가치를 낳는데, 이것이 모든 자본가 계급의 이윤의 원천이다. 자본가들 사이에서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치더라도, 이렇게 생산 과정에서 창출되는 잉여가치가 모든 자본가들이 나눠 가지는 이윤의 원천이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모든 사회에서 생산 과정은 유용한 가치가 창출되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 과정은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가 자행되는 무자비한 착취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르크스가 “모든 생산물은 그것에 투입된 사회적 평균 노동 시간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 가치의 어머니는 바로 노동이다.”라는 ‘가치 법칙’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경제학자였던 리카도가 그것을 먼저 발견했다. 하지만 리카도는 잉여가치 즉, 착취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감추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본가 계급의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잉여가치 앞에서 도망쳐 버렸다.
반면 마르크스는 리카도의 가치 법칙을 계급적 편견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를 최초로 발견했다. 이것은 노동자 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최고의 공헌이었다. 착취가 왜 발생하는지 즉, 왜 노동자들은 가난하고 자본가들은 갈수록 부자가 되는지에 대해서, 나아가서 가만히 놔두면 자본주의는 왜 필연적으로 자본가 계급의 왕국을 건설할 수밖에 없는지를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밝힌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 법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자본주의 불황기와 공황기에 노동자들은 실업과 더 낮아지는 임금에 신음한다. 반면 자본주의 호황기에 노동자들은 잠시 어느 정도 안정된 일자리와 임금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노동자들은 엄청난 잉여가치를 자본가들에게 갖다 바쳐 노동자들을 칭칭 감고 있는 임금노예의 사슬의 길이를 빠르게 늘려야 한다. 잉여가치(이윤)가 빠르게 추가 투자됨으로써 자본가들은 더 거대한 생산수단을 자신의 수중에 축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산자와 유산자 사이의 깊이 파인 골은 더욱 깊어지고, 노동자들은 헤어날 수 없는 더욱 깊은 착취의 수렁으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벗어날 길은 딱 하나다! 노동자 계급 전체에 의한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 즉, 사회주의!”
4. 약탈 경제, 그리고 증가하는 모순
기계제 대공업의 발전으로 공장이 널리 확산됐지만, 이렇게 비약적으로 발전한 사회적 생산력의 성과는 생산자(노동자)들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집단적, 사회적 노동의 성과들은 공장 플랫폼 소유자인 자본가들이 독점했다. 게다가 자본가의 수중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수많은 노동자를 해고하고, 강도 높고 위험한 노동으로 내모는 강력한 무기가 됐다.
플랫폼 자본가는 산업 사회에서 사회적, 집단적 노동의 성과를 자본가가 독점해 이윤으로 흡수했듯이, 디지털 플랫폼 공유경제의 성과 또한 독점해 새로운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이른바 정보통신 플랫폼이 확산하면서 발생하는 효과는 디지털 중앙 플랫폼을 독점하고 있는 자본가에게 주로 귀속된다. 그에 따라 MS, 구글 등의 뒤를 이어 새로운 거대 신흥 자본의 배출구로 디지털 플랫폼 산업이 부상하고 있다. 또한 공장 플랫폼이 수많은 소생산자들을 몰아내고 임금노동자로 둔갑시켰듯이, 디지털 중앙 플랫폼은 택시, 숙박업, 택배, 화물운송, 돌봄 노동 등에서 수많은 소생산자들을 사실상 자기 휘하에 종속시키고 임금노동자로 전락시키고 있다.
플랫폼 기업이 운영하는 정보 플랫폼(거대 앱)을 공유하고, 심지어는 이 플랫폼에 정보를 공급하는 필수적 주체는 바로 이용자들 즉, 사회다. 이처럼 정보의 생성자들은 수많은 이용자들이지만 그 정보는 결코 ‘공유’되지 않고, 플랫폼 기업에게 ‘독점’된다. 정보통신 기술과 과학을 발전시킨 것은 사회지만, 그 결과물은 사회가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 기업에 의해 이윤 창출의 도구로 독점된다. 노동의 사회적 결합, 그리고 이용자와 생산자 사이의 사회적 결합을 통해 더 진전된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제공하며 생산능력을 발전시키는 사람들은 플랫폼 산업의 노동자들이지만, 그 결과물은 플랫폼 자본에 의해 독점된다. 플랫폼이란 기술 장치를 통해서 거래되는 유휴자원의 효율적 관리와 배치, 상호교환, 나아가서 정보공유 플랫폼을 통한 생산성 증대와 비용 절감 등 대부분의 경제적 효과들이 ‘공유’되지 않고, 플랫폼 기업 수중에 ‘집중’, ‘독점’되어 상품으로 가공된다. 이처럼 정보가 플랫폼을 통해 공유되기는 하지만, 공익적 효과가 거의 없는 것이 오늘날 ‘공유경제’의 민낯이다.
디지털 플랫폼 산업에서 자본은 과거 산업자본처럼 상당한 규모의 초기 자본조차 투입하지 않는다. 가령 우버나 에어비앤비 등 글로벌 플랫폼 기업은 거대 독점체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큰 자본을 투입하지 않았다. 단지 정보의 망을 (총자본의 크기에서 보면 별것 아닌) 중앙 정보 플랫폼 장치를 통해 연결했을 뿐이고, 그 작업을 ‘선점’했을 뿐이다. 통상적으로 산업 자본이 투입하는 임금 비용이나 토지매입 비용, 설비투자 비용 등이 디지털 플랫폼 기업에게는 거의 생략된다. 과거 산업 자본은 ‘투자한 자본에 대한 대가’라는 명분으로 이윤을 정당화하려 했다. 디지털 플랫폼 기업은 그런 알리바이조차 댈 수 없게 됐다. ‘초기 투자 자본’이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공유경제라는 말은 그런 딱한 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디지털 플랫폼 산업에서는 거의 손 하나 안 대고, 사회적 공유 성과를 도둑질해 가고 생산자들을 수탈하는 자본의 약탈적 성격이 도저히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정보통신 기술과 과학, 생산자들과 이용자들의 연결망과 이것을 통해 교환되는 거대한 정보는 모두 사회적 공유재산이다. 누구도 이것을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회적 범죄다. 하지만 플랫폼 자본은 중앙 플랫폼을 통해 정보 연결망을 독점해, 사회적 공유재산을 사유화한다. 이것은 IT 분야의 선조인 구글, 페이스북, 네이버, 다음 등의 독점 대자본이 형성됐던 과정이기도 했다. 이 선조의 뒤를 따라 지금 플랫폼 산업은 모든 영역으로 가지를 뻗어 가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택시, 자가용, 트럭 등을 한 대도 보유하지 않고도, 또한 단 한 평의 땅도 사용하지 않고서도 엄청난 이윤을 뽑아 간다. 따라서 본원적 자본 즉, 초기 투자 자본의 권리조차 플랫폼 대자본은 감히 주장할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가 플랫폼 산업에 붙인 ‘공유경제’란 딱지는 한편으로는 비열한 위선이자 사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공유경제! 맞다. 이것은 철저히 공유경제다. 그렇다면 공유의 성과는 사회 전체가 가져가야 하고, 특히 플랫폼 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모든 노동자 민중이 가져가야 마땅하다. 이를 통해 플랫폼 자본이 사회적 공유경제의 효과를 독점해 자신의 이윤으로 착복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원천 봉쇄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이 정보통신 기술과 플랫폼을 통해 발전하는 사회적 노동의 효과를 노동자 계급을 비롯해 전체 사회구성원에게 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전망이다.
이 전망은 국가가 한 줌 자본가들을 대변하는 대신, 사회구성원 다수의 생존을 지키고자 한다면 간단한 조치만으로도 즉각 실행할 수 있다. 가령 국가가 중앙 플랫폼을 만들어 운영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 이미 국가 전산망을 통해 사회 구석구석까지 서로 연결되는 엄청난 플랫폼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국유화된 중앙 플랫폼을 무기로 삼는다면, 점차 이를 중심으로 해당 산업 전반을 장악하고 사회화해 가는 빛나는 전망이 열릴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소유관계와 이것을 반영하는 자본가 국가는 그러한 전망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자본가 소유를 채워 넣는다.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생산력과 이것을 사유화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사이의 충돌은 플랫폼 경제의 확대 속에서 더욱 격렬하게 나타난다.
나아가서 성장하는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 사이의 충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명적인 모순을 잉태한다. 발전하는 생산력은 사회적 성격을 띠지만,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갈수록 그것과 격렬하게 충돌한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이다.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을 더 이상 제대로 담을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은 생산력 발전에 엄청난 장애가 된다. 장기불황과 공황이 그 단적인 증거다.
자본주의 체제의 반동성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 ─ 공황과 장기불황
공황을 살펴보자. 공황의 양상은 어떤 것인가? 공황이 발생하면 수많은 생산설비와 노동력이 쉬게 된다. 기계는 지금 당장이라도 굉음을 내면서 수많은 생산물을 토해 낼 수 있지만, 가동되지 못한다. 수많은 원료가 썩거나 폐기 처분되고, 기계는 녹슨다. 엄청난 숫자의 노동자들이 일하기를 갈망하지만, 실업자로 떠밀려 생산에서 배제된다. 이것은 명백히 생산(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생산설비와 같은 생산수단이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노동자가 문제인 것도 아니다. 기계는 스위치만 누르면 바로 가동될 수 있는 상태고, 노동자의 노동능력도 아무 문제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엄청난 생산능력을 파괴하고 있는가? 바로 자본주의 생산관계다.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본질은 자본-임노동 관계다. 즉, 생산수단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이윤을 증대시키기 위해 무산자인 노동자들을 임금노예로 고용해 착취하는 방식으로 생산이 이뤄지는 것이다. 이러한 생산관계에서 생산의 목적은 무엇인가? 바로 자본가의 이윤을 증식시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생산의 유지, 확대, 축소 여부가 결정된다.
공황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본다면, 결국 공황은 다수 자본가들이 생산을 축소시킨 결과 발생한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생산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는 것이 자신의 이윤 증식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거대한 손실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뒤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장기불황과 공황을 통해서, 다음의 점은 이미 충분히 드러났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이미 사회의 생산(능)력 발전과 충돌하기 시작했다는 점, 따라서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는 이제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철폐할 시기가 되었다는 점!”
5. 생산의 사회적 성격의 확대
지금까지 이어진 인류 보편적 모순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모순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다만 이 충돌이 도달한 역사적 발전 단계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은 기존에 존재했던 다른 사회 체제의 모순과는 구별된다.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등장하고 발전하며 보편화되는 생산력은 바로 ‘사회적’ 생산력이다. 사회적 생산력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생산이 개인적 필요와 욕구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와 요구에 따라 이뤄진다는 뜻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결과물을 대표하는 것이 ‘상품’이라는 점이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상품교환이 일어났지만, 생산물을 대표하는 것이 상품은 아니었다. 주요한 경제활동은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생산(능)력이 너무나 낮은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빼앗길 만한 잉여노동 자체가 아주 클 수가 없었다. 이 잉여노동이 만들어 낸 재화 중에서 노예주나 지주가 소비하는 몫까지 제외한다면, 시장에서 판매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었다.
그런데 상품으로 교환될 수 있는 것은 주로 이 잉여노동 시간에서 발생했다. 자신과 가족이 먹고사는 데 직접 필요한 것들은 결코 상품으로 시장에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예와 농노의 잉여노동에서 발생한 잉여생산물의 경우도, 그것의 대부분은 노예주와 봉건영주, 봉건지주의 호의호식을 위해 사용됐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하는 상품은 사회의 총생산물에서 작은 일부일 수밖에 없었다. ‘타인에게 판매하기 위해 생산하는 생산물’ 즉, ‘교환 자체를 위해 생산하는 생산물’인 ‘상품’이 사회의 총생산물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역사적 발전에 의해 다른 전제조건들이 창출돼야 했다.
기계제 대공업과 집단적 생산
우선 생산능력이 획기적으로 발전해야 했다. 그래서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생산하는 자급자족 수준을 넘어서는 잉여생산물이 큰 규모로 발생해야 했다. 그리고 이 잉여생산물은 착취자의 호화 소비 규모를 넘어설 정도로 충분해야 했다. 이렇게 생산능력이 발전해 타인에게 판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산되는 생산물이 충분하게 발생할 때 시장교환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다음으로 노동 분업이 본격화해야 한다. 노동 분업이란 각각의 생산자가 생산하는 생산물의 종류를 다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생산물은 자기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된다. 자연스레 생산물 사이의 교환이 필수적이게 되고, 그렇게 해서 생산물은 상품으로 전화한다.
이러한 생산능력의 획기적인 발전 및 노동 분업의 본격화를 가능케 했던 것이 바로 기계제 대공업의 등장이다. 봉건 사회 말기에 일어났던 노동 분업은 도시 수공업과 농촌 소규모 생산 사이의 분업이었다. 소농민들은 식량을 생산하고, 이것의 일부를 도시 수공업자들이 생산한 농업 도구들과 교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환이 확대됐지만, 그럼에도 상품으로 교환되는 생산물은 전체 생산물 중 작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기계제 대공업이 도시에서 발전하면서, 이런 상황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기계제 대공업은 엄청난 양의 생산물을 전적으로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했다. 그것과 연관된 다양한 새로운 산업 부문의 등장(가령 철도)은 사회적 노동 분업을 가속화했다. 자급자족적이고 소규모였던 농업 생산의 비중은 급속히 줄어들었고, 판매 자체를 목적으로 생산하는 공업 생산의 비중이 빠르게 높아졌다. 농업 생산도 빠르게 판매를 위한 생산으로 재편되어 갔다.
그와 함께 생산 방식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생산은 소농민이 자기 논과 밭에서 자기 소유의 농업 도구를 가지고 가족과 함께 일하는 ‘소생산 방식’과는 질적으로 달라진다. 거대한 공장에서 수백, 수천, 수만 노동자들이 함께 모여 생산하는 집단적 생산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된다. 또한 그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노동에 종사하는 여러 분야의 노동자들로 나뉜다. ‘사업장 내 노동 분업’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은 ‘이것은 내가 생산한 것’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게 된다. 가령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라면, 이 노동자는 ‘이 자동차는 수천, 수만 명의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생산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자동차 조립공장에 부품을 보내는 수십만 부품업체 노동자들, 자동차 차체와 부품에 들어가는 철강을 가공하고, 플라스틱과 오디오, 전선, 페인트를 제공하는 연관 산업의 수백만 노동자도 고려해야 한다. 심지어는 저 철강과 플라스틱의 원료를 공급하는 칠레의 철광석 노동자, 중동의 석유 산업 노동자도 감안해야 한다. 결국 이것이 진실이다. “이 자동차는 수천만, 수억 세계 노동자의 협력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생산은 집단적 방식으로 이뤄질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전 세계적, 사회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대규모 시장
한두 명, 기껏해야 몇 명에 의해 수공업적으로 이뤄지던 생산이 기계에 기반한 수백, 수천 노동자의 집단적 생산으로 대체됐다. 기계제 대공업을 통해 집단적 생산이 전면화함으로써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이 일어났다. 수공업 생산에 비한다면 기계제 대공업의 1인당 생산량은 비교 불가능할 만큼 엄청나게 증대했다. 그것은 ‘대규모 시장’을 요청했다. 우선 기계제 대공업은 엄청난 양의 원료가 필요했고, 이것은 원료에 대한 대규모 거래가 이뤄지는 시장을 요청했다. 또한 기계를 만들어 내는 자본제 생산 분야와 기계를 사용해 생활수단을 만들어 내는 소비재 생산 분야 사이에 거래가 필요했다. 엄청난 양의 최종생산물 또한 바로 그만큼의 거대한 판매처를 요청했다.
이러한 대규모 시장 없이는 기계제 대공업의 발전이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기계제 대공업으로 아무리 많은 양을 생산하더라도, 결국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는다면 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좁은 지역 사회를 넘어선 전국적 시장교환, 나아가서 세계 차원의 시장 거래를 요구했다. 그것은 철도, 트럭, 선박 등을 활용한 신속하고 대규모적인 물류 운수 산업이 뒷받침돼야 가능했다. 이것은 몇십 년 동안 아직 상용화되지 못한 채 창고에 처박혀 있던 와트의 증기기관을 세상에 불러냈다. 이 증기기관을 장착한 철도가 굉음을 울리면서 대륙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물류 산업이 빠르게 확대되자 이것이 기계제 대공업에 반작용을 가해, 기계제 대공업은 더욱 강하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이렇게 생산과 물류, 시장이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맞물려 들어가면서, 대다수 생산물이 상품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빠르게 확립돼 갔다. 그 본성상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개별 국가를 넘어 전 세계 시장을 향해 뻗어 갔다. 생산은 국가적 성격을 벗어던지고 세계를 향해 확장했고,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 경제를 세상에 토해 냈다.
6. 사회적 생산력과 충돌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바닷물 한 방울에는 대양의 모든 성분이 포함돼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이 응축돼 있다.
상품은 사회적 생산과 교환의 산물이다. 몇 가지 측면만 살펴도 그 점은 너무나 분명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선 상품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수단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상품은 ‘사회적 사용가치’ 즉, 타인들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생산된다. 다음으로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의 생산에 투입한 ‘사회적으로 평균적인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다. 여기서는 ‘주관적 척도’가 아니라, ‘사회적 척도’에 의해 생산자의 노동 가치가 측정된다. 개별 생산자가 10시간의 노동을 투입했더라도, 만약 이 상품 제작에 투입되는 사회적 평균 노동 시간(이것은 평균적인 숙련도와 노동 강도, 기술조건, 기계화.자동화 정도를 기준으로 측정된다)이 9시간이라면, 이 상품은 9시간어치의 교환가치만을 갖게 된다. 이 두 가지 측면이 보여 주는 것은 노동(생산)의 성격이 ‘사회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물론 상품 생산이 존재하는 모든 사회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노동’이 존재했다. 그러나 전체 생산물 중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낮았다. 이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 노동은 아직 충분히 사회적 성격을 띠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원시 공산제의 경우 집단적, 공동체적 노동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그것의 범위는 부족 수준의 아주 제한된 공간을 넘어서지 못했다. 게다가 원시 공산제 사회에서는 아직 사적 소유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생산물이 상품의 형태를 취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면 상품교환의 확대에서만이 아니라, 생산 과정 자체에서 노동의 성격이 질적으로 변화한다. 기계제 대공업의 발전에 따라, 생산 자체가 이미 ‘개별적 노동’이 아니라 ‘집단적 노동’의 성격을 띤다. 나아가서 생산은 개별 작업장의 수준을 넘어서서, 전 세계 차원 생산의 사회적 연결망 속에서 이뤄진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이처럼 작업장 내에서든, 전체 사회적 차원에서든 노동(생산)에 ‘집단적·사회적 성격’을 깊이 각인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생산력은 비로소 ‘사회적’ 단계에 도달했다.
이처럼 생산력은 ‘사회적, 집단적, 세계적 생산력’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고, 또한 그 성격은 갈수록 더욱 강화되지만, 생산관계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우선 ‘소유관계’ 측면에서 보면, 생산은 노동자들의 전 세계적 협동 노동 및 사회적 노동 분업을 통해 이뤄지지만 소유권은 여전히 극소수 자본가 계급이 장악하고 있다. 이것은 ‘분배관계’를 규정한다. 자본주의 분배관계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이라는 형태로 노동력의 가치만 준 뒤, 나머지 노동은 자본가들이 공짜로 가져가 이윤으로 착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배관계는 생산수단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소수 자본가들의 수중에 집중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소유관계를 더욱 강화한다. 이렇게 강화된 소유관계는 자본주의 분배관계를 더욱 강화해, 갈수록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부의 불평등을 키운다. 결국 사회적 생산력과 부르주아적 소유관계, 분배관계 사이에 충돌이 커져 간다.
그리고 충돌은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이 토해 내는 막대한 생산물을 더 이상 자본주의 사회가 소화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기도 한다. 생산과 소비 사이의 충돌이 바로 그것이다. 자본주의 소유관계, 분배관계는 소비의 한계를 만들어 낸다. 자본주의 소유관계에서 노동자들이 분배받는 몫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상품 구매량은 그보다는 빠른 속도로 확대되는 생산량을 결코 쫓아갈 수 없다. 이러한 양상은 결국 파국에 이른다. 시장에서는 팔리지 않는 상품들이 범람해, 불황과 공황이 발생한다. 그 결과 멀쩡한 기계와 작업장이, 수많은 노동자들이 더 이상 생산에 투입되지 못한다. 수많은 공장이 문을 닫거나 가동률을 낮춘다. 자본주의 생산력은 비틀거리고, 쪼그라들면서 후퇴한다. 자본주의 소유관계, 분배관계가 더 이상 포용할 수 없을 만큼 웃자란 사회적 생산력은 결국 폐기 처분된다. 생산력은 성장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가 허용하는 좁은 테두리에 갇히거나 심지어는 파괴된다.
다음으로 ‘교환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생산이 이미 사회적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음에도, 교환은 시장에서 상품교환을 매개하는 무정부적 방식으로 이뤄진다. 생산력과 교환관계는 서로 격렬하게 충돌한다.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은 생산물 사이의 교환이 계획적으로 잘 이뤄지기를 학수고대한다. 그래야만 전 세계적으로 짜인 거대한 사회적 노동 분업망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 필요량이 정확히 측정되고, 그에 맞춰 자동차 산업 및 연관 산업의 전반적인 생산계획이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교환관계는 그것을 전적으로 시장에서의 상품교환에 내맡겨 버린다. 그 결과 자본주의 생산은 무계획적 방식으로 집행된다. 자동차가 시장에서 얼마나 팔리게 될지, 그에 따라 전반적인 생산계획이 어떻게 짜여야 하는지를 전혀 가늠하지 못한 채 생산이 이뤄진다. 모든 것은 시장에서 교환이 일어난 다음에야, 확인된다.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는 상품들이 흘러넘치기 시작한 뒤에야, 자본가들은 생산의 축소를 결정한다.
이러한 무계획적 생산 방식은 자본가들에게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 결과 자본가들은 시장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고 예견하면서 파산이나 손해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를 분석하고 시장 상황을 예측하는 기구들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럼에도 무계획적 생산이 불러오는 파국에서 그들이 자유롭게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런 위험을 경쟁하는 자본가들에게 전가시키기 위해 격렬한 경쟁에 돌입하곤 한다. 그 결과 과잉생산은 결코 멈추지 않으며, 단지 패배한 자본가들이 그 대가를 치를 뿐이다. 상황이 잘 흘러가서 주요한 자본가들이 암묵적 담합을 통해 생산을 감축하는 경우라면 어떨까? 이 경우에도 사회가 치러야 할 결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사회의 생산력은 강제적으로 축소되며, 이에 따라 생산 감축과 실업 행렬이 뒤따른다.
이처럼 무계획적으로 생산이 이뤄짐으로써 발생하는 낭비는 불가피한 것인가? 시장에서의 상품교환이라는 자본주의 교환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생산계획을 짤 수 없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개별 작업장 수준에서는 이미 완전히 계획적인 생산이 이뤄지고 있다. 연간, 월간, 주간, 일간 생산계획표에 따라 생산은 착오 없이 잘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차원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어떤 자본가도 자기 회사에서 생산한 상품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잘 판매될 수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수많은 자본가들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들의 생산을 세계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무계획적인 생산이 야기하는 파국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대자본가들은 잘 발달된 경제 예측 기구들, 가령 거대한 경제 연구소를 운영한다. 자본가 국가 또한 이런 자본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여러 국책 경제 연구소들을 운영한다. 이러한 경제 연구소들만이 아니라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도 손실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경제 연구소를 운영하며 전 세계 생산 흐름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계산한다. 이러한 ‘부기 수단’들이 발전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전 세계적 생산의 흐름을 계산할 수 있는 정교한 방법들을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이렇게 예측하더라도 이것이 생산의 사회적 계획화를 가능케 하는 건 아니다. 몇 년 후 세계 시장에서 자동차가 포화될 거라고 예측하는 자본가는 어떤 전략을 세울까? “누군가는 과잉생산의 결과 몰락할 것이 분명하다. 무정부적 과잉생산의 대가를 치르는 자는 내가 아니라 경쟁자여야 한다. 자동화, 기계화를 촉진하고 노동 강도를 높여 더 값싸게 더 많은 자동차를 생산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이 개별 자본가가 내리는 결론이다. 그 결과 예측의 효과는 사라지고, 대신 과잉생산에 따른 파국은 더 일찍 모습을 드러낸다. 개별 기업 수준의 계획화는 전체 사회 차원에서는 완전한 무계획성으로 둔갑해 버린다.
이와 같은 결과가 너무나 위험천만하기 때문에 주요한 대자본들이 생산을 감축하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한계 내에서 ‘생산의 계획화’가 작동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화는 생산력의 낭비를 제거하는 진정한 계획화가 아니다. 착취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결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강제적인 생산 감축인 것이다. 이 경우에도 그것의 결과는 불황과 공황,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 파괴와 낭비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노동자 계급을 잔인하게 착취한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인류의 진보를 측정하는 중요한 척도인 생산력을 훼손하고 파괴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도 이제 완전히 낡아 버린 반동 체제다.
종합해 보자.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모순은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과 ‘낡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소유관계+교환관계+분배관계)’ 사이의 충돌이다. 이 충돌은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계급 투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노동자 계급은 발전하는 사회적 생산력에 걸맞게, 모든 생산수단을 노동자 계급의 공동 소유, 즉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킴으로써 사회적 생산력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과 충돌을 해결한다. 아울러 자본주의의 무정부성, 그리고 ‘자본주의적 계획화’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사회적 생산과 소비’가 조화로운 진정한 사회적 계획생산의 단계로 인류를 이끈다. 그 결과 사회적 생산력에 조응하는 새로운 사회적 생산관계가 탄생해, 사회적 생산력을 더욱 고도한 단계로 이행시켜 인류를 진보로 이끌게 된다. 바로 그 사회적 생산관계를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라 불렀다.
7.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 그리고 이것과 충돌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은 여러 양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모순은 얽히고설켜 생산력을 제약하고 파괴하는 불황과 공황 등을 잉태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자신이 더 이상 사회의 진보를 대변하지 못한 채 쇠퇴하는 반동적 체제임을 명백히 드러낸다. 그러한 모순 중 마르크스가 주목한, 가장 근본적인 모순은 ‘생산과 소비 사이의 모순(과잉생산 경향)’ 및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
자본주의가 토해 낸 사회적 생산력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한계가 없다는 듯, 무한히 발전한다. 이에 더해 자본주의 생산은 ‘축적(자본의 증식)을 위한 축적’ 경향에 지배받는다.
한편으로 이윤 증식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확대 투자가 필요하다. 미래에 더 큰 이윤을 얻으려면, 자본가들은 더 많은 이윤을 부단히 생산에 투자해야 한다. 다른 한편 무한대의 경쟁이 초래하는 거대한 압력이 자본가들 사이에 작동한다. 자본가들에게는,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서라도 자본 투자를 계속 확대하는 것이 지상 명령이 된다.
이런 점들 때문에, 자본의 무한 증식(축적을 위한 축적)은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는다. 그 결과 사회적 생산력 발전은 가속화하고, 이것은 갈수록 더 많은 생산물을 시장에 토해 놓는다.
하지만 이렇게 확대되는 생산은 소비와 조응해야 한다. 확대되는 생산 규모를 소비 규모가 쫓아가지 못하게 되면 ‘과잉생산’이 발생한다. 얼핏 보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노동자 민중은 소비의 과잉이 아니라 결핍으로부터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소비가 가능한 사람들은 최소한 상층 중간 계급 이상인데, 이들의 비율은 전체 인구에서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란 ‘구매능력’에 좌우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물은 상품 형태로 존재한다. 자본가들은 자선 사업가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생산물을 판매해서, 그것으로부터 투입한 자본과 함께 적정 수준의 이윤을 회수할 수 있어야 생산을 지속할 이유가 생긴다. 그런데 다수 소비자들은 단순히 ‘필요’가 아니라, ‘구매능력’에 따라 소비 행위를 한다. 아무리 절실히 필요하더라도, 구매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소비는 불가능하다.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 그리고 과잉생산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매능력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소유관계에 좌우된다. 사회의 압도 다수인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소유관계에서는 노동력의 가치 즉 임금에 의해 구매능력이 제한된다. 그런데 자본가들의 ‘축적을 위한 축적’ 욕구(이윤 욕구)에는 한도가 없다. 그에 따라 기술적 발전 단계가 규정하는 생산능력의 절대적 한계를 제외하면, 자본주의 생산은 다른 어떤 한계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무한히 확대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 결과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이 커진다. 이 간극은 생산이 소비를 압도하는 양상을 취하는데, 그 결과가 과잉생산이다. 이것은 노동자 계급의 필요를 능가하는 과잉생산이 아니다.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 소유관계가 규정하는 작은 구매능력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하는 과잉생산이다. 만일 노동자 계급이 충분한 구매능력을 갖고 있다면,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의 수입이 ‘임금 법칙’에 갇히지 않고 충분하다면, 결코 발생할 수 없는 그러한 과잉생산인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과잉생산이 노동자 계급의 ‘과소소비(가난과 결핍)’와 나란히 존재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
이러한 과잉생산이 시장에서 전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면, 여러 자본가들이 파산하게 된다. 그와 함께 장기불황 혹은 공황이 사회를 덮치게 된다. 한편으로 시장에는 수많은 생산물이 팔리지 않고 쌓여 있다. 다른 한편으로 기업들이 대대적으로 파산하거나 생산을 대폭 축소하면서 대규모 실업과 저임금에 신음하는 굶주린 노동자들이 생겨난다.
이것은 자연재해로부터 발생하는, 과거의 굶주림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과거 사회에서는 생산물이 흘러넘쳐서가 아니라, 자연재해 때문에 생산이 급격히 감소함으로써 굶주림이 나타났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다르다. 생산물이 흘러넘치지만,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굶주림이 확산된다. 자연재해에 따른 생산의 감소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거대한 기술적 발전과 생산에 대한 투자 확대로 너무나 많은 것이 생산된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노동자 계급의 굶주림이 발생한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을 만들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체제, 즉 자본주의 소유관계가 범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단순히 생산능력을 발전시키는 것만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를 철폐하는 혁명적 전망을 통해서만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줄일 길은 없는가?
과잉생산에 따른 장기불황과 공황을 지우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필사적인 시도를 거듭해 왔다. 노동자 계급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 계급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시도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가령 케인스주의 정책을 이어받아, 노동자 민중의 소득을 향상시켜 자본주의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과거 문재인 정부의 야심찬 계획이 증거가 될 수 있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장이 줄어들어 판로가 좁아지며, 그로 인해 자본가들의 투자가 침체되고 성장률이 낮아지는 게 자본주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노동자 서민의 소득 증대를 시장 확대로 연결해 자본주의를 정상화하고, 나아가서 자본주의를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자본가 계급의 계획이 등장할 수 있다.
그들의 계획을 추진하면,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은 확실히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노동자 계급의 커지는 구매능력은 분명 소비를 확대할 것이고, 그렇게 하면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이 좁아지면서 자본주의는 활력을 되찾을 듯 보인다. 그러나 이 계획의 성공조건은 무엇인가? 노동자 서민의 삶의 개선, 즉 소득의 증대가 자본가들의 이윤과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이윤을 늘리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조건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결코 성립할 수 없는 조건이다. 생산의 동기가 소비 확대이며, 이는 노동자들의 삶의 개선과는 결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이 생산을 결정하는 동기는 무엇일까? 단순히 생산량 확대가 아니다. 유일한 생산 동기는 이윤 증식이다. 그런데 이윤 확대는 소비 증가가 아니라 소비 축소를 요청한다. 왜냐하면 이윤을 확대하기 위한 결정적 조건인 노동자에 대한 착취 증대는 불가피하게 노동자의 소비능력을 줄여 버리기 때문이다. 소비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윤 감소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것은 자본가 계급의 생산 동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아주 예외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절대적 소득 증대와 자본주의 성장이 나란히 서 있는 경우가 있다. 바로 자본주의 경기 활황기다. 안정적인 이윤율이 뒷받침되는 활황기에 자본가 계급은 가장 높은 수준의 투자에 나선다. 이것은 비록 일시적으로나마 고용을 확대하고 임금 수준을 높여, 노동자들의 소득 수준이 절대적으로 높아진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주의는 과거 케인스 식의 논리가 발 딛고 있던 2차 세계대전 후 호황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점증하는 경제 위기에 휩싸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득주도성장론은 완전히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 뒤에는 어떤 정책이 기다리고 있을까? 바로 자본주의 성장을 가속화하는 것 즉, 노동자 착취도를 강화해 이윤율을 높이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을 더욱 키울 수밖에 없다.
본래 자본주의적 성장 그 자체는 노동자 삶의 진정한 개선을 보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빠르게 성장하는 시절에는 더 많은 몫을 빼앗기더라도 노동자들의 절대적인 삶은 개선될 수 있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성장이 갈수록 장애에 부딪히고 있는 오늘날에는, 그에 따른 이윤율 하락을 노동자 삶의 하락을 통해 필사적으로 만회하려 하는 자본가들의 욕구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성장을 목표로 하는 한, 노동자 삶의 질과 수준 하락이 필연코 수반된다.
지금처럼 자본주의의 눈부신 성장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시대에 노동자 민중의 소득을 보장할 유일한 방법은 ‘계급 투쟁’이다. 어떤 계급 투쟁일까? 노동자 민중의 소득 보장을 위해 필요한 만큼 거침없이 자본의 이윤과 소유권을 침해해 들어가는 계급 투쟁이다. 극소수 자본가들이 움켜쥔 막대한 부를, 사회 전체의 부로 전환해서 사회 전체를 위해 계획적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계급 투쟁이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고 소수 자본가들만이 결정권을 갖는 자본주의적 투자를, 노동자 민중의 삶과 사회적 필요의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계획적 생산으로 대체함으로써 생산과 소비 사이의 균형을 창출하는 계급 투쟁이다.
이것만이 과잉생산 경향을 폐지함으로써 불황과 공황을 추방할 수 있고, 진정 소비와 조화를 이루면서 중단 없이 발전하는 효율적 생산 체제를 가져다줄 수 있다. 그것은 생산의 동기 자체를 완전히 바꿔야만 실현할 수 있다. 생산의 목적이 한 줌 자본가들의 이윤 증식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또한 생산의 확대가 노동자 계급의 민주적 동의 아래 결정되는, 적절한 수준의 사회적 투자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8.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
과잉생산 경향은 장기불황과 공황 속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을 가속화하고 갈수록 전면화하는 근본 요인이 있다.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인데, 이 법칙 또한 자본주의 착취 체제(자본주의 소유관계)라는 뿌리에서 자라난다.
자본가 계급의 모든 이윤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기계, 토지, 건물, 노동력 등 총 투하자본에 대한 이윤의 비율(이윤율)’이 갈수록 낮아진다. 기계, 토지, 건물 등 생산수단에 투입하는 자본의 크기(이것을 불변자본이라 부른다)가 늘어나는 비율에 비할 때, 노동력에 투입하는 자본의 크기(이것을 가변자본이라 부른다)가 늘어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더 낮아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경험적으로도 분명한 사실이다. 자본의 총량이 늘어나는 것에 비해 고용하는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임금의 총량은 훨씬 더디게 증가한다.
그런데 자본가들이 이윤을 뽑아내는 부분은 불변자본(생산수단) 부분이 아니다. 구입한 원료나 기계는 자기 가치를 상품에 이전할 뿐, 추가가치(이윤)를 조금도 보태 주지 않는다. 추가가치(이윤)가 발생하는 곳은 바로 노동자에 대한 착취다. 지불하는 임금에 비해 더 많은 일을 시킴으로써 그 차액만큼이 이윤으로 발생한다. 그런데 이처럼 이윤을 낳는 부분(가변자본)이 전체 투하자본 중 차지하는 비율이 갈수록 줄어들게 되면, 착취율이 높아지더라도 이윤율은 경향적으로 낮아지게 된다. 그 결과가 바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다음의 세 가지 점에 주의할 것을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첫째, 줄어드는 것은 이윤율이지 이윤의 총량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윤의 총량은 절대적으로 늘어난다. 다만 총 투하자본에 대비할 때 얻는 이윤의 비율이 줄어들 뿐이다.
둘째,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의 토대에서는 발전하는 생산력이 반영할 수밖에 없는 생산의 기술적 조건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산력의 발전, 즉 생산의 기술적 발전을 드러내는 여러 지표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무엇일까? 바로 생산자 1인이 1시간 동안 생산해 내는 생산량, 즉 1인당 생산성이다. 착취관계를 배제하고 접근한다면, 결국 인류의 생산 발전이란 생산자 1인이 단위시간 동안 얼마만큼 많은 것을 생산했느냐로 측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1인당 생산성은 인류 역사 내내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고, 이러한 발전이 인류의 풍요와 문명의 발전 수준을 규정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1인당 생산성을 규정하는 기술적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단위 시간당 1명의 생산자가 가동하는 기계와 소모하는 원료의 양, 즉 생산수단의 양이다. 이것은 누구의 눈에도 자명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류 사회를 관통하는 그런 명백한 사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다른 외피를 두르고 나타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은 불변자본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노동자는 가변자본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1인당 생산성의 증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총 투하자본 대비 노동력의 비중 저하, 따라서 이윤율의 저하 경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진보를 거꾸로 돌리지 않는 한, 자본주의 사회는 이 이윤율 저하 경향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다. 게다가 자본가들 사이의 첨예한 경쟁은 이윤율 저하 경향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결국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에서 성공 여부는 노동자 1인당 생산성을 누가 더 높일 수 있느냐(이것은 경쟁 자본에 비해 생산물을 더 값싸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게 한다)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셋째, 마르크스는 이윤율 저하 법칙 앞에 ‘경향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무슨 말일까? 단순하게 일직선으로 관철되는 법칙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본가 계급은 생명 같은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착취도를 높이는 것이 대표적인 대처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윤율 저하 법칙을 잠시 저지할 뿐 지속적으로 막을 수 없다. 오히려 장기적으로 볼 때 그러한 저항은 이윤율을 낮추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가령 착취도를 높이는 대표적인 방법은 정리해고로 노동자 수를 줄이는 대신 1인당 생산량을 높이는 것이다. 그 방법 중 대표적인 것이 기계 수를 늘리거나 자동화를 촉진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기계와 같은 생산수단)의 비율을 높인다. 그 결과는 바로 이윤율의 하락이다.
이처럼 이윤율 저하를 막기 위한 자본가 계급의 필사적인 반항에 의해 일시적으로 이윤율이 회복될지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을 마르크스는 강조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이윤율의 저하 경향이 바로 그러한 자본가 계급의 반항을 통해서 장기적으로 관철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것을 표현한 개념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다.
9. 낡아 버린 자본주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파산선고다. 왜냐하면 이 법칙은 자본가 계급이 갈수록 생산의 발전에 적대적인 반동 계급으로 전락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자본가 계급이 생산을 확대할 것인지 축소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윤율’이다. 그런데 이 이윤율이 갈수록 줄어든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투자에 대한 자본가들의 열기가 감소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생산력의 발전이 커다란 장애에 직면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 점 때문에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 앞에서 도망쳤다고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이윤율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투자하고, 그 결과 생산력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는 점에서 자본가들을 정당화했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로서는 자본가 계급의 심장인 이윤율이 갈수록 감소한다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이윤율이 갈수록 감소한다면, 자본가 계급의 투자율도 갈수록 감소할 것이고, 그 결과는 명백히 생산의 맥박이 느려지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거기서 도망치는 대신, 진실을 향해 한 발 내디뎠다. 마르크스는 거기서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성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낮아질수록, 자본주의 체제의 맥박은 느려져서 더욱 빈번하게 그리고 더욱 전면적으로 장기불황이나 공황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고 마르크스는 예견했다. 즉, 마르크스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 작동함으로써 자본주의 반동성은 갈수록 가속화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의 예견은 명확한 사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상식이 됐다. 그리고 이윤율 저하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필연적으로 공황이나 장기불황으로 이어지고 있음도 중요한 사실이다. 어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도 그 점에 대해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더라도, 그들은 그 법칙으로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반동성을 끌어내지 않는다. 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 즉, 자본가 계급의 이론적 수호자라는 지위가 그들에게서 과학적 양심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은 자본주의 체제의 반동성이 갈수록 가속화함을 보여 준다. 자본주의 사회의 과잉생산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이윤율이 갈수록 낮아지는 상황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간극이 조금만 벌어지더라도 이윤율이 최저한도에 금방 이르게 됨으로써, 불황과 공황이 더욱 빠르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최근 상황은 더욱 악화하고 있다. 이제 자본가들의 투자 러시를 불러오는 호황기란 거의 기대할 수 없다. 이윤율이 너무나 낮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호황기란 장마철에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햇볕처럼 기대하기 어려워졌고, 자본주의 사회는 장기불황이 대공황으로 이어지는 것만 막아 내도 다행이라 느끼는 단계에 도달했다.
나아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는 실물자본과 화폐자본의 괴리(거품)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모순을 확대하고 있다. 생산 분야에서 낮아지는 이윤율은 자본가들의 투자 의욕을 짓밟는다. 그에 따라 자본가들은 다른 자본가들의 이윤을 강탈하거나, 중간 계급의 소득이나 노동자 계급의 임금까지 수탈하는 데로 고개를 돌린다. 비생산 분야에서 거품을 일으키거나 부동산, 주식, 화폐, 선물투기 등을 통해 모험을 감수하면서 이윤율을 벌충하려 발악한다. 그러나 비생산 분야에서는 아무런 이윤도 생기지 않는다. 비생산 분야에서의 투기는 다른 자본가들의 이윤을 빼앗아 오는 것에 불과하다. 다만 대가가 있다. 자신의 이윤을 판돈으로 내걸어야 한다. 누군가가 얻으면 누군가는 잃는다.
다만 부동산, 주식, 화폐, 선물투기 등과 맞물린 거품 현상은 중간 계급, 노동자 계급의 소득까지 수탈함으로써만 자본가 계급의 이윤율 회복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대가는 무엇인가? 소비를 감소시키고, 이는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더 빠르게 넓혀 자본주의의 모순을 증폭한다. 여기에도 탈출구는 없다.
사회가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할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다. 생산의 동기가 이윤 증식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생존과 번영이어야 한다. 생산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것을 계획하고 그 결과물을 분배하는 주인공이 자본가들과 그들의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과 그들의 민주적 정부여야 한다. 그것은 모든 생산수단을 자본가 계급의 수중에서 연합한 노동자 계급의 수중으로 이전하는 사회주의를 의미한다. 사회주의는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없앨 것이다. 사회주의는 생산능력의 발전이 전체 사회 번영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줌 착취자들의 이윤율을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불황과 공황처럼 사회가 후퇴하는 이유가 되는 이 어이없는 반동적 생산시스템을 저 멀리 고대 박물관으로 보내 버릴 것이다.
10. 파산하는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쇠퇴는 이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 사상에도 종말을 고한다. 자유주의 이념의 파산은 그 단적인 예다. 자본주의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수요-공급의 법칙에 의해 사회적 자원이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관리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핵심 논리는 이런 것이다. 어떤 산업에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증대하면 가격이 낮아지고, 이것은 자본가의 투자욕을 감퇴시켜 사회적 자원이 이 산업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간다. 반대로 수요보다 공급이 부족하면 가격이 인상되고, 이에 고무된 자본가의 투자는 사회적 자원을 이 산업에 자동으로 추가 투입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런 식으로 사회적 수요에 비해 생산이 과잉인 부분에서는 사회적 자원이 빠져나가고, 사회적 수요에 비해 생산이 부족한 부분에서는 사회적 자원이 투입됨으로써 가장 효율적으로 사회적 자원을 분배하고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율적 조정 장치인 수요-공급에 따른 가격 결정 구조에 개입하는 것은 사회적 생산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간섭으로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가 뒤따랐다. 국가는 이 자율적 경제에 개입해서는 안 되고, 단지 밤에 도둑이나 잡는 역할에만 만족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야경국가론’이 바로 자유주의다.
여기서 하나의 논리가 추가로 파생됐다. 이런 가장 효율적인 자율적 조정 장치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금기시되는 반면, 자본가의 개입은 필수였다. 자본가들의 이윤욕이 개입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사회적 자원은 과잉된 부분(가격이 하락해 이윤율이 낮아지는 부분)에서 결핍된 부분(가격이 올라가 이윤율이 높아지는 부분)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자본가의 이윤욕, 다시 말해 자본주의 체제를 관통하는 이윤 논리는 잔인하고 반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이 효율적 경제 체제를 떠받치는 ‘유일하게’ 윤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사회적인 요소로 정당화된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는 자신이 신처럼 모셔 왔던 자유주의 이념을 스스로 배신하고 있다. 국가는 ‘야경국가’가 아니라, ‘전면적인 개입’에 나서고 있다. 수많은 자유주의 신봉자들이 그것을 보고 경악하며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마저도 국가가 행하는 그런 배신에 정면으로 항의하는 대신, 오히려 더 대담한 배신을 국가에게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이념, 그리고 이 이념이 대변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완전히 낡아 파산해 버렸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하나의 장면을 살펴보자. ‘마스크 사회주의’는 이제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다. 한국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에서 코로나19 당시 마스크를 비롯해 핵심 의료장비의 생산과 유통에서 국가 통제가 본격화됐다. 이는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이 재난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자신을 덮치는 위험을 스스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이념에 따르면, 마스크 수요가 폭증해 가격이 폭등하면, 높아지는 이윤율에 신바람이 난 자본가들에 의해서 사회적 자원이 마스크 생산에 투입됨으로써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돼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시장의 자율적 조정기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마스크 수요에 비해 생산은 부족하기 짝이 없었고, 생산 확대는 재난의 확대 속도를 결코 따라가지 못했다. 이것은 산소호흡기를 비롯해 문제해결에 필수적인 모든 의료장비에 빠짐없이 적용되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민영의료 체계는 이런 비상 상황 앞에서 아무런 효율적인 대처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을 드러냈다.
그 결과 한국 정부는 마스크 5부제를 시행하면서 마스크 생산, 유통, 분배에 직접 개입했다. 마스크 생산 가격도 직접 통제했다. 마스크 산업 자본가들에게 마음대로 맡겨 둔다면 치솟는 마스크 가격과 사재기 등으로 재난 확산에 대처할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 분명했고, 대중의 저항과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스크와 관련해 한국에서 나타났던 상황은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마찬가지 모습으로 재현됐다. 미국 트럼프 정부는 오래된 전시법까지 동원해 지엠에게 산소호흡기 생산을 명령했다. 영국 정부도 다이슨에게 인공호흡기 1만 개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하면서, 생산에 직접 개입했다.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는 손’으로 대체됐다. 그러나 자유주의 이념의 신봉자들은 이 상황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있다. 그들이 찬미하는 자본주의의 자율적 조정기능에 맡겨 둔다면, 그것이 초래할 재앙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료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배신은 거대한 배신의 일각에 불과하다. 자유주의 이념은 경쟁에서 도태된 비효율적인 부분을 제거함으로써 사회적 효율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항상 강조해 왔다. 시장의 가격 경쟁에서 도태된 비효율적인 기업이 제거됨으로써 사회는 선진적이고 효율적인 체제로 끊임없이 물갈이되면서 진보해 나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야경국가’는 파산하는 기업과 자본가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보내서는 안 되며, 이 뒤처진 비효율적인 부분의 파산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비효율적인 부분이 오랜 기간 비대하게 커져 왔다. 파산 직전의 위태로운 기업의 비율이 수십 년 넘는 오랜 기간 동안 계속 확대돼 왔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주요 자본주의 나라에서 이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된 한계 기업의 비중이 40%에 육박하고 있음을 몇 년 전부터 계속 경고했다.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하락하면서, 사회적 자원의 배분과 순환의 키를 쥐고 있는 자본가들이 자기 역할을 방기해 왔고,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활력을 앗아 갔다. 여기서는 자유주의 이념이 절대적으로 옳았다! 자유주의가 주장하듯 자본가들은 오직 이윤욕에 의해서만 생산에 박차를 가하는데, 이윤율 저하는 그들의 의지를 앗아 갔다. 투자율이 전반적으로 하락하면서, 자본주의 생산은 깊은 불황과 저성장의 늪에 깊숙이 빨려들어 갔다.
코로나19 사태는 이런 상황을 극적인 수준으로까지 빠른 속도로 밀어 올렸다. 다수 기업이 한계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생산가동률은 급격히 추락하고 있다. 자유주의의 기대와는 달리,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자율적 조정기능에 내맡겨 둔다면 그 결과는 재앙이다. 그냥 방치하면 이 자율적 조정장치는 완전히 망가져 버려, 대공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비효율성의 극치를 보여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들은 작심하고 자유주의를 완전히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 미국 정부는 부실 기업이 발행한 악성 채권까지 모조리 사들이는 무제한적 재정 투입을 선언했다. 한국 정부도 항공사, 두산중공업을 비롯해 파산 직전의 기업에게 천문학적 국가 재정을 쏟아 붓고 있다. 자본가 국가의 전면적인 개입 덕분에 분야를 막론하고 수많은 기업이 근근이 버티고 있고, 금융권은 파산을 모면하는 등 대공황으로 이어지는 파국이 유예되고 있다. 이러한 국가 개입이 미래에 야기될 거대한 위험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말이다.
자율적 조정능력, 효율성 증대, 자본가 이윤욕의 생산적 역할 등 자유주의가 내세워 왔던 매력들, 그리고 이 매력들에 기반했던 국가 개입 반대가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 자리를 시장에 대한 국가의 전면 개입이 대체하고 있다. 어제까지 강경 자유주의자였던 작자들이 오늘은 국가의 무제한적 개입을 부르짖고 있다. 어제까지 자유주의의 배신자로 취급받았던 국가 개입론자들이 이제 자유주의의 구원 투수로 칭송받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자유주의의 파산선고’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더 이상 이 사회의 진보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반동적 체제로 전락했음을 자본가 계급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자본가 정부는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대자본이 무너지지 않게 지원해야 한다. 국민의 재산인 정부 재정은 위기 때마다 ‘공적자금’이란 형태로 대자본의 회생을 위해 투입되곤 했다. 이렇게 자본가 국가의 도움으로 대자본은 회생하고, 그 과정에서 자본가 정부와 대자본의 융합은 더욱 전면화한다. 이제 대기업의 번영과 생존은 자본가 정부의 번영, 생존과 뗄 수 없이 연결된다. 대기업의 이사진과 경영진에는 공적자금을 지원한 자본가 국가의 핵심 관리들, 특히 산업은행의 관리들이 포진하게 되고, 이들의 입김이 높아진다. 이들은 정부 재정을 회수한다는 이름으로 노동자를 향한 가혹한 구조조정을 강요하고, 기업합병 같은 자본의 집중 경향을 부추긴다. 이런 식으로 국가와 자본 사이의 융합 경향은 지속적으로 강화돼 왔다. 순수한 자유주의 이념은 오직 부르주아 지식인의 관념에서만 존재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도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자본가 국가와 자본 사이의 긴밀한 융합의 확대였다.
11. 자본주의는 유효기간이 다해 가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는 국가와 자본의 융합 경향을 더욱 부각시켰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 이념이 그토록 강조했던 시장의 자율적 조정기능 그리고 자본의 탐욕이 낳는 효율성과 생산성 증대가 결정적 한계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과잉생산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다. 만성화된 과잉생산, 즉 생산과 구매의 부조화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강타했다. 시장은 자율적 조정기능을 발휘해 사회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재분배하기는커녕 만성 불황의 늪에 빨려들었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는 자유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생산의 추동력, 즉 자본가들의 이윤욕에 근거한 맹렬한 투자를 근본적으로 제약했다. 이윤율이 낮아지자 자본가들은 투자를 줄여 버렸고,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률을 극히 낮은 수준에 묶어 버렸다. 이윤에 눈이 먼 자본가들의 투자 덕분에 이뤄지는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은 옛 추억이 됐다.
돈은 생산 부문에서 빠져나와 금융과 부동산으로 흘러들었다. 이윤을 창출하는 유일한 분야인 생산이 답보 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이런 돈의 흐름은 거품과 위험을 증대시켰다. 실물자본과 괴리된 금융자본 부문에서 거품이 터짐으로써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덮쳤다. 여기서도 자본가 국가가 구원 투수로 등장했다. 천문학적 국가 재정이 금융 전반의 파산 도미노를 저지했다. 그 가운데 자본가 국가와 금융자본의 융합이 확대됐다. 코로나19 사태와 경제 위기 앞에서 이런 융합은 더욱 전면화되고 있다. 대불황의 위협 앞에 모든 자본가들이 자본가 국가의 지원책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상황은 자본주의의 몰락을 웅변한다. 하지만 아무리 국가 개입이나 통제가 확대되더라도, 이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을 뒤바꾸지는 못한다.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국가 개입의 모습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오늘날 전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국가 개입’의 의미는 무엇일까? 자본가 국가는 정부 수중으로 집중된 모든 사회적 자원을 자본가 구하기 작전에 투입해야 했다. 정부 재정의 더 많은 부분이 복지 정책이 아니라 자본가 살리기 정책에 투입돼야 했다. 쓸 만한 국유재산이나 공기업들은 최대한 매각해 민영화함으로써 자본가들의 추락하는 이윤율을 회복하는 데 사용하고, 좁아지는 투자처를 벌충해야 했다. 법인세 인하와 같은 조치를 통해 정부 재정은 더욱 전적으로 노동자 민중을 수탈해서 꾸려 가야 했다. 결국 마비 상태에 빠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란, 몰수 국유화를 통한 사회적 통제와는 완전히 반대편에 있다. 자본가 국가의 개입이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수탈로 마련한 사회적 재원으로 파산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구원하는 것, 또한 죽어 가는 자본가들을 사회적 재원으로 회생시켜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가 국가의 개입 확대는 자유주의 이념을 잉태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역사적 유효기간이 만료됐음을 입증한다. 하지만 자본가 국가의 개입 확대는 유효기간이 만료된 자유주의 체제를 회생시키려는 마지막 발악이다. 결국 이 자본가 국가는 자유주의 이념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편에 서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자본가 국가는 파산하는 자유주의 체제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보존하려는 자본가 계급의 필사적인 마지막 발악을 대표한다.
자본가 국가의 전적인 지원으로 당장의 대공황을 피한다고 해도, 역사적 수명이 다한 환자인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길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와 무정부적인 과잉생산은 자본주의 체제의 숙명이고, 이것은 지속적으로 위기의 규모와 폭발력을 키울 것이다. 자본가 국가의 확대되는 개입은 자본주의 한계 내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침식이다. 국가라는 형태로 사회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하지 않는다면, 이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위기와 모순을 조금이라도 유예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없다. 오늘날 국가의 개입은 불가피하다. 자본주의 경제의 불안정성이 나날이 증대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사회적 재난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지속적으로 불러올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본가 계급은 이 국가를 더욱더 분명하게 자본가 계급의 국가로 통제하고 활용하려 발악한다. 이것은 자본가 국가와 자본가들 사이의 융합을 가속화하고, 자본가 국가의 계급적 본질과 반동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 계급이 착취를 통해 쌓아 올린 거대한 부의 성을 허물어 노동자 계급의 일자리와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국가를 갈구한다. 정부 재정을 한 줌 착취자에게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생존을 위해 투입하는 국가를 갈구한다. 생산-유통을 대담하게 사회적으로 통제해 재난과 위기를 극복하는 국가를 갈구한다. 자본가의 이윤논리에서 벗어나 거대한 사회적 생산수단들을 전면적으로 국유화해 사회의 공동체적 원리에 따라 운영하는 국가를 갈구한다. 바로 이렇게 경제와 정치가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며 하나로 결합하는 체제가 바로 사회주의다. 파산하는 자유주의 뒤편에서 사회주의는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