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다시 마르크스주의 연재#4] 국가와 혁명,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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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그래, 다시 마르크스주의 연재#4] 국가와 혁명,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계승

  • 최영익
  • 등록 2026.02.11 12:20
  • 조회수 66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 운동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정치 노선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이었다. 자기해방 운동의 전진, 즉 노동자 계급 스스로의 발전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촉진하고 계급 투쟁의 선두에 서서 안내하는 것, 이것이 마르크스가 제기했던 사회주의자들의 역사적 임무였다.

 

사진: 1917년 6월 러시아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는 자본주의 국가를 대체할 노동자권력의 현실태였다. (편집자 주)

 

4부. 국가와 혁명,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계승

 

1. 자본주의 극복과 노동자 계급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분석하면서 마르크스는 갈수록 반동화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체제로 대체될 수밖에 없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특히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발전함으로써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나날이 창출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그러나 사회적, 집단적 생산력을 담고 있는 거대한 작업장과 기계가, 또한 이것들의 전 세계적 생산 연결망이 그 자체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혁명을 가능케 하는 물질적 토대를 제공할 뿐이다. 혁명의 역사적 주체는 오직 살아 있는 인간이다. 이러한 혁명의 주체라는 문제를 간과한다면, 마르크스주의는 대단히 불완전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 주체가 누구인가와 관련해 아주 분명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입장을 개진했다. 바로 노동자 계급이었다. 

 

왜 노동자 계급인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모순의 결과로부터 신음하고 있는 피착취 계급만이 혁명의 담당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갈수록 반동화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중간 계급, 심지어 자본가 계급도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자본가 계급은 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만 자기 이익을 실현할 수 있다. 중간 계급은 약간의 성공 가능성에 마취돼 자본주의에 굴복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은 다르다. 노동자 계급은 갈수록 ‘무산자’의 성격이 확고해진다.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인 노동력을 제외하면, 노동자는 다른 어떤 생존수단도 갖지 못한다. 소기업 같은 소규모 자본이 널리 퍼져 있던 옛날에는 성공해서 사장이 되는 것을 조금은 꿈꿀 수 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그런 가능성은 닫히고 있다. 날 때부터 재벌이나 사장의 아들딸이 아닌 마당에, 평범한 노동자가 자본가가 되는 문은 사실상 닫혀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노동자는 이 체제에서 자신이 더욱 보잘것없고 무기력한 지경으로 추락해 간다고 느낀다.

 

마르크스는 고통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혁명적 해결책을 단호하게 지지할 수 있는 계급만이 혁명적 과업을 일관되게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점에서 중간 계급은 자격 미달이었다. 왜냐하면 중간 계급은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면서, 유산자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에 미련을 두기 때문이다. 작은 농지나 가게를 갖고 있는 중간 계급은 갈수록 성공 확률이 떨어짐에도, 자신이 보유한 작은 생산수단이나 교환수단에 여전히 미련을 갖는다. 이들은 무산자의 혁명 대신, 유산자로서 성공을 꿈꾼다. 작은 사장에서 큰 사장으로 도약하는 것 즉, 중간 계급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도약하는 것에 미련을 둔다.

 

반면 노동자에게는 그런 미련이 갈수록 사라진다. 노동자가 작은 가게를 차리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직장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해고된 결과 어쩔 수 없이 택하는 불행한 결과일 뿐이다. 양질의 일자리만 보장된다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자영업을 때려치울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사회의 생산수단 중 더욱 결정적인 부분이 소수 자본가 수중에 집적 집중될수록, 그 반대편에서는 ‘무산자’로서의 노동자의 처지가 더욱 확고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무산자인 노동자에서 유산자인 자본가로 도약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결과 노동자는 유산자가 아니라 무산자로서, 개인이 아니라 단결된 전체로서만 해방될 수 있음을 갈수록 분명하게 느낀다. 모든 생산수단을 사회의 공동 소유로 전환해야만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점이 노동자에게는 갈수록 뚜렷해진다. 이것은 노동자 운동을 혁명적 방향으로 이끄는 박차가 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단결하고, 이 단결의 범위가 확장될수록 노동자에게 ‘함께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생산수단을 사회적 공동 소유로 전환하는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음이 분명해진다고 보았다. ‘모든 노동자가 하나로 단결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때’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공동의 해방의 길이 바로 사회주의라고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자 운동을 하나의 단결된 대오로 조직하는 데 결정적 의미를 부여했다.

  

가장 결정적인 질문

 

하지만 노동자 계급을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로 제기하는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몇 가지 주요한 반론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반론은 자본가 계급의 온갖 지배 책략과 힘을 능히 분쇄할 수 있을 만큼 노동자 계급이 강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반론은 결국 ‘혁명의 주인공으로서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불신’을 깔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아주 분명하게 대답했다. 마르크스는 ‘고통받는 것’만으로는 혁명 계급의 자격을 획득할 수 없고, 갈수록 그 힘이 강화되는 계급, 그래서 기존 지배 계급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계급만이 혁명 계급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계급이 바로 그런 계급이었다.

 

우선 노동자 계급은 갈수록 사회 내에서 다수를 점해 간다. 중간 계급은 몰락해 다수가 노동자 계급으로 전화된다. 산업과 업종은 변화할지라도, 노동자 계급은 모든 곳에서 더욱 결정적인 다수가 되고 있다. 초기에는 광업, 제조업에서 출발했던 노동자들이 의료, 유통, 서비스 등 온갖 산업 분야에서 다수자로 모습을 드러낸다. 사무, 금융, 연구, 기술, 교육, 공무원, 언론 분야에서도 더욱 결정적인 다수가 특권적 피고용인에서 일반 노동자로 급속하게 바뀌고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발전의 실을 따라 노동자 계급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중국,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최근 수십 년 사이에 10억 명이 넘는 새로운 노동자 계급이 탄생했다. 이 숫자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시기 전 세계 노동자 계급을 합한 숫자보다 훨씬 더 많다.

 

숫자는 노동자 계급이 가진 위력의 일부만을 보여 준다. 더 결정적인 것은 노동자 계급이 가동하고 있는 사회적 생산능력의 규모다. 고도로 집단적으로 조직된 대작업장 노동자 한 명이 가동하는 사회적 생산력은 중간 계급 한 명이 가내수공업이나 농장, 가게에서 가동하는 사회적 생산력에 비해 몇 배, 심지어 수십 배 이상 크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이 전체 사회에서 차지하는 인구 비중에 비해, 노동자 계급이 가동하는 사회적 생산력의 규모는 훨씬 더 크다. 아프리카나 중동의 극히 후진적인 몇몇 나라를 제외한다면,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발전한 나라 대부분에서 노동자 계급이 가동하고 있는 사회적 생산력은 90%에 육박하거나 그것을 상회한다.

 

이것은 소극적, 방어적 차원에서는 노동자 파업의 힘을 극대화한다. 더 나아가 적극적, 공세적 차원에서 이는 노동자 혁명의 힘, 그리고 노동자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힘을 극대화한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수백만 시위는 노동자 파업과 결합되지 않는 한 자본주의 생산을 결코 타격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력이 결집된 주요 산업에서 전개하는 노동자 파업은 즉각 자본주의 사회를 코너로 몰아붙인다. 게다가 거리 시위는 그 자체로는 대안 사회를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들불처럼 확대되고 혁명적 지향을 띠는 노동자 파업은 새로운 생산 체제를 수립함과 동시에, 국가를 뿌리에서부터 완전히 재조직할 수 있는 위대한 조직, 즉 경제와 정치를 하나로 융합한 ‘노동자평의회’를 잉태한다. 

 

2. 노동자 계급이 역사의 주인이 된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혁명의 괴물이 자라난다면, 자본가 계급은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 노동자 계급의 힘을 줄여 놓으려 발악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혁명을 예방하는 전략을 집행하면, 노동자 혁명을 저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르크스는 그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의 힘을 증대시키지 않는 자본주의 발전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한대의 축적욕과 경쟁이 불러오는 자본의 집적 집중은 노동자를 거대한 규모로 집적하고 집중할 수밖에 없다. 좁은 국내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자본의 필사적인 해외 진출 경향은 노동자 계급을 세계 전반에 확산할 수밖에 없다. 다른 무엇보다 자본의 이윤의 원천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다. 노동자 계급을 지워 버린다면, 자본의 이윤마저 지워진다. 이는 ‘임금노동’의 뒷면이 바로 ‘자본’이라는 사실, 즉 자본-임금노동이라는 관계, 모순, 대립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론이다. 그 점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결정적 힘은 바로 자본 그 자체에서 나온다고 규정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본주의에 맞선 혁명의 주인공인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불신이 거듭해서 등장한다. 심지어는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도 그런 주장이 등장하곤 한다. 그런 주장의 물질적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시적으로 노동자 운동이 퇴보하거나 혁명적 지향을 잃고 비틀거리는 위기 상황, 또는 격렬한 계급 투쟁에서 일시적으로 노동자 운동이 패배한 결과,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힘이 잠시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이런 상황에서 용기와 혁명적 침착성을 잃은 사람들은 ‘노동자 계급에게 안녕을 고할 때’라고 외치면서, 노동자 계급을 대신하는 모종의 새로운 혁명 주체를 고안하기 시작한다.

 

마르크스의 접근은 달랐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이 혁명의 주인공으로 도약하는 과정은 결코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며, 가장 처절한 계급 투쟁 속에서 이뤄지는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역사적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계급 투쟁, 그리고 이 계급 투쟁 속에서 이뤄지는 전 세계 노동자 계급의 총단결, 나아가서 사회주의라는 혁명적 대안에 대한 확신을 통해서만 노동자 계급은 비로소 혁명의 계급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그런 역사적 과정이 필수적인 이유로서, 그 과정을 통해서만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가 심어 준 오물을 토해 내면서 새로운 공동체 사회를 열 수 있는 위대한 자격과 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 역사적 과정을 촉진하고 맨 앞에서 이론적, 실천적으로 이끌고 안내하는 선봉장이 되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자들의 역사적 역할임을 마르크스는 강조했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 과정은 마르크스의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과정이었다. 착취자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본가 계급의 교활하고도 필사적인 책동이 고도화, 전면화됐기 때문이다. 자본가 계급은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의식을 해체하는 갖가지 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해 왔고 갈고 다듬어 왔다. 개량주의, 조합주의, 관료주의의 영향력을 활용해 노동자 운동을 소부르주아적, 부르주아적 의식으로 마취시키는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 전략은 갈수록 고도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기본 노선은 여전히 옳다. 노동자 계급의 힘은 양적, 질적으로 더욱 강해지고 있다. 노동자 계급의 수, 세계적 연결, 사회적 생산력에서 차지하는 비중 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무산자로서 노동자 계급의 성격, 사회주의 없이는 해방될 수 없는 노동자 계급의 처지도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더 이상 생산력 발전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이 초래하는 불평등의 확대, 야만화 경향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와 함께 개량주의, 조합주의, 관료주의와 같은, 노동자 운동의 거대한 혁명적 힘을 거세하는 내부 요소들에 맞서야만 노동자 운동을 전진시킬 수 있다는 노동자들의 자각도 성장하고 있다, 이런 내부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는 내적 힘을 부단히 성장시켜 갈 것이다. 3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펼쳐진 노동자 운동의 수많은 실천 경험들이 그 길을 안내할 것이다.

 

아직 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해지지는 못했지만, 최근 200년 사이에 자본주의에 맞서 벌어진 모든 결정적 투쟁에는 노동자 계급이 변함없이 중심에 서 있었다. 앞으로도 그 점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려는 모든 진지한 투사들은 바로 이 노동자 계급을 향해야 한다. 이 노동자 계급 속에서만 자본주의를 때려잡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 투쟁을 통해 노동자 계급이 바로 그 위대한 힘을 자각하고, 자본주의가 심어 준 온갖 오물을 토해 내면서 자신의 힘을 현실화할 때, 아무리 고도한 자본주의 체제의 시도도 결국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것이다.

 

3. 국가란 무엇인가?(국가의 본질)

  

마르크스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되지 않은 통합물로 접근했다. 특히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에서 그 점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경찰, 군대, 관료제로 구성된 자본가 국가가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등장하기 이전에, 자본가 계급은 경제적 지배권을 이미 거머쥐고 있었다. 봉건적 생산력을 대체하는 자본주의 생산력이 기계제 대공업과 시장경제의 발전 속에서 이미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상태에서, 자본가 계급은 국가권력을 틀어쥐는 정치 혁명으로 전진했다. 경제 혁명이 정치 혁명에 앞서 이뤄진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봉건제를 철폐하는 자본주의 혁명이 ‘유산자 계급’의 혁명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봉건지주 계급이라는 하나의 유산자를 자본가 계급이라는 다른 하나의 유산자로 바꾸는 것에 불과했으므로, 이 유산자 혁명(부르주아 혁명)에 대한 기존 유산자들(지주계급)의 반발은 상당히 누그러질 수 있었다. 프랑스 같은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상당수 자본주의 국가에서 부르주아 혁명은 봉건지주 계급과 신흥 자본가 계급 사이의 타협 혹은 기존 지주 계급 일부가 직접 자본가 계급이 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봉건지대가 자본주의지대로 전환해 자본가 계급이 거둔 이윤의 일부를 지대로 분배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만 보더라도 자본가 계급과 봉건지주 계급 사이의 타협의 물질적 기초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른 무엇보다도 봉건 체제 내에서 상품교환을 매개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성장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정치적으로 봉건권력이 지배하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성장을 늦추었고, 반대로 급진적 부르주아 혁명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경제적으로 확산하는 것을 촉진했다.

 

이것은 정치권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본가 계급은 봉건 국가권력을 굳이 타도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수선해서, 나아가서 봉건 국가가 물려준 경찰, 군대, 관료제를 더욱 완성시켜 자본주의 발전을 추구하는 자본가 계급의 국가로 전환시키는 것이 자본가 계급에게 훨씬 유리했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경험은 모든 나라의 자본가 계급을 일깨웠다. 봉건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수립한 프랑스의 부르주아 민주공화정은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했지만, 동시에 프랑스 노동자 계급에게 혁명적 투쟁의 기회를 제공했다. 1848년 혁명, 특히 1871년 파리코뮌의 경험은 그것을 명확히 보여 줬다.

 

그 뒤 모든 나라의 자본가 계급은 봉건지주권력이 형성해 놓은 반동적 국가권력 즉, 경찰, 상비군, 국가 관료 체계가 다른 누구보다도 자본가 계급 자신에게 유용하다는 점, 즉 원래는 자본가 계급이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이 낡은 반동적 국가권력이 노동자 계급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노동자 투쟁을 진압하는 데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게 됐다. 봉건 국가권력을 타도하기보다는 지주 계급 및 기존 봉건 국가권력과의 정치적 타협을 통해 봉건 국가를 자본가 국가로 점차 개조해 가는 것이 자본가 계급의 전략적 방침으로 자리 잡아 갔다.

 

계급 투쟁

 

모든 종류의 유산자 계급의 지배를 철폐하면서 무계급 사회를 열어젖히는 무산자 혁명이 노동자 혁명의 본질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존 지배 계급과의 모종의 타협이라는 것이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 단계에서는 애당초 성립할 수 없다.

 

우선 사회주의 혁명은 생산수단을 사회화함으로써 자본가 계급을 비롯한 모든 유산자 계급의 착취의 원천을 고갈시켜 버린다. 사회주의 혁명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 이윤을 쌓아 가는 자본가가 존재하는 것은 결코 상상할 수 없다. 공장과 기계, 작업장, 원자재 모두가 사회화된 상태에서 그 어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고용될 것이며, 착취를 허용하겠는가? 바로 그 점 때문에, 혁명이 그 외관에서 평화적으로 이뤄지느냐와 무관하게, 모든 착취 계급은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동원해 사회주의 혁명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개량적’ 방식의 혁명이 애당초 성립할 수 없는 본질적 이유다.

 

마르크스는 그 점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기존 혁명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거듭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혁명이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근본 혁명’이고, 따라서 이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격렬하고 치열한 계급 투쟁과 함께, 노동자 계급의 힘과 의식, 조직이 엄청나게 높은 수준으로 고양되고 발휘돼야 함을 지적했다. 

 

정치 혁명과 경제 혁명

 

부르주아 혁명과 달리, 노동자 혁명에서 정치 혁명과 경제 혁명은 동시적으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연결해 진행할 수밖에 없다. 국가권력을 장악해서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전면적으로 대변하고 착취 계급의 반혁명을 진압하는 정치 혁명 없이는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경제 혁명)를 도저히 실현할 수 없다.

 

우선 사회주의 경제는 개별 기업 수준에서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장악해 스스로 운영하는 방식으로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시도는 있을 수는 있으며, 또한 노동자 혁명의 출발점에서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자본가의 소유권 보호를 본질적 기능으로 삼는 자본가 국가의 탄압과 즉각 맞닥뜨린다. 자본가 국가의 탄압을 넘어서는 정치적 힘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즉, 국가권력이 노동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개별 기업 수준의 노동자 자주관리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다음으로 사회주의 경제의 본질 자체가 개별 기업 수준이 아니라, 심지어는 개별 산업 수준이 아니라 전체 사회 수준에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태내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지만,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제약 때문에 제대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을 전면적으로 해방시키는 데 사회주의 경제의 본질이 있다. ‘세계 혁명’ 없이는 사회주의의 전면화가 불가능한 것도, 바로 그러한 사회주의 경제의 본질적 속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주요한 결정적 생산수단을 사회적 공동 소유로 전환시키지 않고서는 사회주의 경제는 제대로 출발할 수조차 없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통해 국가권력을 노동자 계급의 수중에 틀어쥐고, 이 힘을 바탕으로 모든 주요한 생산수단과 교환수단(가령 은행)을 국유화(사회화)함으로써만 실현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노동자 계급에게 정치적 힘(국가권력 장악)은 곧 경제적 힘(사회주의 건설)이 아닐 수 없다. 반대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경제적 고지를 향해 전진하지 않는다면, 정치적 힘(국가권력 장악)은 곧 부식돼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 계급을 착취로부터 해방시켜 경제의 주인공으로 도약시키는 경제 혁명으로 전진하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은 착취자들의 지배를 경제적으로 용인하는 그러한 국가를 위해 결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동자 혁명에서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은 뗄 수 없는 하나로 결합된다.

 

어떤 국가든 그 본질은 ‘특정 계급의 정치적 지배기관’이다. 자본가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지배기관이며, 이 국가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독재를 통해 자본가 계급의 착취를 뒷받침하는 것을 본질적 사명으로 삼는다. 노동자 국가도 이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국가란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지배기관이며, 이 국가는 자본가 계급에 대한 투쟁을 통해 모든 계급과 착취를 철폐하는 것을 본질적 사명으로 삼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노동자 국가는 자신의 소멸을 준비할 수밖에 없다. 국가가 계급지배의 기관인 이상, 사회주의 건설의 전진에 따라 계급 자체가 소멸해 간다면 노동자 국가 또한 계급 지배기관으로서의 역사적 소임을 마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계급 사회로 전진하면, 특정 계급의 지배기관으로서의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게 된다. 군대나 억압적 경찰은 소멸할 것이고, 단지 공동체 사회의 운영과 관리, 계획화를 위한 역할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런 역할 또한 더 이상 국가기구의 관료제에 의해 수행될 이유가 없게 된다. 생산 공동체를 대표하는 자들이 운영하는 민주적 기관에 의해 사회가 운영될 것이다. 바로 그 사회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노동자 생산 공동체 사회)’라고 불렀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역사적 과정에 대응하는 정치적 도구를 마르크스는 ‘노동자 국가’라고 불렀다. 이 노동자 국가는 더 이상 억눌러야 할 자본가 계급이 존재하지 않게 됨으로써 자연스레 그 과정에서 축소되고 소멸해 가는 국가인데, 그럼에도 이 국가는 그 탄생 시부터 노동자 대중의 민주적이고 직접적인 통제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더 이상 통상적인 ‘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마르크스는 강조했다. 

 

4. 마르크스의 정치 노선: 국가, 민주주의, 정치 투쟁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긴밀한 결합이란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정치 노선을 수립했다. 마르크스는 정치란 일종의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보면서 정치 투쟁에 기권하며 경제 투쟁만을 강조했던, 다양한 무정부주의 조류들에 반대했다. 그러면서 노동자 계급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정치 투쟁이 사활적으로 중요한 요소라고 거듭 강조했다.

 

우선 마르크스는 자본가 국가를 대체하는 노동자 국가 건설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갖는 중요성에 주목했다. 비록 노동자 운동의 궁극적 목표가 모든 형태의 국가를 없애는 것일지라도,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정치 투쟁을 통한 정치권력 장악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그 결론에 마르크스가 이르게 되는 데는 노동자 투쟁의 역사적 경험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파리코뮌을 통해 프랑스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와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철폐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 주었다. 바로 파리코뮌과 같은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다. 당시 파리 노동자 계급은 프루동주의 같은 ‘비사회주의적 지도자’들이나 블랑키스트 같은 무정부주의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사회주의로 전진하는 게 아니라 소생산으로 후퇴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맞서고자 했던 프루동주의자들은 은행에 대한 몰수 국유화 대신 자본주의 은행을 보호했다. 블랑키스트들은 노동자 민중의 집단적 힘을 동원하기보다는 소수 음모 집단의 힘에 의존했다. 특히 모든 국가를 악으로 보고 거부했던 무정부주의 입장은 노동자 국가를 수립하는 결정적 과제로부터 도망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파리코뮌에서, 파리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계급적 본능과 현실의 요구에 발맞춰 자신이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찾아 움직였다. 자본가 국가를 넘어서 노동자 국가를 수립하는 데로 전진한 것이다. 노동자 민병대를 근간으로,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이 직접 대표자를 선출해 수립했던 파리코뮌은 노동자 계급 정부로서의 본질을 드러냈다.

 

비록 충분히 단련돼 있지 못해 사회주의로 직선적으로 전진하지도 못했고, 노동자 국가로서 단호하게 자본가 계급의 반혁명에 대응하지 못해 붕괴하고 말았지만, 파리 노동자 계급이 수립한 파리코뮌과 같은 노동자 정부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결정적 수단임을 마르크스는 간파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정치 노선의 근간이 됐다. 그 핵심은 노동자 국가(권력)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 투쟁 속에서만 노동자 계급은 해방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으로 마르크스는 그러한 정치적 힘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활용하는 정치적 투쟁 또한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란 껍데기 민주주의에 불과하고, 부르주아 선거란 노동자를 지배할 자들을 주기적으로 뽑는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선거나 의회, 특히 언론, 출판, 조직화의 자유를 비롯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노동자의 혁명적 입장을 선전 선동하고,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조직화를 촉진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이라는 점에도 주목했다.

 

마르크스는 비록 낡은 것일지라도, 그것이 새로운 것이 등장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면, 그 마지막 한 방울까지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투쟁, 즉 대립물의 투쟁의 초기 단계는 낡은 것 내부에서 진행된다는 점을 주목했던 것이다. 낡은 것(부르주아 민주주의)을 대체하는 새로운 것(노동자 민주주의, 노동자권력)이 완전한 모습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낡은 것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격렬한 투쟁의 과정이 일차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낡은 것(부르주아 민주주의)을 통해서는 노동자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대립물의 투쟁이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낡은 것 내부에서가 아니라, 낡은 것 외부에 존재하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사이의 전면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새로운 단계로의 이행, 즉 혁명적 이행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또한 낡은 것 내부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는 낡은 것과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새로운 것을 키워 내고 성숙시키는 역사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활용하되,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포섭되고 그것을 영구적 정치 체제로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허구성과 한계를 폭로하고, 그것을 대체하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운동과 조직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정치적 노선은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정치적 수단(선거, 의회)을 계급 투쟁의 일정한 단계에서 혁명적으로 활용하기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구분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마르크스의 정치적 노선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절대화하고 영구화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운동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구조 바깥에서 건설해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점진적 개량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구분했다.

 

국가자본주의 체제

 

마르크스가 제기했던 사회주의는 구소련, 중국, 북한 등 국가자본주의 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가를 노동자 민중이 자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관료 집단이 통제하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사회화는 요원하다. 이런 관료적 국유화 형태는 물론 자유주의와는 확연히 대립된다. 그러나 여기서 국가는 여전히 국가 관료 집단이 통제하는 국가이며, 이 국가는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한다.

 

이런 체제는 자유주의만큼이나 심지어는 자유주의 이상으로 갖가지 새로운 폐해를 양산한다. 노동자 민중에 의해 집단적으로 이뤄지는 민주적 계획화와 대립되는 관료적 계획화는 갖가지 낭비와 비합리성을 낳아 경제 안정을 위협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여기서 국가는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국가이므로, 경제 발전의 모든 성과는 노동자 민중을 희생시킨 대가로 얻어질 뿐이다.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이런 한계는 코로나19 재난 상황에서도 여실히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관료자본가 계급은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 전염병 발생을 숨기면서 재난 확산을 방조했다. 수많은 노동자 민중의 생명을 담보로 지금도 중국 관료자본가 계급은 관료주의 생산 체제를 재가동하기 위해 모험을 감수하고 있다. 재난에 맞서 노동자 민중의 자주적 통제력을 끌어내지 않고 관료적 강제 조치에 의존한 결과, 여전히 통계 조작이 횡행하고 전염병의 위험은 제대로 차단되지 않고 있다. 북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아예 전염병의 확산 정도, 희생자 규모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런 체제는 파산하는 자유주의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자유주의의 맞은편에 서 있는 쌍둥이에 불과하다. 서방의 자유주의 체제와 구소련, 중국, 북한의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서로가 서로의 존립 근거로 작동하고 있을 뿐, 공히 노동자 민중의 이해 및 사회적 진보와는 대립점에 서 있다. 두 종류의 국가 체제 모두 오늘날 세계가 직면해 있는 위기와 모순을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없으며, 마르크스가 제기한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의 맞은편에 서 있는 변종 자본주의 지배 체제일 뿐이다.

 

5.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의 정치적 노선은 노동자 계급의 독립적 정당(사회주의 노동자정당)에 대한 강조로 특징지을 수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등장과 계급 투쟁의 고도화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 계급인 자본가 계급, 중간 계급, 노동자 계급 사이의 정치적 대결이 더욱 의식적이고 전면적인 양상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이 세계 역사상 최초로 전면적으로 충돌했던, 프랑스의 1848년 전투는 ‘정당’을 매개하지 않고서도 전투적 서클과 다양한 소규모 조직의 연합을 통해서도 가능했던 사실상의 마지막 전투였다. 두 가지의 결정적인 상황 변화가 일어났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자본가 국가는 경찰과 상비군으로 아직 중무장하지 않은 원시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848년 프랑스 전투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노동자 운동의 혁명적 힘에 놀란 자본가 계급은 봉건 국가로부터 물려받은 경찰과 상비군, 관료제를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체계적으로 강화해 자본가 국가를 정비했다. 무장한 소규모 블랑키스트 서클들의 연합으로는 이런 거대한 자본가 국가와 결코 맞설 수 없었다. 전체 노동자 운동을 하나로 결집시켜 자본가 국가에 맞선 전면적인 정치 투쟁을 이끌 수 있는 강력한 노동자 조직이 필요했다. 바로 노동자정당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억압적, 관료적 장치에 더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교활한 지배가 결합했다.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를 통해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지배기관인 자본가 국가를 ‘국민의 국가’로 둔갑시켰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가기구와 사적(민간) 부문을 긴밀히 하나로 융합해, 자본주의 체제를 보호하는 촘촘한 그물망을 창출했다. 학교, 교회, 언론, 부르주아 시민 조직 등을 총망라하는 사적 부르주아기구들을 육성해, 노동자 계급의 의식을 마취시키고 분열시키려 했다. 이 사적 부르주아기구들은 자본가 국가를 외곽에서 지지 엄호했고, 핵심 지도자들을 자본가 국가에 공급했다. 자본가 계급의 공적(국가), 사적 부문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노동자 계급에 대한 전투를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자본가정당이 떠맡았다. 자본가정당은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지도기관이었고, 그들의 대중적 전위를 하나로 결합해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이끄는 핵심 참모본부였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노동자 운동 또한 훨씬 높은 수준으로 고양돼야 했다.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전위를 결속한 노동자정당만이 부르주아 국가, 부르주아 시민 조직에 맞서 노동자 계급 전체를 하나로 단결시키고 정치적 방향타를 제공하면서 자본가 계급에 맞선 전투를 진두지휘할 수 있었다. 제1인터내셔널, 그리고 이후 국가 단위로 형성된 대중적 사회주의정당들이 그것의 표현이었는데, 마르크스는 여기서 이론적, 실천적 중심으로 분투했다.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란 단결한 노동자 계급의 공동의 이해와 요구의 과학적 표현이었다. 또한 마르크스는 모든 계급 단결 투쟁은 필연적으로 정치 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정당이란 노동자 계급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기관이어야 하며, 나아가서 그 단결은 전 세계 노동자 계급의 총단결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국가별로 나뉜 노동자정당 대신, 국적을 초월해 하나로 단결한 노동자정당(인터내셔널)의 형식을 지지했고 지향했다.

 

물론 마르크스는 그것에 기계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다. 제1인터내셔널을 해산하고 제2인터내셔널이 수립되기까지 수십 년 동안, 마르크스는 독일의 사회주의 노동자정당을 중심으로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사회주의정당을 건설하는 데 집중했다. 제1인터내셔널 시기와는 달리,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노동자 운동이 이미 대중화된 상황에서는 이것을 반영하는 국가별 사회주의정당들의 토대 위에서 건설되는 인터내셔널만이 세계 노동자 운동을 이끄는 진정한 인터내셔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그 시기에조차 이 사회주의 노동자정당들이 민족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고 세계 노동자 계급 총단결 투쟁의 관점에서 전진하도록, 즉 인터내셔널의 관점에서 전진하도록 고무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관념적으로 설교하거나 노동자 운동에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운동 스스로의 발전을 통해서, 그리고 노동자 운동의 계급적 단결의 확대를 통해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사회주의를 해방의 유일한 길로 선택하게 하려 했다. 이것은 사회주의 사회, 나아가서 공산주의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힘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사회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도약해 나가는 노동자 계급의 발전에 있다는 마르크스의 굳센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 운동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정치 노선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이었다.

 

그러한 자기해방 운동의 전진, 즉 노동자 계급 스스로의 발전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촉진하고 계급 투쟁의 선두에 서서 안내하는 것,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제기했던 사회주의자들의 역사적 임무였다. 사회주의 사상은 그러한 노동자 계급의 발전을 통해 도달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 계급 해방의 과학적 길이고, 사회주의자의 실천은 바로 그러한 발전의 핵심 과정인 계급 투쟁을 이끄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 두 가지 과제(이론적 과제와 실천적 과제)는 사회주의정당에서 반드시 하나로 융합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결코 완벽하지 않으며,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실천 속에서 더욱 날카롭게 벼려지고 구체화해야 하지만, 이런 마르크스의 노선은 지금까지도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근본 방향을 제시한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방향을 따라, 부단한 이론적 활동과 실천적 분투를 통해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완성해 나가는 것,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를 계승하고 따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늘날 해야 할 역사적 임무다.  

 

6. 이론과 실천의 결합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현실적 의미를 증명해야 한다.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사유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 문제다. …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마르크스에게 이론은 세계를 변혁하려는 인간의 능동적 의지를 북돋는 결정적 무기였다. 이 의지는 추상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관념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물질적 운동 자체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마르크스는 실천 속에서 변화하는 사물과 만나고 치열하게 씨름하는 과정에서만 비로소 사물(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실천 없는 이론’이란 애당초 그에게는 성립 불가능한 것이거나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인간의 실천은 의식적인 능동적 행위이며, 거꾸로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 인간의 의식이 더 멀리 전진하고 현실을 더 정확히 반영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마르크스 철학의 핵심을 그람시는 ‘실천 철학’이라고 불렀다.

 

이런 접근법은 그 자신의 철학에도 적용된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그의 인생 좌우명이었던 ‘투쟁(실천)’과 뗄 수 없이 연결돼 있다. 마르크스는 투철한 혁명가였다. 그의 분노는 자본주의 착취 체제를 정면으로 향했고, 그의 의지는 공산주의 해방을 갈구했다. 이 분노와 의지는 오직 노동자 계급 속에서만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었고, 마르크스는 이 노동자 계급의 운동과 자신의 실천을 일체화했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자 운동 속으로 자신의 혁명적 의식(사회주의)을 불어넣었고, 반대로 노동자 운동과 함께함으로써 자신의 혁명적 의식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면서 현실 사회의 운동을 더 정확히 의식적으로 포착해 갈 수 있었다. 가령 노동자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의는 파리코뮌을 수립한 프랑스 노동자 계급의 운동으로부터 (마르크스 자신이 말했던 것 그대로) ‘발견’한 것이었다.

 

잉여가치(착취)에 대한 발견 또한 마찬가지다. 독일 자본가들의 착취에 대한 분노가 없었다면, 또한 ‘영국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관심과 분노가 없었다면, 나아가서 이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으로 떨쳐 일어나지 않았다면, 마르크스는 결코 잉여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케인스는 《자본론》을 읽었지만, “이 따위 책이 어찌하여 그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 아연해진다. 너무나 지루하고 시대착오적이며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가득 찬 책이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이는 그의 지적 능력의 문제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그가 혁명적 실천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부르주아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오직 자본주의에 맞서 노동자 계급과 어깨 걸고 투쟁하려는 사람들에게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 이후의 세계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발전한 모든 사회 형태를 운동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고, 따라서 일시적인 것으로 여기며, 또 그 본질상 비판적, 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도 제약받지 않는다고 마르크스는 규정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사상에도 적용되는 진리였다.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교조적 접근은 결코 마르크스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생전에 마르크스는 현실의 운동을 정확히 포착했지만, 현실의 운동은 결코 멈추지 않았기에 미래의 모든 운동을 마르크스가 미리 발견할 수도 없었고, 대략적인 예측을 넘어 정확히 구체적으로 예견할 수도 없었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 경쟁 자본주의였고, 독점자본은 막 태동하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금융자본과 독점자본의 발전, 그리고 이것이 진화한 국가독점자본, 나아가서 독점자본과 자본수출을 토대로 자라난 제국주의에 대한 이론을 마르크스가 전면적으로 발전시킬 수는 없었다. 또한 마르크스는 노동자 운동이 해방을 향한 실천 과정에서 자신 속에 스며든 자본주의적 요소에 맞선 단호한 내부 투쟁이 필요하다고 인식했지만, 그것이 어떤 구체적 형태로 미래에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 결코 예견할 수 없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실천철학을 계승한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레닌과 트로츠키 등)에 의해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마르크스 생전의 주장을 교조처럼 떠받드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혁명적 관점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현실에 맞게 마르크스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통해서만 비로소 지켜질 수 있다.

  

마르크스 이후의 실천이 드러낸 것

 

“혁명이 필요한 이유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지배 계급을 타도할 수 없기 때문일 뿐 아니라, 지배 계급을 타도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낡은 오물을 말끔히 씻어 버리고 새 사회의 토대를 놓는 데 적합해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러시아 혁명을 비롯한 세계 혁명적 노동자 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의 이 짧은 언명의 의미가 더 분명해졌다. 1917년 러시아에서 탄생한 위대한 노동자 국가는 192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관료 집단의 반혁명에 파괴되고 말았다. 1918년, 1923년 독일, 1925~1927년 중국, 1936년 스페인, 1945년 직후 이탈리아, 그리스, 1956년 헝가리 등 수많은 국가들에서 노동자 혁명의 기회가 자라났고, 노동자 계급은 놀랄만한 혁명적 잠재력을 드러냈지만 이 모든 혁명들은 실패로 돌아갔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노동자정당과 노동자 국가, 노동조합 등 노동자 운동 조직의 상층에서 관료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흐름들이 번성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 생전에도 이런 흐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진실한 대중적 노동조합이나 노동자정당이라면, 노동자 대중에 의해 이런 약점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르크스 사후, 노동자 운동 상층에서 발생하는 기회주의적 흐름이 결코 간단히 격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오히려 바로 이와 같은 노동자 운동 내부의 취약성(노동자 운동이 뱉어 내지 못한 낡은 자본주의적 오물)이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는 결정적 버팀목이라는 점이 세계 대공황 그리고 1차, 2차 세계대전과 맞물린 계급 투쟁의 전면화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문제와 본격적으로 씨름하면서 혁명적 이론을 정식화하는 것은 후대 혁명가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레닌은 러시아의 혁명적 노동자 투사들과 결합한 실천적 분투를 통해,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전위들의 결집체인 혁명정당론을 정식화함으로써 이 과제에 응답했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의 파산의 뿌리를 밝히면서, 그에 맞서는 제3인터내셔널의 이론과 실천을 선도했다. 이런 작업은 트로츠키를 통해 계승됐다. 트로츠키는 구소련에서 관료 집단의 반혁명에 맞서 투쟁했고, 그런 실천과 연계해 혁명정당 운동을 제4인터내셔널로 구체화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론적, 실천적으로 완결되지 못했다. 그 미완의 과제를 레닌과 트로츠키, 로자, 그람시의 뒤를 이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이 치열한 실천 속에서, 그리고 이 실천과 긴밀히 연결된 이론적 탐구 속에서 완수하려 분투하고 있다. 거대한 노동자 운동, 그리고 이 운동이 배출한 혁명적 전위들(혁명정당)의 집단적 실천 속에서 진정 마르크스의 사상을 계승하는 혁명적 이론이 발전하게 될 것이다.

 

7. MZ세대와 마르크스주의

 

오늘날 한국의 MZ 젊은 세대들이 아직 마르크스주의를 향한 열광을 보여 주고 있지는 않다. 진실을 말하자면, 다수의 젊은 세대들이 경쟁주의의 포로가 되어, 자본주의 사상에 감염되어 있다. 학교 교육에서부터 주류 언론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들이 자본주의 사상에 열광하고 도취되어 있는 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드러내는 착취, 불평등, 전쟁, 야만이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와 불신, 의문을 끊임없이 잉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MZ 젊은 세대들이 점차 자본주의적 대안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주의적 대안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 배경이 될 것이다. 쓰디쓴 실제 경험은 무엇보다 훌륭한 선생님이 될 것이다.

 

‘MZ세대’가 노동조합을 결성하며 거치게 될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는 건 그 점에서 상당히 흥미롭다. 현재 많은 노조들이 MZ세대를 주요 기반으로 삼고 있음은 물론 사실이고, 그건 주목할 일이다. 하지만 자본가 언론이 부각시키는 노조의 조합원들이 MZ세대의 다수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중 작은 일부인 대기업 사무직, 연구직만을 대표할 뿐이다. 즉, 소위 MZ세대 노조들은 젊은이들 중에서 경쟁에서 그럭저럭 승리한 상층부 젊은이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출신 가정도 상대적으로 중간 계급 가정이 많다. 이러한 상황은 역설적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래에 겪게 될 모순과 변화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 준다. 잠시 경쟁에서 승리한 이들마저 이후 급격한 의식의 변화 앞에 설 수밖에 없다면, 경쟁에서 떠밀린 다수 젊은이들은 얼마나 거대한 변화를 맞이할 것인가?

 

최근 결성되는 대기업 사무직, 연구직 노조들이 내거는 깃발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직무와 능력에 걸맞은 보상 체계, 성과에 대한 확실한 보상 요구다. 이들은 직무급제, 성과급제 같은 경쟁주의 임금 체계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살벌한 경쟁을 인정한 가운데 ‘공정한 기준’을 적용하라는 것인데, 이게 ‘공정성’으로 규정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생산직 노동자를 비롯한 일반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꾸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민주노총 가입도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이런 노조의 탄생에 대해 자본가 언론과 정부 실세들은 MZ노조가 경쟁과 능력, 업무 기여도를 배제하는 기존 노조와는 달리 임금 체계에 대해 합리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며 큰 기대감을 보인다. 노동자를 분열시키고 자본의 입맛대로 부릴 수 있게 노동조합이 나서고 있으니 박수를 보낼 수밖에. 나아가서 기존 강성 노동조합들을 합리적인 노동조합, 즉 협조적인 노동조합으로, 자본의 정책을 자발적으로 집행하는 노동조합으로 재편할 수 있단 기대감도 숨기지 않는다. 과연 그들의 기대대로 상황이 흘러갈까?

 

대기업 사무연구직들은 상당히 특권화된 노동자들이었고, 중간 계급 의식에 강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들이 받는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노동의 특수성, 노동 시장에서의 특별한 지위, 고학력, 취업 경쟁 제도 등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그런데 사무자동화와 인공지능 등이 발달하면서, 그들이 누리던 과거의 특권적 지위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고, 안정적인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독립해서 사업으로 성공할 가능성도 거의 소멸했다. 어딜 가도 스카우터의 손길이 기다리던 것도 좋은 시절 얘기다. 이런 불안정성과 기득권 약화는 이들이 임금 인상 요구에 눈뜨고 노동조합이란 뜨거운 감자를 만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 점에서 대기업의 젊은 사무직, 연구직들이 노동조합 결성에 나서게 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중간 계급 의식에 물들어 있거나 노동 귀족적 상태에 있던 상층 사무연구직 노동자들이 그로부터 벗어나 노동 운동에 합류해 들어오는 출발점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본가 언론들의 환영인사는 그 점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노동조합들은 성과급 인상 요구나 자본의 일방통행식 통제 거부 등 골치 아픈 문제들을 일으킬 것이며, 특히 정리해고 같은 공격에 직면할 때 저항할 것이다. 이것은 중간 계급 혹은 노동 귀족적 지위를 가졌던 보수적인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버팀목에서 위험 요소로 변화하게 되는 역사적 과정을 반영한다.

 

하지만 대기업 사무직, 연구직 노조들의 등장이 자본주의에 위협만 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 귀족적 지위에 있는 노동자들의 조직, 혹은 중간 계급 요소에 강하게 영향받는 상층 노동자들의 조직은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성을 뒷받침하는 부문이기도 하다. 안정성과 기존의 특권적 지위를 위협받는 상층 노동자들이 노동 운동으로 들어올 때 이들은 불가피하게 소부르주아적, 노동 귀족적 오물을 함께 가지고 온다. 노동 운동이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영향력 확대는커녕 퇴보하면서 개량주의적, 기회주의적 추락으로 귀착될 수도 있다. 지금 자본가 언론이 보내는 환호는 그런 기대감과 함께 그렇게 활용하고자 하는 영악한 목적의식을 반영한다. 현재 대다수 언론을 지배하는 목소리는 바로 그런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이자, 자본가 계급의 계획이다. 대기업 사무연구직 노동조합이 갖는 취약성이 그런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그들이 내거는 공정한 경쟁을 통한 성과급제 요구, 그리고 새로운 노조 운동의 외투를 쓴 생산직 노동자들과의 분리주의 요구는 분명 자본주의적이다. 물론 그런 자본주의 의식에 대한 경계는 아주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만이 존재할까?

 

무엇보다 강력한 삶의 논리

 

관념적 설교로는 그들을 자본주의 의식으로부터 떼어 낼 수 없다. 하지만 삶의 객관적 논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어떤 관념으로도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그들의 뇌를 두드릴 것이다. 단적으로 성과급제 요구를 들어보자. 그들의 주장대로 경쟁논리를 수용하고 소위 ‘공정한 기준’을 세워 성과급제를 완전하게 집행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조합원 사이에서 피 말리는 경쟁이 일어날 것이다. 아무리 ‘공정한 기준’을 세우더라도, 누구는 승자가 돼 더 많은 성과급을 챙기고, 누구는 패자가 돼 피눈물을 삼킬 것이다. 단순히 임금의 문제를 떠나서, 자존심에 깊은 상처가 생길 것이다. 그 뒤에는 패자 사이에 ‘공정한 기준’에 대한 문제제기와 불만이 터져 나온다. 게다가 스스로 자초한 무한대의 경쟁의 링에서 그들 모두가 엄청난 스트레스와 삶의 질 저하를 맛볼 것이다. 애당초 노동자에게 ‘공정한 경쟁 기준’이란 존재할 수 없고, 경쟁논리를 수용하는 순간 노동자 모두가 자본의 포로가 된다는 점이 그들에게 분명해질 것이다. 그 앞에서 그들은 자신이 가진 관념이 얼마나 위험하고 모순적인지 쓰디쓴 경험으로 배울 수밖에 없다. 바로 거기에 마르크스주의가 그들에게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부심을 갖고 있는 MZ세대 노조를 지탱하기도 힘들어진다. 경쟁과 성과급제에 따른 분열과 대립이 노동조합이라는 집단적 기구의 존립을 지속적으로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그들이 단결과 노동조합을 유지하려 한다면, 다음의 선택지만 남는다. ‘공정한 경쟁의 기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성과급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최소한 개별 성과급이 아닌, 노동조합 내부의 분열의 싹을 최소화하는 임금 체계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은 IMF 때 부모 세대의 경험을 뼛속 깊이 기억하고 있다. 대기업의 안정성이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해고당했을 때의 처절한 고통과 절망을 알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함을 알고 있다. 이 냉혹함은 대기업 취업 경쟁의 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나타났지만, 동시에 해고에 대한 불안과 저항 의지를 잉태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들이 경쟁의 링에서 이룬 승리는 일시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이 든 노동자세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사무자동화, 신기술 등이 그들을 덮치고, 경쟁논리는 그들 자신을 찌르는 날카로운 비수가 될 것이다. 노동조합은 바로 그런 불행한 미래에 대한 버팀목임을 그들은 직감하고 있다. 아직 젊은 그들에게 노동자로 살아야 할 날은 매우 길다. 바로 그만큼 그런 보험은 절실하다. 노동조합은 다른 누구보다도 젊은 노동자들에게 가장 절실한 생존수단이다.

 

그 결과 일정하게는 반노동자적인 의식과 요구에서 출발한 이 노동조합들은 점차 노동자적인 의식과 요구에 대해 고민하고, 급기야는 그런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 자신의 뼈저린 경험을 통한 변화가 동반된다면, 이것은 그들이 사회주의 의식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소중한 수단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역할

 

진정으로 새로운 변화를 잉태하는 미래를 여는 것은, 그리고 젊은이들의 삶을 진정으로 대변할 수 있는 건 자본주의 경쟁 제도가 제기하는 공정성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공정성이다. 자본의 착취에 맞서 노동자가 단결해서 주장하는 공정성이고, 자본주의 정치 구조의 위선과 억압에 맞서 주장하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공정성이다. 그 점에서 미래를 이끌어 갈 MZ세대의 의식과 철학, 지향점을 안내해 주고, 그들이 설계해야 할 사회의 도면을 보여 주는 이데올로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나는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와 함께 물질적 힘을 조직해야 한다. 청년의 미래를 노동 운동이 지켜 주고 안내할 수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평생을 자본의 노예로 갈아 넣는 피 말리는 경쟁이 아니라, 노동 운동을 통한 단결된 투쟁에 희망과 탈출구가 있음을 실질적으로, 물질적으로 보여 줘야 한다. 바로 노동 운동의 강력한 집단적 투쟁을 통해서 말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청년 일자리를 정규직으로 제공하도록 자본을 강제하고, 국가가 책임지고 일자리를 보장하도록 노동 운동이 압박해야 한다. 청년 실업자들, 광범한 MZ세대 노동자의 삶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무상주택,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을 둘러싸고 사회적 전투를 감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요구를 내건 MZ세대의 투쟁이 승리하도록 헌신적으로 연대하고 책임져야 한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는 경쟁에서 밀려났던 다수의 젊은 노동자들의 열망과 만나서 하나로 융합하게 된다. 이데올로기와 물질적 운동이 하나로 결합해 자본주의와 자본의 착취, 억압에 맞서는 거대한 젊은 물줄기가 탄생할 것이다. 그 물줄기가 본격화하면, 낡은 부르주아적 공정성 논리에 사로잡혔던 일시적 승리자들, 하지만 영원히 경쟁과 분열의 굴레에 갇혀 살아야만 하는 대기업 상층 MZ세대 노동자들도 기존 틀에서 벗어나 이 흐름에 가세하기 시작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러한 흐름이 꺾이지 않고 전진해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도도한 흐름으로 나아갈 수 있게 안내하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될 것이다.  

 

에필로그: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힘, 마.르.크.스

 

필자가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접했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36년 전이었다. 당시 이 세상을 이해하고, 나아갈 바를 찾는 데서 마르크스주의는 내게 밝은 등대처럼 다가왔다. 그 뒤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진보 진영에서 사상적 혼란이 발생했을 때도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여전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나의 확신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조금도 약해지지 않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선택이었다. 흔들리는 갈대처럼 살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단단함이 그걸 가능케 했다. 바로 현실 자체에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으므로 현실의 시험대를 훌륭하게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분석한 자본주의의 본질은 지금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가난, 실업, 불평등, 공황, 불황 등과 자본주의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아무리 생산력을 발전시켜도 자본주의 하에서 이런 상황은 조금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자본가 국가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억압, 차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자본가 국가는 갈수록 파시즘에게 문을 열어 주고 있다. 자본주의와 자본가 국가가 존속하는 한, 인류는 야만주의적 퇴화와 계속 씨름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보는 젊은 독자들은 인류가 직면한 위기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길을 고민하는 진지한 젊은이들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고민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 전망을 모색할 때 반드시 의지해야 할 출발점이다. 자본주의에 맞서고자 한다면 마르크스주의가 던진 문제의식과 해결책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 결론이 무엇일지는 물론 독자들의 몫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하고자 하는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쉽게 안내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단순화가 있을 수도 있다. 또한 훨씬 더 정교하고 풍부하게 접근해야 할 중요한 주제들이 피상적으로만 다뤄진 측면도 있다. 그러한 약점들은 젊은 독자들과 노동자들이 스스로 학습하고 더 깊이 있게 마르크스주의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극복해 갈 몫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은 해설서, 그것도 아주 기본적인 원리만을 설명하는 해설서가 아니라 원전 그 자체임을 상기하고자 한다. 마르크스 자신이 쓴 글들을 원전 그대로 읽는 것이야 말로 마르크스주의에 가장 옳게 접근하는 길이다. 부디 이 책이 그렇게 발을 내딛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언젠가 어느 곳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사회주의자로서 함께 투쟁하면서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필자에게 가장 커다란 기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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