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간의 충돌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고, 전쟁과 학살은 점점 더 세계인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한국의 한 국제정치학자는 이러한 세계의 변화를 ‘우아한 위선의 시대가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왔다’고 표현했다.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과연 세계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에게 제기되는 과제는 무엇인가?
<목차>
1.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과 이어진 사건들
2. 미·중 패권대결의 기본 성격과 현재 지점
3. 트럼프 정권의 미·중 패권대결 대응 전략과 베네수엘라 침공
4. 미·중 패권대결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5. 실천 방향과 과제
2022년 2월 러시아와 나토가 우크라이나에서 출구 없는 대리전을 시작하면서 세계 자본주의는 다시 한 번 ‘위기·전쟁·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2023년 10월 이후 이스라엘은 가자의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집단학살하면서 동시에 중동 곳곳으로 전쟁을 확산시켰다. 2025년 1월 이후 트럼프는 관세를 앞세워 세계 곳곳을 약탈하고 미국의 대도시들을 사실상의 계엄 상태로 몰아넣으면서 마치 조폭깡패가 힘자랑하듯 세계 최강 제국주의 국가의 힘을 휘둘렀다.
지난 4년 동안, 가깝게는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멀게는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유지돼 오던 국제질서의 ‘규범’들이 하나둘 흔들리면서 세계는 점점 더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강대국 간의 충돌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고, 전쟁과 학살은 점점 더 세계인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한국의 한 국제정치학자는 이러한 세계의 변화를 ‘우아한 위선의 시대가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왔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2026년 1월 한 달 동안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서 전개된 일련의 사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기존 국제질서를 뒤흔들며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충격과 혼란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규칙기반 국제질서’에서 희망을 찾아온 이들, 또는 중국·러시아가 열어냈다는 이른바 ‘다극체제’에서 희망을 찾아온 이들은 예상치 못한 사건들 앞에서 혼란과 당혹, 무기력과 절규를 곳곳에서 표출하고 있다.
요동치는 국제질서는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만큼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과연 세계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에 따라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에게 제기되는 과제는 무엇인가?
1.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과 이어진 사건들
2017년 첫 번째 임기 초반부터 트럼프는 “그들은 엄청난 석유를 가지고 있다”며 베네수엘라 석유에 대한 탐욕과 침공 의사를 여러 차례 공공연히 드러냈다. 2020년에는 미국 법무부가 베네수엘라 대통령 마두로와 정부 관료들을 ‘마약 테러’ 혐의로 기소했다.
2025년 1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직후 트럼프는 ‘마약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마약 카르텔을 테러조직으로 지정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7월에는 국방부에 마약 카르텔에 대한 공격 개시를 명령했고, 8월부터 대규모 미군 병력이 베네수엘라 인근 카리브 해에 배치됐다. 9월 2일 11명이 탑승한 쾌속정을 마약운반선이라며 폭격해 전원을 사망케 했다. 이때부터 12월까지 최소 105명이 비슷한 방식으로 카리브 해상에서 미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11월 11일 미군의 항공모함 전단이 카리브 해에 배치됐다. 12월 10일과 20일, 베네수엘라 인근 해상에서 유조선 두 척이 미군에게 나포됐다. 12월 16일 미국이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부를 ‘해외 테러단체’로 규정했다.
1)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
2026년 1월 2일 저녁 10시 46분(미국 동부시간, 베네수엘라 시간으로는 11시 46분),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침공 작전의 개시를 지시했다. 폭격기, 전투기, 정찰기, 헬리콥터 등 150대 이상의 각종 항공기가 동원됐다. 미군의 고출력 전파방해로 베네수엘라의 러시아제·중국제 방공망이 무력화됐고, 전력망에 대한 사이버 공격으로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했다. 미군이 첨단 극초단파 무기를 사용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3일 오전 2시, 작전개시 두 시간여 만에 미군이 쿠바인 경호부대를 무력화하고 베네수엘라 대통령 마두로와 부인 플로레스를 납치하여 미국 본토로 이송했다.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베네수엘라 측에서는 최소 80여 명의 병사와 민간인이 사망했다. 작전이 끝난 뒤에도 미군은 카리브 해를 떠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미군은 카리브 해상에 1만 5천여 명의 병력을 유지하며 베네수엘라에 대한 해상봉쇄를 지속하고 있다.
이번에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해서 대통령 마두로를 납치한 것은 1989년에 파나마를 침공해서 실권자 노리에가를 납치했던 사건과 닮은꼴이다. 또한 2020년에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솔레이마니를 원격조정 드론으로 살해했던 사건과도 닮아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앞선 두 사건 모두 1990년 1월 3일과 2020년 1월 3일에 일어났다. 1월 3일! 이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과 마두로 납치는 어떤 정당성도 가질 수 없는 제국주의 만행이다. 하다못해 유엔헌장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타국의 주권을 부당하게 침해하고 국가 간 호혜평등 원칙을 짓밟았다는 점에서 명백한 위반이다. 타국과의 전쟁은 의회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미국법도 위반했다. 물론 미국이 제국주의 깡패 노릇을 해온 것은 수없이 되풀이돼 온 일이다. 200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2003년에는 이라크를 침공했으며, 바로 지난해에는 이란을 폭격했다. 미국은 매번 그럴싸한 핑계를 내세웠는데, 이번에는 ‘마약테러와의 전쟁’ 논리를 내세웠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거짓 핑계다. 그런데 이번에는 베네수엘라 석유에 대한 탐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그 허술한 핑계를 포장하려는 노력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뒤에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은 노동자·민중을 억압하는 반동적인 정권이었다. 그러나 마두로 정권이 반민주적이고 반동적이라는 사실은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을 조금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 미국은 마두로를 심판할 어떤 자격, 권리, 권한이 없다. 반동적인 독재자를 심판할 권한은 오로지 베네수엘라 민중에게 있을 뿐이다.
2) 베네수엘라 침공에 이어진 사건들
마두로 납치에 성공한 뒤, 트럼프는 이를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면서 다른 나라들 또한 전격적인 침공작전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공공연히 위협했다. 쿠바에 대해서는 “베네수엘라 석유에 의존해 온 쿠바가 곧 무너질 것”이라고 협박했다. 멕시코에 대해서는 “카르텔들이 멕시코를 운영하고 있어서 멕시코에 무언가 행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콜롬비아 대통령 페트로를 지칭하면서는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때마침 격렬한 반정부 시위가 전개된 이란에 대해서는 군사 공격, 사이버 공격, 추가 제재 등의 개입 가능성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7일 트럼프는 2027 회계연도(2026년 10월 시작) 국방예산을 1조 5천억 달러로 증액해 달라고 의회에 요청했다. 현재 시행 중인 2026 회계연도 국방예산은 약 1조 달러로 세계 2위부터 10위까지 국방예산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다. 그런데 여기에 5,000억 달러가량(50%) 증액을 요청한 것이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증액 요청이다.
같은 날, 트럼프는 기후환경, 인권, 여성, 난민지원, 문화교육, 보건 등에 관련된 국제기구 66개(유엔 산하 31개, 비유엔 35개)에서 미국이 탈퇴하거나 지원을 중단한다는 포고문에 서명했다. 과거에 트럼프 1기 정권이 파리기후협약, 유네스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탈퇴하고 세계보건기구에서 탈퇴 선언을 한 바 있었다. 바이든 정권이 이것을 되돌려 놓았는데, 트럼프 2기 정권 들어 다시 유엔기후변화협약을 탈퇴하고 세계보건기구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세계를 뒤흔든 것은 트럼프가 유럽의 동맹 열강들을 공공연히 협박하면서 그린란드 병합 의사를 노골적으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1월 3일 베네수엘라 침공 직후부터 트럼프는 덴마크의 자치령인 그린란드를 병합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며 협박을 거듭했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을 지지하거나 묵인했던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미국이 나토 동맹국을 군사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협박하자 갑자기 주권에 대한 맹렬한 수호자로 변신했다. 7일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폴란드·덴마크 7개국이 “그린란드는 그린란드 주민들의 것으로, 덴마크와 그린란드 관련 사안을 결정하는 주체는 오직 덴마크와 그린란드뿐”이라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5일 나토가 그린란드에서 군사훈련을 벌이기로 긴급 결정하고 영국·프랑스·독일·네덜란드·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가 소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유럽의 저항에 심기가 뒤틀린 트럼프는 그린란드에 병력을 파견한 8개국에 대해 2월부터 10%, 6월부터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17일 선언했다. 그러자 18일 유럽 8개국이 “관세 위협은 대서양 관계를 훼손”한다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유럽의회에서 미국과의 무역협정 승인절차를 중단하자’, ‘유럽도 보복관세를 부과하자’, ‘통상위협대응조치를 발동하자’, ‘2026 북중미 월드컵을 보이콧하자’ 등 많은 주장이 유럽 각국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제 유럽은 트럼프 달래기를 넘어 대서양 동맹 붕괴를 감수하는 태세 전환에 나서야 한다는 여론도 급부상했다. 미국 공화당의 온건파 상원의원들도 “나토 분열은 중국과 러시아에 좋은 일”이라며 관세 부과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오랜 시간 미국의 맹방이었던 캐나다도 트럼프 2기 집권 이후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겠다는 협박을 지속적으로 받아 왔다. 20일 새벽 트럼프는 그린란드, 캐나다, 베네수엘라 영토에 모두 성조기가 뒤덮인 지도를 배경으로 자신이 유럽의 지도자들과 회담하는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를 트루스소셜에 올렸다.
20일 낮, 캐나다 총리가 스위스 다보스포럼 연설에서 미국을 강한 톤으로 규탄했다. “과거 미국 중심의 규칙기반 국제질서는 이제 끝났으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했다. … 테이블에 앉지 못하면 메뉴판에 오른다. … 중견국들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희생될 수밖에 없다.”
미국과 나토 동맹국들 사이에 긴장이 한창 고조되던 21일, 트럼프는 나토 사무총장과 회담을 가진 뒤 유럽 8개국에 부과한 관세를 취소했다. “유럽과 그린란드 문제를 ‘합의할 틀’을 마련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나토 동맹국들을 상대로 한 트럼프의 영토 병합 공세는 일단 멈췄다. 하지만 그의 공세는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그런데 그린란드 병합을 놓고 유럽을 밀어붙이던 15일, 트럼프는 가자지구 과도 통치와 재건을 주도하기 위해 이른바 ‘평화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유럽 8개국 대상 관세부과를 취소한 21일, 트럼프는 “평화위원회에 러시아의 푸틴도 참여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의 맹방 벨라루스도 참여 의사를 밝혔다. 곧바로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와 평화를 논할 수 없다”며 평화위원회 불참 의사를 밝혔다. 중국은 평화위원회 참여 여부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서 대신 23일 시진핑(중국)-룰라(브라질) 간 정상통화를 통해 ‘유엔의 권위 유지’, ‘브릭스 국가 간 협력’, ‘글로벌사우스의 공동이익 수호’, ‘중국과 중남미 관계의 더 큰 발전 추진’ 등의 얘기를 주고받았다고 발표했다.
한편 국제질서가 이렇게 요동친 1월 한 달 동안, 미국 안에서는 이민자 단속을 둘러싸고 사실상 계엄 상태에 있던 대도시들의 상황이 끔찍한 인명살상으로 발전했다. 1월 8일과 24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이민관세단속국(ICE)의 무자비한 이민자 단속에 항의하던 미국 시민권자 두 명이 ICE 요원들의 총격으로 연거푸 살해당했다.
3) 베네수엘라 침공과 미·중 패권대결의 연관성
미국이 베네수엘라 침공을 개시하기 여섯 시간 전인 2일 오후 5시 30분, 베네수엘라를 방문한 중국 특사가 마두로를 만나 세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중국 특사의 베네수엘라 방문은 베네수엘라가 미국의 침공위협 앞에서 중국에 계속해서 긴급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앞서 중국은 ‘중국과 베네수엘라는 전략적 파트너다’, ‘중국은 모든 일방적 강압 행위를 반대하며 각국의 주권 수호를 지지한다’, ‘베네수엘라와 각국의 정상적 협력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메시지를 냈다. 그러나 중국 특사와 마두로가 헤어지고 세 시간 만에 미국의 침공 작전이 시작됐고, 이 과정에서 중국의 메시지와 약속, 중국이 베네수엘라에 공급한 무기들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이 미국의 세계전략 전반과 깊이 연결돼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오늘날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국과의 패권대결이다. 따라서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은 미·중 패권대결과 깊은 상관관계에 있다. 이를테면 <한겨레신문>의 1월 7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이 ‘마약 단속’을 베네수엘라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중국을 겨냥하고 있음은 명확하다. 중국의 ‘외부 영향력’을 제거하고 서반구를 완전한 미국 주도의 질서로 재편하려는 것이다.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석유 장악’을 강조하는 것도 중국이 베네수엘라 석유를 값싸게 확보해온 것을 겨냥했다. 지난해 11월 기준 베네수엘라 석유 수출의 약 80%가 중국으로 향했다. 베네수엘라는 중국과 ‘전천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은 중국의 중남미 핵심 거점이다. 중국 국유 에너지 기업인 중국석유천연가스집단(CNPC)과 첨단기술기업 화웨이 등이 베네수엘라에서 대규모로 사업을 하고 있다. 2010~2020년 중국이 중남미에 판매한 무기의 86%를 베네수엘라가 사들였다. 중국은 베네수엘라로부터 석유와 자원을 값싸게 수입하고, 통신 장비와 무기 등을 수출하는 구조다. 특히 중국과 베네수엘라의 위안화 석유 거래가 달러 시스템에 타격을 줄 가능성도 미국을 자극했을 것이다.[1]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은 미·중 패권대결이라는 거대한 전개과정이 드러낸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베네수엘라 침공에 이어진 사건들, 특히 트럼프의 그린란드 병합 시도나 가자 평화위원회 구성도 미·중 패권대결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미·중 패권대결의 성격과 동학을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세계를 ‘혼돈’ 속으로 밀어 넣는 사건들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사태의 전개방향을 전망할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그에 대응하는 노동자계급의 실천과제를 올바로 정립할 수 있게 해준다.
2. 미·중 패권대결의 기본 성격과 현재 지점
1) 자본주의 축적위기의 산물이자 축적위기를 가속화하는 요인
오늘날 미·중 패권대결은 1990년대 이후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를 통해 중국이 경제적으로 급부상함으로써 시작됐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세계화에 나섰는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겪고 있던 자본의 축적위기, 즉 자본이 손쉬운 이윤 획득과 원활한 확대재생산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략 30년 동안 이어졌던 전후호황의 황금기를 뒤로 하고 1970년대에 세계경제가 다시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1980년대에 시작된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는 노동자의 고용·임금·복지를 공격하고 자본에게 감세·민영화의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자본의 이윤을 인위적으로 확대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1990년대에 세계화와 금융화가 가세하고서야 자본의 축적위기가 외견상 사라졌다. 세계화는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대대적인 공장이동을 통해 선진국 자본의 임금비용을 획기적으로 감축시켰고, 자유무역의 깃발을 든 선진국 자본이 세계의 모든 시장을 마음껏 접근할 수 있게 했다. 금융화는 주식·부동산 등의 거대한 금융거품 조성이나 지대 인상으로 막대한 금융수탈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자본이 착취를 통한 이윤획득의 부족분을 수탈을 통한 이윤획득으로 보충할 수 있게 했다.
자본주의 경제에는 다시 황금기가 찾아온 듯 했다. 그러나 1930년대 세계대공황의 출발점이었던 1929년 미국 주식대폭락이 보여줬던 것처럼, 거대한 금융거품 조성은 애초부터 거품파열의 위험성을 안고 있었고 다시 현실이 되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에 기초한 축적체제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국가의 전면적인 경제개입을 통해서만 간신히 연명할 수 있는 빈사 상태, 다시 말해 국가의 전면적인 경제개입을 통해서만 자본의 이윤획득과 대중의 소비수준을 보장할 수 있는 만성적인 축적위기에 빠져들었다. 당연하게도 국가부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이 위태위태한 축적위기를 잠재울 해법을 자본주의는 갖고 있지 못했다.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라는 기존의 방책들은 과거와 달리 축적위기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고, 오히려 경제적인 축적위기를 사회 전반의 복합위기로 발전시켰다.
신자유주의 공세는 국가부채 부담을 대중에게 전가하기 위한 대대적인 긴축 공세로 발전했고 상호 결합했다. 신자유주의·긴축 공세는 특히 선진국에서 제조업 이탈과 결합하여 주민의 상당한 부분을 고통스러운 빈곤의 늪으로 빠뜨렸고, 이들을 배경으로 이주민혐오에 기반하고 보호주의·민족주의를 주창하는 극우적인 정치세력이 급성장할 수 있게 했다. 신자유주의·긴축 공세는 또한 부동산 가격급등 및 임대료 상승과 결합하여 세계적으로 청년의 빈곤과 미래 상실을 초래했고, 이는 점점 더 많은 나라에서 사회적 재생산 위기로 이어졌다. 세계 곳곳의 자원개발·생산확장·소비팽창이 가속시킨 무분별한 환경파괴와 지구온난화는 거대한 기후변화를 통해 인류문명의 지속가능성 자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축적위기가 지속되고 심화할수록 금융수탈로 자본의 이윤을 벌충해야 할 필요는 더욱 커져갔고, 따라서 2008년 금융위기가 남긴 교훈을 무시한 채 금융거품은 더욱 더 크게 부풀어 올라 세계경제를 일거에 붕괴시킬 상시적인 시한폭탄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중국은 세계의 수많은 공장들을 빨아들인 세계화의 최대 수혜국으로서 지속적으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미국과의 격차를 줄여 나갔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할 때 미국 대비 12.7%에 불과했던 중국의 GDP는 2007년 24.5%로 성장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중국에게 도약의 기회였다. 2011년 중국의 GDP가 미국 대비 48.4%로 급증했다.
중국의 급격한 부상에 미국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2011년 오바마 정권이 국제정책의 핵심 방향으로 ‘아시아로 집중’을 내걸었고 중국을 배제한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TPP)을 추진했다. 미국과 정반대로 중국은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2012년 시진핑의 집권과 함께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활하는 중국을 꿈꾸는 ‘중국몽’을 말하기 시작했다. 2013년 중국 자본의 적극적인 대외 진출을 선언한 일대일로 정책이 가시화했고, 2015년 첨단기술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하기 위한 ‘중국제조 2025’ 전략이 시작됐다.
한편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에서 성장하던 보호주의·민족주의 극우세력은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성공을 계기로 정치의 전면에 부상했다. 2018년 중국의 GDP가 미국의 67.7%를 기록하던 해에, 트럼프 정권이 중국산 수입품에 대규모 관세를 부과하며 대대적인 무역분쟁을 일으켰다. 마침내 미·중 패권대결이 공공연하게 표면 위로 떠오르는 변곡점이었다.
미·중 패권대결은 바이든 민주당 정권에 의해서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2021년 중국의 GDP가 미국의 77.1%를 기록하던 해에, 바이든 정권은 반도체과학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을 통해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조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글로벌 공급망 분리 정책이 더욱 가속화됐다. 이에 중국은 한편으로 자기완결적인 첨단기술 공급망을 구축하고 내수기반을 확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수출경제를 재편하는 ‘쌍순환’ 전략으로 맞섰다.
그런데 미·중 패권대결은 그 성격상 단순히 경제적 대결에 머무를 수 없었으며, 필연적으로 정치군사적 대결로 확대돼 왔다. 그리고 이 측면에서 미·중 패권대결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넘어 세계질서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중국 또한 세계 자본주의 전반의 극심한 축적위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하락세에 있는 미국・서유럽・일본의 서구 자본주의와 달리, 중국의 자본주의는 상승세에 있다. 중국은 미국을 제외한 모든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을 추월해 제2의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며, 패권적 지위를 상당 부분 상실한 미국을 맹렬히 추격하고 있다. 세계질서의 근간을 뒤흔드는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 인도, 이스라엘, 튀르키예 같은 지역적 군사강국들에게 자신의 팽창 야망을 실행할 공간을 열어주고 있으며, 서유럽과 일본은 세계질서 속에서 더 이상의 지위 하락을 막기 위해 적극적인 재무장에 나서고 있다. 그리고 유일 패권을 복원하고자 하는 미국의 몸부림과 최강대국으로 부활하고자 하는 중국의 야망은 이 모든 상황을 더욱 가파르게 가속시킨다.
따라서 현 시기의 세계질서는 세계 자본주의 전반의 극심한 축적위기가 지속되고 미국의 패권이 제한적으로 작동하는 가운데 미・중 간 패권대결을 중심으로 열강 간의 다각적인 대립・충돌이 점점 더 격화되는 것을 기본 동학으로 한다. 2022년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 2023년 이후 중동에서의 상황, 2025년 인도-파키스탄 갈등, 2026년의 베네수엘라 침공과 그린란드 병합 갈등이 보여주듯이, 당분간 세계질서는 크고 작은 충돌과 격변에 끊임없이 마주할 수밖에 없게 돼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공급망의 분리·교란에서부터 군사적 긴장·충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기존의 축적위기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2) 제국주의 패권대결로서 미·중 패권대결
그런데 미·중 패권대결의 계급적 성격은 무엇인가? 중국은 사회주의 또는 노동자국가인가? 또는 자본주의일지라도 최소한 미국보다는 진보적인가? 그러므로 미국의 유일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은 (그리고 러시아는) 세계의 노동자·민중에게 모종의 희망과 대안을 제시하는가?
중국의 사회성격을 자세히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다만 몇 가지 두드러진 사례들을 통해 오늘날의 중국이 자본주의 사회이자 제국주의 강대국이라는 점, 따라서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 어떤 진보성도 없으며 어떤 희망이나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하겠다.
중국은 생산수단의 상당 부분이 국유화돼 있지만, 이는 사회적 소유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 중국 국가의 실제 주인은 노동자·민중이 아니라 공산당 관료들이기 때문이다. 중국 국가는 민간 자본가들과 깊이 융합돼 있는 공산당 관료들이 노동자·민중을 착취·수탈·억압하기 위한 계급적 지배의 수단일 뿐이다.
중국은 형식적으로 계획경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그 계획의 실제 목적은 노동자·민중의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 자본의 원활한 확대재생산에 있다. 중국 경제는 자본주의의 전형적 특징인 무정부적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에 만성적으로 시달리고 있으며, 과잉생산에 따른 디플레이션도 자주 경험하고 있다.
중국의 거대 기업들은 포춘의 글로벌 500대 기업 리스트에서 130여 개를 차지하며 미국과 1위를 다툰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업의 화려한 성장 반대편에는 노동자들이 하루 12시간 주 6일 장시간 노동해야 하는 초과착취 체제가 자리잡고 있다. 제조업에서는 심지어 일요일까지 일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극단적인 초과착취 체제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자주적인 노동조합이 국가에 의해 철저하게 봉쇄되기 때문인데, 이는 중국 국가의 반동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점이다.
중국 자본주의는 높은 수준의 내부 수탈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중국의 오랜 역사와 관련이 있는데, 2천년 이상 이어져 온 중국의 역사는 제국의 강력한 중심부가 광범한 주변부를 (주로 식량징발을 통해) 수탈해 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제국의 중심부가 매우 강력해서 광범한 주변부 대부분을 제국 안으로 통합하여 유지해 온 것이 ‘거대한 중국’의 역사적 실체였다고 할 수 있다. 중심부(대도시)가 주변부(농촌)를 수탈하는 구조는 1949년 중국혁명 이후에도 지속됐는데, 1958년 도입돼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농촌 주민의 도시 진입을 엄격하게 차단하는 후커우 제도가 그 대표적인 산물이다. 개혁개방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는 중심부가 대도시를 넘어 산업발전이 집중된 동부연안으로 확장되었고 개발에서 소외된 광활한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중서부내륙이 주변부가 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전개된 수탈의 대표적인 표현은 동부연안의 산업거점과 대도시에서 일하지만 저임금과 불안정한 생활조건을 강요당하는 중서부내륙 농촌 출신 수억명의 농민공이다.
내부 수탈의 또 다른 표현은 지역 간의 심각한 경제적 격차로 나타난다. 2024년 중국 전체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억 5천의 인구를 포괄하는 (베이징・상하이・톈진의 3대 대도시와 쟝수성・푸젠성・저장성・광둥성의 4개 성으로 구성된) 동부연안은 평균 약 20,000달러의 1인당 GDP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6천 3백만이 거주하는 베이징・상하이・선전의 3개 도시는 평균 약 30,000달러의 1인당 GDP를 기록했다. 반면 중국 전체 인구의 4분의 3을 포괄하는 중서부내륙은 평균 약 11,000달러의 1인당 GDP를 기록했다.[2]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이 같은 뚜렷한 격차를 중국의 약점으로 보는 시각들이 종종 있다. 물론 노동자·민중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중대한 약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이자 제국주의로서 중국에게는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이다. 중국 제국주의의 실체는 인구 25%를 포괄하는 중심부(동부연안)이고, 인구 75%를 포괄하는 주변부(중서부내륙)는 사실상 ‘내부 식민지’로 작동해 왔기 때문이다. 중심부(동부연안)가 광활한 주변부(중서부내륙)를 마음껏 수탈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중국의 급속한 부상을 가능케 한 결정적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의 자본가계급은 주변부(중서부내륙)에 대한 체계적인 수탈을 기반으로 거대한 사회적 자원을 산업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고, 중심부(동부연안) 내에서도 광범한 노동자들에게 저임금, 높은 노동강도, 불안정한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을 강제할 수 있었다.
한편 2010년대 이후 중국 정부는 ‘공동의 발전’을 강조하면서 상당수 공장을 중서부내륙으로 보냈다. 그런데 이는 공동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이해관계가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첫째, 2010년부터 시작된 동부연안에서의 임금투쟁은 중국 정부로 하여금 자주적 노조운동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해 동부연안을 중심으로 최저임금을 매년 빠른 속도로 올려줄 수밖에 없도록 강제했는데, 이와 같은 임금인상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많은 저부가가치 제조업들이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와 중서부내륙으로 이동했다. 둘째, 2010년대 중반 시작된 일대일로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중국의 과잉자본에게 출구를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건설・토목을 중심으로 중국 외부에서 출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일대일로였다면 제조업을 중심으로 중국 내부에서 출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중서부내륙으로 상당수 공장을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셋째, 2020년대 들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와의 관계에서 공급망 디커플링과 무역분쟁이 격화되자 중국 정부는 중국 자체적으로 완결적인 공급망 구성과 왕성한 내수 수요 창출을 미국에 맞선 패권대결에서 핵심적인 과제로 추진하게 됐는데, 이를 위해 대대적인 중서부내륙 개발에 나선 것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는 중국 자본이 진출해 있다. 그런데 이들은 특히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중국식 초과착취 모델을 현지에 이식하고 있다. 해외에 진출한 중국 기업의 생산현장과 작업장에서는 산업재해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고 있다. 아동노동 착취, 저임금, 임금체불, 폭력적 현장통제도 만연한 상태다. 자원약탈 때문에 원주민과 충돌하는 사례도 여러 곳에서 발생하고 있다.[3]
약소국에 대한 중국의 대출과 투자는 약소국의 주권에 대한 침탈 또는 압박으로 이어진다. 중국이 대출상환 지연을 이유로 2017년에 스리랑카 함반토타 항만에 대한 99년 사용권을 확보한 사례는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은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에게 대출·투자를 통해 의회건물이나 이런저런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해 주고 있는데, 이러한 중국의 선물은 늘 해당 약소국이 대만과의 외교관계 단절, 공공사업 입찰에서 중국 기업에 우선권 부여, 중국이 관여하는 사업에 대한 노동법 적용과 환경 규제 완화 등의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것과 연결돼 있다.
중국은 이집트, 탄자니아, 나이지리아 등 40여 개의 아프리카 국가들과 다양한 수준의 안보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안보협력은 항구·철도 같은 일대일로 자산의 보호와 더불어 해당 국가의 병사들을 훈련하는 프로그램도 포함한다. 모잠비크, 나미비아, 세이셸, 탄자니아, 잠비아, 짐바브웨는 무기의 90% 이상을 중국으로부터 공급받는다. 중국의 방위산업 기업들은 앙골라, 나이지리아, 남아공 등에 사무소를 개설하고서 아프리카 각국에 무기·탄약 공급 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은 남중국해 대부분을 자신의 영해로 주장하는 이른바 9단선을 고집하면서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나이에게 굴욕적 후퇴를 요구하고 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오늘날 중국이 자본주의 사회이자 또 하나의 제국주의 강대국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미·중 패권대결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패권대결이다. 노동자·민중의 관점에서 볼 때, 미국과 중국 어느 쪽도 진보성을 갖지 않으며, 어떤 희망이나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노동자·민중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에 입각해 두 제국주의 강대국 모두에 맞서는 것이며, 이것을 자본주의 철폐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혁명적 전망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3) 미·중 패권대결의 현재 지점 요약
2018년 미·중 패권대결이 본격화한 이후 미국은 우세한 힘을 갖고 중국을 압박하여 추가적인 성장을 차단하려 했지만, 중국은 점점 더 미국의 압박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미국과 중국의 격차가 줄어들면서 중국이 점점 더 대등한 경쟁자의 지위로 다가가는 것이 지금까지의 추세였으며, 이는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15년 정도 전만 해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중국의 눈부신 성장이 저부가가치 단순조립 제조업에서의 현상이지 고부가가치 첨단기술 제조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다르게 전개됐다. 5년 전 바이든 정권이 임기 초에 친환경 산업을 강조하고 나섰을 때에는 중국이 추격할 수 없으리라고 예상된 이 분야에서 격차를 벌이기 위해서였지만, 불과 2~3년 만에 중국산 배터리와 전기차가 세계 시장을 사실상 석권해 버렸다. 바이든 정권이 임기 후반부에 중국의 인공지능 기술 성장을 차단하기 위해 첨단 칩의 중국수출을 제한했지만, 중국은 딥시크 충격을 안겼고 이제는 중국의 독자적인 인공지능 칩 개발 가능성에 안달이 난 엔비디아가 중국수출 제한을 풀어달라고 전방위 로비에 나서는 상황이 됐다. 2025년 트럼프의 관세 공격 또한 중국의 희토류 반격으로 무력화됐다. 미・중 패권대결의 대리전이기도 했던 우크라이나 전쟁은 중국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가 사실상 승리를 굳혀가고 있다.
2024년 중국의 GDP는 18.74조 달러로 미국의 28.75조 달러 대비 65.2%를 기록했다. 명목 GDP만 보면, 2021년 77.1%까지 근접했던 중국의 GDP가 미국의 반격으로 상당히 뒷걸음질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구매력 평가 GDP(PPP) 비교는 상당히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PPP 기준으로 중국은 이미 2014년에 미국을 추월했고 이후 격차를 꾸준히 벌이면서 2024년에는 미국 대비 130.9%를 기록했다. 2021년 이후를 보더라도 124.3%, 125.1%, 128.1%로 계속해서 중국과 미국 간의 격차가 확대돼 왔다. 오늘날 중국이 첫 번째 교역파트너인 국가는 세계 190개 국가 가운데 120~130개 국가에 이른다. 반면 미국은 30개 국가 정도에 불과하다.
중국의 눈부신 성장과 달리, 미국은 쇠퇴를 거듭해 왔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제조업 역량의 심각한 후퇴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은 재래식 전쟁을 감당할 수 없는 열악한 산업역량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를테면 미국이 1년 동안 생산할 수 있는 포탄의 양은 우크라이나의 두 달 소모량을 다 충당할 수 없는 정도였다.
국가부채가 GDP의 125%에 이르러 매년 그 이자비용만 국방비에 맞먹을 정도가 됐다는 점도 미국의 쇠퇴를 상징하는 하나의 창이다. 매년 미국 재정적자의 절반가량은 (대중의 최소생활과 소비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의료지원과 생활지원 비용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긴축 공세로 삭감당한 임금만큼 자본이 획득하는 초과이윤을 국가가 재정을 투입하여 뒷받침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매우 퇴행적인 이 구조는 계급역관계의 급격한 변화 없이는 (즉 급격한 임금상승이나 혹독한 복지중단 없이는) 지속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미국의 국가부채는 당분간 끝없이 부풀어 오를 수밖에 없게 돼 있다.
21세기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치른 두 개의 큰 전쟁에서 모두 패배했다는 사실, 특히 친미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장기간의 시도가 모두 허무한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도 미국에게 큰 부담을 안겼다. 미국이 미·중 패권대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틈을 타서 여러 지역적 군사강국들이 자신의 팽창 야망을 하나둘 행동에 옮기는 상황도 미국의 정치군사적 패권을 상당 수준 약화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로 남아 있다. 미국의 그러한 지위를 보장해 주는 것은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힘과 압도적인 군사력이다. 중국은 많은 영역에서 미국을 추월했거나 대등한 지위에 올라섰지만, 미국의 패권을 뒷받침하는 이 두 핵심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아직 상당히 열등한 위치에 있다.
미국 연준(Fed)은 매년 ‘국제통화사용지수’를 계산해 발표하는데,[4] 아래 도표는 2001~2024년의 추이를 보여준다. 그 시간 동안 중국이 산업적 역량, GDP, 세계 교역 비중 등에서 엄청난 성장을 거듭해 온 것과 매우 다르게, 중국 위안화가 미국 달러화에 비해 여전히 매우 취약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대표하는 것은 군사비 지출과 핵무기 보유량이다. 중국은 최근 매년 7%대의 높은 증가율로 군사비를 증액하고 있지만, 여전히 미국에 한참 못 미친다. 숨겨진 군사비를 더하면 중국의 군사비가 5천억 달러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미국의 절반 수준이다. 중국의 핵무기 보유량은 여전히 미국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중 패권대결의 현재 지점은, 여러 측면에서 중국이 미국을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고 심지어 추월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달러 패권과 군사 패권이라는 결정적인 양 측면에서 미국이 분명한 우위를 갖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중국이 세계패권의 도전자로 부상하면서 미국이 패권적 지위를 상당 부분 상실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의 패권국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현재 지점에서 미국이 가진 우위는 매우 불안한 것이다. 첫째, 중국이 미국과의 패권경쟁에서 중도 하차할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과거 미국의 패권에 도전했던 소련이나 일본이 경제력이나 군사력 가운데 하나에서 결정적 결함을 가졌던 것과 달리 중국은 경제력과 군사력 모두에서 탄탄한 토대를 갖고 있어서다. 둘째, 중국의 상승세와 미국의 하락세가 당분간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3. 트럼프 정권의 미·중 패권대결 대응 전략과 베네수엘라 침공
1) 2025년 12월 발표된 미국 국가안보전략(NSS)의 요지
2025년 12월 5일 트럼프 정권은 미국의 새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을 공개했다.
새 국가안보전략은 트럼프 정권의 기본 방향을 보여주지만, 몇 군데에서 혼선을 유발하는 표현들을 담고 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첫째, 트럼프의 정치적 기반인 마가(MAGA) 세력을 고려한 문학적 수사들 때문이다. 둘째, 트럼프 정권의 중요한 전략적 의도 때문이다.
새 국가안보전략에서 혼선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표현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미국이 아틀라스처럼 세계질서 전체를 떠받치던 시대는 끝났다.”
“패권은 원해선 안 되는 일이었고 달성할 수도 없었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외교정책 엘리트들은 전 세계에 대한 영구적인 미국 지배가 우리 국가의 최선의 이익이라고 스스로 확신했다.”
“엘리트들은 미국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거대한 복지-규제-행정 국가와 거대한 군사·외교·정보·대외원조 복합체를 동시에 유지할 자금을 댈 수 있다고 보았다.”
“요컨대, 우리 엘리트들은 근본적으로 바람직하지도 않고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했다.”
또한 새 국가안보전략에서는 중국에 대한 표현들이 이전보다 완화됐다. 2022년에 바이든 정권이 내놓았던 국가안보전략에서는 중국을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가진 가장 중대한 장기적·전략적 도전’으로 규정했다. 미·중 패권대결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던 것이다. 그런데 새 국가안보전략에서는 ‘비서반구 경쟁국’이나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국가’ 같은 모호한 표현들을 갖고 중국을 지칭했다.
한편 새 국가안보전략은 ‘서반구(Western Hemisphere)에서 미국의 압도적 우위를 회복’하는 데 최우선 순위를 부여했다. 이 또한 바이든 정권의 2022년 국가안보전략이 미·중 패권대결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과 첨단기술·공급망 분리’, ‘민주주의 가치 동맹을 통한 압박’ 등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했던 것과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트럼프 정권이 내놓은 미국의 새 국가안보전략은 어떻게 해석돼야 할까? 일부에서는 이를 미국 국가안보전략의 중대한 변화로 해석한다.[5] 이들은 미국이 새 국가안보전략을 통해 ‘더 이상 패권국이 아님을 스스로 공식 확인’했다고 본다. 이들에게 새 국가안보전략은 ‘미 제국주의 대외정책의 극적 반전을 대표’하고 ‘세계 패권국 지위를 방어하려는 시도의 종언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들은 트럼프 정권의 정책이 ‘주요 적대국(중국·러시아)과의 대결에서는 후퇴하고, 대신 서반구의 약한 동맹국들에 대해서는 약탈, 지배하려는 시도’로 특징지어진다고 본다. 트럼프가 미국의 쇠퇴를 인정하고 ‘보다 현실적인 목표를 스스로에게 설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패권국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포기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패권대결로부터 전혀 물러서지 않았고 물러설 수도 없다. 그 이유와 근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미국 자본주의는 달러 패권에 기초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달러 패권은 미국이 달러의 무제한 발행을 통해 자신의 경제위기를 전 세계로 전가할 수 있는 기반이다. 천문학적인 국가부채를 끝없이 늘려갈 수 있는 것도 달러 패권 덕분이다.
만일, 달러 패권이 붕괴한다면 미국은 더 이상 대규모 재정적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인데, 이는 (대중의 최소생활과 소비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의료지원과 생활지원, (압도적인 군사력 유지를 위한) 국방비 지출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국내적으로는 대규모 경제위기와 계급투쟁의 폭발을 뜻할 것이고 대외적으로는 군사적 우위의 조속한 붕괴를 뜻할 것이다.
달러 패권의 붕괴는 사실상 미국의 전면적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미국은 달러 패권을 사수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의 달러 패권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더 이상 미국의 경제력이 아니라 압도적인 군사력이며, (달러 패권과 군사 패권에 기초한) 세계 패권국 지위다. 오늘날 미국이 패권국의 지위를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않으면서 달러 패권을 사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둘째, 미국과 중국이 서로 세력권을 인정하며 세계를 분할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 냉전 시기에 미국과 소련은 서방과 동방이라는 각자의 세력권을 이끌며 40년 이상 세계를 분할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2차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미국과 소련이 세력권 분할을 합의하고 그에 따라 상대의 세력권을 존중하면서 각자의 세력권을 구축해 갔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이 각각 이끈 서방과 동방은 경제적으로도 철저히 분리돼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미·중 패권대결은 1990년대 이후 세계경제를 하나로 통합시킨 세계화의 기반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에서 보자면, 중국은 라틴아메리카를 포기할 수 없고 미국은 동아시아를 포기할 수 없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첨단기술과 공급망의 분리가 진전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세력권 분할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얘기다. 2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역사적 사건을 경과하지 않는 한, 세력권 분할은 가능하지 않다.
세력권 분할이 가능하지 않다면, 미국과 중국은 세계 패권을 향한 사활적 대결을 피할 수 없다. 미국 자본주의의 존속을 위해 세계 패권의 사수가 필수적인 것만큼, 중국 자본주의의 활로를 위해서는 세계 패권의 쟁취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셋째, 트럼프 정권의 행동은 중국과의 패권대결로 명확히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중 패권대결에 대한 트럼프의 속마음은 ‘중국과의 패권대결이 미국의 최우선 안보사안’이라는 지론으로 유명한 엘브리지 콜비(Elbridge Colby)를 국방부(전쟁부) 정책담당 차관이라는 핵심 요직에 중용한 데서 잘 드러난다. 트럼프 1기 정권 때도 국방부 차관보로 일하면서 2017~18년 미국 국가안보전략 작성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콜비는 2021년 자신의 저서에서 ‘경쟁자인 중국에게 패권을 빼앗기지 않도록 미국의 모든 국력을 동원해 저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만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안보전략의 하위문서로 2026년 1월 23일 발표된 미국 국방부의 ‘2026 국가방위전략(National Defense Strategy)’은 이러한 방향을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새 국가방위전략은 중국을 “19세기 이후 미국이 직면한 가장 강력한 경쟁국가”로 규정했다. 또한 ‘한국이 북한 억지의 일차적 책임을 지고 미국은 결정적이지만 제한적인 지원에 그쳐야 한다’고 전략적 방향전환을 제시하면서 이러한 전환이 ‘미국의 국방 우선순위와도 더 잘 부합’한다고 했다. 주한미군의 주된 임무를 중국 견제에 두고 대만 유사시 곧바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넷째, 미국이 서반구에 집중하겠다는 것은 중국과 사이좋게 세력권을 분할하겠다는 게 아니라 가장 유리한 지역에서부터 중국을 위축시키면서 중국과의 전면적 대결을 준비하겠다는 전략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트럼프가 베네수엘라를 침공한 의도와 직결되는 만큼 자세히 살펴보자.
2)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를 서반구에 둔다는 의미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서반구의 남쪽에는 라틴아메리카(중남미)가 있고, 북쪽에는 캐나다와 그린란드가 있다. 미국의 서반구 집중 전략에서 중국과 관련된 부분은 라틴아메리카에 해당한다. 나토에 속한 캐나다와 그린란드는 러시아와 관련지어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먼저 라틴아메리카를 살펴보자.
흔히 미국의 ‘앞마당’으로 불리는 라틴아메리카는 오랜 시간 미국에 종속되어 제국주의적 수탈을 당해왔다. 특히 1980~90년대 미국이 신자유주의 공세를 전면화할 때, 라틴아메리카는 외채위기, IMF 구조조정, 시장개방, 민영화, 노동유연화, 긴축의 과정을 밟아가며 미국 자본들에게 철저히 수탈당했다.
대륙 전반에 만연한 극심한 빈곤과 불평등 심화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중남미 각국에서 연성 좌파 정권들이 줄줄이 정권을 잡는 ‘핑크타이드’를 만들어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브라질의 룰라,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 등으로 대표되는 중남미 ‘진보’ 정권들은 때마침 진행된 중국의 경제적 급부상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원유·원자재·식량 등 라틴아메리카의 풍부한 자원을 중국이 엄청난 규모로 수입해 간 덕분에 경제적 숨통을 틔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중국 경제의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중남미 각국의 경제도 악화됐다. 2010년대 중후반 중남미 ‘진보’ 정권들은 위기를 맞았고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같은 극우세력이 부상했다. 트럼프와 긴밀히 연결된 중남미 극우세력들의 핵심 정책은 노동유연화·민영화 등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이는 ‘강화된 신자유주의·긴축’과 ‘저항의 범죄화’였다. 물론 극우세력들은 다시 대중의 반발에 부딪쳤다. 그렇게 지난 10년 동안 중남미 각국에서는 미국과 비슷하게 ‘진보’ 정권과 극우세력 간의 정권 주고받기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그 사이 중국은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경제적 기반과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시켜 왔다. 중국은 중남미 국가들 대부분에서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교역파트너로 부상했다. 중국은 전 세계 리튬 매장량의 68%를 보유한 ‘리튬 삼각지대’(아르헨티나·볼리비아·칠레)에 2018년 이후 160억 달러를 투자해 수십 개의 광산·채굴 프로젝트를 확보했다. 중국의 국영기업들은 2018년 이후 중남미 국가들의 전력 부문에 공격적으로 진출하여 칠레와 페루에서 절반 이상의 전력을 통제하고 있으며, 브라질에서도 325억 달러를 투자해 6천만 명에게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중국의 화웨이는 브라질과 멕시코에서 통신 인프라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중국은 페루의 찬카이 항구를 건설한 뒤 이를 브라질과 철도로 연결해 태평양-대서양 회랑을 구축하는 야심찬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전략적 우선순위를 서반구에 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미국의 앞마당 라틴아메리카에서 중국의 경제적 기반과 영향력이 점증하는 상황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둘째, 라틴아메리카에서 중국을 최대한 위축시킨 뒤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의 풍부한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갖겠다는 것이다.
셋째, 다분히 경제적 성격을 가진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경제적인 방식이 아니라 정치군사적인 방식으로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서반구 집중 전략의 중요한 특징으로, 미국과 중국이 가진 강점과 약점을 철저히 타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제조업 역량이 심각하게 쇠퇴한 미국은 경제적인 방식의 경쟁을 통해서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중국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 반면 군사적인 견지에서 보았을 때 라틴아메리카는 중국에게 가장 취약한 지역이다. 아직까지 중국의 군사력은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에서 미군을 격퇴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지구 정반대편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거의 힘을 쓸 수가 없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 또한 미국이 오랜 시간 라틴아메리카에서 행사하고 구축해 온 정치적 영향력에는 비교가 안 된다. 특히 트럼프는 최근 중남미 각국 선거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면서 아르헨티나의 밀레이, 엘살바도르의 부켈레, 에콰도르의 노바아, 칠레의 카스트, 온두라스의 아스푸라 등으로 이어지는 친미 극우정권 연대를 형성해 가고 있다.
미국은 친중 ‘진보’ 정권을 하나씩 군사력으로 (또는 관세공격으로) 타격하는 한편 친미 극우정권을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하며) 지원·육성함으로써 중남미 각국을 친미·반중 정권으로 채워내려 한다. 트럼프 입장에서 친미·반중 정권들의 핵심 과제는 중국과의 추가 경제협력을 중단하거나 계약을 파기한 뒤 중국 기업 대신 미국 기업들에게 자원과 인프라에 대한 접근을 보장해주는 게 될 것이다.
가장 유리한 곳에서부터 승리를 거둔 뒤 이를 요새화하여 결정적인 전투를 준비하는 것은 군사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법이다. 트럼프 정권이 미·중 패권대결이라는 큰 전쟁 속에서 일단 서반구(라틴아메리카)에 전략적 우선순위를 두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전법을 쓰려는 것이다.
3)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한 의도
1999~2013년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은 라틴아메리카 핑크타이드의 중심에 있었다. 차베스는 1989년 수도 카라카스의 반신자유주의 빈민 봉기로부터 성장해 나간 대중운동의 물결을 타고 1998년 선거로 집권했다. 2002년 미국이 지원하는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대규모 군중시위에 힘입어 권좌에 복귀했다. 2004년 불신임 국민투표에서도 승리했다.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야심찬 기치를 내건 차베스 정권은 석유·철강 등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빈민에게 주택·교육·의료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주민 과반수의 탄탄한 지지 기반을 구축했다. 강력한 반제국주의 수사를 사용하면서, 미국 제국주의와 공공연한 마찰을 이어갔다.
그러나 차베스 정권은 실제로는 베네수엘라의 종속적인 자본주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국유화는 일부에 그쳤고, 대다수 기업들의 소유권은 건드려지지 않았다. 국유화 방식도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는 유상 국유화였다. 외채 상환을 거부하지 않았고, 이윤의 해외반출을 허용했다. 거대 기업들에게는 사실상 세금이 면제됐고 막대한 광물자원이 제공됐다. 차베스 정권은 전통적인 자본가계급과 차베스주의를 내건 신흥 자본가계급 모두의 이익을 수호했다.
차베스 정권 아래서 권력은 차베스 개인에게 집중되었고, 통합사회당이라는 단일 정당과 차베스를 추종하는 군부가 국가를 통제했다.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대중은 실질적인 의사결정에서 배제되었다. 차베스주의로 포섭되지 않은 혁명적 좌파는 탄압과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부유층만 선거에 나설 수 있게 한 반민주적인 선거법 때문에 혁명적 좌파는 발언권을 봉쇄당했고 부유한 우파가 차베스 반대진영을 독점했다.
차베스 정권은 핑크타이드에 함께 한 ‘진보’ 정권들 가운데 가장 왼쪽에 있었지만, 이 같은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차베스 정권의 본질적 한계는 2013년 차베스 사망 이후 권력을 이어받은 마두로 정권에서 폭발했다.
마두로 정권이 들어설 무렵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특히 중국 성장세의 둔화 때문에 원유·원자재 가격이 급락했다. 국가 경제의 압도적인 부분을 여전히 석유에 의존하고 있던 베네수엘라는 큰 타격을 받았다. 화폐가치와 가격통제 붕괴로 물가가 하늘 높이 뛰는 상황에서 임금삭감과 연금삭감이 강요됐다. 대중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차 충족되지 않자 주민의 25%에 해당하는 700만이 베네수엘라를 떠났다. 만성적인 물자부족, 의료진 유출, 인프라 파괴, 정전 등으로 의료 시스템도 붕괴했다. 그런 와중에 마두로 정권은 경제위기를 타개하겠다며 특별경제구역을 설치하고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노동법을 무력화했다.
차베스 정권이 과반수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선거에서의 절차적 정당성을 가졌던 것과 달리 마두로 정권은 점점 더 선거부정에 의지했다. 2018년 대선에서는 주요 야권 후보들의 출마가 금지됐다. 2024년 대선에서는 광범한 개표 조작 정황이 뚜렷하게 드러나 전국적으로 대규모 항의시위가 발생했는데, 특히 과거 차베스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던 카라카스의 노동자·빈민 거주지에서 큰 시위가 발생했다. 마두로 정권은 준군사단체 콜렉티보스와 협력해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2천여 명을 체포했다.
한편 2019년 트럼프 1기 정권은 베네수엘라 국회의장 과이도의 쿠데타 시도를 지원하기 위해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광범한 제재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산 원유 공급이 막히자 베네수엘라산 원유 공급을 확대하기 위해 바이든 정권이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재를 완화했다. 2024년 바이든 정권은 베네수엘라 대선을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야당 후보를 당선자로 인정했다. 2025년 트럼프 2기 정권은 초반부터 마두로 정권을 부정하며 베네수엘라 침공을 준비했다. 그리고 2026년 1월 2~3일 베네수엘라 침공 작전이 전격 전개됐다.
트럼프 정권이 베네수엘라를 전격 침공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를 서반구에 두겠다는 국가안보전략을 구체적으로 실행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한 의도는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중국과 베네수엘라의 관계를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중국은 베네수엘라에서 수출되는 원유의 80%를 국제시세보다 50% 할인된 가격으로 공급받아 왔는데, 이는 중국이 베네수엘라에 제공한 차관 600억 달러를 원유로 대환받는 과정이었다. 베네수엘라에서 공급받아 온 원유는 중국이 사용하는 전체 원유의 6~7%를 차지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이후 미국은 카리브 해상에서 베네수엘라를 드나드는 유조선을 계속 나포하면서 베네수엘라산 원유가 중국으로 가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 1월 20일까지 총 7척의 유조선이 미군에게 나포됐다.
한편 마두로 납치 이후 트럼프는 미국이 베네수엘라로부터 최대 5천만 배럴(28억 달러 어치)의 원유를 인도받아 대신 판매한 뒤 그 수익금의 일부를 베네수엘라에게 줄 것인데, 베네수엘라는 이 수익금으로 미국산 상품만을 구입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베네수엘라에서 권력을 승계한 로드리게스 정권은 1월 20일 “미국으로부터 원유판매대금 5억 달러 가운데 3억 달러를 첫 번째 분할금으로 받았다”고 밝혔다. 로드리게스 정권이 트럼프의 요구대로 베네수엘라 원유 수출의 통제권을 미국에게 넘긴 것이다.
둘째,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석유 자원을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대의 원유 매장량(3,030억 배럴)을 갖고 있다. 베네수엘라 석유가 미국 수중으로 들어가면 미국은 세계 원유 매장량의 30%를 통제하게 된다. 이것은 국제유가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여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하는 데, 그리고 ‘페트로-달러’ 체제를 방어하여 달러 패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 트럼프 정권의 국무장관은 베네수엘라 침공 직후인 1월 4일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이 미국의 적대국들에 의해 통제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20년 동안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이 운영되는 데서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중국이었다. 지금도 중국의 기술자들이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의 인프라를 유지·보수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기술자들을 몰아내고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을 장악하려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다.
그런데 베네수엘라에서 원유생산을 크게 늘리려면 ‘1천억 달러의 비용과 수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블룸버그는 예상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석유자원을 통제한다는 것과 그것을 대규모로 개발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다.
셋째, 베네수엘라를 미국의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에서 미국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안정적으로 관철하기 위해 미국은 베네수엘라를 속국으로 만들려 한다. 미국이 경제적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 약소국을 침략하여 속국으로 만드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트럼프는 과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용됐던 방식, 다시 말해 이른바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해서 친미정권을 수립하는 ‘국가건설’ 프로젝트와는 다른 방식을 사용하려 한다.
마두로를 납치한 직후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에서 친미 야권을 대표해 온 마차도 대신 마두로의 부통령 로드리게스를 베네수엘라의 통치자로 인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자신의 의지를 거역한다면 마두로보다 더 험한 일을 겪을 것이라는 위협과 함께, 자신의 요구를 순순히 따른다면 정권의 안위를 보장할 것이라는 신호도 보냈다. 초기에 혼란스런 메시지를 내던 로드리게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트럼프에게 확실히 굴복한 것으로 보인다. 1월 15일 마차도가 워싱턴에서 트럼프를 만나 노벨평화상을 헌납하던 날, 로드리게스는 카라카스에서 미국 CIA 국장을 만났다. 같은 날 로드리게스는 의회에서 첫 국정연설을 하면서 석유산업 국유화를 되돌리기 위한 탄화수소법(석유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석유산업에 대한 외국자본 투자유치, 기업에 유전운영 자율권 부여, 판매수익 배분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이 법안은 베네수엘라 의회에서 29일 통과되었다.
트럼프 자신이 비난해 왔던 ‘국가건설’ 프로젝트 대신 기존 지배세력을 굴복시켜 베네수엘라를 속국으로 만든다는 트럼프의 구상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성공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무엇보다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지배세력의 실체를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민중 위에 군림하는 억압적 세력이라는 점, 제국주의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순순히 굴복할 세력이라는 점, 그렇게 주종관계가 설정되고 나면 제국주의의 이해관계를 지키는 하수인으로서 노동자·민중을 효과적으로 억압할 세력이라는 점 말이다.
넷째, 미국의 군사적 우위와 중국의 군사적 열세를 실제 이상으로 극대화하여 드러냄으로써 미국의 패권적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미국은 베네수엘라 침공 과정에서 압도적인 군사력을 과시했다. 특히 중국제·러시아제 방공망을 철저히 무력화함으로써 베네수엘라만이 아니라 중국·러시아에 대해서도 군사적 우위에 있음을 과시했다. 물론 이것은 라틴아메리카라는 미국에게 매우 유리한 지역에서 벌어진 일로서 실제 격차보다 다분히 과장된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그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베네수엘라 침공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극우정권들이 공개적으로 환호를 보낸 것과 달리, 브라질의 룰라나 멕시코의 셰인바움 같은 ‘진보’ 정권들은 잔뜩 움츠러든 채 모호하고 추상적인 원론적 입장만을 내놓았다. 미국은 이번 베네수엘라 침공을 통해 향후 라틴아메리카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정치군사적 행동과 위협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관철해 나갈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4. 미·중 패권대결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1) 미 국가안보전략에 담긴 또 하나의 의미: 동맹 질서의 재편
미국의 새 국가안보전략에는 트럼프 정권의 중요한 의도가 하나 담겨 있다. 트럼프는 러시아를 중국 편에서 떼어내고 나아가 미국 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푸틴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고 있다.
트럼프 정권의 새 국가안보전략이 ‘미국은 더 이상 세계 패권을 추구하지 않으며 다극 세계질서를 인정하면서 서반구에 집중할 것’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쓰인 것은, 한편으로 마가(MAGA) 세력을 고려한 산물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극 세계질서’라는 푸틴의 슬로건에 공명하려는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국가안보전략은 러시아를 미국의 위협으로 규정하지 않은 대신, 유럽연합이 미국의 분쟁 종식 노력을 방해했다고 규탄했으며, 유럽이 ‘문명의 소멸’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비난했다. 또한 ‘나토가 영구적으로 확장되는 동맹이라는 인식을 종식시키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방지하겠다’면서 러시아의 핵심 요구를 수용할 뜻을 내비쳤다.
사실 트럼프는 러시아를 끌어당김으로써 미·중 패권대결의 판을 흔들고자 하는 의도를 두 번째 취임 직후부터 드러내 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트럼프 정권의 태도 또한 바로 이러한 의도에 의해 규정돼 왔다. 이에 대해 푸틴은 외견상으로는 트럼프의 유혹을 뿌리치며 중국과의 동맹을 강조하는 공식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미국이 러시아에게 어떤 대가를 제공할 수 있는지 확인할 용의가 있다는 점 또한 굳이 숨기지 않았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중국의 하위 동맹자가 된다는 것은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경제적 측면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역사적 맥락과 군사적 역량이란 측면에서 불만스러운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미국의 새 국가안보전략은 트럼프가 푸틴에게 한걸음 더 적극적으로 추파를 던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푸틴 정권은 국가안보전략이 공개된 직후 ‘러시아의 미래 비전과 부합’한다고 긍정적으로 화답했다. 또한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의 공동주범인 트럼프가 제안한 가자 지구 ‘평화위원회’ 참여도 수락했다.
트럼프가 푸틴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는 것은 러시아의 선택이 미·중 패권대결의 향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계산하기 때문이다. 만일 러시아가 미국 편으로 붙는다면 (미국과 중국 모두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인도 또한 러시아를 따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과거 고립된 소련을 몰락시켰던 것처럼 고립된 중국을 밀어붙일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의도가 실제 성공할 가능성은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는 우선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 과정에서 푸틴에게 큰 선물을 안겨줘야 할 텐데,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반발을 잠재우는 게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의 새 국가안보전략이 말하듯, 러시아의 손을 들어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결시키려는 미국의 의도는 그동안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적극적 반대로 계속 좌절돼 왔다. 유럽은 만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다면 그 파장이 우크라이나에 그치지 않고 구 소련권 또는 심지어 구 동구권에서 러시아의 영향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고, 이는 또 다른 전쟁을 촉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착된 형세를 돌파하기 위해, 트럼프는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극우정권 연대와 비슷하게 유럽에서도 극우세력 연대를 추진하겠다고 국가안보전략에서 밝혔다. 이를테면 “친미적 입장을 유지하면서 자주성과 전통적 유럽 생활방식의 보존·복원을 추구하는 정당과 운동, 지식인 및 문화계 인사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극우정권들이 트럼프를 중심으로 강한 주종관계로 묶여 있는 것과 달리 유럽의 극우세력들은 트럼프에게 별로 의존적이지 않은데다가 스펙트럼도 훨씬 넓다.
이런 상황에서, 그린란드와 캐나다를 향한 트럼프의 영토 팽창 야욕은 자신의 동맹 질서 재편 구상을 훨씬 더 실현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 침공 직후 기세를 몰아 그린란드에 군사력 동원 가능성까지 시사하고 유럽 8개국에 관세 부과를 위협하며 그린란드 병합 의지를 관철하려고 해 보았지만, 유럽의 반발과 금융시장이 보내는 위험신호 앞에서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의 ‘도를 넘은’ 탐욕에, 유럽의 자존심은 큰 상처를 입었다. 극우세력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2024년 11월 트럼프의 선거 승리를 크게 반겼던 유럽 극우세력들은 트럼프가 2025년 일방적 관세 부과와 방위비 지출 압박에 이어 2026년 베네수엘라 침공과 그린란드 병합 시도까지 나서자 일제히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라틴아메리카의 극우가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침공을 적극 지지하고 환호한 것과 달리 유럽의 극우는 트럼프의 그린란드 병합 의사에 적극 반발한다는 점이다. 유럽은 라틴아메리카와 달리 미국의 종속국이 아니라 (비록 열세에 있을지라도) 경쟁하는 제국주의 열강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의 극우세력은 유럽연합·유엔 등이 자국의 이민·경제정책 등에 개입하는 것을 ‘주권침해’라고 반대하는 ‘고립주의’에 입각해 세력을 확장해 왔기 때문에, 트럼프의 노골적인 주권침해에 반발하는 게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만일 트럼프가 그린란드 병합을 계속 추진한다면 트럼프와 유럽 극우 사이의 균열은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 등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극우들은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트럼프의 러시아 끌어당기기 카드는 그 자체로도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았는데, 트럼프 자신의 영토팽창 야욕까지 뒤섞이면서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만일 트럼프가 지금 같은 방식으로 일을 밀어붙인다면, 미국이 러시아를 얻는 과정은 동시에 유럽을 잃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중국 입장에서 러시아 대신 유럽을 동맹으로 얻을 수 있다면 꼭 손해만은 아닐 수 있다. 그러한 사태전개의 가능성은 역으로 트럼프가 러시아 끌어당기기 카드를 계속 추진할 동력을 크게 약화시킬 것이다.
2) 미·중 패권대결의 최후 해결책: 군사적 정면대결
미국과 중국을 각각 중심에 둔 동맹 질서가 어느 한편으로 크게 기울면서 한쪽이 심각하게 고립당하는 길로 가지 않는 한, 미국과 중국의 패권대결은 최종적으로는 군사적 정면대결을 통해서 패권의 향방을 결판 짓는 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이며, 지금으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다. 물론 제국주의와 전쟁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국제적 투쟁이 그러한 군사적 정면대결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말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군사적 정면대결이 펼쳐진다면 그 핵심 전장은 어디가 될까? 그것은 단연 동아시아에서 서태평양에 이르는 지역이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첫째, 이 지역은 미국의 해양세력과 중국의 대륙세력이 가장 직접적으로 가장 팽팽하게 맞부딪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일본과 한국을 동맹으로 이끌고 있고, 중국은 러시아와 북한을 동맹으로 이끌고 있다.
둘째, 중국은 서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분쇄하고 미군을 서태평양 동쪽으로 몰아낸 뒤 중국 근해에서 서태평양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대한 통제권의 수립을 전략적 목표로 갖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전략적 목표는 이미 2013년 시진핑이 베이징을 방문한 미국 국무장관에게 “광활한 태평양은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대국을 수용하기에 충분히 넓다”며 태평양 양분론을 제기했을 때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이것은 일본·한국·대만 등의 동아시아와 필리핀·베트남·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전반을 중국의 영향력 아래 두겠다는 것이다. 이에 맞서 미국은 일본과 한국에 6만 4천여 명의 미군을 배치하고 있고, 대만에 점점 더 많은 무기를 공급하고 있으며, 서태평양부터 대만해협까지 대규모의 해군 전력을 상시 가동하고 있다.
셋째, 오늘날 중국・일본・한국・대만을 포괄하는 동아시아는 세계 자동차 생산의 43%, 반도체 생산의 75%, 선박 건조의 95%를 차지하는 ‘세계의 공장’으로서 세계 자본주의의 향방을 결정할 만한 위치에 있다.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몰아내고 패권을 수립한다면, 세계적으로도 미국을 능가하는 최고의 패권국으로 올라설 것이다. 반대로 미국이 중국의 야망을 좌절시킨다면, 미국은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고 유일 패권을 다시 한 번 확립하게 될 것이다.
만일 미국과 중국 사이의 군사적 정면대결이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면, 그 전쟁은 어떤 양상을 띨까?
첫째, 그 전쟁은 (인류의 공멸로 가지 않을 것이라면) 핵 전쟁이 아닌 재래식 전쟁으로 전개되겠지만, 대신 사상 최대 규모의 파괴력을 동원하는 전쟁이 될 것이다. 2025년 기준 미국·일본·한국 동맹이 가진 병력 수는 총 205만(135만+25만+45만)이고, 중국·러시아·북한이 가진 병력 수는 총 470만(200만+150만+120만)이다. 여기에는 세계 5대 군사강국 가운데 4개국이 포함돼 있으며, 전통적인 군사장비부터 첨단기술 군사장비까지 중무장한 군대들과 산업적 역량들이 포괄돼 있다.
둘째, 그 전쟁은 아마도 대만이나 한반도를 둘러싸고 시작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어디서 시작되든 빠른 속도로 동아시아와 서태평양 전체를 포괄하는 전쟁으로 확산될 것이다. 육지에서는 중국의 동부연안, 북한, 러시아 극동지역, 대만, 한국, 일본이 모두 전장이 될 것이고, 해양에서는 중국 근해부터 서태평양에 걸친 영역이 모두 전장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을 핵심 전장으로 하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군사적 정면대결로부터 얼마나 가까이 있을까? 합리적으로 추론해 본다면, 다행히 10년 이상의 시간은 아직 남아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미국과 중국 모두 필수적인 군사적 준비를 위해 최소한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군사적 준비가 끝나더라도 엄청난 규모의 대량 파괴와 살상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대규모 결전을 최종 선택하기까지는 아마도 또 얼마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 간의 군사적 정면대결이 시작되는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15~20년 뒤, 다시 말해 2040년대의 어느 시점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미국과 중국은 각각 어떤 군사적 준비가 필수적인 상황인 것일까?
먼저 중국은 무엇보다 핵무장을 강화해서 핵전쟁을 피할 수 있는 실질적인 핵균형(상호확증파괴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최근 중국은 매년 핵무기를 100기씩 추가하면서 2025년 기준 600기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현 속도라면 10년 뒤에는 대략 1,500기의 핵무기를 갖추게 된다. 이는 미국의 전체 핵무기 수에 비하자면 여전히 절반에 훨씬 못 미치지만 미국이 오랜 시간 유지하고 있는 실전배치 핵무기 수와는 거의 비슷하게 된다. 항공모함 전력을 따라잡는 것도 중요하다. 중국은 2035년까지 항공모함 6척을 추가 건조해 9척을 운용할 계획인데 그렇게 되면 11척을 운용하는 미국에 버금가게 된다.
미국은 무엇보다 재래식 전쟁을 뒷받침할 제조업과 해군력을 뒷받침할 조선업을 재건해야 한다.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에서 벌어질 전쟁에서 해군력이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감안할 때 미국과 중국 사이의 조선업 격차는 미국의 큰 약점이다. 오늘날 중국이 세계 조선업의 55%를 차지하는 반면 미국은 0.1%만을 차지한다. 미국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건조한 총톤수보다 많은 톤수를 중국의 한 조선소가 1년 만에 건조해 낸다. 2025년 현재 중국과 미국의 해군함정 수는 370척 대 297척인데, 당분간 격차가 더 벌어질 상황이다. 중국의 첨단 극초음속 미사일에 대응할 수 있는 무기체계도 개발해야 할 것이다.
15~20년 뒤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을 핵심 전장으로 하는 미국과 중국의 군사적 정면대결 가능성을 전망하는 것은 과도한 예단이 아니냐는 반론이 예상된다. 현실에는 수많은 변수가 작동하는 법인데 시기까지 특정해 가면서 그렇게 전망할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는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실제로 현실은 앞에 얘기한 전망과는 꽤 다른 그림으로 전개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런 전망을 생각하고 얘기하는 것이 갖는 결정적인 유익함이 있다. 꼭 그런 전망대로는 아닐지라도 대략 유사한 형태의 세계사적 격변과 도전이 우리 앞에 가까이 있음을, 따라서 그에 대응할 수 있는 노동자·민중의 운동을 각국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수준에서 시급히 건설해 나가야 할 중차대한 필요성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들은 우크라이나 전쟁, 팔레스타인 학살, 베네수엘라 침공, 그린란드 병합 시도 같은 사건들이 그저 머나먼 나라의 역사 속 한 장면 같은 이야기들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상대적으로 안온한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거대한 핵폭풍의 전조로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그러한 해석에 기초해 노동자계급의 실천적 대응능력을 비상하게 발전시켜 가는가 여부는 머지않은 미래에 엄청난 차이로 돌아올 것이다. 20세기의 첫 15년 동안 독일과 러시아에서 펼쳐졌던 운동의 차이가 마침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엄청난 차이로 돌아왔던 것처럼 말이다.
5. 실천 방향과 과제
자본주의가 ‘위기·전쟁·혁명의 시대’다운 모습을 점점 더 분명히 드러내는 상황에서, 제국주의와 전쟁에 맞서는 노동자·민중의 운동을 각국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건설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노동자계급에게 사활적인 과제다. 그런 관점에서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과 미·중 패권대결’을 살펴본 오늘, 우리의 실천이 나아갈 방향과 과제에 대해 간단히 얘기해 보겠다.
첫째, 전 세계 노동자·민중과 함께 한국의 노동자·민중 또한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을 규탄하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이 갖는 부당함을 규탄하는 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더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것이 베네수엘라와 라틴아메리카 노동자·민중만의 고난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끝내는 전 세계를, 그리고 특히 이곳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끔찍한 참화와 학살로 끌고 들어갈 제국주의 전쟁기계가 작동한 결과라는 사실이다. 지금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에 맞서 싸우는 것은 미래에 바로 우리에게 닥쳐올 훨씬 더 끔찍한 전쟁과 학살을 저지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둘째,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을 규탄하는 노동자·민중의 투쟁과 국제연대는 노동자·민중을 억압하면서 허구적인 반제국주의 깃발을 휘날리는 반동적 정권들과 철저히 독립된, 노동자·민중의 자주적 운동으로서 전개되어야 한다.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의 반동적인 성격은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베네수엘라 노동자·민중의 대중운동을 발전시키는 데서 결정적인 방해물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와 같은 반동적 정권들의 역할에 대한 일체의 환상과 결별할 때에만, 노동자·민중의 반제국주의 운동은 흔들림 없이 일관되게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셋째,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을 규탄하는 투쟁은 세계 노동자·민중의 반제반전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한 큰 흐름의 일부가 돼야 하며, 특히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국제연대 운동과 결합돼야 한다. 지난 2년 동안 가자 집단학살에 맞서 세계 곳곳에서 전개된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은 세계 노동자·민중의 반제반전 운동에서 중심으로 떠올랐다. 특히 온건한 BDS 운동에서부터 격렬한 가두시위, 점거, 수무드 선단까지, 나아가 학살지원을 직접 중단시키기 위한 총파업까지 다양한 투쟁수단을 발전시킴으로써 노동자·민중의 반제반전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구축해 왔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 규탄 투쟁을 팔레스타인 연대운동과 결합시키는 것은 노동자·민중의 반제반전 운동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넷째, 노동자·민중의 반제반전 운동은, 특히 이곳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는, 미·중 패권대결이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을 핵심 전장으로 하는 군사적 정면대결로 나아가는 고리를 끊기 위한 노동자·민중의 국제적인 운동을 건설하는 길로 전진해야 한다. 우리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획기적으로 완화하기 위해 주한미군·주일미군 철수와 북한의 핵무장 해제를 동시에 요구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 모두의 간섭과 침략을 거부하는 대만의 평화적인 자주독립, 따라서 친미 또는 친중 자본가계급이 아닌 노동자·민중 권력에 의한 대만의 자주독립을 지지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중 패권대결이 종국에는 군사적 정면대결이라는 끔찍한 참화와 집단학살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폭로하고 경고하면서 그러한 제국주의 전쟁책동을 반대하고 저지해 낼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반제반전 운동을 한국·일본·미국·중국·대만·북한·러시아에서부터 나아가 전 세계에서 건설해 나가야 한다.
(끝)
[1] 박민희, <한겨레신문>, 2026/01/07, ‘중국특사 만난 뒤 붙잡혀간 마두로... 중국은 어떻게 대응할까’
[2] 2024년 중국 전체 14억 인구의 1인당 GDP는 13,317달러였다.
[3] 안드레 바비에리, 2025,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의 중국」
[4] 연준의 국제통화사용지수(Index of international currency usage)는 세계적으로 공개된 외환 보유고(25%), 외환 거래량(25%), 외화 채권 발행(25%), 외화 및 국제 은행권 채권(12.5%), 외화 및 국제 은행권 부채(12.5%)에서 각 통화가 사용되는 비중을 가중 평균한 값이다.
[5] 미하엘 브뢰브스팅, 2025/12/11, 「트럼프의 새 국가안보전략: 미 제국주의의 다극세계 전략 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