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절망할 바에야 정신 나간 희망을 품겠다!" - 고려대학교 소수자인권위원회 김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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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인터뷰] "절망할 바에야 정신 나간 희망을 품겠다!" - 고려대학교 소수자인권위원회 김서연

  • 고근형
  • 등록 2022.12.2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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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기후정의행진,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문구 ‘절망할 바에야 정신 나간 희망을 품겠다’를 기억하시는지. ‘체제전환을 위한 9.24 기후정의행진 학생참가단’에도 함께한 고려대학교 소수자인권위원회(소인위)는 차별과 혐오 없는 사회, 기후정의 실현,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전환이 서로 뗄 수 없는 과제라고 지적한다. 최근에는 발전 국유화와 공공적 재생에너지 전환을 요구하는 김용균 4주기 청년학생선언을 제안하기도 했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이 소인위 서연님을 만났다.


인터뷰 수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활동하고 계신 고려대학교 소수자인권위원회에 대해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고려대학교 소수자인권위원회는 다양한 소수자성 간의 상호교차성에 주목하는 단체입니다. 여성, 퀴어, 장애, 노동, 빈곤, 이주민, 비거니즘, 기후/환경 등 다양한 의제를 아우르는 활동을 하며, 세미나, 보도사업, 인권소식지와 인권가이드 제작, 학내외 인권단체들과 연대사업 등을 진행합니다. 대자보도 많이 쓰고요. 학내인권단체협의회에 속하여 총학생회 선거운동본부에 정책질의서를 보내는 일도 합니다.


'체제전환을 위한 9.24 기후정의행진 학생참가단'에 참여하셨습니다. '체제전환'을 이야기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사실 학생참가단에 참여하겠다고 했을 때에는 ‘체제전환’보다는 ‘기후’에 더 초점을 맞춘 채였습니다. 하지만 기후정의를 공부하면 할수록 기후‘정의’에는 체제전환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소수자인권위원회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불평등을 다루고, 이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이러한 불평등들을 아우르는 거대한 구조들에 대해서도 공부하거든요. 가부장제라든가 에이블리즘, 인간중심주의나 유/이성애중심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같은 것들이죠. 그러다 보니 기후정의를 공부하면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우리가 맞서 싸우는 불평등이 기후의 문제와 이렇게 맞닿아 얽혀 있구나, 기후의 문제에 맞설 때에도 불평등의 관점에서 다가가야겠구나,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소수자·인권 활동가들이 기후정의운동에 함께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인권운동을 하는 우리는 늘 불평등을 마주합니다. 여성과 남성 사이의 불평등, 노동자와 사용자(자본가) 사이의 불평등, 인간과 비인간동물 사이의 불평등 모두 우리가 각각의 투쟁에서 마주하고 맞서 싸우는 불평등이죠.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은 무척 폭넓고 중첩적이고 또 지독합니다. 내가 소수자이자 동시에 다수자일 수 있다는 인식은 늘 지니는 것이 마땅하나, 또 내가 어떤 정체성을 지닌 이유로 겪는 불평등은 나를 또 다른 싸움에서 불리하게 하기도 합니다. 가령 제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취업시장에서 탈락해 경제적 불평등에도 노출되는, 또 그렇게 주거와 건강이 취약해지는 순환이 발생하는 경우가 그 예시가 되겠지요.


우리가 마주한 기후위기 상황에서도 이러한 불평등의 구조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지난 여름 폭우로 인해 반지하에 거주하는 가난한 이들, 돌보는 이들, 또 노동자들이 죽은 일, 또 사상 최악의 홍수로 국가적 재난 수준의 피해를 입은 파키스탄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몇 년 전에는 호주에 대규모 산불이 발생하여 수많은 동물이 죽고 다친 일도 있었죠. 식량난으로 지구의 남반구에서는 굶주림이 실존적인 위협으로 존재하고, 상승하는 해수면으로 태평양의 섬나라들은 잠기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에, 온실가스 배출에, 환경오염에 가장 적은 기여를 한 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본가, 기업, 부국들이 내뿜은 이산화탄소로 인한 책임을 가장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이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후위기가 불평등하다고 하는 겁니다.


기후위기는 그 시작이 불평등하고 그 결과 또한 불평등합니다. 단 100개의 거대기업이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71%를 발생시키는 동안, 기후위기로 피해를 입는 소수자들은 그 피해로 인해 더욱 위태로워집니다. 불평등이 기후위기를 야기했듯 이제는 기후위기가 불평등을 더욱 더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인권과 소수자를 위해 싸우는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또 이 사달이 나도록 방임하고 또 조장한 책임자들을 나서서 규탄하고 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소수자인권투쟁은 마땅히 기후정의투쟁과 나란해야 합니다. 기후정의운동과 소수자인권 운동의 근간에는 모두 불평등의 문제가 있고, 불평등을 타개하는 일만이 기후정의를 실현하는 일이자 또 소수자를 해방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지난 924 기후정의행진에서 읽은 피켓들은, 그곳에서 외친 구호들은, 그간 제가 임했던 싸움들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습니다. 장애인 이동권을 외치고 동물권을 외쳤습니다. 노동권 보장과 가부장제의 철폐를 외쳤습니다. 불평등에 맞서 싸우는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후정의운동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환경을 이야기할 때 늘 들려오는, 자동차 온실가스 배출이 심각하니 대중교통 이용 활성화하자. 귀가 닳도록 들은 허무한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의 핵심을 짚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문구가 허무한 소리로 들리는 이유는 첫째로 구조에 대한 자중 없이 온실가스 배출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개인의 상황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납작한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대중교통의 이용을 활성화하려면 대중교통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접근가능해야 합니다. 대중교통 시스템이 노동자를 혹사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폭넓게 확립되어야 하고, 노인과 장애인을 비롯한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저상버스와 엘리베이터가 전면 도입되어야 합니다. 시장논리에 의거한 도심지 중심의 교통망 발달이 아닌 기본권으로서의 이동권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노동권 투쟁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기후재난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꼽히는 자본주의 시장구조의 논리 아래서는 인간이 수단화/도구화되고 이윤 추구만을 위한 부품으로 전락합니다. 또 과속/과잉 생산의 굴레는 노동자를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온실가스 배출, 토양 황폐화, 폐기물 발생 등으로 기후위기를 심화시켜 노동자의 삶과 생을 위협합니다.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환경 개선은 노동자를 인간으로 바라보는 일부터, 또 구조의 문제를 인식하고 지적하는 일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후정의 운동은 페미니즘과 연결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기후정의와 젠더정의는 병진해야 합니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노동을 저평가하고 착취해왔으며, 성장주의와 맞물려 전통적으로 여성이 수행하던 돌봄노동을 폄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우리는 이 사회의 돌봄공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기후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착취적 성장주의에서 벗어나, 경쟁과 소외가 아닌 돌봄을 중심에 두는 돌봄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이는 남성-가장-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새로운 문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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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기후정의행진 당일 '절망할 바에야 정신 나간 희망을 품겠다'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말씀해주신 문구는 우리 모두의 일Notre Affaire à Tous의 <기후정의선언: 우리는 실패할 권리가 없습니다>에서 발췌했습니다. 번역체가 아주 심하게 남아 있어서 읽을 때 꽤나 힘들었던 기억이 나지만, 저 문장은 무척 좋아서 적어두었습니다. 사실 인권활동을 하다 보면 지칠 때도 많고, 세상의 더딘 변화에 내가 하는 일의 소용을 의심하게 될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열심히 쓴 대자보는 그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것 같고, 열심히 한 투표는 대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하죠. 그럴 때면 내가 왜 이 힘든 길을 굳이 택해서 걷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드는데, 그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을 저 문장에서 어느 정도 찾은 게 아닐까 싶어요. 아무리 바뀌는 게 없는 것 같아도,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희망을 품고 대자보를 쓰든 투표를 하든 하는 것 같습니다. 


기후정의를 외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9.24 때 들은 구호들을 제가 몇 년 전에만 들었어도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정신 나간’ 것 같다고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묻고 싶습니다. 불에 타고 물에 잠기고 굶주리고 착취당하는 지금의 세상을 그저 바라보는 것과 고치고자 하는 것 중 어느 게 정말로 ‘정신 나간’ 일인지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린 지구를 이제라도,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되돌리고자 하는 태도와 노력은 지극히도 현실적이고, 필수적이고, 당연한 것 아닌지요. 그 태도에는 절망도, 체념도, 회의도 냉소도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희망밖에는 방법이 없기에 희망으로 임합니다. 덧붙여 그 문장이 나온 맥락을 첨부합니다.


“우리는 갈 길이 아주 멉니다. 어쩌면 결코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절망할 바에야 정신 나간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낡아빠진 불가능 염불에 기죽지 맙시다. 바로 우리가 현실주의자입니다!”


조금 벗어난 얘기입니다만 ‘정신 나간’이라는 말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 한 마디 덧붙입니다. 기후정의행진 이전에 저는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주최한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 행사에 참여했는데요. 이 행사는 ‘적자생존’이라는 자본/능력주의 문법에 의문을 걸고 “이상한, 미친, 취약한, 아픈, 연결되고 돌보고 싸우는 맘으로 싸우는 몸으로 살아가는 서로”를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그곳에서 “미쳤다”고 정의되는 이들이 모여 우리를 “미치게” 하는 세상에 어떻게 연결로써 저항할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더 목 놓아 외치고 싶습니다. 정신 나갔다면 정신 나갔다고, 미쳤다면 미쳤다고요.

 

마지막으로 학생사회에 기후정의운동과 관련하여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첫째, 학내 인권기구 혹은 연대체는 학내에서 기후환경운동 단체 혹은 기구와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합니다. 우리 학교의 경우에는 학내인권단체협의회가 구축되어 있어 정기회의와 연대활동을 진행하며 지속적으로 소통합니다. 이러한 연대체를 비롯한 다양한 인권운동의 공론장에서 기후운동과 함께 논의할 것을 제안합니다. 뿐만 아니라 각 단체의 논의에 있어서도 의제간 연결성을 인지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둘째, 우리는 공감을 방패로 삼아 물러서거나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후정의와 장애 인권이, 동물권이, 여성운동과 노동자 투쟁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 이상 자본주의/정상성/가부장제 논리가 어느 누군가라도 억압하려 들 때면 함께 연대하여 맞서야 합니다. 누군가가 ‘기후정의운동하는 데 뭐 이런 것까지 챙기냐’는 말을 하는 것의 위험성을 단호히 인지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부대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서로와 더욱 지독하게 얽혀야 합니다. 삶이 각박해지고 생존경쟁이 유독해질수록 우리는 공감과 연대로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합니다. 다름과 복잡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안에서 섬세함을 잃지 않도록 서로에게 비판과 경청으로 임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루될 가능성이 열린 상태,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연루되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함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소수자인권위원회의 모토는 "인권에는 나중도, 예외도 없다"입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할 때는 "지금 당장 차별금지법"이라고, 여성혐오범죄와 여성살해를 규탄할 때는 ni una menos, "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지난 9월, 기후정의행진의 구호는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였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는 말을 할 때, "단 한 명도"라는 말을 할 때, 저는 항상 진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단 한 명의 여성도 잃을 수 없다며 신당역 추모문화제에 나갔을 때는 정말로 단 한 명의 여성이라도 더는 잃을 수 없다는 처절한 마음으로, 지금 당장 차별금지법을 실현하라며 의원실에 문자를 보낼 때는 정말로 차별금지법 없이는 나와 내 친구들이 하루도 안전할 수 없다는 처절한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삶이 생존이 될 때, 우리의 투쟁은 모두 목숨을 건 일이 됩니다. 여성으로서, 노동자로서, 기후재난의 당사자로서 우리는 오늘도 근근이 생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살고 싶습니다. 그 이유를 모르더라도 하루를 또 하루를 살아내고 싶은 마음만큼은 단단하고 투명하게 존재합니다.


그 마음은 누구에게나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니 그 누가 그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든, 적어도 이윤과 성장, 자본과 경쟁을 앞세워 누군가의 살아갈 자리를 지워버리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쨌든 이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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