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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운사 연재 4회] 1부 폭압과 저항(1970~1987) [3] 민주노조운동의 파괴와 재건

기사입력 2026.02.09 11:37 | 조회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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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를 학살한 전두환 신군부는 모든 민주노조를 파괴했다. 쓰라린 피눈물을 딛고 노동자들은 정권에 맞서 함께 싸우지 못한 것을 통렬히 반성했다. 새로 등장한 민주노조들은 구로동맹파업을 통해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으로 무장한 새로운 민주노조운동의 길을 열었다.

     

     

    1) 신군부의 폭압과 노조파괴

     

    광주민중항쟁을 잔인하게 진압한 전두환은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임의기구의 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사실상 대통령 노릇을 시작했다. 광주를 학살한 군사정권의 폭압이 이제 전 사회를 휘감았다. 8월 27일 체육관 간선을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된 전두환은 10월 27일 공포된 개정 헌법에 따라 1981년 2월 25일 다시 체육관 간선으로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개정 헌법에 따라 비상 입법기구로 등장한 국가보위입법회의(국보위)는 대통령 전두환이 임명한 81명의 의원들로 구성돼 1981년 4월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행할 때까지 6개월 동안 정치활동규제법, 언론기본법, 집회시위법, 노동관계법 등 189건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특히 국보위는 기업별 노조 체제로 전환, 제3자 개입금지 신설, 노조설립 요건 강화, 노조임원 자격 제한, 조합비 사용 제한, 노조운영에 대한 행정개입 확대, 단체교섭권 위임 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쟁의 냉각기간 연장, 직권중재 대상 확대, 노사협의회 설치 등의 내용으로 근로기준법·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노동위원회법을 개정하고 노사협의회법을 신설했다.

     

    전두환 정권은 사회 전반을 상대로 한 이른바 ‘정화’ 조치에 노동조합을 포함시켰다. 1980년 8월 21일 발표한 노동조합 정화 지침에 따라 한국노총 및 산하 산별노조 위원장 12명을 바로 사퇴시켰다. 한국노총 지역지부 105개를 모두 해산시켰다. 노동계 인사 191명을 정화 대상자로 지목해 현장복귀를 지시했다. 특히 1980년 9월 원풍모방 지부장을 정화 조치하고, 12월에는 조합원 40명을 계엄사로 끌고 가 협박과 폭행으로 사표를 강요했다. 그중 일부는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다른 노조에서도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는데, 최소 22명의 노조간부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있다.[1]

     

    1981~82년 전두환 정권은 청계피복, 반도상사, 해태제과, 콘트롤데이타, 서통남화전자, 태창메리야스, 원풍모방 등 민주노조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1981년 1월 6일 청계피복노조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리고 노조 사무실을 폐쇄했다. 1월 30일 조합원 21명이 ‘아시아·아메리카 자유노동기구’(아프리) 농성에 돌입했지만,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 해산하고 12명을 구속시켰다. 1981년 3월 반도상사, 1982년 7월 콘트롤데이타에 폐업을 강제하여 노조를 해산시켰다.

     

    원풍모방노조가 굴복하지 않고 계속 저항하자, 1982년 9월 회사의 사주를 받은 사원 100여 명이 노조 사무실을 점거해 노조 간부들을 폭행하고 기물을 부쉈다. 조합원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가자, 9월 30일 밤부터 추석날인 10월 1일 새벽까지 전투경찰이 합세해 노동자들을 잔인하게 끌어냈다. 경찰은 노조 간부 전원을 전국에 지명 수배했다. 원풍모방 노동자들이 10월 7일과 13일 회사 앞과 영등포 일대에서 거리시위를 벌이자 경찰은 수십 명의 노동자를 구속하거나 구류에 처했다. 회사는 574명을 해고했다. 11월 12일에는 핵심 간부 11명이 전원 체포됐다. 원풍모방 노조의 파괴로 1970년대 민주노조들에 대한 파괴가 일단락됐다.

     

    이렇듯 모든 민주노조가 차례로 탄압을 받고 줄줄이 해산됐지만 민주노조들은 각개격파 당하면서도 연대투쟁의 깃발을 올리지 못했다. 1981년 청계피복노조 사수투쟁부터 1982년 원풍모방노조 사수투쟁까지 개별적인 투쟁으로 저항할 뿐이었다.

     

    신군부의 탄압에 밀려 무기력하게 해산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 주체들은 무엇보다 연대투쟁에 나서지 못한 운동의 한계를 뼈저리게 절감했다. 특히 청계피복노조는 해산을 당한 이후 자기비판 문서를 공개 발표했다. 철저한 반성을 다짐하고 제안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당국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계속되는 탄압에 우리는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직 조직보존을 위해서 뒷걸음질 쳐 왔다. 언젠가 계엄령이 해제되고 사회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면 그동안 입은 타격을 곧 회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그렇게 해왔다. 또 반도상사 노조 파괴를 보면서 가슴아파하면서도 한편 우리의 조직이 붕괴되지 않음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우리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공포심에 우리도 예외 없이 짓눌려 당국의 탄압에 저항을 못했다. … 우리의 조직을 약화시킨 요인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2]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YH 노동자들이 보여준 결기처럼 한편으로 엄청난 힘을 가진 운동이었다. 그런데 자기 사업장 조합원들끼리는 강력한 결집력을 가졌음에도 다른 사업장 민주노조가 탄압으로 해산되는 상황에서 연대투쟁을 할 수 없는 장벽에 갇혀 있었다. 생존권 투쟁은 처절하게 할 줄 알지만, 정권에 맞선 연대투쟁·정치투쟁은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청계피복노조가 한 반성의 의미는 ‘언젠가 우리에게 민주노조 할 기회가 다시 온다면 그때는 다르게 하리라’는, 특히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을 할 수 있는 민주노조운동을 하리라’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해산당한 조합원 가운데 상당수가 새로운 사업장으로 가서 구로공단과 인천 등에서 새로운 민주노조들의 밀알이 됐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중요한 씨앗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구로동맹파업에서 핵심 사업장이었던 대우어패럴노조의 위원장이 바로 청계피복노조의 조합원이었다. 연대투쟁을 당연한 과제로 받아들였던 구로공단 민주노조들의 방향은 청계피복노조의 반성에 기초하고 있었다.

     

    2) 다시 일어서는 노동자들

     

    폭압을 이어가던 전두환 정권은 1983년 2월부터 12월까지 구속자 석방, 사면·복권, 제적생 복교, 대학 상주 경찰의 철수, 해직교수 복직 등의 정치적 유화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했다. 집권 안정기에 들어섰다는 자신감, 탄압의 효력 감소, 1983년 11월 미국 대통령 레이건 방한을 대비한 분위기 조성 등이 그 이유였다. 군사정권의 유화조치는 민주화 투쟁이 다시 활성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노동자들의 투쟁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1983년 9월 전두환 정권 아래서 최초의 공개 운동단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창립됐다. 1984년 3월에는 수도권 해고자들이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복)를 창립했다. 노복은 기관지 <민주노동>을 발행하면서 블랙리스트 철폐투쟁과 노동악법 개정 투쟁에 주력했다. 1981년 강제해산 당했던 청계피복노조가 1984년 4월 ‘법외노조’로 복구를 선언하고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청계피복노조는 합법성 쟁취를 위해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며 다시 한 번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에 섰다.

     

    택시노동자들이 뒤를 이었다. 택시노동자들은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하루 18시간을 일하면서도 한 달에 사흘밖에 쉬지 못했다. 과도한 사납금을 채우기 위해 목숨 걸고 과속운전을 해야 했다. 1984년 5월 대구의 택시노동자 1천여 명이 사납금 인하, 노조결성 방해 중지, 취업카드제 철폐 등을 요구하며 대구시청 앞 등 중심가를 차량으로 봉쇄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당황한 대구시는 사납금 인하 등 택시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을 수락한다고 발표했다가 농성이 해산되자 약속을 뒤집었다. 택시노동자들이 다시 대구택시사업조합 이사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자 경찰이 출동하여 농성을 해산시키고 65명을 연행했다. 대구에서의 파업은 가라앉았지만, 부산·대전·강릉 등 여러 도시로 택시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됐다.

     

    1984년 하반기 대우자동차에서는 노조민주화 세력이 집행부 불신임을 추진한 것과 관련해서 2명이 해고당했다. 1985년 4월 대우자동차의 2천 200여 노동자들이 임금 18.7%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농성이 사흘째 계속되자 대우그룹 총수 김우중이 직접 나서서 해산을 요청했지만 노동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회사측이 주말을 이용해 휴업을 선언하려 하자 강제진압에 대비해 350여 명이 기술센터 3층을 점거했다. 조합원들의 들끓는 열기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파업을 선언하고 어정쩡하게 농성장을 지키고 있던 노조집행부가 더 이상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고 빠져나갔다. 민주파 대의원들이 이미 실질적인 지도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결국 파업 9일 만에 김우중 회장과 민주파 대의원 대표가 16.4% 임금인상에 합의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대우자동차 임금인상투쟁은 대자본에 맞선 투쟁이었기에 사회적으로 관심이 많았고 언론에서도 날마다 보도했다. 대우차 투쟁의 승리는 다른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을 강력하게 자극했다. 학생출신 활동가와 노동자대중의 유기적 결합을 보여주었으며, 남성 중심의 대공장 노동자들도 조직적으로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

     

    3) 1985년 구로동맹파업

     

    오늘날 구로디지털단지가 있는 구로동과 가리봉동 일대에는 1965년부터 구로공단이 있었다. 1980년대에는 섬유산업과 전자산업을 중심으로 8만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수도권 최대 규모 공단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이 다수인 구로공단 노동자들은 욕설과 폭행, 성희롱이 난무하는 인간 이하의 삶에 시달리고 있었다. 임금은 1인 최저생계비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1984년 6월 구로공단에 자리한 대우어패럴에서 민주노조가 결성됐다. 사측은 노조간부 회유·협박, 흑색선전, 노조탈퇴 강요, 노조반대파 조직, 구사대를 동원한 조합원 폭행, 라인축소, 납치·감금 등 온갖 수법으로 노조를 파괴하려 했다. 집요한 탄압 때문에 1천 400여 명이던 조합원이 1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한국노총 위원장실 농성, 민한당사 농성 등을 통해 완강하게 맞서면서 노조를 지켜냈다.

     

    대우어패럴에 이어 대한마이크로,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효성물산, 협진, 유니전 등에서 속속 민주노조가 결성됐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서 배출된 노동자출신 활동가들과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각 사업장에 들어가서 끈질기게 선진노동자들을 조직해 나간 활동의 성과였다.

     

    대우어패럴에는 여러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들어와 있었던 사람은 최한배였다. 최한배는 생산현장에 취업한 것이 아니라, 보일러 기사로 취업했다. 그는 동화교회 야학에서 만나오던 김준용이 군에서 제대하자, 대우어패럴 입사를 권했다. 1982년 김준용은 대우어패럴 재단사로 입사하면서 현장활동을 시작했다. 이 두 사람은 현장활동에 대한 모든 것을 공유하며 논의했다. …

     

    현장활동을 활발히 하던 김준용은 대우어패럴에 들어와 있던 … 학생출신 활동가, 추재숙(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화자(JOC) 같은 여러 활동가들의 동선을 파악하면서, 관계를 만들어 갔다. …

     

    활동가들의 만남이 진행되는 다른 한편 대우어패럴에는 노동자들의 여러 소모임, 친목모임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중활동의 중심에 김준용이 있었다. 김준용은 청계피복노조에서의 활동경험을 살려 남성노동자, 여성노동자 그리고 소속 라인을 넘어 현장 어디서나 노동자들과 편하고 쉽게 사귀었다. 김준용은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술모임, 등산모임, 축구모임 같은 친목모임을 여럿 만들어 노동자들과의 관계를 넓혀갔다. 그 가운데 열성을 가진 사람들은 소모임으로 모아 노동자의 권리, 노동조합에 대한 학습을 하기도 했다. 학습모임은 최한배가 운영했다. 학습소모임 가운데 ‘호롱불’은 가장 열성적이고 적극적인 노동자들이 모였으며, 그 성원들은 대우어패럴 노조결성과 활동의 중심인물로 성장했다.

     

    1년에 걸친 활동 결과, 1984년 김준용을 중심으로 어떤 활동이든 참여하는 노동자가 100명이 넘었다. 이들이 노조결성 뒤 자본가의 탄압에도 끝까지 노조를 사수하는 핵심성원이었다. …

     

    “… 김준용이 『전태일 평전』을 나한테 줬어요…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내가 좀 감동을 받았지…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싶기도 했고 그걸 읽고 ‘노동조합이란 게 필요한 거구나 회사에…’ 그때부터 준용이하고 같이 움직이게 된 거죠. … 청계천 쪽에 가면서 그런 거를 많이 접하게 됐죠. 유인물이나 어디서 데모를 하는지 가두행진을 한다든가 그런 정보를 알게 되고 전태일 기념관도 가게 되고, 홍제동 성당에서 집회 있으면 쫓아다니고 하면서 문익환 목사도 알게 됐죠. 우리도 ‘노동3권이라는 게 참 필요한 것이다’ 알게 돼서, 그런 쪽으로 책을 많이 읽었어요. … 전공투, 자본주의의 이론 책자를, 노동운동에 대한 거였어요. … 그러면서 따로 모임을 가지고. …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이 결성하게 된 힘은 소모임을 통해서 결속력을 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돼요.” …

     

    강명자는 지역소모임에 참여하면서 노동자의식과 현장활동에 대해 배우면서, 그 모임에서 배운 방식으로 현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소모임을 만들어 책읽기, 현장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거나 놀러 다니면서 친목을 다지기도 했다.

     

    “나는 의식은 있고 계속 내 공부 모임하면서 … 대우에서 일하는 사람들하고 소모임을 만들었죠. 그러면서 이제 (내가 읽은 것과) 똑같이 『어느 돌멩이의 외침』 이런 것들을 읽으면서 독후감을 각자 써와서 발표하고, 자기 느낌들을 이야기하고, 놀러도 다니고 …”[3]

     

    {1985년 무렵 구로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지역활동을 벌인 것은 여러 사업장 관계를 맺고 있던 A지역그룹이었다. 이들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기업별 노동조합 체계를 극복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계급적 정치의식 확보를 활동방향으로 삼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노동자의 상태와 조건에 입각하여 활동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구로공단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통해 ‘공단 자체를 단위로 한 실천’을 모색했다. 이들은 소모임 내 활동가들을 공단 내 업종의 특성을 고려하여 섬유·전자 사업장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따라서 대우어패럴, 가리봉전자 같은 민주노조와 중간노조·어용노조가 있는 남성전기, 롬코리아, 부흥사 등에서 직접적으로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

     

    A지역그룹의 경우 공장단위에서 벗어난 공단 단위의 교육-훈련 체계를 노동자 소모임(지역 소그룹)으로 구상했다. 이 소모임은 강사, 학생, 학습 프로그램을 지역적 차원에서 공동으로 조직한 점과 다양한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같이 만날 수 있도록 조직한 것이 특징이다. …

     

    노동자 소모임 프로그램의 기본 틀은 다음과 같다.

     

    “[1단계 프로그램] 노동자의 현장과 생활에서 출발하는 토론 → 의식화에 초점

     

    (예) ‘근로자를 가족처럼’, ‘공장일의 내일처럼’ 등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충효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토론과 교양 + 각 사업장 근로조건을 비교하고 토론

     

    [2단계 프로그램]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등의 사회문제를 둘러싼 토론

     

    [3단계 프로그램] 노동운동사 및 정치경제학적 기초교양”

     

    이런 소모임은 4~6명을 기본 단위로 하여 6~7개 정도가 비공개로 추진되었다. 대우어패럴 교선부장 김준희는 가리봉전자, 남성전기, 협진양행 노동자 5명으로 구성된 한 소모임에 참여했다. 소모임에서는 각 공장의 실태와 운동 상황이 토론되고 『노동의 역사』, 『일하는 사람을 위한 경제지식』, 『어머니』 등을 읽고 학습을 했으며 다른 사업장의 노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동질감을 형성해 갔다. 지역소모임을 통한 조직과 의식화는 새로운 노동운동가를 양성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노조에서도 조합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역할을 했으며 나아가 노조 간의 지역연대 활동에 기초가 됐다. …

     

    지역소그룹 활동과 함께 또 다른 지역활동으로는 <공단소식>을 제작해 사업장, 공단주변과 거주지역에 배포했다. 이 소식지는 여러 사업장 소식을 담고 있어 노동자들이 자신의 사업장만이 아니라 다른 곳과 비교하게 했고, 3회에 걸쳐 배포되다가 구로동맹파업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

     

    “노조가 돌아가는 거라든지, 객관적인 상황 돌아가는 거라든지, 이런 거 새벽에 닭장집…들에 들어가서 문마다 쑤셔 넣고 … 출근해서 얘기가 되고… 탈의실에서 옷 갈아 입다보면 한두 장씩 가져와서 이야기되기도 하고…” (대우어패럴, 김준희)

     

    “노동자신문도 만들어… 노동자들 밀집된… 지역에 살포를, 그때는 대학생 조직하고도 일부 관련이 됐던 것도 같은데요… 그래서 이게 배포되는 시기가 되면 대학생들 일부와 그리고 노동자들 … 닭장집들 … 주변을 돌면서 새벽에… 배포를 했었어요. …” (롬코리아, 장영인)

     

    “공단소식이 저녁에 한 번 돌면 아침에 (회사에) 가면 공단 분위기가 싹 달라져 있다고. 하여튼 공단이라는 게 좁은 데니까. 아침에 현장에 가보면, <공단소식>이 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게 피부로 즉각 즉각 느껴지는 거 같더라고. 그야말로 ‘공단이 내 손안에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공단소식 만들고 뿌리고 그때 당시 이미 해고 되어서 끌려나온 친구들이 많이 했던 거 같애. …” (부흥사, 이선주)[4]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은 소모임활동, 교육활동, 소식지 발간 등을 활발히 진행하면서 간부 교류 등의 연대활동을 벌였다. 민주노조들은 1985년 임금인상 투쟁을 공동으로 준비하였고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대우어패럴 27% 인상, 효성물산 904원 인상, 가리봉전자 17.5% 인상, 선일섬유 13% 인상 등의 성과를 거뒀다.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단결의 힘을 실감했다. 조합원이 증가했고, 노동조합의 힘이 강화됐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이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 6월 22일 대우어패럴노조의 간부 세 명을 전격 구속시켰다. 임금교섭 때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였다. 1980년대 초 민주노조들을 모두 파괴했듯이, 새롭게 등장한 구로지역 민주노조들도 하나하나 깨나가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바로 그날 구로지역 노조간부, 해고자, 활동가 190여 명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경찰의 탄압은 민주노조 각개격파를 위한 신호탄이라 인식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패배를 되풀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월요일인 24일부터 ‘노동운동 탄압하는 노동부 장관 퇴진, 구속노동자 석방, 노동3권 쟁취’를 내걸고 동맹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1970년대 민주노조들이 기업별 노조로서 최상의 조직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부의 탄압에 고립분산적인 대응으로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노조간부들은 1980년대 초와 같이 개별 노조의 조직보존에 매몰되지 말고 노조 간의 연대를 통해 탄압에 대항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투쟁 목적은 정부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연대투쟁을 전개해 정부가 가하는 탄압의 본질을 폭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기업별 노조의 틀을 깨고 고립분산성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데 두었다. 그렇기에 “간격을 두고 차례로 당할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싸우자”는 투쟁방침을 결의했다.[5]

     

    6월 24일 대우어패럴노조가 오전 8시부터 먼저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효성물산노조, 선일섬유노조, 가리봉전자노조가 오후 2시부터 동맹파업에 돌입했다.

     

    6월 24일 7시 30분경, 회사에서는 파업을 미리 예상한 듯 현장출입구에 관리자들이 모두 나와 서 있었고 평소 7시 30분에 열리는 현장 문이 7시 45분이 지나서야 열렸다. 50분에 각 현장별로 실시되는 국민체조가 끝나기를 기다려 각과 부위원장들은 작업대 위로 올라가 위원장이 부당하게 구속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같이 싸우기를 호소했다. 각과 조합원들이 1과 현장으로 속속 모여들었고 노조사무실에서 대기하던 2공장 조합원들도 합세했다. 밀고 들어오는 도중에 저지하던 관리자와 격돌하여 조합원 전재선이 쇠파이프를 맞고 코를 병원에서 세 바늘 꿰매고 돌아오는 사태도 벌어졌다. 관리자들의 저지를 받아 미처 들어오지 못하고 쫓겨난 조합원도 수십 명이었다. 1과 현장에 모인 인원은 285명이었다. 조합원들은 먼저 미싱과 원단을 쌓아 출입구를 차단하고 대열을 정비한 후에 소리 높여 ‘결단가’를 불러 사기를 올렸다.

     

    이어 쟁의부장이 「우리의 결의」라는 유인물을 낭독하고 「노예로 살 것인가, 싸워 이길 것인가」라는 유인물을 배포하며 구호를 선창하자 조합원들도 함께 구호를 외치며 창밖으로 유인물을 뿌렸다. 한쪽에서는 플래카드와 구호를 쓴 종이를 준비하고 나머지는 준비한 머리띠를 두르고 부채를 만들어서 모두 창문에 매달려 ‘선봉에 서서’,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오전 10시경, 회사는 농성에 참가하지 않은 노동자들을 모두 퇴근시켰고 관리자들을 모두 동원해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회사 바깥에서는 어느새 전투경찰들이 쫙 깔려 있었다. 간부들이 연설도 하고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점심시간인데 식사는 공급되지 않았다. …

     

    오후 2시. 맞은편에 보이는 효성물산에서 꽹과리 소리가 나면서 동맹파업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려왔다. 모두들 환호하며, 창가로 가서 구호를 외침으로써 서로를 응원했다. 오후에는 즉흥 촌극과 10·26 사태를 풍자한 연극, 장기자랑 등으로 보냈다. 저녁식사 역시 들어오지 않았고 물은 화장실 안에만 나왔다. 어두워지자 회사는 전기마저 끊어버렸다. 노동자들은 솜방망이에 미싱 기름을 적셔서 횃불을 만들어 회사 주위를 밝히고 소화전 비상등에 전원을 연결, 형광등 하나를 켰다. 앰프도 연결, 마이크도 쓰게 되었다. 11시경 일부는 보초를 서고 나머지는 잠을 잤다.[6]

     

    오후 2시경 3개 사업장에서 ‘임시총회’를 거쳐 동맹파업을 결정했고 파업에 들어갔다. 효성물산 조합원 400여 명은 긴급총회 이후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가리봉전자 구로·독산공장의 520여 명도 ‘임시총회’ 이후 ‘구속자를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선일섬유도 140여 명이 모여 총회를 하는데, 관리자들이 방해를 하여 조합원이 70여 명으로 줄어들자 출입구를 차단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효성물산 농성장에서는 「노조탄압저지 결사투쟁선언」이라는 공동투쟁선언문이 낭독되고 배포됐다. 노동자들은 이 선언문에서 대우어패럴노조 탄압이 곧 자신들의 노조에 대한 탄압으로 다가올 것이므로 동맹파업을 통해 이에 저항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동맹파업 첫날 4개 노조의 조합원 1,300여 명이 참여했다.[7]

     

    25일에는 세진전자노조, 남성전기노조, 롬코리아노조가 동맹파업을 지지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운동 단체들은 구로공단 주변에 유인물을 대량 살포하기 시작했다. 26일에는 민통련, 민청련, 청계피복노조 등 22개 운동단체와 노조 대표들이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동맹파업 지지 농성을 시작했다. 저녁에는 구로공단 일대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27일에는 효성물산과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노동부 중부사무소를 점거했다. 성수동에 있는 삼성제약노조가 중식거부 농성에 들어갔다. 종교단체들도 지지 농성에 들어갔다. 대학생들도 연대투쟁에 나섰다. 28일에는 부흥사노조가 동맹파업에 합류했다.

     

    26~27일에는 동맹파업을 한 3개 노조가 해산했다. 효성물산 조합원 73명은 27일 노동부 중부지방사무소에서 점거농성을 시도하다 모두 연행됐다. 27일 오후 8시까지 농성을 하고 있던 노동자 수는 대우어패럴 사업장의 150여 명과 신민당 제1지구당사의 36명 등 모두 약 200여 명이었다. 같은 날 대우어패럴에서는 반노조원 3백여 명이 노조반대 농성을 벌이다 해산했다. 회사 주위에 전경 차 15대가 배치되자 농성장에 위기의식이 고조됐다. 위협적인 분위기 때문에 농성장에서 처음으로 “살인정부 물러가라”, “노총 자폭하라”는 구호가 나왔다.

     

    28일 부흥사 조합원 118명이 노동운동 탄압에 항의, 동맹파업을 시작했다. 부흥사는 동맹파업 직전에 동참권유를 받았으나 집행부 논의 결과 부결되어 참여하지 못했다. 이들은 구속자 석방, 노조탄압중지 등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들어갔다. 부흥사에서 사업장 내 근로조건 개선요구가 정치적 요구와 결합하여 제기됐다. 그러나 파업은 반노조 폭력단의 폭력으로 6시간 만에 해산됐다. 부흥사의 파업은 동맹파업이 직접적으로 노동자들의 의식을 자각시켜 동참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8]

     

    그러나 동맹파업 6일째인 29일, 닷새 동안 굶주리며 농성을 이어가던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의 농성장에 구사대 500여 명이 벽과 출입문을 부수고 들이닥쳐 각목과 쇠파이프로 노동자들을 폭행하면서 농성을 강제 해산시켰다. 동맹파업의 중심이던 대우어패럴 농성장이 무너지면서 동맹파업도 막을 내렸다.

     

    6월 29일 7시 즈음. 기상해서 출근시간에 맞추어 창틀에 매달려 있는데 한일은행 담을 타고 학생들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노동자들이 반가워서 몰려가 환호, 박수로 환영하고 학생대표의 인사말을 들었다. 그러나 채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현장 벽이 부서지면서 관리자, 경비, 반대파들이 돌과 각목을 던지고 소화기를 뿜어대며 급습, 관리자 200여 명이 각목과 쇠파이프, 의자, 발길질 등으로 가릴 것 없이 농성자들을 구타하면서 머리채, 손발 아무데나 휘어잡고 기숙사 쪽으로 끌고 갔다. 회사 측의 폭력을 피해 20여 명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다 모두 잡혀 남부서로 연행, 회사로 다시 끌려와 기숙사에 갇혔다.

     

    기숙사로 끌려간 농성자들은 한방에 5명씩 갇혀서 1인당 비조합원 3명에게 감시당하면서 갖은 모욕을 당했다. 11시 즈음 의사들이 들어와 진정제를 억지로 먹여서 농성자들은 잠이 들었다. 오후 2시 30분 즈음 이들은 깨어나 죽 한 그릇씩을 먹었다. 관리자들은 수시로 드나들며 “경찰서로 직행시켜야 한다”, “입에다 똥을 처넣어야 한다”는 등의 폭언과 협박을 함부로 했다. 그 이후 회사 측은 농성자들을 한 명씩 총무과에 끌고 가 부모까지 동원하여 강제로 사표를 쓰게 했다.[9]

     

    구로동맹파업은 한국노동자운동사에서 한 획을 긋는 역사적 투쟁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지역연대파업이자, 선진노동자들이 목적의식적으로 조직해 낸 연대파업이었다.

     

    구로동맹파업에는 10개 노조에서 약 2천 5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 43명이 구속되고, 38명이 불구속 입건되었으며, 47명이 구류를 받았다. 1,500여 명이 해고되거나 강제사직을 당했다. 동맹파업에 참여한 구로지역 민주노조 8개가 모두 와해될 정도로 희생은 엄청났다. 그러나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자들에게 큰 교훈을 남겼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조합이 경제투쟁만이 아니라 연대투쟁과 정치투쟁도 조합원대중의 주체적 참여 속에서 수행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민주노조운동이 국가권력의 탄압에 맞서 얼마든지 정면대결을 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구로동맹파업은 1987년 대투쟁 이후 대규모로 등장한 민주노조운동이 국가권력의 탄압에 거침없이 연대투쟁으로 맞섬으로써, 폭발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결코 쉽사리 파괴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진지를 구축해 낼 수 있도록 길을 잡아주었다.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에게 단결의 힘을 인식할 수 있게 했다. 노동자들은 해방춤, 탈춤, 즉흥 촌극, 장기자랑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용하거나, 지원을 통해 서로의 힘을 북돋았다. 이는 노동자들의 투쟁수기, 기고 글, 파업일지 등에서 드러나는데, 「파업농성일지」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우어패럴 조합원들은 맞은 편 효성물산에서 꽹과리 소리가 나면서 동맹파업에 들어갔음을 알려오자 환호하며, 창가로 가서 구호를 외침으로써 서로를 응원했다.”(24일)

     

    “효성물산은 위원장이 가리봉, 선일 등 다른 노조에서도 동맹파업에 들어갔다는 신문보도를 읽어주자, 조합원들은 환호성을 하며 열심히 구호를 외쳤다.”(25일)

     

    “가리봉전자 조합원들은 남성, 세진. 롬코리아의 연대소식을 듣고 힘을 얻었다. 밤늦게 옆 회사 노동자들이 우유 등을 넣어주며 격려하여 눈물겹도록 힘나게 해주었다.”(25일)

     

    이처럼 노동자들은 투쟁하는 서로의 모습에 힘을 얻으면서 노동자로서 일체감을 느꼈다. 또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경찰이나 노동부 등의 탄압을 직접 경험하면서 투쟁 대상에 대한 인식을 보다 분명히 했다. 우선 투쟁 과정에서 드러난 경찰에 대한 노동자들의 태도를 보자.

     

    “가리봉전자에서 정문 앞에서 노동자들이 구호와 노래를 하던 도중에 관리자들과 사복경찰들이 정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했다. 밀고밀치는 싸움과정 속에서 그들은 쇠파이프 각목 등으로 발등을 내리찍고 등을 후려치면서 ‘xx들 다 죽여야 한다’는 등의 욕설과 폭행을 가했다 … 계속되는 치열한 동맹파업과정 속에서 노동자를 탄압해 온 실체가 누구누구인가를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26일)

     

    경찰의 개입에 대해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분노 속에 “폭력경찰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26일). 또 노동자들은 정부가 기관원이나 노동부 관계자들을 투쟁과정에 개입시켜 탄압하는 것에 대해서도 본질을 인식해 갔다.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태도는 다음의 「파업농성 일지」를 통해 확인된다.

     

    “가리봉전자에서는 기관원, 노동부 관악소장 등이 다녀가고 나서부터는 식당아줌마를 퇴근시키고 점심식사를 주지 않았고 물까지 끊었다. 항의하자 회사 측은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밥도 사장은 주려고 했지만 정부에서 주지 말라고 하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짐승에게도 밥은 굶기지 않는데 이 정부는 우리 노동자들을 어떻게 여기기에 밥도 물도 못 먹게 하는가! 전 조합원들은 다시 한 번 악랄한 처사에 치를 떨었다.”(25일)

     

    이러한 노동자들의 정부에 대한 인식은 6월 28일 대우어패럴 농성장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났다. 이날 대우어패럴 기업주의 사주를 받은 비조합원들이 노조반대시위를 하고, 이어 전경차 15대가 주위에 배치되면서 농성노동자들의 위기의식이 고조된 위협적인 분위기에서도 노동자들은 “살인정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경찰, 기관원, 노동부 등의 탄압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은 그 본질에 대해 보다 분명히 인식해 갔다. 파업 때 진행한 토론내용은 ‘투쟁의 의의와 민주노동운동’, ‘관리자의 태도’, ‘노동운동사 강의’, ‘10·26 사태를 풍자한 연극과 토론’, ‘왜 동맹파업을 하는가’, ‘신민당의 태도’ 등이었다. 또한 파업과정에서의 토론은 매 사안에 대해 노동자들이 서로의 의견을 모아 결정하는 민주적인 훈련과정이기도 했다. 이처럼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의 규율을 만들어 갔으며 동시에 투쟁대상을 보다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하여 노동자들의 의식을 변화시켰다.[10]

     

    구로동맹파업은 1970년대 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투쟁이나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명동성당 농성투쟁과는 질적으로 다른 노동운동의 위치를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을 경과하며 변혁적 노동운동 세력이 제거된 뒤 새로이 ‘아래로부터 노동자투쟁’으로 출발한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탄압과 종교계, 지식인 등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세력들의 영향 아래 있었다. 민주노조운동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그들의 생존권적 요구를 정치문제화시켜 해결하려 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으로 노동운동은 1970년대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향한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사회변혁을 지향했으며, 사회변혁운동을 위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사회변혁의 주체가 민중·노동자라는 인식을 분명히 했다. 198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의 인식변화는 구로동맹파업을 통해 좀 더 구체화됐다.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비타협적인 정치투쟁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노동자들의 힘 있는 투쟁만이 민주화운동 세력의 지지와 동참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경제적인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투쟁한다는 시각과 노동운동을 전체 운동의 한 부문운동으로만 파악하던 시각을 극복하고, 노동운동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중심이며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이라는 인식의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11]

     


    [1] 한겨레신문, 2016/11/03, 「54명 사망 삼청 교육…가해자들은 바로 풀려났다」.

    [2] 청계피복노동조합, 1981, 「호소문」.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40~41쪽에서 재인용)

    [3]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99~105쪽.

    [4]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257~263쪽.

    [5]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281쪽.

    [6]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288~296쪽.

    [7]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284~285쪽.

    [8]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285쪽.

    [9]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306쪽.

    [10]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475~477쪽.

    [11]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479~4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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