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다시 마르크스주의 연재#1] 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와 만나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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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그래, 다시 마르크스주의 연재#1] 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와 만나야하는가?

  • 최영익
  • 등록 2026.01.27 14:28
  • 조회수 160

 

프롤로그: 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와 만나야 하는가?

 

모든 지배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거듭 마르크스주의의 종말을 선언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그때마다 거대한 생명력을 드러내며 부상했다. 2023년이 저물어 가는 오늘도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은 모든 나라들에서 잊히지 않은 채 떠오르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이러한 열광은 2018년에 처음 발견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사회주의를 향한 거대한 열광은 1980년대 중반 이후 1990년대까지 터져 나왔다. 이러한 열광은 최근 잠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지만, 그럼에도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나타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중 한 명이다.

 

왜 마르크스주의는 ‘죽은 개’가 될 수 없는가? 나아가 오늘날 노동자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마르크스주의를 탐구하고 마르크스의 사상과 대화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의 출발 - 자본주의에 대한 단호한 규탄

 

마르크스주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지라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상식과 직관이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 적대적이며 자본주의 철폐를 주장하는 급진적 사상이라는 점이다. 그렇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체제가 일하는 사람들에게 전쟁과도 같은 비참한 상태를 강요하며,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반동적인 체제라는 단호한 비판 정신에서 출발한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낳는 치 떨리는 폐해들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대체할 수 있는 과학적인 대안으로, 마르크스에 의해 발견됐다. ‘투사!’ 바로 이것이 사회주의가 마르크스라는 인물 속에서 탄생할 수 있는 뿌리였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처음부터 투사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를 투사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사회주의 사상을 탄생시킬 수 있던 원천을 창조했던 것은 바로 자본주의 그 자체였다.

 

“학문은 이기적인 쾌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운이 좋아서 학문 추구에 전념하게 된 사람은 인류를 위해 자신의 지식을 사용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즐겨 하던 말들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러한 삶의 가치관을 죽을 때까지 굳게 지켜 나갔다.

 

역사적으로 인류를 위해 학문을 하고자 했던 선량하고 훌륭한 청년은 많았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왜 자본주의에 맞선 열렬한 투사의 삶으로 나아갔을까? 그것은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사회와 깊이 연결돼 있었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

 

마르크스는 1818년 프랑스 국경에 인접한 독일의 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1842년 프로이센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절대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스물네 살에 〈라인신문〉에서 편집진으로 일하기 시작한 마르크스는 자연스레 정치적 저항을 펼쳤고,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과 씨름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면서 기계제 대공업 생산이 밀려들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공장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탄생시켰고, 가난한 농민들을 임금노동으로 내몰았다. 마르크스는 슐레지엔 지역 방직공들의 봉기와 모젤 지방에서 포도를 재배하던 가난한 농민들이 받는 억압과 고통 등 노동자 민중의 비참한 삶과 대면했다. 그는 방직공들의 봉기를 전면적으로 지지했고, 그들의 민주적 권리 보장을 주장했다. 또한 사적 소유를 강화하는 새로운 법이 제정되면서 숲에서 땔감을 줍는 일마저 절도죄로 가혹하게 처벌받아야 했던 가난한 농민들의 권리를 옹호했다. 이렇게 가난한 노동자 민중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사적 소유권’ 즉, 자본가들의 재산 보호를 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약탈성과 반인간성을 경험했고, 분노했다.

 

그는 저물어 가는 낡은 봉건적 지배 체제와 새롭게 떠오르는 자본주의 지배 체제 모두에 맞섰다. 두 체제 모두 가난한 노동 인민을 무자비하게 착취했고, 잔인하게 억압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지배 체제의 뿌리, 가난한 노동 인민이 겪는 고통의 뿌리에는 ‘토지와 기계, 작업장 등 생산수단에 대한 배타적, 독점적 소유’가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했다. 지주와 자본가들은 이런 소유권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거대한 이익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이것에 저항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악랄하게 공격했다. 당연히 그것에 대한 해결책은 ‘서로 사랑하자.’는 식의 관념적 호소가 아니라 ‘지배계급에 맞선 피지배계급의 투쟁’이었다.

 

만일 절대주의의 잔인한 억압이 없었다면, 그리고 신흥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 희생되고 짓밟힌 노동자들과 가난한 농민들의 비참한 상태가 없었다면, 마르크스의 이론과 실천은 결코 저항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처럼, 관념철학의 상아탑에 갇힌 평범한 철학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의 뇌가 자본주의를 타도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는 혁명적 사상을 토해 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마르크스를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로 만든 것은 바로 반동적 사회 즉, 자본주의 자체였다. 만일 마르크스주의가 괴물이라면, 이 괴물은 모순으로 가득 찬 당시의 반동적 사회 체제가 잉태한 것이었다.

 

이것은 “왜 마르크스주의는 ‘죽은 개’가 될 수 없는가?”에 대한 대답을 찾는 데서 중요한 실마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착취, 억압, 부정의, 불평등, 전쟁, 바로 이것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잉태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불러오는 공통의 원천이다. 이 원천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르크스주의와 만나야 할 필요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바로 그 점에 대해 다룰 것이다.

 

1부. 알쏭달쏭 마르크스주의


1. 자본주의, 괴물이 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론이 21세기 세계와 한국 사회에 어떤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와는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해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쓸모없는 이론이 되지 않았을까?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흔히 제시하는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브라질에서는 총기 사고로 매년 3만 7,000명이 총에 맞아 죽는다. 인구 10만 명당 19명꼴이다. 이를 두고 가히 전쟁과도 같은 상태라 부를 수 있다면, 한국은 정말 전쟁 중이다. 하루에 43명, 연간 1만 5,000명, 매년 인구 10만 명당 무려 31명이 자살한다. 한 해 평균 2,000명 이상이 산업재해로 사망한다. 이것은 코로나가 정점이었던 2020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900명을 훨씬 넘는 숫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음을 방증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자본가들에게 한국을 포함한 자본주의 체제는 전쟁터가 아니고, 안전한 천국이다. 미국의 억만장자인 데이비드 게펜은 코로나가 절정으로 치달으며 모두 불안에 떨고 있던 2020년 3월, 인스타그램에 “바이러스를 피해 그레나딘 제도에서 자가 격리 중입니다. 모두 안전하길 바랍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과 함께 올라온 사진에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요트를 탄 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요트는 7500억 원짜리 호화 요트였다.  

 

마르크스가 태어나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킨 시기와 그보다 약 2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가 과학적으로 분석한 자본주의의 본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작동하고 있다.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 즉, 불평등은 오히려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이 2014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 안에 드는 부유층의 재산은 110조 달러(약 11경 7,183조 원)로, 가난한 인구 35억 명의 재산보다 65배나 많다. 이런 불평등 경향은 최근 10년 가까운 사이에 계속 증가하고 있다. 다보스포럼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전 세계 억만장자 2,668명의 재산은 코로나19 2년 기간을 거치면서 무려 5,300조 원이나 증가했다. 불과 2년 사이에 1인당 재산이 평균 2조 원이나 늘어난 것이다. 옥스팜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3월 이후 2021년 12월까지 세계 최빈곤층은 매일 2만 명 이상 사망했지만, 세계 10대 부호의 자산은 2배 이상 늘었다.  

 

이러한 불평등은 한국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2021년 기준, 한국에서 상위 10%가 보유한 부(재산)는 평균 12억 2,508만 원으로 전체 부의 58.5%를 차지한다. 반면 하위 50%는 평균 2,354만 원으로 전체 부의 5.6%에 불과해, 상위 10%와 하위 50% 격차가 52배 정도에 이른다. 이처럼 사회의 부 가운데 훨씬 많은 부분을 자본가들이 독점하면서, 그들의 권한은 모든 영역에서 커져 가고 있다. 그 와중에 세기말적 징후라고 하는 전쟁, 범죄, 도덕적 타락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절대빈곤을 해결했다는 것을 체제 정당화의 거의 유일한 알리바이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흔들리고 있다. 세계적으로 실업률은 높은 수준을 이루고 있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인간적 삶마저 포기해야 한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의 2015년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9명 중 1명이 충분한 음식을 공급받지 못했고, 하루 1.25달러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이들이 10억 명 이상이었다. 2022년 옥스팜의 발표 내용은 더욱 어둡다. 이러한 빈곤층이 33시간마다 100만 명이나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격화되는 자본주의 경쟁과 이윤율을 높이려는 자본가들의 잔인한 착취가 결합해, 더 많은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언제든 실업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한다. ILO(국제노동기구)의 2022년 11월 〈2022~2023 글로벌 임금 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중소득과 저소득 국가에서 일자리 숫자는 감염병 이전 일자리 수준에 비해 2% 줄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고소득 국가까지 포함해, 새롭게 생겨나는 일자리들에서 불안정하고 저임금의 비정규직 일자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ILO는 해당 보고서에서 글로벌 임금이 2022년 상반기에 실질적으로 0.9% 하락했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글로벌 임금 보고서〉를 발간하기 시작한 2008년 이후 최초의 하락 사례다. 이것은 가난한 나라들에만 해당하는 사례가 아니다. 보고서는 세계 임금노동자의 60%를 차지하는 G20 국가들로 범위를 좁힐 경우 월 임금 하락률이 2.2%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자본주의가 구세주로 삼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도 해법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가들의 수중에 장악돼 이윤을 위해 작동하는 과학과 기술은 대규모로 일자리를 제거하고, 노동자들을 더 강력한 경쟁의 톱니바퀴 속으로 밀어 넣는 공포의 수단으로 작동해 왔다. 2016년 7월 보고서에서, ILO는 4차 산업혁명으로 앞으로 20년 사이에 아시아에서만 1억 3,70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와 같은 명백한 상황은 만인 대 만인의 무한대의 경쟁을 강요한다.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어린 학생들까지도 경쟁의 링에 올라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안정감과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천 중 하나인 연대감을 파괴한다. 고립된 개인으로 내몰려 불안정해지고 행복감을 상실한 사람들은 자살의 늪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다.  

 

고통에 절규하는 한국의 젊은이들

 

마르크스 이래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마르크스가 규정한 그 잔인한 착취 본성을 더욱 철저하게 발현해 온 것이 자본주의다. 게다가 이 자본주의의 미래 또한 달라질 것이 없다. 그것을 가장 명확히 보여 주는 것이 한국 노동자계급 젊은이들이 현재 겪고 있는 삶이다.

 

세상을 확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움트고 있다. 2015년 10월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의 토론회 “한국인은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에서 발표된 조사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년 42%가 원하는 미래에 대해 “붕괴, 새로운 시작”을 선택했다.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미래에 원하는 것으로 선택한 비율을 23%에 불과했다.

 

이런 결과는 이들의 조부모나 부모 세대가 젊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조부모나 부모 세대만 하더라도, 그들이 젊었을 때 압도적 다수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원하는 미래로 선택했다. 조부모, 부모 세대와 지금의 젊은 세대 사이에는 어떤 강이 흐르고 있는가?

 

과거를 지배했던 패러다임은 무엇이었는가? 첫째 낙수 효과 즉, 선성장 후분배에 대한 기대였다. 자본주의가 성장해 경제가 발전하면, 그 낙수 효과로 자본가들만이 아니라 가난한 노동자들도 혜택을 얻을 수 있어 더 나은 풍요로운 미래가 열릴 수 있다는 기대감 말이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박정희 시대의 엄청난 속도의 경제 발전은 그 낙수 효과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였다. 조부모 세대들은 열광했고, 성장하는 자본주의를 포옹했다.

 

부모 세대에 이르자 이런 포옹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IMF 사태는 자본주의의 잔인한 야만성, 그리고 자본주의가 경제적 풍요의 박차가 아니라 장애물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모 세대에 각인했고 거대한 공포심을 불러왔다. 이러한 부모 세대의 공포감을 보면서 자랐던 지금의 젊은 층은 더 이상 자본주의를 격하게 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수록 경제적 활력이 떨어지고 수시로 비틀거리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이 자신을 덮칠까 공포에 떨고 있다. 세월호 사태는 이 젊은 층에게서 자본주의에 대한 기대감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2022년 미국 퓨리서치센터의 여론조사 결과는 그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19개국을 대상으로 한 미래경제전망 설문조사에서 18세 이상 한국인 응답자의 60%가 자녀 세대의 경제형편이 부모 세대보다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이 수치는 미국 72%, 일본 82%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둘째, ‘개천에서 용 나기’ 패러다임이었다. 허리띠를 조르고 열심히 노력하면, 또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면 훨씬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 그래서 이 고통스런 노동자 계급의 삶을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감이 산산조각 나고 있다. 계층 이동의 통로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으며, 학력 수준은 갈수록 집안의 경제 수준에 좌우되고 있다. 대학을 나오더라도 그들의 다수에게 닥치는 미래는 ‘청년 실업의 높은 벽’이다. 소위 좋은 대학을 나오고 경쟁에서 겨우 승리하더라도, 그들의 대부분은 운 좋게 얼마 안 되는 정규직 자리를 꿰찬 것에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 부모 세대에서는 안정된 정규직 일자리는 고등학교까지 나와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세대를 거치면서 젊은이들의 삶의 기대치는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18~33세 때의 고용 상황을 비교했을 때, 침묵의 세대(1946년 이전 출생), 베이비붐 세대(1946~1964년생), X세대(1964~1980년생)까지는 고용률이 80%에 이르지만, 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의 경우 70% 수준에 머물고 있다.

 

“세계를 변혁하라!”는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도 여전히 정당하다. 아니 더욱 절실하다. 마르크스 시대의 자본주의는 최소한 성장하는 성장하기라도 했다. 그러나 쇠퇴해 내리막길을 내달리는 것이 지금의 자본주의다. 그 내려가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기에 인류, 특히 미래의 세대를 더욱 고통스럽고 위험천만한 상황으로 내몰 것이다.

 

2. 여전히 빛을 발하는 마르크스의 문제의식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의식의 핵심은 바로 나와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사회 구조’를 정확히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노동자를 비롯한 압도적 다수의 노동하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계급 착취 체제인데, 이 착취는 갈수록 강화되고 그 결과 불평등 및 노동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갈수록 커진다는 것이 그 해명의 결과물이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마르크스 생전보다 오늘날의 현실에 더욱 유효하다. 당시에 출발 단계였던 자본주의는 오늘날 더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 자본주의는 세계적으로 확장됐고, 자본주의가 토해 낸 노동자 계급은 더 거대해졌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착취적, 반동적 본질이 200년 동안 결코 변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확고해지면서 미래 세대의 삶을 짓밟고 있다면, 이 자본주의의 본질과 모순을 밝히는 마르크스의 사상은 다른 누구보다도 젊은 세대에게 절실한 가치가 된다. 이 사상은 단지 과거의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결코 변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갈수록 현실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자본주의의 운동 원리가 낳을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미래의 방향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1883년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런던 하이게이트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불과 10여 명이 참석했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당시로는 그만큼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 자본주의가 마르크스의 과학적 분석의 정당성을 현실에서 스스로 드러냄으로써, 나아가서 실업과 공황, 세계대전의 폭풍우 속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인류가 갈구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사상은 전 세계의 노동자들과 젊은이들 속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만성화된 불황, 높아지는 실업률, 격화되는 경쟁, 갈수록 앞이 안 보이는 불확실한 미래, 전쟁의 위협 등이 젊은 세대를 칭칭 휘감고 있다. 다른 누구보다도 ‘오늘날’의 젊은이들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가장 거대한 생명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와 대면해야 하는 이유

 

마르크스주의와 대면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착취적, 반동적 본성을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어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그런 반동적 체제가 갖는 모순과 함께, 그 모순을 타파하고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함께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적대적인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만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진정한 차별점은 자본주의에 적대적일 뿐만 아니라 그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를 제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가 변화 발전하며, 낡고 반동화된 체제는 필연적으로 붕괴한다는 것을 해명했다. 자본주의도 역사적 진보성을 갖고 태어났지만, 결국 반동화돼 폐지해야 할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필연적이고도 과학적인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를 제시했다. 개인적인 이익이나 계급적 편견에 눈먼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같은 결론 즉, 사회주의에 도달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고 기회만 되면 자본가 계급이 떠들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유령 앞에서 그들이 계속해서 벌벌 떨 만큼 변하지 않는 현실성을 사회주의는 획득해 왔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가 하나의 사상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대안은 노동자 투쟁이라는 물질적 힘으로 구체화돼 자본주의를 붕괴 상태로까지 내몬 적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물질적 힘을 만드는 주체가 바로 노동자 계급이라고 규정했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에 의해 가장 고통받는 계급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모든 곳에서 거대하게 성장하고 조직화되는 계급이며,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새로운 노동 공동체 세상을 열 수 있는 혁명 계급임을 마르크스는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다. 하지만 그들을 동정과 배려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역사와 경제를 깊이 연구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이 사회주의 건설의 주역이라는 견해에 이르렀다. 마르크스는 독일 고전철학과 영국 고전경제학, 프랑스 사회주의라는 당시 인류가 획득했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성과들을 깊이 탐구했고, 이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 모순과 이것을 해결하는 새로운 사회로서 사회주의의 필연성을 도출했다. 사적인 이익의 영향을 받거나 계급적 편견에 눈먼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수십 년 사이에 한국에서, 중국에서, 인도에서, 베트남에서 자본주의화와 나란히 등장하는 수억 명의 노동자 계급을 보고 있다. 또한 아무리 사회주의를 증오하더라도, 노동자 없이는 자본주의가 굴러갈 수 없기에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들을 품고 있는 미국, 독일, 일본, 프랑스를 보고 있다. 교통과 통신, 무역의 발달은 이 노동자들을 더욱 긴밀히 연결시키고 있다. 그렇기에 자본가 계급은 잠시 사회주의를 막을 수는 있지만, 결코 이 도도한 물결을 막을 수 없다.

 

자본주의 착취에 대해 규탄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함께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혁명적 대안을 제시한 사람은 마르크스가 최초였다. 또한 마르크스가 제기한 혁명적 대안은 자본주의에 맞서 새로운 사회를 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여전히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남아 있다. 자신을 덮치는 자본주의의 공격에 맞서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모든 젊은이들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3. 사회주의는 죽었다?

 

모든 이론은 실험을 통해 검증된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이야말로 현실의 실험을 통해 명백히 파산을 선고받은 것이 아닌가? 이미 역사에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난 이론을 굳이 공부할 이유가 있을까?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약점을 지적한다는 점에서는 유효할지 몰라도,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사회주의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제기한다는 점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게 아닐까?

 

 대략 위와 같은 논리가 마르크스주의에 다가오는 것을 가로막는 또 다른 결정적 장애물일 것이다. 사회주의가 북한이나 중국, 그리고 1930년대 이후 러시아를 의미한다면, 그런 비판이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주의를 정확히 탐구함으로써 그런 체제들이 과연 자본주의의 변종인지 아니면 진정한 사회주의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만약 변종이라면, 마르크스주의가 그것에 책임질 이유가 없다. 오히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부활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권력자들이 온갖 나쁜 짓을 한다고 해서 그 책임을 사회주의에 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200년이 넘는 기간, 세계적인 역사적 실험을 통해 자본주의는 무엇을 증명했는가? 불평등, 실업, 전쟁, 경쟁, 도덕적 타락, 가난 등이다. 무수한 실험을 통해 응당 파산을 선고받아야 할 당사자는 바로 자본주의 자신이지 않겠는가? 

 

이 모든 것들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학습하고 탐구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자본주의 주류 체제가 왜곡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또는 이러저러한 지식인들이나 지배자들에 의해 변형되고 재해석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 저작 자체를 탐구함으로써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가 오늘날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과학적 해법을 제기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야 한다. 어떤 결과에 도달하든, 다음은 분명하다. 이 체제가 부당하고 낡았으며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느끼는 젊은이들, 이 사회가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전망을 모색하는 주체적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제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왜곡하지 않고, 그 객관적 실체에 다가가 보자. 물론 이 글 역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일 것이다. 책의 글들 또한 의심해 보면서, 더 많은 젊은이들이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이 낡고 반동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길을 찾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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