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서평] 파치: 쓰다 버려지는 삶을 거부한 아사히비정규직지회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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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기고][서평] 파치: 쓰다 버려지는 삶을 거부한 아사히비정규직지회를 쓰다

  • 박수연
  • 등록 2025.11.25 11:41
  • 조회수 6,901

 

『파치』는 아사히비정규직지회(현 아사히글라스지회)의 9년 투쟁기를 싸람(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들)의 소희가 엮은 책이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던 때부터 공장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수천수만 개의 사건 속에서 이십여 개의 장면을 골라내어 보여준다. 얼마나 큰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까. 노동조합을 만들며 느꼈던 해방감이, 투쟁의 통쾌함이, 자본의 더러운 수작을 마주하며 느낀 분노가, 순수한 연대에 대한 의심과 의심에 대한 미안함, 다른 사업장의 동지들과 함께하며 느낀 기쁨과 슬픔,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파라락 눈앞을 스쳐가는 것은 본래 영상을 통한 기록을 의도했었기 때문일지도. 유난히 생생한 글을 심각한 표정으로 읽어나가다 보면 의외로 웃음이 나는 구간들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유치장에서 칫솔 두 개를 받아낸 오수일의 일화 같은 거. ‘인정머리 없는 서울 경찰’이라는 묘사도 왠지 웃겨서 줄을 그어놨다. 정말 백번 공감한다. 지방 경찰이라고 상냥한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책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아사히비정규직지회 22명의 이름과 간단한 프로필이 쭉 적혀있는 페이지였다. 그 장의 끄트머리를 접어두고 이름 하나가 나올 때마다 프로필 페이지로 돌아가서 이 사람이 누구였더라, 하고 찾아보며 읽었다. 그 목록에 없는 이름이 나올 때면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아무튼, 그 페이지를 봤을 때 나는 이유도 없이 좀 눈물이 났다. 그 낯선 이름들의 목록이 뭐라고 그랬나 싶기도 한데, 아무튼 눈물이 났다. 사람의 이야기라는 건,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를 결심하는 이야기라는 건 왜 이렇게 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는지 모르겠다. 누구 하나 지우지 않고 꼭꼭 이름을 적어넣은 저자의 마음을 생각했다. 수없이 내밀어졌을 질문을 생각하고, 서투른 인터뷰를 생각하고, 오래 고민하고 깊이 바라보며 함께했을 시간을 생각한다. 나는 그런 걸 다정함이라고 여긴다. 나는 저들을 모르고 그들도 나를 모르지만 이름의 목록을 안고 책을 읽다 보면 그 낯선 사람들이 꼭 잘 아는 사람이라도 된 것마냥 느껴진다. 프로필들에 이제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꽃길만 걷자, 하는 말들이 몇 차례 눈에 밟혔다. 3,000일을 넘긴 긴긴 싸움이 남긴 상처들이 정말 다 아물 수 있는 걸까, 괜한 걱정을 하게 되고야 마는 것은 역시 내가 겁 많은 종자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괜찮았으면 좋겠다. 투쟁은 싸움이고 상처를 남기지만 그만큼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그리고 22명이 함께니까. 

 

나는 이상한 버릇이 있는데…. 투쟁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그들의 투쟁이 아닌 다른 무언가와 함께 기억하려 애쓴다는 게 그것이다. 취미라든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든가 농담 취향이라든가 습관이나 한때의 장래희망이나 은퇴 후에 하고 싶은 일이나…. 우습지만, 나에게는 꽤 중요한 일이다. 그 사람을 무심코 타자화하거나 신격화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뭐 숙명적인 투사, 이상적인 혁명가, 그런 거 말고 인간으로서의 그를 기억하기 위해서. 그래서 아사히글라스지회 차헌호에 대해 내가 가진 제일 인상적인 기억이 뭐였냐면(나는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시절의 그를 모른다), 옵티칼지회에서 몇몇 동지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떠들다가 (거통고지회에서) 투쟁만 하면 비가 온다는 얘기를 하니 “왜 그런지 알아요? ‘비’정규직이라서”라고 했던 일이다. “정규직이 되니 비가 안 오던가요” 하고 물으니 “정규직은 밖에서 집회할 일이 없다”고 했던 것도. 그런데 이제는 또 회사에 휴직을 신청하고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에서 상근을 시작한다고 한다. 복직도 하고 정규직도 됐으니 이제 힘든 일 그만하고 꽃길만 걷자, 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이렇게 뚜벅뚜벅 꽃길을 벗어나 비 내리는 길거리에 서는 사람이라니.

 

(사진=황상윤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

 

‘박근혜가 탄핵되자 광화문을 밝히던 촛불은 멈췄다.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리라고 기대했지만 해고자는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여전히 권리를 잃은 상태였다. 대선을 치러 대통령이 바뀌더라도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진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여기서 박근혜를 윤석열로 바꾸기만 하면, 2017년의 문장은 고스란히 2025년으로 옮겨온다. 지난 겨울, 탄핵 광장을 한창 지나오던 와중에, 세종호텔 고진수 동지는 또다시 고공에 올랐다. 그리고 여전히 거기에 있다. 삼백일이 다 되어간다. 탄핵, 촛불, 광장, 민주당의 집권과 변한 게 없는 노동자의 삶, 고공농성까지, 거의 십 년이 지났는데 어쩜 이렇게 상황이 똑같단 말인가. 그런데 사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화도 났지만, 그에 앞서 몹시 부끄러웠다. 사실 2016년에 나 역시 광장에 있었다. 그리고 박근혜가 탄핵된 뒤 일상으로 돌아갔다. 촛불광장의 약속이 얼마나 지켜졌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촛불에 ‘탄핵’ 말고 다른 의제가 엮여있으리란 생각조차 못 했다. 나는 내가 정의를 지키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던 거다. 팔 년여의 시간을 건너 나는 또다시 광장에 나왔다. 이번에는 노동자들의 곁에 섰다(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은근슬쩍 낑겨’있었다). 뭐랄까, 신기했다. 신기한 사람들이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생을 갈아 넣어 세상을 전진시키는 사람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이라는 걸 그동안은 왜 몰랐을까.

 

아사히글라스는 오랫동안 불법파견 범죄를 저질러왔다.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고용하고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노동자를 대했다. 참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내니 문자 한 통으로 178명을 해고하고, 수십 건의 고소고발로 사람을 괴롭히고, 매달 수천만 원을 낼지언정 길바닥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내줄 돈은 없다고 했다. 끝의 끝까지 책임을 외면했다. 이것은 물론 불법이고, 범죄지만, 그 이전에, 악(惡)이다. 나는 우리가 법이 아니라 윤리와 정의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검찰수사심의위원회에서 ‘제조업 현장에서 합법 파견이라는 게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불법과 합법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게 ‘합법적인’ 도급이든 간에 ‘불법적인’ 파견이든 간에. 하청이든 협력사든 계약직이든 촉탁직이든 물량팀이든 특수고용이든 프리랜서든 아르바이트든 일용직이든 기간제든 간접고용이든 단기고용이든 플랫폼이든 간에. 어떠한 단어로 표현하든 그것의 본질이 ‘비정규직’이며 ‘불안정노동’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그럼 그건 사회의 악이다. 비윤리적인 고용방식이다. 설령 법이 유연한 고용이니 경제성장이니 노사협력이니 뭐니 하는 입에 발린 말을 내세워 그것을 ‘합법’으로 포장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노동을 존엄하게 여기지 않고, 노동자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필요할 때는 편하게 싼값에 쓰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파치처럼 내다 버리겠다는 자본의 선언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지난 일 년간 나는 법과 제도란 게 때로 대단히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그건 지금 권력을 가진 인간들이 지금의 사회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투쟁은 그 테두리를 넘고 깨고 넓혀가는 일이어야지, 이미 그어진 선 안에 주저앉아있어 봐야 눈 가리고 아웅이지 않나. 근대를 지나며 우리는 인권을 천부인권이라며, ‘하늘이 부여해준’ 것이라 모든 인간에게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글쎄. 같은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2급 인간’들에게도 인권은 주어지는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런 의미에서 ‘세상이 달라진다’는 건 사회를 작동시키는 법과 제도, 구조의 변화 그 자체보다도 그 세계에 속한 인간 개개인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노조는 현장을 바꾸고 동시에 사람을 바꾼다. 자본주의의 톱니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가는 인간성을 지키고, 우리가 공장의 부품이 아닌 사람임을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배우게 한다. 아사히지회의 투쟁은 사람을 바꾸는 투쟁이었다. 더는 착취당하지 않겠다고, 이번에야말로 후회 없이 끝까지 싸워보겠다고, 더 나은 일터를 찾아 떠나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을 좋은 일터로 만들겠다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투쟁. 몇 번을 지고 몇 번을 이기든, 몇 년을 싸우든 22명이 함께 돌아가는 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조직을 만드는 투쟁. 자본과 권력을 상대로 그토록 치열하게 악착같이 싸워내는 와중에도 대화와 토론의 의의를 잊지 않는 투쟁. ‘노동조합 만들어서 인간답게 살아 보자’에서 ‘민주노조 사수하고 현장으로 돌아가자’까지, 패배하더라도 승리하는 싸움이 있다는 믿음으로 수없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달려가는 투쟁. 깨진 유리 조각은 보다 더 날카롭다는 것을 보여주는 투쟁. 지금의 우리가 지켜나가야 하는 민주노조 정신이란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는, 현장의 투쟁.

 

(사진=아사히글라스지회)

 

그래서 이 책을 누가 읽으면 좋겠는가. 일단 일하다가 열 받아서 사장 얼굴에 물건을 집어 던지고 싶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읽으면 대리만족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광장에 발을 디뎠다가 도로 멀어졌던 사람에게도 인상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무엇보다 사람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바꿔나가기 위해 싸우고자 하는 사람이 읽으면 더 좋겠고, 그렇지 않았어도 읽고 나서 그럴 용기를 얻는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겠고.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을 두 번 읽었다. 처음은 후루룩 읽은 뒤 떠오르는 말을 아무렇게나 왕창 써놓았고, 다시 읽으면서 생각과 글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읽으면서는 마스킹테이프로 인상적인 문장들에 표시를 남겼다. 그런데 15번째 테이프를 붙이며 문득, 아, 서평 진짜 어떻게 쓰면 좋지, 싶어졌다. 내가 뭐라고 이 책을, 이 이야기를 감히 평(評)한단 말인가. 노동운동이 뭔지 민주노조가 뭔지 하다못해 투쟁이 뭔지도 제대로 말할 자신 없는 새파란 초짜 주제에. 덥석 제안을 받아들인 것을 아주아주 약간 후회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솔직히 다시 돌아간대도 제안을 거절하진 못할 것 같아서 약간만 후회하기로 했다). 재독을 마치고 세어보니 표시는 총 36개였다. 초독 때 조합원들의 이름 목록을 접어놓았던 것을 포함하면 37개. 그 문장들 하나하나가 역사였다. 가타부타 말 붙이는 대신, 꽃이라도 몇 송이 따다가 그들의 길 앞에 뿌려주는 심정으로, 다만 이 멋진 동지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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