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8월 29일(금) 진행된 '정세집담회: 러시아 소수민족 입장에서 바라본 러-우전쟁'에 발제문으로 제출되었던 글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이 링크를 통해 영어 원문을 확인할 수 있다.
본 발제는 러시아 식민제국과 그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북부, 시베리아, 그리고 극동 지방의 선주민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다룰 것입니다. 특히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역에 초점을 두고, 제 어머니가 속한 민족인 부랴트인들을 위주로 살펴볼 예정입니다. 투바인과 사하인으로 대표되는 시베리아 지방 튀르크인들의 경우, 제가 그 문화에 익숙하지 않으며 그들의 역사를 왜곡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심도 있게 다룰 수 없는 점 양해 바랍니다. 또한 몽골 민족의 식민지화를 다룰 예정이지만, 시베리아 튀르크족, 우랄족, 퉁구스족, 에스키모-알류트어족, 그리고 중국-티베트 민족이 경험한 식민화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싶습니다.
서문
부랴티야 공화국은 현재 러시아 연방의 통치하에 있으며, 바이칼 호 남쪽, 동쪽, 그리고 서쪽 약간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바이칼 호 북쪽에는 이르쿠츠크 주가 있습니다. 부랴티야 공화국의 현재 수도는 울란우데입니다. 부랴티야 공화국은 면적 약 351,000 km2에 약 978,000명의 인구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 부랴티야 공화국이 오늘 발제의 중심이 될 것이며, 이르쿠츠크 주 역시 언급될 것입니다.
(러시아 내 부랴티야 공화국의 위치)
(확대해서 본 부랴티야 공화국의 지도. 울란-우데를 수도로 하고 바이칼 호수 동편을 중심으로 위치해있다.)
러시아 제국 이전의 삶
부랴트인은 몽골인과 비슷하게 말이나 양과 같은 가축을 몰고 다니는 유목 생활을 했습니다. 별개로 유르트 대신 목조 주택을 짓는 등 목가적인 생활방식을 택한 부랴트인들 또한 존재했는데요, 이들은 농작물 재배가 용이한 토양을 가진 바이칼 호 서부에 정착하게 됩니다. 다만 시베리아 전역의 부랴트인들이 몽골인들처럼 사냥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은 언급할 가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몽골인들처럼 부랴트인 역시 16세기까지 샤머니즘을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16세기에 티베트 불교가 몽골에 전파됨과 함께 부랴트인 역시 티베트 불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서부 산림 지역의 부랴트인은 여전히 샤머니즘을 숭배했습니다.
부랴트인은 물물교환에도 참여했는데요, 동물성 제품을 중국의 직물과 금속으로 교환했습니다.
부랴트 사회는 칸 귀족이 다른 부랴트 계층 위에서 군림하는 칸 귀족제로 구성되었습니다. 동부 부랴트인 중에는 ‘노욘’이라고 불리는 부유한 목자들이 존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유지 소유권은 존재하지 않았고, 물물교환 또한 상호부조 내지는 상호주의적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3세기의 부랴트인은 칭기즈칸의 통치 하에서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부랴트인은 퉁구스인과 사모예드인에게 피해를 끼친 분쟁들에도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분쟁들로 인해 부랴트인이 러시아에 알려졌습니다. 러시아가 퉁구스와 사모예드인들을 약탈하기도 전에 이미 부랴트인들이 모든 걸 갈취해갔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와의 첫 접촉, 그리고 정복
부랴트인의 존재를 알게 된 지 20년가량 후, 러시아는 부랴트인들을 정복하기로 결정합니다. 부랴트 정복의 주요 원동력은 바이칼 지역에 풍부했던 은이었습니다.
첫 공격은 1628년의 예니세이에서 일어났습니다. 초반의 러시아군은 약탈은 하지 않았지만, 여성과 아이들을 납치해 갔습니다. 이듬해, 베케토프 사령관이 부랴트인에게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습니다. 안가르 정복이 끝날 무렵, 점령된 영토의 재명명 작업이 시작했습니다. 각 지역의 이름은 ‘브라츠크’, ‘이딘츠크’, ‘이르쿠츠크’로 바뀌었습니다. 부랴트인들은 이에 대항하여 1634년 반러시아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1641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를 계승한 대규모 항거운동이 1644년 벌어졌으나 결국 이르쿠츠크의 완전 포위로만 이어집니다. 1640년대의 부랴트인들은 자신들이 러시아를 상대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남쪽의 몽골로 이주합니다. 자신들의 땅을 빼앗긴 대다수의 부랴트인들은 (대부분 몽골로) 강제 이주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리고 동슬라브족이자 동방정교회 신도들로 구성된 '코사크'족이 러시아로부터 유입되어 대신 부라티야를 점령합니다.
러시아 차르 통치 하의 생활
러시아에 의해 도입되기 전까지 노예제도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부랴티야의 칸들과 노욘들은 생산력을 위해 비-귀족 계층을 착취하기 시작합니다. 부랴트인들은 코사크인과 동일한 방식으로 러시아에 의해 중국 국경의 경비군으로 차출되었습니다.
1822년, 외국인에 대한 법령이 만들어졌습니다. 외국인들은 목축민, 유목민, 떠돌이의 세 분류로 나누어졌으며, 부랴트인들은 이 중 유목민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이 분류는 곧 대초원 행정지역 내에서 부랴트 선주민인 관리자가 부랴트인들을 관리하게 됨을 의미했습니다. 각 대초원 행정지역은 자체적인 관할권을 가졌고, 관리직은 선출되거나 (누가 선출하는지는 명시되지 않음) 귀족제 하에서 상속되었습니다. 부랴트인들에겐 자치권이 주어졌지만, 토지에 대한 권리는 없었습니다. 영토는 오로지 러시아 제국의 소유였습니다. 이 영토는 유목민들이 사용할 수 있고 공인되지 않은 수탈로부터 보호되도록 규정되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존재하는 귀족제를 이용해 부랴트인의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종교의 문제
부랴트인들에게는 기독교와 불교, 두 가지의 종교가 강제되었습니다. 동시에 부랴트인들은 샤머니즘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서부에서는 기독교가, 남동부에서는 불교가 강요되었습니다. 반세기동안 기독교인들은 폭력적인 세레와 샤머니즘 유물을 불태우는 방식으로 부랴트인들을 개종시키고자 했습니다. 기독교 개종의 첫 시도는 실패했으나, 두번째 시도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은 부랴트어를 배우고, 학교를 건립하고, 기독교 경전을 출판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애로워 보이고자 했으나, 그들의 첫번째 시도 이후 부랴트인들은 기독교로의 강제 개종에 저항하는 의미로 대부분 불교에 귀의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부랴트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유산을 져버리도록 강요당했습니다. 부랴트인들의 불교 수용의 기저에 저항심이 있음을 눈치 챈 러시아인들은 불교 수출의 주역이었던 몽골과 부랴트인들 간의 접촉을 끊으려 했습니다. 표토르 1세는 또한, 예카테리나 2세와 다르게 통치 기간동안 확고한 반불교적 개혁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부랴트인들의 러시아어 교육은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이는 몽골인들과 달리 부랴트인들은 대부분 문맹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으로 부랴트인들은 글공부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저항을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20세기 러시아 정부는 20세기부터 부랴트인들의 문화유산과 함께 부랴트인들이 거주하던 대초원 지역의 자치권을 완전히 말소하고자 했습니다. 통치적 자치권과 함께 문화유산 일부를 보존했던 초반부와는 상반되는 행보입니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부랴트인들은 민주적 자치권과 부랴트어로 수업하는 학교들의 창설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이 때문에 부랴트인들은 ‘러시아화’ 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부 부랴트인들은 부랴트식 이름을 유지한 반면, 서부 부랴트인들은 아이들에게 러시아식 이름을 지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소비에트 혁명
러시아어에서 부랴트어로의 지역어 변경이나, 20세기의 점령지 개혁안과 같은 민족주의적인 경향성이 부랴트인들에게 이미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서 부랴트인들 일부는 러시아에서 독립한 범몽골 국가를 창설하고자 하는 희망으로 라마 네이스 게겐을 따라 백군에 참전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부랴트인들이 대다수 적군에 참전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에서의 긴장이 계속 고조되자 부랴트인들은 대부분 몽골과 중국으로 대피하여 이주하게 됩니다.
소비에트 연방과 스탈린주의
소비에트 연방은 서부 부랴트인과 동부 부랴트인의 부랴티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으로의 통합을 적절히 해냅니다. 이는 범몽골주의를 더더욱 강화시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37년, 부랴트인 지식인들과 정치 고위층들이 일본과의 공모 혐의를 받게 되고, 이는 6개 지역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고려인들 역시 비슷한 혐의에 시달렸는데요, 그 과정에서 스탈린 정부는 고려인들을 시베리아에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호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러시아의 고려인 비율이 인접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낮은 이유입니다.
초기의 레닌 정부는 범몽골주의를 반대하지 않았으나, 1937년 스탈린의 탄압 하에서 소비에트 정부는 범몽골주의에 극단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기 시작합니다. 이 대응책은 반종교 운동, 집산화, 그리고 러시아화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라마(티베트 불교의 지도자)와 샤먼들이 수감되었습니다. 이들은 부랴트인들에게 문화적 성유물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서 외국인 법령에 대해 말씀드렸는데요, 유목민들과 다르게 목축민들은 러시아 제국 시기의 농노와 비슷한 정도의 권리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랴트인들의 반(半)유목민으로의 재분류는 부랴트 인구의 도시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또한, 몽골어가 그러했듯, 부랴트어에 키릴식 글자가 사용되도록 강요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몽골로 이주한 부랴트인들은 이후 중국인들, 카자흐인들, 그리고 부랴트인들을 혁명의 적으로 규정한 몽골의 처이발상에 의해 탄압당하기도 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소련이 붕괴하기 전인 1990년, 부랴트인들은 자신들이 ‘억압받는 민족’임을 근거로 하여 소비에트 연방에 영토의 회복과 통합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옐친 정부는 부랴트인들의 높은 학력을 이유로 ‘억압받는 민족’ 지위를 얻을 수 없다고 답합니다. 부랴트인들의 과잉교육에는 일부 진실이 있긴 합니다. 몽골 문자를 문자 체계로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소련 치하의 부랴트인들은 학문적 성취를 얻기 위해 급히 분투했습니다. 유엔마저 부랴트인들이 받는 탄압을 인정했음에도 1994년의 현 러시아 연방은 그 탄압을 부인했습니다. 소련이 붕괴하고 2007년, 부랴트인들은 다시 한번 항소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습니다. 언론은 뒤이어 이 항소를 비웃었습니다. 2007년에서 2010년은 자발적 입국에 대한 선전이 퍼지던 시기였습니다. 푸틴은 부랴트인들이 보호를 명목으로 자발적으로 러사아에 합병당한 것마냥 가장하며 역사를 다시 쓰려 했습니다. 물론, 제가 앞서 부랴트인의 식민화에 대해 서술했듯이, 이는 거짓입니다. 곧이어 학교들은 부랴트어를 ‘개들의 방언’이라 부르며 부랴트어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러시아 제국 당시부터의 자원 약탈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원(금속류)은 모두 모스크바에 경제적으로 집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현재,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부랴트인들은 군인으로 차출되고 있습니다. 금전적인 뇌물을 대가로 부랴트인 자신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전쟁에 참전하는 것입니다.
부랴티야 공화국은 동부 러시아와 함께 가장 군사화된 지역들 중 하나입니다. 부랴티야는 추코트카 자치구, 투바 공화국과 함께 러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 경제 약화는 (금속류를 비롯한) 자원들이 러시아 서부로부터 경제적으로 착취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부랴티야에는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최저임금 이하만으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이러한 부랴티야의 경제적 불리함이 부랴티아를 금전 기반의 군사화에 취약하게 만듭니다.
우크라이나에 가장 먼저 진입한 군대는 부랴트군이었습니다. 러시아군 사망자 중 2.5%가 부랴트인이었는데, 부랴트인은 러시아 인구 중 0.35%만을 차지합니다. 즉, 100,000명 중 252명이 전사하는 것입니다. 1,300만명의 인구를 가진 모스크바 일대에서 1,200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100,000명 중 9명만이 사망한 것입니다. 이 퍼센트 격차는 선주민 인구가 있는 지역들이 포격 대상이 되며 과중하게 군사화되고 있다는 점을 반영합니다. 모스크바를 비롯한 다른 러시아 서부지역에는 이러한 과중한 군사화 계획이 없습니다. 하바롭스크 지역, 특히 하바롭스크의 선주민들 역시 군사화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부랴트인들의 참전 독려에는 강력한 선전 또한 사용되고 있습니다. 크렘린 궁의 정부가 시위, 특히 반전 · 반정부 시위를 강경하게 탄압하는 동안 “러시아인들은 항복하지 않으며, 부랴트인들은 도망치지 않는다” 와 같은 슬로건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탈식민주의 혁명과 국제주의를 향하여
반식민주의의 보루였던 소련은 구 러시아 제국의 선주민들을 진정으로 해방시키지 못했습니다. 소련 혁명 당시 선주민들은 자신들이 대표된다고 느끼지 못했기에 자치권이나 독립에 대한 희망 없이 이민을 택했습니다.
초기 소련은 범몽골주의를 어느 정도 지지했으나, 스탈린 정권은 범몽골주의를 과격하게 반대하며 구 러시아 제국에서부터 이어진 러시아의 지배에 저항하는 선주민들을 징벌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선주민들 사이에서 민족주의가 새로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선주민들이 선주민 인구와 영토의 완전한 독립 내지는 최대한도의 자치권을 원하고 있고, 부랴트인과 사카인으로 대표되는 일부는 범몽골주의적 민족주의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부랴티야 해방운동 내 이런 민족주의적 행보들은 부랴트인들의 완전한 해방을 이룩하는 대에 충분치 않습니다.
대다수 부랴트 혁명집단이 택하는 범몽골주의적 관점은 결국 부랴티아의 몽골 합병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칭기즈칸의 대제국 때 처럼 말이지요. 범몽골주의의 호소력에 대해서는 이해합니다. 부랴티야 단독으로는 해방을 이룩하기에 힘이 부족하니까요.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제가 부랴티아의 해방이 오로지 국제주의적인 반식민주의 혁명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이유입니다. 부랴트인들은 러시아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식민지화된 다른 이들과 연합하여 모든 식민지화된 땅의 해방을 불러와야 할 것입니다.
이 발제에서 저는 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식민화된 이들의 관점을 고려하고, 단지 유럽의 전통적인 서구 제국주의와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식민주의로부터만 식민지화된 이들을 해방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소비에트 연방 시절 결국 선주민의 해방을 불러오지 못한 제국주의적 세력으로서의 러시아 또한 고려할 것을 독려하고 싶습니다.
번역: 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