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벌을 만나다#7] 단지 윤석열만 없을 뿐, 지금 정부가 하는 짓은 똑같잖아요 - 퀴어도 노동자라는 연대동지, 주드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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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말벌을 만나다#7] 단지 윤석열만 없을 뿐, 지금 정부가 하는 짓은 똑같잖아요 - 퀴어도 노동자라는 연대동지, 주드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

  • 정은희
  • 등록 2025.09.15 21:23
  • 조회수 5,983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은 12.3 내란 이후,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는 많은 ‘말벌동지’들을 만났습니다. 4월 4일 윤석열이 파면된 뒤에도 많은 ‘말벌동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때로 노동조합원이 되기도 하고, 때로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기도 하며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에 전진은 말벌동지들이 어떤 생각으로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왔는지, 그전에는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그리고 왜 광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같은 대오에 섰는지,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전망하는지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번(8월 11일)에는 주드 동지를 만났습니다. 성 정체성을 부정당한 고교 시절을 지나 노동자로 살며 광장에 나온 그는, “퀴어도 노동자”라는 사실을 힘 있게 말합니다. 녹슨 민주노조 운동과 진보정치, 그리고 이 체제를 향해 망치를 두드리듯 목소리를 내는 그는, 사회주의 운동이 연대 동지들을 더 적극적으로 조직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트랜스젠더 노동자로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투쟁, 거통고조선하청지회,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투쟁, 지혜복 공익제보교사 투쟁, 반도체 특별법 저지 투쟁,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저지 투쟁까지 쉼 없이 달려 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사진: 인천퀴어문화축제)

 

-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와 퀴어팔레스타인연대 QK48(QK48) 활동가이고, 거통고지회 조합원입니다.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고요, 최근 해고된 노동자이기도 합니다.

 

어릴 때부터 반항적이었어요. 특히 학교와는 맞지 않았죠. 경쟁적인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고, 결국 고등학교 때 자퇴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학업에 큰 공백이 있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보수적인 교수는 전자기기 사용도, 개별 질문도 금지했어요. 학생들이 너무 힘들어했죠. 저는 화가 났고, 그래서 필요한 동료들에게 무료로 개인 교습을 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교육일을 시작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는 학원에서 파트타임 강사로 일했어요. 최근 (2025년 3월) 서울에 상경한 후로는 과외 강사로 일했습니다. 사교육 강사, 특히 파트타임 강사 노동은 상당히 불안정해요. 때문에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추가로 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계속 교육업에 종사했다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연차로 치면 5-6년차 정도. 그러다 최근 해고됐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교육 강사는 노동환경이 상당히 불안정한데, 마찬가지로 그렇다 보니까 저처럼 갑자기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 동지는 내란 사태 이후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는데, 어떤 계기로 광장에 나오게 되었나요?

 

그전에도 가끔 집회에 참여하고는 싶었지만, 방법을 잘 몰랐습니다. 당시에는 ‘내가 이 그룹에 포함돼도 되나’ 하는 조심스러움이 컸습니다.

 

12월 3일 계엄 소식을 늦게 알았는데, 서울 친구들이 국회 앞으로 갔다는 얘기를 듣고 대전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그 계기를 통해 서울 상경 투쟁에도 결합하게 됐습니다. 처음엔 ‘이 운동에 들어오려면 입장권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12월 초에서 초에서 중순까지는 탄핵집회에 주로 참여했고, 이후 2~3주 정도는 전국장애인철폐연대(전장연) 집회에, 그다음에는 한강진 터지기 전날이었던 1월 2일 다른 동지들은 그쪽으로 많이 갔지만, 저는 세종호텔 투쟁문화제 자유발언을 처음으로 받는다고 들어서 세종호텔로 갔어요. 퀴어퍼레이드 행진 때 응원하는 세종동지들의 모습을 봤던 기억이 있어서 애정이 있었거든요. 그걸 계기로 노동운동에도 더 결합하게 된 것 같아요.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는 먼저 긴급행동 실무팀에 결합했다가 나중에 함께하게 되었어요. 지역에서 뭔가 해보고 싶어서 막무가내로 긴급행동에 연락했는데, 그 인연으로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 활동회원으로 결합하게 되고, 3개월 정도 수습 활동을 하다가 활동가가 되었고, 지금은 여기에 더 집중하고 있어요.

 

광장이 정리된 뒤 제가 활동하면서 만나본 사람 중에는 개인 연대자가 아니라 좀 더 조직적으로 참가하거나 본격적으로 집중하여 연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생각되어요. 이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를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문을 열어주면 더 많이 올 수 있고, 우리 활동을 퍼트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속노조 거통고조선하청지회 조합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데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조합원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일자리를 갖고 보니까 제 일자리에는 노조가 없었죠. 학원은 5인 미만 사업장이었고, 지금은 프리랜서예요. 민주노총에 문의도 해봤어요. 대전 일반노조에 가입할 수 있겠다고는 들었는데 서울로 옮겨서 진전이 딱히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민주일반노조 누구나노조지회에 가입했죠. 그런데 거통고지회 연대를 위해 거제에 내려갔는데 다른 동지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내 분야가 아니더라도 경험을 쌓아서 내 업종에서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가입하게 되었죠. 하지만 사실 조합원으로서 활동을 열심히 하지는 못했어요. 초반에는 열심히 했는데 3월부터는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 가입했고, 현지 활동 때문에 인력이 비어서 여기서 열심히 했어요.

 

사교육 쪽에서 일해 왔지만, 이 업종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해요.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구했지만 사교육 자체에 비판적인 입장이기는 해요.

 

- 그동안 활동하시면서 가지신 인상적인 경험을 듣고 싶어요

 

인상적이었던 것은 특별히 없었어요. 그나마 A학교 투쟁 때 연행됐던 거? 다른 하나가 전장연 연대 다니면서 겪었던 일이에요. 제가 국가폭력을 당한 게 한두 번은 아니었어요. 전장연에도 그랬고, 2차 남태령 때에도 그랬고, A학교 투쟁이나 이수기업에서도 그랬죠. 이수 때에는 경찰한테 방패에 다리가 눌려서 걷는 게 어려웠어요. 그 트라우마가 깊지는 않아요. 제가 가정 폭력 생존자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뽑자면, 전장연 출근 선전전 때였는데, 전장연 주황색 몸자보 조끼를 받아 들고 있었는데, 서울교통공사 직원들이 퇴거하라고 하고 그에 불응하자 끌고 나가는 과정에서 조끼 목덜미를 잡아서 목이 졸렸어요. 그날 사실은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만 있으려고 했는데, 목이 졸리니까 말을 안 할 수가 없어서 ‘목을 조르고 있다’고 말했는데 놓기는 했지만, 경찰은 계속 눈치만 보더라고요. 부상을 입었는데도 보고만 있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는 좀 충격이었죠. ‘그 사람들이 나를 정말 죽였을 수도 있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트라우마 때문에 한동안 4호선을 못 탔어요. 직원들이 있는 것만 봐도 힘들었죠. 저는 신체 폭력에 무감한 편이고, 그런 상황에 처하면 제가 앞장서 나서기도 하는 편인데요, 이 사건 자체가 국가폭력이 얼마나 억압적이고, 자본이나 기득권에 국가가 얼마나 동조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이후에 전장연 선전전에 결합하지 못했어요. 시청에서 선전전 하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근처까지 간 적도 있었는데 못하겠더라고요. 국가폭력이란 게 정신을 부숴놓는 것 같아요. 국가가 앞장서서. 어느 정권이든, 국가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해 억압해 왔고, 이 사회는 그것을 방임해 왔는데, 그 부분을 직접적으로 느꼈어요.

 

그때 너무 충격적이었던 게 얼마 안 가서 김형수 동지가 똑같이 목이 졸리셨거든요. 당시 전장연 투쟁에 거통고 지회 동지들이 결합했는데, 전혀 개선이 되지 않았던 거예요. 이것이 의도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러한 국가폭력은 저나 일부 동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장연 동지들은 계속 겪고 있는 것이죠. 현대차 구사대도 그때만의 일이 아니었던 거고요. 너무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대중은 모르거나 이 부분이 잘려 나간 채로 정보를 접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출퇴근해야 하는데, 장애인들이 귀찮게 군다’라는 정도로요.

 

- A학교 투쟁으로 연행된 적이 있었는데요, 연행 당시 무슨 어떤 상황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왜 지혜복 동지의 투쟁에 연대하게 되셨는지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연행 당시에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전전날 화장실 막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출근 때문에 희망텐트에 못 왔다가, 미아리 주거권 투쟁 연대도 하고, 김진숙 동지 강연도 갔다가, 오전 선전전에 갔어요. 그런데 반쯤 졸린 상태로 화장실 가려고 별관에 갔는데, 누가 불법채증을 한다고 해서 말리다가 서재유 동지가 다리를 다치면서 재정신이 들었죠. 그런데 너무 당황스러웠던 것이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퇴거 명령을 내린 거예요. 부상자가 발행했고 응급처치가 필요한 상황인데 퇴거 명령만 내려진 거죠. 그리고는 갑자기 연행을 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아는 게 없으니까 퇴거를 하라고 해서 퇴거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연행을 했죠. 4명 정도 남아 있었을 때였는데. 첫 연행이기도 했고 그래서 ‘어어’하면서 연행됐어요.

 

연행되면서도 당연히 모두가 금방 나오겠거니 했어요. 큰 문제도 아니고. 경찰이 대응을 제대로 못 한 게 몇 갠대요. 그런데 하루 이상을 구속했고, 유치장에서 심각한 인권 침해를 당한 동지들도 다수였죠. 경찰은 아직도 사건을 조사 중이라고 하고요.

 

원래 지혜복 동지 투쟁에는 마음속으로 연대는 계속하고 있었지만, 연대 일정이 겹치면 주로 다른 곳으로 갔어요. 공교육과 교사에 대한 심리적인 거부감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멀리서만 연대했는데, 희망텐트 때는 어이가 없어서 왔었죠.

 

사교육이지만, 교육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교육자로서의 신념을 지혜복 동지가 잘 보여주시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옳은 일을 함께하는 데 결의라는 게 꼭 필요하냐는 말. 당연히 맞는 말이에요.

 

고등학교 때 자퇴 시도도, 등교 거부도 했었어요. 고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배치고시를 보는데, 저는 서울 소재 사립 특목고를 나왔고,. 전형적으로 교사들이 좋아하는 상이었어요. 그런데 입시를 거부한다든가, 젠더 디스포리아(gender dysphoria, 지정 성별과 자신이 정체화한 성별이 불일치하는 트랜스젠더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겪는 고통을 의미) 속에서 사복 바지를 입고 다닌다든가 하면서, 모범생이었던 저에 대한 이상과 현실이 달라지니까 교사들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죠. 교육의 민낯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지정 성별 여성이어서 교복 치마를 입어야 했는데, 치마를 잃어버려서 교복 바지를 사려 했는데 재고가 없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사복 바지를 입었죠. 이 문제로 교사와 부모와 마찰이 심했어요. 그러다 보니 학교에 나오는 데 거부감이 들었고, 등교거부를 했고, 그러면서 공황장애까지 겪었죠.

 

학교보다는 배우는 걸 좋아했어요. 학교 정문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학교가 싫어졌어요. 선생님들은 나를 보호한다기보다는 골칫덩이를 처리한다는 느낌이었죠. 그때부터 교육자들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제대로 된 교육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어요. 지혜복 동지는 앞장서서 발 벗고 나서신 것에요. 사회통념을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런 지혜복 동지를 보면서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런 선생님도 있구나’라고 말이에요.

 

-현재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반대하는 투쟁을 적극적으로 하고 계시는데요, 그 이유를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연하니까요. 짧은 이유를 말한다면요. 긴 이유는, 저는 배우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요. 어렸을 때 논술잡지를 많이 읽었어요. 거기서 전태일 열사 이야기도 처음 접했고요. 거기서 노조나 근로기준법을 알게 됐고. 그 시기에 있었던 글 중 하나가 팔레스타인에 관한 글이었어요. 팔레스타인 민중을 학살하는 데 백린탄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었죠. 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고 국제법상 금지된 무기. 그 외에도 이스라엘에 한국 기업인 한화가 무기를 공급하고 있는데, 그 무기가 팔레스타인의 어린이를 죽이고 있다는 것. 어린이 시절이었는데 너무 끔찍하고 충격적인 이야기였죠. 한화면 한국에서는 추앙받는 기업인데 직접적으로 전쟁에 이바지한다는 게 충격적이었어요.

 

그 이후로는 팔레스타인 소식을 많이 접하지 못했는데, 그러다가 10월 7일 작전이 있었고, 이스라엘이 학살 강도를 높였죠. 말이 안 된다고 느꼈어요. 그 글을 봤을 때가 초등학생 때였는데 10년도 더 지났는데, 아직 해결이 안 되었고, 집단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데 소위 지도층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죠. 말이 안 되었죠. 그래서 계속 알아보게 됐고, 처음에는 전쟁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죠. 애초 식민지 상태였고요. 이것을 알고 나니까 외면할 수가 없었어요.

 

많은 분이 2년 가까이 되어가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특히 3월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기아 학살의 참상을 목격하고 팔레스타인 연대를 시작하시는 거 같아요. 저도 그런 면이 있고요. 다만 연대활동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저는 저와 제가 소속된 국가인 대한민국이 학살 동조국이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어요. 일단 그럴 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했죠. 한국이 서구 열강이라 불리는 국가만큼의 영향력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래서 ‘그나마’ 팔레스타인 학살에 대한 직접적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연대활동을 하다가 계속 느끼는 게…. 한국은 미국 제국주의의 산물이자 동조국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다 보니 미 제국주의가 가담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학살에도 책임이 있는데, 과거의 저와 많은 사람들이 그 부분까진 생각하지 못하고 회피하게 되는 것 같아요. 또한 한국의 경우 자본이 팔레스타인 학살과 이스라엘의 제국/식민주의를 자신의 이익에 이용하고 있지요. 한화 등 방산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요, HD 현대의 굴착기가 이스라엘 불법 정착촌 건립과 팔레스타인 선주민들의 가옥 파괴에 앞장서는데 사측은 모르쇠 중입니다. 최근에 이스라엘 불법 정착민이 팔레스타인인 활동가를 살해했을 때 그 배경에서 HD현대의 굴착기가 비치기도 했어요. 저희(팔레스타인평화연대)가 지금 압박하고 있는 매일유업을 포함한 많은 기업이 이스라엘산 과일을 사용하고 있고요. 사람 목숨값으로 장사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또 사실 이런 부분 때문에 특히 한국에서의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은 반자본주의적 측면을 띌 수밖에 없고, 반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 바람은 아예 사회주의에 기반하여 조직되는 것이지만요. 일전에 노동자 민중, 그중에서도 비정규직/하청노동자/불안정노동자/이주노동자 등 더 열악한 노동환경에 있는 노동자 민중 조직의 필요성과 그들이 어떻게 사회 변혁의 원동력이 될지 대화를 나누었잖아요. 저는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서도 이 노동자 민중의 조직이 중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울산의 서진 동지들이나 이수 동지들의 경우에는 지역 팔레스타인 연대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는 걸로 아는데요, 이걸 더 확대할 방법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민주노조 운동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이 있으실까요?

 

정체돼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개혁적인 집단이었는데, 점점 흐름이 정체되는 느낌 말이에요. 민주노총 자체가 예전에는 변혁적인 집단이었다면, 지금 그 주체는 불안정 고용 노동자, 플랫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억압받고, 불리한 조건에서 싸움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중요하다고 봐요. 민주노총도 그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처음에 ‘민주노총 부른다’라는 말이 있었잖아요?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밈화’되어서 많이 사용했어요. ‘말씀하신 오지랖을 우리는 연대라고 합니다’라는 트윗이 있었는데 이것에도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실제로 활동을 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변혁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고 많이 느꼈어요. 길을 열겠다는 말 이후에 보인 입장이 실망스러웠고. 간부 동지만 봐도 상당히 위계적인 사람들도 있었고요, 대선 때 결국 민주노총은 기권했고요.

 

-현재 윤석열은 재구속되었고, 정권도 바뀌었는데요, 그 과정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세상을 바꾸는 데 필요한 정치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윤석열이 당선됐던 대선 때 해외에 있었어요. 해외 거주자이기 때문에 굉장히 어렵게 투표를 했죠. 당시에는 이재명을 찍었죠. 그리고 진보당에 가입했어요. 한국 상황과 어떻게든 연결되고자 하여 진보당에 가입했죠.

 

그런데 2024년 총선 대 진보당이 말은 세상을 바꾼다고 하는데, ‘민주당과 같이 간다? 이게 맞나?’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내란 청산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는데, 내란 청산이 끝이 아닌데 말이에요. 광장에서도 민주당이랑 활동을 많이 한 게 좋게 보이지 않았어요. 지금의 진보당은 이름값을 못하고 있죠. 민주당의 아류라고 할까요.

 

대선을 2번 겪었는데, 지난번이랑 이번이랑 가장 큰 차이가 결국 진보진영에서는 민주노동당 후보밖에 없었다는 거라고 봐요. 지난번에는 각 정당에서 후보를 냈는데 말이에요. 애초에 민주당이 다른 정당을 뽑으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하는 것도 짜증나는데요, 진보정당들이 단일화한 것도 아쉬웠어요. 민주당에 동조한 진보당의 아쉬움은 말할 것도 없고요. 진보당이 위성정당에 참여했을 때 완전히 반대했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행동을 하길래 미련 없이 떠났어요.

 

결국 권영국 후보를 찍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기대를 하지는 않았어요. 권 후보가 낸 공약이 엄청난 것은 아니었잖아요.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 그런 물음이 들었죠.

 

지금 정부 인선도 그렇고 바뀐 게 없죠. 단지 윤석열만 없을 뿐. 평소 대한민국 정부가 하는 짓을 똑같이 하고 있다고 봐요. 노동자와 소수자들은 다 탄압을 하고 있고.

 

세상을 바꾸기는 데 필요한 정치는, 사실 제가 정치를 잘 몰라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권력을 잡을 수 있고, 이것은 잘 모르겠어요. 소수자들은 항상 버려진 패라는 것, 항상 나중이라는 것, ‘일단 이번 고비는 넘기고’라는 그런 느낌이죠. 소수자들이 싸워서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정치판을 깨야 한다고 봐요. 사실은 굳어져 있는 자본주의 체제기 때문에 진보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똑같은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상 모두. 국회나 의회가 아니라 민중이 시작해야 한다고 봐요. 그 민중에서도 가장 동력이 될 수 있는 사람들, 가장 억압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요.

 

저는 성소수자 운동, 여성운동 쪽에서도 매우 많은 사람이 이 체제를 깨부수는 게 아니라 이 자본주의와 타협하거나 오히려 부역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고 봐요. 서울퀴어페스티벌조직위의 경우, 금전적인 이유로 영·독 대사관 부스 참여를 허용했던 사례처럼요.

 

퀴어도 노동자계급이 아닌가요? 여러 운동을 하는 단체들의, 자신의 노동자성, 그리고 노동자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 맥락을 잘라버리고 자본에 협력하려고 하고 거기서 해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결국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런 한계 때문에, 제가 퀴어인데 퀴어 단체에 안 들어가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퀴어팔레스타인연대에 들어갔을 때 행복했어요. 팔레스타인평화연대도 그렇고. 계급성에 대해 사유하고, 반대하고 저항하려는 게 보였기 때문에 그랬죠.

 

- 사회주의를향한전진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전진의 교육 프로그램을 몇 개 듣다보면 사회주의 혁명은 결국 혼자서, 혹은 소수의 결의가 아니라 오로지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해야만 쟁취할 수 있다는 걸 반복해서 깨닫게 되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조직을 더 열심히 해 주세요. 특히 교육을 통한 선전활동에 많은 여력을 쏟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어렵다는 건 알지만, 그게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의적 의미로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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