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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운사 연재 3회] 1부 폭압과 저항(1970~1987) [2] 1980년의 분출
박정희가 사망하자 지배세력은 일시에 혼란에 빠졌다. 그 혼란의 틈새로 노동자들의 누적된 불만이 터져 나왔다. 1978년 이후 한국경제 위기도 요인이었다. 1980년 들어 5월까지 임금인상, 체불임금 지급, 공장폐쇄 반대, 민주노조 건설, 어용노조 민주화 등을 요구하며 897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1970년대 10년 동안 발생한 노동쟁의 832건을 능가하는 수치였다. 노동쟁의 참가자 수도 1970년대 전체 노동쟁의 참가자 수와 비슷한 2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전두환 신군부가 5·17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에 맞선 광주민중항쟁이 고립된 채 패배했다. 군사정권의 재수립과 함께 노동자투쟁의 분출도 중단됐다.

[목차]
1부 폭압과 저항 (1970-1987)
[시대배경]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
[1] 민주노조운동의 태동
[2] 1980년의 분출
[3] 민주노조운동의 파괴와 재건
[4] 1987년의 대폭발
1) 1980년 서울의 봄과 사북항쟁
가장 먼저 투쟁에 나선 것은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인 청계피복노조였다. 4월 8일부터 10일 동안 청계피복노조 조합원 150여 명이 임금인상, 상여금 지급, 퇴직금제도 전면 실시, 노동3권 완전 부활, 해고자 복권·복직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계엄령 아래서도 공세적인 투쟁을 전개하여 평균 29%의 임금인상과 ‘10인 이상 사업장 퇴직금제 실시’를 관철해 냈다.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강원도 사북에서 탄광노동자들의 항쟁이 전개됐다. 사북에는 전국 최대 민영탄광이던 동원탄좌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노동자들은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다. 게다가 탄광 개발 당시 노동자들을 감독하기 위해 고용됐던 깡패들이 그대로 노조를 장악하고 있었다.
보통 수백m, 깊게는 수천m 지하로까지 내려가야 하는 막장 노동 속에서 한 해 평균 200명의 광부가 목숨을 잃고 5,000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었다. 10명 가운데 1명꼴로 일어나는 막장 사고를 운 좋게 피한다고 하더라도 진·규폐증이 광부들을 기다렸다. 79년 가톨릭대 부설 산업의학연구소가 민영탄광 노동자 9,15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 가운데 16.1%가 진폐증 환자였다. 하루 3교대로 8시간씩, 한 달 평균 28일씩의 중노동을 하면서도 이들이 받는 임금은 79년 당시 평균 16만 4천 원으로 5인 가족 최저생계비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광부들이 거주하는 사택촌은 거의 집단수용소와 같았다. 가구당 주거면적 5~6평에 30~40가구가 한 곳의 공동변소를 이용했으며, 공동수도의 물마저 제한 급수를 받고 있었다. 탄광촌의 유일한 후생복지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목욕탕은 중앙 사택의 단 한 곳뿐이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노조였으나 회사는 지부장에게 자재 납품권, 덕대 하청권, 식당 운영권 등을 주는 방식으로 노조를 철저히 어용화시켰다.[1]
이런 상황에서, 전국광산노동조합이 전체 지부장 회의를 통해 42% 임금인상을 목표로 제시했음에도, 동원탄좌 지부장이 회사와 비밀리에 20% 인상에 합의했다. 이에 동원탄좌 노동자 200여 명이 4월 21일 지부 사무실에서 ‘어용노조 퇴진과 42%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이 출동하자 노동자들이 거칠게 저항하고, 험악한 분위기에 위협을 느낀 경찰이 지프로 도망치다가 노동자 4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노동자 500여 명이 사북 시내로 몰려가 경찰서장과 광업소장에게 몰매를 가하고, 과장급 이상 회사 간부들과 지부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들의 집을 부수었다.
22일 오전 시위대가 가족까지 참여해 2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지부장의 부인을 인질로 잡아 린치를 가했다. 경찰 200여 명이 소총으로 무장하고 읍으로 들어왔다. 5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일단 동원탄좌로 후퇴했다가 경찰에 반격을 가했다. 오후 2시쯤 경찰이 궁지에 몰려 철수했다.
사북읍을 완전히 장악한 노동자들은 자치방범대를 뽑아 치안을 유지했다. 그런데 언론은 노동자들을 폭도로 몰고 경찰은 헬기로 삐라를 뿌리면서 해산하지 않으면 강력히 대처하겠다고 위협했다. 노동자들은 분열하기 시작했고 투쟁의 주도권이 타협적인 대의원들에게 넘어갔다. 정부 측과 협상을 진행한 끝에 24일 아침 기존 노조집행부의 사퇴, 상여금 인상, 부상자 치료·보상, 피해주택 복구 등의 내용으로 타결됐다. 5월 7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70여 명을 연행해 가혹한 구타와 고문을 가했고, 31명이 구속됐다.
사북항쟁 이후 정부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이제 임금 문제보다 어용노조 퇴진과 민주노조 건설이 중심 이슈가 됐고, 투쟁 형태도 탈법적이고 전투적으로 바뀌었다. 동국제강, 인천제철, 일신제강, 원진레이온 등의 노동자투쟁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동국제강 노동자들은 적은 임금인상에 항의하면서 거리까지 밀고 나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끝에 요구를 쟁취했다. 인천제철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회사를 점거·파괴하면서 파업농성을 벌였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5·17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뒤에도 3일간 공장을 계속 점거하며 투쟁했다.
해태제과 노동자들은 1979년부터 줄기차게 요구해 온 8시간 노동제를 임금 삭감 없이 쟁취했다. 해태제과 노사는 기존 12시간 노동의 임금을 8시간 기본급으로 지급하기로 합의했는데, 이로써 실제 임금인상률이 남자 39.8%, 여자 48.5%에 이르렀다.[2]
민주노조들은 산별노조와 한국노총의 민주화에 나서기도 했다. 원풍모방, 반도상사, 동일방직 등의 노조들은 10·26 사태 이후 섬유노조정상화추진위원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콘트롤데이타노조는 금속노조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다.
원풍모방·동일방직 조합원을 비롯한 노동자 3천여 명은 5월 13일 한국노총 주관으로 한국노총 대강당에서 열린 ‘노동기본권 확보 전국궐기대회’에 참가해 노동3권 보장 전국 서명운동과 어용간부 퇴진을 한국노총에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했다. 민주노조들은 2일간의 농성을 통해 한국노총의 각성과 민주화를 강력히 촉구했다. 그런데 이들이 농성을 벌이던 5월 14일 대학생 시위대가 한국노총 회관 앞으로 몰려와 민주화 시위 합류를 요청했다. 농성지도부는 ‘군부에게 탄압의 구실을 주어서는 안 된다’며 거부했다.
5월 15일, 서울 35개 대학과 지방 24개 대학에서 학생들이 전국 주요 도시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서울에서만 10만 명이 서울역에 운집해 계엄군의 탱크가 진주한 광화문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곧 군대가 치고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저녁 8시 국무총리가 “연말까지 개헌안 확정, 내년 상반기까지 양대 선거 실시”라는 민주화 일정을 발표하며 학생 시위대의 해산을 종용했다. 학생운동 지도부는 일단 시위를 멈추고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었다.
2)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1979년 12·12 쿠데타로 군부 내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서울의 봄’ 시위가 커지자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2차 쿠데타를 일으켰다.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 학생들이 투쟁을 포기한 것과 달리, 광주 학생들은 5월 18일 아침에도 ‘비상계엄 해제’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까지 무참히 살육하기 시작했다. 쇠몽둥이로 머리통을 부수었고, 대검으로 온몸을 난자했다.
치 떨리는 살육을 목격한 노동자·민중은 가눌 수 없는 분노로 일어섰다. 평화시위는 폭력항쟁으로 바뀌었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돌과 각목 등을 들고 계엄군의 총칼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공수부대의 잔혹한 유혈진압은 계속됐다. 20일에는 차량시위를 조직하는 등 투쟁이 한층 격렬해졌다. 보안사의 통제 아래 놓인 언론이 광주항쟁을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보도하자 광주 MBC 방송국을 불태웠다. 일부 시위대는 차량을 타고 광주를 빠져나가 전남 일대를 누비며 진실을 알리고 시위를 널리 퍼뜨렸다.
21일 마침내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총을 발포했다. 시위대는 경찰서를 습격하고 무기고를 접수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아세아자동차에서 생산하던 장갑차와 트럭 같은 군용차량들을 확보했다. 화순탄광 노동자들은 탄광에서 쓰던 다이너마이트를 광주로 가지고 왔다. 무장 투쟁이 시작되면서 학생들이 주도하던 운동이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바뀌었다. 시내 곳곳에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21일 밤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포진한 계엄군이 무장 시위대의 거센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광주 외곽으로 철수했다.
계엄군을 몰아낸 노동자·민중은 광주를 해방공동체로 만들었다. 전투 과정에서 형성된 시민군은 시내 방위대와 지역 방위대를 조직해 자치질서를 수립했다. 계엄군의 외곽 봉쇄로 식량과 생활필수품 공급이 차단된 상황에서, 식량이 떨어진 이웃과 쌀을 나누었다. 주먹밥을 이고 거리로 나와 모두가 나눠 먹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자발적으로 부상자들을 치료했고, 너도나도 헌혈에 나섰다. 범죄가 사라졌다. 23일부터 26일까지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매일 수만 명이 모이는 시민궐기대회가 열려 항쟁의 의미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토론했다. 종교인과 지역유지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무기 회수를 통해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25일 윤상원을 비롯한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결성돼 결사항전의 준비를 갖추었다.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157명의 시민군이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며 계엄군에 맞서 싸웠다. 광주민중항쟁으로 인한 희생자는 사망 165명, 행방불명 65명, 부상 후 사망 376명 등 606명으로 나중에 공식 집계됐다. 그러나 암매장자와 미신고 인원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펼쳐진 노동자·민중의 항쟁을 책임졌던 이들은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밀어닥친 역사의 부름에 주저 없이 떨쳐 일어선, 너무나 평범한 노동자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이 엄청난 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학습도 해보지 않았고, 어떤 조직도 가져보지 못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그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조차 짓밟으려 할 때, 노동자계급이 얼마나 단호한 혁명적 본능으로 얼마나 엄청난 혁명적 역량으로 떨쳐 일어설 수 있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1980년 ‘민주화의 봄’을 이끌던 지도부가 광주를 빠져나간 뒤 광주를 지키며 끝까지 싸웠던 이들은 노동자, 농민, 기층민중이었다.
5월 20일 오후 6시쯤 택시노동자들이 택시 2백여 대를 몰고 무등경기장에 모였다. 그들은 18, 19일 광주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공수부대의 만행을 누구보다 생생히 눈으로 보고, 학생들과 부상자를 나르다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7시쯤 버스와 대형 트럭을 앞세운 차량 2백여 대가 금남로에 나타났다. 거리를 가득 메운 채 불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도청 쪽으로 나아갔다. 운수노동자들의 투쟁과 희생은 시위 군중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로케트전기, 전남방직, 일신방직, 아시아자동차, 금호고속, 전일섬유, 광주어망, 남해어망 노동자들이 투쟁의 대열로 모였다. <투사회보>를 만들던 들불야학 팀도 노동자들이었고, <투사회보>를 돌리다 들키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일을 했던 이들은 회보를 하나라도 더 감춰 나르려고 ‘몸빼’ 같은 옷을 입고 나온 21살, 22살, 23살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맨 앞에서 총을 들고 싸웠던 시민군 기동타격대원들을 보더라도 항쟁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5·18 민중항쟁에 적극 참여했다가 군법회의에 넘겨진 기동타격대원 30명의 이름과 나이, 하던 일을 보자.
△윤석루(20세)-자개공 △이재호(33세)-회사원 △이재춘(20세)-방위병 △양기남(19세)-삿슈공 △임성택(17세)-양복공 △구성회(16세)-양화공 △오정호(33세)-식당종업원 △박승렬(20세)-레코드사 △박명국(18세)-양화공 △김상규(19세)-전파사 △박영수(18세)-도자기공 △안성옥(19세)-목공 △김두전(19세)-재수생 △정광호(20세)-타일공 △염동유(23세)-다방 △이성주(18세)-차량조수 △김공휴(19세)-나전칠기공 △남승우(19세)-삿슈공 △도준식(23세)-식당종업원 △남영관(18세)-농업 △박홍식(21세)-목공 △김기광(18세)-고3 △박인수(21세)-노동 △김여수(20세)-용접공 △나일성(18세)-가구공 △김태찬(19세)-석공 △김행남(16세)-노동 △김재귀(16세)-고2 △영용섭(19세)-나전칠기공 △장승희(19세)-양화공. …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 … 바로 노동자들, 기층들, 넝마주이 같은 사람들이었다.[3]
5월 19일부터는 학생시위가 민중항쟁으로 변화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대에는 노동자와 시민들의 참여가 늘어났다. 도청 앞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학생들의 숫자보다, 소상인과 가게종업원, 노동자의 비중이 월등히 커졌다. … 공수부대의 잔혹한 탄압 앞에서 노동자의 숨은 투쟁역량에는 서서히 불이 붙어가기 시작하였다. 머리가 으깨지고 팔이 부러져 온통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 중이던 택시 운전수를 차의 유리창을 부수고 끌어내려 대검으로 무참하게 배를 찔러 살해하는 공수부대의 학살극이 최소한 3건 이상이나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5월 20일 오후 2시부터 무등경기장에는 택시운수노동자들이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군저지선의 돌파에 앞장서자’고 결의하면서 2백여 대가 무리지어 도청을 돌격해 가기 시작하였다. …
5월 21일 오전에는 아세아자동차에서 APC장갑차 3대를 포함한 360여 대의 차량이 징발되었다.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나주 방면을 향하는 7대의 버스에는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이 돌격대가 되어 있었다. 나주경찰서의 무기고에서는 M1소총과 AR소총, 그리고 카빈소총 등이 광주로 반입되었다. 그리고 화순탄광의 돌격부대원들은 화순탄광 광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무기로 얻었다. …
|
계급구성 |
기동타격대 |
사망자 |
구속자 |
||||
|
인원 |
% |
인원 |
% |
인원 |
% |
||
|
노동자 |
생산직 |
19 |
63.4 |
42 |
31.0 |
142 |
36.1 |
|
사무직 |
1 |
3.3 |
9 |
6.5 |
30 |
7.6 |
|
|
서비스직 |
3 |
10.0 |
22 |
16.0 |
23 |
5.9 |
|
|
학생 |
3 |
10.0 |
40 |
29.1 |
130 |
33.1 |
|
|
영세상인 |
2 |
6.7 |
1 |
0.7 |
13 |
3.3 |
|
|
농민 |
1 |
3.3 |
4 |
2.9 |
33 |
8.4 |
|
|
무직 |
|
|
17 |
12.4 |
10 |
2.5 |
|
|
가정주부 |
|
|
1 |
0.7 |
2 |
0.5 |
|
|
군인 |
1 |
3.3 |
1 |
0.7 |
9 |
2.3 |
|
|
공무원 |
|
|
|
|
1 |
0.3 |
|
|
총계 |
30 |
100.0 |
137 |
100.0 |
393 |
100.0 |
|
기동타격대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밝혀진 구속자들 중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성원의 76.7%나 된다. … 확인된 사망자 212명 중 직업미상자 75명을 뺀 137명을 직업별로 나누어 보면 노동자의 비중은 53.5%에 이른다. … 구속자들 중 노동자계급의 비중은 49.6%이다.[4]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린 광주 노동자·민중의 항쟁은 한국 사회 전체를 거대하게 뒤흔들었다. 광주의 혁명적 패배는 1980년대를 ‘혁명의 시대’로 만들었다. 해방광주를 책임진 노동자·민중을 주체로 세워내는 혁명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은 비록 절반의 승리였지만, 마침내 군사정권을 노동자·민중의 힘으로 무릎 꿇렸다.
[1] 경향신문, 2003, 「실록 민주화 운동 (39) 사북 광산노동자투쟁」. ‘덕대’는 “광산업자와 계약을 맺고 광산의 일부를 맡아 채광하는 사람”이다.
[2] 동아일보, 1980/04/25.
[3] 박준성, 2009, 『노동자 역사 이야기』, 이후, 288~290쪽.
[4] 이정로, 1989, 「광주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전환」, 『노동해방문학』 1989년 5월호, 18~22쪽(표는 재구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