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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노동자는 혼자가 아니라 하나다’ GM부품물류센터 부당해고 철회 투쟁의 기억도무지 질 수가 없는 기세로 싸워냈던 약 70일간의 부당해고철회 투쟁을 돌아본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하나’라는 말이 약간 모순적인 듯 보이면서도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은 그 어느 순간에나 전체 노동자의 싸움일 수밖에 없으니, 당신들이 고립되거나 외롭고 힘겹게 싸우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거. 세종시 연기면 공단로 6에는 ‘한국지엠세종중앙물류센터’가 있다. ‘중앙’물류센터라고는 하지만 국내에 한국지엠 물류센터는 세종시에 있는 것 하나뿐이다. 그간 한국지엠이 차근차근 부품·물류센터를 통폐합해왔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정비 등에 필요한 부품들이 전국으로 보내진다. 미국 등 해외 수출 업무도 함께 담당하고 있다. 1차 하청업체인 우진물류에서는 120여 명이 일했다. 이 하청노동자들은 20년을 일해도 최저임금을 받을 정도로 열악한 현장을 바꾸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2025년 11월 파업을 전개했다. 한국지엠은 하청노동자들의 노조와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업체폐업, 집단해고라는 칼을 꺼냈다. 2025년 12월 31일부로 하청노동자들은 전원해고됐다. 정수유통이란 업체가 새로 왔지만, 노동자들의 고용승계는 한국지엠과의 계약서에 들어가지 않은 내용이므로, 고용승계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20여 년간 수차례 업체가 바뀌면서도 이어져 온 (투쟁을 통해 쟁취해온) ‘고용승계 관행’이 깨졌다. 그 뒤 부당한 해고를 거부하고, 외투 자본인 원청의 횡포에 맞서겠다고 선언한 96명이 물류센터에 남아 싸움을 시작했다. 지역사회를 필두로 한 공동대책위가 구성되었다. 그렇게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해고된 날로부터 현장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단 하루도 물류센터를 비우지 않았다. (1월 16일 저녁, GM와 정수유통의 불법 물량반출을 저지하기 위해 GM부품물류지회 노동자들이 대열을 갖춰 이동하고 있다. - 편집자 주) ‘도급계약 종료’라든가, ‘정리해고’라든가. ‘희망퇴직’도 그렇고, ‘발탁채용’이나 ‘바이아웃’[1]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무해한가. 자본의 언어는 언제나 본질을 흐린다. 해고는 해고일 뿐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일터라는 단어 옆에 삶터라는 단어를 놓는다. 하루 열 시간, 열두 시간 머무는 장소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노동이, 매일매일 만나고 관계를 쌓는 내 곁의 사람들이, 삶의 주요 구성요소가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 무엇보다 우리는 노동자다. 그래서 일터는 삶터고 해고는 살인이다. 학연, 지연, 혈연을 따져가며 관계를 맺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 리 없겠지만. 그럼에도 GM부품물류지회에 연대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지역의 일이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나는 평생 충청남도 이곳저곳을 오가며 살았고, 지금은 천안에 살고, 세종시 조치원읍에 있는 대학을 나왔다. 아무렴 120명이 집단해고 됐다는 데 ‘동네 주민’으로서 안 나설 수 없지. 늘 (서울을 포함한) 타지로 연대를 다니는 데 익숙한 내게 내 지역의 일에 결합하는 일은 새삼 낯설면서 또 기쁜 일이기도 했다. ‘찢겨진 노란봉투법을 정부로 보냅니다’라는 타이틀을 걸고 진행한 대정부 항의 행동도 한몫했다. 비록 우리 맘에 꼭 맞는 형태의 법안은 아니었지만, 또 나는 소위 ‘노동운동판’에 기웃대기 시작한 지 이제 일 년 갓 넘겼지만, 그간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이 피눈물을 흘려왔는지 알았기 때문에 너무 간절하고 또 너무 소중한 법이었다. 그럼에도 첫걸음이었다. 암만해도 노동해방 사회가 당장에 도래한다거나 할 수야 없겠지만, 오랫동안 기울어져 있던 무게추를 이제야 되돌려놓는 첫걸음. 원청 한국지엠 모 상무가 지난가을 파업을 준비하던 세종물류센터 노동자들을 만나 ‘진짜 사장 나오래서 나오지 않았으냐’고 말했다고 한다. 수의계약은 늘 해오던 것이니 올해도 정상적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삼 년 뒤에는 정규직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 ‘초치지 말라’고. 한달 뒤 한국지엠은 하청노동자 전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글로벌 자본에게 노란봉투법쯤은 무시해도 좋을 무엇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이십 명 노동자들의 삶도, 그들과 연결된 수백 명의 삶도, 고작해야 노동자의 삶이므로, 도무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는 표어를 문득 떠올린다. 저들은 하청노동자들의 마음속에 피어난 ‘노동조합’이라는 불길을 꺼트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건 해고가 아니라 ‘계약 종료’라는 말로, 다만 정 억울하면 ‘발탁채용’이나 ‘바이아웃’ 같은 방안도 고려해보겠다고, 선심 쓰듯 얼버무린 그 같잖은 언사들이 마음속 불꽃에 장작을 집어넣는 줄도 모르고. 작년 이맘때 나는 거통고(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동지들과 ‘무지개 조선소’에서 연대투쟁호를 만들고 있었다. 노동운동판, 이라는 곳에 본격적으로 기웃대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작업이었다. GM세종물류센터에 상징물 제작 전 사전답사를 온 신유아 동지를 마주쳐, 작업을 함께하잔 제안을 들었을 때 내가 떠올린 것도 무지개 조선소였다. 멋모르고 함께하겠다고 나섰다가 단단히 코가 꿰이고 말았던 그거. 아무렴 그리기나 만들기는 늘 좋아해 왔으니까, 좋아하는 행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데 즐겁지 않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물류센터이니만큼 상징물은 지게차가 될 거라고 했다. 동지·연대·고용승계·투쟁·단결·원청교섭·정규직 전환이라고 적힌 일곱 개의 상자를 얹은 지게차. 그리고 파지 골판지를 오려 만든, 백수십여 개의 지게차 모양 피켓들. 작업 기간은 딱 이틀이었다. 일고여덟 명이 이틀 내내 달라붙어 큰 지게차를 만들고, (물류센터 사수조를 제외한) 다른 조합원들은 오전에 시간을 내 피켓을 만들었다.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에서 주최하는 1박2일 집회에서 내보이는 걸 목표로, 일정이 빠듯하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무탈하게 완성했다. 피켓은 이틀 내내 꼬박 만들 것을 각오했는데, ‘오후 잔업’을 하지 않겠다는 조합원들의 결의로 순식간에 완성해버렸다. 조합원들이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 꾸미기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공대위 동지들을 포함해 모두가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 나는 주로 피켓과 상자 작업을 했는데, 작업을 좀 하다 뒤돌아보면 (조립식) 지게차가 순식간에 턱턱 만들어져있어서 깜짝 놀랐다. 바퀴를 달 때는 고생을 좀 했지만, 노련한 동지들이 이런저런 재료를 가져와 시도해보고, 타카를 박고 덧댈 목재를 자르고 칼집을 내고 스티로폼을 끼워가며 ‘각’을 맞추는 모습을 보면서, ‘일터의 노동자는 무적이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일터의 주인은 노동자, 라는 말을 이런 순간에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토지의 주인이든 건물의 주인이든. 계약서상 고용주든 실질적인 사업주든) 소위 ‘소유주’라고 불리는 그 누구를 데려와도 이런 일을 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자재의 위치와 용도, 목적과 쓸모를 기억하고 찾아내고 적절하게 배치하는 일. 각각의 자재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생각해내고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 무언가로 만들어내는 일. 자르고 썰고 잇고 붙이고 결합하고 조립하고 생산하는 일. ‘이렇게 일 잘하고 일 좋아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려 들다니’라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뱉으면서, 그 순간들에 함께할 수 있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우리 투쟁의 상징물이 곧 일터의 상징물이라는 거. 자본과 권력이 빼앗으려 했으나 우리 손으로 다시 만들어내서라도 손에 쥔 그거. 조명을 달아 반짝이는 그 주황색 지게차. (1월 16일, 불법 물량반출을 저지한 뒤 GM부품물류지회 조합원들과 연대자들이 지게차를 끌고 이동하고 있다 - 편집자 주) 비록 집회 당일 물량 불법 반출 문제로 또 한참을 싸우느라 우리 계획대로 대오 앞에서 짠하고 점등식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수십 명의 손길이 닿은 그 지게차가 얼마나 예뻐 보였는지. 고작 이삼일이었지만, 하루종일 붙어서 뭘 했다고 괜스레 친밀해진 기분이 드는 것도 좋았다. 점거농성 중이기 때문일까, 매일 동고동락하는 지회 동지들의 관계도 무척 끈끈해진 듯 보였는데 그들 틈에 슬그머니 자리 잡고 같이 웃고 있다 보면 제법 즐거웠다. 나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건 부담일까 위안일까. 노조법 개정안 시행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시작된 이 싸움, 여기서 지면 지난 수십 년 애써 만들어낸 노조법 개정안이 유명무실해질지도 모른다든가 하는 게. 때로 내가 힘들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내 옆의 사람이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끝까지 가볼 수밖에 없다는 게. 집단과 조직, 단체, 공동체의 조건에 대해서 종종 생각한다. 노동‘조합’은 그중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그리고 흔히 중앙 내지 본조, 사무처라고 부르는 기관들과 현장의 조직이 지녀 마땅한 성격 또한 다를 테고. 여하간에 나는 현장의 노동조합이 ‘이익집단’이 되지 않기 위해 중요한 건 공동체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규율과 규약, 원칙과 질서, 방향성…. 만큼이나, 우리가 ‘함께’ 싸우고 함께 승리하는 존재라는 자각이. 언젠가 모 대의원 동지가 발언으로 했던 말을 자주 곱씹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하나’라는 말. 어딘가 약간 모순적인 듯 보이면서도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은 그 어느 순간에나 전체 노동자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는 거, 그러니까 당신들이 고립되거나 외롭고 힘겹게 싸우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거. 지난 12월 말, GM부품물류지회와 공대위가 ‘고용노동부 장관 만납시다!’를 이야기하며 서울 고용노동청을 하룻밤 점거했을 때. 스튜디오 알 동지와 함께 점거 장소에 갔다가, 저녁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갔다가, 다음날 새벽녘에 일어나 출근길 선전전에 함께하러 다시 서울에 올라갔을 때. 노동조합을 만든 지 이제 다섯 달 되었다는, 그래서 노조 조끼가 아직 반들반들하고 깨끗한, 해고를 열흘 앞둔 그들을 만나러 가면서 나는 무엇을 생각했는가. 거기에 왜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나. 무엇도 아닌 나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금속노조도 하물며 민주노총도 아니고, 어디 정당이나 시민단체 소속도 아니고, 딱히 활동가라고 스스로를 칭하지도 않고, 이름 앞에 붙여 마땅한 그 어떤 수식어도 없이 나는 당신들의 싸움에 함께하고 싶었다. 나를 등 떠밀어 그들 앞에 데려다 놓은 것은 오직 양심뿐이다. 자본이 틀렸고 노동자가 옳다는 믿음이다. 이 싸움이 정당하다고, 그러니까 지면 안 된다고 말하기 위함이다. 명절을 약 열흘 앞두고 GM부품물류지회는 한국GM으로부터 해고 철회 및 이후의 고용승계 등을 담은 합의서를 받아냈다. 해고 직후 동지들이 외쳤던 구호가 있다. ‘1월의 어느 날에 현장으로 돌아가자’. 내가 들은 구호 중 제일 낭만적인 구호. 일주일 정도 넘기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다짐대로 현장으로 돌아갔다. 나도 얼떨결에 여기저기서 축하를 잔뜩 받았다. 내가 뭘 했다고 축하를 받나, 싶은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승리보고대회에서 지게차를 같이 만들었던 동지가 악수를 청해오며 ‘수연씨, 고생했어요’라고 말했을 땐 솔직히 코가 찡해졌다. 물론 이들의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1차전이 끝났으니 2차전을 시작하겠다’는 동지들의 말마따나, 턱없이 낮은 기본급을 비롯해 바꿔내야 할 현장의 문제들이 있고, 불법 파견 문제도 있고, 직영정비소 폐쇄 등 한국GM 철수설과 관련된 사안들에도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내 동지들은 잘 싸울 것이다. 도무지 질 수가 없는 기세로 싸워냈던 약 70일간의 부당해고철회 투쟁을 겪었으니까. 우리는 함께 싸우는 법을 알고, 함께 승리하는 법도 안다. GM부품물류지회 동지들이 가장 좋아했고, 가장 많이 외친 구호는 이거였다. 단결하는 노동자는 패배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호가 선언에 불과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냈다. 단결로 틔우고 연대로 지켜낸 불씨는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했다. [1] 바이아웃은 본래 주식시장에서 기업의 지분을 다량으로 인수하거나 아예 기업을 통째로 인수하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돈을 주고 통제권을 장악한다’는 의미가 파생하여 임대계약, 고용관계 등에서 돈으로 잔존권리를 사들여 임대기간을 조기종료하거나, 고용의무를 청산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도 쓰이게 됐다. 즉 GM부품물류센터의 사례에서 ‘바이아웃’은 돈을 주고 고용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뜻하며, 실질적으로는 희망퇴직과 동일한 의미이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2026-02-23 | 조회 523 -
[한노운사 연재 6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폭발적 성장을 이어갔다.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지역별·업종별 연합조직을 건설하고 전노협을 건설해 냈다. 민주노조운동은 역동적인 연대투쟁과 지역·전국 총파업을 통해 스스로를 지켜냈다. 민주노조운동은 중소 제조업을 넘어 대기업과 공공부문으로 확대됐고, 마침내 1995년 민주노총을 건설했다. 그런데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전투적·변혁적 세력을 대신해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1996~98년 노동법을 둘러싸고 양대 계급의 대격돌이 펼쳐졌다. 민주노총의 위력적인 총파업이 한국사회를 한 달 동안 뒤흔들었으나 성과는 초라했다. 곧바로 닥친 IMF 외환위기를 빌미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마침내 도입됐다. 1996~98년의 대격돌에서 노동자계급이 패배하면서 비정규직 전면화로 가는 길이 열렸다.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한국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사회 체제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후반까지 10여 년의 과도기를 거쳐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이동했다. 이전 시기 30여 년 이상 한국 자본주의를 지탱하던 여러 요소들이 한꺼번에 큰 격변에 휩싸인 결과였다. 1989~91년 소련·동유럽 붕괴와 함께 세계적으로 냉전 질서가 해체되고 신자유주의 질서로 대체됐다. 국가 지원 아래 비대하게 성장한 독점재벌이 국가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세계 시장으로 진출했다. 1987년을 기점으로 노동자계급이 대규모로 진출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확산됐다. 이 과도기 동안 자본은 과거의 병영적 노동통제를 대신하여 신경영전략과 사회적 합의주의를 추진했다. 또한 신자유주의 질서로 본격 진입을 대비하며 대대적인 노동법 개악에 나섰다. 1997년에 닥친 IMF 외환위기는 신자유주의 질서로 이행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1) 냉전종식과 신자유주의 질서의 세계화 19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소련과 동유럽의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에 누적된 모순을 타개하고자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폈지만,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의 몰락을 피할 수 없었다. 1989년 8월 폴란드에 비공산당 정부가 들어섰고, 11월 동·서 베를린을 가르던 장벽이 무너졌으며, 1990년 10월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합됐다. 마침내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줄곧 지속되던 미국 주도 서방진영 대 소련 주도 동방진영의 냉전이 서방진영의 승리로 종식됐다. 미국은 세계의 유일 패권국가가 됐다. 미국은 냉전 시기 대척점에 서 있던 한국을 특별 관리했다. 한편으로 정치군사적 종속관계를 지속적으로 강요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특혜를 제공했다. 한국에게 유례없는 규모의 경제·군사원조를 제공했고, 한국 자본의 빠른 성장을 돕기 위해 자국 시장도 열어주었다. 그러나 냉전의 종식과 함께 이러한 특별대우도 끝났다. 한국은 냉전 체제에서 누렸던 지정학적 특권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다. ‘친미 쇼윈도’로 보호·육성되던 한국 자본은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에 냉혹하게 내던져졌다. 때로는 미국 정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과의 양자 협상에서, 때로는 GATT와 세계무역협정(WTO)의 다자 협상에서 압력이 줄기차게 전달됐다. 그 내용은 똑같았다. 세계를 뒤덮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여 한국 경제를 개방하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1997년 IMF 외환위기는 신자유주의 질서 정립을 위한 전면적 구조조정을 한국 사회에 강요했다. 한국도 이러한 전 지구적 전환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여러 신흥시장처럼 한국도 거대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갔다. 1990년대 내내 한국 정부는 경제를 자유화하라는 국제적 압력에 시달린다. 압력은 여러 방향에서 들어왔다. … 외부 세력이 요구한 경제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은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와 똑같았다. … 재정수지 적자를 GDP의 1~2 퍼센트 내로 운영 … 공공 지출을 친성장적 투자로 최대한 전환 … 금융시장을 탈규제화 … 환율에 경쟁 체제 도입 … 무역 자유화 …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 … 국공유기업들을 민영화 … 탈규제 … 소유권의 법적 보호 … 이러한 정책적 권고 사안들은 IMF가 1997년 위기 때 구제금융 조건으로 제시한 항목들과 거의 일치한다. 차이가 있다면, 1997년 이전에는 이러한 구조조정이 점진적으로 추진된 반면, 1997년 위기 이후에는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1] 2) 독점재벌의 비대한 성장 1980년대 말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5위 국가로 성장했다. 산업화가 시작되던 1960년대 초에는 가장 저개발된 국가 중 하나였지만, 이제 과잉 도시화와 농촌 공동화를 걱정하는 상황이 됐다. 그와 같은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은 동시에 거대한 자본축적과 독점자본 형성의 과정이었고, 그 결과 비대한 재벌들이 등장했다. 군사정권의 지원과 보호 아래 성장한 재벌들은 1980년대 중후반 국가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전망을 수립하고 이해관계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국가를 주도하려는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일차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재벌의 독자적인 연구기관 설립과 운영이었다. 재벌들의 결집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1967년에 설립됐지만, 1980년대 중후반 정부 산하 연구기관들과 별도로 독자적인 경제분석과 산업정책을 활발히 제시하기 시작했다. 재벌그룹별로도 앞 다투어 독자적인 연구기관을 설립했다. 대우경제연구소(1984년), 쌍용경제연구소(1985년), 삼성경제연구소(1986년), 현대경제사회연구원(1986년), 럭키금성경제연구원(1986년), 동양경제연구소(1987년), 기아경제연구소(1989년) 등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설립됐다. 비대한 재벌은 과거처럼 정부의 지시에 순응하지 않게 됐으며, 1980년대 은행의 민영화 이후 정책금융의 위력이 감소하면서 재벌을 통제할 수 있는 정부의 수단도 줄어들었다. 재벌은 각종 명목의 ‘준조세’뿐만 아니라 그동안 자신들을 육성하는 데 기여했던 보호와 규제조차도 거추장스럽게 여기게 됐다. 그리하여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미 민간주도형 경제로의 이행이 주장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말 이후 ‘규제완화’는 재벌의 제1의 슬로건이 된다.[2] 일부 재벌들은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직접 정치에 뛰어들기도 했다. 특히 현대그룹은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1992년 4월 총선에서 국민당을 창당하고 12월 대선에서 총수 정주영을 후보로 내세웠다. 대우그룹의 김우중도 정계 진출을 공공연히 모색했다. 정치의 전면에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재벌들은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크게 강화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대로 정부 정책을 견인하기 시작했다. 삼성그룹은 그 대표 주자였다. 비대해진 재벌은 1990년대 들어 세계시장 진출을 적극 추진했다. 1990년대 들어 도시화 속도가 현저히 둔화되는 등 한국 안에서는 신규 산업투자로 원활한 수익을 얻기가 훨씬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재벌들은 공격적으로 세계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동안 자신들을 선도하던 일본의 세계적인 제조업체들도 이제 경쟁상대로 인식했다. 1989년 대우그룹 총수 김우중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을 펴냈다. 1993년 삼성그룹 총수 이건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회의를 열고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꿔라”고 말했다. 이처럼 냉전 종식으로 세계질서가 변화하면서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에 뛰어들도록 강요당했을 때, 한국의 재벌들은 적극적인 세계시장 진출을 통해 능동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선진국 클럽으로 간주되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김영삼 정권 주도로 추진한 것은 그와 같은 한국 자본가들의 기세를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3] 그러나 1990년대 재벌들의 적극적인 세계시장 진출은 공격적 투자를 위한 과도한 차입, 무한경쟁에 따른 수익성 저하로 오히려 재벌들을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다. 결국 이는 한국의 외환보유고를 고갈시키며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불러오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4] 3) 노동자계급의 진출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확산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살인적인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고강도 착취체제를 붕괴시켰다. 민주노조의 폭발적 확산은 실질임금의 급속한 상승과 노동시간 단축으로 귀결됐다. 제조업 분야에서 1987~91년의 실질임금 인상률은 12.5%로 1982~86년의 5.4%에 비해 두 배가 넘었다. 병영적 노동통제에 입각한 일방적 노사관계가 대립적 노사관계로 대체됐다. 1987년 이후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꾸준히 확산됐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됐고,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했으며,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시행됐다. 김영삼 정권은 1993년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해체했다. 5공화국 시기 부정부패와 비자금에 대한 사법처리가 진행됐다. 1995년에는 민중들의 투쟁을 바탕으로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학살에 대해서도 사법처리가 진행돼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17년의 징역형이 선고됐다.[5]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1989), 환경운동연합(1993), 참여연대(1994) 등의 시민단체들도 속속 등장했다. 군사파시즘에 맞섰던 1987년 6월 민중항쟁은 군사파시즘을 온전히 철폐하지 못하고 절반의 승리만을 거둔 채 마무리됐다. 이후 노동자계급의 진출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확산은 군사파시즘의 요소들을 더욱 약화시켰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기무사, 안기부 등의 존재를 통해 군사파시즘은 완전히 척결되지 않은 채 부르주아 민주주의 속에 잔존했다. 따라서 한국의 정치체제는 일단 군사파시즘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 채 (자본가계급에 대한 온갖 특혜와 노동자·민중에 대한 사회경제적 대공세를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질서라는 또 다른 억압적 정치제제로 귀결됐다. 4) 자본의 대응 - 신경영전략, 사회적 합의주의, 노동법 개악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기존의 병영적 노동통제가 붕괴하자, 자본가계급은 이를 대체할 새로운 노동통제 체제를 구축해야 했다. 자본가들은 변화한 조건에 대응하는 기업 단위의 새로운 통제전략으로서 이른바 ‘신경영전략’을 추진했다. 이를테면 대우조선은 열심히 일하면 잘 살게 해주겠다며 ‘희망90S운동’을 들고 나왔고, 현대중공업은 반 단위 자율생산체계를 확립한다며 ‘두레활동’을 내세웠다. 1987년 이후 무너진 자본의 현장장악력을 회복하고 자본의 새로운 헤게모니를 구축하려는 전략적 실천이었다. 신경영전략의 주요 내용은 고용유연화, 작업조직 재편, 생산공정 합리화, 능력주의 인사·임금제도 도입, 기업문화 혁신 등이었다. 자본가들은 체계적인 노무관리를 실시하면서 노동조합의 현장 기반을 잠식해 들어갔다. 또한 노동조합과 파업의 기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파업기간 ‘무노동 무임금’ 적용, 노조간부 고소고발,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의 공세를 폈다. 김영삼 정권의 등장과 함께 사회적 차원에서 자본가계급이 꺼내든 새로운 전략은 ‘사회적 합의주의’였다. 민주노조운동은 1990년대 들어 자본가계급의 반격과 경기침체가 맞물리면서 여러모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상당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적 합의’라는 형식을 통해 격렬한 노자대립을 피하면서 생산성과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정권과 자본의 의도는 처음에는 1993~94년 경총과 한국노총의 임금인상 합의로 나타났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통제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한국노총과의 합의는 아무런 실익이 없었다. 오히려 민주노조운동은 한국노총에 대한 규탄 속에서 민주노총 건설의 동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자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민주노조운동 세력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한편 김영삼 정권은 1994년 11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순방길에 ‘세계화’를 선언했다. 1995년 1월에는 ‘세계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8월에는 ‘세계화의 비전과 전략’을 발표하면서, 한국 자본주의를 세계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 속에 편입시키기 위한 준비를 진행해 나갔다. 1996년 4월 김영삼 정권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악을 추진하면서 민주노총에 ‘사회적 합의’를 제안했다. 민주노총은 노동법 개정의 희망을 안고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에 참여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이 제안한 ‘사회적 합의’의 실체는 일방적으로 자본가계급을 편드는 내용에 노동자계급이 들러리를 서라는 것이었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합의’를 거부하고 노개위를 탈퇴했다. 1996년 12월 26일 김영삼 정권은 집권 신한국당을 통해 노동법 개악안을 국회에서 새벽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민주노총 총파업이 한 달가량 거세게 전개되자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대중이 이끌던 국민회의와 신한국당의 재협상 결과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 2년 유보 등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에서 극히 일부 내용만이 수정된 채로 재개정된 노동법이 1997년 3월 통과됐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포한 흐름은 1997년 말 IMF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사태로 한국 자본주의를 휩쓸고 들어왔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외채 상환 요구가 봇물처럼 밀려오자 유동성 위기에 빠진 한국 정부는 IMF에 긴급지원을 요청하여 1997년 12월 3일 IMF와 구제금융 지원에 합의했다. 구제금융을 계기로 한국의 경제정책 전반이 IMF의 관리체제 아래 놓였고, 이를 빌미로 신자유주의 공세가 대대적으로 시작됐다. 새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주도로 1998년 1월 15일 구성된 ‘노·사·정 위원회’는 자본가계급의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위한 이데올로기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수단이었다. 민주노총을 포괄한 노사정위원회는 1998년 2월 6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에 합의했다. 그런데 그 핵심 내용은 민주노총 총파업 때문에 2년 유보 상태에 있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즉시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1] 박형준, 2013, 『재벌, 한국을 지배하는 초국적 자본』, 책세상, 320~321쪽. [2] 정성진, 2005, 『마르크스와 한국 경제』책갈피, 134쪽. [3] 한국은 OECD에 1996년 12월 12일 가입했다. OECD는 1961년 유럽과 북미의 선진 20개국을 포괄하며 출발했는데, 이후 일본(1964), 핀란드(1969), 호주(1971), 뉴질랜드(1973), 멕시코(1994), 체코(1995), 헝가리(1996), 폴란드(1996)가 한국보다 먼저 가입했다. 2025년 현재 38개국이 가입해 있다. [4]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30대 재벌 가운데 16개가 몰락했다. [5] 그러나 1997년 12월 대통령 김영삼은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의 건의를 받아 전두환과 노태우를 특별사면했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2026-02-22 | 조회 338 -
[번역]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아직 더 발전되고 논의돼야 할 이론적 논쟁의 방대한 영역을 열어놓은 엥겔스의 저서는 분명히 비판적으로 읽혀야 한다. 그 내용 중 낡거나 흐릿해진 부분들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서로 상반되는 해석들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엥겔스의 시각은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어떤 본질주의에서도 벗어나 있으며, 정치적 함의를 지닌 결론을 내린다: 역사적으로 발생한 모든 사회적 과정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제도 폐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유언을 집행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1]. 이렇게 엥겔스는 1884년에 발행한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을 시작한다. 마르크스는 전년도에 사망했고, 그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엥겔스는 이후 상당 부분 미완성되거나 미발표된 상태로 남아 있던 (종종 엥겔스와 공동으로 수행된) 마르크스의 작업들을 복원하고 정리하며 발전시키려 했다. 엥겔스의 이 책은 루이스 모건의 인류학 연구서 『고대 사회』(Ancient society)에 대한 독해에서 비롯되었다. 7년 전 미국에서 출판된 이 책은, 엥겔스에게 있어 마르크스의 역사 유물론 이론을 “모건 만의 방식으로” 재발견한 것을 의미했다. 엥겔스는 자신의 작업이 “고인이 된 친구가 쓰지 못한 것을 그저 어느정도 대체할 수 있을 뿐”이라고 여기지만, 마르크스가 모건의 책에 남긴 주석을 활용하여 자신의 작업에 녹여낸다. (마르크스의 주석은 20세기에 『카를 마르크스의 인류학 노트』의 일부로 출판되었다.) 엥겔스는 당대의 여러 인류학적 이론들을 반박한 모건의 연구에 의지했다. 비판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엥겔스는 원시 사회와 현대 사회를 가로지르며 생산양식과 가족 조직 형태의 관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역사 유물론”의 관점에서 접근한 여성 억압 문제를 핵심 주제로 부각시켰다. 그 이후로 엥겔스의 저서는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여성 문제를 다룬 다양한 연구에서 - 항상 동의하기보다는 논쟁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 필수적인 참고 자료가 되어왔다. 또한 비非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이론들 역시, 적어도 논쟁을 위해서라도, 이를 이론적 이정표로 삼아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150년이 지난 오늘날의 적실성 > “아내의 정조를 보장하고, 따라서 그 자녀들이 아버지의 혈통을 확실히 잇도록 하기 위해 아내는 남편의 권력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한 것에 불과하다.”[2] 엥겔스가 여성의 상황에 대해 제기한 비판 중 일부는, 당시에도 급진적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소름끼칠 정도로 여전히 유효하다. 실제로 저자에게 있어 오늘날까지도 지배적인 일부일처제 가족의 확립은 “전 세계 여성의 역사적 대패배”였다: > “… 여자는 자기의 존귀한 지위를 상실하고 노비로, 남자의 정욕의 노예로, 순전한 산아도구로 전락했다. 여성의 이와 같은 굴욕적인 처지는 특히 영웅시대의, 특히 고전시대의 그리스 인들 사이에서 노골적이었는데, 나중에 점차 경감되어 그럴듯하게 꾸며졌으며, 때로는 조금 완화된 형태로 표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처지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다.”[3]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계급 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종속적 지위를 고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고, 당시 사회의 이중 도덕에 맞선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당시 사회는 여성들을 공장에서 초과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대열에 편입시키면서도, 그들을 편리하게 무성적 존재인 어머니로 묘사하거나, 또는 상업적으로 성적 대상화된 창녀로 묘사했다. 이미 『공산당 선언』에서 그들은(마르크스와 엥겔스는 - 역자)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이 ‘부인공유제’를 도입하려 한다’고 비난하는 부르주아적 가치의 옹호자들에게 이렇게 답한 바 있다: > “부르주아는 자신의 아내를 단순한 생산 도구로만 본다. 당연히 부르주아는 생산 도구들이 공동으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여성들도 똑같이 이 공동성의 운명에 빠질 것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부르주아는 단순한 생산 도구들로서의 여성들의 지위를 폐기하는 것,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4]” 엥겔스의 주장은 당시 다른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이 주제에 대해 수행한 연구들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베벨은 1883년 저서에서, 카우츠키는 1882-1883년 사이에 발표된 신문 기사에서, 여성 억압이 인류 최초의 사회 조직 형태부터 지속되어 왔다고 주장했다[5]. 엥겔스는 모건과 당시 다른 인류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러한 종속 관계가 특정 역사적 기원, 즉 사적 소유권이라는 사회적 제도의 출현에서 비롯되었다는 관점을 제시해 이들을 반박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공동체 조직 형태가 여성 억압을 전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평등주의적이며 심지어 모계 중심인 사회 조직이 선행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엥겔스는 스위스 인류학자 바호펜을 인용하며 “모계법”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한 사회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를 규제하는 법도 없었기에 이것이 문제적인 명칭임을 분명히 하면서 말이다). 그는 또한 책 말미에서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의 사상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분명히 밝힌다. 푸리에는 이미 일부일처제와 사유재산을 “문명”의 특징으로 지목했으며, 이를 “부자들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전쟁”이라 불렀다. 엥겔스는 이렇게 자신의 역사적 전제를 제시한다: > “유물론의 관점에 따르면, 역사를 규정하는 결정적 계기는 궁극적으로 직접적 생활의 생산 및 재생산이다. … 그 하나는 생활수단, 즉 의식주의 대상과 이에 필요한 도구의 생산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그 자체의 생산, 즉 종족의 번식이다.”[6] 이후 많은 이들이 “경제주의적”이라고 비판한(엥겔스의 관점이 문제를 제한한다는 점을 입증하기보다는,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비판이다) 이 접근법이 바로 엥겔스 분석의 참신함이다. 이는 여성 억압 문제를 사회적 생산의 이론적 차원으로, 즉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축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엥겔스에 따르면, 여성 억압은 사적 소유와 계급 분열을 사회 조직의 근간으로 정립하는 것과 동일한 과정에서 비롯된다. 이 과정은 축적된 부를 어떻게 상속할지 분명히 하려는 가족 형태, 그리고 새로운 계급 분열 및 소유 계급이 비소유 계급을 착취할 권리를 영속화하려는 국가 형태를, 수반하는 제도로서 형성한다. 즉, 인간이 만들어낸 다른 사회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수천 년에 걸친 여성 억압에는 ‘자연스러운’ 요소가 전혀 없다. 비평과 발전 사회주의적 관점을 공유하는 여러 저자들은 이 책이 몇가지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읽혀야 한다고 지적해왔다. 이 책에서 제시한 문제가 이미 새로운 인류학적 연구에 의해 극복되었다거나, 원시 모계 사회의 존재와 같이 역사적 과정의 일부 이정표를 단순화하거나 이상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를 들어 영국 SWP의 이론가 크리스 하먼은, 농업 사회 초기 단계의 성별과 혈통 조직은, 엥겔스가 제시한 “순진한” 관점보다, (실제로는 - 역자) 훨씬 복잡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또한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되기 시작할 때, 수세기 동안 그러지 않았던 남성들이 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재산권을 장악하고 상속권을 분명히 하고자 했는지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고 덧붙인다[7]. 스페인 페미니스트 셀리아 아모로스는 동일한 비판을 확장하며, 이러한 공백이 엥겔스의 “일정한 자연주의(cierto naturalismo)” 위험을 제기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사유화된” 가사 노동 형태와 유사하게, 여성에게 귀속된다고 충분한 설명 없이 간주되는 업무들의 사회적 가치 평가절하를 전제한다[8]. 반면 만델은 계급 출현 이전의 이 초기 성별 노동 분업이, 사회의 재생산 능력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을 특정 사회적 행위에 가두어둘 필요성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후 새로운 세대가 잠재적인 이익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이는 결국 여성을 경제적 탐욕의 대상물로 전락시켰다[9]. 엥겔스가 원시 사회에 대해 제시한 이러한 설명들은 새로운 인류학적 발견을 기다리며 여전히 논쟁에 열려있는 주제들이다. 그러나 아모로스 자신이 인정하듯, 여성의 종속성이 더 심한 사회는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사회이다. 이를 지적한 것은 엥겔스의 기여이며, 노동 계약과 결혼 계약 사이의 유사점을 규명한 것 역시 그러하다. 이 두 계약 모두 법적으로 동등한 두 당사자를 전제로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두 사람은 전혀 동등하지 않다. 이 책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차용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사이에 확립된 관계에 대해 다루며, 이 책과 마르크스의 『자본론』 사이의 관계를 가리킨다. 아모로스는 여성 노동자가 짊어지는 이중 노동 시간 문제를 지적한 엥겔스의 예민함을 옹호한다. 비록 해결 가능성에 대해선 순진한 낙관주의를 보인다고 평가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모로스는 자본주의가 누구를 착취할지에 대한 선호를 갖고있지 않으며, 필요할 때엔 여성과 아동을 거대한 노동자의 대열에 통합시켰음을 강조한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성별 분업이 이윤 축적을 위해 더 이상 기능하지 않으므로 의미를 상실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많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맞서 주장하듯이, 그(성별 분업의 - 역주) 지속이 남성 노동자들이 아내와 딸들에 대한 억압을 대가로 노동력을 저평가하여 착취 계급과 공모한다는 증거일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으로 알려진 비판을 덧붙일 수 있다. 이 비판에 따르면, 생산과 재생산의 구분을 제시한 엥겔스로부터 시작된 정의는 현실에서 분리되지 않는 '어머니'와 '여성노동자'를 이원론적으로 다루는 문을 열어놓는다[10]. 반대로,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엥겔스가 사회주의가 계급을 해체함으로써 성별 억압도 종식시킬 것이라고 내다보는 만큼,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해석들이 성별 문제를 계급 문제에 종속시켜 그 특수성을 흐리고 위계를 낮추었다고 비판해왔다[11]. 그러나 어떤 경우든, 엥겔스의 작업이 가진 가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구체적 관계를 탐구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그는 자본주의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온 성별 억압의 역사를 인식하면서도, 이를 사회적 부의 점유 형태라는 관점에서 설명함으로써, (고대의 가부장적 편견이 - 역자) 수많은 이전의 제도들 사이에서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왜 자본주의가 재생산/생산 이분법을 구축한 고대의 가부장적 편견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마르크스의 주석이 이 길을 함께한다: > “이름을 바꿈으로써 사물을 바꾸려는 것은, 그리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충분한 동기를 제공했을 때 전통의 틀 안에서 전통을 타파하기 위한 출구를 찾으려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도학자적 근성이다!”[12] 아직 더 발전되고 논의돼야 할 이론적 논쟁의 방대한 영역을 열어놓은 엥겔스의 저서는 분명히 비판적으로 읽혀야 한다. 그 내용 중 낡거나 흐릿해진 부분들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서로 상반되는 해석들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엥겔스의 시각은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어떤 본질주의에서도 벗어나 있으며, 정치적 함의를 지닌 결론을 내린다: 역사적으로 발생한 모든 사회적 과정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제도 폐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17년 5월 1일 La izquierda diario에 발행된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Ariane Díaz [1]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1884, 김대웅 역, 도서출판 두레, 2012, 7p. [2]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1884, 김대웅 역, 도서출판 두레, 2012, 97p. [3]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1884, 김대웅 역, 도서출판 두레, 2012, 94p. [4]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1848, 『칼맑스 프리드리히엥겔스 저작선집 제 1권』, 1991, 417p [5] Hunt, Marx´s general, New York, Metropolitan Books, 2009, pp. 303-5. [6]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1884, 김대웅 역, 도서출판 두레, 2012, 8p [7] “Engels and the origins of human society”, International Socialism 65, 2nd series, 1994. [8] “Origen de la familia, origen de un malentendido”, Hacia una crítica de la razón patriarcal, Barcelona, Anthropos, 1991. [9] Tratado de economía marxista, Tomo I, México, Era, 1969. [10] 이 비판은 리즈 보겔의 것으로, ‘Moore, Antropología y feminismo, Madrid, Cátedra, 2009, p. 66.’에서 인용됐다. 이 경향에 대해서는 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제24권 제2호, 2016년 특별호를 참조하라. [11] 엘사 드루카로프(Elsa Drucaroff)의 최근 저서 Otro logos(Bs. As., Edhasa, 2016)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의 이러한 논의들을 다수 검토한다. [12]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1884, 김대웅 역, 도서출판 두레, 2012, 94p.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2026-02-21 | 조회 552 -
노동개악 앞에서 노정협의체 참여, 민주노총 양경수 집행부는 스스로 무장해제하는가?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농성하던 세종호텔 노동자들과 연대 동지들이 집단연행 당하고 불과 9일 뒤, 민주노총 양경수 집행부가 2월 11일 이재명 정부의 노정협의체에 참여했다. 기간제 노동자 사용기한 2년에서 3년 이상으로 연장, 직무급제 확대, 전략산업 특별연장근로 확대, 지역 '메가특구' 노동시간규제 완화 등 이재명 정부의 노동개악이 본격화하는 지금, 이는 정부에 노동개악을 합의로 추진할 여지를 주는 위험천만한 선택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정협의체 참여를 철회하라. 민주노총-고용노동부 노정협의체 발족식 사진: 노동과 세계 이재명 정부에 대한 민주노총 양경수 집행부의 일관된 타협적 태도 시간을 1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2025년 6월, 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노총 내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시 지도부는 “진보정당과 연대·연합을 실현한 후보를 지지한다”는 안건을 중앙집행위원회에 상정했다. 그럴듯한 ‘연대’의 외피를 썼지만, 그 속내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기존 정치방침을 폐기하고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자는 안건이었으며, 민주노총을 민주당 2중대로 전락시키려는 시도였다. 애초 위원장이 제출한 이 안건은 강력한 반발로 부결되었다. 부결 후에도 양경수 집행부는 끝내 민주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방침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민주노총은 창립 이래 처음으로 ‘지지 후보 없음’ 방침을 결정했다. 이렇듯 이재명 지지 안건은 2023년 9월 민주노총 정치방침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었으나 양경수 집행부는 이를 밀어붙이는데 거리낌이 없었고, 이런 흐름은 대선 이후 이재명 정부에 대한 타협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세종호텔 노동자의 절규 위에 세워진 ‘노정 간 신뢰 회복’이라는 기만 지금, 민주노총 지도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이재명 정부가 ‘노정협의체’라는 손을 내밀자마자 이를 바로 받아들였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번 협의체 참여에 대해 “노정 간 신뢰를 복원하고, 노동 현안에 대한 실질적인 소통의 틀을 마련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자평했다. ‘신뢰’라니, 도대체 누구를 위한 신뢰인가?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정협의체 참여를 결정한 2월 11일로부터 불과 9일 전, 서울 명동 한복판 세종호텔 앞을 기억하는가?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은 이재명 정부의 경찰 병력에 의해 사지가 들려 끌려나갔다. 그들의 절규가 아직 길위에 남아있는데, 지도부는 그 폭력을 자행한 정권과 마주앉아 ‘노동의 미래’를 논하겠다고 한다. 투쟁하는 노동자를 짓밟는 정권과 악수하며 ‘파트너십’을 운운하는 것, 이것이 배신이 아니면 무엇인가? 어디 세종호텔뿐인가? 홈플러스 노동자들도 폐업으로 내몰리고 있고,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 노동자들도 이재명 정부를 규탄하며 청와대에서 농성하고 있다. 투쟁 현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은 자본가 정권의 본능이다. 그런데 민주노총 지도부가 그 칼날 앞에서 투쟁 대열을 정비하기는커녕, 칼자루를 쥔 자들과 “책임 있는 대화”를 하겠다고 나선 꼴이다. 이는 현장의 투쟁 동력을 약화시키고, 정권에는 ‘대화하는 정부’라는 면죄부만 쥐여주는 꼴이다. 2월 2일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폭력연행 사진: 세종호텔 공대위 이재명 정부는 이미 노동개악 추진을 본격화했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발표한 성명서는 더욱 심각한 우려를 자아낸다. 그들은 “미국의 관세 압박, 산업 전환, AI 확산 등 대전환의 시기”를 언급하며, 이것이 “노동자에게 재앙이 될지 기회가 될지는 정부의 선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순진해서 모르는 것은 아닐 테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위기가 닥칠 때, 자본가와 그들의 정부가 선택하는 ‘해법’의 본질은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것이다. 지도부가 언급한 그 ‘복합 위기’ 속에서 자본은 생존을 위해 비용절감을 부르짖을 것이다. 그 비용절감의 실체는 무엇인가? 바로 ‘고용 유연화’라는 이름의 손쉬운 해고, ‘임금체계 개편’이라는 이름의 임금 삭감, 그리고 노동시간 연장이다. 이재명 정부는 이미 노동개악 추진을 본격화했다. 1월 29일 ‘노동구조개혁 TF’ 출범이 알려졌고, 해당 TF는 기간제 노동자 사용기한 2년에서 3년 이상으로 연장, 직무급제 확대, 전략산업 특별연장근로 확대, 지역 '메가특구' 노동시간규제 완화를 논의하고 있다. 이는 정부가 밀어붙이는 ‘5극 3특 국가균형성장 추진전략’과 맞물려 대대적인 노동개악 관철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민주노총이 “위기 극복에 함께하겠다”며 협의체에 들어가는 순간, 정부는 이미 절반의 승리를 가져간 것이다. 이제 정부가 추진할 노동개악과 구조조정은 “민주노총과 협의를 거친 합리적 대안”으로 포장될 것이다. 지도부는 지금 노동자들을 지키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이 직면한 위기를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막아주는 ‘방패막이’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있어야할 곳은 투쟁하는 노동자 곁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지금 민주노총 지도부는 호랑이를 잡을 무기를 내려놓고, 호랑이의 먹잇감이 되기 위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성명서에 적힌 “책임 있고 성실하게 협의에 임할 것”이라는 다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누구에 대한 책임인가? ‘국가 경제’라는 명분으로 포장될 자본의 이윤 보장에 대한 책임인가? 진정한 노동조합의 책임은 자본가 정부와의 협조가 아니라, 그들의 착취와 탄압에 맞서 단결하고 투쟁하는 데 있다. 지금 지도부의 행보는 그 모든 원칙을 허물고 있다. 뻔히 보이는 노동개악과 구조조정의 불구덩이 속으로 120만 조합원을 끌고 들어가는 행위를 즉각 멈춰야 한다. 자본가계급과 한편이 되어 위기를 ‘관리’하려는 자들은 노동자를 대표할 자격이 없다. 민주노총이 있어야 할 곳은 따뜻한 정부청사 회의실이 아니라, 찬 바람 부는 세종호텔 농성장이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곁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즉각 기만적인 노정협의체 참여를 철회하라. “자본가 정권에 맞선 독자적 투쟁”의 깃발을 다시 들어라. 그것만이 다가오는 경제 위기의 파도 앞에서 노동자의 삶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2026-02-19 | 조회 1,151 -
[한노운사 연재 5회] 1부 폭압과 저항(1970~1987) [4] 1987년의 대폭발1986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 경제는 저유가·저금리·저달러를 기반으로 유례없는 ‘3저 호황’을 누렸다. 1980년 배럴당 40달러 수준이던 유가가 배럴당 12달러까지 하락했다. 국가와 기업 모두 많은 빚을 안고 있던 상황에서 국채·회사채 금리가 공히 절반 이하로 하락했다. 1985년 1달러 260엔이던 엔-달러화 환율이 1달러 150엔 이하로 하락하면서 일본을 대신해 대미 수출이 급증했다. 그런데 3저 호황의 한복판이던 1987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대한 분수령이 됐다. 6월 민중항쟁으로 전국 곳곳에서 거대한 거리시위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끝에 마침내 군사정권을 부분적으로나마 무릎 꿇렸다. 7~9월 노동자대투쟁은 화산처럼 폭발한 노동자들의 파업물결을 통해 병영식 노동통제를 일거에 분쇄하면서 대중적인 노동자운동의 힘찬 출발을 선언했다. 1) 1987년 6월 민중항쟁 1961년 5·16 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 군사정권이 1979년까지 지속됐다. 10·26으로 찾아왔던 서울의 봄은 5·17 쿠데타로 짓밟혔고 1980년부터 다시 전두환 군사정권이 지속됐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사정권 27년을 끝장내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고자 하는 민중들의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끄는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사실상 승리한 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운동이 대규모로 조직됐다. 민중운동 세력은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넘어 광범한 민주적 기본권을 실현하는 민주헌법 쟁취를 내세웠다. 1986년 7월 국회에서 개헌특위가 만들어졌지만, 집권 민주정의당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고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면서 공전됐다. 군사정권은 집권연장을 획책하며 1986년 하반기부터 더욱 광포한 탄압을 퍼부었다. 마침내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경찰)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2월 7일과 3월 3일, 박종철을 추모하고 고문을 규탄하는 집회가 조직됐지만 참가자가 아직 제한적이었다.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보다 두려움이 민중들을 억누르고 있었다. 자신감을 가진 전두환은 4월 13일 ‘임기 내 개헌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세우며 기존 헌법대로 차기 대통령을 간선제로 선출하겠다는 ‘호헌’을 선언했다.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를 다음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절차가 본격 시작됐다. 그러나 5월 18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조작이 폭로됐다. 가증스러운 군사정권에 대한 치 떨리는 분노가 두려움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민정당이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기 위해 6월 10일 전당대회를 예고하자, 같은 날 그에 맞선 대규모 거리시위가 예고됐다. 그런 상황에서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교문시위 과정에서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 민중들의 분노에 더욱 불이 붙었다. 6월 10일 민정당이 전당대회를 열고 있을 때, 전국 22개 도시에서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대회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거리에서 개최됐다. 30여만 명이 참여한 이날 거리시위는 군사정권이 시작된 이후 가장 거대한 규모의 대중투쟁이었다. “파쇼타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군사정권 타도와 민주헌법 쟁취가 핵심 요구였다. 시위대가 전투경찰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면서 경찰버스, 파출소, 민정당사를 습격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호응하고 동참하면서 수만 명의 경찰병력으로도 시위를 감당하지 못했다. 전투경찰이 거꾸로 시위대에 포위돼 무장해제당하는 상황도 속출했다. 10일 거리시위 이후 15일까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되면서, 서울 도심에서 사무직 노동자들이 대거 가두시위에 동참했다. 전국 곳곳에서 매일 같이 거리시위가 계속됐다. 전투경찰을 밀어내고 안전한 공간이 확보되면 거리에서 즉석 시민토론회들이 열렸고, 대중들은 자기 목소리를 쏟아냈다. 16일부터 22일까지 부산에서 가톨릭센터 농성이 전개됐다. 18일에는 ‘최루탄 추방대회’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26일에는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려 6월 항쟁 기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군사정권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피로써 진압한 것처럼 군대를 동원한 시위진압을 검토했으나, 자칫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이 군대 안에서의 반란 가능성을 우려하며 군사정권을 만류했다는 설도 있다. 결국 군사정권은 후퇴했다. 29일 노태우 민정당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실시, 시국사범 석방,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담은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롯한 자유주의 보수야당은 6·29선언을 환영하고 ‘승리’를 선언했다. 시위를 주도한 학생운동도 지도자 대부분이 자유주의 보수야당을 추종했기 때문에 가두시위가 급격히 중단됐다. 결국 6월 민중항쟁은 껍데기뿐인 ‘민주화’만을 쟁취한 채 멈춰서고 말았다. 완고하던 군사정권을 굴복시켰다는 점에서 민중의 승리이긴 했지만, 내용적으로는 빈약한 절반의 승리일 뿐이었다. 1987년 5월 27일, 노동·농민·빈민·청년·여성·교육 등 각계 대표 8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의 발기인대회 및 결성식이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국본은 6월 투쟁의 성격을 ‘개헌투쟁’으로 못박고 ‘4·13 헌법개정 반대조치’ 이후 전개되어 온 ‘민주헌법 쟁취운동’의 대중적 구심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이어 1987년 6월 10일, ‘고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는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범국민대회’를 개최함으로써 6월 항쟁의 포문을 열었다. 1987년 6월 10일의 ‘국민대회’는 전국 22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는데 가두시위는 물론이고, 연좌농성, 정치집회, 야간시위, 철야농성 투쟁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대부분의 지역에서 광범위한 대중들이 참여함으로써 시위대들이 경찰을 역포위하고 경찰력을 무력화시켜 무장해제 시키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사실상 군부정권을 지탱해 온 물리적 힘으로서의 경찰력은 통제를 잃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울에서는 6월 10일 대회 이후 명동성당을 근거지로 한 철야농성을 6월 15일까지 계속함으로써 6월 항쟁을 지속시켜 나갔다. … ‘국민대회’ 이후 경찰력은 사실상 무력화된 상태에서 그 이전처럼 공격적인 진압보다는 무자비하게 최루탄을 쏘아대어 해산시키는 전술을 선택함으로써 서울의 종로·을지로·광화문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전국의 주요 도시는 날마다 최루탄 가스 속에 뒤덮이게 되어 최루탄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점차 고조되어 갔다. 게다가 6월 9일 연세대에서 시위 중이던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등 최루탄에 의한 부상자가 속출하자 국본은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정하고 전국 16개 도시와 247개 지역에서 약 150만여 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펼치기도 했다. … 한편, 서울에서 촉발된 국민저항운동은 호남과 사북탄광의 강원 산간지역에까지 확산되어 갔고, 노동자·농민·도시빈민 등이 서서히 시위대의 중심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연일 경찰서·관공서·민정당사가 화염병에 의해 파괴되는 등 투쟁양상은 좀 더 적극적이고 과격한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최된 6월 26일의 ‘국민평화대행진’에는 택시 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였고, 생산직 노동자들도 차츰 개별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대중들의 투쟁이 점차 고조되어 가자 6월 25일, 미국은 ‘한국의 최근 사태에 대한 군부개입과 폭력시위 모두를 반대한다’는 기회주의적인 성명을 발표했고, 6월 28일에는 슐츠 미 국무장관이 “그동안의 미국 입장을 정리하여 전달하였으며, 한국정부는 정치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요한 사항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변경이 있을 것”임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전두환 군부파쇼정권은 마지막 정치적 선택으로 ‘6·29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1] 6·29 선언에는 군사파시즘[2]을 끝장내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서 필수적인 요소들, 다시 말해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12·12와 5·17 쿠데타 세력에 대한 단죄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권리 실현이 포함되지 않았다. 선언의 주체가 군사정권이라는 점에서 포함될 수도 없었다. 군사정권의 철권통치는 매우 심대한 타격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타도되거나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6월 민중항쟁의 최대 수혜자는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보수야당이었다. 이후 그들은 한발 후퇴한 군사파시즘 세력과 연합하면서 새로운 지배체제의 주역으로 올라섰다. 1987년 12월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주의 보수야당을 이끌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분열함으로써 노태우가 35.9%의 낮은 득표를 하고도 당선됐다.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군사파시즘 세력과 서슴없이 손을 잡았다. 김영삼은 1990년 노태우와 김종필로 대표되는 군사파시즘 세력과 연합하는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결성한 뒤 199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됐고, 김대중 또한 김종필과 이종찬을 비롯한 군사파시즘 세력 상당수와 손을 잡고 19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6월 민중항쟁이 절반의 승리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중항쟁 지도부 가운데 다수가 자유주의 보수야당을 추종했기 때문이었다.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의 혁명적 패배는 19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거대한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을 태동시켰으며, 그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부분들은 사회주의 운동으로까지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0~70년대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던 자유주의 보수야당은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에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중항쟁의 지도부 다수가 겉으로는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을 내걸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유주의 보수야당의 영향력 아래에 머무르면서 민중항쟁의 혁명적 발전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당시 학생운동과 민중항쟁의 지도부로서 자유주의 보수야당을 추종하며 민중항쟁의 혁명적 발전을 가로막았던 자들은 대부분 이후 순차적으로 김대중과 김영삼의 정치세력 휘하로 편입되어 전형적인 부르주아 정치인이 됐다. 그러나 비록 절반의 승리였지만, 6월 민중항쟁의 승리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어쨌든 승리감에 힘을 얻은 민중들에게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측면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투쟁들이 끊임없이 솟구쳐 올라왔다. 이것은 1987년 6월 이후 20여 년 동안 한국 사회 전반이 역동적인 변화를 거듭하게 하는 아래로부터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1987년 6월 이후 한국 정치의 형식적 민주주의는 제법 확대됐다. 철권통치로 한국 정치를 지배했던 군사파시즘 세력은 1996년 전두환과 노태우가 쿠데타와 광주학살을 이유로 중형을 선고받으면서 사실상 허물어졌다. 2000년대 이후에는 한국 정치의 오랜 특징이던 1인 지배 체제가 무너지면서 자본가정당들 내부에서조차 실질적인 경선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또한 조선 시대로부터 이어지는 유교 전통에 덧붙여 군사파시즘을 거치면서 극단화됐던 권위주의 문화가 한국 사회 전반에서 꾸준히 약화됐다. 한국전쟁 이후 극단적인 수준으로 유지되던 레드 콤플렉스[3] 또한 제법 약화됐다. 나아가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다양한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와 저항이 사회 전반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안기부(국정원)·보안사(기무사·방첩사) 등의 잔존이 상징하듯이 군사파시즘은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고, 형식적인 민주화 속에 스며든 채 언제라도 부활할 수 있는 상태로 지속됐다. 6월 민중항쟁에서는 노동자가 조직된 힘으로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계속되는 거리시위에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했지만, 조직되지 않은 개인으로서였다. 6월 민중항쟁에 적극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큰 자신감을 얻고 7월부터 전국을 뒤흔든 거센 노동자투쟁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6월 민중항쟁은 몇십 년 동안 숨죽여 지내던 노동자계급이 역사의 무대로 성큼 뛰어올라 자신의 혁명적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열어주었다. 6월 18일 이후 울산, 부산, 마산, 인천, 성남, 안양 등 노동자 밀집지역의 생산직 노동자들은 시위에 대거 참여하였으며, 운수노동자들 또한 시위를 확대·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 예로 경기도 성남시청에서 작성한 「6월 20일~21일 가두시위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6월 19일에는 연행자 80명 중 근로자 34명(42.5%), 대학생 8명(10%), 막노동자 6명(7.5%)이었으며, 근로자·막노동자·실업자 등이 다수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6월 20일부터 근로자들이 주동이 되었으며, 검거자 66명 중 68.8%가 근로자·막노동자·무직자들이었다.[4] 특히 남부 지방에서 노동자들은 더 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전투경찰이 정권 핵심부를 방어하기 위해 서울에 집중되면서 남부 지방에서는 진압 경찰이 부족해 시위가 더욱 격렬하게 분출했기 때문이다. 6월의 거리에서 상당한 자신감과 용기를 얻은 노동자들은 7월부터 현장을 바꾸기 위한 대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2)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 6·29 선언이 발표되자 거리에서의 민중항쟁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7월 중화학공업의 중심지 울산에서 시작된 노동자들의 파업 물결이 부산과 창원으로 퍼지더니 마침내 8월에 이르러 전국의 모든 지역으로 확산됐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세 달 동안 전국적으로 3,337건(하루 평균 40건)의 파업이 일어났으며, 최고조에 이르렀던 8월 29일에는 하루 동안에 무려 743건의 파업이 벌어졌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한국전쟁으로 궤멸됐다가 1970년부터 서서히 되살아나던 노동자 대중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오른 역사적 사건이었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122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종업원 10명 이상 사업체 노동자 333만여 명의 37%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특히 종업원 1,000명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75.5%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세 달 동안 일어난 파업 건수는 이전 10년 동안 일어난 전체 파업 건수의 2배를 넘었고, 파업 참가자 수는 이전 10년 동안 전체 참가자 수의 5배였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1960년대 이래 노동자를 강도 높게 착취해 온 한국 자본주의의 필연적 산물이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과 함께 등장한 민주노조운동은 가혹한 탄압과 처절한 패배들을 딛고 끈질기게 명맥을 이으며 성장해 온 끝에 마침내 거대한 대중투쟁으로 찬란히 꽃을 피웠다. 이전 시기의 노동자 투쟁이 주로 경공업(중소기업) 여성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는 중화학공업(대기업) 남성 노동자들의 주도 아래 모든 산업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게 됐다. 거대한 파업물결은 노동조합의 폭발적 증가로 이어졌다. 1987년 6월 이전까지 2,742개의 노조가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노동조합이라기보다 특수한 노무관리 부서에 가까운 이른바 어용노조였다. 그러나 세 달 동안 파업이 일어난 사업장의 55%에서 노조가 결성되어 1,162개의 노조가 새로 만들어지고 기존 어용노조들의 상당수도 민주화되어, 마침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진정한 노동조합, 즉 민주노조가 비로소 대중화되는 시대가 열리게 됐다. 파업은 특정 직종이나 고용 형태에 관계없이 사업장의 모든 노동자가 참여했기 때문에 파업의 결과로 건설된 민주노조에는 사업장 내 모든 노동자가 포함됐다. 따라서 1987년 대파업 물결은 군사정권과 자본가에 맞서, 또한 어용노조에 맞서 민주노조를 건설한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 물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자 민주주의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노동조합의 모든 주요 사안을 전체 조합원이 결정했다. 노동조합의 모든 활동을 조합원대중의 참여로 진행했다.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어용노조의 철저한 관료주의는 한국전쟁 이후 아래로부터의 노동자투쟁을 효과적으로 잠재우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거대한 파업물결 속에서 총회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전면적인 실현은 아래로부터 솟구치는 노동자들의 힘을 폭발적으로 분출시키며 40년 어용노조의 굴레를 한 방에 날려 버렸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이 주로 내건 요구는 인간적 대우, 임금인상, 차별적 임금제도 폐지, 민주노조 인정 등이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벌어진 파업은 대부분 노동법상의 절차를 무시한 ‘불법파업’이었다. 일부 노동자들이 파업을 선동하면서 공장을 순회하면 대다수 노동자들이 호응하면서 자연스럽게 공장이 멈춰 섰다. 노동자들은 본관 앞에 모여 대표를 선출하고 토론을 통해 요구 사항을 채택한 뒤 회사측에 전달했다. 회사측이 요구사항을 수용할 때까지 공장을 계속 점거했다. 교섭이 진행되면 노동자들이 그 건물 앞을 지키고 있었고, 종종 노동자들이 직접 지켜보는 상황에서 교섭이 진행되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규찰대나 선봉대를 조직해서 구사대나 전투경찰·백골단 등과 싸우기도 했다. 때때로 파업 노동자들이 거리로 진출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파업은 매우 전투적인 양상을 띠었다. ◎ 울산에서 불붙은 1987년 대투쟁 울산은 조선, 자동차, 기계, 석유화학, 화학섬유 부문의 대규모 사업장들, 특히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현대그룹의 주력 기업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열악한 작업조건, 심각한 산업재해 속에서도 울산은 오랫동안 민주노조운동의 무풍지대로 머물러 있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는 현대그룹의 무노조 방침과 머리·복장까지 철저히 규제하는 군사적 노동통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1987년 7월 5일 현대엔진에서 현대 계열사 최초로 노조가 만들어졌다. 노동자대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봉화가 솟구쳐 오른 것이었다. 현대엔진노조의 결성은 단지 6월 항쟁 이후의 좋은 정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권용목을 비롯한 선진노동자들의 몇 년간에 걸친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권용목은 1980년대 초에 고적답사회를 꾸려 매주 토요일 1박 2일의 야간 산행을 하면서 동료들 간의 우애를 다졌다. 그러다가 1986년 4월에 6인을 독서회로 따로 조직해 현장문제를 토론하면서 6개월간 노동법을 공부했다. 이들은 1987년 1월에 상여금 차등지급에 항의하는 몸벽보 시위에 500여 명을 조직할 수 있었다. 그리고 4월에는 노사협의회를 이용해 대중적인 임금인상 투쟁을 전개했다. 이런 투쟁성과를 바탕으로 이들은 ‘노조설립추진위’를 비밀리에 꾸리고 2개월 동안 준비를 하다가 6월 항쟁의 여운이 전국을 휘감고 있던 7월 5일 101명이 참가한 노조 결성대회를 성사시켰다. 노동자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열린 노조결성 보고대회에는 1천여 노동자들이 참석했고, 노조 설립 5일 만에 생산직 노동자 1천 500여 명 거의 전원이 노조에 가입했다. 7월 5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과연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 까닭 모를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며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울산시 옥교동 모 디스코텍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철저한 보안 덕분으로 오후 3시가 되자 101명의 노동자들이 사고 없이 도착했다. 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한시라도 늦게 되면 그만큼 회사가 정보를 입수할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문을 걸어 잠그고 결성대회가 시작되었다. 홀 중앙에는 ‘경축 현대엔진(주) 노동조합 결성대회’라는 커다란 글씨가 노동자들의 떨리는 가슴을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오종쇄 씨의 결성선언과 애국가 합창 순으로 시작된 결성대회는 위원장 권용목, 부위원장 신환영, 이재홍, 사무국장 사영운, 회계감사 장호철, 정흥룡 등을 임원으로 선출하고 2시간 만에 끝이 났다. 저 골리앗 현대에 맞서 노동자의 인간적 삶을 쟁취하기 위한 험난한 첫발을 내딛는 순간, 노동자들의 두 주먹은 불끈 쥐어져 있었다. … 결성대회를 무사히 마친 추진위 멤버들은 다음 날 보고대회에 사용할 유인물과 농성에 필요한 식량 등을 챙겼다. 이들은 야밤의 어둠을 틈타 미리 현장 안에 들어가기로 한 계획대로 회사 앞에 도착했다. … 출근시간이 되었는데도 회사는 조용했다. … 시청 신고서류접수 소식을 속타게 기다리던 이들에게 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든 것은 오전 10시 30분.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사전에 연락해 둔 까닭에 약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보고대회에 참석했다. 사회를 맡은 장호철 회계감사가 전날의 노조결성대회 경과를 보고하자 장내는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뒤덮였다. 권용목 위원장이 연단에 올랐다. 대회장은 흥분의 도가니 바로 그것이었다. 어디 감히 현대에서 노조를 만들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해냈다. 모두의 가슴에 격정의 파도가 몰아치고 얼굴들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된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상여금 차등제가 없어지고 공해수당을 받는다는 기대를 가져도 좋습니다. 이제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 깊이 잠든 노동자의 침묵을 단박에 깨뜨리는 그의 목소리가 원한 서린 노동자의 가슴에 불을 지피며 미포만에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 현대엔진노조의 첫 홍보물은 그들의 노동조합 결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강도 높은 장시간 노동, 열악한 근로조건, 산업재해 속에서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이윤추구의 도구로만 보는 가진 자의 온갖 횡포와 사회적 멸시 속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온 우리 노동자들은 이러한 악조건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으며 또한 다음 세대가 우리의 전철을 되밟지 않게 하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인간성 회복을 위해 전 근로자가 일치단결하여 현대엔진 노동조합을 탄생시켰다.” … 예상했던 사용자측의 대응은 의외로 강하지 않았다. 아니 노동자들이 너무 강력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노동조합은 매일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보고집회를 열면서 노동자들의 단결력을 하루가 다르게 고취시켰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큰 산이 되어갔다. 사측이 노조임원과 결성 발기인들에 대해 온갖 회유와 협박을 가하며 노조탈퇴를 강요했지만 단 한 사람도 노조를 탈퇴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사측의 행동은 오히려 노동자들을 격분시킬 뿐이었다. 노조설립 5일 만에 조합원 가입이 현장생산직 전원인 1,500명으로 늘어났다. 점심시간의 보고대회는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억압의 굴레를 훨훨 벗어던지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가 현대조선소 담안을 온통 휘젓고 있었다. 1,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중공업 쪽을 향해 진군을 시작하자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제발 그것만은 참아달라”며 애걸하다시피 하는 사용자들의 모습에서는 이전의 노예사냥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회사는 엔진의 이 파고가 중공업으로 옮겨갈까 봐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현대엔진의 노조결성 바람이 24,000명의 주력기업 현대중공업으로 옮겨지는 날엔 그들의 목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주영 회장의 결정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결국 회사측은 노조를 인정하겠다는 태도로 변하였다. 매일 여는 보고대회를 중지하면 노조설립 신고필증이 빨리 나오도록 사측도 힘쓰겠다는 약조를 했다. 드디어 7월 14일, 노심초사하던 노조설립 신고필증이 나왔다. 꿈에도 그리던 노동조합이 드디어 합법적으로 쟁취되는 감격의 날이었다.[5]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비로소 대중운동으로서 본궤도에 오른 한국 노동운동의 비약적 발전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현대엔진 노동조합 결성과정의 중요한 요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현대엔진 노동자들은 일상투쟁을 통해 역량을 축적하고 역량에 맞는 싸움을 집요하게 전개했으며, 대중투쟁의 기반 위에서 합법투쟁을 정력적으로 벌여왔다는 사실이다. 둘째, 부서별 모임, 취미모임, 친목회, 기별 모임 등 노동현장의 기본적 조직형태를 생산조직의 기본틀 속에서 강력히 조직, 대중의 단결을 강화하고 조직했다는 사실이다. 셋째, 창의적인 단체행동, 즉 몸벽보, 축구대회, 한 식당 이용 등을 통해 대중의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내고 대중 스스로 투쟁의 주인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넷째, 사용자의 아성인 노사협의회를 적극 노동자의 단결의 장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모든 협상과 상황진행에 대해 노동자들에게 전면적으로 공개하고 부서 단위의 직접토론을 조직하는 민주적 방식에 철저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대중투쟁 원칙에 철저한 지도부의 존재는 87년 7·8·9월의 현대 노동자 대투쟁을 끌어내며 현대그룹의 노동운동이 한국 노동운동의 메카로 일약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다.[6] 7월 15일에는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대회를 갖고 다음 날 보고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노조 설립신고서를 시청에 접수하려는 순간 회사 측이 이를 빼앗아 가버렸다. 비난여론이 빗발쳤고 결국 시청은 3일 만에 노조설립 신고필증을 내주었다. 이 ‘탈취사건’을 계기로 노조 결성이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열기가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현대엔진과 현대미포조선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던 현대자본은 이번에는 어용 한국노총 산하 금속노련과 한통속이 되어 21일과 24일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에 어용노조를 결성했다. 그러나 25일, 전날 결성된 어용노조가 결성 보고대회를 갖는 자리에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분노의 함성을 터뜨렸다. ‘어용노조 물러가라’며 자발적으로 형성된 시위대열이 공장을 한 바퀴 돌자 8천여 명으로 불어났고, 일시에 공장 전체를 마비시켰다. 이들은 폭우가 쏟아지던 상황에서도 농성을 계속하면서 임시총회를 열어 새로운 민주노조 집행부를 세우고 자본으로부터 ‘민주노조를 인정한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현대자동차에서도 어용노조가 만들어졌는데 … 이튿날 7월 25일 어용노조 집행부 30여 명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본관식당에서 노조결성보고대회를 갖기 위해 현수막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분노가 폭발했다. 대다수 노동자들이 어용노조라는 것을 알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한 노동자가 “어용노조 타도하자”라고 외치며 몸싸움을 벌였다. 이를 지켜보던 많은 노동자들이 가세하여 몸싸움을 벌여서 결국 이들을 쫓아냈다. 1,200여 명으로 불어난 노동자들이 어깨동무와 스크럼을 짜고 본관 앞을 출발해 대형→소형→주·단조→제2공장→공작생산부를 돌면서 시위를 벌이자 시위대는 불어났고 공장은 마비되었다. 오후 3시 15분경. 5~6,000으로 불어난 노동자들이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크와 앰프를 확보하여 농성을 계속하였다. 오후 4시 35분경 전체공장의 작업이 중단된 가운데 파업농성을 계속하면서 임시총회를 열어 민주노조위원장으로 이상범을 선출하였다. 파업농성 중에 자연스럽게 수많은 구호가 나왔는데 ‘한국노총 해체하라’ ‘어용노조위원장 정성규는 사퇴하라’ ‘유급휴가 실시하라’ ‘임금인상 실시하라’ ‘콘베어 속도 늦춰라’ 등의 구호에 노동자들의 속내가 드러나 있다. 이에 놀란 회사는 야간조에게 비상연락망을 통해 휴무를 통고했고 정문에 공고도 붙였다. 본관에서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은 야간조와 합치기 위해 정문으로 이동해 정문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농성 소식을 들은 현대엔진노조 간부와 미포조선노조 간부가 농성장을 찾아와 민주노조를 위해 투쟁하는 현자노동자들에게 격려를 보내는 농성장은 연대의 기운이 넘치면서 활기에 넘쳤다. 오후 7시부터 시작된 어용노조 퇴진문제를 포함한 협상에서 회사가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자 순조롭게 진행되던 농성이 오후 10시경, 몇몇 분노한 노동자들에 의해 유리창 몇 장이 깨지고 회사 중역의 승용차를 뒤집어버리는 불상사도 생겼다. 밤 11시경 본관 앞에서 농성을 계속하던 3,000명의 노동자들의 “부사장 나와라”는 항의에 부사장이 마지못해 나왔는데 “노조는 노동자들의 문제이니 당신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자동차는 계속 만들어야 한다. 만들면서 노조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 노동자들의 염장을 지르다 노동자들에게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협상에는 현대자동차 이상범과 현대엔진 위원장, 현대 미포조선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는데 긴 시간 협상 끝에 다음날 0시 20분에 합의서를 겨우 작성했다. 합의 내용의 큰 골자는 이렇다. △회사는 임원진의 사퇴를 종용하고 민주노조를 인정한다. △현 집행부의 신분을 보장하고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회사는 어용노조의 사퇴를 받아낸다. △오늘 근무 시간을 인정한다. △1개월 내에 총회를 소집하여 임원을 민주적으로 재선출한다. 합의서를 받아낸 민주노조 진영은 기다리고 있던 노동자에게 합의내용을 설명하고 회사측이 약속을 어기면 7월 29일부터 시작되는 휴가를 거부하고 투쟁하자고 제안하고 농성을 마쳤다. 하지만 회사는 어용집행부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해 몇 차례 협상이 결렬되는 우여곡절 끝에 7월 28일 04시에 어용노조집행부의 사퇴서를 받아내면서 마무리되었다.[7] 현대중공업에서는 노조결성을 준비해 오던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설립 소식을 듣고 ‘현대중공업노조 개편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대책위는 25일 중식시간에 노조의 어용성을 묻는 서명을 실시하여 3천 125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28일 대책위 주도 아래 1만 7천여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퇴진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단행했다. 29일부터는 2만여 노동자들로 파업대오가 확대됐다. 31일 대책위와 회사 간에 협상이 일차 타결돼 상여금 차등제 폐지, 하도급 직영화, 4일간의 파업에 대한 민형사상 면책 등을 쟁취했으나, 임금인상에 대해서는 민주적인 집행부가 정식 구성된 뒤로 미뤄졌다. 27일 밤, … 대책위원들이 정병모 씨의 집으로 속속 모여들어 내일의 결전을 위해 준비물을 챙겼다. … 조마조마한 마음을 다잡고 28일의 새벽 출근길을 향했다. 온몸에 플랭카드를 칭칭 감고 여기저기 유인물을 숨긴 채 드디어 정문 앞에 당도했다. 사전의 계획대로 3개 정문 바로 안쪽에서 플랭카드를 펼치고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어용노조 물러가라”, “임금 인상하라”, “상여금 차등지급 철폐하라.” 아!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일거에 합세해야 될 동료들이 힐끗힐끗 눈치만 보며 그들을 지나치고 있지 않은가. 대책위원들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끝장이다’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대책위원들이 방향을 틀어 현장 안으로 플랭카드를 앞세우고 걸어나가자 삽시간에 노동자들이 대열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몇 분 만에 수천 명으로 불어난 대열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노도로 변했다. 선두에 선 대책위원들의 눈가에 감격의 눈물이 맺혔다. 3개 정문에서 모여들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대열은 1만 명을 넘어섰다. 자연스럽게 사내행진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노동자 대열이 한을 품고 죽어간 동료들의 원혼을 달래기라도 하듯 굴종의 작업장 원한 서린 곳곳을 돌았다. 사내행진을 마친 노동자들은 운동장에 집결했다. 이미 17,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운집했다. 그들은 죽어간 동료들을 위한 묵념을 빼놓지 않았다. … 한순간에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분노를 식힐 필요를 느낀 회사는 대책위와의 협상을 통해 몇 가지 사항에 합의했다. 28일의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오늘 발생된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2. 이 보고대회에 대한 관계당국(경찰서, 보안대)은 절대 개입을 금한다. 3. 오늘 집회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인정한다. 4. 현 노조의 신고필증은 울산시에서 금일(28일) 오전 11시에 조합장과 회사측에 발송했다고 하니 접수 즉시 현 대책위원회에 준다. 5. 현 대책위원회 임원(11명)은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하고 제반 업무를 보도록 한다.” 그러나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군중은 그동안 억눌려왔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전날의 합의는 그들의 기대에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미흡한 합의사항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이 지도부의 지침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2만여 명이 출근과 동시에 운동장에 집결했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동력에 의해 거침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 노동자들은 어용노조 퇴진은 기정사실화하고 한발 더 나아가 임금인상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 2만여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25%를 내걸고 땡볕 운동장에서 불을 뿜고 있었다. 대책위와 회사 간에 협상이 재개되었다. 대책위는 임금 및 상여금 차등제 철폐를 포함한 17개 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두 차례의 연속된 협상은 부수적인 10개 항에는 쉽게 합의했으나 임금과 상여금차등제 문제에는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다음날 회사는 이춘림 회장의 명의로 배포된 유인물을 통해 노동자의 요구사항을 다음과 같이 수용한다고 발표하였다. “… 6. 하도급제는 현재도 직영화시키고 있으나 남은 부분도 점차 직영화한다. … * 임금조정 문제에 관해서는 앞으로 결성될 민주노조와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노조대표자와 진지한 대화를 통하여 결정토록 한다. * 인사고과 철폐문제는 등급단계를 완화하는 등 제도적으로 보완 개선해 나간다.” 협상이 난항을 겪자, 30일에도 2만 노동자들이 변함없이 운동장에 집결하여 파업농성을 계속했고, 대책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경과보고 유인물을 통해 입장을 천명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현중노조 개편대책위 경과보고 7월 28일(화)부터 뜨겁게 달아오른 민주노조의 열망이 전 노동자의 피끓는 함성으로 천지를 뒤흔든다. … 29일 19시 1차 협상에 들어갔으나 결렬되고 22시 2차 협상에서도 시간을 두고 해결하자는 회사측의 요구로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에 본 대책위원회에서는 전 노동자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집회를 계속할 것이며 대책위원 전원은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갈 것을 천명하는 바이다 …” 이제 투쟁은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전열을 가다듬은 노동자들의 대오는 어느덧 사무직과 여사원들마저 동참하고 있었다. 확대일로의 사태에 심각성을 느꼈는지 회사가 협상에 적극성을 띠고 나왔다. 31일 11인 대책위 전원과 회사측 회장 이하 10명의 중역들이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서 진일보된 합의가 이루어졌다. “1. 연말상여금 차등지급제를 없앤다. 2. 임금인상에 대하여(전 종업원) 1) 실시시기 : 1987년 9월 1일 (9월분 급료) 2) 인상률 : 현중노조 설립이 정식으로 구성된 후 상호 결정한다. 3. 현중노조를 가장 민주적인 방식에 따라 새 집행부를 구성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둔다. … 4. 단 금일(31일)의 집회를 본 합의 후 16시까지 종료하고 향후 이와 유사한 집회가 재발한 경우에는 상기 합의사항 및 7월 29일의 이춘림 회장이 약속한 10개 사항은 무효이며 단위 부서별 소규모 집회는 특별위원회가 구성될 때까지 현 대책위원회가 막는다. 5. 이번 4일간의 집회에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는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 노동자들은 ‘마음속에 무엇인가 허전함’을 떨치지 못하고 일단 대책위의 조업방침에 따랐다. 그러나 내면에는 미흡한 합의에 대한 불만이 충만해 … 있었다. 민주노조 건설과 파업의 불길은 울산 현대 계열사 전체로, 울산지역 전체로 번져갔다. 26일 현대중전기노조가 건설됐다. 27일 태광산업과 동양나일론[훗날 효성]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다. 30일 현대중공업과 현대중전기 노동자들이 연합 가두시위를 벌였다. 31일 이후 6개 버스업체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8월 1일 현대정공과 현대종합목재에 노조가 건설됐다. 8월 초 석유화학단지와 온산공단으로 파업농성이 확산됐다. 현대계열사 가운데 가장 열악한 노동조건에 허덕이던 현대정공 노동자들은 가장 폭발적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1천 200여 현대정공 노동자들은 붉은 페인트로 ‘민주노조 결성’이라고 쓴 회사버스를 타고 시가지를 누볐다. 사무실의 유리창을 박살내고 거리로 나아가 전투경찰에 맞서 간선도로를 4개의 컨테이너로 차단하고 시위를 전개했다. 파업파괴자들에 대해서 단호하게 응징했다. 요구사항을 민주적으로 토론해서 결정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조업재개 후 회사의 민주노조 보장 약속이 유야무야 되려 하자 6일 울산을 방문한 정주영 회장을 운동장으로 끌어냈지만 확답을 듣지 못했다. 7일 회사는 전면 휴업조치를 단행했고, 정주영은 ‘외부 세력’을 들먹이며 대책위와 대화 단절을 선언했다. 대책위는 노동자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노조를 건설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8월 1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간 현장은 그러나 ‘정상’일 수 없었다. 모든 노동자들이 민주노조 탄생을 갈망하며 약속된 회사의 후속조치를 기다리고 있는데도 회사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약속이 기만일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었다. 술렁이는 현장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인 8월 6일, 정주영 회장이 울산에 내려왔다. 6일 오전, 체육관에 조장급 이상의 관리자들을 모아놓고 정 회장의 훈시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책위는 정 회장과의 담판을 시도하기로 하고 집회를 열었다. 유야무야 안개에 싸여가는 회사의 민주노조 보장 약속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정 회장과의 담판이 더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 회장이 훈시하고 있는 체육관 주위를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에워싸고 “임금 25% 인상, 어용노조 퇴진” 등을 외치며 농성을 벌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정 회장이 “11명도 감당 못하느냐”며 격노하면서 후문으로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들에게 저지당했다. 현대왕국의 절대군주 정주영 회장과 현대노동자들의 숙명적인 만남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관리자만 만날 것이 아니라 직접 배를 만들고 현대를 국내 최대기업으로 키워온 현장 노동자들 앞에서 당당히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어느새 주위에는 2만여 노동자들이 운집해 있었다. 노동자들은 운동장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길게 길을 터놓고 그룹총수의 결단을 촉구했다. “회장님 운동장으로 가십시오! 회장님의 분명한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는 좀체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 이때 누군가 정 회장을 향해 흙을 뿌렸다. 마치 정 회장의 눈에 흙이 들어가게 만들어 민주노조를 인정하게 만들겠다는 심정으로! 상황이 다급해져 가는 것을 깨달았는지 무려 1시간의 실갱이 끝에 그가 서서히 운동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동장으로 향하던 정주영 회장도, 2만 노동자들도 대조립공장 벽에 커다랗게 박혀 있는 글귀를 읽었다. ‘회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길이며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 현대 노동자들이 15년 동안 매일같이 보아온 이 글귀가 오늘따라 가슴에 한이 되어 박혀온다. 허허뻘밭 백만 평의 대지에 조선소가 들어선 이래 회사는 얼마나 성장했는가. 중화학공업의 선두주자로 일취월장 성장한 회사로 말미암아 나라는 또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가. 그런데 노동자들은 어떠한가. 잘 되었는가? 그것은 정녕 ‘잘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불과하지 않는가. 자고 나면 누군가 탱크 안에서 죽어갔다는 끔찍한 소식에 치를 떨어야 했던 나날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 말을 끝까지 믿고 싶었다. 그래서 운동장에 모인 2만 노동자들은 힘차게 현대사가를 부르고 애국가도 불렀다. 연단에 올라선 정 회장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민주노조를 만드는 것이 여러분과 회사의 공동 목표”라고 호언하며 “그러나 합법성 있는 노조와 대화할 것임을 잊지 말라”고 천명하고 급하게 운동장을 빠져 나갔다. 담판은 이렇게 소득 없이 끝났다. 현대왕국을 맨손으로 건설한 살아있는 신화 그룹 총수를 운동장까지 모신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미 계획된 수순이었는지도 몰랐다. 오후 4시가 되자 회사는 전면 휴업조치를 단행했다. 이어 다음날인 8월 7일에는 정주영 회장이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현대중공업 사태가 ‘외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매도하면서 대책위와는 절대 대화하지 않겠다는 강경태도로 돌변했다. … 전면휴업을 내린 회사는 대책위와 전혀 대화할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제 대책위가 선택할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건설하자.” … 전열을 가다듬고 8월 14일 총선을 결정했다.[8] 8월 14일 현대중공업 노동자 1만 5천여 명이 임시총회를 갖고 어용 집행부를 99%의 불신임으로 몰아내고 직접 선거로 민주노조를 세웠다. 14일의 총선은 회사도 놀랄 만큼 질서정연하게 치러졌다. 사측이 불법집회라며 투표장인 운동장 입구에 포크레인과 관리자들을 동원하여 바리케이드를 쳤지만, 민주노조에 대한 노동자들의 열망 앞에 허망하게 무너졌다. 총선은 장대비 속에서도 투표장을 여러 번 옮기면서 열화와 같은 참여 속에 진행되었다. 비난의 표적 권오성 집행부를 99%의 찬성으로 불신임시키고 위원장 간선제의 노조규약을 직선제로 개정하였다. 이어 진행된 위원장 선거는 그동안 헌신적으로 투쟁을 이끌어온 11인 대책위 위원들이 출마를 포기한 상태에서 치러졌다. 대책위는 출범 당시 어용진영의 ‘위원장 야심에 불타는 작자’들이란 악의적 매도를 불식시키고 노동자들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위원장 불출마 선언을 한 바 있었기 때문에 이 확약을 굳건히 지키는 대신 대책위와 함께 열심히 투쟁하던 이형건 씨를 위원장 후보로 추천, 당당히 당선시켰다.[9] 자본가들의 번영을 상징하던 공업도시 울산은 이제 노동자들의 투쟁을 상징하는 도시로 탈바꿈해 갔다. ◎ 부산에서 불붙은 1987년 대투쟁 7월 중순에 벌어진 동아건설과 풍영 노동자들의 파업농성은 부산지역 노동자투쟁의 전초전이었다. 25일 시작된 대한조선공사[훗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28일 시작된 국제상사의 나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부산의 공장지대를 투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현대엔진에서처럼 대한조선공사에서도 선진노동자들이 있었고, 1987년 투쟁의 불길을 지피는 예열 과정이 있었다. 박창수는 1986년 여름 ‘우리는 개밥을 먹을 수 없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안전모 속에 숨기고 들어가 공장에 뿌리고 ‘도시락 거부투쟁’을 주도했다. 나흘간 벌인 이 투쟁으로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은 최초의 승리를 맛보았다.[10] 김진숙은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버스안내양을 거쳐 고무공장과 신발공장을 전전하다가 사내 직업훈련소를 거쳐 용접공으로 입사했다. 김진숙은 야학을 통해 민주노조를 알고 1987년 3월 ‘조공 노동자신문’이라는 필사본 유인물을 두 차례 만들어 탈의실 등에 뿌렸다가 발각돼 다른 3명의 동료와 함께 해고당했다. 그러나 현장 노동자들은 유인물에 실린 내용을 서로 이야기하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해고자들의 지속적인 투쟁은 노동자들을 뜨겁게 달구어 결국 1987년 7월의 폭발적 투쟁을 이끌어냈다. 마침내 내 운명의 기수를 ‘노동해방’으로 돌려놓은 한진중공업(당시 대한조선공사)의 용접공 생활이 1981년 7월 1일부터 시작된다. 용접불똥에 군데군데 타 들어간 작업복에 누런 테이프를 붙여 넝마가 된 누더기를 걸친 스물둘의 내 청춘도 산재에 작업에 그렇게 누더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 그러다 마침내 1984년쯤 근로야학이라는 델 찾아가게 되고, … 나한테 절실했던 영어단어나 수학공식보다는 근로기준법이 어떠니 노조가 어떠니 하는 일에 더 열을 올리던 … 강학 하나가 책 한 권을 건네줬다. 진숙 씨가 읽어보면 참 많은 도움이 될 거라면서. 사실 내 이름 뒤에 ‘씨’ 자를 붙여서 불러준 건 야학에서가 처음이었고 나한테 존댓말을 해 주는 최초의 사람들이 야학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야학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 전태일 평전』이라는 책이었다. … 그 책을 끝내 들추지 말았어야 했을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었다. 가슴에 큰 산 하나가 들어앉아 그 산에서 돌덩이가 와르르 쏟아져 양심에 돌팔매질을 해대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산 사람. 그러나 그 삶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끌어안고 뒹굴었던 사람. 난 뭘까. 그의 삶에 비한다면 내 삶은 뭘까. … 나와 함께 일하고 나와 같이 뒹굴며 그러나 끝내 내가 되지 못하고, 내가 그들이 되지도 못한 채 흘러갔던 수많은 아이들.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뒹구는 아무 데서나 오줌 누고 욕을 달아야만 말이 되는 이 아저씨들.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내가 곧 그들이라는 사실이 이제 더 이상 부끄럽지도 치욕스럽지도 않았다. 같이 살아야 된다는 생각. 내가 달라져야 그들이 달라진다는 생각. 그들이 딛고 선 땅이 변해야 내가 딛고 선 땅도 변한다는 생각. 눈물은 곧 다짐이 되었고 가슴 벅찬 환희가 되었다. 인간이 참 고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11] 조선공사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거리로 진출했다. 1천 500여 노동자들은 태종로 거리를 완전히 차단하고 노동조건 개선, 어용노조 퇴진 등 20여 가지의 요구조건을 외쳤다. 경찰과 구사대가 계속 폭력침탈하자 파업자위대를 구성해 맞서 싸웠다. 28일 자본과의 협상이 결렬된 다음에는 3천여 명이 지게차와 물탱크차를 앞세우고 쇠파이프와 쇠망치로 무장한 채 거리시위를 벌였다. 결국 연 300%의 상여금 지급, 어용노조 퇴진 등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휴가비 100% 확보’를 내걸고 시작된 국제상사 노동자들의 투쟁은 700명의 깡패가 휘두르는 쇠파이프와 각목 앞에 내던져졌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지원에 힘입어 깡패들과 맞서 보기도 했으나, 투쟁 대열은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고, 투쟁 공간도 회사 운동장에서 기숙사로, 다시 근처 성당으로 밀려나게 됐다. 하지만 국제상사 여성노동자들은 거리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연일 거리집회를 개최함으로써 부산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을 더욱 고무시켰고, 특히 부산에 밀집해 있는 화학, 신발업계 노동자투쟁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 마산·창원에서 불붙은 1987년 대투쟁 이미 1980년대 초부터 투쟁 전통을 갖고 있었던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들도 투쟁에 떨쳐 일어섰다. 여기서도 의식적인 활동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성현은 1980년에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를 거쳐 선반공으로 동양기계에 입사해서 차돌회라는 소모임에서 활동하다가 회사가 1982년 창원으로 이전하여 (주)통일로 합병될 때 창원으로 내려왔다. 문성현은 1983년 말 노조 사무장으로 당선돼 1984년 단협투쟁에서 유급휴일 확대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를 계기로 500여 명에 불과하던 조합원이 2천여 명으로 급속히 불어났다. 자본이 단협 투쟁에 대한 보복으로 문성현을 대학생 출신이라는 이유로 징계하려 하자 조합원 전체가 들고 일어나 징계를 철회시켰다. 노조는 1985년 임금투쟁에서 협상이 한 달 넘게 진행되는 동안 매일 출근시간과 점심시간에 집회를 열며 투쟁을 병행했다. 2천여 명의 조합원들은 마산·창원 지역 최초로 ‘단결’이라고 쓴 머리띠를 두르고 매일 빠짐없이 집회에 참가했다. 이런 투쟁 과정에서 소모임이 늘어나 1987년 초에는 통일에 소모임이 10개 정도 만들어졌다. 이런 굳건한 토대가 있었기에 마산·창원 노동자운동은 1987년 대투쟁에서 울산·부산 노동자운동에 이어 또 하나의 선봉이 될 수 있었다. 울산 현대정공 노동자들의 투쟁에 고무된 창원 현대정공 노동자들이 7월 30일 노조를 결성했다. 같은 날 한국중공업에서는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성토대회를 열었다. 31일 효성중공업에서는 500여 노동자들이 농성에 들어가며 어용노조 집행부 퇴진, 상여금 인상 등을 요구했다. 8월 6일과 7일에는 기아기공과 (주)통일의 노동자들이 어용노조를 통한 자본가들의 분열책동을 폭로하면서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노동자투쟁을 파괴하려는 자본가들의 음모는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규찰대 조직을 비롯해 다양한 방법으로 자본의 음모를 분쇄했다. 대부분의 파괴공작은 오히려 노동자들의 단결을 더욱 강화해 줄 뿐이었다. 특히 통일 노동자들은 ‘해고노동자 복직’을 으뜸 구호로 내세워 지도자를 되찾겠다는 강한 결의를 보여주었으며, ‘민주노조 쟁취 시범업체’라는 구호를 정문에 내걸어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에 서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실제로 통일 노동자들은 치밀하고 다양한 농성프로그램을 진행해 이 지역 노동자투쟁의 모범이 되었으며, 다른 노동자투쟁들을 적극 지지·지원함으로써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운동을 선두에서 이끌어 나갔다. 회사 안에서만 투쟁하던 노동자들은 8월 11일 금성사 노동자들이 가두시위를 벌인 다음 가두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대림자동차와 창원기화기 노동자들도 가두시위를 벌였고, 풍성전기 노동자들은 8대의 통근버스를 동원해 차량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때부터 창원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은 더욱 고양됐다. 창원 공단 안의 모든 노동자들은 동지였다. 다른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에 박수로만 연대의지를 표명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폭력경찰에 맞서 같이 싸우며 강철 ‘계급’으로 단련되어갔다. 8월 11일에는 각 사업장에서만 투쟁을 전개하던 노동자 수만 명이 지게차를 앞세우고 창원대로로 뛰쳐나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최루탄 속을 돌진하였다. 8월 11일 금성사에서는 철야농성 노동자 중 200여 명이 지게차 25대에 분승하여 공장주변 도로를 돌며 1시간 동안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에 대림자동차에서도 500여 노동자들이 정문을 박차고 나와 “인간답게 살고 싶다. 생활임금 보장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2시간 동안 가두시위를 벌였고 여기에 창원기화기 300여 노동자들도 가두시위를 전개하고 창원시청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그러자 풍성전기 400여 노동자들도 회사 통근버스 8대에 분승하여 창원 전 지역을 돌며 차량 가두시위를 벌였다. 오후 5시경이 되자 또다시 금성사 노동자 250여 명이 지게차에 분승하여 가두로 진출하였고, 뿌연 최루탄 연기 속에서 노동자들과 경찰과의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경찰의 최루탄 난사로 금성사 조합원 이상영이 머리에 부상을 입고 뇌수술을 받는 등 노동자 3명이 크게 다쳤다.) 금성사 노동자들의 가두 진출에 인근의 창원기화기 노동자 200명, 동우정기 노동자 100명, 풍성전기, 오성사, 동환산업 등 노동자들이 동조하면서 박수를 보냈다.[12] ◎ 전국을 투쟁의 불바다로 만든 8월 남부지방에서 집중적으로 타올랐던 투쟁의 불길은 8월 초순을 고비로 전국으로, 노동자가 있는 모든 곳으로 번져 나갔다. 창원공단 금성사 노동자들의 투쟁은 같은 업종의 전자업체가 몰려 있는 구미공단으로 옮겨 붙었으며, 일시에 구미공단의 중심적인 공장들이 투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특히 독점자본의 각 계열사들이 투쟁에 합류했고, 동종 업종의 노동자들은 경쟁적으로 투쟁의 불꽃을 당겼다. 인천, 서울, 성남 등 수도권지역 노동자들도 비로소 본격적인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8월 4일 창원공장 대우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에 고무된 인천공장 대우중공업 1천 500여 노동자들이 8일 파업투쟁에 나섰고, 이어 인천지역 대우 계열사인 대우자동차, 대우전자 노동자들이 투쟁에 가세했다. 이런 방식으로 남부 중공업지대에서 수도권과 전라도, 충청도,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투쟁이 거세게 확산됐다. 또한 업종별로는 이미 투쟁의 열기로 가득 찬 중화학공업 노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여성중심 제조업인 전자, 섬유부문의 노동자들도 투쟁에 떨쳐 일어섰다. 운수노동자들의 투쟁은 8월 7일 전주 택시기사의 총파업을 시발로, 9일에는 광주 시내버스 총파업, 12일에는 전주, 군산, 김제 시내·시외버스 총파업, 14일에는 대전의 버스·택시 총파업이 잇달아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를 뒤흔들었다. 또 부산, 포항, 성남, 춘천, 인천 등지의 운수노동자들도 운수노동자 전국 총파업의 기세로 전국을 굽이쳐 대중교통이 거의 마비상태에 이르렀다. 운수업은 공공서비스업이라는 이유로 언론의 집중공격을 받았으나, 운수노동자들은 무임승차와 같은 다양한 투쟁방식을 개발하고 다른 산업노동자들과 연대투쟁을 벌이면서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은 8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전면화하고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8월 7일 석탄공사 함백광업소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점으로 대성탄좌 문경광업소 노동자 1천 400여 명이 파업농성에 들어갔고,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석탄공사 도계·장성광업소 등 주요 탄광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합류했다. 언제나 그렇듯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은 초기부터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경찰과 대치한 상태에서도 거리투쟁을 계속 벌였고, 철도와 국도도 여러 번 점거했다. 특히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와 석탄공사 장성광업소 노동자들의 투쟁은 흡사 전투를 방불케 하고 지역 봉기의 맹아를 보여줄 정도로 규모가 컸다. 1980년 4월에 사북 항쟁을 벌였던 광산노동자들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압에 잠시 움츠렸지만, 자신의 힘을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과거로부터 배워 일보 전진했다. 요구 측면에서 과거에 주로 제기했던 임금과 상여금 인상 등에서 전근대적 임금제도인 도급제 폐지, 어용노조 퇴진, 위원장 직선제 등으로 한발 더 나아갔다. 투쟁방식도 광업소 내 점거농성에서 거리진출과 철도·도로점거 등으로까지 전진했고, 더 장기간, 더 치열하게 투쟁했다. 바야흐로 전국은 노동자 파업투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이제 노동자투쟁은 남부지역의 몇몇 대기업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전국에 걸쳐, 중소규모·대규모 공장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머리띠를 두르고 대열을 지어 움직이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한 공장에서 승리의 소식이 들리면 바로 옆 공장으로 투쟁이 번지고, 나아가 그 지역 일대가 투쟁의 불길로 휩싸이게 됐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바로 지금이 나설 때’임을 직감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이렇듯 노동자투쟁은 발전을 거듭해 나가 8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하루 평균 쟁의건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연합가두시위가 본격화된 17일부터 29일까지의 기간에는 전국적으로 하루 평균 150개의 공장에서 새롭게 투쟁이 벌어졌다. 1985, 86년의 각 1년 동안 일어났던 투쟁의 절반 이상이 단 하루 사이에 일어났다. 20일에는 하루 500건, 29일에는 743건이 되면서 노동자투쟁은 절정을 이루었다. 이 보름 동안 노동자들의 투쟁은 지칠 줄 모르고 거세게 타올랐다. 한편 이 기간 400여 개의 노동조합이 새로 결성됐다. 이는 비교적 노동운동이 고양되었던 1984년 한해 250개 노조설립과 비교해도 엄청난 것이었다. 투쟁의 양상은 더욱 폭발적이고 조직적인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파업농성 시 규찰대를 조직하고 구사대의 폭력에 대응해 각목과 쇠파이프로 무장하여 투쟁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투쟁방식이 됐다. 나아가 지게차와 같은 중장비를 앞세우고 가두시위를 벌여 자본가들에게 위력을 과시하고,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것이 점차 일반화돼갔다. 이러한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투쟁방식은 예전에는 지역적으로 고립돼 있고 협상 상대인 자본가가 서울에 거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광산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특히 중공업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일반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거제 대우조선에서는 협상에 무성의한 그룹 측에 맞서 노동자들이 거제도 일부를 장악하고 거리시위를 벌였으며 전투경찰과는 투석으로 맞섰다. 인천에서 경동산업 노동자들은 깡패들로 구성된 구사대를 격파한 다음 수차례에 걸쳐 거리시위에 나서 단결력을 과시하면서 인근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무했다. 부천의 경원세기 노동자들도 회사 앞 고속도로를 점거하는 등 격렬한 투쟁을 벌임으로써 요구조건을 완전히 쟁취했다. 이 시기에 발생한 파업은 모두 불법파업이었다. “노동위원회가 적법성을 심사한 뒤 일반사업장은 30일, 공익사업장은 40일이 지나야 파업을 할 수 있다”는 규정을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폭발적인 투쟁으로 악법을 날려버렸으며 ‘선파업 후교섭’을 통해 민주노조 건설, 노조 민주화, 생존권을 당당하게 쟁취했다. 이런 투쟁양상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꾸준히 발전해왔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타협이나 소극적인 청원이 아니라 오로지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노동자들은 이미 경험을 통해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울산 현대노동자들의 연합거리시위 노동자투쟁의 거센 불길은 8월 17~18일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현노협)가 주도했던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연합거리시위에서 절정에 달했다. 8월 들어 단위공장별로 임금협상을 벌이던 현대계열사 노동자대표들은 한결같이 ‘임금 결정은 그룹 차원의 문제’라는 자본의 태도에 부딪혔다. 이에 현대그룹 노동자들은 노동자도 그룹 차원의 노조협의회를 결성해 그룹 차원에서 해결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8월 8일 10만 현대그룹 노동자를 대표하는 현노협이 탄생했다. 그러나 현대 자본은 현노협이 불법단체라고 주장하면서 현노협이 제안한 세 차례의 협상에 모두 응하지 않았다. 현대자본의 응답은 16일의 현대중공업 폐쇄, 독신자 숙소 단전·단수 및 식사제공 중단, 17일의 그룹 전체 공장에 대한 무기한 휴업조치였다. 이제 한국 최대 재벌 현대자본과 10만 현대 노동자들의 정면대결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17일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3~4만에 달하는 현대그룹 노동자들이 현대중공업 운동장에 모였다. 그들은 ‘정주영 회장 화형식’을 가진 뒤, 대형 철구조물을 앞세우고 정문을 나와 길을 가로막는 전투경찰에 맞서 돌을 던지며 싸우다가 남목까지 행진했다. 18일 다시 6만여 노동자와 가족들이 모여 공설운동장까지 5시간에 걸쳐 거리시위를 벌였다. 시위대열 선두에서 오토바이 15대와 마이크를 장치한 1톤 트럭이 대열을 이끌었으며, 그 뒤에는 헬멧, 방진마스크를 착용한 500여 명의 선봉대가 따랐다. 또 샌딩머신, 덤프트럭, 소방차, 지게차 등 중장비 10대가 동원됐다. 6만의 노동자부대는 4Km나 되는 끝도 없이 긴 행렬을 이루며 분노의 행진을 벌였다. 마치 잘 훈련된 노동자군대의 행진연습을 보는 듯했다. 노동자 시위대의 당당한 시가행진 모습은 전국 노동자들에게는 가슴 벅찬 기쁨을, 자본가들에게는 몸서리 처지는 공포를 선사했다. 이런 대부대의 진군은 경찰도 감히 막을 수 없었다. 사태 전개에 경악한 정권은 18일 오후 노동부차관을 현지로 급파했다. 그리고 “현대중공업 이형건 집행부가 회사측과 공식적으로 단체협약에 임할 수 있도록 보장”, “임금인상은 9월 1일까지 타결될 수 있도록 정부가 보장” 등을 서둘러 합의하고 일단 투쟁을 수습했다. 출근시간이 되자 노동자들이 중공업 운동장으로 구름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4만 명이 넘는 현대 노동자들이 운동장을 꽉 메우고도 모자라 운동장 주위를 에워쌌다. 전날처럼 정문 앞에서 “시내로!”를 외치며 서성이던 노동자들도 보이질 않았다. 전날의 유인물 사건으로 분위기가 더욱 고양된 때문인지 3,000여 명의 가족들도 운동장으로 열을 지어 들어오자 집회의 열기는 하늘을 찌를 듯 고조되었다. … 지도부는 가두시위의 분명한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무저항 비폭력 행진, 즉 경찰의 제지로 행진이 막히면 공격하지 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연좌시위를 벌이고, 둘째는 질서 있는 평화행진을 하며 대오를 이탈, 질서를 문란케 하는 자는 행진을 파괴하려는 프락치로 간주, 엄단한다는 것이었다. 출정을 앞둔 집회의 마지막 순서는 정주영 회장 및 족벌체제 타도 화형식이었다. 지도부는 어제의 경험을 살려 보다 조직적이고 질서 있는 시위를 위해 본대를 2,000명 단위로 15개 대열로 나누고 사이사이에 질서대원을 배치시키는 한편, 대열의 선두에는 중장비 부대와 방진마스크 및 화이버로 자체 무장한 선봉대를 배치했다. 대열 최선두 중장비 대열 바로 뒤에 의장단 등 각사 노조 위원장들이 섰다. 회사가 오늘의 시위에 대비하여 중장비의 바람을 빼고 키를 회수했지만 노동자들은 솜씨 좋게도 덤프트럭, 소방차, 카고트럭, 지게차, 심지어 샌딩머신까지 끌어내 대열의 선두에 앞세웠다. … 이렇게 4만 가까운 노동자들이 중장비 수십 대를 앞세우고 질서정연하게 거리에 도열하자 노동자들은 사기충천했다. 이 순간, 자본가들은 ‘폭도’로 변한 노동자들의 무질서한 과격투쟁으로 매도하겠지만 그러나 노동자들은 온몸을 휘감는 분노 속에서도 그동안 현대에 빼앗긴 것들과 거꾸로 된 현실을 향해 보다 진지한 모습으로 전진하는 살아있는 인간으로 부활하고픈 강한 열망에 젖어 있었다. … 오전 11시 30분. 드디어 시위대가 거대한 용이 되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약 4킬로미터의 행진대열이 서서히 인간다운 삶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중공업 민주노조 인정”, “임금인상 즉각 실시”, “휴업철회”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고 ‘아리랑목동’의 노래가락이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4만의 노동자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대열들 속에서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장관을 만들고 있었다. 12개사 현대계열사 노동자들이 지나는 연도에는 시민들이 나와 열렬한 박수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을 떠다주고 수건을 건네주는 등 그들도 하나의 흐름 속에 일부가 되어 행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 도도한 흐름을 누가 막을 것인가! 대열의 선두가 남목고개 마루에 이르렀을 때 저만치 4,500여 명의 전경들이 닭장차로 도로를 차단한 채 포진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열이 전경과 약 100미터의 거리에 이르렀을 때 지도부가 시위대를 정지시켰다. 100미터를 사이에 두고 경찰과 노동자 시위대가 맞포진하고 정중앙 노상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의 협상이 이루어졌다. 도경국장과 안기부 소장, 그리고 권용목 의장이 고갯마루 대로 한복판에서 대좌했다. “권 의장 : 경찰병력을 철수하라! 도경국장 : 안 된다. 다시 회사로 철수해 회사 안에서 하라! 권 의장 : 이 상황에서는 대열에 연락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사람들은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집회를 갖고 해산할 수 있는 명분과 공간을 달라. 병력이 철수하면 편도를 이용하여 평화행진을 한 다음 공설운동장에서 반드시 해산하겠다. 도경국장 : 10분만 기다려 달라. 권 의장 : 좋다. 기다리겠다.” 권 의장은 협상결과를 시위대에 전달하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쉬도록 했다. 그런데 10분이 지나도 도경국장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시위대는 10분이 지났으니 밀어붙이자고 아우성이었다. 시위대는 고개까지 행진해 오는 동안 더욱 늘어 어느덧 5만 대군을 이루고 있었다. 노동부 등 여러 관계기관에서 중재를 시도했으나 상황은 중재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5만 군중의 힘, 그것이 발산될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할 뿐이었다. 앞에는 전경과 백골단, 뒤에는 성난 시위대, 그 중간 노상에서는 국내외 보도진 수십 명이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뒤에서 밀고 나오겠다고 아우성치는 긴박한 상황의 10여 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충돌은 엄청난 사상자만 낼 것이었다. 시위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지도부는 목이 터져라 설득하고 밀고 나가려는 시위차량 앞에서 가로막고 드러눕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그들을 깔아뭉갤 기세로 밀고 나오고 있었다. 참으로 피가 마르는 순간이었다. 중장비 경적 소리가 빵빵거리고 의장단이 “밀고 가려면 우리를 넘어서 가라”는 필사적인 설득의 일분 일분이 흐르고 있었다. 권 의장이 도경국장에게 어떻게 되었는지를 따져 묻자 국장은 “이 사람아! 그것을 내가 결정하나? 높은 데에 알아봐야 될 것이 아닌가”라며 허둥댔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협상이 아니라 담판이 필요했다. 권 의장은 철수요구를 다시 한 번 전하고 가부만을 묻기로 했다. 이 최후통첩이 내려진 5분 후 드디어 ‘높은 곳’에서 재가가 떨어졌다. 도로를 차단했던 전경차들이 방향을 돌리고 전경들이 철수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권 의장이 경찰병력이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하자 갑자기 거대한 시위대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경찰병력이 채 철수하기도 전에 노동자들이 앞으로 밀고 나갔다. 순간적으로 지도부의 통제가 무너졌다. 봇물이 터진 듯 밀고 나가는 노동자들의 눈에는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미처 차에 오르지 못한 전경들이 노동자들의 함성에 기겁하고 산으로 내달리고 시위대는 경주라도 하듯이 경찰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었다. 시위대는 안전모, 각목, 방진마스크 등 경찰의 공격에 대비해 무장했던 것들을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길가에 휙휙 날리고 한 걸음이라도 앞서가겠다는 일념으로 내닫고 있었다. 왜 가야 되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렇게 물밀듯 쏟아져 가는 것이 그들의 목표인 양 앞으로 내달을 뿐이었다. 지도부가 인간 사슬을 하고 막아보았지만 추풍낙엽이었다. 마침내 성내삼거리 평지에 다다르면서 시위대의 걸음이 잦아들고 대열이 질서를 잡기 시작했다. 고갯마루에서 성내삼거리 평지에 이르는 약 10분간의 시간은 지도부와 경호대가 질서를 잃고 쏟아져 내려가는 시위대와 철수하는 경찰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 진땀을 흘린 숨가쁜 시간이었다. … 성내삼거리부터는 왼편에 8km에 이르는 현대자동차 담과 오른편에 염포, 양정동의 주택가를 끼고 4차선의 평탄한 도로가 펼쳐져 있다. 지도부는 방송차량을 선두로 빼서 시위대열을 정비하고 질서를 잡아갔다. 연도의 주민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길가로 나와 시위대를 격려하고 더위에 지친 시위대에게 물과 수건을 건네주는 등 환호하였다. 시위대가 강관, 정공, 자동차를 지날 즈음에는 약 6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간간이 휴식을 취하면서 행진을 계속해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이 공설운동장에 이르렀다. 맨 선두의 선봉대열과 맨 마지막 가족부대까지 총 4km의 행렬이 16km의 대장정을 끝내고 공설운동장에 이르렀을 때의 시각은 오후 4시 25분. 중공업을 출발한 지 약 5시간만의 일이었다. … 운동장에 집결한 6만의 노동자들은 완전히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정주영은 물러가라”, “현중노조 인정하라”, “임금인상 단행하라.” 노동자들의 요구가 거대한 함성이 되어 울산을 뒤흔들고, 가족들이 나와 부르는 노랫가락은 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의 시름을 말끔히 씻어주고 있었다. 재주있는 노동자가 나와 솜씨를 보인 즉흥 원맨쇼는 6만 군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고조되어 가는 것과는 별도로 노동부 소장, 안기부 소장 등 관계기관과 막후협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책임성 있는 현대 측의 관계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이렇다 할 결과가 나오지 않자 노동자들은 정주영 회장이 직접 내려와 책임 있는 답변을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서울에 발이 묶여 있었다. 해결의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현대그룹의 책임자가 아니라 정부의 책임자가 등장하면서 교섭은 급진전되었다. 한진희 노동부 차관이 비행기를 타고 급파되어 현장에 나타났다. 정부가 직접 중재에 나선 것이다. 실무협상은 권용목 의장과 노동부 소장 사이에 이루어졌다. 협상진행 내용은 중간 중간 한진희 차관에게 보고되었고, 대강의 구두합의가 이루어졌다. 합의내용 발표는 차관이 직접 하기로 합의했다. 권용목 의장은 협상을 하면서 중요하게 두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나는 당시 전국적으로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이 격화되고 있던 상황을 고려해 정부가 현대측이 부인하고 있는 현대중공업노조를 인정하여 노조민주화 투쟁의 중대한 선례를 남김으로써 어용노조 시비에 돌파구를 여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실질적 사주인 정주영 회장의 경영일선 퇴진을 명백히 함으로써 전문경영인 체제를 현대에 정착시켜 각 단사의 협상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려에 의해 차관과의 합의가 이루어져 합의서에 양측이 서명했다. 현대 초유의 정부와 노동자 간의 역사적 합의내용은 다음과 같다. “합의서 1. 노동부 장관은 현대중공업 이형건 위원장이 이끄는 집행부가 회사측과 공식적으로 단체협약에 임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즉 현중 민주노조를 인정한다.) 2. 임금인상은 9월 1일까지 타결될 수 있도록 정부가 보장한다. 3. 정주영 회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각 계열사 사장들에게 전권을 위임했다는 내용을 보장한다. 4. 위 사항(세 가지)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울산시장 윤세달 노동부 소장 옥치현 안전기획부 소장 이찬희 노동부 차관 한진희 추서 : 지금까지의 모든 사태는 그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을 것이며 8·17 발생한 최루탄에 의한 부상자는 정부 측이 책임을 보장한다.” 그러나 합의내용이 발표되자 노동자들은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야유를 퍼부었다. 합의내용이 두루뭉술하고 분명한 임금인상률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 권용목 의장이 마이크를 잡고 노동자들 앞에 섰다. 집회 도중에도 간간히 연단에 서서 노동자들의 열띤 호응을 받으며 감동적인 연설을 한 바 있는 그는 17일과 18일 양일간의 대투쟁을 뛰어난 지도력과 결단력으로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이미 그는 현대 노동자들의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가 연단에 서서 “이 자리에서 경영실적이 사별마다 다른 실정에서 구체적인 인상률을 정부와 합의하는 것은 무리이다. 더구나 이제 정부가 현중노조를 인정하고 9월 1일까지 임금인상을 보장했으니 남은 것은 우리가 현대그룹과 투쟁을 통해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쟁취하는 것이다. 정부로부터 이러한 보장을 쟁취한 오늘의 투쟁은 우리가 이룩해낸 위대한 승리다”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자 분위기는 일변하였다. 작은 몸집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는 6만 현대 노동자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 어느덧 집회는 승리의 함성으로 밤늦은 울산을 뒤흔들고 있었다. 해산도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사위는 이미 어둠이 깔리고 천지를 뒤흔들던 6만 대군의 물결이 서서히 운동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인간답게 살고자 열망하는 노동자들의 강렬한 투쟁과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의 선두에 섰던 지도부가 이룩해낸 장엄한 투쟁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8월 18일은 현대 노동자들이, 아니 이 땅의 노동자들이 한을 딛고 오늘 이 땅의 주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위대한 탄생이었으며,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내일을 향한 장엄한 진군이었다.[13]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연합거리시위는 독점자본과 정권의 심장부를 강타했고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현노협은 10만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진정한 대표기구로 정착되지 못했다. ‘각 계열사별 임금교섭’이 합의의 기본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현노협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하지만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8월 대행진에 대한 감격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 정권과 자본의 반격 파업이 사업장 경계를 넘어서는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8월 18일 울산 현대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연합거리시위 직후, 정권은 파업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전투경찰이 전국 각지의 사업장에 파견돼 파업을 진압했다. 수백 명의 노동자가 체포되고 투옥됐다. 자본가들도 노동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업 내부에서 자본가들이 조직한 구사대들은 전투경찰의 도움을 받으면서 파업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공격했다. 파업을 주도하던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반격을 위한 정치파업으로 발전하지 못한 파업 물결은 빠르게 약화됐다. 노사 자율원칙에 입각해 개입을 억제하겠다던 전두환 정권은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연대거리시위를 계기로, 거리시위 초동 진압과 불순세력 개입 색출을 공언했다. 이에 따라 8월 19일 금성사 평택공장의 해고노동자 5명을 구속시켰고, 20일에는 마산·창원 지역 투쟁을 이끌던 경남지역노동자협의회(경노협) 의장 등 2명을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했다. 자본가계급의 반격은 노동자투쟁의 대의와 정당성을 훼손하는 데 일차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졌다. 언론은 노동자투쟁의 정당성을 훼손하기 위해 길길이 날뛰었다. ‘외부 불순세력이 개입하고 있다’, ‘파업이 과격 난동으로 번지고 있다’, ‘수출경제가 파괴되고 있다’, ‘실업자 대량발생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 ‘서민생계를 위협하고 있다’ 등등. 언론은 새빨간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전경련의 한 자본가가 “기아기공 근로자들이 부사장을 포클레인 삽에 싣고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위협했다”, “영창악기에서는 사장을 드럼통에 넣고 굴렸다”고 얘기하자 언론이 이를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기아기공 사측은 사실이 아님을 밝혔고, 영창악기에는 애당초 사람을 넣을 수 있는 드럼통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이런 이데올로기 공세에 제때에 정확하고 강력하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자본가계급의 의도대로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투쟁력이 점차 떨어졌다. 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와 함께, 정권은 물리적 탄압을 강화했다. 8월 22일 거리시위를 벌이던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가슴에 최루탄 파편들이 박혀 사망했다. 이석규 열사의 죽음은 투쟁에 떨쳐 일어섰던 노동자계급 전체에 대한 자본가정권의 도발이었다. 이제 사태는 자본가정권 대 노동자계급의 전면 대결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안양지역에서는 민주노조들이 파업 중인 한국제지 공장으로 결집해 7~800명 규모로 공동추모제를 지내면서 계급적 연대투쟁의 모범을 보였다. 하지만 울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는 이석규 열사의 죽음을 자본가정권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강력한 반격으로 전환시켜 내는 데 실패했다. 정권은 28일 이석규 열사의 시신을 탈취하고, 18개 도시에서 예정된 추모집회와 시위를 원천봉쇄했다. 933명을 연행하여 64명을 구속시켰다. 정권은 이석규 열사 장례투쟁을 계기로 폭력탄압을 전면화했다. 강원도 삼척탄좌 정암광업소에서는 완전무장한 경찰 700여 명이 가스차를 앞세워 최루탄을 뿜어대며 파업농성장을 덮쳤다.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같이 농성 중이던 여성과 어린이까지 마구 짓이기고 연행해갔다. 인천 한영알미늄의 100여 농성노동자들도 폭력 탄압의 제물이 됐다. 9월 2일 경찰까지 포함된 구사대가 최루탄을 쏘아대며 농성장에 난입했고 노동자들은 몰매를 맞고 짓밟히며 공장을 빼앗겼다. 열흘째 파업 중이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도 4일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고 135명이 연행됐다.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9월 2일 울산시와 현중자본의 약속파기에 분노해 시청을 점거하고 항의시위를 벌였으며, 럭키 울산공장 노동자들이 재파업에 돌입하기도 했지만 이런 투쟁기운은 부분적일 뿐 전체적인 하강세에 밀려 예전처럼 파급력을 가질 수 없었다. 4일 정권은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을 투입했고, 회사는 무기한 휴업조치를 내렸다. 정권과 자본가들 그리고 이에 편승한 어용노조들의 파업 진화작업이 눈부시게 이루어졌다. 정권은 공권력을 마구 휘둘러대며 노동자투사들을 짓밟았다. 자본가들은 구사대를 동원해 정권과 보조를 맞추는 한편, 온갖 회유와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어용노조를 부추기고 투쟁의 주역들을 해고·전출시켰으며, 감시망을 튼튼히 짜 다음 투쟁을 대비했다. 안절부절 못하던 어용노조들은 두드러진 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권·자본가·어용노조가 맹렬하게 쏟아 붓는 합동 융단폭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투쟁이 급격하게 식어갔다. 9월 1일 하루 쟁의발생건수 233건을 정점으로 하루하루 쟁의발생건수가 줄어들었다. 9월 20일을 전후해서는 불과 몇몇 공장에서, 그것도 아주 소극적인 방식으로 투쟁이 벌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의의 첫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한국전쟁 이후 30여 년 동안 숨죽이고 있던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다시금 역사의 전면으로 일거에 떠오르는 극적인 전환점이었다. 노동자계급은 1987년 대투쟁을 통해 세상의 주인이 노동자임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일손을 놓자 공장이 멈추고 세상이 마비됐다. 노동자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단 한 대의 차도, 단 한 대의 배도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자본가들이나 정부 관료들이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갈 수 있지만 노동자들이 없으면 세상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렇게 1987년 대투쟁은 ‘역사의 주인은 노동자’란 책의 문구를 살아있는 현실로 만들어냈다. 1987년 대투쟁을 통해 노동자계급은 역사의 무대에 당당히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됐다. 1987년 대투쟁은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반영했고, 또한 그것을 한층 강화시켰다. 노동자들은 1980년 광주항쟁 이후 1987년까지 여러 투쟁을 통해 자신감을 키워왔고, 이것은 1987년 대투쟁을 가능케 한 중요한 주체적 조건이었다. 그런데 1987년 대투쟁은 다시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의식을 비약적으로 키웠다. 노동자들은 대투쟁을 통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힘을 확실히 느꼈으며, ‘투쟁하면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투쟁을 통해 승리한 경험은 노동자들을 한없이 고무시켜 1987년 이후 수년간 계급투쟁이 왕성하게 벌어지도록 만든 원동력이 됐다. 노동자들은 1987년 대투쟁 이후 공장 안에서만이 아니라 바깥에서도 작업복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는데, 이것은 노동자들이 1987년 대투쟁을 계기로 자기 계급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둘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전투적이고 폭발적인 투쟁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한국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후발주자로서 자본의 집중성과 응집력이 대단히 강했다. 이것은 1960~70년대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된 울산·창원·포항·구미 등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자본의 높은 집중성과 응집력은 노동자투쟁의 폭발력을 그만큼 증폭시켰다. 그 결과 1987년 대투쟁은 세계를 놀라게 할 만큼 노동자계급의 감추어진 ‘혁명적 잠재력’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노동자들은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법 테두리를 뛰어넘어 공장을 점거하는 과감한 파업을 전개했다. 노동자들은 생산을 멈춰야 자본가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단호하게 공장을 멈춰 세우고 점거농성을 전개했다. 이런 공장점거파업은 “공장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전면에 제기했다. 이것은 조금만 더 전진하면 “이 사회의 주인이 누구여야 하는가?”로 상승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파업대오를 견결하게 유지하고 구사대·용역깡패나 폭력경찰의 침탈을 막기 위해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선봉대·규찰대·정당방위대를 조직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본가권력의 폭력에 맞서 싸우고 결국 노동자 자신의 권력을 건설할 풍부한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맹아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투쟁에서 이기기 위해 강력한 전술을 구사했다. 대기업의 제조업 노동자들은 거리낌 없이 중장비를 앞세우고 거리로 진출했는데, 조직된 부대의 투쟁대열이라는 점에서 노동자투쟁이 얼마나 위력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지 중요한 단서를 보여주었다. 또한 이러한 거리시위 등의 전술구사가 지도부와 대중이 함께 호흡하면서 창의적이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그리고 울산 등 여러 곳에서 노동자들은 시청 등 관공서를 타격하고 점거하기도 했으며, 철도와 고속도로를 점거하기도 했다. 셋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오랜 기간 노동자들의 투쟁을 가로막아온 노조관료제를 과감하게 무너뜨리고 대신 민주노조를 대규모로 건설해 냈다. 1987년 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은 투쟁이 일어난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그동안 자본과 정권의 지원을 받아 존재해온 한국노총이라는 어용 관료기구를 과감히 거부하고 새로운 노동조합들을 수립했다. 바로 민주노조였다. 민주노조는 총회민주주의로 표현되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전통을 기반으로 했다. 현장의 전체 노동자들을 하나로 단결시켰고, 이런 단결을 통해 형성된 노동자의 힘을 과감한 투쟁으로 남김없이 쏟아 부었다. 노동조합의 모든 활동이 철저하게 조합원대중의 참가와 결정에 의지해서 진행됐다. 1987년 대투쟁 이전에 민주노조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던 1970년대 민주노조들은 1981~82년 전두환 신군부에게 각개격파당해 사라졌다. 1984~85년에 세워진 소수 민주노조들도 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아 1986년이면 거의 작동불능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조는 사실상 존재하지 못했지만, 민주노조라는 개념은 노동자대중 속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정권의 탄압 때문에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어떤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잡을 수만 있다면 ‘공돌이·공순이’로 멸시받는 노동자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줄 무엇으로 민주노조를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해 가고 있었다. 1979년 YH 농성과 1985년 구로동맹파업 같은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수백수천의 노동자가 저렇게 얻어터지면서도 미친 듯이 달려드는 데는 분명 뭔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능적으로 느껴가고 있었다. 그래서 1987년 대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공장을 멈춘 뒤 가장 먼저 총회를 열어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1987년 대투쟁의 주요 요구 가운데 하나는 노동자 단결투쟁의 조직적 구심인 ‘민주노조의 건설·사수’였다. 물론 노동자들이 세운 노동조합이 다 민주노조가 되지는 못했다. 1987년에 1천 5백 개, 1989년까지 5천 개의 노동조합이 새로 건설되었지만, 그 가운데 민주노조로 자리 잡은 것은 대략 1천 개 정도였다. ‘민주노조’는 빠르게 대중적인 용어가 됐다. 민주노조는 기본적으로 어용 한국노총과 달리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노조를 뜻했다. 종종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투쟁에 동참하는 노조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빼앗긴 우리 피땀을 투쟁으로 되찾아’ 노동자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줄 노조라는 의미였다. 1987년 대투쟁이 민주노조라는 조직적 성과를 남긴 것은 그 투쟁이 일회성 분출로 끝나지 않고 거대한 사회적 변화로 이어지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행함으로써 노동자를 단결시켜 내고 그래서 노동자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민주노조를, 수많은 노동자들은 목숨처럼 사랑했다. 그래서 전노협과 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민주노조운동의 시대를 열어낼 수 있었다. 1987년 대투쟁의 역사적 경험은 노동자 민주주의를 획득함으로써 노동자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주면 주는 대로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을 감당하면서도 비천한 존재로 무시당하던 ‘공돌이·공순이’들은 1987년 대투쟁 속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움켜쥠으로써 당당한 역사의 주역 ‘노동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1987년 이후 몇 년간의 계급투쟁이 보여주듯이 한국 노동자계급은 민주노조를 발판으로 삼아 경제적·정치적 이익을 위한 투쟁으로 전진해 갔다. 1987년 대투쟁을 통한 민주노조 건설은 노동자계급이 본격적으로 단결해 투쟁하기 시작했음을, 앞으로 경제투쟁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정치투쟁 수준에서도 계급적으로 단결하고 투쟁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렇게 나아갈 것임을 강력하게 예고한 것이었다. 넷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자본가정권, 자본가언론, 보수야당, 중간계급의 계급적 본질을 낱낱이 폭로했다. 1987년 대투쟁은 초기에 ‘불개입’과 ‘중립’이란 위선의 장막을 쓰고 있던 자본가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6월 항쟁으로 입지가 약해진 정권은 노동자투쟁이 불붙기 시작한 직후에는 잠시 사태를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동자투쟁이 거세게 타오르자 숨겨둔 사나운 발톱을 휘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만히 놔둘 경우 노동자투쟁의 불길이 점점 더 자본주의 체제의 존립을 뒤흔들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정권은 맹렬하게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붓고, 폭력적으로 경찰을 투입해 노동자파업을 짓밟았다. 이를 통해 정부가 ‘자본가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자본가들의 집행위원회’라는 것을 만천하에 극명하게 드러냈다. 언론의 본질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노동자투쟁이 불붙기 시작한 처음에는 언론도 ‘노동자들의 처지가 그동안 너무 열악했으며 이런 조건에서 투쟁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노동자투쟁이 예상을 넘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매우 완강하게 진행되자 자본가계급의 스피커라는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전경련으로 대표되는 자본가와 정부, 경찰이 조작해낸 기사를 사실 확인 없이 그대로 보도했다. 온갖 특집·해설·사설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투쟁을 매도하는 이데올로기 폭격을 퍼부어댐으로써 노동자투쟁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노동자들의 사기를 꺾으며, 분열을 조장하고, 고립을 획책했다. 1987년 대투쟁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하던 자유주의 보수야당의 실체도 폭로했다. 이들은 군사정권 아래서 ‘야당’으로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와 억압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자본가계급의 한 분파임을 드러냈다. 이들은 ‘과격시위 자제’ 운운하면서 여당과 협력했고, 군사정권에 맞선 노동자투쟁 국면을 서둘러 대통령선거 국면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대투쟁은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했던 국민운동본부의 상층 중간계급 지도부의 계급적 한계도 폭로했다. 그들 역시 ‘선거혁명으로 민주사회를 건설하자’고 하면서 대파업에 대해 ‘과격 자제’ 운운했다. 그들은 군사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라는 떡고물을 던지자 사실상 투쟁을 포기하고 거리 청소 등 자본주의 질서를 깨끗하게 정돈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그들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둔 채, 선거를 통한 자신들의 지위 향상만을 희망했던 것이다. 이렇게 1987년 대투쟁이 각 계급의 본질을 선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노동자계급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섯째, 노동자가 역사의 주체로 다시 등장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 싸운 투쟁이기도 했다. 1987년 대투쟁이 터졌을 때 현대중공업에는 직영공 1만 5천 명과 사내하청 4천 명이 일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에서 사내하청이 시작된 것은 1973~74년 ‘위임관리제’라는 이름 아래 직영 기능공 73%가 사내하청으로 전환 당하면서였다. 1987년, 56일간 파업을 벌인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사내하청의 직영 전환을 쟁취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 스스로가 노동자대투쟁에 ‘하도급 철폐, 하청의 직영화’를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파업지도부 ‘민주노조개편대책위’는 17개 요구조건 가운데 12번째로 ‘하도급 직영화’를 명시했다. 1987년 이후 현대중공업은 하도급업체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1989년 5월 21일부로 모두 정리하였다. 이때 하도급 노동자들 중 끝까지 퇴사를 하지 않으려고 한 노동자들은 대체로 직영으로 전환되었다. 현대중공업이 하도급을 정리하고 노동자들을 직영으로 전환시킨 가장 중요한 이유는 노동조합의 등장 때문이다. 1987년 현대중공업에 노동조합이 결성된 이후 직영노동자 뿐만 아니라 하도급업체의 노동자들도 모두 하나의 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이들은 조합비도 내면서 하도급 노동자와 직영 노동자의 노동조건의 {차별} 축소, 나아가 하도급 노동자의 직영으로의 전환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회사로서도 한편으로 하도급을 이용하는 이점이 감소하고 다른 한편 당시 조선산업이 심한 불황에 허덕여 인원을 감축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신규채용을 중지하면서 하도급업체를 모두 정리한 것이다. 현재 전체 생산직 노동자 중 약 30~40%가 하도급 출신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중공업에서는 노동운동의 발전이 노동자에 대한 분할지배 제도를 폐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14] 현대종합목재에서는 직영공 60%, 사내하청(8개 업체) 40%가 일하고 있었다. 직영공과 사내하청이 하나의 노조를 건설했고, 초대 위원장으로 사내하청 노동자가 선출됐다. 현대종합목재에서도 사내하청이 직영으로 전환됐다. 현대종합목재에서는 1987년 당시 8개의 하도급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하도급업체는 현대중공업의 하도급업체와 성격이 거의 같은 것으로 현대종합목재에서 설립한 것이었다. 하도급을 운영한 이유는 노무비를 절감하고 인원정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하도급업체에 고용된 노동자의 전체 수는 현대종합목재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의 약 2/3 정도였다. 그런데 1987년 이후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하도급업체의 노동자들이 모두 본사 노동자들과 함께 하나의 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회사에서는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조이고 하도급업체 노동자는 별도의 법인체에 소속해 있으므로 하나의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노사 간의 의견이 대립되자 노동조합은 노동부에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노동부의 답변은 직영노동자와 하도급업체의 노동자가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노동을 하므로 하나의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제1대 노동조합 위원장이 하도급업체에 고용된 노동자 중에서 선출되었다. 하도급업체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직영으로의 전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회사에서는 더 이상 하도급을 이용하는 이점이 없어지리라고 생각하고 점차 하도급업체를 정리하여 1990년 미주가구의 통합을 마지막으로 하도급업체는 모두 없어졌다. 현재는 식당과 청소를 하청회사에 용역을 주고 있는데 하청 소속으로 일하는 노동자의 수는 23명이다. 그리고 임시 및 일용노동자는 거의 고용하지 않아 1991년 6월 현재 일용공만이 2명 있다. 이처럼 현대종합목재는 현대중공업과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의 발전이 회사에 의한 노동력의 분할지배제도를 철폐시켜 노동자의 기업 내의 동질화를 촉진시킨 사례라고 볼 수 있다.[15] ◎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한계 첫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격렬한 전투성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대중의 낮은 계급의식과 노동자정치의 공백이라는 점에서 결정적 한계를 드러냈다. 1987년 대투쟁은 평범한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일으킨 동시다발적인 파업 투쟁을 특징으로 했다. 그런데 이것은 자본가들을 섬뜩한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거대한 파괴력의 원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투쟁이 더 발전하지 못하게 만든 본원적 한계이기도 했다. 이것은 한국의 역사에서 비롯된 약점이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자본의 급속한 축적에는 군대 같은 작업장에서 가혹한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고통이 수반됐다. 이렇게 누적된 노동자들의 고통은 파업의 폭발성과 전투성을 높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각종 혁명 운동과 좌파 운동이 사실상 전멸한 상태였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주체적인 계급의식은 매우 낮았다. 거대한 파업물결 한복판에서 노동자대중을 이끌 능력을 갖춘 노동자정치세력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그룹들은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며 이제 막 태동하고 있던 상황이라, 이 거대한 파업물결을 상대하기에는 사상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아직 그 역량이 너무 미약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의식적·조직적·정치적 측면에서 뚜렷한 한계를 안고 있었고, 그 때문에 더욱 거센 기세로 뻗어나가지 못한 채 전두환 정권과 자본의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공세와 폭력적 탄압에 밀려 수그러들게 됐다. 1987년 대파업 당시 투쟁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전반적으로 임금인상, 민주노조 건설 등 경제적 이익을 위한 투쟁, 즉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 채 임금노예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만 아직 머물러 있었다. 이런 자생적 경제투쟁을 목적의식적 정치투쟁으로 이끌 수 있는 준비된 전략적 지도부도 없었다. 그 결과 1987년 대파업은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날카롭게 각성시키고 반격을 끌어내는 데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패배하고 절실했던 정치투쟁을 성공적으로 전개할 수 없게 되자 경제투쟁조차도 더 이상 제대로 밀고나갈 수 없었다. 둘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언론과 정권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정면으로 맞받아치지 못했다. 자본가계급은 물리적 탄압을 본격화하기 전에 먼저 이데올로기 공세에 주력했다. 원기왕성하게 전진하던 파업물결은 이데올로기 집중포화를 맞자 기세가 꺾여갔다. 자본가계급은 ‘국민경제 파탄’을 위협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민이란 크게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 쪼개져 있고,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을 착취하며 경제와 사회의 주인으로 군림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민경제란 실제로는 자본가들만을 위한 경제, 한마디로 자본가들의 이윤체제일 뿐이다.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고속 성장했지만, 그 성장의 결실은 모두 자본가들에게 돌아갔고, 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 산재의 고통만 쌓여갔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 자본가들이 강탈해간 노동자의 몫을 되찾기 위한 정당한 투쟁이었다. 파탄에 직면한 것은 자본가들의 경제일 뿐이었다.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불법폭력, 과격난동’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이란 경제적 강자인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표현할 뿐이다. 특히 한국 자본주의를 국가 주도로 고속 성장시키는 것이 자신의 과제였던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더욱 그랬다. 자본가들의 법은 아주 초보적인 노동권조차도 철통같이 봉쇄하면서 노동자들의 손발과 입을 꽁꽁 묶어두고 있었다. 따라서 법에 충실하겠다는 것은 곧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에 충실하겠다는 것, 다시 말해 저항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노예로 살겠다는 것을 뜻했다. 노동자계급이 단호한 투쟁으로 자본가법의 족쇄를 깨뜨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혹사시킬 때, 자본가정권이 선봉에 선 노동자투사들을 수배하고 잡아 가두며 고문할 때, 파업현장에 폭력경찰을 투입할 때, 노동자들이 자기방어를 위해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도 정의로운 정당방위 행위였다. 또한 노동자들의 폭력은 본질적으로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것이었다. 노동자투쟁을 파괴하기 위해 구사대의 각목과 쇠파이프,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이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올 때, 결코 물러서지 않고 굳세게 단결해 투쟁한 것, 포크레인과 지게차를 이끌고 노동자들의 거대한 힘을 과시한 것은 ‘낡아서 사라져야 할 것에 대한 단호한 저항’이자 ‘새로운 노동자들의 질서를 세우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자본가계급은 ‘외부 불순세력’과 ‘제3자 개입’을 운운하며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고, 피억압 민중들로부터 고립시키려 했다. 하지만 노동자는 하나이기에 내부 따로 외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끼리 제3자가 될 수도 없다. 자본가들이 분열시키려 하면 할수록 노동자계급은 더욱 굳게 하나로 결합해야 했다. 특히 자본가계급이 떠들어대는 ‘외부 불순세력’이란 사실은 가장 선봉에서 싸우다 해고된 노동자들이거나 헌신적으로 현장투쟁을 지원하는 노동단체들이었다. 또한 노동자계급은 피억압 민중들을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 동참시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그 투쟁의 선두에 설 때에만 완전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가계급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맹렬하게 전개하는 것이 노동자계급이 해야 할 일이었다. 셋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계급적 정치투쟁으로 과감하게 나아가지 못했다. 정권은 6월 항쟁으로 위축돼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7, 8월 노동자대투쟁이 폭발적으로 전개되는 동안 일정 시점까지는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정권은 노사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다. 물론 정권은 노동자투쟁을 거꾸러뜨릴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이석규 열사 장례투쟁을 계기로 정권은 자신의 야수적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자본가언론을 통한 이데올로기 공격을 대폭 강화했으며, 파업현장에 전투경찰을 무자비하게 투입했고, 노동자투사들을 대거 연행하고 구속했다. 이제 노동자계급은 자본가정권과 전면전을 벌이느냐 아니면 꺾이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정권이 전면에 나서기 전까지는 개별 자본에 맞선 개별 사업장 차원의 경제투쟁에서 거의 매번 승리했다. 이것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총노동에게 유리한 정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 총자본으로서 정권이 전면에 나서 탄압을 시작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하나로 굳게 결집해 이에 대항해야 했다. 하지만 노동자운동은 아직 계급적으로 단결해 ‘계급 대 계급’의 전면 대결로 나아갈 만한 의식적·조직적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자본가정권은 이데올로기 투쟁에서만이 아니라 정치투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노동자운동을 강하게 찍어 눌러서 제압해버렸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위협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굳센 각오로 단결해 일어선 총자본 앞에서 단순히 같은 시기에 비슷한 요구를 내걸고 싸웠을 뿐 사실상 개별적으로 주로 개별 자본가들에 맞서 싸웠던 파업물결은 점차 격파될 수밖에 없었다. 넷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단사주의 경향이 연대투쟁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한 족쇄로 나타났다. 1987년 대투쟁의 한계는 특히 조합주의의 한 변종인 ‘단위사업장주의’(단사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단사주의는 ‘제3자 개입’, ‘불순좌경세력의 개입’ 같은 정권과 언론의 선전공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른 공장 노동자들과의 연대투쟁이나 지역 노동단체의 지원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석규 열사 추모투쟁은 계급적 연대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도, 당시 파업 중이던 사업장에서조차 파업농성 과정에서 이석규 열사 추모 프로그램을 진행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파업물결 속에서 만들어진 민주노조들은 울산의 현대계열사 노조들을 빼면 1987년 대투쟁 동안에는 조직적 결집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파업에 참여한 평범한 노동자들의 의식 수준이 초보적인 권리의식과 연대의식을 넘어서지 못하여 ‘외부세력의 개입’, 즉 노동자들이 사업장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계급적으로 단결하고 투쟁하는 것을 불온시하는 정권과 자본의 논리를 과감하게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단사주의는 자본가정권이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강제한 것이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1980년 노동법을 개악하면서 기업별 노조만을 허용해 노동자들이 기업의 장벽을 뛰어넘어 계급적으로 단결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1985년 정권의 탄압에 맞선 구로동맹파업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1987년 대투쟁 당시에도 이데올로기 공세를 통해 노동자들을 기업의 울타리 안에 가둬두려 했다. 1987년 대투쟁 이후 단사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맹렬하게 전개됐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이 추구했던 방향이 훨씬 거대한 규모로 추진된 것이다. 지역 차원의 치열한 연대투쟁을 바탕으로 지역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들이 건설되고, 나아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건설됐다. 반면 이런 단사주의의 한계를 더 강화하고 고착화하기 위한 자본과 정권의 노력도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선봉에 서서 싸웠던 지도자들을 구속·해고하듯이 선봉 사업장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선봉에 서면 피 본다”, “우리 조합원들의 실리나 챙기자”는 단사주의 의식을 노동자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려고 혈안이 됐다. [1]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2권 1989년 -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논장, 210~212쪽. [2] 파시즘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민주적 기본권(사상·양심·표현·신체·결사·집회·시위 등의 정치적 자유권과 사회적 생존권)과 형식(선거·다당제·삼권분립·자유언론 등)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지배세력의 입장과 이해관계만을 사회 전체에 폭력적으로 관철한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볼 때, 파시즘은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쟁취해 온 조직(노동조합·노동자정당)과 권리(노조결성권·파업권·생존권) 등 노동자운동의 모든 성과를 파괴하여 노동자계급을 원자화된 무기력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뜻한다. 군사정권(군부독재)이 파시즘의 한 형태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정과 노동자운동에 대한 전면적 억압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군사정권을 파시즘의 한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고전적인 파시즘은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혁명 근처까지 다다른 상황에서 이를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하며 몰락하는 소부르주아 대중의 야수적 능동성을 전면적으로 동원해 낸다는 특징이 있다. 즉 단지 폭력을 통한 강제만이 아니라 광기에 찬 대중의 동의를 통해 파시즘을 성립시키고 유지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군사정권은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미약한 상황에서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하며 군홧발의 폭력에 주로 의지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군사정권을 파시즘의 한 형태로 간주하기 어렵다. ‘군사파시즘’은 군사정권이 고전적인 파시즘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음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3] 레드 콤플렉스는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과장되고 왜곡된 공포심과 거부감을 말하며, 또한 그를 근거로 무자비한 인권 탄압을 정당화하거나 용인하는 사회적 심리를 말한다. [4] 김영수, 1999, 『한국 노동자 계급정치운동』, 현장에서미래를, 207쪽. [5]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48~53쪽. [6]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53~54쪽. [7] 정병모, 2005, 「조선소 노동자 정병모의 노동운동 야사」. [8]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63~71쪽. [9]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71쪽. [10] 박창수는 1990년에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이 됐다가 다음 해 옥중에서 안기부의 전노협 탈퇴 공작에 시달리던 중 의문사했다. [11] 김진숙, 2007, 『소금꽃나무』, 44~48쪽. [12]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46~48쪽. [13]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94~103쪽. [14] 정이환, 1992, 「제조업 내부노동시장의 변화와 노사관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11~112쪽. [15] 정이환, 1992, 「제조업 내부노동시장의 변화와 노사관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13~114쪽.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2026-02-18 | 조회 1,148 -
[그래, 다시 마르크스주의 연재#4] 국가와 혁명,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계승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 운동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정치 노선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이었다. 자기해방 운동의 전진, 즉 노동자 계급 스스로의 발전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촉진하고 계급 투쟁의 선두에 서서 안내하는 것, 이것이 마르크스가 제기했던 사회주의자들의 역사적 임무였다. 사진: 1917년 6월 러시아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는 자본주의 국가를 대체할 노동자권력의 현실태였다. (편집자 주) 4부. 국가와 혁명,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계승 1. 자본주의 극복과 노동자 계급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분석하면서 마르크스는 갈수록 반동화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체제로 대체될 수밖에 없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특히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발전함으로써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나날이 창출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그러나 사회적, 집단적 생산력을 담고 있는 거대한 작업장과 기계가, 또한 이것들의 전 세계적 생산 연결망이 그 자체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혁명을 가능케 하는 물질적 토대를 제공할 뿐이다. 혁명의 역사적 주체는 오직 살아 있는 인간이다. 이러한 혁명의 주체라는 문제를 간과한다면, 마르크스주의는 대단히 불완전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 주체가 누구인가와 관련해 아주 분명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입장을 개진했다. 바로 노동자 계급이었다. 왜 노동자 계급인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모순의 결과로부터 신음하고 있는 피착취 계급만이 혁명의 담당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갈수록 반동화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중간 계급, 심지어 자본가 계급도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자본가 계급은 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만 자기 이익을 실현할 수 있다. 중간 계급은 약간의 성공 가능성에 마취돼 자본주의에 굴복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은 다르다. 노동자 계급은 갈수록 ‘무산자’의 성격이 확고해진다.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인 노동력을 제외하면, 노동자는 다른 어떤 생존수단도 갖지 못한다. 소기업 같은 소규모 자본이 널리 퍼져 있던 옛날에는 성공해서 사장이 되는 것을 조금은 꿈꿀 수 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그런 가능성은 닫히고 있다. 날 때부터 재벌이나 사장의 아들딸이 아닌 마당에, 평범한 노동자가 자본가가 되는 문은 사실상 닫혀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노동자는 이 체제에서 자신이 더욱 보잘것없고 무기력한 지경으로 추락해 간다고 느낀다. 마르크스는 고통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혁명적 해결책을 단호하게 지지할 수 있는 계급만이 혁명적 과업을 일관되게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점에서 중간 계급은 자격 미달이었다. 왜냐하면 중간 계급은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면서, 유산자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에 미련을 두기 때문이다. 작은 농지나 가게를 갖고 있는 중간 계급은 갈수록 성공 확률이 떨어짐에도, 자신이 보유한 작은 생산수단이나 교환수단에 여전히 미련을 갖는다. 이들은 무산자의 혁명 대신, 유산자로서 성공을 꿈꾼다. 작은 사장에서 큰 사장으로 도약하는 것 즉, 중간 계급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도약하는 것에 미련을 둔다. 반면 노동자에게는 그런 미련이 갈수록 사라진다. 노동자가 작은 가게를 차리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직장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해고된 결과 어쩔 수 없이 택하는 불행한 결과일 뿐이다. 양질의 일자리만 보장된다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자영업을 때려치울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사회의 생산수단 중 더욱 결정적인 부분이 소수 자본가 수중에 집적 집중될수록, 그 반대편에서는 ‘무산자’로서의 노동자의 처지가 더욱 확고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무산자인 노동자에서 유산자인 자본가로 도약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결과 노동자는 유산자가 아니라 무산자로서, 개인이 아니라 단결된 전체로서만 해방될 수 있음을 갈수록 분명하게 느낀다. 모든 생산수단을 사회의 공동 소유로 전환해야만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점이 노동자에게는 갈수록 뚜렷해진다. 이것은 노동자 운동을 혁명적 방향으로 이끄는 박차가 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단결하고, 이 단결의 범위가 확장될수록 노동자에게 ‘함께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생산수단을 사회적 공동 소유로 전환하는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음이 분명해진다고 보았다. ‘모든 노동자가 하나로 단결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때’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공동의 해방의 길이 바로 사회주의라고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자 운동을 하나의 단결된 대오로 조직하는 데 결정적 의미를 부여했다. 가장 결정적인 질문 하지만 노동자 계급을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로 제기하는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몇 가지 주요한 반론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반론은 자본가 계급의 온갖 지배 책략과 힘을 능히 분쇄할 수 있을 만큼 노동자 계급이 강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반론은 결국 ‘혁명의 주인공으로서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불신’을 깔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아주 분명하게 대답했다. 마르크스는 ‘고통받는 것’만으로는 혁명 계급의 자격을 획득할 수 없고, 갈수록 그 힘이 강화되는 계급, 그래서 기존 지배 계급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계급만이 혁명 계급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계급이 바로 그런 계급이었다. 우선 노동자 계급은 갈수록 사회 내에서 다수를 점해 간다. 중간 계급은 몰락해 다수가 노동자 계급으로 전화된다. 산업과 업종은 변화할지라도, 노동자 계급은 모든 곳에서 더욱 결정적인 다수가 되고 있다. 초기에는 광업, 제조업에서 출발했던 노동자들이 의료, 유통, 서비스 등 온갖 산업 분야에서 다수자로 모습을 드러낸다. 사무, 금융, 연구, 기술, 교육, 공무원, 언론 분야에서도 더욱 결정적인 다수가 특권적 피고용인에서 일반 노동자로 급속하게 바뀌고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발전의 실을 따라 노동자 계급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중국,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최근 수십 년 사이에 10억 명이 넘는 새로운 노동자 계급이 탄생했다. 이 숫자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시기 전 세계 노동자 계급을 합한 숫자보다 훨씬 더 많다. 숫자는 노동자 계급이 가진 위력의 일부만을 보여 준다. 더 결정적인 것은 노동자 계급이 가동하고 있는 사회적 생산능력의 규모다. 고도로 집단적으로 조직된 대작업장 노동자 한 명이 가동하는 사회적 생산력은 중간 계급 한 명이 가내수공업이나 농장, 가게에서 가동하는 사회적 생산력에 비해 몇 배, 심지어 수십 배 이상 크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이 전체 사회에서 차지하는 인구 비중에 비해, 노동자 계급이 가동하는 사회적 생산력의 규모는 훨씬 더 크다. 아프리카나 중동의 극히 후진적인 몇몇 나라를 제외한다면,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발전한 나라 대부분에서 노동자 계급이 가동하고 있는 사회적 생산력은 90%에 육박하거나 그것을 상회한다. 이것은 소극적, 방어적 차원에서는 노동자 파업의 힘을 극대화한다. 더 나아가 적극적, 공세적 차원에서 이는 노동자 혁명의 힘, 그리고 노동자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힘을 극대화한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수백만 시위는 노동자 파업과 결합되지 않는 한 자본주의 생산을 결코 타격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력이 결집된 주요 산업에서 전개하는 노동자 파업은 즉각 자본주의 사회를 코너로 몰아붙인다. 게다가 거리 시위는 그 자체로는 대안 사회를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들불처럼 확대되고 혁명적 지향을 띠는 노동자 파업은 새로운 생산 체제를 수립함과 동시에, 국가를 뿌리에서부터 완전히 재조직할 수 있는 위대한 조직, 즉 경제와 정치를 하나로 융합한 ‘노동자평의회’를 잉태한다. 2. 노동자 계급이 역사의 주인이 된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혁명의 괴물이 자라난다면, 자본가 계급은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 노동자 계급의 힘을 줄여 놓으려 발악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혁명을 예방하는 전략을 집행하면, 노동자 혁명을 저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르크스는 그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의 힘을 증대시키지 않는 자본주의 발전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한대의 축적욕과 경쟁이 불러오는 자본의 집적 집중은 노동자를 거대한 규모로 집적하고 집중할 수밖에 없다. 좁은 국내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자본의 필사적인 해외 진출 경향은 노동자 계급을 세계 전반에 확산할 수밖에 없다. 다른 무엇보다 자본의 이윤의 원천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다. 노동자 계급을 지워 버린다면, 자본의 이윤마저 지워진다. 이는 ‘임금노동’의 뒷면이 바로 ‘자본’이라는 사실, 즉 자본-임금노동이라는 관계, 모순, 대립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론이다. 그 점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결정적 힘은 바로 자본 그 자체에서 나온다고 규정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본주의에 맞선 혁명의 주인공인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불신이 거듭해서 등장한다. 심지어는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도 그런 주장이 등장하곤 한다. 그런 주장의 물질적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시적으로 노동자 운동이 퇴보하거나 혁명적 지향을 잃고 비틀거리는 위기 상황, 또는 격렬한 계급 투쟁에서 일시적으로 노동자 운동이 패배한 결과,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힘이 잠시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이런 상황에서 용기와 혁명적 침착성을 잃은 사람들은 ‘노동자 계급에게 안녕을 고할 때’라고 외치면서, 노동자 계급을 대신하는 모종의 새로운 혁명 주체를 고안하기 시작한다. 마르크스의 접근은 달랐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이 혁명의 주인공으로 도약하는 과정은 결코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며, 가장 처절한 계급 투쟁 속에서 이뤄지는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역사적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계급 투쟁, 그리고 이 계급 투쟁 속에서 이뤄지는 전 세계 노동자 계급의 총단결, 나아가서 사회주의라는 혁명적 대안에 대한 확신을 통해서만 노동자 계급은 비로소 혁명의 계급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그런 역사적 과정이 필수적인 이유로서, 그 과정을 통해서만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가 심어 준 오물을 토해 내면서 새로운 공동체 사회를 열 수 있는 위대한 자격과 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 역사적 과정을 촉진하고 맨 앞에서 이론적, 실천적으로 이끌고 안내하는 선봉장이 되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자들의 역사적 역할임을 마르크스는 강조했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 과정은 마르크스의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과정이었다. 착취자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본가 계급의 교활하고도 필사적인 책동이 고도화, 전면화됐기 때문이다. 자본가 계급은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의식을 해체하는 갖가지 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해 왔고 갈고 다듬어 왔다. 개량주의, 조합주의, 관료주의의 영향력을 활용해 노동자 운동을 소부르주아적, 부르주아적 의식으로 마취시키는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 전략은 갈수록 고도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기본 노선은 여전히 옳다. 노동자 계급의 힘은 양적, 질적으로 더욱 강해지고 있다. 노동자 계급의 수, 세계적 연결, 사회적 생산력에서 차지하는 비중 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무산자로서 노동자 계급의 성격, 사회주의 없이는 해방될 수 없는 노동자 계급의 처지도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더 이상 생산력 발전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이 초래하는 불평등의 확대, 야만화 경향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와 함께 개량주의, 조합주의, 관료주의와 같은, 노동자 운동의 거대한 혁명적 힘을 거세하는 내부 요소들에 맞서야만 노동자 운동을 전진시킬 수 있다는 노동자들의 자각도 성장하고 있다, 이런 내부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는 내적 힘을 부단히 성장시켜 갈 것이다. 3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펼쳐진 노동자 운동의 수많은 실천 경험들이 그 길을 안내할 것이다. 아직 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해지지는 못했지만, 최근 200년 사이에 자본주의에 맞서 벌어진 모든 결정적 투쟁에는 노동자 계급이 변함없이 중심에 서 있었다. 앞으로도 그 점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려는 모든 진지한 투사들은 바로 이 노동자 계급을 향해야 한다. 이 노동자 계급 속에서만 자본주의를 때려잡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 투쟁을 통해 노동자 계급이 바로 그 위대한 힘을 자각하고, 자본주의가 심어 준 온갖 오물을 토해 내면서 자신의 힘을 현실화할 때, 아무리 고도한 자본주의 체제의 시도도 결국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것이다. 3. 국가란 무엇인가?(국가의 본질) 마르크스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되지 않은 통합물로 접근했다. 특히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에서 그 점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경찰, 군대, 관료제로 구성된 자본가 국가가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등장하기 이전에, 자본가 계급은 경제적 지배권을 이미 거머쥐고 있었다. 봉건적 생산력을 대체하는 자본주의 생산력이 기계제 대공업과 시장경제의 발전 속에서 이미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상태에서, 자본가 계급은 국가권력을 틀어쥐는 정치 혁명으로 전진했다. 경제 혁명이 정치 혁명에 앞서 이뤄진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봉건제를 철폐하는 자본주의 혁명이 ‘유산자 계급’의 혁명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봉건지주 계급이라는 하나의 유산자를 자본가 계급이라는 다른 하나의 유산자로 바꾸는 것에 불과했으므로, 이 유산자 혁명(부르주아 혁명)에 대한 기존 유산자들(지주계급)의 반발은 상당히 누그러질 수 있었다. 프랑스 같은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상당수 자본주의 국가에서 부르주아 혁명은 봉건지주 계급과 신흥 자본가 계급 사이의 타협 혹은 기존 지주 계급 일부가 직접 자본가 계급이 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봉건지대가 자본주의지대로 전환해 자본가 계급이 거둔 이윤의 일부를 지대로 분배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만 보더라도 자본가 계급과 봉건지주 계급 사이의 타협의 물질적 기초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른 무엇보다도 봉건 체제 내에서 상품교환을 매개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성장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정치적으로 봉건권력이 지배하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성장을 늦추었고, 반대로 급진적 부르주아 혁명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경제적으로 확산하는 것을 촉진했다. 이것은 정치권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본가 계급은 봉건 국가권력을 굳이 타도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수선해서, 나아가서 봉건 국가가 물려준 경찰, 군대, 관료제를 더욱 완성시켜 자본주의 발전을 추구하는 자본가 계급의 국가로 전환시키는 것이 자본가 계급에게 훨씬 유리했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경험은 모든 나라의 자본가 계급을 일깨웠다. 봉건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수립한 프랑스의 부르주아 민주공화정은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했지만, 동시에 프랑스 노동자 계급에게 혁명적 투쟁의 기회를 제공했다. 1848년 혁명, 특히 1871년 파리코뮌의 경험은 그것을 명확히 보여 줬다. 그 뒤 모든 나라의 자본가 계급은 봉건지주권력이 형성해 놓은 반동적 국가권력 즉, 경찰, 상비군, 국가 관료 체계가 다른 누구보다도 자본가 계급 자신에게 유용하다는 점, 즉 원래는 자본가 계급이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이 낡은 반동적 국가권력이 노동자 계급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노동자 투쟁을 진압하는 데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게 됐다. 봉건 국가권력을 타도하기보다는 지주 계급 및 기존 봉건 국가권력과의 정치적 타협을 통해 봉건 국가를 자본가 국가로 점차 개조해 가는 것이 자본가 계급의 전략적 방침으로 자리 잡아 갔다. 계급 투쟁 모든 종류의 유산자 계급의 지배를 철폐하면서 무계급 사회를 열어젖히는 무산자 혁명이 노동자 혁명의 본질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존 지배 계급과의 모종의 타협이라는 것이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 단계에서는 애당초 성립할 수 없다. 우선 사회주의 혁명은 생산수단을 사회화함으로써 자본가 계급을 비롯한 모든 유산자 계급의 착취의 원천을 고갈시켜 버린다. 사회주의 혁명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 이윤을 쌓아 가는 자본가가 존재하는 것은 결코 상상할 수 없다. 공장과 기계, 작업장, 원자재 모두가 사회화된 상태에서 그 어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고용될 것이며, 착취를 허용하겠는가? 바로 그 점 때문에, 혁명이 그 외관에서 평화적으로 이뤄지느냐와 무관하게, 모든 착취 계급은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동원해 사회주의 혁명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개량적’ 방식의 혁명이 애당초 성립할 수 없는 본질적 이유다. 마르크스는 그 점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기존 혁명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거듭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혁명이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근본 혁명’이고, 따라서 이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격렬하고 치열한 계급 투쟁과 함께, 노동자 계급의 힘과 의식, 조직이 엄청나게 높은 수준으로 고양되고 발휘돼야 함을 지적했다. 정치 혁명과 경제 혁명 부르주아 혁명과 달리, 노동자 혁명에서 정치 혁명과 경제 혁명은 동시적으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연결해 진행할 수밖에 없다. 국가권력을 장악해서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전면적으로 대변하고 착취 계급의 반혁명을 진압하는 정치 혁명 없이는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경제 혁명)를 도저히 실현할 수 없다. 우선 사회주의 경제는 개별 기업 수준에서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장악해 스스로 운영하는 방식으로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시도는 있을 수는 있으며, 또한 노동자 혁명의 출발점에서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자본가의 소유권 보호를 본질적 기능으로 삼는 자본가 국가의 탄압과 즉각 맞닥뜨린다. 자본가 국가의 탄압을 넘어서는 정치적 힘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즉, 국가권력이 노동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개별 기업 수준의 노동자 자주관리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다음으로 사회주의 경제의 본질 자체가 개별 기업 수준이 아니라, 심지어는 개별 산업 수준이 아니라 전체 사회 수준에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태내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지만,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제약 때문에 제대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을 전면적으로 해방시키는 데 사회주의 경제의 본질이 있다. ‘세계 혁명’ 없이는 사회주의의 전면화가 불가능한 것도, 바로 그러한 사회주의 경제의 본질적 속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주요한 결정적 생산수단을 사회적 공동 소유로 전환시키지 않고서는 사회주의 경제는 제대로 출발할 수조차 없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통해 국가권력을 노동자 계급의 수중에 틀어쥐고, 이 힘을 바탕으로 모든 주요한 생산수단과 교환수단(가령 은행)을 국유화(사회화)함으로써만 실현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노동자 계급에게 정치적 힘(국가권력 장악)은 곧 경제적 힘(사회주의 건설)이 아닐 수 없다. 반대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경제적 고지를 향해 전진하지 않는다면, 정치적 힘(국가권력 장악)은 곧 부식돼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 계급을 착취로부터 해방시켜 경제의 주인공으로 도약시키는 경제 혁명으로 전진하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은 착취자들의 지배를 경제적으로 용인하는 그러한 국가를 위해 결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동자 혁명에서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은 뗄 수 없는 하나로 결합된다. 어떤 국가든 그 본질은 ‘특정 계급의 정치적 지배기관’이다. 자본가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지배기관이며, 이 국가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독재를 통해 자본가 계급의 착취를 뒷받침하는 것을 본질적 사명으로 삼는다. 노동자 국가도 이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국가란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지배기관이며, 이 국가는 자본가 계급에 대한 투쟁을 통해 모든 계급과 착취를 철폐하는 것을 본질적 사명으로 삼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노동자 국가는 자신의 소멸을 준비할 수밖에 없다. 국가가 계급지배의 기관인 이상, 사회주의 건설의 전진에 따라 계급 자체가 소멸해 간다면 노동자 국가 또한 계급 지배기관으로서의 역사적 소임을 마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계급 사회로 전진하면, 특정 계급의 지배기관으로서의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게 된다. 군대나 억압적 경찰은 소멸할 것이고, 단지 공동체 사회의 운영과 관리, 계획화를 위한 역할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런 역할 또한 더 이상 국가기구의 관료제에 의해 수행될 이유가 없게 된다. 생산 공동체를 대표하는 자들이 운영하는 민주적 기관에 의해 사회가 운영될 것이다. 바로 그 사회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노동자 생산 공동체 사회)’라고 불렀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역사적 과정에 대응하는 정치적 도구를 마르크스는 ‘노동자 국가’라고 불렀다. 이 노동자 국가는 더 이상 억눌러야 할 자본가 계급이 존재하지 않게 됨으로써 자연스레 그 과정에서 축소되고 소멸해 가는 국가인데, 그럼에도 이 국가는 그 탄생 시부터 노동자 대중의 민주적이고 직접적인 통제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더 이상 통상적인 ‘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마르크스는 강조했다. 4. 마르크스의 정치 노선: 국가, 민주주의, 정치 투쟁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긴밀한 결합이란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정치 노선을 수립했다. 마르크스는 정치란 일종의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보면서 정치 투쟁에 기권하며 경제 투쟁만을 강조했던, 다양한 무정부주의 조류들에 반대했다. 그러면서 노동자 계급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정치 투쟁이 사활적으로 중요한 요소라고 거듭 강조했다. 우선 마르크스는 자본가 국가를 대체하는 노동자 국가 건설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갖는 중요성에 주목했다. 비록 노동자 운동의 궁극적 목표가 모든 형태의 국가를 없애는 것일지라도,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정치 투쟁을 통한 정치권력 장악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그 결론에 마르크스가 이르게 되는 데는 노동자 투쟁의 역사적 경험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파리코뮌을 통해 프랑스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와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철폐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 주었다. 바로 파리코뮌과 같은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다. 당시 파리 노동자 계급은 프루동주의 같은 ‘비사회주의적 지도자’들이나 블랑키스트 같은 무정부주의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사회주의로 전진하는 게 아니라 소생산으로 후퇴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맞서고자 했던 프루동주의자들은 은행에 대한 몰수 국유화 대신 자본주의 은행을 보호했다. 블랑키스트들은 노동자 민중의 집단적 힘을 동원하기보다는 소수 음모 집단의 힘에 의존했다. 특히 모든 국가를 악으로 보고 거부했던 무정부주의 입장은 노동자 국가를 수립하는 결정적 과제로부터 도망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파리코뮌에서, 파리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계급적 본능과 현실의 요구에 발맞춰 자신이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찾아 움직였다. 자본가 국가를 넘어서 노동자 국가를 수립하는 데로 전진한 것이다. 노동자 민병대를 근간으로,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이 직접 대표자를 선출해 수립했던 파리코뮌은 노동자 계급 정부로서의 본질을 드러냈다. 비록 충분히 단련돼 있지 못해 사회주의로 직선적으로 전진하지도 못했고, 노동자 국가로서 단호하게 자본가 계급의 반혁명에 대응하지 못해 붕괴하고 말았지만, 파리 노동자 계급이 수립한 파리코뮌과 같은 노동자 정부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결정적 수단임을 마르크스는 간파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정치 노선의 근간이 됐다. 그 핵심은 노동자 국가(권력)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 투쟁 속에서만 노동자 계급은 해방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으로 마르크스는 그러한 정치적 힘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활용하는 정치적 투쟁 또한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란 껍데기 민주주의에 불과하고, 부르주아 선거란 노동자를 지배할 자들을 주기적으로 뽑는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선거나 의회, 특히 언론, 출판, 조직화의 자유를 비롯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노동자의 혁명적 입장을 선전 선동하고,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조직화를 촉진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이라는 점에도 주목했다. 마르크스는 비록 낡은 것일지라도, 그것이 새로운 것이 등장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면, 그 마지막 한 방울까지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투쟁, 즉 대립물의 투쟁의 초기 단계는 낡은 것 내부에서 진행된다는 점을 주목했던 것이다. 낡은 것(부르주아 민주주의)을 대체하는 새로운 것(노동자 민주주의, 노동자권력)이 완전한 모습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낡은 것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격렬한 투쟁의 과정이 일차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낡은 것(부르주아 민주주의)을 통해서는 노동자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대립물의 투쟁이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낡은 것 내부에서가 아니라, 낡은 것 외부에 존재하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사이의 전면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새로운 단계로의 이행, 즉 혁명적 이행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또한 낡은 것 내부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는 낡은 것과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새로운 것을 키워 내고 성숙시키는 역사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활용하되,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포섭되고 그것을 영구적 정치 체제로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허구성과 한계를 폭로하고, 그것을 대체하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운동과 조직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정치적 노선은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정치적 수단(선거, 의회)을 계급 투쟁의 일정한 단계에서 혁명적으로 활용하기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구분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마르크스의 정치적 노선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절대화하고 영구화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운동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구조 바깥에서 건설해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점진적 개량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구분했다. 국가자본주의 체제 마르크스가 제기했던 사회주의는 구소련, 중국, 북한 등 국가자본주의 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가를 노동자 민중이 자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관료 집단이 통제하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사회화는 요원하다. 이런 관료적 국유화 형태는 물론 자유주의와는 확연히 대립된다. 그러나 여기서 국가는 여전히 국가 관료 집단이 통제하는 국가이며, 이 국가는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한다. 이런 체제는 자유주의만큼이나 심지어는 자유주의 이상으로 갖가지 새로운 폐해를 양산한다. 노동자 민중에 의해 집단적으로 이뤄지는 민주적 계획화와 대립되는 관료적 계획화는 갖가지 낭비와 비합리성을 낳아 경제 안정을 위협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여기서 국가는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국가이므로, 경제 발전의 모든 성과는 노동자 민중을 희생시킨 대가로 얻어질 뿐이다.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이런 한계는 코로나19 재난 상황에서도 여실히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관료자본가 계급은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 전염병 발생을 숨기면서 재난 확산을 방조했다. 수많은 노동자 민중의 생명을 담보로 지금도 중국 관료자본가 계급은 관료주의 생산 체제를 재가동하기 위해 모험을 감수하고 있다. 재난에 맞서 노동자 민중의 자주적 통제력을 끌어내지 않고 관료적 강제 조치에 의존한 결과, 여전히 통계 조작이 횡행하고 전염병의 위험은 제대로 차단되지 않고 있다. 북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아예 전염병의 확산 정도, 희생자 규모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런 체제는 파산하는 자유주의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자유주의의 맞은편에 서 있는 쌍둥이에 불과하다. 서방의 자유주의 체제와 구소련, 중국, 북한의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서로가 서로의 존립 근거로 작동하고 있을 뿐, 공히 노동자 민중의 이해 및 사회적 진보와는 대립점에 서 있다. 두 종류의 국가 체제 모두 오늘날 세계가 직면해 있는 위기와 모순을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없으며, 마르크스가 제기한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의 맞은편에 서 있는 변종 자본주의 지배 체제일 뿐이다. 5.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의 정치적 노선은 노동자 계급의 독립적 정당(사회주의 노동자정당)에 대한 강조로 특징지을 수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등장과 계급 투쟁의 고도화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 계급인 자본가 계급, 중간 계급, 노동자 계급 사이의 정치적 대결이 더욱 의식적이고 전면적인 양상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이 세계 역사상 최초로 전면적으로 충돌했던, 프랑스의 1848년 전투는 ‘정당’을 매개하지 않고서도 전투적 서클과 다양한 소규모 조직의 연합을 통해서도 가능했던 사실상의 마지막 전투였다. 두 가지의 결정적인 상황 변화가 일어났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자본가 국가는 경찰과 상비군으로 아직 중무장하지 않은 원시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848년 프랑스 전투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노동자 운동의 혁명적 힘에 놀란 자본가 계급은 봉건 국가로부터 물려받은 경찰과 상비군, 관료제를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체계적으로 강화해 자본가 국가를 정비했다. 무장한 소규모 블랑키스트 서클들의 연합으로는 이런 거대한 자본가 국가와 결코 맞설 수 없었다. 전체 노동자 운동을 하나로 결집시켜 자본가 국가에 맞선 전면적인 정치 투쟁을 이끌 수 있는 강력한 노동자 조직이 필요했다. 바로 노동자정당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억압적, 관료적 장치에 더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교활한 지배가 결합했다.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를 통해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지배기관인 자본가 국가를 ‘국민의 국가’로 둔갑시켰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가기구와 사적(민간) 부문을 긴밀히 하나로 융합해, 자본주의 체제를 보호하는 촘촘한 그물망을 창출했다. 학교, 교회, 언론, 부르주아 시민 조직 등을 총망라하는 사적 부르주아기구들을 육성해, 노동자 계급의 의식을 마취시키고 분열시키려 했다. 이 사적 부르주아기구들은 자본가 국가를 외곽에서 지지 엄호했고, 핵심 지도자들을 자본가 국가에 공급했다. 자본가 계급의 공적(국가), 사적 부문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노동자 계급에 대한 전투를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자본가정당이 떠맡았다. 자본가정당은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지도기관이었고, 그들의 대중적 전위를 하나로 결합해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이끄는 핵심 참모본부였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노동자 운동 또한 훨씬 높은 수준으로 고양돼야 했다.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전위를 결속한 노동자정당만이 부르주아 국가, 부르주아 시민 조직에 맞서 노동자 계급 전체를 하나로 단결시키고 정치적 방향타를 제공하면서 자본가 계급에 맞선 전투를 진두지휘할 수 있었다. 제1인터내셔널, 그리고 이후 국가 단위로 형성된 대중적 사회주의정당들이 그것의 표현이었는데, 마르크스는 여기서 이론적, 실천적 중심으로 분투했다.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란 단결한 노동자 계급의 공동의 이해와 요구의 과학적 표현이었다. 또한 마르크스는 모든 계급 단결 투쟁은 필연적으로 정치 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정당이란 노동자 계급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기관이어야 하며, 나아가서 그 단결은 전 세계 노동자 계급의 총단결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국가별로 나뉜 노동자정당 대신, 국적을 초월해 하나로 단결한 노동자정당(인터내셔널)의 형식을 지지했고 지향했다. 물론 마르크스는 그것에 기계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다. 제1인터내셔널을 해산하고 제2인터내셔널이 수립되기까지 수십 년 동안, 마르크스는 독일의 사회주의 노동자정당을 중심으로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사회주의정당을 건설하는 데 집중했다. 제1인터내셔널 시기와는 달리,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노동자 운동이 이미 대중화된 상황에서는 이것을 반영하는 국가별 사회주의정당들의 토대 위에서 건설되는 인터내셔널만이 세계 노동자 운동을 이끄는 진정한 인터내셔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그 시기에조차 이 사회주의 노동자정당들이 민족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고 세계 노동자 계급 총단결 투쟁의 관점에서 전진하도록, 즉 인터내셔널의 관점에서 전진하도록 고무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관념적으로 설교하거나 노동자 운동에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운동 스스로의 발전을 통해서, 그리고 노동자 운동의 계급적 단결의 확대를 통해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사회주의를 해방의 유일한 길로 선택하게 하려 했다. 이것은 사회주의 사회, 나아가서 공산주의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힘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사회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도약해 나가는 노동자 계급의 발전에 있다는 마르크스의 굳센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 운동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정치 노선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이었다. 그러한 자기해방 운동의 전진, 즉 노동자 계급 스스로의 발전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촉진하고 계급 투쟁의 선두에 서서 안내하는 것,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제기했던 사회주의자들의 역사적 임무였다. 사회주의 사상은 그러한 노동자 계급의 발전을 통해 도달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 계급 해방의 과학적 길이고, 사회주의자의 실천은 바로 그러한 발전의 핵심 과정인 계급 투쟁을 이끄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 두 가지 과제(이론적 과제와 실천적 과제)는 사회주의정당에서 반드시 하나로 융합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결코 완벽하지 않으며,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실천 속에서 더욱 날카롭게 벼려지고 구체화해야 하지만, 이런 마르크스의 노선은 지금까지도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근본 방향을 제시한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방향을 따라, 부단한 이론적 활동과 실천적 분투를 통해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완성해 나가는 것,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를 계승하고 따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늘날 해야 할 역사적 임무다. 6. 이론과 실천의 결합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현실적 의미를 증명해야 한다.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사유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 문제다. …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마르크스에게 이론은 세계를 변혁하려는 인간의 능동적 의지를 북돋는 결정적 무기였다. 이 의지는 추상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관념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물질적 운동 자체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마르크스는 실천 속에서 변화하는 사물과 만나고 치열하게 씨름하는 과정에서만 비로소 사물(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실천 없는 이론’이란 애당초 그에게는 성립 불가능한 것이거나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인간의 실천은 의식적인 능동적 행위이며, 거꾸로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 인간의 의식이 더 멀리 전진하고 현실을 더 정확히 반영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마르크스 철학의 핵심을 그람시는 ‘실천 철학’이라고 불렀다. 이런 접근법은 그 자신의 철학에도 적용된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그의 인생 좌우명이었던 ‘투쟁(실천)’과 뗄 수 없이 연결돼 있다. 마르크스는 투철한 혁명가였다. 그의 분노는 자본주의 착취 체제를 정면으로 향했고, 그의 의지는 공산주의 해방을 갈구했다. 이 분노와 의지는 오직 노동자 계급 속에서만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었고, 마르크스는 이 노동자 계급의 운동과 자신의 실천을 일체화했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자 운동 속으로 자신의 혁명적 의식(사회주의)을 불어넣었고, 반대로 노동자 운동과 함께함으로써 자신의 혁명적 의식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면서 현실 사회의 운동을 더 정확히 의식적으로 포착해 갈 수 있었다. 가령 노동자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의는 파리코뮌을 수립한 프랑스 노동자 계급의 운동으로부터 (마르크스 자신이 말했던 것 그대로) ‘발견’한 것이었다. 잉여가치(착취)에 대한 발견 또한 마찬가지다. 독일 자본가들의 착취에 대한 분노가 없었다면, 또한 ‘영국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관심과 분노가 없었다면, 나아가서 이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으로 떨쳐 일어나지 않았다면, 마르크스는 결코 잉여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케인스는 《자본론》을 읽었지만, “이 따위 책이 어찌하여 그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 아연해진다. 너무나 지루하고 시대착오적이며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가득 찬 책이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이는 그의 지적 능력의 문제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그가 혁명적 실천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부르주아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오직 자본주의에 맞서 노동자 계급과 어깨 걸고 투쟁하려는 사람들에게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 이후의 세계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발전한 모든 사회 형태를 운동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고, 따라서 일시적인 것으로 여기며, 또 그 본질상 비판적, 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도 제약받지 않는다고 마르크스는 규정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사상에도 적용되는 진리였다.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교조적 접근은 결코 마르크스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생전에 마르크스는 현실의 운동을 정확히 포착했지만, 현실의 운동은 결코 멈추지 않았기에 미래의 모든 운동을 마르크스가 미리 발견할 수도 없었고, 대략적인 예측을 넘어 정확히 구체적으로 예견할 수도 없었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 경쟁 자본주의였고, 독점자본은 막 태동하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금융자본과 독점자본의 발전, 그리고 이것이 진화한 국가독점자본, 나아가서 독점자본과 자본수출을 토대로 자라난 제국주의에 대한 이론을 마르크스가 전면적으로 발전시킬 수는 없었다. 또한 마르크스는 노동자 운동이 해방을 향한 실천 과정에서 자신 속에 스며든 자본주의적 요소에 맞선 단호한 내부 투쟁이 필요하다고 인식했지만, 그것이 어떤 구체적 형태로 미래에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 결코 예견할 수 없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실천철학을 계승한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레닌과 트로츠키 등)에 의해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마르크스 생전의 주장을 교조처럼 떠받드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혁명적 관점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현실에 맞게 마르크스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통해서만 비로소 지켜질 수 있다. 마르크스 이후의 실천이 드러낸 것 “혁명이 필요한 이유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지배 계급을 타도할 수 없기 때문일 뿐 아니라, 지배 계급을 타도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낡은 오물을 말끔히 씻어 버리고 새 사회의 토대를 놓는 데 적합해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러시아 혁명을 비롯한 세계 혁명적 노동자 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의 이 짧은 언명의 의미가 더 분명해졌다. 1917년 러시아에서 탄생한 위대한 노동자 국가는 192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관료 집단의 반혁명에 파괴되고 말았다. 1918년, 1923년 독일, 1925~1927년 중국, 1936년 스페인, 1945년 직후 이탈리아, 그리스, 1956년 헝가리 등 수많은 국가들에서 노동자 혁명의 기회가 자라났고, 노동자 계급은 놀랄만한 혁명적 잠재력을 드러냈지만 이 모든 혁명들은 실패로 돌아갔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노동자정당과 노동자 국가, 노동조합 등 노동자 운동 조직의 상층에서 관료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흐름들이 번성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 생전에도 이런 흐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진실한 대중적 노동조합이나 노동자정당이라면, 노동자 대중에 의해 이런 약점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르크스 사후, 노동자 운동 상층에서 발생하는 기회주의적 흐름이 결코 간단히 격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오히려 바로 이와 같은 노동자 운동 내부의 취약성(노동자 운동이 뱉어 내지 못한 낡은 자본주의적 오물)이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는 결정적 버팀목이라는 점이 세계 대공황 그리고 1차, 2차 세계대전과 맞물린 계급 투쟁의 전면화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문제와 본격적으로 씨름하면서 혁명적 이론을 정식화하는 것은 후대 혁명가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레닌은 러시아의 혁명적 노동자 투사들과 결합한 실천적 분투를 통해,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전위들의 결집체인 혁명정당론을 정식화함으로써 이 과제에 응답했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의 파산의 뿌리를 밝히면서, 그에 맞서는 제3인터내셔널의 이론과 실천을 선도했다. 이런 작업은 트로츠키를 통해 계승됐다. 트로츠키는 구소련에서 관료 집단의 반혁명에 맞서 투쟁했고, 그런 실천과 연계해 혁명정당 운동을 제4인터내셔널로 구체화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론적, 실천적으로 완결되지 못했다. 그 미완의 과제를 레닌과 트로츠키, 로자, 그람시의 뒤를 이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이 치열한 실천 속에서, 그리고 이 실천과 긴밀히 연결된 이론적 탐구 속에서 완수하려 분투하고 있다. 거대한 노동자 운동, 그리고 이 운동이 배출한 혁명적 전위들(혁명정당)의 집단적 실천 속에서 진정 마르크스의 사상을 계승하는 혁명적 이론이 발전하게 될 것이다. 7. MZ세대와 마르크스주의 오늘날 한국의 MZ 젊은 세대들이 아직 마르크스주의를 향한 열광을 보여 주고 있지는 않다. 진실을 말하자면, 다수의 젊은 세대들이 경쟁주의의 포로가 되어, 자본주의 사상에 감염되어 있다. 학교 교육에서부터 주류 언론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들이 자본주의 사상에 열광하고 도취되어 있는 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드러내는 착취, 불평등, 전쟁, 야만이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와 불신, 의문을 끊임없이 잉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MZ 젊은 세대들이 점차 자본주의적 대안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주의적 대안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 배경이 될 것이다. 쓰디쓴 실제 경험은 무엇보다 훌륭한 선생님이 될 것이다. ‘MZ세대’가 노동조합을 결성하며 거치게 될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는 건 그 점에서 상당히 흥미롭다. 현재 많은 노조들이 MZ세대를 주요 기반으로 삼고 있음은 물론 사실이고, 그건 주목할 일이다. 하지만 자본가 언론이 부각시키는 노조의 조합원들이 MZ세대의 다수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중 작은 일부인 대기업 사무직, 연구직만을 대표할 뿐이다. 즉, 소위 MZ세대 노조들은 젊은이들 중에서 경쟁에서 그럭저럭 승리한 상층부 젊은이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출신 가정도 상대적으로 중간 계급 가정이 많다. 이러한 상황은 역설적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래에 겪게 될 모순과 변화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 준다. 잠시 경쟁에서 승리한 이들마저 이후 급격한 의식의 변화 앞에 설 수밖에 없다면, 경쟁에서 떠밀린 다수 젊은이들은 얼마나 거대한 변화를 맞이할 것인가? 최근 결성되는 대기업 사무직, 연구직 노조들이 내거는 깃발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직무와 능력에 걸맞은 보상 체계, 성과에 대한 확실한 보상 요구다. 이들은 직무급제, 성과급제 같은 경쟁주의 임금 체계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살벌한 경쟁을 인정한 가운데 ‘공정한 기준’을 적용하라는 것인데, 이게 ‘공정성’으로 규정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생산직 노동자를 비롯한 일반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꾸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민주노총 가입도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이런 노조의 탄생에 대해 자본가 언론과 정부 실세들은 MZ노조가 경쟁과 능력, 업무 기여도를 배제하는 기존 노조와는 달리 임금 체계에 대해 합리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며 큰 기대감을 보인다. 노동자를 분열시키고 자본의 입맛대로 부릴 수 있게 노동조합이 나서고 있으니 박수를 보낼 수밖에. 나아가서 기존 강성 노동조합들을 합리적인 노동조합, 즉 협조적인 노동조합으로, 자본의 정책을 자발적으로 집행하는 노동조합으로 재편할 수 있단 기대감도 숨기지 않는다. 과연 그들의 기대대로 상황이 흘러갈까? 대기업 사무연구직들은 상당히 특권화된 노동자들이었고, 중간 계급 의식에 강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들이 받는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노동의 특수성, 노동 시장에서의 특별한 지위, 고학력, 취업 경쟁 제도 등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그런데 사무자동화와 인공지능 등이 발달하면서, 그들이 누리던 과거의 특권적 지위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고, 안정적인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독립해서 사업으로 성공할 가능성도 거의 소멸했다. 어딜 가도 스카우터의 손길이 기다리던 것도 좋은 시절 얘기다. 이런 불안정성과 기득권 약화는 이들이 임금 인상 요구에 눈뜨고 노동조합이란 뜨거운 감자를 만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 점에서 대기업의 젊은 사무직, 연구직들이 노동조합 결성에 나서게 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중간 계급 의식에 물들어 있거나 노동 귀족적 상태에 있던 상층 사무연구직 노동자들이 그로부터 벗어나 노동 운동에 합류해 들어오는 출발점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본가 언론들의 환영인사는 그 점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노동조합들은 성과급 인상 요구나 자본의 일방통행식 통제 거부 등 골치 아픈 문제들을 일으킬 것이며, 특히 정리해고 같은 공격에 직면할 때 저항할 것이다. 이것은 중간 계급 혹은 노동 귀족적 지위를 가졌던 보수적인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버팀목에서 위험 요소로 변화하게 되는 역사적 과정을 반영한다. 하지만 대기업 사무직, 연구직 노조들의 등장이 자본주의에 위협만 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 귀족적 지위에 있는 노동자들의 조직, 혹은 중간 계급 요소에 강하게 영향받는 상층 노동자들의 조직은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성을 뒷받침하는 부문이기도 하다. 안정성과 기존의 특권적 지위를 위협받는 상층 노동자들이 노동 운동으로 들어올 때 이들은 불가피하게 소부르주아적, 노동 귀족적 오물을 함께 가지고 온다. 노동 운동이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영향력 확대는커녕 퇴보하면서 개량주의적, 기회주의적 추락으로 귀착될 수도 있다. 지금 자본가 언론이 보내는 환호는 그런 기대감과 함께 그렇게 활용하고자 하는 영악한 목적의식을 반영한다. 현재 대다수 언론을 지배하는 목소리는 바로 그런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이자, 자본가 계급의 계획이다. 대기업 사무연구직 노동조합이 갖는 취약성이 그런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그들이 내거는 공정한 경쟁을 통한 성과급제 요구, 그리고 새로운 노조 운동의 외투를 쓴 생산직 노동자들과의 분리주의 요구는 분명 자본주의적이다. 물론 그런 자본주의 의식에 대한 경계는 아주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만이 존재할까? 무엇보다 강력한 삶의 논리 관념적 설교로는 그들을 자본주의 의식으로부터 떼어 낼 수 없다. 하지만 삶의 객관적 논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어떤 관념으로도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그들의 뇌를 두드릴 것이다. 단적으로 성과급제 요구를 들어보자. 그들의 주장대로 경쟁논리를 수용하고 소위 ‘공정한 기준’을 세워 성과급제를 완전하게 집행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조합원 사이에서 피 말리는 경쟁이 일어날 것이다. 아무리 ‘공정한 기준’을 세우더라도, 누구는 승자가 돼 더 많은 성과급을 챙기고, 누구는 패자가 돼 피눈물을 삼킬 것이다. 단순히 임금의 문제를 떠나서, 자존심에 깊은 상처가 생길 것이다. 그 뒤에는 패자 사이에 ‘공정한 기준’에 대한 문제제기와 불만이 터져 나온다. 게다가 스스로 자초한 무한대의 경쟁의 링에서 그들 모두가 엄청난 스트레스와 삶의 질 저하를 맛볼 것이다. 애당초 노동자에게 ‘공정한 경쟁 기준’이란 존재할 수 없고, 경쟁논리를 수용하는 순간 노동자 모두가 자본의 포로가 된다는 점이 그들에게 분명해질 것이다. 그 앞에서 그들은 자신이 가진 관념이 얼마나 위험하고 모순적인지 쓰디쓴 경험으로 배울 수밖에 없다. 바로 거기에 마르크스주의가 그들에게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부심을 갖고 있는 MZ세대 노조를 지탱하기도 힘들어진다. 경쟁과 성과급제에 따른 분열과 대립이 노동조합이라는 집단적 기구의 존립을 지속적으로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그들이 단결과 노동조합을 유지하려 한다면, 다음의 선택지만 남는다. ‘공정한 경쟁의 기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성과급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최소한 개별 성과급이 아닌, 노동조합 내부의 분열의 싹을 최소화하는 임금 체계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은 IMF 때 부모 세대의 경험을 뼛속 깊이 기억하고 있다. 대기업의 안정성이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해고당했을 때의 처절한 고통과 절망을 알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함을 알고 있다. 이 냉혹함은 대기업 취업 경쟁의 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나타났지만, 동시에 해고에 대한 불안과 저항 의지를 잉태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들이 경쟁의 링에서 이룬 승리는 일시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이 든 노동자세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사무자동화, 신기술 등이 그들을 덮치고, 경쟁논리는 그들 자신을 찌르는 날카로운 비수가 될 것이다. 노동조합은 바로 그런 불행한 미래에 대한 버팀목임을 그들은 직감하고 있다. 아직 젊은 그들에게 노동자로 살아야 할 날은 매우 길다. 바로 그만큼 그런 보험은 절실하다. 노동조합은 다른 누구보다도 젊은 노동자들에게 가장 절실한 생존수단이다. 그 결과 일정하게는 반노동자적인 의식과 요구에서 출발한 이 노동조합들은 점차 노동자적인 의식과 요구에 대해 고민하고, 급기야는 그런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 자신의 뼈저린 경험을 통한 변화가 동반된다면, 이것은 그들이 사회주의 의식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소중한 수단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역할 진정으로 새로운 변화를 잉태하는 미래를 여는 것은, 그리고 젊은이들의 삶을 진정으로 대변할 수 있는 건 자본주의 경쟁 제도가 제기하는 공정성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공정성이다. 자본의 착취에 맞서 노동자가 단결해서 주장하는 공정성이고, 자본주의 정치 구조의 위선과 억압에 맞서 주장하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공정성이다. 그 점에서 미래를 이끌어 갈 MZ세대의 의식과 철학, 지향점을 안내해 주고, 그들이 설계해야 할 사회의 도면을 보여 주는 이데올로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나는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와 함께 물질적 힘을 조직해야 한다. 청년의 미래를 노동 운동이 지켜 주고 안내할 수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평생을 자본의 노예로 갈아 넣는 피 말리는 경쟁이 아니라, 노동 운동을 통한 단결된 투쟁에 희망과 탈출구가 있음을 실질적으로, 물질적으로 보여 줘야 한다. 바로 노동 운동의 강력한 집단적 투쟁을 통해서 말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청년 일자리를 정규직으로 제공하도록 자본을 강제하고, 국가가 책임지고 일자리를 보장하도록 노동 운동이 압박해야 한다. 청년 실업자들, 광범한 MZ세대 노동자의 삶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무상주택,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을 둘러싸고 사회적 전투를 감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요구를 내건 MZ세대의 투쟁이 승리하도록 헌신적으로 연대하고 책임져야 한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는 경쟁에서 밀려났던 다수의 젊은 노동자들의 열망과 만나서 하나로 융합하게 된다. 이데올로기와 물질적 운동이 하나로 결합해 자본주의와 자본의 착취, 억압에 맞서는 거대한 젊은 물줄기가 탄생할 것이다. 그 물줄기가 본격화하면, 낡은 부르주아적 공정성 논리에 사로잡혔던 일시적 승리자들, 하지만 영원히 경쟁과 분열의 굴레에 갇혀 살아야만 하는 대기업 상층 MZ세대 노동자들도 기존 틀에서 벗어나 이 흐름에 가세하기 시작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러한 흐름이 꺾이지 않고 전진해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도도한 흐름으로 나아갈 수 있게 안내하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될 것이다. 에필로그: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힘, 마.르.크.스 필자가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접했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36년 전이었다. 당시 이 세상을 이해하고, 나아갈 바를 찾는 데서 마르크스주의는 내게 밝은 등대처럼 다가왔다. 그 뒤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진보 진영에서 사상적 혼란이 발생했을 때도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여전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나의 확신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조금도 약해지지 않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선택이었다. 흔들리는 갈대처럼 살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단단함이 그걸 가능케 했다. 바로 현실 자체에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으므로 현실의 시험대를 훌륭하게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분석한 자본주의의 본질은 지금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가난, 실업, 불평등, 공황, 불황 등과 자본주의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아무리 생산력을 발전시켜도 자본주의 하에서 이런 상황은 조금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자본가 국가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억압, 차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자본가 국가는 갈수록 파시즘에게 문을 열어 주고 있다. 자본주의와 자본가 국가가 존속하는 한, 인류는 야만주의적 퇴화와 계속 씨름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보는 젊은 독자들은 인류가 직면한 위기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길을 고민하는 진지한 젊은이들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고민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 전망을 모색할 때 반드시 의지해야 할 출발점이다. 자본주의에 맞서고자 한다면 마르크스주의가 던진 문제의식과 해결책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 결론이 무엇일지는 물론 독자들의 몫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하고자 하는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쉽게 안내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단순화가 있을 수도 있다. 또한 훨씬 더 정교하고 풍부하게 접근해야 할 중요한 주제들이 피상적으로만 다뤄진 측면도 있다. 그러한 약점들은 젊은 독자들과 노동자들이 스스로 학습하고 더 깊이 있게 마르크스주의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극복해 갈 몫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은 해설서, 그것도 아주 기본적인 원리만을 설명하는 해설서가 아니라 원전 그 자체임을 상기하고자 한다. 마르크스 자신이 쓴 글들을 원전 그대로 읽는 것이야 말로 마르크스주의에 가장 옳게 접근하는 길이다. 부디 이 책이 그렇게 발을 내딛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언젠가 어느 곳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사회주의자로서 함께 투쟁하면서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필자에게 가장 커다란 기쁨이 될 것이다.2026-02-11 | 조회 2,602 -
[번역] 레닌의 『국가와 혁명』의 적실성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1871년 파리 코뮌이 보여주었듯이 노동 계급의 권력 장악이란 부르주아지가 운용하던 관료적·군사적 국가 기구를 단순히 넘겨받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보여 준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노동 계급은 후퇴하고 사회 혁명은 거의 전적으로 부재한 탓에, 좌파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조차 레닌이 주장하는 내용이 사실상 낯선 것이 되어 버렸다. 일당 체제, 그리고 어디에나 스며 있는 관료제의 지배는 레닌과 이후에 트로츠키가 스탈린주의에 맞서 옹호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아래 글은 아르헨티나 사회주의 사상 연구소(IPS)에서 곧 출간될 V. I. 레닌의 『국가와 혁명』(The State and Revolution) 스페인어판 신간에 실린 크리스티안 카스티요의 서문이다. 『국가와 혁명』은 레닌이 1917년 8~9월에 쓴 글이다. 이때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여 역사상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수립하기에 이른 혁명적 위기의 직전이었다. 역사적인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이 글은 미완으로 남았다. 레닌은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 1917년 2월부터 8월까지 벌어진 일에 대해서 끝내 쓰지 못했다. 은신 중이던 레닌은 이 결정적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의 국가 개념을 명료하게 세우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에 핵심 쟁점이었고, 카를 카우츠키 같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주요 이론가들은 이 문제를 온갖 혼란과 왜곡으로 오염시켜 놓았다. 이 지도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회 계급과 함께 국가도 “소멸”(extinguished)할 것이며 그것이 어떤 자의적 결정에 따라 “폐지”(abolished)될 수는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언급하지 않은 한 가지는, “소멸”하는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가 아니라 혁명 이후 등장하는 국가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 계급 권력의 도래가 곧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 더 정확하게는 그것의 근본 기둥인 관료제와 군사력의 파괴를 함의한다고 보았다는 점도 그들은 숨겼다. 따라서 『국가와 혁명』은 당대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의 지배적 견해(당시 러시아 멘셰비키의 견해와 견줄 만한)를 교정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입장을 면밀히 재구성해서 담고 있다. 1871년 파리 코뮌이 보여주었듯이 노동 계급의 권력 장악이란 부르주아지가 운용하던 관료적·군사적 국가 기구를 단순히 넘겨받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국가와 혁명』은 보여 준다. 그것은 국가 기구를 완전히 파괴한 다음 성격이 전혀 다른 새로운 기구로 대체하도록 요구한다. 말하자면 소수의 자본 소유자들이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지배할 수 있도록 구조가 설계된 부르주아 국가를 노동 계급이 그저 “점유”하는(occupying)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 계급은 부르주아 국가를 노동자의 지배에 적합한 다른 종류의 국가로 대체해야 한다. 파리 코뮌은 상비군과 경찰을 무장한 대중으로 대체했다. 코뮌 구성원들은 그 어떤 정치 공직자도 숙련 노동자보다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없으며 공직자는 선거권자들에 의해 언제든 소환될 수 있음을 확고히 했다. 국가 행정부의 집행 기능을 선출된 대표들이 직접 수행함으로써,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이 외부에서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부르주아 의회들의 “순전한 사기극”과 달리 코뮌은 “일하는 단체”가 되고자 했다. 계급 사회를 종식시키는 과정 속에서 노동자 국가는 정치·경제 업무를 관리하는 일에 점차 사회 전체를 참여시킴으로써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폐지”하게 될 것이었다. 레닌의 이 책이 어째서 지금도 유효한가? 최근 수십 년 동안 노동 계급은 후퇴하고 사회 혁명은 거의 전적으로 부재한 탓에, 좌파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조차 레닌이 주장하는 내용이 사실상 낯선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사회주의/공산주의와 관료적 전체주의의 중요한 차이점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후자는 레닌이 열망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연방에 관료적 전체주의라는 어둠이 내려앉은 데는 몇 가지 핵심 요인이 작용했다. 10월 혁명은 고립되었고, 내전 중에 혁명 간부들과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사망했으며, 러시아 사회가 전반적으로 “후진성”을 벗지 못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 현실은 혁명 이후 탄생한 새로운 국가가 관료화하도록 추동했다. 일당 체제, 그리고 어디에나 스며 있는 관료제의 지배는 이후 발생한 20세기의 혁명들에 “본보기”가 되었으나, 이는 레닌과 이후에 트로츠키가 스탈린주의에 맞서 옹호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오늘날 정치 지형은 자본주의적 지배가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변호하는 두 부문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보통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첫 번째 부문은 부르주아 국가의 기능을 치안과 통제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기업들이 더 전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모든 사회적 권리를 폐지하려 한다. 동시에 그들은 2008년 위기에서 보았듯이 거대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국가를 대규모 부채로 몰아넣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자들이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두 번째 부문은 국가가 계급 화해 기관이라는 국가 숭배(fetishism)를 고수하면서 그것이 지배 장치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숨긴다. 승리한 사회 혁명 없이 수십 년이 흘러온 지금,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어떤 진보적 변화든 국가라는 틀 안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진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대다수 사람이 갈망하는 변화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만 성취할 수 있다고 여겨지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그 자체”로 신비화되었다. 그러나 진실은 이러하다. 여러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는 대중 운동(movilizations), 항거(Revolts), 혁명 운동들이 전면적 혁명 과정으로 전환되면 봉기한 노동자 대중의 권력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는 기구들이 틀림없이 발전해 나올 것이다. 파리 코뮌과 러시아의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이 지배 계급의 탄압에 맞서 자기방어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권력의 여러 표현 형태를 보여 주었다. 러시아의 경우, 소비에트는 투쟁하는 노동자·농민 공동전선의 가장 위대한 표현으로 출발했고, 혁명 승리 이후에는 새로운 국가 권력의 토대로 변모했다. 이는 파리 코뮌의 교훈과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제시한 전망에 근거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모든 혁명다운 혁명은 이 같은 기구들의 출현을 수반할 것이며, 자본주의 국가의 억압적 성격을 드러낼 것이다. 레닌과 이후에 트로츠키가 분명히 하고자 했던 또 하나의 쟁점은, 가장 개방적인 자본주의 민주주의보다도 “천 배 더 나은” 민주주의를 구현할 새 국가의 물질적·경제적 토대였다. 레닌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발전은, 실로 “모두”가 국가 행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전제 조건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전제 조건들 가운데 몇몇은 다음과 같다: 가장 선진적인 여러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미 달성된 보편적 문해력, 그리고 우편·철도·대공장·대상업·은행업 등의 거대하고 복합적이며 사회화된 장치에 의한 수백만 노동자들의 “훈련과 규율”, 등등. 이러한 경제적 전제 위에서 “자본가들과 관료들을 타도한 다음, 즉각, 하룻밤 사이에, 생산과 분배의 통제, 노동과 생산물의 계산 업무에서 그들을 무장한 노동자들, 무장한 인민 전체로 대체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 뒤, 레닌은 이렇게 덧붙인다. 계산과 통제—그것이야말로 공산주의 사회의 첫 단계의 “원활한 작동”, 올바른 기능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다 … 중요한 것은 그들이 평등하게 일하고, 자기 몫의 일을 하며, 동일한 임금을 받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계산과 통제는 자본주의에 의해 극도로 단순화되어, 지극히 단순한 작업으로, 즉 문해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감독, 기록, 사칙 연산, 적절한 영수증 발급으로 축소되었다.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자. 과학 기술 일반, 특히 의사소통 기술이 혁명적으로 발전한 21세기의 우리는 레닌이 언급한 것보다 훨씬 우월한 전제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텔레비전, 라디오, 컴퓨터, 휴대전화, 소셜 네트워크는 수백만 명의 사람에게 정보를 쉽게 전달하고 어떤 경제적·정치적 결정을 내릴지 토론하도록 돕는 수단들이다. 이러한 기술들은 경제 자원을 민주적으로 계획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며, 불평등을 점진적으로 제거하고 노동일을 단축하여 과학적·문화적 지식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에게 도달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 물려받은 비합리성을 이 같은 민주주의 안에서 오래지 않아 억제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사회에서는 다세대 주택과 빈민가에 빽빽하게 몰려 사는 수백만 명을 위한 주택 대신에 아무도 살지 않을 집을 짓자는 계획 따위는 제안할 수 없을 것이다. 수억 명이 굶주리는데 한 줌의 인간이 수십 년 쓰고도 남을 부를 축적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라면, 어떤 사람들은 하루 10시간, 12시간 일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일거리를 얻지 못하고 생존하기 위해 복지제도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깨달을 것이며, 그 대신 더 분명한 계획으로 모든 가용한 일을 모든 가용한 노동자에게 나눌 것이다. 누구도 실업 상태로 남지 않고, 누구도 과로하지 않을 것이다. 소수의 배를 불리기 위해 지구의 미래의 삶을 저당 잡아 환경을 파괴한다는 발상은 한심하게 들릴 것이다. 물론 이 사회는 아직 공산주의는 아니며, 우리는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에서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라는 분배 원칙으로, 다시 말해 “필연의 영역에서 자유의 영역으로” 옮겨 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적 착취가 낳은 모든 치욕과 추악한 것들을 사회에서 철저히 씻어내고 더 전진하기 위한 필수 단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 구성원 전체, 또는 적어도 압도적 다수가 스스로 국가를 운영하는 법을 배우고, 이 일을 자기 수중에 쥐고, 보잘것없는 소수 자본가와 자본주의적 악습을 보존하려는 지주 신사층과 자본주의에 의해 철저히 부패한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를 조직하는 그 순간부터, 어떤 형태의 정부든 그 필요성은 완전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민주주의가 더 완전할수록, 그것이 불필요해지는 순간은 더 가까워진다. 무장한 노동자들로 이루어지고 “더 이상 엄밀한 의미의 국가가 아닌” 그 “국가”가 더 민주적일수록, 모든 형태의 국가는 더 빠르게 시들어간다. 2008년 이후 자본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다. 새로운 세대는 이 체제가 자신들에게 점점 더 어두운 미래만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착취하고 억압하는 이 체제에 맞서서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에게 사회주의적·혁명적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투쟁의 목표를 분명히 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2019년 10월 10일, 일간좌파에 스페인어로 처음 게재됨. 2019년 11월 4일, Left Voice에 게재된 영문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Christian Castillo2026-02-09 | 조회 3,066 -
[한노운사 연재 4회] 1부 폭압과 저항(1970~1987) [3] 민주노조운동의 파괴와 재건광주를 학살한 전두환 신군부는 모든 민주노조를 파괴했다. 쓰라린 피눈물을 딛고 노동자들은 정권에 맞서 함께 싸우지 못한 것을 통렬히 반성했다. 새로 등장한 민주노조들은 구로동맹파업을 통해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으로 무장한 새로운 민주노조운동의 길을 열었다. 1) 신군부의 폭압과 노조파괴 광주민중항쟁을 잔인하게 진압한 전두환은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임의기구의 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사실상 대통령 노릇을 시작했다. 광주를 학살한 군사정권의 폭압이 이제 전 사회를 휘감았다. 8월 27일 체육관 간선을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된 전두환은 10월 27일 공포된 개정 헌법에 따라 1981년 2월 25일 다시 체육관 간선으로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개정 헌법에 따라 비상 입법기구로 등장한 국가보위입법회의(국보위)는 대통령 전두환이 임명한 81명의 의원들로 구성돼 1981년 4월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행할 때까지 6개월 동안 정치활동규제법, 언론기본법, 집회시위법, 노동관계법 등 189건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특히 국보위는 기업별 노조 체제로 전환, 제3자 개입금지 신설, 노조설립 요건 강화, 노조임원 자격 제한, 조합비 사용 제한, 노조운영에 대한 행정개입 확대, 단체교섭권 위임 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쟁의 냉각기간 연장, 직권중재 대상 확대, 노사협의회 설치 등의 내용으로 근로기준법·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노동위원회법을 개정하고 노사협의회법을 신설했다. 전두환 정권은 사회 전반을 상대로 한 이른바 ‘정화’ 조치에 노동조합을 포함시켰다. 1980년 8월 21일 발표한 노동조합 정화 지침에 따라 한국노총 및 산하 산별노조 위원장 12명을 바로 사퇴시켰다. 한국노총 지역지부 105개를 모두 해산시켰다. 노동계 인사 191명을 정화 대상자로 지목해 현장복귀를 지시했다. 특히 1980년 9월 원풍모방 지부장을 정화 조치하고, 12월에는 조합원 40명을 계엄사로 끌고 가 협박과 폭행으로 사표를 강요했다. 그중 일부는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다른 노조에서도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는데, 최소 22명의 노조간부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있다.[1] 1981~82년 전두환 정권은 청계피복, 반도상사, 해태제과, 콘트롤데이타, 서통남화전자, 태창메리야스, 원풍모방 등 민주노조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1981년 1월 6일 청계피복노조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리고 노조 사무실을 폐쇄했다. 1월 30일 조합원 21명이 ‘아시아·아메리카 자유노동기구’(아프리) 농성에 돌입했지만,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 해산하고 12명을 구속시켰다. 1981년 3월 반도상사, 1982년 7월 콘트롤데이타에 폐업을 강제하여 노조를 해산시켰다. 원풍모방노조가 굴복하지 않고 계속 저항하자, 1982년 9월 회사의 사주를 받은 사원 100여 명이 노조 사무실을 점거해 노조 간부들을 폭행하고 기물을 부쉈다. 조합원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가자, 9월 30일 밤부터 추석날인 10월 1일 새벽까지 전투경찰이 합세해 노동자들을 잔인하게 끌어냈다. 경찰은 노조 간부 전원을 전국에 지명 수배했다. 원풍모방 노동자들이 10월 7일과 13일 회사 앞과 영등포 일대에서 거리시위를 벌이자 경찰은 수십 명의 노동자를 구속하거나 구류에 처했다. 회사는 574명을 해고했다. 11월 12일에는 핵심 간부 11명이 전원 체포됐다. 원풍모방 노조의 파괴로 1970년대 민주노조들에 대한 파괴가 일단락됐다. 이렇듯 모든 민주노조가 차례로 탄압을 받고 줄줄이 해산됐지만 민주노조들은 각개격파 당하면서도 연대투쟁의 깃발을 올리지 못했다. 1981년 청계피복노조 사수투쟁부터 1982년 원풍모방노조 사수투쟁까지 개별적인 투쟁으로 저항할 뿐이었다. 신군부의 탄압에 밀려 무기력하게 해산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 주체들은 무엇보다 연대투쟁에 나서지 못한 운동의 한계를 뼈저리게 절감했다. 특히 청계피복노조는 해산을 당한 이후 자기비판 문서를 공개 발표했다. 철저한 반성을 다짐하고 제안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당국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계속되는 탄압에 우리는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직 조직보존을 위해서 뒷걸음질 쳐 왔다. 언젠가 계엄령이 해제되고 사회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면 그동안 입은 타격을 곧 회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그렇게 해왔다. 또 반도상사 노조 파괴를 보면서 가슴아파하면서도 한편 우리의 조직이 붕괴되지 않음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우리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공포심에 우리도 예외 없이 짓눌려 당국의 탄압에 저항을 못했다. … 우리의 조직을 약화시킨 요인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2]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YH 노동자들이 보여준 결기처럼 한편으로 엄청난 힘을 가진 운동이었다. 그런데 자기 사업장 조합원들끼리는 강력한 결집력을 가졌음에도 다른 사업장 민주노조가 탄압으로 해산되는 상황에서 연대투쟁을 할 수 없는 장벽에 갇혀 있었다. 생존권 투쟁은 처절하게 할 줄 알지만, 정권에 맞선 연대투쟁·정치투쟁은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청계피복노조가 한 반성의 의미는 ‘언젠가 우리에게 민주노조 할 기회가 다시 온다면 그때는 다르게 하리라’는, 특히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을 할 수 있는 민주노조운동을 하리라’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해산당한 조합원 가운데 상당수가 새로운 사업장으로 가서 구로공단과 인천 등에서 새로운 민주노조들의 밀알이 됐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중요한 씨앗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구로동맹파업에서 핵심 사업장이었던 대우어패럴노조의 위원장이 바로 청계피복노조의 조합원이었다. 연대투쟁을 당연한 과제로 받아들였던 구로공단 민주노조들의 방향은 청계피복노조의 반성에 기초하고 있었다. 2) 다시 일어서는 노동자들 폭압을 이어가던 전두환 정권은 1983년 2월부터 12월까지 구속자 석방, 사면·복권, 제적생 복교, 대학 상주 경찰의 철수, 해직교수 복직 등의 정치적 유화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했다. 집권 안정기에 들어섰다는 자신감, 탄압의 효력 감소, 1983년 11월 미국 대통령 레이건 방한을 대비한 분위기 조성 등이 그 이유였다. 군사정권의 유화조치는 민주화 투쟁이 다시 활성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노동자들의 투쟁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1983년 9월 전두환 정권 아래서 최초의 공개 운동단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창립됐다. 1984년 3월에는 수도권 해고자들이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복)를 창립했다. 노복은 기관지 <민주노동>을 발행하면서 블랙리스트 철폐투쟁과 노동악법 개정 투쟁에 주력했다. 1981년 강제해산 당했던 청계피복노조가 1984년 4월 ‘법외노조’로 복구를 선언하고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청계피복노조는 합법성 쟁취를 위해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며 다시 한 번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에 섰다. 택시노동자들이 뒤를 이었다. 택시노동자들은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하루 18시간을 일하면서도 한 달에 사흘밖에 쉬지 못했다. 과도한 사납금을 채우기 위해 목숨 걸고 과속운전을 해야 했다. 1984년 5월 대구의 택시노동자 1천여 명이 사납금 인하, 노조결성 방해 중지, 취업카드제 철폐 등을 요구하며 대구시청 앞 등 중심가를 차량으로 봉쇄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당황한 대구시는 사납금 인하 등 택시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을 수락한다고 발표했다가 농성이 해산되자 약속을 뒤집었다. 택시노동자들이 다시 대구택시사업조합 이사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자 경찰이 출동하여 농성을 해산시키고 65명을 연행했다. 대구에서의 파업은 가라앉았지만, 부산·대전·강릉 등 여러 도시로 택시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됐다. 1984년 하반기 대우자동차에서는 노조민주화 세력이 집행부 불신임을 추진한 것과 관련해서 2명이 해고당했다. 1985년 4월 대우자동차의 2천 200여 노동자들이 임금 18.7%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농성이 사흘째 계속되자 대우그룹 총수 김우중이 직접 나서서 해산을 요청했지만 노동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회사측이 주말을 이용해 휴업을 선언하려 하자 강제진압에 대비해 350여 명이 기술센터 3층을 점거했다. 조합원들의 들끓는 열기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파업을 선언하고 어정쩡하게 농성장을 지키고 있던 노조집행부가 더 이상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고 빠져나갔다. 민주파 대의원들이 이미 실질적인 지도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결국 파업 9일 만에 김우중 회장과 민주파 대의원 대표가 16.4% 임금인상에 합의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대우자동차 임금인상투쟁은 대자본에 맞선 투쟁이었기에 사회적으로 관심이 많았고 언론에서도 날마다 보도했다. 대우차 투쟁의 승리는 다른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을 강력하게 자극했다. 학생출신 활동가와 노동자대중의 유기적 결합을 보여주었으며, 남성 중심의 대공장 노동자들도 조직적으로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 3) 1985년 구로동맹파업 오늘날 구로디지털단지가 있는 구로동과 가리봉동 일대에는 1965년부터 구로공단이 있었다. 1980년대에는 섬유산업과 전자산업을 중심으로 8만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수도권 최대 규모 공단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이 다수인 구로공단 노동자들은 욕설과 폭행, 성희롱이 난무하는 인간 이하의 삶에 시달리고 있었다. 임금은 1인 최저생계비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1984년 6월 구로공단에 자리한 대우어패럴에서 민주노조가 결성됐다. 사측은 노조간부 회유·협박, 흑색선전, 노조탈퇴 강요, 노조반대파 조직, 구사대를 동원한 조합원 폭행, 라인축소, 납치·감금 등 온갖 수법으로 노조를 파괴하려 했다. 집요한 탄압 때문에 1천 400여 명이던 조합원이 1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한국노총 위원장실 농성, 민한당사 농성 등을 통해 완강하게 맞서면서 노조를 지켜냈다. 대우어패럴에 이어 대한마이크로,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효성물산, 협진, 유니전 등에서 속속 민주노조가 결성됐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서 배출된 노동자출신 활동가들과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각 사업장에 들어가서 끈질기게 선진노동자들을 조직해 나간 활동의 성과였다. 대우어패럴에는 여러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들어와 있었던 사람은 최한배였다. 최한배는 생산현장에 취업한 것이 아니라, 보일러 기사로 취업했다. 그는 동화교회 야학에서 만나오던 김준용이 군에서 제대하자, 대우어패럴 입사를 권했다. 1982년 김준용은 대우어패럴 재단사로 입사하면서 현장활동을 시작했다. 이 두 사람은 현장활동에 대한 모든 것을 공유하며 논의했다. … 현장활동을 활발히 하던 김준용은 대우어패럴에 들어와 있던 … 학생출신 활동가, 추재숙(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화자(JOC) 같은 여러 활동가들의 동선을 파악하면서, 관계를 만들어 갔다. … 활동가들의 만남이 진행되는 다른 한편 대우어패럴에는 노동자들의 여러 소모임, 친목모임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중활동의 중심에 김준용이 있었다. 김준용은 청계피복노조에서의 활동경험을 살려 남성노동자, 여성노동자 그리고 소속 라인을 넘어 현장 어디서나 노동자들과 편하고 쉽게 사귀었다. 김준용은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술모임, 등산모임, 축구모임 같은 친목모임을 여럿 만들어 노동자들과의 관계를 넓혀갔다. 그 가운데 열성을 가진 사람들은 소모임으로 모아 노동자의 권리, 노동조합에 대한 학습을 하기도 했다. 학습모임은 최한배가 운영했다. 학습소모임 가운데 ‘호롱불’은 가장 열성적이고 적극적인 노동자들이 모였으며, 그 성원들은 대우어패럴 노조결성과 활동의 중심인물로 성장했다. 1년에 걸친 활동 결과, 1984년 김준용을 중심으로 어떤 활동이든 참여하는 노동자가 100명이 넘었다. 이들이 노조결성 뒤 자본가의 탄압에도 끝까지 노조를 사수하는 핵심성원이었다. … “… 김준용이 『전태일 평전』을 나한테 줬어요…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내가 좀 감동을 받았지…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싶기도 했고 그걸 읽고 ‘노동조합이란 게 필요한 거구나 회사에…’ 그때부터 준용이하고 같이 움직이게 된 거죠. … 청계천 쪽에 가면서 그런 거를 많이 접하게 됐죠. 유인물이나 어디서 데모를 하는지 가두행진을 한다든가 그런 정보를 알게 되고 전태일 기념관도 가게 되고, 홍제동 성당에서 집회 있으면 쫓아다니고 하면서 문익환 목사도 알게 됐죠. 우리도 ‘노동3권이라는 게 참 필요한 것이다’ 알게 돼서, 그런 쪽으로 책을 많이 읽었어요. … 전공투, 자본주의의 이론 책자를, 노동운동에 대한 거였어요. … 그러면서 따로 모임을 가지고. …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이 결성하게 된 힘은 소모임을 통해서 결속력을 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돼요.” … 강명자는 지역소모임에 참여하면서 노동자의식과 현장활동에 대해 배우면서, 그 모임에서 배운 방식으로 현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소모임을 만들어 책읽기, 현장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거나 놀러 다니면서 친목을 다지기도 했다. “나는 의식은 있고 계속 내 공부 모임하면서 … 대우에서 일하는 사람들하고 소모임을 만들었죠. 그러면서 이제 (내가 읽은 것과) 똑같이 『어느 돌멩이의 외침』 이런 것들을 읽으면서 독후감을 각자 써와서 발표하고, 자기 느낌들을 이야기하고, 놀러도 다니고 …”[3] {1985년 무렵 구로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지역활동을 벌인 것은 여러 사업장 관계를 맺고 있던 A지역그룹이었다. 이들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기업별 노동조합 체계를 극복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계급적 정치의식 확보를 활동방향으로 삼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노동자의 상태와 조건에 입각하여 활동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구로공단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통해 ‘공단 자체를 단위로 한 실천’을 모색했다. 이들은 소모임 내 활동가들을 공단 내 업종의 특성을 고려하여 섬유·전자 사업장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따라서 대우어패럴, 가리봉전자 같은 민주노조와 중간노조·어용노조가 있는 남성전기, 롬코리아, 부흥사 등에서 직접적으로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 A지역그룹의 경우 공장단위에서 벗어난 공단 단위의 교육-훈련 체계를 노동자 소모임(지역 소그룹)으로 구상했다. 이 소모임은 강사, 학생, 학습 프로그램을 지역적 차원에서 공동으로 조직한 점과 다양한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같이 만날 수 있도록 조직한 것이 특징이다. … 노동자 소모임 프로그램의 기본 틀은 다음과 같다. “[1단계 프로그램] 노동자의 현장과 생활에서 출발하는 토론 → 의식화에 초점 (예) ‘근로자를 가족처럼’, ‘공장일의 내일처럼’ 등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충효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토론과 교양 + 각 사업장 근로조건을 비교하고 토론 [2단계 프로그램]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등의 사회문제를 둘러싼 토론 [3단계 프로그램] 노동운동사 및 정치경제학적 기초교양” 이런 소모임은 4~6명을 기본 단위로 하여 6~7개 정도가 비공개로 추진되었다. 대우어패럴 교선부장 김준희는 가리봉전자, 남성전기, 협진양행 노동자 5명으로 구성된 한 소모임에 참여했다. 소모임에서는 각 공장의 실태와 운동 상황이 토론되고 『노동의 역사』, 『일하는 사람을 위한 경제지식』, 『어머니』 등을 읽고 학습을 했으며 다른 사업장의 노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동질감을 형성해 갔다. 지역소모임을 통한 조직과 의식화는 새로운 노동운동가를 양성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노조에서도 조합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역할을 했으며 나아가 노조 간의 지역연대 활동에 기초가 됐다. … 지역소그룹 활동과 함께 또 다른 지역활동으로는 <공단소식>을 제작해 사업장, 공단주변과 거주지역에 배포했다. 이 소식지는 여러 사업장 소식을 담고 있어 노동자들이 자신의 사업장만이 아니라 다른 곳과 비교하게 했고, 3회에 걸쳐 배포되다가 구로동맹파업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 “노조가 돌아가는 거라든지, 객관적인 상황 돌아가는 거라든지, 이런 거 새벽에 닭장집…들에 들어가서 문마다 쑤셔 넣고 … 출근해서 얘기가 되고… 탈의실에서 옷 갈아 입다보면 한두 장씩 가져와서 이야기되기도 하고…” (대우어패럴, 김준희) “노동자신문도 만들어… 노동자들 밀집된… 지역에 살포를, 그때는 대학생 조직하고도 일부 관련이 됐던 것도 같은데요… 그래서 이게 배포되는 시기가 되면 대학생들 일부와 그리고 노동자들 … 닭장집들 … 주변을 돌면서 새벽에… 배포를 했었어요. …” (롬코리아, 장영인) “공단소식이 저녁에 한 번 돌면 아침에 (회사에) 가면 공단 분위기가 싹 달라져 있다고. 하여튼 공단이라는 게 좁은 데니까. 아침에 현장에 가보면, <공단소식>이 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게 피부로 즉각 즉각 느껴지는 거 같더라고. 그야말로 ‘공단이 내 손안에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공단소식 만들고 뿌리고 그때 당시 이미 해고 되어서 끌려나온 친구들이 많이 했던 거 같애. …” (부흥사, 이선주)[4]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은 소모임활동, 교육활동, 소식지 발간 등을 활발히 진행하면서 간부 교류 등의 연대활동을 벌였다. 민주노조들은 1985년 임금인상 투쟁을 공동으로 준비하였고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대우어패럴 27% 인상, 효성물산 904원 인상, 가리봉전자 17.5% 인상, 선일섬유 13% 인상 등의 성과를 거뒀다.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단결의 힘을 실감했다. 조합원이 증가했고, 노동조합의 힘이 강화됐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이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 6월 22일 대우어패럴노조의 간부 세 명을 전격 구속시켰다. 임금교섭 때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였다. 1980년대 초 민주노조들을 모두 파괴했듯이, 새롭게 등장한 구로지역 민주노조들도 하나하나 깨나가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바로 그날 구로지역 노조간부, 해고자, 활동가 190여 명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경찰의 탄압은 민주노조 각개격파를 위한 신호탄이라 인식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패배를 되풀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월요일인 24일부터 ‘노동운동 탄압하는 노동부 장관 퇴진, 구속노동자 석방, 노동3권 쟁취’를 내걸고 동맹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1970년대 민주노조들이 기업별 노조로서 최상의 조직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부의 탄압에 고립분산적인 대응으로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노조간부들은 1980년대 초와 같이 개별 노조의 조직보존에 매몰되지 말고 노조 간의 연대를 통해 탄압에 대항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투쟁 목적은 정부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연대투쟁을 전개해 정부가 가하는 탄압의 본질을 폭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기업별 노조의 틀을 깨고 고립분산성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데 두었다. 그렇기에 “간격을 두고 차례로 당할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싸우자”는 투쟁방침을 결의했다.[5] 6월 24일 대우어패럴노조가 오전 8시부터 먼저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효성물산노조, 선일섬유노조, 가리봉전자노조가 오후 2시부터 동맹파업에 돌입했다. 6월 24일 7시 30분경, 회사에서는 파업을 미리 예상한 듯 현장출입구에 관리자들이 모두 나와 서 있었고 평소 7시 30분에 열리는 현장 문이 7시 45분이 지나서야 열렸다. 50분에 각 현장별로 실시되는 국민체조가 끝나기를 기다려 각과 부위원장들은 작업대 위로 올라가 위원장이 부당하게 구속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같이 싸우기를 호소했다. 각과 조합원들이 1과 현장으로 속속 모여들었고 노조사무실에서 대기하던 2공장 조합원들도 합세했다. 밀고 들어오는 도중에 저지하던 관리자와 격돌하여 조합원 전재선이 쇠파이프를 맞고 코를 병원에서 세 바늘 꿰매고 돌아오는 사태도 벌어졌다. 관리자들의 저지를 받아 미처 들어오지 못하고 쫓겨난 조합원도 수십 명이었다. 1과 현장에 모인 인원은 285명이었다. 조합원들은 먼저 미싱과 원단을 쌓아 출입구를 차단하고 대열을 정비한 후에 소리 높여 ‘결단가’를 불러 사기를 올렸다. 이어 쟁의부장이 「우리의 결의」라는 유인물을 낭독하고 「노예로 살 것인가, 싸워 이길 것인가」라는 유인물을 배포하며 구호를 선창하자 조합원들도 함께 구호를 외치며 창밖으로 유인물을 뿌렸다. 한쪽에서는 플래카드와 구호를 쓴 종이를 준비하고 나머지는 준비한 머리띠를 두르고 부채를 만들어서 모두 창문에 매달려 ‘선봉에 서서’,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오전 10시경, 회사는 농성에 참가하지 않은 노동자들을 모두 퇴근시켰고 관리자들을 모두 동원해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회사 바깥에서는 어느새 전투경찰들이 쫙 깔려 있었다. 간부들이 연설도 하고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점심시간인데 식사는 공급되지 않았다. … 오후 2시. 맞은편에 보이는 효성물산에서 꽹과리 소리가 나면서 동맹파업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려왔다. 모두들 환호하며, 창가로 가서 구호를 외침으로써 서로를 응원했다. 오후에는 즉흥 촌극과 10·26 사태를 풍자한 연극, 장기자랑 등으로 보냈다. 저녁식사 역시 들어오지 않았고 물은 화장실 안에만 나왔다. 어두워지자 회사는 전기마저 끊어버렸다. 노동자들은 솜방망이에 미싱 기름을 적셔서 횃불을 만들어 회사 주위를 밝히고 소화전 비상등에 전원을 연결, 형광등 하나를 켰다. 앰프도 연결, 마이크도 쓰게 되었다. 11시경 일부는 보초를 서고 나머지는 잠을 잤다.[6] 오후 2시경 3개 사업장에서 ‘임시총회’를 거쳐 동맹파업을 결정했고 파업에 들어갔다. 효성물산 조합원 400여 명은 긴급총회 이후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가리봉전자 구로·독산공장의 520여 명도 ‘임시총회’ 이후 ‘구속자를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선일섬유도 140여 명이 모여 총회를 하는데, 관리자들이 방해를 하여 조합원이 70여 명으로 줄어들자 출입구를 차단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효성물산 농성장에서는 「노조탄압저지 결사투쟁선언」이라는 공동투쟁선언문이 낭독되고 배포됐다. 노동자들은 이 선언문에서 대우어패럴노조 탄압이 곧 자신들의 노조에 대한 탄압으로 다가올 것이므로 동맹파업을 통해 이에 저항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동맹파업 첫날 4개 노조의 조합원 1,300여 명이 참여했다.[7] 25일에는 세진전자노조, 남성전기노조, 롬코리아노조가 동맹파업을 지지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운동 단체들은 구로공단 주변에 유인물을 대량 살포하기 시작했다. 26일에는 민통련, 민청련, 청계피복노조 등 22개 운동단체와 노조 대표들이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동맹파업 지지 농성을 시작했다. 저녁에는 구로공단 일대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27일에는 효성물산과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노동부 중부사무소를 점거했다. 성수동에 있는 삼성제약노조가 중식거부 농성에 들어갔다. 종교단체들도 지지 농성에 들어갔다. 대학생들도 연대투쟁에 나섰다. 28일에는 부흥사노조가 동맹파업에 합류했다. 26~27일에는 동맹파업을 한 3개 노조가 해산했다. 효성물산 조합원 73명은 27일 노동부 중부지방사무소에서 점거농성을 시도하다 모두 연행됐다. 27일 오후 8시까지 농성을 하고 있던 노동자 수는 대우어패럴 사업장의 150여 명과 신민당 제1지구당사의 36명 등 모두 약 200여 명이었다. 같은 날 대우어패럴에서는 반노조원 3백여 명이 노조반대 농성을 벌이다 해산했다. 회사 주위에 전경 차 15대가 배치되자 농성장에 위기의식이 고조됐다. 위협적인 분위기 때문에 농성장에서 처음으로 “살인정부 물러가라”, “노총 자폭하라”는 구호가 나왔다. 28일 부흥사 조합원 118명이 노동운동 탄압에 항의, 동맹파업을 시작했다. 부흥사는 동맹파업 직전에 동참권유를 받았으나 집행부 논의 결과 부결되어 참여하지 못했다. 이들은 구속자 석방, 노조탄압중지 등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들어갔다. 부흥사에서 사업장 내 근로조건 개선요구가 정치적 요구와 결합하여 제기됐다. 그러나 파업은 반노조 폭력단의 폭력으로 6시간 만에 해산됐다. 부흥사의 파업은 동맹파업이 직접적으로 노동자들의 의식을 자각시켜 동참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8] 그러나 동맹파업 6일째인 29일, 닷새 동안 굶주리며 농성을 이어가던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의 농성장에 구사대 500여 명이 벽과 출입문을 부수고 들이닥쳐 각목과 쇠파이프로 노동자들을 폭행하면서 농성을 강제 해산시켰다. 동맹파업의 중심이던 대우어패럴 농성장이 무너지면서 동맹파업도 막을 내렸다. 6월 29일 7시 즈음. 기상해서 출근시간에 맞추어 창틀에 매달려 있는데 한일은행 담을 타고 학생들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노동자들이 반가워서 몰려가 환호, 박수로 환영하고 학생대표의 인사말을 들었다. 그러나 채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현장 벽이 부서지면서 관리자, 경비, 반대파들이 돌과 각목을 던지고 소화기를 뿜어대며 급습, 관리자 200여 명이 각목과 쇠파이프, 의자, 발길질 등으로 가릴 것 없이 농성자들을 구타하면서 머리채, 손발 아무데나 휘어잡고 기숙사 쪽으로 끌고 갔다. 회사 측의 폭력을 피해 20여 명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다 모두 잡혀 남부서로 연행, 회사로 다시 끌려와 기숙사에 갇혔다. 기숙사로 끌려간 농성자들은 한방에 5명씩 갇혀서 1인당 비조합원 3명에게 감시당하면서 갖은 모욕을 당했다. 11시 즈음 의사들이 들어와 진정제를 억지로 먹여서 농성자들은 잠이 들었다. 오후 2시 30분 즈음 이들은 깨어나 죽 한 그릇씩을 먹었다. 관리자들은 수시로 드나들며 “경찰서로 직행시켜야 한다”, “입에다 똥을 처넣어야 한다”는 등의 폭언과 협박을 함부로 했다. 그 이후 회사 측은 농성자들을 한 명씩 총무과에 끌고 가 부모까지 동원하여 강제로 사표를 쓰게 했다.[9] 구로동맹파업은 한국노동자운동사에서 한 획을 긋는 역사적 투쟁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지역연대파업이자, 선진노동자들이 목적의식적으로 조직해 낸 연대파업이었다. 구로동맹파업에는 10개 노조에서 약 2천 5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 43명이 구속되고, 38명이 불구속 입건되었으며, 47명이 구류를 받았다. 1,500여 명이 해고되거나 강제사직을 당했다. 동맹파업에 참여한 구로지역 민주노조 8개가 모두 와해될 정도로 희생은 엄청났다. 그러나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자들에게 큰 교훈을 남겼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조합이 경제투쟁만이 아니라 연대투쟁과 정치투쟁도 조합원대중의 주체적 참여 속에서 수행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민주노조운동이 국가권력의 탄압에 맞서 얼마든지 정면대결을 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구로동맹파업은 1987년 대투쟁 이후 대규모로 등장한 민주노조운동이 국가권력의 탄압에 거침없이 연대투쟁으로 맞섬으로써, 폭발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결코 쉽사리 파괴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진지를 구축해 낼 수 있도록 길을 잡아주었다.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에게 단결의 힘을 인식할 수 있게 했다. 노동자들은 해방춤, 탈춤, 즉흥 촌극, 장기자랑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용하거나, 지원을 통해 서로의 힘을 북돋았다. 이는 노동자들의 투쟁수기, 기고 글, 파업일지 등에서 드러나는데, 「파업농성일지」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우어패럴 조합원들은 맞은 편 효성물산에서 꽹과리 소리가 나면서 동맹파업에 들어갔음을 알려오자 환호하며, 창가로 가서 구호를 외침으로써 서로를 응원했다.”(24일) “효성물산은 위원장이 가리봉, 선일 등 다른 노조에서도 동맹파업에 들어갔다는 신문보도를 읽어주자, 조합원들은 환호성을 하며 열심히 구호를 외쳤다.”(25일) “가리봉전자 조합원들은 남성, 세진. 롬코리아의 연대소식을 듣고 힘을 얻었다. 밤늦게 옆 회사 노동자들이 우유 등을 넣어주며 격려하여 눈물겹도록 힘나게 해주었다.”(25일) 이처럼 노동자들은 투쟁하는 서로의 모습에 힘을 얻으면서 노동자로서 일체감을 느꼈다. 또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경찰이나 노동부 등의 탄압을 직접 경험하면서 투쟁 대상에 대한 인식을 보다 분명히 했다. 우선 투쟁 과정에서 드러난 경찰에 대한 노동자들의 태도를 보자. “가리봉전자에서 정문 앞에서 노동자들이 구호와 노래를 하던 도중에 관리자들과 사복경찰들이 정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했다. 밀고밀치는 싸움과정 속에서 그들은 쇠파이프 각목 등으로 발등을 내리찍고 등을 후려치면서 ‘xx들 다 죽여야 한다’는 등의 욕설과 폭행을 가했다 … 계속되는 치열한 동맹파업과정 속에서 노동자를 탄압해 온 실체가 누구누구인가를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26일) 경찰의 개입에 대해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분노 속에 “폭력경찰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26일). 또 노동자들은 정부가 기관원이나 노동부 관계자들을 투쟁과정에 개입시켜 탄압하는 것에 대해서도 본질을 인식해 갔다.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태도는 다음의 「파업농성 일지」를 통해 확인된다. “가리봉전자에서는 기관원, 노동부 관악소장 등이 다녀가고 나서부터는 식당아줌마를 퇴근시키고 점심식사를 주지 않았고 물까지 끊었다. 항의하자 회사 측은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밥도 사장은 주려고 했지만 정부에서 주지 말라고 하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짐승에게도 밥은 굶기지 않는데 이 정부는 우리 노동자들을 어떻게 여기기에 밥도 물도 못 먹게 하는가! 전 조합원들은 다시 한 번 악랄한 처사에 치를 떨었다.”(25일) 이러한 노동자들의 정부에 대한 인식은 6월 28일 대우어패럴 농성장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났다. 이날 대우어패럴 기업주의 사주를 받은 비조합원들이 노조반대시위를 하고, 이어 전경차 15대가 주위에 배치되면서 농성노동자들의 위기의식이 고조된 위협적인 분위기에서도 노동자들은 “살인정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경찰, 기관원, 노동부 등의 탄압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은 그 본질에 대해 보다 분명히 인식해 갔다. 파업 때 진행한 토론내용은 ‘투쟁의 의의와 민주노동운동’, ‘관리자의 태도’, ‘노동운동사 강의’, ‘10·26 사태를 풍자한 연극과 토론’, ‘왜 동맹파업을 하는가’, ‘신민당의 태도’ 등이었다. 또한 파업과정에서의 토론은 매 사안에 대해 노동자들이 서로의 의견을 모아 결정하는 민주적인 훈련과정이기도 했다. 이처럼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의 규율을 만들어 갔으며 동시에 투쟁대상을 보다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하여 노동자들의 의식을 변화시켰다.[10] 구로동맹파업은 1970년대 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투쟁이나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명동성당 농성투쟁과는 질적으로 다른 노동운동의 위치를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을 경과하며 변혁적 노동운동 세력이 제거된 뒤 새로이 ‘아래로부터 노동자투쟁’으로 출발한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탄압과 종교계, 지식인 등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세력들의 영향 아래 있었다. 민주노조운동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그들의 생존권적 요구를 정치문제화시켜 해결하려 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으로 노동운동은 1970년대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향한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사회변혁을 지향했으며, 사회변혁운동을 위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사회변혁의 주체가 민중·노동자라는 인식을 분명히 했다. 198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의 인식변화는 구로동맹파업을 통해 좀 더 구체화됐다.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비타협적인 정치투쟁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노동자들의 힘 있는 투쟁만이 민주화운동 세력의 지지와 동참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경제적인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투쟁한다는 시각과 노동운동을 전체 운동의 한 부문운동으로만 파악하던 시각을 극복하고, 노동운동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중심이며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이라는 인식의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11] [1] 한겨레신문, 2016/11/03, 「54명 사망 삼청 교육…가해자들은 바로 풀려났다」. [2] 청계피복노동조합, 1981, 「호소문」.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40~41쪽에서 재인용) [3]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99~105쪽. [4]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257~263쪽. [5]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281쪽. [6]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288~296쪽. [7]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284~285쪽. [8]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285쪽. [9]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306쪽. [10]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475~477쪽. [11]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479~480쪽.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2026-02-09 | 조회 2,880 -
“스리랑카·베트남 처녀 수입하자”는 막말, 진도군수만의 문제는 아니다!김희수 진도군수 김희수 진도군수가 생방송 도중 농촌 인구 소멸에 관해 “외국 처녀를 수입하자”고 말해 논란이 일고 있다. 문제의 발언은 방송 3사에 생중계된 2월 4일 전남 해남군 해남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광주·전남 행정통합 찾아가는 타운홀미팅’에서 나왔다. “광주·전남이 통합할 때 인구 소멸에 대한 것을 법제화해서, 정 뭣하면 스리랑카나 베트남이나 그쪽 젊은 처녀들 좀 수입해갖고 농촌 총각 장가도 보내고, 이런 특별 대책을 해야 한다. 사람도 없는데 산업만 밤낮 살리면 그게 제대로 되겠냐”라는 발언이었다. 이주여성 노동자가 혼인과 출산 대행 상품인가! 진도군수의 발언은 이주 여성을 한 인간이자 노동자로서 존중하지 않고, 혼인과 출산을 위한 도구로 취급한 발언이다. 그것도 사람을 사고 파는, '수입 가능한' 상품으로 취급한 노골적인 인권 침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진도군수의 말은 ‘처녀’라는 표현이 ‘결혼하지 아니한 성년 여자’, ‘남자와 성적 관계가 한 번도 없는 여자’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문제다. 그리고 사용 맥락 역시 여성을 가부장제적 인식에 기반해 젠더차별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더 문제다. 또 ‘수입하자’는 발언은 인간을 상품과 동일시하는 극단적인 비인간화다. 이는 단순히 ‘부적절한 표현’, ‘신중하지 못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 노동자 민중, 특히 평균소득이 낮은 나라에서 온 이주여성을 하위의 존재로 규정하는 위계의식에 기반한 혐오발언을 공적 자리에서 내뱉은 사건이다. 진도군수의 발언은 이주민의 인권과 존엄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이 발언은 여성을 노동력 재생산, 무급돌봄노동 도구로 규정하며, 특정 국적의 여성은 더 쉽게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왜곡된 인식을 재생산한다. 계급구조의 폭력성을 바탕으로 성차별·인종차별을 뒤섞은 억압을 정당화하는 발언이다. 가뜩이나 도시와 농촌의 사회적 격차로 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에다 다양한 공적 서비스 인프라가 부족한 농촌에서 이러한 가부장적이고 반동적 이데올로기는 결혼제도 안에서 발생하는 이주여성에 대한 통제와 폭력, 경제적 착취를 구조적으로 은폐한다. 불안정한 체류 자격과 열악한 노동조건, 생계와 송금 등 경제적 압박 속에서 폭력과 차별을 감내하는 결혼 이주민 여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차별과 혐오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군수 하나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 그런데 이 발언이 진도군수 공인 한 사람의 문제일까? 전국 25개 지방자치단체는 2025년 상반기가 되어서야 소위 “국제결혼 지원 조례”에 근거해 세금으로 ‘농촌 총각을 이주 여성에게 장가보내’는 결혼 비용 지원 사업을 폐지했다. 그동안 이는 농촌 인구감소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외국 여성을 사온다는 ‘매매혼’이자, 이주여성을 출산과 무급돌봄노동 도구로 취급하는 인권침해 정책이라는 여러 비판에도 거의 10년간 지속되었다. 최근에는 ‘이주여성 정착지원금’ 등으로 제도를 변경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주여성을 돈 주고 살 수 있는 인구대책 수단이자 상품, 농촌 총각 매매혼의 도구로 생각하고 동시에 농촌 비혼 남성을 이주여성 매입자(구매자)로 규정하는 관점은 한국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기인한다. 노동자 민중을 존엄한 인간이 아닌 도구로 여기는 체제, 가부장적 젠더차별, 성별분업 구조, 값싼 노동력에 의존해 유지되는 자본주의적 농촌 구조, 그리고 이주민을 ‘노동력’이나 ‘인구 대책’ 수단으로 활용해 온 국가의 반동적 이주정책이 결합한 결과다. 다시 말해 여성, 그 중에서도 더 열악한 처지인 아시아 이주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이번 발언을 가능하게 한 토대다. 젠더차별에 맞서는 노동자민중의 단결이 필요하다 이주 여성은 ‘수입’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사회 구성원이다. 여성과 이주민을 억압하는 구조를 철폐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도, 평등도 존재할 수 없다. 여성 노동자가 출산과 무급돌봄노동 도구가 아니듯, 이주여성 노동자는 농촌 인구감소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국적과 인종, 젠더, 성별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우리는 같은 노동자이자 존엄한 삶과 노동을 영위해야 할 주체다. 노동자는 하나라는 대의로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확대재생산하는 인종차별에 맞서자. 한국 자본주의가 만든 지역 사회의 위기를 이주여성에게 떠안기고 이주여성의 존엄을 파괴하는 폭력을 중단하라! 이주민을 '값싼 노동력'으로 사고하는 관점이나 이주여성을 결혼과 출산의 도구로 사고하는 관점을 다르지 않다. 이미 한국 인구 20명 중 1명이 이주민이다. 국내 신혼부부 10쌍 중 1쌍은 다문화 가정*이다. 쇠퇴하는 자본주의, 자본과 정부는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자를 분열시키며 착취와 수탈을 강화한다. 진도군수의 발언을 비판한다면, 국적과 젠더를 활용한 차별에 맞서 노동자 단결을 확대하자. 그것이 노동자 내부를 가르는 저들에 맞서는 우리의 전략이다. *국가데이터처 ‘2024년 다문화 인구동태 통계’, 지난해 다문화 혼인은 2만 1450건으로 1년 전보다 1019건(5.0%)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2026년 1월 6일 발표)2026-02-05 | 조회 3,585 -
[그래, 다시 마르크스주의 연재#3]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운동 법칙을 집중 탐구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생산양식이 어떻게 발생해 소멸해 가게 되는지, 그리고 이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경제적 생산양식이 무엇인지를 다룬 것이 바로 마르크스 경제학설의 내용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과학적인 대답이다. (1852년 《펀치》지에 실린 만화 '콜레라 왕을 위한 법정'은 런던 내 도시노동자계급의 비참한 환경을 묘사하고 있다. - 편집자 주) 3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1. 생산력: 인류 역사 발전의 원동력 출발점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고통스럽고 불안정한 삶에 내몰려 있다. 이것은 결혼과 출산마저 기피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의 뿌리는 무엇일까? 바로 먹고사는 문제, 즉 안정적이고 충분한 생활임금을 주는 일자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다. 이는 경제 문제다. 마르크스 사상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마르크스의 사회 분석에서 출발점은 ‘생산’이다. 인간과 사회의 변하지 않는 제1의 필요는 다름 아니라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먹고사는 것을 만드는 것을 우리는 생산이라 부른다. 생산 방식은 늘 변해 왔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인간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생산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생산된 것을 어떻게 분배하느냐도 중요하다. 하지만 분배는 무언가 생산이 이뤄진 뒤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는다면, 분배 자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회가 변화 발전하는 방향은 우선 생산에 맞춰진다. 분배가 어떻게 이뤄지든,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사회가 생산하는 양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의 크기는 결국 ‘생산능력(생산력)’에 좌우된다. 인류의 역사적 발전 법칙은 바로 이 생산력을 가능한 한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산력은 진공 상태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생산은 생산 과정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맺는 사회적, 집단적 관계 속에서 이뤄진다. 이런 관계에는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관계, 생산물 사이의 교환관계, 생산물에 대한 분배관계 등이 있는데, 마르크스는 이것들을 종합해 ‘생산관계’라고 불렀다. 생산관계라는 형식 속에서 생산(능)력이 살아 숨 쉬는데, 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이 바로 ‘생산양식’이다. 그런데 생산력은 고정돼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 발전한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산력의 변화 발전이 일정한 수준, 단계에 도달하면, 이 생산력은 기존의 생산관계와 충돌한다. 내용(생산력)의 변화 발전은 기존의 고정된 형식(생산관계)과 충돌한다. 이것은 빠르게 성장하는 아이의 몸(생산력)과 그 아이가 입고 있는 옷(생산관계)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아이가 성장(변화 발전)하면, 그동안 아이의 몸에 딱 맞았던 옷이 아이의 몸을 조이기 시작한다. 결국 아이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작은 헌 옷을 버리고 큰 새 옷으로 바꿔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옷 때문에 아이는 고통받게 되며, 언젠가 아이의 몸은 헌 옷을 찢게 될 것이다. 물론 후자의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현명한 부모라면 그런 상황이 닥치기 전에 아이의 성장 속도에 맞게 더 큰 새 옷을 입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발전 과정, 즉 생산력의 발전 과정은 그것과는 달리 대단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생산력의 성장 단계에 발맞춰 기존의 생산관계를 새로운 생산관계로 대체하는 것을 결연하게 막아야 하는 반동 세력 즉, 인류의 사회적 발전을 가로막아야 하는 반동 세력 때문이다. 바로 기존의 생산관계 속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겨 왔던 낡은 지배 계급이다. 낡은 반동 지배 계급은 새로운 생산관계가 사회에 자리 잡아 인류의 생산(능)력이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돋움하는 것에 저항한다. 개인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 저항을 분쇄해 새로운 생산관계를 창조함으로써 인류의 진보에 길을 터 주고 촉진하는 것, 바로 이것이 ‘사회 혁명’이다. 인류 사회는 생산력의 성장에 족쇄를 채우는 낡은 생산관계를 버리고, 생산력 발전에 조응하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채택하는 방향으로 전진해 왔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규정한, 인류 사회의 혁명적 변화 발전의 뿌리였다. 생산력 옷, 쌀, 자동차, 배, TV, 컴퓨터, 휴대폰, 약, 학교 등 의식주를 비롯한 생존 수단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조건을 갖춰야 한다. Ι. 토지, 원료, 기계, 도구, 작업장 ─ 즉 생산수단이라고 부르는 것. ΙΙ. 노동력 ─ 생산수단에 자신의 힘과 기술을 사용해 유용한 것을 생산하는 노동자. 생산수단과 노동력은 생산력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두 요소다. 이 두 조건이 결합해야 비로소 생산이 이뤄진다. 생산수단만으로는 생산할 수 없다. 자동차 공장을 예로 들면, 아무리 우수한 작업 도구와 잘 정비된 조립 라인이 있더라도 노동자가 조립 노동에 나서지 않으면 즉, 노동(능)력이 결합되지 않으면 자동차를 만들 수가 없다. 이것은 노동자가 일을 멈추는 파업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노동력이 준비돼 있더라도, 작업장과 기계, 도구 같은 생산수단과 결합하지 못하면 자동차를 만들 수 없다. 이것은 해고돼 생산수단으로부터 강제로 격리된 노동자들이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것에서 드러난다. 가장 단순하게 접근하면, 생산이란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하는 것, 그래서 유용한 가치를 가진 생산물이 만들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모든 사회에 공통된다. 각각의 사회를 구분하는 것은 우선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질적 차이다. 돌도끼나 낫 같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사회와 거대한 컨베이어나 자동 선반 같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사회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된다. 원시인의 노동력과 잘 숙련돼 있고 여러 고급 기술과 기계를 사용하는 현대 노동자의 노동력 사이에는 거대한 질적 차이가 있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해 구성되는 생산(능)력의 질적 차이로부터 각각의 사회는 질적으로 구별된다. 더 진보한 사회과 덜 발전한 사회를 나누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산력의 질적 차이다. 크게 볼 때 인류 사회는 원시 공산제 생산양식, 노예제 생산양식, 봉건제 생산양식,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질적으로 이행해 왔다. 2. 소유관계와 분배관계 다음으로 각각의 사회를 구별하는 것은 생산관계의 상이성이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하는 것은 특정한 생산관계 아래에서 이뤄진다. 소유관계, 교환관계, 분배관계를 포괄하는 이 생산관계에서 일차적 규정력을 발휘하는 것이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관계’다. 가령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력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한편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유산자 계급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단지 노동(능)력만 갖고 있는 무산자 계급이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 아래에서는 생산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까?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자 계급인 자본가 계급은 다른 사람들을 임금노동자로 고용해서 자신을 위해 일을 시킬 권리를 얻는다. 반대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무산자들인 노동자 계급은 노동력 제공을 조건으로 해서만 비로소 생산수단과 결합할 기회 즉, 취업의 기회를 얻는다. 이렇게 생산수단은 자본가 계급이 소유하고, 노동력은 노동자 계급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해 생산이 이뤄지는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 경제 체제다. 이것은 생산 과정에 자신을 각인한다. 자본주의 소유관계에서 이뤄지는 생산 과정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가 가진 것은 단지 몸뚱이(즉 노동력만 가진 무산자)인 노동자를 마음대로 부려 먹고 착취하는 과정이 된다. 그 결과 생산 과정(노동 과정)은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해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자본가가 노동자를 쥐어짜서 잉여가치(이윤)를 창출하는 잔인한 착취의 과정이게 된다. 개별 소농민이 자기 소유의 밭에서 스스로 일하는 과정은 단순히 일(생산)하는 과정일 뿐이지만, 노동자가 자본가 소유의 작업장에서 일하는 과정은 생산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착취하는 과정이자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착취당하는 과정이다. 교환 과정과 분배관계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을 통과해 만들어진 생산물은 이제 자본주의적 교환 과정 및 분배 과정으로 들어간다. 자본주의 (상품)교환관계에서는 평등한 등가교환의 원리가 작동한다. 동일한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은 동등한 화폐가격으로 서로 교환된다. 시장에서 200만 원에 팔리는 200만 원짜리 오디오 1대를 가정해 보자. 200만 원을 손에 쥔 사장은 이걸로 200만 원 어치 부품, 재료를 다른 사장들로부터 구입할 수 있을 뿐이다. 때로는 더 싸게 구입할 수 있고, 때로는 더 비싸게 구입할 수도 있겠지만, 긴 기간 평균 가격을 따져 본다면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분배관계는 어떨까? 시장에서 판매된 생산물(상품)은 자본가 계급 수중에 화폐로 돌아간다. 이 화폐는 어떻게 분배되는가? 일부는 부품이나 원료, 설비, 도구 등을 다시 구입하는 데 들어간다. 그 뒤 남은 돈으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분배가 일어난다. 자본가는 노동력 공급자인 노동자와 계약을 맺은 돈을 임금으로 지급한다. 이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가 자본가의 이윤이 된다. 이렇게 노동력에 해당하는 가치(임금)와 이걸 제외하고 남은 자본가의 이익(이윤)이 자본주의 분배관계의 핵심이다. 노동자는 노동력의 가치를 임금으로 분배받고,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 낸 전체 노동의 가치 중 이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 가치를 이윤으로 챙긴다. 이런 분배관계의 결과는 무엇일까? 임금은 노동자 가족이 한 달 벌어 먹고사는 데 급급한 낮은 수준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약간 남은 돈은 질병이나 노후, 아이들 학비를 대비해서 모아 두어야 한다. 결국 노동자들은 임금노예의 지위를 넘어설 수 없다. 작업장, 기계 등 생산수단을 구입해 유산자가 되는 길은 봉쇄돼 있다. 한 달에 100만 원도 저축하기 힘든 노동자들이 어찌 수백억, 수천억, 수조 원의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될 수 있겠는가? 반면 기존의 거대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에 더해, 자본가들은 새롭게 확보한 이윤으로 추가 투자를 함으로써 갈수록 더 거대한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눈덩이처럼 커진, 거대한 생산수단을 노동자들이 소유할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닫힌다. 그래서 자본주의 소유관계는 더욱 확고해진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더욱 완전하게 자본주의 착취관계에 빨려들어 간다. 이것은 분배에서의 불평등을 더욱 가속화한다. 이렇게 소유관계 → 분배관계 → 소유관계 → 분배관계로 이어지는 확대 순환의 고리 속에서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더욱 탄탄해진다. 3. 잉여가치의 본질 잉여가치(이윤)는 어디서 발생할까? 어느 지점에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일어나고, 그 결과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창출하게 될까? 교환 과정은 아니다. 여기서는 하나의 상품이 동일한 교환가치를 가진 다른 상품과 화폐를 매개로 교환될 뿐이다. 그렇다면 분배 과정일까? 그렇지 않다. 정상적인 경우 분배는 계약에 의해 정당하게 이뤄진다.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맺은 임금계약에 따라서 임금을 분배받는다. 이 임금계약서는 계약한 임금을 정상 지급한다면, 나머지 이익금을 사장이 가져가는 것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임금계약은 내용적으로는 부당한 것이다. 동등한 두 주체가 맺는 계약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맺은 불평등한 계약이기 때문이다. 입사하는 노동자는 사장에게 ‘내가 일해서 창출한 가치만큼 전액을 임금으로 지급하라.’고 요구하지 못한다. 그러면 사장은 단번에 입사계약을 거부할 것이다. 계약은 전혀 다르게 진행된다. 몸뚱이, 즉 노동(능)력만을 소유하고 있는 노동자는 생산을 해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과 결합해야만 한다. 따라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사장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계약서를 내민다. “네가 노동을 통해 얼마만큼의 가치를 창출하느냐는 임금계약에서 결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네가 노동을 통해 창출한 가치 전체를 줄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면 나에게는 이익(이윤)이 남지 않는다. 나는 오직 네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수준의 임금만을 줄 것이고, 나머지는 내가 가져갈 생각이다. 이것에 동의하면 임금계약서에 사인해라. 그렇지 않으면 취업을 포기하라!” 실업자로 떠돌지 않으려면, 노동자는 이런 불평등한 계약서에 사인해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부당한 착취적 분배관계가 평등한 자유계약으로 둔갑한다. 이렇게 부당한 분배관계가 작동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생산의 두 요소 중, 생산수단을 전적으로 극소수 사장들이 독점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바로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 즉, 소유관계에 있다. 개별 노동자 수준에서 접근한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집단적 임금계약을 맺더라도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강력한 노동조합이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수행한 전체 노동의 가치를 임금으로 달라고 강제하기 어렵다. 단지 착취의 강도를 낮춰, 잉여가치를 줄이는 대신 노동자가 가져가는 임금 비율을 높일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잉여가치를 크게 줄여 버리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이유가 사라진 자본가들은 차라리 회사 문을 닫아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 체제는 그것을 구조적으로 강요한다. 잉여가치를 충분히 뽑아내지 못해서 자본 투자를 줄이는 자본가는 언젠가 경쟁에서 밀려 몰락할 것이고, 이것은 그 자본가와 계약을 맺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실업이라는 거대한 재앙을 선물한다. 이것은 모든 노동조합에 대한 근본적 압력이 된다. 그 결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개의 노동조합 투쟁은 착취 자체를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정상적인 임금이라도 강제하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것은 자본주의 철폐를 향해 단호하게 진격하지 않는 노동조합이라는 한계 내에서 그렇다. 노동자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착취를 철폐하려는 노동조합이라면, 자본주의 경쟁 압력을 뛰어넘어 전체 노동자 계급의 총단결을 추구해야 한다. 그 결론은 자본주의 소유관계를 모든 생산수단을 생산자 자신이 집단적으로 공동 소유하는 사회주의로 대체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전망이 모든 노동조합이 추구해야 할 미래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에게 임금 투쟁은 사활을 걸 만큼 중요하다. 임금 투쟁을 통해서만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정상 임금이라도 강제할 수 있으며, 다른 무엇보다도 자본주의를 철폐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 힘, 단결, 의식을 키워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지속적이고 전투적인 임금 투쟁을 통해서만, 그리고 임금 투쟁의 연장선에 있는 노동 시간 단축 투쟁, 노동 강도 완화 투쟁을 통해서만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를 향한 학습, 토론, 조직화를 이룰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 과정 ─ 노동자 착취 과정 내용적으로 볼 때 부당한 임금계약이 이뤄졌더라도, 그 자체로 잉여가치가 바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빼앗기 위해서는 먼저 빼앗을 것이 있어야 한다. 잉여가치 또한 생산 과정에서만 창조된다. 유산자와 무산자로의 분할이라는 자본주의 소유관계에서 출발한 ‘부당한 계약’은 작업장에서 이뤄지는 생산 과정에서 비로소 집행된다. 모든 가치가 창조되는 생산 과정에서 자본가들은 임금, 즉 노동력 재생산 비용에 해당하는 가치가 창출되는 노동 시간(이것을 마르크스는 ‘필요 노동 시간’이라고 불렀다)을 넘어서는 추가 노동을 하도록 노동자에게 강요한다. 이 추가 노동에 대해서 자본가들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자신이 챙긴다. 이것이 바로 이윤의 원천이다. 이처럼 노동자들이 공짜로 자본가들에게 갖다 바치는 추가 노동 시간을 마르크스는 ‘잉여노동 시간’이라 불렀다. 가령, 생산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자기 임금에 해당하는 가치를 창출하는 시간이 주 20시간이라고 하자. 그런데 취업계약서에 주 40시간이 명시돼 있다면, 나머지 주 20시간의 노동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서 노동자들은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노동하는가? 바로 자본가들을 위해서다. 이 공짜노동이 잉여가치를 낳는데, 이것이 모든 자본가 계급의 이윤의 원천이다. 자본가들 사이에서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치더라도, 이렇게 생산 과정에서 창출되는 잉여가치가 모든 자본가들이 나눠 가지는 이윤의 원천이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모든 사회에서 생산 과정은 유용한 가치가 창출되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 과정은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가 자행되는 무자비한 착취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르크스가 “모든 생산물은 그것에 투입된 사회적 평균 노동 시간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 가치의 어머니는 바로 노동이다.”라는 ‘가치 법칙’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경제학자였던 리카도가 그것을 먼저 발견했다. 하지만 리카도는 잉여가치 즉, 착취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감추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본가 계급의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잉여가치 앞에서 도망쳐 버렸다. 반면 마르크스는 리카도의 가치 법칙을 계급적 편견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를 최초로 발견했다. 이것은 노동자 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최고의 공헌이었다. 착취가 왜 발생하는지 즉, 왜 노동자들은 가난하고 자본가들은 갈수록 부자가 되는지에 대해서, 나아가서 가만히 놔두면 자본주의는 왜 필연적으로 자본가 계급의 왕국을 건설할 수밖에 없는지를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밝힌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 법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자본주의 불황기와 공황기에 노동자들은 실업과 더 낮아지는 임금에 신음한다. 반면 자본주의 호황기에 노동자들은 잠시 어느 정도 안정된 일자리와 임금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노동자들은 엄청난 잉여가치를 자본가들에게 갖다 바쳐 노동자들을 칭칭 감고 있는 임금노예의 사슬의 길이를 빠르게 늘려야 한다. 잉여가치(이윤)가 빠르게 추가 투자됨으로써 자본가들은 더 거대한 생산수단을 자신의 수중에 축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산자와 유산자 사이의 깊이 파인 골은 더욱 깊어지고, 노동자들은 헤어날 수 없는 더욱 깊은 착취의 수렁으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벗어날 길은 딱 하나다! 노동자 계급 전체에 의한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 즉, 사회주의!” 4. 약탈 경제, 그리고 증가하는 모순 기계제 대공업의 발전으로 공장이 널리 확산됐지만, 이렇게 비약적으로 발전한 사회적 생산력의 성과는 생산자(노동자)들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집단적, 사회적 노동의 성과들은 공장 플랫폼 소유자인 자본가들이 독점했다. 게다가 자본가의 수중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수많은 노동자를 해고하고, 강도 높고 위험한 노동으로 내모는 강력한 무기가 됐다. 플랫폼 자본가는 산업 사회에서 사회적, 집단적 노동의 성과를 자본가가 독점해 이윤으로 흡수했듯이, 디지털 플랫폼 공유경제의 성과 또한 독점해 새로운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이른바 정보통신 플랫폼이 확산하면서 발생하는 효과는 디지털 중앙 플랫폼을 독점하고 있는 자본가에게 주로 귀속된다. 그에 따라 MS, 구글 등의 뒤를 이어 새로운 거대 신흥 자본의 배출구로 디지털 플랫폼 산업이 부상하고 있다. 또한 공장 플랫폼이 수많은 소생산자들을 몰아내고 임금노동자로 둔갑시켰듯이, 디지털 중앙 플랫폼은 택시, 숙박업, 택배, 화물운송, 돌봄 노동 등에서 수많은 소생산자들을 사실상 자기 휘하에 종속시키고 임금노동자로 전락시키고 있다. 플랫폼 기업이 운영하는 정보 플랫폼(거대 앱)을 공유하고, 심지어는 이 플랫폼에 정보를 공급하는 필수적 주체는 바로 이용자들 즉, 사회다. 이처럼 정보의 생성자들은 수많은 이용자들이지만 그 정보는 결코 ‘공유’되지 않고, 플랫폼 기업에게 ‘독점’된다. 정보통신 기술과 과학을 발전시킨 것은 사회지만, 그 결과물은 사회가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 기업에 의해 이윤 창출의 도구로 독점된다. 노동의 사회적 결합, 그리고 이용자와 생산자 사이의 사회적 결합을 통해 더 진전된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제공하며 생산능력을 발전시키는 사람들은 플랫폼 산업의 노동자들이지만, 그 결과물은 플랫폼 자본에 의해 독점된다. 플랫폼이란 기술 장치를 통해서 거래되는 유휴자원의 효율적 관리와 배치, 상호교환, 나아가서 정보공유 플랫폼을 통한 생산성 증대와 비용 절감 등 대부분의 경제적 효과들이 ‘공유’되지 않고, 플랫폼 기업 수중에 ‘집중’, ‘독점’되어 상품으로 가공된다. 이처럼 정보가 플랫폼을 통해 공유되기는 하지만, 공익적 효과가 거의 없는 것이 오늘날 ‘공유경제’의 민낯이다. 디지털 플랫폼 산업에서 자본은 과거 산업자본처럼 상당한 규모의 초기 자본조차 투입하지 않는다. 가령 우버나 에어비앤비 등 글로벌 플랫폼 기업은 거대 독점체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큰 자본을 투입하지 않았다. 단지 정보의 망을 (총자본의 크기에서 보면 별것 아닌) 중앙 정보 플랫폼 장치를 통해 연결했을 뿐이고, 그 작업을 ‘선점’했을 뿐이다. 통상적으로 산업 자본이 투입하는 임금 비용이나 토지매입 비용, 설비투자 비용 등이 디지털 플랫폼 기업에게는 거의 생략된다. 과거 산업 자본은 ‘투자한 자본에 대한 대가’라는 명분으로 이윤을 정당화하려 했다. 디지털 플랫폼 기업은 그런 알리바이조차 댈 수 없게 됐다. ‘초기 투자 자본’이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공유경제라는 말은 그런 딱한 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디지털 플랫폼 산업에서는 거의 손 하나 안 대고, 사회적 공유 성과를 도둑질해 가고 생산자들을 수탈하는 자본의 약탈적 성격이 도저히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정보통신 기술과 과학, 생산자들과 이용자들의 연결망과 이것을 통해 교환되는 거대한 정보는 모두 사회적 공유재산이다. 누구도 이것을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회적 범죄다. 하지만 플랫폼 자본은 중앙 플랫폼을 통해 정보 연결망을 독점해, 사회적 공유재산을 사유화한다. 이것은 IT 분야의 선조인 구글, 페이스북, 네이버, 다음 등의 독점 대자본이 형성됐던 과정이기도 했다. 이 선조의 뒤를 따라 지금 플랫폼 산업은 모든 영역으로 가지를 뻗어 가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택시, 자가용, 트럭 등을 한 대도 보유하지 않고도, 또한 단 한 평의 땅도 사용하지 않고서도 엄청난 이윤을 뽑아 간다. 따라서 본원적 자본 즉, 초기 투자 자본의 권리조차 플랫폼 대자본은 감히 주장할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가 플랫폼 산업에 붙인 ‘공유경제’란 딱지는 한편으로는 비열한 위선이자 사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공유경제! 맞다. 이것은 철저히 공유경제다. 그렇다면 공유의 성과는 사회 전체가 가져가야 하고, 특히 플랫폼 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모든 노동자 민중이 가져가야 마땅하다. 이를 통해 플랫폼 자본이 사회적 공유경제의 효과를 독점해 자신의 이윤으로 착복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원천 봉쇄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이 정보통신 기술과 플랫폼을 통해 발전하는 사회적 노동의 효과를 노동자 계급을 비롯해 전체 사회구성원에게 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전망이다. 이 전망은 국가가 한 줌 자본가들을 대변하는 대신, 사회구성원 다수의 생존을 지키고자 한다면 간단한 조치만으로도 즉각 실행할 수 있다. 가령 국가가 중앙 플랫폼을 만들어 운영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 이미 국가 전산망을 통해 사회 구석구석까지 서로 연결되는 엄청난 플랫폼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국유화된 중앙 플랫폼을 무기로 삼는다면, 점차 이를 중심으로 해당 산업 전반을 장악하고 사회화해 가는 빛나는 전망이 열릴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소유관계와 이것을 반영하는 자본가 국가는 그러한 전망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자본가 소유를 채워 넣는다.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생산력과 이것을 사유화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사이의 충돌은 플랫폼 경제의 확대 속에서 더욱 격렬하게 나타난다. 나아가서 성장하는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 사이의 충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명적인 모순을 잉태한다. 발전하는 생산력은 사회적 성격을 띠지만,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갈수록 그것과 격렬하게 충돌한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이다.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을 더 이상 제대로 담을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은 생산력 발전에 엄청난 장애가 된다. 장기불황과 공황이 그 단적인 증거다. 자본주의 체제의 반동성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 ─ 공황과 장기불황 공황을 살펴보자. 공황의 양상은 어떤 것인가? 공황이 발생하면 수많은 생산설비와 노동력이 쉬게 된다. 기계는 지금 당장이라도 굉음을 내면서 수많은 생산물을 토해 낼 수 있지만, 가동되지 못한다. 수많은 원료가 썩거나 폐기 처분되고, 기계는 녹슨다. 엄청난 숫자의 노동자들이 일하기를 갈망하지만, 실업자로 떠밀려 생산에서 배제된다. 이것은 명백히 생산(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생산설비와 같은 생산수단이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노동자가 문제인 것도 아니다. 기계는 스위치만 누르면 바로 가동될 수 있는 상태고, 노동자의 노동능력도 아무 문제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엄청난 생산능력을 파괴하고 있는가? 바로 자본주의 생산관계다.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본질은 자본-임노동 관계다. 즉, 생산수단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이윤을 증대시키기 위해 무산자인 노동자들을 임금노예로 고용해 착취하는 방식으로 생산이 이뤄지는 것이다. 이러한 생산관계에서 생산의 목적은 무엇인가? 바로 자본가의 이윤을 증식시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생산의 유지, 확대, 축소 여부가 결정된다. 공황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본다면, 결국 공황은 다수 자본가들이 생산을 축소시킨 결과 발생한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생산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는 것이 자신의 이윤 증식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거대한 손실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뒤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장기불황과 공황을 통해서, 다음의 점은 이미 충분히 드러났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이미 사회의 생산(능)력 발전과 충돌하기 시작했다는 점, 따라서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는 이제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철폐할 시기가 되었다는 점!” 5. 생산의 사회적 성격의 확대 지금까지 이어진 인류 보편적 모순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모순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다만 이 충돌이 도달한 역사적 발전 단계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은 기존에 존재했던 다른 사회 체제의 모순과는 구별된다.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등장하고 발전하며 보편화되는 생산력은 바로 ‘사회적’ 생산력이다. 사회적 생산력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생산이 개인적 필요와 욕구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와 요구에 따라 이뤄진다는 뜻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결과물을 대표하는 것이 ‘상품’이라는 점이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상품교환이 일어났지만, 생산물을 대표하는 것이 상품은 아니었다. 주요한 경제활동은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생산(능)력이 너무나 낮은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빼앗길 만한 잉여노동 자체가 아주 클 수가 없었다. 이 잉여노동이 만들어 낸 재화 중에서 노예주나 지주가 소비하는 몫까지 제외한다면, 시장에서 판매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었다. 그런데 상품으로 교환될 수 있는 것은 주로 이 잉여노동 시간에서 발생했다. 자신과 가족이 먹고사는 데 직접 필요한 것들은 결코 상품으로 시장에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예와 농노의 잉여노동에서 발생한 잉여생산물의 경우도, 그것의 대부분은 노예주와 봉건영주, 봉건지주의 호의호식을 위해 사용됐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하는 상품은 사회의 총생산물에서 작은 일부일 수밖에 없었다. ‘타인에게 판매하기 위해 생산하는 생산물’ 즉, ‘교환 자체를 위해 생산하는 생산물’인 ‘상품’이 사회의 총생산물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역사적 발전에 의해 다른 전제조건들이 창출돼야 했다. 기계제 대공업과 집단적 생산 우선 생산능력이 획기적으로 발전해야 했다. 그래서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생산하는 자급자족 수준을 넘어서는 잉여생산물이 큰 규모로 발생해야 했다. 그리고 이 잉여생산물은 착취자의 호화 소비 규모를 넘어설 정도로 충분해야 했다. 이렇게 생산능력이 발전해 타인에게 판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산되는 생산물이 충분하게 발생할 때 시장교환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다음으로 노동 분업이 본격화해야 한다. 노동 분업이란 각각의 생산자가 생산하는 생산물의 종류를 다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생산물은 자기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된다. 자연스레 생산물 사이의 교환이 필수적이게 되고, 그렇게 해서 생산물은 상품으로 전화한다. 이러한 생산능력의 획기적인 발전 및 노동 분업의 본격화를 가능케 했던 것이 바로 기계제 대공업의 등장이다. 봉건 사회 말기에 일어났던 노동 분업은 도시 수공업과 농촌 소규모 생산 사이의 분업이었다. 소농민들은 식량을 생산하고, 이것의 일부를 도시 수공업자들이 생산한 농업 도구들과 교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환이 확대됐지만, 그럼에도 상품으로 교환되는 생산물은 전체 생산물 중 작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기계제 대공업이 도시에서 발전하면서, 이런 상황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기계제 대공업은 엄청난 양의 생산물을 전적으로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했다. 그것과 연관된 다양한 새로운 산업 부문의 등장(가령 철도)은 사회적 노동 분업을 가속화했다. 자급자족적이고 소규모였던 농업 생산의 비중은 급속히 줄어들었고, 판매 자체를 목적으로 생산하는 공업 생산의 비중이 빠르게 높아졌다. 농업 생산도 빠르게 판매를 위한 생산으로 재편되어 갔다. 그와 함께 생산 방식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생산은 소농민이 자기 논과 밭에서 자기 소유의 농업 도구를 가지고 가족과 함께 일하는 ‘소생산 방식’과는 질적으로 달라진다. 거대한 공장에서 수백, 수천, 수만 노동자들이 함께 모여 생산하는 집단적 생산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된다. 또한 그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노동에 종사하는 여러 분야의 노동자들로 나뉜다. ‘사업장 내 노동 분업’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은 ‘이것은 내가 생산한 것’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게 된다. 가령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라면, 이 노동자는 ‘이 자동차는 수천, 수만 명의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생산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자동차 조립공장에 부품을 보내는 수십만 부품업체 노동자들, 자동차 차체와 부품에 들어가는 철강을 가공하고, 플라스틱과 오디오, 전선, 페인트를 제공하는 연관 산업의 수백만 노동자도 고려해야 한다. 심지어는 저 철강과 플라스틱의 원료를 공급하는 칠레의 철광석 노동자, 중동의 석유 산업 노동자도 감안해야 한다. 결국 이것이 진실이다. “이 자동차는 수천만, 수억 세계 노동자의 협력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생산은 집단적 방식으로 이뤄질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전 세계적, 사회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대규모 시장 한두 명, 기껏해야 몇 명에 의해 수공업적으로 이뤄지던 생산이 기계에 기반한 수백, 수천 노동자의 집단적 생산으로 대체됐다. 기계제 대공업을 통해 집단적 생산이 전면화함으로써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이 일어났다. 수공업 생산에 비한다면 기계제 대공업의 1인당 생산량은 비교 불가능할 만큼 엄청나게 증대했다. 그것은 ‘대규모 시장’을 요청했다. 우선 기계제 대공업은 엄청난 양의 원료가 필요했고, 이것은 원료에 대한 대규모 거래가 이뤄지는 시장을 요청했다. 또한 기계를 만들어 내는 자본제 생산 분야와 기계를 사용해 생활수단을 만들어 내는 소비재 생산 분야 사이에 거래가 필요했다. 엄청난 양의 최종생산물 또한 바로 그만큼의 거대한 판매처를 요청했다. 이러한 대규모 시장 없이는 기계제 대공업의 발전이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기계제 대공업으로 아무리 많은 양을 생산하더라도, 결국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는다면 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좁은 지역 사회를 넘어선 전국적 시장교환, 나아가서 세계 차원의 시장 거래를 요구했다. 그것은 철도, 트럭, 선박 등을 활용한 신속하고 대규모적인 물류 운수 산업이 뒷받침돼야 가능했다. 이것은 몇십 년 동안 아직 상용화되지 못한 채 창고에 처박혀 있던 와트의 증기기관을 세상에 불러냈다. 이 증기기관을 장착한 철도가 굉음을 울리면서 대륙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물류 산업이 빠르게 확대되자 이것이 기계제 대공업에 반작용을 가해, 기계제 대공업은 더욱 강하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이렇게 생산과 물류, 시장이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맞물려 들어가면서, 대다수 생산물이 상품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빠르게 확립돼 갔다. 그 본성상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개별 국가를 넘어 전 세계 시장을 향해 뻗어 갔다. 생산은 국가적 성격을 벗어던지고 세계를 향해 확장했고,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 경제를 세상에 토해 냈다. 6. 사회적 생산력과 충돌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바닷물 한 방울에는 대양의 모든 성분이 포함돼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이 응축돼 있다. 상품은 사회적 생산과 교환의 산물이다. 몇 가지 측면만 살펴도 그 점은 너무나 분명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선 상품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수단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상품은 ‘사회적 사용가치’ 즉, 타인들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생산된다. 다음으로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의 생산에 투입한 ‘사회적으로 평균적인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다. 여기서는 ‘주관적 척도’가 아니라, ‘사회적 척도’에 의해 생산자의 노동 가치가 측정된다. 개별 생산자가 10시간의 노동을 투입했더라도, 만약 이 상품 제작에 투입되는 사회적 평균 노동 시간(이것은 평균적인 숙련도와 노동 강도, 기술조건, 기계화.자동화 정도를 기준으로 측정된다)이 9시간이라면, 이 상품은 9시간어치의 교환가치만을 갖게 된다. 이 두 가지 측면이 보여 주는 것은 노동(생산)의 성격이 ‘사회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물론 상품 생산이 존재하는 모든 사회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노동’이 존재했다. 그러나 전체 생산물 중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낮았다. 이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 노동은 아직 충분히 사회적 성격을 띠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원시 공산제의 경우 집단적, 공동체적 노동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그것의 범위는 부족 수준의 아주 제한된 공간을 넘어서지 못했다. 게다가 원시 공산제 사회에서는 아직 사적 소유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생산물이 상품의 형태를 취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면 상품교환의 확대에서만이 아니라, 생산 과정 자체에서 노동의 성격이 질적으로 변화한다. 기계제 대공업의 발전에 따라, 생산 자체가 이미 ‘개별적 노동’이 아니라 ‘집단적 노동’의 성격을 띤다. 나아가서 생산은 개별 작업장의 수준을 넘어서서, 전 세계 차원 생산의 사회적 연결망 속에서 이뤄진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이처럼 작업장 내에서든, 전체 사회적 차원에서든 노동(생산)에 ‘집단적·사회적 성격’을 깊이 각인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생산력은 비로소 ‘사회적’ 단계에 도달했다. 이처럼 생산력은 ‘사회적, 집단적, 세계적 생산력’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고, 또한 그 성격은 갈수록 더욱 강화되지만, 생산관계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우선 ‘소유관계’ 측면에서 보면, 생산은 노동자들의 전 세계적 협동 노동 및 사회적 노동 분업을 통해 이뤄지지만 소유권은 여전히 극소수 자본가 계급이 장악하고 있다. 이것은 ‘분배관계’를 규정한다. 자본주의 분배관계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이라는 형태로 노동력의 가치만 준 뒤, 나머지 노동은 자본가들이 공짜로 가져가 이윤으로 착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배관계는 생산수단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소수 자본가들의 수중에 집중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소유관계를 더욱 강화한다. 이렇게 강화된 소유관계는 자본주의 분배관계를 더욱 강화해, 갈수록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부의 불평등을 키운다. 결국 사회적 생산력과 부르주아적 소유관계, 분배관계 사이에 충돌이 커져 간다. 그리고 충돌은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이 토해 내는 막대한 생산물을 더 이상 자본주의 사회가 소화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기도 한다. 생산과 소비 사이의 충돌이 바로 그것이다. 자본주의 소유관계, 분배관계는 소비의 한계를 만들어 낸다. 자본주의 소유관계에서 노동자들이 분배받는 몫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상품 구매량은 그보다는 빠른 속도로 확대되는 생산량을 결코 쫓아갈 수 없다. 이러한 양상은 결국 파국에 이른다. 시장에서는 팔리지 않는 상품들이 범람해, 불황과 공황이 발생한다. 그 결과 멀쩡한 기계와 작업장이, 수많은 노동자들이 더 이상 생산에 투입되지 못한다. 수많은 공장이 문을 닫거나 가동률을 낮춘다. 자본주의 생산력은 비틀거리고, 쪼그라들면서 후퇴한다. 자본주의 소유관계, 분배관계가 더 이상 포용할 수 없을 만큼 웃자란 사회적 생산력은 결국 폐기 처분된다. 생산력은 성장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가 허용하는 좁은 테두리에 갇히거나 심지어는 파괴된다. 다음으로 ‘교환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생산이 이미 사회적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음에도, 교환은 시장에서 상품교환을 매개하는 무정부적 방식으로 이뤄진다. 생산력과 교환관계는 서로 격렬하게 충돌한다.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은 생산물 사이의 교환이 계획적으로 잘 이뤄지기를 학수고대한다. 그래야만 전 세계적으로 짜인 거대한 사회적 노동 분업망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 필요량이 정확히 측정되고, 그에 맞춰 자동차 산업 및 연관 산업의 전반적인 생산계획이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교환관계는 그것을 전적으로 시장에서의 상품교환에 내맡겨 버린다. 그 결과 자본주의 생산은 무계획적 방식으로 집행된다. 자동차가 시장에서 얼마나 팔리게 될지, 그에 따라 전반적인 생산계획이 어떻게 짜여야 하는지를 전혀 가늠하지 못한 채 생산이 이뤄진다. 모든 것은 시장에서 교환이 일어난 다음에야, 확인된다.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는 상품들이 흘러넘치기 시작한 뒤에야, 자본가들은 생산의 축소를 결정한다. 이러한 무계획적 생산 방식은 자본가들에게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 결과 자본가들은 시장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고 예견하면서 파산이나 손해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를 분석하고 시장 상황을 예측하는 기구들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럼에도 무계획적 생산이 불러오는 파국에서 그들이 자유롭게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런 위험을 경쟁하는 자본가들에게 전가시키기 위해 격렬한 경쟁에 돌입하곤 한다. 그 결과 과잉생산은 결코 멈추지 않으며, 단지 패배한 자본가들이 그 대가를 치를 뿐이다. 상황이 잘 흘러가서 주요한 자본가들이 암묵적 담합을 통해 생산을 감축하는 경우라면 어떨까? 이 경우에도 사회가 치러야 할 결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사회의 생산력은 강제적으로 축소되며, 이에 따라 생산 감축과 실업 행렬이 뒤따른다. 이처럼 무계획적으로 생산이 이뤄짐으로써 발생하는 낭비는 불가피한 것인가? 시장에서의 상품교환이라는 자본주의 교환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생산계획을 짤 수 없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개별 작업장 수준에서는 이미 완전히 계획적인 생산이 이뤄지고 있다. 연간, 월간, 주간, 일간 생산계획표에 따라 생산은 착오 없이 잘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차원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어떤 자본가도 자기 회사에서 생산한 상품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잘 판매될 수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수많은 자본가들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들의 생산을 세계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무계획적인 생산이 야기하는 파국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대자본가들은 잘 발달된 경제 예측 기구들, 가령 거대한 경제 연구소를 운영한다. 자본가 국가 또한 이런 자본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여러 국책 경제 연구소들을 운영한다. 이러한 경제 연구소들만이 아니라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도 손실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경제 연구소를 운영하며 전 세계 생산 흐름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계산한다. 이러한 ‘부기 수단’들이 발전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전 세계적 생산의 흐름을 계산할 수 있는 정교한 방법들을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이렇게 예측하더라도 이것이 생산의 사회적 계획화를 가능케 하는 건 아니다. 몇 년 후 세계 시장에서 자동차가 포화될 거라고 예측하는 자본가는 어떤 전략을 세울까? “누군가는 과잉생산의 결과 몰락할 것이 분명하다. 무정부적 과잉생산의 대가를 치르는 자는 내가 아니라 경쟁자여야 한다. 자동화, 기계화를 촉진하고 노동 강도를 높여 더 값싸게 더 많은 자동차를 생산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이 개별 자본가가 내리는 결론이다. 그 결과 예측의 효과는 사라지고, 대신 과잉생산에 따른 파국은 더 일찍 모습을 드러낸다. 개별 기업 수준의 계획화는 전체 사회 차원에서는 완전한 무계획성으로 둔갑해 버린다. 이와 같은 결과가 너무나 위험천만하기 때문에 주요한 대자본들이 생산을 감축하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한계 내에서 ‘생산의 계획화’가 작동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화는 생산력의 낭비를 제거하는 진정한 계획화가 아니다. 착취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결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강제적인 생산 감축인 것이다. 이 경우에도 그것의 결과는 불황과 공황,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 파괴와 낭비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노동자 계급을 잔인하게 착취한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인류의 진보를 측정하는 중요한 척도인 생산력을 훼손하고 파괴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도 이제 완전히 낡아 버린 반동 체제다. 종합해 보자.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모순은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과 ‘낡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소유관계+교환관계+분배관계)’ 사이의 충돌이다. 이 충돌은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계급 투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노동자 계급은 발전하는 사회적 생산력에 걸맞게, 모든 생산수단을 노동자 계급의 공동 소유, 즉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킴으로써 사회적 생산력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과 충돌을 해결한다. 아울러 자본주의의 무정부성, 그리고 ‘자본주의적 계획화’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사회적 생산과 소비’가 조화로운 진정한 사회적 계획생산의 단계로 인류를 이끈다. 그 결과 사회적 생산력에 조응하는 새로운 사회적 생산관계가 탄생해, 사회적 생산력을 더욱 고도한 단계로 이행시켜 인류를 진보로 이끌게 된다. 바로 그 사회적 생산관계를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라 불렀다. 7.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 그리고 이것과 충돌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은 여러 양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모순은 얽히고설켜 생산력을 제약하고 파괴하는 불황과 공황 등을 잉태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자신이 더 이상 사회의 진보를 대변하지 못한 채 쇠퇴하는 반동적 체제임을 명백히 드러낸다. 그러한 모순 중 마르크스가 주목한, 가장 근본적인 모순은 ‘생산과 소비 사이의 모순(과잉생산 경향)’ 및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 자본주의가 토해 낸 사회적 생산력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한계가 없다는 듯, 무한히 발전한다. 이에 더해 자본주의 생산은 ‘축적(자본의 증식)을 위한 축적’ 경향에 지배받는다. 한편으로 이윤 증식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확대 투자가 필요하다. 미래에 더 큰 이윤을 얻으려면, 자본가들은 더 많은 이윤을 부단히 생산에 투자해야 한다. 다른 한편 무한대의 경쟁이 초래하는 거대한 압력이 자본가들 사이에 작동한다. 자본가들에게는,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서라도 자본 투자를 계속 확대하는 것이 지상 명령이 된다. 이런 점들 때문에, 자본의 무한 증식(축적을 위한 축적)은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는다. 그 결과 사회적 생산력 발전은 가속화하고, 이것은 갈수록 더 많은 생산물을 시장에 토해 놓는다. 하지만 이렇게 확대되는 생산은 소비와 조응해야 한다. 확대되는 생산 규모를 소비 규모가 쫓아가지 못하게 되면 ‘과잉생산’이 발생한다. 얼핏 보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노동자 민중은 소비의 과잉이 아니라 결핍으로부터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소비가 가능한 사람들은 최소한 상층 중간 계급 이상인데, 이들의 비율은 전체 인구에서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란 ‘구매능력’에 좌우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물은 상품 형태로 존재한다. 자본가들은 자선 사업가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생산물을 판매해서, 그것으로부터 투입한 자본과 함께 적정 수준의 이윤을 회수할 수 있어야 생산을 지속할 이유가 생긴다. 그런데 다수 소비자들은 단순히 ‘필요’가 아니라, ‘구매능력’에 따라 소비 행위를 한다. 아무리 절실히 필요하더라도, 구매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소비는 불가능하다.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 그리고 과잉생산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매능력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소유관계에 좌우된다. 사회의 압도 다수인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소유관계에서는 노동력의 가치 즉 임금에 의해 구매능력이 제한된다. 그런데 자본가들의 ‘축적을 위한 축적’ 욕구(이윤 욕구)에는 한도가 없다. 그에 따라 기술적 발전 단계가 규정하는 생산능력의 절대적 한계를 제외하면, 자본주의 생산은 다른 어떤 한계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무한히 확대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 결과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이 커진다. 이 간극은 생산이 소비를 압도하는 양상을 취하는데, 그 결과가 과잉생산이다. 이것은 노동자 계급의 필요를 능가하는 과잉생산이 아니다.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 소유관계가 규정하는 작은 구매능력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하는 과잉생산이다. 만일 노동자 계급이 충분한 구매능력을 갖고 있다면,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의 수입이 ‘임금 법칙’에 갇히지 않고 충분하다면, 결코 발생할 수 없는 그러한 과잉생산인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과잉생산이 노동자 계급의 ‘과소소비(가난과 결핍)’와 나란히 존재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 이러한 과잉생산이 시장에서 전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면, 여러 자본가들이 파산하게 된다. 그와 함께 장기불황 혹은 공황이 사회를 덮치게 된다. 한편으로 시장에는 수많은 생산물이 팔리지 않고 쌓여 있다. 다른 한편으로 기업들이 대대적으로 파산하거나 생산을 대폭 축소하면서 대규모 실업과 저임금에 신음하는 굶주린 노동자들이 생겨난다. 이것은 자연재해로부터 발생하는, 과거의 굶주림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과거 사회에서는 생산물이 흘러넘쳐서가 아니라, 자연재해 때문에 생산이 급격히 감소함으로써 굶주림이 나타났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다르다. 생산물이 흘러넘치지만,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굶주림이 확산된다. 자연재해에 따른 생산의 감소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거대한 기술적 발전과 생산에 대한 투자 확대로 너무나 많은 것이 생산된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노동자 계급의 굶주림이 발생한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을 만들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체제, 즉 자본주의 소유관계가 범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단순히 생산능력을 발전시키는 것만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를 철폐하는 혁명적 전망을 통해서만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줄일 길은 없는가? 과잉생산에 따른 장기불황과 공황을 지우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필사적인 시도를 거듭해 왔다. 노동자 계급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 계급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시도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가령 케인스주의 정책을 이어받아, 노동자 민중의 소득을 향상시켜 자본주의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과거 문재인 정부의 야심찬 계획이 증거가 될 수 있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장이 줄어들어 판로가 좁아지며, 그로 인해 자본가들의 투자가 침체되고 성장률이 낮아지는 게 자본주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노동자 서민의 소득 증대를 시장 확대로 연결해 자본주의를 정상화하고, 나아가서 자본주의를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자본가 계급의 계획이 등장할 수 있다. 그들의 계획을 추진하면,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은 확실히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노동자 계급의 커지는 구매능력은 분명 소비를 확대할 것이고, 그렇게 하면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이 좁아지면서 자본주의는 활력을 되찾을 듯 보인다. 그러나 이 계획의 성공조건은 무엇인가? 노동자 서민의 삶의 개선, 즉 소득의 증대가 자본가들의 이윤과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이윤을 늘리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조건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결코 성립할 수 없는 조건이다. 생산의 동기가 소비 확대이며, 이는 노동자들의 삶의 개선과는 결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이 생산을 결정하는 동기는 무엇일까? 단순히 생산량 확대가 아니다. 유일한 생산 동기는 이윤 증식이다. 그런데 이윤 확대는 소비 증가가 아니라 소비 축소를 요청한다. 왜냐하면 이윤을 확대하기 위한 결정적 조건인 노동자에 대한 착취 증대는 불가피하게 노동자의 소비능력을 줄여 버리기 때문이다. 소비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윤 감소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것은 자본가 계급의 생산 동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아주 예외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절대적 소득 증대와 자본주의 성장이 나란히 서 있는 경우가 있다. 바로 자본주의 경기 활황기다. 안정적인 이윤율이 뒷받침되는 활황기에 자본가 계급은 가장 높은 수준의 투자에 나선다. 이것은 비록 일시적으로나마 고용을 확대하고 임금 수준을 높여, 노동자들의 소득 수준이 절대적으로 높아진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주의는 과거 케인스 식의 논리가 발 딛고 있던 2차 세계대전 후 호황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점증하는 경제 위기에 휩싸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득주도성장론은 완전히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 뒤에는 어떤 정책이 기다리고 있을까? 바로 자본주의 성장을 가속화하는 것 즉, 노동자 착취도를 강화해 이윤율을 높이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을 더욱 키울 수밖에 없다. 본래 자본주의적 성장 그 자체는 노동자 삶의 진정한 개선을 보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빠르게 성장하는 시절에는 더 많은 몫을 빼앗기더라도 노동자들의 절대적인 삶은 개선될 수 있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성장이 갈수록 장애에 부딪히고 있는 오늘날에는, 그에 따른 이윤율 하락을 노동자 삶의 하락을 통해 필사적으로 만회하려 하는 자본가들의 욕구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성장을 목표로 하는 한, 노동자 삶의 질과 수준 하락이 필연코 수반된다. 지금처럼 자본주의의 눈부신 성장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시대에 노동자 민중의 소득을 보장할 유일한 방법은 ‘계급 투쟁’이다. 어떤 계급 투쟁일까? 노동자 민중의 소득 보장을 위해 필요한 만큼 거침없이 자본의 이윤과 소유권을 침해해 들어가는 계급 투쟁이다. 극소수 자본가들이 움켜쥔 막대한 부를, 사회 전체의 부로 전환해서 사회 전체를 위해 계획적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계급 투쟁이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고 소수 자본가들만이 결정권을 갖는 자본주의적 투자를, 노동자 민중의 삶과 사회적 필요의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계획적 생산으로 대체함으로써 생산과 소비 사이의 균형을 창출하는 계급 투쟁이다. 이것만이 과잉생산 경향을 폐지함으로써 불황과 공황을 추방할 수 있고, 진정 소비와 조화를 이루면서 중단 없이 발전하는 효율적 생산 체제를 가져다줄 수 있다. 그것은 생산의 동기 자체를 완전히 바꿔야만 실현할 수 있다. 생산의 목적이 한 줌 자본가들의 이윤 증식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또한 생산의 확대가 노동자 계급의 민주적 동의 아래 결정되는, 적절한 수준의 사회적 투자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8.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 과잉생산 경향은 장기불황과 공황 속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을 가속화하고 갈수록 전면화하는 근본 요인이 있다.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인데, 이 법칙 또한 자본주의 착취 체제(자본주의 소유관계)라는 뿌리에서 자라난다. 자본가 계급의 모든 이윤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기계, 토지, 건물, 노동력 등 총 투하자본에 대한 이윤의 비율(이윤율)’이 갈수록 낮아진다. 기계, 토지, 건물 등 생산수단에 투입하는 자본의 크기(이것을 불변자본이라 부른다)가 늘어나는 비율에 비할 때, 노동력에 투입하는 자본의 크기(이것을 가변자본이라 부른다)가 늘어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더 낮아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경험적으로도 분명한 사실이다. 자본의 총량이 늘어나는 것에 비해 고용하는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임금의 총량은 훨씬 더디게 증가한다. 그런데 자본가들이 이윤을 뽑아내는 부분은 불변자본(생산수단) 부분이 아니다. 구입한 원료나 기계는 자기 가치를 상품에 이전할 뿐, 추가가치(이윤)를 조금도 보태 주지 않는다. 추가가치(이윤)가 발생하는 곳은 바로 노동자에 대한 착취다. 지불하는 임금에 비해 더 많은 일을 시킴으로써 그 차액만큼이 이윤으로 발생한다. 그런데 이처럼 이윤을 낳는 부분(가변자본)이 전체 투하자본 중 차지하는 비율이 갈수록 줄어들게 되면, 착취율이 높아지더라도 이윤율은 경향적으로 낮아지게 된다. 그 결과가 바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다음의 세 가지 점에 주의할 것을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첫째, 줄어드는 것은 이윤율이지 이윤의 총량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윤의 총량은 절대적으로 늘어난다. 다만 총 투하자본에 대비할 때 얻는 이윤의 비율이 줄어들 뿐이다. 둘째,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의 토대에서는 발전하는 생산력이 반영할 수밖에 없는 생산의 기술적 조건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산력의 발전, 즉 생산의 기술적 발전을 드러내는 여러 지표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무엇일까? 바로 생산자 1인이 1시간 동안 생산해 내는 생산량, 즉 1인당 생산성이다. 착취관계를 배제하고 접근한다면, 결국 인류의 생산 발전이란 생산자 1인이 단위시간 동안 얼마만큼 많은 것을 생산했느냐로 측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1인당 생산성은 인류 역사 내내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고, 이러한 발전이 인류의 풍요와 문명의 발전 수준을 규정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1인당 생산성을 규정하는 기술적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단위 시간당 1명의 생산자가 가동하는 기계와 소모하는 원료의 양, 즉 생산수단의 양이다. 이것은 누구의 눈에도 자명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류 사회를 관통하는 그런 명백한 사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다른 외피를 두르고 나타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은 불변자본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노동자는 가변자본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1인당 생산성의 증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총 투하자본 대비 노동력의 비중 저하, 따라서 이윤율의 저하 경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진보를 거꾸로 돌리지 않는 한, 자본주의 사회는 이 이윤율 저하 경향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다. 게다가 자본가들 사이의 첨예한 경쟁은 이윤율 저하 경향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결국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에서 성공 여부는 노동자 1인당 생산성을 누가 더 높일 수 있느냐(이것은 경쟁 자본에 비해 생산물을 더 값싸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게 한다)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셋째, 마르크스는 이윤율 저하 법칙 앞에 ‘경향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무슨 말일까? 단순하게 일직선으로 관철되는 법칙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본가 계급은 생명 같은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착취도를 높이는 것이 대표적인 대처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윤율 저하 법칙을 잠시 저지할 뿐 지속적으로 막을 수 없다. 오히려 장기적으로 볼 때 그러한 저항은 이윤율을 낮추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가령 착취도를 높이는 대표적인 방법은 정리해고로 노동자 수를 줄이는 대신 1인당 생산량을 높이는 것이다. 그 방법 중 대표적인 것이 기계 수를 늘리거나 자동화를 촉진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기계와 같은 생산수단)의 비율을 높인다. 그 결과는 바로 이윤율의 하락이다. 이처럼 이윤율 저하를 막기 위한 자본가 계급의 필사적인 반항에 의해 일시적으로 이윤율이 회복될지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을 마르크스는 강조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이윤율의 저하 경향이 바로 그러한 자본가 계급의 반항을 통해서 장기적으로 관철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것을 표현한 개념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다. 9. 낡아 버린 자본주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파산선고다. 왜냐하면 이 법칙은 자본가 계급이 갈수록 생산의 발전에 적대적인 반동 계급으로 전락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자본가 계급이 생산을 확대할 것인지 축소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윤율’이다. 그런데 이 이윤율이 갈수록 줄어든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투자에 대한 자본가들의 열기가 감소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생산력의 발전이 커다란 장애에 직면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 점 때문에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 앞에서 도망쳤다고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이윤율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투자하고, 그 결과 생산력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는 점에서 자본가들을 정당화했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로서는 자본가 계급의 심장인 이윤율이 갈수록 감소한다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이윤율이 갈수록 감소한다면, 자본가 계급의 투자율도 갈수록 감소할 것이고, 그 결과는 명백히 생산의 맥박이 느려지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거기서 도망치는 대신, 진실을 향해 한 발 내디뎠다. 마르크스는 거기서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성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낮아질수록, 자본주의 체제의 맥박은 느려져서 더욱 빈번하게 그리고 더욱 전면적으로 장기불황이나 공황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고 마르크스는 예견했다. 즉, 마르크스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 작동함으로써 자본주의 반동성은 갈수록 가속화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의 예견은 명확한 사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상식이 됐다. 그리고 이윤율 저하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필연적으로 공황이나 장기불황으로 이어지고 있음도 중요한 사실이다. 어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도 그 점에 대해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더라도, 그들은 그 법칙으로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반동성을 끌어내지 않는다. 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 즉, 자본가 계급의 이론적 수호자라는 지위가 그들에게서 과학적 양심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은 자본주의 체제의 반동성이 갈수록 가속화함을 보여 준다. 자본주의 사회의 과잉생산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이윤율이 갈수록 낮아지는 상황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간극이 조금만 벌어지더라도 이윤율이 최저한도에 금방 이르게 됨으로써, 불황과 공황이 더욱 빠르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최근 상황은 더욱 악화하고 있다. 이제 자본가들의 투자 러시를 불러오는 호황기란 거의 기대할 수 없다. 이윤율이 너무나 낮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호황기란 장마철에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햇볕처럼 기대하기 어려워졌고, 자본주의 사회는 장기불황이 대공황으로 이어지는 것만 막아 내도 다행이라 느끼는 단계에 도달했다. 나아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는 실물자본과 화폐자본의 괴리(거품)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모순을 확대하고 있다. 생산 분야에서 낮아지는 이윤율은 자본가들의 투자 의욕을 짓밟는다. 그에 따라 자본가들은 다른 자본가들의 이윤을 강탈하거나, 중간 계급의 소득이나 노동자 계급의 임금까지 수탈하는 데로 고개를 돌린다. 비생산 분야에서 거품을 일으키거나 부동산, 주식, 화폐, 선물투기 등을 통해 모험을 감수하면서 이윤율을 벌충하려 발악한다. 그러나 비생산 분야에서는 아무런 이윤도 생기지 않는다. 비생산 분야에서의 투기는 다른 자본가들의 이윤을 빼앗아 오는 것에 불과하다. 다만 대가가 있다. 자신의 이윤을 판돈으로 내걸어야 한다. 누군가가 얻으면 누군가는 잃는다. 다만 부동산, 주식, 화폐, 선물투기 등과 맞물린 거품 현상은 중간 계급, 노동자 계급의 소득까지 수탈함으로써만 자본가 계급의 이윤율 회복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대가는 무엇인가? 소비를 감소시키고, 이는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더 빠르게 넓혀 자본주의의 모순을 증폭한다. 여기에도 탈출구는 없다. 사회가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할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다. 생산의 동기가 이윤 증식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생존과 번영이어야 한다. 생산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것을 계획하고 그 결과물을 분배하는 주인공이 자본가들과 그들의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과 그들의 민주적 정부여야 한다. 그것은 모든 생산수단을 자본가 계급의 수중에서 연합한 노동자 계급의 수중으로 이전하는 사회주의를 의미한다. 사회주의는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없앨 것이다. 사회주의는 생산능력의 발전이 전체 사회 번영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줌 착취자들의 이윤율을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불황과 공황처럼 사회가 후퇴하는 이유가 되는 이 어이없는 반동적 생산시스템을 저 멀리 고대 박물관으로 보내 버릴 것이다. 10. 파산하는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쇠퇴는 이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 사상에도 종말을 고한다. 자유주의 이념의 파산은 그 단적인 예다. 자본주의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수요-공급의 법칙에 의해 사회적 자원이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관리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핵심 논리는 이런 것이다. 어떤 산업에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증대하면 가격이 낮아지고, 이것은 자본가의 투자욕을 감퇴시켜 사회적 자원이 이 산업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간다. 반대로 수요보다 공급이 부족하면 가격이 인상되고, 이에 고무된 자본가의 투자는 사회적 자원을 이 산업에 자동으로 추가 투입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런 식으로 사회적 수요에 비해 생산이 과잉인 부분에서는 사회적 자원이 빠져나가고, 사회적 수요에 비해 생산이 부족한 부분에서는 사회적 자원이 투입됨으로써 가장 효율적으로 사회적 자원을 분배하고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율적 조정 장치인 수요-공급에 따른 가격 결정 구조에 개입하는 것은 사회적 생산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간섭으로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가 뒤따랐다. 국가는 이 자율적 경제에 개입해서는 안 되고, 단지 밤에 도둑이나 잡는 역할에만 만족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야경국가론’이 바로 자유주의다. 여기서 하나의 논리가 추가로 파생됐다. 이런 가장 효율적인 자율적 조정 장치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금기시되는 반면, 자본가의 개입은 필수였다. 자본가들의 이윤욕이 개입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사회적 자원은 과잉된 부분(가격이 하락해 이윤율이 낮아지는 부분)에서 결핍된 부분(가격이 올라가 이윤율이 높아지는 부분)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자본가의 이윤욕, 다시 말해 자본주의 체제를 관통하는 이윤 논리는 잔인하고 반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이 효율적 경제 체제를 떠받치는 ‘유일하게’ 윤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사회적인 요소로 정당화된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는 자신이 신처럼 모셔 왔던 자유주의 이념을 스스로 배신하고 있다. 국가는 ‘야경국가’가 아니라, ‘전면적인 개입’에 나서고 있다. 수많은 자유주의 신봉자들이 그것을 보고 경악하며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마저도 국가가 행하는 그런 배신에 정면으로 항의하는 대신, 오히려 더 대담한 배신을 국가에게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이념, 그리고 이 이념이 대변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완전히 낡아 파산해 버렸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하나의 장면을 살펴보자. ‘마스크 사회주의’는 이제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다. 한국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에서 코로나19 당시 마스크를 비롯해 핵심 의료장비의 생산과 유통에서 국가 통제가 본격화됐다. 이는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이 재난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자신을 덮치는 위험을 스스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이념에 따르면, 마스크 수요가 폭증해 가격이 폭등하면, 높아지는 이윤율에 신바람이 난 자본가들에 의해서 사회적 자원이 마스크 생산에 투입됨으로써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돼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시장의 자율적 조정기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마스크 수요에 비해 생산은 부족하기 짝이 없었고, 생산 확대는 재난의 확대 속도를 결코 따라가지 못했다. 이것은 산소호흡기를 비롯해 문제해결에 필수적인 모든 의료장비에 빠짐없이 적용되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민영의료 체계는 이런 비상 상황 앞에서 아무런 효율적인 대처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을 드러냈다. 그 결과 한국 정부는 마스크 5부제를 시행하면서 마스크 생산, 유통, 분배에 직접 개입했다. 마스크 생산 가격도 직접 통제했다. 마스크 산업 자본가들에게 마음대로 맡겨 둔다면 치솟는 마스크 가격과 사재기 등으로 재난 확산에 대처할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 분명했고, 대중의 저항과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스크와 관련해 한국에서 나타났던 상황은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마찬가지 모습으로 재현됐다. 미국 트럼프 정부는 오래된 전시법까지 동원해 지엠에게 산소호흡기 생산을 명령했다. 영국 정부도 다이슨에게 인공호흡기 1만 개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하면서, 생산에 직접 개입했다.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는 손’으로 대체됐다. 그러나 자유주의 이념의 신봉자들은 이 상황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있다. 그들이 찬미하는 자본주의의 자율적 조정기능에 맡겨 둔다면, 그것이 초래할 재앙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료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배신은 거대한 배신의 일각에 불과하다. 자유주의 이념은 경쟁에서 도태된 비효율적인 부분을 제거함으로써 사회적 효율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항상 강조해 왔다. 시장의 가격 경쟁에서 도태된 비효율적인 기업이 제거됨으로써 사회는 선진적이고 효율적인 체제로 끊임없이 물갈이되면서 진보해 나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야경국가’는 파산하는 기업과 자본가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보내서는 안 되며, 이 뒤처진 비효율적인 부분의 파산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비효율적인 부분이 오랜 기간 비대하게 커져 왔다. 파산 직전의 위태로운 기업의 비율이 수십 년 넘는 오랜 기간 동안 계속 확대돼 왔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주요 자본주의 나라에서 이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된 한계 기업의 비중이 40%에 육박하고 있음을 몇 년 전부터 계속 경고했다.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하락하면서, 사회적 자원의 배분과 순환의 키를 쥐고 있는 자본가들이 자기 역할을 방기해 왔고,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활력을 앗아 갔다. 여기서는 자유주의 이념이 절대적으로 옳았다! 자유주의가 주장하듯 자본가들은 오직 이윤욕에 의해서만 생산에 박차를 가하는데, 이윤율 저하는 그들의 의지를 앗아 갔다. 투자율이 전반적으로 하락하면서, 자본주의 생산은 깊은 불황과 저성장의 늪에 깊숙이 빨려들어 갔다. 코로나19 사태는 이런 상황을 극적인 수준으로까지 빠른 속도로 밀어 올렸다. 다수 기업이 한계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생산가동률은 급격히 추락하고 있다. 자유주의의 기대와는 달리,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자율적 조정기능에 내맡겨 둔다면 그 결과는 재앙이다. 그냥 방치하면 이 자율적 조정장치는 완전히 망가져 버려, 대공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비효율성의 극치를 보여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들은 작심하고 자유주의를 완전히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 미국 정부는 부실 기업이 발행한 악성 채권까지 모조리 사들이는 무제한적 재정 투입을 선언했다. 한국 정부도 항공사, 두산중공업을 비롯해 파산 직전의 기업에게 천문학적 국가 재정을 쏟아 붓고 있다. 자본가 국가의 전면적인 개입 덕분에 분야를 막론하고 수많은 기업이 근근이 버티고 있고, 금융권은 파산을 모면하는 등 대공황으로 이어지는 파국이 유예되고 있다. 이러한 국가 개입이 미래에 야기될 거대한 위험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말이다. 자율적 조정능력, 효율성 증대, 자본가 이윤욕의 생산적 역할 등 자유주의가 내세워 왔던 매력들, 그리고 이 매력들에 기반했던 국가 개입 반대가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 자리를 시장에 대한 국가의 전면 개입이 대체하고 있다. 어제까지 강경 자유주의자였던 작자들이 오늘은 국가의 무제한적 개입을 부르짖고 있다. 어제까지 자유주의의 배신자로 취급받았던 국가 개입론자들이 이제 자유주의의 구원 투수로 칭송받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자유주의의 파산선고’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더 이상 이 사회의 진보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반동적 체제로 전락했음을 자본가 계급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자본가 정부는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대자본이 무너지지 않게 지원해야 한다. 국민의 재산인 정부 재정은 위기 때마다 ‘공적자금’이란 형태로 대자본의 회생을 위해 투입되곤 했다. 이렇게 자본가 국가의 도움으로 대자본은 회생하고, 그 과정에서 자본가 정부와 대자본의 융합은 더욱 전면화한다. 이제 대기업의 번영과 생존은 자본가 정부의 번영, 생존과 뗄 수 없이 연결된다. 대기업의 이사진과 경영진에는 공적자금을 지원한 자본가 국가의 핵심 관리들, 특히 산업은행의 관리들이 포진하게 되고, 이들의 입김이 높아진다. 이들은 정부 재정을 회수한다는 이름으로 노동자를 향한 가혹한 구조조정을 강요하고, 기업합병 같은 자본의 집중 경향을 부추긴다. 이런 식으로 국가와 자본 사이의 융합 경향은 지속적으로 강화돼 왔다. 순수한 자유주의 이념은 오직 부르주아 지식인의 관념에서만 존재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도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자본가 국가와 자본 사이의 긴밀한 융합의 확대였다. 11. 자본주의는 유효기간이 다해 가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는 국가와 자본의 융합 경향을 더욱 부각시켰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 이념이 그토록 강조했던 시장의 자율적 조정기능 그리고 자본의 탐욕이 낳는 효율성과 생산성 증대가 결정적 한계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과잉생산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다. 만성화된 과잉생산, 즉 생산과 구매의 부조화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강타했다. 시장은 자율적 조정기능을 발휘해 사회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재분배하기는커녕 만성 불황의 늪에 빨려들었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는 자유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생산의 추동력, 즉 자본가들의 이윤욕에 근거한 맹렬한 투자를 근본적으로 제약했다. 이윤율이 낮아지자 자본가들은 투자를 줄여 버렸고,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률을 극히 낮은 수준에 묶어 버렸다. 이윤에 눈이 먼 자본가들의 투자 덕분에 이뤄지는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은 옛 추억이 됐다. 돈은 생산 부문에서 빠져나와 금융과 부동산으로 흘러들었다. 이윤을 창출하는 유일한 분야인 생산이 답보 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이런 돈의 흐름은 거품과 위험을 증대시켰다. 실물자본과 괴리된 금융자본 부문에서 거품이 터짐으로써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덮쳤다. 여기서도 자본가 국가가 구원 투수로 등장했다. 천문학적 국가 재정이 금융 전반의 파산 도미노를 저지했다. 그 가운데 자본가 국가와 금융자본의 융합이 확대됐다. 코로나19 사태와 경제 위기 앞에서 이런 융합은 더욱 전면화되고 있다. 대불황의 위협 앞에 모든 자본가들이 자본가 국가의 지원책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상황은 자본주의의 몰락을 웅변한다. 하지만 아무리 국가 개입이나 통제가 확대되더라도, 이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을 뒤바꾸지는 못한다.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국가 개입의 모습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오늘날 전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국가 개입’의 의미는 무엇일까? 자본가 국가는 정부 수중으로 집중된 모든 사회적 자원을 자본가 구하기 작전에 투입해야 했다. 정부 재정의 더 많은 부분이 복지 정책이 아니라 자본가 살리기 정책에 투입돼야 했다. 쓸 만한 국유재산이나 공기업들은 최대한 매각해 민영화함으로써 자본가들의 추락하는 이윤율을 회복하는 데 사용하고, 좁아지는 투자처를 벌충해야 했다. 법인세 인하와 같은 조치를 통해 정부 재정은 더욱 전적으로 노동자 민중을 수탈해서 꾸려 가야 했다. 결국 마비 상태에 빠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란, 몰수 국유화를 통한 사회적 통제와는 완전히 반대편에 있다. 자본가 국가의 개입이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수탈로 마련한 사회적 재원으로 파산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구원하는 것, 또한 죽어 가는 자본가들을 사회적 재원으로 회생시켜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가 국가의 개입 확대는 자유주의 이념을 잉태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역사적 유효기간이 만료됐음을 입증한다. 하지만 자본가 국가의 개입 확대는 유효기간이 만료된 자유주의 체제를 회생시키려는 마지막 발악이다. 결국 이 자본가 국가는 자유주의 이념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편에 서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자본가 국가는 파산하는 자유주의 체제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보존하려는 자본가 계급의 필사적인 마지막 발악을 대표한다. 자본가 국가의 전적인 지원으로 당장의 대공황을 피한다고 해도, 역사적 수명이 다한 환자인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길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와 무정부적인 과잉생산은 자본주의 체제의 숙명이고, 이것은 지속적으로 위기의 규모와 폭발력을 키울 것이다. 자본가 국가의 확대되는 개입은 자본주의 한계 내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침식이다. 국가라는 형태로 사회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하지 않는다면, 이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위기와 모순을 조금이라도 유예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없다. 오늘날 국가의 개입은 불가피하다. 자본주의 경제의 불안정성이 나날이 증대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사회적 재난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지속적으로 불러올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본가 계급은 이 국가를 더욱더 분명하게 자본가 계급의 국가로 통제하고 활용하려 발악한다. 이것은 자본가 국가와 자본가들 사이의 융합을 가속화하고, 자본가 국가의 계급적 본질과 반동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 계급이 착취를 통해 쌓아 올린 거대한 부의 성을 허물어 노동자 계급의 일자리와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국가를 갈구한다. 정부 재정을 한 줌 착취자에게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생존을 위해 투입하는 국가를 갈구한다. 생산-유통을 대담하게 사회적으로 통제해 재난과 위기를 극복하는 국가를 갈구한다. 자본가의 이윤논리에서 벗어나 거대한 사회적 생산수단들을 전면적으로 국유화해 사회의 공동체적 원리에 따라 운영하는 국가를 갈구한다. 바로 이렇게 경제와 정치가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며 하나로 결합하는 체제가 바로 사회주의다. 파산하는 자유주의 뒤편에서 사회주의는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떠오르고 있다.2026-02-04 | 조회 3,8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