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탈성장 및 “화려한” 공산주의에 대한 에코 공산주의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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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번역] 탈성장 및 “화려한” 공산주의에 대한 에코 공산주의 대안

아르헨티나 마르크스주의자 에스테반 메르카탄테 신간 『불타는 붉은빛 - 생태 위기에 맞선 공산주의적 성찰』 인터뷰

  • 강성윤
  • 등록 2026.03.13 21:03
  • 조회수 491

아르헨티나의 마르크스주의자 에스테반 메르카탄테는 신간 『불타는 붉은빛 - 생태 위기에 맞선 공산주의적 성찰』에서 자본주의를 “다차원적” 생태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정면 비판하면서, 탈성장과 에코 모더니즘 같은 생태주의의 흐름과 중요한 대화를 전개한다. 이 흐름들에 맞서 메르카탄테는 노동을 자기 해방의 주체이자, 사회와 자연의 관계를 질적으로 전환시키는 행위자로 삼는 “에코 공산주의(Ecommunism)” 전략을 주창하며, 이것만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이 책이 스페인어로만 출간된 상황에서, 사회주의적 입장의 국제 학술지 『LINKS』의 페데리코 푸엔테스가 『좌파 사상(Ideas de Izquierda)』 편집위원이기도 한 메르카탄테와 만나 책에서 제기된 핵심 논점들을 짚었다.

 

F: 마르크스주의, 생태주의, 기후 위기에 관한 문헌이 이미 존재하고 끊임없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M: 이 문제가 오늘날의 논의에서 그토록 중대한 초점이 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의 생태 위기는 여러 쟁점이 교차하는 문제고, 이 문제와 그에 따른 영향은 다양한 학문 분야에 걸쳐서 고려되어야 합니다.

 

이 책에서 저는 두 가지를 탐구하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스페인어 사용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떨어지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논의에 도입하고 싶었어요. 특히 이 책이 출간된 아르헨티나에서 그랬죠(지금은 스페인에서도 출간되었습니다). 존 벨러미 포스터의 초기 저작부터 사이토 고헤이와 안드레아스 말름 같은 최근 저자들까지, 지난 수십 년 동안 나온 에코 마르크스주의(ecomarxist) 저작 대부분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혁명적 좌파 활동가들과 생태 운동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염두에 두고, 생태적 비판을 제시하는 몇 가지 동시대 문헌을 종합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신의 관점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천착해야 할 물음들이 있는데, 그 부분에도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자본 축적의 반생태적 성격을 폭로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지 모든 각도에서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 중에, 자본 생산 및 순환의 여러 국면을 재구성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본–노동 관계에서 출발해서 점점 가속화되는 상품과 화폐의 흐름에 기반한 세계 시장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살펴보는 거죠. 이는 순환의 각 단계에서 이런저런 생태 문제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사유할 수 있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가 그간 제대로 다루지 못했지만 우리가 반드시 토론해야 할 핵심 물음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본에 대한 생태적 비판과,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자본 이후 사회를 예비하는 혁명적 전략을 서로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포스터, 사이토 같은 이들이 중요한 논점을 제시했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중대한 약점으로 남아 있죠. 비교적 최근에 이 문제를 다루려는 시도들이 있었는데, 예컨대 안드레아스 말름의 “생태 레닌주의”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접근이 신선하기는 해도,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첫걸음으로서 혁명을 통한 권력 장악은 오늘날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는 말름의 견해는 그의 제안을 다소 허황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책은 제가 근본적이라고 믿는 어떤 논의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말하자면 생태적 관점에서 인류를 착취로부터 해방시키는 동시에,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사회와 자연 사이의 균형 잡힌 대사 작용을 복원하는 공산주의적 전망을 중심으로 혁명 전략을 어떻게 발전시킬까 하는 것입니다.

 

F: 환경주의자들은 흔히 기후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데, 당신의 책은 이 문제를 더 광범위한 “다차원적” 생태 위기 안에 위치시킵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M: 우리가 다차원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생각은 스톡홀름 회복력 센터의 연구가 잘 보여 줍니다. 이 연구는 여러가지 ‘지구 위험 한계선’을 설정합니다. 온실가스와 지구 온난화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생물 다양성 상실, 삼림 파괴와 토지 이용 변화, 해양 산성화, 대기 오염, 그 밖의 여러 한계선도 포함하고 있어요. 스톡홀름 회복력 센터는 아홉 가지 한계선과 각각에 대한 임계점을 제시하는데, 바람직한 삶은 차치하고 “견딜 수 있는” 삶을 위해서라도 악화가 가속화되는 것을 막고 예측 불가능한 결과가 초래되지 않게 하려면, 이 임계점들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다차원적 생태 위기입니다. 이 쟁점을 제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녹색 자본주의 옹호자들이 생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제안하는 해법 상당수가 단일 쟁점, 주로 기후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내놓는 제안에 따르다 보면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결국 다른 문제들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예컨대 에너지 전환을 이루려면 축전지 생산의 원료인 리튬 같은 광물을 대규모로 채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더 많은 자원 채굴로 이어지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물이 사용되며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같은 종속국들의 생태계가 훼손됩니다.

 

F: 왜 이 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의 DNA”에 있다고 보시나요?

 

M: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자연을 가치 증식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시키려는 충동입니다. 노동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자본에 종속된 노동은 물리적으로 가능한 최대의 가치를 끊임없이 생산하도록 강제됩니다. 가치 법칙이 자연으로까지 확장되면 농축산업이든 목재 공급용 농장이든 양식업이든 광업이든 간에 최저 비용으로 최대 자원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우선시됩니다. 자연은 오로지 전유 비용이라는 관점에서만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죠. 그러면서 특정 지역들은 폐기물 “투기장”으로 지정되는데, 이건 자본이 착취할 수 있는 하나의 “서비스”로 간주됩니다.

 

역사적으로 자본의 논리는 환경에 대한 영향을 기업의 방정식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전통적 경제 이론에서 이 부분은 기업 운영 비용에 내재하지 않는 “외부성”으로 존재합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세금, 벌금, 탄소 배출권 같은 방식을 포함한 환경 거버넌스를 통해 이것을 “교정”하려고 했죠. 그렇지만 이런 조치들은 자본과 자연의 관계나 각종 생산 활동의 부정적 영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저 오염에 “가격”을 매겨서 기업이 대가를 지불하게 할 뿐,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죠.

 

자본은 중장기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단기 수익을 우선시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의 행위가 낳은 이런 예기치 못한 결과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전 세기의 온실가스 배출이 야기한 기후 변화 말이죠. 그렇지만 이런 결과를 알고 있는 지금도, 석유 기업들은 사업을 접어야 할 시점이 가까워 오면서 마지막 한 방울의 석유까지 채굴하려고 서두르며 결과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사이토가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려 묘사한 것처럼 “내가 죽은 뒤에 대홍수가 오든 말든” 하는 관점으로 움직이는 이런 행태는 세대 간 지속 가능성이라는 전망을 무너뜨립니다. 많은 기업이 지속 가능성을 주문처럼 되뇌지만 대부분은 순전히 그린 워싱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의 논리는 지리학자 닐 스미스의 표현처럼 “자연의 생산”을 시도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즉 자본이라는 사회적인 것에 의해 전적으로 매개된 자연이죠. 그렇지만 이런 시도는, 스미스는 그 한계를 조금 과소평가하고 있는데, 긴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연의 대사 작용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이 작용을 포섭하려는 자본의 시도는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낳고, 그 영향의 크기는 자연을 지배하려는 노력에 비례합니다. 자연 법칙이 부과하는 한계를 무시하고 이윤을 위해서 그것을 “비틀려”는 지배 시도에 맞서서 자연이 “복수”한다고 말할 때 엥겔스가 염두에 둔 것이 이 부분입니다.

 

F: 책의 서론에서 당신은 환경이 국가 정책과 기업 관행에 매우 깊이 침투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아자이 싱 초더리(Ajay Singh Chaudhary)의 표현을 빌려서, 당신은 오늘날 지배적인 것은 “우파 기후 현실주의”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요?

 

M: 초더리는 지배 계급의 상당수가 기후 정책을 겉치레에 불과한 것, 무력한 것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음을 정확히 지적합니다. 그들이 기후 변화 부정론자라서가 아니라, 기후 재난이 갈수록 빈번하게 파국적으로 되풀이되고 악화가 가속화되어도 자신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초더리는 “무장한 구명정”이라는 발상을 제시하는데, 충분한 자원을 가진 사람들이 기본 필수품을 모두 갖춘 지하 벙커에 투자하면서, 동시에 언젠가 선택된 소수만 지구를 탈출할 수 있게 해 줄지도 모를 기술에도 투자하는 행태를 말합니다.

 

이 같은 생각이 얼마나 실현 가능하고 또 얼마나 순전한 공상인가 하는 것이 적어도 현재로서는 명백한 물음이겠죠. 그렇지만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세력들이 생태 위기를 인정하면서도 위기와 관련해 무언가 조치에 나서기를 거부하는데 스스로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듣는 “우리 모두 한배를 타고 있다”는 생각을 허물어뜨립니다. 생태 위기에 관한 한, 우리는 한배를 타고 있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계급과 빈민이 우리만의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부정론자든 아니든 지배 계급의 어떤 분파도 그걸 우리 대신 찾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F: 극우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아르헨티나와 미국에 극우 대통령이 있죠. 이 상황 때문에 국가 정책이나 COP(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같은 국제 포럼의 입장이 부정론 쪽으로 기울었을까요? 이것과 관련해서, 이 광범위한 극우 내부에서 에코 파시즘 경향이 부상하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M: 극우가 전 세계적으로 세력을 강화하면서 파리 협정과 2030 의제를 거부하고 COP에서 이탈하려는 부정론의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그렇지만 극우 사이에서 분열과 긴장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는 동맹이었지만 지금은 정면충돌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계속 부정론자였지만 머스크는 전기 자동차를 옹호합니다. 둘의 싸움 때문에 전기 자동차와 관련 기술에 대한 공적 재정 지원이 삭감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죠. 우리가 자주 보았듯이, 매우 강력한 부정론자인 극우가 자기 사상을 언제나 반드시 일관된 정책으로 전환시키지는 않아요. 우리는 각각의 경우마다 어떤 동맹이 형성되는지, 대자본의 어떤 부문들에 어떤 양보가 이루어지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부정론자들의 공격이 여러 다자간 포럼에서 의제가 정체된 것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입니다. 좌파와 진보 진영은 우파의 공격으로부터 이런 포럼을 방어하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이런 포럼들이 인색하고 무력하고 냉소적이라는 정당한 비판까지 침묵시키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부정론자들의 공격이 오히려 기업들의 “녹색 자본주의”와 이 포럼들에 일정한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죠. 우리는 이런 위험도 경계해야 합니다.

 

에코 파시즘의 출현 역시, 아직은 맹아적 단계지만, 주목해야 할 중요한 현상입니다. 생태 위기의 결과가 악화될수록 이른바 “비상 조치”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에코 파시즘의 성격을 띠는데, 이건 놀라울 것도 없죠. 이를테면 극우는 기후 위기 때문에 이주민의 물결이 거세질 위험을 이야기하면서 이걸 외국인 혐오와 연결시킵니다.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노동자 계급이 사회적 필요에 응답하고 근본 원인인 자본주의에 맞서서 이러한 위기로부터의 출구를 제시하는 독자적·혁명적 정치 전망을 발전시키지 못하면, 반동적 해법이 강제될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F: 에코 파시즘의 성장과 나란히 종말론적 전망이 갈수록 확산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특히 환경 파국론이나 붕괴 담론이 대중 운동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일부 좌파 진영에서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M: 붕괴라는 것도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특정 반자본주의 좌파 진영은 경제 위기든 생태 위기든 모든 위기에 대해서 매번 낡은 기계론적 파국론을 가져다 붙입니다. 주체적 지형에서의 어려움, 그러니까 혁명적 사회 세력 건설의 어려움을 보상해 줄 객관적 요인으로 그런 위기를 끌어오는 거죠. 이런 경향은 혁명 운동의 역사 내내 반복적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들이 생태 위기를 연료로 쓴다는 점은 놀랍지 않아요.

 

두 번째 경향은, 희소한 화석 연료에 의존하는 사회 조직은 어떤 유형이든 유지 불가능하다고 믿으면서, 자원 고갈이 사회적 수요의 축소를 필연적으로 강제한다고 봅니다. 그들에게 세계화는 지속 불가능한 것이고, 지역적·공동체적 영역으로의 회귀를 강제합니다. 이런 사고는 흔히 탈성장의 특정 조류와 결부됩니다. 바람직한 탈성장이 아니라 우리에게 불가피하게 부과되는 것으로서의 탈성장 말이죠.

 

마지막으로, 붕괴라는 관념은 일종의 일반화된 상식 내지 “감정의 구조”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는데, 이건 기후 재난의 빈도가 높아지면서 강화됩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고, 이미 불가항력적으로 파국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바로 여기에서 생겨났습니다. 이런 생각은 반체제적 대중 운동을 촉발하기보다는 대중을 마비시키는 비관주의로 이어집니다.

 

기계론적 사고의 산물이든 비관주의의 산물이든, 붕괴론은 행동을 막는 장애물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다가오는 파국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F: 일부에서는 북반구 국가들이 위기에 대해 주된 책임을 져야 하고, 남반구 국가들은 경제 발전을 위해 천연자원을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흔히 “공동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이라고 부르는, 또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는 기후정의라고 부르는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M: 그 관점은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중요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국제 거버넌스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부분이고, 예를 들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에 각각 차별화된 온실가스 배출 목표가 설정되죠. 전 지구적 기후정의 운동은 이러한 쟁점의 상당수를 부각시키는 기여를 했습니다. 생태론의 여러 경향도 불평등한 생태 교환이나 생태 부채 같은 개념들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렇지만 경제가 북반구에 종속되어 있는 국가들에게 문제는 “자본주의적 발전”이 헛된 꿈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의 역사는 제국주의 세계 질서 안에서 이 나라들이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저는 『세계적 무질서 시대의 제국주의』에서 전 지구적 가치 사슬의 형성이 어떻게 종속국들을 “바닥을 향한 경쟁”으로 내몰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각국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더 유연한 노동 및 환경 규제와 세제 혜택을 경쟁적으로 제공합니다. 그 결과, 기존 가치 사슬의 여러 고리에 편입하는 데 성공한 국가들조차도 자국 경제를 유의미한 방식으로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 사슬을 따라서 점점 더 불평등하게 가치가 분배되고, 부유한 국가들이 대부분의 몫을 가져가죠.

 

이것이 첫 번째 쟁점입니다. 두 번째 쟁점은, 생태 위기 시대에 발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비자본주의적 전망만이, 첫째로 종속과 약탈의 사슬을 끊고, 둘째로 인간과 자연의 건강한 대사 작용을 유지하면서 사회적 필요를 온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본주의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F: 당신은 “비판적 생태론과 에코 사회주의 내의 서로 다른 흐름들이 탈자본주의 사회 조직을 이끄는 중심 좌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다른 답을 내놓는다”고 썼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흐름들이 있습니까?

 

M: 대체로 이 흐름들은 탈성장 지지자들과 반자본주의적 내지 에코 모더니즘적 가속주의 옹호자들 사이에서 양극화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탈성장의 주요 표적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 성장이고, 경제 성장을 다차원적 생태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이 계열의 저작 대부분은 성장 “이데올로기”를 설명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죠. 여러 탈성장 문헌은 국내총생산 성장이 경제적 성공의 반박 불가능한 척도가 된 과정, 그리고 1930년대 이래 모든 경제 정책의 목표는 지속적 성장을 자극하는 것임을 한참 설명합니다. 탈성장론자들은 GDP 성장, 더 구체적으로는 1인당 GDP 성장과 삶의 질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더 높은 1인당 GDP가 사람들의 삶에서 그만한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저자들이 부유한 나라에서 글을 쓰고 상황을 사유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과잉 소비에 직면했고, 지금까지 추출된 것을 보충하는 지구의 역량을 훨씬 초과해서 자원이 채굴되었다는 논변은 선진국에 대해 말할 때는 타당합니다. 그들은 “제국적 생활 양식” 같은 개념을 제기하는데, 말하자면 부유한 사회들이 지속 가능한 한계를 넘어서 살아가고 있으며, 지구의 다른 부분에서 자원을 추출하고 그곳에 환경적 영향의 비용을 전가하면서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제국주의를 생태 담론에 도입하면서 흥미로운 쟁점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문제를 내포하죠. 예컨대 이런 논의는 생산 자체보다 소비를 문제 삼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고, 의도와 무관하게, 체제에 내재한 문제의 뿌리를 흐릿하게 만듭니다. 또 부유한 국가의 노동자 계급이 “제국적 생활 양식”의 참여자로 여겨지거나 적어도 명시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민영화와 전 지구적 경제 구조조정 때문에 최근 수십 년간 노동자 계급의 생활 수준이 현저히 악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여러 지표가 있는데도 말이죠. 이런 사실은 탈성장 관점에 명확히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균등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런 관점을 취할 때는 불평등이라는 측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전용기와 요트와 저택을 가진 초부유층이 그렇게나 거대한 생태 발자국을 만든 것에 압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죠. 탈성장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경제 성장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생산주의적 사고가 심지어 일부 반자본주의 진영에서도 뿌리를 내렸지만, 그건 분명 막다른 길입니다. 따라서 그런 경고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관된 대안을 발전시킨다는 측면에서는 탈성장 관점에 큰 약점이 있습니다. 탈성장론자들은 생산 방식에 질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는 걸 어려워합니다. 그들이 명확하게 주장하는 방법은 생산과 소비의 규모를 줄이는 것 같은 양적 강조뿐이죠.

 

서로 다른 탈성장 전망들 간의 공통분모는 불분명하고 다의적인 반자본주의적 입장뿐입니다. 경제 성장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데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적 측면에 반대한다는 뜻입니다. 자원 추출이 함께 증가하지 않으면 가치의 지속적 자본 축적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이 부정적 관념을 긍정적 대안으로 전환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탈성장의 대표자들 사이에서도 대안에 관해서 차이가 있습니다. 세르주 라투슈 같은 저자들은 관료화된 노동자 국가라는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사회주의 이념에 대놓고 적대적이고,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를 생산주의자라고 비난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정상 상태 자본주의 경제(일정한 지속적 조치를 통해 성장을 억제하면서 안정적 비율로 재생산을 보장하는 경제)가 성립 가능하기 때문에 탈성장과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적대적이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제이슨 히켈이나 사이토 고헤이처럼 좀 더 반자본주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있고, 특히 사이토는 명시적으로 탈성장 공산주의를 옹호합니다.

 

이렇게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이 전망들의 공통된 특징은 일종의 최소 강령 내지 당면 강령에 집중한다는 점입니다. 강령의 내용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국가에 대한 요구로 이루어지죠. 여기에는 노동시간 단축처럼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흥미로운 쟁점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행기적 전망이나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전략에 해당하는 것과 결합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 입장들에 거의 거울상처럼 맞서는 것이 에코 모더니즘입니다. 이 관점에서 생태 위기의 답은 기술 발전을 가속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혁신을 수익성 있는 사업 모델로 전환해서 투자를 정당화하기가 점점 어렵기 때문에 혁신의 잠재력이 온전히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이 에코 모더니즘의 진단입니다. 아론 바스타니의 책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가 대표적인 예죠. 바스타니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부과하는 제약에서 기술 발전을 해방시키면 생산 과정을 완전히 자동화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에코 모더니즘은 대사 작용을 축소하자는 주장에 반대합니다. 오히려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혁신을 낳으려면 성장을 계속 추구해야 한다고, 어쩌면 더 빠르게 성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가 낳는 문제들은 그저 계획의 부재로 환원됩니다. 에코 모더니즘은 지금의 생산 양식에 고유한 소비 형태가 자본주의 이후에도 지속된다고 상정함으로써 이 소비 형태를 자연화하고 탈역사화합니다. 기술도 물신화하죠. 기술에는 중립성이라는 아우라가 부여되곤 하는데, 사실 모든 새로운 발전과 혁신은 계급 관계에 의해서 형성됩니다.

 

에코 모더니스트들은 이른바 경제와 환경의 탈동조화, 그러니까 자원 추출과 폐기물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영향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는 것에는 거의 한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바스타니가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라고 정의한 체제는 지속 가능성 문제에 전혀 부딪히지 않고 확장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발전된 국가들의 자본주의 하에서 이런 과정이 오랫동안 진행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물질적 영향 측면에서는 효율성 향상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른바 탈동조화에 관한 통계 대부분이 한 가지 사실을 빠뜨린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전 지구적 분업의 변화로 인해 발전된 국가들이 자국 국경 밖에서 진행되는 물질적 과정에 훨씬 더 의존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제국주의 국가 기반의 다국적 기업이 통제하는 개발도상국의 산업 과정에 발전된 국가들이 의존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처한 상황은 탈동조화라기보다는 생산 과정이 제3국으로 오프쇼어링(offshoring, 해외이전)된 상태고, 이 과정을 따라서 환경에 대한 영향이 “외주화”됩니다. 생태 발자국을 따질 때 이 “오프쇼어링”을 고려하면 탈동조화의 규모는 크게 축소되고, 어쩌면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이토록 취약한 가정에 기반한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를 믿으면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에코 모더니스트들도 모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흔히 양다리를 걸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충분한 탈동조화를 달성하지 못하면 답은 우주 채굴(소행성에서의 금속 추출)에 달려 있고, 지구 곳곳에서 갈수록 지속 불가능한 방식으로 축적되고 있는 쓰레기는 우주 공간에 버리면 된다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코 모더니스트들은 노동의 변혁보다는 노동의 제거를 더 많이 생각합니다. 데이브 비치는 이 경향을 본질적으로 반노동적인 것으로 봅니다. 이런 시각은 자기 해방의 주체, 다른 사회적 대사 작용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이 부재하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에코 모더니스트들은 자기들이 제안하는 가속주의가 체제의 수축(진통 *이유: 출산에의 비유인 것 같아서...)을 심화하고, 그러면 계획 가능한 탈자본주의를 낳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부유층의 소비 패턴을 나머지 사회로 “민주화”하고 확장하기를 바라죠.

 

이런 패턴들이 유한한 지구의 한계 안에서는 보편화될 수 없기 때문에, 에코 모더니스트들이 환경 문제에 대해 우주적 해법을 끌어온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바스타니 같은 주장들인데, 말하자면 일론 머스크나 제프 베이조스의 우주적 망상을 (화려한) “공산주의적”으로 변형한 것이죠.

 

F: 이런 경향들에 맞서서 당신은 “에코 공산주의”라는 관점을 주장합니다. 에코 공산주의란 무엇입니까? 에코 사회주의와는 왜, 어떻게 다릅니까?

 

M: 에코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아리엘 페트루첼리의 신간 제목에서 따온 것인데, 이 책은 제 책과 거의 동시에 스페인어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용어가 생태 마르크스주의 내지는 에코 사회주의가 강조해야 할 핵심 쟁점을 전면에 부각시키기 때문에 저는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해법”이 기술에서 나올지 대사 작용 축소에서 나올지 논쟁하는 대신에 우리는 생태 파괴의 초점들, 즉 자본주의와 이 착취적 사회 질서가 낳는 생산 관계를 공격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 세력을 조직해야 합니다.

 

많은 비판적 생태론자들이 보기에, 심지어 일부 에코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생산 관계는 일종의 “블랙박스”입니다. 탐구되지 않은 채 방치된 영역, 겨우 주변적으로만 언급되는 영역이죠. 이 사람들은 거대한 생산 계급인 임금 노동력과 생산 수단 사이의 소외 관계를 종식시키는 것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에코 모더니스트와 탈성장론자 모두 서로 다른 이유와 논리에 따라 노동 시간 단축을 이야기하지만,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는 노동이 자기 해방의 행위자이자 사회–자연 관계의 질적 전환의 행위자로서 주인공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누락합니다.

 

생산 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독점을 종식시킨다는 것은 노동자 민주주의, 즉 생산하는 사람들인 동시에 생산된 것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현재 자본이 지배하는 영역까지 확장한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소비는 교환 과정에 의해 매개되는 분화된 전체입니다. 이 안에서 사회적 필요는 재정적으로 타당한 수요로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그리고 자본가들이 생산해서 판매하기로 사전에 결정한 이런저런 상품의 선택으로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산 수단을 사회화해야만 우리는 두 과정의 진정한 통일을 다시 수립할 수 있고, 이 안에서 생산은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기반합니다. 이것이 모든 계획을 향한 첫걸음이죠. 에코 사회주의자들의 논의는 “더 많이” 아니면 “더 적게”로 양극화되곤 했는데, 여기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핵심적 측면이기도 하고요.

 

어떤 사회적 필요를 우선시해야 하는가에 기초해서 무엇을 생산할지 집단적으로 결정함으로써 사회와 자연의 대사 작용을 합리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이, 곧 자본주의가 남긴 환경 파괴의 유산과 관련된 어려운 결정을 피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재생산을 핵심 기능으로 하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자본의 사적 권력에 의해 이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 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은 생산 계급 전체가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제안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 가지 목표를 충족시킬 것입니다. 바로 근본적인 사회적 필요를 완전히 충족하고, 생산을 민주화하고, 자연과의 합리적 대사 작용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 우리는 “수탈자를 수탈”함으로써 더 폭넓은 부 개념을 회복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늘어나는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조장해 온 부 관념, 풍요는 곧 무한한 소비주의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관념과 단절하는 것입니다.​​

 

탈자본주의적 에코 모더니즘의 신기루는 자동화를 통한 노동의 종말을 상상하는데, 여기서 자본의 궁극적 구현체인 기계는 신적 현현으로 등장하지만, 무엇을 생산할지 결정하는 방식과 주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이해하는 공산주의는 노동의 변혁, 노동과 자연의 관계를 핵심 물음으로 삼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이 강요한 소외 관계 때문에 박탈당한 모든 잠재력을 노동이 회복하고, 동시에 자연의 추상화를 끝내기 위한 초석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필연의 영역에서 자유의 영역으로 이행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고, 그 자유는 균형 잡힌 사회적 대사 작용을 전제합니다.

 

저는 자본이 폐지된 이후의 사회가 마주할 위험한 생태 위기에 대처하는 만능 해법을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단적 의사 결정에 기반한 새로운 생산 관계를 쟁취한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초래한 생태 재앙을 하룻밤 사이에 고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내놓는 좀 더 냉철한 제안은,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의 기술 낙관주의적 프로메테우스주의로 우리 자신을 현혹할 필요도 없고, 탈성장론자들이 옹호하는 고난 때문에 체념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노동자와 공동체의 민주적 숙의에 기반한 사회, 소수 착취자의 수중에 있는 생산 수단을 사회화해서 이루어지는 계획적인 사회적 생산에 기반한 사회를 쟁취해야만, 우리는 사회적 필요를 온전히 충족시키는 동시에 균형 잡힌 사회적 대사를 (재)수립해 나갈 조건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Left Vovice에 2025년 8월 1일 실린 기사를 번역함

LINKS에 2025년 7월 21일 처음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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