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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대만 노동자들이 10년 투쟁 끝에 얻은 ‘4+1일’ 공휴일 확대, 노동자의 국제연대로 장시간 노동 끝장내자대만 노동절 시위 "시대착오적 정권은 노동권을 무시한다" 사진: CNA 5월 9일, 대만 입법원은 새로운 공휴일과 노동절의 적용 범위에 공공부문 노동자를 포함하도록 확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15년부터 이어진 10년의 투쟁 끝에 대만의 공휴일이 기존보다 ‘4+1일’ 늘어난 것이다. △신정 전날 △공자 탄신일 겸 스승의 날인 9월 28일 △광복절 겸 구닝터우 전투(Battle of Guningtou) 기념일인 10월 25일 △헌법절 12월 25일로 4일이 새로운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기존에는 민간에만 적용되었던 국제 노동절인 5월 1일이 올해부터 공무원 등 공공부문에도 확대 적용되어 사실상 1일이 추가되었다. 결과적으로 1인당 연간 공휴일 수가 기존 12일에서 16일로 늘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법안은 원주민 부족들이 전통적인 의식에 따라 3일을 쉴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번 법안의 통과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초과노동을 하고서도 추가 수당을 받지 못하는 등 실질 급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교사와 공무원들은 노동절에도 쉬지 못했다. 특히 교사들은 스승의 날에도 쉴 수 없었다. 전국교사노조연맹(NFTU), 전국교육연합연맹(NFEU) 등은 이러한 불평등에 맞서 수년간 시민단체들과 함께 싸워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2025년 2월, 국민당(KMT)과 인민당(TPP)이 과거에 감축되었던 공휴일을 복원하고자 입법안을 제안했다. 같은 해 5월 1일 노동절 시위에서 노동권 단체들은 주4일제, 노동시간 단축과 더불어 공휴일 연장을 포함한 7개의 주요 요구안을 내걸었다. 대만 노동자들의 초과노동에 맞선 삼십여 년간의 투쟁이 만든 하나의 성과이다. 대만 노동운동은 독립노조를 형성하고 민영화 반대 투쟁을 벌이며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되었다. 2014년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파괴적인 전망을 인지한 청년학생들이 ‘해바라기 운동’으로 알려진 노학연대를 실현했다. 해바라기 운동은 2014년 3월에 약 24일간 이어졌던 입법원 점거 시위이다. 당시 여당인 국민당이 중국과의 ‘양안서비스무역협정(CSSTA)’을 일방적으로 추진하였고 이에 맞서 학생과 시민단체가 입법원을 점거한 것이다. 이 시위는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이끌어 간 운동이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과 저임금 문제 등을 언급하고 총파업을 촉구하는 등 노동자와 학생이 함께하는 광장 정치로 나아가고자 했다. 1997년부터 2006년까지 최저임금이 10년 동안 동일하게 유지되었을 정도로 노동운동이 위축되어 있던 상황에서 학생운동은 2014년에 해바라기 운동으로 절정을 맞이했고, 노학연대로써 노동운동이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2015년부터 2016년까지 노동부의 ‘공휴일 7일 축소 및 40시간 근무제’ 도입 계획안에 맞선 공휴일 감축 반대 시위 및 주 40시간제 개혁 투쟁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2025년 5월, 이주노동자들은 계약기간 상한선 폐지와 함께 5월 1일 노동절의 공휴일 적용 범위 전면 확대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5월 9일 국민당(KMT)과 인민당(TPP)이 법안을 공동 발의하였고, 57:50의 표결로 통과된 것이다. 다만 여당인 민진당(DPP) 의원들은 모두 반대표를 던졌다. 공휴일 확대는 단지 ‘쉬는 날’이 늘어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10년간 이어져 온 노동자 투쟁과 이에 연대해 온 민중의 여론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공공부문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도 공휴일 및 유급휴가 적용 대상에 포함되는 등, 더 많은 노동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쟁취한 것이다. 이를 위해 10년 동안 대만의 노동자와 시민은 여러 차례의 토론회, 지지 기자회견, 서명운동, 행진, 시위를 이어 왔다. 대만노동조합총연맹은 이번 입법안을 대만 노동자들이 간신히 얻은 승리이며, 이를 통해 노동자들이 가장 약한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했다고 성명을 통해 밝혔다. 한국도 대만과 마찬가지로 공휴일을 둘러싼 노동운동 역사가 있다. 한국의 공휴일은 오랫동안 노동법상 휴일이 아니었다. 사업장에 따라 공휴일은 유급휴일이 되기도 하고, 노동일이 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노동부가 내놓은 표준취업규칙(2008년)을 기반으로, 사용자들은 공휴일을 유급휴일에서 제외하거나 공휴일에 연차휴가를 사용하게 하는 등 편법적인 작업을 벌였다. 2023년에 와서야 5인 이상 사업장에 공휴일 유급휴일 적용이 의무화되었으나(‘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의 단계적 민간 적용), 여전히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이주노동자,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 등은 휴업수당 없이 무급으로 쉬거나 가산수당도 받지 못한 채 근무해 왔다. 이렇듯 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노동자들은 과로와 저임금의 위험에 오래도록 노출되어 있었다. 2014년 민주노총의 ‘노동절 유급휴일 권리찾기 운동’, 2017년 ‘공휴일 유급휴일 법제화 운동’ 등을 비롯한 노동시간 단축 요구 투쟁에도, 2025년인 지금까지도 한국 공휴일에는 쉬지 못하는 노동자가 부지기수다. 당장 250만명 가량의 5인 미만 사업장 임금노동자,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의 경우 공휴일에도 법적 유급휴일을 보장받지 못한다. 대만 상황은 더 열악하다. 한국보다 평균임금이 낮고, 노동운동 역시 한국보다 취약하며, 점점 길어지는 노동시간과 높아지는 노동강도에 더불어 급여는 3년 연속 줄어 왔다. 또한 평균적으로 8일마다 한 명의 노동자가 과로사하는 등 초과노동 문제가 심각하다. 많은 자본가들이 실적평가제나 책임제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수당조차 지급하지 않고 초과근무를 요구한다. 노동시간이 가장 높은 제조업에서, 노동자들은 매달 18.1시간 초과 근무한다. 이 외에도 의료산업과 배달 산업 등에서도 초과노동 문제가 심각하다. 이러한 초과노동 문제는 일자리 감소에 따라 실직을 두려워하는 노동자들이 야근을 감내하며 극심해졌다. 이는 7.6%에 불과한 대만 노동조합 조직률과 직결되어 있다. 실업의 공포로 노동자를 규율하며 초과노동으로 이윤을 짜내는 대만 자본주의에 맞서, 노동자들이 열악한 조건을 이겨내고 거둔 이번 승리는 반가운 소식이다. 대만 노동자들의 승리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한국 노동자들에게도 의미가 깊다. 한국 자본주의는 각 산업 노동시간 연장으로 이윤축적의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 정부는 반도체특별법추진과정에서 이미 반도체산업 연구개발인력 특별연장근로 허용 단위기간을 기존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렸다. 2025년 3월 서일준 등 20인이 발의한 ‘조선산업 지원 특별법안’ 역시 주 12시간을 초과한 연장노동을 당사자 합의로 가능케하자고 명시했다. 전 세계 자본가들은 늘 ‘대만 노동자들은 치열한 국제경쟁 속에서 산업의 생존을 위해 더 오래 일한다’, ‘한국 노동자들은 산업경쟁력 확대를 위해 수당도 없이 일한다’며 자국 노동자들의 권리 요구를 억누른다. 노동시간 연장과 착취 강화 시도를 노동자의 국제연대로 끊어내야 한다. 심화하는 위기, 착취 강화로 연명하는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을 확대하자. 참조 Labor activists protest plan to reduce holidays (15.09.15, Taipei Times) Labor groups protest to push shorter work hours (15.01.07, Taipei Times) Taiwan: 7 years since the Sunflower Movement (21.04.07, In Defence of Marxism) Groups to demand four-day workweek on May 1 (25.04.23, Taipei Times) Migrant worker groups urge lifting of employment length restrictions (25.05.18, Focus Taiwan) 工人鬥陣十年 國假終於增加 (25.05.09, 公民行動影音紀錄資料庫(Civilmedia@TW)) Taiwan passes new law adding 4 additional national holidays (25.05.09, Focus Taiwan) 壓垮台灣勞工的高工時與血汗過勞 (25.04.30, International Socialist Alternative Taiwan) Four new national holidays approved by legislature (25.05.09, Taipei Times) Taiwanese Workers Have Shown Us How to Gain Ground in the Neoliberal Era (22.06.12, Jacobin) -
[주간 여성뉴스 브리핑] 기아 화성공장 청소 노동자, 부당 지시와 성희롱에 맞서 투쟁1. 기아 화성공장 청소 노동자, 부당 지시와 성희롱에 맞서 투쟁 기아 화성공장 청소 노동자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업무, 열악해지는 노동환경, 부당한 업무지시, 성희롱 등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청소업체 보광산업은 금속노조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에게 일방적으로 청소 범위를 확대해 친환경차 신공장의 산업폐기물까지 치우도록 지시했다. 이를 거부한 여성 청소 노동자들이 기아자동차의 비정규직 차별 구조에 맞서 작지만, 기아차 원하청 노동자를 모아내고 사업장을 넘은 투쟁을 벌이고 있다. 청소 노동자들은 지난 5월부터 피켓을 들고 공장 내 선전전을 벌였다. 점차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출퇴근시간 공장 문 앞에서 기아차 원하청 노동자들과 단체와 개인 등 연대자들이 모여 연대선전전을 진행했다. 또 투쟁 과정에서 그동안 묻어뒀던 직장 내 성희롱 문제도 제기했다. 노동자들은 부당업무 지시 완전 철회와 그 책임자이며 노노갈등을 유발하는 업체 소장 해임, 성희롱·성추행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재발방지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업체 사장은 “회사를 건들면 죽을 만큼 힘들게 해 주겠다”라고 협박하며 노동자들이 화장실 가는 횟수를 점검하고, 노무사를 동원한 감시성 업무강도 측정 실사를 엄포했다. 직장 내 성희롱 사건들을 철저히 조사하겠다던 원청 협력지원센터는 최근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조사 중지를 통보했다. 원하청 사측은 원하청 노동자의 단결투쟁이 되살아날까 노심초사해 분열조장과 탄압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청소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지만, 청결한 건물과 청결한 화장실을 만드는 일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회사는 우리에게 자부심을 주지 못했다. 원청과 하청은 정육점의 고기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등급을 매긴다. 청소 노동자가 최하위등급이라며 임금을 책정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도 기아차의 주인이다.” 투쟁 주체 중 한 사람인 김경숙 노동자는 이렇게 말하며 오늘도 당당하게 싸우고 있다. 다음 연대선전전은 8월 6일이다. [참가 신청과 후원을 원하는 동지는 아래 내용 참조] 8월 6일(수) 14시 50분 3차 연대선전전 참가신청: https://forms.gle/5GDEkFjoZu335kny8 후원| 국민(ㄱㄱㅁ) 811401-04-245970 <참조 기사>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5080111513596065 2. 양육비 ‘찔끔’ 주는 꼼수 없앤다 … 정부 제도개편 착수 양육비를 지급받지 못하는 한부모가정에 국가가 우선적으로 양육비를 지급한 이후 이를 비양육자 부모로부터 받아내는 ‘양육비 선지급제’가 지난달부터 시행 중이다. 일부 비양육자가 양육비 지급 회피의 수단으로 이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보고되자 관계부처가 제도개편에 착수했다. 여성가족부와 양육비이행관리원은 ‘꼼수 소액 이행’을 막기 위해 양육비 채무 불이행 기준 개선에 착수한다고 지난 7월 28일 밝혔다. 현재는 양육자가 중위소득 150% 이하이면서 선지급 신청일이 속한 달 직전 연속 3개월 또는 3회 이상 양육비를 비양육자로부터 전혀 받지 못한 경우에만 양육비 선지급제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일부 양육비 채무자가 소액의 양육비만 지급하며 이행 책임을 회피하는 ‘꼼수 이행’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이와 같은 편법을 방지하기 위해 양육자가 비양육자로부터 양육비를 일부만 받았거나, 비정기적으로 받은 경우에도 양육비 선지급을 신청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칠 계획이다. 개선 방안은 현장 의견을 수렴한 뒤 양육비이행심의위원회 심의·의결을 거쳐 오는 9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참조 기사>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5528 3. 신고해도 살해당한 여성들, “여성폭력 종합대책 당장 마련해야” 여성단체들 한목소리 최근 몇 달간, 여성들이 경찰에 신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잃는 끔찍한 사건이 줄을 잇고 있다. 이에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노동자회 등 여성단체들은 7월 31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에 ‘여성 폭력 종합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기자회견 참여단체들은 수사기관이 ‘피해자가 원치 않았다’는 이유로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고, 검찰과 법원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실질적으로 격리할 수 있는 유치·감호(잠정조치 4호, 임시조치 5호)와 구속에 너무나 미온적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사각지대에 놓인 데이트폭력 피해자 보호를 위한 법률 개정과, 수없이 실패해 온 가정폭력처벌법과 스토킹처벌법을 개정하지 않는 국회’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제기하며, ‘아무런 대책도 발표하지 않은 정부까지 총체적인 책임 방기 사태’라고 항의했다. 그러면서 “가정폭력 처벌법과 강간죄를 개정해 가해자 처벌에 수사기관의 편견이 최소화하도록 하고, 모든 여성 폭력 사건의 가해자를 격리하는 의무 체포 주의를 도입하라”고 요구했다. <참조 기사> https://www.ildaro.com/10240 4. 다문화가족 배우자 10명 중 1명 가정폭력 피해…이혼 뒤엔 절반 이상 ‘양육비 못 받아’ 다문화가족 10명 가운데 1명이 지난 1년간 배우자로부터 폭력 피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7월 31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4년 전국 다문화가족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내 다문화가구의 82%가 결혼이민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지난 1년간 배우자로부터 폭력 피해를 경험했다는 비율이 9.8%에 이르렀고 그중 31.1%만 주위에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이번 조사는 1만 6,014가구를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전국 다문화가족 실태조사’는 2009년 결혼이민자 약 15만 명을 대상으로 전수조사 방식으로 처음 실시되었다. 이후 2012년부터는 표본조사 방식으로 전환되어 3년 주기로 정기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가정폭력 조사 항목이 포함된 것은 2024년 조사가 처음이다. 조사 결과 양육비 수령 실태도 열악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혼 또는 별거한 결혼이민자 중 양육비를 ‘한 번도 받은 적 없다’라고 응답한 경우는 전체의 51.4%에 달했다. 정기적으로 양육비를 수령한다는 응답은 23.8%에 그쳤으며, 자녀와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는 비양육자는 36.0%에 불과했다. 더구나 이들이 양육비 마련을 위해 도움을 구할 곳도 마땅치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문화·한부모가정에서 한부모가족 아동양육비 지원 서비스를 이용한 비율은 40.2%에 불과했고, 미지급 양육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육비이행관리원의 도움을 받은 비율도 8.6%에 그쳤다. 한부모가족 복지시설을 이용한 비율도 15.6% 수준이었다. 이들은 한국에 정착한 이민자이자 한국 국적을 취득한 한국인이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로부터 차별을 겪고 있다. 지난해 외국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13%였다. 이들을 향한 차별은 직장(74.6%), 거리·동네(53.5%) 순서로 일어났고, 공공기관에서 차별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비율도 27.5%에 달했다. 그러나 10명 중 8명이 차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그냥 참는다”라고 답했다. <참조 기사>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5686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28482193&code=61121111&cp=nv 5. 일본 극우정당 산세이토, 참의원 급부상으로 성소수자 인권 후퇴 우려 지난 7월,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인 퍼스트’로 상징되는 반이민·반다문화·반성소수자를 내건 극우정당인 산세이토가 1석에서 14석으로 의석수를 크게 늘렸다. 이로써 집권 자유민주당·공명당 연립은 다수당 지위를 상실했고, 일본의 다양성 정치 보장과 성소수자 인권 증진이 후퇴될 우려를 낳고 있다. 산세이토는 선거 과정에서 성소수자 인권을 공개적으로 폄훼하는 발언과 캠페인을 이어갔다. 기미야 소헤이 대표는 “우리에게는 성소수자가 필요없다. 남자는 남성다워야 하고, 여성은 여성다워야 한다”라고 말하는 등 전통 가족 가치와 출산율 증가를 내세우며 혼인 평등과 다양성 교육을 반대하는 입장을 강조해 왔다. 또한 복지축소, 이민 규제 강화, 학교 내 다양성 교육 금지, 지자체 인권조례 폐지, 다양성 홍보 예산 삭감 등 성소수자를 비롯해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과 평등 후퇴 정책을 주창하고 있다. 모두의 결혼 일본(Marriage for All Japan) 가토 다케하루 국장은 “극우정당 산세이토 지지층이 퍼뜨린 허위정보와 혐오 발언이 사회적 편견을 강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은 G7 국가 중 유일하게 동성결혼이 법제화되지 않은 나라이며, 포괄적 차별금지법도 없다. 2023년 제정된 성소수자 이해증진법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고 있어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돼 왔다. 성소수자 인권은 단순한 소수자의 권리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인권과 민주주의 수준을 반영한다. 성소수자권리입법을 위한 일본연합(Japan Alliance for LGBT Legislation)의 아키라 니시야마 활동가는 “극우세력에 대해 지나치게 집중하기보다 인권·민주주의 가치를 강화하기 위해 국내외 협력으로 가짜뉴스와 혐오에 맞서 싸우자”라고 강조했다. <참조 기사> https://www.washingtonblade.com/2025/07/28/anti-lgbtq-party-gains-power-in-japanese-diet/ https://www.yna.co.kr/view/AKR20250719064000073 6. 아르헨티나, 밀레이 정권에 맞선 대규모 저항 확산 사진설명: 한 여성의 이마에 “Milei out”이라고 적혀 있다. AP Photo/Gustavo Garello 아르헨티나 대통령 하비에르 밀레이 정권에 맞선 대규모 저항이 확산하고 있다. 밀레이의 극우 정책과 반대 의견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자,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비롯한 전국에서 은퇴자, 노조, 페미니스트, 학생, LGBTQI+ 활동가들이 연대해 저항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매주 수요일 열리는 은퇴자 행진에는 수천 명이 참가하며, 6월 18일에는 최대 백만 명이 마요 광장과 인근 도로를 가득 메웠다. 경찰의 폭력적 진압과 수백 명의 체포가 이어지는 가운데, 시위대는 공공 서비스 축소와 정치적 탄압을 규탄하며 품위 있는 은퇴와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밀레이 대통령은 취임 이후 교육, 의료, 사회, 문화 등 핵심 공공 부문 예산을 대폭 삭감하며 “정치적 계급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이는 빈곤 확대와 구매력 약화로 이어졌다. 밀레이의 수사는 여성, 언론인, 야당, 협동조합 등을 공개적으로 공격하며 증오를 정상화했다. 2024년 5월 바라카스에서 레즈비언 여성 4명이 방화로 사망한 사건은 정부가 조장한 혐오 분위기의 참상을 보여줬다. 이후 올해 2월 1일 대규모 반파시스트 시위를 시작으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6월 3일 ‘니 우나 메노스(Ni Una Menos)’ 10주년 등을 맞아 전국적인 저항이 거세졌다. 여성들은 밀레이 정부의 주요 공격 대상이자 저항의 중심에 서 있다. 사회학자 빅토리아 테소리에로는 “정부는 반페미니즘적이며, 성평등을 위한 법률과 제도적 성과를 철폐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경제학자 칸델라리아 보토 역시 “밀레이의 긴축 정책은 사실상 정치적 프로젝트로, 공공 서비스 질과 양을 축소하고 금융 엘리트에게만 혜택을 준다”라고 비판했다. 정치적 폭력과 증오 표현이 확산하는 가운데, 페미니스트 운동은 수년간 쌓아온 영향력을 바탕으로 전국적 연대를 확대하고 있다. 카타마르카, 코르도바, 리오네그로, 차코 등지에서도 노조, 원주민 단체, 지역 총회가 참여한 정기 시위와 도로 봉쇄가 이어지며, 공공 서비스와 기본권 수호를 위한 투쟁이 이어졌다. 인권 운동가 엠페라트리즈 모네나 마르케스는 “정부가 우리를 짐으로 여기지만, 존엄한 삶과 은퇴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시민들은 긴축과 억압에 맞서 서로를 돌보며 단결하고, 과거의 기억을 지우려는 시도에 저항하며 더 정의로운 미래를 향한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참조 기사> https://www.truthdig.com/articles/argentinian-feminists-retirees-unions-unite-against-milei/ 7. 인도 델리에서 임산부를 폭염으로부터 지키는 지역 사회보건활동가들 인도의 델리는 세계에서 가장 더운 수도 중 하나다. 올해도 더위로 인해 여러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특히 임산부들의 피해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지난 6월, 기온이 43.9℃까지 치솟은 어느 날 아침.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 쿠마리 씨는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가는 도중 실신했다. 유산이 걱정될 정도의 고열 속에서 쓰러진 것이다. 그런데 그의 곁에는 여성 지역 보건활동가(공인된 사회보건활동가, ASHA 노동자)인 칼야니 카란 씨가 있었다. ASHA 노동자는 인도 전역에서 백만 명 이상 활동 중인 여성 의료 인력이다. 이들은 주로 농촌이나 도시 외곽 지역에서 산모·영아 사망률을 줄이기 위해 가정 방문 진료 및 긴급 처치를 수행한다. 칼야니 씨는 쿠마리 씨의 전해질과 수분이 빠르게 손실되고 있어 땀을 통해 체온 조절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스카프에 물을 묻혀 쿠마리 씨의 얼굴을 닦고, 손부채로 부채질을 해 의식을 되찾게 했다. 이후 휴대하고 있던 경구수분보충용액(ORS)을 먹인 뒤 인근 병원으로 급히 이송했다. 국제환경개발연구소(IIED)의 보고서에 따르면, 극심한 폭염은 인도인 대부분의 건강에 직접적인 위험 요인이 되고 있다. 지난 30년간 델리는 35℃ 이상의 날이 4,222일로, 전 세계 대도시 중 가장 많았다. 전문가들은 2050년까지 인도는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더라도 인간에게 '안전한 온도'를 초과하는 국가 중 하나가 될 것으로 예측한다. 임산부는 특히 폭염에 취약하다. 고온 노출은 고혈압, 자간전증, 심장 질환, 임신성 당뇨와 같은 위험을 높이며, 유산, 사산, 저체중 출산률도 증가시킨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3℃ 오를 경우, 임산부에게 ‘가장 심각한 결과’가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참조 기사> https://www.bbc.com/future/article/20250728-health-workers-protecting-pregnant-women-from-dangerous-heat-in-delhi-india [여성 뉴스 브리핑 X] http://x.com/Wo_newsbriefing -
[사회주의 기초학습#1] 사회주의란 무엇인가[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착취와 차별, 억압을 일소하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사상이었다. 인간해방 세상을 꿈꾸며 투쟁하려는 이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도,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계급투쟁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오늘날 진짜 사회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역사의 굴절로 인해, 스스로가 '사회주의'라 주장하는 가짜 사회주의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반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된 소련을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 칭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중국특색 사회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등 다양한 스탈린주의의 변종은 억압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포장하면서, 사회주의를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자기해방 사상에서 계급지배를 정당화하는 수사적 도구로 바꿔버렸다. 다른 한편에는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고 노동자혁명을 파괴한 개량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전통적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지배계급의 일부가 되었고, 새로운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의회주의와 관료주의를 '사회주의'와 뒤섞어버린다. 자본주의는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다시 불러왔다. 위기와 전쟁에 맞선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있지만, 계급투쟁의 사상인 사회주의에 대한 정돈된 지식을 얻기는 너무나 어렵다.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뒤엎기 위해, 스탈린주의와 개량주의의 혼란을 걷어내고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진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함께 배우고, 함께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해 '사회주의 기초학습' 시리즈를 연재한다. [다른 시리즈 읽기] #2 자본주의 원리 파헤치기 #3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 #4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와 전략 인간의 생존 방식과 계급의 발생 2019년 인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야생 호랑이가 민가로 내려와 사람을 공격했다. 그러자 주민 십수 명이 대나무 장대를 들고 쫓아가 호랑이를 잡아 죽였다. 총이 아니라 고작 막대기로 말이다. 물론 이는 인도에서 현행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다. 법을 떠나 맹수가 인간을 공격한 까닭은 인간이 무분별한 개발로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뉴스는 사람이라는 생물 종(種)의 생존 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근력으로 따지면 사람은 범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등한 존재지만, 집단적 협력을 통해 다른 종(種)을 사냥하며 생존경쟁에서 우위에 선 것이다.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어느 강연에서 인류 문명의 진정한 증거는 ‘부러졌다 다시 붙은 대퇴골’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대퇴골은 골반과 무릎 사이의 넙다리뼈로, 대퇴골이 부러지면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즉 치유된 대퇴골은 누군가 부상을 입은 사람을 돌보고 협력했다는 증거다. 인류 역사는 바로 이 집단적 협력으로부터 태동한다. 인류는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정한 사회조직을 형성해야 했다. 인류 최초의 사회조직은 혈족이다. 인류학, 고고학의 연구 성과들은 혈족에 기반한 사회가 평등한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인류가 유랑 생활 대신 정주 생활을 시작하고, 인구 증가로 사회집단의 규모가 커진 이후에도 평등한 사회체제는 한동안 지속됐다. 튀르키예의 차탈회위크는 중앙아나톨리아 지역에 있는 신석기시대 초기 도시 유적이다. 대략 기원전 7500년에서 기원전 5700년 사이에 존재했다. 인구 규모는 5,000~7,000명, 전성기에는 1만 명까지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사회적 혹은 경제적 서열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개별적 부의 축적, 사유재산의 증거도 없으며, 유물에도 성별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잉여생산물이 출현하고, 분배해야 하는 부의 규모가 증대하면서 인류 사회에는 계급이 발생하고 여성 차별이 시작된다. 잉여생산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군가는 직접 노동에 종사하지 않아도 타인의 노동에 의해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연구에 따르면 계급의 발생과 여성 차별의 시작은 일목요연하게 하나의 경로만을 보인 것은 아니다. 여성 억압의 기원에 대해 누군가는 정주 생활에서 아이를 더 많이 출산하는 집단의 생존 확률이 높았으므로 여성을 생산 업무에서 점차 배제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랑생활을 하던 수렵‧채집 경제의 시대에는 여성이 한 명의 유아기 아이만 양육하도록 출산을 억제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다른 학자는 주요 농업 도구가 쟁기로 대체되고 농사에 관개시설을 활용하는 등 근력이 요구되는 중농업이 발전하면서 남성이 주도적 지위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본다. 어쨌건 계급과 여성 차별의 발생을 동시대의 것으로 보는 것은 일반적이다. 처음에는 평등한 관계 위에 공동체의 집단노동을 이끌었던 지혜로운 지도자는, 이제 잉여생산물을 통제하고 세습하는 특권 계급으로 등장하게 된다. 인류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정말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는 폴리네시아 [1] 사회를 톺아보며 인간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발전 형태를 보이는지를 설명한다. 폴리네시아 지역은 사회공동체 간에 교류가 드물고, 현격할 정도로 자연환경의 차이를 보이는 지역이다. 이에 따라 제국에서부터 단순한 촌락에까지 다양한 형태의 사회상을 보인다. 사회 간 발달 수준의 차이는 식량, 가축의 생산, 기후 등 자연환경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제래드 다이아몬드는 추장사회의 추장이 지배계급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추장사회에서 가장 뚜렷한 경제적 특징은 무리나 부족처럼 오로지 호혜적인 교환에만 의존하는 형태(A가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언젠가 B도 자신에게 가치가 비슷한 선물을 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B에게 어떤 선물을 주는 식)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 간단한 예를 들자면 어떤 추장이 수확기에 그 추장사회의 모든 농경민에게서 밀을 거둬들인 후 모두에게 잔치를 베풀어 빵을 먹이거나 그 밀을 저장해두었다가 수확기와 수확기 사이에 조금씩 다시 나눠주는 식이다. 평민들에게서 받은 물품 중 많은 양을 그들에게 재분배하지 않고 추장의 계보나 기능인들이 차지하고 소비한다면 그 같은 재분배는 공물이 되며 이것은 추장사회에서 처음 나타난 조세의 선행 형태였다. 추장들은 평민에게서 물품만 거둔 것이 아니라 공공 토목공사를 위한 노동력도 징발했다. … 폴리네시아의 작은 섬들에서는 추장의 지위가 세습적이라는 점 이외에는 추장사회가 실질적으로 대인이 있는 부족사회와 비슷했다. 추장의 오두막집도 다른 오두막집과 똑같았고 관료나 공공 토목공사도 없었다. 추장은 거둬들인 물품 대부분을 평민들에게 재분배했고 토지는 공동체 전체가 관리했다. 그러나 폴리네시아에서도 가장 큰 섬(하와이, 타히티, 퉁가 등)에서는 장식품만 보아도 추장을 금방 식별할 수 있었고 공공 토목공사는 노동력을 대량 동원해 진행되었다. 공물은 대부분 추장이 차지했고 토지도 모두 추장이 관리했다.” 이처럼 잉여생산물의 규모가 커질수록, 과거 공동체의 재산을 관리할 뿐이던 추장은 이제 잉여생산물을 통제하고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지배계급으로 변신하게 된다. 국가의 출현과 평등을 향한 투쟁 2~300만 년에 이르는 인류의 장구한 역사를 선사(先史) 시대와 역사(歷史) 시대로 구분하는 기준점은 국가의 등장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5,500여 년 전에, 중국과 안데스에서 2,000여 년 전에 최초의 국가가 출현했다. 잉여생산물과 공동체의 집단노동을 통제하는 지배계급은 이제 훨씬 복잡한 사회조직인 국가에서 자신의 지배권을 유지해 나간다. 재래드 다이아몬드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의 생산물을 빼앗아 생활하는 정치를 ‘도둑정치’라 불렀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네 가지 공통 특징이 있다고 보았다. 첫째, 대중을 무장해제하고 엘리트 계급을 무장한다. 둘째, 거둬들인 공물을 대중이 좋아하는 곳에 재분배한다. 셋째, 공공질서를 유지하고 폭력을 억제함으로써 치안을 확보한다. 넷째, 도둑정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구성한다. 이런 식으로 지배 질서의 정당성을 확보해 나간 국가 체계에선 점차 기존의 평등주의적 사회관계가 소멸해 간다. 물론 초기 국가에선 아직도 평등했던 부족사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옛날 부여의 습속에 가뭄이 들어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리고, 혹 왕을 바꾸거나 죽이기도 하였다.”(『三國志』)는 기록은 과거 평등했던 농업공동체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왕이란 공동체의 농업경제를 지휘하는 지도자이므로, 지도력의 부족으로 농사에 실패했다면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진행될수록 이제 계급 질서는 확고해진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고대광실(高大廣室)에서 비단옷을 입고 이밥에 고깃국을 먹지만, 누군가는 오두막에서 태어나 헐벗은 채 주린 배를 채우자면 쉬지 않고 중노동에 종사해야 한다. 고대의 철학이나 종교는 바로 이 계급적 격차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고대 국가로 자리 잡던 한반도의 삼국이 앞다퉈 불교를 수용한 이유가 이것이다. 불교는 현세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불평등한 이유를 전세의 업(業)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윤회(輪廻) 사상을 통해 피지배계급도 현세의 괴로움을 내세에서 위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배계급의 입맛에 맞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종교와 이데올로기로도 계급 적대의 적나라한 모순을 감출 수 없는 국면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민중들 속에서 지배계급에 맞서 평등을 주창하며 사회를 뒤엎으려 했던 시도는 수없이 반복되었다. 기원전 209년 진(秦)나라에서 농민 반란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은 “왕후장상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라고 외쳤다. 신성한 혈통을 들먹이며 지배 질서를 정당화하려던 지배계급에 맞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던가?”라며 맞선 것이다. 1198년 고려에서 노비 반란을 주동했던 만적 또한 이 말을 그대로 반복했는데(“將相寧有種乎!”), 이는 동아시아 사회에서 위 구호가 민중들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기나긴 인류 역사에서 계급과 국가가 출현한 시기는 찰나에 불과하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계급사회는 결코 인류의 본성이 아니었기에, 계급사회의 역사 내내 인류는 평등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끈질긴 노력을 보여왔다. 미륵신앙과 같은 종교적 형태, 정감록과 같은 주술적 형태로 평등사회를 향한 열망을 드러내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복됐던 일이다. 이중혁명(산업혁명, 부르주아혁명)과 자본주의 역사 속 계급사회는 다양한 발전 형태를 취하게 된다. 우리가 이 학습 과정에서 다루는 계급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며, 우리가 주장하는 사회주의 역시 바로 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운동을 가리킨다. 망이‧망소이, 만적, 동학농민군의 운동은 평등주의의 기치를 내걸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운동을 사회주의 운동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로소 등장한 것이므로, 이제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지난했던 이 과정을 과감히 요약하자면 이른바 이중혁명이라 말할 수 있다. 산업혁명과 부르주아혁명이 그것이다. 자본주의는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세계 GDP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던 중국이 아니라 유럽에서 최초로 출현했다. 이것은 우연이 결합한 역설적 현상이다. 청나라는 1741년 약 1억 4,300만 명이던 인구가 1851년 약 4억 3,200만 명으로 세 배나 증가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다스렸던 강건성세(康乾盛世, 1661~1795년)가 이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 증가는 역설적으로 부정적 효과를 초래했는데, 생산과정에서 생산기술의 혁신보다는 노동력의 추가 투입으로 생산량을 늘리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이다. 즉 생산량은 늘어났지만, 기술 발전과 혁신 없이 노동생산성이 정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반면 17~18세기 유럽에서는 대항해 시대 신대륙에서의 대규모 귀금속 유입 등이 불러온 상업의 거대한 발전, 토지 소유를 집중시키며 농민을 토지에서 쫓아냈던 인클로저 운동, 가내공업의 전국적 발전 등이 연달아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전근대 농업경제에서 근대 자본주의 경제로의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 =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를 지극히 파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G. D. H. 콜이 지적했듯이 “산업혁명이란 오랜 경제발전 과정의 결과”를 말한다.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넓은 시장이 새로 생기고 임금노동력이 이용 가능해졌을 때) 필연적으로 위대한 기술의 발명”이 이어졌다. 증기기관, 철도 등 “수많은 위대한 발명은 시장이 급속히 확대되고 높은 이윤을 올릴 수 있는 생산이 유망해지자 많은 사람이 상품 생산량을 늘리고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데 몰두했기에 탄생”한 것이었다.[3] 다른 한편, 자본주의가 굴러가자면 자유롭게 자기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계급, 즉 노동자계급이 대규모로 존재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자유롭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에서다. 하나는 일체의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 질서로 묶인 노예나 농노와는 달리 자유롭게 자기 의사에 따라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다는 뜻이다. 노동자계급은 어느 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직접 생산자계급이던 농민층이 전화한 것인데, 이들이 노동자계급이 되자면 기존의 신분 질서가 타파되어야 했던 것이다. 민중을 봉건 체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 역사적 대사건은 바로 18세기의 프랑스대혁명이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자본가계급은 봉건제의 지배계급인 대토지 소유자들의 지배 질서를 분쇄했고, 이들에게 속박돼 있던 민중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이어진 일련의 부르주아혁명 과정에서, 자본가계급은 민중의 지지를 이끌기 위해 자신들이 만들 세상은 천부인권, 자유와 평등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세상일 것이라 약속했다. 그러나 막상 자본가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세계의 실상은 그들의 약속과 달랐다. 그들이 얘기하던 인권의 핵심은 소유권이었으며, 자유와 평등은 철저하게 그들을 위한 자유와 평등이란 것이 곧바로 드러났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가 갈리는 세상이건만 ‘기회의 평등’은 누구에게나 동등하다고 떠들어대는 오늘날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중혁명 직후 노동자계급의 비참한 삶에 대해선 수많은 사료가 남아있다. 노동자의 생존 자체를 위협했던 악랄한 장시간 저임금 노동이 ‘계약의 자유’라는 허울 아래 거리낌 없이 행해졌다. 지금도 말을 못 잇게 하는 대목은 참혹했던 아동노동의 실태다. 다음은 영국 의회에 제출됐던 공장감독관의 보고서다. “그들 공장주 가운데 일부는 12~15세의 소년 5명을 금요일 오전 6시부터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 4시까지 식사시간과 심야에 1시간의 수면시간만 주고 하나도 쉬게 하지 않은 채 일을 시켰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넝마 구덩이’라고불러도 좋을 만한 굴 속에서 휴식 없이 30시간의 노동을해야 했는데, 그곳은 양모 헝겊 조각을 해체하는 곳이어서 공기 중에 양모 보푸라기와 먼지 등이 가득차있기 때문에 성인 노동자라도 자신의 폐를 보호하기 위해서 늘 수건을 입에 대고 있어야만 하는 곳이었다! … 자신들은 넓은 자비심으로 불쌍한 아이들에게 4시간의 수면을 허락했으나 아이들은 한사코 잠을 자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장감독관 보고서, 1860년 10월 31일 “9세 소년 윌리엄 우드는 “노동을 시작한 것이 7세 10개월부터였다”고 말한다. 그는 처음에 “틀을 운반하는”(틀 속에 들어 있는 완성된 물건을 건조실까지 운반하고 빈 틀을 갖고 다시 돌아온다) 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평일에는 매일 아침 6시에 와서 밤 9시쯤 일을 마친다. “나는 평일에는 매일 밤 9시까지 노동을 합니다. 예를 들어 요즈음 7, 8주 동안은 그랬습니다.” 이처럼 7세 어린이에게 15시간의 노동이 부여되고 있다!”— 아동노동조사위원회 제1차 보고서, 1863년 “이 산업(성냥 제조업)의 노동자 절반은 13세 미만의 어린이와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이었다. … 1863년 화이트 위원이 심문한 증인 가운데 270명은 18세 미만이었고, 40명은 10세 미만이었으며, 10명은 겨우 8세, 그리고 5명은 겨우 6세였다. … 만일 단테가 이러한 공장들을 보았더라면, 그가 상상한 참혹하기 짝이 없는 지옥의 모습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동노동조사위원회 제1차 보고서, 1863년 자본주의 초기 공상적 사회주의의 조류들 노동자들이 비참한 노동조건에 신음하는 동안 자본가계급은 이를 외면한 채 대공업이 창출한 막대한 부를 독점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어린 시절 그저 재미있게 읽었을 『셜록 홈즈』 시리즈나 『80일 간의 세계일주』 같은 19세기 소설을 다시 읽어보길 바란다. 한편에서 노동자들이 생명력을 소진하는 대가로, 부르주아 계급은 천연덕스럽게 근대 문명이 발전시킨 기술을 향유하며 인생을 만끽했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초기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분개했고 평등주의적 지향을 드러냈다. 자본주의의 끔찍한 불평등을 넘어서려는 운동을 통틀어 사회주의라 부를 수 있다. 엥겔스가 말했듯이 “현대 사회주의는 내용으로 보면 무엇보다도 먼저, 한편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유산자와 무산자, 임금 노동자와 부르주아의 계급 대립을,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에서 지배적인 무정부 상태를 목도한 산물”[4]이다. 이러한 사회주의자들 중 엥겔스가 높게 평가했던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의 생시몽, 푸리에, 영국의 오언이다. (푸리에는 “어떤 주어진 사회에서 여성해방의 정도가 전반적 해방의 자연적 척도”라는 역사적인 명제를 남긴 인물로 유명하다.) 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격렬한 사상투쟁을 벌였던 프랑스의 프루동 역시 초기 사회주의자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오언(Robert Owen)의 활동만 잠깐 소개하기로 하자. 오언은 1800년부터 1829년까지 뉴래너크 방적 공장을 통해 자본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던 인물이다. 뉴래너크는 하루에 10.5시간밖에 노동하지 않았으며(동시대 방적 공장의 노동시간은 13~14시간이었다), 휴업 기간에도 임금 전액이 지불됐다. 오언은 2천 명 남짓한 뉴래너크 노동자들에게 집을 싼값으로 빌려줬고, 질병과 사고로 고생하는 이들에게는 의료혜택이 가도록 배려했다. 저축은행을 설립해 노동자들의 저금을 관리했으며, 생활용품을 공동으로 구입하여 노동자들에게 염가에 판매했다. 그럼에도 이 기업은 가치가 배 이상 증가하며 투자자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뉴래너크의 성공에 고무된 오언은 미국으로 건너가 자기 전 재산을 들여 ‘커뮤니티(Community)’라고 부른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했으나 이 실험은 처참하게 실패하며 막을 내린다. 오언의 이러한 시도는 전태일이 구상했던 모범업체 ‘태일피복’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전태일 열사는 “정당한 세금을 물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 계통에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에게 입증”하는 모범업체를 운영해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언의 실패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개별 자본가의 자선 계획만으로는 구원될 수 없는 체제다. 개별 자본가들은 서로 간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역사 속으로 도태되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오언류의 초기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미성숙한 발전과 미성숙한 계급 상황을 반영한 머릿속 개똥철학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들에겐 “사회적 활동 대신에 그들의 개인적 발명 활동이, 해방의 역사적 조건들 대신에 환상적 조건들이,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으로의 조직화 대신에 [그들에 의해] 특별히 고안된 사회조직”이 해결책이다. 따라서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정치적 행동, 특히 모든 혁명적 행동을 거부”한 채 “부르주아의 박애적 심성과 돈 주머니에 호소”할 뿐이다.[5] 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불평등이,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격하고 여기에 주목했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투쟁은 가혹한 탄압 앞에 패배로 귀결되기 일쑤였다. 지금은 자본가들도 헌법으로 보장하는 노동3권이 자본주의 초기에는 모조리 불법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의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파업이 ‘되지도 않을 일에 쓸데없이 피를 흘리는 일’이라며 노동자들을 훈계하려 들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비난하는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경제학자들과 사회주의자들(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 영국의 오웬주의자들)은 다음 한 가지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단결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 당신들의 노력은 헛된 것이다. 당신들의 임금은 언제나 요구된 일손들과 공급된 일손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당신들이 결국 단결을 한다고 해서 무엇을 얻게 될 것인가? … 당신들은 전과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역시 노동자들일 것이며 고용주들은 항상 고용주들일 것이다.”[6]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달랐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낼 가능성과 희망을 보았다.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며, 투쟁을 통해 단련되는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힘이야말로 미래를 향한 원동력이다. “사람들은 질문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노동자들은 그 수단이 전혀 무익하다는 것이 명약관화한 그러한 경우들에도 파업을 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간단히 말해서 노동자들은 임금 삭감에 맞서서 그리고 이러한 임금 삭감의 필연성에 맞서서 저항해야만 하기 때문이며, 인간으로서 노동자들은 상황에 자신들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자신들에게, 인간들에게 맞추어져야 한다고 선언해야 하기 때문이다.”[7]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 그리고 오늘 교육의 주제 그렇다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러한 혁명적 사상은 어떻게 형성되었던 것일까? 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기존의 초기 사회주의 사상을 ‘공상적 사회주의’로, 자신들의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부를 만큼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일까? 위에서 말했듯이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를 넘어서려는 모든 운동을 가리키지만, 현재까지 정치적 실체를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는 사회주의 운동이라면 그 역사적 연원은 오로지 위대한 사상가 마르크스에게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함께 정립한 견해와 학설의 체계를 가리킨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가 19세기의 선진적인 3대 사상 조류를 계승하여 천재적으로 완성한 것이라 평가했다.[8] 이 3대 사상 조류란 독일 고전철학, 영국의 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 이론을 말한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철학 사상(세계관), 경제학(자본주의 경제 분석), 사회주의 정치 이론(노동자 계급투쟁의 정치)이라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가 진행하는 ‘세상을 변혁하는 사회주의 기초학습’ 12강은 위 세 영역을 짜임새 있게 살펴보게 된다. 먼저 오늘 1강에서는 마르크스의 철학을 살펴본다. 곧이어 2강 ‘자본주의의 원리 파헤치기’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다루게 되며, 3강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은 사회주의 정치 이론을 다루게 된다. 이어지는 강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기초 지식을 바탕으로 실제 역사와 현실의 복잡한 정세를 분석하고 대응해 나가는 과정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와 전략’, ‘한국노동자운동사 (1), (2)’, ‘사회주의 바로 알기: 중국,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 ‘기후위기와 민주적 계획경제’, ‘자본주의 역사 꿰뚫어보기 (1), (2)’, ‘오늘날 세계정세: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 ‘사회주의 정당의 기본 노선’이 그것이다. 이제 오늘의 주제에 집중해 보자. 마르크스의 철학과 세계관을 학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철학과 세계관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분석하는 틀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철학과 세계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달라진다. 계급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지배계급의 사상들은 어떠한 시대에도 지배적 사상들”이기 때문이다. 즉 아직 자본주의가 망하지 않은 이유는 피지배계급의 대다수가 지배계급의 사상을 자신들을 위한 사상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 자본주의’라는 그릇된 인식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본을 위한 자유’가 자신들을 위한 자유라고 착각한다. 계급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사회의 지배적 물질적 힘인 계급은 동시에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힘”이기 때문이다. “물질적 생산수단을 제 마음대로 처분하는 계급은 이로써 동시에 정신적 생산수단도 제 마음대로 처분하며, 그 결과 정신적 생산수단이 박탈된 계급의 사상들은 이로써 동시에 대체로 지배계급에 종속”되기 마련이다.[9] 따라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철학을 학습함으로써 주어진 현실에 대해 지배계급의 관점으로 오염된 그릇된 해석을 넘어 올바른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란 마르크스의 철학적 방법론을 계승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마르크스가 천재적 사상가였다 하여,[10] 마르크스의 언술 하나하나가 금과옥조로서 불가침의 권위를 갖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것은 그의 방법론을 사용해 우리 시대에 주어진 현실을 과학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하여 창의적으로 올바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란 마르크스의 개별적 주장 하나하나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혁명적 방법론을 계승하는 것이라던 루카치의 다음 주장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해 마르크스의 개별적 진술들 전부가 사실적으로 부정확하다는 것이 이론의 여지없이 증명되었다고‒비록 인정할 수는 없지만‒가정하더라도, 진지한 ‘정통적’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누구나 이 모든 새로운 성과들을 거리낌 없이 인정하고 마르크스의 개별적 주장 모두를 거부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 정통성(Orthodoxie)을 한순간이라도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연구 결과를 무비판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이런저런 주장에 대한 ‘믿음’이나 어떤 ‘신성한’ 책의 해석을 뜻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에서의 정통성이란 오론지 방법에만 관련된다. 정통성은 변증법적 마르크스주의 속에서 올바른 연구 방법이 발견되었으며, 이 방법은 오직 그 창시자들[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신(Sinn)에 따라서만 확장‧확대‧심화될 수 있다는 과학적 확신이다. 또한 그것은 그 방법을 극복하거나 ‘개선’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천박화‧진부함‧절충주의로 귀착되어 왔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과학적 확신이다.[11]” 헤겔좌파 마르크스와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1818년에 태어났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독창적 견해를 정립한 시기는 1844년 무렵이다. 이전까지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에 속한 철학자였다. 마르크스는 1873년 집필된 『자본』 제1권 제2판의 후기에서 “독일의 식자층 사이에서 큰소리깨나 치는 돼먹지 않게 시건방지고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이 헤겔을 마치 ‘죽은 개’처럼 다루어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오히려 나는 공개적으로 이 위대한 사상가의 제자라고 천명하고 가치론에 관한 장에서는 고의적으로 여러 곳에서 그의 고유한 표현방식들을 따라 사용”했다고 썼다. 이처럼 헤겔 철학은 마르크스 사상의 연원이므로, 그의 사상을 올곧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독일의 상황과 헤겔 철학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에야 독일이 내로라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지만, 19세기 초중반만 하더라도 독일 자본주의는 영국과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한참 뒤떨어진 후발 국가였다. 1848년 3월 독일혁명의 패배는 당시 독일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의 깃발을 내걸었던 3월 혁명의 목표는 봉건주의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다. 그러나 당시 독일은 자본주의 발전이 더딘 상태였다. 3월 혁명 전야를 묘사하면서 엥겔스는 “독일 부르주아지의 부와 결집도는 프랑스나 영국의 부르주아지의 그것들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으며, “독일의 노동자 계급은 그 사회적, 정치적 발전으로 볼 때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자 계급에 비해 엄청나게 뒤처진 상태”에 있었다고 평가했다.[12] 이런 상태에서 독일의 부르주아 계급은 한편으로는 반동적 봉건 세력과 맞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혁명이 완성될 경우 노동자계급이 주도권을 잡으리라 경계했다. 이쪽도 저쪽도 선택하지 못한 부르주아지의 갈팡질팡이 1848년 혁명의 패배를 낳았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1844년 마르크스는 독일의 상태를 두고 “우리의 정치적 현재의 부정조차도 이미 현대 민족들의 역사적 헛간 속에서는 먼지투성이의 사실로서 발견된다”고 썼다. 남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이후의 역사를 모색하는 마당에 독일은 아직 봉건 체제도 청산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직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확립되지 못했던 탓에(정치적 비판의 자유가 제한돼 있으므로) 독일에서는 봉건 체제에 대한 비판이 철학적 투쟁의 형태로 전개된다. “선진 민족들의 경우에는 현대적 국가 상태와의 실천적 반목인 것이, 이 상태 자체가 부재한 독일에서는 무엇보다도 이 상태의 철학적 반영과의 비판적 반목이다.”[13] 당시 철학적 투쟁의 장(場)이 되었던 것은 프로이센 왕국에서 국가 철학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헤겔 철학이다. 헤겔의 다음과 같은 명제는 헤겔 철학이 가장 보수적으로도, 가장 급진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적인 모든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모든 것은 현실적이다.” 먼저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므로, 현존하는 독일의 봉건 체제는 그 나름의 존립 근거와 합리성을 갖춘 게 된다. 정치적 보수주의의 근거인 셈이다. 헤겔 철학을 이렇게 해석했던 것이 헤겔 우파다. 반면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으로 지양(止揚, Aufhebung)되어야 하므로, 헤겔 철학은 공화주의라는 근대 이성의 실현을 위해 분투하는 급진 이념의 밑바탕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헤겔 좌파다. 엥겔스는 “인간의 머릿속에서 이성적인 모든 것은, 비록 현존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과 아무리 모순되더라도 현실적인 것이 되기로 정해져 있다. … 헤겔 철학의 진정한 의미와 혁명적 성격은, 인간의 사유와 행위의 모든 성과가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확실히 끝장내버린 데 있다”[14]고 썼다. 독일에서의 철학 투쟁은 주요하게는 종교 비판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봉건 체제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종교였기 때문이다. 헤겔 좌파의 상당수는 종교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실천적 필요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의 유물론 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때 마르크스를 비롯한 헤겔 좌파에게 엄청난 열광을 불러일으켰던 저작이 출현한다. 1841년 포이에르바하가 쓴 『기독교의 본질』이 그것이다. 엥겔스는 “누구든 이 책의 해방 효과를 생각해 보려면 이 효과를 몸소 체험했어야 한다. 누구나 다 열광했다. 우리는 모든 한순간에 포이에르바하주의자가 되었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포에이르바하의 작업이 “종교적 세계를 그것의 세속적 기초로 해소한 데에 그 요체가 있다”고 평가했다. 성부(聖父), 성모(聖母), 성자(聖子)로 구성된 신성 가족이란 “세속적 기초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위로 올라가 구름 속에 하나의 자립적인 영역으로 스스로를 고정”시킨 것을 뜻한다.[15] 즉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다. 유물론(唯物論, Materialism) 철학이란 무엇인가? 엥겔스는 철학의 중대한 근본 문제가 “사유와 존재의 관계에 관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자연(외부 세계)에 대한 정신(의식)의 관계이다. 엥겔스는 자연에 대해 정신이 본원적이라고 주장한 철학자들을 관념론자, 반면 자연을 본원적인 것으로 여긴 철학자들을 유물론자라고 구별했다. 이것은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에서 주요한 논제인 인식론에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다. 즉 인간의 감각‧경험은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외부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점 말이다. 예컨대 18세기 영국의 관념론자 버클리를 보자. 버클리는 외부 세계라는 것은 전혀 실재하지 않으며, 설령 실재한다 해도 인간은 그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보았다. “실존하는 모든 것‒우리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말 실존하는 모든 것‒은 오직 정신과 그 속의 관념들뿐이다.” 즉 버클리에게 감각 밖의 외부 사물은 “관념의 집합”에 불과하다. 존재하는 것이란 지각되는 것이므로, 감각과 경험이 사라지면 외부 사물의 실재도 사라진다. 그럼에도 인간의 감각 경험이 질서 정연하게,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은 신(神) 때문이다. (버클리는 영국 성공회의 주교였다.) 신은 당신의 경험 계열과 나의 경험 계열을 서로 상관관계가 있도록 함으로써 예측과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은 파국을 막기 위해 신으로 도피하게 된다. 그러나 유물론자에게 감각과 경험, 사유의 형식은 그 자체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관념론자들은 인간의 ‘사유’와 ‘의식’이 외부 존재와 대립해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상정한다. 헤겔 역시 받아들였던, 칸트의 오성(悟性)이 가진 논리적 범주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사유와 의식은 인간의 두뇌의 생산물”이며 “인간 자체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이 환경과 함께 발전해 온 자연의 생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감각, 경험, 사유 등의 “원리들은 연구의 출발점이 아니라 그 최종적 결과이다 ; 원리들은 자연과 인간의 역사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추상되는 것이다 ; 자연과 인간계가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 및 역사와 일치하는 한에서만 원리들은 올바른 것으로 된다. 이것이 사태에 대한 단 하나의 유물론적 파악”이다.[16] 좀 뜬구름 잡는 얘기 같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에서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축구는 세계 축구의 수준에 한참 뒤처져 있었다. 당시 축구 전문가랍시고 누군가 텔레비전에 나오면 매번 강조하는 말이 정신력이었다. 한국 선수들이 기술은 좀 달리지만 투지와 정신력으로 강팀과의 전력 차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2년 히딩크의 진단은 달랐다. 한국 선수들은 기술은 괜찮은데 체력이 떨어지고, 이 때문에 경기 고비마다 정신적으로 위축된다는 진단이었다. 이후 히딩크는 혹독한 체력 훈련을 통해 정신력이 물질적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불패의 명장 이순신의 연전연승(連戰連勝)은 오로지 그의 영용한 지도력 때문인가? 물론 이순신 개인의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빼놓고 연승의 비결을 말할 순 없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조선 해안에 최적화된 판옥선과 함포 사격술이 압도적 승리의 토대였다 보는 것이 유물론적 견해다.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한국의 드라마틱한 성장은 한국민들의 근면과 성실성 때문인가? 물론 입신양명을 향한 유교문화의 특성을 간과할 수 없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은 ‘쇼윈도 자본주의’로서 미국으로부터 받았던 막대한 경제원조가 토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유물론적 인식이다.[17] 이 밖에도 비슷한 예는 무한히 열거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유물론적 세계관과 관념론적 세계관이 가장 격렬히 충돌하는 공간은 종교의 영역이다. 아무리 진보적 종교라 하더라도, 수미일관한 유물론적 세계관은 결코 종교와 양립할 수 없다.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는 세력의 태반이 반공 기독교 교인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18] 그러나 이 말이 곧바로 유물론자들은 종교를 탄압의 대상으로 본다는 뜻은 아니다. 유물론적 세계관에서 종교란 그 효용을 다 하는 순간(인간이 자기 소외를 극복하고 종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순간) 사멸할 수밖에 없는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유물론자는 종교를 낳은 물질적 토대를 변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으로 풀어보는 철학사 더 나아가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적대적인 계급사회에서 철학의 발전은 불가피하게 철학의 두 근본 경향인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으로 나타난다는 것, 이 두 경향은 각각 당대의 진보적인 계급과 반동적인 계급의 이해를 표현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애당초 철학이 계급 적대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서양철학의 연원인 고대 그리스 사회, 동양철학의 연원인 춘추전국시대 모두 국가의 등장 이후 계급 모순을 정당화해야 하는 필요성이 대두한 시기였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에 관해, 여기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조선의 유학(儒學)을 살펴보자.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물질적 존재보다 정신적 존재가 근원적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긍정한 최초의 인물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다. 소크라테스와 대립했던 소피스트들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던 세력이다. 기원전 5세기 소피스트는 하층민을 교육하고 그 대가로 돈을 버는 직업적 교사 집단을 뜻했다. 이들은 체계적인 사상은 없었지만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견지했으며,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대중 교육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며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맞서 아테네 명문 귀족의 이익을 대변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진리란 소피스트들이 흔하게 얘기하는 현상적 진리가 아니라,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진리여야 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상을 완성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이 얘기했던 일반 민중의 의견을 ‘독사(doxa)’, 즉 불확실하고 거짓된 판단력으로 폄하했다. 플라톤은 현실에 존재하는 개별 사물은 이데아의 모방(미메시스, mimesis)이거나 이데아의 성질을 나눠 갖는 것(메텍시스, methexis)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인간의 정신은 원래 이데아를 알고 있었으나 신체와 결합하고 경험적인 사물을 접하면서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관념론은 특히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적 자연 철학과 대립했다. 데모크리토스에게 감각적 지각이란 외부 대상(원자들의 미세한 껍질들)이라는 물리적 근거에 의해 설명된다. 하층 민중들의 이해를 대변했던 소피스트나 자연 철학자들과 달리, 플라톤이 철인(哲人)정치라는 엘리트주의를 제창한 것은 그의 철학적 관념론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주자(朱子)의 교의를 받아들인 조선의 성리학 역시 기본적으로 관념론 철학에 해당한다. 성리학은 세계의 근원을 정신적 실체인 리(理)로 보았다. 이에 따라 모든 봉건적 계급 질서는 천리(天理)를 표현한 것이 된다. 이를테면 정도전은 “도(道)란 것은 이(理)이니 형이상(形而上)의 것이요, 기(器)란 것은 물(物)이니 형이하(形而下)의 것이다. 대개 도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와서 물(物)마다 있지 않음이 없고, 어느 때나 그에 해당되지 않음이 없다. 즉 심신(心身)에는 심신의 도가 있어서 가까이는 부자ㆍ군신ㆍ부부ㆍ장유(長幼)ㆍ붕우(朋友)에서부터 멀리는 천지만물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도가 있지 않음이 없다.”고 했다.[19] 이렇게 봉건 지배 질서를 옹호했던 관념론에 맞서, 유물론적 지향을 보였던 유학자로 특기할 만한 이들은 16세기의 서경덕과 19세기의 최한기다. 서경덕은 “기(氣)를 떠나서는 리(理)가 없다. … 리는 기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가 시작이 없으면 리도 또한 진실로 시작이 없다. 만일 리가 기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하면 리는 기가 시초가 있는 것으로 된다.”[20] 성리학에서 기(氣)는 물질적 존재를 뜻하는데, 이와 같이 서경덕은 리(理)가 기(氣)의 운동 변화를 주재하지 않으며 기에 내재한 합법칙성에 따라 기의 운동이 이뤄진다고 보았다. 또 최한기는 “대개 천지와 인간 만물의 생성은 모두 기(氣)의 조화(造化)에 말미암는 것인데, 이러한 기에 대해서는 후세로 올수록 열력(閱歷)과 경험으로 점점 밝아졌다.”고 썼다.[21] 이 말에서 드러나듯이 최한기는 19세기 조선에 수용됐던 서양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경덕과 최한기가 조선 봉건사회에서 제한적이나마 진보적 태도를 보였던 것은 이들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기계적 유물론을 넘어선 마르크스 그런데 마르크스 철학은 곧 유물론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이는 마르크스의 위대한 사상을 반토막 내는 일이다. 여기에 혁명적 사유 방식인 변증법을 추가해야 한다. 엥겔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두고 “세계를 하나의 과정으로서, 즉 역사적으로 계속 형성 중인 질료로서 파악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했다. 포이에르바하는 관념 대신 실재하는 자연에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하지만, 그에게 자연은 비역사적으로 파악된다. 이는 포이에르바하가 당대 자연과학의 최신 발견, 즉 세포, 에너지 전화, 다윈주의 등을 충실히 쫓을 수 없었던 형편 때문이다. 특히 포이에르바하에게 인간이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추상적 인간에 불과했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가 유물론자인 한 그에게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며, 그가 역사를 고찰하는 한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다”라고 썼다.[22] 마르크스는 달랐다. 도식적으로 얘기해서, 마크르스 철학은 유물론에 헤겔 철학의 혁명적 요소인 변증법을 결합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흔히 정반합(正反合)으로 기억하는 헤겔의 변증법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 헤겔 변증법에서 어떤 개념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스스로 지양하며 고차원적인 존재로 발전해 나간다. 지양(止揚, Aufhebung)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보존한다, 유지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중단시킨다, 끝을 낸다는 뜻이다. 운동이 진행되며 어떤 개념의 부정이 이뤄지면, 이는 하나의 새로운 개념이면서 동시에 앞선 개념보다 좀 더 고차적이며 풍부한 개념이 된다. 헤겔은 이렇게 표현한다. “이것은 마치 같은 내용의 격언을 정확하게 이해는 하면서도 그 의미나 함축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이의 말은 결코 이 격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의 생생한 힘을 알아차리고 있는 세상물정에 밝은 어른의 정신이 해독하는 정도의 의미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23] 예컨대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누구나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만, 아직 풋사랑을 겪었을 뿐인 젊은이와 수차례 찐사랑과 그 안티테제를 경험한 중년에게 이 말의 깊이는 달리 느껴지기 마련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르크스는 『자본』 제1권에서 헤겔의 서술 방식을 그대로 쫓아간다. 상품 속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대립하고(대립물의 통일), 이것이 외화된 ‘단순한 개별적 또는 우연적 가치형태’가 ‘전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로, 다시 ‘일반적 가치형태’와 ‘화폐형태’로 지양(止揚)해 가는 과정은, 헤겔의 『대논리학』에서 순수존재(純粹存在)와 순수무(純粹無)가 통일된 ‘존재’가 ‘현존재(現存在)’로, 다시 ‘대자적(對自的) 존재’로 전개되는 과정을 그대로 오마주(?)한 것이다. 그런데 헤겔 철학에서 “변증법적 발전, 즉 모든 지그재그 운동과 일시적 퇴보를 거쳐 관철되는 더 낮은 것에서 더 높은 것으로의 진보의 인과적 연관은, 어딘지는 모르지만 어느 경우든 사유하는 각 인간의 뇌와 독립하여 영원히 진행되는 개념의 자기 운동을 복사한 것”[24]이다. 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증법의 운동 과정을 절대정신의 전개 과정이 아니라, 실재하는 외부 세계의 변화 과정으로 인식했다. 엥겔스가 머리로 선 변증법을 마르크스가 다시 발로 세웠다고 평가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마르크스는 “우리의 출발점이 되는 전제들은 결코 자의적인 전제들이 아니고, 독단들도 결코 아니며, 오직 상상 속에서만 도외시될 수 있을 현실적 전제들이다. 그것은 현실적 개인들, 그들의 행동 및 그들의 물질적 생활 조건들 ‒ 기존의 생활 조건들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 산출된 생활 조건들”이라고 말했다. 점차 고차원적인 단계로 발전해 나가는 현실 세계를 인식하는 틀이 변증법이었던 것이다. 이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존재의 연원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이란, 외부 세계를 고정불변의 것으로 인식하는 낡은 사유 방법에 불과하다. 외부 세계를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으로 보는 변증법을 통해 근대철학의 중요 문제, 즉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인식주체는 실천을 통해 변화하는 외부 세계를 점진적으로 인식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 증명”한다.[25] 레닌은 유물론 철학의 인식론을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사물은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독립하여 우리 밖에 존재한다. … (2) 현상과 사물 자체 사이에는 결코 어떤 원리적인 차이도 없으며 또 있을 수도 없다. 차이는 다만 인식된 것과 아직 인식되지 않은 것 사이에 있을 뿐이다. … (3) 과학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식론에서도 변증법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즉 우리의 인식을 어떤 기성의 불변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무지(無知)에서 지(知)가 생겨나며 또 어떻게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지식이 더 완전하고 더 정확한 지식으로 되는가를 연구해야 한다.” 변증법은 왜 혁명의 철학인가? 따라서 현재 우리의 인식은 완성된 진리이거나 절대적 진리일 수 없다. 이전 세대로부터 지식이 축적되고,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우리의 상대적 진리는 지속적으로 확장돼 나간다. 일례로 1940년 훈민정음해례본이 재발견되기 이전까지 사람들은 세종이 미닫이문의 격자를 보고 한글 자음을 고안했다고 여기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훈민정음해례본의 연구를 통해 한글 자음이 발음기관을 형상한 위대한 표음문자라는 진리를 알고 있다. 고대인들에게 신의 노여움을 뜻하던 낙뢰(落雷)는 그 발생 원리가 이미 과학적으로 해명되었으며, 미래 세대는 이를 조절‧통제하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가게 될지 모른다. 이처럼 변증법의 시야에서 보자면 ‘진리와 오류’란 제한된 영역과 특정한 단계에서만 통용력을 가진다. 출산이 여성 사망의 제1 원인이며 안전한 피임 방법이 없었던 전근대 사회에서 혼전 순결의 강제는 그 나름의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혼전 순결을 들먹이는 것은 반동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판단, 이것이 변증법이다. 레닌이 말한 대로, “추상적인 진리란 없다. 진리란 언제나 구체적인 것이다.”[26] 세계를 끊임없는 변화와 상호 작용 등으로 인식하는 변증법의 시야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일반적인 운동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것들의 원조는 역시 헤겔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외부 세계의 운동을 머릿속에서 환상적으로 반영했을 뿐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하자.) 첫째, 세계는 끊임없이 운동하는데, 그 원인은 내부적 모순, 즉 ‘대립물의 통일’에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존재’가 변화할 수 있는 이유는 동시에 그 대립물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 ‘존재’한다는 개념에는 그 자체로 ‘무(無)’라는 대립물이 내재하고 있다. 입시 철에는 “시험 잘 보세요”라는 말이 수백만 번 되풀이된다. 그런데 누군가 ‘시험을 잘 본다’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시험을 못 본다’는 대립물이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시험을 잘 본다’에 ‘시험을 못 본다’라는 대립물이 내재해 있다는 것은, ‘시험을 잘 본다’가 언제든지 ‘시험을 못 본다’로 변화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노동은 자본이 가진 생산수단과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이 결합해 이뤄진다. 자본은 노동력을 사용하는 대가로 임금을 적게 지급하려 하지만, 노동자는 노동력을 판매하는 대가로 생계비인 임금을 더 많이 받길 원한다. 이처럼 양자는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대립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필요로 한다. 노동자는 자본가가 없으면 임금을 받을 수 없으며, 자본가는 노동자가 없으면 이윤을 창출할 수 없다. 이 역시 “대립물의 통일(통일물의 상호 배제하는 대립물들로의 분열과 그것들 간의 상호관계)”이다.[27] 레닌은 “대립물의 통일은 조건적이며, 일시적이며, 덧없고, 상대적”이라고 썼다. 자본이 더 많은 축적을 위해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거나 정리해고로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순간, 노동과 자본의 공생관계는 곧바로 파탄이 난다. 평소 ‘기업이 잘 돼야 노동자도 잘 된다’고 생각하던 노동자들이 허위의식을 깨뜨리고 계급적 운동에 나서게 되는 원인이 바로 이러한 내부 모순, 즉 대립물의 통일에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양질전화다. 자연 세계에서 양질전화의 가장 간단한 예는 물의 상태 변화다. 물을 커피포트에 넣고 전원을 연결해도 바로 물이 끓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지만, 조금씩 물의 온도가 올라가 임계점(끓는점)을 지나게 되면 물(액체)은 끓어올라 수증기(기체)로 변하게 된다. 양적 변화(온도 상승)가 질적 변화(액체에서 기체로의 변화)로 바뀐 것이다. 양질전화는 인간 사회에서도 흔히 목격되는 현상이다. 마르크스의 『자본』 1권 제4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는 단순 협업이 매뉴팩쳐, 기계제 대공업으로 변화되면서 나타나는 양질전화의 과정이 상세히 묘사된다. 예컨대 1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자본가가 한 공간에 10명의 노동자를 불러 모은다 하자. 이때의 생산량은 처음에는 1명 노동자 생산량의 10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내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사용하며 생기는 절약분, 업무의 계획적 분업 등을 통해 생산량은 10배 수준을 훨씬 뛰어넘게 된다. 협업은 다시 매뉴팩쳐, 기계제 대공업으로 이행하며 기존 생산력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을 창조해 낸다.[28] 또 하나의 운동 형태는 이른바 ‘부정의 부정’이다. 이는 사물이 지양을 거듭하면서 기존의 장점을 더 높은 수준에서 실현해 나가는 과정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자본』 1권 24장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서 생산방식의 ‘부정의 부정’이 이뤄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최초에는 분산된 노동자가 개별적 생산수단을 소유해 소경영에 나선다. 그러나 이런 협소한 생산 형태로는 분업과 협업, 자연에 대한 대규모 이용 등 사회적 생산력을 활용할 수 없다. 해마다 범람하는 황하의 거대한 물줄기를 조각난 땅뙈기를 부치는 몇 명이 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어느 단계에 이르면 개인적으로 분산됐던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집적된 생산수단으로 전화해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을 창출한다(첫 번째 부정). 물론 이 자본주의의 전사(前史)는 동시에 대다수 민중에게서 생산수단이 박탈되는 고통스러운 수탈의 과정이지만, 이전보다 생산력을 증대시켰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거대한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체제 역시 고유한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차 증대하는 노동자계급의 저항은 마침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弔鐘)을 울리게 한다. “이제는 수탈자가 수탈당하게 된다.”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가들의 사적 소유는 폐지되지만, 자본가들이 창출한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은 상실되지 않는다. “이 부정은 사적 소유를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획득물[즉 협업과 토지 공유 및 노동 자체에 의해 생산되는 생산수단의 공유]을 기초로 하는 개인적 소유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부정의 부정이다. 이와 같이 세계를 끊임없이 변화‧발전하는 운동 상태로 보는 변증법의 시야에서는, 특정 단계에서 역사가 종착역에 다다랐다고 떠드는 것만큼 한심해 보이는 짓도 없다. 구소련의 붕괴 이후 ‘역사의 종말’을 운운하며 “자유민주주의보다 영속성 있는 정치 시스템은 없다”던 부르주아 정치학자의 시야는 혁명적 변증법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불과 몇십 년 전 ‘자유민주주의의 종국적 승리’를 자신했던 그는 과연 트럼프와 윤석열 일당의 반민주주의적 폭거를 설명해 낼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주장은 여전히 타당하다. “합리적인 형태의 변증법은 부르주아들과 그들의 교의를 대변하는 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성하는 모든 형태를 운동의 흐름으로 파악하며, 따라서 언제나 그것들을 일시적인 것으로만 파악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변증법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감화를 받지 않고 본질적으로 비판적이며 혁명적이기 때문이다.”[29] 마르크스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마르크스 철학의 양대 기둥인 유물론과 변증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마르크스 사상의 위대함은 마르크스가 자신의 방법론을 인간의 역사와 사회,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분석하는 데 철두철미하게 적용했다는 점에 있다. 엥겔스가 평가했듯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은 ‘잉여가치를 매개로 한 자본주의 생산 비밀의 폭로’, 그리고 ‘유물론적 역사 파악’이다. ‘유물론적 역사 파악’이란 “정치적 갈등들을 경제적 발전에 의해 주어지는 현존하는 사회 계급들 및 계급 분파들의 이해 관계의 투쟁으로까지 소급하는 것, 그리고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개별 정당들이 이와 동일한 계급들 및 계급 분파들의 적절한 정치적 표현임을 확인하는 것”이다.[30]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한국 정치판의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역사적 연원을 살펴 이들이 대변하려 했던 계급 분파들이 무엇인지, 그들의 정치는 그들이 대변하는 계급 분파들의 이해관계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바로 ‘유물론적 역사 파악’이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적 역사 파악을 위해 정립한 개념이 바로 ‘생산력’과 ‘생산관계’다. 먼저 생산력이란 사회가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능력으로,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그 요소로 한다. 어떤 사회라 하더라도 물질적 생산을 위해서는 생산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의 능력(노동력)이 필요하며, 농지와 쟁기에서부터 공장과 조립로봇에 이르기까지 생산에 필요한 물질적 조건(생산수단)이 있어야 한다. 노동력과 생산수단은 당대의 기술 및 지식에 따라 상호 결합하는 형태가 정해진다. 생산관계란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뜻한다. 이를테면 농지와 공장은 누가 소유하고 통제하는지(소유관계), 잉여생산물을 어떻게 분배하는지(분배관계), 직접 생산자의 노동을 누가 통제하는지(계급관계) 등을 종합한 개념이다. (다른 곳에서 마르크스는 ‘교류형태’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마르크스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개념을 이용해 가장 간결하게 자신의 유물론적 역사 파악을 정식화한 저작은 1859년 출판된 『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이다. 이곳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법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 법률관계나 국가 형태는 절대정신의 보편적 발전 때문이 아니라 물질적 생활 관계들의 변화에 기인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대목은 아주 유명하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 즉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력들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 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제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들은 그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지금까지 그것들이 그 내부에서 운동해 왔던 기존의 생산관계들 혹은 이 생산관계들의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관계들과의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관계들은 이러한 생산력들의 발전 형태들로부터 그것들의 족쇄로 변전한다. 그때 사회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서서히 혹은 급속히 변혁된다.”[31] 우선 생산관계(생산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사회의 생산력 발전 단계에 조응한다. 오늘날 인간사는 돈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관계도 금전 관계를 매개로 이어지기 마련이며, 돈이 많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권능을 의미한다. 그러나 화폐 물신주의가 역사 내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역사에서 중국의 화폐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하기 일쑤였다. 먼저 고려시대에는 건원중보, 무문전, 은병 등의 유통이 시도됐다. 그러나 송나라 사신 서긍은 첩보 보고서 『고려도경』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대개 그 풍속이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고 오직 한낮에 시장을 벌여 남녀ㆍ노소ㆍ관리ㆍ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하고,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紵布)나 은병(銀鉼)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일용(日用)의 세미한 것으로 필(疋)이나 냥(兩)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쌀로 치수(錙銖)를 계산하여 상환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중간에 조정에서 전보(錢寶, 화폐)를 내려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부고(府庫)에 저장해 두고 때로 내다 관속(官屬)들에게 관람시킨다 한다.”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교역은 쌀이나 포목을 사용하고, 기껏 만들어 놓은 화폐는 창고에 처박아 뒀다가 관람용으로나 썼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의 세종 역시 조선통보(朝鮮通寶)란 동전을 만들어 유통을 시도했으나 마찬가지로 실패한다. (조선통보의 유통이 처참히 실패한 탓에, 조선 후기 사대부들 사이에서 조선통보가 기자(箕子) 조선의 유물이란 낭설이 떠돌 지경이었다.) 화폐 유통이 실패한 이유는 간단하다. 고려, 조선 전기까지 사회적 생산력은 상품유통 경제를 전면화시킬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시기에 ‘왜군(倭軍)은 얼레빗, 명군(明軍)은 참빗’이란 말이 떠돌았다. 조선 민중에 대한 수탈의 정도가 명군이 더했다는 뜻인데, 명군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중국은 이미 11세기 송나라 수도 개봉의 인구가 최대 100만을 헤아릴 만큼 상품유통 경제가 발전해 있었다. 임진왜란 시점에는 군인들에게 은자(銀子)를 지급하고 현지 시장에서 군량과 군수품을 조달하도록 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에 와 보니 시장이 있어야지! 은을 내밀어도 받질 않으니 닥치는 대로 약탈을 자행한 것이다. 이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토대 위에 사회의 상부구조(법률적 및 정치적 구조)가 들어선다. 조선의 철저한 사농공상(士農工商) 위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직 상품유통 경제가 전면화하지 못한 사회, 즉 농업생산이 중심이 된 사회의 상부구조를 의미한다. 공상천예(工商賤隷)란 말에서 드러나듯이 상공인을 농민보다 천대하며, 동시에 농민들의 거주 이전을 제한하며 토지에 묶어뒀던 것은 당대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18세기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중국 사대부들이 시장에서 물건을 직접 흥정하는 장면을 보며 조선의 사신이 놀라는 장면이다. “우리나라에선 비록 선비가 궁핍하여 부릴 심부름꾼 하나 없는 처지라도 자신이 직접 시장판에 감히 나가는 일은 없다. 장터에 나가서 되잖은 장사치들과 물건값을 흥정하는 것을 비루하고 좀스러운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상품경제가 발달한 중국에선 사대부도 살아남자면 이재(理財)에 밝아야 했지만, 농업경제 사회의 안온한 질서에 머물렀던 조선의 선비들은 돈을 만지는 것을 금기시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발전 단계가 지배계급의 행동양식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조선 역시 후기에 들어서면 생산력의 발전으로 상품경제가 발전하면서(상평통보의 유통, 장시의 발달 등) 과거의 견고하던 사회 질서들이 조금씩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다. 금난전권(禁亂廛權)이 철폐되고, 족보 위조가 성행하며 신분제가 흔들렸던 것이 대표적이다. 만약 구래(舊來)의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가로막는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예컨대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모든 신분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노동력이 대규모로 출현해야 한다. 또 상품의 전면적 유통을 위해서는 도량형, 화폐단위 등의 지역적 제한이 철폐돼야 한다. 유럽 각국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근본 동인은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았던 낡은 사회 질서를 타파할 실천적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유럽 곳곳에서 봉건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개화하던 시기를 직접 목격했다. 그에 따라 마르크스는 기존의 생산관계(또는 그것이 표현된 법률적 관계)가 생산력 발전의 족쇄가 되는 순간, 사회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고 썼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더 높은 단계로의 생산력 발전의 족쇄가 되는 순간을 수없이 목격한다. 예컨대 AI 기술, 플랫폼 공간에서의 수급 매개 등 각종 디지털 기술의 발전, 자동화 로봇 등을 통한 노동생산성의 향상 등은 물질적 풍요와 생태계 보호를 동시에 가능케 하는 물질적 토대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기술의 발전은 오히려 대규모 정리해고를 유발하거나 비정규직,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를 양산한다. 수요가 긴급한 필수 의약품은 지적재산권에 가로막혀 공급이 제약되며, 기후위기엔 아랑곳없이 환경을 파괴하는 무분별한 생산이 반복된다. 마르크스의 말대로라면, 기존의 생산관계가 생산력 발전의 족쇄가 된 현재는 분명하게 사회혁명의 시대다. 스탈린주의적 역사 파악의 오류 중요한 점은 마르크스가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인간의 실천 활동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어디에서도 생산력 발전에 따라 사회혁명이 자동적으로 이뤄진다고 쓰지 않았다. 『공산주의당 선언』의 첫머리에 명시돼 있듯이,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의 역사가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는 것으로, 혹은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도 끝났다고 썼다. 실제 역사를 돌이켜 보자면, 독점 자본주의가 출현한 20세기 초에 이르면 사회혁명의 토대는 이미 넘치게 무르익었다고 봐야 옳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살고 있다. 물질적 토대의 성숙과는 무관하게 사회혁명은 아직 달성되지 못한 것이다. 인간은 물질적 토대를 떠나 자신이 선택한 조건에서 역사를 창조하지 못한다. 아무리 날고 기는 위인이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삶을 시작할 뿐이다. 거꾸로 역사 또한 인간의 주체적‧능동적 실천 없이 절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력의 부단한 증대가 자동적으로 체제의 질적 변화를 불러오지 않는단 얘기다. 중국공산당은 현재 중국이 ‘사회주의의 초급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 체제가 사회주의란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지만,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설명은 더 황당하다. 즉 앞으로 ‘사회주의 시장 경제’와 ‘중국식 현대화’를 통해 생산력이 발전하면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점진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산력이 발전하면 사회혁명이 절로 이뤄지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를 왜곡‧변용한 것인데, 그 원조는 스탈린이다. 스탈린은 1938년 출간된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서 역사 발전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생산관계의 주요한 다섯 가지 유형은 역사에서 잘 알려져 있다 : 원시 공산 체제, 노예 체제, 봉건 체제, 자본 체제, 사회주의.” 좀 더 구체적으로 원시 공산 체제는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소유”된 사회이며, 노예 체제는 “노예 소유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회, 봉건 체제는 “봉건 영주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생산 노동자(봉건영주가 더 이상 죽일 수는 없지만 그가 사거나 팔 수 있는 농노)는 완전히 소유하지 못하는” 사회다.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생산 노동자들(개인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자본가가 죽이거나 팔 수 없지만 생산수단을 박탈당하고, 굶주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 팔고 착취의 멍에를 감내하지 않을 수 없는 임금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회다. 마지막으로 소련은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로서, 생산관계의 기초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이며 “사람들의 상호관계는 착취로부터 해방된 노동자들의 동지적 협력과 사회주의적 상호 지원”[32]이란 특징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때 스탈린은 역사가 5단계로 발전해 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생산력이라고 보았다. 즉 스탈린에게 새로운 사회의 도래는 생산력 발전에 따른 결과이며, 인류의 역사는 위의 5단계를 차례차례 밟아나가는 단선적(單線的) 발전 과정이다. 이러한 역사 파악에서는 계급투쟁이라는 인간의 주체적 노력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이데올로기, 문화적 차이 등 변화무쌍한 역사의 변수 또한 그렇다. 스탈린의 단선적 역사관이 가장 기괴하게 영향을 미친 세력은 한국의 뉴라이트 논자들이다. 예컨대 뉴라이트 논자 이영훈은 전(前) 마르크스주의자(?) 안병직의 제자다. 요즈음 이영훈은 뜬금없이 조선을 노예제사회로 치부하고 있다. 16~17세기 조선 인구의 40%가 노비였다는 것이다. 서구의 자본주의 문명을 추앙하는 뉴라이트 논자들에게 조선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한 후진적 체제에 머물러야 하므로 이런 얘기를 꺼내든 것이다. 그러나 외거노비의 경우 별도의 호적을 가지고 있었던 점, 사노비가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기도 했던 점, 노비도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점, 주인과 사유재산 문제로 송사를 벌인 노비의 기록까지 있었던 점 등을 살피면, 조선의 노비를 그리스의 노예와 동일시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요점은 이것이다. 스탈린에 의해 정식화된 단선적 역사관과 생산력 중심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세계사를 돌아보면, 어느 발전된 문명이 외부 환경의 변화나 내부 모순을 이겨내지 못하고 소멸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마르크스에게 인류 역사의 ‘발전 법칙’은 결코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에게 추상적 수준의 법칙은 수많은 구체적 사실에 대한 연구로 도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법칙은 새로운 구체적 역사 사실에 대한 분석으로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다. (마르크스 역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정체를 말하는 등 적지 않은 오류를 범했다.) 마르크스의 진술 하나하나를 무오류의 교조적 이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가장 반(反)마르크스주의적인 행태다. 마르크스의 방법론인 유물론과 변증법은 새로운 지식과 발견을 향해 무한히 열려 있는 개방적 사유 방식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는 물질적 토대와 인간의 실천적 활동 사이의 관계를 항상 강조했던 혁명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마르크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엥겔스에 대한 오해 그런데 이 대목에서 엥겔스에게 덧씌워진 부당한 혐의 하나를 반박해야 할 것 같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변증법을 자연으로까지 무리하게 확장해 기계적 유물론으로 만들었고, 그것이 스탈린 체제의 공식 이데올로기로 계승됐다는 혐의 말이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는 경제결정론이 아닌데도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논지를 왜곡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엥겔스의 저작을 읽어보면 이런 주장이 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하다는 걸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오히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생산방식의 ‘부정의 부정’ 법칙을 언급한 대목을 두고 독자들에게 오해를 피하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이 과정을 부정의 부정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렇게 부름으로써 이 과정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그 반대이다. 그는 이 과정이 일부는 이미 실제로 일어났고 일부는 이제 틀림없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다음, 여기에 덧붙여 이 과정을 일정한 변증법적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이 전부이다.”[33] 이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언제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로부터 법칙을 길어냈을 뿐, 선험적 법칙에 역사적 사실을 끼워 맞추려 들지 않았다. 엥겔스가 경제결정론에 기울었다는 주장도 부당하다. 거꾸로 만년(晩年)의 엥겔스는 물질적 토대 외에 상부 구조의 다양한 영역, 심지어 우연마저도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사태를 유물론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당신의 시도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무엇보다도, 유물론적 방법을 역사 연구의 실마리로 다루지 않고 역사적 사실들을 재단하는 완성된 관습적인 방식으로 다룰 때 그것은 그 반대물로 전화하고 만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34] “물질적 존재 방식이 제1차적 동인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관념의 영역이 다시 물질적 존재 방식에 반작용을, 제2차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35] “유물론적 역사 파악에 따르면, 역사에서 종국적인 결정적 계기는 현실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입니다. 맑스도 나도 결코 이 이상의 것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명제를 경제적 계기가 유일한 결정적 계기라고 왜곡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명제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허무맹랑한 공문구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경제적 처지는 토대입니다. 그러나 상부 구조의 다양한 계기들―계급투쟁의 정치적 형태와 계급투쟁의 결과들―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계급이 확립한 헌법 등등―법 형태, 그리고 또 이 모든 현실적 투쟁이 거기에 참가한 사람들의 머리에 반영된 것으로서의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이론, 종교적 견해와 이 견해의 교의 체계로의 가일층의 발전 등도 역사적 투쟁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주며 많은 경우에 주로 이 투쟁의 형태를 결정합니다. 이 모든 계기들은 상호 작용을 하며, 이 상호 작용 속에서 결국 경제적 운동은 무한히 많은 우연들(즉 그 내적 상호 연관이 너무 멀거나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상호 연관이 없다고 간주하고 지나쳐 버릴 가능성이 있는 사물들과 사건들)을 통해서 필연적인 것으로서 자신을 관철해 갑니다.”[36] “우리가 역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영역들의 독자적인 역사적 발전을 부인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역사적 작용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원인과 결과를 영원히 상호 대립하는 두 극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의 상호 작용을 완전히 망각하는 조잡한 비변증법적 표상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 신사들은, 역사적 계기가 또 다른, 결국 경제적인 원인들에 의해 일단 생겨나자마자 그 주변 환경에 대해서, 심지어 그것을 낳은 원인들에 대해서까지도 반작용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거의 의도적으로 망각하고 있습니다.”[37] “정치, 법, 철학, 종교, 문학, 예술 등등의 발전은 경제적 발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는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경제적 토대에 대해서 반작용을 가합니다. 경제적 상태가 유일하게 능동적인 원인이고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수동적인 결과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종국적으로 언제나 관철되는 경제적 필연성에 기초한 상호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 일부의 사람들이 자기들 편한 대로 생각하듯이 경제적 상태가 자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되, 그들을 제약하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기존의 사실적 관계들에 기초하여 만듭니다. 비록 여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들에 영향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 사실적 관계들 중에서 경제적 관계들이 종국적인 결정적 관계들이며, 경제적 관계들을 추적해야만 이해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38] 그렇다. 경제적 토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보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 정면으로 배치(背馳)되는 것이다. 판옥선과 함포 사격술이 조선 수군의 근본적 승리 비결이긴 하지만, 이순신 대신 원균이 지휘권을 장악했을 때의 처참한 결과를 반추해 보라. 때로 우리는 한 명의 위인이 역사의 물줄기를 송두리째 뒤바꿔놓는 장면도 목격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의 레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사회주의를 향한 변혁 주체, 노동자계급 그런데 누군가 마르크스주의를 경제결정론이라 부당하게 비난한다면, 이것이 그들의 정치가 비유물론적인 것이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모든 사안에서 변증법적 상호 작용을 넘치게 강조했지만, 그렇다 하여 무제한적인 상대주의로 빠져들지는 않았다. 이들의 변증법은 유물론이라는 확고한 토대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라클라우와 무페를 보자.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제창자들인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계급성’과 ‘경제결정론’ 중심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혁명의 주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중심부 권력을 탈취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다양한 세력들을 ‘헤게모니적 접합’을 통해 아우를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자계급에 기반하지 않은 다원화된 정치적 실천의 강조란,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이 더 이상 혁명을 수행할 수 없다는 패배 의식을 뜻한다. 이들의 작업이 1980년대 노동자투쟁의 세계적 패배 국면, 즉 신자유주의의 전면화 속에서 등장했음을 상기하자. 하지만 계급이라는 물질적 토대에 기반하지 않은 ‘헤게모니적 접합’은 대체 어디서 출현할 수 있는 것일까? 계급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인데 말이다.[39] 반면 유물론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를 향한 변혁 주체로서 오직 노동자계급이 전략적 지위를 가진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마르크스에게서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은 『공산주의당 선언』에 잘 묘사돼 있다. 마르크스는 “오늘날 부르주아지에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 중에서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다른 계급들은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쇠퇴하고 몰락한다. … 중간 신분들, 즉 소공업가, 소상인, 수공업자 및 농민, 이들 모두는 중간 신분으로서의 자기의 존립을 몰락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하여 부르주아지와 투쟁한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적이지 않고 보수적이다. …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즉 낡은 사회의 최하층의 이 수동적 부패물은 때때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운동에 끌려들어오는 일도 있으나, 그들의 생활 처지 전체로 말미암아 반동적 음모에 매수되는 것을 더 마음 내켜 한다”고 썼다.[40] 프롤레타리아들은 “지금까지의 전유(專有) 양식 전체를 철폐”해야 하는 계급인데,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지켜야 할 자신의 것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이 주도할 사회혁명이 기존의 사회혁명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이다. 부르주아는 혁명을 통해 ‘봉건 지배계급에 의한 지배’를 ‘자본가 계급에 의한 지배’로 바꿔놓았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혁명을 통해 ‘계급에 의한 지배’ 자체를 끝장낼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여전히 중심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가? 마르크스의 이 주장은 오늘날에도 타당할까? 19세기 초기 자본주의 시대,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생활 조건조차 보장되지 않았던 시대에나 걸맞은 얘기가 아닐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박근혜를 끌어내렸던 2017년 촛불 항쟁으로 돌아가 보자.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 직전까지 박근혜에 대한 탄핵 지지 여론은 80%를 오르내렸다. 이어진 대선에서 1,340여만 표를 얻은 문재인은 2위 홍준표의 785만 표의 거의 두 배를 득표했다. 정의당의 심상정은 201만 표를 얻어 6.1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촛불 항쟁의 성과를 독식한 민주당은 20년 집권을 운운할 정도로 자신감이 가득했다. 반면 윤석열의 파면 결정을 앞둔 지금의 상황을 보자. 탄핵 사유의 무게로 따지자면 박근혜의 잘못은 윤석열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현재 윤석열에 대한 탄핵 지지 여론은 60%를 오르내리는 정도이며, 이어질 조기 대선에서 윤석열 일당의 결집 양상은 상당할 것으로 예측된다. 왜 이런 퇴보가 일어난 것일까? 2017년 광장의 민주주의가 일터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제아무리 대통령을 끌어내려도, 일터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 일상적 해고와 고용 불안, 비정규직 차별, 직장 내 괴롭힘과 성폭력 등이 반복되는 상황에선 ‘민주주의’가 가진 자들이 잘난 척하는 배부른 소리에 불과해 보이는 것이다. 방향이 무엇이든, 차라리 세상을 화끈하게 뒤엎자는 얘기에 끌리게 된다. 서부지법 난동을 벌인 청년 극우층의 정서는 바로 이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계급적 불평등의 본질은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할 때 벌어지는 자본과 임금노동 사이의 적대다. 이 사회의 어떠한 질서도, 그리고 이 체제를 뛰어넘겠다는 어떠한 사회운동도 결코 이 중심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가들은 대한민국 민주헌법 130개 조의 절반은 포기할 수 있겠지만, 이윤의 절반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새로운 사회운동도 임금노동이 아니라 무엇으로 사회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할 것인지를 답변하지 않고서는 지속성을 가질 수 없다. 생산 없이 유지될 수 있는 사회는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재화의 생산과 이윤 생산이 통합된 체제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직접 생산자계급인 동시에 자본의 이윤을 전적으로 생산하는 계급이란 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즉 노동자계급이 계급 적대 자체를 철폐할 수 있는 이유는 자본주의 착취 체제 속의 그들의 위치 때문이며,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다. 실제 사회에는 임금노동에서조차 배제된 수많은 약자들이 있으며, 이들의 처지는 임금 노동자보다 훨씬 열악하다. 그러나 이들은 생산과정에서 밀려난 탓에 자본의 이윤 생산을 중단시킬 물리적 힘을 가지기 힘들다. 더욱이 노동자들은 집단적 노동을 통해 공동의 규율을 획득한다는 점도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날의 대규모 기업 내부에는 고도로 체계화된 부서 조직 등이 존재한다. 노동자들은 체계화된 기업 내부에서 타인과 협력하며 공동의 목표를 달성해 나간다. 이것이 기업 내부에서 가능하다면, 전체 사회 차원에서도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최초에 자본가들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노동자들을 집결시켰지만, 이제 노동자들은 공동노동 속에서 단결이라는 노동자계급의 정신을 배우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서로 연합하려는 노동자들의 최초의 시도들은 항상 단결이라는 형태를 취했다. 대공업은 서로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한 장소에 집결시킨다. 경쟁이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을 갈라 놓는다. 그러나 임금의 유지라는, 고용주에 대항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동의 이해가 그들을 저항, 곧 단결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사상으로 결집시킨다. 그리하여 단결은 항상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지양하고 그럼으로써 자본가들에 대해 전체로서 경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이중의 목적을 가진다. 저항의 최초의 목적이 단지 임금의 유지였을 뿐이라 해도 자본가쪽이 억압이라는 하나의 사상으로 결집함에 따라 처음에는 고립되어 있던 단결이 집단을 형성하게 되고, 끊임없이 결합하는 자본에 맞서 노동자들에게는 연합의 유지가 임금의 유지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된다.” 노동자들은 자본에 맞선 투쟁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기업과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선 단결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확대되는 단결을 통해 성별, 고용형태, 업종의 차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민주적 원칙들을 체화해 나간다. 노동자계급의 이러한 거대한 잠재력은 그들의 존재 조건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얘기로도 조금 부족해 보인다. 특히 오늘날 한국처럼 노동자계급의 상층 부문과 하층 부분의 격차가 극심하고, 조직노동자 운동이 평온한 일상에 안주하는 형편에서는 더욱 그래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존재 조건도 자본축적에 따라 특정 산업의 발전과 쇠퇴가 반복되며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 노동자계급의 객관적 존재 조건의 변화, 그에 따른 의식의 변화에 대해서도 우리는 변증법을 사용해야 한다. 오늘날 노동자계급의 분절 상태가 유별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데,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이 압도적 다수인 피지배계급을 통치하는 비법은 언제나 분할통치(Divide and Rule)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시대에도 노동자계급이 단일한 하나의 계급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1885년 엥겔스도 영국 노동자들이 공업 독점으로 초과이윤을 얻고 있던 영국 자본가들의 이익을 나누면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썼을 정도다. 현재 한국의 조직노동자 운동이 가지고 있는 보신주의, 비정규직 차별의 논리는 IMF 구조조정 시기 겪은 정리해고의 상흔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잘 묘사돼 있듯이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하고 평생 일터에서 내몰렸다는 트라우마는, 이후 경제 회복 국면에서 조직노동자 운동이 철저한 조합주의 행태를 보이도록 추동했다. 그러나 세상 만물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트럼프가 벌이는 황당한 짓거리들을 보라. 통상적 방식으로는 안정적 이윤 생산을 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위기 상태를 드러낸다.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계급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 지금, 한국의 조직노동자들만 안온한 상태에 남아있으리라 보기 어렵다. 더 나아가 한국의 국민경제에서 조직노동자 부문이 차지하는 결정적 역할을 고려하면, 이들을 빼놓고서 대안 사회를 얘기한다는 것도 허망한 얘기다. 결국 중요한 것은 능동적 실천이다. 가장 억압받는 청년 노동자들, 미조직 노동자들의 힘으로 조직노동자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고 노동자계급 단결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과제다. 사회주의 운동의 목표와 전술 이는 다음 강좌의 주제가 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세 가지만 다뤄보도록 한다. 첫째, 사회주의 운동은 국가권력 장악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계급지배 질서를 폐지하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사회주의자들은 부자 감세 대신 부자의 불로소득을 징발하자고 주장하며, 부동산을 투기의 대상으로 둘 게 아니라 토지 국유화를 실현하자고 주장한다. 기술이 발전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을 내쫓을 것이 아니라, 전 사회의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노동인구를 기술 발전에 따라 합리적으로 재배치하자고 주장한다. 문제는 공동체를 위한 이러한 요구 모두 자본의 이익에는 완전히 상충되며, 자본가들은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위 요구를 철저히 탄압한다는 것이다. 바로 국가권력을 통해서다. 윤석열의 내란 사태는 국가권력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도 했는데, 총칼로 지배계급의 질서를 피지배계급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계엄 포고령 1호에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하며, 포고령 위반 시 “처단”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었음을 상기하자. 따라서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가계급의 지배 도구인 국가권력을 먼저 장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목적은 …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으로의 형성, 부르주아지 지배의 전복,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이라고 썼다.[41] 이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여기서 수준 낮은 오해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표현에서 소련, 중국, 북한의 일당독재를 연상하며 반민주적 체제를 떠올리는 것이다. 소련, 중국, 북한이 뭐라 떠들건 간에, 그들의 일당독재는 마르크스주의 본연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는 전혀 무관하다. 전광훈이 제아무리 목사라고 떠들어도, 반동적 장사꾼에 불과한 전광훈과 혁명가 예수 사이에 아무런 접점이 없듯이 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어디까지나 지금의 ‘부르주아 독재’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김대중 정도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을 정도로 상당한 지사(志士)적 풍모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민주투사로 자임하더라도,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지배 질서를 뒤엎는 것까지를 용인하는 민주투사는 없다. 레닌이 말했듯이, “‘공공질서의 교란’의 경우에, 그리고 실제로는 피착취계급이 자신의 노예신분을 ‘어기고’ 노예답지 않게 행동하려고 하는 경우에, 아무리 민주적인 국가라 할지라도 그 헌법에 노동자를 향해 군대를 출동시킬 가능성, 계엄령을 선포할 가능성 등을 부르주아지에게 보장하는 단서와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지 않은 국가는 단 하나도 없다.”[42] 즉 계급사회에서 순수한 형태의 민주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냐,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자본가계급의 질서에 반대하는 절대다수의 피착취계급을 억압하는 독재라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반대하는 극소수의 착취계급을 억압하는 독재인 것이다. 둘째, 노동자계급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자본주의 지배 질서를 폐지하는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일상적 투쟁을 중시한다. 마르크스 당대에 어떤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투쟁을 벌이는 것 자체를 백안시했다. 노동자들은 모름지기 임금 노예 신분을 거부하고 국가를 전복하는 혁명적 투쟁에 나서야지, 임금인상 투쟁을 벌이는 것은 자신이 임금 노예임을 인정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자계급이 혁명 투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정치적 계급으로 발전시키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모든 투쟁의 무기는 현실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며, 일련의 투쟁 과정을 거쳐 노동자계급은 정치적 계급으로 발전하게 된다. 즉 개량 투쟁(경제 투쟁)과 혁명 투쟁(정치 투쟁)을 결합시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노동자계급의 정치 운동은 당연히 자신을 위한 정치권력의 전취를 최종 목표로 삼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일정한 지점까지 발전한 노동자계급의 사전 조직이 필요하고, 이 조직은 그들의 경제 투쟁 자체에서 자라납니다. … 이와 같은 방법으로 도처에서 노동자들의 개별화된 경제 운동들로부터 정치 운동, 즉 자신의 이해관계를 일반적인 형태로 또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강제력을 보유하는 형태로 관철하기 위한 계급 운동이 싹트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동들이 일정한 사전 조직을 전제로 한다면, 그 운동들은 마찬가지로 다시 이러한 조직의 발전을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노동자계급이 그 조직으로 볼 때 지배계급의 집단 권력, 즉 정치권력에 맞서 결정적 출정을 감행할 정도로 충분히 전진하지 못한 곳에서는, 그들은 어쨌든 지배계급의 정책에 반대하는 끊임없는 선동(및 적대적인 지향)을 통해 그에 알맞게 훈련되어야 합니다.”[43] 셋째,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철저히 견지한다. 이 말은 사회주의 운동이 노동자계급의 문제 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모든 계급, 계층, 부문에 대한 정치의식을 가진 ‘인민의 호민관’이 되어야 계급적 정치의식을 가질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가장 억압받는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의 투쟁에 가장 노동자계급다운 방식으로 연대하고 투쟁의 최선두에 나서야 한다. 이 시대의 여성 억압을 끝장내기 위해 여성파업을 조직하자는 주장처럼 말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어떠한 부르주아 정치세력에도 용해되지 않은 채,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목표를 견실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각 계급의 존재 조건 탓에 계급 질서 자체를 철폐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은 노동자계급이기 때문이며, 계급 질서 자체가 철폐돼야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모든 억압과 차별이 일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란 노동자계급이 협소한 조합주의, 일국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노동자계급 공동의 이익을 실현해 나가도록 추동하는 정치세력이다. 1887년 엥겔스는 『공산주의당 선언』의 다음 대목이 마르크스와 자신이 40년 넘게 지켜오고 곳곳에서 승리를 이끈 전술이라고 자평했다. “공산주의자들은 …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이해관계로부터 분리된 이해관계라고는 갖고 있지 않다. …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일국적 투쟁들에 있어서 국적에 상관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를 내세우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경과하는 다양한 발전 단계들에 있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당들과 구별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 정당들 중에서 가장 단호한 부분, 언제나 운동을 추동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부분이다 ;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들, 진행 및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여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 …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이 직접 당면한 목적들과 이익들의 달성을 위해서 투쟁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운동 속에서 운동의 미래를 대변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기본 원칙들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 = 엥겔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 마르크스‧엥겔스, 「독일이데올로기」,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 마르크스‧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 알렉스 캘리니코스,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 = 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 [1] 오세아니아의 하위 지역 중 하나다. 아오테아로아, 라파 누이, 하와이를 잇는 이른바 '폴리네시아 삼각형' 안에 1,000개 이상의 섬들이 존재한다. [2] 예를 들자면, 인류 역사 내내 가축화에 성공한 대형 포유류는 5,400여 종 가운데 14종에 불과하다. 이 14종의 13종이 유라시아 대륙에 존재한다. 아즈텍 제국군은 스페인 기병대를 통해 말이란 동물을 처음 목격했다. 오늘날 존속에 성공한 인류 문명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출현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3] G. D. H. 콜,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 [4]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5] 마르크스‧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6] 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7] 엥겔스, 「잉글랜드 노동자계급의 처지」,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8] 레닌, 양효식 옮김, 「마르크스」, 『레닌 전집 58』. [9] 마르크스‧엥겔스, 「독일이데올로기」,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10] 마르크스 당대에도 그의 천재성은 유명했던 것 같다. 1852년 엥겔스는 “우리들 중에는 이상한 고정관념, 즉 모든 것을 아는 것을 소명으로 하는 마르크스라는 대부가 있는데도 우리가 억척스럽게 공부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썼다. 엥겔스, 「엥겔스가 뉴욕의 요제프 바이데마이어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2권. [11]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12] 엥겔스,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2권. [13]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14]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15]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16]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17] 1945년에서 1965년까지 20년간 한국은 약 120억 달러에 이르는 원조를 받았다. 1950년대에는 원조자금이 한국 정부 예산의 100%에 달할 정도였다. 또 다른 분석에 따르면, 1945년에서 1975년까지 한국이 받은 경제원조와 차관 60억 달러는 미국의 아프리카 대륙 원조 총액 68억 달러에 근접하며 소련의 제3세계 경제원조 총액 76억 달러에 약간 못 미치는 규모였다. 1950년에서 1975년까지 미국의 대한(對韓) 군사원조 65억 달러는 남미와 아프리카 두 대륙이 받은 원조 총액 32억 달러의 2배에 달하는 막대한 것이었다. [18] 한국 대형 교회 목사의 설교에서 유물론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마구 처먹는 일, 마구 들이키는 일, 눈요기, 정욕, 교만한 태도, 물욕, 인색, 탐욕, 부당한 이익 추구, 증권 거래소 사기 등 간단히 말해서 속물 자신이 암암리에 하고 있는 모든 추잡한 악덕으로 이해한다 ; 그리고 관념론을 미덕, 일반적 인류애, 대체로 ‘더 나은 세계’ 등에 대한 믿음으로 이해한다.”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19] 정도전, 「佛氏雜辨」, 『三峯集』. “道則理也。 形而上者也。 器則物也。 形而下者也。 蓋道之大原。 出於天。 而無物不有。 無時不然。 卽身心而有身心之道。 近而卽於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 [20] 서경덕, 『花潭集』. “氣外無理。 理者氣之宰也。 所謂宰。 非自外來而宰之。 指其氣之用事。 能不失所以然之正者而謂之宰。 理不先於氣。 氣無始。 理固無始。 若曰。 理先於氣。 則是氣有始也。 老氏曰。 虛能生氣。 是則氣有始有限也。” [21] 최한기, 『氣測體義』. “蓋天地人物之生。 皆由氣之造化。 而後世之閱歷經驗。 漸明乎氣。” [22] 마르크스‧엥겔스, 「독일이데올로기」,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23] 헤겔, 임석진 역, 『대논리학(Ⅰ)』 [24]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25]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26] 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 [27] 레닌, 『철학노트』. [28] 이 과정은 동시에 노동 성격의 질적 변화도 이끌어낸다. 하나의 제품을 완결적으로 생산하던 1명의 자립적 노동자는 매뉴팩쳐와 기계제 대공업 체제에서 세분된 하나의 단순 업무를 담당하는 비자립적 노동자로 전락한다. 매뉴팩쳐 시대에 노동자들이 자기 기능 상실에 맞서 자본에 불복종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29] 마르크스, 『자본』1권 제2판 후기 [30] 엥겔스, 「칼 맑스의 ‘1844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단행본 서설」,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1] 마르크스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사회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상호 행위의 산물입니다. 인간들은 이러저러한 사회 형태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산력들의 특정한 발전 상태를 상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에 상응하는 교류 형태 및 소비 형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생산, 교류, 소비의 특정한 발전 단계들을 상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에 상응하는 사회 질서, 그에 상응하는 가족, 신분들 혹은 계급들의 조직, 한마디로 그에 상응하는 시민 사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 인간이 생산하고 소비하고 교환을 수행하는 경제 형태들은 과도적이며 역사적입니다. 새로운 생산력들의 획득과 함께 인간은 그들의 생산 양식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생산 양식과 함께 그들은 오직 특정한 생산 양식의 필연적 관계들일 뿐이었던 모든 경제 관계들을 변화시킵니다. … 프루동씨가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성에 조응하여 사회적 관계들을 생산하는 바로 그 인간들이 또한 이념들, 범주들, 즉 바로 그러한 사회적 관계들의 추상적, 이념적 표현을 생산해 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주들은 그것들이 표현하는 관계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마르크스, 「맑스가 빠리의 파벨 바실리예비치 안넨코프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32] 이 글이 피의 대숙청이 진행되던 1938년에 발표된 걸 떠올리면 윤석열 뺨치는 망상이 아닐 수 없다. [33]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34] 엥겔스, 「15. 엥겔스가 베를린의 파울 에른스트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5] 엥겔스, 「16. 엥겔스가 베를린의 콘라트 슈미트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6] 엥겔스, 「19. 엥겔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제프 블로흐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7] 엥겔스, 「30. 엥겔스가 베를린의 프란쯔 메링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8] 엥겔스, 「32. 엥겔스가 브레슬라우의 W. 보르기우스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9] 레닌은 노동자투쟁에서조차 경제주의적 자생성에 굴종하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간단한 이유에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이며, 더 포괄적으로 발전해 왔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포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40] 당시 중간계급 또는 사회 최하층의 태도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 유별났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9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썼다. “혁명을 중도에서 저지하는 것은 누구인가? 중산계급이다. 왜? 중산계급은 만족에 도달한 이익이기 때문이다. 어제 그것은 욕망이었고, 오늘 그것은 충족이고, 내일 그것은 포만이다.” 다음으로 테나르디에 부부에 대한 묘사다. “이 인간들은 졸부가 된 속물과 타락한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저 잡종 계급에 속했는데, 이러한 계급은 소위 중류계급과 하류계급의 중간에 위치하여 후자의 결점을 약간 가지면서 동시에 전자의 거의 모든 결점을 가져, 노동자의 씩씩함과 억척스러움도 없고 부르주아의 공정한 질서도 없다.” [41] 마르크스‧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42]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43] 마르크스, 「맑스가 뉴욕의 프리드리히 볼테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4권. .footnote-ref, .footnote-target { scroll-margin-top: 200px; /* 스크롤 위치 보정 */ color: #E60012; /* ✅ 붉은색 번호 적용 */ text-decoration: none; font-weight: normal; /* ✅ 볼드 제거 */ } .footnote-ref:hover, .footnote-target: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마우스 오버 시 강조 */ } .quote-card { background: #fff; border: 1px solid #ddd; padding: 25px; margin: 20px 0; font-family: "Noto Sans KR", Arial, sans-serif; font-size: 1.00em; line-height: 1.8em; color: #333; box-shadow: 0 3px 8px rgba(0,0,0,0.1); border-radius: 6px; } .quote-card .author { display: block; margin-top: 12px; text-align: right; font-size: 0.95em; color: #E60012; font-style: italic; } -
[말벌을 만나다#6] “어떻게 차별금지법을 ‘먹고사니즘’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 요지경 동지를 만나다12.3 내란 이후,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는 많은 '말벌동지'들을 만났다. 4월 4일 윤석열이 파면된 뒤에도 많은 ‘말벌동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때로 노동조합원이 되기도 하고, 때로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기도 하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왔을까? 그 전에 이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 이들은 왜 광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같은 대오에 섰을까?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2025년 여름의 초입이던 5월 14일, 한 말벌동지를 만났다. 금속노조 조끼를 당당히 입고 서대문 인근의 카페에 나타난 그는 바로 요지경 동지. 요지경 동지는 지난 윤석열 퇴진 광장을 통해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의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그는 거통고지회가 외치는 '비정규직 철폐' 투쟁이 자신의 삶과도 너무나 맞닿아 있다고 느껴 선뜻 민주노조에 발을 들였다고 했다. 자본주의 위기가 격화하는 지금, 2030 청년의 삶에 맞닿는 민주노조의 투쟁이란 무엇일까? 민주노조는 어디로 걸어가야 할까? 여러가지를 묻고 들었다. Q1. 12·3 내란사태 이전에도 사회의제나 활동에 관심이 있으셨다면, 주로 어느 방면에서였나요? 처음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오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지경: 계엄령 직후의 시위부터 나가기는 했어요. 초반에는 열심히 나가지는 못했는데, 시위 장소가 바뀌고 나선 퇴근하고 나갈 시간이 생겼거든요. 그때부터는 안 놓치고 나가려고 노력했고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뭔지는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왜 나왔냐라고 물어보면 "나와야 할 것 같아서 나왔다"는 게 제일 맞는 대답인 것 같아요. 많이는 아니지만 이전에도 시위를 나가긴 했었거든요. 내란 직전 마지막 나갔던 시위는 딥페이크 규탄 집회예요. 그때 지혜복 선생님 발언을 듣고 A학교 문제를 알게 되기도 했고요. 그 밖에는 기후 의제, 장애인 인권, 퀴어 퍼레이드 나가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계엄 당시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계엄령 자체가 먼 과거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계엄이 터졌다'고 하니까 너무 막막하고 당황스러웠어요. 당장 ‘내일 출근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잠을 한숨도 못 잔 채로 1시간 일찍 출근했어요. 밤 새고 출근했는데 신문사 사람들은 미리 나와서 대응 준비를 했더라고요. 제가 기사를 쓰는 사람은 아니었어서, 저를 일찍 부르지는 않았는데 기자들이나 조판 작업하시는 분들은 일찍부터 나와서 새벽 내내 일하셨다고 얘기를 들었어요. 계엄에 대한 첫 인상은, "너무너무 무서운데 동시에 너무 허술하다"는 것이었어요. 사실 계엄 세력이 우리를 얕잡아봤을 가능성도 있지만요. 계엄이라는 게, 역사 교과서에서 배울 때는 발동되면 돌이키기 어렵다고 하잖아요. 생각해 보면 박정희 때도 그렇고. 그런데 윤석열이 계엄 포고를 하니까 당일 제압되는 거예요. 계엄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벌어졌을 억압과 탄압에 관한 증거는 굉장히 많이 나왔지만, 계엄군 측 손발이 안 맞았던 부분들이 저를 의아하게 만들기도 했어요. 그래서 위협을 크게 느끼면서도 동시에 "이런 게 대통령이냐"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지원: 그렇군요. 언론사에서 일하셨다고 하니 내란 전에도 사회 문제에 관심은 있으셨겠네요. 지경: 네. 인권 문제라든가. 저는 주로 관심있는 이슈가, 사실 동생이 발달장애인이어서요. 장애인 관련 의제를 관심 있게 지켜봤던 것 같아요. 직접 집회에 참여하진 않았어도 소식을 챙겨 본다든지, 뉴스에 대해 의견을 낸다든지 했어요. Q2.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오고 난 후 스스로 가장 변화했다고 느끼신 지점은 어떤 것이었나요? 혹시 그것이 사회를 보는 관점이나 정치적 입장과도 연관이 있다면, 더 자세히 들려주세요. 지경: 많이 변한 것 같기도 한데, 따지자면 많이 안 변한 것 같기도 해요. 애매한 부분이에요. 제가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이런저런 집회에 열심히 참여하고, 의제에 대해 직접 말하기 시작하면서 "'급속꿘화(급속 운동권화)' 됐다"는 얘기를 듣기도 하지만. 저를 알던 사람들은 "넌 원래 그랬다"라는 이야기도 꽤 하거든요. 그러니까, 내란 직후에 표현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내란 전에는 공개적으로 의견도 잘 내지 않았고, 아직도 제가 광장에 나와 직접 발언해 본 경우는 손에 꼽거든요. 원래도 무대를 좀 힘들어 해서, 발언도 잘 안 하고 얘기도 잘 안 하고. 트위터로 따지면, 비공개 계정에서만 이야기하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이젠 공개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인터뷰를 하거나, 기획이 있으면 참여를 하고. 이렇게 표현하게 된 것이 저한테는 크게 바뀐 지점인 것 같아요. 더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하게 된 거죠. 지원: 사람들이 쳐다봐도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나가는 것도 '더 드러내게 됐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지경: 그런 점도 있지만, 사실 저는 제 옷차림이든 남의 옷차림이든 많이 신경 쓰지 않기도 해요. 원래도 저는 논 바이너리로 정체화했는데, 그 이후부터는 사람들의 외향에 집착하지 않으려 하고 있어요. 그게 실제로 잘 되든 안 되든 그렇게 생각하고 다니기 때문에. 게다가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노조 조끼를 입고 다니는 것도 큰 저항감은 없었어요. 주변에서 약간 신기하게 보긴 하죠. 많이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까요. 사실 제가 정의당 당적이 있어요. 2022년 대선 직후 가입했던 것 같아요. 초반에 당 지도부에 대한 회의감이 컸거든요. 그때 당에서 실망스러운 모습들을 너무 많이 보였고, 동의할 수 없는 점이 많았어요. 이 사람들이 대선에서 보여줬던 모습이랑 실제로 국회에서 활동하는, 또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모습 간의 괴리가 저한테는 너무 큰 거예요. 그래서 지도부가 반성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원외로 나오고 지도부가 바뀌면서, 제가 원하는 '아스팔트 위에서 시작하는 정치'라는 느낌으로 어느 정도 당이 굴러가기 시작한 거죠. 탈당 고민을 해왔었는데, 남아 있기 잘했다라는 생각을 탄핵 정국 동안 조금 했거든요. 사실 저는 막 '사회주의'를 원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저는 저를 사민주의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과 별개로 당시 정의당이 썩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고 보니까요. 자꾸 '제3지대'로 가려고 하고, 이준석과 함께 하는 해당행위(害黨行爲)자들까지 나타나고. 정의당 세력도 줄어들었지만, 사실 당에 대한 신뢰가 많이 깨진 거죠. 그런데도 남은 사람들이 나름 열심히 해서 대선 운동까지 올 수 있지 않았나, 그러니까 지금 권영국 대표가 말하는 의제들을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Q3. 윤석열 퇴진 광장 속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요. 개중에서도 노동자들,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좀 더 이끌리시게 된 이유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지경: 제일 큰 계기는 남태령이에요. 전농 트랙터 시위가 없었다면, 1차 남태령 시위가 없었다면 저도 노동 의제에 뛰어들겠다고 생각 안 했을 것 같아요. 남태령에서 밤새우면서 인상 깊었던 게, 양곡법 의제를 거기 있는 2천 명의 사람들이 다 알진 못했지만 어떤 염원을 보여준 거거든요. ‘대첩’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이 사람들과 이야기 나눌 시간도 없었고, 이 사람들이 말하는 의제가 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연합해서 한 목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거잖아요. 저는 그 이후 한강진이라든가, 여러 연대투쟁을 하게 됐거든요. 그래서인지 남태령과 한강진, 두 사건이 크네요. 그러니까 노동자, 그들의 정치적인 목소리 그리고 그걸 표현하는 시위 방법을 더 이해하게 되고, 내가 직접적으로 도와주고 싶다…. 도와주고 싶다기보단 나도 노동자고. 당시에 저는 비정규직, 하청업체 소속으로 원청에서 일하는 노동자였거든요. 거통고 투쟁에 많은 관심이 갔던 이유가 그거였던 것 같아요. 나도 같은 하청구조 속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내가 느낀 것들을, 이 사람들은 이미 표현하고 있었구나!’ 이 사람들의 투쟁에 힘을 더 실어서 비정규직의 현실을 바꾸면, 내 처우도 개선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비정규직이 문제라는 의식은 저도 있었으니까요. 지원: 거통고 투쟁에 많은 관심이 간 데에는 동지의 비정규직 노동과 거통고 조선하청지회의 노동과 투쟁이 실제로 맞닿아 있기 때문이겠군요. 지경: 그런데 남태령과 한강진이 없었다면 생각을 발전시키지 못했을 것 같아요. 징검다리 같은 거죠. 남태령과 한강진 경험이 있어서 노동자 투쟁에도 결합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사실 한화 앞까지 오는 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어요. 트위터에서 봤는데 5분 거리인 거예요. 그때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커피 한 잔이랑 허니브레드를 시켜놓고 명동에서 먹고 있다가, 빵 절반을 남겨두고 뛰쳐나갔거든요. 갔더니 천막도 못 치게 하고, 용역들이 바글바글 몰려들어 욕하고 드잡이하려고 하고. 내가 여기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죠. Q4. 혹시 윤석열 퇴진 투쟁에서 가장 아쉬운 지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혹은 파면 이후 조직된 노동자 운동에 바라는 점, 또는 민주노총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길이 있으시다면? 지경: 윤석열 퇴진 투쟁에서 가장 아쉬운 지점이요? 사실 퇴진 시위를 하면서 아쉬운 점을 많이 느꼈는데, 당시 아쉬웠던 점들이 파면 이후 더 크게 부각되고 있다고 느껴요. 비상행동에서 ‘사회대개혁’을 걸었으면, 민주당 사람들도 그 기조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게 되지 않더라고요. 자기들 원하는 대로 가버렸잖아요. 혐오 단어도 그대로 쓰고요. 눈치도 보지 않고 투쟁 성과를 독점하려는 행동을 보면서 마음이 아픈 것도 있지만, 사실 너무 무서웠거든요. ‘이 사람들이 2017년의 악몽을 반복하려고 하는구나’ 싶어서요. 2017년도 당시 저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민주당은 '촛불 혁명'이 자기들 공인 것처럼 말했어요.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도 자기들이 다 주도해서 이끈 양, 그렇게 이야기해 왔거든요. 그런 과거가 이번 광장에서 다시 나타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어요. 이번에 촛불행동이 박원순 성폭력 2차 가해를 저지른 자기 대표를 비상행동 공동대표로 올리려고 하는 과정도 있었는데, '아, 이거 정말 많이 삐거덕거리겠구나. 차라리 그냥 갈라졌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또 촛불행동이 자신들 집회 끝내고 비상행동 집회로 와서 뭔가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들이 연이어 생겼고, ‘대선 지나면 다시 민주당이 자기들 공으로 돌리겠구나, 광장에 나온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겠구나’라는 걸 진짜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2017년 제가 청소년이었을 당시에는 퀴어에 대한 의식이 지금보다 강해서, 성소수자 의제가 부각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아쉬움이 컸어요. 그때보다 훨씬 많은 의제에 관심을 가지는 지금, 이런 상황을 마주하기가 겁나요. 거대한 백래시가 어떻게 다가올지 안 봐도 알 것 같은 거예요. 그리고 심지어 그 과정에 민주노총이 일조하고 있다는 게, 저한테는 큰 문제인 거죠. 2017년 당시에는 민주노총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아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총연맹 중앙은 이재명을 지지하고 싶다는 의사를 계속 내비치는데, 그런 입장을 정말 민주노총에 밀어붙이면 ‘이 사람들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본인이 권력을 잡고 싶어 하는구나’라고 많이 생각했어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정말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어느 노동자 개인 권력을 키우는 게 아니잖아요. 정치가 노동자 위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민주노총이 일조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아서 일어나는 문제들, 그리고 그로 인해 투쟁사업장 현안이 뒤로 밀리는 모습들에 화도 많이 나요. 그리고 간혹 민주노총에 속한 노조들이 민주적이지 못한 모습들, 혹은 혐오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상황도 저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저는 사실 민주노조 혁신운동을 하려고 들어온 게 아니라 나에게 맞는 노동조합에 있고 싶은 건데, ‘이런 운동까지 신경써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럼에도 제가 한국노총에 가서 민주노조 운동할 거 아니잖아요. 무슨 MZ노조 가서 새로운 계파를 만들겠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원하는 운동의 공간을 만들려면, 민주노총 안에서 만들어가야 하니까요. 그래서 보고만 있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총파업 공동행동에 들어간 것이기도 해요. Q5. 민주당 지지 여부를 둘러싼 민주노총 중집 대선방침 논의가 뜨거운 이슈가 되었습니다. 진보당 김재연 후보의 민주당 단일화가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요. 보수양당과 구분되는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지원: 부연하자면 노동자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당연히 보수 양당 자장에서 벗어난다는 거잖아요. 노동자 정치라는 게 뭔지 대중에 피력해야 하는 건데. 민주당과 진보당의 단일화 자체도 문제지만, 세부적으로 봐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단일화 합의문에서 차별금지법 추진도 빠졌고요. 그래서 SNS에서 진보당 지지자들이 “그래도 필요한 거 다 챙겨갔다”라고 했을 때 정말 화가 났어요. 어떻게 그걸 보고 "아, 그래도 우리 할 만큼 다 했다. 최선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지경: 그렇죠. 그리고 이번에 민주당 지지자들이 대선 단일화 비판에 대해 ‘내란세력 청산이 다 안 됐는데 퀴어 권리 주장은 이기적이다’, 노동을 강조하면 ‘노동자만 강조하는 건 이기적’이다, 이런 말들을 하는 걸 봤거든요. SNS에서 주로 그런 논리로 대응하더라고요. 소수자 권리에 대한 폄하에 대해서는 무슨 생각이 드냐면,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당신들에게는 퀴어의 권리가 '먹고사니즘'이 아닐 수 있지만, 저한테는 '먹고사니즘'인 거예요. 차별금지법을 예로 들면, 사실 차별금지법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때 트랜스 의제가 과대표되는 경향이 있는데, 장애인 차별 금지, 노동자 차별 금지가 다 들어가 있잖아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는 게 없으면, 소수자들의 생계가 위협받기도 하고요. 단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임금 차이가 있다는 것은 여성은 그만큼 못 번다는 건데, 그러면 생활 수준은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이 법이 제정되지 않으면 여성 차별이 강화되겠죠. 이게 여성 탄압이 아니라고 볼 수 있나요? 그런데도 기독교에서 싫어하니까 차별금지법 안 된다, 아직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았다면서 차별금지법 입법을 저지하려는 행보는 그냥 자신들이 권력 잡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구나 싶어요. 내란 청산? 저는 내란 청산 안에 차별금지법 입법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실제로 제 삶이 소수자 의제에 많이 닿아 있다고 예전부터 생각했어요. 당장 제가 트랜스젠더퀴어고, 제 동생은 장애인이고, 제 어머니가 암 투병하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러다 보니 한부모 가정이고. 그러니까 저는 환자의 보호자였기도 하겠고. 그리고 제 주변에 다문화 가정이라든지, 이런 다양성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의 생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게 차별이란 말이죠. 그럼 ‘차별을 없애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먹고살아야 돼?’가 되는 거예요. 최근에 집중적으로 보는 게 전장연의 탈시설 관련 의제인데. 제 동생이 높은 등급의 발달 장애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더라도 그 친구가 시설에 가게 될 확률이 너무너무 높아요. 제가 데리고 살자니 저는 비정규직이고, 지금은 해고당해서 고용도 되게 불안정한 상태기도 하고요. 이 사람을 개별로 부양하면서 내가 살아갈 수 있는지 생각하면, 그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그렇다고 제 동생을 시설에 보내기에는, 그건 사실 사람이 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장애인도 차별받지 않고 노동할 수 있는 법안이 필요한데 없단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차별금지법을 ‘먹고사니즘’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절대 동의가 안 돼요. 사실 민주당이 광장에 나올 때부터, 민주당이 말하는 ‘광장의 연대’는 한계가 명백하고 그래서 한시적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장에는 윤석열 퇴진을 외치니 마치 같은 걸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광장에서 애국가 부른 거 가지고도 그랬었잖아요. 이렇게나 지향이 다르구나, 하는 걸 많이 느꼈어요. 어느 순간에 민주당 세력은 광장의 대다수를 버릴 텐데. 민주당에 대한 문제제기나 토론, 이런 게 하나도 조직되지 않는 거예요. 민주당에 대한 문제제기가 없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건가’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지원: 맞아요. 민주당이 말하는 진보는 허위이고, 광장도 자기들 입맛에 맞게 재편집하는 것 같아요. 필요한 의제만 취사선택해 진보적으로 포장하고, 그게 대선 단일화에서도 많이 드러났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경: 노란봉투법도 문재인 정권 때부터 나왔는데, ‘윤석열이 거부권을 행사해서 노란봉투법이 통과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마음대로, 편한 대로 말한다 싶어요. 저는 오히려 문재인 정권 때 민주노총이 더 적극적으로 민주당을 규탄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민주당 정권 아래 우리 삶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더 적극적으로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너무 못해서 지금 이렇게 된 점도 있다고 생각하고, 참 안타깝네요. 한국 대의민주주의라는 게, 지역에 기반한 풀뿌리 민주주의가 있어서 가능하기도 하잖아요. 이런 점은 부각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오직 총선, 지선, 대선을 위주로 정치시스템이 굴러가는 걸 보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 자체가 풀뿌리 민주주의, 지역 민주주의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거기서부터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특히, 지역 노조를 통해 민주노조 운동과 함께 정치운동을 발전시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지원: 지역과 현장에 기반한 운동을 정치세력화의 기틀로 삼으면 좋겠다는 취지죠? 지경: 네. 사실 수도권에서는 약간 헛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방으로 갈수록 그런 부분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Q6. 모두 ‘사회대개혁’을 이야기합니다. 윤석열 퇴진 이후를 그리는 상도 각기 조금씩은 다른데요. 윤석열 파면 이후 ‘사회대개혁’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점 또는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들려주세요. 지경: 사실 이 점이 제게 비어 있던 부분 중 하나예요. 그렇지만 저한테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계속 말해왔듯이 차별 철폐인 것 같아요. 계급에 따른 차별, 성별에 따른 차별, 타고난 무언가에 대한 차별이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문제를 비롯해 여러 분야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생각해요. 우리에게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보장하기 위한 법들. 그러니까 차별금지법과 같은 취지의 법을 계속 제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운동이 없다면, 앞으로도 내란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죠. 차별을 철폐하지 않으면 사회 문제들이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 보니까, 저한테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쪽인 것 같아요. 금속노조 조합원으로서 말하자면, 사실 거통고지회가 광장에서 평등한 지향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도, 말벌 동지들이 함께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잖아요. 평등수칙도 만들고. 무지개 조선소 때 다들 열심히 활동해 주셨고. 그런 활동들에 다들 감동받고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아요. 참여하면서 정말 좋았거든요. 물론 문제가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문제 해결 과정도 굉장히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이었어요. 기존에 학교나 다른 사회에서 경험할 수 없던 것이죠. 그런 갈증을 해소해 주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민주적으로 만나는 계기가 계속 필요할 것 같아요. 부딪히라는 소리가 아니라, 살포시 다가가서 악수하는 느낌으로. 지원: 특히 차별 문제에 대해, 주변 노동자 동지들을 비롯해 투쟁하는 동지들과 토론할 때 말씀하시는 거죠?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는 엄중한 투쟁은 엄중하게 해 나가면서. 함께 싸우는 동지들의 내부 혁신과 정치적 논의도 열심히 해 나가자. 그런 말씀으로 이해했어요. 지경: 그렇죠. 그렇죠. Q7. 마지막 질문입니다! 혹시 사회주의를향한전진 동지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이나 소감이 있다면, 남기지 말고 전부 들려 주세요. 지경: 인터뷰를 처음에 해달라고 하셨을 때 흔쾌히 허락했어요. 근데 허락하고 생각을 해 보니까 제가 당적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미안한 거예요. 전진도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사회주의정당 건설 목표로 나아가는 분들인데. 제가 정의당 얘기를 많이 하게 될 것 같은데 이런 얘기를 꺼내도 될까, 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근데 몇몇 전진 동지들이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해 주셨었어요. "지경 씨는 조곤조곤하게 빨간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당적이 있지만, 마음만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같은 속도일 순 없지만 같이 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마음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런 것 같고요. 사실 총파업 공동행동 초반에 학생 동지들이 연명 받으면서 총파업 하자고 얘기했을 때, 되게 회의적이었거든요. 그때는 해고되기 전이라서 일하고 있기도 했고요. 일하지 않는 상태가 나에게 어떤 위협으로 다가올지 알기 때문에 어떻게 파업을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자꾸 헌재 선고 기간이 길어지고 민주노총에서 좀 어영부영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었잖아요. 그때 총파업 공동행동에 대한 인상도, 총파업 자체에 대한 인상도 많이 바뀌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96·97 총파업처럼 강하게 보여주지 않으면 정말로 어려울 수 있겠다’, 그렇게라도 힘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져서. 그래서 총파업 공동행동에도 가입 의사를 밝히고, 말벌 동지들도 조직해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었거든요. 제 생각이 이렇게 변하게 된, 그러니까 약간 좌로 가게 된 그런 터닝포인트들에, 전진 동지들이 항상 같이 있어줬던 것 같아요. 그 부분에 대해 감사하고 있어요. 지원: 말씀하신 연서명은 저랑 청년 학생 동지들이 초동 연명자로 이름을 올렸는데, 아직 기억이 나거든요. 그때가 민주노총이 대의원대회를 했을 때잖아요. 어떤 대의원은 되게 유심히 보기도 하고, 나눠주던 학생 동지한테 이런 거 뿌리지 말라고 얘기했던 대의원도 있고. 그리고 양경수 위원장도 와서 받아 갔었거든요. 그 대의원대회에서 여러 수정동의안이 나왔고 총파업 제기가 있었는데도 그걸 책임지지 않으려고 피해간다는 인상이 되게 컸어요. 그런 걸 보면서 ‘중대한 국면에서 투쟁으로 보여주는 게 필요할 때, 집행부가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면 이런 불상사가 생기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경: 7월 총파업을 시작으로, 새로운 정권에 우리의 목소리와 의제를 강력하게 표출하는 투쟁을 이어가며 정치적 지진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금속노조 기자회견에서 노조법 2·3조 개정 이야기 하는 걸 보면서, ‘일단 뭔가를 하면 그 큰 노조 내부에서도 변할 수는 있구나’라는 생각을 조금씩 하고는 있거든요. 긍정적인 신호인데 그것보다 더 해야죠. 더 가야죠.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하고, 사람들이 조직된 노동자 운동 속에서 더 활동하는 것도 필요하겠고요. 그리고 노동자성 자체를 확장해야 된다는 생각도 합니다. 지원: 특고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갈수록 확산되는 추세 속에서요. 지경: 그것도 그렇고, 전장연 투쟁 중에서 권리중심일자리 해복투라고, 서울시에서 해고한 장애인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잖아요. ‘이것도 노동이다’라는 슬로건을 들고나오는 걸 보면서, 우리가 노동의 범위를 많이 넓혀야 생존권을 보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과 연대하고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계급투쟁이 결정한다 - 노조법 2·3조 개정안 환노위 통과 이후 노동자계급의 과제2025년 7월 24일 <제대로 된 노조법 2·3조 개정 촉구 비정규직이제그만 기자회견> 사진: 요지경 노조법 개정안, 환노위 통과 2025년 7월 28일, 노조법 2·3조 개정안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했다. 환노위 통과안이 기존 노조법보다 발전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를 사용자로 규정하는 ‘사용자 개념 확대’다. 개정안은 노조법 2조 2호, 사용자 정의에 “근로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근로자의 근로조건에 대하여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 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도 그 범위에 있어서는 사용자로 본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이에 따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원청에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둘째, 노동쟁의 대상 일부 확대다. 노조법 2조 5호 개정에 따라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지위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경영상 결정 △사용자의 단체협약 위반 등에 대해서도 파업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 노동법은 노동쟁의를 “근로조건의 ‘결정’에 관한 주장의 불일치”로 인한 분쟁상태로 규정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법률이나 단체협약에 따라 이미 결정된 권리의 이행을 둘러싼 분쟁, 즉 ‘권리분쟁’은 파업권 행사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번 개정은 기존 노조법이 쟁의행위 대상에서 배제해왔던 특정 권리분쟁 사안을 일부 포함해 노동쟁의 범위를 소폭 확장했다. 즉, “근로조건 ‘결정’에 관한 주장의 불일치”시 쟁의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한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부 사안을 명시해 쟁의대상을 소폭 확대한 것이다. 셋째, 노조법 2조 4호 라목 삭제를 통한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의 노동조합 결성권 확대, 해고자와 퇴직자 등을 조합원으로 포괄할 단결권 확대다. 현행 노조법은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에는 이를 노조법상 노동조합으로 보지 않았다. 이 조항이 노조법 2조 4호 라목이다. 윤석열 정권이 ‘화물연대는 노조가 아니’라며 공정거래법을 동원해 화물연대 파업을 탄압했듯, 노조법 2조 4호 라목은 특수고용노동자·플랫폼노동자의 노동3권 행사를 막아왔다. 또한 박근혜 정권의 전교조 탄압에서 드러난 것처럼 해고자, 퇴직자의 노동조합 가입을 사유로 한 탄압의 근거 조항이었다. 환노위를 통과한 노조법 2·3조 개정안의 노조법 2조 4호 라목 삭제로 더 넓은 단결권 행사가 가능해졌다. 한계 또한 분명하다 환노위를 통과한 노동법 개정안의 한계 또한 다음과 같이 분명하다. 첫째, 환노위 통과안은 노동자 정의를 확대하지 못했다. 즉,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노조에 가입한 사람은 노동자로 보는 ‘노동자 추정조항’ 명문화에 실패했다. 주지하듯 화물노동자, 학습지교사, 택배노동자, 배달라이더, 대리운전노동자 등 특수고용노동자들과 플랫폼노동자들은 사용자에게 종속되어 일하면서도 법적 신분은 ‘개인사업자’로 취급되었다. 윤석열 정권의 화물연대 탄압처럼, 국가와 자본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교섭을 요청해도 자본가는 ‘당신들은 노동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거부했다.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한 요구가 노동자 추정조항 신설이었다. ‘일단 원청이 고용한 노동자로 보고, 자본이 노동자성을 부정할 경우 이를 증명할 책임을 자본에 지우자’는 요구였다. 이 조항이 빠짐에 따라, ‘나는 원청 자본에 고용된 노동자’임을 입증할 책임은 여전히 노동자에게 남았다. 둘째, 사용자 정의 확대는 한계적이다. 환노위 통과안은 사용자 범위를 ‘노동조건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 개념에 따라 확대했으나, 명시적으로 ‘원청’을 ‘사용자’로 본다는 규정은 빠졌다. 이에 따라 ‘누가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용자인가’를 둘러싼 공방은 필연이며, 원청은 자신이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용자임을 부인하고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이미 그래왔듯, 원청은 하청구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지휘·명령 체계를 은폐하며, 책임을 하청업체에 전가하는 방식으로 사용자성을 조직적으로 회피할 것이다. 환노위 통과안은 ‘실질적 지배력’이라는 추상적 기준만을 제시함으로써, 현장에서는 여전히 “누가 사용자냐”를 두고 끝없는 공방과 소송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2025년 7월 30일 자본가 단체 기자회견 사진: 연합뉴스 셋째, 노동쟁의 대상 확대 범위는 윤석열이 거부권을 행사안 노조법 2·3조 개정안보다도 후퇴했다. 윤석열의 재의요구권 행사로 폐기되었던 노조법 개정안은 △체불임금 청산 △해고자 복직 △부당노동행위 구제 등 ‘권리분쟁’ 사항을 노동쟁의 대상으로 포함했다. 즉, 아직 ‘결정’되지 않은 노동조건에 관한 사항뿐만 아니라, 법률과 단체협약에 따라 이미 결정된 권리의 실질적 보장을 둘러싼 분쟁, 곧 ‘권리분쟁’도 파업권 행사 대상으로 포함했던 것이다. 이번 환노위 통과안에 따라 단지 ‘결정’되지 않은 노동조건에 대해서만 쟁의할 수 있다는 기존의 협소한 틀은 유지되었고, 이미 확정된 권리의 실현을 위한 투쟁은 여전히 불법화될 위험에 놓여 있다. 넷째, 개인 책임에 따른 손배의 명문화는 그 어떤 의미로도 성과가 아니며 매우 문제적이다. 민주노총은 현 노조법 개정안을 두고 “손배 없는 시대가 열렸다”고 평가하나,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물론, 환노위 통과안이 사용자의 불법행위에 맞선 쟁의행위로 발생한 손해에 대한 배상 책임을 면제하고, 노동조합 파괴를 목적으로 한 손배청구를 금지한 점은 성과다. 그러나 손배 책임을 △노동조합 내 지위와 역할 △쟁의행위 참여 정도 △손해에 대한 관여 정도 등으로 따져 노동자 개개인에게 부여한 점은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합리화할 수 없다. 이는 단지 투쟁 과정에서 힘이 부쳐 끝까지 따내지 못한 결과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견지해온 요구에 대한 명백한 왜곡이다. 즉, ‘개인 책임에 따른 손배’는 ‘손배가압류 철폐’라는 핵심 요구를 흐리고, 노동자 투쟁의 집단성을 훼손하며, 가장 앞장서서 투쟁하는 노동자에게 가장 큰 희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결코 성과가 아니다. 최근 대법원은 2010년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파업에 연대했다는 이유로, 활동가들에게 35억 원에 달하는 손해배상 책임을 확정했다. 이 판결의 취지가 바로 환노위 통과안에 담긴 ‘개인 책임에 따른 손배’다. 개인 책임에 따른 손배는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일 뿐이다. 위와 같은 한계는, 민주당에 의존한 노조법 개정 과정이 노동자들의 피땀 어린 투쟁으로 만든 성과를 어떻게 굴절시켰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2022년 8월 31일 <손해배상 청구 철폐! 노조법 개정, 노란봉투법 제정 촉구 민주노총 기자회견> 사진: 노동과세계 계급투쟁이 결정한다 노조법 2·3조 개정안이 환노위 문턱을 넘었지만,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결국 노동자들의 치열한 투쟁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3권이 한걸음 전진한 데는 치열한 투쟁이, 그리고 투쟁을 통해 쌓인 판례가 있었다. 그 중요 사례는 다음과 같다. 비정규·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3권 확대에 있어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학습지 노동자들의 싸움이 만든 성과다. 학습지 교사들은 1999년 노조 설립 이래 20년 넘게 노조할 권리를 인정받고자 싸웠다. 2018년 대법원은 학습지 노동자들의 손을 들며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는 아니더라도 노동조합법상 노동자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학습지노동자들의 투쟁이 만든 이 판결로, 특수고용노동자들도 단결권을 가지고 있음을, 노조법상 노동자에 해당함을 확인한 것이다. 해당 판례는 이번 노조법 개정안에도 반영되어,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 노조법상 노동조합으로 보지 않는’ 현행 노조법 2조 4호 라목을 삭제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축은 원청 사용자 책임을 관철하기 위한 간접고용노동자들의 투쟁이다. 간접고용노동자들은, 치열한 투쟁으로 현행법을 뚫고 법원과 노동위원회의 의미있는 결정을 강제하며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자가 사용자’라는 개념을 쟁취해왔다. 2021년 중앙노동위원회는 CJ대한통운 택배노동자들의 교섭 요구를 원청이 거부한 사건에 대해, “비록 근로계약 당사자가 아니라도 근로조건에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결정권을 가진 자는 노조법상의 사용자”라고 판정했다. 이 판단은 서울행정법원 1심에서 유지되었고, 2024년 1월 고법 항소심도 CJ대한통운이 전국택배노조와 교섭을 거부한 행위는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무엇보다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의 절박한 투쟁이 돌파구를 만들었다. 3년 전 여름,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은 5년간 삭감된 임금 30%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원청에 맞서 절박한 파업을 벌였고, 좁디좁은 구조물에 자신을 가두고 "이대로 살 수는 없다"며 절규했다. 원청 대우조선은 이를 ‘불법파업’이라 규정하고 폭력 진압을 시도했으며, 파업 종료 후에는 무려 470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대우조선은 하청노동자들의 법적 사용자가 아니고, △그렇기에 하청노동자 파업은 불법이며, △불법 파업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쳤으니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하는 기막힌 현실이었다. 이후 진짜 사장에 맞서 노동3권 행사를 가능케 할 노조법 2·3조 개정 투쟁이 본격화했다. 파업 이후 ‘원청 사용자 책임 강화’에 국민 절반 이상(52.8%)이 동의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투쟁이 얼마나 큰 파장을 만들었는지 여실히 드러냈다. 2022년 7월 22-23일 TBS 여론조사 결과 2022년 12월 30일, 중앙노동위원회는 경남지방노동위원회 판정을 뒤집으며 ‘대우조선 원청은 하청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에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므로 단체교섭 의무가 있다’고 판정했다. 원청의 교섭 거부는 부당노동행위로 인정되었고, 마침내 2025년 7월 25일 서울행정법원도 한화오션의 교섭 의무를 인정했다. 법원은 “하청 노동자들의 노무제공이 원청 사업 수행에 필수적이고, 노동조건을 원청과 집단교섭으로 결정할 필요성이 있다면 원청을 노조법상 사용자로 볼 수 있다”며, 성과급·학자금·노동안전 같은 의제에서는 한화오션이 교섭에 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원청의 교섭의무를 규정한 판결을 투쟁으로 쟁취한 것이다. 2025년 7월 25일, 사법부는 현대제철과 한화오션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원청의 교섭 거부를 부당노동행위로 인정했다 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원청에 맞선 하청노동자들의 투쟁 확대의 중요 계기였다. 2024년 5월, 발전소 경상정비를 담당하는 공공운수노조 발전HPS지부 노동자들은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이후 총고용 보장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정의로운 전환’을 요구하는 의미심장한 파업이었다. 발전HPS지부 노동자들은 발전HPS 사측에 고용보장을 요구했지만, 16차례 교섭 내내 발전HPS 사측은 “원청에 가서 요구하라”는 무책임한 답변만 반복했다. 결국 조합원들은 원청인 남부발전과 직접 교섭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2025년 태안화력 1호기를 시작으로 발전소 폐쇄가 본격화하는 지금, 발전소 비정규직노동자들은 8월과 11월 파업을 앞두고 있다. 정부와 원청 자본에 맞선 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을 목적의식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발전노동자 총고용 보장, 원청이 책임져라! 사진: 공공운수노조 이렇듯 법과 제도를 바꾸어온 것은 계급투쟁이며,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앞서 서술했듯, 원청 자본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하청 구조를 복잡하게 재편하고, 지휘·명령 체계를 은폐할 것이다. 이를 돌파하는 길은 단결과 연대뿐이다. 사업장 담을 넘어, 원청 자본에 맞선 비정규직노동자 연대투쟁으로 나아가자 분명한 것은, 법이 몇 줄 바뀌었다고 원청 자본이 순순히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단체교섭에 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필요한 것은 원청에 맞선 더 강력한 투쟁이며, 그 과정에서 이번 환노위 통과안에 담기지 못한 △노동자 정의와 사용자 정의 확대 △노동쟁의 대상 확대 △모든 형태의 손배 철폐 쟁취를 위한 집단적 의지를 확대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비정규·특수고용노동자 공동투쟁 확대다. 사업장 벽을 허물고, 원청 자본에 맞선 비정규직노동자 공동전선을 구축하며 전 민중 앞에 원청이 진짜 사장임을 드러내자. 원청 자본이 노조법 개정의 근본 취지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모든 노동자 민중 앞에 드러내며 원청 사용자성 쟁취투쟁을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시키자. 부분적이지만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가 확대됐음을 알리고, 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자. 또한, △노동자의 지위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경영상 결정 △사용자의 단체협약 위반을 포괄해 확장된 쟁의행위 범위를 토대로, 자본의 경영독재에 맞선 원하청 노동자 투쟁을 확대하자. 지금까지의 노조법 개정 투쟁과 마찬가지로, 바뀐 법을 토대로 얼마나 나아갈 수 있는지 또한 계급투쟁이 결정할 것이다. 사진: 금속노조 -
“니 약점을 알고 있다!” 노동자를 노예로 만드는 고용허가제 - 미봉책으로 생색만 내려는 이재명 정부스리랑카 이주노동자 지게차 학대 사건 사진: 전남이주노동자네트워크 “니 약점을 알고 있다. 베트남으로 가든지, 불법으로 일하든지. 알아서 해라. 사업장 변경은 해줄 수 없다.” 최근 내가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법률지원센터 소금꽃나무에 사업장 변경 상담을 하러 온 한 베트남 노동자가 사장의 말을 녹취해서 들려줬다. 이 노동자는 사업장 변경 횟수 세 번을 다 썼다. 임금이 한두 달씩 밀리고, 이 노동자에게만 지문인식기를 못 쓰게 하는 괴롭힘도 있어 노동자 책임이 아닌 사유로 사업장 변경을 허가해 달라고 했다. 내가 직접 사장과 통화도 했는데 사장은 이 노동자가 일을 잘 못하는 데다 자기가 키우는 텃밭에 음식물 쓰레기를 잘못 버렸다고 했다. 이 사장의 말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놀라긴 했지만, 이 사례는 심각한 사례 축에 끼지도 못한다. 신발로 맞다 사업장 변경을 요구했더니 사장이 뜨거운 커피를 얼굴에 부어 충격을 받은 네팔 노동자의 사건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사장은 이주노동자를 업무 방해로 고소하기까지 했다. (관련 기사 링크) 현대판 노예제도 최근 전남 나주의 벽돌 공장에서 스리랑카 이주노동자가 지게차 화물에 묶인 채 학대를 당한 사건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자, 정부가 고용허가제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이 스리랑카 노동자가 몇 개월 동안 신고를 못 한 이유는 나쁜 일터를 떠날 자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직장을 옮기려면 사장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고용허가제는 수많은 노동자의 삶을 파괴했다. “다른 공장에 가고 싶어도 안 되고, 네팔 가서 치료를 받고 싶어도 안 되었습니다. 제 계좌에 320만 원이 있습니다. 이 돈은 제 아내와 여동생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2017년 충북 충주의 한 공장에서 일했던 네팔 이주노동자 케샤브 슈레스터는 이런 말을 남기며 목숨을 끊었다. 그는 12시간 맞교대 근무하면서 불면증, 우울증을 겪었다. 회사를 옮겨달라고 요청했고, 그게 어려우면 네팔에서 치료를 받고 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모두 거부당했다. 고용허가제(E-9) 노동자는 입국 후 3년 동안 최대 3회만 허용된다. 이후 사업주의 재고용 허가 요청이 있는 경우 1년 10개월간 그 기간을 연장받을 수 있는데 이 기간에는 2회까지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다. 변경 사유는 근로계약 종료나 사업장 휴·폐업, 사용자에 의한 부당 처우, 성폭력, 임금체불 등 아주 일부의 경우에만 인정된다. 이마저도 대부분 노동자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사업장 변경 승인을 받아도 90일 안에 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강제 출국 대상이 된다. 현대판 노예제도라 부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케샤브 슈레스타가 남긴 유서 사진: 청주청년이주민인권모임 이주민들레 미봉책으로 생색내기 최근 이재명 정부가 언론을 통해 흘리고 있는 개선안은 고용 기간 3년 이후 혹은 4년 10개월 이후에야 사업장 변경 제약을 완화하는 것이다. 3년 동안 죽으라 착취당하다 사장에게 1년 10개월 동안 재고용 허가를 받은 노동자 또는 그렇게 해서 총 4년 10개월(3년+1년 10개월)을 일하다가 귀국한 후, 소위 '성실 근로자'로 재입국한 노동자에게만 사업장 변경의 자유를 주겠다는 생각이다. 애초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권리를 3년 혹은 4년 10개월 후로 미루며, 3년 혹은 4년 10개월 후를 위해 자본가에게 더 철저히 순응하게 될 수밖에 없는 안을 마치 그럴듯한 개선안으로 포장하려 한다. 2021년 한국노동연구원이 내놓은 연구용역 보고서도 ‘1년 이후 사업장 변경 자유화 안’을 제시했는데, 그에도 훨씬 못 미친다. 또한 이 개선안은 여전히 이주노동자들을 고용 기간에 따라 갈가리 찢어 놓는다. 또한 정부는 예외적으로 인정되는 사업장 변경 사유를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정주노동자들의 권리도 수없이 짓밟는 노동부와 법원을 상대로 이주노동자가 예외 사유를 스스로 입증하기란 어렵다. 노동자가 아니라 사업주에게 사업장 변경 제한 사유에 대해 입증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 횟수 문제도 중요하다. 앞에서 베트남 노동자에게 “니 약점을 알고 있다”고 얘기한 사장은 이주노동자에게 사업장 변경 횟수가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횟수 제한이 남아 있는 한 이주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 주장이 카운트(변경 횟수)에 포함되느냐, 안 되냐를 신경 쓰게 되어 권리를 주장하기 힘들다. 아직 정부의 개선안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얘기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개선안은 일시적 미봉책으로 생색내기에 다름없다. 변경 사유와 변경 횟수를 말하기 전에 사업장 변경을 가로막는 제도 자체가 문제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고용허가제는 평소에도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바탕으로 노동자들을 억누르는 자본가들에게 막강한 힘을 실어준다. 이주노동자는 먼저 사표를 제출할 수 없으니, 사업장을 박차고 나올 자유가 없으니, 자본가들은 사업장의 노동 현실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 이주노동자에 대한 야만적 인권 침해는 새로운 일이 전혀 아니다. 2004년 8월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이래 이주노동자들은 살려 달라는 외침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주노동자들의 고통은 당연한 것처럼,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여전히 동정의 대상으로 남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나날이 확산하고 있다. 극심한 경제위기 앞에서 ‘외부의 적’을 만들어 자기 살길을 찾으려는 퇴행적인 정서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일시적인 미봉책은 이주노동자들을 지옥 같은 현실에 다시 매이게 할 뿐이다. 고용허가제는 국제노동기구(ILO)에서도 엄격히 금지하는 '강제노동'인데, 지금까지 수많은 정부는 고용허가제 자체는 그대로 두고 사유나 횟수만 조금씩 건드려왔다. 윤석열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에게 ‘권역 이동 금지’라는 억압까지 추가했다. 매일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이 폭로되었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이주노동자들과 단결해 투쟁에 나서는 노동자들의 힘이 아직 너무나 부족하고, 이중 삼중의 억압 아래 놓여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주체적 조직화도 너무나 더뎠기에 현실이 바뀌지 않았다.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이주노동자들의 요구를 낮춘다고 투쟁 동력이 만들어지거나 이주노동자들의 주체적 조직화가 빨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주노동자들도 고용허가제 자체가 고통의 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시 한번 고용허가제가 회피할 수 없는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지금, 이제는 미봉책이 아니라 근본 대안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 고용허가제 완전 철폐, 사업장 이동의 자유 쟁취, 이주노동자 포함한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 적용을 소리 높여 외치자. 9월 21일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이주노동자대회에 참여자를 조직하자. 현장에서부터 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고, 이주노동자들이 권리의 주체로 일어설 수 있도록 있는 힘껏 지원과 연대를 조직하자. 계급적 연대, 사회적 연대의 깃발 아래 고용허가제 철폐 투쟁을 확산시키자. "강제노동 철폐! 사업장 이동의 자유 보장!" - 2024년 전국이주노동자대회 사진: 이주노조 -
[기고] 푸르던 한여름, 이수기업 해고자 순회투쟁과 연대의 기록사실 연대자의 입장에서 순회투쟁 참여를 꽤 오래 고민했었다. 나는 이 투쟁의 직접적인 당사자도 아니었고, 현대자동차 노동자도, 해고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연대하는 명예조합원(말벌 동지)으로서 함께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며 되돌아보니 함께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뿐이다.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5일간의 순회투쟁은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내 나이 20살, 누군가 내 인생에서 청춘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순회투쟁 5일간의 이야기들을 하며 그 순간들이 내 인생 20년 푸르던 봄의 한 장면이라고 말할 것이다. 7월 14일 순회투쟁 1일 차 : 정문 앞을 채운 강고한 연대투쟁 우리는 울산에서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으로 향했다. 마음속엔 설렘과 떨림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걱정이 더 컸다. 아무리 같은 사업장이라고 해도 지역이 다르면 거리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혹시 우리끼리 외롭게 싸우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전주공장 앞에 도착하여 선전전을 준비하자 나의 불안은 모두 사라졌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정문 앞을 가득 메운 지역 대오. 수많은 연대 동지가 서 있는 모습에 순간 벅차올랐다. 피켓을 들고, 현수막을 들고 강고하게 구호를 외치는 모두의 목소리에 순간 눈물이 핑 돌았었다. 현대차 전주공장 출근선전전 내 눈앞에 보인 장면은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 동지들이, 그리고 연대 동지인 내가 그토록 바라던 꿈같은 한 장면이었다. 울산공장에서는 보거나 느끼지 못했던, 늘 마음속으로 그려왔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니, 마치 기적이 일어난 장면 같았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원청이든 하청이든 그 모든 것들을 떠나 한마음으로 뭉친 우리들이었다. 고용형태의 경계와 지역의 차이 등 모든 것을 뛰어넘은 우리들의 강한 연대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푸르던 7월의 여름. 내 눈앞의 장면은 마치 여름밤의 꿈 같았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전주공장 앞에서 본 동지들의 눈빛을 하나하나 가슴속에 새겼다. 현대차 전주공장 출근선전전 순회투쟁 2일 차 : 탄압에도 꺾이지 않는 연대의 함성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이 같은 사업장이지만 지역이 다른 이야기라면, 순회투쟁 2일 차에 찾은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을 빼놓을 수 없다. 아산공장에 도착하여 투쟁가를 틀고, 선전전을 준비하는데 사측은 데시벨 측정기를 가지고 나오고, 아산서 정보과 경찰은 불법 촬영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이런 상황들이 연대하는 입장에서는 꽤 긴장되는 순간이었지만, 이 상황이 나의 강고한 연대투쟁을 위축시킬 수는 없었다. 현대차 아산공장 출근선전전 사실 이날은 현대자동차지부가 아산공장 교섭과 출정식이 있던 날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현대자동차지부 활동가와 조합원은 참여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아산공장 사내하청지회 박정식 열사 추모제에 참여했던 현대자동차 열사회 이도한 동지가 함께해서 너무나 반가웠다. 이날 출근 선전전에는 우리가 외롭지 않도록 아산공장 사내하청지회 지회장과 동지들이 함께 연대해 주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맙고 따뜻한지...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에, 지역을 넘어 마음을 모아주는 이 연대가 너무 감사했다. 그날 아산공장 앞에서 연대의 힘을 다시금 크게 느꼈다. 현대차 아산공장 출근선전전 순회투쟁 3일 차 : 그럼에도 우리는 결코 멈출 수 없다. 순회투쟁 3일 차 아침, 아산공장 출근 선전전을 진행했다. 선전전에는 아산공장 사내하청지회 동지들과 정규직 현장조직 새길 동지들이 함께해 주었다. 아산공장 동지들과 선전전을 마친 뒤 우리는 서울특별시교육청 앞 천막농성장에서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지혜복 동지를 만나러 출발했다. 전주와 아산에서 받은 따뜻한 마음을 이번에는 우리가 돌려줄 차례라는 생각으로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서울시교육청 점심시간에 지혜복 동지의 선전전에 함께한 후 간담회를 했는데, 지혜복 동지가 얼마나 외롭고 고된 싸움을 이어오고 있는지, 그 투쟁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직접 들으며 다시금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이 떠올랐다. 우리가 옳지만, 세상은 왜 등을 돌리는 걸까. 사측도, 서울특별시교육청도, 그 외면이 너무나도 화났다. 속에서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서울시교육청 앞. A학교 성폭력 사안 축소·은폐 규탄한다! 지혜복 교사 부당해임 철회하라! 간담회를 마치고 곧바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민주노총 총파업 대회로 이동했는데, 마침 하늘도 내 마음을 아는 것인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하지만 비에도 우리는 멈출 수 없었다. 차에서 피켓을 내려 꺼내 들고 빗속에서도 꿋꿋이 서서 싸움을 이어갔다. 우리는 승리 없이 후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민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 민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를 마친 뒤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으로 향했다. 이름 그대로, 꿀잠은 따뜻하고 포근한 공간이었다. 모두의 화장실을 시작으로 동지들의 따뜻한 환영, 그리고 내가 나로 있어도 여기서만큼은 괜찮다는 기분이 드는 곳. 이곳을 지나간 모든 동지가 참 행복했을 것 같았고, 나 역시 꿀잠에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느꼈다. 순회투쟁 4일 차 : 비 속에서 피어난 연대의 꽃 꿀잠에서 한여름 밤의 편안한 잠을 청한 뒤, 순회투쟁 4일 차 아침이 밝았다. 꿀잠에서 동지들과 함께 서울고용노동청 기자회견장으로 향하려던 순간, 창밖으로 억수같이 내리는 비가 보였다. 전날 순회투쟁 중에 웹자보를 만들어 연대 동지들에게 급히 연락하며 미안한 마음으로 기자회견이 있다는 걸 알렸지만, 이런 날씨에 정말 누가 와줄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서울고용노동청 앞에 도착하자, 믿기지 않게도 동지들이 그 비를 뚫고 와 있었다. 흐린 하늘 아래 피어난 꽃들, 꽃들이 피어나 연대해 준 장면을 평생 고맙게 생각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서울고용노동청 기자회견 기자회견을 마친 뒤 동지들이 노동부 장관 후보(현 노동부 장관)에게 면담 요청서를 제출하고 곧바로 국정기획위원회로 이동했다.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와 세종호텔 공대위 동지가 국정기획위원회 담당자와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바리케이드 바깥에 남은 동지들이 이수기업 피켓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피어난 연대의 꽃들이 이곳에도 또다시 싹을 틔운 것이다. 국정기획위원회 요구안 전달 국정기획위원회에 요구안 전달을 마친 우리는 다시 서울고용노동청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투쟁 중인 금속노조 주얼리분회와 서비스연맹 이랜드노동조합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주얼리분회 동지들과 대화를 나누며, 이곳에도 나처럼 명예조합원(말벌 동지)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했다. 이곳에도 또 다른 청춘의 한순간이 피어나고 있다는 게 감동적이었다. 금속노조 주얼리분회 연대방문 간담회에서 들은 이야기들은,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왔다. 금세공 일을 28년 했지만, 이력서에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고용보험에 가입한 단 5년의 경력만 남았다는 말. 23년의 세월이 유령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 박태성 동지의 “청춘을 바쳐 20년을 일했지만, 헌신짝처럼 버려졌다”라는 외침이 다시 귀를 스쳤기 때문이다. 유령이 된 23년의 경력, 헌신 끝에 버려진 20년의 청춘. 그 만남 앞에서 나는 노동운동의 의미를, 연대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간담회를 마친 우리는 세종호텔지부 농성장이 있는 명동 세종호텔로 향했다.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지하차도 위 철골 구조물에 서 있는 세종호텔지부 고진수 지부장의 모습이었다. 20년 경력의 요리사인 그가 손에 든 것은 요리도구가 아닌 확성기였고, 그가 서 있는 곳은 주방이 아닌 지하차도 위 철골 구조물이었다. 고공 위에 내몰린 노동자, 모두의 내일을 위해 잠시 땅과 이별한 동지를 보며 나는 다시금 연대하여 싸울 힘을 얻고 투쟁의 의미를 다시 되새겼다. 세종호텔지부 연대방문 그날 마지막 일정은 고 김충현 노동자의 49재 추모제였는데, 비정규직 구조 속에서 끝내 죽음으로 내몰린 노동자를 생각하며 “산 자여 투쟁하라”라는 외침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였다. 더 이상 어떤 노동자도 죽지 않는 세상을 반드시 우리가, 우리들이, 우리 모두가 만들어야 한다는 다짐으로 그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고 김충현 노동자 49재 추모제 순회투쟁 5일 차 : 승리 없이 후퇴 없다 우리는 서울에서 남양으로 이동해 순회투쟁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마침내 순회투쟁 5일차, 마지막 날 아침을 맞았다. 남양연구소로 향하는 길, 기쁘지만 마음속에는 작은 걱정이 있었다. 과연 연대 동지들이 오늘도 함께해 주실까? 우리만 외롭게 선전전을 진행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것은 사측 관리자와 화성시 정보과 경찰의 격렬하고 기분 나쁜 환영이었다. 사측 관리자들은 집회 신고된 구역이 현대자동차 사유지라나 뭐라나 선전전 할 수 없으니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쳤다. 사측과 실랑이를 하는데 정보과 경찰이 끼어들면서 집회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라나 뭐라나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참 어이없는 순간이었지만, 우리는 그 어떤 걸림돌이 있더라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비정규직지회 동지들과 힘차게 선전전을 이어갔다. 같은 사업장이지만, 다른 지역에서 묵묵히 연대를 위해 나와준 동지들의 결의에 찬 눈빛은 다시금 나를 뛰게 하였다. 함께 구호를 외치던 남양연구소 앞의 공기, 그 시간의 온도,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가 쉽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가슴에 남았다.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출근선전전 선전전을 마치고 남양연구소 비정규직지회 동지들과 근처 편의점에서 간담회를 진행한 후, 우리는 강고한 연대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나눈 뒤 구미로 향했다. 구미에 도착하자마자 맞이한 건 살을 태우는 듯한 땡볕이었다. 숨이 막히는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바로, 불탄 공장 위에서 550일 넘게 고공농성을 이어온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의 수석부지회장 박정혜 동지였다. 박정혜 동지를 생각하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사무실에 도착하니, 동지들이 따뜻하고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곳 동지들도 강고한 연대의 힘을 사랑하는구나’, 그리고 ‘우리의 발걸음이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구나’ 느낄 수 있었다. 짧게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박정혜 동지를 만나러 고공농성장으로 이동하였다. 우리가 미리 준비해 온 “니토는 교섭에 나와라!”라는 슬로건을 머리 위로 높이 들자, 그 모습을 본 박정혜 동지가 불탄 공장 위에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는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의 연대, 우리의 연대가 누군가에게 다시 살아갈, 투쟁할, 내일로 나아갈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옵티칼하이테크지회 연대방문 나는 박정혜 동지를 향해 목청껏 외쳤다. “승리 없이 후퇴 없다! 고공에서 땅으로! 비정규직 철폐 투쟁! 결사 투쟁!” 그 외침에 박정혜 동지도 불탄 공장 위에서 주먹을 쥐고 함께 구호를 외쳤다.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담자, 나는 다시금 이 땅의 모든 노동자, 그리고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들과 연대할 힘이 피어올랐다. 순회투쟁의 마지막 종착역인 울산으로 향하는 길, 전주부터 아산, 서울, 남양, 구미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 위에 피어난 연대의 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래, 연대란 이런 것이구나. 승리 없이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우리기에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다시금 뛰게 만드는구나. 울산에 도착해 동지들과 서로의 노고와 투쟁을 격려하고 손을 흔들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설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순회투쟁 5일간의 기억들이 마치 한여름 밤의 꿈을 꾼 것 같다고. 내 인생 20년 가장 푸르던 여름, 가장 뜨겁고 가장 진심이었던 청춘의 한 장면이 이렇게 막을 내리고, 내일부터 새로운 막이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승리 없이 후퇴 없다! 고용승계 쟁취하자!” 옵티칼하이테크지회 연대방문 -
[주간 여성뉴스 브리핑] 이주인권단체, “민생회복 소비쿠폰, 모든 이주민에게 차별 없이 지급해야”1. 이주인권단체, “민생회복 소비쿠폰, 모든 이주민에게 차별 없이 지급해야” 지난 21일부터 정부가 민생회복 소비쿠폰을 1인당 15만 원(차상위계층·한부모가족 30만 원·기초생활수급자 40만 원)씩 지급했다. 하지만 이주민은 원칙적으로 지급 대상에서 빠졌다. 이번에 정부는 소비쿠폰 지급 대상 이주민을 결혼이주민, 영주권자, 난민인정자로 한정했다. 그로 인해 전국의 이주노동자, 외국 국적 동포, 유학생, 인도적 체류자 등 170만 명에 달하는 대다수 이주민은 소비쿠폰 정책에서 배제된 것이다. 이에 전국 140여 개 이주인권단체와 41명의 이주민은 지난 23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소비쿠폰 차별 진정’을 제기했다. 이들 단체는 이날 인권위 앞 기자회견을 통해 “이주민은 지역을 지키는 구성원이며, 세금과 보험료도 꼬박꼬박 낸다. 이번에도 배제된 건 명백한 차별”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이러한 정부 정책은 헌법이 규정한 인간의 존엄, 행복추구권, 평등의 권리를 침해하며 국제인권규범인 유엔의 자유권·사회권 규약, 인종차별철폐협약에도 어긋난다고도 강조했다. 무엇보다 이는 이주민을 동료 시민이 아닌 노동인력으로만 취급하는 차별적인 행태다. 정부는 이주민에 대한 차별 정책을 지금 당장 멈춰야 한다. <참조 기사> https://www.newsis.com/view/NISX20250723_0003263161 2. 직장인 10명 중 7명 … “새 정부, 차별금지법, 비동의강간죄 추진 필요해” 직장인 10명 중 7명 이상이 새 정부가 비동의강간죄 입법과 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지난 27일,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72.2%가 비동의강간죄 도입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응답자의 70.7%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번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 직장갑질119는 “이재명 대통령은 비동의강간죄 도입과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직시하고 이 과제에 대해 명확한 의지와 철학을 가진 인물을 여성가족부(이하 여가부) 장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앞서 강선우 전 여가부 장관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내세웠고, 비동의강간죄 개정에 대해선 “입증 책임의 전환 우려”를 언급하며 유보적인 입장을 고수한 바 있다. <참조 기사>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10157.html 3. 어린이집 원장의 보육교사 노동자 CCTV 근태 감시, 대법원 위법 판결 최근 서울 송파구 한 어린이집 원장이 CCTV로 보육교사 노동자가 업무 중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이를 운영법인에 전달해 징계 절차의 자료로 활용하려 했다. 이에 대해 법원은 원장이 개인정보보호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사용자의 법 위반 행위를 넘어 직장 내 노동자 통제와 감시가 얼마나 만연한지를 보여준다. 노동자가 업무 중 개인의 모든 행위를 관리자나 사용자로부터 감시당하고 노동자로서 권리를 빼앗긴 채 불안에 시달리게 하는 것은 심각한 노동권 침해다. 특히 보육기관 교육현장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가뜩이나 열악한 보육 노동자들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사업장에서 노동권과 인권을 침해당하는지를 보여준다. 노동자가 휴대전화를 본 것이 곧바로 징계받아 마땅한 일이 되는 일터가 보육현장 외에 또 어디가 있을까? 자신의 노동 일거수일투족을 CCTV로, 심지어는 네트워크 카메라(학부모의 실시간 시청이 가능하다)로 감시당하는 노동자가 대한민국에 보육교사 외에 또 누가 있을까? 아기를 낳아도 믿고 맡길 데가 없는 것이 저출생의 한 원인이라면, 보육 최일선에서 분투하는 보육교사의 인권과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사회는 고강도 장시간 노동, 저임금, 고용불안, 노동통제, 감시사찰, 노조할 권리 등 노동권 보장 취약, 노동법 사각지대, 빈약한 공공성 등에 대해 아직 제대로 답한 것이 하나도 없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보육 노동자의 목소리를 보장하고 강화하는 개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참조 기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54776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338994 4. 7월 30일, 세계 인신매매 반대의 날 매년 7월 30일은 세계 인신매매 반대의 날이다. 지난 2013년 유엔(UN)은 인신매매를 근절하고 피해자 권익 증진을 위해 이날을 세계 인신매매 반대의 날로 지정했다. 여성가족부(이하 여가부)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하 진흥원)은 2025년 세계 인신매매 반대의 날’을 맞아 ‘인신매매 없는 세상, 모두의 연대로 한걸음 가까이’를 주제로 다양한 홍보 활동에 나선다고 24일 밝혔다. 여가부와 진흥원은 먼저 인신매매 피해 사례를 담은 인신매매 방지 홍보영상 2편을 유튜브와 공항 전광판 등에 내보내기로 했다. 또한 관계 부처 누리집 및 누리소통망(SNS) 등에는 인신매매 근절을 위한 짧은 영상과 카드뉴스, 웹포스터 등 다양한 콘텐츠를 게시할 예정이다. 하지만 인신매매를 근절하려면 홍보 활동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실효성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는 성매매를 비롯한 인신매매가 이뤄지고 있다. 특히 많은 여성 이주민들이 인신매매 위협에 안전하지 못한 상황이다. 2023년부터는 인신매매 규정이 확대되어 노동력 착취도 대상에 포함됐다. 노동력 착취까지 고려하면 이주민들의 인신매매 피해는 더 증가한다. 지난 2월 한국으로 일을 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온 A씨는 7월 23일, 국내 처음으로 조선업에서 노동력 착취로 인신매매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A씨와 동료들은 한국에 가면 용접기술도 배우고 조선소에서 일하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한국을 찾았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아무 교육과 돈도 받지 못한 채 노동력 착취를 당했고 여가부 산하 중앙인신매매 등 피해자 권익 보호기관으로부터 인신매매 피해자로 공식 인정됐다. <참조 기사>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5405 https://www.newsgn.com/news/articleView.html?idxno=495194 5. 인도 카르나타카주 보육 노동자들, 얼굴 인식 기술 반대 인도 카르나타카주 앙간와디(보육 프로그램) 노동자들이 연방 정부가 통합아동개발서비스(ICDS, Integrated Child Development Services) 프로그램에 얼굴 인식 기술(FRT, facial recognition technology)을 도입하려는 계획에 반대하고 나섰다. 7월 22일, 앙간와디노동조합 등이 공동 주최한 공개 협의회에서 노동자들은 FRT가 "수혜자들의 사생활과 헌법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라며 강한 우려를 표했다. 또한, 약 20만 명의 수혜자가 이로 인해 프로그램에서 배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장 노동자들은 FRT 도입으로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와 실질적인 불이익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올란드 출신 라자바티 파틸은 사진 증빙을 위한 인터넷과 소프트웨어 오류로 인해 수혜자 등록이 '무효' 처리되는 사례를 지적했다. 우두피 지역의 수실라는 아다르 번호(Aadhaar Number, 개인식별번호), OTP(One Time Password, 1회용 비밀번호), FRT 사진 요구로 인해 수혜자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협조를 꺼린다고 밝혔다. 전문가들도 FRT 도입 효과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경제학자 디파 신하는 연방 정부가 FRT로 정보 누락을 방지하고 노동자의 업무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효과도 입증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오히려 매년 정부가 ICDS 예산을 삭감해 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인도의 앙간와디는 한국의 ‘지역아동센터 + 보건소 + 산모 건강센터’를 결합한 형태에 가까운 다기능 복지 프로그램의 거점이다. 인도 정부의 대표적인 저소득층 아동과 여성 대상 복지 프로그램이며, 보건·영양·교육을 통합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회안전망 역할을 한다. <참조 기사> https://www.thehindu.com/news/national/karnataka/anganwadi-workers-oppose-facial-recognition-tech-in-icds-programmes/article69842342.ece 6. 미국 조지아, 트랜스젠더 아동 서적 전시로 해고된 사서 복직 요구 최근 미국 조지아 남부의 작은 마을 피어스카운티에서 수백 명의 주민이 공공도서관 앞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트랜스젠더 관련 도서 1권을 포함해 도서관 행사를 진행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사서 관리자 라보니아 무어의 해고를 규탄하고 복직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라보니아 무어는 부당해고를 다투며 투쟁하고 있다. 무어는 여름 독서 프로그램 ‘색상에 색을 입하다(Color Our World)’는 행사에 한 어린이가 추천한 도서 《에이단이 형제가 되었을 때(When Aidan Became a Brother)》를 포함했다. 이 책은 상을 받은 적도 있는 트랜스젠더 아동의 성정체성 수용과 가족 사랑을 그린 책이다. 그런데 ‘신앙과 가족을 위한 연합(Alliance for Faith and Family)’이라는 극우기독교 단체가 “부적절한 성 이데올로기를 퍼뜨린다”라고 주장하며 조직적 공격을 가한 끝에 6월 18일, 그가 해고된 것이다. 무어는 “주제가 문제가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무지개 없이 어떻게 세상을 채색할 건가요?”라고 말했다. 지역 주민, 성소수자 커뮤니티 회원, 노동자, 학생, 학부모, 종교인 등 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책을 읽을 권리를 지켜라”, “무어는 우리 도서관의 영웅”, “정치가 아이들을 검열한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교사 노동자 말리사 베넷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단지 무어의 복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도서관이 누구의 것인지, 지역사회가 정치 압력에 굴복할 것인지, 우리가 어떤 가치를 지킬 것인지를 묻는 시간이다.” 학생들과 학부모들도 발언에 나섰다. 한 중학생은 무어를 “책을 통해 세상을 열어준 사람”이라 불렀고, 한 학부모는 “우리 아이가 자신과 닮은 주인공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게 잘못인가?”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집회를 기점으로 부당해고 비판 목소리가 커져 복직 요구 청원에 이미 수천 명의 서명이 몰렸고 여러 단체들의 복직 촉구 성명이 이어지고 있다. 관련 기관은 7월 말 특별회의를 열고 그의 복직 여부를 공식 논의할 계획이다.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성소수자 도서 검열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대하고 있다. <참조 기사> https://glaad.org/georgia-community-rallies-to-reinstate-celebrated-librarian-fired-over-inclusive-book-display/ https://georgiarecorder.com/2025/07/02/south-georgia-librarian-is-fired-over-lgbtq-childrens-book-included-in-summer-reading-display/ 7. 스페인 레온, 여성전용주차장 두고 논란 스페인의 한 도시에서 여성전용주차 구역을 둘러싼 논란이 퍼지고 있다. 23일(현지시간) 프랑스 일간 <르파리지앵>에 따르면 스페인 북서부 레온시는 최근 도시 여러 지역에 취약 계층 보호 및 안전 확보를 명분으로 여성전용주차 공간을 지정했다. 시가 마련한 여성전용주차 공간에는 ‘치마 입은 여성’이 ‘분홍색’으로 그려져 있다. 호세 안토니오 디에스 시장은 “여성이 더 넓고, 조명이 밝고, 인도와 가까운 위치에 주차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잠재적 폭행 위험을 피하자는 취지”라며 “젠더 관점에서 접근한 정책”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미 유럽 다른 도시들에서도 시행 중”이라고 시장은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 정책은 성차별 논란으로 이어졌다. 여성을 치마 입은 모습으로 분홍색을 입혀 표현한 것도 지적되고 있다. 또한 스페인 뉴스 프로그램 쿠아트로에 출연한 여성들은 “성차별적인 조치”라거나 “여성이 남성보다 운전 실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우리에게 별도 주차 공간이 필요하다는 건 완전히 남성 중심적 사고”라고 비판했다. 남성 사이에서도 시의 조치가 차별적이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한 남성 시민은 “스페인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성별에 따른 차별은 어떤 형태로도 허용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참조 기사> https://www.seoul.co.kr/news/international/2025/07/24/20250724500268?wlog_tag3=naver [여성 뉴스 브리핑 X] http://x.com/Wo_newsbriefing -
[기고] <태안화력 故 김충현 노동자 사망사고, 노동자 기후정의운동의 시각으로 바라보기> 간담회 후기지난 7월 4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과 공공재생에너지연대의 공동주최로 열린 [태안화력 故 김충현 노동자 사망사고, 노동자 기후정의운동의 시각으로 바라보기 : 공공재생에너지·정의로운 전환 투쟁으로 나아가는 간담회]에 참석했다. 간담회는 발전노조 서부본부장 이재백 동지와 기후정의동맹 한재각 동지의 발제, 이후 토론 시간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이재백 동지의 발제는 고 김충현 동지 사망 사고에 대한 보고로 시작하여, 발전 사업장의 하청 및 재하청 등 후진적 고용구조, 발전산업 전환기에 발생하고 있는 불안정 고용 문제 등을 짚고, 공공 주도의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외친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졌다. 수십 년 경력의 숙련 노동자조차 손쓸 틈 없이 희생되고 마는 열악한 근무 환경과, 이 같은 환경을 낳은 자본의 탐욕에 새삼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제자가 지적하는바, 발전산업 분야에서 이렇게 불량한 일자리를 줄이고, 더 나아가 화력 발전소의 점진적 폐쇄에 따라 발생할 해고 노동자들을 빠짐없이 끌어안는 방법은 공기업 주도의 재생 에너지 발전소 건설 확대뿐이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은 더디기만 하다. 이재백 동지의 발제에서 특히 눈여겨볼 내용은 태안화력 노동자 동지들의 공공 재생에너지 전환 투쟁 경과에 관한 부분이었다. 화력발전소 원·하청 노동조합 동지들은 ‘내가 일하는 산업은 계속 존속해야 한다’는 이기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기후위기에 대해 공부해 가면서, 지역 민중과 손잡고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요구해 왔다. 이들의 투쟁은 에너지 전환이 ‘정의롭기’ 위해 우리가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제시하며, 계급투쟁과 기후정의 운동이 하나라는 점을 일깨운다. 발전 노동자들의 8월과 11월 파업에 결합해 힘을 보태고, 9월 기후정의행진에서도 가능한 한 폭넓은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는 과제가 다시금 떠올랐다. 이어진 공공재생에너지연대 한재각 동지의 발제는 통계자료를 토대로 현재 국내 재생에너지 발전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 해상풍력 분야에서 민간이 투자하는 경우와 공기업이 주도하는 경우를 비교하여 공공재생에너지법 입법의 필요성을 논증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마련해야 할 제도까지 언급하여 총체적 관점을 갖추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공공의 것이어야 할 바다와 바람은, 이미 갈래갈래 쪼개져 투기 대상으로 전락했는데 기존 입법은 그마저도 민간 사업자들의 이윤 추구 수단으로 고스란히 내주며 우리는 재생에너지 발전 사업 중 민간 비율 90%라는 위태로운 현실에 이르렀다. 전력 민영화가 먼 나라 이야기라는 것은 세간의 착각이다. 한재각 동지의 발제 가운데 민간과 공공의 해상 풍력 개발 비용을 비교한 자료가 인상적이었다. 발제는 민영화가 신속성과 효율성을 동반한다는 환상을 여러 방향에서 무너뜨렸는데, 민간 사업자들은 금리와 원자재 가격 변동에 따라 얼마든지 사업을 지연·철수하곤 한다는 점, 공기업은 본질상 민간 자본보다 훨씬 낮은 수익률을 추구하고 보다 낮은 금융비용을 지불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용자인 시민들에게 더 적은 비용이 전가된다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되었다. 이처럼 재생에너지를 체계적으로 확대하는 데 유리한 공적 투자를 늘리려면, 기후정의에 의거한 과세 및 그와 연계된 재원 관리 기관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7월 25일, 공공재생에너지 확대 기본법 제정을 위한 국회 입법청원이 마감 기한을 이틀 앞두고 성사되었다. 고무적인 성과지만, 공공운수노조 조합원이 20만 명이 넘는 상황에서 5만 서명을 얻는 데 한 달이 꼬박 걸렸다는 사실은 발전 노동자들의 투쟁과 그에 화답하는 연대투쟁이 한참 더 확대되어야 함을 뜻한다. 청원이 심사와 의결을 거쳐 정부에 의해 실행됨으로써 우리의 요구를 실제로 쟁취하기까지의 원동력 또한 계급투쟁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의 최우선 과업은, 8월과 11월 발전노동자 파업투쟁과 그 파급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광범위한 연대를 건설하는 것이다. 9월 기후정의행진 역시 그 가교가 되어야 한다. -
[말벌을 만나다#5] “입체안경을 쓰고 새롭게 세상을 보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요” - IT노동자 동지를 만나다12.3 내란 이후,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는 많은 '말벌동지'들을 만났다. 4월 4일 윤석열이 파면된 뒤에도 많은 ‘말벌동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때로 노동조합원이 되기도 하고, 때로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기도 하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왔을까? 그 전에 이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 이들은 왜 광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같은 대오에 섰을까? 다섯 번째 인터뷰이는 IT노동자 동지다. 주 100시간 노동을 견디며 살아온 IT하청노동자인 그는, 세종호텔 투쟁을 통해 처음으로 ‘입체안경을 쓴 듯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고 말한다. 지금은 일반노조 누구나지회 소속으로 연대 활동을 이어가는 IT노동자 동지. 7월 15일, 그가 어떻게 광장에 서게 되었는지, 어떤 고민과 실천을 이어가는지 들었다. 안녕하세요. 본인을 ‘IT노동자’로 표현하고 계신데요.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IT노동자’라는 닉네임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지은 건 아니고요. 1월에 허지희 동지가 만든 웹자보 보고 세종호텔 집회에 참여했어요. 집회에서 참석자 이름 확인하잖아요. 저는 온라인 활동을 안 해서 닉네임 같은 게 없어서요, 노동 현장이니까 노동자로 얘기해야겠다, 근데 IT쪽에서 일하니까 ‘IT노동자’로 해야겠다 해서 한 번 쓴 거에요. 근데 그때부터 계속 ‘IT노동자’로 기억을 해주셔서 쓰고 있습니다. 저는 강서구에 살고 있는 평범한 신혼부부이고요. 작년에 결혼했는데, 윤석열 내란 때문에 신혼생활을 6개월 만에 빼앗겼습니다. 전에 IT현장에서 근무할 때 1주 100시간씩 4주간 400시간까지 일해봤단 얘기를 하셨어요. 충격적인 얘기였는데요, IT노동 현장 얘기를 좀 들려주세요. 저는 SI(소프트웨어 통합) 업무를 해요. 그러니까 쇼핑몰이라든지, 키오스크라든지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서 소비자들에게 오픈할 때까지 개발하는 과정이에요. 제가 일하는 업체는 전체 규모로는 200명 정도 일하는 곳인데요, 정직원은 50명이고 프리랜서가 150명 정도입니다. 업력은 15년이니 업계에서는 중견기업 정도 되고요. 장시간 노동이 일상이라고 봐야 해요. 일하다 보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요. PM(프로젝트 매니저)이 바뀐다든지, 다른 업체가 펑크를 내 전체 일정이 밀린다든지 하는 일들이 터지는데, 원래는 그럴 때 인원을 추가 투입해야 하거든요. 프리랜서를 계약해 데려오든지 해야 되는데, 그냥 어차피 월급 받는 정직원들이 땜빵하라는 식이죠. 코로나 때는 장시간 노동이 더 심각했어요. 그 전에는 진짜 심각한 프로젝트도 많았는데, 그나마 약간 나아져서 이제는 주 7~80시간까지 가는 프로젝트는 적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예전에는 밥 먹듯이 넘겼는데. 그래도 주 60시간 정도는 일합니다. 그건 명백하게 노동법 위반인데 문제 제기하는 동료들이 없었나요? 아무래도 우리 업체가 하청이다 보니까, 항의를 해도 원청에 책임을 떠넘기죠. “네가 갑(원청)에게 직접 따져서 오더를 내리게 해라” 뭐 이런 식으로요. 원청 대기업과 하청업체가 프로젝트 계약서를 쓰면요, ‘프로젝트 종료 후 2년간 무상으로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런 조항까지 넣어요. 그래서 이미 끝난 프로젝트인데, 원청에서 애프터서비스 요구했다는 이유로 가서 일하는 경우도 있어요. 원청이 작업 일정 등을 통제하는 거니까 불법파견 소지도 있어 보이는데요. 하청업체 사장은 어쩌다 일 터지면 나와서 보는 수준이에요. 보통 6개월에 한 번이나 얼굴을 봤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너네 사장은 그래도 양심 있다”는 얘기를 해요. 우리 업체는 나름대로 팀이라도 꾸려서 프로젝트에 투입됐는데, 어떤 대기업은 하청을 주면서도 아예 원하청 노동자 자리 배치를 같이 하기도 하죠. 같이 일하지만 원하청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도 크다고 들었어요. 본인은 일하실 때 어떻게 대응하셨어요? 일단 너무 바빠서 대응도 힘들었어요. 사실 1주 100시간 일했을 때, 정말 안 되겠다 싶어 퇴사하려고 짐을 다 쌌어요. 그리고 다음날 회사에 출근했는데 너무 바쁜 거예요. 일하는 곳은 광화문이고, 본사는 강남이거든요? 사직서를 내려면 강남까지 가야 하니까, 바빠서 사직서 낼 시간을 못 만들고 흐지부지된 적이 있어요. 워낙 힘드니까 동료들하고 전우 의식 같은 것도 생기기도 했고요. 일하며 힘들어서 민주노총 IT연맹 홈페이지 찾아가 보곤 했어요. 근데 처음에 프리랜서 노조 가입을 받을지 결정이 안 됐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프리랜서가 노조에 가입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노조가 아니겠다 싶어서 가입을 안 했어요. IT업체는 정규직이 적고 프리랜서가 많은데 프리랜서까지 가입이 돼야 뭔가 협상이 가능하지, 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내란 터졌을 때 일반노조 누구나지회가 더 낫겠다 싶어서 거기로 가입했어요. 내란 사태가 터지고 활발하게 활동하셨는데요, 그때의 심경과 고민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세요. 저는 계엄령 발표되고 나라가 망하는 줄 알았어요. 12월 3일에 친구 돌잔치 가려고 돌 반지까지 준비해서 나가려다가 취소하고요, 이틀 후에 집회에 나갔어요. 그게 생애 최초의 집회 참여였습니다. 저는 박근혜 때도 집회 안 나갔었거든요. 근데 계엄령은 진짜 나라 망한다고 생각했어요. 과거 6~70년대 현대사 시간에나 배웠고, 다른 비민주적인 사회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죠. 막 국정원에 끌려가고 그럴 텐데, 못 살 것 같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12월부터 집회에 참여하면서 1월부터는 집회 자원봉사 활동도 하게 됐습니다. 남태령, 한강진, 민주노총 노숙투쟁 모두 참여했고요. 회사 다니면서 집회 다니고 그러다 보니 탄핵되고 나서 몸이 힘들더라고요. 회사에 퇴직하겠다고 하니까 일단 휴직을 쓰라고 해서 6월부터 9월 말까지 휴직을 쓰는 중입니다. 남태령 말씀을 하셔서 말인데요. 고백하자면 저는 그날 남태령 갈 생각을 아예 안 했거든요. 낮부터 집회를 했으니까요. 저녁에 명동에서 정리집회할 때 ‘남태령에서 농민들이 경찰에 막혀 있다’는 얘기가 방송차에서 나왔죠. 저는 그때 ‘아, 그렇구나’ 하면서 집에 갈 생각만 했거든요. 남태령까지 가실 때의 생각은 어떠셨어요? 그때 2차 계엄령을 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긴장감이 있었잖아요. 한덕수도 탄핵해야 하느냐로 시끄러웠고요. 내란 세력과의 파워게임이 되고 있는데, 남태령에서 농민들이 밀린다면 그럼 우리가 밀리는 거다, 저분들이 밀리면 모두 손해를 보는 거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때 집회에서 같이 나간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저 혼자 남태령까지 갔어요. 근데 오래 활동하신 분들은 그때 약간 여유가 있으시더라고요. (웃음) 저는 그때 정말 나라 망하는 줄 알았고요. 윤석열 퇴진 광장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자기주장을 펼쳤죠. 그중에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 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들은 누구였어요? 세종호텔 투쟁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광화문에서 5년 동안 일했는데 세종호텔에 노숙 농성투쟁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거든요. 마치 입체안경을 쓰고 새롭게 세상을 보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너무 무관심하고 몰랐구나, 하는 충격이요. 이렇게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구나, 내가 이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부채 의식이 생겼죠. 나는 그동안 내 살 길만 살았는데 이분들은 이런 사회운동을 했구나, 싶은. 아까 말씀하신 대로 일반노조 누구나지회도 가입하신 건데요. 실제로 노조 활동에 참여해 보니 어떠신가요? 사실 한국에서 노조활동은 사업장 단위로 단체교섭을 통해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게 중심 활동이거든요. 이를 위한 의결체계가 만들어지고요. 그런데 누구나지회 같은 형태에서는 의결체계를 만들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생각보다 활동이 쉽지는 않더라고요. 톡방에서 대화는 활발한데, 서로 얼굴을 익히기도 힘들고요. 두 달에 한번 오프라인 모임을 하고 교육을 하고요. 교육 내용은 민주노조의 형성 과정, 일반노조의 의미 같은 거요. 총회하면 오프라인으로 2~30명 정도? 줌으로 참여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사업계획으로 지역 연대활동을 얘기하는데, 개념은 좋지만 아직 좀 막연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동지는 ‘사회주의를향한전진’에서 진행 중인 사회주의 기초학습을 듣고 계시죠. 6강까지 한번도 빠짐없이 오프라인으로 개근하셨어요. 교육 들으면서 어떠셨어요? 일단 신선해요. 왜냐면 정규 교육에선 못 들었던 얘기니까요. 애니메이션을 통해 일본에는 전공투 같은 사회주의 운동이 있다고 알았지만, 한국에도 사회주의 운동이 있는지 잘 몰랐거든요. 지인들에게 ‘사회주의’란 얘기는 직접 하긴 좀 그런데, 같이 집회 자원봉사했던 사람들에게 ‘너 이거 들었으면 되게 좋았을 거야’라는 말을 많이 하고 다닙니다. 그리고 미학 공부할 때 변증법 이런 게 관심이 있어서, 1강 철학 교육이 제일 재밌었고요. 지금 이재명 정부 지지율이 60% 중반대로 찍더라고요. 아마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왔던 사람들 상당수도 이재명 정부를 지지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앞으로 이재명 정부의 앞날이 어떨까요? 좀 어려운 질문이긴 한데요. 자원봉사를 같이 했던 사람들 보면, 처음에는 기대를 많이 했다가 실망한 것 같더라고요. 이재명이 당선되면 공격적으로 내란 청산을 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광장에 나왔던 사람 중에 민주당원들도 있는데, 이들도 내란 청산이 빨리 안 되는 데 실망감 같은 게 있더라고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9월에 복직한 후에 회사 내에서 노조 활동은 가능할 것 같으신가요? 글쎄요, 회사에서 노조활동 하면 회사가 없어지지 않을까요? (웃음) 사장님이 고령이어서 맨날 ‘회사 문 닫아야 하는데’라고 얘기하시는 분인데 노조가 생기면 진짜 문 닫을 것 같아요. 그래도 동료들을 누구나지회에 가입시킨다든지 이런 건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처럼 노동자 투쟁 연대도 계속하고요. 윤석열 파면 때처럼 열심히는 못 해도, 일과 병행할 수 있을 만큼 투쟁 연대도 열심히 하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