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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기초학습#8] 기후위기와 민주적 계획경제

기사입력 2026.01.26 15:52 | 조회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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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Ⅰ. 기후위기와 자본주의


    Ⅱ. 기후정의운동,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1. ‘탈성장’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인가?
    2. 말름의 ‘기후 전시공산주의’


    Ⅲ. 민주적 계획경제란 무엇인가?
    1.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예견한 미래 사회
    2. 민주적 계획경제의 핵심: 민주적 노동자권력
    3. 현실이 증명하는 민주적 계획경제의 가능성


    Ⅳ. 민주적 계획경제로 나아가는 노동자투쟁
    1. 노동자 기후파업을 조직하자!
    2. 기간산업 국유화와 노동자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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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후위기와 자본주의

     

    기후 이변(異變)? 기후 상태(常態)!

     

    세계기상기구(WMO)가 발간한 ‘2024 전 지구 기후 현황 보고서’(2025. 3. 19)는 2024년 지구 평균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1.55도 상승했다고 밝혔다. 2023년 평균기온이 1.48도 상승하면서 지금껏 가장 뜨거운 해로 기록됐는데, 고작 1년 만에 기록이 갱신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2015년 유엔 기후변화협약 회의에서 채택된 조약, 즉 파리기후협정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 아래로 막고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상 기온 상승을 제한”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간 기후과학자들은 기온 상승 폭 2도가 기후위기의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고 경고해 왔다. 즉 평균기온이 2도 이상 오르면 그때는 지구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위기가 초래되므로, 파국을 막기 위해선 기온 상승 폭을 1.5도 이하로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1.5도란 기준은 10~20년에 걸친 평균기온을 의미하기 때문에 2024년 한 해 평균기온 기록만으로 1.5도 목표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할 순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평균기온 상승분만으로도 세계 곳곳에서 기후재난은 미래가 아니라 당면한 현실이 된 지 오래다. 올해 우리가 맞닥뜨린 기록적 폭염, ‘200년 만의 폭우’ 등도 앞으로 기후 ‘이변(異變)’이란 표현 자체가 현실에 걸맞지 않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이제 기후재난은 말 그대로 기후 ‘상태(常態)[1]’, ‘뉴 노멀(New Normal)’이 되었다.

     

     

    지구의 평균기온은 왜 상승하고 있는가?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산업화 이후 지구 기온 상승이 인간 활동과 무관하다는 헛소리가 횡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지구의 급격한 기온 상승이 인간의 탄소 배출 때문이란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 진실이다. IPCC[2]의 5차 보고서(2013년) 때만 하더라도 과학자들은 1950년대 이후의 온난화가 인간 활동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지만, 2021년 6차 보고서는 인간 활동이 지구 온난화를 일으킨 것이 “명백하다”고 단언한다.[3]

     

    이는 인간이 대기 중으로 얼마나 많은 이산화탄소를 내뿜는지만 살펴도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일이다. 매년 인간이 대기 중으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는 무력 400억 톤에 이른다. 인류는 하나뿐인 지구를 상대로 파국적 결과를 초래할 엄청난 기후 실험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파리기후협정의 1.5도 제한 목표가 실패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재 수준으로 기후위기 대응을 계속하면, 2100년까지의 지구 기온 상승 폭은 2.7도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한반도를 포함한 중위도 지역은 산업화 이전보다 4도 이상이 높아진다.) 연구자들은 기온 상승 폭이 2도만 돼도, 체온 조절 능력이 떨어지는 노령층은 육지의 1/3 지역에서 생존이 불가능할 것이라 본다.

     

     

    누구나 재앙을 예감하며, 실감한다. 인류에게 기후위기 대응은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모든 계급이 다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화석에너지 시대로 돌아가자는 자본가계급

     

    놀랍게도 이 체제의 운영권을 움켜쥔 자본가계급은 아예 기후위기 대응을 포기하는 모양새다. 내일 세상이 망한대도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신들만큼은 끝내 살아남으리라 확신하는 것일까? 폭염, 가뭄, 폭우, 거대산불 등 기후재난으로 인한 희생자는 어차피 노동자 민중일 뿐이라서? 지금 당장 특단의 조치에 돌입해도 한참 늦었다 할 판에 자본가계급은 심지어 화석연료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미친 소리까지 내놓는다. 자본주의 체제 위기의 시대, 즉 자본 이윤 생산의 불확실성에 마주친 시대에는 지구야 어떻게 되건 돈벌이부터 챙기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파리기후협약 탈퇴 망동이다. 2025년 1월 20일 미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트럼프는 곧바로 지지자들이 모인 ‘캐피털원 아레나’ 경기장을 찾아 파리기후협약 재탈퇴를 비롯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럼프는 취임 전부터 기후위기를 ‘사기’라고 주장하며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하고 화석연료 생산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왔는데 취임 첫날 이를 단행한 것이다.

     

    트럼프는 취임식 연설에서 인플레이션 위기 원인으로 에너지 가격 폭등과 정부의 과다 지출을 꼽으며,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석유와 가스 시추를 늘릴 것이라 공언했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양의 석유와 가스를 보유하고 있고, 이것을 사용”할 것이며, 나아가 “미국의 에너지를 전 세계 각국에 수출”하겠다는 것이다. 2021년 기준 미국은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14%를 차지하는 세계 2위의 온실가스 배출국이다. 1인당 탄소 배출량 역시 14.86톤을 기록해 호주에 이어 세계 2위다. 세계 평균 1인당 4.69톤의 세 배 수준이다. 그나마 바이든 행정부 시절에는 ‘그린뉴딜’ 운운하며 탄소배출을 줄인다는 모양새라도 취하더니 이제는 그런 겉치레도 집어치우는 것이다.

     

    트럼프의 화석에너지 생산 확대 선언을 미치광이 정치인의 돌발 행동쯤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전쟁과 위기의 시대, 안정적 이윤 생산이 불투명해진 시대에 각자도생으로 이윤 생산에 몰두하는 자본가계급 전체의 의식이 발현된 것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재생에너지 선도 국가로 주목받던 독일에서조차 화석에너지 사용을 늘리겠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올해 초 독일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조기 총선에서 승리하면 가스 화력발전소 50개를 짓겠다”고 공언해 왔다. 독일이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율을 80%까지 늘리겠다고 약속하고 탈원전 정책에도 나섰던 것을 생각하면 심각한 퇴보다.

     

    지난해 말 독일은 기후변화로 풍력 발전량이 25% 줄어드는 등 재생에너지 공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했던 탓에 화력발전 비용도 급격히 증대한 상황이었다. 독일의 전기요금은 OECD 국가 중 3위로, ㎿h(메가와트시)당 440.3달러(2023년 가정용 기준)에 이른다. 프랑스의 2배 수준이다. 이렇게 높은 전기요금이 독일 제조업의 위기를 부르고 있다는 게 화석에너지 사용 정책의 명분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자동차산업으로 대표되는 독일 제조업은 최근 심각한 침체를 겪고 있다. 독일의 GDP는 2023년 0.3% 감소한 데 이어 2024년에도 0.2% 감소했다. 지난해 말 폭스바겐은 독일 내 공장 3곳을 폐쇄하고 전체 노동자 임금 10%를 삭감하겠다고 발표했을 정도다.

     

    이윤 생산이 안정적이며 자본 축적이 정상적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는, 자본가들은 “모범시민이고, 아마도 동물학대방지협회 회원일지도 모르며, 게다가 성인(聖人)이라는 평판”[4]을 보유한 채 하나뿐인 지구를 살리기 위한 녹색 투사로 행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윤 생산이 장애에 부닥치는 순간이면 자본가들은 언제나 본연의 계급적 이해에 충실해진다. 기후재난이건 뭐건 다 배부른 소리고, 이윤 생산이 최우선이라는 것이다.

     

    윤석열의 친원전 정책과 이재명의 실용 정책

     

    일말의 부르주아적 합리성도 갖추지 못한 천둥벌거숭이 윤석열은 기후위기 대응에서도 헛짓거리로 일관했다. 윤석열은 평소 ‘원전 생태계 복원’을 자신의 업적으로 자부했다. 문재인 정부의 잘못된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고 친원전 정책을 집행함으로써 막대한 ‘국부’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내란 직전인 11월 7일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윤석열은 “24조 원 규모의 체코 원전 건설 사업 계약이 마무리되면, 원전 산업을 비롯한 우리 산업 전반에도 더 큰 활력이 불어넣어질 것”이란 자랑을 잊지 않았다. 또 국회의 탄핵안 가결 직전인 12월 12일 발표한 담화문에서도 윤석열은 이렇게 떠들었다. “망국적 국헌문란 세력이 이 나라를 지배한다면”, “원전산업, 반도체 산업을 비롯한 미래성장동력은 고사될 거고 중국산 태양광 시설들이 전국의 산림을 파괴할 것입니다.”

     

    위 발언들은 윤석열의 단세포적 사고 구조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윤석열에게 기후위기는 정책 결정에서 고려 기준조차 되지 못하며, 무엇이 한국 자본가들에게 더 큰 이윤을 창출하는지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특히 태양광은 중국 자본이 돈을 벌지만 원전은 한국 자본이 돈을 번다는 대목은, 윤석열식 한미일동맹 진영논리가 우스꽝스럽게 드러난 대목이다.

     

    윤석열이 내세운 친원전 정책은 핵발전 고유의 위험성을 간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원전 확대를 위해 기후위기 대응에 불가결한 재생에너지 발전량 목표를 현저하게 후퇴시켰다는 점에서 수천 번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본래 문재인 정부는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2030년 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을 30.2%까지 올리겠다고 밝혔다(물론 이 역시 턱없이 부족한 목표다). 이때 원전의 발전 비율은 23.9%로 전망됐다. 그러나 윤석열은 2023년 발표한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2030년 원자력발전 비율을 32.4%까지 올리며 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을 18.6%로 낮춰 잡았다. 원자력발전을 늘리기 위해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줄이자는 반동적 행태를 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재명 정부는 윤석열 정부와 다를 것인가? 당면한 기후재난에 대응하는 것보다 이윤 창출이 더 중요하다는 윤석열식 논리와 명확하게 선을 긋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민주당 정부가 ‘탈원전’을 표방하던 2017년까지만 하더라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고 원전 해체, 재생에너지 발전망 등이 자본의 새로운 먹거리로 등장하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 정세의 격변이 에너지 안보 위기를 부르자, 현재 각국에서 신규 원전 건설 붐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형편에서 신규 원전 건설 시장은 한국 자본의 상당한 이윤 창출 경로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자본가계급의 한 분파인 민주당 역시 ‘국익’으로 포장된 이윤 창출의 기회를 마다할 리 만무하다. 올해 2월, 한창 내란 정국이 진행되던 와중에 민주당이 대형 원전 2기를 신규 건설하는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안의 국회 보고 절차에 사실상 동의했던 사실이 이를 드러낸다.

     

    또 민주당은 대선 공약집에서 “탄소중립 산업전환”의 목표가 “경제와 환경의 조화로운 발전”이란 점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다. 즉 “탄소중립산업의 국산화 및 수출경쟁력 제고”와 “수출기업의 기후통상 대응역량 지원”에 정부 역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재명 정부 역시 자본의 이윤 창출이 정책 집행의 첫 번째 기준이다.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될 때는 ‘녹색 자본주의’를 표방할 수 있겠지만, 이윤 창출에 방해가 되면 ‘(자본을 위한) 실용주의’를 내걸고 반동적 기후정책으로 돌아가는 일을 되풀이할 게 뻔하다.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야 기후위기 대응이 가능하다

     

    결국 작금의 현실은 자본가계급이 오로지 이윤 창출에만 관심이 있을 뿐, 인류 공멸의 위기인 기후재난을 해결할 역량도, 의지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후재난이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삶의 터전과 생명까지 앗아 가지만 자본가계급은 놀랄 만큼 태연자약하다. 이윤 증식에 눈먼 자본의 이런 태도는 사실 역사에서 몇 번이고 반복됐던 일이다. 19세기 노동자들을 생존의 벼랑으로 떠밀었던 장시간 노동을 두고, 마르크스는 자본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고 묘사했다.

     

    “자본은 인류는 장차 퇴화할 것이라든가 인류는 결국 사멸해 버릴 것이라는 예상에 의해서는 그 실천적 활동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지구가 태양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예상에 의해서는 자본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 뒷일은 될 대로 되라지! 이것이 모든 자본가와 모든 자본주의국의 표어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사회에 의해 강요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에 대해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육체적‧정신적 퇴화, 조기사망, 과도노동의 고통 등에 관한 불평에 대해 자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쾌락(이윤)을 증가시켜 주는데 어째서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가라고.”[5]

     

    여기서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을 ‘기후위기’로, 노동자의 “육체적‧정신적 퇴화, 조기사망, 과도노동의 고통”을 ‘기후위기로 생명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상실할 수억 명 기후난민의 고통’으로 바꿔 읽어보자. 오늘날 자본의 태도와 완전히 똑같지 않은가. 기후위기로 노동자 민중이 죽어 나가건 말건, “우리의 쾌락(이윤)을 증가”시켜야 하니 화석연료도 더 많이 추출하고, 원전도 더 많이 짓겠다는 것이다.

     

    기후재난이 현실이 된 지금, 절박한 심정으로 모든 대안을 모색해 봐도 결국 우리가 다다를 결론은 하나뿐이다. 공동체의 안전보다 이윤 생산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놔두고서는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기후정의 운동은 명확하게 반(反)자본주의의 기치를 내건 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인 대안은 자본의 이윤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위하는 경제 체제, 즉 민주적 계획경제 체제를 건설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점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기후정의 운동에서 주목받는 두 가지 논의 흐름, 즉 ‘탈성장론’과 ‘기후 전시공산주의론’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회주의 운동의 대안인 민주적 계획경제가 어떤 모습일지, 그 구체적 상(象)을 그려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기후정의운동,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1. 탈성장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인가?

     

    현재 기후정의운동에서 ‘탈성장’은 의심할 여지 없는 지고지순(至高至純)의 가치처럼 보인다. 일례로 2022년 3월 ‘체제전환을 위한 기후정의포럼’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은 자본주의 체제의 분리해낼 수 없는 속성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무한히 이윤을 창출하고 축적하려는 철칙을 관철하기 위해 끝없이 경제 규모를 성장시켜 왔으며, 이에 필요한 값싼 노동과 자원을 투입하기 위해 노동자를, 여성을, 지구적 남반부의 민중들(이는 한 국가에서도 존재한다)을 그리고 비인간 동물을 포함한 지구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착취하고 파괴해왔다.” 이처럼 ‘탈성장’이란 기후위기 대응의 자본주의적 흐름(대표적으로 녹색성장, 그린뉴딜 등)과 단절하고, 기후운동을 ‘체제전환’을 위한 사회운동으로 재정립하기 위한 핵심 가치다.[6]

     

    이윤 생산 체제인 자본주의의 야만성과 무정부성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탈성장론은 물론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기후정의운동의 주요 담론으로 등장한 탈성장론을 통해 우리는 과연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 체제를 모색할 수 있을까? 이하에서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2021)』와 요르고스 칼리스 등이 쓴 『디그로쓰(Degrowth, 2021)』를 통해 탈성장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자.

     

    생산력 지상주의에서 탈성장 코뮤니즘으로 마르크스의 변화?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MEGA)의 편집위원이기도 한 사이토 고헤이는 탈성장론자 중 가장 왼쪽에 있다고 평가된다. 그는 마르크스가 젊은 날에는 ‘생산력 지상주의자’이면서 ‘유럽 중심주의자’였다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탈성장 코뮤니즘”이란 도달점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7] 구체적으로 사이토 고헤이는 마르크스가 러시아의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아도 러시아는 코뮤니즘을 실현할 가능성이 있다고, … 분명하게 인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주장을 위해 마르크스를 단편적으로 왜곡한 것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러시아가 ‘미르’라는 농촌공동체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뛰어넘어 공산주의 사회로 직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시종일관한 견해를 표명해 왔다. 즉 “러시아의 혁명이 서구의 노동자 혁명에 신호를 보내고 그리하여 양자가 서로를 보완”한다는 조건이 충족될 경우, “그때 러시아의 토지 소유는 공산주의적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8]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러시아가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생략하고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과업이 아니다. 1875년 엥겔스는 「러시아의 사회상태」란 글에서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러시아의) 공동체를 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개조로 이끄는 데 있어서 주도권은 그것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서구의 공업 프롤레타리아트들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그와 연계된 사회적으로 지휘되는 생산에 의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대체, 그것은 러시아 공동체를 동일한 단계로 고양시키는 데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9]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구래(舊來)의 농촌공동체가 빠른 속도로 분해되는 것에 주목한다. 1894년 쓰인 「러시아의 사회상태」 후기에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편지글을 인용한다. “(러시아가) 일단 자본주의 경제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면, 다른 세속적인 민족들과 완전히 똑같이 이 제도의 가차 없는 법칙을 견뎌 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

     

    핵심적으로 말해서, 탈성장론을 주창하는 사이토 고헤이나 요르고스 칼리스 모두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의 양면성을 변증법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보인다. 요르고스 칼리스는 자신의 책에서 생산력 발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더 명료하게 드러낸다. “이기적 경쟁을 기반 삼은 단종상품 경제의 세계화가, 인류 역사 전 기간에 사회적 진화의 동력이었던 무수한 형태의 상호부조 활동을 계속 갉아먹었던 것으로 보인다.”라는 대목이 그렇다. 그에게 “사회적 진화의 동력”은 자본주의 이전 공동체에 존재했던 자율적 “상호부조 활동”이며, 자본주의 산업화는 이를 훼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도 단순한 접근이다.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은 그 자체로 대립물의 통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에 철도를 부설한 목적은 대륙 진출을 통해 일본 독점자본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요로고스 칼리스의 표현처럼, 조선의 전통적 “상호부조 활동”을 뿌리째 뒤엎었던 침략 행위였던 것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철도 노선에서 비켜난 조선의 전통적 상업 중심지가 일거에 몰락했음을 떠올려 보라). 그러나 일단 부설된 철도는 동시에 진보적 역할도 수행했다. 1921년 레닌이 조선의 혁명가 이동휘에게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철도는 1919년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가능케 한 물질적 기반으로 작동한 것이다.[10]

     

    요컨대 자본주의 생산력에 대한 변증법적‧종합적 인식이 필요하다. 첫째,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무덤을 팔 혁명적 계급, 즉 노동자계급이 함께 성장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자본가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생산성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자본의 집중, 집적을 도모한다. 그런데 그 과정은 동시에 분산돼 있던 노동자들을 집결시키고, 노동자들에게 집단적 생산에 필수적인 사회적 규율을 확립시키며, 자본의 이윤 생산을 전면적으로 중단시킬 수 있는 혁명적 잠재력을 노동자들에게 부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둘째,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생산관계가 제아무리 공동체적 형식을 띠고 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을 거치지 않은 미발달된 생산력 수준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생산력의 발전 없이는 결여가 단지 궁핍만을 일반화할 뿐이고, 따라서 궁핍과 함께 필수품을 둘러싼 투쟁이 다시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11] 마르크스의 예견은 러시아혁명으로 탄생한 최초의 노동자 국가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실증된다. 트로츠키가 지적한 대로, 소련 “관료집단의 통치 기반은 소비재의 빈곤과 이에 따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었다.[12]

     

    즉각적인 탈성장이 필요한 부문 vs 급속한 성장이 필요한 부문

     

    자본주의 생산력이 변증법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현재 산업 분야 중에서 탈성장(나아가 즉각적 생산 폐지)이 시급한 부문과, 반대로 급속하고 비약적인 성장이 필요한 부문이 동시에 공존한다는 것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즉 우리는 ‘①자본의 이윤 획득을 위해 무분별하게 이뤄지는 낭비적‧재앙적 생산력 발전’과, ‘②생태환경을 보전하며 모든 종류의 차별과 억압을 일소하고 인간 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생산력 발전’을 구분해야 한다.

     

    먼저 탈성장(또는 생산 폐지)이 즉각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부문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이윤생산 체제가 얼마나 헛되이 노동력과 자원을 낭비하면서 무분별하게 탄소를 배출하고 있는지, 수백 가지 실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몇 년 전 가상화폐 투기 광풍이 불었을 때 가상화폐 채굴을 위해 사용됐던 전력 사용량은 상상을 초월했다. 2021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대안금융센터는 비트코인 채굴을 위한 전력소비량을 매년 149TWh(테라와트시)라고 추정했는데, 이는 말레이시아(147TWh), 스웨덴(131TWh), 아르헨티나(125TWh) 등 일개 국가의 연간 전력소비량을 앞지르는 규모다.

     

    또 판매돼야만 잉여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상품이 “목숨을 건 도약”을 위해 마다하지 않는 과대포장, 경쟁사로부터 고객을 빼앗아 오기 위해 개별 자본이 지출하는 천문학적인 마케팅 비용, 그밖에 금융업, 광고업 등의 존재 자체도 모두 자본주의적 낭비의 실례다. 공동체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의 이윤을 최우선시하는 체제에서는 이런 불필요한 자원 낭비가 필연적이다. 자본가들은 서로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산을 위한 생산, 축적을 위한 축적으로 맹목적으로 돌진하기 때문이다.

     

    “사용가치와 향락이 아니라 교환가치와 그 증식이 자본가의 추진력 동기가 된다. …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한 기업에 투하되는 자본을 끊임없이 증대시키고, 또 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갖가지 내재적 법칙을 개별 자본가들에게 외적인 강제법칙으로 강요한다. 경쟁은 자본가에게,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끊임없이 증대시키도록 강제하고, 그는 오로지 누진적인 축적을 통해서만 자본을 증대시킬 수 있다.

    … 축적할지어다, 축적할지어다! 이것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이다!”[13]

     

    이와 반대로 탈성장 대신 집중적인 자원 투입을 통해 시급히 생산력을 끌어올려야 하는 부문도 동시에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재생에너지 부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화석연료 연소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을 중지시키자면, 그리고 인류의 미래를 담보로 대책 없이 확대되는 원전 건설을 막자면, 재생에너지 부문의 기술 개발과 생산성 향상이 필수적이다. 재생에너지 생산의 간헐성을 극복하기 위한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전해 그린수소 생산기술 등이 그렇다.

     

    또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노동이지만, 자본주의가 노동자계급의 분할을 통해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열악한 노동이 있다. 예컨대 수천만 명이 배설하는 분뇨와 음식물쓰레기를 매일 처리하는 노동이 존재하며, 맨홀 작업‧고압송전탑 작업처럼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노동도 있다. 이 노동을 좀 더 손쉬운 것으로, 좀 더 안전하고 위생적인 노동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기계화, 로봇화 등의 노동생산성 발전이 필수적이다.

     

    인간을 고통스러운 질병, 감염병 등에서 해방하기 위한 보건의료기술의 발전도 시급하다. 전 세계에서 희귀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숫자는 약 3억 명에 이르며 이 중 50%가 어린이다. 희귀병, 난치병 환자를 위한 치료제 개발에 좀 더 많은 사회적 자원을 투여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대규모 기계제 생산이 아니라는 점에서 탈성장론자들이 주목하는 돌봄노동의 영역에서도 생산력 발전은 꼭 필요하다. 갓난아기의 천 기저귀를 종일 빨아대야 하는 돌봄노동과 친환경 생분해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하는 돌봄노동을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없다. 장바구니를 들고 식재료를 일일이 구입해 요리해야 하는 돌봄노동과 대공업적으로 생산된 밀키트를 전자렌지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되는 돌봄노동은 질적으로 다르다. 가사노동, 돌봄노동의 사회화로 성차별 폐지의 물질적 토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생산성 향상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저개발국가에서 기본적인 생활 인프라의 발전이 필요하다. 2020년 기준으로 세계 인구의 4분의 1인 20억 명은 안전한 식수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 인구의 절반인 36억 명은 안전한 위생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 인구 중 4억 9,400만 명이 여전히 노상 배변을 하고 있다. 여기서도 당연히 성장과 발전이 필요하다.

     

    물론 탈성장론자들도 이 점을 모르는 게 아니다. 여전히 성장이 필요한 부문이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드러난다. 우리는 ‘탈성장’이 필요한 부문과 ‘성장’이 필요한 부문을 어떻게 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탈성장이 필요한 부문에서 비효율적으로 낭비되는 노동과 자원을, 꼭 성장이 필요한 부문으로 급속히 전용(轉用)함으로써 생태환경을 보전하고 인간 해방의 토대를 앞당기는 일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탈성장론의 전략: 커먼(common, 공공재) 되찾기

     

    탈성장론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탈성장론들이 주목하는 것은 협동조합을 통한 ‘커먼(common, 공공재)’ 되찾기, 지역 공동체에서의 상호부조와 협력, 개인 소비 방식의 전환 등이다. 먼저 지역 협동조합을 통한 ‘커먼(common, 공공재)’의 공동체적 소유를 살펴보자. 물론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랜 강령이다. 그러나 탈성장론자들은 ‘커먼’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우회한 채 시민들의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협력을 통해 충분히 달성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구체적으로 사이토 고헤이는 “‘커먼’의 핵심은 사람들이 생산수단을 자율적‧수평적으로 공동 관리하는 것”이므로, 전력 부문을 국유화하는 대신 시민전력회사와 에너지협동조합으로 재생에너지를 보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력을 국유화해도 원자력발전처럼 닫힌 기술이 도입되면 여전히 안전성 등에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사이토 고헤이는 명시적으로 “‘커먼’을 관리할 때 반드시 국가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사이토 고헤이가 예로 든 전력산업을 두고 이야기해 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재생에너지는 간헐성이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재생에너지의 특성상 어느 지역에서는 전력이 넘쳐 생산되고, 어느 지역에서는 전력이 부족할 수 있다. 이때 전력 수요를 원만하게 보장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전력망을 촘촘히 연결해 전력의 효율적 생산, 저장, 교환을 도모하는 것이, 과연 일개 지역 협동조합 차원에서 실현 가능한 일일까? 어느 지역에서는 시민 협동조합이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전력을 생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옆 지역에서는 이윤에 눈먼 거대자본이 전력을 생산, 판매 중일 수 있다. 이 거대자본은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 더구나 거대자본은 자본가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을 것인데, 역사가 증명하듯이 자본가 국가권력은 자본의 이윤 생산을 보장하기 위해 폭력적 수단을 서슴지 않는 존재다.

     

    사실 자본의 이윤 보장을 위해 자본가 국가가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소규모로 운영되는 시민 전력회사가 대공업적 방식으로 운영되는 거대 전력회사와 비용, 효율성 경쟁 등에서 살아남을 거라 기대하기 어렵다. 사이토 고헤이와 요르고스 칼리스는 바르셀로나의 협동조합 운동과 사회연대경제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바르셀로나는 전 세계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가장 활성화된 곳이다. 그러나 사회연대경제가 바르셀로나 전체 일자리 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8%, 총생산액은 바르셀로나 전체 GDP의 7% 정도에 불과하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고작 저 정도에 그칠 뿐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대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은 대규모의 협업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 전제 아래에서만 노동의 분할과 결합이 조직될 수 있으며, 생산수단을 대량 집적에 의해 절약할 수 있고, 또 그 소재적 성격 때문에 공동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는 노동수단(예를 들어 기계 시스템 등)이 생겨날 수 있으며, 나아가 거대한 자연력을 생산에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산과정을 과학의 기술적 응용으로 전화시킬 수 있다.”[14]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상호부조를 통한 소규모 자급자족 경제 대신, 민주적 노동자권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오늘날의 고도로 발전된 생산력은 국가적 차원에서, 더 나아가서는 세계적 차원에서의 조정과 통제를 필요로 하며,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않고 그것을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탈성장론의 전략: 돌봄노동을 주목하는 이유

     

    사이토 고헤이나 요르고스 칼리스가 돌봄노동에 전략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도 앞서와 비슷한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사이토 고헤이가 돌봄노동을 중시하는 이유는 돌봄노동이 “기계화가 어려워서 인간이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동집약적산업”이며, 그 자체로 사용가치 생산을 중시하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또 “탈성장 코뮤니즘이 돌봄노동에 주목하는 것은 … 세계 각지에서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항하여 들고일어나는 이들이 바로 돌봄노동 종사자들” 때문이기도 하다. ‘돌봄 계급의 반역’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주 관리로 나아갈 가능성 역시 가진다고 한다.

     

    지나친 주장이다. 물론 노동자계급의 한 부문으로서 돌봄노동자가 조직되고, 투쟁하고,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넘어서는 대안 질서를 건설하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특히 돌봄노동이 주로 여성들에게 전가되는 현실에서, 돌봄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은 성별 분업을 십분 활용해 노동자계급을 분할하는 자본에 맞서는 투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유독 돌봄노동에만 전략적 지위를 부여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노동조건이 가장 열악하다는 존재 조건이, 그 자체로 가장 전투적인 실천이나 다른 노동자계급 부문을 선도할 역량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혁명적 시기가 아닌 일상적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또 자본주의 이윤 생산의 중심이 돌봄노동 부문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부의 시장화된 고가(高價) 돌봄서비스, 그리고 가정에서 무급으로 행해지는 돌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돌봄 ‘임금노동’의 보수는 국가나 지자체의 공적 재원으로 부담된다. 보육교사의 보육료, 요양보호사의 장기요양보험료 등이 그것이다. 이들의 노동조건은 자본가 정부가 얼마나 많은 재원을 지출하느냐로 결정되는데, 자본가 정부의 지출 규모는 자본주의 경제의 경기 순환이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지, 즉 민간 자본의 이윤율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돌봄노동에 주목하는 것일까? 요르고스 칼리스의 『디그로쓰(Degrowth)』에서 직접적인 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기본 소득을 제안한다. “탈성장과 보조를 맞추는 다른 UBI(Universal Basic Income, 보편 기본 소득) 정책들은 개인을 착취적 고용에서 해방하고, 환경 파괴 체제에서 벗어나는 대전환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물질적 환경의 조성을 촉구한다.” 자본주의가 등장시킨 임금 노동자계급을 보면서 마르크스주의자는 자본주의의 착취 질서를 뒤엎을 거대한 혁명적 주체를 발견한다. 반면 요르고스 칼리스는 임금 노동자계급을 보면서 “개인을 착취적 고용에서 해방”시킬 필요성을 느낀다. 요로고스 칼리스는 자기 주장을 일부 페미니스트들[15]로부터 차용했음을 드러낸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우리는 보편 돌봄 소득을 제안한다. 이것은 … 성별 분화가 심각한 무급 돌봄 활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 … 돌봄 소득론은 우리 자신, 우리의 친족과 다른 많은 이들을 돌보는 우리 모두의 역량과 활동에 우리 모두의 부를 투자하는 것으로 보편 소득을 이해하며, 이러한 이해를 통해 형평과 연대를 촉진하고자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상업적 영역에 포섭되지 않은, 시장 밑에 숨어 있는 가정 내 돌봄, 의료 돌봄, 식료품 제공 돌봄, 어린이와 병약자와 노인을 위한 돌봄 같은 돌봄노동을 포함하여, 노동과 관련이 있는 비판작업과 대중 조직화를 선도해왔다.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성인에게 풀타임 노동을 요구하며 노동을 쥐어짜는 경제 시스템 (바로 이것을 통해서 매일, 세대를 넘어 인간의 삶과 집단과 자연환경이 재생산되고 있다) 안에 기본 구조로서 존재하는, 여성들의 희생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증진시켜 왔다.”

     

    자본주의의 생산 영역(또는 이윤 생산의 중심부)에서 자본의 이윤 생산을 중단시킬 수 있는 임금 노동자들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재생산 영역(또는 생산관계의 외부)에서 무급으로 돌봄에 종사하는 여성들, 지역 커뮤니티에서 상호부조와 협력을 통해 자본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들이 변혁의 주체로 호명된다. 그래서 돌봄노동에 전략적 지위가 부여되는 것이다.

     

    마리아 미스가 1991년에 쓴 ‘소비자해방’이란 글에는 동일한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16] 이 글에서 마리아 미스는 “거대한 경제단위에서는 생태적 지속가능성, 자립, 여성과 어린이의 욕구를 우선시할 수 없다. 이것들은 훨씬 더 작고 분산된 단위를 필요로 한다. 그렇게 되면 생산과 소비가 조율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소비의 필요에 생산을 맞추는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산결정을 내리는 데 진정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소규모 경제단위는 공동체 내의 협동을 용이하게 하며, 자립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고, 상부상조와 호혜성 같은 덕목이 작용하도록 만들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마리아 미스가 주목하는 것은 일본의 세이까쯔클럽 소비자운동이다. 이것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이어주는 대안적 경로”를 통해 자본의 이윤 생산을 종식시키겠다는 운동이다.

     

    시종일관 자신의 ‘탈성장론’이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탈성장론’과는 다르다고 강조했던 사이토 고헤이도 이 대목에서는 별반 다를 게 없다. “억제 없는 소비에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자본의 전제’ 아래에서는 자기 억제의 자유를 선택하기가 어렵다. … 다만 반대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자기 억제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혁명적’ 행위라고.”

     

    문제는 이런 “혁명적 행위”가 소위 먹고살 만한 중간계급에서나 가능하다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더 많은 이윤을 목표로 한 것이지만) 대자본이 대공업적 방식으로 생산한 상품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인터넷 쇼핑몰 대신, 지역 협동조합에서 품앗이 협업으로 생산한 수공업품을 이용할 수 있는 계층은 극히 드물다. 우선 시간이 넘쳐나야 할 것이다. 이런 주장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 하루하루가 피곤한 대다수 노동자계급에 냉소만을 불러일으킬 게 뻔하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탈성장 담론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감축하려는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오용될 가능성도 높다. 예컨대 자본가정부가 전력 수요를 줄여 지구를 구하자면서 전기요금을 대폭 인상하자고 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탈성장론은 노동자계급 생활에 대한 긴축 요구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기후정의 운동에서 노동자계급의 광범위한 대중운동을 조직하자면, 노동자의 고용이나 생활조건에 대한 일체의 공격에 단호히 맞서면서 동시에 생태환경의 보호에 나서자고 주장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의 탈성장론 비판

     

    사회주의자들은 탈성장론자들과 달리, 근본적으로는 자본의 이윤 생산을 위한 것일지라도 자본주의가 사회적 집단노동의 조직을 통해 진정한 생산력 발전의 주‧객관적 토대를 형성하는 것을 주목한다. 자본가는 인류와 생태환경을 위한 진정한 생산력 발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가치증식의 광신자”일 뿐이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 개인의 완전하고 자유로운 발전을 근본원리로 하는 더욱 높은 사회형태의 유일한 현실적 기초가 될 수 있는 물적 생산조건”을 창조한다.[17]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체적 측면에서 노동자계급의 형성이다. 자본주의 생산과정 속에서 노동자계급은 사회적 역량을 축적해 나간다. 자본간 경쟁의 결과인 자본의 집중‧집적으로, 분산돼 있던 노동자들은 서로 연결되고, 공동의 규율을 확립하며, 자본의 이윤 생산을 전면적으로 중단시킬 수 있는 혁명적 잠재력을 보유하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바로 이 노동자계급이 일련의 계급투쟁 과정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민주적 노동자권력을 수립하면, 비로소 사회 모순의 진정한 해결이 가능해진다고 본다.

     

    요약해 보자. 탈성장론은 자본주의 생산 발전의 양면성, 즉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이 미래 사회로의 이행을 담보하기 위한 주‧객관적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 실천적 귀결은 임금 노동자계급이 갖는 전략적 중심성에서 이탈하는 것, 중앙집중화된 노동자 생산통제 대신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소비자운동을 비롯한 풀뿌리 상호부조 활동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들에겐 자본의 이윤 생산을 폭력적 수단으로 수호하는 자본가 국가권력을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결여돼 있다.

     

    반면 사회주의자는 궁극적으로는 계급독재 수단인 국가권력을 사멸시키고 공동체 내 진정한 상호부조와 협력을 실현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려 한다. 즉 노동자 국가를 수립한다는 목적의식 아래 일상적 실천을 조직한다. 레닌은 이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잠정적으로만 국가를 필요로 할 뿐”이며, “우리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피억압계급의 잠정적인 독재가 계급을 폐지하는 데 필수적이듯이, 착취자에 대항하여 국가권력의 도구와 원천들과 수단들을 잠정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8]

     

    2. 말름의 기후 전시공산주의

     

    안드레아스 말름의 주장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2021)를 쓴 안드레아스 말름은 현 국면을 비상사태, 일종의 ‘전시’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후 전시공산주의’ 혹은 ‘생태적 레닌주의’를 제기한다. 안드레아스 말름의 이 책은 코로나19 위기의 한복판에 출간되었다. 그는 기후위기와 코로나19 위기 모두 자본이 만든 것으로 본질이 같다고 주장한다. 기후위기가 자본의 이윤욕 때문인 것처럼, 코로나19 같은 인수공통 감염병도 자본이 이윤 증식을 위해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무차별하게 파괴해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해 국가권력이 사활적으로 대응한 것처럼, 기후위기라는 비상사태에도 국가적 동원 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안드레아스 말름의 주장이다.

     

    안드레아스 말름은 기후위기에 대응해 일종의 ‘전시 동원체제’를 구성하려면, △시간이 우리 편이라고 믿는 점진적 사민주의, △국가권력을 거부하는 아나키즘 모두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민주주의의 이상향이었던, 즉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스웨덴 사회 같은 평온한 날들은 “장기 비상사태 시국”에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또 아나키즘의 교리는 ‘아랍의 봄’과 코로나19를 통해 오류로 입증됐다. 이집트혁명은 저항 세력이 국가를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혁명에 실패했음을, 코로나19는 국가가 취약한 이들을 위한 상호부조 활동을 책임져야 함을 보여준 것이다.

     

    말름은 레닌의 『임박한 파국』을 인용하며, 현재는 파국에 대처하기 위해 자본에 대한 단호한 강제조치가 필요한 시기라고 주장한다. 탄소배출권 거래 제도, 탄소세 부과 등 자본주의적 시장 내 조치로는 실질적 변화를 끌어내지 못했다면, 이제 국가권력을 동원해 급진적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10월 혁명을 앞두고 레닌이 노동자 국가는 전쟁의 종식, 곡물 공급의 통제, 은행과 기업 연합들의 국유화, 주요 생산수단 사유제의 종식 등의 급진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선동했던 것처럼 말이다. 말름은 구체적으로 기업들의 투입과 산출을 철저히 분석해 열대 지역에 대한 수탈을 중단시키고, 화석연료로 돈을 버는 모든 민간기업을 국유화해 “경제에서 화석연료 사업을 영구 삭제”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내놓는다.

     

    혁명 대신 직접적 대중행동?

     

    말름은 이러한 조치들이 자본주의적 방법으로는 시행 불가능하며, 자본주의적 국가도 이를 강제할 수 없다고 올바로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여기서 노동자 혁명을 통한 국가권력의 장악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말름은 그 대신 ‘대중행동을 통해 국가기구가 자본과의 쇠사슬을 끊게 한다’고 말하는 것에 그친다. 말름은 방금 자본주의 국가는 이를 할 수 없으리라고 지적해 놓고선, 우리가 대중행동을 통해 강제력을 행사해야 하는 국가는 어쨌든 자본주의 국가일 수밖에 없지 않냐고 되묻는다.

     

    “코로나 위기와 기후위기를 처음 비교한 결과 도출된 결론은 어떤 자본주의 국가도 결코 스스로 이 같은 일을 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가 이 과업에 나서게 하려면, 시민이 국가에 강제력을 행사해야 한다. 선거운동부터 사보타주까지 일체의 대중적 영향력을 통해서.”

     

    “그러나 어떤 국가를 활용한단 말인가? 우리는 방금 자본주의 국가가 본성상 체제 전환을 스스로 단행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직껏 다른 형식의 국가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기반의 노동자 국가가 하룻밤 새에 기적적으로 탄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장악한 민주주의 기관들의 이중 권력은, 설혹 실현될 수 있더라도, 머지않은 시점에 실현될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을 기다리는 것은 망상과 범죄 모두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들고 싸워야 하는 상대는 자본의 회로에 늘 얽매여 있는 음울한 부르주아 국가일 뿐이다. 자본주의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중이 압력을 가해, 국가 내부에 응축된 힘의 균형에 변화를 일으키고, 다양한 수단(이 수단의 일부는 나의 책 《송유관을 폭파하는 방법: 불타는 세계에서 투쟁 학습하기》에서 더 상세히 다루고 있다)을 활용하며 국가기구들로 하여금 자본과 자기들을 엮은 쇠사슬을 끊고 나아가도록 강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은 기성국가를 파괴하고 또 다른 국가를 세운다는 고전적 기획과는 분명 다르다.”

     

    이처럼 말름은 국가권력을 통한 기후위기 대응 전시체제를 주장하면서도, 대중이 직접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필요성 앞에서는 주저하며 멈춘다. 우리가 대중행동을 통해 움직여야 하는 국가는 언제 등장할지도 모르는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음울한 부르주아 국가”다. 말름이 사회민주주의와 아나키즘을 올바로 비판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강령, 즉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해 노동자 국가를 수립한다는 전략에 대해 한사코 선을 긋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스탈린주의의 경험 때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내전의 발발로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이 소멸하고 관료주의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이를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이 정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기층민의 민주적 권리를 짓밟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힘에 의지하고 그들의 힘을 끌어내면서, 비상시국에 필요한 통제 조치를 실행할 것인가라는 딜레마 말이다. 아나키스트도, 사회민주주의자도 이 딜레마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사회주의의 계보학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평생 고민해왔고, 이를 원칙적 사안으로 삼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은 분파가 있다. 반스탈린주의 레닌주의의 분파이다. 그렇다면 이 분파는 그동안 어떤 확실한 해법을 제시했던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관료주의적 남용을 막는 방어선이 무너지면 어떻게 일을 망칠 수 있는지, 몇 가지 무거운 교훈을 학습했을 뿐이다. … 지난 100년간, 이들은 언제 10월의 기관차가 탈선했는지를, 내적 건설 과정의 어떤 요소가 그 난파에 기여했는지를, 어떻게 했더라면 그 기관차가 더 생산적인 방식으로 조정될 수 있었을지를(또는 그것이 가능했을지를) 줄곧 숙고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번에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지에 관한 정확한 매뉴얼을 마련하지는 않았다.”

     

    스탈린주의가 역사에 끼친 가장 큰 해악이 이것이다. 러시아혁명이 반혁명으로 귀결된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멈췄던 곳에서 역사의 실마리를 계속 이어 나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말까지 강력한 역사적 실체로 존속했던 스탈린주의는, 반(反)스탈린주의 사회주의자들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방어하는 것 이상으로 나가는 것을 어렵게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노동자투쟁의 퇴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말이다.

     

    그러나 다시 자본주의의 위기가 명백해진 상황이다. 말름 역시 국가권력을 통한 전시공산주의 체제가 즉각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객관적 정세의 격변은 주체의 비약적인 성장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오늘날 사회주의자들과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끊어졌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실마리를 다시 이어 나가게 될 것이다.

     

    . 민주적 계획경제란 무엇인가?

     

    이윤 생산 체제인 자본주의에서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는 모두 개별자본이 결정한다. 개별자본은 경쟁자를 누르고 더 많은 이윤만 획득할 수 있다면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다. 김남주 시인이 일갈한 것처럼, 이윤만 난다면 “범죄의 소굴이건 아비규환의 생지옥이건” 상관치 않는 게 자본의 본능이다.[19] 기후재난 앞에서 화석연료 사용을 중단하지 않는 일, 기후위기의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며 폭력적인 해고를 서슴지 않는 일, 에너지 가격을 인상해 폭리를 취하는 일 등이 그래서 벌어진다.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를 온전히 개별자본이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의 근원은 단 하나다. 생산수단의 소유권이 자본에 있으므로, 이를 자기 마음대로 써먹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자본의 이 ‘자유’가 혁신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끄는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생산수단은 개별 자본가들이 땀 흘려 만든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피땀 어린 사회적 노동이야말로 저들이 가진 생산수단의 원천이다. 또 아무리 뛰어난 개인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대개의 ‘혁신’은 과거로부터 전수된 경험과 동시대 집단 지성의 산물이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왜 한 줌 자본가들은 사회적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한 채 무제한적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단 말인가? 삼성 재벌의 이병철은 이건희를 낳고, 이건희는 다시 이재용을 낳고, 이재용은 또 재벌 4세를 낳고…, 왜 자본가들은 대대손손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상속해 가며 경제 부문의 의사결정을 독점하는가? 게다가 자본가들은 이윤이란 과실은 ‘기업가 정신’ 운운하며 모두 챙겨가지만, 손실과 사회적 낭비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책임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 경제위기 때마다 노동자 민중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천문학적 공적자금이 ‘자본가 살리기’에 투입되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나.

     

    한 줌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필요를 위한 경제, 사회적 생산수단을 자본가들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공유하는 경제, 자본가들이 밀실에서 경제적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게 아니라 노동자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생산자 대중이 직접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경제, 한마디로 민주적 계획경제가 우리의 지향이 되어야 한다.

     

    1.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예견한 미래 사회

     

    그런데 ‘계획경제’란 말은 보통 사람들에게 상당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생필품에 대한 배급제, 상점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점원의 불친절한 서비스 태도, 뒤처진 기술혁신 수준…, 이런 것들이 계획경제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모습 아닌가? 요컨대 경제에서 계획이란 그냥 덮어놓고 나쁜 것만 같다. ‘시장경제는 좋고, 계획경제는 나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미 가계 경제 수준에서도 넘치게 계획을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한 달 수입 얼마 중에 저축과 보험은 얼마씩 지출해야 하고, 11개월 무이자 할부로 구입한 노트북 할부가 다음 달에 끝나니 로봇 청소기 할부를 새로 시작할 수 있고 등등…. 경제학에서 즐겨 쓰는 로빈슨 크루소의 비유, 즉 1인 경제 활동에서조차 계획은 필수다.

     

    “(로빈슨 크루소는) 아무리 본래부터 검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여러 가지 욕구는 기본적으로 충족시켜야 할 것이므로 그는 도구를 만들고 가구를 제작하고 염소를 길들이고 고기잡이와 사냥을 하는 등 다양한 종류의 유용노동을 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 그는 필요 그 자체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시간을 그 다양한 기능 사이에 엄밀하게 배분한다. 그의 전체 활동 가운데에서 어떤 부분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어떤 부분이 더 적은 비중을 차지할 것인지는 그가 필요로 하는 유용성을 얻기 위해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 얼마나 크고 작은지에 따라 정해진다. 그는 이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 그의 재산목록 속에는 그가 갖고 있는 유용한 물건들과 그것들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생산물들을 일정량 생산하기 위해 그가 평균적으로 필요로 하는 노동시간에 관한 일람표가 기록되어 있다. 자신이 직접 창출한 부의 내용을 이루는 이들 여러 물건과 로빈슨 자신 사이의 모든 관계가 여기에서는 극히 단순명료하기 때문에 …”[20]

     

    이처럼 모든 경제 활동에서 ‘계획’은 빠질 수 없다. 틈만 나면 ‘계획은 비효율적이고 시장은 효율적이다!’라고 외쳐대는 자본가들 역시 예외가 아닌데, 그들 역시 개별 기업 내에서는 철저한 계획 아래 경제를 운용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먼저 살펴보자.

     

    자본주의 생산의 모순: 기업 내부의 계획적 생산과 사회 전체의 무정부적 생산

     

    엥겔스는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에서 자본주의 생산력의 사회적 성격을 거듭해 강조한다. 전(前)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소유자가 가지고 있던 협소하고 분산된 생산수단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의 집적과 확대를 거쳐 거대한 규모로 재탄생한다.

     

    “분산되고 협소한 생산수단을 집적시키고 확대하여 현재의 생산에 강력하게 작용하는 지렛대로 바꾸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그것의 담지자인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역할이었다. …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을 개인의 생산수단에서 사회적 생산수단으로, 요컨대 오로지 인간들의 총체에 의해서만 사용될 수 있는 생산수단으로 전화하지 않고서는 저 제한된 생산수단을 강력한 생산력들로 전화할 수 없었다.”[21]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적 분업 체제에서, 개별 생산자는 상품의 거래를 통해서 다른 생산자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 개별 생산자의 노동이 사회에 유용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개별 생산자의 상품이 시장에서 판매돼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상품이 시장에서 판매될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주력 수출 상품인 반도체를 생각해 보라. 시장의 플레이어가 손에 꼽는 소수 독점자본임에도 불구하고, 반도체의 호황‧불황 주기가 대체 언제 올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산에 이르는 기업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상품 생산에 근거하는 모든 사회는, 그 사회의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관련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각자는 자신이 우연히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을 갖고서, 자신의 개인적 교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위해 생산한다. 어느 누구도 자기 것과 동일한 품목의 상품이 얼마나 시장에 나올지, 도대체 그 가운데 얼마나 사용될지를 알지 못하며, 그 비용을 회수할지, 또는 도대체 판매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한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가 지배한다. … (상품 생산의 법칙들은) 개별 생산자들에 대해서 경쟁의 강제 법칙으로서 통용력을 지닌다. … 이 법칙들은 생산자들과 독립하여, 생산자들과 대립해서, 그들의 생산 형태에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자연 법칙으로서 자리를 잡는다. 생산물이 생산자들을 지배한다.”

     

    이제 개별 자본가들은 정글과 같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경쟁자를 누르고 자신의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비효율적인 경영 방식과 생산 기법을 절멸해야 한다. 개별 자본가들이 사회의 무정부적 생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집착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계획’이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는 더욱 명명백백해졌으며 더욱 극단화되어 갔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사회적 생산의 이와 같은 무정부 상태를 격화시키는 데 사용한 주요한 도구는 바로 무정부 상태와 반대되는 것이었다. 모든 개별 생산 기업 내에서 생산을 더욱 사회적 생산으로 조직하는 것. 이러한 지렛대와 함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은 지난날의 평온하고 안정적인 상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어떤 산업 부문에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도입되면, 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낡은 경영 방법이 자신과 병존하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 개별 자본가들 사이에서도, 또한 산업과 산업,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자연적인 또는 창조된 생산 조건들의 유리함 여부가 존망을 결정한다. 패배한 것은 가차없이 제거된다. 그것은 다윈이 말한 개체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 몇 배 더 광포한 형태로 자연에서 사회로 옮겨진 것이다. …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전유(專有) 사이의 모순은 개별 공장 내에서의 생산의 조직화와 사회 전체 내에서의 생산의 무정부 상태 사이의 대립으로 재생산된다.” (강조는 엥겔스)

     

    현대 기업은 내부에 경영지원, 연구개발, 자재, 생산, 영업, 고객지원 등 다양한 하위부서를 두고 있다. 물론 이는 조직적 효율성을 높여 이윤 창출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때 여러 부서 간의 유기적 협업은 전사적 계획 없이는 달성 불가능하다. 예컨대 자동차 회사에서 내년 하반기에 신차를 투입할 계획이라면, 올해 안에 연구개발 부서는 신차에 탑재할 신기능을 기술적으로 완성해야 하며, 자재 부서는 신차 생산에 필요한 부품을 내년 상반기까지 조달해야 할 것이다. 생산 부서는 신차 생산에 투입할 인력을 미리 배치해 두어야 하며, 영업 부서는 마케팅 전략을 수립해야 하고, 기타 등등….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계획’ 아래 조정‧통제된다. 두말할 필요도 없는 얘기지만, 만약에 각 부서가 협소한 이기주의에 빠져 전사적 계획에 반대되는 헛짓거리를 한다면 그 기업의 경쟁력은 곤두박질칠 것이다.

     

    계획 달성을 위해 조직적 효율성을 확보하는 것은 오늘날 기업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이므로, 경영학에서는 오로지 이 주제만을 연구하는 하위 분과 학문이 있을 정도다. 경영조직론, 조직행동론 등이 그것이다. 부르주아 경영학자들은 조직 내에서 부문별로 권한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구성원들의 담당업무별로 직무는 어떻게 표준화할 것인가, 조직 내 위계구조와 수평적 분권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리더십(지도력)을 제고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부서 간 소통 체계는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등등을 허구한 날 연구한다. 심지어 팀 조직에서 팀원은 몇 명 이내로 구성해야 수평적 소통이 가능한가, 어떻게 해야 회의를 성과 지향적으로 간결하게 끝낼 수 있는지도 주요 연구 대상이다.[22] 이 모든 것이 전사적 계획 집행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의도 아래 연구된다.

     

    물론 이때의 전사적 계획은 결코 민주적인 것은 아니다. 기업 내부에서 계획은 언제나 소위 최고 경영권자의 ‘결단’으로 확정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정치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조차 재벌 총수를 만나 투자계획의 조속한 확정을 ‘건의’하거나 ‘읍소’하는 일이 그래서 벌어진다.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현대 사회의 거대한 생산력을 저들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을 좀 더 확장해 보자. 오늘날 ‘개별 기업 내에서의 계획경제와 전체 생산에서의 무정부경제’라는 모순적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생산수단이 사적으로 소유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생산력을 표현하는 생산수단이 한 줌 자본가들에 독점돼 있지 않다면, 예컨대 현대차 공장, 지엠 공장, 르노차 공장, KG모빌리티 공장이 몇몇 재벌가의 소유가 아니라 전체 사회의 공동체적 소유라면, 우리는 개별 기업 차원이 아니라 전체 사회의 차원에서도 ‘계획’을 운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각각의 자동차 공장에서 중복되는 낭비적 요소를 제거하고, 사치재 성격을 지니는 고급차 대신 사회에 더 필요한 친환경 차량 등을 훨씬 효율적으로 생산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쌍용차에서 그랬듯이 생산한 차량이 팔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폭력적으로 정리해고하는 대신, 자동차의 사회적 수요에 맞게 노동력을 매시기 합리적으로 재배치함으로써 전 사회적인 노동시간 단축을 실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요컨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폐지된 사회,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을 전체 사회가 공동체적으로 소유하는 사회에서는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 전 사회적 계획경제의 실현이 가능해질 것이다.

     

    “오늘날에는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사회적 성격이 생산자들 자신을 거스르고, 생산방식과 교환방식을 주기적으로 부수며,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자연 법칙으로서 폭력적이고 파괴적으로 자신을 관철해 나가고 있지만, 사회가 생산력들을 점유 획득하게 되면 생산력들은 생산자들에 의해 완전히 의식적으로 통용되게 사용될 것이며, 교란과 주기적 와해의 원인으로부터 생산 자체의 가장 강력한 지렛대로 전화할 것이다. … 오늘날의 생산력들을 마침내 인식된 그 본성에 의거하여 취급하면,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는 전체와 각 개인의 욕구에 의거한 생산의 사회적-계획적 조절로 대체된다.”

     

    마르크스, 『고타 강령 비판 초안

     

    마르크스는 『자본』 1권에서 이런 사회를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면서 각자의 개별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인식하며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결사체”라고 표현했다.[23] 이런 사회에서 계획적 생산은 사회적 필요에 따라 행해질 것이다. 착취계급의 이익이나 소수 부유층의 사치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이뤄졌던 생산은 절멸되거나 최후순위로 밀려날 것이며, 기후위기 대응, 생태환경 보전, 보건의료 위기 해소 등 공동체 전체의 필요를 위한 생산이 최우선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산된 공동체의 전체 생산물은 이제 구성원들에게 개별 생활수단으로 분배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이 분배의 방식은 사회적 생산조직의 특성과 생산자들의 역사적 발전수준에 따라 변화할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산물이 분배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을 것이라 예측한다.[24] 우선 마르크스는 “사회적 총생산물”에서 최우선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공제(控除)돼야 한다고 썼다.

     

    “첫째, 소모된 생산수단의 보전을 위한 배상분. 둘째, 생산의 확대를 위한 추가 부분. 셋째, 사고, 자연재해로 인한 장애 등등에 대비한 예비 기금 혹은 보험 기금. … 이러한 공제는 경제상의 필연이며, 그리고 그것의 크기는 수중에 있는 수단과 역량에 따라 결정되고 부분적으로는 확률 계산에 의해 결정되는 것…”

     

    즉 전체 생산물에서 현재의 생산력 수준을 유지‧제고하기 위한 공제가 우선 이뤄진다.[25] 이어 전체 생산물을 생산자 개개인에게 분배하기에 앞서, 공동체 전체 필요분에 대한 공제가 진행돼야 한다. 여기에는 노동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공공부조도 포함된다. (미래 사회에서 노동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공공부조는, 이들을 아예 노동에 참여시키지 않고 지원하는 형식보다는 각자의 조건에 따라 노동에 참여시키되 노동량이 평균적 수준에 미달할 때 추가적 지원을 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노동할 권리는 인간의 기본 욕구가 될 것이므로.)

     

    “첫째, 생산에 직접 속하지 않는 일반 관리 비용. 이 부분은 지금의 사회와 비교하면 애초부터 극히 현저하게 축소될 것이며, 새로운 사회가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둘째, 학교나 위생 설비 등등과 같은, 수요를 공동으로 만족시키게 되어 있는 것. 이 부분은 지금의 사회와 비교하면 애초부터 현저하게 증가할 것이며, 새로운 사회가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늘어날 것이다. 셋째, 노동 능력이 없는 사람 등등을 위한 기금, 요컨대 오늘날의 이른바 공공 빈민 구제에 속하는 것.”

     

    이제 비로소 사회적 분업에 참여한 생산자들이 각자 필요한 생활수단의 분배를 받을 차례다. 생필품을 포함하여,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은 식량‧주택 등의 분배를 받아야 하며, 농장의 노동자들은 자동차‧농기계 등의 분배를 받아야 하고 등등…. 이때 생산자들이 자신의 개별 노동을 다른 사람의 개별 노동과 교환하는 기준은 노동시간이다. 즉 노동시간은 공동생산물 중 개별 생산자들의 몫을 재는 척도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 매매라는 간접적 방식으로 사회적 노동의 교환이 이뤄지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더는 이러한 우회로가 필요하지 않다.

     

    “생산수단을 공유 재산으로 하는 것에 기초를 둔 조합적 사회 내부에서는 생산자들이 자신의 생산물을 교환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생산물에 사용된 노동이 이 생산물의 가치로, 즉 그 생산물이 보유하고 있는 어떤 물적 특성으로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반대로 개인적 노동이 더 이상 우회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총노동의 구성 부분으로서 존재하기 떄문이다. …

    우리가 여기서 관계하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거꾸로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이며, 그러므로 그 모태인 낡은 사회의 모반이 모든 면에서, 즉 경제적, 윤리적, 정신적으로 아직도 들러붙어 있는 공산주의 사회이다. 이에 걸맞게 개별 생산자는 자신이 사회에 주는 것을―공제 후에―정확히 돌려 받는다. 그가 사회에 주었던 것은 자신의 개인적 노동량이다. … 개별 생산자들 사이의 소비수단의 분배에 관해 말하자면, 상품 등가물의 교환에서와 동일한 원리가 지배하여, 어떤 형태의 동일한 만큼의 노동은 다른 형태의 동일한 만큼의 노동과 교환된다.”

     

    누구나 자신의 노동량에 따라 자신에게 필요한 생산물을 공동체에서 교환해 간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일견 이러한 사회 체제는 평등한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노동량 상당 부분이 잉여가치의 형태로 자본가들에게 착취됨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평등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 개개인이 타고난 천부적 능력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평등한 권리는 여전히 ―원리상―부르주아적 권리 … 이 평등한 권리에는 아직도 부르주아적 제한이 들러붙어 있다. 생산자의 권리는 그의 노동 제공에 비례한다. 평등의 요체는, 평등한 척도인 노동으로 측정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거나 더 많은 시간 동안 노동할 수 있다 … 이것 암묵적으로 개인의 불평등한 소질을 승인하며, 따라서 노동자의 실행 능력을 자연적 특권으로 승인한다. 그러므로 모든 권리가 다 그렇듯이 내용상 불평등한 권리이다.”

     

    따라서 어떤 노동자는 평균적인 노동자보다 더 많은 생활수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개인적 필요분을 초과하는 재화에 대한 상속은 금지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계급을 부활시키지는 않는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이것은 “오랜 산고 끝에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방금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불가피”하다. “권리는 사회의 경제적 형태와 이 형태가 제약하는 문화 발전보다 결코 더 높은 수준일 수는 없다.” 아직 자본주의적 가치관, 예컨대 ‘공정한 노동에 대한 공정한 임금’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한 만큼 받는다’는 원칙만큼 간명하게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분배 기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계급착취라는 굴레로부터 해방된 생산력이 전면적으로 발전하고, 공동체 성원들 사이에서 부르주아적 의식이 점차 소멸하게 되면, 이제 분배 질서는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 즉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적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대립도 사라진 후에,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차적인 생활 욕구로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조합적 부의 모든 분천이 흘러 넘치고 난 후에―그때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대기 중 산소는 인간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산소를 호흡하겠다고 서로 다투지 않는다. 각자의 능력(폐활량)과 필요(상황)에 따라 산소를 호흡할 뿐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산소의 분배를 두고 다퉈야 할 만큼 산소가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전면적 발전으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사라지고, 연대와 협력의 가치관이 확산하면서 이제 공동체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이행하게 된다.

     

    참고로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공산주의의 첫째 국면”, 즉 생산자가 일한 만큼 분배받는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로, 이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를 높은 국면의 ‘공산주의’로 개념화했다.[26] 이후 마르크스주의에서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란 개념 사용은 이러한 용례를 따르고 있다.[27]

     

    여기서 재차 상기해야 할 대목이 있다. 이런 식으로 전체 경제를 계획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즉 개별 생산자들 사이에서 투명한 사회적 교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꼬집는다.

     

    “소비 수단의 그때 그때의 분배는 생산 조건 자체의 분배의 귀결일 뿐이다. 그런데 생산 조건의 분배는 생산방식 자체의 특성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물적 생산 조건들은 자본 소유와 토지 소유의 형태로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배분되는 반면에 대중은 인적 생산 조건인 노동력의 소유자일 뿐이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생산의 요소들이 이렇게 분배되면, 오늘날과 같은 소비 수단의 분배가 저절로 생겨난다. 물적 생산 조건들이 노동자들 자신의 조합적 소유가 되면, 오늘날과는 다른 소비 수단의 분배가 생겨난다. 속류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를 본받아 (그리고 이를 다시 본받아 일부 민주주의자들은) 분배를 생산방식과는 독립된 것으로 간주하고 또 그렇게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주의는 주로 분배를 중심 문제로 하고 있다는 듯이 서술되고 있다.”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가들의 사적 소유 폐지는 언급하지 않은 채, 단지 분배의 개선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속류(俗流) 사회주의’일 뿐이다. 오늘날에도 자본가 권력의 근원인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은 얘기하지 않은 채, 단순히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둬 저소득층에게 더 많은 재정적 지원을 하자고 주장하는 데 그치는 정치 운동이 있다. 이런 정치 운동은 본연의 사회주의 운동과는 질적으로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2. 민주적 계획경제의 핵심: 민주적 노동자권력!

     

    민주적 계획경제는 관료적 명령경제일 수 없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우리가 계획경제에 대해 편견을 갖는 이유는 지구의 1/3에서 실험된 스탈린주의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처참한 실패로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중국을 보자.

     

    1958~1962년, 중국 공산당은 “超英赶美(영국을 넘어서고 미국을 따라잡는다)”를 내세우며 대약진 운동을 시행했다. 중심 정책은 농촌에 인민공사를 설립해 농촌집단화를 실시한 것이다. 농민 혁명을 자신의 역사적 연원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신중국 수립 직후 지주 계급의 토지를 무상몰수해 빈농에게 무상분배하였다. 이로써 전체 경작지의 90% 이상이 빈농과 중농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에서는 다시 토지 등 생산수단의 소소유를 철폐하고 생산수단의 공유를 시도한다. 이는 토지의 대규모 경작을 통해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대약진 운동은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후진 농업국가가 공업 발전을 위해 농촌으로부터 잉여를 추출하려던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농촌에서 잉여를 효율적으로 징발하기 위해 인민공사가 설립된 것이다.

     

    1958년 말이 되면 전체 농촌 가구의 99%가 인민공사로 편제된다. 인민공사는 ‘일한 만큼 분배받는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공동생산에 돌입했지만, 곧 농민들은 인민공사 체제가 일한 만큼 분배되는 체제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깨달았다. 예컨대 농민들의 작업 점수는 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됐을 뿐, 노동의 질적 차이는 고려되지 않았거나 고려되더라도 여성에 대한 차별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경작지에서 단순히 오랫동안 시간을 투여하는 식의 비효율적인 노동을 이어갔다.

     

    문제는 더 있었다. 중국 공산당이 중공업 발전을 위해 농민들에게 철강 생산을 요구한 것이다. 철강 증산을 위해 농민들은 가정 내의 쇠붙이를 그러모아 전통적 방식의 용광로에 집어넣고 철강을 생산하는 토법제철(土法製鐵) 방식을 채택해야 했다. 그러나 그 생산물은 불순물이 많은 저품질이어서 실제로 활용되지도 못한다. 농촌 노동력이 철강 생산으로 집중되고, 토법제철을 위한 땔감으로 수목이 고갈되면서 임야와 농지는 황폐해졌다. 같은 시기 ‘참새는 해로운 동물이다’는 모택동의 말 한마디로 시작된 참새 박멸 운동으로 2억 1천만 마리의 참새가 소탕되는데, 해충을 잡아먹는 참새가 사라진 결과 먹이 사슬이 파괴돼 병충해까지 창궐하게 된다.

     

    여기에 무리한 계획과 허위‧과장 보고가 문제를 악화시켰다. 서로의 혁명적 열정을 과시하듯, 각 단위를 책임진 당 관료들은 경쟁적으로 높은 목표를 설정했으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자 거짓 보고를 일삼았다. 예를 들어 어떤 단위에서 목표의 150%를 달성했다고 보고하면, 다른 단위에서는 200%를 달성했다고 보고하는 식이다. 이러한 허위 보고를 진실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허위 보고에 맞춰 부풀려진 생산량만큼을 국가에 상납하면 된다. 그 결과 식량이 부족해진 농촌 지역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한다. 대약진 운동의 결과는 파국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공식 통계로 2,150만 명 이상의 직간접적 사망자가 발생했다. 실제로는 3,000만 명 이상일 것이라 추정된다.

     

    이 참혹한 실패의 근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인민공사의 경험을 돌이켜 보자면, 생산수단 사적 소유를 철폐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명제가 틀렸던 것일까? 아니다. 문제는 계획이 생산자 대중의 경험과 집단 지성에 근거해 민주적 방식으로 결정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의 계획은 오로지 당과 수령이 결정하는 것이었으며, 소비에트 또는 전국인민대표대회(중국)는 당의 결정을 앵무새처럼 반복해 되뇌는 거수기에 불과했다.

     

    앞서 인민공사에서 노동시간을 통해 작업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 노동의 질적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본래 마르크스주의 노동가치론에서 “복잡노동”은 “단순노동이 제곱된 것 또는 배가된 것”으로 간주된다. 마르크스는 “갖가지 노동을 그 도량단위인 단순노동으로 환산해내는 여러 비율은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생산자들의 배후에서 결정”된다고 썼다.[28] 생산자들이 경험적으로 노동의 질적 차이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인민공사에 참여한 농민들 역시 갖가지 농업노동의 질적 차이를 관습적으로 구분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계획’에서는 생산자들의 오랜 경험과 지혜가 반영되지 않았으며, 오랜 가부장제 문화에 따른 성차별적 편견도 제거되지 않았다.

     

    말이 나온 김에, 생산수단을 공유해 계획경제가 실패했다는 반공주의의 오랜 선전에 대해 반박해 보자. 그들은 중국의 농촌집단화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른 탓에 처참히 실패했으며, 1978년 이후 농지를 개개인에게 다시 배분하는 방식을 취하자 농업 생산이 회복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까지는 맞다. 그러나 그들은 1985년 중국에서 곡물 생산량이 4억 7천만 톤에서 3억 7,900만 톤으로 급락했다는 점에는 침묵한다.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토지의 개별 경영이 확산하면서 토지 운용에서 ‘규모의 경제’ 효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높은 수준의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제 형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사회적 생산수단을 생산자들의 자주적‧민주적 권력이 통제하는가, 아니면 당 관료가 상명하달식으로 통제하는가 하는 것이다. 전자에 해당할 때만 생산자 대중의 노동 의욕이 제고되고, 창의적‧혁신적 시도가 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택동이 토법제철과 참새 박멸 운동을 지시하는 동안 누구도 혁명을 지도한 수령의 ‘권위’에 저항하지 못했으며, 생산단위의 책임자가 허위 보고를 일삼는 동안 누구도 해당 책임자를 소환하지 못했다. 당 관료가 하나의 특권 계급이 돼 생산자들을 지배했던 것, 이것이 과거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실패 원인이다.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에서 스탈린주의 체제를 신랄하게 풍자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폴레옹은 개들을 거느리고 헛간 바닥의 조금 높은 연단으로 올라섰다. 그 연단은 전에 미들화이트 수퇘지 메이저가 연설할 때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나폴레옹은 이제부터 일요일 아침의 <회의>는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회의는 불필요한 시간 낭비라고 그는 말했다. 앞으로 농장 운영에 관한 모든 문제는 돼지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가 결정할 것이며 그 위원회는 나폴레옹 자기가 주재한다는 것이었다. 특별위원회는 비공개로 열리고 결정 사항은 다른 동물들에게 통보될 것이라 그는 말했다. 앞으로도 동물들은 일요일 아침에 모여 깃발을 게양하고 「잉글랜드의 짐승들」을 노래하고 그다음 주에 할 일을 명령받게 될 것이지만 토론은 더 이상 없다고 나폴레옹은 말했다.

     

    스노볼의 축출이 몰고 온 충격에도 불구하고 동물들은 나폴레옹의 이 선언에는 찜찜하고 언짢은 기분이었다. 제대로 따질 말을 생각해 낼 수만 있었다면 몇몇은 항의를 제기했을 것이다. 심지어 복서까지도 심기가 편치 않았다. 그는 귀를 뒤로 젖히고 앞 머리칼을 몇 번 흔들며 생각을 모아보려 했지만 결국 말할 거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정작 똘똘하게 나선 것은 오히려 몇몇 돼지들이었다. 앞줄에 앉았던 식용 돼지 네 마리가 꽥꽥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불만을 표하다가 넷이 한꺼번에 자리에서 일어나 발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을 지키고 앉았던 개들이 으르렁 으르렁 깊고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발언하려던 돼지들은 입을 다물었고, 자리에 도로 주저앉았다. 이어 양들이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를 엄청나게 큰소리로 외쳐댔는데, 그 외침은 거의 15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그 때문에 토론 기회 같은 것은 사라지고 말았다.

     

    나중에 스퀼러가 농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농장의 새 질서를 다른 동물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동무들, 여러분은 나폴레옹 동무가 이 가외의 일을 맡느라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다들 고맙게 생각하리라 믿소. 동무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고는 절대로 생각지 마시오. 오히려 그 반대요. 그건 무거운 책임입니다. 나폴레옹 동무만큼 확고하게 모든 동물이 평등이라는 걸 믿는 동물도 없을 거요. 여러분들이 스스로 모든 일을 결정한다는 데는 나폴레옹 동무도 백 번 찬성이오. 그러나 동무들, 여러분은 가끔 틀린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럴 경우 우린 어찌 되겠소? 만약 여러분이 스노볼과 그 황당한 풍차 계획을 지지했더라면 어찌 될 뻔했소? 모두 알다시피 스노볼은 범죄자요」

     

    「지난번 <외양간 전투>에서 그는 용감히 싸웠는데」 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용감한 것만으론 충분치 않아요」 스퀼러는 말을 계속했다. 「충성과 복종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외양간 전투>에 대해선 당시 스노볼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사실이 장차 밝혀질 것이오. 기율이 필요합니다, 동무들! 강철 같은 기율이 필요해요. 그게 지금부터 우리의 표어요. 우리가 한 발 잘못 디디면 적들이 달려듭니다. 동무들, 여러분은 존즈가 되돌아오는 건 원치 않지요?」

     

    이번에도, 이런 식의 논의에는 아무도 답을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동물들은 존즈가 다시 오는 건 바라지 않았고 일요일 아침에 토의를 벌이는 것이 존즈를 되돌아오게 하는 일이라면 그 토의는 중단되어 마땅할 것이었다. 이제 생각을 다소 정리할 수 있게 된 복서가 동물들의 일반적인 느낌을 표현했다. 「나폴레옹 동무가 옳다고 하면 옳은 거야」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는 <내가 더 열심히 한다>라는 개인 모토 외에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라는 격률을 하나 더 채택했다.

     

    … 매주 일요일 아침 열시 동물들은 헛간에 모여 다음 주 수행해야 할 명령들을 전달받았다. …

     

    … 스노볼이 쫓겨나가고 3주일째가 되는 일요일, 나폴레옹은 어쨌거나 풍차는 건설할 계획이라 발표했고 동물들은 깜짝 놀랐다. 그가 왜 생각을 바꾸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아무 설명이 없었다. 다만 그는 이 특별 과제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동물들의 먹이 분배량을 줄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계획은 이미 마지막 세부 사항까지 다 완료된 상태였다. 돼지들이 특별위원회를 짜서 지난 3주간 그 일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노동자 대중의 창의성과 자주성을 발동하기

     

    반면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전통을 계승한 레닌은, 1917년 혁명 직후 끊임없이 노동자 대중이 자주적 창의성을 발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본가들로부터 몰수한 공장은 누가,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 엘리트 관료 중심으로 국가가 이를 효율적으로 통제해야 하는가? 레닌은 이에 반대해 자발적 노동자 관리를 지지했다.

     

    “일부 동지들은 흔히 공장, 광산 및 제재소 몰수 형태를 취하는 자발적인 노동자 관리 대신 국가 관리를 지지하였다. 다른 동지들은 모든 공장이 아니라 대규모 금속공장, 철도 등에 관리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리치는 이 활동이 축소되어야 한다거나 노동자들의 주도권이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추진될 수도 있지만, 오직 투쟁 속에서만 노동자들이 진정한 관리를 배우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란 위로부터의 명령에 의해서 건설될 수 없는 것이다. … 살아 있는 건설적인 사회주의는 인민대중 자신의 창작품이다(레닌전집 26).”[29]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때를 벗지 못한 노동자들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룹스카야는 이런 후일담을 들려준다. 혁명 직후, 내일 하루 다 같이 쉴 것을 공장에서 민주적 투표로 결정한 노동자의 이야기다. (물론 이것 자체가 무조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만약 평소 야간노동으로 고통을 겪던 응급실 노동자들이 앞으로 야간 근무는 일체 하지 않겠다고 민주적으로 결정한다면, 이것이 타당한 일이겠는가? 개별 단위에서의 민주적 의사결정도 사회 전체의 요구와 결부되어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노동자, 농민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노동을 저주로서, 최소화시켜야 할 무엇으로 보는 수세기 동안의 의무 노동에 의해 조장된 태도와 결부된, 서투른 노동을 유의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에 의해서, 들볶고 욕을 퍼부으며 몰아대는 십장과 감독 계층이 없어졌다. 노동자들은 그들을 없애서 기뻐했고, 피로할 때는 자기들을 혹사시키는 사람 없이 앉아서 담배를 피울 수 있어서 좋아했다. 처음에 공장 조직은 노동자들이 온갖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기꺼이 허용했다. 어떤 증명서를 받으러 교육인민위원회로 나를 찾아온 어느 여성 노동자가 기억난다. 대화 중에 내가 그 여성에게 어느 근무조에서 일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가 야근조에서 일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주간에 인민위원회로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니까. “오늘은 아무도 일하지 않습니다. 어제저녁에 집회가 있었는데, 각자 숙제가 밀려서 오늘 쉴 것을 투표로 결정하였지요. 아시다시피, 이제는 우리가 사장입니다.” 18년이 지난 지금, 이 이야기를 동지들에게 해보면, 아무도 이를 믿으려 하지 않으며 이를 전형적인 사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시행착오는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계급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워낙 억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의 카타르시스는 때론 통제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다. 1917년 짜르의 동궁(冬宮)을 접수한 노동자들은 저장실에서 양질의 보드카를 발견하고는 “로마노프의 찌꺼기를 마셔 버리자”며 광란의 주연에 빠져든다. 노동자들이 고급 상점에서 술을 약탈하는 데까지 이르자, 소비에트는 특별 비상위원회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으며 트로츠키는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해야 했다. “만일 당신들이 혀가 꼬부라지도록 마셔댄다면, 당신은 혁명을 방어하러 나선 길에 장갑차를 팽개쳐 버린 꼴이 될 것이오. 이런 말을 명심해 두기 바라오. 고주망태가 된 날이 하루하루 늘어날수록 우리의 적은 승리를 향해 한 발짝씩 더 나아가는 것이고, 그만큼 우리는 예전의 노예로 다가간다는 사실을 말이오.”[30] 빅토르 세르주는 이후 일주일 만에 모든 악이 평정됐다고 쓴다.

     

    사회주의가 노동자계급의 자기 해방 사업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사회주의자들은, 비록 노동자 대중이 때론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비틀거리며 후퇴하고, 지지부진할지라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단련되고 성장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레닌 역시 1917년 혁명기에 이를 직접 목격하고 역사의 증언을 남겼다.[31]

     

    “과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종류의 인간들이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라고, 즉 자신들이 먼저 선량하고 순수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을 길러내면 그들이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장하고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타락한, 그러나 자본주의가 투쟁으로 단련시킨 남녀 인간들의 도움을 받아 사회주의를 건설하기를 원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아주 굳건해서 여느 군대보다 천 배나 더 많은 곤경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다.”

     

    “인민대중이 스스로 순결하고 소박하게 거칠고 단호하게 역사를 만들기 시작하면, ‘원칙과 이론’을 즉시 그리고 직접 실천하기 시작하면, 부르주아지는 겁에 질려 ‘지성이 땅에 떨어졌다’고 아우성친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 아닌가, 속물근성의 영웅님들? 그런 순간의 역사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것은 개인의 지성이 아니라 대중의 지성 아닌가? 그럴 때 대중의 지성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강력하고 효과적인 힘으로 바뀌는 것 아닌가?)”

     

    “우리가 100번 실수를 할 때마다, 그리고 부르주아지와 그 하수인들(우리나라의 멘셰비키와 우파 사회혁명당을 포함해서)이 우리의 실수를 전 세계에 떠들어 댈 때마다, 위대하고 영웅적인 업적이 1만 개씩 이뤄진다. 이런 업적이 훨씬 더 위대하고 영웅적인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성공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익숙하지 않고(그럴 기회도 없는) 사람들이 공장 지대나 먼 시골의 일상생활에서 이뤄낸,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성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 반대가 진실이라 해도(나는 그런 가정이 틀렸다는 걸 알지만), 만약 우리가 정확한 일 처리를 100개 할 때마다 실수를 1만 번씩 한다고 해도 그때조차 우리의 혁명은 위대하고 천하무적일 것이다. 그리고 세계 역사에도 그렇게 기록될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소수가 아니라, 부자들만이 아니라, 교육받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진정한 민중, 압도 다수의 노동 대중이 스스로 새로운 삶을 건설하고 있고 그들 자신의 경험으로 사회주의를 조직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평범한 노동자, 농민이 가장 의식적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재조직하는 이 과정에서 저지르는 실수 하나 하나가 소수 착취자들의 ‘완벽한’ 성공 ― 노동 대중을 속이고 사기 치는 데 성공하는 것 ― 수백만 개보다 더 소중하다. 오직 그런 실수를 통해서만 노동자, 농민은 새로운 생활을 개척하는 법을 배우고 자본가들 없이도 일할 수 있는 법을 배울 것이다. 오직 그런 식으로만 노동자, 농민은 스스로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사회주의의 승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민주적 노동자권력의 모습을 예상하기

     

    분명한 점이 있다. 현대 사회의 노동자계급은 1917년 혁명기의 러시아 노동자계급보다 훨씬 더 문화적으로 성숙해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윤석열의 시대착오적 계엄령 발동에 단호하게 맞섰던 것처럼(심지어는 직업군인들조차 계엄령에 소극적으로 항명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노동자계급은 자신들 위에 군림하려는 특권 계급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또 노동자계급이 인구 구성의 다수를 점하지 못했고 교육 수준이 낮았던 1917년 러시아와 비교하면, 오늘날 노동자계급의 전반적 역량은 훨씬 탁월하다.

     

    만약 노동자계급의 자주적 역량에 대해 여전히 의심이 남는다면, 범위를 좁혀 자신의 일터를 생각해 보라. 예컨대 나는 IT산업이나 물류산업 등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지만, 내가 십수 년 동안 종사해 온 노동위원회, 노동청 법률 사무라면 누구보다도 효율적으로 업무를 재조직할 자신이 있다. 동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돈벌이 때문에, 사장의 아집과 꼰대 기질 때문에,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는 일을 빙빙 돌아가며 해야 하는 경우가 좀 많은가? 어느 중소기업에서 젊은 노동자가 업무를 간단히 처리할 방법을 제안했더니, 만족한 사장이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켜서 다음부터 침묵했단 얘기는 그냥 웃고 말 일이 아니다. 오랜 경험으로 단련된 노동자들은 자기 업종과 자기 업무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전문가다. 착취의 굴레가 벗겨진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의 집단 지성이 놀라울 정도의 성취를 이뤄낼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부서(팀) 단위에서, 사업장 단위에서 민주적 의사결정 체계를 도입해 자주적 생산관리에 나설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자 대중은 소외된 노동이 아니라 자주적 노동의 효능감을 만끽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동시에 민주적 노동자권력은 사업장 단위뿐만 아니라 산업 단위, 국가 단위에서도 중층적 의사결정 구조를 도입할 것이다. 즉 노동자권력은 부서 단위, 사업장 단위, 지역 단위 등 풀뿌리 민주주의의 활성화를 전폭적으로 긍정하면서도, 이를 중앙집중적으로 모아내는 작업을 동시에 수행할 수밖에 없다. 거듭 지적하지만 현대 사회의 발전된 생산력은 국가 차원 또는 세계적 차원의 조정과 통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전체 공동체에 우선적으로 충족돼야 하는 필요가 무엇인지, 사회의 잉여 자원을 어느 부문에 우선 투입할 것인지, 만약 인간의 필요 충족과 생태환경의 보전이 충돌한다면 이를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 등등 경제 계획의 수립과 집행을 둘러싼 다양한 정치적 견해와 흐름이 전국 노동자평의회에서 백가쟁명식으로 논의되고 결정될 것이다. 다만 계급사회로의 회귀 시도는 철저히 봉쇄한다는 전제 아래 말이다.

     

    3. 현실이 증명하는 민주적 계획경제의 가능성

     

    자주적 노동자권력이 민주적으로 전체 경제를 운영한다는 것이 결코 공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책이 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 경영학 교수 폴 애들러(Paul Adler)가 쓴 『1%가 아닌 99%를 위한 경제(2021)』란 책이다. 폴 애들러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임한다. 그는 경영학 연구 과정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몇몇 사업체의 경영 방식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고 이를 통해 “민주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두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두 가지 결론이란 사회적 생산과 자원의 배분 문제를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전략적으로 경영”하는 체제를 말한다. 즉 폴 애들러가 말하는 대안 사회에서는 “우선 사회의 주요 생산 자원을 공공의 소유로 둠으로써, 경제의 핵은 하나의 거대한 기업이나 다름없어질 것”이고 “오늘날 경쟁적인 여러 기업은 곧 핵심적인 거대 기업의 부차적인 팀원으로 바뀔 것”이다. 마치 “대기업의 최고경영진이 기업 내 여러 부서를 경영하듯이, 이제 한 팀이 된 경쟁 기업들은 상호의존적 문화를 바탕으로 전략적으로 경영”하게 된다. 구성원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협력”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머릿속 추정이 아니며, 현대 기업 연구를 통해 실증된다고 하는 게 이 책의 핵심이다. 폴 애들러는 자본주의의 초대형 기업 몇 군데를 연구한 경험을 소개한다. 이런 초대형 기업은 웬만한 국민경제 몇 개를 합친 것보다 크다. 예컨대 전 세계에 1만 1,700여 개 소매점을 두고 직원이 230만 명에 달하는 월마트, 매년 약 3억 명의 소비자에게 20억 개에 가까운 제품을 배송하는 아마존 등이 그렇다.

     

    그런데 이들 초대형 기업 내부에서 “원자재 공급부터 최종 완제품 판매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자본주의 시장 경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영자의 전략 경영으로 조정”된다. 앞서 말한 대로 철저한 계획경제가 시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대기업이 조직을 관리하면서 내부적으로 맞닥뜨리는 문제는 우리가 경제를 사회주의적으로 관리하려고 할 때 극복해야 할 문제와 유사”하다. 폴 애들러는 초대형 기업 연구를 통해 계획경제에 대한 오래된 비난을 하나씩 반박한다.

     

    첫째, 시장은 가격을 통해 수요와 공급을 ‘효율적으로’ 조정하는 데 비해, 계획경제로는 절대 이 효율성을 쫓아올 수 없다는 주장은 여전히 타당한가? 아니다. 폴 애들러는 “현대의 컴퓨터 기술은 경제 전반에서 일어나는 생산 및 투자 계획을 충분히 계산해낼 수 있어서 자본주의 시장을 통해서만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주장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실제로 현대 대기업은 ‘전사적 자원 관리(ERP, Enterprise Resource Planning)’와 ‘판매 운영 계획(S&OP, Sales and Operations Planning) 같은 시스템으로 경영 전략을 세우기 위한 모든 기본 자료를 통합해 활용한다. 이미 우리도 오늘 오후에 주문한 상품이 다음 날 아침 배송되는 것을 경험한다. (놀라운 일이다! 물류‧유통 자본은 소비자 수요를 정교하게 예측하고 주문 가능성이 높은 물품을 물류창고에 미리 쟁여뒀단 뜻이다.) AI 기술은 이런 효율성을 한층 더 높일 것이다.

     

    둘째, 계획은 본질적으로 중앙집중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계획경제는 결국 관료적 명령경제로 귀결되지 않겠는가? 즉 미래의 경제 혁신에 꼭 필요한 개인의 창의성은 말살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폴 애들러는 이른바 ‘고차원 기업’에서 행해지는 ‘협력하여 전략 세우기’를 실례로 삼아 이 역시 반박한다. ‘고차원 기업’은 디지털 기술에 기반해 경영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통합한 후, 하위 조직의 목표를 전체 전략과 효과적으로 조율하는 상향식 경영 참여 기법을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 중앙집중적 의사결정과 개별 구성원이 가지는 자율성 사이의 긴장은, 이와 같은 ‘협력하여 전략 세우기’를 통해 실천적으로 해소된다. ‘협력하여 전략 세우기’는 이어 ‘협력하여 혁신 이루기’, ‘협력하여 학습하기’, ‘협력하여 일하기’로 나아간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고차원 기업’에서는 개인과 집단 사이의 상호의존성 기업 문화가 자리 잡는다. 즉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독특하고 다양한 발상이 필요한 상황이더라도, 직원과 기업이 공동의 목표를 공유한다면 개인주의 문화와 집단주의 문화가 충돌하지 않는다. 또한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이 팀에서 결정한 업무 지침을 따라야 하더라도 집단주의 문화는 향상할 기회를 확인하며 도움이 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개인의 창의력을 방해하지 않는다.” 고차원 기업의 어느 구성원은 이를 두고, 개인기에만 의존하던 길거리 농구가 개인 기량과 팀플레이가 융합된 NBA 프로 농구로 바뀌는 것 같다고 비유했다.

     

    이 책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은 아쉽게도 여기까지다. 이어 폴 애들러는 민주사회주의로의 변혁 시나리오로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야기들만 내놓기 때문이다. 그의 첫 번째 시나리오는 파국적인 경제위기가 발생했을 때 “민주사회주의가 절실하다는 시민들의 요구”가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예컨대 파산한 기업과 은행을 정부가 인수하라는 요구 같은 것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기후재앙이 현실화하여 사람들이 2차 세계대전의 전시경제체제와 비슷한 비상체제로 돌입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점진적인 변화”를 통한 민주사회주의의 달성이다. 최저임금 인상, 더 강력한 환경 규제, 보편적 의료보험, 노동자 이사, 무상 교육 등등 사회적 합의를 통해 민주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물론 세 가지 시나리오 모두 실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자본주의의 파국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도 아니며, 그때에도 자본가계급은 노동자 계급의 물리적 강제 없이 자신의 계급적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 민주적 계획경제로 나아가는 노동자투쟁

     

    기후위기뿐 아니라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민주적 계획경제를 실현해야 함은 분명하다. 다만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최대강령이다. 즉 최대강령이란 노동자운동의 궁극적 목표를 가리킨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노동자계급이 단번에 최대강령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민주적 계획경제를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려면, 1강에서 지적했듯이 일상적 투쟁을 통해 준비되고 단련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의 부분적 요구를 담아내는 강령을 최소강령이라 부르는데, 『공산주의 선언』에 명시된 고율의 누진세, 모든 아동에 대한 사회적 무상교육 등이 그 예다. 즉 최소강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실현 가능한 요구들까지 포함된다.

     

    그럼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의 간극은 어떻게 극복되는가? 계급투쟁의 발전을 통해서다. 개량주의자들이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우고자 했다면,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은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분투했다. 트로츠키가 주창한 이행강령 역시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는 측면에서 제기된 것이다.[32]

     

    “일상적 투쟁에서 대중이 사회주의혁명의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가교(假橋)를 놓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가교에는 이행기 요구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 요구들은 현재의 객관적 상황과 광범위한 노동자대중의 의식에 기초하여 제기되면서, 동시에 이들이 노동자계급의 권력장악이라는 단 하나의 최종 결론에 도달하도록 인도한다.

     

    … (제4인터내셔널의) 정치적 목표는 자본가계급 수중의 생산수단을 몰수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적 임무는 모든 전술적 문제들, 심지어는 아주 사소하고 부분적인 전술적 문제들을 가장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서는 달성될 수 없다. 후진층, 선진층, 직업, 집단 등을 망라하여 노동자계급 전체는 혁명운동에 가담해야 한다. 혁명정당은 대중의 일상투쟁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반대로 이 투쟁들은 실제 혁명의 임무와 완벽히 결합한다. 이것이 바로 반동적 자본주의인 제국주의 시대의 특징이다.”[33]

     

    이행강령이 제기된 시대적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자본주의의 위기가 고조됐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혁명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행강령은 대중의 절박한 생존적 요구를 대변하면서 그 자체로 국가권력 장악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오늘날 절박하게 요구되는 긴급 조치들은 민주적 계획경제로 나아가는 이행강령적 성격을 띠게 된다.

     

    1. 노동자 기후파업을 조직하자!

     

    독일의 메가스트라이크

     

    2020년 독일의 기후운동가들은 중대한 고민에 맞닥뜨렸다. 2018년부터 시작된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 FFF)’ 운동이 전략적 공백과 퇴조를 겪었기 때문이다. 한때 ‘금요일 기후파업’ 등을 중심으로, 기후 운동에서는 ‘체제전환(System change)’이라는 슬로건이 유행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실제로는 시민 불복종이라는 상징적인 행동, 혹은 정치 결정권자를 향한 몇 차례 집회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독일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녹색당이 연합한 소위 ‘신호등’ 연방정부는 2021년 출범해 전형적인 녹색자본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연방정부는 기후운동의 상승기에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조치를 약속했지만, 그 대신 기후위기의 비용을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는 ‘긴축 생태’ 정책을 펼쳤다.

     

    이때 기후활동가들이 주목한 것이 바로 노동자운동이었다. 이들은 기후정의 운동에 더 많은 노동자계급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 기후 문제를 노동자들의 일터로 가져가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첫 시도로 기후활동가들은 대중교통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자가용 차량 대신 대중교통의 서비스 질과 이용 편의성을 높여야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버스, 철도 등 대중교통 부문 노동자들은 장시간 교대 근무를 하며 최저임금을 약간 상회하는 급여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청년층의 유입은 줄어들고 퇴직률이 높아 이미 수만 명의 운전자가 부족한 가운데, 교통요금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으며, 특히 농촌 지역의 여객 운송 시스템은 점점 더 축소되고 있었다.

     

    이는 1990년 이래 지속된 공공부문 민영화의 결과다. 1990년대 이후 연방정부는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고 자유화하면서 인력 감축, 업무강도 강화, 불안정한 고용, 소득 감소, 노동조합 약화 등 각종 긴축 조치를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철도 공기업이었던 ‘도이체반’도 1994년에 민간 기업으로 전환되고, 철도 여객 서비스의 상당 부분도 1996년 이후 대부분 민간 공급업체로 넘어갔다. 민영화의 여파 속에서 조직노동자들은 서로 다른 단체와 소속으로 분열되는 등 투쟁의 구심점을 모아내지 못한 채 결속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은 2020년 지역 대중교통 단체교섭에 연대하며, 파업 당일 30개 이상의 도시에서 공공서비스노조(Ver.di)의 투쟁을 방문하고 지원했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은 교통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고자 “#wirfahrenzusammen (#WeDriveTogether) 2020”라는 캠페인을 추진하였다. 이 캠페인을 통해 ‘미래를 위한 금요일’ 활동가들은 파업 노동자들을 위한 구체적인 연대를 조직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승객들로부터 연대 성명서를 수집하고, 정치인들을 만나 노동자들의 요구를 전달했으며, 시민들과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을 조직했다. 심지어 활동가들이 직접 노동자들에게 파업에 나서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2020년 파업을 계기로 여러 도시에서 노동운동과 기후운동의 동맹을 목적으로 하는 공동의 단체들이 설립되었고, 2024년 현재 60개 이상의 도시에서 1,000여 명의 활동가들이 #wirfahrenzusammen 캠페인에 참여하여 대중교통 노동자들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2023년 3월 3일,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전 세계 기후파업에 맞춰 독일 대중교통 노동자들이 함께 파업에 돌입했다. 이날 공공서비스노조는 전국적으로 지역 대중교통 노동자들이 하루 동안 행동할 것을 촉구하고 6개 연방 주에서 경고 파업을 벌였다. 그 결과 최소 30개 도시의 20만 명 이상이 파업에 참여했다. 독일 고용주 연맹(BDA)의 CEO 슈테펜 캄페터는 “노조가 정치파업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며 파업을 비난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자본가들이 사회적 정당성을 갖춘 노동자들의 파업을 극히 두려워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3월 27일, 파업은 이제 전체 운송부문으로 확대됐다. 대중교통 종사자뿐만 아니라 항공, 철도, 수상 운송 종사자들도 파업에 참여했다. 이날 독일 최대 공항인 프랑크푸르트 공항 등 전국 공항에서 항공편 운항이 중단됐다. 전국에서 장거리 열차 운행이 멈췄고, 베를린에서는 도시고속철도 운행이 끊기고, 독일 최대 항구인 함부르크 항도 마비됐다. 한 언론의 표현처럼 독일 안의 “모든 바퀴가 멈췄다(All wheels stand still!).” 대규모 파업에 놀란 사측은 27개월 동안 5% 임금인상과 일시금 2,500유로(약 350만 원) 지급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 내무장관 낸시 패저가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매년 14억 유로(약 1조 9천억 원)가 추가로 든다”며 난색을 표했음에도 말이다.

     

    프랑스 토탈(Total) 정유공장 파업

     

    2021년 1월 4일, 프랑스 그랑퓌 정유공장 노동자들은 석유·가스부문 거대 다국적기업인 토탈(Total)의 정유공장 폐쇄에 맞서 파업에 들어갔다. 토탈은 그랑퓌 정유공장을 왜 폐쇄했는가? 자본이 내세운 명분은 “석유 제로” 전략이었다. 그러나 화석연료 생산을 줄이겠다는 공장 폐쇄 명분은 전형적인 그린워싱이었다. 실상 토탈은 그랑퓌의 정유공장을 폐쇄하고, 원유매장지에서 가깝고 노동조건이 열악하며 환경기준이 느슨한 아프리카 국가 등으로 공장을 이전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탈이 추진하고 있는 우간다 틸렝가 석유 시추 프로젝트와 동아프리카 원유 송유관(EACOP) 건설 사업은 해당 지역의 자연환경과 주민들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1,443㎞ 길이의 송유관이 우간다와 탄자니아의 주요 생태계 보전지역을 가로지르면서 국립공원이 파괴되고, 10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토지를 빼앗긴 채 강제 이주를 당할 위기에 처했다.

     

    토탈 그랑퓌 공장의 노동자들은 자본의 그린워싱에 맞서 일자리를 위한 투쟁과 환경을 위한 투쟁을 묶어내는 광범한 공동전선을 건설했다. 토탈 정유공장 노동자들은 수년 전 정리해고가 관철됐던 라메드 정유공장 노동자들과 만나 소통하고, ‘지구의 친구들’, ‘그린피스’ 등 기후·환경운동 단체와 접촉했다. 기후·환경운동가들은 화석연료 자본과 맞서는 투쟁에 매우 흥분했고, 이를 계기로 형성된 노동자와 기후운동의 결합은 파업의 큰 동력이 되었다.

     

    노동자들은 투쟁 속에서도 에너지·산업 전환에 관한 토론을 이어 나가며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다국적기업의 손으로 친환경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들은 “노동자들이 공장의 통제권을 장악하면 오염을 덜 일으킬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윤 본위의 생산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를 위한 생산이라면 생태적 한계를 유지하고 공동체를 존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메가스트라이크, 프랑스 토탈 그랑퓌공장의 파업 모두 기후정의 운동과 노동자운동이 결합했을 때 얼마나 큰 성과를 낼 수 있는지 보여준 실례다. 결국 자본가들을 물러나게 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가진 물리적 힘이기 때문이다. 또 노동자운동은 기후정의를 내세워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의 기후정의 운동도 노동자운동과의 결합이라는 관점을 전면화해야 한다. 이를테면 노동 현장에서 노동안전 투쟁은 그 자체로 기후정의 투쟁이 될 수 있다. 폭염, 폭우, 혹한과 같은 기후재난에서 노동자가 죽지 않고 일하기 위해서는 작업중지권 보장, 노동시간 단축 및 충분한 휴게시간 보장, 냉난방 등의 조치가 시행돼야 한다. 현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조건을 자주적으로 통제해야 하며, 이는 그 자체로 기후정의를 위한 투쟁의 성격을 가질 것이다.

     

    2. 기간산업 국유화와 노동자 통제

     

    기후재난 시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기간산업에서 즉각적으로 자본의 소유권을 몰수하고 이를 국유화하는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다. 우선 에너지산업을 국유화해 재생에너지 전환을 전면화하고 노동자 민중의 필요와 계획에 따른 에너지 생산으로 대체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 민중의 기본권인 에너지 생산마저 이윤 창출의 수단으로 악용한다. 한국에서 전체 발전의 30%는 민간자본 발전사가 담당한다. 천연가스 직수입을 악용해서 엄청난 돈을 버는 SK, GS 등 재벌 발전사도 그중 일부다. 한국전력공사는 재벌 발전사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비싼 값에 전기를 구매하고, 여기서 발생한 적자를 노동자 민중의 전기요금 인상으로 해결한다. 더욱이 저들은 안정적 이윤 생산을 위해서라면 위험천만한 핵발전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의 무분별한 행태를 제어하자면 에너지산업의 각종 소유권을 몰수하고 국유화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제철, 조선 등의 제조 분야, 철도, 버스 등 대중교통 분야 등 탄소 배출량이 높은 각종 기간산업 역시 국유화해야 한다. 이들 기간산업에서도 경쟁의 압력에 놓인 개별자본은 사회 전체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윤 획득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간산업의 재벌은 그동안 비정규직·사내하청 확대 등으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한 것을 넘어, 중소기업, 소상인 등 광범위한 노동자 민중을 수탈하며 천문학적인 이윤을 벌어왔다. 기간산업의 국유화는 해당 분야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을 방어하는 것은 물론 사회에 대한 재벌의 문어발식 수탈을 막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기간산업을 국유화함으로써 이윤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필요에 맞춘 계획적 생산을 도모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회가 기후재난에 대응하기 위한 기본 전제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국유화된 기간산업을 노동자계급이 자주적·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만 국유화된 산업은 노동자 민중의 필요를 충족하는 계획적 생산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 속의 공기업들이 사기업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해고 등 악랄한 착취와 억압을 자행하는 것을 수차례 목격해 왔다. 기간산업을 국유화하더라도 이것이 단지 기업의 경영권을 민간 자본가에서 국가 관료의 탈을 쓴 자본가에게 양도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국유화는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게 된다.

     

    해당 산업을 실질적으로 운영해 온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역량을 넘치게 발휘해 해당 산업의 생산체계를 사회 전체의 필요를 위해 합리적으로 재편할 것이다. 기간산업 노동자들로 구성된 산업통제위원회는 이윤 생산에만 도움이 될 뿐 기후위기 대응에는 무의미한 낭비적 생산 분야를 즉각 폐지할 것이며,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수렴하여 전기, 대중교통 등 필수 공공서비스 요금을 체계적으로 낮출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 통제의 경험은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수단이다. 노동자 통제를 통해 노동자계급은 민주적 계획경제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체계적으로 습득하고 발휘하게 된다. 이것은 기생충에 불과한 한 줌 자본가계급을 완전히 청산하고, 이윤 대신 사회적 필요를 위한 합리적 경제체제를 건설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

    = 마르크스, 「고타 강령 초안 비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4권.

    =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 레닌, 『국가와 혁명』

     

    [미주]


    [1] 보통 때의 모양이나 형편.

    [2]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세계기상기구(WMO)와 유엔환경계획(UNEP)이 1988년에 공동 설립한 국제기구로,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한다.

    [3] “It is unequivocal that human influence has warmed the atmosphere, ocean and land. Widespread and rapid changes in the atmosphere, ocean, cryosphere and biosphere have occurred.”

    [4] 칼 마르크스, 『자본』 1권,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333쪽.

    [5] 칼 마르크스, 앞의 책, 381쪽.

    [6] 다음 기사도 참조할 만하다. 박기용, “가속을 멈춰라, 달팽이처럼 기어서 가자”, <한겨레21> 2023년 4월 13일, https://h21.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53695.html

    [7] 사이토 고헤이의 정의에 따르면, ‘탈성장 코뮤니즘’이란 “정상(定常)형 경제에 근거한 지속 가능성과 평등이 자본주의에 저항할 거점이 되어 미래 사회의 기초”가 된다고 보는 “평등하고 지속 가능한 탈성장형 경제”다.

    [8] 마르크스‧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러시아어판 서문(1882년),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9] 엥겔스, 「러시아의 사회상태」,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4권.

    [10] 3.1 운동보다 불과 수십 년 앞섰던 1862년 임술농민봉기, 1894년 갑오농민전쟁 등이 삼남 지역만으로 제한됐던 것과 확연히 비교된다.

    [11]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12]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김성훈 옮김, 갈무리, 제5장. ‘소련에서의 테르미도르 반동’

    [13] 마르크스, 『자본』 1권,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811쪽 이하.

    [14] 마르크스, 앞의 책, 851쪽.

    [15] 요로고스 칼리스가 말하는 페미니즘은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와 같은 생산관계와 무관하게 존속해 왔다고 보는 페미니즘이며, 자본주의의 핵심을 임금노동 관계에서의 ‘착취’가 아니라 ‘약탈’로 보고 자급자족 경제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페미니즘이다.

    [16] 마리아 미스‧반다나 시바, 『에코페미니즘(개정판)』, 17장 ‘소비자해방’.

    [17] 마르크스, 『자본』 1권,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810쪽.

    [18] 레닌, 『국가와 혁명』, 김영철 옮김, 제4장. ‘보론: 엥겔스의 보충 설명’

    [19]  <똥파리와 인간> - 김남주

    똥파리에게는 더 많은 똥을 / 인간에게는 더 많은 돈을 /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

    똥파리는 똥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 떼지어 붕붕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 시궁창이건 오물을 뒤집어쓴 두엄더미건 상관 않고 //

    인간은 돈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 무리지어 웅성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 범죄의 소굴이건 아비규환의 생지옥이건 상관 않고 //

    보라고 똥없이 맑고 깨끗한 데에 가서 / 이를테면 산골짜기 옹달샘 같은 데라도 가서 /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떼지어 사는 똥파리를 //

    보라고 돈 없이 가난하고 한적한 데에 가서 / 이를테면 두메산골 외딴 마을 깊은 데라도 가서 /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인간을 //

    산 좋고 물 좋아 살기 좋은 내 고장이란 옛말은 / 새빨간 거짓말이다 똥파리에게나 인간에게나 / 똥파리에게라면 그런 곳은 잠시 쉬었다가 / 물찌똥이나 한번 찌익 깔기고 돌아서는 곳이고 / 인간에게라면 그런 곳은 주말이나 행락철에 / 먹다 남은 찌꺼기나 여기저기 버리고 돌아서는 곳이다 //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게 별 것 아닌 것이다 / 똥파리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이다

    [20] 마르크스, 『자본』 1권,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140쪽.

    [21] 이하 엥겔스의 글은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22] 눈치챈 사람들이 있겠지만, 정말 사회주의자들이 배워야 할 실용 지식이 아닐 수 없다….

    [23] 마르크스, 『자본』 1권,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142쪽.

    [24] 이하, 마르크스, 「고타 강령 초안 비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4권.

    [25] “한 사회가 그 부를 동일한 규모로 재생산하거나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1년 동안에 소비된 생산수단[즉 노동수단‧원료‧보조재료들]을 새로운 물품의 일정량―연간 생산물에서 따로 떼어내 다시 생산과정에 투입하는 양―에 의하여 현물로 보전해야 한다.” 마르크스, 『자본』 1권,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777쪽.

    [26]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과학적 차별성은 명료하다. 현재 흔히 사회주의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것을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의 ‘첫째’, 또는 낮은 국면이라고 개념 규정했다.” 레닌, 앞의 책, 제5장. ‘국가사멸의 경제적 토대’.

    [27] 한편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공산주의 사회에 이르러서야 국가가 사멸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던 점도 주목하라. “‘보다 높은’ 국면의 공산주의가 도래하기까지는, 노동정책과 소비정책에 대한 사회와 국가의 엄격한 통제가 요구된다 … 이 통제는 자본가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의 수립과 함께 자본가들이 지니고 있던 생산수단의 몰수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관료로 이뤄진 국가가 아닌 무장한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에 의해 실행되어야만 한다.”, “소비재의 분배에 관련하여 부르주아적인 권리는 불가피하게 부르주아 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데, 왜냐하면 권리란 권리의 기준에 대한 준수를 강제할 수 있는 장치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28] 마르크스, 『자본』 1권,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100쪽.

    [29] 이하 그룹스카야, 『레닌의 회상』, 일월서각, 1986, 352쪽.

    [30] 빅토르 세르주, 『러시아 혁명의 진실』, 제3장. ‘도시 중간계급 대 프롤레타리아트’.

    [31] 이하는 토니 클리프, 『레닌평전 3 – 포위당한 혁명』, 4.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재인용

    [32] 최대강령, 최소강령, 이행강령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라. 최영익, ‘오늘날의 사회주의 강령-최소강령, 최대강령, 이행강령’ https://nht.jinbo.net/bbs/board.php?bo_table=online1&wr_id=632

    [33] 트로츠키, 「이행기강령 –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 『사회혁명을 위한 이행기 강령』, 풀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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