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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을 만나다#3] "해결이 안됐는데 냅두고 갈 순 없잖아요" 호랭이 글우 동지를 만나다12.3 내란 이후,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는 많은 말벌동지들을 만났다. 4월 4일 윤석열이 파면된 뒤에도 많은 ‘말벌동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때로 노동조합원이 되기도 하고, 때로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기도 하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왔을까? 그 전에 이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 이들은 왜 광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같은 대오에 섰을까? 대선 시기에 들어서며, 광장에서 우리가 외쳤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중집에서 민주당 지지안건 통과를 시도했고, 이미 전현직 간부와 단위노조의 민주당 지지가 줄지어 벌어졌다. 민주노총을 믿고 투쟁했던 말벌 동지들은 이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지금도 고공투쟁중인 3개의 투쟁사업장을 비롯해 여러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고 있는 말벌동지들 중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세 번째 인터뷰이는 글우 동지다. 최근 세종호텔 투쟁문화제에 왔다면 ‘세종호텔 호랭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글우 동지가 호랑이 탈을 쓰고 세종호텔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을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생일파티로 시작된 세종호텔과의 인연을 끈질기게 이어가고 있는 글우 동지는 어떤 과정을 통해 노동운동을 함께 하게 되었을까? 광장이라는 두 글자로 압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글우 동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Q1. 12·3 내란사태 이전에도 사회의제나 활동에 관심이 있으셨다면, 주로 어느 방면에서였나요? 집회에 참여해본 적이 있으셨나요? 혹은 아예 없으셨나요? 처음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오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광장 집회는 이번에 처음 나온 게 맞고요. 그 전에 집회, 시위에는 다녀본 적이 잘 없었어요. 예전에 혜화역에서 불법 촬영 반대집회나 미투운동 할 때 잠깐 참여했었는데, 제가 원래 연극 뮤지컬을 좋아해서 혜화역에 자주 방문하고, 가깝기 때문에 참여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거 외에는 솔직히 없었던 것 같아요. 12.3 내란 이후에는 언제 처음 나왔나요? 내란 터진 그 주의 주말 집회가 처음이었어요. 친구들끼리 같이 갔었는데, 그때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9호선을 타러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는데,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요. 내려서 걸어갈 때도, 도착했을 때도 사람이 정말 많았고요. 사실 저는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고, 그런 곳을 잘 가지도 않는지라 그런 인파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는 ‘선결제’가 많아서 친구들이랑 국회로 가는 길에 누군가 선결제해준 음식을 수령해서 먹기도 했어요. 그 외에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는데, 너무 오래 되어서 멀게 느껴져요. 그리고 심각한 상황이라는 건 인지하지만, 친구들과 먹고 떠들고 하느라고 그렇게 무거운 느낌은 아니었던지라 크게 기억에 남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이미 오래 전처럼 느껴지는군요. 세종호텔 투쟁, 혹은 넓게 보면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사안에 대해서 12.3 내란 이전에 무언가 알거나 또는 관심을 가지거나 그런 적이 있나요? 사실 알지 못했고, 제가 관심도 없었던 것 같아요. 아, 퀴어퍼레이드 행진할 때 세종호텔을 지나갔는데요, 그때 세종호텔 동지들이 피켓 만들어서 연대해줬잖아요. 저도 그때 같이 행진하면서 봐서 기억은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찾아보거나 하진 않았어서 제대로 모르고 있었죠. 퀴어퍼레이드나, 불법촬영 반대시위 등 페미니즘, 퀴어 의제와 연관된 일들에 참여하곤 하셨었군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요? 제가 참여하는 무언가는 다 저랑 가깝기 때문에 간다고 생각해요. 불법촬영도 여성들이 주로 겪었던 것이고, 저랑 멀리 떨어진 게 아니잖아요. 혜화역은 제가 자주 가는 곳이기도 하고. 그래서 더 쉽게 접하고 참여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내란 이전에는 참 무지했다고 느끼기도 했고... 왜 몰랐고, 왜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자주 했어요. 지금도 사실 제가 가까운, 다닐 수 있는 곳들을 다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세종호텔은 어떻게 처음 알게 됐어요? 내란 이후 연대 시민들이 문화제에 참여하는 트윗을 보고, 세종호텔에서 매주 목요일에 문화제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세종호텔에 처음 가게 된 건 제 생일날 주간의 목요문화제였고, 다음날인 금요일이 생일이어서 농성장에 생일케이크를 들고 가서 먹었어요. 사실 ‘꼭 세종호텔에서 먹어야겠다’라는 생각이 있던 건 아니고, 그 전에 크리스마스날에 광장 집회에서 어느 분이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가져와 나눠 드셨다는 트윗을 봤는데, 그게 저는 너무 부럽고 좋아보였어요.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맛있는 걸 나눠 먹고, 함께한다는 게 아름다워서요. 제 생일날에도 함께한다면 저에게 의미 있는 생일날이 될 거라고 생각했고요. 세종호텔에 왔다가 ‘아 그래 이렇게 싸우는구나’ 하고 그냥 돌아갈 수도 있잖아요. 근데 왜 이렇게 계속 나오게 된 건가요? 그냥 돌아가는 경우는 상상이 안 가요. 생일날 저녁에 3시간 동안 농성장에 있으면서 세종호텔 동지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투쟁이 있었는지 고진수 동지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가 많이 와닿았는데요. 기사와 선전물의 글도 봤지만, 글로만 읽을 때는 누군가의 투쟁이라고 생각했다면, 투쟁 당사자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더 이상 누군가가 아닌 내 앞에 있는 동지의 투쟁이라고 느꼈고, 연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연대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엄청난 걸 하겠다는건 아니고 그냥 ‘목요문화제를 열심히 참석하고, 세종호텔 투쟁을 알려야겠다’ 정도를 생각했던 것 같은데... 진수 동지가 고공농성을 시작하고 나서는 일주일에 7일을 세종호텔에 가게 됐죠. 저는 원래 정이 많은데, 그래서 이렇게 계속 나오게 되는 것 같아요. 동지들이 이렇게 투쟁하고, 사람이 고공에 있는데 그냥 두고 살아갈 수는 없어서요. Q2.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오고 난 후로 스스로 가장 변화했다고 느끼신 지점은 어떤 것이었나요? 혹시 그것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정치적 입장과도 연관이 있다면, 조금만 더 자세히 들려주세요. 바뀌긴 했는데, 정치적으로는 잘 모르겠어요. 물론 정치에 대해서 그 전보다 좀 더 관심을 갖게 된 건 있지만요. 저는 원래 누구랑 다투는 것도 싫어하고, 싸우는 것도 싫어하고, 분쟁이 일어나는 것도 싫어해요. 그래서 말하는 걸 잘 못하기도 하고, 보통 ‘그냥 내가 참고 말지’ 했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의 문제는 이제 그렇게 안 넘어가고 싶더라고요. 누군가 그런 싸움이 필요하다 하면 함께 싸울 생각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투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해요. 예전엔 잘 행동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최근에 집에 가는데, 인도에서 오토바이 타신 분이 넘어지셨어요. 옛날 같으면 지켜보다가 그냥 갔을 것 같은데, 지금은 먼저 달려가서 돕게 되는, 그런 행동이 바뀐 것 같아요. 지금은 전보다 예민해진 것 같아요. 예민하면 피곤하잖아요 솔직히. 그래서 예전에는 좀 둔감하게 살려고 했고. 지나가다가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도, 한두번 힐끔거리다가 그냥 갔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한 번 더 신경 쓰게 되고, 어떤 상황인지 알려고 행동하게 된 것 같아요. ‘세상에 지지 말아요’ 노래가 생각이 나네요. “좀 더 예민하게 세상을 봐요”라는 가사가요. Q3. 윤석열 퇴진 광장 속에서 대안을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개중에서도 노동자들,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좀 더 이끌리시게 된 이유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특별히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이끌렸던 건 아니긴 해요. 원래는 성소수자와 장애인 인권운동 쪽에 관심이 많았는데, 세종호텔 동지들과 함께하다 보니까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제가 하는 투쟁이, 그렇게 노동자 투쟁에 국한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다니는 거 보면 그런 것 같긴 하네요.(웃음) 넓고, 다양한 문제들에 연대하고 싶은데, 투쟁은 많고 시간과 체력은 한정되어 있는걸 느끼곤 해요. Q4. 결국 윤석열은 노동자민중의 이름으로 파면을 선고받았습니다. 윤석열 파면 광장도 일단락되며 퇴진 이후를 향해가는 사회대개혁의 광장이 새로이 열렸고요. 그러나 혹시 개인적으로 평가하시는 윤석열 퇴진 투쟁에서의 가장 아쉬운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혹은 파면 이후 조직된 노동자 운동(민주노총)에 바라는 점 또는 조직된 운동(민주노총)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되는 길이 있으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어느 순간 편 가르기가 되던 게 제일 아쉬웠던 것 같아요. ‘왜 응원봉을 갖다 쓰냐’, ‘퀴어를 갖다 붙이냐’ 같은 말들. 트위터에서 ‘퀴어 얘기하느라고 여성을 얘기 안 해준다’ 뭐 이런 말들이 나오는 게 저는 사실 너무 이해가 안 가고 답답했거든요. SNS에서 사람들이 많이 싸우잖아요. 계정 뒤에 사람이 있는 걸 모르는 것처럼 공격적인 말과 혐오발언이 너무 많았어요…그런 글들을 보면서 좀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할까’라고 고민도 해봤지만 이해할 수 없었고요. 민주노총은 양경수 위원장이 루프탑 파티를 한다는 걸 보고 정말 실망했었어요. 음식도 틀리고, 날짜도 틀리고, 장소도 틀리고. 세 가지가 다 틀려가지고. 비건 동지들도 있는데, 바베큐 파티에다가, (고공투쟁사업장 집회를 하는) 목요일이고, 루프탑에서. 그런데 글이 올라오고나서 많은 동지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냈는데도, 그 비판점에 대해서 ‘문제가 없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것도 참 화가 났어요. Q5. 최근 민주노총 중집에서의 대선방침 논의 이후 민주노총 전체 차원에서의 민주당과 정책협약 시도가 언론화되며 뜨거운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의 직전에 진보당 김재연 후보의 민주당 단일화가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요. 동지께서는 보수양당과 구분되는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시나요? 마지막 질문이 ‘사회주의를향한전진’에 대한 생각이잖아요. 그 질문을 보고 전진이 어떤 곳인지 잘 몰라서,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글을 읽어봤었거든요. 거기에 당을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써 있던데 ‘사회주의노동당’이 만들어지면 괜찮지 않을까요?(웃음) 어떤 의미에서 괜찮을 것 같나요?(웃음) 필요하다고 생각하긴 해요. 민주당이나 다른 정당에서 해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제가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부분이어서, 질문을 듣고도 생각나는 의견이 없더라고요. 현재의 노동자 권리가 너무 낮고,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많아서, 그것에 대해 정치적으로 운동을 하려면 확실히 당이 있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전진이랑 민주노동당은 생각의 차이가 꽤 있는데, 민주노동당도 나름대로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얘기하고, 그래서 지금 민주당과 단일화 안 하고 따로 가고 있잖아요.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원래 정치에 대해서 관심이 진짜 없어가지고 잘 모르겠는데, 현장을 다니다 보면은 노동당 조끼나, 녹색당 대표님이나 이런 분들 많이 보잖아요. 오늘도 팔레스타인 집회에 있으셨고. 그런 걸 보면서, 투쟁현장에 어떤 정치인이 오고 또 발언해주는 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은 들어요. 그런 당을 지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요. 근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어떤 정당에서 정치인이 와서 ‘투쟁을 지지해준다’라는 게 중요하다고 보지는 않고요. 거꾸로 투쟁하는 사람들이 잘 뭉치고 모여서, 그 힘을 바탕으로 당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투쟁하는 이들이 주체가 되는 당인 거죠. 이들의 요구가 당의 요구가 되고요. 당은 계급투쟁의 한 가지 수단인 거죠. 그래서 정치인이 그 자체로 어떤 힘을 갖고 있어서, 그 힘을 주기 위해 지지하러 오거나, 도와주러 오거나, 이런 게 아니라 투쟁의 힘이 정치적 형태로 표현되면 그게 곧 당이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당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가장 최종적으로 좋을 것 같긴 하네요. 지금은 일단 그런 당이 없다 보니까… 아직 그런 당이 존재하지 않아서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해봤던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좋을 것 같아요. Q6. 모두가 ‘사회대개혁’을 이야기합니다. 윤석열 퇴진 이후를 그리는 상도 저마다 각기 조금씩은 다른 만큼, 그 디테일의 차이도 천차만별인데요. 윤석열 파면 이후 ‘사회대개혁’을 말할 때, 동지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부분 또는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들려 주세요. 거시적으로 말하면 ‘모든 차별과 배제가 없는 평등한 세상’이라고 생각하고요. 그걸 이루기 위해 제가 투쟁이나 집회에 나간다고 생각해요. 부당해고 당하거나, 피해 받은 노동자 분들이 복직하고, 투쟁사업장들 문제가 제대로 해결돼야 하고, 차별금지법도 당연히 제정돼야 하고, 장애인 이동권, 탈시설 권리도 보장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미 광장에서 저희가 다 외쳤던 거잖아요. 근데 해결된 게 윤석열 탄핵밖에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긴 해요. 그리고 윤석열 탄핵되고 일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다는 게, 참 아쉬운 것 같아요. 동지는 앞으로 어떻게 활동하실 계획이세요? 활동이요..?(웃음) 계속 연대는 다니겠죠. 근데…잘 모르겠어요. 요즘은 ‘어떻게 해야 될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어요. 해결된 문제가 별로 없고, 진행상황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이게 참 답답하는 생각이 종종 들어요. 사실 제가 뭔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어서, 방안을 혼자서 생각해 보다가도, ‘내가 생각해서 답이 나오는 문제라면 이미 (세종호텔) 공대위 쪽에서 뭔가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도 했어요. 나름대로 집회에 참여하고, SNS도 열심히 올리고 있긴 하지만, 가끔 ‘내가 하는 일들이 도움이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어떻게’라는 질문이 계속 머리를 맴도시는군요. ‘어떻게 하면 고진수가 이겨서 내려오나’ 그게 가장 크죠. ‘일단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이면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주변 친구들한테 많이 얘기하긴 하거든요. “세종호텔 놀러와라, 명동와라” 근데 잘 안와주더라고요. 쉽지 않더라고요. 답답하고, 해결될지도 잘 모르겠고, 그런데도 계속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요? 해결 안 됐으니까 하는 거 아니에요?(웃음) 그렇다고…냅두고 갈 순 없잖아요. 우문현답이네요. Q7. 마지막 질문입니다! 혹시 사회주의를향한전진 동지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이나 소감이 있다면, 남기지 말고 전부 들려주세요. 어렵네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어요. 들어가서 단체 소개도 읽고, 홈페이지를 봤는데 이것저것 많은 글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왜 이렇게 정리를 해놓고 홈페이지 홍보를 안 했을까’라고 생각을 했고요. 진다 동지한테 얘기하니까 ‘그 사람들은 후원계좌도 홍보를 안 한다’고 얘기해 줬어요. 전진이 뭐하는 집단인지 모를 때부터 전진 멤버들은 많이 봤던 것 같아요. 제가 고진수 동지랑 처음 봤을 때 이청우 동지도 봤었고요. 양동민 동지도, 정은희 동지, 백종성 동지도 전진 소속이시고. 그래서 ‘주변 동지들 중에 전진 소속이 많구나. 뭐 하는 데인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리고 광장에서 부스가 되게 구석에 있더라고요. 한번 봤었는데, 너무 구석에 있어서, ‘왜 저렇게 안 보이는 곳에다 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안 보이는 데 있는 거를 눈여겨 봐주셨네요. 깃발이 커다랗고, 무지개였어서 잘 보였어요. 좀 더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게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전진이 어떤 단체고, 어떤 걸 하는지. 홈페이지 들어갔다가 트위터의 여성뉴스브리핑 계정을 알게 되어서 구독하고 기사 잘 읽고 있습니다. 근데 팔로워가 14명이더라고요.. 사람들이 많이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많은 투쟁 사업장들도, 전진 단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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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여성뉴스 브리핑] 탄핵 후 첫 서울퀴어퍼레이드, 노동자 안에 퀴어 있다!1. 탄핵 후 첫 서울퀴어퍼레이드, 노동자 안에 퀴어 있다! 사진 출처: 신유아 6월 14일, 서울 도심에서는 성소수자 자긍심의 날, 서울퀴어문화축제의 메인 행사인 퀴어퍼레이드가 ‘우리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슬로건으로 개최되었다. 무지개 행진차량과 깃발과 피켓, 다양한 소품과 장신구로 행진에 나선 성소수자와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3km를 행진하며 성소수자의 인권을 열렬히 옹호하고 자긍심을 만끽했다. 주최 측은 이날 전체 행사 참여자를 17만 명으로 추산, 역대 최대 인원을 기록했다. 이번 서울퀴어퍼레이드(이하 퀴퍼)가 예년과 다른 점은 단연 행진 1호 차량이었다. 1호차는 고공농성 투쟁을 벌이고 있는 노동조합 투쟁사업장인 세종호텔지부,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세 곳이 함께 이룬 차량으로 투쟁하는 노동자와 말벌대오, 팔레스타인 연대대오가 합류하는 차량이었다. 무려 100m가 넘는 행진 대오는 ‘노동자 안에 퀴어 있다, 퀴어 안에 노동자 있다’라는 타이틀과 거통고의 연대투쟁호를 앞세우며 노동자 운동으로 성소수자 인권 보장 운동을 해 나가자며 선두에서 대오를 이끌었다. 퀴퍼 행렬을 이룬 참가자들은 거통고 고공농성장 앞을 지나며 “김형수 힘내라!”라고 외쳤고, 2022년부터 매년 퀴퍼를 응원한 세종호텔 농성장 앞을 지나며 “고진수 힘내라”라고 외쳤다. 옵티칼 국민청원 서명은 퀴퍼 참가자들이 서명에 대거 참여하면서 폭넓게 알려져 35시간 만에 1만 5,000명 서명을 추가로 조직해 5만 명을 달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퀴퍼 주최 측에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 부스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동조하는 영국와 독일대사관이 참여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참여하지 않았고 어떤 국가기관도 성소수자 인권 보장과 차별금지법 제정에 나서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처음으로 질병관리청이 부스에 참여해 HIV바이러스 감염 예방을 홍보하기도 했다. 그리고 젠더폭력 가해자인 고 김기홍(전 제주퀴어문화축제 공동조직위원장)에 대해 서울퀴어문화축제와 전국퀴어문화축제연대가 조사 중이라는 이유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고 김기홍을 추모하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피켓을 든 참가자가 적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연대 단위는 부스 행사장 입구에서 퀴어 팔레스타인 연대 서명과 선전전을 벌이기도 했다. <참조 기사>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5061415570849598 https://www.hani.co.kr/arti/society/rights/1202803.html 2. 요양보호사 지원 축소, 인력난 심화 부추기는 정부 정책 정부가 요양보호사의 인건비 등을 지원하는 제도를 폐지 혹은 변경하면서 일선 현장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올해 1월 요양보호사 배치 기준을 입소자 2.3명당 1명에서 2.1명당 1명으로 강화하는 동시에 2011년부터 시행해 온 ‘요양보호사 추가배치 가산제’를 폐지했다. 이로 인해 기준 이상 인력을 고용한 시설에 지급되던 인건비 지원금이 전면 중단됐다. 또한 고용노동부는 요양보호사 자격 취득 제도도 바꿨다. 기존에는 내일배움카드를 통해 교육비의 45%를 지원했으나 올해부터 교육비의 90%를 수강자가 선납하고, 6개월 이내 취업 후 180일 이상 근속해야 환급받을 수 있게 됐다. 한층 까다로워진 지원 기준으로 인해 요양시설은 인력감축 압력에 직면해 있고, 교육기관은 수강생 이탈을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다. <참조 기사> https://www.woman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6757 3. “불안한 체류, 저임금, 열악한 노동권”…외국인 가사관리사 사업 실태조사 결과 발표 사진출처: 공항사진기자단, 경향신문>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에 참여한 필리핀 돌봄 노동자들이 불안정한 체류자격 및 과도한 가사 업무, 저임금과 불안정한 노동시간 등 심각한 문제를 겪은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특별시의회와 이주가사돌봄연대는 지난 12일, 국제가사노동자의 날 기념토론회를 개최하고,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은 지난해 9월부터 올해 2월 말까지 서울시와 고용노동부가 시행했다. 서울특별시의회와 이주가사돌봄연대는 토론회를 통해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에 참여한 필리핀 돌봄노동자 21명을 심층조사한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참여자들은 체류 불안정성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이들은 비전문인력 이주노동자 채용을 위한 비자인 고용허가제(E-9 비자)로 입국했다. 고용노동부는 외국인 가사관리사의 비자가 3년까지 연장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다른 고용허가제 노동자(4년 10개월)보다 2년 가까이 짧은 기간이다. 이마저도 실제 연장기한은 3개월~1년에 그쳤다. 참여자들은 “업체가 비자로 위협한다”, “추방될까봐 두려웠다”라고 증언했다. 또한 아동 돌봄전문가로 입국했지만 실제로는 가사돌봄업무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참여자 가운데 A씨는 “고객 2명 중 1명의 고객 집에서만 케어기버(돌봄전문가)로 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B씨는 “온 집을 다 청소한 다음에야 아이들을 돌볼 수 있다”고 증언했다. C씨는 “계약을 맺을 때는 아이 돌봄 계약에 사인했지만, 지금까지 아이를 하나도 돌보지 않았다”고 전했다. 임금도 최저시급을 적용받지만 주거비, 보험, 휴대폰비, 소득세 등 공제액을 제외한 실수령액은 90만~130만 원에 그쳤다. 반면 업무는 명확한 경계 없이 확장됐다. 일부 노동자들은 고용주 가족의 친척 집까지 가서 청소를 하고, 아이들의 영어교육을 지도하는 경우도 다수 있었다. 심지어 아이가 자는 동안에도 부모와의 영어 회화를 계속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추행과 성희롱 피해를 당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미애 서울대 아시아이주센터 공동연구원은 “필리핀 돌봄노동자들의 문제는 개별 사례가 아닌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라며 “체류 안정성 보장, 노동권 강화, 양질의 돌봄 일자리 창출을 통한 지속가능한 돌봄체계 구축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김혜정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사무처장은 “‘저임금의 이주가사돌봄노동자’에서 돌봄 문제의 대안을 찾을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평등한 돌봄으로의 제도개선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참조 기사> https://www.khan.co.kr/article/202506121654001 4. 성소수자 청소년 10년 숨죽인 통계, 공공이 손 놓고 있다 한국 사회는 성소수자 청소년의 절박한 외침을 제대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비영리 민간단체 ‘띵동’이 설립 10주년을 맞아 밝힌 안타까운 사실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띵동’의 성소수자 청소년 상담이 500건을 넘어섰다. 성소수자 청소년 가운데 대다수는 학업은 물론 생존을 위협받는 수준의 차별, 혐오, 고립을 겪고 있다. 공공 차원에서 이루어진 성소수자 청소년에 대한 실태조사는 지난 2015년 국가인권위의 조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소년의 92%가 “차별·괴롭힘이 두려워 자신의 정체성을 숨겼다”라고 응답했고, 80% 이상이 교사·또래로부터 혐오 표현을 들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후 정부는 더 이상 이들의 실태를 파악하지 않았고, 구체적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성소수자 청소년이 ‘언제, 얼마나’ 존재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고립을 방치하고 있는 현실이다. ‘띵동’의 상담 건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자해 또는 자살 위기에 몰린 청소년 또한 매년 30명가량에 이른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가정과 학교, 더 나아가 사회에서 ‘없는 존재’로 취급된다. 이들의 정체성은 부정되거나 놀림거리가 되고, 정부 차원의 조사나 현황 파악은 없는 실정이다. 여러 연구는 성소수자 청소년이 일반 인구보다 자살시도율과 자살성 사고의 빈도가 높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성소수자는 그 어떤 통계에도 포함되지 않듯 자살 관련 통계에서조차 비가시화된다. 정부의 자살예방 기본계획에는 성소수자 청소년이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국가가 성소수자 인권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제라도 정부와 사회가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을 허물어야 할 때다. 미래 세대인 청소년이 차별과 불평등에서 벗어나도록 인권과 안전을 보장받도록 공공이 책임을 다해야 한다. <참조 기사> https://www.ytn.co.kr/_ln/0103_202506150513432275 5. 유럽 수천 명 시위대, 가자지구와 자유 항해단을 위해 나서다 6월 9일, 12명의 ‘자유항해단(la flottille de la liberté)’ 수천 명이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전역에서 시위에 나섰다. 그 이유는 활동가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체포되고 가자지구에 대한 군사 압박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가자 해안 57km 해상에서 봉쇄를 뚫기 위해 항해 중이던 구호선 매들린(Madleen)의 억류에 대해서도 항의했다. 파리에서 시작된 시위는 툴루즈, 스트라스부르, 브뤼셀 등 여러 도시에서 자발적인 연대 시위로 이어졌다. 이스라엘은 최근 가자지구 주민들을 라파 지역에 몰아넣은 뒤 대규모 폭격과 식량 봉쇄를 통해 사실상의 집단학살을 감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구호물자 전달조차 군대나 무장 세력의 약탈 대상이 되며, 민간인을 향한 총격도 발생했다. 그런데도 유럽 주요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며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을 외면했다. 이런 침묵 속에서도 항만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계급적 연대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포쉬 쉬르메르와 이탈리아 제노바의 항만 노동자들이 이스라엘로 향하는 무기 수송을 막았으며, 이는 학살을 멈추기 위한 노동계의 실천적 가능성을 보여줬다. 거리 시위를 넘어선 조직된 총파업과 집단행동이 지금, 절실하다. <참조 기사> https://www.revolutionpermanente.fr/Des-milliers-de-manifestants-pour-Gaza-et-la-flottille-de-la-liberte-construisons-une-mobilisation 6. 인도 사탕수수 노동자들, 자궁적출 수술 강요에 분노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의 활동가들이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자궁적출 수술을 받도록 여전히 강요받고 있다고 밝혔다. 여성 노동자들이 자궁적출 수술을 강요받는 이유는 생리통 없이 더 오래 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여성 노동자들은 직접 손으로 사탕수수를 수확하고, 모으고, 들어 올려 트럭이나 트랙터에 싣는 등 장시간의 고된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받는 임금은 하루 4파운드(약 7,000원)도 안 되는 저임금이다. 거기에 결근이나 작업 누락 시 벌금까지 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측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자궁적출술을 받도록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2019년, 마하라슈트라 주 NGO들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마하라슈트라 주의 주요 사탕수수 생산지 중 하나인 비드 지역 여성의 자궁적출술률은 36%로, 전국 평균 3%에 비해 훨씬 높았다. 또한 지난 10년 동안 25세 미만의 여성을 포함해 해당 지역의 사탕수수 생산자 13,000명 이상이 자궁적출술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에는 25세 미만의 여성도 포함돼 있었다. 이후 여성 건강 검진 등 여러 개혁 조치가 도입되었지만, 활동가들은 수술 강요를 막기 위한 실질적 조치는 거의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성 농업 노동자 권리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 연합의 대변인인 시마 쿨카르니는 “이들은 생리 중에도, 임신 중에도, 유산 중에도 단 하루도 쉴 수 없습니다. 이들는 모든 면에서 ‘노예 노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루를 쉬면 하루치 임금을 잃을 뿐 아니라 노동 계약자에게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라며 분노했다. <참조 기사> https://www.theguardian.com/global-development/2025/jun/12/outrage-as-sugar-cane-workers-in-india-still-being-pushed-into-having-hysterectomies?CMP=Share_AndroidApp_Other [여성 뉴스 브리핑 X] http://x.com/Wo_newsbrief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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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2[편집자 주] 2023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대량학살하고 있다. 히메나 베르가라의 이 글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계급적·국제주의적 전략을 제시한다. 본 번역은 글의 분량상 총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전편 읽기]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1 팔레스타인 공산주의 운동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급격히 확산시켰다. 수십만 명의 노동자와 급진적 청년들이 국제적 혁명 사상 아래 결집하였고, 수백 개의 새로운 공산당이 탄생했다. 1919년 볼셰비키당의 지도 하에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설립되었다. 1920년,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온 트로츠키가 지도자로 있던 제3인터내셔널은 전 세계 반식민 ·민족해방 투쟁을 극히 진지하고 성실하게 다루었다. 레닌은 1920년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에서 전 세계의 공산당이 “(식민지에서의) 혁명운동 전반을 물질적·정신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레닌은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이러한 적극적 지지는 “성직자, 기독교 선교사 및 이와 유사한 요소들의 반동적이고 중세적인 영향력에 맞선 투쟁”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해방운동을 현지 반동세력의 강화 시도와 결합하려는 범이슬람주의와 유사한 경향에 맞선 투쟁과 결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1920년 볼셰비키는 제2차 코민테른 대회의 일환으로 아제르바이잔에서 동방인민대회(Congress of the Peoples of the East)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는 이란, 이집트, 팔레스타인, 터키, 인도 및 기타 아시아, 중동 국가에서 2,850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대회의 회의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역사학자 피에르 브루에의 연구에 따르면 회의 결의안 중 하나는 “동방 민중이 자신의 해방을 위해 프랑스, 영국,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반식민 투쟁에 나설 붉은 군대(Red Army)와 함께 싸울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1) 1) Broué, Pierre. Histoire de l’Internationale communiste (1919-1943). Éditions Fayard. 1997 동방인민대회는 영국 제국주의가 시온주의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아랍인과 유대인을 분열시켰다고 선언했다. (영국은) 유대인 정착민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아랍인들을 몰아냈다. 그러고는 아랍인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바로 그 유대인 정착민들을 적대하도록 아랍인들을 선동해 모든 공동체 사이에 불화와 적대감, 증오를 심어 양측의 관계를 약화시켰다. 이는 (영국이) 이들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역사학자 랜 그린스타인(Ran Greenstein)의 설명에 따르면, 동방인민대회의 일반적 입장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고, 시온주의를 규탄하며, 제국주의와 협력하는 아랍 및 유대 세력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동방인민대회는 터키, 이란, 이집트, 인도,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공산당이 설립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1920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동방인민대회 팔레스타인공산당은 1924년 유대인 반시온주의 운동가들과 지식인들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공산당의 전략적 노선은 영국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반대하고 아랍과 유대인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투쟁하는 것으로, 이는 첫 세 차례의 코민테른 대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한편, 시온주의 점령에서 비롯되는 긴장이 아랍 대중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고,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유대인 노동자와 지식인에 대해 점점 더 적대적 태도를 드러내면서,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정책은 갈수록 당시 흐름과 충돌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공산당은 식민지와 팔레스타인 문제 전반에 대해 제3인터내셔널의 정치적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제국주의의 압제와 점증하는 시온주의 식민화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는 문제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새롭고도 중요한 이론적 문제를 제기했다. 신생 팔레스타인공산당의 노선은 미숙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1920년대 내내 전개된 좌익반대파와 스탈린 주도로 나날이 강해지는 소련 관료집단의 정치투쟁으로부터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창당 초기부터, 팔레스타인공산당은 급진화된 유대인 청년층 일부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팔레스타인 아랍 대중 사이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공산당은 1920년대 말부터 ‘아랍화’2) 정책이라는 굴곡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이 정책은 한창 스탈린주의화되어가던 코민테른에 의해 추진되었다. 2) (역자주) 팔레스타인공산당이 거쳐온 '아랍화'는 창당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전신은 1919년 설립된 '유대사회주의노동자당(Jewish Socialist Workers Party)'이었는데, 전 세계 유대인 좌파노동자연맹인 ‘시온의 노동자들’(Poalei Zion)에 속하던 이 당은 좌파 시온주의 경향에 의해 주도되었다. 유대사회주의노동자당이 코민테른 가입을 신청하자, 코민테른 지도부는 가입 조건으로 '아랍화' 정책을 주문한다. 아랍화는 당내 주류였던 좌파 시온주의와의 단절로,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당에 아랍인 당원을 조직·포함하도록 하고, 시온주의적 공동체 및 조직에 기반해온 기존 조직화 범위를 전체 아랍 민중으로 확장하고, 당이 팔레스타인 내 아랍인과 유대인을 모두 포괄할 수 있도록 명칭을 변경하는 조치를 포함했다. 시온주의 경향과 반시온주의 경향 간의 격렬한 당내 대립 하에 1921년 3차 당대회를 거치며 유대사회주의노동자당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를 대표하는 공산당의 유대민족 지부를 의미하는 '팔레스타인공산당유대공산당지부(Jewish Communist Party — Poalei Zion, section of the Palestine Communist Party)로 명칭을 변경한다. 그러나 이는 아랍인 당원과 아랍 민족 지부가 부재한 상태에서 상징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유대사회주의노동당이 시온주의 경향과 반시온주의 경향으로 분열하며 1923년 팔레스타인공산당이 설립되었고, 당 지도부가 아랍화 정책을 수용하며 코민테른 지도부는 1924년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승인한다. 공산당의 첫 아랍인 당원 가입은 1924년에 이루어졌으며, 존속 기간 내내 전체 당원수가 1,000명을 넘지 못했다. 영국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팔레스타인공산당원 중 아랍인은 1930년에도 26명에 불과했다. 스탈린 집권 이후 제3인터내셔널 아래 아랍화 정책은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 이전의 '초좌파' 노선, 7차 대회 이후의 인민전선 노선 사이에서 혼란스럽게 전개된다. 7차 대회 이전, 코민테른은 팔레스타인공산당에 '노동자·농민의 정부' 구호와 함께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에 맞서 투쟁하라고 지시하였으나, 7차 대회 이후 팔레스타인공산당은 '반제국주의 인민전선' 노선에 따라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그린스타인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공산당의 유대인 반시온주의 운동가들은 당내 유대계 주변부의 친시온주의적 편견에 적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수사적으로는 시온주의를 거부하고 영국의 위임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이와 동시에 ‘이슈브 Yishuv’로 알려진 유대인 정착지를 “이민을 통해 계속 성장할 수 있는” 합법적인 공동체라며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입장은, 나크바(Nakba) 이전 진행된 가장 중요한 유대인 집단이주 중 하나와 맞물려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심해지는 반유대주의를 피해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는데, 이는 각자의 식민주의적 목표를 가진 영국과 시온주의 자본가들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다.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탈출한 유대인 난민 대다수는, 가혹한 이민 할당제3)와 강대국들의 정책에 따라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예컨대, 미국은 유대인 난민 수십만 명의 입국을 막고 팔레스타인으로 피난가도록 압박했다. 3) (역자주) 당시 미국은 이민 할당제를 운용하여 출신 국가에 배당된 할당량(쿼터)에 따라 이민 비자를 신청순대로 발급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 지역 전체,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아랍 농민 대중의 불안이 고조되었다. 유대인 식민화에 반대하는 자생적 반란이 여러 촌락 공동체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야파에서 시작된 유대인 시위대 간 충돌이 팔레스타인 전역 아랍인-유대인 유혈사태로 파급된 1921년 야파 사태. 팔레스타인공산당은 식민에 맞선 아랍 민중의 저항과 충돌에 대해 답해야만 했다.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소위 ‘아랍화’ 정책은, 혁명가들이 아랍의 전위적 집단, 특히 농촌에서 봉기하던 대중 속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혁명적 전망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랍화 정책은 근본적으로 1927년 중국 혁명 당시 스탈린주의가 수립한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anti-imperialist united front”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 정책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으며, 각국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겠다고 자처하는 부르주아 혹은 소부르주아 지도부와의 정치적 동맹을 만들어냈다. 이 정책의 이론적 배경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민족해방 투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3인터내셔널의 창립 원칙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이 정책은 소련이 관료화 과정을 겪는 동안 코민테른 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스탈린에게 있어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 투쟁은 부르주아적 성격을 띤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민족해방을 생각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혁명의 문제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민족해방 투쟁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국민국가의 설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투쟁을 주도하는 것은 민족 자본가의 한 부문이며, 그러한 세력이 없다면 자본주의적 관계를 거스르지 않는 강령을 가진 소부르주아 지도부가 이 과정을 주도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탈린이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아랍화' 정책을 추진한 동기는 아랍 지역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끌기 위해 아랍 대중들 사이에서 더 큰 유기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던 것이 아니라,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 및 '반제국주의' 아랍 국가들과 기회주의적 협정을 맺어 세계 질서 내에서 소련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있었다. 1924년부터 1930년까지 젊은 팔레스타인공산당은 한편으로는 영국과 점증하는 시온주의의 지배에 맞선 아랍 지도부의 민족주의적 압력에 굴복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온주의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청년층과 급진적 유대 지식인층의 초기 민족주의 정서에 굴복했다. 1929년, 식민 지배와 점증하는 시온주의자들의 이주가 만들어낸 긴장은 전국적인 충돌로 분출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노동자들의 대투쟁과 '대반란'의 서막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팔레스타인공산당이 배포한 포스터. 히브리어로 '파시즘을 분쇄할 영웅적 붉은 군대 만세!', '소련 인민과 반파시스트 세계 전체의 지도자 스탈린 만세!' 라고 적혀 있다. 랜 그린필드는 이러한 (당내) 입장 차이가 계급투쟁의 압력과 아랍 대중 사이에서 증가하는 불만에 의해 어떻게 더욱 공고해졌는지 설명한다. 당은 아랍 대중에 대한 노선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 민족 갈등의 심화, 특히 1936~39년 아랍 반란은 당원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이는 1937년 자율적인 '유대인 분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반란이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은 반대 방향, 즉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로 인해 1930년대 당이 아랍 민족투쟁 편에 섰을 때 당과 가까워졌던 아랍 지식인과 운동가들은 소외되었다. “당이 각자의 (민족:역자) 공동체에게 각자의 정치적 언어로 대화하고, 각자의 민족 감정에 호소하는” 상황에 따라, 민족주의적 긴장이 당 내부에 반영되었다. 스탈린주의 정책의 이 명백한 '변화'는 궁극적으로 시온주의 정착민들의 팔레스타인 식민지화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47년 유엔 총회는 소련과 영국 및 미국 제국주의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을 결의했다.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아랍화'를 권고하고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어떻게 팔레스타인의 대규모 식민지화를 위해 제국주의 열강과 협정을 맺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역사학자 가브리엘 고로데츠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련의 입장은 특히 놀랍다. 시온주의 체제에 대한 일관된 부정적 태도, 1929년 및 1936년 아랍 반란 당시 크렘린이 이슈브(Yishuv)를 영국 제국주의의 동맹이자 도구로 비난하며 취한 명시적인 친아랍 노선을 고려하면 말이다. 시오니즘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에서 열렬한 지지로 소련의 태도가 변화한 것은 종종 1941년 6월 21일 독일의 소련 침공과 관련되어 설명된다. 모스크바가 세계 유대인 및 팔레스타인의 이슈브와 맺은 유대 관계는, 러시아의 전쟁 노력에 세계 유대인 공동체의 지원을 끌어들일 필요성을 우선적으로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전쟁은 러시아에게 “나치 독일에 맞선 투쟁에서 최대한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서방세계에서 광범위한 동맹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음을 시사한다. 히틀러가 스탈린과 체결한 협정을 파기한 제2차 세계대전의 역동4) 앞에서, 관료화된 코민테른은 민족해방 문제에 대한 180도 입장 선회를 “소련 방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했다. 이는 실제로는 소련의 영향권을 보장받기 위해,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확장을 억제하는 대가로 제국주의와 협정을 맺는 행위와 다름 없었다.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라는 개념으로 이 정책을 이론적으로 포장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한 정면 부정이었다. 이는 소련 관료의 이익 증진을 대가로 한 피억압 민중의 투쟁에 대한 배신을 의미했고, 실제로 그런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스탈린주의 소련은 민족해방의 경로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이라는 계급 화해 정책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을 근본적, 그리고 역사적으로 거부하는 논리를 팔레스타인 정책에 적용했다. 이 점은 스탈린주의 노선이 아랍 국가의 부르주아계급과 협정을 지향한 데서 명확히 드러났다. 4) (역자주) 나치 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2년 만에 파기하고 1941년 소련을 침공한 사건 1949년 5월 1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린 노동절 행사에 스탈린 초상화가 걸린 트럭이 행진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억압은 세계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제국주의는 현대 세계질서를 조직하고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한 시대다. 이 시기에 경제, 정치, 군사, 이데올로기적 권력은 제국주의 국민국가가 대표하고 옹호하는 기업들 수중에 집중된다. 그 결과 국경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토지, 자연의 착취는 전 세계로 확장되며, 이는 모두 이윤 추구와 자본의 재생산을 위한 것이다. 에스테반 메르카탄테(Esteban Mercatante)는 “세계 무질서 시대의 제국주의(Imperialism in Times of World Disorder)”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잠재적이든 실제적이든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경쟁과 갈등, 그리고 초국적 기업과 세계 금융자본의 지구 약탈은 결코 서로 대립하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들은 현대 제국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동시에 접근해야 하는 두 가지 차원이다. 제국주의 이론을 정교화하기 위해 두 차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정립된 제국주의 이론은, 세계 자본과 가장 강력한 국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행동한 결과 세계 경제가 위계적 총체로 형성되었는다는 점을 설명한다. 제국주의는 정책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제국주의가 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이며, 역사발전의 결과, 혹은 그 발전 과정에서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정의는 러시아 볼셰비키당과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이 역사적 시기는 20세기 초에 시작되었으며, 이 단계의 자본주의는 위기, 전쟁, 혁명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반동적 시기를 나타낸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의 기본적 특성에서 비롯된 긴장의 첫 번째 큰 표현이었다. 이 기본적 특성이란,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의 금융자본으로의 융합, 자본수출을 끊임없이 지속하려는 강박적 욕구, 그리고 정치적·경제적 힘이 불균등한 국가들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제국주의 국가,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제국주의 기업에게 수탈당하며 제국주의 정부에 의해 억압받는 푸에르토리코, 멕시코, 알제리, 시리아 등 식민지 및 반식민지로 나뉘는 것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많은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영국이 세계적 패권을 상실하자,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영국을 대신할 새로운 패권국으로 부상하려 시도하였다. 미국과 나치 독일은 그러한 국가 중 하나였다. 공식적인 역사는 항상 제2차 세계대전을 민주주의와 파시즘, 인권과 나치즘의 대결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실상은 세계 주요 강대국들이 새로운 세계 질서의 수립을 촉진하고, 시장을 재편하고, 대규모 파괴와 살상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 전 세계 노동계급을 통제하고자 저지른 전 세계적 학살이다. 트로츠키는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사상」에서 레닌에게 경의를 표하며 제국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제국주의는 식민지, 시장, 원자재 공급원, 세력권 등을 장악하고자 하는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침략자들에 맞서 평화를 지키기 위해”,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등의 이념으로 위장한다. 이러한 이념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다. 모든 사회주의자의 의무는 이를 지지하는 대신, 오히려 인민 앞에 그 본질을 폭로하는 것이다. 1915년 3월, 레닌은 다음과 같이 남겼다. “어느 집단이 먼저 군사적 타격을 가했느냐 또는 먼저 전쟁을 선포했느냐의 문제는 사회주의자들의 전술을 결정하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다”, “조국 방어, 적의 침략 격퇴, 방어 전쟁 수행 등에 관한 문구는 양측 모두가 인민을 완전히 기만하는 것이다.” 레닌은 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수십년 간”, “세 강도(영국, 러시아, 프랑스 부르주아지와 정부)가 독일을 약탈하기 위해 무장했다. 세 강도가 주문한 새 칼을 얻기 전에 두 강도(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공격을 시작한 것이 놀라운 일인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45년 8월, 미국이 서명 하나로 원자폭탄을 투하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괴하고 226,000명을 살해한 제2차 세계대전 말엽에, 트루먼 대통령은 팔레스타인에 홀로코스트 생존자 10만 명을 수용하도록 촉구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 제국주의가, 쇠퇴하는 대영제국의 과제를 이어받아 유대인 국가 건설 프로젝트를 다시 추진하겠다는 명확한 신호였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으로) 팔레스타인 영토의 56%를 시온주의 국가에 할당했다. 이는 유대인들이 전체 팔레스타인 사유지의 약 7%만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나크바(Nakba)’, 즉 시온주의 민병대와 신생 이스라엘군이 7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그들의 집과 땅에서 폭력적으로 추방했을 때, 미 제국주의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주도한 목적이 유대인에게 홀로코스트의 배상이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정당화했다. 홀로코스트는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이 전쟁에 참가할 때까지 의도적으로 묵인되어온 비극이었다. 다시 말해, 미국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자신들의 지난 행보를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위해 팔레스타인 인구의 약 4분의 3을 폭력적으로 추방하는 데 자금을 지원하고 지시함으로써 정당화한 것이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초기 정착기인 신 이슈브(New Yishuv) 시대를 낭만적으로 묘사한 삽화 '어린 정원사들', 1960년대 유대민족기금(JNF) 발행 1948년 나크바로 인해 집과 터전을 잃고 피난길에 오른 팔레스타인인 아동과 여성들 시온주의 국가(Zionist state)는 그 기원부터 제국주의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산물이다. 따라서 시온주의 국가는 ‘정착민 식민주의’, 즉 집단학살과 인종청소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형태의 정착민 식민주의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며, 실행한다. 이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5) 아래 한 세기 간의 지배가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산물이다. 5) (역자주) 라틴어로 "미국에 의한 평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패권국으로 부상하며 형성된 세계 질서를 의미,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에 의한 평화‘, 로마제국의 최전성기인 1~2세기에 걸쳐 지속된 고대 지중해 세계의 상대적 안정기)’에서 차용된 용어. 시온주의 국가는 그 식민주의적 확장을 가능하게 한 세계 질서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제국주의적 괴물이다. 레온 트로츠키는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두 가지 다른 미래를 제시했다.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제국주의의 대학살을 국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할 가능성,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 지배체제가 이 전쟁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전진한다면, 이는 스탈린주의와 같은 지도력의 타락을 막을 터였다. 에밀리오 알바몬테와 마티아스 마이에요는 「“부르주아 복고”의 한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이 두 가지 변수 중 어느 것도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국주의가 완전히 처벌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후 지구의 3분의 1에서 부르주아지가 축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으며, 퇴보로 이어지는 조건을 제거하지도 못했다. 붉은 군대의 손에 나치즘이 패배하면서 스탈린주의는 새로운 위신을 얻었고, 스탈린주의는 이 위신을 이용해 전후 혁명에 제동을 걸었다(얄타 및 포츠담 협정). 스탈린주의는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배신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식민지와 반(半)식민지에서의 혁명은 억제할 수 없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새로운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주요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력은 중요한 모순을 안은 채 확립된 것이었다. 소련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공로가 아니라, 나치를 피비린내 나는 러시아의 겨울로 몰아넣은 프롤레타리아 군대인 ‘붉은 군대’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바로 이 특정한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미국은 유엔의 공모와 스탈린주의의 지지를 받아, 이스라엘 국가를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이익을 위한 거점으로서 인위적으로 관철해냈다. 나크바는 시온주의의 식민주의적 특성을 집약하는 역사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미국이 중동에서 자신의 이익을 확장하고 공고히 하는 과정의 중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두 국가 해법’을 옹호하는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의 일부 세력은, 시온주의 국가의 기원이 드러내는 본질적 측면, 즉 시온주의 국가의 존재 자체가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의 해방과 모순된다는 사실을 누락한다. 토지 강탈, 공동체 전체의 추방, 잔혹한 군대와 정착민 무장집단에 의한 인종청소 없이 이스라엘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제국주의 없이는 이스라엘 국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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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양경수 집행부의 사회적 대화기구 참여 강행이 민주노총을 추락시키고 있다민주노총이 양경수 위원장의 사조직인가? 민주노총 양경수 위원장은 6월 24일 중앙위원회에 '국회 사회적 대화 참여 건'을 직권으로 상정했다. 이 논란은 작년 8월 국회의장 우원식이 민주노총에 '국회 주도의 사회적 대화'를 제안하면서부터 발생했다. 이후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한 번도 '국회 사회적 대화'가 민주노총 의결기구에서 결정된 적이 없다. 양경수 집행부는 민주적 논의를 무시하기로 작정한 듯 독단적으로 이 안건을 밀어붙이고 있다. 양경수 집행부는 지난 대선방침 논의 때도 '보수 양당 정치 타파와 진보정치세력의 세력화'라는 기존 대의원대회 방침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결론 없는 종결', '지지 후보 없음'을 밀어붙였다. 자본가 정당과의 단절이라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근본 대의를 짓밟고 이재명 지지의 길을 열어줬다. 역사에 길이 남을 배신을 저지르고도, 일말의 반성도 없이 다시 민주노조운동을 정부와 자본가들과의 협조로 이끌고 있다. 노동자의 손발을 묶는 사람들 5월 9일 국회의장실에서 도출된 '국회 사회적 대화 운영에 관한 잠정 합의안'을 보면 국회와 민주노총, 한국노총,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등 5개 단체가 ‘국회 사회적 대화기구’를 구성하기로 했다. 이 기구의 취지와 목적은 '혁신', '보호', '상생'의 기치 하에 사회적 대화와 타협을 통해 만들어 내는 것, 사회적 합의를 통한 갈등 해결 방안 마련, 사회적 이해 대변 주체들의 능동적 정책 참가의 장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의결기구의 결정도 없이 잠정합의를 추진한 것만으로도 심각한 문제다. 나아가 그 내용은 반노동적 기만으로 가득차 있다. '혁신', '보호', '상생'의 기치? 그동안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양보를 끌어내기 위해 입만 열면 떠들었던 얘기가 아닌가? 사회적 이해 대변의 주체? 경총, 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가 자본가계급의 이해 말고 다른 이해를 대변한 적이 있었던가? 의제별 협의체는 두 개가 제시됐는데 혁신 의제의 명칭은 '첨단·신산업 분야 경쟁력 강화'이고 보호 의제의 명칭은 '특수고용·플랫폼노동, 프리랜서 사회보험 및 사회안전망'이다. 지금도 정부와 국회는 재벌 특혜, 반노동·반환경 악법인 반도체특별법을 밀어붙이고 있다. 어제 최저임금위원회는 2026년에도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이런 정부와 국회에 맞서 투쟁을 조직하는 대신, 함께 앉아 자본의 경쟁력 강화 방법을 논의해 노동자들의 생존과 권리를 지킬 수 있는가? 국회 사회적 대화 기구가 열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부와 자본가들은 극심해지는 경제위기를 거론하며 정리해고·구조조정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는 재벌 대자본의 초과 착취가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임금과 철밥통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양보 없이는 그 어떤 혁신도, 그 어떤 경쟁력 강화도 불가능하다며 민주노총을 공격할 것이다. 문성현은 경사노위 위원장 시절에 민주노총에게 "투쟁할 생각이면 들어오지도 마라"고 했다. 이게 저들의 분명한 속셈이다. 독 묻은 사과를 거부하고 민주노조운동의 원칙을 지켜내자!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도입했던 노사정위원회부터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등 숱한 노사정 기구, 노사정 대화의 경험은 둘 중 하나다.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거나 아무것도 합의되지 않거나. 물론 그 사이 노동자들의 손과 발은 묶인다. 그런데도 민주적 논의 절차마저 무시하고, 현장을 혼란에 빠뜨리면서까지 사회적 대화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재명 정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 때문인가? 분명히 묻는다. 정말 다른가? 민주노총이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합의해 주고, 기간제법, 최저임금 산입 범위 개악 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 대한 환상이었다. 양경수 집행부는 이 범죄적 환상을 그대로 공유하며, 민주노조운동을 끝없는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전임 김명환 집행부는 경사노위에 참여하려다 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사퇴했다. 그렇지만 사회적 합의주의에 경도된 민주노총 양경수 집행부는 민주노조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민주성조차 내다버린 채 다시 '사회적 대화'라는 독 묻은 사과를 노동자들에게 내밀고 있다. 노사정위원회와 경사노위에 이어, 이제는 국회 사회적 대화기구? 사회적 대화기구는 노동개악을 민주노조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허울에 불과하다. 민주노조운동의 모든 역사가 보여주듯, 또한 역대 민주당 정부가 사회적 합의기구를 통해 관철한 수많은 노동악법에서 보여주듯, ‘사회적 대화’에 대한 환상은 노동자들의 양보와 굴종으로 이어질 뿐이다. 모든 진지한 투사들과 활동가들이 나서야 한다. 노동조합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자! 민주노총의 민주성, 자주성, 투쟁성을 회복하고 투쟁 태세를 갖추자! 자본가 정부, 자본가 의회에 대한 노동조합의 독자성을 지켜내자! 2025년 6월 12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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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여성뉴스 브리핑] 보수 개신교 세력 항의로 혐오표현금지법안에서 ‘성적 지향’은 빼겠다는 민주당 의원들1. 보수 개신교 세력 항의로 혐오표현금지법안에서 ‘성적 지향’은 빼겠다는 민주당 의원들 ‘혐오표현금지법’ 제정이 일부 보수 개신교계의 민원 제기로 무산됐다. 혐오표현금지법은 특정 집단이나 구성원에 대해 차별을 정당화·조장·강화하거나 폭력을 선전·선동하는 내용의 정보 유통을 금지한다. 일부 보수 개신교계가 해당 법안 제정에 반대하는 것은 법안 내용에 ‘성적 지향’이 들어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회 입법 예고 홈페이지에 반대 민원이 쇄도하자, 해당 법안을 대표 발의했던 조인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성적 지향’ 문구를 빼서 재발의하기로 했다. 인권단체들은 “성소수자 혐오세력에 정치가 굴복했다”며 일제히 비판했다. 전국 166개 인권·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6월 5일 조인철 의원실을 비롯해 법안을 발의했던 11개 의원실에 ‘성적 지향’을 삭제한 혐오표현금지법 재발의 중단을 촉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의견서에서 “혐오를 방지하는 법안에서 성적 지향을 빼겠다는 건 광장을 지킨 성소수자들과 이들과 함께 평등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던 시민들의 열망을 외면하는 것”이라며 “혐오와 차별을 용납하지 않고 평등으로 나아가기 위한 진중한 논의에서 누군가를 배제하겠다는 반인권적 행태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참조 기사>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6788 2. 여가부 강화한다는 이재명 정부 … 여성계 “차별금지법 제정, 비동의강간죄 도입으로 성평등 민주주의 앞장서야” ‘여성가족부 폐지’. 지난 정부는 선전포고와 같은 이 일곱 글자와 함께 막을 열었다. 윤석열의 공약은 당선하자마자 여성가족부 폐지를 핵심으로 하는 정부조직 개편안 발표로 이어졌으나, 야당의 반대, 국회 회기 종료 등으로 자동 폐기됐다. 논란 속에서 여성가족부는 존치됐지만 예산 삭감, 성평등 관련 전담기관 기능 축소 등으로 사실상 ‘식물화’됐다는 지적을 받았다. 새 정부가 탄생함에 따라 정부 부처 개편 논의가 본격화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가장 큰 변화가 예상되는 부처 중 하나로 여성가족부가 꼽힌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당시 여성가족부의 기능을 확대‧강화해 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여성계는 이 대통령의 여성가족부 확대 공약을 환영하면서도 이재명 정부가 ‘성평등 정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여성계의 오랜 숙원인 비동의강간죄 개정,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등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차별금지법 제정, 성평등 정책에 미온적 태도로 일관한 이재명 당선인에게는 과제가 많이 남아 있다”고 지적하며 “성평등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우리는 새 정부가 후퇴한 성평등 인식과 정책을 회복시켜 광장의 민의에 제대로 응답할 것을 끝까지 요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여성의전화도 “더불어민주당 정책공약집에서 누락되었던 차별금지법 제정,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포함한 차별과 혐오를 넘어 성평등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지금 당장 착수해야 할 과제들이 여전히 산적해 있다”며 이재명 정부가 좀 더 성평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했다. <참조 기사>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5060518591294422 3. 대전에서 열린 고 변희수 하사 추모식과 대전퀴어문화축제 사진출처: 뉴스1 지난 7일, 제2회 대전퀴어문화축제가 대전 동구 소제동에서 열렸다. 대전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이하 조직위)가 주최한 이번 행사는 ‘사랑이쥬–광장에 나와, 너’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진행됐다. 행사장 양편에는 성소수자 인권 보호와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44개 단체의 부스가 설치됐다. 그런가 하면 종교계도 참여해 성소수자들이 사회적 편견 없이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연대의 장으로 꾸려졌다. 반면, 도로 맞은편에서는 지역 시민단체와 학부모 단체 등 60여 개 단체가 모여 ‘건강한 가족 대전시민대회’라는 이름의 반대 집회를 열었다. 이에 대해 조직위는 “이번 축제를 앞두고도 성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우리는 더 깊이 연대할 것”이라며 “사랑과 환대는 혐오와 차별을 반드시 이긴다”고 밝혔다. 조직위는 또한 축제 하루 전날인 현충일에 성소수자 인권연대와 함께 대전현충원에서 ‘고 변희수 하사 추모식’을 열었다. 변 하사는 2019년 11월 휴가 중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강제 전역 조처를 당했다. 육군을 상대로 전역 처분을 취소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재판이 미뤄졌고, 2021년 3월 3일 충북 청주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국방부는 지난해 4월 변 하사의 순직을 인정했고, 국가보훈부는 같은 해 6월 변 하사의 현충원 안장을 승인했다. 조직위와 성소수자 인권연대는 추모식에서 ‘차별 없는 무지개 세상’을 만들려 했던 ‘군인 변희수’의 용기와 의지를 잇겠다고 다짐했다. <참조 기사> https://www.hani.co.kr/arti/area/chungcheong/1201521.html 4. 일본 성소수자들, 우정결혼 늘어 최근 일본의 성소수자들 사이에서는 이성애 중심의 결혼 강요로 인한 소위 ‘우정결혼’이 늘고 있는 추세다.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혼인평등권과 다양한 가족구성권이 인정되지 않는 일본에서 성소수자 사이의 이러한 결혼은 ‘최후의 수단’ 또는 ‘생존수단’이라 불리고 있다. ‘우정결혼’이란 가족이나 직장 동료들에게 자신의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 등을 밝히지 못하는 성소수자들이 평생을 친구로 함께 살아가는 일종의 위장 결혼을 말한다. 사츠키와 미나토의 경우는 레즈비언으로 양성애자로 살아오다 한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만났고,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 우정결혼에 합의하며 부부가 되었다. 둘은 인공수정으로 자녀도 출산했고 자녀를 키우며 친구로 살아간다. 이들은 서로를 ‘전우’, ‘사촌’이라고 불렀다. 우정결혼을 돕는 우정결혼정보회사도 있다. ‘칼러러스(Colorus)’라는 한 우정결혼정보회사는 벌써 300쌍 이상의 우정결혼을 성사했고, 43.6%의 매칭성공률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곳은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연애도 섹스도 없는 우정결혼’, ‘결혼이 아닌 결혼’이라며 자사를 홍보하고 있다. 일본은 이성애 중심의 정상 가족주의가 강요되고 여성‧성소수자 차별이 존재하며 경제적 불평등이 심한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다. 그나마 2023년 ‘성소수자 이해증진법’이 통과되고 지자체별로 성소수자 커플을 인정하는 파트너십 제도가 있지만 여전히 성소수자들에게 사회적 차별과 법적 제약이 크다. 이러한 불평등이 성소수자들이 ‘우정결혼’을 하게 만든다. 쿠보타 교수는 혼인 불평등 사회가 만들어낸 우정결혼을 성소수자들의 ‘최후의 수단’이자 ‘생존수단’이라고 불렀다. <참조 기사> https://unseen-japan.com/friendship-couples-children-japan/ 5. “더는 참을 수 없다”…스코틀랜드 돌봄 노동자들 10년 만에 파업 돌입 스코틀랜드 전역의 돌봄 노동자들이 열악한 처우에 맞서 10년 만에 첫 전국 파업에 나섰다. 6월 5일 이스트렌프루셔를 시작으로, 애버딘셔, 모레이, 에어셔, 에든버러, 글래스고 등에서 5일간 파업이 이어졌다. 이번 파업은 장기간의 임금 동결과 정부의 약속 불이행에 대한 집단적 외침이다. 공공부문 노동조합 유니슨(Unison)은 정부가 약속한 임금 인상과 복지 개혁을 수년간 외면해 왔다고 비판하며, “이번 파업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며 지속적인 약속 위반의 결과”라고 밝혔다. 노동자들은 필수 서비스를 유지하는 가운데, 6월 12일에는 스코틀랜드 의회 앞에서 집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현장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절박하다. 인에이블에서 8년간 일한 안나 베어드는 “일이 좋아 견디고 있지만, 더는 감정만으로 버티기 어렵다”라며, “우리는 단지 우리가 하는 중요한 일에 대해 정당한 대우를 받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유니슨 측도 “돌봄 노동자가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하는 한, 이 위기는 해결될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회사는 노조와 협력하겠다고 밝혔고 정부는 실질임금 인상안을 언급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노동자들은 “공공부문 수준의 대우 없이는 돌봄의 질도 지켜낼 수 없다”라며, 이번 파업이 일회성이 아닌 구조적 변화를 위한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참조 기사> https://news.stv.tv/scotland/care-workers-strike-for-first-time-in-decade-in-dispute-over-pay 6. 아프리카 여성들, ‘취업 사기’로 러시아서 자폭 드론 제조 아프리카 출신 여성들이 허위 취업 광고 등에 속아 러시아 내 공장에서 자폭 드론(무인기) 생산에 동원되고 있다. 국제조직범죄방지기구(Global Initiative Against Transnational Organised Crime)의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옐라부가 경제특구 공장에서 수백 명의 아프리카 출신 여성들이 이란산 자폭 드론을 조립하는 데 참여하고 있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18세 미만의 미성년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채용 광고는 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텔레그램 등을 통해 유포되고 있는데, 러시아에서 공부하고 또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채용 광고에 지원했던 참가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 유해 화학 물질 노출, 인종 차별, 그리고 끊임없는 감시에 시달리고 있다. 어떤 이들은 현장에 도착한 후에야 업무 내용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옐라부가 공장에서는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자폭 드론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란이 설계한 자폭 드론을 조립, 생산하는 것이 주된 업무다. 국제조직범죄방지기구는 전쟁 초기에는 현지 학생들을 강제 고용해 노동시켰지만, 전쟁이 지속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공장 측이 값싼 해외 노동력을 찾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참조 기사> http://web.sabc.co.za/sabc/home/channelafrica/news/details?id=4e7402c2-9b0e-4ae3-b467-4fcd6f2bf8b7&title=African%20women%20misled%20into%20gruelling%20work%20in%20Russian%20drone%20factories:%20Report [여성 뉴스 브리핑 X] http://x.com/Wo_newsbrief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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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1[편집자 주] 2023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대량학살하고 있다. 히메나 베르가라의 이 글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계급적·국제주의적 전략을 제시한다. 본 번역은 글의 분량상 총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히메나 베르가라, 2024년 4월 19일 시온주의의 억압에 맞선 투쟁은 국제 정치와 국내 정치의 중심에 있다. 요르단 강에서 지중해까지, 아랍인과 유대인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자유롭고 사회주의적인 노동자의 팔레스타인을 위한 투쟁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다. 뉴욕 팔레스타인 연대시위 사진: Eduardo Munoz / Reuters 팔레스타인 해방투쟁의 방향을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가자지구와 그 주변 지역의 아랍 대중은 물론, 미국 등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도 피어나기 시작한 집단학살에 반대하는 전 세계 운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이 과제에서 필수적인 것은 팔레스타인에서 작동하는 거대한 사회적 힘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힘들은 아랍 세계의 이 지역(팔레스타인)을 세계적 위기, 즉 지구적 제국주의의 새로운 위기의 진원지로 만들었다.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잔혹한 식민 프로젝트의 비극은,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쇠퇴가 낳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결과를 표현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비극은 제국주의·인종주의·식민주의에 아래로부터 맞서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영웅적 저항이 자신을 대변한다고 느끼는 전 세계의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결집하는 외침이 되었다. 이스라엘 국가(The state of Israel)는 아르헨티나에서 미국에 이르는 모든 곳에서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적인 괴물 같은 국제 극우세력을 대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팔레스타인 해방은 전 세계 곳곳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수십억 민중에게 이롭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향한 승리의 길을 찾으려면 국제적, 지역적(regional), 국지적(local) 차원에서 거대한 사회적 힘들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그리고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대량학살의 맥락이 어떤 계급적 역학을 나타내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절박한 자결권 쟁취투쟁과 이 지역 사회주의 혁명을 결합하며, 누가 동지이고 누가 적인지 구분할 수 있는 해방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은 중동 전역의 민중이 단결하여 제국주의의 멍에와 자국 자본가·권위주의 정권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이스라엘 노동자계급이 시온주의 및 식민정책과 단절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위한 투쟁과 이 지역의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사이의 연관성은 레온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분명히 새겨져 있다. 이 이론을 팔레스타인 해방투쟁에 가장 체계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아마도 팔레스타인 트로츠키주의자 자브라 니콜라(Jabra Nicola)일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시온주의 국가를 계급적, 반제국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였으며, 지역의 계급 역학을 분석하여 팔레스타인 주변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역사학자 호세피나 L. 마르티네즈는 다음과 같이 썼다: 트로츠키는 생전에 자신의 연속혁명 이론이 세 가지 개념을 통합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첫째는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이다. 둘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이행기로서의 혁명 그 자체이며, 이 이행기는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하여 사회가 평형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경제, 기술, 과학, 가족, 도덕, 일상생활의 혁명”을 수반한다. 셋째는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적 성격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차원의 상호작용이야말로 오늘날 이 이론에 지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 글은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한 전략적 관점을 정교화하기 위해 이 일련의 개념들의 타당성과 연관성을 입증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레온 트로츠키, 자브라 니콜라, 그리고 일란 파페(Ilan Pappé), 우사마 막디시(Ussama Makdisi), 란 그린스타인(Ran Greenstein), 재커리 록맨(Zachary Lockman), 가브리엘 고도레스키(Gabriel Godorezky), 피에르 브루에(Pierre Broué) 같은 역사가들의 논의를 바탕에 둔다. 우리는 연속혁명 이론의 기본 원리를 교조적으로 반복하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세계 제국주의 위기를 배경으로 한 팔레스타인의 최근 역사와 현재 상황에 비추어 연속혁명 이론의 구체화를 시도할 것이다. 우리는 트로츠키 연속혁명론의 핵심을 이루는 세 가지 개념을 활용해 팔레스타인 역사의 근본적인 순간을 탐색하고 혁명적 좌파의 사상과 강령의 역사를 복원할 것이다. 우리는 이를, 특히 팔레스타인의 사회주의적 미래는 물론, 보다 일반적으로는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주의적 미래에 대한 구상을 철저히 거부해 온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지도자들의 사상과 대조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빈 땅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일란 파페의 설명처럼, 팔레스타인은 1948년 나크바 이전에도 결코 빈 땅이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은 빌라드 알 샴(‘북쪽의 땅’ Bilad al-Sham), 즉 당시 레반트 지역의 일부로 번성했던 땅이다. 풍요로운 농업, 작은 마을들과 역사적인 도시들은 시온주의자들이 도래하기 직전까지 50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지탱하고 있었다.1) 1) Pappé, Ilan. Ten Myths About Israel. Verso Books, 2017. (국역: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틈새책방, 2024) 19세기 말, 팔레스타인의 적지 않은 인구 중 유대인 비중은 미미했다. 오늘날 흔히 '글로벌 사우스'라고 불리는 여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사람 대다수는 많게는 1,000명이 거주하는 촌락에 속한 농민들이었다. 새로 생겨난 도시들에는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몰려들었으며, 이들은 해안가와 고지대에 정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20세기 초가 되면 제국주의의 침투로 초기 형태의 팔레스타인 도시 노동자계급이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파페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 기록물을 인용하여 19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구조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시온주의가 부상하기 전의 유대인 비율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약 2~5% 수준이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기록에 따르면 1878년에는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 총 46만 2,465명이 살았다. 이 중 40만 3,795명(87%)은 이슬람교도였고, 4만 3,659명(10%)이 기독교인, 1만 5,011명(3%)은 유대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기 전, 오스만 제국은 자신의 지배와 제국 자체에 대한 더 노골적인 인종주의를 발전시켰다. 19세기 중후반에는 ‘터키인’이 “오스만주의”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까지 이르렀고, 이는 팔레스타인의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국가 정체성과 정치적 소속감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역사학자 우사마 막디시(Ussama Makdisi)가 “오스만 오리엔탈리즘”에서 설명한 것처럼, 오스만 제국에 봉사하던 지식인들은 제국 내 터키인들을 아랍인, 특히 팔레스타인인 등 다른 민족 집단과 차별하고자 인종적 서열체계를 개발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민족주의 정서는 팔레스타인과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부르주아 혁명과 이전 식민지의 재편 아래 지정학을 재구성하던 강력한 개념인 ‘국민국가’(the nation)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중동 각지에서 오스만 제국의 압제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을 독려했다. 이는 중동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영국 제국주의의 입지를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영국은 아랍 민중에게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면 자결권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로 인해 중동 전역에서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었다. 다른 한편, 영국은 전쟁이 끝난 후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분할할지를 프랑스 및 다른 열강과 비밀리에 거래하며 이 지역 주민들을 새로운 제국주의 압제자들의 지배 아래로 몰아넣었다.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되면서, 이러한 초기 단계의 민족자결 사상은 발전하거나 실현될 수 없었다. 영국은 당시 중동 지역에서 프랑스 다음으로 강력한 제국주의 세력으로 중동 지역의 정치를 지배하고 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팔레스타인에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국 내 시온주의 세력과도 강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20세기 초 30여 년간 이루어진 제국주의의 초기 개입은 팔레스타인의 복잡한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학자 엔조 달 피토(Enzo Dal Fitto)는 팔레스타인 트로츠키주의자 자브라 니콜라의 연구를 토대로 이러한 동학을 설명한다. 1917년부터 1939년 사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이루어진 시온주의 경제 부문의 발전은 아랍 봉건제를 파괴하고 자본주의적 부르주아계급의 형성을 저지하여 해당 지역의 경제적 발전 조건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역사 발전은 정체되었고, 반제국주의 세력의 역사적 활력도 고갈되었다.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장악하기 전,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는 영국 시온주의 지도자 월터 로스차일드 경에게 공식 서한을 보내, 영국 정부가 유대인 디아스포라2)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2) (편집자 주) 세계 곳곳에 사는 유대인 집단 1917년 11월 2일, 아서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이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서한 1918년 영국 정부는 국제 열강과 국제연맹과 함께 이 지역의 경계를 재협상해,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보다 명확히 정의된 지리적 공간을 창출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 경계제국주의는 팔레스타인 원주민과 새로운 유대인 정착민 중 누가 팔레스타인을 통치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했다. 일란 파페에 따르면,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경계를 재편함으로써 시온주의자들이 에레츠 이스라엘(Eretz Israel, 이스라엘의 땅)을 지리적으로 개념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땅에서는 유대인만이 땅과 자원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서사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공식 역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빈 땅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팔레스타인은 역사적 분쟁의 대상이 된 땅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다모클레스의 칼날3)처럼 다가오는 신흥 열강에 맞서, 새로운 제국주의적 열망을 품고 세계를 자신의 상상대로 재구축하고자 했던 구 식민 열강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재편” 과정의 다음 단계인 제2차 세계대전의 피비린내 나는 예행연습이었다. 3) (편집자 주) 고대 그리스의 일화로, 권력과 영광 뒤에 도사린 위험과 불안을 상징한다. 본문에서는 항상 팔레스타인에 드리워진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을 뜻한다. 시온주의자들이 제안한 팔레스타인 식민화는 영국 제국주의에 의해 의도적으로 도구화되고, 물질적으로 지원되었다. 영국 자체는 쇠퇴하는 제국이었지만,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중동에서의 서방 제국주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 제국 분할의 일환으로 1923년 국제연맹에 의해 공식화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에 맞서 강력하게 저항했고, 이 저항은 영국 점령 기간 동안, 특히 1929년부터 1939년 사이에 더욱 확산되고 강화되었다. 이 반란의 절정은 1936년 총파업으로 나타났다. 아랍 노동자계급이 총파업을 주도했으며, 노동조건 개선과 민족 독립이 주요 요구였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대반란(The Great Revolt)”으로 알려진 격렬한 계급투쟁의 시기 동안, 농촌의 농민 대중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농민들은 유대인 정착민과 영국의 점증하는 침탈에 맞서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역사학자 재커리 록맨(Zachary Lockman)은 「동지와 적」(Comrades and Eenemie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36년 4월 15일, 샤이크 ‘이즈 알딘 알카삼(Izz al-Din al-Qassam)’이 창립한 게릴라 부대원들이 나블루스 인근에서 차량과 버스를 습격해 유대인 승객 2명을 살해했다. 이틀 후 우익 유대인 준군사 조직이 아랍인 2명을 살해하며 보복했다. 아랍인들의 시위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점차 광범위한 반식민주의 및 반시온주의 민중봉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폭력을 억제하고 아래로부터의 분노를 제어하기 위해, 아랍 민족주의 운동가들은 재빨리 전국적인 총파업을 촉구했다. 파업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모든 주요 도시에서 투쟁을 주도하기 위해 새로운 “민족위원회”(national committees)가 생겨났다. 깜짝 놀란 엘리트 정치인들은 대중적 저항의 물결에 편승하고자 파업 요구를 지지하는 한편, 아민 알후사이니(Amin al-Husayni)를 위원장으로 모든 주요 정당을 대표하는 새로운 아랍고등위원회(AHC)를 구성했다. 총파업은 1936년 10월까지 6개월간 계속되어 역사상 가장 긴 총파업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영국 통치와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아랍 민족주의 반란의 첫 단계로, 1939년 여름에야 끝이 났다. 1936년 4월 팔레스타인 야파에서 영국 경찰이 시위 중인 아랍 군중을 해산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노동자계급의 대반란 참여는 지역 노동운동 역사상 가장 전투적인 장(章) 중 하나일 것이다. 록먼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팔레스타인 도시의 아랍 인구 대부분이 총파업에 참여했으며, 도시 노동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산 시드키 알다자니(Hasan Sidqi al-Dajani)의 운전사노조는 아랍의 자동차 운송을 마비시켰고, 야파항구 노동자들은 항구를 폐쇄했다. 파업을 지속하기 위해 전국위원회는 부유한 팔레스타인인들과 주변 국가의 동조자들로부터 기부금을 모금했고, 야파부두 노동자를 포함해 파업으로 휴업중인 사람들에게 파업 수당을 분배했다. 이 반란은 탄압에 의해, 그리고 ‘히스타드루트’(Histadrut, 1920년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설립된 이스라엘 최대 노동조합연맹)가 이끄는 유대인 노조 지도부의 의식적인 행동에 의해 진압되었다. 히스타드루트는 시온주의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며 식민점령을 옹호했다. 한편, 과거 대지주로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팔레스타인 가문들은 반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운동의 지도부로 자리 잡았으며, 점령 세력과의 협조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영국과 시온주의 정착민들에게 토지를 빼앗겼지만, 시온주의 세력으로부터 상당한 보상과 막대한 혜택을 받아 당시 식민체제의 부유층을 형성했다. 이 가문들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 시절 수십 년 간 이 지역을 관리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이 땅을 점령했을 때도 점령군을 위해 계속 일했다. 팔레스타인 대중의 고통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들 가문은 주로 압드 알카디르 알후사이니(Abd al-Qadir al-Husayni)가 이끄는 아랍-팔레스타인 당(Arab-Palestinian Party)과 정치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엔조 달 피토(Enzo Dal Fitto)는 팔레스타인 대반란 당시 지도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썼다: 그들의 부는 시온주의자들의 점령에 의존했기에, 그들의 반대는 그저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다. 그들은 아랍의 반시온주의 의식 형성을 지연시켰으며, 밸푸어 선언 역시 늦게서야 규탄했다. 알-카삼 저항과, 이후의 아랍 저항운동을 고무하고 강화한 시리아의 거대한 총파업 여파에 압도된 그들은, 1936년 “대반란”에 참여했다. 대반란은 거대한 파업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납세 거부와 같은 시민불복종 행동과 반란 민병대 결성을 동반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시온주의 민병대의 지원을 받은 영국 식민지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한편 유럽 파시즘의 확산과 히틀러의 집권, 동유럽에서 발생한 수많은 유대인 학살(포그롬, Pogrom), 그리고 유럽에 내재하던 반유대주의가 강화되는 상황에 따라 유대인 이민이 증가했다. 결과적으로 아랍 경제가 폐쇄되면서, 시온주의 세력의 경제는 유럽에서 대규모로 유입된 유대 자본에 힘입어 그 영향력을 강화하고 확장할 수 있었다. 영국은 반란에 대응하기 위해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받은 필 위원회(Peel commission)를 설립했다. 위원회의 임무는 이 지역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하라고 권고하는 것이었으며, 그 분할의 목적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아랍과 유대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해 영국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맞서는 계급투쟁을 차단하는 데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임박했다. 세계적 대재앙을 목전에 둔 영국의 정책은, 해당 지역 정부의 지지가 필요한 상황에서 아랍의 봉기를 방지하려는 목적에 따라, 그리고 새로운 유대인 정착민들의 유입과 잠재적인 유대 국가 설립으로 지역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욕망에 따라 수립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될 무렵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국제 사회주의 혁명이 패배한 상황에서, 이 전쟁은 결국 팔레스타인을 짓누를 새로운 압제자의 형태와 성격을 결정짓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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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계약직 15명에게 "수국 1만 주 심어라" 부당한 업무지시를 거부하며 투쟁하는 한국마사회지부 부경지회최근 마사회는 계약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수국 1만 주를 심으라고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거부했습니다. 기존의 노동강도와 업무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작업이었습니다. 조경사업법에 등록한 전문 업체가 전문 장비를 투입해서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사회와 마사회시설관리는 책임자 징계 운운하고 있습니다. 계약직 노동자들을 방어하고 위해 전체 조합원이 나서고 있습니다. 공공운수노조 한국마사회지부 부경지회 김재철 지회장의 발언을 원문 그대로 전합니다. --- 조합원 동지 여러분,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마사회는 지난 3월 29일부터 약 한 달 동안 ‘경운작업’이라 부르며 토양 정비와 토목공사를 지시했습니다. 굴삭기 3대가 투입되고, 우리 조경부서 인력 대부분이 동원됐습니다. 그리고 5월에는 또다시, 수국 1만 주를 식재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것도 여성 계약직 조합원 15명에게 말입니다. 이 작업들, 누가 봐도 단순한 유지관리가 아닙니다. 공사입니다, 명백한 공사.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작업을 조경공사업 등록도 하지 않은 자회사를 통해 무리하게 밀어붙였다는 겁니다. 건설산업기본법 위반은 물론, 산업안전보건법과 근로기준법까지 모조리 무시한 불법입니다. 우리 노조는 5월 4일, 공식 공문으로 작업이 위법임을 통보하고 작업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하지만 사측은 아무런 답변 없이 작업을 강행했습니다. 심지어 현장소장은 조합원들 앞에서 직접 작업을 지시했고, 우리 노조 대표가 작업중지를 명령했음에도 이를 묵살했습니다. 이건 단순한 작업 지시가 아닙니다. 조합의 단체행동권을 짓밟고, 작업중지권을 무시하는 명백한 부당노동행위입니다. 그런데도 사측은 지금, 정당한 작업 거부를 문제 삼아 징계와 계약해지를 운운하고 있습니다. 동지 여러분, 우리는 단언합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그 어떤 징계도, 단 한 명에 대한 부당한 불이익도 결코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마사회는 모든 책임을 자회사에 떠넘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수억 원이 투입된 대규모 조경공사를 과연 자회사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원청 담당자가 현장에 직접 내려와 작업을 지시한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이건 묵인이 아니라, 직접적인 개입이고 공모입니다. 하지만 본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책임 있는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 무책임, 이 침묵이야말로 현장 노동자들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요구는 명확합니다. 첫째, 마사회는 이번 무등록 조경공사 지시의 전말을 밝혀야 합니다. 둘째, 작업을 거부한 조합원들에 대한 징계나 불이익을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셋째, 비정규직, 특히 여성 노동자에게 위험하고 과중한 업무를 떠넘기는 구조를 즉시 바꿔야 합니다. 동지 여러분, 우리는 이번 사안을 끝까지 추적할 것입니다. 법적 대응은 물론이고, 현장에서의 투쟁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에도 우리는 '표준응대매뉴얼'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노동자의 인권을 짓밟으려는 시도를 막아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와 똑같은 착취가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업무는 늘어나고, 임금은 그대로이며, 책임은 가장 약한 이들에게 전가되고 있습니다. 이게 과연 공공기관이 해야 할 일입니까? 동지 여러분, 우리는 이 현장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시키는 대로만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위법한 지시에는 불복종으로, 노동 탄압에는 단결로 맞설 것입니다. 한국마사회는 지금이라도 응답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더 크고 강한 투쟁으로 다시 이 자리에 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투쟁! 2025년 6월 5일 공공운수노조 한국마사회지부 부경지회장 김재철 ※결의대회 당일 한 계약직 조합원의 발언 또한 영상을 통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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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을 만나다#2]‘“우리에겐 독자적인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필요해요” 누구나노조지회의 시화 동지를 만나다12.3 내란 이후,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는 많은 말벌동지들을 만났다. 4월 4일 윤석열이 파면된 뒤에도 많은 ‘말벌동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때로 노동조합원이 되기도 하고, 때로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기도 하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왔을까? 그 전에 이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 이들은 왜 광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같은 대오에 섰을까? 대선 시기에 들어서며, 광장에서 우리가 외쳤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중집에서 민주당 지지안건 통과를 시도했고, 이미 전현직 간부와 단위노조의 민주당 지지가 줄지어 벌어지고 있다. 민주노총을 믿고 투쟁했던 말벌 동지들은 이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지금도 고공투쟁중인 3개의 투쟁사업장을 비롯해 여러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고 있는 말벌동지들 중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두 번째 인터뷰이는 시화(김형은) 동지다. ‘단결 투쟁’이라 적힌 머리띠를 묶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고양이를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둔 그는 인터뷰이 요청에 망설임 없이 흔쾌히 응해주었다. 내란 사태 이후 광장을 경유하며 민주일반노조 누구나지회의 조합원으로 함께하게 된 그의 SNS 피드는 쿠팡 노동자의 선거권 보장을 요구하는 포스터,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청원 연대를 요청하는 포스터, 135주년 세계 노동절 맞이 고공농성 투쟁사업장과 비정규직 단위들이 함께한 1,000인 선언 라이브 영상 링크 등 온통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의 가장 최근 게시물에는 2025 퀴어퍼레이드를 홍보하는 해시태그가 들어있었다. #우리는결코멈추지않는다. 시화 동지는 어떤 과정을 통해 노동운동과 함께, ‘결코 멈추지 않을’ 길로 들어서게 되었을까? 광장이라는 두 글자로 압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화(김형은) 동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2025년 3월 15일, 거통조선하청지회 지회장 김형수 동지가 고공농성을 시작한 날 밤, 시화(김형은) 동지를 비롯한 누구나노조지회 조합원들이 휴대폰 플래시로 하트를 만들고 있다.) Q1. 12·3 내란사태 이전에도 사회의제나 활동에 관심이 있으셨다면, 주로 어느 방면에서였나요? 집회에 참여해본 적이 있으셨나요? 혹은 아예 없으셨나요? 처음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오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주로 페미니즘과 관련된 사회의제,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기점으로 집회에 참여하거나 주변 사람들과 사회의제에 대해 말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퀴어문화축제를 한 번도 집회로 인식하지는 않았지만, 서울퀴어문화축제는 성실하게…? 참여했었어요. 박근혜 파면 이후로도 여성을 비롯해 소수자에 대한 정책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그 뒤로) 개인의 정신건강도 좋지 않아져서 집회 참여를 한동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당일 계엄 포고 과정을 전부 봤으면서도 국회로 가지 못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 광장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불안감과 죄책감, 미안함 등의 감정이 가장 큰 계기였던 것 같아요. Q2.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오고 난 후로 스스로 가장 변화했다고 느끼신 지점은 어떤 것이었나요? 혹시 그것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정치적 입장과도 연관이 있다면, 조금만 더 자세히 들려주세요. 타인에게 말을 걸고 다가가는 것, 인사를 하는 것이 조금 쉬워졌어요.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고, 광장에 나와서 외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외치는 말'들이 왜 진보 의제가 되었는지, 사회가 얼마나 기울어져 있는지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을 되돌리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힘과 용기를 많이 얻었죠. 저들이 지치기 전에 함께 외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대선에는 살면서 처음으로 소신투표를 해볼 계획이에요. Q3. 윤석열 퇴진 광장 속에서도 대안을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개중에서도 노동자들,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좀 더 이끌리시게 된 이유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취업을 준비하며 다양한 곳의 취업 조건들을 비교해보았고, 내가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직종에 정규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수가 많지는 않고 자격조건도 많이 걸려있더라고요.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나만 좋은 조건의 일자리를 가지면 되는 걸까?” 스스로 질문을 해봤는데, 모두에게 안정적이고 안전한 일자리가 생기지 않으면 내 일자리의 조건은 언제든지 나빠질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안정적이고 안전한 일자리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Q4. 결국 윤석열은 노동자민중의 이름으로 파면을 선고받았습니다. 윤석열 파면 광장도 일단락되며 퇴진 이후를 향해가는 사회대개혁의 광장이 새로이 열렸고요. 그러나 혹시 개인적으로 평가하시는 윤석열 퇴진 투쟁에서의 가장 아쉬운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혹은 파면 이후 조직된 노동자 운동(민주노총)에 바라는 점 또는 조직된 운동(민주노총)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되는 길이 있으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사회대개혁의 광장이라고 말을 하지만, 자꾸 의회적인 방식으로만 풀이하려는 게 아쉽습니다. 퇴진 투쟁에서 나왔던 다양한 의제들 중 어떤 것들은 또다시 일부만 얘기하는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어 아쉬워요. 민주노총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인식되었을 때, 기존 산별 체계에서는 조직될 수 없는 다양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더 작은 사업장들에도 근로기준법이 적용되고, 안전하고 안정적인 일자리의 비중이 훨씬 더 많이 늘어나도록 같이 싸워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알도록 그 방법을 잘 홍보하고, 더 많이 조직하거나, 조직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도 잘 대변하는 노동자 운동이 되면 좋겠습니다. Q5. 최근 민주노총 중집에서의 대선방침 논의 이후 민주노총 전체 차원에서의 민주당과 정책협약 시도가 언론화되며 뜨거운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의 직전에 진보당 김재연 후보의 민주당 단일화가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요. 동지께서는 보수양당과 구분되는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의 노동자계급에게는)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정책협약 시도나 김재연 후보의 단일화를 아쉽게 느낍니다. 자본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에 기대어서는 정책, 법안을 입안하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설령 재판에서 승리를 하더라도 자본이 그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마저 광장에서 종종 보게 되면서 일단 노동자계급이 정치세력화되지 않으면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변화를 일으키기는 어렵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나와 가장 가까운 얘기를 해주는 정치인이 필요해서였고요. Q6. 모두가 ‘사회대개혁’을 이야기합니다. 윤석열 퇴진 이후를 그리는 상도 저마다 각기 조금씩은 다른 만큼, 그 디테일의 차이도 천차만별인데요. 윤석열 파면 이후 ‘사회대개혁’을 말할 때, 동지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부분 또는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들려주세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역시나 "차별금지법 제정"입니다. 우선은 차별금지법에 대해 말하는 권영국 후보가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도록 함께할 사람들을 열심히 찾아볼 예정이에요, 그 다음은, 차차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서 정확히 어떤 활동들을 해야 할지 제 안에서 명확하게 정리된 바가 없어서요. 먼저 투쟁을 시작한 사람들의 곁에서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Q7. 마지막 질문입니다! 혹시 사회주의를향한전진 동지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이나 소감이 있다면, 남기지 말고 전부 들려주세요. 인터뷰를 비대면으로라도 시간 맞춰 진행했어야 했구나 싶은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멋진 질문이었습니다…! 작성하는 내내 많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별개로 전진 동지들이 열어주신 사회주의 기초학습 강의 잘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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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여성뉴스 브리핑] 여성 노동자 숨진 빵 공장, 야구팬들 분노에 ‘크보빵’ 생산중단1. 여성 노동자 숨진 빵 공장, 야구팬들 분노에 ‘크보빵’ 생산중단 SPC삼립이 최근 발생한 노동자 사망 사고 후속 조처로 한국야구위원회(KBO)와 협업해 출시한 ‘크보빵’ 생산을 중단하고 안전 강화 활동에 나선다고 밝혔다. SPC삼립은 5월 29일 홈페이지에 대표이사 명의로 이 같은 내용의 ‘SPC삼립 안전사고 후속 조치’ 공지를 올렸다. 5월 19일 오전 2시 50분쯤 SPC삼립 시화 공장 크림빵 포장 공정에서 일하던 50대 여성 노동자 A씨가 냉각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졌다. A씨는 기계에 윤활유를 뿌리는 작업을 하다 참변을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몇 년 동안 SPC 계열사에서는 노동자 사망 사고가 잇따랐다. 2022년 10월 SPL 평택 제빵 공장에서 20대 여성 노동자가 소스 배합기에 끼여 숨졌다. 이후 불매 운동이 벌어지자 SPC 측은 3년 간 1,000억 원을 투자해 안전 시스템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듬해 8월 SPC 샤니 성남 제빵 공장에서 50대 여성 노동자가 반죽 기계에 끼여 사망하고, 시화 공장 사고마저 발생하면서 안전 관리 체계에 구조적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참조 기사>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52914270001738?did=NA 2. 거대 양당 공약집에서 자취 감춘 ‘성평등’ 약속 거대 양당이 내놓은 대선 정책 공약에서 유독 성평등 정책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양상이다. 양당 공약에 대해 전문가들은 성평등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 차원의 비전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더불어민주당은 21대 대선 정책공약집에서 여성 대상 공약 첫머리에 여가부를 성평등가족부로 확대·강화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여성계가 성평등 정책 과제로 꾸준히 요구해온 비동의 강간죄 도입, 낙태죄 보완 입법(임신중지 권리 보장), 차별금지법 제정 등은 이번에도 보이지 않았다. 국민의힘 정책자료집에서는 ‘성평등’이란 표현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국민의힘은 지난 대선에서 여가부 폐지를 공약하고 실제 이를 추진하기도 했으나, 이번엔 여가부 관련 공약을 내놓지 않았다. <참조 기사>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1199898.html 3. ‘유모차→유아차’ ‘육아휴직→육아몰입기간 …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결혼·출산 용어 바꾼다 사진 출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여성신문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저출생 해소를 위해 결혼과 출산에 부정적 인식을 줄 수 있는 용어를 바꾸려 하고 있다. ‘육아휴직’은 ‘쉬고 온다’는 부정적 어감이 있어 ‘육아몰입기간’ 등으로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시댁’, ‘유모차’, ‘안사람’ 등 차별적 요소가 있는 일상생활 용어도 개선할 계획이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이하 저고위)는 지난 5월 29일 제13차 인구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결혼·출산 등과 관련한 부정적 용어 정비 △저출생 대응을 돕는 금융상품 사례 △정책 성과 평가 결과 △치매머니 관리 방안 △노인빈곤 대응 △수도권 집중 완화 등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저고위는 ‘육아휴직’을 ‘육아몰입기간’, ‘경력단절여성’을 ‘경력전환여성’, ‘난임치료휴가’를 ‘희망출산휴가’ 등으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생활용어도 그 대상이다. 남성 중심적 언어라는 지적을 받아온 ‘시댁’은 ‘시가’로, 성 역할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표현인 ‘집사람’, ‘바깥사람’은 ‘배우자’로, 주 양육자를 엄마로 제안하는 표현인 ‘유모차’는 ‘유아차’ 또는 ‘영유아차’로 바꿀 예정이다. 저고위는 오는 6월 중 국민 대상 온라인 설문조사를 거쳐 9월 정기국회에 관련 법을 개정하는 것을 추진하기로 했다. 법령 변경까지 시간이 걸리는 용어는 현장부터 먼저 바꿔가는 ‘병기·순화’ 방식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언어는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점에서 저고위의 이번 계획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정착된다면, 결혼과 출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거둬 내고, 나아가 성평등 의식을 확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은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제도적 성차별을 바꿔내지 않는 한 결혼과 출산에 대한 인식 전환과 성평등 확산을 근본적으로 이뤄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참조 기사> https://www.news1.kr/economy/population-statistics/5798779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2934 4. 6월, 자긍심의 달 세계 곳곳에서 행사와 시위 이어진다 6월,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프라이드 먼스, LGBTQ Pride Month)을 맞아 세계 곳곳에서 행사와 시위가 개최되고 있다. 올해 프라이드 먼스는 미국 트럼프를 위시한 극우 세력이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며 성소수자, 특히 트랜스젠더를 혐오하고 탄압하는 가운데 맞고 있어 평등과 인권을 위한 저항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커질 전망이다.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은 1969년 6월 뉴욕에서 발생한 스톤월 항쟁에서 유래한다. 이 항쟁은 경찰의 괴롭힘과 차별에 맞선 저항에서 촉발된 LGBTQ+ 인권 운동의 전환점이다. 미국은 이번 프라이드 행사를 트럼프의 성소수자, 특히 트랜스젠더 혐오와 탄압에 반대하는 투쟁의 메시지를 담아 전국의 도시에서 행진을 비롯한 다양하게 펼칠 계획이다. 주요 도시의 일정을 보면, 6월 첫 주에는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뉴욕, 샌프란시스코에서 행진이 열리고, 다음 주에는 필라델피아, 6월 14일에는 뉴올리언스, 6월 21일과 22일에는 시카고, 그리고 6월 28일과 29일 주말에는 뉴욕에서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 워싱턴D.C에서 격년으로 열리는 ‘월드 프라이드’ 국제행사는 5월 31일부터 3주간 진행된다. 태국 방콕에서는 6월 1일 프라이드 행진이 개최되었다. 태국은 올해 초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여 어느 때보다 밝고 활기찬 분위기의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일본 도쿄에서는 6월 8일,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6월 27~29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는 6월 22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6월 28일에 프라이드 행사가 열린다. 영국 런던 프라이드는 7월에 행사가 계획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6월 7일 대전퀴어문화축제, 6월 14일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예정되어 있다. 극우 총리가 프라이드 행진에 금지령을 내린 헝가리에서는 6월 28일 성소수자 행사금지 탄압법에 항의하는 행진이 개최된다. 이탈리아에서는 로마, 밀라노 등지에서 6월 1일부터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최근 이탈리아 헌법재판소가 체외수정으로 아이를 출산한 동성 부부에게 이성애 부부와 동등한 법적 권리를 보장했다. 이는 유럽에서 극우 정치세력의 성소수자 혐오 선동을 제어하는 데 긍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6월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 세계 곳곳에서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 금지, 평등을 향한 저항의 무지개가 떠오르고 있다. <참고 기사> https://apnews.com/article/when-pride-month-2025-lgbtq-june-nyc-7e8e42f98e71a1af9f33aa2e2640a93a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25/jun/01/far-right-weaponising-lgbtq-rights-in-europe-to-sow-division-campaigners-say 5. 이란 국가안보회의, 의회에 히잡법 시행 보류 지시 이란 국회의장 모함마드 바게르 갈리바프가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SNSC) 측에 의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히잡 관련 법률 시행을 유보하라고 지시했다. 갈리바프 의장은 이란 헌법 제176조에 따라 국가안보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 최고국가안보회의가 상위 권한을 갖는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이런 종류의 지시가 내려질 경우, 국회의장은 법적으로 이를 시행할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가정 보호 및 정숙과 히잡 증진법’이라는 명칭의 해당 법안은 2023년 12월 국회를 통과했지만, 내부의 이견과 국내외의 광범위한 반발로 인해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다. 유엔은 이 법안에 대해 “성별에 따른 아파르트헤이트(차별정책)”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 결정은 해당 법을 즉각적으로 시행하려는 초강경 보수 세력과, 사회 불안을 피하려는 국가 기관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몇 달 동안, 강경파와 종교적 자경단체들은 법 시행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연좌 농성을 벌이는 등 압박을 가해왔다. 일부 시위는 경찰에 의해 해산되기도 했다. 2025년 5월 22일, 이란 남부 항구 도시 반다르아바스에서 시작된 트럭 운전사들의 전국적인 파업이 전국 31개 주 155개 도시로 확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지배계급이 노동자민중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여성의 히잡 단속을 그 유화책으로 쓰려는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법률이 공식적으로 시행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당국은 다른 방식으로 히잡 규제를 추진하고 있다. 3월 말 이후, 테헤란, 시라즈, 이스파한의 여성들은 감시 카메라 영상으로 히잡 위반이 적발됐다며 문자 경고를 받았다고 전했다. 활동가들과 디지털 권리 전문가들은 이러한 경고가 인공지능 기반의 얼굴 인식 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는 정부의 신원 정보 데이터베이스와 휴대전화 정보와 교차 분석된다고 주장했다. <참조 기사> https://www.iranintl.com/en/202505252480 6. 이탈리아, 14세 소녀 잔혹 살해 사건에 충격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 아프라골라에서 소녀의 시신이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이후 19세 남성이 나폴리 외곽 마을 아프라골라에서 14세인 전 여자친구를 살해한 사실을 자백했다. 이 살인 사건은 2016년 10월 29일 발생했으며 당시 이탈리아 전역은 충격에 빠졌다. 2025년 5월 28일, 아프라골라의 폐건물 옷장 안에서 또다시 14세 소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소녀는 19세 전 남자친구에게 무참히 살해되고 유기된 것이다. 경찰은 19세 남성 알레시오 투치를 살인과 유기 혐의로 긴급 체포했다. 투치는 경잘 조사에서 “(이별한 후) 다시 만나주지 않으려 해서 돌로 내리쳤다”고 진술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페미사이드(여성 살해)로 이탈리아는 또 한 번 충격과 분노로 일렁였다.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이탈리아에선 페미사이드가 심각한 사회문제다. 올해 들어서만 여성 살해 사건이 이미 16건 이상 발생했다. 그중 상당수가 전 남자친구, 남편, 연인에 의해 벌어졌다. 약 6주 전에도 이틀 간격으로 여대생 2명이 잇따라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해 큰 파장을 낳았다. 이탈리아 여야 대표들은 한 목소리로 “정쟁을 멈추고 젠더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라 전체가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야 대표들이 일치된 목소리를 낸 것은 거의 처음이라고 한다. 한편 여성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최근 한국에서는 배우자나 파트너 관계에서 발생하는 ‘비치명적 목조름’이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비치명적 목조름은 ‘목 부위를 압박해 일시적인 호흡곤란을 일으키지만 피해자가 사망에는 이르지 않는 행위’를 말한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목조름이 피해자의 생명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신호라며 제도적 대응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행위가 단순한 폭력을 넘어, 피해자가 죽음에 매우 가까워졌음을 경고하는 위험 신호라고 강조하며 법과 제도를 통해 실효성 있는 보호조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젠더 폭력을 둘러싼 법과 제도의 정비는 절실하다. 나아가 관계 맺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평등한 성인식을 다지기 위해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굴레를 벗어날 좀 더 근본적인 노력이 시급해 보인다. <참조 기사> https://www.wantedinrome.com/news/italy-afragola-brutal-murder-girl.html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2627 [여성 뉴스 브리핑 X] http://x.com/Wo_newsbrief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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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노동자 죽이는 다단계 하청구조를 철폐하고 발전산업을 국유화하라!6월 2일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발전산업 다단계 하청구조가 다시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숨진 노동자는 한국서부발전 하청업체이자 한전의 발전정비 자회사인 한전KPS, 그 한전KPS의 재하청 업체인 한국파워O&M 소속 선반공이었다. 재해 현장은 한전KPS가 한국서부발전과 임대차계약을 맺은 정비동 기계공작실로, 숨진 노동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혼자 기계작업을 수행하던 중 참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6년 6개월 전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 이후 달라진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낙탄 제거 작업을 홀로 수행하다 참변을 당한 김용균의 죽음과 전혀 다르지 않은 죽음을, 우리는 다시 목도하고 있다. 두 노동자가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사실도, '2인1조' 근무수칙이 버젓이 무시됐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원하청 자본이 사고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모습마저 똑같다. (김용균 노동자가)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던 사측 관계자의 진술은, 이번에는 (숨진 노동자가) "기계공작실 내 선반 주변을 임의로 정리 중이었다"는 한국서부발전의 사고 보고서로 되풀이되고 있다. 한국서부발전이 말하는 '(노동자) 임의적인 행동'은 결국 자본의 임의적인 사고 축소·은폐 조치일 뿐이다. 비용절감을 위해 위험을 방치하고, 끝내 벌어진 죽음 앞에서도 노동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자본을 노동자 민중의 연대투쟁으로 응징하자. 껍데기만 공기업인 발전소 내부는 온갖 외주·하청업체로 가득하다. 복잡다단한 하청구조 속에서, 위험은 고용구조 하단으로 전가되고, 노동자는 착취당하고 또 착취당하다 끝내 죽음으로 내몰린다. 이에 우리는 요구한다. 발전산업을 국유화하고 다단계 하청구조를 철폐하라! 발전산업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 중대재해처벌법을 전면 강화하고, 노동자 작업중지권을 전면 보장하라! 발전소 현장의 모든 노동자가 더 이상 과로와 위험에 내몰리지 않도록 인력충원을 실시하라! 다시 노동자가 죽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와 자본에 맞선 원하청 노동조합의 투쟁이다. 발전노동자들의 단결에 기반해, 투쟁을 사회적으로 확대하자. 사회주의를향한전진도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 2025년 6월 3일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