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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우파에 맞서서 승리하는 법: 밀레이에 맞선 아르헨티나 노동운동에서 얻은 교훈싸움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지만, 아르헨티나의 병원 노동자들, 교사들, 대학 교직원과 학생들은 자기 조직화, 계급적 독립성, 현장 조직화를 무기 삼아 긴축 프로그램과 예산 삭감에 맞설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맞이한 트럼프는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노동 계급을 공격 중이며, 특히 이민자 공동체, 성소수자, 유색인,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많은 이들이 반격에 나서지만, 흔히 그렇듯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의견이 갈린다. 아르헨티나에서 좌파 투쟁가들과 정치 활동가들이 축적해 온 경험은 미국에서 투쟁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왜 아르헨티나를 주목해야 하는가? 한편으로, 아르헨티나에서는 급진적 자유 시장주의를 표방하는 우파 정부의 실험이 현재 진행형으로 펼쳐지고 있다.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움직임은 중심부 국가들의 우파가 정책을 쇄신하는 데 영감을 제공하곤 했다. 이를테면 1970년대 칠레에서 피노체트가 추진한 프로그램은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의 초기 실험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계급 조직화와 저항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는 곳 또한 주변부 국가들이다. 특히 아르헨티나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혁명적 좌파연합 중 하나가 존재하며, 계급투쟁과 사회운동의 역사가 풍부하기 때문에 집단적 저항의 기억, 노동계급의 투쟁방법에 대한 신뢰, 직접행동이라는 전통을 남겨 놓았다. 밀레이, 부르주아 야당, 좌파 먼저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주요 정치 행위자들을 개괄해 보자. 정치 무대에 갑자기 등장한 하비에르 밀레이는 매우 연극적인 인물이다. 논쟁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자였던 그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옹호하면서 분노를 폭발시키는 모습으로 텔레비전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밀레이는 자신을 정치적 아웃사이더로 브랜딩했지만, 그의 인기가 높아진 데는 미디어 재벌 에두아르도 에우르네키안의 힘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 나아가 2023년 대선 승리는 낡은 정치 브로커들과 극도로 실용주의적이고 원칙 없는 권력 협상을 벌인 결과였다. 그럼에도 밀레이의 담론과 정책이 워낙 기이했고 지난 20년간 나라를 지배해 온 두 연합(키르치네르주의와 “변화를 위한 연합(Juntos por el Cambio)”)에 맞서는 “아웃사이더”를 자임했기 때문에, 그는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 후에도 반기득권 수사의 혜택을 계속 누렸다.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그의 경제 노선은 본질적으로 정부 긴축, 규제 완화, 자본가계급 특혜 정책의 새로운 판본이며, 노동자조직 악마화와 노동자투쟁 탄압을 수반한다. 밀레이와 그를 지지하는 운동을 낳은 국내적인 토양이 분명히 있지만, 이것이 일국에 국한된 현상은 결코 아니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도널드 트럼프,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로 이어지는 전 지구적 우파 정부 물결의 일부다. 하비에르 밀레이는 이스라엘 정부와 가자에서 벌어지는 집단 학살의 확고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밀레이에 대항하는 부르주아 야당으로는 중도 및 중도좌파 정치인들을 포괄하는 잡탕과 같은 페론주의 연합, 그리고 “변화를 위한 연합”의 중도우파 잔여 세력이 있다. 후자는 두 정당으로 분열되었는데,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적이며 중산층 기반인 급진시민연합(UCR)과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대통령의 공화주의제안(PRO)이다. 밀레이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 바로 이 두 주류 정당을 맹공격함으로써 담론을 형성했다. 이들은 곧 “정치 카스트”였다. 그러나 밀레이는 결선 투표를 며칠 앞두고 마크리와의 거래를 통해 내각의 몇 자리를 내주고 마크리 지지자들의 표를 확보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2023년 PRO의 대선 후보였던 파트리시아 불리치로, 이후 밀레이 정부 치안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페론주의는 빅텐트 조직으로, 후안 D. 페론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적 개발주의를 느슨하게 계승한 정치 이념을 내세운다. 키르치네르주의는 세기 전환기 이후 페론주의 내에서 지배적 분파로 자리 잡은 중도좌파 정치 기획으로, 처음에는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그의 사망 이후에는 그의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가 이끌었다. 2003년부터 2015년까지 집권했으며 2019~2023년에는 더 광범위한 (비키르치네르주의) 페론주의 연합의 일부로서 다시 권력을 잡았다. 키르치네르주의는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가장 심각했던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딛고 부상했다. 그 위기는 2001년 민중 봉기로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이 축출되며 막을 내렸다. 이런 배경 때문에 키르치네르주의는 대중운동과 전투적 노동계급에 많은 부분에서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정치적 지지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포괄적 복지 정책과 일정 수준의 경제적 재분배를 실시했으며, 사회운동과 인권 단체를 포섭했다. 키르치네르주의의 핵심 과제는 국가 제도의 정당성을 회복하여 사회 질서를 복원하고 자본 축적을 위한 조건을 재설정하는 것이었다.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임기 말인 2015년에, 그리고 알베르토 페르난데스와 키르치네르 행정부 시기인 2019~2023년에는 더더욱, 빈곤율이 치솟았고 인플레이션율도 폭등했으며, 이들의 정치 기획에 대한 환멸감이 모든 사회 계층에 깊숙이 침투했다. 밀레이의 집권을 이해하려면 키르치네르주의에 대한 깊은 실망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아울러 2015~2019년 마크리의 과도기 정권이 (미온적으로나마) 노동운동을 길들이려 시도하고 단편적 긴축(마크리는 충격 요법에 대비되는 “점진주의”를 내세웠다)을 실시하여 투자를 유치하고 경제를 부양하려다 실패한 점도 기억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의 반자본주의 좌파는 대다수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중요도와 대중적 인지도를 자랑한다. 2011년 창설 이래 좌파노동자전선(FIT-U)은 민중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정치 세력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FIT-U는 현재 연방 의회에서 5석, 주 의회 및 지방 의회에서 수십 석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노동계급의 계급적 독립성을 바탕으로 쟁취한 것이다. 이 같은 계급 독립 정치는 좌파전선 원내 교섭 단체가 밀레이 정부의 모든 조치에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반대한 유일한 교섭 단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나아가 소속 의원 전원이 교사 수준의 소득만 자신이 갖고, 나머지 세비는 노동자 투쟁과 사회적 투쟁에 기부하겠다고 서약했다. 좌파전선의 유명 인사들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언제나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나란히 서 있는 사람들로 인식된다. 이를테면 전 대선 후보이자 연방 의원인 니콜라스 델 카뇨와 미리암 브레그만은 모두 좌파노동자전선 소속 사회주의노동자당(PTS) 당원으로, 의회에서 정부의 탄압을 끊임없이 고발하는 동시에 현장 투쟁에 연대한다. 이들이 노동운동가들, 연금 삭감에 항의하는 퇴직자들, 병원 해체에 맞서는 의료 노동자들과 함께 최루액을 맞고 후추 스프레이를 맞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좌파노동자전선의 활동 무대는 의회로 국한되지 않는다. 소속 활동가들은 전국 수백 개 노조 지부에서 지도자나 조직가로 활동하고, 수십 개 대학에서 조직을 이끌며, 강력한 여성운동 조직에서도 가장 전투적인 대열에 속해 있다. 바로 이런 것들이, 그리고 특히나 노동운동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좌파노동자전선 주요 단위인 PTS 활동의 핵심이다. 행위함으로써, 또 행위하지 않음으로써 아르헨티나의 정치 상황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내 행위자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노조 관료들이다. 아르헨티나 노동운동은 역사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축에 속했으며, 400만 명에 달하는 조합원(전체 노동인구의 약 25퍼센트, 공식 고용 노동자의 거의 40퍼센트)을 자랑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조는 통상 페론주의 성향의 관료적 분파가 장악하고 있으며, 이들은 자신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정치인과도 기꺼이 거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르헨티나에는 노동조합 총연맹이 두 개 있다. 가장 크고 가장 관료적인 CGT, 그리고 CGT에서 갈라져 나온 전투적이고 (약간이나마 더) 민주적인 CTA다. 이 상급 노동 조직들은 국가 경제를 마비시킬 힘을 갖고 있지만, 지도부는 (종종 용역 깡패까지 동원하면서) 조합원의 참여와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을 가로막고, 파업 조직을 회피할 구실을 늘 궁리한다. 마지막으로, 정부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외부 행위자를 빼놓으면 전체 구도가 완성되지 않는다. 국제통화기금(IMF)이다. IMF는 역사적으로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유 시장 및 긴축 정책을 밀어붙이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IMF는 “최후의 대부자”, 말하자면 국채 매입자를 찾지 못하는 나라에 신용이라는 생명줄을 제공하는 지위 덕분에 공공 정책에 대해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IMF 대출에는 통상 “조건부 이행 사항”이 붙는데, 여기에는 대개 재정 적자 축소 또는 해소, 사회 지출 삭감, 자유 무역 장벽 최소화 등의 요구가 포함된다. 중간 선거를 앞둔 밀레이 정부 밀레이 정부는 임기 초부터 자랑할 만한 핵심 성과를 하나 거두었는데, 바로 인플레이션을 잡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권 안정의 주된 토대다.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은 지난 10년간 아르헨티나를 짓눌러 온 문제였다. 마크리 집권기(2015~2019년)에 연 40퍼센트였던 물가상승률은 2023년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임기 마지막 해 200퍼센트를 돌파하며 치솟았다. 이례적으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은 이토록 불안정한 경제 환경에서 국내외 자본의 투자를 가로막아 재계를 위축시켰을 뿐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거대한 불안의 원천이 되었다. 임금은 물가를 따라가지 못했고, 가격을 예측할 수 없는 노동자 가정은 극도로 불안해졌다. 역대 정부가 가격 통제를 시도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하비에르 밀레이는 취임하자마자 가격을 자유화하고, 과열된 경기를 식히기 위한 친시장 정책과 여러 조치를 통과시켰다. 포퓰리즘적 “아웃사이더” 담론을 내세웠지만 그의 경제 정책은 교과서적인 신자유주의 충격 요법 그 자체였다. 집권 첫 주에 정부는 자국 통화를 50퍼센트 평가 절하하고 가격을 자유화했으며, 이로 인해 실질임금이 급락했다. 공공 지출 총액을 29퍼센트 삭감했고, 연방 정부의 주요 감축 조치는 13개 부처 폐지(또는 “차관급”으로 격하), 모든 공공 인프라 사업 동결, 보건·교육·과학 분야 지출 대폭 삭감 등을 포함했다. 2025년 6월까지 정부는 공무원 5만 명을 해고했다(취임 당시 공무원은 총 20만 5천 명이었다). 물가는 초기에 급등한 이후 안정되었고, 인플레이션은 2023년 12월 월 약 25퍼센트에서 1년 뒤 월 2.5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치러야 할 대가는 혹독했다. 경기 냉각 정책에는 필연적으로 침체의 위험이 따르는데, 아르헨티나는 사회적·경제적 상황자체가 이미 참담했다. 2025년 상반기에 부분적으로 회복되기는 했으나 밀레이 집권 첫 해 경제 활동은 3.5퍼센트 감소했고, 2023년 11월부터 2024년 8월 사이에 거의 14만 개의 일자리(민간 부문 전체 고용의 2.2퍼센트)가 증발했다. 초기 정책들이 시행된 직후 빈곤율은 역대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고, 이후 감소하기는 했으나 이미 높았던 2023년 빈곤율 언저리에서 고착되었다. 2025년 6월 기준으로 실업률은 최근 4년 중 최고치인 7.9퍼센트까지 올라섰고, 비공식 고용을 비롯한 각종 불안정 노동은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 계수는 이전의 0.41에서 0.47로 뛰어올랐다. 여러 논평가들은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정부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민중의 묵묵한 인내가, 특히 가장 취약한 처지에 놓인 이들의 바로 그 인내가 역대 정권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드러내는 또 하나의 척도가 되었다. 눈에 띄게 나빠진 경제 여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밀레이에게 자신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 기회와 더 많은 시간을 기꺼이 주려 했다. 밀레이의 목표는 판을 엎고 다시 투자를 끌어모아 대폭 경제 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구상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새로 짜는 것, 말하자면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고 임금을 깎아내리는 것이며, 이를 통해 착취와 이윤 창출의 기회를 늘리고 확대하려 한다. 그러나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먼저 아르헨티나 노동계급과 그 조직들, 그리고 과거 투쟁으로 쟁취한 것을 지키려는 의지에 결정적 패배를 안겨야 한다. 대부분의 전국 단위 노조가 관료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해도, 지도부는 여전히 지지 기반을 이루는 목소리들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장 조합원들의 핵심적인 권리가 박탈당하면 조직적 운동에 나서라는 거대한 압력이 지도부에 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5년 들어 밀레이 정부는 정권의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여러 스캔들에 맞닥뜨렸다. 첫 번째는 리브라($Libra) 스캔들로, 하비에르 밀레이 본인이 소셜 미디어 X에서 해당 암호 화폐를 홍보한 뒤 투기꾼들이 투자 회수 사기를 통해 2억 5천만 달러를 챙긴 사건이다. 이어서 마약 유통업자들의 뇌물과 연루된 부패 사건이 터졌는데, 음성 녹음에는 하비에르의 여동생이자 대통령 최측근 자문인 카리나 밀레이가 직접 연루되어 있다. 가장 최근에는 밀레이의 정당인 자유전진(La Libertad Avanza)의 간판이자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중간선거 첫 번째 후보였던 호세 루이스 에스페르트가 마약 사건에 휘말려 선거운동 도중 후보직을 사퇴했고, 연방 판사에 의해 자금세탁 혐의로 기소되었다. 경제는 도약하지 못하고, 국제수지 적자와 결부된 모순이 심화되면서 단기 및 중기 경제 전망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재무부가 200억 달러를 구제금융으로 제공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의 발표는 밀레이에게 단기적이기는 하지만 절실한 생명줄이다. 게다가 트럼프는 또 다시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밀레이가 선거에서 승리해야만 대출을 승인하겠다고 못 박았다. 좌파전선의 전 의원이자 전국 지도자인 미리암 브레그만이 비난했듯이, 이 합의는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이 심화된다는 의미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정부는 강경한 태세를 유지하면서 타협 불가 이미지를 내세우려 한다. 그러나 밀레이 취임 이후 계급투쟁의 윤곽을 드러낸 중요한 운동이 몇 차례 있었다. 두 차례의 총파업, 교육을 지키기 위한 대규모 시위, 성소수자의 권리와 공공 의료를 위한 대규모 시위, 운수·교사·공무원 파업, 그리고 주요 도시 전역에서 열린 대중 집회가 그것이다. 이 모든 투쟁 가운데 지금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세 가지가 있다. 정부를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거나, 정부에 맞서 싸우는 방법에 관해 중요한 시사점이 있는 사례들이기 때문이다. 대학이 반격하다 아르헨티나에서 공립대학들의 권위는 상당하다. 등록금이 전액 무료임에도 공립대학 학위는 대부분의 경우 사립대학 학위보다 높이 평가된다. 2024년 10월 정부는 공립대학을 겨냥했다. 이것이 첫 번째 공격은 아니었다. 밀레이가 취임 직후 내놓은 2024년 예산안에서 연방 정부가 전국적으로 직접 지원하는 국립대학 재정이 대폭 삭감되었다. 페소화 기준 예산은 2023년 수준에서 동결되었지만, 연간 288퍼센트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거의 70퍼센트 삭감과 다르지 않았다. 2024년 4월, 50만에서 1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공립대학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는 지난 20년간 가장 큰 대중운동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10월에 대통령은 한술 더 떠서 의회가 통과시킨 고등교육 긴급 재정지원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하나둘 시작된 대학 점거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다. 운동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학생들은 전국 30개 국립대학에서 80곳 이상의 건물 점거를 조직했고, 교원 및 비교원 직원의 임금 인상과 대학 예산 전반의 증액을 요구했다. 노동조합과 대학생 연합은 두 차례의 전국 파업과 주요 도시에서의 대규모 행진을 조직했다. 이 강력한 운동 앞에서 정부는 빠르게 뒷걸음질쳤다. 밀레이는 공립대학에 등록금을 부과하겠다는 암묵적 위협을 교묘하게 내비쳤으나, 충돌이 시작된 지 불과 며칠 만에 공립대학 무상 원칙을 폐기하지 않겠다고 직접 나서서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 운동에 불을 붙이고 힘을 실어 준 것은 수십만 명의 학생, 교사, 교수, 대학 직원들로 이루어진 풀뿌리 조직이었다. 이들은 건물을 점거하고 민주적 토론과 의사 결정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냈다. 각 학교의 활동가 수백 명이 총회에 모여서 토론하고 다음 행동을 표결로 정했다. 좌파 일각에서는 이 같은 사례를 이상화하거나 저절로 생긴 현상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좌파 정치 활동가들은 이러한 자기 조직화 기구들을 구축하고, 발전시키고, 쟁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좌파노동자전선 소속 PTS 당원들은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민주적 의사 결정을 위해 쉼 없이 싸웠다. 이 투쟁 국면에서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낸 조직과 기관으로는 전국대학간위원회(CIN, 전국 대학 총장 협의체), 대학 노조 연합(Frente Sindical Universitario), 그리고 학생운동 대표들이 있었다. CIN의 구성원은 대부분 오래된 두 부르주아 정당(페론주의와 급진시민연합)에 소속된 총장들로, 직접 행동을 만류하거나 약화시키려 했고 학부 건물 점거에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며 일부 학교에서는 원격 수업으로 전환하여 운동을 고립시키려 했고 관심을 오로지 의회에서의 예산 협상으로 집중시키려 했다. 대학 노조 지도부도 투쟁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두 차례의 매우 성공적인 파업과 전국 행진 이후 정부가 약세를 보이던 시점에 그들은 세 번째 전국 교육 행진 소집을 거부했다. 학생 조합은 당연히 학생들의 도덕적 열기와 투쟁 의지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많은 점거 현장에 참여하고 점거를 이끌었다. 이를테면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철학부 학생 조합 사무총장인 루카 본판테는 CIN의 타협적 노선을 거듭 규탄하면서, 지속적인 직접 행동과 전국적 학생운동 조율을 촉구했다. 그러나 전국 조직과 다수의 주·지방 조직에서 학생 조합 지도부는 대부분 급진시민연합과 페론주의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점거를 적극적으로 말리면서 초점을 2025년 대학 예산을 둘러싼 의회 논의로 돌리려 했다. 학생들과 대학 노동자들에게 허락된 역할은 의원들의 토론과 표결을 지켜보는 수동적 구경꾼에 불과했다. 이 투쟁의 핵심 교훈은 직접 행동과 자기 조직화야말로 대학 운동의 진정한 동력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노조와 학생 조합의 관료들은, 제도적 경로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든 아니면 자신들의 손을 벗어날지도 모르는 광범위한 대중운동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든 간에, 운동의 급진적인 칼날을 무디게 하고 가로막기만 했다. 게다가 주류 부르주아 정당 성향을 가진 조직들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거스를 수 없을 때만 행동에 동참하고, 그 와중에도 운동을 해체하고 고립시키고 잠재우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으며, 투쟁의 현장과 동떨어진 의회 논의로 대화의 장을 옮기기 위해 애썼다. 꼼짝도 하지 않는 병원 교육과 더불어 의료 부문 또한 밀레이 행정부 출범 초부터 공격 대상이었다. 일부 추산에 따르면, 병원 예산은 최대 54퍼센트까지 삭감되었다. 고등 교육을 공격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밀레이 행정부는 더 작고 만만해 보이는 표적을 겨냥했다. 바로 연방 정부 관할로 운영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정신건강 병원이었다. 보나파르트 병원은 아르헨티나에서 유일하게 정신질환과 중독에 대해 여러 분야의 통합 치료를 수행하는 전문 병원이다. 이 공격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기관에서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작업은 아르헨티나의 어떤 의료 시설과도 다르다. 의사, 사회복지사, 치료사, 사회과학자, 음악치료사 등이 협력해서 정신건강 환자에게 총체적 치료법을 제공한다. 인권 활동가이자 오월광장어머니회 소속인 라우라 보나파르트의 이름을 딴 이 병원은 진보적이고 평등한 의료의 상징이다. 2024년 10월 4일 금요일, 병원 노동자들은 입원 병동과 응급실을 폐쇄하라는 정부 공문을 받았다. 몇 시간 뒤, 이 조치들은 다음 주 월요일에 실행될 병원 최종 폐쇄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소식이 여러 경로를 통해 들려 왔다. 공무원 노조(ATE)가 긴급 회의를 소집했고, 곧이어 총회에서 자신들의 몸으로 병원을 지키기로 표결했다. 점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팔짱 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최대한 관심을 끌어야만 했다. 정부는 평화로운 시위에도 물리력을 행사할 의지가 있음을 이미 충분히 입증했다. 보나파르트 노동자들은 언제든 폭력적으로 진압당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병원에 남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지체 없이 바로 그날 거리로 나가 전단을 돌리며 지역 사회의 지지를 호소했다. 숨 가쁜 속도로 다음 날인 토요일 저녁 연대 음악회를 조직했고, 여러 밴드가 투쟁에 연대하며 무대에 올랐다. 환자들과 인근 지역 및 그 너머 주민들의 뜨거운 지지가 쏟아지며 조직화에 힘이 실렸다. 10월 7일 월요일에는 병원을 “껴안는” 연대 집회에 수백 명이 모였고, 기자회견에는 국회의원, 인권 활동가, 노조 지도자들이 함께했다. 맨 처음 회의를 소집한 것은 노조 현장위원회였지만, 현장 조합원들이 스스로 나서서 병원을 조직하고, 각기 다른 과제(언론 대응, 연대, 환자 돌봄 등)를 조율할 위원회를 꾸리고, 투쟁 전략을 결정했으며, 노조 공식 지도부는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신 건강 전문가 훌리에타 슈발리에의 회고에 따르면, 병원 직원이자 조합원으로 지낸 11년 중에 어떤 행동을 할지 “직접 투표로 결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용 형태, 조합원 여부, 소속 부서와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가 총회에 모여 매 결정마다 거수로 표결했다. 투쟁 첫 2주 동안 총회는 거의 매일 열렸다. 훌리에타는 자신들이 보건 부문 안팎에서 투쟁하는 다른 노동자 집단들과 빠르게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을 곧바로 깨닫게 된 과정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포사다스 병원, 가라한 병원, 철도 노동자, 공항 노동자 등이 연대의 대상이었다.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대학 투쟁에도 주의를 기울여 의과 대학에 대표단을 파견하고 싸우는 부문들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이러한 연대는 곧 결실을 맺었고, 보나파르트 병원은 정부에 맞선 대중 행동과 저항의 진원지가 되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정부는 한발 물러서서 병원을 계속 운영하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임박한 폐쇄 위험은 넘겼지만 정부가 병원 “구조조정”을 고집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구조조정은 병원을 서서히 고사시키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병원 존치를 공개적으로 약속한 것은 정부의 명백한 패배였고, 보나파르트 병원은 전국적으로 밀레이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보나파르트 병원 직원들을 대표하는 두 노조의 지도부는 단결, 결집, 민주적 의사 결정을 요구하는 현장 조합원들의 목소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조 대표들이 정부 당국과 만나 모든 일자리와 부서를 포함한 병원 존치 합의에 서명하면서 정부와 함께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데 동의해 버렸다. 구조조정이란 통상 해고와 부분 폐쇄를 포함하는 긴축의 완곡한 표현이다. 이후 병원 총회는 어떠한 형태의 구조조정에도 반대한다고 표결했고, 이는 현장 조합원들이 자기 지도부보다 더 왼쪽에 서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일간 좌파>와의 인터뷰에서 보나파르트 병원 핵심 조직가 중 한 명인 하비에르 리오스는 이 투쟁의 가장 중요한 교훈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정부를 후퇴시킬 수 있었던 것은 현장 조합원의 힘, 지역 사회와의 유대 구축, 병원의 벽(과 인력) 너머로 확산된 광범위한 능동적 저항 운동 덕분이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투쟁들이 서로를 자극하고, 기금을 모으고, 서로의 현장에 달려가고, 가장 넓은 의미의 노동계급 연대를 체현하는 운동이 만들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사들이 파업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교사 파업은 누가 우리의 동지이며 누가 우리의 적인지 선명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파업은 5월에 시작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최대 공립 교사 노조인 수테바(SUTEBA)가 정부와의 잠정 합의안을 발표하고 표결에 부친 뒤였다. 잠정 합의안은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소수의 교사를 대표하는 노조인 FEB가 파업을 소집하도록 추동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정부는 현재 중도 좌파 경제학자 악셀 키실로프가 이끌고 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정부의 경제부 장관이었던 그는 현재 페론주의 내 지배적 분파인 키르치네르주의의 주도권을 두고 크리스티나와 다투고 있다. 지난 9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중간 선거에서 키실로프의 후보들이 밀레이 측 대리인들에게 큰 타격을 입힌 뒤 야당 내에서 그의 입지가 높아졌다. 키실로프는 밀레이에 대한 저항의 선봉을 자처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가 밀레이의 경제 노선에 맞서는 “방패” 역할을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FEB가 파업을 선언하자마자 키실로프는 파업에 참여하는 교사들에 대해 결근을 이유로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위협은 파업을 무력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키실로프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 분명히 드러냈다. 수테바 지도부는 언제나 그렇듯 보수적 역할을 맡았고, 조합원의 극히 일부에게만 의견을 물었으면서도 잠정 합의안이 압도적 다수의 동의로 통과되었다고 둘러댔다. 수테바 내 좌파 분파인 물티콜로르가 파업에 합류하겠다고 선언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내 최대 지구의 조합원 압도적 다수가 파업 호소에 응했다. 이러한 결과는 놀랍지 않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교사들은 생계를 위해 두 곳, 심지어 세 곳의 일자리를 가진 경우가 허다하다. 수테바가 협상한 임금 인상은 고작 4퍼센트(수개월 후 7퍼센트로 상향)였고, 2025년 물가상승률이 (작년보다 나아진 수치임에도) 27퍼센트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이 인상분은 사실상 감소한 소득분을 메우기조차 턱없이 부족하다. 이는 이미 빈약한 임금을 또다시 깎는 것이나 다름없다. 생활비를 감안하면,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실제로 전국에서 교사 임금이 가장 낮은 세 개 주 가운데 하나다. 교사들에 대한 키실로프의 적대 행위는 그가 가진 정치적 입장의 민낯을 드러낸다. 키실로프는 겉보기에는 밀레이의 노골적 신자유주의와 매우 다르지만, 여러 근본 요소와 목표의 상당 부분을 공유한다. 전투적 수사를 내세우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경제 정책은 밀레이와 마찬가지로 국내외 투자를 끌어들이는 것에 기초한다. 이를 위해 키실로프는 관광업, 제조업, 광업 부문에서의 대규모 자본 투자에 대해 향후 30년간 파격적인 세금 감면을 제공하는 등 여러 경제적 특혜를 내놓았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의 노선이 IMF 및 기타 국제 금융 기구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종속에 도전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고착시킨다는 점이다. 고용주들에게 밀레이의 집권은 공세에 나서라는 신호였다. 그들은 노동운동가를 해고하고, 더 낮은 임금으로 협상하고, 노동 강도를 높이려 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진행 중인 수많은 노동자투쟁에 대한 주 정부의 답변은 “강제 조정” 조치였다. 말하자면 노동자에게는 업무 복귀를, 고용주에게는 괴롭힘, 불법해고, 임금삭감 중단을 강제하는 조치다. 문제는,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을 위험 때문에 이 조치에 따라야 하는 반면, 고용주들은 아무런 제재 없이 이를 무시할 수 있고 실제로 종종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강제 조정은 고용주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투쟁을 무력화하는 몽둥이 구실을 할 뿐이다. 다시 말해,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키실로프 행정부는 밀레이의 정책에 대한 그 어떤 “방패”도 되어 주지 않는다. 진보적 수사로 포장되었을 뿐, 자본 투자에 보상하고 저임금을 유지하고 투쟁하는 노동자를 규율하는 정책의 온건한 판본이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교사들은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키실로프의 임금 삭감이 위법하다는 법원 판결에 힘입어, 물티콜로르와 반대파 지부들은 정부와 로베르토 바라델 예하 수테바 지도부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물티콜로르 지도자이자 전 연방 의원인 나탈리아 곤살레스 셀리그라의 발언에 따르면, 수테바 지도부는 “사실상 키실로프 행정부의 연장선에 있는 듯하다.” 이 사례가 무엇보다 잘 보여 주는 것은, 수사가 아무리 좌파적이어도 부르주아 정치인은 자본주의 게임의 규칙 안에서만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좌파는 시장과 노동자를 중재하겠다고,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겠다고 약속하는 국가 관리자에게 희망을 걸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 경험이 입증하듯, 시장의 압력 하에서는 투자와 기업 이윤을 촉진하려는 충동이 민중의 안녕보다 언제나 우선한다. 이 사례에서도 역시 노조 관료층은 운동을 잠재우는 역할을 맡고 있다. 미국 좌파를 위한 전망과 교훈 우파 정부의 공세에 맞서려면 정치적 차이를 잠시 잊어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듣는다. “지금은 전략을 논할 때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킬 때”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권위주의 정부의 파렴치한 공격에 맞서서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운동을 능동적 저항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것이 차이를 숨기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강력한 좌파야말로 극우에 대한 최선의 방어다. 이 글에서 다룬 사례들은 좌파 활동가들이 밀레이에 맞선 싸움을 선도하는 모습을 가득 담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철학부 학생 조합 사무총장 루카 본판테는 PTS 당원이며, 보나파르트 병원의 하비에르 리오스, 교사 활동가이자 전 의원인 나탈리아 곤살레스 셀리그라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혁명적 활동가들은 투쟁 현장에 전략적으로 자리 잡고, 동료 노동자, 학생, 사회운동 활동가를 조직하며, 노동계급의 힘을 강화하는 타협 없는 강령을 제시하고, 자기 조직화 기구 건설을 추동한다. 바로 이러한 노력이 방어적 투쟁에 힘과 예리한 칼날을 부여한다. 이것이 수십 년에 걸친 끈질긴 조직화의 결실이라는 점도 강조할 만하다. PTS는 1990년대에 혹독한 시절을 겪었다. 활동가는 전국에 수백 명뿐이었고 대중적 인지도는 미미했다. 그러나 혁명 정당, 전투적 정당을 건설한다는 전략적 목표가 1988년 창당 이래 모든 투쟁과 모든 전술적 결정에 방향을 제시했다. 2000년대와 2010년대에 아르헨티나 좌파 대부분이 키르치네르주의를 지지하거나 그쪽에 합류했지만, PTS는 정치적 독립을 유지한 소수 조직 가운데 하나였고 이들 대부분은 현재 좌파전선에 통합되어 있다. PTS가 지금 이 투쟁들에 내부적으로 개입하면서 급진적 목소리를 내고 사회주의적·반제국주의적 강령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원칙에 입각한 조직화와 당 건설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다. 좌파전선은 IMF를 비롯한 전 지구적 금융 기구들과 제국주의적 종속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단절되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유일한 전국적 세력이다. 이 투쟁들이 밀레이 정부를 압박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자기 조직화 기구를 만들어 민주적 의사 결정을 가능하게 하고, 노조 및 여타 운동의 관료적 지도부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그들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현장 조합원의 힘을 키우고 지역 사회와 강한 유대를 맺음으로써 정부의 공격에 맞선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진보적 수사와 소소한 양보를 제시하면서 시장의 지배를 유지하고 재정 균형을 위해 필요할 경우 노동자를 규율하는 차악의 정부를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미국 좌파는 이러한 경험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실천이 재현된다면 트럼프에 저항하는 운동을 더욱 강화하는 동시에, 두 자본주의 정당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좌파의 토대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전국 단위 노조 지도자들은 대체로 이민국(ICE)에 의한 이주민(또는 이주민처럼 보이는) 노동자 납치와 공포 조성을 외면했을 뿐 아니라, 연방 공무원에 대한 대규모 해고와 노조가 교섭으로 쟁취한 권리의 박탈에 맞서 단호한 투쟁을 조직하는 데도 실패했다. 노조 관료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노조 내부에 반대파와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것은 오늘날 절박한 과제다. 오늘날 미국 좌파에게 특히 어려운 과제는 조란 맘다니 현상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이다. 자신을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하는 맘다니의 선거운동은 뉴욕 시 노동계급과 좌파 전반에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기성 정치권과 보수 정치인들에게는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맘다니의 공약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보적이며, 뉴욕 시 노동계급 가정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숨통을 틔워줄 수 있을 것이다. 좌파는 노동계급의 권리를 확장하고 자본의 힘을 억제하는 조치들을 지지할 수 있고 또 지지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대중운동에 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맘다니 개인에게 정치적 지지를 보내고 그의 캠프에 결집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그가 11월에 당선되더라도, 취임 직후 시내 대기업을 만족시키라는 즉각적 압력에 직면할 것이고 자기 공약의 가장 급진적인 부분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뉴욕 시의 정치 브로커들이나 재계 엘리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이 그들의 부와 이익에 위협이 된다는 우려를 불식시켰다. 민주당에서 출마한 좌파 성향의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들, 이를테면 버니 샌더스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 같은 정치인들의 전례를 보면, 그들이 현 상태에 도전하거나, 시장의 명령에서 벗어나거나, 독립적인 노동계급 정치 조직의 발판을 제공할지도 모른다는 환상은 사라질 것이다. Left Voice에 2025년 10월 26일 발행된 기사를 번역함. 저자: Remo Erdosain 번역: 강성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인터뷰] “서광석열사가 바라는 대로 끝까지 투쟁해서 꼭 이겨서 돌아가겠습니다” - 화물연대 서울경기지역본부 편의점지부 CU지회 윤정욱지회장4월 25일, CU진주물류센터 앞 서광석열사가 돌아가신 도로를 둘러 ‘열사정신 계승! CU 투쟁승리! 공권력 살인폭력 규탄! 화물연대 총력투쟁 결의대회’가 열렸다.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는 9천 명이 모였다고 했는데, 실제 현장에서는 1만 명도 넘게 보였다. 진중하게 뿜어져 나오는 노동자들의 분노와 결기는 서로를 더욱 뜨겁게 연결하는 듯했다. 결의대회를 마치고 서울경기지역본부 편의점지부 CU지회 윤정욱 지회장을 만났다. 윤정욱 지회장은 “서광석열사에게 너무 죄송하다, 자본과 경찰이 너무 원망스럽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은 “연대와 조직, 동지를 믿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로 이어졌다. 윤정욱 지회장의 열사와 동지를 향한 절절한 마음, 4만5천 화물노동자와 모든 노동자의 대의를 향하는 단호한 목소리와 자본가를 꿰뚫어 보는 깊은 눈빛을 글로는 담을 수 없다. 다만, 최전선에서 싸우는 CU화물노동자의 이야기를 부족하나마 옮겨본다. 인터뷰는 노동조합이 투쟁해온 시간 순서대로 싣는다. 4.25 결의대회 후 문화제에 참가 중인 화물연대 서울경기지역본부 편의점지부 CU지회 윤정욱 지회장 질문1. 노동조합을 만든 이유와 계기를 말씀해주세요. 윤정욱 CU지회장: 나는 CU편의점에 물건을 공급하는 화물노동자로 안성센터에서 일한다.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은 BGF로지스와 운송사를 거쳐 화물노동자에게 지역별 센터에서 편의점까지의 화물운송 일감을 맡긴다. CU안성센터와 화성센터에 지회가 생긴지는 얼마 안 된다. 안성센터에서 작년 8월 9일 41명 중에 40명이 노조에 가입했다. 화성센터는 한 달 정도 뒤에 가입해서 하나의 지회가 되었다. 노동조합에 가입해 투쟁하게 된 계기는 별거 없다. 진짜 ‘인간답게’,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어서다. 여기 지금 다닌 지는 11년째고, 패밀리마트 때부터 오래 일한 분들도 있는데 처우가 그때랑 지금이랑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후퇴했고 일은 많아졌다. 상하차 이외에 다른 업무들이 너무 많다. 센터가 작다, 뭐가 없다 핑계를 대면서 화물노동자가 할 일이 아닌 걸 시켰다. 코스를 잘라버리는 등 갑질도 심했다. CU노동자들은 노동환경과 처우 개선을 위해 단결해서 노조를 결성한 것이다. 새 차 가격이 7천만 원, 냉동차는 1억이다. 그런데 370만 원 운송료를 받으면 차값 최소 70에 지입료, 보험료, 뭐 떼고 하면 한 220~230만 원. 그것도 2회전을 해서 버티려고 했다. 하루 빠지면 월급이 14만 원씩 빠져서 아파도 진짜 기어 다니면서 일하는 사람이 많다. 코로나 때는 코로나 걸려서도 일했다. 당시 편의점이 호황이었다. 물량이 많아 회사가 쉬지를 못하게 했다. 격리하는 화물노동자에게 배송시킨 상황도 포착했었다. 그때 CU 영업이익이 엄청 늘어난 걸로 알고 있다. 고생이란 고생은 노동자가 다 했다. 매년 월급이 5만 원씩 오른다. 그러면서 잡다한 일들도 점점 늘어났다. 공병 수거라든지 행사 반품, 행사 상품 분류 등이 많다 보니까 노동자들이 많이 힘들어한다. 예를 들어서 발렌타인데이, 빼빼로데이, 화이트데이, 추석, 설날, 어버이날 등 행사가 한 대차 나오면 화물노동자가 하나하나 리스트를 보면서 다 분류해야 한다. 그러니 이직률도 높다. CU자본은 돈 아끼려고 사람 안 쓰고 화물노동자한테 공짜노동까지 강요하는 것이다. GS나 세븐일레븐은 불합리한 점이 개선되어 상하차만 하면 된다. 노조가 먼저 만들어진 영향이 컸다고 본다. CU 다녔던 사람이 GS로 가서 알려준 얘기를 듣고서는 ‘CU가 더 큰 회사고 같은 업종인데 어떻게 그래?’라고 했다. 직접 확인하면서 우리도 이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참고했다. 질문2. 파업 후 투쟁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윤정욱 CU지회장: 솔직히 작년 8월, 9월달에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이렇게 총파업을 하게 될 줄 몰랐다. CU편의점 화물노동자들은 안성화성센터, 나주센터, 원주센터, 진주센터가 있고, 이번에 제주센터에서도 가입했다. CU전체 화물노동자를 2,500명~2,800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약 7~8%가 화물연대 조합원이고 파업하고 있다. 자본은 지난달 안성화성센터에서 선전전을 한 후 물량 두 개 하던 걸 반으로 줄여놨다. 우리한테 통보 한마디 없이 축소해버렸다. 차에 실린 물량을 센터에 내려놓았더니 물건은 가져가 놓고 매가(판매가) 기준으로 2억 원 손해배상을 때렸다.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협박했지만 조합원들이 흔들림 없이 믿고 파업했다. 우리는 회사원들하고 달라서 일을 안 하면 다음 달 월급이 한 푼도 없다. 4월 5일부터 파업해서 딱 21일 차다. 이렇게 시작한 게 20여 일밖에 안 됐고 끝까지 싸워서 돌아가야 한다. 파업을 준비할 때 ‘우리가 모두를 위해 싸운다고 비조합원이 같이 싸우겠냐?’는 얘기도 있었는데, 지금 안 하면 ‘GS나 세븐일레븐보다 10년 도태된다’,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다들 결의에 차서 시작했다. 조합원들의 의지가 대단하다. 물량 저지 투쟁을 해왔다. 그러면 센터의 반장들이 자본에게 대체 차량 기사를 구해준다. 만약 자본이 안성하고 화성 물량을 다른 센터로 이관시킬 때, 같은 노동자면 ‘우리는 해주지 말자’, ‘같이 위해서 싸우지 못할망정 우리라도 도와주지 말자’ 이렇게 되는데, 반장들이 ‘돈 더 준다’, ‘안 하면 잘라버리겠다’는 식으로 협박과 회유를 하면서 기사를 구해주는 거다. 그런데 그곳의 화물노동자들은 ‘왜 진작 오지 이제 왔냐’고 말한다. 지금 이 사태가 끝나면 가입하겠다고 많이 이야기한다. 지금은 같이하지 못하지만 지지하고, 독려하는 노동자들이 많다. CU에 제일 안 좋은 제도가 반장 제도인데, 반장에게 일과 사람을 자를 수 있는 인사까지 현장의 권력을 다 주는 제도라서 서로 감시하고 분열시키면서 노조를 못 하게 하는 거다. 꼭 없앨 생각이다. 처음에는 CU화물노동자 2500명을 위해서 시작한 투쟁이 지금은 그 이상, 화물 노동자 전체의 투쟁이 되었다. 서광석동지가 연대하다가 고인이 되셨다. 너무 죄송하고 평생 마음에 빚을 졌다. 본부장님이 큰 힘을 주고 있으며, 화물연대 조직을 비롯해 수많은 동지의 연대의 힘으로 싸우고 있다. 우리는 절실하다. 그래서 지금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질문3. 1월부터 7차례 교섭을 요구했는데, 사측이 거부한 이유, 그리고 사측 태도에 대해 얘기해 주세요. 윤정욱 CU지회장: 사측이 이전엔 한두 평도 안 되는 막사에 히터와 에어컨 하나 달아주던 걸, 노동조합이 생기니 (휴게실로) 컨테이너를 하나 해줬다. 엄청나게 생색을 냈다. 우리는 3월 노란봉투법 시행 전인 11월부터 얘기하자고 했고, 1월부터 교섭공문을 7차례나 보냈다. 그런데 들은 게 없다, 화물노동자가 일방적으로 차를 세웠네 마네 그런 거짓말을 해댔다. 자본은 진짜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새벽에 나와서 밤낮 안 가리고 일하고, 잠도 못 자고, 가족 얼굴 못 보면서 일한다. 일요일 하루 쉬고 명절에 하루 쉬니까 양가를 다 가지도 못하고 그나마 꼴랑 휴일도 일요일과 겹치면 추석날이라도 그냥 쉬는 날 없는 거고. 많은 것도 바라지도 않고 그냥 하루 더 쉬자, 그런 걸 개선하자고 했다. 절대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회사 쪽에서는 절대! 대화조차 거부했다. 화물노동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노동조합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노동조합 들었다고 2회전 물량까지 빼앗아 다른 센터로 이관하고, 탄압하고. 그냥 살지 말라는 거다. 지금은 서광석열사의 죽음으로 사회적 이미지 때문에 끌려 나온 것 같다. CU BGF리테일, 로지스 쪽에서 얘기하자고 해놓고도 뒤에서 딴짓하고 있다. 질문4. 서광석 열사의 죽음 당시 상황과 경찰 폭력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조합원들의 심정도 같이 얘기해 주십시오. 윤정욱 CU지회장: 참담했다. 저는 진천 허브 센터에 있었는데 언론에 공개된 영상, 여기서 직접 찍은 영상들을 봤다. CU투쟁에 연대하러 온 동지가 그렇게 고인이 되어 조합원들이 처음에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당장 가자, 당장 가자, 지금 가서 우리가 하자’며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서로 감정을 좀 누르고 본부장 지침에 따라 CU진주센터로 내려왔다. 뭐라 말 못할 정도로 고인과 유족에게 죄송했다. 우리가 할 일을 연대한 동지가 하면서 고인이 되신 게. ‘정말 저희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생각했다. CU자본과 경찰이 너무 원망스럽다. 이것은 사고가 아니라 명백한 살인이다. 다른 센터에 가서 물량 저지를 여러 번 했지만, 각본대로 나온다. 그런데 굳이 역주행해서 저렇게 무리하게 나간 거는 분명히 사측이 경찰하고 모의한 결과일 것이다. 사측 입장에선 어떻게든 물량을 빼내야 하니까. 얼마나 아팠을까. 그 차가 얼마나 무거운데. 그 안에 짐이 몇 톤이 실려 있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마음이 너무 아프고 너무 죄송스럽고 평생 가슴에 간직하면서 빚을 졌다는 생각으로 살 것이다. CU조합원 모두 다 그런 생각이다. 연대와 단결, 투쟁 정신이 정말 존경스럽다. 질문5. 지금 실무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한편으로 CU가 가처분 신청을 넣는 등 탄압이 상당한 것 같습니다. CU는 교섭도 아니고 ‘만남’이라고 선을 긋고 있죠. 지금 쟁점은 어떤 것입니까? 윤정욱 CU지회장: CU자본은 교섭하자 해놓고 다시 말을 바꿔 ‘협의’라고 한다. ‘점주, 가맹점주들을 위해서 나왔다’고 한다. CU는 성실교섭을 해야 한다. 쟁점이랄 게 없다. 왜냐면 우리가 크게 바라는 게 없어서다. 돈을 100만 원 올려달라는 게 아니라 처우 개선만 좀 해달라고 하는 거다. CU 홍씨 일가와 오너들은 몇십억 몇백억씩 가져가면서 화물노동자에게 한 달에 10만 원~20만 원 올려주는 걸 아까워한다. CU가 교섭하지 않는 이유는 이거다. 자신들이 ‘교섭’으로 노동자와 이야기하면 노동자를 평생 개돼지로 못 써먹으니까! 노동자를 개돼지로 부려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는데 ‘교섭’하면 돈이 문제가 아니고 평생 개돼지로 부려 먹지 못할까 봐 교섭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파업으로 CU화물노동자의 노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드러났다. 비조합원이 대부분이고 (CU 화물노동자의) 고작 7~8% 정도만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조합원으로서 파업했다. 그런데도 이 정도 타격을 줄 수 있으면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노동을 하는 노동자인가. 사측은 이를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질문6. 노동부는 처음에 화물연대를 ‘자영업자 단체’로 간주하며 이번 투쟁에 대해 교섭 자체가 노조법 상 교섭이 아니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이번 사안을 노란봉투법상 원·하청 교섭 문제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죠. 엊그제 고용노동부 장관 김영훈이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형식적으로는 자영업자라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종속된 관계라면 노동자로 볼 수 있다는 판례가 있다”며 “형식보다 실질을 중시해야 한다”고 얘기하긴 했지만, 얘기하긴 했지만, 명확한 태도는 없습니다. 이런 태도에 대한 생각은? 윤정욱 CU지회장: 노동부가 우리 보고 자영업자라고 말하는 건 노동조합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거다. 그래놓고 라디오에선 또 ‘리테일이 원청입니까?’ 물어보니 ‘네’ 그랬다더라. 말을 자꾸 바꾸는 게 주위의 압박이 심해선가? 리테일이 원청으로서 결정 권한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복잡한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우리는 확실히 노동자다! 우리가 왜 CU 모든 화물노동자의 저임금,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 오만가지 공짜노동을 개선하려 파업을 하겠는가. 고용노동부는 이 하나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이번 기회에 특수고용노동자의 문제를 관심있게 보고 노동자성을 인정하면 좋겠다. CU투쟁을 선례로 원청을 원청으로서, 사용자로서 명확히 책임지게 만들어야 한다. 고용노동부장관이 그런 걸 좀 했으면 좋겠다. 질문7. 이번 투쟁의 목표에 대해 말씀해 주시길. 원청 교섭 요구를 통한 투쟁 요구가 있고, 열사 투쟁의 성격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윤정욱 CU지회장: 우선 고인이 되신 서광석 열사가 빨리 하루 좋은 곳으로 가실 수 있게 해결이 잘 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다. 화물노동자는 생계가 매우 어려워서 현장 복귀가 빠를수록 좋다. 하지만 열사의 한을 풀 수 있는 협상이 안 되면 돌아갈 생각 없다. CU투쟁으로 열사가 돌아가셨다. 열사투쟁은 CU투쟁이 묻히는 게 아니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산다. 돌아가신 분들은 어떻게 하나. 조합원들은 산 자가 열사의 원한을 풀어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굳건하다. 둘째, 투쟁이 조금 오래 걸리고, 힘든 싸움이 되더라도 처우 개선을 지금 안 하면 안 된다. 어떻게든 원청 CU자본에게 꼭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 ‘우리만 좋게 하자, 귀족노조 하자’는 게 아니다. 모든 화물노동자를 위해 서광석열사가 바라는 대로 끝까지 투쟁해서 꼭 이겨서 돌아가겠다. 질문8.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윤정욱 CU지회장: 화물 노동자가 하는 일은 다르더라도 똑같은 처지라 생각한다. 사안이 생길 때 앞서서 투쟁하는 사람도 있고, 뒤로 빠져 있는 사람도 있고, 같이 연대하고 싶지만 못하는 사람도 있고,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뜻은 다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동자의 처우가 개선되려면, 우리가 목소리를 내려면 민주노총이나 화물연대에 무조건 가입하라는 건 아니지만 용기를 내서 동조하고 지지하면 좋겠다. 그래야 노동자의 권리가 나아지는 방향으로 빨리 변할 거다. 처음에 이 투쟁을 결의하면서 전국적 투쟁을 하자고 했을 때 어떤 조합원들이 ‘아니 왜 우리가 힘들게 싸워서 다른 노동자들까지 올려주냐’, ‘우리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그때 본부장 동지가 정리를 해준 게 ‘그러면 지금 CU노동자들도 야간에 화물차 톨게이트비 면제받지 않냐? 화물복지카드 유가보조금 혜택 받지 않냐, 그때 우리가 싸우지 않은 것과 똑같은 거다’라고 말했다. 그 말씀으로 한 번에 다 정리가 됐다. 모든 화물 노동자들이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함께 연대해야 하고, 노동자가 존중받는 사회를 사회에서 살려면 ‘니가, 내가’가 아니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화물연대 2만 5천 명이 싸우지만 45만 전체 화물 노동자를 위한 싸움을 하자고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CU투쟁으로 인해서 희생되고 다치신 분들께 죄송하고, 평생 마음에 빚을 안고 항상 기억하겠다. 끝까지 우리 연대를 믿고 조직을 믿고 동지를 믿고 투쟁하겠다. 연대하는 모든 동지에게 감사하고 많은 걸 배운다. 꼭 이겨서 CU노동자들도 계속 교육하고 조직하면서 어려운 곳에 함께하겠다.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도 최선을 다해 이 싸움 함께하겠습니다 -
[성명] 기업 범죄 방패막이 사법부, 변하지 않는 체제의 실체 - 아리셀 참사 주범 박순관 4년 선고에 부쳐22일 수원고등법원은 1심에서 15년을 받은 아리셀 대표이사 박순관에게 징역 4년, 똑같이 1심에서 징역 15년을 받은 그의 아들 박중언 총괄본부장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23명이 죽었는데도 4년이라니 유가족들은 울부짖었다. "이주노동자들이 죽었다고 이런 판결을 내린 건가? 아니면 우리가 돈도 없고 권리 없고 사는 게 힘들어서 이런 판결을 내리는 거냐"라며 오열했다. 법원은 “참사가 발생한 공장 3동 2층에 비상구 및 비상통로의 설치·유지·이용 의무가 없다”라며 살인자들에게 면죄부를 줬다. 또한, 안전보건관리체계가 전혀 수립되지 않아 23명의 노동자가 사망했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피고인들이 위험성을 외면하고 이익 추구에만 몰두하였다거나, 안전을 위한 조치를 방치하였다고는 보이지 않는다”라는 해괴한 논리를 폈다. 재벌과 보수언론은 그동안 엄살을 떨어왔다. 2022년 1월 법 시행부터 2025년 9월까지 중대재해 유죄판결 중, 실형은 8%에 불과하다. 이번 판결은 중대재해처벌법을 무력화하려는 사법부의 일관된 모습이면서도, 가장 극악한 사례다. 법은 자본가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을 보호함으로써 노동자들의 고혈을 짜내는 것을 정당화했다. 자본가들의 수많은 범죄에 처벌하는 시늉만 했다. 예를 들어, 천 억이 넘는 비자금을 조성하고 수천 억대의 배임과 횡령을 저지른 정몽구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기도 했고. 역시 천 억이 넘는 세금을 포탈하고, 수 조원의 차명주식과 자금을 운영한 이건희에게 불구속 기소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은 무수히 짓밟았다. 노동자 민중이 고통당해야 했던 것은 법치주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 법치주의라는 헛된 선동 뒤에 숨어있었던 자본의 무자비한 공격 때문이었다. 지금도 법원은 CU 투쟁에 나선 화물연대 조합원 두 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은 CU를 철저히 보호하기 위해 대체인력 투입을 저지하는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짓밟았다. 그 과정에서 서광석 열사가 목숨을 잃었다. 관료적이고 억압적인 법원, 검찰, 경찰의 본질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유가족에게는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자본가에게는 솜방망이 처벌만 내리는 체제, 다단계 하청구조를 이용한 착취는 무한대로 허용하고, 파업은 경찰을 투입해 짓밟는 체제는 뒤집어져야 한다. 23명의 죽음을 잊지 말자. 노동자 민중의 힘으로 정의를 다시 세우자. 강력한 처벌을 위해 싸우자. 자본가의 이윤이 아니라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이 우선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단결하자! 투쟁하자! 2026년 4월 23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
“유족 앞에 무릎 꿇릴 때까지 싸울 것이다” - 진주 CU현장으로 모인 화물노동자의 거대한 분노4월 20일, 화물연대 광양컨테이너지부장 서광석 동지의 사망 소식은 화물노동자의 운전대를 멈추게 했다. 진주 정촌에 있는 CU물류센터 정문에서 좌측으로 약 100미터에 이른 길은 이전에는 평범한 도로였을 테다. 하지만 지금은 CU원청 자본과 정부가 ‘살기 위해’ ‘노조하다가’ 무참히 ‘살해당한’ 서광석 열사를 떠나보낸 현장이자, 전국 화물노동자의 애끓는 분노가 모이고 투쟁이 살아 숨 쉬는 현장이 되었다. 현장에 도착한 4월 20일 자정께부터 21일 17시 화물연대 집회를 마칠 때까지, 노동자는 그곳으로 모이고 또 모였다. 밤새 CU BGF 공장 정문을 지키고 또 지켰다. 서광석 열사가 떠난 자리 옆을 지키고 일손을 놓고 진주로 오는 인원을 점검하고 투쟁을 이야기하고 뉴스를 확인하고 집회하고 토론하고 회의하고 피켓을 들고 주위를 청소하고 음식을 나눠 먹고 투쟁 복장을 챙기고 구호를 외쳤다. 때로는 울다가 때로는 눈물을 삼켰다. 구호로 심경을 토해내고 이를 악물었다. 4월 20일에 약 300명의 인원은 21일 아침부터 계속 불어나더니 11시 약식집회에는 900명에 이르렀다. 4월 21일 17시에 열린 ‘열사정신 계승! 살인기업 CU BGF 규탄! 살인진압 경찰 공권력 규탄! 화물연대 결의대회’는 대오가 3천을 넘기며 예정 시간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에 대오는 계속 불어났다. 화물노동자 2,700명, 연대 대오까지 4천여 명이 “서광석을 살려내라”고 외쳤다. 경찰은 노동자들이 분노로 쓰러트린 공장 펜스 대신 방패로 무장하고 시종일관 자본을 지켜주었다. “저기에 가면, 아직 핏자국이 선명합니다” 밤늦게서야 도착한 CU진주물류센터(CU BGF로지스) 앞은 밤샘농성 중이었다. 어두워졌지만 동영상에 나온 바로 그 공장문과 도로였다. 오전까지 현장에서 투쟁하던 화물연대 노동자 서광석 지부장이 하루아침에 고인이 되어 영정사진 속에서 화물연대 노동자와 연대동지를 맞이하는 현실이 기막혔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심경이 어떨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뜯어낸 정문 안팎에서 화물연대 동지들이 농성을 이어가고 서광석 열사와 같은 지부 동지들이 번갈아가며 영정사진을 들었다. 비슷하게 도착한 동지들과 일행을 이루었고, 화물연대 임원 동지가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어제 같이 있었는데”, “저기에 가면, 아직 핏자국이 선명합니다.” 그 말을 들은 후에는 다른 말들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영상 속 길을 걸어 사고장소까지 갔다. 하얀색 분필의 선들, 그리고 검은 핏자국이 검붉게 느껴졌다. 묵념하는 마음이 타들어갔다. CU자본과 경찰이 얼마나 끈끈했던 걸까. 생각보다 차가 작았고 차고가 높지 않았다. 영상이 그려져서 고통이 배가됐다. 원청교섭 하자는데, 손해배상에 해고(계약해지). 정부는 CU자본의 ‘공권력 투입 요청’에 기꺼이 응답했다. 차로 사람을 밀고가게 사주하고, 사람들이 차에 치였는데도 대체차량을 빼내기에 급급했던 공권력과 자본. 저들은 야만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열사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생각을 쏟아냈다. “운전하는 사람이 앞에 사람이 있는데 운행을 할 수가 없어”, “동영상 보셨어요? 동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는데”, “경찰이 차를 계속 가라고 하잖아”, “사람이 차에 끌려 들어갔는데도 그를 구하려는 우리는 밀쳐내고 차들을 보내잖아, 인간이 아니야”, “위에서 시키지 않았으면 그럴 수 없다”, “사고낸 운전자만 잡아넣으면 억울해서 안 된다”, “이건 사고가 아니다. 구조적 살인이다” “실감이 안 납니다” 눈을 붙이러 간 노동자들도 많았지만, 4~50여 명 노동자는 정문 앞쪽을 떠나지 않았다. 서광석 열사와 같이 노조하던 ‘동지’가 갑자기 ‘유족’이 된 광양컨테이너지부 동지들은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나같이 “실감이 안 납니다”고 말했다. 지부 동지들은 덤덤하시다가 울다가, 또 서로를 챙기다가 고개를 떨구시기도 했다. 조용히 사진 속 얼굴을 만지기도 했다. “엊그제 만났는데”, “노동운동을 오래 열심히 한 동지인데”, “동료들을 잘 챙기던 동지인데”, “앞에 서지만 않았더라면”, “같이 모임도 하고 있는데”, “내년 환갑까지만이라도 살았으면 덜 억울할텐데” 그리고 “실감이 안 난다” “‘사망’이라는 소식을 듣고 운전대에서 손을 놓았습니다. 파업지침이 내려지고 광양에서 컨테이너를 몰고 그대로 달려왔습니다. 병원으로 바로 갔습니다. 유족분들이 오열하셨습니다. 보고도 믿기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데 가족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이 싸움은 원청교섭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CU자본이 유족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할 때까지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겁니다.” 영정을 든 한 간부 노동자는 피맺힌 결의를 말해주었다. 차분하고 단호한 동지의 목소리가 하늘에 닿는 듯했다. CU살인기업, 이재명 살인정권 바로 옆 주택가에 버려진 박스로 피켓을 만들기 시작했다. 피켓이 하나둘 만들어지니, 누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CU진주물류센터 앞에 도열한 노동자들은 피켓을 들었다. “공권력의 살인이라는 문구를 써달라”, “서광석을 살려내라”, “유족 앞에 무릎 꿇라고 써달라” 등 피켓 문구를 요구하며 함께 만들기도 했다. 피켓이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으면 서로 이렇게 들자고 하고, 피켓이 없으면 더 챙기기도 했다. 17시 집회가 열리기 전까지 정문 앞 농성조가 피켓을 이어 들었다. 아침 8시 투쟁 일과가 시작되기 전, 노동자들은 부러진 나뭇가지와 맨손으로 정문 앞과 도로 주변을 쓸고 청소했다. 그 풍경은 마치 새벽에 장례식장 빈소를 청소하고 정돈하는 모습 같았다. 오전에 되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서광석 열사가 쓰러진 장소가 밟힐까 불안했다. 부러진 이동식 경찰바리케이드 조각과 도로 위에 있던 교통꼬깔을 모아 표식을 했다. 그랬더니 화물노동자들이 경찰바리케이드를 통째로 옮겨 열사의 피가 지워지지 않게 보호했다. 열사가 떠난 자리 4월 21일 11시, 경남경찰청 앞에서는 화물연대 16개 지역본부와 중집, 공공운수노조, 사회단체 등이 참여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같은 시각 CU진주 현장에서도 집회가 열렸다. 화물노동자들은 일사분란하게 ‘고 서광석조합원 분향소’가 차려진 무대차량을 바라보고 앉아 ‘투쟁’을 외쳤다. 집회에서 사회자는 먼저 CU투쟁과 열사투쟁을 하나로 진행한다고 전달했다. “우리가 서광석이다. CU BGF 박살내자! 화물악법철폐투쟁 결사투쟁” 사회자는 CU편의점 화물노동자가 노동자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로 얼마나 착취당하는지 폭로하며 CU자본과 공권력에게 서광석 열사 죽음의 책임을 물었다. “1회전을 하면 6-7시간이 걸리고 점포수 14-16개. 그런데 월대 270만원 받는다. 그래서 2회전을 한다. 그럼 13-14시간 운행한다. 운수도 상하차도 한다. 1회전을 하면 굶어 죽는다. 2회전을 하면 도로에서 죽는다” “살려달라고, 죽지 않게 해달라고 대화 요구했다. 대화를 요구했더니 계약해지를 날렸다”, “경찰이 입고 쓰는 물건도 화물노동자가 운송해준 거다. 그런데 이것이 2026년을 살고있는 화물노동자의 현실이다” 발언자로 나선 여러 지부 임원들은 절절하게 투쟁을 토해냈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안타깝게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게 투쟁하자”, “어제 아침 경찰이 CU대문을 막고 사람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서광석동지의 아픈 소식이 들렸다. 화물연대의 정신으로 CU자본 박살내자. 승리할 때까지 이 자리를 사수하자”, “친일자본 CU자본이 쉽게 굴복하지 않을 테지만 서광석동지가 하늘에서 지켜본다. 끝까지 투쟁하자!” 전날 경찰에 연행됐다가 석방된 노동자도 마이크를 잡았다. “열사의 정신으로 이번 투쟁 승리하자. 진주CU분회는 4명이지만 4백 명, 4천 명이 되고 이길 것이다. 승리할 때까지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 화물연대 진군가와 파업가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자영업자 개소리 정부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의 책임자이자 공범이다.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아직도 보장하지 않는 공범이다. 노동자가 투쟁으로 개정한 노조법, 원청사용자 편에서 시행령부터 원청 대자본의 온갖 부당한 노조탄압을 비호하고 방관하는 공범이다. 그러다가 죽을 만큼 힘겹게 일하는 특수고용 화물노동자를 국가폭력으로 죽였다. 반노동을 감추려는 정부는 립서비스가 통하지 않을까 봐 고용노동부 장관을 급히 보내더니, 고용노동부는 하루도 되지 않아 화물노동자는 ‘자영업자’라고 떠들었다. ‘화물연대는 노조 아님’, 그저 ‘자영업자가 대화할 구조가 없는 게 문제의 원인’이라고 했다. 화물노동자들은 분명히 말했다. “구조적 타살”이라고! 현장에서는 “자영업자 개소리다”고 했다. 그리고 “김영훈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공공운수노조는 성명을 내어 ‘사태해결을 가로막는 자영업자 논리에 눈이 멀어있는 정부도, 모두 서광석 열사를 죽인 공범이다’고 규탄했다. 이재명 살인정부의 손에 피도 마르기 전에 ‘화물연대’가 노조가 아니라며 원청을 비호하는 모습에 ‘윤석열’이 떠올랐다. ILO권고가 어쨌든, 2022년 파업 당시 화물연대를 ‘사용자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한 기억을 화물노동자들이 더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원청을 위해 바리케이드 친 공권력의 모습대로 정부는 서광석 열사의 죽음을 피해가면서, 원청을 비호하기 위해 실질적 저지선을 치려 했다. 17시 화물노동자 결의대회가 있기 전까지 화물연대 외의 노동조합과 연대대오는 적었다. 원청교섭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노동자 규모를 민주노총은 10만 명이라고 했다. 2026년 진짜 사장, 대원청 투쟁을 하는 노동자는 많으나 열사가 살해당한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몸은 무거운 듯했다. 민주노총 지침을 여러 번 확인했지만, 속보 외에 지침은 따로 없었다(이후 4월 22일, 민주노총은 사업장 열사 분향소 설치와 현수막 게시, 조문 안내 등의 내용을 담은 지침을 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오, 내가 서광석이다! 17시가 되기도 전에 CU진주물류센터 앞 도로는 사람들도 넘쳤다. 무대차량 앞 분향소 옆으로 화환이 둘러쳐졌다. 자리가 없었다. 16시부터 대오정리를 반복해 당겨 앉고, 또 당겨 앉았다. 그렇게 무대 앞부터 서광석 열사가 떠난 자리 넘어까지 대오가 3천 명에 이르면서 집회는 10여 분 일찍 시작됐다. 수많은 인파에도 노동자들은 비장하고 엄중했다. 사실 화물연대는 이 투쟁이 지속될 것을 고려해, 이날 전국을 동원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도 대오는 계속 늘어났다. CU물류센터를 지나 GS물류센터 입구에 이르는 2백여 미터 도로를 가득 메웠다. 묵념,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화물연대 김동국 위원장의 긴 발언이 있는 동안 노동자들은 울기도 하고 “투쟁!”, “살려내라!” 등을 크게 외치기도 했다. “고의적으로 공권력이 CU와 합작해서 살인한 것입니다. 악덕 CU보다 경남경찰청장을 더 죽여버리고 싶다. 경찰청장이 사퇴하지 않으면 이 싸움 접을 수 없다. 화물연대는 화물연대다운 투쟁을 해야 합니다. 대화에는 대화로, 탄압에는 저들보다 더 악랄하게” 공공운수노조 엄길용 위원장은 윤석열 탄핵 광장에서 열사가 남긴 말을 상기시켰다. “헌법파괴의 시작, 업무개시명령 즉각 폐지, 안전운임제 재입법과 확대”, “화물연대가 앞장서겠다” 광장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한 청년 연대동지들은 연신 눈시울을 붉혔다. 열사와 10일 전 마지막 술자리를 했다는 광주전남 이행섭 본부장은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죽여놓고 말 한마디 없는 것이 지금의 권력과 정권이다, 이 투쟁 끝까지 가야 된다”고 강조했다. 서울경기지역 장정훈 본부장은 “삶에 편리한 편의점이지만, 배송노동자는 새벽 2-3시에 출근해서 저녁 6-7시에 퇴근한다. 배라도 덜 곯고자 노조에 가입한 게 무리냐”며 “꼭 사람이 죽어야만 우리 화물노동자를 찾아주는 정치다. 고용노동부 장관 왔다 가서 기대했는데, 우리를 다시 자영업자라고 한다”고 비판했다. 김동환 울산본부장은 “죽을 때까지 4월 20일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정말 억울한 죽음이 되지 않게 투쟁하자”고 했다. “내가 서광석이다! 열사의 한을 풀어내자”, “살려내라, 살려내라, 서광석을 살려내라!” 방송 스피커 장비의 높은 볼륨이 아닌 노동자의 육성, 대오의 커다란 분노가 하늘에 울렸다. 서광석 열사 곁에서 현장의 화물노동자들은 진실로 끝까지 싸운다고 결의했다. 1시간의 집회가 끝나고 1시간의 헌화가 이어진 사이 현장의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CU물류센터 정문을 막고 선 경찰을 밀었다. 노동자를 죽이고도 26개 중대, 1,500명을 동원한 정부를 향한 몸짓이었을 것이다. 사회자의 요구로 노동자들이 빠지자, 경찰은 다시 CU자본을 지키는 방패를 이어 붙였다. ‘노동절’ 이름은 되찾았다. 그러나 노동자의 이름과 권리는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2026년 국제노동절을 열흘 앞두고 노조한다고, 원청교섭 하잔다고 살해당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영업자 단체’ 해법을 제시받고 있다. 하지만 진주CU 현장에서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열사의 한을 풀고, CU자본과 정부를 유족 앞에 무릎 꿇리게 할 사람은 정치꾼이나 노조관료가 아니라 오직 투쟁하는 노동자라는 사실을! 화물연대 뿐 아니라 원청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힘을 집중하자. 민주노조 노동자가 앞장서자. CU살인기업, 이재명 살인정권 노동자가 심판하자! 서광석을 살려내라! -
[발언] 원청교섭 사업장 선봉 파업과 금속노조 총파업으로 원청교섭 쟁취하자!금속노조는 지난 4월 15일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현대차그룹을 시작으로! 원청교섭 쟁취! 금속노조 결의대회'를 열었다. 원청교섭에 나선 금속노동자들이 현대차그룹 본사 앞 집회를 열고 항의 투쟁을 전개하게 된 이유는 현대차그룹 산하기업 단 한 곳도 원청교섭에서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금속노조 박상만 위원장은 "오늘 금속노조 투쟁은 단순한 임금 인상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며, 모든 노동자의 총고용을 지키고 원청교섭 쟁취의 원년을 만드는 싸움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자동차·철강·조선·전자 업종별 공동파업과 정의선이 원청교섭에 나올 때까지 7월 15일, 8월 26일, 9월 3일 총 세 번의 총파업으로 세상을 뒤흔들겠다"라는 계획을 알렸다. 이날 연설에 나선 금속노조 지부와 지회 지도부들은 이구동성 현대차그룹과 각 사업장 자본의 교섭 거부를 규탄하고 금속노동자 단결투쟁을 호소했다. 결의대회를 마친 금속노조 지도부와 지부·지회 임원과 간부들은 '개정 노조법 이행·원청교섭 촉구 교섭요구안 및 항의서한'을 전달하려 했지만, 현대차 자본은 철저하게 외면하며 문전박대했다. 정의선이 회장으로 있는 현대글로비스는 현대자동차, 현대제철,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현대트랜시스와 함께 현대차그룹의 최첨단 자동화와 로봇 투입을 통한 구조재편으로 완성차·부품사·서열 물류사 노동자 대량해고, ‘대학살’을 기획하고 있는 중추 기업이다. 현대글로비스 울산지회, 전주지회, 광주지회는 현대글로비스를 상대로 교섭 공문을 발송했으나 자본은 교섭 요구 공지조차 하지 않는 작태를 부리고 있다. 이날 현대글로비스 울산지회 김미옥 지회장의 금속노조 결의대회 발언문을 소개한다. [발언문] 동지들! 반갑습니다. 현대글로비스 울산지회 지회장 김미옥입니다. 힘찬 투쟁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투쟁! 지금 자본가들은 공동 모의하여 교섭을 지연하거나 거부하며 노동자들을 철저히 우롱하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 현대제철,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현대글로비스 등 현대차 자본은 완고하게 교섭 거부로 패악을 벌이고 있습니다. 거의 매일 언론에 나오는 현대차 정의선은 올해 원청교섭에서 총자본의 선봉장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우리 노동자들은 개정 노조법의 허술함과 이재명 정부의 시행령 때문에, 자본가들이 순순히 교섭에 나오지 않을 거라 예상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말과 공문으로 자본가들을 교섭에 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동지들! 또한 고용노동부의 절차적 해석과 결정이 원청교섭을 보장하지 않으며,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고용안정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노동자들의 강력한 투쟁으로 압박하지 않으면, 자본가들은 더욱더 버틸 것이며, 우리는 교섭에서 원청 자본의 얼굴을 볼 수 없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자본가들의 이윤을 침해하는 강력한 총파업으로 자본가들을 교섭으로 끌어내야 합니다. 오늘 집회를 마치고 각 지역으로 돌아가면, 원청교섭에 나선 모든 지회, 현대차 산하 지회들이 일치단결하여 현장조합원들을 조직화 연대를 이어가면서 금속노조 7월 총파업을 반드시 조직해 냅시다! 현대차 자본은 2026년 1월, 미국 조지아주에 "로봇 메타플랜트 응용 센터"를 개설했습니다. 이곳은 공장 투입 이전에 로봇을 학습하고 검증하는 '로봇 훈련소'와 같습니다. 이미 아틀라스 100대를 모아놓고 테스트 중이라고 합니다. 테스트를 마친 아틀라스는 2028년 메타플랜트 부품 분류와 서열작업에 투입될 예정입니다. 또한 2030년에는 메타플랜트 조립공정에 투입할 예정이며, 이후 현대차 국내외 모든 공장에도 투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아틀라스 투입은 부품 분류·서열에서 시작하여 조립과 서비스로 투입될 것이기 때문에, 오늘 집회에 참여한 모든 사업장 우리 노동자의 생존권과 일자리를 위협할 게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현대차 정의선은 무엇을 도대체 꿈꾸는 것입니까? 현대차 공장에는 이미 프레스, 차체, 도장에 산업로봇과 협동 로봇이 일자리를 대체했습니다. 이제 부품 물류와 서열, 의장까지 자율 운반 차량, 자율이동로봇, 4족 보행 로봇, 아틀라스까지 투입하여, 주 7일 동안 매일 24시간 공장을 가동되는 "불빛 없는 공장"를 세계화하는 것입니다. 2030년은 길지 않은 시간입니다. 이제 4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현대차 자본은 또한 울산 1공장과 42라인을 통합하는 재건축 계획을 밝혔습니다. 재건축 기간을 40개월로 잡았습니다. 재건축 공장은 최첨단 자동화와 로봇을 투입하여 인원은 최소화하고 생산성과 효율성을 최대화한 유연생산 공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재건축 과정에서 현대차 하청노동자와 촉탁직, 그리고 부품사와 서열업체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고용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현대차 정의선의 노동자들에 대한 대량해고, 대학살은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현대차 정의선의 불빛 없는 공장계획을 가만히 손 놓고 지켜볼 수 없습니다. 현대차 자본이 교섭에 나와서 완성차 원하청 노동자, 부품사와 서열업체 노동자의 생존권과 총고용 보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도 자본가들에 맞서 모든 노동자의 생존권과 총고용 보장을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올해 원청교섭 투쟁은 노동자들의 사활이 걸린 투쟁입니다. 원청교섭을 쟁취하여 모든 자본가와 이재명 정부에게 모든 노동자의 생존권과 총고용 보장을 책임지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지들! 우리의 정당하고 절박한 투쟁에 현대차 산하 지회들이 선봉에 섭시다! 원청교섭 쟁취 투쟁에 나선 모든 지회가 선봉에 섭시다! 우리 스스로가 파업의 선봉에 설 때, 원하청 공동파업도 가능할 것입니다. 또한 위력적이고 실질적인 금속노조 7월 총파업도 조직할 수 있습니다. 금속노조 18만 7월 총파업으로 원청 자본을 교섭 석상에 끌어내어 우리 모든 노동자의 생존권과 고용안정을 책임지게 합시다. 총파업 투쟁으로 총고용을 쟁취하자! 투쟁! -
[번역] 마르크스주의, 스탈린주의, 퀴어혐오수십 년간,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대립에만 천착할 뿐 여성이나 유색 인종, LGBTQ+에 대한 억압 같은 다른 형태의 억압은 무시한다는 주장이 마치 상식처럼 통용되어 왔다. 실제로 스탈린주의로부터 사회민주주의 전통에 이르는, 그리고 오늘날 미국민주적사회주의자들(DSA)까지 포함하는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특수한 억압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노동자계급 중 상층에만 유리한 경제주의 전략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성적·젠더적 억압에 대한 스탈린주의 및 사회민주주의의 반동적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을 조금도 반영하지 않는다. 혁명적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이는 분명하다. 오히려 러시아의 혁명적 사회주의는 10월 혁명을 통해 LGBTQ+ 차별의 물적·이데올로기적 토대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길을 선도했다. 반동적 일탈이 발생한 시점은 정당과 조직들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혁명적 전망을 포기하고 자본주의 세계와 타협하려 했을 때였다. 이 같은 역사적 통찰은, 특히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의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미국에서 퀴어 인권을 향한 새로운 공격이 거세지는 오늘날, 해방을 위해 우리에게 어떤 정치가 필요한지 분명히 알려 줄 수 있다. 볼셰비키의 전진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양대 핵심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는 게이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목욕탕 같은 사교 공간이 생겨났고, 언어 코드(예컨대 ‘뚀뜨끼(tetki)’라는 단어는 대략 ‘아줌마’로 번역되는데, 게이 당사자와 비당사자 모두가 게이를 가리킬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와 복장 코드의 요소들, 그리고 적어도 사적 공간에서는 크로스 드레싱도 존재했다. 역사가 댄 힐리는 혁명기 러시아와 소비에트 연방 시기 동성애의 역사를 다룬 저작 『혁명기 러시아의 동성애적 욕망』에서 이렇게 적는다. “제정 러시아나 소련의 이러한 동성애 하위문화가 해외에서 수입되거나 공산주의의 실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은 이성애 중심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쇼비니즘에 다름 아니다.”[1] 한편으로 남성 간 성행위는 러시아 정교회 규율상 불법이었다. 1917년까지 합의에 의한 “남색”은 시베리아 유형감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위협이 일관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1917년 차르 체제의 법전이 폐지되면서 동성애는 사실상 비범죄화되었고, 1922년 새로운 법전이 채택된 후 신생 소비에트 국가의 공식 법률 문서에서 “남색”에 대한 언급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로써 소비에트 연방은 18세기 혁명기 프랑스에 이어 세계 최초로 동성애를 합법화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동성애를 범죄화한 제국 시대의 악명 높은 175조가 여전히 효력을 유지했고 파시즘 하에서 더욱 강화되었으며, 독일연방공화국이 이를 최종 폐지한 것은 1994년에 이르러서였다. 소비에트 연방이 동성애를 비범죄화하고 수십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다른 여성과 연애 또는 성적 관계를 맺은 여성들은 러시아에서 공적 영역에 진입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웠고, 따라서 응집력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어려웠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사료도 적은데, 여성 간 성행위는 처벌 대상이 아니어서 이를테면 법원 기록 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경제적으로 독립한 여성들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전통적 이성애 가족을 넘어서는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 10월 혁명 이후 내전기의 군사적 분위기 속에서 많은 여성이 남성적인 스타일을 선택했는데, 한편으로는 혁명에 충성하고 혁명을 수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성애자 여성이 다른 여성의 관심을 끌기 위한 코드이기도 했다. ‘트랜스섹슈얼리티’와의 경계는 종종 모호했다. 1923년 모스크바 스베르들로프 대학에서 실시한 섹슈얼리티에 관한 설문에는 이런 응답이 있었다. “나는 남자가 되고 싶다. 거세하고 남성 분비샘을 이식하는 과학적 방법이 발견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2] 1920년대에 실제로 이 같은 수술이 시행되었지만, 의료 기술이 아직 초보적이었던 탓에 성공 여부는 의문이었다. 의학적 개입과 별도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변경할 기회를 적극 활용했다. 적절한 신분증을 발급받고, 원래 이름을 남성형으로 개명하고, 복장과 외모를 바꾸었다. 이와 더불어 동성애와 젠더의 기원과 본질에 관한 과학적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당시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생물학자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콜초프(Nikolai Konstantinovich Koltsov)는 이렇게 단언했다. “물론 하나의 ‘중간 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무한한 수의 중간 성들이 존재할 뿐이다.”[3] 예브게니 표도로비치 M.은 17세이던 1915년에 남성 정체성을 취하기 시작했다. 혁명기에 그는 공문서상의 이름을 변경하고 비밀경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22년 예브게니는 새로운 신분증을 가지고 사료에 S.로 기록된 어떤 여성과 결혼했다. 정체성 변경 사실이 알려진 후에도, 이 부부를 “자연에 반하는 범죄”로 기소한 지방 법원 소송은 기각되었고 혼인은 유지되었다. 법원은 이 결합이 상호 합의에 의한 것이므로 합법이며 배우자의 젠더 정체성은 무관하다고 판결했다. 이 부부는 S.가 직장 동료와의 관계로 낳은 아이와 함께 수년간 가족으로 함께 살았다.[4] 혁명적 각성과 전통적 규범 거부라는 대의는 볼셰비키 엘리트들의 전유뮬이 아니었고, 예브게니 같은 사람들에게도 전례 없는 수준의 자기 결정권을 주었다. 부르주아 역사학계는 볼셰비키가 차르 체제의 법전을 폐지하면서 동성애를 합법화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시몬 카를린스키는 10월 혁명이 1905년 혁명과 1917년 2월 혁명에서 성취한 동성애 인권을 되돌리고 부정했다고 주장하면서, 최초의 “남색” 비범죄화는 곁가지 정도로 취급했다.[5] 그러나 힐리는 1991년 소비에트 문서고 개방과 함께 접근 가능해진 법무인민위원부의 기록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명확한 결론에 도달한다: 이 문서들이 남색 조항을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성인들 간의 합의에 따른 행위를 비범죄화하겠다는 원칙적 의도는 분명히 드러난다. 이 같은 의도는 1918년 사회주의 형법을 기초하려 한 최초의 시도부터 1922년 법안의 최종 채택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표명되었다.[6] 남성 동성애를 비범죄화함으로써 볼셰비키는 노동 운동의 오랜 전통 위에 자리 잡았다. 이를테면 1898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아우구스트 베벨은 의회에서 동성애 해방을 요구한 최초의 정치인이었다. 그보다 3년 앞서서 사회주의자들은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기도 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동성애가 “자연”에서 일탈한 것이라는 관념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동성애는 오히려 “굳건히 유지되어 온 허구적 규범”으로부터의 일탈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성과 남성 간의 유사한 계약이 형사 처벌을 받아야 할 합리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7] 동성애 합법화를 요구한 것은 사회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10월 혁명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요구를 내거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실행한 유일한 세력이었다. 1923년 모스크바 사회위생연구소 소장 그리고리 바트키스(Grigorii Batkis) 박사가 집필한 소책자 「러시아의 성 혁명(The Sexual Revolution in Russia)」은 혁명 직후 몇 년간 볼셰비키의 공식 입장을 엿보게 해 준다. 그는 이렇게 적는다. 소비에트 법제는 누구도 해를 입지 않고 누구의 이익도 침해되지 않는 한에서는 성적 문제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절대적 불개입을 선언한다. 유럽 법제에서 공공 도덕을 해치는 범죄로 규정된 동성애, 남색, 그 밖의 다양한 성적 만족의 형태들에 관련해서, 소비에트 법제는 이를 소위 “자연적” 성교와 정확히 동일하게 취급한다. 모든 형태의 성교는 사적인 문제다.[8] 물론 신생 소비에트 연방에서 모든 편견이 하루 만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편견은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친 차르 체제의 후진성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더욱이 볼셰비키의 합법화 정책이 소비에트 연방 전역으로 확대된 것도 아니었다. 예컨대 1926년에 제정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법전은 여전히 동성애를 금지하는 조항들을 담고 있었다.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유럽 쪽 러시아에서는 동성애를 소수의 선천적 특성으로 이해했다면, 주변부에서는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파악했다. 힐리는 이를 “소비에트 연방이 스스로 표방한 성적 전위주의와 변방 지역에서의 실제 정책 사이의 모순”이라고 부른다.[9] 게다가 1920년대 동안 도시 중심부의 무도회장과 집회장 이용은 점점 줄었는데, 이는 보통 사적 영역으로의 후퇴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 같은 해석은 동성애자 남성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중요한 공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과 모순된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6년 동성애를 긍정하는 최초의 커밍아웃 소설 『날개』를 쓴 작가 미하일 쿠즈민(Mikhail Kuzmin)은 혁명에 동조하여 페트로그라드 예술가 협회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커밍아웃한 게이였던 게오르기 치체린(Georgy Chicherin)과 친분이 있었는데, 치체린은 1918년부터 1930년까지 소비에트 외무부 장관에 상응하는 직책인 외무인민위원을 지냈다. 레닌의 몇몇 발언은 볼셰비키가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해 고루한 입장을 취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인용되곤 한다. 1915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이네사 아르망(Inessa Armand)과 주고받은 서신에서 레닌은 “사랑의 자유”라는 소책자 문구에 대해 반대 입장을 개진했다.[10] 여러 줄에 걸쳐서 그는 이 문구가 물질적 계산, 종교적 편견, “법과 법원과 경찰의 족쇄”로부터의 자유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며, “연애의 진지한 요소”로부터의 자유 혹은 “출산”으로부터의 자유로도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부르주아적 요구라고 주장했다. 힐리 또한 이 구절들(그리고 레닌 사후에 클라라 체트킨이 레닌의 말이라며 전한 유사한 발언들[11])을 보건대, 성생활에서 “개인적 비정상성”을 지닌 이들은 그것을 사적 영역에 두고 혁명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 레닌의 진의였을 수도 있다고 추론한다.[12] 셰리 울프는 『섹슈얼리티와 사회주의』에서 이러한 “레닌 사상에 대한 다소 작위적인 독해”를 강하게 거부하면서, 그것이 레닌을 금주하는 금욕주의자로 묘사하는 냉전기 희화화의 산물이라고 지적한다.[13] 실제로 아르망에게 보낸 레닌의 편지들은 스탈린 치하인 1939년에야 비로소 출간되었는데, 힐리가 각주에 적은 내용에 따르면 이는 “1930년대 가족 정책의 변화는 레닌주의에서 기원했다”고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14] 스탈린주의 반동 볼셰비키의 기대와는 달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혁명적 분위기가 유럽을 휩쓸면서 사회주의 국가가 잇따라 출현하는 일은 1923년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본주의 세력에 포위된 상황, 세계 대전에 이어 내전을 겪으면서 수년간 지속된 물질적 궁핍, 그 결과로 소비에트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대대적으로 위축된 현실 속에서 행정의 전 영역에 걸쳐 광범위한 관료제가 뿌리내렸고, 이 관료제는 국가의 고립 상태를 “일국 사회주의”라는 이론적 지위로까지 격상시키려 했다. 관료 집단에게는 자본주의 서방과 공존하며 자기를 보존하는 것이 이익이었고 이는 노동력 수요 증가와 맞물렸으며, 출생률을 끌어올리는 정책으로 이어졌다. 공공 보육 시설, 세탁소, 국영 식당을 설립해 가족의 사회적 재생산 기능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서 가족을 철폐하려던 노력은, 전통적 가족 규범과 젠더 규범을 공고화하는 시도로 바뀌었다. 1938년 축출되기 전까지 소비에트 사법부의 주요 직책을 역임한 아론 솔츠(Aron Solz)는 한 노조 기관지에 이렇게 썼다. “소비에트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그녀는 저 위대하고 명예로운 자연적 의무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그녀는 어머니이며, 생명을 낳는다.”[15] 1934년, 문화 예술 영역에서 스탈린의 대변인이었던 작가 막심 고리키는 동성애 재범죄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했다. 그는 동성애가 청년들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의 “순수성”이라는 신화와 “과도하게 문명화된” 서방의 퇴폐를 대비시켰다. 그에 따르면 서방의 퇴폐와 동성애는 파시즘을 낳은 토양이었다. 그의 주장은 다음의 악명 높은 선언에서 절정에 달했다. “동성애자들을 없애라. 그러면 파시즘이 사라질 것이다.”[16] 1922년 동성애 비범죄화가 젠더나 섹슈얼리티에 기반한 모든 형태의 억압을 극복하려는 폭넓은 노력의 일부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의 반동적 개혁 역시 동성애 박해에서 멈추지 않았다. 성매매도 다시 범죄화되었고 임신중지는 금지되었으며 당 중앙위원회의 여성부는 해체되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이 같은 금지 정책들을 “경찰의 권력을 쥔 사제의 철학”이라 묘사했다.[17] 이러한 모성 숭배로의 전환에 이어서 실재하는 정치적 반대파, 그리고 상상 속의 반대파에 대해서까지 잔혹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빵과 장미』에서 안드레아 다트리가 서술한 바에 따르면, 여성 정치와 관련하여 갓 탄생한 노동자 국가의 초기 법령들과 이후 관료제가 내놓은 개탄스러운 조치들 사이에는 명백한 단절이 있다. 관료 집단에게 “혁명은 반혁명으로 맞서야 한다”는 점은 분명했다.[18]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강제 이주, 투옥, 고문, 살해를 통해 이 같은 파열이 심화되었다. 혁명적 내용이 탈각된 코민테른의 도움으로 스탈린주의 관료 집단은 1920년대 중반부터 자신들의 반동적 이데올로기를 전 세계 공산당에 이식했다. 혁명기 쿠바에서는 공산당 관료 집단이 게이 남성들을 체포·투옥하고 HIV 감염인들을 국영 요양소에 강제 수용했으며, 1980년 마리엘 보트리프트(Mariel Boatlift)를 통해 수천 명의 퀴어를 추방했다. 동성애를 범죄화한 모든 조항이 법전에서 삭제된 것은 1986년이 되어서였다. 중국에서는 마오의 사후에야 공식적으로 동성애가 금지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다른 남성과 성적 관계를 추구한 남성들은 “난동죄”로 기소될 수 있었고, 마오와 그의 동맹 세력이 촉발한 이른바 문화 대혁명 시기에 특히 그러했다. 이로써 전 세계 공산당들은 이후 수십 년간 좌파 전체에 강력한 보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생겨난 좌파 내의 퀴어 적대는 오랫동안 스탈린주의 조직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미국의 트로츠키주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역시 스톤월 항쟁을 전후한 시기, 즉 급진화된 성소수자 해방 운동이 태동하던 바로 그 시점에 동성애자와 트랜스를 조직에서 “비공식적으로” 배제했다. SWP 청년 조직은 성소수자 배제 정책을 심지어 공개적으로 선언하기까지 했지만, 이는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조직은 1975년 소책자를 통해 미국 내 동성애자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선회했지만, 카스트로 정권이 공개적인 동성애 표현을 금지하고 있던 당시 쿠바에까지 이를 요구하는 것은 “문화 제국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59년 쿠바 혁명 이전까지 쿠바에서 동성애는 합법이었다. 쿠바인들이 유독 보수적이라거나 심지어 모두가 이성애자라는 생각은 당시에도 인종주의적 고정 관념일 뿐이었다. 이 같은 입장을 취한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SWP만이 아니었다. ‘광부들을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활동으로 1984년 영국 광부 대파업에 연대하고 영화 『프라이드(Pride)』에 영향을 준 레이 굿스피드(Ray Goodspeed)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 자기 조직의 태도를 이렇게 전한다. “내가 속해 있던 ’밀리턴트(Militant)’는 동성애자의 권리를 부르주아적 관심사로 간주했고, 노동자들이 그런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커밍아웃했을 때 이상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당 간부들뿐이었고, 정작 노동자계급 사람들은 딱히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SWP는 트로츠키주의의 혁명적 유산을 계승한다고 자임하면서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공공연하게 반동적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SWP의 일탈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정치 방법론으로부터 이탈한 귀결이었다. 이러한 이탈은 “객관주의”의 심화, 즉 계급의 정치적 전위가 수행해야 할 역할을 상대화하고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는 태도로 나타났다. SWP는 당시 미국 노동자계급의 상당 부분에 자리 잡고 있던 후진적 의식을 이행기적 요구로 끌어올리기는커녕 보수주의에 영합했다. 이 조직이 쿠바에 무비판적이었던 탓에, 쿠바 혁명의 성취에 대한 옹호와, 동성애자를 박해하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억압한 관료 집단에 대한 옹호가 뒤섞여 버렸다. 유산 1917년 이후 볼셰비키의 동성애 정책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모순은 젊은 소비에트 국가가 처해 있던 물질적 결핍과 국제적 고립이라는 맥락을 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렇게 역사적으로 특수한 조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엄청난 파괴를 딛고 이루어진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은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 시도를 전례 없이 유리한 위치에 놓을 것이다. 이를테면 신생 소비에트 국가에서는 재생산 노동을 사회화하려는 시도가 좌초할 수밖에 없었고 이성애 규범적 가족을 철폐하려는 기획도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러한 기획을 뒷받침할 경제적 조건은 오늘날 비교가 안 될 만큼 우월하다. 젠더 억압과 성적(sexual)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동성애 합법화는 성 해방의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였을 뿐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제도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를 조직하는 마르크스주의의 힘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레닌이 1902년에 썼듯이, 이러한 운동은 “어느 계급이 영향을 받든 간에 모든 폭정, 억압, 폭력, 학대에 응답하도록 훈련된” 운동이다.[19] 오늘날 미국에서는 성소수자들이 쟁취한 것을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투쟁은 전 세계 자본가들의 자칭 “민주주의”가 이제껏 성취해 온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인정과 자유를 퀴어와 함께 쟁취할 수 있다. Left Voice에 2022년 7월 17일 게재된 글을 번역함. 저자: Marco Blechschmidt, Niko Weber 번역: 강성윤 [1] Dan Healey, _Homosexual Desire in Revolutionary Russia: The Regulation of Sexual and Gender Dissent_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2001), 48. [2] 같은 책, 63. [3] 같은 책, 166. [4] 같은 책, 68–72. [5] Simon Karlinsky, “Russia’s Literature and Culture: The Impact of the October Revolution,” in _Hidden from History: Reclaiming the Gay and Lesbian Past_, edited by Martin Bauml Duberman, Martha Vicinus, and George Chauncey Jr., 357 (New York, 1989). [6] Healey, _Homosexual Desire_, 116. [7] Eduard Bernstein, “The Judgement of Abnormal Sexual Intercourse,” _Die Neue Zeit_ 13/2 (1895), 228-233. [8] Sherry Wolf, _Sexuality and Socialism: History, Politics, and Theory of LGBT Liberation_ (Chicago 2009), 91. [9] Healey, _Homosexual Desire_, 162. [10] V. I. Lenin to Inessa Armand, January 17, 1915, in _Lenin Collected Works_, vol. 35, (Moscow, 1976), 180–81. [11] Clara Zetkin, _Reminiscences of Lenin_ (New York, 1934). [12] Healey, _Homosexual Desire_, 113. [13] Wolf, _Sexuality and Socialism_, 93. [14] Healey, _Homosexual Desire_, 301. [15] Victoria I. Sakevich and Boris P. Denisov, _Birth Control in Russia: Overcoming the State System Resistance_(Moscow, 2014), 9. [16] Healey, _Homosexual Desire_, 189–90. [17] Leon Trotsky, _The Revolution Betrayed: What Is the Soviet Union and Where Is it Going?_ (New York, 1937). [18] Andrea D’Atri, _Bread and Roses. Gender and Class under Capitalism_ (London 2021), 96. [19] V. I. Lenin, _What Is to Be Done? Burning Questions of our Movement_, in _Lenin’s Collected Works_, vol. 5 (Moscow, 1961),347–30.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발언] 고진수 동지의 뜻을 따라 전국의 동지들에게 호소합니다[편집자주] 고진수 세종호텔지부 지부장 구속을 규탄하며 즉각 석방을 촉구한 21일 오전 청와대 앞 기자회견에서 호소한 지혜복 동지의 발언문을 전합니다. [출처] 고요 비통하고 침울한 마음을 가눌 길 없습니다.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이 죽고, 연행되고, 구속되고, 고공에 올라야 하는 이 현실이 분노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탄압에도 우리는 물러서거나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자본과 국가가 그 어떤 폭압을 휘두른들,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는 결코 깨뜨릴 수 없습니다. 어제는 화물연대 서광석 동지가 CU 원청 BGF리테일 자본과 국가폭력에 무참히 살해됐습니다. 노조법 2,3조 개정에 따른 정당한 교섭 요구였는데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남 조합원이었지만 진주에 연대하러 한달음에 올라 온 동지였습니다. 노동자는 하나라는 마음으로 같은 전선에 섰습니다. 그런 고귀한 서광석 동지의 투혼에서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 고진수의 모습을 봅니다. 저는 재판에서 이기고도 아직도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정근식 교육감의 직무유기와 시교육청의 담합 때문입니다. 오히려 정근식 교육감은 교섭을 해태하고 재선에 나갔습니다. 그런 조건에서 저는 절박한 마음으로 고공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고진수 동지가 구속됐습니다. 고진수 동지가 구속될 만한 행위는 전혀 없었는데도, 더구나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도 전혀 없었는데도 동지를 가둬버렸습니다. 그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서울시교육청, 용산경찰서, 서부지방법원, 거기에 세종호텔 악질자본까지, 국가와 자본은 애초 하나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듯 뻔뻔스럽게도 고진수 동지를 잡아갔습니다. 고진수 동지와 저는 부당해고에 맞서 거리에서 장기 투쟁을 이어왔습니다. 노동자로서 해고의 고통이 어떤지 알기에, 부당한 해고 폭력에 맞서 원직복직이라는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서로를 지지하며 함께 투쟁했습니다. 저는 A학교 성폭력 사안을 해결하려다 부당하게 해고됐고, 고진수 동지는 세종호텔에서 민주노조운동을 이어오다가 자본의 노조파괴에 부당한 해고를 당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투쟁이 연결된 지점인 정의의 실현, 평등과 존엄의 가치를 실현하는 길에 하나 된 마음으로 서로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연대했습니다. 우리의 연대는 단순히 원직 복직을 넘어, 단 한 사람이라도 부당하게 해고돼서는 안 된다는 절실한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전체 노동자의 권리를 넓히고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비상계엄에 광장으로 진출한 수많은 시민이 끌어올린 연대의 힘을 알려낸 투쟁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현장에서 고진수 동지가 늘 외치던 ‘함께 싸워 함께 이기자’는 구호는 이 시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불평등과 착취, 억압에 노동자 단결과 연대를 강조하고 저항의 기치를 높이 들게 한 이 시대의 상징입니다. 그런 고진수 동지를 남겨두고 유치장을 나서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고진수 동지는 자신의 구속으로, 자신의 희생으로, A학교 사안이 하루 빨리 해결되고, 또 세종호텔 투쟁 승리의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며 당부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약속은 세종호텔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피눈물이 흘렀습니다. “함께 싸우고, 함께 승리하자!” [출처] 고요 고진수 동지는 내일로 다가온 세종대 사학비리 퇴출을 촉구하는 교육부 결의대회를 걱정하셨습니다. 19일 유치장에서 쓴 그의 편지를 읽으며 다시금 세종호텔 승리를 위한 투쟁의지를 다집니다. “오랜기간 반복되는 세종대학교 사학비리 이번에는 반드시 근절하기 위해 이재명 정부와 최교진 교육부장관의 강력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교육부 감사로 수차례 해임되고도 다시 사면복권되어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주명건과 그 일가가 비리를 더 이상 반복하지 못하도록 대양학원에 관선이사를 파견해야 합니다. 이재명 정부가 민생안정을 진심으로 원한다면 사학비리로 고통받고 있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요구를 해결하는데 진심으로 나서야 합니다.” 고진수 동지의 뜻을 받아 전국의 동지들에게 호소합니다. 내일 세종시 교육부 앞에서 열릴 결의대회에 갇혀있는 고진수와 하나된 마음으로 최대한 모여 주십시오. 고진수 동지의 구속이라는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가 그 뜻을 실현합시다. 주변 동료들에게 적극 권하고 함께 손잡고 세종시로 갑시다. 이재명 정부가 스스로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 노동자의 힘으로 강제해 냅시다. 동지들, 내일 세종시에서 승리를 향한 뜨거운 투쟁 열기로 뵙겠습니다. * 세종대 사학비리 신속 퇴출 촉구 교육부 결의대회 참가 신청: https://forms.gle/AJ151H956j1ARFfc6 -
[성명] 이재명 정부와 CU 원청이 서광석을 죽였다! - 고 서광석 동지의 죽음을 애도하며오늘 2026년 4월 20일 오전, 화물연대 전남지역본부 서광석 동지가 자본과 공권력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렸다. 화물노동자들은 파업 대오를 깔아 뭉개서라도 화물 차량을 내보내려는 사측에 맞서 40여명이 연좌해 맞섰다. 그러나 경찰은 사람을 짓뭉개려는 차를 막기는커녕, 정당하게 파업하며 연좌한 노동자들을 도로에 팽개치고 막무가내로 폭력을 행사했다. 서광석 동지의 죽음 이전에 네 명의 노동자가 길에 넘어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그리고, 공권력과 CU원청이 서광석 동지를 살해했다. 이주노동자 탄압으로 두 명의 뚜안을 죽이고, 택시노동자 고영기를 하늘 감옥에 가두고, 세종호텔지부장 고진수를 구속시킨 이재명 정부가 화물노동자 서광석까지 죽였다. 서광석 동지의 죽음은 말로만 ‘노동 존중’을 외칠 뿐, 그 어떤 정부보다 교활한 노동탄압을 자행 중인 이재명 정부, 7차례 교섭을 파국으로 몰며 화물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짓밟은 CU원청, 자본의 용역 깡패로 전락한 경찰 공권력이 합심해 서광석 열사를 죽였다. 업무개시 명령으로 총파업에 돌입한 화물노동자들을 짓밟았던 윤석열 정부, 화물노동자들의 파업을 살인적으로 탄압하는 이재명 정부는 끔찍하게도 닮아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 노동자 민중에게는 매일이 계엄이라는 사실, 국민의힘 정부건 민주당 정부건 자본가들을 위한 정부라는 사실만 뚜렷해졌다. 이제 서광석을 죽인 이재명 정부와의 ‘사회적 대화’ 테이블을 걷어찰 때다. 이재명에게 요구해야 하는 것은 미소와 악수가 아니라 화물노동자의 희생에 대한 책임이다. CU원청과 이재명 정부는 서광석의 죽음 앞에 사죄하라! 전 계급적 연대투쟁으로 화물노동자투쟁 승리하자! 열사의 죽음 앞에 사회적 대화 중단하고 이재명 정부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자! 2026년 4월 20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
[한노운사 연재 14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비정규직은 악조건 속에서도 스스로 노조를 결성하고 투쟁에 나섰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예열기를 거친 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비정규직 투쟁이 본격적으로 분출했다. 수백, 수천, 때때로 수만 단위의 대중투쟁이 곳곳에서 끈질기게 펼쳐졌다.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이데올로기 전선에서도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도덕적 우위를 갖고 상당한 대치전선을 형성해 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비정규직 제도를 둘러싼 정치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노조운동이 투쟁을 통해 만들어낸 요구들을 집약하여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을 제출했다. 노무현 정권은 한나라당과 손잡고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허울 아래 기간제법을 제정하고 파견법을 개악했다. 민주노총은 수차례의 총파업을 조직했지만 진정한 투쟁동력을 건설해내지는 못했다. 이전 편 보기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1) 1999~2002년 비정규직 투쟁 비정규직이 빠르게 늘던 1990년대 후반부터 비정규직 노조운동이 시작됐다. 1999~2001년 사이에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학습지교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방송사 비정규직, 한국통신 계약직, 캐리어 사내하청 등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투쟁에 나섰다. 이 시기에는 아직 사회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이 공론화되지 못했고, 운동 주체들의 준비 또한 많이 부족했다. 정규직 노조운동은 노동자계급의 대의에 반하는 태도들을 곳곳에서 서슴없이 드러냈다. 비정규직 주체들은 활동가들의 역량도 부족했고 대중적으로도 아직 자기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비정규직 노조들은 대다수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1999년 3월 사내하청 대량해고에 맞서 급하게 결성된 한라중공업사내하청노조는 최초로 등장한 비정규직 노조였다. 사내하청 대량해고는 정규직에 대한 대량 정리해고로 이어졌다. 8월 10일부터 72일간 한라중공업 정규직 노조가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을 전개했다. 사내하청 노조는 정규직 노조의 파업에 연대하며 사내하청 노조의 요구(노조간부 현장출입, 고소고발·손배 취하, 사내하청 직영화 등)를 파업 요구로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했지만, 정규직 노조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규직 노조의 파업이 9월 7일부터 점거파업으로 발전했지만, 사내하청 노조는 정규직 노조의 만류로 점거파업에 합류하지 못했다. 옥쇄파업을 진행하면서 한라중공업 노동조합은 매일 야간집회와 조합원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현장노동자를 단련시켰지만, 하청이나 비정규직 문제는 한 번도 다루지 않았다. … 민주노총 광주전남지역본부가 중심이 된 한라중공업 파업지지와 경찰투입 저지를 위한 목포역 천막농성 기자회견문과 민주노총 기자회견문에 ‘하청노조의 활동보장과 하청의 직영화’라는 문구가 들어갔을 뿐이고, 현장 안에서 개최된 민주노총 집회 때 했던 한 번의 발언만이 하청노조가 한라중공업노조 파업투쟁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유일한 경우였다.[1] 1999년 11월 재능교육 학습지교사들이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재능교육교사노조는 설립 후 3주 만에 1천2백여 명을 조직해서 32일간 파업을 전개함으로써, 비정규직의 대중적 조직화가 가능함을 확인한 첫 사례가 됐다. 2000년 7월에는 특수고용 노동자 최초로 단체협약을 쟁취했다.[2] 2000년 4월 부산지역일반노조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슬로건 아래 결성됐다. 기존 산별노조의 한계를 넘어서서 업종·사업장·고용형태에 상관없이 지역을 기반으로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운동을 표방했다. 2001년에는 창원, 진주, 서울 등에도 일반노조 설립이 이어졌다. 우리에게 노동조합은 그림의 떡이었다. 중소 영세·하청기업 노동자 및 임시·계약직, 파견·용역노동자에게 정규직노동자들의 노조활동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노조는 이제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3] KBS 등 방송사의 파견노동자들이 파견법 시행 2주년을 앞둔 2000년 5월 해고예고통보를 받고 방송사비정규노조를 결성했다. 방송사들은 2년마다 파견노동자를 교체했지만, 노조가 끈질기게 싸운 결과 2004년 KBS의 운전직 파견노동자를 KBS 자회사에 직접고용하게 했다. 방송사비정규노조의 투쟁은 파견법의 실태를 폭로하고 파견법 철폐의 요구를 대중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0년 6월 롯데호텔노조가 ‘일방중재조항 폐지, 임금 인상, 계약직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김대중 정권은 술을 마신 전경들을 투입해 롯데호텔 농성장을 강제진압 했는데, 임산부에게까지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렀다. 74일 동안 파업을 이어간 롯데호텔노조는 ‘3년 이상 근속한 계약직의 정규직화’를 쟁취했다. 역시 2000년 6월 물류센터의 파견노동자를 조직한 이랜드노조가 ‘불법도급전환 반대, 임금 인상, 근무조건 개선,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2001년까지 265일 동안 파업을 이어간 이랜드노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끈질긴 연대투쟁을 통해 ‘3년 이상 근속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쟁취했다. 2000년 9월 전국건설운송노조가 설립돼 레미콘 노동자 2천8백 명이 가입했다. 2001년 4월부터 12월까지 여의도에 레미콘 차량 수백 대를 집결시켜 놓고 노조 인정 및 단체협약 체결, 매주 일요일 휴무 등을 요구하며 전면파업을 전개했다. 파업을 통해 사업장마다 상당한 운송비 인상의 성과를 거뒀지만, 수십억의 손배가압류를 짊어져야 했다. 2000년 11월 ㈜SK의 저유소에서 인력파견업체 인사이트코리아 소속으로 2년 동안 일해 온 노동자들이 ‘계약직으로 신규채용’하겠다는 SK측 제의를 거부했다가 해고되자 노조를 결성하고 소송을 제기했다. 인사이트코리아 노동자들은 끈질긴 투쟁 끝에 2003년 대법원에서 위장도급이기에 실제로는 ㈜SK가 직접 고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판결을 통해 승리했다. 1998년부터 정규직 1만여 명을 강제 명예퇴직으로 내몬 한국통신은 2000년 6월부터 11월까지 전국의 계약직 7천 명 전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오랫동안 정규직이 될 희망을 안고 저임금과 차별을 견뎌 온 계약직 노동자들은 2000년 6월 한국통신계약직노조를 설립한 뒤, 12월 13일부터 원직복직과 임금 현실화를 내걸고 파업투쟁에 나섰다. 정규직으로 구성된 한국통신노조가 18일부터 강제 명예퇴직 철회와 민영화 중단을 요구하며 사흘 동안 파업에 나섰을 때 계약직 노조는 당연히 연대투쟁을 기대했지만 정규직 노조는 연대를 거부했다. 계약직 노조는 28일 한국통신 본사 2층 로비를 점거했다. 2001년 1월 16일에는 한강철교 고공농성에 나섰다. 2월 1일에는 정규직화 쟁취로 파업의 목표를 올렸다. 3월 9일 새벽 목동전화국을 점거했다. 5월 8일 114를 담당하는 정규직들이 분사화에 맞서 파업에 돌입했다. 계약직 노조는 각 지역에서 114를 담당하는 계약직들을 조직했다. 6월 11일 114를 담당하는 계약직도 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16일 114 정규직들은 집단적 전환배치와 징계 최소화를 조건으로 분사화를 수용하면서 파업을 끝냈다. 공동투쟁을 해왔던 계약직들과 아무런 상의도 없었고, 합의안에 114 계약직들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8월 28일 계약직 노조는 국회 의원회관 옥상에서 기습농성을 벌였다. 10월 28일에는 국회 본회의장에 진입해서 ‘한국통신 계약직 문제 해결하라’고 절규했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은 처절한 투쟁을 전개했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2002년 5월 12일, 노조 해산을 조건으로 도급업체 취업 알선을 수용하며 517일간의 투쟁을 마무리했다. 2001년 캐리어사내하청노조는 사내하청 600명 가운데 450명을 조직한 뒤 정규직 전환을 내걸고 투쟁에 나섰다. 애초 사내하청 노조의 조직화를 적극 지원했던 정규직 노조는 회사가 자본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하자 고용불안 위기의식에 빠져 태도를 정반대로 뒤집어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4월 26일 투쟁하는 사내하청들을 정규직들이 회사 밖으로 내쫓았다. 5월 1일에는 농성중인 사내하청들에게 정규직 구사대가 심각한 폭력을 행사했다. 캐리어는 구사대 폭력, 파견법 위반, 블랙리스트 작성 등으로 사회적 질타를 받게 되자 7월에 사내하청 74명의 정규직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정규직화 명단에서 노조활동 적극 가담자 30여 명을 제외하고 하청업체 관리자를 포함하는 등 사내하청 노조를 부정하는 성격의 조치였다. 비정규직 노조운동을 태동시켰던 치열한 투쟁들이 2001년까지 대부분 패배한 가운데 2002년에는 이렇다 할 투쟁들이 거의 진행되지 않는 소강상태를 보였다. 그러나 2002년은 사회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는 시기였다. 특히 1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 공간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 비정규직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한 논란이 주요한 정치적·사회적 의제로 등장했다. 비록 조직적인 저항이 잠시 주춤해졌지만,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과 극심한 차별·억압에 대한 대중적인 분노가 밑바닥부터 들끓고 있었다. 많은 비정규직 활동가들은 지난 투쟁의 패배로부터 교훈을 끌어내고 새로운 대중적 분출을 준비하면서 여러 비정규직 현장에서 수면 아래의 조직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2002년에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겉으로는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사회적 조건 성숙이나 주체적 준비라는 측면에서 속으로는 발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2) 2003~07년 비정규직 투쟁 2003년 이후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한국 사회에 뚜렷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조업과 건설업을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새로 비정규직 노조들이 결성됐고 대중적인 투쟁들이 펼쳐졌다. 새롭게 등장한 비정규직 주체들은 그 규모와 범위, 파급력에서 이전 시기를 훨씬 뛰어넘었다. 새로운 주체들이 나타나자 그동안 힘겹게 조직을 유지해 왔던, 주로 특수고용과 공공부문의 직접고용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기존의 비정규직 노조들도 새롭게 활기를 띠었다. 지입제 차주로서 화물차를 운행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2002년 전국운송하역노조 산하 화물연대를 결성한 뒤 2003년 5월 도로비 인하, 유가 인하, 지입제와 다단계 알선 폐지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화물연대 파업은 전국의 물류시스템을 마비시키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노정 합의를 이끌어냈다. 화물연대는 하반기에도 다시 파업에 나섰지만 노무현 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고 패배했다. 2003년 11월 노무현 정권이 화물연대 파업에 대처할 방안으로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에 업무개시명령 제도 도입 안을 제출하자 여야 합의로 신속히 법제화됐다.[4] 2003년에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과 울산공장, 금호타이어, 현대중공업 등 대공장 사내하청 노조들이 속속 건설됐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과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등에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2004년 2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박일수의 분신자결은 그가 남긴 생생한 유서와 함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어차피 하청비정규직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나의 신분에 한 점 부끄럽지 않다. 노동자신분에 보람과 긍지,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이 사회에 또는 현대 ××공장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임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현대판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기득권 가진 놈들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제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현대 ××공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패, 착취, 비리. 직영 노동자들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대하는 행패와 멸시. 고위관리직 이사부터 하위관리직 팀장 반장까지 안 썩은 곳이 없고 상납이라는 추악한 고리에 향락접대에 연결 안 된 ××들 없다. 윗물이 그러하다 보니 협력업체 총무경리까지 노동자임금 도둑질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현실 피해자는 하청노동자다. 상납되는 검은 돈은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피를 빨고 돈 잔치를 하고 있고, 향락 접대비도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땀과 피로 술 퍼마시고 ××하는 것이다. … 대한민국 노동법은 자본을 위한 법이고 하청 비정규에게 생색만 내는 노동법이다. 현대 어용 노동조합은 그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조합이고 노동자는 하나다는 원칙은 말장난일 뿐 열악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안중에도 없다. 태어나면서 귀족노동자 하청노동자로 태어나지 않았고 어떡하다보니 직영노동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 뿐인데 직영노동자라 하여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를 기만하고 멸시할 자격은 없다. 이런 현대 ××같은 풍토가 개선되어야 한다. … 이런 현실이 세상에 밝혀지고 대수술이 없는 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희망과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손가락이나 빨아라라는 차별경영을 비통한 마음으로 당하면서 또 한 번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을 피눈물 나는 심정으로 울분을 달랬어야 했다. … 현대 ××공장 사내 복지시설을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식당, 샤워실, 화장실, 커피자판기다. 그 많은 복지시설은 직영노동자만 사용한다. 직영노동자 탈의실과 하청노동자 탈의실에서부터 소외감을 갖는다. 하청노동자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한여름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그늘 찾아 헤맨다. 한겨울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바람피할 곳을 찾아 헤맨다. 직영노동자는 시설 잘되어있는 건물내부에 휴식을 취한다. 이렇듯 직영노동자에 비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차별을 받는다. 직영노동조합 단체협약을 보면 백가지도 넘는 복지혜택, 문화의료혜택, 자녀교육혜택, 주거혜택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해진 시급, 일급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90%가 불법파견근로현장에 투입되다 보면 직영노동자에게 작업지시 받는다. 작업하기 더럽고 어렵고 힘든 곳은 하청노동자에게 투입시킨다. 이토록 비인간적이고 불합리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현대 ××공장 현실이다. 직영노동자 몇백명 중에 한두 사람은 인간적인 사고와 공동체의식, 인격적으로 노동자는 하나라는 생각, 측은지심 시각으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직영노동자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리고 하청 비정규직 현실이 변하는 데에는 도움이 안 된다. 그리고 현대 ××공장 외부 일반적인 사람들, … 이 나라 지도자들, 법을 집행하는 고급공무원들, 노동자 바람박이를 해줘야할 노동부 공무원들도 몰라서 안하고 알아도 안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현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세상이 이렇다 하여 나도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이 나라가 요만큼이나 민주화가 된 것은, 세상이 쥐꼬리만큼 변하게 된 것은, 이 사회 구조를 아파하고 정직한 노동의 대가가 안 주어지는 이 현실에 약자가 보호받아야 되는 법이 외면한 현실에 … 그럼에도 약해지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모순된 현실을 개선하고자 개혁하고자 사랑하는 처자식 남겨두고 홀로 외롭게 세상을 고통스럽게 떠나버린 열사들이 있었기에 쥐꼬리만큼이나마 이 사회가 노동자의 환경이 변한 것이다. 나도 앞서간 열사들의 고뇌와 희생에 같은 심정이다. 나의 한 몸 불태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이 착취당하는 구조가 개선되길 바란다. 악질 협력업체 사장 박진용 같은 사람이 이 사회에 발붙일 곳 없어야 한다. 부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진실된 노동의 대가가 보장되는 일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5] 2004년 노동부로부터 1만여 공정 전체 불법파견 판정을 끌어낸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5년 불법파견 정규직화와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하며 전면적인 투쟁에 나섰다. 1월 울산공장의 파업과 잔업거부 투쟁으로 100여명이 해고당하고 납치·폭행과 구속이 줄을 잇는 상황에서도 울산·아산·전주를 합쳐 3천여 명의 조합원을 조직하여 9월까지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장기간의 대중적 투쟁을 펼쳤다. 2005년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 1천여 명은 정규직 노조의 임단협 투쟁이 마무리된 뒤에도 몇 차례 독자파업을 벌인 끝에 사내하청 노조로서는 처음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해 냈다. 현대하이스코 사내하청 노동자 1백여 명은 노조 결성 뒤 폐업을 빌미로 대량해고가 자행되자 집단 크레인 농성과 지역연대를 통해 해고자 전원복직, 72억 손해배상 청구 철회, 비정규직 노조활동 보장을 쟁취했다.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자 1백여 명은 노조 결성을 이유로 집단해고를 당한 뒤에도 불법파견 판정을 얻어내며 강고한 장외 파업투쟁을 벌였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동희오토, 기륭전자, GM창원공장 등에서도 사내하청 노조가 속속 결성되어 투쟁에 나섰다. 2004년 노조를 건설한 울산의 건설플랜트 노동자 1천여 명이 2005년 단체협약 체결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 맞서 원청 SK자본을 상대로 전투적인 가두시위, 고공 점거농성, 집단 상경투쟁 등 강고한 파업투쟁을 76일 동안 벌였다. 울산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탄압을 이겨냈고, 노동조합은 뿌리를 내렸다. 울산건설플랜트노조는 울산 지역 석유화학 단지의 여천, 온산, 용연 공단 등지의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배관, 용접, 제관, 비계, 기계, 계전, 보온 등의 직종을 가지고 주로 정유공장과 석유화학 공장, 발전소나 제철소, 조선소 등 국가기관 사업 설비의 건설과 유지 보수를 담당하는 일을 한다. 대부분의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30년이 넘게 산업 역군으로 불리며 이 나라 경제 성장의 동력으로 일해 왔다. 그렇지만 이들의 근무 조건은 아직도 30년 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새벽밥을 먹고 현장에 오면 탈의실조차 없어 도로에서 옷을 갈아입고, 쇳가루와 시멘트, 가루가 날리는 난장에서 비가와도 피할 곳 없이 밥을 먹고 일했다. 그것도 자기 돈 내서 먹는 도시락이다. 하루 일 마치고도 땀에 젖은 몸 씻을 샤워장은 고사하고 세면장 하나 없이 살았다. 세면장은커녕 화장실마저도 제대로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근로계약서를 본 사람도 제대로 없고, 퇴직금을 제대로 받아본 이도 드물었다. 근로기준법상의 주휴나 연차, 휴가, 각종 수당 등은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간혹 작업 중에 사고로 다치거나 죽게 되어도 제대로 된 산재 보상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 계속되는 단체 협상 요구를 무시하고, 업체들은 오히려 사찰과 해고, 노조 탈퇴서 등을 요구하면서 노동조합의 활동을 막고 있었다. 2005년 들어 노동조합은 업체들의 교섭 해태에 대응하기 위해 총파업을 결의하게 된다. 그러나 총파업 첫날부터 조합원에 대한 홍보 활동조차 할 수 없었다. 첫날부터 회사 출입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완전 무장한 전투 경찰들이었다. 전투 경찰의 비호 아래 업체들은 파업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대체인력을 투입시키고 있었다. 대체인력 투입에 항의하는 조합원을 경찰들이 막고 있었다. … 계속되는 대체인력 투입과 이를 오히려 보호하고 있는 공권력의 폭력에 나날이 긴장감은 높아갔다. 법에 정해진 노동자의 정당한 단체 행동권마저 가로막고 있는 공권력에 대한 분노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리고 파업 대오로 모여드는 조합원들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파업이 계속될수록 조합원들의 눈빛과 각오도 결연해져 갔다. … 플랜트 노동자들의 요구는 교섭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교섭 대상인 업체는 자신들이 교섭 대상이라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지도해야 할 노동부와 시청은 플랜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국내 거대 그룹인 SK의 압력과 건설노조를 무력화하려는 폭력적 공권력에 있었다. … 공권력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은 더욱 강한 단결력으로 파업 대오를 유지하고 있었다. 공권력은 초반부터 물리력을 통한 파업 와해 작전을 폈으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노골적인 폭력으로 노동조합을 죽이려 들었다. … 계속되는 SK의 교섭 해태와 본질을 왜곡하는 언론의 호도 속에 파업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SK 본사 앞으로 두 차례에 걸친 상경 투쟁을 진행하며 SK의 노동 탄압을 알려내고 있던 노동조합은 마침내 서울 마포 SK건설 타워크레인에 점거 농성을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전국적인 여론 형성을 위한 결단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5월 1일 울산 SK 공장 내 베셀 타워를 다시 점거하게 된다. … 연이은 4월 1일 남부서 폭력 사태, 4월 8일 전 조합원에 대한 시청 폭력 연행, 4월 28일 노동부 앞 폭력 진압, 그리고 5월 5일 남부서에서의 가대위에 대한 폭력 행위까지 노동조합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계속되는 탄압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장을 하고 거리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 5월 17일 단위 노조의 어려운 한계 속에서도 울산 플랜트 노동자들의 파업을 엄호하기 위해 현장의 작업을 멈추고 달려온 여수와 포항, 전남동부경남서부 플랜트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연대는 지역과 단위노조의 한계를 뛰어넘는 실질적인 연대파업을 만들어냈다.[6] 덤프트럭을 운전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2004년 건설운송노조 산하 덤프연대를 결성하여 2005년 최대 1만여 명이 참여한 파업투쟁을 세 차례나 벌였다. 산업인력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5년 정규직 전환 및 차별 시정을 요구하며 66일 동안 파업을 벌였다. 철도공사의 자회사에 고용돼있던 KTX 승무원들이 2005년 철도노조에 가입한 뒤 2006년 3월부터 철도공사 직접고용과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철도공사, 국회, 국가인권위원회, 서울시장 후보 선거사무소들에 대한 점거농성, 서울역 단식농성, 서울역 고공농성 등 다양한 형태의 투쟁을 이어나간 KTX 승무원들은 2008년 9월 서울역 연좌시위를 마지막으로 대중투쟁을 마무리하고 법률투쟁으로 전환했다.[7] 대구경북건설노조는 2006년 적정임금 지급, 불법 다단계 하도급 철폐, 상습 임금체불 근절 등을 요구하며 6월부터 35일간 파업을 벌였다. 포항건설노조는 주5일제 시행과 불법 다단계 하도급 철폐를 요구하며 7월부터 83일간 파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포스코의 대체인력 투입에 반발하며 8일 동안 포스코 본사 점거농성을 벌였다. 2007년 7월 1일 기간제법 시행을 앞두고 이랜드그룹이 계약직의 외주화를 추진하자, 그에 맞서 이랜드일반노조가 6월 30일 홈에버 상암점 점거를 시작으로 510일간 파업을 이어나갔다. 같은 이랜드그룹에 맞선 뉴코아노조는 뉴코아 강남점을 점거하면서 이랜드·뉴코아 공동투쟁을 만들어 나갔다.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는 원청과의 단체교섭을 요구하며 8월말 9일간의 공장점거 파업을 전개했다. 비정규직 노조들은 ‘전국비정규직노동조합연대회의’(전비연)라는 전국 조직으로 결집하여 단위노조의 투쟁을 넘어 사회정치적 투쟁에 나섰다. 비정규직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그리고 노조를 유지하기 위해 ‘비정규직 고용’ 자체의 문제점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점을 배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비정규직 노조 간 ‘품앗이 투쟁’이 차츰 목적의식적으로 법제도적 탄압 돌파를 위한 ‘비정규직 공동투쟁’을 조직하려는 노력으로 발전해갔다. 이런 노력으로 2000년 민주노총 서울본부에 서울지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가 구성되었고, 2002년 민주노총에 특수고용대책회의가 구성되었다. … 2003년 8월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 구성을 위한 첫모임이 진행되었다. … 2003년 9월 27일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가 발족했고, 첫 번째 주요 사업으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 2003년 10월 26일 열린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서 당시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이용석 광주본부장이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이렇게 하여 노동법상 근로자성 인정을 공동요구로 하는 특수고용 노조, 원청의 사용자책임 인정을 공동요구로 하는 간접고용 노조, 올바른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공동요구로 하는 공공부문 노조 등 법제도 개선 요구를 중심으로 하는 비정규직노조 연대운동의 질서가 형성되고, 느슨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4년 1월 30~31일 열린 비정규직 간부수련회를 통해 전국비정규직노동조합연대회의(준)이 출범하였다.[8] 전비연을 중심으로 한 비정규직 주체들은 2004년 9월 열린우리당 점거농성, 11월 국회 타워크레인 점거농성 등 ‘비정규직 관련 개악법안 저지와 비정규직 권리보장 법안 쟁취를 위한 투쟁’을 앞장서 이끌면서, 2004년 11월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법안 관련 총파업에 나서도록 끌어내는 등 사회적 영향력과 운동적 위상을 빠른 속도로 강화해 나갔다. 2005년 10월 16일, 6만여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비정규직 노조들의 연대체인 ‘전국비정규직노동조합연대회의’가 정식 발족했다. 전비연은 2006년 8월 25일 사내하청노조 공동 파업을 조직하는 등 비정규직 공동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3) 2003~06년 현대차 비정규직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2003년, 현대차에서 비정규직이 스스로 노조를 설립했다. 발단은 3월 19일 현대차 아산공장에서 한 사내하청 노동자가 월차를 쓰려고 했다가 하청업체 관리자에게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공격당하는 식칼테러를 당한 사건이었다. 같은 업체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된 비공인파업으로 아산공장이 중단됐고, 28일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아산공장사내하청지회가 결성됐다. 아산공장의 불길은 생산의 주력인 울산공장으로 넘어왔다. 4월 28일 울산공장의 한 사내하청 노동자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인간선언’이라는 유인물을 뿌리면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주체적 단결을 호소한 게 출발점이 됐다. 세계 초일류 기업, 그러나 기계만도 못한 하청 노동자! 세계 초일류 기업을 자처하고 나선 현대자동차는 사상 최대의 흑자를 기록하며 눈부신 질주를 하고 있다. 그러나 몇 십억의 흑자를 내는 현대자동차 내에는 언제 짤릴지 모르는 고용불안과 비인간적 대우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고통과 절망 속에 살아가는 하청 노동자들이 있다. 하청이기 때문에 법에 다 나와 있는 노동자의 권리조차도 무시된다. 연차 사용은 그저 꿈이나 꿀 수 있는 것이고 월차 하나 쓰는데도 아쉬운 소리에 온갖 눈치 봐야 한다. 똑같은 공정에서 일한다 하더라도 직영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안전장비를 지급받지 못한다. 작업 중에 다쳐도 쉽게 산재신청을 내야겠다는 하청 노동자는 찾아보기 어렵고 업체와 싸워 산재를 신청했다 하더라도 미운 털 박혀 해고 대상이 되거나 어디 구석으로 전환배치되기 십상이다. 하다못해 기계도 고장나면 기름칠하고 보수하는데 우리 하청 노동자는 쓰다가 고장나면 버리는 소모품과 다름없는 취급을 당한다. 명절에는 그저 불효자가 되어 고향길에 오르고, 더럽고 힘들고 어려운 공정에서 뼈 빠지게 일해도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40%도 되지 않는다. 2·3차 업체 하청 노동자들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 석면을 다루는 공정에서 일을 하더라도 환풍시설 하나, 몸을 씻을 시설 하나 없다. 딱 최저생계비만큼 지급되는 임금은 근속연수가 2년이 되어도 인상될 줄 모르며, 일년 전에 지급한다던 안전화는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다. 말만 만근이지 만근수당은 어느새 철야만근수당이 되어 정취를 하더라도 철야를 하지 않으면 지급되지 않는다. 법에도 나와 있다는 취업규칙은 구경조차 한 일이 없다. 왜 우리가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가? 명절 때면 고향에서 만난 선후배나 어르신들이 “어디에 다니냐”고 물으면 아주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저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에 다닙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하청 노동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이 적당한 말로 얼버무리거나 그도 아니면 현대자동차에 다닌다고 할 것이다. 왜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는 걸까?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비참함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우리 하청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은 로또복권 당첨률에 맞먹는 본청의 신규사원 채용공고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으로, 정규직 노동조합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으로 바꾸어 낼 수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여, 이제 우리도 인간임을 선언하자! 하청노동자에게 가해지는 부당함, 죄인 아닌 죄인으로 숨죽이고 고개 숙이며 살아온 많은 날들. 이러한 굴레들은 그저 앉아서 기다린다고 바뀌지 않는다. 하청 노동자 스스로 우리의 권익확보와 노조건설의 일념으로 일어설 때만 우리는 당당한 인간으로, 당당한 노동자로 살아갈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은 힘이 없다. 그러나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목소리를 높이고 싸워 나간다면 하청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그 어떤 부당함에도 맞설 수 있다. 아산 하청 노동자들은 당당하게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지난 3월 19일,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는 월차 한 번 쓰겠다던 하청 노동자에게 폭행이 가해지더니 급기야는 발목을 칼로 긋는 천인공노할 식칼테러가 발생하였다. 이것이 단순히 어느 또라이같은 관리자의 행패가 아님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아산의 하청 노동자들은 월차라도 한 번 쓰려면 병원 진단서에 시말서·반성문에 온갖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했다. ‘하청’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한 권리들도 행사하지 못한 채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세화산업 노동자들은 동료에게 가해진 테러에 분노하며 하나 둘 모여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만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답은 하나였다. 모두들 일손을 놓고 우리도 인간이라며 목청을 돋구어 부당함에 맞서기 시작했다. 하나의 업체에서 끊긴 컨베이어는 서서히 멈추어 갔고 아산공장 전체 가동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3월 28일 이 하나하나의 힘들이 모이고 모여 ‘아산 하청 노조’(금속노조 현대아산사내하청지회)가 만들어졌다. 사측에서는 온갖 협박, 공갈로 하청노조를 말살하려 하지만 아산의 하청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피와 땀으로 만든 노동조합을 지켜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고 있다. 아산에서의 하청노조 건설은 우리 하청 노동자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제 아산 하청 노동자들이 보여준 그 희망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자! … 비정규직도 인간이라고 우리의 목소리를 외칠 수 있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숨죽여 기다려 왔는가! 바로 지금이야말로 현대자동차 하청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 떨쳐 일어설 때이다. 앞장서 나서는 것은 늘 외롭고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동료들의 눈빛 속에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길들을 보라! 87년 희생을 각오하고 앞장서 투쟁하는 자들이 있음으로써 오늘날의 정규직 노조가 설 수 있었다. 우리의 힘을 모아 하청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조직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이제 더 이상 하청 노동자들이 노예가 아님을, 기계에 속한 부품이 아님을 당당하게 보여주자![9] 5월 2일, 80여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모여 ‘현대자동차 비정규직투쟁위원회’(비투위)를 결성했다. 비투위 결성 두 달 만인 7월 8일, 127명의 발기인이 모여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동조합’을 설립했다. 설립총회를 마친 비정규직노조는 일부 정규직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조합원 가입을 받았는데, 24시간 만에 약 500여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그러나 노조 건설에 나선 비정규직에게 현대차노조가 준 선물은 비정규직 노조 건설이 “현자노조 결정에 반하는 사항”이므로 “심각한 우려와 함께 … 재고해 줄 것을 강력 희망하며 요구한다”는 내용을 담은 노조홍보물의 배포였다.[10] 현대차노조의 입장이 현장에 알려지자 비정규직노조 가입 흐름은 바로 중단됐다. 현대차노조가 내세운 명분은 노조 규약을 개정해서 비정규직이 현대차노조에 ‘직가입’할 수 있게 하겠으니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정규직의 독자노조 결성을 방해하는 데 무게가 실린 무책임한 약속이었다. 실제로 비정규직노조는 현대차 단일노조 건설을 추구하는 한시적인 노조임을 규약에 명시하여, 비정규직노조 건설이 ‘직가입’과 상충되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반대로 현대차노조는 2006년 6월 산별노조 전환 전까지 ‘직가입’을 위한 규약 개정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며, 산별노조로 전환한 뒤에도 금속노조의 공식 방침인 ‘1사1조직’에 따른 조직편제(비정규직지회와의 통합)를 세 차례나 부결시켰다. 현대차노조는 비정규직의 독자적인 대규모 조직화를 두려워했다. 언제든 비정규직을 정규직 고용의 방패막이로 사용할 수 있으려면, 비정규직이 무기력하게 미조직 상태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차에서는 신차 투입으로 사업부 차원에서 맨아워 협상을 할 때마다 거의 매번 수십에서 수백 명의 사내하청이 정규직 노사의 합의에 의해 정리해고 당해야 했다.[11] 이런 일이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 이후 사업부를 번갈아 가며 1년에 한두 차례씩 꾸준히 발생했으며, 심지어 2010년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 이후인 2011년에도 발생했다. 어려운 조건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비정규직노조는 2004년 불법파견 진정을 주요 사업의 하나로 추진했다. 2003년 12월 금속연맹 정기대의원대회에서 2004년 상반기 주력사업으로 결의된 ‘릴레이식 불법파견 진정사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비정규직노조는 불법파견을 진정한 이후 이를 입증하기 위해 현장 자료들을 광범하게 수집, 제출하는 등 치열한 노력을 펼쳤다. 현대차노조도 나중에 불법파견 진정에 합류했다. 비정규직노조가 제기한 불법파견 판정이 유력해지자 회사는 다시 한 번 비정규직노조의 주력을 현장에서 제거하려는 계략에 나섰다. 2004년 7월 회사와 5공장 대의원회는 42개 공정을 직영화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고용보장 또한 합의했지만, 회사는 이를 악용했다. 42명 정리해고자 명단에 안기호 위원장을 비롯한 핵심 활동가들을 다수 포함시킨 것이다. 7월 23~24일 결국 정리해고가 단행되자, 해고당한 조합원 11명은 7월 27일부터 산타모 식당 앞에서 무기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가 불법파견 판정을 눈앞에 두고 비정규직노조의 주력을 제거하려는 회사의 계략임이 널리 알려지면서, 정규직 활동가들도 이 투쟁에 점점 공감하고 나섰다. … 기나긴 추석휴가를 무사히 돌파해 냄으로써, 5공장 비정규직 해고자들의 투쟁은 승기를 잡았다.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회투쟁은 어느덧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비롯하여 전국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시선을 모으는 투쟁이 되었다. 10월 5일에는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이 직접 지지 방문에 나서기도 했다. 마침내 10월 7일, 회사와 현대차노조 사이에 합의가 이뤄지면서 5공장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승리로 끝났다. 비정규직노조 안기호 위원장의 단식투쟁이 38일차에 이른 날이었다.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불법파견 판정 앞에서 비정규직노조의 주력을 지켜냈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실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만일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가 통용됐다면, 회사는 이후 불법파견 해법이랍시고 소수 공정의 정규직화를 내걸고 수시로 비정규직 노조간부들을 정리해고하는 탄압을 자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회사가 더 이상 그런 술책을 쓸 수 없게 차단해 냈다는 의미가 있었다.[12] 결국 12월 16일, 노동부가 현대차 울산공장 101개 업체 7천 175명, 아산공장 12개 업체 1천 109명, 전주공장 12개 업체 950명 등 현대차 국내 생산공장 세 곳 모두에서 125개 업체 9천 234명이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했다.[13] 거대 자본인 ‘현대’가 현대자동차 산하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전원 불법파견 형태로 고용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 이번 판정결과는 민주노총에서 주장해온 제조업 사내하청은 곧 불법파견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준 것이며, 현대자동차가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할 노동자 1만여 명을 불법적인 파견근로 형태로 사용함으로써 엄청난 초과착취와 차별을 자행해왔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 민주노총은 지난 1998년 이른바 ‘파견법’이 시행된 이후 현장에서 도급을 위장한 무수한 불법파견이 발생하고 있다고 제기해왔다. 우리는 그동안 이를 모르쇠 해오던 행정관청이 뒤늦게 불법의 확인과 시정에 나서고 있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행여 이러한 노동부의 움직임이 파견업종 전면 확대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파견법 개정안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 파견업종 전면 확대와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는 정부의 비정규 관련 법안은 즉시 폐기되어야 한다. … 민주노총은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 현대자동차는 이미 법적인 지위는 사실상 정규직이고, 현대자동차의 노동자인, 불법파견으로 판정 난 전원을 즉각 직접고용·정규직화 하라![14]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2005년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대대적으로 전개해나감으로써 비정규직 조직화의 물꼬를 새롭게 트고자 했다. 불법파견 철폐와 정규직화를 내걸고 1월 18일부터 파업농성을 벌이며 처절한 투쟁을 전개했다. 1월 18일 5공장 원·하청 노동자 200여 명이 출근투쟁에 참여했다. 출근투쟁을 마친 비정규직 대오는 의장52부 대흥기업·평원산업 탈의실로 이동하여 파업동참을 설득했다. 의장52부 비정규직들은 이미 그 전날 방문 때부터 파업에 합류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도장5부 50여 명, 의장52부 50여 명, 의장51부 중심의 기존 선봉대 20여 명 등 총 120여 명이 파업을 결행하기로 결의가 모아졌다. 탈의실에서 농성투쟁이 시작됐다. 처음에 합류하지 못했던 노동자들이 원·하청 관리자의 탄압을 뚫고 속속 결합하면서 파업대오는 150여 명으로 늘어났다. 비정규직 150여 명이 전격 파업에 들어가자 52라인은 가다서다 하다가 10시경 완전히 멈춰 섰다. … 5공장이 전격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2·3공장 비정규직들은 20일로 예정됐던 잔업거부를 이틀 앞당겨 18일부터 바로 돌입했다. 1·2·3공장을 망라해서 주간조 420명이 잔업거부에 동참했다. 잔업시간에 1·2·3공장 라인 또한 끊어졌다. 오후 6시 5공장 정문 앞에서 잔업을 거부한 비정규직 대오들이 집결하여 집회를 열었다. 집회를 마친 대오는 5공장 농성장으로 합류하여 전체 결의대회를 가졌다.[15] 18일 오전 8시부터 5공장 의장부 업체 탈의실에서 시작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에 80~90명으로 시작된 파업결의대회가, 원하청 관리자의 탄압을 뚫고 속속 결합하는 주간조 동지들로 결국 150여 대오로 불어났을 때, “우리 비정규직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투쟁의지로 탈의실 전체가 후끈 달아올랐다. 곧이어 150여 노동자들은 4개 조로 나뉘어 이번 파업투쟁의 규율을 스스로 정하고 파업투쟁 승리를 위한 실천방침 토론을 전개했다. 각자 자신의 조에 명칭을 정했는데, 이름하여 ‘불사조’, ‘사생결단조’, ‘무적탱크조’, ‘천하무적조’! “바지사장 찢어놓고 우리 권리 우리가 찾자!” “빡씨게 싸워서 우리 모두 승리하자! 무임승차 하지말자!” “눈치 보지 말자! 싸울 땐 싸우자! 정정당당하자!” 각자 특색 있는 구호로 무장하고 조별 깃발을 제작하며 ‘이런 게 바로 노동자들의 힘이구나!’ 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정규직 대소위원들 또한 5공장 비정규직 동지들의 투쟁에 지지엄호를 결정하고 ‘노동자는 하나’라는 원칙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옮기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5공장 파업을 선봉으로 전 공장으로 확산시키고 원하청 공동투쟁으로 기필코 전원 정규직화 쟁취하자!![16]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비정규직노조의 투쟁을 외면했다. 대체인력 투입을 용인하여 비정규직 파업이 무력화되는 것을 방치했고, 관리자·경비들이 수백 명씩 공장 안에 몰려다니며 비정규직에게 집단 폭행을 하는 것도 방치했다. 현대차노조와 비정규직노조가 일시적으로 관계를 개선하고 원하청 연대회의를 결성하여 6월에 공동의 조직화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울산·아산·전주 비정규직노조들의 조합원수가 울산 2천 명 등 전체 3천 명 수준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8월에 비정규직노조가 투쟁에 나섰을 때 현대차노조는 다시 회사의 폭력적 탄압을 방치했다. 2005년 1월 비정규직노조가 5공장 농성투쟁을 시작한 직후부터 회사는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해 왔다. 3월부터는 정규직에게까지 폭력적 노무관리를 확대해 왔다. 회사의 폭력은 너무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면 잠시 주춤해졌지만, 얼마 못 가서 바로 재개되는 양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회사가 전례 없이 폭력적 노무관리를 전개하자, 정규직 현장 활동가들은 이를 강력히 규탄했다. 다양한 단위에서 출근투쟁을 조직했고, 천막농성을 전개했다. 본관 앞 열사광장에 농성천막 6동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런데 회사의 폭력은 8월 25일 비정규직노조의 파업 직전에 극점에 이르렀다. 비정규직노조 파업의 기세를 꺾기 위한 의도된 폭력이었다. 8월 24일 밤 9시부터 25일 새벽 7시까지 3공장의 2차 하청업체 현대세신과 신한·계림 조합원들 그리고 노조간부들에게 회사는 관리자들을 통해 집단폭행·성추행·납치 등 일련의 폭력을 자행했다. 회사는 그 와중에 비정규직노조 사무국장을 납치하여 집단폭행하고 경찰에 넘기기도 했다. 회사의 극악한 폭력은 다시 한 번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켰다.[17] 마침내 불법파견 철폐 투쟁 과정에서 해고당한 비정규직(류기혁)이 자결하는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졌으나, 그 상황에서조차 현대차노조는 열사니 아니니 하는 논쟁을 일으키며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연대를 거부했다.[18] 비정규직노조는 100명 이상의 해고자가 발생한 2005년 투쟁에서 아무 성과를 얻지 못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2006년에도 투쟁을 이어갔다. 비정규직노조는 불법파견 철폐와 단체협약 쟁취를 내걸고 독자적인 임단협 투쟁에 나서 생산라인을 멈춰 세우는 파업을 여러 차례 펼쳤다. 그러나 중재를 하겠다고 나선 현대차노조는 비정규직노조 지도부가 투쟁을 유보한 채 스스로 요구안을 대폭 삭감하고 결국 알맹이 없는 합의에 이르도록 유도했다. 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이 강력 반발했고, 비정규직노조 위원장의 사퇴와 비상대책위 구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비정규직노조 비대위가 재파업을 추진하자 현대차노조가 이를 주저앉히기 위해 모든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허리가 꺾인 비정규직노조의 파업은 성사되지 못했다.[19] 2005년의 불법파견 철폐투쟁과 2006년의 독자 임단투가 모두 실패로 끝난 상황에서, 2007년 1월 검찰이 현대차의 불법파견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20] 많은 조합원들이 노조를 떠나 다시 500명 수준으로 돌아갔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대중투쟁 동력을 상실한 가운데 최소한의 집행력도 유지하기 어려운, 깊은 침체 상태에 빠져들었다. 비정규직은 1987년 이전 노동조합이 없던 시절 노동자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었다. 그런 비정규직이 급격히 증가하여 노동자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 2000년대 초반은 민주노조운동에게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한편에는 노동조합의 문호를 비정규직에게 과감히 개방하는 길, 다시 말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위해 기존의 민주노조운동이 역량을 집중하여 적극 지원하고 엄호하는 길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기존 조합원의 지위를 지키는 데 몰두하는 길, 다시 말해 비정규직에 대한 자본의 초과착취에 눈감는 또는 심지어 협력하고 담합하는 길이 있었다. 불행히도 후자의 길이 더 일반적인 양상으로 전개됐다. 현대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자의 길을 열고자 하는 흐름이 없지는 않았지만, 후자의 힘에 크게 밀렸다. 다만 그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노동자 총단결의 길을 열고자 하는 흐름은 비록 세가 밀리긴 했지만 끊임없이 노력했고 도전했다. 덕분에 노동조합은 일방적으로 후자의 길만을 걷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계 또한 분명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정규직노조는 늘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노골적으로 연대를 저버리지는 않았지만, 진정으로 함께 피땀 흘리고 눈물 적시는 공동의 투쟁 주체이지는 못했다. 2003년부터 본격화된 현대차 비정규직의 단결과 투쟁은 바로 그런 조건 위에서 전개됐다.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루하루를 사측의 협박과 조롱 속에서 보내야 했던 류기혁의 모습은 대량해고, 징계, 고소고발, 손배가압류, 각종 폭력에 직면해야 했던 비정규직 모두의 모습이기도 했다. 한 때 민주노조운동 전반에서 큰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그 시절 현대차 비정규직의 투쟁은 결국 패배했다. 류기혁의 죽음은 그 고통스런 패배의 표현이자 상징이었다. 비정규직노조는 점점 사그라졌고 100명에 가까운 해고자를 남긴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21] 현대차에서 비정규직 운동은 정규직 운동의 15년 역사를 이어받지 못한 채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다수의 비정규직은 초보적인 계급의식도 갖추지 못한 채 한 발 떨어져 눈치만 살폈다. 비정규직 운동은 비정규직의 절실한 염원을 담아내긴 했지만, 정규직의 한계를 딛고 넘어설 만큼은 성장하지 못했다. 계급적 단결의 대의를 저버린 정규직의 모습이 튀어나올 때마다 비정규직은 결정적으로 흔들렸고, 결국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4) 2004~06년 비정규직 입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을 둘러싼 대결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비정규직 입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을 둘러싸고 치열한 계급 간 정치투쟁이 전개됐다. 한편에는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비정규직 권리보장과 전체 노동자의 온전한 노동3권을 요구하는 민주노총이 있었다. 반대편에는 자본가들을 대표하여 비정규직 확산과 전체 노동자의 노동권 약화를 도모하는 노무현 정권이 있었다. 2003년 노무현 정권은 출범 직후부터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노사관계제도 개선’을 국정과제로 제시했다. 5월 노동부가 노사관계학자 15명을 위촉해서 ‘노사관계제도 선진화 연구위원회’를 구성했다. 연구위원회는 9월 중간보고와 12월 최종보고를 통해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방안’(노사관계 로드맵)을 내놓았다. 노사관계 로드맵은 노동관계법 전반에 걸친 34개 과제로 구성됐는데, △노동자 파업권 약화 △사용자 대항권 강화 △정리해고 요건 완화 △부당해고 금전보상 허용 등이 그 요지였다. 9월 중간보고가 나오자 노사정위원회가 10월부터 민주노총의 불참 속에 노사관계 로드맵을 논의했다.[22] 그러나 2004년 4월 한국노총 지도부가 자신들이 지지한 녹색사민당의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 논의가 중단됐다. ◎ 2004년 비정규직 입법 전선의 형성 2004년 2월 출범한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노사정 대화를 통한 사회적 교섭에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다. 다만 이수호 집행부는 기존 노사정위원회를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를 추진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면서 △노사정 대등 운영 △기구의 독립성과 합의사항 이행 △산업·업종별 협의 틀 마련을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의 원칙으로 제시했다. 6월 4일 민주노총, 한국노총, 경총, 대한상의, 노동부, 노사정위원회의 대표자가 참여하는 1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렸다. 7월 6일 2차 노사정대표자회의는 노사정위원회 개편방안에 대해 △노사정위원회 성격 △논의의제 △명칭 △참여주체 △업종별 협의회 등 5개 핵심 쟁점을 놓고 집중 논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한편 7월 12일, 민주노총은 △상시업무 정규직화와 비정규직 사용 제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보장 △파견법 폐지와 불법파견 근절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 등을 요지로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을 민주노동당[23]을 통해 국회에 제출했다. 이번 입법안은 사회적으로 심각한 비정규노동자 문제 해결을 위해 무분별하게 확산되고 있는 비정규 사용의 억제와, 부당한 차별의 철폐, 권리보장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음. … 1) 상시업무 정규직화와 비정규직 사용제한 … 2003년 현재 전체 노동자의 55.4%에 이르는 782만명이 비정규직임 … 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 … 따라서 비정규직 고용을 엄격하게 제한해야 함. 이를 위해서는 ‘상시적으로 필요한 업무’는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경우에만 비정규직을 사용하도록 제한해야 함. 즉, △출산·육아 또는 질병·부상 등으로 발생한 결원을 대체할 경우 △계절적 사업의 경우 △일시적, 임시적 고용의 필요성이 있는 경우 등으로 비정규직(임시직) 고용의 이유를 근로기준법에 명문화 함. [근로기준법 제23조(근로계약기간) 개정] 2) 동일노동 동일임금 보장과 최저임금 현실화 … 2003년 현재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51%임. 다른 노동조건의 차별은 더욱 심해 퇴직금, 상여금, 연장근로수당 등이 적용되는 비정규직은 10~16%에 불과함. 나아가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 사회보험의 경우도 30% 미만의 비정규직만 적용되고 있음. 비정규직이 당하는 이러한 부당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절실함. 구체적으로는 △근로형태의 차이를 이유로 고용 및 근로조건상 차별대우 금지 △동일 사업(사업장) 내의 동일가치 노동에 대하여 동일임금 지급 등을 명문화함. [근로기준법 제5조(균등처우) 개정] 3) 파견법 폐지와 불법파견 근절 … 1998년에 제정된 파견법에 따라 그 이전까지 불법이었던 파견용역업체나 도급업체 등에 의한 중간착취를 합법화하고, 도급·사내하청 등의 이름으로 불법파견을 양산하고 있음. 또한 사용자들이 노동법상 사용자의 책임을 결정권한이 없는 파견업체에 떠넘겨 회피함으로써 파견업체(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노동법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음. 따라서 파견제를 폐지하고 불법파견을 근절하고 사용사업주가 노동법상 사용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제도가 개선되어야 함. 이를 위해서 △현행 파견법의 폐지 △불법파견 시 해당 노동자 직접고용 △파견과 도급의 구분 기준 강화 △사용사업자의 노동법상 사용자 책임 명시함.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 폐지 및 직업안정법 개정] 4)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권 보장 …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조합이 인정되지 않거나, 노동조합이 있더라도 사용자들이 노동조합 활동과 단체협약을 부정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음. 임금·노동조건의 보호와 단결권·단체교섭권·쟁의권 등 노동3권이 부정되어 열악한 노동조건과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음. … 따라서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의 ‘근로자 정의’ 규정에서 독립사업장 형태의 노동자를 추가해 명문으로 규정함. 아울러 … 노조활동 등을 이유로 한 ‘도급계약 해지’를 부당노동행위로 규정함.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 개정][24] 7월 중순, 노동위원회가 서울지하철, 도시철도, 인천지하철, LG정유 등에 잇따라 직권중재를 결정하면서 파업을 불법으로 내몰았다. 21일,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이 “직권중재와 구속 위협에 처해 있는 조합원들과 이라크 파병강행을 막아내지 못한 상황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며 삭발을 하고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30일 민주노총은 8월 6일로 예정됐던 3차 노사정대표자회의를 “무기한 유보하자”고 각 단위에 통보했다. 8월 17일,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천정배가 노사정위원회를 방문해 “노사정위에서 결정된 사안은 국민적 합의로 인식해 최대한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25일, 민주노총이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조속히 재개하고 9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 ‘사회적 교섭방침’ 안건을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31일 열린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사회적 교섭방침’ 안건의 상정 시기를 2005년 1월 정기대의원대회로 연기했다. 한편, 2004년 9월 10일 노무현 정권이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이름 아래 기간제법 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기간제법 제정안은 기간제 노동자를 3년 이내의 범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파견법 개정안은 파견 기간을 초과한 파견노동자는 직접 고용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기존 ‘고용의제’ 조항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고용의무’로 완화하는 내용이었다. 기간제 근로자 사용기간을 3년 이내로 제한하고, 3년을 초과하여 사용할 경우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계약기간 만료만을 이유로 고용종료 금지 … 파견기간을 기간제 근로 사용기간에 맞추어 최장 2년에서 최장 3년으로 연장 … 현행 고용의제 규정을 고용의무 방식으로 전환하되 불법파견에 대해서도 고용의무 적용[25] 16일,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전비연) 대표자 15명이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장실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전비연 대표자들은 노무현 정권이 제출한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입법’을 ‘비정규직 확산법안’이라고 규정했다.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법안을 반대하며 열린우리당 점거농성에 들어간 것은,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내걸고 실제로는 비정규직을 대폭 확대하려던 노무현 정권의 위선적 구상에 상당한 타격을 안겼다. 1주일 동안 점거농성을 이어간 전비연 대표자들은 ‘비정규직 확산법안 철회와 비정규직 권리입법 쟁취’를 주장하며 △파견법 철폐와 불법파견 정규직화 △비정규직 사용제한과 상시고용 비정규직 정규직화 △특수고용 노동자에게 노동법·노동3권 보장 △원청 사용자성 인정 △이주노동자 노동허가제 실시를 5대 입법요구로 내걸었다. 전비연 대표자들의 열린우리당 점거농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21일 열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확산법안 철폐를 위해 11월 하순에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심상치 않다. 11월 노동계 총파업을 앞둔 지금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10월 10일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양대노총 위원장은 분노로 치를 떨며 ‘결사투쟁’을 외쳤다. 바로 다음날, 김대환 노동부 장관은 기다렸다는 듯 맞받아쳤다. “총파업은 실정법 위반이다.” 이대로 가면 노사정 대타협은 고사하고 ‘대파국’이 불을 보듯 뻔하다. 으레 그렇듯이 경고도 없이 ‘선제공격’을 날린 건 정부였다. 그런데 그 ‘한방’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9월 10일 노동부가 발표한 소위 ‘비정규보호법안’이 그것이다. 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자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파견근로의 규제를 사실상 모두 풀어버리고 기간제 근로의 독소조항들도 가득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안은 순식간에 노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양대노총은 “말이 비정규직 ‘보호’ 법안이지 비정규직을 일상화하고 정규직 노동자들을 비정규직화 하겠다는 의도”라며 총파업을 선언했다. ‘타협’을 말하던 이들의 입은 얼어붙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법안의 문구 하나 하나가 정부의 의지를 대변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출범 당시부터 사회적 교섭을 강조해왔다. “노무현 정부에게는 최상의 노동계 파트너”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올 초부터 정부의 잇따른 직권중재와 파업에 대한 강경대응이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급기야 8월 31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다시 참석키로 한 중앙집행위의 결정을 뒤집는 일이 벌어졌다. 올 10월 노사정위 복귀가 점쳐지던 이수호 체제는 불과 몇 달 사이 총파업을 결의하는 ‘초강성노조’가 됐다. 사실 9월 초만 하더라도 정부가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복귀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유화 제스처’가 나올 것으로 기대됐었다. 하지만 이제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에 참여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비정규법안으로 퇴로마저 차단당한 것이다.[26] 11월 26일,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확산법안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상정되는 데 맞서 민주노총이 6시간 총파업을 전개했다. 전국에서 15만 7천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민주노총은 법안 통과 강행시 12월 2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전비연은 국회 앞 타워크레인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2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비정규직 확산법안을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민주노총은 12월 2일로 예정했던 총파업을 유보했다. 전비연의 국회 앞 타워크레인 점거농성도 종료됐다. ◎ 2005년 사회적 교섭과 어설픈 타협안 2005년 1월 20일,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예정대로 정기대의원대회에 ‘사회적 교섭방침’ 안건을 상정했다. 1998년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해 준 쓰라린 역사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게다가 노무현 정권의 반노동자적 성격이 명확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사회적 교섭은 당연하게도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 대의원대회는 결국 유회됐다. 이수호 집행부는 2월 1일 대의원대회를 재소집해 같은 안건을 다뤘다. 격렬한 논쟁 끝에 토론을 종결하고 표결을 선언한 순간, 대회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회적 합의주의·노사정 담합 분쇄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전노투)가 단상을 점거하고 시너를 뿌렸다. 소화기 분말 가루가 자욱하게 분사됐고, 철제의자가 날아다녔다. 몸싸움도 벌어졌다. 언론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폭력으로 얼룩졌다고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이수호 집행부는 3월 15일 대의원대회를 다시 소집했다. 이번에는 개회를 선언하기도 전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이수호 집행부가 배치한 질서유지대와 전노투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교섭 반대파가 집단 몸싸움을 벌였다. ‘사회적 교섭 폐기’, ‘총파업 조직’, ‘이수호 위원장 사퇴’ 같은 구호들이 대회장에 울려 퍼졌다. 결국 이수호 집행부는 대의원대회를 생략한 채 3월 17일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노사정 교섭 추진을 결정했다. 1. 대대무산에 대하여 - 대의원대회를 물리력으로 무산시키려는 행동은 어떠한 명분과 정당성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행위이다. 민주노총의 지도집행력 회복을 위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 2. 중집 결정사항 1)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보호를 위하여 총파업에 돌입한다. 비정규 개악안 저지와 권리보장 입법쟁취를 위한 4.1 총파업 및 투쟁에 총력 집중한다. 2) 위원장의 책임 하에 비정규관련 노·사·정 교섭틀을 확보하고 전조직적 논의와 의견수렴을 통해 지도집행력을 회복한다. 3) 위원장의 책임 하에 노사정대표자회의를 통해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최우선과제로 논의한다. 노사정교섭방침과 관련하여는 추후 적절한 시점에 대의원대회를 소집하여 승인여부를 결정한다.[27] 4월 1일, 민주노총이 비정규 개악안 폐기와 권리보장 입법 쟁취,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총파업을 전개했다. 13만 조합원이 참여했다. 그리고 6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매개로 노사정 교섭이 재개됐다. 노·사·정 대표자회의 결정사항 1. 노사정은 오늘부터 시작된 국회 환노위 주관의 대화가 비정규직 보호입법을 위한 실질적인 논의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한다. 2. 앞으로 실무대화 진행은 환노위 법안심사소위원장이 주관한다. 3. 국회 환노위는 노사정 대화를 최대한 존중한다. 2005년 4월 6일 국회환경노동위원장 이경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이용득,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이수호,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이수영,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박용성, 노동부장관 김대환[28] 이런 상황에서 4월 11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에 대해 의견서를 발표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서는 노무현 정권이 발표한 비정규직 확산법안과 민주노총이 제출한 비정규직 권리보장 법안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총은 환영의 뜻과 함께 “이번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이 현재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논의되고 있는 비정규입법안 논의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비정규노동자의 진정한 보호와 권리보장을 {위한} 제대로 된 법안이 마련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특히 사회적 약자의 인권과 관련해 의미 있는 의견을 내온 국가인권위원회가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에 대한 의견서를 내놓았다. 우리는 이번 의견서가 비정규직 문제해결에 대하여 핵심적이고 중요한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를 환영한다. 이번 의견서는 △임시계약직의 사유제한으로 비정규직의 무분별한 사용을 제한하고,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규정으로 차별을 폐지하라는 것이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중간착취와 불법파견을 낳고 있는 파견제의 폐지안을 내지 않은 점이나 정부가 안을 제출하지 않은 특수고용노동자 노동권 보장에 대한 언급이 없는 등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중요한 방향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안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이런 권고안의 방향과는 사뭇 다르다. ‘보호’를 위한 법안이라는 겉 표현과는 달리, △임시계약직(기간제) 사용 사유의 무제한 허용 △파견 비정규직의 전면 허용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규정 없는 실효성 없는 차별해소 방안 △비정규직 노동3권 외면 등을 기조로 하고 있어 비정규직을 더욱 확산하고 차별해소 효과는 미미할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의 노동권을 박탈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번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이 현재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논의되고 있는 비정규입법안 논의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비정규노동자의 진정한 보호와 권리보장을 {위한} 제대로 된 법안이 마련되길 기대한다.[29] 이렇듯 ‘환영’과 ‘기대’의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민주노총은 자신의 입법요구를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서 수준으로 사실상 축소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서가 배제한 파견법 폐지와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권 보장은, 이후 민주노총의 요구에서 사실상 사라졌다.[30] 6월까지 진행된 노사정대표자 교섭은 아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종결됐다. 8월 26일, 금속연맹이 불법파견 정규직화, 성실교섭, 비정규직 노동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며 6시간 정치총파업을 단행했다. 9만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10월 6일, 민주노총·한국노총과 경총이 노사정 교섭의 불씨를 다시 살려 보려고 ‘노사 대토론회’를 사상 처음으로 열었다. 한국 경제는 1997년 말 발생한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으나, 최근 수년간 불균형 성장의 또 다른 문제점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부문과 내수부문, 성장산업과 사양산업 등 경제전반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노동시장 영역에서도 정규직-비정규직간 격차 확대 등으로 실업자와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의 고통이 심화되는 등 구조적인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과거 수십 년 간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노사관계 영역에서도 ‘관 주도’의 관행과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가운데 사회적 대화 영역에서 노사 간의 자율적이고 직접적인 노력은 전무한 형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시민사회의 성숙도와 기업 및 노동운동의 성장과 조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사 모두에게 하나의 숙제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특히 이 같은 주체적 측면의 취약성은 최근 노-정 관계가 깊은 갈등 국면에 빠지면서 사회통합의 주체 구실을 해야 할 노사정이 오히려 갈등과 대립의 문화를 반복하고 있다는 국민들의 비판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올해 6월 이후 사회적 대화가 전면 중단되는 등 안타까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양대노총과 경총은 생산과 대화의 실질적인 핵심 주체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반성적으로 재인식하면서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과제들을 놓고 노(勞)와 사(使)가 직접 만나 해법을 찾아보자는 데 뜻을 같이 했고, 이 같은 취지에서 <노사 대토론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31] 그런데 6일, 민주노총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이 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로부터 5천만 원 금품을 수수한 게 드러나 긴급체포돼 7일 구속됐다. 이수호 위원장은 11일 ‘하반기 투쟁을 책임진 뒤 조기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했으나 현장으로부터 강력한 비판과 질타가 줄을 잇자 20일 위원장직을 사퇴했다. 민주노총은 전재환 금속연맹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비상대책위 체제로 전환됐다. 11월 10일, 열린우리당 초청 노사대표자 간담회를 시작으로 민주노총·한국노총과 경총 사이에서 실무급 노사교섭이 진행됐다. 30일 마지막 노사교섭까지 결렬된 날, 한국노총이 정부 법안의 골격을 수용하는 최종안을 발표했다. 1안) 기간제 근로를 1년간 사용한 이후에 갱신되는 1년간은 사용사유를 제한하여 기간제 근로를 2년으로 제한하고 계속 근로기간이 2년을 초과하여 지속된 경우에는 즉시 고용의무를 부과함. 2안) 기간제 근로 계약이 반복갱신된 기간을 포함하여 계속근로기간이 2년을 초과하여 지속된 경우 그 근로 계약은 기간을 정하지 않은 무기근로계약으로 간주함.[32]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과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확산법안에서 기간제 관련 핵심 쟁점은 ‘사용사유 제한’이냐, ‘사용기간 제한’이냐에 있었다. 민주노총은 엄격히 제한된 경우에만 기간제 사용을 허용하자는 것이었고, 노무현 정권은 보편적인 기간제 사용을 허용하되 사용기간을 3년 이내로 제한하자는 것이었다. 두 입장은 비정규직의 대대적 확산을 차단할 것이냐 아니면 촉진할 것이냐 하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고, 따라서 노·사·정의 사회적 교섭으로는 결코 좁혀질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노총이 내놓은 1안은 민주노총이 주장하는 사용사유 제한에 입각하되 그 적용을 첫 번째 1년에는 하지 않고 두 번째 1년에만 하자는 것이었다. 2안은 정부가 주장하는 사용기간 제한에 입각하되 그 시기를 3년에서 2년으로 단축하자는 것이었다. 한국노총의 최종안은 형식적으로는 민주노총 안과 정부 안을 절충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정부 안의 손을 들어주면서 민주노총을 고립시키기 위한 안이었다. 1안은 사용사유 제한의 취지를 전혀 살릴 수 없는데다가 현실적이지도 않은 안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12월 1일, 녹색연합,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여성단체연합, 함께하는시민행동의 7개 시민단체가 ‘기간제 고용을 2년 한도로 허용하고 2년 후 무기계약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비정규직법안 핵심쟁점에 대한 7개 시민단체 조정안’으로 발표했다. 한국노총 최종안의 2안과 같은 것이었다. 역시 민주노총을 고립시키기 위한 행보였다. 지난 1년 동안 민주노총은 투쟁동력을 단호하게 건설해 내는 대신 합리적 타협을 기대하며 사회적 교섭에 매달렸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맞닥뜨린 것은 사회적 교섭 테이블에서 민주노총의 고립이었다. 민주노총은 다시 한 번 민주노총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고려하여 조속한 입법화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그 내용 역시 올바른 원칙하에 처리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입법 원칙 및 방향을 밝힌다. 1. 정부의 기간제 법안 폐기 및 기간제 엄격 사유제한 … 2.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 … 3. 파견법 철폐 및 불법파견 정규직화 … 4. 특수고용 노동자성 인정, 노동3권의 보장 … 5. 간접고용에서 원청의 사용자책임 인정 … 지금 한국노총이 제안하는 수정안은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문제의 해결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현 국면에서 민주노총과의 합의 없이 수정안을 제출하는 것은 공조파기를 의미한다. … 민주노총은 이번 국회에서 비정규권리보장입법을 반드시 쟁취하기 위해 12월 1일부터 진행되는 총파업을 포함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33] 12월 1일과 2일, 민주노총은 노사교섭 결렬에 항의하며 총파업을 단행했다. 1일에는 6만 명, 2일에는 2만 명이 참여했다. 5일부터 7일까지는 확대간부 파업을 하면서 3천 명의 상경대오를 조직하여 국회·경총·전경련 앞에서 ‘비정규 악법 국회통과 저지 및 비정규 입법 쟁취를 위한 상경투쟁’을 전개했다. 8일, 다시 총파업을 단행해 6만7천 명이 참여했다. 그런데 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 논의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이 기간제 사용사유를 기존 4개에서 10개로 대폭 확대한 수정안을 제출했다. 1. 출산 육아 또는 질병 부상 등으로 인해 발생한 결원을 대체할 경우 2. 계절적 사업의 경우 3. 사업의 완료 또는 특정한 업무의 완성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경우 4. 그 밖에 일시적·임시적 고용의 필요성이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경우 5. 휴직·파견 등으로 결원이 발생해 당해 근로자가 복귀할 때까지 그 업무를 대신할 필요가 있는 경우 6. 학업·직업훈련 등을 이수함에 따라 그 이수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경우 7. 전문적 지식·기술의 활용이 필요한 경우와 정부의 복지정책·실업대책 등에 의해 일자리를 제공하는 경우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 8. 수출 주문의 예외적 급증이 발생한 경우 9. 기업의 일시적 업무량이 증가한 경우 10. 안전조치를 위한 긴급한 작업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34] 단병호 의원의 수정안 제출은 민주노총 지도부와 긴밀히 교감한 결과였으며, 한국노총과 사전 조율을 거친 것이었다. 비정규직권리보장입법을 둘러싸고 막바지 교섭이 진행 중이다. 민주노총은 그동안 비정규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항으로 기간제 사용시 사유제한과 불법파견 고용의제 등을 계속 주장해왔다. 이번에 입법을 하기 위한 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8일 오전 8시 30분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의 초청으로 양대노총 위원장은 간담회를 갖고 사용사유 제한에 대해 논의하였다. 민주노동당은 사용사유 제한의 원칙은 지키되 그 범위를 10가지로 제한하는 수정안을 제안하였다. 한국노총은 이에 환영의 의사를 표하였고 민주노총 역시 민주노동당과 양노총의 동일한 입장으로 제시되는 것이 현 시기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이제 정치권에서 답할 차례이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어렵게 의견을 단일화해서 제안한 만큼 비정규직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한다면 당리당략에 의한 접근이 아니라 진정성을 가지고 민생을 위한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35] 사회적 교섭 테이블에서 궁지에 몰린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하겠다고 뛰쳐나갔다. 하지만 총파업은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초라한 수준이었다. 국회라는 교섭 테이블에 다시 돌아온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의 수정안을 통해 어설픈 타협안을 내밀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의지박약과 무기력을 자인하는 어설픈 타협안은, 노무현 정권도 자본가들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민주노총의 어설픈 타협안은 그동안 주장해 온 사용사유 제한의 정당성을 스스로 약화시켰고,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권의 사용기간 제한(보편적인 기간제 사용) 입장을 사실상 수용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8일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는 단병호 의원의 협조 아래 한국노총 등의 수정안을 반영한 정부 안을 통과시켰다. 비정규직법이 국회에서 심의 중인 가운데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수정안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다. 수정안 철회를 요구하는 이들은 지난 15일 토론회를 연 데 이어 18일 중앙위에서 결의문 채택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기간제 노동과 관련해서는 당초 근기법 개정을 통한 엄격한 비정규직 사유제한 도입 등 비정규직 철폐안을 제출했으나 법안 심사과정에서 정부가 제출한 기간제법 형식에 따른 일부 조항 의결에 참여했고, 사유제한의 폭도 기존 4가지에서 10가지로 확대하는 등 양보했다고 지적했다. 또 당초 파견법 폐지를 내건 민주노동당이 환노위 법안심의 과정에서 사실상 파견법 존치를 전제로 불법파견 적발시 고용의제 확보 등을 제시했다고 비판했다.[36] 이제 비정규직 확산법안(기간제법 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사위원회, 본회의를 속속 통과하며 입법 처리를 완료할 수순만 남아 있었다. ◎ 2006년 비정규직 확산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의 통과 2006년 2월 21일 민주노총 조준호 보궐 집행부가 당선됐다. 그런데 그 직후인 27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국회 경위권을 발동한 가운데 환경노동위원회를 개최하여 비정규직 확산법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노총의 허를 찌른 기습처리였다.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했다. 28일 10만3천 명이 참여했다. <비정규법안의 문제점> 1. 날치기 과정 :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야합하여 통과시킴 - 2. 22.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민주당, 국민중심당 등 야4당은 국회에서 원내대표회담을 열고 비정규직법 처리를 차기 임시국회로 미루기로 합의함 - 그런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밀실에서 야합하여 2. 27.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를 전격적으로 개최하여 통과시킴 - 사상 유례가 없는 환노위 질서유지권을 발동하고 항의하는 민주노동당 의원들을 폭력적으로 끌어내고 강행하였음 - 환노위 국회의원인 단병호 의원마저도 국회 경위를 동원하여 자리에서 끌어내고는 이를 임의로 무효표로 처리함 2. 기간제 비정규직의 무제한 사용·확대를 초래하는 내용의 법안이 통과 … - 결국, 이제 2년 이내의 계약직은 우리 사회에서 상징적이고 정상적인 고용형태가 될 것임 3. 파견노동이 사실상 전면 확대하고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는 법안이 통과됨 … -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 법안임. 즉, 불법파견을 해도 2년까지는 봐주고 반드시 2년이 지나야 고용의제도 아니고 고용의무를 지도록 하였음. 고용의무는 안 따르면 그만이고 과태료 3000만원만 내면 되도록 해버렸음. 사용자들은 마음 놓고 불법파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음. … 4. 오히려 차별을 용인하고 실효성 없는 차별시정절차를 담고 있을 뿐임[37] 민주노총은 3월 2일에도 총파업을 이어가 18만 명이 참여했다. 1996~97년 총파업 이후 최대 규모의 조합원이 참여한 총파업이었다. 3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비정규직 법안의 후속 처리를 4월 임시국회로 연기했다. 민주노총 총파업도 4월로 유보됐다. 3월 15일, 4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재개돼 노사관계 로드맵을 논의했다.[38]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법안 재논의와 장기투쟁사업장 문제해결 등을 전제조건으로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참했다. 4월 10일부터 14일까지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법안 강행처리 저지, 노사관계 로드맵 폐기, 무상교육·무상의료 쟁취, 한미FTA 협상 중단을 내걸고 산하 연맹별 순환파업을 전개했다. 특히 14일 금속연맹 총파업에는 12만 조합원이 참여했다. 21일, 국회 법사위원회가 비정규직 법안을 처리하려 하자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단행해 10만5천 명이 참여했다. 법사위원회의 비정규직 법안 처리가 27일로 연기되자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유보했다. 대신 국회 법사위에서 비정규직 법안이 처리되면 그 다음날부터 무기한 전면 총파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27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관계 악화 때문에 법사위원회가 열리지 못했다. 대신 5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려 노사정위원회 명칭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로 개정하는 등의 노사정위원회 개편방안과 노사관계 로드맵의 첫 번째 합의사항으로서 노동위원회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5월 16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에 조준호 집행부가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 문제를 논의에 부쳤다. 격론 끝에 23일 속개된 중앙집행위원회는 집행부가 제출한 사업계획에서 “노사정대표자회의 참여를 통해 노사관계 로드맵의 반노동자성을 폭로하고, 노사관계 민주화 방안과 특수고용 노동기본권 등을 쟁점화 한다”는 부분을 삭제했다. 금속, 공무원, 공공, 전교조, 사무금융 등 대규모 연맹들이 줄줄이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에 대해 반대 또는 회의적이라는 입장을 냈기 때문이다. 대신 민주노총 중집은 ‘노사관계 로드맵 저지를 위한 6월 21일 총파업’을 결의했다. 그러나 6월 13일 열린 중앙위원회는, 6월 21일 총파업이 각 산별연맹의 자체 일정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함을 확인했다. 그러자 노사정대표자회의 불참 방침을 전면 재검토하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고 찬반 논쟁 끝에 19일 중집에 결정을 위임했다. 19일 열린 중집은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를 10분 만에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민주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를 결정하기까지 노무현 정권은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참여를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여러 차례 내보내고 있었다. 민주노총이 복귀하자마자 노사관계 로드맵 논의가 빠르게 진행됐다. 21일 실무회의를 거쳐 7월 6일 6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렸다. 7월 12일, 민주노총이 한미FTA 협상 저지, 노사관계 로드맵 저지, 특수고용 노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였다. 9만4천 명이 참여했다. 21일, 민주노총이 노무현 정권의 노사관계 로드맵에 대응하여 대안적 노사관계 구축을 위해 ‘민주적 노사관계 구축의 4대 방향, 8대 핵심요구안’을 제출했다. 민주적 노사관계의 4대 방향 1. 국제적 노동기준의 보장 … 2. 비정규 노동자와 산별노조의 노동기본권 보장 … 3. 노사자치의 보장 … 4. 고용안정의 보장 … 8대 핵심요구안 요지 1. 공무원·교수·교사의 노동3권 보장 … 2. 비정규 노동자 노동3권 보장 … 3. 산별교섭 보장과 산별협약의 제도화 … 4. 복수노조하 자율교섭 보장 … 5. 직권중재조항 폐지와 긴급조정제도 요건 강화 … 6. 손배가압류 및 업무방해죄 적용 금지 … 7.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조항 폐지 … 8. 고용안정 보장[39] 8월 10일, 8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이 날까지 전체 논의과제 40개 가운데 23개에 대해 의견일치를 봤고, 나머지 17개는 9월 4일까지 논의하기로 했다. 26일, 9차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복수노조와 노조 전임자 문제가 처음으로 다뤄졌다. 9월 2일, 한국노총과 경총이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5년 유예하자고 사전 합의하여 의견을 냈다. 9월 11일, 민주노총을 제외하고 한국노총, 경총, 대한상의, 노동부, 노사정위원회 대표자들이 긴급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열어 이른바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에 전격 합의했다. 그 내용은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 3년 유예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3년 유예 △필수공익사업장에 직권중재를 폐지하되 필수유지업무제도 운용 및 쟁의기간 대체인력의 채용·하도급 허용 △필수공익사업장 확대(혈액공급, 항공, 폐․하수처리, 증기·온수공급업) △부당해고 벌칙조항 삭제 △정리해고 사전통보기간을 60일에서 50일로 단축 등이었다. 단호하게 투쟁동력을 건설하는 대신 노사정 교섭을 통한 사회적 합의를 모색해 온 민주노총은 다시 한 번 결정적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11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동양증권 빌딩 21층 노사정위원회. 한국노총과 정부, 사용자단체가 수십 명의 기자들 앞에서 로드맵에 대한 노사정 합의 결과를 발표하며 서로 손을 굳게 잡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같은 시간 동양증권 빌딩 앞에는 2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마이크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고, 맥 빠진 구호와 힘없는 투쟁가가 건물 안팎을 가득 메운 경찰들 사이로 맥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사정 합의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금속연맹과 금속노조 간부들 30여 명이 회의를 중단하고 달려왔지만 초라한 풍경은 그대로였다. “한국노총과 자본의 야합을 결코 좌시하지 않고 투쟁해 나가겠다”는 연설자들의 외침은 공허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노동조합이 없는 89%, 1천3백만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선택권을 또 다시 유린하고, 정리해고 사전 통보기간을 단축해 해고를 쉽게 만들고, 필수공익사업장 확대와 대체근로 인정으로 파업을 어렵게 만드는 법안과 노조간부 임금을 맞바꾼 ‘희대의 야합’이 벌어진 날, 그 많은 민주노총 간부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 한국노총 야합보다 더 절망스런 일이 민주노총의 무기력이다. 민주노총은 지난 주 한국노총과 사용자단체에게 ‘5년 유예 합의’라는 뒤통수를 맞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을 뿐더러, 주말에 벌어진 노사정의 ‘음모’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고, 이날 오후 2시 매우 ‘형식적인 집회’를 잡아놓았을 뿐이었다. … “천만노동자 팔아먹은 밀실야합 박살내자” 민주노총 간부들이 길을 가로막으며 ‘노사정야합’을 규탄했고, 일부 간부들은 이용득 위원장 앞에 드러누워 “나를 밟고 가라”고 외쳤지만, 한국노총 간부들과 이용득 위원장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하게’ 정부가 지어준 한국노총 건물로 들어갔다. 민주노총이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전국노동자대회를 열고 강력하게 저항했다면, 최소한 가까운 지역의 간부들을 비상소집해 노사정 야합을 막는 투쟁을 했다면, 한국노총처럼 비상대표자회의를 열어 농성을 벌이면서 ‘야합’에 대비했다면 한국노총이 ‘부끄러운 합의’를 하고도 떳떳하게 걸어 나오는 사태를 목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탈하고 참담하고 부끄러운 9월 11일이었다.[40] 11월 15일, 민주노총이 노동법 개악 저지와 노사관계 민주화 입법 쟁취, 비정규 권리보장 입법 쟁취, 한미FTA 협상 저지, 산재보험법 전면 개혁을 내걸고 총파업을 벌였다. 13만 8천 명이 참여했다. 22일에도 총파업을 벌여서 14만 4천 명이 참여했다. 29일, 국회 법사위원회가 비정규직 법안을 강행 처리하려 하자 민주노총이 다시 총파업에 나섰다. 16만이 참여했다.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당직자들은 법안 처리를 물리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법사위원회를 점거했다. 30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국회 본회의를 열어 기간제법 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노동당이 농성 중인 법사위원회를 건너뛰어 의장 직권으로 본회의에 상정해 표결 처리한 것이었다. 30일에도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이어갔다. 12만 2천 명이 참여했다. 이번에 날치기 통과된 비정규법은 △임시계약직(기간제) 사용 사유의 무제한 허용 △파견 비정규직의 전면 허용 △실효성 없는 차별해소 방안 △비정규직 노동3권 외면 등을 기조로 하고 있어 비정규직을 더욱 확산하고 차별해소 효과는 미미할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의 노동권을 박탈하는 법이다. 정부와 양당은 이제 모든 노동자를 비정규화하여 빈곤과 고용불안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번 비정규악법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으며 줄기찬 개정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이고 곧 국회에서 심의에 들어갈 노동법 개악안 저지를 위한 총력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할 것이다.[41] 12월 6일, 민주노총이 노동법 개악저지와 날치기 비정규법 전면무효를 내걸고 총파업에 들어갔다. 15만 명이 참여했다. 7일과 8일에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을 다루는 데 맞서 1박 2일 전 간부 상경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법안은 통과됐다. 노무현 정부와 보수양당은 우리가 주장한 민주적 노사관계방안을 끝내 수용하지 않고 노동법개악을 자행하였다. 1500만 노동자의 간절한 염원을 저버리고 오늘 노동법 개악안을 국회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강행처리했다. 지난 11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비정규 확산법 날치기통과에 이어 또 다시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이라는 기만적인 이름으로 노동법을 개악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제도는 법적으로 완비된 것과 다름없다. 비정규악법으로 비정규노동자를 무제한 확산시키는 길을 열었으며 노동법 개악으로 정규직노동자의 비정규직화를 가속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번 통과된 노동법 개악안은 복수노조를 3년 동안 금지하여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권을 침해하고, 비정규노동자의 교섭권확보를 봉쇄하였으며, 부당해고의 벌칙조항을 삭제하고, 정리해고 통보일을 60일에서 50일로 축소하여 부당해고를 남발할 수 있게 하였다. 여기에 혈액공급과 항공운수를 포함하여 필수공익사업장을 확대하고, 필수공익사업장의 직권중재제도를 폐지하는 대신에 파업참가자 1/2에 대하여 대체근로를 허용하여 파업권을 제한하였으며, 결국 필수공익사업장노동자의 노동유연화 장치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사용자들의 전횡과 독단이 무소불위로 자행될 것이며 노동자들의 권리는 심각하게 무력화될 것이다. 또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금지 조항을 노사자율로 하자는 상식적이고 보편타당한 우리의 주장을 무시하고 3년 동안만 유예하였으며, 공무원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산별교섭 제도화와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 문제도 추후 논의하는 것으로 정리하여 이후 노사관계의 갈등과 혼란이 극심해질 가능성을 남겨놓았다. … 우리는 이번에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통과된 노동법 개악안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으며, 본회의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총력투쟁을 진행할 것이며 비정규악법철폐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해 나갈 것이다.[42] 그런데 8일 민주노총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전 간부 상경투쟁을 진행하던 바로 그 시각에,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단병호 의원은 법안 처리에 협력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비정규직 법안 통과에 항의하면서 국회 진격투쟁에 돌입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국회 환노위에서는 놀랄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이 환노위에서 로드맵 법안 처리에 합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린우리당 의원인 우원식 법안소위장은 “오늘 합의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 여야 노동계가 최초로 합의해서 통과시킨 것이다. 오늘 합의는 끝없이 벌어지는 (노사)갈등을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이른바 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 법안 통과에 맞서 노동자투쟁을 조직하는 선봉에 서기는커녕, 비정규직 법안 이상으로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악법인 로드맵 법안을 암묵적으로 추인해주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노동운동을 정치적으로 대표한다고 하는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힘을 얼마만큼 싹둑 잘라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 민주노동당은 “반대를 명확히 하되 일부 완화된 수정안이 통과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 하에 환노위 통과를 인정했다. 이것은 애초부터 노동자의 투쟁을 조직해서 자본의 공세에 저항하는 노선 대신 ‘일부 완화된 수정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다는 실리주의적 투항노선을 민주노동당이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노동자들을 선거 때 표를 던지는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 이상으로는 여기지 않는 의회주의 노선의 필연적인 결정판이다. 물론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단독 범죄는 아니다. 민주노총의 노조관료들이 공범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보건의료산업노조 지도부는 노조의 합법적 쟁의권을 조금이라도 보호하기 위해서 ‘파업참가자의 50%까지 대체근로 허용, 정리해고제 사전통보기간 현행 60일에서 50일로 단축, 필수공익사업장 항공사 포함 등’의 독소 조항들이 담긴 로드맵 법안 통과를 ‘양해’하도록 민주노동당 지도부에 종용했다. 결국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관료들 사이의 분업구조가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조합 관료층은 노동자의 힘을 조직하는 대신 의회주의 정당의 국회의원들에게 의지하고, 이 의회주의 정당의 이른바 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은 자본가 정당들과의 밀실협약과 거래에 의지하여 노동자의 절박한 생존권과 권리들을 헌납하는 전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분업구조가 나타난 것이다. … 노동자의 힘의 원천인 단결투쟁력을 파괴하거나 그것을 아주 제한적 수준(이른바 교섭을 위한 압력 수단)에만 묶어둔 채 모든 것을 교섭장에서의 자본과의 협상에만 의존하는 노조관료층의 노선을 민주노동당은 의회 차원에서 확대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 이제 막 등장해서, 기껏해야 국회의원 몇 명 정도 배출한 것에 지나지 않은 민주노동당이 벌써부터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미래에 그들이 취할 모습은 더욱 명확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을 계급적으로 결집시키는 그릇인 노동자의 정치적 성장은 가로막힐 뿐만 아니라 해체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민주노동당의 성장가능성을 제거해버린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한국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무참히 매장해버리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43] 11일, 민주노총 조준호 위원장이 노동법 개악안 저지를 위해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12일부터 14일까지 연맹별로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을 전개하고, 본회의가 예정된 15일에는 민주노총 차원의 총파업을 단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는 12일부터 14일까지 연맹별 간부상경투쟁 정도가 진행됐고, 15일 총파업도 연기됐다. 민주노총은 다시 19일부터 22일까지 연맹별 간부상경투쟁을 진행했다. 민주노총의 무기력한 투쟁을 비웃듯이, 22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을 통과시켰다. 오늘 국회 본회의에서 노동법 개악안을 처리할 예정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지난 8일 상임위에서 강행처리한 노동법 개악안을 법사위 통과와 함께 본 회의까지 초고속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그동안 한나라당이 개방형 이사제 폐지를 위해 사학법 재개정 주장으로 국회파행을 유도하는 몽니를 부리다가 가까스로 본회의를 열기로 합의한 결과가 노동법 개악안과 파병연장안을 처리하는 것이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 희망을 염원하는 지금 또 다시 보수양당의 반노동 만행은 우리 사회를 절망에 빠뜨리고 있다. 사용자의 불법적 노조파괴와 노동탄압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이를 통제할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측의 불법횡포를 합법화해주려는 부정의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현 국회의 자화상이다. 노무현 신자유주의 노동착취 정부는 거대 재벌들과 외국자본의 배만 불리고 노동자는 사지로 내몰고 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도 안 되는 정규직을 눈엣가시처럼 못 마땅히 여기며 어떻게든 비정규직화 시키고 비정규직노동자의 차별과 빈곤을 고착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를 때려죽이고도 5개월이 지나도록 책임은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인면수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보수 정치판은 정치모리배 속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당리당략에만 몰두하며 민생은 안중에도 없고 빈곤과 차별, 속박과 불안으로 온 사회가 멍들어 가는 속에서 부패정치만 일삼고 노동악법만 생산하고 있다.[44] 비정규직 확산법안 저지와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 쟁취를 위해, 그리고 노사관계 로드맵 저지와 민주적 노사관계 쟁취를 위해 1996~97년 총파업 이후 최대 규모로 전개됐던 민주노총의 2004~06년 총파업은 결국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동안 민주노총은 열 번이 훨씬 넘는 총파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확산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의 통과를 끝내 막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형식적으로는 많은 총파업을 했지만, 1996~97년 총파업과 달리 실제로는 위력적인 총파업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총파업을 하는 시늉만 했을 뿐, 악법을 꼭 막아내고 노동자의 요구를 반드시 쟁취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총파업을 전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왜 그렇게 됐을까? 첫째, 민주노총의 중핵인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이 단위사업장 차원의 임금·단체협약에만 함몰돼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은 광범한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서도 노동법의 변화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지침에 따라 형식적으로 파업에 임할 뿐 절실하게 조합원들을 설득해 나가지 않았고, 따라서 파업참여 조합원의 대다수는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퇴근했다. 둘째, 총연맹으로서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입법과 노동법 개정에 대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단호한 투쟁에 근거한 해법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추구한 해법은 노무현 정권과의 ‘적절한 타협’이었다.[45] 총파업은 협상의 수단일 뿐이었기에 노무현 정권과의 관계나 국회 상황에 따라 걸핏하면 유보됐다. 산하 노조들을 독려하여 위력적인 총파업을 건설함으로써 노동자의 요구를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민주노총 지도부는 갖고 있지 않았다. 2004년 9월 노무현 정부가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입법예고한 후 민주노총은 2006년 한 해에만 총파업 돌입 총 14회, 연인원 181만4천368명이 참가한 것으로 보고됐다. 하지만 96~97년 총파업 투쟁 이후 최대라는 2006년 총파업 투쟁은 정부 법안의 골자를 바꾸지도 못했고, 비정규직 고용에 관한 민주노총 소속 노조의 태도를 변화시키지도 못했다. … 2000년대 이후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자신의 임금을 방어하거나 혹은 개선할 수 있었지만, 90%의 미조직 노동자들과의 격차가 확대되는 것은 사실상 방관했다. 그 결과 임금과 고용을 방어하는 노동조합 본연의 역할이, 정권과 자본에 의해 집단이기주의로 몰렸는데도 뾰족한 대책이 없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46] 비정규직 보호입법이 국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2004~06년 동안만 보더라도,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투쟁, 울산플랜트노조의 투쟁, 완성차 사내하청노조들의 투쟁, 덤프연대의 투쟁 등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이 폭발하였으나 이것과 권리입법 쟁취투쟁이 결합되지 못했다. 2005년 ‘비정규직 보호입법’과 ‘사회적 교섭’이 논란이 되는 와중에도 비정규직 노조들은 92명의 구속자, 1362명의 해고자(계약만료통보로 인한 해고 제외), 1498억 원의 손해배상·가압류(하이스코의 72억원 제외) 등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으나,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노동기본권 문제를 쟁점으로 만들고 권리입법투쟁과 연결시키지 못했다. 비정규직 노조조차도 권리입법 투쟁에 매진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비정규직노조 대표자 수준에서는 정세에 대한 공유나 어느 정도의 공동실천이 이루어졌으나, 대표자를 넘어 해당 노조에까지 긴장감이 형성되지는 못했다. 단위 사업장의 현안을 놓고서는 그야말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권리입법투쟁에 있어서는 그만큼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유지 자체가 어렵고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비정규직노조의 조건을 고려한다 하여도, 비정규직 노조마저도 자신의 현안과 권리입법 투쟁을 별개의 것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47] 5) 2007~08년 이랜드일반노조의 계약직 정규직화 투쟁 2006년 말에 제정된 기간제법은 2007년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기간제법 시행을 앞두고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계약직 노동자들이 해고당했다. “2년을 초과하여 기간제 근로자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그 기간제 근로자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로 본다”는 기간제법 제4조 2항 때문이었다. 기간제법 시행을 앞둔 자본가들의 대응은 크게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대세를 이룬 대응방안은 계약직이 수행하던 업무를 용역·도급 등의 간접고용으로 대체(외주화)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계약직이 용역·도급으로 전환되기도 했고, 아예 새로운 노동자로 대체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2년 이상 경력자를 포함해 많은 계약직이 해고당했다. 이와 관련 경총은 2007년 5월 「비정규 인력의 합리적 활용과 법적 대응방안」이라는 문서를 통해 “비정규 인력이 담당하는 업무를 도급화해서 해결하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방향을 제시했다. 또 하나의 방향은 직군분리를 통한 무기계약직 도입이었다. 기간제법 제정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벌어지는 동안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는 사실상 정규직을 뜻하는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무기계약직이라는 새로운 직군을 도입해서 (기간제법의 차별금지 조항을 비껴갈 수 있는) ‘합리적 차별’의 근거를 마련했다. 통상 무기계약직은 임금과 처우는 계약직과 같고 고용만 보장되는 것으로 설계됐다. 그 무기계약직조차 2년 이상 일한 계약직 가운데 소수만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기간제법 시행을 하루 앞둔 6월 30일,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들이 계약직 정규직화와 고용보장을 핵심 요구로 내걸고 홈에버 월드컵점에서 점거농성을 시작했다. 7월 20일까지 이어진 이 점거농성은 사회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언론보도가 집중됐고, 노동자·민중의 지지와 연대가 쏟아졌다. 특히 2006년 말 비정규직 확산법안의 통과를 막아내지 못하고서 의기소침해 있던 민주노총이 이 투쟁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달라붙었다. 1980년 이랜드라는 패션브랜드로 시작하여 급성장을 거듭한 이랜드그룹은 2006년 프랑스계 대형할인매장 까르푸를 인수하여 홈에버로 이름을 바꾸면서 뉴코아·홈에버·2001아울렛 등을 거느린 거대 유통그룹이 됐다. 까르푸가 이랜드그룹으로 인수합병되면서 이랜드노조와 까르푸노조가 통합하여 2006년 12월 이랜드일반노조를 결성했다. 이랜드그룹에는 뉴코아노조가 또 있었지만, 역사와 조건의 차이 때문에 노조를 통합하지는 않고 공동투쟁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랜드일반노조로 통합된 이랜드노조와 까르푸노조는 정규직 중심의 노조가 계약직에게도 문호를 열고 계약직의 노동조건 개선과 정규직화를 위해 투쟁해 온 공통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2006년 까르푸 매각과 비정규직법 개악을 겪고 2007년 기간제법 시행이 다가오자 계약직들이 고용불안을 느끼고 노조에 대거 가입했다. 이랜드그룹은 기간제법 시행을 앞두고 산하 기업들에서 1천여 명의 계약직을 해고하고 용역으로 전환했다. 한편 홈에버가 6월 15일 “3천여 명의 비정규직 중 2년 이상 된 1천여 명을 직무급제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는데, 직무급제 정규직은 무기계약직을 뜻했다. 그런데 까르푸 시절 노조가 쟁취한 단체협약에는 “18개월 이상 근무한 계약직은 계약기간 만료 때 계약을 해지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즉 18개월 이상이면 자동으로 무기계약직이 되는 것인데, 2년 이상 경력자를 채용 절차를 거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었다. 노조는 회사 방침에 대해 “노조파업을 무력화시키고 노동자를 분열시키기 위한 악질 사기극”이라고 비판했다.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는 기간제법 시행을 앞둔 이랜드그룹의 계약직 대량해고와 외주화(아웃소싱), 분리직군제 도입에 맞서 공동투쟁을 시작했다. 두 노조는 6월 10일, 17일, 23일 공동파업을 전개했다. 특히 23일에는 이랜드그룹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기록하는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했다. 1층은 이랜드일반노조가, 2층은 뉴코아노조가 계산대를 점거하고 고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24일에는 뉴코아 강남점에서 매장 진입을 시도했다. 26일에는 뉴코아 야탑점과 홈에버 야탑점, 27일에는 뉴코아 일산점과 홈에버 일산점에서 파업을 벌였다. 뉴코아노조는 조합원 대다수가 정규직이었지만, 이랜드일반노조는 조합원 다수가 고용불안에 쫓겨 막 노조에 가입한 계약직들이었다. 파업도 집회도 처음이었다. 아직 별다른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기간제법의 시행을 하루 앞둔 30일 오후 12시 30분,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600여 명이 홈에버 월드컵점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노조의 핵심 요구는 3개월 이상 근무자 고용보장, 2년 이상 근무자 정규직 전환, 사내도급 중단, 민형사징계 면제 등 네 가지였다. 매장을 점거하고 앉은 여성노동자들은 “우리가 언제 그런 법을 만들어 달랬다고 비정규직법을 만들어서 우리를 길거리로 내쫓냐”고 분노했다. …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기혼이었다. 특히, 캐셔들 가운데는 40대 이상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이혼하거나 사별해서, 또는 홀로 벌어서 생활하는 여성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한 달 일해 받는 80만 원이 유일한 생계비였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가 계약을 중단하고 퇴사시키면서 생계를 위협받고 있었다.[48] 오후 4시, 민주노총·민주노동당·학생 등 연대대오 100여 명이 결합했다. 오후 9시, 뉴코아 강남점의 킴스클럽을 봉쇄하다 온 뉴코아노조 조합원 700여 명이 합류했다. 애초 이랜드일반노조 지도부의 계획은 1박2일 점거농성이었다. 그러나 점거 첫날부터 조합원들은 ‘힘들게 들어왔는데 이대로 나갈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지도부는 고심하다가 분회토론과 전체 토론을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분회 토론과 전체 토론에서는 ‘무기한 점거’ 의견이 쏟아졌다. 결국 조합원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무기한 점거농성을 결정했다. 조합원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조합원들은 이후 경찰병력에 의해 끌려나오기까지 21일 동안 힘차게 점거농성을 이어갔다. 투쟁 주체는 다수가 당시 ‘아줌마’, ‘주부사원’으로 불리던 40대 전후의 기혼 여성노동자들이었다. … 이들 대부분은 510일 투쟁 이전에는 노조활동의 경험이 없었고, 작업장 안에서도 일에 쫓겨 몇몇 자신의 주변 동료 이외의 사람들과는 서로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 또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관리자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해 왔다. 그런데 월드컵점 점거농성장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와 결의로 지도부의 1박2일 계획을 전복시켜서 진행한 20일 투쟁과정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였다. 매장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거대한 매장이 여성노동자들이 손을 놓는 순간 멈춰 섰고, 스스로가 꾸려 나가는 공간이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다양한 연대세력들을 만났고 이들의 발언과 여러 강의를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이해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들이 같이 일했던 동료인 여성노동자들을 알아갔다는 것이다. 교대해서 집에 가면 냉장고를 털어 농성하는 동료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바리바리 싸왔다. 농성장에서는 자발적으로 나선 이들이 매끼 수백 명의 밥과 국을 하면서도, 그것이 동료들을 위한 투쟁이라며 기꺼이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으로 수십 끼를 같이 먹으며 이들은 ‘식구’가 되어 갔다.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서로 이야기를 나눈 밤이 있었다. 20일 밤을 계산대 사이사이에 모여 서로 살아온 이야기와 현실 문제, 현장 문제와 위축되어 대응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모습 등 수년을 같이 일해도 나누지 못했던 삶과 현장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 과정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서로에게 ‘또 다른 나’를 발견했고, 진한 동료애로 서로를 껴안을 수 있었다. 이들은 ‘여성’으로 그리고 ‘노동자’로 일과 가사노동·돌봄노동을 병행해야 하는 조건에 있는 동료들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49] 7월 8일,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 그리고 민주노총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매출타격투쟁을 벌였다. 전국적으로 5천여 명이 연대투쟁에 나서면서, 애초 계획한 12개를 넘어 20개 매장에서 점거농성을 벌였다. 회사는 점거농성이 벌어지면 매장을 닫는 것으로 대응했다. 뉴코아노조는 이날 회사와 경찰의 대응이 전국적으로 분산된 틈을 활용하여 뉴코아 강남점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했다. 민주노총은 11일부터 20일까지를 전국 불매운동 1차 집중시기로 정하고 80만 조합원에게 뉴코아 아울렛, 뉴코아 백화점, 킴스클럽, 홈에버, 2001아울렛 등 이랜드그룹 5개사에 대한 불매운동에 참여할 것을 지침으로 내렸다. 13일, CBS가 홈에버 월드컵점 점거농성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비정규직 파업 사태의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의견은 31.9%, 사업주에 책임이 있다는 의견은 24.4%였다. 정부와 사업주의 책임이라는 의견이 절반을 넘어 55.3%에 이른 반면 노조에 책임이 있다는 의견은 23.2%였다. 16일,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랜드 불매운동에 참여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녹색연합 등 57개 시민사회단체가 합류했다. 20일, 경찰병력이 홈에버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의 농성장을 침탈해서 농성자들을 모두 연행했다. 점거농성을 시작한 지 월드컵점은 21일, 강남점은 13일만이었다. 9시 50분, 조합원들이 앉은 곳을 제외한 전 매장 안에 들어온 경찰이 경고방송을 시작했다. 경찰의 방송 소리에 모두 입에 호루라기를 꺼내 물고 불어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구호를 외쳤다. “일하게 해달라는데 공권력투입 웬 말이냐.” “비정규직도 사람이다. 노무현 정권 물러나라.” … 국회의원들은 체포영장이 발부된 김경욱 위원장을 가운데 두고 경찰의 강제연행에 항의했다. … 경찰은 5~6명씩 달려들어 남성조합원들을 먼저 연행하기 시작했고, 여경들은 여성조합원들을 한 명씩 끌어냈다. 조합원들은 뿔뿔이 끌려 나가기 직전 “경찰 조사 받고 나오는 대로 다시 싸우자”고 서로의 손을 움켜쥐었다. … 연행 시작 1시간도 채 못 된 10시 55분, 강제해산을 위한 경찰의 진압작전은 위원장의 연행으로 종료됐다. 위원장은 끝까지 놓지 않았던 조합원과 마지막 포옹을 하고 경찰에 검거됐다.[50] 이날 민주노총은 농성장 공권력 침탈에 항의하며 전국 12개 이랜드계열 유통매장에서 항의투쟁을 전개했다. 각 매장마다 수백여 명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항의투쟁에 동참해서 산발적인 매장 진입과 점거, 결의대회, 기자회견 등을 진행했다. 21일, 민주노총이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2차 매출제로투쟁을 벌였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전국 33개 매장 앞에서 집회와 기자회견을 했고, 다른 28개 매장에서도 1인 시위와 불매운동을 벌였다. 22일, 이랜드일반노조가 홈에버 중동점을 기습 점거했다가 철수했다. 20일 연행됐다 석방된 조합원들까지 3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참여했다. 23일에는 뉴코아 강남점 앞 시위, 24일에는 홈에버 월드컵점 타격투쟁이 전개됐다. 27일, 홈에버 월드컵점 앞에서 ‘비정규 노동자 대량해고 이랜드규탄 민주노총 총력결의대회’가 열렸다. 3천여 명이 참여했다. 집회를 마친 노동자들은 매장 진입을 시도하다 이를 가로막는 경찰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월드컵점의 셔터가 20일 공권력 투입 이후 처음으로 다시 내려졌다. 29일, 뉴코아노조와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600여 명이 뉴코아 강남점을 다시 점거하고 점거농성을 이어갔다. 31일 새벽, 경찰이 투입돼 농성 조합원들을 모두 연행했다. 이날 민주노총은 이랜드-뉴코아 투쟁과 관련해서 긴급 산별대표자회의를 열고 투쟁수위를 높이기로 결정했다. 8월 13일부터 문제해결 때까지 1천여 명의 ‘이랜드 타격투쟁 중앙선봉대’를 운영하기로 했다. 18일에는 5만여 명이 참가하는 노동자대회를 전국동시다발로 개최하고 21일에는 이랜드-뉴코아 투쟁을 단일 안건으로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8월 5일, 민주노총이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3차 매출타격투쟁을 벌였다. 전국 12개 매장에서 타격투쟁이 전개됐는데, 홈에버 전주점을 200여 명의 조합원이 일시 점거했다. 노동자의힘, 다함께, 문화연대, 민교협, 인권단체연석회의, 이윤보다인간을 등 노동사회단체들이 ‘비정규직법 폐기와 뉴코아-이랜드투쟁 승리’를 위해 세종로 소공원에서 시국농성에 돌입했다. 9일, 민주노동당이 당의 사활을 걸고 이랜드사태 해결, 비정규악법 재개정 및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리보장을 위한 투쟁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16일, 민주노총의 1천인 선봉대 발대식이 홈에버 목동점에서 열렸다. 700여 명이 참석했다. 17일, 민주노총 선봉대 400여 명이 비정규악법 전면 재개정과 이랜드그룹 박성수 회장 구속을 요구하는 항의서한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를 향했으나 광화문 인근에서 경찰에게 저지당했다. 18일, 민주노총이 전국동시다발 노동자대회를 열어 전국 11개 지역에서 이랜드계열 유통매장 12곳을 봉쇄했다. 서울역에 모인 3천 명은 둘로 나뉘어 홈에버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을 봉쇄했다. 전국적으로 9천 7백 명이 참여했다. 21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열렸다. 민주노총은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 조합원들의 투쟁에 전 조직 역량을 모으기로 했다. 우선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 조합원 800여 명에게 1인당 월 50만원씩의 생계비를 9월부터 12월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이에 필요한 월 4억 원의 투쟁기금은 민주노총과 산하조직의 모금 등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또한 추석 직전인 9월 15일부터 21일까지를 집중타격투쟁 기간으로 잡고 단위노조 대의원 이상 2만여 명이 참석하는 전국동시다발 매장봉쇄투쟁을 진행하기로 했다. 특히 9월 18일과 19일은 전 간부가 서울로 상경해 수도권 12개 매장을 전면 봉쇄하는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민주노총 80만 조합원의 힘으로 860만 비정규 문제를 해결하자! 오늘 우리는 80만 조합원의 대표자격으로서 이랜드 투쟁의 승리를 위한 총력투쟁에 나설 것을 힘차게 결의하였다. 이랜드 문제는 이 땅 860만 비정규직 문제 그 자체이다. 우리는 민주노총의 이름으로 이랜드 투쟁의 승리를 위해 강력한 지지연대투쟁에 나서 비정규직 완전철폐를 위한 승리의 대항쟁에 불을 지펴 갈 것이다. 오늘의 결의를 시작으로 지난 두 달여간 보여 왔던 계급적 단결과 연대정신 그 이상의 투쟁력을 발휘하여 승부를 내야 할 때다. 지금부터 9월말까지 한 달 간의 기간이 이랜드 투쟁의 최대 승부처이며 분수령이다. 바로 이 기간에 투쟁에 최대 집중하여 비정규직을 탄압하는 악덕기업이 이 땅에 설 자리가 없도록 바로 우리 손으로 바꿔나가자. 이에 우리는 이랜드 투쟁의 완전승리를 위해 다음과 같이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이랜드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지역별 매장봉쇄투쟁을 비롯한 모든 투쟁에 전조직적으로 나설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전조직적인 이랜드 불매운동을 확산하며 전 국민적인 불매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9월말 추석 전 매출봉쇄 집중투쟁, 불매운동 강화, 이랜드 투쟁기금 조성 등 대의원대회 결의사항을 가맹산하조직, 단위노조 등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사수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이랜드뿐만 아니라 비정규 투쟁사업장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연대투쟁을 조직하고 860만 비정규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사업에 박차를 가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이랜드 지지투쟁에 머물지 않고 하반기 비정규법 전면 재개정 쟁취투쟁을 전개하며, 노무현정권의 비정규정책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정책 폐기를 위해 강력한 하반기 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51] 22일, 전북 농민들이 쌀 27가마를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에 전달했다. 29일에는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쌀 50여 포대를 두 노조에 전달했다. 24일, 이랜드일반노조, 뉴코아노조, 철도노조 KTX 승무원지부,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의 조합원 1천여 명이 기륭전자 정문 앞에 모여 ‘비정규 여성노동자 공동투쟁 연대결의대회’를 가졌다. 25일, 민주노총이 전국 11개 이랜드계열 유통매장에서 6차 매출제로투쟁을 벌였다. 26일,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250여 명이 홈에버 월드컵점을 기습 점거했다가 철수했다. 31일, 민주노총이 16일부터 활동한 1천인 선봉대의 해산식을 가졌다. 매일 두 곳씩 이랜드계열 매장의 봉쇄를 목표로 했던 선봉대 활동은 나름 의미가 있었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선봉대 1천 명을 각 연맹별로 할당했지만, 실제로 선봉대에 참여한 숫자는 평균 478명에 그쳤다. 각 연맹에서는 연맹 간부들을 선봉대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현장 조합원들 속으로는 전혀 파고들지 못했다. 민주노총 1천인 선봉대가 운영되는 동안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의 파업참여 조합원은 평균 494명이었다. 9월 3~4일, 민주노총이 중앙집행위원회를 갖고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추석기간 집중타격투쟁을 12일과 13일, 15일과 16일 두 차례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8일, 민주노총과 이랜드-뉴코아 노조가 국회 앞에서 1천3백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집회를 가진 뒤 홈에버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으로 이동해 봉쇄투쟁을 전개했다. 이랜드그룹은 민주노총의 추석기간 집중투쟁을 앞두고 교섭에 나섰는데, 뉴코아에 대해서는 외주화 철회 등의 진전된 안을 낸 반면 홈에버에 대해서는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면서 두 노조를 분리하려는 술책을 썼다. 결국 11일 두 노조는 각각 노조 총회를 갖고 교섭을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뉴코아노조는 민주노총의 추석기간 집중투쟁이 예정된 12일부터 14일까지 매장타격투쟁을 유보하고 교섭에 집중하기로 했다. 반면 이랜드일반노조는 매장타격투쟁에 집중하기로 했다. 뉴코아노조의 교섭 타결 가능성이 회자되면서 민주노총의 추석기간 집중투쟁 동력은 크게 이완됐다. 12일부터 14일까지 이랜드일반노조는 민주노총과 함께 매장타격투쟁을 전개했다. 12일에는 중계점, 13일에는 일산점·중동점·병점점, 14일에는 목동점과 시흥점에 집중했다. 그 기간 교섭에 집중하기로 했던 뉴코아노조는 타결에 이르지 못했다. 15일, 민주노총이 1박2일로 예정된 이랜드-뉴코아 2차 집중타격 상경투쟁 일정을 시작했다. 여의도에 1천여 명이 모여 결의대회를 가진 뒤 홈에버 월드컵점으로 이동해 봉쇄투쟁을 전개했다. 16일 새벽 1시,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200여 명이 홈에버 면목점을 기습 점거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연대 대오 100여 명이 농성현장에 합류했다. 새벽 4시경 경찰병력이 투입돼 조합원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했다. 대오를 이끌던 홍윤경 직무대행이 맨 먼저 끌려 나왔다. 홍윤경 직무대행은 연행되기 직전 “경찰의 군홧발이 여성노동자를 짓밟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짓밟혀 쓰러지지 않는다”고 외쳤다. … 뒤이어 조합원들이 줄줄이 전투경찰들과 긴급히 투입된 100여 명의 여경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연행됐다. 경찰 투입 20여 분만에 상황은 끝났다. 조합원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깔고 앉았던 박스만이 남아 있었다.[52] 추석 대목은 이랜드그룹 전체 매출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주노총의 이랜드계열 전국유통매장에 대한 추석기간 집중타격투쟁은 결정적인 승부처였다. 만일 민주노총이 8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결의한 대로 9월 15일부터 21일까지 2만여 명이 참석하는 전국동시다발 매장봉쇄투쟁을 전개했다면 이랜드 자본에게는 엄청난 압박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민주노총은 전혀 총력을 집중하지 않았다. 이랜드그룹이 흘리는 교섭타결 가능성에 현혹돼서, 또는 스스로 한 대의원대회 결의조차 우습게 여기는 잘못된 관행에 빠져서 투쟁동력 건설을 방기했다. 실제로 진행된 집중타격투쟁은 애초의 결의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랜드 자본을 전혀 압박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민주노총은 8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지금부터 9월말까지 한 달 간의 기간이 이랜드 투쟁의 최대 승부처”라면서 “지난 두 달여간 보여 왔던 계급적 단결과 연대정신 그 이상의 투쟁력을 발휘하여 승부를 내야 할 때”라고 했다. 따라서 “대의원대회 결의사항을 가맹산하조직, 단위노조 등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사수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와 전혀 달랐다. 민주노총 스스로 “이 땅 860만 비정규직 문제 그 자체”라고 했던 이랜드-뉴코아 투쟁을 패배로 몰고 간 결정적인 지점이었다. 이후에도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의 파업투쟁은 계속 됐다. 그러나 결정적인 승부처를 놓치고 난 뒤, 두 노조의 투쟁은 하염없는 장기전으로 빠져들었다. 민주노총의 연대 동력은 크게 가라앉았다. 상황을 반전시킬 계기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승리의 전망을 놓쳐버린 힘든 싸움이었지만,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들은 2008년 11월 13일까지 총 510일 동안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 나갔다. 여성노동자들은 아이들을 챙기고 가사노동을 하면서 또 나이 든 부모의 병간호를 맡아 하면서도 510일을 견디고 저항했다. 남편과 갈등하거나 시부모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노동자’인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투쟁의 현장으로 나왔다. 더욱이 가장으로서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했기에 투쟁이 길어지자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투쟁의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자식의 세대, 다음 세대까지 비정규직을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 여성노동자들은 월드컵점 점거농성에서 쌓인 ‘동료애’를 바탕으로 서로 의지하기도 하고, 동료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긴 투쟁을 이어 나갔다. 이들은 노동자로서 안정된 조건에서 일하고 싶다는 기본적인 요구를 하던 동료들을 끌고 간 이랜드자본과 정부의 탄압에 분노했다. 즉, 동료애와 분노는 동전의 양면처럼 여성노동자들이 강하고 질기게 510일을 거리에서 저항하게 했던 힘이었다.[53] 2008년 8월 29일 뉴코아노조가 파업 434일 만에 회사와 합의하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계약만료된 계약직 36명의 재고용, 노조간부 18명의 해고 수용, 노조간부 대상 손해배상소송 철회(노조와 민주노총 등 연대단위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소송은 유지), 2010년까지 무파업이 요지였다. 노조 간부를 포함해 조합원 대부분이 정규직인 뉴코아노조가 500일 가까이 비정규직 문제를 놓고 벌였던 ‘아름다운 투쟁’은 결국 뉴코아 사측의 완승으로 끝난 셈이다. 이번 합의로 뉴코아 노사의 극단적 갈등은 종료됐지만, 같은 이랜드그룹의 홈에버를 상대로 아직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랜드일반노조는 큰 부담을 안게 됐다. … 뉴코아노조가 이 같은 합의안에 도장을 찍은 배경과 관련해 경제적 문제 등의 현실적 어려움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형근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위원장은 “더 연대가 붙기도 어렵고 사회적 이슈로 주목 받는 것도 한계가 온 상황에서 시간만 보내는 것은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노동계 관계자는 “정규직인 뉴코아 간부들이 오랜 파업에서 비롯된 경제적 어려움과 각종 손배소로 인해 아파트까지 가압류되는 등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며 “그런 환경들이 노조 간부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으로 내몬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파업 중인 노동자에 대한 수십억 대의 손해배상 소송이 노조를 무릎 꿇게 한 셈이다.[54] 11월 13일 이랜드일반노조도 회사와 합의하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끝까지 투쟁한 조합원 180여 명의 현장 복귀, 16개월 이상 근무한 계약직의 무기계약직 전환이라는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노조간부 12명의 해고를 노조와 당사자가 수용한다는 참혹한 내용이 포함됐다. 총회 때 찬반투표를 했는데, 전 반대했죠. … 투쟁이 패배할 수는 있는데, 사직서를 받는 대신에 돈을 받는 거잖아요? … 투쟁을 마무리하면서 실력이 안 되면 해고자들을 복직 못 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지. 나머지 조합원들이 현장에 복직해서 추후를 도모할 수는 있잖아요? 그렇게라도 들어가야지요. 그런데 그걸 넘어서서 사직서를 받는 방식은 아예 해고자들을 내치는 거잖아요. 회사는 “해고자들을 잘라내라. 이 강성들을”, 거기에 동의해 준 거지요. 그러니까 단순히 사직서 쓰는 차원이 아니죠. 그런데도 통과됐죠. 조합원들이 경제적 어려움이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끝내는 게 중요했어요. “이후를 도모하자” 이런 것도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무조건 끝내자” … 합의 없이 투쟁을 마무리하고 싶으면 비해고자들을 복귀 전술을 쓰고 해고자들은 남아서 이 비해고자들이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고, 조직을 복원하는 데 활동가로서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그런 전술을 쓸 수 있는데, 이 전술을 안 쓰고 임금인상을 받아 복직자들한테 명분을 준다는 의미죠. 대신에 … 해고자를 내친다는 거예요. … (서형태, 병점)[55] 다음 편 보기 [1] 김기일(비정규직전국모임 대표), 1999,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 본 한라중공업 파업투쟁」, 『민주노동과 대안』 12월호. [2] 대법원은 일찍이 1996년 4월 판결을 통해 학습지교사의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을 부정했다. 학습지교사의 노동조합법상 노동자성은 오랜 투쟁과 법적 다툼 끝에 2018년 6월 대법원 판결을 통해 인정됐다. [3]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 2000/04/01, 「창립결의문」. [4]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은 2022년 11월 윤석열 정권에 의해 처음 발동됐다. [5] 박일수(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2004/02/14, 「유서」 [6] 울산건설플랜트 노조, 2005, <2005 울산건설플랜트 파업투쟁 때려! - 76일간의 파업일지>(영상) [7] KTX 승무원들은 2010년 1심과 2011년 2심에서 ‘철도공사와 직접 근로관계가 인정된다’고 하여 승리했으나 2015년 대법원이 직접 근로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최종 패소했다. 그런데 2018년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KTX 대법 판결이 박근혜 정권 청와대와 대법원이 협조한 사례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2018년 철도공사가 철도노조와 KTX 해고 승무원 복직을 합의했다. [8]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191~192쪽. [9] 안기호(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2003/04/28, 「비정규직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인간선언」. [10] 현대차노조, 2003/07/08, 「비정규직 독자노조 추진에 대한 우리의 입장 - 현대자동차노동조합 상무집행위원 일동」, <중앙쟁대위 속보>. 2002~03년 현대차노조는 ‘중앙파’인 민노투 집행부가 이끌었다. 한편 2003년 7월 하순 현대차노조 위원장이 사측에게 파업중단 요청과 함께 2억 원을 받은 사실이 2007년 1월 사측에 의해 폭로됐다. 그가 사측에게 돈을 받은 시점은 정규직 노조의 방해를 딛고 비정규직 노조가 설립된 지 불과 보름 정도 뒤였다. 뇌물 수수 사실이 폭로되면서 구속된 그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11] 맨아워(Man-Hour)는 한 사람이 한 시간에 하는 일의 양이다. 완성차 조립공정에 신차가 들어오면 전체 작업공정이 달라지는데, 이에 따라 맨아워 조정이 이뤄진다. 통상 자본은 신차 투입을 계기로 자동화, 외주모듈화, 노동강도의 수준을 높임으로써 작업에 투입되는 노동자의 숫자를 줄이려고 했다. 맨아워 협의에 임한 정규직 대의원들이 줄어드는 작업자의 수를 사측과 합의하면, 사측은 그 수만큼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리해고 했다. [12]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13] 이 때 생산공정 비정규직의 8~90%를 차지하는 1차 하청 전체가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다. 현대차에는 이들 말고도 생산공정에 2·3차 하청이 존재했으며, 그밖에도 식당·청소·통근버스·조경·경비 등 다양한 분야에 사내하청이 존재했다. [14] 민주노총, 2004/12/09,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전원 불법파견 확인... 즉각 정규직화 해야」. [15]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16]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2005/01/18, 「생산을 멈춘 5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현장」, <현자비정규직노조>. [17]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18] 2004~05년 현대차노조는 다시 ‘현장파’인 민투위 집행부가 이끌었다. 민투위 집행부는 2001년에 7·5 총파업에 불참한 데 이어 2004~05년에는 비정규직의 불법파견 철폐 투쟁을 배신했다. [19] 2006년 현대차노조는 ‘중앙파’인 민노회 집행부가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현대차에서 국민파·중앙파·현장파는 번갈아 가며 비정규직을 배신했다. [20] 이후 2005년 비정규직 해고자들이 현대차를 상대로 근로자지위를 확인해 달라며 제기한 민사소송에서도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은 자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2010년 7월 대법원은 ‘현대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21]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22] 노무현 정권은 정권 초기인 2003년 3월,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역임한 김금수를 노사정위원장으로 임명하면서 민주노총을 노사정위원회에 다시 끌어들이고자 했으나 민주노총은 여전히 불참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안에는 사회적 교섭에 찬성하는 세력이 많았지만, 1998년 2·6 정리해고 도입 합의 같은 쓰라린 경험 때문에 노사정위원회 복귀를 쉽사리 밀어붙일 수 없었다. [23] 2004년 4월 총선에서 민주노총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민주노동당은 국회의원 10명을 당선시켰다. 진보정당에서 국회의원 당선자가 나온 것은 1961년 박정희 군사쿠데타 이후 처음이었다. [24] 민주노총·민주노동당, 2004/07/07, 「비정규 노동자 보호와 권리보장을 위한 입법안 주요 요지」. [25] 노동부, 2004/09/16, 「비정규직 입법안의 주요 내용」. [26] 박권일, 2004/11/15, 「노무현은 왜 비정규직을 버렸나」, <월간 말>. [27] 민주노총, 2005/03/17, 「[보도] 민주노총 중집 결정사항에 대하여」. [28] 민주노총, 2005/04/06, 「[보도] 노·사·정, 정당 대표자회의 결정사항」. [29] 민주노총, 2005/04/14, 「[논평] 비정규입법 관련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을 환영한다」. [30] 특히 노무현 정권의 파견법 개정안이 파견기간 초과시 ‘고용의제’를 ‘고용의무’로 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던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공식 입장(권리보장 입법안)으로는 파견법 폐지를 주장했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파견법 개악을 반대하는 수준, 즉 기존 파견법의 ‘고용의제’를 방어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31] 민주노총, 2005/10/05, 「[보도자료] 사상 첫 ‘노사 대토론회’ 개최」. [32] 한국노총, 2005/11/30, 「비정규직 관련법 제·개정을 위한 최종안」. [33] 민주노총, 2005/11/30, 「[기자회견] 노사교섭 결렬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34]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이 2005년 12월 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제출한 수정안. 1번부터 4번까지는 2004년 7월 제출한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에 담긴 내용이고, 5번부터 10번까지가 새로 추가된 내용이었다. [35] 민주노총, 2005/12/08, 「[논평] 이제 정치권이 답할 차례이다」. [36] 매일노동뉴스, 2005/12/19, 「민주노동당, ‘비정규직법 수정안’ 놓고 논란」. [37] 민주노총, 2006/02/28, 「[보도자료] 비정규법안의 문제점과 총파업의 정당성」. [38] 노사관계 로드맵은 2003년 12월 최종보고가 제출된 이후 2년 넘게 사회적 교섭에서 논의되지 못했다. 노무현 정권은 2006년 1월 당정 협의를 통해 노사관계 로드맵을 24개 과제로 압축한 뒤, 4월 임시국회 상정을 추진하고 있었다. [39] 민주노총, 2006/07/21, 「민주적 노사관계 구축의 4대 방향, 8대 핵심요구안」. [40] 박점규, 2006/09/12, 「한국노총 야합보다 더 절망스런 민주노총의 무기력」, <레디앙>. [41] 민주노총, 2006/11/30, 「[성명] 보수양당의 반노동 비정규악법 날치기처리는 역사적 심판을 받을 것이다」. [42] 민주노총, 2006/12/08, 「[성명] 노동자의 기본권을 무력화하는 노동법 개악안 통과를 규탄한다」. [43] 노동해방연대, 2007/02/01, 「한발 한발, 그러나 고지를 향해 똑바로!」, 『노동해방』 53호. [44] 민주노총, 2006/12/22, 「[기자회견문] 1500만 노동자는 보수양당을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45] 김대중 정권 시절을 거치는 동안 자주성이 심각하게 훼손됐던 ‘민주노조운동’은 노무현 정권 시절 동안 자주성을 더욱 상실했다. 김금수·박태주·김영대 등 노무현 정권에는 민주노총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진 노동운동 출신 인사들이 포진한 까닭이기도 했지만, 정부 측 인사들의 일상적인 개입과 영향력 행사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민주노총의 주체적 상태 때문이기도 했다. [46] 윤애림, 2015/01/29, 「2015년 민주노총 총파업은 2006년과 어떻게 다른가」, <매일노동뉴스>. [47]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224쪽. [48]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296~298쪽. [49]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18~20쪽. [50]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398~399쪽. [51] 민주노총, 2007/08/21, 「제41차 임시대의원대회 결의문」. [52]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514쪽. [53]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18~20쪽. [54] 프레시안, 2008/08/31, 「‘434일 만의 타결’ 뉴코아 노사, 이면 합의 있었다」. [55]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2권, 봄날의박씨, 392~393쪽. 병점 분회장이던 서형태는 애초 사직서 제출자 12명에 포함됐지만 이를 거부하고 유일한 해고자로 남았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번역] 퀴어 억압은 자본주의의 심장에 새겨져 있다LGBTQ+ 억압은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 구조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사회주의만이 퀴어 해방, 나아가 모두의 성적 해방을 위한 토대를 만들 수 있다. 2004년에는 미국인의 60퍼센트가 동성 결혼에 반대했다. 지금[2019년]은 61퍼센트가 동성 결혼을 지지한다.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던 후보 중 한 명은 커밍아웃한 게이 남성이었고, 오늘날 젊은 세대의 절반 이상은 자신을 비이성애자로 정체화한다. 굉장한 변화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치 권력의 최상부에 올라선 이들과 여전히 억압으로부터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이들의 격차는 엄청나게 크다. 퀴어가 CEO가 되고 권력의 중심에 진입하는 바로 그 나라에서, 흑인 트랜스 소녀는 생존을 위한 성노동에 내몰리고 레즈비언은 ‘교정’이라는 이름으로 강간당하며 트랜스 여성 록사나 에르난데스는 이민자 구금시설에서 목숨을 잃는다. LGBTQ+ 억압의 위력은 여전히 무시무시하며, 트랜스, 유색인, 빈곤층에게 특히나 강력하다. 우리가 쟁취한 권리와 소수의 특권은 다수의 비참한 현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이 모순을 앞에 두고서 LGBTQ+ 해방은 사다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새로운 권리를 하나씩 쟁취할 때마다 퀴어는 해방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것일까? 아니면 LGBTQ+ 억압은 사회 구조 자체에 각인되어 있어서 자본주의 체제 전체를 깨부수지 않는 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일까? 노동 착취에 기반한 체제인 자본주의는 광범위한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열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LGBTQ+ 정체성 자체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산물이다. 그러나 이 체제는 자유, 해방, 정의라는 자신의 약속을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행할 수 없다. 퀴어에게 가해지는 LGBTQ+ 억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 모두의 산물이며, 특히 노동 소외와 핵가족이 요구하는 경직된 젠더 역할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LGBTQ+ 해방, 더 나아가 넓은 의미의 성적 해방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억압은 이 체제 안에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새겨져 있다. 반면에 사회주의는 LGBTQ+ 억압을 종식시킬 물적 토대를 제공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구성 어떤 인권 옹호자들은 LGBTQ+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으며, 우리는 “이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존 디에밀리오는 이 같은 입장을 “영원한 동성애자라는 신화”라고 부르는데, 현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동성 간 욕망과 젠더 유동성은 역사 전반에 걸쳐 전 세계 다양한 문화권에서 존재해 왔지만, 그것의 사회적 역할과 수용 정도는 시대에 따라 극적으로 달랐다. 어떤 문화에서는 동성 간의 성적 관계가 의례적 역할을 수행했고, 다른 문화에서는 논바이너리적 존재가 특별한 능력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이전 유럽 사회에도 “크로스 드레싱 금지법”과 수많은 남색(Sodomy) 금지법이 존재했지만, 봉건제 하에서는 공고한 LGBTQ+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았고 범죄화된 행위가 있을 뿐이었다. 디에밀리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 노동 체제야말로 “20세기 후반의 수많은 남성과 여성이 스스로를 게이라 부르고, 자신들이 유사한 남녀 공동체의 일원임을 인식하며, 그 정체성을 기반으로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런 이유에서, 역사를 되돌아보며 전혀 다른 맥락과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 LGBTQ+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 『역사에서 감추어진 것들(Hidden from History)』 서론에서 주장하듯이,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동성애자 역할은 근대에 발전한 것인데, 이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의 동성애자 역할은 아니다.” 역사적 고찰의 대상은 퀴어 정체성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근대적 가족의 형성, 근대적 젠더 역할, 이성애라는 개념 자체 역시 역사적 구성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구성물들을 낳는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젠더·섹슈얼리티·가족·사랑이 조직되는 방식은 상당 부분 인간의 생산 관계에 기반한다. 우리가 먹을 것을 확보하고, 공동체를 조직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쏟는 방식을 결정하는 그 관계 말이다. 엥겔스의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은 생산의 발전과 가부장적 가족의 발전을 연결하고, 사유 재산이야말로 남성에 대한 여성 종속에 기반한 가족 단위를 만들어 낸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엥겔스가 부정확한 인류학 연구를 바탕으로 삼은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의 흐름에 대한 전반적 성찰은 옳다. 가정 대신 작업장이 생산의 장이 되면서, 자본주의는 새로운 종류의 가족 관계를 탄생시킨다. 가족에게 필요한 재화가 한때는 가정에서 생산되었지만, 이제 다른 곳에서 생산되어 구매된다. 가정은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 단위로, 노동자를 먹이고 입히며 아이들을 노동자 계급의 일원으로 길러내는 장소로 남는다. 한편 남성은 원자화된 임금 노동자가 되어, 고향을 떠나 어디서든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게 되었다. 가부장제는 이 배치 속에 각인되어 있으며, 여성은 임금 노동이라는 짐을 지든 아니든 간에 가정 내 무급 노동을 떠맡는다. 이 사적 소유와 노동력 판매 체제로부터 근대 민주주의가 출현했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 노동 시장에서는 모든 이가 평등하며 누구에게든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자유”가 있다는 관념도 생겨났다. 존 디에밀리오가 주장하듯 자본주의의 선택 개념은 가족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파트너십은 점차 욕망과 친화성이라는 근대적 이상에 기초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선택”과 “자유”는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자본주의 역사 전반에 걸쳐 “만인을 위한 자유와 평등”이 의미하는 것은 곧 법에 새겨진 인종 차별, 성차별, 동성애·트랜스 혐오였고, 이것은 국가의 억압 기구에 의해 강화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학교, 가족, 교회 같은 사회 제도에 의해 제한되며, 이 제도들은 사람들에게 “허용 가능한” 성적·젠더 규범을 주입하려 한다. 선택의 자유는 경찰, 감옥, 법률 같은 억압적이고 인종주의적인 기구에 의해서도 제한되며, 자본주의의 경직되고 잔혹한 경쟁 구조 안에 가두어져 있다. 사회적 낙인과 억압 또한 자유를 제약한다. 식민주의는 젠더와 성적 역할을 가장 잔혹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강제했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원주민 공동체에 이식되었고 토지는 약탈당했으며 원주민은 값싼 노동력으로 사용되었다. 식민자들은 군대를 동원해 논바이너리 구성원들을 표적 공격하고, 원주민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제하고, 기숙 학교에서 원주민에게 규범적 성별 역할을 주입하는 등 집단 학살에 준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나 삶에서 선택할 권리에 관한 자본주의적 관념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동성 파트너십이라든가 출생 시 지정된 것과 다른 젠더를 “선택”할 가능성을 열었다. 존 디에밀리오의 주장에 따르면, “가구에서 경제적 자립을 박탈하고 섹슈얼리티와 출산의 분리를 촉진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일부 남성과 여성이 동성에 대한 성애적·감정적 끌림을 중심으로 개인의 삶을 조직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냈다.” 마찬가지로 수전 스트라이커(Susan Stryker)는 디에밀리오가 자본주의 체제의 “동성애자”에 대해 묘사한 것과 동일한 과정이 트랜스 구성원들에게도 적용되었다고 『트랜스젠더의 역사(Transgender History)』에서 주장한다. 사람들이 공동체 바깥으로 이주할 자유를 갖게 되면서 출생 시 지정되지 않은 젠더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전진하는 과정에서 피억압자들은 자본주의가 약속한 평등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불평등을 나타내는 명백한 법률적 지표 상당수는 피억압 민중의 운동으로 타파되었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여성과 유색 인종은 법 앞의 평등을 거의 완전히 쟁취해 냈다. 그러나 법적 평등이 곧 삶의 평등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구조 속에 새겨진 억압을 유지하면서도 형식적 평등은 기꺼이 양보하는 경우가 많다. 인종 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트랜스 혐오가 바로 그렇다. 자본주의적 재생산과 성적 비참함 자본주의에서 가족 단위는 선행하는 가부장적 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족은 이성애 규범적 젠더 역할에 기초하는데 이 역할은 “과학”과 “생물학”을 근거로 삼는다고 여겨진다. 여성은 요리, 청소, 육아, 빨래 같은 재생산 노동에 맞는 생물학적 성향을 지닌다는 것이다. 무급 가사 노동에서 “여성의 역할”은 자본주의의 톱니바퀴를 돌리는 데 필수적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성별 역할, 특히 가족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무급 육아와 가사 노동에 막대한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다. 자본가가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 비용을 직접 지불해야 한다면 이윤이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어머니이자 돌봄 제공자가 될 운명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동성 커플, 출산하지 않는 여성, 전업주부 아버지, 그 외의 비전통적 본보기들까지 우리 사회에 반례가 넘치도록 있는데도 끈질기게 지속되어 왔다. 자본주의 태동기부터 흑인 여성은 흑인 남성과 나란히 가장 혹독하고 가혹한 노동에 내몰렸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이 이데올로기는 지속되어 왔다. 오히려 이 사실은 흑인을 병리화하는 데 이용되어, 제도적 인종주의에 맞서 싸우거나 배상을 요구하는 대신 핵가족을 통해 흑인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 생겨났다. 여성 해방 운동과 LGBTQ+ 권리 운동 이후 가족과 젠더 역할이 좀 더 유동적으로 변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스–이성애 규범적 가족 모델은 여전히 건재하며 퀴어 억압을 재생산하고 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낭만적 가족 파트너십이 사랑을 바탕으로 선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생활비를 나누어 지불할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는 막대한 경제적 유인이 존재하여, 운 좋으면 지루하고 최악의 경우 폭력적인 관계에 매이게 된다. 이는 동일 노동에 더 적은 임금을 받는 여성에게, 특히 유색 인종 여성과 노동자 계급 여성에게 더욱 절박한 현실이다. 이 구조는 각 가족이 사회 전체의 최선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만의 최선을 위해 행위하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복무한다. 자본주의는 가족의 경제적 필요와 더불어 낭만적 가족 이데올로기를 퍼뜨린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올바른” 젠더 역할이 주입되며, 우리는 사랑하는 파트너가 자본주의의 소외를 치료하여 우리를 온전하고 완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세뇌당하는데, 이것은 특히 여성을 겨냥한 메시지다. 전통적 가족 단위는 소외되고 고립된 세계 한가운데에서 지지의 공간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일부일처제가 강제하는 성적 비참함의 단위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 성 연구자 빌헬름 라이히는 『성 혁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결혼 제도의 모순은 결혼의 성적 이익과 경제적 이익이 충돌하며 비롯된다…완전히 충족된 성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 결혼 도덕의 조건(평생 오직 한 명의 파트너)에 복종할 가능성은 낮으므로, 즉 성-경제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첫 번째로 요구되는 것은 성적 욕구의 고질적인 억압, 특히 여성에 의한 억압이다. 가족은 우리의 성적 욕망과 충돌하는 필수적 경제 단위다. 라이히의 설명처럼 가족 구조는 욕망을 억압하기 위한 구조이며, 여기에 나는 동성 간 욕망 및 젠더 탐색에 대한 억압을 덧붙이고 싶다. 그러나 모범적인 “전통적” 가족이란 노동자 계급 대다수에게 신기루에 가깝다. 노동자 계급은 물려줄 사유 재산이 없고, 노동 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여성에게는 경직된 성별 역할을 강제할 수 없으며, 너무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하거나 동생들의 부모 역할을 떠맡아야 하는 노동자 계급 아이들에게는 “순수한 어린 시절”이 없다. 대량 투옥, 추방, 서구 제국주의가 강제한 이주로 인해 해체된 가족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부유한 여성은 관리자 역할을 하면서 다른 여성들(대개 흑인, 갈색 피부, 이민자 여성)을 조직해 가정 내 가사 노동을 맡긴다. 여성 해방 운동이 전개되고 (남성의) 가족 임금이 해체되면서 점점 더 많은 여성이 노동 시장에 진입하는데, 이것이 자본가의 이윤 추구와 결합하면서 전통적 가족 단위는 무너지고 있는 듯하다. 자본주의가 핵가족 구조에 의해 떠받쳐지는 동시에 핵가족 구조를 파괴한다는 모순은 “가족 수호” 이데올로기가 출현하는 조건이 되는데, 이 같은 이데올로기는 대개 가짜 생물학적 결정론에 기반한다. 정치인들은 부모에게(보통 어머니 또는 흑인 아버지에게) 자녀와 더 긴 시간 함께하지 않는다고 훈계하고, 우파는 가족의 해체를 애도한다. 국가는 총기 난사, 부실한 교육, 아동 비만 증가 등 모든 사회적 병폐의 원인을 가족의 붕괴로 돌린다.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가족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도, 자본주의적 경제 조건은 언제나 가족을 잠식했으며 현재의 사회적 재생산 위기 또한 자본주의 위기의 직접적 산물이라는 사실은 외면한다. LGBTQ+ 억압과 부르주아 가족 LGBTQ+는 가부장적 가족 단위의 근간을 이루는 생물학적 결정론이 틀렸음을 그 자체로 입증한다. 직업을 가진 여성들, 입양, 체외 수정 등의 사례가 이미 생물학적 결정론의 기만성을 입증하지만, LGBTQ+는 “전통적 가족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우파에 의해 특별히 표적이 되어 왔다. 그리고 어떤 차원에서는 그것이 사실이다. LGBTQ+는 출생 시 여성으로 지정된 사람이 반드시 여성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 여성인 사람이 반드시 남성에게 끌리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자녀를 보살피는 어머니일 필요도 없고, 집안을 돌보도록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존재도 아니다. 바로 이 불편한 사실들 때문에 자본주의에게는 LGBTQ+를 억압하고 주변화하면서 우리가 “정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수많은 제도들은 전통적 가족 및 젠더 모형에 특히 깊이 빠져 있고, 일부 동성 커플을 주변부에 받아들인 것만으로는 이 모형이 유의미하게 대체되지 않았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의류 매장의 아동용품 코너를 걷기만 해도 젠더 역할 고정 관념이 여전히 만연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독교는 가족 단위가 중요하다고 설교하고, 대부분의 교회에서 동성 관계는 죄악이다. 학교 역시 젠더 규범을 떠받치는 데 일조한다. 이를테면 학교가 정의한 남아와 여아 구분에 따라 화장실 앞에 줄을 서도록 요구하며, 많은 학교는 트랜스 아동들이 자신의 젠더에 맞는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류에 편입한 LGBTQ+ 구성원들은 가족을 파괴하지 않았다. 게이와 레즈비언 정체성이 부분적으로 정상화되었지만, 동성 간 욕망과 젠더 탐색을 억압하는 체계는 여전히 굳건하다. 물론 이 정상화는 게이 크루즈, 프라이드 깃발, 레인보우 아디다스 스니커즈에 이르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틈새 시장을 창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정상화는 근저의 시스-이성애-가부장적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한에서만 허락된다. 말하자면 가족 단위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구성 요소로 기능하는 한에서, 두 남성의 결혼도 허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선택적 정상화는, 경찰에 저항하는 스톤월의 뿌리로부터 급진적 퀴어 운동의 노골적 섹슈얼리티와 이성애 규범성 거부에 이르기까지 LGBTQ+ 운동의 가장 전복적인 측면들을 길들이면서 작동했다. 정상화는 또한 퀴어들의 사교를 위한 비상품화된 공간을 파괴하면서 진행되었다. 뉴욕의 더 피어스(The Piers)처럼 주로 유색 인종 퀴어들이 어울리고 유혹하고 섹스하던 장소들 말이다. 피어스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주로 유색 인종 퀴어가 모이던 공공 공간은 경찰의 단속과 젠트리피케이션의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자 장 니콜라가 주장했듯, “부르주아지가 게이에게 이성애자와의 형식적 평등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심지어 동성 커플을 제도화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해도—그럼으로써 게이 정체성의 환상은 강화된다—실질적 평등을 확립하기란 무한히 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사회 유기체 전체 내에 동성애적 구성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 텐데, 이는 남성적 지위와 남성성에 대한 너무나 급진적인 도전이어서 가족과 부르주아 문화 전체의 근본적 격변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LGBTQ+의 욕망과 젠더를 사회에 온전히 통합하려면, 일부 사회적 태도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 체제 자체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만드는 성적 비참함 그러나 LGBTQ+ 억압은 자본주의적 사회 재생산의 일부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에 새겨진 성적 비참함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 체제는 자기 몸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해 시장에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절대다수에 대한 착취에 의존한다. 이것이 인구 대다수의 소외와 성적 비참함의 물적 토대다. 마르크스가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설명하듯이, “노동은 노동자에게 외적이다. 즉, 노동은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속에서 자기를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소모시키고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이것이 소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 창의성, 생각을 부정하고 억누르고 무시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노동자는 자신의 몸과 정신을 회복 불가능한 방식으로 소진시키면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무엇보다 가장 고되고 소외된 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은 흔히 미등록 이주민과 유색 인종이다. 젠더적·성적 비참함은 이 같은 일상의 물적 조건에서 파생된다. 즉, 하루의 대부분을 바치는 소외된 노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외는 작업장에서 멈추지 않는다. 소외는 우리의 삶과 정신 전체를 지배하며, 섹슈얼리티 안으로까지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시간 부족 문제가 있다. 일하고, 쉬고, 아이를 돌보고, 성적 관계든 아니든 친밀한 관계를 맺기에 충분한 시간이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쾌락을 부정하면서 소외된 노동으로 점철된 하루를 보내고, 퇴근 후에 기진맥진한 몇 시간 동안 그 소외를 깨고 자기 자신이나 타인과 의미 있는 유대를 쌓기란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노동 시장은 우리 몸을 망가뜨리고 시간을 잠식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기구는 특정한 젠더 표현과 수행을 노동 시장의 요구와 결부시키며, 이를 생산적 시민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간단한 예시를 하나 들면, 다음 두 광고의 시간 차는 불과 10년이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1943년 J. 하워드 밀러가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을 위해 제작한 포스터다. 제2차 세계대전 한복판에서 여성 노동자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걸 여자도 열 수 있다고요?”는 1953년 알코아 알루미늄의 광고다. 첫 번째 광고는 수많은 남성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상황에서 산업 노동에 여성이 필요했던 역사적 시기를 반영한다. 두 번째 광고는 저가 상품의 대량 생산에 기반한 새로운 경제의 산물로, 노동 시장에서 축출된 여성에게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불과 10년 사이에 여성은 근육을 자랑하던 존재에서 케첩 병도 열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마찬가지로, 가족을 위해서 불평 없이 희생하는 남성 가장이라는 구성물은 자본주의에 막대한 이윤을 안겨 주었다. 이를테면 앨런 시어스(Alan Sears)가 『몸의 정치(Body Politics)』에서 설명하듯, 20세기 초 포드는 “부양 가족을 먹여 살리는 능력과 힘들고 고통스럽고 지루한 노동을 견디는 능력에 기반한 남성적 자부심”을 고취했다. 인종화된 젠더 구성물 역시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친다. 흑인 남성을 범죄자로, 흑인 여성을 강인한 존재로 구성함으로써 교도소 체제 안팎에서 극도로 착취당하는 노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젠더 역할에 순응하지 않는 것은 종종 LGBTQ+에 대한 사회적 징벌, 때로는 물리적 징벌을 의미했다. 이 경직되고 사회적으로 강요된 젠더 역할은 개인적 표현이나 탐색을 가로막는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특히 여성, LGBTQ+, 여성이자 LGBTQ+인 우리에 대해서 젠더적·성적으로 억압하는 체제의 일부다. 자본주의 특유의 자유와 억압의 혼합물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성적 비참함의 체계를 만들어 낸다. 1960년대 후반 장 니콜라는 “동성애자”에 대한 낙인이 퀴어를 노동 시장에서 축출하는 역할을 하며, 이 원리가 “동성애적” 욕망을 스스로 억누르는 “이성애자”로 정체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규율 효과를 갖는다고 썼다. 결국 사회가 규정한 협소한 역할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류 노동 시장에서 주변화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도 젠더 비순응적인 사람들은, 심지어 일부 게이나 레즈비언까지도, 특정 직종에서 배제되고 승진을 거부당하며 직장에서 계속 차별받는다. 사회적 기준에 맞지 않는 많은 이들은 일자리에서 완전히 거부당하는데, 수많은 유색 인종 트랜스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유색 인종 트랜스는 흔히 실업 또는 불완전 고용 상태의 산업 예비군으로 남는다. 이 사실은 모든 이의 욕망을 규율한다. 광범위한 젠더적·성적 경험이 인구 대다수에게 차단되고, 계속해서 LGBTQ+를 주변화함으로써 이러한 경험이 수치심과 비밀의 영역으로 밀려난다는 뜻이다. 사회주의와 성적 해방 LGBTQ+ 억압은 핵가족 단위와 근대 노동의 소외를 통해 강요되는 일반화된 비참함과 깊이 연관된다. 일부 게이 남성이(그리고 그보다 훨씬 적은 수의 레즈비언이) 기업과 정치의 영역에서 사다리를 오른다 해도, LGBTQ+ 주변화는 자본주의의 생산·재생산 관계에 각인되어 있으므로 점진적인 권리 축적만으로는 LGBTQ+ 해방에 불충분하다. 아무리 많은 법이 통과되더라도 LGBTQ+ 억압은, 더 넓게는 섹슈얼리티의 억압은, 이 체제 안에서 해결될 수 없다. 따라서 LGBTQ+ 해방을 위해서는 가족의 해체와 소외된 생산으로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해체가 모두 필요하다. 사회주의는 퀴어 해방의 필수 조건이다. 이미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족의 종식을 사회주의 정치의 중요한 부분으로 제시했다. 사회주의가 사랑이나 로맨스의 종말을 요구한다는 뜻은 아니다. 경제적·정치적 단위로서의 가족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누구의 생존도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좌우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가족의 종식이란 곧 파트너 없이도, 혹은 해로운 파트너를 떠나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물적 안전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볼셰비키는 온 힘을 다해 이 문제에 매달렸다. 그들은 새로운 물적 토대 위에 새로운 사회가 형성됨에 따라 가족이 국가처럼 차츰 소멸하기를 기대했다. 이런 의미에서 적어도 당이 스탈린화되기 이전까지의 볼셰비키는 부르주아 가족 구조를 구식으로 만들겠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그들은 진부한 가사 노동을 개인의 손에서 거두어 (이제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국가의 손에 맡기고자 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정치는 여성에 대해서든 LGBTQ+에 대해서든 볼셰비키의 정치와는 전혀 달랐다. 가족의 종식에 관해 쓴 니콜라이 크릴렌코(Nikolai Krylenko) 같은 이론가들은 체포되어 살해되었고, “남색”과 성노동은 범죄화되었다. 스탈린 정부는 전통적 성별 역할을 강제하기 시작했다. 1944년 스탈린은 “모성 영예 훈장(Order of Maternal Glory)”을 제정해 출산한 자녀 수에 따라 여성을 서열화했다. 볼셰비키당 내 좌익 반대파(Left Opposition)의 지도자 레온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이러한 비판은 제4인터내셔널의 형성 과정에서 명확히 표현되었다. 트로츠키는 『이행 강령』에서 이렇게 쓴다. 기회주의 조직들은 본성상 노동 계급의 상층부에 관심을 집중하며, 따라서 청년과 여성 노동자를 무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쇠퇴는 임금 노동자이자 가정주부인 여성에게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한다. 제4인터내셔널의 각 부문은 노동 계급의 가장 착취받는 층에게서, 즉 여성 노동자들에게서 지지 기반을 찾아야 한다. 트로츠키는 가족의 종식과 가사 노동 사회화를 인간 해방의 필수 조건으로 본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초기 볼셰비키들을 이어 주는 고리다. 이 같은 사회에서는 예컨대 누군가에게 저녁을 만들어 주는 일이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의 표현이자 하나의 선물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젠더 역할과 어쩌면 젠더 그 자체마저 물적 토대를 상실한다. 젠더 역할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사라지면서 다수의 젠더, 젠더의 부재, 유동하는 젠더, 이 유동성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생산 노동이 재조직되는 과정 또한 성적 소외의 종식에 기여할 것이다. 기술은 우리 모두가 더 적은 시간 일하면서도 모든 이에게 충분할 만큼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한다. 현재 실업 상태거나 수감 중이거나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를 고려하면 이 점은 더욱 명백하다.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더 이상 직장에서 질식당하지 않는 우리의 시간과 창조적 잠재력을 해방시킬 것이다.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이 같은 미래를 구상했다. “필요 노동에 전용되어야 하는 본능적 에너지의 양은 (노동 자체가 완전히 기계화되고 합리화되어) 매우 적어질 것이므로, 외부적 힘에 의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광범위한 억압적 제약과 변형이 붕괴할 것이다. … 생의 본능인 에로스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해방될 것이다.” 단축되고 덜 고된 노동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과 연결되었다고 느끼게 만들 것이며, 휴식하고 유혹하고 섹스할 시간을 줄 것이다. 완전한 성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결코 구경하지 못할 이윤을 위한 임금 노동의 폭정으로부터 우리의 시간이 해방되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생산과 재생산 영역에서의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다.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욕망 위에 세워진 사회는, 무의미한 노동 대신 하루 대부분을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에 쓸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모든 기술을 사용할 것이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주장하듯이 공산주의는 구속 없이 이것저것 해 볼 자유를 약속한다.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돌보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쓰지만, 사냥꾼이나 어부나 목동이나 비평가가 되지는 않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이 자유는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에도 적용되어, 낮에는 부치 다이크, 밤에는 드래그 퀸, 주말에는 도미나트릭스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의 폐지,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와 함께 젠더 역할이 불필요해지고 자유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남에 따라,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가능성, 우리의 젠더적·성적 해방의 가능성은 무한해진다. 사랑과 섹슈얼리티를 핵가족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우리는 연대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볼셰비키 지도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날개 달린 에로스에 길을(Make Way for the Winged Eros)』에서 이 발상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기심이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공동체적 사랑의 토대 위에 사회가 건설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쓴다.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는 동지애와 연대라는 원칙 위에 건설되고 있다. 연대란 공동의 이익에 대한 자각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집단의 구성원들을 잇는 지적·정서적 유대에도 달려 있다. 연대와 협력 위에 사회 체제를 건설하려면 사람들이 사랑과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노동자 계급의 모든 구성원이 같은 계급의 다른 구성원들의 고통과 필요에 응답하고, 타인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고 고무하고자 한다. 이 모든 ‘따뜻한 감정들’—섬세함, 연민, 공감, 호응하는 마음—의 원천은 하나다. 이 감정들은 협소한 성적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사랑의 여러 측면이다. 사랑과 욕망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이 미래 각본에서,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작동할까?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정체성들을 위한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될까? 아니면 이름 따위는 전혀 필요 없게 되고, 로자 룩셈부르크가 전망했듯이 “모든 인간이 사회적으로 평등하고, 인간적으로 다르며, 완전히 자유로운 그런 세계”에서 살게 될까? 레프트보이스(Left Voice)에 2019년 7월 5일 게재된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Tatiana Cozzarelli 번역: 강성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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