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기초학습#3]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
[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착취와 차별, 억압을 일소하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사상이었다. 인간해방 세상을 꿈꾸며 투쟁하려는 이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도,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계급투쟁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오늘날 진짜 사회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역사의 굴절로 인해, 스스로가 '사회주의'라 주장하는 가짜 사회주의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반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된 소련을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 칭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중국특색 사회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등 다양한 스탈린주의의 변종은 억압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포장하면서, 사회주의를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자기해방 사상에서 계급지배를 정당화하는 수사적 도구로 바꿔버렸다.
다른 한편에는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고 노동자혁명을 파괴한 개량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전통적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지배계급의 일부가 되었고, 새로운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의회주의와 관료주의를 '사회주의'와 뒤섞어버린다.
자본주의는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다시 불러왔다. 위기와 전쟁에 맞선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있지만, 계급투쟁의 사상인 사회주의에 대한 정돈된 지식을 얻기는 너무나 어렵다.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뒤엎기 위해, 스탈린주의와 개량주의의 혼란을 걷어내고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진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함께 배우고, 함께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해 '사회주의 기초학습' 시리즈를 연재한다.
[다른 시리즈 읽기]
#1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2 자본주의의 원리 파헤치기
#4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와 전략
1. 들어가며
오늘, 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쟁은 동유럽과 중동을 불태우고 있다. 세계 각국 극우세력은 이민자, 여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선동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저출생에도 재생산 책임은 노동자 민중의 몫으로 맡겨진다. 기후재앙은 일상이 되었고, 그 피해는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민중에게 집중된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분노 역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 개혁인가, 혁명인가.
선거를 통해, 제도를 조금씩 고치며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이 체제 자체를 전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혁명이 필요한가? 개량주의는 말한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피를 흘리지 않고 점진적으로 바꿔나갈 수 있다면 그 편이 낫지 않겠냐고. 더 나은 법, 더 진보적인 정권, 더 세련된 정책으로 세상을 조금씩 바꿔가자고.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점진적 개혁의 약속이 어디로 향했는지, 우리는 이미 20세기 초에 똑똑히 목격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잘 조직된 노동자 정당이, 전쟁과 학살의 편에 서기로 결정한 그날이었다.
2. 1914년 8월 4일, 노동자당이 자본가들의 전쟁에 뛰어들다
1914년 8월 4일은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의 비극이었다. 이날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단 전원은 1차 세계대전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졌다. “우리는 위험의 순간에 조국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선언과 함께. 뒷날 독일 혁명 과정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 동료 혁명가 칼 리프크네히트조차 전날 확인된 사회민주당 의원단 당론을 거스르지 못하고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노동자당은 그렇게 세계대전의 한복판으로 뛰어들며 독일정부의 전쟁에 찬동했다.
1889년 창립 이래, 제2인터내셔널은 거의 모든 대회에서 전쟁반대 결의안을 채택해왔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그 인터내셔널의 기둥이었다. 전쟁공채 찬성 표결 불과 5일 전인 1914년 7월 하순에조차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의지를 다지는 한편, 세르비아 사태가 격화되어 세계대전이 발발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종언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던 차였다.[1] 그런 독일 사회민주당이 독일 황제와 나란히 섰다는 소식은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에게 날벼락이었다. 스위스에서 소식을 받아본 레닌은 이를 ‘가짜 뉴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8월 4일 제국의회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이 군사 공채에 찬성 투표를 던졌다는 기사가 담긴 <전진>이 스위스에 도착하자, 레닌은 이것은 독일의 참모본부가 적을 속이고 위협하기 위해 찍어낸 가짜 신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비판적인 정신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한 믿음이 아직도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2]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모범으로 추앙받던 독일 사회민주당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뛰어든 이후 각국 노동자들은 조국방어를 외치며 전쟁 속으로 뛰어들었다. 노동자계급 국제주의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다음을 보자.
「곳곳의 사회주의자들은 어깨에 잔뜩 힘을 주면서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람들은 동부의 전제정에 맞서 유럽문화를 수호한다고 했고, 독인인들은 차르의 폭정에서 여러 민족을 해방시킴으로써 유럽문화를 지킨다고 했으며,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은 프로이센의 족쇄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방어한다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민족주의적인 목적에 맞게 혁명전쟁이라는 자코뱅의 유산이 개조되었고,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는 차르정에 대한 민주주의의 저주가 개작되었다. …… 1915년 빈에서 열린 회의에서 독일 사회주의자들이 ‘민족독립과 러시아에 맞선 방어’ 따위의 미사여구를 들먹였지만, 독일군의 벨기에 진격으로 독일 사회민주당은 도덕적으로 크게 불리해졌다. 프랑스와 벨기에, 영국 등의 사회주의자들은 독일 사회주의자들을 군사침략을 승인했다고 비난했다. 1915년 2월 14일에 런던에서는 프랑스, 벨기에, 영국의 사회주의 정당과 러시아의 사회혁명당이 모여 자신들의 전쟁 참여의 명분을 다듬었다. 그것은 독일에 맞선 전쟁이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고, 독일의 패배가 민주주의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했다.」[3]
물론, 마르크스 본인을 포함한 사회주의자들이 모든 전쟁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은 민족해방 전쟁을 비롯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를 방어하기 위한 전쟁 등, 더 진보적인 편의 승리가 진보적 역사 발전을 촉진하는 경우 해당 편을 지지했다.[4] 그러나 1914년 유럽 열강 간의 전쟁은 시장과 식민지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여기에는 어떤 진보적 성격도 없었다.
제국주의 전쟁에 국경을 초월하는 노동자의 단결로 맞서자고 결의하던 2인터내셔널은 완전히 파산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이 거대한 배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사상적 기반 위에서 준비되고, 어떤 일상적 실천 속에서 그 맹아가 확대되어 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왜 이런 선택을 했는가? 단지 지도자 몇 명의 배신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의 정치노선과 조직 구조가 이미 개량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사회민주당 내부 노선투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3. 혁명인가 개량인가 - 베른슈타인과 독일 사회민주당 수정주의 논쟁
1) 독일 사회민주당의 형성과 성장
‘1914년 8월 4일’이라는 비극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일상적 실천 속에서 준비되어 왔다. 잠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자.
19세기 중후반 이후 유럽 노동운동은 대중적, 정치적, 국제적 운동으로 발전했고, 이는 1889년 각국 노동자 정당의 국제 결사체인 제2인터내셔널 창립으로 이어진다.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에서 바쿠닌, 프루동, 블랑키 등과 내부 논쟁을 겪으며 체계적으로 형성된 맑스주의는, 이제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 이념이 되었다. 그 2인터내셔널 중심에 1875년 창립된 독일 사회민주당이 있었다.
1850~60년대를 거치며, 독일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산업화 진척과 함께 1850년대 말에는 프로이센 왕정의 정치 탄압도 완화되어, 1848년 혁명 패배 이후 붕괴되었던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조직들이 재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 탄압이 다소 완화되었을 뿐, 여전히 의회는 결정력을 가진 기구가 아니라 국왕의 자문기구 수준에 불과했으며 그 의회조차도 재산(세금 납부액)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선거권에 차별을 두는 방식으로 선출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의회나 내각에 진출하기도 했고 보통선거권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거부하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노동자들의 권익도 체제의 변혁이 아니라 근면하게 일하고 교육 받으며 협동조합 등을 설립하는 자조(自助) 방식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계급은, 전제왕정에 저항하거나 비판적이었던 지주, 자본가, 지식인 등과 노동자계급 자신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요구가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1863년 지식인이자 노동운동가인 라쌀레(Ferdinand Lassalle)의 지도하에 “독일 노동자총연맹”이 창설되었다. 1869년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 주도로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이 결성되었다.
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같은 목적의 정치조직이 별개로 건설되었는가? 라쌀레가 지도하는 독일 노동자총연맹 강령(1867년)과 베벨·리프크네히트가 지도하는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 강령(1869년) 모두 ‘자유로운 인민 국가’, ‘자본주의 생산양식 폐지’, ‘민주주의 국가 건설’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건설의 방법과 경로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독일노동자총연맹은 ‘의회 진출과 국가의 도움을 통한 생산자 협동조합 확대’를 목표로 했다. 라쌀레는 자본가들에 맞서 생산자 협동조합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라쌀레 세력은 보수주의자들, 즉 대지주들과의 타협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베벨과 리프크네히트는 맑스주의에 따라 국가를 지배계급의 도구로 보고 ‘계급투쟁을 통한 국가권력 장악’을 지향했으며, 자본주의 자체를 전복하지 않는 이상 협동조합만으로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달성할 수 없다고 보았다. 독일 통일[5]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을 제시한 독일 노동자총연맹의 강령과,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한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의 강령은 사회주의 건설의 방법론에 있어 차이가 분명했다.
그럼에도 18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 이르러 격렬해지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노동조합의 결성으로 양 조직은 실질적인 공동투쟁을 하고 있었고, 더욱이 1871년 프랑스 파리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과 최초의 노동자 정부 ‘파리코뮌’에 놀란 비스마르크 정부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함에 따라 두 조직의 통합이 요구되었다. 마침내 1874년 12월 통합협상이 시작되었고, 강령 합의가 이루어졌다. 1875년 5월, 튀링겐의 고타(Gotha)에서 통합대회가 열리고 강령이 통과되면서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탄생했다. 이 당이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독일 사회민주당이다.[6]
19세기말, 독일 노동자계급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잘 조직된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성장은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는데, 독일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Reichstag) 선거 득표율 수치는 다음과 같다.
제국의회 선거
독일 사회민주당 득표
1877년 선거
49만 3,447표 (9.1%, 13석)
1887년 선거
76만 3천 표 (10.1%, 11석)
1890년 선거
142만 7천 표 (19.7%, 35석)
1907년 선거
325만 9천 표 (29.0%, 43석)
1912년 선거
425만 표 (34.8%, 110석)
1914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원 수는 108만 6천 명이나 되었고, 당은 260만 조합원이 속한 노동조합(자유노련)의 지지를 받았다. 사회민주당은 독일의 모든 도시에 유통되는 일간지, 소비조합을 가지고 있었으며, 노동자 우표수집 동호회, 노동자 토끼사육 동호회 등도 있었다. 노동자 합창단 회원은 20만명, 노동자 사이클 클럽의 회원은 13만 명이나 되었다.[7] 이대로라면 사회주의와 노동자계급의 승리는 역사의 필연으로 보였다.
「노동자당과 사회주의당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으며, 극도의 주의와 주목을 끌었다. 과거의 성장세에 근거하여, 그들의 지도자들은 승리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프롤레타리아는 인민의 다수가 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이들 정당에 참여하고 있다. … 1880년대 이래로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들의 급격한 부상이 정당들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그것의 지지자나 구성원들에게도 흥분과 희망, 즉 자신들의 승리가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공장과 작업장 그리고 광산에서 직접 노동하던 이들에게 이전에는 결코 그와 같은 희망의 시대가 있어본 적이 없었다.」[8]
그러나 눈부신 성장의 이면에서, 어떤 이들은 질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렇게 성장하고 있는데, 혁명은 과연 필요한가?
2) 자본주의는 진화하는데, 붕괴는 대체 언제 온다는 말인가? - 베른슈타인의 문제 제기
독일 사회민주당이 성장하던 19세기 말, 당 이론가 그룹의 일원인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은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사회주의의 문제들’이라는 이름의 논문을 당 기관지에 연재했다. ‘수정주의 논쟁’의 시작이었다.[9] 이 논문은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커다란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1898년 슈투트가르트 당대회는 베른슈타인에 대한 격한 비판과 함께 다음 해 당대회에 베른슈타인의 해명서를 요구한다. 이에 1899년,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를 출판하며 자기 견해를 변호했다. 베른슈타인은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이 전제하던 자본주의 붕괴론을 비판했는데, 비판의 주된 근거는 자본주의의 적응 능력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가 자기 모순에 따라 필연적으로 붕괴한다고 전제해왔으나, 베른슈타인이 보기에 그 믿음에는 근거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맑스가 살아있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베른슈타인은 카르텔과 트러스트 등 독점자본의 기업조직이 시장경쟁을 제한하여 경제공황의 규모와 빈도를 완화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금융 수단의 발달, 통신수단 등의 발전으로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주장했다. 또한, 주식회사의 발전에 따라 자본의 소유가 다수에게 분산되는 한편, 인구 대다수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는 ‘계급의 양극분해’가 나타나지 않고 중간계급이 두텁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 노동조합 투쟁의 성과로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지위가 상승하고 있다는 점, 이에 더해 민주주의 제도가 발전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당의 과제는 혁명[10]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내에서 노동자의 경제적 처우를 개선하고 의석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베른슈타인은 독일의 식민지 획득에 찬성 입장을 표명했다. 다른 제국주의 열강과 마찬가지로 독일은 점점 더 식민지 생산물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식민지는 개발·보호되어야 하며, 독일 같은 문명국은 미개민족의 영토에 대해 더 많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11]
수정주의 논쟁에 착수한 베른슈타인의 중심 문제의식은, 당의 실천은 자본주의 ‘개혁’으로 굳어져 있음에도 당의 이론은 ‘혁명’이라는 문구에 매달리고 있으니 현실에 맞게 이론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민주당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늘날 중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으며 점진적 개혁이 당의 과제다. 즉, 사회민주당은 ‘목표’를 폐기해야 한다! 베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을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내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아무런 관심도 없다. 이 목표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나에게는 무(無)이며, 운동이 전부이다.」
‘사회주의의 교황’ 칼 카우츠키, 독일 사회민주당에 갓 입당한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더 파르부스, 프란츠 메링 등이 베른슈타인을 비판했다. 심지어 당내 우파들 역시 당대회에서 베른슈타인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민주당 우파들에게 이론과 원칙을 두고 논쟁하는 것은 ‘실천과 무관한 당내 분란’에 불과했으며, 골치 아픈 논쟁 없이도 충분히 의회주의적-개량주의적 실천을 주요 흐름으로 만들고 있었다. 독일 사회민주당 우파의 일원 이그나츠 아우어(Ignaz Auer)는 베른슈타인에게 “친애하는 에데(베른슈타인의 애칭),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공개적으로 인정하거나 공식적으로 표결에 부칠 일이 아닙니다. 그냥 조용히 그렇게 실천하면 될 일입니다”라고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이론’은 여전히 혁명을 지지했다. 1899년 하노버 당대회에서 카우츠키와 베벨은 베른슈타인의 견해를 강력히 비판했고, 베벨은 수정주의 비판 결의안을 제출해 216대 21로 가결되었다. “당은 계속 계급투쟁의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노동자계급의 자유는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1901년 뤼벡 당 대회에서, 베벨은 다시 베른슈타인을 비판했다. 베른슈타인은 “나는 당의 프로그램이나 실천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이론을 비판했을 뿐”이라며 항변했지만, 대회는 203대 31로 비판 결의를 채택했다. 결의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되었다. “베른슈타인은 앞으로 당의 다수 결정에 따라 행동할 것을 기대한다.”
베른슈타인은 당대회에서 혹독히 비판받았고, 1900년 초 사회민주당 기관지 편집진에서 사임했다. 이렇듯 표면적으로는 수정주의가 철저히 패배한 것으로 보였으나, 앞서 말했듯 수정주의자들의 실천과 수정주의 비판자들의 실천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사실 베른슈타인의 주장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일상적 실천을 이론으로 표현했을 뿐이었다. 개량주의적 실천과 함께 언젠가 올 혁명을 기다리는 것이 사회민주당의 노선이라면,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 목표를 간직하는 것이 대체 왜 중요하다는 말인가?
베른슈타인이 쓴 것은 하나의 ‘논문’이었지만, 사회민주당의 다수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었다. 말로는 혁명을 외치되, 실천은 개량으로 귀결되는 이중성. 독일 사회민주당의 위기는 바로 이론과 실천의 괴리, 즉 이데올로기로만 혁명을 유지한 채 실천에서는 제거한 모순에 있었다.
4. 수정주의 대두의 배경
1) 독일 자본주의의 성장
19세기 말 20세기 초, 독일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강대국 대열에 합류했다. 독일 자본주의의 성장은 노동자계급에게 물질적 양보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민주적 제도의 발전은 ‘계급투쟁이 완화되고 있다’는 진단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성과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자본주의는 고쳐 쓸 수 있고, 실제로 고쳐쓰고 있다’는 착시를 심어주었고, 자본주의의 진화에 조응하는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배경이 되었다. 즉, 자본주의의 성장은 사회민주당 내부에서 혁명적 전망을 희미하게 만들었고, 이미 존재하던 ‘실천적 수정주의’를 ‘이론적 수정주의’로도 돌출시켰다.
「문제가 되는 것은 붕괴론이며 또한 현재 독일의 경제발전 수준과 도시와 농촌에 있는 노동자계급의 성숙도를 감안할 때 사회민주당이 급작스런 독일자본주의의 파국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나는 이 물음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며 특히 끊임없이 이어져온 내 견해로는 독일 자본주의가 지속적인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파국을 맞이할 가능성보다 더 크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 우리는 선진국 도처에서 계급투쟁이 점차 완화된 형태를 띠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며 미래에도 그것은 별로 변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지 않다.」[12]
실제로 1차대전 발발 전 반세기 동안 유럽은 발칸반도 변경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쟁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화로웠다. 유럽은 거의 반세기에 걸친 평화의 기간 동안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의회주의, 개량주의적 사회주의가 동시에 번성하던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두 세대에 걸쳐 유럽인들은 인간이 자연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고 논의, 화해, 그리고 다수결에 따른 투표를 통해 사회환경을 변화시키고 완성시킬 정도로 진보했다는 낙관적 믿음 속에서 성장했다. 유럽 전체에서 부의 축적은 너무나 인상적이고 빨랐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계급들에게 번영의 증대를 보장하고 격렬한 사회 갈등을 배제하는 듯했다.[13]
2) 본격화하는 제국주의 시대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의 인식은 당대, 그리고 닥쳐올 시대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인식조차 결여하고 있었다. 바로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이다. 식민지 획득을 둘러싼 열강 사이의 투쟁이 격화하고 있었고 세계는 초유의 ‘대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1884년 열강 사이의 아프리카 분할을 조정하기 위한 베를린 회의가 있었고, 1898년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충돌하는 파쇼다 사건이 있었으며, 1899년 영국이 오늘날의 남아공을 병합한 보어전쟁, 1900년 독일을 포함한 8개 열강의 베이징 점령이 있었다. 다음은 1900년 7월 27일, 중국으로 떠나는 군대를 향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연설이다. 소위 ‘훈족의 연설’로 불리는 이 연설은 학살을 주문하는 잔인성으로 유명하다.
「적을 만나면 반드시 물리쳐라! 자비를 베풀지 마라! 포로를 만들지 마라! 너희 손에 떨어지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천 년 전 훈족이 그들의 왕 아틸라 아래에서 스스로의 이름을 역사와 전설 속에 위대하게 남겼듯이, 너희도 중국에서 독일이라는 이름을 그렇게 각인시켜라. 다시는 어떤 중국인도 독일인을 곁눈질조차 하지 못하도록 하라.」[14]
시대적 상황은 명확했다. 세계는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15]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1871년 독일 제국 통일 이후, 독일은 뒤늦게 식민지 확보 경쟁에 뛰어들며 식민지를 통해 값싼 원자재를 확보하고 투자처를 넓히려 했다. 이렇듯 독일 제국주의가 본격화하는 상황에서도 베른슈타인은 식민지 확보를 비판하기는커녕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심지어 식민지 민중을 유럽의 문명화 대상으로 놓는 시각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의 시각과 하등 다르지 않다.
「독일이 현재 매년 상당량의 식민지 생산물을 수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언젠가 그 일부를 자국 식민지에서 조달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아무리 사회주의자들이 독일에서 자신들의 발전 속도를 낙관적으로 본다 해도, 다른 수많은 국가들이 사회주의로 전환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임을 외면할 수 없다. 그리고 열대 농장의 생산물을 소비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면, 우리가 직접 열대 농장을 경작하는 것도 비난받을 일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부(whether)”가 아니라 “어떻게(how)”이다. 유럽인이 열대지방을 점유하는 것이 원주민들의 삶의 질을 해치는 결과를 반드시 초래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실제로 지금까지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토지를 점유하고 있는 미개인들(savages)의 권리는 조건적 권리로만 인정될 수 있다. 보다 높은 문명이 결국 더 높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16]
심지어 베른슈타인은 1897년 독일의 칭다오 점령과 교주만 조차(租借, 타국 영토 일부를 일정 기간 빌려 통치하는 행위. 유명 사례로 영국의 홍콩 조차)까지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을 들어 합리화한다. ‘독일이 중국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도, 중국은 어차피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자본주의 속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특히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에 예속되었을 것이다, 교주만 조차는 독일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이것이 베른슈타인의 논리였다.
이런 흐름은 독일 국가의 노동운동에 대한 전략과도 맞물렸다. ‘복지국가’의 원형은 스웨덴도, 영국도 아닌 1880년대 독일이다. 독일 국가는 1883년 건강보험, 1884년 산재보험, 1889년 노령 및 장애연금법을 제정했다. 노동자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비스마르크가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한 목적은 계급투쟁 격화의 방지였다. 사회주의자들의 세력 확대를 막고, 혁명을 예방하려고 했던 것이다.[17] 1871년 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 파리코뮌이 지배계급에 남긴 두려움 역시 중요한 배경이다. 물론 사회보장제도 확대 같은 ‘당근’뿐만이 아니라 ‘채찍’ 또한 있었다. 독일은 1878년 ‘사회주의금지법’을 제정해 사회주의자들의 집회·결사, 출판 등을 금지했다. (사회주의금지법은 사회민주당을 강제 해산하지는 않았으나, 정당 활동을 의회로 제한했다.) 즉, 비스마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과 노동자계급을 제도 내로 유인하고 국가가 정한 경계 안에 가두고자 한 것이다.
3) 독일사회민주당에 고질적인 최대강령과 최소강령의 분리, 이론과 실천의 분리
독일 사회민주당의 에어푸르트 강령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흔히 최대강령으로 불리는 첫 번째 부분은 칼 카우츠키가 작성한 것으로 자본주의의 모순과 사회주의로의 지향을 서술하고 있다. 최소강령이라고 불리는 두 번째 부분은 베른슈타인이 작성한 것으로 당면 실천과제로서 일반적 민주주의적 요구들과 노동자계급의 복지를 위한 개량적 조치들을 정식화했다.
당 강령은 분명 사회주의적 전망과 현실 개량을 동시에 담고 있었지만, 두 영역은 별개의 궤도로 움직였다. 문제는 양자의 연결이었다. 최대강령에 표현된 사회주의적 원리와, 당시 사회의 법적 테두리를 넘어서지 않는 민주주의적 실천과제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었으나, 카우츠키를 비롯한 독일사회민주당 지도자들에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역사 발전에 따라, 언젠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저절로 그 간극을 메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혁명은 필연적인, 그러나 먼 훗날의 일에 불과했다. 엥겔스의 비판을 보자.
「가재가 자신의 껍질을 깨뜨리는 것 같이 사회도 필연적으로 낡은 사회 체제로부터 성장하여 그 낡은 껍질을 폭력적으로 깨뜨려야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자문해 보지 않고, 게다가 마치 독일 사회는 여전한 반(半) 절대주의적 족쇄와 더 나아가서는 형언할 수 없이 혼란한 정치적 질서를 깨뜨릴 필요가 없는 것처럼, “오늘날의 사회는 사회주의로 성장해 갈 것이다”라고 자신들과 당에게 그럴싸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 그들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정치적 문제들을 전면에 내세워 당면한 구체적 문제들, 즉 일찍이 없었던 대사건들이나 일찍이 없었던 정치적 위기가 도래하면 저절로 일정에 오르게 되는 문제들을 덮어두고 있다.」[18]
엥겔스의 예언적 비판은 1차대전으로 현실이 된다. 앞서 살펴보았듯, 사회민주당과 제2인터내셔널은 자본주의의 발전으로부터 나오는 개량과 환상에 절여져있었고 그 결과는 양자의 정치적 파산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그 이데올로기, 표어, 상징을 지난 세기의 혁명기로부터, 1848년의 대격변으로부터, 1871년의 파리코뮌으로부터, 그리고 비스마르크에 맞선 독일 사회주의의 지하투쟁으로부터 물려받았다. 그 표어와 상징은 노동자들의 국제적 단결과, 부르주아 정부의 타도를 지향하는 가차 없는 계급투쟁을 주창했다. 그런데 그 이래 오랫동안 사회주의 정당들의 실제 활동은 이런 전통에 부합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가차 없는 계급투쟁은 평화적 거래와 의회주의적 개량주의에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런 방식이 점차 성공을 거둠에 따라, 사회민주당·노조와 정부·고용주 단체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국가적 이익과 관점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국제주의 표어보다 더 우세하게 퍼져나갔다. 1914년까지 사회주의 정당들은 여전히 습관화된 혁명용어로 그들의 개량주의적 활동을 설명하고 정당화했다.[19] 노동자당이 체제에 길들여져온 결과는 1차 대전 동조라는 대재앙이었다.
4) 독일사민당 총파업 논쟁이 드러낸 것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고 총파업이 차르 전제정을 위협할 정도로 확산되자, 그 파장은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도 거세게 미쳤다. 러시아의 대중파업은 독일 좌파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당내 좌파는 총파업을 혁명 전략의 핵심 전술로 채택하자고 주장했다. 러시아에서 벌어진 대중파업을 관찰한 그녀는, 대중파업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혁명으로 나아가는 긴 과정의 일부이며, 혁명의 발단이자 그에 필요한 조직과 의식을 창출하는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대중파업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구분을 지우며 종합함으로써, 양자를 계급투쟁으로 고양하는 매개라고 주장했다. 계급투쟁은 ‘정당의 입법 정치투쟁’, ‘노동조합의 임단협 경제투쟁’이라는 기계적 역할분담을 지양한다. 계급투쟁은 착취를 제한하는 투쟁이자, 착취를 폐지하는 투쟁이다.
「정치적·경제적 투쟁의 분리와 그 각각의 독립성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의회주의 시기의 인위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 평화롭고 '정상적인' 흐름 속에서는 경제투쟁이 각각의 작업장과 생산 부문에서 수많은 개별 투쟁으로 분열되어 흩어진다. 반면 정치투쟁은 … 부르주아 국가의 형식에 맞춰 대의제 방식, 즉 입법기관의 대표자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수행된다. 그러나 일단 혁명적 투쟁의 시기가 시작되고 대중이 투쟁 무대에 등장하면, 경제투쟁의 분절화도, 정치투쟁의 간접적인 의회적 형태도 사라진다. 혁명적 대중행동 속에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은 하나가 되며,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라는 노동운동의 두 조직을 서로 분리하고 완전히 독립된 형태로 놓는 인위적 경계선도 쓸려 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대중운동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바는, 의회주의 시기에도 현실 속에서는 사실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은 단지 혁명 시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회주의 시기에도 실제 현실로 존재한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에는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이라는 두 별개의 형태가 아니라, 하나의 계급투쟁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착취를 제한하려는 투쟁이자,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와 함께 착취를 폐지하려는 투쟁이다.」[20]
하지만 사회민주당 내부의 반응은 일치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독일 노동조합 지도부는 정치총파업을 극렬히 반대했다. 이들은 1905년 루르 지역 광부 20만 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광산 파업과 그 여파로 벌어진 파업 물결을 조직 확장의 계기보다는 재정적‧정치적 부담으로 인식했다. 1905년 쾰른에서 열린 노동조합(자유노련) 대회는 압도적 다수의 결의로 총파업 전술에 반대했다. “아나키스트들이나 경제투쟁에 아무런 경험이 없는 자들이 주장하는 총파업은 대회가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대회는 노동자들에게 이런 사상을 받아들이고 퍼뜨리는 일이 일상적인 조직강화 활동을 저해하지 않도록 경고한다.”[21] 흥미롭게도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을 포함한 일부 수정주의자들은 정치총파업에 일정한 지지를 표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각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개혁, 예컨대 보통선거권 쟁취나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서, 통제 가능한 전술에 불과했다. 그들의 정치총파업론은 혁명의 촉진이 아니라, 협상력 제고 수단에 가까웠다.
이에 비해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현지에서 목격한 경험을 통해 다른 전망을 제시했다.[22] 그녀는 『대중파업론』에서 러시아 혁명의 총파업이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의식과 조직을 혁명적으로 성장시키는 결정적 계기라고 주장했다. 대중파업은 가장 낙후된 노동자들도 스스로 투쟁 주체로 등장하게 만든다. 이는 단지 의회 압박의 도구가 아니라, 혁명적 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1905년 9월 예나에서 열린 사회민주당 당대회는 논쟁 끝에 총파업을 당의 전술 중 하나로 공식 채택했다. 그러나 당대회는 총파업이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막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라는 점을 인정하되, 혁명적 투쟁 수단으로 보는 것은 거부했다. 이는 좌파(로자 룩셈부르크), 중앙파(아우구스트 베벨), 우파(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간 절충된 합의였다. 하지만 그 제한적 합의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인 1906년 2월, 당 지도부는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비공식 회담을 통해 총파업을 선동하지 않겠다고 확약했고, 9월 만하임 당대회에서는 노동조합의 전술을 결정할 권리는 노동조합에 있다고 결정한다. 이로써 예나 당대회에서 총파업을 전술로 채택한 결의는, 만하임에서 ‘노조 자율’ 원칙이 확정됨으로써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우리는 당과 노동조합 간의 평화와 조화를 최우선으로 추구한다” - 독일 사회민주당의 구심 중 하나인 아우구스트 베벨의 말이다. 그러나 노조의 일은 노조가, 당의 일은 당이 맡아 각자 수행하자는 노선 속에서 정치투쟁은 의회입법으로 한정되고, 노동조합 투쟁은 임단협으로 한정된다. 이런 역할분담론은 당의 정치투쟁을 의회 개혁으로, 노조의 투쟁을 임금교섭으로 제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혁명적 전망 자체를 폐기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 “병행 행동”(parallel action)을 하며 “동등한 권위”를 지닌다는 이론은 전적으로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이 이론은 부르주아 사회의 평화롭고 “정상적인” 시기라는 환상에 기초해 있다. 이 시기에는 사회민주당의 정치투쟁이 의회투쟁으로만 소모되어버리는 듯 보인다. 그러나 노동조합 투쟁과 마찬가지로 의회투쟁도, 부르주아 사회 질서라는 토대 위에서만 수행되는 투쟁이다. 노동조합의 활동이 경제개혁 작업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본질상 정치개혁 작업이다. … 최종 목표는 의회투쟁이나 노동조합 투쟁 그 너머에 있다. …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의 “동등한 권위”라는 이론은 단순한 이론적 오해나 혼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잘 알려진 기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 경향의 표현이다. 이 경향은 노동계급의 정치투쟁을 의회투쟁으로 축소시키고, 사회민주당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에서 소부르주아적 개혁정당으로 바꾸려 한다. … 물론 이것은 노동조합 조직을 정당에 흡수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운동 전체와 그 일부인 노동조합 간의 실제 관계에 상응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 간의 통일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다.」[23]
당시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을 통해 보려 했던 것은, 단순한 전술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세상을 바꾸는 주체로 성장해가는 과정이었다. 일상의 개량과 미래의 혁명을 분리하지 않는 계급투쟁 속에서, 대중은 체제의 본질을 자각하고 조직을 만들어간다는 사상이었다. 반면, 지도부와 노동조합 관료층은 기존 제도 안에서 조직을 보존하고 개량적 성과를 쌓는 것을 최우선시했다. 이로 인해 당은 보수적 실용주의의 길로 기울어갔다.
5. 혁명과 개량에 관하여
1) 혁명은 모험주의적 폭동이 아니다
개량주의자들은 흔히 혁명을 ‘무책임한 모험’이나 ‘파괴적 동란’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혁명은 단지 무장 봉기나 유혈 충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은 낡은 지배계급이 더 이상 옛 방식으로 통치할 수 없고, 피지배계급이 더 이상 그대로 살 수 없는 조건 아래, 억압받는 계급이 그 체제를 전복하고 권력을 쟁취하는 질적 단절의 과정이다. 그렇기에 혁명은 단순한 결단이나 소수의 선동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혁명은 사회의 모순이 극도로 격화되고, 기존 제도가 해답을 줄 수 없는 조건 속에서, 계급의 대중적 행동으로 분출된다. 혁명은 비이성적 격변이 아니라, 계급의식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의 합리적 실천이다. 러시아 혁명의 사례를 보자.
(1) 1917년 2월 혁명, 러시아 혁명의 발발
1914년 러시아의 1차 세계대전 참전은 1912년 이래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러시아 노동운동이 급격히 후퇴하는 계기였다. 애국주의는 전 국가를 휘감아 혁명적 정치운동을 질식시켰다. 투쟁적인 노동자들은 전선으로 차출되었고, 파업은 가혹하게 처벌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낳은 운동의 퇴조는 오래가지 않았다. 전황은 패색이 짙었고, 이는 짜르체제에 대한 환멸로 이어진다. 이제, 노동자들은 전쟁이 억누른 자신의 생존권 요구를 내걸고 1915년 이후 격렬한 투쟁에 나선다.[24] 독일과의 전쟁은 계급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전쟁은 노동계급에게 생존 위기를 야기한 반면,[25] 군수산업 팽창은 자본가들에게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1915년 여름, 자본가들은 군사산업위원회를 만들어 거세지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체제 내로 가두는 하는 한편, 노동자들을 애국주의 아래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지배 체제는 이미 노동자 투쟁을 체제 안에 붙잡아 둘 힘을 상실하고 있었다. 1916년 말 이후 러시아 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소요는 점증하고 있었다. 1917년 1월 26일 밤, 전제정치 종식을 주장한 군사산업위원회 중앙노동자그룹 대표들이 체포되었고, 이는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26] 2월 18일 푸틸로프 금속공장 노동자들은 2월 22일 다른 공장의 연쇄파업을 촉발했고, 정세 고조 속에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러시아 구력. 신력으로는 3월 8일)을 맞아 여성노동자들이 진행한 거리시위는 2월 혁명의 결정적 포문을 연다.
당시 어떤 혁명세력도 이것이 혁명으로 이어지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지구조직 중 가장 전투적인 비보르그 지구위원회조차 애초 2월 23일 파업을 반대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날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만도 12만 명에 달했다. 다음 날에는 시위가 더 발전해 20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다. 2월 25일, 투쟁은 총파업으로 발전했다.[27] 그리고 2월 26일,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일부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시위대로 합류한다. 2월 27일, 페트로그라드 주둔군 대부분이 반란에 합류하고,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구성된다. 그리고 3월 2일, 러시아를 지배하던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한다. 러시아를 300년간 지배하던 로마노프 왕조가 일주일 남짓한 기간에 붕괴하고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노동자 민중의 자치 기구인 소비에트, 그리고 입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로 구성된 임시정부였다. 누가 러시아 혁명의 진로를 결정할 것인가? 소비에트인가, 임시정부인가?
(2) 소비에트, 노동자 민중 자신의 권력
1917년 2월 혁명과 함께 대중은 자신의 투쟁기관을 건설했다. 1905년 혁명에서 이미 등장한 소비에트가 다시 건설되었다. ‘평의회’를 뜻하는 소비에트는 노동자, 병사, 농민들이 공장과 병영, 농촌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건설한 자치기관으로, 대중은 자신이 선출한 대의원을 소비에트로 보내 자신을 대표하게 했다.[28] 3월 17일까지 49개 도시에서 소비에트가 있었다. 5일 뒤에는 77개가 되었으며, 6월에는 519개가 되었다.[29] 소비에트는 삶의 공간으로부터 구성되었고 공장, 군대, 우편, 철도 등 러시아의 근간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명령 제1호’[30]는 평의회로 조직된 대중의 힘을 여실히 드러낸다.
1917년 3월 1일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가 페트로그라드 지구 주둔군에게 내리는 제1호 명령
수비대, 육군, 포병, 해군의 모든 병사들은 즉시 이 명령을 완전하게 이행해야 하며,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에게도 이를 널리 알려야 한다.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는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1. 모든 중대, 대대, 연대, 포대, 기병대 및 각 군부의 독립 부서들과 해군 함정에서는, 위 부대 병사들 중에서 즉시 위원회를 선출해야 한다.
2. 아직 노동자 소비에트에 대표를 선출하지 않은 모든 부대는, 각 중대에서 한 명의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 이들은 신분증을 소지하고 1917년 3월 2일 오전 10시까지 국가 두마(duma, 의회) 건물에 도착해야 한다.
3. 모든 정치적 행동에 있어, 각 부대는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및 자기 부대 위원회의 지시에 복종한다.
4. 국가 두마의 군사위원회가 발행한 모든 명령은 이행하되, 노동자·병사 소비에트가 발행한 명령 및 포고와 상충되는 명령은 제외한다.
5. 소총, 기관총, 장갑차 등 모든 종류의 무기는 중대 및 대대 위원회의 통제 하에 두며, 장교들의 요구가 있더라도 절대 그들에게 넘겨져서는 안 된다.
6. 진형을 갖추고 근무 중일 때 병사들은 엄격한 군사 규율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비근무 시간 및 진형 외에서는 정치적·시민적·개인적 생활에서 일반 시민이 누리는 권리를 완전히 향유해야 한다.
특히, 비근무 시간에 거수경례 및 경례 의무는 폐지된다.
7. 장교에 대한 호칭은 '각하', '존경하는' 등의 표현 대신, '장군님', '대령님'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
병사에 대한 무례한 언행, 특히 '너'(thou)라고 부르는 행위는 금지되며, 이러한 규율 위반이나 장교와 병사 간의 갈등은 병사들이 중대 위원회에 보고해야 한다.
이 명령은 모든 중대, 대대, 연대, 수병, 포대 및 기타 전투 및 비전투 부대에서 낭독되어야 한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1905년 만들어졌던 소비에트가 다시 세상에 나왔다는 것, 1917년 소비에트는 1905년과는 달리 군대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 또한 1905년과는 달리 처음부터 매우 정치화되어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짜르체제가 심각하게 붕괴했다는 것을 뜻했고, 이는 1917년 2월 혁명이 단지 부르주아 혁명에 그치지 않을 전조였다.
레닌은 1917년 4월 3일 망명지에서 러시아로 귀국한 이후 ‘혁명은 이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넘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행하고 있으며, 권력의 주인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소비에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본가들을 위한 임시정부는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으며,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진해야 한다.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영토 전역에서 선출된 노동자, 농업노동자와 빈농의 대표가 구성하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혁명의 목표이다. 이에 볼셰비키는 임시정부에 대한 모든 협력을 거부해야 하며, 소비에트만이 유일한 혁명적 정부임을 대중들에게 인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31]
그러나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 당파들은 소비에트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멘셰비키[32]는 소비에트를 임시정부를 보호하고 대중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이었던 멘셰비키, 니콜라이 치헤이제는 소비에트를 “혼란과 파괴의 와중에서 대중들을 조직하고 훈련하며 …… 수백 년 묵은 질곡이 벗겨져 버렸을 때 국민의 기본적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멘셰비키 체레텔리는 소비에트의 임무를 새로운 민주적 기구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획득한 자유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비에트를 수동적으로 보는 관점은 진행 중인 러시아 혁명에 대한 기본적 입장에서 기인했다. 멘셰비키는 2월 러시아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에 머물러야 한다고 사고했고, 이는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에 대한 멘셰비키의 입장과 같았다. 소비에트 안에는 이처럼 당면 정세에 대한 노선을 달리하는 당파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내에서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경합하며, 임시정부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로 세력을 확대했다.
(3) 2월 혁명 이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실현할 수 없는 임시정부
대중이 구성한 평의회 권력, 소비에트 반대편에 임시정부가 있었다. 소비에트로 결집한 대중의 요구는 ‘빵, 토지, 평화’로 집약되었으나, 자유주의자들과 입헌민주주의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는 대중의 요구를 실현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 전쟁의 한 복판에서 혁명이 벌어졌음에도 임시정부는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러시아의 1차대전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도 당연히 러시아의 전쟁 지속을 원했다. 임시정부의 자본가들은 제국주의 전쟁과 긴밀한 이해관계로 얽혀있었다.
첫째, 임시정부의 자본가들은 전쟁을 계속해야 ‘혁명을 심화하는 세력’에 대항할 수 있었다. 애국주의 정서를 확대하며 토지문제와 사회입법 등 노동자 민중이 원하는 혁명적 조치를 늦출 방법이 바로 전쟁 지속이었다. 둘째, 임시정부의 자본가들은 제국주의적 열망을 공유했으며, 1차 대전에서 승리할 경우 러시아가 확보할 전리품을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병합이 1차 대전 당시 러시아의 주요 목표였다. 러시아는 남하하여 지중해, 나아가 대서양으로 진출하려는 오랜 야망을 품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오스만 제국의 해협 지대가 필요했다.[33]
이렇듯 러시아 황제의 퇴위 이후 임시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임시정부는 전쟁을 중단하고 대중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의사가 없었고, 이는 노동자 민중의 열망을 정면으로 배신하는 행위였다.[34] 그리고 임시정부가 전쟁을 지속할 것이라는 사실은 ‘밀류코프 각서’를 통해 대중 앞에 드러난다. 1917년 4월, 임시정부 외무장관인 파벨 밀류코프는 1차 대전 동맹국들에게 각서를 보내 임시정부는 차르 정부가 맺은 모든 조약을 존중하고, 전쟁을 지속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임시정부는 … 우리 연합국들에 대한 의무를 전적으로 이행할 것이다.” 다음은 당시 레닌의 글이다.
「외국 영토의 점령은 자본가들에게 필요하다. 그들은 새로운 시장, 자본을 수출할 새로운 장소, 그들의 아들 수만 명에게 수익성 있는 일자리를 마련할 새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러시아 자본가들의 이익은 영국 및 프랑스 자본가들의 이익과 일치한다. 바로 그것, 오직 그것만이 차르가 맺은 조약이 러시아 자본가들의 임시정부에게도 소중한 이유다. …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이 나라에 단 하나의 권력만이 존재해야 한다고 분명히 선언해야 한다 - 바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다. 소수 자본가들의 정부인 임시정부는 이 소비에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35]
(4) 이중권력과 10월 혁명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 임시정부는 대중의 요구를 수용해 개혁을 수행할 능력도, 소비에트로 결집한 대중을 통제할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 대중의 자치기구인 소비에트와 ‘공식’ 권력인 임시정부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권력’ 상태였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형성된 소비에트와 임시정부의 이중권력 상태는 결국 10월 혁명을 통한 임시정부의 타도와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으로 마무리된다. 그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1917년 4월, 서방 동맹국들에게 전쟁 지속을 약속하는 밀류코프 각서가 불러일으킨 분노가 ‘4월 위기’로 이어졌다. 시위대는 전쟁 종식을 요구하며 임시정부의 해산 명령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요청에 따라 시위를 해산했다. 대중시위가 일으킨 정치적 위기에, 임시정부는 소비에트 내 온건 사회주의자들을 임시정부 장관으로 수혈해 소비에트를 달래려 한다. 그러나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대중의 간극은 커지고 있었다. 6월, 임시정부는 전쟁 종식은커녕 러시아군에게 독일군에 대한 공세를 명령했고, 제국주의 열강의 공조 아래 노동자 민중을 총알받이로 밀어넣는 임시정부에 대한 분노는 더욱 커졌다. 6월 18일 시위에는 40만명이 넘는 노동자와 병사들이 “자본가 장관 10명 물러나라!”, “공격 정책 집어치워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슬로건을 들고 행진했다.
7월 3일, 분노한 대중이 준비되지 않은 봉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봉기는 임시정부의 발포와 함께 해산당했다. 볼셰비키는 봉기를 말렸지만, 책임을 뒤집어쓴 것은 볼셰비키였다. ‘레닌은 독일 첩자’라는 비난과 함께 볼셰비키는 불법화됐고, 볼셰비키 축출에 성공한 임시정부는 대중집회 규제와 전선 사형제 부활을 통한 소비에트 억압에 이어, 우익의 희망 코르닐로프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 총사령관은 이중권력을 적당히 두고볼 생각이 없었다. 민간 사형제 부활, 철도와 방위산업 군사화, 노동자 단체활동 금지 등에 이어 마침내 수도를 점령하고자 군대를 파견했다. 쿠데타였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노동자들은 모든 조치로 쿠데타를 막았기 때문이다. 반혁명 군대가 보내는 전보의 차단, 철도를 따라 이동하는 군대의 규모와 목적지 파악, 쿠데타군 이동 선로의 폐쇄…. 수도 전역에서 경종이 울렸고 노동자들은 무장한 채 전투를 준비했다. 7월 봉기를 주도한 크론시타트 수병들이 다시 혁명의 수도를 지키고자 페트로그라드에 정박했다. 이제, 혁명 세력이 쿠데타 세력보다 강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반격을 앞장서서 조직한 주체가 볼셰비키였고, 이들은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8월 31일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선거에서 볼셰비키가 최초로 다수를 확보했다. 리가, 모스크바 등 다른 도시도 페트로그라드의 뒤를 따랐다.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 10월 혁명은 이런 흐름의 연속선 위에 있었다.
(5) 혁명은 파괴와 건설의 통일이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 소비에트로의 권력이양 요구는 혁명의 연속적·안정적 발전과 직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혁명은 권력에 굶주린 볼셰비키가 경쟁자들을 무자비하게 제압한 조치가 아니라 소비에트 권력의 확대 발전을 위한 조치였다. 레닌이 7월 중순에 쓴 ‘슬로건에 관하여’를 보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옮겨야 한다”는 슬로건의 지지자들 모두가 그것이 혁명의 평화적 발전을 위한 슬로건이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생각해본 것 같지는 않다. 평화적이라는 말은 누구도, 어떤 계급도, 약간이라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어떤 세력도 당시(2월 27일부터 7월 4일까지)에는 소비에트로 권력이 옮겨지는 것에 저항할 수도 없고 그것을 막을 수도 없을 것이라는 뜻만은 아니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국가권력 전체가 곧바로 소비에트로 넘겨지기만 하면 소비에트 내부의 계급과 정당들의 투쟁이 매우 평화롭게 고통 없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당시에는 평화적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 소비에트가 분할되지 않은 독점적 권력을 행사했다면, 소비에트 내에서 권력을 쥔 계급과 정당들의 변화도 평화롭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36]
레닌 자신이 명시적으로 설명하듯,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요구는 혁명의 평화적 발전과 직결되어 있었다. 바로 그랬기에, 1917년 8월 코르닐로프 쿠데타를 분쇄한 이후 정치 무대에 복귀한 볼셰비키는 혁명의 평화적 발전경로를 다시 모색했다. 이는 카메네프를 비롯한 볼셰비키 우파와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좌파 모두 마찬가지였다.[37] ‘사회주의정당들과 부르주아정당의 결별을 전제로 사회주의자들만으로 구성된 혁명정부를 구성하자’, 이것이 8월 말 군부 쿠데타를 대중의 힘으로 분쇄한 이후 볼셰비키가 전개한 전술이었다. 즉, 자본가들에 맞선 사회주의자들의 공동전선이다.
사회주의 정당들이 부르주아와 결별하고 사회주의자들만의 정부를 구성했다면, 소비에트 권력은 사회주의 정당 사이의 협력과 견제 속에 더욱 성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9월 ‘민주협의회’는 다시 한번 부르주아와의 연립을 결정하며, 사회주의 정당들로만 구성된 혁명정부의 평화적 구성 역시 물거품이 된다. 코르닐로프 쿠데타 연루 의혹을 받는 입헌민주당은 여전히 버젓이 내각에 참여했다. 사회주의 정당들로만 구성된 연립정권의 무산, 이는 독일과의 전쟁 지속과 임시정부-소비에트 이중권력 상태의 불안한 지속을 뜻했다. 이런 조건에서 10월 9일, 임시정부는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전선 차출, 즉 혁명을 지지하는 군대를 수도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한다. 소비에트 권력의 말살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였다.
그 결과가 바로 1917년 10월 25일 봉기였다. 봉기는 혁명의 평화적 발전 경로가 소멸한 상황에 대한 냉엄한 인식에 근거했다. 곧, 봉기는 권력을 독점하려는 볼셰비키의 야욕이 만들어낸 사건이 아니라 볼셰비키에게 불가피하게 강요된 선택에 가까웠다. 9월 중순 이후 레닌이 아무리 편지로 당 주도의 봉기를 독촉했다 하더라도, 이는 타 당파를 제외하고 권력을 독식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다. 10월 봉기의 군사지도자 트로츠키조차 소비에트가 평화롭게 성장할 수 있었다면 봉기는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38] 누구나 혁명의 연속적·평화적 발전을 원하며, 이는 100년 전 러시아 혁명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요구가 10월 25일 볼셰비키 봉기 전에 사회혁명당, 멘셰비키와의 협력을 통해 실현되었다면 가장 좋은 상황이 창출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해졌음을 깨달았을 때, 볼셰비키는 역사적 단절을 택했다. 봉기의 성공이라는 조건 위에서 행해진 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대회는 이를 열렬히 환영한다. 소비에트 권력이 창출되었다.
이상에서 드러나듯, 혁명은 단지 구체제의 파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것은 구체제 안에서 형성된 물질적, 정신적 요소를 재료로 새로운 체제를 건설해가는 연속적 과정이기도 하다.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권력기관을 형성하고 사회 전체에 헤게모니화 하는 과정이다.
2) 진정한 개량은 혁명적 계급투쟁의 결과다
많은 개량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법과 제도를 바꾸는 데 집중하자. 그렇게 하나하나 바꾸다 보면 결국 다른 세상이 올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았다. 지배계급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양보한 적이 없다. 진정한 개량은 투쟁과 저항, 때때로 혁명적 위협의 산물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통찰했다.
「입법 개혁과 혁명은 역사의 진열대에서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뜨겁거나 차가운 소시지를 선택하듯 취사선택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역사 발전 방식이 아니다. 입법 개혁과 혁명은 계급사회 발전의 서로 다른 요소들이다. 이들은 서로를 조건짓고 보완하는 동시에, 북극과 남극,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처럼 서로를 배제한다.
모든 법적 헌정체제는 혁명의 산물이다. 계급들의 역사에서 혁명은 정치적 창조의 행위이며, 입법은 이미 형성된 사회의 정치적 표현이다. 개혁을 위한 활동은 혁명과 무관한 독자적인 힘을 갖지 않는다. 모든 역사적 시기에서 개혁을 위한 활동은 오직 마지막 혁명이 부여한 방향 속에서만 이루어지며, 그 혁명의 추진력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동안에만 지속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각 역사적 시기에서 개혁 활동은 언제나 마지막 혁명이 만들어낸 사회 형태의 틀 안에서만 진행된다. 여기에 바로 문제의 핵심이 있다.」[39]
즉, 진정한 개량은 체제 내의 협상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투쟁의 산물이다. 앞서 보았듯 비스마르크의 사회보장제도 확대 조치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예방조치로서 이루어졌다. 자본가들이 이윤을 줄이는 경우는, 이윤을 줄이지 않을 경우 체제 자체가 흔들릴 위험에 직면했을 때다. 8시간 노동, 사회보장제도, 보통선거권, 여성 참정권, 주 5일제나 최저임금도, 모두 계급투쟁ㄸ 결과로 쟁취된 것이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파견법과 기간제법을 폐지하고 싶다면, 그에 준하는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싶다면, 그에 준하는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그 과정은 때로 매우 고통스럽고 지난할 수 있다. 마르크스 역시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들은 때때로 승리하나, 그것은 단지 일시적일 뿐이다. 그들의 투쟁의 진정한 성과는 직접적인 전과(戰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더욱더 확대되는 단결이다.」
즉, 자본주의 속에서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은 항상 일시적일 수밖에 없으며, 진정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계급’으로서의 단결이다. 이를 통해 혁명이라는 근본적 변화를 추동할 힘을 가지는 것이다.
3) 배신적 개량과 진정한 개량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 노동자들은 일정한 개량을 성취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에 기초한 개량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초과착취에 기생하는 개량이었기 때문에 지속될 수 없었다. 자본주의 위기가 다시 도래하고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개량을 빼앗겨 왔다. 이제 자본주의 위기가 극심해지면서 심각한 공격에 맞닥뜨리고 있다.
한국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누려온 약간의 개량은 투쟁의 성과인 측면도 있지만 비정규직 초과착취를 묵인하고 그것에 기생해 온 측면도 있다. 역시 지속될 수 없는 개량이다. 이런 부류의 개량들이 계급투쟁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투쟁에 기초한 개량은 혁명으로 가는 길을 여는 개량이다. 혁명으로 가는 길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배신적 개량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노동자계급 전체의 단결과 투쟁에 입각해 획기적인 개량을 과감하게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혁명으로 가는 길이 열릴 수 있다.
6. 국가권력의 문제, 점진적인 이행은 가능하지 않다
1) 파리코뮌, 노동자계급은 기존 국가권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
1871년 프랑스 파리에서 수립된 파리코뮌은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사건이었다. 이는 단지 ‘정부’ 교체가 아닌, 기존의 국가기구 자체를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의 권력을 창출한 사건이었다. 배경을 살펴보자.
1848년 2월, 프랑스를 지배하던 루이 필립의 왕정[40]이 혁명으로 붕괴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와 한 대열에서 공화정을 수립했고, 주도적이었던 세력은 프롤레타리아였다. 2월 혁명에서 파리 노동자들은 '사회공화국'을 외쳤다. 노동자계급이 요구한 ‘사회공화국’은 단순한 정치적 자유뿐만 아니라 노동할 권리,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에 대한 지향을 담은 슬로건이었다.
노동자계급이 공화국을 세운 2월 혁명의 핵심 동력이었음에도, 혁명으로 세워진 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을 배제했다. 맑스 말마따나 노동자계급이 혁명으로 쟁취한 것은 해방을 위한 투쟁의 지반이었을 뿐, 해방 자체는 아니었던 셈이다. 노동자계급이 세운 공화국에 노동자계급의 자리는 없었다. 임시정부 내 노동부서는 무기력했고, 미약한 개혁에조차 ‘사회주의’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나마 임시정부가 노동자계급에게 내준 국민작업장[41] 마저 곧 폐지될 예정이었다.
「노동자 대중은 다음과 같이 외치며 파리 시청으로 행진하였다 : 노동을 조직하라! 별도의 노동부를 설치하라!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와 공동으로 2월 혁명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 부르주아지와 나란히 그들의 이해를 관철시키려 하였다. 노동을 조직하라! 그러나 임금노동, 그것이야말로 현존하는 부르주아적 노동조직이다. … 별도의 노동부를 달라! 그렇지만 재무부, 상업부, 공공사업부, 이것들은 부르주아적 노동부처들이지 않은가? 부르주아적 노동부처들과 나란히 서 있는 프롤레타리아적 노동부란, 하나의 무력한 부처, 천진난만한 소망의 부처 … 일 수밖에 없었다. …
국민작업장 … 반쯤은 소박하고 반쯤은 고의적인 파리 부르주아지의 혼동에 의해, 그리고 인위적으로 조장된 프랑스와 유럽의 언론에 의해, 저 노동수용소는 사회주의의 최초의 실현인 것으로 되었고, 그것과 함께 사회주의는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국민작업장은 그 내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명칭을 통해서, 부르주아 산업과 부르주아 신용과 부르주아 공화국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을 구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의 증오란 증오는 모두 이 국민작업장에 쏟아졌다. … 소부르주아들의 온갖 불안과 온갖 불만이 공동의 표적인 이 국민작업장을 향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처지가 날로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되어 갈 때 프롤레타리아 부랑아들이 삼켜버린 액수를 분노에 차서 계산하였다. 일만 하는 척만 하면 국가가 연금을 주는 것, 이것이 사회주의로군! 그들은 이렇게 속으로 투덜거렸다.」
1848년 6월, 국민작업장 폐쇄 방침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파리에서 봉기하자, 부르주아 공화국은 군대를 동원해 유혈 진압했다.[42] 그리고 이 유혈 진압은 반동의 길을 열었다. 봉기를 진압한 장군, 까베냑은 국민작업장을 공식 해산하고, 노동시간 제한법을 폐지하며, 모든 클럽(토론장)을 폐쇄하고, 사회주의자를 탄압하는 등 반동 정책을 전면화했다. 부르주아는 노동자계급의 급진화가 두려워 '질서'를 원했고, 결국에는 공화국마저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모두가 동의할 법한 목표 뒤에는 적대적 계급 사이의 치열한 이해 대립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혁명은 노동자계급의 패배와 함께 반동의 길로 접어들고, 1848년 12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조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는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구호 아래 1851년 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을 해체하고, 이듬해 자신을 ‘나폴레옹 3세’로 선포하며 제2제정을 열었다. 이 체제는 산업 부르주아지와 금융자본의 이익을 보호하는 관료적 독재체제였다. 맑스는 이를 ‘보나파르티즘’이라고 이름 붙이며 상이한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 속에서, 비대해진 자율적 국가권력이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국가 형태로 분석했다.[43]
제2제정 후반,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제국적 위신을 높이고 아메리카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 시도가 바로 멕시코 원정(1861-1867)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라틴 아메리카에 프랑스의 위성국가를 세우고자 군대를 파병했고,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대공을 멕시코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이는 현지 민중의 격렬한 무장 저항과 미국의 강경한 반발에 부딪혀 완전히 실패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철수했고, 막시밀리안은 고립된 채 민중군에게 붙잡혀 1867년 처형당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큰 외교적 타격과 굴욕을 입었다.
한편 유럽 대륙에서는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하며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자 모두와 협정을 맺고 양자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고자 하였으나, 프랑스는 국제무대에서 고립되었다. 내부적으로도 1866년의 경제 위기와 식량 가격 폭등은 도시 노동자와 하층민의 삶을 파탄에 몰아넣었고, 파리 등 주요 도시에서 파업과 시위가 확산되었다. 특히 파리에서는 제2제정 최초로 파업 진압을 위해 군대가 투입될 정도로 대중의 분노가 높아졌고, 정권은 외교, 경제, 정치 모든 면에서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보나빠르뜨는 모든 계급들에게 가부장적 은인으로 나타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계급에게서 빼앗지 않고서는 그 어떤 계급에게도 줄 수 없다”[44]는 맑스의 말이 집약하듯,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여러모로 인기 없고 취약한 정부였다. 제국의 권위와 통치력은 급속히 흔들렸고, 이를 만회하려는 도박이 바로 전쟁이었다. 1870년 7월,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비스마르크가 이끌던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한다(보불전쟁).[45]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주도하던 프로이센은 떠오르는 강국이었다. 프랑스는 연전연패 끝에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는 치욕까지 당했고, 프랑스 제2제국은 붕괴했다. 9월 4일, 온건 공화파들이 주도해 제2제정 종말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것이다(제3공화국).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 수립된 ‘국민방위정부’였다.
나폴레옹 3세는 포로로 잡히고 퇴위했지만 프로이센은 파리를 향해 계속 진군했다. 1870년 9월 이후 프로이센은 파리를 포위했고, 파리 노동자 민중은 프로이센 군대에 맞서 장기 방어전에 돌입했다. 두더지와 쥐까지 잡아먹을 정도의 처절한 항전이었다. 그러나 이미 파리의 부르주아들 사이에서는 “비스마르크가 블랑키보다 낫다”는 말이 떠돌았다. 부르주아들은 파리를 떠나기 시작했고, 노동자 민중이 파리 국민방위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1871년 1월 28일, 양국의 강화 협정이 이루어진다. 프로이센이 내건 조건은 가혹했다. 프랑스는 알사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 할양하고, 5년 동안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프로이센과의 강화 교섭은 파리 노동자 민중 몰래 진행되었다. 이 강화 협상을 주도한 인물이 ‘아돌프 티에르’였다.
이제 비스마르크와 티에르가 합의한 ‘전후질서’를 공식 추인하고 굴욕적 평화를 프랑스에 관철할 체계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2월 8일 프랑스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총선거는 독일의 침략군이 43개 도를 점령한 가운데서 실시되었다.[46] 비스마르크의 의도에 따라 진행된 선거에서, 반동적 왕당파가 대거 의회로 진출했고, 공화파는 위축되었다. 이렇게 보수파가 장악한 국민의회가 출범했고, 파리는 더욱 고립되었다. 그러나 파리는 무기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다.
1871년 3월 18일, 티에르는 파리 노동자 민중에 대한 무장해제에 나섰다. 정부군이 파리 노동자 민중으로부터 400여 문의 대포를 몰수하려 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었다. 수비대 병사들은 무기를 지켜내고 파리 주요 거점을 점거했다. 티에르 정부는 베르사유로 도망쳤고, 파리의 실권은 노동자 민중 손에 들어갔다. 파리코뮌의 출범이었다. “파리의 반동배는 3월 18일의 승리에 전율하였다. 그들에게 그것은 인민의 복수가 마침내 몰려온다는 신호였다. 1848년 6월의 날들부터 1871년 1월 22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손에 살해된 희생자들의 그들의 눈앞에 일어났던 것이다.”[47]
3월 26일에는 파리 20개 행정구별로 주민 대표를 선출하는 코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92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파리코뮌 의회”가 탄생했다. 이어 3월 28일, 붉은 깃발 아래 첫 총회가 열렸다. 파리코뮌은 모든 공직자를 직접 선출했고, 언제라도 소환 가능해짐에 따라 관료제의 특권은 폐지되었다. 상비군은 해체되었고 무장한 민중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었으며, 교육은 공공 무상교육으로 전환되었다. 파리코뮌은 기존 국가기구를 인수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원칙에 기초한 권력기구를 창출했다. 단순히 정부의 성격이 바뀐 것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의 성격이 바뀐 것이다.
파리코뮌은 다음을 보여주었다. “노동자 계급은 기존의 국가 기구를 단순히 접수하여 이것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 국가권력은 중립적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물질적 조직이다. 경찰, 군대, 관료제, 사법부 등은 노동자계급이 그 지배를 가능케 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자율적 행동을 억제하는 억압기구다.
만약 노동자계급이 기존 국가기구를 그대로 유지한 채 ‘진보적 법안’을 통과시키고, ‘공공 정책’을 확대해 나가면 혁명 없이도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진다면, 이는 파리코뮌의 교훈을 완전히 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코뮌의 경험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의 ‘고타강령’ 초안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한 바 있다. 그는 국가의 ‘자유로운 인민국가’라는 표현을 비판하며, “국가는 본질적으로 계급 억압의 도구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 억압기구의 철폐를 목표로 한다”고 단언했다.
노동자계급의 국가, 파리코뮌은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포화 앞에 고립된 채 맞서야 했다. 베르사유에 도피한 티에르 정부는 파리코뮌을 ‘무정부적 폭도들의 반란’으로 규정하며 반격을 준비했다. 프랑스 지배계급에게 파리코뮌은 프로이센보다 더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티에르 정부는 파리 진압을 위한 군대를 프로이센에 요청했다. 승전국 지배계급과 패전국 지배계급이 노동자계급 진압으로 하나가 되었다. 5월 중순, 베르사유군은 파리 외곽을 돌파했고,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피의 일주일’이라 불리는 참극이 벌어졌다. 거리마다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파리 노동자 민중은 마지막 순간까지 무기를 들고 저항하다 학살당했다.
파리코뮌은 실패했다. 단지 군사적 패배 때문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전역의 민중과 연대하지 못했고, 재정적‧군사적으로 고립되었으며, 결정적으로 반동 베르사유 군대에 맞서 선제공격을 주저했다. 그러나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보여준 새로운 국가형태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남아있다.
2) 칠레의 경험
1970년 9월, 칠레 노동자 민중은 살바도르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아옌데는 사회당, 공산당, 급진당 등 좌파와 중도좌파 정당이 결성한 ‘인민연합’(Unidad Popular, UP) 소속으로 출마하여 토지개혁, 대외 종속 탈피, 기간산업 국유화, 교육·보건 공공성 강화 등 개혁 프로그램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아옌데 정부는 집권 이후 미국 자본이 장악하고 있던 구리 산업을 비롯해 은행, 석유, 통신, 제약 등 주요 부문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1971년 7월 11일 의회가 만장일치로 의결한 헌법 개정에 기초한 것으로, ‘초과이윤 조항’을 통해 미국 자본에 대한 보상을 최소화했다.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의 길’을 내건 아옌데 정부는 이러한 개혁을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한 채 합법적으로, 즉 기존 헌정질서의 틀 내에서 추진하려 했다. 사실 인민연합정부는 출범부터 의회제도를 비롯한 기존질서 유지를 ‘보장법’으로 약속했다.[48] 현존 정치체제와 사법체제, 교육제도·노동조합·사회조직의 사회주의 지향으로부터의 독립, 출판과 대중매체에 대한 국가로부터의 독립 등을 서약하며 제도 내에 존재할 것을 다짐하고서야 출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국가의 골격을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자본은 아옌데 정부에 극렬한 반격을 개시한다. 칠레 자본가계급은 보수 언론과 정당, 교회, 자본가 단체들을 통해 조직적으로 아옌데 정부를 흔들었다. 특히 1972년 10월에 발생한 '트럭 소유주 연맹'의 대규모 파업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 파업은 CIA가 수백만 달러를 투입해 기획한 것으로, 물류망을 마비시켜 아옌데 정권을 흔들기 위함이었다.
더욱이, 의회 다수와 사법부는 인민연합 정부의 경제 개입 조치를 '합법성 결여'라 비판하며 사보타주에 나섰고, 1973년 8월 22일에는 하원이 아옌데 정부가 '헌법을 위반했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는 군부의 정치 개입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미 그 무렵 칠레 군대는 우익 쿠데타 세력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칠레 노동자 민중은 자본주의가 정한 틀 내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경제를 마비시키려는 자본의 사보타주와 군부의 쿠데타 위협 속에서, 1972년부터 1973년까지 노동자 민중은 공장과 지역에서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권력기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바로 산업조정위원회(cordones industriales, 직역하면 ‘산업 벨트’)이었다. 코르돈(산업조정위원회)은 작업장과 지역 단위를 잇는 노동자 조직으로 공장점거, 생산통제, 분배 조정, 쿠데타에 맞선 방어조직 형성 등을 수행했다. 유통부문에서는 노동자와 주부, 학생들이 '민중공급위원회'(공급과 물가위원회)를 구성하고 식량과 필수재의 배급을 자율적으로 조정했다. 산업조정위원회와 민중공급위원회처럼 노동자 민중이 자본가들의 공격에 맞서고자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들이 전국으로 확장되고 이것이 정부의 지지, 지원과 결합할 경우, 이것이 ‘이중권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아옌데 정부는 이런 조직을 잠재적 권력기구가 아니라 자본가들을 놀라게하는 성가신 존재들로 취급했다.
1973년 6월, 군부가 쿠데타를 시도하자 코르돈 조직은 수십 개의 공장을 접수하고 생산과 물자 이동을 자체적으로 통제하며 반격했다. 하지만 아옌데 정부는 이 흐름을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화된 기업을 자본가에게 돌려주는 조치를 취했고, 위기 타개를 위해 피노체트를 내무장관으로 기용하는 타협을 선택했다.
이는 치명적인 선택이었다. 결국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군부는 쿠데타를 단행했고, 아옌데는 대통령궁에서 자결했다. 칠레 군부는 대대적 학살을 자행했고, 정치적 억압뿐 아니라 경제 구조의 근본적 재편을 추진했다. 그 중심에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과에서 밀턴 프리드먼에게 학습한 신자유주의 교리로 무장한 경제학자 집단, 이른바 ‘시카고 보이즈’가 있었다. 이들은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고삐 풀린 시장 개방, 국영기업의 민영화, 노동권 축소, 복지 철폐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대대적으로 도입했다. 이는 이후 IMF가 세계 곳곳에 강요할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원형이었다. 아옌데 정부가 추구한 ‘사회주의로 가는 평화로운 길’은 무참히 짓밟혔고, 군부와 자본의 연합은 칠레 노동자 민중의 삶을 벼랑으로 몰았다.
칠레의 비극은 단지 민중연합의 적들이 악랄해서가 아니었다. 자본주의 국가기구의 ‘중립성’에 대한 환상, 부르주아 헌정질서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에 대한 집착, 그리고 노동자 민중이 아래로부터 만들어낸 투쟁과 기구에 대한 방기. 이것이야말로 ‘체제 내 사회주의’가 가진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혁명이 배제된 사회주의는, 자본이 허용하는 만큼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3) 그리스의 경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이어진 유럽 재정위기는 남유럽 국가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안겨줬다. 그리스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 중 하나였다.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으로 구성된 ‘트로이카’는 그리스 정부에 퇴직연령 상향, 연금 삭감, 최저임금 삭감, 단체교섭 제한, 해고 요건 완화, 공공부문 축소 등 가혹한 긴축정책을 요구했다. 그리스 실업률은 30%에 가깝게 치솟았고, 청년실업률은 50%를 넘겼다. 분노한 대중은 기존과는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49]
이런 상황에서 ‘시리자’(SYRIZA)와 같은 급진 좌파 정당들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급진좌파연합’ 이라는 뜻의 시리자는 2004년 여러 좌파정당의 연합체로 결성되었고, 이후 2012년에 하나의 통합 정당으로 재편되었다. 시리자는 긴축정책에 맞선 대중운동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면서 지지층을 빠르게 넓혀갔다.
시리자는 2012년 5월 1차 선거에서 16.8%, 6월 2차 선거에서 26.9%를 얻어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PASOK)를 제치고 제2당으로 부상했다. 2009년 선거에서 4.6%를 획득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장이었다. 결국 시리자는 2015년 1월 총선에서 36.3%를 득표하며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트로이카가 강요하는 긴축안에 맞선 대중투쟁이 시리자의 집권 배경이었다.
긴축을 둘러싼 협상이 시작되었다. 트로이카는 강경하게 가혹한 조건을 강요했고, 그 강경함 뒤에는 다른 채무국에 대한 경고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5년 7월 9일, 시리자는 굴욕적 긴축안을 트로이카에 제출한다. 2015년 7월 5일 긴축 찬반을 둘러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가 '긴축 반대'를 결정하고 단 4일이 지난 뒤였다. 7월 12일, 그리스와 트로이카가 합의한 긴축안은 △연금 삭감 △노동유연화 △해고 공무원 재고용조치 등 구제금융 합의에 위배되는 법률 철회 △500억 유로 규모 국유자산 민영화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대중의 기대를 품고 집권한 시리자는 트로이카의 긴축안 집행자로 전락했다. 시리자의 몰락은 통상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몰락 경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물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계급투쟁의 발전 전망에 중대한 타격을 주었다는 점에서, 시리자의 굴복이 남긴 상처는 더 컸다. ᅠ
명백히 드러났듯, 긴축의 중단은 열강의 대리자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입씨름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시리자는 트로이카와의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와 그리스 노동자 민중의 힘에 호소했어야 한다. 또한, 유럽노동자계급의 연대를 구하며 트로이카의 악랄한ᅠ강요에 맞서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어야 했다. 그 힘과 함께 ‘유로존 탈퇴’라는 도약을 감행하지 않고, ‘긴축의 거부’는 불가능했다.
ᅠ
시리자가 부상하던 당시, ‘혁명과 개량의 이분법을 넘어서자’는 말장난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에도 많았다.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는 지금, 시리자의 몰락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상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7. 왜 다시 혁명을 말하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는 낡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선거를 통해 제도를 바꾸고, 점진적인 개혁으로 사회를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나가자는 생각의 한계는 앞서 살펴본 역사적 경험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 법과 제도에 순응한 채로는 결코 스스로의 해방을 실현할 수 없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는 더 심화되고 있다. 극우의 부상, 확산하는 전쟁 위기, 기후재앙, 지구적 불평등은 모두 자본주의가 더 이상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다는 신호다. 우리가 다시 혁명을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이상적 구호가 아니라, 현실적 대안이기 때문이다.
그 씨앗, 혁명의 가능성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벌어지는 대중투쟁 속에 자라고 있다.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이 파업과 광장투쟁 과정에서 스스로 조직을 만들고, 직접적인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전체 노동자 민중의 요구로 투쟁의 범위를 확대할 때, 모든 억압과 차별에 맞서 단결할 때, 우리는 기존 질서와는 다른 사회의 가능성을 현실에서 목격한다. 그것은 의회나 정부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노동자 민중 스스로가 만드는 힘이다.
노동자계급이 사회를 통제하고, 생산과 분배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며, 억압과 착취 없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사회주의이다. 혁명은 여전히, 아니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절박하게 필요하다.
※참고로 읽어보면 좋을 자료
정성진, 제2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 (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중, 한울 아카데미)
프리드리히 엥겔스, 1891년 사회민주주의당 강령초안 비판을 위하여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6권』 중, 박종철출판사)
칼 마르크스, 프랑스 내전, 박종철출판사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론, 풀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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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동하, 「제1차 세계대전기 독일 사회민주당의 방어전쟁과 로자 룩셈부르크」, 2014
[2] 트로츠키, 『나의 생애 上』, 범우사, pp.370-371.
[3] 제프 일리, 『THE LEFT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 1848~2000』, 뿌리와이파리, pp.245-247.
[4] 맑스는 1864년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서한을 보내 재선을 축하한다. “유럽의 노동자들은, 아메리카의 독립 전쟁이 중간계급의 권력을 신장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제친 것처럼, 아메리카의 노예제 반대 전쟁이 노동자 계급의 권력을 신장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 맑스, 「아메리카 합중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5] 당시 독일은 프로이센, 바이에른 등 여러 제후국들로 쪼개져 있었다.
[6] 독일 사회민주당은 실천적 필요에 의해 탄생했으나, 당 내 이론적 차이는 지양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7] 정성진, 「제2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한울아카데미
[8]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한길사, pp.247-248.
[9] 수정주의는 노동자의 권력 장악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으나 혁명에는 반대했다. 즉, 점진적인 사회개혁과 선거를 통한 집권이 그들의 노선이었다. 개량주의자들은 권력 장악 자체에 반대했다. 물론 오늘날 양자의 큰 차이는 없다.
[10] 베른슈타인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블랑키주의적 봉기로 생각했다. ‘블랑키주의’는 소수의 비밀스러운 혁명가 집단이 봉기로 국가권력을 전복하고 사회주의를 수립할 수 있다는 이념을 뜻한다. 이런 사고는 19세기 혁명가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로부터 비롯되었다.
[11] 사회민주당의 독일 제국주의에 대한 동조적 입장은 이미 증기선 보조금 논쟁에서 드러난바 있다. 1884년, 독일 제국은 서아프리카의 토고, 카메룬 등의 영토를 식민지로 편입하면서 본격적인 제국주의적 팽창을 시작했다. 해외 식민지 방어와 통상 보호를 명분으로, 독일 정부는 증기선 구매 예산안을 제국의회에 제출했다.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이후 사회민주당으로 당명 개정)은 이 예산안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특히 항만 도시 함부르크 출신 의원들은 찬성 입장을 보였는데, 증기선 건조와 통상 확대가 노동자 고용 확대와 지역경제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실용적 이유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당은 증기선 예산안에 반대표를 던지기로 결정했다. 이 논쟁은 식민지 획득 경쟁에 대한 사회주의 정당의 태도를 결정짓는 중대한 정치적 시험대였다. 제국주의 문제를 놓고 사회민주당 내 균열은 커지고 있었다.
[12]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 한길사, p.59.
[13] 아이작 도이처,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pp.293-294.
[14] https://en.wikipedia.org/wiki/Hun_speech
[15] “황제들과 제국들은 오래된 것이지만 제국주의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1883년 사망한 마르크스의 저술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제국주의란 단어는 1870년대에 영국에서 처음 정치적 용어로 등장했으며 1870년대의 마지막 무렵까지도 새로운 용어로 간주되었다. 그것이 일반적 용법으로 사용된 것은 1890년대였다.” 에릭 홉스봄, 한길사, 『제국의 시대』, p.159.
[16]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bernstein/works/1899/evsoc/ch03-3.htm#n33
[17] “논리적인 비스마르크는 이미 1880년대에 야심에 찬 사회보장계획으로 사회주의자들의 선동 기반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으며, 그의 이러한 경로를 오스트리아와 1906~1914년의 영국 자유주의 정부가(연금, 공공노동교환, 의료·실업보험), 그리고 몇 차례에 걸친 주저 끝에 프랑스가(노인연금 지급, 1911년) 뒤따르게 되었다. 매우 흥미롭게도, 최근에 ‘최고의 복지국가’라 불리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당시에는 이러한 경향에 매우 뒤처져 있었고 다른 여러 나라들은 그저 형식적인 태도만을 취하고 있었으며, 카네기와 록펠러와 모건의 미국은 그와 같은 정책들이 전무했다.”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한길사, p.224.
[18] 엥겔스, 「1891년 사회민주주의당 강령초안 비판을 위하여」,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6권』, 박종철출판사, pp.347-348.
[19] 아이작 도이처,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pp.293-294.
[20]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 정당, 노동조합』, 8장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단결」 https://www.marxists.org/archive/luxemburg/1906/mass-strike/ch08.htm
[21] https://de.wikipedia.org/wiki/Massenstreikdebatte
[22] 1905년 12월,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언론인을 가장해 러시아로 잠입해 러시아 대중파업을 직접 관찰했다.
[23]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 정당, 노동조합』, 8장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단결」
[24] “미숙련 노동력의 공장유입과 전쟁이윤에 대한 탐욕스러운 각축은 모든 곳에서 노동조건의 하락을 초래하고, 가장 야만적인 착취방법들을 등장시켰다. 생활비의 증가는 자동적으로 실질임금을 하락시켰다. 경제파업은 이에 대한 대중의 불가피한 대응이었다. 특히 이 투쟁이 개전으로 유보되어 왔기 때문에 그 규모는 폭풍우와도 같았다. 파업은 집회, 정치선언문의 채택, 경찰과의 대치, 그리고 종종 발포와 희생자 발생으로 이어졌다.”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上, 풀무질, pp.74-75.
[25] “농민들은 공산품을 입수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는 급속히 가치가 떨어져 가는 지폐를 받고 농산물을 내놓지 않으려 했다. 물건이 심각하게 부족해짐에 따라 임금과 뛰어오르는 생활비 사이의 격차가 커졌다. … 생필품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서 실질임금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수준의 3분의 1정도로 줄어들었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혁명의 시간』, 교양인, pp.34-35.
[26] 오스카 안바일러,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 지양사, 116p.
[27] 오스카 안바일러,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 지양사, 116p.
[28] 1905년과 달리,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병사들의 연합 평의회 형태였다.
[29] 페로(M. Ferro), 《1917년 2월 러시아혁명》, 60p, 페로, 《10월혁명》, 183p. 도니 글룩스타인, 『서구의 소비에트』 28쪽에서 재인용.
[30] https://www.marxists.org/history/ussr/government/1917/03/01.htm
[31] 볼셰비키 역시 ‘다가올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우선 부르주아 혁명을 거친 후, 한참 뒤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다가올 것이었다. 하지만 1917년 4월, 레닌이 돌아오자마자 이 입장을 뒤집는 「4월 테제」를 발표했다. 이 테제는 볼셰비키는 물론, 당시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테제는 레닌의 이름으로만 발표되었다. … 레닌과 함께 이 문서에 서명한 조직, 그룹, 개인은 하나도 없었다.”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上』 , 풀무질, p.422.
[32]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 분열 후 형성된 온건 사회주의 세력. 1917년 당시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의 완성을 주장했다.
[33] 이 해협 지대는 러시아가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다.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3월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러시아는 콘스탄티노플, 보스포루스 해협, 다르다넬스 해협을 차지해 지중해 진출 경로를 확보할 예정이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 북아프리카 등 지역을 차지할 예정이었다.
[34] 「“전쟁을 끝내라!” … 이 구호는 여성 시위대, 뷔보르그지구 노동자들, 근위병 연대에서 터져나왔다. 3월초 의회의원들이 전선을 순시했을 때, 특히 나이 많은 병사들은 계속 이런 질문을 했다 : “토지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오가고 있습니까?” 의원들은 토지문제는 제헌의회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그러나 여기서 모두가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공공연히 드러내지 못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 “글쎄, 토지는 내가 살아있지 않으면 필요 없지요.” 먼저 평화, 다음에 토지! 이것이야말로 혁명을 일으킨 병사들의 원래 강령이었다.」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上, 풀무질, pp.370-371.
[35] 레닌, 「임시정부의 각서」, 1917.4.20.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apr/20f.htm
[36] 레닌, 「슬로건에 관하여」, 『지젝이 만난 레닌』, 교양인, pp.102-103.
[37] “이즈음 볼셰비키의 운세는 급속도로 상승하고 있었다. … 코르닐로프 사건 이후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는 다수를 확보했다. … 레닌이 4월 테제에서 예견한 대로 혁명의 두 번째 단계로의 이행을 정당화시킬 제 조건이 꾸준히 성숙하고 있었다. 레닌의 첫 태도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의 부활이었다.“ E.H.카, 『볼셰비키 혁명사』, 화다, p.111
[38] “소비에트 민주주의체제 하에서 소비에트에 권력이 집중되었다면, 볼셰비키당은 소비에트의 다수파가 될 완벽한 기회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자신의 강령에 기초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럴 경우, 무장봉기는 필요 없었을 것이며, 정당 간의 권력 이양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4월부터 7월까지 당은 소비에트를 통한 혁명의 평화적 발전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참을성 있게 설명하라“ ― 이것이 볼셰비키당 정책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7월 시기로 인해 상황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中』 , 풀무질, 410p.
[39]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https://www.marxists.org/archive/luxemburg/1900/reform-revolution/ch08.htm
[40] 1830년 7월 혁명으로 등장했다는 이유로 ‘7월 왕정’이라고 불렸다.
[41] 말하자면 당대의 공공근로 사업장이라고 할 수 있다. 1848년 2월 27일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설립된 국민작업장은, 파리 및 다른 도시의 실업노동자들을 위한 공공 구호시설로, 노동자들은 임금으로 빵과 소금을 받았다.
[42] “부르주아 공화제가 승리를 거두었다. 금융 귀족, 산업 부르주아지, 중간층, 소부르주아들, 군대, 기동방위대로 조직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지식인들, 성식자들, 농촌 주민 등이 부르주아 공화제를 지지하였다. 빠리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지한 것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이 승리 후에 3,000명 이상의 폭동 가담자들이 학살당했고, 15,000명이 재판도 없이 추방되었다. 이 패배로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 무대의 뒷전으로 물러선다.” 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6권』
[43] “강력하고 무제한적인 정부는 이 ‘물질적 질서’를 폭력으로 옹호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모순으로 가득 찬 임무는 그의 정부의 모순들, 즉 이번에는 이 계급 다음 번에는 저 계급을 때로는 획득하려 하고 떄로는 굴복시키려 함으로써 결국 모든 계급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드는 불명확한 암중모색을 설명한다.” - 같은 책
[44] 같은 책
[45]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을 촉발한 직접적인 원인은, 프로이센 왕가(호엔촐레른 가문)에 속한 레오폴트 후작의 스페인 왕위 계승에 프랑스가 반대하면서 격화된 외교 분쟁이었다. 스페인 왕위를 호엔촐레른 가문이 계승할 경우, 프랑스는 남쪽과 동쪽 모두에 적을 두게되는 셈이었다.
[46]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까치, 291p.
[47] 맑스, 「프랑스에서의 내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4권』, 박종철출판사, p.57
[48] 1970년 9월 4일, 아옌데는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 선거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 당시 칠레 헌법에 따라,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국회가 상위 두 후보 중 한 명을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했다. 아옌데의 인준을 위해서는 기독교민주당(PDC)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들은 아옌데 정부가 현행 제도를 유지할 것이라는 보장을 요구했다.
[49] 기존 그리스 정치판도는 중도우파 신민주주의당(ND)과 중도좌파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 (PASOK)이 번갈아가며 집권하던 구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