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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운사 연재 6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폭발적 성장을 이어갔다.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지역별·업종별 연합조직을 건설하고 전노협을 건설해 냈다. 민주노조운동은 역동적인 연대투쟁과 지역·전국 총파업을 통해 스스로를 지켜냈다. 민주노조운동은 중소 제조업을 넘어 대기업과 공공부문으로 확대됐고, 마침내 1995년 민주노총을 건설했다. 그런데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전투적·변혁적 세력을 대신해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1996~98년 노동법을 둘러싸고 양대 계급의 대격돌이 펼쳐졌다. 민주노총의 위력적인 총파업이 한국사회를 한 달 동안 뒤흔들었으나 성과는 초라했다. 곧바로 닥친 IMF 외환위기를 빌미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마침내 도입됐다. 1996~98년의 대격돌에서 노동자계급이 패배하면서 비정규직 전면화로 가는 길이 열렸다.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한국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사회 체제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후반까지 10여 년의 과도기를 거쳐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이동했다. 이전 시기 30여 년 이상 한국 자본주의를 지탱하던 여러 요소들이 한꺼번에 큰 격변에 휩싸인 결과였다. 1989~91년 소련·동유럽 붕괴와 함께 세계적으로 냉전 질서가 해체되고 신자유주의 질서로 대체됐다. 국가 지원 아래 비대하게 성장한 독점재벌이 국가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세계 시장으로 진출했다. 1987년을 기점으로 노동자계급이 대규모로 진출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확산됐다.
이 과도기 동안 자본은 과거의 병영적 노동통제를 대신하여 신경영전략과 사회적 합의주의를 추진했다. 또한 신자유주의 질서로 본격 진입을 대비하며 대대적인 노동법 개악에 나섰다. 1997년에 닥친 IMF 외환위기는 신자유주의 질서로 이행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1) 냉전종식과 신자유주의 질서의 세계화
19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소련과 동유럽의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에 누적된 모순을 타개하고자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폈지만,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의 몰락을 피할 수 없었다. 1989년 8월 폴란드에 비공산당 정부가 들어섰고, 11월 동·서 베를린을 가르던 장벽이 무너졌으며, 1990년 10월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합됐다. 마침내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줄곧 지속되던 미국 주도 서방진영 대 소련 주도 동방진영의 냉전이 서방진영의 승리로 종식됐다. 미국은 세계의 유일 패권국가가 됐다.
미국은 냉전 시기 대척점에 서 있던 한국을 특별 관리했다. 한편으로 정치군사적 종속관계를 지속적으로 강요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특혜를 제공했다. 한국에게 유례없는 규모의 경제·군사원조를 제공했고, 한국 자본의 빠른 성장을 돕기 위해 자국 시장도 열어주었다.
그러나 냉전의 종식과 함께 이러한 특별대우도 끝났다. 한국은 냉전 체제에서 누렸던 지정학적 특권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다. ‘친미 쇼윈도’로 보호·육성되던 한국 자본은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에 냉혹하게 내던져졌다.
때로는 미국 정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과의 양자 협상에서, 때로는 GATT와 세계무역협정(WTO)의 다자 협상에서 압력이 줄기차게 전달됐다. 그 내용은 똑같았다. 세계를 뒤덮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여 한국 경제를 개방하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1997년 IMF 외환위기는 신자유주의 질서 정립을 위한 전면적 구조조정을 한국 사회에 강요했다.
한국도 이러한 전 지구적 전환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여러 신흥시장처럼 한국도 거대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갔다. 1990년대 내내 한국 정부는 경제를 자유화하라는 국제적 압력에 시달린다. 압력은 여러 방향에서 들어왔다. … 외부 세력이 요구한 경제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은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와 똑같았다. …
재정수지 적자를 GDP의 1~2 퍼센트 내로 운영 … 공공 지출을 친성장적 투자로 최대한 전환 … 금융시장을 탈규제화 … 환율에 경쟁 체제 도입 … 무역 자유화 …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 … 국공유기업들을 민영화 … 탈규제 … 소유권의 법적 보호 …
이러한 정책적 권고 사안들은 IMF가 1997년 위기 때 구제금융 조건으로 제시한 항목들과 거의 일치한다. 차이가 있다면, 1997년 이전에는 이러한 구조조정이 점진적으로 추진된 반면, 1997년 위기 이후에는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1]
2) 독점재벌의 비대한 성장
1980년대 말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5위 국가로 성장했다. 산업화가 시작되던 1960년대 초에는 가장 저개발된 국가 중 하나였지만, 이제 과잉 도시화와 농촌 공동화를 걱정하는 상황이 됐다. 그와 같은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은 동시에 거대한 자본축적과 독점자본 형성의 과정이었고, 그 결과 비대한 재벌들이 등장했다.
군사정권의 지원과 보호 아래 성장한 재벌들은 1980년대 중후반 국가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전망을 수립하고 이해관계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국가를 주도하려는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일차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재벌의 독자적인 연구기관 설립과 운영이었다. 재벌들의 결집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1967년에 설립됐지만, 1980년대 중후반 정부 산하 연구기관들과 별도로 독자적인 경제분석과 산업정책을 활발히 제시하기 시작했다. 재벌그룹별로도 앞 다투어 독자적인 연구기관을 설립했다. 대우경제연구소(1984년), 쌍용경제연구소(1985년), 삼성경제연구소(1986년), 현대경제사회연구원(1986년), 럭키금성경제연구원(1986년), 동양경제연구소(1987년), 기아경제연구소(1989년) 등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설립됐다.
비대한 재벌은 과거처럼 정부의 지시에 순응하지 않게 됐으며, 1980년대 은행의 민영화 이후 정책금융의 위력이 감소하면서 재벌을 통제할 수 있는 정부의 수단도 줄어들었다. 재벌은 각종 명목의 ‘준조세’뿐만 아니라 그동안 자신들을 육성하는 데 기여했던 보호와 규제조차도 거추장스럽게 여기게 됐다. 그리하여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미 민간주도형 경제로의 이행이 주장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말 이후 ‘규제완화’는 재벌의 제1의 슬로건이 된다.[2]
일부 재벌들은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직접 정치에 뛰어들기도 했다. 특히 현대그룹은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1992년 4월 총선에서 국민당을 창당하고 12월 대선에서 총수 정주영을 후보로 내세웠다. 대우그룹의 김우중도 정계 진출을 공공연히 모색했다. 정치의 전면에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재벌들은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크게 강화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대로 정부 정책을 견인하기 시작했다. 삼성그룹은 그 대표 주자였다.
비대해진 재벌은 1990년대 들어 세계시장 진출을 적극 추진했다. 1990년대 들어 도시화 속도가 현저히 둔화되는 등 한국 안에서는 신규 산업투자로 원활한 수익을 얻기가 훨씬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재벌들은 공격적으로 세계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동안 자신들을 선도하던 일본의 세계적인 제조업체들도 이제 경쟁상대로 인식했다. 1989년 대우그룹 총수 김우중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을 펴냈다. 1993년 삼성그룹 총수 이건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회의를 열고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꿔라”고 말했다.
이처럼 냉전 종식으로 세계질서가 변화하면서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에 뛰어들도록 강요당했을 때, 한국의 재벌들은 적극적인 세계시장 진출을 통해 능동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선진국 클럽으로 간주되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김영삼 정권 주도로 추진한 것은 그와 같은 한국 자본가들의 기세를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3] 그러나 1990년대 재벌들의 적극적인 세계시장 진출은 공격적 투자를 위한 과도한 차입, 무한경쟁에 따른 수익성 저하로 오히려 재벌들을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다. 결국 이는 한국의 외환보유고를 고갈시키며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불러오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4]
3) 노동자계급의 진출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확산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살인적인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고강도 착취체제를 붕괴시켰다. 민주노조의 폭발적 확산은 실질임금의 급속한 상승과 노동시간 단축으로 귀결됐다. 제조업 분야에서 1987~91년의 실질임금 인상률은 12.5%로 1982~86년의 5.4%에 비해 두 배가 넘었다. 병영적 노동통제에 입각한 일방적 노사관계가 대립적 노사관계로 대체됐다.
1987년 이후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꾸준히 확산됐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됐고,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했으며,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시행됐다. 김영삼 정권은 1993년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해체했다. 5공화국 시기 부정부패와 비자금에 대한 사법처리가 진행됐다. 1995년에는 민중들의 투쟁을 바탕으로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학살에 대해서도 사법처리가 진행돼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17년의 징역형이 선고됐다.[5]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1989), 환경운동연합(1993), 참여연대(1994) 등의 시민단체들도 속속 등장했다.
군사파시즘에 맞섰던 1987년 6월 민중항쟁은 군사파시즘을 온전히 철폐하지 못하고 절반의 승리만을 거둔 채 마무리됐다. 이후 노동자계급의 진출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확산은 군사파시즘의 요소들을 더욱 약화시켰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기무사, 안기부 등의 존재를 통해 군사파시즘은 완전히 척결되지 않은 채 부르주아 민주주의 속에 잔존했다. 따라서 한국의 정치체제는 일단 군사파시즘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 채 (자본가계급에 대한 온갖 특혜와 노동자·민중에 대한 사회경제적 대공세를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질서라는 또 다른 억압적 정치제제로 귀결됐다.
4) 자본의 대응 - 신경영전략, 사회적 합의주의, 노동법 개악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기존의 병영적 노동통제가 붕괴하자, 자본가계급은 이를 대체할 새로운 노동통제 체제를 구축해야 했다. 자본가들은 변화한 조건에 대응하는 기업 단위의 새로운 통제전략으로서 이른바 ‘신경영전략’을 추진했다. 이를테면 대우조선은 열심히 일하면 잘 살게 해주겠다며 ‘희망90S운동’을 들고 나왔고, 현대중공업은 반 단위 자율생산체계를 확립한다며 ‘두레활동’을 내세웠다. 1987년 이후 무너진 자본의 현장장악력을 회복하고 자본의 새로운 헤게모니를 구축하려는 전략적 실천이었다.
신경영전략의 주요 내용은 고용유연화, 작업조직 재편, 생산공정 합리화, 능력주의 인사·임금제도 도입, 기업문화 혁신 등이었다. 자본가들은 체계적인 노무관리를 실시하면서 노동조합의 현장 기반을 잠식해 들어갔다. 또한 노동조합과 파업의 기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파업기간 ‘무노동 무임금’ 적용, 노조간부 고소고발,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의 공세를 폈다.
김영삼 정권의 등장과 함께 사회적 차원에서 자본가계급이 꺼내든 새로운 전략은 ‘사회적 합의주의’였다. 민주노조운동은 1990년대 들어 자본가계급의 반격과 경기침체가 맞물리면서 여러모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상당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적 합의’라는 형식을 통해 격렬한 노자대립을 피하면서 생산성과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정권과 자본의 의도는 처음에는 1993~94년 경총과 한국노총의 임금인상 합의로 나타났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통제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한국노총과의 합의는 아무런 실익이 없었다. 오히려 민주노조운동은 한국노총에 대한 규탄 속에서 민주노총 건설의 동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자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민주노조운동 세력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한편 김영삼 정권은 1994년 11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순방길에 ‘세계화’를 선언했다. 1995년 1월에는 ‘세계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8월에는 ‘세계화의 비전과 전략’을 발표하면서, 한국 자본주의를 세계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 속에 편입시키기 위한 준비를 진행해 나갔다.
1996년 4월 김영삼 정권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악을 추진하면서 민주노총에 ‘사회적 합의’를 제안했다. 민주노총은 노동법 개정의 희망을 안고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에 참여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이 제안한 ‘사회적 합의’의 실체는 일방적으로 자본가계급을 편드는 내용에 노동자계급이 들러리를 서라는 것이었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합의’를 거부하고 노개위를 탈퇴했다.
1996년 12월 26일 김영삼 정권은 집권 신한국당을 통해 노동법 개악안을 국회에서 새벽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민주노총 총파업이 한 달가량 거세게 전개되자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대중이 이끌던 국민회의와 신한국당의 재협상 결과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 2년 유보 등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에서 극히 일부 내용만이 수정된 채로 재개정된 노동법이 1997년 3월 통과됐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포한 흐름은 1997년 말 IMF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사태로 한국 자본주의를 휩쓸고 들어왔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외채 상환 요구가 봇물처럼 밀려오자 유동성 위기에 빠진 한국 정부는 IMF에 긴급지원을 요청하여 1997년 12월 3일 IMF와 구제금융 지원에 합의했다. 구제금융을 계기로 한국의 경제정책 전반이 IMF의 관리체제 아래 놓였고, 이를 빌미로 신자유주의 공세가 대대적으로 시작됐다.
새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주도로 1998년 1월 15일 구성된 ‘노·사·정 위원회’는 자본가계급의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위한 이데올로기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수단이었다. 민주노총을 포괄한 노사정위원회는 1998년 2월 6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에 합의했다. 그런데 그 핵심 내용은 민주노총 총파업 때문에 2년 유보 상태에 있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즉시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1] 박형준, 2013, 『재벌, 한국을 지배하는 초국적 자본』, 책세상, 320~321쪽.
[2] 정성진, 2005, 『마르크스와 한국 경제』책갈피, 134쪽.
[3] 한국은 OECD에 1996년 12월 12일 가입했다. OECD는 1961년 유럽과 북미의 선진 20개국을 포괄하며 출발했는데, 이후 일본(1964), 핀란드(1969), 호주(1971), 뉴질랜드(1973), 멕시코(1994), 체코(1995), 헝가리(1996), 폴란드(1996)가 한국보다 먼저 가입했다. 2025년 현재 38개국이 가입해 있다.
[4]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30대 재벌 가운데 16개가 몰락했다.
[5] 그러나 1997년 12월 대통령 김영삼은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의 건의를 받아 전두환과 노태우를 특별사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