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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다시 마르크스주의 연재#4] 국가와 혁명,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계승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 운동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정치 노선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이었다. 자기해방 운동의 전진, 즉 노동자 계급 스스로의 발전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촉진하고 계급 투쟁의 선두에 서서 안내하는 것, 이것이 마르크스가 제기했던 사회주의자들의 역사적 임무였다. 사진: 1917년 6월 러시아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는 자본주의 국가를 대체할 노동자권력의 현실태였다. (편집자 주) 4부. 국가와 혁명,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계승 1. 자본주의 극복과 노동자 계급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분석하면서 마르크스는 갈수록 반동화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체제로 대체될 수밖에 없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특히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발전함으로써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나날이 창출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그러나 사회적, 집단적 생산력을 담고 있는 거대한 작업장과 기계가, 또한 이것들의 전 세계적 생산 연결망이 그 자체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혁명을 가능케 하는 물질적 토대를 제공할 뿐이다. 혁명의 역사적 주체는 오직 살아 있는 인간이다. 이러한 혁명의 주체라는 문제를 간과한다면, 마르크스주의는 대단히 불완전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 주체가 누구인가와 관련해 아주 분명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입장을 개진했다. 바로 노동자 계급이었다. 왜 노동자 계급인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모순의 결과로부터 신음하고 있는 피착취 계급만이 혁명의 담당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갈수록 반동화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중간 계급, 심지어 자본가 계급도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자본가 계급은 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만 자기 이익을 실현할 수 있다. 중간 계급은 약간의 성공 가능성에 마취돼 자본주의에 굴복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은 다르다. 노동자 계급은 갈수록 ‘무산자’의 성격이 확고해진다.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인 노동력을 제외하면, 노동자는 다른 어떤 생존수단도 갖지 못한다. 소기업 같은 소규모 자본이 널리 퍼져 있던 옛날에는 성공해서 사장이 되는 것을 조금은 꿈꿀 수 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그런 가능성은 닫히고 있다. 날 때부터 재벌이나 사장의 아들딸이 아닌 마당에, 평범한 노동자가 자본가가 되는 문은 사실상 닫혀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노동자는 이 체제에서 자신이 더욱 보잘것없고 무기력한 지경으로 추락해 간다고 느낀다. 마르크스는 고통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혁명적 해결책을 단호하게 지지할 수 있는 계급만이 혁명적 과업을 일관되게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점에서 중간 계급은 자격 미달이었다. 왜냐하면 중간 계급은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면서, 유산자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에 미련을 두기 때문이다. 작은 농지나 가게를 갖고 있는 중간 계급은 갈수록 성공 확률이 떨어짐에도, 자신이 보유한 작은 생산수단이나 교환수단에 여전히 미련을 갖는다. 이들은 무산자의 혁명 대신, 유산자로서 성공을 꿈꾼다. 작은 사장에서 큰 사장으로 도약하는 것 즉, 중간 계급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도약하는 것에 미련을 둔다. 반면 노동자에게는 그런 미련이 갈수록 사라진다. 노동자가 작은 가게를 차리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직장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해고된 결과 어쩔 수 없이 택하는 불행한 결과일 뿐이다. 양질의 일자리만 보장된다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자영업을 때려치울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사회의 생산수단 중 더욱 결정적인 부분이 소수 자본가 수중에 집적 집중될수록, 그 반대편에서는 ‘무산자’로서의 노동자의 처지가 더욱 확고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무산자인 노동자에서 유산자인 자본가로 도약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결과 노동자는 유산자가 아니라 무산자로서, 개인이 아니라 단결된 전체로서만 해방될 수 있음을 갈수록 분명하게 느낀다. 모든 생산수단을 사회의 공동 소유로 전환해야만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점이 노동자에게는 갈수록 뚜렷해진다. 이것은 노동자 운동을 혁명적 방향으로 이끄는 박차가 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단결하고, 이 단결의 범위가 확장될수록 노동자에게 ‘함께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생산수단을 사회적 공동 소유로 전환하는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음이 분명해진다고 보았다. ‘모든 노동자가 하나로 단결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때’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공동의 해방의 길이 바로 사회주의라고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자 운동을 하나의 단결된 대오로 조직하는 데 결정적 의미를 부여했다. 가장 결정적인 질문 하지만 노동자 계급을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로 제기하는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몇 가지 주요한 반론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반론은 자본가 계급의 온갖 지배 책략과 힘을 능히 분쇄할 수 있을 만큼 노동자 계급이 강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반론은 결국 ‘혁명의 주인공으로서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불신’을 깔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아주 분명하게 대답했다. 마르크스는 ‘고통받는 것’만으로는 혁명 계급의 자격을 획득할 수 없고, 갈수록 그 힘이 강화되는 계급, 그래서 기존 지배 계급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계급만이 혁명 계급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계급이 바로 그런 계급이었다. 우선 노동자 계급은 갈수록 사회 내에서 다수를 점해 간다. 중간 계급은 몰락해 다수가 노동자 계급으로 전화된다. 산업과 업종은 변화할지라도, 노동자 계급은 모든 곳에서 더욱 결정적인 다수가 되고 있다. 초기에는 광업, 제조업에서 출발했던 노동자들이 의료, 유통, 서비스 등 온갖 산업 분야에서 다수자로 모습을 드러낸다. 사무, 금융, 연구, 기술, 교육, 공무원, 언론 분야에서도 더욱 결정적인 다수가 특권적 피고용인에서 일반 노동자로 급속하게 바뀌고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발전의 실을 따라 노동자 계급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중국,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최근 수십 년 사이에 10억 명이 넘는 새로운 노동자 계급이 탄생했다. 이 숫자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시기 전 세계 노동자 계급을 합한 숫자보다 훨씬 더 많다. 숫자는 노동자 계급이 가진 위력의 일부만을 보여 준다. 더 결정적인 것은 노동자 계급이 가동하고 있는 사회적 생산능력의 규모다. 고도로 집단적으로 조직된 대작업장 노동자 한 명이 가동하는 사회적 생산력은 중간 계급 한 명이 가내수공업이나 농장, 가게에서 가동하는 사회적 생산력에 비해 몇 배, 심지어 수십 배 이상 크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이 전체 사회에서 차지하는 인구 비중에 비해, 노동자 계급이 가동하는 사회적 생산력의 규모는 훨씬 더 크다. 아프리카나 중동의 극히 후진적인 몇몇 나라를 제외한다면,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발전한 나라 대부분에서 노동자 계급이 가동하고 있는 사회적 생산력은 90%에 육박하거나 그것을 상회한다. 이것은 소극적, 방어적 차원에서는 노동자 파업의 힘을 극대화한다. 더 나아가 적극적, 공세적 차원에서 이는 노동자 혁명의 힘, 그리고 노동자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힘을 극대화한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수백만 시위는 노동자 파업과 결합되지 않는 한 자본주의 생산을 결코 타격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력이 결집된 주요 산업에서 전개하는 노동자 파업은 즉각 자본주의 사회를 코너로 몰아붙인다. 게다가 거리 시위는 그 자체로는 대안 사회를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들불처럼 확대되고 혁명적 지향을 띠는 노동자 파업은 새로운 생산 체제를 수립함과 동시에, 국가를 뿌리에서부터 완전히 재조직할 수 있는 위대한 조직, 즉 경제와 정치를 하나로 융합한 ‘노동자평의회’를 잉태한다. 2. 노동자 계급이 역사의 주인이 된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혁명의 괴물이 자라난다면, 자본가 계급은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 노동자 계급의 힘을 줄여 놓으려 발악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혁명을 예방하는 전략을 집행하면, 노동자 혁명을 저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르크스는 그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의 힘을 증대시키지 않는 자본주의 발전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한대의 축적욕과 경쟁이 불러오는 자본의 집적 집중은 노동자를 거대한 규모로 집적하고 집중할 수밖에 없다. 좁은 국내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자본의 필사적인 해외 진출 경향은 노동자 계급을 세계 전반에 확산할 수밖에 없다. 다른 무엇보다 자본의 이윤의 원천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다. 노동자 계급을 지워 버린다면, 자본의 이윤마저 지워진다. 이는 ‘임금노동’의 뒷면이 바로 ‘자본’이라는 사실, 즉 자본-임금노동이라는 관계, 모순, 대립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론이다. 그 점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결정적 힘은 바로 자본 그 자체에서 나온다고 규정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본주의에 맞선 혁명의 주인공인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불신이 거듭해서 등장한다. 심지어는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도 그런 주장이 등장하곤 한다. 그런 주장의 물질적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시적으로 노동자 운동이 퇴보하거나 혁명적 지향을 잃고 비틀거리는 위기 상황, 또는 격렬한 계급 투쟁에서 일시적으로 노동자 운동이 패배한 결과,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힘이 잠시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이런 상황에서 용기와 혁명적 침착성을 잃은 사람들은 ‘노동자 계급에게 안녕을 고할 때’라고 외치면서, 노동자 계급을 대신하는 모종의 새로운 혁명 주체를 고안하기 시작한다. 마르크스의 접근은 달랐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이 혁명의 주인공으로 도약하는 과정은 결코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며, 가장 처절한 계급 투쟁 속에서 이뤄지는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역사적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계급 투쟁, 그리고 이 계급 투쟁 속에서 이뤄지는 전 세계 노동자 계급의 총단결, 나아가서 사회주의라는 혁명적 대안에 대한 확신을 통해서만 노동자 계급은 비로소 혁명의 계급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그런 역사적 과정이 필수적인 이유로서, 그 과정을 통해서만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가 심어 준 오물을 토해 내면서 새로운 공동체 사회를 열 수 있는 위대한 자격과 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 역사적 과정을 촉진하고 맨 앞에서 이론적, 실천적으로 이끌고 안내하는 선봉장이 되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자들의 역사적 역할임을 마르크스는 강조했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 과정은 마르크스의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과정이었다. 착취자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본가 계급의 교활하고도 필사적인 책동이 고도화, 전면화됐기 때문이다. 자본가 계급은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의식을 해체하는 갖가지 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해 왔고 갈고 다듬어 왔다. 개량주의, 조합주의, 관료주의의 영향력을 활용해 노동자 운동을 소부르주아적, 부르주아적 의식으로 마취시키는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 전략은 갈수록 고도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기본 노선은 여전히 옳다. 노동자 계급의 힘은 양적, 질적으로 더욱 강해지고 있다. 노동자 계급의 수, 세계적 연결, 사회적 생산력에서 차지하는 비중 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무산자로서 노동자 계급의 성격, 사회주의 없이는 해방될 수 없는 노동자 계급의 처지도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더 이상 생산력 발전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이 초래하는 불평등의 확대, 야만화 경향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와 함께 개량주의, 조합주의, 관료주의와 같은, 노동자 운동의 거대한 혁명적 힘을 거세하는 내부 요소들에 맞서야만 노동자 운동을 전진시킬 수 있다는 노동자들의 자각도 성장하고 있다, 이런 내부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는 내적 힘을 부단히 성장시켜 갈 것이다. 3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펼쳐진 노동자 운동의 수많은 실천 경험들이 그 길을 안내할 것이다. 아직 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해지지는 못했지만, 최근 200년 사이에 자본주의에 맞서 벌어진 모든 결정적 투쟁에는 노동자 계급이 변함없이 중심에 서 있었다. 앞으로도 그 점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려는 모든 진지한 투사들은 바로 이 노동자 계급을 향해야 한다. 이 노동자 계급 속에서만 자본주의를 때려잡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 투쟁을 통해 노동자 계급이 바로 그 위대한 힘을 자각하고, 자본주의가 심어 준 온갖 오물을 토해 내면서 자신의 힘을 현실화할 때, 아무리 고도한 자본주의 체제의 시도도 결국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것이다. 3. 국가란 무엇인가?(국가의 본질) 마르크스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되지 않은 통합물로 접근했다. 특히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에서 그 점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경찰, 군대, 관료제로 구성된 자본가 국가가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등장하기 이전에, 자본가 계급은 경제적 지배권을 이미 거머쥐고 있었다. 봉건적 생산력을 대체하는 자본주의 생산력이 기계제 대공업과 시장경제의 발전 속에서 이미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상태에서, 자본가 계급은 국가권력을 틀어쥐는 정치 혁명으로 전진했다. 경제 혁명이 정치 혁명에 앞서 이뤄진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봉건제를 철폐하는 자본주의 혁명이 ‘유산자 계급’의 혁명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봉건지주 계급이라는 하나의 유산자를 자본가 계급이라는 다른 하나의 유산자로 바꾸는 것에 불과했으므로, 이 유산자 혁명(부르주아 혁명)에 대한 기존 유산자들(지주계급)의 반발은 상당히 누그러질 수 있었다. 프랑스 같은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상당수 자본주의 국가에서 부르주아 혁명은 봉건지주 계급과 신흥 자본가 계급 사이의 타협 혹은 기존 지주 계급 일부가 직접 자본가 계급이 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봉건지대가 자본주의지대로 전환해 자본가 계급이 거둔 이윤의 일부를 지대로 분배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만 보더라도 자본가 계급과 봉건지주 계급 사이의 타협의 물질적 기초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른 무엇보다도 봉건 체제 내에서 상품교환을 매개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성장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정치적으로 봉건권력이 지배하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성장을 늦추었고, 반대로 급진적 부르주아 혁명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경제적으로 확산하는 것을 촉진했다. 이것은 정치권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본가 계급은 봉건 국가권력을 굳이 타도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수선해서, 나아가서 봉건 국가가 물려준 경찰, 군대, 관료제를 더욱 완성시켜 자본주의 발전을 추구하는 자본가 계급의 국가로 전환시키는 것이 자본가 계급에게 훨씬 유리했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경험은 모든 나라의 자본가 계급을 일깨웠다. 봉건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수립한 프랑스의 부르주아 민주공화정은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했지만, 동시에 프랑스 노동자 계급에게 혁명적 투쟁의 기회를 제공했다. 1848년 혁명, 특히 1871년 파리코뮌의 경험은 그것을 명확히 보여 줬다. 그 뒤 모든 나라의 자본가 계급은 봉건지주권력이 형성해 놓은 반동적 국가권력 즉, 경찰, 상비군, 국가 관료 체계가 다른 누구보다도 자본가 계급 자신에게 유용하다는 점, 즉 원래는 자본가 계급이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이 낡은 반동적 국가권력이 노동자 계급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노동자 투쟁을 진압하는 데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게 됐다. 봉건 국가권력을 타도하기보다는 지주 계급 및 기존 봉건 국가권력과의 정치적 타협을 통해 봉건 국가를 자본가 국가로 점차 개조해 가는 것이 자본가 계급의 전략적 방침으로 자리 잡아 갔다. 계급 투쟁 모든 종류의 유산자 계급의 지배를 철폐하면서 무계급 사회를 열어젖히는 무산자 혁명이 노동자 혁명의 본질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존 지배 계급과의 모종의 타협이라는 것이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 단계에서는 애당초 성립할 수 없다. 우선 사회주의 혁명은 생산수단을 사회화함으로써 자본가 계급을 비롯한 모든 유산자 계급의 착취의 원천을 고갈시켜 버린다. 사회주의 혁명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 이윤을 쌓아 가는 자본가가 존재하는 것은 결코 상상할 수 없다. 공장과 기계, 작업장, 원자재 모두가 사회화된 상태에서 그 어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고용될 것이며, 착취를 허용하겠는가? 바로 그 점 때문에, 혁명이 그 외관에서 평화적으로 이뤄지느냐와 무관하게, 모든 착취 계급은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동원해 사회주의 혁명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개량적’ 방식의 혁명이 애당초 성립할 수 없는 본질적 이유다. 마르크스는 그 점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기존 혁명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거듭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혁명이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근본 혁명’이고, 따라서 이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격렬하고 치열한 계급 투쟁과 함께, 노동자 계급의 힘과 의식, 조직이 엄청나게 높은 수준으로 고양되고 발휘돼야 함을 지적했다. 정치 혁명과 경제 혁명 부르주아 혁명과 달리, 노동자 혁명에서 정치 혁명과 경제 혁명은 동시적으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연결해 진행할 수밖에 없다. 국가권력을 장악해서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전면적으로 대변하고 착취 계급의 반혁명을 진압하는 정치 혁명 없이는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경제 혁명)를 도저히 실현할 수 없다. 우선 사회주의 경제는 개별 기업 수준에서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장악해 스스로 운영하는 방식으로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시도는 있을 수는 있으며, 또한 노동자 혁명의 출발점에서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자본가의 소유권 보호를 본질적 기능으로 삼는 자본가 국가의 탄압과 즉각 맞닥뜨린다. 자본가 국가의 탄압을 넘어서는 정치적 힘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즉, 국가권력이 노동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개별 기업 수준의 노동자 자주관리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다음으로 사회주의 경제의 본질 자체가 개별 기업 수준이 아니라, 심지어는 개별 산업 수준이 아니라 전체 사회 수준에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태내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지만,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제약 때문에 제대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을 전면적으로 해방시키는 데 사회주의 경제의 본질이 있다. ‘세계 혁명’ 없이는 사회주의의 전면화가 불가능한 것도, 바로 그러한 사회주의 경제의 본질적 속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주요한 결정적 생산수단을 사회적 공동 소유로 전환시키지 않고서는 사회주의 경제는 제대로 출발할 수조차 없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통해 국가권력을 노동자 계급의 수중에 틀어쥐고, 이 힘을 바탕으로 모든 주요한 생산수단과 교환수단(가령 은행)을 국유화(사회화)함으로써만 실현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노동자 계급에게 정치적 힘(국가권력 장악)은 곧 경제적 힘(사회주의 건설)이 아닐 수 없다. 반대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경제적 고지를 향해 전진하지 않는다면, 정치적 힘(국가권력 장악)은 곧 부식돼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 계급을 착취로부터 해방시켜 경제의 주인공으로 도약시키는 경제 혁명으로 전진하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은 착취자들의 지배를 경제적으로 용인하는 그러한 국가를 위해 결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동자 혁명에서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은 뗄 수 없는 하나로 결합된다. 어떤 국가든 그 본질은 ‘특정 계급의 정치적 지배기관’이다. 자본가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지배기관이며, 이 국가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독재를 통해 자본가 계급의 착취를 뒷받침하는 것을 본질적 사명으로 삼는다. 노동자 국가도 이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국가란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지배기관이며, 이 국가는 자본가 계급에 대한 투쟁을 통해 모든 계급과 착취를 철폐하는 것을 본질적 사명으로 삼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노동자 국가는 자신의 소멸을 준비할 수밖에 없다. 국가가 계급지배의 기관인 이상, 사회주의 건설의 전진에 따라 계급 자체가 소멸해 간다면 노동자 국가 또한 계급 지배기관으로서의 역사적 소임을 마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계급 사회로 전진하면, 특정 계급의 지배기관으로서의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게 된다. 군대나 억압적 경찰은 소멸할 것이고, 단지 공동체 사회의 운영과 관리, 계획화를 위한 역할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런 역할 또한 더 이상 국가기구의 관료제에 의해 수행될 이유가 없게 된다. 생산 공동체를 대표하는 자들이 운영하는 민주적 기관에 의해 사회가 운영될 것이다. 바로 그 사회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노동자 생산 공동체 사회)’라고 불렀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역사적 과정에 대응하는 정치적 도구를 마르크스는 ‘노동자 국가’라고 불렀다. 이 노동자 국가는 더 이상 억눌러야 할 자본가 계급이 존재하지 않게 됨으로써 자연스레 그 과정에서 축소되고 소멸해 가는 국가인데, 그럼에도 이 국가는 그 탄생 시부터 노동자 대중의 민주적이고 직접적인 통제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더 이상 통상적인 ‘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마르크스는 강조했다. 4. 마르크스의 정치 노선: 국가, 민주주의, 정치 투쟁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긴밀한 결합이란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정치 노선을 수립했다. 마르크스는 정치란 일종의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보면서 정치 투쟁에 기권하며 경제 투쟁만을 강조했던, 다양한 무정부주의 조류들에 반대했다. 그러면서 노동자 계급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정치 투쟁이 사활적으로 중요한 요소라고 거듭 강조했다. 우선 마르크스는 자본가 국가를 대체하는 노동자 국가 건설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갖는 중요성에 주목했다. 비록 노동자 운동의 궁극적 목표가 모든 형태의 국가를 없애는 것일지라도,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정치 투쟁을 통한 정치권력 장악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그 결론에 마르크스가 이르게 되는 데는 노동자 투쟁의 역사적 경험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파리코뮌을 통해 프랑스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와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철폐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 주었다. 바로 파리코뮌과 같은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다. 당시 파리 노동자 계급은 프루동주의 같은 ‘비사회주의적 지도자’들이나 블랑키스트 같은 무정부주의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사회주의로 전진하는 게 아니라 소생산으로 후퇴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맞서고자 했던 프루동주의자들은 은행에 대한 몰수 국유화 대신 자본주의 은행을 보호했다. 블랑키스트들은 노동자 민중의 집단적 힘을 동원하기보다는 소수 음모 집단의 힘에 의존했다. 특히 모든 국가를 악으로 보고 거부했던 무정부주의 입장은 노동자 국가를 수립하는 결정적 과제로부터 도망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파리코뮌에서, 파리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계급적 본능과 현실의 요구에 발맞춰 자신이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찾아 움직였다. 자본가 국가를 넘어서 노동자 국가를 수립하는 데로 전진한 것이다. 노동자 민병대를 근간으로,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이 직접 대표자를 선출해 수립했던 파리코뮌은 노동자 계급 정부로서의 본질을 드러냈다. 비록 충분히 단련돼 있지 못해 사회주의로 직선적으로 전진하지도 못했고, 노동자 국가로서 단호하게 자본가 계급의 반혁명에 대응하지 못해 붕괴하고 말았지만, 파리 노동자 계급이 수립한 파리코뮌과 같은 노동자 정부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결정적 수단임을 마르크스는 간파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정치 노선의 근간이 됐다. 그 핵심은 노동자 국가(권력)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 투쟁 속에서만 노동자 계급은 해방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으로 마르크스는 그러한 정치적 힘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활용하는 정치적 투쟁 또한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란 껍데기 민주주의에 불과하고, 부르주아 선거란 노동자를 지배할 자들을 주기적으로 뽑는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선거나 의회, 특히 언론, 출판, 조직화의 자유를 비롯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노동자의 혁명적 입장을 선전 선동하고,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조직화를 촉진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이라는 점에도 주목했다. 마르크스는 비록 낡은 것일지라도, 그것이 새로운 것이 등장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면, 그 마지막 한 방울까지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투쟁, 즉 대립물의 투쟁의 초기 단계는 낡은 것 내부에서 진행된다는 점을 주목했던 것이다. 낡은 것(부르주아 민주주의)을 대체하는 새로운 것(노동자 민주주의, 노동자권력)이 완전한 모습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낡은 것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격렬한 투쟁의 과정이 일차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낡은 것(부르주아 민주주의)을 통해서는 노동자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대립물의 투쟁이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낡은 것 내부에서가 아니라, 낡은 것 외부에 존재하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사이의 전면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새로운 단계로의 이행, 즉 혁명적 이행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또한 낡은 것 내부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는 낡은 것과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새로운 것을 키워 내고 성숙시키는 역사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활용하되,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포섭되고 그것을 영구적 정치 체제로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허구성과 한계를 폭로하고, 그것을 대체하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운동과 조직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정치적 노선은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정치적 수단(선거, 의회)을 계급 투쟁의 일정한 단계에서 혁명적으로 활용하기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구분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마르크스의 정치적 노선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절대화하고 영구화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운동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구조 바깥에서 건설해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점진적 개량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구분했다. 국가자본주의 체제 마르크스가 제기했던 사회주의는 구소련, 중국, 북한 등 국가자본주의 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가를 노동자 민중이 자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관료 집단이 통제하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사회화는 요원하다. 이런 관료적 국유화 형태는 물론 자유주의와는 확연히 대립된다. 그러나 여기서 국가는 여전히 국가 관료 집단이 통제하는 국가이며, 이 국가는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한다. 이런 체제는 자유주의만큼이나 심지어는 자유주의 이상으로 갖가지 새로운 폐해를 양산한다. 노동자 민중에 의해 집단적으로 이뤄지는 민주적 계획화와 대립되는 관료적 계획화는 갖가지 낭비와 비합리성을 낳아 경제 안정을 위협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여기서 국가는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국가이므로, 경제 발전의 모든 성과는 노동자 민중을 희생시킨 대가로 얻어질 뿐이다.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이런 한계는 코로나19 재난 상황에서도 여실히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관료자본가 계급은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 전염병 발생을 숨기면서 재난 확산을 방조했다. 수많은 노동자 민중의 생명을 담보로 지금도 중국 관료자본가 계급은 관료주의 생산 체제를 재가동하기 위해 모험을 감수하고 있다. 재난에 맞서 노동자 민중의 자주적 통제력을 끌어내지 않고 관료적 강제 조치에 의존한 결과, 여전히 통계 조작이 횡행하고 전염병의 위험은 제대로 차단되지 않고 있다. 북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아예 전염병의 확산 정도, 희생자 규모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런 체제는 파산하는 자유주의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자유주의의 맞은편에 서 있는 쌍둥이에 불과하다. 서방의 자유주의 체제와 구소련, 중국, 북한의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서로가 서로의 존립 근거로 작동하고 있을 뿐, 공히 노동자 민중의 이해 및 사회적 진보와는 대립점에 서 있다. 두 종류의 국가 체제 모두 오늘날 세계가 직면해 있는 위기와 모순을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없으며, 마르크스가 제기한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의 맞은편에 서 있는 변종 자본주의 지배 체제일 뿐이다. 5.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의 정치적 노선은 노동자 계급의 독립적 정당(사회주의 노동자정당)에 대한 강조로 특징지을 수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등장과 계급 투쟁의 고도화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 계급인 자본가 계급, 중간 계급, 노동자 계급 사이의 정치적 대결이 더욱 의식적이고 전면적인 양상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이 세계 역사상 최초로 전면적으로 충돌했던, 프랑스의 1848년 전투는 ‘정당’을 매개하지 않고서도 전투적 서클과 다양한 소규모 조직의 연합을 통해서도 가능했던 사실상의 마지막 전투였다. 두 가지의 결정적인 상황 변화가 일어났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자본가 국가는 경찰과 상비군으로 아직 중무장하지 않은 원시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848년 프랑스 전투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노동자 운동의 혁명적 힘에 놀란 자본가 계급은 봉건 국가로부터 물려받은 경찰과 상비군, 관료제를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체계적으로 강화해 자본가 국가를 정비했다. 무장한 소규모 블랑키스트 서클들의 연합으로는 이런 거대한 자본가 국가와 결코 맞설 수 없었다. 전체 노동자 운동을 하나로 결집시켜 자본가 국가에 맞선 전면적인 정치 투쟁을 이끌 수 있는 강력한 노동자 조직이 필요했다. 바로 노동자정당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억압적, 관료적 장치에 더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교활한 지배가 결합했다.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를 통해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지배기관인 자본가 국가를 ‘국민의 국가’로 둔갑시켰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가기구와 사적(민간) 부문을 긴밀히 하나로 융합해, 자본주의 체제를 보호하는 촘촘한 그물망을 창출했다. 학교, 교회, 언론, 부르주아 시민 조직 등을 총망라하는 사적 부르주아기구들을 육성해, 노동자 계급의 의식을 마취시키고 분열시키려 했다. 이 사적 부르주아기구들은 자본가 국가를 외곽에서 지지 엄호했고, 핵심 지도자들을 자본가 국가에 공급했다. 자본가 계급의 공적(국가), 사적 부문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노동자 계급에 대한 전투를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자본가정당이 떠맡았다. 자본가정당은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지도기관이었고, 그들의 대중적 전위를 하나로 결합해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이끄는 핵심 참모본부였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노동자 운동 또한 훨씬 높은 수준으로 고양돼야 했다.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전위를 결속한 노동자정당만이 부르주아 국가, 부르주아 시민 조직에 맞서 노동자 계급 전체를 하나로 단결시키고 정치적 방향타를 제공하면서 자본가 계급에 맞선 전투를 진두지휘할 수 있었다. 제1인터내셔널, 그리고 이후 국가 단위로 형성된 대중적 사회주의정당들이 그것의 표현이었는데, 마르크스는 여기서 이론적, 실천적 중심으로 분투했다.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란 단결한 노동자 계급의 공동의 이해와 요구의 과학적 표현이었다. 또한 마르크스는 모든 계급 단결 투쟁은 필연적으로 정치 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정당이란 노동자 계급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기관이어야 하며, 나아가서 그 단결은 전 세계 노동자 계급의 총단결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국가별로 나뉜 노동자정당 대신, 국적을 초월해 하나로 단결한 노동자정당(인터내셔널)의 형식을 지지했고 지향했다. 물론 마르크스는 그것에 기계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다. 제1인터내셔널을 해산하고 제2인터내셔널이 수립되기까지 수십 년 동안, 마르크스는 독일의 사회주의 노동자정당을 중심으로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사회주의정당을 건설하는 데 집중했다. 제1인터내셔널 시기와는 달리,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노동자 운동이 이미 대중화된 상황에서는 이것을 반영하는 국가별 사회주의정당들의 토대 위에서 건설되는 인터내셔널만이 세계 노동자 운동을 이끄는 진정한 인터내셔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그 시기에조차 이 사회주의 노동자정당들이 민족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고 세계 노동자 계급 총단결 투쟁의 관점에서 전진하도록, 즉 인터내셔널의 관점에서 전진하도록 고무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관념적으로 설교하거나 노동자 운동에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운동 스스로의 발전을 통해서, 그리고 노동자 운동의 계급적 단결의 확대를 통해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사회주의를 해방의 유일한 길로 선택하게 하려 했다. 이것은 사회주의 사회, 나아가서 공산주의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힘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사회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도약해 나가는 노동자 계급의 발전에 있다는 마르크스의 굳센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 운동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정치 노선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이었다. 그러한 자기해방 운동의 전진, 즉 노동자 계급 스스로의 발전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촉진하고 계급 투쟁의 선두에 서서 안내하는 것,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제기했던 사회주의자들의 역사적 임무였다. 사회주의 사상은 그러한 노동자 계급의 발전을 통해 도달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 계급 해방의 과학적 길이고, 사회주의자의 실천은 바로 그러한 발전의 핵심 과정인 계급 투쟁을 이끄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 두 가지 과제(이론적 과제와 실천적 과제)는 사회주의정당에서 반드시 하나로 융합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결코 완벽하지 않으며,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실천 속에서 더욱 날카롭게 벼려지고 구체화해야 하지만, 이런 마르크스의 노선은 지금까지도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근본 방향을 제시한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방향을 따라, 부단한 이론적 활동과 실천적 분투를 통해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완성해 나가는 것,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를 계승하고 따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늘날 해야 할 역사적 임무다. 6. 이론과 실천의 결합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현실적 의미를 증명해야 한다.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사유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 문제다. …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마르크스에게 이론은 세계를 변혁하려는 인간의 능동적 의지를 북돋는 결정적 무기였다. 이 의지는 추상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관념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물질적 운동 자체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마르크스는 실천 속에서 변화하는 사물과 만나고 치열하게 씨름하는 과정에서만 비로소 사물(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실천 없는 이론’이란 애당초 그에게는 성립 불가능한 것이거나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인간의 실천은 의식적인 능동적 행위이며, 거꾸로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 인간의 의식이 더 멀리 전진하고 현실을 더 정확히 반영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마르크스 철학의 핵심을 그람시는 ‘실천 철학’이라고 불렀다. 이런 접근법은 그 자신의 철학에도 적용된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그의 인생 좌우명이었던 ‘투쟁(실천)’과 뗄 수 없이 연결돼 있다. 마르크스는 투철한 혁명가였다. 그의 분노는 자본주의 착취 체제를 정면으로 향했고, 그의 의지는 공산주의 해방을 갈구했다. 이 분노와 의지는 오직 노동자 계급 속에서만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었고, 마르크스는 이 노동자 계급의 운동과 자신의 실천을 일체화했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자 운동 속으로 자신의 혁명적 의식(사회주의)을 불어넣었고, 반대로 노동자 운동과 함께함으로써 자신의 혁명적 의식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면서 현실 사회의 운동을 더 정확히 의식적으로 포착해 갈 수 있었다. 가령 노동자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의는 파리코뮌을 수립한 프랑스 노동자 계급의 운동으로부터 (마르크스 자신이 말했던 것 그대로) ‘발견’한 것이었다. 잉여가치(착취)에 대한 발견 또한 마찬가지다. 독일 자본가들의 착취에 대한 분노가 없었다면, 또한 ‘영국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관심과 분노가 없었다면, 나아가서 이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으로 떨쳐 일어나지 않았다면, 마르크스는 결코 잉여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케인스는 《자본론》을 읽었지만, “이 따위 책이 어찌하여 그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 아연해진다. 너무나 지루하고 시대착오적이며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가득 찬 책이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이는 그의 지적 능력의 문제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그가 혁명적 실천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부르주아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오직 자본주의에 맞서 노동자 계급과 어깨 걸고 투쟁하려는 사람들에게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 이후의 세계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발전한 모든 사회 형태를 운동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고, 따라서 일시적인 것으로 여기며, 또 그 본질상 비판적, 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도 제약받지 않는다고 마르크스는 규정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사상에도 적용되는 진리였다.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교조적 접근은 결코 마르크스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생전에 마르크스는 현실의 운동을 정확히 포착했지만, 현실의 운동은 결코 멈추지 않았기에 미래의 모든 운동을 마르크스가 미리 발견할 수도 없었고, 대략적인 예측을 넘어 정확히 구체적으로 예견할 수도 없었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 경쟁 자본주의였고, 독점자본은 막 태동하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금융자본과 독점자본의 발전, 그리고 이것이 진화한 국가독점자본, 나아가서 독점자본과 자본수출을 토대로 자라난 제국주의에 대한 이론을 마르크스가 전면적으로 발전시킬 수는 없었다. 또한 마르크스는 노동자 운동이 해방을 향한 실천 과정에서 자신 속에 스며든 자본주의적 요소에 맞선 단호한 내부 투쟁이 필요하다고 인식했지만, 그것이 어떤 구체적 형태로 미래에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 결코 예견할 수 없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실천철학을 계승한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레닌과 트로츠키 등)에 의해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마르크스 생전의 주장을 교조처럼 떠받드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혁명적 관점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현실에 맞게 마르크스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통해서만 비로소 지켜질 수 있다. 마르크스 이후의 실천이 드러낸 것 “혁명이 필요한 이유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지배 계급을 타도할 수 없기 때문일 뿐 아니라, 지배 계급을 타도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낡은 오물을 말끔히 씻어 버리고 새 사회의 토대를 놓는 데 적합해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러시아 혁명을 비롯한 세계 혁명적 노동자 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의 이 짧은 언명의 의미가 더 분명해졌다. 1917년 러시아에서 탄생한 위대한 노동자 국가는 192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관료 집단의 반혁명에 파괴되고 말았다. 1918년, 1923년 독일, 1925~1927년 중국, 1936년 스페인, 1945년 직후 이탈리아, 그리스, 1956년 헝가리 등 수많은 국가들에서 노동자 혁명의 기회가 자라났고, 노동자 계급은 놀랄만한 혁명적 잠재력을 드러냈지만 이 모든 혁명들은 실패로 돌아갔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노동자정당과 노동자 국가, 노동조합 등 노동자 운동 조직의 상층에서 관료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흐름들이 번성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 생전에도 이런 흐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진실한 대중적 노동조합이나 노동자정당이라면, 노동자 대중에 의해 이런 약점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르크스 사후, 노동자 운동 상층에서 발생하는 기회주의적 흐름이 결코 간단히 격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오히려 바로 이와 같은 노동자 운동 내부의 취약성(노동자 운동이 뱉어 내지 못한 낡은 자본주의적 오물)이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는 결정적 버팀목이라는 점이 세계 대공황 그리고 1차, 2차 세계대전과 맞물린 계급 투쟁의 전면화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문제와 본격적으로 씨름하면서 혁명적 이론을 정식화하는 것은 후대 혁명가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레닌은 러시아의 혁명적 노동자 투사들과 결합한 실천적 분투를 통해,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전위들의 결집체인 혁명정당론을 정식화함으로써 이 과제에 응답했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의 파산의 뿌리를 밝히면서, 그에 맞서는 제3인터내셔널의 이론과 실천을 선도했다. 이런 작업은 트로츠키를 통해 계승됐다. 트로츠키는 구소련에서 관료 집단의 반혁명에 맞서 투쟁했고, 그런 실천과 연계해 혁명정당 운동을 제4인터내셔널로 구체화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론적, 실천적으로 완결되지 못했다. 그 미완의 과제를 레닌과 트로츠키, 로자, 그람시의 뒤를 이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이 치열한 실천 속에서, 그리고 이 실천과 긴밀히 연결된 이론적 탐구 속에서 완수하려 분투하고 있다. 거대한 노동자 운동, 그리고 이 운동이 배출한 혁명적 전위들(혁명정당)의 집단적 실천 속에서 진정 마르크스의 사상을 계승하는 혁명적 이론이 발전하게 될 것이다. 7. MZ세대와 마르크스주의 오늘날 한국의 MZ 젊은 세대들이 아직 마르크스주의를 향한 열광을 보여 주고 있지는 않다. 진실을 말하자면, 다수의 젊은 세대들이 경쟁주의의 포로가 되어, 자본주의 사상에 감염되어 있다. 학교 교육에서부터 주류 언론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들이 자본주의 사상에 열광하고 도취되어 있는 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드러내는 착취, 불평등, 전쟁, 야만이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와 불신, 의문을 끊임없이 잉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MZ 젊은 세대들이 점차 자본주의적 대안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주의적 대안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 배경이 될 것이다. 쓰디쓴 실제 경험은 무엇보다 훌륭한 선생님이 될 것이다. ‘MZ세대’가 노동조합을 결성하며 거치게 될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는 건 그 점에서 상당히 흥미롭다. 현재 많은 노조들이 MZ세대를 주요 기반으로 삼고 있음은 물론 사실이고, 그건 주목할 일이다. 하지만 자본가 언론이 부각시키는 노조의 조합원들이 MZ세대의 다수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중 작은 일부인 대기업 사무직, 연구직만을 대표할 뿐이다. 즉, 소위 MZ세대 노조들은 젊은이들 중에서 경쟁에서 그럭저럭 승리한 상층부 젊은이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출신 가정도 상대적으로 중간 계급 가정이 많다. 이러한 상황은 역설적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래에 겪게 될 모순과 변화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 준다. 잠시 경쟁에서 승리한 이들마저 이후 급격한 의식의 변화 앞에 설 수밖에 없다면, 경쟁에서 떠밀린 다수 젊은이들은 얼마나 거대한 변화를 맞이할 것인가? 최근 결성되는 대기업 사무직, 연구직 노조들이 내거는 깃발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직무와 능력에 걸맞은 보상 체계, 성과에 대한 확실한 보상 요구다. 이들은 직무급제, 성과급제 같은 경쟁주의 임금 체계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살벌한 경쟁을 인정한 가운데 ‘공정한 기준’을 적용하라는 것인데, 이게 ‘공정성’으로 규정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생산직 노동자를 비롯한 일반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꾸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민주노총 가입도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이런 노조의 탄생에 대해 자본가 언론과 정부 실세들은 MZ노조가 경쟁과 능력, 업무 기여도를 배제하는 기존 노조와는 달리 임금 체계에 대해 합리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며 큰 기대감을 보인다. 노동자를 분열시키고 자본의 입맛대로 부릴 수 있게 노동조합이 나서고 있으니 박수를 보낼 수밖에. 나아가서 기존 강성 노동조합들을 합리적인 노동조합, 즉 협조적인 노동조합으로, 자본의 정책을 자발적으로 집행하는 노동조합으로 재편할 수 있단 기대감도 숨기지 않는다. 과연 그들의 기대대로 상황이 흘러갈까? 대기업 사무연구직들은 상당히 특권화된 노동자들이었고, 중간 계급 의식에 강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들이 받는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노동의 특수성, 노동 시장에서의 특별한 지위, 고학력, 취업 경쟁 제도 등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그런데 사무자동화와 인공지능 등이 발달하면서, 그들이 누리던 과거의 특권적 지위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고, 안정적인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독립해서 사업으로 성공할 가능성도 거의 소멸했다. 어딜 가도 스카우터의 손길이 기다리던 것도 좋은 시절 얘기다. 이런 불안정성과 기득권 약화는 이들이 임금 인상 요구에 눈뜨고 노동조합이란 뜨거운 감자를 만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 점에서 대기업의 젊은 사무직, 연구직들이 노동조합 결성에 나서게 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중간 계급 의식에 물들어 있거나 노동 귀족적 상태에 있던 상층 사무연구직 노동자들이 그로부터 벗어나 노동 운동에 합류해 들어오는 출발점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본가 언론들의 환영인사는 그 점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노동조합들은 성과급 인상 요구나 자본의 일방통행식 통제 거부 등 골치 아픈 문제들을 일으킬 것이며, 특히 정리해고 같은 공격에 직면할 때 저항할 것이다. 이것은 중간 계급 혹은 노동 귀족적 지위를 가졌던 보수적인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버팀목에서 위험 요소로 변화하게 되는 역사적 과정을 반영한다. 하지만 대기업 사무직, 연구직 노조들의 등장이 자본주의에 위협만 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 귀족적 지위에 있는 노동자들의 조직, 혹은 중간 계급 요소에 강하게 영향받는 상층 노동자들의 조직은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성을 뒷받침하는 부문이기도 하다. 안정성과 기존의 특권적 지위를 위협받는 상층 노동자들이 노동 운동으로 들어올 때 이들은 불가피하게 소부르주아적, 노동 귀족적 오물을 함께 가지고 온다. 노동 운동이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영향력 확대는커녕 퇴보하면서 개량주의적, 기회주의적 추락으로 귀착될 수도 있다. 지금 자본가 언론이 보내는 환호는 그런 기대감과 함께 그렇게 활용하고자 하는 영악한 목적의식을 반영한다. 현재 대다수 언론을 지배하는 목소리는 바로 그런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이자, 자본가 계급의 계획이다. 대기업 사무연구직 노동조합이 갖는 취약성이 그런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그들이 내거는 공정한 경쟁을 통한 성과급제 요구, 그리고 새로운 노조 운동의 외투를 쓴 생산직 노동자들과의 분리주의 요구는 분명 자본주의적이다. 물론 그런 자본주의 의식에 대한 경계는 아주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만이 존재할까? 무엇보다 강력한 삶의 논리 관념적 설교로는 그들을 자본주의 의식으로부터 떼어 낼 수 없다. 하지만 삶의 객관적 논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어떤 관념으로도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그들의 뇌를 두드릴 것이다. 단적으로 성과급제 요구를 들어보자. 그들의 주장대로 경쟁논리를 수용하고 소위 ‘공정한 기준’을 세워 성과급제를 완전하게 집행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조합원 사이에서 피 말리는 경쟁이 일어날 것이다. 아무리 ‘공정한 기준’을 세우더라도, 누구는 승자가 돼 더 많은 성과급을 챙기고, 누구는 패자가 돼 피눈물을 삼킬 것이다. 단순히 임금의 문제를 떠나서, 자존심에 깊은 상처가 생길 것이다. 그 뒤에는 패자 사이에 ‘공정한 기준’에 대한 문제제기와 불만이 터져 나온다. 게다가 스스로 자초한 무한대의 경쟁의 링에서 그들 모두가 엄청난 스트레스와 삶의 질 저하를 맛볼 것이다. 애당초 노동자에게 ‘공정한 경쟁 기준’이란 존재할 수 없고, 경쟁논리를 수용하는 순간 노동자 모두가 자본의 포로가 된다는 점이 그들에게 분명해질 것이다. 그 앞에서 그들은 자신이 가진 관념이 얼마나 위험하고 모순적인지 쓰디쓴 경험으로 배울 수밖에 없다. 바로 거기에 마르크스주의가 그들에게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부심을 갖고 있는 MZ세대 노조를 지탱하기도 힘들어진다. 경쟁과 성과급제에 따른 분열과 대립이 노동조합이라는 집단적 기구의 존립을 지속적으로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그들이 단결과 노동조합을 유지하려 한다면, 다음의 선택지만 남는다. ‘공정한 경쟁의 기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성과급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최소한 개별 성과급이 아닌, 노동조합 내부의 분열의 싹을 최소화하는 임금 체계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은 IMF 때 부모 세대의 경험을 뼛속 깊이 기억하고 있다. 대기업의 안정성이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해고당했을 때의 처절한 고통과 절망을 알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함을 알고 있다. 이 냉혹함은 대기업 취업 경쟁의 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나타났지만, 동시에 해고에 대한 불안과 저항 의지를 잉태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들이 경쟁의 링에서 이룬 승리는 일시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이 든 노동자세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사무자동화, 신기술 등이 그들을 덮치고, 경쟁논리는 그들 자신을 찌르는 날카로운 비수가 될 것이다. 노동조합은 바로 그런 불행한 미래에 대한 버팀목임을 그들은 직감하고 있다. 아직 젊은 그들에게 노동자로 살아야 할 날은 매우 길다. 바로 그만큼 그런 보험은 절실하다. 노동조합은 다른 누구보다도 젊은 노동자들에게 가장 절실한 생존수단이다. 그 결과 일정하게는 반노동자적인 의식과 요구에서 출발한 이 노동조합들은 점차 노동자적인 의식과 요구에 대해 고민하고, 급기야는 그런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 자신의 뼈저린 경험을 통한 변화가 동반된다면, 이것은 그들이 사회주의 의식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소중한 수단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역할 진정으로 새로운 변화를 잉태하는 미래를 여는 것은, 그리고 젊은이들의 삶을 진정으로 대변할 수 있는 건 자본주의 경쟁 제도가 제기하는 공정성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공정성이다. 자본의 착취에 맞서 노동자가 단결해서 주장하는 공정성이고, 자본주의 정치 구조의 위선과 억압에 맞서 주장하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공정성이다. 그 점에서 미래를 이끌어 갈 MZ세대의 의식과 철학, 지향점을 안내해 주고, 그들이 설계해야 할 사회의 도면을 보여 주는 이데올로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나는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와 함께 물질적 힘을 조직해야 한다. 청년의 미래를 노동 운동이 지켜 주고 안내할 수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평생을 자본의 노예로 갈아 넣는 피 말리는 경쟁이 아니라, 노동 운동을 통한 단결된 투쟁에 희망과 탈출구가 있음을 실질적으로, 물질적으로 보여 줘야 한다. 바로 노동 운동의 강력한 집단적 투쟁을 통해서 말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청년 일자리를 정규직으로 제공하도록 자본을 강제하고, 국가가 책임지고 일자리를 보장하도록 노동 운동이 압박해야 한다. 청년 실업자들, 광범한 MZ세대 노동자의 삶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무상주택,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을 둘러싸고 사회적 전투를 감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요구를 내건 MZ세대의 투쟁이 승리하도록 헌신적으로 연대하고 책임져야 한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는 경쟁에서 밀려났던 다수의 젊은 노동자들의 열망과 만나서 하나로 융합하게 된다. 이데올로기와 물질적 운동이 하나로 결합해 자본주의와 자본의 착취, 억압에 맞서는 거대한 젊은 물줄기가 탄생할 것이다. 그 물줄기가 본격화하면, 낡은 부르주아적 공정성 논리에 사로잡혔던 일시적 승리자들, 하지만 영원히 경쟁과 분열의 굴레에 갇혀 살아야만 하는 대기업 상층 MZ세대 노동자들도 기존 틀에서 벗어나 이 흐름에 가세하기 시작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러한 흐름이 꺾이지 않고 전진해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도도한 흐름으로 나아갈 수 있게 안내하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될 것이다. 에필로그: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힘, 마.르.크.스 필자가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접했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36년 전이었다. 당시 이 세상을 이해하고, 나아갈 바를 찾는 데서 마르크스주의는 내게 밝은 등대처럼 다가왔다. 그 뒤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진보 진영에서 사상적 혼란이 발생했을 때도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여전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나의 확신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조금도 약해지지 않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선택이었다. 흔들리는 갈대처럼 살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단단함이 그걸 가능케 했다. 바로 현실 자체에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으므로 현실의 시험대를 훌륭하게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분석한 자본주의의 본질은 지금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가난, 실업, 불평등, 공황, 불황 등과 자본주의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아무리 생산력을 발전시켜도 자본주의 하에서 이런 상황은 조금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자본가 국가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억압, 차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자본가 국가는 갈수록 파시즘에게 문을 열어 주고 있다. 자본주의와 자본가 국가가 존속하는 한, 인류는 야만주의적 퇴화와 계속 씨름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보는 젊은 독자들은 인류가 직면한 위기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길을 고민하는 진지한 젊은이들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고민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 전망을 모색할 때 반드시 의지해야 할 출발점이다. 자본주의에 맞서고자 한다면 마르크스주의가 던진 문제의식과 해결책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 결론이 무엇일지는 물론 독자들의 몫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하고자 하는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쉽게 안내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단순화가 있을 수도 있다. 또한 훨씬 더 정교하고 풍부하게 접근해야 할 중요한 주제들이 피상적으로만 다뤄진 측면도 있다. 그러한 약점들은 젊은 독자들과 노동자들이 스스로 학습하고 더 깊이 있게 마르크스주의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극복해 갈 몫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은 해설서, 그것도 아주 기본적인 원리만을 설명하는 해설서가 아니라 원전 그 자체임을 상기하고자 한다. 마르크스 자신이 쓴 글들을 원전 그대로 읽는 것이야 말로 마르크스주의에 가장 옳게 접근하는 길이다. 부디 이 책이 그렇게 발을 내딛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언젠가 어느 곳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사회주의자로서 함께 투쟁하면서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필자에게 가장 커다란 기쁨이 될 것이다. -
[번역] 레닌의 『국가와 혁명』의 적실성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1871년 파리 코뮌이 보여주었듯이 노동 계급의 권력 장악이란 부르주아지가 운용하던 관료적·군사적 국가 기구를 단순히 넘겨받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보여 준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노동 계급은 후퇴하고 사회 혁명은 거의 전적으로 부재한 탓에, 좌파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조차 레닌이 주장하는 내용이 사실상 낯선 것이 되어 버렸다. 일당 체제, 그리고 어디에나 스며 있는 관료제의 지배는 레닌과 이후에 트로츠키가 스탈린주의에 맞서 옹호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아래 글은 아르헨티나 사회주의 사상 연구소(IPS)에서 곧 출간될 V. I. 레닌의 『국가와 혁명』(The State and Revolution) 스페인어판 신간에 실린 크리스티안 카스티요의 서문이다. 『국가와 혁명』은 레닌이 1917년 8~9월에 쓴 글이다. 이때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여 역사상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수립하기에 이른 혁명적 위기의 직전이었다. 역사적인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이 글은 미완으로 남았다. 레닌은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 1917년 2월부터 8월까지 벌어진 일에 대해서 끝내 쓰지 못했다. 은신 중이던 레닌은 이 결정적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의 국가 개념을 명료하게 세우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에 핵심 쟁점이었고, 카를 카우츠키 같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주요 이론가들은 이 문제를 온갖 혼란과 왜곡으로 오염시켜 놓았다. 이 지도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회 계급과 함께 국가도 “소멸”(extinguished)할 것이며 그것이 어떤 자의적 결정에 따라 “폐지”(abolished)될 수는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언급하지 않은 한 가지는, “소멸”하는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가 아니라 혁명 이후 등장하는 국가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 계급 권력의 도래가 곧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 더 정확하게는 그것의 근본 기둥인 관료제와 군사력의 파괴를 함의한다고 보았다는 점도 그들은 숨겼다. 따라서 『국가와 혁명』은 당대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의 지배적 견해(당시 러시아 멘셰비키의 견해와 견줄 만한)를 교정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입장을 면밀히 재구성해서 담고 있다. 1871년 파리 코뮌이 보여주었듯이 노동 계급의 권력 장악이란 부르주아지가 운용하던 관료적·군사적 국가 기구를 단순히 넘겨받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국가와 혁명』은 보여 준다. 그것은 국가 기구를 완전히 파괴한 다음 성격이 전혀 다른 새로운 기구로 대체하도록 요구한다. 말하자면 소수의 자본 소유자들이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지배할 수 있도록 구조가 설계된 부르주아 국가를 노동 계급이 그저 “점유”하는(occupying)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 계급은 부르주아 국가를 노동자의 지배에 적합한 다른 종류의 국가로 대체해야 한다. 파리 코뮌은 상비군과 경찰을 무장한 대중으로 대체했다. 코뮌 구성원들은 그 어떤 정치 공직자도 숙련 노동자보다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없으며 공직자는 선거권자들에 의해 언제든 소환될 수 있음을 확고히 했다. 국가 행정부의 집행 기능을 선출된 대표들이 직접 수행함으로써,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이 외부에서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부르주아 의회들의 “순전한 사기극”과 달리 코뮌은 “일하는 단체”가 되고자 했다. 계급 사회를 종식시키는 과정 속에서 노동자 국가는 정치·경제 업무를 관리하는 일에 점차 사회 전체를 참여시킴으로써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폐지”하게 될 것이었다. 레닌의 이 책이 어째서 지금도 유효한가? 최근 수십 년 동안 노동 계급은 후퇴하고 사회 혁명은 거의 전적으로 부재한 탓에, 좌파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조차 레닌이 주장하는 내용이 사실상 낯선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사회주의/공산주의와 관료적 전체주의의 중요한 차이점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후자는 레닌이 열망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연방에 관료적 전체주의라는 어둠이 내려앉은 데는 몇 가지 핵심 요인이 작용했다. 10월 혁명은 고립되었고, 내전 중에 혁명 간부들과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사망했으며, 러시아 사회가 전반적으로 “후진성”을 벗지 못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 현실은 혁명 이후 탄생한 새로운 국가가 관료화하도록 추동했다. 일당 체제, 그리고 어디에나 스며 있는 관료제의 지배는 이후 발생한 20세기의 혁명들에 “본보기”가 되었으나, 이는 레닌과 이후에 트로츠키가 스탈린주의에 맞서 옹호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오늘날 정치 지형은 자본주의적 지배가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변호하는 두 부문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보통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첫 번째 부문은 부르주아 국가의 기능을 치안과 통제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기업들이 더 전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모든 사회적 권리를 폐지하려 한다. 동시에 그들은 2008년 위기에서 보았듯이 거대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국가를 대규모 부채로 몰아넣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자들이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두 번째 부문은 국가가 계급 화해 기관이라는 국가 숭배(fetishism)를 고수하면서 그것이 지배 장치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숨긴다. 승리한 사회 혁명 없이 수십 년이 흘러온 지금,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어떤 진보적 변화든 국가라는 틀 안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진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대다수 사람이 갈망하는 변화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만 성취할 수 있다고 여겨지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그 자체”로 신비화되었다. 그러나 진실은 이러하다. 여러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는 대중 운동(movilizations), 항거(Revolts), 혁명 운동들이 전면적 혁명 과정으로 전환되면 봉기한 노동자 대중의 권력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는 기구들이 틀림없이 발전해 나올 것이다. 파리 코뮌과 러시아의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이 지배 계급의 탄압에 맞서 자기방어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권력의 여러 표현 형태를 보여 주었다. 러시아의 경우, 소비에트는 투쟁하는 노동자·농민 공동전선의 가장 위대한 표현으로 출발했고, 혁명 승리 이후에는 새로운 국가 권력의 토대로 변모했다. 이는 파리 코뮌의 교훈과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제시한 전망에 근거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모든 혁명다운 혁명은 이 같은 기구들의 출현을 수반할 것이며, 자본주의 국가의 억압적 성격을 드러낼 것이다. 레닌과 이후에 트로츠키가 분명히 하고자 했던 또 하나의 쟁점은, 가장 개방적인 자본주의 민주주의보다도 “천 배 더 나은” 민주주의를 구현할 새 국가의 물질적·경제적 토대였다. 레닌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발전은, 실로 “모두”가 국가 행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전제 조건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전제 조건들 가운데 몇몇은 다음과 같다: 가장 선진적인 여러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미 달성된 보편적 문해력, 그리고 우편·철도·대공장·대상업·은행업 등의 거대하고 복합적이며 사회화된 장치에 의한 수백만 노동자들의 “훈련과 규율”, 등등. 이러한 경제적 전제 위에서 “자본가들과 관료들을 타도한 다음, 즉각, 하룻밤 사이에, 생산과 분배의 통제, 노동과 생산물의 계산 업무에서 그들을 무장한 노동자들, 무장한 인민 전체로 대체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 뒤, 레닌은 이렇게 덧붙인다. 계산과 통제—그것이야말로 공산주의 사회의 첫 단계의 “원활한 작동”, 올바른 기능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다 … 중요한 것은 그들이 평등하게 일하고, 자기 몫의 일을 하며, 동일한 임금을 받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계산과 통제는 자본주의에 의해 극도로 단순화되어, 지극히 단순한 작업으로, 즉 문해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감독, 기록, 사칙 연산, 적절한 영수증 발급으로 축소되었다.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자. 과학 기술 일반, 특히 의사소통 기술이 혁명적으로 발전한 21세기의 우리는 레닌이 언급한 것보다 훨씬 우월한 전제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텔레비전, 라디오, 컴퓨터, 휴대전화, 소셜 네트워크는 수백만 명의 사람에게 정보를 쉽게 전달하고 어떤 경제적·정치적 결정을 내릴지 토론하도록 돕는 수단들이다. 이러한 기술들은 경제 자원을 민주적으로 계획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며, 불평등을 점진적으로 제거하고 노동일을 단축하여 과학적·문화적 지식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에게 도달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 물려받은 비합리성을 이 같은 민주주의 안에서 오래지 않아 억제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사회에서는 다세대 주택과 빈민가에 빽빽하게 몰려 사는 수백만 명을 위한 주택 대신에 아무도 살지 않을 집을 짓자는 계획 따위는 제안할 수 없을 것이다. 수억 명이 굶주리는데 한 줌의 인간이 수십 년 쓰고도 남을 부를 축적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라면, 어떤 사람들은 하루 10시간, 12시간 일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일거리를 얻지 못하고 생존하기 위해 복지제도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깨달을 것이며, 그 대신 더 분명한 계획으로 모든 가용한 일을 모든 가용한 노동자에게 나눌 것이다. 누구도 실업 상태로 남지 않고, 누구도 과로하지 않을 것이다. 소수의 배를 불리기 위해 지구의 미래의 삶을 저당 잡아 환경을 파괴한다는 발상은 한심하게 들릴 것이다. 물론 이 사회는 아직 공산주의는 아니며, 우리는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에서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라는 분배 원칙으로, 다시 말해 “필연의 영역에서 자유의 영역으로” 옮겨 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적 착취가 낳은 모든 치욕과 추악한 것들을 사회에서 철저히 씻어내고 더 전진하기 위한 필수 단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 구성원 전체, 또는 적어도 압도적 다수가 스스로 국가를 운영하는 법을 배우고, 이 일을 자기 수중에 쥐고, 보잘것없는 소수 자본가와 자본주의적 악습을 보존하려는 지주 신사층과 자본주의에 의해 철저히 부패한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를 조직하는 그 순간부터, 어떤 형태의 정부든 그 필요성은 완전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민주주의가 더 완전할수록, 그것이 불필요해지는 순간은 더 가까워진다. 무장한 노동자들로 이루어지고 “더 이상 엄밀한 의미의 국가가 아닌” 그 “국가”가 더 민주적일수록, 모든 형태의 국가는 더 빠르게 시들어간다. 2008년 이후 자본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다. 새로운 세대는 이 체제가 자신들에게 점점 더 어두운 미래만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착취하고 억압하는 이 체제에 맞서서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에게 사회주의적·혁명적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투쟁의 목표를 분명히 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2019년 10월 10일, 일간좌파에 스페인어로 처음 게재됨. 2019년 11월 4일, Left Voice에 게재된 영문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Christian Castillo -
[한노운사 연재 4회] 1부 폭압과 저항(1970~1987) [3] 민주노조운동의 파괴와 재건광주를 학살한 전두환 신군부는 모든 민주노조를 파괴했다. 쓰라린 피눈물을 딛고 노동자들은 정권에 맞서 함께 싸우지 못한 것을 통렬히 반성했다. 새로 등장한 민주노조들은 구로동맹파업을 통해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으로 무장한 새로운 민주노조운동의 길을 열었다. 1) 신군부의 폭압과 노조파괴 광주민중항쟁을 잔인하게 진압한 전두환은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임의기구의 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사실상 대통령 노릇을 시작했다. 광주를 학살한 군사정권의 폭압이 이제 전 사회를 휘감았다. 8월 27일 체육관 간선을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된 전두환은 10월 27일 공포된 개정 헌법에 따라 1981년 2월 25일 다시 체육관 간선으로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개정 헌법에 따라 비상 입법기구로 등장한 국가보위입법회의(국보위)는 대통령 전두환이 임명한 81명의 의원들로 구성돼 1981년 4월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행할 때까지 6개월 동안 정치활동규제법, 언론기본법, 집회시위법, 노동관계법 등 189건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특히 국보위는 기업별 노조 체제로 전환, 제3자 개입금지 신설, 노조설립 요건 강화, 노조임원 자격 제한, 조합비 사용 제한, 노조운영에 대한 행정개입 확대, 단체교섭권 위임 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쟁의 냉각기간 연장, 직권중재 대상 확대, 노사협의회 설치 등의 내용으로 근로기준법·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노동위원회법을 개정하고 노사협의회법을 신설했다. 전두환 정권은 사회 전반을 상대로 한 이른바 ‘정화’ 조치에 노동조합을 포함시켰다. 1980년 8월 21일 발표한 노동조합 정화 지침에 따라 한국노총 및 산하 산별노조 위원장 12명을 바로 사퇴시켰다. 한국노총 지역지부 105개를 모두 해산시켰다. 노동계 인사 191명을 정화 대상자로 지목해 현장복귀를 지시했다. 특히 1980년 9월 원풍모방 지부장을 정화 조치하고, 12월에는 조합원 40명을 계엄사로 끌고 가 협박과 폭행으로 사표를 강요했다. 그중 일부는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다른 노조에서도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는데, 최소 22명의 노조간부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있다.[1] 1981~82년 전두환 정권은 청계피복, 반도상사, 해태제과, 콘트롤데이타, 서통남화전자, 태창메리야스, 원풍모방 등 민주노조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1981년 1월 6일 청계피복노조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리고 노조 사무실을 폐쇄했다. 1월 30일 조합원 21명이 ‘아시아·아메리카 자유노동기구’(아프리) 농성에 돌입했지만,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 해산하고 12명을 구속시켰다. 1981년 3월 반도상사, 1982년 7월 콘트롤데이타에 폐업을 강제하여 노조를 해산시켰다. 원풍모방노조가 굴복하지 않고 계속 저항하자, 1982년 9월 회사의 사주를 받은 사원 100여 명이 노조 사무실을 점거해 노조 간부들을 폭행하고 기물을 부쉈다. 조합원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가자, 9월 30일 밤부터 추석날인 10월 1일 새벽까지 전투경찰이 합세해 노동자들을 잔인하게 끌어냈다. 경찰은 노조 간부 전원을 전국에 지명 수배했다. 원풍모방 노동자들이 10월 7일과 13일 회사 앞과 영등포 일대에서 거리시위를 벌이자 경찰은 수십 명의 노동자를 구속하거나 구류에 처했다. 회사는 574명을 해고했다. 11월 12일에는 핵심 간부 11명이 전원 체포됐다. 원풍모방 노조의 파괴로 1970년대 민주노조들에 대한 파괴가 일단락됐다. 이렇듯 모든 민주노조가 차례로 탄압을 받고 줄줄이 해산됐지만 민주노조들은 각개격파 당하면서도 연대투쟁의 깃발을 올리지 못했다. 1981년 청계피복노조 사수투쟁부터 1982년 원풍모방노조 사수투쟁까지 개별적인 투쟁으로 저항할 뿐이었다. 신군부의 탄압에 밀려 무기력하게 해산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 주체들은 무엇보다 연대투쟁에 나서지 못한 운동의 한계를 뼈저리게 절감했다. 특히 청계피복노조는 해산을 당한 이후 자기비판 문서를 공개 발표했다. 철저한 반성을 다짐하고 제안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당국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계속되는 탄압에 우리는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직 조직보존을 위해서 뒷걸음질 쳐 왔다. 언젠가 계엄령이 해제되고 사회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면 그동안 입은 타격을 곧 회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그렇게 해왔다. 또 반도상사 노조 파괴를 보면서 가슴아파하면서도 한편 우리의 조직이 붕괴되지 않음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우리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공포심에 우리도 예외 없이 짓눌려 당국의 탄압에 저항을 못했다. … 우리의 조직을 약화시킨 요인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2]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YH 노동자들이 보여준 결기처럼 한편으로 엄청난 힘을 가진 운동이었다. 그런데 자기 사업장 조합원들끼리는 강력한 결집력을 가졌음에도 다른 사업장 민주노조가 탄압으로 해산되는 상황에서 연대투쟁을 할 수 없는 장벽에 갇혀 있었다. 생존권 투쟁은 처절하게 할 줄 알지만, 정권에 맞선 연대투쟁·정치투쟁은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청계피복노조가 한 반성의 의미는 ‘언젠가 우리에게 민주노조 할 기회가 다시 온다면 그때는 다르게 하리라’는, 특히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을 할 수 있는 민주노조운동을 하리라’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해산당한 조합원 가운데 상당수가 새로운 사업장으로 가서 구로공단과 인천 등에서 새로운 민주노조들의 밀알이 됐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중요한 씨앗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구로동맹파업에서 핵심 사업장이었던 대우어패럴노조의 위원장이 바로 청계피복노조의 조합원이었다. 연대투쟁을 당연한 과제로 받아들였던 구로공단 민주노조들의 방향은 청계피복노조의 반성에 기초하고 있었다. 2) 다시 일어서는 노동자들 폭압을 이어가던 전두환 정권은 1983년 2월부터 12월까지 구속자 석방, 사면·복권, 제적생 복교, 대학 상주 경찰의 철수, 해직교수 복직 등의 정치적 유화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했다. 집권 안정기에 들어섰다는 자신감, 탄압의 효력 감소, 1983년 11월 미국 대통령 레이건 방한을 대비한 분위기 조성 등이 그 이유였다. 군사정권의 유화조치는 민주화 투쟁이 다시 활성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노동자들의 투쟁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1983년 9월 전두환 정권 아래서 최초의 공개 운동단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창립됐다. 1984년 3월에는 수도권 해고자들이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복)를 창립했다. 노복은 기관지 <민주노동>을 발행하면서 블랙리스트 철폐투쟁과 노동악법 개정 투쟁에 주력했다. 1981년 강제해산 당했던 청계피복노조가 1984년 4월 ‘법외노조’로 복구를 선언하고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청계피복노조는 합법성 쟁취를 위해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며 다시 한 번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에 섰다. 택시노동자들이 뒤를 이었다. 택시노동자들은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하루 18시간을 일하면서도 한 달에 사흘밖에 쉬지 못했다. 과도한 사납금을 채우기 위해 목숨 걸고 과속운전을 해야 했다. 1984년 5월 대구의 택시노동자 1천여 명이 사납금 인하, 노조결성 방해 중지, 취업카드제 철폐 등을 요구하며 대구시청 앞 등 중심가를 차량으로 봉쇄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당황한 대구시는 사납금 인하 등 택시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을 수락한다고 발표했다가 농성이 해산되자 약속을 뒤집었다. 택시노동자들이 다시 대구택시사업조합 이사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자 경찰이 출동하여 농성을 해산시키고 65명을 연행했다. 대구에서의 파업은 가라앉았지만, 부산·대전·강릉 등 여러 도시로 택시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됐다. 1984년 하반기 대우자동차에서는 노조민주화 세력이 집행부 불신임을 추진한 것과 관련해서 2명이 해고당했다. 1985년 4월 대우자동차의 2천 200여 노동자들이 임금 18.7%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농성이 사흘째 계속되자 대우그룹 총수 김우중이 직접 나서서 해산을 요청했지만 노동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회사측이 주말을 이용해 휴업을 선언하려 하자 강제진압에 대비해 350여 명이 기술센터 3층을 점거했다. 조합원들의 들끓는 열기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파업을 선언하고 어정쩡하게 농성장을 지키고 있던 노조집행부가 더 이상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고 빠져나갔다. 민주파 대의원들이 이미 실질적인 지도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결국 파업 9일 만에 김우중 회장과 민주파 대의원 대표가 16.4% 임금인상에 합의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대우자동차 임금인상투쟁은 대자본에 맞선 투쟁이었기에 사회적으로 관심이 많았고 언론에서도 날마다 보도했다. 대우차 투쟁의 승리는 다른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을 강력하게 자극했다. 학생출신 활동가와 노동자대중의 유기적 결합을 보여주었으며, 남성 중심의 대공장 노동자들도 조직적으로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 3) 1985년 구로동맹파업 오늘날 구로디지털단지가 있는 구로동과 가리봉동 일대에는 1965년부터 구로공단이 있었다. 1980년대에는 섬유산업과 전자산업을 중심으로 8만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수도권 최대 규모 공단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이 다수인 구로공단 노동자들은 욕설과 폭행, 성희롱이 난무하는 인간 이하의 삶에 시달리고 있었다. 임금은 1인 최저생계비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1984년 6월 구로공단에 자리한 대우어패럴에서 민주노조가 결성됐다. 사측은 노조간부 회유·협박, 흑색선전, 노조탈퇴 강요, 노조반대파 조직, 구사대를 동원한 조합원 폭행, 라인축소, 납치·감금 등 온갖 수법으로 노조를 파괴하려 했다. 집요한 탄압 때문에 1천 400여 명이던 조합원이 1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한국노총 위원장실 농성, 민한당사 농성 등을 통해 완강하게 맞서면서 노조를 지켜냈다. 대우어패럴에 이어 대한마이크로,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효성물산, 협진, 유니전 등에서 속속 민주노조가 결성됐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서 배출된 노동자출신 활동가들과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각 사업장에 들어가서 끈질기게 선진노동자들을 조직해 나간 활동의 성과였다. 대우어패럴에는 여러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들어와 있었던 사람은 최한배였다. 최한배는 생산현장에 취업한 것이 아니라, 보일러 기사로 취업했다. 그는 동화교회 야학에서 만나오던 김준용이 군에서 제대하자, 대우어패럴 입사를 권했다. 1982년 김준용은 대우어패럴 재단사로 입사하면서 현장활동을 시작했다. 이 두 사람은 현장활동에 대한 모든 것을 공유하며 논의했다. … 현장활동을 활발히 하던 김준용은 대우어패럴에 들어와 있던 … 학생출신 활동가, 추재숙(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화자(JOC) 같은 여러 활동가들의 동선을 파악하면서, 관계를 만들어 갔다. … 활동가들의 만남이 진행되는 다른 한편 대우어패럴에는 노동자들의 여러 소모임, 친목모임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중활동의 중심에 김준용이 있었다. 김준용은 청계피복노조에서의 활동경험을 살려 남성노동자, 여성노동자 그리고 소속 라인을 넘어 현장 어디서나 노동자들과 편하고 쉽게 사귀었다. 김준용은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술모임, 등산모임, 축구모임 같은 친목모임을 여럿 만들어 노동자들과의 관계를 넓혀갔다. 그 가운데 열성을 가진 사람들은 소모임으로 모아 노동자의 권리, 노동조합에 대한 학습을 하기도 했다. 학습모임은 최한배가 운영했다. 학습소모임 가운데 ‘호롱불’은 가장 열성적이고 적극적인 노동자들이 모였으며, 그 성원들은 대우어패럴 노조결성과 활동의 중심인물로 성장했다. 1년에 걸친 활동 결과, 1984년 김준용을 중심으로 어떤 활동이든 참여하는 노동자가 100명이 넘었다. 이들이 노조결성 뒤 자본가의 탄압에도 끝까지 노조를 사수하는 핵심성원이었다. … “… 김준용이 『전태일 평전』을 나한테 줬어요…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내가 좀 감동을 받았지…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싶기도 했고 그걸 읽고 ‘노동조합이란 게 필요한 거구나 회사에…’ 그때부터 준용이하고 같이 움직이게 된 거죠. … 청계천 쪽에 가면서 그런 거를 많이 접하게 됐죠. 유인물이나 어디서 데모를 하는지 가두행진을 한다든가 그런 정보를 알게 되고 전태일 기념관도 가게 되고, 홍제동 성당에서 집회 있으면 쫓아다니고 하면서 문익환 목사도 알게 됐죠. 우리도 ‘노동3권이라는 게 참 필요한 것이다’ 알게 돼서, 그런 쪽으로 책을 많이 읽었어요. … 전공투, 자본주의의 이론 책자를, 노동운동에 대한 거였어요. … 그러면서 따로 모임을 가지고. …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이 결성하게 된 힘은 소모임을 통해서 결속력을 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돼요.” … 강명자는 지역소모임에 참여하면서 노동자의식과 현장활동에 대해 배우면서, 그 모임에서 배운 방식으로 현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소모임을 만들어 책읽기, 현장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거나 놀러 다니면서 친목을 다지기도 했다. “나는 의식은 있고 계속 내 공부 모임하면서 … 대우에서 일하는 사람들하고 소모임을 만들었죠. 그러면서 이제 (내가 읽은 것과) 똑같이 『어느 돌멩이의 외침』 이런 것들을 읽으면서 독후감을 각자 써와서 발표하고, 자기 느낌들을 이야기하고, 놀러도 다니고 …”[3] {1985년 무렵 구로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지역활동을 벌인 것은 여러 사업장 관계를 맺고 있던 A지역그룹이었다. 이들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기업별 노동조합 체계를 극복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계급적 정치의식 확보를 활동방향으로 삼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노동자의 상태와 조건에 입각하여 활동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구로공단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통해 ‘공단 자체를 단위로 한 실천’을 모색했다. 이들은 소모임 내 활동가들을 공단 내 업종의 특성을 고려하여 섬유·전자 사업장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따라서 대우어패럴, 가리봉전자 같은 민주노조와 중간노조·어용노조가 있는 남성전기, 롬코리아, 부흥사 등에서 직접적으로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 A지역그룹의 경우 공장단위에서 벗어난 공단 단위의 교육-훈련 체계를 노동자 소모임(지역 소그룹)으로 구상했다. 이 소모임은 강사, 학생, 학습 프로그램을 지역적 차원에서 공동으로 조직한 점과 다양한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같이 만날 수 있도록 조직한 것이 특징이다. … 노동자 소모임 프로그램의 기본 틀은 다음과 같다. “[1단계 프로그램] 노동자의 현장과 생활에서 출발하는 토론 → 의식화에 초점 (예) ‘근로자를 가족처럼’, ‘공장일의 내일처럼’ 등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충효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토론과 교양 + 각 사업장 근로조건을 비교하고 토론 [2단계 프로그램]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등의 사회문제를 둘러싼 토론 [3단계 프로그램] 노동운동사 및 정치경제학적 기초교양” 이런 소모임은 4~6명을 기본 단위로 하여 6~7개 정도가 비공개로 추진되었다. 대우어패럴 교선부장 김준희는 가리봉전자, 남성전기, 협진양행 노동자 5명으로 구성된 한 소모임에 참여했다. 소모임에서는 각 공장의 실태와 운동 상황이 토론되고 『노동의 역사』, 『일하는 사람을 위한 경제지식』, 『어머니』 등을 읽고 학습을 했으며 다른 사업장의 노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동질감을 형성해 갔다. 지역소모임을 통한 조직과 의식화는 새로운 노동운동가를 양성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노조에서도 조합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역할을 했으며 나아가 노조 간의 지역연대 활동에 기초가 됐다. … 지역소그룹 활동과 함께 또 다른 지역활동으로는 <공단소식>을 제작해 사업장, 공단주변과 거주지역에 배포했다. 이 소식지는 여러 사업장 소식을 담고 있어 노동자들이 자신의 사업장만이 아니라 다른 곳과 비교하게 했고, 3회에 걸쳐 배포되다가 구로동맹파업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 “노조가 돌아가는 거라든지, 객관적인 상황 돌아가는 거라든지, 이런 거 새벽에 닭장집…들에 들어가서 문마다 쑤셔 넣고 … 출근해서 얘기가 되고… 탈의실에서 옷 갈아 입다보면 한두 장씩 가져와서 이야기되기도 하고…” (대우어패럴, 김준희) “노동자신문도 만들어… 노동자들 밀집된… 지역에 살포를, 그때는 대학생 조직하고도 일부 관련이 됐던 것도 같은데요… 그래서 이게 배포되는 시기가 되면 대학생들 일부와 그리고 노동자들 … 닭장집들 … 주변을 돌면서 새벽에… 배포를 했었어요. …” (롬코리아, 장영인) “공단소식이 저녁에 한 번 돌면 아침에 (회사에) 가면 공단 분위기가 싹 달라져 있다고. 하여튼 공단이라는 게 좁은 데니까. 아침에 현장에 가보면, <공단소식>이 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게 피부로 즉각 즉각 느껴지는 거 같더라고. 그야말로 ‘공단이 내 손안에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공단소식 만들고 뿌리고 그때 당시 이미 해고 되어서 끌려나온 친구들이 많이 했던 거 같애. …” (부흥사, 이선주)[4]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은 소모임활동, 교육활동, 소식지 발간 등을 활발히 진행하면서 간부 교류 등의 연대활동을 벌였다. 민주노조들은 1985년 임금인상 투쟁을 공동으로 준비하였고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대우어패럴 27% 인상, 효성물산 904원 인상, 가리봉전자 17.5% 인상, 선일섬유 13% 인상 등의 성과를 거뒀다.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단결의 힘을 실감했다. 조합원이 증가했고, 노동조합의 힘이 강화됐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이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 6월 22일 대우어패럴노조의 간부 세 명을 전격 구속시켰다. 임금교섭 때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였다. 1980년대 초 민주노조들을 모두 파괴했듯이, 새롭게 등장한 구로지역 민주노조들도 하나하나 깨나가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바로 그날 구로지역 노조간부, 해고자, 활동가 190여 명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경찰의 탄압은 민주노조 각개격파를 위한 신호탄이라 인식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패배를 되풀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월요일인 24일부터 ‘노동운동 탄압하는 노동부 장관 퇴진, 구속노동자 석방, 노동3권 쟁취’를 내걸고 동맹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1970년대 민주노조들이 기업별 노조로서 최상의 조직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부의 탄압에 고립분산적인 대응으로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노조간부들은 1980년대 초와 같이 개별 노조의 조직보존에 매몰되지 말고 노조 간의 연대를 통해 탄압에 대항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투쟁 목적은 정부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연대투쟁을 전개해 정부가 가하는 탄압의 본질을 폭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기업별 노조의 틀을 깨고 고립분산성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데 두었다. 그렇기에 “간격을 두고 차례로 당할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싸우자”는 투쟁방침을 결의했다.[5] 6월 24일 대우어패럴노조가 오전 8시부터 먼저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효성물산노조, 선일섬유노조, 가리봉전자노조가 오후 2시부터 동맹파업에 돌입했다. 6월 24일 7시 30분경, 회사에서는 파업을 미리 예상한 듯 현장출입구에 관리자들이 모두 나와 서 있었고 평소 7시 30분에 열리는 현장 문이 7시 45분이 지나서야 열렸다. 50분에 각 현장별로 실시되는 국민체조가 끝나기를 기다려 각과 부위원장들은 작업대 위로 올라가 위원장이 부당하게 구속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같이 싸우기를 호소했다. 각과 조합원들이 1과 현장으로 속속 모여들었고 노조사무실에서 대기하던 2공장 조합원들도 합세했다. 밀고 들어오는 도중에 저지하던 관리자와 격돌하여 조합원 전재선이 쇠파이프를 맞고 코를 병원에서 세 바늘 꿰매고 돌아오는 사태도 벌어졌다. 관리자들의 저지를 받아 미처 들어오지 못하고 쫓겨난 조합원도 수십 명이었다. 1과 현장에 모인 인원은 285명이었다. 조합원들은 먼저 미싱과 원단을 쌓아 출입구를 차단하고 대열을 정비한 후에 소리 높여 ‘결단가’를 불러 사기를 올렸다. 이어 쟁의부장이 「우리의 결의」라는 유인물을 낭독하고 「노예로 살 것인가, 싸워 이길 것인가」라는 유인물을 배포하며 구호를 선창하자 조합원들도 함께 구호를 외치며 창밖으로 유인물을 뿌렸다. 한쪽에서는 플래카드와 구호를 쓴 종이를 준비하고 나머지는 준비한 머리띠를 두르고 부채를 만들어서 모두 창문에 매달려 ‘선봉에 서서’,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오전 10시경, 회사는 농성에 참가하지 않은 노동자들을 모두 퇴근시켰고 관리자들을 모두 동원해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회사 바깥에서는 어느새 전투경찰들이 쫙 깔려 있었다. 간부들이 연설도 하고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점심시간인데 식사는 공급되지 않았다. … 오후 2시. 맞은편에 보이는 효성물산에서 꽹과리 소리가 나면서 동맹파업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려왔다. 모두들 환호하며, 창가로 가서 구호를 외침으로써 서로를 응원했다. 오후에는 즉흥 촌극과 10·26 사태를 풍자한 연극, 장기자랑 등으로 보냈다. 저녁식사 역시 들어오지 않았고 물은 화장실 안에만 나왔다. 어두워지자 회사는 전기마저 끊어버렸다. 노동자들은 솜방망이에 미싱 기름을 적셔서 횃불을 만들어 회사 주위를 밝히고 소화전 비상등에 전원을 연결, 형광등 하나를 켰다. 앰프도 연결, 마이크도 쓰게 되었다. 11시경 일부는 보초를 서고 나머지는 잠을 잤다.[6] 오후 2시경 3개 사업장에서 ‘임시총회’를 거쳐 동맹파업을 결정했고 파업에 들어갔다. 효성물산 조합원 400여 명은 긴급총회 이후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가리봉전자 구로·독산공장의 520여 명도 ‘임시총회’ 이후 ‘구속자를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선일섬유도 140여 명이 모여 총회를 하는데, 관리자들이 방해를 하여 조합원이 70여 명으로 줄어들자 출입구를 차단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효성물산 농성장에서는 「노조탄압저지 결사투쟁선언」이라는 공동투쟁선언문이 낭독되고 배포됐다. 노동자들은 이 선언문에서 대우어패럴노조 탄압이 곧 자신들의 노조에 대한 탄압으로 다가올 것이므로 동맹파업을 통해 이에 저항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동맹파업 첫날 4개 노조의 조합원 1,300여 명이 참여했다.[7] 25일에는 세진전자노조, 남성전기노조, 롬코리아노조가 동맹파업을 지지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운동 단체들은 구로공단 주변에 유인물을 대량 살포하기 시작했다. 26일에는 민통련, 민청련, 청계피복노조 등 22개 운동단체와 노조 대표들이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동맹파업 지지 농성을 시작했다. 저녁에는 구로공단 일대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27일에는 효성물산과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노동부 중부사무소를 점거했다. 성수동에 있는 삼성제약노조가 중식거부 농성에 들어갔다. 종교단체들도 지지 농성에 들어갔다. 대학생들도 연대투쟁에 나섰다. 28일에는 부흥사노조가 동맹파업에 합류했다. 26~27일에는 동맹파업을 한 3개 노조가 해산했다. 효성물산 조합원 73명은 27일 노동부 중부지방사무소에서 점거농성을 시도하다 모두 연행됐다. 27일 오후 8시까지 농성을 하고 있던 노동자 수는 대우어패럴 사업장의 150여 명과 신민당 제1지구당사의 36명 등 모두 약 200여 명이었다. 같은 날 대우어패럴에서는 반노조원 3백여 명이 노조반대 농성을 벌이다 해산했다. 회사 주위에 전경 차 15대가 배치되자 농성장에 위기의식이 고조됐다. 위협적인 분위기 때문에 농성장에서 처음으로 “살인정부 물러가라”, “노총 자폭하라”는 구호가 나왔다. 28일 부흥사 조합원 118명이 노동운동 탄압에 항의, 동맹파업을 시작했다. 부흥사는 동맹파업 직전에 동참권유를 받았으나 집행부 논의 결과 부결되어 참여하지 못했다. 이들은 구속자 석방, 노조탄압중지 등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들어갔다. 부흥사에서 사업장 내 근로조건 개선요구가 정치적 요구와 결합하여 제기됐다. 그러나 파업은 반노조 폭력단의 폭력으로 6시간 만에 해산됐다. 부흥사의 파업은 동맹파업이 직접적으로 노동자들의 의식을 자각시켜 동참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8] 그러나 동맹파업 6일째인 29일, 닷새 동안 굶주리며 농성을 이어가던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의 농성장에 구사대 500여 명이 벽과 출입문을 부수고 들이닥쳐 각목과 쇠파이프로 노동자들을 폭행하면서 농성을 강제 해산시켰다. 동맹파업의 중심이던 대우어패럴 농성장이 무너지면서 동맹파업도 막을 내렸다. 6월 29일 7시 즈음. 기상해서 출근시간에 맞추어 창틀에 매달려 있는데 한일은행 담을 타고 학생들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노동자들이 반가워서 몰려가 환호, 박수로 환영하고 학생대표의 인사말을 들었다. 그러나 채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현장 벽이 부서지면서 관리자, 경비, 반대파들이 돌과 각목을 던지고 소화기를 뿜어대며 급습, 관리자 200여 명이 각목과 쇠파이프, 의자, 발길질 등으로 가릴 것 없이 농성자들을 구타하면서 머리채, 손발 아무데나 휘어잡고 기숙사 쪽으로 끌고 갔다. 회사 측의 폭력을 피해 20여 명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다 모두 잡혀 남부서로 연행, 회사로 다시 끌려와 기숙사에 갇혔다. 기숙사로 끌려간 농성자들은 한방에 5명씩 갇혀서 1인당 비조합원 3명에게 감시당하면서 갖은 모욕을 당했다. 11시 즈음 의사들이 들어와 진정제를 억지로 먹여서 농성자들은 잠이 들었다. 오후 2시 30분 즈음 이들은 깨어나 죽 한 그릇씩을 먹었다. 관리자들은 수시로 드나들며 “경찰서로 직행시켜야 한다”, “입에다 똥을 처넣어야 한다”는 등의 폭언과 협박을 함부로 했다. 그 이후 회사 측은 농성자들을 한 명씩 총무과에 끌고 가 부모까지 동원하여 강제로 사표를 쓰게 했다.[9] 구로동맹파업은 한국노동자운동사에서 한 획을 긋는 역사적 투쟁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지역연대파업이자, 선진노동자들이 목적의식적으로 조직해 낸 연대파업이었다. 구로동맹파업에는 10개 노조에서 약 2천 5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 43명이 구속되고, 38명이 불구속 입건되었으며, 47명이 구류를 받았다. 1,500여 명이 해고되거나 강제사직을 당했다. 동맹파업에 참여한 구로지역 민주노조 8개가 모두 와해될 정도로 희생은 엄청났다. 그러나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자들에게 큰 교훈을 남겼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조합이 경제투쟁만이 아니라 연대투쟁과 정치투쟁도 조합원대중의 주체적 참여 속에서 수행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민주노조운동이 국가권력의 탄압에 맞서 얼마든지 정면대결을 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구로동맹파업은 1987년 대투쟁 이후 대규모로 등장한 민주노조운동이 국가권력의 탄압에 거침없이 연대투쟁으로 맞섬으로써, 폭발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결코 쉽사리 파괴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진지를 구축해 낼 수 있도록 길을 잡아주었다.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에게 단결의 힘을 인식할 수 있게 했다. 노동자들은 해방춤, 탈춤, 즉흥 촌극, 장기자랑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용하거나, 지원을 통해 서로의 힘을 북돋았다. 이는 노동자들의 투쟁수기, 기고 글, 파업일지 등에서 드러나는데, 「파업농성일지」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우어패럴 조합원들은 맞은 편 효성물산에서 꽹과리 소리가 나면서 동맹파업에 들어갔음을 알려오자 환호하며, 창가로 가서 구호를 외침으로써 서로를 응원했다.”(24일) “효성물산은 위원장이 가리봉, 선일 등 다른 노조에서도 동맹파업에 들어갔다는 신문보도를 읽어주자, 조합원들은 환호성을 하며 열심히 구호를 외쳤다.”(25일) “가리봉전자 조합원들은 남성, 세진. 롬코리아의 연대소식을 듣고 힘을 얻었다. 밤늦게 옆 회사 노동자들이 우유 등을 넣어주며 격려하여 눈물겹도록 힘나게 해주었다.”(25일) 이처럼 노동자들은 투쟁하는 서로의 모습에 힘을 얻으면서 노동자로서 일체감을 느꼈다. 또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경찰이나 노동부 등의 탄압을 직접 경험하면서 투쟁 대상에 대한 인식을 보다 분명히 했다. 우선 투쟁 과정에서 드러난 경찰에 대한 노동자들의 태도를 보자. “가리봉전자에서 정문 앞에서 노동자들이 구호와 노래를 하던 도중에 관리자들과 사복경찰들이 정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했다. 밀고밀치는 싸움과정 속에서 그들은 쇠파이프 각목 등으로 발등을 내리찍고 등을 후려치면서 ‘xx들 다 죽여야 한다’는 등의 욕설과 폭행을 가했다 … 계속되는 치열한 동맹파업과정 속에서 노동자를 탄압해 온 실체가 누구누구인가를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26일) 경찰의 개입에 대해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분노 속에 “폭력경찰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26일). 또 노동자들은 정부가 기관원이나 노동부 관계자들을 투쟁과정에 개입시켜 탄압하는 것에 대해서도 본질을 인식해 갔다.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태도는 다음의 「파업농성 일지」를 통해 확인된다. “가리봉전자에서는 기관원, 노동부 관악소장 등이 다녀가고 나서부터는 식당아줌마를 퇴근시키고 점심식사를 주지 않았고 물까지 끊었다. 항의하자 회사 측은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밥도 사장은 주려고 했지만 정부에서 주지 말라고 하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짐승에게도 밥은 굶기지 않는데 이 정부는 우리 노동자들을 어떻게 여기기에 밥도 물도 못 먹게 하는가! 전 조합원들은 다시 한 번 악랄한 처사에 치를 떨었다.”(25일) 이러한 노동자들의 정부에 대한 인식은 6월 28일 대우어패럴 농성장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났다. 이날 대우어패럴 기업주의 사주를 받은 비조합원들이 노조반대시위를 하고, 이어 전경차 15대가 주위에 배치되면서 농성노동자들의 위기의식이 고조된 위협적인 분위기에서도 노동자들은 “살인정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경찰, 기관원, 노동부 등의 탄압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은 그 본질에 대해 보다 분명히 인식해 갔다. 파업 때 진행한 토론내용은 ‘투쟁의 의의와 민주노동운동’, ‘관리자의 태도’, ‘노동운동사 강의’, ‘10·26 사태를 풍자한 연극과 토론’, ‘왜 동맹파업을 하는가’, ‘신민당의 태도’ 등이었다. 또한 파업과정에서의 토론은 매 사안에 대해 노동자들이 서로의 의견을 모아 결정하는 민주적인 훈련과정이기도 했다. 이처럼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의 규율을 만들어 갔으며 동시에 투쟁대상을 보다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하여 노동자들의 의식을 변화시켰다.[10] 구로동맹파업은 1970년대 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투쟁이나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명동성당 농성투쟁과는 질적으로 다른 노동운동의 위치를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을 경과하며 변혁적 노동운동 세력이 제거된 뒤 새로이 ‘아래로부터 노동자투쟁’으로 출발한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탄압과 종교계, 지식인 등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세력들의 영향 아래 있었다. 민주노조운동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그들의 생존권적 요구를 정치문제화시켜 해결하려 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으로 노동운동은 1970년대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향한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사회변혁을 지향했으며, 사회변혁운동을 위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사회변혁의 주체가 민중·노동자라는 인식을 분명히 했다. 198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의 인식변화는 구로동맹파업을 통해 좀 더 구체화됐다.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비타협적인 정치투쟁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노동자들의 힘 있는 투쟁만이 민주화운동 세력의 지지와 동참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경제적인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투쟁한다는 시각과 노동운동을 전체 운동의 한 부문운동으로만 파악하던 시각을 극복하고, 노동운동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중심이며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이라는 인식의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11] [1] 한겨레신문, 2016/11/03, 「54명 사망 삼청 교육…가해자들은 바로 풀려났다」. [2] 청계피복노동조합, 1981, 「호소문」.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40~41쪽에서 재인용) [3]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99~105쪽. [4]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257~263쪽. [5]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281쪽. [6]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288~296쪽. [7]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284~285쪽. [8]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285쪽. [9]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306쪽. [10]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475~477쪽. [11]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479~480쪽.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스리랑카·베트남 처녀 수입하자”는 막말, 진도군수만의 문제는 아니다!김희수 진도군수 김희수 진도군수가 생방송 도중 농촌 인구 소멸에 관해 “외국 처녀를 수입하자”고 말해 논란이 일고 있다. 문제의 발언은 방송 3사에 생중계된 2월 4일 전남 해남군 해남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광주·전남 행정통합 찾아가는 타운홀미팅’에서 나왔다. “광주·전남이 통합할 때 인구 소멸에 대한 것을 법제화해서, 정 뭣하면 스리랑카나 베트남이나 그쪽 젊은 처녀들 좀 수입해갖고 농촌 총각 장가도 보내고, 이런 특별 대책을 해야 한다. 사람도 없는데 산업만 밤낮 살리면 그게 제대로 되겠냐”라는 발언이었다. 이주여성 노동자가 혼인과 출산 대행 상품인가! 진도군수의 발언은 이주 여성을 한 인간이자 노동자로서 존중하지 않고, 혼인과 출산을 위한 도구로 취급한 발언이다. 그것도 사람을 사고 파는, '수입 가능한' 상품으로 취급한 노골적인 인권 침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진도군수의 말은 ‘처녀’라는 표현이 ‘결혼하지 아니한 성년 여자’, ‘남자와 성적 관계가 한 번도 없는 여자’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문제다. 그리고 사용 맥락 역시 여성을 가부장제적 인식에 기반해 젠더차별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더 문제다. 또 ‘수입하자’는 발언은 인간을 상품과 동일시하는 극단적인 비인간화다. 이는 단순히 ‘부적절한 표현’, ‘신중하지 못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 노동자 민중, 특히 평균소득이 낮은 나라에서 온 이주여성을 하위의 존재로 규정하는 위계의식에 기반한 혐오발언을 공적 자리에서 내뱉은 사건이다. 진도군수의 발언은 이주민의 인권과 존엄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이 발언은 여성을 노동력 재생산, 무급돌봄노동 도구로 규정하며, 특정 국적의 여성은 더 쉽게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왜곡된 인식을 재생산한다. 계급구조의 폭력성을 바탕으로 성차별·인종차별을 뒤섞은 억압을 정당화하는 발언이다. 가뜩이나 도시와 농촌의 사회적 격차로 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에다 다양한 공적 서비스 인프라가 부족한 농촌에서 이러한 가부장적이고 반동적 이데올로기는 결혼제도 안에서 발생하는 이주여성에 대한 통제와 폭력, 경제적 착취를 구조적으로 은폐한다. 불안정한 체류 자격과 열악한 노동조건, 생계와 송금 등 경제적 압박 속에서 폭력과 차별을 감내하는 결혼 이주민 여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차별과 혐오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군수 하나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 그런데 이 발언이 진도군수 공인 한 사람의 문제일까? 전국 25개 지방자치단체는 2025년 상반기가 되어서야 소위 “국제결혼 지원 조례”에 근거해 세금으로 ‘농촌 총각을 이주 여성에게 장가보내’는 결혼 비용 지원 사업을 폐지했다. 그동안 이는 농촌 인구감소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외국 여성을 사온다는 ‘매매혼’이자, 이주여성을 출산과 무급돌봄노동 도구로 취급하는 인권침해 정책이라는 여러 비판에도 거의 10년간 지속되었다. 최근에는 ‘이주여성 정착지원금’ 등으로 제도를 변경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주여성을 돈 주고 살 수 있는 인구대책 수단이자 상품, 농촌 총각 매매혼의 도구로 생각하고 동시에 농촌 비혼 남성을 이주여성 매입자(구매자)로 규정하는 관점은 한국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기인한다. 노동자 민중을 존엄한 인간이 아닌 도구로 여기는 체제, 가부장적 젠더차별, 성별분업 구조, 값싼 노동력에 의존해 유지되는 자본주의적 농촌 구조, 그리고 이주민을 ‘노동력’이나 ‘인구 대책’ 수단으로 활용해 온 국가의 반동적 이주정책이 결합한 결과다. 다시 말해 여성, 그 중에서도 더 열악한 처지인 아시아 이주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이번 발언을 가능하게 한 토대다. 젠더차별에 맞서는 노동자민중의 단결이 필요하다 이주 여성은 ‘수입’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사회 구성원이다. 여성과 이주민을 억압하는 구조를 철폐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도, 평등도 존재할 수 없다. 여성 노동자가 출산과 무급돌봄노동 도구가 아니듯, 이주여성 노동자는 농촌 인구감소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국적과 인종, 젠더, 성별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우리는 같은 노동자이자 존엄한 삶과 노동을 영위해야 할 주체다. 노동자는 하나라는 대의로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확대재생산하는 인종차별에 맞서자. 한국 자본주의가 만든 지역 사회의 위기를 이주여성에게 떠안기고 이주여성의 존엄을 파괴하는 폭력을 중단하라! 이주민을 '값싼 노동력'으로 사고하는 관점이나 이주여성을 결혼과 출산의 도구로 사고하는 관점을 다르지 않다. 이미 한국 인구 20명 중 1명이 이주민이다. 국내 신혼부부 10쌍 중 1쌍은 다문화 가정*이다. 쇠퇴하는 자본주의, 자본과 정부는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자를 분열시키며 착취와 수탈을 강화한다. 진도군수의 발언을 비판한다면, 국적과 젠더를 활용한 차별에 맞서 노동자 단결을 확대하자. 그것이 노동자 내부를 가르는 저들에 맞서는 우리의 전략이다. *국가데이터처 ‘2024년 다문화 인구동태 통계’, 지난해 다문화 혼인은 2만 1450건으로 1년 전보다 1019건(5.0%)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2026년 1월 6일 발표) -
[그래, 다시 마르크스주의 연재#3]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운동 법칙을 집중 탐구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생산양식이 어떻게 발생해 소멸해 가게 되는지, 그리고 이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경제적 생산양식이 무엇인지를 다룬 것이 바로 마르크스 경제학설의 내용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과학적인 대답이다. (1852년 《펀치》지에 실린 만화 '콜레라 왕을 위한 법정'은 런던 내 도시노동자계급의 비참한 환경을 묘사하고 있다. - 편집자 주) 3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1. 생산력: 인류 역사 발전의 원동력 출발점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고통스럽고 불안정한 삶에 내몰려 있다. 이것은 결혼과 출산마저 기피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의 뿌리는 무엇일까? 바로 먹고사는 문제, 즉 안정적이고 충분한 생활임금을 주는 일자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다. 이는 경제 문제다. 마르크스 사상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마르크스의 사회 분석에서 출발점은 ‘생산’이다. 인간과 사회의 변하지 않는 제1의 필요는 다름 아니라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먹고사는 것을 만드는 것을 우리는 생산이라 부른다. 생산 방식은 늘 변해 왔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인간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생산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생산된 것을 어떻게 분배하느냐도 중요하다. 하지만 분배는 무언가 생산이 이뤄진 뒤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는다면, 분배 자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회가 변화 발전하는 방향은 우선 생산에 맞춰진다. 분배가 어떻게 이뤄지든,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사회가 생산하는 양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의 크기는 결국 ‘생산능력(생산력)’에 좌우된다. 인류의 역사적 발전 법칙은 바로 이 생산력을 가능한 한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산력은 진공 상태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생산은 생산 과정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맺는 사회적, 집단적 관계 속에서 이뤄진다. 이런 관계에는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관계, 생산물 사이의 교환관계, 생산물에 대한 분배관계 등이 있는데, 마르크스는 이것들을 종합해 ‘생산관계’라고 불렀다. 생산관계라는 형식 속에서 생산(능)력이 살아 숨 쉬는데, 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이 바로 ‘생산양식’이다. 그런데 생산력은 고정돼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 발전한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산력의 변화 발전이 일정한 수준, 단계에 도달하면, 이 생산력은 기존의 생산관계와 충돌한다. 내용(생산력)의 변화 발전은 기존의 고정된 형식(생산관계)과 충돌한다. 이것은 빠르게 성장하는 아이의 몸(생산력)과 그 아이가 입고 있는 옷(생산관계)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아이가 성장(변화 발전)하면, 그동안 아이의 몸에 딱 맞았던 옷이 아이의 몸을 조이기 시작한다. 결국 아이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작은 헌 옷을 버리고 큰 새 옷으로 바꿔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옷 때문에 아이는 고통받게 되며, 언젠가 아이의 몸은 헌 옷을 찢게 될 것이다. 물론 후자의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현명한 부모라면 그런 상황이 닥치기 전에 아이의 성장 속도에 맞게 더 큰 새 옷을 입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발전 과정, 즉 생산력의 발전 과정은 그것과는 달리 대단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생산력의 성장 단계에 발맞춰 기존의 생산관계를 새로운 생산관계로 대체하는 것을 결연하게 막아야 하는 반동 세력 즉, 인류의 사회적 발전을 가로막아야 하는 반동 세력 때문이다. 바로 기존의 생산관계 속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겨 왔던 낡은 지배 계급이다. 낡은 반동 지배 계급은 새로운 생산관계가 사회에 자리 잡아 인류의 생산(능)력이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돋움하는 것에 저항한다. 개인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 저항을 분쇄해 새로운 생산관계를 창조함으로써 인류의 진보에 길을 터 주고 촉진하는 것, 바로 이것이 ‘사회 혁명’이다. 인류 사회는 생산력의 성장에 족쇄를 채우는 낡은 생산관계를 버리고, 생산력 발전에 조응하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채택하는 방향으로 전진해 왔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규정한, 인류 사회의 혁명적 변화 발전의 뿌리였다. 생산력 옷, 쌀, 자동차, 배, TV, 컴퓨터, 휴대폰, 약, 학교 등 의식주를 비롯한 생존 수단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조건을 갖춰야 한다. Ι. 토지, 원료, 기계, 도구, 작업장 ─ 즉 생산수단이라고 부르는 것. ΙΙ. 노동력 ─ 생산수단에 자신의 힘과 기술을 사용해 유용한 것을 생산하는 노동자. 생산수단과 노동력은 생산력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두 요소다. 이 두 조건이 결합해야 비로소 생산이 이뤄진다. 생산수단만으로는 생산할 수 없다. 자동차 공장을 예로 들면, 아무리 우수한 작업 도구와 잘 정비된 조립 라인이 있더라도 노동자가 조립 노동에 나서지 않으면 즉, 노동(능)력이 결합되지 않으면 자동차를 만들 수가 없다. 이것은 노동자가 일을 멈추는 파업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노동력이 준비돼 있더라도, 작업장과 기계, 도구 같은 생산수단과 결합하지 못하면 자동차를 만들 수 없다. 이것은 해고돼 생산수단으로부터 강제로 격리된 노동자들이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것에서 드러난다. 가장 단순하게 접근하면, 생산이란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하는 것, 그래서 유용한 가치를 가진 생산물이 만들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모든 사회에 공통된다. 각각의 사회를 구분하는 것은 우선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질적 차이다. 돌도끼나 낫 같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사회와 거대한 컨베이어나 자동 선반 같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사회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된다. 원시인의 노동력과 잘 숙련돼 있고 여러 고급 기술과 기계를 사용하는 현대 노동자의 노동력 사이에는 거대한 질적 차이가 있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해 구성되는 생산(능)력의 질적 차이로부터 각각의 사회는 질적으로 구별된다. 더 진보한 사회과 덜 발전한 사회를 나누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산력의 질적 차이다. 크게 볼 때 인류 사회는 원시 공산제 생산양식, 노예제 생산양식, 봉건제 생산양식,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질적으로 이행해 왔다. 2. 소유관계와 분배관계 다음으로 각각의 사회를 구별하는 것은 생산관계의 상이성이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하는 것은 특정한 생산관계 아래에서 이뤄진다. 소유관계, 교환관계, 분배관계를 포괄하는 이 생산관계에서 일차적 규정력을 발휘하는 것이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관계’다. 가령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력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한편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유산자 계급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단지 노동(능)력만 갖고 있는 무산자 계급이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 아래에서는 생산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까?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자 계급인 자본가 계급은 다른 사람들을 임금노동자로 고용해서 자신을 위해 일을 시킬 권리를 얻는다. 반대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무산자들인 노동자 계급은 노동력 제공을 조건으로 해서만 비로소 생산수단과 결합할 기회 즉, 취업의 기회를 얻는다. 이렇게 생산수단은 자본가 계급이 소유하고, 노동력은 노동자 계급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해 생산이 이뤄지는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 경제 체제다. 이것은 생산 과정에 자신을 각인한다. 자본주의 소유관계에서 이뤄지는 생산 과정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가 가진 것은 단지 몸뚱이(즉 노동력만 가진 무산자)인 노동자를 마음대로 부려 먹고 착취하는 과정이 된다. 그 결과 생산 과정(노동 과정)은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해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자본가가 노동자를 쥐어짜서 잉여가치(이윤)를 창출하는 잔인한 착취의 과정이게 된다. 개별 소농민이 자기 소유의 밭에서 스스로 일하는 과정은 단순히 일(생산)하는 과정일 뿐이지만, 노동자가 자본가 소유의 작업장에서 일하는 과정은 생산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착취하는 과정이자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착취당하는 과정이다. 교환 과정과 분배관계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을 통과해 만들어진 생산물은 이제 자본주의적 교환 과정 및 분배 과정으로 들어간다. 자본주의 (상품)교환관계에서는 평등한 등가교환의 원리가 작동한다. 동일한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은 동등한 화폐가격으로 서로 교환된다. 시장에서 200만 원에 팔리는 200만 원짜리 오디오 1대를 가정해 보자. 200만 원을 손에 쥔 사장은 이걸로 200만 원 어치 부품, 재료를 다른 사장들로부터 구입할 수 있을 뿐이다. 때로는 더 싸게 구입할 수 있고, 때로는 더 비싸게 구입할 수도 있겠지만, 긴 기간 평균 가격을 따져 본다면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분배관계는 어떨까? 시장에서 판매된 생산물(상품)은 자본가 계급 수중에 화폐로 돌아간다. 이 화폐는 어떻게 분배되는가? 일부는 부품이나 원료, 설비, 도구 등을 다시 구입하는 데 들어간다. 그 뒤 남은 돈으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분배가 일어난다. 자본가는 노동력 공급자인 노동자와 계약을 맺은 돈을 임금으로 지급한다. 이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가 자본가의 이윤이 된다. 이렇게 노동력에 해당하는 가치(임금)와 이걸 제외하고 남은 자본가의 이익(이윤)이 자본주의 분배관계의 핵심이다. 노동자는 노동력의 가치를 임금으로 분배받고,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 낸 전체 노동의 가치 중 이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 가치를 이윤으로 챙긴다. 이런 분배관계의 결과는 무엇일까? 임금은 노동자 가족이 한 달 벌어 먹고사는 데 급급한 낮은 수준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약간 남은 돈은 질병이나 노후, 아이들 학비를 대비해서 모아 두어야 한다. 결국 노동자들은 임금노예의 지위를 넘어설 수 없다. 작업장, 기계 등 생산수단을 구입해 유산자가 되는 길은 봉쇄돼 있다. 한 달에 100만 원도 저축하기 힘든 노동자들이 어찌 수백억, 수천억, 수조 원의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될 수 있겠는가? 반면 기존의 거대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에 더해, 자본가들은 새롭게 확보한 이윤으로 추가 투자를 함으로써 갈수록 더 거대한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눈덩이처럼 커진, 거대한 생산수단을 노동자들이 소유할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닫힌다. 그래서 자본주의 소유관계는 더욱 확고해진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더욱 완전하게 자본주의 착취관계에 빨려들어 간다. 이것은 분배에서의 불평등을 더욱 가속화한다. 이렇게 소유관계 → 분배관계 → 소유관계 → 분배관계로 이어지는 확대 순환의 고리 속에서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더욱 탄탄해진다. 3. 잉여가치의 본질 잉여가치(이윤)는 어디서 발생할까? 어느 지점에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일어나고, 그 결과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창출하게 될까? 교환 과정은 아니다. 여기서는 하나의 상품이 동일한 교환가치를 가진 다른 상품과 화폐를 매개로 교환될 뿐이다. 그렇다면 분배 과정일까? 그렇지 않다. 정상적인 경우 분배는 계약에 의해 정당하게 이뤄진다.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맺은 임금계약에 따라서 임금을 분배받는다. 이 임금계약서는 계약한 임금을 정상 지급한다면, 나머지 이익금을 사장이 가져가는 것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임금계약은 내용적으로는 부당한 것이다. 동등한 두 주체가 맺는 계약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맺은 불평등한 계약이기 때문이다. 입사하는 노동자는 사장에게 ‘내가 일해서 창출한 가치만큼 전액을 임금으로 지급하라.’고 요구하지 못한다. 그러면 사장은 단번에 입사계약을 거부할 것이다. 계약은 전혀 다르게 진행된다. 몸뚱이, 즉 노동(능)력만을 소유하고 있는 노동자는 생산을 해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과 결합해야만 한다. 따라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사장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계약서를 내민다. “네가 노동을 통해 얼마만큼의 가치를 창출하느냐는 임금계약에서 결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네가 노동을 통해 창출한 가치 전체를 줄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면 나에게는 이익(이윤)이 남지 않는다. 나는 오직 네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수준의 임금만을 줄 것이고, 나머지는 내가 가져갈 생각이다. 이것에 동의하면 임금계약서에 사인해라. 그렇지 않으면 취업을 포기하라!” 실업자로 떠돌지 않으려면, 노동자는 이런 불평등한 계약서에 사인해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부당한 착취적 분배관계가 평등한 자유계약으로 둔갑한다. 이렇게 부당한 분배관계가 작동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생산의 두 요소 중, 생산수단을 전적으로 극소수 사장들이 독점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바로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 즉, 소유관계에 있다. 개별 노동자 수준에서 접근한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집단적 임금계약을 맺더라도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강력한 노동조합이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수행한 전체 노동의 가치를 임금으로 달라고 강제하기 어렵다. 단지 착취의 강도를 낮춰, 잉여가치를 줄이는 대신 노동자가 가져가는 임금 비율을 높일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잉여가치를 크게 줄여 버리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이유가 사라진 자본가들은 차라리 회사 문을 닫아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 체제는 그것을 구조적으로 강요한다. 잉여가치를 충분히 뽑아내지 못해서 자본 투자를 줄이는 자본가는 언젠가 경쟁에서 밀려 몰락할 것이고, 이것은 그 자본가와 계약을 맺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실업이라는 거대한 재앙을 선물한다. 이것은 모든 노동조합에 대한 근본적 압력이 된다. 그 결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개의 노동조합 투쟁은 착취 자체를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정상적인 임금이라도 강제하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것은 자본주의 철폐를 향해 단호하게 진격하지 않는 노동조합이라는 한계 내에서 그렇다. 노동자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착취를 철폐하려는 노동조합이라면, 자본주의 경쟁 압력을 뛰어넘어 전체 노동자 계급의 총단결을 추구해야 한다. 그 결론은 자본주의 소유관계를 모든 생산수단을 생산자 자신이 집단적으로 공동 소유하는 사회주의로 대체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전망이 모든 노동조합이 추구해야 할 미래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에게 임금 투쟁은 사활을 걸 만큼 중요하다. 임금 투쟁을 통해서만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정상 임금이라도 강제할 수 있으며, 다른 무엇보다도 자본주의를 철폐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 힘, 단결, 의식을 키워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지속적이고 전투적인 임금 투쟁을 통해서만, 그리고 임금 투쟁의 연장선에 있는 노동 시간 단축 투쟁, 노동 강도 완화 투쟁을 통해서만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를 향한 학습, 토론, 조직화를 이룰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 과정 ─ 노동자 착취 과정 내용적으로 볼 때 부당한 임금계약이 이뤄졌더라도, 그 자체로 잉여가치가 바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빼앗기 위해서는 먼저 빼앗을 것이 있어야 한다. 잉여가치 또한 생산 과정에서만 창조된다. 유산자와 무산자로의 분할이라는 자본주의 소유관계에서 출발한 ‘부당한 계약’은 작업장에서 이뤄지는 생산 과정에서 비로소 집행된다. 모든 가치가 창조되는 생산 과정에서 자본가들은 임금, 즉 노동력 재생산 비용에 해당하는 가치가 창출되는 노동 시간(이것을 마르크스는 ‘필요 노동 시간’이라고 불렀다)을 넘어서는 추가 노동을 하도록 노동자에게 강요한다. 이 추가 노동에 대해서 자본가들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자신이 챙긴다. 이것이 바로 이윤의 원천이다. 이처럼 노동자들이 공짜로 자본가들에게 갖다 바치는 추가 노동 시간을 마르크스는 ‘잉여노동 시간’이라 불렀다. 가령, 생산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자기 임금에 해당하는 가치를 창출하는 시간이 주 20시간이라고 하자. 그런데 취업계약서에 주 40시간이 명시돼 있다면, 나머지 주 20시간의 노동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서 노동자들은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노동하는가? 바로 자본가들을 위해서다. 이 공짜노동이 잉여가치를 낳는데, 이것이 모든 자본가 계급의 이윤의 원천이다. 자본가들 사이에서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치더라도, 이렇게 생산 과정에서 창출되는 잉여가치가 모든 자본가들이 나눠 가지는 이윤의 원천이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모든 사회에서 생산 과정은 유용한 가치가 창출되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 과정은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가 자행되는 무자비한 착취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르크스가 “모든 생산물은 그것에 투입된 사회적 평균 노동 시간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 가치의 어머니는 바로 노동이다.”라는 ‘가치 법칙’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경제학자였던 리카도가 그것을 먼저 발견했다. 하지만 리카도는 잉여가치 즉, 착취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감추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본가 계급의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잉여가치 앞에서 도망쳐 버렸다. 반면 마르크스는 리카도의 가치 법칙을 계급적 편견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를 최초로 발견했다. 이것은 노동자 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최고의 공헌이었다. 착취가 왜 발생하는지 즉, 왜 노동자들은 가난하고 자본가들은 갈수록 부자가 되는지에 대해서, 나아가서 가만히 놔두면 자본주의는 왜 필연적으로 자본가 계급의 왕국을 건설할 수밖에 없는지를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밝힌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 법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자본주의 불황기와 공황기에 노동자들은 실업과 더 낮아지는 임금에 신음한다. 반면 자본주의 호황기에 노동자들은 잠시 어느 정도 안정된 일자리와 임금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노동자들은 엄청난 잉여가치를 자본가들에게 갖다 바쳐 노동자들을 칭칭 감고 있는 임금노예의 사슬의 길이를 빠르게 늘려야 한다. 잉여가치(이윤)가 빠르게 추가 투자됨으로써 자본가들은 더 거대한 생산수단을 자신의 수중에 축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산자와 유산자 사이의 깊이 파인 골은 더욱 깊어지고, 노동자들은 헤어날 수 없는 더욱 깊은 착취의 수렁으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벗어날 길은 딱 하나다! 노동자 계급 전체에 의한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 즉, 사회주의!” 4. 약탈 경제, 그리고 증가하는 모순 기계제 대공업의 발전으로 공장이 널리 확산됐지만, 이렇게 비약적으로 발전한 사회적 생산력의 성과는 생산자(노동자)들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집단적, 사회적 노동의 성과들은 공장 플랫폼 소유자인 자본가들이 독점했다. 게다가 자본가의 수중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수많은 노동자를 해고하고, 강도 높고 위험한 노동으로 내모는 강력한 무기가 됐다. 플랫폼 자본가는 산업 사회에서 사회적, 집단적 노동의 성과를 자본가가 독점해 이윤으로 흡수했듯이, 디지털 플랫폼 공유경제의 성과 또한 독점해 새로운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이른바 정보통신 플랫폼이 확산하면서 발생하는 효과는 디지털 중앙 플랫폼을 독점하고 있는 자본가에게 주로 귀속된다. 그에 따라 MS, 구글 등의 뒤를 이어 새로운 거대 신흥 자본의 배출구로 디지털 플랫폼 산업이 부상하고 있다. 또한 공장 플랫폼이 수많은 소생산자들을 몰아내고 임금노동자로 둔갑시켰듯이, 디지털 중앙 플랫폼은 택시, 숙박업, 택배, 화물운송, 돌봄 노동 등에서 수많은 소생산자들을 사실상 자기 휘하에 종속시키고 임금노동자로 전락시키고 있다. 플랫폼 기업이 운영하는 정보 플랫폼(거대 앱)을 공유하고, 심지어는 이 플랫폼에 정보를 공급하는 필수적 주체는 바로 이용자들 즉, 사회다. 이처럼 정보의 생성자들은 수많은 이용자들이지만 그 정보는 결코 ‘공유’되지 않고, 플랫폼 기업에게 ‘독점’된다. 정보통신 기술과 과학을 발전시킨 것은 사회지만, 그 결과물은 사회가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 기업에 의해 이윤 창출의 도구로 독점된다. 노동의 사회적 결합, 그리고 이용자와 생산자 사이의 사회적 결합을 통해 더 진전된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제공하며 생산능력을 발전시키는 사람들은 플랫폼 산업의 노동자들이지만, 그 결과물은 플랫폼 자본에 의해 독점된다. 플랫폼이란 기술 장치를 통해서 거래되는 유휴자원의 효율적 관리와 배치, 상호교환, 나아가서 정보공유 플랫폼을 통한 생산성 증대와 비용 절감 등 대부분의 경제적 효과들이 ‘공유’되지 않고, 플랫폼 기업 수중에 ‘집중’, ‘독점’되어 상품으로 가공된다. 이처럼 정보가 플랫폼을 통해 공유되기는 하지만, 공익적 효과가 거의 없는 것이 오늘날 ‘공유경제’의 민낯이다. 디지털 플랫폼 산업에서 자본은 과거 산업자본처럼 상당한 규모의 초기 자본조차 투입하지 않는다. 가령 우버나 에어비앤비 등 글로벌 플랫폼 기업은 거대 독점체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큰 자본을 투입하지 않았다. 단지 정보의 망을 (총자본의 크기에서 보면 별것 아닌) 중앙 정보 플랫폼 장치를 통해 연결했을 뿐이고, 그 작업을 ‘선점’했을 뿐이다. 통상적으로 산업 자본이 투입하는 임금 비용이나 토지매입 비용, 설비투자 비용 등이 디지털 플랫폼 기업에게는 거의 생략된다. 과거 산업 자본은 ‘투자한 자본에 대한 대가’라는 명분으로 이윤을 정당화하려 했다. 디지털 플랫폼 기업은 그런 알리바이조차 댈 수 없게 됐다. ‘초기 투자 자본’이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공유경제라는 말은 그런 딱한 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디지털 플랫폼 산업에서는 거의 손 하나 안 대고, 사회적 공유 성과를 도둑질해 가고 생산자들을 수탈하는 자본의 약탈적 성격이 도저히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정보통신 기술과 과학, 생산자들과 이용자들의 연결망과 이것을 통해 교환되는 거대한 정보는 모두 사회적 공유재산이다. 누구도 이것을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회적 범죄다. 하지만 플랫폼 자본은 중앙 플랫폼을 통해 정보 연결망을 독점해, 사회적 공유재산을 사유화한다. 이것은 IT 분야의 선조인 구글, 페이스북, 네이버, 다음 등의 독점 대자본이 형성됐던 과정이기도 했다. 이 선조의 뒤를 따라 지금 플랫폼 산업은 모든 영역으로 가지를 뻗어 가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택시, 자가용, 트럭 등을 한 대도 보유하지 않고도, 또한 단 한 평의 땅도 사용하지 않고서도 엄청난 이윤을 뽑아 간다. 따라서 본원적 자본 즉, 초기 투자 자본의 권리조차 플랫폼 대자본은 감히 주장할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가 플랫폼 산업에 붙인 ‘공유경제’란 딱지는 한편으로는 비열한 위선이자 사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공유경제! 맞다. 이것은 철저히 공유경제다. 그렇다면 공유의 성과는 사회 전체가 가져가야 하고, 특히 플랫폼 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모든 노동자 민중이 가져가야 마땅하다. 이를 통해 플랫폼 자본이 사회적 공유경제의 효과를 독점해 자신의 이윤으로 착복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원천 봉쇄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이 정보통신 기술과 플랫폼을 통해 발전하는 사회적 노동의 효과를 노동자 계급을 비롯해 전체 사회구성원에게 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전망이다. 이 전망은 국가가 한 줌 자본가들을 대변하는 대신, 사회구성원 다수의 생존을 지키고자 한다면 간단한 조치만으로도 즉각 실행할 수 있다. 가령 국가가 중앙 플랫폼을 만들어 운영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 이미 국가 전산망을 통해 사회 구석구석까지 서로 연결되는 엄청난 플랫폼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국유화된 중앙 플랫폼을 무기로 삼는다면, 점차 이를 중심으로 해당 산업 전반을 장악하고 사회화해 가는 빛나는 전망이 열릴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소유관계와 이것을 반영하는 자본가 국가는 그러한 전망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자본가 소유를 채워 넣는다.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생산력과 이것을 사유화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사이의 충돌은 플랫폼 경제의 확대 속에서 더욱 격렬하게 나타난다. 나아가서 성장하는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 사이의 충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명적인 모순을 잉태한다. 발전하는 생산력은 사회적 성격을 띠지만,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갈수록 그것과 격렬하게 충돌한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이다.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을 더 이상 제대로 담을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은 생산력 발전에 엄청난 장애가 된다. 장기불황과 공황이 그 단적인 증거다. 자본주의 체제의 반동성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 ─ 공황과 장기불황 공황을 살펴보자. 공황의 양상은 어떤 것인가? 공황이 발생하면 수많은 생산설비와 노동력이 쉬게 된다. 기계는 지금 당장이라도 굉음을 내면서 수많은 생산물을 토해 낼 수 있지만, 가동되지 못한다. 수많은 원료가 썩거나 폐기 처분되고, 기계는 녹슨다. 엄청난 숫자의 노동자들이 일하기를 갈망하지만, 실업자로 떠밀려 생산에서 배제된다. 이것은 명백히 생산(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생산설비와 같은 생산수단이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노동자가 문제인 것도 아니다. 기계는 스위치만 누르면 바로 가동될 수 있는 상태고, 노동자의 노동능력도 아무 문제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엄청난 생산능력을 파괴하고 있는가? 바로 자본주의 생산관계다.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본질은 자본-임노동 관계다. 즉, 생산수단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이윤을 증대시키기 위해 무산자인 노동자들을 임금노예로 고용해 착취하는 방식으로 생산이 이뤄지는 것이다. 이러한 생산관계에서 생산의 목적은 무엇인가? 바로 자본가의 이윤을 증식시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생산의 유지, 확대, 축소 여부가 결정된다. 공황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본다면, 결국 공황은 다수 자본가들이 생산을 축소시킨 결과 발생한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생산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는 것이 자신의 이윤 증식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거대한 손실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뒤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장기불황과 공황을 통해서, 다음의 점은 이미 충분히 드러났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이미 사회의 생산(능)력 발전과 충돌하기 시작했다는 점, 따라서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는 이제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철폐할 시기가 되었다는 점!” 5. 생산의 사회적 성격의 확대 지금까지 이어진 인류 보편적 모순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모순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다만 이 충돌이 도달한 역사적 발전 단계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은 기존에 존재했던 다른 사회 체제의 모순과는 구별된다.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등장하고 발전하며 보편화되는 생산력은 바로 ‘사회적’ 생산력이다. 사회적 생산력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생산이 개인적 필요와 욕구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와 요구에 따라 이뤄진다는 뜻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결과물을 대표하는 것이 ‘상품’이라는 점이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상품교환이 일어났지만, 생산물을 대표하는 것이 상품은 아니었다. 주요한 경제활동은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생산(능)력이 너무나 낮은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빼앗길 만한 잉여노동 자체가 아주 클 수가 없었다. 이 잉여노동이 만들어 낸 재화 중에서 노예주나 지주가 소비하는 몫까지 제외한다면, 시장에서 판매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었다. 그런데 상품으로 교환될 수 있는 것은 주로 이 잉여노동 시간에서 발생했다. 자신과 가족이 먹고사는 데 직접 필요한 것들은 결코 상품으로 시장에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예와 농노의 잉여노동에서 발생한 잉여생산물의 경우도, 그것의 대부분은 노예주와 봉건영주, 봉건지주의 호의호식을 위해 사용됐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하는 상품은 사회의 총생산물에서 작은 일부일 수밖에 없었다. ‘타인에게 판매하기 위해 생산하는 생산물’ 즉, ‘교환 자체를 위해 생산하는 생산물’인 ‘상품’이 사회의 총생산물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역사적 발전에 의해 다른 전제조건들이 창출돼야 했다. 기계제 대공업과 집단적 생산 우선 생산능력이 획기적으로 발전해야 했다. 그래서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생산하는 자급자족 수준을 넘어서는 잉여생산물이 큰 규모로 발생해야 했다. 그리고 이 잉여생산물은 착취자의 호화 소비 규모를 넘어설 정도로 충분해야 했다. 이렇게 생산능력이 발전해 타인에게 판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산되는 생산물이 충분하게 발생할 때 시장교환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다음으로 노동 분업이 본격화해야 한다. 노동 분업이란 각각의 생산자가 생산하는 생산물의 종류를 다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생산물은 자기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된다. 자연스레 생산물 사이의 교환이 필수적이게 되고, 그렇게 해서 생산물은 상품으로 전화한다. 이러한 생산능력의 획기적인 발전 및 노동 분업의 본격화를 가능케 했던 것이 바로 기계제 대공업의 등장이다. 봉건 사회 말기에 일어났던 노동 분업은 도시 수공업과 농촌 소규모 생산 사이의 분업이었다. 소농민들은 식량을 생산하고, 이것의 일부를 도시 수공업자들이 생산한 농업 도구들과 교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환이 확대됐지만, 그럼에도 상품으로 교환되는 생산물은 전체 생산물 중 작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기계제 대공업이 도시에서 발전하면서, 이런 상황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기계제 대공업은 엄청난 양의 생산물을 전적으로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했다. 그것과 연관된 다양한 새로운 산업 부문의 등장(가령 철도)은 사회적 노동 분업을 가속화했다. 자급자족적이고 소규모였던 농업 생산의 비중은 급속히 줄어들었고, 판매 자체를 목적으로 생산하는 공업 생산의 비중이 빠르게 높아졌다. 농업 생산도 빠르게 판매를 위한 생산으로 재편되어 갔다. 그와 함께 생산 방식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생산은 소농민이 자기 논과 밭에서 자기 소유의 농업 도구를 가지고 가족과 함께 일하는 ‘소생산 방식’과는 질적으로 달라진다. 거대한 공장에서 수백, 수천, 수만 노동자들이 함께 모여 생산하는 집단적 생산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된다. 또한 그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노동에 종사하는 여러 분야의 노동자들로 나뉜다. ‘사업장 내 노동 분업’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은 ‘이것은 내가 생산한 것’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게 된다. 가령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라면, 이 노동자는 ‘이 자동차는 수천, 수만 명의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생산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자동차 조립공장에 부품을 보내는 수십만 부품업체 노동자들, 자동차 차체와 부품에 들어가는 철강을 가공하고, 플라스틱과 오디오, 전선, 페인트를 제공하는 연관 산업의 수백만 노동자도 고려해야 한다. 심지어는 저 철강과 플라스틱의 원료를 공급하는 칠레의 철광석 노동자, 중동의 석유 산업 노동자도 감안해야 한다. 결국 이것이 진실이다. “이 자동차는 수천만, 수억 세계 노동자의 협력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생산은 집단적 방식으로 이뤄질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전 세계적, 사회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대규모 시장 한두 명, 기껏해야 몇 명에 의해 수공업적으로 이뤄지던 생산이 기계에 기반한 수백, 수천 노동자의 집단적 생산으로 대체됐다. 기계제 대공업을 통해 집단적 생산이 전면화함으로써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이 일어났다. 수공업 생산에 비한다면 기계제 대공업의 1인당 생산량은 비교 불가능할 만큼 엄청나게 증대했다. 그것은 ‘대규모 시장’을 요청했다. 우선 기계제 대공업은 엄청난 양의 원료가 필요했고, 이것은 원료에 대한 대규모 거래가 이뤄지는 시장을 요청했다. 또한 기계를 만들어 내는 자본제 생산 분야와 기계를 사용해 생활수단을 만들어 내는 소비재 생산 분야 사이에 거래가 필요했다. 엄청난 양의 최종생산물 또한 바로 그만큼의 거대한 판매처를 요청했다. 이러한 대규모 시장 없이는 기계제 대공업의 발전이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기계제 대공업으로 아무리 많은 양을 생산하더라도, 결국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는다면 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좁은 지역 사회를 넘어선 전국적 시장교환, 나아가서 세계 차원의 시장 거래를 요구했다. 그것은 철도, 트럭, 선박 등을 활용한 신속하고 대규모적인 물류 운수 산업이 뒷받침돼야 가능했다. 이것은 몇십 년 동안 아직 상용화되지 못한 채 창고에 처박혀 있던 와트의 증기기관을 세상에 불러냈다. 이 증기기관을 장착한 철도가 굉음을 울리면서 대륙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물류 산업이 빠르게 확대되자 이것이 기계제 대공업에 반작용을 가해, 기계제 대공업은 더욱 강하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이렇게 생산과 물류, 시장이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맞물려 들어가면서, 대다수 생산물이 상품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빠르게 확립돼 갔다. 그 본성상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개별 국가를 넘어 전 세계 시장을 향해 뻗어 갔다. 생산은 국가적 성격을 벗어던지고 세계를 향해 확장했고,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 경제를 세상에 토해 냈다. 6. 사회적 생산력과 충돌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바닷물 한 방울에는 대양의 모든 성분이 포함돼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이 응축돼 있다. 상품은 사회적 생산과 교환의 산물이다. 몇 가지 측면만 살펴도 그 점은 너무나 분명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선 상품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수단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상품은 ‘사회적 사용가치’ 즉, 타인들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생산된다. 다음으로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의 생산에 투입한 ‘사회적으로 평균적인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다. 여기서는 ‘주관적 척도’가 아니라, ‘사회적 척도’에 의해 생산자의 노동 가치가 측정된다. 개별 생산자가 10시간의 노동을 투입했더라도, 만약 이 상품 제작에 투입되는 사회적 평균 노동 시간(이것은 평균적인 숙련도와 노동 강도, 기술조건, 기계화.자동화 정도를 기준으로 측정된다)이 9시간이라면, 이 상품은 9시간어치의 교환가치만을 갖게 된다. 이 두 가지 측면이 보여 주는 것은 노동(생산)의 성격이 ‘사회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물론 상품 생산이 존재하는 모든 사회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노동’이 존재했다. 그러나 전체 생산물 중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낮았다. 이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 노동은 아직 충분히 사회적 성격을 띠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원시 공산제의 경우 집단적, 공동체적 노동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그것의 범위는 부족 수준의 아주 제한된 공간을 넘어서지 못했다. 게다가 원시 공산제 사회에서는 아직 사적 소유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생산물이 상품의 형태를 취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면 상품교환의 확대에서만이 아니라, 생산 과정 자체에서 노동의 성격이 질적으로 변화한다. 기계제 대공업의 발전에 따라, 생산 자체가 이미 ‘개별적 노동’이 아니라 ‘집단적 노동’의 성격을 띤다. 나아가서 생산은 개별 작업장의 수준을 넘어서서, 전 세계 차원 생산의 사회적 연결망 속에서 이뤄진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이처럼 작업장 내에서든, 전체 사회적 차원에서든 노동(생산)에 ‘집단적·사회적 성격’을 깊이 각인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생산력은 비로소 ‘사회적’ 단계에 도달했다. 이처럼 생산력은 ‘사회적, 집단적, 세계적 생산력’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고, 또한 그 성격은 갈수록 더욱 강화되지만, 생산관계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우선 ‘소유관계’ 측면에서 보면, 생산은 노동자들의 전 세계적 협동 노동 및 사회적 노동 분업을 통해 이뤄지지만 소유권은 여전히 극소수 자본가 계급이 장악하고 있다. 이것은 ‘분배관계’를 규정한다. 자본주의 분배관계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이라는 형태로 노동력의 가치만 준 뒤, 나머지 노동은 자본가들이 공짜로 가져가 이윤으로 착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배관계는 생산수단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소수 자본가들의 수중에 집중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소유관계를 더욱 강화한다. 이렇게 강화된 소유관계는 자본주의 분배관계를 더욱 강화해, 갈수록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부의 불평등을 키운다. 결국 사회적 생산력과 부르주아적 소유관계, 분배관계 사이에 충돌이 커져 간다. 그리고 충돌은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이 토해 내는 막대한 생산물을 더 이상 자본주의 사회가 소화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기도 한다. 생산과 소비 사이의 충돌이 바로 그것이다. 자본주의 소유관계, 분배관계는 소비의 한계를 만들어 낸다. 자본주의 소유관계에서 노동자들이 분배받는 몫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상품 구매량은 그보다는 빠른 속도로 확대되는 생산량을 결코 쫓아갈 수 없다. 이러한 양상은 결국 파국에 이른다. 시장에서는 팔리지 않는 상품들이 범람해, 불황과 공황이 발생한다. 그 결과 멀쩡한 기계와 작업장이, 수많은 노동자들이 더 이상 생산에 투입되지 못한다. 수많은 공장이 문을 닫거나 가동률을 낮춘다. 자본주의 생산력은 비틀거리고, 쪼그라들면서 후퇴한다. 자본주의 소유관계, 분배관계가 더 이상 포용할 수 없을 만큼 웃자란 사회적 생산력은 결국 폐기 처분된다. 생산력은 성장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가 허용하는 좁은 테두리에 갇히거나 심지어는 파괴된다. 다음으로 ‘교환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생산이 이미 사회적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음에도, 교환은 시장에서 상품교환을 매개하는 무정부적 방식으로 이뤄진다. 생산력과 교환관계는 서로 격렬하게 충돌한다.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은 생산물 사이의 교환이 계획적으로 잘 이뤄지기를 학수고대한다. 그래야만 전 세계적으로 짜인 거대한 사회적 노동 분업망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 필요량이 정확히 측정되고, 그에 맞춰 자동차 산업 및 연관 산업의 전반적인 생산계획이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교환관계는 그것을 전적으로 시장에서의 상품교환에 내맡겨 버린다. 그 결과 자본주의 생산은 무계획적 방식으로 집행된다. 자동차가 시장에서 얼마나 팔리게 될지, 그에 따라 전반적인 생산계획이 어떻게 짜여야 하는지를 전혀 가늠하지 못한 채 생산이 이뤄진다. 모든 것은 시장에서 교환이 일어난 다음에야, 확인된다.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는 상품들이 흘러넘치기 시작한 뒤에야, 자본가들은 생산의 축소를 결정한다. 이러한 무계획적 생산 방식은 자본가들에게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 결과 자본가들은 시장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고 예견하면서 파산이나 손해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를 분석하고 시장 상황을 예측하는 기구들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럼에도 무계획적 생산이 불러오는 파국에서 그들이 자유롭게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런 위험을 경쟁하는 자본가들에게 전가시키기 위해 격렬한 경쟁에 돌입하곤 한다. 그 결과 과잉생산은 결코 멈추지 않으며, 단지 패배한 자본가들이 그 대가를 치를 뿐이다. 상황이 잘 흘러가서 주요한 자본가들이 암묵적 담합을 통해 생산을 감축하는 경우라면 어떨까? 이 경우에도 사회가 치러야 할 결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사회의 생산력은 강제적으로 축소되며, 이에 따라 생산 감축과 실업 행렬이 뒤따른다. 이처럼 무계획적으로 생산이 이뤄짐으로써 발생하는 낭비는 불가피한 것인가? 시장에서의 상품교환이라는 자본주의 교환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생산계획을 짤 수 없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개별 작업장 수준에서는 이미 완전히 계획적인 생산이 이뤄지고 있다. 연간, 월간, 주간, 일간 생산계획표에 따라 생산은 착오 없이 잘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차원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어떤 자본가도 자기 회사에서 생산한 상품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잘 판매될 수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수많은 자본가들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들의 생산을 세계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무계획적인 생산이 야기하는 파국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대자본가들은 잘 발달된 경제 예측 기구들, 가령 거대한 경제 연구소를 운영한다. 자본가 국가 또한 이런 자본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여러 국책 경제 연구소들을 운영한다. 이러한 경제 연구소들만이 아니라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도 손실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경제 연구소를 운영하며 전 세계 생산 흐름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계산한다. 이러한 ‘부기 수단’들이 발전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전 세계적 생산의 흐름을 계산할 수 있는 정교한 방법들을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이렇게 예측하더라도 이것이 생산의 사회적 계획화를 가능케 하는 건 아니다. 몇 년 후 세계 시장에서 자동차가 포화될 거라고 예측하는 자본가는 어떤 전략을 세울까? “누군가는 과잉생산의 결과 몰락할 것이 분명하다. 무정부적 과잉생산의 대가를 치르는 자는 내가 아니라 경쟁자여야 한다. 자동화, 기계화를 촉진하고 노동 강도를 높여 더 값싸게 더 많은 자동차를 생산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이 개별 자본가가 내리는 결론이다. 그 결과 예측의 효과는 사라지고, 대신 과잉생산에 따른 파국은 더 일찍 모습을 드러낸다. 개별 기업 수준의 계획화는 전체 사회 차원에서는 완전한 무계획성으로 둔갑해 버린다. 이와 같은 결과가 너무나 위험천만하기 때문에 주요한 대자본들이 생산을 감축하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한계 내에서 ‘생산의 계획화’가 작동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화는 생산력의 낭비를 제거하는 진정한 계획화가 아니다. 착취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결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강제적인 생산 감축인 것이다. 이 경우에도 그것의 결과는 불황과 공황,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 파괴와 낭비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노동자 계급을 잔인하게 착취한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인류의 진보를 측정하는 중요한 척도인 생산력을 훼손하고 파괴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도 이제 완전히 낡아 버린 반동 체제다. 종합해 보자.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모순은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과 ‘낡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소유관계+교환관계+분배관계)’ 사이의 충돌이다. 이 충돌은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계급 투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노동자 계급은 발전하는 사회적 생산력에 걸맞게, 모든 생산수단을 노동자 계급의 공동 소유, 즉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킴으로써 사회적 생산력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과 충돌을 해결한다. 아울러 자본주의의 무정부성, 그리고 ‘자본주의적 계획화’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사회적 생산과 소비’가 조화로운 진정한 사회적 계획생산의 단계로 인류를 이끈다. 그 결과 사회적 생산력에 조응하는 새로운 사회적 생산관계가 탄생해, 사회적 생산력을 더욱 고도한 단계로 이행시켜 인류를 진보로 이끌게 된다. 바로 그 사회적 생산관계를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라 불렀다. 7.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 그리고 이것과 충돌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은 여러 양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모순은 얽히고설켜 생산력을 제약하고 파괴하는 불황과 공황 등을 잉태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자신이 더 이상 사회의 진보를 대변하지 못한 채 쇠퇴하는 반동적 체제임을 명백히 드러낸다. 그러한 모순 중 마르크스가 주목한, 가장 근본적인 모순은 ‘생산과 소비 사이의 모순(과잉생산 경향)’ 및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 자본주의가 토해 낸 사회적 생산력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한계가 없다는 듯, 무한히 발전한다. 이에 더해 자본주의 생산은 ‘축적(자본의 증식)을 위한 축적’ 경향에 지배받는다. 한편으로 이윤 증식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확대 투자가 필요하다. 미래에 더 큰 이윤을 얻으려면, 자본가들은 더 많은 이윤을 부단히 생산에 투자해야 한다. 다른 한편 무한대의 경쟁이 초래하는 거대한 압력이 자본가들 사이에 작동한다. 자본가들에게는,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서라도 자본 투자를 계속 확대하는 것이 지상 명령이 된다. 이런 점들 때문에, 자본의 무한 증식(축적을 위한 축적)은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는다. 그 결과 사회적 생산력 발전은 가속화하고, 이것은 갈수록 더 많은 생산물을 시장에 토해 놓는다. 하지만 이렇게 확대되는 생산은 소비와 조응해야 한다. 확대되는 생산 규모를 소비 규모가 쫓아가지 못하게 되면 ‘과잉생산’이 발생한다. 얼핏 보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노동자 민중은 소비의 과잉이 아니라 결핍으로부터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소비가 가능한 사람들은 최소한 상층 중간 계급 이상인데, 이들의 비율은 전체 인구에서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란 ‘구매능력’에 좌우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물은 상품 형태로 존재한다. 자본가들은 자선 사업가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생산물을 판매해서, 그것으로부터 투입한 자본과 함께 적정 수준의 이윤을 회수할 수 있어야 생산을 지속할 이유가 생긴다. 그런데 다수 소비자들은 단순히 ‘필요’가 아니라, ‘구매능력’에 따라 소비 행위를 한다. 아무리 절실히 필요하더라도, 구매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소비는 불가능하다.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 그리고 과잉생산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매능력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소유관계에 좌우된다. 사회의 압도 다수인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소유관계에서는 노동력의 가치 즉 임금에 의해 구매능력이 제한된다. 그런데 자본가들의 ‘축적을 위한 축적’ 욕구(이윤 욕구)에는 한도가 없다. 그에 따라 기술적 발전 단계가 규정하는 생산능력의 절대적 한계를 제외하면, 자본주의 생산은 다른 어떤 한계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무한히 확대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 결과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이 커진다. 이 간극은 생산이 소비를 압도하는 양상을 취하는데, 그 결과가 과잉생산이다. 이것은 노동자 계급의 필요를 능가하는 과잉생산이 아니다.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 소유관계가 규정하는 작은 구매능력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하는 과잉생산이다. 만일 노동자 계급이 충분한 구매능력을 갖고 있다면,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의 수입이 ‘임금 법칙’에 갇히지 않고 충분하다면, 결코 발생할 수 없는 그러한 과잉생산인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과잉생산이 노동자 계급의 ‘과소소비(가난과 결핍)’와 나란히 존재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 이러한 과잉생산이 시장에서 전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면, 여러 자본가들이 파산하게 된다. 그와 함께 장기불황 혹은 공황이 사회를 덮치게 된다. 한편으로 시장에는 수많은 생산물이 팔리지 않고 쌓여 있다. 다른 한편으로 기업들이 대대적으로 파산하거나 생산을 대폭 축소하면서 대규모 실업과 저임금에 신음하는 굶주린 노동자들이 생겨난다. 이것은 자연재해로부터 발생하는, 과거의 굶주림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과거 사회에서는 생산물이 흘러넘쳐서가 아니라, 자연재해 때문에 생산이 급격히 감소함으로써 굶주림이 나타났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다르다. 생산물이 흘러넘치지만,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굶주림이 확산된다. 자연재해에 따른 생산의 감소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거대한 기술적 발전과 생산에 대한 투자 확대로 너무나 많은 것이 생산된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노동자 계급의 굶주림이 발생한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을 만들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체제, 즉 자본주의 소유관계가 범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단순히 생산능력을 발전시키는 것만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를 철폐하는 혁명적 전망을 통해서만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줄일 길은 없는가? 과잉생산에 따른 장기불황과 공황을 지우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필사적인 시도를 거듭해 왔다. 노동자 계급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 계급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시도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가령 케인스주의 정책을 이어받아, 노동자 민중의 소득을 향상시켜 자본주의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과거 문재인 정부의 야심찬 계획이 증거가 될 수 있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장이 줄어들어 판로가 좁아지며, 그로 인해 자본가들의 투자가 침체되고 성장률이 낮아지는 게 자본주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노동자 서민의 소득 증대를 시장 확대로 연결해 자본주의를 정상화하고, 나아가서 자본주의를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자본가 계급의 계획이 등장할 수 있다. 그들의 계획을 추진하면,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은 확실히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노동자 계급의 커지는 구매능력은 분명 소비를 확대할 것이고, 그렇게 하면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이 좁아지면서 자본주의는 활력을 되찾을 듯 보인다. 그러나 이 계획의 성공조건은 무엇인가? 노동자 서민의 삶의 개선, 즉 소득의 증대가 자본가들의 이윤과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이윤을 늘리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조건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결코 성립할 수 없는 조건이다. 생산의 동기가 소비 확대이며, 이는 노동자들의 삶의 개선과는 결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이 생산을 결정하는 동기는 무엇일까? 단순히 생산량 확대가 아니다. 유일한 생산 동기는 이윤 증식이다. 그런데 이윤 확대는 소비 증가가 아니라 소비 축소를 요청한다. 왜냐하면 이윤을 확대하기 위한 결정적 조건인 노동자에 대한 착취 증대는 불가피하게 노동자의 소비능력을 줄여 버리기 때문이다. 소비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윤 감소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것은 자본가 계급의 생산 동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아주 예외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절대적 소득 증대와 자본주의 성장이 나란히 서 있는 경우가 있다. 바로 자본주의 경기 활황기다. 안정적인 이윤율이 뒷받침되는 활황기에 자본가 계급은 가장 높은 수준의 투자에 나선다. 이것은 비록 일시적으로나마 고용을 확대하고 임금 수준을 높여, 노동자들의 소득 수준이 절대적으로 높아진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주의는 과거 케인스 식의 논리가 발 딛고 있던 2차 세계대전 후 호황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점증하는 경제 위기에 휩싸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득주도성장론은 완전히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 뒤에는 어떤 정책이 기다리고 있을까? 바로 자본주의 성장을 가속화하는 것 즉, 노동자 착취도를 강화해 이윤율을 높이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을 더욱 키울 수밖에 없다. 본래 자본주의적 성장 그 자체는 노동자 삶의 진정한 개선을 보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빠르게 성장하는 시절에는 더 많은 몫을 빼앗기더라도 노동자들의 절대적인 삶은 개선될 수 있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성장이 갈수록 장애에 부딪히고 있는 오늘날에는, 그에 따른 이윤율 하락을 노동자 삶의 하락을 통해 필사적으로 만회하려 하는 자본가들의 욕구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성장을 목표로 하는 한, 노동자 삶의 질과 수준 하락이 필연코 수반된다. 지금처럼 자본주의의 눈부신 성장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시대에 노동자 민중의 소득을 보장할 유일한 방법은 ‘계급 투쟁’이다. 어떤 계급 투쟁일까? 노동자 민중의 소득 보장을 위해 필요한 만큼 거침없이 자본의 이윤과 소유권을 침해해 들어가는 계급 투쟁이다. 극소수 자본가들이 움켜쥔 막대한 부를, 사회 전체의 부로 전환해서 사회 전체를 위해 계획적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계급 투쟁이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고 소수 자본가들만이 결정권을 갖는 자본주의적 투자를, 노동자 민중의 삶과 사회적 필요의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계획적 생산으로 대체함으로써 생산과 소비 사이의 균형을 창출하는 계급 투쟁이다. 이것만이 과잉생산 경향을 폐지함으로써 불황과 공황을 추방할 수 있고, 진정 소비와 조화를 이루면서 중단 없이 발전하는 효율적 생산 체제를 가져다줄 수 있다. 그것은 생산의 동기 자체를 완전히 바꿔야만 실현할 수 있다. 생산의 목적이 한 줌 자본가들의 이윤 증식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또한 생산의 확대가 노동자 계급의 민주적 동의 아래 결정되는, 적절한 수준의 사회적 투자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8.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 과잉생산 경향은 장기불황과 공황 속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을 가속화하고 갈수록 전면화하는 근본 요인이 있다.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인데, 이 법칙 또한 자본주의 착취 체제(자본주의 소유관계)라는 뿌리에서 자라난다. 자본가 계급의 모든 이윤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기계, 토지, 건물, 노동력 등 총 투하자본에 대한 이윤의 비율(이윤율)’이 갈수록 낮아진다. 기계, 토지, 건물 등 생산수단에 투입하는 자본의 크기(이것을 불변자본이라 부른다)가 늘어나는 비율에 비할 때, 노동력에 투입하는 자본의 크기(이것을 가변자본이라 부른다)가 늘어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더 낮아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경험적으로도 분명한 사실이다. 자본의 총량이 늘어나는 것에 비해 고용하는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임금의 총량은 훨씬 더디게 증가한다. 그런데 자본가들이 이윤을 뽑아내는 부분은 불변자본(생산수단) 부분이 아니다. 구입한 원료나 기계는 자기 가치를 상품에 이전할 뿐, 추가가치(이윤)를 조금도 보태 주지 않는다. 추가가치(이윤)가 발생하는 곳은 바로 노동자에 대한 착취다. 지불하는 임금에 비해 더 많은 일을 시킴으로써 그 차액만큼이 이윤으로 발생한다. 그런데 이처럼 이윤을 낳는 부분(가변자본)이 전체 투하자본 중 차지하는 비율이 갈수록 줄어들게 되면, 착취율이 높아지더라도 이윤율은 경향적으로 낮아지게 된다. 그 결과가 바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다음의 세 가지 점에 주의할 것을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첫째, 줄어드는 것은 이윤율이지 이윤의 총량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윤의 총량은 절대적으로 늘어난다. 다만 총 투하자본에 대비할 때 얻는 이윤의 비율이 줄어들 뿐이다. 둘째,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의 토대에서는 발전하는 생산력이 반영할 수밖에 없는 생산의 기술적 조건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산력의 발전, 즉 생산의 기술적 발전을 드러내는 여러 지표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무엇일까? 바로 생산자 1인이 1시간 동안 생산해 내는 생산량, 즉 1인당 생산성이다. 착취관계를 배제하고 접근한다면, 결국 인류의 생산 발전이란 생산자 1인이 단위시간 동안 얼마만큼 많은 것을 생산했느냐로 측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1인당 생산성은 인류 역사 내내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고, 이러한 발전이 인류의 풍요와 문명의 발전 수준을 규정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1인당 생산성을 규정하는 기술적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단위 시간당 1명의 생산자가 가동하는 기계와 소모하는 원료의 양, 즉 생산수단의 양이다. 이것은 누구의 눈에도 자명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류 사회를 관통하는 그런 명백한 사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다른 외피를 두르고 나타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은 불변자본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노동자는 가변자본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1인당 생산성의 증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총 투하자본 대비 노동력의 비중 저하, 따라서 이윤율의 저하 경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진보를 거꾸로 돌리지 않는 한, 자본주의 사회는 이 이윤율 저하 경향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다. 게다가 자본가들 사이의 첨예한 경쟁은 이윤율 저하 경향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결국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에서 성공 여부는 노동자 1인당 생산성을 누가 더 높일 수 있느냐(이것은 경쟁 자본에 비해 생산물을 더 값싸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게 한다)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셋째, 마르크스는 이윤율 저하 법칙 앞에 ‘경향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무슨 말일까? 단순하게 일직선으로 관철되는 법칙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본가 계급은 생명 같은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착취도를 높이는 것이 대표적인 대처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윤율 저하 법칙을 잠시 저지할 뿐 지속적으로 막을 수 없다. 오히려 장기적으로 볼 때 그러한 저항은 이윤율을 낮추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가령 착취도를 높이는 대표적인 방법은 정리해고로 노동자 수를 줄이는 대신 1인당 생산량을 높이는 것이다. 그 방법 중 대표적인 것이 기계 수를 늘리거나 자동화를 촉진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기계와 같은 생산수단)의 비율을 높인다. 그 결과는 바로 이윤율의 하락이다. 이처럼 이윤율 저하를 막기 위한 자본가 계급의 필사적인 반항에 의해 일시적으로 이윤율이 회복될지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을 마르크스는 강조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이윤율의 저하 경향이 바로 그러한 자본가 계급의 반항을 통해서 장기적으로 관철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것을 표현한 개념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다. 9. 낡아 버린 자본주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파산선고다. 왜냐하면 이 법칙은 자본가 계급이 갈수록 생산의 발전에 적대적인 반동 계급으로 전락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자본가 계급이 생산을 확대할 것인지 축소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윤율’이다. 그런데 이 이윤율이 갈수록 줄어든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투자에 대한 자본가들의 열기가 감소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생산력의 발전이 커다란 장애에 직면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 점 때문에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 앞에서 도망쳤다고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이윤율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투자하고, 그 결과 생산력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는 점에서 자본가들을 정당화했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로서는 자본가 계급의 심장인 이윤율이 갈수록 감소한다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이윤율이 갈수록 감소한다면, 자본가 계급의 투자율도 갈수록 감소할 것이고, 그 결과는 명백히 생산의 맥박이 느려지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거기서 도망치는 대신, 진실을 향해 한 발 내디뎠다. 마르크스는 거기서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성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낮아질수록, 자본주의 체제의 맥박은 느려져서 더욱 빈번하게 그리고 더욱 전면적으로 장기불황이나 공황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고 마르크스는 예견했다. 즉, 마르크스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 작동함으로써 자본주의 반동성은 갈수록 가속화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의 예견은 명확한 사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상식이 됐다. 그리고 이윤율 저하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필연적으로 공황이나 장기불황으로 이어지고 있음도 중요한 사실이다. 어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도 그 점에 대해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더라도, 그들은 그 법칙으로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반동성을 끌어내지 않는다. 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 즉, 자본가 계급의 이론적 수호자라는 지위가 그들에게서 과학적 양심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은 자본주의 체제의 반동성이 갈수록 가속화함을 보여 준다. 자본주의 사회의 과잉생산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이윤율이 갈수록 낮아지는 상황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간극이 조금만 벌어지더라도 이윤율이 최저한도에 금방 이르게 됨으로써, 불황과 공황이 더욱 빠르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최근 상황은 더욱 악화하고 있다. 이제 자본가들의 투자 러시를 불러오는 호황기란 거의 기대할 수 없다. 이윤율이 너무나 낮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호황기란 장마철에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햇볕처럼 기대하기 어려워졌고, 자본주의 사회는 장기불황이 대공황으로 이어지는 것만 막아 내도 다행이라 느끼는 단계에 도달했다. 나아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는 실물자본과 화폐자본의 괴리(거품)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모순을 확대하고 있다. 생산 분야에서 낮아지는 이윤율은 자본가들의 투자 의욕을 짓밟는다. 그에 따라 자본가들은 다른 자본가들의 이윤을 강탈하거나, 중간 계급의 소득이나 노동자 계급의 임금까지 수탈하는 데로 고개를 돌린다. 비생산 분야에서 거품을 일으키거나 부동산, 주식, 화폐, 선물투기 등을 통해 모험을 감수하면서 이윤율을 벌충하려 발악한다. 그러나 비생산 분야에서는 아무런 이윤도 생기지 않는다. 비생산 분야에서의 투기는 다른 자본가들의 이윤을 빼앗아 오는 것에 불과하다. 다만 대가가 있다. 자신의 이윤을 판돈으로 내걸어야 한다. 누군가가 얻으면 누군가는 잃는다. 다만 부동산, 주식, 화폐, 선물투기 등과 맞물린 거품 현상은 중간 계급, 노동자 계급의 소득까지 수탈함으로써만 자본가 계급의 이윤율 회복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대가는 무엇인가? 소비를 감소시키고, 이는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더 빠르게 넓혀 자본주의의 모순을 증폭한다. 여기에도 탈출구는 없다. 사회가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할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다. 생산의 동기가 이윤 증식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생존과 번영이어야 한다. 생산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것을 계획하고 그 결과물을 분배하는 주인공이 자본가들과 그들의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과 그들의 민주적 정부여야 한다. 그것은 모든 생산수단을 자본가 계급의 수중에서 연합한 노동자 계급의 수중으로 이전하는 사회주의를 의미한다. 사회주의는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없앨 것이다. 사회주의는 생산능력의 발전이 전체 사회 번영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줌 착취자들의 이윤율을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불황과 공황처럼 사회가 후퇴하는 이유가 되는 이 어이없는 반동적 생산시스템을 저 멀리 고대 박물관으로 보내 버릴 것이다. 10. 파산하는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쇠퇴는 이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 사상에도 종말을 고한다. 자유주의 이념의 파산은 그 단적인 예다. 자본주의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수요-공급의 법칙에 의해 사회적 자원이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관리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핵심 논리는 이런 것이다. 어떤 산업에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증대하면 가격이 낮아지고, 이것은 자본가의 투자욕을 감퇴시켜 사회적 자원이 이 산업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간다. 반대로 수요보다 공급이 부족하면 가격이 인상되고, 이에 고무된 자본가의 투자는 사회적 자원을 이 산업에 자동으로 추가 투입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런 식으로 사회적 수요에 비해 생산이 과잉인 부분에서는 사회적 자원이 빠져나가고, 사회적 수요에 비해 생산이 부족한 부분에서는 사회적 자원이 투입됨으로써 가장 효율적으로 사회적 자원을 분배하고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율적 조정 장치인 수요-공급에 따른 가격 결정 구조에 개입하는 것은 사회적 생산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간섭으로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가 뒤따랐다. 국가는 이 자율적 경제에 개입해서는 안 되고, 단지 밤에 도둑이나 잡는 역할에만 만족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야경국가론’이 바로 자유주의다. 여기서 하나의 논리가 추가로 파생됐다. 이런 가장 효율적인 자율적 조정 장치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금기시되는 반면, 자본가의 개입은 필수였다. 자본가들의 이윤욕이 개입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사회적 자원은 과잉된 부분(가격이 하락해 이윤율이 낮아지는 부분)에서 결핍된 부분(가격이 올라가 이윤율이 높아지는 부분)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자본가의 이윤욕, 다시 말해 자본주의 체제를 관통하는 이윤 논리는 잔인하고 반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이 효율적 경제 체제를 떠받치는 ‘유일하게’ 윤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사회적인 요소로 정당화된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는 자신이 신처럼 모셔 왔던 자유주의 이념을 스스로 배신하고 있다. 국가는 ‘야경국가’가 아니라, ‘전면적인 개입’에 나서고 있다. 수많은 자유주의 신봉자들이 그것을 보고 경악하며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마저도 국가가 행하는 그런 배신에 정면으로 항의하는 대신, 오히려 더 대담한 배신을 국가에게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이념, 그리고 이 이념이 대변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완전히 낡아 파산해 버렸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하나의 장면을 살펴보자. ‘마스크 사회주의’는 이제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다. 한국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에서 코로나19 당시 마스크를 비롯해 핵심 의료장비의 생산과 유통에서 국가 통제가 본격화됐다. 이는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이 재난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자신을 덮치는 위험을 스스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이념에 따르면, 마스크 수요가 폭증해 가격이 폭등하면, 높아지는 이윤율에 신바람이 난 자본가들에 의해서 사회적 자원이 마스크 생산에 투입됨으로써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돼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시장의 자율적 조정기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마스크 수요에 비해 생산은 부족하기 짝이 없었고, 생산 확대는 재난의 확대 속도를 결코 따라가지 못했다. 이것은 산소호흡기를 비롯해 문제해결에 필수적인 모든 의료장비에 빠짐없이 적용되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민영의료 체계는 이런 비상 상황 앞에서 아무런 효율적인 대처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을 드러냈다. 그 결과 한국 정부는 마스크 5부제를 시행하면서 마스크 생산, 유통, 분배에 직접 개입했다. 마스크 생산 가격도 직접 통제했다. 마스크 산업 자본가들에게 마음대로 맡겨 둔다면 치솟는 마스크 가격과 사재기 등으로 재난 확산에 대처할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 분명했고, 대중의 저항과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스크와 관련해 한국에서 나타났던 상황은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마찬가지 모습으로 재현됐다. 미국 트럼프 정부는 오래된 전시법까지 동원해 지엠에게 산소호흡기 생산을 명령했다. 영국 정부도 다이슨에게 인공호흡기 1만 개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하면서, 생산에 직접 개입했다.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는 손’으로 대체됐다. 그러나 자유주의 이념의 신봉자들은 이 상황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있다. 그들이 찬미하는 자본주의의 자율적 조정기능에 맡겨 둔다면, 그것이 초래할 재앙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료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배신은 거대한 배신의 일각에 불과하다. 자유주의 이념은 경쟁에서 도태된 비효율적인 부분을 제거함으로써 사회적 효율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항상 강조해 왔다. 시장의 가격 경쟁에서 도태된 비효율적인 기업이 제거됨으로써 사회는 선진적이고 효율적인 체제로 끊임없이 물갈이되면서 진보해 나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야경국가’는 파산하는 기업과 자본가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보내서는 안 되며, 이 뒤처진 비효율적인 부분의 파산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비효율적인 부분이 오랜 기간 비대하게 커져 왔다. 파산 직전의 위태로운 기업의 비율이 수십 년 넘는 오랜 기간 동안 계속 확대돼 왔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주요 자본주의 나라에서 이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된 한계 기업의 비중이 40%에 육박하고 있음을 몇 년 전부터 계속 경고했다.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하락하면서, 사회적 자원의 배분과 순환의 키를 쥐고 있는 자본가들이 자기 역할을 방기해 왔고,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활력을 앗아 갔다. 여기서는 자유주의 이념이 절대적으로 옳았다! 자유주의가 주장하듯 자본가들은 오직 이윤욕에 의해서만 생산에 박차를 가하는데, 이윤율 저하는 그들의 의지를 앗아 갔다. 투자율이 전반적으로 하락하면서, 자본주의 생산은 깊은 불황과 저성장의 늪에 깊숙이 빨려들어 갔다. 코로나19 사태는 이런 상황을 극적인 수준으로까지 빠른 속도로 밀어 올렸다. 다수 기업이 한계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생산가동률은 급격히 추락하고 있다. 자유주의의 기대와는 달리,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자율적 조정기능에 내맡겨 둔다면 그 결과는 재앙이다. 그냥 방치하면 이 자율적 조정장치는 완전히 망가져 버려, 대공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비효율성의 극치를 보여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들은 작심하고 자유주의를 완전히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 미국 정부는 부실 기업이 발행한 악성 채권까지 모조리 사들이는 무제한적 재정 투입을 선언했다. 한국 정부도 항공사, 두산중공업을 비롯해 파산 직전의 기업에게 천문학적 국가 재정을 쏟아 붓고 있다. 자본가 국가의 전면적인 개입 덕분에 분야를 막론하고 수많은 기업이 근근이 버티고 있고, 금융권은 파산을 모면하는 등 대공황으로 이어지는 파국이 유예되고 있다. 이러한 국가 개입이 미래에 야기될 거대한 위험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말이다. 자율적 조정능력, 효율성 증대, 자본가 이윤욕의 생산적 역할 등 자유주의가 내세워 왔던 매력들, 그리고 이 매력들에 기반했던 국가 개입 반대가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 자리를 시장에 대한 국가의 전면 개입이 대체하고 있다. 어제까지 강경 자유주의자였던 작자들이 오늘은 국가의 무제한적 개입을 부르짖고 있다. 어제까지 자유주의의 배신자로 취급받았던 국가 개입론자들이 이제 자유주의의 구원 투수로 칭송받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자유주의의 파산선고’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더 이상 이 사회의 진보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반동적 체제로 전락했음을 자본가 계급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자본가 정부는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대자본이 무너지지 않게 지원해야 한다. 국민의 재산인 정부 재정은 위기 때마다 ‘공적자금’이란 형태로 대자본의 회생을 위해 투입되곤 했다. 이렇게 자본가 국가의 도움으로 대자본은 회생하고, 그 과정에서 자본가 정부와 대자본의 융합은 더욱 전면화한다. 이제 대기업의 번영과 생존은 자본가 정부의 번영, 생존과 뗄 수 없이 연결된다. 대기업의 이사진과 경영진에는 공적자금을 지원한 자본가 국가의 핵심 관리들, 특히 산업은행의 관리들이 포진하게 되고, 이들의 입김이 높아진다. 이들은 정부 재정을 회수한다는 이름으로 노동자를 향한 가혹한 구조조정을 강요하고, 기업합병 같은 자본의 집중 경향을 부추긴다. 이런 식으로 국가와 자본 사이의 융합 경향은 지속적으로 강화돼 왔다. 순수한 자유주의 이념은 오직 부르주아 지식인의 관념에서만 존재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도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자본가 국가와 자본 사이의 긴밀한 융합의 확대였다. 11. 자본주의는 유효기간이 다해 가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는 국가와 자본의 융합 경향을 더욱 부각시켰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 이념이 그토록 강조했던 시장의 자율적 조정기능 그리고 자본의 탐욕이 낳는 효율성과 생산성 증대가 결정적 한계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과잉생산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다. 만성화된 과잉생산, 즉 생산과 구매의 부조화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강타했다. 시장은 자율적 조정기능을 발휘해 사회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재분배하기는커녕 만성 불황의 늪에 빨려들었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는 자유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생산의 추동력, 즉 자본가들의 이윤욕에 근거한 맹렬한 투자를 근본적으로 제약했다. 이윤율이 낮아지자 자본가들은 투자를 줄여 버렸고,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률을 극히 낮은 수준에 묶어 버렸다. 이윤에 눈이 먼 자본가들의 투자 덕분에 이뤄지는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은 옛 추억이 됐다. 돈은 생산 부문에서 빠져나와 금융과 부동산으로 흘러들었다. 이윤을 창출하는 유일한 분야인 생산이 답보 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이런 돈의 흐름은 거품과 위험을 증대시켰다. 실물자본과 괴리된 금융자본 부문에서 거품이 터짐으로써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덮쳤다. 여기서도 자본가 국가가 구원 투수로 등장했다. 천문학적 국가 재정이 금융 전반의 파산 도미노를 저지했다. 그 가운데 자본가 국가와 금융자본의 융합이 확대됐다. 코로나19 사태와 경제 위기 앞에서 이런 융합은 더욱 전면화되고 있다. 대불황의 위협 앞에 모든 자본가들이 자본가 국가의 지원책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상황은 자본주의의 몰락을 웅변한다. 하지만 아무리 국가 개입이나 통제가 확대되더라도, 이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을 뒤바꾸지는 못한다.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국가 개입의 모습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오늘날 전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국가 개입’의 의미는 무엇일까? 자본가 국가는 정부 수중으로 집중된 모든 사회적 자원을 자본가 구하기 작전에 투입해야 했다. 정부 재정의 더 많은 부분이 복지 정책이 아니라 자본가 살리기 정책에 투입돼야 했다. 쓸 만한 국유재산이나 공기업들은 최대한 매각해 민영화함으로써 자본가들의 추락하는 이윤율을 회복하는 데 사용하고, 좁아지는 투자처를 벌충해야 했다. 법인세 인하와 같은 조치를 통해 정부 재정은 더욱 전적으로 노동자 민중을 수탈해서 꾸려 가야 했다. 결국 마비 상태에 빠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란, 몰수 국유화를 통한 사회적 통제와는 완전히 반대편에 있다. 자본가 국가의 개입이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수탈로 마련한 사회적 재원으로 파산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구원하는 것, 또한 죽어 가는 자본가들을 사회적 재원으로 회생시켜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가 국가의 개입 확대는 자유주의 이념을 잉태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역사적 유효기간이 만료됐음을 입증한다. 하지만 자본가 국가의 개입 확대는 유효기간이 만료된 자유주의 체제를 회생시키려는 마지막 발악이다. 결국 이 자본가 국가는 자유주의 이념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편에 서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자본가 국가는 파산하는 자유주의 체제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보존하려는 자본가 계급의 필사적인 마지막 발악을 대표한다. 자본가 국가의 전적인 지원으로 당장의 대공황을 피한다고 해도, 역사적 수명이 다한 환자인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길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와 무정부적인 과잉생산은 자본주의 체제의 숙명이고, 이것은 지속적으로 위기의 규모와 폭발력을 키울 것이다. 자본가 국가의 확대되는 개입은 자본주의 한계 내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침식이다. 국가라는 형태로 사회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하지 않는다면, 이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위기와 모순을 조금이라도 유예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없다. 오늘날 국가의 개입은 불가피하다. 자본주의 경제의 불안정성이 나날이 증대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사회적 재난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지속적으로 불러올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본가 계급은 이 국가를 더욱더 분명하게 자본가 계급의 국가로 통제하고 활용하려 발악한다. 이것은 자본가 국가와 자본가들 사이의 융합을 가속화하고, 자본가 국가의 계급적 본질과 반동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 계급이 착취를 통해 쌓아 올린 거대한 부의 성을 허물어 노동자 계급의 일자리와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국가를 갈구한다. 정부 재정을 한 줌 착취자에게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생존을 위해 투입하는 국가를 갈구한다. 생산-유통을 대담하게 사회적으로 통제해 재난과 위기를 극복하는 국가를 갈구한다. 자본가의 이윤논리에서 벗어나 거대한 사회적 생산수단들을 전면적으로 국유화해 사회의 공동체적 원리에 따라 운영하는 국가를 갈구한다. 바로 이렇게 경제와 정치가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며 하나로 결합하는 체제가 바로 사회주의다. 파산하는 자유주의 뒤편에서 사회주의는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떠오르고 있다. -
[한노운사 연재 3회] 1부 폭압과 저항(1970~1987) [2] 1980년의 분출박정희가 사망하자 지배세력은 일시에 혼란에 빠졌다. 그 혼란의 틈새로 노동자들의 누적된 불만이 터져 나왔다. 1978년 이후 한국경제 위기도 요인이었다. 1980년 들어 5월까지 임금인상, 체불임금 지급, 공장폐쇄 반대, 민주노조 건설, 어용노조 민주화 등을 요구하며 897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1970년대 10년 동안 발생한 노동쟁의 832건을 능가하는 수치였다. 노동쟁의 참가자 수도 1970년대 전체 노동쟁의 참가자 수와 비슷한 2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전두환 신군부가 5·17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에 맞선 광주민중항쟁이 고립된 채 패배했다. 군사정권의 재수립과 함께 노동자투쟁의 분출도 중단됐다. [목차] 1부 폭압과 저항 (1970-1987) [시대배경]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 [1] 민주노조운동의 태동 [2] 1980년의 분출 [3] 민주노조운동의 파괴와 재건 [4] 1987년의 대폭발 1) 1980년 서울의 봄과 사북항쟁 가장 먼저 투쟁에 나선 것은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인 청계피복노조였다. 4월 8일부터 10일 동안 청계피복노조 조합원 150여 명이 임금인상, 상여금 지급, 퇴직금제도 전면 실시, 노동3권 완전 부활, 해고자 복권·복직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계엄령 아래서도 공세적인 투쟁을 전개하여 평균 29%의 임금인상과 ‘10인 이상 사업장 퇴직금제 실시’를 관철해 냈다.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강원도 사북에서 탄광노동자들의 항쟁이 전개됐다. 사북에는 전국 최대 민영탄광이던 동원탄좌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노동자들은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다. 게다가 탄광 개발 당시 노동자들을 감독하기 위해 고용됐던 깡패들이 그대로 노조를 장악하고 있었다. 보통 수백m, 깊게는 수천m 지하로까지 내려가야 하는 막장 노동 속에서 한 해 평균 200명의 광부가 목숨을 잃고 5,000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었다. 10명 가운데 1명꼴로 일어나는 막장 사고를 운 좋게 피한다고 하더라도 진·규폐증이 광부들을 기다렸다. 79년 가톨릭대 부설 산업의학연구소가 민영탄광 노동자 9,15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 가운데 16.1%가 진폐증 환자였다. 하루 3교대로 8시간씩, 한 달 평균 28일씩의 중노동을 하면서도 이들이 받는 임금은 79년 당시 평균 16만 4천 원으로 5인 가족 최저생계비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광부들이 거주하는 사택촌은 거의 집단수용소와 같았다. 가구당 주거면적 5~6평에 30~40가구가 한 곳의 공동변소를 이용했으며, 공동수도의 물마저 제한 급수를 받고 있었다. 탄광촌의 유일한 후생복지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목욕탕은 중앙 사택의 단 한 곳뿐이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노조였으나 회사는 지부장에게 자재 납품권, 덕대 하청권, 식당 운영권 등을 주는 방식으로 노조를 철저히 어용화시켰다.[1] 이런 상황에서, 전국광산노동조합이 전체 지부장 회의를 통해 42% 임금인상을 목표로 제시했음에도, 동원탄좌 지부장이 회사와 비밀리에 20% 인상에 합의했다. 이에 동원탄좌 노동자 200여 명이 4월 21일 지부 사무실에서 ‘어용노조 퇴진과 42%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이 출동하자 노동자들이 거칠게 저항하고, 험악한 분위기에 위협을 느낀 경찰이 지프로 도망치다가 노동자 4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노동자 500여 명이 사북 시내로 몰려가 경찰서장과 광업소장에게 몰매를 가하고, 과장급 이상 회사 간부들과 지부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들의 집을 부수었다. 22일 오전 시위대가 가족까지 참여해 2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지부장의 부인을 인질로 잡아 린치를 가했다. 경찰 200여 명이 소총으로 무장하고 읍으로 들어왔다. 5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일단 동원탄좌로 후퇴했다가 경찰에 반격을 가했다. 오후 2시쯤 경찰이 궁지에 몰려 철수했다. 사북읍을 완전히 장악한 노동자들은 자치방범대를 뽑아 치안을 유지했다. 그런데 언론은 노동자들을 폭도로 몰고 경찰은 헬기로 삐라를 뿌리면서 해산하지 않으면 강력히 대처하겠다고 위협했다. 노동자들은 분열하기 시작했고 투쟁의 주도권이 타협적인 대의원들에게 넘어갔다. 정부 측과 협상을 진행한 끝에 24일 아침 기존 노조집행부의 사퇴, 상여금 인상, 부상자 치료·보상, 피해주택 복구 등의 내용으로 타결됐다. 5월 7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70여 명을 연행해 가혹한 구타와 고문을 가했고, 31명이 구속됐다. 사북항쟁 이후 정부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이제 임금 문제보다 어용노조 퇴진과 민주노조 건설이 중심 이슈가 됐고, 투쟁 형태도 탈법적이고 전투적으로 바뀌었다. 동국제강, 인천제철, 일신제강, 원진레이온 등의 노동자투쟁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동국제강 노동자들은 적은 임금인상에 항의하면서 거리까지 밀고 나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끝에 요구를 쟁취했다. 인천제철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회사를 점거·파괴하면서 파업농성을 벌였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5·17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뒤에도 3일간 공장을 계속 점거하며 투쟁했다. 해태제과 노동자들은 1979년부터 줄기차게 요구해 온 8시간 노동제를 임금 삭감 없이 쟁취했다. 해태제과 노사는 기존 12시간 노동의 임금을 8시간 기본급으로 지급하기로 합의했는데, 이로써 실제 임금인상률이 남자 39.8%, 여자 48.5%에 이르렀다.[2] 민주노조들은 산별노조와 한국노총의 민주화에 나서기도 했다. 원풍모방, 반도상사, 동일방직 등의 노조들은 10·26 사태 이후 섬유노조정상화추진위원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콘트롤데이타노조는 금속노조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다. 원풍모방·동일방직 조합원을 비롯한 노동자 3천여 명은 5월 13일 한국노총 주관으로 한국노총 대강당에서 열린 ‘노동기본권 확보 전국궐기대회’에 참가해 노동3권 보장 전국 서명운동과 어용간부 퇴진을 한국노총에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했다. 민주노조들은 2일간의 농성을 통해 한국노총의 각성과 민주화를 강력히 촉구했다. 그런데 이들이 농성을 벌이던 5월 14일 대학생 시위대가 한국노총 회관 앞으로 몰려와 민주화 시위 합류를 요청했다. 농성지도부는 ‘군부에게 탄압의 구실을 주어서는 안 된다’며 거부했다. 5월 15일, 서울 35개 대학과 지방 24개 대학에서 학생들이 전국 주요 도시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서울에서만 10만 명이 서울역에 운집해 계엄군의 탱크가 진주한 광화문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곧 군대가 치고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저녁 8시 국무총리가 “연말까지 개헌안 확정, 내년 상반기까지 양대 선거 실시”라는 민주화 일정을 발표하며 학생 시위대의 해산을 종용했다. 학생운동 지도부는 일단 시위를 멈추고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었다. 2)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1979년 12·12 쿠데타로 군부 내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서울의 봄’ 시위가 커지자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2차 쿠데타를 일으켰다.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 학생들이 투쟁을 포기한 것과 달리, 광주 학생들은 5월 18일 아침에도 ‘비상계엄 해제’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까지 무참히 살육하기 시작했다. 쇠몽둥이로 머리통을 부수었고, 대검으로 온몸을 난자했다. 치 떨리는 살육을 목격한 노동자·민중은 가눌 수 없는 분노로 일어섰다. 평화시위는 폭력항쟁으로 바뀌었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돌과 각목 등을 들고 계엄군의 총칼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공수부대의 잔혹한 유혈진압은 계속됐다. 20일에는 차량시위를 조직하는 등 투쟁이 한층 격렬해졌다. 보안사의 통제 아래 놓인 언론이 광주항쟁을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보도하자 광주 MBC 방송국을 불태웠다. 일부 시위대는 차량을 타고 광주를 빠져나가 전남 일대를 누비며 진실을 알리고 시위를 널리 퍼뜨렸다. 21일 마침내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총을 발포했다. 시위대는 경찰서를 습격하고 무기고를 접수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아세아자동차에서 생산하던 장갑차와 트럭 같은 군용차량들을 확보했다. 화순탄광 노동자들은 탄광에서 쓰던 다이너마이트를 광주로 가지고 왔다. 무장 투쟁이 시작되면서 학생들이 주도하던 운동이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바뀌었다. 시내 곳곳에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21일 밤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포진한 계엄군이 무장 시위대의 거센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광주 외곽으로 철수했다. 계엄군을 몰아낸 노동자·민중은 광주를 해방공동체로 만들었다. 전투 과정에서 형성된 시민군은 시내 방위대와 지역 방위대를 조직해 자치질서를 수립했다. 계엄군의 외곽 봉쇄로 식량과 생활필수품 공급이 차단된 상황에서, 식량이 떨어진 이웃과 쌀을 나누었다. 주먹밥을 이고 거리로 나와 모두가 나눠 먹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자발적으로 부상자들을 치료했고, 너도나도 헌혈에 나섰다. 범죄가 사라졌다. 23일부터 26일까지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매일 수만 명이 모이는 시민궐기대회가 열려 항쟁의 의미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토론했다. 종교인과 지역유지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무기 회수를 통해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25일 윤상원을 비롯한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결성돼 결사항전의 준비를 갖추었다.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157명의 시민군이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며 계엄군에 맞서 싸웠다. 광주민중항쟁으로 인한 희생자는 사망 165명, 행방불명 65명, 부상 후 사망 376명 등 606명으로 나중에 공식 집계됐다. 그러나 암매장자와 미신고 인원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펼쳐진 노동자·민중의 항쟁을 책임졌던 이들은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밀어닥친 역사의 부름에 주저 없이 떨쳐 일어선, 너무나 평범한 노동자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이 엄청난 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학습도 해보지 않았고, 어떤 조직도 가져보지 못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그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조차 짓밟으려 할 때, 노동자계급이 얼마나 단호한 혁명적 본능으로 얼마나 엄청난 혁명적 역량으로 떨쳐 일어설 수 있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1980년 ‘민주화의 봄’을 이끌던 지도부가 광주를 빠져나간 뒤 광주를 지키며 끝까지 싸웠던 이들은 노동자, 농민, 기층민중이었다. 5월 20일 오후 6시쯤 택시노동자들이 택시 2백여 대를 몰고 무등경기장에 모였다. 그들은 18, 19일 광주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공수부대의 만행을 누구보다 생생히 눈으로 보고, 학생들과 부상자를 나르다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7시쯤 버스와 대형 트럭을 앞세운 차량 2백여 대가 금남로에 나타났다. 거리를 가득 메운 채 불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도청 쪽으로 나아갔다. 운수노동자들의 투쟁과 희생은 시위 군중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로케트전기, 전남방직, 일신방직, 아시아자동차, 금호고속, 전일섬유, 광주어망, 남해어망 노동자들이 투쟁의 대열로 모였다. <투사회보>를 만들던 들불야학 팀도 노동자들이었고, <투사회보>를 돌리다 들키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일을 했던 이들은 회보를 하나라도 더 감춰 나르려고 ‘몸빼’ 같은 옷을 입고 나온 21살, 22살, 23살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맨 앞에서 총을 들고 싸웠던 시민군 기동타격대원들을 보더라도 항쟁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5·18 민중항쟁에 적극 참여했다가 군법회의에 넘겨진 기동타격대원 30명의 이름과 나이, 하던 일을 보자. △윤석루(20세)-자개공 △이재호(33세)-회사원 △이재춘(20세)-방위병 △양기남(19세)-삿슈공 △임성택(17세)-양복공 △구성회(16세)-양화공 △오정호(33세)-식당종업원 △박승렬(20세)-레코드사 △박명국(18세)-양화공 △김상규(19세)-전파사 △박영수(18세)-도자기공 △안성옥(19세)-목공 △김두전(19세)-재수생 △정광호(20세)-타일공 △염동유(23세)-다방 △이성주(18세)-차량조수 △김공휴(19세)-나전칠기공 △남승우(19세)-삿슈공 △도준식(23세)-식당종업원 △남영관(18세)-농업 △박홍식(21세)-목공 △김기광(18세)-고3 △박인수(21세)-노동 △김여수(20세)-용접공 △나일성(18세)-가구공 △김태찬(19세)-석공 △김행남(16세)-노동 △김재귀(16세)-고2 △영용섭(19세)-나전칠기공 △장승희(19세)-양화공. …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 … 바로 노동자들, 기층들, 넝마주이 같은 사람들이었다.[3] 5월 19일부터는 학생시위가 민중항쟁으로 변화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대에는 노동자와 시민들의 참여가 늘어났다. 도청 앞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학생들의 숫자보다, 소상인과 가게종업원, 노동자의 비중이 월등히 커졌다. … 공수부대의 잔혹한 탄압 앞에서 노동자의 숨은 투쟁역량에는 서서히 불이 붙어가기 시작하였다. 머리가 으깨지고 팔이 부러져 온통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 중이던 택시 운전수를 차의 유리창을 부수고 끌어내려 대검으로 무참하게 배를 찔러 살해하는 공수부대의 학살극이 최소한 3건 이상이나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5월 20일 오후 2시부터 무등경기장에는 택시운수노동자들이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군저지선의 돌파에 앞장서자’고 결의하면서 2백여 대가 무리지어 도청을 돌격해 가기 시작하였다. … 5월 21일 오전에는 아세아자동차에서 APC장갑차 3대를 포함한 360여 대의 차량이 징발되었다.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나주 방면을 향하는 7대의 버스에는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이 돌격대가 되어 있었다. 나주경찰서의 무기고에서는 M1소총과 AR소총, 그리고 카빈소총 등이 광주로 반입되었다. 그리고 화순탄광의 돌격부대원들은 화순탄광 광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무기로 얻었다. … 계급구성 기동타격대 사망자 구속자 인원 % 인원 % 인원 % 노동자 생산직 19 63.4 42 31.0 142 36.1 사무직 1 3.3 9 6.5 30 7.6 서비스직 3 10.0 22 16.0 23 5.9 학생 3 10.0 40 29.1 130 33.1 영세상인 2 6.7 1 0.7 13 3.3 농민 1 3.3 4 2.9 33 8.4 무직 17 12.4 10 2.5 가정주부 1 0.7 2 0.5 군인 1 3.3 1 0.7 9 2.3 공무원 1 0.3 총계 30 100.0 137 100.0 393 100.0 기동타격대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밝혀진 구속자들 중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성원의 76.7%나 된다. … 확인된 사망자 212명 중 직업미상자 75명을 뺀 137명을 직업별로 나누어 보면 노동자의 비중은 53.5%에 이른다. … 구속자들 중 노동자계급의 비중은 49.6%이다.[4]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린 광주 노동자·민중의 항쟁은 한국 사회 전체를 거대하게 뒤흔들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혁명적 패배는 한국의 1980년대를 ‘혁명의 시대’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1950~1953)을 거치며 절멸당한 사회주의 운동이 한국에서 다시 부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광주민중항쟁의 혁명적 패배로부터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서, 학생운동을 비롯한 급진적인 지식인 전반의 사상적 경향이 빠른 속도로 급진화됐다. 광주민중항쟁을 학살한 군사정권의 잔인한 폭력성에 치를 떨면서 민주화 투쟁이 승리하려면 혁명적인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됐다. 한국 민중들의 민주화 투쟁을 지원하리라 기대했던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이 군사정권을 전면적으로 지지한 것에 대한 충격 속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재인식이 시작됐다. 지식인들의 허약함과 달리 노동자들을 비롯한 기층 민중들이 광주민중항쟁을 끝까지 사수하다 죽음을 맞이한 사실로부터 변혁의 주체로서 노동자계급에 대한 진지한 재인식이 시작됐다. 광주의 혁명적 민중항쟁이 일주일 넘게 지속되었는데도 철저히 고립된 채 패배한 사실로부터 전국적인 투쟁을 이끌 수 있는 강력한 조직을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이러한 반성적 평가를 바탕으로, 1970년대 민주화 운동과는 그 급진성과 규모에서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이 1980년대 초반에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태동했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역사적 죄의식과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압통치에 대한 분노 때문에 대학생들을 비롯한 지식인 집단 전반에서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지지가 매우 높았으며, 엄청난 숫자의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운동에 새롭게 뛰어들었다. 학내시위부터 가두시위까지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압에 항거하는 정치투쟁, 그리고 노동자들을 변혁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려는 학생출신 활동가들의 현장 투신이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어 1980년대 중반에는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게 됐다. 1980년대 초반에 해방신학 등 해외의 진보적 이념들을 소개하는 책자와 팸플릿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1980년대 중반부터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원전들이 번역되어 팸플릿으로 비밀리에 유통되기 시작했다.[5] 적극적인 실천과 학습, 그리고 치열한 논쟁은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부분들을 점점 사회주의자로 변모시켜 나갔고,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는 사회주의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구하는 그룹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주) [1] 경향신문, 2003, 「실록 민주화 운동 (39) 사북 광산노동자투쟁」. ‘덕대’는 “광산업자와 계약을 맺고 광산의 일부를 맡아 채광하는 사람”이다. [2] 동아일보, 1980/04/25. [3] 박준성, 2009, 『노동자 역사 이야기』, 이후, 288~290쪽. [4] 이정로, 1989, 「광주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전환」, 『노동해방문학』 1989년 5월호, 18~22쪽(표는 재구성). [5]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1984년 무렵에 가장 먼저 대중화된 원전 팸플릿이었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한창이던 8월에야 처음으로 책자로 발간되었는데, 노동자대투쟁의 물결 속에서 벌어진 인쇄소 노동자들의 파업 때문에 예상보다 보름 정도 늦게 출판됐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성명] 세종호텔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을 폭력만행으로 짓밟는 이재명정부 규탄한다! 연행자를 석방하고 정리해고 철회하라!2026년 2월 2일 10시 30분, 경찰은 세종호텔 로비 농성 중 중인 고진수, 허지희 세종호텔지부 조합원과 연대자들을 집단연행했다. 바로 오늘, 이재명 정부는 생존권 쟁취와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처절한 투쟁을 전개하는 세종호텔 노동자들과 연대자들을 짓밟으며 주명건 등 악질 자본가를 비호하는 정부로서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명동에 관광객들이 넘쳐나는데도 민주노조를 겨냥한 표적해고를 철회하지 않는 세종호텔 자본에 맞서, 고진수 지부장은 처절한 336일 고공농성을 진행했다. 고진수 지부장의 처절한 투쟁에 이은 세종호텔 노동자들과 연대자들의 로비농성에도, 세종호텔 실소유주인 ᅠ주명건 세종대학교 대양학원 명예이사장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로비농성 20일째인 오늘, 이재명 정부는 이 처절한 투쟁을 폭력으로 짓밟았다. 2021년 12월, 세종호텔 자본은 ‘코로나로 관광객이 없으니 3층 연회장을 폐쇄해야한다’는 명분으로 민주노조 조합원들을 해고했다. 관광객이 넘쳐나는 지금, 3층 연회장을 운영하는 세종호텔 자본에 조합원들과 연대자들이 항의하자 경찰이 집단연행한 현실은, 세종호텔 자본과 경찰의 긴밀한 협조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추악한 공모와 탄압을 모든 노동자 민중운동의 연대로 박살내자. 민주노조운동의 단호한 투쟁으로 세종호텔 정리해고 철폐하자! 지금 당장 연행자를 석방하라! 세종호텔 정리해고 투쟁으로 박살내자! 노동자 민중 총단결로 정리해고제 철폐하자! 2026년 2월 2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
[후기] '지혜복 교사는 공익제보자가 맞다' 2년 간의 투쟁과 연대가 만든 승리2년 전, 지혜복 교사는 학교 내 성폭력 문제를 고발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강제전보, 해임당했다. 그리고 1월 29일, 법원은 지혜복이 공익제보자이며 이 전보가 부당하다고 판결해 지혜복 교사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이는 지혜복 선생님의 2년간의 끈질긴 의지, 그리고 평등하고 안전한 학교와 사회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연대가 만들어낸 승리다. [돌멩_사회주의를향한전진] 2년 전, 지혜복 교사는 학교 내 성폭력 문제를 고발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강제전보, 해임당했다. 남학생들은 수년간 구조적으로 여학생들을 성추행하고 괴롭혀 왔으며, 지혜복 교사는 학생들의 증언을 통해 이를 알게 되었다. 지혜복 교사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포괄적 성교육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학교는 가해자를 제대로 징계하려 하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성폭력을 신고한 피해자들의 신원이 노출되었음에도 학교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아 2차 피해를 입게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혜복 교사는 이 사건을 공익신고하고 피해자들을 위해 싸웠으며, 마침내 2년, 740일 간의 투쟁 끝에 1월 29일 법원이 지혜복은 공익제보자가 맞으며 전보는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이 2년간의 'A학교 투쟁'은 한 교사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 피해자들의 완전한 회복을 위한 투쟁이었고,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를 바꾸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이는 지혜복 교사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안전하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노동자, 학생, 여성, 소수자들의 투쟁이었다. 그래서 지혜복 교사는 혼자가 아니었고, 법원의 판결은 뜨거운 연대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지혜복 교사가 투쟁하는 동안, 소위 '진보 교육감'이라는 서울시교육감 조희연과 정근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혜복이 공익제보자임을 부정하고, 지혜복 교사를 부당전보·해임했으며, 심지어 형사 고발까지 했다. 이는 소위 '진보적'이라는 서울시교육감들이 책임자들을 처벌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부추겨 학교를 안전하지 않고 불평등한 곳으로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지혜복 교사가 소속된 전교조조차 투쟁을 외면한 사실은 그들의 관료주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조희연과 정근식 전-현 서울시교육감은 피해자와 지혜복 교사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완전한 회복을 지원하고, 서울 모든 학교에서 성폭력 문제에 대한 전면 조사를 실시하며, 포괄적 성교육을 도입해야 한다. 또한 지혜복 교사를 즉시 본래 직위로 복직시켜야 한다. 지혜복 교사, 그리고 지혜복과 연대하는 우리는 모두 함께 더 안전하고 평등한 학교와 사회를 위해 더 큰 투쟁을 해나갈 것이다.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English] 2 years ago, Ji hye-bok, a teacher was unjustly and forcibly transferred to another school, for the reason that she whistle-blowed the sexual violence problem in her school. and on 29th January, the court ruled that the transfer was unjust, proving that Ji Hyebok was right. this is victory made by 2 years of passionate and long-standing will of Ji hyebok, and by solidarity of the people aspiring to equal and safe school and society. [script] Hi, I’m Min and today we made significant victory. 2 years ago, Ji hye-bok, a teacher was unjustly and forcibly transferred to another school, for the reason that she whistle-blowed the sexual violence problem in her school. the male students systematically continued to sexually harass and bully female students for years, and Ji hyebok got to know that from the testimonies of the students. she tried to protect the victims and tried to solve the problem with comprehensive educational perspective, but the school doesn’t want to displine the perpetrator properly, and more seriously, the identities of the victims that reported the sexual violence were exposed, but the school didn’t do anything to protect the victims, exposing them to the secondary harming. that’s why Ji Hyebok whistleblowed this case and fought for the victims, and finally after 2 years, 740 days of the struggle, the court ruled today that the transfer of ji Hyebok was unjust. for these 2 years, this ‘A school struggle’ has not been just a struggle of one teacher. it was a fight for the full recovery of the victims, and to change a society that forces silence to the victims of sexual violence. and it was a fight not only by ji hyebok, but by all workers, students, women, and minors who struggled for safe and equal society. that’s why ji hyebok wans’t alone, and the court’s decision was the result of passionate solidarity. While Teacher Ji Hye-bok was fighting, Cho Hee-yeon and Jeong Geun-sik, the so-called ‘progressive chairman of Seoul educational office’ did nothing for her. rather, they denied that ji hyebok is whistleblower, and they forcibly transferred her, fired her, and even filed criminal charges against her. this shows that these so-called ‘progressive chairmen of seoul educational office, not only failed to punish those responsible, but actually encouraged them, making the school unsafe and unequal. and the fact that even the labor union where ji hyebok belong, turned a blind eye to her struggle, starkly reveals their bureaucracy. the chairman of Seoul educational office, must publicly apologize to the victims, and Teacher Ji Hye-bok. they must support the victims' full recovery, and conduct a comprehensive investigation on sexual violence problems, and introduce comprehensive sex education in all schools in Seoul. and, immediately reinstate Ji Hye-bok to her original position. Teacher Ji Hye-bok, and our comrades in solidarity with her, all together will march toward a greater struggle for safer and more equal schools and society. March to Socialism also will be always at that fight. 투쟁! -
[후기] 세종호텔 로비농성 2주, 교섭은 바로 결렬, 복직까지 투쟁은 끝나지 않는다.세종호텔 로비에서 2주 동안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복직을 쟁취할 때까지 계속 싸울 것이다. 이는 단지 세종호텔 노동자들의 투쟁이 아니라, 이 잔혹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는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이다. [돌멩_사회주의를향한전진] 안녕하세요, 지금 저는 세종호텔에 와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협상 이후로 호텔 로비에서 2주째 농성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오늘 교섭이 있었지만 사측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수백 명이 넘는 노동자와 시민들, 노조를 비롯해 정치단체, 시민단체, 종교단체 등 다양한 조직과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을 비롯해, 여러 개인들이 모여 해고된 노동자들과 함께 여기 굳건히 서 있습니다. 현재 해고된 노동자 중 몇 명만이 남아 투쟁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는 결코 몇 명만의 싸움이 아닙니다. 세종호텔 노동자들은 항상 모든 노동자를 위해 싸워왔습니다. 경영진이 호텔에 도입하려 했던 정리해고법과 비정규직화에 맞서 싸워왔고, 여성, 성소수자, 이주노동자에 대한 모든 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웠으며, 팔레스타인 해방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2021년 12월 해고 이후 5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투쟁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업장의 담벼락을 넘어선 연대가 필요하며, 바로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노동자와 시민들이 착취, 차별, 억압에 맞서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이 노동자들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매일 수십 명, 때로는 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함께 농성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 투쟁은 우리가 복직을 쟁취할 때까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투쟁! [English] at the Sejong Hotel, we’re doing sit-in protest in the lobby for 2 weeks, and we will continue to fight until we win the reinstatement. It's not only a fight of a few Sejong hotel workers, but of all workers fighting against this brutal capitalist system. [Script] Hi I’m Min and I’m here at the Sejong Hotel, we’re doing sit-in protest in the lobby of the hotel now for 2 weeks, since the previous negotiation. today, new negotiation was done but there was no difference on owners’ position, so we, more than hundreds of workers and people, from various organizations, such as Unions, political organization, civil right or religious organization, including my organization march to socialism, and all the individuals are firmly standing here together with the laid-off workers. now among the fired workers, three of them remains and continues to fight, but it’s never a fight of the three. Sejong hotel workers, always has fought for all workers, fighting against lay-off law and irregular working system, that the owner wanted to adopt to hotel and they fought against it. and they has fought against all the discrimination and oppression on women, LGBTs, migrants, and held the flag of Free Paelstine. this struggle, now continuing more than 5 years since the lay-off on december 2021, has really significant political meaning. for this fight to win, the solidarity beyond the borders of working places must be needed, and that’s what’s happenning right now, workers from all different background are concentrating their force for these workers, who never gave up to fight against exploitation, discrimination and oppression. everyday more than dozens of people, many times around hundred people are doing the sit-in protest together, this fight will never end until we win the re-instatement. 투쟁!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과 미·중 패권대결강대국 간의 충돌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고, 전쟁과 학살은 점점 더 세계인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한국의 한 국제정치학자는 이러한 세계의 변화를 ‘우아한 위선의 시대가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왔다’고 표현했다.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과연 세계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에게 제기되는 과제는 무엇인가? <목차> 1.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과 이어진 사건들 2. 미·중 패권대결의 기본 성격과 현재 지점 3. 트럼프 정권의 미·중 패권대결 대응 전략과 베네수엘라 침공 4. 미·중 패권대결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5. 실천 방향과 과제 2022년 2월 러시아와 나토가 우크라이나에서 출구 없는 대리전을 시작하면서 세계 자본주의는 다시 한 번 ‘위기·전쟁·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2023년 10월 이후 이스라엘은 가자의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집단학살하면서 동시에 중동 곳곳으로 전쟁을 확산시켰다. 2025년 1월 이후 트럼프는 관세를 앞세워 세계 곳곳을 약탈하고 미국의 대도시들을 사실상의 계엄 상태로 몰아넣으면서 마치 조폭깡패가 힘자랑하듯 세계 최강 제국주의 국가의 힘을 휘둘렀다. 지난 4년 동안, 가깝게는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멀게는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유지돼 오던 국제질서의 ‘규범’들이 하나둘 흔들리면서 세계는 점점 더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강대국 간의 충돌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고, 전쟁과 학살은 점점 더 세계인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한국의 한 국제정치학자는 이러한 세계의 변화를 ‘우아한 위선의 시대가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왔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2026년 1월 한 달 동안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서 전개된 일련의 사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기존 국제질서를 뒤흔들며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충격과 혼란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규칙기반 국제질서’에서 희망을 찾아온 이들, 또는 중국·러시아가 열어냈다는 이른바 ‘다극체제’에서 희망을 찾아온 이들은 예상치 못한 사건들 앞에서 혼란과 당혹, 무기력과 절규를 곳곳에서 표출하고 있다. 요동치는 국제질서는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만큼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과연 세계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에 따라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에게 제기되는 과제는 무엇인가? 1.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과 이어진 사건들 2017년 첫 번째 임기 초반부터 트럼프는 “그들은 엄청난 석유를 가지고 있다”며 베네수엘라 석유에 대한 탐욕과 침공 의사를 여러 차례 공공연히 드러냈다. 2020년에는 미국 법무부가 베네수엘라 대통령 마두로와 정부 관료들을 ‘마약 테러’ 혐의로 기소했다. 2025년 1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직후 트럼프는 ‘마약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마약 카르텔을 테러조직으로 지정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7월에는 국방부에 마약 카르텔에 대한 공격 개시를 명령했고, 8월부터 대규모 미군 병력이 베네수엘라 인근 카리브 해에 배치됐다. 9월 2일 11명이 탑승한 쾌속정을 마약운반선이라며 폭격해 전원을 사망케 했다. 이때부터 12월까지 최소 105명이 비슷한 방식으로 카리브 해상에서 미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11월 11일 미군의 항공모함 전단이 카리브 해에 배치됐다. 12월 10일과 20일, 베네수엘라 인근 해상에서 유조선 두 척이 미군에게 나포됐다. 12월 16일 미국이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부를 ‘해외 테러단체’로 규정했다. 1)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 2026년 1월 2일 저녁 10시 46분(미국 동부시간, 베네수엘라 시간으로는 11시 46분),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침공 작전의 개시를 지시했다. 폭격기, 전투기, 정찰기, 헬리콥터 등 150대 이상의 각종 항공기가 동원됐다. 미군의 고출력 전파방해로 베네수엘라의 러시아제·중국제 방공망이 무력화됐고, 전력망에 대한 사이버 공격으로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했다. 미군이 첨단 극초단파 무기를 사용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3일 오전 2시, 작전개시 두 시간여 만에 미군이 쿠바인 경호부대를 무력화하고 베네수엘라 대통령 마두로와 부인 플로레스를 납치하여 미국 본토로 이송했다.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베네수엘라 측에서는 최소 80여 명의 병사와 민간인이 사망했다. 작전이 끝난 뒤에도 미군은 카리브 해를 떠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미군은 카리브 해상에 1만 5천여 명의 병력을 유지하며 베네수엘라에 대한 해상봉쇄를 지속하고 있다. 이번에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해서 대통령 마두로를 납치한 것은 1989년에 파나마를 침공해서 실권자 노리에가를 납치했던 사건과 닮은꼴이다. 또한 2020년에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솔레이마니를 원격조정 드론으로 살해했던 사건과도 닮아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앞선 두 사건 모두 1990년 1월 3일과 2020년 1월 3일에 일어났다. 1월 3일! 이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과 마두로 납치는 어떤 정당성도 가질 수 없는 제국주의 만행이다. 하다못해 유엔헌장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타국의 주권을 부당하게 침해하고 국가 간 호혜평등 원칙을 짓밟았다는 점에서 명백한 위반이다. 타국과의 전쟁은 의회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미국법도 위반했다. 물론 미국이 제국주의 깡패 노릇을 해온 것은 수없이 되풀이돼 온 일이다. 200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2003년에는 이라크를 침공했으며, 바로 지난해에는 이란을 폭격했다. 미국은 매번 그럴싸한 핑계를 내세웠는데, 이번에는 ‘마약테러와의 전쟁’ 논리를 내세웠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거짓 핑계다. 그런데 이번에는 베네수엘라 석유에 대한 탐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그 허술한 핑계를 포장하려는 노력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뒤에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은 노동자·민중을 억압하는 반동적인 정권이었다. 그러나 마두로 정권이 반민주적이고 반동적이라는 사실은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을 조금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 미국은 마두로를 심판할 어떤 자격, 권리, 권한이 없다. 반동적인 독재자를 심판할 권한은 오로지 베네수엘라 민중에게 있을 뿐이다. 2) 베네수엘라 침공에 이어진 사건들 마두로 납치에 성공한 뒤, 트럼프는 이를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면서 다른 나라들 또한 전격적인 침공작전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공공연히 위협했다. 쿠바에 대해서는 “베네수엘라 석유에 의존해 온 쿠바가 곧 무너질 것”이라고 협박했다. 멕시코에 대해서는 “카르텔들이 멕시코를 운영하고 있어서 멕시코에 무언가 행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콜롬비아 대통령 페트로를 지칭하면서는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때마침 격렬한 반정부 시위가 전개된 이란에 대해서는 군사 공격, 사이버 공격, 추가 제재 등의 개입 가능성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7일 트럼프는 2027 회계연도(2026년 10월 시작) 국방예산을 1조 5천억 달러로 증액해 달라고 의회에 요청했다. 현재 시행 중인 2026 회계연도 국방예산은 약 1조 달러로 세계 2위부터 10위까지 국방예산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다. 그런데 여기에 5,000억 달러가량(50%) 증액을 요청한 것이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증액 요청이다. 같은 날, 트럼프는 기후환경, 인권, 여성, 난민지원, 문화교육, 보건 등에 관련된 국제기구 66개(유엔 산하 31개, 비유엔 35개)에서 미국이 탈퇴하거나 지원을 중단한다는 포고문에 서명했다. 과거에 트럼프 1기 정권이 파리기후협약, 유네스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탈퇴하고 세계보건기구에서 탈퇴 선언을 한 바 있었다. 바이든 정권이 이것을 되돌려 놓았는데, 트럼프 2기 정권 들어 다시 유엔기후변화협약을 탈퇴하고 세계보건기구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세계를 뒤흔든 것은 트럼프가 유럽의 동맹 열강들을 공공연히 협박하면서 그린란드 병합 의사를 노골적으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1월 3일 베네수엘라 침공 직후부터 트럼프는 덴마크의 자치령인 그린란드를 병합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며 협박을 거듭했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을 지지하거나 묵인했던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미국이 나토 동맹국을 군사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협박하자 갑자기 주권에 대한 맹렬한 수호자로 변신했다. 7일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폴란드·덴마크 7개국이 “그린란드는 그린란드 주민들의 것으로, 덴마크와 그린란드 관련 사안을 결정하는 주체는 오직 덴마크와 그린란드뿐”이라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5일 나토가 그린란드에서 군사훈련을 벌이기로 긴급 결정하고 영국·프랑스·독일·네덜란드·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가 소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유럽의 저항에 심기가 뒤틀린 트럼프는 그린란드에 병력을 파견한 8개국에 대해 2월부터 10%, 6월부터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17일 선언했다. 그러자 18일 유럽 8개국이 “관세 위협은 대서양 관계를 훼손”한다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유럽의회에서 미국과의 무역협정 승인절차를 중단하자’, ‘유럽도 보복관세를 부과하자’, ‘통상위협대응조치를 발동하자’, ‘2026 북중미 월드컵을 보이콧하자’ 등 많은 주장이 유럽 각국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제 유럽은 트럼프 달래기를 넘어 대서양 동맹 붕괴를 감수하는 태세 전환에 나서야 한다는 여론도 급부상했다. 미국 공화당의 온건파 상원의원들도 “나토 분열은 중국과 러시아에 좋은 일”이라며 관세 부과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오랜 시간 미국의 맹방이었던 캐나다도 트럼프 2기 집권 이후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겠다는 협박을 지속적으로 받아 왔다. 20일 새벽 트럼프는 그린란드, 캐나다, 베네수엘라 영토에 모두 성조기가 뒤덮인 지도를 배경으로 자신이 유럽의 지도자들과 회담하는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를 트루스소셜에 올렸다. 20일 낮, 캐나다 총리가 스위스 다보스포럼 연설에서 미국을 강한 톤으로 규탄했다. “과거 미국 중심의 규칙기반 국제질서는 이제 끝났으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했다. … 테이블에 앉지 못하면 메뉴판에 오른다. … 중견국들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희생될 수밖에 없다.” 미국과 나토 동맹국들 사이에 긴장이 한창 고조되던 21일, 트럼프는 나토 사무총장과 회담을 가진 뒤 유럽 8개국에 부과한 관세를 취소했다. “유럽과 그린란드 문제를 ‘합의할 틀’을 마련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나토 동맹국들을 상대로 한 트럼프의 영토 병합 공세는 일단 멈췄다. 하지만 그의 공세는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그런데 그린란드 병합을 놓고 유럽을 밀어붙이던 15일, 트럼프는 가자지구 과도 통치와 재건을 주도하기 위해 이른바 ‘평화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유럽 8개국 대상 관세부과를 취소한 21일, 트럼프는 “평화위원회에 러시아의 푸틴도 참여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의 맹방 벨라루스도 참여 의사를 밝혔다. 곧바로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와 평화를 논할 수 없다”며 평화위원회 불참 의사를 밝혔다. 중국은 평화위원회 참여 여부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서 대신 23일 시진핑(중국)-룰라(브라질) 간 정상통화를 통해 ‘유엔의 권위 유지’, ‘브릭스 국가 간 협력’, ‘글로벌사우스의 공동이익 수호’, ‘중국과 중남미 관계의 더 큰 발전 추진’ 등의 얘기를 주고받았다고 발표했다. 한편 국제질서가 이렇게 요동친 1월 한 달 동안, 미국 안에서는 이민자 단속을 둘러싸고 사실상 계엄 상태에 있던 대도시들의 상황이 끔찍한 인명살상으로 발전했다. 1월 8일과 24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이민관세단속국(ICE)의 무자비한 이민자 단속에 항의하던 미국 시민권자 두 명이 ICE 요원들의 총격으로 연거푸 살해당했다. 3) 베네수엘라 침공과 미·중 패권대결의 연관성 미국이 베네수엘라 침공을 개시하기 여섯 시간 전인 2일 오후 5시 30분, 베네수엘라를 방문한 중국 특사가 마두로를 만나 세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중국 특사의 베네수엘라 방문은 베네수엘라가 미국의 침공위협 앞에서 중국에 계속해서 긴급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앞서 중국은 ‘중국과 베네수엘라는 전략적 파트너다’, ‘중국은 모든 일방적 강압 행위를 반대하며 각국의 주권 수호를 지지한다’, ‘베네수엘라와 각국의 정상적 협력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메시지를 냈다. 그러나 중국 특사와 마두로가 헤어지고 세 시간 만에 미국의 침공 작전이 시작됐고, 이 과정에서 중국의 메시지와 약속, 중국이 베네수엘라에 공급한 무기들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이 미국의 세계전략 전반과 깊이 연결돼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오늘날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국과의 패권대결이다. 따라서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은 미·중 패권대결과 깊은 상관관계에 있다. 이를테면 <한겨레신문>의 1월 7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이 ‘마약 단속’을 베네수엘라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중국을 겨냥하고 있음은 명확하다. 중국의 ‘외부 영향력’을 제거하고 서반구를 완전한 미국 주도의 질서로 재편하려는 것이다.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석유 장악’을 강조하는 것도 중국이 베네수엘라 석유를 값싸게 확보해온 것을 겨냥했다. 지난해 11월 기준 베네수엘라 석유 수출의 약 80%가 중국으로 향했다. 베네수엘라는 중국과 ‘전천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은 중국의 중남미 핵심 거점이다. 중국 국유 에너지 기업인 중국석유천연가스집단(CNPC)과 첨단기술기업 화웨이 등이 베네수엘라에서 대규모로 사업을 하고 있다. 2010~2020년 중국이 중남미에 판매한 무기의 86%를 베네수엘라가 사들였다. 중국은 베네수엘라로부터 석유와 자원을 값싸게 수입하고, 통신 장비와 무기 등을 수출하는 구조다. 특히 중국과 베네수엘라의 위안화 석유 거래가 달러 시스템에 타격을 줄 가능성도 미국을 자극했을 것이다.[1]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은 미·중 패권대결이라는 거대한 전개과정이 드러낸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베네수엘라 침공에 이어진 사건들, 특히 트럼프의 그린란드 병합 시도나 가자 평화위원회 구성도 미·중 패권대결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미·중 패권대결의 성격과 동학을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세계를 ‘혼돈’ 속으로 밀어 넣는 사건들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사태의 전개방향을 전망할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그에 대응하는 노동자계급의 실천과제를 올바로 정립할 수 있게 해준다. 2. 미·중 패권대결의 기본 성격과 현재 지점 1) 자본주의 축적위기의 산물이자 축적위기를 가속화하는 요인 오늘날 미·중 패권대결은 1990년대 이후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를 통해 중국이 경제적으로 급부상함으로써 시작됐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세계화에 나섰는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겪고 있던 자본의 축적위기, 즉 자본이 손쉬운 이윤 획득과 원활한 확대재생산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략 30년 동안 이어졌던 전후호황의 황금기를 뒤로 하고 1970년대에 세계경제가 다시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1980년대에 시작된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는 노동자의 고용·임금·복지를 공격하고 자본에게 감세·민영화의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자본의 이윤을 인위적으로 확대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1990년대에 세계화와 금융화가 가세하고서야 자본의 축적위기가 외견상 사라졌다. 세계화는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대대적인 공장이동을 통해 선진국 자본의 임금비용을 획기적으로 감축시켰고, 자유무역의 깃발을 든 선진국 자본이 세계의 모든 시장을 마음껏 접근할 수 있게 했다. 금융화는 주식·부동산 등의 거대한 금융거품 조성이나 지대 인상으로 막대한 금융수탈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자본이 착취를 통한 이윤획득의 부족분을 수탈을 통한 이윤획득으로 보충할 수 있게 했다. 자본주의 경제에는 다시 황금기가 찾아온 듯 했다. 그러나 1930년대 세계대공황의 출발점이었던 1929년 미국 주식대폭락이 보여줬던 것처럼, 거대한 금융거품 조성은 애초부터 거품파열의 위험성을 안고 있었고 다시 현실이 되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에 기초한 축적체제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국가의 전면적인 경제개입을 통해서만 간신히 연명할 수 있는 빈사 상태, 다시 말해 국가의 전면적인 경제개입을 통해서만 자본의 이윤획득과 대중의 소비수준을 보장할 수 있는 만성적인 축적위기에 빠져들었다. 당연하게도 국가부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이 위태위태한 축적위기를 잠재울 해법을 자본주의는 갖고 있지 못했다.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라는 기존의 방책들은 과거와 달리 축적위기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고, 오히려 경제적인 축적위기를 사회 전반의 복합위기로 발전시켰다. 신자유주의 공세는 국가부채 부담을 대중에게 전가하기 위한 대대적인 긴축 공세로 발전했고 상호 결합했다. 신자유주의·긴축 공세는 특히 선진국에서 제조업 이탈과 결합하여 주민의 상당한 부분을 고통스러운 빈곤의 늪으로 빠뜨렸고, 이들을 배경으로 이주민혐오에 기반하고 보호주의·민족주의를 주창하는 극우적인 정치세력이 급성장할 수 있게 했다. 신자유주의·긴축 공세는 또한 부동산 가격급등 및 임대료 상승과 결합하여 세계적으로 청년의 빈곤과 미래 상실을 초래했고, 이는 점점 더 많은 나라에서 사회적 재생산 위기로 이어졌다. 세계 곳곳의 자원개발·생산확장·소비팽창이 가속시킨 무분별한 환경파괴와 지구온난화는 거대한 기후변화를 통해 인류문명의 지속가능성 자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축적위기가 지속되고 심화할수록 금융수탈로 자본의 이윤을 벌충해야 할 필요는 더욱 커져갔고, 따라서 2008년 금융위기가 남긴 교훈을 무시한 채 금융거품은 더욱 더 크게 부풀어 올라 세계경제를 일거에 붕괴시킬 상시적인 시한폭탄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중국은 세계의 수많은 공장들을 빨아들인 세계화의 최대 수혜국으로서 지속적으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미국과의 격차를 줄여 나갔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할 때 미국 대비 12.7%에 불과했던 중국의 GDP는 2007년 24.5%로 성장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중국에게 도약의 기회였다. 2011년 중국의 GDP가 미국 대비 48.4%로 급증했다. 중국의 급격한 부상에 미국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2011년 오바마 정권이 국제정책의 핵심 방향으로 ‘아시아로 집중’을 내걸었고 중국을 배제한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TPP)을 추진했다. 미국과 정반대로 중국은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2012년 시진핑의 집권과 함께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활하는 중국을 꿈꾸는 ‘중국몽’을 말하기 시작했다. 2013년 중국 자본의 적극적인 대외 진출을 선언한 일대일로 정책이 가시화했고, 2015년 첨단기술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하기 위한 ‘중국제조 2025’ 전략이 시작됐다. 한편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에서 성장하던 보호주의·민족주의 극우세력은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성공을 계기로 정치의 전면에 부상했다. 2018년 중국의 GDP가 미국의 67.7%를 기록하던 해에, 트럼프 정권이 중국산 수입품에 대규모 관세를 부과하며 대대적인 무역분쟁을 일으켰다. 마침내 미·중 패권대결이 공공연하게 표면 위로 떠오르는 변곡점이었다. 미·중 패권대결은 바이든 민주당 정권에 의해서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2021년 중국의 GDP가 미국의 77.1%를 기록하던 해에, 바이든 정권은 반도체과학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을 통해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조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글로벌 공급망 분리 정책이 더욱 가속화됐다. 이에 중국은 한편으로 자기완결적인 첨단기술 공급망을 구축하고 내수기반을 확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수출경제를 재편하는 ‘쌍순환’ 전략으로 맞섰다. 그런데 미·중 패권대결은 그 성격상 단순히 경제적 대결에 머무를 수 없었으며, 필연적으로 정치군사적 대결로 확대돼 왔다. 그리고 이 측면에서 미·중 패권대결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넘어 세계질서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중국 또한 세계 자본주의 전반의 극심한 축적위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하락세에 있는 미국・서유럽・일본의 서구 자본주의와 달리, 중국의 자본주의는 상승세에 있다. 중국은 미국을 제외한 모든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을 추월해 제2의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며, 패권적 지위를 상당 부분 상실한 미국을 맹렬히 추격하고 있다. 세계질서의 근간을 뒤흔드는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 인도, 이스라엘, 튀르키예 같은 지역적 군사강국들에게 자신의 팽창 야망을 실행할 공간을 열어주고 있으며, 서유럽과 일본은 세계질서 속에서 더 이상의 지위 하락을 막기 위해 적극적인 재무장에 나서고 있다. 그리고 유일 패권을 복원하고자 하는 미국의 몸부림과 최강대국으로 부활하고자 하는 중국의 야망은 이 모든 상황을 더욱 가파르게 가속시킨다. 따라서 현 시기의 세계질서는 세계 자본주의 전반의 극심한 축적위기가 지속되고 미국의 패권이 제한적으로 작동하는 가운데 미・중 간 패권대결을 중심으로 열강 간의 다각적인 대립・충돌이 점점 더 격화되는 것을 기본 동학으로 한다. 2022년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 2023년 이후 중동에서의 상황, 2025년 인도-파키스탄 갈등, 2026년의 베네수엘라 침공과 그린란드 병합 갈등이 보여주듯이, 당분간 세계질서는 크고 작은 충돌과 격변에 끊임없이 마주할 수밖에 없게 돼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공급망의 분리·교란에서부터 군사적 긴장·충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기존의 축적위기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2) 제국주의 패권대결로서 미·중 패권대결 그런데 미·중 패권대결의 계급적 성격은 무엇인가? 중국은 사회주의 또는 노동자국가인가? 또는 자본주의일지라도 최소한 미국보다는 진보적인가? 그러므로 미국의 유일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은 (그리고 러시아는) 세계의 노동자·민중에게 모종의 희망과 대안을 제시하는가? 중국의 사회성격을 자세히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다만 몇 가지 두드러진 사례들을 통해 오늘날의 중국이 자본주의 사회이자 제국주의 강대국이라는 점, 따라서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 어떤 진보성도 없으며 어떤 희망이나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하겠다. 중국은 생산수단의 상당 부분이 국유화돼 있지만, 이는 사회적 소유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 중국 국가의 실제 주인은 노동자·민중이 아니라 공산당 관료들이기 때문이다. 중국 국가는 민간 자본가들과 깊이 융합돼 있는 공산당 관료들이 노동자·민중을 착취·수탈·억압하기 위한 계급적 지배의 수단일 뿐이다. 중국은 형식적으로 계획경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그 계획의 실제 목적은 노동자·민중의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 자본의 원활한 확대재생산에 있다. 중국 경제는 자본주의의 전형적 특징인 무정부적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에 만성적으로 시달리고 있으며, 과잉생산에 따른 디플레이션도 자주 경험하고 있다. 중국의 거대 기업들은 포춘의 글로벌 500대 기업 리스트에서 130여 개를 차지하며 미국과 1위를 다툰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업의 화려한 성장 반대편에는 노동자들이 하루 12시간 주 6일 장시간 노동해야 하는 초과착취 체제가 자리잡고 있다. 제조업에서는 심지어 일요일까지 일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극단적인 초과착취 체제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자주적인 노동조합이 국가에 의해 철저하게 봉쇄되기 때문인데, 이는 중국 국가의 반동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점이다. 중국 자본주의는 높은 수준의 내부 수탈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중국의 오랜 역사와 관련이 있는데, 2천년 이상 이어져 온 중국의 역사는 제국의 강력한 중심부가 광범한 주변부를 (주로 식량징발을 통해) 수탈해 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제국의 중심부가 매우 강력해서 광범한 주변부 대부분을 제국 안으로 통합하여 유지해 온 것이 ‘거대한 중국’의 역사적 실체였다고 할 수 있다. 중심부(대도시)가 주변부(농촌)를 수탈하는 구조는 1949년 중국혁명 이후에도 지속됐는데, 1958년 도입돼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농촌 주민의 도시 진입을 엄격하게 차단하는 후커우 제도가 그 대표적인 산물이다. 개혁개방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는 중심부가 대도시를 넘어 산업발전이 집중된 동부연안으로 확장되었고 개발에서 소외된 광활한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중서부내륙이 주변부가 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전개된 수탈의 대표적인 표현은 동부연안의 산업거점과 대도시에서 일하지만 저임금과 불안정한 생활조건을 강요당하는 중서부내륙 농촌 출신 수억명의 농민공이다. 내부 수탈의 또 다른 표현은 지역 간의 심각한 경제적 격차로 나타난다. 2024년 중국 전체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억 5천의 인구를 포괄하는 (베이징・상하이・톈진의 3대 대도시와 쟝수성・푸젠성・저장성・광둥성의 4개 성으로 구성된) 동부연안은 평균 약 20,000달러의 1인당 GDP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6천 3백만이 거주하는 베이징・상하이・선전의 3개 도시는 평균 약 30,000달러의 1인당 GDP를 기록했다. 반면 중국 전체 인구의 4분의 3을 포괄하는 중서부내륙은 평균 약 11,000달러의 1인당 GDP를 기록했다.[2]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이 같은 뚜렷한 격차를 중국의 약점으로 보는 시각들이 종종 있다. 물론 노동자·민중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중대한 약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이자 제국주의로서 중국에게는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이다. 중국 제국주의의 실체는 인구 25%를 포괄하는 중심부(동부연안)이고, 인구 75%를 포괄하는 주변부(중서부내륙)는 사실상 ‘내부 식민지’로 작동해 왔기 때문이다. 중심부(동부연안)가 광활한 주변부(중서부내륙)를 마음껏 수탈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중국의 급속한 부상을 가능케 한 결정적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의 자본가계급은 주변부(중서부내륙)에 대한 체계적인 수탈을 기반으로 거대한 사회적 자원을 산업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고, 중심부(동부연안) 내에서도 광범한 노동자들에게 저임금, 높은 노동강도, 불안정한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을 강제할 수 있었다. 한편 2010년대 이후 중국 정부는 ‘공동의 발전’을 강조하면서 상당수 공장을 중서부내륙으로 보냈다. 그런데 이는 공동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이해관계가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첫째, 2010년부터 시작된 동부연안에서의 임금투쟁은 중국 정부로 하여금 자주적 노조운동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해 동부연안을 중심으로 최저임금을 매년 빠른 속도로 올려줄 수밖에 없도록 강제했는데, 이와 같은 임금인상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많은 저부가가치 제조업들이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와 중서부내륙으로 이동했다. 둘째, 2010년대 중반 시작된 일대일로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중국의 과잉자본에게 출구를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건설・토목을 중심으로 중국 외부에서 출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일대일로였다면 제조업을 중심으로 중국 내부에서 출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중서부내륙으로 상당수 공장을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셋째, 2020년대 들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와의 관계에서 공급망 디커플링과 무역분쟁이 격화되자 중국 정부는 중국 자체적으로 완결적인 공급망 구성과 왕성한 내수 수요 창출을 미국에 맞선 패권대결에서 핵심적인 과제로 추진하게 됐는데, 이를 위해 대대적인 중서부내륙 개발에 나선 것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는 중국 자본이 진출해 있다. 그런데 이들은 특히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중국식 초과착취 모델을 현지에 이식하고 있다. 해외에 진출한 중국 기업의 생산현장과 작업장에서는 산업재해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고 있다. 아동노동 착취, 저임금, 임금체불, 폭력적 현장통제도 만연한 상태다. 자원약탈 때문에 원주민과 충돌하는 사례도 여러 곳에서 발생하고 있다.[3] 약소국에 대한 중국의 대출과 투자는 약소국의 주권에 대한 침탈 또는 압박으로 이어진다. 중국이 대출상환 지연을 이유로 2017년에 스리랑카 함반토타 항만에 대한 99년 사용권을 확보한 사례는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은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에게 대출·투자를 통해 의회건물이나 이런저런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해 주고 있는데, 이러한 중국의 선물은 늘 해당 약소국이 대만과의 외교관계 단절, 공공사업 입찰에서 중국 기업에 우선권 부여, 중국이 관여하는 사업에 대한 노동법 적용과 환경 규제 완화 등의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것과 연결돼 있다. 중국은 이집트, 탄자니아, 나이지리아 등 40여 개의 아프리카 국가들과 다양한 수준의 안보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안보협력은 항구·철도 같은 일대일로 자산의 보호와 더불어 해당 국가의 병사들을 훈련하는 프로그램도 포함한다. 모잠비크, 나미비아, 세이셸, 탄자니아, 잠비아, 짐바브웨는 무기의 90% 이상을 중국으로부터 공급받는다. 중국의 방위산업 기업들은 앙골라, 나이지리아, 남아공 등에 사무소를 개설하고서 아프리카 각국에 무기·탄약 공급 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은 남중국해 대부분을 자신의 영해로 주장하는 이른바 9단선을 고집하면서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나이에게 굴욕적 후퇴를 요구하고 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오늘날 중국이 자본주의 사회이자 또 하나의 제국주의 강대국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미·중 패권대결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패권대결이다. 노동자·민중의 관점에서 볼 때, 미국과 중국 어느 쪽도 진보성을 갖지 않으며, 어떤 희망이나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노동자·민중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에 입각해 두 제국주의 강대국 모두에 맞서는 것이며, 이것을 자본주의 철폐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혁명적 전망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3) 미·중 패권대결의 현재 지점 요약 2018년 미·중 패권대결이 본격화한 이후 미국은 우세한 힘을 갖고 중국을 압박하여 추가적인 성장을 차단하려 했지만, 중국은 점점 더 미국의 압박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미국과 중국의 격차가 줄어들면서 중국이 점점 더 대등한 경쟁자의 지위로 다가가는 것이 지금까지의 추세였으며, 이는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15년 정도 전만 해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중국의 눈부신 성장이 저부가가치 단순조립 제조업에서의 현상이지 고부가가치 첨단기술 제조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다르게 전개됐다. 5년 전 바이든 정권이 임기 초에 친환경 산업을 강조하고 나섰을 때에는 중국이 추격할 수 없으리라고 예상된 이 분야에서 격차를 벌이기 위해서였지만, 불과 2~3년 만에 중국산 배터리와 전기차가 세계 시장을 사실상 석권해 버렸다. 바이든 정권이 임기 후반부에 중국의 인공지능 기술 성장을 차단하기 위해 첨단 칩의 중국수출을 제한했지만, 중국은 딥시크 충격을 안겼고 이제는 중국의 독자적인 인공지능 칩 개발 가능성에 안달이 난 엔비디아가 중국수출 제한을 풀어달라고 전방위 로비에 나서는 상황이 됐다. 2025년 트럼프의 관세 공격 또한 중국의 희토류 반격으로 무력화됐다. 미・중 패권대결의 대리전이기도 했던 우크라이나 전쟁은 중국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가 사실상 승리를 굳혀가고 있다. 2024년 중국의 GDP는 18.74조 달러로 미국의 28.75조 달러 대비 65.2%를 기록했다. 명목 GDP만 보면, 2021년 77.1%까지 근접했던 중국의 GDP가 미국의 반격으로 상당히 뒷걸음질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구매력 평가 GDP(PPP) 비교는 상당히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PPP 기준으로 중국은 이미 2014년에 미국을 추월했고 이후 격차를 꾸준히 벌이면서 2024년에는 미국 대비 130.9%를 기록했다. 2021년 이후를 보더라도 124.3%, 125.1%, 128.1%로 계속해서 중국과 미국 간의 격차가 확대돼 왔다. 오늘날 중국이 첫 번째 교역파트너인 국가는 세계 190개 국가 가운데 120~130개 국가에 이른다. 반면 미국은 30개 국가 정도에 불과하다. 중국의 눈부신 성장과 달리, 미국은 쇠퇴를 거듭해 왔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제조업 역량의 심각한 후퇴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은 재래식 전쟁을 감당할 수 없는 열악한 산업역량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를테면 미국이 1년 동안 생산할 수 있는 포탄의 양은 우크라이나의 두 달 소모량을 다 충당할 수 없는 정도였다. 국가부채가 GDP의 125%에 이르러 매년 그 이자비용만 국방비에 맞먹을 정도가 됐다는 점도 미국의 쇠퇴를 상징하는 하나의 창이다. 매년 미국 재정적자의 절반가량은 (대중의 최소생활과 소비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의료지원과 생활지원 비용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긴축 공세로 삭감당한 임금만큼 자본이 획득하는 초과이윤을 국가가 재정을 투입하여 뒷받침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매우 퇴행적인 이 구조는 계급역관계의 급격한 변화 없이는 (즉 급격한 임금상승이나 혹독한 복지중단 없이는) 지속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미국의 국가부채는 당분간 끝없이 부풀어 오를 수밖에 없게 돼 있다. 21세기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치른 두 개의 큰 전쟁에서 모두 패배했다는 사실, 특히 친미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장기간의 시도가 모두 허무한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도 미국에게 큰 부담을 안겼다. 미국이 미·중 패권대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틈을 타서 여러 지역적 군사강국들이 자신의 팽창 야망을 하나둘 행동에 옮기는 상황도 미국의 정치군사적 패권을 상당 수준 약화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로 남아 있다. 미국의 그러한 지위를 보장해 주는 것은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힘과 압도적인 군사력이다. 중국은 많은 영역에서 미국을 추월했거나 대등한 지위에 올라섰지만, 미국의 패권을 뒷받침하는 이 두 핵심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아직 상당히 열등한 위치에 있다. 미국 연준(Fed)은 매년 ‘국제통화사용지수’를 계산해 발표하는데,[4] 아래 도표는 2001~2024년의 추이를 보여준다. 그 시간 동안 중국이 산업적 역량, GDP, 세계 교역 비중 등에서 엄청난 성장을 거듭해 온 것과 매우 다르게, 중국 위안화가 미국 달러화에 비해 여전히 매우 취약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대표하는 것은 군사비 지출과 핵무기 보유량이다. 중국은 최근 매년 7%대의 높은 증가율로 군사비를 증액하고 있지만, 여전히 미국에 한참 못 미친다. 숨겨진 군사비를 더하면 중국의 군사비가 5천억 달러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미국의 절반 수준이다. 중국의 핵무기 보유량은 여전히 미국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중 패권대결의 현재 지점은, 여러 측면에서 중국이 미국을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고 심지어 추월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달러 패권과 군사 패권이라는 결정적인 양 측면에서 미국이 분명한 우위를 갖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중국이 세계패권의 도전자로 부상하면서 미국이 패권적 지위를 상당 부분 상실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의 패권국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현재 지점에서 미국이 가진 우위는 매우 불안한 것이다. 첫째, 중국이 미국과의 패권경쟁에서 중도 하차할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과거 미국의 패권에 도전했던 소련이나 일본이 경제력이나 군사력 가운데 하나에서 결정적 결함을 가졌던 것과 달리 중국은 경제력과 군사력 모두에서 탄탄한 토대를 갖고 있어서다. 둘째, 중국의 상승세와 미국의 하락세가 당분간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3. 트럼프 정권의 미·중 패권대결 대응 전략과 베네수엘라 침공 1) 2025년 12월 발표된 미국 국가안보전략(NSS)의 요지 2025년 12월 5일 트럼프 정권은 미국의 새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을 공개했다. 새 국가안보전략은 트럼프 정권의 기본 방향을 보여주지만, 몇 군데에서 혼선을 유발하는 표현들을 담고 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첫째, 트럼프의 정치적 기반인 마가(MAGA) 세력을 고려한 문학적 수사들 때문이다. 둘째, 트럼프 정권의 중요한 전략적 의도 때문이다. 새 국가안보전략에서 혼선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표현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미국이 아틀라스처럼 세계질서 전체를 떠받치던 시대는 끝났다.” “패권은 원해선 안 되는 일이었고 달성할 수도 없었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외교정책 엘리트들은 전 세계에 대한 영구적인 미국 지배가 우리 국가의 최선의 이익이라고 스스로 확신했다.” “엘리트들은 미국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거대한 복지-규제-행정 국가와 거대한 군사·외교·정보·대외원조 복합체를 동시에 유지할 자금을 댈 수 있다고 보았다.” “요컨대, 우리 엘리트들은 근본적으로 바람직하지도 않고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했다.” 또한 새 국가안보전략에서는 중국에 대한 표현들이 이전보다 완화됐다. 2022년에 바이든 정권이 내놓았던 국가안보전략에서는 중국을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가진 가장 중대한 장기적·전략적 도전’으로 규정했다. 미·중 패권대결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던 것이다. 그런데 새 국가안보전략에서는 ‘비서반구 경쟁국’이나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국가’ 같은 모호한 표현들을 갖고 중국을 지칭했다. 한편 새 국가안보전략은 ‘서반구(Western Hemisphere)에서 미국의 압도적 우위를 회복’하는 데 최우선 순위를 부여했다. 이 또한 바이든 정권의 2022년 국가안보전략이 미·중 패권대결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과 첨단기술·공급망 분리’, ‘민주주의 가치 동맹을 통한 압박’ 등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했던 것과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트럼프 정권이 내놓은 미국의 새 국가안보전략은 어떻게 해석돼야 할까? 일부에서는 이를 미국 국가안보전략의 중대한 변화로 해석한다.[5] 이들은 미국이 새 국가안보전략을 통해 ‘더 이상 패권국이 아님을 스스로 공식 확인’했다고 본다. 이들에게 새 국가안보전략은 ‘미 제국주의 대외정책의 극적 반전을 대표’하고 ‘세계 패권국 지위를 방어하려는 시도의 종언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들은 트럼프 정권의 정책이 ‘주요 적대국(중국·러시아)과의 대결에서는 후퇴하고, 대신 서반구의 약한 동맹국들에 대해서는 약탈, 지배하려는 시도’로 특징지어진다고 본다. 트럼프가 미국의 쇠퇴를 인정하고 ‘보다 현실적인 목표를 스스로에게 설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패권국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포기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패권대결로부터 전혀 물러서지 않았고 물러설 수도 없다. 그 이유와 근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미국 자본주의는 달러 패권에 기초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달러 패권은 미국이 달러의 무제한 발행을 통해 자신의 경제위기를 전 세계로 전가할 수 있는 기반이다. 천문학적인 국가부채를 끝없이 늘려갈 수 있는 것도 달러 패권 덕분이다. 만일, 달러 패권이 붕괴한다면 미국은 더 이상 대규모 재정적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인데, 이는 (대중의 최소생활과 소비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의료지원과 생활지원, (압도적인 군사력 유지를 위한) 국방비 지출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국내적으로는 대규모 경제위기와 계급투쟁의 폭발을 뜻할 것이고 대외적으로는 군사적 우위의 조속한 붕괴를 뜻할 것이다. 달러 패권의 붕괴는 사실상 미국의 전면적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미국은 달러 패권을 사수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의 달러 패권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더 이상 미국의 경제력이 아니라 압도적인 군사력이며, (달러 패권과 군사 패권에 기초한) 세계 패권국 지위다. 오늘날 미국이 패권국의 지위를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않으면서 달러 패권을 사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둘째, 미국과 중국이 서로 세력권을 인정하며 세계를 분할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 냉전 시기에 미국과 소련은 서방과 동방이라는 각자의 세력권을 이끌며 40년 이상 세계를 분할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2차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미국과 소련이 세력권 분할을 합의하고 그에 따라 상대의 세력권을 존중하면서 각자의 세력권을 구축해 갔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이 각각 이끈 서방과 동방은 경제적으로도 철저히 분리돼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미·중 패권대결은 1990년대 이후 세계경제를 하나로 통합시킨 세계화의 기반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에서 보자면, 중국은 라틴아메리카를 포기할 수 없고 미국은 동아시아를 포기할 수 없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첨단기술과 공급망의 분리가 진전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세력권 분할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얘기다. 2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역사적 사건을 경과하지 않는 한, 세력권 분할은 가능하지 않다. 세력권 분할이 가능하지 않다면, 미국과 중국은 세계 패권을 향한 사활적 대결을 피할 수 없다. 미국 자본주의의 존속을 위해 세계 패권의 사수가 필수적인 것만큼, 중국 자본주의의 활로를 위해서는 세계 패권의 쟁취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셋째, 트럼프 정권의 행동은 중국과의 패권대결로 명확히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중 패권대결에 대한 트럼프의 속마음은 ‘중국과의 패권대결이 미국의 최우선 안보사안’이라는 지론으로 유명한 엘브리지 콜비(Elbridge Colby)를 국방부(전쟁부) 정책담당 차관이라는 핵심 요직에 중용한 데서 잘 드러난다. 트럼프 1기 정권 때도 국방부 차관보로 일하면서 2017~18년 미국 국가안보전략 작성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콜비는 2021년 자신의 저서에서 ‘경쟁자인 중국에게 패권을 빼앗기지 않도록 미국의 모든 국력을 동원해 저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만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안보전략의 하위문서로 2026년 1월 23일 발표된 미국 국방부의 ‘2026 국가방위전략(National Defense Strategy)’은 이러한 방향을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새 국가방위전략은 중국을 “19세기 이후 미국이 직면한 가장 강력한 경쟁국가”로 규정했다. 또한 ‘한국이 북한 억지의 일차적 책임을 지고 미국은 결정적이지만 제한적인 지원에 그쳐야 한다’고 전략적 방향전환을 제시하면서 이러한 전환이 ‘미국의 국방 우선순위와도 더 잘 부합’한다고 했다. 주한미군의 주된 임무를 중국 견제에 두고 대만 유사시 곧바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넷째, 미국이 서반구에 집중하겠다는 것은 중국과 사이좋게 세력권을 분할하겠다는 게 아니라 가장 유리한 지역에서부터 중국을 위축시키면서 중국과의 전면적 대결을 준비하겠다는 전략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트럼프가 베네수엘라를 침공한 의도와 직결되는 만큼 자세히 살펴보자. 2)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를 서반구에 둔다는 의미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서반구의 남쪽에는 라틴아메리카(중남미)가 있고, 북쪽에는 캐나다와 그린란드가 있다. 미국의 서반구 집중 전략에서 중국과 관련된 부분은 라틴아메리카에 해당한다. 나토에 속한 캐나다와 그린란드는 러시아와 관련지어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먼저 라틴아메리카를 살펴보자. 흔히 미국의 ‘앞마당’으로 불리는 라틴아메리카는 오랜 시간 미국에 종속되어 제국주의적 수탈을 당해왔다. 특히 1980~90년대 미국이 신자유주의 공세를 전면화할 때, 라틴아메리카는 외채위기, IMF 구조조정, 시장개방, 민영화, 노동유연화, 긴축의 과정을 밟아가며 미국 자본들에게 철저히 수탈당했다. 대륙 전반에 만연한 극심한 빈곤과 불평등 심화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중남미 각국에서 연성 좌파 정권들이 줄줄이 정권을 잡는 ‘핑크타이드’를 만들어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브라질의 룰라,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 등으로 대표되는 중남미 ‘진보’ 정권들은 때마침 진행된 중국의 경제적 급부상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원유·원자재·식량 등 라틴아메리카의 풍부한 자원을 중국이 엄청난 규모로 수입해 간 덕분에 경제적 숨통을 틔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중국 경제의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중남미 각국의 경제도 악화됐다. 2010년대 중후반 중남미 ‘진보’ 정권들은 위기를 맞았고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같은 극우세력이 부상했다. 트럼프와 긴밀히 연결된 중남미 극우세력들의 핵심 정책은 노동유연화·민영화 등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이는 ‘강화된 신자유주의·긴축’과 ‘저항의 범죄화’였다. 물론 극우세력들은 다시 대중의 반발에 부딪쳤다. 그렇게 지난 10년 동안 중남미 각국에서는 미국과 비슷하게 ‘진보’ 정권과 극우세력 간의 정권 주고받기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그 사이 중국은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경제적 기반과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시켜 왔다. 중국은 중남미 국가들 대부분에서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교역파트너로 부상했다. 중국은 전 세계 리튬 매장량의 68%를 보유한 ‘리튬 삼각지대’(아르헨티나·볼리비아·칠레)에 2018년 이후 160억 달러를 투자해 수십 개의 광산·채굴 프로젝트를 확보했다. 중국의 국영기업들은 2018년 이후 중남미 국가들의 전력 부문에 공격적으로 진출하여 칠레와 페루에서 절반 이상의 전력을 통제하고 있으며, 브라질에서도 325억 달러를 투자해 6천만 명에게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중국의 화웨이는 브라질과 멕시코에서 통신 인프라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중국은 페루의 찬카이 항구를 건설한 뒤 이를 브라질과 철도로 연결해 태평양-대서양 회랑을 구축하는 야심찬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전략적 우선순위를 서반구에 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미국의 앞마당 라틴아메리카에서 중국의 경제적 기반과 영향력이 점증하는 상황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둘째, 라틴아메리카에서 중국을 최대한 위축시킨 뒤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의 풍부한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갖겠다는 것이다. 셋째, 다분히 경제적 성격을 가진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경제적인 방식이 아니라 정치군사적인 방식으로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서반구 집중 전략의 중요한 특징으로, 미국과 중국이 가진 강점과 약점을 철저히 타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제조업 역량이 심각하게 쇠퇴한 미국은 경제적인 방식의 경쟁을 통해서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중국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 반면 군사적인 견지에서 보았을 때 라틴아메리카는 중국에게 가장 취약한 지역이다. 아직까지 중국의 군사력은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에서 미군을 격퇴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지구 정반대편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거의 힘을 쓸 수가 없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 또한 미국이 오랜 시간 라틴아메리카에서 행사하고 구축해 온 정치적 영향력에는 비교가 안 된다. 특히 트럼프는 최근 중남미 각국 선거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면서 아르헨티나의 밀레이, 엘살바도르의 부켈레, 에콰도르의 노바아, 칠레의 카스트, 온두라스의 아스푸라 등으로 이어지는 친미 극우정권 연대를 형성해 가고 있다. 미국은 친중 ‘진보’ 정권을 하나씩 군사력으로 (또는 관세공격으로) 타격하는 한편 친미 극우정권을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하며) 지원·육성함으로써 중남미 각국을 친미·반중 정권으로 채워내려 한다. 트럼프 입장에서 친미·반중 정권들의 핵심 과제는 중국과의 추가 경제협력을 중단하거나 계약을 파기한 뒤 중국 기업 대신 미국 기업들에게 자원과 인프라에 대한 접근을 보장해주는 게 될 것이다. 가장 유리한 곳에서부터 승리를 거둔 뒤 이를 요새화하여 결정적인 전투를 준비하는 것은 군사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법이다. 트럼프 정권이 미·중 패권대결이라는 큰 전쟁 속에서 일단 서반구(라틴아메리카)에 전략적 우선순위를 두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전법을 쓰려는 것이다. 3)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한 의도 1999~2013년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은 라틴아메리카 핑크타이드의 중심에 있었다. 차베스는 1989년 수도 카라카스의 반신자유주의 빈민 봉기로부터 성장해 나간 대중운동의 물결을 타고 1998년 선거로 집권했다. 2002년 미국이 지원하는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대규모 군중시위에 힘입어 권좌에 복귀했다. 2004년 불신임 국민투표에서도 승리했다.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야심찬 기치를 내건 차베스 정권은 석유·철강 등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빈민에게 주택·교육·의료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주민 과반수의 탄탄한 지지 기반을 구축했다. 강력한 반제국주의 수사를 사용하면서, 미국 제국주의와 공공연한 마찰을 이어갔다. 그러나 차베스 정권은 실제로는 베네수엘라의 종속적인 자본주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국유화는 일부에 그쳤고, 대다수 기업들의 소유권은 건드려지지 않았다. 국유화 방식도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는 유상 국유화였다. 외채 상환을 거부하지 않았고, 이윤의 해외반출을 허용했다. 거대 기업들에게는 사실상 세금이 면제됐고 막대한 광물자원이 제공됐다. 차베스 정권은 전통적인 자본가계급과 차베스주의를 내건 신흥 자본가계급 모두의 이익을 수호했다. 차베스 정권 아래서 권력은 차베스 개인에게 집중되었고, 통합사회당이라는 단일 정당과 차베스를 추종하는 군부가 국가를 통제했다.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대중은 실질적인 의사결정에서 배제되었다. 차베스주의로 포섭되지 않은 혁명적 좌파는 탄압과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부유층만 선거에 나설 수 있게 한 반민주적인 선거법 때문에 혁명적 좌파는 발언권을 봉쇄당했고 부유한 우파가 차베스 반대진영을 독점했다. 차베스 정권은 핑크타이드에 함께 한 ‘진보’ 정권들 가운데 가장 왼쪽에 있었지만, 이 같은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차베스 정권의 본질적 한계는 2013년 차베스 사망 이후 권력을 이어받은 마두로 정권에서 폭발했다. 마두로 정권이 들어설 무렵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특히 중국 성장세의 둔화 때문에 원유·원자재 가격이 급락했다. 국가 경제의 압도적인 부분을 여전히 석유에 의존하고 있던 베네수엘라는 큰 타격을 받았다. 화폐가치와 가격통제 붕괴로 물가가 하늘 높이 뛰는 상황에서 임금삭감과 연금삭감이 강요됐다. 대중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차 충족되지 않자 주민의 25%에 해당하는 700만이 베네수엘라를 떠났다. 만성적인 물자부족, 의료진 유출, 인프라 파괴, 정전 등으로 의료 시스템도 붕괴했다. 그런 와중에 마두로 정권은 경제위기를 타개하겠다며 특별경제구역을 설치하고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노동법을 무력화했다. 차베스 정권이 과반수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선거에서의 절차적 정당성을 가졌던 것과 달리 마두로 정권은 점점 더 선거부정에 의지했다. 2018년 대선에서는 주요 야권 후보들의 출마가 금지됐다. 2024년 대선에서는 광범한 개표 조작 정황이 뚜렷하게 드러나 전국적으로 대규모 항의시위가 발생했는데, 특히 과거 차베스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던 카라카스의 노동자·빈민 거주지에서 큰 시위가 발생했다. 마두로 정권은 준군사단체 콜렉티보스와 협력해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2천여 명을 체포했다. 한편 2019년 트럼프 1기 정권은 베네수엘라 국회의장 과이도의 쿠데타 시도를 지원하기 위해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광범한 제재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산 원유 공급이 막히자 베네수엘라산 원유 공급을 확대하기 위해 바이든 정권이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재를 완화했다. 2024년 바이든 정권은 베네수엘라 대선을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야당 후보를 당선자로 인정했다. 2025년 트럼프 2기 정권은 초반부터 마두로 정권을 부정하며 베네수엘라 침공을 준비했다. 그리고 2026년 1월 2~3일 베네수엘라 침공 작전이 전격 전개됐다. 트럼프 정권이 베네수엘라를 전격 침공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를 서반구에 두겠다는 국가안보전략을 구체적으로 실행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한 의도는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중국과 베네수엘라의 관계를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중국은 베네수엘라에서 수출되는 원유의 80%를 국제시세보다 50% 할인된 가격으로 공급받아 왔는데, 이는 중국이 베네수엘라에 제공한 차관 600억 달러를 원유로 대환받는 과정이었다. 베네수엘라에서 공급받아 온 원유는 중국이 사용하는 전체 원유의 6~7%를 차지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이후 미국은 카리브 해상에서 베네수엘라를 드나드는 유조선을 계속 나포하면서 베네수엘라산 원유가 중국으로 가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 1월 20일까지 총 7척의 유조선이 미군에게 나포됐다. 한편 마두로 납치 이후 트럼프는 미국이 베네수엘라로부터 최대 5천만 배럴(28억 달러 어치)의 원유를 인도받아 대신 판매한 뒤 그 수익금의 일부를 베네수엘라에게 줄 것인데, 베네수엘라는 이 수익금으로 미국산 상품만을 구입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베네수엘라에서 권력을 승계한 로드리게스 정권은 1월 20일 “미국으로부터 원유판매대금 5억 달러 가운데 3억 달러를 첫 번째 분할금으로 받았다”고 밝혔다. 로드리게스 정권이 트럼프의 요구대로 베네수엘라 원유 수출의 통제권을 미국에게 넘긴 것이다. 둘째,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석유 자원을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대의 원유 매장량(3,030억 배럴)을 갖고 있다. 베네수엘라 석유가 미국 수중으로 들어가면 미국은 세계 원유 매장량의 30%를 통제하게 된다. 이것은 국제유가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여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하는 데, 그리고 ‘페트로-달러’ 체제를 방어하여 달러 패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 트럼프 정권의 국무장관은 베네수엘라 침공 직후인 1월 4일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이 미국의 적대국들에 의해 통제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20년 동안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이 운영되는 데서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중국이었다. 지금도 중국의 기술자들이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의 인프라를 유지·보수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기술자들을 몰아내고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을 장악하려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다. 그런데 베네수엘라에서 원유생산을 크게 늘리려면 ‘1천억 달러의 비용과 수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블룸버그는 예상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석유자원을 통제한다는 것과 그것을 대규모로 개발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다. 셋째, 베네수엘라를 미국의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에서 미국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안정적으로 관철하기 위해 미국은 베네수엘라를 속국으로 만들려 한다. 미국이 경제적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 약소국을 침략하여 속국으로 만드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트럼프는 과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용됐던 방식, 다시 말해 이른바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해서 친미정권을 수립하는 ‘국가건설’ 프로젝트와는 다른 방식을 사용하려 한다. 마두로를 납치한 직후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에서 친미 야권을 대표해 온 마차도 대신 마두로의 부통령 로드리게스를 베네수엘라의 통치자로 인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자신의 의지를 거역한다면 마두로보다 더 험한 일을 겪을 것이라는 위협과 함께, 자신의 요구를 순순히 따른다면 정권의 안위를 보장할 것이라는 신호도 보냈다. 초기에 혼란스런 메시지를 내던 로드리게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트럼프에게 확실히 굴복한 것으로 보인다. 1월 15일 마차도가 워싱턴에서 트럼프를 만나 노벨평화상을 헌납하던 날, 로드리게스는 카라카스에서 미국 CIA 국장을 만났다. 같은 날 로드리게스는 의회에서 첫 국정연설을 하면서 석유산업 국유화를 되돌리기 위한 탄화수소법(석유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석유산업에 대한 외국자본 투자유치, 기업에 유전운영 자율권 부여, 판매수익 배분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이 법안은 베네수엘라 의회에서 29일 통과되었다. 트럼프 자신이 비난해 왔던 ‘국가건설’ 프로젝트 대신 기존 지배세력을 굴복시켜 베네수엘라를 속국으로 만든다는 트럼프의 구상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성공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무엇보다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지배세력의 실체를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민중 위에 군림하는 억압적 세력이라는 점, 제국주의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순순히 굴복할 세력이라는 점, 그렇게 주종관계가 설정되고 나면 제국주의의 이해관계를 지키는 하수인으로서 노동자·민중을 효과적으로 억압할 세력이라는 점 말이다. 넷째, 미국의 군사적 우위와 중국의 군사적 열세를 실제 이상으로 극대화하여 드러냄으로써 미국의 패권적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미국은 베네수엘라 침공 과정에서 압도적인 군사력을 과시했다. 특히 중국제·러시아제 방공망을 철저히 무력화함으로써 베네수엘라만이 아니라 중국·러시아에 대해서도 군사적 우위에 있음을 과시했다. 물론 이것은 라틴아메리카라는 미국에게 매우 유리한 지역에서 벌어진 일로서 실제 격차보다 다분히 과장된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그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베네수엘라 침공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극우정권들이 공개적으로 환호를 보낸 것과 달리, 브라질의 룰라나 멕시코의 셰인바움 같은 ‘진보’ 정권들은 잔뜩 움츠러든 채 모호하고 추상적인 원론적 입장만을 내놓았다. 미국은 이번 베네수엘라 침공을 통해 향후 라틴아메리카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정치군사적 행동과 위협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관철해 나갈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4. 미·중 패권대결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1) 미 국가안보전략에 담긴 또 하나의 의미: 동맹 질서의 재편 미국의 새 국가안보전략에는 트럼프 정권의 중요한 의도가 하나 담겨 있다. 트럼프는 러시아를 중국 편에서 떼어내고 나아가 미국 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푸틴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고 있다. 트럼프 정권의 새 국가안보전략이 ‘미국은 더 이상 세계 패권을 추구하지 않으며 다극 세계질서를 인정하면서 서반구에 집중할 것’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쓰인 것은, 한편으로 마가(MAGA) 세력을 고려한 산물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극 세계질서’라는 푸틴의 슬로건에 공명하려는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국가안보전략은 러시아를 미국의 위협으로 규정하지 않은 대신, 유럽연합이 미국의 분쟁 종식 노력을 방해했다고 규탄했으며, 유럽이 ‘문명의 소멸’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비난했다. 또한 ‘나토가 영구적으로 확장되는 동맹이라는 인식을 종식시키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방지하겠다’면서 러시아의 핵심 요구를 수용할 뜻을 내비쳤다. 사실 트럼프는 러시아를 끌어당김으로써 미·중 패권대결의 판을 흔들고자 하는 의도를 두 번째 취임 직후부터 드러내 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트럼프 정권의 태도 또한 바로 이러한 의도에 의해 규정돼 왔다. 이에 대해 푸틴은 외견상으로는 트럼프의 유혹을 뿌리치며 중국과의 동맹을 강조하는 공식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미국이 러시아에게 어떤 대가를 제공할 수 있는지 확인할 용의가 있다는 점 또한 굳이 숨기지 않았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중국의 하위 동맹자가 된다는 것은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경제적 측면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역사적 맥락과 군사적 역량이란 측면에서 불만스러운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미국의 새 국가안보전략은 트럼프가 푸틴에게 한걸음 더 적극적으로 추파를 던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푸틴 정권은 국가안보전략이 공개된 직후 ‘러시아의 미래 비전과 부합’한다고 긍정적으로 화답했다. 또한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의 공동주범인 트럼프가 제안한 가자 지구 ‘평화위원회’ 참여도 수락했다. 트럼프가 푸틴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는 것은 러시아의 선택이 미·중 패권대결의 향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계산하기 때문이다. 만일 러시아가 미국 편으로 붙는다면 (미국과 중국 모두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인도 또한 러시아를 따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과거 고립된 소련을 몰락시켰던 것처럼 고립된 중국을 밀어붙일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의도가 실제 성공할 가능성은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는 우선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 과정에서 푸틴에게 큰 선물을 안겨줘야 할 텐데,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반발을 잠재우는 게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의 새 국가안보전략이 말하듯, 러시아의 손을 들어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결시키려는 미국의 의도는 그동안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적극적 반대로 계속 좌절돼 왔다. 유럽은 만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다면 그 파장이 우크라이나에 그치지 않고 구 소련권 또는 심지어 구 동구권에서 러시아의 영향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고, 이는 또 다른 전쟁을 촉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착된 형세를 돌파하기 위해, 트럼프는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극우정권 연대와 비슷하게 유럽에서도 극우세력 연대를 추진하겠다고 국가안보전략에서 밝혔다. 이를테면 “친미적 입장을 유지하면서 자주성과 전통적 유럽 생활방식의 보존·복원을 추구하는 정당과 운동, 지식인 및 문화계 인사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극우정권들이 트럼프를 중심으로 강한 주종관계로 묶여 있는 것과 달리 유럽의 극우세력들은 트럼프에게 별로 의존적이지 않은데다가 스펙트럼도 훨씬 넓다. 이런 상황에서, 그린란드와 캐나다를 향한 트럼프의 영토 팽창 야욕은 자신의 동맹 질서 재편 구상을 훨씬 더 실현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 침공 직후 기세를 몰아 그린란드에 군사력 동원 가능성까지 시사하고 유럽 8개국에 관세 부과를 위협하며 그린란드 병합 의지를 관철하려고 해 보았지만, 유럽의 반발과 금융시장이 보내는 위험신호 앞에서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의 ‘도를 넘은’ 탐욕에, 유럽의 자존심은 큰 상처를 입었다. 극우세력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2024년 11월 트럼프의 선거 승리를 크게 반겼던 유럽 극우세력들은 트럼프가 2025년 일방적 관세 부과와 방위비 지출 압박에 이어 2026년 베네수엘라 침공과 그린란드 병합 시도까지 나서자 일제히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라틴아메리카의 극우가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침공을 적극 지지하고 환호한 것과 달리 유럽의 극우는 트럼프의 그린란드 병합 의사에 적극 반발한다는 점이다. 유럽은 라틴아메리카와 달리 미국의 종속국이 아니라 (비록 열세에 있을지라도) 경쟁하는 제국주의 열강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의 극우세력은 유럽연합·유엔 등이 자국의 이민·경제정책 등에 개입하는 것을 ‘주권침해’라고 반대하는 ‘고립주의’에 입각해 세력을 확장해 왔기 때문에, 트럼프의 노골적인 주권침해에 반발하는 게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만일 트럼프가 그린란드 병합을 계속 추진한다면 트럼프와 유럽 극우 사이의 균열은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 등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극우들은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트럼프의 러시아 끌어당기기 카드는 그 자체로도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았는데, 트럼프 자신의 영토팽창 야욕까지 뒤섞이면서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만일 트럼프가 지금 같은 방식으로 일을 밀어붙인다면, 미국이 러시아를 얻는 과정은 동시에 유럽을 잃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중국 입장에서 러시아 대신 유럽을 동맹으로 얻을 수 있다면 꼭 손해만은 아닐 수 있다. 그러한 사태전개의 가능성은 역으로 트럼프가 러시아 끌어당기기 카드를 계속 추진할 동력을 크게 약화시킬 것이다. 2) 미·중 패권대결의 최후 해결책: 군사적 정면대결 미국과 중국을 각각 중심에 둔 동맹 질서가 어느 한편으로 크게 기울면서 한쪽이 심각하게 고립당하는 길로 가지 않는 한, 미국과 중국의 패권대결은 최종적으로는 군사적 정면대결을 통해서 패권의 향방을 결판 짓는 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이며, 지금으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다. 물론 제국주의와 전쟁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국제적 투쟁이 그러한 군사적 정면대결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말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군사적 정면대결이 펼쳐진다면 그 핵심 전장은 어디가 될까? 그것은 단연 동아시아에서 서태평양에 이르는 지역이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첫째, 이 지역은 미국의 해양세력과 중국의 대륙세력이 가장 직접적으로 가장 팽팽하게 맞부딪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일본과 한국을 동맹으로 이끌고 있고, 중국은 러시아와 북한을 동맹으로 이끌고 있다. 둘째, 중국은 서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분쇄하고 미군을 서태평양 동쪽으로 몰아낸 뒤 중국 근해에서 서태평양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대한 통제권의 수립을 전략적 목표로 갖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전략적 목표는 이미 2013년 시진핑이 베이징을 방문한 미국 국무장관에게 “광활한 태평양은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대국을 수용하기에 충분히 넓다”며 태평양 양분론을 제기했을 때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이것은 일본·한국·대만 등의 동아시아와 필리핀·베트남·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전반을 중국의 영향력 아래 두겠다는 것이다. 이에 맞서 미국은 일본과 한국에 6만 4천여 명의 미군을 배치하고 있고, 대만에 점점 더 많은 무기를 공급하고 있으며, 서태평양부터 대만해협까지 대규모의 해군 전력을 상시 가동하고 있다. 셋째, 오늘날 중국・일본・한국・대만을 포괄하는 동아시아는 세계 자동차 생산의 43%, 반도체 생산의 75%, 선박 건조의 95%를 차지하는 ‘세계의 공장’으로서 세계 자본주의의 향방을 결정할 만한 위치에 있다.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몰아내고 패권을 수립한다면, 세계적으로도 미국을 능가하는 최고의 패권국으로 올라설 것이다. 반대로 미국이 중국의 야망을 좌절시킨다면, 미국은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고 유일 패권을 다시 한 번 확립하게 될 것이다. 만일 미국과 중국 사이의 군사적 정면대결이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면, 그 전쟁은 어떤 양상을 띨까? 첫째, 그 전쟁은 (인류의 공멸로 가지 않을 것이라면) 핵 전쟁이 아닌 재래식 전쟁으로 전개되겠지만, 대신 사상 최대 규모의 파괴력을 동원하는 전쟁이 될 것이다. 2025년 기준 미국·일본·한국 동맹이 가진 병력 수는 총 205만(135만+25만+45만)이고, 중국·러시아·북한이 가진 병력 수는 총 470만(200만+150만+120만)이다. 여기에는 세계 5대 군사강국 가운데 4개국이 포함돼 있으며, 전통적인 군사장비부터 첨단기술 군사장비까지 중무장한 군대들과 산업적 역량들이 포괄돼 있다. 둘째, 그 전쟁은 아마도 대만이나 한반도를 둘러싸고 시작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어디서 시작되든 빠른 속도로 동아시아와 서태평양 전체를 포괄하는 전쟁으로 확산될 것이다. 육지에서는 중국의 동부연안, 북한, 러시아 극동지역, 대만, 한국, 일본이 모두 전장이 될 것이고, 해양에서는 중국 근해부터 서태평양에 걸친 영역이 모두 전장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을 핵심 전장으로 하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군사적 정면대결로부터 얼마나 가까이 있을까? 합리적으로 추론해 본다면, 다행히 10년 이상의 시간은 아직 남아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미국과 중국 모두 필수적인 군사적 준비를 위해 최소한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군사적 준비가 끝나더라도 엄청난 규모의 대량 파괴와 살상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대규모 결전을 최종 선택하기까지는 아마도 또 얼마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 간의 군사적 정면대결이 시작되는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15~20년 뒤, 다시 말해 2040년대의 어느 시점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미국과 중국은 각각 어떤 군사적 준비가 필수적인 상황인 것일까? 먼저 중국은 무엇보다 핵무장을 강화해서 핵전쟁을 피할 수 있는 실질적인 핵균형(상호확증파괴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최근 중국은 매년 핵무기를 100기씩 추가하면서 2025년 기준 600기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현 속도라면 10년 뒤에는 대략 1,500기의 핵무기를 갖추게 된다. 이는 미국의 전체 핵무기 수에 비하자면 여전히 절반에 훨씬 못 미치지만 미국이 오랜 시간 유지하고 있는 실전배치 핵무기 수와는 거의 비슷하게 된다. 항공모함 전력을 따라잡는 것도 중요하다. 중국은 2035년까지 항공모함 6척을 추가 건조해 9척을 운용할 계획인데 그렇게 되면 11척을 운용하는 미국에 버금가게 된다. 미국은 무엇보다 재래식 전쟁을 뒷받침할 제조업과 해군력을 뒷받침할 조선업을 재건해야 한다.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에서 벌어질 전쟁에서 해군력이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감안할 때 미국과 중국 사이의 조선업 격차는 미국의 큰 약점이다. 오늘날 중국이 세계 조선업의 55%를 차지하는 반면 미국은 0.1%만을 차지한다. 미국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건조한 총톤수보다 많은 톤수를 중국의 한 조선소가 1년 만에 건조해 낸다. 2025년 현재 중국과 미국의 해군함정 수는 370척 대 297척인데, 당분간 격차가 더 벌어질 상황이다. 중국의 첨단 극초음속 미사일에 대응할 수 있는 무기체계도 개발해야 할 것이다. 15~20년 뒤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을 핵심 전장으로 하는 미국과 중국의 군사적 정면대결 가능성을 전망하는 것은 과도한 예단이 아니냐는 반론이 예상된다. 현실에는 수많은 변수가 작동하는 법인데 시기까지 특정해 가면서 그렇게 전망할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는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실제로 현실은 앞에 얘기한 전망과는 꽤 다른 그림으로 전개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런 전망을 생각하고 얘기하는 것이 갖는 결정적인 유익함이 있다. 꼭 그런 전망대로는 아닐지라도 대략 유사한 형태의 세계사적 격변과 도전이 우리 앞에 가까이 있음을, 따라서 그에 대응할 수 있는 노동자·민중의 운동을 각국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수준에서 시급히 건설해 나가야 할 중차대한 필요성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들은 우크라이나 전쟁, 팔레스타인 학살, 베네수엘라 침공, 그린란드 병합 시도 같은 사건들이 그저 머나먼 나라의 역사 속 한 장면 같은 이야기들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상대적으로 안온한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거대한 핵폭풍의 전조로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그러한 해석에 기초해 노동자계급의 실천적 대응능력을 비상하게 발전시켜 가는가 여부는 머지않은 미래에 엄청난 차이로 돌아올 것이다. 20세기의 첫 15년 동안 독일과 러시아에서 펼쳐졌던 운동의 차이가 마침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엄청난 차이로 돌아왔던 것처럼 말이다. 5. 실천 방향과 과제 자본주의가 ‘위기·전쟁·혁명의 시대’다운 모습을 점점 더 분명히 드러내는 상황에서, 제국주의와 전쟁에 맞서는 노동자·민중의 운동을 각국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건설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노동자계급에게 사활적인 과제다. 그런 관점에서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과 미·중 패권대결’을 살펴본 오늘, 우리의 실천이 나아갈 방향과 과제에 대해 간단히 얘기해 보겠다. 첫째, 전 세계 노동자·민중과 함께 한국의 노동자·민중 또한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을 규탄하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이 갖는 부당함을 규탄하는 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더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것이 베네수엘라와 라틴아메리카 노동자·민중만의 고난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끝내는 전 세계를, 그리고 특히 이곳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끔찍한 참화와 학살로 끌고 들어갈 제국주의 전쟁기계가 작동한 결과라는 사실이다. 지금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에 맞서 싸우는 것은 미래에 바로 우리에게 닥쳐올 훨씬 더 끔찍한 전쟁과 학살을 저지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둘째,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을 규탄하는 노동자·민중의 투쟁과 국제연대는 노동자·민중을 억압하면서 허구적인 반제국주의 깃발을 휘날리는 반동적 정권들과 철저히 독립된, 노동자·민중의 자주적 운동으로서 전개되어야 한다.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의 반동적인 성격은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베네수엘라 노동자·민중의 대중운동을 발전시키는 데서 결정적인 방해물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와 같은 반동적 정권들의 역할에 대한 일체의 환상과 결별할 때에만, 노동자·민중의 반제국주의 운동은 흔들림 없이 일관되게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셋째,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을 규탄하는 투쟁은 세계 노동자·민중의 반제반전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한 큰 흐름의 일부가 돼야 하며, 특히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국제연대 운동과 결합돼야 한다. 지난 2년 동안 가자 집단학살에 맞서 세계 곳곳에서 전개된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은 세계 노동자·민중의 반제반전 운동에서 중심으로 떠올랐다. 특히 온건한 BDS 운동에서부터 격렬한 가두시위, 점거, 수무드 선단까지, 나아가 학살지원을 직접 중단시키기 위한 총파업까지 다양한 투쟁수단을 발전시킴으로써 노동자·민중의 반제반전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구축해 왔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 규탄 투쟁을 팔레스타인 연대운동과 결합시키는 것은 노동자·민중의 반제반전 운동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넷째, 노동자·민중의 반제반전 운동은, 특히 이곳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는, 미·중 패권대결이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을 핵심 전장으로 하는 군사적 정면대결로 나아가는 고리를 끊기 위한 노동자·민중의 국제적인 운동을 건설하는 길로 전진해야 한다. 우리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획기적으로 완화하기 위해 주한미군·주일미군 철수와 북한의 핵무장 해제를 동시에 요구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 모두의 간섭과 침략을 거부하는 대만의 평화적인 자주독립, 따라서 친미 또는 친중 자본가계급이 아닌 노동자·민중 권력에 의한 대만의 자주독립을 지지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중 패권대결이 종국에는 군사적 정면대결이라는 끔찍한 참화와 집단학살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폭로하고 경고하면서 그러한 제국주의 전쟁책동을 반대하고 저지해 낼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반제반전 운동을 한국·일본·미국·중국·대만·북한·러시아에서부터 나아가 전 세계에서 건설해 나가야 한다. (끝) [1] 박민희, <한겨레신문>, 2026/01/07, ‘중국특사 만난 뒤 붙잡혀간 마두로... 중국은 어떻게 대응할까’ [2] 2024년 중국 전체 14억 인구의 1인당 GDP는 13,317달러였다. [3] 안드레 바비에리, 2025,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의 중국」 [4] 연준의 국제통화사용지수(Index of international currency usage)는 세계적으로 공개된 외환 보유고(25%), 외환 거래량(25%), 외화 채권 발행(25%), 외화 및 국제 은행권 채권(12.5%), 외화 및 국제 은행권 부채(12.5%)에서 각 통화가 사용되는 비중을 가중 평균한 값이다. [5] 미하엘 브뢰브스팅, 2025/12/11, 「트럼프의 새 국가안보전략: 미 제국주의의 다극세계 전략 제시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