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기초학습#7] 사회주의 바로알기: 중국,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
[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착취와 차별, 억압을 일소하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사상이었다. 인간해방 세상을 꿈꾸며 투쟁하려는 이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도,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계급투쟁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오늘날 진짜 사회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역사의 굴절로 인해, 스스로가 '사회주의'라 주장하는 가짜 사회주의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반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된 소련을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 칭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중국특색 사회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등 다양한 스탈린주의의 변종은 억압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포장하면서, 사회주의를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자기해방 사상에서 계급지배를 정당화하는 수사적 도구로 바꿔버렸다.
다른 한편에는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고 노동자혁명을 파괴한 개량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전통적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지배계급의 일부가 되었고, 새로운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의회주의와 관료주의를 '사회주의'와 뒤섞어버린다.
자본주의는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다시 불러왔다. 위기와 전쟁에 맞선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있지만, 계급투쟁의 사상인 사회주의에 대한 정돈된 지식을 얻기는 너무나 어렵다.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뒤엎기 위해, 스탈린주의와 개량주의의 혼란을 걷어내고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진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함께 배우고, 함께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해 '사회주의 기초학습' 시리즈를 연재한다.
[다른 시리즈 읽기]
#1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2 자본주의의 원리 파헤치기
#3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
#4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와 전략
중국,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
이 강의 제목은 ‘사회주의 바로알기: 중국,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다. 그렇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에서는 중국과 북한을 사회주의 체제라고 보지 않는다. 세간의 인식과 용법, 그리고 북한과 중국이 스스로를 ‘사회주의 국가’라고 칭하는 것과 다르게 말이다. 중국, 북한 만이 아니다. 베트남, 쿠바, 소련 몰락 이전의 동구권 국가들 또한 사회주의 국가라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주의의 ‘종주국’이라 얘기되는 ‘소련’ 또한 그 국가가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던 훨씬 더 많은 시기동안, 사실은 자본주의 국가였다고 본다.[1]
소련, 중국, 북한과 같은 사회가 ‘가짜 사회주의’라는 걸 밝히는 건 왜 중요할까? 오늘날 러시아, 중국, 북한의 현실이 그 이유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노동자민중에게 강요하는 착취와 차별, 억압을 일소한 사회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 북한 사회는 노동자민중에 대한 착취와 차별, 억압이 일소되기는 커녕, 아주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사회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큰 나라이다. 그리고 중국의 노동자들은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만들 권리가 없다. 2017년 제이식 노동자들은 자주적 노동조합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했는데, 중국공산당 정부는 이를 강경진압했다. 노동자들과 연대하던 학생들은 소리소문없이 잡혀가 몇 달동안 사라졌다가, 모든 정치활동을 그만둔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고, 파업을 주도했던 노동자들은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많은 중국 노동자들이 자생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중국공산당정부가 어용노조와 함께 자주적 노동조합 건설시도를 강경하게 탄압하고 있기 때문에, 자주적인 노동조합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자주적인 노동조합조차 만들지 못하는데, 진정한 의미의 노동자 당이 존재할 수나 있겠는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 체제에서 노동자들은 독립적인 정치활동의 자유조차 없다.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이 모든 사회구성원을 대변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체제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고 말한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빈부격차, 알리바바의 마윈과 같은 자본가들의 존재, 시장에서 불안정한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노동자들의 존재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자본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은, 아니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권리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체제 아래 압살당해 매우 제한적으로만 주어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볼 뿐이다. 알리바아의 마윈, 텐센트의 마화텅, 샤오미의 레이쥔 같은 자본가들은 정확히 중국 버전의 제프 베조스, 마크 주커버그, 팀 쿡일 뿐이다.
북한은 중국보다 더하다. 2024년 중국 지린성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임금체불 해결을 요구하며 자생적인 파업을 벌인 것이 화제가 되었다. 이것은 6.25 전쟁 이후 아마도 유일하게 확인되는 북한 노동자들의 파업인데, 72년 간 다른 파업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만큼 극심한 노동통제에 시달리고 있다. 북한의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수준은 최악으로, 선거, 언론, 집회결사, 이동,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약받고 있다.
문제는 이런 국가들이 스스로를 ‘사회주의’ 국가라고 내세우고, 이른바 ‘자유진영’의 부르주아들은 이런 국가의 존재를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한국에서 “그렇게 사회주의가 좋으면 북한가서 살아라”라는 말은 우파들이 늘 쓰는 단골소재다.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국가들이 얼마나 착취적이고 억압적인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도 뻔히 보인다. 그런데 그런 사회가 곧 ‘사회주의’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사회주의 사회를 대안적인 사회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에겐, 이러한 사회가 ‘가짜 사회주의’임을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중국, 북한 같은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 ‘가짜 사회주의’인가? ‘가짜’임에도 그들은 왜 스스로 ‘사회주의’라고 말하는가? ‘진짜 사회주의’는 어떠해야하고,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이 물음을 풀기 위해 우리는 먼저, 노동자혁명을 통해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국가를 수립했던 1917년 러시아로 가봐야한다.
1917년, 노동자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세우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인류 역사 상 최초로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타파하고 노동자국가를 세운 사건이었다. 러시아혁명은 1917년 2월, 여성의 날[2] 일어난 자생적 봉기로 시작됐다. 1905년 실패의 교훈으로부터 배운 노동자들은 2월 혁명을 통해 러시아 제정을 타도하고,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3]를 수립했다. 한편 러시아 제국의회 의원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제정을 타도한 뒤 러시아를 누가 이끌어갈지를 두고, 임시정부와 소비에트가 경합하는 ‘이중권력’ 상태가 벌어졌다.
혁명을 완전히 압살하려던 제정의 반동세력들, 제정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수준의 진보성도 달성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반동의 품에 안겨있던 자본가들, 혁명이 앞으로 전진하는 과정을 두려워하고, 혁명은 ‘단계적’이어야 한다며 임시정부에게 권력을 넘기려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혁명을 좌절시키는 편에 섰던 맨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우파, 가난한 농민들의 입장을 대변했지만 ‘농업 사회주의’라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사회혁명당 좌파. 그리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와 함께 노동자의 권력장악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볼셰비키까지 다양한 혁명세력이 경합했다. 결국 볼셰비키가 주도한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는 러시아 제정 타도에 이어 10월 혁명을 통해 임시정부도 타도하고 노동자국가를 수립했다. 자생적 대중봉기로 시작된 2월 혁명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으로 혁명을 완수한 10월 혁명까지의 복잡다단한 과정은 그 자체로 굉장히 많은 실천적 교훈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중요한 역사적 과정이다. 이번 교육자료에서 우리는 방대한 그 과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10월 혁명이 완수된 러시아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4]
8개월 간의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 10월 혁명을 통해 마침내 노동자국가가 탄생했다. 비록 파리코뮌에서 노동자들이 약 두 달 간 도시를 통치하긴 했지만, 1억 3천만 명이 사는 국가의 권력을 노동자들이 쥐게 된 것은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10월 혁명 이후, 노동자계급 다수의 지지를 받은 볼셰비키는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를 통해 여러 진보적인 사회적 조치들을 취했다. 몇가지 자료를 통해 소비에트 정부가 취한 조치들을 살펴보자. 이 진보적 조치들이 스탈린의 집권 이후 어떻게 뒤집어졌는지를 보면, 초기 노동자국가와 스탈린주의 반혁명 이후의 방향성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혁명 당시 노동자민중의 핵심 구호는 “빵, 토지, 평화”로 압축됐다. 당시 러시아가 1914년부터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극심한 착취와 수탈, 전쟁의 폐허 속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노동자민중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민중들을 사지로 내모는 전쟁을 중단하는 것, 그리고 더 이상의 착취와 수탈을 멈추는 것이었고, 이것을 표현하는 구호가 “빵, 토지, 평화”였다. 병사들은 평화협정 체결을, 노동자들은 자본의 몰수와 생산통제를,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소유권 박탈과 경작할 토지의 획득을 갈망했다.
10월 25일, 권력을 잡은 당일,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노동자, 병사, 농민 여러분께!
제2차 전러시아 노동자 및 병사 대표 소비에트 대회(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습니다. 대회에는 대부분의 소비에트가 참석했습니다. 농민 소비에트에서 파견된 대표들도 일부 참석했습니다. 타협적인 중앙집행위원회의 임기가 종료되었습니다. 노동자, 병사, 농민의 대다수의 의지에 힘입어,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난 노동자와 수비대의 승리한 봉기에 힘입어, 대회는 권력을 자신의 손에 잡았습니다.
…
소비에트 정부는 모든 민족에게 즉각적인 민주적 평화와 모든 전선에서의 즉각적인 휴전을 제안할 것입니다. 토지 소유자, 왕실, 수도원의 토지를 보상 없이 농민 위원회에 이전하도록 보장할 것입니다; 군대에서 완전한 민주주의를 도입하여 병사의 권리를 보호할 것입니다;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수립할 것입니다; 제헌의회를 지정된 시기에 소집하도록 보장할 것입니다; 도시에는 빵을, 마을에는 필수품을 공급할 것입니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에게 진정한 자결권을 보장할 것입니다.[5]"
그 뒤를 이어 소비에트는 1년여에 걸쳐 지속적으로 법령을 발표한다. 그 중 가장 먼저 발표된 것은 평화와 토지에 관한 법령이었다.
평화와 민족자결의 원칙
"[평화에 관한 법령 中]
10월 24-25일 혁명에 의해 수립된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 즉 노동자, 병사, 농민 대표 소비에트를 기반으로 하는 정부는 모든 전쟁 당사국과 그 정부에게 공정하고 민주적인 평화를 위한 즉각적인 협상을 시작할 것을 촉구합니다.
공정하거나 민주적인 평화란, 전쟁으로 인해 지쳐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모든 전쟁 당사국 노동계급과 다른 노동인민의 압도적 다수가 간절히 바라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차르 독재 정권의 전복 이후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들이 가장 분명하고 강력하게 요구해 온 평화입니다. — 이러한 평화는 정부에게 있어 즉각적인 평화, 즉 영토 병합(즉, 외국 영토의 점령, 외국 민족의 강제 병합)과 배상금 없이 이루어지는 평화를 의미합니다.
러시아 정부는 이 같은 평화를 모든 전쟁 당사국들이 즉시 체결할 것을 제안하며, 모든 국가와 민족의 인민 대표들의 권위 있는 의회에서 이러한 평화의 모든 조건이 최종적으로 비준될 때까지 지체 없이 모든 결단력 있는 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
어떤 국가든 간에, 특정 국가의 영토 내에 강제적으로 억류되어 있는 경우, 그 국가가 자신의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 언론, 공개 회의, 정당의 결정, 또는 국가적 억압에 대한 항의와 봉기 등 어떤 수단을 통해 표현되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 자유로운 투표를 통해 국가 존재의 형태를 결정할 권리를 부여받지 않는 경우, 그러한 병합은 병합이 아니며, 점령과 폭력입니다.
…
정부는 비밀 외교를 폐지하며, 자신의 부분에서는 모든 협상을 인민 전체의 눈앞에서 완전히 공개적으로 진행할 것을 단호히 선언합니다. 정부는 1917년 2월부터 10월 25일까지 지주와 자본가 정부에 의해 승인되거나 체결된 모든 비밀 조약을 즉시 전면 공개할 것입니다. 정부는 이 비밀 조약에 포함된 내용 중 러시아 지주와 자본가에게 특권과 혜택을 보장하거나, 대러시아인의 병합을 유지하거나 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부분에 대해 - 그리고 대부분이 이에 해당하는데 - 조건 없이 즉시 무효화함을 선포합니다.[6]"
평화에 관한 법령에서 우리는 통상적인 자본주의 국가와 달리 노동자국가가 취한 중요한 조치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외교에서의 비밀을 없애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노동조합의 ‘이면합의’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비밀조약’, 그래서 대중에게 알려져서는 안되는 조약은 그 내용에 꺼림칙한 협잡을 담고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비밀조약은 오로지 협약을 체결하는 상층의 결정권자 일부에게만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대중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런 점에서 ‘외교관계에서 모든 비밀조약의 전면 공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허울을 폭로하고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조치였다.
또 하나는 약소민족의 민족자결권에 대한 인정이다.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배가 지속되는 한, 노동계급의 단결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는 노동계급의 단결을 위해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지지한다. 노동자국가 러시아는 제국주의 국가였던 제정 러시아가 오랫동안 ‘대러시아주의’를 내세우며 지배하던 주변 민족들의 민족자결권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던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달랐다.[7] 노동자국가 러시아는 핀란드 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러시아에 점령됐던 터키 아르메니아인들의 자기결정권을 선포했다.
민족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
잠깐 여기서, 민족문제에 대해 사회주의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 생각해보자.
사회주의자는 국제주의자이며, 따라서 국적과 민족, 인종, 종교 등에 의한 어떤 차별도 또한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성’을 중심으로 하나로 단결하려고 하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사실 본질적으로는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계급’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대국의 민족주의는, 오늘날 미국과 유럽, 중국 등 강대국에서 극우파의 성장이 민족주의와 긴밀히 결합된 점에서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듯이, 타국/타민족을 공격하고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반동적인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사회주의자는 제국주의 강대국의 이러한 반동적 민족주의와는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면서 국제주의 원칙을 옹호한다.
그런데 약소국의 민족주의에 대해 사회주의자가 취하는 입장은 조금 다르다. 많은 경우 약소국/식민지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압제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정당한 저항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저항적 민족주의의 요구, 즉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요구를 지지하는 건,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만약 일본의 노동자민중이 조선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조선 노동자민중과 일본 노동자민중의 국제적 단결이 가능할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약소국/식민지의 노동자민중에게 제국주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은 너무나 중요한 과제인데,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가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면, 양국의 노동자민중은 실질적으로 단결을 건설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는 기본적으로 약소국의 민족자결 권리를 지지한다. 오늘날에도 신장위구르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의 철폐 없이 중국에서 서로 다른 민족 간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생각하기 어렵고, 팔레스타인의 민족해방이란 전망을 전제하지 않고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말할 수 없다. 강대국(제국주의)이 약소국(식민지) 민족(종교, 인종)을 억압할 때, 제국주의 국가의 사회주의자라면 약소국 피억압 민중과의 단결을 위해 자국의 부르주아지에 맞선다는 관점으로, 약소국의 사회주의자라면 자국의 민족해방 투쟁을 부르주아에게 맡겨놓지 않고 노동자민중이 주도해야한다는 관점으로 이러한 민족억압에 맞서 싸워야한다.
이런 맥락에서, 당시 제정 러시아에 의해 오랜 시간 억압받았던 러시아 주변국 노동자민중과 단결하기 위해서는 민족자결의 원칙을 옹호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노동자국가를 수립한 볼셰비키는 제일 먼저 민족자결권을 담은 법령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민족자결의 원칙은 스탈린의 집권 이후 180도 달라지며, 강압적인 수탈과 지배로 변모한다.
토지와 농민
평화에 관한 법령을 통해 민족문제에 대한 노동자국가의 입장을 확인했다. 다음으로 토지에 관한 법령을 보자. 이는 러시아를 비롯해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농민층에 대한 입장을 드러낸다.
"[토지에 관한 법령 中]
(1) 토지 소유권은 즉시 보상 없이 폐지된다.
(2) 지주 소유의 토지, 왕실, 수도원, 교회 소유지 및 그에 속한 모든 가축, 농기구, 건물 및 모든 재산은 제헌의회 소집까지 농촌 토지 위원회와 농민 대표 소비에트에게 귀속된다.
(3) 몰수된 (이제부터 전체 인민의 소유인)재산에 대한 모든 손상은, 혁명 법원에 의해 처벌되는 중대한 범죄로 선포된다. 농민 대표 소비에트는 소유지의 몰수 과정에서 엄격한 질서 유지, 소유지의 규모 결정, 몰수 대상 소유지 특정, 몰수된 모든 재산의 정확한 목록 작성, 인민에게 이양된 모든 농업 시설(건물, 농기구, 가축, 생산물 재고 등)을 혁명적 방식으로 엄격히 보호하는 등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4) 다음 농민 명령은 《전러시아 농민 대표 소비에트의 소식지》 제88호 (페트로그라드, 제88호, 1917년 8월 19일)에 게재된 242개 지역 농민 명령을 바탕으로 편찬된 것으로, 제헌의회에서 최종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모든 지역에서 대토지 개혁의 실행을 안내하는 지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
이 위임장의 전체 내용은 러시아 전역의 계급 의식을 가진 농민 대다수의 절대적 의지를 반영하며, 임시 법령으로 선포된다. 이 법령은 제헌의회 소집까지 유효하며, 가능한 한 즉시 시행되어야 하며, 그 중 일부 조항은 군 농민 대표 소비에트가 결정하는 대로 점진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5) 일반 농민과 일반 코사크의 토지는 몰수되지 않는다.[8]"
토지에 관한 법령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당시 러시아혁명이 놓였던 매우 심각한 어려움을 이해해야 한다. 바로 혁명 당시 러시아가 여전히 봉건사회의 잔재인 농민층이 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였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제정 러시아는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기술을 모방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장을 페트로그라드에 설립했지만, 이러한 선진자본주의적 풍경은 급속히 발전한 몇몇 도시들에 국한됐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나던 무렵까지도 광대한 러시아 땅의 대부분은 낙후된 농촌이었으며, 인구의 88%가 농민이었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였던 러시아에는 매우 집중화된 노동자계급과, 봉건제의 잔재인 광범위한 농민층이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불균등하게 결합돼있었다.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은 혁명에 성공해 권력을 잡았지만, 이러한 계급구성 때문에 혁명의 시작부터 아주 난처한 모순에 처해있었다. 만약 노동자계급이 사회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면, 노동자계급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힘차게 추진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 사회의 다수는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었다. 사회의 다수인 농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노동자권력은 유지될 수 없었다. 노동자국가는 수많은 농민의 열망과 심각한 긴장관계를 발생시키지 않으면서, 사회주의를 수립해야하는 어려운 과제를 풀어야만했다.
농민의 소부르주아적 성격
농민의 열망과 노동자의 열망이 어떻게 다르길래, 난처한 모순에 처했다는 것인지 잠시 설명해보겠다.
노동자와 농민은 어떻게 다른 존재인가? 노동자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생산관계 속에서, 자본가에게 고용돼 노동을 하는 존재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촘촘하게 짜여진 광범위한 분업을 토대로 한다. 노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생산’의 일부로서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노동자의 열망은, 생산현장에서 자본가의 독재를 철폐하고, 노동자가 직접 생산을 집단적으로 관리하고 계획해 실행하는 것이다. 즉 ‘사회적 생산’과 괴리된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생산관계에 걸맞은 ‘사회적 소유’를 실현하는 것이다.
반면 농민들은 당시 러시아에서 여전히 큰 부분을 차지하던 봉건적 생산관계의 잔존물로서, 작은 규모의 땅을 경작하여 살아가는 존재였다. 농민의 열망은 자신들의 생산물을 강탈하는 지주를 없애고, ‘나의 땅’을 직접 갖고 경작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는 한편으로 봉건지주와 자본가들에게 수탈당하며 ‘자유로운 나의 토지’를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었던 농민들이 갖게되는 자연스러운 해방을 향한 열망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농민의 열망은 온전한 ‘사적 소유’를 달성하는 것이었지, ‘사회적 소유’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 전체의 계획과 운영에는 무관심하고 ‘나의 소유’만을 신경쓴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회주의적이기보다 초기 자본주의적인 요구였다. 그것이 소(小)소유를 통한 소(小)생산을 물질적 기반으로 삼는 농민들의 소부르주아적 속성이었다.
토지를 나눠갖는다는 농민의 이상향은 자본주의가 새로운 사회적 생산관계를 통해 만들어낸 생산력의 진보를 앞으로 더 진전시키는 게 아니라, 다시 초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농민들이 꿈꾸는 이상향에서는 철도도, 공장도 존재할 수 없었다. ‘농촌 사회주의’에서는 빈곤과 결핍으로부터의 해방도, 고립된 농촌사회가 지속시키던 가부장제와 종교적 미신으로부터의 해방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농민들은 사회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지만, 혁명을 주도할 수 없었다. 사회적 헤게모니를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민이 혁명을 주도할 순 없었지만, 여전히 러시아 사회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사회를 지탱할 식량을 생산하는 주체였기 때문에, 어떤 권력이든 존속하기 위해서는 (농민을 강제로 탄압할게 아니라면) 농민의 열망을 만족시킬 해법이 필요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며 수많은 농민을 전쟁터로 보내고, 식량을 강제징발하며 궁핍을 불러온 제정러시아는 농민의 지지를 잃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들어선 임시정부도 전쟁을 끝내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농민은 “빵, 토지, 평화”라는 슬로건을 지지했기 때문에, 이를 기치로 내세우고 10월 혁명을 한 노동자국가를 지지했다.
노동자국가가 추구하는 농업정책의 장기적 방향은, 농업에서의 ‘사회적 생산 체제’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엔 이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미 농업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자본주의적 생산체제가 확립되어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식량생산의 많은 부분은 세계적인 대자본에 의한 대규모 기계농업에 의해 이뤄진다. 그래서 오늘날 농업분야에서 혁명 후 취할 조치는, 기본적으로 농업자본을 국유화하고, 농업노동자에 의한 자주관리와 생산통제를 통해 농업에서의 ‘사회적 소유’에 기반한 ‘사회적 생산’을 하는 것이다. 설령 오늘날 소부르주아적 기반을 가진 농민들과 타협해야하더라도, 산업생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높아진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는 훨씬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는 과제일 것이다.[9]
하지만 당시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여전히 소소유에 기반한 생산방식으로 인해 농업생산성이 많이 낙후돼있었다. 농업생산성을 빠르게 끌어올리는 것이 노동자국가의 주된 과제였다. 일반적인 자본주의에서라면, 농업에서의 생산력 발전 과정은 농업자본가들이(또는 농업자본가로 변신한 지주들이) 농촌을 점령함을 통해 이뤄졌을 것이다. 농민들을 몰아내 부랑자로 만들고, 자본주의적 기계농업을 도입하고, 농업노동자를 고용함으로써 말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농민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피와 오물을 뚝뚝 흘리는’ 과정이다. 농민들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농민들과 ‘함께’ 사회주의로 나아가려는 노동자국가가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농민들을 그렇게 억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농민들을 강제로 억압하지 않고서, 사적소유를 열망하는 농민들을 설득해 집단적 소유에 기반해 높은 농업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생산체제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볼셰비키의 농민 문제에 대한 기본 접근법이었다. 소비에트가 통과시킨 [토지에 관한 법령]은 이런 접근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법령은 한편으로는 토지의 사적소유 철폐를 명시했지만, 또한 토지에 대한 관리권한을 농민 소비에트에 부여했고, 일반 농민의 토지를 몰수하지 않았다.
레닌의 입장은 농민들의 구체적인 요구가 비록 사회주의의 방향과 달랐다하더라도 그들이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제공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농민들이 스스로 경험하고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어야한다는 취지였다.
"여기서 이 법령 자체와 명령서가 사회혁명당[10]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인가요? 누가 작성했는지가 중요합니까? 민주적 정부로서, 우리는 대중의 결정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경험의 불꽃 속에서, 법령을 실천에 적용하고 지역적으로 실행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은 스스로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농민들이 사회혁명당을 따라가더라도, 그들이 제헌의회에서 사회혁명당에 다수석을 부여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말할 것입니다 — 그게 어때서요?
경험은 최고의 교사이며, 누가 옳은지 보여줄 것입니다. 농민들이 이 문제를 한쪽에서 해결한다면, 우리는 다른 쪽에서 해결할 것입니다. 경험은 우리를 혁명적 창조적 작업의 일반적 흐름 속에서, 새로운 국가 형태의 수립 과정에서 하나로 뭉치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는 경험에 의해 안내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대중의 창조적 역량에 완전한 자유를 허용해야 합니다. 무장 봉기로 전복된 옛 정부는 옛 그대로의 차르 관료제를 통해 토지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관료제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농민들과 싸우기만 했습니다.
농민들은 우리 혁명의 8개월 동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모든 토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법안의 모든 개정안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세부 사항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동 강령이 아닌 법령(포고령)을 작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광활하며 지역 조건은 다양합니다. 우리는 농민들이 우리보다 더 정확하고, 더 적절하고, 더 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정신으로 그 일을 하는지, 사회주의 혁명 강령의 정신으로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농민들이 시골에 더 이상 지주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모든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정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1]"
"노동자국가는 농민의 자기모순적 강령을 이들 스스로 행동을 통해 시험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
노동계급권력을 확립하고 성공적으로 보존한 후에야 사회주의 전망을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권력은 농민혁명을 확고하게 지지해야만 보존될 수 있었다. 토지분배가 사회주의정부를 정치적으로 강화시킨다면, 이것은 완전히 당면조치로 정당화될 수 있었다. 혁명은 농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새로운 체제만이 농민을 재교육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교육은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산업조직의 도움으로 한 순간이 아니라 한 세대에 걸쳐 진행되어야 했다. 포고령과 훈령은 노동계급독재는 농민의 이해를 세심하게 배려할 뿐만 아니라 소(小)소유자인 농민의 환상에 대해 참을성을 가질 의무가 있음을 의미했다. 농민혁명에는 얼마간의 단계와 전환점이 있다는 것이 사전에 분명해졌다. 취합된 훈령은 최종적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농민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에 불과했다. 노동자들은 농민의 진보적 요구들이 실현되도록 도우면서 이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경우 이를 경고해야 했다.[12]"
농민문제에서 노동자국가가 취한 태도는 비록 시간이 걸릴지라도 그들이 가진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면서, 참을성 있게 그들을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성도 스탈린의 집권 이후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여성과 소수자
다음으로 노동자국가의 수립 이후 여성과 소수자에 관해 취한 정책방향을 살펴보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은 남성들을 병사로 징집하며 더 많은 여성들을 산업현장으로 불러들였다. 전쟁시기에 이는 여성들에게 더욱 심각한 착취를 의미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러시아에서 남성들이 전선으로 파견되는 동안 여성의 생산 참여율은 산업에 따라 70%에서 400%까지 증가했다. 여성들은 농업노동자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결국 농촌 노동자의 72%를 차지하게 되었다. 공장에서 여성노동자는 1914년 노동력의 33%에서 1917년 50%로 증가했다. 유럽 전역에서 여성들은 가정 밖에서 일해야 했으며, 이전에는 남성 전용으로 여겨졌던 산업 분야에서도 일했다. 그들은 무기와 탄약을 제조하고 전차와 기관차를 운전했으며 중공업에 진출했다. 혹독한 노동 조건은 여성들의 질병과 사망률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인플레이션, 궁핍, 빈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직면한 피로, 불안, 불확실성, 절망과 결합되어 상황을 악화시켰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쟁에 징집되자, 도시에서는 영아 사망률이 50%에 달했으며, 유산과 사산이 급증했다.[13]"
부르주아 여성단체(여성평등연맹)가 1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러시아의 딸들”을 연호하며 ‘조국방위전쟁’을 지지할 때, 볼셰비키의 여성들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해 자국의 부르주아에 맞서 무기를 들어야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전쟁으로 늘어난 여성노동자들의 반란은 러시아혁명을 촉발한 불꽃이었다.
"1917년 1월까지 차르 경찰조차 러시아 여성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비밀 보고서는 여성들이 자유주의 부르주아 당의 지도자들보다 혁명에 더 개방적이라고 경고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민주주의자들보다 차르 체제에 더 큰 위협이 되었다. 그들은 “불꽃을 일으킬 수 있는 불씨”였다.
1917년 2월 23일(서양력 3월 8일)에 빵, 평화, 자유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여성 노동자들, 특히 섬유 노동자들이 20세기 가장 위대한 혁명의 길을 열었다. 이 혁명은 이날 시작되어 10월에 볼셰비키 당의 지도 하에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14]"
2월 혁명으로 차르 정권을 타도한 뒤, 임시정부 하에서 여성들은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쟁취했다. 이는 1918년 영국, 1920년 미국 등보다 빠르게 투표권을 획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투표권은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를 향한 긴 투쟁의 시작일 뿐이었다.
10월 혁명 이후 여성들은 이혼권과 임신중절권,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위 폐지, 민사혼인(신고결혼)과 사실혼 사이의 평등과 같은 법률적 권리를 쟁취했다. 이런 법률적 평등은 특히 후진적이던 러시아 사회에서[15] 선진 자본주의 국가도 달성하지 못한 평등권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매우 진보적이었다.
"사회복지부 장관이 된 콜론타이는 여성과 가족에 관한 다양한 개혁의 설계자로 활동했다. 이 노동자국가의 장관이 옹호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소련 여성이 직업 선택의 자유, 모든 공직에 진출할 기회,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받을 권리를 누리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임신 여성 해고가 금지됐다. 또한 여성에게 이혼할 권리와 남녀공학에 입학할 권리가 인정됐다.[16]"
"혁명이 일어나고 1년도 채 안 된 1918년, 가족법이 제정됐다. 웬디 골드먼은 이를 “세상에서 가장 진보적인 가족법”이라고 불렀다. 새 가족법은 결혼을 개인 사안으로 규정하고서 교회가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이혼이 합법적으로 허용됐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사유서를 제출할 필요 없이 누구나 진행할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했다. 이 법은 사유재산에 대한 남성의 특권을 보장하는 낡아빠진 규정을 폐기했다. 혼외 자녀를 포함해 모든 자녀가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았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에는, 그 여성의 성적 파트너 모두가 자녀 양육의 책임을 나눠야 했다. 미국에서조차 통과되지 못한 법률개정을 거쳐 남성과 여성이 법적으로 동등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새 가족법을 작성한 알렉산드르 고이키바르크는 이 법을 국가나 가족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일시적인 조치로 여겼다. 오히려 이 법은 가족의 소멸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이었다.[17]"
지금까지 열거한 법률적 조치들은 1917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과들이었다. 그러나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이런 법률적 조치들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과도기적이며 불충분한 것이고, 진정한 실질적 평등으로 나아가는 ‘시작’이라고 인식했다.
"그러나 레닌이 주장했듯이 법적인 평등은 시작에 불과했으며, 여성 권리를 위해 혁명이 이뤄내야 할 최소한의 조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주도, 자본가도, 상인도 없는 곳, 이들 착취자 없이 노동자의 정부가 세워지고 있는 곳, 그곳에 여성과 남성의 평등이 법률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법적인 평등과 삶에서의 평등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여성 노동자가 법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남성 노동자와 평등을 누리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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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해서 본다면, 1918년 가족법은 놀라울 정도로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성평등, 이혼, 친권, 재산권 등을 다루는 유사한 법령이 미국이나 다수의 유럽 나라에서는 아직 제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새 가족법이 파격적인 혁신을 담고 있는데도 법학자들은 ‘이것은 사회주의 법령이 아니라 과도기의 법령일 뿐’이라고 빠르게 지적했다. 그 가족법이 혼인 신고, 이혼 수당, 자녀 양육과 그 밖의 생계유지를 위한 대비 등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가족 단위에 필요한 항목을 남겨놨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법학자들은 그들 스스로 곧 유명무실해질 거라고 여기는 법령을 만들어내는 특이한 위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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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법을 둘러싸고 드러난 이런 새로운 사고방식은, 이 혁명은 이제 1막을 지났을 뿐이며 그것은 수천 년간 재생산된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의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볼셰비키의 관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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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여성, 가정, 가족의 일상을 혁명적으로 뒤집은 이 같은 혁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사회주의혁명의 열기 속에서 저절로 솟아난 것도 아니다. 레닌이 이끈 정당에서는 여성해방에 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육아가 사회화되고 나면 어머니 역할은 무엇이어야할까? 모든 애정 관계에서 국가의 개입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는데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가 결혼증명서를 발행해야 할까? 이런 여러 쟁점에 대해 볼셰비키 내에 통일된 입장은 없었으며, 다양한 입장 간 개방적인 논쟁이 있었을 뿐이다.[18]"
노동자국가가 도입한 이러한 진보적인 조치들이, ‘1막’을 지나 활짝 만개한 역사를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위대한 혁명의 1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어려움 앞에 부딪치게 되었다.
1918년: 내전과 독일혁명의 패배
1917년 10월 혁명 후 숨을 돌릴 틈도 없이, 혁명 러시아는 내전의 고통 속으로 빨려들어가야 했다. 사회주의 혁명을 두려워한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부르주아들은 망명한 러시아의 부르주아, 귀족들과 연합해 혁명 러시아를 포위공격하기 시작했다. 1918년부터 1921년까지 러시아는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노동자국가는 반혁명 세력의 공세에 군사적으로 맞서야 한다는 힘겨운 과제에 직면했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모든 경제생활을 전쟁에 대한 대응에 집중해야했고, 노동자국가는 ‘전시공산주의’ 체제를 도입했다.
이는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볼셰비키 당원이자, 혁명을 대중적으로 주도하고 지탱했던 수많은 노동자계급의 선진부위가 내전 기간에 전선에서 사망했다. 내전 기간 배급제를 실시하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식량을 징발해야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노동자국가와 농민 간의 긴장관계를 강화했다. 많은 농민들이 자신들을 수탈하던 제정 러시아와, 전시공산주의를 실행하는 노동자국가를 구별할 수 없었고 식량 강제징발에 항의해 식량을 숨기고 저항했다. 그렇다고 식량을 징발하지 않고서, 공업생산을 유지하며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길도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전시 공산주의”의 강령과 점점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생산은 계속해서 감소했는데 전쟁에 의한 생산수단의 파괴뿐만 아니라 생산자들의 개인적 이해가 억압당했기 때문이었다. 도시는 농촌으로부터 곡물과 원자재를 요구했다. 그러나 도시는 농촌에 과거의 기억에 따라 화폐라고 불리는 얼룩덜룩한 종이쪽지 외에는 따로 줄 것이 없었다. 따라서 농민은 자신의 생산물을 땅속에다 숨겼다.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곡물을 징발하기 위해 무기를 든 노동자 파견대를 농촌으로 보냈다. 이에 대해 농민은 파종의 규모를 축소하는 것으로 대항했다.[19]"
내전이 불러온 결과는 참혹했다.
"내전이 끝난 직후인 1921년에 총 산업생산량은 기껏해야 내전 이전의 5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강철 생산은 4,200,000톤에서 183,000톤으로 떨어졌는데 이것은 과거 생산량의 23분의 1에 지나지 않는 수치였다. 총 곡물생산량은 801억 파운드에서 1922년의 503억 파운드로 줄었다. 이해에는 끔찍한 기근이 발생하였다. 동시에 외국과의 무역은 29억 루블에서 3천만 루블로 급속히 감소하였다.[20]"
러시아의 적백내전은 본질적으로 세계적인 계급전쟁이었다. 러시아라는 한 국가에서 혁명이 성공하자, 곧바로 사회주의 혁명을 용납할 수 없었던 세계 부르주아와의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부르주아의 희망이 국경을 넘어 자신을 지원해준 영국과 프랑스의 부르주아였듯이,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의지할 수 있는 희망도 마찬가지로, 국경을 넘어선 세계 노동자계급과의 단결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구체적인 조건에서 무엇보다 이는 독일 노동자계급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의미했다. 독일혁명의 승패 여부는 이후 러시아 노동자국가의 경로를 규정할 결정적 조건이었다. 만약 독일 혁명이 승리하여 러시아와 독일 노동자계급이 하나의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한다면, 러시아 노동자계급에게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안겼던 러시아의 산업적 후진성은 선진자본주의 공업국인 독일에 의해 훨씬 수월하게 극복될 수 있을 것이었다.
"전시 공산주의 시기의 유토피아적 희망은 이후 많은 측면에서 정당하면서도 무자비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모든 계산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자 혁명이 곧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 전제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볼셰비키당의 이론적인 오류는 결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혁명에서 승리한 독일의 노동자들이 소련이 미래에 되갚을 식량과 원자재를 신용담보로 하여 생산기계와 제품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 기사, 조직가들을 소련에 제공할 것이라는 희망은 당연한 상식으로 간주되었다.[21]"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독일혁명이 패배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1년이 지난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에 참전중이던 독일에서 실패할 게 분명한 공격명령에 저항하며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러시아 소비에트처럼 독일의 노동자병사 평의회 수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독일 혁명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배신과 타락으로 패배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권력을 잡고서도 혁명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오히려 1919년 1월 반동 군대인 자유군단과 손잡고 로자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등의 혁명가를 살해하고 혁명을 진압하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독일사회민주당의 개량주의적 퇴보는 세계혁명을 좌절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러시아 노동자민중을 암울한 조건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독일혁명의 패배로 러시아는 당분간 세계혁명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내전의 폐허 위에서 생존을 지속해야하는 혹독한 조건으로 내몰렸다. 수많은 1917년 혁명 세대의 죽음을 비롯해 내전이 강요한 위기는 이후 관료집단의 성장을 용이하게 만든 물질적 조건이 되었다.
"볼셰비키들은 전시 공산주의를 잘못 판단했다. 서유럽에서 사회주의가 조기 승리하는 데 혁명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되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승리가 오지 않을 것이 분명해졌을 때, 비로소 그들은 러시아에서 상당 기간 이행기 노동자국가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22]"
1921년~1926년: 신경제정책
"러시아 혁명은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국제적으로 고립됐으며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생존이라는 당면 문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부담은 제국주의 침략과 자국 내 반혁명 세력에 맞서 소비에트 신생 국가를 군사적으로 방어해야 하는 필요성으로 인해 배가되었다. 혁명의 군사적 적들이 패배하는 동안 국제 혁명도 패배했고, 타격을 입은 노동자국가는 그 후진성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볼셰비키의 전략은 해외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다시 일어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만큼 러시아의 압도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었다.[23]"
세계혁명이 일차적으로 패배한 조건에서, 러시아 노동자국가는 생각보다 장기적으로 일국적 생존을 도모해야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농민들과의 관계 때문에, 내전기간 ‘전시공산주의’가 도입한 계획경제를 계속 밀어붙임으로써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 식량을 강제징발해 도시에 보급하는 전시공산주의 방식을 계속했다간 농민과의 관계가 끝장날 것이었다.
"불행한 현실은 급박한 전시 상황이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필수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시장을 없앴고, 농민으로부터 강제 징발했으며, 노동자에게 쓸모없는 돈 대신 재화로 임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사회주의의 특징인 높은 생산성을 향한 전진이 아니라 후퇴였다. 레닌은 이를 회고적으로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는 소농 국가에서 공산주의 노선에 입각해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명령에 따라 국가 생산과 국가 유통을 직접 조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또는 충분한 고려 없이 추측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경험은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국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여러 이행기 단계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 위대한 혁명이 불러일으킨 열정에 힘입어, 개인의 이익, 개인적 인센티브, 비즈니스 원칙의 기초 위에서, 우리는 먼저 이 소농 국가에서 국가 자본주의를 통해 사회주의로 가는 탄탄한 통로를 구축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24]"
농업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소부르주아인 농민들이 갖고있던 자본주의적 이윤동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신경제정책(NEP)으로 이어졌다. 신경제정책은 농민들이 시장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판매할 수 있게 함으로써 생산의욕을 고취시켰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수가 적고, 심각하게 약화됐으며, 과중한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노동자들의 의식적인 계획이 가능했을까? 산업과 문화가 크게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높아져야만 노동자계급이 진정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늘리려면 먼저 소비에트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상거래와 소부르주아 생산의 회복을 넘어 자본주의적 조치에 의지해야 했다. 이러한 위험하지만 절실히 필요한 조치들은 소련을 한동안만 노동자국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선진국에서의 혁명은 제국주의 포위망을 깨고 혁명적 러시아가 살아남는 데 매우 중요했다.[25]"
신경제정책은 생존을 위해 불가피했지만, 동시에 위험했다. 신경제정책의 시행으로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들이 다시 성장했다. 이는 도시에서는 속칭 ‘네프맨’이란 기업가의 성장으로, 농촌에서는 부농(쿨락)의 성장으로 나타났다. 노동자가 권력을 잡고있었지만, 사회에선 다시 자본주의적 계급 분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다시 국제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러시아의 노동자국가는 일시적으로만 연명할 수 있을 뿐이었다.
"1920년대의 “신경제정책”(NEP)은 시장을 합법화하고 개인의 상거래와 소규모 부르주아 생산을 장려했다. (외국인 투자도 장려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유치되지 않았다.) 동시에 1921년에 국가 계획을 향한 첫 번째 조치가 취해졌다. 전기화 계획이 수립되고 국가계획위원회(Gosplan)가 설립됐다. 그 결과 1926년에는 생산량이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어 사람들이 다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노동자국가는 부활한 소규모 자본주의의 영향에 맞서 싸워야 했다. 일부 사회적 혜택이 도입되고 다른 혜택이 약속되었지만, 희소성, 착취, 불평등이 경제를 지배했다. 가치법칙은 여전히 철옹성을 유지하고 있었다.[26]"
관료적 퇴보
전시공산주의와 신경제정책 시기를 거치며 소비에트와 볼셰비키당의 관료화가 빠르게 진전되었다. 여기엔 여러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물질적으로는 내전기간 혁명 소비에트를 주도했던 수많은 선진노동자들이 죽고 약화했다. 이데올로기적으로도 그랬다. 전시공산주의와 신경제정책은 사회주의로의 전진이 아니라, 내전과 파괴적인 경제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불가피한 후퇴였다. 후퇴는 후퇴로 인식되어야 했고, 언젠가 뒤집어져야 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조차 후퇴를 정당화하는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볼셰비키가 실패한 것은 부분적으로 파괴적인 경제 상황 때문이었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후퇴의 필요성에 당이 정치적으로 순응한 결과였다.
자신들이 직면한 엄청난 압박 아래서 볼셰비키가 중요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점을 반드시 말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공산당 내 분파 금지와 다른 모든 노동자계급 정당의 금지는 압력을 못 이겨 취해진 조치였으며 처음에는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볼셰비키를 제외한 마지막 소비에트 정당인 사회혁명당은 1918~21년 내전 기간 동안 무장 반혁명을 고수했기 때문에 탄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전시 공산주의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후퇴한 지점이 너무 자주 실질적인 성과로 옹호되었고, 노동자국가가 퇴보함에 따라 점점 더 그러했다. 1921년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과 같이, 노동자국가를 방어하는 데 필요했던 가혹한 조치들은 나중에 노동자국가의 수호자들에 대한 무력 진압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노동자국가를 특징짓는 노동자 의식의 요소는 무엇보다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 민병대,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노동자계급 정당 등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기구들에서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기관들은 노동자계급의 더 넓은 부분을 포괄할 수 있도록 성장해야 한다. 내전으로 노동자계급이 극도로 약화된 이후에는 혁명적 전위만이 경제적·정치적 운영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전체 계급이 직접 참여해야 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임금을 인상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정치에 헌신할 시간, 에너지, 열정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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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이게도 레닌이 묘사한 소비에트는 내전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지도적인 프롤레타리아트 중 다수는 농민들이 주축이 된 붉은 군대의 중추를 구성하기 위해 떠났다. 다른 이들은 공장을 떠나 당과 국가 내부에서 발전해 가던 기구들에 소속되었다. 그들과 대중과의 유대는 느슨해졌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점점 더 의식적인 대중의 활기찬 정치 생활로 가득했던 소비에트는 생존을 조직하려는 노력 속에서 토론을 생략한 채 명령 기관으로 변모했다. 굶주림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시야가 좁아지면서 관료들이 대신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노동자국가는 옛 차르·부르주아 질서의 요소를 통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말고는 군사 기술과 행정에 대해 교육받고 훈련받은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1919년 레닌은 이렇게 관찰했다. “소비에트는 그 강령에 따르자면 ‘근로인민에 의한’ 정부 기관이지만, 실제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선진층에 의한 ‘근로인민을 위한’ 정부 기관이지 근로인민 전체에 의한 정부 기관은 아니다.” 1921년에는 상황이 훨씬 더 악화됐다. 국가는 “온전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관료주의적 일그러짐이 가해진 노동자국가” 또는 “관료주의적 왜곡을 가진 노동자국가”가 되었다.
노동조합과 소비에트가 관료화되거나 위축된 상황에서 볼셰비키 당은 노동자계급과 국가를 연결하는 유일한 노동자 기관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당 역시 관료주의에 굴복하고 있었다. 조셉 스탈린은 당의 총서기(원래는 최고의 정치적 지위가 아닌 행정적 지위였던)가 되었고, 확대되는 기구의 임명을 통해 점점 더 많은 권력을 축적해 나갔다.
해외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서, 레닌은 당과 국가의 퇴보와 씨름하면서 인생의 마지막 시간들을 보냈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마지막 노력인 유언장에서 레닌은 스탈린의 총서기직 해임과 관료주의적 방식을 따르는 다른 볼셰비키들의 추방을 요구했다. 레닌은 이를 위해 트로츠키와 블록을 제안했다. 그러나 투쟁은 지연되었고, 관료주의는 나쁜 방법을 사용하는 타락한 관리들을 넘어 전체 기생하는 층으로 확대되어 당과 국가 기구 전체를 감염시켰다.
1923년 레닌이 병에 걸렸을 때, 스탈린의 관료 조직은 당 대회 선거를 통제하고 반대자들을 침묵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한 후 그의 유언장은 당원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그 후 스탈린은 악명 높은 “레닌 입당”을 획책하여 수만 명의 후진 분자들을 당에 영입했고, 이는 구 볼셰비키 간부들을 압도하며 당의 혁명적 성격을 희석시켰다. 당과 국가 내 승진은 점점 더 스탈린과 그의 내부 조직 덕분에 자리를 차지한 관료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이 파벌은 당의 핵심 기관에서 촌충처럼 성장했다. 멘셰비키 출신 경력자들은 1917년 혁명에 반대했던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에 환영받았고, 곧 주요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들은 나중에 트로츠키가 이끄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맞선 반대파 운동을 공격하는 데서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27]"
1926년~1929년: 산업화 논쟁에서 스탈린이 정적을 제거하다
신경제정책 기간 동안 노동자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두고 당 내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 의견들은 크게 부하린으로 대표되는 우파,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중도파, 트로츠키로 대표되는 좌익반대파[28]로 나뉘었다.
부하린으로 대표되는 우파는 급속한 공업화로 나아가기를 두려워했고, 러시아에서 사적 자본주의의 확대를 통한 반혁명의 위험을 간과했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성장하는 쿨락과 네프맨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부하린은 “농민이여 부자가 되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좌익반대파는 신경제정책으로 등장한 자본주의 요소들을 경계하며, 이러한 위험이 더 커지기 전에 사회주의적 조치들을 강하게 추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최대한 빠른 속도의 공업화 정책을 통해 생산력을 증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속한 공업화로 농민들과 공업발전의 혜택을 공유하는 것을 통해 농민들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을 주고, 농업집산화로 공업과 농업의 성장의 선순환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스탈린의 중도파는 한마디로, 관료집단의 파벌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건 일관된 정책방향보다, 관료집단인 그들 자신의 생존이었다.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던 이들은 먼저 부하린의 우파와 연합해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를 탄압했다. 트로츠키는 1927년에 당에서 제명됐고, 다음 해에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했고, 1929년 터키 프린키포 섬으로 망명했다. 좌익반대파를 완전히 제거한 뒤에 스탈린은 칼날을 부하린의 우파에게 돌렸다. 스탈린은 부하린을 “자유부르주아지의 끄나풀”로 몰아서 제거했다.
이후 스탈린은 강제 농업집산화와 관료적 공업화 정책을 시행했다. 스탈린의 관료적 공업화정책(제1차 5개년 계획)은 급속한 산업화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좌익반대파가 내세웠던 주장과 일견 유사해보이지만, 노동자 민주주의의 파괴, 농민에 대한 폭력에 기반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달랐다. 스탈린의 관료적 공업화는 오로지 ‘일국사회주의’ 관점에서 국가적 보존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강제 농업집산화 정책은 농민과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했다. 농민들이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사회적 생산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기존의 방향은 폐기되었고, 스탈린과 관료들이 지배하는 노동자국가는 농민을 강제로 집단농장으로 내몰았다.
"1928~29년 스탈린의 지도력 아래 있던 지배 관료집단은 보수주의에서 급격히 전환했다. 경제 위기 심화, 노동자계급 전투성 증가, 국제적 긴장 악화에 대응하면서, 관료집단은 정신없는 속도로 산업화를 추진했다. 제1차 5개년 계획에 따라 농민을 강제로 집단화하고 대규모 노예노동 수용소를 설립했으며 신경제정책 민간경제를 종식시켰다. 스탈린은 이러한 전환을 “위대한 단절”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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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주의의 “위로부터 혁명”은 이전의 관행에서 폭력적으로 벗어난 것이었다. 강제 집단화는 농민을 사회주의 농업 강령으로 획득하기 위한 설득과 모범 정책의 틀을 산산조각냈다. 게다가 그것은 후진성의 집단화였다. 국가는 전(前)자본주의적 조건 아래서 굴러가던 농장들을 인수했다. 수백만 명의 농민을 농촌에서 도시로 몰아내면서 새로운 산업 노동력이 창출되었다. 산업화가 ‘달팽이 걸음’에서 하룻밤 사이에 ‘미친 질주’로 가속되었지만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비롯한 권리들을 박탈당하여 관리자들과 관료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었다. 악명 높은 굴락 강제수용소의 인구는 1928년 3만 명에서 1930년 60만 명으로, 1930년대 중반에는 거의 200만 명으로 증가했다. 노예노동은 수천 명이 사망한 백해-발트해 운하와 같은 주요 건설 프로젝트에 사용되었다.[29]"
스탈린의 노선인 ‘일국사회주의’는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의 역량에 대한 냉소주의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독일혁명은 패배했고, 국제적인 노동자혁명의 가능성은 없다. 소련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도모하자’라는 것이 일국사회주의론의 핵심 철학이었다.
노동자계급의 국제혁명이 아니라, 소련의 생존이 최우선이 되면서, 많은 희생이 정당화되었다. 소련이란 국가의 생존에 방해가 된다면 노동자도 농민도 얼마든지 탄압의 대상이 됐다. 소련의 생존을 위해 부르주아 국가와 적당한 외교관계를 유지하는게 필요할 땐, 이를 위해 타국의 노동자계급을 배신하는 행위도 얼마든지 정당화됐다.
"세계적인 노동 분업과 연계하여 소비에트 국가를 발전시키려는 좌파의 관점에 반대하면서, 스탈린은 포위에 맞서 자립적인 요새를 구축하고자 했다. 서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자국 시장을 통제하고 초기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민족국가를 강화함으로써 발전했던 것처럼, 스탈린도 제국주의가 약탈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련의 독립적인 힘을 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엄청났다. 국가권력은 농촌 빈민들에게 기아를 강요하고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혹독한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데 사용되었다. 스탈린주의 산업화는 초중앙집권화와 자본주의 관계의 강화를 독특하게 결합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이는 지속될 수 없는 불안정한 결합이었다. 수많은 노동자와 농민이 죽은 노동을 창출하기 위해 노예화하였다는 것은 가치법칙이 노동자국가의 목을 조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30]"
1930년~1936년: 스탈린의 권력장악
1930년대에 들어서며 스탈린은 완연히 권력의 주인이 되었다. 이후 스탈린이 실시한 조치들은 이전 노동자국가의 진보적 조치들을 거꾸로 돌리는 것이었다.
먼저 민족자결의 원칙 대신에, 제정 러시아가 하던 것과 다르지 않은 민족억압이 이뤄졌다.
"하나의 주목할 만한 반혁명적 변화는 스탈린주의가 민족 억압을 부활시킨 것이었다. 이는 소비에트 초기에 (민족자결권을 포함하여) 소수민족의 권리를 지지했던 것과 반대였다. 고려인, 볼가 독일인, 타타르인 등의 소수민족은 모든 주민이 삶의 터전에서 추방당했다. 여러 개의 소수민족 공화국들이 해체되었고 그 주민들이 “이주”당했다. 남아 있는 소수민족 공화국 내의 러시아계 정착민들은 우대를 받았고, 비러시아 언어들은 러시아화되었다. 이렇게 부추겨진 민족주의적 분노는 오늘날까지 피비린내 나게 끓어오르고 있다.[31]"
노동자들의 권리 또한 억압당했다. 급속한 공업화를 통해 ‘일국 사회주의’를 빠르게 발전시키기 위해선 노동강도를 증대해야했다. 이 과정은 노동자 민주주의의 파괴, 급속한 관료화와 궤를 같이했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스탈린 아래 급속한 공업화 과정은 박정희 시기 한국의 착취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노동규율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인센티브제가 도입되고, 과로를 장려하는 문화운동이 도입되었다.
"노동 분야에서 당시의 슬로건은 “사회주의적 경쟁”이었다:
“인센티브는 임금체계 조정과 임금차이 확대에 의해, 그리고 배급제의 점진적 폐지와 구매 가능한 물품의 확대에 의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1934년 이후 매우 높은 생필품 가격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과급 체계 위에서) 더 열심히 일하도록 자극했다.”
이러한 인센티브 정책은 1935년에 시작된 스타하노프 운동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스타” 숙련 노동자들은 인적·물적 지원을 제공받으며 노동 표준을 깼고, 전체 노동자들에게 제시할 더 어려운 목표를 수립했다. 그 의도는 평등에 대한 소련 노동자들의 약속을 깨는 것이었고, 관료들의 국가권력에 깊은 이해관계를 가진 새로운 노동귀족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시스템은 자본주의적 방식의 강화였다. 트로츠키는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의 말을 인용했다: “루블은 사회주의적(!) 노동 대가 지불 원칙의 실현을 위한 유일한 실제 수단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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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노동자와 농민의 관점에서 볼 때 1930년대 중반에는 생산 촉진을 목표로 하는 전통적인 자본주의 경쟁 방식이 다시 등장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진정한 반혁명을 수행하려면, 노동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해야 했다. 트로츠키는 이 체제를 “전체주의”라고 명명했다. 문학과 예술은 획일적이고 답답한 것이 되었다. 당이 스탈린주의화하고 소비에트가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부터 스포츠클럽까지 모든 노동자 조직들이 관료적 위계질서로 아로새겨졌다.
노동법이 대폭 강화되었다. 먼저 노동수첩이 다시 도입되어 사실상 노동자계급에게 적용되는 국내 여권이 만들어졌다. 그런 다음 단 한 번의 무단결근으로 자동 해고되고 주택을 상실하는 처벌이 복원되었다. 원래 이 조치는 1930년대 초에 입법됐지만 개별 관리자들이 이를 무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효력을 잃은 뒤, 1938년의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조차 사용되지 않았다. 마침내 1940년, 전직과 무단결근(20분 늦게 출근하면 하루 결근으로 간주!)이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형사 범죄로 규정되었다.
한 관찰자는 이렇게 요약했다. “공장을 노동자의 소유물로 선언한 10월 혁명에서 노동자를 공장의 소유물로 전락시킨 스탈린의 법령으로 돌아가기까지 겨우 20년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다.”[32]"
이데올로기적 후퇴도 동반됐다. 인센티브제는 본래 능력에 따른 차등분배를 정당화하는, 가장 자본주의에 걸맞는 임금체계다. 그러나 이는 스탈린에 의해 ‘사회주의적 경쟁’이라고 포장됐다.
"노동자들에 대한 스탈린주의 공격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의 반혁명을 동반했다. … 스탈린의 보좌관 보즈네젠스키는 노동자계급 내부 평등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라는 새로운 정책을 더 설명하기 위해, 1931년 성과급(노동시간이 아니라 완료한 과업에 따른 임금체계)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
“사회주의 시대에도 여전히 성과급 임금이 존재할 것이다. 제공된 노동의 양과 질에 따른 보상 원칙에 가장 부합하기 때문이며, 노동생산성을 높여 사회주의 축적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성과급을 “자본주의 생산에 가장 적합한 임금 형태”로 규정했다. 신경제정책 아래서 일부 성과급 제도가 ‘필요하지만 일시적인 조치’로 도입되었다. 스탈린의 혁신은 (부분적으로 마르크스를 인용하면서) 불평등의 심화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 명분이 무엇이든, 이러한 추세는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스탈린이 사망할 무렵 소련 산업 노동자의 4분의 3이 성과급 제도 아래 있었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논평했다:
“노동의 리듬이 루블을 쫓는 것에 의해 결정되면, 사람들은 ‘능력에 따라’, 즉 신경과 근육의 상태에 따라 자신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 이 방법은 조건부로만 그리고 엄격한 필요성에 의해서만 정당화 될 수 있다. 이를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새롭고 더 높은 문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자본주의의 익숙한 오물 속에 집어넣고 냉소적으로 짓밟는 것을 의미한다.”[33]"
스탈린 치하의 관료적 명령경제는 비합리적인 계획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관료파벌들 간의 경쟁으로 운영되었다. 이는 아래로부터의 피드백에 기반한 민주적 계획경제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오히려 그 작동방식은 일반적인 시장경제에서의 혼란스러운 경쟁을 닮았고, 어떤 점에서는 그보다도 못한 비효율적인 체제였다.
"“각 부처 내에서 기업들은 특권적 지위, 합리적인 할당량, 쉬운 주문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같은 종류의 경쟁이, 낮은 수준에서는 각 기업 안에서, 높은 수준에서는 부처 간에 존재했다. 과거의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정글은 협상, 이면거래, 협박으로 점철된 이 지저분한 영향력 쟁탈전에 비하면 펜싱 대회처럼 보였다.”
스탈린주의 정글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조건 아래 놓인 “계획”은 분명히 노동자국가의 창시자들이 상상했던 과학적 메커니즘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명령에 의한 관리이다. “사회주의적 경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든 생산단위를 축적의 극대화라는 목표에 종속시키는 수단으로서, 진정한 계획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모든 기업, 상점, 개별 노동자의 생산량을 계산하고 예측하려면 규칙적이고 협력적이며 예측 가능한 작업 관행이 필수적이다. 스타하노프 운동이나 노력영웅 등 스탈린주의적 인센티브 방식은 이를 불가능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상품시장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명령체계로 대체되었는데, 이러한 명령체계는 자원을 필요와 맞물리는 과학적 계획이 아니라 우선순위 체계에 기반했다. 중공업과 군수부문이 선호되었고 농업과 경공업은 이에 종속되었다. 그 결과 1930년대에 비선호 분야의 “계획된” 생산량은 예상 수치에 훨씬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분야는 자원을 박탈당한 만큼 가용한 자원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이는 소련 경제를 움직였다는 계획이 실제로는 가장 특권적인 부문을 제외하고는 분권화를 가속화하는 것이었음을 의미했다.[34]"
스탈린 관료집단은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도 뒤로 후퇴시켰다. 여성들 사이의 차이가 심화됐고, 법률적 권리가 후퇴했다. 폐지되어야 할 구시대적 이념이던 ‘모성’과 ‘가족’이 반대로 ‘사회주의적 가치’로 강조되기 시작했다.
"가족의 어머니로서 존경받는 공산당원인 여성은 요리사, 상점에 명령을 내리기 위한 전화기, 용무용 자동차 등을 소유하고 있지만, 가게를 뛰어다니며 저녁을 직접 준비하고,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걸어서 데려가야 하는 노동자 여성의 상황과는 거의 공통점이 없습니다. 만약 유치원이 있다면 말이죠. 이 사회적 대립은 서구 어느 국가의 부르주아 여성과 프롤레타리아 여성 사이의 대립과 마찬가지로 두드러집니다.[35]
1926년 스탈린의 관료적 체제 하에서 민사 혼인(신고결혼)이 유일한 법적 결합으로 재도입되었다.[36] 낙태 권리는 나중에 폐지되었고, 중앙위원회 여성 부서와 당의 모든 수준에서 그에 상응하는 부서들이 해체되었다. 1934년 동성애가 금지되었고 성매매가 범죄로 규정되었다. 테르미도르 관료집단[37]의 눈에는 가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부르주아'나 '초좌파’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한 스탈린주의 지도자는 1936년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생명 파괴인 낙태는 우리나라에서 용납될 수 없습니다. 소련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는 자연이 그녀에게 부과한 위대하고 명예로운 의무에서 그녀를 면제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이며, 생명을 낳습니다.”
낙태 금지 조치는 혁명 초기 사회 정책을 특징지었던 해방적 이상을 훼손하고 지우기 위한 더 넓은 캠페인의 일부였다. 트로츠키는 낙태 금지 조치의 재도입을 “(카톨릭)신부의 철학에 경찰의 권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지칭했다.
이 혁명적 성취의 역전은 12세부터 사형 제도의 도입, 고문의 허용, 그리고 스탈린 정권에 반대하는 옛 볼셰비키 세대와 모든 반대자들을 말살하기 위한 대규모 임의적 처형과 동반되었다. 수년 후 1944년, 가족에 대한 재정 지원이 증가했으며, 7명에서 9명의 자녀를 둔 여성에게는 “모성 영광 훈장”이, 10명 이상의 자녀를 둔 여성에게는 “모성 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1917년에 폐지된 사생아 지위가 복원되었으며, 이혼은 비용이 많이 들고 어려운 절차로 변모했다.[38]
가사노동을 대체한 사회 서비스가 기이하게도 사회주의 이름 아래 제약됐다. 오직 결혼한 부부 관계만 국가가 공식적으로 승인했고,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의 여성부는 해체됐다. 성매매는 범죄화됐으며, 성소수자들은 박해받은 채 감옥에 끌려갔다. 임신중지는 금지됐다. 혁명 초기 몇 년간 볼셰비키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토론했던 여성해방에 관한 모든 논의는 완전히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됐다.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부르주아 가족제도와 낡은 모성 관념을 떠받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스탈린 정권 아래에서 국가는 여성이 오직 어머니, 아내, 주부 같은 모습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했다. 1944년 스탈린은 얼마나 많은 자녀를 낳았는지를 기준으로 여성에게 호칭을 부여했다. ‘명예로운 어머니 훈장’을 제정해 여성을 분류했고, 10명 이상 출산한 여성에게는 ‘어머니 영웅’이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전통적인 가족을 사회의 기강을 잡는 기본 토대로 간주했는데,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도 가족이 그런 역할을 맡았다. 혁명 초기 몇 년간 자유로운 사랑과 가족의 소멸에 관한 해방적인 사고가 정점에 달했지만, 이제 그 모든 게 부도덕하고, 무정부주의적이며, 소부르주아적인 선전이라고 매도당했다.[39]"
1936년~1939년: 반혁명의 완수
1936년 스탈린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새 헌법과 함께 스탈린은 소련에서 마침내 사회주의가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소련 법률의 구조도 마찬가지로 1930년대 중반에 개정되었다. 스탈린의 1936년 새 소련 헌법(외관상 부하린이 초안을 작성)은 혁명 직후 채택된 기존 헌법이 노동자들에게 부여했던 선거 상의 특혜를 삭제했다. 그 대신 고립된 개인의 투표에 기반한 부르주아 의회 제도를 도입했다. 물론 1936년에 이르러 노동자들은 소비에트에서 민주적 권리를 완전히 상실했고, 마찬가지로 약속됐던 부르주아식 선거도 실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 모델에서 부르주아 모델로의 상징적 전환은 큰 의미를 가졌다. 트로츠키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법률적으로 청산하는 것”에 해당했다. 스탈린에게 이는 소비에트 혁명이 주요 정치적 목표를 달성했고 격변의 시기가 공식적으로 끝났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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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이렇게 논리를 전개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계급이다. 더 이상 자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도 없다. 삼단논법 주장으로서 이것은 흠이 없다. 그러나 약간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만일 프롤레타리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국가의 주인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신할 것인가? 스탈린은 다소 설득력 없이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이제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우리 노동자계급은 생산도구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게 아니라 오히려 전체 인민과 공동으로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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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새 헌법 제정은 사회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법률적으로 박탈하고, 공산당에 모인 관료집단에게 이를 집중하는 과정이었다. 이후 스탈린은 1937년 대숙청을 통해 반혁명을 완수했다. 대숙청 과정에서 최소 60만 명이 살해됐다고 추정되며, 대부분의 기존 볼셰비키 당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1930년대 후반의 대규모 숙청은 당 내부에서 볼셰비즘과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집권 상층 관료집단에게 조직화된 구조와 공식적인 인정을 부여했다.
숙청으로 수십만 명의 선진 노동자들과 당 간부들이 사라졌다. 당의 최고위층이 완전히 변모했다. 1939년 제18차 당 대회가 열릴 무렵에는 1934년(이전 당 대회) 당직자의 70~90%가 해임되거나 투옥되거나 살해당했다. 1920년대부터 산업을 관리해 온 공산주의자들인 “적색 경영자들”의 거의 모두가 제거되었다. 그들은 스탈린 밑에서 훈련받은 당의 브레즈네프/코시긴/안드로포프 세대인 “신지식인”으로 대체되었다. 이들은 책임 있는 위치로 급격히 승진하여 대중에 대한 당의 지배에 전념했다. 숙청은 1930년대 중반에 수립된 분권화된 구조와 사회적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 결과 오늘날 스탈린주의를 규정하는 관료적 자본가계급과 국유화된 자본주의 체제가 탄생했다.
최고위층에 대한 숙청의 정도는 놀랍다. 숙청이 끝날 때까지, 다음 인원들이 처형당했다. 당 중앙위원 139명 가운데 100명, 소련 내 각 공화국들의 중앙위원 가운데 90%,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 전원,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 7명 가운데 6명, 소련 내 각 공화국들의 인민위원들 가운데 90%, 통제위원회와 전쟁위원회 거의 전원, 비밀경찰과 전 체카의 지도부 거의 전원, 코민테른 간부의 60%. 소련군에서는 모든 상급 장교의 86%와 모든 장교(부사관 포함)의 50%가 총살당했다. 구체적으로는 육군 원수 16명 가운데 14명, 사단장 199명 가운데 66명, 여단장 377명 가운데 221명, 해군제독 8명 가운데 8명, 정치위원 11명 가운데 11명이 총살당했다.
숙청은 당을 참수하고 변모시켰으며, 국가기구와 (노동자국가의 무장력인) 군대를 분쇄했다. 트로츠키는 이 사건을 비무장하고 사기가 저하된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관료집단의 “예방적 내전”으로 규정했다.[40]
"어떤 지배계급도 자신이 착취하는 계급을 몰살할 수 없다. 이 사실은 계급투쟁에서 지배계급의 악랄함에 한계를 설정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잔재와 독립적인 계급 운동 및 의식을 모두 없애야 할 필요에 직면한 스탈린주의는 다른 일을 했다. 스탈린주의는 노동자들의 혁명적 지도자들을 그 잠재적인 부분까지 제거했다. 좌익반대파뿐만 아니라 전 우파, 심지어 1930년대 초 스탈린주의 핵심들까지 절멸되었다. 10월의 유산이 남긴 모든 흔적은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숙청은 당 지도부에 국한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 깊숙이까지 확대되었다. 어떤 노동자든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거나 레닌의 전통을 주장하면 트로츠키주의자로 비난받아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학살된 노동자나 당원의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추정만 가능하다. “1918년 초 당원 수는 26만에서 27만 명으로 대부분 청년들이었다. 내전(1918~21년) 기간의 높은 사망률을 고려하더라도 이들 가운데 1939년 초에 살아 있는 숫자가 20만 명에 미치지 못할 거라고 추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가운데 10%만이, 즉 2만 명 정도만이 당에 남아 있었다.” 나머지는 살해당하거나 단순히 숙청되었다. 어느 경우든 당은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트로츠키는 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스탈린주의라고 불리는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볼셰비키 당이 아니었다. 볼셰비키 당의 근절이었다.”[41]"
1937년 대숙청을 거치며 스탈린은 반혁명을 물리적으로 완수했다. 혁명의 주역이었던 대중의 선진부위는 숙청됐다. 이후의 소련은 스스로 ‘사회주의’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스탈린 관료집단이 또 하나의 자본가계급이 되어 통치한 자본주의 국가였다. 노동자계급 사이의 위계와 차별이 심화됐고, 관료와 노동자 사이에는 심대한 격차가 존재하게 됐다.
"새로 형성된 지배계급은 노멘클라투라(당원들로 임명되며 특권이 부여되는 공식 직책 일람표)를 통해 스스로를 조직화했다. “위로부터 혁명” 시기에도 당을 불태웠던 과거의 공산주의 정신은 부패에 자리를 내주었다. 관리의 급여를 노동자 임금으로 제한하는 고전적인 “당 최고급여”는 이제 농담이 되었다. 과시적인 소비가 규칙이 되었으며, 지위에 맞추어 사치품을 판매하는 특별 상점이 일반화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노동자들을 분노하게 한다. … 새로운 지배자들은 또한 예의 바른 엘리트처럼 행동해야 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 기술 전문가들과의 여러 인터뷰를 인용한 기록에 묘사되어 있다:
“1930년대 노동규율의 강화는 1937년 이후 형식적이고 위계적인 관계의 도입을 수반했다. ‘공개적인 선언도 없었고 회의나 신문에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다르게 행동하라는 지시를 사적으로 받았다.’ 구두 지시는 더욱 경직된 관계를 조장했다.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의 친밀감’은 권장되지 않았다. 부하직원은 상사에게 보고할 때 앉아서 할 수 없었다. 보고는 약속을 먼저 잡은 뒤에 짧게 해야 했다. 경영자나 수석 엔지니어가 현장을 지나갈 때 직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존경의 표시를 해야 했다. 업무 외적인 관계에서도 위계질서가 장려되었다. ‘직급이 거의 같은 직원 중에서 친구를 선택해야 한다는 힌트가 떨어졌다.’”
“1933년 이후 노동자와 노동자 자녀의 고등교육기관 유입이 현저하게 감소했다. 또한 노동자의 관리직 승진은 1930년대 후반에 거의 중단되었다. 뛰어난 노동자들은 이제 더 높은 임금과 상여금 등으로 보호받았고, 사회적·물질적 지위에서 대다수 노동자들보다 높은 수준으로, 거의 공장 사무직원과 엔지니어의 고위직 수준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승진’하지 못했고 육체노동자로 남아있었다. 게다가 이 무렵에는 소수의 특혜를 받은 노동자들에게만 고등교육을 받아 나중에 산업 지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920년대 말에 정식화되었던, 노동자계급에서 성장하고 노동과 결속된 사람들에게 산업의 방향을 맡긴다는 생각은 이제 사라졌고, 대학과 기술학교에서 노동자의 핵을 보장하라는 명령은 암묵적으로 잊혀졌다. 1940년 말에는 노동자의 자녀가 고등교육을 받는 데에도 장애물이 생겼다.”
즉, 숙련노동자들은 이제 노동귀족으로 포괄되었지만, 관료집단으로는 포괄되지 않았다. 새로운 관료집단은 대중적 지지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동시에 계급 이동의 사다리를 자르고 있었다. 그래야 노멘클라투라로 상징되는 계급 간 경계선을 엄격하게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혁명의 공식적인 정점은 1939년 3월 제18차 당 대회였다. 의기양양한 공산당은 새로운 사회관계를 성역화하고 스스로를 공공연히 관료적 지식인의 당으로 만들었다. 이 시점 이후로는 국가가 비록 왜곡된 형태로라도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해 통치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노동자계급은 그 대리인조차 권력에서 제거되었고, 이미 10년 동안 진행된 경제적 변화는 국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객관적’ 이익을 구현하지 못하도록 보장했다.
1936년 헌법이 “전체 인민”을 앞세우며 프롤레타리아트를 상징적으로 물러나게 했다면, 이제 당 대회는 새로운 관료집단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숙청 기간 동안 당원 모집이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었을 때, 1929년 2% 미만이었던 지식인 부문 신규 당원이 40% 이상을 차지했다. (노동자 신규 당원은 81%에서 41%로 감소했고, 두 시기 모두 농민 신규 당원이 약 15%를 차지했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노동자는 신규 당원의 20% 미만을 차지한 반면 공무원·사무직원·지식인은 70% 이상을 차지했다.[42]"
반혁명이 완수된 후의 소련은, 관료들이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는 또 하나의 자본주의 체제였다. 이 체제는 노동자, 농민, 소수민족,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탄압을 구조화했다. 물론 그것은 통상적으로 역사 속에 존재해왔던 시장경제에 기반한 자본주의와는 다른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 산업은 국유화돼있었고, 시장이 하는 역할을 많은 부분 관료적 명령경제가 대체했다. 노동자들의 해고가 시장경제만큼 자유롭지 않았고, 기업은 생산성을 충분히 내지 못해도 파산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장 자본주의와의 차이점들은 주로 러시아혁명이 남긴 노동자국가의 잔재로부터 비롯하는 것이었다. 노동자국가의 잔재는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비효율적인 생산을 유지시킴으로서 자유로운 자본주의 성장을 방해하고 경제성장을 둔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혹자는 소련의 이런 특징들을 근거로 소련이 자본주의가 아니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체계적으로 국가의 부의 축적을 위해 억압되고 착취당했다는 점에서, 소련은 본질적으로 시장자본주의와 다르지 않은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43]
한편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국제적으로도 세계 노동자계급을 배신하고 패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배신적 타락에 의해 1919년 독일혁명은 패배했지만, 이후 히틀러가 집권하는 1933년까지 독일에선 여러 차례 또 다른 혁명적 봉기의 계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격의 기회는 스탈린이 지휘한 코민테른이 재앙적인 지도력을 발휘함으로써 좌절됐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중국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진행됐다. 국제혁명의 필요성을 ‘일국사회주의의 생존’으로 대체해버린 스탈린주의 노선이 세계 곳곳에서 혁명적 봉기의 가능성을 패배시켰다.[44]
반혁명 이후의 소련은 국제관계에 있어 전형적인 자본주의 강대국처럼 행동했다. 소련은 동유럽과의 관계에서 또 하나의 제국주의 강대국으로서 주변국들을 지배하는 국가로 군림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러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러시아에 대한 강렬한 민족적 증오는 스탈린 치하 소련이 제정 러시아를 이어받아 행해온 오랜 민족억압의 결과이다.
그리고 소련은 ‘자유진영’ 부르주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는 걸 약소국 민족들이 해방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이는 1947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지 3일 후인 1948년 5월 17일에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이는 나치 독일로부터 위협을 느낀 소련이 서방 자본주의 국가와의 동맹을 위해 아랍 노동자계급을 배신한 행위였다.
"소련의 입장은 특히 놀랍다. 시온주의 체제에 대한 일관된 부정적 태도, 1929년 및 1936년 아랍 반란 당시 크렘린이 이슈브(Yishuv)를 영국 제국주의의 동맹이자 도구로 비난하며 취한 명시적인 친아랍 노선을 고려하면 말이다. 시오니즘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에서 열렬한 지지로 소련의 태도가 변화한 것은 종종 1941년 6월 21일 독일의 소련 침공과 관련되어 설명된다. 모스크바가 세계 유대인 및 팔레스타인의 이슈브와 맺은 유대 관계는, 러시아의 전쟁 노력에 세계 유대인 공동체의 지원을 끌어들일 필요성을 우선적으로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전쟁은 러시아에게 “나치 독일에 맞선 투쟁에서 최대한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서방세계에서 광범위한 동맹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음을 시사한다.
히틀러가 스탈린과 체결한 협정을 파기한 제2차 세계대전의 역동 앞에서, 관료화된 코민테른은 민족해방 문제에 대한 180도 입장 선회를 “소련 방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했다. 이는 실제로는 소련의 영향권을 보장받기 위해,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확장을 억제하는 대가로 제국주의와 협정을 맺는 행위와 다름 없었다.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라는 개념으로 이 정책을 이론적으로 포장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한 정면 부정이었다. 이는 소련 관료의 이익 증진을 대가로 한 피억압 민중의 투쟁에 대한 배신을 의미했고, 실제로 그런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스탈린주의 소련은 민족해방의 경로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이라는 계급 화해 정책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을 근본적, 그리고 역사적으로 거부하는 논리를 팔레스타인 정책에 적용했다. 이 점은 스탈린주의 노선이 아랍 국가의 부르주아계급과 협정을 지향한 데서 명확히 드러났다.[45]"
1927년: 중국에서 노동자계급의 패배에 스탈린주의가 한 역할
지금까지 스탈린 반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소련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았다. 스탈린 반혁명의 역사는 중국에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이 좌절되는 과정에, 그리고 1949년 중국혁명과 이후 중국의 역사적 진행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의 반혁명이 오늘날의 중국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펴보자.
앞서 잠시 언급했듯, 레닌 사후에 스탈린이 권력을 잡기 시작하면서 코민테른은 세계혁명을 매우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갔다. 중국에서도 그러했다.
1921년 창당한 중국공산당은 본래 자본가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과 독립적으로 노동자계급을 조직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자본가 정당과의 계급독립성에 기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회주의 운동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용해될 것’을 요구했다.
"(1921년 7월 23일) (중국공산당 첫 번째 당대회) 결의안에는 공산당을 코민테른의 지부로 설립한다는 내용이 있었으며, 또한 대회는 자본가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과는 어떠한 동맹도 배제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한 투쟁을 결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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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에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반제국주의 연합전선을 건설했는데, 자본가 민족주의 정당과 반제국주의 투쟁을 함께 하더라도 자신의 조직과 깃발을 유지하고 고통당하는 대중을 끌어모으는 계급 독립성의 축을 세워나갔다. 그러나 고작 1년 후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에서 세력을 키워간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지시 아래 국민당 대열 속으로 용해됐다. 나아가 소위 통일전선(1차 국공합작 – 옮긴이)에서, 국민당 지도자 쑨원은 중국공산당이 자기 조직을 해산하고 국민당에 개별 당원으로 들어와 국민당의 사상과 규율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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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구가 1923년 초 소련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토의됐을 때, 스탈린과 부하린(이들은 코민테른을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국제조직에서 소련의 대외정책을 위한 도구로 빠르게 변형시키고 있었다)은 중국공산당의 해산을 압박하는 데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국민당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1922년 결의안을 우스꽝스럽게 해석하며 그렇게 했다. 이 동의안에 대해 트로츠키만 유일한 반대표를 던졌다.[46]"
코민테른이 국민당과의 연합을 중요시한 배경에는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이론이 있었다. 스탈린에겐 중국 혁명의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것보다, 국민당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게 더 중요했다.
"코민테른 관료집단은 이제 스탈린과 부하린의 철권통치 아래 2단계 혁명 이론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주주의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민족 자본가가 이끄는 부르주아혁명이 우선 이뤄져야 하고, 그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종속시켜야만 하며, 이어 미래의 언제쯤인가 사회주의 혁명이 뒤따른다는 이론이다. 코민테른 관료집단은 다가오는 혁명의 과정에서 국민당에게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 조직에 수년간 필수적인 군사적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국민당을 강화시킨 반면 중국공산당 동지들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후 몇 년간은 이런 투쟁 양상으로 채워졌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을 조직하기 위해 헌신한 반면, 코민테른은 중국 민중이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는 데 필요한 지도부라며 국민당을 지지했다. 1925년에서 1926년까지 점증하는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해, 공산주의자들은 외국인 소유 기업에서 광범위하게 조직된 노동자들을 파업으로 이끌었다. 노동자계급의 상당 부분을 공산주의자들이 이끌고 있었는데, 파업 물결이 거세지면서 노동자들의 힘과 계급의식이 강화됐다. 이것은 국민당의 헤게모니를 위협했다. 바로 이때 코민테른은 1926년 국민당을 명예회원 조직으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과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소비에트를 건설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이것은 코민테른이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이념을 포기하고 스탈린과 부하린의 ‘일국 사회주의’ 이론에 젖어 들어간 것과 동시에 이뤄졌다. 그것은 당시 세계혁명의 패배, 특히 1919년과 1923년 독일혁명의 치명적 패배 앞에서, 사회주의자의 첫 번째 임무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신생 소비에트 국가를 방어하는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것이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자본가들과 놀랄 만한 동맹을 맺는 것을 뜻하더라도 말이다.
중국에서 그것은 공산주의 운동의 성장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훨씬 규모가 큰 국민당과 동맹을 추구하는 것으로 표현됐다. 파업 물결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국민당과 공산주의자 사이의 투쟁이 점점 더 논리적 결말을 향해 치닫게 되자, 트로츠키는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당을 떠나야 한다는 적극적인 운동을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더 많은 제한을 받게 될 때 이어질 일들을 대부분 예측하면서 말이다.[47]"
노동자계급의 성장이 아니라 국민당과의 연합을 최우선으로 추진한 코민테른 정책은 1927년 상하이 대학살로 운동이 궤멸되는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다.
"공산주의자들을 국민당의 요구와 규율에 복종시키면서 스탈린은 그들의 손을 묶었고, 1927년 2차 중국혁명의 치명적인 패배를 초래했다. 그 패배는 중국 사회주의의 발전 경로를 영구히 뒤바꾼 패배다.
1927년 4월 수천 명의 상하이 노동자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총파업을 벌이고 자주적인 조직체를 결성했다. 그때 국민당 장군이었던 장제스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 확대를 두려워해 노동자와 중국공산당 당원들에 대한 피의 학살을 명령했다. 백색테러 기간으로 알려진 그때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동조한 노동자와 농민들도 전국 각지에서 쫓기고, 구금, 처형되거나 실종됐다.[48]"
"2월 19일 총파업은 권력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보이틴스키를 통해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은 공산당 지도부는 ‘이미 봉기가 펼쳐지고 있는 동안에 봉기에 나서야 할지에 관해 논쟁’했고, 노동자들이 싸우는 동안에 자본가계급과의 상층 연합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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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노동자들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총공회는 3월 21일 정오에 총파업 돌입과 동시에 봉기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발표했다. ... 파업은 완벽했다. 실제로 상하이의 모든 노동자가 거리로 나왔다. 수많은 점원들과 도시빈민들이 결합하면서 대오가 불었다. 50~8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직접 참가했다. 봉기 계획은 신중하게 결정됐다. 훈련된 5,000명의 규찰대로 구성된 노동자민병대가 봉기의 주축이 됐고, 이들은 각각 20~30명 단위로 소대를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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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베이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노동자들은 날이 저물기 전에 경찰서와 지역 군사기관을 제압하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많은 군인과 경찰이 제복이 찢겼고 무기와 폭탄을 넘겨줬다. 규찰대 공격 대오는 도처에서 무기를 손에 넣었고, 저녁 무렵에는 비교적 잘 무장할 수 있었다. 가구, 상자, 의자를 모두 가두로 끌어냈다. 경찰서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쌓기 위해 대문을 모두 떼어 냈다. 수백 개의 작은 식당들은 끼니를 준비하느라 분주했고, 여성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전선으로 날랐다. 남녀 노동자들은 오른 팔에 붉은색 띠를 묶었다. 이것은 새로운 노동자 군대의 표식이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모든 경찰서가 점령됐다. 전화국과 무선전신국도 점령됐다. 전선은 절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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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지도자들은 국민 혁명군이 도착하는 날이 곧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되리라고 상하이 노동자들에게 말했다. 승리한 3월 21일 봉기의 중심 구호는 “국민 혁명군 만세! 장제스 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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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가 도착한 이튿날, 서문에서 환영 집회가 열렸다. 5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모여 ‘장제스를 극도로 칭송하는’ 공산당원들의 연설을 들었다.
하지만 상하이 노동자들과 중국 공산당원들만 장제스와 그의 군대를 인민의 구세주로 환영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장제스가 상하이로 향하는 것이야말로 세계 혁명의 기치라고 이해했던 코민테른의 각국 정당도 똑같은 태도로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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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2일 새벽 4시, 치치로의 외교부에 자리한 장제스사령부에서 나팔신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스에 정박 중이던 중국 군함은 사이렌을 울리며 응답했다. “동시에 기관총성이 끊임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자베이, 난스, 후시, 우쑹, 푸둥, 차오쟈두에서 습격이 시작됐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놀란 것은 노동자들뿐이었는데, “자정을 전후로 중국과 외국의 모든 관계당국이 새벽에 벌어질 일을 비밀리에 전파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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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바로 각지의 노동자 진지들은 깡패들에게 점령됐다. 노동자지구가 점령된 뒤, 노동자규찰대와 동조자들은 지체 없이 잔혹하게 처형됐다. 무기를 박탈당했고, “심지어 옷과 신발이 벗겨졌다”. 반항하는 노동자는 모두 그 자리에서 총살됐다. 나머지는 한데 묶여 가두나 룽화 사령부로 끌려가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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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정오에 노동자들은 자베이의 칭윈로에 집결해 대중집회를 열었고, 몰수된 무기의 반환, 노조 파괴자의 처벌, 총공회 보호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 단 1명도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 그들을 기다리던 기관총수들이 발포를 개시했다. 거리 양편에서 밀집한 군중을 향해 총탄이 뿜어져 나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며 진흙 바닥 위로 고꾸라졌다. 군중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미친 듯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달아나는 노동자들을 향해 총격이 계속됐다. 길 위의 바퀴자국을 따라 흐르는 흙빛 빗물은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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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는 상하이 전역에 수립된 공포 정치에 협력했다. 특히 프랑스 당국이 간접적으로 지원했는데, 프랑스 조계 경찰정보부 책임자인 곰보 황진룽이 모든 부하를 동원해 노동자들에 맞서 행동했다. ... 4월 14일 밤에는 영국 철갑차들이 일본 상륙부대와 함께 조계 외각 지역을 습격해 여러 번 기관총을 사용했다. 집집을 돌며 샅샅이 수색해 많은 사람을 체포했다. 체포된 이들은 대규모로 룽화 군사령부로 넘겨졌다. 그리고 장제스 장군이 발동한 계엄령 조례에 따라 군사법정에 세워졌다. ‘긴급’ 상황에서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은 군 장교로 구성된 군사법정은 테러체제를 위한 도구가 돼, 몇 달 동안 노동자, 학생 등 말 그대로 수천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49]"
"당황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이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좀 더 모험적인 조치를 취하길 강요했는데, 이 모든 것은 국민당에 의해 무자비하게 분쇄됐다. 근본적으로 이런 패배들이 중국공산당의 경로를 규정했으며, 중국공산당은 노동자계급 속에서 다시는 그와 같은 거대한 영향력을 가질 수 없게 됐다.[50]"
1927년의 궤멸적 패배는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이 불러온 결과였다. 이는 이후 중국에서 노동자계급에 의한 혁명의 가능성을 오랫동안 봉쇄했다. 이러한 역사적 경로 위에, 노동자계급의 대중운동을 농민과 지식인의 게릴라 운동으로 대체한 마오쩌둥주의가 중국공산당의 주류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노동자계급이 궤멸된 상황에서, 도시에서 노동자운동을 재건하는 대신 농촌으로 향했다.
"이렇게 된 뒤, 천두슈 같은 저명한 지도자들은 이 경험에서 반드시 끌어내야 할 결론을 도출했고, 그 해답을 찾아 트로츠키의 저작에 눈을 돌려 제4인터내셔널의 지부로서 중국 좌익반대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농촌으로 내려가 마오쩌둥에 합류했다. 마오쩌둥은 다가오는 혁명에서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 이론은 중국공산당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 걸쳐 세계 사회주의 운동 모두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이어진 20여 년간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이 농촌을 향하게 했으며 농민 유격대로 홍군(紅軍)을 조직했고, 국민당과 제국주의에 맞선 오랜 투쟁을 시작했다. 마오주의 지도자들은 노동자 전위가 농촌으로 하방해 유격대를 조직하는 것을 돕도록 했다. 혁명의 주체 문제에 관한 이런 전환은 파급력이 큰 결과를 가져왔다. 왜냐면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자기 조직화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적을 패배시킬 준비가 된 군사력을 건설하는 데 종속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당 관료주의로 대체됐는데, 이것은 여러 계급으로 구성된 농민군 속에서 ‘규율’을 유지하기 위해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기구였다.[51]"
마오쩌둥주의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냉소주의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스탈린주의 철학을 공유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주의의 ‘인민전선’(자본가계급과의 연합전선)도 받아들였다. 민족해방을 위해서는 자국의 자본가들과도 연합해야한다는 게 마오쩌둥의 본래 생각이었다. 이는 2차 국공합작(1937~1945)으로 나타났다.
"1927년의 사건 이후,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긴 했지만 마오쩌둥은 본질적으로 스탈린과 동일한 이론적 틀을 가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에게 다가오는 중국혁명은 제국주의와 봉건제에 맞서는 것이지, 자본주의에 맞서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주의를 향한 것은 더욱 아니고 말이다. 스탈린처럼 마오쩌둥 역시 과업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혁명의 담당자는 노동자, 농민뿐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에 기꺼이 참여할 뜻이 있는 민족 자본가와 지주들이기도 했다.
이것은 마오쩌둥이 1946~1949년의 내전 이전까지 국민당과의 동맹을 모색하도록 했다. 스탈린주의의 인민전선 전략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몇 년 전 중국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혁명 운동에서도 그랬다),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은 민족 자본가와의 기회주의적 동맹을 계속하려 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일본을 패배시키기 위해 1937년에 소위 2차 국공합작으로 알려진 국민당과의 또 다른 인민전선을 형성한 것이다. 국민당과 중국공산당 동맹의 군사전략은 노동자, 농민, 소부르주아, 그리고 특히 민족 자본가를 포함해 4계급 연합을 구성한다는 마오쩌둥의 이론을 반영했다. 마오쩌둥은 계급 간 동맹이 제국주의 침략을 분쇄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민족 자본가들과 손잡고 반일 통일전선을 결성하면서, 마오쩌둥은 농민대중을 단결시켰던 토지개혁의 선동을 포기했다. 그것은 다수가 대지주인 국민당 장군들의 이익을 공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일본 제국주의와의 모순이 ‘주요 모순’이라고 말했다. 즉 민족 자본가 및 오래된 봉건적 질서와의 ‘모순’(중국 민중에 대한 억압의 물질적 기반을 이룬다)은 부차적인 차원으로 밀려났다. 마오쩌둥은 당의 지도 아래 민족해방의 과제가 이들 계급을 원활하게 통합시킬 것이라 믿었지만, 자본주의적 관계가 계속되는 한 결국 정점에 치달을 계급 간 갈등이 해소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52]"
그러나 국민당은, 여타의 약소국, 식민지 부르주아 세력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민족해방의 과제를 달성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권력을 잃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다. 마오쩌둥은 주요모순(일본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부차모순(중국의 민족자본가, 봉건지주)을 뒤로 미뤄두고 중국의 자본가, 지주들과 단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국민당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2차 국공합작은 국민당의 공격과 함께 2차 국공내전(1946~1949)으로 이어졌다.
"국민당과의 궁극적인 단절은 1947년 장제스와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의 위협을 쓸어버리기로 결심하고 그들에 맞선 군사 행동을 시작하면서 강제로 이뤄졌다. 이 공격 행위는 마오쩌둥이 국민당과의 관계를 단절하며, 국민당을 패배시키고 신중국 건설을 요구하도록 만들었다. 국민당과의 동맹이 깨지면서 중국공산당은 자신의 통제 아래 있던 점령지뿐만 아니라 중국 영토 전체의 광범위한 토지개혁을 요구했다. 이것은 농민대중 사이에서 거대한 운동을 촉발시켰다. 농민들은 강제로 토지를 몰수하고 재분배했다. 지주를 살해하고, 마오쩌둥에게 토지 몰수 및 재분배 강령을 시행할 것을 강제하면서 말이다.[53]"
1949년: 중국혁명은 무엇이었나
결국 1949년 마오쩌둥은 국민당 군대를 몰아내고 중국혁명에 성공한다. 이는 국민당 군대, 그리고 이와 결탁한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냈다는 점에서 민족해방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어떤 의미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다. 중국의 노동자계급은 조직화되어있지 않았고, 러시아혁명과 독일혁명 등 노동자계급의 혁명과정에서 나타났던 노동자평의회 또한 등장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의 마지막 결정적인 국면에서 미미한 역할을 수행했다. 상하이에서 20년 전에 장제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떤 주요한 파업이나 도시 봉기도 홍군에게 길을 닦아준 바 없었다. 개선하는 홍군 속에 노동자는 거의 없었다. 홍군은 본질적으로 농민들로 구성되고 농민 일부와 지식인들이 장교를 맡았다.[54]"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혁명은 아니었지만, 중국혁명은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의 기치를 내건 광범위한 대중운동이었다. 중국과 같은 거대한 국가에서, 수많은 대중들의 열망의 폭발은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했고, 이는 한편으로 중국혁명 이후의 진보적 조치들을 도입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대중의 에너지는 중국공산당 지배계급에 의해 종종 통제되거나 진압됐고, 때로는 지배계급의 권력 강화를 위해 동원되기도 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주의의 2단계 혁명론을 따라, 1949년 혁명을 ‘신민주주의 혁명’ 시기, 즉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에 맞선 혁명의 시기라고 규정했다. 이는 곧 민족부르주아와의 협력을 의미했다.
중국에 이식된 스탈린주의
권력을 잡은 중국공산당은 스탈린주의의 관료적 명령경제를 중국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중국공산당의 목표는 자본주의 철폐와 사회주의 수립이 아니라 강력한 자립적 민족경제였다. 마오쩌둥에게 소련의 경제성장 모델은 중국의 민족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오주의는 스탈린주의의 ‘일국사회주의’ 철학의 변형이었으며, 사회주의의 외피를 쓴 민족주의였다.
중국공산당이 도입한 관료적 명령경제는 한편으로는 중국의 봉건지주들, 제국주의 세력 및 이들과 연결된 군벌과 봉건잔당들의 권력을 빼앗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빼앗은 권력이 노동자에게 주어지지는 않았다. 노동자가 자기 조직화를 통해 직접 쟁취한 권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49년 혁명으로 권력을 쥔 것은 중국공산당 관료들이었다.
노동자 민주주의에 기반하지 않은 관료적 명령경제의 이식은 중국에서도 소련처럼 또 다른 거대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수립됨을 의미했다. 중국공산당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을 요구했다. 노동자민중의 시각에서 보면, 노동자와 농민의 피와 땀을 담보로 한 국가 주도 경제성장을 목표했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박정희가 주도했던 국가주도 경제개발과 소련과 중국의 국가주도 경제개발은 본질적으로 별로 다르지 않은 과정이었다.
앞서 우리는 스탈린주의 아래 소련에서 성과급제와 권위적 노동통제가 이뤄졌으며, 이것이 ‘사회주의적’인 것이라며 장려됨을 살펴보았다. 관료적 명령경제가 이식되던 1950년대 중국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전개됐다. 노동자들은 평등하지 않았고, 국가가 설정한 기준에 따라 차별적 대우를 받았다.
"1950년대에 중국공산당은 또한 도시 공기업의 위계체제를 만들었다. 일부는 직원들이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진 집체기업이었고, 다른 일부는 산업화 프로젝트의 핵심인 국영기업이었다. 국영기업의 일부는 중앙 정부에서 직접 운영하고 다른 일부는 지방 정부에서 운영했다. 국영기업은 특별한 단웨이(노동단위)를 구성하여, 생산과정뿐만 아니라 육아·교육·주택·여가·건강·연금 등 정규직 노동자들의 일상생활까지 조직했다. 따라서 국영기업의 특권적인 정규직 노동자들은 국가 노동자들의 엘리트이자 노동단위의 ‘주인’으로 여겨졌으며, 훗날 ‘철밥통’이라고 불리는 복지 보장을 누렸다. 국영기업 노동자들과 그들의 ‘철밥통’은 사회주의의 성과를 제시할 때 자주 언급된다. 하지만 사회주의 시기 내내 이 노동자들은 사실 중국에 있는 (농촌과 도시의) 전체 노동자들 가운데 소수에 불과했다. 다양한 유형의 기업들이 (예를 들어 다양한 종류의 집체기업과 국영기업들이) 피라미드를 형성하여, 상위에 있는 기업은 하단에 있는 기업보다 더 많은 자원을 받고 더 높은 임금을 지급했으며, 일부는 직원들에게 크기가 다른 ‘밥그릇’을 제공하거나 아예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노동단위 간의 새로운 위계질서는 새로운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의 위계적 구성과 일치했다. 첫째, 철강이나 기계 생산과 같은 핵심 산업에서 중국공산당 정권은 숙련되고 안정적인 핵심 인력이 필요했으며, 이들을 특권과 규제를 통해 통제했다. 둘째, 다른 도시 산업은 대부분 특권이 적고 임금이 낮은 도시노동자를 대량으로 고용했다. 셋째, 특정한 업무와 계절적 노동은 임시(농촌출신 이주) 노동자로 구성된 유연한 노동력이 수행했는데, 이들은 더 낮은 임금과 열악한 조건에 맞닥뜨려야 했다. 이 세 가지 노동 분업이 숙련과 미숙련, 정규직과 임시직, 특권과 비특권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를 연상시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55]"
이러한 서술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노동귀족으로 길들여진 대기업 정규직과 불안정 비정규직 노동자의 격차를 쉬이 떠올리게 한다.
농민들 또한 많은 희생을 강요당했다. 중국혁명 이후 토지개혁을 통해 봉건지주계급의 토지를 몰수했으나, 공업화를 우선하며 농업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부차화됐다.
"토지개혁은 가능한 한 빨리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인구 규모에 비해 경작지가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식량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고, 따라서 중국 역사상 식량 부족과 기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 정권은 식량 공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여러 유형의 농민들 사이에 큰 불평등이 존재하는 농민 경제를 그대로 놔두었다. 이러한 불평등 중 일부는 개혁 이후에도 다시 나타났다. 1953년 1차 5개년 계획 이전에는 단순히 협동조합의 자발적인 설립을 장려했다. 이는 잘 작동하지 않았는데, 부분적으로는 (대부분 농촌 당 간부였던) 새로운 부유층 농민들의 저항 때문이었다. 1955년 중국공산당 정권은 마침내 농업 집단화를 시행했다. 마을 주민들은 (소련의 국영농장 시스템과는 다소 다르게) 일정한 자경지를 인정받았지만, 여전히 사회주의 간부 밑에서 노동자가 되어 (식량과 소비재로 전환할 수 있는) 노동점수 형태의 임금을 지급받았다. 이들의 소득과 생활수준은 도시노동자들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농업노동자들은 1970년대 후반까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농업노동자들의 상황은 1950년대에 1949년 이전보다 개선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착취를 당하고 상당히 빈곤한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사회 피라미드의 최하층에 머물러 있었다. 한편, 도시 산업화를 위해 새로운 노동력이 필요할 때 일시적으로 이용되던 농촌으로부터 이주는 점점 더 통제되고 제한되었다. 1950년대 후반 이주를 제한하기 위한 제도인 호구 제도가 확립되면서부터는 자유로운 이동이 매우 어려워졌다.[56]"
중국혁명 이후 여성의 권리
앞서 설명했듯이 중국혁명이 기반한 대중적 에너지는 여러 측면에서 발산되었는데,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 쟁취란 측면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혁명의 결과로 여러 가부장적 제도와 규범에 대한 진보적 조치가 도입됐다.
"중국공산당이 봉건적·권위주의적·가부장적 질서를 종식시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여성*[57]은 국민당을 축출하고 중국 사회를 혁명하려는 중국공산당과 그 운동의 주요 지지자 중 하나였다. 1940년대 중국공산당의 홍군에 의해 해방된 지역들은 사회주의[58] 사회에서 여성*의 미래 역할을 위한 훈련장이 되었다. 예를 들어, 군대에 남성*이 동원되면서 노동력 부족이 발생하자 더 많은 여성*이 농업이나 산업 일자리에 동원되었다. 한편, 여성*은 대부분 군대 안팎에서 보조적인 일을 맡았는데, 이는 “전쟁 역할의 성별 귀속이 심화”된 것을 보여주었다.
...
1940년대를 거치며, 중국공산당 내 여성* 해방에 대한 논쟁은 점점 더 온건화 되었다. 그러나 1949년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집권한 후 여성*들은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개선을 위해 압력을 행사했고, 첫 단계는 유망해 보였다. 예를 들어, 하인 가사노동과 성매매가 여성*에 대한 착취형태로 규정되며 금지되었다. 1949년 4월 중화전국부녀연합회[中华全国妇女联合会, ACWF]가 설립되면서 여성*의 이해관계를 위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1950년에는 중화전국부녀연합회가 결혼법 제정을 도왔는데, 이 법은 여성*에게 결혼과 이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가족과 가정에서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부여했다. 이 법의 시행과 함께 1953년까지 캠페인이 지속되었으며, 그 시기 이혼이 급증했다.[59]"
그러나 소련에서 스탈린주의 반혁명과 함께 여성의 권리가 후퇴했듯이, 중국에서도 관료적 명령경제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며 여성의 권리가 빠르게 후퇴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여성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스탈린주의가 추구하는) 급속한 국가경제 성장과 충돌하기 때문이었다.
"그 후의 상황은 혁명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대부분 무임금노동인) 여성*의 재생산노동은 자본주의 체제의 기능과 안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자주 간과되어 왔다. 이는 사회주의 중국에서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여성*은 산업 노동단위와 농장에서 임금노동을 요구받았을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재생산노동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농촌에서는 여성*이 처음으로 농업노동에 대규모로 동원되었다. 새로운 협동조합은 “혈통과 가족의 사회적 기능을 약화시켰고, 여성에 대한 혈통적 권위와 가부장적 권위를 약화시켰다.” 여성*은 농사일의 집단적 조직화와 그래서 받은 보수를 통해 지역사회에서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결혼법 캠페인을 축소했다. 전통적인 가족 관계에 대한 공격에 저항하는 농촌 남성*을 (그리고 일부 여성*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여성*의 농촌 고용이 증가했지만 남성*과 여성*은 종종 다른 생산팀에서 일했다. 예를 들어, 남성은 모를 담은 자루를 나르는 등 더 힘들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는 반면, 여성은 모를 심는 등 몇 시간 동안 쪼그려 앉아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성*은 여성*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았다. “작업의 고된 정도는 노동점수로 평가되었다. 한 여성은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 작업장에서는 남성의 노동이 10점의 가치가 있었다. 최악은 8.5점을 받았고, 최고는 10점을 받았다. 여성의 노동은 최고가 5.5점이었다.’ 또 다른 여성은 ‘우리의 노동은 절반의 가치만 있었다’고 말한다.”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은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더욱 규정되었고, 육아와 같은 재생산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의무로 남았다. 요컨대, 여성의 임금노동과 (생산 및 재생산에서의) 무임금노동은 사회주의 시초축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성의 노동은 비용을 절감시켰고 (농촌에서 생산되고 산업화 노력에 사용된) 잉여를 확대했다. 게일 허셔터는 이 과정을 “숨겨진 축적”이라고 했다.
도시의 작업장들에서는, 가부장적 질서가 변화하고 단웨이(노동단위)가 가족 기능을 부분적으로 대체하면서 여성*이 가정 밖에서 임금노동자로 대규모로 고용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그러나 류 지에유는 어떻게 단웨이 지도자들이 전통적인 가족의 가부장과 유사한 역할을 맡게 되었는지 또한 어떻게 단웨이의 가족 문화가 직장에서의 성별 분리와 사회에서의 성별 격차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사회주의 노동단위는 여성의 경력과 개인 생활에 대한 결정권자 역할을 수행하며 사회주의 이전 제도의 가부장적 기능을 이어갔다. 그 결과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보다 더 큰 사회적 불이익을 받았다.” 여성의 업무는 종종 “가벼운” 업무로 분류되어 남성의 “무거운” 업무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다. 왕 정에 따르면 “교육 수준에 관계없이 남성은 압도적으로 기술직에, 여성은 비기술직·보조직·서비스직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성별 고용 위계는 여성의 종속적 지위를 확립하고 여성의 자기인식을 규정했다.” 또한 여성*은 임금노동에 종사하는 동안 무급 재생산노동을 계속했다. 이후 20년 동안 임금노동에 여성*을 할당할지 여부는 (그리고 그 숫자는) 사회주의 국가가 측정한 전반적인 노동력 수요 또는 노동력 부족에 따라 결정되었다. 1957년에는 중화전국부녀연합회 자체도 “여성 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성을 생산에 동원하던 이전의 정책”에서 벗어나 “가족과 가정에서 여성의 임무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가족 구조는 (특히 농촌 지역에서) 여성*이 기대했던 것만큼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전족, 어린 신부, 첩, 기타 사악한 습관과 관습이 근절되었지만 전통적인 가족 구조에는 큰 변화가 거의 없었다. … 정부와 사회가 남녀평등을 주창했지만, 농민 하위문화에서는 남성이 여전히 여성보다 우월한 존재로 여겨졌다.” 1950년대 중반 협동조합이 도입되면서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가 사실상 폐지되었지만, 농민들의 전통적인 시집살이 패턴은 변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여성이 (비혼) 성적 관계를 가지는 것을 격렬하게 반대했고 이성애 결혼을 새로운 도덕의 핵심으로 삼으려 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에게 “가족은 여전히 사회주의 사회의 기본 세포”였다.
요컨대, 가부장적 질서는 폐지되지 않고 사회주의 국가와 경제의 필요에 따라 “현대화”되었다. 여성 임금노동의 도입과 확대, 그리고 여성*의 (대부분 무임금인) 재생산노동은 주로 “값싸고 유연한” 노동력의 공급과 재생산에 기여했다. 마오주의 가부장적 질서에서 여성*에 대한 새로운 억압은 사회 안정을 강화하고 당의 통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사회주의 시기 중국공산당의 주요 정책 목록에서 페미니스트 요구는 결코 높은 순위를 차지하지 못했고, 여성*의 새로운 권리에 대한 남성의 반발이나 저항에 직면했을 때 (여성*이 주요 역할을 하지 않았던)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여성* 해방을 위한 요구를 더욱 약화시켰다. 1949년 이전 유교의 이념적·구조적 유산은 사회주의 국가의 요구에 맞게 재구성되고 적응되었다.[60]"
여성의 권리는 언제나 국가성장을 위한 계획에 종속되었다. 여성이 가정으로 돌아가야 할때는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강조됐고, 집단노동에 동원되야할 때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강조됐다. 어떤 경우에서든 여성은 본질적으로 억압됐다.
"1950년대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산하 중화전국부녀연합회는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지만, 중국공산당 전체에서 이러한 견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무임금노동의 대부분은 여성*이 담당해야 했다. 1955~1959년 오호활동[五好活动] 기간 동안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도시와 농촌의 주부들에게 자녀 교육과 남성 파트너 지원을 통해 사회주의 발전을 촉진하도록 촉구했다. 이 운동의 일부는 사회주의 주부의 모범적인 본보기가 되는 이들을 이른바 오품활동가로 지정하는 것이었다.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이들을 위한 일종의 (무급) 서비스 노동자로서의 주부의 역할이 미화되었다.”
1958년 이후, 이러한 상황은 대약진운동 동안 인민공사의 구조조정으로 일시적으로 바뀌었다. “대약진운동의 구조재편에는 결국 더 많은 여성을 더 많은 시간 집단적 노동에 투입하기 위해 여성의 전통적인 사적 노동 일부를 사회화하려는 노력이 포함되어야 했다.” 많은 농촌 여성*이 특히 농업에서 임금노동에 동원되었고, 남성*은 건설 프로젝트나 뒷마당 용광로에서 일했다. 그러나 인프라 건설, 광업, 철강생산, 행정직에 종사하는 이른바 ‘철의 여인들’도 있었다. 동시에 농촌 지역에는 공공식당, 보육원, 세탁소가 설립되었다. 이를 통해 여성*들은 처음으로 “집안일을 포기하고 사회적 생산에 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부엌에 묶여 있던 여러 세대의 여성들에게 이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많은 여성*은 이러한 노동 배당을 “마을 어른들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여겼고, 이러한 자유를 이용해 상대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성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대약진운동은 일부 여성*에게 부정적인 변화도 가져왔다. 다른 사람들이 산업노동에 동원되면서 농사일을 담당한 것은 대부분 자녀를 둔 여성*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집단을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집안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그 부담을 감당하기 힘들었고, 결국 “지치고 병들고 죽어갔다.” 그들은 그러한 노동 배당을 싫어했고 많은 사람들이 탈출을 시도했다. 이러한 “‘탈주’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의료, 보육, 공동식당을 제공하여 여성*의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대약진운동의 약속은 헛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여성*은 재생산노동에서 부분적으로 해방되었지만 일시적으로만 그랬다. 대기근과 대약진운동 실패 이후, 공동식당은 해체되었고 “농촌 여성들은 다시 가사노동의 부담을 떠안고 이전의 위치로 돌아가야 했다.”대약진운동 동안 증가했던, 집단에서 임금노동에 참여하는 여성*의 비율은 대약진운동 이전 수준으로 떨어졌고, 마오주의 가부장제의 이전 구성형태는 대부분 복원되었다.[61]"
1957~1966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과 중국공산당의 대응
1949년 중국혁명부터 오늘날까지 중국의 혼란스러운 역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관료적 명령경제의 강화 또는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과 같이 노동자민중의 희생을 강요한 지배계급의 행위에 맞서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는 점, 그리고 중국공산당 지배계급의 분파마다 때로는 저항을 수용하고, 때로는 이용하고, 때로는 강경하게 탄압하는 등 여러 대응방식이 뒤엉켰다는 점을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 아래 1950년대부터 중국이 개혁개방을 거쳐 시장자본주의로 완전히 전환하기까지,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지배계급의 대응과정을 살펴보자.
1949년 중국혁명은 대중들에게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엄청난 기대를 불러일으켰지만, 토지개혁과 여성의 평등권 등 진보적 조치가 도입되던 몇 년이 지난뒤, 본격적인 관료적 명령경제가 시작됨과 함께 통제가 강화되고 희생이 강요됐다. 노동자, 학생, 농민 등 다양한 사회세력이 이에 대한 저항을 시작했다.
"점증하는 노동자들의 분노는 1956년 초에 실시된 산업의 전면 국유화에 대한 대응으로 산발적인 파업이 일어났을 때 처음 표출되었다. 노동자들은 전반적으로 국유화에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이미 존재하던 국영기업과 비슷한 수준으로 복지혜택과 생활조건이 개선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망했다. 노동자들의 참여권은 더욱 제한되었고, 임금과 주거 등에서 물질적 개선은 “생산의 급속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기대만큼 이루어지지 않았다.
…
작업장에서 사회적 위계질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특히 좌절감을 느꼈다. 프랑수아 지풀루에 따르면 1956년과 1957년 수백 개의 공장에서 발생한 파업은 “대부분 임시직·계약직·서비스직·견습생 등 국영기업의 베테랑 직원에게 부여된 특권을 공유하지 못한 ‘주변부’ 노동자들이 선동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사실상 이중 노동력 시스템을 구축했다. 정규직 노동자는 더 나은 조건을 누렸지만, 임시직·청년·견습생·여성* 노동자는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렸고 때때로 결근과 태업으로 저항했다.[62]"
1957년 시작된 백화제방, 백가쟁명 운동은 노동자들의 파업과 농민폭동, 지식인들의 저항에 대응하기 위한 중국공산당의 유화적 조치였다.
"1957년 2월 27일, 마오쩌둥은 사회 내에서 비판적 토론을 허용하는 “비적대적 모순”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일어난 봉기를 그곳의 공산당이 고립된 탓으로 보고 중국에서 비슷한 사태전개를 막고자 했다. 1957년 4월말 당 정화 캠페인으로 시작된 백화제방·백가쟁명 운동이 1957년 6월까지 6주 동안 지속되었다.[63]"
그러나 이러한 유화적 조치에 따라 시작된 ‘비판적 토론’은, 마오쩌둥이 예상하고 기대했던 선을 넘어갔다.
"중국공산당은 사회적 긴장이 더 이상 고조되는 것을 피하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국공산당 정권에 대한 지지를 더 많이 이끌어내고자 했다. 중국공산당은 비판이 본질적으로 “비적대적”이고 “나쁜” 계급 배경을 가진 간부들의 부패와 같이 공식적으로 제재된 결함을 지적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1957년 5월이 되자 비판은 근본적이고 불만은 예상보다 훨씬 더 깊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예를 들어 입법·사법·행정에서 중국공산당의 역할이 공격받았고, 당은 “중국 국가를 자신의 사유재산처럼 취급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5월 중순, 학생들이 처음으로 대자보, 즉 이후 시위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벽보를 사용했다. 대학 캠퍼스에 부착된 대자보에는 당시까지 8년간의 중국공산당 통치에 대한 매우 비판적인 평가가 담겨 있었다. “관료제에 대한 비판은 개별 관료에 대한 비판을 넘어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갔다.” 비판의 물결은 앞서 언급한 일련의 노동 시위와 맞물려 “1957년 봄까지 불만을 가진 지식인과 학생들이 말하거나 쓴 어떤 것보다 당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되었다.” 통치가 약화될 가능성에 직면하자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반격에 나섰다.[64]"
반격을 위해 중국공산당은 ‘반우파운동’을 개시했다. 대중들의 분노가 ‘일부 관료에 대한 비판’을 넘어 ‘당 권위에 대한 도전’,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백화제방·백가쟁명 운동 과정에서 당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비판이 쏟아지고 노동자들이 더 나은 조건을 위해 투쟁에 나서자,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불만의 물꼬를 정권으로부터 지식인들에게로 돌리기로 결정했다. … 1957년 6월 8일,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지난 몇 주 동안 감히 당을 비판한 사람들에 맞서 싸우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 나중에 발표된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57년과 1958년에 55만 명 이상이 “우파”로 낙인찍혀 비판·공격·강등·해고를 당하거나 심지어 농촌으로 쫓겨났다.[65]"
이와 함께 마오쩌둥은 1958년부터 대약진운동을 추진했다. 대약진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중국의 체제 유지를 위해 서로 다른 노선이 대립했음을 짚을 필요가 있다.
"각 분파는 경제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논쟁의 기본 구도는 엄격한 집단화와 중앙 계획이냐, 아니면 더 부드러운 집단화와 더 많은 노동 인센티브 및 제한된 시장을 혼합한 계획이냐였다. 1958년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이른바 대약진운동이라는 형태로 첫 번째 방향을 추진했다.[66]"
마오쩌둥은 ‘엄격한 집단화와 중앙계획’에 입각한 급속한 공업화를 추구했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에 성공하면서 중국공산당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은 관료적 명령경제가 내재하고 있는 비효율성 때문에 처참하게 실패했다. 특히 농민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농촌 노동력의 상당 부분이 인민공사의 비농업 대약진운동 프로젝트와 도시 산업화에 동원되면서, 필수적인 농업 작업의 상당 부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외에도 불리한 기상 조건, 잘못된 관리, 마을 간부들이 국가계획위원회에 제출한 과장되고 왜곡된 경제 보고서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식량 생산량이 부족해졌다. 도시와 도시노동자들에 대한 식량 공급은 대체로 유지되었지만, 많은 농촌 지역에서는 주민을 먹여 살리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농민들은 곡식을 숨기고 곡물창고를 약탈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농촌 저항으로 대응했다. 대약진운동으로 인한 기근은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지속되었으며, 대부분 농촌에서 수천만 명이 사망했다.[67]"
대약진운동이 실패한 뒤, 이를 추진했던 마오쩌둥은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나야했고, ‘부드러운 집단화와 더 많은 노동 인센티브 및 제한된 시장을 혼합한 계획’을 추구했던 중국공산당 내 보수파가 주도권을 쥐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2진으로 물러나야 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보다 실용적인(또는 보수적인) 그룹이 대약진운동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한 개혁을 조율했다. 1961년 이후, 그들은 바퀴를 어느 정도 뒤로 돌렸다. 인민공사에서 농촌노동자들은 작은 토지를 소유할 권리를 되찾았고, 이는 농업생산량 증가에 도움이 되었다. 도시의 산업화 프로젝트에 동원되었던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농촌으로 돌려보내졌고, 도시 고용은 1,600만 명 이상 감소했다.[68]"
그런데 대약진운동이 관료적 명령경제의 폐해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면서 노동자민중을 희생시켰다면, 보수파가 도입한 새로운 시장친화적 조치들은 시장자본주의와 유사한 방식의 사회적 불평등을 확대시킴으로써 노동자민중을 희생시켰다. 관료적 명령경제든 시장경제의 확대든, 이는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적 조치가 아니었다.
"1960년대 초 산업 생산이 회복되면서 노동단위에서는 임시로 계약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장려되기도 했다. 다양한 새로운 규정이 정규직보다 고용안정성과 복지혜택이 적은 계약직 노동형태를 제도화했다. “1962년부터 1966년 사이에 국가부문에서 정규직 신분을 갖지 못한 노동자의 비율은 8%에서 13%로 증가했다.”[69]"
한편 마오쩌둥 분파는 대약진운동으로 잃어버린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을 희생양을 찾아 숙청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과정에 현실에 불만을 가진 노동자, 농민들이 갖고있던 (중국공산당에 대한) 환상을 동원했다. 마오쩌둥은 1962년부터 ‘사회주의교육운동’(4청운동)이란 이름으로 정적에 맞선 권력 강화 캠페인을 벌였다.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사회주의를 위협하는 (지주나 자본가 같은) 낡은 엘리트들의 유령을 다시 불러냄으로써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중국의 큰 분열은 그들과 지도부 사이가 아니라 대중과 ‘계급의 적’, 즉 1949년 이전에서 유래한 ‘나쁜 요소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설득하고자 했다. 한편 마오와 그의 분파는 자신들이 보기에 점점 더 관료적이고 부패한 또는 당 노선을 따르지 않는 그러므로 “대중적 감시”가 필요한 당·국가 간부를 겨냥한 캠페인을 추진했다.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지속된 사회주의교육운동, 일명 4청운동[四清运动]이 바로 그러한 캠페인이었다.
농촌에서 사회주의교육운동은 빈농과 하층 중농을 동원하여 (과거 사회에서 비롯된 계급의 적으로서) 농촌 간부들과 (대약진운동 실패에 책임이 있는) “주자파”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 이 캠페인은 도시 공장에서도 진행되었는데, (다른 노동단위에서 온) 당 간부들로 구성된 파견 공작팀이 노동자들에게 공장 간부들을 비판하도록 요청했다. “이 캠페인은 산업 노동단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종종 대대적인 지도부 교체로 이어졌다.”
사회주의교육운동 동안 500만 명 이상이 박해를 받았는데, 그 중 다수가 간부들이었다. 처벌로 거의 7만 명이 사망했다. 사회주의교육운동은 “주자파” 간부들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문화대혁명을 예고했다.[70]"
1966~1976년: 문화대혁명
1949년 중국혁명의 지도자로서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중들에게 엄청난 권위를 갖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를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종종 노동자민중을 동원하는 대중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의 열망은 때로 마오쩌둥이 원하는 수준을 넘어갔고, 이 때마다 마오쩌둥은 다시 노동자민중의 운동을 억압했다. 이런 모순된 동학을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이다.
앞서 진행한 ‘사회주의교육운동(4청운동)’으로 마오쩌둥은 시장 도입에 더 우호적이었던 ‘보수파’ 정적들을 충분히 제압하지 못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1966년 문화대혁명을 시작한다.
"사회주의교육운동, 즉 당 간부들로 구성된 공작팀을 인민공사와 도시 노동단위로 파견하는 것은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 그 지지자들이 기대했던 결과, 즉 당·정부·경제관리에서 “주자파”를 견제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권력을 되찾고 정치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다가오는 사회적 대결을 극복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안정시키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 “주자파”로 의심되는 분파를 불신임하고 축출해야 했다. 중국공산당 내부 세력만으로는 이를 쉽게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자신의 명성과 지위, 그리고 많은 도시 청년들의 불만을 이용해 당 외부의 운동을 동원했다. 매우 위험한 것으로 판명될 실력행사였다.[71]"
"1966년 마오쩌둥(毛泽东)이 문화혁명을 일으킨 것은 당내 관료주의 현상이 자본주의 노선을 회복하려는 관료(이른바 주자파 관료 走资派官僚)가 적지 않을 정도로 심각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대규모 상향식 대중운동을 통해 주자파를 당에서 제거하고, 마오쩌둥 개인의 당내 권력집중을 실현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마오쩌둥의 입장에서 대중운동의 의미는 체제개혁이지 체제전복은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문제가 된 것은 체제 자체가 아니라 체제 일부이기 때문에, 대중의 힘으로 이들을 종양 제거 수술처럼 제거하면 체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이것이 마오쩌둥이 일련의 발언에서 대다수 공산당 간부들은 훌륭하고, 주자파 관료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던 이유다.[72]"
문화대혁명은 처음에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 간부의 자녀 등 이른바 ‘붉은 출신배경’을 가진 ‘보황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는 것을 주된 목표로 했다.
"1966년 여름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 내 “주자파”에 대항하는 청년들의 반란을 촉구하면서 홍위병이 창설되었고, 이는 곧 대중운동으로 이어졌다. 도시의 청년실업, 사회질서의 상대적 고정과 신분상승의 어려움, 고착화된 계급구분과 관련된 문제 등의 사회적 요인들이 청년들 사이에서 반란이 빠르게 확대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베이징에 설립된 최초의 홍위병은 대부분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 간부의 자녀들로 구성되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영웅적인” 혁명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세대로서 이들은 가족의 특권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들은 악명 높은 “혈통이론”을 언급하면서, “붉은” 출신배경을 가진 자신들에게 부모를 따라 체제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지도적 간부가 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1966년 8월, “붉은 공포”라고 불리는 시기에, 이들 최초의 홍위병은 “반동적인” (혐의를 받는) 지도자와 지식인뿐만 아니라 많은 청년, 주변부 노동자, 실업자 등 국가가 선언한 모든 종류의 “나쁜” 또는 “검은” 요소와 연결된 주민 전체를 공격했다.[73]"
그러나 이것이 마오쩌둥이 원한 것은 아니었다. 보황파가 겨냥한 ‘검은’ 요소는 당내 ‘주자파’보다, 주변부의 노동자민중을 겨냥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주자파’를 겨냥하기 위해 운동의 방향을 수정하는 조치를 취하는데, 이것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보기에 이 운동은 “검은” 요소를 표적으로 삼음으로써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마오쩌둥의 목표는 류사오치를 중심으로 한 경쟁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1966년 가을,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의 방향을 재조정하여 당 지도부 내 “부르주아 반동 노선”에 대한 공격에 다시 초점을 맞췄다.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은 원치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홍위병에서 배제되고 심지어 홍위병의 공격을 받기도 했던 청년들, 즉 “검은” 계급의 자녀들이 한꺼번에 문화대혁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후 홍위병 운동은 “붉은” 계급 출신으로 중국공산당 간부의 특권을 옹호하는 이들과 “검은” 계급 출신으로 간부들과 그들의 특권을 공격하는 이들로 나뉘었다. 이 갈등은 곧 “보황파”[保皇派]와 “조반파”[造叛派] 간의 갈등으로 변모하여 문화대혁명의 궤적을 형성하고 이후 몇 년 동안 더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74]"
마오쩌둥의 방향전환으로 등장한 ‘조반파’는 (여전히 매우 혼란스러운 요소들을 갖고 있었으나), 자기 특권 유지를 목표로 한 ‘보황파’와는 달리 관료의 특권을 비판했다. 특권이 없는, 중국 국가자본주의 체제에서 더 주변부로 밀려나있던 노동자들이 ‘조반파’의 주요 동력을 구성했다.
"공장에서 최초의 홍위병 조직은 사실상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계급적 배경이 완벽한 노동자로만 구성된, 당 조직의 산물”이었으며, 노동자들의 자율적인 조직화 노력은 계속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1966년 10월과 11월, “조반파” 운동이 도시 작업장으로 확산되었다. 여러 도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진원지는 중국 최대 산업 중심지였던 상하이였다. 젊은 노동자, 견습생, 임시직 노동자(대부분 여성*)들은 조반파 조직을 세우면서, 종종 “공장으로 온” 학생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 학생들은 “신생 조반파 노동자 단체가 요구를 공식화하고, 공장 지도자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하며, 대자보를 만들고, 유인물을 발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반파 노동자들은 또한 대규모 시위를 벌이거나 노동 중단을 조직했다. 그들의 요구에는 물질적 개선과 정규직 고용이 포함되었다. “임시 계약직에 적용되는 이른바 ‘노동자-농민’ 시스템”은 노동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실제로 이러한 조건으로 고용된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영구 고용 상태에 있는 많은 노동자들도 곧 계약직으로 강제 전환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에 저항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75]"
마오쩌둥 분파는 정적인 당내 주자파에 맞서기 위해 조반파의 동력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반파 운동을 주도한 노동자들은 마오쩌둥이 의도했던 범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그가 “스스로가 스스로를 교육하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해방하라”는 대중운동의 구호를 제출한 후 대중의 ‘조반운동’의 발전이 점차 애초 그가 예상한 목표를 훨씬 초과하고 통제될 수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마오쩌둥은 단지 틈을 열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틈을 통해 노동자와 학생, 특히 노동자들이 독립적인 조직처럼 움직이는 급진적인 운동에너지가 분출됐던 것이다. 우이칭(吴一庆)의 연구에 따르면, 1966년 말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조직을 설립하도록 독려하는 호소가 나온 후, 도시에서 일하는 임시직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곧 ‘전국홍색노동자조반총단(全国红色劳动者造反总团)’과 같은 조직들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이런 조직들은 마오쩌둥의 예상대로 이른바 ‘주자파 관료’에 도전하고 비판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차별과 불공정으로 얼룩진 이원화된 노동체제를 비판하며 ‘동일노동 동일임금 동일권리’를 요구했다. 제도적인 고용 차별에 도전하고, 평등을 추구했던 일련의 조직들과 운동들은 문화혁명 지도층에 의해 ‘경제주의’라는 꼬리표를 달고 탄압받았다.[76]"
조반파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 중 가장 급진적인 일부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급진적인 조반파는 마오쩌둥의 언어를 차용하였으나, 점차 중국공산당에 의한 국가통제 강화라는 마오쩌둥의 정치적 의도를 벗어난 수준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마오쩌둥 분파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또한 조반파 운동은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발전시킨 핵심 활동가들을 배출했다. 이들은 사회적 불만과 차별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했으며, 일부는 중국을 계급 사회로,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붉은 부르주아지”로 묘사하기도 했다. 존 하사드 등에 따르면, “문화대혁명 동안 … 중국공산당이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고 그 특권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새로운 착취적 지배계급이라는 생각이 운동의 더 급진적인 참여자들 사이에서 일반화되었다.” 예를 들어 베이징의 젊은 활동가 유루크와 후난성의 대중조직 셩우롄[省无联:성무련, 호남성무산계급혁명파대연합위원회]의 양시광 주변 그룹에서 제기한 이러한 급진적인 비판은 홍위병과 조반파를 넘어서서 널리 토론되었다. 이 급진주의자들이 권위주의적 중국 사회주의의 대안을 설명하기 위해 언급했던 주요 모델은 파리 코뮌이었다. 이들은 관료화에 대한 마오쩌둥의 비판을 활용했다(마오쩌둥의 비판은 원래 소련의 수정주의와 그가 “주자파”라고 부른 중국공산당 내 특정 개인과 집단을 겨냥했다). 일반적으로 문화대혁명 조반파는 마오쩌둥의 권위와 자신들이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독립된 조직을 결성할 수 있도록 한 그의 역할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 특정 급진 조반파들은 마오쩌둥이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논쟁을 전개하여 사회주의 계급 위계구조 전반에 반대하면서 “붉은 자본가들”에 의한 사회적 배제와 경제적 착취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
1966년 말과 1967년 초, 조반파의 행동이 당 조직을 파괴하고, 작업장으로 넘어가 “경제주의 바람”을 일으키며 경제에 심각한 해를 끼치자,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는 이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조반파를 분열시키고, 조반파의 일부를 포섭하고, 남은 조반파를 무력화하기 위해 인민해방군을 이용했다. 1970년대 초 조반파에 대한 숙청이 계속되는 동안 주민 내부의 환멸과 불만이 커졌다. 마오주의의 정치적 고갈을 보여주는 명백한 징후였다.[77]"
"많은 노동자와 학생들은 ‘관료주의’나 ‘주자파’에 대한 마오쩌둥의 비판을 따라 계속해서 고민했고, 결국에는 마오쩌둥보다 더 급진적이고 심각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들 노동자와 학생들이 보기에 마오쩌둥은 관료주의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가 내린 처방은 틀린 것이었다. 관료주의의 근원은 특정 관료 개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일당독재체제에 있었다. 이런 체제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관료주의를 완전히 타파하려면 일당독재의 폐지를 통해 노동자들이 진짜 민주적인 방식에 따라 스스로 생산수단을 통제해야 했다. 이러한 사고 방향의 가장 대표적인 논의는 후난성 무산계급혁명파 대연합위원회(湖南省无产阶级革命派大联合委员会)에서 나왔다. 이와 같은 논술에는 ‘사회주의민주’에 대한 마르크스 본인의 논술은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조반파’운동은 마오쩌둥이 설정한 어젠다를 넘어 문화혁명 지도부의 권위에 분명히 도전했으며, 체제변혁과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부르짖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마오쩌둥과 문화혁명 지도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8년부터 마오쩌둥은 공개적으로 군부의 개입을 허용하고, ‘조반파’를 대대적으로 진압했다. 월더의 연구에 따르면, 문화혁명으로 인한 사상자 절대다수는 1968년 이후 관방이 조반파에 가한 탄압으로부터 발생한 것이었다. 사상자 숫자를 통해 볼 때,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식 탄압 사건이었다. 일부 도시에서는 진압에 나선 군대와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그 결과는 참패였다. 이러한 탄압과 함께 관방은 조반파의 ‘사회주의민주’ 논술을 무정부주의이자 트로츠키주의라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78]"
1967년 초에는 조반파 운동세력의 일부가 상하이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상하이코뮌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마오쩌둥은 일부 세력에 대한 포섭과, 다른 세력에 대한 탄압을 혼합하며 상하이코뮌을 무력화하고 ‘혁명위원회’라는 이름의 기구로 중국공산당의 통제를 회복했다.
"2월 말 상하이에서, 그들은 상하이 코뮌을 새로운 통치기구인 ‘혁명위원회’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혁명위원회는 인민해방군 장교, 기존 당 간부, 협력적인 조반파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이른바 ‘위대한 동맹’을 통해 구성되었으며, 이후 다른 지역에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한 모델로 사용되었다. 인민해방군 장교와 당 간부들이 위원회를 지배한 반면 조반파 지도자들은 대부분 조직이 강제 해체된 후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했다.[79]"
전국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급진적 조반파를 무력화시킨 마오쩌둥은 조반파운동을 진압하는데 성공한다.
"인민해방군과 혁명위원회는 전국에서 문화혁명 활동가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조반파에 대한 대규모 체포, 농촌으로 하방, 살해 등이 전개되었다.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진행된 ‘계급대오 정화’ 캠페인은 공식적으로 당내 반역자·간첩·“주자파”와 “검은” 계급범주들[黑五类:흑오류=지주+부농+반혁명+악질분자+우파]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1970년의 ‘일타삼반운동’[반혁명활동을 타격하고 뇌물횡령·폭리취득·사치낭비에 반대하는 운동], 1971년의 ‘5·16요소 반대운동’ 등 조반파에 맞선 다른 캠페인들이 이어졌다.
사실 이 때가 가장 유혈이 낭자했던 시기였다: 다니엘 리즈에 따르면 “사상자의 약 75%, 심지어 정치적 박해의 90%가 문화대혁명의 대중적 단계가 끝난 후, 즉 1968년 중반 이후에 일어났다.”
폭력적인 숙청·처벌·소탕의 주요 표적 중에는 조반파 운동 안에서 사회주의 계급 체제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정식화했던 흐름들이 있었다. 중국공산당 정권은 (후난성의 조반파 동맹인 셩우롄이 정식화한 것과 같은) 이러한 비판을 “독초”라고 불렀다. 반란이 진압된 후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당과 국가기관 내부에서 정치적으로 위험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려고 했다. 많은 간부들이 “사상 개조”를 위해 농촌의 특정 “학교”로 보내지거나 공장에서 육체노동을 해야 했다.[80]"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 시작한 대중동원 캠페인이었다. 그러나 한번 들고 일어선 대중은 마오쩌둥이 원하는 수준으로 자신의 열망을 제한하지 않았다. 노동자민중이 처한 착취와 억압의 현실에 맞선 저항적 요구는, 대중적 에너지 속에서 생활조건의 개선을 넘어 노동자 민주주의와 노동자 통제라는 정치적 요구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조반파 운동의 급진적 부류는 이러한 경향을 대표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중국공산당의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와 충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반파는 결국 사상적으로 마오쩌둥을 넘어서지 못한 한계를 갖고 있었고, 이 점에서 지배계급의 탄압에 취약성을 드러냈다.
"마오쩌둥이 자신의 강력한 지위를 활용하지 않았다면, 인민해방군이 대규모 조반파 조직들을 진압하고 조반파 지도자들을 새로운 정부 기관으로 포섭하는 일이 그렇게 빨리 그렇게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반파들조차 마오쩌둥을 유일하고 신격화된 지도자로 여기고 마오쩌둥 숭배에 동참했다는 사실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마오쩌둥이 조반파에게 등을 돌렸을 때 조반파들은 “왕에게 등을 돌리고” 공격에 저항하며 대안을 만들어 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조반파 세력들은 서로 지속적인 긴박한 충돌에 빠지면서, 즉 분열되고 극단적인 폭력의 트라우마에 휩싸이면서, 기존 사회주의 계급 위계질서를 넘어서는 보다 급진적인 관점을 제시하지 못했다. 조반파는 중국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공격을 넘어 독립적인 조직을 결성하는 단계로 나아갔지만, 당 국가 개념을 극복하기보다는 어떤 조반파 조직이 새로운 당 국가의 핵심을 형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파벌 분쟁을 벌였다.[81]"
큰 틀에서 1971년에 조반파 운동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그 뒤에도 1970년대 동안 권력에 저항하는 대중봉기는 재차 반복되었다. 노동자들은 대개 마오쩌둥의 구호와 언어를 빌려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했다. 중국공산당 지배계급은 그럴 때마다 저항을 탄압했다.
중국공산당의 덩샤오핑 분파는 좌파를 비판하며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대중운동의 일부를 포섭하고, 일부는 탄압하면서, 결국 ‘좌파 4인방’을 체포함과 함께 중국공산당 권력을 잡는데 성공했다. 권력장악 이후에 덩샤오핑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것 같은 대중운동을 탄압했다.
"덩샤오핑은 처음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구 체제에 대한 비판과 변화에 대한 요구를 환영했다. 그의 분파는 이러한 비판을 이용해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에서 개혁 노선을 추진했고, 권력을 장악했으며,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지역 풀뿌리 단체들과 비공식 저널들이 공고해지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1980년 9월부터 노동자 소요가 증가하면서 독립 노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덩샤오핑은 이것이 중국공산당 정권에 미치는 위험을 깨닫고 이 운동과 그 급진적 부분을 “파괴적이고 심지어 위협적”이라고 간주했다.” 사실, “당은 반체제 출판운동, 광범위한 산업소요,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 사이의 연결이 갖는 위험을 인식하는 데 있어 ‘민주주의 벽’ 활동가들보다 앞서 있었다.” 덩샤오핑은 인민은 “‘4대 기본 원칙’을 따라야 하며, 어떤 민주주의 운동도 사회주의 노선,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 마르크스-레닌-모택동 사상과 모순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모든 반대 활동을 제한했다. 그 후 대자보가 제한되고, 운동이 점차 침묵했으며, 많은 활동가들이 체포당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총리가 사망하자 (일부에서 예상했던 덩샤오핑이 아니라) 화궈펑이 총리 권한대행이 되었다. 덩샤오핑은 이후 그의 경제 변화 계획에 반대하는 좌파의 마지막 캠페인으로 두 번째 숙청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6년 9월 마오가 사망한 후 전세가 다시 바뀌었다. 1976년 10월 6일 좌파 4인방과 일부 지지자들이 체포되었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일련의 숙청을 통해 수백만 명의 급진파 또는 좌파가 국가 행정부, 대학, 노동단위에서 직위를 박탈당했다. “수천 명의 전 조반파 지도자와 활동가들이 투옥되었고, 그 중 상당수는 장기간 수감되었다.”[82]"
덩샤오핑의 집권은 지배계급 내 분파 간 투쟁의 결과였다. 본질적으로 중국공산당 좌파든, 보수파든 지배계급의 서로 다른 일부였다. 개혁개방 등 정책방향을 둘러싼 이견은 있었지만, 중국공산당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무엇이 더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한 견해 대립이었을 뿐, 서로 다른 분파 간에 본질적인 게급적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지배계급 내 권력투쟁에 불과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수사가 동원됐다.
"4인방에게는 그들이 여러 해 동안 제국주의의 첩자 노릇을 했고 마오쩌둥과 그가 주장하는 모든 것에 격렬하게 반대했으며, 문화 혁명 당시 저질러진 모든 죄악에 책임이 있다는 지금까지도 따라붙는 의례적인 비판이 가해졌다. 4인방이 만들어 자신의 정적들을 공격하는 데 이용했던 선전기구가 이제는 바로 자신들을 향해 정확히 똑같은 거짓말과 욕설을 퍼부어댔다. 어느 캐나다 마오쩌둥주의자는 4인방의 체포를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시인했다.
“공식 기관지 <<인민일보>>는 불과 몇 달 전에 덩샤오핑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했던 언어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4인방과 그들의 범죄를 묘사했다. 때때로 그러한 기사들이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이름만 적절하게 바꿔 기입해 그대로 다시 실렸다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83]"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 분파는 관료적 명령경제에 기반한 국가자본주의로는 더 이상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기존의 형식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억압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그들까지 공격할 것이었다. 덩샤오핑 분파는 이에 조심스럽게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서 덩샤오핑과 마오쩌둥 사이에 분명한 단절선이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짚을 필요가 있다. 미국과의 관계개선과 세계시장 자본주의로의 통합은 1970년대 초부터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 과정은 마오쩌둥의 감독 아래 진행되었다. 덩샤오핑은 1978년 개혁개방 선언으로 이를 가속화했지만, 그 출발점은 이미 마오쩌둥 권력 시기부터 예정돼있었다.
그 배경에는 1950년대부터 이어져온 중소분쟁이 있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과의 평화공존 노선으로 향하며, 중국은 더 이상 소련에 의존할 수 없다는 위협을 느꼈다. 중국은 그 뒤로 소련에 의존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길을 도모했는데, 그러한 모색의 끝에 중국은 결국 소련보다 적극적으로 미국의 손을 잡는 길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도 우리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각자 분투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을 볼 수 있을 뿐, 사회주의적 대의를 찾아볼 수 없다.
"1953년 소련 지도자 요셉 스탈린이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이른바 탈스탈린화라는 정치적·제도적 개혁을 시작했다. 중국공산당 정권은 짜증이 났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중국에서도 비슷한 “탈마오화”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 소련 정권이 냉전의 적대국인 미국과의 “평화공존”이라는 개념에 따라 외교 정책을 재편하자 중국공산당 정권은 더욱 소외되었으며, 대신 반제국주의 입장을 고수했다. 1940년대 후반 이후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많은 지역이 식민지에서 벗어나면서 세계 지형이 바뀌었다. 중국공산당 정권은 사회주의 국제주의 담론과 반식민주의 ‘민족해방’ 투쟁을 내세워 새로 형성된 민족국가들 사이에서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1955년 (민족국가들의) 비동맹운동 반둥회의에 참여했는데, 이는 이미 소련과 분리되어 “제3의 길”을 가겠다는 신호였다. 또한 1956년 사회주의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일어난 대중 봉기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사회관계와 계급정치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고 소련과 중국 간의 불협화음을 더욱 심화시켰다.
대약진운동은 중국 정권이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려는 시도로도 볼 수 있었다. 소련과 중국의 최종적인 관계 파탄은 1960년에 이루어졌고, 이는 세계의 세력균형에 변화를 가져왔다. 소련과 멀어지면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자신만의 ‘일국 사회주의’ 모델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1964년, 중국은 첫 번째 원자폭탄 실험을 통해 핵보유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같은 해, 중국은 1970년대까지 지속될 이른바 제3전선 건설[三线建设:삼선건설]이라는 대규모 산업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여기에는 중요한 산업 클러스터를 쓰촨성과 같은 내륙 지역, 즉 미국의 공격 위협이 있는 동해안으로부터 또한 소련의 침략 가능성이 있는 북쪽 국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 보수파는 지정학적 힘의 균형을 바꾸고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로 재통합하는 첫 단계로 볼 수 있는 결정을 밀어붙였다. 10년간 미국과 소련 정권의 양면 위협에 시달리며 막대한 자원을 동원해 방어 조치를 취해야 했던 중국공산당 정권은 적들 중 한 쪽의 편에 서기로 결정했다.
다른 한편에서, 1970년대 초 미국 정부 대표들과의 비공식적인 이른바 탁구 외교는 미국과의 화해의 길을 열었다. 1971년 11월 중국은 유엔에 가입하고 대만을 대신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얻었다. 그리고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중국공산당 정권은 당시 이미 예견된 “미국의 베트남전쟁 패배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미국 정부는 아시아 전략을 재계산해야 했고, 이는 중국공산당 지도부에게 “중국의 고립을 완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보수파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중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현대 기술에 접근하고 서방 국가와의 무역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중국은 이전의 자립 정책에서 벗어나 1972년 선진 산업국으로부터 산업 기술을 수입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화학비료와 인공섬유 생산을 위한 공장이었다. “1971년 중국의 총 대외무역은 GDP의 5%로 최저점을 기록했지만 1975년에는 대외무역이 세 배로 증가했다. …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지원을 받아 경제정책에서 큰 변화를 시작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 정권은 1960년대 후반 프롤레타리아트의 공격과 사회주의 국가가 거의 붕괴될 뻔한 위기에서 살아남았지만 장기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를 꾀해야 했다. 중국공산당 정권은 1970년대 초부터 경제개혁을 도입하고 외교 정책을 변경했다. 미국과의 화해는 외부 압력을 줄이고 해외 자원과 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1971년부터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까지는 중국 사회주의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분명하지 않았지만, 중국을 자본주의로 이끄는 전환기적 과정이 시작되었다.[84]"
1978년: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 시기 이전에 추진하던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을 다시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 과정은 농촌에서 집단농장을 해체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농촌에서 시장자본주의 요소가 도입되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이주노동자’가 돼 도시로 유입됐다.
"변화의 속도는 놀라웠다. 1984년까지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민공사 제도가 폐지되었다. 새로운 가족 경작지는 여전히 소규모였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생산성이 증가했고 농업 생산과 농민 소득도 증가했다. (집단적 토지소유 아래서) 가족 경작의 복원과 이러한 생산성 및 소득 증가는 잉여 노동력을 창출했다. 이 노동력은 (농촌 집단 제조업으로부터 성장한) 향진기업, 경제특구 내 새로운 외국인 또는 중국인 소유 공장, 확장하는 도시의 건설 현장, (가사노동이나 성노동 같은) 도시서비스 부문에 소요되었다.[85]"
농촌 출신 이주노동자들은 해외직접투자 확대와 연결되어, ‘경제특구’의 값싼 노동력이 되었다.
"농촌출신 이주민들은 마을의 열악한 생활환경을 벗어나 더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았다. 국가는 필요한 법적 변화를 제공했다. 후커우 규정이 더욱 자유화되어 더 많은 농촌 주민들이 이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중 다수가 경제특구의 새로운 산업 클러스터로 이주했다. 1980년 남부 광둥성과 푸젠성에 네 개의 경제특구가 설립되어 홍콩을 비롯한 외국 투자자들이 중국 기업과의 합작 회사를 제안받았다. 1984년에는 동부 연안 14개 도시가 경제특구 지위를 부여받았는데, 이번에는 외국 기업이 전액 출자한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해외직접투자(FDI)의 GDP 비중은 1%를 넘은 적이 없었다. 1992년 덩샤오핑의 악명 높은 “남부순방” 이후 중국은 외국 투자자들에게 더욱 개방되었고, 해외직접투자의 GDP 비중은 5~6%로 증가했다. 흔히 ‘농민공’[农民工:농민공]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이주자들은 농촌 후커우를 유지해야 했으며, 경제특구 공장들과 건설, 식당, 성산업, 가사서비스 등 도시의 저임금 부문에서 일했다.[86]"
도시에서는 국영기업이 민영화되거나, 국가통제가 완화됐다. 이 과정에서 일부 노동자들이 지난 국가자본주의 시기에 누리던 고용보장(‘철밥통’)과 같은 권리들이 약화되거나 사라졌다.
"정권은 (특정) 노동단위에서 제공하는 평생 고용과 복지를 “철밥통”이라고 부르면서, 이는 “제도의 왜곡”이자 “사회주의의 본질적 특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도시 노동단위는 평생 고용보장으로 인해 해고할 수 없기 때문에 비효율적이고 인력과잉이라고 의심받았다. “티에판완”[铁饭碗:철반완, 철밥통]과 “다구어판”[大锅饭:대과반, 큰 밥솥으로 상징되는 평등주의]에 반대하는 캠페인은 이들을 문화대혁명의 좌편향 및 4인방의 극단주의 혐의와 연결시켰다. 아니타 챈에 따르면, “대중매체를 지배한 이러한 비판들은 국가의 부가 근본적으로 재분배되는 결정적인 시기에 공평과 사회적 정의에 대한 모든 주장을 무력화시켰다.”
기획부처와 기업이 점차 분리되었고, 더 많은 시장이 도입·확장되었으며, 국영기업에 대한 국가계획이 더욱 완화되어 이윤세를 납부하면서 더 많은 이윤을 보유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82년에는 헌법에서 파업권을 삭제하고 1984년에는 공장장 책임제와 같은 산업 개혁을 추진했다. 이 제도는 노동단위 경영진의 역할을 강화하고, 신규 국영기업 노동자에 대한 고용보장과 복지혜택을 약화시켰으며, 더욱 강도 높은 테일러주의 노동관행을 도입했다. 1986년 신규 채용자를 위한 노동력 배분은 기간제 노동계약 제도로 대체되었고, 산업 기업에서 계약직과 임시직 노동자의 비율이 급격히 증가했다. “1976~1984년 약 14~15%로 꾸준히 유지되던 비율이 1989년에는 26%로 치솟았다.”[87]"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 과정에서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보장하던 교육, 의료 등 복지제도가 해체됐다. 생존은 점점 더 온전히 개별 가정(또는 개인)의 몫이 되었다. 이러한 전환과정에서 여성들은 더욱 큰 피해를 입었다.
"1978년 이후 개혁개방 정책과 집단농장 폐지로 집단이 제공하던 교육·의료를 비롯한 사회서비스 분야의 많은 복지구조가 폐지되었다. 이는 “농촌 가정이 다시 한 번 자녀를 일종의 노후보장 시스템으로 간주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이에 대응하여 국가는 인구 증가를 제한하기 위해 더욱 가혹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악명 높은 한 자녀 정책이 시작됐다. 이 정책에 따라 대부분의 여성*은 자녀를 한 명만 낳아야 했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처벌을 받아 강제 낙태나 불임 수술을 받거나 벌금을 내야 하거나 직장을 잃어야 했다.
이와 같은 여성의 신체와 재생산에 대한 통제 강화와 함께, 여성성에 대한 재정의, 성매매와 첩의 부활 등 다른 변화도 있었다. 다이 진화에 따르면, 1980년대부터 여성*은 “희생”되었고 계급 분화 과정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이 다시 쓰였다. 새로운 노동시장은 점점 더 성별로 분리되었고,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간 소득 격차가 확대되었다. 여성*은 다시 한 번 (중국공산당 정권이 작업장에서 그들을 필요로 하는 장소·시간·방법에 따라) “집으로 돌아가라”거나 임금노동을 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초에는 공식 캠페인에서 도시 여성*에게 “‘집으로 돌아가라’(후이지아[回家:회가])고 요청했다. … 당시 천만 명이 넘는 ‘농촌에서 돌아온 청년’이 도시 실업률을 증가시켰고, 여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가면 실업률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심지어 여성*들은 도시 노동단위를 떠나 “다시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는 요청까지 받았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주 여성*들은 점점 더 임금노동에 투입되어 향진기업, 외자기업, 도시서비스산업, 가정에서 착취당했다.[88]"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은 지배계급이 쓰는 수사도 변화시켰다. 관료적 명령경제 하에서의 중국공산당은 스탈린 치하 공산당이 그러했듯이,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의 수사를 활용했다.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 수사를 활용했지만,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과 함께 계급투쟁적 요소는 선택적으로 삭제됐고, 민족주의적 수사가 더욱 부각되었다.
"중국공산당 간부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을 동원하는 데 공식적으로 사용되던 계급투쟁 수사들이 1980년대를 거치며 점차 폐기되었다. 사회주의·마오주의 신화 가운데 중국공산당 통치를 정당화하기에 여전히 적합한 부분은 유지되었는데, 민족해방의 영웅적 이야기들, 중국의 성공적인 통일, 마오쩌둥과 그의 “사상”, 중국 사회주의에 대한 변형된 서사 등이었다. 반면 계급, 계급갈등, 대중투쟁 등 잠재적으로 전복적인 개념에 대한 전투적인 언급은 폐기되었다."
1989년: 천안문항쟁
천안문항쟁은 개혁개방 과정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사건이자, 중국공산당이 이를 진압하는데 성공하며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완수하는 과정이었다.
개혁개방을 통해 노동자들은 생활조건의 개선과 민주주의 확대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는 곧 실망으로 뒤바뀌었다.
"도시노동자들은 개혁개방이 더 많은 개선을 가져올 것이라는 높은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에도 경제는 여전히 취약했고, 새로운 시장과 가격 정책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증가하여 노동자들의 임금이 평가절하되었다. 고용불안이 커지고 노동단위의 노동관계가 변화하면서 노동 규율위반이 증가했다. 사회주의 경영진과 국가 관리들은 (1988년 기업법에 의해 더욱 강화된) 새로운 권한을 이용해 국가 재산을 수탈했고, 간부들의 부패도 증가했다.
노동자들은 “점점 더 자신을 고용된 노동자에 불과하다, 또는 심지어 기계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정리해고된 사람들 중 일부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서, 노동자들은 고용불안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또한 “자신들의 생활수준이 정체되거나 하락하는 동안 공공연하게 펼쳐지는 공직 부패”에 혐오감을 느꼈다. 기업 경영진에 반대하면서, 노동자들은 결국 “불만을 표현하고 해결하는 데서 비효율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공식 채널을 외면”하고 파업과 다른 형태의 작업장 저항에 점점 더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89]"
학생들 또한 개혁개방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확대를 기대했다. 학생들은 천안문 항쟁을 시작한 주요한 주체였다. 그러나 이후 살펴보겠지만, 천안문 항쟁에 참여한 학생과 노동자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존재했다. 천안문 항쟁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986년, 학생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1986년 12월, 허페이 시에서 학생 시위가 처음으로 일어났다. 운동은 “인민대표대회에 자신들의 후보를 직접 추천할 자유의 부재를 둘러싼 학생들의 불만”에서 촉발되었다. 이후 우한, 상하이, 베이징, 톈진, 난징, 쿤밍, 항저우, 쑤저우, 광저우 등 다른 도시로 퍼져나갔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위는 소규모로 진행되었지만 상하이와 베이징에서는 수만 명이 모였다. 캠퍼스 환경부터 개혁 과정의 느린 속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가 학생들의 시위에서 제기되었다. 시위 중에 외친 구호와 대자보·전단지에 적힌 구호는 민주주의 확대를 촉구하고 권위주의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그다지 대결적이지 않았고, 시위 학생들은 일부 지방 정부와 협상을 시작하기도 했다. 시위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9년 시위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은 1986년 투쟁의 경험을 토대로 삼았다.[90]"
학생들의 시위를 접한 중국공산당 지배계급은 고민에 빠졌다. 학생시위의 주류는 개혁개방에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대체로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에 따른 권위주의에 반대하였고, 서구식 민주주의(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도입하길 원했다. 지배계급은 기본적으로 개혁개방을 계속 추진해나간다는 점에서는 학생들과 생각이 일치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의 (리펑을 비롯한) 보수파는 ‘민주주의의 확대’가 자신들의 권력에 해가될까 우려했다. 반면에 (후야오방을 비롯한) 개혁파는 좀 더 적극적으로 민주주의적 개혁을 추진하길 원했다.
지배계급 분파 간의 입장 차이는 학생들이 일으킨 천안문 항쟁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났다. 개혁파는 학생들을 설득하는 방향을 취했으나, 보수파는 항쟁을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강경탄압하는 쪽을 택했다.
"1986년, 개혁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를 둘러싼 중앙 정부 내부의 “보수파”와 “개혁파” 간의 갈등은 학생들의 시위와 그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더욱 심화되었다. 앞서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여러 분파갈등과 마찬가지로, 보수파와 개혁파는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이 아니었다. 줄리아 퀑에 따르면, 두 분파 모두 1970년대 중반에 채택된 개혁 노선을 선호했다. “존재했던 차이는 변화의 속도와, 그리고 중국이 자본주의에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취해야 할 예방 조치와 더 관련이 있었다.[91]”
결국 정권은 더 점진적인 접근을 선택했는데, 부분적으로는 덩샤오핑이 보수파의 편에 섰기 때문이었다. 1987년, 개혁파 후야오방이 실각했다. 그는 민주적 개혁에 대한 보다 개방적인 접근을 선호했고 중국공산당 총서기직을 사임해야만 했다. 새로 총서기가 된 자오쯔양은 다가오는 투쟁의 전개과정에서 양면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92]"
천안문 항쟁은 개혁파였던 후야오방의 죽음을 계기로 시작됐다. 이는 학생들이 ‘자유주의자’인 후야오방에 대해 갖고 있던 환상과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4월 15일 후야오방의 죽음이 불씨가 됐다. 후야오방은 1980년 대 초의 여러 정치 개혁을 이룬 장본인이며, 1986년에 학생들의 항의시위가 있은 뒤 축출되자 자유주의자로서 그의 이미지는 더욱 높아졌다. 그가 정치국 회의에서 보수파(특히 리펑 총리)와 논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문이 학원가에 급속히 확산됐다. 이튿날 학생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들어서 광장 한가운데 있는 ‘인민의 영웅’ 탑에 화환을 바치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연사들의 연설을 들었다.
그 뒤 이틀 동안에 청중이 수백 명에서 수천 명으로, 수천 명이 수만 명으로(노동자의 증가도 포함해) 늘어갔다. 연사들은 이제 단순히 후야오방을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부에 대한 정치적 요구, 즉 민주 선거,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관료 내부의 부패 및 족벌주의의 종식 등의 요구를 내걸기까지 했다.[93]"
천안문 항쟁은 학생들이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노동자들이 시위에 대거 동참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시위에 참여하면서 자주적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베이징 노동자 자치연합회‘(北京工人自治联合会, 이하 ‘공자련’)의 구성으로 나타났다.
"’신화문 사건‘(4월 20일 학생과 무장경찰들이 중난하이 신화문 앞에서 충돌한 사건) 이후 경찰이 학생들을 거칠게 다룬 것에 격노한 소수의 노동자들은 하나의 조직을 만들기로 결의한다. 이것이 ‘공자련’의 전신이다. 또한 ‘공자련’의 성립은 ’베이징 대학생 자치연합회‘(고자련)보다 며칠 빠르기도 했다.[94]"
4~5월 천안문 항쟁의 초기국면은 학생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학생들의 운동이 수그러들었던 반면, 노동자들이 점점 더 시위의 주요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공자련’은 그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조성한 비공식 조직일 뿐, 아무런 공개 활동도, 조직 구조도 갖추지 못했으며, 그 성원들 역시 서로 간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다. 4월, 운동의 리듬은 줄곧 학생들에 의해 장악돼 있었다. 4월 17일 천안문 광장 행진과 그에 따른 ‘신화문 사건’부터 4월 22일 후야오방 장례 당일 행진, 그리고 4월 27일 <인민일보>의 4‧26 사설에 항의하는 10만 대학생 행진, 최종적으로 5월 4일 보다 큰 규모의 5‧4운동 기념 행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시위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에 의해 조직된 것이었다.
하지만 5월 4일 이후 학생운동 흐름은 수그러들었다. 대다수 학생들은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고, 운동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했다. 많은 학생들은 동맹휴업을 끝냈다. 운동이 정체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곤경 속에서 일부 분교의 급진적 학생들이 단식 투쟁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기회를 빌어 참여 열의를 지속시켜나가고, 운동을 새로운 단계로 고조시키길 바랬다. 이런 의미에서 단식에 동참한 학생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확실히 실현했다. 5월 13일 수백 명의 학생들이 단식을 시작한 첫날, 천안문 광장에 모인 시위 참여자 수는 30만 명에 다다랐고, 운동이 시작된 이래 최대였다.
단식이 시작되면서 이 운동의 방향은 의의에 있어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대다수 학생들의 참여 열정은 비록 단기간 내 다시 점화되었지만, 여전히 쇠락이 계속되는 것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5월 13일 후, 학생들의 참여는 전반적으로 끊임없이 하락했고, 점차 패색을 띄었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학생들의 단식 투쟁 이전에 아직 보이지 않았던 노동자와 시민들의 참여가 촉발됐다. 평범한 노동자들의 열정은 참여자 숫자에서만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들 자신의 시위 행진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플래카드와 표어 등을 만들어내는 것에서도 드러났다. 노동자들은 점차 운동의 주력군이 됐다. 노동자들이 운동에 대규모로 참여하도록 자극한 것은 단식 학생들에 대한 소박한 동정심도 있었고, 정부가 단식 학생들의 면전에서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도덕적인 의분도 있었다. 내가 만난 한 노동자 시위 참여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그저 “정부가 이렇게 학생들을 농락하는 건 너무 심하지 않나”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나아가 노동자 참여자 수의 폭증으로 ‘공자련’은 5월 중순 경 공개활동을 시작했고, 대규모로 회원들을 모집했다.[95]"
4월 초 작은 조직에 불과하던 공자련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5월 20일 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진압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계엄령 앞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조직화했고, 군인들을 무장해제시키며 혁명적 잠재력을 드러냈다.
"노동자들을 더욱 급진화시킨 것은 오히려 5월 20일 계엄령의 선포였다. 군대가 위풍당당하게 사면팔방에서 베이징 시내로 들어오고 있을 때 무수한 노동자와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도시 외곽의 각지로 가서 군대의 도시 진입을 막으려 했다. 그들은 인벽을 세우고, 바리케이트를 쌓아 군대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저지했다. 그들은 사병들에게 음식과 보급품을 주었고, 사병들과 함께 우의와 신의를 구축했다. 마음을 움직이고, 이치로 설명하여 사병들에게 무기를 내려놓게 했다. 다시 말해 계엄이 시작되고 정세의 위험 정도가 매우 크게 증가하던 시기에, 감히 국가폭력장치에 가장 강력하게 맞서고 교섭했던 이들은 학생이 아니라, 노동자들이었다. 그렇게 노동자들은 확실히 잠깐 동안의 승리를 쟁취했다. 즉, 인민해방군의 도시 진입의 발걸음은 저지됐다.
역사학자 우인화는 『천안문에서의 잔혹한 진압』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1989년 민중 항쟁에서 가장 도덕적인 용기를 가졌고, 가장 참혹한 희생을 치렀던 이들은 학생도, 지식계 인사도 아니었다. 그것은 베이징시의 노동자 형제자매와 시민들이었다. 천안문 광장을 지키고, 천안문 광장에서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내내 온몸을 바쳐 발톱까지 무장한 해방군 계엄부대를 막고 있었다. 피흘려 싸웠고, 목숨을 던져 앞으로 돌진했다.”
독일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빌리자면, 노동자계급의 투쟁의식은 투쟁 과정에서 끊임없이 배양된다. 6‧4운동도 이러한 점을 입증했다. 군의 도시 진입을 막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점차적으로 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내포한 거대한 역량을 깨달았다. 이는 전무후무한 자아 해방이었다. ‘자기 조직화’의 물결이 일자, 파도가 몰아쳤다. 앤드류 왈더와 공샤오샤가 제공한 데이터에 따르면, 5월 중순부터 공자련의 성원수가 폭증하기 시작했고, 6월 초순에 이르러선 이미 2만 명에 다다랐다. 이와 동시에 기타 각양각색의 노동자 조직들도 우후죽순으로 나타났다.
조직의 발전은 행동의 급진화를 가져왔다. 노동자들은 군부의 움직임을 적시에 관찰하고 전달하기 위해, 동시에 도시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군부에 탄압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규찰대(纠察队)’, ‘결사대(敢死队)’ 등 자생적 민병대와 유사한 조직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앤드류 G. 월더(Andrew G. Walder)와 공사샤(龚小夏, Sasha Gong)의 논문에서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인터뷰한 한 6.4운동 경험자는 노동자들이 군 차량을 막기 시작한 지 일주일 후, 장안거리(长安街)[베이징 도심을 동서로 관통하는 대로] 서향선 북측(무시디木樨地, 군사박물관 북측)의 위탄(月坛)과 간자커우(甘家口) 일대에서만 10여 개의 노동자 규찰대가 활동했다고 회상했다. 이들 규찰대는 3교대 또는 4교대로 근무하며 사구(社区)와 골목(街道)의 상황을 관찰하고 질서유지를 지원했다. 내가 인터뷰한 또 다른 6.4운동 경험자는 시위 당시 베이징은 거의 노동자와 시민이 자치하는 도시였다고 말했다. 이는 1917년 2월과 10월 혁명이 한창이던 시기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무장조직을 설립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동시에 노동자들은 더 많은 거리에서 토치카(堡垒)와 바리케이드를 쌓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공장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파업이나 태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바오푸(鮑彤)가 정리한 <리펑의 6.4일기>에 따르면, 5월 말 수도제철소(首都钢铁厂) 노동자 10만 명이 파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중국공산당 수뇌부는 혼돈에 빠졌다. 당시 수도제철소는 베이징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상징적인 공업기업 중 하나로, 이곳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면 도시 전체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공자련은 이미 “총파업을 주비하라(筹备发起总罢工)”라는 구호를 내걸고, 공장 간 연계를 통한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발적 무장과 자기조직화(自我组织), 파업 등 행동들은 시위, 행진, 점거와 의미가 다르다. 후자의 의의는 주로 ‘자기 표현’이지만, 전자의 행동들은 본질적으로 ‘스스로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것’, 즉 일상생활에서의 생산을 통제하고, 사회를 관리할 수 있는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시위·퍼레이드·점거보다 훨씬 급진적인 셈이다. 6·4운동이 5월 말과 6월 초로 발전하면서 학생운동은 한계에 부딪혀 규모가 줄어들었고,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반해 노동자운동은 고도화된 자기조직과 동원 속에서 급진적으로 발전했으며, 나날이 그 규모가 증가하고 있었다.[96]"
중국공산당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이 보여준 혁명적 잠재력을 두려워했다.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던 5월 중순까지 지배계급은 학생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단식자들을 찾아가는 등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정부는 강경진압을 결정한다. 6월 초 정부는 천안문 광장을 피로 물들였다.
"6월 3일부터 시작된 톈안먼 광장 운동에 대한 진압은 6월 4일 군대가 베이징 거리에서 자동소총, 탱크, 폭발물 등으로 시위대를 공격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명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수천 명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도 베이징에서 시위대를 진압하는 데는 며칠이 걸렸다. 한편 시안, 란저우, 상하이, 창사, 우한, 선양, 하얼빈, 창춘, 다롄, 광저우, 허페이, 톈진, 난징 등 다른 도시에서도 베이징의 “학살”에 항의하는 파업과 시위가 일어났다. 많은 학생 지도자들이 중국을 탈출하는 동안 수천 명의 사람들, 특히 많은 노동자들이 군대와 경찰의 급습으로 체포되어 노동수용소와 감옥으로 보내졌다. 일부는 처형되기도 했다. 6월 24일, 이미 5월 말부터 열외로 취급되던 총서기 자오쯔양이 모든 직책에서 사임했다.[97]"
"저녁 시간 내내 학생들을 방어해 주기 위해 시민들이 자꾸자꾸 모여들었는데 11시 30분 즈음에는 우리 주위에 약 1만여 명의 시민이 있었다. 죽음을 불사한다는 표시로 검고 노란 무늬가 새겨진 띠를 팔에 두른 사람들이 조를 이루어 군인들을 저지하기 위해 시내 중심가로 향하는 간선도로로 가서 방비를 했다. 새벽 1시에 학생 100여 명으로 구성된 우리 조는 서부 시단 지역으로 갔는데 우리는 거기서 곧바로 군대와 직면했다.
앞줄에는 폭동 진압을 위한 특수 경찰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뒤에 군대가 버티고 있었다. 경찰은 곧바로 우리를 해산시키려고 최루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전거 탈 때 쓰는 마스크로 가릴 수밖에 없었으며 몇몇 사람은 기절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달아나면서 이 운동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총소리를 들었다. 처음에 우리는 군대가 우리를 향해 발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으나, 더 많은 사람들이 쓰러짐에 따라 그 사실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진짜 총알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에 우리는 부상자들을 데리고 시시난 거리를 향해 남쪽으로 후퇴했다. 우리는 총알을 피하려고 엎드렸는데, 그때 군인들을 잔뜩 실은 탱크와 장갑차들이 창안로를 지나 천안문으로 향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대열은 한 시간 동안이나 지속됐다.
… 마치 도살장 같았다. 긴 의자든, 침대든, 바닥 위의 피에 흠뻑 젖은 매트리스에든, 어디나 사상자들이 널려 있었다. 대다수가 가슴이나 다리 또는 머리에 크게 총상을 입고 있었다. 어느 의사는 감정이 격앙돼 쉰 목소리로 부상자 300명이 입원했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대부분은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우리는 그들을 다른 곳으로 보냈습니다. … 목에 총상을 입은 아홉 살 소녀를 포함해 4명이 죽었습니다.” … 근처에 있는 우체국에 딸린 보건소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 다른 의사 한 사람은 자기 앞에서 12명이 죽었으며 300명의 부상자 가운데 30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수도 베이징의 주요 병원 스무 군데에서 각각 50명씩은 죽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당국이 6월 초에 왜 최종 결심(항쟁 무력진압)을 굳히게 됐는가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미 퇴조와 패색이 짙게 드러난 학생운동이 아니라, 빠르게 확대되고 급진화하는 노동운동의 자기조직화나 총파업 조직화야말로 당국을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시위 진압 당일(6월 4일) 혹은 그 직후에 당국이 보인 여러 행위들은 노동자 탄압이 학생 탄압보다 훨씬 강력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98]"
천안문 항쟁은 노동자들에 의해 혁명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가능성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겠지만, 큰 틀에서는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한편으로 학생과 노동자는 모두 ‘민주주의’를 요구했지만, 사실 서로 목표했던 것이 달랐다. 학생들 주류가 열망하는 민주주의는 개혁개방을 지속하면서 서구식 민주주의(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반면 노동자들이 추구한 민주주의는 시장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단절한, 노동자 민주주의였다.
"투쟁이 전개된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이 운동의 발언권과 언론의 관심은 주로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 쏠려 있었다. 대학생과 지식인의 표현력이나 외국어 능력, 언론과의 상호작용 능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반면 대학생들에 비해 노동자들은 자기 언어를 잃는 처지에 있었다. 앞서 논의했듯, 노동자들의 민주 권력 추구는 그들의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부터 나타난다. 행동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 자체가 노동자들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 자체로 급진적인 민주주의 상상이기 때문이다.
투쟁 참여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남긴 말과 문자는 학생들에 비해 적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민주’에 대한 노동자들의 표현은 나름의 독특성이 있고, 학생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사회학자 앤드류 G. 월더(Andrew G. Walder)와 공샤오샤(龚小夏)의 공자련 전단지 분석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무엇보다 생계와 관련된 경제 문제인 인플레이션이나 빈부격차에 주목한다. 시장주의 개혁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모순들은 도시 노동자들이 시장주의 개혁에 대해 갖는 태도를 매우 부정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경제 그 자체에 대해 논하지 않고, 경제 관련 의제들에 대해 정치화된 해석을 제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담론을 세워나간다.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인플레이션이나 빈부격차 등 모순들의 근본 원인은 관료 시스템에 있다. 노동자조직 공자련 전단지에서 “스탈린주의식”의 “전제관료”와 같은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투쟁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민주주의를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눈에 비친 민주주의는 일터의 민주주의, 노동권의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지식인들과 달랐다. ‘민주’에 대한 공자련의 주장은 시종일관 비민주적인 관방 공회(노동조합) 시스템(중화전국총공회, 中华全国总工会)에 대한 비판이었다. 공자련은 관방 공회가 노동자들을 진정으로 대표할 방도가 없다고 여겼으며, 노동자들이 자신의 독립적인 공회를 갖게 되고, 기업 내 관리자들을 감독하며, 단체교섭의 권리를 갖게 되길 바랐다. 공자련의 관점에서 이와 같은 “노동자자치연합회’라는 조직형식은 더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터에 자치조직을 설립하도록 독려함으로써 노동자들을 결집시키고 관료들과 맞서 싸우게 할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봤다. 시장주의 개혁 자체에 대한 반발을 넘어, 시장주의 개혁의 정치적 기반인 ‘관료 독재’에 직접적인 화살을 겨눈 것이다.
노동자들은 직장 내 ‘공장 독재’(민주주의 없는 일터)에 대한 경험이나 국가 정책 전반의 경제 모델 변경에 대한 무력감이 ‘관료 독재’ 문제의 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자가 인터뷰했던 6.4운동 참여 노동자들 역시 그렇게 인식했다. 그들이 보기에 1980년대 말 경제 정책은 변덕스럽고 모순적이었다. 때로는 너무 느슨해서 대규모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때로는 너무 심한 긴축으로 인해 기업들이 도산했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그 피해는 항상 노동자들의 몫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순된 정책들은 한편으로는 국가권력을 쥐고 있는 관료들이 멍청하고 무능하다는 걸 보여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료들이 기회주의적으로 개혁개방을 자기 이익에 활용하기만 할 뿐, 노동자들의 생사는 전혀 돌보지 않았다는 걸 보여줬다. …
따라서 노동자가 정의하는 ‘민주’란 관료제를 전복하고 노동자계급의 자기 통치로 대체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 실현하는 첫 번째 단계는 일터에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노동자들의 자기조직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민주 구상은 뚜렷한 계급성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주체성을 기반으로 하며,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민주’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민주’ 구상은 ‘민주’에 대한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의 인식과는 매우 달랐다. 후자의 언술에서 ‘민주’는 보편적 자유의 가치로 구성된다. 학생들은 비록 부정부패 척결이나 관료 부패 척결을 요구했지만, 추상적 민주 권리와 자유를 지향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터와 노동 생산과정에 대한 민주주의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장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시선에서 민주주의와 시장주의 개혁은 극명하게 대립된 것이었다. 시장주의 개혁은 가뜩이나 거대한 권력을 쥐고 있는 관료들이 더욱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게 했다. 따라서 시장주의 개혁과 관료독재라는 두 요소는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동시에 전복되어야 했다. 이에 반해 대학생들의 시선에서 ‘민주’와 ‘시장주의 개혁’은 동반되어야 할 것이었고, 시장주의 개혁에서 나타나는 부패, 관피아 등 문제는 시장주의 개혁이 부족했기에 발생하는 결과라고 봤다. 다시 말해, 민주화 개혁이 시장화 개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대학생들이 내놓은 대안은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을 병행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6·4운동의 예행연습(六四运动预演)’이라 불리는 1986~87년 학생운동의 물결에서 ‘경제자유화 지속’이라는 구호는 대학생 시위의 핵심 구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노동자들은 계급적 담론에 기초한 민주주의, 학생들은 탈계급화된 민주주의를 원했다. 전자는 우선적으로 일터의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후자는 추상적인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시장주의 개혁을 배격하는 민주주의를 지향했고, 후자는 시장주의 개혁을 포용하는 민주주의를 지향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6·4운동 당시) 노동자들은 ‘사회주의민주’를 추구했고, 대학생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99]"
서구식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추구했던 학생운동은 노동자들과의 동맹을 건설하는 문제에 있어 무관심했다. 학생들은 중국공산당 정부와의 대화와 타협, 호소를 통해 요구를 관철시키고자 했고, 총파업과 같은 노동자들의 전투적인 투쟁이 이에 방해가 될까 우려했다. 군사진압 앞에서 노동자들이 광주항쟁과 유사하게 무기를 들고 맞서려 했던 것과 달리, 학생들은 수동적인 저항에 머물렀다.
"이러한 격차는 노동운동에 대한 학생들의 거부감으로 먼저 나타났다. 학생들은 천안문항쟁이 온전히 학생만의 것이어야 한다며 운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애썼다. 월더와 공사샤는 학생들이 5월 말까지 천안문광장에서 노동자 조직들을 배척했다고 지적했다. 학생들은 노동자 단체, 특히 건설 노동자 조직(당시 건설 노동자들은 주로 베이징 교외의 농민들이었음)과 소통하기를 꺼렸다. 모리스 마이스너의 연구에서도 학생들이 조직한 몇 차례의 대행진에서 학생들이 팔짱을 끼고 도로 양쪽에 인간띠를 두른 것은 시민들이 행렬에 끼어들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고 밝혔다. 한 천안문항쟁 경험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학생들은 홍콩이나 해외에서 기부한 보급품들을 조달할 때, 그것이 노동자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썼다.
바로 여기에 천안문항쟁의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투쟁 과정에서 학생운동 리더들은 자신의 실천으로 인민들을 ‘일깨우겠다(唤醒)’고 수차례 다짐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들을 보노라면, 그들은 전혀 잠들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깨어나 있었고, 심지어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했던 민중들을 외면했다.[100]"
"노동자들에 대한 학생들의 태도는 모순적이었다. 한편에서 그들은 가두 선동과 공장 집회를 통해 노동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의식적으로 손을 뻗쳤다. 그러나 운동 지도부는 노동자의 역할을 공장과 사무실에서 그들의 집단적 힘을 발휘하는 역할보다는 단순히 거리에서 숫자를 늘리는 것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학생들을 지지해 줄 시민 집단들 가운데 하나일 뿐으로 여겨졌다. 상하이에서는 심지어 운동 지도부가 파업 행동에 대해 반대하기까지 했다. 경제에 손실을 입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101]"
"[1989년] 5월에 접어들면서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가 이 항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를 두고 내부적인 이견을 보이자, 일부 학생들은 자오쯔양을 비롯한 온건파와 협력해 당 지도부 간 파벌 갈등을 활용해 자신들의 (정치적) 공간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이것이 바로 학생운동 리더들이 (노동자들의) 총파업 주장에 대해 “훼방꾼”이라며 완강히 반대했던 이유다.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학생들의 전략은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시각에서) 자오쯔양은 시장주의적인 개혁을 통해 이익을 얻어내려는 전제 관료의 전형적인 대표였으며, 온건파와 강경파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공자련은 당내 고위관료들과 협력한 역사적 결과를 상기하면서, 결국 그것이 관료들의 이익 실현을 위한 도구가 된다고 여겼다. 1976년 덩샤오핑은 4·5운동(四五运动; 1976년 천안문사건)을 계기삼아 집권했었다. 공자련이 볼 때 항쟁을 성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이 항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기 조직화하고 무장(사상적·조직적으로)함으로써 자신의 역량을 축적해 관료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에 있었다. 이것이 당시 공자련이 유인물에서 “프랑스 혁명을 배워 20세기판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하자”고 호소했던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1989년에 일어난 것이 하나의 운동이 아니라, 두 개의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의 운동과 노동자들의 운동은 서로 겹치는 시공간에서 벌어졌으며, 때로는 교차하고 상호작용하기도 했지만(5월 중순부터 시작된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 참가 역시 처음에는 학생들을 지원하고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됐다), 두 운동은 좀처럼 통합되지 않았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도, 충분한 의사소통도, 전략적인 조정도, 함께 싸워야 한다는 단결의 감각도 없었다.[102]"
"(6월 4일 군사진압 이후) 천안문의 학생 지도자들은 그들의 운동이 평화적인 것이라 주장하면서 저항을 계속하는 데에 반대했다. 노동자들과 몇몇 학생들이 무기를 들어야한다고 게속 주장해 큰 논쟁이 벌어졌으나, 학생 지도부는 꼼짝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이 노획한 무기를 군대에 되돌려주기까지 했다. 학생 지도부 중 한 사람인 리루는 무기는 모두 사용할 수 없는것이었고 학생들을 덫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나중에 주장했다. 설사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천안문의 지도부가 어떠한 저항도 조직하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어떤 형태의 자위도 중지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103]"
학생운동의 한계와 함께, 다른 한편으로, 더 중요하게는,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독립적 조직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천안문 항쟁 과정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공자련’과 같은 노동자들의 독립적인 조직이 등장했다. 이런 독립적 조직들은 추상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요구를 뛰어넘어,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를 결합시키며 노동자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들은 학생운동의 한계를 뛰어넘고 헤게모니를 발휘할만큼 조직적, 사상적으로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다. 이는 결정적으로 학생지도부들이 반대하면서, 총파업을 성사시키지 못한 데에서 드러났다.
"투쟁을 결정적으로 진전시킬 좋은 기회의 하나로 베이징 공인자치연합이 제기한 월요일의 총파업 제안이 있었다.
…
그러나 총파업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군대가 학생자치연합과 접촉해 그들로 하여금 파업 제안을 취소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었다.
…
주말의 바리케이드 이후, 월요일 파업 행동의 철회는 운동 지도부의 약점을 드러냈고 정부로 하여금 재차 공세로 나서도록 만들었다. 민족주의를 끝까지 떨쳐 버리지 못한 학생 지도자들은 ‘국익’의 존재를 받아들여, 결국은 ‘경제에 손실을 입힌다’는 이유로 총파업 제안을 기각했던 것이다.[104]"
온전한 시장자본주의로 이행한 중국
천안문 항쟁을 진압하면서 중국공산당 지배계급은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에 따른 폐해, 그리고 지배계급의 독재에 맞선 노동자들의 저항을 결정적으로 분쇄했다. 한국에서는 노동자들이 비슷한 시기인 1987년에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뒤, 7,8,9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자주적인 노동자 조직 건설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반면 중국에서는 천안문 항쟁이 좌절되면서, 이후 중국의 대대적인 신자유주의 재편과정에 노동자들이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천안문 항쟁의 주체였던 학생과 노동자는 서로 다른 과정을 겪었다.
"1990년대 시장주의 개혁의 가속화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엘리트 교육을 받은 대학 졸업생들에게 더 많은 경제적 기회를 제공했다. 일찍이 관찰자들은 천안문항쟁에 참여했던 많은 자유주의적 엘리트 지식인들이 시장화의 물결 속에서 신흥 도시 중산층으로 탈바꿈하고 현재의 중국공산당 체제를 옹호하는 기득권자로 변모했다고 지적해 왔다. 시장화 개혁은 어느 정도 중국공산당 당국이 그 세대의 천안문항쟁 학생 참가자들을 포섭하고 매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는 1980년대 말 베이징의 명문대학에 다녔던 대학생들을 많이 접한 적 있다. 당시 이들은 거의 모두 1989년 시위에 참여했지만 지금 현재에는 ‘안정지상주의’를 믿는다. 그들은 돌이켜보니 당시 항쟁에 참여한 것은 유치하고 미숙한 행동이었고, ‘누군가에 의해 조종된’ 행동이었다고 여긴다.
1990년대의 시장화 개혁은 학생과 지식인 집단을 ‘매수’하는 동시에, 도시 노동자계급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많은 국유기업들이 구조조정, 인원 감축, 사유화를 겪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도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근속 연수를 단절하도록 강요받았다. 취업 기회와 기본적인 일자리 보장의 기회도 모두 상실했다. 분석가들은 항상 당국이 국유기업 개혁을 시작할 수 있는 주요 요인은 경제적 고려 사항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천안문항쟁의 궤적을 돌아보면, 비록 그러한 추측이 충분한 증거가 없더라도, 우리가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는 정치적 동기가 당국의 의사 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당국은 도시 노동자계급이 운동에서 보여준 조직력과 급진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 계급을 전체적으로 무너뜨려야 한다는 결심을 했을 것이다.[105]"
중국의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은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 아래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재편되는 과정과 맞물려 진행됐다. 노동자의 저항을 분쇄한 조건 위에서 이러한 전환은 노동자들에게 착취의 강화를, 특히 여성, 농민공 등에게는 더욱 차별적인 착취 강화를 의미했다.
"… 이 시점에 중국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데서 마지막 단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만일 자본주의 서방 대 사회주의 동방이라는 냉전적 대립이 세계적 수준에서 해체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세계 제조업의 중심을 동아시아로 이동시킨 경제위기·투자이전·산업발전의 변증법이 없었다면, 이 마지막 단계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980년대에는 개혁이 점진적이었고 종종 실험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지만, 이제는 보다 명확한 방향을 따르고 있었다. 1990년대에는 “이중트랙” 경제가 단계적으로 폐지되었고, 국영기업이 더욱 구조조정 되었으며, 도시 노동자계급에 대한 사회적 보장이 폐지되었고,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에 더욱 통합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어진 엄청난 경제성장은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의 원대한 계획이나 중국 모델의 결과가 아니라 역사적인 우연성의 결과였다. 개혁개방은 중국에 대한 외국인 투자 유치에 의존했는데, 마침 자본주의 핵심 국가의 기업들이 투자 기회를 찾는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
1990년대에 중국공산당 정권은 글로벌 자본을 위한 “값싼” 노동력의 제공자로서 호랑이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톈안먼 광장 운동에 대한 진압 직후, 미국을 비롯한 각국은 중국에 경제 제재를 가했고, 중국은 일시적으로 다시 왕따 국가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으며, 중국은 곧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해외직접투자 유치국이 되었다. 1992년 이후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중국 경제를 더욱 개방하자, 글로벌 자본은 중국 동부 연안 지방에 늘어나는 경제특구에 새로운 공장을 설립했다. 홍콩·대만 등 이른바 차이나 서클이라 불리는 화교 네트워크와 기타 동아시아 지역이 외국인 투자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투자자들은 일정한 제한을 받아들여야 했는데, 예를 들어 일부 부문에서는 중국 기업과 합작 회사를 설립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중국 정권이 민감하게 여기는 다른 부문은 여전히 국가의 손에 남겨져 있었다. 외국 자본과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협력을 통해 경제 발전이 가속되었고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서 세계 경제에 통합되었다. 새로운 공장에 필요한 노동력 공급을 보장하기 위해, 새로운 이주 규정은 노동계약이 있는 한 농촌 후커우를 가진 사람들이 도시에서 일할 수 있게 하는 임시허가를 허용했다. “기숙사 노동 체제”는 작업장과 가까운 기숙사 건물에서 이주민들에게 임시로 “저렴한” 주택을 제공했다. 작업장 내부에서는 새로운 공장 체제가 노동 통제와 조직에 사회주의적 요소와 자본주의적 요소를 결합했다. 성별 노동분업을 통해, 소비재를 생산하는 저임금 장시간노동 작업장에서는 여성 이주노동자의 “민첩한 손가락”이 활용됐고, 건설과 같은 다른 분야에서는 주로 남성 노동력이 열악한 조건에서 착취당했다.[106]"
시장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완수한 중국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미국과 세계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제국주의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천안문 항쟁의 패배 이후, 큰 틀에서 오늘날까지 중국에서 노동자들은 아직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노동자의 조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17년 제이식 노동자들의 파업, 2022년 폭스콘 장저우 공장 노동자 봉기, 배달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 건설 시도 등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북한: 스탈린주의의 가장 반동적인 형태[107]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북한에서 등장한 체제는 아래로부터의 혁명 없이 수립되었다. 미국, 소련, 영국 등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정했는데, 신탁통치는 실제로는 실현되지 않았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해방 직후 미소는 38선을 경계로 한국을 남한과 북한으로 분할해 3년간 군정을 실시했다. 북한은 소련군의 관할 하에, 남한은 미군의 관할 하에 편입됐다. 남북으로의 분할은 철저히 미국과 소련의 세계적 이해관계 속에서 이뤄졌다. 일본, 독일에 대항해 승리한 승전국이었던 미소는 전리품을 분배하듯이, (유럽의 동서분할과 함께) 한반도를 분할해 자기 영향력 하에 복속시켰다.
북한은 소련 스탈린주의 관료체제의 세계적 팽창을 위한 도구로 자리매김 되었다. 북한 정권을 수립하는 데서 소련 스탈린주의 관료체제가 고려했던 것은 소련 관료집단의 이해와 요구를 충실히 대변할 수 있느냐였다. 그 결과 소련군 장교라는 특성, 즉 소련 관료집단과의 유착 관계가 주요하게 고려돼서 김일성이 북한 정권의 지도자로 선택되었다. 중국에서 항일전쟁에 참여했던 공산주의자들이나 일제하 조선에서 비밀리에 활동했던 공산주의자들은 권력 핵심에서 배제되었고, 한국 전쟁 이후에는 숙청을 통해 제거됐다.
김일성 정권이 북한에서 형성했던 체제는 소련 스탈린 관료체제를 그대로 이식한 것이었다. 형식적으로는 소련의 소비에트를 본 따 만든 인민위원회가 존재했지만, 그것은 당관료 집단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노동자 민중의 자주적 자기조직화 기관은 제대로 등장하지도 못한 채 질식당했고, 그 관료적 변종은 위로부터의 통제에 종속되었다. 인민위원회는 소련 관료집단에 의해 통제되는 당의 결정과 지시에 일방적으로 복종하도록 요구되었다.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혁명, 나아가서 민족해방혁명이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으로 전진하는 연속혁명의 전망은 제대로 시작도 못한 채 닫혀버렸다. 지주 소유 토지에 대한 “무상 몰수, 무상 분배” 같은 급진적 조치는 이뤄졌지만, 이것은 농민대중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조치에 머물렀을 뿐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란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어떤 식이든 1945년 이후 북한에서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1945년 이후 북한에서 수립된 체제는 소련 관료집단의 이해관계 속에서 복사된 스탈린주의 관료체제였다.
1950년 한국전쟁: 모험주의로 닫혀버린 아래로부터의 한반도 혁명의 가능성
미국과 소련이 그어 놓은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이제 남북한의 국경선이 되어버렸다. 북한은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해 남한을 압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국외 정세도 크게 변화했다. 1949년 3월 17일에는 소련과 북한 간에 군사비밀협정이 체결됐다. 1949년 10월 중국 대륙에서 모택동 정부가 혁명으로 수립되었고, 중국과 북한 사이의 상호방위조약도 체결되었다. 반면 남한에서는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하였으며, 1950년 1월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킨다는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성명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 고무된 김일성은 한반도 전쟁 계획에 대해 스탈린의 승인을 받아낸 뒤, 1950년 4월 초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무력통일안을 확정했다.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1950년에 시작된 한국 전쟁은 남북 노동자 민중의 단결을 통한 한반도 혁명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모험주의적 도박이었다. 남한 노동자 민중의 자주적 혁명 가능성에 대한 비관주의에서 출발해, 혁명을 군사적으로 ‘수출’할 수 있다는 오판 속에서 전개된 한국 전쟁은 비극 그 자체였다. 남한과 북한의 노동자 민중은 서로 분열돼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에 내몰렸다. 그렇지 않아도 미군정과 극우 정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받으면서 약화되었던 남한의 좌익은 한국 전쟁 과정에서 완전히 대중적으로 고립되었고,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궤멸되고 말았다. 남한의 노동자 민중의 눈에는 한국 전쟁이 단순히 북한의 침략전쟁으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한국 전쟁은 미소 사이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됐다. 김일성과 스탈린의 기대와는 달리, 소련의 남하를 차단하기 위해 미국은 한국 전쟁에 전면개입했다. 전세는 역전됐고 미국과의 전면전에 부담을 느낀 스탈린은 참전을 포기했다. 그 대신 중국 모택동 정부가 전면에 나섰다. 혁명으로 갓 수립된 중국 정부는 바로 코앞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작동하는 걸 극히 꺼렸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참전으로 이제 한국 전쟁은 남북만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 참여하는 국제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군사적 힘의 균형이 이뤄졌고 38선이 휴전선으로 대체되면서 종전되었다.
휴전선은 38선보다 몇 십 배 강하게 한반도 노동자계급을 분리시켜 버렸다. 38선은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의 벽이었다. 한반도의 민중들은 여전히 서로가 하나의 민족이고 언젠가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백만이 죽임을 당하는, 거대한 동족상잔의 전쟁 속에서 남북한 노동자계급은 갈가리 찢겨버렸다. 이런 거대한 비극 속에서 남한 노동자 민중은 극우 세력과 미국의 영향력에 장악되어 버렸다. 북한 군대는 해방군이 아니라 남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침략군으로 비춰졌던 반면, 미국은 남한 국민을 구제한 혈맹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극우 세력들이 남한에서 완전한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좌익 혹은 좌익으로 의심되는 세력들에 대한 대학살을 통해 좌익운동은 남한에서 사실상 완전히 청소되었다. 김일성 스탈린주의 체제가 벌인 모험주의적 행각은 거대한 참사로 귀결됐다.
개인숭배 관료체제: 반대파 숙청과 노동자의 자기조직화 차단
한국 전쟁이 남긴 비극적 유산은 비단 남한에만 남겨진 것이 아니었다.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되고,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버린 한국 전쟁 앞에서 북한 김일성 체제는 책임을 대신 짊어질 희생양을 찾아야만 했다. 나아가 김일성 체제는 반대파를 숙청하면서 관료적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미제의 스파이란 굴레를 씌워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의 상징이었던 박헌영을 처형했고, 비슷한 방식으로 연안파를 숙청했다. 북한을 지배하는 조선노동당은 김일성 분파의 수중에 완전히 장악됐다. 이러한 잔인한 독재체제는 미 제국주의로부터 북한을 수호한다는 정치이념에 의해 정당화됐다.
이렇게 모든 반대파를 제거한 북한식 스탈린주의 관료 체제는 끝없이 진화했다. 소련 스탈린체제의 개인숭배 정책이 북한에도 복사됐다. 비밀경찰의 강력한 감시 하에서 사회 모든 곳이 김일성 관료집단에 의해 통제됐다. 김일성 관료집단이 결집한 조선노동당과 그 허수아비 조직을 제외하고는 노동자 민중에게 어떠한 자주적 조직도 허락되지 않았다. 조선노동당 안에서도 당내 민주주의가 완전히 소멸했고, 사회 전반에서 정치적 기본권이 완전히 무시되었다. 선거조차도 완전히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개인숭배 정책은 결국 동양의 유교문화와 결합해 대를 이어 세습하는 수령체제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이 수령체제는 세습적 군주체제가 발딛고 있는 역사적 토대와는 다른 기초 위에서 작동한다. 북한에서 성립된 세습적 수령체제는 노동자계급을 착취하는 집단적 자본가로서 관료집단의 안정적 지배를 위한 구조적 장치로 기능한다.)
수령 체제로 상징되는 북한 관료체제는 노동자 민중의 자기 조직화의 모든 숨구멍을 완전히 틀어막아버렸고, 이것을 억압적 정보 감시기구와 관료적 행정기구의 촘촘한 그물망으로 대체해버렸다. 노동자계급의 자기 조직화를 봉쇄하고 노동자계급을 원자화시키는 관료적 행정기구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작동했다. 이 거대한 관료적 감시 통제 시스템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외피는 미제의 침략으로부터 ‘사회주의’ 국가를 방어한다는 것이었지만, 그 본질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지배 안정성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1990년대: 대기근과 시장경제의 확산
북한의 관료적 지배 체제는 1980년대 이후 큰 도전에 직면했다.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시스템의 위기였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북한 경제체제는 남한 체제에 비해 우위에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지배 하에서 주요 중공업 생산시설이 한반도의 북쪽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한은 상당 기간 남한에 비해 경제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또한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균열 속에서 줄타기 외교를 통해 양국 모두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우위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남한에서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1970년대를 거치며 사라져갔다. 북한 관료집단은 사회적 자원의 엄청난 부분을 계속해서 군사비로 투입했다. 노동자계급의 능동적 참여와 통제 하에 이뤄지는 민주적 계획과 무관한 관료적 명령경제는 합리적으로 경제를 조직해 내지 못하면서 갈수록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대중의 삶보다 체제의 축적논리를 앞세운 허구적 계획은 관료들 사이의 경쟁 속에서 더욱 조잡해져갔고, 산업 사이의 유기적 조화는 파괴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남북한 사이의 경제적 역관계가 역전되었다.
북한 경제의 본격적인 위기는 1990년대 초반에 찾아왔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북한 체제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소련과의 무역 및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중화학 공업이 큰 타격을 받았다. 에너지 위기와 함께, 농업기반시설을 뒷받침하고 있던 제반 산업분야가 취약해졌다.
1994년부터 수년간은 가뭄·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덮쳤다. 사회적 대처능력이 고갈된 상황에서 덮친 자연재해는 재앙이었다. 대중의 경제적 생활수준은 최악으로 하락했고, 수십만이 굶어 죽었다. 거대한 대기근이 북한 사회를 덮쳤다.
1990년대 대기근은 북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이 체제는 위기를 타개할 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 관료적 명령경제는 사회적 위기에 대응할 어떠한 실질적 능력도 갖고 있지 못했다. 기존 경제시스템이 파국에 이르자, 자연발생적으로 시장경제가 확대되었다. 장마당으로 불리는 소규모의 암시장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수많은 생필품이 암시장을 통해 거래되었다. 많은 상거래에서 북한의 공식 화폐를 대신해 중국의 위안화가 실질적인 화폐로 유통되었다.
“생존을 위한 북한 주민의 몸부림과 함께 성장한 장마당은 2018년 2월 현재 공인된 종합시장만 480여 개에 이르며, 이외에도 골목시장, 야시장 등 다양한 시장이 곳곳에 존재한다. 그리고 북한 주민은 이 시장에서 생활 수요의 80~90%를 해결하고 있다. … 다양한 형태의 거래 공간에 종사하는 북한 주민이 100만 명이 넘는다. 장마당 관련 종사자와 그 가족을 포함하면 북한 주민의 3분의 1 이상이 수입의 3분의 2 이상을 장마당에서 얻고 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부유층을 중심으로 한 사금융이 금융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108]
이러한 시장경제의 확산은 장마당과 같은 소규모 비공식 시장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시장경제가 확산되는 더욱 중요한 통로는 ‘민관합작투자’, ‘대외무역’ 등의 형식으로 공식 경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 정부는 경제적으로 거의 완전 파탄 상태에 있다. … 중앙정부의 지원이 부족해짐에 따라 정부 산하 기관은 자체 예산을 사실상 독자적인 방법으로 확보한다. … 공무원들은 임시방편으로 자신들이 속한 기관의 우산 밑에서 유사 민영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 중국 혹은 더 먼 외국에서 합작 사업이나 수출입 사업 기회를 찾는다. 특히 중요하게 노리는 분야는 음식, 농업용품, 의약품, 고급소비재 등이다. … 사업을 통해 얻는 수익 중 정부로 들어가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 사업 경영자는 수익의 60~70%를 챙기고 나머지는 정부 부서와 뇌물을 줘야 할 상층부 사람에게 상납하게 된다.”[109]
“북한에서 시장화라는 눈덩이는 계속해서 무게와 속도를 더해 가, 급기야 북한이 한국과 같은 ‘재벌 및 대기업의 나라’가 돼간다는 진단이 나올 정도가 됐습니다. 군부가 소유한 고려항공은 이제 콜라와 통조림 등의 가공식품을 생산하고 평양 시내에서 택시 서비스 사업도 벌입니다(평양에서 다른 일곱 개 기업과 요금 경쟁을 벌이고 있지요). ‘내고향’이라는 이름의 재벌 기업은 실소유주가 누군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북한 내수용 담배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아침’이라는 브랜드로 이란에 수출까지 합니다. 이 회사는 제빵 업체도 소유하고 있고, 여성 위생 용품과 스포츠 의류도 생산하지요. … 신용카드는 아직까지 없지만 몇몇 은행이 직불카드 서비스를 두고 경쟁 중입니다. 휴대전화 서비스 시장에도 고려링크와 경쟁하는 ‘별’이라는 이름의 회사가 등장했고요.”[110]
“국영 상점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고, 결국 돈주가 된 소상인이 이 상점에 투자하면서 장마당 경제의 변종이라 할 수 있는 ‘민수 기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물론 개인 명의로 운영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기관에 적을 올려놓고 일정한 비용을 지불한다. 상품의 생산과 판매, 직원의 고용과 해고 등 모든 책임은 돈주가 진다. 이윤 역시 돈주가 취한다. … 민수기업의 돈주는 이제 국영 상점 투자를 넘어 외화벌이 기관과 직접 연결해 장마당에 상품을 공급한다. 입출고, 장부 관리, 재정 통계, 운반에 이르는 전 과정의 전문성은 ‘장사’를 넘어선 ‘기업경영’ 수준이다.”[111]
지배 관료집단은 비공식 장마당에서 뇌물수수 방식으로 흡수하는 이윤과 함께, 공식 경제로부터 확보하는 이윤 모두로부터 혜택을 받았다. 이 이윤은 암시장에 대한 통제권 및 민관합작투자·대외무역에 대한 관할권과 연동된, 관료적 지위에 따라 분배되었다. 그 결과 지배 관료집단은 시장경제의 확대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얻는 집단이 되었다.
“김정은은 집권 후 시장 통제를 포기했다. 오히려 장마당에 대한 규제를 다시 풀어주고 장려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바꾸었다. 그 결과 북한 시장은 무섭게 커졌고, 나름 정교하게 분업화되었다. 무역일꾼과 마찬가지로 장마당 돈주 역시 일정 정도의 자금을 김일성·김정일 기금이나 각종 지원 사업 명목으로 나라에 바치면서 ‘노력영웅’ 칭호까지 얻고 있다.”[112]
“부동산으로 돈 버는 사람도 따져보면 다 중앙당 고위 간부들이죠. 그런데 자기가 못 나서니 아내가 움직여요. 아내는 또 똑똑한 놈 하나 내세워요. 아파트 하나 지으려면 승인 도장 7개 받아야 하는데 그거 하나하나에 뇌물이 어마어마해요. 권력자가 끼지 않으면 좋은 부지는 확보할 수 없죠. 이런 걸 돈 대는 간부들이 뒤에서 다 해결해주죠.”[113]
공식 관료집단 내부에서, 그것도 이 집단의 핵심부에서 직간접적으로 ‘돈주’라 불리는 신흥 자본가 집단이 출현했다. 이 신흥 자본가 집단은 기존 관료집단과 구별되는 게 아니라, 소련·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비호 하에서 그 유기적 일부로서 등장했다. 기존의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에서 나타났던 ‘축적을 위한 축적’에 복무하는 ‘집단적 자본가’로서의 관료집단과 나란히, 그것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신흥 자본가’ 집단이 시장경제의 확대 속에서 나타났다. 다만 북한에서 이 두 집단은 완전히 섞여서 형식적으로는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관료집단의 완전한 통제력 하에서 작동하는 돈주 집단은 전통적인 관료집단의 직접적 일부이거나 최소한 그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기근 시기를 관통하면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결정적인 한계를 드러내자, 북한 지배집단이 선택한 탈출구는 시장경제 확산을 묵인하는 것이었다. 대중은 암시장과 같은 비공식 시장경제를 통해서, 공식 체제가 해결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가고 있었다. 관료집단은 신흥 자본가 집단을 창출하고 포괄함으로써 시장경제 확대의 과실을 독식하면서, 자신의 결속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장경제 확산은 북한이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심각한 국제적 고립에 처한 상황에서 진행됐다. 북한의 지배집단은 시장경제 전환 과정에서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통해 정권의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적 지원을 끌어내고자 했다. 북한에게 적대정책으로 일관하는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북한은 핵개발 카드를 꺼내들었다.
북한은 왜 시장자본주의 대신 핵무장과 고립주의로 나아갔는가
1958년 주한미군에 의해 남한에 핵무기가 배치된 이래 북한은 줄기차게 ‘조선반도의 비핵 평화지대화’를 주장했다. 세계정세의 거대한 변화와 함께 1991년 남한에 배치된 미군 핵무기가 철수하고 1992년 남북한 정부 사이에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채택됐다. 그런데 자신의 오랜 주장이 관철된 비핵화 공동선언 이후 북한은 오히려 핵무장을 향한 핵개발 정책을 시작했다.
1991년 소련 붕괴는 정치적, 군사적 측면에서 북한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소련의 군사적 우산 아래서 미국의 침략에 대한 방어막을 구축하고 있던 북한 체제는 소련 붕괴 앞에서 독자적인 군사적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만 했다. 남북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단결이라는 진정한 해법은 자신들의 반(反)노동자계급적 본질로부터 당연히 배제할 수밖에 없었기에, 북한의 관료적 지배집단은 모험주의적 도박정책을 더욱 극단으로 밀고 나갔다. 그들에게 해법으로 모색된 것이 바로 핵개발 정책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 북한 정부는 핵개발 정책을 추진하되, 그것을 철회하는 대가로 미국과 남한으로부터 군사적 안전보장과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끌어내고자 했다. 이런 양다리 걸치기 전술을 통해 북한 지배집단은 지배체제의 보호라는 관점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방안을 선택하려 했다. 당연히 이러한 전술을 관통하는 핵심 카드는 핵개발의 가속페달을 최대한 밟아 몸값을 높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미국으로부터 충분한 약속을 받아낼 수 없었다. 소련 붕괴 이후 세계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유일패권 국가로 위상을 확고히 한 미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핵개발 카드가 그다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 핵무장은 하나의 계획이자 엄포였지, 현실화된 수준은 지극히 초보적이었다. 또한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위협을 미사일방어망(MD) 체제를 구축하는 명분으로 역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결국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가 타결됐지만 제대로 이행되지 않다가 파기되는 형태로, 거래는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북한 관료집단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좁았다. 이것은 1990년대 중후반 북한을 휩쓸었던 대기근의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대상이 절실히 필요했다는 점과도 깊이 관련돼 있었다. 경제봉쇄를 비롯한 미국의 공격을 대기근의 유일한 원인으로 자리매김하는 건 대기근의 책임으로부터 북한 관료집단이 벗어나기 위한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적 수단이었다. 대기근은 북한 관료집단이 당분간 핵개발 모험주의 정책에 가속페달을 밟도록 강요하는 결정적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대기근 이후 아래로부터 시장경제가 광범하게 확산하는 상황에서, 시장경제로의 공식적인 전환 및 그것과 맞물린 개혁개방은 북한 관료집단의 지배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었다. 북한 지배체제는 강력한 통제 정책 및 반미를 앞세운 이데올로기를 통해 작동하고 있는데, 개혁개방은 그것을 현저히 약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 관료집단은 개혁개방에 앞서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통해 정권의 안전을 보장받았던 1970년대 중국과 1980년대 베트남의 선례를 따르고자 했다. (그러나 1991년 이전 소련을 고립시키기 위해 중국·베트남과의 관계정상화를 적극 추진했던 미국은 이제 소련이 몰락한 상황에서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소련 몰락 이후에도 거대한 군산복합체를 가동하기 위해 가상 적국을 반드시 필요로 했던 미국은 북한이 몇 안 되는 적대국가 중의 하나로 남아 있기를 원했다.)
이처럼 핵개발은 기존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안정적인 체제 유지가 어렵게 된 북한 지배세력이 탈출구로 모색한 모험주의적인 벼랑 끝 협상카드였다. 이미 시장경제 확산을 저지할 능력을 상실했고,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확신을 상실했으며, 오히려 시장경제 확대의 최대 수혜자가 되고 있는 그들은 더욱 과감하게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국 2000년대 초중반, 북한 관료집단은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핵무장을 향한 가속페달을 더욱 강하게 밟아야 하고, 미국을 실질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수준에 최대한 빠르게 도달해야 한다는 파국적 결론에 도달했다.
북한은 2003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2006년 최초로 핵실험을 단행하며 핵개발을 공식화한 뒤 2017년까지 총 여섯 차례의 핵실험을 전개했다. 또한 2017년 11월 대륙간 탄도미사일 화성 15형의 시험발사를 성공함으로써 핵무기를 미국 본토까지 날려 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뒤, ‘핵무력 완성’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북한이 핵무장을 완료하면서 마침내 2018~19년 트럼프와 김정은의 정상회담을 중심으로 미국과의 본격적인 핵협상이 열렸다. 북한 지배층에게 미국과의 핵협상에서 핵심 관건은 북한 지배체제 유지에 대한 확고한 보장과 함께, 그것을 뒷받침하는 대대적인 경제 지원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미국 정부가 북한과의 협상에 접근하는 핵심은 간단했다. 세계적 차원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미·중 대립 구도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트럼프 정부 시절에 이 전략적 이익의 핵심은 중국과의 제국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중국을 포위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북태평양에서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적 진지는 미·일·한 동맹을 통해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여기에 북한을 더하는 게 주는 이점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 핵을 빌미로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이를 활용해 한국과 일본의 군사적 무장을 확대하면서 주한·주일 미군의 군사적 자산을 결합해 중국을 포위하는 게 더 바람직했다. 2016~18년 북한핵을 빌미로 한국에 (실제로는 중국의 군사력을 대상으로 하는) 사드를 배치한 것은 그 일환이었다. 오히려 한반도의 긴장 완화는 중국에 대한 군사적 포위 전략, 그리고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화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었다.
미국은 협상에서 두 가지 중 하나를 획득하기를 원했다. 하나는 (협상을 명분으로 북한의 추가 핵개발을 중단시킴으로써) 북한핵을 놔둔 채 다만 미 본토를 위협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않게 묶어두는 것이었다. 남한과 일본만 사정거리에 두게 함으로써 미·일·한 군사 동맹을 강화하는 수단 정도로 활용하면서, 북한핵을 빌미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상황을 지속하면서 중국을 수시로 압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완전히 친미 국가로 넘어오겠다면 협상을 타결하는 것이었다. 다만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전적으로 남한 정부가 떠안아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였다.
북한으로서는 이런 거래조건을 수용할 이유가 없었다. 그 동안 사회적 자원의 엄청난 부분을 핵개발에 투입해온 것에 비한다면, 얻을 수 있는 건 보잘 것 없었다. 게다가 중국을 버리고 미국 품에 안기는 것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중국과의 경제적 단절은 엄청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북한 지배집단에게 최선의 전략은 미·중 사이에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북한 지배체제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고 양쪽 모두로부터 지원을 끌어내 이걸 바탕으로 북한 경제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북한의 줄타기 외교 전략은 2018~19년 김정은이 트럼프와 정상회담을 진행되는 동안 중국의 시진핑과 다섯 차례, 러시아의 푸틴과 한 차례 정상회담을 가진 것에서 잘 드러난다.) 결국 거래는 성사되지 못하고 불발로 끝났다.
핵개발을 지렛대로 삼은 모험주의적 체제 유지 전술은 한반도에서 노동자 민중의 단결을 더욱 약화시켰고, 동아시아 전반의 군사적 긴장만 확대했다. 북한 핵개발이 확대될수록 남한에서 극우의 입지는 높아졌고,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과 미·일·한 군사동맹은 더욱 강해졌으며,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은 약화됐다. 북한 내부적으로도 사회적 자원의 군사적 낭비는 북한 노동자 민중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러·북 동맹의 구축
결국 30년 가까이 진행된 북미 핵협상은 부분적인 타결과 파기를 되풀이하며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북한은 핵개발을 완료했지만 끝내 미국으로부터 정권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고 경제적 지원도 끌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찾아온 세계정세의 격변은 북한에게 새로운 공간을 열어 주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러시아의 전략적 패착은 러시아를 중국의 경제지원에 의존하도록 강제하면서 역설적으로 중국 주도의 견고한 중·러 동맹이 미국과 서방에 맞서 구축되는 것으로 귀결됐다. 세계적으로는 미·중 패권대결의 강화와 더불어 양 진영에 속하지 않은 중소 열강들의 독자 진로 모색이 함께 나타나고 있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상황은 압도적으로 미·중 제국주의 대결 구도가 지배하게 됐다.
이처럼 한반도를 둘러싸고 두 진영 간 대결구도가 급격히 현실화한 것은 북한 지배집단에게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다. 중·러 제국주의가 미·일·한 군사동맹과 직접 부닥치지 않게 하는 완충망으로서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는 미·중 패권대립 격화에 따라 더욱 중요해졌다. 필요하다면 미 제국주의 진영과의 전쟁에서 북한이 대리전을 치르게 하면서 중·러 본국을 보호할 수 있고, 군사력 자체만 보더라도 중·러 제국주의를 동북아에서 보호하는 데서 큰 보탬이 될 수 있다. 그 점에서 북한 핵무기는 이제 중·러에게 큰 이점이 될 수 있었고, 실제 중국과 러시아는 2020년 이후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 핵개발 제재에 적극 동참했던 2017년까지와 달리) 북한에 대한 추가 제재를 일관되게 반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재래식 무기에서도 북한의 가장 중요한 산업인 군수산업의 생산력은 중·러 제국주의에게 무시할 수 없는 유혹이다. 실제로 북한은,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서방 세계 최대 규모로 포탄을 공급하는 것과 비슷하게, 러시아에 대규모의 포탄과 미사일을 공급하고 있다.
또한 북한이 보유한 풍부한 광물자원과 부동항은 중·러 제국주의 진영에게 세계적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했다. 북한의 관료적 지배집단은 이제 중국과 러시아와의 동맹을 통해 상당한 외부 지원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고, 중·러 공급망 사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경제적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미·중 제국주의 대립의 역설을 보여준다. 트럼프 정부 때부터 가파르게 확대됐던 미·중 제국주의 대립은 북한의 몸값을 미국에게는 낮췄지만, 중·러에게는 크게 높여주었다. 북한 관료지배집단은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중·러의 품에 다시 깊숙이 안기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본격적인 전환점으로 해서, 북한은 1990년대 이후 오랜 고립에서 벗어나 중·러·북 동맹을 구축할 수 있게 됐다. 북한 지배집단은 이제 독자생존이 아닌, 중·러·북 동맹이라는 경제적·군사적 우산 밑에서 생존을 추구할 것이다.
이제 북한은 1990년대 이후 극심한 고립에 빠졌던 시기와 달리 중·러 제국주의라는 든든한 뒷배를 갖게 됐다. 중·러와의 경제적 교역 및 지원이 확대되면서 경제 또한 호전되고 있다. 자신감을 갖게 된 북한은 2022년 하반기부터 미·일·한의 합동 전쟁연습에 적극적인 군사행동으로 맞대응하고 있다. 2023년 말에는 “적대적인 두 교전국 관계”로 남북한의 관계를 규정하고 ‘핵무력으로 남한 전 영토를 평정할 대사변’ 준비를 공언하는 등 공격적인 언사 또한 쏟아내고 있다. 향후 중·러의 묵인 속에서 북한의 핵개발은 더욱 과감해질 것이다.
지금까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 수립 이후 북한의 역사를 간략히 훑어보았다. 북한 지배층이 선택하는 모든 어지러운 정책에도 불구하고, 그 정책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목표는 결국 북한 지배체제의 유지에 있다.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보존이든, 시장경제의 전면적인 수용이든, 둘 사이의 결합이든, 모든 경제 정책은 이른바 ‘사회주의’의 대의가 아니라 북한 지배체제의 안정화와 권위 유지를 위한 필요에 기초한다. 그 필요에 부응한다면, 그들은 어떠한 경제 체제든 전폭 수용할 용의가 있으며, 어떠한 경제 체제에서든 그 과실은 바로 이 관료집단에게 귀속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억압 체제로서의 그 본성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외교정책도 마찬가지다. 북한 지배체제의 유지라는 오직 하나의 실제적 목표가 외교정책을 관통한다.
‘가짜 사회주의’ 극복하기
오늘날 중국은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와 시장경제에 기반한 자본주의 체제다. 북한은 생존을 위해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꾀했지만, 미국이 이를 받아주지 않음에 따라 여전히 폐쇄적인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두 국가 모두 스스로를 ‘사회주의’ 국가라고 내세우지만, 그 실상은 민주적 권리가 심각하게 제약된 자본주의 국가일 뿐이다. 두 ‘변형된’ 자본주의 국가들의 뿌리에는 스탈린주의 반혁명으로 왜곡된 소련의 역사가 있다.
1937년 대숙청 이후 스탈린과 관료들이 지배하는 소련은 또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였다. 그리고 1949년 중국 혁명 이후 마오쩌둥의 주도 아래 중국에 이식된 체제는 소련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복사판이었다. 그러나 관료적 명령경제는 본질적으로 비효율적이었고, 지배계급은 권력유지를 위해 결국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과 1991년 소련 붕괴는 이러한 전환의 과정이었고, 국가자본주의 아래 지배계급은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 과정에서 일정한 내부 권력다툼이 벌어졌을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시장자본주의 전환 이후에도 지배계급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북한 또한 중국과 베트남에서 일어난 이러한 전환을 뒤따라, 권력을 유지하며 시장자본주의로 전환해 세계경제에 편입되길 원했으나, 미국의 고립화 전략으로 인해 이에 실패하고 대신 핵무장을 통한 권력유지라는 위험한 길을 걷게 됐다.
이러한 국가자본주의 아래 노동자민중은 국가의 성장과 관료집단 지배계급의 권력유지를 위해 희생되었다. 국가자본주의가 시장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과정도 노동자민중의 희생 아래 이뤄졌다. 국유화된 형식을 취하든, 시장의 형식을 취하든, 노동자민중의 체계적으로 착취당하고 억압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국가자본주의 아래에서도,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 과정에서도 저항했지만, 지배계급을 뒤엎고 새로운 혁명으로 나아갈 만큼 스스로를 조직화하진 못했다. 스탈린주의가 불러온 사상적 왜곡 또한 노동자계급의 자기조직화에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중국과 북한의 ‘가짜 사회주의’를 극복하고, 이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정치와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까? 첫째로, ‘가짜 사회주의’ 국가들의 역사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개량주의 및 스탈린주의 사상과 철저히 단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 살펴보았듯,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패배에는 두 가지 큰 역사적 사건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나는 독일혁명의 전개과정에서 독일사회민주당의 개량주의적 배신으로 인해, 국제혁명의 가능성이 닫히며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수립된 노동자국가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러시아 노동자국가가 점차 스탈린주의 관료들에 의해 지배되어 결국 반혁명으로 노동자국가가 전복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사회주의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해선 독일사회민주당으로 표현되는 개량주의 정치, 그리고 스탈린 집권 아래 소련공산당으로 표현되는 스탈린주의 정치를 모두 극복해야한다.
그렇다면 올바른 ‘진짜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견지해야 할 원칙은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오늘날 또 한번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권력을 타도하고 노동자국가를 수립하게 된다면, 러시아혁명의 경험으로부터 아래와 같은 것들을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스탈린주의를 극복한다는 점에서 가장 먼저 강조할 점은 노동자 민주주의의 온전한 실현이다. 한편으로 자본가계급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철저한 독재가 관철돼야 한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에 대한 독재가 곧 노동자계급 내 다양한 정치경향을 억압하는 것으로 이어져선 안된다. 스탈린주의의 성장은 소비에트의 쇠락과 궤를 같이했다. 민주적 노동자국가에선 다양한 노동자 정당의 존재가 인정되어야 하며, 노동자의 일반의지를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노동자평의회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발전시켜야한다. 노동자국가의 대표에 대한 광범위한 소환권이 보장돼야 하고, 정치파업을 비롯한 집회시위의 자유가 폭넓게 보장돼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국가는 ‘인민의 호민관’으로서, 농민과 같은 소부르주아, 피억압민족,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일소를 위해 앞장서 투쟁해야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도입되었던 진보적 조치들과 같이, 오늘날에도 차별과 억압의 철폐를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권력장악과 함께 즉각 도입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출발’이 좌절되지 않기 위해선 피억압자들이 스스로를 자기조직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노동자국가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에 맞서 변혁적 페미니스트 운동, 장애해방 운동, 소수자운동, 민족해방운동 등의 진지를 구축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은 곧 혁명 이후 피억압 민중의 권리를 중단없이 실현해가기 위한 핵심적인 토대가 될 것이다.
또한 노동자국가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전면적 실현과 연계된 민주적 계획경제를 실현해야한다. 국가자본주의의 ‘계획’은 결국 비효율적인 관료적 명령경제로 귀결되었다. 위로부터의 명령만 있을 뿐, 잘못된 계획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피드백이 불가능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민주적 계획경제를 실현하려면,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적 필요를 고려해 짠 생산계획이 아래로부터의 끊임없는 피드백으로 수정, 관리되어야 한다. 그래서 계획경제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온전한 실현과 불가분 연결돼있다. 생산단위 현장에서의 민주주의, 즉 노동자 자주관리의 실현이 민주적 계획과 결합함을 통해 이것이 현실화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노동자국가를 수립한다면, 그 어느때보다도 세계혁명의 전망 아래 국경을 넘어 단결해야한다. 스탈린주의는 국제혁명에 대한 냉소주의 아래 ‘일국사회주의’론으로 표현됐다. 한 국가의 생존과 성장이 우선시되면서 민주주의, 국제주의 등 노동자계급의 모든 원칙들이 무너졌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20세기 초반보다 훨씬 더 긴밀하게 세계적으로 연결돼있고, 일국에서 노동자국가의 수립은 세계 자본주의를 상대로 한 투쟁의 본격적인 시작일 뿐, 혁명의 완수가 될 수 없다. 자본주의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를 실천할수록, 세계혁명의 전망 또한 보다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마지막 교훈과 연결지어, 오늘날 두 번째로 강조하고 싶은 과제를 얘기해보겠다. ‘가짜 사회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자의 독립적인 자기조직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특히 우리는 중국과 북한 등 ‘가짜 사회주의’ 국가의 노동자들과의 국제연대를 건설해야한다. 중국에서는 지배계급의 극악한 착취와 억압에 맞선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투쟁을 여럿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의 코로나 봉쇄와 구조조정 등 열악한 노동현실에 저항하며 발생하는 이런 투쟁들은 때로 폭발적인 형태로 벌어지지만, 중국 당국의 극심한 탄압으로 인해 주로 임금체불 등 경제적 요구에 국한될 뿐 아직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노동조합을 건설하는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이런 중국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하고 단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경로를 찾아야한다.
안타깝게도 북한에서 우리는 유의미한 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화 시도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의 억압적 체제 아래 노동자민중의 분노의 에너지가 상당하게 축적되어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한국 노동자들이 중국, 일본, 러시아, 대만 등 동아시아 노동자계급과의 국제연대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북한 지배계급에 맞선 북한 노동자계급의 자주적인 투쟁 가능성에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을 자료
=Ralf Ruckus, 2021, The Communist Road to Capitalism: How Social Unrest and Containment Have Pushed China’s (R)evolution since 1949, PM Press. 한국어로 번역 중.
=찰리 호어, 1991, 『천안문으로 가는 길』, 김희정 역, 2002, 책갈피.
=지한(吉汉), (2019), 邊緣化的六四論述:八九春夏,其實發生的是「兩場運動」, 김모두 역, 「1989년 천안문광장에서 벌어진 6·4운동에 관한 비주류적 서술」.
1편 https://platformc.kr/2024/07/two-movement-in-tiananmen-1/,
2편 https://platformc.kr/2024/07/two-movement-in-tiananmen-2/.
=Sou Mi. (2021), From Revolution to Capitalist Restoration: 100 Years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Left Voice, 김요한 역, 「혁명에서 자본주의 복고까지: 중국공산당 100년」. https://nht.jinbo.net/bbs/board.php?bo_table=online1&wr_id=1055
=Walter Daum, 1990, The Life and Death of Stalinism, http://lrp-cofi.org/book/index.html. 번역 출간 예정.
=트로츠키, 1936, 『배반당한 혁명』, 김성훈 역, 2018, 갈무리.
=D’Atri, A, (2020), Bread and roses (N. Flakin, Trans.), London, England: Pluto Press, 번역 출간 예정.
=오연홍 외, (2023), 『빵과장미의 도전』, 숨쉬는책공장.
=사회주의를향한전진, (2024), 「제국주의 패권대결과 전쟁확산에 맞서 반제반전 노동자 국제연대투쟁을 건설하자!」,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964&me_id=28&me_code=60
=해럴드 로버트 아이작, 1938, 『중국 혁명의 비극』, 정원섭·김명환 역, 2016, 숨쉬는책공장.
[1] 정확히 말하자면 소련은 노동자국가였던 시기가 있었지만, 결국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본주의로 후퇴했다고 본다. ‘노동자국가’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단계로, 노동자가 부르주아 국가를 타도하고 권력을 쥐었지만 아직 체제 전반을 사회주의로 바꿔내지 못한 상태, 즉 정치권력만 노동자가 쟁취했을 뿐 경제, 사회적 변혁을 달성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노동자국가가 온전한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면 이는 곧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계급대립이 소멸함을 의미하며, 피착취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 또한 사멸해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련은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수립하긴 했지만, ‘사회주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2] 당시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날은 러시아 달력으로 2월 23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으로는 3월 8일이다. 그래서 러시아혁명은 여성의 날에 시작된 혁명이지만, ‘2월 혁명’이라고 부른다.
[3] “소비에트”는 러시아어 “совет (sovet)”에서 유래한 단어로, 평의회 또는 회의를 뜻한다.
[4] 러시아혁명의 배경과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이후 9강 ‘자본주의 역사 꿰뚫어보기(1): 1945년 이전’에서도 다루게 될 것이며, 추후 러시아혁명의 전개과정을 심도있게 다루는 추가강의도 진행하게 될 것이다.
[5]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oct/25-26/25b.htm
[6]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oct/25-26/26b.htm
[7] 제국주의 식민지 확장경쟁이 한창이던 20세기 초, 독일 사회민주당조차 자국 노동자계급의 복지를 위해 식민지 보유가 불가피하다는 식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결국 그런 논리들이 당을 전쟁에 찬성하는 수준까지 타락시켰다.
[8]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oct/25-26/26d.htm
[9] 오히려 오늘날 농업의 주된 문제는 식량의 생산능력 부족이 아니라, 무계획적 대량생산과 낭비적 파괴 등으로 인한 기후위기와 환경파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 노동자가 권력을 잡는다면 더 이상의 환경파괴를 막고, (진정한 의미에서) 지속가능한 게획농업을 확립하는 게 농업정책 상의 주된 과제가 될 것이다.
[10] 사회혁명당은 ‘농촌사회주의’를 추구한 정당으로, 농민의 열망을 대변하는 정당이었다.
[11]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oct/25-26/26d.htm
[12] 트로츠키, 1930, 『러시아혁명사』, 최규진 역, 2004, 풀무질, 3권, 제10장 411p.
[13] D’Atri, A. (2020). Bread and roses (N. Flakin, Trans.). London, England: Pluto Press. 한국어로 번역 중
[14] 같은 책.
[15] “세계적인 시야에서 이와 같은 진보적인 조치를 볼 때 가장 신기한 점은 러시아, 즉 경제적, 문화적으로 뒤쳐졌다고 여겨진 나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가부장과 차르, 보드카에 절어 있는 코사크족, 글을 배우지 못한 소작농, 채찍을 휘두르며 부를 쌓은 쿨락(부농)의 나라에서 여성이 반란을 일으켰다.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 건,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로 만신창이가 되고 제국주의 군대에 포위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가뭄, 질병,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던 시점이었다.” 오연홍 외. (2023). 『빵과장미의 도전』. 숨쉬는책공장. 103p.
[16] 오연홍 외. (2023). 『빵과장미의 도전』. 숨쉬는책공장.
[17] 같은 책.
[18] 같은 책.
[19] 트로츠키, 1936, 『배반당한 혁명』, 김성훈 역, 2018, 갈무리, 2장
[20] 같은 책.
[21] 같은 책.
[22] Walter Daum, 1990, The Life and Death of Stalinism, http://lrp-cofi.org/book/index.html
[23] 같은 책.
[24] 같은 책.
[25] 같은 책.
[26] 같은 책.
[27] 같은 책.
[28] 엄밀히 말하자면 좌익반대파의 입장을 트로츠키의 입장으로 모두 수렴하기는 어렵다. 프레오브라젠스키 등 좌익반대파의 일부는 급속한 공업화를 위해 강제적 농업집산화에 찬성하며 스탈린과 같은 길을 걷게 된다.
[29] 같은 책.
[30] 같은 책.
[31] 같은 책.
[32] 같은 책.
[33] 같은 책.
[34] 같은 책.
[35] 트로츠키, 1936, 『배반당한 혁명』, 김성훈 역, 2018, 갈무리, 7장
[36] 혁명 직후엔 신고결혼과 사실혼 사이의 법적 평등이 명문화됐었는데, 이것이 후퇴한 것이다.
[37] 원문의 저자가 스탈린 관료집단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38] D’Atri, A. (2020). Bread and roses (N. Flakin, Trans.). London, England: Pluto Press. 한국어로 번역 중
[39] 오연홍 외. (2023). 『빵과장미의 도전』. 숨쉬는책공장.
[40] “트로츠키, (1937), 「다시 한 번 소련과 그 방어에 대해」. 숙청당한 사망자의 수는 수십만에서 수백만까지 다양하게 추정된다. 어느 쪽이든 트로츠키의 용어가 문학적 과장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저자 각주)
[41] Walter Daum, 1990, The Life and Death of Stalinism, http://lrp-cofi.org/book/index.html
[42] 같은 책.
[43] 소련에 대한 전진의 ‘국가자본주의’ 규정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른 문서를 통해 체계적으로 논증하고자 한다. 관심있는 동지들은 추후에 나올 문서를 참고해주기 바란다.
[44] 스탈린주의가 어떻게 국제혁명에 재앙적 영향을 끼쳤는지는 추후 다른 강의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45] Ximena Goldman. (2024), Palestinian Liberation and Permanent Revolution, Left Voice, 최종현 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202&me_id=16&me_code=30
[46] Sou Mi. (2021), From Revolution to Capitalist Restoration: 100 Years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Left Voice, 김요한 역, 「혁명에서 자본주의 복고까지: 중국공산당 100년」, https://nht.jinbo.net/bbs/board.php?bo_table=online1&wr_id=1055
[47] 같은 글.
[48] 같은 글.
[49] 해럴드 로버트 아이작, 1938, 『중국 혁명의 비극』, 정원섭·김명환 역, 2016, 숨쉬는책공장, 7장~10장.
[50] Sou Mi. (2021), From Revolution to Capitalist Restoration: 100 Years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Left Voice, 김요한 역, 「혁명에서 자본주의 복고까지: 중국공산당 100년」, https://nht.jinbo.net/bbs/board.php?bo_table=online1&wr_id=1055
[51] 같은 글.
[52] 같은 글.
[53] 같은 글.
[54] 찰리 호어, 1991, 『천안문으로 가는 길』, 김희정 역, 2002, 책갈피.
[55] Ralf Ruckus, 2021, The Communist Road to Capitalism: How Social Unrest and Containment Have Pushed China’s (R)evolution since 1949, PM Press. 한국어로 번역 중.
[56] 같은 책.
[57] “여성 뒤에 붙은 별표(*)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젠더를 나타낸다. 여성*은 이분법적인 이성애 성별 개념을 넘어 여성으로 묘사되는 모든 사람과 의도적으로 여성과 같은 성별 표현을 선택하는 모든 사람(트랜스*, 인터* 또는 퀴어*)을 지칭한다. 별표(*)가 붙은 남성도 비슷한 이유로 사용되며, 시스 남성은 자본주의(및 사회주의) 국가에서 여성*과 같은 정도의 가부장적 폭력과 억압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저자의 각주)
[58] Ralf Ruckus의 ‘자본주의로 가는 공산주의 길’(The Communist Road to Capitalism)은 1949년 중국혁명부터 2021년까지 중국의 역사를 다루는 책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어떻게 ‘공산주의’를 공식 이데올로기로 내세운 중국이 오늘날의 자본주의 국가가 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규명하는 걸 목표로 한다. 이 책은 중국의 역사에 대한 풍부한 자료와 유익한 시각을 제공하지만, 저자의 시각은 우리와 일정한 차이가 있다. 저자는 1949년부터 개혁개방이 공식화된 1978년까지의 중국을 (전환기를 포함한) 사회주의, 1978년부터 오늘날까지의 중국을 (전환기를 포함한) 자본주의라고 규정한다. 반면 사회주의를향한전진에선 1949년부터 1978년까지 중국을 국가자본주의로, 1978년부터 오늘날까지는 시장자본주의라는 틀로 이해한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증은 추후에 다른 문서를 통해 진행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인용한 구절 곳곳에서 개혁개방 이전 시기를 ‘사회주의’라고 지칭하는데, 저자의 표현방식을 인용하였지만 우리는 그 표현에 동의하지 않음을 밝힌다.
[59] 같은 책.
[60] 같은 책.
[61] 같은 책.
[62] 같은 책.
[63] 같은 책.
[64] 같은 책.
[65] 같은 책.
[66] 같은 책.
[67] 같은 책.
[68] 같은 책.
[69] 같은 책.
[70] 같은 책.
[71] 같은 책.
[72] 지한(吉汉), (2019), 邊緣化的六四論述:八九春夏,其實發生的是「兩場運動」, 김모두 역, 「1989년 천안문광장에서 벌어진 6·4운동에 관한 비주류적 서술」. https://platformc.kr/2024/07/two-movement-in-tiananmen-2/
[73] Ralf Ruckus, 2021, The Communist Road to Capitalism: How Social Unrest and Containment Have Pushed China’s (R)evolution since 1949, PM Press. 한국어로 번역 중.
[74] 같은 책.
[75] 같은 책.
[76] 지한(吉汉), (2019), 邊緣化的六四論述:八九春夏,其實發生的是「兩場運動」, 김모두 역, 「1989년 천안문광장에서 벌어진 6·4운동에 관한 비주류적 서술」. https://platformc.kr/2024/07/two-movement-in-tiananmen-2/
[77] Ralf Ruckus, 2021, The Communist Road to Capitalism: How Social Unrest and Containment Have Pushed China’s (R)evolution since 1949, PM Press. 한국어로 번역 중.
[78] 지한(吉汉), (2019), 邊緣化的六四論述:八九春夏,其實發生的是「兩場運動」, 김모두 역, 「1989년 천안문광장에서 벌어진 6·4운동에 관한 비주류적 서술」. https://platformc.kr/2024/07/two-movement-in-tiananmen-2/
[79] Ralf Ruckus, 2021, The Communist Road to Capitalism: How Social Unrest and Containment Have Pushed China’s (R)evolution since 1949, PM Press. 한국어로 번역 중.
[80] 같은 책.
[81] 같은 책.
[82] 같은 책.
[83] 찰리 호어, 1991, 『천안문으로 가는 길』, 김희정 역, 2002, 책갈피.
[84] Ralf Ruckus, 2021, The Communist Road to Capitalism: How Social Unrest and Containment Have Pushed China’s (R)evolution since 1949, PM Press. 한국어로 번역 중.
[85] 같은 책.
[86] 같은 책.
[87] 같은 책.
[88] 같은 책.
[89] 같은 책.
[90] 찰리 호어, 1991, 『천안문으로 가는 길』, 김희정 역, 2002, 책갈피.
[91] ‘중국이 자본주의와 너무 가까워지는 것’은 저자의 시각이 묻어나는 서술이다. 우리 관점에서 다시 써보자면 시장자본주의 요소가 강화되면서 중국공산당의 통제력이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할 수 있다.
[92] Ralf Ruckus, 2021, The Communist Road to Capitalism: How Social Unrest and Containment Have Pushed China’s (R)evolution since 1949, PM Press. 한국어로 번역 중.
[93] 찰리 호어, 1991, 『천안문으로 가는 길』, 김희정 역, 2002, 책갈피.
[94] 지한(吉汉), (2019), 邊緣化的六四論述:八九春夏,其實發生的是「兩場運動」, 김모두 역, 「1989년 천안문광장에서 벌어진 6·4운동에 관한 비주류적 서술」. https://platformc.kr/2024/07/two-movement-in-tiananmen-1/
[95] 같은 글.
[96] 같은 글.
[97] Ralf Ruckus, 2021, The Communist Road to Capitalism: How Social Unrest and Containment Have Pushed China’s (R)evolution since 1949, PM Press. 한국어로 번역 중.
[98] 찰리 호어, 1991, 『천안문으로 가는 길』, 김희정 역, 2002, 책갈피.
[99] 지한(吉汉), (2019), 邊緣化的六四論述:八九春夏,其實發生的是「兩場運動」, 김모두 역, 「1989년 천안문광장에서 벌어진 6·4운동에 관한 비주류적 서술」. https://platformc.kr/2024/07/two-movement-in-tiananmen-2/
[100] 같은 글.
[101] 찰리 호어, 1991, 『천안문으로 가는 길』, 김희정 역, 2002, 책갈피.
[102] 지한(吉汉), (2019), 邊緣化的六四論述:八九春夏,其實發生的是「兩場運動」, 김모두 역, 「1989년 천안문광장에서 벌어진 6·4운동에 관한 비주류적 서술」. https://platformc.kr/2024/07/two-movement-in-tiananmen-2/
[103] 찰리 호어, 1991, 『천안문으로 가는 길』, 김희정 역, 2002, 책갈피.
[104] 같은 책.
[105] 지한(吉汉), (2019), 邊緣化的六四論述:八九春夏,其實發生的是「兩場運動」, 김모두 역, 「1989년 천안문광장에서 벌어진 6·4운동에 관한 비주류적 서술」. https://platformc.kr/2024/07/two-movement-in-tiananmen-2/
[106] Ralf Ruckus, 2021, The Communist Road to Capitalism: How Social Unrest and Containment Have Pushed China’s (R)evolution since 1949, PM Press. 한국어로 번역 중.
[107] 북한에 관한 교육자료는 전진에서 발행한 소책자 「제국주의 패권대결과 전쟁확산에 맞서 반제반전 노동자 국제연대투쟁을 건설하자!」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108] 주성하, 2018, 『평양 자본주의 백과전서』, 북돋움, 40쪽
[109] 다니엘 튜더 외, 2017, 『조선 자본주의 공화국』(North Korea Confidential), 비아북, 38~40쪽
[110] 같은 책, 8~9쪽
[111] 주성하, 2018, 『평양 자본주의 백과전서』, 북돋움, 44쪽
[112] 같은 책, 36쪽
[113] 같은 책, 30쪽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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