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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다시 마르크스주의 연재#1] 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와 만나야하는가?프롤로그: 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와 만나야 하는가? 모든 지배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거듭 마르크스주의의 종말을 선언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그때마다 거대한 생명력을 드러내며 부상했다. 2023년이 저물어 가는 오늘도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은 모든 나라들에서 잊히지 않은 채 떠오르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이러한 열광은 2018년에 처음 발견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사회주의를 향한 거대한 열광은 1980년대 중반 이후 1990년대까지 터져 나왔다. 이러한 열광은 최근 잠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지만, 그럼에도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나타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중 한 명이다. 왜 마르크스주의는 ‘죽은 개’가 될 수 없는가? 나아가 오늘날 노동자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마르크스주의를 탐구하고 마르크스의 사상과 대화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의 출발 - 자본주의에 대한 단호한 규탄 마르크스주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지라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상식과 직관이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 적대적이며 자본주의 철폐를 주장하는 급진적 사상이라는 점이다. 그렇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체제가 일하는 사람들에게 전쟁과도 같은 비참한 상태를 강요하며,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반동적인 체제라는 단호한 비판 정신에서 출발한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낳는 치 떨리는 폐해들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대체할 수 있는 과학적인 대안으로, 마르크스에 의해 발견됐다. ‘투사!’ 바로 이것이 사회주의가 마르크스라는 인물 속에서 탄생할 수 있는 뿌리였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처음부터 투사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를 투사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사회주의 사상을 탄생시킬 수 있던 원천을 창조했던 것은 바로 자본주의 그 자체였다. “학문은 이기적인 쾌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운이 좋아서 학문 추구에 전념하게 된 사람은 인류를 위해 자신의 지식을 사용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즐겨 하던 말들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러한 삶의 가치관을 죽을 때까지 굳게 지켜 나갔다. 역사적으로 인류를 위해 학문을 하고자 했던 선량하고 훌륭한 청년은 많았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왜 자본주의에 맞선 열렬한 투사의 삶으로 나아갔을까? 그것은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사회와 깊이 연결돼 있었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 마르크스는 1818년 프랑스 국경에 인접한 독일의 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1842년 프로이센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절대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스물네 살에 〈라인신문〉에서 편집진으로 일하기 시작한 마르크스는 자연스레 정치적 저항을 펼쳤고,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과 씨름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면서 기계제 대공업 생산이 밀려들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공장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탄생시켰고, 가난한 농민들을 임금노동으로 내몰았다. 마르크스는 슐레지엔 지역 방직공들의 봉기와 모젤 지방에서 포도를 재배하던 가난한 농민들이 받는 억압과 고통 등 노동자 민중의 비참한 삶과 대면했다. 그는 방직공들의 봉기를 전면적으로 지지했고, 그들의 민주적 권리 보장을 주장했다. 또한 사적 소유를 강화하는 새로운 법이 제정되면서 숲에서 땔감을 줍는 일마저 절도죄로 가혹하게 처벌받아야 했던 가난한 농민들의 권리를 옹호했다. 이렇게 가난한 노동자 민중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사적 소유권’ 즉, 자본가들의 재산 보호를 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약탈성과 반인간성을 경험했고, 분노했다. 그는 저물어 가는 낡은 봉건적 지배 체제와 새롭게 떠오르는 자본주의 지배 체제 모두에 맞섰다. 두 체제 모두 가난한 노동 인민을 무자비하게 착취했고, 잔인하게 억압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지배 체제의 뿌리, 가난한 노동 인민이 겪는 고통의 뿌리에는 ‘토지와 기계, 작업장 등 생산수단에 대한 배타적, 독점적 소유’가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했다. 지주와 자본가들은 이런 소유권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거대한 이익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이것에 저항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악랄하게 공격했다. 당연히 그것에 대한 해결책은 ‘서로 사랑하자.’는 식의 관념적 호소가 아니라 ‘지배계급에 맞선 피지배계급의 투쟁’이었다. 만일 절대주의의 잔인한 억압이 없었다면, 그리고 신흥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 희생되고 짓밟힌 노동자들과 가난한 농민들의 비참한 상태가 없었다면, 마르크스의 이론과 실천은 결코 저항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처럼, 관념철학의 상아탑에 갇힌 평범한 철학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의 뇌가 자본주의를 타도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는 혁명적 사상을 토해 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마르크스를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로 만든 것은 바로 반동적 사회 즉, 자본주의 자체였다. 만일 마르크스주의가 괴물이라면, 이 괴물은 모순으로 가득 찬 당시의 반동적 사회 체제가 잉태한 것이었다. 이것은 “왜 마르크스주의는 ‘죽은 개’가 될 수 없는가?”에 대한 대답을 찾는 데서 중요한 실마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착취, 억압, 부정의, 불평등, 전쟁, 바로 이것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잉태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불러오는 공통의 원천이다. 이 원천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르크스주의와 만나야 할 필요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바로 그 점에 대해 다룰 것이다. 1부. 알쏭달쏭 마르크스주의 1. 자본주의, 괴물이 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론이 21세기 세계와 한국 사회에 어떤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와는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해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쓸모없는 이론이 되지 않았을까?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흔히 제시하는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브라질에서는 총기 사고로 매년 3만 7,000명이 총에 맞아 죽는다. 인구 10만 명당 19명꼴이다. 이를 두고 가히 전쟁과도 같은 상태라 부를 수 있다면, 한국은 정말 전쟁 중이다. 하루에 43명, 연간 1만 5,000명, 매년 인구 10만 명당 무려 31명이 자살한다. 한 해 평균 2,000명 이상이 산업재해로 사망한다. 이것은 코로나가 정점이었던 2020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900명을 훨씬 넘는 숫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음을 방증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자본가들에게 한국을 포함한 자본주의 체제는 전쟁터가 아니고, 안전한 천국이다. 미국의 억만장자인 데이비드 게펜은 코로나가 절정으로 치달으며 모두 불안에 떨고 있던 2020년 3월, 인스타그램에 “바이러스를 피해 그레나딘 제도에서 자가 격리 중입니다. 모두 안전하길 바랍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과 함께 올라온 사진에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요트를 탄 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요트는 7500억 원짜리 호화 요트였다. 마르크스가 태어나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킨 시기와 그보다 약 2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가 과학적으로 분석한 자본주의의 본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작동하고 있다.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 즉, 불평등은 오히려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이 2014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 안에 드는 부유층의 재산은 110조 달러(약 11경 7,183조 원)로, 가난한 인구 35억 명의 재산보다 65배나 많다. 이런 불평등 경향은 최근 10년 가까운 사이에 계속 증가하고 있다. 다보스포럼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전 세계 억만장자 2,668명의 재산은 코로나19 2년 기간을 거치면서 무려 5,300조 원이나 증가했다. 불과 2년 사이에 1인당 재산이 평균 2조 원이나 늘어난 것이다. 옥스팜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3월 이후 2021년 12월까지 세계 최빈곤층은 매일 2만 명 이상 사망했지만, 세계 10대 부호의 자산은 2배 이상 늘었다. 이러한 불평등은 한국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2021년 기준, 한국에서 상위 10%가 보유한 부(재산)는 평균 12억 2,508만 원으로 전체 부의 58.5%를 차지한다. 반면 하위 50%는 평균 2,354만 원으로 전체 부의 5.6%에 불과해, 상위 10%와 하위 50% 격차가 52배 정도에 이른다. 이처럼 사회의 부 가운데 훨씬 많은 부분을 자본가들이 독점하면서, 그들의 권한은 모든 영역에서 커져 가고 있다. 그 와중에 세기말적 징후라고 하는 전쟁, 범죄, 도덕적 타락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절대빈곤을 해결했다는 것을 체제 정당화의 거의 유일한 알리바이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흔들리고 있다. 세계적으로 실업률은 높은 수준을 이루고 있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인간적 삶마저 포기해야 한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의 2015년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9명 중 1명이 충분한 음식을 공급받지 못했고, 하루 1.25달러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이들이 10억 명 이상이었다. 2022년 옥스팜의 발표 내용은 더욱 어둡다. 이러한 빈곤층이 33시간마다 100만 명이나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격화되는 자본주의 경쟁과 이윤율을 높이려는 자본가들의 잔인한 착취가 결합해, 더 많은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언제든 실업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한다. ILO(국제노동기구)의 2022년 11월 〈2022~2023 글로벌 임금 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중소득과 저소득 국가에서 일자리 숫자는 감염병 이전 일자리 수준에 비해 2% 줄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고소득 국가까지 포함해, 새롭게 생겨나는 일자리들에서 불안정하고 저임금의 비정규직 일자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ILO는 해당 보고서에서 글로벌 임금이 2022년 상반기에 실질적으로 0.9% 하락했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글로벌 임금 보고서〉를 발간하기 시작한 2008년 이후 최초의 하락 사례다. 이것은 가난한 나라들에만 해당하는 사례가 아니다. 보고서는 세계 임금노동자의 60%를 차지하는 G20 국가들로 범위를 좁힐 경우 월 임금 하락률이 2.2%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자본주의가 구세주로 삼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도 해법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가들의 수중에 장악돼 이윤을 위해 작동하는 과학과 기술은 대규모로 일자리를 제거하고, 노동자들을 더 강력한 경쟁의 톱니바퀴 속으로 밀어 넣는 공포의 수단으로 작동해 왔다. 2016년 7월 보고서에서, ILO는 4차 산업혁명으로 앞으로 20년 사이에 아시아에서만 1억 3,70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와 같은 명백한 상황은 만인 대 만인의 무한대의 경쟁을 강요한다.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어린 학생들까지도 경쟁의 링에 올라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안정감과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천 중 하나인 연대감을 파괴한다. 고립된 개인으로 내몰려 불안정해지고 행복감을 상실한 사람들은 자살의 늪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다. 고통에 절규하는 한국의 젊은이들 마르크스 이래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마르크스가 규정한 그 잔인한 착취 본성을 더욱 철저하게 발현해 온 것이 자본주의다. 게다가 이 자본주의의 미래 또한 달라질 것이 없다. 그것을 가장 명확히 보여 주는 것이 한국 노동자계급 젊은이들이 현재 겪고 있는 삶이다. 세상을 확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움트고 있다. 2015년 10월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의 토론회 “한국인은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에서 발표된 조사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년 42%가 원하는 미래에 대해 “붕괴, 새로운 시작”을 선택했다.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미래에 원하는 것으로 선택한 비율을 23%에 불과했다. 이런 결과는 이들의 조부모나 부모 세대가 젊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조부모나 부모 세대만 하더라도, 그들이 젊었을 때 압도적 다수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원하는 미래로 선택했다. 조부모, 부모 세대와 지금의 젊은 세대 사이에는 어떤 강이 흐르고 있는가? 과거를 지배했던 패러다임은 무엇이었는가? 첫째 낙수 효과 즉, 선성장 후분배에 대한 기대였다. 자본주의가 성장해 경제가 발전하면, 그 낙수 효과로 자본가들만이 아니라 가난한 노동자들도 혜택을 얻을 수 있어 더 나은 풍요로운 미래가 열릴 수 있다는 기대감 말이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박정희 시대의 엄청난 속도의 경제 발전은 그 낙수 효과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였다. 조부모 세대들은 열광했고, 성장하는 자본주의를 포옹했다. 부모 세대에 이르자 이런 포옹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IMF 사태는 자본주의의 잔인한 야만성, 그리고 자본주의가 경제적 풍요의 박차가 아니라 장애물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모 세대에 각인했고 거대한 공포심을 불러왔다. 이러한 부모 세대의 공포감을 보면서 자랐던 지금의 젊은 층은 더 이상 자본주의를 격하게 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수록 경제적 활력이 떨어지고 수시로 비틀거리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이 자신을 덮칠까 공포에 떨고 있다. 세월호 사태는 이 젊은 층에게서 자본주의에 대한 기대감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2022년 미국 퓨리서치센터의 여론조사 결과는 그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19개국을 대상으로 한 미래경제전망 설문조사에서 18세 이상 한국인 응답자의 60%가 자녀 세대의 경제형편이 부모 세대보다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이 수치는 미국 72%, 일본 82%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둘째, ‘개천에서 용 나기’ 패러다임이었다. 허리띠를 조르고 열심히 노력하면, 또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면 훨씬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 그래서 이 고통스런 노동자 계급의 삶을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감이 산산조각 나고 있다. 계층 이동의 통로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으며, 학력 수준은 갈수록 집안의 경제 수준에 좌우되고 있다. 대학을 나오더라도 그들의 다수에게 닥치는 미래는 ‘청년 실업의 높은 벽’이다. 소위 좋은 대학을 나오고 경쟁에서 겨우 승리하더라도, 그들의 대부분은 운 좋게 얼마 안 되는 정규직 자리를 꿰찬 것에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 부모 세대에서는 안정된 정규직 일자리는 고등학교까지 나와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세대를 거치면서 젊은이들의 삶의 기대치는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18~33세 때의 고용 상황을 비교했을 때, 침묵의 세대(1946년 이전 출생), 베이비붐 세대(1946~1964년생), X세대(1964~1980년생)까지는 고용률이 80%에 이르지만, 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의 경우 70% 수준에 머물고 있다. “세계를 변혁하라!”는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도 여전히 정당하다. 아니 더욱 절실하다. 마르크스 시대의 자본주의는 최소한 성장하는 성장하기라도 했다. 그러나 쇠퇴해 내리막길을 내달리는 것이 지금의 자본주의다. 그 내려가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기에 인류, 특히 미래의 세대를 더욱 고통스럽고 위험천만한 상황으로 내몰 것이다. 2. 여전히 빛을 발하는 마르크스의 문제의식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의식의 핵심은 바로 나와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사회 구조’를 정확히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노동자를 비롯한 압도적 다수의 노동하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계급 착취 체제인데, 이 착취는 갈수록 강화되고 그 결과 불평등 및 노동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갈수록 커진다는 것이 그 해명의 결과물이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마르크스 생전보다 오늘날의 현실에 더욱 유효하다. 당시에 출발 단계였던 자본주의는 오늘날 더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 자본주의는 세계적으로 확장됐고, 자본주의가 토해 낸 노동자 계급은 더 거대해졌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착취적, 반동적 본질이 200년 동안 결코 변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확고해지면서 미래 세대의 삶을 짓밟고 있다면, 이 자본주의의 본질과 모순을 밝히는 마르크스의 사상은 다른 누구보다도 젊은 세대에게 절실한 가치가 된다. 이 사상은 단지 과거의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결코 변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갈수록 현실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자본주의의 운동 원리가 낳을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미래의 방향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1883년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런던 하이게이트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불과 10여 명이 참석했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당시로는 그만큼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 자본주의가 마르크스의 과학적 분석의 정당성을 현실에서 스스로 드러냄으로써, 나아가서 실업과 공황, 세계대전의 폭풍우 속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인류가 갈구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사상은 전 세계의 노동자들과 젊은이들 속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만성화된 불황, 높아지는 실업률, 격화되는 경쟁, 갈수록 앞이 안 보이는 불확실한 미래, 전쟁의 위협 등이 젊은 세대를 칭칭 휘감고 있다. 다른 누구보다도 ‘오늘날’의 젊은이들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가장 거대한 생명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와 대면해야 하는 이유 마르크스주의와 대면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착취적, 반동적 본성을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어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그런 반동적 체제가 갖는 모순과 함께, 그 모순을 타파하고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함께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적대적인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만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진정한 차별점은 자본주의에 적대적일 뿐만 아니라 그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를 제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가 변화 발전하며, 낡고 반동화된 체제는 필연적으로 붕괴한다는 것을 해명했다. 자본주의도 역사적 진보성을 갖고 태어났지만, 결국 반동화돼 폐지해야 할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필연적이고도 과학적인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를 제시했다. 개인적인 이익이나 계급적 편견에 눈먼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같은 결론 즉, 사회주의에 도달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고 기회만 되면 자본가 계급이 떠들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유령 앞에서 그들이 계속해서 벌벌 떨 만큼 변하지 않는 현실성을 사회주의는 획득해 왔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가 하나의 사상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대안은 노동자 투쟁이라는 물질적 힘으로 구체화돼 자본주의를 붕괴 상태로까지 내몬 적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물질적 힘을 만드는 주체가 바로 노동자 계급이라고 규정했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에 의해 가장 고통받는 계급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모든 곳에서 거대하게 성장하고 조직화되는 계급이며,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새로운 노동 공동체 세상을 열 수 있는 혁명 계급임을 마르크스는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다. 하지만 그들을 동정과 배려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역사와 경제를 깊이 연구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이 사회주의 건설의 주역이라는 견해에 이르렀다. 마르크스는 독일 고전철학과 영국 고전경제학, 프랑스 사회주의라는 당시 인류가 획득했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성과들을 깊이 탐구했고, 이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 모순과 이것을 해결하는 새로운 사회로서 사회주의의 필연성을 도출했다. 사적인 이익의 영향을 받거나 계급적 편견에 눈먼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수십 년 사이에 한국에서, 중국에서, 인도에서, 베트남에서 자본주의화와 나란히 등장하는 수억 명의 노동자 계급을 보고 있다. 또한 아무리 사회주의를 증오하더라도, 노동자 없이는 자본주의가 굴러갈 수 없기에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들을 품고 있는 미국, 독일, 일본, 프랑스를 보고 있다. 교통과 통신, 무역의 발달은 이 노동자들을 더욱 긴밀히 연결시키고 있다. 그렇기에 자본가 계급은 잠시 사회주의를 막을 수는 있지만, 결코 이 도도한 물결을 막을 수 없다. 자본주의 착취에 대해 규탄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함께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혁명적 대안을 제시한 사람은 마르크스가 최초였다. 또한 마르크스가 제기한 혁명적 대안은 자본주의에 맞서 새로운 사회를 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여전히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남아 있다. 자신을 덮치는 자본주의의 공격에 맞서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모든 젊은이들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3. 사회주의는 죽었다? 모든 이론은 실험을 통해 검증된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이야말로 현실의 실험을 통해 명백히 파산을 선고받은 것이 아닌가? 이미 역사에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난 이론을 굳이 공부할 이유가 있을까?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약점을 지적한다는 점에서는 유효할지 몰라도,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사회주의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제기한다는 점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게 아닐까? 대략 위와 같은 논리가 마르크스주의에 다가오는 것을 가로막는 또 다른 결정적 장애물일 것이다. 사회주의가 북한이나 중국, 그리고 1930년대 이후 러시아를 의미한다면, 그런 비판이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주의를 정확히 탐구함으로써 그런 체제들이 과연 자본주의의 변종인지 아니면 진정한 사회주의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만약 변종이라면, 마르크스주의가 그것에 책임질 이유가 없다. 오히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부활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권력자들이 온갖 나쁜 짓을 한다고 해서 그 책임을 사회주의에 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200년이 넘는 기간, 세계적인 역사적 실험을 통해 자본주의는 무엇을 증명했는가? 불평등, 실업, 전쟁, 경쟁, 도덕적 타락, 가난 등이다. 무수한 실험을 통해 응당 파산을 선고받아야 할 당사자는 바로 자본주의 자신이지 않겠는가? 이 모든 것들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학습하고 탐구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자본주의 주류 체제가 왜곡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또는 이러저러한 지식인들이나 지배자들에 의해 변형되고 재해석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 저작 자체를 탐구함으로써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가 오늘날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과학적 해법을 제기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야 한다. 어떤 결과에 도달하든, 다음은 분명하다. 이 체제가 부당하고 낡았으며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느끼는 젊은이들, 이 사회가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전망을 모색하는 주체적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제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왜곡하지 않고, 그 객관적 실체에 다가가 보자. 물론 이 글 역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일 것이다. 책의 글들 또한 의심해 보면서, 더 많은 젊은이들이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이 낡고 반동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길을 찾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
[기고] 유럽투쟁기행: 날짜변경선을 넘어서 (3) 이탈리아, 스위스, 다시 한국이탈리아 - 로마, 베네치아, 볼로냐 다음날 낮에는 로마로 이동. G 동지와 만날 장소를 모색하며 메시지를 나누다 '좋은 데'로 데려가 주겠다기에 로마 구도심에서 강 하나 건넌 트라스테베레 지구로 나설 채비를 한다. 짐을 줄일 겸 모자에 조끼를 바로 걸치고 나서면 문득 조끼는 여행 중 도난방지에 유리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파란 모자에 머리띠는 합류할 때도 눈에 띄고 말이지. 박물관에서 일어를 할 줄 아는 C 동지를 데리고 오느라 좀 늦는다고 해 젤라또 가게도 들르고 공원이며 유적지를 가로지르며 구경도 하다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 사이에도 이런저런 그래피티와 스티커와 심볼들이 눈에 들어와 넋을 놓고 셔터를 눌러대고, 한 시간 남짓 경로의 어디를 둘러봐도 존재하는 팔레스타인 연대의 메시지가 전날 시위에서의 환대를 떠올리게 한다. 트라스타베레로 넘어가는 강둑 성당 앞 작은 광장에서 두 동지와 만난다. C 동지는 일어를 3년, 한국어를 1년 정도 공부했다고 한다. 간단한 의사교환이 큰 지체없이 일어나는 것에 감사한다. C 동지의 첫 마디는 역시나 “한국에도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단체가 있어?” 팔레스타인 긴급행동에 가입된 단체 숫자와 좌파 운동에서의 팔레스타인 문제의 중요도에 대해 말해 주었다. “다행이다”라는 반응도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향한 바의 입구에는 팔레스타인기 스티커가 붙어있으며, 옆의 벽에는 울고 있는 수박과 다양한 메시지들이 쓰여있었다. 바에 자리가 없어 크래프트 콜라를 한 손에 들고 바로 앞 분수대 계단에 C 동지를 중간에 두고 셋이 나란히 앉아 번역기로 이야기한다. 이번에는 긴 호흡으로 좀 더 길고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번역기 입력창에서 최근 한국의 정세를 축약하다 보면 모든 걸 담았지만 건조하고 맥락 없는 문장이 넷플릭스 프로그램 소개문을 닮아있다. 나중에 찾아보니, 트라스타베레는 '로마의 홍대'라고 한다. 그러니까 동지는 정말로 외국인을 '좋은 곳'에 데려가 준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안 외에도 어떤 투쟁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4B 운동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해외에 한국발 페미니즘으로 대표되고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4B 운동에 대한 질문을 받을 줄이야. C 동지는 한국의 페미니스트 작가의 인스타그램 계정도 보여준다. 기존의 좌익운동과의 분리, 해당 의제를 주로 하는 페미니스트 그룹의 배제주의 노선, 여성-재생산 파업이라는 개념에 대한 공감의 존재 등으로 설명한다. 더불어 우리야 뭐 이것저것 한다, 기후정의, 장애인이동권, 노동권, 젠더/성소수자 이슈 등등…정도의 맥아리 없는 대답을 돌려주자 유익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탈리아는 2023년경 임신중절 범죄화와 같은 여성과 성소수자 권리에 대한 백래쉬가 있었으며,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항하는 연대의 물결에 동참했다.” 전날 시위에서 남성 동지의 백팩에 달려있던 '임신중단은 자연스러운 것이다'라는 인상적인 뱃지와, 벽에 적혀있는 임신중단권을 옹호하는 문구에 대해 납득한다. 이 이전에도 후에도 본 수많은 여성과 트랜스젠더를 옹호하는 심볼이며 문구이며 인클루시브 프라이드 플래그 등등에 대해 이 설명이 없었다면 많이 혼란스러웠으리라. 동시에 이탈리아는 한국에 비해 중심적인 거대담론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멜로니 정부가 저출생에 대한 대응으로 이주민 유입을 일부 확대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는 G 동지에게, 한국의 극우들 사이에서 북풍몰이를 대신해 확산되고 있는 혐중정서나 이주민 혐오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국의 저출생 대응에는 그러한 정책적 흐름이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왜곡된 페미니즘 이론을 우파적 선전에 이용하는 이들도 있으나 주류 정치에서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의제는 여전히 주변부적 위치라거나, 그런 대답을 늘어놓는다. C 동지가 G는 역사지리학 교수라고 소개하며, 이탈리아와 이탈리아의 사회에 대해 궁금하거나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지 묻는다. 10월 초 우정국 파업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이탈리아는 지금까지 방문했던 국가들 중에서 비교적 설명하기 힘든 방식으로 감성적이고 고맥락적이라 한국(아시아권 국가)과 약간 닮은 부분도 있다. 친절하고, 타인과의 거리감이 가깝고, 아주 강하게 조직될 수 있는 사람들로 여겨지며, 동시에 그것이 정반대의 진영에서도 일어나리라 예상된다고 답하자 나름 수긍하는 표정을 한다. 이야기가 길고 복잡해지자 G 동지가 잠시 난감해하다 스마트폰을 수평으로 들어 올려 번역기에 음성인식으로 입력하는 것도, 그것이 제법 잘 인식-번역된 결과물도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G 동지가 건네오는 질문은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 엄청난 주어이다. 기대에 서툰 성격 상 평소에 너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부분이라 뭐라 답할 수 없어, 대신 근 1년여간 봐온 것들, 만나온 사람들, 좌파 운동과 그 안에서의 사회주의 의제,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탄압의 현주소를 이야기한다. 나는 내 생애 그것이 가능할지 너무 기대하지 않고, 나의 노조와 함께 '내 일한 만큼 받는 세상', 더 나아가 '능력껏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세상'을 위해 힘쓸 뿐이라는 말과 함께.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 미사를 시작하기 전의 성당을 구경하러 간다. 입구로 들어서기 전, 오면서 여러 번 보며 신경 쓰였던 원과 화살표의 심볼을 떠올리고 사진을 보여준다. “자율주의Autonomism. 노조나 정당이 아니라 네트워크에 가까운 방식을 추구하는 노동자 운동.” 혼란에 빠진다. 일주일 안 되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노조 바깥의 사회주의자들을 만나며 세계관을 넓히고 있었지만 여전히 현장중심적 노동운동에서 노조운동 외를 좀처럼 떠올리지 못하는 나는 기존의 방법론에 대한 비판이나 냉소 같은 안티-테제적인 개념만을 한참 더듬다가, 일종의 아나키즘적-노동자 운동이라는 결론을 제시하고는 적당한 수긍을 듣는다. 그렇다면 그만큼 급진적인 사상이라는 거겠지. 트랜스 심볼과의 결합이며 함께 그려져 있던 서클 A들을 떠올리며, T 동지의 ‘뒤숭숭한 세상에서 극좌가 부상한다’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탈리아는 정말로 어떤 곳일까. 답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질문이 시작된다. 따뜻한 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회랑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C 동지와 실없이 몇 마디를 주고받는다. 크리스천이냐는 질문에 “크리스천적인 인간이지만 더이상 종교로서 믿지는 않는데, 나 같은 사람을 냉담자라고 하더라”고 답하자, C 동지는 “나도 그렇다”고 말한다. 예상 외의 대답이었기에 그 한마디가 어떤 의미일지 곰곰히 생각하면서 크지 않은 회랑에서 빠져나온다.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직전에 한국의 연대시민들이 만든 팔레스타인이나 노동 의제 스티커를 한국어를 공부한다는 C 동지에게 넘겨준다. C 동지가 “티켓을 살 필요는 없다”고 한 버스에 올라타면 피렌체의 트램에서 본 것과 같은 티켓 리더기가 있어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도덕의 기준이나 문화적 규범은 유동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며 숙소로 돌아간다. 트라스테베레의 로마 최고最古의 성 마리아 성당 다음 날에는 사람에 치이며 바티칸을 관광한다. 시스티나 성당 예배당 천장의 '천지창조'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적 세계관 속의 인간과 신의 도달 불가능한 간극에 대해 듣는다. 기념품점에는 새 교황의 호쾌한 얼굴이 마치 슈퍼스타처럼 늘어서 있다. 가족을 위해서는 삼중관과 열쇠가 그려진 묵주를 산다. 희년(禧年, Iobeleus)을 맞은 베드로 대성당은 성당은 고사하고 광장 바깥에서부터 사람으로 가득 차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바티칸 바로 옆의 집값은 로마의 다른 곳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가이드로부터 듣는다. 구글 지도의 경로 안내가 버스 파업으로 갱신되고 우체국이 점심때 닫는 것을 보며 로마 구도심의 유적들로 다시 향하면, 이 성당에서는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됐고 저 성채에는 교황님이 피신하셨으며 저 성당의 성문(聖門, Porta Sancta)을 통과하면 죄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들이 발에 채일 듯이 널려있다. 우리나라의 극우 컨트롤 타워 중 하나는 개신교와 해당 계열 컬트라고 했을 때 G 동지는 “억압적인 사상의 가톨릭 국가로서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가톨릭 신자 비율이 80퍼센트인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것은 더 이상 나의 믿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C 동지의 말을 다시 곱씹어본다. 해방신학에 대한 흥미를 표했을 때 별 답을 듣지 못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저 허공에 매인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뿐일지도. 일기예보를 본다. 변경된 일정에 따른 기상 악화의 가능성으로 고심 끝에 인터라켄 방문을 취소하고 로마에서 하루를 더 보낸다. 이런 일정을 짤 때는 앞으로는 주말을 동지들과 보내는 것을 염두에 두기로 한다. 달리 할 일이 없어 찾아간 국립 미술관에서 팜플렛 표지서부터 나오는 적장의 목을 따는 유디트는 결국 찾지 못하고 대신 인상적인 그림을 본다.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여행 속에서 나름 기독교 예술을 질리도록 접한 뒤라 흔치 않은 시점과 구도라는 설명에 공감한다. 고통에 찬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유대인들의 왕'과, 만면에 띄운 조롱의 미소이며 가시관을 씌우는 우악스러운 손길이 생생하게 대비된다. 이 그림의 감상은 '이 이야기의 올바른 편'이 어느 쪽인지 그림을 보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완성되리라.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부담도 주저도 없는, 반성도 사과도 들을 수 없는 탄압과 살해에 스스로 용서를 주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닌 '사람의 아들'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야간열차로 로마를 떠나 새벽에 베네치아에 떨어진다. 역을 나서자마자 바닷물이 보이는 도시에서는 자동차의 역할을 모두 배가 한다. 경찰 보트가 넓은 운하를 가로지르고 운구-선이 관을 공동묘지-섬으로 옮기며 정비소 역할을 하는 아주 작은 조선소에는 아주 작은 크레인이 있다. 잘못 탄 수상 버스 차창 너머에서, 바닷물 한가운데에 뻗은 기둥에 멋들어지게 적힌 'Free Palestine'이 눈에 들어와 잠을 깬다. 사람 없는 시간에 자기 배를 몰고 온 누군가는 이것을 그리는 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까. 벽에 이것저것 쓰여있다거나 심볼이 있다거나 물가에 면한 가정집 창가에 팔레스타인기를 걸어놓는 일은 여전히 계속되고, 오히려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마주치는 것들의 종류며 빈도가 로마보다 더욱 밀도가 높은 느낌도 든다. 로마의 '관광객은 집으로'에 이어 '베네치아를 베네치아인에게'라는 문구를 벽에서 찾는다. 그린피스 스티커나 관광객 안내도의 금지사항들을 보며 기후위기의 국면을 맞은 수상-관광도시가 처할법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Stecco: 본명 Luca Dolce. 25년 4월에 3년 6개월의 징역을 구형받은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활동가. 현재 복역 중. 이 사람들에게 축구 팀이란 무엇일까 (‘1312’는 ‘ACAB’(모든 경찰은 후레자식이다)의 은어로 쓰인다.) 'Venezia FC 파이팅' 아담한 크레인. 구글 지도에 조선소라고 적혀있는 이곳은 아마 자동차 정비소 정도의 개념인 듯 하다. 여섯 색 무지개는 물론 인클루시브 프라이드 플래그가 어엿하게 자리잡은 사회가 신기하다 관광도시의 주민이 드러내는 정치적 실천은 세계를 향한 스피커로 기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밤늦게 출발하는 열차로 베네치아를 떠나, 볼로냐 중앙역에서 짧은 밤을 보낼 숙소로 이동한다. 역 인근에서 10여 분을 걸었을 뿐인데도 아주 많은 말, 지금까지의 명료한 단어나 심볼을 넘어서는 난해한 문장들이 사방에 펼쳐진다. 런던에서의 익숙한 폰트와 재회한다. 영국에 비하면 이탈리아의 '혁명 공산당'은 상당한 신생정당인 것으로 보인다. Camp Unil Palestine: 스위스 로잔의 대학교 UNIL–Géopolis를 거점으로 하는 팔레스타인 연대 단체. 이스라엘에 대한 학술 보이콧 활동을 하고 있다. A Foras: 사르데냐 군사점령 반대 단체. 사르데냐에는 이탈리아와 NATO의 군사시설이 집중되어 있으며 분리주의 의제의 정당(사르데냐 행동당)이 존재한다. Rami Elgaml: 이집트계 19세 청년. 24년 11월 밀라노에서 친구와 스쿠터 운전 중 고의적 경찰폭력으로 추락사. 해당 사건에 대한 재판은 현재까지 진행 중. 인터라켄의 예정이 사라졌으므로 마지막 날은 볼로냐 중앙역에서 밀라노 중앙역으로, 거기에서 스위스의 취리히 중앙역으로, 다시 취리히 공항역으로 이동. 밀라노 중앙역에서 탄 국제선 교통약자 칸에서는 뒷좌석의 할아버지들이 팔레스타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드문드문 들려온다. 국경을 넘기 직전에 잠시 정차한 기차 안에서 이것저것 돌이켜본다. 햇살이 뜨겁고 사람들이 정열적인, 국가 단위의 거대담론이 건재하고 강하게 조직된 동지들이 살고 있는 음식이 맛있는 나라. 동시에 전체주의와 조직폭력단을 일컫는 일반명사가 태어난 나라. 축구 경기에 관심이 많고, 거리감이 가까워 처음 만난 이에게도 친근하게 다가오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튀는 사람으로 살기에는 고생스러울 것 같다고 생각되는 나라.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급격하게 이행하는 불연속점이 시스템 전반에서 눈에 띄는 나라. 더운 날씨 때문인지 방문했던 다른 국가들에 비해 확연하게 밤이 늦은 나라. 카톨릭과 가부장제가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는 나라. 고생하시는군요, 서로 힘냅시다 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프랑스에서 느꼈던 서러움과는 정반대의 어딘가 익숙하고도 가까운 기분이 드는, 어딘가 지금의, 혹은 좀 더 이전의 한국에 대한 기억과 닮은 나라. 아직 다 해석되지 않은 한 무더기의 사진들과 함께 나는 한동안 이 땅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스위스 기차에서 내리면 언어와 화폐와 물가가 다른 땅. 마지막 식사를 위해 역을 나선다. 강풍주의보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강을 따라 내려가며 느낀 첫 감상은 '표백된 것 같다'였다. 풍요로운 마트와 맛있는 간식 가게와 예쁜 경치가 있고, 큰길을 따라 내려가면 별 눈에 띄는 낙서도 스티커도 없이 평화로운 광경. 여러 곳에서 본 여러 선전물들이 있을 법한 자리의 공백이 어색하게 느껴지고, 여섯 색깔 무지개와 환대의 표현이 종종 보이는 것 정도가 두드러지는. 그러나 역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음식점을 찾아 몇 걸음만 골목으로 들어가면 조금이나마 익숙한 문구들이 보이고, 인근 거주자들이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쓰레기 수거함은 좋은 선전물이 될 수 있다는 걸 이탈리아에 이어 다시금 깨닫는다. 하여튼 어디든 경찰 싫어하는 것만큼은 똑같은 것 같다. 짧은 시간 체류했지만 산지가 많고, 문화적 특징보다는 청정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자부심이 두드러지고, 물가가 인근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높고, '일단은' 중립국인 작은 이 연방공화국으로부터 자의적으로건 타의적으로건 어딘가 고립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런 식의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이 사람들에게 자연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다양한 사회의 형태를 접하고 그것이 운영되는 방식을 엿보는 것은 언제나 경이롭다. 대한민국: 그리고 남은 이야기 공항 구석에 있는 국적기 카운터의 직원이 수하물 위탁은 받지만 체크인은 모바일로 해오라고 하거나(영국이라면 이런 건 무인-기계-위탁으로 돌렸을 텐데!), 기껏 이탈리아어에 익숙해졌더니 독일어에 당황하거나 하는 일들을 거쳐 열 한시간을 날아 인천으로 돌아간다. 손가방에 배인 러쉬 워터멜론(수익의 70%가 팔레스타인의 절단장애인 의료지원에 사용된다고 한다)의 강렬한 향이 눈빛이 부드럽고 색소가 옅은 검역견과의 짧은 만남을 주선한다. 아뇨, 과일은 없어요. 가방에 든 음식은 과자랑 파스타 뿐입니다. 세관을 통과해 공항 로비로 나오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인천공항 재파업을 목전에 둔 공공운수노조 조합원의 조끼 위의 몸자보.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고민을 하고 돌아온 여행의 마무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나의 삶과 운동의 공간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느껴진다. 날짜를 확인하면 빌려왔던 하루가 사라진 것이 묘하게 손해 본 기분이 든다. 여행 내내 셔터를 눌러 댄 필름 여섯 통분의 사진이 수동카메라의 조작 미숙으로 찍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현상소에서 깨닫고 절망한 다음(내 베스트 컷들이!) 사진을 기대한 L 동지 일행에게 그 사실을 전하고, 대신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 중 괜찮은 것들을 보내준다. 아직 시차에 고통받고 있는 동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감상평 하나가 눈을 끌어 심야 티켓을 끊는다. 초반부터 '아나키스트 활동가'는 구체적으로 어떤 반정부 투쟁을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동시에 T 동지의 '너희 나라 아나키'의 취급에 대한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도, 우리나라에는 '극좌'가 존재하지 않는다던 누군가의 평가마저도 이해한다. I 동지가 고공농성과 도크 점거를 보고 감탄한 다음 “그 사람들은 감옥에 갔어?”라는 물음부터 꺼냈던 것이 어떤 논리에서 온 것인지도 생각한다. “감옥은 안 갔어. 우리가 안 가게 탄원했어. 가끔 조사는 받았어.”라는 대답에 얼굴에 번지던 미소도. 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뒤집히고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파리에서도 런던에서도 혁명의 전운을 느끼고 앞으로의 세계가 어디로 나아갈지, 이 역동이 한국에는 언제 어떻게 다다를지 상상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길거리며 시위 한복판을 걷는 동안 나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는 현재진행형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혁명은 한순간의 커다란 완결이 아니라 작은 변화들이 만드는 흐름에 대한 정의라는 것. 매일매일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변화'들이 서로 연결되어 우리가 바라는 세상에 다다르는 발걸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 그렇다면 그것이 내가 자리한 곳이 아닐 이유는 없으며, 오늘 우리의 집회도 몇십 년 후에는 혁명의 흐름 위에서 이야기될지도 모른다는 것. '연속혁명'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는, 러시아 혁명이며 한국 노운사 따위의 성공과 실패, 반복되는 진전과 퇴보를 떠올리며 '말이 쉽지. 혁명이란 순간 같아도 전후 몇십 년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데, 지금의 우리에게 그런 큰일을 연달아 터뜨릴 기반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좌파 운동이나 체제전환에 대한 이해 없이 장엄한 수사로서 혁명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냉소도 커져만 갔다. 세계가 나빠져만 가는 소식들을 들을 때마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라는 무력감에 짓눌려왔다. 지금은 안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이유는 사실은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할 때조차 언제나 같은 적과 함께 싸워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혁명이란 연표 위의 한 점이 아니라 시공간적인 연속성이 만들어내는 흐름 그 자체이며, 역사라는 이야기의 모든 사람들이 연루되고 또 구성하는 것이며, 오늘 나의 한 걸음 또한 돌아갈 수 없는 변화를 만드는 데에 가담하였다면 나는 이미 '라 비바 레볼루시옹'의 일원이라는 것을. 말 그대로의 투쟁, 영원한 투쟁One Battle After Another. 여행을 떠나는 길에는 막연하게 '집회에 나간다'거나, '활동가를 만난다'라는, 마치 세상 어디서든 일요일에는 예배를 드리는 기독교인의 심정으로 내가 평소에 해 오던 것을 하러 가리라고 생각했다. 막상 현지에서 만난 동지들은 어엿한 사회주의 단체에 소속되어 공통된 이론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사회상이나 운동의 양상, 방향성의 차이 등을 감안하더라도 스스로의 이론적 토대의 부실함에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 간극을 곱씹는 동안 '사회주의자 동지들의 관심사를 듣는 것도 함께 이야기하는 것도 소중한 경험이지만 어쩌면 나는 노조활동가를 만나서 노조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을지도 몰라' '다음 목적지는 독일의 금속노조 사무실이 될지도 모르겠군' 같이 자신의 관심사의 좌표가 점차 선명해져가고,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 운동, 사회주의 운동에서 노조운동의 범주 바깥에 존재하는 다양한 방향성에 대해 시야에 넣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 즐겁고도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얻게 된 의문과 해답들을 좀 더 이해하거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전체상 위에서 나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운동의 목표와 방향성을 설정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연결될 필요성을 느끼거나, 누군가에게 여러가지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개념과 언어를 가지거나 하고 싶은 마음이 사회주의의 이론과 역사를 공부하는 일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좀 더 알고 싶다. 배우고 싶다. 먼 나라의 먼 시대의 사람들이 해왔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전진의 교육은 새로 조직된 이들에게 지식과 통찰을 제공하였다'고 T 동지에게 스스로가 한 말을 믿는다면, 한국과 세계의 운동사에 대한 개괄적 이해가 실제로 먼 나라의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므로 이 모든 게 강단 위의 헛소리가 아니라 실재하는 역사이고 삶이며 운동의 실천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지식이고 누군가를 키우고 또 연결하는 일이라면 조금만 더 잘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다양한 사회 속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며 계속해서 생각했던 것은, '어딘가에서 당연하지 않은 것은 어딘가에서는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또 어딘가에서 당연하다고 믿는 것도 다른 곳에서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 골목길의 가게나 마트의 진열대에 수많은 종류의 햄이나 치즈가 밑반찬처럼 늘어서 있는 풍경, 몇백 년씩 된 낯선 모양의 건축물들. 혹은 터무니없이 들릴 만큼 강력한 총파업과 봉쇄 행동, 관광지 한복판에 나타난 트랙터와 그에 대한 경찰의 태도, 거리를 메운 상징과 포스터의 전쟁. 좌파 정치에 영향을 미칠 만큼의 아나키스트와 마오주의자가 있는 나라. 우리가 쿠바의 미군정과 혁명에 대해 아는 만큼만 북한의 정세에 대해 아는 사람들. 그리고 거기서 열 몇시간을 날아가면 옛 왕궁 근처의 빌딩에서 사회주의의 기초를 가르치기 위해 '중국과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라는 챕터에 한 강 전체를 할애하는 분단국가가 나온다. '멀리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인지도와 동의도의 차이. 우리가 물리적인 세계를 산다는 것이 빚어내는 간극들. '지정학'이라는 개념의 무게에 대해 새삼 느끼며 역사지리학자인 G 동지가 수업에서 할 법한 이야기들도 생각해본다. 다음에 그를 만날 때엔 좀 더 괜찮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면 좋겠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결국 동화 속 공주님이 뾰족한 성에 사는 것도, 에펠탑이며 모나리자도, 선진국에서는 허구한 날 파업으로 지각한다는 소문도, 사회주의 혁명을 삶의 목표로 삼고 내다보며 준비하는 사람들도, 어떤 이야기나 메타포 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손을 거쳐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나에게 그건 정말로 그곳에 가서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일이었으며, 어쨌거나 직접 보고 만 이상 다시 없던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고, 이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 '진짜인' 모든 것들이 나의 삶이며 결정 같은 것들과 이전에도 앞으로도 상호작용하리라는 진실이리라. 떠올릴 때마다 심란해지는 사실이지만 이론에 선행하는 경험을 부정할 재간은 없다. 이따금 피렌체 시위에서의 영원한 돌림노래가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집회에서 찬바람 부는 이태원을 행진하며 만난 외국인들의 환대에 이어진 하늘 너머 어느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의 그것을 떠올린다. 다른 장대한 목표들과 함께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것'을 사회주의자의 현시점에서의 중요한 과제라고 하는 강의자료를 보며 바다 건너 '제국'의 동지들의 진지한 고민들을 떠올린다. 돌아온 곳을 새로운 눈으로 마주하며 여행은 다시금 이어진다. 일곱 시간 뒤에서, 혹은 두 세기를 넘어서, 사십 오 년 전으로, 어쩌면 바로 지금. 바다를 건너서, 철조망을 넘어서, '제국'이 그은 금에도 신경 쓰지 않으며, 우선은 이 손이 닿는 곳에서부터. 백만 가지의 모습으로 서로에게 손을 뻗고 그렇게 누구도 선 뒤에 남겨두지 않아야만 비로소 내일이 찾아온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혁명은 시작된다.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이미 '인터내셔널'일지니, 기립하는 것 외의 선택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끝) [지난 글 보기] [기고] 유럽투쟁기행: 날짜변경선을 넘어서 (2) 이탈리아 피렌체 -
[기고] 유럽투쟁기행: 날짜변경선을 넘어서 (2) 이탈리아 피렌체이탈리아 - 피렌체 아침에 출발한 비행기가 약간의 연착을 거쳐 피렌체 공항에 도착한 것은 정오 남짓. 작은 도시의 작은 공항인데도 바로 앞의 정류장에서부터 군인들을 마주쳤다. 아, 지금 온 트램은 시내로 안 간다고요? 파리에서 런던으로 넘어갈 때의 영어가 이렇게나 친근한 언어였던가 하는 기분과 대조적으로 이탈리아어는 한 문장 중에 한 단어만 정도 귀에 들어온다. 이후 이탈리아 여행 내내, 어쩌면 경찰보다도 많은 군인을 길에서 마주친다. 밤에는 검문에 걸린 듯 군인에게 둘러싸인 사람들도 본다. 마지막 날 들른 볼로냐 중앙역에는 군용 인식표를 만들 수 있는 기계까지 있었다. 관광도시라서? 혹은 착륙하자마자 외교부가 칼같이 보내온 ‘치안과 마약에 주의하라’는 문자와 같은 맥락으로? 캐리어와 함께 매장된 유적을 보호하기 위한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건너와 체크인을 하고 시간을 보니, G 동지가 연결해 준 오늘 시위에 참석하는 L 동지를 미리 만나 설명을 듣겠다는 계획은 물 건너간 듯하다. 시작 전까지는 도착하겠다는 연락을 보내고 간단한 세부사항을 묻는다. “공장을 점거하여 집단해고된 노동자들이 친환경적이고 자주적인 공장 운영을 위한 정부의 지원을 촉구하고 있으며, 이는 시민사회의 큰 지지를 얻고 있다.” “이런 종류의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되며, 대개 경찰과의 충돌은 없다.” 좋군요, 우리도 노동자-자주관리 기업이 드물지만 존재합니다. 첫 끼로 햄과 치즈가 든 피자-빵(아마도 파누오초)을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해치우고는 버스에 오른다. 숏폼으로 시위 영상을 보는 승객의 옆자리에서 금속노조 조끼를 입는다. 10월인데도 아직 여름이라는 기분이 들 정도로 햇살이 따갑고 날씨가 더워서, 노조 모자도 가져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 Collettivo di fabbrica GKN 주최.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는 다비드 상이 전시되어 있다. 버스에서 내려 대학 뒤편의 광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경찰이 둘쯤 보이고, 가방에 여러 개의 퀴어 플래그 뱃지를 달거나 쿠피예를 걸치거나 노란색 깃발(나중에 현장의 동지에게 유명한 반군사 단체의 깃발이라고 듣는다)을 든 사람들이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걸 보고 안심하고 따라붙는다. 졸업 시즌이라 붐비는 대학교 앞을 돌아 샛길로 들어가면 광장에 도착한다. 집회 시작 전부터 투쟁 굿즈 가판대며, 동지들이 선전물을 나눠주는 작은 테이블, 모금함을 든 사람이며 책을 파는 사람들이 있다. 아나키즘이나 반-시온주의 상징 등과 함께, 한 손에는 팔레스타인기를, 한 손에는 투석구를 든 유명한 시위대의 사진이 뱃지로 판매되는 것을 보며 문화의 차이를 느낀다. 동시에, 그 모습이 오늘 시위의 테마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매대 앞에서 가진 현금을 가늠하다 슬로건이며 핀버튼이며 마그넷 같은 것을 몇 종 산다. 배포대를 접을 준비를 하는 동지들과 인사하고 유인물을 받아든다. 동지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는 'Solidarlity' 한 단어만이 귀에 꽂혀온다. 다양한 단체의 깃발들이며 행진을 위해 길게 펼쳐진 현수막들은 붉은색과 흰색이 주된 색조로, 천 위에 손으로 쓰고 그린 것이 생각보다 많다. 확성기를 들고 행진 내내 노래를 부르게 되는 영어를 잘하는 동지가 '우리를 잃어버리면 이 못생긴 깃발을 따라오면 돼'라고 했던 오늘 함께하게 될 조직의 깃발도 붉은 천 위에 손으로 쓰여있다. 크기가 크거나 깃대가 길지 않아서인지 대부분의 깃발이 마치 손깃발을 키워놓은 양 흰색 플라스틱 깃대에 천 전체가 걸려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다비드가 붉은 옷을 입고 있었으니 노동 의제 시위이겠거니 한 것 치고는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상징들이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행진이 시작되면 동지들이 내내 부르는 노래들 또한 그러하다. 필름카메라의 셔터를 연신 누르고 있자니 행진이 시작할 때쯤 '저런 걸 찍어야지'라며 한 동지가 앞쪽을 가리킨다. 손가락이 가리킨 끝에서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저게 뭐냐고 기겁하자 '스포츠 경기 응원 등에서도 사용되는, 근사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덕덕고(DuckDuckBot. 구글 등과 달리 개인정보 보호를 모토로 계정 기능, 검색어 수집 없음을 특징으로 하는 일부-오픈소스 검색엔진)로 'Fumogeno'의 이미지 검색 결과를 보여줘서 에펠탑 앞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납득한다. 한편으로는 화기로 오인되지는 않는 것인가? 경찰에게 제지받지 않아? 하고 한국에서 온 연대자로서는 머리가 멍해진다. Insorgiamo: '기립하라, 봉기하라'. 시위의 주최단위인 GKN 피렌체 공장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된 사회적 운동. 기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파르티잔 저항운동의 구호. 눈부신 햇살 아래 어느 단위든 씩씩하게 행진하지만, 나의 일행들은 한눈에 봐도 작은 단위인데도 쉼 없이 구호를 외치고 노래하고 북을 두드리는 모습이 대오 안에서도 존재감 있게 느껴진다.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클라이맥스. 영원히 불나비를 부르며 진격하는 말벌부대를 상상해보라. 탄핵 정국의 '축제 같은 시위'에 대한 누군가의 엄중한 지적이 한층 더 공허하게 느껴진다. 잠시 대오가 멈추고 노래가 잦아드는 쉬는 시간에도 지치지도 않고 서로 장난치고 입을 맞추고 방금 전까지 부르던 네타냐후를 규탄하는 노래를 어깨에 힘을 빼고 흥얼거리는 것을 보며 그 활력에 감탄한다. 동시에, 시위의 행선지도 종료 시간도 모르고, 불리우는 노래도 구호도 평소와는 모두 다르고, 몇 시간 전에 처음 밟은 땅의 말은 제대로 알아듣지도 외치지도 못해서 동지들의 성량에 뒤지지 않기 위해 조끼 주머니의 '응급용 카주'를 꺼내 열심히 불던 입장에서는 '나도 저런 동지들이 있는데, 저런 거 할 줄 아는데' 하고 약간의 쓸쓸함을 느끼고, 동시에 내가 광장에서 만나온 동지들을 하나씩 겹쳐보며 나름대로 마음으로 다가서 보기도 한다. 파리와도 런던과도 다른 직선적인 건축양식.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오래된 건물들 위로 맑은 날씨의 빛과 그림자가 드리우며 풍경을 만들고, 몇 시간에 걸쳐 걷다 보면 해가 기울어 감에 따라 시가지는 점차 얼굴을 바꾸어간다. 통일감 있는 건물들 사이에서도 심심찮게 시선을 사로잡는 것들은 평범한 가정집에 내건 팔레스타인 깃발이며 인클루시브 프라이드 플래그, 낯익은 배색으로 늘어놓은 빨랫감, 무심하게 난간에 걸쳐진 쿠피예, 때때로 육교 위에서며 가게 위층이며 열린 창 너머로 환호를 보내오는 사람들. 생각 이상으로 대오는 컸고, 경찰은 보이지 않았고, 퀴어문화축제나 퇴진광장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종류의 환대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크기와 빈도로 접해서 얼떨떨해진다. 여기서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좌파 운동 바깥에서도 이렇게나 지지를 얻고 있단 말인가? 대오가 잠시 멈추었을 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모자의 머리띠는 무슨 의미인가?” 단결, 투쟁, 노동조합 내셔널 센터 로고입니다. “어디서 왔나?” 한국입니다. “한국의 팔레스타인 연대는 어떤가?” 어, 오늘 열린 2주년 집회에 천명 정도 왔습니다. “좋군. 오늘 뉴욕에서 열린 No Kings 시위에는 10만 명 이상이 모였다고 한다. 그 말인즉슨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인터내셔널?) 그래, 인터내셔널, 당신은 이 이야기의 올바른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시위에 나와 우리를 지지해줘서 고맙다.” '이 이야기의 올바른 편'이라는 단어가 서정적으로 들림과 동시에 아주 높은 곳에서 스스로를 내려다보는 듯한, 유럽에서 내내 느껴왔던 오늘의 나의 운동이 시공간을 넘나들며 연결된 거대한 흐름 위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만든다. 얼마쯤 지나자 같은 노래가, 같은 구호가, 반복되는 단어가 점차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하고, 이탈리아에 도착하자마자 광장이며 이스라엘이며 팔레스타인이며 평화이며 종식 같은 단어들을 '고맙습니다'나 '미안합니다'보다 먼저 익히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동시에 시위대의 기세도 약간은 잦아들어 대오가 잠시 멈추면 차도에 앉거나 담배를 말아 불을 붙이는 사람들도 종종 보인다. 프랑스도 한국에 비해 흡연에 관대하기는 했지만, 행진 한복판에서? 전노대며 결의대회 때마다 들리는 사회자의 '흡연은 대오 밖에서'라는 잇따른 고지와, 대오가 멈추면 삼삼오오 무리 지어 옆으로 빠졌다가 어느새 돌아오는 금속노조의 아저씨들을 떠올린다. 운동의 실천과 면면에서는 의제만 조금 바뀌어도 언제나 새로움을 느껴왔지만, 정말로 함께 걸으며 무언가를 외친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낯설다. Scuola per la Palestina: '팔레스타인을 위한 학교'.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이탈리아 교사 네트워크 Società operaie di mutuo soccorso (SOMS): 이탈리아 노동자 상호부조협회. 1848년 혁명의 영향 하에서 탄생함. '마르완 바르구티를 석방하라' '투쟁하는 GKN 노동자들과 언제나 함께하겠습니다!' FLC-CGIL Università di Firenze: '피렌체대학교 이탈리아 노동총연맹(Confederazione Generale Italiana del Lavoro, CGIL) 지식노동자연맹(Federazione Lavoratori della Conoscenza , FLC)' '공공재 수호를 위해 단결' '누구든 경찰을 싫어한다(프랑스어)' 몇 시간씩 걸어 슬슬 지쳐갈 때서야 하루 동안 그다지 먹은 게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조금 긴 휴식 이후 행진이 다시 출발하기 시작하자, 기운을 찾은듯한 시위대와 대조적으로 나이든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인도 쪽으로 빠져나와 대오를 배웅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 눈에 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언제 끝나는지 물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점차 시가지를 벗어나, 해가 기울어 서늘한 색으로 변한 하늘 아래 아스팔트가 깔리고 근처에서 차가 다니는 황량한 국도 같은 곳을 걷고 있었다. 가드레일을 몇 번 넘다 보니 일행들과도 흩어지고, 그럼에도 여전히 앞뒤에서 한 방향으로 걷고 있는 대오를 따라간다. 걷다 보면 머리 위에 걸린 표지판의 공항 마크가 눈에 들어와 불현듯 오늘의 목적지를 깨닫는다. 아, 공항. 사람도 많고 좋지. 뭔가…선전전이라도 하는 건가? 한참을 걷다 보면 예상대로 오늘만 두 번째 보는 낯익은 공항이 보이고, 주차장을 가로질러 건물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상상 이상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작은 도시의 작은 공항의 유리문을 들어서자 모든 곳에 사람이 차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접한 새로운 전략, '주요시설 점거'. 이 정도의 시위대가 이 정도의 공간에 들어가면 물리적으로 공항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밀집한 사람들의 냄새와 열기. 쉼 없이 공간 안을 울리는 구호와 노랫소리에 맞춰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양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거나 가끔 양 주먹을 쥐어 보이는 일종의 항의행동을 한다. 주최단체의 긴 현수막이 공간을 만들며 선전물의 역할을 한다. 드문드문 나갈 길을 찾지 못해 당황한 이용객들이 보인다. 시위대를 따라 앞으로 나가다 보면 공항의 반대쪽 끝에 가까워진다. 한쪽 끝에는 한 무리의 세룰리안 블루 색의 헬멧과 검은 슈트로 온몸을 감싼 사람들-아마도 이 나라의 기동대가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다. 젠더를 인식할 수 있는 기호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인지 생각보다 여성의 비율이 높다고 느껴 약간의 의문에 빠진다. 머잖아 그들이 삼단봉으로 나보다 조금 앞 열에 있던 참가자들을 구타한다. 순간 얼어붙기도 잠시 곧이어 사람들이 기동대 쪽으로 움직이며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이 사람들에게 밀집 사고 트라우마는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 반, 항의 반의 생각을 머릿속에 띄우면서도 앞뒤의 사람들에 섞여 속절없이 한 사람분의 부피를 보탠다. 얼마지않아 압력이 사라지고-대치가 풀리고-저지선을 넘는 데에 성공해 그때까지 기동대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오른쪽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로 걸음을 옮긴다. 기동대 몇몇만이 2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난간 너머로 삼단봉을 휘두르며 때늦은 저지를 시도한다. 2층에는 탑승 게이트가 보이고(도착했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작은 공항이다), 여전히 팔레스타인 깃발 한 쌍이 시위대의 머리 위에서 힘차게 춤추고, 1층보다 더 좁은 공간에서 여전히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른다. 영상을 촬영하자 몇몇이 저지하는 제스처를 건네 스마트폰을 내리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모습을 화면에 담고 있는걸 보고 눈치를 보며 다시 카메라를 켠다. 넋이 나간 상태로 아직 본 적 없는 채증 카메라를 뒤늦게 염두에 두고 구호가 적힌 슬로건으로 얼굴을 가리자 누구는 손짓으로 내리라고 하지만('테러리스트'를 연상해서?) 막상 해산할 때 보면 여러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원이 공유하는 명확한 룰은 성립하기 힘들다. 갑자기 누군가가 큰 소리로 선언하고 사람들이 중간중간 환호한다. 한층 기세를 얻은 노래와 구호가 이어지고, 그것이 잠잠해지면 대오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올라온 계단으로 천천히 질서 있게 내려온다. 이 많은 인원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사고가 없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기동대의 저지선 뒤쪽에 있던 작은 카페의 진열장 유리가 산산조각 나 계단 앞부터 쏟아져 있다. 아마도 충돌에 휘말려 부서진 거겠지. 혹은 시위대에 대한 반감을 염두에 두고 기동대가 부쉈거나. 'Sigfrido Ranucci(이탈리아의 언론인. 이 시위가 있기 이틀 전 마피아에 의한 차량 폭탄테러의 표적이 되었다.)는 우리들 중 한 사람이다. 기립하라!' 부서진 진열장. 바닥에 유리조각이 쏟아져 있다. 나가는 길은 들어올 때와는 반대쪽 출구라 내려오면 머잖아 자동문을 마주친다. 공항을 나서기 직전 인파 속에서 L 동지가 나타난다. 나의 얼굴을 보며 걸어온 첫마디는 “나는 몰랐다”. 생각지 못한 강도의 현장을 맞닥뜨린 충격과의 간극에 뭔가 따지고 싶어졌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게릴라 행동이 모든 참가자들에게 공유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주차장에서 다시 북소리와 음악과 구호를 발산하며 대오가 모이기를 한동안 기다리고, 공항을 나와 아스팔트 도로 위로 오르면 먼 하늘에서부터 희미한 저녁노을이 번져온다. 아까의 선언 같은 것으로 힘을 얻은 모양인지 시위대는 다시 목청껏 노래하고, 이제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는 나는 동지들 곁에서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터덜터덜 걸으며 이제는 뇌리에 지져진 돌림노래를 카주로 따라 연주한다. 그런 와중에도 하늘은 시시각각 얼굴을 바꾸어가고 공항을 나오면서부터 심심찮게 피어오르던 붉은 색과 녹색의 연기며 때때로 쏘아 올리는 불꽃 또한 허공을 가르며 감색으로 깊어져 가는 배경을 점차 아름답게 수놓는다. 여러 가지 생각은 들지만 역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처음 출발했던 곳 인근에서 대오 정비를 하고 해산할 즈음엔 이미 밤이 깊어 사위가 어둑하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 네 명 정도의 동지들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나서다, 행진 진행 방향의 끝에서 경찰 밴 몇 대와 삼단봉과 방패를 들고 있는 십수 명의 기동대를 찾아내어 등골이 서늘해진다. 상상 이상의 현장이었음에도 아무도 연행되지 않은 것에 새삼 안도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다. 2층의 열린 창 너머로 환호하며 인도를 걷는 우리에게 말을 거는 가족(아마도 아래층 가게를 운영하는)들과 거기에 응답하는 동지들의 대화가 퍽 다정하게 들린다.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다 창 아래의 피자가게로 별 고민 없이 들어선다. 자리에 앉아 메뉴를 고르고 나에게 돌아온 첫 마디는, “그 옷은 무엇인가”. 우리 노조 유니폼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조끼가 노조의 상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매번 설명하면서 다시 놀란다. “한국의 전쟁무기 수출은 팔레스타인 학살에 기여하고 있다” 어, 우리 '진짜 사장'은 한화인데, 한화는 '한국 화약'의 약자이고 당연히 전쟁 무기를 수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레스타인과 연대하고 있다. “한국의 팔레스타인 연대는 어느 정도인가” 음…오늘 2주년 집회에 천 명쯤 왔다. 그래도 작년보단 많아진 것이다. “괜찮네, 잠깐, 몇천? 아니면 일천?” 일천(현장의 동지로부터 시작 시에 집계된 인원만 들었다). “적군…. 하지만 거긴 머니까 말이지” 이 대답에 새삼 지정학적 요건이라는 변수를 상기한다. 지중해의 맞은 편. 가자행 선단을 출발시킬 수 있는 위치. 수무드 선단의 안전에 따라 파업을 결의한 바다 위의 항만노동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정말로 피부로 느껴지는 일이었으리라. 그리고 대체로 번역기를 사용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다. 행동력이나 언어나 IT능력과 같은 교섭력이 좋은 비교적 젊은 동지 한 명이 소통을 맡고, 연장자로 여겨지는 차분한 인상의 한 명 정도가 토의의 중심이 되어 의견을 내거나 취합하거나 하는 흐름으로, 이와 비슷한 모습은 다음날 로마에서도 보게 된다. 골판지 상자 위에 무심히 올려져 나온 나폴리 피자에서는 앤초비의 짠맛이 두드러진다. 이탈리아에서는 사람 하나당 피자 한 판으로, 일행과 나누거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접시의 튀긴 공 같은 것 중 붉은 색은 아란치니. “삼성 노조가 파업한 것은 팔레스타인 연대의 의미인가?” T 동지도 전국삼성노동조합의 파업 이야기는 알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새삼 삼성의 인지도와 영향력에 놀란다. 더불어, 이러한 관점의 차이에서 현재 이들에게 팔레스타인 문제가 얼마나 주된 담론으로 여겨지는지를 체감한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의 파업은 아니라는 대답에 이어 겸사겸사 삼성의 무노조 경영방침이나 전삼노 간부들의 비리며 한국에서는 정치파업이 금지되었다는 이야기를 거쳐 노조 간부들의 총파업에 대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까지 흘러간다. 노조관료주의는 아직 국적과 소속을 불문하고 어느 테이블에서도 실패한 적 없는 주제로, 대화를 통해 이탈리아 또한 비슷한 문제가 있음을 확인한다. “오늘 시위는 마음에 들었나?” 마음에 들었지만,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공항 점거는 사전에 계획된 건가? 우리는 오늘 시위에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 퇴각했나? 왜 공항 2층에서 사람들이 기뻐했나? 일단 나는 이 시위를 공장 자주관리를 시도하는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의제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계획되었지만 고지되지는 않았다. 기뻐한 것은 아니고 점거를 통해 우리의 강력한 의사를 표현하는 것에 대한 동의의 의미로 환호했다. 오늘 우리가 옹호한 공장의 노동자들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기 위한 파업을 했기 때문에 해고되었다. 평소에는 이 정도까지 하진 않지만, 최근 몇 주간 교착된 정세로 인해 가중된 압력이 터져 나온 것이다.” 요컨대 위력 행사이군. 왜 해고노동자를 지지하는 시위가 동시에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인지 납득했다고 전한다. 점거현장의 분위기와 대답을 겹쳐보며 '데모'가 무엇의 약자인지 새삼 깨닫는다. 시위에서 나온 구호나 노래들을 정확하게 알려주면 감사하겠다고도 말한다. “'멜로니 정부는 물러가라, 모든 것을 봉쇄하자, 파업하라, 파업하라' 같은 반정부 구호를 많이 외쳤다.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는 제국주의에 맞서 '강에서부터 바다까지,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라' 같은 구호도 외쳤다. 파업을 주도한 노동자들을 위한 구호도 많이 외쳤다.” 이탈리아어 원문을 훑어보며 그게 이런 뜻이었군. 하고 끄덕인다. 나는 이제 이탈리아어로도 '파업하라'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감사합니다'는 어떻게 말하는지 모른다. 말이 나온 김에 좋아하는 민중가요도 물어본다. 이탈리아 파르티잔들이 부른 'Fischia il vento'를 제일 좋아하지만 인터내셔널도 좋아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는 무엇인가?' 고민 끝에 임정득 가수님의 '벨라 차오' 번안이나 금속노조가, 팔레스타인 정기집회에서 자주 듣던 'Leve Palestina, krossa sionismen' 등을 답한다. 한국에서 '파르티잔(빨치산)'은 과격파 좌파 운동가를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한다. 금속노조가의 가사에 흥미를 보이기에 영상을 찾는 김에 나온 김형수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지회장의 고공해제 영상도 보여준다. 내친김에 2022년 파업 당시 부지회장의 사진도 보여준다. 눈빛이 형형한 다박수염의 남자가 올라간 이유를 대답하다 보면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현실을 거쳐 한국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조조직률 이야기까지 넘어간다. “북한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가?” 좌파 전반의 통일에 대한 희망, 우파의 전쟁 위협과 매카시즘의 수단,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 이북에서 온 조부의 이야기는 이 땅에서 드물지 않다는 설명을 한다.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북한이 주변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가?” 한국인으로서는 의외의 접근에 잠시 멍해진다. 오늘만 몇 번을 이렇게 되는 것인지. 북한이 기근과 빈곤을 거치며 퇴보한 이유 중 하나로 소련의 붕괴를 꼽을 수는 있겠으나, 북한에 이미 자유시장경제가 자리를 잡았으며 돈이 있다면 외국의 문물도 어느 정도 접할 수 있다는 것, 나의 관점에서 현재의 북한은 단순한 세습독재국가에 가까우며 매체에서도 자본주의의 영향보다는 내부의 모순이나 병폐에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나면 저쪽에서도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는지 심화된 질문이 들어온다. “그 사람들이 굶고 있는가?” 북한 내에서 외국 통화가 더 가치가 높은 현상이며, 외국 친지로부터의 송금이나 외국 주재 요리점, 단속을 피해 중국으로 일하러 다녀오는 등이 GDP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설명한 다음, 음식이 아예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으나 가치체계의 붕괴와 불평등이 결과적으로 인민의 배를 고프게 한다고 말한다. 국가보안법 등에 대한 설명과 함께 몇 년에서 몇십 년이 지나서야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참고하므로 현재 정세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고도 말한다. 동지들이 접하는 주류 언론에서는 북한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는다는 설명을 듣자, '굶어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은 나에게 어릴 적부터 좌우를 막론하고 이야기되어온 익숙한 이미지이지만, 어쩌면 저 동지들에게는 오늘 새롭게 듣는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뒤늦게 생각한다. 한국에는 사회주의자 K-팝 스타가 있는지도 물어온다. 표정을 보니 이전보단 격의 없는 질문이라고 느껴져 짧은 대화 속에서도 거리감이 가까워졌음을 실감한다. 정치적 지형 때문에 가수가 자신의 정치신념을 밝히기는 쉽지 않으며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없지만 부적절한 노동환경에 대해 고발하기 위해 국회에 출석한 아이돌은 있다고 말한다. 시간은 이미 10시가 넘어 해산할 때가 다가오고,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우리의 전략에 대해 묻는다. 피로로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한국의 분단이 미-소의 대리전에서 왔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하며 사회주의의 국제주의적 측면,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가장 확실하다고 말하자 좌중은 일제히 환호하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돌아가는 길에 천과 깃대가 분리되지 않은 깃발을 말아쥐고 어떻게 할지 의논하다 누군가가 받아들고 저마다의 방향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어딘지 익숙한 풍경처럼 느껴져, 다음에 또 봐요, 하고 인사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돌아가는 길에 신나서 셔터를 눌렀지만 이 정도는 서막에 불과했다 두어명의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검문(같은 것)을 겪고 있는 장면을 마주친다 [지난 글 보기] [기고] 유럽투쟁기행: 날짜변경선을 넘어서 (1) 프랑스, 영국 [다음 글 보기] [기고] 유럽투쟁기행: 날짜변경선을 넘어서 (3) 이탈리아, 스위스, 다시 한국 -
[기고] 유럽투쟁기행: 날짜변경선을 넘어서 (1) 프랑스, 영국프랑스 가족의 개인전으로 10월 초 파리 방문 예정이 잡혔다. 유럽 여행에 대한 생각은 전부터 있었지만 급하게 계획을 시작해, 가이드 북 한 권에 기대어 파리-런던-로마-인터라켄 루트로 일정의 개요만 정한다. 마침 9월의 파리는 한창 총파업으로 떠들썩했다. 9일 아침에 출발해, 태양의 운행을 거슬러 열 네시간을 날아가면 현지 시각으로 같은 날 오후에 착륙한다. 줄곧 밝기만 한 창 옆에서 내내 졸면서 마비된 시간감각까지 더해져 하루를 득본 기분을 느낀다. 시내에 도착한 다음부터는 가족과 함께 시내에 머무르며 숙소와 갤러리가 있는 파리 3, 4구역 위주로 움직였다. 남쪽으로 강을 끼고 상대적으로 도시의 부가 집중되는 지역으로, 관광지나 미술관이나 브랜드 매장, 그리고 실외기도 설치되지 않아 에어컨이 없는 오래된 건물들이 잔뜩 있었다. 3구의 퀴어 씬에 관심이 있어 LGBT 센터에 방문하고 싶었지만 일정이 허락하지 않고, 대신 인근의 문 앞에 프라이드 플래그를 다섯 개쯤 건 성인용품점이나 횡단보도의 무지개 정도만 눈에 담는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커다란 그림 곳곳에는 프랑스 국기의 모티프가 산적해 있다. 이 사람들에게 예술과 혁명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파리 3구 인근에서 찍은 사진. FREE PALESTINE(팔레스타인에 자유를), EAT The Rich(부자를 잡아먹자), ACAB(모든 경찰은 후레자식이다), Fuck le macronisme(마크롱주의 엿먹어라) 같은 낙서들이 눈에 띈다. 13일 오후에야 혼자가 되어 런던행 유로스타가 있는 10구의 파리 북역 근처 도미토리로 이동했다. 이전 일정에서도 가끔 경찰에 대한 반감이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를 표시하는 그래피티나 스티커를 보긴 했지만, 스탈린그라드 역(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전승을 기리는 의미라고 한다)에서 내려서 도미토리로, 또 거기에서 북역이며 생드니의 무역노조 사무실 등을 오가는 이 하루 저녁 동안에는 그동안 봤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양의 좌파적 색채의 포스터나 연대의 슬로건을 볼 수 있었다. 파리 북역에서 파리 북역은 '이민자와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는', '치안이 나쁜' 지역이라는 인터넷의 '경고'를 떠올린다. 파리 북역 인근은 세계요리점이나 수입 식료품점, 전통의상점 등이 있는 서아시아계 이민자 거리로, 담배 같은 물건들을 파는 행상인들이 종종 있었다. 도미토리에 도착할 무렵 다음날 북역 인근에서 만나게 될 T 동지에게 저녁의 집담회 일정을 추천받아, 일정을 변경해 체크인 후 바로 출발한다. 목적지는 북역에서 고속열차로 한 정거장을 가면 나오는 93번 지역인 생드니. 역에서 무역노조 사무실까지는 북역보다 피부색이 어둡고 아프리카계에 가까워 보이는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고, 파리 중심가보다는 좀 더 현대적이고 개량된 건축양식의, 길에는 트램이 다니고 통속적인 품목이 늘어선 슈퍼나 저렴한 빵집 등이 있는 한적한 주택가였다. 교통이나 입지, 주변 환경을 고려할 때 상대적으로 소득수준이 낮고 파리 시내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위성도시로 느껴졌다. 생드니에서 역에서 주택가로 들어가자 T 동지가 연결해준 집담회 참가자 I 동지가 근처까지 나와 같이 올라갔다. 긴장한 탓에 동지의 유창한 영어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사무실을 향했지만, 무역노조 사무실을 보고 웃으며 카메라를 꺼내 들자, 시선을 따라간 끝을 보고 같이 웃는 것으로 서로가 동지임을 확인한다. 생드니의 무역노조 사무실. 이탈리아에서도 종종 보게 될 스프레이로 그린 낫과 망치를 이때 처음으로 보았다. 집담회가 이루어진 공간은 작고 조명이 약했다. 참가자들은 철제 테이블을 ㅁ자로 두고 둘러앉았고, 문이 열려있어 방 안으로 다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입구 쪽에 의자를 두거나, 비치되어 있는 남은 책상에 걸터앉았다. 젊은 여성으로 보이는 사회자가 노트북을 보며 긴 이야기를 끝마친 다음 다른 동지들이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이 이어졌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통역 앱을 켜거나 I 동지에게 묻거나 하면서 포착한 개념들: [9월 사회운동과 그 결과 | 노조관료화(투쟁을 꺼려하는 간부들) | 마크롱의 재선 요구와 제도권 좌파 정당들의 선거만능주의 | 투쟁을 통해 급진 민주주의 요구를 제시할 필요성 |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선 이탈리아의 총파업 | 9월 운동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로 조직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의 조직의 사후전략 | 마린 르펜에 대한 비판(이베리아 포퓰리즘(스페인 복스당)과의 연관?) | 제5공화국의 끝 | 마크롱에 대한 반감(탄핵이라는 단어가 나옴) | 2019년의 영향(체념? 소진?) | 학생들의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 파편적인 정보들이었지만 시위와 총파업을 기대하고 도착한 파리가 생각보다 조용해서 의아했던 부분들이 어느정도 정리되었다. 그들은 지난 정국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방향성을 계획하고, 9월에 조직된 사람들, 특히 많은 젊은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요컨대 나는 4월 20일의 서울에 도착해 비상행동 시위를 찾고 있는 상황이었다. 6시 반부터 시작된 집담회는 8시 반 정도까지 이어졌고, 우리 이후에는 다른 팀이 회의실을 이용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뒤풀이는 인근의 프렌치프라이가 맛있는 노천 바. 프랑스는 야외 테이블이 있는 식당이 많다. I 동지와 번역기로도, 또 영어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하는 중간중간 '부르주아지bourgeoisie'나 '레짐Régime'과 같은 단어들이 프랑스어의 발음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느껴지는 혁명의 나라라는 감각이 인상적이었다. 22년 도크게이트 점거와 25년 고공농성을 포함한 거통고의 투쟁 이야기를 하자 멋지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감사와 함께 따라오는 석연찮음을 말로 만들어, “그러나 우리는 선진 노동자와 후진 노동자 간의 간극이 크다. 프랑스처럼 다 같이 안전한 총파업을 하고 싶다. 당신들은 어떤 강력한 투쟁을 해왔는가?” 하고 되물었다. 단어를 고르기 위해 잠시 머뭇거리는 동지에게 “Dangerous?” 하고 묻자 “위험한” 투쟁은 아니라고 하며 예시들을 들어 보였다. “이를테면 연료를 수송하는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한다면 경찰차도 도로 한복판에서 서버린다”는 말을 하면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고, '결정적 액션'으로 주요 도로나 식료품점을 봉쇄하는 것을 언급했다. 한국의 노조운동에 결합한 관점에서 '봉쇄'라는 개념에 의아함을 느끼고 되묻는다.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 점거할 수 있어? 실패한 총파업 같은 건가?” 하고 물으니 I 동지는 조금 난감해하다, “9월과 같은 정치, 경제적 요구가 결합한 대규모 운동에서는 수십만명 규모의 대규모 시위와 기업 봉쇄 등이 연계되어야 하며, 이것이 우리의 전략이다. 내일 동지들과 만나서 더 나은 설명을 듣도록 하라”고 이야기한다. 자리를 정리하며 건넨 “마지막으로, 당신에게도 자랑하고 싶은 동지가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철도노동자인 A동지(모로코계 프랑스인으로 철도노조 파업을 포함한 다양한 캠페인을 주도했다.), 변호사인 E동지(노동 변호사이자 운동가.), 고등학교에서의 T와 대학 시절의 동지” 같은 사람들을 언급한다. “T 동지와 고등학교 동기였어요?” 하고 되묻자 어떤 체제나 구조와 관련된 것 같은 전부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 문장의 의미는 다음 날 T 동지와의 만남에서 대략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다음 날, T 동지와 만나기 전에 에펠탑과 마르스 광장을 구경한다. 마르스 광장 쪽으로 발을 옮기자 눈에 들어온 것은 노란색의 큰 슬로건 현수막, 뭔가 타는 냄새와 회색의 연기. 이어지는 환호성. 이것은…트랙터? 그리고 멀찍이 서 있는 방패를 든 경찰들…. 구경하느라 약간 늦을 것을 고할 겸, 연기와 타는 냄새에 놀란 마음으로 T 동지에게 “마르스 광장인데, 트랙터가 있다. 무언가의 데모인가?” 하고 설명하니 ‘좌파 농민단체의 데모’라고 했다. 발언 사이사이에 “oui(프랑스어로 ‘그렇다’라는 뜻)” 같은 화답을 들으며, 파리에도 전봉준투쟁단과 ‘맞습니다!’가 있군…같은 생각을 하며 떠나려는 찰나 시위대는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고, 곧이어 EDM이 나오며 몸을 들썩이거나 바닥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중에 T 동지는 “이들이 파리에서 시위를 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최근 조직된 한국의 젊은이들은 다들 트랙터를 좋아한다”고 말하니 “우리 쪽에는 농민 의제 시위에 그렇게 쿨한 이미지는 없어서 의외”라 한다. 이해합니다. 아무래도 우리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지요. 방패를 들고 각반을 찬 경찰(기동대?)들. 검은 베레모를 쓰고 있다. '유기농 식품이 암을 예방한다' 농민연맹Confédération paysanne의 EU와 메르코수르 4개국의 무역협정에 대한 반대 북역 근처의 소박한 알제리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는 T 동지에게로 서둘러 향한다. T 동지는 일어가 유창한 일본계 프랑스인으로, 대화하는 동안 다른 프랑스 동지들의 질문도 일어로 번역하여 전달해주었다. 알제리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역사를 언급하며, 아프리카에 가지 않는 한 이런 제대로 된 알제리 음식을 먹어볼 일은 없으니 가족이나 친지들이 파리를 방문할 때에는 데려온다는 설명에서 연속혁명의 반제국주의적 지향이 생활속에 녹아서 드러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패스트리로 고기나 야채 등을 감싸 튀긴 알제리 요리 부렉Bourek 자리에 앉아 들은 첫 번째 질문은 “한국은 수험에 대한 압박이 심하다 들었는데, 이에 대응하는 당사자 단체가 있어?” 예상을 벗어난 질문에 얼떨떨하며 ‘대학입시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느꼈다. 뒤이어 도착한 다른 동지의 첫 번째 질문은 “한국의 소자고령화(저출생 고령화의 일본식 조어) 문제는 수험압박과 관련이 있어?” “물론, 당연하게도.”라고 답했다. 이날 자리한 동지들은 (기억하기로는) 조직 산하 학생단체의 학생 운동가들로, 대학 내에서의 활동이나 조직화는 물론이고, “우리는 고등학생들을 조직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고등학교에서의' T. 간밤의 I 동지의 이야기의 퍼즐이 맞춰지는 동시에 고등학생 운동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에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조어였다. “한국의 대학생 운동은 어때? (일본의 전학련과 같은) 관련 단체들은 있어?” 라던가, 일본의 6,70년대 학생운동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랑스의 전국 대학 단체 선거에서 동지들이 속한 조직 쪽의 사람들이 많은 득표수로 당선되어 대학 사회에서의 약진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곧 올 동지는 파리 8대학에 버금가는 우수한 대학에 재학 중이라는 것과 같은 '대학 이름이 정체성이 되는' 설명을 들으며 여기에서조차…라는 생각과 동시에 우리 쪽에서 대공장노조의 이름이 거론되듯 학생운동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활과 운동의 주된 무대가 곧 정체성이 될 수 있으리라는 묘한 납득을 얻기도 하였다. 내가 나온 대학은 재학 당시 총여학생회를 폐지하는 행렬의 선두에 있었기에 소속감이나 주위 환경등의 영향으로 당사자로서의 대학생 운동은 참가한 경험도 아는 바도 관심도 많지 않았으므로,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동지와의 만남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돌아볼 기회를 주었다. 동시에, 관심사가 명확한 동지의 질문들에 '좀 더 잘 아는 사람이 설명해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사회가 뒤숭숭해지며 마린 르펜과 같은 극우가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아나키스트나 마오주의와 같은 극좌(이 단어를 건조한 지칭으로 들은 것은, 살면서 사회주의 기초학습을 포함해 세 번째였다) 사상 또한 힘을 얻고 있으며, 우리 조직 또한 그들을 고려하여 활동의 전략을 짜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범좌파 자체가 세가 적어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극좌라는 구분조차 잘 안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마오주의자 개인과 아나키스트 단체를 본 일이 있다”고 답하자, 한국의 '빨갱이' 탄압의 설명을 들은 T 동지는 놀라며 “그 사람들은 경찰이나 국가로부터 탄압받거나 하지 않아?” 하고 물었다. “딱히? 아나키스트라니, 그게 뭐야? 라는 느낌이지. 애초에 아나키스트라 긴밀하게 조직되지도 않고.”라고 답했을 때 그가 느꼈을 황당함에 대해서는 귀국 후 한 영화를 보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회원 규모가 몇 백명에 달하지만 파리의 물가 때문에 올해 말에야 사무실을 얻게 되는, '고등학생을 조직하고' '극좌를 염두에 두며 활동하는' 사회주의자들. 이야기를 잔뜩 나누고 여러 가지를 알게 되어 즐거웠으며, 지구 반대편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위치에서 할 일을 찾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같은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에 설레는 시간이었다. 다른 사회에서 보이는 진보적 단면들이며 프랑스의 정치지형과 그 위에서의 생각치 못한 운동의 방식 등은 여러 가지 통찰과 스스로를 깨치는 경험들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위험한' 투쟁과 '강력한' 투쟁은 같은 단어가 아니라는 깨달음이며, “정치파업은 금지되어 있으며, 경제파업을 하기 위해서는 지난한 교섭과 조정을 거치고 국가기관에 신고 후 심사를 통해 허가를 받아야 한다” 거나, “아이가 셋 이상이면 출국할 때 줄을 안 선다는 것 따위가 우리의 저출생 정책이다”라거나 “우리나라 극우는 기독교와 그 계열 컬트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식민지배의 영향인지 통상의 자국우월주의보다는 미국과 일본을 숭상하는 경향을 보인다” 같은 부분을 들을 때마다 T 동지와 그 일행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서글픔을 느끼기도 했다. 비행기를 타고 열 네시간을 가면 당연하다고 여긴 것은 당연하지 않고, 당연하지 않다고 여긴 것이 당연하게 되는 곳이 있다는 것.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영국 프랑스를 뒤로하고 유로스타를 통해 육로로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다음 날 아침, 프랑스 동지들과 함께하다 보니 나의 동지들이 생각나 실례를 무릅쓰고 런던에 계시는 아는 동지께 연락 해봤다. 체류 기간 중에는 아쉽게도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대답을 듣고 결합할만한 단체나 시위를 추천해달라고 말하니, 영국의 팔레스타인 연대 행동 인스타그램 계정(@palestinesolidarityuk)과 더불어 '영국 정부가 시위자들을 보호하지 않고 있다. 경찰력을 동원해 대규모 체포가 이루어졌다. 신변 보호를 위해 집회 참가를 추천하지 않는다.'라는 답을 들었다. 계정을 둘러보니 현재 가장 가깝게 예정된 시위는 토요일로 참가일정이 맞을 것 같지 않고, 프랑스에서 집회에 참가하지 못한 아쉬움과 팔레스타인 총파업이 강력하다는 이탈리아의 정세에 대한 기대를 안고 현지의 활동에 결합할 방법을 찾다 이탈리아의 한 사회주의 조직의 동지들과 연락이 닿게 된다. 런던에서는 특별히 예정된 만남이 없으니 짧은 일정동안 쉬어가는 시간을 갖기로 생각한것도 무색하게, 아침의 찬 공기를 가르며 킹스 크로스 역 인근의 숙소에서 빨래방으로 가는 길에 심상찮은 외관을 한 서점과 마주친다. '1945년부터 영업한 급진적 서점' Housmans 세탁이 끝나고 둘러본 내부는 외관 이상으로 굉장해서, 한국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담론들도 아동/청소년 도서나 그래픽 노블 등의 낮은 접근성을 가진 매체로 비치되어 있었으며, 다양한 진보적 사회운동과 관련된 유인물을 배부하고 굿즈를 장식하거나 판매하고 있었고, 직접수유 친화/반-인종차별적 '안전공간'으로서의 명시나 청소년을 위한 할인이나 다른 손님이 책값을 대신 내주는 시스템 등 여러 방식으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었다. 남아있는 인칭대명사 뱃지가 He/Him밖에 없는 것에 아쉬워하는 동시에 좌파 서점 고객의 성비에 대해 생각해보며 이런저런 뱃지나 '래디컬 플레잉 카드(역사의 진보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나 작은 책자를 사서 나온다. 이후에 목적없이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하루 저녁 만에도 거리에서 메시지 카드 전문의 문구점이며 크고 작은 서점과 다양한 문구류들을 마주치고 그때마다 즐거워했지만, 다음 날 영국박물관을 나와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에 의도도 노력도 없이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아무리 서점이 많다고는 해도 이게 이 도시에서는 얼마나 일반적인 일일지 가늠해보며 혼란에 빠졌다. '사회주의 서점' 이라고는 하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쉽고 짧은 이론서 등이 눈에 띄고, 입지 때문인지 좀 더 가게가 작고 구성이 간결하며 현대적인 인테리어라는 것 외엔 범좌파적 의제의 폭이나 내용의 관점에서 큰 차이는 없었다. 한눈에 봐도 좌파언론 같은 제목에 뒤표지까지 기사가 적힌 잡지들을 둘러보다 작은 '붉은 별' 뱃지와 책 몇 권을 구매한다. '사회주의 서점' Bookmarks 런던의 성이며 사원 같은 관광지들은 4시 반이면 영업을 종료하는 곳이 생각보다 많아 의아해한다. 우중충한 날씨 속에서 갈 곳은 없어도 중랑천을 닮은 템즈강도 보고, 저녁 하늘에 불을 밝히는 빅 벤도 보며 거리를 방황하다 보면 다양한 스티커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지나간 시위나 기후위기 관련 서적의 북 토크 홍보 전단 같은 것들이 고전적인 방식의 조직화가 아직도 유효하게 여겨진다는 놀라움을 준다. 파리와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세속적이고 고도화된 이 도시가 왕과 서점과 메시지 카드로 대표되는 아날로그적 문화 속에 있다는 것은 이런 부분에도 적용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불충분한 의료복지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런던에서 항상 보였던 영국 혁명 공산당(RCP.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의 선전물은 대부분 QR코드가 훼손되어 있었다. 칼 마르크스 워킹 투어. 매주 일요일 출발. 코비드 19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벽.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상징들. 하마스에 구금된 인질의 귀환을 바라거나, 팔레스타인의 행동들을 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족히 20여 종은 될 팔레스타인 연대의 스티커와 곳곳에 보이는 공산당의 선전물. 동시에 그중 절반 이상은 뜯겨나가거나 덧칠되거나 다른 스티커로 덮혀 있었고, 방문한 나라들 중 이스라엘 측을 대변하는 메시지 또한 가장 구체적이고 다양했다. 래쉬와 백래쉬 모두 강하고 그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하는, 국지적으로 퍼져나가는 장과 장이 거리 곳곳에서 부딪히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영국 정부가 시위대를 보호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반영하는 이 도시의 정세를 상상해본다. 근위병 교대식을 관람하러 버킹엄 궁을 향했을 때, 금요일 낮치곤 유독 붐비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같은 역에서 다 같이 내리고, 전철 안에서 코스프레를 닮은 검은 정장에 높은 실크햇을 쓴 남성이 생활감 넘치는 비닐봉지를 든 것을 목격한다. 의아해하던것도 잠시 열차가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몇몇 남성들, 심지어 겉보기 남성이 아닌 사람까지 '영국 신사'의 차림을 한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이며, 어른아이 할 것 없이 경찰의 통제가 필요할 정도로 인근을 가득 메워 정작 교대식은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대다수가 전형적인 코카서스계 백인의 인상에 유아차를 끌고 나온 생활감 넘치는 가족들도 심심찮게 보이는 것이 마냥 관광객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행사가 끝나고 바로 옆의 버킹엄 궁 정원에서 시민들의 관심을 익숙하게 무시하는 수많은 새들과 다람쥐에 둘러싸여서도, '왕실 납품' 티 브랜드의 매장 맨 위층에서 차를 마시면서도, 이 차갑고 세속적인 도시에서 이토록 존중의 대상이 되는 고루한 개념, '이 사람들에게 왕이란 무엇인가'라는 얼떨떨한 의문은 가시지를 않는다. 사진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군중들. 비수기의 유럽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인구밀도가 높았던 장소이다. 무지개들. 축구 팀 이름으로 여겨왔던 단어들이 전부 런던의 지명이라는 것에 놀랐는데, 지지하는 팀의 이름으로 사회적 가치를 드러내는 모습도 신기하다. 방문한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영국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지점은 대도시 특유의 개인주의와 영어권-제국의 다문화적인 배경의 구성원들을 고려한 것인지 식이지향에 대한 고려를 일상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것. 고통받는 생명으로서의 동물을 묘사하며 비거니즘을 촉구하는 스티커들, 맥도날드의 비건 메뉴 탭, 식당에서의 알러지 여부를 묻는 질문 같은 것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같은 미식으로 유명한 나라들에서는 도리어 찾기 힘든 광경이었다. 포장은 물론 상품에서도 콩기름 잉크나 재생지, 혹은 생분해성 플라스틱 등이 비교적 보편화된 것도 눈에 띄었다. 재료를 전부 선택할 수 있는 파이브가이즈의 탄생이며 써브웨이의 패스트푸드 점유율 1위, 비거니즘이나 생태주의를 필두로 하는 진보적 가치를 세일즈 포인트로 삼는 러쉬(Lush)가 만들어진 토양 등에 대해 나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맥도날드의 비건 메뉴. 병아리콩으로 만든 너겟 같은 것Dipper과 소스에서는 커리 맛이 난다. 런던의 거리를 걸으며 마주한 시위 선전물의 날짜가 모두 주말인 것을 보아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순서를 바꾸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에 반쯤 도달한다. 마침 이탈리아 조직의 G 동지로부터 '18일 피렌체 시위가 볼만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마지막 날 로마에서 취리히로 가는 환승편을 취소하고 대신 18일 아침에 출발하는 런던발 피렌체행 항공편을 예약한다. 시위 장소까지의 경로를 찾다 '피렌체 공항은 시내와 가까워 도보로도 접근이 가능하다'라는 정보를 보고 무슨 효용이 있는 건지 고민하지만 이내 잊어버리고 밤을 새워 다시 짐을 꾸린다. [다음 글 보기] [기고] 유럽투쟁기행: 날짜변경선을 넘어서 (2) 이탈리아 피렌체 -
[사회주의 기초학습#8] 기후위기와 민주적 계획경제[목차] Ⅰ. 기후위기와 자본주의 Ⅱ. 기후정의운동,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1. ‘탈성장’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인가? 2. 말름의 ‘기후 전시공산주의’ Ⅲ. 민주적 계획경제란 무엇인가? 1.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예견한 미래 사회 2. 민주적 계획경제의 핵심: 민주적 노동자권력 3. 현실이 증명하는 민주적 계획경제의 가능성 Ⅳ. 민주적 계획경제로 나아가는 노동자투쟁 1. 노동자 기후파업을 조직하자! 2. 기간산업 국유화와 노동자 통제 ---- Ⅰ. 기후위기와 자본주의 기후 ‘이변(異變)’? 기후 ‘상태(常態)’! 세계기상기구(WMO)가 발간한 ‘2024 전 지구 기후 현황 보고서’(2025. 3. 19)는 2024년 지구 평균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1.55도 상승했다고 밝혔다. 2023년 평균기온이 1.48도 상승하면서 지금껏 가장 뜨거운 해로 기록됐는데, 고작 1년 만에 기록이 갱신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2015년 유엔 기후변화협약 회의에서 채택된 조약, 즉 파리기후협정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 아래로 막고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상 기온 상승을 제한”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간 기후과학자들은 기온 상승 폭 2도가 기후위기의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고 경고해 왔다. 즉 평균기온이 2도 이상 오르면 그때는 지구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위기가 초래되므로, 파국을 막기 위해선 기온 상승 폭을 1.5도 이하로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1.5도란 기준은 10~20년에 걸친 평균기온을 의미하기 때문에 2024년 한 해 평균기온 기록만으로 1.5도 목표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할 순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평균기온 상승분만으로도 세계 곳곳에서 기후재난은 미래가 아니라 당면한 현실이 된 지 오래다. 올해 우리가 맞닥뜨린 기록적 폭염, ‘200년 만의 폭우’ 등도 앞으로 기후 ‘이변(異變)’이란 표현 자체가 현실에 걸맞지 않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이제 기후재난은 말 그대로 기후 ‘상태(常態)[1]’, ‘뉴 노멀(New Normal)’이 되었다. 지구의 평균기온은 왜 상승하고 있는가?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산업화 이후 지구 기온 상승이 인간 활동과 무관하다는 헛소리가 횡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지구의 급격한 기온 상승이 인간의 탄소 배출 때문이란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 진실이다. IPCC[2]의 5차 보고서(2013년) 때만 하더라도 과학자들은 1950년대 이후의 온난화가 인간 활동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지만, 2021년 6차 보고서는 인간 활동이 지구 온난화를 일으킨 것이 “명백하다”고 단언한다.[3] 이는 인간이 대기 중으로 얼마나 많은 이산화탄소를 내뿜는지만 살펴도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일이다. 매년 인간이 대기 중으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는 무력 400억 톤에 이른다. 인류는 하나뿐인 지구를 상대로 파국적 결과를 초래할 엄청난 기후 실험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파리기후협정의 1.5도 제한 목표가 실패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재 수준으로 기후위기 대응을 계속하면, 2100년까지의 지구 기온 상승 폭은 2.7도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한반도를 포함한 중위도 지역은 산업화 이전보다 4도 이상이 높아진다.) 연구자들은 기온 상승 폭이 2도만 돼도, 체온 조절 능력이 떨어지는 노령층은 육지의 1/3 지역에서 생존이 불가능할 것이라 본다. 누구나 재앙을 예감하며, 실감한다. 인류에게 기후위기 대응은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모든 계급이 다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화석에너지 시대로 돌아가자는 자본가계급 놀랍게도 이 체제의 운영권을 움켜쥔 자본가계급은 아예 기후위기 대응을 포기하는 모양새다. 내일 세상이 망한대도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신들만큼은 끝내 살아남으리라 확신하는 것일까? 폭염, 가뭄, 폭우, 거대산불 등 기후재난으로 인한 희생자는 어차피 노동자 민중일 뿐이라서? 지금 당장 특단의 조치에 돌입해도 한참 늦었다 할 판에 자본가계급은 심지어 화석연료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미친 소리까지 내놓는다. 자본주의 체제 위기의 시대, 즉 자본 이윤 생산의 불확실성에 마주친 시대에는 지구야 어떻게 되건 돈벌이부터 챙기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파리기후협약 탈퇴 망동이다. 2025년 1월 20일 미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트럼프는 곧바로 지지자들이 모인 ‘캐피털원 아레나’ 경기장을 찾아 파리기후협약 재탈퇴를 비롯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럼프는 취임 전부터 기후위기를 ‘사기’라고 주장하며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하고 화석연료 생산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왔는데 취임 첫날 이를 단행한 것이다. 트럼프는 취임식 연설에서 인플레이션 위기 원인으로 에너지 가격 폭등과 정부의 과다 지출을 꼽으며,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석유와 가스 시추를 늘릴 것이라 공언했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양의 석유와 가스를 보유하고 있고, 이것을 사용”할 것이며, 나아가 “미국의 에너지를 전 세계 각국에 수출”하겠다는 것이다. 2021년 기준 미국은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14%를 차지하는 세계 2위의 온실가스 배출국이다. 1인당 탄소 배출량 역시 14.86톤을 기록해 호주에 이어 세계 2위다. 세계 평균 1인당 4.69톤의 세 배 수준이다. 그나마 바이든 행정부 시절에는 ‘그린뉴딜’ 운운하며 탄소배출을 줄인다는 모양새라도 취하더니 이제는 그런 겉치레도 집어치우는 것이다. 트럼프의 화석에너지 생산 확대 선언을 미치광이 정치인의 돌발 행동쯤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전쟁과 위기의 시대, 안정적 이윤 생산이 불투명해진 시대에 각자도생으로 이윤 생산에 몰두하는 자본가계급 전체의 의식이 발현된 것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재생에너지 선도 국가로 주목받던 독일에서조차 화석에너지 사용을 늘리겠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올해 초 독일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조기 총선에서 승리하면 가스 화력발전소 50개를 짓겠다”고 공언해 왔다. 독일이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율을 80%까지 늘리겠다고 약속하고 탈원전 정책에도 나섰던 것을 생각하면 심각한 퇴보다. 지난해 말 독일은 기후변화로 풍력 발전량이 25% 줄어드는 등 재생에너지 공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했던 탓에 화력발전 비용도 급격히 증대한 상황이었다. 독일의 전기요금은 OECD 국가 중 3위로, ㎿h(메가와트시)당 440.3달러(2023년 가정용 기준)에 이른다. 프랑스의 2배 수준이다. 이렇게 높은 전기요금이 독일 제조업의 위기를 부르고 있다는 게 화석에너지 사용 정책의 명분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자동차산업으로 대표되는 독일 제조업은 최근 심각한 침체를 겪고 있다. 독일의 GDP는 2023년 0.3% 감소한 데 이어 2024년에도 0.2% 감소했다. 지난해 말 폭스바겐은 독일 내 공장 3곳을 폐쇄하고 전체 노동자 임금 10%를 삭감하겠다고 발표했을 정도다. 이윤 생산이 안정적이며 자본 축적이 정상적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는, 자본가들은 “모범시민이고, 아마도 동물학대방지협회 회원일지도 모르며, 게다가 성인(聖人)이라는 평판”[4]을 보유한 채 하나뿐인 지구를 살리기 위한 녹색 투사로 행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윤 생산이 장애에 부닥치는 순간이면 자본가들은 언제나 본연의 계급적 이해에 충실해진다. 기후재난이건 뭐건 다 배부른 소리고, 이윤 생산이 최우선이라는 것이다. 윤석열의 친원전 정책과 이재명의 ‘실용’ 정책 일말의 부르주아적 합리성도 갖추지 못한 천둥벌거숭이 윤석열은 기후위기 대응에서도 헛짓거리로 일관했다. 윤석열은 평소 ‘원전 생태계 복원’을 자신의 업적으로 자부했다. 문재인 정부의 잘못된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고 친원전 정책을 집행함으로써 막대한 ‘국부’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내란 직전인 11월 7일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윤석열은 “24조 원 규모의 체코 원전 건설 사업 계약이 마무리되면, 원전 산업을 비롯한 우리 산업 전반에도 더 큰 활력이 불어넣어질 것”이란 자랑을 잊지 않았다. 또 국회의 탄핵안 가결 직전인 12월 12일 발표한 담화문에서도 윤석열은 이렇게 떠들었다. “망국적 국헌문란 세력이 이 나라를 지배한다면”, “원전산업, 반도체 산업을 비롯한 미래성장동력은 고사될 거고 중국산 태양광 시설들이 전국의 산림을 파괴할 것입니다.” 위 발언들은 윤석열의 단세포적 사고 구조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윤석열에게 기후위기는 정책 결정에서 고려 기준조차 되지 못하며, 무엇이 한국 자본가들에게 더 큰 이윤을 창출하는지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특히 태양광은 중국 자본이 돈을 벌지만 원전은 한국 자본이 돈을 번다는 대목은, 윤석열식 한미일동맹 진영논리가 우스꽝스럽게 드러난 대목이다. 윤석열이 내세운 친원전 정책은 핵발전 고유의 위험성을 간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원전 확대를 위해 기후위기 대응에 불가결한 재생에너지 발전량 목표를 현저하게 후퇴시켰다는 점에서 수천 번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본래 문재인 정부는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2030년 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을 30.2%까지 올리겠다고 밝혔다(물론 이 역시 턱없이 부족한 목표다). 이때 원전의 발전 비율은 23.9%로 전망됐다. 그러나 윤석열은 2023년 발표한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2030년 원자력발전 비율을 32.4%까지 올리며 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을 18.6%로 낮춰 잡았다. 원자력발전을 늘리기 위해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줄이자는 반동적 행태를 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재명 정부는 윤석열 정부와 다를 것인가? 당면한 기후재난에 대응하는 것보다 이윤 창출이 더 중요하다는 윤석열식 논리와 명확하게 선을 긋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민주당 정부가 ‘탈원전’을 표방하던 2017년까지만 하더라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고 원전 해체, 재생에너지 발전망 등이 자본의 새로운 먹거리로 등장하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 정세의 격변이 에너지 안보 위기를 부르자, 현재 각국에서 신규 원전 건설 붐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형편에서 신규 원전 건설 시장은 한국 자본의 상당한 이윤 창출 경로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자본가계급의 한 분파인 민주당 역시 ‘국익’으로 포장된 이윤 창출의 기회를 마다할 리 만무하다. 올해 2월, 한창 내란 정국이 진행되던 와중에 민주당이 대형 원전 2기를 신규 건설하는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안의 국회 보고 절차에 사실상 동의했던 사실이 이를 드러낸다. 또 민주당은 대선 공약집에서 “탄소중립 산업전환”의 목표가 “경제와 환경의 조화로운 발전”이란 점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다. 즉 “탄소중립산업의 국산화 및 수출경쟁력 제고”와 “수출기업의 기후통상 대응역량 지원”에 정부 역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재명 정부 역시 자본의 이윤 창출이 정책 집행의 첫 번째 기준이다.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될 때는 ‘녹색 자본주의’를 표방할 수 있겠지만, 이윤 창출에 방해가 되면 ‘(자본을 위한) 실용주의’를 내걸고 반동적 기후정책으로 돌아가는 일을 되풀이할 게 뻔하다.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야 기후위기 대응이 가능하다 결국 작금의 현실은 자본가계급이 오로지 이윤 창출에만 관심이 있을 뿐, 인류 공멸의 위기인 기후재난을 해결할 역량도, 의지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후재난이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삶의 터전과 생명까지 앗아 가지만 자본가계급은 놀랄 만큼 태연자약하다. 이윤 증식에 눈먼 자본의 이런 태도는 사실 역사에서 몇 번이고 반복됐던 일이다. 19세기 노동자들을 생존의 벼랑으로 떠밀었던 장시간 노동을 두고, 마르크스는 자본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고 묘사했다. “자본은 인류는 장차 퇴화할 것이라든가 인류는 결국 사멸해 버릴 것이라는 예상에 의해서는 그 실천적 활동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지구가 태양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예상에 의해서는 자본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 뒷일은 될 대로 되라지! 이것이 모든 자본가와 모든 자본주의국의 표어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사회에 의해 강요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에 대해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육체적‧정신적 퇴화, 조기사망, 과도노동의 고통 등에 관한 불평에 대해 자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쾌락(이윤)을 증가시켜 주는데 어째서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가라고.”[5] 여기서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을 ‘기후위기’로, 노동자의 “육체적‧정신적 퇴화, 조기사망, 과도노동의 고통”을 ‘기후위기로 생명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상실할 수억 명 기후난민의 고통’으로 바꿔 읽어보자. 오늘날 자본의 태도와 완전히 똑같지 않은가. 기후위기로 노동자 민중이 죽어 나가건 말건, “우리의 쾌락(이윤)을 증가”시켜야 하니 화석연료도 더 많이 추출하고, 원전도 더 많이 짓겠다는 것이다. 기후재난이 현실이 된 지금, 절박한 심정으로 모든 대안을 모색해 봐도 결국 우리가 다다를 결론은 하나뿐이다. 공동체의 안전보다 이윤 생산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놔두고서는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기후정의 운동은 명확하게 반(反)자본주의의 기치를 내건 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인 대안은 자본의 이윤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위하는 경제 체제, 즉 민주적 계획경제 체제를 건설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점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기후정의 운동에서 주목받는 두 가지 논의 흐름, 즉 ‘탈성장론’과 ‘기후 전시공산주의론’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회주의 운동의 대안인 민주적 계획경제가 어떤 모습일지, 그 구체적 상(象)을 그려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Ⅱ. 기후정의운동,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1. ‘탈성장’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인가? 현재 기후정의운동에서 ‘탈성장’은 의심할 여지 없는 지고지순(至高至純)의 가치처럼 보인다. 일례로 2022년 3월 ‘체제전환을 위한 기후정의포럼’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은 자본주의 체제의 분리해낼 수 없는 속성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무한히 이윤을 창출하고 축적하려는 철칙을 관철하기 위해 끝없이 경제 규모를 성장시켜 왔으며, 이에 필요한 값싼 노동과 자원을 투입하기 위해 노동자를, 여성을, 지구적 남반부의 민중들(이는 한 국가에서도 존재한다)을 그리고 비인간 동물을 포함한 지구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착취하고 파괴해왔다.” 이처럼 ‘탈성장’이란 기후위기 대응의 자본주의적 흐름(대표적으로 녹색성장, 그린뉴딜 등)과 단절하고, 기후운동을 ‘체제전환’을 위한 사회운동으로 재정립하기 위한 핵심 가치다.[6] 이윤 생산 체제인 자본주의의 야만성과 무정부성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탈성장론은 물론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기후정의운동의 주요 담론으로 등장한 탈성장론을 통해 우리는 과연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 체제를 모색할 수 있을까? 이하에서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2021)』와 요르고스 칼리스 등이 쓴 『디그로쓰(Degrowth, 2021)』를 통해 탈성장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자. ‘생산력 지상주의’에서 ‘탈성장 코뮤니즘’으로 마르크스의 변화?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MEGA)의 편집위원이기도 한 사이토 고헤이는 탈성장론자 중 가장 왼쪽에 있다고 평가된다. 그는 마르크스가 젊은 날에는 ‘생산력 지상주의자’이면서 ‘유럽 중심주의자’였다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탈성장 코뮤니즘”이란 도달점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7] 구체적으로 사이토 고헤이는 마르크스가 러시아의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아도 러시아는 코뮤니즘을 실현할 가능성이 있다고, … 분명하게 인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주장을 위해 마르크스를 단편적으로 왜곡한 것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러시아가 ‘미르’라는 농촌공동체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뛰어넘어 공산주의 사회로 직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시종일관한 견해를 표명해 왔다. 즉 “러시아의 혁명이 서구의 노동자 혁명에 신호를 보내고 그리하여 양자가 서로를 보완”한다는 조건이 충족될 경우, “그때 러시아의 토지 소유는 공산주의적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8]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러시아가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생략하고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과업이 아니다. 1875년 엥겔스는 「러시아의 사회상태」란 글에서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러시아의) 공동체를 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개조로 이끄는 데 있어서 주도권은 그것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서구의 공업 프롤레타리아트들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그와 연계된 사회적으로 지휘되는 생산에 의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대체, 그것은 러시아 공동체를 동일한 단계로 고양시키는 데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9]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구래(舊來)의 농촌공동체가 빠른 속도로 분해되는 것에 주목한다. 1894년 쓰인 「러시아의 사회상태」 후기에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편지글을 인용한다. “(러시아가) 일단 자본주의 경제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면, 다른 세속적인 민족들과 완전히 똑같이 이 제도의 가차 없는 법칙을 견뎌 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 핵심적으로 말해서, 탈성장론을 주창하는 사이토 고헤이나 요르고스 칼리스 모두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의 양면성을 변증법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보인다. 요르고스 칼리스는 자신의 책에서 생산력 발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더 명료하게 드러낸다. “이기적 경쟁을 기반 삼은 단종상품 경제의 세계화가, 인류 역사 전 기간에 사회적 진화의 동력이었던 무수한 형태의 상호부조 활동을 계속 갉아먹었던 것으로 보인다.”라는 대목이 그렇다. 그에게 “사회적 진화의 동력”은 자본주의 이전 공동체에 존재했던 자율적 “상호부조 활동”이며, 자본주의 산업화는 이를 훼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도 단순한 접근이다.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은 그 자체로 대립물의 통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에 철도를 부설한 목적은 대륙 진출을 통해 일본 독점자본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요로고스 칼리스의 표현처럼, 조선의 전통적 “상호부조 활동”을 뿌리째 뒤엎었던 침략 행위였던 것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철도 노선에서 비켜난 조선의 전통적 상업 중심지가 일거에 몰락했음을 떠올려 보라). 그러나 일단 부설된 철도는 동시에 진보적 역할도 수행했다. 1921년 레닌이 조선의 혁명가 이동휘에게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철도는 1919년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가능케 한 물질적 기반으로 작동한 것이다.[10] 요컨대 자본주의 생산력에 대한 변증법적‧종합적 인식이 필요하다. 첫째,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무덤을 팔 혁명적 계급, 즉 노동자계급이 함께 성장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자본가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생산성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자본의 집중, 집적을 도모한다. 그런데 그 과정은 동시에 분산돼 있던 노동자들을 집결시키고, 노동자들에게 집단적 생산에 필수적인 사회적 규율을 확립시키며, 자본의 이윤 생산을 전면적으로 중단시킬 수 있는 혁명적 잠재력을 노동자들에게 부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둘째,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생산관계가 제아무리 공동체적 형식을 띠고 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을 거치지 않은 미발달된 생산력 수준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생산력의 발전 없이는 결여가 단지 궁핍만을 일반화할 뿐이고, 따라서 궁핍과 함께 필수품을 둘러싼 투쟁이 다시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11] 마르크스의 예견은 러시아혁명으로 탄생한 최초의 노동자 국가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실증된다. 트로츠키가 지적한 대로, 소련 “관료집단의 통치 기반은 소비재의 빈곤과 이에 따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었다.[12] 즉각적인 탈성장이 필요한 부문 vs 급속한 성장이 필요한 부문 자본주의 생산력이 변증법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현재 산업 분야 중에서 탈성장(나아가 즉각적 생산 폐지)이 시급한 부문과, 반대로 급속하고 비약적인 성장이 필요한 부문이 동시에 공존한다는 것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즉 우리는 ‘①자본의 이윤 획득을 위해 무분별하게 이뤄지는 낭비적‧재앙적 생산력 발전’과, ‘②생태환경을 보전하며 모든 종류의 차별과 억압을 일소하고 인간 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생산력 발전’을 구분해야 한다. 먼저 탈성장(또는 생산 폐지)이 즉각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부문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이윤생산 체제가 얼마나 헛되이 노동력과 자원을 낭비하면서 무분별하게 탄소를 배출하고 있는지, 수백 가지 실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몇 년 전 가상화폐 투기 광풍이 불었을 때 가상화폐 채굴을 위해 사용됐던 전력 사용량은 상상을 초월했다. 2021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대안금융센터는 비트코인 채굴을 위한 전력소비량을 매년 149TWh(테라와트시)라고 추정했는데, 이는 말레이시아(147TWh), 스웨덴(131TWh), 아르헨티나(125TWh) 등 일개 국가의 연간 전력소비량을 앞지르는 규모다. 또 판매돼야만 잉여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상품이 “목숨을 건 도약”을 위해 마다하지 않는 과대포장, 경쟁사로부터 고객을 빼앗아 오기 위해 개별 자본이 지출하는 천문학적인 마케팅 비용, 그밖에 금융업, 광고업 등의 존재 자체도 모두 자본주의적 낭비의 실례다. 공동체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의 이윤을 최우선시하는 체제에서는 이런 불필요한 자원 낭비가 필연적이다. 자본가들은 서로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산을 위한 생산, 축적을 위한 축적으로 맹목적으로 돌진하기 때문이다. “사용가치와 향락이 아니라 교환가치와 그 증식이 자본가의 추진력 동기가 된다. …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한 기업에 투하되는 자본을 끊임없이 증대시키고, 또 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갖가지 내재적 법칙을 개별 자본가들에게 외적인 강제법칙으로 강요한다. 경쟁은 자본가에게,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끊임없이 증대시키도록 강제하고, 그는 오로지 누진적인 축적을 통해서만 자본을 증대시킬 수 있다. … 축적할지어다, 축적할지어다! 이것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이다!”[13] 이와 반대로 탈성장 대신 집중적인 자원 투입을 통해 시급히 생산력을 끌어올려야 하는 부문도 동시에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재생에너지 부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화석연료 연소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을 중지시키자면, 그리고 인류의 미래를 담보로 대책 없이 확대되는 원전 건설을 막자면, 재생에너지 부문의 기술 개발과 생산성 향상이 필수적이다. 재생에너지 생산의 간헐성을 극복하기 위한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전해 그린수소 생산기술 등이 그렇다. 또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노동이지만, 자본주의가 노동자계급의 분할을 통해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열악한 노동이 있다. 예컨대 수천만 명이 배설하는 분뇨와 음식물쓰레기를 매일 처리하는 노동이 존재하며, 맨홀 작업‧고압송전탑 작업처럼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노동도 있다. 이 노동을 좀 더 손쉬운 것으로, 좀 더 안전하고 위생적인 노동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기계화, 로봇화 등의 노동생산성 발전이 필수적이다. 인간을 고통스러운 질병, 감염병 등에서 해방하기 위한 보건의료기술의 발전도 시급하다. 전 세계에서 희귀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숫자는 약 3억 명에 이르며 이 중 50%가 어린이다. 희귀병, 난치병 환자를 위한 치료제 개발에 좀 더 많은 사회적 자원을 투여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대규모 기계제 생산이 아니라는 점에서 탈성장론자들이 주목하는 돌봄노동의 영역에서도 생산력 발전은 꼭 필요하다. 갓난아기의 천 기저귀를 종일 빨아대야 하는 돌봄노동과 친환경 생분해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하는 돌봄노동을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없다. 장바구니를 들고 식재료를 일일이 구입해 요리해야 하는 돌봄노동과 대공업적으로 생산된 밀키트를 전자렌지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되는 돌봄노동은 질적으로 다르다. 가사노동, 돌봄노동의 사회화로 성차별 폐지의 물질적 토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생산성 향상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저개발국가에서 기본적인 생활 인프라의 발전이 필요하다. 2020년 기준으로 세계 인구의 4분의 1인 20억 명은 안전한 식수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 인구의 절반인 36억 명은 안전한 위생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 인구 중 4억 9,400만 명이 여전히 노상 배변을 하고 있다. 여기서도 당연히 성장과 발전이 필요하다. 물론 탈성장론자들도 이 점을 모르는 게 아니다. 여전히 성장이 필요한 부문이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드러난다. 우리는 ‘탈성장’이 필요한 부문과 ‘성장’이 필요한 부문을 어떻게 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탈성장이 필요한 부문에서 비효율적으로 낭비되는 노동과 자원을, 꼭 성장이 필요한 부문으로 급속히 전용(轉用)함으로써 생태환경을 보전하고 인간 해방의 토대를 앞당기는 일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탈성장론의 전략: ‘커먼(common, 공공재)’ 되찾기 탈성장론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탈성장론들이 주목하는 것은 협동조합을 통한 ‘커먼(common, 공공재)’ 되찾기, 지역 공동체에서의 상호부조와 협력, 개인 소비 방식의 전환 등이다. 먼저 지역 협동조합을 통한 ‘커먼(common, 공공재)’의 공동체적 소유를 살펴보자. 물론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랜 강령이다. 그러나 탈성장론자들은 ‘커먼’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우회한 채 시민들의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협력을 통해 충분히 달성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구체적으로 사이토 고헤이는 “‘커먼’의 핵심은 사람들이 생산수단을 자율적‧수평적으로 공동 관리하는 것”이므로, 전력 부문을 국유화하는 대신 시민전력회사와 에너지협동조합으로 재생에너지를 보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력을 국유화해도 원자력발전처럼 닫힌 기술이 도입되면 여전히 안전성 등에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사이토 고헤이는 명시적으로 “‘커먼’을 관리할 때 반드시 국가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사이토 고헤이가 예로 든 전력산업을 두고 이야기해 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재생에너지는 간헐성이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재생에너지의 특성상 어느 지역에서는 전력이 넘쳐 생산되고, 어느 지역에서는 전력이 부족할 수 있다. 이때 전력 수요를 원만하게 보장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전력망을 촘촘히 연결해 전력의 효율적 생산, 저장, 교환을 도모하는 것이, 과연 일개 지역 협동조합 차원에서 실현 가능한 일일까? 어느 지역에서는 시민 협동조합이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전력을 생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옆 지역에서는 이윤에 눈먼 거대자본이 전력을 생산, 판매 중일 수 있다. 이 거대자본은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 더구나 거대자본은 자본가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을 것인데, 역사가 증명하듯이 자본가 국가권력은 자본의 이윤 생산을 보장하기 위해 폭력적 수단을 서슴지 않는 존재다. 사실 자본의 이윤 보장을 위해 자본가 국가가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소규모로 운영되는 시민 전력회사가 대공업적 방식으로 운영되는 거대 전력회사와 비용, 효율성 경쟁 등에서 살아남을 거라 기대하기 어렵다. 사이토 고헤이와 요르고스 칼리스는 바르셀로나의 협동조합 운동과 사회연대경제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바르셀로나는 전 세계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가장 활성화된 곳이다. 그러나 사회연대경제가 바르셀로나 전체 일자리 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8%, 총생산액은 바르셀로나 전체 GDP의 7% 정도에 불과하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고작 저 정도에 그칠 뿐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대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은 대규모의 협업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 전제 아래에서만 노동의 분할과 결합이 조직될 수 있으며, 생산수단을 대량 집적에 의해 절약할 수 있고, 또 그 소재적 성격 때문에 공동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는 노동수단(예를 들어 기계 시스템 등)이 생겨날 수 있으며, 나아가 거대한 자연력을 생산에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산과정을 과학의 기술적 응용으로 전화시킬 수 있다.”[14]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상호부조를 통한 소규모 자급자족 경제 대신, 민주적 노동자권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오늘날의 고도로 발전된 생산력은 국가적 차원에서, 더 나아가서는 세계적 차원에서의 조정과 통제를 필요로 하며,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않고 그것을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탈성장론의 전략: 돌봄노동을 주목하는 이유 사이토 고헤이나 요르고스 칼리스가 돌봄노동에 전략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도 앞서와 비슷한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사이토 고헤이가 돌봄노동을 중시하는 이유는 돌봄노동이 “기계화가 어려워서 인간이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동집약적산업”이며, 그 자체로 사용가치 생산을 중시하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또 “탈성장 코뮤니즘이 돌봄노동에 주목하는 것은 … 세계 각지에서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항하여 들고일어나는 이들이 바로 돌봄노동 종사자들” 때문이기도 하다. ‘돌봄 계급의 반역’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주 관리로 나아갈 가능성 역시 가진다고 한다. 지나친 주장이다. 물론 노동자계급의 한 부문으로서 돌봄노동자가 조직되고, 투쟁하고,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넘어서는 대안 질서를 건설하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특히 돌봄노동이 주로 여성들에게 전가되는 현실에서, 돌봄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은 성별 분업을 십분 활용해 노동자계급을 분할하는 자본에 맞서는 투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유독 돌봄노동에만 전략적 지위를 부여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노동조건이 가장 열악하다는 존재 조건이, 그 자체로 가장 전투적인 실천이나 다른 노동자계급 부문을 선도할 역량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혁명적 시기가 아닌 일상적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또 자본주의 이윤 생산의 중심이 돌봄노동 부문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부의 시장화된 고가(高價) 돌봄서비스, 그리고 가정에서 무급으로 행해지는 돌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돌봄 ‘임금노동’의 보수는 국가나 지자체의 공적 재원으로 부담된다. 보육교사의 보육료, 요양보호사의 장기요양보험료 등이 그것이다. 이들의 노동조건은 자본가 정부가 얼마나 많은 재원을 지출하느냐로 결정되는데, 자본가 정부의 지출 규모는 자본주의 경제의 경기 순환이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지, 즉 민간 자본의 이윤율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돌봄노동에 주목하는 것일까? 요르고스 칼리스의 『디그로쓰(Degrowth)』에서 직접적인 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기본 소득을 제안한다. “탈성장과 보조를 맞추는 다른 UBI(Universal Basic Income, 보편 기본 소득) 정책들은 개인을 착취적 고용에서 해방하고, 환경 파괴 체제에서 벗어나는 대전환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물질적 환경의 조성을 촉구한다.” 자본주의가 등장시킨 임금 노동자계급을 보면서 마르크스주의자는 자본주의의 착취 질서를 뒤엎을 거대한 혁명적 주체를 발견한다. 반면 요르고스 칼리스는 임금 노동자계급을 보면서 “개인을 착취적 고용에서 해방”시킬 필요성을 느낀다. 요로고스 칼리스는 자기 주장을 일부 페미니스트들[15]로부터 차용했음을 드러낸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우리는 보편 돌봄 소득을 제안한다. 이것은 … 성별 분화가 심각한 무급 돌봄 활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 … 돌봄 소득론은 우리 자신, 우리의 친족과 다른 많은 이들을 돌보는 우리 모두의 역량과 활동에 우리 모두의 부를 투자하는 것으로 보편 소득을 이해하며, 이러한 이해를 통해 형평과 연대를 촉진하고자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상업적 영역에 포섭되지 않은, 시장 밑에 숨어 있는 가정 내 돌봄, 의료 돌봄, 식료품 제공 돌봄, 어린이와 병약자와 노인을 위한 돌봄 같은 돌봄노동을 포함하여, 노동과 관련이 있는 비판작업과 대중 조직화를 선도해왔다.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성인에게 풀타임 노동을 요구하며 노동을 쥐어짜는 경제 시스템 (바로 이것을 통해서 매일, 세대를 넘어 인간의 삶과 집단과 자연환경이 재생산되고 있다) 안에 기본 구조로서 존재하는, 여성들의 희생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증진시켜 왔다.” 자본주의의 생산 영역(또는 이윤 생산의 중심부)에서 자본의 이윤 생산을 중단시킬 수 있는 임금 노동자들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재생산 영역(또는 생산관계의 외부)에서 무급으로 돌봄에 종사하는 여성들, 지역 커뮤니티에서 상호부조와 협력을 통해 자본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들이 변혁의 주체로 호명된다. 그래서 돌봄노동에 전략적 지위가 부여되는 것이다. 마리아 미스가 1991년에 쓴 ‘소비자해방’이란 글에는 동일한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16] 이 글에서 마리아 미스는 “거대한 경제단위에서는 생태적 지속가능성, 자립, 여성과 어린이의 욕구를 우선시할 수 없다. 이것들은 훨씬 더 작고 분산된 단위를 필요로 한다. 그렇게 되면 생산과 소비가 조율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소비의 필요에 생산을 맞추는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산결정을 내리는 데 진정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소규모 경제단위는 공동체 내의 협동을 용이하게 하며, 자립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고, 상부상조와 호혜성 같은 덕목이 작용하도록 만들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마리아 미스가 주목하는 것은 일본의 세이까쯔클럽 소비자운동이다. 이것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이어주는 대안적 경로”를 통해 자본의 이윤 생산을 종식시키겠다는 운동이다. 시종일관 자신의 ‘탈성장론’이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탈성장론’과는 다르다고 강조했던 사이토 고헤이도 이 대목에서는 별반 다를 게 없다. “억제 없는 소비에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자본의 전제’ 아래에서는 자기 억제의 자유를 선택하기가 어렵다. … 다만 반대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자기 억제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혁명적’ 행위라고.” 문제는 이런 “혁명적 행위”가 소위 먹고살 만한 중간계급에서나 가능하다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더 많은 이윤을 목표로 한 것이지만) 대자본이 대공업적 방식으로 생산한 상품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인터넷 쇼핑몰 대신, 지역 협동조합에서 품앗이 협업으로 생산한 수공업품을 이용할 수 있는 계층은 극히 드물다. 우선 시간이 넘쳐나야 할 것이다. 이런 주장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 하루하루가 피곤한 대다수 노동자계급에 냉소만을 불러일으킬 게 뻔하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탈성장 담론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감축하려는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오용될 가능성도 높다. 예컨대 자본가정부가 전력 수요를 줄여 지구를 구하자면서 전기요금을 대폭 인상하자고 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탈성장론은 노동자계급 생활에 대한 긴축 요구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기후정의 운동에서 노동자계급의 광범위한 대중운동을 조직하자면, 노동자의 고용이나 생활조건에 대한 일체의 공격에 단호히 맞서면서 동시에 생태환경의 보호에 나서자고 주장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의 탈성장론 비판 사회주의자들은 탈성장론자들과 달리, 근본적으로는 자본의 이윤 생산을 위한 것일지라도 자본주의가 사회적 집단노동의 조직을 통해 진정한 생산력 발전의 주‧객관적 토대를 형성하는 것을 주목한다. 자본가는 인류와 생태환경을 위한 진정한 생산력 발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가치증식의 광신자”일 뿐이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 개인의 완전하고 자유로운 발전을 근본원리로 하는 더욱 높은 사회형태의 유일한 현실적 기초가 될 수 있는 물적 생산조건”을 창조한다.[17]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체적 측면에서 노동자계급의 형성이다. 자본주의 생산과정 속에서 노동자계급은 사회적 역량을 축적해 나간다. 자본간 경쟁의 결과인 자본의 집중‧집적으로, 분산돼 있던 노동자들은 서로 연결되고, 공동의 규율을 확립하며, 자본의 이윤 생산을 전면적으로 중단시킬 수 있는 혁명적 잠재력을 보유하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바로 이 노동자계급이 일련의 계급투쟁 과정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민주적 노동자권력을 수립하면, 비로소 사회 모순의 진정한 해결이 가능해진다고 본다. 요약해 보자. 탈성장론은 자본주의 생산 발전의 양면성, 즉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이 미래 사회로의 이행을 담보하기 위한 주‧객관적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 실천적 귀결은 임금 노동자계급이 갖는 전략적 중심성에서 이탈하는 것, 중앙집중화된 노동자 생산통제 대신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소비자운동을 비롯한 풀뿌리 상호부조 활동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들에겐 자본의 이윤 생산을 폭력적 수단으로 수호하는 자본가 국가권력을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결여돼 있다. 반면 사회주의자는 궁극적으로는 계급독재 수단인 국가권력을 사멸시키고 공동체 내 진정한 상호부조와 협력을 실현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려 한다. 즉 노동자 국가를 수립한다는 목적의식 아래 일상적 실천을 조직한다. 레닌은 이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잠정적으로만 국가를 필요로 할 뿐”이며, “우리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피억압계급의 잠정적인 독재가 계급을 폐지하는 데 필수적이듯이, 착취자에 대항하여 국가권력의 도구와 원천들과 수단들을 잠정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8] 2. 말름의 ‘기후 전시공산주의’ 안드레아스 말름의 주장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2021)를 쓴 안드레아스 말름은 현 국면을 비상사태, 일종의 ‘전시’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후 전시공산주의’ 혹은 ‘생태적 레닌주의’를 제기한다. 안드레아스 말름의 이 책은 코로나19 위기의 한복판에 출간되었다. 그는 기후위기와 코로나19 위기 모두 자본이 만든 것으로 본질이 같다고 주장한다. 기후위기가 자본의 이윤욕 때문인 것처럼, 코로나19 같은 인수공통 감염병도 자본이 이윤 증식을 위해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무차별하게 파괴해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해 국가권력이 사활적으로 대응한 것처럼, 기후위기라는 비상사태에도 국가적 동원 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안드레아스 말름의 주장이다. 안드레아스 말름은 기후위기에 대응해 일종의 ‘전시 동원체제’를 구성하려면, △시간이 우리 편이라고 믿는 점진적 사민주의, △국가권력을 거부하는 아나키즘 모두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민주주의의 이상향이었던, 즉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스웨덴 사회 같은 평온한 날들은 “장기 비상사태 시국”에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또 아나키즘의 교리는 ‘아랍의 봄’과 코로나19를 통해 오류로 입증됐다. 이집트혁명은 저항 세력이 국가를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혁명에 실패했음을, 코로나19는 국가가 취약한 이들을 위한 상호부조 활동을 책임져야 함을 보여준 것이다. 말름은 레닌의 『임박한 파국』을 인용하며, 현재는 파국에 대처하기 위해 자본에 대한 단호한 강제조치가 필요한 시기라고 주장한다. 탄소배출권 거래 제도, 탄소세 부과 등 자본주의적 시장 내 조치로는 실질적 변화를 끌어내지 못했다면, 이제 국가권력을 동원해 급진적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10월 혁명을 앞두고 레닌이 노동자 국가는 전쟁의 종식, 곡물 공급의 통제, 은행과 기업 연합들의 국유화, 주요 생산수단 사유제의 종식 등의 급진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선동했던 것처럼 말이다. 말름은 구체적으로 기업들의 투입과 산출을 철저히 분석해 열대 지역에 대한 수탈을 중단시키고, 화석연료로 돈을 버는 모든 민간기업을 국유화해 “경제에서 화석연료 사업을 영구 삭제”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내놓는다. 혁명 대신 ‘직접적 대중행동’? 말름은 이러한 조치들이 자본주의적 방법으로는 시행 불가능하며, 자본주의적 국가도 이를 강제할 수 없다고 올바로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여기서 노동자 혁명을 통한 국가권력의 장악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말름은 그 대신 ‘대중행동을 통해 국가기구가 자본과의 쇠사슬을 끊게 한다’고 말하는 것에 그친다. 말름은 방금 자본주의 국가는 이를 할 수 없으리라고 지적해 놓고선, 우리가 대중행동을 통해 강제력을 행사해야 하는 국가는 어쨌든 자본주의 국가일 수밖에 없지 않냐고 되묻는다. “코로나 위기와 기후위기를 처음 비교한 결과 도출된 결론은 어떤 자본주의 국가도 결코 스스로 이 같은 일을 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가 이 과업에 나서게 하려면, 시민이 국가에 강제력을 행사해야 한다. 선거운동부터 사보타주까지 일체의 대중적 영향력을 통해서.” “그러나 어떤 국가를 활용한단 말인가? 우리는 방금 자본주의 국가가 본성상 체제 전환을 스스로 단행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직껏 다른 형식의 국가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기반의 노동자 국가가 하룻밤 새에 기적적으로 탄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장악한 민주주의 기관들의 이중 권력은, 설혹 실현될 수 있더라도, 머지않은 시점에 실현될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을 기다리는 것은 망상과 범죄 모두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들고 싸워야 하는 상대는 자본의 회로에 늘 얽매여 있는 음울한 부르주아 국가일 뿐이다. 자본주의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중이 압력을 가해, 국가 내부에 응축된 힘의 균형에 변화를 일으키고, 다양한 수단(이 수단의 일부는 나의 책 《송유관을 폭파하는 방법: 불타는 세계에서 투쟁 학습하기》에서 더 상세히 다루고 있다)을 활용하며 국가기구들로 하여금 자본과 자기들을 엮은 쇠사슬을 끊고 나아가도록 강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은 기성국가를 파괴하고 또 다른 국가를 세운다는 고전적 기획과는 분명 다르다.” 이처럼 말름은 국가권력을 통한 기후위기 대응 전시체제를 주장하면서도, 대중이 직접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필요성 앞에서는 주저하며 멈춘다. 우리가 대중행동을 통해 움직여야 하는 국가는 언제 등장할지도 모르는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음울한 부르주아 국가”다. 말름이 사회민주주의와 아나키즘을 올바로 비판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강령, 즉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해 노동자 국가를 수립한다는 전략에 대해 한사코 선을 긋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스탈린주의의 경험 때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내전의 발발로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이 소멸하고 관료주의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이를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이 정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기층민의 민주적 권리를 짓밟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힘에 의지하고 그들의 힘을 끌어내면서, 비상시국에 필요한 통제 조치를 실행할 것인가라는 딜레마 말이다. 아나키스트도, 사회민주주의자도 이 딜레마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사회주의의 계보학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평생 고민해왔고, 이를 원칙적 사안으로 삼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은 분파가 있다. 반스탈린주의 레닌주의의 분파이다. 그렇다면 이 분파는 그동안 어떤 확실한 해법을 제시했던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관료주의적 남용을 막는 방어선이 무너지면 어떻게 일을 망칠 수 있는지, 몇 가지 무거운 교훈을 학습했을 뿐이다. … 지난 100년간, 이들은 언제 10월의 기관차가 탈선했는지를, 내적 건설 과정의 어떤 요소가 그 난파에 기여했는지를, 어떻게 했더라면 그 기관차가 더 생산적인 방식으로 조정될 수 있었을지를(또는 그것이 가능했을지를) 줄곧 숙고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번에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지에 관한 정확한 매뉴얼을 마련하지는 않았다.” 스탈린주의가 역사에 끼친 가장 큰 해악이 이것이다. 러시아혁명이 반혁명으로 귀결된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멈췄던 곳에서 역사의 실마리를 계속 이어 나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말까지 강력한 역사적 실체로 존속했던 스탈린주의는, 반(反)스탈린주의 사회주의자들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방어하는 것 이상으로 나가는 것을 어렵게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노동자투쟁의 퇴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말이다. 그러나 다시 자본주의의 위기가 명백해진 상황이다. 말름 역시 국가권력을 통한 전시공산주의 체제가 즉각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객관적 정세의 격변은 주체의 비약적인 성장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오늘날 사회주의자들과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끊어졌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실마리를 다시 이어 나가게 될 것이다. Ⅲ. 민주적 계획경제란 무엇인가? 이윤 생산 체제인 자본주의에서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는 모두 개별자본이 결정한다. 개별자본은 경쟁자를 누르고 더 많은 이윤만 획득할 수 있다면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다. 김남주 시인이 일갈한 것처럼, 이윤만 난다면 “범죄의 소굴이건 아비규환의 생지옥이건” 상관치 않는 게 자본의 본능이다.[19] 기후재난 앞에서 화석연료 사용을 중단하지 않는 일, 기후위기의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며 폭력적인 해고를 서슴지 않는 일, 에너지 가격을 인상해 폭리를 취하는 일 등이 그래서 벌어진다.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를 온전히 개별자본이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의 근원은 단 하나다. 생산수단의 소유권이 자본에 있으므로, 이를 자기 마음대로 써먹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자본의 이 ‘자유’가 혁신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끄는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생산수단은 개별 자본가들이 땀 흘려 만든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피땀 어린 사회적 노동이야말로 저들이 가진 생산수단의 원천이다. 또 아무리 뛰어난 개인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대개의 ‘혁신’은 과거로부터 전수된 경험과 동시대 집단 지성의 산물이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왜 한 줌 자본가들은 사회적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한 채 무제한적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단 말인가? 삼성 재벌의 이병철은 이건희를 낳고, 이건희는 다시 이재용을 낳고, 이재용은 또 재벌 4세를 낳고…, 왜 자본가들은 대대손손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상속해 가며 경제 부문의 의사결정을 독점하는가? 게다가 자본가들은 이윤이란 과실은 ‘기업가 정신’ 운운하며 모두 챙겨가지만, 손실과 사회적 낭비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책임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 경제위기 때마다 노동자 민중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천문학적 공적자금이 ‘자본가 살리기’에 투입되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나. 한 줌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필요를 위한 경제, 사회적 생산수단을 자본가들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공유하는 경제, 자본가들이 밀실에서 경제적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게 아니라 노동자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생산자 대중이 직접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경제, 한마디로 민주적 계획경제가 우리의 지향이 되어야 한다. 1.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예견한 미래 사회 그런데 ‘계획경제’란 말은 보통 사람들에게 상당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생필품에 대한 배급제, 상점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점원의 불친절한 서비스 태도, 뒤처진 기술혁신 수준…, 이런 것들이 계획경제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모습 아닌가? 요컨대 경제에서 계획이란 그냥 덮어놓고 나쁜 것만 같다. ‘시장경제는 좋고, 계획경제는 나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미 가계 경제 수준에서도 넘치게 계획을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한 달 수입 얼마 중에 저축과 보험은 얼마씩 지출해야 하고, 11개월 무이자 할부로 구입한 노트북 할부가 다음 달에 끝나니 로봇 청소기 할부를 새로 시작할 수 있고 등등…. 경제학에서 즐겨 쓰는 로빈슨 크루소의 비유, 즉 1인 경제 활동에서조차 계획은 필수다. “(로빈슨 크루소는) 아무리 본래부터 검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여러 가지 욕구는 기본적으로 충족시켜야 할 것이므로 그는 도구를 만들고 가구를 제작하고 염소를 길들이고 고기잡이와 사냥을 하는 등 다양한 종류의 유용노동을 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 그는 필요 그 자체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시간을 그 다양한 기능 사이에 엄밀하게 배분한다. 그의 전체 활동 가운데에서 어떤 부분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어떤 부분이 더 적은 비중을 차지할 것인지는 그가 필요로 하는 유용성을 얻기 위해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 얼마나 크고 작은지에 따라 정해진다. 그는 이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 그의 재산목록 속에는 그가 갖고 있는 유용한 물건들과 그것들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생산물들을 일정량 생산하기 위해 그가 평균적으로 필요로 하는 노동시간에 관한 일람표가 기록되어 있다. 자신이 직접 창출한 부의 내용을 이루는 이들 여러 물건과 로빈슨 자신 사이의 모든 관계가 여기에서는 극히 단순명료하기 때문에 …”[20] 이처럼 모든 경제 활동에서 ‘계획’은 빠질 수 없다. 틈만 나면 ‘계획은 비효율적이고 시장은 효율적이다!’라고 외쳐대는 자본가들 역시 예외가 아닌데, 그들 역시 개별 기업 내에서는 철저한 계획 아래 경제를 운용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먼저 살펴보자. 자본주의 생산의 모순: 기업 내부의 계획적 생산과 사회 전체의 무정부적 생산 엥겔스는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에서 자본주의 생산력의 사회적 성격을 거듭해 강조한다. 전(前)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소유자가 가지고 있던 협소하고 분산된 생산수단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의 집적과 확대를 거쳐 거대한 규모로 재탄생한다. “분산되고 협소한 생산수단을 집적시키고 확대하여 현재의 생산에 강력하게 작용하는 지렛대로 바꾸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그것의 담지자인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역할이었다. …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을 개인의 생산수단에서 사회적 생산수단으로, 요컨대 오로지 인간들의 총체에 의해서만 사용될 수 있는 생산수단으로 전화하지 않고서는 저 제한된 생산수단을 강력한 생산력들로 전화할 수 없었다.”[21]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적 분업 체제에서, 개별 생산자는 상품의 거래를 통해서 다른 생산자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 개별 생산자의 노동이 사회에 유용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개별 생산자의 상품이 시장에서 판매돼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상품이 시장에서 판매될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주력 수출 상품인 반도체를 생각해 보라. 시장의 플레이어가 손에 꼽는 소수 독점자본임에도 불구하고, 반도체의 호황‧불황 주기가 대체 언제 올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산에 이르는 기업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상품 생산에 근거하는 모든 사회는, 그 사회의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관련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각자는 자신이 우연히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을 갖고서, 자신의 개인적 교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위해 생산한다. 어느 누구도 자기 것과 동일한 품목의 상품이 얼마나 시장에 나올지, 도대체 그 가운데 얼마나 사용될지를 알지 못하며, 그 비용을 회수할지, 또는 도대체 판매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한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가 지배한다. … (상품 생산의 법칙들은) 개별 생산자들에 대해서 경쟁의 강제 법칙으로서 통용력을 지닌다. … 이 법칙들은 생산자들과 독립하여, 생산자들과 대립해서, 그들의 생산 형태에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자연 법칙으로서 자리를 잡는다. 생산물이 생산자들을 지배한다.” 이제 개별 자본가들은 정글과 같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경쟁자를 누르고 자신의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비효율적인 경영 방식과 생산 기법을 절멸해야 한다. 개별 자본가들이 사회의 무정부적 생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집착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계획’이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는 더욱 명명백백해졌으며 더욱 극단화되어 갔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사회적 생산의 이와 같은 무정부 상태를 격화시키는 데 사용한 주요한 도구는 바로 무정부 상태와 반대되는 것이었다. 모든 개별 생산 기업 내에서 생산을 더욱 사회적 생산으로 조직하는 것. 이러한 지렛대와 함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은 지난날의 평온하고 안정적인 상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어떤 산업 부문에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도입되면, 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낡은 경영 방법이 자신과 병존하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 개별 자본가들 사이에서도, 또한 산업과 산업,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자연적인 또는 창조된 생산 조건들의 유리함 여부가 존망을 결정한다. 패배한 것은 가차없이 제거된다. 그것은 다윈이 말한 개체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 몇 배 더 광포한 형태로 자연에서 사회로 옮겨진 것이다. …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전유(專有) 사이의 모순은 개별 공장 내에서의 생산의 조직화와 사회 전체 내에서의 생산의 무정부 상태 사이의 대립으로 재생산된다.” (강조는 엥겔스) 현대 기업은 내부에 경영지원, 연구개발, 자재, 생산, 영업, 고객지원 등 다양한 하위부서를 두고 있다. 물론 이는 조직적 효율성을 높여 이윤 창출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때 여러 부서 간의 유기적 협업은 전사적 계획 없이는 달성 불가능하다. 예컨대 자동차 회사에서 내년 하반기에 신차를 투입할 계획이라면, 올해 안에 연구개발 부서는 신차에 탑재할 신기능을 기술적으로 완성해야 하며, 자재 부서는 신차 생산에 필요한 부품을 내년 상반기까지 조달해야 할 것이다. 생산 부서는 신차 생산에 투입할 인력을 미리 배치해 두어야 하며, 영업 부서는 마케팅 전략을 수립해야 하고, 기타 등등….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계획’ 아래 조정‧통제된다. 두말할 필요도 없는 얘기지만, 만약에 각 부서가 협소한 이기주의에 빠져 전사적 계획에 반대되는 헛짓거리를 한다면 그 기업의 경쟁력은 곤두박질칠 것이다. 계획 달성을 위해 조직적 효율성을 확보하는 것은 오늘날 기업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이므로, 경영학에서는 오로지 이 주제만을 연구하는 하위 분과 학문이 있을 정도다. 경영조직론, 조직행동론 등이 그것이다. 부르주아 경영학자들은 조직 내에서 부문별로 권한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구성원들의 담당업무별로 직무는 어떻게 표준화할 것인가, 조직 내 위계구조와 수평적 분권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리더십(지도력)을 제고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부서 간 소통 체계는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등등을 허구한 날 연구한다. 심지어 팀 조직에서 팀원은 몇 명 이내로 구성해야 수평적 소통이 가능한가, 어떻게 해야 회의를 성과 지향적으로 간결하게 끝낼 수 있는지도 주요 연구 대상이다.[22] 이 모든 것이 전사적 계획 집행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의도 아래 연구된다. 물론 이때의 전사적 계획은 결코 민주적인 것은 아니다. 기업 내부에서 계획은 언제나 소위 최고 경영권자의 ‘결단’으로 확정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정치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조차 재벌 총수를 만나 투자계획의 조속한 확정을 ‘건의’하거나 ‘읍소’하는 일이 그래서 벌어진다.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현대 사회의 거대한 생산력을 저들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을 좀 더 확장해 보자. 오늘날 ‘개별 기업 내에서의 계획경제와 전체 생산에서의 무정부경제’라는 모순적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생산수단이 사적으로 소유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생산력을 표현하는 생산수단이 한 줌 자본가들에 독점돼 있지 않다면, 예컨대 현대차 공장, 지엠 공장, 르노차 공장, KG모빌리티 공장이 몇몇 재벌가의 소유가 아니라 전체 사회의 공동체적 소유라면, 우리는 개별 기업 차원이 아니라 전체 사회의 차원에서도 ‘계획’을 운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각각의 자동차 공장에서 중복되는 낭비적 요소를 제거하고, 사치재 성격을 지니는 고급차 대신 사회에 더 필요한 친환경 차량 등을 훨씬 효율적으로 생산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쌍용차에서 그랬듯이 생산한 차량이 팔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폭력적으로 정리해고하는 대신, 자동차의 사회적 수요에 맞게 노동력을 매시기 합리적으로 재배치함으로써 전 사회적인 노동시간 단축을 실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요컨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폐지된 사회,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을 전체 사회가 공동체적으로 소유하는 사회에서는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 전 사회적 계획경제의 실현이 가능해질 것이다. “오늘날에는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사회적 성격이 생산자들 자신을 거스르고, 생산방식과 교환방식을 주기적으로 부수며,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자연 법칙으로서 폭력적이고 파괴적으로 자신을 관철해 나가고 있지만, 사회가 생산력들을 점유 획득하게 되면 생산력들은 생산자들에 의해 완전히 의식적으로 통용되게 사용될 것이며, 교란과 주기적 와해의 원인으로부터 생산 자체의 가장 강력한 지렛대로 전화할 것이다. … 오늘날의 생산력들을 마침내 인식된 그 본성에 의거하여 취급하면,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는 전체와 각 개인의 욕구에 의거한 생산의 사회적-계획적 조절로 대체된다.” 마르크스, 『고타 강령 비판 초안』 마르크스는 『자본』 1권에서 이런 사회를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면서 각자의 개별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인식하며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결사체”라고 표현했다.[23] 이런 사회에서 계획적 생산은 사회적 필요에 따라 행해질 것이다. 착취계급의 이익이나 소수 부유층의 사치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이뤄졌던 생산은 절멸되거나 최후순위로 밀려날 것이며, 기후위기 대응, 생태환경 보전, 보건의료 위기 해소 등 공동체 전체의 필요를 위한 생산이 최우선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산된 공동체의 전체 생산물은 이제 구성원들에게 개별 생활수단으로 분배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이 분배의 방식은 사회적 생산조직의 특성과 생산자들의 역사적 발전수준에 따라 변화할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산물이 분배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을 것이라 예측한다.[24] 우선 마르크스는 “사회적 총생산물”에서 최우선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공제(控除)돼야 한다고 썼다. “첫째, 소모된 생산수단의 보전을 위한 배상분. 둘째, 생산의 확대를 위한 추가 부분. 셋째, 사고, 자연재해로 인한 장애 등등에 대비한 예비 기금 혹은 보험 기금. … 이러한 공제는 경제상의 필연이며, 그리고 그것의 크기는 수중에 있는 수단과 역량에 따라 결정되고 부분적으로는 확률 계산에 의해 결정되는 것…” 즉 전체 생산물에서 현재의 생산력 수준을 유지‧제고하기 위한 공제가 우선 이뤄진다.[25] 이어 전체 생산물을 생산자 개개인에게 분배하기에 앞서, 공동체 전체 필요분에 대한 공제가 진행돼야 한다. 여기에는 노동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공공부조도 포함된다. (미래 사회에서 노동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공공부조는, 이들을 아예 노동에 참여시키지 않고 지원하는 형식보다는 각자의 조건에 따라 노동에 참여시키되 노동량이 평균적 수준에 미달할 때 추가적 지원을 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노동할 권리는 인간의 기본 욕구가 될 것이므로.) “첫째, 생산에 직접 속하지 않는 일반 관리 비용. 이 부분은 지금의 사회와 비교하면 애초부터 극히 현저하게 축소될 것이며, 새로운 사회가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둘째, 학교나 위생 설비 등등과 같은, 수요를 공동으로 만족시키게 되어 있는 것. 이 부분은 지금의 사회와 비교하면 애초부터 현저하게 증가할 것이며, 새로운 사회가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늘어날 것이다. 셋째, 노동 능력이 없는 사람 등등을 위한 기금, 요컨대 오늘날의 이른바 공공 빈민 구제에 속하는 것.” 이제 비로소 사회적 분업에 참여한 생산자들이 각자 필요한 생활수단의 분배를 받을 차례다. 생필품을 포함하여,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은 식량‧주택 등의 분배를 받아야 하며, 농장의 노동자들은 자동차‧농기계 등의 분배를 받아야 하고 등등…. 이때 생산자들이 자신의 개별 노동을 다른 사람의 개별 노동과 교환하는 기준은 노동시간이다. 즉 노동시간은 공동생산물 중 개별 생산자들의 몫을 재는 척도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 매매라는 간접적 방식으로 사회적 노동의 교환이 이뤄지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더는 이러한 우회로가 필요하지 않다. “생산수단을 공유 재산으로 하는 것에 기초를 둔 조합적 사회 내부에서는 생산자들이 자신의 생산물을 교환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생산물에 사용된 노동이 이 생산물의 가치로, 즉 그 생산물이 보유하고 있는 어떤 물적 특성으로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반대로 개인적 노동이 더 이상 우회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총노동의 구성 부분으로서 존재하기 떄문이다. … 우리가 여기서 관계하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거꾸로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이며, 그러므로 그 모태인 낡은 사회의 모반이 모든 면에서, 즉 경제적, 윤리적, 정신적으로 아직도 들러붙어 있는 공산주의 사회이다. 이에 걸맞게 개별 생산자는 자신이 사회에 주는 것을―공제 후에―정확히 돌려 받는다. 그가 사회에 주었던 것은 자신의 개인적 노동량이다. … 개별 생산자들 사이의 소비수단의 분배에 관해 말하자면, 상품 등가물의 교환에서와 동일한 원리가 지배하여, 어떤 형태의 동일한 만큼의 노동은 다른 형태의 동일한 만큼의 노동과 교환된다.” 누구나 자신의 노동량에 따라 자신에게 필요한 생산물을 공동체에서 교환해 간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일견 이러한 사회 체제는 평등한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노동량 상당 부분이 잉여가치의 형태로 자본가들에게 착취됨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평등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 개개인이 타고난 천부적 능력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평등한 권리는 여전히 ―원리상―부르주아적 권리 … 이 평등한 권리에는 아직도 부르주아적 제한이 들러붙어 있다. 생산자의 권리는 그의 노동 제공에 비례한다. 평등의 요체는, 평등한 척도인 노동으로 측정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거나 더 많은 시간 동안 노동할 수 있다 … 이것 암묵적으로 개인의 불평등한 소질을 승인하며, 따라서 노동자의 실행 능력을 자연적 특권으로 승인한다. 그러므로 모든 권리가 다 그렇듯이 내용상 불평등한 권리이다.” 따라서 어떤 노동자는 평균적인 노동자보다 더 많은 생활수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개인적 필요분을 초과하는 재화에 대한 상속은 금지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계급을 부활시키지는 않는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이것은 “오랜 산고 끝에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방금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불가피”하다. “권리는 사회의 경제적 형태와 이 형태가 제약하는 문화 발전보다 결코 더 높은 수준일 수는 없다.” 아직 자본주의적 가치관, 예컨대 ‘공정한 노동에 대한 공정한 임금’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한 만큼 받는다’는 원칙만큼 간명하게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분배 기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계급착취라는 굴레로부터 해방된 생산력이 전면적으로 발전하고, 공동체 성원들 사이에서 부르주아적 의식이 점차 소멸하게 되면, 이제 분배 질서는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 즉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적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대립도 사라진 후에,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차적인 생활 욕구로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조합적 부의 모든 분천이 흘러 넘치고 난 후에―그때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대기 중 산소는 인간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산소를 호흡하겠다고 서로 다투지 않는다. 각자의 능력(폐활량)과 필요(상황)에 따라 산소를 호흡할 뿐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산소의 분배를 두고 다퉈야 할 만큼 산소가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전면적 발전으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사라지고, 연대와 협력의 가치관이 확산하면서 이제 공동체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이행하게 된다. 참고로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공산주의의 첫째 국면”, 즉 생산자가 일한 만큼 분배받는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로, 이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를 높은 국면의 ‘공산주의’로 개념화했다.[26] 이후 마르크스주의에서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란 개념 사용은 이러한 용례를 따르고 있다.[27] 여기서 재차 상기해야 할 대목이 있다. 이런 식으로 전체 경제를 계획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즉 개별 생산자들 사이에서 투명한 사회적 교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꼬집는다. “소비 수단의 그때 그때의 분배는 생산 조건 자체의 분배의 귀결일 뿐이다. 그런데 생산 조건의 분배는 생산방식 자체의 특성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물적 생산 조건들은 자본 소유와 토지 소유의 형태로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배분되는 반면에 대중은 인적 생산 조건인 노동력의 소유자일 뿐이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생산의 요소들이 이렇게 분배되면, 오늘날과 같은 소비 수단의 분배가 저절로 생겨난다. 물적 생산 조건들이 노동자들 자신의 조합적 소유가 되면, 오늘날과는 다른 소비 수단의 분배가 생겨난다. 속류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를 본받아 (그리고 이를 다시 본받아 일부 민주주의자들은) 분배를 생산방식과는 독립된 것으로 간주하고 또 그렇게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주의는 주로 분배를 중심 문제로 하고 있다는 듯이 서술되고 있다.”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가들의 사적 소유 폐지는 언급하지 않은 채, 단지 분배의 개선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속류(俗流) 사회주의’일 뿐이다. 오늘날에도 자본가 권력의 근원인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은 얘기하지 않은 채, 단순히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둬 저소득층에게 더 많은 재정적 지원을 하자고 주장하는 데 그치는 정치 운동이 있다. 이런 정치 운동은 본연의 사회주의 운동과는 질적으로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2. 민주적 계획경제의 핵심: 민주적 노동자권력! 민주적 계획경제는 관료적 명령경제일 수 없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우리가 계획경제에 대해 편견을 갖는 이유는 지구의 1/3에서 실험된 스탈린주의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처참한 실패로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중국을 보자. 1958~1962년, 중국 공산당은 “超英赶美(영국을 넘어서고 미국을 따라잡는다)”를 내세우며 대약진 운동을 시행했다. 중심 정책은 농촌에 인민공사를 설립해 농촌집단화를 실시한 것이다. 농민 혁명을 자신의 역사적 연원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신중국 수립 직후 지주 계급의 토지를 무상몰수해 빈농에게 무상분배하였다. 이로써 전체 경작지의 90% 이상이 빈농과 중농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에서는 다시 토지 등 생산수단의 소소유를 철폐하고 생산수단의 공유를 시도한다. 이는 토지의 대규모 경작을 통해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대약진 운동은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후진 농업국가가 공업 발전을 위해 농촌으로부터 잉여를 추출하려던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농촌에서 잉여를 효율적으로 징발하기 위해 인민공사가 설립된 것이다. 1958년 말이 되면 전체 농촌 가구의 99%가 인민공사로 편제된다. 인민공사는 ‘일한 만큼 분배받는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공동생산에 돌입했지만, 곧 농민들은 인민공사 체제가 일한 만큼 분배되는 체제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깨달았다. 예컨대 농민들의 작업 점수는 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됐을 뿐, 노동의 질적 차이는 고려되지 않았거나 고려되더라도 여성에 대한 차별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경작지에서 단순히 오랫동안 시간을 투여하는 식의 비효율적인 노동을 이어갔다. 문제는 더 있었다. 중국 공산당이 중공업 발전을 위해 농민들에게 철강 생산을 요구한 것이다. 철강 증산을 위해 농민들은 가정 내의 쇠붙이를 그러모아 전통적 방식의 용광로에 집어넣고 철강을 생산하는 토법제철(土法製鐵) 방식을 채택해야 했다. 그러나 그 생산물은 불순물이 많은 저품질이어서 실제로 활용되지도 못한다. 농촌 노동력이 철강 생산으로 집중되고, 토법제철을 위한 땔감으로 수목이 고갈되면서 임야와 농지는 황폐해졌다. 같은 시기 ‘참새는 해로운 동물이다’는 모택동의 말 한마디로 시작된 참새 박멸 운동으로 2억 1천만 마리의 참새가 소탕되는데, 해충을 잡아먹는 참새가 사라진 결과 먹이 사슬이 파괴돼 병충해까지 창궐하게 된다. 여기에 무리한 계획과 허위‧과장 보고가 문제를 악화시켰다. 서로의 혁명적 열정을 과시하듯, 각 단위를 책임진 당 관료들은 경쟁적으로 높은 목표를 설정했으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자 거짓 보고를 일삼았다. 예를 들어 어떤 단위에서 목표의 150%를 달성했다고 보고하면, 다른 단위에서는 200%를 달성했다고 보고하는 식이다. 이러한 허위 보고를 진실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허위 보고에 맞춰 부풀려진 생산량만큼을 국가에 상납하면 된다. 그 결과 식량이 부족해진 농촌 지역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한다. 대약진 운동의 결과는 파국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공식 통계로 2,150만 명 이상의 직간접적 사망자가 발생했다. 실제로는 3,000만 명 이상일 것이라 추정된다. 이 참혹한 실패의 근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인민공사의 경험을 돌이켜 보자면, 생산수단 사적 소유를 철폐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명제가 틀렸던 것일까? 아니다. 문제는 계획이 생산자 대중의 경험과 집단 지성에 근거해 민주적 방식으로 결정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의 계획은 오로지 당과 수령이 결정하는 것이었으며, 소비에트 또는 전국인민대표대회(중국)는 당의 결정을 앵무새처럼 반복해 되뇌는 거수기에 불과했다. 앞서 인민공사에서 노동시간을 통해 작업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 노동의 질적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본래 마르크스주의 노동가치론에서 “복잡노동”은 “단순노동이 제곱된 것 또는 배가된 것”으로 간주된다. 마르크스는 “갖가지 노동을 그 도량단위인 단순노동으로 환산해내는 여러 비율은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생산자들의 배후에서 결정”된다고 썼다.[28] 생산자들이 경험적으로 노동의 질적 차이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인민공사에 참여한 농민들 역시 갖가지 농업노동의 질적 차이를 관습적으로 구분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계획’에서는 생산자들의 오랜 경험과 지혜가 반영되지 않았으며, 오랜 가부장제 문화에 따른 성차별적 편견도 제거되지 않았다. 말이 나온 김에, 생산수단을 공유해 계획경제가 실패했다는 반공주의의 오랜 선전에 대해 반박해 보자. 그들은 중국의 농촌집단화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른 탓에 처참히 실패했으며, 1978년 이후 농지를 개개인에게 다시 배분하는 방식을 취하자 농업 생산이 회복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까지는 맞다. 그러나 그들은 1985년 중국에서 곡물 생산량이 4억 7천만 톤에서 3억 7,900만 톤으로 급락했다는 점에는 침묵한다.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토지의 개별 경영이 확산하면서 토지 운용에서 ‘규모의 경제’ 효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높은 수준의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제 형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사회적 생산수단을 생산자들의 자주적‧민주적 권력이 통제하는가, 아니면 당 관료가 상명하달식으로 통제하는가 하는 것이다. 전자에 해당할 때만 생산자 대중의 노동 의욕이 제고되고, 창의적‧혁신적 시도가 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택동이 토법제철과 참새 박멸 운동을 지시하는 동안 누구도 혁명을 지도한 수령의 ‘권위’에 저항하지 못했으며, 생산단위의 책임자가 허위 보고를 일삼는 동안 누구도 해당 책임자를 소환하지 못했다. 당 관료가 하나의 특권 계급이 돼 생산자들을 지배했던 것, 이것이 과거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실패 원인이다.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에서 스탈린주의 체제를 신랄하게 풍자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폴레옹은 개들을 거느리고 헛간 바닥의 조금 높은 연단으로 올라섰다. 그 연단은 전에 미들화이트 수퇘지 메이저가 연설할 때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나폴레옹은 이제부터 일요일 아침의 <회의>는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회의는 불필요한 시간 낭비라고 그는 말했다. 앞으로 농장 운영에 관한 모든 문제는 돼지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가 결정할 것이며 그 위원회는 나폴레옹 자기가 주재한다는 것이었다. 특별위원회는 비공개로 열리고 결정 사항은 다른 동물들에게 통보될 것이라 그는 말했다. 앞으로도 동물들은 일요일 아침에 모여 깃발을 게양하고 「잉글랜드의 짐승들」을 노래하고 그다음 주에 할 일을 명령받게 될 것이지만 토론은 더 이상 없다고 나폴레옹은 말했다. 스노볼의 축출이 몰고 온 충격에도 불구하고 동물들은 나폴레옹의 이 선언에는 찜찜하고 언짢은 기분이었다. 제대로 따질 말을 생각해 낼 수만 있었다면 몇몇은 항의를 제기했을 것이다. 심지어 복서까지도 심기가 편치 않았다. 그는 귀를 뒤로 젖히고 앞 머리칼을 몇 번 흔들며 생각을 모아보려 했지만 결국 말할 거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정작 똘똘하게 나선 것은 오히려 몇몇 돼지들이었다. 앞줄에 앉았던 식용 돼지 네 마리가 꽥꽥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불만을 표하다가 넷이 한꺼번에 자리에서 일어나 발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을 지키고 앉았던 개들이 으르렁 으르렁 깊고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발언하려던 돼지들은 입을 다물었고, 자리에 도로 주저앉았다. 이어 양들이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를 엄청나게 큰소리로 외쳐댔는데, 그 외침은 거의 15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그 때문에 토론 기회 같은 것은 사라지고 말았다. 나중에 스퀼러가 농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농장의 새 질서를 다른 동물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동무들, 여러분은 나폴레옹 동무가 이 가외의 일을 맡느라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다들 고맙게 생각하리라 믿소. 동무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고는 절대로 생각지 마시오. 오히려 그 반대요. 그건 무거운 책임입니다. 나폴레옹 동무만큼 확고하게 모든 동물이 평등이라는 걸 믿는 동물도 없을 거요. 여러분들이 스스로 모든 일을 결정한다는 데는 나폴레옹 동무도 백 번 찬성이오. 그러나 동무들, 여러분은 가끔 틀린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럴 경우 우린 어찌 되겠소? 만약 여러분이 스노볼과 그 황당한 풍차 계획을 지지했더라면 어찌 될 뻔했소? 모두 알다시피 스노볼은 범죄자요」 「지난번 <외양간 전투>에서 그는 용감히 싸웠는데」 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용감한 것만으론 충분치 않아요」 스퀼러는 말을 계속했다. 「충성과 복종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외양간 전투>에 대해선 당시 스노볼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사실이 장차 밝혀질 것이오. 기율이 필요합니다, 동무들! 강철 같은 기율이 필요해요. 그게 지금부터 우리의 표어요. 우리가 한 발 잘못 디디면 적들이 달려듭니다. 동무들, 여러분은 존즈가 되돌아오는 건 원치 않지요?」 이번에도, 이런 식의 논의에는 아무도 답을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동물들은 존즈가 다시 오는 건 바라지 않았고 일요일 아침에 토의를 벌이는 것이 존즈를 되돌아오게 하는 일이라면 그 토의는 중단되어 마땅할 것이었다. 이제 생각을 다소 정리할 수 있게 된 복서가 동물들의 일반적인 느낌을 표현했다. 「나폴레옹 동무가 옳다고 하면 옳은 거야」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는 <내가 더 열심히 한다>라는 개인 모토 외에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라는 격률을 하나 더 채택했다. … 매주 일요일 아침 열시 동물들은 헛간에 모여 다음 주 수행해야 할 명령들을 전달받았다. … … 스노볼이 쫓겨나가고 3주일째가 되는 일요일, 나폴레옹은 어쨌거나 풍차는 건설할 계획이라 발표했고 동물들은 깜짝 놀랐다. 그가 왜 생각을 바꾸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아무 설명이 없었다. 다만 그는 이 특별 과제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동물들의 먹이 분배량을 줄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계획은 이미 마지막 세부 사항까지 다 완료된 상태였다. 돼지들이 특별위원회를 짜서 지난 3주간 그 일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노동자 대중의 창의성과 자주성을 발동하기 반면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전통을 계승한 레닌은, 1917년 혁명 직후 끊임없이 노동자 대중이 자주적 창의성을 발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본가들로부터 몰수한 공장은 누가,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 엘리트 관료 중심으로 국가가 이를 효율적으로 통제해야 하는가? 레닌은 이에 반대해 자발적 노동자 관리를 지지했다. “일부 동지들은 흔히 공장, 광산 및 제재소 몰수 형태를 취하는 자발적인 노동자 관리 대신 국가 관리를 지지하였다. 다른 동지들은 모든 공장이 아니라 대규모 금속공장, 철도 등에 관리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리치는 이 활동이 축소되어야 한다거나 노동자들의 주도권이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추진될 수도 있지만, 오직 투쟁 속에서만 노동자들이 진정한 관리를 배우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란 위로부터의 명령에 의해서 건설될 수 없는 것이다. … 살아 있는 건설적인 사회주의는 인민대중 자신의 창작품이다(레닌전집 26).”[29]”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때를 벗지 못한 노동자들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룹스카야는 이런 후일담을 들려준다. 혁명 직후, 내일 하루 다 같이 쉴 것을 공장에서 민주적 투표로 결정한 노동자의 이야기다. (물론 이것 자체가 무조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만약 평소 야간노동으로 고통을 겪던 응급실 노동자들이 앞으로 야간 근무는 일체 하지 않겠다고 민주적으로 결정한다면, 이것이 타당한 일이겠는가? 개별 단위에서의 민주적 의사결정도 사회 전체의 요구와 결부되어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노동자, 농민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노동을 저주로서, 최소화시켜야 할 무엇으로 보는 수세기 동안의 의무 노동에 의해 조장된 태도와 결부된, 서투른 노동을 유의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에 의해서, 들볶고 욕을 퍼부으며 몰아대는 십장과 감독 계층이 없어졌다. 노동자들은 그들을 없애서 기뻐했고, 피로할 때는 자기들을 혹사시키는 사람 없이 앉아서 담배를 피울 수 있어서 좋아했다. 처음에 공장 조직은 노동자들이 온갖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기꺼이 허용했다. 어떤 증명서를 받으러 교육인민위원회로 나를 찾아온 어느 여성 노동자가 기억난다. 대화 중에 내가 그 여성에게 어느 근무조에서 일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가 야근조에서 일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주간에 인민위원회로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니까. “오늘은 아무도 일하지 않습니다. 어제저녁에 집회가 있었는데, 각자 숙제가 밀려서 오늘 쉴 것을 투표로 결정하였지요. 아시다시피, 이제는 우리가 사장입니다.” 18년이 지난 지금, 이 이야기를 동지들에게 해보면, 아무도 이를 믿으려 하지 않으며 이를 전형적인 사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시행착오는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계급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워낙 억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의 카타르시스는 때론 통제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다. 1917년 짜르의 동궁(冬宮)을 접수한 노동자들은 저장실에서 양질의 보드카를 발견하고는 “로마노프의 찌꺼기를 마셔 버리자”며 광란의 주연에 빠져든다. 노동자들이 고급 상점에서 술을 약탈하는 데까지 이르자, 소비에트는 특별 비상위원회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으며 트로츠키는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해야 했다. “만일 당신들이 혀가 꼬부라지도록 마셔댄다면, 당신은 혁명을 방어하러 나선 길에 장갑차를 팽개쳐 버린 꼴이 될 것이오. 이런 말을 명심해 두기 바라오. 고주망태가 된 날이 하루하루 늘어날수록 우리의 적은 승리를 향해 한 발짝씩 더 나아가는 것이고, 그만큼 우리는 예전의 노예로 다가간다는 사실을 말이오.”[30] 빅토르 세르주는 이후 일주일 만에 모든 악이 평정됐다고 쓴다. 사회주의가 노동자계급의 자기 해방 사업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사회주의자들은, 비록 노동자 대중이 때론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비틀거리며 후퇴하고, 지지부진할지라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단련되고 성장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레닌 역시 1917년 혁명기에 이를 직접 목격하고 역사의 증언을 남겼다.[31] “과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종류의 인간들이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라고, 즉 자신들이 먼저 선량하고 순수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을 길러내면 그들이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장하고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타락한, 그러나 자본주의가 투쟁으로 단련시킨 남녀 인간들의 도움을 받아 사회주의를 건설하기를 원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아주 굳건해서 여느 군대보다 천 배나 더 많은 곤경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다.” “인민대중이 스스로 순결하고 소박하게 거칠고 단호하게 역사를 만들기 시작하면, ‘원칙과 이론’을 즉시 그리고 직접 실천하기 시작하면, 부르주아지는 겁에 질려 ‘지성이 땅에 떨어졌다’고 아우성친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 아닌가, 속물근성의 영웅님들? 그런 순간의 역사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것은 개인의 지성이 아니라 대중의 지성 아닌가? 그럴 때 대중의 지성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강력하고 효과적인 힘으로 바뀌는 것 아닌가?)” “우리가 100번 실수를 할 때마다, 그리고 부르주아지와 그 하수인들(우리나라의 멘셰비키와 우파 사회혁명당을 포함해서)이 우리의 실수를 전 세계에 떠들어 댈 때마다, 위대하고 영웅적인 업적이 1만 개씩 이뤄진다. 이런 업적이 훨씬 더 위대하고 영웅적인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성공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익숙하지 않고(그럴 기회도 없는) 사람들이 공장 지대나 먼 시골의 일상생활에서 이뤄낸,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성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 반대가 진실이라 해도(나는 그런 가정이 틀렸다는 걸 알지만), 만약 우리가 정확한 일 처리를 100개 할 때마다 실수를 1만 번씩 한다고 해도 그때조차 우리의 혁명은 위대하고 천하무적일 것이다. 그리고 세계 역사에도 그렇게 기록될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소수가 아니라, 부자들만이 아니라, 교육받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진정한 민중, 압도 다수의 노동 대중이 스스로 새로운 삶을 건설하고 있고 그들 자신의 경험으로 사회주의를 조직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평범한 노동자, 농민이 가장 의식적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재조직하는 이 과정에서 저지르는 실수 하나 하나가 소수 착취자들의 ‘완벽한’ 성공 ― 노동 대중을 속이고 사기 치는 데 성공하는 것 ― 수백만 개보다 더 소중하다. 오직 그런 실수를 통해서만 노동자, 농민은 새로운 생활을 개척하는 법을 배우고 자본가들 없이도 일할 수 있는 법을 배울 것이다. 오직 그런 식으로만 노동자, 농민은 스스로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사회주의의 승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민주적 노동자권력의 모습을 예상하기 분명한 점이 있다. 현대 사회의 노동자계급은 1917년 혁명기의 러시아 노동자계급보다 훨씬 더 문화적으로 성숙해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윤석열의 시대착오적 계엄령 발동에 단호하게 맞섰던 것처럼(심지어는 직업군인들조차 계엄령에 소극적으로 항명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노동자계급은 자신들 위에 군림하려는 특권 계급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또 노동자계급이 인구 구성의 다수를 점하지 못했고 교육 수준이 낮았던 1917년 러시아와 비교하면, 오늘날 노동자계급의 전반적 역량은 훨씬 탁월하다. 만약 노동자계급의 자주적 역량에 대해 여전히 의심이 남는다면, 범위를 좁혀 자신의 일터를 생각해 보라. 예컨대 나는 IT산업이나 물류산업 등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지만, 내가 십수 년 동안 종사해 온 노동위원회, 노동청 법률 사무라면 누구보다도 효율적으로 업무를 재조직할 자신이 있다. 동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돈벌이 때문에, 사장의 아집과 꼰대 기질 때문에,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는 일을 빙빙 돌아가며 해야 하는 경우가 좀 많은가? 어느 중소기업에서 젊은 노동자가 업무를 간단히 처리할 방법을 제안했더니, 만족한 사장이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켜서 다음부터 침묵했단 얘기는 그냥 웃고 말 일이 아니다. 오랜 경험으로 단련된 노동자들은 자기 업종과 자기 업무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전문가다. 착취의 굴레가 벗겨진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의 집단 지성이 놀라울 정도의 성취를 이뤄낼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부서(팀) 단위에서, 사업장 단위에서 민주적 의사결정 체계를 도입해 자주적 생산관리에 나설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자 대중은 소외된 노동이 아니라 자주적 노동의 효능감을 만끽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동시에 민주적 노동자권력은 사업장 단위뿐만 아니라 산업 단위, 국가 단위에서도 중층적 의사결정 구조를 도입할 것이다. 즉 노동자권력은 부서 단위, 사업장 단위, 지역 단위 등 풀뿌리 민주주의의 활성화를 전폭적으로 긍정하면서도, 이를 중앙집중적으로 모아내는 작업을 동시에 수행할 수밖에 없다. 거듭 지적하지만 현대 사회의 발전된 생산력은 국가 차원 또는 세계적 차원의 조정과 통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전체 공동체에 우선적으로 충족돼야 하는 필요가 무엇인지, 사회의 잉여 자원을 어느 부문에 우선 투입할 것인지, 만약 인간의 필요 충족과 생태환경의 보전이 충돌한다면 이를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 등등 경제 계획의 수립과 집행을 둘러싼 다양한 정치적 견해와 흐름이 전국 노동자평의회에서 백가쟁명식으로 논의되고 결정될 것이다. 다만 계급사회로의 회귀 시도는 철저히 봉쇄한다는 전제 아래 말이다. 3. 현실이 증명하는 민주적 계획경제의 가능성 자주적 노동자권력이 민주적으로 전체 경제를 운영한다는 것이 결코 공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책이 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 경영학 교수 폴 애들러(Paul Adler)가 쓴 『1%가 아닌 99%를 위한 경제(2021)』란 책이다. 폴 애들러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임한다. 그는 경영학 연구 과정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몇몇 사업체의 경영 방식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고 이를 통해 “민주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두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두 가지 결론이란 사회적 생산과 자원의 배분 문제를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전략적으로 경영”하는 체제를 말한다. 즉 폴 애들러가 말하는 대안 사회에서는 “우선 사회의 주요 생산 자원을 공공의 소유로 둠으로써, 경제의 핵은 하나의 거대한 기업이나 다름없어질 것”이고 “오늘날 경쟁적인 여러 기업은 곧 핵심적인 거대 기업의 부차적인 팀원으로 바뀔 것”이다. 마치 “대기업의 최고경영진이 기업 내 여러 부서를 경영하듯이, 이제 한 팀이 된 경쟁 기업들은 상호의존적 문화를 바탕으로 전략적으로 경영”하게 된다. 구성원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협력”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머릿속 추정이 아니며, 현대 기업 연구를 통해 실증된다고 하는 게 이 책의 핵심이다. 폴 애들러는 자본주의의 초대형 기업 몇 군데를 연구한 경험을 소개한다. 이런 초대형 기업은 웬만한 국민경제 몇 개를 합친 것보다 크다. 예컨대 전 세계에 1만 1,700여 개 소매점을 두고 직원이 230만 명에 달하는 월마트, 매년 약 3억 명의 소비자에게 20억 개에 가까운 제품을 배송하는 아마존 등이 그렇다. 그런데 이들 초대형 기업 내부에서 “원자재 공급부터 최종 완제품 판매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자본주의 시장 경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영자의 전략 경영으로 조정”된다. 앞서 말한 대로 철저한 계획경제가 시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대기업이 조직을 관리하면서 내부적으로 맞닥뜨리는 문제는 우리가 경제를 사회주의적으로 관리하려고 할 때 극복해야 할 문제와 유사”하다. 폴 애들러는 초대형 기업 연구를 통해 계획경제에 대한 오래된 비난을 하나씩 반박한다. 첫째, 시장은 가격을 통해 수요와 공급을 ‘효율적으로’ 조정하는 데 비해, 계획경제로는 절대 이 효율성을 쫓아올 수 없다는 주장은 여전히 타당한가? 아니다. 폴 애들러는 “현대의 컴퓨터 기술은 경제 전반에서 일어나는 생산 및 투자 계획을 충분히 계산해낼 수 있어서 자본주의 시장을 통해서만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주장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실제로 현대 대기업은 ‘전사적 자원 관리(ERP, Enterprise Resource Planning)’와 ‘판매 운영 계획(S&OP, Sales and Operations Planning) 같은 시스템으로 경영 전략을 세우기 위한 모든 기본 자료를 통합해 활용한다. 이미 우리도 오늘 오후에 주문한 상품이 다음 날 아침 배송되는 것을 경험한다. (놀라운 일이다! 물류‧유통 자본은 소비자 수요를 정교하게 예측하고 주문 가능성이 높은 물품을 물류창고에 미리 쟁여뒀단 뜻이다.) AI 기술은 이런 효율성을 한층 더 높일 것이다. 둘째, 계획은 본질적으로 중앙집중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계획경제는 결국 관료적 명령경제로 귀결되지 않겠는가? 즉 미래의 경제 혁신에 꼭 필요한 개인의 창의성은 말살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폴 애들러는 이른바 ‘고차원 기업’에서 행해지는 ‘협력하여 전략 세우기’를 실례로 삼아 이 역시 반박한다. ‘고차원 기업’은 디지털 기술에 기반해 경영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통합한 후, 하위 조직의 목표를 전체 전략과 효과적으로 조율하는 상향식 경영 참여 기법을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 중앙집중적 의사결정과 개별 구성원이 가지는 자율성 사이의 긴장은, 이와 같은 ‘협력하여 전략 세우기’를 통해 실천적으로 해소된다. ‘협력하여 전략 세우기’는 이어 ‘협력하여 혁신 이루기’, ‘협력하여 학습하기’, ‘협력하여 일하기’로 나아간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고차원 기업’에서는 개인과 집단 사이의 상호의존성 기업 문화가 자리 잡는다. 즉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독특하고 다양한 발상이 필요한 상황이더라도, 직원과 기업이 공동의 목표를 공유한다면 개인주의 문화와 집단주의 문화가 충돌하지 않는다. 또한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이 팀에서 결정한 업무 지침을 따라야 하더라도 집단주의 문화는 향상할 기회를 확인하며 도움이 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개인의 창의력을 방해하지 않는다.” 고차원 기업의 어느 구성원은 이를 두고, 개인기에만 의존하던 길거리 농구가 개인 기량과 팀플레이가 융합된 NBA 프로 농구로 바뀌는 것 같다고 비유했다. 이 책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은 아쉽게도 여기까지다. 이어 폴 애들러는 민주사회주의로의 변혁 시나리오로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야기들만 내놓기 때문이다. 그의 첫 번째 시나리오는 파국적인 경제위기가 발생했을 때 “민주사회주의가 절실하다는 시민들의 요구”가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예컨대 파산한 기업과 은행을 정부가 인수하라는 요구 같은 것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기후재앙이 현실화하여 사람들이 2차 세계대전의 전시경제체제와 비슷한 비상체제로 돌입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점진적인 변화”를 통한 민주사회주의의 달성이다. 최저임금 인상, 더 강력한 환경 규제, 보편적 의료보험, 노동자 이사, 무상 교육 등등 사회적 합의를 통해 민주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물론 세 가지 시나리오 모두 실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자본주의의 파국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도 아니며, 그때에도 자본가계급은 노동자 계급의 물리적 강제 없이 자신의 계급적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Ⅳ. 민주적 계획경제로 나아가는 노동자투쟁 기후위기뿐 아니라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민주적 계획경제를 실현해야 함은 분명하다. 다만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최대강령이다. 즉 최대강령이란 노동자운동의 궁극적 목표를 가리킨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노동자계급이 단번에 최대강령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민주적 계획경제를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려면, 1강에서 지적했듯이 일상적 투쟁을 통해 준비되고 단련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의 부분적 요구를 담아내는 강령을 최소강령이라 부르는데, 『공산주의 선언』에 명시된 고율의 누진세, 모든 아동에 대한 사회적 무상교육 등이 그 예다. 즉 최소강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실현 가능한 요구들까지 포함된다. 그럼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의 간극은 어떻게 극복되는가? 계급투쟁의 발전을 통해서다. 개량주의자들이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우고자 했다면,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은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분투했다. 트로츠키가 주창한 이행강령 역시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는 측면에서 제기된 것이다.[32] “일상적 투쟁에서 대중이 사회주의혁명의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가교(假橋)를 놓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가교에는 이행기 요구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 요구들은 현재의 객관적 상황과 광범위한 노동자대중의 의식에 기초하여 제기되면서, 동시에 이들이 노동자계급의 권력장악이라는 단 하나의 최종 결론에 도달하도록 인도한다. … (제4인터내셔널의) 정치적 목표는 자본가계급 수중의 생산수단을 몰수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적 임무는 모든 전술적 문제들, 심지어는 아주 사소하고 부분적인 전술적 문제들을 가장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서는 달성될 수 없다. 후진층, 선진층, 직업, 집단 등을 망라하여 노동자계급 전체는 혁명운동에 가담해야 한다. 혁명정당은 대중의 일상투쟁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반대로 이 투쟁들은 실제 혁명의 임무와 완벽히 결합한다. 이것이 바로 반동적 자본주의인 제국주의 시대의 특징이다.”[33] 이행강령이 제기된 시대적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자본주의의 위기가 고조됐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혁명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행강령은 대중의 절박한 생존적 요구를 대변하면서 그 자체로 국가권력 장악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오늘날 절박하게 요구되는 긴급 조치들은 민주적 계획경제로 나아가는 이행강령적 성격을 띠게 된다. 1. 노동자 기후파업을 조직하자! 독일의 메가스트라이크 2020년 독일의 기후운동가들은 중대한 고민에 맞닥뜨렸다. 2018년부터 시작된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 FFF)’ 운동이 전략적 공백과 퇴조를 겪었기 때문이다. 한때 ‘금요일 기후파업’ 등을 중심으로, 기후 운동에서는 ‘체제전환(System change)’이라는 슬로건이 유행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실제로는 시민 불복종이라는 상징적인 행동, 혹은 정치 결정권자를 향한 몇 차례 집회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독일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녹색당이 연합한 소위 ‘신호등’ 연방정부는 2021년 출범해 전형적인 녹색자본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연방정부는 기후운동의 상승기에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조치를 약속했지만, 그 대신 기후위기의 비용을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는 ‘긴축 생태’ 정책을 펼쳤다. 이때 기후활동가들이 주목한 것이 바로 노동자운동이었다. 이들은 기후정의 운동에 더 많은 노동자계급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 기후 문제를 노동자들의 일터로 가져가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첫 시도로 기후활동가들은 대중교통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자가용 차량 대신 대중교통의 서비스 질과 이용 편의성을 높여야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버스, 철도 등 대중교통 부문 노동자들은 장시간 교대 근무를 하며 최저임금을 약간 상회하는 급여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청년층의 유입은 줄어들고 퇴직률이 높아 이미 수만 명의 운전자가 부족한 가운데, 교통요금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으며, 특히 농촌 지역의 여객 운송 시스템은 점점 더 축소되고 있었다. 이는 1990년 이래 지속된 공공부문 민영화의 결과다. 1990년대 이후 연방정부는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고 자유화하면서 인력 감축, 업무강도 강화, 불안정한 고용, 소득 감소, 노동조합 약화 등 각종 긴축 조치를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철도 공기업이었던 ‘도이체반’도 1994년에 민간 기업으로 전환되고, 철도 여객 서비스의 상당 부분도 1996년 이후 대부분 민간 공급업체로 넘어갔다. 민영화의 여파 속에서 조직노동자들은 서로 다른 단체와 소속으로 분열되는 등 투쟁의 구심점을 모아내지 못한 채 결속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은 2020년 지역 대중교통 단체교섭에 연대하며, 파업 당일 30개 이상의 도시에서 공공서비스노조(Ver.di)의 투쟁을 방문하고 지원했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은 교통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고자 “#wirfahrenzusammen (#WeDriveTogether) 2020”라는 캠페인을 추진하였다. 이 캠페인을 통해 ‘미래를 위한 금요일’ 활동가들은 파업 노동자들을 위한 구체적인 연대를 조직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승객들로부터 연대 성명서를 수집하고, 정치인들을 만나 노동자들의 요구를 전달했으며, 시민들과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을 조직했다. 심지어 활동가들이 직접 노동자들에게 파업에 나서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2020년 파업을 계기로 여러 도시에서 노동운동과 기후운동의 동맹을 목적으로 하는 공동의 단체들이 설립되었고, 2024년 현재 60개 이상의 도시에서 1,000여 명의 활동가들이 #wirfahrenzusammen 캠페인에 참여하여 대중교통 노동자들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2023년 3월 3일,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전 세계 기후파업에 맞춰 독일 대중교통 노동자들이 함께 파업에 돌입했다. 이날 공공서비스노조는 전국적으로 지역 대중교통 노동자들이 하루 동안 행동할 것을 촉구하고 6개 연방 주에서 경고 파업을 벌였다. 그 결과 최소 30개 도시의 20만 명 이상이 파업에 참여했다. 독일 고용주 연맹(BDA)의 CEO 슈테펜 캄페터는 “노조가 정치파업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며 파업을 비난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자본가들이 사회적 정당성을 갖춘 노동자들의 파업을 극히 두려워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3월 27일, 파업은 이제 전체 운송부문으로 확대됐다. 대중교통 종사자뿐만 아니라 항공, 철도, 수상 운송 종사자들도 파업에 참여했다. 이날 독일 최대 공항인 프랑크푸르트 공항 등 전국 공항에서 항공편 운항이 중단됐다. 전국에서 장거리 열차 운행이 멈췄고, 베를린에서는 도시고속철도 운행이 끊기고, 독일 최대 항구인 함부르크 항도 마비됐다. 한 언론의 표현처럼 독일 안의 “모든 바퀴가 멈췄다(All wheels stand still!).” 대규모 파업에 놀란 사측은 27개월 동안 5% 임금인상과 일시금 2,500유로(약 350만 원) 지급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 내무장관 낸시 패저가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매년 14억 유로(약 1조 9천억 원)가 추가로 든다”며 난색을 표했음에도 말이다. 프랑스 토탈(Total) 정유공장 파업 2021년 1월 4일, 프랑스 그랑퓌 정유공장 노동자들은 석유·가스부문 거대 다국적기업인 토탈(Total)의 정유공장 폐쇄에 맞서 파업에 들어갔다. 토탈은 그랑퓌 정유공장을 왜 폐쇄했는가? 자본이 내세운 명분은 “석유 제로” 전략이었다. 그러나 화석연료 생산을 줄이겠다는 공장 폐쇄 명분은 전형적인 그린워싱이었다. 실상 토탈은 그랑퓌의 정유공장을 폐쇄하고, 원유매장지에서 가깝고 노동조건이 열악하며 환경기준이 느슨한 아프리카 국가 등으로 공장을 이전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탈이 추진하고 있는 우간다 틸렝가 석유 시추 프로젝트와 동아프리카 원유 송유관(EACOP) 건설 사업은 해당 지역의 자연환경과 주민들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1,443㎞ 길이의 송유관이 우간다와 탄자니아의 주요 생태계 보전지역을 가로지르면서 국립공원이 파괴되고, 10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토지를 빼앗긴 채 강제 이주를 당할 위기에 처했다. 토탈 그랑퓌 공장의 노동자들은 자본의 그린워싱에 맞서 일자리를 위한 투쟁과 환경을 위한 투쟁을 묶어내는 광범한 공동전선을 건설했다. 토탈 정유공장 노동자들은 수년 전 정리해고가 관철됐던 라메드 정유공장 노동자들과 만나 소통하고, ‘지구의 친구들’, ‘그린피스’ 등 기후·환경운동 단체와 접촉했다. 기후·환경운동가들은 화석연료 자본과 맞서는 투쟁에 매우 흥분했고, 이를 계기로 형성된 노동자와 기후운동의 결합은 파업의 큰 동력이 되었다. 노동자들은 투쟁 속에서도 에너지·산업 전환에 관한 토론을 이어 나가며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다국적기업의 손으로 친환경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들은 “노동자들이 공장의 통제권을 장악하면 오염을 덜 일으킬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윤 본위의 생산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를 위한 생산이라면 생태적 한계를 유지하고 공동체를 존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메가스트라이크, 프랑스 토탈 그랑퓌공장의 파업 모두 기후정의 운동과 노동자운동이 결합했을 때 얼마나 큰 성과를 낼 수 있는지 보여준 실례다. 결국 자본가들을 물러나게 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가진 물리적 힘이기 때문이다. 또 노동자운동은 기후정의를 내세워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의 기후정의 운동도 노동자운동과의 결합이라는 관점을 전면화해야 한다. 이를테면 노동 현장에서 노동안전 투쟁은 그 자체로 기후정의 투쟁이 될 수 있다. 폭염, 폭우, 혹한과 같은 기후재난에서 노동자가 죽지 않고 일하기 위해서는 작업중지권 보장, 노동시간 단축 및 충분한 휴게시간 보장, 냉난방 등의 조치가 시행돼야 한다. 현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조건을 자주적으로 통제해야 하며, 이는 그 자체로 기후정의를 위한 투쟁의 성격을 가질 것이다. 2. 기간산업 국유화와 노동자 통제 기후재난 시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기간산업에서 즉각적으로 자본의 소유권을 몰수하고 이를 국유화하는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다. 우선 에너지산업을 국유화해 재생에너지 전환을 전면화하고 노동자 민중의 필요와 계획에 따른 에너지 생산으로 대체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 민중의 기본권인 에너지 생산마저 이윤 창출의 수단으로 악용한다. 한국에서 전체 발전의 30%는 민간자본 발전사가 담당한다. 천연가스 직수입을 악용해서 엄청난 돈을 버는 SK, GS 등 재벌 발전사도 그중 일부다. 한국전력공사는 재벌 발전사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비싼 값에 전기를 구매하고, 여기서 발생한 적자를 노동자 민중의 전기요금 인상으로 해결한다. 더욱이 저들은 안정적 이윤 생산을 위해서라면 위험천만한 핵발전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의 무분별한 행태를 제어하자면 에너지산업의 각종 소유권을 몰수하고 국유화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제철, 조선 등의 제조 분야, 철도, 버스 등 대중교통 분야 등 탄소 배출량이 높은 각종 기간산업 역시 국유화해야 한다. 이들 기간산업에서도 경쟁의 압력에 놓인 개별자본은 사회 전체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윤 획득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간산업의 재벌은 그동안 비정규직·사내하청 확대 등으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한 것을 넘어, 중소기업, 소상인 등 광범위한 노동자 민중을 수탈하며 천문학적인 이윤을 벌어왔다. 기간산업의 국유화는 해당 분야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을 방어하는 것은 물론 사회에 대한 재벌의 문어발식 수탈을 막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기간산업을 국유화함으로써 이윤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필요에 맞춘 계획적 생산을 도모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회가 기후재난에 대응하기 위한 기본 전제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국유화된 기간산업을 노동자계급이 자주적·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만 국유화된 산업은 노동자 민중의 필요를 충족하는 계획적 생산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 속의 공기업들이 사기업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해고 등 악랄한 착취와 억압을 자행하는 것을 수차례 목격해 왔다. 기간산업을 국유화하더라도 이것이 단지 기업의 경영권을 민간 자본가에서 국가 관료의 탈을 쓴 자본가에게 양도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국유화는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게 된다. 해당 산업을 실질적으로 운영해 온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역량을 넘치게 발휘해 해당 산업의 생산체계를 사회 전체의 필요를 위해 합리적으로 재편할 것이다. 기간산업 노동자들로 구성된 산업통제위원회는 이윤 생산에만 도움이 될 뿐 기후위기 대응에는 무의미한 낭비적 생산 분야를 즉각 폐지할 것이며,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수렴하여 전기, 대중교통 등 필수 공공서비스 요금을 체계적으로 낮출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 통제의 경험은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수단이다. 노동자 통제를 통해 노동자계급은 민주적 계획경제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체계적으로 습득하고 발휘하게 된다. 이것은 기생충에 불과한 한 줌 자본가계급을 완전히 청산하고, 이윤 대신 사회적 필요를 위한 합리적 경제체제를 건설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 = 마르크스, 「고타 강령 초안 비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4권. =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 레닌, 『국가와 혁명』 [미주] [1] 보통 때의 모양이나 형편. [2]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세계기상기구(WMO)와 유엔환경계획(UNEP)이 1988년에 공동 설립한 국제기구로,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한다. [3] “It is unequivocal that human influence has warmed the atmosphere, ocean and land. Widespread and rapid changes in the atmosphere, ocean, cryosphere and biosphere have occurred.” [4] 칼 마르크스, 『자본』 1권,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333쪽. [5] 칼 마르크스, 앞의 책, 381쪽. [6] 다음 기사도 참조할 만하다. 박기용, “가속을 멈춰라, 달팽이처럼 기어서 가자”, <한겨레21> 2023년 4월 13일, https://h21.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53695.html [7] 사이토 고헤이의 정의에 따르면, ‘탈성장 코뮤니즘’이란 “정상(定常)형 경제에 근거한 지속 가능성과 평등이 자본주의에 저항할 거점이 되어 미래 사회의 기초”가 된다고 보는 “평등하고 지속 가능한 탈성장형 경제”다. [8] 마르크스‧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러시아어판 서문(1882년),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9] 엥겔스, 「러시아의 사회상태」,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4권. [10] 3.1 운동보다 불과 수십 년 앞섰던 1862년 임술농민봉기, 1894년 갑오농민전쟁 등이 삼남 지역만으로 제한됐던 것과 확연히 비교된다. [11]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12]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김성훈 옮김, 갈무리, 제5장. ‘소련에서의 테르미도르 반동’ [13] 마르크스, 『자본』 1권,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811쪽 이하. [14] 마르크스, 앞의 책, 851쪽. [15] 요로고스 칼리스가 말하는 페미니즘은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와 같은 생산관계와 무관하게 존속해 왔다고 보는 페미니즘이며, 자본주의의 핵심을 임금노동 관계에서의 ‘착취’가 아니라 ‘약탈’로 보고 자급자족 경제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페미니즘이다. [16] 마리아 미스‧반다나 시바, 『에코페미니즘(개정판)』, 17장 ‘소비자해방’. [17] 마르크스, 『자본』 1권,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810쪽. [18] 레닌, 『국가와 혁명』, 김영철 옮김, 제4장. ‘보론: 엥겔스의 보충 설명’ [19] <똥파리와 인간> - 김남주 똥파리에게는 더 많은 똥을 / 인간에게는 더 많은 돈을 /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 똥파리는 똥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 떼지어 붕붕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 시궁창이건 오물을 뒤집어쓴 두엄더미건 상관 않고 // 인간은 돈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 무리지어 웅성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 범죄의 소굴이건 아비규환의 생지옥이건 상관 않고 // 보라고 똥없이 맑고 깨끗한 데에 가서 / 이를테면 산골짜기 옹달샘 같은 데라도 가서 /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떼지어 사는 똥파리를 // 보라고 돈 없이 가난하고 한적한 데에 가서 / 이를테면 두메산골 외딴 마을 깊은 데라도 가서 /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인간을 // 산 좋고 물 좋아 살기 좋은 내 고장이란 옛말은 / 새빨간 거짓말이다 똥파리에게나 인간에게나 / 똥파리에게라면 그런 곳은 잠시 쉬었다가 / 물찌똥이나 한번 찌익 깔기고 돌아서는 곳이고 / 인간에게라면 그런 곳은 주말이나 행락철에 / 먹다 남은 찌꺼기나 여기저기 버리고 돌아서는 곳이다 //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게 별 것 아닌 것이다 / 똥파리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이다 [20] 마르크스, 『자본』 1권,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140쪽. [21] 이하 엥겔스의 글은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22] 눈치챈 사람들이 있겠지만, 정말 사회주의자들이 배워야 할 실용 지식이 아닐 수 없다…. [23] 마르크스, 『자본』 1권,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142쪽. [24] 이하, 마르크스, 「고타 강령 초안 비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4권. [25] “한 사회가 그 부를 동일한 규모로 재생산하거나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1년 동안에 소비된 생산수단[즉 노동수단‧원료‧보조재료들]을 새로운 물품의 일정량―연간 생산물에서 따로 떼어내 다시 생산과정에 투입하는 양―에 의하여 현물로 보전해야 한다.” 마르크스, 『자본』 1권,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777쪽. [26]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과학적 차별성은 명료하다. 현재 흔히 사회주의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것을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의 ‘첫째’, 또는 낮은 국면이라고 개념 규정했다.” 레닌, 앞의 책, 제5장. ‘국가사멸의 경제적 토대’. [27] 한편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공산주의 사회에 이르러서야 국가가 사멸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던 점도 주목하라. “‘보다 높은’ 국면의 공산주의가 도래하기까지는, 노동정책과 소비정책에 대한 사회와 국가의 엄격한 통제가 요구된다 … 이 통제는 자본가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의 수립과 함께 자본가들이 지니고 있던 생산수단의 몰수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관료로 이뤄진 국가가 아닌 무장한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에 의해 실행되어야만 한다.”, “소비재의 분배에 관련하여 부르주아적인 권리는 불가피하게 부르주아 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데, 왜냐하면 권리란 권리의 기준에 대한 준수를 강제할 수 있는 장치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28] 마르크스, 『자본』 1권,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100쪽. [29] 이하 그룹스카야, 『레닌의 회상』, 일월서각, 1986, 352쪽. [30] 빅토르 세르주, 『러시아 혁명의 진실』, 제3장. ‘도시 중간계급 대 프롤레타리아트’. [31] 이하는 토니 클리프, 『레닌평전 3 – 포위당한 혁명』, 4.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재인용 [32] 최대강령, 최소강령, 이행강령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라. 최영익, ‘오늘날의 사회주의 강령-최소강령, 최대강령, 이행강령’ https://nht.jinbo.net/bbs/board.php?bo_table=online1&wr_id=632 [33] 트로츠키, 「이행기강령 –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 『사회혁명을 위한 이행기 강령』, 풀무질. [앞선 시리즈 읽기] #7 사회주의 바로알기: 중국,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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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운사 연재 2회] 1부 폭압과 저항(1970~1987) [1] 민주노조운동의 태동[목차] 1부 폭압과 저항 (1970-1987) [시대배경]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 [1] 민주노조운동의 태동 [2] 1980년의 분출 [3] 민주노조운동의 파괴와 재건 [4] 1987년의 대폭발 일제강점기에 줄기차게 전개된 투쟁과 조직화를 토대로 해방공간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최대 50만의 조합원을 포괄하며 등장했지만, 미군정의 거센 탄압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절멸됐다. 이후 20여 년의 공백을 건너뛰어 1970년 전태일 열사로부터 민주노조운동이 다시 시작됐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섬유·전자 등 경공업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1979년 YH노조 투쟁이 보여준 결기는 강고해 보이던 유신체제가 내부로부터 허물어지게 하는 기폭제가 됐다. 1) 아름다운 청년노동자, 전태일 전태일은 1948년 9월 대구에서 가난한 봉제노동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도 3년밖에 다니지 못했고, 항상 굶주림을 떨치지 못했다. 1964년 서울로 올라와 구두닦이, 신문팔이, 우산장사, 리어카 뒤밀이 등을 하며 떠돌이 노동자로 살다가 1965년 가을 평화시장의 한 작업장에서 시다(보조원)가 됐다. 그런데 전태일이 마주친 평화시장은 한마디로 노동지옥이었다. 대부분이 여성인 2만여 노동자들이 먼지와 소음으로 가득 차고,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곳에서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15시간 동안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일했다. 사장들은 수시로 철야작업까지 강요하며 노동자들을 짐승처럼 부려먹었다. 여름에는 찜통 같은 더위에,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영양실조, 만성 소화불량, 신경성 위장병, 만성 피로, 진폐, 기관지염, 폐결핵, 눈병, 신경통 등에 걸리지 않은 노동자가 없었다. 어느 날 전태일과 같이 일하던 여성 미싱사가 새빨간 핏덩이를 왈칵 토해내며 쓰러졌다. 급하게 돈을 걷어 병원에 데려가 보니 폐병 3기라는 것이었다. 그 여성노동자는 곧바로 해고당했다. 전태일은 이 끔찍한 노동지옥을 바꿔보기 위해 몇 년 동안 피나는 노력을 했다.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비를 털어서 풀빵을 사주고 집까지 두세 시간 걸어가기를 예사로 했다. 재단사가 된 뒤에는 여공들을 일찍 퇴근시키고 혼자 남아서 시다들의 일까지 대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전태일은 아버지와 얘기하던 도중에 우연히 근로기준법의 존재와 그 내용을 알게 됐다. 어머니를 졸라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샀는데, 한자로 쓰인 법률 용어들이 수두룩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생 친구라도 있었으면”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전태일은 포기하지 않고 밤낮을 안 가리며 노력한 끝에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터득했다. 암흑의 동굴 속에서 한 줄기 광명을 발견한 듯 희망과 환희를 느꼈다. 이렇게 좋은 규정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사장이 시키는 대로 찍소리 한번 못하고 살아온 자신이 정말 너무나도 ‘바보’ 같았다. 전태일은 젊은 재단사들을 모아 ‘바보회’를 만들었다. 바보회는 평화시장 일대 3만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근로기준법대로 준수되도록 하기 위해,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실태를 조사했다. 설문지가 곳곳에서 업주들에게 발각되고 회원들이 탄압을 받았다. 전태일은 회수된 설문지를 모아 결과를 분석하고 이를 근거로 근로기준법상의 감독권 행사를 요구하기 위해 서울시청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갔다. 하지만 성의 없이 ‘서류를 두고 가라’는 말만 내뱉는 근로감독관 앞에서 전태일은 깊은 실의와 낙담에 빠졌다. 바보회는 탄압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전태일 자신도 해고당했다. 그동안 바보회를 꾸려 나가느라 상당한 빚도 졌다. 지친 전태일은 평화시장을 떠나 막노동판에서 일하면서 고뇌와 좌절과 자학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 혹독한 시련의 시기는 전태일의 ‘사상’이 벼려지는 시기가 됐다. 전태일은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하다가, 돈 많은 독지가의 투자를 받아서 평화시장 안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업체를 하나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사람대접해 주고도 얼마든지 사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꿈을 품고 평화시장으로 돌아갔다. 전태일은 바보회를 삼동회로 바꾸고 이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공동으로 행동하는 조직’으로 강화했다. 삼동회는 지난해의 경험을 살려 설문지의 배포와 회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를 근거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노동청장에게 제출했다. 다음날 <경향신문>에 평화시장 노동자의 참상에 관한 보도가 실렸다. 삼동회 회원들은 기쁨에 겨워 신문사로 달려가 신문 300부를 사서 팔았는데, 삽시간에 다 팔렸다. 허리조차 마음대로 펼 수 없는 2층 다락방, 뿌연 먼지 날리는 작업장, 커피 한 잔 값의 임금을 받고 10대의 어린 여공들이 하루 14시간에서 16시간 철야 노동을 하고 있었다.[1] 다음날 전태일 등 세 사람이 삼동회를 대표하여 요구조건을 적은 건의서를 갖고 평화시장 주식회사 사무실을 찾았다. 사기가 충천한 삼동회와 달리, 사장들과 노동청은 안절부절못했지만, 적당히 회유하면서 삼동회를 깨려고만 할 뿐 문제를 해결할 자세를 보이지는 않았다. 결국 진정과 호소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삼동회는 시위를 계획했다. 애초에 10월 24일로 계획했던 시위는 11월 7일까지 해결해 주겠다는 정보과 형사의 회유로 무산됐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삼동회는 11월 13일에 다시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다. 전태일은 “이번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단코 물러서지 말고 싸우자”고 힘주어 말했다. 목숨을 건 결연한 투쟁만이 유일한 활로라고 생각했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40분경, 서울 평화시장 앞에서는 시위를 위해 모인 노동자 500여 명이 경찰과 경비원들의 방해에 가로막혀 시위를 벌이지 못한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스물두 살의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이 담긴 법전을 가슴에 안고 기름을 뒤집어 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채 달려 나갔다. 화염에 휩싸인 전태일은 타들어 가는 목소리로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전태일의 분신은 강렬한 충격이 되어 노동자들의 굴종과 지식인들의 침묵을 흔들어 일깨웠다. 전태일의 동료들은 11월 27일 최초의 민주노조인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를 건설했다. 이어 대학생들의 농성과 시위, 종교인들의 각성과 지지, 노동자들의 죽음을 불사하는 격렬한 투쟁이 잇따라 일어났다. 전태일이 분신한 1970년은 민주노조운동의 원년이 됐다. 전태일에서 시작된 결연한 투쟁은 전투적 기풍을 형성하며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이 됐다. 민주노조운동은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88년 이후 매년 11월 13일 전후에 전국노동자대회를 열고 있다. 전태일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언짢아지는 심성을 가졌고 모두가 용해되어 있는 상태의 참된 공동체를 꿈꾸었다. 그러나 전태일의 눈에 비친 사회 현실은 노동자들이 단지 생존을 위해 노동하고, … 어린 소녀들이 … 더러운 부자의 거름이 되는 비참한 것이었다. 전태일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이 참혹한 세상에 대하여 분노했고, 이 분노 때문에 삶에 대한 온갖 미련을 떨쳐버리고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결단할 수 있었다. “쉽다면 누군들 안 하겠나? 어려울 때 어려운 일 하는 것이 진짜 사람일세”라며, 전태일이 승리의 환희보다도 오늘의 헌신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 아주 컸기 때문이다. 전태일은 일기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 전태일은 ‘나의 일부인 너’가 자신의 뒤를 따를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전태일은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참다운 공동체에 대한 열망,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무한한 헌신, 남은 사람들이 자신이 못다 한 일을 이루리라는 인간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으로 물려주었다.[2] 2)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 항거는 노동자운동의 부활을 알리는 위대한 외침이었다. 11월 27일 전태일 열사의 피를 머금고 평화시장에서 청계피복노조(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가 탄생했다. 청계피복노조는 1970년대 암흑의 시대에 세상을 밝히는 등불과도 같았다. 경찰의 감시, 연행, 구속, 고문 등 온갖 탄압이 빗발쳤지만, 청계피복노조는 목숨을 건 투쟁들로 스스로를 지켜내면서 노동자운동을 선봉에서 이끄는 ‘불굴의 결사대’ 역할을 했다. 전태일의 죽음이 한국 사회에 던진 충격과 함께 1971년 들어 급속한 경제침체로 기업의 도산과 임금체불이 급증했다. 1971년 내내 노동자와 도시빈민의 생존권 투쟁, 중간계급의 민주화 투쟁이 터져 나왔다. 4월 연세대와 고려대를 시작으로 전국의 대학생들이 교련반대 투쟁을 격렬하게 전개했다. 4월과 5월 동아일보를 비롯한 14개 언론기관에서 언론자유수호 선언운동이 벌어졌다. 6월부터 9월 국립의료원을 시작으로 서울대병원을 비롯한 전국 국립대병원에서 수련의들이 처우개선과 신분보장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7월 전국 판사의 36%에 해당하는 지방법원 판사 153명이 시국사건 무죄판결 판사 구속영장 청구에 맞서 사법부 독립을 주장하며 집단사표를 제출했다. 8월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대단지 판자촌으로 쫓겨난 도시빈민 수만 명이 부동산 투기와 살인적인 불하가격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8월과 9월 서울대를 시작으로 전국의 국공립대학들과 사립대학들에서 교수들이 학생들의 교련반대투쟁을 지지하며 대학 자치를 위한 대학 자주화 선언에 나섰다. 9월 한진상사 베트남 파견노동자들이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대한항공 빌딩에 불을 지르면서 시위를 벌였다. 10월 전국의 대학생 5만 명이 고려대에 난입해 학생을 연행·구타한 군인들의 처벌을 요구하며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일련의 투쟁들에 박정희 정권은 강력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10월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명령’을 발표했다.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특히 그 법에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또는 단체행동권의 행사는 미리 주무관청에 조정을 신청하고 그 조정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노동자들로부터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사실상 박탈했다. 1972년 10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제정하며 박정희 종신집권을 위한 유신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이 엄혹한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의 투쟁과 민주노조 건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972년 4월부터 8월까지 원풍모방 노동자 600여 명이 명동성당 농성 등의 조직적 투쟁을 통해 어용노조 민주화를 쟁취했다. 1972년 5월 동일방직노조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어용 남성 지부장을 물리치고 한국 최초로 여성 지부장이 당선되면서, 선거를 통해 노조민주화를 이뤄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1966년부터 진행한 소그룹 활동의 결실이었다. 1973년 9월 서울 영등포 삼립식품 노동자 1천여 명이 8시간 노동, 임금인상, 주1일 휴무 등을 요구하며 어용노조 집행부의 통제를 벗어나 사흘간 비공인파업을 벌였다. 1973년 10월과 12월 인천 부평4공단 삼원섬유 노동자 120명이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뒤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1973년 12월 컴퓨터 기억장치를 생산하는 미국계 기업 콘트롤데이타 노동자 600명이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1974년 2월 반도상사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 파업을 벌인 뒤 4월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1974년 10월 <동아일보> 기자 2백여 명이 ‘언론자유 실천’을 선언하고 ‘외부간섭 배격, 기관원 출입 거부, 언론인 불법연행 거부’를 결의하자 35개 언론사 기자들이 선언에 동참했다. 언론자유 실천운동으로 기자 146명이 해고됐다. 1975년 5~6월 YH무역 노동자 2천 명이 민주노조를 건설한 뒤 지부장·부지부장 해고 등 사측 탄압을 이겨내고 노조를 안착시켰다. 이렇게 속속 등장한 1970년대 민주노조들은 대체로 섬유·전자·가발 등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 속해 있었고, 대부분의 조합원이 여성이었다. 이들은 장시간 노동, 저임금, 열악한 작업환경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남성 관리자들에 의한 성희롱과 성폭력까지 겪어야 했기 때문에 그만큼 분노가 응어리져 있었다. 1970년대 민주노조들은 형성과정과 일상활동, 투쟁과정에서 도시산업선교회·가톨릭노동청년회 등 기독교 단체들과 학생운동 출신 지식인 운동가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기독교 단체들의 지원은 특히 소그룹 활동과 노동자교육에서 큰 역할을 했다. 노동운동을 위하여 교회단체들이 지원한 가장 중요한 사업은 소그룹활동이었다. 교회의 지붕 아래에서 서로 접촉하게 된 6~8명의 노동자들이 샛별, 소나무, 청년클럽, 승리, 다이아몬드, 소띠모임 등의 이름을 가진 소규모 비공식집단들을 결성했다. 소모임 참가자들은 신부, 목사, 혹은 대학생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정기적으로 만나서 다양한 레크리에이션 활동과 문화 활동에 참여하였고, 자신들의 공장생활과 현장의 문제들을 토론하였다. 이런 활동을 통하여 노동자들은 더 예리한 사회의식을 얻었고,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각성해나갔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대개 이런 소모임 활동의 산물이었다.[3] “70년대 초중반기 처음 활동을 시작하는 모임들은 주로 취미활동 … 교양문제를 많이 취급하였으나 70년대 중반기 이후에는 그룹을 시작한 지 3~4개월이 지나면 이런 것들보다는 자기들 회사의 노동문제, 노동법, 정치, 경제 등의 토픽을 스스로 선택하게 됨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처음에 산업선교는 노동자를 위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 곳으로 알고 무엇인가 자기들 생활에 보탬이 되는 것을 얻으러 왔다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처해 있는 열악한 상황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고 이에 분노하는 ‘노동자 의식’이 생기게 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경우, 노동자 스스로 힘을 만들어 해결해야 함을 깨닫고 같은 회사의 다른 동료노동자를 조직하여 산업선교에 오게 하는 일에 열심하게 되곤 하였다. 어떤 노동자의 경우, 저 사람이 돈을 벌려고 공장에 다니나 아니면 그룹 조직하러 공장에 다니나 할 정도로 조직활동에 열심을 다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그룹은 그룹 확장을 위해 아예 그룹원 전원(7~9명)이 흩어져서 각기 한 그룹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 노동자들과 산업선교는 조심스럽게 그 회사에서 최우선적으로 개선해야 할 노동자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의논하고 … 때가 이르렀다고 판단되면 그 회사에 속해 있는 전체 그룹들이 함께 모여(예, 수련회)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토의하고 행동에 대한 최종 결정을 하였다.” (「70년대 영등포산업선교회 전략」)[4] 1970년대 후반에는 대학교의 이념서클이 급성장하면서 사회과학 이론으로 의식화된 지식인 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됐다. 이들이 야학에 참여하면서 시혜 차원의 검정고시야학이 사회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야학으로 바뀌어 갔다. 노동야학은 영어와 수학보다는 국어, 사회, 역사를 중심으로 교과목을 편성하고 사회과학의 기초를 가르친다. 사회의식이 깃든 노래를 가르치기도 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일까, 인생이란 무엇일까 등을 주제로 토론하기도 한다. 일부 노동야학에서는 졸업 후에 후속 모임을 만들어 더 높은 의식화 교육을 실시한다. 이렇게 하여 노동야학은 의식화된 노동자들을 배출한다. 학생운동가들은 야학에서 노동자들을 만나며 현장감을 익히고 노동자운동에 투신할 준비를 한다. 노동야학은 노동자들의 초기 의식화를 담당하고 노조 교육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해 민주노조의 발전에 도움을 준다.[5] 민주노조는 기독교 단체들 및 지식인 운동가들과 협력하면서 조합원을 상대로 다양한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교육 내용은 주로 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의식과 단결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것들이었다. 강의 외에도 토론, 노래, 율동, 연극, 촛불의식 등 다양한 교육방식을 활용했다. 민주노조들은 조직적인 투쟁을 통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에 성공했다.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지만, 결연하게 단체행동을 조직해 요구조건을 쟁취해냄으로써 조합원들의 지지와 신뢰를 강화해 나갔다. 이를테면, 청계피복노조는 1975년 12월 주휴제 철저 이행과 저녁 8시 작업 종료 등을 요구하며 ‘시간 단축 투쟁’에 들어갔다. 50여 명이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하는 등 노조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78년 추석을 앞두고 원풍모방노조는 사측의 신입사원 상여금 체불 방침을 전면파업으로 철회시켰다. 이 투쟁으로 노조에 대한 조합원들의 절대적 신뢰가 형성됐다. 노조는 막강한 조직력을 토대로 매년 임금인상 때마다 인상액의 일주일분을 적립하고 상여금이 나오면 특별조합비를 내서 파업기금을 조성했다. 1982년 신군부에게 강제해산 당할 무렵 파업기금이 1억 5천만 원 넘게 적립돼 있었다. 민주노조들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정권과 자본에다가 어용 상급단체까지 나서서 전방위적인 민주노조 파괴공작을 펼쳤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조간부들과 조합원들이 권력기관에 연행·구속되거나 수배되었고 회사로부터 해고당하면서 숱한 고초를 겪었다. 한국노총과 산하 산별노조들도 극심한 견제와 탄압을 가했다.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대부분 어린 나이에도 권리의식과 주체의식에 스스로 눈을 떠 국가와 자본의 탄압에 맞서 강인한 투쟁을 벌였다. 활동에 참가한 노동자들이 구사대나 회사에 고용된 깡패들에게 매를 맞는 것은 흔하게 있는 일이고, 여성 노동자는 성폭행의 위협에 떨어야 하고, 심지어는 살의를 띤 폭력에 죽음까지 각오해야 한다. 사소한 일을 빌미로 해고하고 회사측만의 진술로 구속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합법적인 활동조차 폭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는 헌신적인 의지를 필요로 한다. ‘악으로 깡으로’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지킨다는 자세로 싸운다.[6] 정권·자본·한국노총이 합작하여 획책한 노조파괴 공작에 정면으로 대항한 대표적인 사례는 1976~78년 동일방직노조(전국섬유노조 동일방직지부) 투쟁이었다. 1976년 7월 동일방직지부의 지부장 등 노조간부 10명을 경찰이 연행한 가운데 회사측 대의원들만 참석해서 어용 지부장을 선출했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지부장 석방, 노조활동 보장, 대의원대회 무효 등을 주장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이 농성 조합원 연행에 나서자 여성노동자들이 속옷까지 벗어던지며 저항했다. 결국 노동자들이 승리하여 3대째 민주파 여성지부장이 탄생할 수 있었다. 1978년 2월 동일방직지부 총회가 예정된 날 조합원들의 선거 참여를 막기 위해 회사측 노동자 6명이 여성노동자들의 얼굴과 옷에 닥치는 대로 똥을 바르고 심지어 여자 기숙사까지 쫓아가 똥이 든 양동이를 머리에 뒤집어씌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국섬유노조는 조직행동대를 보내 지부 사무실을 점거하여 총회를 방해한 뒤 동일방직지부를 ‘사고지부’로 규정하고 집행부를 해산시켰다. 회사는 124명을 해고했다. 노동자들은 1980년 5월까지 줄기차게 현장복귀 투쟁을 전개했다. 전국섬유노조 본조는 해고자들의 명단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전국 사업장에 배포하여 이들의 취업을 막았다. 1976년 11월에는 원풍모방 지부장이 ‘국가원수 모독죄’를 이유로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조합원 1,500여 명이 지부장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인 끝에, 결국 7일 만에 석방되어 지부장으로 복귀했다. 1977년 7월 경찰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법정모독으로 구속하고 청계피복노조의 평화시장 노동교실을 폐쇄하려 시도했다. 노동자 2천여 명이 경찰을 쫓아내고 교실을 장악했다. 경찰이 진압을 시작하자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팔목의 동맥을 끊고 유리로 배를 가르는 등 극렬하게 저항한 끝에 노동교실을 지켜냈다. 민주노조 간부들은 기업과 지역을 넘어 서로 교류하면서 긴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했다. 한 조직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의논하여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해결책을 찾고자 함께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노조 간의 연대보다는 종교계 및 자유주의 보수야당의 보호·지원과 사회 여론의 지지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더 강했다. ‘독재정권이 강요한 희생 때문에 노동자들이 궁핍해졌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어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면 여론이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개별노조 차원을 넘어서는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을 초보적인 수준에서 시도했다. 1977년 7월 10일 협신피혁 노동자 민종진의 가스 질식사에 항의하는 연대시위, 1978년 3월 20일 기독교방송국 점거시위, 1978년 3월 26일 여의도 부활절 연합예배장 시위 등이 그 사례였다. 민주노조의 등장은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통제를 벗어난 새로운 노조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한국노총은 박정희의 철권통치 아래서 정부 정책에 적극 협력하며 어용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종되던 한국노총은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즉각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노총은 1973년 “국가 이익 우선주의에 입각하여 계급투쟁적인 극렬한 운동 방향을 배제하고 임금인상 일변도의 활동노선을 지양하고 생산성 향상 운동을 통한 분배원천의 증대라는 노사 공동 이익의 영역을 찾아 서로 협력”하기로 운동 방침을 정했다. 한국노총 위원장은 1974년 1월 ‘한국노총 산별 위원장 및 시도협의회 연석회의 개회사’에서 “도시산업선교회 같은 불순분자의 조직침투행위에 대해서 전체 조직력을 총동원하여 지난날 전평을 타도한 그 기개로써 단호히 분쇄할 것을 다짐”했다. 노사협조주의를 선언한 한국노총은 노동자의 단결된 투쟁을 포기하고 정부와 기업에 건의하거나 진정하는 방식으로 1970년대를 일관했다. 뿐만 아니라 유령노조 설립, 민주노조에 대한 사고지부 처리, 노조파괴 등으로써 자본가에게 적극 협력했다. 한국노총 간부들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지부장 선거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등의 비민주적 행위를 자행하고, 이권이 큰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자리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노총의 재원을 확보하고 직위 상승에 필요한 자기 패거리를 늘리기 위해 신규노조 결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1970년대 초반 60만이었던 조합원 수가 후반에는 115만으로 급증했다. 1970년대 민주노조의 수는 10여개에 불과했으며, 대부분 서울, 인천 등 경인지역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조는 사용자와 대등하게 마주서서 자신들의 요구를 당당하게 주장함으로써 사용자의 말 한마디에도 오금 저리던 노동자들에게 희망이 됐다. 민주노조들이 지향한 것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민주노조들은 현장에 뿌리를 둔 조직적 역량을 구축하여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조합운동의 자주성과 민주성의 원칙을 관철하고자 했다. 민주노조는 권력과 자본의 탄압 실태를 폭로했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럼으로써 사회 전반에 노동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확산시켰고, 또한 기층 노동자들의 의식이 변화하는 과정에 불을 지폈다. 민주노조들은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과도 연대했다. 민주노조운동은 민주화운동의 폭을 넓히고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민주화운동은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반독재라는 자유화운동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민주노조운동이 그 자체의 존재를 통해서, 또한 다른 민중운동의 선구가 됨으로써, 민주화운동에 계급적 성격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민주노조운동은 유신체제에 끊임없이 타격을 가했고, 마침내 붕괴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는 전태일의 헌신성과 치열함, 인간에 대한 믿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 1970년대의 노조 활동가들은 인간을 신뢰하며 시대 상황의 어려움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고, 참담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이런 전통은 전태일에서 시작했고 1990년대 초반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분명한 약점을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유주의 보수야당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부족했다. 또한 고립분산적 활동을 넘어 확고한 계급적 연대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 1974년 현대조선 파업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경공업의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동안, 남성 위주의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대기업들이 형성되면서 젊은 남성노동자들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중화학공업 대기업 자본가들은 안정적인 인력 관리를 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그만큼 높은 노동강도로 일을 했다. 중소사업장에서의 노동자통제가 대체로 가부장적이었다면 대기업에서의 통제는 군대처럼 강압적이었다. 당연히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았지만 이직률이 매우 높아서 불만 세력이 축적되지 않았다. 또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절대 안 된다’는 대자본가들의 완고한 태도와 대기업 노동자의 조직화를 우려하는 국가기관의 통제정책 때문에 대기업에서의 민주노조 결성은 대단히 어려웠다. 그러나 그 불만이 투쟁으로 표출될 때에는 아주 격렬한 양상을 띠었다. 1971년 9월 한진상사 베트남 파견노동자들의 대한항공 빌딩 방화사건, 1974년 9월 울산 현대조선(훗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 1977년 현대건설 사우디아라비아 파견노동자들의 현지 파업시위 등이 그 대표적 투쟁들이었다. 신진자동차(훗날 대우자동차-한국GM) 부평공장에서는 1967년, 1969년, 1971년 세 차례나 노조결성 시도가 실패했다. 1971년 4월에 노조가 결성되기는 했지만 열성조합원 208명이 무더기로 해고당하면서 흐지부지됐다. 1974년 9월 19일, 울산 현대조선에서 발생한 파업은 1970년대 최대 규모의 노동쟁의였다. 노동조합도 없고 합법적인 단체행동권도 없었지만, 노동자들은 자신의 요구를 내걸고 격렬하게 투쟁에 나섰다. 1972년 3월 기공식을 가진 현대조선은 세계 처음으로 조선소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유조선을 건조하는 ‘신화’를 만들어 나갔다. 하지만 그 신화의 실체는 지옥 같은 작업환경이었다. 현대조선에서 1973년 한 해에만 34명의 노동자가 중대재해 사고로 사망했다. 1973년 7월 회사는 ‘위임관리제’라는 이름으로 사내하청 제도를 도입했다. 사원 대우를 해주겠다며 모집한 직영 기능공의 대다수를 사내하청으로 전환하는 조치였다. 1974년 10월까지 순차적으로 위임관리제 전환이 진행된 결과, 전체 기능직 가운데 직영공은 3,929명(26.6%), 사내하청은 10,852명(73.4%)이 됐다. 1974년 9월 선각부 직영공 2,400명을 위임관리제로 전환한다는 회사의 방침이 발표되었을 때, 19일 오전 8시부터 노동자들이 신분보장과 처우개선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농성을 시작했다. “도급제 폐지하라” “사원과 기능공의 차별대우를 철폐하라” “시간당 임금을 100% 인상하라” “노동조합 결성을 보장하라” 등의 투쟁구호를 외치며 시작한 집단적 항의는 한 회사간부의 자극적인 발언에 의해 파업시위로 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상황이 급변하자 중심에 섰던 조장급들이 집단행동에서 빠져나가고 일반 노동자들이 시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야간 작업조와 건조부 이외 노동자들이 합세하면서 파업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경찰과 노동청의 중재 아래 오전 10시부터 노사 간의 ‘협상’이 시작됐다. 형식을 갖춘 정식 협상이 아니라 회사를 대표하는 일부 간부가 메가폰을 들고 노동자들을 설득하려 하고, 노동자들은 그를 둘러싸고 중구난방으로 불평·불만을 터트리며, 경찰과 노동청 관료들은 회사와 노동자 사이에서 절충을 시도하는 식의 난상토론이었다. 협상은 순조롭지 않았다. 회사 측이 노조결성, 위임관리제 폐지 등 일부 사항에 대해 완강하게 수용을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오후 5시 30분경 노동자들과 정주영 그룹회장이 만났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이 위임관리제 만큼은 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특히 이 요구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발표를 하며 노동자들을 자극했고 이것이 폭동으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3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1,200여 명 경찰 저지선을 뚫고 정문 경비실에 걸려 있는 사기(社旗)를 불지른 후, 구내식당, 5층 본관건물 유리창 200여 장을 부수고 사무실 집기를 파괴하였다. ‘회사기물은 말할 것도 없고 생산시설인 철판절단기 1백여 대가 망가지고 경영진들의 승용차가 불타는가 하면 외국인 기술자 숙소에서는 TV, 라디오, 심지어 바르던 로숀까지 없어졌다.’ … 이날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경남도경찰국장의 지휘로 진압이 시작되어 노동자 총 877명이 연행되고, 이중 20명은 구속, 21명은 불구속 기소되고 나머지 인원은 훈방되었다.[7] 정부는 9월 21일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열고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을 분석한 후 회사에게 노사협의회 조직을 명령했다. 노사협의회(최초 명칭은 새마을협의회)를 통해 위임관리제 철폐와 노동조합 결성을 제외한 나머지 요구사항을 회사가 받아들이는 선에서 사태를 봉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74년 10월 5일 결성된 현대조선 노사협의회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직전까지 유지되면서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의 폭발을 지연시키는 고충처리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 노동자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8] 1974년 현대조선 투쟁은 중화학공업 대기업 노동자들의 폭발력을 보여주었지만, 비조직적이고 자연발생적인 폭동의 한계를 드러냈다. ◎ 1979년 YH투쟁에서 유신붕괴까지 1979년 8월 YH노조의 신민당사 농성투쟁은, 박정희 유신철권통치가 그 잔인함과 모순을 만천하에 드러낸 끝에 마침내 스스로 붕괴하도록 몰고 간 결정적 사건이었다. ‘YH무역’은 설립자 장용호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가발업체로 1966년에 창설됐다. 1970년대 초에는 4천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면서 수출 순위 15위를 기록하는 한국 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도급제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인 대우에 시달렸다. 결국 1975년 민주노조를 결성했다. 장용호는 미국에서 백화점과 호텔을 설립해 외화를 빼돌렸다. 뒤를 이은 경영진들도 회사 자금을 빼돌리고 은행 빚을 얻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다. 1977년부터 재무구조가 극도로 악화된 회사는 1978년 말 도산 위기에 직면했다. 회사는 노동자를 500여 명으로 축소하더니, 마침내 1979년 3월 30일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했다. YH노조는 부채상환 연기를 통한 회사 정상화나 3자 인수를 통한 고용승계를 목표로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갔다. 네 달 동안 노동청을 비롯한 관계기관을 찾아다니며 필사적으로 대책을 호소하고 항의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8월 1일부터 기숙사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던 YH 노동자들은 8월 9일 새벽 삼삼오오 짝을 지어 회사 기숙사를 빠져 나와 신민당사로 농성장을 옮겼다. 오전 9시 30분 YH노조 187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이다’는 각오로 택한 마지막 방법이었다. 아울러 “동일방직이 처참하게 깨지는 것을 보면서, 이왕 깨질 거라면 확실하게 왕창 깨져서 다시는 당국이 민주노조에 손댈 엄두를 못 내게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10일 밤, YH 노동자들은 ‘우리를 나가라면 어디로 가란 말인가!’라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마치 유서를 쓰듯 ‘노조 종결대회’라는 이름의 총회를 열었다. 경찰이 진입하기 몇 시간 전이었다.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올린 뒤, “이제부터 어머님의 약값은 누가 댈 것이며, 동생의 학비는 누가 보탤 것입니까?”라며 오열했다.[9] 11일 새벽 2시, 기동경찰과 폭력배 2천여 명이 신민당사에 투입됐다. 4층 강당 농성장에서 노동자들을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하며 끌어냈다. 격앙된 몇몇 노동자들이 깨진 유리조각으로 자살을 기도했으나 10여 분 만에 모두 당사 밖으로 끌려 나갔다. YH 노동자 김경숙이 당사 뒷마당에서 왼팔 동맥이 끊긴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항의의 뜻으로 동맥을 끊었다가 진압 도중 추락한 것으로 추정됐다. 2층 회의실에서는 신민당 총재 김영삼과 10여 명의 국회의원, 기자, 당원들이 폭력배들에게 무차별로 구타당했다. 9월 들어 대학교가 개강하자 학생들이 연일 군부독재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16일 김영삼은 외신 인터뷰에서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 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멀지 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무참히 쓰러질 것이다”라고 규탄했다. 10월 4일 박정희 정권은 공화당과 유정회를 동원하여 제1야당 총재 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시켰다.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시민들까지 합세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경찰력이 무력화됐다. 박정희 정권은 18일 부산에 계엄령을 발동하여 군대를 투입했다. 20일에는 마산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그러나 24일 대구에서도 수천 명이 시위를 벌이는 등 사태가 계속 확산됐다. 위기를 맞은 지배세력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열됐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대로 계속 가면 4·19 이상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면서 ‘하루빨리 수습책을 발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선 300만 명을 죽여도 끄떡없다’며 ‘우리도 100만 명 정도 죽여 버리면 잠잠해질 것’이라면서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각하가 무서운 줄 알고 더 이상 대들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시위가 확산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면서 차지철을 옹호했다. 결국 26일 김재규가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와 차지철을 권총으로 살해했다. 1961년 이후 18년 이상 지속된 박정희 군사정권, 특히 1972년 이후 7년 동안 지속된 유신체제가 스스로 막을 내렸다. 1979년 박정희 유신통치를 자기붕괴로 몰고 간 YH노조의 투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YH 노동자들의 그 목숨 건 결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것도 지도자 한 두 사람이 아니라, 180여 명이나 되는 농성대오가 그런 결기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민주노조’였다. 열서너 살에 고향을 떠나와 ‘공순이’의 서러운 삶을 살아가던 YH 노동자들은 민주노조와 함께 새로운 삶을 꿈꾸고 시작할 수 있었다. 유신의 엄혹한 철권통치 아래서도 민주노조로 단결한 노동자들은 감히 임금인상투쟁이란 것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사장의 오만한 콧대를 납작 찌그러뜨릴 수도 있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욕구가 인간이 가진 다른 어떤 욕구나 두려움보다 소중하고 강력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릎을 꿇고 사느니, 차라리 민주노조와 함께 장렬하게 산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YH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조가 자기 목숨과도 바꿀 만큼 소중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민주노조를 통해서 그야말로 진정한 단결을 이뤄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소통과 우애를 통한 하나됨이 노동자들에게 삶을 송두리째 던질 만한 감동과 희열로 다가갔기 때문일 것이다. YH노조 조직체계는 조합원 의견을 늘 듣기 위해 [의장단 논의·대책마련 → 상집위원 논의 → 대의원 그룹토론 → 대의원과 상집위원 중 그룹진행위원을 선발(16명)하여 조합원을 16개 소그룹으로 나눈 뒤 모든 그룹에 참가하여 토론을 주도(나머지 대의원과 상집위원들은 보조역할) → 모임 뒤 그룹진행위원이 평가회를 통해 조합원의 반응·결정사항·요구내용 등 종합토론]하는 5단계 토의방식체계를 운영했다. 이는 조합원들이 차례로 그룹토의에 참가하여 참여의식을 높이며, 함께 문제를 발굴하여 해결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10] YH노조는 노조원을 대상으로 모집 인원 60명인 녹지중학교를 설립하여 1984년까지 운영한다. 신민당사 농성 투쟁 중 사망한 김경숙은 이 학교 출신이다. 녹지중학교 졸업생을 상대로 비공개로 운영되는 동일교회 야학에서는 노동, 사회, 정치, 경제를 교육한다. 주1회 소그룹으로 운영되는 영클럽은 월 1회 교양강좌, 연 4회 역사공부, 연 6회 타 노조와의 연합모임을 가진다. 노조는 월 1회 대의원 모임을 열고 분반토론으로 논의를 활성화하고, 합창단과 탈춤반을 운영하며 노조원들이 노조에 쉽게 친근감을 가지게 하고, 상조회를 설립하여 우애를 돈독하게 한다. 이런 활동들에서 대학생 출신의 활동가가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고 노동자들은 이들과 연계하여 헌신적으로 모범적인 활동을 펼친다. 이런 활동의 성과는 1979년의 일사불란한 신민당사 농성 투쟁으로 나타난다.[11] [미주] [1] 경향신문, 1970/10/07,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2] 안승천, 2002,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22~23쪽. [3] 노동사회교육원, 2008, 『금속노동자를 위한 노동운동사』, 전국금속노동조합, 93쪽. [4] 이광일, 2008,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메이데이, 122~123쪽. [5] 안승천, 2002,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49~50쪽. [6] 안승천, 2002,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26~27쪽. [7] 신원철, 2003, 「사내하청공 제도의 형성과 전개: 현대중공업 사례」, 『산업노동연구』 제9권 제1호, 111쪽. [8] 현대중공업노동조합, 2007, 『현중노조 20년』, 59쪽. [9] 경향신문, 2003, 「실록 민주화 운동 (24) YH노조 신민당사 농성사건」. [10] 유경순, 2012,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의 형성과 분화에 관한 연구」, 65쪽. [11] 안승천, 2002,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50쪽.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전쟁범죄 동조자 유발 샤니 교수는 고려대를 떠나라!1월 19일 오후 1시 고려대학교 SK미래관 앞에서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고려대 구성원 및 시민사회 일동'이 '고려대학교의 유발 샤니 이스라엘 교수 초빙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같은 날 오후 2시부터 휴먼아시아와 고려대 국제인권센터, 국제대학원 등이 주최하는 '국제 AI 인권장전 세미나'에 기조강연자로 유발 샤니(Yuval Shany)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법학교수가 참여하는 것을 규탄하고 이를 보이콧하기 위해서였다. 재한 팔레스타인 학생, 고려대학교 학부생, 대학원생, 강사,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시민사회 구성원 등 다양한 이들이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참여하며 유발 샤니 교수와 고려대학교를 목소리 높여 규탄했다. 기자회견 전후로 유발 샤니 초청에 맞선 항의행동이 고려대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강연 5일 전부터 주요 게시판에 유발 샤니와 그를 초청한 고려대를 규탄하는 대자보가 붙고, 학내 구성원 대상연서명이 진행되었다. 기자회견 직후에는 강연장 입구에서 ‘고려대는 이스라엘 전쟁범죄 동조자와 학술협력 동결하라!’, ‘집단학살 옹호하는 유발샤니 규탄한다!’ 등 항의 구호를 함께 외치고, 강연 후에는 캠퍼스를 떠나는 유발 샤니를 쫓아 항의 피케팅을 진행했다.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팔학(@studentcoalition.kr)님의 공유 게시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점령과 집단학살이 지속되는 와중에, 집단학살을 정당화하는 이스라엘 학자를 초청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것도 ‘인권’을 주제로! 이스라엘이 학교, 대학 등 교육기관을 대상으로 무차별적 폭격과 학살, 이른바 교육학살(Scholasticide)을 자행했음을 고려하면, 고려대를 비롯한 한국 대학과 이스라엘 학계의 교류는 그 자체로 규탄 대상이다. 이 기사는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과 유발 샤니 교수가, 이스라엘의 집단학살과 식민점령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 규명하고자 한다. 이들의 진상이 드러날수록, 이들과 협력하는 한국 대학과 학계가 팔레스타인 점령과 학살에 얼마나 깊숙이 공모하고 있는지, 팔레스타인 점령과 학살에 얼마나 무책임하고 근시안적인지 드러날 것이다. 대자보 문구를 일부 인용하자면, “강의실이 호화로운 만큼, 그럴싸한 이론이 마이크를 통해 또렷하게 전달되는 만큼, 연사들의 높은 명망만큼, 커져가는 참여자들의 박수소리만큼, 팔레스타인의 비참한 현실과의 대조는 강연을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이다. 축제 같은 분위기 아래 펼쳐지는 공허한 ‘인권과 평화’의 아우성이 집단학살과 식민점령을 외면하는 침묵을 더욱 부각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집단학살과 식민점령의 씽크탱크 유발 샤니가 재직 중인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은 어떤 곳인가. 2024년 9월 20일, ‘팔레스타인 대학교수 및 직원 노조연맹’(PFUUPE)과 ‘팔레스타인 과학기술 아카데미’(PalAST)는 이스라엘 대학들이 어떻게 팔레스타인 점령과 집단학살에 기여하고 있는지 각 대학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이에 대한 보이콧과 협력 중단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공동으로 발행했다. ‘교육학살’에 직면한 팔레스타인 학계 구성원들은 호소문을 통해 “모든 팔레스타인인을 억압하는 이스라엘의 76년 정착민 식민지 분리주의 통치, 그리고 현재 국제사법재판소가 점령지 가자지구에서 23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집단학살이라고 판결한 사건에서 핵심 역할”을 해왔으며, 이스라엘 학술기관들이 국제법을 위반해 왔기 때문에 윤리적 고려와 국제법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모든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밝혔다. 마찬가지로 호소문은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이 팔레스타인 집단학살과 교육학살에 대한 직접적 공범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유발 샤니는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스코푸스산(Mount Scopus) 캠퍼스에 재직 중이다. 스코푸스산 캠퍼스가 위치한 동예루살렘은 1967년 이스라엘이 군사점령한 땅으로, 이곳에 점령국 시민들이 거주하는 것은 국제법상 불법이다. 점령지에 세워진 캠퍼스 역시 이스라엘 정착촌과 마찬가지로 존재 자체가 제4차 제네바협약을 위반하는 중대한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따라서 여기 속한 교수 등 종사자 개인 역시 적극적인 전쟁범죄 공모자로서 보이콧 대상이다. 히브리대학교는 고교졸업자 중 소수 엘리트를 선발하여 첨단 군사과학 인재로 육성시키는 ‘탈피오트’ 군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해당 프로젝트는 이스라엘 공군과 육군의 후원을 받는다. 탈피오트 프로그램을 졸업한 이들은 군복무와 고등교육을 병행하며 이스라엘군의 R&D와 정보전에 동원된다. 탈피오트 프로그램은 이명박정권 시기 국방부 주도로 고려대학교에 설립된 계약학과인 사이버국방학과 설립과 운영에 롤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잠시 동예루살렘에 주목해보자. 2024년 7월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동예루살렘·서안지구·가자지구) 군사점령이 불법이라고 결정하고, 이에 따라 2024년 9월 유엔총회가 각국에 이스라엘이 불법 점령지에서 철수하도록 경제, 외교, 군사, 기타 모든 수단을 동원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바로 지금 동예루살렘에서는 정반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군사점령과 통제, 정착민 폭력은 날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심지어 1월 19일 이스라엘 식민당국은 동예루살렘에 위치한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UNRWA) 본부를 철거했다.[1] 이는 이스라엘 당국이 2024년 UNRWA를 불법화하고, UNRWA 직원들을 표적 살해하고, 산하 학교, 병원 등 구호시설을 파괴해온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휴먼아시아는 불과 며칠 전 요르단 제라시 팔레스타인 난민캠프에서 구호활동을 진행했다고 SNS에 게시했다. 물론 이러한 구호행위까지 부적절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활동은 필연적으로 다음 질문에 직면한다. “‘팔레스타인 난민’이란 무엇인가?” 팔레스타인 난민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나크바에서 기원한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저지른 인종청소와 원주민 추방의 결과가 요르단, 이집트, 레바논 등 아랍과 전 세계에 퍼진 팔레스타인 난민이다. 비참한 현상유지가 아닌, 팔레스타인 고향 땅으로의 귀환이야말로 세대를 초월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염원이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자결권과 귀환권은 유엔총회결의 194에 명시되어 있지만, 그 실현을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시온주의 체제의 철폐다. 시온주의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지탱하는 대학 등 이스라엘 국가기구에 대한 단호한 거부는 시민사회와 NGO에게도 요구되는 책임이다.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역시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자유주의적 시온주의자 유발 샤니 교수: 이스라엘군의 집단학살을 정당화하다 「국제 AI 인권장전 세미나」의 주최측은 유발 샤니를 예루살렘 히브리대 법학교수, 옥스포드 대학교 AI 윤리 연구소 석좌연구위원, 전 유엔 자유권위원회 위원장 등 화려한 직함으로 소개했다. 이는 여타 학술행사에서 공개된 유발 샤니의 이력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유발 샤니를 환대하는 이들이 잘 언급하지 않는 이력이 있다. 유발 샤니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실과 이스라엘군, 이스라엘 법무부의 자문을 맡아왔다. 학살자 네타냐후와 이스라엘 점령군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스라엘 법무부 역시 점령과 학살의 체제를 유지하는 국가기관의 핵심이다. 이스라엘 군과 정부부처와 함께 일한 경력으로 인해 2018년 유발 샤니가 유엔 자유권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될 당시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선택적으로 나열된 경력이 그의 손에 묻은 피까지 지울 수는 없다. 법률학자로서 유발 샤니의 ‘전문성’과 학술적 권위는 이스라엘군의 집단학살과 식민점령을 옹호하는 데 쓰인다. 유발 샤니는 국제법 전문매체인 〈저스트 시큐리티〉에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정당화하는 논설을 꾸준히 기고하고 있다. 이러한 논설은 2023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기한 집단학살(Genocide) 소송, 2024년 국제앰네스티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보고서, 유엔 등 국제기구의 집단학살 규탄 등을 주로 겨냥한다. 2023년 10월 논설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10월 9일 사용한 “전면 봉쇄(total siege)”가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이스라엘군이 민간인들이 가자 남부로의 이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했기에 국제법을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이 민간 시설을 표적 삼아 공격하고 공공 서비스로의 접근을 차단한 행보에 대해 유엔 사무총장이 언급한 “집단처벌”[2]에 관해서도, 집단처벌 규정이 합법적 조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며 이스라엘군에 면죄부를 부여했다. 2024년 10월 국제엠네스티 보고서 반박기고에서는, 이스라엘이 민간인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으며, 여러 건의 국제인도법 위반이 발생하여 보호대상집단 구성원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만으로 집단학살이라고 추론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같은 매체의 팟캐스트에서는 ‘이스라엘이 민간인들에게 특정 지역을 떠나라고 미리 경고를 하는 등, 피해 최소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집단학살이 2년 넘게 지속되는 지금, 우리는 이러한 옹호가 철저히 거짓임을 보고 있다. 가자 남부 라파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무참하게 파괴되었고, 이후 벌어진 것은 가자지구 전역의 끔찍한 기아였다. 이스라엘군은 병원, 학교, 주거지 등 생존에 필수적인 민간 시설을 파괴했으며 가자지구 주민들은 최소한의 생존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군은 민간 시설 폭격 후 민간인을 구조하러 오는 구급대원 등을 공격하는 ‘더블 탭’ 전술을 시험하기도 했다. 유발 샤니 초청강연 주제가 ‘AI의 윤리적 활용’이라는 사실은 더욱 아이러니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AI기술이 팔레스타인 민중을 '효율적'으로 학살하고, 식민점령을 공고화하는 데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2025년 7월, 유엔 팔레스타인 점령지 특별보고관 보고서 "(가자지구) 점령 경제에서 집단학살 경제로"는 이스라엘 점령군이 데이터 처리 및 표적 목록 생성에 각종 인공지능 시스템을 개발해 활용하고 있으며, 빅테크 기업과 대학은 이스라엘과 협력하며 이윤을 쌓고 있음을 지적한다. 강연 직후,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강연장을 나서는 유발 샤니에게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대한 입장을 묻자, 유발 샤니는 ‘나는 AI에 대해 말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AI를 집단학살에 활용 중인 자국의 책임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대답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가 쓴 「국제 AI 인권장전의 필요성과 실현가능성 백서」에서도 드러난다. 백서는 다양한 법령과 사례를 들어 AI의 윤리적 이용에 대해 역설하나, AI를 집단학살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문제제기는 단 한마디도 없다. 이러한 유발 샤니의 입장과 행보는 소위 ‘자유주의적 시온주의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에 부합한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유대인의 민족자결권과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모두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2. 종종 이스라엘 정부 또는 정착민들을 비판하지만, 절대 시온주의 이념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3. 팔레스타인 귀환권 보장을 거부하고 정착민 식민주의 폭력을 경시하면서 ‘두 국가 해법’을 주창한다 자유주의적 시온주의는 유대 국가와 함께 민주주의와 인권도 지지한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유대민족국가체제를 옹호할 뿐이다. 가자 구호선단에 참여한 한국 시민 납치까지 선동하다 2025년 10월 초, 이스라엘군은 구호물품을 싣고 가자지구로 향하던 ‘천개의 매들린 호’ 선단에 참여한 한국인 활동가 해초를 공해상에서 납치하고 강제 구금했다. 해초 활동가뿐만 아니라 ‘글로벌 수무드 함대’ 등 선단 수십 척이 이스라엘에 의해 나포되고 그레타 툰베리를 비롯한 활동가 수백 명이 강제 구금과 잔혹한 폭력을 겪었다. 이 피랍에 대해 유발 샤니도 한마디를 얹었다. 유발 샤니는 가자 구호선단 나포에 대해, ‘가자지구 봉쇄가 무기반입을 막으려는 군사적 목적이라고 정당화될 수 있기에, 선박들이 이 봉쇄를 깨려는 의도를 가졌다면 사전경고 후 나포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가자 봉쇄는 정당하며 이스라엘군의 구호활동가 납치도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군의 구호활동가 납치마저 정당화한 인물을, 인권 주제 강연에 기조강연자로 세우는 고려대학교의 행보를 도대체 무엇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군/정부 자문 이력을 누락하고, 학살과 점령에 이어 구호활동가 납치까지 정당화하는 유발 샤니 교수의 과오에 대한 침묵은 또 하나의 학살 공모행위이다. 이스라엘의 집단학살과 식민점령을 정상으로 포장하는 모든 시도에 저항하라 필자는 이스라엘 대학과 학술기관이 집단학살과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복무하고 있으며, 이들이 보이콧의 대상임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이 나올 수 있다. 이스라엘 기관에 속한 개인까지 보이콧하는 것은 과도하지 않은가? 학술보이콧으로 학문의 자유와 독립성이 과도하게 침해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일란 파페처럼 시온주의 체제 철폐를 요구하는 이스라엘 출신 학자들도 있지 않은가? 기자회견 후, 고려대학교 국제인권센터장이자 휴먼아시아 대표이사인 서창록 고려대 교수가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학생 공동행동>에 보낸 메일도 이러한 논지다. “이러한 이유로, 국적이나 소속을 이유로 학술행사 자체를 중단하거나 발언의 기회를 사전에 제한하는 것은 학문의 자율성과 대학의 기본 원칙과 양립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학술행사는 특정 국가나 정부의 정책, 군사행위, 또는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유발 섀니 교수는 오랫동안 국제 인권 규범의 형성과 발전을 연구해 온 학자로, 유엔 자유권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또한 디지털 기술과 인권의 관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해 온, 이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학자입니다. 그의 국적이나 소속 기관을 이유로 이번 학술행사에서의 참여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인권 규범의 진전을 이끌어 온 학문적 논의의 취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는 진부하고 태만한 변명이다. 이런 변명은 ‘이스라엘 학술·문화 보이콧 팔레스타인 캠페인’(Palestinian Campaign for the Academic and Cultural Boycott of Israel; 이하 학술 보이콧 캠페인) 속에서 숱하게 반박되어왔다. 학술보이콧 운동은 특정 개인의 정체성이나 견해만으로 개인을 보이콧하지 않는다. 학술 보이콧 캠페인 가이드라인은 이스라엘 학자들이 이스라엘 연구기관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보이콧을 적용할 근거가 될 수 없으며, 학문의 자유에 대한 침해에 해당할 수 있음을 명확히 한다. 그러나 학술 보이콧 캠페인 가이드라인은 이스라엘의 점령과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공모하거나 연루된 개인은 보이콧 대상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앞서 설명했듯, 유발 샤니가 보이콧 대상인 이유는 단순히 이스라엘 학자라서가 아니다. 인권과 국제법을 다루는 강연에 이러한 인사를 기조강연자로 초청하는 것은, 학술보이콧 가이드라인이 명시하듯 점령과 학살을 ‘정상화’(normalization)[3]하려는, 즉 점령과 학살을 정상으로 포장하려는 기획이다. 이러한 정상화 기획은 직접적 집단학살 가담, 노골적 학살 선동에 비해 간과되기 쉽다. 그러나 정상화 기획은 자기 논거를 ‘국제법’, ‘인권’, ‘학술적’ 중립 따위에 두기에, 시온주의를 보다 교묘하게 정당화하는 데 동원된다. 한국에서 석사과정에 다니는 팔레스타인인 타렉 함단은,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학계의 책임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의 집단학살과 교육학살이 지속되는 와중에)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법학부 유발 샤니 교수를 ‘국제 인공지능 인권장전’ 세미나 연사로 초청한 모욕적 결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인권’을 함께 논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이스라엘이 인권을 무시하고 직접 유린하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경우일 뿐이지, 그 어떠한 방식으로건 학술적 의미의 인권을 논할 발언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계가 조작된 합의를 받아들이도록 방치할 수 없습니다. 거리는 저항 행렬로 가득합니다. 지금 필요한 논의는 더 이상 “너무 복잡하다”가 아니라, “그들이 아이들을 또 살해하다니 믿을 수 없다”입니다. 우리가 인권을 설파하면서도 국제적 살인자들을 학문의 전당에 초청해 인권을 이야기하게 한다면, 우리 청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까? 고려대학교가 세미나를 열고자 한다면, 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절단장애 아동이 발생하는 곳이 팔레스타인이라는 현실을 다루는 세미나를 요구합니다. 저는 팔레스타인에서 학교, 어린이집, 대학을 겨냥한 직접적 폭격을 논의하는 세미나를 요구합니다. 저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를 다루는 세미나를 요구합니다.“ 유발 샤니 초청은 1월 19일 기자회견에서 박민상 공공운수노조 대학원생노조지부 고려대분회 조합원이 지적했듯, 학술적 중립과 학계의 권위를 명분으로 학살과 파괴를 묵인하고 연장하는 행위이다. 당면한 폭력과 부정의 앞에 침묵하는 학문은 잡담에 불과하다. 가자지구 학자들과 대학 책임자들의 공개서한을 기억하자. “우리는 전 세계의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점령된 팔레스타인에서 계속되는 교육학살에 맞서 저항하자고 호소합니다. 파괴된 팔레스타인의 대학 재건을 위해 협력하자고 호소합니다. 팔레스타인 학술기관을 무력화하고 훼손하며 약화하는 모든 계획을 거부하자고 호소합니다.” 더욱 철저한 학술보이콧 실천으로 한국의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을 확장해 나가자 이번 고려대학교 유발 샤니 교수 초청 규탄 기자회견과 항의행동은 한국 대학과 시온주의 학자의 협력에 저항한 첫 사례다. 학술보이콧 운동에 대한 이스라엘 당국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역설적으로 이 운동이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의미있게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대학과 이스라엘 학계의 협력이 강화되는 지금, 학술보이콧 운동은 대학 내에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확대하는 또 하나의 계기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향한 싸움을 확대하자! [1] 철거에는 한국 기업인 HD현대가 생산한 굴삭기가 사용되었다. [2]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2023년 10월 “하마스의 공격이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집단처벌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밝혔다. 집단처벌은 제4차 제네바 협약에서 금지한 전쟁범죄로, 일부 개인의 행위에 대해 집단 전체를 처벌하는 것을 뜻한다. http://www.snujn.com/news/74022 [3] 학술 보이콧 가이드라인은 이스라엘 ‘정상화’ 프로젝트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양자건 다자건, 팔레스타인인과(또는) 다른 아랍 지역인이 한편에, 이스라엘인이 다른 한편에 참여하는 문화활동, 프로젝트, 행사, 생산물 중 억압자와 피억압자 사이에 대칭성/동등성이 존재한다는 그릇된 전제를 바탕으로 하거나, 식민 지배자와 식민 지배를 받는 자가 소위 ‘갈등’에 같은 책임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들은, 지적으로 부정직하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형태의 ‘정상화’에 해당하며 보이콧되어야 한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번역] 엥겔스, 여성 노동자,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역자: 김요한 글쓴이: 호세피나 마르티네스(Josefina L. Martínez) 친구의 죽음에 여전히 영향을 깊게 받고 있던 1883년,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런던에 있는 마르크스의 집에서 마르크스가 미완성으로 남겨둔 편지, 원고, 메모 더미를 살펴보고 있었다. 자료들 속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미국 인류학자 루이스 헨리 모건의 저작에 관해 남긴 일련의 메모를 발견했다. 모건의 마지막 책 <고대사회>가 바로 몇 해 전 출판된 터였다. 두 친구는 이 주제에 관해 여러 차례 의견을 교환했고, 엥겔스는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 들떴다. 마르크스의 인류학 메모를 기초로, 엥겔스는 친족, 가부장제 가족, 결혼제도, 일부일처제 형태의 변화와 특히 연관된 사회 조직들에 대한 역사유물론적 분석을 전개했다.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이라는 엥겔스의 책이 1884년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출판 이후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에게 필독서가 되었다. 나는 아래에서 이 책의 근본적인 공헌뿐만 아니라 이 책이 야기한 논쟁 몇 가지에 관해서도 지적할 것이다. 그에 앞서 먼저 여성해방에 관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처음으로 내놓은 입장의 전체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엥겔스는 1845년 출판된 <잉글랜드 노동자계급의 처지>란 책에서 처음으로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이중 억압에 관해 기술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영국 노동자계급의 생활, 노동조건, 도시의 과밀상태, 거대한 고난을 직접 보여줬다. 엥겔스는 이것들을 공상적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주의 운동이 출현하게 된 토대로 보았다. 엥겔스는 당시 24세였는데, 엥겔스가 1892년 독일어판 서문에서 설명했듯이 그가 훗날 마르크스와의 협력을 통해 발전시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관점은 그 책에서 아직 시작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잉글랜드 노동자계급의 처지>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훌륭한 시각적 비유로 시작된다. 엥겔스는 템즈강을 거슬러 올라가 런던에 입성할 때 경험하는 충격에 대해 기술한다. 여행자는 도시의 놀라운 발전, 건물의 숫자, 선박들, 번영하는 문명의 모든 상징에 매혹된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 “슬럼(빈민가)”으로 이어지는 좁은 거리를 걸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 런던 사람들이 그들의 도시를 가득 채우는 문명의 온갖 경이를 실현하기 위해 인간 본성의 가장 뛰어난 자질을 희생하도록 강요당해왔다는 것,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더 완전하게 계발하고 다른 이들과 연합해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 안에 가만히 잠들어 있는 백 가지 능력을 억눌러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1] 즉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잔혹한 불평등에 대해 언급하는데, “문명의 온갖 경이”는 사회의 거대한 부문, 즉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짓밟아 성취한 것이다. 엥겔스의 시선은 이제 노동자계급 이웃 속으로 한층 더 파고든다. 더럽고 비좁은 거리, 난방이 되지 않는 집, 식량 부족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이어 엥겔스는 섬유산업 종사자의 다수인 여성 노동자를 특별히 언급한다. 그들은 남성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루에 10~12시간을 일하고 있었지만, 더 적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또 위기가 닥치면 여성 노동자들은 제일 먼저 해고됐다. 여성 노동자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요리, 세탁, 육아 등의 돌봄을 해야만 했다. 비록 엥겔스가 이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 내 노동자계급 여성의 역할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반복해서 특히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현상을 강조했다. 엥겔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 질서는 노동자계급 가족의 해체를 초래하고 있었다. 그 존재 조건을 불가능하게 해서 말이다. “이런 사회질서 때문에 노동자가 가정생활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불편하고 더러워서 밤새 쉬기도 어렵고, 세간도 변변치 않고, 대개 지붕에서 물이 샐 뿐더러 따뜻하지도 않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탁한 공기가 방을 가득 채우는 집에서 안락하게 지내기란 불가능하다. 남편은 온종일 일을 하고, 형편에 따라 부인과 나이 많은 자식들까지 일을 한다. 일하는 장소는 모두 다르다. 그들은 밤과 아침에만 만나고, 모두 음주의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이런 마당에 어떤 가정생활이 가능하겠는가? 그럼에도 노동자는 가족에게서 벗어날 수 없고 가족과 함께 살아야만 한다. 그 결과 부모와 자식 모두의 도덕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가족 간 갈등과 가정 불화가 끊임없이 잇따르게 된다.”[2] 15세~20세 사이의 여성들은 섬유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많은 수의 아동들도 그러했다. 엥겔스는 여성 노동자들이 매우 자주 “출산 후 3~4일 만에 공장으로 돌아가야” 했으며, 휴식 시간에 신생아 수유를 위해 일터에서 집으로 달려갔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성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12시간 혹은 13시간을 일하는 동안 아이들은 친척이나 이웃들이 돌봐주든지, 아니면 맨발로 주변을 헤매고 있었다. 게다가 작업장에서의 성적 학대가 만연했다. 엥겔스에 따르면 “공장에서의 종속관계가 다른 종속관계와 마찬가지로, 심지어 그보다 더한 정도로 제조업자에게 초야권(初夜權, 중세 영주가 신랑보다 먼저 신부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는 권리 – 옮긴이)을 부여한다는 것도 당연히 문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고용주는 피고용인들의 인신과 아리따운 용모를 지배하는 군주이기도 하다.”[3] 이런 이유에서 엥겔스는 “아내의 고용은 완전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가족을 해체시키며, 가족에 기반한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가족의 해체는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했다.[4] 오늘날의 사회는 가족에 기반해 있지만, 동시에 가족을 해체하기도 한다. 가족의 존재가 불가능한 조건을 만들어서 말이다. 이러한 파괴적 모순은 여성 노동자들과 전체 노동자계급이 살아가고 투쟁하는 조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는 못했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생각을 계속 이어나갔다. 두 사람은 이 문제로 돌아와, 여성해방을 향한 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정의, 가부장적 억압의 기원에 대한 분석, 가부장제 가족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내놓는다. <신성 가족>이란 책에서 그들은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푸리에는 “사회의 진보와 시대의 변화는 자유를 향한 여성의 진보라는 미덕을 통해 이루어지며, 사회의 퇴보는 여성의 자유가 줄어든 결과로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수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이전부터 여성 억압의 문제를 다뤄왔다. 어떻게 이를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말이다. 이런 전통에서 가사노동의 사회화, 일부일처제의 종식, 자유로운 사랑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소규모 공산주의 사회의 청사진을 그리면서 개별 주택의 구조를 개조할 필요와 같은 문제들이 검토됐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고안했던 이러한 개요는 꽤 모호했다. 그들은 그 목적에 어떻게 다다를 것인지, 그리고 어떤 사회적 힘으로 달성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미국에서 오언주의 공동체의 경험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엥겔스가 이후 저작에서 지적했듯이, 오언의 글을 통해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미래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씨앗을 뿌렸다.[5]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선구자인 플로라 트리스탄의 작업은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 중간에 있었다. 그의 책 <노동자 연합>(1843년)에서, 그는 노동자계급의 사회·정치적 조직에 대한 제안을 개괄했으며, 처음으로 계급과 젠더의 관계를 다뤘다. 이 책의 세 번째 장은 전적으로 여성들에게 할애되었는데, 그는 여성들을 프랑스 사회의 “마지막 노예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책을 통해 노동자들이 이 문제를 숙고할 것을 요구했고, 여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인간해방의 과업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언급했다.[6]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선언>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거듭 주장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 가족 구성원 모두를 동등하게 착취하고, 많은 여성과 아이들을 작업장 안으로 밀어 넣어 노동자계급의 전통적 가족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들의 “이중 잣대”를 비난했다. 즉 부르주아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부인 공유제”를 도입하기를 원한다고 비난하지만, 여성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면서 (사회적으로 남성에게만 허용되는) 간통이나 성매매를 통해 이를 실제 실현한 것은 부르주아들이었다. <자본>도 수차례에 걸쳐 여성 노동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다. 산업예비군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또한 여성과 아동노동에 대한 잔혹한 착취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그러나 가족 제도와 여성 억압의 원인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분석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엥겔스의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에서 전개됐다. 가족, 여성 노동자, 그리고 공산주의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은 여전히 필수 저작이다. 비록 모건의 연구가 이제 시대에 뒤떨어졌고, 이 책이 역사 시기에 대해 다소 도식적인 관점을 보이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 책은 무엇보다도 여성 억압의 역사적 기원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필수적이다. 여성 억압이 항상 존재했거나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인 것이란 점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엥겔스는 베벨과 같은 다른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저작에 관해서도 논쟁을 벌였다.[7] 엥겔스의 책이 출판된 이후, 베벨은 모건에 대한 엥겔스의 참조를 포괄하며 자신의 저작을 수정했다. 카우츠키는 직전에 이 주제에 관한 저작을 출판했는데, 여성의 종속은 인류사회의 시초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마치 여성 억압이 언제나 존재했던 것처럼 말이다. 엥겔스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 대신 엥겔스는 좀 더 평등하고 심지어 모권(母權)에 기반한 “원시 사회”가 있다고 보았으며, 그 역사를 강조하고자 했다. 엥겔스는 사적 소유의 등장, 사회의 계급 분할, 그리고 여성이 종속적 역할을 하는 가족 제도의 정립 사이의 관계를 입증했다. 결혼과 일부일처제의 성립을 통해, 여성과 아이들은 “남성의 사적 소유물”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 엥겔스는 이렇게 썼다. “남자는 집안에서도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여자는 지위가 하락하여 예속적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남자의 정욕의 노예로, 단순한 산아 도구로 전락하였다. … 아내의 정조, 따라서 자녀들 아버지의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내는 남편의 무조건적 권력 하에 놓인다.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의 권리를 행사한 것에 불과하다.”[8] 게다가 이 책 초판 서문에는 엥겔스가 가족 문제와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고찰한 중심점으로서,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 중요한 구절이 있다. “유물론적 파악에 따르면, 다음의 요인들이 역사를 종국적으로 규정한다. 직접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 그런데 이것 자체는 다시 두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한편으로 그것은 생활 수단들의 생산, 즉 의식주의 대상들과 그것에 필요한 도구들의 생산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 자체의 생산, 즉 종의 번식이다. 특정한 역사 시기와 특정한 지역의 인간들이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회적 제도는 두 종류의 생산에 의해 규정된다. 한편으로 노동의 발전 단계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 가족의 발전 단계에 의해.”[9] 이 구절은 여러 차례 인용됐으며, 다양한 이론적 입장에서 의문이 제기됐다. 엥겔스가 아직 생존해있을 동안, 여성해방을 향한 투쟁을 사회주의 강령의 근본 요소로 방어하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받아들이기 꺼리는 사회민주당 내 보수적인 부문 사이의 논쟁이 있었다. 예를 들어 1886년 10월 고타에서 열린 독일 사회민주당 대회에서 클라라 체트킨은 여성 노동자와 사회주의 문제에 대해 중요한 연설을 했다. 그는 여성해방을 향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과 연결돼 있으며, 따라서 여성들 속에서의 사회주의 선동과 노동조합 내의 여성조직을 늘리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여성 혐오적인 입장으로 유명한 영국 사회주의자 벨포트 백스는 그 연설을 거세게 비판했다.[10] 벨포트 백스는 클라라 체트킨에 맞선 논쟁 과정에서 엥겔스의 권위에 호소하려고 했다. 그 문제에 대한 엥겔스의 관점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칼 마르크스의 막내딸 엘리노어 마르크스(엥겔스와 매우 친밀했다)는 벨포트 백스에게 공개적으로 답변했는데, 이 문제에 관해 엥겔스와 체트킨이 일치해 있다는 것을 재차 단언했다. 엘리노어 마르크스는 가사노동 문제와 여성 노동자가 감당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강조했다. 그는 여러 유럽 국가들의 여성 노동자 수를 지적했다. 영국에서 약 450만 명, 프랑스에서 370만 명, 이탈리아에서 350만 명, 독일에서 500만 명 이상,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350만 명. 이처럼 주요 유럽 국가에서 여성 노동자 수가 2천만 명 이상이며, 많은 경우 이들은 노인, 아동, 또는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 생계비를 버는 사람들이다. 엘리노어 마르크스는 한때 집에서 행해지는 많은 작업들이 현대적 생산 작업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양의 일들이 개별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 모순에 대해 그는 이렇게 썼다. “공장노동과 기타 임금노동 외에도, 여성들은 가사노동 또한 수행해야 한다. 나는 벨포트 백스나 그의 의견을 따르는 누군가가 자본주의 산업화가 여성을 가정주부의 의무였던 여러 중요한 역할들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성들은 더 이상 집에서 양말을 뜨개질하거나, 아마포를 바느질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으며, 다른 가사노동 일거리도 최소한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청소, 세탁, 요리 등 해야 할 가사노동이 남아있다. 자본주의는 아직 가사노동 기계를 발명하지도 못했고, 동시에 실직한 남편이 집과 아이들을 돌보는 수준으로, 그러니까 자신의 아내가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게 “가정적”이 되도록 하지도 못했다. 그렇다, 벨포트 백스 동지. 클라라 체트킨은 엥겔스와 함께 여성은 “가정의 프롤레타리아”라고 말할 완전한 권리가 있다. 클라라 체트킨은 이보다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 여성은 이중의 프롤레타리아라고 말했어야 했다. 여성은 두 종류의 해야 할 일이 있다. 공장에서 생산자로서의 일과 가정에서 주부, 아내, 어머니로서의 일 말이다. 여성 노동자들의 근육과 혈액은 한편으로는 자본가의 즉각적인 이윤을 위해 소모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가의 미래 이윤을 위해 소모된다.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세대를 낳고 키우기 때문이다. 거기서도 일하고, 여기서도 일해라!“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엘리노어 마르크스의 단호한 대답에서 엥겔스가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엘리노어 마르크스와 클라라 체트킨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주의 지도자들도 이후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여성의 사회적‧정치적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데 집중했다. 가정에서 수행되는 가사노동의 이중 부담을 규탄하면서 말이다. 수십 년 후 러시아혁명은 이런 사상을 실제 현실로 만들려 시도했다. 러시아혁명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 조치들을 가능하게 했다. 임신중절과 이혼의 합법화, 혼외자녀에 대한 인정, 여성에 대한 동등한 임금,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위한 조치로서 유아원‧급식소‧어린이집‧세탁소의 설립. 나중에 특히 1930년대에 이 분야에서 나타난 후퇴는 내부 반혁명의 맥락에서 일어났다. 스탈린의 억압적 독재가 공고해지는 동안, 여성을 전통적 가족 내 “가정의 수호자”로 여기는 반동적 이데올로기가 다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후 공산당들이 여성들의 투쟁이 마치 노동자계급 투쟁보다 부차적인 것처럼 계급투쟁과 분리하는 정책을 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애초부터 이 문제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료적 입장과 계급 문제에 대한 경제주의적 해석을 정당화하려는 목표로 이뤄진 마르크스주의의 보수적 수정에서 비롯된 것이다.[11] 가부장제, 생산과 재생산 1960~70년대에 2세대 페미니즘과 함께 엥겔스의 책에 대한 또 다른 논쟁이 등장했다. 한편으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과 케이트 밀럿 같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작가들은, 가족 제도를 당연시하지 않고 여성 억압을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개념화한 것은 엥겔스의 공헌이라고 썼다. 동시에 그들은 역사적 유물론 일반이 일종의 “경제주의”인 것처럼 비판했다. 일례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별 계급투쟁을 기반으로 새로운 역사적 유물론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제안을 하는 데까지 나아갔다.[12] 파이어스톤은 경제주의 버전의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를 섹슈얼리티 문제에 초점을 맞춰 뒤집는다. 그러나 파이어스톤은 사회적 관계의 물질적‧경제적 현상의 중요성을 삭제하거나 줄이면서 관념적 개념으로 나아가는데, 그에 따라 변화의 가능성은 문화 운동으로 국한된다. 이런 바탕 위에서 그 후 몇 년간 급진주의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 생겨난 분리주의 경향들은 사회에서 억압받는 다양한 부문들 사이의 어떠한 공동 투쟁에도 반동적인 방식으로 반대했다. 앞에서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으로부터 인용한 바로 그 구절은 생산 영역을 삶의 재생산 영역으로부터 과도할 정도로 분리하는 계속되는 오류의 근원이라고 다양한 관점으로부터 비판받았다. 엥겔스가 생산 영역을 재생산 영역과 “이원론적으로” 분리했다는 생각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리즈 보걸이 1983년 발간한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 단일 이론을 향하여>에서 내놓았다.[13] 이 비판은 좀 더 최근에는 수잔 퍼거슨과 같은 다양한 작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사회적 재생산 이론으로 정의한 이론을 발전시켰다.[14] 퍼거슨이 보기에 엥겔스의 저작이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근본적 공헌을 했다 하더라도, 엥겔스 저작이 제공한 관점은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공산당들이 여성들의 “특별한” 투쟁은 노동자계급 투쟁과 분리될 수 있다거나 심지어 혁명 이후로 “연기”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관점에서는, 자주 인용되는 엥겔스의 구절은 그런 분리를 상정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그것은 두 영역 사이의 관계를 수립하는데, 아리아네 디아스가 지적하듯이 이것은 “엥겔스의 분석에서 정확히 새로운 것이다. 엥겔스는 여성 억압의 문제를 사회적 생산이라는 이론적 수준으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관심사의 일부로 끌어올렸다.”[15] 그리고 여성 억압을 사회적 현상 및 생산과 재생산과 연관시켜, 여성의 종속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어떤 형태의 생물학적 결정론에서도 이 문제를 해방시킨다. 지난 몇 년간 여러 새로운 기고가 이뤄진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수많은 전체 논쟁을 여기서 다룰 생각은 없다. 이 주제에 관한 자세한 분석을 위해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여러 기사를 참조할 수 있다.[16] 그러나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 아래 재생산이 생산에 종속된 것을 강조하는 것은 투쟁의 전략을 세우는 데 필수적”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17] 가족 안에서 여성들이 수행하는 가사노동에 대한 체계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화가 1960~70년대(다양한 이론적 입장들과 정치적 전략들이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 논쟁을 벌였다) 2세대 페미니즘 논쟁의 맥락 속에서야 나타났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말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전에는 여성 문제를 중요한 주제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이 민주적 권리 획득과 (여성들이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도록) 더 평등한 노동시장에의 참여로 제한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뜻도 아니다. 이는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 여성 억압은 근본적인 주제였고,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향한 투쟁 역시 그러했는데, 여성들은 또한 “가정의 프롤레타리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투쟁들은 자본주의를 끝장낼 사회주의 전략과 연결돼 있었다. 엥겔스는 이런 관점을 1885년에 쓴 편지에서 드러냈다. “남성과 여성의 진정한 평등은 남녀 쌍방에 대한 자본의 착취가 폐지되고 사적인 가사 노동이 공적인 산업으로 전화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18] 엥겔스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남긴 유산과 관련해서, 가부장제 가족과 결혼제도에 대한 엥겔스의 날카로운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우 강력하게 유효함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전통적(가부장제적) 가족의 역할을 무조건 복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적이고 “가족주의”적인 입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특히 그러하다. 엥겔스는 가족 제도가 “자연적”이지도 않고 폭풍 한복판의 “오아시스”도 아니며, 경제적 의존에 기반해 있고 가부장적 위계 관계가 스며들어 있으며 그 안에서 사회적 모순들이 재생산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 가부장적 제도와 남편이 여성을 “소유”한다는 관념에 대한 비판을 중심에 두지 않고서는 젠더에 기반한 폭력에 관해 이야기하기 어렵다. 동시에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자본주의는 노동자 가족의 생활 조건을 저하시키는데(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집과 직업 같은 권리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가족을 이 사회의 기둥 중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그렇게 한다. 이것은 엄청난 모순을 만들어낸다. 엥겔스의 관점에서는 가족과 결혼이 강제적인 경제적 의존의 단위로 존재하기를 그쳤을 때, 그리고 재생산 노동이 사회화되었을 때, 더 나아가 “아동에 대한 돌봄과 교육이 공적인 업무”가 되었을 때만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억압을 극복할 것이었다.[19] 엥겔스가 이렇게 썼을 때 세계의 많은 곳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집에서 자기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그때는 보편적 공교육이나 유치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부르주아 여성들만 여성 노동자의 저임금 노동을 통해 자신의 아이를 돌보는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역사적 차이를 넘어 이것은 여전히 핵심적 의제로 계속되고 있다. 유치원, 아동의 생애 최초 몇 개월간 무상보육을 보장하지 않는 자본가 정부의 정책이 시행된 결과로 교육과 공중 보건에서 일어난 퇴보를 고려하면 말이다. 좀 더 최근에는 팬데믹 기간 아이들의 온라인 교육을 도와야 했던 많은 수의 여성 노동자들이 삼중 부담을 감당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인간 사이의 감정적‧성적 관계를 규제하고 제약을 가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은, 이런 장애물들이 극복된 사회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사적 소유와 인류 대다수에 대한 착취로 지배되는 사회가 강제하는 제약으로부터 개인적 관계가 해방될 수 있는 사회, 따라서 사랑, 섹슈얼리티, 우정이 새로운 기반 위에 재건될 수 있을 사회를 떠올리도록 한다. 2022년 1월 2일 노동해방투쟁연대(준)에 게재되었던 기사를 재발행 [후주] [1] ‘대도시’,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라티오, 64쪽 [2] ‘결과’,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라티오, 179쪽 [3] ‘산업의 단일 부문들: 공장노동자’,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라티오, 200쪽 [4] 같은 책 [5]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중앙기관지 <전진>에 1876~1878년 처음 연재되었다. 책으로는 1880년 폴 라파르그의 프랑스 번역으로 처음 출판되었다. [6] “플로라 트리스탄: 망치와 장미”, 2019년 3월 4일자 <일간좌파(La Izquierda Diario)> 기사 [7] 베벨의 책 <여성과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자 탄압법의 검열 아래 라이프치히에서 비밀리에 인쇄돼 몇 년간 비합법적으로 유통되었다. 이 책은 1895년까지 독일에서 25차례 인쇄됐고, 이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폴란드어, 플랑드르어, 그리스어, 불가리아어, 루마니아어, 헝가리어, 체코어로도 출판됐다. 이 책은 분명히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8] 엥겔스, ‘대우혼 가족’,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옮긴이 - ‘대우혼(對偶婚)’이란 한 혈족의 형제자매와 다른 혈족의 형제자매가 교차하여서 짝을 짓는 혼인 형식을 말한다. [9] 엥겔스, 같은 책 초판 서문 [10] 벨포트 백스는 <여성의 종속(1869)>(존 스튜어트 밀이 쓴 책으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출발점이라고 평가 받는다 – 옮긴이)을 두고 여성운동에 맞선 모든 종류의 주장이 담긴 <남성의 법적 종속(1908)>이라는 자극적 제목의 책을 썼다. 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11] 엘리노어 마르크스, <가정의 프롤레타리아(1896)> [12]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 페미니즘 혁명을 위하여> [13] 리즈 보걸,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 단일 이론을 향하여> [14] 수잔 퍼거슨, <여성과 일 : 페미니즘, 노동, 그리고 사회적 재생산(2019년)> [15] 아리아네 디아스,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16] 안드레아 다트리‧셀레스테 무리쇼, “우리, 프롤레타리아트” / 아리아네 디아스, “사회적 재생산의 정치경제학 I : 노동과 자본” / 파울라 바렐라, “현재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존재하는가? 오늘날 여성운동, 노동자계급,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메모” [17] 호세피아 마르티네스·신티아 루스 부르게뇨,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페미니즘, 계급, 그리고 다양성> [18] ‘엥겔스가 보이텐의 게르트루트 기욤-샤크에게’, <저작 선집 6>, 박종철출판사, 473쪽 [19] 엥겔스, ‘가족’,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지엠부품물류지회 투쟁승리를 위한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 1박2일 연대한마당1월 16일과 17일,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이 주최하여, GM세종물류센터에서 지엠부품물류센터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1박2일 연대한마당이 진행되었다. 다양한 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시민사회단체, 연대시민들이 함께 참여해 해고된 120명의 세종물류센터 노동자들의 원직 복직 쟁취 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GM과 폐업하지 않은 다른 하청업체인 정수유통은, 우진물류가 맡아오던 물량을 몰래 빼돌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꼼수를 쓰고 있다. 이에 지엠부품물류지회와 GM부품물류투쟁승리공대위 공대위는 불법적인 부품 빼돌리기를 저지하는 투쟁을 전개해오고 있다. 문화제가 열릴 예정이던 이날 저녁에도, 정수유통은 은밀하게 기습적인 물량반출을 시도했다. 이에 연대한마당 참여자들은 7시에 예정되어있던 문화제를 미루고 물량반출 저지투쟁을 함께 했고, 2시간 여의 대치 끝에 물량반출 저지에 성공했다. 이후 9시경에 지연된 연대문화제를 시작했다. 한국지엠 노래패 참소리가 문화공연으로 원하청 연대투쟁을 실천했다. 이어 교섭창구단일화 강제로 원청교섭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노조법 시행령 폐기를 위해 서울고용노동청에서 농성투쟁을 이어가던 아사히글라스지회, 자동차판매연대지회, 쿠팡물류센터지회,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이수기업 해고노동자들이 단상에 올라, GM부품물류 투쟁 승리가 곧 원청사용자에 맞선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3권 쟁취투쟁의 전진임을 역설했다. 이어 시민사회단체를 대표해 발언한 김용균재단 김미숙 동지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가 보장되었더라면, 용균이가 그처럼 죽지는 않았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라며 말하며, GM부품물류지회의 투쟁이 故 김용균 노동자를 비롯해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죽음을 막기 위한 투쟁과 연결되어있음을 드러냈다. 노래패 ‘노래로 물들다’의 힘찬 공연에 이어 GM부품물류지회 투쟁을 다룬 영상이 상영되었고, 이어 지엠부품물류지회 노래패가 ‘촛불하나’를 개사해 부르며 청중에게 벅찬 감동을 선사했다. 이어서 단상에 오른 김용태 지엠부품물류지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단결해 싸우겠다는 결의를 드러냈다. 지역 연대를 구축하고 있는 ‘GM부품물류지회 투쟁승리 공대위’ 구성원들이 모두 단상에 올라 연대투쟁을 확대하겠다는 다짐을 전했다. 선지현 공동대책위원장은 “GM부품물류지회, 총연맹, 산별노조, 지역과 시민사회단체, 정당이 각자의 사명을 다하며 싸울 때, 민주노조를 지키고 혁신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이 투쟁을 함께 승리로 이끌어, ‘우리가 이렇게 싸워야겠구나’라는 걸 전국의 노동자와 사회운동에 알릴 것”이라고 밝혔다. 고용승계와 한국지엠 원청 책임을 요구하며 굳건히 세종물류센터를 사수하고 있는 GM부품물류지회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한다. 모든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로, 세종물류센터 노동자 집단해고를 철회시키고, 한국지엠 직접고용을 쟁취하자!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English]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
[한노운사 연재 1회] 1부 폭압과 저항(1970~1987) [시대배경]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연재취지: 한국노동자운동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절멸됐다가 1970년대 이후 부활했다. 현대 한국노동자운동의 역사는 자본주의가 자신을 무덤으로 보낼 노동자계급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는 사실,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이 존재하는 한 노동자운동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러므로 자본주의야말로 노동자운동의 진정한 모태이자 영원한 숙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운동의 역사를 이해할 때만, 우리는 운동의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큰 틀에서 인식할 수 있다. 투쟁의 역사 속에 담긴 수많은 경험과 교훈을 연구할 때만, 우리는 당면한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다. 1970년부터 2025년까지 한국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연재한다. [목차] 1부 폭압과 저항 (1970-1987) [시대배경]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 [1] 민주노조운동의 태동 [2] 1980년의 분출 [3] 민주노조운동의 파괴와 재건 [4] 1987년의 대폭발 1부. 폭압과 저항 (1970-1987) 한국전쟁으로 노동자운동이 절멸당하면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착취·억압에 내몰렸다. 1970년 전태일의 처절한 분투를 밑거름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시작됐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결기는 철옹성만 같던 박정희 유신정권을 자멸로 내몰았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광주민중항쟁을 주도한 노동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전두환 정권의 민주노조운동 말살에 무기력하게 대응했던 노동자들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통해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군사정권을 무릎 꿇리며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은 7·8·9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세상을 뒤흔드는 거인의 모습으로 다시 일어섰다. [시대배경]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 한국전쟁 이전 시기에 한반도 남쪽에서 이루어진 약간의 산업화는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송두리째 파괴됐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모색되기 시작한 산업화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수백 년에 걸쳐 진행된 자본주의 산업화가 수십 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루어졌다. 국가 주도의 고도성장과 수출주도형 공업화를 특징으로 하는 박정희 정권의 성장 전략은 1960년대에 섬유·전자 등 노동집약산업, 1970년대 조선·철강·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된 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 의해 계승되어 재벌 체제를 확립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20세기 후반에 한국은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 산업 자본주의 사회로 빠르게 변모했다. 수출 지향적 자본축적의 과정에서 노동자와 농민은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권과 자본은 노동자들을 극단적인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시켰으며,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저곡가 정책으로 농민들의 삶 또한 벼랑으로 밀어붙였다. 그래서 해마다 30만에서 50만에 이르는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면서 노동자들이 엄청난 속도로 늘어났다. 놀라운 속도로 진행된 자본축적의 비밀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매우 높은 수준의 착취에 있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과 통제였다. 자주적인 노동자조직은 군사정권에 의해 사실상 금지되었고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국가 발전’을 절대화하는 이데올로기는 끔찍한 착취와 억압·통제를 정당화했다. 노동자들은 ‘공돌이·공순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사장과 현장관리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수시로 구타를 일삼을 정도로 폭압적이었다. 정권과 자본이 고도성장을 자축하며 흥겨운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에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병영식 노동통제 체제’가 노동자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1) 1960년대 박정희 군사쿠데타와 경제개발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쿠데타를 정당화하려 했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울산공업지구 기공식을 성대히 거행한 게 그 시작이었다. 산업화를 위한 자금은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조달했다. 미국은 한국을 냉전시대 서방 진영의 우월성을 보여줄 수 있는 모델로 삼고자 했다. 1945년부터 1970년 한국을 원조지원 대상국에서 제외할 때까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원조는 무상원조 44억 달러, 유상원조 4억 달러로 총 48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이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제공한 원조가 68억 달러임을 감안할 때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미국의 원조는 소비재와 식량에 집중되었고, 이는 농업에서 공업으로 노동력을 이전하는 도구이자 저임금을 유지하는 원천이 됐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미국으로부터 더 막대한 자금지원과 혜택을 얻기 위해 베트남전쟁 파병을 단행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 5만여 명을 베트남에 상시 유지하기 위해, 총 32만여 명이 파병됐다. 파병 대가로 미국은 한국에 전쟁준비금으로 10억 달러, 개인별 파병수당으로 2억 4천만 달러를 지급했는데, 그 금액의 대부분이 산업화 자금으로 활용됐다. 이와 별도로 미국은 공공차관으로 5억 2천만 달러, 상업차관으로 2억 4천만 달러를 제공했는데, 각각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중화학공업 설비투자에 집중적으로 투입됐다. 미국은 한국에 시장도 활짝 열어주었다. 1964년 3천 5백만 달러이던 한국의 대미 수출은 1972년 7억 6천만 달러로 성장했다. 외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한일 국교정상화도 추진했다. 1964년 타결된 한일회담에 따라 1965년 한일협정이 조인됐다. 일본은 3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을 지원하고,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골자였다. 식민통치에 대한 아무런 사과와 보상도 얻지 못한 졸속 정상화였다.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은 한국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은 1960년대에 산업구조를 노동집약적 부문에서 자본기술집약적 부문으로 전환하면서, 퇴출되는 잉여자본을 한국으로 수출했다. 1960년대 내내 섬유, 신발, 가구, 전자 등 일본의 노동집약적 산업이 한국으로 대규모로 이전하여 한국 자본주의의 첫 번째 산업군을 형성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일본은 중공업 분야의 일부 잉여자본을 한국으로 이전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수입함으로써 자본축적 과정을 가속화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은 철저히 국가가 주도하는 형태로 전개됐다. 철도, 전력, 수도, 철강, 도로, 해운, 우편, 전화 등 사회간접자본을 행정기관 또는 국유기업을 통해 국가가 제공했다. 정부가 기능공을 직접 양성하고, 기업에 헐값으로 산업단지를 제공했다. 간접세 중심으로 세제를 개편하고, 국내산업 보호를 위한 수입금지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민간자본에게 온갖 특혜를 제공했는데, 특히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끌어들인 외자를 정부 보증 아래 민간자본에게 쏟아 부었다. 1964년 말, 9대 재벌의 총 대출금이 177억 환이었는데. 이는 화폐발행고의 82%, 통화량의 43%에 달했다. 정권의 보호 속에서 민간자본은 빠르게 덩치를 키워 나갔다. 1960년대 수출의 주력 상품은 섬유, 봉제 등의 경공업 부문이었다. 수출 시장에서 한국의 가장 큰 무기는 값싼 노동력이었다. 품질에 비해서 싼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강요했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저곡가를 강요했다. 1969년 한국은 수출목표 7억불을 달성하고, 경제규모에서 세계 30위권에 진입했다. 2) 1970년대 유신체제와 중화학공업화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요동치고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몰려왔다. 1971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유일한 중국 대표’로 유엔에 가입하면서 중화민국(대만)을 축출하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했다.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신생 독립국들이 대거 유엔에 가입하면서 유엔 총회 표결에서 승리한 결과였다. 1972년 2월에는 미국 대통령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 주석 마오쩌둥과 전격 회담을 가졌다. 이후 20여 년 동안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소련을 고립시켜 나간 전략의 출발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중국의 유엔가입 등을 구실로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비상대권을 부여하면서, 노동자들로부터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사실상 박탈했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을 채택하면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을 합의한 뒤, ‘평화통일’ 추진을 명분으로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서 유신 헌법을 제정했다. 이른바 ‘유신체제’의 시작이었다. 대통령선거가 간선제로 변경됐고, 대통령 연임제한이 사라졌으며, 대통령의 초법적 긴급조치를 통해 최소한의 민주적 권리마저 억압됐다. 민방위대, 학도호국단, 새마을운동 같은 국민 동원 체제가 더욱 강화됐다. 한편, 1971년 8월 미국 대통령 닉슨은 악화되는 경제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달러의 금태환 중지를 선언했다. 1973년에는 제1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세계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미국은 경공업 제품 수입을 규제하기 시작했고 한국에게도 차관을 갚으라고 재촉했다. 그동안 외자로 성장해 온 한국 기업들의 휴업, 도산, 은행관리 사태가 속속 발생했다. 경제성장률이 1969년 14.6%에서 1970년 10.0%, 1972년 7.2%로 하락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일련의 경제적 조치들을 취했다. 특히 1972년 8월 3일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기업인들에게 엄청난 특혜를 주는 사채동결 조치를 시행했다. 모든 기업은 사채를 정부에 신고해서 3년 거치 후 5년 분할 상환할 수 있게 됐다. 금리인하, 환율안정화, 산업합리화 정책들도 추진했다. 1973년 1월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공업을 수출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7월에는 포항종합제철을 준공했다. 정권은 중화학공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기업들은 앞 다투어 중화학공업에 뛰어들었다. 전체 제조업에서 중화학공업 비중은 1967년 33.2%에서 1978년 55.2%로 늘어났다. 1960년대 섬유, 봉제, 신발이던 주요 수출산업이 1970년대 조선,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으로 전환됐다. 1977년 한국 경제는 수출 1백억 달러, 국민소득 1천 달러를 달성했다. 그 과정에서 재벌은 전체 경제보다 더 빨리 성장했으며, 큰 그룹일수록 훨씬 더 빨리 성장했다. 현대, 삼성, 럭키, 대우, 쌍용이 5대 재벌을 이뤘고, 정부의 지원 아래 빠르게 대자본으로 성장했다. 3) 1960~70년대 농촌을 떠나온 노동자 1960년 86만 명이던 노동자수는 1975년 367만 명에 이르렀다. 그 시절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농촌을 떠나온 이들로서, 농민의 자식이었다. 1960년대에는 영세한 농민 가족 전체가 고향을 떠난 반면, 1970년대에는 대부분 15~25세의 청년이 홀로 농촌을 떠났다. 1960~70년대 노동자들의 삶은 너무나 참담했다. 엄청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노동자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노동시간은 하루 12~16시간이나 됐으며, 하루 24시간 꼴딱 밤을 새워가며 철야노동을 할 때도 많았다. 임금은 굶어 죽는 걸 겨우 면할 정도였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린 고도성장 밑에서 높아가는 국민소득은 평균치일 뿐, 그 혜택은 모두 자본가들의 차지였다. 1960년대 노동생산성이 연평균 12% 증가했지만,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연평균 2.4%만 상승했다. 노동자는 인간이 아닌 기계로 취급당했다. 1960년대를 거치며 산업재해 사망자 수가 30배로 증가하였고, 1970년대부터는 단연 세계 1위를 기록하면서 세계적인 ‘산재왕국’이 됐다. 자본가들이 돈을 하늘 높이 쌓아갈수록, 노동자들은 피눈물만 늘어나고 있었다. 농촌의 딸, 빈민촌의 아들이 1970년대 노동자의 다수를 이룬다. 이들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노동자라서, 어릴 때부터 노동자의 생활과 정서를 접해 온 지금의 노동자들과는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다르다. 회사는 가부장적인 권위와 강압적인 노무관리로 어린 노동자들을 맘껏 부려먹고, 농민층에서 대거 유입된 나이 어리고 학력 낮은 노동자들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을 받는다. 회사에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회사의 규칙이 곧 법이다. 권리를 주장해야 할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이 있는지조차 모르니 사업주가 노동관계 법률을 제대로 지킬 리도 없다. 회사는 노동자들을 기숙사에 넣어 놓고 외출도 통제하고, 현장에서는 인격을 무시하는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구타하는 일도 예사로 일어난다. 임금을 떼이고 거리를 헤매는 일도 다반사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배우지 못한 것이 죄’라고 자신을 한탄하며 열악한 조건을 감수한다. 하루 14시간 이상을 미싱 대가리에 고개 처박고 일하면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장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 … 노동자라는 동질성이 말이나 행동으로 표출되는 곳은 회사 밖 술집뿐이다. 사회에서 자본의 힘이 안 뻗치는 곳이 어디 있으랴마는 회사라는 자본가의 울타리에만 들어서면 노동자들은 쉽게 분열한다. 회사가 승진, 호봉, 성과금 등을 미끼로 인사고과 점수를 매기며 노동자들의 분열을 조장할 때, 노동자들은 담당 반장이나 계장의 평가와 자신의 시급이 얼마인지에 더 관심을 쏟는다. 같은 또래나 입사 동기와 비교해서 자기가 더 나으면 은근히 으스대고, 그렇지 못하면 자기의 실력을 몰라준다고 푸념이나 늘어놓으면서, 정작 자신들을 반목하게 하는 자본가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못한다.[1] 1976년 한국의 산업재해율은 미국과 영국의 5배였고, 일본의 15배였다. 자본가들은 작업장의 안전조치를 위한 투자를 거의 하지 않았다.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아마 울산의 현대중공업일 것이다. 조선소가 가동된 초기 3년간(1972~75) 2천 건 이상의 산재사고가 발생했으며, 그로 인하여 83명의 조선노동자가 사망했다. 그뿐만 아니라 열악한 노동조건은 노동자들의 건강에 심각한 해를 끼쳤다. 대부분의 공장노동자들은 기준치를 넘는 소음, 먼지, 열, 가스 때문에 많은 직업병을 앓았다. ‘죽음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원진레이온 공장 중에서는 2차 대전 중에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데 사용했다는 이황화탄소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안전시설은 전혀 없었고, 노동자들은 방독면을 쓰고 매월 정규노동시간 2백 시간 외에도 평균 1백 20시간씩 초과 노동을 해야 했다.[2] 4)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와 재벌 체제의 확립 1970년대 말 제2차 오일쇼크로 세계경제가 다시 한 번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한국경제도 큰 타격을 받았다. 연 평균 10% 내외이던 경제성장률이 1980년 -1.7%로 추락했다. 그런 상황에서 재벌들의 중화학공업 중복투자는 대기업들을 대거 위기로 몰아넣는 역할을 했다. 1979년 12·12 쿠데타와 1980년 5·17 쿠데타를 연쇄적으로 단행하여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재벌들의 중화학공업 중복투자를 강압적으로 조정했다. 자동차(현대·대우), 전자(삼성), 중전기(현대·효성), 철강제련(럭키), 발전설비(공기업) 등 각 산업마다 이를 담당할 재벌을 지정해 주면서 나머지 재벌은 손을 떼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7개 부문, 26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강제 인수합병을 통한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각 산업마다 독점적 지위를 가진 재벌의 수익성을 원활하게 보장해 주기 위한 조치였다. 정권은 또한 해외 건설, 해운업, 조선, 합판, 제지, 종합상사 등 광범위한 업종에 걸쳐 부실기업을 정리했다. 부실기업을 인수하는 기업에게는 부채를 탕감하고 세금을 면제해 주는 특혜를 주었다. 국가소유의 은행들을 하나씩 민영화하면서 재벌들도 은행지분을 소유할 수 있게 했다. 이제 재벌은 경공업, 중화학공업, 전자산업과 같은 제조업뿐만 아니라 금융, 건설, 골프장, 호텔 등 모든 분야를 다 가지게 됐다. 재벌은 전두환 정권 시기를 거치며 전체 경제를 지배하는 독점자본으로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총매출에서 12대 재벌의 매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1972년 14.6%에서 1987년 33.4%로 늘어났다. 소수 재벌들이 한국 경제를 좌우하는 재벌 체제가 확립됐다. 5) 1980년대 최대 계급이 된 노동자 1980년대 재벌이 거대한 독점자본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 노동자 수도 엄청나게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사회 구성에서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가 한국 사회에서 확고한 최대 다수 계급으로 올라선 것이다. 1960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농민(65.2%)으로 노동자(11.4%)를 압도했다. 그런데 1980년 노동자(37.2%)의 비중이 농민(33.5%)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도시중간계급(25.8%)도 상당한 비중에 이르렀다. 1985년에 이르면, 노동자(41.5%)의 비중이 농민(23.9%)의 거의 두 배에 이를 정도가 됐다. 도시중간계급(32.0%)도 농민을 능가했다. 노동자 수는 1980년 473만 명에서 1985년 637만 명으로 늘었다. 1980년대에도 노동자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재벌에게는 천국과 같은 세상이었지만,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착취와 억압에 시달렸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임금인상 억제 정책을 강도 높게 폈다. 1984년 공무원 봉급을 동결하는 등 공공부문부터 임금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여 민간기업까지 확장했다. 1980년대 중반 4인 가족 최저생계비로 월 52만 원이 요구되었지만, 대기업 생산직의 통상임금은 월 21만 원에 그치고 있었다. 노동시간은 길고 임금은 적었다. 자재 결품으로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을 제일 신나는 날로 여길 정도였다. 시간으로 임금을 책정하다 보니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할증률과 더불어 임금이 올라갔다. 일을 적당히 하고 건강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은 뒷전으로 밀렸다. 할증률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았다. 휴일 없이 잔업과 특근을 하며 기계처럼 일하다가 과로사하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회사에서 나눠준, 청바지 원단으로 만든 작업복은 두꺼워 몸에 감겼다. 하루 종일 선풍기 하나 없는 공장에서 일하고 나면 속옷과 온몸에 시퍼런 물이 들었다. 쉬는 시간에는 양말과 장화에 고인 땀을 짜냈고, 접촉성 피부염을 달고 살았다. 겨울에는 나무를 집어다 불을 때 공장을 데운 후 일을 시작하곤 했다. 용접용 안경은 유리로 만들어져 무겁고, 외국에서 수입한 것이라 크기도 맞지 않았다. 컨베이어 속도가 빨라 관절 이상, 디스크, 위장병 등에 시달렸다. 늘 과로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에게 식사는 보잘 것 없었다. 식당에 가면 관리자와 노동자가 서로 구분된 공간에서 밥을 먹었다. 노동자 대다수가 미혼 남성인데, 독신자 기숙사는 턱없이 부족했다. 대부분 두세 명이 자취방을 얻어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하며 생활하거나 하숙했다. 노동자들은 공장 주변 술집에서 노동으로 지친 몸을 달랬다. 공장 주변에는 슬레이트 지붕의 조그만 선술집들이 많았다. 노동자들은 막걸리집에 들러 안주 하나 시켜놓고 술을 마신 후 기숙사로 자취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공장 안은 군대 같았다. 정문을 통과할 때부터 경비가 장발을 단속했고, 회사복 착용자만 통과시켰다. 조반장 위계질서가 확실했고, 어쩌다 불량이라도 내면 정강이를 차고, 쥐어박는 건 일상이었다. ‘안전과’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 안전과 수칙을 안 지켜 적발되면 그 기록이 고과에 반영되어 보너스, 시급 차이로 나타났다. 출근할 때 경비반장에게 잡혀도 감점이었다. 불만이 목까지 차 있었지만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술자리에서도 조심스러웠다. 술 마시고 화풀이하거나 대들면 그대로 짐을 싸야 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이 불만을 호소할 조직도 없었다.[3] [1] 안승천, 2002,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13~16쪽. [2] 노동사회교육원, 2008, 『금속노동자를 위한 노동운동사』, 전국금속노동조합, 84~85쪽. [3]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서영호 편.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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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주노동자 뚜안 사망사건 대책활동 및 투쟁경과와 앞으로의 과제들어가는 글 한 이주노동자가 공권력에 의해 살해당했다. ‘살해당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 이주노동자가 죽었고, 또 그 과정에 국가공권력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해당한 이주노동자의 억울한 죽음의 원인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고, 그 죽음의 배경이 된 제도와 정책을 폐기하든가, 최소한 전향적으로 바꾸기 위한 투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사건은 한 사람의 죽음이기도 하지만, 이주노동자 모두의 죽음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글이 끝나지 않은 투쟁, 포기할 수 없는 투쟁에 대한 우리 모두의 다짐으로 읽히길 바란다. 1. 뚜안 사망사건의 발생 경과 지난 10월 28일 베트남 출신 청년 노동자가 공장으로 들이닥친 법무부 출입국단속반을 피해 2층 창고 구석 실외기 뒤에 숨어 있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로 3층에서 추락해서 목숨을 잃었다. 윤석열 정권에서 수립된 ‘불법체류 감축 5개년 계획(23-27)’을 그대로 이어받은 이재명 정권은 25년 4월에 이 계획에 따라 1차 합동단속(4월15일-6월30일, 77일간)을 실시하였고, 지난 9월 30일 ‘APEC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2차 합동단속’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 보도자료를 본 전국의 이주단체와 민주노총은 여러 경로를 통해 성명서를 내고, 합동단속 계획을 철회하고 이주노동자 노동권보장, 미등록노동자의 체류권 보장을 위한 정책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였다. 특히 10월 17일 공식 출범한 ‘사람이 왔다-이주노동자 차별 철폐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10월 28일 전국의 각 출입국사무소 앞에서 일인시위 혹은 다인시위를 진행하였다. 단속추방이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 밖에 없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부상 혹은 사망을 막아보겠다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그러나 관계 당국이 이를 비웃기나 하듯, 대구 성서공단의 한 업체에 단속반이 들이닥쳤고 이 단속 과정에서 한 청년 노동자가 결국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 청년이 단속을 피해 숨어 있으면서 남긴 SNS 메시지가 가슴을 저민다. -15:26 나는 숨어 있다, 무섭다 ㅜㅜ -16:35 무섭다 -17:20 죽겠다. 어떻게 ㅠㅠ- 그동안 법무부 출입국단속반의 단속으로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또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표1: 단속으로 인해 사망, 중상을 당한 미등록 이주민) 물론 이 표는 어떤 식으로든 드러난, 혹은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건·사고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묻혀 버린 이주노동자의 비극은 이 표를 통해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2. 뚜안 사망사건의 발생원인 ① 윤석열정부의 불법체류 감축 5개년 계획 2022년 연말 법무부는 ‘불법체류 감축 5개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 계획에 따라 단속 할당량에 따른 목표치를 세우고 단속계획을 수립했다. 또한 보도자료를 통해 상/하반기로 나누어 연 2차례 합동단속을 실시하고 2027년까지 약 43만 명이 넘는 미등록노동자(2023년 9월 기준)를 약 20만 명까지 줄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연도 목표 2023 58,400 (단속+자진출국) 2024 70,760 (단속+자진출국) 2025 86,645 (단속+자진출국) (표2) 2022년 법무부가 수립한 단속 목표치 윤석열 정부와 당시 법무부장관이던 한동훈에 의해 세워진 이 잔인한 계획은 이재명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윤석열 정부는 2023년 12월 ‘법무부와 그 소속기관 직제 시행규칙 일부 개정령안 입법예고’를 통해 출입국단속반 인원을 증원하고 그 증원된 인원만큼 단속 실적을 올릴 것을 강요하였다. 그런데 이재명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이 실적위주의 폭력적 단속은 그대로 계속됐다. ‘그동안 단속 과정에서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다치거나 죽는 비극이 반복되었으므로 불가피하게 단속을 하더라도 증원된 인원은 이주노동자들의 안전을 담당하는 안전요원으로 배치를 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은 하지 않고, <표2>에서 보이듯이 오히려 더 숫자채우기가 강화되어 왔다. ② APEC의 성공적 개최라는 허황한 명분 앞에서 잠깐 언급되었지만 2025년 9월 30일 법무부는 ‘2025년 2차 불법체류 외국인 정부합동단속 실시’라는 보도자료를 발표한다. 9월 29일부터 12월 5일까지 66일간 정부 5개부처(법무부, 경찰청, 해양경찰청, 고용노동부, 국토노동부)가 합동으로 미등록이주노동자를 단속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 합동단속은 그 명분이 ‘엄정한 체류질서 확립을 통한 ’APEC 2025 KOREA’의 성공적 개최‘였다. 도대체 미등록노동자들이 APEC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어서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APEC의 성공적 개최에 목을 매는 관료들의 전형적 탁상행정이 이 비극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이 우리를 분노하게 한다. 이 보도자료 중의 한 문장은 참으로 궁색하다. “…이번 정부합동단속 기간에는 ‘APEC 2025 KOREA’ 성공적인 개최를 지원하기 위해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집중단속을 실시하는 한편,…” 그래서 바로 다음 날인 10월 1일 민주노총 경주지부, 금속노조 경주지부, 경주이주노동자센터는 ‘이주노동자 정책의 전면적인 전환을 요구하며 우리 지역 이주노동자들의 권리침해를 막기 위해 공동 대응할 것이다’라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③ 이주노동자에게 노예의 삶을 강요하는 복잡다단한 비자 제도 비자 제도는 근대 국민국가가 고착화된 이후 국민/비국민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정규직/비정규직, 정주 노동자/이주노동자, 등록노동자/미등록노동자, 헤아릴 수 없이 우리를 갈라치기하고 이를 통해 울타리 안의 성원을 관리하고 이윤을 착취하는 자본과 정권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국민/비국민의 갈라치기를 강요한다. 국민/비국민의 갈라치기가 보편적 인식으로 자리를 잡아야만 그 모든 갈라치기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비자 종류는 세분하면 260개가 넘고, 취업과 관련한 비자 종류도 대분류만 무려 34가지이다. 이렇게 복잡한 비자는 이주노동자 혹은 이주민의 신분을 규정한다. 어떤 비자를 발급받는가에 따라 그의 삶이 결정된다. 비자 제도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이주노동자는 자칫 잘못하는 순간 비자를 잃게 되고 미등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주노동자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사업장 변경의 자유’도 결국 사업장을 변경하는 문제와 비자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자별로 업종별 취업이 제한되거나 금지되기도 하고 지역별 이동이 제한되기도 한다. 결국 이주노동자는 부여받은 비자의 종류에 따라 노예의 삶을 살든가 아니면 강제추방되든가의 선택만이 강요될 뿐이다. 유학생이었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던 뚜안님이 발급받은 비자는 D-10 비자인데 이는 구직활동비자라고 불린다. D-10 비자는 제조업종(구체적으로 소위 3D업종으로 불리는 뿌리산업이나 건설업 등) 취업이 원칙적으로 제한된다. 대학을 졸업했으니, 전문인력이므로 단순한 업무를 반복하는 업종에 취직해서는 안 된다는 비현실적 이유다. 이런저런 일자리를 찾다가 결국 인력파견업체를 통해 성서공단에서 일했던 그는, 취업이 제한된 업종에서 일하다가 단속에 적발되면 이후 체류에 문제가 생기거나 추방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단속을 피해 숨을 수밖에 없었다. ④ 지방대학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유학생 유치계획 최근 유학생이 급증하고 있지만 유학생을 재정확충의 수단으로 여기고 그들의 졸업 이후의 삶이나 유학생활 등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는 지방대학의 현실도 문제이다. 유학생들을 옥죄는 비자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전혀 대책을 세우고 있지 않은 것은 물론, 졸업 이후에 한국에서 이후의 삶을 계획하는 학생들에게 안정적 체류가 가능하도록 하는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할 말은 많지만, 이 사건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간략히 언급만 하고 이하 줄인다. 3. 대책활동 및 투쟁 경과 10월 28일 비극적인 사고 소식을 접하고 대구, 경북지역 시민 사회 노동 이주단체들이 함께 모였다. 더 이상의 비극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마음들이 모여 ‘‘이주노동자 뚜안 사망사건 진상규명과 강제 단속 중단을 위한 대구/경북 대책위원회(이하 뚜안 사망사건 대책위)’를 결성하였고 바로 대구 출입국외국인사무소 앞에서 24시간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11월 16일에는 금속노조 성서공단 지역지회 조합원들과 많은 베트남 이주민, 유가족이 함께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행진이 대구 성서공단에서 있었고, 11월 20일에는 대구 시내에서 많은 시민들과 함께하는 ‘이재명정부 강제단속 규탄, 이주노동자 故 뚜안 대구추모제’를 열었다. 철야농성을 전후하여 대구 출입국 관계자들을 두 차례 면담했으나 ‘법적 절차를 지켰고, 뚜안님의 사망은 단속이 종료된 이후에 벌어진 일이므로 책임이 없다’는 무책임인 답변만 되풀이했다. 이에 ‘뚜안 사망사건 대책위’는 투쟁의 수위를 끌어올려 단속추방 일변도의 현 정부 정책의 기조에 변곡점을 만들어 내고, 체류권 보장 정책으로의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12월 9일부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노숙 농성을 시작하였다. 대통령집무실 앞 노숙 농성이 시작되며 뚜안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단속추방 정책에 분노하는 많은 이들이 노숙 농성에 함께 결합하고 이 투쟁에 동참하였다. 매일 중식 선전전에 각 단체의 활동가들과 연대시민, 이주노조 조합원들이 함께하여 이 투쟁을 알렸고, 종교계를 중심으로 서울 대통령집무실 앞과 대구시내, 부산출입국 앞에서 성탄절을 전후한 예배와 미사 등을 열었다. 정치권에서도 이 사건의 대책마련을 위해 나서기도 했다.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로 옮기고 난 뒤에는 청와대 앞에서 유가족이 함께하는 108배를 시작했다. 유가족이 함께하는 투쟁은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이 투쟁을 증폭시키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한편 지난 10월17일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한 ‘사람이 왔다-이주노동자 차별 철폐 네트워크’는 이 사건을 알리고 전국적인 항의행동을 조직하여 매주 수요일 전국 출입국사무소 앞에서 일인시위를 중심으로 한 항의행동을 이어가도록 하는 한편, 서울 출입국 세종로 출장소 앞에서 매주 추모문화제를 열면서 뚜안의 죽음이 묻히지 않고 단속추방 중단과 미등록 이주민 체류권 보장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하는 투쟁을 이어갔다. 유가족과 이주노동자들이 함께 하는 11월 30일 오체투지,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을 기념하여 열린 12월 14일 전국이주노동자대회 등을 통해 ‘정부의 사과, 책임자처벌, 진상규명, 단속추방중단, 미등록 이주노동자 체류권 보장’ 등을 요구하였다. 12월 23일에도 ‘불법사람은 없다. 더 이상 죽이지마라. 뚜안님 추모 및 강제 단속 중단 투쟁문화제’가 열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100명 남짓 동지들이 함께 모여 투쟁의 결의를 이어 나갔다. 이날의 투쟁 발언은 다 가슴을 저미는 내용이었지만 류금신동지가 공연을 하면서 ‘지금 내리는 비는 뚜안님과 고통당한 혹은 살해당한 이주노동자들이 흘리는 눈물이다. 함께 비라도 맞자’라고 호소하면서 분위기를 숙연하게 했다. 이날 오전에는 금속노조 회의실에서 ‘뚜안 사망사건 진상조사 중간 보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10월28일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점 등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특히 단속종료 시점과 뚜안님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 법무부가 사건을 은폐하려는 다양한 정황 등에 대한 지적이 나왔다. 무엇보다 이날 대구의 성서공단에서 일하거나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나와 증언 형식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해 고발하는 발언을 했다. 그중 한 명, 미등록 신분의 이주노동자가 한 발언은 보고회 참석자 모두를 울게 했다. 그 발언의 일부를 옮긴다. “우리 미등록이지만 버리지 않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뚜안 소식 들으니까 뚜안 아니고, 나도 언제든 이런 일 당할 수 있구나 해서 불안합니다. 어디 나가지도 못합니다. 어디 나가면 뒤를 보게 되고 경찰 등 다른 친구들이 너 동네 경찰 있다고 하면 만약 나가고 싶어도 숨어서 다시 집에 왔습니다. 지금 한국 정부에는 초등학교 들어가면 부모님도 합법화된다는 소식은 있는데, 저도 2년 더 기다려 보자, 애도 합법화되고 부모님도 합법화된다고 생각했는데 뚜안 생각해서 나도 2년 동안 버틸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제 한국에서 기대 없이 살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대한 미운 마음 가지고 저는 베트남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단순히 미등록인데 범죄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뚜안도 출입국관리사무소가 뚜안 꼭 잡아야 한다고 하는 거 들어보니까 뚜안이 위험한 범죄자도 아닌데. 자기 생활 좀 나아지고 그리고 부모님도, 남동생도 도와주려고 자기 비자 때문에 숨겨야 했었지만 범죄자가 아닌데. 한국에 범죄자가 많아요. 그런데 그들은 안 잡고 우리 미등록만 잡습니까. 그건 너무 밉습니다. 밉고, 한국 밉고 그리고 예전에 너무 사랑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랑하지 않고 미운 마음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동지들 우리 미등록자 버리고 관심 끄면 안됩니다. 감사합니다.” 4. 대책활동 및 투쟁의 성과와 한계 마침내 2025년의 마지막 날 법무부 이민조사과장과 대구 출입국 외국인사무소 소장이 뚜안의 유족 앞에 고개를 숙였다. 법무부의 공식적인 사과 방침을 전한 이들은 뚜안님 부모님들의 안정적 체류와 이후 대책활동을 위한 체류비자 발급을 약속했고, 대책위 활동가들에게 단속을 중단할 수는 없지만 이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안전을 우선시한 단속활동이 되도록 전면적인 검토를 하겠다고 했다. 또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단속 일변도의 정책을 점검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겠다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대책위 활동가들은 이주민 정책의 전반적인 문제, 특히 미등록노동자의 단속과 관련하여 대화 테이블을 구성해 보자고 제안했지만, 검토하겠다는 답변만 듣고 그 자리를 일어서야 했다. 이후 남은 숙제이기도 하다. 이번 투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번 투쟁을 사실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뚜안님의 아버지 부반숭 동지가 당국의 사과를 받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다. ‘저희 가족은 기관의 사과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사과가 저희 가족만을 위한 것으로 남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난 65일 동안 뚜안과 우리 가족을 지켜보며 함께 아파하고 연대해 주신 모든 분들께서도 이 사과를 함께 들을 수 있기를, 그리고 이를 통해 관계기관의 책임과 성찰 그리고 변화의 의지를 사회 전체가 함께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 뿐인 사과가 되지 않도록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1월 2일에는 용산 대통령실 앞 농성단을 해산했고, 1월 9일에는 대구출입국 앞 농성장도 해단했다. 1월 9일 해단식에는 200여 명의 동지들이 함께 모였고 뚜안님 유가족들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이후 과제로 남겨진 투쟁을 함께 이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이번 투쟁이 가지고 있는 성과와 한계는 농성단을 해단하면서 발표한 투쟁결의문과 성명서로 대신한다. [투쟁결의문] 불법인 사람은 없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故 뚜안 사망 진상규명과 강제단속 중단 촉구 농성 해단식 투쟁결의문 농성은 마무리되지만, 투쟁은 계속된다. 지난 10월 28일 베트남 청년노동자 故뚜안님이 대구 성서공단 내 제조업체에서 4시간 가까이 이어진 토끼몰이식 정부 합동단속을 피하다 추락 사망한 이래 대구경북대책위와 사람이왔다_이주노동자차별철폐네트워크를 비롯한 전국의 이주, 노동, 인권, 시민사회 운동 진영은 이 사건이 △윤석열정부의 단속기조를 이은 이재명정부의 합동단속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고 △APEC을 빌미로 미등록을 희생양 삼은 반인권적 행태이자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강력한 억압 정책이며 △법무부의 인권보호 준칙조차 지키지 않은 야만적 단속으로 규정하여 강력히 규탄하였고, 故 뚜안님 사망에 대한 정부 사과,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미등록 강제단속 중단을 요구하며 쉼 없이 싸워 왔다. 스물다섯 해 동안 애지중지 키워 온 딸을 잃은 유가족도 원통한 마음을 안고 투쟁에 앞장섰다. 우리는 사건 직후부터 규탄 성명 발표, 대통령실 앞 이주인권단체 규탄 기자회견, 11월 13일부터 진행 중인 대구출입국 앞 천막농성과 매주 벌어진 전국적인 출입국사무소 항의행동, 네 차례 촛불 추모행진과 문화제, 오체투지 행진, 12월 9일부터 시작된 대통령실 앞 노숙농성, 국회 토론회, 전국이주노동자대회,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전국 동시다발 공동행동, 진상조사 중간 보고회, 종교계 기도회, 청와대 앞 릴레이 108배 등을 통해서 사안을 전 사회적으로 알리고 투쟁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 각계각층에 공감대가 확대되었고 뚜안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이는 뚜안님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정의를 바라는 이들의 염원과 지속적인 투쟁으로 가능했으며 이 사회에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인권 문제를 다시금 분명한 의제로 제기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부름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출입국은 단속반이 떠나고 난 뒤의 일이므로 개인 과실이라며, 사과와 진상규명을 외면했다. 최소한의 자료 요구에도 법무부는 응하지 않고 국회의원실 등의 요구에만 찔끔찔끔 내놓았을 뿐이다. 이에 대책위와 이주인권, 시민사회는 투쟁을 진행하면서, 대통령실 경청수석실, 국회의원실, 노동부 등을 통해 다각적인 경로로 요구를 제기하였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법무부 측은 유가족과 농성단을 만나 사과를 표명했고, 유가족 체류 보장, 현재와 같은 미등록 이주민 강제단속 정책 일부 변경 및 논의 테이블 구성 검토, 자료제공 검토 등을 밝혔다. 이는 우리 투쟁의 성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요구의 온전한 수용은 아니며 명시적 책임을 인정한 사과는 아니었다. 뚜안 아버님도 사과를 받아들이면서도 “사과는 받았지만, 죽은 딸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단속하고 구금하는 제도와 절차 전반에 대해 반드시 개선이 이루어져, 더 이상 ‘제2의 뚜안’이 발생하지 않기를, 그리고 우리 가족처럼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는 부모가 다시는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아버님의 말처럼 다시는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한 과제를 안고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강제단속과 추방 중심 정책이 지난 수십 년간 이어져 오면서 수십 명의 사망자, 수백 수천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뚜안 아버님 말대로, 정부의 사과가 뚜안 가족만을 위한 것으로 남아서는 안되며 모든 피해 이주노동자와 가족들에게 전해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서울 대통령실 앞에서 진행된 故뚜안 사망 진상규명과 강제단속 촉구 농성투쟁은 일단락하지만 앞으로 더욱 힘을 모으고 연대를 넓히고 사회적 의제화하여 남은 진상규명과 강제단속 중단의 과제를 현실화하고자 한다.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근기법·파견법·산안법·중처법에 대한 고소고발을 통한 노동부 조사, 故뚜안 산재승인을 위한 과정들이 산적해 있고, 윤석열 정권에서 시작한 ‘불법체류 50% 감축 5개년 계획’중단 투쟁, 미등록 이주민에 대한 안정적 체류권 보장을 위한 투쟁 또한 계속되어야 한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다시 한번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며 투쟁의 결의를 밝히는 바이다. - 이재명 정부는 故뚜안 사망사건 제대로 진상규명 실시하라! - 윤석열정부의 불법체류 감축 5개년 계획 폐기하라! - 강제단속 중단하고 미등록 이주민 체류권 보장 정책 수립하라! - 노동부는 사업주, 파견사업주 철저하게 조사하고 처벌하라! - 투쟁은 계속된다! 단속 중단과 미등록 이주민 권리보장 연대투쟁 확대하자! 2026년 1월 2일 故 뚜안 사망 진상규명과 강제단속 중단 촉구 농성 해단식 참가자 일동 5. 앞으로의 과제 ① 철저한 진상규명 법무부 당국자가 사과를 하러 온 자리에서 ‘단속은 계속할 수밖에 없다’면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대구출입국 앞에서 열린 금요추모 집회에 참석하여 발언했던 민주노총 부위원장 동지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언급했다. 미등록이주노동자 단속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다치고 죽는 이주노동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번 뚜안님의 죽음이 더욱 그렇다. 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의 진상을 밝혀야만 사람을 죽이는 ‘미필적 고의’인 단속행위를 중단시킬 수 있다. ② 단속추방 중단 최근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있는 미등록노동자를 찾아가는 모임인 ‘마중’의 활동을 그만두고 새로운 오솔길을 모색해 보겠다고 소회를 밝힌 한 활동가가 그렇게 말했다. ‘보호소가 있는 한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단속될 수밖에 없다고....’ 보호소는 단속된 미등록이주노동자를 구금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지만 현실은 보호소가 있기 때문에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단속된다는 이 역설은 역설이긴 하지만 우리의 가슴을 친다. 미등록이주노동자를 양산하는 제도의 불법성이 먼저다. 불법적인 제도를 만들어서, 복잡다단한 비자제도를 설계해서 이주노동자를 벼랑으로 내몰고 그 벼랑에서 떨어진 이주노동자를 오히려 불법으로 낙인찍고 보호란 명분으로 보호소에 구금하거나 아예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여 격리시킨다. 불법적인 제도 안에는 그 제도의 불법적 폭력을 감수하는 노예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표1>에서 보여준 이주노동자의 현실이 그렇다. 우선은 이 정부가 윤석열 정부의 ‘불법체류 감축 5개년 계획’을 포기하거나 전면 수정하도록 해야 한다. ③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안정적 체류권 확보 복잡다단한 비자제도를 단순화하게 만드는 투쟁과 아울러 이 비자제도의 희생양인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공동체의 정당한 시민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묵인한 비자제도로 인해 불법으로 내몰린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회복은 우리의 남은 과제이다. ④ 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동자에게 국경은 없다.’라는 외침을 다시 가슴에 담았으면 한다. 이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고 폭력적인 제도와 정책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자고 간절히 호소한다. 35명의 비극(표1)이 반복된 이후에 결국 또 한 명의 이주노동자가 죽었다. 이제 우리가 이 비극을 끝내야 한다. 故 뚜안님의 명복을 빈다. -
[번역] 이란의 혁명: 노동자만이 하메네이와 팔라비에게 맞서 흐름을 바꿀 수 있다번역: 레비 2026년 1월 12일 Left Voice에 게재된 기사를 번역 이란 봉기가 확산하는 가운데 미국이 개입 위협을 고조시키자, 레자 팔라비는 트럼프와 이스라엘의 지지를 등에 업고 현 운동의 방향을 틀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메네이(Khamenei) 정권과 친제국주의적인 샤(Shah)왕정 복고 시도 모두에 맞서, 오직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대중운동만이 진보적인 길을 열 수 있다. 한 테헤란 주민은 르몽드(Le Monde)에 이렇게 전했다. "실로 장관이었습니다. 엄청난 인파가 모였고, 그들의 용기는 귀감이 될 만했습니다. 저는 밤 8시부터 자정까지 테헤란(Tehran) 도심에서 북부까지 행진했으며 보안군은 최루탄과 펠렛건으로 공격했습니다. 대다수의 구호는 레자 팔라비를 지지하는 문구와 '독재자에게 죽음을'이었습니다." 이 증언은 현 국면의 거대한 규모와 그 안에 내재한 모순을 동시에 보여준다. 역사적인 규모의 민중 운동이 열어낸 기회와, 그 운동이 마주한 심각한 위협 말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레자 팔라비를 지지하는 공세적인 캠페인을 통해 운동의 일부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한편, 제국주의에 완전히 종속된 정권을 세우기 위해 이란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개입까지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치명적인 위협은 한 가지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바로 하메네이에 대한 반란이 과연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하는 하메네이의 공포 정치 목요일 밤을 지나 금요일로 넘어가면서, 이슬람 공화국의 반동 정권에 맞선 시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수만, 어쩌면 수십만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이란의 양대 도시인 테헤란과 마슈하드(Mashhad)에서 정권의 민병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소셜 미디어에 공유되는 영상들은 질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시위대는 더 이상 경찰의 돌격에 흩어지지 않고 억압에 직접적으로 맞서고 있다. 여러 영상에서는 시위대가 자신들의 진군을 가로막는 보안군과 경찰 바리케이드를 향해 차량으로 돌진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이러한 격화는 이란 쿠르디스탄의 코말라당(Komala in Iranian Kurdistan)을 비롯한 쿠르드계 조직들이 호소한 파업 이후에 나타났다. 이는 쿠르드 지역의 본격적인 저항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마흐사 아미니 피살 이후의 봉기를 재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일람(Ilam) 주는 매우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테헤란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는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으며, 상인들, 특히 바자르(Bazaar, 상점가)의 상인들이 시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인권운동가통신(HRANA)에 따르면 12월 28일 이후 31개 주 111개 도시에서 약 350건의 시위가 기록되었다. 학생들 또한 대학 내에서 시위를 조직하며 청년 대중운동과 노동자계급의 도시 봉기를 연결하는 등, 더욱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시위 11일 차인 1월 7일 수요일에는 10개 대학이 동참했으며, 12월 말부터는 총 35개 이상의 대학이 시위에 참여했다. 1월 9일 금요일 연설에서 하메네이는 시위대를 "외세에 복무하는 용병"이라 비난하며 봉기의 정당성을 깎아내리려는 익숙한 수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은 전술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일 수 있다. 지금까지는 바시즈(Basij) 민병대가 시위 진압의 주력이었지만, 이러한 규정은 최고지도자 직속의 '군대 안의 군대'인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소속 공격부대의 투입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IRGC는 2022년 봉기 당시 제한적으로 투입된 이후, 이미 이란 쿠르디스탄 지역에 배치된 상태다. 전국적인 인터넷 차단은 대규모 탄압이 임박했음을 암시한다. 가장 잔혹했던 사건 중 하나는 다친 시위대가 치료받고 있던 일람의 한 병원을 급습한 일이다. 또한 테헤란과 동맹 관계인 이라크의 시아파(Shiite) 민병대가 개입했다는 보고도 잇따른다. 보안군이 실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현재까지 200명 이상이 사망했다. 흔들리는 정권 이번 시위의 새로운 물결은 석유 노동자 파업이 두드러졌던 2019년 운동과 2022년 봉기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는 하메네이 정권의 취약성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란은 이스라엘 및 미국과의 대치를 거치며 약화되었다. 지역 내 동맹 간 결속은 큰 타격을 입었고, 경제 제재는 이미 허약한 경제를 초토화했으며, 내부 분열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다. 곧 닥쳐올 후계자 문제는 하메네이의 40년 통치 자체에 대한 광범위한 심판으로 번지고 있다. IRGC가 연이어 패배하면서 정규군의 입지가 강화되었고, 미국과의 타협을 주장하는 "개혁파"는 세력을 얻고 있다. 분석가들은 하산 로하니(Hassan Rouhani)와 하산 호메이니(Hassan Khomeini) 같은 인물들을 잠재적인 경쟁자로 꼽는다. 정치 분석가 캄란 보카리(Kamran Bokhari)가 지적했듯이, 정권은 전쟁 이후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사회적 통제 완화나 미국과의 외교 재개 같은 '통제된 개혁'을 모색하는 한편, 제국주의 자본에 대한 부분적인 개방을 추진해 왔다. 이러한 경향은 봉기가 일어나기 불과 며칠 전,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Mohammad Javad Zarif)가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기고한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란 민간 부문 발전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핵 합의, 안보 협정, 경제 협력을 제안했다. 현상 유지든 개혁이든, 지배층 내부의 역학 관계는 대중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무력에 의존하는 통치, 즉 보나파르티즘적 귀결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제국주의 개입의 위협 외부의 압박은 빠르게 거세지고 있다. 베네수엘라를 공격하고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납치한 지 불과 며칠 만에, 미 제국주의는 이란에 대한 개입을 공공연하게 위협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란이 시위대를 탄압할 경우 미국이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정권의 수뇌부를 제거한 뒤 "개혁파"와 협상에 나선다는 시나리오는 이제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스라엘 지도부 역시 베네수엘라를 경고의 사례로 명시하며 비슷한 위협을 가했다. 이스라엘은 이미 공격 계획을 승인하고 군에 최고 경계 태세를 발령했다. 이와 동시에 제국주의는 레자 팔라비를 다시 무대 위로 소환했다. 네타냐후와 트럼프의 오랜 동맹이자 서방 및 이스라엘 언론이 적극적으로 띄우고 있는 샤의 후계자는, 이란 내 지지 기반이 과장되었음에도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의 복귀는 엄청난 위험을 내포한다. 제국주의 열강의 지지를 받는 팔라비는, 1979년 성직자 계급이 혁명을 가로채기 전 노동자 평의회가 타도했던 바로 그 독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의 복귀는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완전한 종속, 이란 자원의 약탈, 그리고 노동자 착취의 심화를 의미할 뿐이다. 그가 어떤 미사여구를 사용하든, 팔라비가 제공하는 것은 이란 민중들이 이미 겪어 본 낡은 독재의 잔재에 불과하다. 제국주의로부터 독립된 노동자계급의 중심 역할 이번 봉기에는 리알화 붕괴로 급진화된 상인과 바자르 소유주, 그리고 마흐사 아미니 봉기를 겪으며 성장한 청년 세대 등 새로운 계층이 합류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힘은 여전히 노동자계급에게 있다. 오늘날 노동계의 참여는 아직 고르지 않지만, 사우스 파르스(South Pars) 가스 시설의 파업, 자그로스(Zagros)와 로레스탄(Lorestan) 지역 정비 노동자들의 투쟁, 교사, 트럭 운전사 및 석유 노동자들의 연대 성명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중요성은 결코 작지 않다. 만약 이란 노동자계급이 하메네이와 제국주의 모두에 맞서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나선다면, 팔라비에 의한 봉기 가로채기를 막고 리비아식 참사를 피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정치 총파업은 이제 오직 폭력적인 탄압으로만 연명하는 정권을 무너뜨리고, 계급의 힘에 뿌리내린 진보적 결실의 가능성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승리는 중동 전역에 큰 파장을 일으켜 계급투쟁을 재점화하고 팔레스타인 투쟁을 강화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위험은 실로 막대하지만, 가능성 또한 그에 못지않게 크다. 단, 그 가능성은 하메네이에 맞선 투쟁이 제국주의로부터, 그리고 1979년의 패배를 지우고 꼭두각시 왕정을 복원하려는 자들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전개될 때만 현실이 될 수 있다. -
[기고] 캠퍼스는 탈정치의 꿈을 꾸는가2025년 3월 11일 <윤석열 퇴진을 위한 충북대학교 학생공동행동> 결의대회에 난입한 극우세력 사진: 뉴시스 지금의 캠퍼스는 확실히 병들었다. 발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점점 낮아지는 학생회와 자치기구 선거 투표율, 소극적이 되어가는 학생회 활동, ‘외부인’과 ‘학생’을 구별하며 고립을 자처하고(실제로 완전한 구별이 가능한지도 의문스럽다), 포스터와 대자보를 붙일 수 있는 게시판을 철거하며 흘러간 긴 시간 동안, “탈정치”라는 병이 캠퍼스를 좀먹어 왔다.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주제를 언급하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입막음 당하는 것이 최근 캠퍼스의 유행이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적 세력과 무관하다”는 문구가 없으면 인쇄하거나 게시할 수도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윤석열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참여한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폭력적인 대응을 주도한 학생이 차기 총학생회장으로 당선하기도 했다. 캠퍼스는 완전히 탈정치할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까지 다양한 캠퍼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흐름을 기반으로 말하자면, 전혀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른 모든 공간과 마찬가지로, 캠퍼스는 좌도 우도 아닐 수는 없다는 사실, 정치적 진공상태일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캠퍼스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입장, 캠퍼스는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입장은 캠퍼스 내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 바로 학내에서 점잖게는 ‘좌파’, 혹은 경멸 섞인 호칭으로 ‘빨갱이’라고 불리는 진보적 학생 진영을 억압하는 도구다. 학생자치기구 탄압, 백래시의 끝과 시작 ‘탈정치’의 이름으로 휘둘러진 탄압은 제일 먼저 학생자치기구로 향했다. 정치적인 색을 띠는 학생자치기구들을 폐지하거나 통폐합하는 등의 논의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고려대학교에서는 여학생위원회와 소수자인권위원회가 통폐합되었고, 성균관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정정헌>도 중앙 동아리 재등록이 부결되어 정식 학내 단체에서 제외되었다. 경희대학교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는 이준석 강연 초청 비판 대자보를 게시했다는 이유로 폐지 논의를 거쳐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포항공과대학교 총여학생회가 국내 마지막 총여학생회로서 자취를 감추었다. 기존 기구가 총여학생회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 폐지의 근거였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생활자치도서관은 12.3 비상계엄 관련 성명문에서 윤석열을 ‘내란 수괴’라고 표현했다는 이유로 특별기구로서 재인준을 받지 못해 지원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 지지 금지, 정치적 사안 언급에 대한 암묵적 금지가 탈정치화 중인 캠퍼스의 주된 경향이라면, 특정 정치인 초청 강연은 허용되고, 이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특정 대통령 후보들에게만 강연 요청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기준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비상계엄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하는 것은 왜 정치적이고, 탄핵에 반대하는 것은 왜 정치적이지 않은가? 성균관대 여성주의 교지를 중앙 동아리로 재등록할 수 없게 저지하는 이유가 ‘정치적이기 때문’이고, 전체 회원이 36명이나 되며 매년 교지를 발간하고 세미나를 개최하는 단체의 활동과 활동 인원이 부족하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캠퍼스 내 소수자, 여성, 장애인 등의 복지에 힘쓰는 것이 왜 정치적이며, 그들의 복지를 가로막고 캠퍼스에서 고립되도록 두는 것은 왜 정치적이지 않은가? 허용되는 정치가 있고, 허용되지 않는 정치가 있다면, 이는 ‘탈정치’라고 할 수 없다. 현 상황은 명백하게, 그렇지 않아도 보수주의로 물든 캠퍼스에 더해진 극우화의 물살이다. 이러한 백래시의 흐름은 학생자치기구 탄압으로 시작된 듯하지만, 동시에 아주 오래 전부터 쌓여온 치우친 탈정치 담론의 결과이기도 하다. 대학은 수십 년 동안 시장화되어 왔다. 학생들은 대학과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관리해야 할 고객처럼 다루어졌다. 학습의 공간이자 정치적 주체 형성의 공간이어야 할 대학에 대한 자본의 직·간접적 지배가 강화되었고, 이와 함께 강의와 학습, 취업과 관련된 범위 외의 모든 활동이 ‘불안 요소’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탈정치 담론은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 자본, 대학 당국을 비판하는 정치로부터는 ‘탈(脫)’해야 하고, 그들을 옹호하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처럼 여겨지는 것이 지금의 탈정치 담론이다. 비상계엄 전까지는 이러한 탈정치 담론이 아주 견고한 것처럼보였다. 그러나 12.3 계엄과 탄핵은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극우세력은 계엄에 저항했던 광장의 청년 세대가 지닌 정치적 잠재력을 실감했고, 따라서 캠퍼스를 최우선으로 선점해야 할 공간으로 판단했다. 우파 정치인 강연 초청, 진보적 교지 폐간, 인권기구 폐지 공세 등은 각각 분리된 우발적 사건들이 아니라 일종의 ‘제2의 백래시 물결’ (2018년을 전후로 전국 여러 대학에서 총여학생회가 ‘남성혐오적’ 및 ‘편향적’이라는 이유로 존폐 위기를 맞거나 실제로 폐지되었던 것이 제1의 백래시다) 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적 공격이었다. 이들은 탈정치 담론을 한 번 더 이용하여, 특정 정치인의 강연은 ‘학술 활동’으로 인정하고, 그를 비판하는 대자보는 ‘정치적 행위’로 규정하여 금지하는 등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다. 탈정치 프레임은 캠퍼스를 보수화시키는 가장 편리한 명분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캠퍼스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조차 흔들리는 공간이 되었다. 대부분의 학생자치는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축소되었고, 대표성과 투명성, 책임성이라는 민주적 절차들도 무력화되었다. 정치적 논쟁을 피하려는 태도는 결국 인권, 성평등, 복지와 같은 의제까지 ‘민감한 정치적 주제’로 분류하여 언급할 수조차 없게 했다. 충북대학교 차기 총학생회 PRO(프로)의 당선자의 경우, 캠퍼스의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한 대표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선거 과정 전후로 규정상 금지된 선거운동을 하는 등 투명성 또한 상실된 상태였다. 특정 정치성향 학생들을 ‘빨갱이’ 등 모욕적 언사로 공격한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는 혐의를 받았으며, 캠퍼스 내 집회를 방해하고자 폭력과 방화를 저지른 극우 유튜버들과의 연관성도 제기되었다. 당선자는 이러한 혐의를 부인하지만, 극우세력이 캠퍼스에서 자행한 노골적 폭력에 그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은채 침묵한 것은 밝혀진 정황상 결코 우연이 아니며, 당시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 대변인으로서 최소한의 책임조차 저버린 행위다. 토론회 질의응답 과정에서 드러난 실무적 능력 부실 또한 책임성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해당 선본은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았다. 극우세력의 폭력적인 집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인권, 성평등 등 진보적 의제는 외면하는 선본의 태도는 정치적으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중립적, 내지는 탈정치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여졌다. 허용되는 말과 행위, 금지되는 말과 행위를 구분하는 기준은 언제나 특정한 정치적 진영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리고 이 기준을 형성하고 통제하는 이들은 국가 및 자본과 깊숙이 결탁한 학교 당국과 우파세력이다. 이처럼 탈정치 담론의 실상은 정치적·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진보적 세력을 제거하는 우파의 무기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캠퍼스 내 진보진영은 이렇듯 극우진영은 캠퍼스 내에서 소리 없이 세력을 확장해 왔다. 특히 박근혜 퇴진 정국에 비해 한층 심화한 탈정치 담론은 극우의 성장과 불가분하다. 박근혜 퇴진 정국, 특히 ‘정유라 사태’까지만 해도 캠퍼스 내 주된 담론은 ‘공정성’에 관한 것이었다. 정유라 사태가 캠퍼스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경우였기 때문이다. 능력 있는 자가 경쟁에서 승리하고, 그에 걸맞는 사회적·경제적 보상―예컨대 대기업 정규직 등―이 주어진다는 환상이 순리인 양 여겨진 시기였다. 그러나 박근혜, 문재인, 그리고 윤석열 정권까지, 이러한 능력주의와 경쟁주의의 환상은 점차 힘을 잃었다.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여겨지거나, 이미 쟁취했다고 여겨진 이들 다수도 심화하는 경쟁과 노동유연화를 피하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던 일부 학생들은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품고, 경쟁구조를 철폐하자고 나섰다. 경쟁구조 편입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소수자·약자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나와서 싸우게 되었다. 극우진영은 이들을 ‘탈정치’ 담론으로 찍어 누른다. 소수자, 약자, 차별, 체제를 언급하기만 해도 과도하게 ‘정치적’이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고 낙인찍는다. ‘정치’라는 단어는 이렇게 오염되어 왔다. 이들에게 이미 존재하는 구조, 체제,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는 것은 정치적이지 않고,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정치적이다. ‘정치적 갈등’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능력을 길러야 할 대학생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본질은 점점 붕괴하는 능력주의와 경쟁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의문과 도전을 봉쇄하는 억압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탈정치 담론은 ‘위’를 공격하지 않게 하고, ‘아래’는 외면하는 흐름을 형성하는 데에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점차 캠퍼스의 학생들은 자신을 경쟁하게 하는 체제, 이를 부추기는 국가와 자본을 내면화하고, 차별 등의 문제로 경쟁에서 패배하거나 아예 경쟁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는 소수자, 약자의 싸움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해진 우파적 흐름은 진보진영을 아직 완전히 붕괴시키지 못했다. 계엄 이후 청년들, 그리고 캠퍼스의 학생들이 광장에서 보여준 저항력과 결집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 몇몇 대학에서는 다시 학생자치를 복원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폐지 공세에서 살아남은 학생자치기구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그들 각자만의 능력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학생들의 지지와 동참을 기반으로 부활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경유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크고 작은 모임과 스터디가 캠퍼스 곳곳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학생자치기구가 폐지되고, 중앙 동아리가 재등록을 거부당하고, 개개인의 정치적 목소리가 억압당해도, 이를 비판하는 학생들의 성명과 연대 활동 또한 이어지고 있는 것 역시 중요한 변화이다. 이러한 흐름은 비록 미약해 보일지언정 탈정치 담론이 완성될 수 없다는 증거이자, 캠퍼스 내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능성이다.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학생회장은 개인 명의 대자보에서 문과대학 인권복지위원회를 신설한 이유로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의 ‘과도한 정치적 행위’를 언급했다. 해당 대자보는 학생자치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으며, 학생회는 단순한 ‘복지기구’로 전락했고, 이는 학생들의 학생사회에 대한 참여가 저조하며 각자 본인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단순한 복지기구도, 정치적 활동도 학생자치의 적절한 길이 아니라면 그 중도의 길은 어디 있는가? 캠퍼스 내 모든 학생의 동의를 얻는 정치적 활동은 없다.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정치적 활동이 허용되는 열린 공간으로서의 캠퍼스를 만드는 것이 학내 구성원들의 진정한 ‘참여’를 가능케 하는 길이다. 정치적 활동이 가능한 대학을 향한 싸움이 학내 구성원들의 학생사회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확대할 수 있다. 탈정치 담론에, 자본주의 체제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아가 탈정치 담론과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목소리 높이고 싸워야 한다. 동아리, 학회, 학생회, 노학연대 활동, 캠퍼스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체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서자. 어떤 정치적 행동이든 시도해보아야 한다. ‘정치적’이라는 비판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정치적’ 행위를 더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각자의 캠퍼스에, 가까운 캠퍼스에 스피커와 확성기를 대자. 방식과 규모는 당장에는 중요하지 않다. [참조] - 대학가에 불어닥친 ‘급진화된 보수주의’ (시사IN, 김다은 기자) - 극우 집회서 마이크 잡고 윤어게인‥몇 달 뒤 충북대 학생회장? (MBC, 김은초 기자) - 충북대 총학 선거 후폭풍, 학생총회 소집 운동으로 확산 (충청리뷰, 최산 기자) -
[후기] 세종호텔, 고진수동지 고공농성 해제 후 로비 농성 돌입세종호텔 해고노동자 고진수 동지가 고공농성 336일만에 땅으로 내려왔다. 고공해제 이후 세종호텔 오세인 대표와 7차 교섭에 들어갔지만, 세종호텔 측은 복직과 관련한 어떠한 안도 갖고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1월 29일로 예정된 8차 교섭장소로 세종호텔은 안된다는 말까지 했다. 이에 50여명의 동지들이 함께 세종호텔 로비에 앉아 세종호텔의 실소유주 주명건이 교섭에 나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은 코로나 시기 경영 상 어려움을 명목상의 이유로 해고됐습니다. 하지만 이는 핑계에 불과하며, 실제 이유는 노조파괴이다. 세종호텔 노조는 오랫동안 어용노조에 맞서 싸우며, 호텔의 비정규직화에 맞서 싸워왔다. 단지 정규직 노동자만의 권리가 아니라, 청소노동자 등 외주하청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앞장서 싸웠다. 세종호텔 노조는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싸우는 게급적 노동조합이기 때문에, 세종호텔 실소유자 주명건은 세종호텔 노동조합을 반드시 파괴하고 싶어했다. 해고된지 4년이 넘었고, 호텔은 그 어느때보다 호황이다. 더 이상 코로나로 인한 경영상 위기라는 핑계는 일말의 근거도 없다. 그럼에도 호텔은 해고노동자들의 복직을 거부하고 있다. 세종호텔 노조 고진수 동지는 윤석열의 내란 쿠데타에 맞선 투쟁이 한창 벌어지던 지난해 2월 13일, 교통통제판 위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고진수 동지를 비롯한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은 정당한 자신들의 요구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계급적 연대를 위해, 모든 사회적 차별과 억압에 맞선 요구에 연대하며 투쟁해왔다. 퀴어퍼레이드가 열린 날 고진수 동지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모든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했다.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맞서 ‘Free Palestine’을 함께 외쳤다. 베트남 이주노동자의 죽음 앞에, 고진수 동지는 죽음을 막지 못해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렸다. 세종호텔 노동자들이 늘 세종호텔 복직과 함께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제 철폐를 요구해왔다. 언제나 계급적 연대를 위한 자신의 역할을 고민했다. 이제 우리가 336일 동안 고공농성을 이어온 고진수 동지의 염원을 이어받아 싸우자. 이제 우리가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에 대한 계급적 연대를 통해, 반드시 복직을 쟁취하자. 그리고 고진수 동지와 함께,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복직을 쟁취하고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제 철폐 투쟁으로 나아가자. 착취와 차별, 억압이 없는 세상을 향해 함께 싸워가자! ※세종호텔 투쟁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 영문 영상을 게재하였다. 내용은 위와 동일하다.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
[번역] 미국 제국주의는 베네수엘라에서 물러나라!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전미 대륙 총파업과 국제적 대중운동을 위해!트럼프의 신식민주의적 도발에 맞서, 미주대륙과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혁명적 사회주의 국제조직인 연속혁명경향-제4인터내셔널(CPR-FI)은 노동조합과 사회·정치 운동이 미주 전역 노동자계급 총파업에 나서자고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노동자민중의 자기조직화와 미주대륙 총파업을 통해, 권위주의 베네수엘라 정부와 독립적으로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자는 CPR-FI의 성명을 지지하며, 해당 성명을 번역해 소개한다. 작성자: 연속혁명경향-제4인터내셔널(CPR-FI) 2026년 1월 10일 Left Voice에 게재된 기사를 번역 미국 군대의 베네수엘라 침공은 라틴아메리카를 겨냥한 제국주의 공세의 도약이다. 이는 단순히 한 국가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워싱턴의 명령에 도전하는 모든 민족에게 보내는 잔혹한 경고이다. 이러한 신식민주의의 확대에 맞서 외교적 규탄과 추상적인 평화의 호소만으로는 부족하다: 대중적, 국제주의적, 계급적 기반의 대응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연속혁명경향-제4인터내셔널(CPR-FI)과 일간좌파 국제 네트워크는 노동조합 연맹과 사회·정치 운동 단체들, 특히 이번 공격을 규탄한 단체들을 중심으로 아메리카 대륙 전역의 노동자 계급 파업을 촉구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제국주의적 침략을 저지하고, 미국 제국주의를 베네수엘라에서 추방하며,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대중 투쟁을 열 수 있는 국제적 대중운동의 핵심이 될 것이다. 1월 3일 새벽부터 세계는 미주대륙에서 미군의 베네수엘라 공격이라는 범죄적 침략을 목격하고 있다. 이는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신식민주의 공세의 재앙적 전환점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과 실리아 플로레스를 납치하고 베네수엘라 영토를 폭격하여 최소 80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 전쟁 행위이자 주권 침해는 베네수엘라의 전략적 부를 장악하고 전 지역 및 그 너머에 위협적 메시지를 보내면서, 추출주의적 약탈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무력으로 강요하려는 것이다. 연속혁명경향-제4인터내셔널(CPR-FI)은 이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해 가장 강력한 저항의 목소리를 높인다. 비록 우리는 베네수엘라 정부에 반대하는 좌익이며 반제국주의 세력이지만, 미국 제국주의 국가와 그 사법 체계가 그들을 심판할 권리가 없기에 마두로와 플로레스의 석방을 요구한다. 우리는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군사적 진영에 분명히 서며, 이를 물리치기 위해 국제 노동계급과 세계 민중의 대중적 결집을 촉구한다. 이는 현재 델시 로드리게스가 이끄는 마두로 정부에 어떠한 정치적 지지도 부여하지 않으면서 행하는 것이다. 이 정부는 노동자와 민중 운동을 탄압하면서 경제 위기와 제재의 부담을 노동자 계급에게 전가한 극도로 반노동적인 부르주아 정권이다. 이 정부는 자본과 제국주의에 대한 협정, 양보, 항복을 통해 국가 자원을 넘겨주었고, 이로써 이번 개입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 정부는 선거 사기와 권위주의적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이 지역 전체에서 좌파 정치를 불신하게 만드는 우익의 가장 효과적인 선전 도구가 되었으며, 오늘날 대중적 반제국주의 결집 가능성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유산을 남겼다. 우리는 베네수엘라에서 제국주의를 패배시키는 것이 세계의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중대한 이익임을 주장하지만, 반제국주의를 명분으로 정권을 방어하는 것은 민중을 정치적으로 무장 해제시키고 민중 저항을 국가 탄압과 혼동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경고한다. 공격의 본질: 가면을 벗은 제국주의 미국이 베네수엘라에 가한 군사 작전은 이 지역의 최근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표면적 명분인 이른바 “마약 밀매와의 전쟁”과 “마약 테러리즘”은 무력 개입, 점령,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재활용된 낡은 제국주의 변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이제 그 어떤 수사적 가면도 벗어던지고, 베네수엘라를 미국이 관리해야 할 영토로 간주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먼로 독트린의 최악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각이다. 이와 함께 베네수엘라에 대한 식민지적 폭격으로 대담해진 트럼프는 콜롬비아, 멕시코, 심지어 그린란드까지 위협하며 “국가 안보”를 이유로 이 지역들이 미국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또한 쿠바가 “곧 무너질 것”이라며 쿠바의 경제 위기를 베네수엘라 석유 의존과 연결시켰다. 이러한 발언들은 베네수엘라에 대한 공격과 함께 제국주의적 압박과 개입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어떤 공격에 직면하더라도 우리의 입장은 분명하다: 우리는 제국주의에 맞서 쿠바를 방어한다. 쿠바에서 손 떼라! 제국주의 봉쇄와 금수 조치를 중단하라! 미국은 관타나모에서 철수하라! 미국은 마약 밀매와의 싸움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마약 밀매에 있어 미국은 세계 최대규모의 시장이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공격은 정치적 통제를 강요하고, 지역적 규율을 강제하며, 공유자원을 약탈하기 위한 특권적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은 러시아, 중국 등 다른 강대국들을 밀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미국과 중국이 라틴아메리카를 두고 벌이는 경쟁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막대한 석유, 광물, 희토류 매장량과 지정학적 위치는 이 나라를 핵심 표적으로 만든다. 이 나라를 거대한 석유 식민지로 만들려는 것이 바로 진정한 '전환'이다. 따라서 베네수엘라 침공을 저지하고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는 것은 모두의, 특히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에 사는 이들의 시급한 과제다. 한편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국제법”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도, 트럼프의 공격을 거의 직접적으로 지지했다. 트럼프의 그린란드 관련 위협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 속에서 국제적 역할이 쇠퇴하고 있는 EU에 경보를 울렸다. EU 역시 베네수엘라와 라틴아메리카의 석유 및 자원 약탈의 몫을 차지하려 하며, 레프솔, BBVA, 토탈 에너지 등 그들의 다국적 기업을 위해 EU-메르코수르 협정을 추진 중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유럽 제국주의와 그 다국적 기업들에 맞서 싸우며, 수십 년간 라틴아메리카에서 약탈당한 기업과 자원의 무상 반환을 요구하는 이유다. 군사 공격 이후 베네수엘라 정부의 정치적 파산 이처럼 예외적인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베네수엘라 정부의 대응은 그 정치적·전략적 파산을 여실히 드러냈다. 니콜라스 마두로의 납치와 델시 로드리게스의 새 집권층으로의 등극은 외세의 공격과 제국주의적 강요의 심각성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베네수엘라 정권을 극도의 취약 상태에 놓이게 했다. 혁명적 관점에서, 필수적으로 마두로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제국주의의 힘에 맞닥뜨렸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정치적·전략적 한계가 이끈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 마두로, 정부 지도부, 군 고위 지휘부는 어떤 한계도 없이 법적 절차를 무시하는 적 앞에서 대중을 정치적으로 무장 해제시킨 채 국가를 극도의 취약 상태로 몰아넣은 책임이 있다. 초기 차비즘은 미국 제국주의와의 공개적인 마찰을 특징으로 하는 반제국주의적 수사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차비즘 정권은 국가의 종속적 자본주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타파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다. 국제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남은 것은 급진주의의 허울뿐이었으며, 그 이면에서는 외국 자본(부채 상환 및 신규 차입, 국내에서 창출된 모든 이익의 해외반출 허가, 석유 거대 기업에 대한 거의 완전한 세금 면제, 광물 자원 제공)과 국내 유산 계급(전통적 부유층과 차베스주의와 함께 등장한 신흥 부르주아지 모두)의 이익이 충족되었다. 베네수엘라는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도 자원이 부족해진 상태가 되었고, 노동권 해체, 볼리바르 화폐 가치 붕괴, 임금 및 연금 삭감, 가격 완전 자유화, 달러화 정책, 노동운동 및 민중불만에 대한 탄압으로 노동자계급과 빈곤층에게 그 부담을 전가했다. 노동자계급이 경제위기와, 이후 제국주의 제재의 주된 타격을 감당하는 동안, 새롭게 부유해진 고위 민간·군사 관료들로 구성된 통치 계급이 등장했으며 이들은 점점 더 대중적 지지를 상실해갔다. 친제국주의 야당의 포위 공격에 직면한 정부는 군대와 경찰, 준군사 조직의 행동을 통치의 축으로 삼아 억압적 국가 기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방향성은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했으며, 대중적 기반을 물질적·정치적으로 훼손했다. 노동운동을 자본주의 통치 전략에 종속시키고, 점차 민간 자본과 탄압에 의존함으로써 정부는 결국 미국 제국주의의 신식민지적 욕망 앞에서 민중의 무장 해제를 자초했다. 그 결과 대중의 의식적·조직적 지지의 부재 아래 직접적 공세에 저항할 수 없는 국가 기구만 남았다. 이러한 방향성은 노동자 계급이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할 실질적 역량을 약화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 정부는 제국주의와의 강제 협상보다 결집하는 대중을 더 두려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공격을 받더라도 아래로부터의 조직적 대중 저항을 촉구하기보다 협상적 해결책 모색, 외교적 중재 호소, 합의 탐색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공식적 대응은 형식적 성명, 제도적 차원의 규탄, 반복되는 추상적 ‘평화’ 호소로 축소되었으며, 델시 로드리게스가 서한을 통해 “트럼프 정부에 협력 의제 마련을 위한 공동 작업 초대”를 제안할 정도로 협상 채널 재건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마두로주의자(Madurista) 기구는 제국주의에 저항할 어떤 의지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는 권력을 쥔 차베스주의의 권위주의적 퇴보가 초래한 논리적 결과다. 차베스주의는 우고 차베스 정부 시절 누렸던 선거적 정당성을 점차 내버리고, 대신 지난 대선 때와 같이 사기에 의존해 왔다. 이러한 궤도의 또 다른 결과는 수백만 베네수엘라인의 대량 이주로 드러났다. 수년간 종속적 자본주의 국가를 운영하며, 민중 조직을 포섭·무력화하고, 독립적인 좌파를 탄압하며, 러시아·중국·유럽 자본(셰브론 같은 미국 다국적 기업을 포함)과의 동맹을 심화시킨 끝에, 정부는 일관된 저항을 제공할 능력이 없음을 입증했다. 정부는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협할 수밖에 없는 대중 저항을 촉발하기보다는 항복하는 것을 선호한다. 군대는 다른 부르주아 기관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국가 방위를 위해 싸우는 것보다 자신들의 사업과 생존에 더 관심이 있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내세워온 '군복을 입은 민중'이 아니라 억압의 도구일 뿐이다. 제국주의에 복무하는 부르주아지: 자신들의 학살자를 찬양하다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 같은 인물들은 미국 제국주의에 완전히 복종하며, 외국 세력의 직접적인 대리인으로서 자국민을 학살한다. 라틴아메리카 부르주아지의 침략에 대한 반응은 하인 같은 비열함 그 자체였다. 바로 이 때문에 라틴아메리카 부르주아지의 광범위한 계층과 노골적으로 친제국주의적인 정부들의 반응은 이 사태에서 가장 역겨운 측면 중 하나였다. 대통령들, 외무장관들, 언론들은 침략을 축하하거나 개입을 정당화하거나 공모적인 침묵을 유지했다. 이러한 노골적인 비굴함은 역사적 진실을 확인시켜 준다: 라틴아메리카 부르주아지는 그 이익이 구조적으로 제국주의 자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 주권을 일관되게 수호할 능력이 없다. 20세기 전반에는 멕시코의 카르데나스(Cárdenas), 브라질의 바르가스(Vargas), 아르헨티나의 페론(Perón)(초기 대통령 재임 시절)과 같은 부르주아 정부가 제국주의적 야욕에 부분적으로 맞서기도 했지만, 라틴아메리카 부르주아지는 1960~70년대 노동운동의 부상에 점차 겁을 먹고, 세계경제의 변화(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대외 부채 부담, 민영화 등)에 직면하면서 자국민을 약탈하는 제국주의의 동반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심화시켰다. 아르헨티나의 밀레이를 비롯한 지역 내 우파 정부들은 군사 공격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제국주의 자본의 하위 파트너인 이들 토착 부르주아지는 워싱턴에 대한 복종을 자국 노동계급을 깨부수고 국가 자원을 더욱 잔혹하게 착취할 수 있는 보증으로 본다. 그들의 역할은 약탈을 위한 지역 경찰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트럼프에게 복종하는 조건을 협상해 온 룰라(Lula)나 셰인바움(Scheinbaum) 같은 지역 내 ‘진보적’ 정부들의 무기력함을 규탄한다. 이들은 트럼프가 베네수엘라를 군사적으로 공격하고 지역 여러 국가들을 위협하는 동안 미지근한 성명만 내놓고 있다. 룰라의 경우 군사 개입 비판에서조차 트럼프와 미국을 언급하지 않으며, 미국의 카리브해 봉쇄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워싱턴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진보적’ 정부들의 정책은 단계적 항복에 불과하며, 이는 결국 미국이 지역에서 새로운 공세를 강화하는 데만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공세는 조만간 그들 자신에게도 돌아올 것이다. 룰라와 같은, 트럼프에 대한 화해적 정책은, 역사적으로 실패할 운명이다. 행동하는 국제주의: 세계의 거리에서,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연대 이러한 제국주의 군사 침략에 맞서 전 세계 노동자 계급, 청년, 운동 진영에서 비록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국제적 대응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미국, 유럽 및 여타 지역에서 제국주의 공격을 규탄하는 집회, 시위, 성명,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마두로 정권의 노골적인 반동적 성격은, 수십 년 만에 이 지역을 겨냥한 미국의 첫 번째 폭력적 공격에 맞선 대규모 대중운동의 발전에 장애물이 되어왔다. 그렇기에 세계를 움직여왔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행진, 학생 점거, (가자로 향하는)함대, 이탈리아의 총파업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가장 선진적 요소들에 의지하여, 계급 독립성을 바탕으로 국제주의 관점의 일관된 반제국주의 대중운동를 재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공격에 맞서, 일간좌파 국제 네트워크와 CPR-FI는 거리에서의 전투적 행동을 촉구하며 대응해왔다. 미국을 포함해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까지, 멕시코에서 프랑스까지, 브라질에서 독일까지, 우리는 제국주의 침략을 규탄하기 위한 대중운동, 피켓팅, 집회를 조직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우리는 공동행동, 조정(coordination), 대중운동 호소를 촉진하며, 수사적이지 않으며 전투적인 국제주의를 재확인했다. 이 아래로부터의 연대는 제국주의 공세에 맞서는 근본적인 지지점이다. 미국에서는 좌파의 목소리를 통해, 괴물의 심장부에서 우리는 적이 내부에 있음을 고발하며 요구한다: 베네수엘라 침략을 위한 단 한 푼의 달러나 총알도 허용하지 말라! 베네수엘라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손 떼라! 미국 제국주의를 타도하라! 트럼프가 미국 제국주의의 쇠퇴를 다루기 위해 투사하려는 강경한 이미지의 이면에는, 트럼프 정부의 다중적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그는 2025년 말 선거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 지지율도 계속 하락하고 있으며, MAGA 운동으로 표현되는 그의 가장 가까운 사회적 기반조차도 내외 정책을 둘러싸고 점점 더 격렬해지는 분열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수백만 명이 “왕은 없다”는 구호로 미국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한 ICE(이민세관단속국)의 급습은 로스앤젤레스의 봉기, 시카고의 저항, 그리고 최근 ICE 요원에 의해 살해된 이민자 권리 운동가 르네 니콜 굿에 대한 미니애폴리스 시위에서 드러났듯 점점 더 큰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우리 모두는 미국 내외를 막론하고 적진에서 일어나는 이 동요를 인식해야 한다. 전 아메리카 대륙을 아우르는 대중운동만이 제국주의의 재식민화 시도를 저지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이 이끄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수억 명의 억압받는 민중들의 힘 앞에서, 거대한 미군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회운동, 페미니스트 운동, 환경운동, 학생 단체, 원주민 운동을 포함한 거대한 양대륙의(bicontinental) 운동이 트럼프와 우익 세력을 패배시켜야 한다. 미주 전역의 대규모 노조들은 트럼프와 제국주의에 맞서 일어나야 하며, 미국 내에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손 떼라'는 ‘노킹스(No Kings)’ 시위를 통해 결집한 수백만 명, ICE에 저항하는 수백만 이민자,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반란을 일으킨 거대한 반인종주의 운동, 대학·학교·직장에서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맞서 일어난 청년들과 함께해야 한다. 저항이 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어, 제국주의의 진격을 막을 수 있도록 우리는 단결해야 한다. 베네수엘라와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 제국주의를 몰아내자! 이것이 우리의 국제주의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성명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지역에서 제국주의와 그 모든 대리자들을 물리칠 유일한 방법으로서, 아래로부터 조직되고 독립적인 노동자계급의 대응을 촉진하며, 대중과 함께 싸우러 나간다. 제국주의에 맞선 우리의 투쟁은 마두로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국주의의 공격은 실상 전 세계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모든 인민에 대한 공격이며, 워싱턴의 지시에 반대하는 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새로운 침략의 서막이다. 부르주아 국가의 틀 안에서, 엘리트들 간의 협정, 궁정 외교를 통한 해결책은 없다. 오직 독립적으로 조직된 노동계급과 억압받는 민중들의 국제적 연대만이 이 진격을 저지하고 진정한 해방적 전망을 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자 조직, 노동조합, 청년 조직, 페미니스트 조직, 풀뿌리 활동가들에게 소위 “진보적” 부르주아 정부나 군부 계층에 대한 어떤 환상도 없이, 각국에서 투쟁의 조직화와 행동을 촉진할 것을 촉구한다. 제국주의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은 오직 세계의 억압받는 이들의 의식적이고 독립적인 결집 속에 있다. CPR-FI는 명확하고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우리는 베네수엘라의 군사적 편에 서서 미국에 대항하지만, 베네수엘라 국가를 운영하는 부르주아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억압적인 정부에 어떠한 정치적 지지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권을 지지함으로써 반제국주의 대의에 대한 서반구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이들의 지지와 결집을 이뤄낼 수 없다. 우리의 과업은 자본주의 질서 내의 계급 화해 프로젝트나 대안적 해결책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독립성을 촉진하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침략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교훈을 재확인한다: 종속적 자본주의 내에서는 지속적인 민족 해방이 불가능하다. 진정한 주권은 오직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새로운 토대 위에서 사회를 재조직함으로써만 쟁취될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이 전망은 제국주의, 지역 부르주아지 및 그 정부들에 대한 혁명적 대안으로서 전 라틴아메리카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건설을 위한 투쟁 속에서 구체화된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국주의 공격에 맞서, CPR-FI는 라틴아메리카와 세계의 노동자계급 및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긴급한 전략적 행동 강령을 제시한다: 우리는 미국의 공격을 규탄한 단체들을 시작으로, 노동조합, 사회운동 및 좌파 세력이 노동자계급의 대륙 총파업을 호소할 것을 요구한다. 대륙적 규모의 노동자계급 행동을 통해 트럼프의 진격을 저지해야 한다.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노동조합(아르헨티나의 CGT-CTA, 브라질의 CUT, 칠레 CUT 등)이 베네수엘라를 겨냥한 제국주의 전쟁 기계를 저지하기 위한 대륙 총파업의 일부로서 각국에서의 대중운동과 함께 전국적 파업을 선언할 것을 호소한다. 군사적 침략의 즉각 중단을 요구한다! 항만 노동자들은 라틴아메리카 자매형제들을 죽이는 무기 선적을 거부해야 한다. 베네수엘라와의 연대를 위해 운송부문부터 공장까지 모든 것을 중단시켜야 한다. 이탈리아 노동계급은 최근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서 국가를 마비시키고 반(反)식민 투쟁을 벌인 위대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제 대륙 총파업을 통한 반제국주의 투쟁을 제기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갈 때다. 우리는 제국주의에 의해 납치된 니콜라스 마두로와 그의 아내 실리아 플로레스의 자유를 요구한다. 우리는 그들을 재판할 미국 법원의 사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베네수엘라 노동자민중만이 그 권리를 가진다. 우리는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의 평회원들이 민주적으로 조직한 각국의 행동 위원회(action committees)를 기반으로, 베네수엘라에 대한 침략에 맞서 싸우는 자기조직화 운동을 위해 투쟁한다. 우리는 노동자와 민중의 자기조직화를 통해 베네수엘라의 주권을 무조건적으로 수호한다. 베네수엘라와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 제국주의를 몰아내자! 우리는 모든 미군 병력, 함정, 항공기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철수와 대륙 내 모든 외국 군사 기지의 해체를 요구한다. 우리는 외채 상환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베네수엘라와 우리나라의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민중은 우리를 약탈하기 위해 억압자들이 발생시킨 빚에 대해 한 푼도 갚을 의무가 없다. 셰브론을 비롯한 모든 다국적 석유, 광업, 농업 기업을 비롯한 제국주의 기업들의 무상 몰수를 요구한다. 라틴아메리카 땅에 있는 모든 미국 소유 기업들은 침략에 대응하여 노동자 통제 하에 국유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미국과의 모든 무역 및 안보 협정 및 조약(USMCA, 번영동맹(Alliance for Prosperity, TIAR 등)의 종료를 요구한다. 경험은 어떤 민족 부르주아지도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걸 보여준다. 해방의 유일한 보장은, 노동자와 억압받는 이들의 정부를 통해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 전역의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위해 투쟁하며, 빈곤, 종속, 환경 파괴, 자본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한 경제를 민주적으로 계획한다.
공지/성명/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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