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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이후 극우세력의 준동과 노동자계급의 대응방향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 못지않게 이후 극우세력의 준동 또한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양상으로 전개돼 왔다. 서부지법 폭동, 헌법재판소에 대한 공공연한 폭동 모의와 선동, 황당한 부정선거 음모론, 계몽령 운운하며 계엄의 실체를 덮으려는 새빨간 거짓말들, 인권위를 동원한 윤석열 비호 등등.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 전제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깨져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트럼프 재집권 이후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다. 2021년 의사당 폭동자들에 대한 사면, 이민자들의 대량 체포, 연방공무원 대량해고 추진, 캐나다·파나마·그린란드 등에 대한 주권 부정,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주민의 강제이주와 미국에 의한 강탈 계획 등등. 극우세력의 준동이 이처럼 한국과 세계를 뒤흔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노동자계급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1. 개념 정리 극우세력의 준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개념 정리부터 시작해 보자. 극우와 우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극우와 파시즘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좌파, 우파, 극우, 파시즘의 개념부터 하나씩 정리해 보자. 1) 좌파와 우파 좌파는 일반적으로 기존 사회질서 안에서 고통당하는 이들, 즉 착취·억압받는 노동자·민중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을 말한다. 반대로 우파는 일반적으로 기존 사회질서 안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지배계급, 즉 자본가계급과 그 하수인들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을 말한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좌파는 기존 사회질서를 변화시키려 하고 우파는 기존 사회질서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런데 우파가 기존 사회질서의 유지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종종 우파는 지배계급의 기득권을 되찾거나 강화하기 위해서 기존 사회질서의 변화를 추구한다. 물론 그러한 변화는 노동자·민중의 관점에서 볼 때, 또한 보편적 해방을 향해 도도히 전진해 온 인류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의 물줄기를 거꾸로 돌리는 반동적 변화다. 우파가 반동적 변화를 추구할 때, 당연히 좌파는 그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때 좌파가 변화에 반대하는 것은 노동자·민중이 역사적으로 성취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지 기존 사회질서 자체를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결국 좌파는 보편적 해방을 향해 기존 사회질서를 변화시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좌파도 우파도 내부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특히 우파는 일반적으로 중도우파(리버럴·자유주의)와 보수우파(보수파)로 나뉜다. 보수우파가 보다 간명하게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면, 중도우파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민중의 이해관계를 화해시키려는 외관을 통해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킨다. 중도우파의 존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운용되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 보수우파의 노골적인 자본가계급 이해관계 옹호에 분노한 노동자·민중에게 중도우파가 그럴싸한 대안으로 내세워지기 때문이다. 노동자·민중이 다시 중도우파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을 때 새롭게 단장한 보수우파가 다시 대안으로 내세워진다. 노동자·민중을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쳇바퀴 안에 영원히 가두기 위한 메커니즘이다. 2) 우파와 극우 우파와 극우는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대표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우파와 극우가 갈라지는 지점은 변화를 추구하는 목표와 방법에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파는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 변화를 추구한다. 하지만 극우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민주적 기본권과 형식들까지 일정하게 파괴하는 목표를 추구하며 또한 그러한 방법들을 서슴없이 사용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계급은 통상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계급지배를 위해 불가피하면서도 유용한 형식으로 간주한다. ‘불가피하다’는 것은 자본가계급이 노동자·민중과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계급투쟁을 전개한 결과 역사적으로 도달한 균형점이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의미에서다. ‘유용하다’는 것은 (정말로 자유와 평등이 존재하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은 외형을 통해 환상을 불어넣고 가둠으로써)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노동자·민중을 효과적으로 무력화하기 때문에 자본가계급의 실질적인 지배를 원활하게 보장한다는 의미에서다. 따라서 자본가계급은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기초하는 우파를 통해 자신의 이해관계를 표현한다. 그런데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더 이상 제대로 관철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따라서 노동자·민중에 대한 착취·억압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할 필요를 느낄 때 자본가계급은 극우를 불러낸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과감하게 깨뜨리고서 훨씬 더 강압적인 새로운 계급지배 형식을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우파와 극우가 갈라지는 또 하나의 지점은 대중과의 관계다. 일반적으로 우파는 대중의 수동성을 토대로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한다. 대중의 대다수는 노동자·민중이기 때문에 대중이 능동성을 갖게 되면 자칫 노동자·민중의 힘이 강력해지고 따라서 자본가계급의 지배가 위협받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파는 대중을 수동화하는 효과적인 장치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적극 활용한다. 이와 달리 극우는 대중의 능동성을 동원한다. 물론 그 능동성은 대중을 자기해방이 아니라 파멸로 이끈다는 점에서 악마적 능동성이다. 나와 우리 모두의 자유·평등·연대를 실현하고 해방으로 이끌기 위한 이성적 능동성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혐오·차별·억압을 통해 배타적인 특정 집단만의 생존을 도모하려 하는 야수적 능동성이다. 극우가 대중의 야수적 능동성을 동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역사적 균형점을 깨뜨리는 데 많은 정치적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혐오·차별·억압의 광기로 대중의 시선을 돌림으로써 변화의 진정한 본질(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 관철을 위한 착취·억압 강화)을 효과적으로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3) 극우와 파시즘 파시즘은 극우가 가장 극악하게 진화한 형태다. 통상적으로 극우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부분적 부정을 뜻한다면, 파시즘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뜻한다. 파시즘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민주적 기본권(사상·양심·표현·신체·결사·집회·시위 등의 정치적 자유권과 사회적 생존권)과 형식(선거·다당제·삼권분립·자유언론 등)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지배세력의 입장과 이해관계만을 사회 전체에 폭력적으로 관철한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볼 때, 파시즘은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쟁취해 온 조직(노동조합·노동자정당)과 권리(노조결성권·파업권·생존권) 등 노동자운동의 모든 성과를 파괴하여 노동자계급을 원자화된 무기력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뜻한다. 군사정권(군부독재)이 파시즘의 한 형태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정과 노동자운동에 대한 전면적 억압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군사정권을 파시즘의 한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고전적인 파시즘은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혁명 근처까지 다다른 상황에서 이를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하며 몰락하는 소부르주아 대중의 야수적 능동성을 전면적으로 동원해 낸다는 특징이 있다. 즉 단지 폭력을 통한 강제만이 아니라 광기에 찬 대중의 동의를 통해 파시즘을 성립시키고 유지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군사파시즘은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미약한 상황에서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하며 군홧발의 폭력에 주로 의지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군사정권을 파시즘의 한 형태로 간주하기 어렵다. 군사정권이 고전적인 파시즘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음을 내포하면서 ‘군사파시즘’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이 논란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2. 세계적인 극우세력 성장이 자본주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 오늘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정치형태로 통상 간주된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출발할 때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파시즘의 역사를 겪기도 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도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오늘날 세계를 뒤흔드는 극우세력의 준동은 전체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와 위치를 갖는 것인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1) 부르주아 혁명과 부르주아 공화주의 자본주의는 봉건제와 절대왕정 체제 안에서 경제적으로 먼저 성숙했다. 자본가계급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에 이르렀지만, 왕과 귀족이 독점하던 정치권력으로부터 배제돼 있었다. 자본가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면 왕과 귀족의 권력을 타도하는 혁명에 나서야 했다. 사회적으로 소수인 자본가계급 홀로서 이 혁명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사회의 다수인 노동자·민중을 혁명의 주체로 끌어내기 위해 자본가계급은 자유·평등·박애라는 보편적 대의를 내걸면서 자신들의 혁명을 포장했다. 노동자·민중의 폭발적인 참여를 통해 왕과 귀족의 권력을 타도하는 혁명이 성공했고, 공화국이 건설되었다. 노동자·민중은 이제 모두를 보편적 해방으로 이끄는 진정한 공화국이 건설될 것이라 믿었지만, 자본가계급의 생각은 달랐다. 혁명의 주도권을 쥔 자본가계급은 공화국의 진정한 시민, 즉 선거권자를 사실상 자본가계급 또는 유산계급으로 제한했다. 자본가만을 위한, 자본가에 의한, 자본가의 공화국. 이른바 ‘부르주아 공화주의’였다. 왕과 귀족의 권력을 타도한 혁명은 부르주아 공화주의를 수립하는 부르주아 혁명으로 귀결됐다. 2)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의 수립 노동자계급은 이제 자본가계급에 맞서 투쟁에 나섰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선거권을 비롯한 정치적 권리와 사회경제적 권리를 쟁취하여 진정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였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민중을 착취·억압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철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서였다. 노동자·민중이 1백여 년에 걸쳐 줄기차게 투쟁한 결과, 19세기 중후반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되기 시작했다. 자본가계급이 여전히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사회를 지배하지만,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노동자·민중에게 선거권을 비롯한 각종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고 최소한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보장하는 체제였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많은 경우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투쟁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노동자혁명을 향한 투쟁의 부산물로서 주어졌다. 특히 1917년 러시아 노동자혁명은 전 세계 자본가계급에게 보통선거권, 여성 참정권, 8시간 노동제를 수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런데 그 시절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강탈당하던 식민지·반식민지들이었다. 유럽과 미국은 본국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확산하는 경우에도 식민지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정치적·경제적 권리조차 유린하는 강권통치를 철저하게 고수했다. 식민지에 대한 초과착취와 수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결코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형식적으로 독립을 유지한 반식민지 국가들도 그 정치형태가 무엇이든 부패한 독재정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제국주의 자본가들이 원활한 수탈을 위해 그러한 체제가 수립·유지되도록 적극 유도하고 지원했기 때문이다. 3) 파시즘의 대반동 보편적 해방을 향해 기존 사회질서를 변화시키려 하는 노동자·민중의 반대편에는 항상 역사의 물줄기를 거꾸로 돌리려는 반동 세력이 있었다. 자본주의 초기에 반동을 대표한 것은 왕정 체제 복원을 도모하는 왕당파였는데, 당연하게도 왕당파의 낡은 주장은 대중 속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런데 러시아 혁명 이후 1920~30년대 이탈리아와 독일을 중심으로 파시즘이 등장해 반동의 새로운 대표 주자가 되었다. 파시즘은 ‘위대한 이탈리아 국민성에 입각한 로마 영광의 재현’이나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실현하는 국가 사회주의’ 같은 ‘참신한’ 슬로건을 내걸었다. 마침 세계대공황과 같은 극심한 경제 파탄으로 삶이 무너지는 대중이 있었다. 파시즘은 절망하는 대중에게 (노동자운동과 유대인이라는) 혐오·저주의 대상을 제시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야수적 능동성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계급적으로는 몰락한 소부르주아들이, 사회적으로는 퇴역 군인들이 파시즘의 핵심 지지자가 되고 돌격대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또한 대자본이 극심한 경제위기에 대응할 해법으로 노동자운동의 절멸을 추구하는 파시즘을 선택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특히 독일에서, 노동자계급은 파시즘 세력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세계 최강의 조직력을 갖고 있었지만,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분열을 이겨내지 못하고 허망하게 패배했다. 사회민주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파시즘과 공산당 모두의 위협으로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켜내겠다고 주장했다. 공산당은 사회민주당을 파시즘과 다를 바 없다며 사회파시즘이라고 규정짓고 파시즘 집권은 공산당 집권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분열 덕분에 손쉽게 승리한 히틀러의 나치당은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은 물론이요, 노동조합과 협동조합까지 노동자운동의 모든 요소들을 절멸시켰다. 1933년 독일에서 노동자계급이 패배한 경험은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큰 반면교사가 됐다. 1934년 프랑스 파시스트들이 독일과 비슷하게 위협적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 노동자대중은 사회당과 공산당의 단결을 아래로부터 강제해 내며 압도적인 대중의 힘으로 거리에서 파시스트들을 제압해 냈다. 파시즘의 분쇄를 위해 노동자들의 모든 힘을 결집시키는 ‘노동자 공동전선’이야말로 파시즘을 물리칠 수 있는 진정한 방안임을 입증해 낸 것이다.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파시즘을 제압해 낸 성과 위에서 거대한 전진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1936년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이 중도우파 급진당과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결성해 집권했다. 군부 파시스트들과 내전이 터진 스페인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더 폭넓게 단결할수록 파시즘을 막아낼 힘이 더 강화될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자본가 정치세력과 인민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침해하지 않도록 노동자대중의 요구와 행동에 족쇄가 채워졌기 때문이다. 인민전선 정부가 노동자투쟁을 제약하고 심지어 탄압하면서 노동자대중의 혁명적 역동성은 급격히 잦아들었다. 허약해진 인민전선은 몇 년 뒤 파시즘 세력에게 패배하고 굴복했다. 인민전선은 파시즘 세력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패배로 몰고 간 족쇄였다. 4) 전후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전성기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정점으로 한 때 유럽과 아시아에서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파시즘 세력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몰락했다. 승자는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스탈린주의 세력이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전성기가 냉전이라는 상호 대치 속에서 한동안 전개되었다. 서방 진영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뒷받침한 것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전후 호황이었다. 많은 나라에서 자본가들에게 상당한 세금이 부과됐고, 무상의료 같은 개량들이 도입됐다. ‘자본주의 안에서 개량의 지속적 확산’에 대한 낙관이 널리 퍼졌고,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서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라는 자본주의의 근본은 달라지지 않았다. 인종과 젠더에 입각한 억압·차별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식민지·종속국을 상대로 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전쟁 또한 지속되었다. 따라서 1960년대부터 흑인민권운동, 여성해방운동, 반제반전운동이 세계적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1970년대에는 세계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도 세계 곳곳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동방 진영의 스탈린주의는 소련을 넘어 동유럽과 중국 등으로 확산되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는 애초 러시아혁명이 추구했던 노동자 민주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전개됐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창출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훨씬 진전된 민주주의였다. 노동자·민중의 대표기관이 국가권력의 전권을 장악함으로써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의 숨은 지배까지 종식시켰다. 조직된 노동자·민중이 관료적 국가기구를 대체하여 국가업무의 집행자가 됐다. 노동자·민중의 대표자들에게 어떤 특권도 부여하지 않았다. 노동자·민중이 선출하는 대표자들을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었다. 생산수단을 국유화하여 이를 노동자·민중의 생존권과 해방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30년대 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노동자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관료집단의 독재로 대체했다.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유지됐지만 이제 관료집단의 특권과 국가자본의 축적을 위한 수단이 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일한 성격을 가진 체제가 동유럽과 중국으로 확산됐다. 스탈린주의가 여전히 앞세웠던 ‘사회주의 노동자국가’라는 허울과 현실 사이에는 거대한 괴리가 있었다. 스탈린주의 체제의 위선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폭발적인 투쟁이 동독, 헝가리,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5) 신자유주의 대공세 1970년대 세계 경제위기와 노동자·민중의 폭발적인 투쟁을 겪으면서 자본가계급 내부에서 대대적인 ‘혁신’이 시작됐다. 악화된 경제 환경 속에서도 자본의 이윤율을 원활히 보장할 수 있도록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를 획기적으로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리해고, 비정규직화, 임금삭감, 사유화(민영화), 규제완화, 감세, 노조무력화 등을 파상적으로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대공세가 1980년대부터 선진국들에서 시작됐다. 처음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주도한 것은 강경 보수우파였다. 정치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틀을 유지했지만, 노동자·민중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심각하게 후퇴시켰다. 1970년대 초중반부터 제3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후원 아래 들어선 군사정권들은 (이전 시기 개량의 정도가 선진국에 비해 매우 취약한 제3세계의 조건 위에서) 노동자·민중에 대한 사회경제적 공격과 군사파시즘을 결합시켰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는 세계적으로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가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주도해 나갔다. 선진국들에서는 강경 보수우파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토대로 중도우파·중도좌파가 집권했지만, 전체 자본가계급의 지상과제가 된 신자유주의 공세를 (보다 세련된 외관을 갖고) 집행했다. 제3세계에서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등장한 중도우파·중도좌파 민간정권들도 신자유주의 집행자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중도우파·중도좌파 세력이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주도한 것은 착취에 맞선 투쟁과 억압·차별에 맞선 투쟁이 서로 분열되도록 유도하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중도우파·중도좌파 정권들은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주도하며 노동자·민중을 사회경제적으로 공격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종과 젠더 등에 기초한 억압·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척하면서 종종 개량적 조치도 취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동안 억압·차별에 맞선 투쟁이 노동자·민중으로부터 분리돼 채 중간계급 지식인 중심의 개량주의 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게 하는 유인으로 작용했다. 1989~91년 스탈린주의 정권의 몰락 이후 소련과 동유럽에서도, 또한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이들 국가에서는 억압적인 권위주의 체제가 수립되거나 기존 스탈린주의 정치체제가 유지됐지만, 중도우파·중도좌파의 세계적 주도력에 이끌리는 양상을 보였다. 6) 자본주의 위기 심화와 극우세력의 준동 신자유주의 대공세와 세계화·금융화는 자본의 이윤율을 회복시킴으로써 한동안 자본주의에 새로운 부흥을 가져다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에 내재한 모순을 폭발시켰다. 이후 자본주의는 (자본의 원활한 확대재생산이 위협받는) 축적위기가 점점 더 심화되어 왔다. 자본가계급이 여전히 의지해 온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라는 기존의 방법들은 모순을 더욱 악화시킬 뿐 유효한 해법이 되지 못한 가운데, 극우세력이 강화되고 준동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왔다. 긴축정책까지 가세하며 더욱 강화된 신자유주의 대공세는 선진국 노동자·민중을 빈곤으로 내몰며 거대한 정치적 에너지를 창출했다. 빈곤화한 노동자·민중을 토대로 한편으로는 좌파의 새로운 운동이 성장해 나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주민 혐오 등에 기반한 극우세력이 큰 규모로 형성되었고 빠르게 성장해 왔다. 선진국의 생산기반을 신흥국으로 이전시킨 세계화는 국가 간 세력판도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특히 중국이 경제적 부상과 함께 최강대국의 꿈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내부적으로 전체주의 성격을 더욱 강화한 것은 선진국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보호주의와 중국 혐오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에서 극우세력의 성장을 가속시킨 또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보여준 파국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2008년 이후 금융수탈을 위한 금융화가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전개돼 왔다. 부동산·주식·암호화폐 투기에 따른 천문학적 불로소득은 노동을 경시하는 일확천금의 환상을 크게 부채질함으로써 극우세력의 세계관에 중요한 자양분을 제공했다. 지난 10여 년, 세계 곳곳에서 극우세력이 급성장했다. 많은 나라에서 집권했거나 집권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와 같은 세계적인 극우세력 성장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것은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승리였다. 그런데 트럼프 승리의 배경에는 기독교 근본주의(기독교 극우)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2025년 다시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미국과 세계의 노동자·민중을 상대로 파상적인 극우 공세에 나서고 있다. 7) 미국 극우세력의 중추로 성장한 기독교 근본주의 기독교 근본주의는 간단히 말해서 이슬람 근본주의의 거울이다. 모든 것을 성경에 적힌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화론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완고하게 창조론을 신봉한다. 성경에 나타난 고대의 사회관계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면서 가부장제, 젠더억압, 인종차별을 적극 옹호한다. 순응과 소명을 강조함으로써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자·민중의 자주적인 조직과 투쟁을 배척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비과학적인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과학에 기초한 자본주의 산업 발전과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동안 소수 종파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착취와 억압·차별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거세게 발전해 나가자 지배계급이 이를 억누를 이데올로기적·조직적 수단으로서 기독교 근본주의의 효용성을 재평가하게 됐다. 특히 1960~70년대 흑인민권운동, 반전운동, 페미니즘, 성소수자 해방운동 등이 대대적으로 확산돼 나갈 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 오늘날 미국 극우세력의 중추로 성장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본격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출발점은 1950년대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 폐지와 1960년대 인종분리정책 폐지에 대한 반발이었다. 1970년대를 거치며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은 ‘창조론’을 가르치는 백인 전용 사립 기독교 학교를 미국 전역에 5천 개나 설립함으로써 1백만 명의 학생을 수용하게 됐다. 또한 젠더평등을 명시하는 헌법수정안 거부운동을 펼쳐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기독교 근본주의는 본격적인 정치참여를 위해 1979년 ‘도덕적 다수’라는 정치조직을 설립해 유권자 등록운동과 공화당 지지 운동에 나섰다. 또한 낙태, 성소수자 권리, 공교육의 세속화, 환경운동, 페미니즘, 포르노 등 ‘미국을 타락시키는 도덕적 위기’에 맞선 ‘문화전쟁’을 선언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을 지지하여 당선에 일조했지만, 레이건이 문화전쟁에 충분히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자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게 됐다. 1989년 ‘미국기독교연합’이라는 새로운 정치조직을 출범시키고, 아래로부터 공화당을 장악해 간다는 목표 아래 주·지역 단위 역량 강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는 한편, 클린턴 탄핵 운동을 주도했다. 2000년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2세 또한 문화전쟁에서 약속한 만큼 행동하지 않았지만, 복지서비스를 대거 교회와 기독교 자선단체에 넘기는 선물을 안겼다. 기독교 근본주의 목사들이 교도소 프로그램, 직업훈련, 청소년 혼전순결 같은 온갖 복지사업에 관여하게 됐다. 신자들의 모든 삶과 소비를 포괄하며 이미 거대한 규모로 발전해 가던 기독교 산업을 더욱 확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오바마 정부가 부패한 금융자본을 구제하며 가난한 노동자·민중을 희생양으로 만든 것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급격히 성장하는 비옥한 토양이 됐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오바마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실망을 활용하여 자신들이 장악한 주·지역에서 문화전쟁을 대대적으로 강화했다. 2016년 대선 무렵, 기독교 근본주의는 공화당 지역 조직의 다수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트럼프를 자신의 후보로 선택하고 당선시켰다. 트럼프는 기독교 근본주의에 크게 두 가지를 약속했고 실행에 옮겼다. 연방판사들에 대한 통제권과 이스라엘 주재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이었다. 특히 사법부에 대한 통제권이야말로 문화전쟁에서 승리하는 데서 핵심이라고 기독교 근본주의는 판단했다. 트럼프 집권 기간 문화전쟁에 동조하는 보수 대법관들이 세 명이나 임명됐고, 결국 낙태권을 부정하는 대법원 판결로 이어졌다. 트럼프 집권 이후 낙태권, 성소수자, 흑인 등에 대한 극우적 공격이 미국 전역에서 파상적으로 펼쳐졌다. 바이든 집권 기간에도 공화당이 장악한 주를 중심으로 공격이 계속됐다. 그러나 민주당의 태도는 위선적이었다. 집권 이전에는 흑인에 대한 경찰 폭력을 비난했지만, 집권 이후에는 경찰 예산을 대폭 증액시켜 주었다. 이민자에 대한 트럼프 정책을 비난해 놓고 강경 차단 정책을 똑같이 실행했다. 민주당은 기독교 근본주의를 중추로 한 극우세력의 공세에 맞서는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2025년부터 시작된 트럼프 2기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주도하는 문화전쟁을 지속하는 데 덧붙여 ‘테슬라 무노조경영’으로 악명 높은 머스크를 앞세워 연방 공무원 대량해고를 시작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대공세로 나아가고 있다. 3. 한국에서 극우세력의 성장 한국에서 극우세력의 성장 과정은 세계적인 흐름을 반영하면서도 고유의 역사를 갖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극우세력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1) 일제강점기 친일파로부터 군사파시즘의 중추세력까지 한국 극우세력의 기원은 일제강점기 친일파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군정에게 중용된 친일파는 이승만 정권 수립 이후 경찰·군대·행정·사법 등 국가기구의 중심세력이 되었으며, 또한 적산불하와 원조특혜 등을 통해 자본가계급의 근간이 되었다. 이들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기간 동안 군사파시즘을 떠받치는 중추세력으로 기능했다. 2) 1987년의 제한된 민주화 속에 잔존한 극우세력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되어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정점에 이르렀던 노동자·민중의 민주주의 투쟁은 군사정권과 야합한 부르주아 보수야당의 배신에 가로막혀 절반의 승리만을 거둔 채 멈춰 섰다. 민주주의는 껍데기로만 쟁취되었고, 군사파시즘은 온전히 청산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세력의 주류였으며 군사정권 시절 박정희·전두환을 떠받치던 극우세력은 1987년의 형식적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군대·경찰·행정·사법 등 국가기구 곳곳에서 강력한 기반을 유지했다. 파시즘의 잔재는 ‘1987년 체제’라는 제한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으로 스며들었고 지속되었다. 1990년 전두환·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3당 합당’에 나섬으로써 (오늘날 국민의힘의 원조라 할)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군사정권 주역들과 보수야당 온건파의 결합이었다. 처음에는 군사정권 후예들이 민주자유당의 주류였다. 하지만 1993년 김영삼 정권에 의해 군부 내 하나회 세력이 제거되고 1995년 전두환·노태우가 5·17 쿠데타로 내란죄 처벌을 받으면서 주도권이 보수야당 출신의 공화주의 보수우파에게 넘어갔다. 지도부를 잃고 중핵이 와해된 군사정권의 잔존 세력은 정치적 생존을 위해 공화주의 보수우파로 변신했다. 1997년 IMF 경제위기를 전후해 김대중이 이끌던 보수야당 급진파가 ‘신자유주의 중도우파’로 재정립할 때, (군사정권 잔존세력을 포괄한) 공화주의 보수우파는 ‘신자유주의 보수우파’로 재정립했다. 이후 두 세력은 1998년의 김대중 정부부터 2024년의 윤석열 정부까지 자본가정당이라는 근본적 본질에서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공세를 집행한다는 핵심 정책에서도 엇비슷한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두 세력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보수우파가 집권할 때마다 그 속에 내재한 극우적 본성을 드러내면서 노동자·민중을 더욱 거칠게 공격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2009년 쌍용차 파업에 대한 살인적 진압, 2010~12년 금속산업 민주노조들에 대한 와해 공격, 이명박·박근혜 정권 내내 계속된 KBS·MBC 방송 장악, 박근혜 정권 시기 문화계 블랙리스트, 2015~16년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 공세, 2022~24년 윤석열 정권의 화물연대·건설노조 등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극우적 공격은 노동자·민중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렀다. 2016~17년 박근혜 퇴진투쟁이 폭발하고 결국 탄핵으로 귀결되었던 것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극우적 공격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반격이 축적되고 결집한 결과였다. 3) 박근혜 탄핵에 맞서 극우세력의 부활을 이끈 기독교 극우 그런데 박근혜 탄핵은 다시 극우세력이 새롭게 부활하는 반작용을 낳았다. 노동자·민중의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 맞서 극우세력의 ‘태극기집회’가 출현했다. 1997년 이후 20여 년 동안 신자유주의 보수우파라는 외피에 봉인돼 있던 극우세력의 목소리가 (군부에게 노골적으로 쿠데타를 호소하는 등) 거리에서 거침없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2017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탄핵이 최종 확정될 무렵, 태극기집회는 거리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태극기집회에는 예비역 군 장성 등 군사정권 후예들도 결합했지만, 극우세력의 부활을 주도한 것은 단연 전광훈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극우였다. 19세기 말 한반도에 들어온 기독교(개신교)는 유럽으로부터 전파된 천주교와 달리 주로 미국으로부터 전파됐다. 따라서 기독교는 한국사회 안에서 미국식 세계관과 가치관을 유포하면서 친미세력의 구심 역할을 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기독교 일부가 반독재투쟁에 나서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기독교는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치는 보수 세력으로 기능했다. 특히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1990년대를 거치며 대형교회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기독교의 보수적 성격이 더욱 강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의 한 부분으로서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반공’을 신앙보다 앞세워 왔던 기독교 극우가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상당 부분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가 1980년대 이후 줄기차게 정치세력화를 추진한 영향이었다. 애초에 기독교가 도입될 때부터 미국 남부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던 것의 자연스런 결과이기도 했다. 기독교 극우는 2004년 한국기독당(1.00%)을 시작으로 총선이 열릴 때마다 비례대표 선거에 후보를 내세웠다. 2008년 기독사랑실천당(2.59%), 2012년 기독자유민주당(1.20%), 2016년 기독자유당(2.63%)을 내세웠다. 그러나 한 번도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한편 기독교 극우는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권과 상당한 교감관계에 있었다. 보수 기독교 전반이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결집했다. 전광훈이 “이명박 장로를 찍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지워 버린다”고 설교하여 처음으로 유명세를 탔다. 이명박 정권은 2009년 “임신중지와 비혼이 저출산의 원인”이라며 낙태 단속 강화를 선언했다. 그러자 2010년 기독교 기반의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불법낙태’를 상습 시술했다며 산부인과 3곳과 의사 8명을 형사고발했다.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가 수행하는 ‘문화전쟁’을 한국에서 시도해 본 것이었다. 결과는 양면적이었다. 한편으로 낙태수술을 위축시키는 효과가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반발 여론을 크게 불러일으키며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꾸준히 세력을 확산해 가던 기독교 극우에게 2016~17년 태극기집회는 획기적인 교두보가 됐다. 박근혜 탄핵은 흩어져 있던 극우 성향의 인물과 세력들이 하나로 결집하는 계기를 만들어 줬다. 그런데 기독교 극우의 조직력과 활력이 고엽제전우회나 어버이연합 같은 전통적인 극우성향 관변단체들을 압도했다. 기독교 극우가 새롭게 부활한 극우세력을 이끌게 됐다. 4) 문재인 정권 시기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의 성장 문재인 정권을 지나는 동안 기독교 극우의 세력 확산에는 제동이 걸렸다. 2019년 ‘황교안 전도사’를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대표로 밀어 올렸지만, 2020년 총선에서 참패했다. 비례대표로 내세운 기독자유통일당(1.83%)도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입당전술을 통해 국민의힘 안에서 영향력 확산을 시도했지만, 신자유주의 보수우파로서 국민의힘을 주도한 김종인과 이준석은 ‘아스팔트 극우’와의 관계단절을 공식화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 아래서 극우적 성향을 가진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가 2030 남성들 사이에서 상당한 규모로 형성됐다. 처음에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허울뿐인) ‘공공기관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대한 일부 정규직 청년들의 엘리트주의적 반발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조국사태로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평등·공정·정의’의 허구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청년들이 광범하게 반발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권의 허울뿐인 ‘성평등’ 정책을 비난하며 2030 남성들을 반페미니즘으로 결집시켜 세력화하려는 이준석의 정치적 시도가 큰 반향을 얻었다. 문재인 정권의 성평등 정책은 ‘공공부문 여성 대표성 확대’ 등에 중점을 두었을 뿐, OECD 최악의 성별임금격차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보편적 고용안정과 생활임금 보장 같은 (자본을 강제해야 하는) 실질적인 문제에는 눈을 감는, 그야말로 껍데기뿐인 정책이었다. 이준석의 반페미니즘 선동에 상당수의 2030 남성들이 호응한 배경에는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면서 맞닥뜨리게 된 고통스런 현실과 암울한 미래가 있었다. 물론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는 여성에 대한 혐오·차별·억압의 강화를 통해 남성 청년의 위기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극우적 성향을 내포한 것이었다. 결국 2022년 대선에서 이준석의 조언대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앞세운 윤석열은 20대 남성에게서 58.7%, 30대 남성에게서 52.8%의 지지를 얻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2030 남성 상당수의 반페미니즘 세력화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2017년 6월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이미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임한 문재인에게 20대 남성의 87%가 지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허울뿐이고 위선적인 페미니즘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 모두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꿔나가는 진정한 페미니즘이 실행됐더라면, 2030 남성들을 혐오정치로 묶어세우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5) 윤석열 정권 시기 극우세력의 분산 검찰이라는 핵심 관료조직을 틀어쥔 윤석열은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된 뒤 이준석으로 대표되는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와 손을 잡고 대선을 치렀다. 그러나 윤석열은 집권 직후 이준석을 내쫓고 국민의힘을 장악했다. 이후 윤석열은 노골적으로 국민의힘 대표선거에 개입하고 대표에게 사퇴를 강요하는 등 불법적이고 반공화주의적인 당무개입을 지속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을 연상케 하는 극우적 행보였다. 그러나 국민의힘의 다수 정치인들은 친윤계라는 이름 아래 윤석열에게 줄서고 맹목적으로 지지했다. 윤석열은 극우적인 정책들도 대거 밀어붙였다. 화물연대와 건설노조 등을 상대로 광포한 탄압을 자행했다. 여론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멈춰서긴 했지만 주69시간 노동제 도입을 시도했다.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 폐지 등 젠더평등에 반하는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였다.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동조하고,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 배상’ 대법 판결을 무력화했으며, 한미일 동맹 강화와 전쟁연습 확대로 전쟁위기를 고조시켰다. 공정과 상식을 앞세워 놓고서 본인과 부인의 의혹에 대한 수사는 철저히 거부했다. 윤석열의 거듭되는 극우적 행보는 여론을 크게 악화시켰고, 결국 2024년 4월 총선에서 야권의 압승을 초래했다. 총선 이후에도 윤석열의 지지율은 계속 하락했다. 2024년 11월초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윤석열의 지지율은 17%까지 하락했다. 특히 20대 11%와 30대 10%로 청년들 사이에서는 더욱 지지기반을 상실했다. 윤석열의 총선 패배와 지지율 하락은 윤석열, 기독교 극우,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가 서로 분산돼 있는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2021년 이준석이 ‘아스팔트 극우’와의 관계 단절을 추진한 이후 기독교 극우와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는 서로 단절돼 있었다. 2022년 윤석열이 이준석을 무리하게 내치면서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와 윤석열의 관계도 단절되었다. 그러나 극우세력의 성장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기독교 극우는 2024년 총선에도 자유통일당(2.26%)을 내세워 정치세력화를 시도했다. 2017년 이후 대거 등장하여 세력을 키워 온 극우 유튜버들은 특히 부정선거 음모론을 활용하며 꾸준히 구독자를 늘려 나갔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극우 유튜버들의 성장은 그 열성 구독자로 윤석열을 조직해 낼 정도에 이르고 있었다. 한편 범보수 기독교는 2024년 10월말 차별금지법과 동성혼을 반대하면서 ‘200만 연합예배’라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6) 군사파시즘 부활을 시도한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 2023~24년 공식 석상에서 ‘반국가세력 척결’을 되풀이해서 외치던 윤석열은 12월 3일 비상계엄을 전격 발동하며 친위쿠데타에 나섰다.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한 12·3 담화와 극우세력의 궐기를 촉구한 12·12 담화를 통해 반국가세력의 핵심으로 민주당을 지목했다. 또한 부정선거 진실규명을 계엄 선포의 주된 이유로 내세웠다. 윤석열은 선관위 직원들을 고문하여 부정선거 증거를 조작해 낸 뒤 4월 총선을 무효화하고 국회를 해산하려 했다. 체포명단에 이재명은 물론이요, 한동훈까지 포함시킴으로써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자 했다. 계엄선포 직후 발표된 포고령 제1호는 △국회·지방의회·정당의 활동 금지 △결사·집회·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 △언론과 출판에 대한 계엄사의 통제 △파업·태업·집회 금지 △영장 없는 체포·구금·압수수색 등 광범한 기본권 박탈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압살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 금지 △가짜뉴스·여론조작·허위선동 금지 △포고령 위반자 처단 등 모든 비판과 저항을 반국가세력의 국가전복 행위로 규정하여 난폭하게 탄압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다면, 결과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것은 노동자·민중이었을 것이다. 체포명단에는 민주노총 위원장이 포함돼 있었다. 포고령은 파업·집회·언론·정치활동의 자유를 압살함으로써 노동자·민중의 권리를 전면적으로 박탈하려 했다. 만일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다면, 한마디로 말해서 파업과 민주노조가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민주노총도 존재할 수 없고, 좌파정치조직·진보정당·노동단체·시민단체 등도 모두 존재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본가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계급이 쟁취해 온 모든 성과들을 박탈하려고 나섰을 것이다.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박정희의 1961년 5·16 쿠데타와 1972년 10·17 쿠데타, 전두환의 1979년 12·12 쿠데타와 1980년 5·17 쿠데타를 재현하려 한 시도였다. 만일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다면 1961~1987년의 군사파시즘이 전면적으로 부활했을 것이다. 따라서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1987년의 제한된 민주화에 입각한 현 헌정체제마저 반인민적 음모와 무력을 통해 일거에 전복시키려 한, 인민에 맞선 ‘내란’이었다.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2017년 이후 극우세력이 부활하고 다시 성장해 온 사회적·정치적 변화 위에서 군사파시즘의 부활이라는 극우세력의 잠재된 열망이 전격적으로 실행에 옮겨진 사건이었다. 또한 한국에서는 군사파시즘의 역사와 잔재 때문에 극우세력의 성장이 중간과정을 생략한 채 친위쿠데타 등을 통한 군사파시즘 부활 시도로 매우 빠르게 진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계엄선포 직후 국회로 달려간 수천 명과 그들을 응원한 수백만 명의 노동자·민중 덕분에, 그리고 군대와 경찰이 유혈사태를 감수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덕분에,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는 조기에 실패했다. 극우세력의 성장이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자를 휘어잡을 정도에 이르렀고, 이것이 군사파시즘의 역사와 잔재 때문에 조기에 파시즘 부활 시도로 이어졌지만, 친위쿠데타를 주도한 자들의 역량 부족과 충동적 성격 때문에 어설프게 준비하고 실행했다가 실패로 끝난 것이었다. 7) 12·3 친위쿠데타 이후 극우세력의 급성장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 실패는 탄핵과 내란죄 수사라는 강력한 역풍을 불러왔다. 그러나 2017년 이후 부활·성장해 온 극우세력은 다시 강력한 저항과 반격에 나섰다. 윤석열은 몰락의 결정적 위기 앞에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선언하고 극우적 언행들을 거침없이 쏟아냄으로써 일거에 극우세력의 구심으로 부상했다. 그동안 윤석열의 극우적 행보를 맹목적으로 지지해 오던 친윤계 의원들도 윤석열을 따라 명확하게 극우의 길로 들어섰다. 갑자기 극우세력이 제도정치권 안에 강력한 교두보를 형성하게 됐고, 영향력이 급격하게 확산됐다. 12월 중순 탄핵찬성 여론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에도 극우세력은 탄핵반대로 20~25%를 집결시켰다. (12월 12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탄핵찬반은 75%대 21%를 기록했다.) 12월 14일 윤석열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극우세력은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친윤계 지도부의 구축과 함께 국민의힘 자체가 극우정당으로 변신했다. 기독교 극우, 극우 유튜버들,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탄핵반대 집회에서 하나가 됐다. 극우세력은 ‘민주당의 줄탄핵과 국정 발목잡기 때문에 계엄을 하게 됐다’며 계엄사태의 책임을 민주당에게 떠넘겼다. 부정선거 음모론과 중국 혐오를 결합시켜 온갖 가짜뉴스들을 만들어냈다. 이런 상황에서 1월 3일 (사실상 민주당에 의해 좌우되는) 국회 탄핵소추단이 탄핵소추 근거에서 내란죄 부분을 철회하면서, 불에 기름을 끼얹는 효과를 낳았다. 내란죄가 탄핵소추의 가장 중요한 논거였고 극우세력과의 대결에서 핵심의제가 된 상황에서 조기 탄핵심판을 위해 내란죄를 철회한다는 것은 첨예한 대결 상황에서 탄핵의 정당성을 스스로 갉아먹는 어리석은 자충수였다. 민주당의 어설픈 꼼수는 국민의힘에게 ‘사기 탄핵’을 운운하면서 전통적인 국민의힘 지지자들을 대거 탄핵반대 지지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실책을 물고 늘어지면서, 탄핵심판과 내란죄 수사를 내란수괴에 대한 준엄한 단죄의 과정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당들 간의 이전투구의 공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나갔다. 민주당의 행태는 또한 2030 남성들 가운데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를 강력하게 자극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의 위선을 비난하며 윤석열을 지지했으나 이준석 퇴출 이후 윤석열로부터도 등을 돌린 채 이완돼 있었다. 계엄 이후 탄핵소추안 가결까지도 이들은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마주하게 된 민주당의 위선적 행태로부터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의 상당수가 자기정당성을 획득하고 극우세력으로 활성화했다. 전통적인 국민의힘 지지자들과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의 상당 부분이 합류한 결과, 1월 중순 탄핵반대 여론이 35~40%로 올라섰다. (1월 17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탄핵찬반은 57%대 36%를 기록했다.) 22-03-09 대선출구조사 윤석열지지 24-11-07 한국갤럽 윤석열지지 24-12-12 한국갤럽 탄핵반대 25-01-17 한국갤럽 탄핵반대 25-02-14 한국갤럽 탄핵반대 전체 48.4% 17% 21% 36% 38% 20대이하 45.5% 11% 08% 25% 29% 30대 48.1% 10% 15% 29% 35% 40대 35.4% 09% 13% 31% 25% 50대 43.9% 15% 13% 27% 29% 60대 64.8% 23% 36% 54% 56% 70대이상 69.9% 34% 43% 50% 59% 극우세력의 1월 19일 서부지법 폭동은 탄핵반대 여론이 급격히 확대된 상황에서 발생했고, 윤석열의 12월 3일 비상계엄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극우세력은 격렬하고 끔찍한 공격성을 보여줬다. 경찰을 구타하고 건물을 파괴했으며 서버까지 탈취했다. 태극기집회를 주도하던 60대 이상 노년층만이 아니라 4050 중년층과 2030 청년층까지 전 세대가 골고루 폭동에 가담했다. 서부지법 폭동은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비롯한 극우세력이 끊임없이 극우 대중의 행동을 선동하고 조직해온 결과였다. 극우세력은 인터넷 공간에서 공공연히 폭동을 사전 모의하고 고무했다. 극우 유튜버들은 폭동 과정을 생중계했다. 백골단, 북벌의병단 등 돌격대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는 단체들까지 속속 등장했다. 이후 한 달 동안 여론지형이 고착된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극우세력의 선동과 세력과시가 계속되고 있다. (2월 14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탄핵찬반은 57%대 38%를 기록했다.) 극우세력의 공세는 이제 헌법재판소로 집중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말로써 온갖 위협과 비난을 쏟아냈다면, 조만간 헌법재판소에 대한 압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조직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계몽을 위한 경고용 계엄’부터 ‘선거연수원 중국인 99명 체포’까지 극우세력의 온갖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억지와 가짜뉴스로 가득 차 있다. 지금 극우세력에게 중요한 것은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진짜로 무엇이었느냐가 아니다. 부정선거가 실제로 있었느냐도 아니다. 지금 극우세력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윤석열을 권좌에 복귀시켜 (또는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권을 세워) 자신들이 말하는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겠다는 야수적 욕망과 집단적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 4. 극우세력 분쇄와 사회대변혁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관점 극우세력이 준동하는 현 상황은 노동자계급에게 거대한 위기와 거대한 기회가 병존하고 있음을 뜻한다. 극우세력을 왜 분쇄해야 하는가? 극우세력을 어떻게 분쇄할 수 있는가? 극우세력을 분쇄하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나씩 살펴보자. 1) 극우세력 부상은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한 결과다 지난 10여 년 세계적으로 극우세력이 부상한 것은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한 결과다. 경제적으로 빈곤해진 노동자·민중의 상당 부분이 누군가에 대한 혐오·차별·억압을 통해 자신들만의 생존을 도모하고자 하는 혐오정치에 빠져들었다. 이들의 야수적 능동성을 불러낸 극우세력은 언제나 존재해 왔지만,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면서 급격하게 세력을 불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극우세력의 부상을 이끄는 진정한 힘은 자본가계급에게서 나온다. 갈수록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자본가계급이 살아남을 방도는 노동자·민중에 대한 착취·억압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다. 노동자·민중에게 대공세를 펼칠 수 있으려면, 자본가계급에게는 강력한 정치적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본가계급의 의도를 드러내면 노동자·민중의 폭발적인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이주민, 성소수자, 여성, 흑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정치는 얼핏 자본가계급과 직결돼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극우세력이 부상하는 동안 자본가계급은 미소를 감추며 조용히 돕는다. 극우세력이 충분히 강력해지면 이제 자본가계급이 전면에 부상하여 자신의 의도를 노골화한다. 미국에서 기독교 극우와 트럼프의 ‘문화전쟁’을 중심으로 극우세력이 강력하게 부상한 뒤, 이제 ‘테슬라 무노조경영’의 머스크가 전면에 나서 연방공무원 대량해고를 시작으로 노동자계급에 대한 대공세에 나서는 것은 이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에서도 극우세력의 부상 뒤에는 자본주의 위기 심화가 깔려 있다. 이명박 정권이 이른바 7-4-7 공약(7% 경제성장, 4만 달러 국민소득, 세계 7위 경제규모)을 내걸었다 실패한 이후 어떤 자본가 정부도 그런 식의 공약을 더 이상 내걸 수 없을 정도로 자본주의 ‘성장 엔진’이 꺼져버렸다. 높아지는 무역 장벽과 이윤율 하락 속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안정적 일자리의 지속적인 축소, 자영업자의 몰락 등이 초래하는 거대한 불안감이 이미 만성화되어 있다. 자본주의 위기가 실업과 불평등, 생활의 불안정성,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계속 낳고 있다. 청년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고, 수많은 노인들도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여성들은 저임금 불안정노동을 집중적으로 강요당하면서 가사노동까지 이중의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이처럼 청년, 노인, 여성 등을 중심으로 사회 한쪽에서 극심한 고통이 누적되고 있었고, 이것이 극우세력의 부상에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광장의 진출에) 상당한 에너지를 공급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한국의 극우세력 부상과 세계적인 양상 사이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노동자·민중의 빈곤화가 상당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 극우세력의 부상에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군사파시즘의 잔재와 연결된 정치적 요소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혐오정치보다 ‘반국가세력 척결’로 표현되는 반공정치가 주도적 역할을 한다. 혐오정치로부터 출발한 2030 청년층으로 최근에 극우세력이 급격히 확산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군사파시즘에 향수를 느끼는 6070 노년층만큼 완고하고 강력한 기반을 형성하지 못했다. 많은 나라에서 집권한 극우세력이 노동자·민중을 극심하게 공격하면서도 파시즘으로는 쉽게 진화하지 않은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극우세력의 부상이 조기에 군사파시즘 부활 시도로 나타났다. 많은 나라에서 주민의 다수가 빈곤화로 허우적대며 극우세력에게서 희망을 찾게 된 것과 달리,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주민의 다수가 극우세력의 부상을 심각하게 경계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가 자본주의 위기 심화로 극우화 강풍에 휩쓸리는 동안 한국은 이른바 K-시리즈에 열광하며 ‘성장과 안정’에 관한 환상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위기로부터 비켜선 채 그럭저럭 안온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한국의 자본주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경제적 양극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직시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조합 덕분에 어느 정도 방어막을 갖고 있는 조직 노동자들의 다수가 그랬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극우세력이 부상한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극우세력은 대중의 고통과 절망을 자양분 삼아 소리 없이 계속 성장해 왔고, 지금 한국 사회를 심각한 정치적 위기로 내몰고 있다. 격동하는 현 정세를 올바로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합리성이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는 헌법재판소와 법원이 알아서 심판해 줄 일이고, 극우세력은 조만간 힘을 잃고 잠잠해질 것이다. 그러나 12·3 이후 우리는 부르주아 법질서가 혼란과 불확실성을 해결하는 데 얼마나 무능력한지를 거듭해서 확인했다.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투쟁이 없었다면, 윤석열 탄핵소추 가결도 체포·구속도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부지법 폭동을 보았고, 백골단의 부활을 보았으며, 헌법재판소를 둘러싼 또 다른 폭력사태를 예감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자본주의 위기 심화로 시달리는 자본가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깨뜨리고 더욱 강력한 착취·억압 체제를 수립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극우세력의 부상을 조용히 지원하면서 자신들이 전면에 나설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아래서 경찰, 검찰, 법원 등 국가기구는 결국 철저히 자본가계급의 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국가기구가 노동자·민중의 정당한 투쟁을 ‘법’의 이름으로 얼마나 잔인하게 탄압해 왔는지 잘 알고 있다. 지금 당장은 국가기구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척 하고 있지만, 극우세력의 성장이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국가기구 자체가 아주 빠르게 극우 체제의 수호자로 변신할 것이다. 그러므로 극우세력의 부상과 준동은 전체 노동자·민중의 삶을 송두리째 뒤엎을 수 있는 거대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노동자·민중이라면 누구도 이 거대한 위협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 전체가 송두리째 뒤집어지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단체협약이 노동자를 지켜줄 수 없다.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한국 사회의 시계를 1987년 이전으로 돌리려 했던 것처럼, 극우세력이 승리한다면 (민주노조, 파업권, 진보정당·정치조직, 경제적 성과 등)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 노동자계급이 쟁취해 온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에 대한 혐오·차별·억압 또한 극단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극우세력의 부상과 준동은 노동자·민중에게 거대한 기회 또한 제공하고 있다. 눈앞의 삶에 파묻혀 살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반응하고 행동하도록 내몰기 때문이다. 노동자·민중이 거대하게 각성하고 단결한다면 극우세력을 얼마든지 분쇄해 낼 수 있다. 노동자·민중의 힘으로 극우세력을 분쇄해 낸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회 전체에 대한 자본가계급과 국가기구의 장악력은 결정적 타격을 받을 것이다. 자신감에 충만한 노동자·민중은 이제 모두의 해방을 위해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를 묻고 꿈꾸고 실행해 나갈 것이다. 노동자·민중은 1987년 이후 획득해 온 모든 것을 훨씬 초과하는 거대한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지배계급이 불러온 정치적 위기가 야만을 향한 거대한 위협과 사회변혁을 향한 거대한 기회를 동시에 던지고 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제돼 왔던 정치체제 자체가 공격받는 상황에서, 그동안 익숙했던 사고틀, 근시안적이고 조합주의적인 시야로는 격동하는 현 정세를 결코 읽어낼 수 없다. 계급적·변혁적 시야로 현실을 치열하게 다시 바라봄으로써, 극우세력의 부상과 준동이 세계와 한국을 뒤흔드는 이 격동하는 세상을 제대로 읽어내고 올바른 실천과제를 도출해 내자. 2) ‘민주당과 연합’은 극우세력 분쇄 방안이 될 수 없다 극우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노동자·민중은 민주당과 연합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극우세력에 반대하는 세력을 최대한 모아야 그 힘도 강해질 거라는 주장이 그럴싸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과 연합’은 노동자·민중의 극우세력 분쇄 방안이 될 수 없다. 극우세력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광범한 노동자·민중이 능동적 투쟁주체로 일어서야 하는데, ‘민주당과 연합’은 그것을 정면으로 가로막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명확히 자본가계급을 대변하는 정당, 즉 자본가정당 가운데 하나다. 최근 이재명이 민주당을 가리켜 ‘(진보가 아니라) 중도보수’라고 했는데, 이는 정확한 자기진단이다. 과거 김대중은 여러 차례 민주당을 ‘중도우파’라고 스스로 규정했다. 2015년 문재인도 ‘보수정당’, 2018년 이해찬도 ‘중도우파’라고 민주당을 규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당이 배출한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은 하나같이 자본가계급을 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로 기능했다. 민주당은 자본가정당답게 언제나 사회 전체의 대의보다 자신들의 권력 장악과 유지에 최우선 가치를 둔다. 12·3 이후에도 극우세력의 철저한 분쇄보다 자신들의 재집권을 우선시했다. 민주당은 윤석열 탄핵소추 가결 직후 내란 세력들에게 국정안정협의체를 제안했다. 탄핵심판이 열리자마자 탄핵소추 근거에서 내란죄를 철회했다. 윤석열 체포 직후 극우세력의 폭력성이 거침없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재명은 “이제 민생과 경제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리고선 반도체특별법 주52시간 특례를 통해 근로기준법을 무력화하려 했다. 트럼프가 미국의 가자지구 소유를 발표할 때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고, 이후 이스라엘 대사와 접견했다. 이 모든 것은 대선을 앞당기고 중도층의 표심을 잡으려는 계산과 연결돼 있다. 그런 민주당의 행태는 윤석열과 국민의힘에게 반격의 명분을 제공했고, 극우세력에 맞선 투쟁을 교란시켰다. 만일 민주당 정권이 등장한다면, ‘민주당과 연합’은 극우세력과의 결전에서 패배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본가계급에게 봉사할 민주당 정권은 다시금 대중 속에 거대한 실망과 환멸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노동자·민중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당과 연합이 아니라 민주당 정권에 맞선 힘찬 투쟁이다. 만일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독자적인 전망을 제시해 내지 못한다면 대중의 실망과 환멸은 고스란히 극우세력의 성장에 거대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이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윤석열 정권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문재인 정권이었다. 문재인 정권은 2016~17년 촛불항쟁으로 표출된 노동자·민중의 열망과는 반대의 길을 갔다. 또 하나의 자본가정권답게 최저임금을 찍어 눌렀고, 집값 폭등을 방조했으며, 특권층의 부패를 감쌌다. 윤석열 정권의 광포한 건설노조 탄압을 먼저 시작한 것도 문재인 정권이었다. 윤석열 정권은 오로지 문재인 정권에 대한 대중의 광범한 실망과 환멸을 토대로 집권할 수 있었다. 그보다 앞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등장시킨 것 또한 김대중·노무현 정권이었다. 1998년부터 10년 동안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펼친 신자유주의 공세는 대량 정리해고의 충격과 함께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을 불러왔다. 권력의 단맛을 본 민주당은 본격적으로 반동적인 주류 지배세력의 일부가 되었다. 민주당 정권 10년에 대한 대중의 광범한 실망과 환멸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연속 집권을 가능케 했다.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2021년 1월 미국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극우 시위대가 의사당을 습격했을 때 세계는 경악했다. 트럼프가 폭력과 파괴를 부추겨 미국 민주주의를 훼손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트럼프가 다시 집권했다. 민주당 정권이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배신하면서 극우세력에게 다시 길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노동자·민중의 투쟁에 기반하는 진실한 노동자정당의 부재 속에서 발생한 거대한 비극이다. 민주당은 노동자·민중의 삶을 바꿀 수 없다. 지금 노동자·민중에게는 가난·실업·전쟁에 맞서는 투쟁, 공공성 확대와 복지를 위한 투쟁, 여성·성소수자·장애인·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 비정규직 철폐와 노동시간 단축 등 청년들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한 투쟁이 절실하다. 하지만 그런 투쟁들이 전개될 때마다 민주당은 다시 한 번 자본가정당답게 반동적인 태도를 되풀이할 것이다. 노동자·민중에게는 ‘민주당과 연합’ 말고 다른 길이 있다. 극우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압도적 다수의 힘이 있다. 이미 노동자·민중은 그런 역량을 분명히 보여줬다. 수백만이 윤석열 탄핵과 구속을 위해 거리로 나왔고 남태령, 한강진에서 중요한 투쟁을 해냈다. 극우세력을 제압할 힘은 의회 다수 의석이 아니라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능동적 투쟁에서 나온다. 노동자계급은 엄청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작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만 명이 결집해 있는 민주노조는 이데올로기전의 중요한 거점이다. 조직된 노동자들은 수많은 현장에서 선전할 수 있고, 선동할 수 있고, 현장 토론을 조직할 수 있다. 110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살아 있는 스피커가 된다면 극우 유튜버들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저들보다 더 과감하게 행동하고, 총파업을 비롯한 집단적 힘을 발휘하면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면, 민주노총 조합원과 미조직 노동자, 2030 청년들의 에너지가 결합한다면 저들의 물리력을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 노동자계급은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나 물리적 측면에서나 압도적인 힘으로 극우세력을 격퇴할 수 있다.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것만이 극우세력을 분쇄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극우세력 분쇄를 위한 투쟁 속에서 철저하게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견지해 나가자. 민주당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민주당에 맞서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제기해 나가자. 민주당과 독립적인 노동자투쟁을 확대하고, 그러한 투쟁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진전시켜 나가자. 3) 노동자계급의 힘으로 극우세력을 분쇄하고 사회대변혁으로 전진해야 한다 12·3 이후 지금까지 투쟁에서 민주노총의 역할은 모순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상당한 역할을 해왔지만, 자신의 잠재력에 비해서는 매우 제한된 수준에 그쳤다. 민주노총은 12월 4일 새벽 3시를 기해 ‘윤석열 퇴진시까지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5일, 6일, 11일 세 번에 걸쳐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를 중심으로 5만에서 10만 정도가 참여하는 제한된 총파업에 그쳤다. 민주노총은 주말 집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았고 초기에는 상당수 조합원들이 주말 집회에 참여했다. 민주노총이 주말 집회에서 경찰 바리케이드를 밀어내고 길을 열어낸 모습은 광범한 미조직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농민투쟁단이 남태령을 넘는 순간에도 길을 여는 역할을 했다. 1월 3~5일 한강진의 내란수괴 윤석열 체포·구속 투쟁에서도 민주노총 확대 간부와 조합원이 광장 대중과 함께 투쟁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끌어내지 못했다. 민주노총이 위력적인 총파업을 조직해 냈다면, 폭발적인 광장투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을 텐데, 민주노총은 그런 역할을 회피했다. 민주노총은 광장 청년대오의 환호에 자족할 뿐 총파업을 조직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광장에 참여하는 조합원의 대오도 크게 줄어들었다. 반면 12·3 이후 광장에 쏟아져 나온 청년 미조직 노동자들은 계엄과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사의 주인으로 발돋움해 왔다.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와 섬뜩한 포고령은 대중을 심각한 충격과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대중은 잠시 위축됐던 감정과 불안을 금세 떨쳐냈다. 거듭되는 집회와 거리 투쟁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며 심리적 불안과 공포를 저항으로 승화했다. 계엄과 내란을 처음 경험한 청년 대중은 수천수만 노동자의 참여를 보며 심리적 안정감을 느꼈고 사회적 소수자와의 연대를 넓혀가며 자신감을 쌓아갔다. 저항의 날들이 더해질수록 지금껏 의심하지 않았던 자유민주주의 이념, 기존 보수정치가 쥐락펴락해 온 국가에 대한 의문을 싹 틔우며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에 대한 본능적 갈망을 분출했다. 광장의 청년 대중 다수는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와 실업자들이다. 이들은 한국 자본주의 체제에서 처음으로 부모 세대보다 가난해진 세대다. 온갖 형태의 비정규직과 실업의 굴레에 묶여 미래의 안정적 삶을 꿈꾸지 못하고 절망했다. 그러나 계엄과 내란 정세에서 역사의 무대로 뛰어나와 지금까지의 고통과 절망을 딛고 새로운 삶과 희망을 찾는 용기를 내고 있다. 광장의 청년 대중은 조직노동자에 대한 과거의 불신을 뒤로 하고 민주노총 조직노동자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구사대와 용역깡패를 동원한 한화오션의 악랄한 노동탄압에 맞선 거통고 조선하청노동자들의 투쟁에, 1년 넘게 먹튀자본 닛토덴코에 맞서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불탄 공장을 지키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들의 투쟁에, 어처구니없는 대법원 패소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에 맞서 장기투쟁을 벌이는 세종호텔 노동자들의 투쟁에, A학교에서 벌어진 성폭력 축소은폐에 맞서다 학교에서 쫓겨나고 해임당한 지혜복 교사의 투쟁에 ‘말벌 동지들’의 지지와 연대가 쇄도하고 있다. 극우세력의 부상과 준동을 멈춰 세우고 분쇄하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위력적인 총파업이고 그에 기초한 폭발적인 광장투쟁이다. 그렇다면 어떤 총파업을 말하는 것인가? 1934년 2월 프랑스 노동자대중이 거리에서 파시스트들을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해 냈을 때,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80만의 조합원을 갖고 450만이 참여하는 총파업을 조직해 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웃나라 독일처럼 파시즘이 도래할 수 있겠다는 광범한 노동자대중의 위기의식이 그런 기적 같은 일을 가능하게 했다. 지금 한국에서도 수많은 노동자대중이 극우세력의 부상과 준동을 바라보며 말로 다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윤석열 탄핵심판 결과가 어찌 나오든 극우세력의 준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범한 노동자대중의 스트레스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바로 거기에 이제껏 한국 사회에 존재해 본 적이 없는 거대한 총파업을 조직할 수 있는 에너지가 축적되고 있다. 이 총파업은 민주노총의 조직노동자가 선두에 서는 총파업이되, 다양한 사회세력이 함께 하는 ‘사회적 총파업’이다. 광범한 미조직노동자가 동참하는 총파업, 억압·차별에 맞선 여성과 소수자가 동참하는 총파업, 학생들도 동맹휴업으로 동참하는 총파업이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대중의 폭발적인 광장투쟁으로 극우세력을 물리적으로 압도하는 총파업이다. 단 하루의 파업만으로도 한국 사회를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을 그런 총파업이다. 이 총파업의 일차적 요구는 극우세력 분쇄다. 그 세부 내용은 총파업 전개 시점에 맞춰 구체화되겠지만, 윤석열 파면·퇴진과 내란죄 단죄, 국민의힘 해체, 내란선동세력 처벌 등은 기본이 될 것이다. 이 총파업의 요구는 또한 노동자·민중의 다양한 열망을 담아냄으로써 사회대변혁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내야 한다. 노동자·민중의 삶은 비정규직 초과착취와 노동기본권 부정으로, 여성·성소수자·장애인·이주민 등에 대한 억압·차별로, 기후위기 가속화와 환경 파괴로, 제국주의 진영 간 패권대결과 전쟁위기로 심각하게 유린당해 왔다. 오죽하면 한국 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과 가장 낮은 출산율을 갖고 있겠는가! 이제 이 모든 것을 갈아엎어야 한다. 또한 계엄과 내란 사태를 통해 확인한 비민주적 제도들을 바로잡기 위한 민주적 요구들을 포함해야 한다. 사회대변혁으로 나아가기 위한 요구들은 다음의 것들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 비정규직 제도 철폐! ○ 정리해고제 철폐! ○ 모든 해고 금지! ○ 손배가압류 제도 철폐! ○ 모든 노동자에게 실질적인 노동3권 보장! ○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 최저임금 대폭 인상! ○ 육아·교육·주거·돌봄·노후를 국가책임으로 보장! ○ 차별금지법 제정! ○ 장애인 이동권 보장! ○ 전쟁위기 조장하는 한미일·북중러 동맹 해체! ○ 모든 전쟁연습·군사도발 중단! ○ 계엄제도 폐지! ○ 국민투표에 의한 대통령 파면제 도입! ○ 국회의원 상시 주민소환제 도입! ○ 군대·경찰에게 불법 명령에 대한 거부의무 부여! ○ 검찰·경찰·사법부 지휘부에 대한 주민직선소환제 도입! 5. 예상되는 세 가지 경로 지금 노동자계급 앞에는 세 가지 예상 가능한 경로가 놓여 있다. 첫째, 윤석열 탄핵이 기각되는 경우. 둘째, 윤석열 파면 후 차기 정권에서 극우세력이 대대적으로 성장하는 경우. 셋째, 윤석열 파면 후 사회대변혁을 향한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전진이 이뤄지는 경우. 하나씩 살펴보자. 1) 윤석열 탄핵 기각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 윤석열 탄핵이 기각될 가능성은,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0%’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에 12·3 친위쿠데타 자체가 합리적인 사고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후 우리가 목격해 온 극우세력의 준동 또한 마찬가지다. 비록 그 가능성이 매우 낮다 해도, 탄핵 기각의 경우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탄핵 기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파산 선언이 될 것이다. 광범한 노동자·민중 속에서 국가에 대한 믿음 자체가 붕괴할 것이다. 그동안 극우세력의 준동을 힘겹게 참아왔던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대폭발 지경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양상으로 표출될지는 누구도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비록 민주노총 차원에서는 무산됐지만) 금속노조가 3월 총파업에 대해 대의원대회에서 논의하고 있다. 중집이 3월 경고파업 안을 제출했고, 현장발의로 3월 14일 안이 제출됐다. 금속노조가 헌재 선고를 앞두고 경고파업을 조직하면서 투쟁의 근육을 다져둔다면, 그래서 만일 탄핵 기각시 즉각 단호한 총파업에 나선다면,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분노는 훨씬 쉽게 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우여곡절을 겪을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노동자계급의 위력적인 총파업과 폭발적인 광장투쟁을 조직해 낼 수 있느냐가 결국 관건이 될 것이다. 광장 청년 대중의 능동성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금속노조의 3월 총파업을 현장 곳곳을 파고들며 최대한 열성적으로 조직하는 것은 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가장 확실한 방책이 될 것이다. 2) 윤석열 파면 후 차기 정권에서 극우세력의 대대적 성장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 윤석열 파면이 확정되고 대선이 열리면 민주당 정권의 등장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민주당 정권 아래서 노동자·민중의 삶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머지않아 대중의 거대한 실망과 환멸이 다시 조성될 것이다. 극우세력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전열을 정비하고 더욱 강력하게 성장할 수 있다. 특히 세계경제와 한국경제가 점점 더 깊은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점은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 수 있다. 이제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양상처럼 극우세력이 노동자·민중의 빈곤화로부터 강력한 사회적 기반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심화와 함께 자본가계급이 극우세력을 노골적으로 지원하고 나설 수도 있다. 강력하게 성장한 극우세력이 재집권하게 된다면 그 자체로 노동자·민중에 대한 극심한 사회경제적 공격을 의미하게 되겠지만, 다시 한 번 군사파시즘 부활을 획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지금 극우세력의 행보가 객관적으로 향하고 있는 승부처는 이번 대선이 아니라 다음 대선이라고 할 수 있다. 당사자들이 그것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느냐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는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 윤석열이 파면될 경우 극우세력은 헌재 결정에 불복하면서 차기 정권 내내 준동을 이어갈 것이다. 민주당 정권은 결국 극우세력이 대대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비옥한 토양을 제공할 것이고, 극우세력은 다음 대선에서 크게 승리할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객관적 가능성을 가진 시나리오다. 노동자·민중이 ‘민주당과 연합’하는 것은 이 시나리오를 완성시켜 주는 결정적 패착이 될 것이다. 3) 사회대변혁을 향한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전진 그런데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다고 해서 상황이 무조건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독립성과 투쟁력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느냐에 따라 이후 사태 전개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환멸이 윤석열 정권의 등장으로 귀결된 것은 노동자운동·노동자정치의 위축과 민주당에의 종속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일 문재인 정권 아래서 노동자계급이 독립성과 투쟁력을 단호하게 발전시켜 나갔다면 문재인 정권에 대한 실망과 환멸은 극우세력이 아니라 노동자운동과 노동자정치가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노동자계급은 (예상되는) 민주당 정권에 맞서 독립성과 투쟁력을 단호하게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민주당 정권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환멸을 노동자운동과 노동자정치가 도약하는 발판으로 획득해 나가야 한다. (‘민주당과 연합’이 아니라) 민주당 정권에 맞서 단호하게 투쟁하는 것이 극우세력의 성장을 차단할 수 있는 길이다. 노동자계급은 위력적인 사회적 총파업을 조직함으로써 민주당 정권에 맞설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극우세력을 결정적으로 분쇄하면서 사회대변혁의 길을 열어야 한다. 이를 위한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지금부터 건설해 나가자. 민주노총은 이미 7월 총파업을 결의했다. 이 총파업이 첫 번째 위력적인 사회적 총파업이 될 수 있도록 조합원들과 광장의 청년 대중 속에서 그 동력을 힘차게 조직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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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민주당은 공허한 말들로 트럼프를 이길 수 없었다 — 그러나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은 이길 수 있다[편집자 주] 윤석열 친위쿠데타 이후 극우세력의 준동을 지켜보면서, 많은 이들이 극우세력의 (재)집권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그런 한국 상황은 미국에서 트럼프의 재집권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미국 의사당을 공격했을 때, 트럼프의 재집권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을 지난 이후 트럼프는 버젓이 재집권했고, 의사당을 공격한 폭도들을 사면했다. 미국에서 트럼프는 왜 그리고 어떻게 재집권할 수 있었는가?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도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반면교사를 얻기 위해, 레프트보이스의 관련 기사를 시일이 좀 지났지만 번역해서 싣는다. 히메나 베르가라(Jimena Vergara)와 시빌 데이비스(Sybil Davis) 2024년 11월 6일 대승을 거둔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돌아가 매우 반동적인 의제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다. 투쟁할 준비가 된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극우를 멈춰 세울 수 있다. 선거일 밤이 다가오면서,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누가 이겼는지 알기까지 며칠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주요 경합 주를 모두 제패하고 선거인단 및 일반 투표에서 모두 승리했다. 공화당은 상원과 하원을 모두 장악할 게 확실시되고 있다. 몇 달 동안 선거 운동을 벌인 끝에, 미래가 드러났다: 우리는 공화당이 대통령, 의회, 대법원을 모두 장악하는 보수적 삼권 분립에 직면해 있다.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우경화 현상이 나타났다. 파란(민주당) 주와 빨간(공화당) 주, 도시와 작은 마을에서 모두 트럼프의 득표율이 증가했다. 뉴욕과 같은 확실한 파란 주에서도 해리스는 1988년 이후 어떤 민주당 후보보다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동시에 트럼프는 투표율이 약간 낮아졌기에 2020년 바이든보다 적은 표로 승리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당파 투표율이 민주당 지지자 투표율보다 높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민주당 후보에 대한 열정이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우경화 현상을 경제 위기, 신자유주의의 위기, 그리고 민주당 위기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선거를 몇 달 남겨놓고 해리스를 후보로 내세운 민주당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에게 줄 게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트럼프의 압승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들에게 큰 위협이다.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 주에서 이미 목격한 바와 같이, 극우파는 이 힘을 이용해 이민자, 노동자 권리, 재생산 권리, 트랜스젠더 권리, 그리고 다른 민주적 권리에 대한 공격을 가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선거일 이후 어느 정도 절망감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지만, 우리는 트럼프와 그의 극우 동맹에 맞서 절망을 행동으로 바꾸고 조직해야 한다. 우리는 (민주당에 대한 지지로 전환돼 버렸던) 트럼프 첫 임기 때의 저항을 넘어 우파에 대항하는 진정한 운동, 즉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한다. 유권자 성향의 변화 유권자 인구 통계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쪽으로 이동한 정도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특히 젊은 남성, 흑인 남성, 라틴계 사이에서 지지 기반을 넓혔다(이 중 40% 이상이 트럼프를 지지했다). 30세 미만의 남성은 2020년 15% 포인트의 격차로 바이든을 지지하다가 13% 포인트의 격차로 트럼프를 지지했다. 트럼프는 공화당을 대학에 다니지 않은 노동자계급 유권자의 당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그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했다. 선거를 앞두고 성별 투표성향 차이에 대한 논의가 많았지만, 백인 여성의 다수가 트럼프를 세 번 연속 지지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실제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해리스는 전체 여성 속에서 10% 차이로 승리했지만, 2020년 바이든이 트럼프에게 14% 차이로 승리했던 것보다는 낮은 수치다. 반면, 트럼프는 전체 남성에서 바이든 때와 같은 차이로 승리했다. 중요한 것은 민주당이 임신중지권에 대한 지지를 승리의 비책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미주리주와 몬태나주 등 여러 주에서 임신중지권을 보호하기 위한 주민투표가 통과됐지만, 동시에 트럼프가 다수 득표를 했다. 플로리다주를 비롯한 다른 많은 주에서는 임신중지권 지지율이 트럼프 지지율보다 높았다. 이 사실은 임신중지권을 둘러싼 투쟁을 무기로 활용하는 것이 해리스의 여성 지지율을 높이는 데서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민주당이 임신중지권을 방어하기 위한 강력한 전국적 운동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임신중지권 확보에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지 못했다. 민주당은 임신중지권 이슈에 의존하여 2022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돌풍을 잠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민주당에 불리하게 바뀌었다. 트럼프가 임신중지권에 대한 공화당의 공식 입장을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임신중지권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변경은 매우 교활했다. 트럼프는 임신중지권을 “주(州)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움으로써,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임신중지권을 반대하는 건 아니라고 일부 유권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트럼프가 임신중지권 반대 세력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임신중지권에 관한 한 트럼프가 다른 공화당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가 재생산 권리를 공격해 온 당의 수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임신중지권을 실제로 보호하기 위해 민주당이 국가 차원에서 한 일이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트럼프가 해리스와의 토론에서 지적했듯이, 해리스가 서명하겠다고 약속한 임신중지권 복원은 민주당원들이 조직하기를 꺼려하는 상당한 계급투쟁 없이는 의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트럼프가 승리한 결과는 미국인의 다수(주민의 55%)가 이민을 억제하기를 원한다는 것도 보여준다. 이것은 미국 태생과 일부 이민 노동자 모두의 경제적 불안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두려움을 반동적인 입장으로 표출했다. 트럼프는 이민자들에게 가장 가혹한 입장을 가진 후보였다. “지금 당장 대량 추방”은 트럼프 집회에서 외치는 주요 구호가 되었다. 해리스가 이민 문제에 관해 오른쪽으로 멀리 이동했지만, 트럼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트럼프는 모든 것을 이민자의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의 정치경력을 쌓았기 때문이다. 해리스가 실패한 이유의 일부는 2020년 바이든 선거운동에서 친이민 정책을 펴려고 노력했다는 모순과 관련이 있다. 그때 민주당은 NGO들과 협력하여 이민자 권리 운동을 민주당으로 유입시키려고 노력했었다. 그 후, 바이든은 이민자에게 가혹한 탄압을 퍼부었는데, NGO들의 지도부가 방향을 상실하고 운동을 무력화하도록 성공적으로 이끈 뒤였기 때문에 바이든 정부에 맞서 싸울 힘이 없었다. 그러한 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반이민 감정이 고조되었고, 트럼프는 이민자들을 노동자계급을 괴롭히는 모든 문제를 뒤집어씌울 유용한 희생양으로 강력히 활용했다.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는 데 있어, 민주당은 트럼프가 선거운동의 기둥으로 삼은 이슈들에 대해서만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선거 결과는 그들이 트럼프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당으로 나서는 데서도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자코뱅>이 펜실베니아주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조사대상이 된 모든 정치적 메시지 중에서 민주주의에 관한 메시지가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민주당원들이 민주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거나 또는 직접 공격하고 있으면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라”고 메시지를 내는 것은 상당수 유권자에게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정부 기관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으며, 민주당원들이 매달리는 규범을 보호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 민주당의 위기 다수의 유권자들은 경제를 이번 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보았다. 선거 결과가 보여주듯이 다수는 트럼프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바이든은 코로나19 봉쇄 이후 경제를 안정시키고 반도체과학법 같은 몇 가지 주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일반 미국인의 경제 상황은 물가인상 때문에, 특히 식료품 같은 일반 소비재 가격의 상승과 주택가격 상승으로 인해 더욱 불안정해졌다. 이런 상황을 놓고, 민주당은 경제가 실제로는 잘 돌아가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트럼프와 공화당은 강하게 비난했다. 바이든의 2020년 선거 캠페인은 샌더스의 지지 기반을 민주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샌더스와 협상해야 했다. 바이든은 학자금 대출 탕감, 노조조직화 보호법 추진, 노조 제조업 일자리 귀환 등 일부 진보적인 정책으로 통치했다. 이에 비해 2024년 해리스의 공약은 초점이 없었고, 노동자계급보다는 중간계급을 겨냥했다. 해리스는 월스트리트 억만장자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이로 인해 노동자계급의 일부가 트럼프와 손을 잡게 되었고, 노동자계급과 민주당의 역사적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번 선거는 2008년부터 성장해 온 정치적 현상, 즉 노동자계급의 일부가 민주당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의 결과를 보여준다. 2016년에는 트럼프가 일부 러스트벨트 주에서 승리했지만, 이번에는 ‘블루 월’(민주당 우세 주들을 연결한 벽)이 무너졌다.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제 확고하게 공화당 지지자가 되면서, 정치에서 새로운 “학위 격차”를 만들어 냈다. 민주당은 노동자계급 및 사회운동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비록 바이든이 노동자들에게 호소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말이다. 수십 년 동안 신자유주의 정치와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표하지 않는 정치에 지친 노동자들은 더 이상 민주당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보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역동적인 운동은 이 점을 반영했다. 시온주의를 완전히 수용한 민주당은 팔레스타인 운동에게 사소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전당대회에서 팔레스타인 운동 대표에게 발언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집회에서 아랍계 미국인을 쫓아냈다. 그 결과, 해리스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지지자 없음’ 운동이 등장해 많은 아랍계 미국인들이 그녀에게 투표하기를 거부했다. 일부 아랍계 미국인들은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민주당은 2020년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이 자신을 지지하도록 이끌었던 것과 달리 팔레스타인 운동을 투표함으로 이끌지 못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과 민권 운동으로 청년들이 급진화되었던 것과 비슷하게, 오늘날 젊은 활동가들과 민주당 간의 단절이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 진보의원들 가운데 유일하게 해리스를 지지하지 않았던 라시다 탈리브가 자신의 선거구에서 해리스보다 더 많은 표를 얻어 당선된 사실은 적극적인 팔레스타인 지지 입장이 갖는 대중성을 보여준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활동가 기반을 멀리한 것은 해리스가 패배하게 한 이유의 일부였다. 유권자들의 경제적 두려움 앞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값비싼 전쟁에서 미국을 빼내겠다고 약속했다. 반면에 민주당은 세계 질서에서 미국의 역할에 관한 매파적 수사를 두 배로 늘렸다. 공화당 지지기반 내 중도층을 공략하기 위해, 해리스는 이라크 전쟁의 주모자 중 한 명이자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지른 자의 딸인 리즈 체니와 손을 잡았고, 트럼프는 미국을 값비싼 “영원한 전쟁”에서 빼내려는 후보로 자신을 그렸다. 해리스가 트럼프에게 패배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앞으로 몇 달 또는 몇 년 동안 논쟁이 계속될 것이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 분명히 실수를 저질렀고, 트럼프에 대한 두려움조차도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해리스는 “기쁨”, “자유”, “코코넛 나무” 같은 공허한 말들로 가득 찬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러면서 이민자 권리, 기후 변화, 군대, 트랜스젠더 권리 등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는 공화당원인 체니 같은 이들과 함께 하는 해리스의 “빅 텐트”는, 해리스를 초당파적 기득권 세력의 수호자로, 반면 트럼프를 그 거부자로 그려지게 했다. 요컨대, 오른쪽으로의 이동은 해리스에게 완전한 실패를 의미했다. 집권한 신우파 트럼프는 승리 연설에서 자신이 다가오는 임기 동안 대통령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권한은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트럼프의 지지 연합은 다양한 분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경제적 포퓰리즘을 원하는 노동자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확고한 극우파 이데올로그들이 있다. 임신중지권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에 불만을 가진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반면, 임신중지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다수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영향력을 얻기 위해 서로 알력다툼을 벌일 MAGA 운동의 다양한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다. 트럼프는 2016년과 2020년에 확보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거대자본들로부터 지지받고 있다. 트럼프가 이례적인 대통령 후보였고 자본의 중요한 부문이 해리스를 지지하고 기부했지만, 일론 머스크와 같은 일부 거대자본가들은 트럼프를 지지했다. 자본가들의 이러한 변화는 미국의 미래에 대해 제국주의 부르주아지 사이에 분열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안톤 재거는 <신좌파평론>에 이렇게 썼다. “두 정당의 사회적 구조는 2010년대 미국 정치 경제의 지각변동을 반영하고 있다. 녹색 재산업화라는 방향과 국내외 화석연료 생산이라는 방향 사이에서 갈등이 존재한다. 인플레이션과 싸운다는 방향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서 달러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 제공이라는 방향 사이에서도 갈등이 존재한다. 이 복잡한 상황을 중심으로 두 블록이 응집되었다. 한편으로는,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계급을 넘어선 탄소집약연합이 형성되었는데, 공화당의 기존 신보수주의 지지자들을 제거하는 대신 주변부 블루칼라 노동자들, 농촌의 소부르주아, 교외의 중간 관리자, 부동산 자본가, 암호화폐 상인, 실리콘 밸리의 우파, 1980년대 자유방임주의의 맹공격에서 살아남은 철강 생산자들을 끌어들였다. 레이건이 결성한 연합과 달리, 트럼프의 연합은 백인 대학 졸업생이 부족하지만 학위가 없는 백인들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트럼프의 연합은 미국의 헌법이 가진 반다수결주의적 특성 덕분에 엄청난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투표자 억제 수단에 의존하고 있다. 그 동원력은 이제 트럼프를 이용하여 주정부 기금에 대한 접근을 보장받고자 하는 포드 같은 기술 재벌에 의해 완화되고 있으며, 일부 노동 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공동 결정제도 및 단체 임금협상에 관심이 있는 당내 새로운 수정주의 우파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할 때, 앞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될 것은 더욱 극단적인 권위주의적 특징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정부다. 이를테면 법무부에 대한 통제 강화와 행정부의 권력 강화 시도가 있을 것이다. 자본의 더 큰 부문에 점점 더 호소력을 발휘하는 의제를 내세울 것이다. 이 의제는 금융 규제 완화, 국가와 교회의 분리 축소, 보호 무역주의, 그리고 민주적 권리 공격에 기반을 둘 것이다. 강력한 이민자 혐오 정책을 갖고 반이민 민병대를 부추기는 정부가 될 것이다. 이 정부는 “대 이스라엘”이라는 대량 학살 프로젝트를 계속 지원할 것이다. 가장 먼저 트럼프를 축하한 세계의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가 네타냐후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정부는 국제 동맹국들과 재협상을 시도하여 우크라이나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꿀 것이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트럼프는 반전 대통령이 될 수 없다. 그는 대신 중국과의 대결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화와 국경 군대 배치 등을 통해 미국 사회를 재편하고자 한다. 트럼프는 극단적 제국주의자로서 통치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에 맞서 싸우려면 전 세계 노동자 자매형제들과 연대하여 싸우는 강력한 노동자계급 국제주의가 필요하다. 억압에 대한 모든 위협과 함께, 트럼프는 미래의 국내 계급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 단계 주류 분석가와 정치인들은 계급투쟁을 고려하지 않는다. 최근 <에즈라 클라인 쇼>에서 게리 거스틀은 신자유주의의 구질서가 사라졌지만 아직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것은 “낡은 것이 죽어가지만 새로운 것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그람시의 유기적 위기 개념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그러나 클라인과 거스틀이 놓치고 있는 것은 계급투쟁이 상황을 규정하고 급격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변화하는 상황은 선거를 통해 표현되었지만, 거리, 학교, 직장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이와 같은 계급투쟁의 배제는 논리적으로 트럼프가 반인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조치를 반대 없이 강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이러한 조치를 방해하고 중단시킬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 임기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노동자계급의 행동에 달려 있다. 트럼프의 복귀 앞에서, 민주당은 노동조합 및 사회운동 관료들과 공모하여 광범위한 인민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스스로를 재구성하려고 할 것이다. <자코뱅>과 DSA는 민주당을 노동자계급과 좌파에 더 가깝게 재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2016년과 2020년 샌더스 차단이 보여주었듯이 성공적이지 못했다. 또한 신우파가 등장하는 상황에서 좌파가 방향을 잃게 하는 데 일조했다. 민주당은 자본과 자본주의 체제에 묶여 있기 때문에 트럼프와 극우파에 맞서는 데 필요한 투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이번 선거가 우경화를 보여주었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적인 요소도 있다. 민주당과 결별하고 좌파로 향하는 세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운동은 아직 사회운동의 무덤으로 이끌려 가지 않았고, 이로 인해 정권과 대학 내 동맹세력은 이를 억압하기 위해 더욱 가혹한 전술을 사용해야만 했다. 집단학살이 계속되면서, 이 운동이 다시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마도 트럼프가 주도하는 탄압적인 조치에 맞선 더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하면서 말이다.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 공격 이후 오랜 동면으로부터 다시 깨어나는 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새로운 노조들이 결성되고, 투쟁적인 파업들이 진행되고 있으며, 노동자들이 노조를 단순한 생계유지 이상의 것을 위한 투쟁수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좋은 징조이며, 상황을 분석할 때 함께 고려해야 한다. 관료들이 이런 투쟁을 막으려 할 것이지만, 현장 노동자들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노동조합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다. 트럼프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노동자계급과 사회운동에 있다. 우리가 민주당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계급투쟁을 함께 조직할 수 있다면, 트럼프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계급투쟁이 유기적으로 출현할 수 있는 격동의 시기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시기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낡은 것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계급투쟁은, 만일 우리가 조직해 낸다면, 새로운 무언가의 산파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파에 대항하는 공동전선만이 아니라 우리의 투쟁을 하나로 묶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사회주의 강령을 가진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정당이 필요하다. (원문) https://www.leftvoice.org/the-democrats-couldnt-beat-trump-with-hot-air-and-coconut-trees-an-organized-working-class-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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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이후 현 정세의 성격과 노동자계급의 과제에 관한 의견12월 3일 윤석열 비상계엄 발표 사진:로이터 1. 윤석열 12·3 친위쿠데타의 성격 12월 3일 저녁 10시 23분, 윤석열이 느닷없이 대국민담화를 시작한 뒤 10시 28분 ‘반국가세력 척결’을 내걸고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11시 23분, 계엄사령관이 포고령 제1호를 발표했다. 그러나 4일 새벽 1시 1분,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요구안을 통과시켰다. 4시 27분 윤석열이 비상계엄 해제를 선언했다. 비상계엄 선포로부터 5시간 59분 만이었다. 1)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압살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한 12·3 담화와 극우세력의 궐기를 촉구한 12·12 담화를 통해 반국가세력의 핵심으로 민주당을 지목했다. 또한 부정선거 진실규명을 계엄령 선포의 주된 이유로 밝혔다. 3일 밤 정보사령부에는 북파공작부대(HID)를 포함한 38명의 요원들이 다음날 출근하는 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하여 B1 벙커로 이송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방첩사령관이 국정원1차장과 경찰청장에게 제시한 체포대상자 명단에는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에게 부정선거 주범으로 지목된 인물들이 포함돼 있었다. 윤석열은 선관위 직원들과 체포된 인사들을 고문하여 부정선거 증거를 조작해 낸 뒤 4월 총선을 무효화하고 국회를 해산하면서 민주당을 절멸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을 비롯한 민주당계 인사들이 체포대상 명단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또한 민주당이 일차적인 공격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체포대상 명단에 한동훈까지 포함된 것은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정적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동훈은 ‘국회에 가면 체포되고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전화를 계엄 선포 직후 누군가에게 받았다고 밝혔다. 체포대상 명단에 국회 의장과 부의장이 포함된 것, 전·현직 대법관들과 이재명 무죄선고 판사가 포함된 것은 입법부를 완전히 무력화하고 사법부 또한 겁박하려 했던 노골적인 의도를 보여준다. 계엄선포 직후 발표된 포고령 제1호는 △국회·지방의회·정당의 활동 금지 △결사·집회·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 △언론과 출판에 대한 계엄사의 통제 △파업·태업·집회 금지 △영장 없는 체포·구금·압수수색 등 광범한 기본권 박탈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압살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 금지 △가짜뉴스·여론조작·허위선동 금지 △포고령 위반자 처단 등 모든 비판과 저항을 반국가세력의 국가전복 행위로 규정하여 난폭하게 탄압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2) 노동자·민중의 기본권에 대한 압살 그런데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다면, 결과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것은 노동자·민중이었을 것이다. 체포대상 명단에는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이 포함돼 있었다. 포고령은 특히 파업·집회·언론·정치활동의 자유를 압살함으로써 노동자·민중의 권리를 전면적으로 박탈하려 했다. 만일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다면, 한마디로 말해서 파업과 민주노조가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민주노총도 존재할 수 없고, 좌파정치조직·진보정당·노동단체·시민단체 등도 모두 존재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본가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계급이 쟁취해 온 모든 성과들을 박탈하려고 나섰을 것이다. 3)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은 군사파시즘 부활 시도 12월 3일 낮 국방부장관 김용현은 점심을 먹으면서 “탱크로 국회를 밀어버리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전차부대를 지휘하는 제2기갑여단장은 3일 밤 선관위 공격을 위해 요원들이 대기 중이던 정보사령부에서 별도 대기했다. 만일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계속 진행됐다면, 전차들이 서울 시내 한복판을 휘젓고 다녔을 것이라는 얘기다.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박정희의 1961년 5·16 쿠데타와 1972년 10·17 쿠데타, 전두환의 1979년 12·12 쿠데타와 1980년 5·17 쿠데타를 재현하려 한 시도였다. 만일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다면 1961~1987년의 군사파시즘이 전면적으로 부활했을 것이다. 1961~1987년 한국을 지배했던 군사정권은 (파시즘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압살했을 뿐만 아니라 자주적인 노조결성권과 파업권 등 노동자계급의 모든 권리를 박탈했다는 본질적인 측면에서 파시즘의 한 형태, 즉 군사파시즘이었다. (1920~30년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등장했던 고전적인 파시즘과 1961~1987년 한국에 존재했던 군사파시즘 사이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고전적인 파시즘은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혁명 근처까지 다다른 상황에서 이를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군사파시즘은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매우 미약한 상황임에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했다.)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은, 1972년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수립하며 단행했던 10·17 비상계엄이나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을 짓밟으며 군사파시즘 체제를 재수립하는 과정에서 단행했던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매우 닮은꼴이다. 결론적으로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은 노동자·민중이 피로써 쟁취한 모든 권리들을 일거에 박탈하고서 군사파시즘을 전면적으로 부활시키려 획책한 친위쿠데타였다. 또한 1987년의 제한된 민주화에 입각한 현 헌정체제마저 반인민적 음모와 무력을 통해 일거에 전복시키려 한, 인민에 맞선 ‘내란’이었다. 2. 윤석열 12·3 친위쿠데타가 발생한 이유 1) 윤석열의 정치적 위기 윤석열이 2022년 3월 대선에서 0.73% 근소한 차이로 승리해 5월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민주당 등 야권은 국회의 63%(189석)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취임 2년 뒤에 치러진 2024년 4월 총선에서도 야권이 압승해 국회의 64%(192석)를 장악했다. 윤석열이 4월 총선에서 대패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의 반동적 정책들 때문이었다. 윤석열은 화물연대와 건설노조 등을 상대로 광포한 탄압을 자행했다. 여론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멈춰서긴 했지만 주69시간 노동제 도입을 시도했다.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 폐지 등 젠더평등에 반하는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였다.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동조하고,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 배상’ 대법 판결을 무력화했으며, 한미일 동맹 강화와 전쟁연습 확대로 전쟁위기를 고조시켰다. 공정과 상식을 앞세워 놓고서 본인과 부인의 의혹에 대한 수사는 철저히 거부했다. 윤석열은 화물연대와 건설노조 등을 상대로 광포한 탄압을 자행했다 4월 총선에서 대패한 결과, 윤석열의 대통령 취임 이후 12월 3일까지 2년 7개월 동안 한국 정치사에서 전례없는 여소야대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동안 윤석열은 25번의 거부권을 행사하여 민주당이 주도한 각종 법률과 특검법 등을 무산시켰다. 윤석열의 수하 노릇을 한 검찰은 이재명을 상대로 압수수색 376회 등 전방위 수사를 진행하여 5건의 형사재판에 회부한 반면, 윤석열과 김건희의 의혹에 대해서는 철저히 수사를 회피했다. 윤석열의 거부권 행사 대상에는 본인과 김건희의 의혹을 수사하기 위한 특검법들이 여러 차례 포함됐다. 반면 민주당은 22건의 탄핵소추를 통해 정부 관리들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민주당의 탄핵소추 대상에는 윤석열과 김건희의 의혹 수사를 회피한 검사들과 이재명 수사를 담당한 검사들이 포함됐다. 이 과정은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비리를 폭로하고 사법체계를 동원하는, 부르주아 정치질서 안에서 숱하게 되풀이되어 온 암투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암투에서 상황은 윤석열에게 점점 더 불리해졌다. 그것은 무엇보다 한동훈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한동훈은 윤석열의 최측근이었으나 차기 대권을 꿈꾸며 정치에 뛰어든 뒤 김건희 의혹에 대한 해법을 둘러싸고 윤석열과 일정한 차별화를 시도했다. 윤석열과 한동훈의 관계는 끝없이 악화되었고, 국민의힘 내 한동훈 세력이 김건희 특검법 재의결에 동참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또 하나의 변수는 윤석열 대선 때 깊이 관여한 정치브로커 명태균과 관련된 폭로였다. 10월 31일 윤석열의 불법적인 공천개입을 시사하는 녹음파일이 공개되었다. 12월 2일에는 구속된 명태균이 자신의 휴대폰을 민주당에 제공할 수 있다면서 윤석열·김건희를 강하게 압박했다. 이러한 요소들은 계엄을 선포한 12월 3일에 이르기까지 윤석열의 정치적 위기가 어떻게 심화하였는가를 보여준다. 그런데 윤석열의 정치적 위기가 45년만의 비상계엄으로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많은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윤석열 개인의 성향과 기질도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윤석열이 자신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비상계엄이라는 선택을 할 수도 있게끔 영향을 미친 사회적·정치적 변화일 것이다. 2) 파시즘의 잔재 위에서 극우세력의 재성장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되어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정점에 이르렀던 노동자·민중의 민주주의 투쟁은 군사정권과 야합한 부르주아 보수야당의 배신에 가로막혀 절반의 승리만을 거둔 채 멈춰 섰다. 민주주의는 껍데기로만 쟁취되었고, 군사파시즘은 온전히 청산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세력의 주류였으며 군사정권 시절 박정희·전두환을 떠받치던 극우세력은 1987년의 형식적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군대·경찰·행정·사법 등 국가기구 곳곳에서 강력한 기반을 유지했다. 파시즘의 잔재는 ‘1987년 체제’라는 제한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으로 스며들었고 지속되었다. 1990년 전두환·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민주공화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의 합당을 통해, 즉 군사정권 주역들과 보수야당 온건파의 결합을 통해 (오늘날 국민의힘의 원조라 할)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처음에는 군사정권 후예들이 민주자유당의 주류였지만, 1993년 김영삼 정권에 의해 군부 내 하나회 세력이 제거되고 1995년 전두환·노태우가 5·17 쿠데타로 내란죄 처벌을 받으면서 주도권이 보수야당 출신의 공화주의 보수파에게 넘어갔다. 지도부를 잃고 중핵이 와해된 군사정권의 잔존 세력은 정치적 생존을 위해 공화주의 보수파로 변신했다. 1997년 IMF 경제위기를 전후해 김대중이 이끌던 보수야당 급진파가 신자유주의 중도우파로 재정립할 때, (군사정권 잔존세력을 포괄한) 공화주의 보수파는 신자유주의 우파로 재정립했다. 이후 두 세력은 1998년의 김대중 정부부터 2024년의 윤석열 정부까지 자본가정당이라는 근본적 본질에서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공세를 집행한다는 핵심 정책에서도 엇비슷한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두 세력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우파가 집권할 때마다 그 속에 내재한 극우적 본성을 드러내면서 노동자·민중을 더욱 거칠게 공격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2009년 쌍용차 파업에 대한 살인적 진압, 2010~12년 금속산업 민주노조들에 대한 와해 공격, 이명박·박근혜 정권 내내 계속된 KBS·MBC 방송 장악, 박근혜 정권 시기 문화계 블랙리스트, 2015~16년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 공세, 2022~24년 윤석열 정권의 화물연대·건설노조 등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극우적 공격은 노동자·민중으로부터 거센 반작용을 낳았다. 2016~17년 박근혜 퇴진투쟁이 폭발하고 결국 탄핵으로 귀결되었던 것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극우적 공격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반격이 축적되고 결집한 결과였다. 그런데 박근혜의 탄핵은 다시 극우세력이 새롭게 성장하는 반작용을 낳았다. 2017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의 탄핵이 최종 확정될 무렵, 극우세력이 결집한 이른바 ‘태극기집회’는 거리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1997년 이후 20여 년 동안 신자유주의 우파라는 외피에 봉인돼 있던 극우세력의 목소리가 군부에게 노골적으로 쿠데타를 호소하는 등 거리에서 거침없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극우세력의 재성장은 전광훈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복음주의 우파가 주도했고 예비역 군 장성 등 군사정권 후예들이 결합했다. 극우세력의 기세는 문재인 정권 내내 지속되었고, 극우세력의 대중적 기반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서 극우 유튜버들과 부정선거 음모론이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극우세력은 2020년 총선 등에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시도했지만, 단 한 명의 국회의원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입당전술을 통해 국민의힘 안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국민의힘에 대한 극우세력의 영향력 강화는 한동안 김종인과 이준석으로 대표되는 공화주의 보수파의 영향력 확산과 병행해서 진행되었다. 검찰이라는 핵심 관료조직을 틀어쥔 윤석열은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영입되면서 극우세력의 중심으로 부상했지만, 공화주의 보수파의 외피를 쓰고 대선을 치렀다. 윤석열은 집권 직후 이준석을 내쫓고 당권을 장악하면서 극우세력의 본성을 드러냈고, 이후 국민의힘의 주도권은 윤석열을 중심으로 한 극우세력에게 확연히 넘어갔다. 이후 윤석열은 노골적으로 국민의힘 대표선거에 개입하고 대표에게 사퇴를 강요하는 등 불법적이고 반공화주의적인 당무개입을 지속했다. 그러나 친윤계라는 이름 아래 국민의힘의 다수 정치인들이 윤석열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줄서는 행태는 변하지 않았다. 2023~24년 윤석열이 공식 석상에서 ‘반국가세력 척결’을 되풀이해서 외치며 극우세력의 목소리를 점점 더 노골적으로 대변하는 동안, 친윤계 또한 공화주의 보수파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극우세력의 본성을 노골화하는 방향으로 점점 이동하고 있었다. 이처럼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개인적 동기를 넘어 사회구조라는 큰 틀에서 바라보자면, 군사파시즘의 잔재 위에서 2017년 이후 극우세력이 다시 성장해 온 사회적·정치적 변화를 반영하는 사건이다. 또한 그러한 조건 위에서 군사파시즘의 부활이라는 극우세력의 잠재된 열망을 전격적으로 실행에 옮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3) 세계적인 극우세력 부상과의 관련성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그리고 그 사회적 기반이 된 2017년 이후 극우세력의 재성장은 최근 10여 년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극우세력이 부상해 온 세계적 경향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까?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미국 등과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기독교 근본주의, 즉 복음주의 우파가 최근의 극우세력 성장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 왔다는 점이다. 한국의 복음주의 우파는 태극기 집회에 성조기와 함께 이스라엘기를 휘날리고 차별금지법 반대운동을 극렬하게 펼쳐 왔는데, 이는 미국에서 복음주의 우파가 강력한 시온주의 지지 세력이자 성소수자 혐오 세력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부정선거 음모론이 극우세력의 논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점도 미국이나 브라질에서 나타난 현상과 일맥상통한다.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부정선거 진실규명’을 주된 명분의 하나로 내걸었다는 점에서, 부정선거를 주장했던 2021년 미국 의사당 폭동, 2023년 브라질 의회·대법원·대통령궁 폭동과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2021년 미국 의사당 폭동 사진: EPA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세계적인 극우세력의 부상은 대체로 자본주의 위기 심화에 따른 노동자·민중의 경제적 빈곤화로부터 역설적으로 가장 큰 동력을 얻고 있으며, 트럼프의 재집권이 보여주듯 많은 나라에서 상당히 폭넓은 사회적 기반을 획득해 가고 있다. 또한 극우세력의 집권은 노동자·민중에 대한 극심한 사회경제적 공격을 뜻하긴 하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를 전면 부정하는 파시즘으로는 쉽게 진화하지 않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 극우세력의 부상은 아직까지는 파시즘의 잔재와 연결된 정치의식의 요소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사회적 기반 또한 과거 군사파시즘에 향수를 느끼는 60대 이상으로 무게중심이 크게 쏠려 있다. 또한 군사파시즘의 역사와 잔재 때문에 극우세력의 성장이 중간과정을 생략한 채 12·3 친위쿠데타와 같은 파시즘 부활 시도로 매우 빠르게 진화할 수 있다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3. 윤석열 12·3 친위쿠데타가 실패한 이유 1) 어설픈 준비와 자기정당성의 결여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왜 실패했는가? 일차적인 이유는 계엄선포 직후 수천 명의 노동자·민중과 국회의원들이 계엄해제를 위해 국회로 달려간 속도에 비해 군대와 경찰이 국회를 봉쇄하러 달려간 속도가 밀렸다는 데 있다. 그런데 만일 동원된 군대와 경찰이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해서라도 국회를 마비시키고자 했다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실제로 윤석열은 특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안에 있는 인원들을 끄집어내라”고 지시했고, 수방사령관에게 “4명이 들어가 1명씩 끌고 나오라”고 지시했으며, 경찰청장에게도 여섯 차례나 국회의원 체포를 지시했다. 그러나 군대·경찰 지휘관들은 국회를 봉쇄하라는 윤석열의 명령을 기본적으로 실행하면서도 유혈사태를 야기할 정도의 명령은 이행하지 않았다. 유혈사태와 그에 따른 사후 책임을 감수할 정도로는 의식적으로 준비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대·경찰 지휘관들이 유혈사태를 감수하지 못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유혈사태가 발생할 경우 일선 병사들과 경찰들이 집단 항명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 12·3 비상계엄을 총괄기획한 국방부장관 김용현은 9월 2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계엄준비 의혹을 제기하는 민주당 의원에게 “지금 대한민국 상황에서 과연 계엄을 한다고 하면 어떤 국민이 이를 용납하겠나. 우리 군에서도 따르겠나. 저는 안 따를 것 같다”고 답변한 바 있다. 그의 답변은 계엄준비 사실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었지만, 계엄에 대한 군대의 불복종 가능성을 언급함으로써 자신들의 계획에 심각한 역효과를 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가 그 핵심 주동자들 사이에서조차 자기정당성을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허술하게 준비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년 이상 친위쿠데타를 논의하고 준비했지만, 윤석열 개인의 위기 타개나 부정선거 음모론을 넘어서는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극우세력의 성장이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자와 집권당 국회의원 수십 명을 휘어잡을 정도에 이르렀고, 이것이 군사파시즘의 역사와 잔재 때문에 조기에 파시즘 부활 시도로 이어졌지만, 친위쿠데타를 주도한 자들의 역량 부족과 충동적 성격 때문에 너무 어설프게 준비하고 실행했다가 “중과부적”으로 실패해 버린 것이다. 2) 광주민중항쟁이 남긴 역사적 힘 그런데 만일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가 어떤 식으로든 일단 성공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났던 것과 비슷한 노동자·민중의 항쟁이 이번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항쟁이 성공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설령 그 항쟁이 다시 한 번 군홧발의 폭력에 짓밟혔을지라도, 1980년 5월 광주의 혁명적 패배가 1980년대 한국을 혁명의 시대로 만들었듯이, 학살당한 이들의 붉은 피를 머금고 군사파시즘의 압제에 맞서는 새로운 혁명의 시대가 펼쳐졌을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의 패배가 1987년 6월 민중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부활하고 전진했던 그 과정이 이번에도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노동자·민중의 투쟁은 1980년대보다 훨씬 더 폭발적이고 거대한 양상을 띠었을 가능성이 높다. 1980년 광주에서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 민중항쟁을 앞장서 책임졌지만, 그들은 그전에 어떤 조직적 무기도 갖고 있지 못했다. 1987년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노동자계급은 조직적 무기를 갖고 있지 못했고 따라서 독립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중추적인 영역을 중심으로 110만의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으로 조직되어 있다. 비록 심각한 관료적 후퇴로 고통 받고는 있지만 민주노조운동의 잠재력은 여전히 살아있다. 친위쿠데타에 맞선 항쟁 과정에서, 그리고 설령 패배하였더라도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에서 지금 민주노총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힘은 거대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가 설령 성공했을지라도 군사파시즘은 결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1980년대를 훨씬 능가하는 거대한 혁명적 파도가 한국을 휩쓸었을 것이고, 노동자계급은 1980년대보다 훨씬 더 멀리 전진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 즉 설령 성공하더라도 오래 버티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국회를 봉쇄하러 동원된 군대와 경찰의 지휘관들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제한적인 민주화에 그치긴 했지만,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역사 속에서 보여준 극적인 부활과 승리를 모르거나 무시할 수 있는 한국인은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이야말로 군대·경찰 지휘관들을 머뭇거리게 만든 진정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두려움이 없었다면 어설픈 대의명분을 갖고도 훨씬 쉽게 유혈사태를 감수했을 수 있다. 그러나 친위쿠데타가 성공하더라도 오래 버티지 못할 수 있다면 유혈사태까지 감수하기에는 훨씬 더 선명한 대의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3) 국지전 불장난의 실패 12·3 친위쿠데타의 주모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명분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기는 했다. 북한을 자극하여 국지전을 유도해 내는 것이었다. 10월 11일 북한은 한국이 10월 3일, 9일, 10일 세 차례에 걸쳐 평양 상공에 무인기를 침투시켜 대북전단을 살포했다고 발표했다. 12·3 친위쿠데타가 실패한 이후 바로 이 무인기 침투 사건은 국지전을 유도하여 비상계엄의 명분을 확보하려는 윤석열 정권의 의도된 도발이었음이 확인되었다. 11월 18일 국방부장관은 북한 오물풍선 원점타격을 지시했지만 합참의 반대에 막혔던 것으로도 알려진다. 12·3 친위쿠데타를 실무기획한 노상원의 수첩에서는 “NLL 북한 공격 유도”라는 메모가 발견되었다. 대북전단 살포 무인기 잔해 국지전을 유도하려는 윤석열 정권의 시도는 왜 실패했을까? 10월 31일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9’ 발사가 그 이유를 압축적으로 설명해 준다. 러시아와의 군사적 밀착, 중·러·북 동맹의 작동으로 자신감이 높아진 북한은 조급하게 국지전에 말려드는 대신 오히려 대담하게 ‘전쟁을 원한다면 전면전을 하자’고 (윤석열 정권이 아닌) 미국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실제로 지금의 국제정세 속에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국지전으로 제한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난 몇 년 동안 미국과 중국을 정점으로 제국주의 패권대결이 매우 격화되어 왔으며, 그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는 대만과 함께 세 번째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한반도는 대만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걸려 있지만, 대만과 달리 미·일·한과 중·러·북의 국제적 대치구도가 이미 팽팽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수십 년 동안 엄청난 양의 강력한 무기들이 서로를 겨눠 왔다. 따라서 만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자칫 미국·일본과 중국·러시아가 모두 뛰어드는 대량파괴 국제전으로, 나아가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 정확한 과정은 아직 알 수 없지만,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갖는 이 위험성 때문에 윤석열 정권의 국지전 유도 시도는 실패했을 것이다. 미국으로서도 정권 교체기에 준비되지 않은 방식으로 한반도 전쟁에 휩쓸려 들어갈 수는 없었을 테니까. 윤석열 정권의 국지전 유도 시도는 한편으로 국제정세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얼마나 저열한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준다. 파시즘만이 아니라 전쟁 또한 얼마나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며, 그야말로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극심한 위기가 파시즘과 전쟁을 부르는 시대, 따라서 노동자·민중이 생존을 위해서라도 혁명으로 떨쳐 일어서지 않을 수 없는 시대, 즉 위기·전쟁·혁명의 시대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다시 한 번 너무나 명징하게 보여준다. 4. 새로운 계급투쟁 지형의 성격과 전망 1) 극우세력에 맞선 전선의 돌출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로 한국의 계급투쟁 지형이 하루 밤 사이에 급변했다. 극우세력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노동자·민중의 권리를 전면 박탈하는 군사파시즘의 부활을 획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형 위에서 노동자계급은 극우세력에 맞서기 위해 불가피하게 민주당을 비롯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과 한 편에 서서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현 상황은 1917년 8월말 러시아에서 코르닐로프 반란이 일어났을 때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임시정부와 한 편에 서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형국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1980년대 군사정권에 맞서 노동자·민중과 부르주아 보수야당이 한 편에 서서 싸웠던 전선이 재현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존의 계급투쟁 지형은 이와 달랐다. 노동자·민중은 신자유주의 우파(국민의힘)와 신자유주의 중도우파(민주당)라는 두 자본가세력 모두에 맞서 투쟁했다. 둘 사이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 결정적인 차이는 아니었다. 기존의 계급투쟁 지형에서는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견결히 고수하면서 두 자본가세력 모두에 맞서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발전시켜 나가야 했다. 그와 같은 기존의 계급투쟁 지형은 1987년 제한된 민주화와 함께 형성됐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을 지나며 군사정권 잔존 세력이 공화주의 보수파로 변신하고 부르주아 정치질서가 신자유주의 우파 대 신자유주의 중도우파의 대결구도로 재편되면서 지형이 고착됐다. 이후 3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기존의 계급투쟁 지형이 12·3 친위쿠데타와 함께 새로운 지형으로 바뀐 것이다. 새로운 지형에서도 노동자계급의 독립성과 투쟁력을 견결히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극우세력만이 아니라 민주당 등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에 맞선 투쟁도 당연히 지속되어야 한다. 다만 새로운 지형의 특징은 극우세력에 맞선 투쟁이 핵심 과제라는 데 있다. 극우세력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이 민주당을 능가하여 주도권을 장악할수록 광범한 대중 속에서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 있고, 따라서 민주당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투쟁 또한 더욱 성공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1917년 8월말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이끈 소비에트는 코르닐로프 반란군을 무력화하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서 거둔 성과는 소비에트로 결집한 노동자·민중의 자신감을 극대화했고, 결국 두 달 뒤 껍데기만 남은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가볍게 제압하고 소비에트가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하는 10월 혁명으로 귀결됐다. 마찬가지 원리가 지금 극우세력에 맞선 전선에서도 작동한다. 2) 극우세력의 목표와 방법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도발적으로 새로운 전선을 열었지만, 곧바로 허망하게 실패하면서 극우세력을 매우 불리한 위치로 내몰았다. 그러나 정치적·사회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갖고 있는 극우세력은 만만치 않은 저항과 반격에 나서고 있다. 처음에 윤석열을 비롯한 극우세력은 한동훈과의 타협을 통해 탄핵소추를 피하면서 전열정비의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러나 한동훈이 ‘3~4개월 내 조기퇴진’이라는 항복을 요구하자 타협을 깨고 정면대결의 길로 선회했다. 윤석열은 12·12 담화에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선언했고, 12월 14일 탄핵소추가 가결될 때 국민의힘 의원 85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거나 12·3 비상계엄은 내란이 아니라는 응답이 여론조사에서 20~25%를 유지했다. 전광훈 등은 거리에서 극우 총궐기를 조직하기 위해 광기어린 선동에 나섰다. 탄핵소추 가결 이후에도 윤석열과 극우세력은 버티기를 통해 세력관계 반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윤석열은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는 최대한 지연시킬 작전을 펴면서 내란죄 수사는 일체 거부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헌법재판관 추가선임 절차를 보이콧하고 친윤계 일색으로 지도부를 재정비했다.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는 헌법재판관 추가임명과 내란 상설특검 후보 추천을 거부하면서 탄핵심판과 내란죄 수사를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현 정세에서 국민의힘을 비롯한 극우세력의 핵심 목표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윤석열의 파면과 내란죄 처벌을 막아내는 것이다. 저들의 논리는 ‘12·3 비상계엄은 대통령의 통치행위로서 내란이 아니다’로 요약된다. 군사파시즘의 부활을 시도했던 12·3 비상계엄을 본질적으로 옹호하면서 준엄한 단죄를 무산시키려는 것이다. 윤석열의 파면과 내란죄 처벌이 확정될 경우 자신들에게 미칠 후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군사파시즘 부활 시도를 정당화하여 이후에도 다시 시도할 길을 열어두려는 극우적 의도 때문이기도 하다. 3) 민주당의 목표와 방법 현 정세에서 민주당의 핵심 목표는 민주당 정권의 재창출이다. 한편으로는 12·3 친위쿠데타가 성공했을 경우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말살과 끔찍한 개인적 고초들을 겪을 뻔했기 때문에 민주당 또한 윤석열 파면과 내란죄 처벌에는 진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의 전면적인 발전과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권리 쟁취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들의 재집권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또한 집권할 경우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로서 노동자·민중을 거세게 공격할 것이라는 본질에도 전혀 변함이 없다. 당연하게도 민주당 정권의 재창출은 노동자·민중이 결코 공유할 수 없는 목표다. 사실 윤석열 국민의힘 정권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문재인 민주당 정권이었다. 문재인 정권은 2016~17년 촛불항쟁으로 표출된 노동자·민중의 열망과는 반대의 길을 갔다. 또 하나의 자본가정권답게 최저임금을 찍어 눌렀고, 집값 폭등을 방조했으며, 특권층의 부패를 감쌌다. 윤석열 정권의 광포한 건설노조 탄압을 먼저 시작한 것도 문재인 정권이었다. 윤석열 정권은 오로지 문재인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실망과 환멸을 토대로 집권할 수 있었다. 그보다 앞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등장시킨 것 또한 김대중·노무현 정권이었다. 1998년부터 10년 동안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펼친 신자유주의 공세는 대량 정리해고의 충격과 함께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을 불러왔다. 권력의 단맛을 본 민주당은 본격적으로 반동적인 주류 지배세력의 일부가 되었다. 민주당 정권 10년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실망과 환멸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연속 집권을 가능케 했다. 너무나 긴박한 현 정세에서도 재집권에 몰두하는 민주당의 본질은 윤석열 탄핵소추 가결 직후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에게 국정안정협의체를 제안하며 여당 노릇을 하려 했던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제 안정을 내세워야 다가오는 대선에서 중도층의 표심을 잡을 수 있으리라는 얕은 계산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는 윤석열·한덕수와 국민의힘에게 전열정비의 시간과 명분만 제공하는 중대한 실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민주당은 국회에서 170석(56.7%)을 갖고 있는 자신의 의회 권력을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군중집회는 자신들의 의회권력 행사를 정당화해 줄 보조수단으로서만, 또한 자신들이 그어놓은 정치적 한계 안에서만 작동하기를 원한다. 만일 민주당의 의도가 그대로 관철된다면, 극우세력에 맞선 투쟁은 결정적으로 약화될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의 압살을 꿈꾸는 극우세력을 제압할 힘은 의회 다수의석에서 나오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이 총파업이라는 고유의 수단을 동원하며 민중항쟁의 주도자로 나설 때에만 극우세력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4) 노동자계급의 목표와 방법 현 정세에서 노동자계급의 핵심 목표는 윤석열의 파면·퇴진과 내란죄 구속·처벌을 가장 단호하고 철저하게 관철하는 것이다. 또한 극우세력의 결집체가 되어 뻔뻔스럽게 윤석열의 파시즘 부활 시도를 옹호하고 있는 내란동조정당 국민의힘을 해체하거나 궤멸적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군사파시즘의 부활을 획책하는 쿠데타가 한국 사회에서 다시는 시도될 수 없도록 확고하게 뿌리를 뽑아야 한다. 아울러 한국 사회의 정치지형을 왼쪽으로 크게 이동시킴으로써 노동자·민중의 권리를 광범하게 쟁취하고 노동자운동과 노동자정치를 획기적으로 전진시킬 길을 열어야 한다. 동시에 노동자계급은 12·3 친위쿠데타 제압 이후 활짝 열린 광장 속에서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요구들을 함께 쟁취해야 한다. 노동자·민중은 12·3 비상계엄 이전에도 본질적으로 기본권을 박탈당한 삶을 강요당해 왔다. 노동자·민중의 삶은 비정규직 초과착취와 노동기본권 부정으로,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억압·차별로, 기후위기 가속화와 환경 파괴로, 제국주의 진영 간 패권대결과 전쟁위기로 이미 심각하게 유린당해 왔다. 오죽하면 한국 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과 가장 낮은 출산율을 갖고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윤석열 정권에서나 과거 민주당 정권에서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를 분쇄해 낸 바로 그 힘으로 이제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권리 쟁취를 위한 거대한 투쟁으로 전진해야 한다. 아울러 노동자계급은 최근 사태와 관련된 급진적 민주주의 요구들을 함께 쟁취해야 한다. 사문화된 줄로만 알았던 비상계엄이 현실로 튀어나와 군사파시즘 부활을 획책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재발을 막으려면 이제 계엄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 찬성률이 75%에 이르는 데도 소수 헌법재판관에게 탄핵심판을 맡겨놓고 기다리는 것은 너무 불합리하다. 국민투표에 의한 대통령 파면제를 도입해야 한다. 유권자의 의사와 다르게 85명의 국회의원이 탄핵에 반대했으나 다음 선거 전까지는 이들을 응징할 방법이 없다. 국회의원 상시 주민소환제를 도입해야 한다. 국회를 봉쇄하라는 명백한 불법 명령 앞에서도 군대와 경찰이 한편으로는 주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명령을 이행했다. 군대·경찰에게 불법 명령에 대한 거부의무를 명시해야 한다. 윤석열은 관료적 국가기구인 검찰조직을 장악함으로써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검찰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검찰의 지역분권화를 통한 상호감시 및 지휘부에 대한 주민직선소환제를 도입해야 한다. 한편 현 정세에서 노동자계급은 위력적인 총파업이라는 고유의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폭발적인 민중항쟁의 주도자로 나서야 한다. 한편으로는 그것만이 극렬 저항에 나서고 있는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비롯한 극우세력을 실질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 정세에서 극우세력에 맞선 투쟁을 실질적으로 주도함으로써, 또한 실질적으로 주도할 때에만, 노동자계급이 윤석열 탄핵과 내란죄 처벌에 찬성하는 70~75%의 광범한 대중 속에서 헤게모니를 획득하면서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관철할 힘과 노동자운동의 힘찬 전진을 보장하는 미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2016~2017년 촛불항쟁의 경험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015~16년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에 맞선 민주노총의 투쟁은 2016~17년 촛불항쟁의 문을 열었지만, 민중항쟁을 주도할 만한 총파업을 조직하는 데 실패하면서 탄핵을 성공시킨 민주당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 탄핵소추 이후 헌법재판소 결과가 나오기까지 세 달 동안 열린 광장에서 노동자·민중의 요구가 폭넓게 제기되었지만, 대중적 탄력은 결코 받지 못했다. 촛불항쟁의 승리자가 된 민주당의 정치가 큰 틀에서 대중의 의식을 지배하고 제한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선의 핵심 과제, 즉 극우세력의 저항을 진압하며 윤석열 파면·퇴진과 내란죄 구속·처벌을 관철하고 국민의힘을 해체·몰락시키는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수록 노동자·민중의 다양한 요구들을 제기하고 관철시킬 힘이 확대된다. 역으로 노동자계급이 또 다시 핵심 과제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다시 한 번 민주당의 부르주아 의회권력이 결정적인 해결사로 기능한다면, 민주당의 정치를 넘어서는 노동자·민중의 요구는 대중적 호응 없는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분출하기 위해 다양하게 노력해야 하지만, 핵심 과제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결정적 역할 없이는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사진: 연합뉴스 5) 예상되는 세 가지 시나리오 새로운 계급투쟁 지형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큰 틀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첫 번째, 윤석열 파면·퇴진과 내란죄 구속·처벌 및 국민의힘 해체·몰락이 모두 실현되는 시나리오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번 기회에 극우세력을 궤멸시키는 것으로서, 현 정세에서 노동자계급이 최선을 다해 추구해야 할 투쟁목표다. 이러한 성과는 민주당의 부르주아 의회권력을 중심으로 해서는 결코 얻어질 수 없다. 오직 노동자계급이 위력적인 총파업으로 폭발적인 민중항쟁을 주도함으로써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 낼 때에만 쟁취할 수 있다. 만일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한다면, 노동자·민중의 다양한 요구들과 급진적 민주주의 요구들을 관철해 나갈 수 있는 거대한 동력이 형성될 것이다. 노동자운동과 노동자정치가 그야말로 획기적인 전진을 시작할 것이다. 민주당의 재집권이 아닌 노동자정부 수립과 노동자세상 건설로 나아가야 한다는 노동자계급의 전망까지도 상당한 대중 속에서 유의미한 대안으로 부상하기 시작할 것이다. 두 번째, 국민의힘 해체·몰락은 말할 것도 없고 윤석열 파면과 내란죄 처벌조차 실패하는 시나리오다. 그 형태가 윤석열의 복귀든, 내각제 개헌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결론은 같다. 극우세력의 목표가 실현되는 것으로 노동자계급으로서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물론 여론의 70%가 12·3 친위쿠데타에 대해 강력한 분노를 갖고 있고 군중집회가 계속되는 현재 상황에서는 가능성이 매우 낮다. 그러나 극우세력이 궤멸의 위기 앞에서 필사적인 저항과 반격에 나서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완전히 봉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여론을 넘어 물리력으로도 극우세력을 제압해 나가야 한다. 세 번째, 윤석열 파면과 내란죄 구속·처벌은 실현되지만 국민의힘 해체·몰락은 실현되지 않는 시나리오다. 윤석열을 단죄함으로써 파시즘 부활 시도에 상당한 경종을 울리기는 하겠지만, 극우세력 또한 국민의힘을 지켜냄으로써 추후 반격을 도모할 진지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세력관계를 크게 바꿔내지 못한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다. 극우세력에 맞선 투쟁이 민주당의 부르주아 의회권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면,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의 총파업과 민중항쟁이 충분히 강력하게 전개되지 못한다면, 이 시나리오로 귀결될 것이다. 이 시나리오로 간다면, 이후 상황은 매우 위험하게 전개될 수 있다. 이 시나리오는 민주당의 재집권으로 귀결될 것인데, 민주당 정권 아래서 노동자·민중의 삶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머지않아 노동자·민중 속에 거대한 실망과 환멸이 다시 조성될 것이다. 살아남은 극우세력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전열을 정비하고 세를 불려 더욱 강력해진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특히 세계경제와 한국경제가 점점 더 깊은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점은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의 극우세력 성장은 과거 군사파시즘에 향수를 느끼는 60대 이상에 크게 쏠려 있었다. 그런데 이제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양상처럼 극우세력이 노동자·민중의 경제적 빈곤화로부터 역설적으로 강력한 사회적 기반을 제공받으면서 전 세대에 걸친 세력을 구축하게 될 수 있다. 극우세력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관계도 바뀔 수 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극우세력의 성장은 자본가계급 전반의 지지를 얻지 못한 가운데 이루어졌고,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가 실패한 또 하나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향후 경제위기가 심화된다면 자본가계급 전반이 극우세력의 집권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할 가능성도 있다. 만일 극우세력이 재집권하게 된다면 그 자체로 노동자·민중에 대한 극심한 사회경제적 공격을 의미하게 되겠지만, 다시 한 번 파시즘 부활을 획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가 이번에 확인했듯이, 군사파시즘의 역사와 잔재 때문에 극우세력의 집권이 매우 빨리 파시즘으로 진화하는 게 한국 사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로 가게 되더라도 상황이 무조건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설령 민주당이 재집권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노동자계급의 독립성과 투쟁력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느냐에 따라 이후 사태 전개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민주당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실망과 환멸이 윤석열 국민의힘 정권의 등장으로 귀결된 것은 노동자운동·노동자정치의 위축과 민주당에의 종속이라는 연결고리가 있기에 가능했다. 만일 민주당 정권 아래서 노동자계급이 독립성과 투쟁력을 단호하게 발전시켜 나갔다면 민주당 정권에 대한 실망과 환멸은 극우세력이 아니라 노동자운동·노동자정치가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결국 실천적인 요점은 이것이다. 첫 번째 시나리오를 현실화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것,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의 위력적인 총파업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민중항쟁을 주도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것은 설령 투쟁이 목표한 만큼 이루어지지 못해 세 번째 시나리오로 귀결되더라도 그에 대한 최선의 준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5. 노동자계급의 투쟁방향 수립을 위하여 2016년 박근혜 퇴진 투쟁 때에는 10월 24일 최순실 태블릿PC가 폭로되고부터 46일 만에 탄핵소추가 가결되었다. 당시 군중집회 흐름 안에서는 민주당의 거국내각 타협 시도와 탄핵 추진을 비판하면서 ‘대중투쟁의 힘에 의한 퇴진’을 추구하는 노선이 한동안 우위에 섰었다. 하지만 11월 30일 민주노총 총파업이 초라하게 실패하자 민주당 중심의 탄핵 추진으로 분위기가 급선회했다. 12월 9일 민주당이 주도적으로 탄핵소추를 성공시킨 뒤 촛불항쟁의 모든 성과를 가져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12·3 친위쿠데타 시도 후 11일 만에 탄핵소추가 가결되었다. 2016년과 달리 처음부터 ‘대중투쟁의 힘에 의한 퇴진’이 아니라 ‘부르주아 제도에 의한 탄핵’으로 길이 잡힌 것이다. 왜 그랬을까? 첫 번째는 2016년 경험에 의한 학습효과일 것이다. 두 번째는 다시 한 번 민주노총이 ‘대중투쟁의 힘에 의한 퇴진’을 주도적으로 관철할 만큼 위력적인 총파업을 조직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12·3 친위쿠데타 이전 민주노총의 상태는 2016년 최순실 태블릿PC 폭로 이전보다 더욱 좋지 않았다. 세 번째는 민주당이 처음부터 모든 타협을 거부하고 탄핵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제2의 계엄령 선포에 대한 공포 때문에 윤석열의 직무를 하루라도 빨리 중단시켜야 한다는 대중적 공감대가 매우 강력했기 때문이다. 비록 ‘대중투쟁의 힘에 의한 퇴진’ 경로를 가지 못하고 ‘부르주아 제도에 의한 탄핵’ 경로를 밟아 왔을지라도,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지금까지 노동자·민중의 투쟁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비상계엄 선포로부터 2시간 33분 만에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요구 결의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 힘은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듣자마자 국회로 달려갔던 수천 명의 노동자·민중에게서, 또한 전국 각지에서 그들을 응원했던 수백만, 수천만의 노동자·민중에게서 나왔다. 12월 7일 이후 지속되고 있는 군중집회는 윤석열 탄핵소추가 가결되게 한 결정적인 힘이었으며, 윤석열의 파면과 내란죄 구속·처벌 및 국민의힘 해체를 향해 전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힘으로 기능하고 있다. 지금까지 투쟁에서 민주노총의 역할은 모순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상당한 역할을 해왔지만, 자신의 잠재력에 비해서는 매우 제한된 수준에 그쳤다. 민주노총은 12월 4일 새벽 3시를 기해 ‘윤석열 퇴진시까지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5일, 6일, 11일 세 번에 걸쳐 금속노조와 철도를 중심으로 5만에서 10만 정도가 참여하는 제한된 총파업에 그쳤다. 민주노총은 군중집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고 있고 상당수 조합원들이 군중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군중집회에서 경찰 바리케이드를 밀어내고 길을 열어낸 모습은 광범한 미조직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위력적인 총파업을 조직해 낸다면, 군중집회는 폭발적인 민중항쟁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아직 민주노총 내 공식 단위는 물론 현장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이에 관한 논의들이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군중집회에서는 2030 여성들의 주도성이 눈에 띄게 부상했다. 양적 기준에서는 2008년이나 2016년의 군중집회에서도 비슷한 면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과거보다 훨씬 강력한 적극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21~22일 남태령에서 경찰에 가로막힌 전봉준투쟁단에 2030 여성들 주도로 아래로부터 전투적 연대를 조직하여 28시간 만에 승리를 쟁취한 것은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다. ‘남태령 대첩’의 감동은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과 이동권 투쟁 장애인들에 대한 자발적 연대로 이어지고 있다. 차별과 억압에 맞서 스스로 연대를 조직하며 광장의 주역이 된 2030 여성들이 현 정세에서 전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 정세에서 가장 핵심은 민주노총이 윤석열 파면·퇴진과 내란죄 구속·처벌 및 국민의힘 해체라는 핵심 요구와 함께 노동자·민중의 다양한 요구들을 내걸고 위력적인 총파업을 조직해 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폭발적인 민중항쟁을 주도하며 정세를 이끌고 나가는 것이다.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민주노총의 위력적인 총파업을 촉구하고 선도하는 활동을 아래로부터 긴급하게 조직해 나가야 한다. 좌파 정치조직들, 전투적·변혁적 현장 활동가들,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먼저 주체로 일어서서 그 절실한 필요성을 광범한 조합원들에게 호소하고 설득해 나가야 한다. 동시에 민주노총 공식 기구에 전면적인 토론을 제기하고 단호한 결의를 끌어내야 한다. 관료적으로 후퇴한 노동자운동의 상태 때문에 당장에는 충분한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 같은 역동적인 정세에서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도약이 일어날 수도 있다. 결과가 무엇이든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야 할 시점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번에 극우세력을 궤멸시키지 못한다면, 노동자·민중의 경제적 빈곤화가 역설적으로 극우세력 성장에 폭넓은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는 세계적인 양상이 이제 한국에서도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다. 사회적으로 가장 위험한 부분은 2030 남성이다. 2030 남성은 대체로 2030 여성에 비해 상당히 보수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향후 2030 남성 사이에서 실업·비정규직에 따른 경제적 고통이 심화되고 여성·소수자 혐오성향이 강화된다면, 그 상당수가 극우세력의 강력한 사회적 기반으로 포획될 가능성이 있다. 만일 이것이 현실화한다면 극우세력의 파괴력이 몇 곱절 배가될 것이다. 이미 60대 이상이 극우세력의 중요한 기반이 돼 있는 상황에서 OECD 최악의 노인빈곤도 주목해야 한다. 당면한 정세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과정에서 이러한 위험에 맞선 투쟁을 적극적으로 조직해야 한다. 핵심적으로는 노동자운동이 청년실업·비정규직·노인빈곤 문제를 해결할 계급적 요구를 전면에 제기하는 것, 2030 여성운동이 분리주의가 아닌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뻗어나가면서 2030 남성을 견인해 내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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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전환점에 선 베네수엘라(원문 기사) https://www.leftvoice.org/venezuela-at-a-tipping-point/ 후안 크루즈 페레, 히메나 베르가라 2024년 8월 8일 7월의 치열한 대선 이후 베네수엘라는 쉬운 탈출구가 없는 전환점에 서 있다. 권위주의적이고 반노동자적인 마두로 정부도 극우파 야당도 베네수엘라 노동자계급에게 어떤 것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정치적 위기가 극에 달하고 있다. 7월 28일(일) 베네수엘라 중앙선관위가 니콜라스 마두로를 대선 승리자로 선언하자, 우파 야당은 중앙선관위의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자체 집계 결과를 토대로 에드문도 곤살레스 우루티아 후보를 승자로 내세웠다. 미국의 주류 언론 매체는 예상대로 마두로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우파 야당을 지지하고 있다. 일부 좌파들은 계속해서 마두로를 옹호하며 이번 선거가 공정하고 투명했다고 주장한다. 베네수엘라 외부의 사람들이 너무 많은 소음 속에서 급변하는 현 상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7월 29일 아침 베네수엘라 전역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어떤 축하 행사나 불만의 표시도 없었다. 하지만 늦은 아침이 되자 정적은 냄비와 프라이팬을 두드리는 소리로 바뀌었고, 몇 시간 뒤에는 전국 각지에서 수천 명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선거 조작이 있었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인데, 특히 광역 카라카스로 알려진 노동자·빈민 거주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이 수년 동안 반민주 정권과 굶주림에 지쳐 있었고, 따라서 마두로가 압도적인 선거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시위는 우파와 정부 모두를 놀라게 했을 것이다. 일요일 밤, 우파 야당 지도자인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와 에드문도 곤살레스 우루티아는 사람들에게 거리로 나오라고 요청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부는 폭력적인 진압으로 대응했는데, 특히 월요일 늦게 노동자 거주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7월 30일 화요일까지 우파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자발적인 시위가 자신들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유도했고, 자신의 전통적인 사회적 기반인 중산층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집회를 조직했다. 7월 29일 밤부터 대규모 군경 부대가 시위대를 체포하고 괴롭히고 잔인하게 구타했으며, 정부가 후원하는 준군사 단체인 이른바 '콜렉티보스'와 협력했는데 이들은 시위가 열리는 동안 총기를 발사하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단속이 시작된 이후 최소 2,000명의 시위대가 체포되었고 수백 건의 불법 가택 급습이 보도되었다. 마두로는 심지어 구금된 시위대를 “옛날처럼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강제 노역에 투입하고 싶다고 기자회견에서 말하기도 했다. 제국주의 압력과 차베스주의 사이의 베네수엘라 오늘날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마두로는, 1999년부터 2013년까지 베네수엘라를 통치한 중도 좌파 군 장교이자 정치가인 우고 차베스의 후계자다. 그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온 나라를 뒤흔든 격변기 이후 1998년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그 결과 강력한 반제국주의 수사(修辭), 석유 대금 일부를 전유(專有)하는 국가 개입, 석유 추출주의로 자금을 조달하는 진보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중심으로 지지층을 구축했다. 차베스의 정책은 불평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그의 목표와 업적은 베네수엘라 안팎에서 크게 과장돼 있다. 그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21세기 사회주의”라고 불렀지만, 일부 유명한 국유화를 제외하고는 기업 소유권은 여전히 사적 소유로 남아 있었고, 소유주에게는 항상 시장 가치에 따라 관대한 보상이 주어졌다. 14년간의 집권 기간에 차베스는 외채를 갚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중남미 지역 좌파들은 대체로 외채를 제국주의 국가들의 수탈 장치로 인식한다. 특히 FT는 그런 인식이 분명하고, 따라서 중남미 지역 전반에서 ‘외채상환 거부’를 중요한 투쟁 강령으로 내세운다. -옮긴이). 2013년 차베스가 사망한 후 마두로가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그해 말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 직후 유가가 급락하면서 베네수엘라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졌다. 마두로는 노동자계급에게는 잔인하고 대자본과 기업에게는 유리한 긴축 정책을 펼치며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2018년 마두로가 내놓은 경제 계획은 최저임금을 급격히 하락시켜 월평균 3달러로 떨어뜨렸다(필자의 확인에 따르면, 2017년에는 최저임금이 월평균 13달러였다. -옮긴이). 임금은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차베스주의와 제국주의 압력으로 베네수엘라는 평화 시기에 있는 국가 중에서 21세기 들어 가장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졌다. (2010년대 초반 베네수엘라 인구의 약 20%에 해당하는) 500만 명 이상이 베네수엘라를 떠났고 기아와 실업, 빈곤이 전례 없는 비율에 이르렀다. 제재를 통한 제국주의의 개입은 2017년과 2019년에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역외 자산과 전 세계 유동성 은행계좌를 몰수하면서 급격히 증가했다. (쿠바에 대한 금수 조치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이런 제재를 가한 이유는 베네수엘라 인민을 고통과 빈곤에 빠뜨려 정부에 대한 불만을 촉발하거나 강화함으로써 정부 축출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2019년 [우파의 대부분이 동조하고 트럼프 또한 마침내 베네수엘라에서 정권 교체를 단행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보았던] 후안 과이도의 쿠데타 시도 과정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게다가 차베스의 프로젝트는 민주적 참여 메커니즘을 구축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은 의사결정에서 배제되었다. 그 대신 차베스 개인에게 집중된 하향식 통치, 베네수엘라 통합사회당이라는 단일 정당에 의한 국가 통제,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를 지지하는 군대에 의존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대부분의 좌파 조직들은 차베스주의에 포섭되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 탄압의 표적이 되었다. 예를 들어, 매우 반민주적인 선거법 때문에, 통상적으로 자원이 부족한 좌파 조직들은 [우파가 정치적 대표성을 가진 것과 달리] 선거에 후보를 내세울 수 없었다. <제4인터내셔널 트로츠키주의분파>(FT그룹) 소속 사회주의노동자동맹(LTS)의 지도자 밀턴 데 레온은 이렇게 설명한다. “수백만 명의 베네수엘라 인민이 극심한 빈곤에 빠진 반면, 소수의 기존·신흥 부자들은 베네수엘라에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해 왔다. 밀레이가 아르헨티나에서 하려고 하는 일을 마두로는 이미 수행했다. 그래서 나는 아르헨티나의 '자유주의자' 대통령이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부러워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왔다. 만일 야권 후보인 에드문도 곤살레스가 집권한다면 그가 해야 할 더러운 일의 상당 부분은 이미 수행된 상태일 것이다.” 차베스주의의 권위주의적 과정과 지금의 선거 양보를 제공할 능력이 사라지면서 정부는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강압에 의존하게 되었다. 장기적인 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차베스 사망 이후 마두로 정부는 보나파르트주의와 억압의 강화라는 특징을 띠었다. 따라서 오늘날 베네수엘라 정부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정부가 선거 조작을 저질렀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합법적이고 정당한 분노가 촉발되었고, 탄압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월요일에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민주주의를 (또는 적어도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표현인 투표권 인정을) 지키기 위한 대중의 결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파에 의해 활용되고 있다. 노골적인 선거 조작에 맞서, 보수파 ‘통합 민주주의 플랫폼’의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옹호자로 내세운다. 하지만 이들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이전 정부에 대한 군사 쿠데타와 외국의 개입을 일관되게 옹호했었다. 우파 야당 인사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는 차베스 집권 초기부터 차베스나 마두로를 무력으로 축출하려는 모든 시도를 일관되게 지지해 왔다. 마차도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2002년 쿠데타를 지지했는데,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차베스 대통령이 군부 고위층에 의해 체포되고 사업가 페드로 카르모나로 대체되었지만 대규모 군중 동원으로 차베스가 다시 권력을 되찾았다. 2004년에는 차베스 축출을 위한 국민투표를 다시 추진했지만, 거의 20%의 표차로 패배하자 부정투표를 주장하며 공식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2019년 후안 과이도의 실패한 쿠데타 시도를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개입을 옹호하기도 했다. 이 마지막 행위로 인해 마차도는 이번 선거에서 출마가 금지되었다. 따라서 마차도는 74세의 전직 외교관인 에드문도 곤살레스 우루티아를 대선 후보로 직접 지명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거리낌이 전혀 없었던 마차도가 다시 한 번 군대에 “베네수엘라 국민의 편에 서라”고 촉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군부는 2002년 쿠데타 실패 이후 줄곧 차베스에게 충성해 왔으며 마두로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7월 28일 선거와 부끄러운 조작극 이후 새로운 지형에 접어들고 있다. 마두로에 대한 표면적으로 견고한 지지는 충분한 수의 노동자계급이 지속적으로 결집한다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과 국제 좌파는 마두로 정부나 우파 야당 어느 쪽에도 희망을 두지 않아야 한다. 실제로 베네수엘라의 한 좌파 단체 연합은 이번 선거 기간 동안 “노동자계급에게는 후보가 없다”는 캠페인 아래서 단결했다. 참여 단체인 사회주의노동자동맹(LTS), 모두를 위한 나라(PPT-APR), 사회주의 흐름(MS), 사회주의 자유당(PSL)은 공동 성명에서 정부와 부르주아 야당이 노동자 권리를 약화시키고 초과착취 조건을 강요하려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둘 다 청소년에 대한 경찰폭력 지지, 낙태 금지와 반성소수자 종교단체에 대한 지지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마두로는 이번 선거에서 지지를 얻기 위해 2023년부터 수천 개의 교회에 자금, 물품, 라디오 방송을 제공하는 등 복음주의 교회들에 구애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리더 앙헬 아리아스가 기자회견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후보가 차이는 있지만 사업가와 대형 상인, 다국적 기업과 은행가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국제적 압력 강화 시간이 지나도 정부가 공식 개표 결과를 발표하지 못하면서 마두로에 대한 외국의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미국과 그 지역적 '전선 조직' 미주기구(OAS)의 비난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앤서니 블링컨은 8월 1일 목요일 보도자료를 통해 “에드문도 곤살레스 우루티아가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발표했다. 루이스 알마그로 미주기구 사무총장은 마두로에게 패배를 인정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미주기구 상임 총회에서 공식 투표 기록의 즉각적인 공개를 요구하는 안건에 충분한 찬성표를 모으는 데는 실패했다. 선거 결과 발표 이후 이 지역의 중도 좌파 정부들은 곤경에 처했다. 마두로 정부에 우호적인 정부들은 베네수엘라 정부가 제공한 납득할 수 없는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외국의 개입을 거부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다.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멕시코), 구스타보 페트로(콜롬비아),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브라질) 대통령은 모든 투표 집계표의 공개와 공정한 기관의 결과 검증을 요구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최근 미국 국무부는 곤살레스 우루티아를 아직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브라질·콜롬비아·멕시코 정부가 제안한 협상적 권력 이양을 위한 중재를 지지한다고 밝히며 입장을 완화했다. 미국이 강경한 정권 교체 접근 방식에서 벗어난 것은 지역 내 중국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미국의 영향력이 감소한 맥락, 그리고 마두로 정부와 다른 중도 좌파 라틴 아메리카 정부들 사이에 틈을 벌리려는 시도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쉬운 탈출구는 없다 베네수엘라는 전환점에 서 있다. 이 갈등이 어떻게 해결되든, 우리는 정치적 사건들의 가속화를 목격하고 있다. 마두로는 탄압을 강화해야만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며, 이미 그 맛보기가 일어나고 있다. 반면에 모종의 권력 이양이 합의되면 우파 정부는 노동자의 권리를 약화시키고 국내외 자본에게 유리한 퇴행적 재분배를 초래할 프로그램을 시행하려고 할 것이다. 베네수엘라 인민은 뚜렷한 탈출구가 없는 수렁에 빠져 있다. 미국의 제재는 지난 10년간 엄청난 고통을 초래했으며, 미국에서 베네수엘라에 연대하려는 노력은 무엇보다 바로 이 제재를 문제 삼아야 한다. 또한 선거 과정이 아무리 조작되거나 의심스러워 보여도 우리는 항상 외국의 개입에 반대해야 한다. 베네수엘라에서 손을 떼라! 그러나 이것이 마두로 정부에 대한 지지를 의미해서는 안 된다. 미국 좌파의 일부는 (설령 수사에 불과할지라도) 미 제국주의와 반대되는 '진영'에 자신을 배치하는 정치 지도자를 지지하는 '진영주의' 입장을 취한다. 사회주의해방당(PSL)이 대표적이다. 사회주의해방당은 더 나아가 반대편을 가리키는 압도적인 증거들을 무시한 채 차베스주의를 사회주의를 향한 '혁명적' 경로의 예로 찬양한다. 마두로의 통치를 지지함으로써, 사회주의해방당은 권위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자본주의 이윤을 보존하기 위해 긴축 정책을 통과시키고 노동자계급 운동과 좌파를 탄압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도 보이지 않는 정부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장애물이다. 국제 좌파는 친쿠데타 우파를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특히 마두로 정부가 사회적 시위에 대해 잔인한 탄압을 가할 때 마두로에 반대하는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차베스주의의 기괴한 퇴행에 직면하여, 좌파는 이 경험에서 결론을 도출하고 독립적이고 노동자계급적이며 사회주의적인 프로젝트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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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총선은 과연 극우파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는가?6월 14일 신인민전선 선거강령 발표 사진: AFP 2차 대전 이후 최초로 극우파 정부가 출현할 가능성 때문에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던 프랑스 총선이 7월 7일 예상 밖 결과와 함께 끝났다. 1차 투표에서 33.2%를 득표하며 1위를 했던 극우파 ‘국민연합’(RN)은 143석을 차지하며 3위로 밀려났다. 마크롱 대통령이 속한 중도우파 ‘앙상블’은 1차 투표 3위(21.3%)라는 부진을 딛고 163석으로 2위로 올라섰다. ‘불복프랑스’(LFI)·사회당·공화당·녹색당을 중심으로 결성된 신생 좌파연합 ‘신인민전선’(NPF)은 1차 투표에서 2위(28.2%)로 선전한 여세를 몰아 182석으로 깜짝 1위를 차지했다. 이번 선거는 투표율이 1차(66.7%)와 2차(67.1%) 모두 1997년 총선 이후 최고를 기록할 만큼 프랑스 국내에서도 뜨거운 관심 속에 치러졌다. 2022년 총선에 비하면 20% 가량 투표율이 치솟았다. 관심의 초점은 역시 거침없는 상승세를 보여 온 극우파 국민연합의 집권 여부였다. 2007년 총선 때만 해도 4.3%에 불과했던 극우파의 득표율이 2022년 총선 때 18.7%로 늘어났다가 올해 6월 초 유럽의회 선거에서 31.4%로 폭증했기 때문이다. 2위를 한 마크롱 세력(14.6%)과 16.8%나 차이가 나면서 선거 결과는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럽의회 선거 결과가 나오던 6월 9일 밤,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라는 승부수를 꺼내 들었다. 한편으로 극우파의 기세가 탄력을 받은 상황에서 다음 총선까지 3년 동안 소수파 정부를 끌고 가는 데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면, 다른 한편으로 극우파의 집권을 경계하는 표가 결집함으로써 자신의 당이 2022년 총선의 부진을 딛고 다시 과반수를 획득할 수도 있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극우파의 집권 실패와 신인민전선의 ‘성공’ 마크롱이 그런 도박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전제는 2022년 총선 때 결성됐던 좌파 선거연합 ‘사회생태신인민연합’(NUPES)이 붕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내부 분란으로 시달리던 사회생태신인민연합은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과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 이후 내부 이견이 첨예화하면서 끝내 붕괴했다. 하마스의 공격을 “테러리스트 공격”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사회당의 주장을 불복프랑스가 반대하자 사회당이 전격 철수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크롱이 조기 총선을 발표하고 불과 5일 만인 6월 14일 불복프랑스·사회당·녹색당·공산당은 새 선거연합 ‘신인민전선’의 결성을 선언하면서 공동 강령을 발표했다. 사회경제 분야에서는 급진좌파 불복프랑스의 입장을 골격으로 해서 △2023년 연금개악 취소 및 퇴직 연령을 64세에서 60세로 하향 △세후 최저임금을 월 1,600유로(약 230만원)로 14% 인상 △생필품과 에너지 가격 동결 △임금과 연금의 물가연동제 △(2017년 마크롱 정부가 폐지한) 부유세 재도입 △과도한 이윤에 대한 새로운 세금 도입 △의회 투표를 생략할 수 있는 정부의 긴급명령 입법권을 헌법에서 삭제 등의 공동 강령이 만들어졌다. 반면 대외정책 분야에서는 사회당의 입장을 골격으로 해서 △러시아에 맞서 NATO 협력을 유지하며 우크라이나 계속 지원 △우크라이나에 프랑스의 직접적인 군사개입 반대 △두 국가 해법을 전제로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 △이스라엘에 무기수출 중단 △10·7 하마스 공격을 ‘테러주의 학살’로 규정 △이스라엘과 하마스 지도부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 체포영장 지지 등의 공동 강령이 만들어졌다. 또한 극우파 국민연합이 이민자 수의 대폭 축소를 핵심 공약으로 내거는 데 맞서 △2023년 마크롱 정부가 개악한 이민법 취소 △망명 절차를 더 관대하고 매끄럽게 하는 이민법 개정 등을 내걸었다. 결과적으로 신인민전선은 결성 23일 만에 극우파의 집권을 저지하고 최다 의석을 차지하면서 일정한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신인민전선의 성공은 극우파의 집권 가능성에 맞서 신인민전선을 열렬히 지지한 노동자대중에게도 역시 성공을 뜻할까? 신인민전선의 모델 - 1936년 프랑스 인민전선 극우파의 집권을 막겠다고 결성된 신인민전선이 모델로 한 것은, 그 이름에서 바로 드러나듯이 1936년의 프랑스 인민전선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프랑스 인민전선이 처음에는 파시즘에 맞서 그럴 듯하게 출발했지만 결국에는 파시즘에게 스스로 굴복했다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 있는데도 신인민전선이 이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이 집권한 이후 이웃 나라 프랑스에서도 나치당과 비슷한 파시즘 세력이 거침없이 준동했다. 독일 노동자계급이 파시즘에게 패배한 핵심 이유가 공산당과 사회당의 분열에 있다고 본 프랑스 노동자대중은 파시즘에 맞선 공산당과 사회당의 단결을 아래로부터 추동해 냈다. 1935년 정치적 단결을 실현해 낸 프랑스 노동자계급이 파시즘 세력을 거리에서 육탄전을 펼쳐가며 분쇄해 냈을 때, 노동자대중의 자신감은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런 상황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이 1936년 총선을 앞두고 자본가정당인 급진당을 끌어들여 인민전선을 결성했다. 57.8%를 득표하며 610석 가운데 386석(63.3%)을 차지한 인민전선의 총선 승리는 파시즘을 확실히 제압한 것처럼 보였다. 총선 직후 노동자들은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공장점거 총파업을 일으켰다. 10일 이상 프랑스를 완전히 마비시킨 총파업을 중단시키기 위해 자본가들은 (1930년대 대공황 상황임에도) △집단교섭권과 파업권의 보편적 인정 △주 48시간 임금을 지급하며 주 40시간으로 노동시간 단축 △2주간의 유급 여름휴가 등 상당한 양보를 제시했다. 1936년 총파업에 나선 르노 노동자들. '바캉스'라는 말은 프랑스 노동자들이 총파업으로 얻어낸 2주 유급휴가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더욱 근본적인 변화를 향해 전진할 수도 있었을 그 상황에서, 노동자들을 설득하여 이 총파업을 중단시킨 것은 바로 인민전선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시 노동자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공산당이 급진당의 인민전선 이탈을 막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중단하도록 설득하여 관철시킨 것이었다. 파시즘을 막아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총파업이 아니라 인민전선 정부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노동자들은 물러섰다. 그러나 인민전선은 세상을 바꾸는 길과는 반대로 갔다. 바로 옆 나라 스페인에서 비슷한 성격의 인민전선 정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파시즘 군부에 맞서 내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독일의 나치 정부와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부가 스페인 군부를 공공연히 지원한 것과 달리)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는 급진당의 반대에 가로막혀 스페인 인민전선에 대한 지원을 포기했다. 급진당은 자본가들의 지원을 받으며 1년 뒤 인민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급진당 주도로 재구성된 인민전선 정부는 긴축정책을 전면화하고, 그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를 무력 진압했다. 인민전선 정부의 정책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노동자대중의 힘을 약화시키고 파시즘 세력의 힘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1940년 애초 인민전선 정부를 출범시켰던 그 의회가 (히틀러에게 항복한) 파시즘 군부에게 나치 부역정권을 수립하도록 전권을 부여하면서 스스로 최후를 맞이했다. 자본가정당과 연합한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환상 때문에 총파업이라는 무기를 내려놓고 수동적 방관자로 전락했던 노동자대중은 결국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그런데 만일 1936년 거대한 총파업에 나섰던 프랑스 노동자들이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면서 (당장 권력 장악까지는 아닐지라도) 작업장을 토대로 지역별로 노동자평의회를 건설해 내면서 자본가계급과 정부를 감시하고 통제할 물질적 힘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진했다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경제위기 신인민전선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듯이, 지금 프랑스의 상황은 1930년대와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반은 1930년대 대공황 때와 비슷하게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끝없는 경제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1930년대보다는 국가의 경제 개입이 훨씬 다양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경제위기의 양상이 덜 파국적이지만, 문제는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럽의 위기는 미국과도 뚜렷이 대비된다. 미국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진원지였지만, 지난 15년 동안 기축통화 달러를 마음껏 찍어내며 자신의 경제위기를 나머지 세계로 (아직까지는 성공적으로) 전가해 왔다. 물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여전히 몇몇 나라를 상대로 제국주의적 수탈을 지속하고 있긴 하지만, 달러화 대비 유로화가 가진 취약성은 미국과 큰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다. 경제학적으로는 벌써 수십 번 파산했어야 마땅한 달러화의 무제한 발권이 지속될 수 있는 힘은 첨단기술, 금융, 군사 부문에서 여전히 세계를 압도하는 미국의 패권에서 나온다. 그런 패권을 갖고 있지 않은 유럽은 따라서 유로화를 마음껏 찍어내며 국가개입을 극대화하는 마법을 부릴 수가 없다. 게다가 유로화는 유럽연합이 미국처럼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는 또 하나의 취약점을 안고 있다. 유럽연합 27개 국가 중 19개 국가가 유로화를 공동화폐로 사용하는 상황에서, 유로존 국가들은 특정 국가가 과도하게 재정을 지출하여 유로화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타국에 피해를 안길까봐 서로 민감하게 감시하고 있다. 그래서 유로존에서는 매년 정부 재정적자를 GDP 대비 3% 이내로 하고 누적된 총 정부부채를 GDP 대비 60% 이내로 유지한다는 이른바 ‘재정건전성’ 기준이 존재한다. 물론 이 기준은 수시로 무시되긴 하지만, 늘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미국처럼 무제한 발권을 통한 국가개입을 불가능하게 하는 또 하나의 족쇄로 작용한다. 지난 15년 동안 자본주의 위기 대응에서 미국과 유럽 사이에 발생한 차이는 2008년 미국 GDP 대비 110.3%를 기록했던 유럽연합의 GDP가 2023년에는 67.1%로 축소됐다는 통계로도 확연히 드러난다. 위기 전가 공세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 2008년 이후 만성화된 유럽의 경제위기는 당연하게도 그 고통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기 위한 수많은 공세를 낳았다. 그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도 줄기차게 전개됐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정권의 공세와 노동자들의 투쟁이 거대한 파노라마를 형성하며 전개돼 왔다. 2010년 우파 정권이 밀어붙인 연금개악에 프랑스 노동자들은 최대 300만 명이 참여한 총파업으로 맞섰다. 그러나 총파업의 위력을 10여 차례의 하루 경고파업과 거리시위로 제한시킨 노조 지도부 때문에 ‘60세 정년의 62세로 연장’ 등을 요지로 하는 연금개악을 저지하지 못했다. 노조 지도부가 생각한 대안은 정권교체였고, 노동조합의 강력한 지원에 힘 받은 중도좌파 사회당이 2012년 대선과 총선에서 모두 승리하며 집권했다. 그러나 사회당은 연금개악을 되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2016년에는 노동시간 연장과 정리해고 자유화를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악을 추진했다. 다시 노동자들이 격렬한 총파업으로 맞섰지만, 사회당 정부는 헌법상 긴급명령 제도를 활용해 의회 표결을 생략한 채 입법을 강행했다. 이후 사회당 정부의 지지 기반이 무너져 내린 틈을 뚫고 중도우파 마크롱이 혜성처럼 나타나 권력을 장악했다. 프랑스 정치의 양대 축으로서 번갈아 공세를 폈던 우파와 중도좌파가 공히 대중의 분노 앞에 무너져 내리면서 발생한 정치적 격변이었다. 그런데 2017년 집권한 마크롱 또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2018년의 유류세 인상은 ‘노란 조끼’ 운동이라는 광범위한 빈민층의 반란을 촉발했다. 2019년의 공공부문 연금개악 추진은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의 강력한 총파업에 맞닥뜨렸고 2020년 코로나가 터지면서 흐지부지되었다. 2022년 가까스로 재집권에 성공한 마크롱은 2023년 다시 ‘정년 64세로 추가 연장’을 핵심으로 하는 연금개악을 추진했다. 2023년, 그러니까 지난해 상반기 연금개악에 맞서 다시 한 번 거대한 총파업이 전개됐다. 최대 참가 인원이 350만 명으로 2010년의 규모를 능가하면서 1980년대 이후 최대 규모의 노동자투쟁이 됐다. 전통적으로 노동자투쟁의 중심 역할을 해온 대도시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의 중소도시들까지도 총파업 열기로 가득 찼다. 여론조사에서 94%가 연금개악에 반대하고 65%가 연금개악 철회를 위한 경제봉쇄를 지지할 정도로 일반 대중의 지지도 압도적이었다. 2010년의 총파업이 연금개악을 저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다 기억하는 상황에서, 일부 선진노동자들은 무기한 총파업을 건설하기 위한 운동에 착수했다. 에너지·정유·철도·청소 등 일부 부문에서는 실제로 무기한 파업이 아래로부터 시작되기도 했다. 그러나 노조 지도자들은 다시 한 번 총파업을 10여 차례의 하루 경고파업과 거리시위로 제한하면서, 더 이상 넘어서려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들이 생각한 대안은 ‘정권교체’였다. 그들이 생각한 정권교체의 주체는 2022년 총선 때 결성됐던 좌파 선거연합 ‘사회생태신인민연합’(NUPES)이었다. 그 중심에는 사회당의 몰락 이후 좌파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한 급진좌파 불복프랑스가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명백하게 배신했던 사회당 또한 좌파 선거연합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좌파 선거연합의 집권이 또 다른 배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총파업이 연금개악을 막지 못하고 허망하게 소멸되자, 대중의 기대는 좌파 선거연합보다는 한 번도 집권한 적이 없는 극우파 국민연합을 향해 쏠렸다. 연금개악에 반대한다는 입장만 밝혔을 뿐 총파업 시위에는 매우 적대적이었던 극우파가 아이러니하게도 연금개악 반대투쟁의 가장 큰 정치적 수혜자가 됐다. 극우파의 지지가 가파르게 상승하자, 마크롱 정부는 그 기세를 꺾어볼 요량으로 극우파의 핵심 공약인 이민 제한을 상당 부분 수용하는 이민법 개악을 지난해 12월 강행했다. 이민 허용 기준을 강화함으로써 극우파로 쏠리는 흐름을 자기 당에 묶어 보겠다는 계산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당은 분열되고 극우파의 기세만 더 살려주는 꼴이 되었다. 바로 이런 배경 위에서 지난 6월 초 유럽의회 선거에서 국민연합이 (2022년 총선 때 18.7%에서 31.4%로 득표율이 폭증하는) 눈부신 선전을 하게 된 것이었다. 독일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서도 극우파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는데, 구체적인 맥락은 조금씩 다르지만 큰 틀에서는 비슷한 과정의 결과였다. 2023년 프랑스 연금개악 반대투쟁 사진:AFP 무엇이 진정한 희망인가? 자본가세력과의 인민전선인가, 투쟁하는 노동자대중의 자기조직화인가? 이번 총선에서 극우파의 상승세가 집권으로 귀결되는 것을 막았다고 해서 불복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신인민전선이 새로운 희망을 만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불복프랑스는 지난해 연금개악 반대투쟁 때 오로지 그 정치적 수혜를 얻는 것에만 집중할 뿐 무기한 총파업을 건설하려는 노력에는 철저히 눈을 감았다. 그런 태도를 가진 불복프랑스가 설령 집권을 한들 노동자들의 열망을 진정으로 관철해 낼 수 있을까? 결코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주관적인 진실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인 역학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기한 총파업과 같이 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상황이 열리면 노동자대중은 자본주의 일상 속에서는 감히 꿈꾸지 못하던 변화를 추구하고 실행하면서 자본주의를 결정적으로 타격할 힘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러한 투쟁 속에서 건설되는 노동자평의회 같은 노동자대중의 자기조직화 기관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집결하는 조직적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들이 중단되고 자본주의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래서 노동자대중의 힘이 가라앉고 자본가계급의 통제력에 압도당하는 상황에서는 노동자대중의 의식마저 부르주아 의식에 장악당하게 된다. 그렇게 무기력해진 노동자들 위에서 자본가계급이 가하는 압력은 어떤 정권에게든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된다. 이번 선거에서 불복프랑스가 보여준 ‘정치’는 만일 그들이 집권한다면 훨씬 더 거세질 압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불복프랑스가 주도적으로 결성한 신인민전선에 참여한 사회당은 2012년부터 5년 간 대통령을 역임하며 노동법 개악 강행 등을 주도했던 올랑드를 총선 후보로 내세웠고 결국 당선까지 시켰다. 6월 30일 오후 8시 15분, 1차 투표의 개표 결과가 나온 직후 불복프랑스를 대표하는 멜랑숑은 신인민전선 소속으로 3위를 한 모든 후보들의 사퇴를 전격 선언하며 극우파 국민연합에 맞선 이른바 ‘공화국전선’의 형성에 앞장섰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신인민전선 후보들이 양보해 준 후보들 가운데에는 마크롱 정부의 전 총리로서 2023년 연금개악과 그 긴급명령 강행처리를 주도했던 보른, 그리고 역시 마크롱 정부의 현 내무장관으로서 노란조끼 시위부터 연금개악 반대투쟁과 경찰폭력 항의투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위에 대한 잔인한 폭력진압과 2023년 이민법 개악을 주도했던 다르마냉이 포함돼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극우파 대통령 밀레이의 미치광이 같은 정책들이 보여주듯이, 지난 10여 년 자본주의 위기 심화와 함께 세계 곳곳에서 성장해 온 극우파의 집권은 노동자들에 대한 훨씬 더 강화된 공세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앞으로 자본주의 위기가 더욱 심화되면 이들 극우파는 노동자의 모든 성과를 파괴하고 노동자운동의 절멸을 시도하는 파시즘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해 갈 것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끝없이 전개되는 상황에서는,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대안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결국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야만 나의 생존을 지킬 수 있다는 극우파와 파시즘의 논리가 대중에게 악마적 호소력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극우파의 전진을 저지하는 것, 파시즘으로의 진화를 가로막는 것은 오늘날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사활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얼핏 보기에 극우파를 제외한 모든 세력과의 연합은 극우파를 저지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최근의 프랑스 사례가 보여주듯이 그러한 방법은 극우파의 전진을 저지하지 못한다. 오히려 극우파의 성장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줄 뿐이다. 극우파의 전진을 저지할 힘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불러내는 데 있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건설해 내고, 그 한복판에서 노동자대중의 자기조직화 기관을 건설해 내는 것이다. 자본가세력과 연합하는 인민전선이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노동자투쟁의 건설 및 노동자대중의 자기조직화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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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중국에 파업이 돌아오다중국 최대 음식배달 플랫폼 메이퇀 배달 노동자 (사진: REUTERS/ALY SONG/FILE PHOTO) (옮긴이 주) 최근 중국 노동자투쟁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아시아 노동 리뷰>(Asian Labour Review)에 6월 4일자로 실린 ‘The Return of Strikes in China’를 번역하여 게재한다. (원문) https://labourreview.org/strike-wave-china/ 1980년대 시장 개혁 이후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에서는 특히 2000년대와 2010년대 초에 제조업 부문에서 파업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러나 2016년 이후 공장 파업은 전반적으로 그 수와 규모가 감소했으며, 파업의 중심도 제조업에서 서비스 부문, 특히 플랫폼 경제로, 연안 도시에서 중국 내륙으로 옮겨가고 있다. 공장 노동자들의 최근 파업 양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인가? 플랫폼 노동자들의 파업은 중국 노동자운동의 현황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제조업 파업의 부활 2023년은 2016년 이후 파업의 활기에서 새로운 정점을 찍은 해였다. 공장 파업 건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으며, 특히 주강삼각주와 양쯔강삼각주 등 연안지역에서 파업이 가장 많이 발생했다. <중국노동통신>(China Labor Bulletin)에 따르면 2023년 공장 파업은 434건으로 2022년 37건, 2021년 66건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 434건 중 약 80%가 남동부 연안지역에서 발생했다. 2023년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 증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중국노동통신>의 중국 파업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제조업 파업의 절반 이상이 저부가가치 공장의 이전 또는 폐쇄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 이후 이러한 공장 이전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코로나19 팬데믹의 파급 효과로 인해 자본 이전이 가속화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글로벌 공급망의 최하단에 위치한 공장들은 큰 타격을 입었고, ‘제로코로나’ 정책이 종료된 이후에도 주문량이 늘지 않았다. 이러한 압박에 따라 공장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임금이 낮은 지역으로 이전했다. 지난 10년 동안 운영의 일부를 이전한 일부 공장은 이제 완전히 이전하고 있다. 둘째, 팬데믹은 글로벌 공급망의 구조조정을 촉발했다. 대형 글로벌 브랜드들은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중국 공급업체에 과도하게 의존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로 인해 이들 브랜드는 다른 곳에서 공급업체를 찾게 되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2022년 ‘제로코로나’ 정책으로 인해 세계 최대 아이폰 조립공장인 정저우의 폭스콘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새 아이폰 모델의 출시가 지연되었고, 애플은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중국 외 지역으로의 생산 전환을 가속화했다. 셋째, 2000년대 말부터 연안지역 지방정부들은 산업 고도화를 촉진하기 위해 저급 제조업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도록 장려했다. 2023년 광둥성 정부는 공장 이전을 장려하고 ‘첨단화, 지능화, 친환경화’ 제조업을 촉진하기 위해 거의 10개의 청사진과 지침을 발표했다.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되어 중국 연안, 특히 남부 주강삼각주에서 저급 제조업 자본이 대량으로 빠져나가는 현상이 발생했다. 중국 노동법에 따르면 고용주는 노동자를 해고할 경우 퇴직금을 지급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윤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고용주들은 2023년에 공장 이전 비용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사용했다. 일부 사장들은 몰래 기계를 반출하거나 잠적하기도 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퇴직금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임금과 사회보험을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판 틱톡에서 노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사장들의 도주’라고 부른다. 일요일이나 휴일을 마치고 돌아온 노동자가 사장이 이미 도망친 것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국경절과 설 연휴 기간 동안 노동자들은 사장의 도주 가능성에 대한 걱정을 짧은 동영상으로 표현했다. 고용주가 퇴직금을 피하기 위한 또 다른 일반적인 전략은 노동자에게 ‘주 5일, 하루 8시간’ 근무를 강요하는 것이다. 표준 노동일은 국제 노동운동의 역사적인 승리이지만 오늘날 중국에서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의 제조업 부문에서 노동자는 일반적으로 매우 낮은 기본급을 받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장근무에 의존해야 한다. 고용주가 연장근무를 줄이거나 없애면 노동자는 충분한 수입을 올릴 수 없다. 이렇게 함으로써 고용주는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그만두도록 효과적으로 강요하여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일부 고용주들은 노동자를 기술적으로 ‘해고’하지 않으면서 공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 위해 이 전략을 사용한다. 고용주들은 또한 월급을 더 줄이기 위해 노동자에게 더 많은 휴가를 제공한다. 일부 공장은 노동자들에게 일주일에 이틀이나 사흘만 일하게 하고 최저임금의 70~80%만 지급한다. 일부 공장은 단순히 생산을 중단하고 몇 달 동안 휴무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사장들은 퇴직금을 회피하거나 줄일 수 있었다. 또한 노동자들을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했다. 중국의 지속적인 경기 침체로 노동자들은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대체 일자리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공장 폐쇄와 이전으로 인해 2023년에 많은 비공인 파업이 발생했다. 고용주의 전략에 대응하여 노동자들은 법 안팎에서 행동에 나서고 요구를 제기했다. 첫째, 노동자들은 고용주에게 퇴직금 지급을 압박하기 위해 폐쇄된 공장의 기계 반출을 막았다. 둘째, 노동자들은 휴무일 연장과 잔업 취소를 고용주의 꼼수로 인식하고 ‘주 5일, 하루 8시간’ 근무제에 맞서 싸우며 잔업 시간을 요구했다. 셋째, 노동자들은 연장근무수당에 의존할 필요가 없도록 고용주에게 기본급 인상을 요구했다. 넷째, 일부 노동자들은 사장이 퇴직금을 줄이기 위해 임금을 삭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법에 규정된 것 이상의 퇴직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2023년 11월 세계 최대 신발 제조업체 중 하나인 바오첸 코퍼레이션은 장쑤성 양저우에 있는 공장을 폐쇄하고 인도에 대한 투자를 늘렸다. 노동자들의 파업 압력으로 공장은 법이 정한 대로 노동자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지난 1년 동안 노동자들의 임금이 5,000위안(약 95만원)에서 2,000위안(약 38만원)으로 급격히 감소하면서 퇴직금이 크게 줄었다. 노동자들은 보상 계획에 불만을 품고 파업을 계속했다. 요약하자면, 노동자들은 고용주의 공세에 맞서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많은 노동자가 과거에 파업을 통해 집단행동에 참여하는 경험을 쌓았고 또 이를 공유했다. 2023년 파업에서는 작업 중단, 집회, 농성, 공장 출입구 봉쇄, 기계 지키기 등 다양한 전술을 사용하여 사장들을 압박했다. 또한 노동자들은 총공회(노동조합), 노동국, 법무부, 사회보장국 등에 불만 사항을 전달하며 여러 정부 기관에 시정조치를 요구했다. 일부 투쟁이 몇 달 동안 지속되는 등 노동자들의 활력이 행동의 지속 기간에서도 입증되었다. 하지만 이번 파업 물결에도 한계가 있었다. 첫째, 제조업 노동력의 규모가 급격히 축소되면서 노동자들의 협상력이 제한되었다. 수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던 2016년 이전 파업에 비해 2023년 공장 파업 참가자는 보통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불과했다. 둘째, 많은 공장이 생산 축소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이미 생산 규모가 축소되거나 중단된 공장을 상대로 파업을 벌였다. 이러한 파업은 사측에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셋째, 2015년 이후 중국 정부가 더욱 권위주의적으로 변하고 노동권 보호를 약화시켰으며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정부는 노동자들의 행동을 억압하기 위해 고용주들과 손을 잡았다. 2023년의 파업 물결에서도 노동 NGO의 개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선전의 한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파업이 발생하자 정부 기관과 노동조합이 신속하게 개입하였는데, 표면적으로는 분쟁을 중재했지만 실제로는 사측을 지지했다. 지방 노동감독관은 ‘고의로 생산을 방해하는 노동자는 해고하고 구금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이 공장의 노동자 수백 명이 함께 걸어 나와 지하철을 타고 시청으로 향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내리자 경찰이 이들을 가로막고 버스에 태워 다시 공장으로 돌려보냈다. 이렇듯 제조업 부문 노동자들은 투쟁 과정에서 더 적대적인 상황에 마주쳤다. 플랫폼 노동자들의 새로운 전술 지난 몇 년 동안 제조업의 공장 폐쇄와 IT·부동산 같은 분야의 대규모 해고로 인해 플랫폼 산업에 진출하는 노동자가 점점 더 많아졌다. 2018년 중국 최대 음식배달 플랫폼인 ‘메이퇀’의 배달 노동자는 270만 명이었는데, 2023년에는 7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승차공유 운전자도 같은 추세이다. 이처럼 플랫폼 노동자가 크게 증가했지만 경기 침체로 인해 고객층이 줄어들고 있다. 중국의 플랫폼 산업은 2023년에 ‘포화 상태’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부 관찰자들은 공장 노동자에 비해 플랫폼 노동자들이 집단적 조직화에서 더 큰 장벽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한다. 플랫폼 노동자들은 노동 과정에서 공간적으로 더 많이 분산되어 있어 지속적인 관계를 구축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소통과 조율이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2023년 중국의 플랫폼 노동자들은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산발적으로 투쟁을 벌였다. 10월에는 헤이룽장성 칭안현의 노동자 50여 명이 메이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8월에는 하이난성 청하이시의 메이퇀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다. 4월에는 광둥성 산웨이시에서 수백 명의 메이퇀 음식배달 노동자들이 일주일 이상 파업을 벌여 국내외의 관심을 끌었다. 산웨이 지역 음식배달 노동자들의 파업은 최근 몇 년간 플랫폼 노동자들의 파업 중 가장 길고 가장 잘 알려진 파업 중 하나였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메이퇀 산웨이 지사에 고용된 음식배달 노동자는 총 800명에서 1,000명 사이였다. 2023년 4월 초, 메이퇀의 현지 관리사무소는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던 각종 보조금을 취소하고 주문 건당 단가를 낮췄다. 그 후 메이퇀 노동자들은 각 역과 팀 내에서 오프라인 대화를 통해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성공적인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일부 직원들이 파업을 제안했다. 이들은 위챗 그룹을 개설하고 팀원들에게 파업에 대한 관심을 표시하기 위해 그룹에 가입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지인·친구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팀과 역의 동료들을 추가했고, 그러자 이들이 다시 자기 팀원들 사이에서 소문을 퍼뜨렸다. 쿠이위안 거리는 산웨이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으로, 많은 배달 노동자들이 주문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기다리는 동안 노동자들은 동료들에게 파업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위챗 그룹에 가입하도록 권유했다. 며칠 만에 위챗 그룹에 가입한 노동자 수가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위챗 그룹 참여자 누구도 대면 조직화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4월 중순까지 수많은 오프라인 대면 조직화가 이루어졌다. 오프라인 대화를 통해 노동자들은 비가 올 때 파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메이퇀은 보통 비가 올 때 더 많은 주문량을 받기 때문에 그때 파업을 하면 메이퇀에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결정은 오프라인에서 팀원 네트워크와 팀 간의 지인·친구 네트워크를 통해 노동자들 사이에 불균등하게 전달되었다. 4월 19일, 비가 내렸다. 노동자들은 위챗 그룹에 “지금 비가 오니 더 이상 주문을 받지 말아야겠다”와 같은 메시지를 올렸다. 수십 개의 메시지가 그룹에 넘쳐나자 모두가 파업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위챗 그룹에 속하지 않은 노동자들도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앱에서 로그오프하면서 배달이 불가능할 만큼 많은 주문이 배정되자 파업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주문을 완료할 수 없어 일을 중단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파업 첫날이 끝날 무렵 산웨이에서 역에 기반해 움직이는 메이퇀 노동자들의 70%가 파업에 참여했다고 추정했다. 둘째 날 밤, 메이퇀은 파업을 중단시키기 위해 주변 지역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를 산웨이로 투입했다. 파업파괴에 동원된 노동자들에게는 일당 200위안의 기본급과 산웨이 노동자들보다 거의 3배나 많은 단가가 지급되었다. 이는 산웨이 현지 노동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파업 3일째부터 경영진에 가장 충성도가 높은 30명의 현지 노동자만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추정했다. 나머지는 모두 파업을 벌였다. 파업파괴에 동원된 노동자들은 메이퇀의 운영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산웨이의 복잡한 지역 지리를 잘 몰랐고 주문을 배달하는 데 매우 느렸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곧 지쳐서 차라리 기본급만 받고 인터넷 카페에서 비디오 게임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자 지역 당국과 경찰이 노동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일터로 복귀하라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한 노동자는 경찰의 전화를 받고 압박에 굴복하여 일터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곧 그의 팀원들이 메이퇀 업무 앱을 통해 그가 순위 시스템에서 ‘최고 성과자’로 선정된 것을 보게 되었고, 따라서 그가 업무에 복귀한 게 틀림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같은 팀에서 파업을 조직하고 있던 그의 삼촌에게 꾸중을 들었다. 다른 팀원들에게도 꾸중을 들었다. 이 노동자는 다시 파업에 들어갔다. 동료노동자들 간의 압력이 국가 당국의 압력을 무력화시킨 사례였다. 파업이 시작된 후 위챗 그룹은 노동자들이 다음 단계를 논의하는 활기찬 공간이 되었다. 노동자들은 경영진과 교섭할 대표를 선출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노동자 교섭 대표들이 보복을 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대신 팀 리더들이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을 경영진에게 전달했다. 8일째 되던 날, 경영진은 모든 보조금을 원상복구하고 단가를 기존 수준으로 회복하는 것으로 양보했다. 그러나 파업 참가자들은 파업 기간 동안 ‘모든 등급의 폐지’라는 야심차고 평등주의적인 요구를 만들어 냈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들을 더 잘 단결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파업 전에는 많은 보조금이 A등급 노동자에게만 지급되었고, 그 단가도 더 높았다. 노동자들은 보조금을 메이퇀 앱을 통해 일하는 모든 산웨이 배달 노동자에게 적용하고 단가를 균등화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파업 참가자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8일차와 9일차에 A등급 노동자들이 대부분 업무에 복귀했지만, 하위 등급 노동자들은 파업을 계속 이어갔다. 이후 며칠 동안 경영진은 매일 보너스를 지급하며 노동자들을 다시 일터로 유인했다. 11일째가 되자 파업 참가자의 약 80%가 업무에 복귀했다. 14일째에 파업이 사실상 종료되었다. 파업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난 파업 참가자들 사이의 분열은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반년이 지난 후에도 일부 노동자들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A등급 노동자들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불평하며 다시는 이런 배신자들과 함께 파업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파업 이후 메이퇀 경영진은 파업을 조직하고 유지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팀원 네트워크를 방해하기 위해 산웨이 지사와 팀 구조를 훨씬 더 자주 개편했다. 이번 파업에는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플랫폼 노동자들이 주로 비교적 작은 도시의 지역 주민인 경우, 노동자들 간의 촘촘한 인적 네트워크가 공간적으로 분산된 노동력을 조직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이 사례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플랫폼 알고리즘이 노동자들의 파업을 확산하고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셋째, 노동자들의 연대가 취약하며 경영진의 ‘분할지배’ 전략을 극복하는 것이 단체행동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2023년 공장 노동자와 플랫폼 노동자가 주도한 중국의 파업은 고무적이면서도 냉정한 교훈을 준다. 경기 침체가 노동자들의 생계에 다양한 방식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치자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싸우면서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요구하겠다는 강한 결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산발적이고 즉흥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은 사측의 책략, 정부의 조치, 경제의 구조적 변화로 인해 제약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장벽에 대응하려면 보다 정교하고 지속가능한 조직화 방식과 더 강력하고 광범위한 계급 연대의식이 필요하다. 거칠게 조직화를 가로막는 정치 환경 속에서 이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지가 중국 노동자들에게 절박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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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노조건설 연대 캠페인에 나서자!'현대차 노동자들이 함께 일어서자!' 전미자동차노조는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등 미조직노동자 조직화에 나섰다 사진: UAW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 자리한 현대차 미국공장에서 노조건설 운동이 한창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이 만만치 않다. 한국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연대가 절실한 시점이다. UAW의 역사적인 파업 승리와 조직화 캠페인 미국의 전미자동차노조(UAW)는 2023년 9~10월 3대 자동차기업 빅쓰리(GM·포드·스텔란티스)를 상대로 40여일간 파업투쟁을 벌여 △임금인상 △이중임금제 폐지 △물가임금연동제 복원 △공장폐쇄에 맞선 파업권 보장 등을 쟁취했다. △임시직 고용보장과 정규직화 미진 △2007년 이후 입사자의 퇴직의료연금 복원 미해결 △전면파업 불발 등에서 한계도 분명했지만, 수십 년 동안 끝없는 양보교섭으로 점철돼 온 역사 위에서 보자면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승리’라 할 만한 결과였다. UAW는 2023년 파업투쟁 승리를 노동자계급 전체로 확대하기 위해 11월부터 현대차, 도요타, 혼다, 폭스바겐 등 13개 미조직 자동차 공장 15만 명을 상대로 조직화 캠페인에 나섰다. 그리고 올해 4월 17~19일 테네시주 채터누가 폭스바겐 공장에서 노조건설 인준투표를 실시하여 73% 찬성으로 압도적 가결을 끌어냄으로써 첫 번째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5월 13~17일 앨라배마 주 터스칼루사 메르세데스-벤츠 공장에서 실시된 노조건설 인준투표에서는 56.4%가 반대를 던져 부결됐다. 세 번째 노조건설 인준투표가 열릴 곳은 아마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현대차 공장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지난 2월 1일 UAW가 현대차 공장에서 폭스바겐, 메르세데스-벤츠에 이어 세 번째로 노조건설 동의서명이 30%를 넘어섰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미국 노동법에 따라 국가노동관계위원회(NLRB)에 노조건설 인준투표를 신청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문턱을 넘어선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녹록지 않다. 노조건설 동의서명 30% 달성을 발표하고 100일이 넘었지만 UAW는 추가 수치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상황이 보여주듯이, 현대차 사측과 앨라배마 주 정부 등이 노조건설을 적극 방해하고 나서면서 만만치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2002년 현대자동차는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에 미국공장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2005년 문을 연 이 공장에 앨라배마 주 정부는 2억 5,280만 달러의 보조금을 제공했다. 주 정부가 제공하는 막대한 보조금, 취약한 노동조합 전통과 저임금에 이끌려서, 비슷한 시기 독일·일본 등 다른 외국계 자동차 회사들도 줄줄이 미국 남부지역에 현지공장을 세웠다. 기아자동차도 2009년 조지아주 웨스트포인트에 미국공장을 설립했다. 앨라배마 주에서는 1997년 메르세데스-벤츠 공장이 설립된 이후 2001년 혼다, 2003년 도요타, 2005년 현대차 공장이 문을 열고 그 협력업체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현재 4만 7천 명이 자동차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현재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에서는 약 3천8백 명의 노동자들이 산타페, 투싼, 산타크루즈 픽업트럭, GV70 럭셔리 SUV, GV70 전기차를 조립하고 있다. 현대차 그룹은 3억 달러를 들여 앨라배마 공장 업그레이드를 진행 중이며, 총 50억 달러가 투자되는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와 SK On의 합작 배터리공장을 조지아주에 건설하고 있다.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의 노동조건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노동자들은 주 6일, 하루 10시간 근무를 기본으로 한다. 날마다 회사가 요구하는 잔업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장시간 노동 못지않게 노동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불규칙한 근무일정이다. 특히 주말과 휴일 전후에 작업 스케줄이 수시로 달라지고 또 대부분 직전에야 통보된다. 토요일에 근무한다고 해놓고선 갑자기 취소한다든지, 반대로 근무 안 한다고 했다가 갑자기 출근하라고 통보하는 식이다. 노동자들은 주 6일 근무제와 갑작스러운 작업 스케줄 변경 때문에 주말을 망치고, 과로와 사기 저하에 시달린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노동자들은 99% 이상 출석을 해야 하며,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자동적으로 ‘시정조치’가 들어간다. 지각이나 결석으로 인해 출근율 99% 기준을 어기면 구두경고를 받고 1년 동안 관찰대상이 된다. 출근율 99% 기준을 한 번 더 어기면 서면경고를 받고 노무과에 반성문을 제출해야 하며 2년 동안 관찰대상이 된다. 출근율 99% 기준을 세 번째로 어기면 자동으로 해고된다. 여름휴가와 개인휴가가 근속에 따라 결정되는데,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1년 동안 4~5일의 여름휴가와 3일의 개인휴가만을 갖고 있다. 휴가를 소진할 경우 자기 몸이 아무리 아파도, 아이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도, 자녀에게 특별한 행사가 있어도, 부모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이를 악물고 출근하거나 징계를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작업시간 중에는 화장실 가는 게 제한돼 있다. 또 작업장 온도가 너무 높아서 사람들이 땀을 너무 많이 흘린다. 종종 너무 더워서 기절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노동자들은 열악한 작업환경 때문에 “우리 몸이 찢겨 나가고 있다, 그냥 소모품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목, 어깨회전판, 손목터널, 손가락 등에 근골격계 질환을 갖고 있다. 또 많은 부상을 입는데, 노동자들은 “사람들이 다치고 또 다친다”고 표현한다. 상당수 노동자들이 부상 때문에 회사를 잠시 그만두고 수술을 받은 뒤 복귀한다. 그렇게 다시 돌아오는 노동자들을 회사는 반드시 원래 일하던 똑같은 자리에 배치한다. 그래서 어떤 노동자는 수술을 여덟 번이나 했다고 한다. 또 지금까지 두 명의 노동자가 일하다가 죽었는데, 그때마다 라인이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갔다고 한다. 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지금까지 앨라배마 공장을 다니다가 그만둔 사람이 9천 명 정도인데, 그 가운데 일부만 정년퇴직을 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다쳐서 그만두거나 또는 다쳤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의 임금은 미국의 완성차 업체들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다. 자동차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이지만, 그 임금으로는 자동차를 살 수가 없다. 2019년까지는 1년에 10센트나 12센트씩밖에 오르지 않았다. 2020년부터는 임금이 조금 더 올랐지만, 물가가 훨씬 더 많이 올랐다. 그런데 2023년 UAW가 3대 자동차기업(빅쓰리)을 상대로 2028년 4월까지 임금을 25% 인상시켰다. 물가임금연동제 복원에 따른 자동상승분까지 감안하면 33% 인상이다. 그러자 노조건설 바람이 몰아닥칠까 봐 외국계 자동차 기업들도 덩달아 임금을 올렸다. 도요타가 9%, 혼다가 11%를 인상했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향후 4년 동안 25%를 인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동안 1년에 2~3천 달러 이상 준 적이 없던 보너스도 8천 달러나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현대차 앨라배마 노동자들은 빅쓰리에 고용된 UAW 조합원들보다 시간당 10달러 정도를 덜 받는다. "우리 몸이 찢겨 나가고 있습니다" - 열악한 노동조건을 증언하는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노동자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의 노조건설 시도 2015~16년에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에서 노조를 건설하려는 1차 시도가 있었다. 일정한 숫자의 노조건설 동의서명을 조직했지만, 사측의 협박과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코로나19 기간에 노동자들이 다시 노조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에 관리직에게는 유급휴가를 주면서, 생산직 노동자들은 일시해고를 해서 실업급여를 받게 한 게 중요한 계기였다. 실업급여를 신청하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릴 때의 심경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이다. 1차 노조건설 시도 때 만들어졌던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노동자들의 소통이 활발해졌다. 게시물을 자주 올리던 다섯 명이 노조건설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면서 줌과 페이스북으로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2023년 가을 UAW 파업이 승리하면서,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에서도 노조건설 운동이 본격화됐다. 현대차 앨라배마 사측의 노조건설 방해 한국에서 노조탄압으로 악명 높은 현대차가 앨라배마 공장 노조건설 시도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지난해 12월 11일 UAW는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노동자들이 경영진을 노조건설 방해 불법행위 의혹으로 전국노동관계위원회(NLRB)에 신고했다고 발표했다. UAW에 따르면, 현대차 사측은 앨라배마 공장에서 업무 외 시간에 업무 공간이 아닌 곳에서 노조 홍보물을 압수하여 폐기하거나 반입하지 못하게 했다. 한 노동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생산구역 바깥에 있는 휴게실로 UAW 유인물을 가지고 갔을 때 그룹 리더가 ‘회사 구내에 이런 건 가져올 수 없다’면서 유인물을 가져가서 폐기처분했다. 주차장에서 유인물을 배포하는 걸 중단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현대차 사측은 노동자들을 매일같이 모임에 불러 반노조 영상물을 보게 한다. ‘노조는 평범한 노동자들을 등쳐먹고 사는 부패한 집단’ 같은 온갖 비방들로 노동자들을 세뇌하려는 것이다. 노조 없이도 잘 살아오지 않았냐며 회유도 하고, 노조가 들어서면 공장이 떠나갈 수 있다며 협박도 한다. 반노조 티셔츠를 나눠주기도 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전국노동관계위원회는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을 상대로 제기된 세 건을 조사하고 있다. 노조건설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한 명의 노동자를 해고한 건, 노조 유인물을 압수하고 배포를 금지한 건, 그리고 노조 지지자들을 협박한 건이다. 그런데 이런 방법들이 2016년에는 노조건설 흐름을 잠재울 만큼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지금은 노조건설에 앞장선 노동자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기 때문에 그 효과가 제한적이다. 하지만 다수 노동자를 머뭇거리게 하면서 노조건설의 발목을 잡는 효과는 분명히 내고 있다. 앨라배마 주 정부와 자본가단체의 노조 공격 현대차 공장이 위치한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는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의 탄생지이다. 로자 파크스가 버스 좌석의 강제 양보를 거부하면서 흑인 민권운동의 불을 붙였던 곳이고, 흑인 민권운동에서 전국적인 지도자가 됐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처음으로 설교를 했던 곳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1860년대 노예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흑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심각하게 자행됐던 곳이다. 그런데 그러한 인종적 차별과 억압이 오늘날에도 잔존하면서 노동조합 배제를 통한 노동권 억압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앨라배마 주 정치인들은 일자리라는 큰 행운을 안겨다 준 회사들에 (주로 흑인으로 이루어진)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이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앨라배마 주의 자동차산업을 지키겠다’며 공공연히 반노조 선동에 앞장서고 있다. 올해 1월 메르세데스-벤츠 노동자들이 노조건설 운동을 공개적으로 시작했을 때, 앨라배마 주지사 케이 아이비는 노조건설을 기필코 좌절시키겠다고 다짐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 자발적으로 노조를 인정하는 기업에는 보조금 수령자격을 박탈하는 법안을 앨라배마 주 의회가 통과시키자, 주지사가 5월 13일 최종 서명했다. 앨라배마 주 자본가단체는 반노조운동 웹사이트를 개설해서 막대한 선전물량을 쏟아내고 있다. 이처럼 ‘앨라배마 비즈니스 모델’, 즉 무노조 경영을 어떻게든 고수하겠다는 앨라배마 자본가계급의 태도에는 노예해방을 거부하던 1850년대 노예주들의 모습이 겹쳐 어른거린다. 앨라배마 주정부는 자본가들과 함께 현대차 등 미조직노동자들의 노조건설에 탄압을 퍼붓고 있다 한국 노동자들의 연대 메시지가 가질 힘 한국에서 현대차 자본의 노조 건설 방해와 탄압은 악명이 높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폭력 탄압하고, 수천억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부품사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부품사 자본과 함께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실행했다. 정규직 노동자들을 상대로도 일상적인 단협 위반, 징계 등을 일삼고 있다. 경총, 한경협 같은 자본가단체를 통해 정부와 국회에 노조법 2·3조 반대, 노동개악 등을 주문해왔다. 이런 현대차 자본의 탄압에 맞서 그동안 한국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단결해서 함께 싸웠다. 그런데 이제 한국에서 노조탄압을 일삼던 현대차 자본이 미국에서도 노조건설을 방해하고 노동자들을 탄압한다면, 우리가 할 일은 간명하다. 미국의 노동자들과도 연대하고 단결해서 현대차 자본에 맞서 함께 싸우는 것이다. 현 상황에서 현대차를 비롯한 한국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의 연대와 지지는 앨라배마 공장 노동자들에게 가뭄에 단비 같은 소중한 소식이 될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라는 위대한 가능성 앞에서,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노동자들은 자본이 강요하는 굴종적인 삶을 거부하고 당당한 노동자의 삶을 희망하며 노동조합으로 과감하게 전진할 것이다.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노조건설에 대한 한국 노동자들의 연대와 지지는 미국 노동자운동 전반에도 작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UAW의 파업 승리 이후 조직화 캠페인에 많은 노동자의 눈과 귀가 쏠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평양을 건너 머나먼 곳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힘을 건네주는 꼭 그만큼, 우리의 연대는 한국의 노동자운동을 더욱 건강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 우리 자신을 도울 것이다.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노조건설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현장에서 광범하게 조직해 내자!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를 향해 의미 있는 한 발을 내딛자!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의 노조건설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현대차는 모든 곳에서 노조 탄압을 중단하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라!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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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옴니버스 법안을 폐기시키다아르헨티나, 옴니버스 법안을 폐기시키다 아르헨티나의 극우 대통령 하비에르 밀레이가 야심차게 밀어붙이던 옴니버스 법안이 하원 심의과정에서 폐기됐다. 극우 대통령의 등장에 위축되지 않고 아래로부터 힘차게 투쟁을 이어나간 노동자·민중이 거둔 첫 승리다. (참고: 아르헨티나, 극우정권의 초긴축 실험에 맞서 노동자의 반격이 시작되다!) 옴니버스 법안, 빈껍데기로 전락하자 자진 철회 지난해 12월 10일 취임한 밀레이는 곧바로 일련의 ‘충격요법’ 조치들을 단행했다. 12월 12일에는 △공공지출 대폭 축소 △공공사업 전면 유보 △에너지·교통보조금 삭감 △연방예산 동결 등이 담긴 ‘경제비상조치’를 발표했다. 12월 20일에는 노동권, 임대차, 가격규제, 민영화, 교육, 연금, 관광, 위성인터넷 서비스, 의약품 판매, 무역, 외국인 토지매입 등 다방면에 걸친 대규모 규제완화를 위해 수백 개의 법률을 무력화하는 366개 조항의 ‘메가 대통령령’을 발표했다. 그리고 12월 27일에는 △공기업 사유화 △시위제한 명령권 △불법시위 처벌 강화 △환경규제 완화 △세금·연금·에너지·안보 관련 의회 권한의 대통령 양도 등이 포함된 664개 조항의 ‘옴니버스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후 한 달여, 밀레이 정부는 의회에서 다수를 확보하기 위해 협상을 벌이면서 옴니버스 법안의 절반 정도를 포기하고 300여 개 조항으로 추려냈다. 2월 2일 하원에서 옴니버스 법안에 대해 ‘큰 틀에서 동의’하는 찬반투표가 가결됐을 때, 밀레이 정부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것 같았다. 그러나 2월 6일 옴니버스 법안의 각 조항별 찬반투표를 진행하자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공기업 사유화 등 핵심 조항들이 무더기로 부결되면서 옴니버스 법안은 빈껍데기가 되어갔다. 결국 집권 자유진보당(Libertad Avanza)이 법안 자체를 자진 철회했다. “이 법을 필요로 하는 건 정부가 아니라 주민들이라는 게 이해될 때 법안을 다시 제출하겠다”면서. 옴니버스 법안이 폐기된 직후 대통령실은 소셜미디어 X에 올린 공식 성명에서 “주지사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정부가 갖지 못하게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주지사들의 압력으로 하원의원 다수가 옴니버스 법안에 반대했다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자본가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이해관계 조정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부르주아 정치분석가들은 ‘하원에서 옴니버스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한 밀레이의 패배는 그의 정치적 경험부족을 드러냈다’면서 무엇보다 ‘모든 개혁을 하나의 거대 법안에 담아내려 했던 게 실패 요인’이며 ‘밀레이 정부가 정치 전략을 재고해야 할 상황으로 내몰렸다’는 분석을 해외 언론들에 전했다. JP 모건 이코노미스트 디에고 페레이라는 “이건 아르헨티나에서 전례 없는 사건인데, 정부가 첫 번째 입법을 거부당한 사례를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극우 대통령에 맞선 첫 전투 -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나? 그런데 부르주아 정치분석가들이 말하지 않는 결정적인 진실이 있다. 자본가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이해관계 조정이 실패한 것은 무엇보다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가한 강력한 압력 때문이다. 하비에르 밀레이가 취임 직후부터 ‘충격요법’ 조치들을 쏟아내고 있을 때, 취임 10일 차인 12월 20일부터 노동자·민중의 투쟁도 시작되었다. 이 투쟁에 발동을 건 것은 노동조합총연맹 공식 지도부가 아니었다. 노동조합 공식 지도부가 ‘공세를 완화하기 위한 교섭테이블 모색’이나 ‘다음 선거를 통한 심판’ 정도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 사회주의노동자당(PTS) 등 좌파전선(FIT-U)에 결집한 혁명적 좌파 정치세력이 전투적인 노동조합들과 실업자단체를 추동해 2만 명의 도심 시위를 조직해 내면서 투쟁의 물꼬를 텄다. 아래로부터 촉발된 도심 시위는 밀레이 정부의 도로점거 시위 금지령을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매일 같이 이어졌다. 밤에는 각 지역마다 (냄비와 팬을 두드리는) 카세롤라조 시위를 벌이면서 2001년 민중항쟁을 상기시켰다. 총파업을 소집하라는 압력이 아래로부터 강력하게 밀려오자, 마침내 12월 28일 최대 노총 CGT가 총파업을 선언했다. 그리고 1월 24일 3대 노총이 주도하고 150만 명이 참여한 위력적인 총파업이 전개됐다. 총파업 이후에도 투쟁은 계속됐다. 전투적인 노동조합, 여성조직, 문화단체, 사회단체, 은퇴자 등 수천 명의 시위대가 연일 폭염 속에서도 의회 앞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최루탄을 난사하고 때때로 강경진압에 나서면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밤에는 다시 각 지역마다 집회를 열고 카세롤라조 시위를 이어나갔다. 상당수 지역 집회는 참가자들이 민주적 토론을 진행하는 자발적 총회 형식을 띠었다. 노동조합총연맹들이 다시 총파업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언제라도 결정타를 날릴 잠재적 가능성으로 밀레이 정부를 비롯한 전체 자본가 정치세력들을 압박했다. 그리고 좌파전선 소속 하원의원 다섯 명의 맹활약이 있었다. 이들은 매일 가두시위 현장과 의회를 오가면서, 가두시위가 가하는 압력을 의회에 온몸으로 전달했다. 시위대 맨 앞에서 최루탄을 뒤집어쓴 뒤 의회로 달려가 “누가 옴니버스 법안에 찬성표를 던지는지 대중 앞에 다 폭로하겠다”고 압박했다. 257명의 하원은 자본가 정치세력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고, 이들은 모두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를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려는 점에서는 일치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대중투쟁과 그 압력을 의회 안으로 직접 끌어들이는 좌파전선 의원단의 활약은 대중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다수 자본가 정치세력으로 하여금 밀레이 정부와 쉽사리 타협에 나서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아르헨티나 하원의원 니콜라스 델 카뇨 (PTS, 좌파전선 소속) 이러한 요소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아르헨티나 노동자·민중은 극우 대통령 하비에르 밀레이와 치른 첫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왜 그렇게 경제위기가 잦은가? 2024년 1월 아르헨티나 물가는 전월 대비 20.6% 올랐다. 전년 동월대비로는 254.2% 상승이다. 물가가 공식 수치로 5%만 올라도 생활에 부담이 만만치 않은데, 250%를 훌쩍 넘겨 버리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상상이 잘 안 가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 엄청난 물가가 ‘아르헨티나’ 얘기라고 하면 으레 ‘그 나라는 원래 그런 나라 아냐?’ 하는 반응들이 이어진다. ‘넓은 국토와 풍부한 자원을 가졌고 그래서 한때는 선진국 소리까지 들었다지만 포퓰리즘의 퍼주는 정치를 하다가 경제가 망해버린 대표적인 나라.’ 그게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아르헨티나의 이미지다. 그런데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면이 보인다. 경제가 그렇게 망가졌다는데도 그 부담을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는 것이 쉽지 않은 나라이기도 한 것이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가 왔을 때 한국에서 벌어졌던 상황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김대중 정부가 주도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는 외환위기에 따른 경제적 고통을 고스란히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했다. 그 대표적인 결과가 엄청난 규모의 정리해고였고, 뒤이은 비정규직화였다. 그렇게 해서 구축된 고강도 초과착취 시스템 덕분에 삼성·현대·SK·LG로 대표되는 한국의 재벌들은 세계적 수준의 경쟁력을 발휘하며 거대한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부 노동자들도 그 떡고물을 얻어먹으며 ‘노동귀족’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한국의 재벌들이 그렇게 약진하는 동안 노동자계급의 다수를 이루는 비정규직의 삶은 과연 나아졌는가? 또 하나. 한국의 재벌들은 언제까지고 약진을 계속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에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숙명이 있다면, 바로 ‘불균등발전의 법칙’이다. 어떤 기업, 어떤 국가도 언제나 경쟁에서 승리하고 언제나 승승장구할 수는 없다. 한국의 재벌들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한국 노동자계급의 운명은 다시 어떻게 될까? ‘노동귀족’ 소리를 듣던 정규직의 삶은? 그리고 비정규직의 삶은? 2001년 아르헨티나는 큰 경제위기를 겪었다. 한국의 외환위기보다 훨씬 더 큰 위기였다. 그런데 그 경제위기 한복판에서 거대한 규모의 민중항쟁이 폭발했다.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도망쳐야 했고, 그 뒤로 들어선 임시대통령이 2주일 사이에 세 명이나 줄줄이 날아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결국 자본가 정치세력들 가운데 가장 덜 공격적인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페론주의 좌파, 키르치네르주의 세력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아르헨티나 정치를 주도했던 키르치네르주의는 물론 아르헨티나 경제를 위한 해법을 찾지 못했다. 사실 글로벌 사우스에 속하는 대다수 나라들이 그러하듯이, 제국주의 국가들에 경제가 이미 심각하게 종속된 상황에서 자본주의 틀 안에서는 어떤 획기적인 돌파구라는 걸 찾기 어려웠다.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 수준을 대폭 강화해서 자본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법도 쓰지 못했다. 아르헨티나에 조성된 계급역관계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심각한 경제위기가 왔다. 거듭되는 경제위기에 지친 대중은 누군가 어떤 마법이라도 부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극우인사 밀레이를 선택했다. 밀레이가 부리려는 마법은 간단하다.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를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전투에서 밀레이는 패배했다. 외신들에 따르면 밀레이를 지지했던 대중의 상당수는 옴니버스 법안을 비롯한 그의 ‘충격요법’을 실수였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밀레이를 지지한다고 한다. 밀레이가 마법을 부려주기를 기대하지만, 그 마법이 나의 권리를 박탈하는 ‘착취의 획기적인 강화’는 아니기를 바란다는 뜻이겠다. 물론 아르헨티나의 상황은 노동자·민중에게도 아주 고통스럽다. 자본의 위기 전가를 어느 정도 막아낼 힘은 있지만,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만큼의 힘은 아직 없다. 러시아 혁명을 이끌던 볼셰비키 의원단을 연상시키는 사회주의 의원단이 당당하게 활동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들이 수만 명의 대중투쟁을 직접 주도해 나갈 정도의 힘은 있지만, 아직 거대한 노동조합운동의 지도력은 페론주의 세력에게 강고하게 장악돼 있다. 어쨌든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보자면, 아르헨티나는 그저 ‘포퓰리즘 하다가 망한 나라’가 아니다. 극심한 경제위기 속에서도 ‘착취의 획기적인 강화’는 막아낼 정도의 힘을 노동자계급이 갖고 있는 나라다. 또 하나. 여성의 권리와 해방을 위해 가장 강력한 수준의 여성파업을 조직해 낸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르헨티나는 21세기 세계 자본주의라는 사슬에서 ‘가장 약한 고리’일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기괴한 극우 대통령은 ‘이상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별난 일’이라기보다는 앞으로 세계 자본주의 전반에 밀어닥칠 일들을 미리 보여주는 전조일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 아르헨티나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던지는 의미는 결코 사소한 게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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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극우정권의 초긴축 실험에 맞서 노동자의 반격이 시작되다!1월 24일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에서 전국적으로 150만 명이 참여하는 12시간 총파업이 전개됐다. 대선 과정에서 온갖 기괴한 공약들을 내세웠던 극우 인사 하비에르 밀레이가 대통령에 취임한지 불과 45일 만이었다. 노동자총동맹(CGT), 자치노동자연합(CTA-A), 노동자연합(CTA-T) 등 3대 노총이 주도한 이날 총파업에는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대중경제노동자연합(UTEP), 사회운동 단체들, 문화단체들, 스포츠단체들, 좌파 정당 및 정치조직들까지 광범하게 참여했다. 우파 정권 시절인 2019년 5월 이후 5년 만에 다시 조직된 이날 총파업의 핵심 요구는 밀레이 정권의 ‘충격요법’ 정책들을 철회하라는 것, 특히 366개 조항의 ‘메가 대통령령’과 664개 조항의 ‘옴니버스 법안’을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극우 정권의 초긴축 공격에 맞서 100년 넘게 투쟁으로 쌓아 올린 노동자의 권리와 사회적 정의를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결의를 모았다. 1월 24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모인 총파업 시위대 (사진:CTA-A) 밀레이 극우정권의 출범 지난해 하반기 치러진 아르헨티나 대선은 물가상승률이 150~180%에 이르러 임금의 실질 구매력이 턱도 없이 깎여나가고 빈곤율이 40%를 넘어서는 파국적 상황에서 펼쳐졌다. 밀레이는 자국 페소화 대신 미국 달러화를 사용하겠다는 허황된 물가안정 대책과 ‘특권층’에게 위기의 책임을 묻겠다는 입 발린 약속으로, 절망에서 허우적거리는 상당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선투표 과정에서 ‘특권층’의 한 축인 전통적인 우파 공화당과 손을 잡은 밀레이는 강력한 우파 세력을 품에 안은 극우정권을 탄생시켰다. 12월 10일 취임한 밀레이는 우파 공화당의 주요 인사들을 치안부·재무부·국방부 등 요직 장관에 임명했다. 특히 공화당 대선후보로서 1차 투표 때 3위를 했던 빠뜨리샤 불리치가 치안부 장관이 됐다. 동시에 18개 부처 가운데 노동사회보장부, 공공사업부, 사회개발부, 환경부, 여성인권부 등 9개를 폐지했다. 밀레이는 자신의 초긴축 정책이 불러올 노동자·민중의 저항을 겨냥해서 취임 연설에서부터 “도로를 점거하는 시위대에게는 사회보조금 수령자격을 박탈하겠다”고 협박했다. 치안부 장관은 시위 주최 단체에게 경찰의 진압 경비를 부담하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12월 12일, 밀레이는 ‘경제비상조치’를 단행했다. 현재 GDP 5% 수준인 재정적자를 0%로 만들겠다며 △공공지출 대폭 축소 △공공사업 전면 유보 △에너지·교통보조금 삭감 △연방예산의 나머지 모든 항목 동결을 발표했다. 또한 수출경쟁력을 높인다면서 자국 페소화를 달러화 대비 54% 평가절하했다. ‘메가 대통령령’과 ‘옴니버스 법안’ 12월 20일, 밀레이는 대규모 규제완화를 위한 366개 조항의 ‘메가 대통령령’을 발표했다. 노동권, 임대차, 가격규제, 민영화, 교육, 연금, 관광, 위성인터넷 서비스, 의약품 판매, 무역, 외국인 토지매입 등 다방면에 걸친 규제완화를 위해 수백 개의 법률을 무력화하는 조치로 12월 29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메가 대통령령’은 노동권 관련해서 △미등록 고용에 대한 벌금·처벌 폐지 △수습기간을 3개월에서 8개월로 연장 △업무시간 중 노조활동 금지 △필수부문(의료·교육·수도·가스·전기·항공·통신 등)은 파업시 75% 업무유지 △중요부문(운송·식품가공·물류·광산·우편 등)은 파업시 50% 업무유지 △파업 도중 작업장점거·출입봉쇄·기물파손하면 해고 △사업장 단위 조합비 자동공제를 개별 동의로 변경 △기존에 노조가 운영하던 조합원 의료보험에 보험사 진입 허용 등을 포함하고 있다. 임대차 관련해서는 △2020년부터 시행돼 오던 임대차 기간 3년 보장과 임대료 인상 제한 폐지 △미국 달러로 임대료 납부 요구 허용 등을 포함하고 있다. 모든 가격통제와 가격규제도 폐지했다. 리튬채굴 등을 위한 외국인 토지매입도 전면 허용했다. ‘메가 대통령령’은 1994년부터 실행돼 온 헌법상의 대통령 긴급명령권을 발동한 것인데, 그동안 하나의 대통령령으로 이렇게 수많은 법률을 무력화하고 정책을 변경한 경우는 없었다. ‘메가 대통령령’은 상하 양원 모두 거부하거나 법원이 위헌으로 판결하지 않는 한 효력이 유지된다. 현재까지 1월 3일 연방노동항소법원이 △수습 기간 3개월에서 8개월로 연장 △해고시 보상 삭감 △출산휴가 축소 등에 대해서만 시행 중단을 판결한 상태다. 공화당을 포함한 밀레이 세력은 하원의 경우 257석 가운데 79석만을 갖고 있지만 상원의 경우 72석 가운데 39석을 확보하고 있어서, 법적으로만 본다면 ‘메가 대통령령’의 대부분이 그대로 관철될 가능성이 높다. 12월 27일, 밀레이는 광범한 영역에 걸친 664개 조항의 ‘옴니버스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워낙 그 내용이 많아 현지에서도 온전히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내용에는 △국내외 미신고 자산 등록시 중과세 면제 △비례대표제 폐지와 소선거구제 도입 △치안부 장관에게 시위제한 명령권 부여 △‘불법’ 시위에 대한 징역형 대폭 상향 △법률에서 ‘젠더 폭력’ 표현을 ‘가족 간 폭력’으로 대체 △세금·연금·에너지·안보 관련 의회 권한을 2025년까지 대통령에게 이양 등이 포함돼 있다.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은 ‘메가 대통령령’과 결합된 ‘옴니버스 법안’을 “노동자계급이 오랜 세월 투쟁으로 쟁취한 권리들과 성과들을 다 쓸어버리려는 공격”이자 “시위와 파업의 권리마저 제한함으로써 최소한의 민주적 권리마저 박탈하려는 시도”라고 규정했다. 자신의 ‘충격요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쉽게 보여주려는 듯, 밀레이는 연말을 맞으며 공공부문 계약직 공무원 5천 명의 계약연장을 거부하여 전격 해고했다. 초긴축 정책의 계급적 본질 밀레이는 획기적으로 물가를 잡겠다고 했지만, 그의 취임 이후 오히려 물가가 더욱 급등했다. 에너지·교통보조금 삭감, 페소화 평가절하, 모든 가격통제와 가격규제 폐지 등 물가의 고삐를 푸는 조치들을 줄줄이 취했기 때문이다. 밀레이 취임 이후 며칠 만에 휘발유 가격이 60%, 식료품 가격이 50% 급등했다. 12월 물가가 전월 대비 25.5% 치솟으면서 2023년 전체 물가상승률이 211.4%를 기록했다. 교통보조금 삭감이 적용되는 1월부터는 대중교통 요금이 3배로 폭등했다. 12월 20일 ‘메가 대통령령’과 함께 가격통제가 사라지자, 바로 다음날 보험사들의 의료보험료가 일괄 40% 인상됐고, 30일 만에 식품·의약품·연료 가격이 100% 상승했다. 그 사이 임금의 구매력은 20% 이상 하락했는데, 이는 노동자계급에게서 자본가계급에게로 그만큼의 소득이전이 발생했음을 뜻했다. 밀레이는 ‘특권층’에게 위기의 책임을 묻겠다고 했지만, 그의 정권은 ‘특권층’을 중추로 하여 구성됐고, 그의 ‘충격요법’ 정책들은 자본가계급에게 보내는 선물로 가득 차 있다. 그 가운데서도 국제 금융자본과 광산·석유 대자본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풍부한 리튬 자원에 눈독을 들여 온 일론 머스크는 마음껏 리튬을 채굴해 갈 기회가 열리려 하자 밀레이를 크게 칭송하고 있다. 밀레이는 가자지구 학살로 이스라엘과 미국이 세계적으로 비난받는 상황에서, 수시로 이스라엘 국기를 자기 몸에 휘두르며 이스라엘 네타냐후 학살정권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2018년 미국 트럼프 정권과, 2019년 브라질 보우소나루 정권의 뒤를 따라 자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고도 공언한다. 반면 자신이 ‘공산주의’로 규정해 온 중국과 브라질이 주도하는 브릭스(BRICS)에는 가입을 철회하겠다고 통보했다. 밀레이가 보여준 일련의 정책들에 흡족해 하며, 국제통화기금(IMF)은 1월 10일 아르헨티나에 47억 달러 추가대출을 결정했다. 이는 2018년 아르헨티나와 체결했던 총 440억 달러 대출프로그램의 일환인데, 한동안 동결돼 있던 추가대출을 재개하면서 일부 조기대출까지 덧붙인 것이다. 그런데 이 대출금에는 2024년 말까지 GDP 2% 수준의 재정흑자를 달성해야 한다는 가혹한 조건이 붙어 있다. 밀레이 정권은 △한시적 수출입세 인상 △에너지·교통보조금 축소 △주 정부와 국영기업에 대한 지원 축소 △사회기반시설 지출 축소 등을 통해 조건을 달성하겠다는 계획이다. 그와 같은 대출조건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또한 대출금을 상환하는 과정에서,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은 피땀을 갈아 넣도록 강요당할 것이다. 저항의 물꼬를 트다 밀레이 정권 출범 이후 처음으로 투쟁이 시작된 날은 12월 20일이었다. 전투적인 노동조합들과 실업자단체, 그리고 ‘좌파전선’1)이 함께 주최하는 시위가 열려 2만 명이 참여했다. 대통령과 치안부 장관이 도로점거 시위를 금지하고 위반시 엄벌하겠다고 공언하는 상황에서, 이날 시위대는 경찰과 충돌하며 차도로 나아간 뒤 대통령궁 앞에 위치한 ‘5월 광장’을 장악하고 새벽까지 시위를 벌였다. 이날 밀레이가 ‘메가 대통령령’을 발표하자, 많은 이들이 5월 광장과 의회 앞으로 몰려나와 새벽까지 냄비와 팬을 두드리는 ‘카세롤라조’ 시위를 전개했다. 비슷한 상황이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내 여러 지역과 지방 대도시들에서도 전개됐다. 경찰은 어떻게 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했다. 1) ‘좌파전선’(FIT-U)은 사회주의노동자당(PTS), 노동자당(PO), 사회주의좌파(IS), 노동자사회주의운동(MST) 등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들로 구성된 공동 선거기구이자 공동 투쟁체이다. ‘좌파전선’은 혁명적 강령과 대중투쟁 노선을 견지하는 가운데 다섯 명의 하원 의원을 갖고 있다. 의회에서 혁명적 입장을 제기하는 이 의원들은 노동자 평균임금만을 받고 나머지 급여를 투쟁기금으로 내며, 투쟁현장에서 최선두에 선다. 밀레이 정권이 ‘옴니버스 법안’에서 비례대표제 폐지를 추진하는 것은 이들을 의회에서 제거하려는 데 그 목표가 있다. ‘좌파전선’은 2023년 하반기 치러진 대선과 총선에서 각각 2.7%와 3.3%를 득표했다. 이후 매일같이 간호사, 타이어산업 노동자, 실업자, 공무원 등이 시위를 계속 이어갔다. 최대 노총 CGT와 좀 더 전투적인 CTA에게 총파업에 나서라는 호소와 압력이 빗발쳤다. 밀레이 정권이 ‘옴니버스 법안’을 발표한 12월 27일 CGT 주최로 시위가 열렸다. 원래 CGT 지도부는 ‘메가 대통령령’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러 법원을 향해 인도로 행진하는 작은 시위를 계획했는데, 2만 명이 몰려나와 법원 앞 광장과 차도를 가득 메워버렸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밀린 CGT는 결국 다음날 다른 노총들과 함께 1월 24일 총파업과 대규모 시위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총파업 계획이 발표되자, 부르주아 언론들은 “새 정부 취임 18일 만에 ‘역사상 가장 빠른 반정부 파업’을 발표했다”면서 비판에 나섰다. 자본가단체들은 “밀레이 정권을 지지하는 맞불 시위를 조직하겠다”고 발표했다. 밀레이 정권은 “나는 파업하지 않을 것”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총파업을 좌절시키려는 캠페인에 나섰다. 반면 좌파전선과 전투적인 노조들은 모든 사업장에서, 모든 노동자들 속에서,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총파업을 조직해 나가자고 결의하고 호소했다. 노동자계급의 힘을 보여준 총파업 150만 명이 참여한 1월 24일의 총파업은 누가 이 세상이 굴러가게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수도를 비롯한 여러 대도시에서 도로와 광장을 점거하고 대규모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도로점거 시위를 엄벌하겠다는 대통령과 치안부 장관의 엄포를 묵사발 냈다. 밀레이 정권의 ‘메가 대통령령’과 ‘옴니버스 법안’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요구를 앞세우고 전투적인 노조들, 사회단체들, 지역조직들, 좌파조직들이 함께 행진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노동조합들, 사회단체들, 좌파조직들 등으로 구성된 10만 명 이상의 군중이 의회 광장 주변으로 운집하면서 도심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서는 조종사들을 필두로 항공노동자들의 파업이 잇따르면서 300편이 넘는 비행편이 모두 취소됐다. 항공노동자들은 밀레이가 추진하는 국영항공사의 사유화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공무원, 트럭기사, 인쇄, 은행 부문도 파업에 강하게 동참했다. 버스와 지하철은 오후 7시부터 파업에 동참했다. 수도를 둘러싼 광역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에서는 제조업 파업이 힘차게 펼쳐졌다. 특히 자동차산업에서 파업이 매우 강력했다. 90초마다 차량을 생산하던 도요타 공장이 완전히 멈춰 섰다. 포드에서도 생산이 마비됐다. 폭스바겐은 휴가 중이었지만 일부 노동자들이 행진에 나섰다. 금속부문과 식료부문에서도 파업이 벌어졌다. 타이어산업 노동자들은 자체적으로 7시간을 추가해 19시간 파업을 벌였다. 통신사 건물도 거의 텅 비었고, 병원은 응급실만 운영됐다. 그러나 이날 총파업에는 아쉬움도 있었다. 특히 버스와 지하철이 오후 7시부터 파업에 나서면서 파업의 위력을 극대화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만일 버스와 지하철이 아침부터 파업에 들어갔다면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출근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파업 효과를 극대화하고 시위 규모도 훨씬 늘릴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당 노조 안에서 계급투쟁 노선 활동가들이 더 강력한 파업을 요구하며 내부투쟁을 전개했지만, 파업 시점을 바꿔내지 못했다. 그런데 버스와 지하철 노조 지도부가 보여준 이러한 어정쩡한 자세는 사실 더 큰 문제의 일부였다. 페론주의(키르치네르주의) 세력과 노조관료들 아르헨티나는 공식 경제에 포괄된 노동자들의 40% 정도가 조직돼 있을 정도로 노동조합의 규모가 큰 나라다. 1930년에 결성된 최대 노총 CGT의 조합원 수는 오늘날 700만에 이른다. 그런데 노동조합을 이끄는 노조관료들은 1940년대 페론주의가 등장할 때부터 그 한 축을 구성해 왔다.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아르헨티나 정치를 주도했던 페론주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력에게 포퓰리즘의 전형으로 흔히 비난받는데, 임금 인상, 단체교섭권 보호, 주택 개량, 사회보험 시행 등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개량적 조치들을 취하긴 했지만, 엄연히 자본주의 착취·억압 체제를 수호하는 자본가 정치세력이었다. 페론주의의 일부가 된 노조관료들은 정권으로부터 약간의 개량을 얻어오는 대가로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투쟁을 억눌렀다. 1970~80년대 군사정권을 거친 뒤, 1990년대에 정권을 잡은 페론주의 우파가 전면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폈을 때, 페론주의 노조관료들은 의료보험과 연금기금에 대한 통제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사유화와 노동유연화를 수용했다. 그러나 점점 심화하는 경제위기 속에서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생존권이 파탄나자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떠밀려 수십 차례 총파업에 나섰다. 결국 2001년 거대한 경제위기가 터졌고, 강력하게 성장한 실업자운동을 중심으로 전면적인 민중항쟁이 폭발하면서 2주일 사이에 네 명의 대통령을 갈아치웠다. 이후 자본가권력의 통치위기 상황을 수습한 뒤 최근까지 20년 동안 아르헨티나 정치를 주도한 게 페론주의 좌파에 해당하는 키르치네르주의였다. 페론주의 노조관료들은 다시금 키르치네르주의를 떠받치는 하위 파트너로 역할했다. 특히 지난 4년 동안 키르치네르주의 정권이 전임 우파 정권의 대규모 임금·연금 개악을 복원하겠다던 공약을 이행하지 않는데도, 노조관료들은 한 번도 총파업을 조직하지 않았다. 키르치네르주의는 개량을 안겨줄 것 같은 언사를 앞세웠지만 실제로는 어정쩡한 수준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거짓말과 모순으로 점철된 정치적 위선, 또 하나의 ‘특권층’이 되어 깊이 빠져든 부패, 물가폭등에 대한 통제력 상실 등 키르치네르주의 정권에 대한 광범한 실망과 분노가 2023년 대선을 앞두고 폭발했다. 극우인사 밀레이가 깜짝 부상하고 집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에너지를 집어삼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키르치네르주의가 계속 정권을 잡았다 하더라도, 분명히 그들 또한 IMF와 협력하며 긴축 정책을 실시했을 것이다. 물론 좀 더 유연하게, 특히 노조관료들과 협상하는 방식을 취했겠지만, 그 본질은 밀레이 정권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월 24일 총파업이 벌어질 때까지, 밀레이 정권의 ‘충격요법’에 대해 키르치네르주의 세력의 실세인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는 침묵했다. 대선후보였던 세르히오 마사는 밀레이에게 시간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키르치네르주의 정치인들은 총파업 시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밀레이의 초긴축 정책이 총파업과 거리시위 같은 대중투쟁에 의해 분쇄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자본가정부의 정책을 대중투쟁으로 분쇄할 수 있을 정도로 노동자계급의 힘이 강해지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키르치네르주의 세력이 원하는 것은 대중투쟁의 물꼬를 의회와 법원에서의 말다툼으로 돌리는 것이고, 차악으로서 자신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회복하는 것이며, 결국 4년 뒤 선거에서 재집권하는 것이다. 그런 자신들의 목표에 부합하는 수준과 방식으로 총파업이 제한되는 것이다. 문제는 총파업을 공식적으로 이끄는 노조관료들의 대다수가 여전히 페론주의에 빠져 있고 키르치네르주의를 추종한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떠밀려 총파업을 선언하고 실행했지만, 페론주의 노조관료들은 밀레이 정권에 맞서 전면전에 나설 생각이 없다. 그들이 생각하는 전망은 의회와 법원이 대신해서 밀레이 정권의 독주를 막아주는 것이다. 거기에 필요한 만큼만 투쟁하면 된다는 페론주의 노조관료들의 본심은 버스와 지하철의 어정쩡한 파업으로도 나타났지만, 1월 24일 총파업 이후 투쟁계획을 내놓지 않은 것으로도 나타났다. 아래로부터 자주적인 투쟁역량을 건설하기 그러한 노조관료들의 실체를 꿰뚫어 보고 있기에, 사회주의노동자당(PTS)을 비롯한 좌파전선은 총파업 계획이 발표된 이후 노조관료들과 독립적으로 아래로부터 노동자·민중의 자주적인 투쟁역량을 건설하기 위해 분투해 왔다. 노조관료들이 의식적으로 토론을 회피하는 상황에서, 좌파전선은 영향력을 가진 사업장들과 전투적인 노동조합들 속에서 대중적 토론을 제기하고 조직해 나갔다. 나아가 지역 단위로 조합원, 미조직 노동자, 특수고용, 실업자, 여성, 학생, 그밖에 공세에 맞닥뜨린 모든 민중을 포괄하여 토론 모임을 갖고 카세롤라조와 집회를 열었다. 이를 토대로 전투적인 노조들, 사회단체들, 좌파조직들을 중심으로 ‘민중회의’라는 지역조직들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필두로 여러 지역에서 건설해 나가고 있다. 좌파전선은 일회성 총파업을 넘어 밀레이 정권의 초긴축 정책을 완전 분쇄할 때까지 무기한 전면 총파업으로 나아가자는 방향을 제기했다. 또한 △자본의 위기전가 반대 △IMF와의 합의 거부 △고용·임금·연금의 방어 △살인적인 물가인상에 맞서 임금·연금과 특수고용소득의 긴급 인상 △‘메가 대통령령’과 ‘옴니버스 법안’ 등 모든 긴축정책의 즉각 폐기 △모든 임시직의 정규직 전환 △폐쇄·정리해고 공장에 대한 노동자 자주관리 △식료품을 비롯한 필수품에 대한 가격통제 △식료품 대기업의 회계장부 공개 △사람들을 굶주림으로 내모는 모든 기업의 몰수와 노동자통제 등과 같은 독립적인 노동자계급 강령을 모든 모임과 집회에서 제기해 나가고 있다. 이와 같이 노동자계급의 명확한 전망을 내걸고 아래로부터 건설되는 자주적인 투쟁역량이 얼마나 강력하게 성장하는가, 그래서 이 힘이 얼마나 강력하게 노조관료들을 압박해 내고 나아가 압도해 내는가야말로 향후 투쟁의 전망을 가르는 관건이 될 것이다. 세계적 중요성을 가진 극우정권의 초긴축 ‘실험’과 노동자의 반격 1월 17일, 밀레이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전 세계를 대표하는 자본가들을 상대로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기조의 연설을 하고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그는 “서방 세계가 집단주의와 급진적 페미니즘, 잔인할 정도의 환경 보호 등 사회주의로 향할 수밖에 없는 세계관에 사로잡혀 위험에 빠져 있다”면서 “자유시장경제만이 기아와 빈곤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핏대를 올렸다. 세계경제포럼에서의 연설과 환대는 밀레이 정권의 초긴축 실험이 오늘날 세계 계급투쟁에서 갖는 의미를 함축해 보여준다. 아르헨티나와 인접한 칠레에서 1973년 쿠데타에 성공한 피노체트는 칠레를 세계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책 실험장으로 만들었다. 칠레에서 실현가능성이 입증된 신자유주의 정책은 이후 1980년대에 영국과 미국에서 본격화했고, 1990년대를 거치며 전 세계로 확산됐다. 얼핏 보기에, 밀레이 정권의 초긴축 정책은 200%가 넘어가는 ‘예외적인’ 하이퍼인플레이션 상황에서 나온 ‘예외적인’ 정책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예외적인’ 상황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오히려 오늘날 세계경제 전반이 통제 불가능한 금융대공황과 하이퍼인플레이션을 향해 치달아 가는 과정에서 ‘약한 고리’에서 먼저 불거져 나온 전조증상으로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밀레이의 언행은 기괴하기 짝이 없지만, 우리는 오늘날 그 못지않게 기괴하고 극단적인 극우인사들이 줄줄이 집권하는 상황을 세계 도처에서 보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필리핀의 두테르테,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같은 자들이 좀 더 직접적으로 밀레이와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었다면, 중국의 시진핑, 러시아의 푸틴, 인도의 모디, 이탈리아의 멜로니,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같은 자들도 그 실질적 면모에서는 그리 밀리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지금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과 함께 유럽 전역에서 극우가 맹렬하게 성장하는 것을 보고 있다. 물론 다른 나라들에서는 아직 극우정권이 밀레이 정권만큼 극단적인 초긴축 정책을 내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점점 더 많은 나라들을 침몰시켜 나간다면, 지금 밀레이 정권의 초긴축 정책은 세계 자본주의를 위한 또 하나의 ‘실험’일 수 있지 않을까? 지구를 덮치게 된 기후재난이 파키스탄의 홍수에서 그칠 수 없는 것처럼, 세계를 휘감게 된 전쟁이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세계를 뒤흔드는 경제파탄과 극우정권의 초긴축 정책은 결코 아르헨티나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밀레이 정권의 초긴축 ‘실험’에 맞선 아르헨티나 노동자계급의 투쟁 또한 그만큼 세계적 중요성을 갖는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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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전미자동차노조의 큰 승리: 미국 노동운동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편집자 주) 2023년 11월 12일 자로 레프트보이스에 실린 제임스 데니스 호프의 글을 번역해 소개한다. 원문: https://www.leftvoice.org/the-uaw-won-big-what-does-it-mean-for-the-u-s-labor-movement/ 완성차업체 빅쓰리(지엠·포드·스텔란티스)에 맞선 전미자동차노조(이하 UAW) 파업은 자동차 노동자들만의 승리가 아니었다. 전체 노동자계급의 승리였다. 10월 25일, UAW는 41일간의 피켓 시위 끝에 포드와 잠정합의안을 도출했다. 나흘 뒤에 GM과 스텔란티스도 거의 동일한 임금인상, 보너스, 복리후생 패키지에 합의함으로써 수십 년 만에 가장 중요하고 역동적이며 주목받았던 자동차 파업이 사실상 종결되었다. UAW 조합원들은 여전히 잠정합의안에 대해 토론하고 투표하고 있으며, 목표했던 모든 것을 얻지는 못했지만(실제로 미시간주 플린트 지엠공장의 잠정합의 부결이 보여주었듯이, 평조합원들이 주도권을 잡았다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잠정합의는 자동차 노동자들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실질적인 성과를 따낸 이번 잠정합의는 지난 15년 동안 빅쓰리에 양보한 임금과 복리후생의 상당한 회복을 의미한다. 노조는 4년 6개월의 계약 기간 동안 25%의 임금 인상(첫해 11%)과 타결 성과금 5,000달러를 확보했고, 향후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임금을 보호할 수 있는 생활비 조정제도(물가임금연동제)를 되찾았으며, 자동차 3사 모두에서 이중임금제 폐지를 향해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 이처럼 임금 문제에서 승리한 것 외에도, 노조는 파업을 통해 세 자동차 회사 모두 대규모 투자로 생산시설을 확충하고 전기차·배터리 공장을 노조로 조직할 경로를 보장하게 함으로써, 자동차 산업이 전기차 생산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일자리와 임금을 보호할 안전장치를 확보했다. 여기에는 일리노이주 벨비디어 조립 공장의 재가동과 오하이오주 워런에 있는 울티움 셀 배터리 공장에서 기본 협약에 따라 약 1,000명의 노동자가 추가로 노조에 가입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번 잠정합의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성과는 공장폐쇄에 맞선 파업권을 포함시킨 것이다. 향후 정리해고가 현실화할 경우 파업으로 맞설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중대한 승리라 할 수 있다. UAW 파업은 단지 자동차 노동자들만의 승리가 아니다. 이 파업을 예의주시하고 주목해 온 전체 노동자계급의 승리이기도 하다. 파업에 나선 5만 명 이상의 UAW 조합원과 이들을 지지한 다른 모든 사람이 이루어낸 이번 합의의 성과는 노동자들이 조직하고 연대할 때 발휘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준다. 이번 파업은 모든 노동자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 가운데 많은 노동자들이 피켓 시위에 나와 UAW 편에 섰으며, 미국에서 한창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노동운동에 상당한 열기를 더했다. 이번 파업의 교훈을 배움으로써 노조들의 (나아가 새로운 노동운동 전반의) 힘과 전투성을 강화하는 것은 특히 정치적, 경제적, 생태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이 시점에 조직된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모두에게 중요한 과제이다. 경찰이 면책특권을 갖고 살인을 계속하고, 성전환자와 여성들이 민주적 권리를 계속 박탈당하며, 미국이 자신의 힘을 해외에 강제하기 위해 수천억 달러의 세금과 수많은 생명을 낭비하고, 미국이 지원하는 폭탄이 가자지구에 계속 떨어지고 있는 지금, 착취만이 아니라 억압과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는 노조를 건설하는 건 관건적인 과제다. 전체 계급을 위한 역사적인 파업 UAW 파업은 의심할 여지없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노동자투쟁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 파업은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지난 몇 년 동안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노동자투쟁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2018년에 시작된 교사파업 물결부터 경찰폭력에 맞선 2020년 봉기, 팬데믹 이후 신규 노동자 조직화의 폭발적 증가, 2023년의 대규모 파업들(약 20만 명의 배우와 작가 포함)에 이르기까지 미국 노동자계급은 지난 40년간 반동적인 신자유주의 공세에 빼앗겼던 전투성을 서서히 재건해 왔다. 이러한 새로운 전투성과 계급의식 상승은 UAW 파업의 길을 열었고, 이 파업은 다시 새로운 노동운동의 성장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는 파업 초기에 포드, 스텔란티스, 지엠에서 12,000명 이상의 UAW 노동자들이 작업장을 나섰을 때, 수천 명의 열렬한 지지자들이 합류하고, 곳곳에서 여러분의 투쟁이 곧 우리의 투쟁이라고 행동으로 말하는 노동조합, 조합원, 노동자들의 연대가 넘쳐나면서부터 분명해졌다. 실제로 파업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78%가 빅쓰리에 맞선 UAW를 지지한다는 걸 볼 수 있었는데, 이는 트럼프나 바이든의 지지율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었다. 그 후 UAW와 동맹세력들은 몇 주에 걸쳐 투쟁을 전개했고, 결국 UAW 조합원 3명 가운데 1명이 파업에 참여할 정도로 파업 규모가 커졌다. 다른 조합원들이 일을 계속하며 정규 임금을 받는 동안에도, 이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부름에 호응하여 자신의 생계를 희생하며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파업에 나섰다. 이들은 추위와 비를 무릅쓰고 정문 앞에서 행진을 벌임으로써 트럭과 배달 차량을 막아섰으며, 파업을 깨뜨리려는 관리자와 대체인력에 맞서 강고하게 피켓라인을 유지했다. 파업 참가자들이 사업장 입구를 막는 것을 금지하는 반노조법을 무시함으로써, 피켓라인은 노동자들이 사장의 권력뿐만 아니라 국가의 권력과도 맞서는 전쟁의 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투 정신과 하루라도 더 싸우겠다는 헌신이 있었기에 UAW는 처음에는 바이든이, 다음에는 트럼프가, 그리고 나중에는 업계 전체가 이번에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 수 있었다. 2007년 이후 고용된 노동자들에 대한 연금 제공이 빠졌다는 이유로 잠정합의를 부결시킨 미시간주 플린트 지엠 공장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노력 또한 UAW 평조합원들의 전투성과 계속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평조합원들의 전투성과 힘, 그리고 UAW의 새 지도자 숀 페인의 전투적인 수사는 이번 파업이 공격적인 파업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사실 이번 잠정합의는 이전 합의들에서 빼앗긴 것들을 되찾아오는 성격을 가졌다. 이번 파업에 돌입하기 전까지 UAW는 거의 20년 동안 뒷걸음질을 거듭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정부의 구제금융 덕분에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을 때, UAW 지도부는 회사에 좋은 것이 곧 노동자에게도 좋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일련의 거대한 양보에 동의했다. 이러한 노사협조주의(business union approach)는 2023년 초 페인이 집권할 때까지 UAW의 지배적인 활동 원칙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전투성과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연히 빅쓰리는 이 기회와 연방정부로부터 받은 수십억 달러를 이용해 기록적인 이익을 축적했지만, 그 중 어느 것도 노동자들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2019년 마침내 UAW가 파업에 돌입했지만, 한 회사에서 파업을 벌여 전형을 만들려는 구태의연한 모델을 따랐다. 이는 앞서 11년간의 손실을 되돌리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수준의 저조한 임금 인상만을 따냈을 뿐만 아니라 공장폐쇄와 대량 정리해고로 이어져 조합원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상처를 남긴 실패작이 되었다. UAW의 새 지도부는, 양보한 것들을 되찾고 정리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파업을 조직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합원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영감을 줄 수 있는 대담한 요구를 제시하고, 세 완성차업체를 동시에 공격하며, 무엇보다도 전체 노동자계급의 연대를 구축해야 했다. 그리고 바로 이게 지도부가 한 일이었다. 계급투쟁과 연대의 수사가 동반된 전례 없는 대담한 요구들을 공격적으로 제시함으로써 UAW는 미국 전역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투쟁으로 간주하면서 주목하는 파업을 건설할 수 있었다. 페인과 UAW는, 빅쓰리의 CEO와 경영진을 포함한 슈퍼리치에 대한 정기적이고 일관된 비난을 통해, 자동차 노동자들의 생활수준과 복지에 대한 공격이 전체 노동자에 대한 더 큰 공격의 일부라는 점을 주목하게 할 수 있었다. 또한 모든 노조 지지자가 알고 있는 사실, 즉 노조원들이 거두는 성과는 모든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포드가 제시안을 낸 지 며칠 후, 도요타와 혼다는 UAW의 조직화 시도를 막고 여전히 타이트한 노동시장에서 빅쓰리와 경쟁하기 위해 생산직 노동자 임금을 각각 9%와 11% 인상했다. 페인은 연설할 때마다 파업에 대한 언론의 관심을 이용해 조합원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자계급을 대상으로 불평등, 착취, 노동의 존엄성, 연대의 힘과 파업이라는 무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6만 명 이상의 청중이 실시간으로 참여하는 정기적인 페이스북 이벤트를 통해 기업들이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방식에 대해, 미국 안에서나 국제적으로나 노동조합 간 연대와 노동조합과 미조직 노동자 간 연대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다. 또한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노동자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11월 9일 일리노이주 벨비디어에서 열린 집회에서 페인은 일터로 돌아갈 UAW 조합원들에게 다시 한 번 이 점을 강조했다: “노동자들이 경제를 운영한다. 그리고 만일 경제가 노동자계급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 노동자들은 경제를 중단시킬 힘이 있다.” 이러한 계급적 분노와 연대의 표출은 외국의 노동자들, 때로는 심지어 다른 기업의 노동자들까지 경쟁자로 간주하는 미국 노동조합운동 내 노사협조주의와 노동국수주의 정치와 정면으로 상충한다. 실제로 페인은 다른 자동차 회사의 미조직 노동자들을 경쟁자가 아니라 미래의 UAW 조합원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직접 말하며,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려는 사측의 시도를 약화시켰다. 또한 그는 극심한 착취에 맞선 멕시코 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자주 언급하며, 사측이 공장 폐쇄와 해외 이전 위협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자들이 국제적으로 서로 경쟁하는 대신 전 세계 노동자계급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좋은 합의를 따내거나 빅쓰리로부터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전략이 아니었다. 여러모로 이 파업은 활력을 되찾고 투쟁하는 UAW의 시작점이 될 수 있는 첫 번째 전투였다. 페인을 비롯한 새로운 지도부는 UAW를 지속적으로 성장시키고 뻗어가는 새로운 노동운동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 이번 파업의 모멘텀을 활용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UAW는 도요타, 현대자동차, 테슬라 등 다른 자동차 회사에서도 적극적으로 조직화에 나설 계획임을 분명히 밝혔으며, 이미 캘리포니아주 프리몬트 테슬라 공장의 노동자들은 UAW와 함께 조직위원회를 구성했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불가능해 보였던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UAW는 빅쓰리와의 단체협약 만료일을 모두 4월 30일로 설정하여, 향후 파업이 5월 1일 메이데이에 맞춰 시작될 수 있도록 했으며, 전국의 다른 모든 노조에도 동일한 조치를 취하여 함께 파업에 들어갈 수 있게 하자고 촉구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현실화한다면 연대파업을 금지한 태프트-하틀리 법에 대한 도전이며 이를 크게 약화시킴으로써 노조의 정치적 힘을 상당히 증가시킬 것이다. 진정한 계급투쟁 노동운동을 구축하려면 자기 조직화가 필요하다. 이번 파업과 이를 통해 얻은 상당한 성과는 이전 UAW 지도자들의 실패한 노사협조주의 전략에서 벗어난 전환의 결과를 분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거의 40만 명의 조합원을 가진 UAW 같은 거대한 조직을 변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위로부터 내려오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페인의 큰 야망과 계급투쟁적 수사, 전투적인 전 위원장 월터 루써에 대한 존경에도 불구하고, UAW는 여전히 관료적 지도부에 의해 통제당하고 제한돼 있으며, 그 결과 조합원들의 자기조직화가 계속 방해받을 뿐 아니라 제국주의 민주당에 여전히 묶인 상태로 있다. 예를 들어, “억만장자 계급”에 대한 페인의 비판은 대부분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2020년 예비 선거 캠페인 때 했던 수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또한 페인이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당 정치인들과 점점 더 친밀한 관계를 가져가는 것은 하향식 관료주의 노조 모델에 내재된 모순을 보여준다. 최근 페인이 바이든을 비공식적으로 지지하면서 절정에 달한 민주당과의 관계는 UAW와 노조 운동에 치명적인 위험요소를 제기한다. 민주당은 노조가 자신의 힘을 완전히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노조 지도부를 더 가깝게 묶어 내려고 국가가 사용하는 도구다. 이번 파업에서도 우리는 바이든이 어떻게 파업에 대한 “지지”를 활용하여 빠른 합의를 압박하려고 시도하는지, 또한 어떻게 자신을 노동자계급의 관심사에 신경 쓰는 진보적 인사로 이미지 개선하려고 시도하는지를 보았다. 이러한 모순은 파업 캠페인 내내 고스란히 드러났다. 파업 전술로서 스탠드업 파업(노조가 지정하는 공장만 파업에 돌입하는 전술 -옮긴이)은 사측이 매번 우왕좌왕하게 만들고 종종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혁신적인 교란 방법이었다. UAW는 매주 새로 파업에 추가되는 공장을 발표함으로써 언론의 관심을 계속 유지하고 파업을 주요한 화젯거리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전술은 파업에 참여할 수 있는 UAW 조합원의 수를 제한하기도 했다. 엔진, 차축, 변속기 공장 등 가장 중요한 생산현장 대부분은 계속 가동되었기 때문에, 빅쓰리 기업들은 대부분의 생산을 중단 없이 계속할 수 있었다. 이는 파업의 모든 힘이 발휘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며, GM에서의 전면적인 연금 원상회복 등 노조가 더 많은 요구를 쟁취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또한 파업이 대부분 위로부터 억제되고 통제되었기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투쟁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UAW 조합원들은 파업 시작 시기와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또한 잠정합의들이 논의되는 동안 업무에 복귀하는 것도 사전에 평조합원들 사이에서 어떤 논의나 의견 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다. 좋은 단체협약을 따내는 것도 중요하고 노조에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지만, 노동운동과 평조합원의 자기조직화는 사측과 자본의 횡포에, 즉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윤을 목적으로 한 줌 소수가 생산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방식에, 실제로 도전하기 위해 필요한 힘을 구축하는 데서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업이 각 사업장의 파업위원회에 의해 아래로부터 주도되어야 한다. 어디서 언제 어떻게 파업을 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조합원들의 공개적인 토론과 논의를 통해 내려져야 한다. 교섭 과정 내내 모든 협상이 조합원들에게 공지되고 공개돼야 한다. 이를 루이지 모리스와 나는 작년에 이렇게 설명했다. 진정으로 민주적인 노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평조합원들에게 최대한 많은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노조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업장의 모든 조합원들이 정기적으로 토론하고 논쟁하며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회의체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공개적이고 투명한 교섭을 의미하며, 현장대표자 및 교섭위원을 조합원들이 직접 선출하고 언제든 소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고, 언제든 소환될 수 있으며, 평균임금 이하를 받는 지역 및 전국 단위 노조 지도자들을 현장으로부터 직접 선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언제 파업을 접고 업무에 복귀할 것인지는 단지 지도부와 교섭팀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권리라는 점이다. 페인은 포드에서의 업무 복귀가 아직 잠정합의에 이르지 않은 다른 자동차 회사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전술적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더 많은 것을 위해 계속 싸울 수도 있었던 노조의 입지를 약화시켰으며, 또한 전체 노동자가 결정했어야 하는 문제였다. UAW는 억압과 제국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 UAW와 미국 노동운동의 가장 큰 맹점은 아마도 국가 억압에 대한 지속적인 침묵과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지지, 그리고 때로는 공모일 것이다. 스타벅스 노동자들의 트랜스젠더 권리 옹호나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항만노조(ILWU)의 지속적인 옹호 활동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대다수 노조는 임금, 복리후생, 노동조건 등 소위 먹고사는 투쟁에만 집중하면서 정치 문제를 둘러싼 국가와의 대립을 피해 왔다. 노동조합이 정치에 개입하는 경우는 대개 노동자 권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법안에 관한 것이고, 아니면 단순히 선언문만 내는 수준이다. 이러한 소심함은 부분적으로 국가와 민주당이 노동조합을 역사적으로 포섭한 산물이다. 노동조합이 평화를 유지하고 이념적으로 순응하는 대가로 국가와 민주당은 노동조합에 합법성을 부여하고 제한된 보호를 제공했다. 그 결과 노동운동은 상당히 위축되었고, 남은 노동운동 또한 점점 더 관료화되고 정치적으로 약화되었다. 더 이상 모든 노동자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지 않게 된 노동조합은 반세기 이상 계급투쟁 전략에서 계급화해 전략으로 후퇴해 왔다. 노동을 국가의 이해관계와 화해시키려는 이 프로젝트는 노동조합, 특히 미국 노동조합의 이해관계가 국가의 성쇠와는 직결돼 있지만 국내외의 광범위한 억압과 착취 문제와는 별개인 것으로 보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낳았으며, 또한 이 관점에 의해 계속해서 강화되고 있다. “억만장자 계급”을 비판하는 페인과 같은 진보적인 지도자들이 성조기로 장식된 무대에 당당히 서서 전미자동차노조(UAW)가 “민주주의의 무기고”를 채우기 위해 어떻게 무기 제작에 기여했는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거나 미국 대통령과 함께 행복한 셀카 동영상을 찍을 때, 그들은 광범위한 노동자계급 투쟁에 대한 국가의 탄압을 감추고 미국 노동자들과 미 제국주의 폭력의 피해자인 노동자들 사이에 쐐기를 박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 점령 확대와 가자지구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이 제공한 무기로 자행된 11,000명 이상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UAW가 계속 침묵하고 있는 것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이러한 사건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거나 노동의 힘을 이용해 잔학 행위의 가해자들과 맞서 싸우는 것은 노동조합의 영역 밖이라는 주장은 노동자계급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곳, 즉 이미 잘 조직되어 있고 정의를 위해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잠재력을 가진 작업장에서 노동자계급을 더욱 분열시킬 뿐이다. 전 세계 노동자들의 안녕과 삶을 위협하는 위기와 전쟁의 시기에, 노조가 민주당과 국가의 이념적, 구조적 사슬에서 벗어나 노동의 힘을 이용해 전체 계급을 위한 정치투쟁을 벌이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UAW 파업이 거둔 의미 있는 승리와 그 덕분에도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는 노동운동은 민주당에 대항하는 독립적인 노동자계급 대안을 구축할 수 있는 조건이 무르익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구세주가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해줄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투쟁과 자기조직화를 통해 우리 스스로 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