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8월 29일(금) 진행된 '정세집담회: 러시아 소수민족 입장에서 바라본 러-우전쟁'에 발제문으로 제출되었던 글이다. 이 링크를 통해 영어번역본을 확인할 수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푸틴은 3일 안에 우크라이나를 복속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일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러시아는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이어 자포리자와 헤르손 주도 대부분 점령했다. 그러나 수도인 키이우까지 직선로로 점령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몇 차례 반격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2022년 11월 헤르손 시를 탈환하고, 2023년 자포리자 주 로보티네를 확보하는 등 일부 성과가 있었지만 제한적이었다. 2024년 8월에는 러시아 쿠르스크 주에 공세를 펼치기도 했으나, 큰 성과를 내진 못했다. 결과적으로 현재 러시아가 도네츠크, 루한스크 지역 대부분을, 그리고 자포리자와 헤르손의 상당 부분을 점령한 상태에서 전선이 고착화됐다.
얼마 전 트럼프가 푸틴과 젤렌스키를 각각 만나며, 휴전과 평화협정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트럼프는 중국과의 대결이라는 전략적 목표에 자원을 집중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여되는 비용을 줄이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러시아에게 미국이 너무 많은 양보를 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와 푸틴에게 각각 더 많은 것을 양보할 것을 요구하며 갈지자 행보를 이어가고 있고, 언제 실제로 휴전과 평화협정이 진행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이 전쟁을 수행하고 관여하고 있는 어떤 주체도, 고통받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노동자민중의 편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 반동적인 전쟁에 대해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의 이전 조직 중 하나인 노동해방투쟁연대는 2022년 3월 1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즉각 중단하라! 미국과 유럽연합은 NATO를 해체하라! 모든 제국주의 강대국들은 패권대결·전쟁책동·억압침탈을 중단하라!”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구호는 지금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이 구호를 둘러싼 몇가지 측면들에 대해 이 글을 통해 다루고자 한다.
[사진: Viacheslav Ratynskyi / the Collection of war.ukraine.ua]
1.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반동적인 제국주의 침략일 뿐이다.
푸틴과 레닌은 정반대의 입장을 갖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전 제정 러시아에 의해 오랫동안 민족억압을 겪어왔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의 민족자결권 보장이라는 올바른 입장을 가졌다. 레닌은 당시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주변 민족들의 민족자결권과, 그들의 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탈퇴할 권리”에 대해서 얘기했다. 푸틴이 2022년 2월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을 선포하며 이를 비난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정반대의 위치에 서있는지를 의미심장하게 보여준다.
아래는 레닌이 1917년 6월에 쓴 글로, 제정러시아의 민족억압의 역사적 맥락 위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노동자민중의 단결을 위해 우크라이나의 민족자결권을 지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민주주의자라면 누구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서 자유롭게 분리할 권리를 부인할 수 없다. 이 권리를 조건 없이 인정해야만 우크라이나인과 대(大)러시아인의 자유로운 연합, 한 국가 안에서 두 민족의 자발적인 결합을 옹호할 수 있다. 이 권리를 조건 없이 인정해야만 차르가 다스리던 저주받은 과거를, 언어·영토·성격·역사에서 매우 가까운 두 민족이 모든 점에서 서로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완전히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청산할 수 있다. 저주받은 차르 체제는 대(大)러시아인을 우크라이나 인민에 대한 사형 집행자로 만들었고, 우크라이나 어린이가 모국어로 말하고 공부하는 것을 금지시킨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을 조장했다. 러시아의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이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진정으로 민주적이고자 한다면, 반드시 과거와 단절해야 한다. 그들 스스로를 위해, 러시아의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우크라이나 노동자와 농민에게서 형제적 신뢰를 다시 얻어야 한다. 그런 신뢰를 다시 얻는 것은 자유롭게 분리할 권리를 포함해서 우크라이나의 모든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작은 국가의 존재를 선호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나라의” 자본가들과 다른 모든 나라의 자본가들에 맞서는 세계 노동자들의 가장 긴밀한 연합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 결합이 자발적인 것이 되게 하기 위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부르주아지를 조금도 잠시도 신뢰하지 않는 러시아 노동자는 이제 우크라이나인들의 분리할 권리를 지지한다. 자신의 우정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으면서, 하지만 그들을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에서 동등한 동맹이자 형제로 대우함으로써 그들의 우정을 얻고자 분투하면서."[1]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하는 연설에서 레닌의 이러한 입장을 아래와 같이 비난했다.
"현대의 우크라이나는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해,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볼셰비키의 공산주의 러시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과정은 사실상 1917년 혁명 직후부터 시작되었는데, 레닌과 그의 동지들은 이 일을 러시아에 몹시 무례한 방식으로 했습니다. 러시아 고유의 역사적 영토를 러시아로부터 분리, 강탈하는 방식이었습니다.
…
러시아와 러시아 민족들의 역사적 운명이라는 관점에서 레닌의 국가 건설 원칙들은 단순한 과오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나쁜 것이었습니다."[2]
푸틴의 요지는, 레닌이 이끈 러시아혁명 이후 노동자국가가 민족자결권 원칙을 고수하고, 소비에트 헌법에 이를 명시한 것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가능하게 했고, 이로써 러시아 민족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것이다. 분명하게 푸틴은 레닌의 노동자 국제주의가 아니라 스탈린에 뒤이은 대러시아 민족주의의 계승자다.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지역 러시아인들을 파시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수밖에 없다는 푸틴의 수사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한 달 전 ‘독일 민족의 보호를 위해’ 독일의 팽창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던 히틀러의 수사와도 판박이다.
“1000만이 넘는 독일인이, 우리나라 국경에 인접하고 있는 두 나라에 살고 있다.… 독일로부터 정치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해서, 권리의 박탈, 즉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일반적인 여러 권리가 박탈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의 국경 연변에 살며, 스스로의 노력으로서는 도저히 그 정치적・정신적 자유를 획득할 처지에 있지 못한, 이들 독일 민족을 보호하는 것은 독일의 큰 관심사에 속하는 것이다.”[3]
스탈린이 반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우크라이나 민족억압을 부활시켰다.
오늘날 우크라이나는 스탈린 반혁명으로 등장한 국가자본주의 소련의 유산 위에 존재한다. 그 역사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러시아 노동자국가는 1920년대 초중반까지, 레닌이 정식화한 민족자결권에 입각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자율성과 민족적 요구들을 존중했다.
"1923년 소련 전체에 ‘토착화’ 정책이 도입되어 각 공화국의 민족, 문화에 따른 시책이 종용되었다. 그야말로 우크라이나를 겨냥한 정책이기도 했다. … 1922년 정부 직원의 35퍼센트, 공산당원의 23퍼센트였던 우크라이나인 비율이 1926년부터 1927년에는 각각 54퍼센트, 52퍼센트로 상승했다.
…
우크라이나어 사용도 장려됐다. 정부 직원 가운데 우크라이나어를 하지 못하는 직원은 우크라이나어 코스를 이수하여 1년 내에 습득하지 못하면 해고됐다. 정부 문서, 간행물의 우크라이나어 작성으로 1922년에 20퍼센트였던 우크라이나어 문서가 1927년에는 70퍼센트로 상승했다.. 또한 당의 업무도 우크라이나어로 이루어졌다.
…
학교 교육에서도 우크라이나어화가 이루어졌다. 1929년에는 일반 교육의 80퍼센트, 대학 교육의 30퍼센트가 우크라이나어만으로 이루어졌다. 신문과 서적의 우크라이나어화도 추진되어 전체 출판물 가운데 우크라이나어 출판물이 차지하는 비율은 1922년 27퍼센트에서 1927년 50퍼센트 이상이 됐다. … 역사학자이자 중앙 라다의 대통령이었던 흐루셰브스키도 귀국하여 아카데미의 정식 회원으로서 우크라이나사 연구에 착수했다.
…
종교면에서도 우크라니아화가 나타났다. 우크라이나의 정교도는 예전부터 모스크바로부터의 독립을 원했고 1920년에 ‘우크라이나 독립 정교회’가 설립되어 1921년에는 키예프 및 전 우크라이나 부주교가 임명됐다. 독립 정교회의 의식에는 교회 슬라브어가 아닌 우크라이나어가 사용됐다."[4]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 소련 공산당에서 스탈린이 권력을 쥐고, 1930년대 일국사회주의론에 기반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민족억압이 체계적으로 부활했다. 그 참혹한 결과 중 하나는 1932년 우크라이나 대기근이었다. 스탈린은 민족 억압과 대기근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가혹한 숙청으로 진압했다.
"우크라이나화는 1930년대 전반까지 계속됐으나 이미 1920년대 후반부터 단속이 시작됐다. 원칙적으로는 완고하지만 전술에는 유연했던 레닌이 1924년 5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트로츠키(1879~1940), 지노비예프(1883~1936) 등 라이벌을 추방하고 1927년에 스탈린(1879~1953)이 권력을 장악한 것이 전환점이 됐다.
… 앞서 기술한 것처럼 스탈린은 오히려 농민을 사회주의에 대한 저항 세력으로 여긴 때가 있어, 농민을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해서는 거친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 그 수단이 된 것이 1928년에 시작되어 1929년부터 강제화된 ‘농업 집단화’다.
… 농민들은 저항했다. 어쩔 수 없이 집단 농장에 들어가게 된 농민들은 기르던 가축을 도살하여 식용으로 삼거나 팔아버렸다. 1928년에서 1932년 사이에 우크라이나는 가축의 절반을 잃었다. 그러나 당과 정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집단화를 추진했다. 저항하는 이는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 우크라이나에서 이 집단화는 1930년과 1931년에 급속도로 진행됐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에서 집단화된 농가 비율은 1928년 3.4퍼센트에서 1935년에는 91.3퍼센트에 달했다.
…
집단화는 스탈린과 당 지배의 영속화에는 이바지했을언정 우크라이나에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가 바로 1932년~1933년에 일어난 대기근이다.
1930년 우크라이나의 곡물 생산은 2100만 톤으로 비교적 양호했고 정부 조달량은 760만 톤이었다. 이 조달량은 이미 1920년대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1931년은 흉작으로 전년 대비 65퍼센트인 1400만 톤에 그쳤지만 조달량은 달라지지 않았다. 1932년에도 생산량은 1400만 톤으로 전년과 같은 흉작이었다. 이러한 수확량 감소는 집단화에 의한 혼란이 주된 원인이었다.
… 농민들은 이러한 조달 방식에 저항했지만, 모스크바의 당과 정부는 무리하게 밀어붙였다. 당 활동가는 농가에서 곡물을 압수할 법적 권리를 가졌다. 도시의 당 활동가 무리는 농가로 찾아가 집집마다 돌며 마루를 부수면서까지 곡물을 찾아냈다. 굶지 않은 이는 음식물을 숨긴 것으로 간주했다. 음식물을 감춘 이는 사회주의 재산을 절도한 것으로 간주하여 사형에 처하는 법률이 제정됐다.
이로써 기근은 1933년 봄이 되어 절정에 달했다. 기근은 소련 안에서도 우크라이나와 북캅카스 지역에서 발생했다. 도시 주민이 아니라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이 굶주리고 곡물 생산이 적은 러시아 중심부가 아니라 곡창 우크라이나에서 기근이 발생한 몹시 비정상적인 사태였다. 농민들은 빵이 없어서 쥐, 나무껍질, 잎사귀까지 먹었다. 인육을 먹었다는 이야기도 다수 전해진다. 마을 전체가 절멸한 곳도 있었다. 흐루쇼프의 회상록에는 한 대의 열차가 굶어 죽은 사람들의 사체를 가득 싣고 키예프 역으로 들어왔는데, 폴타바에서 키예프까지 계속해서 사체를 실었기 때문이라는 일화가 실려 있다.
…
이 기근으로 발생한 아사자의 수는 소련 정부가 감추고 있었던 탓에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느 학자는 300만 명에서 600만 명 사이로 추계했다. 독립 후, 우크라이나의 공식 견해와 쿠치마 대통령(1938~)의 머리말이 실린 『우크라이나에 대한 모든 것』(1998)에 따르면 이 기근으로 우크라이나 공화국에서는 350만 명이 아사했고 출산율 저하를 포함한 인구 감소는 500만 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북캅카스에 거주한 우크라이나인 약 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북캅카스 출신이자 외가 쪽이 우크라이나계로 추정되는 고르바초프(1931~)에 따르면 자신의 마을에서도 이 기근으로 3분의 1이 사망했다고 한다.
…
이 기근의 첫 번째 특징은 강제적인 집단화와 곡물 조달로 인해 발생한 인위적인 기근이며 필연성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기근은 유대인에 의한 홀로코스트에 필적할 만한 제노사이드라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두 번째 특징은 러시아 자체는 이 기근을 거의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를 약화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자행했다는 설이 제기됐다. 그 증거로 “민족 문제는 농민 문제를 말한다”라는 스탈린의 발언과 1930년 『프라우다』지의 “우크라이나의 집단화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개인 소유 농가의 농업)의 기반을 파괴하는 특별한 임무를 갖는다”라는 구절을 들었다. 세 번째 특징은 이 기근이 소련에서는 가능한 한 감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 1986년에 이르러서도 소련 관제의 우크라이나사는 ‘지독한 식량 문제가 있었다’고만 서술했을 뿐 기근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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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권력 장악으로 우크라이나 자치에 제한이 가해지기 시작했고 우크라이나인들이 농업 집단화와 곡물 조달에 저항하자 그 흐름은 더욱 강화됐다. 1920년대에 활약한 인텔리 문화인에 대한 공격도 시작됐다. 1931년에는 흐루셰브스키 아카데미의 역사 부문도 폐쇄됐다. 그는 러시아로 추방되어 1934년 캅카스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1932년 즈음부터는 공산당원에 대한 숙청이 시작됐다. 소련 전체의 대숙청은 1936년부터 1938년에 걸쳐 일어났으므로 우크라이나에 한해서는 몇 년 앞서 시작된 셈이 된다. … 스탈린은 1933년에 발생한 기근의 책임을 우크라이나 공산당원들에게 전가했다. 1933년에는 교육의 우크라이나화를 촉진한 고참 볼셰비키이자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교육 코미사르(각료)였던 스크리프니크(1872~1933)를 자살로 내몰았다. 그 밖에 우크라이나화를 추진한 유력 당원들이 자살하거나 유형을 당하는 등 홀연히 사라졌다. 1933년부터 1934년에 걸쳐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10만 명의 당원을 잃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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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부터 1938년에는 숙청의 대상이 우크라이나인을 포함한 소련인 전체로 확대됐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각료 17명도 체포된 후 처형됐고 류브첸코 수상(1897~1937)은 자살했다. 우크라이나 공산당원의 37퍼센트에 해당되는 17만 명이 숙청됐다. 이로써 우크라이나의 공산당은 괴멸 상태에 빠졌다. 1930년대 말에는 각 공화국의 자치가 대부분 완전히 사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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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전체의 교육과 문화는 일률화, 러시아화됐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러시아어 교육이 필수가 됐다. 우크라이나어의 알파벳, 어휘, 문법은 러시아어와 가까워졌다. 우크라이나인도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러시아 작가의 문학을 읽도록 장려됐다. 신문과 잡지에서도 우크라이나어의 비중이 줄어들었다. 이로써 1920년대에 꽃피웠던 우크라이나 문화는 이 시기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5]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시대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일정한 유화정책이 있기도 했지만, 큰 틀에서 우크라이나는 소련 붕괴 때까지 지속적으로 스탈린 반혁명 이후 국가자본주의가 된 소련 아래에서 지속적인 민족 억압에 시달려야 했다. 소련의 관료적 명령경제 체제는 우크라이나의 산업과 농업 생산을 정체시켰고,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고르바초프 취임 후 글라스노스트를 통해 1390년대의 대기근과 숙청 등의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며, 소련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분노가 터져나왔다.
"브레즈네프, 셰르비츠키 시대의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어의 사용이 장려되고 우크라이나어의 사용에는 간섭이 뒤따랐다. ... 그 결과 1969년부터 1980년에 걸쳐 우크라이나어 신문의 비율은 46퍼센트에서 19퍼센트로 줄었고, 1958년부터 1980년 사이에 우크라이나어로 출판된 책은 60퍼센트에서 24퍼센트까지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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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상황을 보면 흐루쇼프 시대에는 미국을 넘어서겠다는 목표가 있어 여전히 의욕적인 면이 있었지만 경제 성장률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고,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정체 상태에 빠졌다. 제5차 5개년 계획(1951~1955) 동안의 우크라이나 공업의 연간 성장률은 13.5퍼센트였지만 30년 후의 제11차 5개년 계획(1981~1985) 동안에는 3.5퍼센트로 떨어졌다. 공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심각한 에너지 부족이 일어났고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드네프르강에 거대한 댐이 연달아 건설되면서 드네프르강은 연이어진 인공 호수처럼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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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소련의 농업 전체가 정체됐다. 브레즈네프 시대 후반에는 소련에서 곡물을 수입하는 게 일반화될 정도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배경에는 관료 통제에 의한 비효율, 이윤 동기 및 경쟁 부재에 의한 노동 의욕의 감퇴 등이 있었다. 이 점은 반대로 이윤 동기가 작용했던 주택에 부속된 자영 채소밭의 높은 생산성으로 증명된다. 1970년, 우크라이나에서 전체 농지의 몇 퍼센트에 불과했던 자영 채소밭은 농가 수입의 36퍼센트를 차지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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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서 소련 체제에 대한 불신이 처음으로 고조된 계기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폭발 사고다. 1986년 4월 26일, 키예프 북쪽 방면으로 약 10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제4호 원자로가 폭발했다. 192톤의 핵연료 중 4퍼센트가 대기 중으로 방출되어 히로시마형 원자폭탄 500발분의 방사능이 확산됐다. 사고 자체로도 사상 초유의 재난이었지만 사태를 한층 더 악화시킨 것은 소련의 은폐 구조였다.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획득한 지 1년 남짓 됐고 글라스노스트도 아직 정착되지 않은 시기였던 탓에 사고는 28일까지 감춰져 있었다. 이 때문에 좀 더 빨리 공표하여 필요한 조처를 취했다면 구할 수 있었던 많은 생명을 잃었고 몇만 명의 사람은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 소련은 생산지상주의로 그동안 환경 문제에는 거의 무관심했다. 문제가 일어나도 감추기만 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제1중화학 공업지대라고 자랑했지만 실상은 공장과 광산이 배출하는 오염물질이 흘러넘치고 있었고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는 소련 유수의 오염지대가 되어 주민들의 건강 문제가 심각해졌다.
글라스노스트가 정착해가자 그동안 억눌려 있던 불만이 터져나왔다. 긴 시간 터부시됐던 역사의 ‘공백’을 명확히 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일어난 대기근이 공공연하게 논의됐고 1930년부터 1940년대에 보안 경찰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의 대규모 무덤이 발견됐다."[7]
소련의 무기력 아래 1989년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이 시작됐고, 1990년 3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의회인 ‘최고회의’(베르호우나 라다)의 선거에서 우크라이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4분의 1 의석을 획득했다. 1990년 7월 16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주권 선언을 했고, 1991년 8월 24일 거의 만장일치로 독립 선언을 채택했다. 이후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에서 90.2퍼센트의 찬성으로 독립을 확정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는 독립국가가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으로부터 부패한 관료 지배계급(올리가르히)을 물려받았는데, 이 유산은 오늘날까지 우크라이나 민중을 억압하고 있다. 2004년 오렌지혁명, 2014년 유로마이단 운동에서 ‘부패 청산’은 우크라이나 민중의 공통된 구호였다. 소련 붕괴 후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과정은 ‘친러'와 '친서방’ 지배계급 세력 간의 대립으로 특징지어지는 진자 운동을 반복해왔는데, 부패는 ‘친러’와 ‘친서방’을 가리지 않았다. ‘부패 척결’을 내걸고 2019년에 당선된 젤렌스키도 현재 부패스캔들에 연루돼있고, 2025년 7월에는 젤렌스키의 반부패기관 통제법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오늘날 러시아의 침공은 우크라이나에서 극우 파시즘을 강화할 뿐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에서 ‘네오나치’가 성장하고 있다며, 이를 침공의 근거로 삼았다. 그런데 실제 우크라이나에서는 극우 파시즘이 성장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회학자이자 ‘Lefteast’의 편집자인 볼로디미르 이셴코는 프랑스 사회주의 잡지 <연속혁명>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의 극우의 상태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프랑스의 극우, 주로 르펜의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은 우크라이나에서 논의되는 운동들보다 훨씬 덜 극단적이다. 르펜의 정당은 아마 나치 상징을 사용하지 않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비시 정권과의 협력에 대해 더 정교한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세계대전 시기 파시스트들로부터) 정화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이와 다르다. 당신이 언급한 스테판 반데라(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연합한 극우 성향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는 공개적으로 미화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특히 아조프 대원들에 의해 와펜 SS(나치 민병대의 일종)가 미화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극우의 극단주의 수준은 서구 극우보다 훨씬 높다. 최근 그들은 서부 우크라이나 최대 도시인 리비우에서 ‘네이션 유로파’라는 국제 회의를 개최했는데, 여기에 독일의 드리테 베그, 이탈리아의 카사 파운도 등 여러 유럽 국가의 유사 네오나치 단체들을 초청했다.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스보보다(Svoboda) 정당을 비롯해 아조프/국민군(National Corps)의 주요 인사 등 주요 극우 조직들이 모두 참여했다. 이들 우크라이나 정당, 조직, 군사 부대는 일반적으로 단순히 '극우'로 불리지만, 서구의 주류 극우 정당보다는 훨씬 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서구 단체들과 국제적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참고로, 이 회의에 참여한 우크라이나 군사 부대 대부분은 우크라이나 군사 정보국(HUR)과 연계되어 있다.
…
의회 지위를 추구하는 서구의 주요 극우 정당들과 달리, 우크라이나 극우의 힘은 항상 거리 동원 능력과 폭력의 위협에 있었다. 중요한 점은, 2012년 선거에서 극우 스보보다당이 1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한 한 차례를 제외하면, (서부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방 의회에서는 훨씬 더 큰 대표성을 확보하고 최대 파벌을 형성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선거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주된 권력 원천은 과두 정당이나 취약한 자유주의 정당들과 달리, 의회 밖에서의 동원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전후 유럽의 파시스트 운동 계열에 속했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조직(OUN)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치적 전통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 이제 아조프여단은 전쟁의 영웅으로서 매우 합법적인 지위를 얻었다. 그들은 특별한 미디어 관심을 누리며 자신들을 엘리트 부대로 포지셔닝하고, 미디어가 이를 확언해주고 있다. 아조프 연대 소속 연사들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또한 2022년 이전에 그들을 네오나치라고 부르던 과거를 쉽게 잊어버린 서방 언론들 덕에, 그들은 일종의 이미지 세탁(White-washing) 효과를 누렸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명목상의 극우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및 서방 엘리트들이 우크라이나 극우와 민족주의를 미화하는 데 공모한 점도 고려해야 한다. … 미국으로 이주한 우크라이나 역사학자 마르타 하브리슈코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정책, 우크라이나 극우에 대해 비판적으로 글을 쓰며 계속해서 수천 건의 위협, 특히 살해 위협과 강간 위협을 받고 있다.
당신의 의견으로는 아조프가 우크라이나 극우의 주력 세력인가? 그들은 마리우폴과 바흐무트 전투로 인해 극도로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극우 세력의 재편 과정에서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는가?
오히려 그들은 확장되었다. 현재 국가수비대 내 제3돌격여단과 아조프여단 두 여단, 그리고 군사정보부에 소속된 특수부대 크라켄까지 보유하고 있다.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과 미디어 노출도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그들의 세탁된 정당성도 확장되었기에, 그들은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그들은 비정치화되지 않았다."[8]
푸틴이 얘기하지 않는 것은, 러시아의 반복된 침공과 군사적 위협이 우크라이나에서 파시즘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번 전쟁을 거치며 아조프여단 등 우크라이나의 극우는 ‘전쟁영웅’ 칭호를 얻고, 영향력을 더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우크라이나에서 파시즘의 성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 반동적 전쟁을 지금 당장 중단시켜야한다.
정리하자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파시스트’를 빌미삼아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지만, 이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팽창야욕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스탈린 반혁명 이후 오랜시간 이어져온 국가자본주의 소련의 민족억압의 역사는 우크라이나에서 극우 민족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했다. 꼬여버린 역사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선 무엇보다 오늘날에도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우크라이나의 민족자결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한다. 제국주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우크라이나의 파시즘을 강화하는 반동적 침략전쟁일 뿐이다.
2. 서방제국주의와 NATO가 우크라이나를 구원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어떤 역사적 배경 위에서 벌어진 것이며, 어째서 제국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침략전쟁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사태의 다른 측면인, NATO와 서방 제국주의의 위선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러시아의 반동적인 군사적 대응을 만든 건 NATO의 동진정책이었다.
1990년에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통일 독일에 나토군을 주둔시키며 “NATO는 동쪽으로 1인치도 더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공문구에 불과했고, NATO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회원구을 받으며 동진을 이어왔다.
나토는 독일 통일 당시 ‘1인치도 더 나아가지 않을 것’이란 미국 국무장관의 선언과 반대로, 빠른 속도로 러시아 국경을 향해 가입국을 확대해왔다. 1999년 폴란드, 헝가리, 체코가 NATO에 가입했다.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는 2002년 공식 가입 초청을 받았으며 2년 후 가입 절차를 완료했다.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는 2009년 가입했으며, 마케도니아는 2020년에 가입했다. 러시아와의 거대한 물리적 경계선인 우크라이나는 2008년 NATO 가입 과정인 Membership Action Plan(MAP)을 신청했으며, 유로마이단 이후인 2014년 가입 의사를 공식 목표화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연설에서도 제임스 베이커의 말을 인용하며, NATO의 지속적인 동진 위협을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했다. 실제로 NATO는 소련 해체 이후에도 동진을 거듭했고, 러시아를 상대로 한 군사적 위협을 증대시켜왔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정당화될 순 없으나, NATO의 지속적인 동진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푸틴의 반동적 반응을 낳은 것은 분명하다.
[1997년 이후 나토의 확장을 보여주는 지도]
나토는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핑계삼아 끊임없이 자기 세력을 확장해왔다. 그러나 독일 사회주의자 내대니얼 플래킨이 지적하듯, 이런 위협은 의도적으로 과장돼있다.
"현재 나토 회원국들은 우크라이나 정부에 무기를 공급하기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민주당 내 '사회주의자'를 포함한 미국 의회는 추가 무기 지원으로 400억 달러를 승인했다. 독일 자본가들은 군대에 추가로 1000억 유로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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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실은 부패한 러시아 정권의 군대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에서 겨우 조각을 뜯어내는 데도 힘겨워한다는 점이다. 나토의 새로운 군국주의는 방어와 무관하다. 제국주의 패권을 공고히 하고 중국과의 더 큰 대결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 모든 신형 무기들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새로운 제국주의 모험에 사용될 것이다.
1914년에도 비슷한 논의가 있었다. 독일 제국은 유럽에서 가장 야만적인 국가였던 러시아의 독재 정권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장군들은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 이 전쟁이 독일 노동계급이 누리는 제한된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차르는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 조직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이 독일 장군들은 노동자들의 파업권, 집회권, 심지어 의견 표현권마저 박탈했다.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으로 계엄 상태를 정당화한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소책자에서 러시아가 독일을 정복하려 한다는 주장의 터무니없음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차르가 유럽이나 달을 병합하려 한다고 가정하는 게 더 설득력 있을 것이다.” 오늘날 푸틴이 폴란드를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욱 터무니없으며, 미국 국민을 위협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노동자 계급에게 가장 큰 위협은 지구상 어디든 죽음의 비를 내릴 수 있는 무적의 수단을 가진 나토 군대에서 온다."[9]
NATO는 미국과 유럽의 팽창주의를 위해 봉사하는 제국주의 전쟁 기계다. 나토는 회원국을 잠재적 침략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방어적’ 동맹이라는 수사를 내세운다. 그러나 나토는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인도적 지원’과 ‘민간인 보호’등을 명목으로 적극적인 ‘공격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9년 코소보 전쟁, 2001~202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2011년 리비아 내전 개입이다.
“나토 역사상 최초의 합동 공격 작전은 1995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에서 세르비아군을 상대로 벌인 침공이었다. 이는 구 유고슬라비아의 해체와 1991년부터 2001년까지 이어진 지역 내 독립 전쟁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토가 모든 군사력을 쏟아부은 것은 1999년 코소보 전쟁 때였다. 13개국에서 파견된 600대의 전투기가 코소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폭격했으며, 이로 인해 2,500명에서 5,700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했으며, 우라늄 폭탄 사용으로 인한 막대한 물질적·환경적 피해가 발생했다. 나토 개입의 명분은 코소보에서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범죄를 자행한 세르비아군의 인종청소를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코소보 알바니아인의 정당한 자결권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발칸 반도라는 러시아의 영향권에 나토의 존재감을 확대할 친미 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었다.[10]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9·11 테러 배후 조직의 지도자 빈 라덴이 그곳에 은신 중이라는 구실로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의 지역 내 이익은 무슬림 국가인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아랍 세계까지 포함하는 더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 핵심 지역을 장악하는 것은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지정학적 우위를 제공할 것으로 여겨졌다. 이 지역에서의 전쟁은 제국주의 침략국 기업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년간 지속되었으며, NATO 군대의 굴욕적인 철수와 함께 탈레반 정부 손에 나라가 넘어가며 종결되었다. 전쟁의 결과로 인구는 황폐화되었으며 — 현재 인구 평균 연령은 18세이다. 전쟁은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남겼고, 전면적인 내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또 다른 결과는 나토 회원국들 내부에서 이슬람교도 인구에 대한 외국인 혐오 정책과 차별이 확산된 것이다.
…
2011년 5개월 동안 북아프리카 국가 리비아에 대해 NATO는 공습과 군사 개입을 단행했다. 3월 1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민간인 보호를 위한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로 표결했으며, 20개국이 넘는 국가들이 무기 지원 또는 직접적 개입을 통해 참여했다.
나토의 행동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으로 알려진 혁명적 과정 속에서 해당 지역에서 공세적 입지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42년간 리비아 대통령을 지낸 무아마르 카다피는 아랍의 봄 운동의 결과로 축출된 지역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집권 당시 소비에트와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그의 정부는 수년간 쇠퇴해 왔다. 미국과 유럽은 군사적 개입 외에도 반군 단체에 무기와 훈련을 지원하며 자금을 제공했다. 2011년 10월 11일, 카다피는 미국이 지원하는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으며, 이로 인해 리비아 내부에 권력 분열을 초래하는 내전이 발발해 두 개의 정부가 생겨났다. 당시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이에 대해 웃으며 “우리는 왔고, 보았고, 그가 죽었다”고 발언했다.
나토(NATO)는 이러한 봉기를 '인도적 지원'이 아닌 서방 이익에 유리한 새 정부를 세워 영토 통제권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았다. 리비아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기근과 분쟁을 피해 도피하는 난민 통제에 전략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막대한 가스·석유 매장량으로 지역 지정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군사 작전을 주도했으며 석유 거래로 가장 큰 이익을 얻었다.
평화와는 거리가 먼 리비아는 여전히 내전에 시달리고 있다. 나토군은 이 지역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리비아인들의 권리는 유린되었고, 기아와 완전한 파괴로 인해 수백만 명이 고향을 떠났다."[11]
서방 제국주의는 우크라이나에게 굴종과 광물을 요구한다.
올해 2월 트럼프는 젤렌스키와의 회담에서 노골적으로 젤렌스키에게 모욕을 주었다. 출입기자와 부통령 J.D.밴스는 젤렌스키에게 정장을 입고 오지 않았다느니, 미국에 대해 충분히 고마워하지 않았다느니 무례한 말을 쏟아냈고, 트럼프는 젤렌스키에게 “너는 (협상할) 카드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며 미국에 대한 굴종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젤렌스키는 이날 화난 표정으로 광물협정에 서명하지 않고 회담장을 빠져나갔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5월 결국 광물협정을 통해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50%씩 출자해 ‘미국, 우크라이나 투자 재건펀드’를 만들어, 우크라이나의 광물과 에너지 자원 투자에 관여할 수 있게 됐다. 10년 간 광물산업 투자를 통해 얻은 순이익은 반반씩 나누되, 우크라이나의 재건을 위해 쓰기로 한다는 단서조항이 있지만, 실제 기반시설을 확충하고 광물산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려면 10년 이상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광물협정에 따라 앞으로 많은 이익을 가져갈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래에 미국의 미래 군사지원을 펀드 기여금으로 간주하자는 내용도 담겼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의 광물을 탐내는 것은 중국과의 경쟁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는 흑연, 티타늄, 리튬과 같은 필수 희귀 광물이 대량 매장돼 있다. 미국이 중국과의 미래 산업(AI,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등)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천연자원이다. 트럼프는 중국으로부터 자유롭고, 미국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천연자원 공급망을 확보하려고 한다.
중국은 이미 몇 십년 간 남미와 아프리카에 대규모 투자를 통해 핵심광물에 대한 통제권을 늘려왔다. 오늘날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 생산량의 약 60%를 차지하고, 천연자원의 가공산업에서는 거의 90%의 점유율을 차지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에 관세를 부과한 지 며칠 후 중국 정부가 흑연과 텅스텐을 포함한 20개 이상의 핵심 광물에 대한 수출 규제로 반격한 것은, 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중국의 천연자원에 대한 우위가 얼마나 중요한 위협인지를 잘 보여준다.
한편 트럼프는 미국의 NATO 방위비 분담금을 줄이기 위해 유럽 동맹국들에게 줄기차게 방위비 인상을 요구해왔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방위비 지원에서도, 유럽의 동맹국들이 더 많은 몫을 부담해야한다고 강조해왔다. 또한 얼마 전 8월 18일 트럼프와 젤렌스키가 진행한 회담에서 젤렌스키는 트럼프에게 미국산 무기를 대량으로 구매하겠다고 약속해야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의 광물자원을 노리는 건 단지 트럼프의 미국만이 아니다. 전통적인 유럽의 동맹국들도 전쟁이 길어지고 방위비 부담이 커질수록, 우크라이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자국의 이익에 더욱 관심을 쏟고 있다. 세바스티앙 르코르뉘 프랑스 군무장관은 얼마 전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광물 협정 체결이 임박하자, 노골적으로 자신들도 광물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한다고 발언했다. ("프랑스 방위산업도 특정 원자재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우크라이나의 안보비용을 분담하는 자신들의 ‘지분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아래 한 EU정책자문가의 사설은 EU가 우크라이나에 더 많은 개입을 해야만 더 많은 지분권을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이번 주 초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차지하고, 미국이 천연자원을 얻으며, 유럽이 평화유지 비용을 부담하는 식으로는 안 된다.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
궁극적으로 EU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군사적 지원 확대 노력은 EU가 제공할 수 있는 가능한 안보 보장 협상과 병행되어야 한다. 후자는 우크라이나가 경제 회복과 재건을 위한 신뢰할 수 있고 강력한 유럽의 지원을 바탕으로 할 때만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우크라이나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EU가 모든 차원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확대할 의지를 더 많이 표명할수록, 향후 어떤 협상 테이블에서도 자리를 요구할 수 있는 신뢰성을 더 확보할 수 있다."[12]
우크라이나 경제는 이미 3년 반의 전쟁으로 파탄난 상태다. 우크라이나의 GDP는 2022년 28.8% 감소한 후, 국제원조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2023년 5.5%, 2024년 2.9% 증가했다. 국제원조 없이는 현재 우크라이나 경제의 지속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러시아의 공세가 시작된 첫 달, 우크라이나 정부는 국채를 판매하고 화폐를 발행하며 적자를 메우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해 연말 기준 우크라이나의 경제 규모는 거의 3분의 1 규모로 축소되었으며, 물가는 25% 이상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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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 우크라이나의 발전량 중 절반 이상이 러시아에 의해 파괴되거나 점령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 에너지부는 2022년 10월~2024년 9월 기준 러시아가 자국 에너지 인프라를 1000번 이상 공격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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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경제의 또 다른 큰 문제는 3분의 1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되는 노동력이다.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 국외로 떠난 피난민, 계속되는 동원이 그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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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국민 거의 4분의 1이 피난민이 되었다. UN에 따르면 해외에 거주 중인 우크라이나 난민은 현재 약 700만 명 수준이며(그중 6300만 명이 유럽에 거주한다) 국내 실향민 또한 460만 명이나 된다."[13]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광물자원에 대해 미국과 유럽이 어느정도의 지분권을 갖고 나눠먹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그들의 수사와 달리, 미국과 유럽이 방위비의 댓가로 우크라이나 노동자민중에게 심각한 경제적 종속을 불러올 청구서를 내밀 것은 분명하다. 또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호자 행세를 하는 미국과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가자지구에서 진행중인 집단 학살에 공모하는 바로 그 세력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수탈의 자유를 제공하는 댓가로 얻어지는 NATO의 안보보장은 과연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제공할 수 있는가? NATO 내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친러 성향은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반대하고 있는데, 이들이 하는 말 중 이런 얘기가 있다. “우크라이나가 NATO에 가입하면 NATO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고, 이는 NATO와 러시아의 전면전이라는 더 큰 전쟁을 낳을 수 있다.” 슬로바키아와 헝가리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유리한 근거를 취사선택하는 것일 뿐이지만, 이는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혹은 NATO 동맹국들의 안보지원은 러시아와의 전쟁위협을 더욱 강화시킬 것이며, 절대로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없다.
제국주의 패권대결의 총체성 속에서 러우전쟁을 바라봐야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고, 어떤 좌파들은 이 전쟁을 제국주의 세력 간의 대리전이 아니라, 러시아의 침략에 맞선 우크라이나가 민족해방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NATO의 무기지원을 지지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 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자본주의의 총체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독일 사회주의자 나다니엘 플라킨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상황을 1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와 세르비아 전쟁에 비유하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게오르크 루카치는 1967년 레닌 사상에 관한 연구의 후기에서 레닌주의의 핵심 범주로 “총체성”을 강조하였다:
“혁명적 실천을 지향하는 계급의식을 올바르게 가리키는 것은 바로 총체성이다. 총체성을 향한 지향 없이는 역사적으로 진실한 실천은 존재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들 중 누구도 총체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전쟁을 미국 헤게모니 쇠퇴기 속 강대국 간 고조되는 긴장의 일부가 아닌, 두 불평등한 국가 간의 갈등으로 보길 원한다. 즉, 그들은 우리가 세계적 제국주의의 총체성으로부터 분리된, 임의로 정의된 전쟁의 일부만을 보길 바라는 것이다.
…
여기서 LIT-CI[14]의 입장은 특히 기이하다. 그들은 “나토가 러시아를 공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묻고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이 상황에서는 러시아를 방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약하고 종속적인 국가(러시아)에 대한 제국주의 나토의 침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나토의 패배를 지지할 것이다.”
따라서 미군이 러시아군을 향해 발포한다면, LIT-CI는 180도 입장을 바꿀 것이다: 그들은 젤렌스키 지지를 중단하고 즉시 러시아군 편에 설 것이다. 문제는 물론 우크라이나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원”과 직접적인 제국주의 개입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없다는 점이다. LIT-CI의 두 입장, 즉 우크라이나 지원이나 가상의 러시아 지원 모두 잘못되었다. 이는 세계 정세의 총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극히 기계적인 사고의 결과이다.
…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동의하듯, 제1차 세계대전은 일련의 고립된 민족해방 전쟁이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 간의 세계적 갈등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국” 부르주아지의 패배를 위해 싸워야 했다. 이는 “조국”이 파괴 위협에 직면했을 때조차 “국방”에 용감히 반대했던 세르비아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예산에 반대한 세르비아 사회주의자들을 칭송했다. 이 입장은 전체적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오늘날 나토 국가들의 사회주의자들은 ‘자국’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야 한다. 강대국 간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새로운 갈등과 전쟁이 발생할 것이며, 각 제국주의 세력은 자신들의 침략을 ‘민주주의’와 ‘자결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려 할 것이다. 이는 항상 전쟁 선전의 언어였다.
사회주의자들은 독립적인 입장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이는 우크라이나에도 적용된다. 우크라이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이 독립적인 정치적 주체로 성장하여, 나토와 러시아 제국주의 양측으로부터 국가를 해방시키는 전망을 가지고 투쟁해야 한다. 이것이 반동적 전쟁을 종식시키는 유일한 길이다."[15]
3. 위기와 전쟁의 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열었다.
이미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질서가 상당히 약화되었던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은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이 시대에 위기에 빠진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의 위기를 상대국에게 전가하기 위해 치열한 정치군사적 다툼을 벌인다.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집단학살과 중동의 전쟁위기,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군사행동과 개입강화, 유럽에서 극우파시즘의 부상과 군비인상, 동아시아에서 북중러-한미일 진영의 강화는 세계 자본주의 위기의 표현들이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위기의 표현이자 위기를 심화시키는 또 하나의 조건이 되었다.
전쟁 장기화로 러시아는 중국에 경제적으로 의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처지가 됐고,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올해 전승절 행사에서 러시아는 중국과의 동맹을 과시했고, 9월 3일에 열릴 중국의 전승절 행사에는 푸틴과 김정은, 시진핑이 한 자리에 모일 예정이다.
한편 얼마 전인 6월 나토 회원국들이 2035년까지 국방비를 자국 국내총생산의 5%까지 늘린다는 합의를 통과시켰는데, 이는 유럽 각 국에서 기존 국방비를 2~3배 이상 인상해야함을 의미한다.[16] 국방비 지출이 늘어나는 만큼 사회복지를 위한 공공재정은 줄어들 것이며, 기후위기 대응 또한 뒷전으로 밀려날 것이다.
미국의 주도 아래 이뤄진 NATO의 동진정책과 러시아의 팽창적 야욕이 만나 벌어진 이 반동적인 전쟁으로 수많은 우크라이나, 러시아 노동자민중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잔혹한 행위를 하고, 죽고 죽여야 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7만여명에서 15만여명[17], 러시아에서는 최소 18만여명에서 25만여 명까지 사망했다고 추정되고 있다.[18] 발제 2에서도 강조되듯, 러시아에서 징집돼 사망한 이들 중 불비례한 숫자가 소수민족과 가난한 주변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나왔다.
우크라이나의 진정한 평화와 자유는 NATO가 가져다줄 수 없다. 러시아도 가져다줄 수 없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노동자민중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의 노동자민중의 국제연대와 단결을 통해 반동적 전쟁을 끝내고 각국의 군사적 팽창 시도를 저지하여 노동자혁명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다.
운동의 실마리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리고 주변국에서 전쟁을 멈추고 나토와 푸틴 양측 모두와 독립된 노동자의 운동을 조직할 실마리가 얼마나 있는가? 전쟁 초창기인 2022년 4월에, 러시아 군을 지원하던 벨라루스에서 철도노동자들이 고의적 사보타지를 통해 러시아 군사장비 수송을 막고 손상시켰다.[19]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철도노동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반대하며 나토의 무기수송을 반대하는 파업에 돌입해 2주간 무기수송을 지연시켰다.[20] 안타깝게도 이러한 저항이 보다 폭넓은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행동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이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역할해야할지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러시아에서는 2022년 9월에 평화운동단체가 주도한 반전시위로 1300여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지난 7월 젤렌스키 정부의 반부패기관 통제법안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아직 그 이상의 대중적인 반전운동의 소식은 포착하지 못했다.
한편, 앞서 언급한 벨라루스 철도노동자들은 친러 벨라루스 정권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또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쪽에서 나토의 군사개입, 러시아의 침공을 반대한 평화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탄압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에 기반한 탄압도 강화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LGBT는 서구가 퍼뜨린 극단주의 이데올로기’라며 성소수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어린이들에게 우크라이나에 대한 증오심을 가르치고 있다. 반대로 우크라이나에선 러시아어 사용을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되고 극우파시즘 세력이 성장하고 있다.
"아이들은 이제 중학교 시절부터 자동소총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있다. 애국심과 파란색, 흰색, 빨간색 깃발에 대한 사랑, 그리고 레닌에 대한 증오를 가르친다. 우크라이나에 자결권을 부여한 이가 바로 레닌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우크라이나인을 증오하도록 가르친다. 오늘 그들을 증오하도록 가르쳐 내일 무의미한 전투에서 마을마다, 킬로미터마다 완전히 황폐화된 동부 우크라이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그들을 죽일 수 있도록 말이다.[21]
예를 들어, 오데사처럼 압도적으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도시에서도 우크라이나 학교에서는 러시아어를 더 이상 가르치지 않는다. 심지어 선택 과목으로도 없다. 그곳 우크라이나 아이들의 80~90%가 부모와 러시아어로 대화할 것이다. 최근 제출된 법안은 교실 내 교사와의 대화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에 학생들 간의 사적인 대화에서도 러시아어 사용을 금지할 수 있다. 이 법안은 이미 교육부 장관의 승인을 받았다."[22]
한편 우크라이나 사회학자 볼로디미르 이셴코는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노동계급의 현재 조직화 정도에 대한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했다.
"현재 상황에서 노동계급은 역할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우크라이나 노동운동은 전쟁 이전부터 이미 취약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규모 정치적 파업은 1993년 돈바스 광부들이 벌인 것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돈바스의 자치권과 러시아와의 긴밀한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파업조차 소위 '붉은 이사들'이라 불리는 소비에트 기업 경영진들의 이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소비에트 붕괴 직후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파업을 정부로부터 특정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결국 파업은 조기 선거와 정부 교체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진정한 대규모 파업은 없었습니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소규모 파업만 목격해왔는데, 이는 대개 특정 기업에 국한되거나 기껏해야 경제의 일부 분야에 그쳤으며, 정치화된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참고로,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당시 정치적 파업을 시작하지 못한 점이 정부에 대한 영향력 부족으로 인해 폭력적 격화로 이어졌습니다. 정부는 시위자들에게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이 시위의 폭력적 전략을 추진할 기회가 열렸습니다. 따라서, 맞습니다, 이 전면적 침공 이후 파업은 금지되었습니다. 발생한 파업들은 아마도 비공식적 파업일 것입니다."[23]
그의 분석이 맞다면 안타깝게도 우크라이나 노동자계급은 정치적으로 자신을 조직화해야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있다.
여기서 국가자본주의 소련의 유산은 우크라이나에서 극우민족주의와 스탈린주의 모두에 맞설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대안을 만드는 과정을 한층 더 어렵게 하고 있다.
이셴코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른바 ‘좌파’로 분류되는 정치세력의 주류는 ‘우크라이나 공산당’으로, 러시아의 침공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보다 훨씬 수가 적은(전성기 때에도 1/100 정도 되는), 서구의 민주사회주의 및 자유주의 좌파 경향이 있는데, 이들은 전쟁 발발 후 우크라이나 정부를 지지하고 군에 자원입대 하는 등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잔혹한 징병제가 시행되고, 또 다수의 우크라이나 민중이 전쟁 지속을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24], 이들은 전쟁에 대한 입장을 조심스럽게 재검토하고 있다.
이셴코가 분류하는 마지막 부류의 좌파에 대해 이셴코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우크라이나 좌파의 세 번째 세력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25]인데, 내가 “신소비에트 부흥”이라 부르는 현상의 일부로, 많은 구소련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크루즈키(kruzhki)’—문자 그대로 '동아리'를 의미—로 조직되며, 단순한 마르크스-레닌주의 독서 모임을 넘어선 원시적 정치 조직이다. 러시아에서 훨씬 더 대중적이어서 수십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기도 한다. 러시아, 벨라루스, 중앙아시아에서 크루즈키는 소련에서 단 하루도 살지 않았지만 자국 사회·정치 현실에 비판적인 수천 명의 젊은이들을 포괄하며,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그 현실을 다루는 수단을 찾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도 이 단체들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확장되었다. 탈공산화, 반러시아 민족주의 및 반공주의 정서 고조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단체들은 거의 창립 초기부터 정부에 반대하는 동시에 혁명적 패배주의 입장을 취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100년 전 붕괴하는 러시아 제국에서처럼 사회 혁명이 과연 가능한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단체는 창립 초기부터 강제 징병제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국제주의를 호소하며, 우크라이나 국가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하지 않았다."[26]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 밖의 구소련 국가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이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흐름은 ‘친서방’ 노선도 ‘친러’ 노선도 구소련 국가의 노동자민중들에게 자유와 빵과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진지한 물음의 반영일 것이다.
이미 여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노동자민중들이 목숨을 걸고 용기를 내 전쟁에 반대했고, 그 결과로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다. 아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행위에 맞선 투쟁이 대중적으로 폭발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 방향이 틀렸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노동자민중이 쇼비니즘 이데올로기에 짓눌리고 탄압받고 있는 상황은, 이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고, 직접적인 탄압에서 좀 더 자유로운 전 세계 각 국의 노동자들이 더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함을 의미한다.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한 한국 사회주의자의 일차적 과제
한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에 지속적으로 155mm 포탄 60만 발을 보내며 간접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해왔다. WP는 2023년 12월 “한국이 미국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보낸 포탄이 모든 유럽 국가의 공급량을 합한 것보다 많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북조선은 지난 2025년 4월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에 군대를 파병했음을 공식 승인했다. 북한이 2024년 한 해에만 포탄 900만 발을 공급했다는 보도도 있다.[27] 러우전쟁을 통해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보내진 탄약과 군인이 서로 맞붙고 있는 셈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고조로 강화되었고 앞으로도 강화될 미중패권대결은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긴장을 끊임없이 고조시키고 있고, 이것이 열전으로 비화한다면 한반도에서의 대리전으로 나타날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한국의 우크라이나 군사개입을 중단시키고, 북한의 전쟁개입 중단을 요구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노동자민중과의 연대일 뿐 아니라 한반도에 닥칠 전쟁을 막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갈 길은 아직 요원하다. 이재명이 8월 25일 트럼프를 만나 MAGA가 적힌 모자와 MASGA딜[28]을 상징하는 거북선을 선물하는 등 엄청난 아부를 하고 돌아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피스메이커를 하면 저는 페이스메이커로 열심히 지원하겠다”, “미리 일본과 만나서 대통령께서 걱정하는 (위안부) 문제를 다 정리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인 입장을 더는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국방비를 늘리겠다.” 이재명이 한미 정상회담 기간 중 한 발언들이다.
정상회담의 모든 의제는 제국주의 열강투쟁에 관한 것이었고, 이재명은 모든 대목에서 ‘한국은 미국의 동맹’임을 호소했다. 이로써 이재명은 자신에 대한 ‘오해’, 즉 친중·친북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불식시켰고, “함께 갑시다”라는 주한미군 슬로건까지 인용하며 미국의 하위 파트너로서의 한국을 강조했다. 이에 더해 한국 자본가들은 대미 추가 투자 1,500억 달러를 약속하며 패권 유지를 위해 제조업 부흥을 꾀하는 트럼프를 기쁘게 했다. 물론 이는, 한국이 이미 약속한 대미 투자 3,500억 달러와 마찬가지로 국책금융기관 대출과 지급보증으로 충당될 것으로 예상되어 한국 자본가들에게도 손해가 아니다.
미국에게 이번 회담은, 열강투쟁 격화 속에서 ‘한국은 누구 편인가’를 묻는 자리였다. 그리고 미국은, 이재명 정부 국정과제에 담긴 ‘국익 중심 실용외교’는 그저 수사일뿐, 한국은 확실한 미국편임을 확인했다. 이에 중국은 한미 정상회담 이후 즉각 경고했다. “한국이 반도체, 공급망, 대만해협, 남중국해 등 중국의 핵심 이익과 관련해 미국의 명령을 따른다면 자국 운명을 위험한 수레에 묶는 것과 다름없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핵을 영원히 내려놓지 않으려는 우리의 입장은 절대불변”, “우리의 핵정책이 바뀌자면 세상이 변해야 하고 조선반도의 정치군사적 환경이 변해야 한다.”
이런 이재명의 외교행보가 ‘현명’하다며 치켜세우는 목소리가 많다.[29] 그러나 이재명이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수장으로서 아무리 현명한 처세술을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이 자본주의란 체스판의 규칙 아래 현명한 선택을 한 것에 불과하다. 이 게임은 한 턴이 지날 때마다 제국주의 패권대결의 논리를 따라 더 큰 전쟁과 위기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게임을 멀찍이 지켜볼 수 있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죽음과 비극을 눈앞에서 지켜봐야하는 체스판 위의 말이다. 이 체스판을 뒤집지 않고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이재명 정부의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에 맞선 투쟁으로부터 출발하자. 올바른 관점을 분명히 세우고, 노동자 국제연대를 전방위적으로 확대해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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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enin, 1917.06.15., The Ukraine, Pravda No.82.,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jun/28.htm
[2] 통일시대, 2022, 「푸틴대통령의 2월 21일 연설 전문」, https://www.tongil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703
[3] 배진영, 2018, 「평화만을 추구하다 전쟁 불러들인 네빌 체임벌린」, 월간조선, 2018년 6월,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806100042
[4] 구로카와 유지, 2022, 유럽 최후의 대국 - 우크라이나의 역사, 안선주 역, 2022, 글항아리, 제7장
[5] 같은 책.
[6] 같은 책.
[7] 같은 책, 8장.
[8] Philippe Alcoy & Sasha Yaropolskaya, 2024, “There Is No Enthusiasm in Ukraine”: Interview with Volodymyr Ishchenko,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there-is-no-enthusiasm-in-ukraine-interview-with-volodymyr-ishchenko/
[9] Nathaniel Flakin, 2022, Reading Rosa Luxemburg’s ‘Junius Pamphlet’ in Times of War,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reading-rosa-luxemburgs-junius-pamphlet-in-times-of-war/
[10] Josefina L. Martínez and Diego Lotito, 2022, NATO and Imperialist Military Expansionism, Left Voice, Originally published in Spanish on May 21, 2022 in Ideas de Izquierda., Translated by B.C. Daurelle, https://www.leftvoice.org/nato-and-imperialist-military-expansionism/
[11] Claudia Ferri, 2022, Three Interventions That Show NATO’s Imperialist Role, Left Voice, First published on March 1 in Spanish in La Izquierda Diario., https://www.leftvoice.org/three-interventions-that-show-natos-imperialist-role/
[12] Julian Bergmann, 2025, Opinion: Amid US fallout, time for the EU to step up assistance to Ukraine, Devex, https://www.devex.com/news/opinion-amid-us-fallout-time-for-the-eu-to-step-up-assistance-to-ukraine-109458
[13] 아나스타샤 자누다, 2025, 「우크라이나 경제는 앞으로도 전쟁을 감당할 수 있을까?」, BBC 코리아, https://www.bbc.com/korean/articles/cp9x9eeyxxyo
[14] 국제노동자연맹 제4인터내셔널(LIT-CI)은 모레노-트로츠키주의 조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나토의 무기지원을 지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5] Nathaniel Flakin, 2023, Ukraine Is Not Vietnam,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ukraine-is-not-vietnam/
[16] 2024년 나토 방위비 분담금의 평균은 GDP의 2.2%이다.
[17] UALosses 프로젝트는 사상자를 이름별로 기록했고, 이에 따라 2025년 8월 7일 기준으로 우크라이나군 전사자 73,920명과 실종자 75,253명을 집계했다.
[18] BBC News Russian과 Mediazona에 따르면 사망자 수는 2025년 8월 초 기준 189,051명에서 273,073명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19] Marius Rautenberg, 2022, Belarus Rail Workers Sabotage Russia’s Attack on Ukraine: Building an Independent Position on the War, Left Voice, First published in German on April 4 in Klasse Gegen Klasse, https://www.leftvoice.org/belarus-rail-workers-sabotage-russias-attack-on-ukraine-how-an-independent-position-on-the-war-can-be-built/
[20] Simon Zinnstein, 2022, Greek Railroad Workers Block Delivery of U.S. Tanks to Ukraine, Left Voice, First published in German on April 3 in Klasse Gegen Klasse, https://www.leftvoice.org/greek-railroad-workers-block-delivery-of-u-s-tanks-to-ukraine/
[21] Sasha Yaropolskaya, 2025, Sasha Yaropolskaya: “The Only Possible Response to the War in Ukraine Is Internationalist”,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sasha-yaropolskaya-the-only-possible-response-to-the-war-in-ukraine-is-internationalist/
[22] Philippe Alcoy & Sasha Yaropolskaya, 2024, “There Is No Enthusiasm in Ukraine”: Interview with Volodymyr Ishchenko,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there-is-no-enthusiasm-in-ukraine-interview-with-volodymyr-ishchenko/
[23] 같은 기사.
[24] “‘승리할 때까지 계속 싸워야 한다’는 여론은 눈에 띄게 줄었다. 2022년에는 73%에 달했던 결사항전 여론이 2023년 63%, 작년 38%로 줄었고, 올해는 24%까지 떨어졌다.”, 이영경, 2025, 「전쟁에 지친 우크라 “결사항전보다 종전”···결사항전 여론 73→24%」,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article/202508072004001
[25]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스탈린주의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용어인데, 여기서 이셴코가 언급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소련에 살아본 경험이 없지만, 그 유산인 자신의 나라(러시아, 벨라루스, 중앙아시아 등)에서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돌아본다는 점에서 정통 스탈린주의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어보인다. 다만 그 비판의 근거를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 자장에서 벗어났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고, 중국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마오주의를 차용하는 중국의 젊은 마오주의자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26] 같은 기사.
[27] 박현주, 2025, 「“북한이 포탄 900만발 보내자…러시아는 판치르 넘겨줬다”」,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40069
[28]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의 줄임말로, 한국 정부가 미국과의 통상 협상 과정에서 제안한 전략적 협력 구상이다.
[29] 심지어 조선일보조차 “불협화음 없이 무난하게 첫 단추를 잘 꿴 셈”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