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매일 삼성전자의 위기를 다루고 있다. 이 위기에 대한 분석도 넘쳐난다. ‘고대역폭메모리(HBM)’ 투자 소홀, 기술개발보다 재무관리에 치중한 경영진의 전략 실패, 경직된 조직구조, 중국 기업의 추격이 많이 거론된다. 이런 결과에 노동자들의 책임은 없지만 삼성은 노동자들의 크나큰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 30% 희망퇴직, 발광다이오드 LED 사업 철수, 삼성SDI 편광필름사업 매각 입장이 발표됐다. 삼성은 호주·남미·싱가포르 등 전 세계 글로벌 자회사의 영업·마케팅 직원 약 15%와 행정 직원 최대 30%를 감축할 방침인데 해외 언론은 이미 인도와 남미 일부에서 10% 수준의 감원 작업을 마쳤다고 보도했다.
한국 자본주의에서 삼성이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할 때 삼성의 추락은 한국 자본주의의 추락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될 것이다. 이 추락을 막기 위해 삼성만이 아니라 정부도 자본을 최대한 지원하고 노동자들의 저항을 억누를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해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자본의 전략에서 결정적 변수는 노동자들의 저항이다. 거대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저항은 수많은 부품사,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넘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얼마 전 강력한 파업투쟁을 펼쳤던 인도 첸나이 삼성전자 공장의 노동자들은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파업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이제 당당하게 삼성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역할을 얘기할 수 있다. 저들의 의도대로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할 수 있다. 올해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의 24일 총파업으로 노동자들의 막강한 힘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용수철처럼 솟구쳐 오른 투쟁
전삼노는 △전 조합원 노조 창립휴가 1일 보장 △전 조합원 베이스 업(Base-UP) 3.5% 인상 △성과급(OPI·TAI) 제도 개선 △무임금 파업으로 발생된 모든 조합원 경제 손실 보상을 요구하며 투쟁을 전개했다.
오랫동안 삼성과 싸워 온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이종란 상임활동가는 “용수철처럼 솟구쳐 오른 투쟁”이라고 했다. 명실상부하게 투쟁할 수 있는 노조가 생기면서 황유미(삼성 반도체 백혈병으로 2007년 사망)씨의 아버님 황상기 씨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도 했다. 황상기씨는 “삼성에 노조가 있었으면 유미는 병에 걸리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전삼노를 비롯한 5개 노조의 쟁의행위 찬반투표 찬성률은 97.5%였다. 쟁의행위 찬반투표 때 전삼노의 조합원 수는 1만 8천 명 정도였는데 파업을 거치며 3만 6천 명으로 늘었다. 파업 초기엔 하루에 500명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6천 명 이상의 조합원이 파업에 참여했다. 조합원들이 자신의 얼굴이 드러나는 걸 두려워할까봐 노조가 투쟁 초반에 가면을 준비하기도 했는데 가면을 쓰고 활동하던 조합원은 투쟁 발언 중 가면을 던지며 떳떳하게 공개했다. 이 장면은 조합원들의 변화를 상징했다. 노동조합은 평택, 기흥, 화성, 온양, 천안 사업장에서 노조 가입 홍보활동을 펼쳤다. 100~200명의 조합원이 참여해 “동료야 나와라! 동료야 함께하자! 우리가 지켜줄게!”라는 구호를 외치며 비조합원들을 적극 조직했다. 공장 순회 선동은 비조합원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다.
사진_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제공
투쟁이 용수철처럼 솟구쳐 오른 이유는 불만과 분노는 켜켜이 쌓여 왔는데 그걸 표출하고 해결할 통로와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렇게 솟구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삼성은 3월만 해도 노조와의 임금교섭을 사실상 거부하고 노사협의회에서 임금인상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노동조합의 힘을 아주 얕봤다. 노동조합 지도부도 현장의 힘을 확신하지는 못했다. 6월 27일 지도부가 '휴가 의무사용일수 2일 축소, 재직자 기준 1회성 여가포인트 50만 원' 등의 내용이 담긴 사후조정안으로 타결을 생각했을 때, 조합원들은 투쟁 지속을 강력히 원했다. 70% 이상이 타결을 반대했다. 아래로부터의 분노가 파업을 지속시키고 확대시켰다.
수시로 위기를 거론하는 임원진들은 계속 자기 배를 불렸다. 2023년 임원진이 수령한 성과급은 3,880억이나 된다. 반면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디바이스 솔루션(DS) 부문 노동자들은 올해 성과급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OPI(옛 PS)는 1년에 한 번 지급하는 성과급으로, 삼성전자의 성과급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삼성은 이 성과급을 30% 혹은 50%로 가정하고 연봉을 설정한다. 기본급 비중이 높지 않은 임금 구조에서 성과급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상의 임금 삭감이다.
위기를 불러온 장본인들은 성과를 독식했다. 그들은 노동자들에게는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강요했다. 이게 과연 공정이고 혁신인가? 노동자들의 자연스러운 외침이었다.
열악한 현장의 현실이 드러나다
노동자들의 분노는 임금 문제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무시하는 자본의 일방적 행태에 분노했다. 삼성 자본은 줄곧 노사협의회를 방패 삼아 현장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요구를 무시했다. 무노조경영 폐기는 말뿐이었다. 열악한 노동조건은 계속 은폐됐다.
삼성 현장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삼성의 기술은 21세기인데 현장은 19세기”라는 말을 많이 해왔다. 관리자들은 성과 경쟁을 앞세우며 노동자들을 줄 세웠다. 많은 삼성전자 노동자가 과도한 성과압박감 때문에 자신의 작업속도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응답했다.
(금속노조/전국삼성전자노조 발행. 반올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공동 연구)
2024.3. 삼성-전자계열사 노동안전보건실태조사보고서
노동자들은 인원 부족과 높은 노동강도에 시달렸다. 특히 기흥사업장 여성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부각됐다. 기흥사업장 6, 7, 8라인은 자동화가 되지 않은 수작업 반도체 생산 라인인데 여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퇴행성 관절염, 신우신염, 손가락 류마티스 관절염, 손목터널증후군, 하지정맥류 등의 증상을 겪고 있다. 여성노동자들은 기형이 된 손가락 모습을 보여줬다.
연차휴가도 가위바위보나 사다리 게임으로 정하고 있다. 마음 편히 밥을 먹기도 어렵고 화장실 가기도 어렵다. 한 노동자는 방광염을 심하게 앓은 뒤 출근 전에는 물도 마시지 않고 커피도 입에 대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이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에 적극 참가했다. 파업 첫날인 7월 8일 기흥사업장 8인치 라인의 가동률은 기존 80%에서 18%로 떨어졌다.
사진_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제공
물론 이런 열악한 현실은 극히 일부만 드러났을 뿐이다. 자동화가 많이 진척되었지만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다. 설비 자동화는 설비유지보수 노동의 증가로 이어지는데 유지보수나 고장수리를 할 때 화학물질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설비유지보수 업무 대부분이 설비업체(유지보수 담당 사내협력업체, 장비업체)에 외주화되어 있다.
이들도 저항의 기회를 찾고 있다. 지난 8월 7일에는 삼성전자 반도체라인 세정업무를 하는 도급업체 이앤에스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어 금속노조 경기지부에 가입했다. 인터넷에서도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장에서 제품생산 할 수 있는 장비를 설치하고 배관라인 설치하는 일용직 배관사들과 용접사들 없이 반도체가 생산되나요? 협력사 일용직들 개무시하고 갑질하는 관계자들 그들의 존재 자체도 인식 못하는 언론인들과 일반 국민들. 일용직 기술인들도 있기에 반도체가 생산되는 겁니다. 보안과 안전이라는 이유로 현장에서 불합리한 대우와 처우를 받는 일용직 기술인들도 있다는 사실을 아셨으면 좋겠네요.” (「삼성전자 왜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나요?」, IT버시티] 기사에 달린 댓글)
지지를 확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
보수 언론은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파업을 맹렬히 비난했다. <반도체 겨우 살아났는데… 삼성전자 노조 쟁의 '몽니'>(파이낸셜뉴스), <억대 연봉 삼성 노조 “月 10만원 더달라”>(매일경제), <노조 파업 선언 그 뒤엔 확장 노린 민노총>(한국경제) 등 매일 투쟁을 비난했다. 하루에 200개 이상의 기사가 쏟아지기도 했다.
보수 언론의 탓도 있었겠지만,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파업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큰 지지를 불러일으키지 못한 더 큰 이유는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요구가 아직 자신들만의 요구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이 세계적인 독점 대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삼성 정규직 노동자들은 평범한 노동자들이 꿈꿀 수 없는 만큼의 임금(성과급 포함)을 받아왔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을 보장받아 왔다. 그런데 삼성 자본의 성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하청, 부품사 노동자들을 초과착취한 결과물이다. 전삼노의 요구가 자신들의 임금인상, 성과 보상, 노동조건 개선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의 요구로까지 뻗어나가야 삼성전자 밖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획득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더 열악한 노동자들에게 손을 내밀 때
최근 삼성은 방사능 피폭 사고를 당한 노동자들에게 '부상'이 아닌 '질병'을 얻은 거라고 우겨댔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중대재해 규정 적용을 피해가기 위해서다. 지난 6월 발생한 화학물질 노출사고에 대해서도 작업자 부주의로 보고한 사실이 드러났다. 삼성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바뀐 게 없다. 지난 투쟁에서 노동자들이 내걸었던 요구 역시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단체협약, 임금협상도 중요하지만, 구조조정 대응도 미룰 수 없다. LED 사업부 철수, 삼성SDI 편광필림 매각, 반도체 DS 부분 희망퇴직은 끝없는 구조조정의 서막이다.
지난 7월 31일 교섭 결렬 이후 10월 중순부터 단체협약과 2023, 2024년 임금교섭이 다시 시작됐다. 총파업에도 물러서지 않았던 자본이다. 교섭장에서 교섭위원들이 압박한다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할 리는 전혀 없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더 많이 폭로하는 것, 성실 교섭을 촉구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론 상황을 절대 바꿀 수 없다. 지난 투쟁의 교훈은 더 굳센 투쟁, 더 폭넓은 연대를 만들어야 삼성전자 노동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수 언론과 경영진은 회사의 위기를 이유로 투쟁을 아예 하지 말라고 압박할 것이 분명한데, 회사의 위기를 이유로 투쟁을 멈춘다면 그동안 폭발했던 조합원의 열기가 차갑게 식을 수 있다. 기흥공장 8라인에서 드러났듯 노동자들은 현장을 멈춰 세울 강력한 힘이 있다. 그 힘에 주목하자.
지금이야말로 노조가 구조조정 앞에 떨고 있는 수많은 조합원, 비조합원, 계열사 노동자들에게 손을 적극 내밀어야 할 때다. 정규직보다 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손을 내밀어야 할 때다. 그들의 구심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규직들이 집단행동의 계기를 찾았을 때 폭발적인 힘을 보여주었듯 하청, 비정규직들도 집단행동의 계기를 찾을 수 있다면 그동안의 설움과 분노를 끝내기 위해 폭발적으로 떨쳐 나설 것이다.
삼성전자노조가 아리셀 참사 투쟁과 기후정의행진에 결합했을 때, 삼성전자노조는 다른 노동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렇게 사회적 투쟁에 나서고, 나아가 노동자 생존권을 말살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와의 투쟁에도 나서야 고립되지 않고 자신의 투쟁을 확대할 수 있다.
물론 이 위대한 도약은 단시간에 이루어질 수 없다. 저절로 이루어질 수도 없다. 노사협조주의적 태도, 우유부단한 태도로는 결코 이 도약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지난 투쟁에서 보여준 현장의 역동적인 힘을 믿고 투쟁을 밀어붙이려는 뚝심 있는 노동자들과 투사들만이 해낼 수 있다.
어렵고 힘든 길이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다. 민주노조운동의 역사가 보여주듯 계급적 투쟁과 노동자계급의 연대를 향해 전진하지 않고서는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의 전환, 구조조정 저지, 노동조건 개선은 이룰 수 없다. 삼성 노동자들이 자신의 의지를 최대한 끌어올려 진정한 희망을 일구어가길 기대하면서 연대를 향해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