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벌을 만나다#1] ‘경계에 애매하게 선 사람’을 어떻게 포용할지 고민하는 사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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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말벌을 만나다#1] ‘경계에 애매하게 선 사람’을 어떻게 포용할지 고민하는 사람, 진다

  • 양동민
  • 등록 2025.05.28 13:39
  • 조회수 278

12.3 내란 이후,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는 많은 말벌동지들을 만났다. 4월 4일 윤석열이 파면된 뒤에도 많은 ‘말벌동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때로 노동조합원이 되기도 하고, 때로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기도 하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왔을까? 그 전에 이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 이들은 왜 광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같은 대오에 섰을까? 대선 시기에 들어서며, 광장에서 우리가 외쳤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그 어느때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중집에서 민주당 지지안건 통과를 시도했고, 이미 전현직 간부와 단위노조의 민주당 지지가 줄지어 벌어지고 있다. 민주노총을 믿고 투쟁했던 말벌 동지들은 이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지금도 고공투쟁중인 3개의 투쟁사업장을 비롯해 여러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고 있는 말벌동지들 중 몇 명의 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필자가 첫번째로 이야기를 나눈 ‘진다’ 동지와 처음 인연이 닿은 것은 A학교 성폭력 사안 해결과 부당해임 철회를 요구하는 지혜복 동지가 다른 22명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시교육청에 의해 강제연행된 2월 28일 이후였다. 그 뒤 3월 7일 윤석열이 구속취소되었고, 옵티칼하이테크지회, 세종호텔지부, 거통고조선하청지회, A학교 공대위 등 단위들이 함께 광화문에 ‘투쟁사업장 농성장’을 차렸다. 진다동지는 광화문 농성장에 매일 함께했다. 이후 대선시기 고공3주체 문제 즉각해결과 노동자의 요구를 확대하기 위한 ‘우리 삶을 바꾸는 노동자 공동행동’ 기획단에도 함께 참여하였고, 울산 이수기업의 2차 천막투쟁 때는 구사대의 폭력에 함께 싸우기도 했다. 5월 16일, 세종호텔 농성장 인근에서 진다동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8일, 3개의 고공투쟁사업장이 함께 국회를 향해 행진했다. 진다동지는 실시간으로 트위터에 소식을 퍼나르기 위해 쉴 새 없이 휴대폰을 만지며 행진을 함께했다.)

 

Q1. 12·3 내란사태 이전에도 사회의제나 활동에 관심이 있으셨다면, 주로 어느 방면에서였나요? 집회에 참여해본 적이 있으셨나요? 혹은 아예 없으셨나요? 처음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오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제가 나이가 어렸으면 이번이 처음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아요. 저는 박근혜 탄핵국면 때도 매주 집회 나왔어요. 그때 연극 뮤지컬 매니아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실 퀴어 정체성을 가지면 어떤 운동이랑 무관하게 살 수가 없어요.

 

지금도 문화제 할 때도 문화제에 오는 모든 사람을 알진 못하잖아요. 예를 들어 A학교 공대위 집회 할 때도 제 친구들이 자주 오는데 친구들은  되게 조용히 다녀요. 저 역시 그런 포지션으로 오래 있었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행사가 있으면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는.

 

연극 뮤지컬 쪽에서는 생각보다 요란하게 다녔어요. 그쪽이 판이 작아서도 있지만, 연극뮤지컬계에 성폭력 가해자가 들어온다든지, 미투가 터진다든지 사건들이 많았으니까. 그럴 때 좀 더 목소리를 많이 내는 편이었죠.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이렇게 많은 시간을 쓰진 않았던 거 같아요.

 

조용하지만 계속 어딘가에 나오게 되는 이유가 뭐였어요?

 

열 받아서? 저는 얽히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에요. 생각이 너무 많고, 겁도 많은데, 열 받으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 같아요.

 

연극 뮤지컬 쪽에서 모짜르트라는 극으로 엠씨더맥스 이수가 복귀를 한다는 게 있었어요. 엠씨더맥스 이수가 미성년자 성매매로 존스쿨(성범죄자 재범방지 교육)을 받았거든요. 계속 방송에 못 나오는데 연극 뮤지컬은 좀 턱이 낮으니까 그쪽으로 넘어온다는 거죠. 그때 동네에 미성년자 감금 성매매 사건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동네에서 하교하는 학생들 지킨다고 ‘아버지회’도 만들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그만큼 심각했던 사건이었다는거죠.

 

이수가 얽혔던 사건도 미성년자 감금 성매매가 연관되어 있었는데, 버젓이 뮤지컬 쪽으로 복귀한다고 그러니까 열이 받아서 이수가 복귀하기 전까지의 기사를 쫙 다 정리해서 포스팅을 올렸고, 그게 엄청 리트윗을 탄 적이 있어요. 열 받으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불합리하다고 생각되고 열받는 일이 있으면 뭐라도 해야하는군요

 

‘다 그러지 않나’라고 생각했는데, 다 그러진 않은 것 같더라고요. 근데 그래도 너무 많이는 얽히지 않으려 그래요. 지금 이렇게 얽혀버리고서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웃음) 왜냐하면 제가 감당 안 될 걸 아니까요. 감당 안 될 걸 아는데 너무 섣불리 뛰어드는 것도 좀 위험하다고 늘 생각해요. 그래서 선은 좀 지키려고 하죠. 근데 중간에서 얘길 듣다보면 선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고요.

 

12.3 내란 후 광장에는 언제 처음 나왔나요?

 

저 12.3 다음 날부터 나왔어요. 그 전에 이미 박근혜 탄핵국면을 경험했으니까 좀 더 쉽게 나왔죠. 나오는 게 맞다고 생각을 했고, 그냥 별 생각 안 했던 것 같아요. 차별금지법도 통과가 안 된 것도 있고, 여성문제도 통과 안 된 게 너무 많았었고, 해결이 안 된 게 너무 많았어요. 저는 퀴어랑 여성 쪽 집회에 조용하지만 꾸준히 다녔으니까 그건 알았죠.

처음에 저는 응원봉을 들었어요. 내란 다음 날, 누가 응원봉을 들고 나왔는데 그걸로 욕을 트위터 안에서 엄청 먹었어요. 지금은 응원봉 하면 박수받고 그러지만, 처음에는 안그랬어요. 팬들 사이에선 “왜 이 가수 상징에 정치색을 묻히냐”는 식의 얘기가 나왔죠. 팬이 아닌 사람들도 욕했어요. 아이돌 팬들은 욕을 그냥 많이 먹어요. 어린 여자아이들이 많다고 생각하니까 욕을 많이 하는 거죠.

 

그런 사람들까지 달라붙어서 욕을 진짜 많이 먹고 있던 와중에, 제가 속한 팬덤의 익명 커뮤니티에서 어떤 분이 ‘응원봉에 ‘파면’ 글자를 붙여서 나오면 좋겠다’ 라고 아이디어를 냈어요. 그리고 그날 제가 ‘백분토론’을 보다가 열 받아서 손으로 ‘파면’ 글자를 잘라서 응원봉에 붙이고 국회에 나갔죠. 근데 그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찍혀서, 이제 제가 욕을 먹는 신세가 됐죠.(웃음)

 

(당시 진다동지가 손수 제작한 응원봉)

 

그런데 반응이 약간 상반되긴 했어요. 욕을 왕창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다른 한편으론 응원봉에 ‘파면’이란 글자를 자기도 약간 붙이고 나오고 싶은 분들도 있는 거예요. ‘한 사람이라도 더 붙이고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다음 집회에는 여러 장을 뽑아서 응원봉 들고 있는 사람들한테 나눠준 적도 있었어요.

 

왜 응원봉을 들고 갔어요?

 

박근혜 탄핵정국 때도, 제 옆에는 응원봉 부대가 늘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박근혜 탄핵 때 여자들 안 나왔다고 누가 얘기하면 열받는다니까요.(웃음) 그 당시에는 연극, 뮤지컬 매니아로 나갔는데, 연극, 뮤지컬 매니아들은 깃발을 들고 나갔어요. 주로 레미제라블을 부르면서 연뮤덕 깃발 아래에 항상 있었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여자로 패싱되는 집단은 광장에 늘 있었죠.

 

물론 지금처럼 이렇게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늘 거기에 있었다는 걸 아니까 이번에도 응원봉 들고 나오는 게 당연했던 거죠. 박근혜 때는 내가 좋아했던 게 연극, 뮤지컬이었고,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게 아이돌이니까. ‘응원봉 들고 나간다고 문제가 되나’라고 생각했죠.

 

이후에 다행히 ‘탄핵’이란 글자를 붙이는 게 트렌드처럼 돼서 좋은 방향으로 간 거지, 앞에 얘기한 것처럼 초반에는 응원봉 들었다고 엄청 욕을 먹었어요. 저도 당사자니까, 트위터에 계속 인용으로 욕 먹고 있는 걸 실시간으로 자꾸 보게 되죠. 근데 욕 먹고 있으니까 더 악착같이 들고 나가게 되는거죠.

 

그 이후 1월 한강진 투쟁 때는, “응원봉에 퀴어를 묻혔다” 해서 또 욕을 먹었어요. 당시에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 집회에서 응원봉을 웹포스터에 썼는데요. 그에 대해 ‘퀴어를 묻히지 마라’는 식으로 얘기가 많이 돌았어요. 남태령 투쟁 이후 전농에서 무지개떡 돌린 것 가지고도 욕이 많이 올라왔었죠.

 

저에겐 지금 쓰는 진다라는 계정 외에 다른 계정이 하나 더 있는데, 그 계정을 그때 팠어요. 새 계정을 판 이유는 딱 하나였어요. 제 본 계정에는 올릴 수 없는 얘기지만, “화제가 됐던 그 응원봉 사진의 주인공이, 나다,  그러니까 퀴어인 나다”는 애기를 한 번쯤 하고 싶었거든요.

 

12월 21일 남태령에는 어떻게 가게 됐어요?

 

친구랑 그날 비상행동 집회 끝나고, 뒷풀이로 저녁을 먹으러 갔어요. 그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몰려갔으니 당연히 트랙터가 넘어갔을거라고 생각하고 뒷풀이를 갔었거든요. 그런데 트위터를 딱 켰는데, 여전히 트랙터가 막혀서 거기서 집회를 하고 있다는거에요. 그래서 친구랑 같이 남태령으로 갔죠. 막차까지 있을 생각이었는데 트랙터가 계속 빠지지 않으니까, 엄마한테 전화해서 “남태령인데 아침에 들어갈 것 같아.”라 하고.

 

그날 운 좋게 담요부터 해서 짐을 진짜 바리바리 싸들고 갔어요. 제가 집회를 다니면서 어린이들에게 뭘 나눠주는 걸 되게 좋아했는데요. ‘캐치티니핑 비타민c 영양제’가 한 줄에 천원씩 하거든요. 그걸 매번 큰 집회마다 5천원씩 사가지고 가서 나눠주곤 했어요. 그날도 광화문에서 나눠주려고 샀는데, 그날따라 날이 추워 어린이들이 안보여 티니핑 영양제가 많이 남았는데, 그걸 남태령에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다녔어요. 그때는 발언이나 다른 걸 할 생각은 전혀 못했어요. 너무 추우니까 앉아서 계속 핫팩을 붙잡고, “이거 이상한 거 아닙니다. 어린이 영양제입니다.”라며 사람들한테 티니핑만 나눠줬죠.

 

이전에는 여성과 퀴어 집회에 조용히 참여해왔다고 했잖아요. 근데 트랙터 상경투쟁은 농민들의 시위였잖아요. 그런데도 왜 가겠다고, 또 밤을 새서 있겠다고 생각을 한 건가요?

 

그런데 솔직히 얘기하면, 퀴어나 여성 의제도 제가 갔던 집회가 당장 제가 처한 어려움은 아니었어요. 제 정체성과 연관돼있으니 좀 더 관심을 가졌던 거지만요. 불법촬영을 규탄하는 집회에도 갔지만, 그렇다고 제가 직접적인 불법촬영 폭력에 크게 노출된 적이 있었던 건 아니고, 제가 퀴어로서 열 받아 하는 지점들은 보통 제 친구가 겪은 것이지 제가 직접적으로 겪은 건 많지 않아요. 그럼에도 집회에 나가는 거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나갔던 거라고 생각해요. 분류가 필요하니 여성과 퀴어 문제에 대한 집회에 나갔다고 했지만, 그거 말고도 큰 규모의 다른 집회도 나가곤 했었으니까요.

 

투쟁하는 노동자들하고 만난 건 언제가 처음이었어요?

 

12월인지 1월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겨울에 세종호텔 문화제 할 때요. 처음에는 조용히 앉아만 있다왔어요. 그때 전병철 동지가 사진을 찍는 걸 보고, 저도 카메라가 있으니까 사진을 찍어서 트위터에 올렸어요. 보통 문화제에 온 사람은 많은데 사진은 많이 안 올라오더라고요. 그래서 사진을 올리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날 집회 발언을 들으며, ‘잘 해결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느꼈어요. 그 때만해도 세종호텔 목요문화제에선 발언자가 다양했던 거 같아요. 세종호텔 집회에 참여한 경험에 대해서 발언을 하는 분, 뭐 학생인 경우도 있고 어떤 뭐 다른 이슈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서 좀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연대자들이 슬슬 오기 시작할 때였으니 발언이 더 다양했잖아요.

(진다동지가 처음 세종호텔 문화제에 참여해서 찍었던 사진)

 

그래서 지금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는 건, 연대자 발언이 많이 늘어나긴 했는데 연대자로서의 발언만 많이 늘어난 것 같아요. 본인 얘기는 이미 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저는 반대로 연대자적인 발언을 많이 했다가 되려 제 직업이나 이런 것들을 얘기하게 됐거든요.

 

그때 당시에는 세종호텔 문화제의 발언들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어요. 직업적인 특성상 이야기를 모으는 습성도 있기 때문에 더 자주 가게 됐어요. 그러고 트위터에 제가 올린 글을 글우 동지가 보고 연락을 해가지고 자기 생일 파티를 거기서 하고 싶다는 거에요. 그러더니 고진수동지 고공에 올라가고 부터는 세종호텔에서 맨날 지내더라고요.

 

(세종호텔 고진수 동지가 고공농성을 시작할 때 진다동지도 라이브를 시청하고 있었다)

 

Q2.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오고 난 후로 스스로 가장 변화했다고 느끼신 지점은 어떤 것이었나요? 혹시 그것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정치적 입장과도 연관이 있다면, 조금만 더 자세히 들려주세요.

 

사람을 너무 많이 알게 됐어요. 사실 이렇게까지 깊게 관여하지 않았으면, 지금 가볍게 와서, 가볍게 힘내라고 하고, 갔을텐데. 어쩌다가 깊게 얽히게 됐고, 얽히다 보니까 외부 사람이 볼 때 답답한 부분을 마주하게 되니까 가만히 못있겠더라고요.

 

저는 옛날에는 애매하게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왜 온전히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애매한 거리를 계속 유지를 할까. 그런데 요즘에는 그 애매하게 선 사람이 안으로 안 들어간 게 문제가 아니라, 이 애매하게 서있는 사람들을 안으로 품지 못한게 문제가 아닌가? 우리의 동지라는 범위가, “이 사람이 왜 이만큼까지 안 오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만큼을 품어와야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끔 해요.

 

나는 더 많은 사람이 모이려면 바깥쪽으로 좀 더 얘기가 됐으면 좋겠는데, 막상 안에 들어왔을 때, 조직적인 결합도 너무너무 중요한데요. 그런데 내부적인 결합과 바깥쪽으로 얘기되는 것 두 개가 공존이 안 되는 느낌을 받을 때 좀 답답함을 느껴요.

 

그래서 바깥에도 사람들이 있다는 걸 계속 상기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우리가 깊게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 친한 사람들이 당연히 더 잘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투쟁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것은, 애매하게 서 있는 사람들이 그 현장에 왔기 때문에 많이 모인 거잖아요.

 

(고진수 동지가 고공농성을 시작한 뒤) 비상행동 집회 끝나고 고진수 동지가 있는 데까지 행진해서 온 사람들이 엄청 많았잖아요. 근데 그 사람들이 매일 지금까지 있냐고 하면 그건 아니잖아요. 비상행동 집회라는 자체가 애매하게 서 있는 사람들, 내가 이 사람에 대해서 잘 모르고 이 문제에 대해서 잘 몰라도, 연대하러 온 사람들까지 포함이 됐던거죠. 그 연대가 엄청 큰 영향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이 투쟁이 어떤 방식으로든 마침표가 찍어져야지 알겠지만, 그래도 마침표가 찍혔을 때 그 순간은 굉장히 인상 깊은 순간으로 남겠죠. 비상행동 집회가 끝나고 나서도 다 같이 와서 “고진수 힘내라”를 외쳤던 것, 애매한 사람들이 포용되는 순간이 저는 그때라고 생각해요.

 

 

질문이랑 좀 어긋나긴 하지만, 12월 2일 전에 나는 이런 것에 대해 생각을 안 했었다면, 지금의 나는, 지금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때 되게 중요한 국면이라고 생각이 되고, 그래서 ‘어떻게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이 됐어요.

 

운동에서 그런 역할을 하고 싶으시다는 거군요

 

아니요. 역할을 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를 하고...(웃음) 지금 가장 큰 고민은 ‘내가 이만큼까지 얽혔는데, 나의 생업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요. 모든 사람이 지금쯤은 그런 고민을 할 때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간 벌어놓은 자금이 약간이라도 있으니까 지금처럼 활동하는데,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면, 바빠지면 이만큼 신경을 못 쓸 거고, 그럴 때 너무 죄책감을 가지지 않으려고 생각을 많이 해요.

 

(2025년 3월 25일 전봉준투쟁단 2차 상경투쟁 때 진다동지는 남태령에서 밤을 새며 자리를 지켰다. 노트북을 켜 일을 하며.)

 

Q3. 윤석열 퇴진 광장 속에서도 대안을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서도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좀 더 이끌리시게 된 이유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거통고조선하청지회는, 서울에서 계속 스케쥴이 있어서 거제에 내려가보진 못했어요. 거통고 동지들이 상경투쟁을 오고나서 경비원들이 천막을 침탈하고 하는 걸 라이브로 봤어요. 그 다음에 문화제를 했잖아요. 그때 갔었어요. 옵티칼은 조합원 동지들이 서울에 와서 오픈마이크로 발언을 하는 걸 자주 보면서 관심이 생겼어요.

 

그리고 지혜복 선생님은, 2월 19일에 ‘서울시교육청 안에서 면담투쟁을 하고있다’고 트위터에 올라온 거예요. 그 때 처음 갔어요. 그때 면담을 안 해준다고 해서, 며칠 동안 교육청 안에서 노숙하던 때였는데, 밤을 함께 보내지는 못하고 매일 막차를 타고 집에 갔어요. 그리고 희망텐트가 있던 2월 27일, 지혜복 선생님과 동지들이 연행되기 전날에, 몇몇 동지들 얼굴을 제가 아니까 다음 날 제가 도넛과 떡을 가져오겠다고 했어요. 그날 오전에 풀코스로 찾아서 교육청에 갈 생각이었단 말이에요. 근데 아침에 눈을 뜨니까 (사람들이 연행되면서) 난리나고, 저는 라이브 보고 있고. 그런데 주문한 떡이랑 도넛은 일단 찾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그걸 찾아서 들고 종로경찰서 앞 기자회견을 갔어요.

 

(지혜복, 이학수 즉각석방을 요구하며 3월 1일 성북경찰서 앞에 모였을 때도 진다동지는 휴대폰 팻말을 들고 함께했다.)

 

그렇게 이 동지들을 처음 만나게 되셨군요.

 

네, 그런데 이 질문은 저한테 안 맞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는 연초에 세월호 부스에 계속 있었고, 세월호 부스가 치워지기 전날까지 세월호 부스에서 계속 시간을 보냈거든요. 당시 다양한 부스를 방문하고 결합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노동자 이슈가 끼게 됐다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자꾸 고공에 올라가니까 그러다 보니까...글우동지도 갑자기 세종호텔 호랑이가 돼 있잖아요. 지혜복 선생님 문제도 노동자의 문제 하나로만 설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잖아요. 저는 2월에는 지혜복 선생님에게 연대하러 가는 횟수가 더 많았었어요. 그렇게 다양한 이슈에 결합을 했던건데요. 지금은...제가 왜 이렇게 됐을까요?(웃음)

 

사실 광화문의 비정규직 투쟁사업장 농성장에 제가 오래 있어서 제가 노동자 이슈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있다고 보여졌을 거 같은데요. 처음에 농성장이 차려지고 오픈마이크를 할 때는, 띄엄띄엄 다니곤 했어요. 그러다 평일 낮이나 이런 시간에 갈 때, 농성장이 비거나 운영상의 문제가 생기는 걸 마주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얘기를 안 하려다가, ‘이러면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라고 생각이 들어서 그런 문제들을 얘기하다가, ‘그러면 평일 낮 시간은 내가 프리랜서니까 좀 커버를 같이는 쳐줄 수 있다. 메인으론 못하지만’이라고 얘기를 드렸어요.. 그러다가 내부에 있는 문제들에 관여하게 되면서 오래있게 되고…

 

(진다동지는 거의 매일 광화문 투쟁사업장 농성장 테이블 앞을 지키며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쉬지않고 얘기를 건넸다.)

 

그런데 평일에 남는 시간에 다른 걸 할 수도 있잖아요. 왜 “평일에는 이 농성장에 있어야겠다”라고 생각한거에요?

 

탄핵이 안 됐고 너무 상황이 이상하게 굴러가고 있어서.(*광화문 농성장은 윤석열 구속취소 후 차려졌다) 문제가 심각하게 갈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을 했고요. 거기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때, 여러 서사 때문에 안면도 있었고, 당시에 제게 시간도 있었고. 이 정도의 시간을 쓰는게 그렇게 부담은 아니었었으니까 하지 않았을까요?

엄청 커다란 이유를 갖고 하면 좋은데…나름 커다란 이유긴 했죠. ‘윤석열이 복귀하면 어떻게 될까?’ 라는. 저는 이 농성장에 관심이 끊기지 않기를 바랐어요. 이야길 들으면서 이 문제들이 심각하다고 느꼈고요. 우리가 했던 오픈마이크에 사람들이 엄청 많이 모이진 않았잖아요. 근데 여기에서 나오는 소리들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일단은 그렇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한다고 내 일상이 엄청 크게 피해를 보는 건 아니니까. 농성장에서 평일 낮 시간에 내가 그 정도 시간을 쓴다고 해서 내 삶이 크게 무너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한 거 같아요.

 

Q4. 결국 윤석열이 노동자민중의 이름으로 파면을 선고받았는데요. 윤석열 파면 광장도 일단락되며 퇴진 이후를 향해가는 사회대개혁의 광장이 새로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혹시 개인적으로 평가하시는 윤석열 퇴진 투쟁에서의 가장 아쉬운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혹은 파면 이후 조직된 노동자 운동(민주노총)에 바라는 점 또는 조직된 운동(민주노총)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되는 길이 있으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민주당에 대해서, 여의도에서는 이렇게까지 반감이 없었는데, 광장이 열리고 나서 제가 반감을 가지게 된 이유들이 있었어요.

 

제가 세월호 부스를 했잖아요. 세월호 부스는 민주당 의원들이 굉장히 많이 오는 곳이고. 민주여성 분들도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갖고 오는 부스에요. 저는 그 안에 있었죠. 좀 괴리감이 있었어요. 비정규직 농성장에 오픈마이크를 들으러 앉아있는 나와, 세월호 부스에서 자원활동을 하는 나 사이에 괴리감이 있었죠.

 

나에게 어떤 차이가 있다기보단,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차이가 생기는 게 좀 이상했어요. 나는 똑같은 사람이고, 둘 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둘 다 목소리를 내는데, 비정규직 농성장에 있는 나는 불만스러운 존재가 되고, 세월호부스에 있는 나는 ‘세월호 부스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제가 목소리가 워낙 크니까, ‘세월호 부스에서 서명받을 때 목소리 되게 크게 내던 사람’이라 하면 저인지 알거든요. 근데 그럴 땐 ‘좋은 일에 수고하는 사람’이 되고, 비정규직 농성장에서 제가 소리를 크게 지르면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되는 거에요. 저는 둘 다 똑같이 중요하고, 세월호부스에서는 서명을 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거고 비정규직 농성장에서는 선전물을 최대한 많이 나눠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 했던 것 뿐인데. 그러면서 민주당에 대한 좀 생각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리고 야5당이 사전 집회를 종종 크게 했잖아요. 그렇게까지 정당 목소리를 크게 들어줄 필요가 있었나. 개별 부스들이 많았는데, 그런 다양한 목소리들에게 무대를 주는 걸 사전집회로 하는 게 옳지 않았나란 생각도 있어요.

 

내란 이전에 민주당에 가졌던 생각과, 지금의 생각에 차이가 있어요?

 

정치에 크게 관심은 없었어서요. 먹고살다보면 몇몇 이슈들 빼고는 잘 모를 때가 많아요. 그 전에도 민주당이 ‘나이브하게 군다’라는 생각은 있었지만요. 사실 민주당이랑 민주노총이랑 지금 같은 종류의 문제인 것 같은데, 너무 팬클럽화 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되게 무섭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아이돌 좋아하고, 평생 어떤 동경의 대상이 있긴 했지만, 그 대상에 대한 비판이 없었냐고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저는 배우랑 알고 지낼 때도 배우가 아쉬운 것도 있으면 얘기하는 스타일이고. 근데 그런 비판이 더 활발하게 오가야 하는 집단이 정당이고, 민주노총인데.

 

민주당은 이번 내란으로 인해서 너무 팬클럽화 돼가고 있다고 봐요. 뭐, 국회 담을 넘었을 때 대단하긴 했죠. 쉽지는 않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너무 크게 우상화되면서 광장의 목소리에 호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팬클럽화가 단단하게 된 거 같아요.

 

그 결과가 이재명 대선 공약으로 나타났다고 보는데요. MBC에서 인터뷰를 할 기회가 생겨서 저와 제 지인분이 퀴어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거든요. MBC에서 이 내용이 크게 한번 보도된 적이 있는데, 그래서 대선공약에도 그런 게 나올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 민주당 대선 공약을 보면 굉장히 실망스럽죠. 그래서 좀 씁쓸해요. 공약이라는 건, 보통 안 지키잖아요. 사실 공약이란 건 ‘하는 척’만 해도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민주당이 ‘척’도 안 하는데, 과연 당선이 되고 나면 어떻게 될 거냐 라는 생각도 좀 들었어요.

 

반도체특별법 관련해 며칠 전에 토론회를 갔는데,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을 했고, 경제적인 관점에서 반도체 특별법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도표나 자료로 되게 설명을 잘해준 토론회였다고 생각했거든요. 민주당이 지금 밀고 있는 공약들이, 장밋빛 미래가 그려질 수 없는 미래를 끌어다가, ‘사람들이 어차피 잘 안 찾아볼 거니까’라는 생각으로 던져놓는 게 너무 많은 거 같아요.

 

그리고 민주당에 대해 한마디만 더 하자면요. 광화문에 우리 농성장 진짜 눈에 잘 띄었잖아요. 지나칠 수가 없는 농성장이었어요. 그런데 그 농성장을 찾지 않고서, 민주당이 ‘연대시민’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싶어요. 솔직히 남태령에 있던 사람, 한강진에 있던 사람, 어디 있던 사람, 화제가 된 발언한 사람, 다 비정규직 농성장에 모였단 말이에요. 한강진에서 민주노총 트럭 올라가서 발언했던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고 자주 찾는 공간인데, 그런 공간에 오지 않았던 사람들이, 지금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꾸 ‘연대시민’을 호명하려 하니까 화가 나는 거죠.

 

민주노총에 대해서 아쉬웠던 건 없었나요?

 

민주노총 서울본부 김진억 본부장님하고 간담회한다고 갑자기 연락이 왔었는데요. 그 때 가서 제가 불만을 많이  얘기했어요. 저는 당시 3개의 고공사업장 모두 인력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과연 이 문제를 민주노총이 지금 제대로 파악하면서 고공3사 문제를 메인으로 밀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좀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때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에서 벌어진 부당징계에 대해서 금속노조가 발언 안 하는 거에 매우 열받아 있었어요.

 

울산 이수기업 투쟁에 대해서도 불만을 얘기했어요. 천막설치 투쟁을 1차, 2차 했잖아요. (*진다동지는 이수기업 2차 천막설치 투쟁에 함께 연대했다.) (구사대의 폭력만행이) 인터넷에도 쫙 퍼져서 제 친구들, 또 유흥희 동지한테도 괜찮냐고 따로 연락도 왔기도 했고요. 당장 울산에 올 수 없는 사람들이 괜찮냐고 연락을 했어요.

 

그런데 금속노조 울산지부는 구사대의 폭력 사실을 몰랐냐는 거예요. 알았겠지. 알았으면, 구사대가 계속 깔려 있는 게 보이면 왔었어야죠. 이렇게 문제가 심각하면 왔었어야죠. 같이 대처를 했었어야죠. 그래야 자정에 그 난리를 안 폈겠죠.(*2차 천막 설치 투쟁을 하고난 뒤인 4월 19일 자정에 이수기업 퇴근선전전을 하려고 하자 구사대가 현수막을 침탈해가며 다시 한 번 폭력을 저질러 2명의 동지가 앰뷸런스에 실려갔다.)

 

근데 안 온 거잖아요. 저는 금속노조 내부 사정이 뭔지는 모르겠고, 연대자로서 사람들이 버스를 조직해서 간건데. 여기가 위험할 거 같아서 연대하러 간 사람들인데. 정규직 투쟁하는 데 가면 보호할 연대자고, 비정규직 투쟁사업장에 가면 그냥 냅둬도 되는 연대자인가? 1차, 2차 천막설치투쟁 때 폭력사건이 계속 터지고, 라이브가 돌아가고, 이 상황을 모르지 않았는데도 방기하는 거, 정작 이렇게 내부에서 선을 그으면 그게 말이 되냐는 거죠.

 

그리고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의 부당징계에 관해서, “금속노조는 왜 입장문을 안 내느냐”는 마음으로, 부당징계에 대한 연대서명을 받는 피켓을 노동절날 금속노조 대오 앞에서 들고 있었어요.  1열에서 “이걸 들고 있어야 하는 것은 (연대시민인) 내가 아니라 (조합원인) 여러분이다”라고 외쳤어요. 민주노조의 노동절 집회에서 이 사태가 이렇게 되고 있는 게 말이 되느냐라는 말을 했죠. 뒷 대오에서는 많이들 QR코드를 찍어서 서명을 해줬어요. 그런데 1열에 있던 사람들은 다 금속노조 임원들이었다고요. 그 분들은 안 했거든요.

 

김진억 서울본부장님 만났을 때 그런 얘기들을 막 했죠. 그래도 김진억 본부장도 우리 희망텐트 할 때 반올림 동지들을 찾아와서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리고 전삼노 사태에 대한 금속노조의 입장문이 나오긴 했는데 저는 너무 늦게 나왔다고 생각해요.

 

(5월 1일 노동절 대회에서 진다동지는 “전국삼성전자노조 집행부는 부당징계 철회하라”는 피켓을 들고,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서명 동참을 호소했다.)

 

그러니까 제가 볼 때는, 이 사례를 보면, 민주노총이 내부적인 조직도 지금 안 되고 있는 거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보니 외부의 연대자는 팬클럽 같은 형식으로 끌고 온 걸로 보여지기도 하고요.

 

그리고 누구나지회 같은 시도는, 어떤 의미에서 좋은 면도 있지만, 약간 아쉽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노동자들에게 각각의 직업에 맞는 길을 찾아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당연히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경험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각의 노동자가 연대자로만이 아니라, 앞으로 노동자로서 어떻게 길을 걸어갈지에 대해서 고민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이 사람들이 노조라는 곳에 관심을 가졌을 때, 그냥 들어올 수 있는 허들만 낮추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실제로 노동자로서 겪는 어려움, 또 진짜로 뭔가 도모할 때 잡아줄 수 있는 게 돼야 규모가 커지고 결집력이 있어지는 거지, 지금 같은 형태는 심하게 말하면 ‘광장이 열렸고, 이를 대표할 얼굴마담을 찾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끔 할 때가 있어요.

 

Q5. 최근 민주노총 중집에서의 대선방침 논의 이후 민주노총 전체 차원에서의 민주당과 정책협약 시도가 언론화되며 뜨거운 이슈가 되었는데요. 이 과정의 직전에 진보당 김재연 후보의 민주당 단일화가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동지께서는 보수양당과 구분되는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사실 저는 잘 몰라요. 탄핵 초반에는 일단 민주당이 좀 더 잘 보이고, 민주당이 다음 선거 때 되겠거니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런데 비상행동 같은 큰 행사가 아니라, 작은 곳에 있어 보니까 거기엔 민주당이 안 보이는 거에요. 그러니까 좀 더 열받았죠. 민주당에 얼마나 사람들이 많은데.

 

‘비정규직 투쟁이나 지혜복 동지 투쟁 같은 현장에는 왜 민주당이 없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죠?

 

아니 이게 얼마나 이상한 일이에요? (지혜복 동지 투쟁에서) 23명이 연행되고. 그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데, 한 명도 안 올 수가 있어요.

 

민주당이 프레임을 되게 잘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윤석열과 이재명이 붙었을 때 표차이가 아주 조금 났는데, 그것 때문에 윤석열이 됐다.’(*20대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는 48.56%, 이재명 후보는 47.83%의 지지를 얻어 윤석열이 0.73%p 앞서며 대통령으로 당선됐다.)라는 프레임이요.

 

그런데, 저는 그 얘길 하고 싶어요. 민주당이 기독교계 표를 잃고 싶지 않아서 차별금지법 얘길 안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한강진에 갔을 때 우리의 반대 쪽(내란옹호세력)에 있던 사람들이 동성애 반대를 외쳤죠. 우리 쪽에 있던 사람들이 동성에 반대를 외치지 않아요. 그러면 그들이 원하는 표는 어디에 있냐는 거예요. 이미 내란세력과 함께 있는 표인데, 그거를 신경 쓴다고 여기에 있는 수많은 (퀴어들의) 표를 뒤로 한다? 그거 되게 어리석은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정치하는 사람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좀 어리석다고 생각했어요.

 

아까 ‘지혜복 동지 투쟁에 왜 민주당 사람들이 한 명도 안 올까’ ‘의원들이 한 명도 안 올까, 이상하다’라고 얘기했잖아요. 제 입장에서 볼 때는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하게 느껴져요. 오히려 민주당이 그 투쟁에 온다면 ‘쟤가 여기 왜 왔지’ 싶고 이상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가 볼 때 민주당은 자기 권력을 잡기 위해서 움직이는 당이지,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당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노동자가 죽지 않는 세상’, ‘차별금지법 제정하고 반도체 특별법 폐기하는’ 이런 목표 자체가 우리와 다른 당이거든요.

 

그러니까 애초에 추구하는 가치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차별금지법도 늘 안 하겠다는 거라고 생각하고요. 정말 어떤 압도적 민심 또는 투쟁으로 ‘이거를 안 하면 내가 권력에서 밀려나겠다’ 싶을 때나야 차별금지법 같은 걸 추진하는 거지, 절대 자기 가치에 따라 먼저 추구할 거라고 생각이 안 들어요.

 

그들은 우리와 다른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고, 우리는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해야 된다, 그리고 그걸 못 하고 민주당에게 끌려다니는 만큼 우리 힘은 줄어드는 거다라고 생각해요.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하는 게 저는 맞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민주당은 원래 그런 당이다’라는 걸 너무 전제로 깔면, 그 당이 그렇게 나이브하게 행동하는 데 힘을 실어준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다른 동지들이랑 얘기할 때도 ‘그 당이 그렇게 하는 건 당연해요’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동의는 하지만, ‘그거 당연하지 않은건데 걔네들이 나쁘게 행동을 해’라는 수사가 베이스가 돼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걔네는 원래 그런 애들이야.”라고 해버리면, 민주당이 나쁘게 행동할 때 그냥 그게 다 이해가 돼버리는 거죠. 그 사람들은 원래 권력만 추구하는 집단이니까. 근데 저는 가끔은 그 안에서도 양심을 건드리면 나올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양심에 따라 민주당에서 나오는 방향도 있겠지만, 반대로 민주당 안에서 뭔가 얘기를 했을 때, 그 사람의 양심이 건드려져서 뭔가 옳은 것에 목소리를 낼 수도 있겠죠.

 

예를 들면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같은 경우에도 한국노총 소속이잖아요. 그런데 한기박 동지랑 다른 동지들이 잘못된 걸 바꿔보려고 노력을 했었던 거고, 그 안에서 민주노조를 외쳤었던 거고. 그런 것처럼 민주당이 잘못됐다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얘네가 안 오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야” 라기보다는, 그냥 안 오는 걸 계속 비판해야 되는 거죠. “너네가 지금 정치를 하겠다고 계속 나오는데, 왜 이 문제를 해결하러 안 오냐.”

 

저는 말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항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 눈치를 많이 보니까요.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는 당연히 필요하죠. 비판을 같이 갖고 가면서, 동시에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정치세력을 만들어야 되는 것도 맞고요. 그것이 사실 민주노동당으로 너무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 방향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요. 다른 방향성의 정치세력화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국민의 힘한테 ‘너네 이렇게 왜 안 해’라고 안 하잖아요. 저한테는 민주당도 똑같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건 맞죠. 하지만 민주당이 당선될 확률이 너무 높으니까 고민을 하는 거겠죠. 사실 안 될 확률이 높으면 이런 고민 안 할 텐데.

 

저는 민주당이 곧 권력을 잡을텐데, 민주당하고 정확하게 각을 치고, 그들과 다른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투쟁을 조직해야, 민주당이 당선 이후에 집행할 노동자에 대한 공격과 개악 정책에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들에게 ‘너네 그래도 좋은 애들이였잖아’ 라는 방식으로는 환상만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런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왜 민주당은 제대로 안 하냐’가 되야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외부의 목소리가 잘 들렸으면 좋겠어요.

 

Q6. 좋아요(웃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볼게요. 모두가 ‘사회대개혁’을 이야기해요. 윤석열 퇴진 이후를 그리는 상도 저마다 각기 조금씩은 다른 만큼, 그 디테일의 차이도 천차만별인데요. 윤석열 파면 이후 ‘사회대개혁’을 말할 때, 동지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부분, 그리고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들려 주세요.

 

이게 제일 어렵네요. 이상적으로 생각하면 ‘모두가 행복하게 되었습니다’라는 디즈니식 결말인데… 아무래도 당장에는 나의 이슈겠죠. 차별이 없는 세상이요. 차별이 없진 않아도, 차별이 없으려고 노력하는 세상.

 

누군가가 무언가에 문제가 있다고 했을 때, 그래서 피켓을 들고 서 있을 때, 지나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이요. 같이 서 있지는 못해도 적어도, 그게 매일 똑같은 풍경이어도 눈길을 한 번씩 줄 수 있는 세상이 사회대개혁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농성장이나 부스에 있으면서 느낀 건요. 우리가 변화를 외치면서도, 굉장히 무관심하구나. ‘(내가) 무관심했구나’도 있고 ‘(사람들이) 무관심하구나’도 있고요.

 

(5월 14일, 지혜복 동지의 삭발식 날 진다동지는 연대발언으로 함께했다.)

 

Q7. 네, 마지막 질문입니다. 혹시 사회주의를향한전진 동지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이나 소감이 있다면, 남기지 말고 전부 들려 주세요.

 

남들이 봤을 때 되게 허황된 얘기들일 수 있잖아요. 저도 가끔 그렇게 느끼기는 하는데. 예를 들면 총파업이랄지.

 

광장에서 광야의 초인처럼 총파업을 외치긴 했죠.(웃음)

 

사실은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알아요. 저도 생업으로 글을 쓰다보면, 어떤 점에서 타협을 하긴 하지만, 타협하지 않는 선도 있거든요. 타협하지 않아서 돈은 덜 벌고 시간은 더 씀에도 불구하고요. 신념적인 부분이잖아요. 전진을 보면, 뭔가 정답이 없는데 모여서 하고 있는 거 보면 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좀 이상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이상하지만 좋은 사람들. 여기까지 합시다. 좋은 사람들? 아니야 좋은 사람들은 판단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냥 이상한 사람들로 할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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