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한국어로 번역된 이 책의 저자는 브래디 미카코다. 브래디 미카코는 1965년 생 일본인 여성으로, 1996년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인 남성과 결혼한 이주민 노동자다.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라는 책의 부제는 ‘영국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의 사랑과 긍지’다. 베이비부머 세대란 1946~64년에 태어난 사람들을 가리킨다. 공식 집계로만 5,646만 명이 희생된 2차 세계대전의 참상 위에서, 역설적으로 자본주의는 상당 기간 전후 호황을 이어갈 수 있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이윤율 하락으로 전면적 경제위기에 빠져들기 전까지 말이다. 이 시대에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자본주의 복지 시스템의 혜택을 경험했던 세대다.
이 세대가 가졌던 정서를 영국 록 밴드 ‘더 스미스’의 보컬 모리시(노동계급 출신의 싱어송라이터)는 이렇게 표현한다. “잉글랜드는 나를 먹여 살릴 의무가 있다.” 술과 노름에 중독되는 것만 주의했다면, 성실히 일해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했던 세대다. 젊은 날 심취했던 록 음악과 히피 문화란 바로 그 틀에 박힌 삶이 가져다주는 지루함에 대한 반항이었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신자유주의 이후 전반적 복지 시스템이 붕괴된 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젊은 세대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지표들을 가지고 있다.
밴드 '더 스미스'의 보컬 모리시
대표적으로 술을 빼놓을 수 없다. “어두운 조명, 불결해 보이는 카펫, 가죽 의자와 당구대가 뒤엉켜 있는” 저 유명한 펍(pub)에서 축구 중계를 보며 맥주를 들이붓는 잉글랜드 아재들을 쉽게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젊은 세대는 술 자체를 먹지 않는다고. 영국에서 펍(pub)의 숫자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브래디 미카코는 영국에서 “알코올을 둘러싼 상황 변화가 어떤 면에서는 세대론이나 계급론보다 더 선명하게 저변 사회의 변화 양상”을 보여준다고 평한다. (이 대목에서 오늘날 젊은 세대가 술을 멀리하는 것을 두고 ‘문명의 퇴보’라 개탄했던 한국의 어느 아재가 떠오른다. 물론 나 역시 술집이 아니라 카페에서 두 시간 동안 정치토론을 했다는 어느 젊은 동지의 말에 적잖은 문화 충격을 받은 바 있다.)
영국에서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자계급이 새삼 주목을 받았던 것은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때문이다. 그들 상당수가 브렉시트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대다수 젊은 세대들은 베이비부머 세대의 브렉시트 찬성을 인종차별이자 경제적 자해 행위로 여겼다. 젊은 세대에게 베이비부머 세대는 좋은 시절에 태어나 누릴 것은 다 누려놓고(“좋은 시절에 섹스도 많이 하고 좋은 음악을 듣던 사람들”), 이제 뒷세대의 앞길을 막은 대책 없는 세대로 취급됐다. 젊은 세대는 베이비부머 세대에 대한 적개심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브렉시트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나 같은 젊은이를 향해 세운 가운뎃손가락이었다.”
브래디 미카코는 주변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자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그들이 브렉시트에 찬성한 정치적 맥락이 무엇이었는지를 날카롭게 짚어낸다.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말이다. 나아가 인간에 대해 지닌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노동자들 사이에 세대와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는 연대의 희망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과연 작가의 내공이 만만찮다.
영국 노동자계급의 자랑이었던 NHS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자계급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EU 탈퇴파가 되었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후 호황에 기반했던 복지국가가 70년대 경제위기 이후 무참히 파괴됐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2012년 개최된 런던올림픽 개막식을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재들일수록 최근의 기억보다 오래된 과거의 기억이 더 선명하다. 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는 ‘미스터 빈’을 연기한 로언 앳킨슨의 명연기도 화제였지만, 간호사 복장을 한 600여 명의 무용수들이 320개의 환자용 침대를 끌고 나와 스타디움 한가운데 횃불로 ‘NHS’를 수놓았던 장면도 큰 화제가 되었다. NHS(National Health Service)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8년 노동당 정부 시절에 탄생한 영국의 무상의료체계다.
2012년 런던올림픽 개막식
올림픽 개막식에 이를 자랑거리로 삼았을 만큼, 누구나 치료비 없이 무상으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NHS는 영국 노동자계급의 긍지였다. “영국 사람들은 미국 등의 나라에서 의료보험 문제로 다투면 늘 ‘야만인들이네’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영국은 소득, 인종, 사회 계층 등과 관계없이 누구든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는 평등한 의료제도를 70년 동안이나 유지해온 세련된 나라라고 생각했고 이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이윤율 저하 위기에 맞닥뜨린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공격을 시작하고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NHS는 말 그대로 껍데기뿐인 제도가 되었다. NHS 시스템에서는 환자가 곧바로 전문의를 만날 수 없다. 우선 동네마다 설치된 진료소에 가서 일반의(General Practitioner, GP)에게 진찰을 받은 이후, 일반의가 소개장을 써주면 비로소 전문의의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계속된 긴축 재정으로, 일반의를 만나기 위해서 한 달 이상의 예약 기간이, 다시 전문의를 만나기 위해 두 달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현재 NHS의 실태란다.
이러다 보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영국인들은 민간 의료 시설(‘프라이빗 private’)을 이용하고, 돈이 없는 이민자들만 NHS를 이용하는 형편이다. “NHS 대기실에는 이민자들이 가득하다. NHS가 이민자들에게 공중 납치당했다.” 한때는 복지국가의 상징과도 같았던 NHS가 인종차별과 혐오를 낳는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브렉시트 투표 당시 극우파는 “브렉시트를 하면 일주일에 3억 5,000만 파운드씩 나가는 EU 분담금을 NHS의 자금으로 돌릴 수 있다”라는 가짜 뉴스를 퍼트렸고, 이것이 노동자들 사이에 상당히 먹혀들었다고 한다.
"유럽연합 대신 NHS에 자금을" - 브렉시트 찬성 진영 광고버스. 출처: getty images
브래디 미카코의 남편(그 역시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자계급이다)은 아직 NHS가 완전히 망가지기 이전, 무상으로 암 치료를 받고 생존했던 사람이다. 갑작스러운 두통 증상으로 암센터에서 다시 진료를 받으려 하니 이제 9주를 기다려야 한단다. 놀란 브래디 미카코가 민간 의료 시설을 이용할 것을 권유하자, 남편은 이렇게 대답한다. “NHS를 잃는다면 우리는 영국이 복지국가였던 시절의 유산을 전부 잃어버리게 되는 거야. 대처한테 지는 거란 말이야.” “자기 건강과 돈 중에 뭐가 더 중요해?” “그러니까 이건 건강과 돈만의 문제가 아니야. 더 큰 거라고. 나는 대처한테도, 글로벌 자본주의한테도 질 수 없다고. 물론 가담하지도 않아.”
각자의 방식으로 노동자계급의 자존심을 지키는 아재들
브래디 미카코의 남편처럼, 이들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자계급은 자신들이 젊은 날 경험했던 복지국가의 유산이 상실되는 것에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한다.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1958년생 노동자 스티브는 노동자들이 살만한 시절(정확히 말하자면 일을 안 해도 실업수당이 충분히 나오던 시절), “할 일이 너무 없어서 도서관에 다니며 책을 읽고 특정 분야에 별다른 쓸모도 없는 지식을 잔뜩 쌓는 오타쿠”, 아니 “아마추어 연구자”다. 스티브는 긴축 재정으로 동네의 도서관이 폐쇄된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코피를 흘릴 정도로 분노한다. 지역 정부는 도서관을 폐쇄하고 이를 어린이 놀이방 한구석의 도서 대여 서비스로 몰아넣는데, 스티브는 억지로라도 공공 도서 서비스를 계속 이용하겠다며 매일 어린이 놀이방으로 출근한다. 그곳에서 스킨헤드의 험상궂은 스티브는 동네 꼬마들에게 부활절 달걀을 선물 받는 할아버지가 된다.
스티브는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자가 가진 모순된 속성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한편으로 스티브는 “이민자가 너무 늘어나 학교와 병원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은 이민을 통제할 수 있는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던 EU 탈퇴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스티브는, 중국인 이주민 주택에 누군가 인종차별 낙서를 남기자 “다시 잡화점 주인(이주민)이 칼에 찔리던 시절로 퇴행하는 짓은 용서할 수 없다”며 야간 순찰대를 조직해 이주민을 보호한다.
1955년생 택배 기사 사이먼은 런던에서 개최된 트럼프 반대 시위의 맨 앞줄에 참석해 일약 동네의 스타가 된 인물이다. 2018년 트럼프가 미국과 영국의 통상 교섭에서 NHS도 의제에 오를 것이라 발언하자 런던에서는 25만 명이 참가한 거대한 항의 시위가 개최된다. 사이먼은 시위대의 맨 앞줄에 서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의회광장으로 나갔다. “우리의 NHS를 내주지 않겠다”는 플래카드를 들고서.
사이먼 역시 모순적 인물이다. 사이먼은 입버릇처럼 “젊은 세대와 이민자는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는다”며 노동조합의 약화 원인을 이주민에게 돌리는 인물이다. EU 이민자들이 “영국 국내 노동자의 대우와 임금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그를 열받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먼은 정작 자신의 젊은 조카가 연인인 프랑스 여성과 함께 난생처음 파업에 ‘데뷔’한다고 하니 기뻐서 플래카드를 함께 제작한다.
출처: 출판사 제공 카드 리뷰
사이먼의 조카와 연인은 웨더스푼이라는 술집 체인에서 일하는 불안정 노동자들이다. 이들에게 사이먼으로 대표되는 노동운동은 “커뮤니티센터 구석에서 따지기 좋아하게 생긴 아저씨가 전단을 돌리는 이미지”이거나 “전체적으로 어두운 느낌”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제 이들 젊은 세대에게도 파업은 뭔가 ‘힙(hip)’한 것이 됐다. “그런데 파업 말이야. 좀 새롭다는 느낌이야.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연설 따위는 촌스럽지만 일제히 노동을 거부한다니 완전 멋져!” 청년층 사이에서 ‘사회주의(socialism)’가 “새로운 밴드 이름이나 제일 잘나가는 클럽 이름처럼 멋지게 들린다”고 하자, 사이먼은 이렇게 얘기한다.
“이 나라는 부유한 녀석들 입장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라고. 우리한테만 ‘먹느냐 먹히느냐’의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면서 부유층의 ‘요람에서 무담까지’는 정치에 의해 잘도 보호받고 있지. 그 녀석들한테만 세금을 절약할 수 있는 샛길을 마련해주고, 규제를 완화해서 장사하기 쉽게 해주었지. 무슨 실패를 해도 그 녀석들한테만큼은 ‘자기 책임’이라고 안 해. 무슨 짓을 어떻게 하든 정부가 뒤를 다 닦아주는 거야. 금융 위기 때도 그랬잖아. 은행을 구한 건 시장이 아니라 정부였다고.”
노동자계급의 연대를 향해
브래디 미카코는 세대 간 갈등, 정주민 노동자와 이주민 노동자 사이의 갈등의 본질이 결국은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있음을 노동자들의 일상을 통해 드러낸다. 물론 이를 단지 ‘긴축재정’ 정도로 표현하고 있지만 말이다. “‘자기보다 이득을 보는 사람’을 온 힘을 다해 비난하는 것이 긴축 시대를 사는 이들의 마음가짐이라면, 그 표적은 외국인, 생활 보호 대상자, 싱글 맘 등이 될 것이다. ‘좋은 시대를 산 베이비부머 세대’도 그 한 가지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브래디 미카코는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자계급이 가지는 독특한 문화적 지표를 강조하는 것은 가난한 계급의 분열을 조장하는 행위에 불과하다고도 지적한다. “노동계급 안에는 상당한 다양성이 존재한다. 이 다양한 사람들이 노동자로서 겪은 공통의 경험이 이들을 같은 계급으로 만든다. 이들이 겪은 같은 경험이란 보수당의 긴축재정으로 공공서비스와 복지가 삭감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 노동조합의 약화로 기업의 힘이 비대해진 현 상황에서 악화된 고용 조건과 임금으로 인해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점 등일 것이다. … 외국인 노동자 거의 대부분이 이렇게 ‘강 건너 불구경’ 식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계급을 경제적 계층이 아닌 문화적 계층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렇게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은 정치 세력과 언론이다.”
영국의 이야기지만, 자본의 고도성장기를 거쳐온 한국의 중장년 세대가 젊은 세대와 겪고 있는 세대갈등과도 무언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이자. 정작 사회민주주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유럽에서 체제 위기와 개량은 결코 양립할 수 없음이 명백히 증명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사회민주주의를 국민의힘 또는 민주당과 구별되는 진보정치 노선이라 제창하는 이들이 있다. 부디 정신 차리기 바란다. 시대는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