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3일, 정부 경제정책 수장들이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어 50조+α 유동성 공급계획을 공개했다. 50조원, 코로나19 유행 초입인 2020년 3월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비상경제조치 규모와 같다. 그런데도 자본시장은 불안에 떤다. 알려졌듯 비상상황을 촉발한 계기는 ‘레고랜드’ 부도 위기다. 굵직한 재벌계열사가 망한 것도 아니고, 놀이공원 문제가 일파만파로 번져 위기를 야기한 것이다. 김진태는 억울하다. ‘재정자립율 전국 최하위, 강원도 살림살이를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고자 결단했을 뿐인데, 왜 내가 국가경제를 파탄 낸 주범이 되어야 하는가?’ 경과를 보자.
놀이공원이 금융시장을 뒤흔들기까지 - 기능하지 않는 최종대부자
10년 전 강원도는 테마파크 개발사업을 벌이는 영국 ‘멀린그룹’과 합작해 ‘강원중도개발공사(당시 LL개발)’라는 시행사를 세워 공사에 착수했다. 공사 중인 2014년, 대규모 선사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공사는 3년 지체 후 2020년 개장을 목표로 재개되었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공사는 다시 늦어졌고 결국 레고랜드는 2022년 5월 1일, 애초 목표보다 7년 늦게 개장했다.
사진: 레고랜드 코리아
지체를 거듭하며 빚이 늘었다. 강원중도개발공사는 사업비 4,500억원 중 2,050억원을 채권발행으로 조달했고, 그 지급보증은 강원도가 했다. 즉, 개발공사가 발행한 채권은 지방정부가 보증을 서는 최고등급 국공채였다. 개발공사는 입장료 수입과 주변 개발이익으로 빚을 갚을 구상이었다. 전형적인 부동산 프로젝트 금융(PF)이다.
우여곡절 끝에 레고랜드가 개장하고 5개월여가 지났다. 이제 공사비를 갚거나, 채권 만기를 연장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9월 28일, 강원도지사 김진태는 채권 만기연장을 하루 앞두고 법원에 중도개발공사 회생신청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따져보니 중도개발공사 부채 2,050억원 중 412억을 자체 상환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즉, 강원도 빚을 늘리느니 개발공사 자산을 팔고 손을 털기로 했다. 법정관리가 시작되면 채권자들은 원금과 이자를 받기는커녕 망한 회사의 주주가 된다. 불과 1주일 전 A1등급 채권은 D등급으로 수직 낙하했고, 10월 5일 부도 처리됐다.
사진: 강원일보
레고랜드는 강원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채권금리가 오르던 차다. 즉 빌릴 사람은 많은데, 돈 떼일 위험에 빌려주는 사람은 적어 자금조달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 상황에서 지방정부, 즉 국가가 보증한 채권마저 부도가 났다. 그렇다면 기업이 발행한 채권은? 투자자들은 공포에 빠졌고 자본시장은 얼어붙었다.
기업어음 금리 추이 (2022년 1월 초 - 2022년 10월 말. 출처: 한국은행 통계시스템)
레고랜드 사태 후 한화솔루션, LG유플러스, 한진택배 등 대기업 채권마저 유찰됐다. 롯데건설은 돈 구할 곳이 없어 롯데케미칼에 돈을 빌렸고 건설사 연쇄부도설은 금융당국의 ‘루머 엄단’ 방침에도 여전히 시중에 나돈다. 한전, 가스공사, 부산교통공사, 인천도시공사, 인천공항공사 등 공사채도 유찰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오르던 채권금리가 단기간에 치솟았음은 물론, 치솟은 금리로 채권을 발행해도 사려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다. 채권발행에 실패한 기업들이 은행창구로 몰리며 대출금리도 함께 치솟고 있다.
레고랜드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될 수 있을까? 정부도 50조원짜리 대책을 내놓았는데? 문제는 레고랜드 같은 부동산PF 사업이 강원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은행이 밝힌 2022년 6월 기준 부동산 PF 대출잔액은 112조원에 달한다. 올해 말 만기가 도래하는 PF유동화증권 발행 잔액은 27조원에 달한다. 당장 금융시장이 얼어붙으며 역대 최대 재건축단지 둔촌주공조차 자금조달에 실패했다. 사태가 진정되지 않을 경우 2,500조원 규모 한국 채권시장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금줄이 마르던 차에, 레고랜드라는 작은 불씨가 거대한 인화물질 더미로 던져진 셈이다.
50조원+α로 위기 대응?
정부가 50조원+α 유동성 공급계획으로 회사채와 기업어음을 사들인다고 해도 불씨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다. 게다가 찬찬히 살피면 정부 재정으로 50조원을 투입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자금이 50조원이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10월 23일 추경호 경제부총리의 발표문 역시 다음과 같다. “기존 시장안정조치에 더해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50조원+α 규모로 확대하여 운영하겠습니다.”
따져보자. 10월 23일 정부 발표에 따르면 50조원의 구성은 △채권시장안정펀드 20조원 △회사채·기업어음 매입과 P-CBO(회사채 유동화증권) 발행 확대 16조원 △증권사 지원 3조원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자 보증 지원 10조원이다.
이중 △20조원 규모 채권시장안정펀드는 은행·증권사 등 83개 금융기관이 출자해 만들어진다. 곧 정부자금도 아니고, 즉시 투입되는 여유재원 역시 1.6조원에 불과하다. △회사채·기업어음 매입 여력은 기존 5.5조원에서 10조원으로 4.5조원 늘렸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P-CBO 신규발행 역시 기존 2.6조원에서 5.6조원으로 3조원 늘렸을 뿐이다. 여기에 △증권사 지원 3조원 △PF사업자 지원 10조원을 합해도 정부자금은 총 20조5천억원 들어갈 뿐이다.
더군다나 주로 은행자금으로 만들어지는 채권시장안정펀드의 경우, 펀드출자금 마련을 위한 은행채 발행 증가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날마다 치솟는 채권금리에 기름을 부을 수도 있다. 즉, 정부는 채권시장을 진정시키려 은행자금을 끌어오고자 하나, 은행도 채권시장에서 빚을 내야 한다. 은행이 채권발행을 늘리면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는 자금조달에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은행들이 채권발행을 자제하며 당분간 정부에 협조한다고 해도, 자본시장의 전반적 위기 속에 그 협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상황을 종합할 때, 윤석열 정부는 이자율을 올리면서도 양적완화를 진행해야 하는 난처한 처지로 몰렸다. 44일 만에 파산한 영국 트러스 정부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재정건전성을 앞세우는 정부는 아직 그 난처함이 크지 않다고 실제로 판단하고 있거나, 적어도 대외적으로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한다. 현 위기에 대한 철저한 무능 혹은 가당치 않은 허세, 혹은 양자 모두다.
김진태는 강원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위기관리에 실패하고 있다. 금리, 물가, 환율 모두 오르는 위기상황에서 마땅한 방법을 찾기도 어렵다. 더구나 이자보상배율 3년 연속 1미만인 한계기업이 5년 사이 두 배로 폭증한 상황에서(2022년 8월 산업은행 미래전략연구소) 과잉자본 청산을 영원히 유보할 수도 없는 구조적 조건이다.
그래서 시장은 여전히 불안하다. 우량기업들이 채권을 사달라며 전에 없던 고금리를 내걸어도, 유찰의 연속이다. 정부대책 발표 이후에도 회사채와 국고채 금리차(스프레드)는 여전히 2009년 이후 최대로 높다. 오늘도 자금줄이 말라간다. 파산의 공포가 시장에 드리워져 있다.
이렇듯, 외양은 윤석열 중앙정부가 김진태 지방정부를 꾸짖으며 사고를 수습하는 형국이나, 중앙정부도 현 위기를 과소평가하고 있음은 물론, 대응에도 실패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10월 25일, 대통령이 2023년도 예산안 시정연설 곳곳에서 강조한 것은 ‘재정건정성’이었다. “건전재정 기조로 내년 예산을 편성하기로 확정한 바 있습니다. 내년도 총지출 규모는 639조원으로 2010년 이후 처음으로 전년 대비 예산을 축소 편성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는 법인세와 종부세 등 5년간 60조원의 부자감세를 밀어붙였고, 정작 이 위기에 확대해야 할 공공임대주택 공급예산은 5.7조원이나 삭감했다. ‘작은 정부’와 ‘낙수효과’라는 ‘신념’의 산물이다.
돌이켜보자. 김진태의 레고랜드 회생신청 역시 강원도 재정건전성을 위한 신념과 충정의 산물이었을 따름이다. 춘천의 김진태, 용산의 김진태. 그리고 작은 정부와 낮은 세금을 기조로 ‘제2의 대처’를 꿈꾸며 야심차게 출발해 450억 파운드(약 70조원) 부자감세안을 내놓은 후 최단기간에 퇴진한 영국의 김진태, 리즈 트러스 정부까지. 오늘도 수많은 김진태가 자본주의체제 안정화에 실패하고 있다. 국가권력을 대표하는 인사들의 희극적 실패. 위기심화의 전형적 징후다. 어느새 국가를 대표하는 무능한 인물들이 늘어나서가 아니라, 체제내적 위기관리 수단이 없기에 이 인물들이 실패하는 상황이다.
"국가를 운영하지 않는 방법" - 10월 1일자 <이코노미스트> 표지
격돌에 대비하자
모든 곳에서 위기 심화의 징후가 감지되고 있다. 체제가 스스로 위기를 해결할 수 없는 지금, 위기의 비용과 고통은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될 것이다. IMF가 10월 발표한 경제전망 보고서 제목은 ‘생계비 위기에 대처하기(countering the cost-of-living crisis)’였다. 연대의 확장과 단결의 강화로 자본주의 체제를 겨냥한 큰 싸움을 준비할 때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도 그 과제에 충실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