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상춘재의 축배 소리
지난 12월 9일, 16일간 이어진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2차 파업이 쓰라린 패배로 끝났다. 그리고 바로 이날 저녁 대통령 윤석열은 청와대 상춘재에서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구자열 한국무역협회 회장, 최진식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 등 자본가 5단체 수뇌들과 비공개 만찬을 가졌다. 축배를 든 것이다. 건배사로 “이겼다!”라는 말을 지껄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통령실에서 거르고 거른 표현인즉, 이날 자본가들은 화물연대 파업에서 “정부가 법과 원칙을 잘 지켜서 해결”된 데 대해 윤석열에게 고마움을 표했고 윤석열은 “앞으로도 모든 것에 있어서 법과 원칙에 따라 할 테니 기업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큰소리를 쳤다 한다.
노동자들이 자기 계급의 진짜 힘을 만분의 일도 드러내지 못한 상태에서, 저들은 화물연대 파업을 깨뜨린 자신감으로 각종 노동개악을 밀어붙일 심산이다. 당장 9일 만찬에서 윤석열과 자본가들은 법인세율 인하, 중대재해처벌법 무력화, 노조법 2‧3조 개정안 폐기, 30인 미만 사업장 주 8시간 특별연장근로 일몰 연장 등 자본의 이윤 제고를 위한 모든 정책을 집행할 것을 모의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윤석열은 화물연대 파업 기간 “결국 피해를 보는 이들은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시달리는 저임금 노동자”(11. 28. 대통령실 수석비서관 회의)라며 마치 자신이 저임금 노동자들의 대변자라도 되는 양 행세했다. 그러나 막상 조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꺾이고 나니, 곧바로 미조직 노동자들, 가장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들의 삶을 직격하는 노동개악안을 들고나왔다. 이른바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노동시장 개혁 권고안이 그것이다.
이제 거추장스러운 경사노위는 필요 없다?
김문수 같은 극우분자를 경사노위 위원장으로 앉힌 데서도 드러나지만, 윤석열 정부는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정부를 자임하는 데서 형식적인 노사합의의 외양은 거추장스럽기만 하다고 보는 모양이다. 민주노총이 빠진 반쪽짜리 협의체일지언정 문재인 정부가 경사노위를 통해 노동개악을 시도했다면, 윤석열 정부는 어용학자들을 전문가로 내세워 노동개악에 속도를 내려 한다. 자본을 위한 정책 집행에서 일말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다.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2022년 6월 고용노동부에서 발표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에 따라 지난 7월 출범한 단체다. 한때는 좌파 학자라고 행세하던 전문가들까지 부나방처럼 달려들어 자본가들의 요구를 고스란히 반영한 권고문을 지난 12일 내놓았다. 권고문이 발표된 다음 날인 13일, 윤석열은 국무회의에서 “(미래노동시장연구회) 권고 내용을 토대로 조속히 정부 입장을 정리하고 우리 사회의 노동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흔들림 없이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떠들었다. 동네 양아치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도 이보다는 세련될 것이다.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권고문이 “우리 사회의 노동 약자를 보호”하기는커녕, 그들을 가장 가혹하게 공격할 것이란 진실이 잠시라도 드러날까 봐 하루 만에 권고 내용을 전격 수용하겠노라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권고문에는 대체 무슨 내용이 담겨 있길래, 윤석열과 자본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개 박수를 쳐대는 것일까? 권고문은 크게 노동시간 유연화와 임금체계 개편으로 구분된다. 이 중 초점이 맞춰진 것은 노동시간 유연화다. 임금체계는 사업장별로 단체협약, 취업규칙, 근로계약 등으로 결정돼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크지 않은 반면, 노동시간 유연화는 법 제도를 통해 일률적인 적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시간 유연화는 궁극적으로 저임금을 강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취업 노동자의 노동시간 유연화, 다시 말해 장시간 노동은 산업예비군의 규모를 팽창시킴으로써 노동자들 사이의 취업 경쟁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주 40시간제가 법정 노동시간인 나라에서 주 80시간을 넘게 일해도 합법?
이번 권고문에서 노동시간 유연화에 관한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자본가들의 모든 요구가 집대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① 연장노동 한도를 1주 단위에서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산정, ② 평균적으로 주 40시간을 맞추면 연장수당 지급 의무가 없는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단위 기간을 3개월로 확대, ③ 탄력적 근로시간제에서 근로일별 노동시간을 그때그때 사용자 마음대로 지정하게 하는 방식(내가 내일 6시간을 일할지, 12시간을 일할지, 당일이 되기 전까지 알 수 없다)을 전면 확대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1주 노동시간의 절대 상한을 규제하는 연장노동 한도 산정 단위를 1주에서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현재 근로기준법의 법정 노동시간은 1주 40시간이며, 당사자 간의 합의가 있는 경우에 한해 1주 12시간 한도 내에서 연장이 가능하다. (연장노동에는 노동자 동의가 필요하며 자본가는 이를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없다. ‘주52시간제’라는 표현은 연장노동에 대한 노동자 동의권을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용어다.)
그런데 앞으로 연장노동 한도 제한 단위를 1주가 아니라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산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1주 12시간을 월 단위로 환산하면 52시간이 된다.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근로일 간 11시간의 휴식의무를 부여해서 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다 떠들지만, 이 기준을 적용해도 주 80시간의 노동이 합법화된다. 예컨대 09시 출근, 22시 퇴근을 일주일 내내 반복하는 경우, 1일의 노동시간은 11.5시간(휴게시간 1.5시간 제외)이므로 7일 간의 총 노동시간은 무려 80.5시간이 된다. 이것이 합법이라는 것이다!
연장노동 한도를 월 단위로 산정할 경우, 월 총량 52시간 중에서 40.5시간(=80.5시간-40시간)을 사용했어도 다음 주에 여전히 11.5시간의 연장노동이 가능하다. 따라서 바쁠 때는 09시 출근, 22시 퇴근하는 노동을 휴일 없이 10일 연속으로 해도 합법이다. 만약 연장노동 한도를 분기 단위로 산정했다면, 주 80시간 노동을 2주, 3주 연속으로 휴일 없이 지속해도 합법이다. 죽을 만큼 일하면 진짜 죽는다! 주 60시간, 주 70시간, 주 80시간 일하다 과로사한 노동자들의 사례는 사실 드물지 않다. 이런 경우 사후적으로라도 자본가들을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아예 이것을 합법화시켜주겠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왜 유연한 노동시간을 요구하는가?
여기서 잠깐 자본가들이 왜 노동시간 유연화를 요구하는지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미래시장노동연구회의 어용학자들을 비롯해, 정부와 자본가들이 틈만 나면 떠드는 흰소리가 있다. 지금의 노동법은 공장 노동 시대를 배경으로 하므로 현재의 경제 구조와 맞지 않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예컨대 미래시장노동연구회는 권고문에서 “현행 근로시간 제도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로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하는 전통적인 공장형 노동과정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어, 기술혁신과 디지털혁명, 일하는 방식과 생활세계의 변화 등에 더 이상 부합”하지 않으므로 “노사가 자유롭게 근로시간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근로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인 노사관계에서 ‘자율’, ‘자유’, ‘선택’ 등등을 운운하는 것은 그저 자본가 맘대로 모든 계약조건을 정한다는 뜻임은 차치하자. 위 얘기가 흰소리에 불과한 까닭은,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불규칙적으로 유연하게 쓰려는 것은 그 무슨 4차 산업혁명과 같은 “기술혁신”의 결과물이 아니라 자본주의 이윤 논리에 내재한 자본의 고유 욕망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들끼리 터무니없는 무정부적 경쟁을 벌이는 체제다. (반면 하나의 자본 내에서는 고도의 계획경제가 행해진다.) 따라서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에 관한 자본가들의 경영상 결정은 대부분 불확실한 운의 영역에 놓이기 일쑤다. 자본가들은 어떤 경우에는 과소생산으로 이윤 획득의 기회를 상실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과잉생산으로 파산의 위험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따라서 어느 순간 ‘좋은 시절’에 맞닥뜨려 생산규모를 늘려야 할 때, 자본가들은 절대 노동자의 수를 증가시키길 원하지 않는다. ‘안 좋은 시절’이 닥쳐오면 늘어난 노동자 수가 짐이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모든 자본가의 절대적 관심사는 일정량의 노동을 더 적은 노동자에게서 뽑아내는 데 있지, 같은 가격으로 [또는 좀 더 싼 가격일지라도] 그것을 더 많은 노동자에게서 뽑아내는 데 있지 않다.”고 썼다(<자본1>). 다른 조건이 불변일 때, 고용된 노동자의 숫자를 늘리는 것보다는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이 이윤 획득에 훨씬 도움이 된다. 즉 “노동자 수를 두 배로 늘려 착취하려면 기계나 건물에 투하된 불변자본 부분과 원료나 보조재료 따위에 투하된 불변자본 부분도 두 배로 늘릴 필요가 있다. 노동일(노동시간)이 늘어나면, 기계와 건물에 투하된 자본 부분이 변하지 않더라도 생산규모는 확대된다. 그러면 잉여가치는 늘어나고 그것을 착취하는 데 필요한 지출은 줄어들게 된다.”
이처럼 일이 몰릴 때 취업 노동자가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소진하기를 요구하는 것, 저들 표현대로라면 바쁠 때는 일을 많이 하고 한가할 때는 휴식하면서 노동력을 유연하게 사용하라는 것은 자본의 아주 오래된 요구다. 1865년 영국 의회 아동노동조사위원회의 기록을 보자. 한 제화공 노동자는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 고용주들은 기묘한 사람들로, 한 소년을 반년 동안 죽도록 혹사시킨 다음 나머지 반년 동안 거의 강제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게 하더라도 그것이 그 소년에게 조금도 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한국의 자본가들이 바라마지 않는 노동력의 유연한 사용 형태를 이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가 <자본1>에서 지적한 대로, 노동시간의 유연화, 즉 “노동력 지출의 불규칙성”은 “생산 그 자체의 무정부성”, 즉 “산업순환의 일반적인 주기적 국면 전환과 각 생산부문의 특수한 시장 변동 … 계절의 주기성이라든지 유행이라든지 하는 것” 때문에 발생한다. 이러한 자본주의 경제 특성에 맞춰 철두철미하게 자본의 이익을 우선하자는 게 바로 노동시간 유연화인 것이다.
공장법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자본가들
또한 이 방식은 자본주의 체제 전체에도 도움이 된다. 한편에서는 실업과 불완전 취업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넘쳐나도, 다른 한편에서는 취업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생명력을 소진하도록 두는 것이 자본가들에게는 유리하다. 자본주의가 ‘좋은 시절’을 맞았을 때, 실업 노동자들은 “결정적인 시점에 다른 영역의 생산규모에 피해를 입히지 않은 채로 신속하게 투입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가들은 노동자 두 명이 주 40시간씩 일하기보다는, 한 명은 주 80시간을 일하고 다른 한 명은 산업예비군으로서 기아(飢餓) 상태로 대기하고 있기를 원한다.
노동자들은 자본의 논리에 맞서 싸웠다. 노동자들은 세계 각국에서 격렬한 투쟁을 거쳐 노동시간을 표준화, 법제화했다. 노동자가 규칙적으로 노동하고 충분한 휴식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 공장법이 확대 적용되는 과정은, 사업의 특성상 노동시간이 유연해야 하고 노동시간의 균등한 지출이 불가능하다는 자본가들의 갖은 핑계를 거짓으로 판명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플랫폼노동자의 콜 대기 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인정하는 것이 왜 불가능한가? 방문요양서비스 제공을 위해 한 가정에서 다른 가정으로 이동하는 요양보호사의 이동 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인정하는 것은 왜 불가능한가? OECD에서 손꼽히는 장시간 노동국가에서 노동시간 단축이야말로 시대적 과제가 아닌가? 다 떠나서 한국의 장시간 노동체제에서 저출생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러나 철면피한 저들은 다시 주 80시간 노동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한다. 공장 노동을 배경으로 하는 노동법은 오늘날과 안 맞으니 아예 공장법이 없었던 시절, 무제한적 착취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한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도, 오늘 당장 자본의 이윤 획득이 먼저라는 것이다.
‘근로자대표’가 없는 노동자들
앞서 지적했듯이 권고안에 따른 노동시간 유연화는 누구보다도 미조직 노동자, 가장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들에게 직격탄이 될 것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노동시간 유연화 제도를 도입하려면 ‘근로자대표’와의 서면 합의가 필요하다. 과반수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에서는 과반수 노조가 ‘근로자대표’이기 때문에 일정 정도 자본가의 전횡을 제어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미조직 사업장에서 ‘근로자대표’는 유명무실하다. 근로기준법에 ‘근로자대표’는 ‘근로자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라고만 규정돼 있을 뿐, ‘근로자대표’를 어떻게 선출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미조직 사업장에서는 ‘자본가가 지명하는 고분고분한 노동자 = 근로자대표’라는 등식이 성립한 지 오래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 노동시간 유연화 제도의 도입 요건으로 ‘근로자대표와의 서면 합의’를 두는 것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다.
이 때문에 딱히 진보적일 것도 없는 노동법학자들조차 노동시간 유연화 제도를 확대하자면, 그 동전의 양면으로서 ‘근로자대표’ 선출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미 2020년 경사노위에서도 나온 얘기다. 그러나 이번 ‘미래시장노동연구회’ 권고안에서는 “근로자대표의 민주적 정당성 강화를 위한 선출 절차”의 마련은 당면 과제가 아니라 “추가 과제”라고 명시했다. 노동권을 공격하는 개악은 당면 과제지만, 최소한의 형식적 정당성을 마련하는 제도 개선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추가 과제”다! 어용학자는 ‘학자’가 아니라 ‘어용’일 뿐이다.
‘부분근로자대표’, 노동조합 무력화 시도
조직 노동자들도 안심할 처지는 아니다. 미조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전반적으로 하락할 때 조직 노동자들 역시 결코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원론적 취지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번 권고안에는 노동조합의 법적 동의 권한을 무력화할 수 있는 꼼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바로 ‘부분근로자대표’다. 현재는 사업장 단위에 과반수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 과반수 노동조합이 노동시간 유연화 제도 도입 등 제반 노동조건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권고안에 따르면, 앞으로는 특정 직종, 직군 노동자들이 자체적으로 ‘부분근로자대표’를 선출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힘은 단결에서 나오고, 자본가들의 권력은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경쟁시키고 원자화시키는 데서 나온다. 자본가들은 앞으로 특정 직종, 직군뿐만이 아니라, 특정 사업장, 특정 부서 등에서도 각각 ‘부분근로자대표’를 선출하라면서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 들 것이다.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권고안 대부분은 입법이 필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부분근로자대표’는 이미 2021년 문재인 정부에서 노동부 행정해석 변경을 통해 인정된 제도다. 앞으로 투쟁하지 않는 노동조합은 자본이 이 꼼수를 활용해 자기 의지를 관철하려 들 때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21세기 한복판에 주 80시간 노동을 합법화하자는 자본가들의 요구는, 역설적으로 지금의 자본주의가 얼마나 깊고 넓은 위기에 빠져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자본의 이윤 획득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민주주의의 장식 따위는 모두 떼어내겠다는 저들에 맞서 노동자들의 전열 정비가 시급하다.
무엇보다도 국회 다수당인 민주당에 대해 일체의 기대도 품지 말아야 한다. 화물연대 파업투쟁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민주당이 안전운임제 일몰 연장이라는 기존 정부안을 수용하는 배신행위를 벌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윤석열과 자본가들이 커다란 자신감을 얻었던 계기가 되었다. 노조 혐오 정서를 자극하면서 지지층을 결집시킨다, 지지율이 조금만 올라도 자본가 양당의 하나인 민주당은 동요하고 끌려오게 돼 있다, 이것이 윤석열 정부가 이번 화물연대 파업 과정에서 확인한 점이다.
‘미래시장노동연구회’의 권고안 대부분이 국회 입법 사안이라는 점에서, 민주당은 자신들이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다며 조직 노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노동개악을 막을 수 있는 진짜 힘은 노동자들 스스로의 자주적 단결에 있지, 자본가 양당의 하나에게 정치를 위탁하는 데 있지 않다.
비록 패배한 투쟁이지만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노동자들의 진짜 힘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불과 수천의 대오가 자본의 이윤 질서를 교란하자, 저들은 화물연대를 깨기 위해 모든 공세를 총동원했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노동자들이 가진 거대한 잠재력을 보여준다. 수천의 대오가 아니라, 수십만,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자본의 이윤 생산을 중단시킨다면, 민주노조 운동이 가장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들을 대변해 앞장서 싸운다면, 저들의 노동개악 시도 따위는 일순간에 허물어뜨릴 수 있다. 모든 노동자들에게 절실한 근로기준법 전면 확대, 노조법 2‧3조 개정을 위해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물리력이다. 저들의 물리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노동자들의 거대한 물리력, 바로 그것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