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노운사 연재 1회] 1부 폭압과 저항(1970~198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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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한노운사 연재 1회] 1부 폭압과 저항(1970~1987) (1)

[시대배경]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

  • 양준석
  • 등록 2026.01.18 17:02
  • 조회수 290

 

연재취지: 한국노동자운동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절멸됐다가 1970년대 이후 부활했다. 현대 한국노동자운동의 역사는 자본주의가 자신을 무덤으로 보낼 노동자계급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는 사실,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이 존재하는 한 노동자운동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러므로 자본주의야말로 노동자운동의 진정한 모태이자 영원한 숙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운동의 역사를 이해할 때만, 우리는 운동의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큰 틀에서 인식할 수 있다. 투쟁의 역사 속에 담긴 수많은 경험과 교훈을 연구할 때만, 우리는 당면한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다. 1970년부터 2025년까지 한국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연재한다.

 

[목차]

1부 폭압과 저항 (1970-1987)

[시대배경]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

[1] 민주노조운동의 태동

[2] 1980년의 분출

[3] 민주노조운동의 파괴와 재건

[4] 1987년의 대폭발

 

1부. 폭압과 저항 (1970-1987)

 

한국전쟁으로 노동자운동이 절멸당하면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착취·억압에 내몰렸다. 1970년 전태일의 처절한 분투를 밑거름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시작됐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결기는 철옹성만 같던 박정희 유신정권을 자멸로 내몰았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광주민중항쟁을 주도한 노동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전두환 정권의 민주노조운동 말살에 무기력하게 대응했던 노동자들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통해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군사정권을 무릎 꿇리며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은 7·8·9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세상을 뒤흔드는 거인의 모습으로 다시 일어섰다.

 

[시대배경]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

 

한국전쟁 이전 시기에 한반도 남쪽에서 이루어진 약간의 산업화는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송두리째 파괴됐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모색되기 시작한 산업화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수백 년에 걸쳐 진행된 자본주의 산업화가 수십 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루어졌다.

 

국가 주도의 고도성장과 수출주도형 공업화를 특징으로 하는 박정희 정권의 성장 전략은 1960년대에 섬유·전자 등 노동집약산업, 1970년대 조선·철강·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된 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 의해 계승되어 재벌 체제를 확립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20세기 후반에 한국은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 산업 자본주의 사회로 빠르게 변모했다. 수출 지향적 자본축적의 과정에서 노동자와 농민은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권과 자본은 노동자들을 극단적인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시켰으며,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저곡가 정책으로 농민들의 삶 또한 벼랑으로 밀어붙였다. 그래서 해마다 30만에서 50만에 이르는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면서 노동자들이 엄청난 속도로 늘어났다. 놀라운 속도로 진행된 자본축적의 비밀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매우 높은 수준의 착취에 있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과 통제였다. 자주적인 노동자조직은 군사정권에 의해 사실상 금지되었고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국가 발전’을 절대화하는 이데올로기는 끔찍한 착취와 억압·통제를 정당화했다. 노동자들은 ‘공돌이·공순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사장과 현장관리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수시로 구타를 일삼을 정도로 폭압적이었다. 정권과 자본이 고도성장을 자축하며 흥겨운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에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병영식 노동통제 체제’가 노동자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1) 1960년대 박정희 군사쿠데타와 경제개발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쿠데타를 정당화하려 했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울산공업지구 기공식을 성대히 거행한 게 그 시작이었다. 산업화를 위한 자금은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조달했다.

 

미국은 한국을 냉전시대 서방 진영의 우월성을 보여줄 수 있는 모델로 삼고자 했다. 1945년부터 1970년 한국을 원조지원 대상국에서 제외할 때까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원조는 무상원조 44억 달러, 유상원조 4억 달러로 총 48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이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제공한 원조가 68억 달러임을 감안할 때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미국의 원조는 소비재와 식량에 집중되었고, 이는 농업에서 공업으로 노동력을 이전하는 도구이자 저임금을 유지하는 원천이 됐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미국으로부터 더 막대한 자금지원과 혜택을 얻기 위해 베트남전쟁 파병을 단행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 5만여 명을 베트남에 상시 유지하기 위해, 총 32만여 명이 파병됐다. 파병 대가로 미국은 한국에 전쟁준비금으로 10억 달러, 개인별 파병수당으로 2억 4천만 달러를 지급했는데, 그 금액의 대부분이 산업화 자금으로 활용됐다. 이와 별도로 미국은 공공차관으로 5억 2천만 달러, 상업차관으로 2억 4천만 달러를 제공했는데, 각각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중화학공업 설비투자에 집중적으로 투입됐다. 미국은 한국에 시장도 활짝 열어주었다. 1964년 3천 5백만 달러이던 한국의 대미 수출은 1972년 7억 6천만 달러로 성장했다.

 

외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한일 국교정상화도 추진했다. 1964년 타결된 한일회담에 따라 1965년 한일협정이 조인됐다. 일본은 3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을 지원하고,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골자였다. 식민통치에 대한 아무런 사과와 보상도 얻지 못한 졸속 정상화였다.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은 한국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은 1960년대에 산업구조를 노동집약적 부문에서 자본기술집약적 부문으로 전환하면서, 퇴출되는 잉여자본을 한국으로 수출했다. 1960년대 내내 섬유, 신발, 가구, 전자 등 일본의 노동집약적 산업이 한국으로 대규모로 이전하여 한국 자본주의의 첫 번째 산업군을 형성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일본은 중공업 분야의 일부 잉여자본을 한국으로 이전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수입함으로써 자본축적 과정을 가속화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은 철저히 국가가 주도하는 형태로 전개됐다. 철도, 전력, 수도, 철강, 도로, 해운, 우편, 전화 등 사회간접자본을 행정기관 또는 국유기업을 통해 국가가 제공했다. 정부가 기능공을 직접 양성하고, 기업에 헐값으로 산업단지를 제공했다. 간접세 중심으로 세제를 개편하고, 국내산업 보호를 위한 수입금지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민간자본에게 온갖 특혜를 제공했는데, 특히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끌어들인 외자를 정부 보증 아래 민간자본에게 쏟아 부었다. 1964년 말, 9대 재벌의 총 대출금이 177억 환이었는데. 이는 화폐발행고의 82%, 통화량의 43%에 달했다. 정권의 보호 속에서 민간자본은 빠르게 덩치를 키워 나갔다.

 

1960년대 수출의 주력 상품은 섬유, 봉제 등의 경공업 부문이었다. 수출 시장에서 한국의 가장 큰 무기는 값싼 노동력이었다. 품질에 비해서 싼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강요했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저곡가를 강요했다. 1969년 한국은 수출목표 7억불을 달성하고, 경제규모에서 세계 30위권에 진입했다.

 

2) 1970년대 유신체제와 중화학공업화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요동치고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몰려왔다. 1971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유일한 중국 대표’로 유엔에 가입하면서 중화민국(대만)을 축출하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했다.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신생 독립국들이 대거 유엔에 가입하면서 유엔 총회 표결에서 승리한 결과였다. 1972년 2월에는 미국 대통령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 주석 마오쩌둥과 전격 회담을 가졌다. 이후 20여 년 동안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소련을 고립시켜 나간 전략의 출발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중국의 유엔가입 등을 구실로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비상대권을 부여하면서, 노동자들로부터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사실상 박탈했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을 채택하면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을 합의한 뒤, ‘평화통일’ 추진을 명분으로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서 유신 헌법을 제정했다. 이른바 ‘유신체제’의 시작이었다.

 

대통령선거가 간선제로 변경됐고, 대통령 연임제한이 사라졌으며, 대통령의 초법적 긴급조치를 통해 최소한의 민주적 권리마저 억압됐다. 민방위대, 학도호국단, 새마을운동 같은 국민 동원 체제가 더욱 강화됐다.

 

한편, 1971년 8월 미국 대통령 닉슨은 악화되는 경제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달러의 금태환 중지를 선언했다. 1973년에는 제1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세계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미국은 경공업 제품 수입을 규제하기 시작했고 한국에게도 차관을 갚으라고 재촉했다. 그동안 외자로 성장해 온 한국 기업들의 휴업, 도산, 은행관리 사태가 속속 발생했다. 경제성장률이 1969년 14.6%에서 1970년 10.0%, 1972년 7.2%로 하락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일련의 경제적 조치들을 취했다. 특히 1972년 8월 3일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기업인들에게 엄청난 특혜를 주는 사채동결 조치를 시행했다. 모든 기업은 사채를 정부에 신고해서 3년 거치 후 5년 분할 상환할 수 있게 됐다. 금리인하, 환율안정화, 산업합리화 정책들도 추진했다.

 

1973년 1월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공업을 수출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7월에는 포항종합제철을 준공했다. 정권은 중화학공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기업들은 앞 다투어 중화학공업에 뛰어들었다. 전체 제조업에서 중화학공업 비중은 1967년 33.2%에서 1978년 55.2%로 늘어났다. 1960년대 섬유, 봉제, 신발이던 주요 수출산업이 1970년대 조선,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으로 전환됐다. 1977년 한국 경제는 수출 1백억 달러, 국민소득 1천 달러를 달성했다.

 

그 과정에서 재벌은 전체 경제보다 더 빨리 성장했으며, 큰 그룹일수록 훨씬 더 빨리 성장했다. 현대, 삼성, 럭키, 대우, 쌍용이 5대 재벌을 이뤘고, 정부의 지원 아래 빠르게 대자본으로 성장했다.

 

3) 1960~70년대 농촌을 떠나온 노동자

 

1960년 86만 명이던 노동자수는 1975년 367만 명에 이르렀다. 그 시절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농촌을 떠나온 이들로서, 농민의 자식이었다. 1960년대에는 영세한 농민 가족 전체가 고향을 떠난 반면, 1970년대에는 대부분 15~25세의 청년이 홀로 농촌을 떠났다.

 

1960~70년대 노동자들의 삶은 너무나 참담했다. 엄청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노동자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노동시간은 하루 12~16시간이나 됐으며, 하루 24시간 꼴딱 밤을 새워가며 철야노동을 할 때도 많았다. 임금은 굶어 죽는 걸 겨우 면할 정도였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린 고도성장 밑에서 높아가는 국민소득은 평균치일 뿐, 그 혜택은 모두 자본가들의 차지였다. 1960년대 노동생산성이 연평균 12% 증가했지만,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연평균 2.4%만 상승했다.

 

노동자는 인간이 아닌 기계로 취급당했다. 1960년대를 거치며 산업재해 사망자 수가 30배로 증가하였고, 1970년대부터는 단연 세계 1위를 기록하면서 세계적인 ‘산재왕국’이 됐다. 자본가들이 돈을 하늘 높이 쌓아갈수록, 노동자들은 피눈물만 늘어나고 있었다.

 

농촌의 딸, 빈민촌의 아들이 1970년대 노동자의 다수를 이룬다. 이들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노동자라서, 어릴 때부터 노동자의 생활과 정서를 접해 온 지금의 노동자들과는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다르다. 회사는 가부장적인 권위와 강압적인 노무관리로 어린 노동자들을 맘껏 부려먹고, 농민층에서 대거 유입된 나이 어리고 학력 낮은 노동자들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을 받는다. 회사에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회사의 규칙이 곧 법이다. 권리를 주장해야 할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이 있는지조차 모르니 사업주가 노동관계 법률을 제대로 지킬 리도 없다. 회사는 노동자들을 기숙사에 넣어 놓고 외출도 통제하고, 현장에서는 인격을 무시하는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구타하는 일도 예사로 일어난다. 임금을 떼이고 거리를 헤매는 일도 다반사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배우지 못한 것이 죄’라고 자신을 한탄하며 열악한 조건을 감수한다. 하루 14시간 이상을 미싱 대가리에 고개 처박고 일하면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장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 …

 

노동자라는 동질성이 말이나 행동으로 표출되는 곳은 회사 밖 술집뿐이다. 사회에서 자본의 힘이 안 뻗치는 곳이 어디 있으랴마는 회사라는 자본가의 울타리에만 들어서면 노동자들은 쉽게 분열한다. 회사가 승진, 호봉, 성과금 등을 미끼로 인사고과 점수를 매기며 노동자들의 분열을 조장할 때, 노동자들은 담당 반장이나 계장의 평가와 자신의 시급이 얼마인지에 더 관심을 쏟는다. 같은 또래나 입사 동기와 비교해서 자기가 더 나으면 은근히 으스대고, 그렇지 못하면 자기의 실력을 몰라준다고 푸념이나 늘어놓으면서, 정작 자신들을 반목하게 하는 자본가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못한다.[1]

 

1976년 한국의 산업재해율은 미국과 영국의 5배였고, 일본의 15배였다. 자본가들은 작업장의 안전조치를 위한 투자를 거의 하지 않았다.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아마 울산의 현대중공업일 것이다. 조선소가 가동된 초기 3년간(1972~75) 2천 건 이상의 산재사고가 발생했으며, 그로 인하여 83명의 조선노동자가 사망했다. 그뿐만 아니라 열악한 노동조건은 노동자들의 건강에 심각한 해를 끼쳤다. 대부분의 공장노동자들은 기준치를 넘는 소음, 먼지, 열, 가스 때문에 많은 직업병을 앓았다. ‘죽음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원진레이온 공장 중에서는 2차 대전 중에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데 사용했다는 이황화탄소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안전시설은 전혀 없었고, 노동자들은 방독면을 쓰고 매월 정규노동시간 2백 시간 외에도 평균 1백 20시간씩 초과 노동을 해야 했다.[2]

 

4)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와 재벌 체제의 확립

 

1970년대 말 제2차 오일쇼크로 세계경제가 다시 한 번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한국경제도 큰 타격을 받았다. 연 평균 10% 내외이던 경제성장률이 1980년 -1.7%로 추락했다. 그런 상황에서 재벌들의 중화학공업 중복투자는 대기업들을 대거 위기로 몰아넣는 역할을 했다.

 

1979년 12·12 쿠데타와 1980년 5·17 쿠데타를 연쇄적으로 단행하여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재벌들의 중화학공업 중복투자를 강압적으로 조정했다. 자동차(현대·대우), 전자(삼성), 중전기(현대·효성), 철강제련(럭키), 발전설비(공기업) 등 각 산업마다 이를 담당할 재벌을 지정해 주면서 나머지 재벌은 손을 떼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7개 부문, 26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강제 인수합병을 통한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각 산업마다 독점적 지위를 가진 재벌의 수익성을 원활하게 보장해 주기 위한 조치였다.

 

정권은 또한 해외 건설, 해운업, 조선, 합판, 제지, 종합상사 등 광범위한 업종에 걸쳐 부실기업을 정리했다. 부실기업을 인수하는 기업에게는 부채를 탕감하고 세금을 면제해 주는 특혜를 주었다. 국가소유의 은행들을 하나씩 민영화하면서 재벌들도 은행지분을 소유할 수 있게 했다. 이제 재벌은 경공업, 중화학공업, 전자산업과 같은 제조업뿐만 아니라 금융, 건설, 골프장, 호텔 등 모든 분야를 다 가지게 됐다.

 

재벌은 전두환 정권 시기를 거치며 전체 경제를 지배하는 독점자본으로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총매출에서 12대 재벌의 매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1972년 14.6%에서 1987년 33.4%로 늘어났다. 소수 재벌들이 한국 경제를 좌우하는 재벌 체제가 확립됐다.

 

5) 1980년대 최대 계급이 된 노동자

 

1980년대 재벌이 거대한 독점자본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 노동자 수도 엄청나게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사회 구성에서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가 한국 사회에서 확고한 최대 다수 계급으로 올라선 것이다. 1960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농민(65.2%)으로 노동자(11.4%)를 압도했다. 그런데 1980년 노동자(37.2%)의 비중이 농민(33.5%)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도시중간계급(25.8%)도 상당한 비중에 이르렀다. 1985년에 이르면, 노동자(41.5%)의 비중이 농민(23.9%)의 거의 두 배에 이를 정도가 됐다. 도시중간계급(32.0%)도 농민을 능가했다. 노동자 수는 1980년 473만 명에서 1985년 637만 명으로 늘었다.

 

1980년대에도 노동자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재벌에게는 천국과 같은 세상이었지만,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착취와 억압에 시달렸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임금인상 억제 정책을 강도 높게 폈다. 1984년 공무원 봉급을 동결하는 등 공공부문부터 임금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여 민간기업까지 확장했다. 1980년대 중반 4인 가족 최저생계비로 월 52만 원이 요구되었지만, 대기업 생산직의 통상임금은 월 21만 원에 그치고 있었다.

 

노동시간은 길고 임금은 적었다. 자재 결품으로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을 제일 신나는 날로 여길 정도였다. 시간으로 임금을 책정하다 보니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할증률과 더불어 임금이 올라갔다. 일을 적당히 하고 건강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은 뒷전으로 밀렸다. 할증률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았다. 휴일 없이 잔업과 특근을 하며 기계처럼 일하다가 과로사하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회사에서 나눠준, 청바지 원단으로 만든 작업복은 두꺼워 몸에 감겼다. 하루 종일 선풍기 하나 없는 공장에서 일하고 나면 속옷과 온몸에 시퍼런 물이 들었다. 쉬는 시간에는 양말과 장화에 고인 땀을 짜냈고, 접촉성 피부염을 달고 살았다. 겨울에는 나무를 집어다 불을 때 공장을 데운 후 일을 시작하곤 했다. 용접용 안경은 유리로 만들어져 무겁고, 외국에서 수입한 것이라 크기도 맞지 않았다.

 

컨베이어 속도가 빨라 관절 이상, 디스크, 위장병 등에 시달렸다. 늘 과로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에게 식사는 보잘 것 없었다. 식당에 가면 관리자와 노동자가 서로 구분된 공간에서 밥을 먹었다.

 

노동자 대다수가 미혼 남성인데, 독신자 기숙사는 턱없이 부족했다. 대부분 두세 명이 자취방을 얻어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하며 생활하거나 하숙했다.

 

노동자들은 공장 주변 술집에서 노동으로 지친 몸을 달랬다. 공장 주변에는 슬레이트 지붕의 조그만 선술집들이 많았다. 노동자들은 막걸리집에 들러 안주 하나 시켜놓고 술을 마신 후 기숙사로 자취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공장 안은 군대 같았다. 정문을 통과할 때부터 경비가 장발을 단속했고, 회사복 착용자만 통과시켰다. 조반장 위계질서가 확실했고, 어쩌다 불량이라도 내면 정강이를 차고, 쥐어박는 건 일상이었다. ‘안전과’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 안전과 수칙을 안 지켜 적발되면 그 기록이 고과에 반영되어 보너스, 시급 차이로 나타났다. 출근할 때 경비반장에게 잡혀도 감점이었다.

 

불만이 목까지 차 있었지만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술자리에서도 조심스러웠다. 술 마시고 화풀이하거나 대들면 그대로 짐을 싸야 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이 불만을 호소할 조직도 없었다.[3]

 


[1] 안승천, 2002,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13~16쪽.

[2] 노동사회교육원, 2008, 『금속노동자를 위한 노동운동사』, 전국금속노동조합, 84~85쪽.

[3]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서영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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