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정신은 언제나 노동자를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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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40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정신은 언제나 노동자를 깨운다!

구로동맹파업 40주년, 선배 노동자들의 피맺힌 투쟁

  • 이용덕
  • 등록 2025.06.26 17:39
  • 조회수 156

 

농성인원을 점검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투쟁결의를 모았다.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미싱에서 기름을 빼서, 재단 반에서 찾은 솜에 묻혀 횃불을 밝히고, 방을 뒤져다가 화염병을 만들었다. 모두 자신을 보호할 무기를 하나씩 찾아들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두려움 없이 싸울 것”을 결의했다. 조합원들이 힘들어할 때 간부들과 지도부는 몇 곱절 목소리를 높여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갈수록 허기져서 버틸 힘이 없었다. 모두들 태어나 처음으로 며칠씩 배를 곯고 속옷도 못 갈아입고 씻지도 못했다. (···) 물도 먹을 수 없고 화장실 물을 받아다가 사무실에서 쓰는 가스렌지에 물을 끓였다. 그 때 누군가 물을 끓이기 위해 넣은 옥수수가 퉁퉁 불어 먹어보니 먹을 만하다고 말했다. 많이 힘든 사람부터 먹기로 했다. 자신도 배고파 힘들면서도 동지를 먼저 챙기는 모습은 투쟁에서 만나는 소중한 동지애다. 쓰러지는 친구들이 나타나자 설탕물을 조금씩 타서 먹였다. (김준희, 대우어패럴 전 사무장,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 삶을 말하다”, 유경순 엮음, 메이데이, 86쪽)

 

40년 전인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의 한 장면이다. 1985년 6월 24일, 서울 구로공단에서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연대파업이 시작됐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자계급이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중심, 변혁운동의 주체임을 각인시켰다. 수많은 선진노동자를 배출시키며 노동자 정치적 발전을 추동했고, 87년 노동자대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구로공단은 1960년대 말 박정희 정권이 조성한 수출산업 공단 제1호 지역이었다. 노동자들은 주로 섬유, 봉제, 전자제품 공장에서 일했다. 1970년대 한국의 전체 수출액에서 구로공단의 생산품이 약 10%나 차지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리직과의 차별 대우, 성희롱, 성폭력이 극심했다. 구로지역 사업장들의 임금 수준은 1인당 국민소득이 1,988달러, 즉 5인 가족 기준 1가구 평균이 70만 원이었던 그 당시에 월 10만 원 정도였다.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기본 근무 10시간에 항상 2∼8시간의 잔업, 철야까지 월평균 80여 시간, 심지어 110시간의 초과근무를 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공순이’, ‘공돌이’로 불리는 일하는 기계였을 뿐이었다.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강요받았다.

 

노동자가 200명이 훨씬 넘었는데 화장실은 남녀 한 칸씩만 있고, 그것도 붙어있는 데다가 문은 판자쪼가리로 안이 다 보이고, 잠그는 고리도 없고, 변은 넘쳐서 발 디딜 곳도 없어서 화장실 가는 게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김현옥, 선일섬유 전 위원장,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 삶을 말하다”, 유경순 엮음, 메이데이, 18쪽)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투쟁이 아니다

 

폭압을 이어가던 전두환 정권은 1983년 2월부터 12월까지 구속자 석방, 사면·복권, 제적생 복교, 대학 상주 경찰의 철수, 해직교수 복직 등의 정치적 유화조치를 단계적으로 실행했다. 집권 안정기에 들어섰다는 자신감, 탄압의 효력 감소, 1983년 11월 미국 대통령 레이건 방한을 대비한 분위기 조성 등이 그 이유였다.

 

군사정권의 유화조치는 민주화 투쟁이 다시 활성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일시적으로 활동공간이 열리자, 저임금과 높은 노동강도에 고통받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최저생계비 확보와 노동악법 철폐 투쟁에 나섰다. 1983년 ‘민주노동운동자 블랙리스트철폐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블랙리스트 철폐투쟁을 벌였고 1984년에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를 위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1984년 구로공단에도 민주노조가 연이어 결성됐다. 1984년 가리봉전자, 대우어패럴에 이어 효성물산에서도 7월 14일 여성노동자들이 모여 민주노조를 결성했다. 대우어패럴에 이어 대한마이크로,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효성물산, 협진, 유니전 등에서 속속 민주노조가 결성됐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서 배출된 노동자출신 활동가들과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각 사업장에 들어가서 끈질기게 활동한 결과였다.

 

이 시기 구로공단 민주노조운동의 특징은 다양한 방식의 연대와 의식적 조직화에 있다. 연대 활동은 신생 노조로서 노조 운영을 위한 정보 교환과 자문이 필요하다는 요구에서 노조 간부들 간의 가벼운 교류로 시작됐으나 점차 노조 운동의 방향을 공유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노조 탄압 사례 발표를 통해 여러 노조의 조합원들이 비슷하게 탄압받은 경험을 공유하고 분노하면서 노동자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탄압이 한 기업 차원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면서 공동 대처 방안을 찾았다.

 

노조 현판식 같은 기념행사나 문화 행사에 서로 번갈아 참여했다. 탈춤, 꽃꽂이, 연극 등 다양한 공동체 프로그램에 있었다. 숙박 교육에 참여한 조합원들은 공식적인 교육 일정이 끝나면 서로 간에 각자의 회사 이야기나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너희 회사, 우리 회사’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어울리게 됨으로써 노동자들의 일체감은 더욱 높아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공개로 여러 노조의 간부들이 참여하는 지역 소모임을 만들어 학습하면서 사회를 보는 눈을 넓혀가는 지역 활동도 전개했다. 이런 활동이 공동으로 싸울 수 있는 기초였고 토대였다. 소모임과 비공개조직에서 단련된 투사들, 노동자의 대의, 투쟁, 연대를 끊임없이 실어 나르며 선두에서 투쟁하는 선진 투사들이 있었기에 조합원들은 굴종이 아니라 투쟁을 선택할 수 있었다.

 

노동자 소모임 프로그램의 기본 틀은 다음과 같다.

[1단계 프로그램] 노동자의 현장과 생활에서 출발하는 토론 → 의식화에 초점

(예) ‘근로자를 가족처럼’, ‘공장일을 내 일처럼’ 등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충효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토론과 교양 + 각 사업장 근로조건을 비교하고 토론

[2단계 프로그램]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등의 사회문제를 둘러싼 토론

[3단계 프로그램] 노동운동사 및 정치경제학적 기초교양”

 

이런 소모임은 4~6명을 기본 단위로 하여 6~7개 정도가 비공개로 추진되었다. 대우어패럴 교선부장 김준희는 가리봉전자, 남성전기, 협진양행 노동자 5명으로 구성된 한 소모임에 참여했다. 소모임에서는 각 공장의 실태와 운동 상황이 토론되고 노동의 역사, 일하는 사람을 위한 경제지식, 어머니 등을 읽고 학습을 했으며 다른 사업장의 노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동질감을 형성해 갔다. 지역소모임을 통한 조직과 의식화는 새로운 노동운동가를 양성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노조에서도 조합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역할을 했으며 나아가 노조 간의 지역연대 활동에 기초가 됐다.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지난 6월 15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스튜디오R, 학생사회주의자연대가 함께 개최한 <구로동맹파업 40주년, 역사기행>에 강사로 참여한 대우어패를 전 사무장 강명자 동지는 기숙사 일찍 소등해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었던 경험, 사업장을 뛰어넘어 연대했던 경험을 얘기하며 노동자들이 열심히 배우려 했고, 일상적으로 연대하려 했기 때문에 동맹파업이 가능했다고 얘기했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파업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센터 소장도 강사로 참여했는데, 대우어패럴에 골방파(학습 중심)와 고고장파(조직화 중심)가 있었는데 이 둘이 하나로 힘을 모았기에 노동자들의 힘이 세졌다고 했다.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 중요하다는 얘기였다.

 

파업의 도화선

 

동맹파업의 직접적 계기는 구로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중심이었던 대우어패럴 노조 간부 3인의 구속이었다. 6월 22일 오전 11시에 대우어패럴노조 김준용 위원장, 강명자 사무국장, 추재숙 여성부장이 연행·구속되고, 간부 8명이 불구속으로 입건됐다.

 

소식을 듣고 분노한 조합원들은 즉각 작업을 중단했다. 100여 명이 회사 총무과에 몰려가 고발 취소를 요구하며 오후 5시까지 농성을 벌였다. 이후 간부들은 밤을 새워 대책회의를 하고, 이튿날(23일) 대의원 전체가 모여 총파업을 결의했다.

 

대우어패럴 간부들이 구속되던 날인 토요일 안양에 있는 기독교 원로원에서는 구로공단의 효성물산노조, 선일섬유노조, 가리봉전자 노조 간부와 조합원, 구로지역의 활동가와 해고노동자 150여 명이 합동교육을 받고 있었다. 대우어패럴 노조 간부들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노동자들은 대응책을 찾았다. 대우어패럴노조에 대한 탄압은 대우어패럴만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노조탄압의 첫 신호이기 때문에 자신들 모두에게 닥쳐올 문제라고 인식했다.

 

노동자들은 “70년대 선배 노동자들이 치열하게 잘 싸웠지만, 그러나 단위노동조합이 작업장 별로 따로따로 싸우다가 1981년, 1982년 전두환 정권의 노조 탄압으로 모두 깨지는 결과를 가져왔다”라는 생각을 공유했다. 함께 연대투쟁으로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탄압에 대응할 것을 모색하였다.

 

동맹파업의 시작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 등 3개 노조는 6월 24일 오후 2시에 연대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세진전자·청계피복·선일섬유 노조가 공동으로 발표한 ‘노동조합 탄압저지 결사투쟁선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대우 노동조합 탄압은 80년의 저 무시무시한 노동조합 탄압을 되새기게 한다. 현 정권은 70년대의 민주노조들을 하나씩 차례로 깨부숴버렸다. …80년 이후 5년간 우리는 노동자의 기본 권리를 한 치도 허용하지 않는 암담한 현실을 뚫고 일어섰다. 갖은 탄압과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주노조의 전통을 이어온 우리가 물러설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번 대우 노조 파괴음모가 모든 민주노조에 대한 사형선고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임금인상조차도 못하는 노동조합으로 비굴하게 살아남을 건가? 가만히 앉아서 민주노조가 차례로 깨져나가길 기다리고 있을 건가? 우리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두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다. …민주노조 선진노동자들이여! 함께 일어나 싸우자! 천만 노동자의 동지애로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6월 24일 오전 7시 반, 대우어패럴 조합원 350여 명이 관리자들의 방해를 뚫고 1공장 2층 생산과 작업실에 집결해 ‘우리의 결의문’을 낭독하고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조합원들은 “노조간부 석방하라, 민주노조 탄압마라, 노동악법 개정하라, 집시법·언론기본법 폐지하라, 노동부장관 물러나라”를 소리 높여 외쳤다.

 

회사에서는 파업을 미리 예상한 듯 현장출입구에 관리자들이 모두 나와 서 있었고 평소 7시 30분에 열리는 현장 문이 7시 45분이 지나서야 열렸다. 50분에 각 현장별로 실시되는 국민체조가 끝나기를 기다려 각과 부위원장들은 작업대 위로 올라가 위원장이 부당하게 구속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같이 싸우기를 호소했다. 각과 조합원들이 1과 현장으로 속속 모여들었고 노조사무실에서 대기하던 2공장 조합원들도 합세했다. 밀고 들어오는 도중에 저지하던 관리자와 격돌하여 조합원 전재선이 쇠파이프를 맞고 코를 병원에서 세 바늘 꿰매고 돌아오는 사태도 벌어졌다. 관리자들의 저지를 받아 미처 들어오지 못하고 쫓겨난 조합원도 수십 명이었다. 1과 현장에 모인 인원은 285명이었다. 조합원들은 먼저 미싱과 원단을 쌓아 출입구를 차단하고 대열을 정비한 후에 소리 높여 ‘결단가’를 불러 사기를 올렸다.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오후 2시가 되자 마주보는 건물에 있는 효성물산노조 조합원 400여 명이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파업에 동참했다. 같은 시각, 가리봉전자 구로공장과 독산공장 500여 명과 선일섬유 노동자들까지 농성을 시작했다. 동맹파업 첫날 4개 노조 조합원 1,300여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3개 사업장 사측은 곧바로 물과 전기를 차단해버렸다. 경찰 150여 명은 신일섬유 농성장을 봉쇄했다.

 

효성물산과 대우어패럴은 서로 마주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효성물산의 조합원들이 2층 건물 베란다로 나가 “대우, 힘내라”고 외치기도 했고, 그 소리에 건너편 대우어패럴에서는 “효성 힘내라”고 외치며 투쟁을 전개했다. 효성물산의 조합원들은 취침 시간에도 대우어패럴에서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지면 모두 난간으로 나가 꽹과리 치면서 안부를 확인하였다.

 

가리봉전자에서는 사무장 윤혜련이 조합원들을 현장에 다 모이게 한 후 임시총회를 열고 대우어패럴의 노조 탄압을 알리는 선전물의 배포하고 같이 투쟁해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조합원들이 공동 투쟁을 결의하고 바로 파업에 들어가면서 현장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1985년 6월 25일 동아일보

 

6월 25일 남성전기노조 조합원 300여 명이 오후부터 농성을 시작했다. 세진전자노조 조합원 250여 명도 오후 5시 30분부터 11시까지 회사 운동장에서 지지농성을 했다. 롬코리아도 2층 식당에서 100여 명이 철야농성을 전개했다. 이렇게 연대투쟁은 하루 만에 7개 사업장으로 확산했다. 이날 구로공단과 주변 주택가 곳곳에는 ‘구로지역 20만 노동자여! 다함께 일어나 싸워나가자!’라는 제목의 유인물이 살포됐다.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연합·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청계피복노조 명의의 유인물의 주요 내용은 “6월 26일 오후 8시 30분 가리봉오거리에 총집결해 ‘전두환 정권의 노동자 탄압을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벌이자”라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내세웠다. 개별 사업장의 요구를 뛰어넘는 전체 노동자의 요구, 경제적인 요구를 뛰어넘는 정치적인 요구를 제기했다.

 

1. 정부당국은 대우어페럴노동조합 위원장 김준용 동지를 비롯한 구속자 전원을 즉각 석방하라!

2. 정부당국은 민주노조운동을 짓밟는 모든 악법(집회시위법, 언론기본법, 노동악법 등)을 즉각 철폐하라!

3. 정부당국은 부당해고자 전원을 즉각 복직시켜라!

4. 정부당국은 정책적인 어용노조 설립을 즉각 중단하라!

5. 정부당국은 임금동결정책을 포기하고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라!

6. 민주노동조합 파괴에 앞장서 온 조철권 노동부장관은 즉각 물러가라!

 

악랄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은 투쟁의지

 

정부와 회사의 탄압은 악랄했다.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사업장 주위와 구로공단 요소요소에 배치해 지원 연대를 차단하려 했고 회사 측은 농성장에 대한 단전 단수와 함께 음식물을 일절 들여보내지 않아 노동자들은 주린 배를 움켜잡고 투쟁해야 했다.

 

효성물산의 경우, 파업 시작 첫날 밖에서 빵과 음료 등을 넣어주었으나 그다음 날부터 경찰이 이를 막은 데 이어 전기불과 수돗물까지 차단했으며 물이 안 나오니 화장실까지 막혀 농성 노동자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대우어패럴에서도 회사 측이 단전 단수와 함께 음식물 반입을 막았다. 3일째 되는 날에는 배가 고파 쓰린 배를 움켜쥔 조합원들 사이에 “지나가는 쥐라도 있으면 잡아먹고 싶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에도 노동자들이 계속 파업을 벌일 수 있었던 이유는 같이 싸우는 동료들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 통탄할만한 농성반대 집회가 있고 나서 밖에 있는 조합원들을 퇴근시키더니 다시는 출근을 시키지 않았다. 그 일로 쟁의부장 박신자 동지가 온몸이 돌아가며 쓰러졌다. 병원에 가야 한다며 밖에 내보내려 했는데 쟁의부장은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 손을 따 달라”고 해서 모든 동료들이 달려들어 따고 주무르고, 농성장이 한바탕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렇지만 쟁의부장이 보여준 투쟁의지는 다른 동지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김현옥, 선일섬유 전 위원장,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 삶을 말하다”, 유경순 엮음, 메이데이, 35쪽)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투쟁은 다른 지역으로 계속 번져갔다. 삼성제약 조합원들도 농성과 점심 식사 거부로 지지를 표명했고, 저 멀리 경남 창원에 있는 (주)통일 노조도 지지를 표명했고 연대투쟁을 조직했다. 농민운동 단체들도 성명을 발표하여 정권의 노조 탄압을 규탄하고 동맹파업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표명하였다.

 

 

6월 27일, 대우어패럴에서는 회사에서 동원한 노동자 300여 명이 노조반대 농성을 했고, 가리봉전자에서는 새벽에 회사 관리자와 구사대들이 식당 문을 두드리고 욕을 하고 각목을 휘두르며 폭력적으로 파업을 방해했다.

 

6월 28일, 부흥사 조합원도 노동운동 탄압에 항의하여 동맹파업을 시작했다. 120여 명이 출근과 동시에 3층 작업장에서 구속노동자 석방을 요구하며 연대투쟁에 동참했다. 그러나 관리직 남성들이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휘두르며 난입해 오후 4시 30분경 해산당하고 말았다. 회사는 해산 이후 공갈, 협박, 폭행으로 80여 명에게 사직서를 쓰게 하고 29일부터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남성전자, 세진전자, 롬코리아 등의 지지 농성 투쟁도 이어졌다. 롬코리아는 대우어패럴의 파업을 알게 된 대의원들이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되겠냐”라며 위원장에게 따져서 지지 투쟁을 시작했으며 조합원들은 근무시간이 끝나고 이틀 밤을 새우면서 지지 농성을 벌였다.

 

한편, 효성물산노조가 회사로부터 보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26일 밤 11시에 농성을 해산했으나 회사는 7월 3일까지 휴업공고를 냈다. 효성물산과 청계피복 조합원 100여 명은 27일 오후에 노동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노동부 중부지방사무소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강제해산을 당했고 물론 청계피복노조 사무장과 효성물산 노조위원장 등 7명이 구속되고 말았다. 27일에 농성을 해산한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에서도 농성을 주도했던 노동자들에 대한 보복 폭력이 난무했다.

 

6월 27일 음식 반입까지 가로막힌 가운데 탈진한 노동자들이 실려 나가고 남은 대우어패럴 농성자는 100명 남짓으로 줄었다. 그런데도 회사는 비조합원 300여 명을 강제 동원해 농성장 앞 운동장에서 4시간 동안 노조를 비방하는 구호를 외쳐대는 등 방해 책동에 열을 올렸다.

 

 

6월 29일 오전 8시경 대학생 18명이 빵과 우유, 의약품을 짊어지고 지붕을 타고 넘어 합류했다. 농성장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다급해진 회사는 깡패 500여 명과 사복경찰을 동원해 벽을 뚫고 진입했다. 해산 과정에서 구사대가 각목과 쇠파이프로 농성 노동자들을 폭행했으나 경찰은 이를 묵인하고 방관했다.

 

6월 29일 7시 즈음. 기상해서 출근 시간에 맞추어 창틀에 매달려 있는데 한일은행 담을 타고 학생들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노동자들이 반가워서 몰려가 환호, 박수로 환영하고 학생대표의 인사말을 들었다. 그러나 채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현장 벽이 부서지면서 관리자, 경비, 반대파들이 돌과 각목을 던지고 소화기를 뿜어대며 급습, 관리자 200여 명이 각목과 쇠파이프, 의자, 발길질 등으로 가릴 것 없이 농성자들을 구타하면서 머리채, 손발 아무데나 휘어잡고 기숙사 쪽으로 끌고 갔다. 회사 측의 폭력을 피해 20여 명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다 모두 잡혀 남부서로 연행, 회사로 다시 끌려와 기숙사에 갇혔다.

기숙사로 끌려간 농성자들은 한방에 5명씩 갇혀서 1인당 비조합원 3명에게 감시당하면서 갖은 모욕을 당했다. 11시 즈음 의사들이 들어와 진정제를 억지로 먹여서 농성자들은 잠이 들었다. 오후 2시 30분 즈음 이들은 깨어나 죽 한 그릇씩을 먹었다. 관리자들은 수시로 드나들며 “경찰서로 직행시켜야 한다”, “입에다 똥을 처넣어야 한다”는 등의 폭언과 협박을 함부로 했다. 그 이후 회사 측은 농성자들을 한 명씩 총무과에 끌고 가 부모까지 동원하여 강제로 사표를 쓰게 했다.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이처럼 6월 24일부터 4개 사업장으로 시작된 동맹파업은 6일 동안 굶주리면서 싸운 대우어패럴 노동자 80여 명이 강제 해산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농성을 풀었다가 신민당사에서 다시 농성을 벌이던 효성물산노조 조합원 36명도 30일 “신민당이 노동운동 탄압과 폭력 사태를 막기 위해 노력하겠다”라는 약속(성명 발표)을 받고 농성을 풀었다.

 

구로공단에 있는 5개 사업장에서 약 1,400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을 벌였고, 또 다른 5개 사업장에서 연대투쟁을 벌이는 등, 2,500여 명의 노동자가 투쟁에 참여했다. 투쟁 과정에서 구속 43명, 불구속 입건 38명, 구류 47명, 그리고 2,000여 명이 해고 및 강제사직으로 공장에서 쫓겨났다.

 

빛나는 의의와 함께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은 경제적 요구를 넘어 국가권력을 상대로 정치적 요구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정치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구로동맹파업은 이후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정치투쟁 조직이 출범하는 근거가 되었다. 빛나는 의의와 더불어 우리는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통, 지금도 겪고 있는 거대한 고통도 잊지 말아야 하고, 그 당시 활동가들의 반성도 눈여겨 돌아봐야 한다.

 

"예전엔 블랙리스트에 걸려서 이 거리를 못 움직였는데, 지금은 돈이 없어서 이 거리를 못 움직여요. 이렇게 투어를 할 때 한번씩 와서 여러분들한테 인사를 하게 되네요. 역사적인 장소 산업민주화와 혁명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여기만 오면 저는 슬퍼요. 제가 아직까지도 우리 대우어패럴 동지들 모임 회장을 맡고 있는데, 친구들과 동생들이 지금까지도 울면서 저한테 전화를 해요. 그때 열여덟 열아홉 되었을 때, 성폭력 당해서 결혼 해가지고도 말 못하고 고통스러워서 하는 동생들이 있어요. 지금까지도 노동조합 했다는 소리를 남편이고 아이들한테 못 한 사람들도 있고요. 실신하고 들쳐 엎는 상황에서도 자기의 소중한 부위를 만지는 걸 느낌으로 알 수 있잖아요. 성추행이잖아요. 지금 같으면 언론이나 연대싸움을 해서라도 떠들 수가 있는데, 그렇게 못한 게 너무도 한이 돼서 지금도 말 못하고 언니한테만 얘기한다고 울어요. 저도 그 얘기를 들으면 슬퍼서 울어요. 사람이 사람답고자 했던 행위가 하나의 인간으로 대접 못 받는 수치를 많이 남긴 거잖아요." (강명자 대우어패럴노조 전 사무장 발언, "지금도 노조했단 말 못한단 얘기 들으면, 슬퍼서 울어요", 연정, 오마이뉴스)

 

나를 포함해 노동운동에 뛰어든 학출 활동가들이 갖고 있던 지적인 허영과 오만, 가장 옳은 입장이라고 자처했던 독선, 노동자들을 대상화했던 순간들, 비민주성, 패권주의, 자신조차 추스르지 못하고 상처받은 노동자 동지들의 손을 놓아버린 약하고 무책임한 뒷모습···· 모든 것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부끄러움과 고통으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혜경, 전 가리봉전자 부위원장,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 삶을 말하다”, 유경순 엮음, 메이데이, 229쪽)

 

당시는 노동운동의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선진 투사들이 노동해방사회의 건설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활동한 것은 아니었고, 여러 정치적, 실천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구로동맹파업을 신화적으로 기억해선 안 된다. 의의만이 아니라 한계까지도 곱씹어 전진해 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그럼에도 구로동맹파업의 의의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는다. 당장의 실리에 집착하면서 노동자의 대의를 내팽개치는 조합주의, 관료주의에 맞서 구로연대파업이 보여주었던 계급적 단결과 연대의 정신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 동맹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내 사업장만 살자‘는 조합주의를 넘어, ’옆 사업장이 깨지면 다음은 우리 차례‘라는 절박함으로 ’함께 싸워야 이긴다‘는 계급적 연대를 선택했다. 물과 전기가 끊긴 공장 안에서도, 밥 한 끼 없이 쓰러져 가는 와중에도 서로를 부축하며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웠다. 나의 투쟁과 당신의 투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끝까지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40년 전 구로동맹파업이 남긴 가장 빛나는 유산이자, 오늘의 비정규·미조직·청년·여성 노동자들의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바꿀 수 있는 무기다. 구로동맹파업 40주년, 그 정신은 영원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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