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부트 이후, 이전과 달라진 장면 중 하나는 페미니즘 도서가 쏟아진 것이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2013년 8,023권에 불과했던 페미니즘 관련 도서 매출권 수는 2017년에 이미 6만3,196권으로 폭증했다. 리부트 이후 여성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페미니즘 도서를 후원했고, 그런 지원에 힘입어 이제는 페미니즘 정의부터 역사까지, 자궁부터 체제까지 각양각색의 도서를 찾아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러한 풍요 속에서도 왠지 뭔가 빠진 것만 같다. 바로 페미니즘 도서 랭킹은 있으되 토론은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미국 제국주의를 떠받쳐 온 부르주아 페미니스트 힐러리도 거칠 것 없이 ‘친구’처럼 느낀다고 말하는 페미니스트 정희진이 미국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해 온 앤절라 Y. 데이비스의 《여성, 인종, 계급》 해제를 썼지만, 이런 것쯤은 아무런 토론 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현실에서는 여성 CEO가 페미니스트의 롤모델이 되고, 기업은 페미니즘 언어로 광고하면서도, 면접에서는 페미니즘에 관한 질문으로 여성 구직자를 가르는 해괴한 상황이 됐다.
여성운동의 분화
이같이 모순적인 사정은 페미니즘 진영의 현실을 반영한다. 서구와 유사하게 한국에서도 페미니즘 진영은 계속해서 분화해 왔지만, 계급에 관한 토론은 부차적이었다. 가부장적이며 개혁주의에 편향된 진보진영 내에서 페미니즘 운동은 계급보다는 가부장제 문제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화를 추구해 왔기 때문이다.
애초 국내 여성운동은 군사독재 시절 민족민주운동과 함께 성장했으나, 동구 몰락과 잇따른 탈계급화, 운동사회의 가부장성 속에서 90년대 이후 페미니즘을 단일 의제로 분리 정립하여 발전해 왔다. 그러나 페미니즘 의제에 입각한 사회 변화를 위해서는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조건에서 여성운동은 각 정치세력과 교섭해 왔다. 첫 번째 동맹은 여성운동이 90년대 말 이후 성 주류화 전략을 채택하고 국회와 정부기관에 진입하기 시작하며 동거한 김대중 정부였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계급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정치세력을 동맹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전략이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경향은 신자유주의 김대중 정부와 동거한 여성 정치인들부터 추적단불꽃 출신으로 지난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공동비대위원장으로 발탁됐다가 사실상 쫓겨난 박지현까지 계속됐다. 두 번째 동맹은 2000년대 민주노동당을 필두로 여기서 분화된 정의당, 진보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이다. 이들은 계급 문제를 중시했지만, 그럼에도 의회 중심의 개혁주의 속에서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에 한정되는 부문운동으로 취급되는 한계를 노정했다. 더구나 진보진영 내 가부장성으로 인해 페미니스트들은 진보진영에서 서서히 이탈해 갔다. 그런 조건에서 2010년대 중반 페미니즘이 대중화되었지만, 이들의 실천은 기존 운동사회와는 괴리된 채 분리주의적이고 개인적 실천에 한정되었으며, 계급 문제 역시 외면됐다. 결과적으로 2010년대 중반 일부 여성운동은 페미니즘 리부트를 배경으로 기타 정치세력과의 동맹 없이 여성 단일 의제에 기초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면서 더욱 탈계급적인 행보를 보였다. 앞서 여성의당은 여성 자본가에게 후원을 요청*하는 한편, 페미니즘당창당모임은 지난 4월 전주을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밝힌 진보당 후보와 정책연합**한 바 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조건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사회진보를 원하는 많은 페미니스트에게는 자율주의 운동이 호소력을 갖게 됐지만, 이 역시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조직하는 데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결국 페미니즘에 중요한 것은 가부장제로 소급될 뿐 자본주의 체제와 계급 문제는 공백 상태로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자유주의나 개혁주의 또는 자율주의 페미니즘 운동으로 여성억압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갈수록 심화하는 여성억압과 계급 분화를 고려하면, 과연 우리는 어떤 페미니즘 운동으로 노동자계급 여성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지 실천적으로 토론해야 한다.
여성억압과 계급 격차의 심화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억압과 계급분화가 심화하고 있으며, 그것은 리부트 과정에서도 쉼 없이 지속됐다. 이를테면, 가부장제 아래에서도 지배계급에 진입하는 ‘우먼파워’ 여성의 수는 늘어났다. 예컨대 여성장관 비율은 27.8%, 공공 및 민간사업장의 여성관리자 비율은 20.9%, 4급 이상 일반직 국가공무원 중 여성 비율은 17.8%, 변호사 중 여성 비율은 27.8% 등으로 의사결정 직위에 오르는 여성들의 비율은 계속 상승하고 있다.*** 그러나 기층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숨 가쁘게 후퇴했다. 그나마 구할 수 있는, 이인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2008~2012년 국세청의 과세대상 남녀 근로자 소득백분위 자료를 분석한 결과 발표에 따르면, 같은 기간 여성 상위 10%의 소득은 11.5% 증가했지만, 하위 10%는 –6.5%로 감소했다. 2012년 여성 상위 1%의 평균 급여는 1억 4,228만 원이었으며, 하위 1%는 873만 원으로 16배의 차이가 났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는 해마다 늘어나 이제는 여성 2명 중 1명꼴로 나타나며, 또 최저임금을 받는다. 성폭력도 계급적 위계와 직결된다.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여성 노동자 25.8%가 직장에서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특히 비정규직인 여성 노동자의 경우엔 29.5%로 그 비율이 늘어났다.*****
여성 노동자에게 성별에 따른 억압과 착취가 심화하는 이유는 가부장제와 결탁한 자본주의 체제가 그들의 지위를 체계적으로 유린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여성은 가정에서는 가사, 출산, 돌봄의 부담을 떠맡고, 직장에서는 생계 보조자로 위치 지워져 더욱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받는다. 무급 가사돌봄이나 경력단절, 그리고 그로 인한 지위 박탈이 일어나는 구조적인 이유다. 그러나 동아제약에서처럼 채용 성차별이나 KEC 여성 노동자들처럼 직장에 다니고 있는 여성들의 경력도 남성 중심의 승진승급제도에 의해 단절되어 있을 만큼 자본을 위한 가부장제는 현실에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노동자계급 여성을 억압하고 초과착취하는 이 참혹한 자본주의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이 바로 《빵과장미의 도전》(오연홍 엮음, 김요한·양동민·양준석·오연홍·전해성 옮김, 숨쉬는책공장, 2023)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빵과장미의 도전
《빵과장미의 도전》은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혁명적 페미니즘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사회주의 여성단체 ‘빵과장미(Pan y Rosas)’ 이야기다. 2003년 아르헨티나에서 창립해 지금은 수천 명으로 성장했고, 멕시코와 스페인, 프랑스 등 14개국에서도 생겨나 국제네트워크를 결성하고 있다. 이러한 《빵과장미의 도전》은 “이 고통스러운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야만 전 세계 여성의 삶에 만연한 성차별도 끝장낼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기반으로 삼는다”고 한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과 성소수자가 진짜로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사회주의혁명만이 여성억압을 끝장낼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그 주체는 자본주의 체계가 억압하고 착취하는 노동자계급 당사자다. 하지만 이들은 노동자계급이 페미니즘 운동과 단결하고, 유색인종·원주민·성소수자를 비롯해 억압받는 사람들의 운동과 단결하면 무적의 세력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
실제로 빵과장미는 페미니즘 운동을 노동자계급과 연결하고 이들의 요구로 채택하도록 밀어 올리면서 새로운 사회주의 페미니즘 운동을 노동 현장에서 일궈왔다. 빵과장미는 전국 곳곳의 공장과 작업장에 여성위원회(여기에는 여성 노동자뿐 아니라 남성 노동자의 배우자나 어머니, 딸도 포함된다)를 조직하기 위해 애써왔고, 이를 토대로 수많은 계급투쟁을 일으켰다.
(펩시코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여성살해에 맞선 시위의 상징인 '니 우나 메노스(Ni Una Menos)' 구호에서 파생된 "한 명의 해고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구호가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펩시코공장에서는 하청제도에 반대하고 출산휴가를 늘리며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이끌어 왔다. 남성만 고용했던 마디그라프의 한 공장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고 일했던 트랜스여성이 여성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파업을 조직하기도 했다. 크라프트 공장에서도 한 여성 노동자가 관리자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하자, 여성위원회가 파업을 조직했다. 참혹한 여성살해에 떨쳐 일어나 아르헨티나를 뒤흔든 니 우나 메노스(#NiUnaMenos, 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 시위에 이어 임신중지 권리 쟁취 투쟁에서도 현장에서 파업을 일으키고 노조 지도부가 여성파업에 가세하도록 끈질기게 압력을 조직했다. 또 나아가 “한 명도 더 일자리를 잃을 수 없다”, “하청제도는 (여성) 폭력이다”라는 구호를 비롯해 니 우나 메노스 운동 속에서도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를 조직했다. 결국 2003년 아르헨티나에서 몇십 명으로 시작된 빵과장미는 이제 수천 명의 회원과 지지자를 결집해 단독으로 대중적인 집회까지 조직할 수 있는 규모로 성장했다.
이러한 빵과장미는 2001년 아르헨티나 금융위기 동안 벌어진 수많은 공장점거를 비롯한 노동자투쟁 속에서 태어났다. 그중 하나가 여성 노동자가 다수인 브루크만 의류 공장에서 일어났고 이들은 경찰에 맞서 대결했고, 이 투쟁은 아르헨티나 사회주의노동자당이 빵과장미 운동을 조직하는 데 주요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들에게 여성의 권리란 사회주의를 통한 노동자의 집단적인 해방 투쟁의 일부였고, 더구나 국내 민주당처럼 말로만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또 다른 자본주의 정치세력 키르치네르 정부 속에서 노동자계급이 조직돼야 할 필요성은 점점 더 분명해지면서 힘을 키워 나갔다.
이러한 빵과장미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나 실비아 페데리치의 자율주의 페미니즘과는 경로가 다르다. 여성 개인의 성공을 말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운동에서 사회에 대한 더 깊이 있는 비판 정신을 걷어냈고, 우익 여성에게 문을 열어줬다”고 비판한다. 페데리치는 벤사이드가 그의 이론에 대해 ‘현대의 유토피아’라고 표현했듯, “계급과 국가가 없는 사회로 전진하는 수단으로서 노동자계급 사회주의혁명의 가능성을 부정한다”고 논박한다. 빵과장미는 대신 여성해방을 노동자혁명의 중심 과제로 여겼던 러시아 혁명에서 그들 운동의 원류를 찾는다. 실제로 레닌은 “여성의 완전한 자유를 쟁취하지 않는 한 노동자계급은 완전한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주지하듯, 러시아혁명가들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일자리를 마련하고 공공탁아소와 공동식당, 공공세탁소 등을 개설하여 가사노동을 사회화했다. 볼셰비키는 경제적 평등을 위한 조치뿐 아니라 여성억압적인 제도 역시 뜯어고쳤다. 그 결과, 남녀는 법 앞에 평등해졌고, 이혼 절차가 간소화되었으며, 임신중지가 합법화, 성매매는 비범죄화됐다. 동성애 역시 합법화되었으며, 나아가 레즈비언 간의 동성결혼도 보장한 사례가 보고된다. 형법에 성 행위에 관한 언급은 1922년 사라졌으며, 성범죄는 개인의 “생명, 건강, 자유, 존엄”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로 규정됐다. 비혼모의 자녀(사생아)도 법적으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완전한 자유, 평등, 진정한 우정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 관계가 꽃을 피웠다. 이러한 여성해방 조치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보다 최소 60년 이상 앞선 조치였다.
그러나 《빵과장미의 도전》이 지적하듯, 볼셰비키의 혁명은 스탈린의 반혁명에 질식당했고 1917년 혁명 세대는 궤멸됐다. 그럼에도 대표적인 미국 러시아혁명 연구자 웬디 골드먼이 그의 책 <여성·국가·혁명>에서 “스탈린 정권이 저지른 모든 범죄 중 가장 끔찍한 것은 스탈린 관료 체제가 ‘현실 사회주의’라고 온 세계가 믿게 만든 것”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볼셰비키 혁명은 스탈린의 반혁명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빵과장미의 도전》은 볼셰비키는 계급 환원론 관점을 취하기는커녕, 여성해방을 노동자혁명의 중심 과제로 여겼고 현실화했다고 강조한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변혁하는 혁명적 페미니즘 운동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빵과장미는 세계사적으로도 과거 페미니즘 운동과 구별되는 분기점을 형성한다. 선거권이나 재산 소유권을 말했던 페미니즘 1물결도, 섹슈얼리티나 재생산권을 말한 페미니즘 2물결도 여성 억압의 구조적 모순을 웅변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노동자계급의 운동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90년대 이후 부상한 교차페미니즘 역시 다양한 모순에 대한 성찰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계급 문제 역시 모순의 N분의 1로 바라보면서 사회 혁명의 전략을 누락했다. 반면, 대다수 노동운동이나 좌파는 계급투쟁을 경제주의적 이슈로 한정해 여성들에게 외면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페미니즘과 좌파운동으로는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갈수록 여성에 대한 착취와 여성혐오와 살해가 심화하는지 설명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를 변혁할 대중적인 계급운동 역시 조직할 수 없다.
즉 우리에게는 이 노동자계급의 힘으로 이 지독한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여성운동이 필요하며, 그 점에서 빵과장미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시해 준다. 우리는 페미니즘을 말하면서 신자유주의 정권에 타협해 간 여성 정치인들이나 개량주의 페미니즘과는 다른 페미니즘 운동을 건설할 수 있다. 무엇보다 빵과장미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경제적 공격뿐 아니라 여성의 권리에 대한 백래시를 동반한 신자유주의의 폭력에 맞선 여성 노동자계급의 동시대 변혁운동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그 점에서 《빵과장미의 도전》은 여성해방을 꿈꾸는 모든 이들이 연구하고, 토론하며, 참고해야 할 안내서임이 분명하다.
※지난 3월 27일 《빵과장미의 도전》 출간을 기념하는 북콘서트가 열렸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유튜브를 통해 북콘서트의 전체 영상도 볼 수 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00311187500001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4707
***https://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56469449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62876
*****직장갑질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젠더 폭력을 묻는 온라인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2022년 11월 공개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0670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