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기초학습#4]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와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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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사회주의 기초학습#4]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와 전략

  • 정은희
  • 등록 2025.12.07 21:36
  • 조회수 5,248

 

[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착취와 차별, 억압을 일소하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사상이었다. 인간해방 세상을 꿈꾸며 투쟁하려는 이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도,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계급투쟁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오늘날 진짜 사회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역사의 굴절로 인해, 스스로가 '사회주의'라 주장하는 가짜 사회주의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반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된 소련을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 칭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중국특색 사회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등 다양한 스탈린주의의 변종은 억압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포장하면서, 사회주의를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자기해방 사상에서 계급지배를 정당화하는 수사적 도구로 바꿔버렸다.

 

다른 한편에는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고 노동자혁명을 파괴한 개량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전통적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지배계급의 일부가 되었고, 새로운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의회주의와 관료주의를 '사회주의'와 뒤섞어버린다.

 

자본주의는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다시 불러왔다. 위기와 전쟁에 맞선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있지만, 계급투쟁의 사상인 사회주의에 대한 정돈된 지식을 얻기는 너무나 어렵다.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뒤엎기 위해, 스탈린주의와 개량주의의 혼란을 걷어내고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진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함께 배우고, 함께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해 '사회주의 기초학습' 시리즈를 연재한다.

 

[다른 시리즈 읽기]

#1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2 자본주의의 원리 파헤치기

#3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

 

오늘날 여성과 성소수자의 현실은 어느 때보다도 모순적이다. 여성 정치인과 CEO는 해마다 증가하지만, 여성의 현실은 평등과는 까마득히 멀다. 1987년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 등 성차별은 법으로 규제되지만, 현실에서는 임금, 노동조건, 고용형태 등 모든 면에서 구조적인 성차별이 지속하고 있다.

 

가령 국내 여성 임금 노동자 2명 중 1명은 비정규직이며, 다수가 최저임금을 받는다. 초단시간 노동자의 70% 이상은 여성이며,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의 다수의 성별도 여성이다. 시간당 임금은 남성 정규직 > 남성 비정규직 > 여성 정규직 > 여성 비정규직 순이다. 여성 비정규직 월평균 임금은 남성 정규직의 38.8%일 뿐이다. 청소, 콜센터, 톨게이트, 가스검침, 요양을 비롯해 여성 노동자가 다수인 직장은 모두 최저임금 사업장이다. 이러한 성별 직종분리 추세는 확대돼 왔으며, 여성 비율이 많은 직종일수록 임금이 낮다. 한국이 OECD에 가입한 원년부터 지금까지 내내 성별임금격차는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여성 연금 수급액 수준은 남성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더구나 정부는 필리핀 가사 관리사 시범사업의 사례처럼 이주 여성 노동자에게 더 불평등한 임금과 노동조건을 강요하고 있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이자 여성 노동 운동가 클라라 체트킨이 20세기 초 “자본주의적 생산양식[1]이 사회적 격변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현대 여성 문제를 촉발시켰다”[2]라고 지적했듯이, 구조적 성차별은 가부장제와 결탁한 자본주의 체제에 따른 결과다.

 

그러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억압되는 구조적 배경을 살펴보자. 자본주의란 생산수단 소유 여부로 계급이 나누어지는 계급사회다. 마르크스가 분석했듯이 노동력만을 소유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여 생존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하는 잉여가치를 착취한다. 그리고 착취가 지속되려면 노동력은 재충전되어야 한다. 노동력은 한편으로는 가정을 비롯해 기숙사 등에서 회복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력은 출산을 통해 새롭게 공급돼야 한다. 자본가에게는 이주 노동자 도입이나 노예화도 노동력을 보충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출산을 통해 노동력이 보충될 때는 아이를 낳는 다수인 여성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여성은 동시에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자본가에게 출산은 노동자로서 여성이 생산하는 잉여가치를 감소시킬 위험이 있다. 이 때문에 출산은 당장에는 자본의 잉여 가치 착취에 방해가 된다. 그러나 노동력이 세대에 걸쳐서 보충되려면 출산이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지배계급 입장에서 노동력 재생산에는 잠재적 모순이 존재한다. 여기서 리즈 보겔은 “이러한 모순의 해결을 둘러싼 계급투쟁 과정에서 피착취계급 여성에 대한 억압이 발전한다”[3]고 분석한다. 결과적으로 지배계급은 노동력을 최대로 착취하면서도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가부장제를 동원해 출산시 여성을 남성이 책임지도록 하고, 남성에게는 임금노동에 더 많은 책임을 부여하고 여성에 대해서는 무급 재생산 노동에 대한 부담을 지운다. 이렇게 아이들과 가족 구성원을 먹이고, 돌보고, 교육하는 재생산 노동은 여성에게 사적으로 떠맡겨지고 평가절하된다.

 

이렇게 생산 노동과 재생산 노동이 분리된 것은 자본주의에서였다. 생산노동은 직장에서 수행되며, 재생산 노동은 갈수록 시장화(사회화)되고 있지만, 주로 사적으로 집안에서 수행된다. 이런 재생산 노동은 (계급투쟁의 결과에 따라) 국가가 자녀수당에서처럼 한편에선 지원하고, 다른 한편에선 결혼제도에서처럼 통제한다. 가부장적 억압은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이 같은 메커니즘을 이념적으로 정당화하고 여성을 규율한다. 여성의 성은 혼인에 구속되며 임신출산은 국가 인구정책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재생산 노동에 대한 국가나 자본의 지원은 늘 충분히 못하므로 임신출산과 가사돌봄을 사적으로 떠맡은 여성은 불완전한 노동자로 전락하여 채용에서부터 임금과 승진승급이나 불안정한 고용형태까지 다양한 차별을 받는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전 사회에 다양한 형태로 개진된다. 나아가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성별과 신체와 출신과 능력에 등급을 매겨 서로를 경쟁시킨다. 그래서 어떤 노동에는 고가가 매겨지지만, 구조적으로 저임금 일자리로 떠밀리는 사람들이 있으며, 노동력을 팔고 싶어도 팔 수 없거나 노동을 해도 보상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도 존재한다. 이 같은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에 여성 노동자의 가치는 평가절하되고 성소수자의 존재는 지워진다. 그러나 남성에게는 당연시되는 노동강도를 비롯해 남성 노동자 역시 성별을 이유로 억압된다. 그리고 그러한 억압을 통한 이득은 이 자본주의 체제가 비호하는 한 줌의 자본가들에게 돌아간다.

 

더불어 임금노동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여성은 빈곤한 재정적 여건으로 인하여 파트너에게 의존하게 된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이는 가부장적 폭력을 조장한다.

 

체트킨이 지적했듯, 자본가계급 여성도 가부장제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급적 차이에 따른 여성 억압의 양상은 전혀 다르다. 자본가계급 여성의 현실은 직장과 가장에서 이중으로 착취되고 억압받는 노동자계급 여성과는 구조적으로 다르다. 즉, 노동자계급 여성은 자본주의 고유의 생산양식에 의해 차별받는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이렇게 젠더에 따른 차별과 억압의 근원이 노동력 착취와 재생산을 위해 가부장제를 동원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고 보고 가부장적 자본주의 철폐를 위한 계급투쟁으로 젠더평등을 쟁취하고자 하는 사상이다. 즉,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성적 억압과 차별의 원인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라는 점을 직시하며, 이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맞선 계급투쟁을 조직해야 한다는 관점을 공유한다.

 

1. 세계 자본주의 변동과 페미니즘 운동의 대응

 

자본주의의 정치체제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낳은 프랑스혁명부터 인간의 평등은 부르주아 남성에 한정되었다. 대신 여성에게는 혼전 순결과 모성, 부권을 강요하는 부르주아의 성 규범이 뿌리를 내렸다. 서구에서의 이러한 여성 억압은 제국주의 시대를 경유하며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피식민지에 이식됐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서구에서 일어난 페미니즘 제1물결은 이러한 부르주아 시민 혁명의 한계 속에서 예고된 것이었다. 여성들은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도 여전히 불평등한 현실을 지적하며 참정권, 재산권, 혼인, 교육, 직업 등에서 남성과의 평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페미니즘 제1물결은 부르주아 여성의 삶의 조건에 치우쳐 비인간적인 노동환경 속에서 임금 노동자나 빈민, 성 노동자로 살았던 국내외 노동자계급 여성의 삶은 철저히 외면됐다. 예를 들어, 1894년 독일여성단체연맹은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여성 단체의 가입을 거부했고, 1900년에는 사회민주주의 여성 운동과 협력하자는 운동에 반대했다. 영국 여성사회정치연합(WSPU)은 재산을 소유한 여성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할 것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4]

 

여성노동자들은, 착취당하고, 사회적으로 억압당하며, 여성운동이나 노동조합들에게도 버림받았지만, 19세기 계급투쟁의 최전선에 있었다. 대표적으로 1812년 밀가루 가격의 제한을 요구했던 노팅엄 봉기, 필로멘 로잘리 로잔이 이끈 리용의 비단 노동자 파업, 1888년 남성 노조들과 독립적으로 조직되어 요구를 쟁취했던 런던의 성냥공장 여성노동자 파업, <우리, 여성>이라는 소책자에서 성 평등의 이름으로 인쇄할 권리를 요구했던 에딘버러 여성 식자공 파업, 그리고 1857년 3월 8일 경찰의 공격을 받았고 수십 년 뒤 ‘세계 여성의 날’ 제정을 끌어냈던 뉴욕 직물공장 여성노동자 파업 등이 있다.[5] 이후 제국주의 국가에 식민지배를 받던 지역 여성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쿠바, 아르헨티나, 멕시코, 인도, 조선 등 식민지 여성 노동자들은 제국주의 지배와 자본의 착취 아래 더욱 비참한 현실 속에서 투쟁했다. 조선에서는 대표적으로 1930년 8월 임금삭감과 보증금제도 및 불량품에 대한 벌금제를 이유로 일본 자본에 맞서 일어난 평양고무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다.

 

여성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주목한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이었다. 그들은 여성억압이 자본주의 체제에 따른 구조적 결과라는 점에서 여성해방이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 과제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변혁운동의 과제로 여성해방을 강조했고, 클라라 체트킨,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를 비롯한 사회주의 여성 혁명가들은 부르주아 여성운동에 대비되는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조직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여성 노동자의 권리가 단순한 권리의 획득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해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 같은 방향에서 그들은 제2 인터내셔널 사회주의 여성대회를 소집했고, 계급투쟁 속에서의 여성해방 실현을 추구하며 여성 노동자를 조직했으며, 노동권, 동일임금, 유급 출산휴가, 무료 보육 시설, 여성교육 등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6] 1910년 8월 제2인터내셔널 사회주의자 여성대회에서 클라라 체트킨을 비롯한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국제여성의날을 제안한 배경도 이 같은 맥락이었다.[7] 이 같은 배경 속에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혁명에 성공하자 여성해방을 핵심 과제 중의 하나로 삼고,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가사노동 사회화, 그리고 성평등 조치에 나섰다.

 

이후 서구는 전후 자본주의 장기호황에 힘입어 정부 지출과 통화 공급을 증대해 질서를 유지했다. 더구나 주류 노동운동은 미국에서는 뉴딜을 정점으로 체제 내화한 지 오래였고, 냉전의 여파 속에서 갈등은 쿠바, 베트남 등 주로 제3세계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1960년대 프랑스와 독일, 미국 등에서 국가 폭력과 전쟁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학생 시위가 일어나 서구 사회를 뒤흔들기 시작했고, 민권 운동과 신좌파운동의 영향 속에서 분출한 혁명적 열기는 여성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구에서 여성의 선거권이나 재산권, 교육 등은 보장되었으나 여성은 여전히 현모양처로 호출됐다. 소비에트연합에서도 스탈린 반혁명에 가부장제가 강화된 지 오래였고, 서구의 공산당 운동은 스탈린주의를 표방했으며, 사민주의 운동도 가부장적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페미니즘 제2물결은 이 같은 조건에서 일어났다. 아르헨티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안드레아 다트리는 페미니즘 제2물결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에서 나타나듯이, “사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 사이의 관계를 제기했다. 여성들은 자본이 제도화하고 안착시키려 애썼던 것, 즉 정치적 영역(생산/임금노동)과 사적 영역(재생산/무급노동) 사이의 분할에 의문을 제기했다”[8]고 표현한다. 또 낸시 프레이저는 당시 “여성해방 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지배에 맞서 봉기”했으며, “다른 급진주의 조류와 합류하여 사회민주주의의 허상을 폭로했고, 자본주의의 깊숙한 남성 중심주의의 뿌리와 가지를 바꾸고자 했다”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당시 페미니즘 운동은 급진적 실천에도 신좌파운동이나 노동자운동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고 주류 페미니즘 운동은 체제 순응적인 제도화의 길을 걸었다.

 

제2 페미니즘 물결 이후 서구에서는 1970년대 시작한 자본주의의 장기불황 속에서 신자유주의 질서가 구축되기 시작하며 백래시가 밀려 왔다. 미국에서는 뉴딜 합의가 붕괴했고, 긴축, 규제 완화, 복지 축소, 노동유연화를 설교하는 ‘워싱턴 컨센서스’가 새로운 지표가 됐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함께 우파는 1960~1970년대 성장한 미국 신좌파와 민권운동, 여성운동 등 진보적인 사회 흐름에 대한 백래시로 보수적인 성과 가족, 사회 질서, 국가안보를 옹호하는 신보수주의를 이끌었다. 반면, 자유주의 세력은 여성의 권리를 지지했지만, 사회적 평등은 오히려 후퇴시켰다. 더구나 주류 여성운동은 이 같은 자유주의 세력에 포섭돼 지배계급의 일부로 역할했다. 한편,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바이섹슈얼 등 기존 페미니즘이 소외시켰던 성 소수자들을 포함해 여성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 인종, 계급, 성 정체성, 문화 등 다양한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제3 페미니즘 물결이 일었지만, 계급투쟁과의 거리는 더 멀어졌다. 당시 두드러진 운동 담론인 정체성정치에 계급은 하나의 부문운동 이상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게다가 역설적이게도 당시 지배계급은 페미니즘의 구호를 적극적으로 차용해 신자유주의를 구축해냈다. 낸시 프레이저에 따르면, 페미니즘 제2물결은 경제 지상주의, 국가주의, 남성 중심주의 등을 비판했으나, 이는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를 구축되는 데 활용됐다. 즉, 경제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은 정체성 정치로 수렴되어 사회경제적 투쟁을 축소시켰고,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은 복지국가 해체로, 남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가족 임금 해체를 비롯해 보다 유연한 자본주의를 위한 도덕적 설명으로 치환됐다.[9]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는 2007~2008년 시작한 세계공황 속에서 전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저항에 직면하기 시작한다. 2010년대 이른바 아랍의 봄과 유럽 긴축반대 투쟁, 미국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 멕시코 에너지 민영화 반대 투쟁, 칠레 펭귄시위와 무상교육투쟁 등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이 확산했으며, 이와 맞물려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 역시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아랍의 봄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에서는 집회 시위 중 벌어진 성폭력에 맞서 여성들의 시위가 일어났고, 아르헨티나에서는 니우나메노스(Ni Una Menos(“No one less”)는 ‘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는 뜻으로, 더 이상 젠더기반 폭력으로 살해당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위가 전개됐다. 미국에서는 수십만 명이 참여한 여성대행진이 있었고, 스페인에서는 수백만이 여성파업을 일으켰다. 멕시코에서는 페미사이드 반대 시위, 칠레에서는 집회 시위 중 발생한 경찰의 성폭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폴란드와 아일랜드에서는 임신중지 억압에 반대하는 여성파업이 일어났다.

 

사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가장 큰 희생자 중의 하나는 여성이었다. 어느 때보다도 여성 노동자의 수가 증가한 시기지만, 이들은 대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불안정해진 일자리에서 일해야 했고, 사회복지비는 축소되어 여성에 대한 무급 재생산 노동을 강화했으며, 젠더폭력 역시 배가됐다. 그러나 전체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노조는 가부장적인 관료주의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고, 주류 여성운동은 제도화되어 기층 여성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터져 나온 여성들의 시위는 이 사회를 생산하며 재생산하는 노동자계급으로서의 투쟁이자 다수가 그 전술로서 노동자계급의 무기인 파업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적 열기는 계급운동으로 조직되지 못하고 대개는 개량주의 정치세력에 흡수되며 산개해버렸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 위기 속에서 출현한 극우의 세계화 속에서 여성과 성소수자에게 보다 폭력적인 자본주의를 대면하고 있다.

 

2. 한국에서의 여성운동

 

한국에서 여성운동은 이러한 세계 자본주의와 여성운동의 동학과 맞물려 전개해왔다. 그러나 또한 식민지와 내전, 분단과 독재정권이라는 제3세계적 특수성 속에서 사회 변혁운동의 자장 속에서 태동했다.[10] 이러한 한국 여성운동은 1970년대 전투적인 여성노동자 투쟁과 인권, 노동, 학생운동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노동자대투쟁은 여성운동의 이념과 조직적 정비를 부추기는 데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이에 따라 여성 노동자운동은 여성운동 안에서 중심축의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진보적 여성운동 단체인 1984년 여성평우회[11]도 여성운동의 주체를 ‘기층여성’으로 설정했다.

 

대표적으로 이화여대 출신 여성 지식인과 학생운동 출신의 운동가들이 창설한 여성평우회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결합되어 있다고 인식했고, 80년대 민족민주민중운동의 부문운동으로 여성운동의 위치를 규정하면서 여성해방을 추구하며 결혼퇴직제(25세 조기정년제) 철폐나 가사노동 등 여성 이슈를 의제화하는 성과를 낳았다. 그러나 운동 전체로 보면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여성운동을 도구화하는 경향이 강했고, 여성평우회 내적으로는 여성운동 내 지식인과 운동가 사이 민족민주운동과 여성운동의 관계에 대한 이견 때문에 1987년 해산했다. 이후 1980년대 여성운동은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민우회 등으로 분화했으며, 진보적 여성운동단체들의 연합체로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이 결성되었다.[12] 그러나 당시 한국여성단체연합도 여성운동의 주체를 여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기층여성에 두고 이들의 생존권 투쟁 지원에 주력했다는 점에서 80년대 여성운동은 노동자계급 여성 이슈가 중심축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13] 한편으로 대학 사회에서는 80년대 초중반 대학 운동권 내 남성중심적 문화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져왔던 여성들을 중심으로 총여학생회가 설치됐다. 이들 역시 여성 억압을 군사 독재 정권, 식민 지배 역사, 자본주의 체제 등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속에 위치시키고자 하였다.[14]

 

그러나 90년대 문민정부 출현과 소비에트 몰락 이후 계급운동의 퇴조와 방향 상실 속에서 주류 여성운동은 탈계급화하기 시작해 기층여성 중심의 ‘노동자’ 정체성은 1990년대에 ‘여성일반’으로 전환됐다. 여성운동은 독자성과 대중성을 추구하며 성폭력과 성차별 등 문제를 대중화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대표적으로 성폭력특별법(1994년) 제정, 호주제 폐지(2005년 헌법 불합치 결정) 등의 제도 개혁을 이끌었다. 그러나 노동 등 사회 문제는 사안별 연대로 국한되었으며, 기층 노동계급 여성의 생존권에는 거리가 있었다.

 

한편 90년 중반 이후 여성운동은 성주류화 정책을 주요 전략으로 채택하며 본격적인 제도화의 길을 밟기 시작해 갔다.[15] 그리고 이는 당시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루며 자신의 정당성과 기반을 다지기 위해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대거 흡수한 김대중 정권의 이해와 맞물렸다.[16] 이 같은 조건에서 김대중 정권은 여성부와 여성공천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 등을 제정하여 그동안 여성운동이 주장해 온 요구를 일부 수용했다.[17]

 

그러나 김대중 정권은 이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구조개악을 밀어붙이며 전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을 후퇴시켰고, 이는 특히 노동자계급 여성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김대중 정권이 강행한 공공부문 매각과 정리해고 및 파견제 도입 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노동자계급 여성을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로 대거 밀어냈다. 대표적으로, 1998년 본격적으로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시작하면서 여성 임시/일용직 노동자는 57%에서 68.9%까지 증가했다.[18] 여연조차 2001년 1월 “김대중 정부의 여성정책 3년에 대한 평가에서 우리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며 “여성들의 정리해고, 비정규직화, 시간제 노동이 가속적으로 증가하여, 대표적으로 9개 은행의 명예퇴직 여성의 비율이 74.5~95.5%를 차지했다”고 기록한다.[19]

 

둘째, 김대중 정권 시절 남녀고용평등법 전부 개정, 모자보건법 개정 등으로 도입된 일·가정 양립 정책은 신자유주의적 여성정책으로 임신·출산, 가사돌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방기한 채 여성 노동력을 시장화하기 위해 필요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 여성은 가족임금제(남성부양모델)가 해체되고 유연화한 고용조건 속에서 임신·출산, 가사돌봄이란 이중의 부담을 떠맡으며 저임금 일자리로 밀려들었다.

 

셋째, 김대중 정권은 외환위기 이후 출생율이 급감[20]하면서 처음으로 저출산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해 신보수주의의 출산장려정책을 추진할 발판을 마련해주었다.[21]

 

마지막으로 김대중 시절 수립된 신자유주의적 여성노동·인구정책 기조는 이후 전 노동계급에 대한 노동유연화를 촉진하는 기조로 활용됐다.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6년 8월 수립된 1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을 시작으로 ‘근로형태 유연화’가 출산장려정책의 주요 과제로 자리 잡았으며, 주요 정책 과제 중 하나인 ‘가족친화적 기업 지원’에서도 기준 항목에 탄력적 근무제가 포함됐다.[22] 이명박 정부는 저출산 정책으로 유연근무제를 추진했는데, 이는 사실 단시간노동제로서 신규채용을 단시간 일자리로 전환하고 직무를 단시간화하여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조치였다.[23] 문재인 정권도 노동유연화 조치인 직무급제를 추진하며 내세운 명분 중 하나로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들었다.

 

이렇듯 그동안 여성운동이 이룬 성과는 적지 않지만, 여성과 퀴어의 성적 권리는 여전히 무거운 납덩이에 짓눌려 있다. 2019년 대중적 페미니즘 운동의 여파 속에서 낙태죄가 헌법에 불합치하다고 결정됐지만, 문재인 정부부터 임신중지 권리를 보장하는 대체입법에 나서지 않았다. 퀴어의 성적기본권은 다양한 음행매개, 음화반포와 제조, 공연음란죄(형법 제242~245조)를 비롯해, 군형법 추행죄, 에이즈예방법 상 전파 매개 행위 금지 조항 등으로 통제되고 있다. 차별금지법 역시 2007년 노무현 정부가 발의했고, 2021년에는 국민동의청원이 10만 명의 동의를 얻어 국회 소관위원회 회부 기준을 충족하기도 하였는데도, 기독교 우파, 근본적으로는 자본가계급의 눈치를 보며 이번 민주당 이재명 후보 역시 외면하고 있다.

 

3. 마르크스주의자와 여성억압

 

그러면 여성억압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장은 어떻게 전개되어 왔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성억압을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봤고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여성해방을 추구했다. 특히 그들은 여러 지면을 통해 자본주의 여성억압의 물질적 토대를 분석하며 이론적 토대를 세워 갔다.

 

우선 마르크스는 1845년 <신성가족>에서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말을 의역하여, “역사적 시대의 변화는 여성의 자유를 향한 진보에 의해 항상 측정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 남성에 대한 여성의 관계에서, 강자에 대한 약자의 관계에서, 잔인함에 대한 인간 본성의 승리가 가장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해방 정도는 일반적인 해방의 자연스러운 척도다”라고 봤다.

 

엥겔스는 당대 노동자계급 여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억압의 구조적 기원을 최초로 역사유물론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그는 여성 억압이 단순히 문화적,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구조 속에서 등장하고 재생산된다고 보았다.

 

그는 24세였던 1845년 영국 노동자계급 여성들의 삶을 세세하게 기록하며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성적 학대 속에서 저임금 노동자로서 그리고 가정에서는 무급 가사 노동자로서 이중의 굴레를 지고 있다는 점을 제기했다.

 

“여자들은 대개 분만한 지 사흘이나 나흘 만에 당연히 아기를 남겨둔 채로 공장으로 복귀한다. 저녁시간에 여자들은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자기도 뭔가를 먹는다.”[24]

 

“이 외에 공장에서의 종속관계가 다른 종속관계와 마찬가지로, 심지어 그보다 더한 정도로 제조업자에게 초야권(중세 영주가 신랑보다 먼저 신부와 잠자리를 할 수 있는 권리)을 부여한다는 것도 당연히 문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고용주는 피고용인들의 인신과 아리따운 용모를 지배하는 군주이기도 하다. 고용주가 해고하겠다고 위협만 해도 어차피 순결을 단호하게 지킬 마음도 없는 소녀들 10명 가운데 9명은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제조업자가 몹시 비열한 사람이라면 그의 공장은 하렘이기도 하며, 공식 보고서에 그런 사례가 몇 가지 실려 있다.”[25]

 

“공장노동은 여성의 체격에도 뚜렷하고 독특한 영향을 미친다. 장기간 노동이 초래하는 변형은 여자들 사이에서 훨씬 더 심각하다. 장시간 노동은 흔히 골반의 변형을 일으키는데, 일부 변형은 엉덩이뼈의 비정상적인 위치와 성장으로 나타나고, 일부 변형은 척추 하부의 기형으로 나타난다. (...) 몇몇 산파들과 산과의사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다른 여자들보다 난산으로 고생하고 또 유산하기도 쉽다고 증언한다. 더욱이 여성 공원들은 모든 공원에게 공통된 전신 허약으로 고생하며, 임신을 해도 분만하는 시간까지 공장에서 계속 일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임금을 받지 못할뿐더러, 너무 일찍 일자리를 비웠다가 다른 노동자로 대체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전날 저녁까지 노동하다가 이튿날 아침에 분만하는 일이 빈발하고, 공장의 기계들 사이에서 분만하는 경우도 그리 드물지 않다.”[26]

 

특히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사후 인류학에 대해 그가 남긴 메모를 기초로 친족, 가부장제 가족, 결혼제도, 일부일처제 형태의 변화와 연관된 사회 조직에 대한 역사 유물론적 분석을 전개했다. 그것이 1884년 쓰인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인데, 이 책에서 엥겔스는 유물론적 관점에 따라 가족 문제와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고찰하며,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관계를 강조했고, 여성 억압의 기원이 자연적인 게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적이라는 점을 보여줬다.[27] 즉 여성억압의 기원이 사유재산의 축적에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하며 계급사회의 산물임을 밝혀냈다.

 

“유물론적 관점에 따르면, 역사를 규정하는 결정적 계기는 궁극적으로 직접적 생활의 생산 및 재생산이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그 하나는 생활수단, 즉 의식주의 대상과 이에 필요한 도구의 생산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그 자체의 생산, 즉 종족의 번식이다. 특정한 역사 시기 및 특정한 지역의 인간들이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회 조직은 이 두 가지 종류의 생산에 의해, 즉 하나는 노동의 발전 단계에 의해, 다른 하나는 기존의 발전 단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의 발전이 미약할수록, 그 생산물의 양이 제한될수록, 따라서 사회의 부가 제한될수록 사회제도는 혈연적 유대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다.”[28]

 

“이렇듯 재부가 증대함에 따라 가족 내에서 한편으로는 아내보다도 남편이 더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강화된 지위를 이용해 남편은 자녀들을 위해 기존의 상속 순위를 폐지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모권에 의해서만 혈통을 따졌던 시기에는 그것이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모권은 폐지되어야 했으며 또 폐지되었다. (...) 모권의 전복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였다. 남자는 가정에서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어 여자는 자기의 존귀한 지위를 상실하고 노비로, 남자의 정욕의 노예로, 순전한 산아도구로 전락했다.”[29]

 

“일부일처제 가족은 남편의 지배에 따른 것으로, 아버지의 혈통이 확실한 아이를 낳자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혈통이 확실해야 할 필요성은 아이들이 후에 직계 상속인으로서 아버지의 재산을 소유해야 했기 때문이다.”[30]

 

“현대의 개별 가족은 아내의 공공연한 또는 은폐된 가내 노예제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리고 현대 사회는 순전히 개별 가족이라는 분자로만 구성된 집단이다. (...) 가정에서 남편은 부르주아지이고 아내는 프롤레타리아트이다. (...) 여성해방의 첫째 조건은 여성 전체가 사회적 노동에 복귀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또한 개별 가족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31]

 

무엇보다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이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에 묶여 있는 사회적 노동의 일부라는 점을 인식했고, 이에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공산주의 사회의 목표 중의 하나로 제시했고 이 같은 그의 제안은 현재까지 주요 과제로 다뤄진다.[32]

 

“여자의 지위, 즉 모든 여자의 지위에도 극심한 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생산수단이 공동소유로 됨으로써 개별 가족은 이제 사회의 경제적 단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사로운 집안 살림은 사회적 산업으로 전환되고, 아이들을 돌보며 교육시키는 것은 공공사업으로 전환될 것이다. 사회는 적자나 사생아를 막론하고 모든 아동들을 똑같이 돌보아 줄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처녀가 마음놓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몸을 맡길 수 없게 만드는 가장 본질적인 사회적 계기 – 도덕적 및 경제적 –인 그 ‘결과’에 대해서 처녀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은 강요받지 않은 성교를, 따라서 또 처녀의 명예 및 여성의 수치에 관한 보다 관대한 여론을 점차 발전시키기에 충분한 원인으로 되지 않을까?”[33]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 쓴 《공산당 선언》에서는 부르주아 가족 제도를 비판하며 이는 “자본이자, 사적 이득 위에 서 있다. 이 가족은 완전히 발전된 형태로 오직 부르주아지에게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 상태는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가족이 사실상 부재하다는 사실과 공창 속에서 그 보완물을 발견한다”라고 지적하는 한편,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아내를 단순한 생산의 도구로만 본다”고 비판하며, “현 생산 체제의 폐지가 여성의 공유, 즉 공창과 사창 모두의 폐지를 가져오리라는 것은 자명하다”[34]라고 봤다.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족이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한편, 그 결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가족은 사실상 해체됐다고 지적한다. 또 부르주아가 일부일처제를 명문화하면서도 아내를 출산 도구화하고 ‘공유’하는 위선을 비판하며, 노동자계급은 성매매가 가족을 대신하고 있다고 봤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는 여성 노동의 착취적 측면에 대하여 분석했다. 기계가 육체적 힘의 차이를 지워버리며 임금노동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수단이 되었는데, 이러한 기술 진보가 노동자에게 야기하는 문제로 여성과 아동을 저임금 노동에 유입시켜 전체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트리고 착취의 정도를 강화한다고 비판한다.

 

기계, 근육의 힘을 요구하지 않는 한, 근육의 힘이 약하거나 또는 육체적 발달은 미숙하지만 팔과 다리는 더욱 유연한 노동자를 사용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여성노동과 아동노동은 자본가에 의한 기계사용의 첫 번째 결과였다! (...) 노동력의 가치는 개별 성인노동자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뿐 아니라 노동자 가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기계는 노동자 가족의 전체 구성원을 노동시장에 내던짐으로써 가장의 노동력 가치를 그의 전체 가족구성원들에게로 분할한다. 그러므로 기계는 가장의 노동력 가치를 저하시킨다. (...) 이와 같이 기계는 처음부터 자본의 가장 특징적 착취대상인 인간적 착취재료를 추가할 뿐 아니라 착취의 정도를 증가시킨다. (...) 기계는 아동과 여성을 대량으로 노동자계급에 추가함으로써, 성인 남성노동자가 매뉴팩처 시기 전체를 통해 자본의 독재에 대항했던 반항을 드디어 타파하게 된다.”[35]

 

또 인용에서 “가족 기능의 어떤 것(예컨대 어린이를 돌보며 그들에게 젖을 먹이는 일)은 전혀 없애버릴 수는 없으므로, 자본이 징발한 어머니는 어떤 대체물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며 여성이 공장 노동과 함께 가정 내에서의 전통적인 역할과 의무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아울러 현대의 ‘경력단절’ 여성과 같이, 더 많이 착취할 생각으로 부양가족이 있는 고분고분한 기혼 여성만 고용하는 사업주의 사례[36] 등도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자본론》에서는 여성억압의 물질적 기초로서 가사노동이 수행하는 역할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유일하게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이 되는” 즉,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력이란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의 필요를 다루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재생산 노동의 위치 등을 제시했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력이 가치인 한, 노동력 그 자체는 거기에 대상화되어 있는 일정한 양의 사회적 평균노동을 표현할 뿐이다. (...) 노동력의 생산이란 이 개인 자신의 재생산, 즉 그의 생활의 유지다. (...) 그러므로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는 달리 노동력의 가치규정에는 역사적 및 도덕적[정신적] 요소가 포함된다. (...) 노동력 소유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따라서 그가 시장에 연속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판매자는 ”살아 있는 개체는 어느 것이나 생식에 의해 자신을 영구화하는 것처럼“, 생식에 의해 자기 자신을 영구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모와 사망의 결과 시장에서 빠져나가는 노동력은 적어도 같은 수의 새로운 노동력에 의해 끊임없이 보충되어야 한다.”[37]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선구자 플로라 트리스탄은 1843년 자신의 책 《노동자 연합》에서 처음으로 계급과 젠더의 관계를 다뤘다. 그는 여성이 프랑스 사회의 ‘마지막 노예’라고 부르며 노동자들이 이 문제를 숙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38] 또 여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프롤레타리아트이며, 여성은 노동자계급과 함께 손을 잡아야만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남성 노동자는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위한 투쟁의 기치 아래 여성과 함께 싸울 것을 촉구하지 않는 한 임금 노예의 멍에에서 해방되기를 열망할 수 없다고도 한다.[39]

 

이렇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억압이 자본주의에 따른 결과로 보면서 여성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또 여성이 이미 사회 생산의 주체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일례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80년 신생 프랑스 노동자당 선거 강령에 조언하였는데, 이 강령 서문의 첫 문장은 “생산계급의 해방은 성별이나 인종의 구별 없이 모든 인간을 포함한다”였다.

 

이후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을 조직해 온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계승, 발전시키며 자본주의의 여성억압에 맞서 투쟁했다. 특히 자본주의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던 독일의 사회민주당(SPD) 여성 운동 지도자이자 초기 개량주의의 반대자였던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은 여성 노동자 조직에 사회주의 운동의 성사가 달려 있다고 주장할 만큼 여성 노동자 조직에 앞장섰다.

 

그는 특히 명시적으로 계급사회 내 여성의 종속 문제가 갖는 이론적 성격을 분석했는데, 생산양식과 계급에 따라 여성문제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제시했다. 1896년 독일 사회민주당(SPD) 여성회의에서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함께해야만 사회주의는 승리할 수 있다>에서 체트킨은 여성 억압을 ‘성별 일반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문제로 분석하며,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부르주아 여성의 처지와 이해관계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즉 여성 문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산물인 특정 사회 계급들에서만 나타난다고 봤다.

 

체트킨에 따르면, 우선 상류계급 여성은 언제나 배우자, 어머니, 주부로서의 임무를 하인에게 떠맡길 수 있는 계급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유롭게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권리다. 프티부르주아지, 즉 중간계급에서는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고 정신적 만족을 얻기 위해 사회로 진출할 수밖에 없는데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때문에 교육과 취업등 기회의 평등이 중요한 요구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에 관한 한 여성 문제를 창출하는 것은 끊임없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착취해야 하는 자본주의의 필요다. 이들은 저임금 노동자가 되어 자본주의 생산이 적선하듯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만 할당받는다. 때문에 프롤레타라아 여성의 해방 투쟁은 부르주아 여성처럼 자기 계급의 남성에 맞서 싸우는 투쟁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전체 자본가계급에 맞서 자기 계급 남성과 공동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4. 볼셰비키 혁명과 여성해방

 

1910년 10월, 한 섬유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 시간 연장으로 인해 두 명이 사망하자 파업을 벌였다. 이들은 공장 내 노동자 5,000명의 지지를 얻었다. 1913년에는 또 다른 섬유 공장의 여성 노동자 2,000명이 임금 인상, 유급 출산 휴가 및 기타 요구 사항을 요구하며 50일 가까이 파업을 벌였다. 그 후 5,000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고무 공장에서 파업을 벌였다. 또 다른 여성 노동자들은 사장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섬유 공장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또 다른 3,000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향수와 파스타 공장을 마비시켰다. 합판 공장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이 비위생적인 작업 환경과 관리자의 성희롱에 항의했다.[40]

 

이것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과 정치 조직화를 촉진하면서 투쟁을 조직했던 사례들이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여성억압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고, 결국 노동자혁명에 성공하자 자본주의의 여성억압에 맞선 조치를 현실화했다.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부터 여성해방 문제를 사회주의 혁명의 핵심적 일부로 생각하고 여성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는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하는 한, 프롤레타리아는 온전한 해방을 이룰 수 없다”라며 “자본주의는 형식적 평등의 문제에서조차 일관될 수 없다. 가장 분명한 사례 하나가 바로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이라고 봤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망명 중 작성된 1903년 최초의 당 강령의 초안에 “남성과 여성의 권리의 완전한 평등”에 대한 요구로 포함됐다. 이후 레닌은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여성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법률을 남김없이 모두 단숨에 일소해 버림으로써 완전한 법률적 평등을 즉시 보장했다”고 밝혔다.

 

레닌은 여성이 여성으로서 겪는 특별한 억압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레닌은 매춘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 원인을 사회적 조건에서 찾고 처벌 중심의 자유주의적 해결책을 비판했다. 산아 제한 운동의 계급적 성격을 분석하며, 소부르주아 자유주의자의 심리와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의 관점을 대비시켰다. 레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아제한은 빈민과 유색인종에 대한 강제불임 등에서처럼 종종 빈곤과 여성 억압의 산물로 나타난다고 봤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는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해야 하며, 동시에 낳지 않을 권리도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임신중지나 피임의 제한을 없애는 모든 법 개정을 지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그는 농민들의 ‘수세기 된 가부장적 전통’이 여성에게 특히 잔혹한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비판했다. 레닌은 또한 당시 남성 공산주의자들이 집안일에 대해 무관심하며 여성 동지들을 가사노동에 방치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남성 내부의 교육과 사상 개조 또한 필수적이라 강조했다.[41]

 

레닌과 함께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위해 싸웠던 레온 트로츠키는 특히 볼셰비키 혁명 뒤 물질적 토대를 구축해야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며 여성 해방 조치의 실현을 위해 분투했다. 그는 또한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적 가족 구조를 사회적으로 대체하고 여성의 역할을 해방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봤다. 이를 위해 그는 당사자로서의 여성들에게 가사 노동의 최대한의 사회화를 위해 투쟁할 것을 촉구했고, 무엇보다도 여성들에게 무기력과 맹목적인 습관에 맞서 의식적으로 싸울 것을 호소했다.[42]

 

한편 러시아 혁명가들은 부르주아의 젠더규범과는 다른 노동자계급의 성적 실천을 추구했다. 여기에는 최초 볼셰비키 사회위원이었던 콜론타이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평가되며, 그의 사상은 혁명 포고령에 반영됐다.

 

콜론타이는 봉건주의에는 기사도적인 사랑이, 자본주의에는 부르주아 결혼과 매춘이 있었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지배 시기에 적합한 성적 사랑의 형태는 ‘동지애적 사랑’이라고 제안했다. 이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성과 사랑의 사유화와는 대조적으로, 여성이 완전히 평등하고 독립적인 사회주의 집단에 성적 사랑을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동지애적 사랑’의 핵심은 ‘완전한 자유, 평등, 진정한 우정’이었다.

 

“‘파트너’의 육체뿐 아니라 감정까지 완전히 소유한다는 원리를 면밀히 발전시킨 것은 바로 부르주아지다. 그 결과 그들은 소유권의 개념을 타인의 정신과 감정 세계 전부에 대한 권리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했다. 이렇게 해서 가족 구조는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를 지배하기 위해 투쟁하던 시기에 강화되고 안정됐다.”[43]

 

“노동자 국가에서는 남녀 사이에 새로운 형태의 관계가 확립돼야 한다. (...) 여성의 예속 상태에 기초를 둔 영속적 결혼은 사랑과 존중으로 뒷받침되는 노동자 국가의 두 구성원 사이의 자유로운 결합으로 대체돼야 한다. 이런 결합에서 남녀는 권리와 책임을 똑같이 평등하게 나눠 가질 것이다. (...) 그 속에서 모든 노동자가, 모든 남성과 여성이 동지가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미래 공산주의 사회의 남녀 관계일 것이다. (...) 새로운 형태는 (...) 애정과 동지애로 맺어진 결합일 것이고, 공산주의 사회의 평등한 두 인간이 맺는 결합일 것이다.”[44]

 

러시아혁명가들은 이러한 방향 속에서 자본주의 변혁 운동을 조직했다. 대표적으로 볼셰비키당은 가장 진보적인 여성들과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볼셰비키가 1917년 10월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계급의식을 고양하고 노동자계급을 조직화하고 통합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일례로 모스크바에서 노동조합은 초기에 여성이 더 후진적이고 보수적이라고 생각하여 여성 조합원을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했다. 이러한 생각은 노동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모든 국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점차 가장 진보된 노동자들은 성별에 따른 노동계급 내 분열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주로 남성 노동자들로 구성된 모스크바 노동조합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전단을 배포하며 노동계급의 단결 운동을 시도했다.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자 노동자들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일자리를 마련하고 공공탁아소와 공동식당, 공공세탁소 등을 개설하여 가사노동을 사회화했다. 볼셰비키는 경제적 평등을 위한 조치를 취했을 뿐 아니라 여성억압적인 제도 역시 뜯어고쳤다. 그 결과, 남녀는 법 앞에 평등해졌고, 이혼 절차가 간소화되었으며, 임신중지가 합법화, 성매매는 비범죄화됐다. 동성애 역시 합법화되었으며, 나아가 동성결혼도 보장했다. 형법에 성 행위에 관한 언급은 1922년 사라졌으며, 성범죄는 개인의 “생명, 건강, 자유, 존엄”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로 규정됐다. 이전과는 다르게 비혼모의 자녀도 법적으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완전한 자유, 평등, 진정한 우정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 관계가 꽃을 피웠다. 이러한 여성해방 조치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보다 최소 60년 이상 앞선 조치였다.

 

볼셰비키 정부는 법적 개혁뿐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가 구현해야 할 성평등 문화를 여러 캠페인을 통해 알려나갔다. 여성교육의 필요성과 아내 구타나 직장 내 성폭력을 금지하는 캠페인이 수많은 포스터, 영화, 연극을 통해 이뤄졌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혁명은 스탈린의 반혁명에 질식당했고 1917년 혁명 세대는 궤멸됐다. 그럼에도 대표적인 미국 러시아혁명 연구자 웬디 골드먼이 그의 책 <여성·국가·혁명>에서 “스탈린 정권이 저지른 모든 범죄 중 가장 끔찍한 것은 스탈린 관료 체제가 ‘현실 사회주의’라고 온 세계가 믿게 만든 것”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볼셰비키 혁명은 스탈린의 반혁명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여성해방을 노동자혁명의 중심 과제로 여겼고 이를 현실화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5. 20세기 하반기 사회주의 페미니즘 논쟁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서구 자본가 정부들에 의해 스탈린주의와 동일시되었으며, 남성중심적인 서구 사민당이나 공산당처럼 주류 좌파는 여성억압을 경제 문제로 환원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편견을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이 같은 조건에서 1970년대 좌파 페미니스트들은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억압의 관계를 밝히려는 시도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논쟁을 벌였고, 그 영향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여성억압을 야기하는 원인으로 무급 가사노동의 성격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다.

 

1972년 자율주의 페미니스트 마르크스주의자인 마리아로사 달라코스타와 셀마 제임스[45]는 <여성의 힘과 공동체의 전복>이라는 책에서 마르크스가 ‘생산적 노동’만이 교환가치를 창출한다고 밝힌 것을 ‘남성적’ 편견이라면서 마르크스의 정의가 대부분 여성이 수행하는 재생산 노동에 대한 경제적 보상의 결여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특히 가사노동은 가정에서 직접 소비할 사용가치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노동 능력이라는 필수 상품 노동력을 생산한다며, 주부들이 엄격한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착취당하는 '생산적 노동자'라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주부들이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표적 자율주의 페미니스트 실비아 페데리치 역시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적’이란 말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을 말하는 사전적 의미다. 잉여가치란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급된 가치를 초과하는 나머지 가치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적 노동이란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임금을 받는 노동, 즉 유급 노동을 의미한다. 가사노동은 노동자의 생존에 꼭 필요한 사용가치를 생산하지만,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의 생산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잉여가치의 생산이다. 노동자는 그가 무엇인가를 생산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 또는 자본의 가치증식에 기여하는 노동자만이 생산적이다. (...) 그러므로 생산적 노동자의 개념은 노동활동과 그 유용효과 사이의 관계, 즉 노동자와 그의 노동생산물 사이의 관계를 내포할 뿐 아니라 노동자를 자본의 직접적 가치증식 수단으로 만드는 특수한 사회적/역사적 생산관계도 내포한다. 따라서 생산적 노동자가 되는 것은 행운이 아니라 불운이다.[46]

 

위의 표현처럼,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가치증식 수단으로 만드는 특수한 사회역사적 생산관계 때문에 오히려 생산적 노동자가 되는 것은 오히려 불운이라고 말했다. 그 사회역사적 생산관계란 임금 노동자를 창출하기 위해 지배집단이 농민에게서 농토를 빼앗은 인클로저 운동과 같은 사례를 유추해볼 수 있다. 스페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마르티네스의 설명을 보면 이 같은 성격을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시장에서 판매되는 ‘유급노동’이 아니다. 사실 가사노동은 생산적인 것도, 비생산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범주는 유급 노동에 적용되는 것이고, 자본주의적인 잉여가치 생산에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은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것들을 생산한다. 그것이 시장에서 비교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 가치를 측정하는 데 쓰이는 추상적 노동으로 환원될 수 없다. 가사노동은 사적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소비되는 유용한 노동이다. 이것은 곧 가사노동의 지속시간, 반복 주기, 구체적인 할 일 등을 자본가들이 직접 통제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구별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와 노동력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노동자와 달리) 노동력은 시장에서 판매되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따를 때, 가사노동은 자본주의 사회관계에 종속돼 있으면서도 자율성을 유지하며, 자본의 통제에 종속돼 있지는 않다.[47]

 

즉, 자본주의는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재생산 노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잉여가치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이는 자본주의가 생산과 재생산영역을 분리하고 노동력 재생산에 따르는 부담을 사적으로 여성에게 전가했기 때문이다. 즉 자본은 여성에게 무급 재생산 노동이라는 굴레를 씌웠는데, 오늘날 이 부담은 더더욱 무거워졌다. 즉, 재생산 노동은 꼭 필요하지만, 가치나 잉여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논쟁의 갈래를 잘 살펴야 하는 이유는 가사임금을 말하는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생산하고 있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해방을 위해 어떠한 변혁 전략을 취할 것인가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라코스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억압에 맞서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주부들을 결집시키고 가사노동을 중단함으로써 가사임금을 쟁취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생산영역이 아닌 재생산영역을 계급투쟁의 영역으로 보면서 노동력이 사회적 공장에서 생산된다고 말하는 페데리치의 자율주의 페미니즘과도 같은 궤를 형성한다.

 

그러나 가사노동의 중단은 자본주의적 여성억압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할지라도 자본가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 가사노동이 자본가계급이 원하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페데리치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말하는 ‘자율적인 재생산 공동체’는 어떻게 이러한 사회로 이행할 것인가라는 점에서 반자본주의 전략이 부재하다.

 

이들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리즈 보겔은 마르크스가 체계화한 분석틀에서 여성억압의 근원을 찾았다. 그는 자본주의적 여성 억압의 근원을 가정 내의 개별적, 사적 관계로 함몰시키는 대신 노동력 재생산이 이뤄지는 사회적 구조에 주목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의 관계를 다뤘고,[48]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 수행되는 여성의 역할에서 여성억압의 근원을 해석했다.

 

그에 따르면, 계급 사회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항상 잉여 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 착취 가능한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영원히 살 수 없으며, ‘마모되고 죽고’ 새로운 노동력으로 최소한 똑같은 양의 신선한 노동력이 계속해서 교체되어야 한다. 세대교체를 통한 교체가 이루어질 때, 여성이 출산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성의 노동 능력이 출산 기간 동안 다소 제한되면서 지배계급에게 모순을 초래할 수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자본은 남성에 더 큰 생계유지 책임과 여성의 더 큰 필수 노동 책임, 그리고 가부장제를 이용했다.

 

결국 이 같은 조건에서 여성은 가정에서는 가사, 출산, 돌봄의 부담을 떠맡고, 직장에서는 남성이 중심이 되어, 여성은 ‘남성 가장’을 보조하는 ‘생계 보조자’로 위치지어진다. 이에 여성은 더욱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받으며, 나아가 가부장제는 노동자계급 내 젠더 위계와 분열을 유발하여, 계급적 단결을 가로 막아 자본이 노동력의 가치를 감소시킬 수 있도록 한다.

 

둘째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가부장제 간의 관계에 관한 토론이다.

 

1970년대 서구에서 하이디 하트만은 〈마르크스주의와 가부장제는 화해할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계급 환원주의’라며, 여성 억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두 개의 억압 체계를 함께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여성 억압을 설명하려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체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며 가부장제는 자율적인 억압 체계이며, 자본주의와는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봤다. 이들은 스스로를 사회주의 페미니즘으로 불렀다.

 

그러나 리즈 보겔과 같은 다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 특히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더 가까운 이론가들은 여성 억압은 자본주의 내에서 기능하며,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종속된 관계라고 봤다. 따라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별개의 체계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하나의 물질적 토대 위에서 여성 억압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전자는 이원론/이중체계론 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으로, 후자는 일원론이자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으로 불려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혼용해 쓴다. 한편, 일부 좌파는 페미니즘을 잘못된 관점으로 부르주아 여성운동과 동일하게 보아 자본주의 여성억압에 맞선 운동을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이라고 부른다. 전진이 말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내용은 ‘6.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전략’에서 살펴보자.

 

셋째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계급환원론이라는 딱지다.

 

자율주의 페미니스트나 이중체계론자 그리고 최근에는 사회재생산 페미니스트까지 마르크스주의를 계급환원론이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논지를 편다.

 

그러나 스페인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호세피나 마르티네스가 잘 지적했듯이, “‘계급 환원론’이라는 용어에는 난점이 있다. 마치 ‘젠더’ 요구를 ‘계급’ 요구에 대립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젠더냐 계급이냐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내의 경제주의, 부문 주의, 조합주의 관점이다. 계급적 관점에서라면, 노동자 운동 내 분열과 모든 성차별, 인종차별, 그 밖의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제기할 것”이다.[49]

 

여성 억압에 관한 경제주의적 입장이 널리 퍼진 이유는 각국에서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이 가부장적인 경제주의적 환원론을 취했고, 노동운동에서도 강력한 노동 관료제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노동 관료제는 여성, 가장 불안정한 처지의 청년, 이주민, 인종차별에 시달리는 사람들 등 노동자계급 내에서 가장 착취당하는 부분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지키려 한다.”[50]

 

6.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전략

 

이제까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적 전개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다시 간추리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물론적 관점에 따라 여성억압의 기원이 사적 소유에 있다고 봤다. 노동자계급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계급은 노동력 재생산을 위하여 생산과 재생산을 분리하고 재생산은 사적으로 여성에게 전가한다. 여기서 재생산노동은 원래부터 여성에게 부합하는 일이라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동원되어 차별적인 성별 노동 분업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이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변혁을 우회할 수 없다고 본다. 이를 위해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과 노동자계급이 동맹하여 여성해방을 노동자혁명의 중심 과제로 여겼던 러시아 혁명을 원류로 삼는다. 이때 노동자들은 가사노동을 사회화했을 뿐 아니라 동성결혼의 권리 등 현재도 접근하기 어려운 수많은 권리를 쟁취했다. 그러나 이후 “스탈린주의와 노조 관료주의, 국가기구로 넘어간 사회운동가와 비영리 단체의 탈정치적 분열로 노동자계급과 여성 간 동맹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페미니즘은 젠더에 따른 일체의 차별과 억압을 폐지하려는 사상이지만,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이 필요하다. 즉,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에는 과연 ‘어떤 정치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돼야 한다. 우리는 그 정치란 노동자계급정치여야 한다고 말한다. 즉,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노동자 헤게모니에 기초하여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그 토대부터 뒤엎을 변혁 전략을 취한다. “계급투쟁에서 헤게모니란 한 계급이 지배적인 위치에 서서 다른 계급들과 다양한 사회세력들을 이끌 수 있는 힘”[51]을 뜻한다. 노동자 헤게모니의 전략은 노동자계급 중심의 동맹을 건설하여 작게는 개별 페미니즘 사안부터 가부장적 자본주의 철폐와 사회주의 사회 건설까지 여성억압 문제를 계급투쟁의 과제로 삼고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다양한 페미니즘 운동이 전개되어 왔고, 그 성과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여성과 성소수자들은 여전히 차별적인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다. 더구나 최근 인셀(‘비자발적 독신자[Involuntary Celibate]’의 줄임말로 여성혐오 관념을 내재하고 있다) 문화처럼 여성과 성소수자는 점점 더 혐오와 폭력의 대상이 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각 페미니즘 진영의 정치에 대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부르주아 페미니즘은 자유, 평등, 정의라는 자유주의 가치에 근거하여 남성과의 동등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운동으로 특히 법적, 인습적 차별을 폐지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러나 이들이 성차별을 폐지하려는 이유는 남성과 공정하게 경쟁하려는 데 있다. 때문에 이들이 원하는 체제는 ‘성평등한 자본주의’로 요약되지만, 자본주의는 애초 여성억압적이기 때문에 실현 불가능한 요구라 할 수 있다. 여성의 현실이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상층 계급의 여성에 한정된다.

 

급진주의(분리주의) 페미니즘은 이 체제를 남성지배체제로, 사회의 위계와 모순을 근본적으로 생물학적 성차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사실상 가부장제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 외의 역사적 설명을 하지 못하며, 계급이 아닌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적대하여 트랜스젠더 혐오와 성차별적인 분리주의로 귀결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사회 불만을 약자에게 전가하는 지배질서에 의해 극우화 경향이 확산되는 현상과도 맞물려 있다.

 

교차성 페미니즘은 2008년 자본주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새로운 저항 운동이 등장하면서 페미니즘 운동, 성소수자 권리 운동, 인종차별 철폐 운동 등 다양한 억압받는 집단 간의 연대를 형성하기 위해 새로운 의미에서 ‘교차성’의 개념이 관심을 모은 데서 비롯됐다. 특히 국내에선 페미니즘 대중화와 맞물려 부상한 터프(TERF,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래디컬 페미니즘)에 반대하여 선호되었다. 이러한 교차성은 터프 등 분리주의나 전체주의 세력에 반하여 다양한 하위계층이 겪는 억압을 조명하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나 교차성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변혁 전략이 모호하다. 이를테면 교차성은 여러 정체성 중의 하나로 계급을 취급하는 경향이 있으며, 인종이나 성별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두지만 계급은 평가절하된다. 그러나 애초 1970년대 사회주의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단체 콤바이 리버 콜렉티브(CRC)의 정체성 담론은 계급을 여러 정체성 중 하나로 취급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이면서 흑인여성이자 레즈비언으로서 경험하는 억압을 말하기 위해 정체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동구 붕괴 뒤 포스트 모더니즘의 유행 속에서 콤바히 리버 콜렉티브가 제기한 정체성에 관한 문제의식은 탈계급화한다.

 

물론, 여성과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모든 문제가 계급으로 ‘환원’되지는 않지만, 억압과 착취의 범주를 명확히 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다. 계급은 착취의 영역이며, 성과 인종 등 이른바 정체성은 억압과 차별의 영역이다. 잉여가치 생산을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은 다양한 정체성을 활용하여 차별과 억압을 재생산함으로써 착취를 강화한다.

 

이러한 페미니즘 진영과 다르게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여성억압의 원인을 찾는다. 이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자본주의 변혁운동을 조직한다. 이를 위한 핵심적 과제는 노동자계급과 페미니즘 운동 간 역사적 동맹을 다시 세워내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페미니즘을 노동자계급 투쟁의 과제로 세워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혁명적 페미니즘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사회주의 여성단체 ‘빵과장미(Pan y Rosas)’”를 참조한다. 

 

7. 빵과장미 사례

 

빵과장미는 2003년 아르헨티나에서 창립해 지금은 수천 명으로 성장했고, 멕시코와 스페인, 프랑스 등 14개국에서도 생겨나 국제네트워크를 결성하고 있다. 이러한 빵과장미는 “이 고통스러운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야만 전 세계 여성의 삶에 만연한 성차별도 끝장낼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기반으로 삼는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과 성소수자가 진짜로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사회주의혁명만이 여성억압을 끝장낼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그 주체는 자본주의 체계가 억압하고 착취하는 노동자계급 당사자다. 하지만 이들은 노동자계급이 페미니즘 운동과 단결하고, 유색인종·원주민·성소수자를 비롯해 억압받는 사람들의 운동과 단결하면 무적의 세력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

 

실제로 빵과장미는 페미니즘 운동을 노동자계급과 연결하고 이들의 요구로 채택하도록 밀어 올리면서 새로운 사회주의 페미니즘 운동을 현장에서 일궈왔다. 빵과장미는 전국 곳곳의 공장과 작업장에 여성위원회(여기에는 여성 노동자뿐 아니라 남성 노동자의 배우자나 어머니, 딸도 포함된다)를 조직하기 위해 애써왔고, 성평등을 위해 수많은 계급투쟁을 일으켰다.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펩시코공장에서는 하청제도에 반대하고 출산휴가를 늘리며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이끌어 왔다. 남성만 고용했던 마디그라프의 한 공장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고 일했던 트랜스여성이 여성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파업을 조직하기도 했다. 크라프트 공장에서도 한 여성 노동자가 관리자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하자, 여성위원회가 파업을 조직했다. 참혹한 여성살해에 떨쳐 일어나 아르헨티나를 뒤흔든 니우나메노스 시위에 이어 임신중지 권리 쟁취 투쟁에서도 현장에서 파업을 일으키고 노조 지도부가 여성파업에 가세하도록 끈질기게 압력을 조직했다. 또 나아가 “한 명도 더 일자리를 잃을 수 없다”, “하청제도는 (여성) 폭력이다”라는 구호를 비롯해 니우나메노스 운동 속에서도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를 조직했다. 결국 2003년 아르헨티나에서 몇십 명으로 시작된 빵과장미는 이제 수천 명의 회원과 지지자를 결집해 단독으로 대중적인 집회까지 조직할 수 있는 규모로 성장했다.

 

이러한 빵과장미는 2001년 아르헨티나 금융위기 동안 벌어진 수많은 공장점거를 비롯한 노동자투쟁 속에서 태어났다. 그중 하나가 여성 노동자가 다수인 브루크만 의류 공장에서 일어났는데 이들은 경찰에 맞서 대결했고, 이 투쟁은 아르헨티나 사회주의노동자당이 빵과장미 운동을 조직하는 데 주요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들에게 여성의 권리란 사회주의를 통한 노동자의 집단적인 해방 투쟁의 일부였다. 더구나 국내 민주당처럼 말로만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또 다른 자본주의 정치세력 키르치네르 정부 속에서 노동자계급이 조직돼야 할 필요성은 점점 더 분명해지면서 빵과장미는 힘을 키워 나갔다.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을 우회할 수 없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전략의 핵심은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의 반자본주의의 계급동맹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은 함께 여성억압, 성소수자 혐오,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양자의 연대가 아닌 노동자계급의 자기조직화와 계급투쟁으로 이뤄지는 체제 변혁을 위한 전략이다.

 

노동자혁명으로 쟁취한 사회주의 사회는 여성해방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사적 소유와 임금 노동이 폐지된 사회에서 해방되어 노동자 자신이 생산과 재생산을 통제하여 여성억압의 물질적 기반을 제거하고,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생물학적 성 중심주의나 성별이분법이 아닌 연대적인 새로운 젠더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노동자계급과 페미니즘 운동과의 계급적 동맹을 통한 노동자계급의 페미니즘 운동, 즉 노동자계급으로서 여성과 퀴어, 청소년, 억압받는 우리 자신의 변혁적 여성운동을 조직하는 것이다.(끝)

 

[참고]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여성운동위원회, 《변혁적 여성운동 네트워크 건설을 위한 토론회》 자료집, 2022.11

양준석, 《오늘날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전략》

오연홍 편, 김요한·양동민·양준석·오연홍·전해성 옮김, 《빵과장미의 도전》, 숨쉬는책공장, 2023

정은희, <식민지 조선의 낙태죄와 세계 자본주의>, 《검은 시위》, 무산여성, 2023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웅진씽크빅, 2010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재만 옮김,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라티오, 2014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두레, 2012

Andrea D’Atri, Translated by Nathaniel Flakin, 《Bread and Roses》, PLUTO PRESS, 2021

Lise Vogel, 《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Brill,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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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산수단이 사적으로 소유되고, 임금 노동을 통해 잉여가치(이윤)를 창출하는 계급 사회의 경제 체제

[2] 클라라 체트킨, <오직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함께해야만 사회주의는 승리할 수 있다>
https://www.marxists.org/deutsch/archiv/zetkin/1896/10/proletfrau.html

[3] Lise Vogel, 《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Brill, 2013, 153p

[4] Andrea D’Atri, Translated by Nathaniel Flakin, Bread and Roses, PLUTO PRESEE, 2021

[5] 앞의 책

[6] Honeycutt, Karen. "Clara Zetkin: A Socialist Approach to the Problem of Woman's Oppression." Feminist Studies, vol. 3, no. 3/4, 1976, pp. 131–144

[7]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제2 인터내셔널에 속한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자국 전쟁을 지지하면서 분열됐을 때 노동자 국제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도 이들 여성 혁명가들이었다.

[8] 셀레스테 무리쇼·안드레아 다트리, <생산과 재생산>, 《빵과장미의 도전》, 숨쉬는책공장 2023, 134쪽

[9] 낸시 프레이저, 《전진하는 페미니즘》, 돌베개, 301-309쪽

[10] 강남식, 《한국 여성운동의 흐름과 쟁점》, 기억과 전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11] 여성평우회는 1920년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여성운동이 창설한 근우회를 조직 모델로 삼았다.

유경순, <1980년대 여성평우회의 기층여성 중심의 활동과 여성운동의 방향 논쟁>, 《역사문제연구》, 2020, vol.24, no.1, 통권 43호 pp. 457-499

[12] 앞의 글

[13] 최상림, <여성노동운동 지평확산을 위한 연대모색의 방향>, 《한국 여성노동자의 현실과 여성노동운동》, 전태일 35주기 기념 대토론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5

[14] 정다울, 이나영, <대학 여성운동을 역사화하기: 대학 사회 및 한국 여성운동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사회과학연구》 제28집 1권, 2020

[15] 1995년 북경대회가 주창. 강남식, 한국 여성운동의 흐름과 쟁점, 기억과 전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16] 대표적으로 김대중 대통령 취임에 앞서 평민당에 합류한 이우정, 박영숙은 1세대 여성운동가로 각각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 대표, 부대표를 지냈으며, 초대 여성부장관으로 임명된 한명숙 의원도 여연 상임대표 출신. 이후 민주당 공직자나 정부 관료로 진출하는 여성운동가의 수와 단체는 여연에 이어 한국여성민우회, 여성정치연구소 등으로 그 폭이 넓어졌음.

[17] 앞의 책

[18] 정성미, <비정규직 여성근로자의 고용특징>, 한국노동연구원, 2005

[19] http://women21.or.kr/policy/3623

[20] 앞선 20여 년간 합계출산율은 1.5~1.7명 사이로 유지했지만, 1998년에는 1.46명, 2002년에는 1.18명으로 급격하게 낮아졌다.

[21] 2002년 국민연금발전위원회가 ‘저출산’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해 사회적으로 공론화했다.

[22] https://www.betterfuture.go.kr/front/policySpace/basicPlanDetail.do;jsessionid=50834218BBCA6D108693F71F18E941BF.node20?articleId=1

[23] http://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79513059713069

[24]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재만 옮김,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라티오, 2014, 193-194쪽

[25] 앞의 책, 200쪽

[26] 앞의 책, 213쪽

[27]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엥겔스, 여성 노동자, 사회주의 페미니즘>, 《빵과장미의 도전》, 숨쉬는책공장, 2023, 156쪽

[28]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두레, 2012, 8-9쪽

[29] 앞의 책, 92-94쪽

[30] 앞의 책, 104쪽

[31] 앞의 책, 125-126쪽

[32]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인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빵과장미의 도전》, 174쪽

[33] 앞의 책, 129쪽

[34]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웅진씽크빅, 2010, 249-251쪽

[35]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하), 533-544쪽

[36]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하), 534-544쪽

[37]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1권(상), 223-224쪽

[38]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엥겔스, 여성 노동자, 사회주의 페미니즘>, 《빵과장미의 도전》, 154쪽

[39] Andrea D’Atri, Translated by Nathaniel Flakin, Bread and Roses, PLUTO PRESEE, 2021

[40] Andrea D’Atri, Translated by Nathaniel Flakin, Bread and Roses, PLUTO PRESEE, 2021

[41] Lise Vogel, 《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Brill, 2013

[42] 안드레아 다트리, <레온 트로츠키 저작 속의 여성 문제>

https://www.leftvoice.org/the-woman-question-in-the-work-of-leon-trotsky/

[43]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성적 관계와 계급투쟁>

https://www.marxists.org/archive/kollonta/1921/sex-class-struggle.htm

[44]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공산주의와 가족>

https://www.marxists.org/archive/kollonta/1920/communism-family.htm

[45] 그들은 뉴욕의 실비아 페데리치 등과 함께 국제페미니스트연합을 결성하고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을 벌였다.

[46] 카를 마르크스, 김수행 옮김, 《자본론》 1권(하), 688쪽

[47]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인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빵과장미의 도전》, 179-180쪽

[48] 사회주의를향한전진 내부토론회, <사회 재생산과 계급 환원론>, 2023.7.25

[49]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인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빵과장미의 도전》, 172-173쪽

[50] 앞의 책

[51] 양준석, 《오늘날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전략》,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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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강_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와 전략.pdf (232.4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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