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노동과세계
정년연장은 노동자계급의 요구가 될 수 없다
최근 민주노총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국민연금 수급개시연령과 연계한 65세 정년연장 법안의 2025년 국회 입법 통과를 강력히 촉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다음과 같다. 정년연장이 정말 노동자들의 요구여야 하는가? 주당 노동시간은 줄이자면서 평생의 노동시간은 늘리자는 게 모순되지는 않는가? 정년연장 요구는 일부 정년이 보장된 대기업 정규직, 공공부문의 노동자들만의 이해에 한정된 것이 아닌가?
한국에서 정년이 보장되는 사업장은 많지 않다. 현 정년연장 요구의 중심에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유노조·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그러나 저임금 불안정 고령노동자들도 정년연장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으며, 이에는 절박한 이유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노후소득 보장체계가 부실하고, 국민연금 수급개시연령이 65세로 늦춰진 상황에서,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들은 퇴직 후 생존하기 위해 더 오래 일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필자 역시 이런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 사업장의 정년연장 요구에 한정해 동의한다. 그러나 현 법적 정년연장 요구의 전반적 맥락은 이와 다르다.
정부와 자본은 고령화, 연금재정 부담, 숙련인력 유지 등을 명분으로 정년연장을 추진하지만, 실제 목적은 임금피크제 확대, 직무·성과급제 일반화, 탄력근로제 확대, 외주·파견·플랫폼고용 확대와 결합된 ‘장기 사용 가능한 값싼 노동력체제’ 구축이다. 이는 고령노동자 권리 확대가 아니라, 고령노동자를 더 낮은 임금과 더 취약한 위치에 가두고 더 오래 노동하도록 강제하는 조치다.
자본의 의도대로라면, 기업은 숙련노동력을 계속 사용하면서도 인건비를 대폭 삭감할 수 있고, 청년층에게 돌아가야 할 신규·양질 일자리는 축소되고, 한정된 일자리를 두고 세대 간 경쟁이 격화된다. 이에 따라 자본은 일자리 문제의 본질이 마치 정년을 둘러싼 노동자들 간 이해충돌인 것처럼 몰고간다.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정년 문제의 본질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결국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가, 우리가 노동하고 생산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노동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부는 누구를 위해 어떻게 쓰여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공적연금에 대한 자본의 부담을 높이고, 교육·의료·주거·노후생활을 국가가 보장하라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대안은 ‘무조건적 정년연장’이나 ‘현행 유지’의 협소한 이분법이 아니라, ①공적연금 소득대체율 강화와 사적연금 의존 구조 축소 ②전 사회적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 ③비정규·간접고용 철폐 ④초과이윤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 ⑤주거·의료·돌봄·교육 공공성 강화를 통해 노후생계를 이유로 고령노동을 강요받지 않을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다. 특히 정년연장 논의는 국민연금 수급개시연령 65세 상향에 따른 소득 공백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며, 국민연금의 문제는 곧 극심한 저출생에서 파생된다. 공적연금에 대한 자본의 부담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교육·의료·주거·노후생활에 대한 국가적 보장체제 구축으로 노동자계급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구축하지 못하는 한, 극심한 저출생으로 표현되는 사회재생산의 위기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적 전환 없이 추진되는 정년연장은 고령노동자에게는 빈곤을 매개로 한 강제적 노동 연장이고, 청년에게는 일자리에 대한 구조적 진입장벽의 확대이며, 전체 노동자계급에게는 임금 하향 압력과 노동자들간의 분열을 확대하는 반동적 정책에 불과하다. 따라서 민주노총은 전체 노동자들의 근본적 요구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살펴야 한다.
민주노총은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체제와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현재 60세까지 정년을 유지하는 비중은 약 17.4%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2023년 6월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정년제를 운용하는 기업은 21.2%로 사업체 규모가 클수록, 사업체에 노동조합이 있을수록 정년제 운영비율이 높았다. 300인 이상 기업 94.6%, 노조가 있는 기업 95.7%에 정년제도가 있다. 300인 미만 기업의 경우 21.0%, 노조가 없는 기업의 경우 17.8%만이 정년제를 운용하고 있다. 즉, 정년을 보장받는 노동자 대부분은 대기업 정규직, 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이다. 대다수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60세 정년’도 남의 얘기일 텐데, 65세 정년연장 투쟁에 얼마나 동참할 수 있겠는가? 정년연장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요구가 될 수 없다.
더 늦은 은퇴를 거부하는 프랑스 노동자들의 거대한 투쟁을 보자
2023년 프랑스에서는 연금수급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올리는 마크롱 정부의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뜨거운 투쟁이 벌어졌다. 마크롱 정부는 2017년 취임 이후 부동산, 동산, 금융자산 등 순자산 전반에 대해 부과되던 부유세(‘부에 대한 연대세’)를 부동산 자산에만 부과하도록 한정했다. 법인세는 33.3%에서 25%까지 낮췄다. 자본가들을 위한 전방위 감세와 함께 마크롱 정부는 연금제도까지 손댔다. 마크롱 정부가 연금수급연령을 단계적으로 64세로 올리며 더 많은 노동을 강요하자, 연금개악에 반대하는 거대한 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정부는 입법절차를 우회해 연금개악안을 밀어붙이고자 프랑스 헌법 49조 3항, 즉 의회 표결 없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비상입법조항’까지 발동하며 연금개악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노동자 민중의 분노는 커졌고, 프랑스 정치권은 극심한 균열로 치달았다. 2024년 조기 총선에서 마크롱 정부 여당인 '르네상스'는 과반을 상실했고, 이후 구성된 내각은 예산안 처리와 긴축을 둘러싼 갈등으로 연거푸 붕괴했다. 결국 2025년 10월, 세 번째 총리로 임명된 세바스티앙 르코르뉘는 불신임 위기를 피하고자 연금개악을 2027년 대선 이후로 '일시 정지'하겠다고 발표했다.
프랑스와 한국의 세부적 상황이야 다를 수 있으나, 큰 맥락은 다르지 않다. 현 상황의 본질은 누가 연금의 재정과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위기로 전쟁과 학살로 치닫는 자본주의 속에서 누가 위기의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가를 두고 벌어지는 매우 중대한 전투다. 각국 지배계급은 군비를 확대할 돈은 있어도 복지를 확대할 돈은 없다. 반도체산업 자본가에게 갖다줄 돈은 있어도 반도체산업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갖다줄 돈은 없다. 연금수급연령을 늦추고, 가입기간을 늘려서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들이 져야 하는가? 아니면 기업과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늘려 그들이 책임지게 할 것인가? 마크롱은 이렇게 말했다. “정년연장을 하지 않는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 연금을 납부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마크롱이 연금개악의 명분으로 삼은 당사자들인 청년들은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는 길을 선택했다. 2025년 프랑스 정부의 발표로 연금 개악은 잠시 멈췄으나, 아직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이를 두고 또 한 번 격돌이 있을 것이다.
만약 한국 노동자들이 이대로 ‘정년연장’을 요구한다면, 프랑스 지배계급은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봐라, 근면한 한국 노동자들은 당신들과 달리 제발 더 일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한국 노동자들이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 지배계급의 개악조치에 명분을 더해주다니, 안될 일이다. 오히려 우리 한국 노동자들이 더 늦은 은퇴를 거부하는 프랑스 노동자들의 거대한 투쟁으로부터 용기를 얻고,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 지배계급을 향해 이렇게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의 극심한 저출생 위기, 40%에 달하는 노인빈곤에 대한 책임은 국가와 자본이 져라!”, “공적연금에 대한 자본의 부담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교육·의료·주거·노후 생활에 대한 국가적 보장체제를 구축하라!”

2023년 프랑스 노동자들의 연금개악 반대투쟁
위기로 치닫는 자본주의, 사회를 파탄 낸 지배계급의 책임을 묻자
연금과 정년을 둘러싼 투쟁에 있어 노동자계급의 방향은 ‘정년연장’이 아니라 임금·고용·연금·복지를 결합한 총체적 대안을 쟁취하기 위한 계급투쟁이다. 이미 정년을 보장받는 일부 노동자가 아니라, 대다수 미조직 불안정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할 요구, 전체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추동할 요구를 제출해야 한다. 노동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부의 사용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통제력을 확대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한다.
이는 결코 ‘국회를 통과할 만한 정책’이나 ‘자본가들과 협상 가능한 현실적 정책’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동자를 단물, 쓴물, 골수까지 빼 먹다 폐기처분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 그 자체에 맞선 투쟁에 나서야 한다. 위기로 치닫는 자본주의 속에서, 지배계급은 젊은 노동자와 고령 노동자,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 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를 가르며 사회를 파탄 낸 자기 책임을 모면한다. 지금, 노동자의 단결은 국가와 자본에 맞선 투쟁 속에서만 가능하다. 총체적 삶의 위기 앞에, 우리의 요구는 더 많은 고령노동이 아니다. 우리의 요구는 공적연금에 대한 자본 부담 확대와 교육·의료·주거·노후 생활에 대한 국가적 보장체제 구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