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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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4

  • 최종현
  • 등록 2025.07.14 13:05
  • 조회수 122

[편집자 주]

2023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대량학살하고 있다. 히메나 베르가라의 이 글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계급적·국제주의적 전략을 제시한다. 본 번역은 글의 분량상 총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전편 읽기]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1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2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3 

 

아랍 민족주의에서 정치적 이슬람으로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은 중동의 지정학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또한, 제국주의의 침투와 함께 1950년대 이후 계급투쟁과 정치적 위기로 분출한 사회적 긴장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 시기에 새로운 탈식민 정부들이 다양한 형태의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등장했다. 이라크의 파이잘 1세 국왕,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와 같은 정치 지도자들이 이를 대표했다. ‘아랍 민족주의 운동(Arab Nationalist Movement)’,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PLO)’,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Arab Socialist Ba'ath Party, 약칭 바트당)’과 같은 조직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1967년 6일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이들 지도세력은 주도적 지위에 있었다. 클라우디아 시나티는 “정치적 이슬람, 반제국주의,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슬람주의 부상은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거둔 승리에 그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 전쟁 이후, 1950년대에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쿠데타로 (역자: 제국주의에 기생하거나 협력하던) 토착 지배세력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탈식민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권들은, 돌이킬 수 없는 쇠퇴에 접어들었다. 1967년 6월 6일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에 대한 선제공격을 개시했다. 시온주의 군대는 단 6일 만에 세 국가를 패배시키고 예루살렘과 요르단 강 서안지구는 물론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까지 점령했다. 이 사건의 충격은 너무나 커서, 나세르가 침공 당일 밤 사임할 정도였다. (역자: 나세르 사임을 반대하는) 수백만 규모의 집회가 나세르의 권력을 유지시켰지만, 나세르주의적 민족주의는 이미 소진된 상태였다. 1970년 나세르 사망 이후, 그의 후계자인 안와르 사다트는 경제 개방과 광범위한 민영화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이 정책은 많은 사람들, 특히 나세르 치하의 호황기 동안 농촌에서 대도시로 대거 이주해 도시 외곽에 정착한 빈민층 대중에게 재앙적 결과를 초래했다.

 

6일 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이 패배하며 만들어진 세력균형에 따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결국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1)에 서명했다. 이집트는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을 인정한 최초의 아랍 국가가 되었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 대부분의 아랍 국가에서 구 민족주의 정부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이는 스탈린주의의 변종들과 다른 세속주의 그룹 등 좌익 민족주의 조직들을 일시적으로 강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통적 민족주의의 위기 앞에서, 점점 더 정치화된 이슬람주의 조직들이 아랍 청년층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시나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1978년 9월 17일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총리에 의해 조인된 협정으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중재 및 입회하에 체결되었다. 조인된 두 주요 협정 중 하나인 중동 평화협정에는 이스라엘의 독립적 주권과 영토 인정, 양국 간 적대관계 청산 및 관계 정상화, 시나이 반도에서의 이스라엘 완전 철수,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이 담겨 있었다.
해당 협정에 정작 당사자 기구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참여는 배제되었다. 1978년 12월, 1979년 12월 유엔총회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PLO의 참여가 배제된 것, 협정 내용이 팔레스타인인들의 귀환권, 자결권, 민족 독립, 주권에 부합하지 않음에 대한 비판을 담은 결의안을 의결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며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이집트는 1979년 아랍연맹에서 퇴출되었다. (역자주)

 

...기존 이슬람주의 조직과 신생 이슬람주의 조직들은... 이집트와 알제리 등의 국가에서 도시 빈민층을 이룬 실업 청년들과, 고등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확대되었지만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시기에 형성된 대학생과 지식인층 사이에서 강화되었다. 전통적 조직에 비해, 이 단체들은 종교적 담론과 행동 방식을 급진화했다... 2006년 1월 의회 선거에서 파타(Fatah)를 제치고 승리한 하마스의 대중적 부상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붕괴를, 그리고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제국주의 및 이스라엘 국가와 추진하던 화해 정책의 실패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신호다.

 

자브라 니콜라는 아랍 민족주의의 역할로부터 연속혁명의 전체적 동학에 대한 자신의 전망과 부합하는 교훈을 도출했다. 그는 “중동 혁명에 관한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948년 정착민 식민주의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고향에서 쫓아내면서 탄생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웃 아랍 국가로 흩어졌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난민 캠프에 수용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아랍 국가에서 받았던 사회적 처우를 드러낸다. 아랍 정권들은 이스라엘 국가에 반대한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되찾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나세르가 집권했을 때, 대중이 아니라 국가 기구들로 이스라엘에 대항하려는 그의 시도는 이집트인들과 다른 아랍 대중은 물론 팔레스타인인들도 무력하게 만들었다... 1967년 6월 아랍 군대의 패배는 심각한 타격이었으며 아랍 대중은 이에 동요했다.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 대중은 제국주의와 시온주의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투쟁에 있어 나세르주의 지도부에 희망을 걸었으나, 이 참패로 나세르주의 지도부가 제국주의에 맞서거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이끌 능력이 없음이 드러났다. 그 결과 그들 정권은 흔들렸고, 그들의 파산에 눈뜨기 시작한 대중에 의해 전복될 위험을 느꼈다.

 

1978년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나 악수하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왼쪽)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오른쪽), 중재자로 참여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가운데) 출처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60년대와 1970년대 중동 전역에서 일어난 이슬람주의 조직의 부흥과 정치화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서 뒤늦게 나타났으며, 그 결과 고유한 특징을 갖게 되었다. 달 피토(Dal Fitto)는 하마스의 등장을, 아랍 부르주아들의 잇따른 배신 이후 팔레스타인 해방을 향한 열망을 전달할 수 있었던 소부르주아 지도부의 출현으로 설명한다.

 

종교적 소부르주아(하마스, 이슬람 지하드)는 무슬림형제단의 영향을 받아 이집트에서 유입된 '혁명적 이슬람' 전략에 따라 움직였다. 이들은 1979년 레자 팔레비의 친제국주의 정권을 전복하고 호메이니의 비호 아래 신정체제를 구축한 이란 시아파 정치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호메이니는 혁명에 참여했던 공산주의자와 노동자 집단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주도했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이슬람공화국이 수립된 직후, 여성에 대한 히잡 착용 의무조치가 강제되자 같은 해 3월 8일 여성의날 벌어진 반정부 시위. 1979년 팔레비 왕정을 타도한 이란 혁명에 앞서, 이란 노동자계급은 1978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란 전역을 마비시키는 총파업을 펼쳤다. 총파업 조직 과정에서 노동자평의회 성격을 지닌 ‘쇼라’가 등장한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모두 민족해방운동의 일부를 이끌며 광범위한 사회적, 정치적 유권자 기반을 갖춘 조직이다. 시나티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파타(Fatah)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파벌의 통제 하에 범민족적 팔레스타인 투쟁을 주도해왔다. 이슬람주의와는 거리가 먼 운동의 급진적 부위는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과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 같은 마르크스주의 계열 단체를 통해 표현되었다. 세속주의 지도부가 주도해온 이 흐름은 1987년 제1차 인티파다 과정에서 셰이크 아메드 야신이 무슬림형제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팔레스타인 영토에 정착해 이슬람 저항 운동, 즉 하마스를 창립하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마스는 1987년 난민 캠프와 도시 지역의 가난한 청년들이 주도해 팔레스타인 영토 전역으로 확산된 제1차 인티파다 속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등장했다. 시나티는 “하마스의 특징은 팔레스타인 청년들의 증오심에 종교적 논리를 부여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진실한 사람들(true people)의 체현, 즉 ‘부패한’ 세속 엘리트에 맞서는 순수하고 신실한 ‘움마’2)의 체현으로 내세우고, 이로 하여금 신앙심 깊은 부르주아와의 동맹을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이후 몇 년간 하마스의 사회적 기반은 2001년 아리엘 샤론이 이스라엘 대통령에 당선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시작하며 군사 봉쇄가 강화될 때까지 가자지구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2)  ‘أمة’ 이슬람 교단이나 공동체를 의미하며, 종교적 체계와 규율에 기초한 모든 무슬림의 초국가적 공동체를 가리킨다. (역자주)

 

1988년 1월 서안지구에서 촬영된 제1차 인티파다 당시 사진 (인티파다는 아랍어로 ‘봉기’를 의미)

 

2000년 10월 29일 제2차 인티파다 당시 가자지구에 진입한 이스라엘군 전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파리스 오데. 2000년 당시 파리스 오데는 만 14세였으며, 같은 해 11월 8일 가자 북부 카르니 교차로에서 이스라군을 상대로 저항을 이어가다 사망한다. (출처 : AP통신)

 

샤론이 이끄는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영토로 진격하였고, 야세르 아라파트를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시켰다. 아라파트의 후계자로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된 마흐무드 압바스는, 상황이 팔레스타인 대중에게 점점 더 견디기 어려워지는 가운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시온주의 점령군 및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했다. 하마스가 2006년 가자지구 선거에서 승리한 배경에는 이러한 맥락이 있다. 클라우디아 시나티는 2009년 자신의 저작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마스는 샤리아에 기반한 이슬람 국가 수립이라는 목표를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반미·반이스라엘 담론을 유지하면서 아랍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쇠퇴를 기회로 삼았다. 그러나 하마스의 일련의 선거 공약과 이스라엘 점령에 맞선 저항의 지속을 넘어, 역사적 팔레스타인 영토에 종교 국가(confessional state)를 세우겠다는 전략은 반동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민중의 정당한 민족적 열망에 대한 진보적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종교적 도덕을 절대적 가치이자 법으로 삼는 것은 기본적인 민주적 자유를 공격하며 사회적 억압의 도구를 유지하는 것뿐 아니라, 서구 사회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사회에도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있으며, 종교가 착취자의 지배 유지에 봉사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이스라엘 국가를 종교 국가(religious state)로 대체하려는 하마스의 전망은 아랍인, 무슬림, 유대인 대중의 해방을 가져올 수 없다. 이란식 종교 국가는 권위주의 국가일 뿐만 아니라 심각한 계급 모순으로 분열된 자본주의 국가이기도 하다. 소위 ‘팔레스타인 대의’3)에 종속되지 않는 노선은 무엇보다 일관된 반제국주의·반시온주의 노선을 요구한다. 동시에, ‘팔레스타인 대의’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진지로 삼으며 자국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을 착취하고, 많은 경우 청년, 여성, 성소수자, 좌파를 탄압하는 아랍 부르주아지와도 독립적인 노선을 요구한다.

3) 필자는 여기서 부르주아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왜곡된 ‘팔레스타인 대의’를 비판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편집자 주)

 

아랍 민족주의의 다양한 정당과 인물들은,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대중적 저항운동의 일부인 이슬람주의 조직들(하마스, 헤즈볼라 등)과 공통점을 지닌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계급 관계나 지역 내 제국주의의 구조적 이해관계를 건드리지 않고서, 시온주의의 압제를 종식시키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2022년 12월 14일 가자기구 도심에서 열린 하마스 창립 35주년 기념 집회 (출처 : Quds News Network)

 

아랍의 봄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의)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경찰이 자신의 물건을 압수하고 모욕을 주며 수레를 뒤집어엎자 이에 항의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수만 명의 튀니지인들이 부아지지를 기리며 수십 년간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부과되고 2008년 대불황으로 악화된 굶주림와 고통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 사이 부아지지는 병원에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다. 대중은 1987년부터 국가를 통치해온 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의 권위주의 정권에 분노를 쏟아냈다. 2011년 1월 4일 부아지지는 사망했고, 벤 알리는 불과 열흘 뒤인 1월 14일 대중의 힘으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튀니지 반란은 (아랍)지역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집트에서는 수백만 명이 호스니 무바라크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왔고, 리비아에서는 무아마르 카다피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시리아에서는 바하르 알 아사드에 맞서 반란이 일어났고, 알제리와 예멘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저마다의 특수성이 있었지만, 이들 정부는 공통적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주의적 아랍 민족주의가 절정에 달했을 때 부르주아 민족주의 강령을 내걸고 집권했다. 1970년대의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겪은 이후, 이들 정부는 신자유주의로 전환하여 점점 더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미국의 명령을 집행했다.

 

물론 아랍의 봄 기간에 대규모 반란을 겪은 국가들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민족적으로 이질적이며, 경제적 구조도 불균등하고 다채롭다. 그러나 많은 역사적 추세가 이들을 공통분모로 엮고 있으며, 아랍의 봄은 이 지역 전체에 걸친 '문제의 통일성'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2008년 경제위기는 식량 가격 상승으로 표현되었고, 이는 북아프리카 전역에 식량 위기를 초래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아랍의 봄에 앞서 도시 빈민층 주도로 빵 폭동4)이 벌어졌다. 무바라크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이 발발하기 전, 이집트 노동계급은 마할라알쿠브라(Mahalla el Kubra)와 같은 중요한 노동자 중심지에서 노동력의 재편 과정을 겪는 동시에 저임금에 맞선 투쟁을 경험했다.

4) 2008년 경제위기 여파로 곡물가격이 급등해 식량위기가 이집트 전역에 확산된다. 국영 빵집에서 판매하는 빵 크기와 양이 줄고, 정부는 1인당 빵 구매량에 상한선을 설정한다(인구 절반가량이 빈곤층인 이집트는 국영 빵집에서 빵을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국영 빵집 대기열을 두고 발생한 충돌이 유혈사태로 번지고, 국영 제빵업자들이 정부와 경찰에 건낼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밀가루를 암시장에 팔아치우는 지경에 이른다. 국영 제빵업자들이 파업하자 무라바크 정권은 긴급조치로 군대를 동원해 빵을 굽게 한다. 

식량위기와 저임금이 촉발한 분노로, 이집트 노동자계급과 반체제운동 진영은 2008년 4월 6일 예정된 마할라알쿠브라 섬유 노동자 수천 명의 파업에 호응하며 총파업을 조직한다. 그러나 파업 당일 경찰이 도시를 원천봉쇄하고, 주요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하며 총파업은 무산된다. SNS 매개로 총파업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4월 6일 청년운동’은 2011년 이집트 혁명에서 주요 세력으로 부상한다.

 

“아랍의 봄” 동안 계급투쟁 과정은 그 깊이, 대중의 참여 정도 등에서 서로 다른 수위로 전개된다. 요컨대, 각국의 계급투쟁 동학은 상이했다. (각국의 투쟁은) 잔혹한 독재 정권에 대한 반란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제국주의에 이용되었다. 제국주의 강대국들은 이 반란을 제국주의적 목적에 더 이상 복무하지 않는 협력자들을 제거하는 기회로 삼았으며, 리비아와 시리아에서는 카다피와 아사드에 대해 군사 개입까지 단행했다.

 

예를 들어 리비아에서 카다피 독재에 대한 반란은 민중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반란이 대중의 자기조직화에 기반한 독립적 지도부를 갖추지 못한 가운데, 제국주의 세력은 이를 이용해 나토를 통해 직접적으로 개입하며 피비린내나는 내전을 일으켰다. 카다피 처형 이후 리비아는 제국주의에 더 크게 종속되었다. 트로츠키주의 분파(Trotskyist Fraction)로서 우리는 2013년 “혁명적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운동을 위한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리비아와 같은 공개적인 내전(open civil war) 사례에서, 독재자들에 맞선 군사적 투쟁과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분리할 수 없으며, 내전의 과정을 어떤 계급이 주도하며 그들의 사회적 내용이 무엇인가에 관한 문제도 부차화될 수 없다. 정치적 문제를 군사적 문제에 종속시키는 관점은 나토 개입으로 이루어진 카다피 축출을 ‘대중운동의 승리'로 해석하게 만든다. 이는 미국과 다른 강대국이 반독재 시류에 편승해, 민주화운동이 '연속적(permanent)’ 동력을 얻는 것을 막음으로써 정권 교체 후 새로운 동맹을 확보하고자 하던 시기에 발생했다. 즉, 그들은 운동이 부르주아와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투쟁으로 전환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시리아의 경우, '반군'에 대한 정치적 유보 없이 그들 편에 서거나, 미국의 동맹국들이 유지하는 친제국주의적 반군 지도부로부터 독립적인 전략의 제시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급진화된 노동자계급이 주도한 더 심오하고 발전된 과정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무바라크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뒤를 이은 무슬림 형제단의 온건 이슬람주의 정부와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싸웠다. 노동자계급과 대중의 활동은 무슬림형제단 정부의 약점과 결부되며 체제 전체를 위협했다. 결국 부르주아 야당 주요 지도부의 지지를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 결과 미국의 이익에 전적으로 종속된 권위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혁명적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운동을 위한 선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튀니지의 엔나흐다당과 이집트의 자유정의당 등 집권한 모든 이슬람주의 조직은 종교적 광신, 후견주의적 포퓰리즘(clientelistic populism),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혼합하여 설교하는 부르주아 세력이다. 혁명가들은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부르주아지나 그 대표자와 동맹을 맺는 대신, 노동자계급적이고 반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이러한 정책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집트 운동에서 드러난 동학은 대중의 삶의 조건과 관련된 요구에 연속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는 민주적 혁명이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제국주의적 억압을 종식하지 않고는 이러한 요구가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혁명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첫 번째 구조적 민주주의 문제이며,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이를 끝까지 이끌 수 있다.

 

‘아랍의 봄’으로 알려진 계급투쟁의 순환은 중동 전역의 아랍 프롤레타리아를 하나로 묶는 경제적,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단결을 보여주었다. 이 단결은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유대뿐만 아니라 착취와 제국주의적 억압, 계급투쟁을 함께 겪어온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아랍의 봄은 동시에 아랍 부르주아, 그리고 아랍 부르주아와 ‘반제국주의’ 투쟁의 이름으로 협력하는 조직들이 거대한 장애물로 작용했음을 드러냈다. 이 아랍 국가들은 자국 노동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며, 외세 제국주의로부터 양보를 얻기 위한 기반으로 활용하고 있다.

 

출처 : AFP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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