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꺼지지 않을 해방의 횃불 광주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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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영원히 꺼지지 않을 해방의 횃불 광주민중항쟁

  • 이용덕
  • 등록 2025.05.16 09:22
  • 조회수 88

 

윤석열의 계엄에 맞선 투쟁에서 광주민중항쟁은 부활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계엄군과 맞섰던 광주 노동자 민중의 용기가, 그들이 지키려 했던 민주주의가 윤석열 퇴진 투쟁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왔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다. 더욱 엄숙한 마음으로 광주항쟁의 기억을 돌아본다.

 

피의 일요일부터 계엄군의 도청 철수까지

 

1979년 박정희의 죽음은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켰다. 부산과 마산 등에서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다. 1980년 봄, 학생들은 유신체제의 완전한 청산을 위해 투쟁했다. 이들은 유신잔당이라 불리는 정치인들의 퇴진, 1972년 박탈한 대통령 직접선거권의 회복, 계엄령 해제를 요구했다. 1980년 5월은 민주화의 요구가 전국적으로 고조되면서 유신체제를 떠받쳐온 군부와 민중의 대결은 결정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서울의 봄’과 광주의 저항을 짓밟으며 군사파시즘 체제를 재수립하려 했다. 신군부의 꼭두각시 같은 최규하 정부는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군인들이 주요 대학을 점령했다. 학생운동 지도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갔다.

 

전국이 숨죽이고 있을 때 광주에서는 학생, 시민, 노동자들의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었다. 5월 8일부터 16일까지 ‘민족민주성회’라는 두 차례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횃불 행진 등 투쟁의 분위기가 끓어올랐다.

 

공수부대 계엄군은 군홧발을 앞세우고 진압봉과 대검을 휘두르며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에 나서 처참한 만행을 저질렀다. 5월 18일은 ‘피의 일요일’이었다. 일요일 오전 계엄 확대 소식을 듣고 모인 전남대 학생들을 맞이한 것은 새벽에 이미 학교를 점령한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였다. 공수부대는 가정집까지 뛰어 들어가 사람들을 연행했다. 붙잡힌 사람은 발가벗긴 뒤 맨몸의 시위대를 향해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었다. 19일부터 저항도 더 거세졌다. 이제 항쟁은 영세 작업장 노동자, 택시 기사 등 평범한 노동자들이 주도했다.

 

금남로 차량 시위 

 

5월 20일 오후가 되면서 10만에 이르는 노동자 민중이 금남로를 메웠다. 오후 7시쯤 운수 노동자들이 200여 대의 버스와 택시에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로 들어섰다. 운수 노동자들은 차량을 앞세워 계엄군을 밀어붙였다. 5월 21일 오후 1시 계엄군은 도청에서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자행했다. 도청 앞 상무관에는 대검에 난자당한 시신들, 구타로 얼굴이 짓이겨진 시신들, 총격에 머리통이 날아간 시신들이 넘쳐났다.

 

공수부대의 잔혹한 유혈진압이 계속되자 시위대는 자신과 가족과 이웃을 지키려고 관청을 습격하고, 무기고를 접수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총과 장갑차로 밀어붙이는 공수부대의 살육에 투석전만으로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시민군 대표’ 이름으로 발표된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팜플릿에서 시민들은 무장 이유에 대해 “그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는가?"

 

광주지역 노동운동의 거름과 불씨였던 들불야학 출신들은 5월 21일부터 ‘투사회보’라는 소식지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계엄군의 학살을 알려 나갔다. 시내 곳곳에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 졌다. 시민군은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으로 계속 몸을 던졌다. 증원된 공수부대의 진입을 막기 위해 시민들은 바리케이드를 쳤다. 일부 시위대는 차량을 나누어 타고 광주를 빠져나가 전남 일대를 누비며 진실을 알리고 시위를 널리 퍼뜨렸다. 항쟁은 급속히 화순, 나주, 함평, 영광,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 16개 지역으로 확산됐다.

5월 23일 투사회보 6호

 

노동자 민중 시위대는 광주항쟁을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왜곡 보도하는 MBC와 KBS 방송국을 응징했다. 시민들은 세무서도 공격했다. 자신들을 무참하게 진압하는 군을 위해 자신들의 세금이 사용된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기존의 국가 기능에 대한 부정, 새로운 국가 질서에 대한 모색이 진행됐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사적으로 전투에 임하는 시민군을 상대로 계엄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고, 21일 도청에서 철수하여 외곽으로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대한 해방공동체

 

광주는 투쟁하는 노동대중의 힘으로 해방되었다. 노동대중이 광주를 움직였고, 스스로 치안과 행정을 떠맡았다. 계엄군이 광주를 봉쇄해, 광주 노동자 민중은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공급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치 조직과 무장 조직을 만들어 스스로 질서를 잡아나갔다. 시민군 관리 사무실을 만들고 사령부에 접근할 수 있는 통행증과 차량 통과를 위해 안전 통행권, 연료 주입권을 발행했다. 식량이 떨어진 이웃과 쌀을 나누었다. 많은 시민이 주먹밥과 음료수를 이고 거리로 나와 곳곳에서 시민군에게 나누어 주었다.

 

22일부터 산수시장 아주머니들이 밥을 지어 손수레로 실어다 주었고, 도청에 가족 생사확인을 위해 들렸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동네 사람들과 상의하여 주먹밥과 빵, 우유 등을 가져다주었다. 양동시장과 서방시장에서도 밥을 짓거나 주먹밥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산수동, 학운동, 백운동, 농성동, 운암동, 두암동 등 외곽을 방어하는 지역방위대도 앞장서서 식사를 공급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정성을 다해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나이 어린 학생들까지 헌혈에 앞장서 혈액은 남아돌았다. 혼란을 틈탄 매점매석도 없었고 범죄는 없었다. 금융기관이나 금은방 하나 탈취된 곳이 없었다.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너도나도 헌혈에 앞장섰다 

 

광주 노동자 민중 모두가 개인보다는 전체를 생각했다. 23일 이후 도청 앞 광장에서 여러 차례 궐기대회를 열고, 활발한 민주적 토론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 민중이 직접 세상을 운영하는 위대한 광주 해방공동체가 탄생하고 있었다.

 

진정한 지도부

 

피 흘려 쟁취한 해방광주는 지도부에 의해 무너져 갔다. 5월 23일 수습대책위원회는 무장을 해제하고 협상하자는 ‘투항파’와, 희생자들의 피에 보답하려면 무기를 들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투쟁파’로 나뉘었다. 부시장을 주축으로 신부, 교수, 변호사, 정치인, 지역유지 등 행정관료와 지역 자본가들로 구성된 수습대책위는 계엄군과 협상에 들어갔고, 시민군의 무기를 회수하여 계엄군에 반납할 것을 결정했다. 이들은 군부독재를 반대했지만, 기존 질서를 뛰어넘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할 정도로 성장한 노동대중의 힘을 두려워했다. 6·25 때나 쓰던 M1과 카빈소총을 들고, M16으로 무장한 고도로 훈련된 공수부대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5월 23일 오전 도청 내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재야수습대책위원회와 합의하여 강제로 무기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궐기대회가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도 도청 수습대책위는 계속 무기를 회수했다. 기동순찰대가 아닌 사람이 총을 들고 있으면, 강제로 총기를 회수해 갔다.

 

5월 25일 3차 시민 궐기대회에서 투쟁파의 주장이 지지를 얻어 오후 10시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결성하였다. 시민궐기대회는 수습위의 투항주의 노선을 대중적으로 폭로하고 노동대중의 투쟁 의지를 더욱 확산시키는 투쟁의 공간으로 자리 잡아갔다.

 

10만이 모인 대회에서 대중은 수습위와 계엄군의 협상 내용 공개를 요구했고, 수습대책위가 제시한 ‘사후보복을 막는 선에서의 타협’은 그동안 흘린 피를 짓밟는 것이라며 사방에서 야유를 보냈다. 노동자 민중은 더 이상 주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투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았던 수습위는 방송시설 전원을 차단하는 등 노골적으로 시민궐기대회를 방해하기까지 했다

 

새로운 항쟁지도부로 ‘민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을 때 중요한 역할을 맡은 대변인 윤상원, 기획실장 김영철, 홍보부장 박효선은 ‘들불야학’ 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요구사항 관철 없이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대중의 피를 빨아먹는 행위’라며 무기 회수에 반대하던 인물들을 만나갔다. 무장해제는 곧 투쟁의 패배를 뜻했다. 계엄군의 또 다른 살육, 그 시작을 의미했다. 우리가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 시민들에게 알리고 고등학생 등 총기를 다룬 경험이 없는 사람들의 총기는 회수하되,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에게는 총기를 지급하여 재무장하도록 촉구하기로 했다. 또한 시민의 요구로 도청 내 수습대책위원회의 입장을 변경하도록 촉구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윤상원 열사 

 

윤상원은 지도부를 새롭게 재편하기 위해 노력했다. 기존의 명망가가 아니라 무장봉기의 한가운데서 투쟁을 통해 성장하는 인물에 주목하고, 이들을 새롭게 지도부로 발탁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가령 운수 노동자 출신의 박남선은 목숨을 건 전투 속에서 시민군으로부터 지도력을 인정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이후 상황실장으로서 시민군의 총지휘를 맡아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안타깝게도 새로운 지도부 구축은 너무 늦었다. 절반 이상의 무기가 반납되었고, 시민들의 자신감과 투쟁력은 상당히 위축되었으며, 계엄군은 진압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새로운 지도부에 의해 투쟁 동력이 살아날 것을 우려한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도청 진압 계획을 세웠다.

 

도청사수투쟁

 

도청에서 끝까지 항전했던 200여 명의 시민군 투사들은 곧 다가올 죽음을 예감했다. 공수부대 3개 여단을 비롯해 2만여 명의 자본가군대에 200여 명이 맞서 싸웠을 때의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음이 두려워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흘린 노동자들의 피를 저버릴 수 없었다. 지도부는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처들어오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가두 방송을 진행했다. 도청의 투사들은 “폭력과 탄압으로 우리의 목숨을 강제로 빼앗을 수는 있어도, 우리의 정신을 짓밟을 수는 없다!”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5월 26일 윤상원은 전라남도청 홍보실에서 대변인 자격으로 10여 명의 외신기자가 참여한 가운데 처음이자 마지막 기자회견을 가졌다. 윤상원은 다음과 같은 말을 기자들에게 남겼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5월 27일 새벽, 윤상원은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사망한 뒤, 성명불상자로 상반신이 불탄 채 시신이 공개되었다.

 

공수부대의 마지막 공격이 있기 전 투쟁 지휘자는 “죽어도 좋다는 사람만 남으시오! 오늘 밤 계엄군이 들어오면 우리는 끝까지 항거할 것이오. 전멸할지도 모르오.”라고 목메어 외쳤다. 남아있던 200여 명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5월 27일 새벽 4시가 지나면서 계엄군이 쏟아내는 총소리가 광주를 울리기 시작했다.

 

윤상원은 이렇게 얘기했다.

 

“여러분! 드디어 전두환 살인집단은 이 시각 현재 우리를 죽이기 위해 탱크를 앞세워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야수와도 같이 야음을 틈타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냥 도청을 비워줘야 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저들에 맞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냥 도청을 비워주게 되면 우리가 싸워온 그동안의 투쟁은 헛수고가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투쟁에 임합시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뭉쳐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불의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다는 자랑스런 기록을 남깁시다. 이 새벽을 넘기면 기필코 아침이 옵니다.”

 

역사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다수는 바로 공장노동자, 목공, 건설노동자, 구두닦이 등 그간 멸시와 천대를 받아왔던 노동자들이었다. 2001년에 조사된 희생자 162명의 직업분포를 보면 노동자가 가장 많은 35명, 학생이 31명, 무직이 23명, 불명 17명, 사무직 13명, 자영업 12명, 운수업 및 운전기사가 12명, 서비스직 11명, 농업 4명, 공무원과 방위병 각 2명이다. 학생 사망자 중에는 대학생보다 초중고생과 재수생이 더 많았다.

 

폭력 앞에 사회공동체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은 거만하게 주인 행세하던 정치인, 자본가들이 아니었다. “공돌이, 공순이”로 놀림받던 이들, 바로 노동자들이었다! 광주항쟁은 국가권력의 본질을 분명히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누가 국가권력의 실질적 주인이 되어야 하는지도 분명히 보여줬다.

 

노동자들은 항쟁 과정에서 집단적 힘을 과감하게 동원했다.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생산하던 장갑차를 내주고, 화순의 광산 노동자들은 다이너마이트를 공급했으며, 나주 섬유 노동자들은 트럭을 타고 경찰서 지서를 털어 무기를 도청으로 실어 날랐다. 당시 노동자들은 자신이 가진 힘의 1/100도 쓰지 못했지만, 혁명적 잠재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영원한 광주항쟁

 

광주의 투사들은, 미래를 위해 죽는 그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질문을 바꾸어, 목숨과 맞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역사의 연속성, 노동자 민중의 잠재력을 믿었다. 당장의 패배를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다. 도청사수투쟁이 미래의 승리를 위한 밑거름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당장의 고통, 당장의 이익을 기준으로 투쟁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문제까지도 노동자 민중의 대의를 기준으로 판단했다.

 

그들은 옳았다. 광주민중항쟁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후세들에게 패배주의와 무력감을 남겨주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다. 광주항쟁은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의 역동성을 보여주었고, 노동자 민중이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투쟁하지 않고 패배를 받아들였을 때 일어나는 사기 저하는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들은 역사의 사기 저하를 막았다. 피 흘려 쟁취한 해방된 광주를 포기하지 않고 계엄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였기에 대중은 이 패배를 이후 승리를 위한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었고 투쟁 의지를 보존할 수 있었다. 광주민중항쟁의 혁명적 패배는 1987년 6월 민중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부활했고, 윤석열의 쿠데타에 맞선 투쟁에서도 부활했다.

 

오늘날 노동자 운동은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고 있는가? 누구도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한계를 보인다. 전체 노동자의 공동이익을 위해, 불평등과 차별, 소외에 짓밟히는 전체 민중의 해방을 위해 제대로 싸우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은 여전히 살아있고 무궁무진하다. 광주항쟁 당시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조직적 무기를 하나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지금은 다르다. 수많은 파업과 투쟁으로 성장한 110만 민주노총이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의 분열, 심각한 관료직 후퇴, 자본가정당에 대한 정치적 굴종으로 너무나 큰 고통을 받고 있지만, 그 누구도 이 상태가 영원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은 결코 잊힐 수 없고, 그 정신을 이어받은 노동자들은 수년, 수십 년이 걸리더라도 새로운 세상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썩어빠진 사회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려 하며, 착취와 억압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자본가들과 정부에 맞선 저항은 쉴 새 없이 펼쳐지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의 혁명적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착취와 억압이 없는 세상을 향해 더 굳세게, 더 거침없이 전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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