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레온 트로츠키의 공산당선언 90주년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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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번역] 레온 트로츠키의 공산당선언 90주년 서평

  • 돌멩
  • 등록 2025.12.18 20:41
  • 조회수 1,327

 

공산당선언이 쓰인지 177년이 지난 오늘날, 자본주의는 다시 위기와 전쟁의 시대에 진입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함께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하던 시대는 끝났다. 20세기 전반기 노동자 혁명의 패배와 함께, 1,2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으며 어마어마한 인명과 생산력의 파괴를 통해 다시 소생한 자본주의가, 전후호황과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쳐 다시 제국주의 국가들 간 패권대결이 지배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트로츠키는 1937년,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앞두고, 스페인에서 노동자계급이 파시즘의 승리를 저지하기 위한 마지막 전투를 벌이던 시점에 이 서평을 썼다. 트로츠키는 90년이 지났어도 그 의미가 바래지 않은 공산당 선언의 핵심 테제를 정리하며, 이와 함께 ‘선언’의 낡아버린 부분과, 집필 당시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의 미성숙으로 다루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내고 있다. 미국의 노골적인 라틴아메리카 개입, 유럽의 재무장,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중국의 대만 군사위협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갈등과 대결이 사태전개를 지배하며 또 다시 전면전을 준비해가고 있는 오늘날, 트로츠키의 서평은 다시 읽어볼 가치가 있다. 이에 Marxist Internet Archive에 게재된 문서를 번역해 소개한다.

 

*각주는 모두 역자의 것이다.

작성일: 1937년 10월 30일

최초 게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아프리칸스어로 번역된 공산당 선언 초판에 실림.

영어로 처음 출판됨: The New International [뉴욕], Vol. IV No. 2, 1938년 2월, pp. 53–55, 63.

본 버전은 Fourth International [뉴욕], Vol. IX No. 1, 1948년 1월–2월, pp. 28–31에서 발췌.

전사/HTML 마크업: 데이비드 월터스.

저작권 표시: 레온 트로츠키 인터넷 아카이브(www.marxists.org) 2003. 본 문서는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조건에 따라 복제 및/또는 배포할 수 있습니다.

공산당 선언의 백주년이 불과 10년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세계 문학에서 그 어떤 작품보다도 뛰어난 천재성을 보여주는 이 소책자는 오늘날에도 그 신선함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 가장 중요한 부분들은 마치 어제 쓰인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젊은 저자들(마르크스는 스물아홉, 엥겔스는 스물일곱)은 그들 이전의 누구보다도, 그리고 아마도 그들 이후의 누구보다도 더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72년판에 공동으로 쓴 서문에서 이미 선언했듯이, 선언의 일부 부차적인 구절들은 시대에 뒤떨어졌지만, 그 사이 25년 동안 선언이 이미 역사적 문서가 되었기에 원문을 수정할 권리가 더 이상 없다고 느꼈다. 그로부터 65년이 더 흘렀다. 선언의 일부 구절들은 더욱 과거 속으로 사라져갔다. 우리는 이 서문에서 선언의 사상 중 오늘날에도 완전한 힘을 유지하는 것들과 중요한 수정이나 보충이 필요한 것들을 간결히 규명하려 한다.

 

1. 마르크스가 불과 얼마 전에 발견하고 공산당선언에서 완벽한 기술로 적용한 유물론적 역사관은 사건들의 시험과 적대적 비판의 타격을 완전히 견뎌냈다. 이는 오늘날 인간 사상의 가장 소중한 도구 중 하나를 구성한다. 역사적 과정에 대한 다른 모든 해석들은 과학적 의미를 완전히 상실했다. 우리는 단언할 수 있다: 우리 시대에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을 내면화하지 않고서는 혁명적 투사는 물론, 정치에 정통한 관찰자가 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2. 공산당선언의 첫 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역사유물론적 해석에서 도출된 가장 중요한 결론인 이 명제는 즉시 계급투쟁의 쟁점이 되었다. 특히 반동적 위선자들, 자유주의 교조주의자들, 이상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은 ‘공동 복리’, ‘민족적 단결’, ‘영원한 도덕적 진리’를 물질적 이해관계의 투쟁을 역사의 원동력으로 대체한 이 이론을 향해 극히 악의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이후 노동운동 진영 내부에서 이른바 수정주의자들, 즉 계급 협력과 계급 화해의 정신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재검토(‘수정’)하자는 주창자들이 가세하였다. 마침내 우리 시대에 이르러서는 코민테른의 경멸스런 추종자들(‘스탈린주의자들’)이 실제로 동일한 길을 걸었다: 소위 인민전선 정책은 전적으로 계급투쟁 법칙의 부인에서 비롯된다. 한편, 모든 사회적 모순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제국주의 시대야말로 공산당 선언에 최고의 이론적 승리를 안겨준다.

 

3. 사회 경제적 발전의 특정 단계로서 자본주의의 해부학은 마르크스가 자본론(1867)에서 완성된 형태로 제시했다. 그러나 공산당 선언에서도 미래 분석의 주요 골격은 확고히 제시되어 있다: 노동력의 대가가 그 재생산 비용과 동등하게 지급되는 것; 자본가들에 의한 잉여가치 전유; 사회 관계의 기본 법칙으로서의 경쟁; 중간 계층, 즉 도시 소부르주아지와 농민의 파멸; 한쪽 극단에서는 점점 줄어드는 재산 소유자들에게 부가 집중, 다른 쪽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적 증가; 사회주의 체제를 위한 물질적·정치적 전제 조건의 조성.

 

4. 선언에서 노동자의 생활 수준을 낮추고 심지어 그들을 빈민으로 전락시키는 자본주의의 경향에 관한 주장은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목사, 교수, 장관, 언론인, 사회민주주의 이론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이른바 '빈곤화 이론'에 맞서 나섰다. 그들은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번영의 징후를 끊임없이 발견해 내거나, 노동 귀족을 프롤레타리아로 위장하거나, 일시적인 경향을 영구적인 것으로 포장했다. 한편 세계 최강 자본주의인 미국 자본주의의 발전조차도 수백만 노동자를 빈민으로 전락시켰으며, 이들은 연방·지방 자선단체 또는 민간 자선단체의 지원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5. 상업·산업 위기를 점차 확대되는 재앙의 연속으로 묘사한 공산당 선언과 대조적으로, 수정주의자들은 국내·국제적 트러스트의 발전이 시장 장악을 보장하고 위기를 점진적으로 폐지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지난 세기 말과 이번 세기 초는 실제로 위기가 단지 ‘우발적’ 중단에 불과해 보일 만큼 격렬한 자본주의 발전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러나 이 시대[1]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궁극적으로 이 문제에서도 진실은 마르크스 편에 서 있음을 증명했다.

 

6. “현대 국가의 행정부는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 업무를 관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이 신문잡지 특유의 역설로 여겼던 이 간결한 공식은 사실 국가에 관한 유일한 과학적 이론을 담고 있다. 부르주아지가 만들어낸 민주주의는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가 생각한 것처럼 어떤 계급적 내용이라도 마음대로 채울 수 있는 빈 주머니가 아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오직 부르주아지에게만 봉사할 수 있다. 블룸(Blum)[2]이나 쇼탕(Chautemps)[3], 카바예로(Caballero)[4]나 네그린(Negrin)[5]이 이끄는 ‘인민전선’ 정부도 결국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 업무를 관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이 ‘위원회’가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때마다 부르주아지는 이를 발로 걷어차 버린다.

 

7. “모든 계급 투쟁은 정치적 투쟁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조직화는 정치적 정당으로의 조직화이다.” 조합주의자들과 아나코신디칼리스트[6]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역사적 법칙을 이해하는 것을 회피해 왔으며, 지금도 회피하려 한다. “순수한” 노동조합주의는 이제 그 주요 피난처인 미국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아나코신디칼리즘은 마지막 거점인 스페인에서 회복불가능한 패배를 당했다.[7] 여기서도 선언은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8.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가 정립한 법적 틀 안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목적이 오직 모든 현존하는 사회 조건의 강제적 전복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개량주의는 당시 운동의 미성숙과 민주주의의 불충분한 발전을 근거로 ‘선언’의 이 전제를 설명하려 했다. 이탈리아, 독일 및 수많은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의 운명[8]은, “미성숙”이 바로 개량주의자들의 사상 자체를 특징짓는 요소임을 증명한다.

 

9. 사회의 사회주의적 변혁을 위해 노동자 계급은 새로운 체제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모든 정치적 장애물을 분쇄할 수 있는 권력을 손에 쥐어야 한다. “지배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 — 이것이 바로 독재이다. 동시에 이는 유일하게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이다. 그 범위와 깊이는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에 달려 있다.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걷는 국가가 많을수록,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더 자유롭고 유연한 형태를 취하게 되며, 노동자 민주주의는 더 넓고 깊어질 것이다.

 

10. 자본주의의 국제적 발전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국제적 성격을 미리 결정해 놓았다. “적어도 주요 문명 국가들의 공동 행동은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첫 번째 조건 중 하나이다.” 자본주의의 후속 발전은 우리 행성의 모든 지역, 즉 “문명화된” 지역과 “문명화되지 않은” 지역을 매우 밀접하게 엮어 놓았기에, 사회주의 혁명의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계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소련 관료층은 이 근본적 문제에 관해 선언을 무력화시키려 시도했다. 소련 국가의 보나파르티스트적[9] 퇴보는 ‘일국 사회주의’ 이론의 허위성을 압도적으로 입증하는 사례이다.

 

11. “발전 과정에서 계급 구분이 사라지고 모든 생산이 전국민의 거대한 연합에 집중되면, 공권력은 정치적 성격을 상실할 것이다.” 즉, 국가는 소멸한다. 사회는 남는다. 억압의 족쇄에서 해방된 채.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다. 반대의 정리: 소련에서 국가 강압의 괴물 같은 성장은 사회가 사회주의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명백히 증명한다.

 

12.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이 선언의 문구는 속물[10]들에 의해 선동적 농담으로 평가받곤 했다. 사실 이 문구는 자본주의적 “조국” 문제에 있어 프롤레타리아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지침을 제공했다. 제2인터내셔널이 이 지침을 위반한 결과 유럽에 4년간의 파괴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세계 문화의 정체까지 가져왔다. 제3인터내셔널의 배신이 길을 닦은 임박한 새로운 전쟁을 고려할 때, 공산당 선언은 지금도 자본주의적 “조국” 문제에 관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지침서로서 그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두 젊은 작가의 공동 작업이자 비교적 간결한 저작이 해방 투쟁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들에 대해 대체 불가능한 지침을 계속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산당 선언과 비교할 만한 다른 책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는 생산력의 전례 없는 발전과 거대한 사회적 투쟁이 90년간 진행된 후에도 선언에 수정이나 보충이 필요없다는 뜻은 아니다. 혁명적 사상은 우상 숭배와 공통점이 없다. 프로그램과 전망은 경험이라는 인간 이성의 최고 기준에 비추어 검증되고 수정된다. 선언 역시 수정과 보충이 필요하다. 그러나 역사적 경험 자체가 증명하듯, 이러한 수정과 보충은 선언 자체의 기초에 담긴 방법에 따라 진행될 때만 성공할 수 있다. 우리는 몇 가지 가장 중요한 사례를 통해 이를 지적하려 한다.

 

1. 마르크스는 어떤 사회 체제도 창조적 가능성을 완전히 소진하기 전에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선언은 생산력 발전을 저해하는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그 시기뿐만 아니라 이후 수십 년 동안에도 이러한 저해는 상대적인 성격에 불과했다. 19세기 후반에 사회주의적 기초 위에서 경제를 조직할 수 있었다면, 그 성장 속도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더 빨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적으로 반박 불가능한 가정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생산력이 세계적 규모로 계속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뒤엎지 못한다. 가장 현대적인 과학기술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가 완전히 정체되고 심지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지난 20년간의 일이다. 인류는 축적된 자본을 소진하기 시작했으며, 다음 전쟁은 앞으로 오랫동안 문명의 기초 자체를 파괴할 위협을 안고 있다. 선언의 저자들은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반동적인 체제에서 절대적으로 반동적인 체제로 변모하기 훨씬 전에 폐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변모는 현 세대의 눈앞에서 비로소 최종 형태를 갖추었고, 우리 시대를 전쟁과 혁명, 파시즘의 시대로 바꿔놓았다.

 

2.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역사적 시기에 대해 저지른 오류는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에 잠재된 미래 가능성을 과소평가한 데서,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성숙도를 과대평가한 데서 비롯되었다. 1848년 혁명은 선언이 예견했던 것처럼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되진 않았으며, 오히려 독일에게 광대한 미래의 자본주의적 도약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파리 코뮌은 단련된 혁명적 당을 선두에 두지 않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로부터 권력을 빼앗을 수 없음을 증명했다. 한편 이어진 장기간의 자본주의 번영은 혁명적 선봉대의 양성이 아니라 노동 귀족의 부르주아적 퇴보를 초래했으며, 이는 다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주요 제동 장치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선언의 저자들은 이 “변증법”을 예견할 수 없었다.

 

3. 선언에게 자본주의는 자유 경쟁의 왕국이었다. 자본의 집중이 증가하고 있음을 언급하면서도, 선언은 독점에 관한 필요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독점은 우리 시대에 지배적인 자본주의 형태가 되었으며 사회주의 경제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마르크스는 그 후 『자본론』에서 자유 경쟁이 독점으로 변모하는 경향을 규명했다. 『제국주의론』에서 독점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 정의를 제시한 것은 레닌이었다.

 

4. 선언의 저자들은 영국의 ‘산업혁명’ 사례를 바탕으로 중간 계층의 소멸 과정을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즉 수공업·소규모 상업·농민 계층의 전면적 프롤레타리아화를 통해 그려냈다. 사실 경쟁의 원초적 힘은 이 진보적이면서도 야만적인 작업을 완수하지 못했다. 자본주의는 소부르주아를 프롤레타리아화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파멸시켰다. 게다가 부르주아 국가는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소부르주아 계층을 인위적으로 유지하는 정책을 추진해왔다. 반대 극단에서는 기술 발전과 대규모 산업의 합리화가 만성적 실업을 초래하며 소부르주아의 프롤레타리아화를 가로막는다. 동시에 자본주의 발전은 기술자, 관리자, 상업 종사자 등 이른바 '신중산층'의 급속한 성장을 극도로 가속화했다. 결과적으로, 선언이 그 소멸을 단호히 언급한 중간 계급은 독일처럼 고도로 산업화된 국가에서도 인구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 그러나 낡은 소부르주아 계층의 인위적 보존은 사회적 모순을 완화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모순에 특별한 악성을 부여하며, 영구적인 실업자 군대와 함께 자본주의 쇠퇴의 가장 악의적인 표현을 구성한다.

 

5. 혁명적 시기를 염두에 두고 작성된 선언은 (제2장 끝부분에)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직접적 전환 시기에 부합하는 열 가지 요구사항을 담고 있다. 1872년 서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요구사항들이 부분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어떤 경우에도 단지 부차적인 중요성만을 지닌다고 선언했다. 개혁주의자들은 이 평가를 빌미로, 이행기적 혁명적 요구가 영원히 사회민주주의적 ‘최소 강령’에 자리를 내주었다고 해석했는데, 이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사실 선언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이행기적 강령에 대한 주요 수정점을 매우 정확히 지적했는데, 바로 “노동자 계급은 단순히 기존 국가 기구를 장악하여 자신의 목적을 위해 휘두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이 수정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우상 숭배를 겨냥한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이후 자본주의 국가에 맞서 코뮌 유형의 국가를 대립시켰다. 이 “유형”은 이후 소비에트라는 훨씬 더 생생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오늘날 소비에트와 노동자 통제 없이는 혁명적 강령이 있을 수 없다. 그 외의 부분에 관해, 평화로운 의회 활동의 시대에 “구식”으로 보였던 선언의 열 가지 요구는, 오늘날 완전히 진정한 의미를 되찾았다. 반면 사회민주주의의 “최소 강령”은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6. 선언문은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은 곧이어 일어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주곡에 불과할 것”이라는 기대를 바탕으로, 17세기 영국이나 18세기 프랑스에 비해 훨씬 진보된 유럽 문명의 조건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훨씬 더 큰 발전을 언급한다. 이 예언의 오류는 단지 시기에만 있지 않았다. 1848년 혁명은 불과 몇 달 만에, 오히려 더 진보된 조건 하에서 부르주아 계급 중 어느 누구도 혁명을 완결시킬 능력이 없음을 드러냈다: 대·중간 부르주아지는 지주 계급과 너무도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으며 대중들에 대한 두려움에 얽매여 있다; 소부르주아지는 지나치게 분열되어 있고 그 상층 지도부는 대부르주아지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전 발전 과정이 입증하듯, 부르주아 혁명은 그 자체로는 일반적으로 완결될 수 없다. 사회에서 봉건적 잔재물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정당의 영향에서 벗어나 농민 계급의 선두에 서서 혁명적 독재를 수립할 수 있는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다. 이에 따라 부르주아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제1단계와 얽히게 되며, 이후 후자에 흡수된다. 민족 혁명(national revolution, 또는 일국혁명)은 이로써 세계 혁명의 한 고리가 된다. 경제 기반과 모든 사회 관계의 변혁은 연속적(끊김없는) 성격을 띠게 된다.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후진국의 혁명 정당들에게, 민주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그리고 이를 통한 국제 사회주의 혁명) 사이의 유기적 연결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이다.

 

7. 자본주의가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국가들을 어떻게 소용돌이로 끌어들이는지 묘사하면서도, 선언은 식민지 및 반식민지 국가들의 독립 투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사회 혁명을 “적어도 선진 문명 국가들에서” 향후 몇 년 안에 일어날 일로 간주한 한, 식민지 문제는 억압받는 민족들의 독립적 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주의 모국 중심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의 결과로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선언은 식민지 및 반식민지 국가들의 혁명 전략 문제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허나 이러한 문제들은 독립적인 해결책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민족적 조국”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가장 해로운 역사적 제동장치가 되었지만, 독립적 존재함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후진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요소로 남아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선언은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에서나 현존하는 사회·정치 질서에 대항하는 모든 혁명적 운동을 지지한다”고 선언한다. 유색 인종들이 제국주의적 억압자들에 맞서 벌이는 운동은 현존 질서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운동 중 하나이므로, 백인종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완전하고 무조건적이며 제한 없는 지지를 요구한다. 억압받는 민족들을 위한 혁명적 전략을 발전시킨 공로는 무엇보다 레닌에게 있다.

 

8. 선언에서 방법론적  측면이 아닌 내용적 측면에서 가장 구식인 부분은 19세기 전반의 “사회주의” 문헌에 대한 비판(제3장)과 다양한 반대 정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에 대한 규정(제4장)이다. 선언에 열거된 운동과 정당들은 1848년 혁명이나 그 뒤를 이은 반혁명에 의해 극적으로 쓸려나갔기에, 이제는 역사 사전에서조차 그 이름들을 찾아봐야 할 지경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선언은 아마도 이전 세대보다 지금의 우리에게 더 가깝게 다가온다. 제2인터내셔널이 꽃피던 시대[11], 마르크스주의가 절대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듯했던 시절에는 마르크스 이전 사회주의 사상들이 결정적으로 과거로 물러났다고 여겨질 수 있었다. 오늘날 사정은 다르다.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단계적 붕괴는 괴물 같은 이념적 퇴행을 낳는다. 노쇠한 사상은 유아기로 회귀한 듯 하다. 쇠퇴의 시대에 예언자들은 만병통치약을 찾아 과학적 사회주의에 의해 오래전 매장된 교리들을 재발견한다.

 

야당 문제에 관해 말하자면, 지난 수십 년간 가장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분야가 바로 이 영역이다. 오래된 정당들이 새로운 정당들에 의해 오랫동안 밀려났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라는 조건 속에서 정당들의 본질적 성격과 상호 관계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따라서 공산당 선언은 제1차부터 제4차까지의 코민테른 대회[12]의 주요 문서들, 볼셰비키주의의 핵심 문헌들, 그리고 제4인터내셔널 회의 결의안들로 보완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어떤 사회 질서도 그 안에 잠재된 가능성을 모두 소진하지 않고서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우리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낡은 사회 질서조차도 저항 없이 새로운 질서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사회 체제의 변화는 가장 격렬한 형태의 계급 투쟁, 즉 혁명을 전제로 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떤 이유로든 과감한 일격으로 낡은 부르주아 질서를 전복하지 못한다면, 불안정한 지배를 유지하려는 금융 자본은 자신이 파멸시키고 사기 저하시킨 소부르주아를 파시즘의 학살 군대로 전락시킬 수밖에 없다. 사회민주주의의 부르주아적 퇴보와 소부르주아의 파시스트적 퇴보는 인과관계로 얽혀 있다.

 

현재 제3인터내셔널은 제2인터내셔널보다 훨씬 더 무분별하게 모든 국가에서 노동자들을 기만하고 사기 저하시키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스페인의 프롤레타리아트 선봉대를 학살함으로써, 모스크바의 제멋대로인 용병들은 파시즘의 길을 닦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의 상당 부분을 수행하고 있다. 점점 더 인류 문명의 위기로 변모하고 있는 국제 혁명의 장기적 위기는 본질적으로 혁명적 지도부의 위기라고 환원할 수 있다.

 

공산당 선언이 가장 소중한 연결고리를 차지하는, 위대한 전통의 계승자로서, 제4인터내셔널은 오래된 과제를 해결할 새로운 간부들을 양성하고 있다. 이론은 일반화된 현실이다. 혁명 이론에 대한 정직한 태도에는 사회적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열렬한 열망이 표현된다. 어둠의 대륙 남부에서 우리의 동지들이 최초로 공산당 선언을 아프리칸스어로 번역한 사실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오늘날 오직 제4인터내셔널의 기치 아래에서만 살아있음을 또다시 생생히 보여준다. 제4인터내셔널에 미래가 있다. 공산당 선언 백주년이 기념될 때, 제4인터내셔널은 우리 세계에서 결정적인 혁명적 세력이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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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트로츠키가 글을 쓴 시점은 1937년으로 이미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이 벌어지고, 뒤이어 2차 세계대전 발발을 앞두고 있었다.

[2] 앙드레 레옹 블룸은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세 차례에 걸쳐 프랑스 총리를 역임했다. 1936년 6월 4일부터 1937년 6월 22일까지 인민전선 정부에서 총리로 재임하며 일련의 주요 경제 및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블룸은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내전이 프랑스 본토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립을 선언했다.

[3] 1936년 레옹 블룸의 인민전선 정부에서 쇼탕은 급진사회당을 대표해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37년 6월부터 1938년 3월까지 블룸의 뒤를 이어 정부 수반을 역임했다.

[4]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는 스페인 정치인이자 노동조합 운동가로, 인민전선이 1936년 스페인 총선에서 승리한 후 7월 쿠데타가 발생하자, 1936년 9월 4일부터 1937년 5월 17일까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스페인 제 2공화국 총리를 역임했다.

[5] 후안 네그린 로페스는 카바예로의 뒤를 이어 1937년 5월 17일부터 1939년 5월 31일까지 스페인 제2공화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스페인 사회주의 노동자당(스페인어: Partido Socialista Obrero Español, PSOE)의 지도자이자 스페인 내전 당시 인민전선 정부의 지도자였다.

[6] ‘무정부주의적(Anarcho) 조합주의자(Syndicalist)’

[7] 스페인 내전을 주도했던 아나코신디칼리즘의 패배를 의미한다.

[8] 이탈리아와 독일이 파시즘의 지배 아래 넘어간 것을 의미한다

[9] “보나파르티즘(프랑스어: Bonapartisme)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그의 추종자 및 후계자들로부터 파생된 정치 이념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창안한 이 용어는 좁은 의미에서 보나파르트 왕조와 그 통치 방식을 복원하고자 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나파르티스트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제국주의적 정치 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이를 옹호한 사람을 가리켰다. 보나파르티즘은 1814년 나폴레옹의 첫 패배와 함께 등장했으나, 1840년대에 이르러서야 교리적 명확성과 결속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 용어는 군사적 강인한 지도자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비교적 전통주의적 이념을 지닌 권위주의적 중앙집권 국가를 옹호하는 정치 운동을 의미하는 광범위한 정의로 발전했다.” - Bonapartism - Wikipedia

“트로츠키는 보나파르티즘을 투쟁하는 계급들 위에 군림하려 하며, 의회를 희생시키면서 군대에 더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자본주의적 재산권을 보존하고 질서를 강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정부 형태로 정의했다. 다만 아직은 더 결정적인 물리적 충돌의 경보를 울리지는 않는 형태로 말이다.

“이는 “질서”의 도구이다. 현존하는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소환된다. 계급들 위에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보나파르티즘은, 사실 그 선행 형태인 카이사르주의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의미에서 언제나 그리고 모든 시대에 걸쳐 착취자 계급 중 가장 강력하고 확고한 부분의 통치를 대표한다.”“ - Fascism or Bonapartism? Lessons from Trotsky for Understanding Brazil Under Bolsonaro - Left Voice

“보나파르티즘은 주로 지배 계급이 더 이상 헌법적·의회적 수단으로 통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지만, 노동계급 역시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립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 Turkey's Fragile Bonapartism - Left Voice

[10] 원문에는 블레셋인(philistines)이라 되어있는데, 구글 사전에 따르면 philistines는 “문화와 예술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사람, 혹은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11] ‘제 2인터내셔널이 꽃피던 시대’는 바로 앞 문장에서 얘기한 ‘이전 세대’를 의미한다.

[12] 코민테른 1차 대회(설립대회)는 1919년 3월 2일~3월 6일, 2차 대회는 1920년 7월 19일~8월 7일, 3차 대회는 1921년 6월 22일~7월 12일, 4차 대회는 1922년 11월 5일~12월 5일에 열렸다. 5차 대회는 2년 뒤인 1924년 6~7월에 열렸다. 5차 대회는 레닌의 죽음(1924년 1월 21일) 이후 열린 첫 코민테른 대회로, 4차 대회에서            채택한 공동전선 전략을 페기하고 스탈린의 지배를 공고히 한 제 6차대회(1928)로 가는 가교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참고: The forgotten Fifth Comintern Congress: Bridge between Lenin and Stalin - John Ridd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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