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정치캠프] 약탈과 전쟁·학살로 치닫는 자본주의 국제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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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2025 정치캠프] 약탈과 전쟁·학살로 치닫는 자본주의 국제질서

  • 백종성
  • 등록 2025.12.13 10:36
  • 조회수 1,802

사진: AP 연합뉴스

[편집자 주]

이 글은 지난 11월 28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 사회주의를향한전진 2025 정치캠프 <위기·전쟁·혁명> 2일차 전체세션 발제문으로 제출되었다.   

 

들어가며

 

세계화의 전성기, 누군가는 '맥도날드가 들어선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열강이 충돌하는 '제국주의' 시대는 가고, 전 세계를 단일 질서로 포섭하는 '제국'의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지배적 담론이었던 ‘세계화의 불가역성’이 허상으로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계화의 호시절은 짧았다.

 

미국은 쇠퇴했고, 중국과 브릭스 국가들이 곳곳에서 부상했다.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보호무역주의 심화는 열강투쟁 격화와 전쟁위기 확대로 급격하게 발전했다. 세계화의 첨병으로 기능하던 WTO는 흔적만 남았다. 이렇게, 영원할 것 같던 세계화와 자유무역 질서가 허물어지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쇠퇴하는 헤게모니를 조금이라도 연장하고자 경제적 수탈과 군사적 폭압을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세계는 다시 노골적 제국주의 열강투쟁의 시기로 진입했다. 위기와 전쟁, 혁명의 시대가 우리 앞에 있다.

 

1. 미국 주도 관세전쟁의 본질

 

1) 대대적 약탈에 나선 트럼프 정부

 

2025년 4월 2일, 도널드 트럼프는 이날을 “미국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이라 이름 붙이며 대통령 긴급권한에 근거해 대대적인 고율관세 부과조치를 발표했다. 트럼프 정부는 이날 발표한 소위 상호관세율이 상대국의 △대미 관세 △비관세 장벽 △환율 조작까지 고려해 산정한 잠정관세율에서 할인한 수치라고 설명했으나, 실제 관세율 산정 방식은 ‘엑셀 돌리기’에 불과하며 합리적 근거는 전무하다. ‘미국 무역적자의 원인이 상대국의 불공정 무역에 있다’고 규정하며 심지어 생명체라고는 펭귄뿐인 섬까지 관세를 매기겠다고 발표한 트럼프 정부의 행보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대대적 수탈의 개시를 알렸다.

 

물론 이것이 완전히 새로운 풍경은 아니다. 1기 트럼프 정부 당시 이미 중국은 물론 캐나다와 멕시코 등에 대한 관세인상 조치를 압박했고, 화웨이·SMIC 등 중국 자본을 규제대상 기업 목록(Entity list)에 올려 서방 공급망에서 퇴출시켰다. 2018년에는 ‘수출통제개혁법’(Export Control Reform Act, ECRA)을 제정해 반도체·AI·5G 등 '첨단 전략기술'을 국가안보 범주로 분류하며 중국 기업에 대한 장비·소프트웨어·설계기술 등 수출 제한에 착수했다. 바이든 정부는 트럼프의 대중국 관세조치를 철회하지 않았으며, 반도체과학법, 인플레이션감축법 등으로 제조업 부흥을 추진하는 한편 트럼프의 보호주의를 충실히 이어갔다. (바이든 정부는 보조금 지급 조건으로 영업비밀 열람권까지 요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2기 트럼프 정부는 동맹국을 포함한 전 세계를 대상으로 고율관세 부과를 압박하며 미국에 대한 투자를 강요하고 있다. 자신이 만든 자유무역 체제를 노골적으로 뒤집으며 ‘내가 본 손해를 보상하라’고 강요하는 미국의 행보는, 흔들리는 패권국 지위를 노골적 수탈로 만회하려는 시도다. 미국은 유럽연합에 대해 4월 2일 발표한 30%의 관세를 15%로 낮추는 댓가로 6천억 달러 투자를, 일본에 대해서는 25% 관세를 15%로 낮추는 대신 5,500억 달러 미국 투자를, 그리고 한국은 25% 관세를 15%로 낮추는 댓가로 3,500억 달러 투자를 뜯어냈다.

 

2) 제국주의 열강투쟁 격화, 미국 헤게모니 위기에 대응하는 폭력적 질서재편 시도

 

미국의 약탈은 단지 무역적자 해소를 위한 조치가 아니다. 2기 트럼프 정부는 ‘스티븐 미란’이라는 인물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했다(현재 그는 연방준비위원회 이사를 겸직하고 있기도 하다). 미란은 「국제 무역체제 재구조화를 위한 사용자 가이드」, 일명 ‘미란 보고서’를 작성한 당사자다. 보고서는 제국주의 열강투쟁에 대한 예리한 인식에 근거한다.

 

「‘역사의 종언’이 뒤집히고 국가안보 위협이 다시 돌아오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주요 지정학적 경쟁자가 없던 시기, 미국 지도자들은 제조업 기반 쇠퇴의 의미를 축소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가 단지 무역 상대가 아니라 안보 위협으로 등장하면서, 강력하고 다각화된 제조업 기반은 다시 필수 사항이 되었다. 무기와 방위체제를 생산할 공급망이 없다면 국가안보도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말했듯이, “철강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많은 경제학자는 이러한 외부효과를 분석에 포함하지 않고, 따라서 공급망을 무역 동반자나 동맹국에 의존하는 것이 문제없다고 여기지만, 트럼프 진영은 그러한 신뢰를 공유하지 않는다. 미국의 동맹국과 동반자 중 상당수는 미국보다 중국과의 무역·투자 규모가 더 크다.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과연 그들을 신뢰할 수 있는가?」 (미란 보고서, 5p.)

 

보고서는 미국의 지속적 무역적자는 강한 달러 때문이라고 짚으며 이는 달러의 기축통화 기능과 연동된다고 주장한다. 즉, 무역적자가 지속되면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수출이 늘어나 무역적자가 해소되어야 하는데, 달러가 기축통화인 관계로 이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국이 기축통화인 달러를 비축하고 있기에, 달러 강세는 필연적이다. 이에 따라 미국에는 무역적자가 쌓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세계경제의 작동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이 막대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인식에 따라, 미란 보고서는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관세를 주요 수단으로 제시하며[1], 다음 기준으로 각국 관세율을 산정하자고 한다.

  

- 해당국이 미국산 수입품에 대해 미국이 그들에게 부과하는 수준과 비슷한 관세를 적용하는가?

- 외환보유고를 과도하게 축적해 자국 통화를 인위적으로 평가절하한 이력이 있는가?

- 미국 기업이 해당국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정도가, 외국 기업이 미국 시장에 접근하는 수준과 유사한가?

- 미국의 지식재산권을 존중하는가?

- 해당국이 중국으로부터 제품을 수입한 후 미국에 재수출하는 방식으로 관세를 회피하고 있는가?

- 나토 국방예산 분담금을 전액 납부하고 있는가?

- 중국, 러시아, 이란 등과의 국제 분쟁에서 어느 편에 서 있는가?

- 제재 대상 국가 또는 기업과의 거래, 혹은 그들에 대한 제재 회피를 방조하는가?

- 다양한 지역에서 미국의 안보작전을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

- 미국의 적대 세력(테러리스트, 사이버 범죄자 등)을 자국 내에서 보호하거나 수용하는가?

- 국제 무대에서 미국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반미적인 외교 행보를 하는가? (미란 보고서, 23p.)

 

위 기준들에서 드러나듯 고율관세 압박은 무역과 안보를 직결시키고 세계 자본주의를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재구축하는 지렛대다. 제국주의 열강투쟁이 격화하는 지금, 미국은 경제와 안보를 하나로 묶으며 ‘당신은 누구 편인가’를 묻는 한편, ‘나의 편이 되고 싶다면, 수탈을 수용하라’고 강요한다.

 

「이러한 체제는 국가안보와 무역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구현할 수 있다. … 미국의 방위 우산(defense umbrealla) 안에 들어오고자 한다면, 공정무역 우산(fair trade umbrella) 안에도 들어와야 한다.」 (미란 보고서, 23p.)

 

이렇듯 관세는 단지 경제정책의 기술적 도구가 아니다. 관세부과 자체가 목적도 아니다. 현재 미국에게 관세는 국제질서 재편을 위한 정치적 수단이다. 보고서는 무역·금융·안보를 통합한 ‘안보구역’을 구축을 제안한다. 이 안보구역을 구축하는 수단이 소위 ‘마라라고 합의’(Mar-a-Lago Accord)다. 미국은 각국에 100년 만기 채권 구입[2] 등 조치를 제안할 것이며, 조치를 따르지 않는 국가에는 더 높은 관세를 부과하거나, 미국이 제공하는 방위우산에서 배제하겠다는 압박이 따를 것이다. ‘안보구역 건설에는 돈이 필요하다. 100년 뒤에 돌려줄테니, 일단 돈을 내놓아라’, 그러나 각국은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이 제공하는 달러-금융 시스템과 안보체제에 편입하기 위한 정당한 대가일 뿐이다.

 

현 미국의 정책이 보고서의 청사진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아니나, 안보와 경제를 직결시키며 고율관세, 통상압박, 조공과도 다르지 않은 투자 강요에 나선 미국 행보의 본질은 보고서에 담긴 구상과 같다. 미국은 1971년 달러 금태환 중지, 1985년 플라자합의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위기에 대한 폭력적 해결에 나섰다. 미국은 사적 이익을 공공의 이익으로 포장하나, 그 명분은 트럼프의 그린란드·캐나다·파나마운하 편입 압박만큼이나 허약하다.   

 

폭력적 질서재편에 나선 미국, 그 배경에 미국의 쇠퇴가 있다. 미국의 지위는 예전 같지 않다. 2차대전 직후 세계 GDP의 50%에 달하던 미국 GDP 규모는 1985년 플라자합의 당시 35%로 줄었고, 이제는 세계 GDP의 24-25% 가량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부상했다. 최근 중국의 경제위기로 미·중 경제력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인식이 있으나, 이는 상당 부분 착시다. 첫째,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고, 중국은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달러 기준으로 본 미국 경제 규모는 실제보다 부풀려지고, 중국은 실제보다 과소평가된다. 둘째, 최근 3년 사이 위안화 가치는 달러보다 15%가량 하락했다. 이에 따라 같은 양을 생산하더라도, 달러 기준으로 본 중국 산출량은 15% 과소평가 된다. 2024년 기준으로 미국의 명목 GDP는 28조 달러, 중국은 18조 달러이나, 세계은행의 구매력 평가(PPP) 기준에서는 이미 11년 전인 2014년 중국경제가 미국경제를 앞질렀다.

 

3) 달러체제의 균열, 종이금 대신 진짜 금을 쌓는 제국주의 열강

 

트럼프 정부는 미국이 전 세계를 위해 손해를 감수해 온 것처럼 묘사하나, 현실은 정반대다. 미국의 막대한 무역적자는 미국의 손해가 아니라 기축통화국의 터무니 없는 특권을 여실히 드러냈을뿐이다. 첫째, 무역수지 적자가 누적되고 국가 채무가 쌓여도, 달러 가치는 자본수지 흑자를 통해 유지되어 왔다. 중국을 비롯한 대미 무역흑자국들은 확보한 달러를 미국 국채와 주식을 비롯한 달러표시 자산에 투자했고, 이를 통해 무역적자로 빠져나간 달러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즉, 미국은 기축통화라는 무기로 세계 각국 노동자들이 생산한 실물가치를 자국으로 흡수하는 한편, 자국 자산시장을 지탱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일례로, 2024년 말 기준 한국은행 총자산 약 596조원 중 외화증권이 401조원이며, 이 중 태반이 미국채다. 즉, 무역흑자를 통해 들어온 달러화가 고스란히 미국으로 다시 유입되는 상황을 한국은행 대차대조표 역시 잘 보여주고 있다.) 주식 등 가공자본 축적은 생산을 통한 이윤축적이 아니라 생산될 이윤에 대한 ‘청구권’의 축적, 즉 기생적이고 투기적인 채권자계급의 성장을 뜻한다. 맑스의 설명처럼, “이윤율이 저하하면 … 다른 한편에서는 … 투기와 투기의 일반적 촉진이 나타난다.”[3] 물론, 미국은 해외 각국이 보유한 달러표시 자산에 대한 이자를 지급해야 하나, 그간 미국의 해외 지급액은 미국 자본의 해외투자 수입보다 적었다.

 

문제는 연금술과도 같은 이 구조가 균열해왔고, 최근 들어 더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2024년 3분기, 미국이 외국에 지급한 투자수익은 미국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투자수익을 초과했다. 이는 미국이 21세기에 들어 최초로 기록한 본원소득수지(Balance on primary income) 적자다. 미국의 지대수취체제, 금융수탈체제의 균열이 심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본원소득수지 추이 (본원소득 = 미국의 해외투자 수익과 노동소득 – 미국이 해외에 지급하는 투자수익과 노동소득)

 

금융팽창, 즉 거대한 가공자본(의제자본, ficticious capital) 축적으로 전 세계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를 미국으로 흡수해 패권을 유지하던 미국 자본주의가 난관에 봉착했다. 그렇다면 미국이 해외투자로 벌어들이던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이 해외로 유출되는 현 상황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기존보다 더 높아진 금리가 미국의 본원소득수지 적자의 한 요인이다. 즉, 현재 미국은 양적완화 저금리 국면 당시 해외투자자들에게 지급하던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2025년 2분기 말 기준으로 미국 GDP의 118.8%에 달하는 막대한 국가부채에 더해, 고금리로 매년 지급해야하는 이자부담까지 급증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2025년 7월 의회를 통과한 감세 및 지출 법안, 소위 ‘크고 아름다운 법안’으로 향후 10년 동안 약 3.4조 달러의 추가 재정적자가 더해질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재정적자는 GDP의 6% 이상을 유지할 것이며, 공공부채 대비 GDP 비율은 10년 이내에 128%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10년 그리스 국가부채위기 직전 수준과 유사하다.) 2024 회계년도 기준 미국이 지출하는 이자만 1조 1,330억 달러로 2023년 대비 29%나 증가했다. 부채에 대한 연이자가 1조 달러를 넘어선 것은 2024년이 최초다. 현재 미국이 부채에 대해 지급하는 이자비용은 국방비, 메디케어(고령자 건강보험)보다 높다.

 

그렇다면 이자율을 낮추면 되지 않을까? 문제는 현 상황이 중앙은행 정책금리 조정으로 대응할 수 있는 단기 추세가 아니라는 점이다. 장기금리는 본질적으로 시장이 결정한다. 아래 30년 만기 미국채 수익률 추이에서 드러나듯, 미국 장기금리는 연준의 수차례 금리인하에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다. 미국 채권이 이전처럼 인기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미국 채권에 대한 수요는 상당히 떨어져있고, 이에 따라 미국이 빚을 내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금리를 얹어주어야 한다.

 

30년 만기 미국국채 시장수익률

 

높은 장기금리의 배경에는 △인플레이션 기대 (명목금리 ≒ 실질금리 + 인플레이션) △재정적자 확대에 따른 불안 △미국채에 대한 구조적 수요 감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2010년대 중반부터 중국은 미국채권 매도에 나섰고, 특히 2022년 러우전쟁 이후로 국채 매각 속도를 높여왔다.[4] 이와 함께 중국·러시아·터키·인도를 비롯한 다수 국가가 금 축적에 나서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열강은 물론, 개인들까지 너도나도 금 매입에 뛰어들며 금값이 치솟고 있다.

 

(좌) 중국의 미국채 보유량  / (우) 금 가격 추이

 

치솟은 금값과 달러체제 위기는 동전의 양면이다. 금값 폭등은 달러 위기의 반영이자, 달러 위기를 가속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미국 주도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믿음, ‘종이금’(paper gold)으로 여겨졌던 달러가 지불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자, 진짜 화폐(眞幣), 즉 ‘금’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5] 맑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실적인 지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한, 화폐는 유통수단, 즉, 상품교환의 오직 순간적인 매개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의 개별적 화신, 교환가치의 독립적 존재형태, 일반적 상품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 메커니즘에 전반적 교란이 일어날 때, 그 교란의 원인이 무엇이든, 화폐는 계산화폐라는 순전힌 관념적인 모습으로부터 갑자기 그리고 직접적으로 금속화폐로 변해버린다. 더 이상 보통의 상품은 화폐를 대신할 수 없다. … 사슴이 신선한 물을 갈망하듯 부르주아의 영혼은 유일한 부(富)인 화폐를 갈망한다.」[6]

 

2. 일대일로 2.0 - 헤게모니 국가로 부상을 시도하는 중국

 

1) 미국의 급소를 공략하며 활로를 찾는 중국

 

첫째, 중국은 희토류를 지렛대로 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초반 승기를 잡았다.[7] 중국은 기존 규제에 이어 2025년 4월 희토류 원광 · 산화물 · 금속 · 자석 완제품을 포함한 7개 희토류에 사용처 신고와 수출허가제를 적용하곘다고 나섰고, 중국 밖에서 만든 반도체·배터리·항공전자장비라 할지라도 중국산 희토류를 포함한다면 수출허가 대상으로 포함했다. 2025년 10월에는 규제를 더 강화해, 희토류뿐 아니라 리튬-이온 배터리소재, 항공·방산용 금속 등까지 통제 대상으로 포함했다. “중국의 희토류 통제는 전 세계 공급망과 산업기반 전체를 겨냥한 바주카포 같은 조치”, 미 재무장관 스콧 베센트의 말이다. 아이폰도, 테슬라 전기차도, F35전투기도 희토류 없이는 만들 수 없다. 중국은 미국의 급소를 찾았다.

 

2025년 10월 30일, APEC을 계기로 약 6년 4개월 만에 열린 부산 정상회담 결과는 중국의 당면 우위를 잘 드러낸다. 미국은 대(對)중국 관세를 10%를 인하하고, 규제 대상 1,300여개 중국기업의 자회사와 손자회사까지 총 2만개 이상 중국기업으로 규제를 확대하는 '50% 자회사 규칙' 적용을 1년 동안 중단했다. 자회사 규칙은 미국의 기술통제에 대한 중국의 우회를 원천차단하겠다는 시도였다.[8] 중국은 그 댓가로 중국은 미국에 대한 희토류 수출통제를 1년 연기하고, 미국산 대두를 구입한다. 중국은 어차피 어디선가는 사야 하고, 기존에도 미국에서 구입하던 대두 수입을 약속했고 트럼프가 아니었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희토류 수출통제 조치를 거둬들였다. 미국은 대만 문제와 ‘기술안보’ 등 핵심 쟁점은 건드리지도 못했다. 중국의 희토류 수출통제 유예기간이 끝나는 2026년 11월에는 미국 중간선거가 있고, 이것은 다시 트럼프 정부의  약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서방이 희토류 추출·분리 역량을 키우고 결과를 내기까지는 5에서 7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둘째, 중국은 미국의 보호주의와 공급망 봉쇄 압박에 대응해 소위 '홍색공급망'을 구축해왔다. 동남아 등지로 생산거점을 이전해 중국제품에 대한 고율관세를 피하고, 애플ᅠ등 대자본의 공급망 이전에 조응해 현지 생산기지를 구축하며 새로운 시장과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시도다. 중국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글로벌 남반구 국가들과의 무역 확대, 투자 확대를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셋째, 중국은 브릭스를 통해 미국에 맞설 우방을 규합하며, 브릭스를 G7에 대한 정치경제적 대항축으로 형성하고자 한다. 2024년에는 이집트·에디오피아·이란·아랍에미리트가, 2025년에는 인도네시아가 새롭게 가입해 현 브릭스 가입국은 모두 10개국으로 늘었다. 브릭스는 현재 전 세계 GDP의 약 37.3%를 차지한다. 2024년 카잔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발표된 브릭스 공동선언문에서 드러나듯, 브릭스는 미국과 달리 ‘예측 가능하며 포용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규정한다.[9]

 

「우리는 세계무역기구를 핵심으로 하는 개방적이고 투명하고, 공정하고 예측 가능하고 포용적이며, 평등하고 차별적이지 않은 다자간 무역시스템을 지지하며, 최빈개도국을 포함한 개발도상국에 대해 특별하고 차별적인 대우를 제공하는 것을 지지하며, 세계무역기구의 규칙에 부합하지 않는 일방적인 무역제한조치를 거부한다.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에서 열린 제13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 결과를 환영하며,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 결정과 선언을 이행하기 위해서 함께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재확인한다.」

 

중국은 브릭스를 축으로 위안화 국제화 역시 추진하고 있다. 2024년 12월 기준, 위안화 결제 비중은 달러화(49%), 유로화(21.74%) 파운드화(6.94%)에 이어 3.75%로 4위를 기록했다. 이미 중국은 자국 상품··서비스 무역액의 25% 이상을 위안화로 결제한다. 사우디와 위안화 대출협정을 맺고, 브라질과 교역 시 위안화-헤알화 거래에 합의하는 등, 미국 주도 세계질서에 맞선 중국 행보가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위안화 국제화 시도와 직결되는 것이 앞서 설명한 중국의 급속한 금 축적이다. 기축통화로서의 위안화를 지향하는 중국은, ‘무엇으로 인민폐의 가치를 보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중국이 축적한 금은 그 중요한 보증이다. 중국의 공식 금 축적량은 2,300톤을 초과했다. 일각에서는 중국의 실제 금 보유량이 공식 발표치의 두 배를 넘는 5,500톤에 달한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2025년 1월 31일, 트럼프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우리는 이들 국가가 새로운 브릭스 통화를 만들거나, 강력한 미국 달러를 대체할 다른 통화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100% 관세에 직면할 것이다”, “브락스가 국제무역이건, 또는 그 어떤 영역이건 달러를 대체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런 시도를 하는 국가가 있다면, 관세와 마주할 것이며 미국과는 작별할 것이다.” 트럼프가 브릭스의 탈달러 시도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실제로 미국의 통화패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2) 중국 자본주의의 위기

 

중국이 보여주는 자신감과 외교적 공세에도, 중국 경제 내부 조건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중국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중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 자본주의 가치사슬에서 '세계의 공장'으로 기능했다. 거대한 인구에 기반한 안정적 저임금 노동력 공급과 이를 통한 제조업 중심 자본축적, 거대한 과잉생산을 흡수할 자유무역체제는 중국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러나 미국 주도 공급망 재편과 보호주의 심화는 중국 자본주의의 근간을 침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중국 자본주의는 미국 주도 세계화의 가장 중요한 일부이자 수혜자였으며, ‘세계의 공장’이라는 위상은 중국 내부의 저임금 생산체제와 자유무역체제가 맞물릴 때만 유지될 수 있었다.

 

중국 자본주의의 위기는 이미 2008년 이후 심화해왔다. 무역장벽 확대와 세계 수요 둔화 속에서, 중국의 과잉자본의 배출창구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중국은 대규모 부동산·인프라 투자를 확대해왔고, 그 결과 부동산 부문은 GDP의 약 30%를 차지할 정도로 비대해졌고, 폭증한 주택담보대출 등으로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06년 11% 미만에서 현재 60% 이상에 달할 정도로 폭증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중국은 거대한 잉여노동력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 매년 1,100만 명이 넘는 대졸자가 쏟아져 나오지만, 공식 청년실업률만 20%에 달하는 구직난 속에 상당수 청년은 저임금·불안정 노동으로 밀려나거나 아예 구직 자체를 포기하고 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유행하는 ‘탕핑(躺平, 드러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기)’은 단순한 밈이 아니라 중국 자본주의에 대한 대중의 체념과 분노를 표현하는 사회적 징후다. 이런 흐름은 중국공산당의 통치 위기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대외 팽창은 ‘상승하는 강대국의 자신감’의 발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기로부터 주어진 것에 가깝다.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균열 속에서 그 질서의 일부인 중국은 BRICS 확장, 글로벌사우스의 전략적 연대로 새로운 무역대상국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과잉생산의 흡수처를 확보하고자 한다. 또한, 각국과의 경제적 연계를 정치적 영향력 투사와 연계하며 미국에 대응하는 세력권을 구축하고자 한다. 금융정보업체 S&P글로벌 추산에 따르면, 중국 수출에서 글로벌사우스 비중은 2015년 35%에서 2024년에는 44%까지 올라갔다. 같은 기간 미국 비중은 18%에서 15%로 감소했고, 서유럽은 14% 수준을 유지했다. 중국의 무역흑자 가운데 글로벌사우스가 차지하는 몫은 54%에 달하며, 이는 미국(36%)과 유럽(23%)을 더한 수준이다.

 

3) 미국의 폭주가 중국의 활로를 연다

 

중국을 상대적으로 ‘합리적 존재’로 보이게 만드는 존재는 미국이다. 트럼프 정부의 미국 우선주의가 고율관세, 노골적 수탈, 대외원조 축소, 특유의 즉흥적 외교 등으로 우방마저 불안하게 만드는 현 상황을 기회로, 중국은 내부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대안으로 제시할 공간을 넓히고 있다. 트럼프 정부가 UN의 존재 이유를 문제삼으며 다수의 다자기구에서 철수하고 있음에 반해, 중국은 2025년 9월 1일 ‘글로벌 거버넌스 이니셔티브’(GGI) 구상을 발표하며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등 자국이 주도하는 국제기구를 확대하고 있다.[10] 중국의 주요 행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대일로 2.0’의 부상이다. 정체하는 것으로 보였던 일대일로(Belt and Road Initiative, BRI) 프로젝트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2024년 중국의 일대일로 관련 투자와 건설 계약 규모는 전년 대비 두 자릿수 증가세를 기록했고, 2025년 상반기에는 사업 규모가 팬데믹 이전 수준을 넘어 역대 최고치에 도달했다. 특히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중동·걸프 지역, 남미가 신규 확장 축으로 떠올랐다. 과거 일대일로의 중심이 철도·항만·도로·발전소 등 토목형 인프라 구축이었다면, 현재의 일대일로는 재생에너지·배터리·디지털 통신망·스마트시티 플랫폼으로 확장되어 진화하고 있다. 이는 중국 제조업의 과잉생산을 흡수할 해외시장의 구축 과정이자,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투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대만 문제를 두고 중국을 지지하는 70여개국 대부분은 일대일로 참여국이다.   

 

진화한 일대일로와 함께, 중국은 주로 서방이 우위를 점해온 의제에서도 개입력을 확대하고 있다. 그 중요한 행보 중 하나가 재생에너지 선두국가로서의 부상이다. 트럼프가 기후위기를 “사상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규정하며 파리기후협정에서 탈퇴하고 화석연료 중심 정책을 강화할 때, 중국은 태양광·배터리·풍력터빈·스마트 전력망 등에서 세계 공급망을 장악하며 산업적 우위를 도덕적·외교적 자산으로까지 전환하고 있다.[11] 중국에 따르면,

 

「일대일로 공동건설은 글로벌 거버넌스를 개선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제시한다. 우리는 진정한 다자주의를 견지하며, '공동논의 · 공동건설 · 공동공유'라는 글로벌 거버넌스 관점을 실천하고, 대립이 아니라 대화를 선택하며, 장벽을 쌓지 않고 장벽을 허물며, 분리나 탈동조화가 아니라 융합을 선택하고, 배제가 아닌 포용을 추구함으로써 국가 간 상호작용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둘째, 미국의 무역전쟁으로 타격 받은 저개발국을 달래며 세력권을 확대하고 있다. 이를 잘 드러내는 행보가 아프리카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다. 미국은 아프리카 20개국을 고율관세 대상으로 지정했으나, 중국은 2025년 6월 아프리카 53개국에 대한 전면 무관세 정책을 발표하며 이전 33개국에서 모든 아프리카 국가로 무관세 정책을 확대했다. 이미 15년째 아프리카의 최대 교역국 지위를 유지하는 중국의 아프리카 무역 지배력은 압도적이다. 미국보다 중국과의 교역 규모가 더 큰 아프리카 국가는 2003년 18개국에 불과했으나, 2023년에는 54개국 중 52개국이 미국보다 중국과 더 많이 교역한다. 이는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 확대 조치인 동시에, 미국산 농산물 등에 대한 대체경로 확보 조치이기도 하다.

 

셋째, 러시아·북한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있음은 물론, 인도 등 상대적으로 미국과 가까웠던 국가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과 인도는 그간 중국 견제라는 목표 아래 협력해왔으나, 트럼프는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이유로 인도에 관세율 50%라는 징벌적 조치를 취했다. 미국의 고율관세 부과 직후인 8월 30일, 모디 총리는 톈진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 참석하며 미국 조치에 따르지 않겠다는 태도를 드러냈다. “시진핑과 모디의 회담 결과에 따르면, 양측은 양자관계에서 일부 갈등 요소를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또한 중국-인도 관계는 '제3국의 영향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4) 브릭스는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미국과 중국의 투쟁은 분명 현 국제정세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축이다. 그러나 현 세계질서는 미국과 중국이 세계 각국을 양 진영으로 편재하는 ‘신냉전’이라기보다, 1차대전 이전 난마(亂麻)처럼 얽힌 열강의 각축체제에 가깝다. 미국과 중국 어느 국가도 대중의 이념적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두 국가 모두 자국의 질서를 보편규범으로 확장할 정당성이나, 이념적 흡입력이 없다. 확고한 헤게모니 국가의 부재 속에, 국가 간 이해관계는 복잡하게 교차하고 있으며 각국은 단기적 이익에 따라 정렬과 이탈을 반복하고 있다. 브릭스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브릭스는 반미(反美)라는 대강의 이해관계로 묶여 있을 뿐, 통일된 경제·안보 블록으로 기능하기에는 너무도 균열해 있다. 심지어 ‘반미’도 확실하지 않다. 중국·러시아·이란과 같은 미국의 제재 대상국이 있는 반면, 사우디와 UAE처럼 미국과 군사적으로 깊게 연결된 국가들도 있다. 인도는 미국·일본·호주와 함께 쿼드(QUAD) 회원국이기도 하다. 그 결과, 브릭스는 외교적 수사를 넘어 실질적 행동 능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즉, 브릭스의 확장은 미국의 수탈적 행보에 대한 반작용이 낳은 현상일 뿐 브릭스가 새로운 세계질서의 모태가 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브릭스 소속 국가가 늘어날수록, 브릭스 내부의 균열 역시 커질 것이다. 2025년 4월 브라질 리우 외교장관회의에서 브릭스는 창설 이후 처음으로 공동성명 채택에 실패했다. 쟁점은 유엔 안보리 개혁 문제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상임이사국 지위를 요구하자, 남아공과 지역적 경쟁관계에 있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는 이를 반대했다. 이는 2023년 브릭스 확대 이후 처음으로 발생한 중대한 내부 갈등으로, 신규 아프리카 회원국들이 기존 회원국에 대한 우대 조치에 공개적으로 반발한 사례다. 2025년 6월, 미국의 이란 핵시설 폭격 이후에도 브릭스는 미국 또는 이스라엘을 명시적으로 규탄하지 못한 채, ‘확전에 반대한다’는 수준의 모호한 입장만을 내놓았다. 브릭스가 위기 상황에서 단일한 대오로 기능할 가능성은 여전히 낮다.

 

브릭스의 중심 국가인 중국과 러시아의 동맹 역시, 당면 이해관계 속에서 러시아가 중국의 하위파트너로 역할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기인한다. 관련, 8월 31일부터 9월 1일까지 있었던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서 중국이 10년 넘게 추진해온 ‘상하이협력기구 개발은행’이 통과되었다. 그런데 중국이 10년 동안 이를 추진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간 러시아의 반대였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개발 자금을 자신이 통제하는 체계를 통해 조달하길 원했으나,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장기화하며 러시아는 경제·군사적으로 중국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지금, 중국의 제안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중-러의 동맹 역시 미국에 대한 반작용에 근거할 뿐, 균열적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브릭스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공간을 확보하며 당면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국가들의 느슨하고 과도적인 조합에 가깝다. 물론 이러한 제약에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브릭스는 미국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탱되고 있으며, 브릭스의 존재 그 자체가 미국 중심 세계질서가 더 이상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체제가 아님을 증명한다. 세계는 조각조각 균열하고 있다.

 

3. 헤게모니 국가의 부재, 무장하는 세계

 

1) 전쟁위기 확대, 군비경쟁 격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군비경쟁을 본격 촉발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2024년 세계 국방비 지출 총액은 약 2조 7,180억 달러로, 2023년 대비 9.4% 증가했다. 이는 연구소가 보고서를 내기 시작한 1988년 이후 가장 가파른 증가율이다. 불과 몇 년전까지, 나토 국방비 가이드라인은 각국 GDP의 2%였다. 기준이 만들어진 2014년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한 해이고, 그해 가이드라인을 지키는 나토국가는 3개에 불과했다. 그리고 2025년 6월 헤이그 나토 정상회의는 GDP 대비 5% 국방비 지출을 결의했다. 막대한 사회적 자원이 군비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교육, 의료, 복지예산 감축은 당연한 일이다.

 

대만해협과 남중국해를 둘러싼 긴장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개념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미 노무현 정권 당시인 2006년 미국과 맺은 '전략적 유연성' 합의[12]가 최근 훨씬 구체적으로, 또한 공격적인 개념으로 부상하고 있다. 2006년 합의가 ‘주한미군을 한반도 밖으로 투입할 수 있다’고 확인하는 개념적 수준이었다면, 2025년의 전략적 유연성은 실제 작전·전력·외교구조를 변화시키는 실행 패러다임으로 진화했다. 2025년 11월 17일, 주한미군사령관 제이비어 브런슨은 동아시아 지도를 거꾸로 들어보이며 “한국은 러시아 북부함대, 중국 북부전구, 북한군 모두에게 비용을 부과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중·대러 전초기지로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의 언급은 미국이 한국을 전쟁기지로 규정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유사시 대만해협 군사개입’을 언급한 다카이치 사나에의 발언이 촉발한 중국과 일본의 갈등 격화가 드러내듯, 북중러와 한미일의 투쟁은 날이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전쟁위기는 남미로도 뻗어나가고 있다. 2025년 트럼프는 세계 최대의 항공모함 제럴드 포드호를 비롯한 미 해군 함대를 카리브해로 파견하며 베네수엘라를 압박했는데, 이는 1989년 파나마 침공 이후 최대 규모의 중남미 개입이다. 미군은 마약 단속을 명분으로 남미 연안에서 공습을 단행해 9월 이후 최소 76명을 사살했고 , 베네수엘라 해역 인근에 핵잠수함까지 배치하며 침공에 준하는 군사개입을 진행했다.

 

2) 팔레스타인 학살, 그리고 학살에 맞선 투쟁 확대

 

헤게모니의 침식 속에서 세계 곳곳으로 확산하는 전쟁과 학살, 그 한 축에 3년째 지속되는 팔레스타인 학살이 있다. 서방 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대량학살에 그치지 않고 레바논, 이란을 공격했고, 최근에는 시리아를 공습했다. 이렇듯 팔레스타인 학살은 팔레스타인이라는 좁은 지역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중동 전역에 대한 서방 제국주의 패권 유지와 직결되어 있다. 미국은 학살이 개시된 2023년 10월 직후 지중해와 홍해에 항모전단을 급파했고, 영국과 함께 예멘 후티세력을 공격했다. 프랑스, 독일 등 나토 소속 주요 열강 역시 해군 투입, 방공방 구축, 군수지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중동 군사작전에 동참하고 있다.

 

이는 브릭스의 중동-북아프리카 확장과 맞물려 열강투쟁을 심화하고 있다. (2024-2025년 사우디·UAE·이란·이집트·에티오피아 등이 브릭스에 새롭게 가입했다.) 당면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낮으나, 심지어 팔레스타인의 브릭스 가입 관련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상황 자체가 분명 중동지역 패권을 둘러싼 열강투쟁이 격화하고 있음을 뜻한다. 중동 전문 매체 ‘미들이스트 모니터’에 실린 한 기사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유럽 국가들의 공허한 제스처 너머에서, 우리는 종종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을 승리로 보려는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결과 없는 인정은 공허한 의식일 뿐이다.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을 인정하면서도 이스라엘과 무기거래를 지속하고, 그들의 스파이웨어를 구매하며, 외교적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한다면, 그러한 제스처는 공범행위가 된다. 제재 없는 인정은 억압자를 보상하고 피억압자를 버린다. 브릭스는 훨씬 더 중대한 것을 제공한다: 구조적 지원이다. 신개발은행(NDB) 접근권, 남남(South-South) 투자, 대안 무역체제, 그리고 무엇보다 - 세계최대 경제권 일부로부터의 정치적 연대. 그것은 정중한 박수와 실질적 동맹의 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팔레스타인의 브릭스 참여는 유럽의 위선과 전략적 결별을 의미한다: 그것은 상징적 인정이 아니라 세계 정치경제 형성에 실질적 참여를 요구한다.」

 

물론 브릭스는 중동 민중의 해방을 위한 대안이 아니다. 다만 이런 상황은 제국주의 학살 뒤에 어떤 맥락이 있는지, 또한 그 학살이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2025년 10월 기준, 가자지구 사망자는 6만 7천 명을 넘었고 부상자는 1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학살이 시작된 2023년 10월 이후 숱한 UN결의안이 학살중단을 권고하고, 2025년 9월 23일까지 158개국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한 지금에도 학살은 지속되고 있다. 2025년 10월 발효된 ‘휴전’ 이후에도 최소 312명이 죽었다.

 

그러나 한편에서 학살을 지원하는 제국주의 국가들마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 흐름은 학살에 반대하는 대중투쟁을 제외하고 설명할 수 없다. 투쟁이 여론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서유럽 국가들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는 역사적 최저치로 떨어졌다. 2025년 6월 보도에 따르면, 서유럽 6개국(독일·프랑스·덴마크·이탈리아·스페인·영국) 응답자 중 63-70%가 이스라엘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10월 발표에 따르면 응답자 59%가 이스라엘 정부를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이 과도하다’는 응답 역시 2023년 27%, 2024년 31%, 2025년 39%로 상승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노동자계급의 팔레스타인 연대파업이 정세를 돌파할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2025년 9월 22일, 이탈리아 제노바 항만노동자들은 이스라엘로 향하는 군수 물자를 실은 선박의 작업을 집단적으로 거부하며 팔레스타인 연대총파업을 전개했다. 항만뿐 아니라 철도, 교육, 운수 노동자들까지 파업에 동참했고, 65개 도시에서 50만 명이 가담했다. 이 투쟁은 곧 유럽 각국으로 확산되었다. 9월 27일, 베를린에서 10만 명이 참여한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가 벌어졌다. 스페인에서는 마드리드 금속노조(CGT Metal Madrid)가 ‘이스라엘이 수무드 선단을 공격하는 순간 즉시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하며 본격적인 연대투쟁이 시작됐다. 10월 2일부터 5일까지 마드리드·바르셀로나·발렌시아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연인원 2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0월 15일에는 스페인의 양대노총이 조별 2시간 부분파업을 조직했고, 보다 왼쪽의 노동총연맹(CGT)는 24시간 총파업을 선언하며 보다 강경한 행동을 촉구했다. 학생들 역시 80%가 수업을 거부했다. 이 땅에서도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선 노동자 국제주의 투쟁을 확장해야 한다.

 

 

4. 한국 자본주의와 노동자계급 운동

 

1) 한미관세협정, 국가를 등에 업고 세계적 독점자본으로의 부상을 꾀하는 한국 자본[13]   

 

10월 29일 한미 관세협정이 타결되었다. 한국은 매년 현금 200억 달러씩 10년에 걸쳐 총 2,000억 달러를 '상업적 합리성'이 보장되는 사업으로 미국에 투자하고, 나머지 1,500억 달러는 한국 조선업 자본의 미국 투자에 대한 정부 보증과 대출로 이루어지는 마스가(MASGA) 프로젝트 투자다. 그 댓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한 상호관세를 15%로 유지하고, 자동차에 부과되던 25% 관세율을 15%로 낮춘다.

 

2천억 달러 투자에 대한 배분비율은 원리금 회수 전까지는 미국과 한국 5:5다. 이에 따라 2천억 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한 한국이,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4천억 달러 이상의 이윤이 남아야 한다. 연간 이익을 10%로 잡아도 원금 회수에는 20년이 걸리며, 투자 손실이 발생하면 모두 한국정부 손해가 될 뿐이다.

 

협정 타결 직후 백악관 발표문에는 한국정부가 발표하지 않은 투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가스공사는 연간 330만톤의 미국산 LNG를 수입한다. 대한항공은 362억 달러에 달하는 항공기 103대와 137억 달러에 달하는 엔진을 미국기업에게 구매한다. 한국 공군은 23억 달러 규모 조기경보기 개발사업 파트너로 미국기업을 선정한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미국기업과 함께 미국 내 희토류 분리정제 및 자석 생산단지를 개발한다. LS그룹은 2030년까지 30억 달러를 미국 전력망 인프라에 투자한다, 등등. 트럼프 정부는 이번 거래가 미국의 에너지 패권을 더 공고히 하고, 기술혁신에서의 미국 우위를 강화하며, 미국 조선산업 생산력 확대 등을 통해ᅠ미국의 지도력을 다시 세우는 계기였다고 선전한다.

 

이것은 약탈이다. 그러나 미국이 빼앗은 것은 한국 노동자 민중의 피땀일뿐, 한국 자본의 이윤이 아니다. 한국정부는 기업에 달러를 빌려주고, 삼성·현대차·한화·포스코 등 기업은 정부로부터 조달한 달러를 미국 제조업과 에너지 인프라 확대를 위해 투자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투자가 성공하면 한 단계 도약할 계기를 확보하는 셈이고, 실패해도 정부가 이를 보전하니 손해 볼 것이 없다. 즉, 한국 자본은 국가의 비호 아래 안전한 이윤축적 기회를 확보했다.

 

“미국은 프로젝트에 상품·서비스를 제공할 벤더 및 공급업체 선정시 한국 업체를 우선하여야 하며, 개별 프로젝트별로 가능한 한국이 추천하는 한국 프로젝트 매니저를 선정하여야 한다. 또한, 투자 이행 과정에서 분쟁이나 갈등이 발생할 경우, 협의위원회 등을 통해 최대한 우호적으로 해결해나가기로 하였다.” (2025.11.14. 한미관세협정 팩트시트)

 

“우리 기업의 대미 진출 확대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히, 프로젝트 추진 과정에서 연방토지 임대, 용수·전력 공급, 구매계약 주선 및 규제절차 신속 진행 등 미측의 유·무형적인 지원을 확보하였으며, 미국이 최대한 한국업체를 선정하고 한국이 추천하는 한국 프로젝트 매니저를 채용하도록 하여 우리 기업의 미국 사업기회가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미 조선협력(MASGA)도 우리 기업이 주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2025.11.14. 팩트시트 관련 산자부 보도자료)

 

이것이 한국 자본가단체 모두가 관세협정 타결을 환영하는 이유다. "한미 양국이 상호 이익과 공동 번영이라는 대원칙을 공유하고 있음을 재확인했다"(한국경제인협회), "양국간 교역과 투자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첨단분야에서 상호 국익을 증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경총), "22,000여 개 대미 수출 중소기업들이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대미 투자와 수출시장을 안정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중소기업협회), "대미 무역, 투자 불확실성이 상당히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대한상의), "우리 기업들에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새로운 투자·수출 전략을 모색할 기반이 마련됐다"(한국무역협회).

2,000억불 투자 자금조달 및 현금흐름 구조도 (산자부 2025.11.14.). ‘한미전략투자기금’, 즉 한국 정부가 마련한 달러는 각 프로젝트에 투입되며 한국 주요 기업은 각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수임한다. 한국 정부와 한국 기업의 구체적 이윤배분 비율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환영 일색인 자본가단체들의 입장에서 드러나는바, 계약은 자본 측에 유리하게 설계되었을 공산이 매우 크다.

 

백악관 발표에 따르면 한국과 미국은  AI 수출, AI 표준 등에 관한 '기술번영협정'을 체결했으며, 최근 발표된 엔비디아의 한국 기업들에 대한 최신 GPU 대량공급 역시 이번 한미 협정의 결과다. 이번 관세협정은 한국 지배계급과 미국 지배계급의 이해타산 일치로 맺어진 거래이자, 한국 자본의 도약을 위한 국가적 사업이다.

 

매해 노동자 민중을 위해 쓰일 수 있는 30조 원가량의 재정이 미국 제조업 부흥을 위해 이전되며, 그 과정에서 한국 대자본은 이윤 축적을 확대한다. 한국정부는 재정 부담을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할 것이며, 이는 복지축소와 공공요금 인상, 공공부문 민영화 확대로 다가올 것이다. 한국 자본의 미국 생산 확대에 따른 일자리 감소와 실업 확대, 구조조정의 고통이 노동자 민중을 덮칠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2) 격화하는 동북아 전쟁위기 심화, 전쟁산업 확대로 이윤을 쌓는 한국 자본

 

문제는 노동자 민중의 피땀을 자본의 이윤으로 바꾸는 관세협정뿐만이 아니다. 한국정부는 국방비를 현 GDP의 2.8% 수준에서 3.5%로 올리겠다고 약속했고, '중국을 견제하겠다'며 핵추진 잠수함 건조에 대한 미국 승인을 확보했다. 이는 북중러 블록에 맞선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에 대한 한국정부 자신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편입이자, 한미일 동맹 강화 속에서 한국자본의 세계화를 가속하겠다는 야망의 표출일 뿐이다.

 

한국의 군사적 팽창은 튼튼한 제조업을 바탕으로 한 방위산업 수출로도 드러나고 있음은 잘 알려져있다. 2020년까지 한국 방위산업 수출액은 30억 달러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나, 2021년 72억 5천만 달러를 기록하며 급성장했고, 2022년 173억 달러, 2023년 130억 달러, 2024년 95억를 기록하며 이전보다 훨씬 확장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전통적 군수산업 확대에 그치지 않는다. 한미 기술번영협정과 GPU 대량 도입의 의미 역시 한국 경제 군사부문 팽창과 연동되어 있다. 현 정세에서 GPU는 전략자산이다. 2021년 현대차그룹의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 2024년 삼성그룹의 레인보우로보틱스 인수 등 로봇과 피지컬AI 투자를 확대하는 대자본의 행보는 분명 전투로봇과 자율살상무기체계(Lethal Autonomous Weapons Systems, LAWS) 개발 등 전쟁산업 고도화와 연관이 있다. 이런 조건에서 GPU 대량 도입은 대자본이 주도하는 전쟁산업 고도화의 중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렇듯 한국 자본은 전쟁위기 확대와 군비경쟁 격화를 중요한 이윤축적 계기로 삼고 있으며, 이번 관세협정 역시 이를 잘 드러낸다.

 

[한반도 및 지역 사안에 대한 공조]

“양 정상은 항행·상공비행의 자유와 여타 합법적인 해양 이용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재확인하였다. 양 정상은 모든 국가의 해양 권익 주장은 국제해양법과 합치해야 함을 재확인하였다.”

“양 정상은 대만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양 정상은 양안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독려하였으며, 일방적 현상 변경에 반대하였다.”

 

‘항행의 자유’, ‘대만해협 현상변경 반대’ - 대만해협과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격화하는 동북아 전쟁위기에 대한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라는 흐름은 이번 협정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한미동맹 현대화]

“한미 양국은 북한을 포함하여, 동맹에 대한 모든 역내의 위협에 대한 미국의 재래식 억제 태세를 강화할 것이다. 양측은 2006년 이래의 관련 양해를 확인한다. 양측은 긴밀한 협의를 지속하고, 이행 진전 상황을 각측 지도부에 보고할 것이다.”

 

‘2006년 이래의 관련 양해’, 그 핵심은 물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다. 노무현 정부 당시 합의문은 다음과 같다.

 

"반기문 장관과 라이스 장관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관하여 양국정부의 양해사항을 아래와 같이 확인하였다. 한국은 동맹국으로서 미국의 세계 군사전략 변화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존중한다. 전략적 유연성의 이행에 있어서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동북아 전쟁위기가 미국과 중국의 자유무역 호시절인 2006년보다 훨씬 격화된 지금,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당시 조항은 그야말로 공허하다. 이미 주한미군은 중러를 견제하는 기동군이며, 한반도는 중국과 러시아 코앞에서 미군을 품은 병참기지다. 무장력 강화를 위해 한국군에게는 핵추진 잠수함 보유 승인이라는 약속이 주어졌다. 또한, 격화하는 미중투쟁 속에서 중국의 1/200에 지나지 않는 미국 조선업의 건조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한국 조선소에서는 미국 군함이 건조될 공산이 높다. 미군이 계약한 선박의 해외 건조를 금지한 현행 존스법을 뜯어고치건, ‘비상 상황’을 명분으로 존스법 적용예외를 추진하건, 합작회사 방식으로 법을 우회하건 말이다.

 

[해양 및 원자력 분야 파트너십 발전]

“한미 양국은 조선 분야 실무협의체를 통하여 유지·정비·보수, 인력 양성, 조선소 현대화, 공급망 회복력을 포함한 분야에서 협력을 진전시키기로 하였다.”

“이러한 구상들은 한국 내에서의 잠재적 미국 선박 건조를 포함하여, 최대한 신속하게 미국 상업용 선박과 전투수행이 가능한 미군 전투함의 수를 증가시킬 것이다.”

 

“미국은 한미 원자력 협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를 지지한다.”

“미국은 한국이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미국은 이 조선 사업의 요건들을 진전시키기 위해, 연료 조달 방안을 포함하여, 한국과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이다.”

 

3) 바로 지금 이 땅에서의 국제주의 계급투쟁으로

 

심화하는 열강투쟁은 각급 진영론으로 이어진다. 한국 운동 진영에서도 중국-브릭스 대안론, 미국 주도 세계질서 인정론, 혹은 ‘규칙기반 세계질서’ 수호론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현 정세는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쟁투이며, 그 대가를 치르는 존재는 노동자계급이다. 한국 노동자계급운동은 격화하는 제국주의 패권대결과 그 위험을 올곧게 해설하고, 반제반전 국제주의 연대투쟁을 전체 노동운동의 과제로 제기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스스로 팔레스타인 연대투쟁 등 국제주의 실천에 앞장서는 한편,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 중동전쟁 위기, 대만해협 위기, 각국 군비경쟁이 노동자계급의 생존권 쟁취투쟁과 어떤 관련을 가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를 통해 지역과 현장에서 반제반전 연대투쟁을 자기 과제로 여기는 노동자와 노동자조직을 확대하고, 더 넓은 민중조직과 함께 반제반전 정치파업을 조직해가야 한다. 이런 목표 아래, 당면 주요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관세전쟁 이후 횡행하는 산업주권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이재명 정부와 자본에 대한 독립적 태도에 기반해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추동해야한다. 관세전쟁 이후 확산하는 산업주권 이데올로기는 국가와 자본의 이익이 곧 노동자의 이익이라고 호도한다. 그러나 이번 관세협정 결과가 드러내듯, 국가를 등에 업고 세계적 독점자본으로 부상을 시도하는 한국 자본은 관세협정의 피해자가 아니라 수혜자다. 국가와 자본에 맞선 독립적 운동을 확대하자.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사회적 대화의 환성을 거부하고, 전체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추동하자.

 

둘째, 급속히 팽창하는 한국 전쟁산업 양상과 실체를 드러내며 제국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을 확대하자.  전쟁산업 확대와 군비증강은 필연적으로 전체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압박, 복지삭감, 기후위기 확대로 이어지며 그야말로 극소수 일부 노동자들이 그 수혜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제국주의와 전쟁에 맞선 투쟁을 △생존권 쟁취투쟁 △교육·의료·주거 등 복지삭감 반대투쟁 △기후정의 투쟁과 연동해 확대하자. 현 정세 속에서 노동자계급 국제주의는 ‘전쟁을 위한 생산을 사회적 필요를 위한 생산으로 전환하라’는 요구와 함께 확대되어야 한다.

 

셋째, 이주노동자 연대를 확대하자. 현 정세 속에서 한국 자본주의는 한편으로는 필요에 따라 더 많은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주노동자 탄압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왜 ‘일은 하지만 사회구성원이 아닌 사람들’을 만들어내는가? 왜 국가와 자본은 이주노동자 혐오를 부추기는가? 이주노동자가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될 경우 이주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임금인상을 요구할 것이며, 같은 사람으로서 한국노동자와 동일한 조건을 요구할 것이다. 이는 ‘저임금-무권리 노동력에 대한 자유로운 착취’라는 자본의 이주노동자 도입 목적 자체와 충돌한다. 즉, 정주노동자가 이주노동자들을 일자리 경쟁자로 놓으며, 이주노동자의 무권리 상태를 방치하는 한 자본은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투쟁은 임금 하한선을 높일 것이며, 이에 따라 평균임금을 높일 것이고, 이는 저임금 정주노동자의 임금투쟁 확대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이에 자본은 이주노동자의 단결을 봉쇄하고자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고,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철저한 탄압으로 일관하며, 다양한 민족국가의 노동자들을 유입시키는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극심한 착취와 수탈에 따라 저출생이 장기화했고, 이에 따라 이주노동자 증가는 필연이다. 이주노동자와 정주노동자의 연대는 위기로 치닫으며 착취와 수탈을 강화하는 자본주의에 노동자의 단결로 맞서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다.

 

넷째, 의식적 노동운동, 정치적 노동운동을 확대하자. 노동운동이 단지 현장의 경제적 요구를 넘어, 사회 전체의 운영 방향에 대한 의식적 투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지배계급은 제국주의 열강투쟁과 함께 확산하는 군사경제와 민족주의를 국가적 생존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며 노동자계급의 희생을 다시 강요할 것이다. 이것이 미국 노동운동 일각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2025년 3월 26일, 전미자동차노조(UAW)는 트럼프 정부의 관세정책 지지 입장을 발표했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노동자계급 공동체를 황폐화한 자유무역 재앙을 끝내고자 나선 트럼프 행정부에 갈채를 보냅니다”(숀 페인 UAW 위원장). UAW는 해당 성명에서 △미국 내 생산 확대 △저임금 국가로의 일자리 이전 금지 △미국산 부품 사용 확대 등을 요구했다. 그야말로 반동적인 입장이다. UAW와 숀 페인 논리대로라면, 미국 노동자들과 한국 노동자들은 트럼프 정부와 세계 자본가들에 맞서 함께 싸워야 할 동지이기는커녕, 철천지원수일 수밖에 없다. 당면 경제적 요구를 넘어, 산업부문과 고용형태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분할을 넘어, 전쟁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목적의식적 정치투쟁을 형성하자.

 

[각주]

 

[1] 관세에 따르는 수입물가 상승의 경우, 무역 상대국의 환율 평가절하가 미국의 수입물가 상승을 상쇄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2] 미란 보고서는 각국이 보유한 미국 국채를 ‘100년 만기 채권’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보고서 자체에 100년 만기 채권이 ‘무이자’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세간은 해당 채권이 무이자일 가능성까지 내다본다.

[3] 맑스, 『자본론』 3권, 3편 15장 「법칙의 내적 모순들의 전개」

[4] 2022년 1월에서 2024년 12월 사이 중국의 공식 미국채 보유액은 27% 넘게 감소해 2015∼2022년 감소율 17%를 크게 뛰어넘었다. 미국의 러시아 해외자산 동결을 목격한 이후, 중국의 미국채 매각 속도가 빨라지고 있음이다. 어느새 중국의 미국채 보유량은 영국보다도 낮아졌다.

[5] 금은 상품의 가치를 ‘질적으로 같으며 양적으로 비교가능한 크기’로 표현하는 일반적 척도로 기능한다.

[6] 맑스, 『자본론』 1권, 1편 3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 맑스는 『자본론』 3권, 5편 33장 「신용제도 아래의 유통수단」에서도 마찬가지로 위기 상황에서는 “신용제도(credit system)가 갑자기 화폐제도(monetary system)로 전환”한다고 논한다. 여기서 ‘화폐’란 국가권력이 강제통용하는 불환지폐가 아니라 금이 뒷받침하는 화폐,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상품화폐를 뜻한다.

[7] 미국과의 무역전쟁 관련 희토류 통제는 바이든 정부 때부터 시작되었다. 2023년 8월 중국은 갈륨과 게르마늄에 대한 수출허가제를 도입했고, 2024년 12월에는 희토류 가공기술 및 자석 제조기술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8] 과거에는 블랙리스트에 오른 중국 개별 기업이나 연구기관만 규제 대상이었다. 그러나 해당 기업들이 규제를 피하고자 자회사를 설립하면, 미국정부가 이를 제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 기술과 부품조달이 가능했다. “A new export rule escalates US-China tensions”, PIIE, 2025.10.27.

[9] 미국 주도 관세전쟁 속에서, 중국은 브릭스 국가들은 물론 남미를 비롯한 글로벌 사우스, 나아가 미국의 전통적 우방들에도 손짓한다. 중국은 자유무역을 역설하며 동맹을 강화할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당장 2025년 3월 30일 한·중·일 경제통상장관들이 5년 만에 3자 회담을 열어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 대응 방안을 논의했고 4월 9일에는ᅠ중남미·카리브 국가공동체(CELAC) 30개 회원국이 트럼프 정부의 관세정책을 규탄했다.

[10] 중국에 따르면, GGI는 다섯 가지 핵심 원칙에 기반한다. △주권 평등 △국제법 준수 △다자주의 실천 △사람 중심 접근방식 △실질적 행동

[11] 물론, 중국의 실제 의도가 기후위기 대응 자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일대일로 에너지 투자가 보다 ‘녹색화’ 되고 있지만, 여전히 화석연료 투자가 지배적이다. 2023년부터 2025년 사이, 일대일로 재생에너지 투자는 95억 달러에서 118억 달러, 그리고 2025년 상반기 94억 달러로 늘었다. 그러나 석유·가스 투자는 157억 달러에서 243억 달러, 그리고 440억 달러로 증가했다. 현 행보는 CATL, 화웨이, 롱기 같은 민간기업이 아프리카·동남아·남미에서 배터리공장, 데이터센터, 광산 개발을 주도하고 국유기업은 여전히 정유시설과 파이프라인, 거대 광산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형태로 파악된다.

[12] “반기문 장관과 라이스 장관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관하여 양국정부의 양해사항을 아래와 같이 확인하였다. 한국은 동맹국으로서 미국의 세계 군사전략 변화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존중한다. 전략적 유연성의 이행에 있어서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13] 아래 단락은 한미관세협정에 대한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의 성명 “미국의 약탈, 필요한 것은 산업주권 수호투쟁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국제연대다”를 토대로 보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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