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이후 극우세력의 준동과 노동자계급의 대응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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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성명/논평

12·3 이후 극우세력의 준동과 노동자계급의 대응방향

한국 극우세력, 어떻게 성장했으며 어떻게 맞설 것인가?

  • 양준석
  • 등록 2025.02.24 21:34
  • 조회수 412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 못지않게 이후 극우세력의 준동 또한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양상으로 전개돼 왔다. 서부지법 폭동, 헌법재판소에 대한 공공연한 폭동 모의와 선동, 황당한 부정선거 음모론, 계몽령 운운하며 계엄의 실체를 덮으려는 새빨간 거짓말들, 인권위를 동원한 윤석열 비호 등등.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 전제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깨져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트럼프 재집권 이후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다. 2021년 의사당 폭동자들에 대한 사면, 이민자들의 대량 체포, 연방공무원 대량해고 추진, 캐나다·파나마·그린란드 등에 대한 주권 부정,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주민의 강제이주와 미국에 의한 강탈 계획 등등.

 

극우세력의 준동이 이처럼 한국과 세계를 뒤흔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노동자계급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1. 개념 정리

 

극우세력의 준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개념 정리부터 시작해 보자. 극우와 우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극우와 파시즘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좌파, 우파, 극우, 파시즘의 개념부터 하나씩 정리해 보자.

 

1) 좌파와 우파

 

좌파는 일반적으로 기존 사회질서 안에서 고통당하는 이들, 즉 착취·억압받는 노동자·민중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을 말한다. 반대로 우파는 일반적으로 기존 사회질서 안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지배계급, 즉 자본가계급과 그 하수인들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을 말한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좌파는 기존 사회질서를 변화시키려 하고 우파는 기존 사회질서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런데 우파가 기존 사회질서의 유지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종종 우파는 지배계급의 기득권을 되찾거나 강화하기 위해서 기존 사회질서의 변화를 추구한다. 물론 그러한 변화는 노동자·민중의 관점에서 볼 때, 또한 보편적 해방을 향해 도도히 전진해 온 인류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의 물줄기를 거꾸로 돌리는 반동적 변화다.

 

우파가 반동적 변화를 추구할 때, 당연히 좌파는 그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때 좌파가 변화에 반대하는 것은 노동자·민중이 역사적으로 성취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지 기존 사회질서 자체를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결국 좌파는 보편적 해방을 향해 기존 사회질서를 변화시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좌파도 우파도 내부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특히 우파는 일반적으로 중도우파(리버럴·자유주의)와 보수우파(보수파)로 나뉜다. 보수우파가 보다 간명하게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면, 중도우파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민중의 이해관계를 화해시키려는 외관을 통해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킨다. 중도우파의 존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운용되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 보수우파의 노골적인 자본가계급 이해관계 옹호에 분노한 노동자·민중에게 중도우파가 그럴싸한 대안으로 내세워지기 때문이다. 노동자·민중이 다시 중도우파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을 때 새롭게 단장한 보수우파가 다시 대안으로 내세워진다. 노동자·민중을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쳇바퀴 안에 영원히 가두기 위한 메커니즘이다.

 

2) 우파와 극우

 

우파와 극우는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대표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우파와 극우가 갈라지는 지점은 변화를 추구하는 목표와 방법에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파는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 변화를 추구한다. 하지만 극우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민주적 기본권과 형식들까지 일정하게 파괴하는 목표를 추구하며 또한 그러한 방법들을 서슴없이 사용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계급은 통상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계급지배를 위해 불가피하면서도 유용한 형식으로 간주한다. ‘불가피하다’는 것은 자본가계급이 노동자·민중과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계급투쟁을 전개한 결과 역사적으로 도달한 균형점이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의미에서다. ‘유용하다’는 것은 (정말로 자유와 평등이 존재하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은 외형을 통해 환상을 불어넣고 가둠으로써)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노동자·민중을 효과적으로 무력화하기 때문에 자본가계급의 실질적인 지배를 원활하게 보장한다는 의미에서다. 따라서 자본가계급은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기초하는 우파를 통해 자신의 이해관계를 표현한다.

 

그런데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더 이상 제대로 관철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따라서 노동자·민중에 대한 착취·억압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할 필요를 느낄 때 자본가계급은 극우를 불러낸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과감하게 깨뜨리고서 훨씬 더 강압적인 새로운 계급지배 형식을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우파와 극우가 갈라지는 또 하나의 지점은 대중과의 관계다. 일반적으로 우파는 대중의 수동성을 토대로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한다. 대중의 대다수는 노동자·민중이기 때문에 대중이 능동성을 갖게 되면 자칫 노동자·민중의 힘이 강력해지고 따라서 자본가계급의 지배가 위협받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파는 대중을 수동화하는 효과적인 장치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적극 활용한다.

 

이와 달리 극우는 대중의 능동성을 동원한다. 물론 그 능동성은 대중을 자기해방이 아니라 파멸로 이끈다는 점에서 악마적 능동성이다. 나와 우리 모두의 자유·평등·연대를 실현하고 해방으로 이끌기 위한 이성적 능동성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혐오·차별·억압을 통해 배타적인 특정 집단만의 생존을 도모하려 하는 야수적 능동성이다.

 

극우가 대중의 야수적 능동성을 동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역사적 균형점을 깨뜨리는 데 많은 정치적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혐오·차별·억압의 광기로 대중의 시선을 돌림으로써 변화의 진정한 본질(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 관철을 위한 착취·억압 강화)을 효과적으로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3) 극우와 파시즘

 

파시즘은 극우가 가장 극악하게 진화한 형태다. 통상적으로 극우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부분적 부정을 뜻한다면, 파시즘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뜻한다.

 

파시즘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민주적 기본권(사상·양심·표현·신체·결사·집회·시위 등의 정치적 자유권과 사회적 생존권)과 형식(선거·다당제·삼권분립·자유언론 등)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지배세력의 입장과 이해관계만을 사회 전체에 폭력적으로 관철한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볼 때, 파시즘은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쟁취해 온 조직(노동조합·노동자정당)과 권리(노조결성권·파업권·생존권) 등 노동자운동의 모든 성과를 파괴하여 노동자계급을 원자화된 무기력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뜻한다.

 

군사정권(군부독재)이 파시즘의 한 형태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정과 노동자운동에 대한 전면적 억압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군사정권을 파시즘의 한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고전적인 파시즘은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혁명 근처까지 다다른 상황에서 이를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하며 몰락하는 소부르주아 대중의 야수적 능동성을 전면적으로 동원해 낸다는 특징이 있다. 즉 단지 폭력을 통한 강제만이 아니라 광기에 찬 대중의 동의를 통해 파시즘을 성립시키고 유지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군사파시즘은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미약한 상황에서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하며 군홧발의 폭력에 주로 의지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군사정권을 파시즘의 한 형태로 간주하기 어렵다.

 

군사정권이 고전적인 파시즘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음을 내포하면서 ‘군사파시즘’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이 논란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2. 세계적인 극우세력 성장이 자본주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

 

오늘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정치형태로 통상 간주된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출발할 때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파시즘의 역사를 겪기도 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도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오늘날 세계를 뒤흔드는 극우세력의 준동은 전체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와 위치를 갖는 것인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1) 부르주아 혁명과 부르주아 공화주의

 

자본주의는 봉건제와 절대왕정 체제 안에서 경제적으로 먼저 성숙했다. 자본가계급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에 이르렀지만, 왕과 귀족이 독점하던 정치권력으로부터 배제돼 있었다. 자본가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면 왕과 귀족의 권력을 타도하는 혁명에 나서야 했다. 사회적으로 소수인 자본가계급 홀로서 이 혁명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사회의 다수인 노동자·민중을 혁명의 주체로 끌어내기 위해 자본가계급은 자유·평등·박애라는 보편적 대의를 내걸면서 자신들의 혁명을 포장했다.

 

노동자·민중의 폭발적인 참여를 통해 왕과 귀족의 권력을 타도하는 혁명이 성공했고, 공화국이 건설되었다. 노동자·민중은 이제 모두를 보편적 해방으로 이끄는 진정한 공화국이 건설될 것이라 믿었지만, 자본가계급의 생각은 달랐다. 혁명의 주도권을 쥔 자본가계급은 공화국의 진정한 시민, 즉 선거권자를 사실상 자본가계급 또는 유산계급으로 제한했다. 자본가만을 위한, 자본가에 의한, 자본가의 공화국. 이른바 ‘부르주아 공화주의’였다. 왕과 귀족의 권력을 타도한 혁명은 부르주아 공화주의를 수립하는 부르주아 혁명으로 귀결됐다.

 

2)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의 수립

 

노동자계급은 이제 자본가계급에 맞서 투쟁에 나섰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선거권을 비롯한 정치적 권리와 사회경제적 권리를 쟁취하여 진정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였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민중을 착취·억압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철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서였다.

 

노동자·민중이 1백여 년에 걸쳐 줄기차게 투쟁한 결과, 19세기 중후반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되기 시작했다. 자본가계급이 여전히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사회를 지배하지만,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노동자·민중에게 선거권을 비롯한 각종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고 최소한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보장하는 체제였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많은 경우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투쟁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노동자혁명을 향한 투쟁의 부산물로서 주어졌다. 특히 1917년 러시아 노동자혁명은 전 세계 자본가계급에게 보통선거권, 여성 참정권, 8시간 노동제를 수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런데 그 시절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강탈당하던 식민지·반식민지들이었다. 유럽과 미국은 본국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확산하는 경우에도 식민지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정치적·경제적 권리조차 유린하는 강권통치를 철저하게 고수했다. 식민지에 대한 초과착취와 수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결코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형식적으로 독립을 유지한 반식민지 국가들도 그 정치형태가 무엇이든 부패한 독재정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제국주의 자본가들이 원활한 수탈을 위해 그러한 체제가 수립·유지되도록 적극 유도하고 지원했기 때문이다.

 

3) 파시즘의 대반동

 

보편적 해방을 향해 기존 사회질서를 변화시키려 하는 노동자·민중의 반대편에는 항상 역사의 물줄기를 거꾸로 돌리려는 반동 세력이 있었다. 자본주의 초기에 반동을 대표한 것은 왕정 체제 복원을 도모하는 왕당파였는데, 당연하게도 왕당파의 낡은 주장은 대중 속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런데 러시아 혁명 이후 1920~30년대 이탈리아와 독일을 중심으로 파시즘이 등장해 반동의 새로운 대표 주자가 되었다. 파시즘은 ‘위대한 이탈리아 국민성에 입각한 로마 영광의 재현’이나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실현하는 국가 사회주의’ 같은 ‘참신한’ 슬로건을 내걸었다. 마침 세계대공황과 같은 극심한 경제 파탄으로 삶이 무너지는 대중이 있었다. 파시즘은 절망하는 대중에게 (노동자운동과 유대인이라는) 혐오·저주의 대상을 제시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야수적 능동성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계급적으로는 몰락한 소부르주아들이, 사회적으로는 퇴역 군인들이 파시즘의 핵심 지지자가 되고 돌격대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또한 대자본이 극심한 경제위기에 대응할 해법으로 노동자운동의 절멸을 추구하는 파시즘을 선택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특히 독일에서, 노동자계급은 파시즘 세력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세계 최강의 조직력을 갖고 있었지만,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분열을 이겨내지 못하고 허망하게 패배했다. 사회민주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파시즘과 공산당 모두의 위협으로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켜내겠다고 주장했다. 공산당은 사회민주당을 파시즘과 다를 바 없다며 사회파시즘이라고 규정짓고 파시즘 집권은 공산당 집권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분열 덕분에 손쉽게 승리한 히틀러의 나치당은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은 물론이요, 노동조합과 협동조합까지 노동자운동의 모든 요소들을 절멸시켰다.

 

1933년 독일에서 노동자계급이 패배한 경험은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큰 반면교사가 됐다. 1934년 프랑스 파시스트들이 독일과 비슷하게 위협적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 노동자대중은 사회당과 공산당의 단결을 아래로부터 강제해 내며 압도적인 대중의 힘으로 거리에서 파시스트들을 제압해 냈다. 파시즘의 분쇄를 위해 노동자들의 모든 힘을 결집시키는 ‘노동자 공동전선’이야말로 파시즘을 물리칠 수 있는 진정한 방안임을 입증해 낸 것이다.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파시즘을 제압해 낸 성과 위에서 거대한 전진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1936년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이 중도우파 급진당과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결성해 집권했다. 군부 파시스트들과 내전이 터진 스페인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더 폭넓게 단결할수록 파시즘을 막아낼 힘이 더 강화될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자본가 정치세력과 인민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침해하지 않도록 노동자대중의 요구와 행동에 족쇄가 채워졌기 때문이다. 인민전선 정부가 노동자투쟁을 제약하고 심지어 탄압하면서 노동자대중의 혁명적 역동성은 급격히 잦아들었다. 허약해진 인민전선은 몇 년 뒤 파시즘 세력에게 패배하고 굴복했다. 인민전선은 파시즘 세력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패배로 몰고 간 족쇄였다.

 

4) 전후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전성기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정점으로 한 때 유럽과 아시아에서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파시즘 세력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몰락했다. 승자는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스탈린주의 세력이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전성기가 냉전이라는 상호 대치 속에서 한동안 전개되었다.

 

서방 진영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뒷받침한 것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전후 호황이었다. 많은 나라에서 자본가들에게 상당한 세금이 부과됐고, 무상의료 같은 개량들이 도입됐다. ‘자본주의 안에서 개량의 지속적 확산’에 대한 낙관이 널리 퍼졌고,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서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라는 자본주의의 근본은 달라지지 않았다. 인종과 젠더에 입각한 억압·차별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식민지·종속국을 상대로 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전쟁 또한 지속되었다. 따라서 1960년대부터 흑인민권운동, 여성해방운동, 반제반전운동이 세계적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1970년대에는 세계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도 세계 곳곳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동방 진영의 스탈린주의는 소련을 넘어 동유럽과 중국 등으로 확산되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는 애초 러시아혁명이 추구했던 노동자 민주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전개됐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창출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훨씬 진전된 민주주의였다. 노동자·민중의 대표기관이 국가권력의 전권을 장악함으로써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의 숨은 지배까지 종식시켰다. 조직된 노동자·민중이 관료적 국가기구를 대체하여 국가업무의 집행자가 됐다. 노동자·민중의 대표자들에게 어떤 특권도 부여하지 않았다. 노동자·민중이 선출하는 대표자들을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었다. 생산수단을 국유화하여 이를 노동자·민중의 생존권과 해방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30년대 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노동자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관료집단의 독재로 대체했다.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유지됐지만 이제 관료집단의 특권과 국가자본의 축적을 위한 수단이 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일한 성격을 가진 체제가 동유럽과 중국으로 확산됐다. 스탈린주의가 여전히 앞세웠던 ‘사회주의 노동자국가’라는 허울과 현실 사이에는 거대한 괴리가 있었다. 스탈린주의 체제의 위선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폭발적인 투쟁이 동독, 헝가리,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5) 신자유주의 대공세

 

1970년대 세계 경제위기와 노동자·민중의 폭발적인 투쟁을 겪으면서 자본가계급 내부에서 대대적인 ‘혁신’이 시작됐다. 악화된 경제 환경 속에서도 자본의 이윤율을 원활히 보장할 수 있도록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를 획기적으로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리해고, 비정규직화, 임금삭감, 사유화(민영화), 규제완화, 감세, 노조무력화 등을 파상적으로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대공세가 1980년대부터 선진국들에서 시작됐다. 처음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주도한 것은 강경 보수우파였다. 정치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틀을 유지했지만, 노동자·민중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심각하게 후퇴시켰다.

 

1970년대 초중반부터 제3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후원 아래 들어선 군사정권들은 (이전 시기 개량의 정도가 선진국에 비해 매우 취약한 제3세계의 조건 위에서) 노동자·민중에 대한 사회경제적 공격과 군사파시즘을 결합시켰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는 세계적으로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가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주도해 나갔다. 선진국들에서는 강경 보수우파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토대로 중도우파·중도좌파가 집권했지만, 전체 자본가계급의 지상과제가 된 신자유주의 공세를 (보다 세련된 외관을 갖고) 집행했다. 제3세계에서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등장한 중도우파·중도좌파 민간정권들도 신자유주의 집행자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중도우파·중도좌파 세력이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주도한 것은 착취에 맞선 투쟁과 억압·차별에 맞선 투쟁이 서로 분열되도록 유도하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중도우파·중도좌파 정권들은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주도하며 노동자·민중을 사회경제적으로 공격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종과 젠더 등에 기초한 억압·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척하면서 종종 개량적 조치도 취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동안 억압·차별에 맞선 투쟁이 노동자·민중으로부터 분리돼 채 중간계급 지식인 중심의 개량주의 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게 하는 유인으로 작용했다.

 

1989~91년 스탈린주의 정권의 몰락 이후 소련과 동유럽에서도, 또한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이들 국가에서는 억압적인 권위주의 체제가 수립되거나 기존 스탈린주의 정치체제가 유지됐지만, 중도우파·중도좌파의 세계적 주도력에 이끌리는 양상을 보였다.

 

6) 자본주의 위기 심화와 극우세력의 준동

 

신자유주의 대공세와 세계화·금융화는 자본의 이윤율을 회복시킴으로써 한동안 자본주의에 새로운 부흥을 가져다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에 내재한 모순을 폭발시켰다.

 

이후 자본주의는 (자본의 원활한 확대재생산이 위협받는) 축적위기가 점점 더 심화되어 왔다. 자본가계급이 여전히 의지해 온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라는 기존의 방법들은 모순을 더욱 악화시킬 뿐 유효한 해법이 되지 못한 가운데, 극우세력이 강화되고 준동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왔다.

 

긴축정책까지 가세하며 더욱 강화된 신자유주의 대공세는 선진국 노동자·민중을 빈곤으로 내몰며 거대한 정치적 에너지를 창출했다. 빈곤화한 노동자·민중을 토대로 한편으로는 좌파의 새로운 운동이 성장해 나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주민 혐오 등에 기반한 극우세력이 큰 규모로 형성되었고 빠르게 성장해 왔다.

 

선진국의 생산기반을 신흥국으로 이전시킨 세계화는 국가 간 세력판도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특히 중국이 경제적 부상과 함께 최강대국의 꿈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내부적으로 전체주의 성격을 더욱 강화한 것은 선진국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보호주의와 중국 혐오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에서 극우세력의 성장을 가속시킨 또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보여준 파국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2008년 이후 금융수탈을 위한 금융화가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전개돼 왔다. 부동산·주식·암호화폐 투기에 따른 천문학적 불로소득은 노동을 경시하는 일확천금의 환상을 크게 부채질함으로써 극우세력의 세계관에 중요한 자양분을 제공했다.

 

지난 10여 년, 세계 곳곳에서 극우세력이 급성장했다. 많은 나라에서 집권했거나 집권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와 같은 세계적인 극우세력 성장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것은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승리였다. 그런데 트럼프 승리의 배경에는 기독교 근본주의(기독교 극우)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2025년 다시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미국과 세계의 노동자·민중을 상대로 파상적인 극우 공세에 나서고 있다.

 

7) 미국 극우세력의 중추로 성장한 기독교 근본주의

 

기독교 근본주의는 간단히 말해서 이슬람 근본주의의 거울이다. 모든 것을 성경에 적힌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화론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완고하게 창조론을 신봉한다. 성경에 나타난 고대의 사회관계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면서 가부장제, 젠더억압, 인종차별을 적극 옹호한다. 순응과 소명을 강조함으로써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자·민중의 자주적인 조직과 투쟁을 배척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비과학적인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과학에 기초한 자본주의 산업 발전과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동안 소수 종파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착취와 억압·차별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거세게 발전해 나가자 지배계급이 이를 억누를 이데올로기적·조직적 수단으로서 기독교 근본주의의 효용성을 재평가하게 됐다. 특히 1960~70년대 흑인민권운동, 반전운동, 페미니즘, 성소수자 해방운동 등이 대대적으로 확산돼 나갈 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

 

오늘날 미국 극우세력의 중추로 성장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본격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출발점은 1950년대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 폐지와 1960년대 인종분리정책 폐지에 대한 반발이었다. 1970년대를 거치며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은 ‘창조론’을 가르치는 백인 전용 사립 기독교 학교를 미국 전역에 5천 개나 설립함으로써 1백만 명의 학생을 수용하게 됐다. 또한 젠더평등을 명시하는 헌법수정안 거부운동을 펼쳐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기독교 근본주의는 본격적인 정치참여를 위해 1979년 ‘도덕적 다수’라는 정치조직을 설립해 유권자 등록운동과 공화당 지지 운동에 나섰다. 또한 낙태, 성소수자 권리, 공교육의 세속화, 환경운동, 페미니즘, 포르노 등 ‘미국을 타락시키는 도덕적 위기’에 맞선 ‘문화전쟁’을 선언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을 지지하여 당선에 일조했지만, 레이건이 문화전쟁에 충분히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자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게 됐다. 1989년 ‘미국기독교연합’이라는 새로운 정치조직을 출범시키고, 아래로부터 공화당을 장악해 간다는 목표 아래 주·지역 단위 역량 강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는 한편, 클린턴 탄핵 운동을 주도했다.

 

2000년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2세 또한 문화전쟁에서 약속한 만큼 행동하지 않았지만, 복지서비스를 대거 교회와 기독교 자선단체에 넘기는 선물을 안겼다. 기독교 근본주의 목사들이 교도소 프로그램, 직업훈련, 청소년 혼전순결 같은 온갖 복지사업에 관여하게 됐다. 신자들의 모든 삶과 소비를 포괄하며 이미 거대한 규모로 발전해 가던 기독교 산업을 더욱 확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오바마 정부가 부패한 금융자본을 구제하며 가난한 노동자·민중을 희생양으로 만든 것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급격히 성장하는 비옥한 토양이 됐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오바마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실망을 활용하여 자신들이 장악한 주·지역에서 문화전쟁을 대대적으로 강화했다.

 

2016년 대선 무렵, 기독교 근본주의는 공화당 지역 조직의 다수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트럼프를 자신의 후보로 선택하고 당선시켰다. 트럼프는 기독교 근본주의에 크게 두 가지를 약속했고 실행에 옮겼다. 연방판사들에 대한 통제권과 이스라엘 주재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이었다. 특히 사법부에 대한 통제권이야말로 문화전쟁에서 승리하는 데서 핵심이라고 기독교 근본주의는 판단했다. 트럼프 집권 기간 문화전쟁에 동조하는 보수 대법관들이 세 명이나 임명됐고, 결국 낙태권을 부정하는 대법원 판결로 이어졌다.

 

트럼프 집권 이후 낙태권, 성소수자, 흑인 등에 대한 극우적 공격이 미국 전역에서 파상적으로 펼쳐졌다. 바이든 집권 기간에도 공화당이 장악한 주를 중심으로 공격이 계속됐다. 그러나 민주당의 태도는 위선적이었다. 집권 이전에는 흑인에 대한 경찰 폭력을 비난했지만, 집권 이후에는 경찰 예산을 대폭 증액시켜 주었다. 이민자에 대한 트럼프 정책을 비난해 놓고 강경 차단 정책을 똑같이 실행했다. 민주당은 기독교 근본주의를 중추로 한 극우세력의 공세에 맞서는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2025년부터 시작된 트럼프 2기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주도하는 문화전쟁을 지속하는 데 덧붙여 ‘테슬라 무노조경영’으로 악명 높은 머스크를 앞세워 연방 공무원 대량해고를 시작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대공세로 나아가고 있다.

 

3. 한국에서 극우세력의 성장

 

한국에서 극우세력의 성장 과정은 세계적인 흐름을 반영하면서도 고유의 역사를 갖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극우세력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1) 일제강점기 친일파로부터 군사파시즘의 중추세력까지

 

한국 극우세력의 기원은 일제강점기 친일파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군정에게 중용된 친일파는 이승만 정권 수립 이후 경찰·군대·행정·사법 등 국가기구의 중심세력이 되었으며, 또한 적산불하와 원조특혜 등을 통해 자본가계급의 근간이 되었다. 이들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기간 동안 군사파시즘을 떠받치는 중추세력으로 기능했다.

 

2) 1987년의 제한된 민주화 속에 잔존한 극우세력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되어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정점에 이르렀던 노동자·민중의 민주주의 투쟁은 군사정권과 야합한 부르주아 보수야당의 배신에 가로막혀 절반의 승리만을 거둔 채 멈춰 섰다. 민주주의는 껍데기로만 쟁취되었고, 군사파시즘은 온전히 청산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세력의 주류였으며 군사정권 시절 박정희·전두환을 떠받치던 극우세력은 1987년의 형식적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군대·경찰·행정·사법 등 국가기구 곳곳에서 강력한 기반을 유지했다. 파시즘의 잔재는 ‘1987년 체제’라는 제한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으로 스며들었고 지속되었다.

 

1990년 전두환·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3당 합당’에 나섬으로써 (오늘날 국민의힘의 원조라 할)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군사정권 주역들과 보수야당 온건파의 결합이었다.

 

처음에는 군사정권 후예들이 민주자유당의 주류였다. 하지만 1993년 김영삼 정권에 의해 군부 내 하나회 세력이 제거되고 1995년 전두환·노태우가 5·17 쿠데타로 내란죄 처벌을 받으면서 주도권이 보수야당 출신의 공화주의 보수우파에게 넘어갔다. 지도부를 잃고 중핵이 와해된 군사정권의 잔존 세력은 정치적 생존을 위해 공화주의 보수우파로 변신했다.

 

1997년 IMF 경제위기를 전후해 김대중이 이끌던 보수야당 급진파가 ‘신자유주의 중도우파’로 재정립할 때, (군사정권 잔존세력을 포괄한) 공화주의 보수우파는 ‘신자유주의 보수우파’로 재정립했다. 이후 두 세력은 1998년의 김대중 정부부터 2024년의 윤석열 정부까지 자본가정당이라는 근본적 본질에서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공세를 집행한다는 핵심 정책에서도 엇비슷한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두 세력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보수우파가 집권할 때마다 그 속에 내재한 극우적 본성을 드러내면서 노동자·민중을 더욱 거칠게 공격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2009년 쌍용차 파업에 대한 살인적 진압, 2010~12년 금속산업 민주노조들에 대한 와해 공격, 이명박·박근혜 정권 내내 계속된 KBS·MBC 방송 장악, 박근혜 정권 시기 문화계 블랙리스트, 2015~16년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 공세, 2022~24년 윤석열 정권의 화물연대·건설노조 등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극우적 공격은 노동자·민중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렀다. 2016~17년 박근혜 퇴진투쟁이 폭발하고 결국 탄핵으로 귀결되었던 것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극우적 공격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반격이 축적되고 결집한 결과였다.

 

3) 박근혜 탄핵에 맞서 극우세력의 부활을 이끈 기독교 극우

 

그런데 박근혜 탄핵은 다시 극우세력이 새롭게 부활하는 반작용을 낳았다. 노동자·민중의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 맞서 극우세력의 ‘태극기집회’가 출현했다. 1997년 이후 20여 년 동안 신자유주의 보수우파라는 외피에 봉인돼 있던 극우세력의 목소리가 (군부에게 노골적으로 쿠데타를 호소하는 등) 거리에서 거침없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2017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탄핵이 최종 확정될 무렵, 태극기집회는 거리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태극기집회에는 예비역 군 장성 등 군사정권 후예들도 결합했지만, 극우세력의 부활을 주도한 것은 단연 전광훈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극우였다.

 

19세기 말 한반도에 들어온 기독교(개신교)는 유럽으로부터 전파된 천주교와 달리 주로 미국으로부터 전파됐다. 따라서 기독교는 한국사회 안에서 미국식 세계관과 가치관을 유포하면서 친미세력의 구심 역할을 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기독교 일부가 반독재투쟁에 나서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기독교는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치는 보수 세력으로 기능했다. 특히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1990년대를 거치며 대형교회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기독교의 보수적 성격이 더욱 강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의 한 부분으로서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반공’을 신앙보다 앞세워 왔던 기독교 극우가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상당 부분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가 1980년대 이후 줄기차게 정치세력화를 추진한 영향이었다. 애초에 기독교가 도입될 때부터 미국 남부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던 것의 자연스런 결과이기도 했다.

 

기독교 극우는 2004년 한국기독당(1.00%)을 시작으로 총선이 열릴 때마다 비례대표 선거에 후보를 내세웠다. 2008년 기독사랑실천당(2.59%), 2012년 기독자유민주당(1.20%), 2016년 기독자유당(2.63%)을 내세웠다. 그러나 한 번도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한편 기독교 극우는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권과 상당한 교감관계에 있었다. 보수 기독교 전반이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결집했다. 전광훈이 “이명박 장로를 찍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지워 버린다”고 설교하여 처음으로 유명세를 탔다. 이명박 정권은 2009년 “임신중지와 비혼이 저출산의 원인”이라며 낙태 단속 강화를 선언했다. 그러자 2010년 기독교 기반의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불법낙태’를 상습 시술했다며 산부인과 3곳과 의사 8명을 형사고발했다.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가 수행하는 ‘문화전쟁’을 한국에서 시도해 본 것이었다. 결과는 양면적이었다. 한편으로 낙태수술을 위축시키는 효과가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반발 여론을 크게 불러일으키며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꾸준히 세력을 확산해 가던 기독교 극우에게 2016~17년 태극기집회는 획기적인 교두보가 됐다. 박근혜 탄핵은 흩어져 있던 극우 성향의 인물과 세력들이 하나로 결집하는 계기를 만들어 줬다. 그런데 기독교 극우의 조직력과 활력이 고엽제전우회나 어버이연합 같은 전통적인 극우성향 관변단체들을 압도했다. 기독교 극우가 새롭게 부활한 극우세력을 이끌게 됐다.

 

4) 문재인 정권 시기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의 성장

 

문재인 정권을 지나는 동안 기독교 극우의 세력 확산에는 제동이 걸렸다. 2019년 ‘황교안 전도사’를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대표로 밀어 올렸지만, 2020년 총선에서 참패했다. 비례대표로 내세운 기독자유통일당(1.83%)도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입당전술을 통해 국민의힘 안에서 영향력 확산을 시도했지만, 신자유주의 보수우파로서 국민의힘을 주도한 김종인과 이준석은 ‘아스팔트 극우’와의 관계단절을 공식화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 아래서 극우적 성향을 가진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가 2030 남성들 사이에서 상당한 규모로 형성됐다.

 

처음에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허울뿐인) ‘공공기관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대한 일부 정규직 청년들의 엘리트주의적 반발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조국사태로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평등·공정·정의’의 허구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청년들이 광범하게 반발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권의 허울뿐인 ‘성평등’ 정책을 비난하며 2030 남성들을 반페미니즘으로 결집시켜 세력화하려는 이준석의 정치적 시도가 큰 반향을 얻었다.

 

문재인 정권의 성평등 정책은 ‘공공부문 여성 대표성 확대’ 등에 중점을 두었을 뿐, OECD 최악의 성별임금격차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보편적 고용안정과 생활임금 보장 같은 (자본을 강제해야 하는) 실질적인 문제에는 눈을 감는, 그야말로 껍데기뿐인 정책이었다.

 

이준석의 반페미니즘 선동에 상당수의 2030 남성들이 호응한 배경에는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면서 맞닥뜨리게 된 고통스런 현실과 암울한 미래가 있었다. 물론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는 여성에 대한 혐오·차별·억압의 강화를 통해 남성 청년의 위기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극우적 성향을 내포한 것이었다.

 

결국 2022년 대선에서 이준석의 조언대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앞세운 윤석열은 20대 남성에게서 58.7%, 30대 남성에게서 52.8%의 지지를 얻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2030 남성 상당수의 반페미니즘 세력화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2017년 6월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이미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임한 문재인에게 20대 남성의 87%가 지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허울뿐이고 위선적인 페미니즘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 모두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꿔나가는 진정한 페미니즘이 실행됐더라면, 2030 남성들을 혐오정치로 묶어세우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5) 윤석열 정권 시기 극우세력의 분산

 

검찰이라는 핵심 관료조직을 틀어쥔 윤석열은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된 뒤 이준석으로 대표되는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와 손을 잡고 대선을 치렀다. 그러나 윤석열은 집권 직후 이준석을 내쫓고 국민의힘을 장악했다.

 

이후 윤석열은 노골적으로 국민의힘 대표선거에 개입하고 대표에게 사퇴를 강요하는 등 불법적이고 반공화주의적인 당무개입을 지속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을 연상케 하는 극우적 행보였다. 그러나 국민의힘의 다수 정치인들은 친윤계라는 이름 아래 윤석열에게 줄서고 맹목적으로 지지했다.

 

윤석열은 극우적인 정책들도 대거 밀어붙였다. 화물연대와 건설노조 등을 상대로 광포한 탄압을 자행했다. 여론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멈춰서긴 했지만 주69시간 노동제 도입을 시도했다.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 폐지 등 젠더평등에 반하는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였다.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동조하고,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 배상’ 대법 판결을 무력화했으며, 한미일 동맹 강화와 전쟁연습 확대로 전쟁위기를 고조시켰다. 공정과 상식을 앞세워 놓고서 본인과 부인의 의혹에 대한 수사는 철저히 거부했다.

 

윤석열의 거듭되는 극우적 행보는 여론을 크게 악화시켰고, 결국 2024년 4월 총선에서 야권의 압승을 초래했다. 총선 이후에도 윤석열의 지지율은 계속 하락했다. 2024년 11월초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윤석열의 지지율은 17%까지 하락했다. 특히 20대 11%와 30대 10%로 청년들 사이에서는 더욱 지지기반을 상실했다.

 

윤석열의 총선 패배와 지지율 하락은 윤석열, 기독교 극우,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가 서로 분산돼 있는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2021년 이준석이 ‘아스팔트 극우’와의 관계 단절을 추진한 이후 기독교 극우와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는 서로 단절돼 있었다. 2022년 윤석열이 이준석을 무리하게 내치면서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와 윤석열의 관계도 단절되었다.

 

그러나 극우세력의 성장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기독교 극우는 2024년 총선에도 자유통일당(2.26%)을 내세워 정치세력화를 시도했다. 2017년 이후 대거 등장하여 세력을 키워 온 극우 유튜버들은 특히 부정선거 음모론을 활용하며 꾸준히 구독자를 늘려 나갔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극우 유튜버들의 성장은 그 열성 구독자로 윤석열을 조직해 낼 정도에 이르고 있었다. 한편 범보수 기독교는 2024년 10월말 차별금지법과 동성혼을 반대하면서 ‘200만 연합예배’라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6) 군사파시즘 부활을 시도한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

 

2023~24년 공식 석상에서 ‘반국가세력 척결’을 되풀이해서 외치던 윤석열은 12월 3일 비상계엄을 전격 발동하며 친위쿠데타에 나섰다.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한 12·3 담화와 극우세력의 궐기를 촉구한 12·12 담화를 통해 반국가세력의 핵심으로 민주당을 지목했다. 또한 부정선거 진실규명을 계엄 선포의 주된 이유로 내세웠다. 윤석열은 선관위 직원들을 고문하여 부정선거 증거를 조작해 낸 뒤 4월 총선을 무효화하고 국회를 해산하려 했다. 체포명단에 이재명은 물론이요, 한동훈까지 포함시킴으로써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자 했다.

 

계엄선포 직후 발표된 포고령 제1호는 △국회·지방의회·정당의 활동 금지 △결사·집회·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 △언론과 출판에 대한 계엄사의 통제 △파업·태업·집회 금지 △영장 없는 체포·구금·압수수색 등 광범한 기본권 박탈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압살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 금지 △가짜뉴스·여론조작·허위선동 금지 △포고령 위반자 처단 등 모든 비판과 저항을 반국가세력의 국가전복 행위로 규정하여 난폭하게 탄압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다면, 결과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것은 노동자·민중이었을 것이다. 체포명단에는 민주노총 위원장이 포함돼 있었다. 포고령은 파업·집회·언론·정치활동의 자유를 압살함으로써 노동자·민중의 권리를 전면적으로 박탈하려 했다.

 

만일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다면, 한마디로 말해서 파업과 민주노조가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민주노총도 존재할 수 없고, 좌파정치조직·진보정당·노동단체·시민단체 등도 모두 존재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본가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계급이 쟁취해 온 모든 성과들을 박탈하려고 나섰을 것이다.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박정희의 1961년 5·16 쿠데타와 1972년 10·17 쿠데타, 전두환의 1979년 12·12 쿠데타와 1980년 5·17 쿠데타를 재현하려 한 시도였다. 만일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다면 1961~1987년의 군사파시즘이 전면적으로 부활했을 것이다. 따라서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1987년의 제한된 민주화에 입각한 현 헌정체제마저 반인민적 음모와 무력을 통해 일거에 전복시키려 한, 인민에 맞선 ‘내란’이었다.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2017년 이후 극우세력이 부활하고 다시 성장해 온 사회적·정치적 변화 위에서 군사파시즘의 부활이라는 극우세력의 잠재된 열망이 전격적으로 실행에 옮겨진 사건이었다. 또한 한국에서는 군사파시즘의 역사와 잔재 때문에 극우세력의 성장이 중간과정을 생략한 채 친위쿠데타 등을 통한 군사파시즘 부활 시도로 매우 빠르게 진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계엄선포 직후 국회로 달려간 수천 명과 그들을 응원한 수백만 명의 노동자·민중 덕분에, 그리고 군대와 경찰이 유혈사태를 감수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덕분에,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는 조기에 실패했다. 극우세력의 성장이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자를 휘어잡을 정도에 이르렀고, 이것이 군사파시즘의 역사와 잔재 때문에 조기에 파시즘 부활 시도로 이어졌지만, 친위쿠데타를 주도한 자들의 역량 부족과 충동적 성격 때문에 어설프게 준비하고 실행했다가 실패로 끝난 것이었다.

 

7) 12·3 친위쿠데타 이후 극우세력의 급성장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 실패는 탄핵과 내란죄 수사라는 강력한 역풍을 불러왔다. 그러나 2017년 이후 부활·성장해 온 극우세력은 다시 강력한 저항과 반격에 나섰다.

 

윤석열은 몰락의 결정적 위기 앞에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선언하고 극우적 언행들을 거침없이 쏟아냄으로써 일거에 극우세력의 구심으로 부상했다. 그동안 윤석열의 극우적 행보를 맹목적으로 지지해 오던 친윤계 의원들도 윤석열을 따라 명확하게 극우의 길로 들어섰다. 갑자기 극우세력이 제도정치권 안에 강력한 교두보를 형성하게 됐고, 영향력이 급격하게 확산됐다. 12월 중순 탄핵찬성 여론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에도 극우세력은 탄핵반대로 20~25%를 집결시켰다. (12월 12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탄핵찬반은 75%대 21%를 기록했다.)

 

12월 14일 윤석열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극우세력은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친윤계 지도부의 구축과 함께 국민의힘 자체가 극우정당으로 변신했다. 기독교 극우, 극우 유튜버들,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탄핵반대 집회에서 하나가 됐다. 극우세력은 ‘민주당의 줄탄핵과 국정 발목잡기 때문에 계엄을 하게 됐다’며 계엄사태의 책임을 민주당에게 떠넘겼다. 부정선거 음모론과 중국 혐오를 결합시켜 온갖 가짜뉴스들을 만들어냈다.

 

이런 상황에서 1월 3일 (사실상 민주당에 의해 좌우되는) 국회 탄핵소추단이 탄핵소추 근거에서 내란죄 부분을 철회하면서, 불에 기름을 끼얹는 효과를 낳았다. 내란죄가 탄핵소추의 가장 중요한 논거였고 극우세력과의 대결에서 핵심의제가 된 상황에서 조기 탄핵심판을 위해 내란죄를 철회한다는 것은 첨예한 대결 상황에서 탄핵의 정당성을 스스로 갉아먹는 어리석은 자충수였다.

 

민주당의 어설픈 꼼수는 국민의힘에게 ‘사기 탄핵’을 운운하면서 전통적인 국민의힘 지지자들을 대거 탄핵반대 지지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실책을 물고 늘어지면서, 탄핵심판과 내란죄 수사를 내란수괴에 대한 준엄한 단죄의 과정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당들 간의 이전투구의 공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나갔다.

 

민주당의 행태는 또한 2030 남성들 가운데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를 강력하게 자극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의 위선을 비난하며 윤석열을 지지했으나 이준석 퇴출 이후 윤석열로부터도 등을 돌린 채 이완돼 있었다. 계엄 이후 탄핵소추안 가결까지도 이들은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마주하게 된 민주당의 위선적 행태로부터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의 상당수가 자기정당성을 획득하고 극우세력으로 활성화했다.

 

전통적인 국민의힘 지지자들과 혐오정치 청년 보수우파의 상당 부분이 합류한 결과, 1월 중순 탄핵반대 여론이 35~40%로 올라섰다. (1월 17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탄핵찬반은 57%대 36%를 기록했다.)

 

22-03-09

대선출구조사

윤석열지지

24-11-07

한국갤럽

윤석열지지

24-12-12

한국갤럽

탄핵반대

25-01-17

한국갤럽

탄핵반대

25-02-14

한국갤럽

탄핵반대

전체

48.4%

17%

21%

36%

38%

20대이하

45.5%

11%

08%

25%

29%

30대

48.1%

10%

15%

29%

35%

40대

35.4%

09%

13%

31%

25%

50대

43.9%

15%

13%

27%

29%

60대

64.8%

23%

36%

54%

56%

70대이상

69.9%

34%

43%

50%

59%

극우세력의 1월 19일 서부지법 폭동은 탄핵반대 여론이 급격히 확대된 상황에서 발생했고, 윤석열의 12월 3일 비상계엄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극우세력은 격렬하고 끔찍한 공격성을 보여줬다. 경찰을 구타하고 건물을 파괴했으며 서버까지 탈취했다. 태극기집회를 주도하던 60대 이상 노년층만이 아니라 4050 중년층과 2030 청년층까지 전 세대가 골고루 폭동에 가담했다.

 

서부지법 폭동은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비롯한 극우세력이 끊임없이 극우 대중의 행동을 선동하고 조직해온 결과였다. 극우세력은 인터넷 공간에서 공공연히 폭동을 사전 모의하고 고무했다. 극우 유튜버들은 폭동 과정을 생중계했다. 백골단, 북벌의병단 등 돌격대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는 단체들까지 속속 등장했다.

 

이후 한 달 동안 여론지형이 고착된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극우세력의 선동과 세력과시가 계속되고 있다. (2월 14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탄핵찬반은 57%대 38%를 기록했다.)

 

극우세력의 공세는 이제 헌법재판소로 집중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말로써 온갖 위협과 비난을 쏟아냈다면, 조만간 헌법재판소에 대한 압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조직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계몽을 위한 경고용 계엄’부터 ‘선거연수원 중국인 99명 체포’까지 극우세력의 온갖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억지와 가짜뉴스로 가득 차 있다. 지금 극우세력에게 중요한 것은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진짜로 무엇이었느냐가 아니다. 부정선거가 실제로 있었느냐도 아니다. 지금 극우세력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윤석열을 권좌에 복귀시켜 (또는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권을 세워) 자신들이 말하는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겠다는 야수적 욕망과 집단적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

 

4. 극우세력 분쇄와 사회대변혁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관점

 

극우세력이 준동하는 현 상황은 노동자계급에게 거대한 위기와 거대한 기회가 병존하고 있음을 뜻한다. 극우세력을 왜 분쇄해야 하는가? 극우세력을 어떻게 분쇄할 수 있는가? 극우세력을 분쇄하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나씩 살펴보자.

 

1) 극우세력 부상은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한 결과다

 

지난 10여 년 세계적으로 극우세력이 부상한 것은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한 결과다. 경제적으로 빈곤해진 노동자·민중의 상당 부분이 누군가에 대한 혐오·차별·억압을 통해 자신들만의 생존을 도모하고자 하는 혐오정치에 빠져들었다. 이들의 야수적 능동성을 불러낸 극우세력은 언제나 존재해 왔지만,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면서 급격하게 세력을 불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극우세력의 부상을 이끄는 진정한 힘은 자본가계급에게서 나온다. 갈수록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자본가계급이 살아남을 방도는 노동자·민중에 대한 착취·억압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다. 노동자·민중에게 대공세를 펼칠 수 있으려면, 자본가계급에게는 강력한 정치적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본가계급의 의도를 드러내면 노동자·민중의 폭발적인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이주민, 성소수자, 여성, 흑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정치는 얼핏 자본가계급과 직결돼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극우세력이 부상하는 동안 자본가계급은 미소를 감추며 조용히 돕는다. 극우세력이 충분히 강력해지면 이제 자본가계급이 전면에 부상하여 자신의 의도를 노골화한다. 미국에서 기독교 극우와 트럼프의 ‘문화전쟁’을 중심으로 극우세력이 강력하게 부상한 뒤, 이제 ‘테슬라 무노조경영’의 머스크가 전면에 나서 연방공무원 대량해고를 시작으로 노동자계급에 대한 대공세에 나서는 것은 이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에서도 극우세력의 부상 뒤에는 자본주의 위기 심화가 깔려 있다. 이명박 정권이 이른바 7-4-7 공약(7% 경제성장, 4만 달러 국민소득, 세계 7위 경제규모)을 내걸었다 실패한 이후 어떤 자본가 정부도 그런 식의 공약을 더 이상 내걸 수 없을 정도로 자본주의 ‘성장 엔진’이 꺼져버렸다. 높아지는 무역 장벽과 이윤율 하락 속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안정적 일자리의 지속적인 축소, 자영업자의 몰락 등이 초래하는 거대한 불안감이 이미 만성화되어 있다. 자본주의 위기가 실업과 불평등, 생활의 불안정성,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계속 낳고 있다. 청년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고, 수많은 노인들도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여성들은 저임금 불안정노동을 집중적으로 강요당하면서 가사노동까지 이중의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이처럼 청년, 노인, 여성 등을 중심으로 사회 한쪽에서 극심한 고통이 누적되고 있었고, 이것이 극우세력의 부상에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광장의 진출에) 상당한 에너지를 공급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한국의 극우세력 부상과 세계적인 양상 사이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노동자·민중의 빈곤화가 상당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 극우세력의 부상에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군사파시즘의 잔재와 연결된 정치적 요소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혐오정치보다 ‘반국가세력 척결’로 표현되는 반공정치가 주도적 역할을 한다. 혐오정치로부터 출발한 2030 청년층으로 최근에 극우세력이 급격히 확산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군사파시즘에 향수를 느끼는 6070 노년층만큼 완고하고 강력한 기반을 형성하지 못했다. 많은 나라에서 집권한 극우세력이 노동자·민중을 극심하게 공격하면서도 파시즘으로는 쉽게 진화하지 않은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극우세력의 부상이 조기에 군사파시즘 부활 시도로 나타났다. 많은 나라에서 주민의 다수가 빈곤화로 허우적대며 극우세력에게서 희망을 찾게 된 것과 달리,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주민의 다수가 극우세력의 부상을 심각하게 경계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가 자본주의 위기 심화로 극우화 강풍에 휩쓸리는 동안 한국은 이른바 K-시리즈에 열광하며 ‘성장과 안정’에 관한 환상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위기로부터 비켜선 채 그럭저럭 안온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한국의 자본주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경제적 양극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직시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조합 덕분에 어느 정도 방어막을 갖고 있는 조직 노동자들의 다수가 그랬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극우세력이 부상한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극우세력은 대중의 고통과 절망을 자양분 삼아 소리 없이 계속 성장해 왔고, 지금 한국 사회를 심각한 정치적 위기로 내몰고 있다.

 

격동하는 현 정세를 올바로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합리성이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는 헌법재판소와 법원이 알아서 심판해 줄 일이고, 극우세력은 조만간 힘을 잃고 잠잠해질 것이다. 그러나 12·3 이후 우리는 부르주아 법질서가 혼란과 불확실성을 해결하는 데 얼마나 무능력한지를 거듭해서 확인했다.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투쟁이 없었다면, 윤석열 탄핵소추 가결도 체포·구속도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부지법 폭동을 보았고, 백골단의 부활을 보았으며, 헌법재판소를 둘러싼 또 다른 폭력사태를 예감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자본주의 위기 심화로 시달리는 자본가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깨뜨리고 더욱 강력한 착취·억압 체제를 수립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극우세력의 부상을 조용히 지원하면서 자신들이 전면에 나설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아래서 경찰, 검찰, 법원 등 국가기구는 결국 철저히 자본가계급의 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국가기구가 노동자·민중의 정당한 투쟁을 ‘법’의 이름으로 얼마나 잔인하게 탄압해 왔는지 잘 알고 있다. 지금 당장은 국가기구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척 하고 있지만, 극우세력의 성장이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국가기구 자체가 아주 빠르게 극우 체제의 수호자로 변신할 것이다.

 

그러므로 극우세력의 부상과 준동은 전체 노동자·민중의 삶을 송두리째 뒤엎을 수 있는 거대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노동자·민중이라면 누구도 이 거대한 위협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 전체가 송두리째 뒤집어지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단체협약이 노동자를 지켜줄 수 없다.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한국 사회의 시계를 1987년 이전으로 돌리려 했던 것처럼, 극우세력이 승리한다면 (민주노조, 파업권, 진보정당·정치조직, 경제적 성과 등)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 노동자계급이 쟁취해 온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에 대한 혐오·차별·억압 또한 극단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극우세력의 부상과 준동은 노동자·민중에게 거대한 기회 또한 제공하고 있다. 눈앞의 삶에 파묻혀 살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반응하고 행동하도록 내몰기 때문이다. 노동자·민중이 거대하게 각성하고 단결한다면 극우세력을 얼마든지 분쇄해 낼 수 있다. 노동자·민중의 힘으로 극우세력을 분쇄해 낸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회 전체에 대한 자본가계급과 국가기구의 장악력은 결정적 타격을 받을 것이다. 자신감에 충만한 노동자·민중은 이제 모두의 해방을 위해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를 묻고 꿈꾸고 실행해 나갈 것이다. 노동자·민중은 1987년 이후 획득해 온 모든 것을 훨씬 초과하는 거대한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지배계급이 불러온 정치적 위기가 야만을 향한 거대한 위협과 사회변혁을 향한 거대한 기회를 동시에 던지고 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제돼 왔던 정치체제 자체가 공격받는 상황에서, 그동안 익숙했던 사고틀, 근시안적이고 조합주의적인 시야로는 격동하는 현 정세를 결코 읽어낼 수 없다. 계급적·변혁적 시야로 현실을 치열하게 다시 바라봄으로써, 극우세력의 부상과 준동이 세계와 한국을 뒤흔드는 이 격동하는 세상을 제대로 읽어내고 올바른 실천과제를 도출해 내자.

 

2) ‘민주당과 연합’은 극우세력 분쇄 방안이 될 수 없다

 

극우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노동자·민중은 민주당과 연합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극우세력에 반대하는 세력을 최대한 모아야 그 힘도 강해질 거라는 주장이 그럴싸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과 연합’은 노동자·민중의 극우세력 분쇄 방안이 될 수 없다. 극우세력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광범한 노동자·민중이 능동적 투쟁주체로 일어서야 하는데, ‘민주당과 연합’은 그것을 정면으로 가로막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명확히 자본가계급을 대변하는 정당, 즉 자본가정당 가운데 하나다. 최근 이재명이 민주당을 가리켜 ‘(진보가 아니라) 중도보수’라고 했는데, 이는 정확한 자기진단이다. 과거 김대중은 여러 차례 민주당을 ‘중도우파’라고 스스로 규정했다. 2015년 문재인도 ‘보수정당’, 2018년 이해찬도 ‘중도우파’라고 민주당을 규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당이 배출한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은 하나같이 자본가계급을 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로 기능했다.

 

민주당은 자본가정당답게 언제나 사회 전체의 대의보다 자신들의 권력 장악과 유지에 최우선 가치를 둔다. 12·3 이후에도 극우세력의 철저한 분쇄보다 자신들의 재집권을 우선시했다. 민주당은 윤석열 탄핵소추 가결 직후 내란 세력들에게 국정안정협의체를 제안했다. 탄핵심판이 열리자마자 탄핵소추 근거에서 내란죄를 철회했다. 윤석열 체포 직후 극우세력의 폭력성이 거침없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재명은 “이제 민생과 경제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리고선 반도체특별법 주52시간 특례를 통해 근로기준법을 무력화하려 했다. 트럼프가 미국의 가자지구 소유를 발표할 때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고, 이후 이스라엘 대사와 접견했다. 이 모든 것은 대선을 앞당기고 중도층의 표심을 잡으려는 계산과 연결돼 있다. 그런 민주당의 행태는 윤석열과 국민의힘에게 반격의 명분을 제공했고, 극우세력에 맞선 투쟁을 교란시켰다.

 

만일 민주당 정권이 등장한다면, ‘민주당과 연합’은 극우세력과의 결전에서 패배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본가계급에게 봉사할 민주당 정권은 다시금 대중 속에 거대한 실망과 환멸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노동자·민중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당과 연합이 아니라 민주당 정권에 맞선 힘찬 투쟁이다. 만일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독자적인 전망을 제시해 내지 못한다면 대중의 실망과 환멸은 고스란히 극우세력의 성장에 거대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이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윤석열 정권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문재인 정권이었다. 문재인 정권은 2016~17년 촛불항쟁으로 표출된 노동자·민중의 열망과는 반대의 길을 갔다. 또 하나의 자본가정권답게 최저임금을 찍어 눌렀고, 집값 폭등을 방조했으며, 특권층의 부패를 감쌌다. 윤석열 정권의 광포한 건설노조 탄압을 먼저 시작한 것도 문재인 정권이었다. 윤석열 정권은 오로지 문재인 정권에 대한 대중의 광범한 실망과 환멸을 토대로 집권할 수 있었다.

 

그보다 앞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등장시킨 것 또한 김대중·노무현 정권이었다. 1998년부터 10년 동안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펼친 신자유주의 공세는 대량 정리해고의 충격과 함께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을 불러왔다. 권력의 단맛을 본 민주당은 본격적으로 반동적인 주류 지배세력의 일부가 되었다. 민주당 정권 10년에 대한 대중의 광범한 실망과 환멸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연속 집권을 가능케 했다.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2021년 1월 미국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극우 시위대가 의사당을 습격했을 때 세계는 경악했다. 트럼프가 폭력과 파괴를 부추겨 미국 민주주의를 훼손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트럼프가 다시 집권했다. 민주당 정권이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배신하면서 극우세력에게 다시 길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노동자·민중의 투쟁에 기반하는 진실한 노동자정당의 부재 속에서 발생한 거대한 비극이다.

 

민주당은 노동자·민중의 삶을 바꿀 수 없다. 지금 노동자·민중에게는 가난·실업·전쟁에 맞서는 투쟁, 공공성 확대와 복지를 위한 투쟁, 여성·성소수자·장애인·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 비정규직 철폐와 노동시간 단축 등 청년들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한 투쟁이 절실하다. 하지만 그런 투쟁들이 전개될 때마다 민주당은 다시 한 번 자본가정당답게 반동적인 태도를 되풀이할 것이다.

 

노동자·민중에게는 ‘민주당과 연합’ 말고 다른 길이 있다. 극우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압도적 다수의 힘이 있다. 이미 노동자·민중은 그런 역량을 분명히 보여줬다. 수백만이 윤석열 탄핵과 구속을 위해 거리로 나왔고 남태령, 한강진에서 중요한 투쟁을 해냈다. 극우세력을 제압할 힘은 의회 다수 의석이 아니라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능동적 투쟁에서 나온다.

 

노동자계급은 엄청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작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만 명이 결집해 있는 민주노조는 이데올로기전의 중요한 거점이다. 조직된 노동자들은 수많은 현장에서 선전할 수 있고, 선동할 수 있고, 현장 토론을 조직할 수 있다. 110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살아 있는 스피커가 된다면 극우 유튜버들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저들보다 더 과감하게 행동하고, 총파업을 비롯한 집단적 힘을 발휘하면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면, 민주노총 조합원과 미조직 노동자, 2030 청년들의 에너지가 결합한다면 저들의 물리력을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 노동자계급은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나 물리적 측면에서나 압도적인 힘으로 극우세력을 격퇴할 수 있다.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것만이 극우세력을 분쇄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극우세력 분쇄를 위한 투쟁 속에서 철저하게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견지해 나가자. 민주당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민주당에 맞서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제기해 나가자. 민주당과 독립적인 노동자투쟁을 확대하고, 그러한 투쟁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진전시켜 나가자.

 

3) 노동자계급의 힘으로 극우세력을 분쇄하고 사회대변혁으로 전진해야 한다

 

12·3 이후 지금까지 투쟁에서 민주노총의 역할은 모순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상당한 역할을 해왔지만, 자신의 잠재력에 비해서는 매우 제한된 수준에 그쳤다.

 

민주노총은 12월 4일 새벽 3시를 기해 ‘윤석열 퇴진시까지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5일, 6일, 11일 세 번에 걸쳐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를 중심으로 5만에서 10만 정도가 참여하는 제한된 총파업에 그쳤다.

 

민주노총은 주말 집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았고 초기에는 상당수 조합원들이 주말 집회에 참여했다. 민주노총이 주말 집회에서 경찰 바리케이드를 밀어내고 길을 열어낸 모습은 광범한 미조직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농민투쟁단이 남태령을 넘는 순간에도 길을 여는 역할을 했다. 1월 3~5일 한강진의 내란수괴 윤석열 체포·구속 투쟁에서도 민주노총 확대 간부와 조합원이 광장 대중과 함께 투쟁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끌어내지 못했다. 민주노총이 위력적인 총파업을 조직해 냈다면, 폭발적인 광장투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을 텐데, 민주노총은 그런 역할을 회피했다. 민주노총은 광장 청년대오의 환호에 자족할 뿐 총파업을 조직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광장에 참여하는 조합원의 대오도 크게 줄어들었다.

 

반면 12·3 이후 광장에 쏟아져 나온 청년 미조직 노동자들은 계엄과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사의 주인으로 발돋움해 왔다.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와 섬뜩한 포고령은 대중을 심각한 충격과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대중은 잠시 위축됐던 감정과 불안을 금세 떨쳐냈다. 거듭되는 집회와 거리 투쟁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며 심리적 불안과 공포를 저항으로 승화했다. 계엄과 내란을 처음 경험한 청년 대중은 수천수만 노동자의 참여를 보며 심리적 안정감을 느꼈고 사회적 소수자와의 연대를 넓혀가며 자신감을 쌓아갔다. 저항의 날들이 더해질수록 지금껏 의심하지 않았던 자유민주주의 이념, 기존 보수정치가 쥐락펴락해 온 국가에 대한 의문을 싹 틔우며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에 대한 본능적 갈망을 분출했다.

 

광장의 청년 대중 다수는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와 실업자들이다. 이들은 한국 자본주의 체제에서 처음으로 부모 세대보다 가난해진 세대다. 온갖 형태의 비정규직과 실업의 굴레에 묶여 미래의 안정적 삶을 꿈꾸지 못하고 절망했다. 그러나 계엄과 내란 정세에서 역사의 무대로 뛰어나와 지금까지의 고통과 절망을 딛고 새로운 삶과 희망을 찾는 용기를 내고 있다.

 

광장의 청년 대중은 조직노동자에 대한 과거의 불신을 뒤로 하고 민주노총 조직노동자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구사대와 용역깡패를 동원한 한화오션의 악랄한 노동탄압에 맞선 거통고 조선하청노동자들의 투쟁에, 1년 넘게 먹튀자본 닛토덴코에 맞서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불탄 공장을 지키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들의 투쟁에, 어처구니없는 대법원 패소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에 맞서 장기투쟁을 벌이는 세종호텔 노동자들의 투쟁에, A학교에서 벌어진 성폭력 축소은폐에 맞서다 학교에서 쫓겨나고 해임당한 지혜복 교사의 투쟁에 ‘말벌 동지들’의 지지와 연대가 쇄도하고 있다.

 

극우세력의 부상과 준동을 멈춰 세우고 분쇄하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위력적인 총파업이고 그에 기초한 폭발적인 광장투쟁이다. 그렇다면 어떤 총파업을 말하는 것인가?

 

1934년 2월 프랑스 노동자대중이 거리에서 파시스트들을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해 냈을 때,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80만의 조합원을 갖고 450만이 참여하는 총파업을 조직해 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웃나라 독일처럼 파시즘이 도래할 수 있겠다는 광범한 노동자대중의 위기의식이 그런 기적 같은 일을 가능하게 했다.

 

지금 한국에서도 수많은 노동자대중이 극우세력의 부상과 준동을 바라보며 말로 다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윤석열 탄핵심판 결과가 어찌 나오든 극우세력의 준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범한 노동자대중의 스트레스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바로 거기에 이제껏 한국 사회에 존재해 본 적이 없는 거대한 총파업을 조직할 수 있는 에너지가 축적되고 있다.

 

이 총파업은 민주노총의 조직노동자가 선두에 서는 총파업이되, 다양한 사회세력이 함께 하는 ‘사회적 총파업’이다. 광범한 미조직노동자가 동참하는 총파업, 억압·차별에 맞선 여성과 소수자가 동참하는 총파업, 학생들도 동맹휴업으로 동참하는 총파업이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대중의 폭발적인 광장투쟁으로 극우세력을 물리적으로 압도하는 총파업이다. 단 하루의 파업만으로도 한국 사회를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을 그런 총파업이다.

 

이 총파업의 일차적 요구는 극우세력 분쇄다. 그 세부 내용은 총파업 전개 시점에 맞춰 구체화되겠지만, 윤석열 파면·퇴진과 내란죄 단죄, 국민의힘 해체, 내란선동세력 처벌 등은 기본이 될 것이다.

 

이 총파업의 요구는 또한 노동자·민중의 다양한 열망을 담아냄으로써 사회대변혁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내야 한다. 노동자·민중의 삶은 비정규직 초과착취와 노동기본권 부정으로, 여성·성소수자·장애인·이주민 등에 대한 억압·차별로, 기후위기 가속화와 환경 파괴로, 제국주의 진영 간 패권대결과 전쟁위기로 심각하게 유린당해 왔다. 오죽하면 한국 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과 가장 낮은 출산율을 갖고 있겠는가! 이제 이 모든 것을 갈아엎어야 한다. 또한 계엄과 내란 사태를 통해 확인한 비민주적 제도들을 바로잡기 위한 민주적 요구들을 포함해야 한다. 사회대변혁으로 나아가기 위한 요구들은 다음의 것들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 비정규직 제도 철폐!

○ 정리해고제 철폐!

○ 모든 해고 금지!

○ 손배가압류 제도 철폐!

○ 모든 노동자에게 실질적인 노동3권 보장!

○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 최저임금 대폭 인상!

○ 육아·교육·주거·돌봄·노후를 국가책임으로 보장!

○ 차별금지법 제정!

○ 장애인 이동권 보장!

○ 전쟁위기 조장하는 한미일·북중러 동맹 해체!

○ 모든 전쟁연습·군사도발 중단!

○ 계엄제도 폐지!

○ 국민투표에 의한 대통령 파면제 도입!

○ 국회의원 상시 주민소환제 도입!

○ 군대·경찰에게 불법 명령에 대한 거부의무 부여!

○ 검찰·경찰·사법부 지휘부에 대한 주민직선소환제 도입!

 

5. 예상되는 세 가지 경로

 

지금 노동자계급 앞에는 세 가지 예상 가능한 경로가 놓여 있다. 첫째, 윤석열 탄핵이 기각되는 경우. 둘째, 윤석열 파면 후 차기 정권에서 극우세력이 대대적으로 성장하는 경우. 셋째, 윤석열 파면 후 사회대변혁을 향한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전진이 이뤄지는 경우. 하나씩 살펴보자.

 

1) 윤석열 탄핵 기각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 윤석열 탄핵이 기각될 가능성은,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0%’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에 12·3 친위쿠데타 자체가 합리적인 사고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후 우리가 목격해 온 극우세력의 준동 또한 마찬가지다. 비록 그 가능성이 매우 낮다 해도, 탄핵 기각의 경우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탄핵 기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파산 선언이 될 것이다. 광범한 노동자·민중 속에서 국가에 대한 믿음 자체가 붕괴할 것이다. 그동안 극우세력의 준동을 힘겹게 참아왔던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대폭발 지경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양상으로 표출될지는 누구도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비록 민주노총 차원에서는 무산됐지만) 금속노조가 3월 총파업에 대해 대의원대회에서 논의하고 있다. 중집이 3월 경고파업 안을 제출했고, 현장발의로 3월 14일 안이 제출됐다. 금속노조가 헌재 선고를 앞두고 경고파업을 조직하면서 투쟁의 근육을 다져둔다면, 그래서 만일 탄핵 기각시 즉각 단호한 총파업에 나선다면,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분노는 훨씬 쉽게 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우여곡절을 겪을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노동자계급의 위력적인 총파업과 폭발적인 광장투쟁을 조직해 낼 수 있느냐가 결국 관건이 될 것이다. 광장 청년 대중의 능동성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금속노조의 3월 총파업을 현장 곳곳을 파고들며 최대한 열성적으로 조직하는 것은 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가장 확실한 방책이 될 것이다.

 

2) 윤석열 파면 후 차기 정권에서 극우세력의 대대적 성장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 윤석열 파면이 확정되고 대선이 열리면 민주당 정권의 등장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민주당 정권 아래서 노동자·민중의 삶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머지않아 대중의 거대한 실망과 환멸이 다시 조성될 것이다. 극우세력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전열을 정비하고 더욱 강력하게 성장할 수 있다.

 

특히 세계경제와 한국경제가 점점 더 깊은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점은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 수 있다. 이제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양상처럼 극우세력이 노동자·민중의 빈곤화로부터 강력한 사회적 기반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심화와 함께 자본가계급이 극우세력을 노골적으로 지원하고 나설 수도 있다. 강력하게 성장한 극우세력이 재집권하게 된다면 그 자체로 노동자·민중에 대한 극심한 사회경제적 공격을 의미하게 되겠지만, 다시 한 번 군사파시즘 부활을 획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지금 극우세력의 행보가 객관적으로 향하고 있는 승부처는 이번 대선이 아니라 다음 대선이라고 할 수 있다. 당사자들이 그것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느냐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는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 윤석열이 파면될 경우 극우세력은 헌재 결정에 불복하면서 차기 정권 내내 준동을 이어갈 것이다. 민주당 정권은 결국 극우세력이 대대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비옥한 토양을 제공할 것이고, 극우세력은 다음 대선에서 크게 승리할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객관적 가능성을 가진 시나리오다. 노동자·민중이 ‘민주당과 연합’하는 것은 이 시나리오를 완성시켜 주는 결정적 패착이 될 것이다.

 

3) 사회대변혁을 향한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전진

 

그런데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다고 해서 상황이 무조건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독립성과 투쟁력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느냐에 따라 이후 사태 전개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환멸이 윤석열 정권의 등장으로 귀결된 것은 노동자운동·노동자정치의 위축과 민주당에의 종속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일 문재인 정권 아래서 노동자계급이 독립성과 투쟁력을 단호하게 발전시켜 나갔다면 문재인 정권에 대한 실망과 환멸은 극우세력이 아니라 노동자운동과 노동자정치가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노동자계급은 (예상되는) 민주당 정권에 맞서 독립성과 투쟁력을 단호하게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민주당 정권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환멸을 노동자운동과 노동자정치가 도약하는 발판으로 획득해 나가야 한다. (‘민주당과 연합’이 아니라) 민주당 정권에 맞서 단호하게 투쟁하는 것이 극우세력의 성장을 차단할 수 있는 길이다.

 

노동자계급은 위력적인 사회적 총파업을 조직함으로써 민주당 정권에 맞설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극우세력을 결정적으로 분쇄하면서 사회대변혁의 길을 열어야 한다. 이를 위한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지금부터 건설해 나가자. 민주노총은 이미 7월 총파업을 결의했다. 이 총파업이 첫 번째 위력적인 사회적 총파업이 될 수 있도록 조합원들과 광장의 청년 대중 속에서 그 동력을 힘차게 조직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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