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리자(Riesa) 항구에서 홍수에 침수된 컨테이너. 사진: 로이터
4월, 유럽연합 의회 표결을 앞둔 공급망감시법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 즉 유럽연합공급망감시법이 3월 15일 유럽연합 이사회(각료 이사회)에서 통과되었다. 유럽연합 이사회 통과에 따라, 법안은 4월 유럽연합 의회 표결을 앞두고 있다1).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은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과 함께 2050년까지 유럽 기후중립을 달성한다는 EU그린딜 계획을 구성하는 중요 법안인데, 법안은 유럽연합 대기업의 공급망 내 강제노동, 아동노동, 삼림벌채 등 노동권 탄압과 환경오염 행위를 규제한다. 기업은 기후변화 대응 의무 등 법안 관련 내용을 매년 공시해야 한다. EU 각국은 기업의 규정 준수 여부를 확인할 감독기관을 지정하며, 감독기관은 조사를 통해 규정 미준수 기업에 순매출액의 5%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1) 유럽연합 입법절차는 △유럽연합 시민을 대표하는 유럽 의회 △유럽연합 정부를 대표하는 유럽연합 이사회 △유럽연합의 종합적 이익을 대표하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세 주요 기관의 합의 과정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후위기 대응과 노동권 확대를 위한 대기업 규제에 있어 진일보로 보인다. 그러나 그 실제 과정은 자본의 승리를 드러낸다. 법안 주요 내용은 이번 유럽연합 이사회 부의와 통과 과정에서 심각하게 후퇴했는데, 이는 세계 각국에서 확대되는 그린래시와 기후운동 퇴조를 반영한다. 그간 ‘ESG 경영’, ‘그린뉴딜’ 등 녹색 분칠에 바쁘던 국가와 자본은 이제 그 분칠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기후-환경정책에 반격하고 있다.
자본의 승리, 공급망감시법 축소 조정
경과를 보자. 작년 12월 유럽연합 이사회와 유럽연합 의회의 합의 후, 세부 조정을 거쳐 올해 1월 30일 공개된 공급망감시법 최종 초안은 유럽연합 이사회 표결을 어렵지 않게 통과할 것으로 보였다. 이미 12월 합의 과정에서 금융부문이 당면 규제에서 제외된 터였다.
그러나 독일이 2월 유럽연합 이사회 투표에서 법안에 기권하겠다고 밝힌 후, 여러 EU 국가가 줄줄이 법안을 반대하고 나섰다. 독일 연립정부(사민·녹색·자민당 연립정부, 신호등 연정) 구성원인 자유민주당(FDP)이 자본가 단체들과 함께 ‘과도한 관료주의로 기업에 부담이 될 것’이라며 독일 입장을 법안 반대로 돌려놓았고, 프랑스는 법안이 적용될 기업의 고용 규모를 초안의 10배로 늘리자고 주장했다. 이탈리아 극우정부 역시, 별개 법안인 플라스틱 포장재 규제법을 무력화하고자 하는 실제 의도로 공급망감시법에 반대하며 법안 사이의 거래를 시도했다.
이렇듯 독일·이탈리아·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은 자본의 이윤 축소 우려를 앞세우며 법안에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고, 결국 초안은 부결되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2월 28일 법안 표결에서 독일·이탈리아·핀란드·오스트리아·불가리아·체코·에스토니아·헝가리·리투아니아·룩셈부르크·몰타·슬로바키아·키프로스 등 13개국이 기권했고, 스웨덴은 법안에 반대했다.2)
2) 유럽연합 이사회 의결을 위해서는 △회원국 55%(15개국) 찬성에 더해 △찬성 회원국들의 인구가 유럽연합 인구의 65% 이상이어야 한다. 따라서 인구가 많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 반대할 경우 법안 통과는 불가능하다.
2월 유럽연합 이사회 부결 후, 법안은 대폭적 축소 조정을 거쳐 3월 15일 27개 EU국 중 17개국 지지로 이사회를 통과했다. 법안 무력화의 핵심은 ‘대기업’ 정의를 훨씬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초안이 명시한 고용인원 500명 이상, 순매출액 1억 5천만 유로 이상 기업에 공급망감시법을 적용한다는 기준은, 고용인원이 1천명 이상(초안의 2배)인 동시에 순매출액이 4억 5천만 유로 이상인 기업(초안의 3배)에 적용하는 것으로 대폭 후퇴했다. 결과적으로 법안이 규제하는 기업 수는 기존의 1/3로 줄어 전체 유럽기업의 0.05%에 불과하다.3) 다국적기업연구센터(SOMO) 추산에 따르면, 적용 대상 기업은 5,421개에 그치며 이는 2023년 12월 유럽연합 의회·집행위원회·이사회 잠정합의 기준에 따른 16,389개에서 67%나 감소한 수치다.
3) 여기서 알 수 있는 지점은 2023년 12월 합의안을 기준으로 해도 규제대상 기업은 전체 유럽 기업의 0.15%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법안이 적용되는 기업 규모 기준 다음으로 큰 반대에 부딪힌 내용은 법안 미준수 기업에 대한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의 권한이었는데, 애초 법안에 포함되어 있던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가 법안 미준수 기업을 고소할 수 있다’는 민사책임 조항도 삭제되었다.
공급망 전반에 대한 법안의 강제력도 대폭 축소되었다. 3월 15일 통과된 법안은 “회사를 위해 또는 회사를 대신하여 활동을 수행하는” 사업 파트너에게만 적용된다. 공급망 하단부터 상단까지 복잡다단한 생산의 그물망을 강제하지 못하는 이름뿐인 ‘공급망 감시’ 법안인 것이다.
또한, 고위험산업 규제조항, 즉 ‘인권 또는 환경 분쟁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은 산업’(임업, 석유산업, 채굴업 등)은 고용인원이나 매출액이 법 적용 기준에 못미쳐도 규제 대상으로 놓았던 기존 규정도 삭제되었다. 제품 폐기, 해체, 재활용까지 포괄하던 내용(다운스트림 규제) 역시 삭제되었다.
규제력이 즉각 발휘되는 것도 아니다. △고용인원 5천 명, 매출액 15억 유로 기업은 3년 후부터 적용되며, △고용인원 3천 명, 매출액 9억 유로 기업은 4년 후, △고용인원 1천 명, 매출액 4억 5천만 유로 기업은 5년 후에야 규제를 적용받는다. 현 상황은 세계 기후운동의 퇴조 속에 그린워싱 흉내조차 거추장스러워진 자본과 국가의 노골적 행보를 드러낸다.
유럽 열강의 행보가 드러내는 것 - 국가와 자본은 기후파국을 앞당기고 있을 뿐이다
공급망감시법을 무력화한 유럽 열강, 독일은 그 중에서도 선두에 있다. 독일은 2월 28일 표결에 이어 3월 15일 표결에서도 기권했다. 이렇듯 독일의 태도는 일관적인데, 이는 공급망감시법에 그치지 않는다. 공급망감시법 표결 이틀 전인 3월 13일, 독일은 ‘강제노동 규제방침(Forced Labor Regulation, FLR)’ 표결에서도 헝가리, 라트비아와 함께 기권했다(법안은 27개국 중 24개국 지지로 유럽연합이사회에서 통과되었으며, 공급망감시법과 마찬가지로 4월 유럽연합 의회 표결을 앞두고 있다).
공급망감시법 무력화에 앞장선 독일의 입장은, 독일 공급망이 중국과 긴밀하게 얽혀있는 상황에서 비롯된다. 독일 산업의 중국·러시아 의존성은 다른 유럽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높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및 미중 무역분쟁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유럽 국가가 독일이기도 하다. 실제로 독일 화학기업 BASF, 자동차기업 폭스바겐 등은 신장위구르 지역에 공장을 두고 있으며, 이는 ‘서방’이 중국의 강제노동 수용소라고 극렬 비판하는 지역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애초 공급망감시법 자체에 서방의 중국 견제 의도가 담긴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 견제 의도가 얼마나 위선적인지도 분명하다. 중국은 EU공급망감시법에 반대함은 물론, 유럽연합의 ‘공급망 실사’에 맞서 반간첩법을 대폭 강화하는 등, 중국 내에서 수집한 데이터의 유출에 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상황을 종합하면, 법안 무력화에 나선 독일을 포함한 유럽 주요국의 입장은 중국 견제로 심화될 공급망의 균열이 결과적으로 자국 자본의 불이익으로 돌아오게 될 상황에 기인한다.4) 이렇듯 공급망감시법 축소 조정 과정은, 법이 내세우는 ‘보다 환경친화적인 공급망’, ‘노동권을 확대하는 공급망’이라는 명분의 허울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제 국가와 자본은 파국을 피하려는 시늉조차 내지 않는다. 자본축적이라는 대전제 앞에, 자본과 국가는 ‘ESG경영’이라는 허울조차 벗어던지고 있다. 4월 유럽연합 의회 표결 후 법안이 실제 적용될 3년 뒤까지의 시간 동안, 유럽 자본은 교묘한 기업분할과 다단계 하도급 확대를 비롯해 규제 회피를 위한 각급 조치를 취할 것임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4) 실제로 법안 반대 최선두에 선 독일과 중국의 산업 연관은 여전히 긴밀함은 물론 더욱 강화되는 양상까지 있는데, 2023년 중국으로 향하는 해외직접투자(FDI)가 급감하는 상황 속에서도 독일은 대중국 직접투자를 사상 최대치로 늘리기도 했다.
공급망감시법의 현 상황은 자본주의 체제가 기후파국을 막을 수 없음을, 특히 제국주의 열강투쟁 격화가 기후파국을 앞당기고 있음을 드러낸다. 지금, 기간산업 국유화와 노동자 민중의 생산통제는 생존의 문제다. 이윤을 위한 생산체제를 끝내기 위해, 기후정의운동과 노동운동의 연대를 지역과 현장으로 확대하자. 산업과 생산은 노동자 민중에 의해 감시되고 통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