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34주년 대구경북 노동절 집회
가수 임재범이 부른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샤카 동지의 애창곡이다.
노동조합 이주활동가들이 지리산 어느 쪽으로 활동가 수련회를 갔을 때 통기타를 들고 부른 첫 노래였는데, 이제 서른을 넘긴 노동자가 어떤 인생의 애환이 있었기에 저런 곡조, 저런 애절함이 묻어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그는 대구의 한 섬유공장에서 주야 2교대 근무를 하고 주말이면 하루 다섯 번 기도를 드린다. 노동조합 활동을 위해서는 가끔 맥주 한 잔 정도는 하고 한국어가 서툰 동료들을 위해 일요일 통역 자원활동도 열심이다. 팔이 잘린 친구가 산재 신청을 위해 통역을 요청하면 야간이 끝나고 피곤할 텐데도 병원으로 달려가길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샤카 동지를 보고 있자면 왜 미등록체류자가 되었을까, 어떻게 하면 비자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온갖 잡다한 생각이 드는 거다. 2023년 대구경북 이주노동자의 날 집회를 준비하며 샤카 동지와 친구들 몇이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의문이 풀렸다.
샤카 동지는 엄마와 누나 2명과 함께 살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지 못해 놀고 있었을 때 한국 드라마 ‘시티헌터’를 보며 코리안 드림을 꿈꾸었다. 1년을 일하며 한 푼도 쓰지 않고 월급을 모았고 그것을 밑천으로 한국어 공부를 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한국으로, 고용허가제를 통해 입국했다. 세계이주노동자의 날 무대에 선 그가 때론 웃으며 때론 진지하게 준비한 글을 읽어갔다.
“꿈같은 한국에 왔는데 매일 잔소리만 들었습니다. 일이 끝났는데도 빨리빨리 해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씨발놈아’라는 말이 청소하라는 말인 줄 알고 열심히 청소하기도 했습니다. 사장님이 ‘야 임마 야 임마’ 이렇게 불렀는데, 제가 ‘임마 아니에요’라고 했던 기억도 납니다.
제 친구는 선장이 여권, 외국인등록증, 통장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월급을 2~3개월에 한 번만 줬습니다. 한번 배가 나가면 3개월을 배에서만 일했는데 선장님이 핸드폰을 압수해 주지 않았습니다. 선장은 기분이 나쁘면 때리고, 한국어를 모른다고 때렸습니다. 선장이 매일 때렸지만, 핸드폰이 없어서 증거를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3개월 뒤에 배에서 내리면 상처가 아물었습니다. 노동부를 찾아가서 회사를 바꾸고 싶다고 했지만 안 된다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여권만 가지고 도망쳤습니다. 사람들이 불법이라고 부르지만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는 고용허가제 계약기간 3년을 채웠지만 사장님이 허락해주지 않아서 더 이상 한국에 체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면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고 3년 동안 모아둔 돈도 별로 안 됐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미등록체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한국은 선진국이라고 하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을 때리고, 욕하고, 힘들게 합니까. 한국이 만든 고용허가제는 2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왜 이런 제도가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까.
이렇게 잘못된 고용허가제를 그냥 두면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이 계속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불법을 만드는 건 우리가 아닌데 왜 우리를 나쁜 범죄자처럼 이야기합니까. 이주노동자들 복지가 너무 낮은데 왜 한국정부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우리를 상품으로만 취급합니까. 이주노동자들이 만드는 것을 입고, 먹고, 타고 다니면서 이주노동자들은 왜 아직도 사람이 아닙니까.
2003년 명동성당에서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워주신 선배님들께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여러분은 비록 한국을 떠났지만, 여러분의 투쟁의 유산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가 계속 이어갈 것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알고 싸울 수 있도록 이 자리에 모인 우리가 먼저 더 열심히 싸울 것입니다. 동지 여러분, 함께 싸워주시겠습니까?”
각기 다른 이유로 한국이라는 나라에 이주해 온 이주민이 250만 명에 다다른다. 수백 년 동안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샤카 동지의 출신국 인도네시아는 공교롭게도 한국과 같은 1998년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여 공기업민영화, 노동유연화가 추진됐고 노동자민중의 삶은 더욱 황폐해졌다. 제국주의에 수탈당하고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에 남은 것까지도 빼앗긴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렵게 한국으로 왔으니 미등록체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사업장 이동과 선택의 자유가 없는 고용허가제 및 관련 노동법 조항에, 헌법재판소는 수 차례 합헌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법과 제도는 문제가 있으나 이주노동을 선택한 사람들이 당연히 감내해야 한다고 한다. 그 결과 2024년 대한민국 통계에 의하면 샤카 동지와 같은 미등록이주노동자는 42만 명에 이른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계절근로자제도(E-8), 특정활동(E-7) 등 법무부가 관할하는 비자들은 민간업체들의 개입으로 브로커 비용이 일천만 원을 넘어서고 있다. 5개월 계약으로 한국에 입국하는 계절노동자들은 소개비와 수수료 등 사용한 비용이 5개월 임금보다 훨씬 많다. 조선업 이주노동자들은 계약 당시 한국인 1인당 국민총소득(GNI)의 70~80%를 약속받고 입국하지만, 입국과 동시에 최저임금으로 다시 계약하라고 강요받는다.
그런데도 이들은 사업장을 그만둘 수도 없고 다른 회사로 옮길 수도 없다. 남은 것은 그냥 참거나 회사를 이탈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위 ‘불법체류자’가 되는 길임을 알지만, 살기 위해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행정서류상 체류기간을 넘긴 사람들은 국가에 의해 범죄자가 되었다.
사진: 노동자는 하나! 2024년 2월 5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선전전
윤석열 정부의 불법체류자 감축 5개년 계획에 맞춰 법무부 단속반들이 식당, 교회, 마트, 원룸촌으로 쳐들어 온다. 늦은 밤 자국민보호연대, 불법체류자추방위원회의 거짓 신고를 받고 경찰차가 공장 기숙사로 쳐들어 온다. 총자본에 의해 불법노조가 된 건설노조가 불법체류자를 단속하라며 정부에 요구한다.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자며 싸웠던 민주노조의 정신, 독재정권에 맞서 피 흘리며 지켜온 민주주의의 정신은 이주노동자 앞에서 멈췄다.
텔레그램이 온 소리가 들려 핸드폰 창을 열어보니 샤카 동지가 잔업을 빼고 인도네시아 조합원 병문안을 갔다. 사진 속 두 동지 모두 활짝 웃고 있다. 병원에 가봐야 한다는 생각을 못 한 나를 미안하게 만드는 동지, 이런 동지가 있어 이주운동의 미래가 밝다.
샤카 동지는 안다. 결국 샤카 동지와 같은 이들이 나서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것이 내가 맡은 임무이다. 샤카 동지와 같은 이들이, 나와 같은 이들이 더 많아지면 더할 나위 없을 거 같다.
기만적인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지 21년이다. 올 9월 말 전국의 이주노동자가 서울로 모인다. 연대자가 아니라 주체로 함께할, 샤카 동지와 함께 투쟁할, 정주 동지들도 많이 오시라.
Free job change! Stop crackd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