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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4[편집자 주] 2023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대량학살하고 있다. 히메나 베르가라의 이 글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계급적·국제주의적 전략을 제시한다. 본 번역은 글의 분량상 총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전편 읽기]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1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2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3 아랍 민족주의에서 정치적 이슬람으로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은 중동의 지정학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또한, 제국주의의 침투와 함께 1950년대 이후 계급투쟁과 정치적 위기로 분출한 사회적 긴장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 시기에 새로운 탈식민 정부들이 다양한 형태의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등장했다. 이라크의 파이잘 1세 국왕,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와 같은 정치 지도자들이 이를 대표했다. ‘아랍 민족주의 운동(Arab Nationalist Movement)’,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PLO)’,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Arab Socialist Ba'ath Party, 약칭 바트당)’과 같은 조직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1967년 6일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이들 지도세력은 주도적 지위에 있었다. 클라우디아 시나티는 “정치적 이슬람, 반제국주의,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슬람주의 부상은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거둔 승리에 그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 전쟁 이후, 1950년대에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쿠데타로 (역자: 제국주의에 기생하거나 협력하던) 토착 지배세력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탈식민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권들은, 돌이킬 수 없는 쇠퇴에 접어들었다. 1967년 6월 6일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에 대한 선제공격을 개시했다. 시온주의 군대는 단 6일 만에 세 국가를 패배시키고 예루살렘과 요르단 강 서안지구는 물론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까지 점령했다. 이 사건의 충격은 너무나 커서, 나세르가 침공 당일 밤 사임할 정도였다. (역자: 나세르 사임을 반대하는) 수백만 규모의 집회가 나세르의 권력을 유지시켰지만, 나세르주의적 민족주의는 이미 소진된 상태였다. 1970년 나세르 사망 이후, 그의 후계자인 안와르 사다트는 경제 개방과 광범위한 민영화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이 정책은 많은 사람들, 특히 나세르 치하의 호황기 동안 농촌에서 대도시로 대거 이주해 도시 외곽에 정착한 빈민층 대중에게 재앙적 결과를 초래했다. 6일 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이 패배하며 만들어진 세력균형에 따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결국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1)에 서명했다. 이집트는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을 인정한 최초의 아랍 국가가 되었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 대부분의 아랍 국가에서 구 민족주의 정부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이는 스탈린주의의 변종들과 다른 세속주의 그룹 등 좌익 민족주의 조직들을 일시적으로 강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통적 민족주의의 위기 앞에서, 점점 더 정치화된 이슬람주의 조직들이 아랍 청년층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시나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1978년 9월 17일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총리에 의해 조인된 협정으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중재 및 입회하에 체결되었다. 조인된 두 주요 협정 중 하나인 중동 평화협정에는 이스라엘의 독립적 주권과 영토 인정, 양국 간 적대관계 청산 및 관계 정상화, 시나이 반도에서의 이스라엘 완전 철수,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이 담겨 있었다. 해당 협정에 정작 당사자 기구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참여는 배제되었다. 1978년 12월, 1979년 12월 유엔총회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PLO의 참여가 배제된 것, 협정 내용이 팔레스타인인들의 귀환권, 자결권, 민족 독립, 주권에 부합하지 않음에 대한 비판을 담은 결의안을 의결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며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이집트는 1979년 아랍연맹에서 퇴출되었다. (역자주) ...기존 이슬람주의 조직과 신생 이슬람주의 조직들은... 이집트와 알제리 등의 국가에서 도시 빈민층을 이룬 실업 청년들과, 고등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확대되었지만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시기에 형성된 대학생과 지식인층 사이에서 강화되었다. 전통적 조직에 비해, 이 단체들은 종교적 담론과 행동 방식을 급진화했다... 2006년 1월 의회 선거에서 파타(Fatah)를 제치고 승리한 하마스의 대중적 부상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붕괴를, 그리고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제국주의 및 이스라엘 국가와 추진하던 화해 정책의 실패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신호다. 자브라 니콜라는 아랍 민족주의의 역할로부터 연속혁명의 전체적 동학에 대한 자신의 전망과 부합하는 교훈을 도출했다. 그는 “중동 혁명에 관한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948년 정착민 식민주의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고향에서 쫓아내면서 탄생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웃 아랍 국가로 흩어졌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난민 캠프에 수용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아랍 국가에서 받았던 사회적 처우를 드러낸다. 아랍 정권들은 이스라엘 국가에 반대한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되찾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나세르가 집권했을 때, 대중이 아니라 국가 기구들로 이스라엘에 대항하려는 그의 시도는 이집트인들과 다른 아랍 대중은 물론 팔레스타인인들도 무력하게 만들었다... 1967년 6월 아랍 군대의 패배는 심각한 타격이었으며 아랍 대중은 이에 동요했다.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 대중은 제국주의와 시온주의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투쟁에 있어 나세르주의 지도부에 희망을 걸었으나, 이 참패로 나세르주의 지도부가 제국주의에 맞서거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이끌 능력이 없음이 드러났다. 그 결과 그들 정권은 흔들렸고, 그들의 파산에 눈뜨기 시작한 대중에 의해 전복될 위험을 느꼈다. 1978년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나 악수하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왼쪽)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오른쪽), 중재자로 참여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가운데) 출처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60년대와 1970년대 중동 전역에서 일어난 이슬람주의 조직의 부흥과 정치화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서 뒤늦게 나타났으며, 그 결과 고유한 특징을 갖게 되었다. 달 피토(Dal Fitto)는 하마스의 등장을, 아랍 부르주아들의 잇따른 배신 이후 팔레스타인 해방을 향한 열망을 전달할 수 있었던 소부르주아 지도부의 출현으로 설명한다. 종교적 소부르주아(하마스, 이슬람 지하드)는 무슬림형제단의 영향을 받아 이집트에서 유입된 '혁명적 이슬람' 전략에 따라 움직였다. 이들은 1979년 레자 팔레비의 친제국주의 정권을 전복하고 호메이니의 비호 아래 신정체제를 구축한 이란 시아파 정치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호메이니는 혁명에 참여했던 공산주의자와 노동자 집단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주도했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이슬람공화국이 수립된 직후, 여성에 대한 히잡 착용 의무조치가 강제되자 같은 해 3월 8일 여성의날 벌어진 반정부 시위. 1979년 팔레비 왕정을 타도한 이란 혁명에 앞서, 이란 노동자계급은 1978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란 전역을 마비시키는 총파업을 펼쳤다. 총파업 조직 과정에서 노동자평의회 성격을 지닌 ‘쇼라’가 등장한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모두 민족해방운동의 일부를 이끌며 광범위한 사회적, 정치적 유권자 기반을 갖춘 조직이다. 시나티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파타(Fatah)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파벌의 통제 하에 범민족적 팔레스타인 투쟁을 주도해왔다. 이슬람주의와는 거리가 먼 운동의 급진적 부위는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과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 같은 마르크스주의 계열 단체를 통해 표현되었다. 세속주의 지도부가 주도해온 이 흐름은 1987년 제1차 인티파다 과정에서 셰이크 아메드 야신이 무슬림형제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팔레스타인 영토에 정착해 이슬람 저항 운동, 즉 하마스를 창립하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마스는 1987년 난민 캠프와 도시 지역의 가난한 청년들이 주도해 팔레스타인 영토 전역으로 확산된 제1차 인티파다 속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등장했다. 시나티는 “하마스의 특징은 팔레스타인 청년들의 증오심에 종교적 논리를 부여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진실한 사람들(true people)의 체현, 즉 ‘부패한’ 세속 엘리트에 맞서는 순수하고 신실한 ‘움마’2)의 체현으로 내세우고, 이로 하여금 신앙심 깊은 부르주아와의 동맹을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이후 몇 년간 하마스의 사회적 기반은 2001년 아리엘 샤론이 이스라엘 대통령에 당선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시작하며 군사 봉쇄가 강화될 때까지 가자지구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2) ‘أمة’ 이슬람 교단이나 공동체를 의미하며, 종교적 체계와 규율에 기초한 모든 무슬림의 초국가적 공동체를 가리킨다. (역자주) 1988년 1월 서안지구에서 촬영된 제1차 인티파다 당시 사진 (인티파다는 아랍어로 ‘봉기’를 의미) 2000년 10월 29일 제2차 인티파다 당시 가자지구에 진입한 이스라엘군 전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파리스 오데. 2000년 당시 파리스 오데는 만 14세였으며, 같은 해 11월 8일 가자 북부 카르니 교차로에서 이스라군을 상대로 저항을 이어가다 사망한다. (출처 : AP통신) 샤론이 이끄는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영토로 진격하였고, 야세르 아라파트를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시켰다. 아라파트의 후계자로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된 마흐무드 압바스는, 상황이 팔레스타인 대중에게 점점 더 견디기 어려워지는 가운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시온주의 점령군 및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했다. 하마스가 2006년 가자지구 선거에서 승리한 배경에는 이러한 맥락이 있다. 클라우디아 시나티는 2009년 자신의 저작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마스는 샤리아에 기반한 이슬람 국가 수립이라는 목표를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반미·반이스라엘 담론을 유지하면서 아랍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쇠퇴를 기회로 삼았다. 그러나 하마스의 일련의 선거 공약과 이스라엘 점령에 맞선 저항의 지속을 넘어, 역사적 팔레스타인 영토에 종교 국가(confessional state)를 세우겠다는 전략은 반동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민중의 정당한 민족적 열망에 대한 진보적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종교적 도덕을 절대적 가치이자 법으로 삼는 것은 기본적인 민주적 자유를 공격하며 사회적 억압의 도구를 유지하는 것뿐 아니라, 서구 사회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사회에도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있으며, 종교가 착취자의 지배 유지에 봉사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이스라엘 국가를 종교 국가(religious state)로 대체하려는 하마스의 전망은 아랍인, 무슬림, 유대인 대중의 해방을 가져올 수 없다. 이란식 종교 국가는 권위주의 국가일 뿐만 아니라 심각한 계급 모순으로 분열된 자본주의 국가이기도 하다. 소위 ‘팔레스타인 대의’3)에 종속되지 않는 노선은 무엇보다 일관된 반제국주의·반시온주의 노선을 요구한다. 동시에, ‘팔레스타인 대의’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진지로 삼으며 자국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을 착취하고, 많은 경우 청년, 여성, 성소수자, 좌파를 탄압하는 아랍 부르주아지와도 독립적인 노선을 요구한다. 3) 필자는 여기서 부르주아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왜곡된 ‘팔레스타인 대의’를 비판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편집자 주) 아랍 민족주의의 다양한 정당과 인물들은,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대중적 저항운동의 일부인 이슬람주의 조직들(하마스, 헤즈볼라 등)과 공통점을 지닌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계급 관계나 지역 내 제국주의의 구조적 이해관계를 건드리지 않고서, 시온주의의 압제를 종식시키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2022년 12월 14일 가자기구 도심에서 열린 하마스 창립 35주년 기념 집회 (출처 : Quds News Network) 아랍의 봄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의)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경찰이 자신의 물건을 압수하고 모욕을 주며 수레를 뒤집어엎자 이에 항의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수만 명의 튀니지인들이 부아지지를 기리며 수십 년간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부과되고 2008년 대불황으로 악화된 굶주림와 고통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 사이 부아지지는 병원에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다. 대중은 1987년부터 국가를 통치해온 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의 권위주의 정권에 분노를 쏟아냈다. 2011년 1월 4일 부아지지는 사망했고, 벤 알리는 불과 열흘 뒤인 1월 14일 대중의 힘으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튀니지 반란은 (아랍)지역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집트에서는 수백만 명이 호스니 무바라크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왔고, 리비아에서는 무아마르 카다피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시리아에서는 바하르 알 아사드에 맞서 반란이 일어났고, 알제리와 예멘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저마다의 특수성이 있었지만, 이들 정부는 공통적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주의적 아랍 민족주의가 절정에 달했을 때 부르주아 민족주의 강령을 내걸고 집권했다. 1970년대의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겪은 이후, 이들 정부는 신자유주의로 전환하여 점점 더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미국의 명령을 집행했다. 물론 아랍의 봄 기간에 대규모 반란을 겪은 국가들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민족적으로 이질적이며, 경제적 구조도 불균등하고 다채롭다. 그러나 많은 역사적 추세가 이들을 공통분모로 엮고 있으며, 아랍의 봄은 이 지역 전체에 걸친 '문제의 통일성'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2008년 경제위기는 식량 가격 상승으로 표현되었고, 이는 북아프리카 전역에 식량 위기를 초래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아랍의 봄에 앞서 도시 빈민층 주도로 빵 폭동4)이 벌어졌다. 무바라크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이 발발하기 전, 이집트 노동계급은 마할라알쿠브라(Mahalla el Kubra)와 같은 중요한 노동자 중심지에서 노동력의 재편 과정을 겪는 동시에 저임금에 맞선 투쟁을 경험했다. 4) 2008년 경제위기 여파로 곡물가격이 급등해 식량위기가 이집트 전역에 확산된다. 국영 빵집에서 판매하는 빵 크기와 양이 줄고, 정부는 1인당 빵 구매량에 상한선을 설정한다(인구 절반가량이 빈곤층인 이집트는 국영 빵집에서 빵을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국영 빵집 대기열을 두고 발생한 충돌이 유혈사태로 번지고, 국영 제빵업자들이 정부와 경찰에 건낼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밀가루를 암시장에 팔아치우는 지경에 이른다. 국영 제빵업자들이 파업하자 무라바크 정권은 긴급조치로 군대를 동원해 빵을 굽게 한다. 식량위기와 저임금이 촉발한 분노로, 이집트 노동자계급과 반체제운동 진영은 2008년 4월 6일 예정된 마할라알쿠브라 섬유 노동자 수천 명의 파업에 호응하며 총파업을 조직한다. 그러나 파업 당일 경찰이 도시를 원천봉쇄하고, 주요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하며 총파업은 무산된다. SNS 매개로 총파업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4월 6일 청년운동’은 2011년 이집트 혁명에서 주요 세력으로 부상한다. “아랍의 봄” 동안 계급투쟁 과정은 그 깊이, 대중의 참여 정도 등에서 서로 다른 수위로 전개된다. 요컨대, 각국의 계급투쟁 동학은 상이했다. (각국의 투쟁은) 잔혹한 독재 정권에 대한 반란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제국주의에 이용되었다. 제국주의 강대국들은 이 반란을 제국주의적 목적에 더 이상 복무하지 않는 협력자들을 제거하는 기회로 삼았으며, 리비아와 시리아에서는 카다피와 아사드에 대해 군사 개입까지 단행했다. 예를 들어 리비아에서 카다피 독재에 대한 반란은 민중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반란이 대중의 자기조직화에 기반한 독립적 지도부를 갖추지 못한 가운데, 제국주의 세력은 이를 이용해 나토를 통해 직접적으로 개입하며 피비린내나는 내전을 일으켰다. 카다피 처형 이후 리비아는 제국주의에 더 크게 종속되었다. 트로츠키주의 분파(Trotskyist Fraction)로서 우리는 2013년 “혁명적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운동을 위한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리비아와 같은 공개적인 내전(open civil war) 사례에서, 독재자들에 맞선 군사적 투쟁과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분리할 수 없으며, 내전의 과정을 어떤 계급이 주도하며 그들의 사회적 내용이 무엇인가에 관한 문제도 부차화될 수 없다. 정치적 문제를 군사적 문제에 종속시키는 관점은 나토 개입으로 이루어진 카다피 축출을 ‘대중운동의 승리'로 해석하게 만든다. 이는 미국과 다른 강대국이 반독재 시류에 편승해, 민주화운동이 '연속적(permanent)’ 동력을 얻는 것을 막음으로써 정권 교체 후 새로운 동맹을 확보하고자 하던 시기에 발생했다. 즉, 그들은 운동이 부르주아와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투쟁으로 전환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시리아의 경우, '반군'에 대한 정치적 유보 없이 그들 편에 서거나, 미국의 동맹국들이 유지하는 친제국주의적 반군 지도부로부터 독립적인 전략의 제시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급진화된 노동자계급이 주도한 더 심오하고 발전된 과정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무바라크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뒤를 이은 무슬림 형제단의 온건 이슬람주의 정부와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싸웠다. 노동자계급과 대중의 활동은 무슬림형제단 정부의 약점과 결부되며 체제 전체를 위협했다. 결국 부르주아 야당 주요 지도부의 지지를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 결과 미국의 이익에 전적으로 종속된 권위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혁명적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운동을 위한 선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튀니지의 엔나흐다당과 이집트의 자유정의당 등 집권한 모든 이슬람주의 조직은 종교적 광신, 후견주의적 포퓰리즘(clientelistic populism),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혼합하여 설교하는 부르주아 세력이다. 혁명가들은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부르주아지나 그 대표자와 동맹을 맺는 대신, 노동자계급적이고 반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이러한 정책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집트 운동에서 드러난 동학은 대중의 삶의 조건과 관련된 요구에 연속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는 민주적 혁명이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제국주의적 억압을 종식하지 않고는 이러한 요구가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혁명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첫 번째 구조적 민주주의 문제이며,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이를 끝까지 이끌 수 있다. ‘아랍의 봄’으로 알려진 계급투쟁의 순환은 중동 전역의 아랍 프롤레타리아를 하나로 묶는 경제적,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단결을 보여주었다. 이 단결은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유대뿐만 아니라 착취와 제국주의적 억압, 계급투쟁을 함께 겪어온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아랍의 봄은 동시에 아랍 부르주아, 그리고 아랍 부르주아와 ‘반제국주의’ 투쟁의 이름으로 협력하는 조직들이 거대한 장애물로 작용했음을 드러냈다. 이 아랍 국가들은 자국 노동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며, 외세 제국주의로부터 양보를 얻기 위한 기반으로 활용하고 있다. 출처 : AFP 통신2025-07-14 | 조회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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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3[편집자 주] 2023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대량학살하고 있다. 히메나 베르가라의 이 글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계급적·국제주의적 전략을 제시한다. 본 번역은 글의 분량상 총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전편 읽기]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1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2 자브라 니콜라와 팔레스타인의 연속혁명 팔레스타인 해방투쟁에 초기부터 참여한 팔레스타인 공산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 시오니즘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교하게 설명하면서, 이 지역 노동자계급이 해방을 위한 투쟁을 주도해야 한다는 점을 규명했다. 자브라 니콜라는 1912년 하이파에서 태어났다. 그는 20대 초반인 1930년대 초 팔레스타인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일찍부터 스탈린주의 정책을 비판했고, 좌익반대파1)의 기치 아래 당내에서 계속 활동하던 소규모 반대파 트로츠키주의 그룹에 가까워졌다. 이 그룹은 이후 1940년에 유대인 트로츠키주의자 토니 클리프의 요청으로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과 제4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1) (편집자 주) 좌익반대파는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소련 공산당 내에서 레온 트로츠키가 주도한 정치적 경향으로,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국제적 혁명 전략을 강조하며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의 당내 집권파(트로이카)에 맞서 싸웠다. 1927년 말, 주요 지도부가 당에서 축출되고 트로츠키는 추방당했다. 이후 1930년 국제좌익반대파(ILO)를 거쳐 1938년 제4인터내셔널 건설로 이어졌다. 니콜라는 제4인터내셔널 운동에 합류한 후, 아랍 혁명의 과제에 대한 전략적 대응을 수립하기 위해, ‘불균등 결합 발전 법칙’의 인식틀과 연속혁명 이론을 통해 팔레스타인 분쟁(palestinian conflict)을 이해하는 이론적 과제를 수행했다. 1944년 팔레스타인 영국 위임통치 당시 자브라 니콜라의 모습, 사진은 니콜라의 기자증 니콜라는 비록 미완성이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아랍 국가와 아시아적 생산양식’ 서문에서, 중동의 사회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동의 사회구조는 발전중인 내재적 역사 경향과 야만적 제국주의의 침투라는 거대한 외재적 힘이 충돌한 결과로, 팔레스타인의 경우 내재적 역사경향이 시온주의 식민화와 충돌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현재 중동 전역의 아랍 사회는 정치적, 사회적 위기를 겪고 있다. 이 위기는 종종 1967년의 패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이 위기는 이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하고 발전해 왔으며, 전쟁은 이 위기의 증상에 불과했다. 패배는 위기를 더 심화시키고, 선명하게 만들며, 드러냈을 뿐이다. 이 ‘위기’는 단지 경제 발전의 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발전국들의 경제위기가 아니다. 이 ‘위기’는 단지 제국주의에 지배 받는 국가들의 정치적 위기도 아니다. 즉, 제국주의에 의해 만들어져, 여전히 재정적·군사적으로 유지·지원받아 잠재적 저항국들에 대한 채찍 역할을 하도록 의도된 식민주의적·팽창주의적 이웃 국가의 영구적 위협에 직면한 국가들이 겪는 단순한 정치위기도 아니다. 이 ‘위기’는 주로 이들 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사회적 위기다. 이는 단순한 저발전의 경제위기도, 정치위기도 아닌, 전 세계적인 사회 위기이며, 이는 전통 아랍사회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특수성에서 비롯된 역사적 산물일 뿐만 아니라, 상당 부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오랜, 그리고 여전히 존재하는 관계의 산물이다. 이 위기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기반과, 그 위에 강제 부과된 외국 상부구조 사이 모순의 표현이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확보한 영토(짙은 청록색이 전쟁 이전, 연한 청록색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 쿠웨이트, 레바논을 상대로 6일만에 승리를 거두고, 이집트로부터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요르단으로부터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점령한다. 니콜라는 아랍 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의 극심한 지배 - 팔레스타인의 경우 제국주의 거점인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와 결합된 - 와 지역 부르주아지의 약점과 종속성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의 멍에로부터 팔레스타인과 아랍의 해방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나 '민족 혁명'의 틀 안에서 실현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토착 지배계급은 제국주의 세력에 전적으로 의존적이거나, 제국주의 세력 앞에서 극도로 약하기 때문이다. 니콜라에게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의 주체는 농민과 동맹을 맺은 아랍 노동자계급이었다. 그는 “중동 혁명에 관한 테제 Theses on the Revolution in the Middle Eas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랍의 혁명은 ‘민주주의 Democratic’ 민족혁명이나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연속혁명으로만 가능하다. 노동자계급이 빈농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적 조치를 시행하지 않는 한, 대중의 긴박한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민족적 민주주의 과제도, 급속한 산업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 니콜라의 저술 전반에서 우리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아랍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설명하려는 매우 분명한 시도를 볼 수 있으며, 제국주의가 강요한 국경을 넘어선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잠재적인 강력한 단결에 대한 깊은 이해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 상황의 특수성을 이해하려는 매우 진지한 시도도 엿볼 수 있다. 제국주의의 중동 침투가 불균등 결합발전에 따라 다양한 사회구조를 만들어낸 것처럼, 팔레스타인 사회와 그 사회경제적 구조도 이스라엘 국가의 정착민 식민주의에 의해 형성되었다. 달 피토(Dal Fitto) 는 니콜라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주장한다. 신생 시온주의 사회는 팔레스타인 아랍 사회의 다양한 계급과 충돌했다. 시온주의는 유럽에서 자본, 기술적 해법, 근대적 지식을 가져왔다. (대개 시온주의 기금의 지원을 받은) 유대 자본은 단순히 토지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봉건적 요소를 점차 대체했고, 시온주의 법규는 아랍인에게 토지를 재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재정적, 경제적 우위를 갖게 된 시온주의 자본주의 경제는 아랍 자본가계급의 형성을 차단했다. 아랍 농민들을 그들의 땅에서 추방하며 이들과 충돌한 시온주의는, 유대인 경제 부문에서 (강력한 팔레스타인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 또한 막았다. 아랍 부문의 자본주의 발전이 지연되고 방해받았기 때문에 농민들은(아랍 지식인들 또한) 영국 위임통치 행정부와 공공 서비스 분야를 제외하면 일자리를 찾기가 극도로 어려웠다. 시리아와 매우 유사한 조건에서 발전해 오던 아랍 팔레스타인의 사회경제적 구조는 시온주의 식민화로 완전히 왜곡되었다. 이러한 왜곡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좌) 1967년 6월 7일, 예루살렘 바위의 돔으로 진격하는 이스라엘군 (우) 제3차 중동전쟁의 결과로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점령과 탄압은 더욱 극심해졌다. 엔조 달 피토는 니콜라의 사상을 해석한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토지를 취득하고, 때로는 그 가치 이상으로 비싸게 토지를 구입하며, 연속적인 이민 물결로 유입된 유대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할 필요는 산업 부문에서 유대인에 대한 배타적 고용과, 아랍인에 대한 토지 판매 금지에 기반한 인종차별적 정책을 정당화했다. 이 정책은 농업 경제의 봉건적 구조를 약화시키는 한편, 일부 유대인 대기업들이 아랍인 노동자 고용을 금지함으로써 아랍인의 프롤레타리아화도 저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건제는 자본주의 경제 구조의 발전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강력한 아랍 정치 지도세력의 형성을 가로막았다. 니콜라가 보기에, 시온주의 식민화의 '왜곡'으로 인해, 명확히 구분된 계급사회로의 발전이 차단된 것은 팔레스타인 정치적 상부구조 구성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사회경제적 왜곡은 정치적 영역에도 반영되었다. 부르주아지, 프롤레타리아트, 농민은 정상적인 발전 경로를 밟지 못했기 때문에, 충분한 역량을 갖춘 정당과 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아랍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지도력은, 시온주의자들에게 토지를 팔아넘기며 계급으로서의 자신을 청산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 거래로 막대한 재정적 이익을 얻은 지주들의 손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니콜라가 보기에, 연속혁명의 논리를 적용할 때, 정착민 식민주의의 멍에 아래 있는 팔레스타인 사회구조의 취약성은 팔레스타인 노동자계급과 농민들이 민족해방 투쟁을 (아랍) 지역 차원으로 확대하여,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혁명 아래 아랍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을 필수적으로 만들었다. 만약 노동자와 피억압 대중이 자국 자본가계급의 족쇄를, 또한 많은 경우 독재 정부의 족쇄를 벗어 던진다면, 아랍 노동자계급의 '국경 없는' 연대야 말로 팔레스타인 대의에 물질적,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니콜라의 분석은 급진적 민주주의 투쟁(즉, 팔레스타인 해방 문제)의 열기 속에서 만들어진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반제국주의 동맹이라는 전략적 전망, 명백히 국제주의적인 전망을 대표한다. 무엇보다, 그는 이러한 단결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연결시키며 그 전망을 확고히 견지했다.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한 그의 구상은, 항상 제국주의에 묶인, 또한 제국주의에 따른 착취와 억압에 묶인 부르주아 민족국가의 한계를 넘어 민족해방 문제를 창의적으로 사고함으로써, 국가적 틀을 초월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민족주의적 구상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대치시켰다.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당시 아부 고쉬(Abu Ghosh)에 모여 집회를 연 팔레스타인 노동자들 "5월 1일, 노동자들과 투사들에게 영광을!", 팔레스타인 노동총연맹, 1969년 레바논에서 발행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아랍과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 동맹의 중요성에 대한 니콜라의 이해로 더욱 강화되었다. 이것은 그의 관점(연속혁명의 관점)을 팔레스타인 공산당으로부터 분리시켰다. 팔레스타인 공산당은 그 기원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좌파에 (당시에도 현재에도) 가해진 엄청난 민족주의적 압력에 굴복해왔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압력은 지역 내 반혁명 세력으로서 시온주의에 근거하며, 정도는 다르지만 아랍 민족주의나 근본주의 지도부로 구성된 반시온주의 저항세력으로부터도 기원한다. 이들은 노동자계급 해방의 전망도, 팔레스타인과 아랍 대중 해방의 전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니콜라에게 시온주의 국가의 사회경제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근본적이었다. 시온주의 국가는 다른 정착민 식민주의 국가와 달리 고도로 발달된 내부 계급 층위를 특징으로 하며, 명확히 구분된 프롤레타리아트, 중산층, 부르주아지가 존재한다. 여기에 더해 이스라엘은 국경 내에 거주하며 무권리 상태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아랍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아파르트헤이트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제국주의 국가의 무기로 무장한 군대와, 팔레스타인 주민을 폭력으로 위협하고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하기 위해 조직된 무장 민간인에 의해 강압적으로 존속하고 있다. 니콜라는 군사화된 이스라엘 사회의 파시즘적 특징과 시온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이해했다. 하지만 달 피토가 설명하듯,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트는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세력이다.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트는) 제국주의의 후견을 주변 아랍 세계와의 협력과 통합으로 대체한다면 얻을 것이 많다. 따라서 계급 분석은 아랍 팔레스타인 계급 구조의 단일한 내부 분화가 아니라, 중동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부문 간 이해관계의 연대에 주목해야 한다. 니콜라가 볼 때, 계급 분석은 잠재적으로 이스라엘을 내부로부터 파괴할 수 있는, 이스라엘 국가 내부의 긴장을 밝혀내야 했다. 그러나 니콜라는 제국주의와 시오니즘에 대한 투쟁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프롤레타리아 간의 잠재적 동맹을 조건으로 한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가 식민지 국가의 사회적 기반이며, 그 안에서 발전하는 모든 혁명적 정치는 팔레스타인 민족자결권을 위한 투쟁을, 또한 이스라엘 노동계급과 시온주의의 완전한 단절을 수반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더욱이, 니콜라에게 팔레스타인 해방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잠재적 동맹의 출현에 종속될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 해방은 먼저 사회주의적 관점으로 이스라엘 국가를 해체하기 위한 아랍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거쳐야 했다. 이러한 단결을 통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의) 동맹을 구축하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아랍) 지역 전체를 해방시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억압 민족이다. 이 지역에서 제국주의의 전초기지이자, 아랍 혁명에 대해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역할을 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시온주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리한 아랍 사회주의 혁명의 의미는 시온주의의 패배와 시온주의 국가의 전체 구조의 파괴, 중동에서 제국주의 지배와 영향력의 청산, 팔레스타인의 권리 회복을 의미한다. 1963년 니콜라는 1962년 이스라엘 공산당과 결별하며 등장한 반시온주의 단체인 마츠펜(Matzpen)에 합류했다. 니콜라는 이 단체의 정치적 이념을 형성하고,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한 강령적 접근에 연속적(permanent) 성격을 부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니콜라의 영향 아래, 이 젊은 조직은 시온주의 식민지화와 이스라엘 국가 수립 과정에서 소련의 책임에 대해 심도 있는 평가를 내렸다. 창립 초기에 마츠펜은 팔레스타인 연속혁명의 고유한 특성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 또한 강령에서는 식민국가의 구조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시온주의와 단절해야 할 필요성, 시온주의적 세뇌에 맞선 투쟁에 기초한 아랍과 유대인 프롤레타리아의 동맹을 강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혁명적 주체로써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세력 간의 필수적인 지역적 동맹을 강조했다. 이는 제국주의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사회주의 사회 건설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성격 규정이 니콜라나 마츠펜의 정치적 관점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2) 2) 우리는 니콜라의 이론적 관점과 마츠펜의 혁명적 조직으로서의 궤적 모두에 대해, 몇몇 지점에서 견해차가 있다. 마츠펜의 경우, 두 국가 해법에 명확히 반대하지 않는 등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강령에 있어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점에서 그들의 정치적 관점과 강령, 특히 니콜라의 관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전략적 나침반으로서 연속혁명 이론의 재확인이다. 유엔이 이스라엘 국가의 건국을 선언한 지 반세기가 넘었다. 그 이후 아랍 세계에서 여러 시기에 계급투쟁의 영웅적 사례들이 발생했고, 항상 팔레스타인 문제가 그 배경에 있었다.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을 배신한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과 새로운 근본주의 지도부의 등장을 통해, 니콜라의 사상과 연속혁명 이론은 부정적인 방식으로나마 입증되었다.2025-07-01 | 조회 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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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2[편집자 주] 2023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대량학살하고 있다. 히메나 베르가라의 이 글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계급적·국제주의적 전략을 제시한다. 본 번역은 글의 분량상 총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전편 읽기]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1 팔레스타인 공산주의 운동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급격히 확산시켰다. 수십만 명의 노동자와 급진적 청년들이 국제적 혁명 사상 아래 결집하였고, 수백 개의 새로운 공산당이 탄생했다. 1919년 볼셰비키당의 지도 하에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설립되었다. 1920년,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온 트로츠키가 지도자로 있던 제3인터내셔널은 전 세계 반식민 ·민족해방 투쟁을 극히 진지하고 성실하게 다루었다. 레닌은 1920년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에서 전 세계의 공산당이 “(식민지에서의) 혁명운동 전반을 물질적·정신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레닌은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이러한 적극적 지지는 “성직자, 기독교 선교사 및 이와 유사한 요소들의 반동적이고 중세적인 영향력에 맞선 투쟁”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해방운동을 현지 반동세력의 강화 시도와 결합하려는 범이슬람주의와 유사한 경향에 맞선 투쟁과 결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1920년 볼셰비키는 제2차 코민테른 대회의 일환으로 아제르바이잔에서 동방인민대회(Congress of the Peoples of the East)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는 이란, 이집트, 팔레스타인, 터키, 인도 및 기타 아시아, 중동 국가에서 2,850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대회의 회의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역사학자 피에르 브루에의 연구에 따르면 회의 결의안 중 하나는 “동방 민중이 자신의 해방을 위해 프랑스, 영국,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반식민 투쟁에 나설 붉은 군대(Red Army)와 함께 싸울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1) 1) Broué, Pierre. Histoire de l’Internationale communiste (1919-1943). Éditions Fayard. 1997 동방인민대회는 영국 제국주의가 시온주의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아랍인과 유대인을 분열시켰다고 선언했다. (영국은) 유대인 정착민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아랍인들을 몰아냈다. 그러고는 아랍인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바로 그 유대인 정착민들을 적대하도록 아랍인들을 선동해 모든 공동체 사이에 불화와 적대감, 증오를 심어 양측의 관계를 약화시켰다. 이는 (영국이) 이들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역사학자 랜 그린스타인(Ran Greenstein)의 설명에 따르면, 동방인민대회의 일반적 입장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고, 시온주의를 규탄하며, 제국주의와 협력하는 아랍 및 유대 세력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동방인민대회는 터키, 이란, 이집트, 인도,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공산당이 설립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1920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동방인민대회 팔레스타인공산당은 1924년 유대인 반시온주의 운동가들과 지식인들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공산당의 전략적 노선은 영국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반대하고 아랍과 유대인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투쟁하는 것으로, 이는 첫 세 차례의 코민테른 대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한편, 시온주의 점령에서 비롯되는 긴장이 아랍 대중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고,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유대인 노동자와 지식인에 대해 점점 더 적대적 태도를 드러내면서,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정책은 갈수록 당시 흐름과 충돌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공산당은 식민지와 팔레스타인 문제 전반에 대해 제3인터내셔널의 정치적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제국주의의 압제와 점증하는 시온주의 식민화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는 문제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새롭고도 중요한 이론적 문제를 제기했다. 신생 팔레스타인공산당의 노선은 미숙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1920년대 내내 전개된 좌익반대파와 스탈린 주도로 나날이 강해지는 소련 관료집단의 정치투쟁으로부터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창당 초기부터, 팔레스타인공산당은 급진화된 유대인 청년층 일부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팔레스타인 아랍 대중 사이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공산당은 1920년대 말부터 ‘아랍화’2) 정책이라는 굴곡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이 정책은 한창 스탈린주의화되어가던 코민테른에 의해 추진되었다. 2) (역자주) 팔레스타인공산당이 거쳐온 '아랍화'는 창당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전신은 1919년 설립된 '유대사회주의노동자당(Jewish Socialist Workers Party)'이었는데, 전 세계 유대인 좌파노동자연맹인 ‘시온의 노동자들’(Poalei Zion)에 속하던 이 당은 좌파 시온주의 경향에 의해 주도되었다. 유대사회주의노동자당이 코민테른 가입을 신청하자, 코민테른 지도부는 가입 조건으로 '아랍화' 정책을 주문한다. 아랍화는 당내 주류였던 좌파 시온주의와의 단절로,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당에 아랍인 당원을 조직·포함하도록 하고, 시온주의적 공동체 및 조직에 기반해온 기존 조직화 범위를 전체 아랍 민중으로 확장하고, 당이 팔레스타인 내 아랍인과 유대인을 모두 포괄할 수 있도록 명칭을 변경하는 조치를 포함했다. 시온주의 경향과 반시온주의 경향 간의 격렬한 당내 대립 하에 1921년 3차 당대회를 거치며 유대사회주의노동자당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를 대표하는 공산당의 유대민족 지부를 의미하는 '팔레스타인공산당유대공산당지부(Jewish Communist Party — Poalei Zion, section of the Palestine Communist Party)로 명칭을 변경한다. 그러나 이는 아랍인 당원과 아랍 민족 지부가 부재한 상태에서 상징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유대사회주의노동당이 시온주의 경향과 반시온주의 경향으로 분열하며 1923년 팔레스타인공산당이 설립되었고, 당 지도부가 아랍화 정책을 수용하며 코민테른 지도부는 1924년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승인한다. 공산당의 첫 아랍인 당원 가입은 1924년에 이루어졌으며, 존속 기간 내내 전체 당원수가 1,000명을 넘지 못했다. 영국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팔레스타인공산당원 중 아랍인은 1930년에도 26명에 불과했다. 스탈린 집권 이후 제3인터내셔널 아래 아랍화 정책은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 이전의 '초좌파' 노선, 7차 대회 이후의 인민전선 노선 사이에서 혼란스럽게 전개된다. 7차 대회 이전, 코민테른은 팔레스타인공산당에 '노동자·농민의 정부' 구호와 함께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에 맞서 투쟁하라고 지시하였으나, 7차 대회 이후 팔레스타인공산당은 '반제국주의 인민전선' 노선에 따라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그린스타인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공산당의 유대인 반시온주의 운동가들은 당내 유대계 주변부의 친시온주의적 편견에 적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수사적으로는 시온주의를 거부하고 영국의 위임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이와 동시에 ‘이슈브 Yishuv’로 알려진 유대인 정착지를 “이민을 통해 계속 성장할 수 있는” 합법적인 공동체라며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입장은, 나크바(Nakba) 이전 진행된 가장 중요한 유대인 집단이주 중 하나와 맞물려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심해지는 반유대주의를 피해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는데, 이는 각자의 식민주의적 목표를 가진 영국과 시온주의 자본가들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다.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탈출한 유대인 난민 대다수는, 가혹한 이민 할당제3)와 강대국들의 정책에 따라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예컨대, 미국은 유대인 난민 수십만 명의 입국을 막고 팔레스타인으로 피난가도록 압박했다. 3) (역자주) 당시 미국은 이민 할당제를 운용하여 출신 국가에 배당된 할당량(쿼터)에 따라 이민 비자를 신청순대로 발급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 지역 전체,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아랍 농민 대중의 불안이 고조되었다. 유대인 식민화에 반대하는 자생적 반란이 여러 촌락 공동체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야파에서 시작된 유대인 시위대 간 충돌이 팔레스타인 전역 아랍인-유대인 유혈사태로 파급된 1921년 야파 사태. 팔레스타인공산당은 식민에 맞선 아랍 민중의 저항과 충돌에 대해 답해야만 했다.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소위 ‘아랍화’ 정책은, 혁명가들이 아랍의 전위적 집단, 특히 농촌에서 봉기하던 대중 속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혁명적 전망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랍화 정책은 근본적으로 1927년 중국 혁명 당시 스탈린주의가 수립한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anti-imperialist united front”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 정책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으며, 각국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겠다고 자처하는 부르주아 혹은 소부르주아 지도부와의 정치적 동맹을 만들어냈다. 이 정책의 이론적 배경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민족해방 투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3인터내셔널의 창립 원칙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이 정책은 소련이 관료화 과정을 겪는 동안 코민테른 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스탈린에게 있어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 투쟁은 부르주아적 성격을 띤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민족해방을 생각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혁명의 문제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민족해방 투쟁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국민국가의 설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투쟁을 주도하는 것은 민족 자본가의 한 부문이며, 그러한 세력이 없다면 자본주의적 관계를 거스르지 않는 강령을 가진 소부르주아 지도부가 이 과정을 주도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탈린이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아랍화' 정책을 추진한 동기는 아랍 지역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끌기 위해 아랍 대중들 사이에서 더 큰 유기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던 것이 아니라,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 및 '반제국주의' 아랍 국가들과 기회주의적 협정을 맺어 세계 질서 내에서 소련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있었다. 1924년부터 1930년까지 젊은 팔레스타인공산당은 한편으로는 영국과 점증하는 시온주의의 지배에 맞선 아랍 지도부의 민족주의적 압력에 굴복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온주의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청년층과 급진적 유대 지식인층의 초기 민족주의 정서에 굴복했다. 1929년, 식민 지배와 점증하는 시온주의자들의 이주가 만들어낸 긴장은 전국적인 충돌로 분출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노동자들의 대투쟁과 '대반란'의 서막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팔레스타인공산당이 배포한 포스터. 히브리어로 '파시즘을 분쇄할 영웅적 붉은 군대 만세!', '소련 인민과 반파시스트 세계 전체의 지도자 스탈린 만세!' 라고 적혀 있다. 랜 그린필드는 이러한 (당내) 입장 차이가 계급투쟁의 압력과 아랍 대중 사이에서 증가하는 불만에 의해 어떻게 더욱 공고해졌는지 설명한다. 당은 아랍 대중에 대한 노선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 민족 갈등의 심화, 특히 1936~39년 아랍 반란은 당원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이는 1937년 자율적인 '유대인 분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반란이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은 반대 방향, 즉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로 인해 1930년대 당이 아랍 민족투쟁 편에 섰을 때 당과 가까워졌던 아랍 지식인과 운동가들은 소외되었다. “당이 각자의 (민족:역자) 공동체에게 각자의 정치적 언어로 대화하고, 각자의 민족 감정에 호소하는” 상황에 따라, 민족주의적 긴장이 당 내부에 반영되었다. 스탈린주의 정책의 이 명백한 '변화'는 궁극적으로 시온주의 정착민들의 팔레스타인 식민지화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47년 유엔 총회는 소련과 영국 및 미국 제국주의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을 결의했다.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아랍화'를 권고하고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어떻게 팔레스타인의 대규모 식민지화를 위해 제국주의 열강과 협정을 맺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역사학자 가브리엘 고로데츠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련의 입장은 특히 놀랍다. 시온주의 체제에 대한 일관된 부정적 태도, 1929년 및 1936년 아랍 반란 당시 크렘린이 이슈브(Yishuv)를 영국 제국주의의 동맹이자 도구로 비난하며 취한 명시적인 친아랍 노선을 고려하면 말이다. 시오니즘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에서 열렬한 지지로 소련의 태도가 변화한 것은 종종 1941년 6월 21일 독일의 소련 침공과 관련되어 설명된다. 모스크바가 세계 유대인 및 팔레스타인의 이슈브와 맺은 유대 관계는, 러시아의 전쟁 노력에 세계 유대인 공동체의 지원을 끌어들일 필요성을 우선적으로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전쟁은 러시아에게 “나치 독일에 맞선 투쟁에서 최대한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서방세계에서 광범위한 동맹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음을 시사한다. 히틀러가 스탈린과 체결한 협정을 파기한 제2차 세계대전의 역동4) 앞에서, 관료화된 코민테른은 민족해방 문제에 대한 180도 입장 선회를 “소련 방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했다. 이는 실제로는 소련의 영향권을 보장받기 위해,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확장을 억제하는 대가로 제국주의와 협정을 맺는 행위와 다름 없었다.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라는 개념으로 이 정책을 이론적으로 포장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한 정면 부정이었다. 이는 소련 관료의 이익 증진을 대가로 한 피억압 민중의 투쟁에 대한 배신을 의미했고, 실제로 그런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스탈린주의 소련은 민족해방의 경로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이라는 계급 화해 정책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을 근본적, 그리고 역사적으로 거부하는 논리를 팔레스타인 정책에 적용했다. 이 점은 스탈린주의 노선이 아랍 국가의 부르주아계급과 협정을 지향한 데서 명확히 드러났다. 4) (역자주) 나치 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2년 만에 파기하고 1941년 소련을 침공한 사건 1949년 5월 1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린 노동절 행사에 스탈린 초상화가 걸린 트럭이 행진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억압은 세계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제국주의는 현대 세계질서를 조직하고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한 시대다. 이 시기에 경제, 정치, 군사, 이데올로기적 권력은 제국주의 국민국가가 대표하고 옹호하는 기업들 수중에 집중된다. 그 결과 국경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토지, 자연의 착취는 전 세계로 확장되며, 이는 모두 이윤 추구와 자본의 재생산을 위한 것이다. 에스테반 메르카탄테(Esteban Mercatante)는 “세계 무질서 시대의 제국주의(Imperialism in Times of World Disorder)”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잠재적이든 실제적이든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경쟁과 갈등, 그리고 초국적 기업과 세계 금융자본의 지구 약탈은 결코 서로 대립하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들은 현대 제국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동시에 접근해야 하는 두 가지 차원이다. 제국주의 이론을 정교화하기 위해 두 차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정립된 제국주의 이론은, 세계 자본과 가장 강력한 국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행동한 결과 세계 경제가 위계적 총체로 형성되었는다는 점을 설명한다. 제국주의는 정책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제국주의가 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이며, 역사발전의 결과, 혹은 그 발전 과정에서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정의는 러시아 볼셰비키당과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이 역사적 시기는 20세기 초에 시작되었으며, 이 단계의 자본주의는 위기, 전쟁, 혁명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반동적 시기를 나타낸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의 기본적 특성에서 비롯된 긴장의 첫 번째 큰 표현이었다. 이 기본적 특성이란,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의 금융자본으로의 융합, 자본수출을 끊임없이 지속하려는 강박적 욕구, 그리고 정치적·경제적 힘이 불균등한 국가들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제국주의 국가,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제국주의 기업에게 수탈당하며 제국주의 정부에 의해 억압받는 푸에르토리코, 멕시코, 알제리, 시리아 등 식민지 및 반식민지로 나뉘는 것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많은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영국이 세계적 패권을 상실하자,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영국을 대신할 새로운 패권국으로 부상하려 시도하였다. 미국과 나치 독일은 그러한 국가 중 하나였다. 공식적인 역사는 항상 제2차 세계대전을 민주주의와 파시즘, 인권과 나치즘의 대결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실상은 세계 주요 강대국들이 새로운 세계 질서의 수립을 촉진하고, 시장을 재편하고, 대규모 파괴와 살상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 전 세계 노동계급을 통제하고자 저지른 전 세계적 학살이다. 트로츠키는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사상」에서 레닌에게 경의를 표하며 제국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제국주의는 식민지, 시장, 원자재 공급원, 세력권 등을 장악하고자 하는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침략자들에 맞서 평화를 지키기 위해”,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등의 이념으로 위장한다. 이러한 이념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다. 모든 사회주의자의 의무는 이를 지지하는 대신, 오히려 인민 앞에 그 본질을 폭로하는 것이다. 1915년 3월, 레닌은 다음과 같이 남겼다. “어느 집단이 먼저 군사적 타격을 가했느냐 또는 먼저 전쟁을 선포했느냐의 문제는 사회주의자들의 전술을 결정하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다”, “조국 방어, 적의 침략 격퇴, 방어 전쟁 수행 등에 관한 문구는 양측 모두가 인민을 완전히 기만하는 것이다.” 레닌은 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수십년 간”, “세 강도(영국, 러시아, 프랑스 부르주아지와 정부)가 독일을 약탈하기 위해 무장했다. 세 강도가 주문한 새 칼을 얻기 전에 두 강도(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공격을 시작한 것이 놀라운 일인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45년 8월, 미국이 서명 하나로 원자폭탄을 투하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괴하고 226,000명을 살해한 제2차 세계대전 말엽에, 트루먼 대통령은 팔레스타인에 홀로코스트 생존자 10만 명을 수용하도록 촉구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 제국주의가, 쇠퇴하는 대영제국의 과제를 이어받아 유대인 국가 건설 프로젝트를 다시 추진하겠다는 명확한 신호였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으로) 팔레스타인 영토의 56%를 시온주의 국가에 할당했다. 이는 유대인들이 전체 팔레스타인 사유지의 약 7%만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나크바(Nakba)’, 즉 시온주의 민병대와 신생 이스라엘군이 7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그들의 집과 땅에서 폭력적으로 추방했을 때, 미 제국주의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주도한 목적이 유대인에게 홀로코스트의 배상이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정당화했다. 홀로코스트는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이 전쟁에 참가할 때까지 의도적으로 묵인되어온 비극이었다. 다시 말해, 미국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자신들의 지난 행보를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위해 팔레스타인 인구의 약 4분의 3을 폭력적으로 추방하는 데 자금을 지원하고 지시함으로써 정당화한 것이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초기 정착기인 신 이슈브(New Yishuv) 시대를 낭만적으로 묘사한 삽화 '어린 정원사들', 1960년대 유대민족기금(JNF) 발행 1948년 나크바로 인해 집과 터전을 잃고 피난길에 오른 팔레스타인인 아동과 여성들 시온주의 국가(Zionist state)는 그 기원부터 제국주의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산물이다. 따라서 시온주의 국가는 ‘정착민 식민주의’, 즉 집단학살과 인종청소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형태의 정착민 식민주의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며, 실행한다. 이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5) 아래 한 세기 간의 지배가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산물이다. 5) (역자주) 라틴어로 "미국에 의한 평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패권국으로 부상하며 형성된 세계 질서를 의미,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에 의한 평화‘, 로마제국의 최전성기인 1~2세기에 걸쳐 지속된 고대 지중해 세계의 상대적 안정기)’에서 차용된 용어. 시온주의 국가는 그 식민주의적 확장을 가능하게 한 세계 질서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제국주의적 괴물이다. 레온 트로츠키는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두 가지 다른 미래를 제시했다.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제국주의의 대학살을 국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할 가능성,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 지배체제가 이 전쟁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전진한다면, 이는 스탈린주의와 같은 지도력의 타락을 막을 터였다. 에밀리오 알바몬테와 마티아스 마이에요는 「“부르주아 복고”의 한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이 두 가지 변수 중 어느 것도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국주의가 완전히 처벌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후 지구의 3분의 1에서 부르주아지가 축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으며, 퇴보로 이어지는 조건을 제거하지도 못했다. 붉은 군대의 손에 나치즘이 패배하면서 스탈린주의는 새로운 위신을 얻었고, 스탈린주의는 이 위신을 이용해 전후 혁명에 제동을 걸었다(얄타 및 포츠담 협정). 스탈린주의는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배신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식민지와 반(半)식민지에서의 혁명은 억제할 수 없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새로운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주요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력은 중요한 모순을 안은 채 확립된 것이었다. 소련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공로가 아니라, 나치를 피비린내 나는 러시아의 겨울로 몰아넣은 프롤레타리아 군대인 ‘붉은 군대’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바로 이 특정한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미국은 유엔의 공모와 스탈린주의의 지지를 받아, 이스라엘 국가를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이익을 위한 거점으로서 인위적으로 관철해냈다. 나크바는 시온주의의 식민주의적 특성을 집약하는 역사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미국이 중동에서 자신의 이익을 확장하고 공고히 하는 과정의 중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두 국가 해법’을 옹호하는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의 일부 세력은, 시온주의 국가의 기원이 드러내는 본질적 측면, 즉 시온주의 국가의 존재 자체가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의 해방과 모순된다는 사실을 누락한다. 토지 강탈, 공동체 전체의 추방, 잔혹한 군대와 정착민 무장집단에 의한 인종청소 없이 이스라엘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제국주의 없이는 이스라엘 국가도 없다.2025-06-14 | 조회 1,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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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1[편집자 주] 2023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대량학살하고 있다. 히메나 베르가라의 이 글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계급적·국제주의적 전략을 제시한다. 본 번역은 글의 분량상 총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히메나 베르가라, 2024년 4월 19일 시온주의의 억압에 맞선 투쟁은 국제 정치와 국내 정치의 중심에 있다. 요르단 강에서 지중해까지, 아랍인과 유대인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자유롭고 사회주의적인 노동자의 팔레스타인을 위한 투쟁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다. 뉴욕 팔레스타인 연대시위 사진: Eduardo Munoz / Reuters 팔레스타인 해방투쟁의 방향을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가자지구와 그 주변 지역의 아랍 대중은 물론, 미국 등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도 피어나기 시작한 집단학살에 반대하는 전 세계 운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이 과제에서 필수적인 것은 팔레스타인에서 작동하는 거대한 사회적 힘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힘들은 아랍 세계의 이 지역(팔레스타인)을 세계적 위기, 즉 지구적 제국주의의 새로운 위기의 진원지로 만들었다.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잔혹한 식민 프로젝트의 비극은,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쇠퇴가 낳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결과를 표현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비극은 제국주의·인종주의·식민주의에 아래로부터 맞서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영웅적 저항이 자신을 대변한다고 느끼는 전 세계의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결집하는 외침이 되었다. 이스라엘 국가(The state of Israel)는 아르헨티나에서 미국에 이르는 모든 곳에서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적인 괴물 같은 국제 극우세력을 대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팔레스타인 해방은 전 세계 곳곳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수십억 민중에게 이롭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향한 승리의 길을 찾으려면 국제적, 지역적(regional), 국지적(local) 차원에서 거대한 사회적 힘들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그리고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대량학살의 맥락이 어떤 계급적 역학을 나타내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절박한 자결권 쟁취투쟁과 이 지역 사회주의 혁명을 결합하며, 누가 동지이고 누가 적인지 구분할 수 있는 해방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은 중동 전역의 민중이 단결하여 제국주의의 멍에와 자국 자본가·권위주의 정권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이스라엘 노동자계급이 시온주의 및 식민정책과 단절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위한 투쟁과 이 지역의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사이의 연관성은 레온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분명히 새겨져 있다. 이 이론을 팔레스타인 해방투쟁에 가장 체계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아마도 팔레스타인 트로츠키주의자 자브라 니콜라(Jabra Nicola)일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시온주의 국가를 계급적, 반제국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였으며, 지역의 계급 역학을 분석하여 팔레스타인 주변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역사학자 호세피나 L. 마르티네즈는 다음과 같이 썼다: 트로츠키는 생전에 자신의 연속혁명 이론이 세 가지 개념을 통합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첫째는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이다. 둘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이행기로서의 혁명 그 자체이며, 이 이행기는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하여 사회가 평형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경제, 기술, 과학, 가족, 도덕, 일상생활의 혁명”을 수반한다. 셋째는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적 성격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차원의 상호작용이야말로 오늘날 이 이론에 지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 글은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한 전략적 관점을 정교화하기 위해 이 일련의 개념들의 타당성과 연관성을 입증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레온 트로츠키, 자브라 니콜라, 그리고 일란 파페(Ilan Pappé), 우사마 막디시(Ussama Makdisi), 란 그린스타인(Ran Greenstein), 재커리 록맨(Zachary Lockman), 가브리엘 고도레스키(Gabriel Godorezky), 피에르 브루에(Pierre Broué) 같은 역사가들의 논의를 바탕에 둔다. 우리는 연속혁명 이론의 기본 원리를 교조적으로 반복하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세계 제국주의 위기를 배경으로 한 팔레스타인의 최근 역사와 현재 상황에 비추어 연속혁명 이론의 구체화를 시도할 것이다. 우리는 트로츠키 연속혁명론의 핵심을 이루는 세 가지 개념을 활용해 팔레스타인 역사의 근본적인 순간을 탐색하고 혁명적 좌파의 사상과 강령의 역사를 복원할 것이다. 우리는 이를, 특히 팔레스타인의 사회주의적 미래는 물론, 보다 일반적으로는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주의적 미래에 대한 구상을 철저히 거부해 온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지도자들의 사상과 대조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빈 땅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일란 파페의 설명처럼, 팔레스타인은 1948년 나크바 이전에도 결코 빈 땅이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은 빌라드 알 샴(‘북쪽의 땅’ Bilad al-Sham), 즉 당시 레반트 지역의 일부로 번성했던 땅이다. 풍요로운 농업, 작은 마을들과 역사적인 도시들은 시온주의자들이 도래하기 직전까지 50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지탱하고 있었다.1) 1) Pappé, Ilan. Ten Myths About Israel. Verso Books, 2017. (국역: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틈새책방, 2024) 19세기 말, 팔레스타인의 적지 않은 인구 중 유대인 비중은 미미했다. 오늘날 흔히 '글로벌 사우스'라고 불리는 여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사람 대다수는 많게는 1,000명이 거주하는 촌락에 속한 농민들이었다. 새로 생겨난 도시들에는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몰려들었으며, 이들은 해안가와 고지대에 정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20세기 초가 되면 제국주의의 침투로 초기 형태의 팔레스타인 도시 노동자계급이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파페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 기록물을 인용하여 19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구조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시온주의가 부상하기 전의 유대인 비율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약 2~5% 수준이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기록에 따르면 1878년에는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 총 46만 2,465명이 살았다. 이 중 40만 3,795명(87%)은 이슬람교도였고, 4만 3,659명(10%)이 기독교인, 1만 5,011명(3%)은 유대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기 전, 오스만 제국은 자신의 지배와 제국 자체에 대한 더 노골적인 인종주의를 발전시켰다. 19세기 중후반에는 ‘터키인’이 “오스만주의”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까지 이르렀고, 이는 팔레스타인의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국가 정체성과 정치적 소속감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역사학자 우사마 막디시(Ussama Makdisi)가 “오스만 오리엔탈리즘”에서 설명한 것처럼, 오스만 제국에 봉사하던 지식인들은 제국 내 터키인들을 아랍인, 특히 팔레스타인인 등 다른 민족 집단과 차별하고자 인종적 서열체계를 개발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민족주의 정서는 팔레스타인과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부르주아 혁명과 이전 식민지의 재편 아래 지정학을 재구성하던 강력한 개념인 ‘국민국가’(the nation)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중동 각지에서 오스만 제국의 압제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을 독려했다. 이는 중동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영국 제국주의의 입지를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영국은 아랍 민중에게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면 자결권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로 인해 중동 전역에서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었다. 다른 한편, 영국은 전쟁이 끝난 후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분할할지를 프랑스 및 다른 열강과 비밀리에 거래하며 이 지역 주민들을 새로운 제국주의 압제자들의 지배 아래로 몰아넣었다.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되면서, 이러한 초기 단계의 민족자결 사상은 발전하거나 실현될 수 없었다. 영국은 당시 중동 지역에서 프랑스 다음으로 강력한 제국주의 세력으로 중동 지역의 정치를 지배하고 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팔레스타인에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국 내 시온주의 세력과도 강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20세기 초 30여 년간 이루어진 제국주의의 초기 개입은 팔레스타인의 복잡한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학자 엔조 달 피토(Enzo Dal Fitto)는 팔레스타인 트로츠키주의자 자브라 니콜라의 연구를 토대로 이러한 동학을 설명한다. 1917년부터 1939년 사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이루어진 시온주의 경제 부문의 발전은 아랍 봉건제를 파괴하고 자본주의적 부르주아계급의 형성을 저지하여 해당 지역의 경제적 발전 조건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역사 발전은 정체되었고, 반제국주의 세력의 역사적 활력도 고갈되었다.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장악하기 전,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는 영국 시온주의 지도자 월터 로스차일드 경에게 공식 서한을 보내, 영국 정부가 유대인 디아스포라2)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2) (편집자 주) 세계 곳곳에 사는 유대인 집단 1917년 11월 2일, 아서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이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서한 1918년 영국 정부는 국제 열강과 국제연맹과 함께 이 지역의 경계를 재협상해,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보다 명확히 정의된 지리적 공간을 창출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 경계제국주의는 팔레스타인 원주민과 새로운 유대인 정착민 중 누가 팔레스타인을 통치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했다. 일란 파페에 따르면,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경계를 재편함으로써 시온주의자들이 에레츠 이스라엘(Eretz Israel, 이스라엘의 땅)을 지리적으로 개념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땅에서는 유대인만이 땅과 자원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서사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공식 역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빈 땅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팔레스타인은 역사적 분쟁의 대상이 된 땅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다모클레스의 칼날3)처럼 다가오는 신흥 열강에 맞서, 새로운 제국주의적 열망을 품고 세계를 자신의 상상대로 재구축하고자 했던 구 식민 열강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재편” 과정의 다음 단계인 제2차 세계대전의 피비린내 나는 예행연습이었다. 3) (편집자 주) 고대 그리스의 일화로, 권력과 영광 뒤에 도사린 위험과 불안을 상징한다. 본문에서는 항상 팔레스타인에 드리워진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을 뜻한다. 시온주의자들이 제안한 팔레스타인 식민화는 영국 제국주의에 의해 의도적으로 도구화되고, 물질적으로 지원되었다. 영국 자체는 쇠퇴하는 제국이었지만,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중동에서의 서방 제국주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 제국 분할의 일환으로 1923년 국제연맹에 의해 공식화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에 맞서 강력하게 저항했고, 이 저항은 영국 점령 기간 동안, 특히 1929년부터 1939년 사이에 더욱 확산되고 강화되었다. 이 반란의 절정은 1936년 총파업으로 나타났다. 아랍 노동자계급이 총파업을 주도했으며, 노동조건 개선과 민족 독립이 주요 요구였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대반란(The Great Revolt)”으로 알려진 격렬한 계급투쟁의 시기 동안, 농촌의 농민 대중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농민들은 유대인 정착민과 영국의 점증하는 침탈에 맞서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역사학자 재커리 록맨(Zachary Lockman)은 「동지와 적」(Comrades and Eenemie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36년 4월 15일, 샤이크 ‘이즈 알딘 알카삼(Izz al-Din al-Qassam)’이 창립한 게릴라 부대원들이 나블루스 인근에서 차량과 버스를 습격해 유대인 승객 2명을 살해했다. 이틀 후 우익 유대인 준군사 조직이 아랍인 2명을 살해하며 보복했다. 아랍인들의 시위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점차 광범위한 반식민주의 및 반시온주의 민중봉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폭력을 억제하고 아래로부터의 분노를 제어하기 위해, 아랍 민족주의 운동가들은 재빨리 전국적인 총파업을 촉구했다. 파업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모든 주요 도시에서 투쟁을 주도하기 위해 새로운 “민족위원회”(national committees)가 생겨났다. 깜짝 놀란 엘리트 정치인들은 대중적 저항의 물결에 편승하고자 파업 요구를 지지하는 한편, 아민 알후사이니(Amin al-Husayni)를 위원장으로 모든 주요 정당을 대표하는 새로운 아랍고등위원회(AHC)를 구성했다. 총파업은 1936년 10월까지 6개월간 계속되어 역사상 가장 긴 총파업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영국 통치와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아랍 민족주의 반란의 첫 단계로, 1939년 여름에야 끝이 났다. 1936년 4월 팔레스타인 야파에서 영국 경찰이 시위 중인 아랍 군중을 해산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노동자계급의 대반란 참여는 지역 노동운동 역사상 가장 전투적인 장(章) 중 하나일 것이다. 록먼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팔레스타인 도시의 아랍 인구 대부분이 총파업에 참여했으며, 도시 노동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산 시드키 알다자니(Hasan Sidqi al-Dajani)의 운전사노조는 아랍의 자동차 운송을 마비시켰고, 야파항구 노동자들은 항구를 폐쇄했다. 파업을 지속하기 위해 전국위원회는 부유한 팔레스타인인들과 주변 국가의 동조자들로부터 기부금을 모금했고, 야파부두 노동자를 포함해 파업으로 휴업중인 사람들에게 파업 수당을 분배했다. 이 반란은 탄압에 의해, 그리고 ‘히스타드루트’(Histadrut, 1920년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설립된 이스라엘 최대 노동조합연맹)가 이끄는 유대인 노조 지도부의 의식적인 행동에 의해 진압되었다. 히스타드루트는 시온주의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며 식민점령을 옹호했다. 한편, 과거 대지주로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팔레스타인 가문들은 반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운동의 지도부로 자리 잡았으며, 점령 세력과의 협조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영국과 시온주의 정착민들에게 토지를 빼앗겼지만, 시온주의 세력으로부터 상당한 보상과 막대한 혜택을 받아 당시 식민체제의 부유층을 형성했다. 이 가문들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 시절 수십 년 간 이 지역을 관리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이 땅을 점령했을 때도 점령군을 위해 계속 일했다. 팔레스타인 대중의 고통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들 가문은 주로 압드 알카디르 알후사이니(Abd al-Qadir al-Husayni)가 이끄는 아랍-팔레스타인 당(Arab-Palestinian Party)과 정치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엔조 달 피토(Enzo Dal Fitto)는 팔레스타인 대반란 당시 지도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썼다: 그들의 부는 시온주의자들의 점령에 의존했기에, 그들의 반대는 그저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다. 그들은 아랍의 반시온주의 의식 형성을 지연시켰으며, 밸푸어 선언 역시 늦게서야 규탄했다. 알-카삼 저항과, 이후의 아랍 저항운동을 고무하고 강화한 시리아의 거대한 총파업 여파에 압도된 그들은, 1936년 “대반란”에 참여했다. 대반란은 거대한 파업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납세 거부와 같은 시민불복종 행동과 반란 민병대 결성을 동반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시온주의 민병대의 지원을 받은 영국 식민지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한편 유럽 파시즘의 확산과 히틀러의 집권, 동유럽에서 발생한 수많은 유대인 학살(포그롬, Pogrom), 그리고 유럽에 내재하던 반유대주의가 강화되는 상황에 따라 유대인 이민이 증가했다. 결과적으로 아랍 경제가 폐쇄되면서, 시온주의 세력의 경제는 유럽에서 대규모로 유입된 유대 자본에 힘입어 그 영향력을 강화하고 확장할 수 있었다. 영국은 반란에 대응하기 위해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받은 필 위원회(Peel commission)를 설립했다. 위원회의 임무는 이 지역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하라고 권고하는 것이었으며, 그 분할의 목적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아랍과 유대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해 영국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맞서는 계급투쟁을 차단하는 데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임박했다. 세계적 대재앙을 목전에 둔 영국의 정책은, 해당 지역 정부의 지지가 필요한 상황에서 아랍의 봉기를 방지하려는 목적에 따라, 그리고 새로운 유대인 정착민들의 유입과 잠재적인 유대 국가 설립으로 지역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욕망에 따라 수립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될 무렵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국제 사회주의 혁명이 패배한 상황에서, 이 전쟁은 결국 팔레스타인을 짓누를 새로운 압제자의 형태와 성격을 결정짓는 계기였다.2025-06-08 | 조회 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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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전쟁과 열강투쟁4월 9일, 트럼프 정부는 상호관세 발효 13시간 만에 중국을 제외한 국가들에 대해 90일간 관세부과 유예를 발표했다. 미국은 호기롭게 발표한 고율 관세 시행을 유보하며 취약함을 드러냈으나,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미국의 관세전쟁은 지속되고 있다. 그 맥락은 무엇이며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관세전쟁, 흔들리는 제국의 노골적 강제력 행사 4월 2일, 도널드 트럼프가 발표한 ‘상호관세’에 상호적인 것은 그 이름뿐이다. 베트남의 경우를 보자. 베트남의 최혜국 관세율, 즉 베트남이 같은 WTO 회원국들에 부여하는 관세율은 9.4%다. 상호관세가 이름처럼 ‘상호적’이라면, 미국이 베트남에 부과하는 세율도 9.4%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가 발표한 세율은 무려 46%다. 한국 상호 관세율 25%가 계산된 방식은 어떠한가? 2024년 미국이 한국과의 상품무역에서 기록한 적자(660억 달러)를 미국의 한국 상품 수입액(1,315억 달러)으로 나누면 50.2%가 나온다. 이 50.2%가 미국이 주장하는 공정한 관세율이다. 미국은 한국에 50.2% 관세를 매겨야 하나, ‘관대하게도’ 절반으로 깎아 25%만 매기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미국은 각국 상호관세율을 해당 국가의 △대미 관세 △비관세 장벽 △환율 조작까지 고려한 잠정관세율에서 할인한 수치라고 설명했으나, 실제 관세율 산정 방식은 ‘엑셀 돌리기’에 불과하며 합리적 근거는 전무하다.1) 1)실제 적용된 산식은 다음과 같다. (해당국과의 무역적자 / 해당국으로부터의 상품수입액) ÷ 2 미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유무역 질서를 만들었다. 2차 대전 후 자본주의 황금기가 끝난 1970년대, 이윤율 저하에 직면한 미국 자본은 해외로 진출해 더 값싼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하는 한편, 각국에 시장 개방을 압박했다. 이어 소련-동구권 붕괴와 중국의 자유무역질서 편입에 따라 자본주의 단일 시장이 형성되었다. 세계화의 전성기, 이제 ‘열강투쟁’과 ‘제국주의 전쟁’은 역사 속 이야기가 된 것처럼 보였다. 오른편에서는 ‘맥도날드가 들어선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2), 왼편에서는 열강이 충돌하는 ‘제국주의’ 시대는 가고, 전 세계를 단일 질서로 포섭하는 ‘제국’의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화의 호시절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중국과 브릭스 국가들이 부상했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보호주의 확대는 ‘열강투쟁 격화’라는 분명한 경향을 드러냈다. 2)소위 ‘골든 아치’ 이론. 골든 아치는 맥도날드의 ‘M’ 로고다. 미국의 지위는 예전 같지 않다. 2차대전 직후 세계 GDP의 50%에 달하던 미국 GDP 규모는 1985년 플라자합의 당시 35%로 줄어들었고, 이제는 세계 GDP의 24-25% 가량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부상했다. 최근 중국의 경제위기로 미·중 경제력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인식이 있으나, 이는 상당 부분 착시에 근거한다. 첫째,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고, 중국은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달러 기준으로 본 미국 경제 규모는 실제보다 부풀려지고, 중국은 실제보다 과소평가된다. 둘째, 최근 3년 사이 위안화 가치는 달러보다 15%가량 하락했다. 이에 따라 같은 양을 생산하더라도, 달러 기준으로 본 중국 산출량은 15% 과소평가 된다. 2024년 기준으로 미국의 명목 GDP는 28조 달러, 중국은 18조 달러이나, 세계은행의 구매력 평가(PPP) 기준에서는 이미 2014년 중국 경제가 미국 경제를 앞질렀다. 구매력 평가 기준 GDP 순위 (2025, IMF)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2기는 1기 당시보다 훨씬 더 확장된 관세전쟁을 촉발했다. 트럼프 1기 관세전쟁 대상은 중국이었다. 트럼프 2기 관세전쟁 대상은 미국의 동맹국을 포함한 전 세계다. 자신이 만든 자유무역 체제를 노골적으로 뒤집으며 ‘내가 본 손해를 보상하라’고 강요하는 미국의 행보는, 흔들리는 패권국 지위를 노골적 수탈로 만회하려는 시도다. 트럼프는 상호관세를 발표한 4월 2일을 ‘미국 해방의 날’이라고 불렀다. 제국주의 국가가 노골적 수탈을 개시하겠다고 선언한 날의 이름 치고는 매우 뻔뻔하다. 관세는 경제전략이자 군사전략이다 2기 트럼프는 ‘스티븐 미란’이라는 인물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했다. 최근 화제인 ‘국제 무역체제 재구조화를 위한 사용자 가이드’, 일명 ‘미란 보고서’를 작성한 당사자다. 미란은 미국의 지속적 무역적자는 강한 달러 때문이라고 짚으며 이는 달러의 기축통화 기능과 연동된다고 주장한다. 즉, 무역적자가 지속되면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수출이 늘어나 무역적자가 해소되어야 하는데, 이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국이 기축통화인 달러를 비축하고 있기에, 달러 강세는 필연적이다. 이에 따라 미국에는 무역적자가 쌓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미란 보고서는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관세를 주요 수단으로 제시하며3), 다음의 안보·무역 기준들로 각국 관세율을 산정하자고 한다. (미란 보고서, 23p) 3)관세에 따르는 수입물가 상승의 경우, 무역 상대국의 환율 평가절하가 미국의 수입물가 상승을 상쇄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 해당국이 미국산 수입품에 대해 미국이 그들에게 부과하는 수준과 비슷한 관세를 적용하는가? - 외환보유고를 과도하게 축적해 자국 통화를 인위적으로 평가절하한 이력이 있는가? - 미국 기업이 해당국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정도가, 외국 기업이 미국 시장에 접근하는 수준과 유사한가? - 미국의 지식재산권을 존중하는가? - 해당국이 중국으로부터 제품을 수입한 후 미국에 재수출하는 방식으로 관세를 회피하고 있는가? - 나토 국방예산 분담금을 전액 납부하고 있는가? - 중국, 러시아, 이란 등과의 국제 분쟁에서 어느 편에 서 있는가? - 제재 대상 국가 또는 기업과의 거래, 혹은 그들에 대한 제재 회피를 방조하는가? - 다양한 지역에서 미국의 안보작전을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 - 미국의 적대 세력(테러리스트, 사이버 범죄자 등)을 자국 내에서 보호하거나 수용하는가? - 국제 무대에서 미국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반미적인 외교 행보를 하는가? 위 기준들에서 드러나듯 미국의 관세전쟁은 단지 미국 세수를 늘리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이러한 체계는 국가 안보와 무역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구현할 수 있다. … 미국의 방위 우산 안에 들어오고자 한다면, 공정무역 체계 안에도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미란 보고서 23p). 관세는 무역과 안보를 직결시키고 세계 자본주의 자체를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재구축하는 지렛대다. 미국은 경제와 안보를 하나로 묶으며 ‘당신은 누구 편인가’를 묻는 한편, ‘나의 편이 되고 싶다면, 수탈을 수용하라’고 강요한다. 관세전쟁에는 실제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마라라고 합의’, 미국의 우산 아래 머물고 싶다면 대가를 지불하라 관세전쟁을 촉발한 미국은 무역·금융·안보를 통합한 ‘안보구역’ 구축에 나서고 있다. 소위 ‘마라라고 합의’다. 100년 만기 채권 구입4) 등 미국이 제안하는 조치를 따르지 않는 국가에는 더 높은 관세를 부과하거나, 미국이 제공하는 방위우산에서 배제하겠다고 압박한다. 각국은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이 제공하는 달러-금융 시스템과 안보체제에 편입하는 각국이 부담해야 하는 정당한 대가일 뿐이다. 다음을 보자. 4)미란 보고서는 각국이 보유한 미국 국채를 ‘100년 만기 채권’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보고서 자체에 100년 만기 채권이 ‘무이자’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세간은 해당 채권이 무이자일 가능성까지 내다본다. "오늘날의 경제와 1980년대의 경제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미국의 총부채는 GDP 대비 120%를 초과하는 반면, 플라자합의 당시에는 약 40% 수준이었다. 이는 1980년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채권시장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 다음과 같은 ‘마라라고 합의(Mar-a-Lago Accord)’를 제안한다: 1. 안보구역은 공공재이며, 그 안에 속한 국가는 미국 국채를 매입해 안보구역에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2. 안보구역은 자본재이며, 단기 국채가 아닌 100년 만기 채권으로 조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안보구역에는 철조망이 있다. 당신이 단기채권을 장기채권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관세가 당신을 안보구역 밖으로 밀어낼 것이다." (미란 보고서, 28p) 미란 보고서는 미국이 전 세계를 위해 손해를 보는 것처럼 묘사하나, 현실은 정반대다. 그간 미국이 막대한 무역적자를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축통화국으로서의 특권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이 특권 덕분에 미국은 수입대금을 지불할 때 자국 통화를 마음껏 발행하고, 상대 흑자국들은 그 달러를 다시 미국 국채에 투자해왔다. 즉, 미국은 달러로 세계 각국의 실물가치를 흡수해 온 것이며, 이것이 미국이 세계 패권을 유지하는 동학이었다. ‘안보구역 건설에는 돈이 필요하다. 100년 뒤에 돌려줄 테니, 일단 돈을 내놓아라’, 미란 보고서가 제시하는 마라라고 합의는 1971년 달러 금태환 중지, 1985년 플라자합의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위기에 대한 패권적 해결책일 뿐이다. 미국은 사적 이익을 공공의 이익으로 포장하나, 그 명분은 트럼프의 그린란드·캐나다·파나마운하 편입 압박만큼이나 허약하다. 미국은 세계 자본주의를 이끄는 헤게모니 국가가 아니라, 그저 보다 강한 일개 패권국으로서 힘을 행사하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위기는 그만큼 깊고 넓다. 세계 자본주의 균열 심화 4월 9일, 트럼프 정부는 중국을 제외한 국가들에 대해 90일간 관세부과 유예를 발표했다. 직접적인 원인은 금융시장 발작이다. 금융자산은 한 달 전부터 하락하기 시작했으나, 4월 2일 상호관세 발표 후 주식시장은 폭락했고, 이보다 더 중요하게 국채 투매에 따른 국채 가격 폭락과 그에 따르는 국채금리(수익률) 상승이 벌어졌다. 일반적으로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투자자들은 안전자산인 미 국채로 몰려 국채 가격이 상승한다(=국채금리 하락). 그러나 이번에는 미 국채 투매가 벌어졌다. 며칠 사이 10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이 3.85%에서 4.5%로 급등했고, 3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0.54% 급등해 4.92%를 기록했다. 채권자들이 그만큼 많은 국채 물량을 투매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지적한 대로, 이는 미국 금융체제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 국채금리 급등은 왜 문제인가? 첫째, 막대한 빚을 진 미국 정부에게 국채금리 급등은 치명적이다. 미국 전체 국가부채는 약 36.2조 달러(약 5경원)에 달하며, 이 중 2025년에 갚아야 할 부채만 9.2조 달러(약 1경 3천조 원)로, 전체 빚의 25% 이상을 차지한다. 금리 인상기, 미국은 이자 부담을 줄이고자 단기채권 발행을 늘렸고, 이에 만기 1년 이하 부채는 전체 부채의 22%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채금리가 급등하면, 미국 정부는 더 높은 금리로 새로운 빚을 낼 수밖에 없고, 이는 정부의 부채 부담을 훨씬 키운다. 둘째, 국채금리 급등으로 미국 은행과 기업이 잇따라 파산 위기에 빠질 수 있다. 2023년 3월, 뱅크런에 이은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이 드러내듯, 미국 은행과 기업은 상당한 자산을 국채로 보유한다. 국채금리가 급등하면 국채 가격은 크게 떨어지기에, 국채금리 급등은 은행과 기업이 보유한 자산평가액 급감을 뜻한다. 멀쩡하던 기업이 갑자기 유동성 위기에 몰려 연쇄적으로 파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국채금리는 시장금리의 기준이 되기에, 주택담보대출을 비롯한 각급 대출금리도 덩달아 오르게 된다. 4월 2일 이후 나타난 채권자들의 미국채 투매는 중요한 징후다. 미국의 의도는 그대로 관철되지 않으며, 그 후폭풍은 미국 주도 세계체제에 대한 신뢰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는 중국과 브릭스의 팽창에 날개를 달 것이다. 중국은 미국에 대응해 대미 관세를 125%로 인상했고, 희토류 수출 통제에 나섰으며, 브릭스 국가들은 물론 남미를 비롯한 글로벌 사우스, 나아가 미국의 전통적 우방들에도 손짓하고 있다. 균열하는 세계 속에서, 중국은 자유무역을 역설하며 동맹을 강화할 좋은 명분을 얻은 것이다. 당장 2025년 3월 30일 한·중·일 경제통상장관들이 5년 만에 3자 회담을 열어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이 회담에서 세 국가는 △공급망 협력 강화 △수출통제에 대한 소통 강화 △‘높은 수준’의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을 위한 협력을 논의했다. 4월 9일에는 중남미·카리브 국가공동체(CELAC) 30개 회원국이 트럼프 정부의 관세정책을 규탄했다. 트럼프 관세 발표 이후 5년 만에 열린 한중일 경제통상장관회의 현시점에서 트럼프가 관세 전쟁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인지, 봉합할 것인지는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관세전쟁을 촉발한 트럼프와 미국 정부조차 그 결과를 알지 못하고 있음은 마찬가지다. 다만 확실한 것은 미국의 패권적 행보가 세계 자본주의의 균열을 심화하고 있다는 것, 각국은 각자의 이익대로 움직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 양상은 명분과 이념으로 무장한 두 거대 진영 사이의 대결이라기보다, 거대 열강과 지역 패권국들의 합종연횡에 가까울 것이다. 국경이 아니라 계급을 기준으로 단결하자 3월 26일, 전미자동차노조(UAW)는 트럼프 정부의 관세정책 지지 입장을 발표했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노동자계급 공동체를 황폐화한 자유무역 재앙을 끝내고자 나선 트럼프 행정부에 갈채를 보냅니다”(숀 페인 UAW 위원장). UAW는 해당 성명에서 △미국 내 생산 확대 △공장폐쇄와 저임금 국가로의 일자리 이전 금지 △미국산 부품 사용 확대 등을 요구했다. 그야말로 반동적인 입장이다. 트럼프가 이민자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감행하고, 수십만 연방 공무원 노동자를 해고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UAW와 숀 페인 논리대로라면, 미국 노동자들과 한국 노동자들은 트럼프 정부와 세계 자본가들에 맞서 함께 싸워야 할 동지이기는커녕, 철천지원수일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관세로 산업과 일자리를 미국으로 되돌리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구축된 글로벌 공급망 해체가 이루어질 것인지도 미지수일뿐더러, 일부 산업이 미국으로 회귀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위기의 미국 자본을 위한 것일 뿐, 노동자의 임금·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극소수 노동자가 그 수혜자가 될 수는 있으나, 전체 노동자들은 감소한 생산에 따르는 고용 감소, 수입물가 인상이라는 더 큰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자본은 관세 비용을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할 것이며, 노동자 민중은 물가상승과 실질임금 삭감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기에 UAW의 입장은 전 세계 노동자들은 물론 미국 노동자들의 입장 또한 대표하지 못한다. 2025년 4월 5일, 미국 전역의 1,400개 도시에서 약 60만 명이 참여한 동시다발 시위가 벌어졌다. 이번 시위는 그간 이어져온 연금과 공공의료보험 등 사회보장제도 수호, 공공부문 해고반대 시위의 연장선에 있으며, 관세정책에 대한 비판 역시 참가자들의 주요 목소리였다. 4월 5일 시위 사진: Oregon Public Broadcasting 고율 관세는 전 세계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를 더 많이 분할하고자 하는 제국주의 열강투쟁의 결과이자, 이를 더욱 강화하는 촉매다. 노동자들이 국제주의적 관점으로 단결하지 못한다면, 남는 것은 착취와 실업의 고통을 타국 노동자에게 전가하기 위한 노동자 내부의 투쟁뿐이다. 자본가들의 전쟁에 노동자가 앞장서서는 안 된다. 심화하는 보호주의 속에서, 한국 자본은 수출 감소를 만회하고자 노동자들의 고용, 임금, 노동조건을 공격할 것이다. 반도체특별법에서 드러나듯 국가는 자본에는 특혜를, 노동자에게는 노동시간 연장을 비롯한 착취 강화에 나설 것이다. 한국 노동자들은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구조조정에 맞서는 한편, 세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관세전쟁 뒤로 실제 전쟁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지금, 노동자의 국제연대는 더욱 절실하다.2025-04-19 | 조회 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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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민주당은 공허한 말들로 트럼프를 이길 수 없었다 — 그러나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은 이길 수 있다[편집자 주] 윤석열 친위쿠데타 이후 극우세력의 준동을 지켜보면서, 많은 이들이 극우세력의 (재)집권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그런 한국 상황은 미국에서 트럼프의 재집권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미국 의사당을 공격했을 때, 트럼프의 재집권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을 지난 이후 트럼프는 버젓이 재집권했고, 의사당을 공격한 폭도들을 사면했다. 미국에서 트럼프는 왜 그리고 어떻게 재집권할 수 있었는가?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도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반면교사를 얻기 위해, 레프트보이스의 관련 기사를 시일이 좀 지났지만 번역해서 싣는다. 히메나 베르가라(Jimena Vergara)와 시빌 데이비스(Sybil Davis) 2024년 11월 6일 대승을 거둔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돌아가 매우 반동적인 의제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다. 투쟁할 준비가 된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극우를 멈춰 세울 수 있다. 선거일 밤이 다가오면서,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누가 이겼는지 알기까지 며칠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주요 경합 주를 모두 제패하고 선거인단 및 일반 투표에서 모두 승리했다. 공화당은 상원과 하원을 모두 장악할 게 확실시되고 있다. 몇 달 동안 선거 운동을 벌인 끝에, 미래가 드러났다: 우리는 공화당이 대통령, 의회, 대법원을 모두 장악하는 보수적 삼권 분립에 직면해 있다.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우경화 현상이 나타났다. 파란(민주당) 주와 빨간(공화당) 주, 도시와 작은 마을에서 모두 트럼프의 득표율이 증가했다. 뉴욕과 같은 확실한 파란 주에서도 해리스는 1988년 이후 어떤 민주당 후보보다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동시에 트럼프는 투표율이 약간 낮아졌기에 2020년 바이든보다 적은 표로 승리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당파 투표율이 민주당 지지자 투표율보다 높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민주당 후보에 대한 열정이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우경화 현상을 경제 위기, 신자유주의의 위기, 그리고 민주당 위기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선거를 몇 달 남겨놓고 해리스를 후보로 내세운 민주당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에게 줄 게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트럼프의 압승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들에게 큰 위협이다.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 주에서 이미 목격한 바와 같이, 극우파는 이 힘을 이용해 이민자, 노동자 권리, 재생산 권리, 트랜스젠더 권리, 그리고 다른 민주적 권리에 대한 공격을 가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선거일 이후 어느 정도 절망감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지만, 우리는 트럼프와 그의 극우 동맹에 맞서 절망을 행동으로 바꾸고 조직해야 한다. 우리는 (민주당에 대한 지지로 전환돼 버렸던) 트럼프 첫 임기 때의 저항을 넘어 우파에 대항하는 진정한 운동, 즉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한다. 유권자 성향의 변화 유권자 인구 통계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쪽으로 이동한 정도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특히 젊은 남성, 흑인 남성, 라틴계 사이에서 지지 기반을 넓혔다(이 중 40% 이상이 트럼프를 지지했다). 30세 미만의 남성은 2020년 15% 포인트의 격차로 바이든을 지지하다가 13% 포인트의 격차로 트럼프를 지지했다. 트럼프는 공화당을 대학에 다니지 않은 노동자계급 유권자의 당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그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했다. 선거를 앞두고 성별 투표성향 차이에 대한 논의가 많았지만, 백인 여성의 다수가 트럼프를 세 번 연속 지지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실제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해리스는 전체 여성 속에서 10% 차이로 승리했지만, 2020년 바이든이 트럼프에게 14% 차이로 승리했던 것보다는 낮은 수치다. 반면, 트럼프는 전체 남성에서 바이든 때와 같은 차이로 승리했다. 중요한 것은 민주당이 임신중지권에 대한 지지를 승리의 비책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미주리주와 몬태나주 등 여러 주에서 임신중지권을 보호하기 위한 주민투표가 통과됐지만, 동시에 트럼프가 다수 득표를 했다. 플로리다주를 비롯한 다른 많은 주에서는 임신중지권 지지율이 트럼프 지지율보다 높았다. 이 사실은 임신중지권을 둘러싼 투쟁을 무기로 활용하는 것이 해리스의 여성 지지율을 높이는 데서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민주당이 임신중지권을 방어하기 위한 강력한 전국적 운동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임신중지권 확보에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지 못했다. 민주당은 임신중지권 이슈에 의존하여 2022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돌풍을 잠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민주당에 불리하게 바뀌었다. 트럼프가 임신중지권에 대한 공화당의 공식 입장을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임신중지권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변경은 매우 교활했다. 트럼프는 임신중지권을 “주(州)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움으로써,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임신중지권을 반대하는 건 아니라고 일부 유권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트럼프가 임신중지권 반대 세력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임신중지권에 관한 한 트럼프가 다른 공화당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가 재생산 권리를 공격해 온 당의 수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임신중지권을 실제로 보호하기 위해 민주당이 국가 차원에서 한 일이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트럼프가 해리스와의 토론에서 지적했듯이, 해리스가 서명하겠다고 약속한 임신중지권 복원은 민주당원들이 조직하기를 꺼려하는 상당한 계급투쟁 없이는 의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트럼프가 승리한 결과는 미국인의 다수(주민의 55%)가 이민을 억제하기를 원한다는 것도 보여준다. 이것은 미국 태생과 일부 이민 노동자 모두의 경제적 불안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두려움을 반동적인 입장으로 표출했다. 트럼프는 이민자들에게 가장 가혹한 입장을 가진 후보였다. “지금 당장 대량 추방”은 트럼프 집회에서 외치는 주요 구호가 되었다. 해리스가 이민 문제에 관해 오른쪽으로 멀리 이동했지만, 트럼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트럼프는 모든 것을 이민자의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의 정치경력을 쌓았기 때문이다. 해리스가 실패한 이유의 일부는 2020년 바이든 선거운동에서 친이민 정책을 펴려고 노력했다는 모순과 관련이 있다. 그때 민주당은 NGO들과 협력하여 이민자 권리 운동을 민주당으로 유입시키려고 노력했었다. 그 후, 바이든은 이민자에게 가혹한 탄압을 퍼부었는데, NGO들의 지도부가 방향을 상실하고 운동을 무력화하도록 성공적으로 이끈 뒤였기 때문에 바이든 정부에 맞서 싸울 힘이 없었다. 그러한 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반이민 감정이 고조되었고, 트럼프는 이민자들을 노동자계급을 괴롭히는 모든 문제를 뒤집어씌울 유용한 희생양으로 강력히 활용했다.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는 데 있어, 민주당은 트럼프가 선거운동의 기둥으로 삼은 이슈들에 대해서만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선거 결과는 그들이 트럼프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당으로 나서는 데서도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자코뱅>이 펜실베니아주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조사대상이 된 모든 정치적 메시지 중에서 민주주의에 관한 메시지가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민주당원들이 민주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거나 또는 직접 공격하고 있으면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라”고 메시지를 내는 것은 상당수 유권자에게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정부 기관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으며, 민주당원들이 매달리는 규범을 보호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 민주당의 위기 다수의 유권자들은 경제를 이번 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보았다. 선거 결과가 보여주듯이 다수는 트럼프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바이든은 코로나19 봉쇄 이후 경제를 안정시키고 반도체과학법 같은 몇 가지 주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일반 미국인의 경제 상황은 물가인상 때문에, 특히 식료품 같은 일반 소비재 가격의 상승과 주택가격 상승으로 인해 더욱 불안정해졌다. 이런 상황을 놓고, 민주당은 경제가 실제로는 잘 돌아가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트럼프와 공화당은 강하게 비난했다. 바이든의 2020년 선거 캠페인은 샌더스의 지지 기반을 민주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샌더스와 협상해야 했다. 바이든은 학자금 대출 탕감, 노조조직화 보호법 추진, 노조 제조업 일자리 귀환 등 일부 진보적인 정책으로 통치했다. 이에 비해 2024년 해리스의 공약은 초점이 없었고, 노동자계급보다는 중간계급을 겨냥했다. 해리스는 월스트리트 억만장자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이로 인해 노동자계급의 일부가 트럼프와 손을 잡게 되었고, 노동자계급과 민주당의 역사적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번 선거는 2008년부터 성장해 온 정치적 현상, 즉 노동자계급의 일부가 민주당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의 결과를 보여준다. 2016년에는 트럼프가 일부 러스트벨트 주에서 승리했지만, 이번에는 ‘블루 월’(민주당 우세 주들을 연결한 벽)이 무너졌다.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제 확고하게 공화당 지지자가 되면서, 정치에서 새로운 “학위 격차”를 만들어 냈다. 민주당은 노동자계급 및 사회운동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비록 바이든이 노동자들에게 호소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말이다. 수십 년 동안 신자유주의 정치와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표하지 않는 정치에 지친 노동자들은 더 이상 민주당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보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역동적인 운동은 이 점을 반영했다. 시온주의를 완전히 수용한 민주당은 팔레스타인 운동에게 사소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전당대회에서 팔레스타인 운동 대표에게 발언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집회에서 아랍계 미국인을 쫓아냈다. 그 결과, 해리스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지지자 없음’ 운동이 등장해 많은 아랍계 미국인들이 그녀에게 투표하기를 거부했다. 일부 아랍계 미국인들은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민주당은 2020년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이 자신을 지지하도록 이끌었던 것과 달리 팔레스타인 운동을 투표함으로 이끌지 못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과 민권 운동으로 청년들이 급진화되었던 것과 비슷하게, 오늘날 젊은 활동가들과 민주당 간의 단절이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 진보의원들 가운데 유일하게 해리스를 지지하지 않았던 라시다 탈리브가 자신의 선거구에서 해리스보다 더 많은 표를 얻어 당선된 사실은 적극적인 팔레스타인 지지 입장이 갖는 대중성을 보여준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활동가 기반을 멀리한 것은 해리스가 패배하게 한 이유의 일부였다. 유권자들의 경제적 두려움 앞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값비싼 전쟁에서 미국을 빼내겠다고 약속했다. 반면에 민주당은 세계 질서에서 미국의 역할에 관한 매파적 수사를 두 배로 늘렸다. 공화당 지지기반 내 중도층을 공략하기 위해, 해리스는 이라크 전쟁의 주모자 중 한 명이자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지른 자의 딸인 리즈 체니와 손을 잡았고, 트럼프는 미국을 값비싼 “영원한 전쟁”에서 빼내려는 후보로 자신을 그렸다. 해리스가 트럼프에게 패배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앞으로 몇 달 또는 몇 년 동안 논쟁이 계속될 것이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 분명히 실수를 저질렀고, 트럼프에 대한 두려움조차도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해리스는 “기쁨”, “자유”, “코코넛 나무” 같은 공허한 말들로 가득 찬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러면서 이민자 권리, 기후 변화, 군대, 트랜스젠더 권리 등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는 공화당원인 체니 같은 이들과 함께 하는 해리스의 “빅 텐트”는, 해리스를 초당파적 기득권 세력의 수호자로, 반면 트럼프를 그 거부자로 그려지게 했다. 요컨대, 오른쪽으로의 이동은 해리스에게 완전한 실패를 의미했다. 집권한 신우파 트럼프는 승리 연설에서 자신이 다가오는 임기 동안 대통령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권한은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트럼프의 지지 연합은 다양한 분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경제적 포퓰리즘을 원하는 노동자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확고한 극우파 이데올로그들이 있다. 임신중지권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에 불만을 가진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반면, 임신중지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다수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영향력을 얻기 위해 서로 알력다툼을 벌일 MAGA 운동의 다양한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다. 트럼프는 2016년과 2020년에 확보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거대자본들로부터 지지받고 있다. 트럼프가 이례적인 대통령 후보였고 자본의 중요한 부문이 해리스를 지지하고 기부했지만, 일론 머스크와 같은 일부 거대자본가들은 트럼프를 지지했다. 자본가들의 이러한 변화는 미국의 미래에 대해 제국주의 부르주아지 사이에 분열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안톤 재거는 <신좌파평론>에 이렇게 썼다. “두 정당의 사회적 구조는 2010년대 미국 정치 경제의 지각변동을 반영하고 있다. 녹색 재산업화라는 방향과 국내외 화석연료 생산이라는 방향 사이에서 갈등이 존재한다. 인플레이션과 싸운다는 방향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서 달러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 제공이라는 방향 사이에서도 갈등이 존재한다. 이 복잡한 상황을 중심으로 두 블록이 응집되었다. 한편으로는,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계급을 넘어선 탄소집약연합이 형성되었는데, 공화당의 기존 신보수주의 지지자들을 제거하는 대신 주변부 블루칼라 노동자들, 농촌의 소부르주아, 교외의 중간 관리자, 부동산 자본가, 암호화폐 상인, 실리콘 밸리의 우파, 1980년대 자유방임주의의 맹공격에서 살아남은 철강 생산자들을 끌어들였다. 레이건이 결성한 연합과 달리, 트럼프의 연합은 백인 대학 졸업생이 부족하지만 학위가 없는 백인들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트럼프의 연합은 미국의 헌법이 가진 반다수결주의적 특성 덕분에 엄청난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투표자 억제 수단에 의존하고 있다. 그 동원력은 이제 트럼프를 이용하여 주정부 기금에 대한 접근을 보장받고자 하는 포드 같은 기술 재벌에 의해 완화되고 있으며, 일부 노동 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공동 결정제도 및 단체 임금협상에 관심이 있는 당내 새로운 수정주의 우파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할 때, 앞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될 것은 더욱 극단적인 권위주의적 특징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정부다. 이를테면 법무부에 대한 통제 강화와 행정부의 권력 강화 시도가 있을 것이다. 자본의 더 큰 부문에 점점 더 호소력을 발휘하는 의제를 내세울 것이다. 이 의제는 금융 규제 완화, 국가와 교회의 분리 축소, 보호 무역주의, 그리고 민주적 권리 공격에 기반을 둘 것이다. 강력한 이민자 혐오 정책을 갖고 반이민 민병대를 부추기는 정부가 될 것이다. 이 정부는 “대 이스라엘”이라는 대량 학살 프로젝트를 계속 지원할 것이다. 가장 먼저 트럼프를 축하한 세계의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가 네타냐후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정부는 국제 동맹국들과 재협상을 시도하여 우크라이나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꿀 것이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트럼프는 반전 대통령이 될 수 없다. 그는 대신 중국과의 대결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화와 국경 군대 배치 등을 통해 미국 사회를 재편하고자 한다. 트럼프는 극단적 제국주의자로서 통치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에 맞서 싸우려면 전 세계 노동자 자매형제들과 연대하여 싸우는 강력한 노동자계급 국제주의가 필요하다. 억압에 대한 모든 위협과 함께, 트럼프는 미래의 국내 계급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 단계 주류 분석가와 정치인들은 계급투쟁을 고려하지 않는다. 최근 <에즈라 클라인 쇼>에서 게리 거스틀은 신자유주의의 구질서가 사라졌지만 아직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것은 “낡은 것이 죽어가지만 새로운 것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그람시의 유기적 위기 개념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그러나 클라인과 거스틀이 놓치고 있는 것은 계급투쟁이 상황을 규정하고 급격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변화하는 상황은 선거를 통해 표현되었지만, 거리, 학교, 직장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이와 같은 계급투쟁의 배제는 논리적으로 트럼프가 반인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조치를 반대 없이 강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이러한 조치를 방해하고 중단시킬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 임기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노동자계급의 행동에 달려 있다. 트럼프의 복귀 앞에서, 민주당은 노동조합 및 사회운동 관료들과 공모하여 광범위한 인민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스스로를 재구성하려고 할 것이다. <자코뱅>과 DSA는 민주당을 노동자계급과 좌파에 더 가깝게 재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2016년과 2020년 샌더스 차단이 보여주었듯이 성공적이지 못했다. 또한 신우파가 등장하는 상황에서 좌파가 방향을 잃게 하는 데 일조했다. 민주당은 자본과 자본주의 체제에 묶여 있기 때문에 트럼프와 극우파에 맞서는 데 필요한 투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이번 선거가 우경화를 보여주었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적인 요소도 있다. 민주당과 결별하고 좌파로 향하는 세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운동은 아직 사회운동의 무덤으로 이끌려 가지 않았고, 이로 인해 정권과 대학 내 동맹세력은 이를 억압하기 위해 더욱 가혹한 전술을 사용해야만 했다. 집단학살이 계속되면서, 이 운동이 다시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마도 트럼프가 주도하는 탄압적인 조치에 맞선 더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하면서 말이다.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 공격 이후 오랜 동면으로부터 다시 깨어나는 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새로운 노조들이 결성되고, 투쟁적인 파업들이 진행되고 있으며, 노동자들이 노조를 단순한 생계유지 이상의 것을 위한 투쟁수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좋은 징조이며, 상황을 분석할 때 함께 고려해야 한다. 관료들이 이런 투쟁을 막으려 할 것이지만, 현장 노동자들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노동조합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다. 트럼프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노동자계급과 사회운동에 있다. 우리가 민주당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계급투쟁을 함께 조직할 수 있다면, 트럼프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계급투쟁이 유기적으로 출현할 수 있는 격동의 시기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시기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낡은 것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계급투쟁은, 만일 우리가 조직해 낸다면, 새로운 무언가의 산파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파에 대항하는 공동전선만이 아니라 우리의 투쟁을 하나로 묶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사회주의 강령을 가진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정당이 필요하다. (원문) https://www.leftvoice.org/the-democrats-couldnt-beat-trump-with-hot-air-and-coconut-trees-an-organized-working-class-can/2025-02-06 | 조회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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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을 끌어내리고 이주민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힘을 모으자!사진=민주노총 전북본부 제공 지난 11월 8일 미등록 이주아동 출신 32살 노동자 강태완씨가 전북 김제의 특장차 생산업체 에이치알이앤아이(HR E&I)에서 10t짜리 건설기계 장비와 굴착기 사이에 끼여 목숨을 잃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인 어머니는 경찰에게 붙잡힐까 두려워 주검이 안치된 병원 밖을 맴돌며 울었다. 너무나 비극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바늘구멍은 뚫었지만, 빛은 없었다 강태완씨는 1998년, 6살에 몽골에서 어머니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와 23년간 이주아동, 이주청년으로 살았다. 그는 체류자격이 없다는 불안감을 안고 청소년기를 버텨왔다.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언제든 강제출국될 수 있다. ‘재학생 강제퇴거 유예’ 지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진학도 취업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강태완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10년간 비자 없이 이삿짐센터와 공장에서 일하며 버텨왔다. 2021년 몽골로 자진출국한 후 2022년 단기 체류 비자로 한국에 다시 들어온 강씨는 구체신청을 거쳐 유학(D-2) 체류자격을 받을 수 있었다. 이 기간에 겪은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다. 몽골 정부는 유학비자는 한국에 가서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한국 정부는 몽골에서 유학비자를 받아와야 한다고 했다. 여러 활동가의 도움으로 간신히 유학비자를 얻고 전문대를 나온 강태완씨는 김제의 HR E&I에 취업했다. 정부와 지자체가 ‘지정된 인구감소 지역에서 5년 이상 거주’하면 취업비자를 건너뛰고 곧바로 거주비자를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지역특화형 비자(F2R)로, ‘5년 거주 의무’라는 족쇄가 있는 비자이지만 강태완씨는 이제야 제대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그는 입사 8개월 만에 중대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자본은 이윤축적을 위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전 세계 노동자민중을 착취해 왔다. 자본이동의 자유에 비하면 노동자들은 이동의 자유가 너무나 좁다. 이주민들은 개별 국가들이 설치한 높은 장벽과 좁은 관문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정주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 강태완씨도 힘겹게 이 높은 장벽과 좁은 관문, 즉 ‘바늘 구멍’을 뚫었다. 그런데 애초에 이렇게 높은 장벽과 좁은 관문이 왜 필요한가? 이러한 정부의 이주(노동) 정책은 오로지 자본가들의 편의를 위해서 도입됐다. 그렇기에, 정부는 이들에 대한 기본권을 제한하는 내용을 덕지덕지 갖다 붙였다. 고용허가제 안의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대표적인 예다. 바닥 향한 경쟁 막아내자 법무부의 미등록 이주아동 조건부 구체대책이 2025년 3월에 끝난다. 강태완씨는 사고가 나기 몇 달 전 구제 대책을 끝내지 말라는 캠페인 지지 영상을 촬영했다. 15년 이상 체류, 중·고교 재학, 고등학교 졸업 등 일정한 요건을 충족할 경우 임시체류자격(G-1 비자)를 부여하는 제도다. 모든 미등록 이주아동의 차별 없는 삶을 위해서는 구제대책의 상시화만이 아니라 ‘체류기간, 공교육 이수’라는 족쇄도 없어져야 한다. 유족 측은 브레이크 기능도 없는 장비를 경사로에서 후진시키면서 뒤에 고소차들까지 줄지어 세워둔 것을 끼임 사고의 중요한 원인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사측은 사고의 원인을 태완씨에게 돌리며 아직까지 공식적인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 재발방치 대책과 산재처리 협조 요구도 묵살하고 있다. 이주운동 단체들과 활동가들이 2024년 12월 5일 HR E&I 본사 앞 규탄집회와 원광대병원 앞 추모제를 열었다. 이주민과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바꾸지 않고서는 선주민과 정주노동자의 열악한 현실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열악한 현실이 노동자 민중을 바닥 향한 경쟁으로 내모는 강력한 압력이기 때문이다. 모든 미등록 이주아동의 합법화, 모든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기본권을 위해 힘을 모으자. 고용허가제를 폐지하고 노동허가제를 쟁취하자.2024-12-06 | 조회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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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법은 달라도, 부품 취급은 똑같네[편집자 주] 일본자본 닛토덴코의 먹튀폐업에 맞서 고공농성을 300일 넘게 전개하고 있는 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들이 일본 본사에 책임을 묻기 위해 원정투쟁을 떠난다. 수많은 외투자본이 한국에 들어와 노동자를 착취하다가 민주노조가 결성되면 공장을 일방적으로 청산하고 먹튀한 역사를 반복해왔다. 일국을 넘어선 공장폐쇄 결정 앞에 많은 민주노조가 무너져왔다. 그래서 외투자본의 먹튀에 맞선 투쟁은 국제적일 수밖에 없다. 기고자는 먹튀폐업에 맞서는 옵티칼하이테크지회의 일본원정투쟁을 기록해 전하려 한다. 일본원정투쟁 이틀 차, 첫날은 비행기, 기차, 지하철을 타고 꽤 먼 길을 오느라 하루를 다 썼다. 지난밤, 자려는데 느낌이 왔다. ‘내일 재밌는 일이 생길 거 같아.’ 조금 신이 난 채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다같이 아침 먹고, 비타민과 홍삼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고 나왔다. 종이비행기로 날린 항의 오늘은 ‘수도권지역 유니온네트워크 일일 행동’의 날이다. 일본의 일반노조 동지들이 닛토덴코의 도쿄 본사 방문을 시작으로, 수도권 투쟁 사업장들을 돌며 연대하는 날이다. 일정표를 보니까,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하는 ‘차별 없는 서울 대행진’이랑 비슷했다. (이지영 사무장이 보안에게 '항의서한 받을 사람을 데려와'라며 따지고 있다.) 시나가와역에서 약 70명의 동지를 만나 닛토덴코 영업 본사로 갔다. 도쿄 시나가와역에서 약 5분 거리였다. 아주 높은 빌딩의 26층이었다. 밖에서 간단히 상황 설명 후 약 20명이 26층으로 올라갔다. 가보니, ‘아! 여기구나’ 싶었다. 옵티칼 조합원들이 본사를 찾아갔다가 항상 보안에게 막히는 곳이었다. 이번에도 보안 셋이서 로봇같은 얼굴로 막고 있었다. 이지영 사무장님은 “이번에 우리가 온 게 10번째에요! 해결될 때까지 계속 올 거라고요!”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일본 동지들이 순식간에 이곳저곳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분위기가 거세졌다. “동지들이 ‘비켜라!’, ‘담당자 나와라!’라고 말하고 있어요” 통역을 담당해준 사코다상이 설명해주었다. 우린 다같이 “다카사키 히데오 나와라!”를 외쳤다. 약 20분간 소리를 지르며 싸웠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 앞엔 닛토덴코가 고용한 것도 아닌, 건물 경비 용역이 3명에서 4명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닛토덴코 직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항의서한을 그 자리에서 지원모임 대표 동지가 읽었고, 이지영 동지가 그걸 종이비행기로 접었다. 슝- 종이비행기를 던지고 나왔다. 일본 동지들은 닛토덴코는 다른 일본 기업에 비교해도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나쁘다고 했다. 일본 동지들은 이지영 동지에게 종이비행기가 너무 좋았다며, 다음엔 항의서한을 훨씬 더 많이 뽑아서 가져오자고, 다같이 비행기를 던지자고 했다. 우린 닛토덴코가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기 전까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매일 찾아갈 거다. 필요하다면 26층 전체가 종이비행기로 가득 찰 만큼 잔뜩 접어갈 거다. (닛토덴코 항의행동 후 나와서 지회 깃발을 몸에 두른 이지영 사무장) 와, 일본은 법이 좋네 이제부터 우리가 연대할 차례였다. 처음 간 곳은 ‘가이치 학원’이란 사학재단이었다. 초/중/고/대학교를 모두 가진 사립재단은 선생님의 임금을 떼어먹고 있었다. 일본은 법적으로 한 달에 최대 60시간까지 야근을 할 수 있는데, 투쟁 당사자는 60시간 야근을 하고도 수당을 전혀 받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수업 준비를 위해 사용하는 시간도 수당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사코다상은 우리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한국은 근로기준법이죠? 일본은 노동기준법이에요. 일본은 국적이나 사업장 규모와 상관없이 모두 노동기준법을 적용받아요. 만약 ‘불법체류자’라도 법적 권리가 있어요. 그런데도 일본에도 ‘빨갱이’가 노조를 한다는 인식이 있어서 사업장에 노조를 만들기 어려워요. 그래서 저 선생님은 혼자서도 가입할 수 있는 지역 일반노조에 들어온 거에요. 이런 식으로 사업장에서 혼자 투쟁하는 경우가 일본에 많아요. 일본은 일반노조가 아주 중요해요.” (한 동지가 가마치 사학재단의 부교장에게 항의서한을 주며, 수당을 지급하라고 말하고 있다.) 흥미로웠다. 5인 미만 사업장에도 법적으로 ‘노동’기준법이 전부 적용된다니. 일본은 법이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당사자가 주장하는 수업 준비 시간과 야근에 대한 수당은 모두 법적으로 주어야 하는 것인데, 사립재단이 대놓고 위법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부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니까 사코다상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이랑 비교하니까 재밌죠? 근데 한국보다 못한 것도 많아요. 그래서 국제연대가 중요해요. 서로가 서로한테 도움이 되는 게 국제연대에요.” 화려한 표현은 아니지만, 와닿는 말이었다. 이지영 사무장님은 여기선 내가 발언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이훈입니다. 한국에도 여기와 같은 곳이 있습니다. 강원대학교입니다. 강원대학교는 한국어 교원(외국인 학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육노동자)에게 수업 준비 시간에 대한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법원까지 판결이 났는데도 여전히 수당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우린 돈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이런 돈을 줘도 너는 일할 수밖에 없잖아’라며 우릴 무시하는 그 태도가 분노스러운 겁니다.” 일본 동지들이 굉장히 기뻐하며 발언을 들어주었다. 끝나고 우린 당사자에게 가서 “We support your fight”라며 약간 틀렸을지도 모를 문법으로 응원의 마음을 전했다. (가마치 학교 앞에서 일반노조의 이주노동자 조합원들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고 있다.) 부품 취급하는 건 똑같네 다음으로 간 곳은 JA라는 일본농업협회중앙회였다. 외국인 파견노동자가 포크레인을 운전하다가 산재를 당했다고 했다. 당시 포크레인으로 1톤 정도의 쌀을 옮기고 있었는데, 포크레인이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쌀이 쏟아지면서 노동자를 덮쳤다. 해당 노동자는 어깨를 다쳐서 산업재해 10급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파견업체는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노동자를 탓하며 그를 해고했다. 배/보상금도 없었다. 원청인 농협중앙회는 아예 교섭에 나오지도 않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원래 무거운 걸 들라고 만들어진 게 포크레인인데, 그게 어떻게 1톤에 무너질 수가 있나. 노동환경이 너무 안 좋았던 게 분명한 상황”이라며 화를 냈다. 또한, 외국인 노동자의 기여 성과는 이미 수치로 드러났는데도 전국 곳곳에서 비슷한 상황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고 원통함을 표현했다. 한국제강 생각이 났다. 1톤이 넘는 철판을 들어 올려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을 하던 하청노동자였다. 들어 올린 끈이 끊어지면서 철판이 노동자의 다리를 덮쳤고 과다출혈로 운명을 달리했다. 원청 한국제강의 사장은 판결로 1년 징역형이 나오자, 형량이 과도하게 크다며 항소했었다. 비슷하다. (한 일본 동지가, 파견노동자의 상황과 전반적인 일본 노동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우린 모두 다르고, 전부 똑같다 국제연대란 뭘까. 고작 하루 일본을 돌아다닌 내가 무얼 알겠나 싶지만, 그럼에도 생각해본다. 아마도 국제연대의 시작은 ‘아, 여기도 이래?’라는 공감과 놀라움의 시작이 아닐까. 일본과 한국은 법, 언어, 분위기가 모두 다르지만, 핵심은 같다. 노동자는 무시당하고 있었다. 법적으로 권리가 있음에도 무시당하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법, 언어, 분위기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거 같다. 우리 모두가 무시당하고 있고, 우리는 그걸 참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국제연대의 중요한 시작점이 아닐까. (닛토덴코 본사 건물 앞에서 이지영 사무장, 이훈, 배태선 교육국장이 지회 깃발을 들고 서있다.)2024-11-14 | 조회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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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파 저지에 매몰돼 신인민전선을 지지한 프랑스노총(CGT) - 계급적 원칙을 저버린 잘못된 사례[편집자 주] 오는 11월 27~29일 민주노총 정책대회에는 프랑스 노동총동맹(CGT) 초청강연이 예정돼 있다. CGT 대표단은 ‘노동자 정치세력화’ 세션에서 <2024 프랑스 조기 총선과 프랑스노총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에 나설 예정이다. 민주노총 집행부가 CGT를 초청한 것은 무엇보다 프랑스 6~7월 총선에서 신인민전선을 지지한 CGT의 사례를 활용해 한국의 4월 총선에서 민주당과 진보당의 위성정당 선거연합을 지지하고자 했던 자신들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7월 19일자로 발행한 <프랑스 총선은 과연 극우파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는가?> 기사에서 신인민전선을 둘러싼 배경과 전개과정을 소개하면서 신인민전선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오늘 소개하는 10월 13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2024 정치캠프 <프랑스 신인민전선, 극우파 성장에 맞선 대안인가?> 세션에서 프랑스의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 <연속혁명> 활동가 조아킴의 발제문은 CGT의 신인민전선 지지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좀 더 생생하게 들려준다. CGT는 300만 노동자가 총파업에 참여했던 2023년 연금개악 반대투쟁 때 마크롱 정부의 연금개악 강행을 분쇄하기 위해 무기한 총파업으로 전진하는 것을 거부한 채 관성적인 하루파업에 안주하다가 역사적인 투쟁을 패배로 이끌었다. 그런데 2024년 총선에서는 극우파 집권을 저지하고 신인민전선의 총선 승리를 지지하기 위해 동네마다 대중 집회를 조직하는 등 2023년 총파업 때보다 더 열심히 활동했다. 그 신인민전선의 한 축에 과거 집권시 노동법을 개악하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집행했던 사회당이 버젓이 자리잡고 있음에도 말이다. 1.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극우의 부상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네, 우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발제를 하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세계적인 극우 부상의 근원은 자본주의 위기 심화에 있다고 보는데요. 프랑스는 좋은 예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프랑스 자본주의는 깊은 위기에 빠져 있는데요. 매년 GDP의 6%에 달하는 큰 재정적자를 겪고 있습니다. 오늘날 프랑스 자본주의의 생산성이 매우 낮아서, 생존을 위해서는 많은 재정을 경제에 투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프랑스 자본가들이 노동법과 노동권을 공격하는 데서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이웃 나라들에 뒤처진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 정치적, 국제적 측면에서 위기가 누적돼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제국주의는 최근 북서 아프리카 지역에서 패배를 겪고 있습니다.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도 제각각의 위기들을 겪고 있다고 봅니다. 미국이나 독일처럼 극우가 전진하고 있는 나라들의 상황이 다 비슷한 것 같습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연합 전체에서 노동유연화의 장기적 추세가 나타났고, 공공 서비스가 붕괴되었으며, 많은 반사회적 정책으로 인해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생활여건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러한 사회적 여파 속에서 프랑스에서는 기존에 중심적 역할을 하던 자본가정당들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우파인 공화당과 중도좌파인 사회당을 말하는데요. 두 당은 지난 70년 동안 모든 대통령을 번갈아 배출했습니다. 하지만 2년 전인 2022년 대선에서 공화당은 4%, 사회당은 1%만을 득표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극우파 국민연합(RN)이 빠르게 성장해 왔습니다. 마크롱이 이끄는 새로운 극중도파 정당도 등장했습니다. 마크롱은 사회당과 공화당에서 사람들을 모아 순수한 신자유주의 정당을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좌익 포퓰리즘을 표방하는 신개량주의, 즉 멜랑숑이 이끄는 불복프랑스(LFI)도 성장해 왔습니다. 마크롱은 2017년에 대통령이 되면서 노동자계급을 잔혹하게 공격하여 노동자의 소득을 대량으로 자본에게 이전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라는 임무를 금융자본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이에 맞서 2019년에는 노란 조끼 시위라는, 새로운 종류의 정치적 계급투쟁, 거대한 전국적 계급투쟁이 펼쳐졌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정치적 관점을 갖지 못해 때때로 극우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마크롱주의와 같은 새로운 정치형태조차도 매우 빨리 낡은 게 되었습니다. 2022년 대선에서 마크롱은 재선되었지만, 총선에서는 의회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마크롱은 권력을 독재적으로 행사했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 예산을 2년 연속 의회 투표 없이 대통령의 긴급명령으로 통과시켰습니다.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독일에서, 남미에서 극우를 부상케 한 요소들과 형태들은 매우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 비슷한 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다수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권위주의와 억압적인 인종주의 정치가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필연적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냉전 종식 이후 자유 민주주의는 삶의 개선이라는 변화의 환상조차 더 이상 제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노동자대중의 삶에 더 이상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수 없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들은 동의를 끌어내는 능력을 점점 상실하고 있습니다. 2024년 8월 31일 극우 ‘독일을위한대안’ 유세 현장 EPA-EFE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많은 나라에서 펼쳐진 대중운동을 통해 노동자계급을 공격할 수밖에 없는 자본가계급의 모순을 보았습니다. 계급투쟁이 고조되면서 자본가들은 더욱 권위주의적인 질서를 세우기 위해 극우를 선택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동시에 극우 정당들이 대중적 기반을 넓혀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위기 속에 개량주의의 엄청난 무기력이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날 개량주의는 '개량 없는 개량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프랑스 사회당처럼 노동자들을 직접 공격한 경우는 개량주의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프랑스에서 '개량 없는 개량주의'의 전형은 불복프랑스입니다. 그리고 혁명운동에 엄청난 위기가 있습니다. 피착취 대중을 위한 혁명조직이라는 관점이 오늘날 세계에는 명확하게 자리잡혀 있지 않습니다. 자본가를 공격하고 부자를 공격함으로써 노동자 민중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전망은 그럴듯하지만 매우 비현실적인 전망으로 비쳐집니다. 어느 프랑스 사회학자가 극우파 국민연합에 투표한 사람들에 대해 조사한 게 있습니다. 그들은 부자와 사장들을 미워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외국인, 이주민, 실업자들도 미워합니다.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하락을 피하기 위해 더 쉽게 공격하고 약탈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극우의 부상은 이 모든 요소들과 피착취자들의 거대한 분열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2. 최근 프랑스에서 극우파 국민연합이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은 무엇이고 왜 그런가요? 국민연합은 이 글로벌 역학의 일부입니다. 예외는 아닙니다. 국민연합(RN)의 전신인 국민전선(FN)은 1970년대에 창당되었습니다. 네오파시스트 집단이 선거에 나가기 위해 만든 정당이었습니다. 2002년 대선에서 마린 르펜의 아버지인 장마리 르펜이 결선투표에 진출해 우파인 시라크와 맞붙었습니다. 장마리 르펜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이 역사의 사소한 일부라면서, 홀로코스트와 나치즘을 방어했는데요. 정말 도발적인 파시스트 스타일이자 파시스트 어법이었습니다. 그의 딸 마린 르펜은 2011년에 당의 지도권을 물려받은 뒤, 당의 악마적 이미지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어, 파시즘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는 자신의 아버지와 그 주변 인물들을, 유권자를 얻어 선거에서 이기는 것을 방해한다며 당에서 축출했습니다. 한편으로 마린 르펜은 아버지의 초자유주의적 입장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소소한 사회적 공약들을 내걸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마린 르펜은 유로존 탈퇴를 옹호하면서, 빚을 갚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마린 르펜은 점점 더 금융자본의 요구를 존중하는 경제 강령을 채택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마린 르펜은 2023년 마크롱의 연금개혁에 반대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선거 때에는 "연금개혁을 원하지 않지만 마크롱이 한 개혁을 깰 수 있는 재정 상황이 아닐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마린 르펜은 자본의 규칙을 존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마린 르펜은 2017년 대선에서 결선투표에 진출해 마크롱과 맞붙었고, 2022년 대선에서도 다시 한 번 결선투표에서 마크롱을 상대했습니다. 마린 르펜은 2014년부터 유럽연합 선거에서 세 번 연속 최다 의석을 확보했습니다. 그래서 큰 영향력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거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국민연합은 지역적 존재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국민연합은 영향력 있는 주류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자본가들도 국민연합에 거리를 두었습니다. 국민연합은 2017년 대선 결선투표에서 800만 표를 얻었지만 이어진 총선에서는 8명의 의원만을 당선시켰습니다. 기존 주류 정당에 유리한 프랑스의 비민주적인 선거 시스템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2년 전에 바뀌었습니다. 이제 장벽은 무너졌고 국민연합은 2022년 총선에서 의원 89명을 당선시킨 정당으로 성장했습니다. 올해 6월에 치러진 유럽연합 선거에서 국민연합은 프랑스의 100개 주 가운데 96개 주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지역에 깊이 뿌리내린 정당이 되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2024년 프랑스 국민연합은 유럽연합 선거에서 압승했다 Reuters 의회 해산 후 7월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국민연합이 126명의 의원을 확보했습니다. 공화당 출신 동조세력을 포함할 경우 142명의 의원을 확보했습니다. 국민연합의 부상은 마크롱에 대한 엄청난 증오의 결과입니다. 마크롱은 르펜을 자신의 적, 자신의 맞수로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르펜은 마크롱에 대한 차악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자본가들의 일부가 이제 르펜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르펜이 자본가들의 첫 번째 바람은 아닙니다. 여전히 금융자본의 첫 번째 바람은 마크롱입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마린 르펜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조르당 바르델라는 국민연합의 당 대표인데요, 28세로 정말 젊습니다. 그는 프랑스 정치의 새로운 스타와 같습니다. 바르델라는 르펜보다 더 경제계에 신뢰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부채를 갚고 재정적 안정성을 보장할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자본가들이 그를 좋아합니다. 마크롱은 이민자들에 대해 소규모 파시스트 집단이 사용했던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인종차별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자본가들이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향해 급진화하면서, TV, 유튜브, 신문에서 그에 관한 공개 토론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대 대체 이론'(Great Replacement)이라고 백인이 유색인에 대체될 수 있다는, 과거 트럼프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애용하던 극우파 논리가 있는데요. 이게 지금은 공화당을 비롯한 우파들의 일반적인 논리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에 뱅상 볼로레라는 억만장자가 있는데요, 그는 서아프리카의 모든 항구와 공항, 철도를 통제하여 거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볼로레는 여러 TV 채널을 사서 에릭 제무르나 마린 르펜 같은 극우파들에게 완전히 복무하게 했고, 종교적 방송을 하거나 이주민 추방을 촉구했습니다. 최근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많은 일들이 상황을 더욱 가속하고 있는데요. 불복프랑스와 장뤼크 멜랑숑을 겨냥한 매우 거대한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멜랑숑이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하마스가 테러 조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은 멜랑숑을 반유대주의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방송에서는 멜랑숑이 네오나치라고 말했습니다. 국민연합의 전신인 국민전선은 나치 친위대 출신들이 함께 참여해 만든 정당인데요. 그렇게 출발한 국민연합이 이제 자신을 프랑스 내 유대인의 수호자라고 내세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정권 전체가 마린 르펜이 장뤼크 멜랑숑보다 유대인을 더 잘 보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금 극우파가 어떻게 해서 매우 존경받는 사람들로 여겨지고 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과거에 사람들은 마린 르펜이 아돌프 히틀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린 르펜은 여성, 고위 임원, 연금 수급자 등에서 다양한 유권자층을 확보했습니다. 과거에는 르펜과 국민연합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3. 오늘날의 극우와 1930년대 파시즘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훌륭한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그 질문을 하고 있고, 사실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선, 우리는 둘 사이에 강력한 유사점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세계 자본주의 위기와 자본주의 국가들의 해소되지 않는 정치적 위기라는 구조적 추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 위기, 무역 전쟁, 군사적 갈등으로 이어지는 추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극우가 번성할 수 있는 토양이 되고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오늘날 모든 극우 정당은 1930년대의 파시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원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국민연합, 이탈리아의 '이탈리아 형제들', 스페인의 VOX에 대해 모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민연합(RN)의 전신인 국민전선(FN)은 1940~50년대의 구세대 파시스트들과 1960년대 알제리 독립에 반대한 극우 테러리스트들의 융합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소규모 파시스트 폭력 집단들과 네오나치들이 국민연합 주변을 돌며 국민연합 안팎에서 일자리를 얻고 있습니다. 오늘과 어제의 극우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실은 그들이 대중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노동자계급 조직이 당시만큼 강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이 더 쉽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의 강력한 노동조합과 노동자계급 정당은 극우를 봉쇄하는 노동자계급의 힘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조직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노동자계급은 그때보다 훨씬 더 분할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도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마르크스주의 관점에 입각한다면 국민연합을 파시스트 조직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파시즘은 1917년과 이후의 혁명적 물결에 대한 반혁명적 대응이었습니다. 파시즘은 농민, 상인, 장인, 지식인, 학생 등 사회적 지위하락으로 위협받는 소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군사적 대중운동이었습니다. 트로츠키는 당시 파시즘을 자본가계급의 내전을 위한 전투 조직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대중운동으로서 파시즘은 피켓 라인을 공격하고, 노동자 건물에 불을 지르고, 거리에서 노동조합원을 죽이고, 혁명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를 죽였습니다.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기 3년 전인 1930년에 히틀러는 이미 10만 명의 무장대원을 보유했습니다. 1년 전인 1932년에는 40만 명의 무장대원을 보유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자본가계급의 통상적인 통치 방식과 구별됩니다. 자본가계급의 일반적인 폭력과 파시즘을 통해 사용하는 폭력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자본가계급은 극심한 위기의 시기에만 최후의 해결책으로 파시즘을 부릅니다. 자본가계급은 자신의 통치를 위해 군주제를 취할 수도 있고, 대통령제를 취할 수도 있으며, 의원내각제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가계급은 자신의 통치를 위해 노동자 조직에도 의존합니다. 자본가계급은 분명히 노동자 조직을 공격하고 억압하지만, 또한 노동자 조직에 의지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 관료주의는 노동자 운동이 노동자 엘리트와 불안정 노동자 사이에서 분열되게 하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부르주아 합법성의 틀 안으로 가두려고 합니다. 자본가계급은 때때로 노동자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일부 노조 관료들을 자본주의 관리경영에 끌어들이기도 합니다. 자본가계급이 파시스트를 권력에 부를 때는, 조직된 노동자 운동을 근절하기 위해서입니다. 자본가계급은 더 이상 노동자 운동에 의지할 수 없을 때, 노동자 운동을 파괴할 때가 왔다고 말합니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모든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을 청산하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모든 맹아를 파괴하는 것이 권력을 잡았을 때 파시즘의 역사적 역할입니다. 그러한 조직들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 안에 있는 아주 작은 사회주의적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으로 나아가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요소들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조직들, 즉 노동조합, 협동조합, 다양한 협회, 또는 노동자 정당은 노동자 투쟁, 노동자 권력,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의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국민연합을 비롯한 유럽 극우 정당들은 현재 노동자 운동을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의회 바깥에서 폭력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선거용 운동체고, 견고한 조직도 없습니다. 특히 국민연합의 경우 이 점이 분명한데, 그들은 때때로 프랑스 전역에 후보를 내세우는 데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극우 또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특징인 조직의 약화라는 양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들 또한 예전 같은 대중조직이 없습니다. 노동자 운동과 마찬가지로요. 아마도 '독일을 위한 대안'(AfD)에서 파시즘으로 진화하는 첫 번째 경향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금 분명히 파시스트적 어법을 가지고 있는데요. 미래에 더 노골적인 파시스트로 진화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적어도 국민연합은 외부에서 체제를 전복하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제로의 통합을 더욱 가속시키고자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본가계급이 지금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조직을 정말로 필요로 한다는 점입니다. 비록 그들에 적대적일지라도 말이죠. 프랑스에서 우리는 노란 조끼 운동을 겪었으며, 연금 개악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일으킨 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종류의 총파업이나 더 큰 규모의 운동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다는 점에서 마크롱이 노조 관료들에게 많은 감사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국민연합이 집권하더라도 노동조합 관료체계를 파괴하라는 임무를 자본가계급이 부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으로서는 자본가계급에게 노동조합 관료체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만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국민연합은 모든 노동자 조직을 공격하고 제거할 힘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국민연합이 집권한다면, 분명히 권위주의와 잔혹한 경찰 폭력이 증가할 것이고, 노동자 조직과 여성의 권리, 외국인에 대한 공격이 늘어날 것이며, 소규모의 진짜 파시스트 집단에게도 격려가 될 것입니다. 4. 7월 프랑스 의회 선거에서 극우 국민연합이 이길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좌파 신인민전선이 우위를 점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선거 후 어떤 정치적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까? 유럽의회 선거에서 큰 패배를 당하자, 마크롱은 바로 국회를 해산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은 마치 군주처럼 국회를 해산할 수 있습니다. 마크롱이 14%를 득표한 반면, 르펜은 31%를 얻었습니다. 역대 프랑스 대통령이 집권 도중에 이렇게 엄청난 패배를 당한 적은 없었습니다. 마크롱은 선거를 준비할 시간으로 고작 2주만 주면서 총선을 소집했습니다. 그의 도박은 좌파 정당들이 자신에 맞서 연합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마크롱은 총선을 국민연합 대 마크롱 정당의 2파전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사람들이 화가 나서 그렇게 투표했지만, 총선에서는 자신에게 투표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2022년 총선 때 불복프랑스는 꽤 강했습니다. 몇 주 전에 대선에서 멜랑숑이 아슬아슬 3위를 차지했고 총선을 앞두고 사회당, 녹색당, 공산당과 연합을 결성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연합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불복프랑스는 그 연합을 통해 사회당이 정당성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사회당은 프랑수아 올랑드가 대통령 시절 노동자를 공격한 것 때문에 완전히 미움을 받았고 대선에서 단지 1%만을 얻었는데, 이제 좌파의 대가족 속으로 다시 통합되었습니다. 2022년에 결성된 연합의 대가는 불복프랑스의 강령을 약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불복프랑스의 강령은 반자본주의 강령은 아니고, 반신자유주의 강령이자 프랑스 제국주의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강령입니다. 미국 제국주의를 따르지 않으면서 프랑스의 독자적인 길을 찾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멜랑숑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고, NATO도 지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무기를 주는 것도 거부합니다. 그래서 2022년에 결성된 이 동맹은 다른 이유도 있지만 주로 국제정책에서의 차이 때문에 1년 뒤에 깨졌습니다. 사회당과 녹색당이 친NATO, 친미 성향인데 반해, 불복프랑스가 프랑스 제국주의의 자율성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 연합이 깨진 상태였기 때문에, 마크롱은 의회를 해산할 경우 마크롱과 르펜의 2파전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마크롱의 의회 해산은 극우파에게 의회를 넘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크롱의 도박은 실제로 르펜에게 의회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금 재정 상황이 너무 나쁘기 때문에 르펜이 권력을 잡아도 소진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3년 후 대선은 다시 자기편으로 넘어올 것이라고 마크롱이 계산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도적 좌파는 며칠 만에 통합에 성공했고, 신인민전선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2022년 연합과의 차이점은 사회당이 직전 유럽의회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제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회당은 강령과 후보자 선정에 더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를 들어, 전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가 신인민전선 후보로 나서서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크롱의 보건부 장관이 사임하고 사회당에 가입한 뒤에 신인민전선의 후보로 나섰습니다. 그는 마크롱의 연금 개악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노동자들에게는 완전히 계급의 적이죠. 하지만 신인민전선의 후보가 되었습니다. 대통령 시절 노동개악을 주도한 올랑드는 2024년 총선에서 신인민전선 후보로 당선되었다 AFP 결국 국민연합은 선거에서 이기지 못했습니다. 가장 많은 표를 얻었지만,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1차 투표에서 전통적 우파인 공화당이 100만 표를 얻었습니다. 극중도 마크롱주의자들은 600만 표를 얻었고, 좌파 신인민전선은 700만 표를 얻었으며, 극우파 국민연합이 1,000만 표를 얻었습니다. 여기서 이른바 공화국 전선이 작동했습니다. 극우파에 맞서 이른바 모든 공화주의 세력이 단결한 거죠. 국민연합에 맞선 신인민전선과 마크롱주의의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국민연합 후보가 1위를 차지한 모든 선거구에서 3위를 한 신인민전선 후보나 마크롱주의 후보가 2위 후보에게 의석을 주기 위해 후보를 사퇴했습니다. 끔찍한 이민법을 만든 마크롱의 내무부 장관 제랄드 다르마닌이 이 전술을 통해 선출되었습니다. 연금 개악을 밀어붙인 총리였던 엘리자베스 보른도 신인민전선의 양보 덕분에 선출되었습니다. 총선 이후 프랑스에서는 의회가 완전히 조각났습니다. 우호 세력을 합쳤을 때, 신인민전선이 193석, 마크롱주의자들이 166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민연합이 142석, 공화당이 39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화당의 작은 의석을 기억하세요. 왜냐하면 그들이 지금 정부를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좌파 성향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선거에 임했습니다. 다른 선거보다 기권이 적었죠. 국민연합이 집권하는 걸 막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거에 의존하는 방어적 반응이었습니다. 총선 이후 사람들은 그동안 극우를 부상시킨 원동력이었던 마크롱주의가 극우의 부상을 막을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환상은 금새 깨졌지요. 신인민전선이 의석 수에서 선두를 차지했지만, 마크롱은 신인민전선에게 정부를 구성할 기회조차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비민주적이었죠. 대신 마크롱은 공화당의 미셸 바니에를 총리로 지명했습니다. 그래서 6%의 표를 얻은 공화당이 이제 정부의 키를 쥐었습니다. 미셸 바니에는 50년 경력의 전문 정치인입니다. 그는 낙태 합법화에 반대하고 동성애 합법화에도 반대한 인물로서, 정말 반동주의자입니다. 미셸 바니에가 이끄는 새 정부는 마크롱주의자들과 공화당원들로 구성된 완전히 소수파 정부입니다. 총선 이후, 마크롱은 반동적 인물인 미셸 바니에를 총리로 임명했다 AFP 이런 소수파 정부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 마린 르펜이 이미 이 정부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을 해줬기 때문입니다. 이 정부의 임무는 유럽연합이 요구하는 엄격한 규칙을 준수하기 위해 노동자들과 공공 서비스를 상대로 가혹한 공격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프랑스는 이제 5년 동안 1,000억 유로를 절감해야 합니다. 즉, 그들은 매년 200억 유로를 우리 등에 떠넘길 것입니다. 5. 신인민전선은 1936년 프랑스 인민전선을 연상시킵니다. 1930년대 인민전선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인민전선은 프랑스 좌파 사이에서 가장 큰 신화, 가장 큰 전설 중 하나입니다. 좌파 활동가나 좌파 성향 사람들에게는 '인민을 위한 1936년 5월'이 역사 속에서 그들의 마음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좌파의 단결, 반파시스트 투쟁, 거대한 파업,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유급 휴가 획득, 노동시간을 48시간에서 40시간으로 단축. 이 황금빛 전설은 올해 좌파 정당들의 연합에도 일정한 정통성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인민전선에 대해 생각할 때, 서로 다른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혼동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민전선에는 두 개의 원동력이 있었습니다. 한편에는 대규모 노동자 정당이었던 공산당과 사회당이 완전히 부패한 자본가 정당인 중도좌파 급진당과 구성한 계급협조주의 정부가 있었습니다. 인민전선의 반대편에서는 거대한 총파업이 벌어졌습니다. 1968년 5월 이전까지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규모의 총파업이었죠. 350만 명의 노동자가 공장을 점거하고 국가를 완전히 마비시켰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1929년 이후 대공황이 펼쳐지는 가운데 유럽과 프랑스에서 파시즘이 부상하자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단결에 대한 강한 열망이 형성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1933년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한 뒤 벌어지는 일을 사람들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1934년 2월 프랑스에서도 수천 명의 무장 파시스트가 의회를 공격했을 때 당시 노동자 운동은 일백만 노동자가 거대한 총파업으로 대응했습니다. 노동자 운동은 사회당과 공산당에게 연합하라는 압력을 가했습니다. 왜냐하면 두 정당이 분열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1934년 사회당은 자본가 정당인 중도좌파 급진당과 연합하고 싶어했습니다. 공산당은 스탈린의 지도를 받았는데, 사회당의 개량주의자들과 그를 따르는 노동자들을 파시스트라고 말하는 극좌적 노선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산당은 개량주의자들과 공동전선을 만들거나 개량주의 노조와 함께 싸우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1934년 2월 파시스트들을 응징한 강력한 총파업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러한 노동자들의 압력 때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탈린의 외교적 필요성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스탈린은 히틀러의 공격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프랑스와 영국이라는 제국주의 식민제국으로부터 보호막을 끌어내고자 했습니다. 프랑스의 거의 모든 좌파 활동가들이 잊었거나 모르는 게 있습니다. 인민전선은 스탈린이 1935년에 프랑스와 평화협정을 맺은 사실의 산물이기도 했습니다. 평화협정에 서명하면서 스탈린은 프랑스 제국주의가 국가 방위를 위해 싸우고, 군대를 가지며,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식민지를 가질 권리를 인정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이후 프랑스 공산당은 식민지 독립 요구를 멈췄습니다. 식민지의 독립은 프랑스를 약화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은 빨강, 하양, 파랑으로 된 프랑스 자본가계급의 깃발, 파리코뮌 학살의 깃발을 함께 들었습니다. 공산당은 프랑스가 최대한 많은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여성들에게 더 이상 임신 중절을 하지 말라고 요청했습니다. 공산당은 군사예산에도 찬성했습니다. 공산당은 불과 몇 주 전까지도 사회당조차 파시스트라고 말했지만, 이제 자본가 정당과도 동맹을 맺고 싶어했습니다. 따라서 1936년 초여름에 일어난 총파업은 좌파 정부의 결과가 아니라 좌파 정부와의 충돌이었습니다. 실제로 공산당과 사회당은 파업을 중단시키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했습니다. 프랑스 공산당과 사회당은 1936년 총파업을 멈추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했다 당시 공산당 지도자였던 모리스 토레즈가 파리 노동자들에게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을 때는 파업을 멈출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요구를 완전히 따내지 못했더라도 주된 요구를 따냈다면 말입니다." 1930년대에 노동자들의 주된 요구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대공황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고, 전쟁이 다가오고 있으며, 주변 국가에 파시즘이 들어선 상황에서 말이죠. 유일한 요구는 자본주의 전복 아닐까요? 인민전선 정부는 강령에 따라 일부 파시스트 조직을 해체했습니다. 그러나 그 조직들은 즉시 재건되었습니다. 그런데 파시스트를 해체한 동일한 법률이 반식민주의 조직을 해체하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튀니지에서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인민전선 정부가 보낸 사회주의 군대에게 사살당했습니다. 당시 트로츠키주의 언론이 식민지에서 벌어진 일을 비난하자 프랑스에서는 발행이 금지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1930년대에 자본가계급은 심각한 자본주의 위기에 직면했고 노동자들의 급진화에 직면했습니다. 이에 맞서 자본가계급은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파시즘을 통해 노동자 운동을 파괴할 수도 있었고, 인민전선을 통해 노동자 운동을 부패시켜 포섭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자본가계급은 둘 다 사용했습니다. 특히 스페인에는 파시즘과 인민전선이 함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6. 오늘날 신인민전선의 정치적 성격을 어떻게 특징지을 수 있을까요? 1930년대 인민전선과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을까요? 가장 큰 차이점은 오늘날 신인민전선에는 노동자계급 정당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1930년대의 공산당과 사회당은 거대한 노동자계급 정당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회당은 자본가계급의 중심 정당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회당은 제5공화국에서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했고, 지난 수십 년 동안 노동자계급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주도했습니다. 녹색당은 항상 사회당과 연합해 왔으며, 또한 자본가 정당입니다. 완전히 유럽연합 정당입니다. 공산당은 전기를 비롯한 공공 서비스 등에서 소규모로 오래된 노동자계급 기반을 유지하고 있지만, 현재는 주로 지방의 선출직 공직자들로 구성된 주변 정당에 불과합니다. 불복프랑스는 신인민전선 안에서 가장 급진적이지만, 시민주의에 입각한 포퓰리스트 조직입니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에 관심이 없습니다. 전략이나 담론에 계급적 관점이 전혀 없습니다. 불복프랑스는 반자본주의가 아니라 반신자유주의입니다. 그들은 반NATO, 반미를 표방하지만 프랑스 제국주의를 옹호합니다. 불복프랑스의 주된 대중적 기반은 노동자가 아니라 소부르주아에 있습니다. 도시에 기반한, 고학력 노동자나 학생입니다. 불복프랑스도 노동자 기반을 가지고 있지만, 국민연합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더 많은 표를 얻었습니다. 오늘날 노동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수는 기권합니다. 만일 1936년과 같은 파업이 벌어진다면, 이 당들 가운데 누구도 개입할 수 없을 겁니다.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1936년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또 다른 차이는 이들 가운데 어느 정당도 자본주의 철폐를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930년대 당시 사회당과 공산당은 말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원했습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말로는 원한다고 했습니다. 1930년대와 오늘 사이에 유사점도 있습니다. 첫째, 혁명적이거나 반제국주의라고 주장하는 여러 소규모 집단의 투항입니다. 많은 반인종주의 조직들이 신인민전선에 들어가서 식민주의 정당인 사회당과 한 편에 섰습니다. 또한 무정부주의자들이나 과거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상당수 신인민전선에 들어갔습니다. 특히 반자본주의신당(NPA)의 필립 푸투는 신인민전선의 후보가 되었습니다. 필립 푸투는 선거 운동 기간 필립 푸투에서 프랑수아 올랑드까지 좌파가 파시즘에 맞서 하나로 단결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캠페인에서 푸투는 경찰에 대한 과거 자신의 비판을 모두 철회해야 했습니다. 1930년대와 오늘의 또 다른 유사점은 전선 안에 우파와 좌파가 분명히 있고 서로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연합을 매우 취약하고 무력하게 만듭니다. 계급투쟁이나 국제정책의 첫 번째 압력이 이 연합을 완전히 깨뜨릴 수 있습니다. 2년 전처럼요. 연금 개악에 맞서 거대한 총파업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이미 제5공화국의 위기에 대해 말했습니다. 마크롱은 연금 개악을 위해 반민주주의적 수단을 많이 동원해야 했고 그에 맞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불복프랑스는 반자본주의 정책 없이 단지 의회에서 시위를 벌이면서 매우 급진적인 척했습니다. 불복프랑스는 의회에서 소리를 지르고 장관들을 모욕했습니다. 형식에서는 정말 급진적이었지만 강령상으로는 그렇게 급진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본가계급은 불복프랑스가 현 체제에 대해 너무 왼쪽에 있다고 보면서 매일같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복프랑스를 반유대주의이고 신나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복프랑스는 거리나 대중 운동에 대해 너무 오른쪽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연금 파업 동안 멜랑숑은 운동에 어떤 방향성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멜랑숑이 제안한 것은 오로지 새로운 선거 뿐이었습니다. 그는 마크롱이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면서, 그럴 경우 더 많은 좌파 의원을 당선시켜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전략이었습니다. 이 전략은 선거를 통한 집권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복프랑스는 항상 사회당과 연합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불복프랑스는 사회당에 맞서 진짜 좌파를 세우려고 설립되었음에도 말이죠. 불복프랑스는 선거를 통한 집권 전략 때문에 늘 사회당과 연합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자신의 다소 급진적인 강령조차 매번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7. 신인민전선이 극우의 부상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대안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실 저는 동지의 질문에 극우에 맞선 대안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적 마크롱주의나 권위주의적 자본가정치 전반에 맞선 대안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좌파 유권자들은 선거에서 이겼기 때문에, 그래서 극우파 국민연합 정부가 들어서는 걸 막아냈기 때문에 정말 기뻤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선거결과를 완전히 강탈당했다고 느낍니다. 지금 우파 정부, 심지어 어느 정도는 극우파라 할 정부가 프랑스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크롱을 통한 또는 그 이전의 사르코지와 올랑드를 통한 권위주의의 부상과, 극우파 르펜의 부상이 모두 동일한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외적이거나 일시적인 게 아닌, 구조적인 위기입니다. 이제 자본가계급은 정말 어려운 과제에 내몰려 있습니다. 중국에서, 독일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경제침체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자본가들은 노동자 민중으로부터 1,000억 유로를 빼앗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동시에 자본가들은 군대가 전쟁을 준비할 수 있도록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데, 그 비용을 노동자들이 지불하게 하면서도 정치적 폭발을 피해야 합니다. 그간의 정치적 위기로 체제가 너무 허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프랑스에서는 아직 1,000억 유로를 빼앗기 전인데도 총파업에 근접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래서 자본가계급에게는 정말 위험한 상황입니다.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신인민전선의 답은 케인스주의 해법입니다.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내게 하면, 국가가 확대된 재정으로 경제를 부양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부자들에게 세금을 깎아주면 더 많이 투자할 것이라고 말할 때 품고 있는 것과 똑같은 환상입니다. 지금 자본주의는 거대한 축적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위기는 전 세계 자본주의 경제가 갖고 있는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극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밀어 올리는 뿌리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경제위기와 전쟁을 만들어내고 여러 국가와 전 세계에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이번 총선은 신인민전선을 지지하지 않은 혁명가들에게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일부 동지들의 친구나 가족들은 우리가 국민연합에 맞서 투표하지 않을 거기 때문에 파시스트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극우가 노동자들 사이에서 많은 표를 얻고 있는데, 그건 사회당, 마크롱주의자들, 심지어 일부 노조가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가혹하게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우리의 입장을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의식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비타협적으로 인종주의에 맞서고 제국주의에 맞서는 급진적인 친노동자 강령을 내걸고 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일을 사회당과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당은 위기의 대가를 노동자들이 치르게 해 온 당이니까요.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이주민을 추방한 사회당으로는 극우를 물리칠 수 없다고 설명하면서, 우리는 신인민전선의 사기행각을 비판했습니다. 선거 후 몇 달이 지난 지금, 좌파 유권자들은 사태전개에 매우 실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실질적인 대안이 없습니다. 신인민전선에게 투표하면 모든 게 바뀔 거라고 한 불복프랑스를 비롯한 개량주의자들의 말을 믿었다가 실망하고 있고, 약간은 낙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크롱이 신인민전선을 차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랑스의 제5공화국 체제가 정말 비민주적이기 때문입니다. 불복프랑스는 이제 마크롱을 탄핵과 같은 의회 절차를 통해 무너뜨리자고 제안하고 있는데, 사실 그것은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수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불복프랑스는 탄핵 지지 시위를 몇 차례 조직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탄핵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의회를 통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노란 조끼보다 더 큰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조합 좌파에 대해 좀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지금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일이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독일과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프랑스에는 더 이상 노동자 정당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자 조직이 있는데, 그것은 노조입니다. 노조는 오늘날 프랑스에서 가장 큰 노동자 조직입니다. 2023년 연금 투쟁 때 우리는 그들이 거대한 파업과 시위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일부 노조들은 중립을 지켰고, 일부 조합원들은 극우파 국민연합에게 투표했습니다. 하지만 CGT, Solidaires, FSU와 같은 좌익 노총들은 신인민전선을 지지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신인민전선의 일부였습니다. 사실 이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노동조합이 좀처럼 정치에 나서려 하지 않기 때문이죠. 프랑스에서는 노동조합에 무정부주의 전통이 강해서, 정치와 노동조합 사이에 뚜렷한 경계가 있습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정치가 아닌 혁명적 정치를 원한다고 핑계를 대 왔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전통이 "우리는 정치를 하려는 게 아니라 자본가들과 논의하여 사회적 파트너십을 만들려는 거다"라고 말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들은 그게 정치가 아닌 척하지만, 사실은 자본가들과 대화하고 협력하는 정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 냉전 기간에는 노조가 정당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습니다. CGT는 공산당과, CFDT는 사회당과 연결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강한 독립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들이 이번 총선에서 정치 캠페인에 그렇게 많은 투자를 한 것은 꽤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조합들의 정치참여는 자본가정당, 특히 집권 시기 노동권을 대규모로 파괴했던 사회당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재정치화가 일정하게 이루어졌지만, 완전히 나쁜 방식으로, 계급적 독립성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CGT의 사무총장, 소피 비네는 노동자 조직의 이러한 복종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금이 '자정 5분 전'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정은 파시즘을 의미합니다. 파시즘까지 5분밖에 안 남았으니, 신인민전선에 투표하는 것과 같은 긴급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신인민전선의 프랑수아 올랑드를 위해 우리가 대중 집회를 열었기 때문에, 우리가 회의를 열었기 때문에, 우리가 행진을 조직했기 때문에, 파시즘을 막고 극우를 물리칠 수 있었다고 CGT는 말했습니다. CGT는 2023년 연금 투쟁 기간보다 2024년 신인민전선 정치 캠페인에서 더 활동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CGT는 동네마다 대중 집회를 여는 등 야심차게 정치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대규모 파업이 벌어지던 연금 투쟁 동안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었습니다. 프랑스 노동총동맹(CGT)은 6월 총선에서 신인민전선을 지지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정부를 갖게 되었는데요. CGT가 파시즘을 물리쳤다고 말하기에는 상황이 역설적이고 모호합니다. 사실 국민연합은 어느 때보다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의원 수는 어느 때보다 많습니다. 어느 때보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CGT의 말을 들으면 파시즘의 위협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자정 5분 전이 아니라 한낮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위협은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1년이 지나면 마크롱이 다시 국회를 해산할 수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선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린 르펜도 바로 그 상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CGT는 순수한 노동조합주의로 돌아갔습니다. 정치적 위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마크롱에게 선거를 강탈당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임금과 연금을 비롯한 경제적 요구만 말합니다. 부르주아 분석가들은 의회가 세 조각으로 나뉜 상태에서 새 정부가 정말 취약하며 사회적 기반이 미미하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새 정부는 의회를 회피하는 해결책으로 노동조합과의 사회적 대화에 더 많은 무게를 둘 것으로 보입니다. 의회에서 바로 법을 만들려 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지만, 노동자 단체 및 자본가 단체와 사회적 합의를 이룬다면 통과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프랑스 좌파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선거에 몰두하는 정치적 좌파가 있습니다. 멜랑숑은 마크롱이 다시 의회를 해산할 경우 치러질 총선이나 2년 반 후에 치러질 대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불복프랑스와 멜랑숑은 이후에 치를 선거를 준비하며 마크롱을 탄핵하자는 담론과 선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 CGT를 비롯한 노조는 이제 더 많은 계급협조주의를 향해, 자본가들과의 더 많은 토론과 협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혁명적 좌파의 과제는 사람들에게 사기를 북돋고 전략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2023년 연금 개악에 반대해 총파업에 나선 노동자들, 2024년 신인민전선에 투표한 많은 노동자들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파업을 해도 효과가 없었고, 투표를 하니 더욱 효과가 없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자본가들이 결과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요. 이런 상황에서 일부 혁명 조직이나 중도파 조직이 우리는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 어느 방향으로" 싸우느냐입니다. 사실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2016년 이후 거의 매년 정말 열심히 싸워 왔습니다. 이제 혁명가들의 임무는 노동자계급이 혁명적 강령과 전략을 갖고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은 노동자정치를 만들어 냄으로써 정치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멜랑숑을 넘어서야 합니다. 멜랑숑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운동을 할 수 있지만 혁명과 정치는 시민을 위한 것이며, 의회 절차와 선거를 통한 부르주아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조관료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노조관료들은 지금 프랑스를 뒤흔드는 역사적인 체제 위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대신 자본가들과 협상에 나서며 위기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현 상황을 타개하는 진정한 길은 노동자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자본가를 수탈하여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데 있음을 설명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이 정권의 모든 반민주적 성격과 반민주적 공격을 서슴없이 비난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급진적인 민주주의 슬로건을 소리 높이 외쳐야 합니다. 개량주의자들은 마크롱을 끌어내리기 위한 시위를 조직하면서 '의회에서 진행 중인 탄핵 절차를 지지하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크롱을 타도하자. 그러려면 총파업이 필요하다. 노란 조끼 운동이나 2023년 총파업보다 더 큰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준비할 조직이 필요하다. 그런데 당신의 조직인 불복프랑스는 그런 총파업을 조직할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가?' 우리는 또한 말합니다. '우리는 마크롱을 끌어내린 뒤 다른 군주나 다른 대통령으로 대체하고 싶지 않다. 설령 그가 좌파라도 말이다. 멜랑숑은 다음번 군주가 되는 게 꿈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저는 이게 불복프랑스와 토론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크롱 정부에 맞서 2023년 프랑스 연금파업, 그 이상의 투쟁을 조직해야할 때다 Reuters 여기서 우리는 1936년 인민전선에 대응했던 트로츠키의 논리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트로츠키는 프랑스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단일 의회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점을 놓고 개량주의 지도부 및 기층과 토론하라고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대통령이 필요 없다. 상원도 필요 없다. 우리는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언제든 소환당하는 의원들로 구성된 단일 의회만 필요하다. 이 의회로 입법권과 행정권을 집중시켜야 한다.‘ 트로츠키는 단일 의회 슬로건을 파업 같은 계급투쟁 방법과 결합함으로써 대중을 운동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사회를 통제하고 선출된 대표자를 통제할 수 있다는 영감을 대중에게 불어넣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노동자들이 시장의 가격을 통제하고, 공장의 생산을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단일 의회는 소비에트가 아닙니다. 이중권력 상황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급진적인 요구는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지 않고 자본가를 수탈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단지 말에 그칠 뿐임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지금 정치인들은 자본주의 위기에 따른 비용을 감당하라고, 다가올 전쟁을 위한 비용을 감당하라고 노동자들에게 강요합니다. 이에 맞서 우리는 의원들이 노동자 임금 이상을 받을 수 없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는 정치체제를 위해 싸우자고 노동자들에게 호소합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슬로건이나 요구로 제5공화국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강화하고자 합니다. 계급투쟁의 방법을 통해 대중을 그렇게 준비시키고자 합니다. 불복프랑스는 우리가 이 권위주의 공화국과 싸워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이 공화국의 법률에 따라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환상입니다. 만일 우리가 대중과 이런 방식으로 대화해 나가지 않는다면, 개량주의자들은 비민주적인 공화국과 정치적 위기에 대해 유일한 비판자 지위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자본가들의 대규모 공격에 맞선 계급투쟁이 머지않아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앞으로 몇 주, 몇 달, 또는 몇 년 안에 있겠지만, 몇 주 또는 몇 달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정부가 정말 잔인하겠지만 또한 매우 허약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양한 사회 부문이 이 기회를 이용해 싸워서 뭔가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작년에 비록 우익적 요소가 강했지만 농민들이 투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매우 모순적인 요소들과 함께 매우 발작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혁명은 순수한 화학적 과정이 아니라고 레닌이 말했습니다. 오른쪽에서도 왼쪽에서도 무언가가 펼쳐지는 복잡한 상황에 혁명가들은 개입해야 합니다. 혁명가들은 대중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개입하면서, 대중이 개량주의적 환상과 결별하고 더 급진적인 해결책을 찾을 가능성을 대비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조직, '연속혁명'이 규모는 크지 않지만, 프랑스에서 이 과제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혁명 조직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자본주의신당(NPA)은 완전히 굴복했고 지금은 불복프랑스의 작은 사본일 뿐입니다. 불복프랑스의 반신자유주의 강령에 순응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모든 비판을 철회했습니다. 반대로 노동자투쟁(LO)은 자신의 회원들이나 노동자들이 정치 상황에 개입하도록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노동자 권력을 일반적으로 선전하는 데 머무르는 선전주의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노동자들이 행동의 방향을 찾고 있을 때,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행동 강령을 제공해야 합니다. 노동자들의 당면 의식과 노동자 권력에 대한 인류의 필요성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혁명가들에게는 가능성과 기회가 매우 풍부한 상황입니다. 우리가 상황의 모든 요소를 고려하여 대중의 의식을 고취하는 올바른 행동 강령을 제안한다면, 개량주의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환상에 강력한 타격을 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프랑스 노동자들 대다수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것은 멜랑숑에게 투표하는 것이고, 더 나쁘게는 르펜에게 투표하는 것입니다. 만일 혁명 조직들이 수동적으로 기다린다면, 상황에 개입하지 않은 채 소비에트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면, 그것은 노동조합 관료와 개량주의 관료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이 경우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을 위한 정치적 담론과 해결책을 독점하게 될 것이고, 결국 거듭된 패배로 귀결될 것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듯이, 우리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사회주의를 건설하지 못한다면, 야만이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자본주의는 이 야만성을 약속하고 있습니다.2024-11-13 | 조회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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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팔레스타인 노동조합의 BDS 압박강화 촉구 공동성명(2024년 10월 19일, 울산 '화물연대운송산업 구조개악 반대! 안전운임제 확대입법 촉구 전국동시다발 결의대회'에서 팔레스타인 울산 긴급행동 소속 동지들이 팔레스타인 연대를 호소했다.) 편집자 주: 가자지구 집단학살이 시작된지 1년이 넘어가는 지금, 팔레스타인의 여러 노동조합이 BDS(이스라엘에 대한 보이콧, 투자철회, 제재를 요구하는 운동)전국위원회를 통해 각국에서 BDS압박을 강화할 것을 요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팔레스타인 노동조합은 약 1년 전인 2023년 10월 16일에도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가능케하는 각 국가의 모든 공모를 끝내달라는 긴급한 요청을 보낸 바 있다. 특히 이번 요구의 첫 번째 줄에는 한국의 HD현대를 콕 집어 명시하고 있다. HD현대는 정착촌 건설을 위해 팔레스타인 민중의 집을 파괴하는 굴착기를 이스라엘에 수출중이다. 팔레스타인 노동자민중의 호소에 응답하기 위한 한국노동자운동의 실천을 위해, BDS전국위원회에 게시된 공동성명을 번역해 소개한다. ---이하 공동성명 전문--- 팔레스타인 노동조합과 전문직 조합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 및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공모를 종식시키기 위해 BDS 압박을 강화할 것 촉구합니다 점령, 포위된 가자지구에서 23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학살이 생중계된 지 1년이 넘은 지금,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지속된 정착민 식민주의, 점령,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단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 세계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에게, 전체 팔레스타인 민중, 또한 무엇보다도 레바논의 형제같은 민중들에 대한 국가, 기업, 기관들의 이스라엘 범죄행각 공모를 종식시키기 위해, BDS 압력을 강화할 것을 촉구합니다. 국제 노동자들의 연대는 공모를 끝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는 도덕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법적 의무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점령,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 유엔 인권이사회의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금수조치 촉구, 유엔 총회의 제재 요구는 모두 BDS 조치가 옳을 뿐만 아니라, 법적 의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작년에 전 세계 노동조합이 취한 가장 고무적인 조치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 140개국 5천만 명의 광업, 에너지 및 제조업 분야 노동자를 대표하는 글로벌 노동조합 연합인 IndustriALL 글로벌 유니온(IndustriALL Global Union)은 BDS를 지지했고, 이로써 BDS를 지지하는 가장 큰 노동조합 단체가 되었습니다. - 노르웨이의 100만 명에 달하는 강력한 노동조합 연맹 LO는 세계 최대 규모인 노르웨이 국부펀드가 약 5억 달러 규모의 이스라엘 국채를 전량 투자철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수천만 명의 노동자를 대표하는 주요 인도 노동조합들은 인도 정부에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대체하기 위해 인도 노동자를 이스라엘로 '수출'하는 계약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에게 이스라엘 제품 불매 운동, 그리고 이스라엘 화물을 취급하지 말 것을 촉구했습니다. - 벨기에, 인도, 카탈루냐,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캘리포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항만노동자 노동조합은 이스라엘 선박 또는 이스라엘로 향하는 무기 선적에 맞선 행동을 실시했습니다. - 550만 명의 노동자와 48개 노조를 대표하는 영국노동조합회의(TUC)는 만장일치로 이스라엘의 점령과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무기금수조치를 촉구하며, 정부에게 대량학살을 방지해야 할 의무를 상기시켰습니다. - 6개 대륙 27개 이상의 국가에서 10만 명의 조합원이 속한 앱 기반 운송노동자노동조합국제연합인 IAATW는 셰브론 주유소 보이콧을 결정했습니다. - 영국 최대 연기금 중 하나인 USS는 대학 노조(UCU)의 압력으로 1억 달러가 넘는 이스라엘 국채 자산을 매각했습니다. - 전체 조합원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미국의 7개 주요 노동조합이 사상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군사 원조를 중단하라”고 촉구했습니다. - 에콰도르노동자총연맹(UGTE)은 이스라엘 문화 보이콧을 포함한 BDS를 지지하며, 스스로를 ‘이스라엘아파르트헤이트자유지대(AFZ)’로 선언했습니다. - 27,000명의 대학 노동자를 대표하는 호주 고등교육노조는 모든 이스라엘 공모 대학에 대한 보이콧을 지지하고, 호주 대학들에 이스라엘 군 및 그 공급업체와의 관계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 프랑스의 ‘CGT 탈레스(Thalès)’(이 무기 회사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노동조합)는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고려해, 이스라엘과의 모든 협력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CGT의 파리지부가 BDS를 지지했습니다. - 오스카상 수상자를 포함한 할리우드 SAG-AFTRA 노조원 700명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집단학살과, 팔레스타인 언론인 학살을 규탄했습니다. - 아르헨티나의 ATE 코르도바 노동조합은 스스로를 ‘이스라엘 아파르트헤이트 자유지대’로 선언하며, BDS를 지지했습니다. - 스코틀랜드예술가연합과 아일랜드예술가연합(프락시스)은 모두 이스라엘 문화 보이콧을 포함한 BDS를 지지했으며, 아일랜드예술가연합은 스스로를 ‘이스라엘아파르트헤이트자유지대(AFZ)’로 선언했습니다. 팔레스타인대학교수및직원노조연맹(PFUUPE)과 약 1만 명의 대학 노동자를 대표하는 팔레스타인과학기술아카데미(PalAST)는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 반인도 범죄, 집단학살에 연루된 이스라엘 대학 및 연구 센터와의 협력 계약을 검토, 유예, 단절”하려는 전 세계 대학들의 조치를 환영했습니다. BDS 압력은 해방, 정의, 난민의 귀환을 위해 싸우는 팔레스타인 투쟁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국제연대의 형태이며, 공모를 종식시키기 위한 민중의 힘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2023년 10월부터의 우리의 요청에 따라 여러분 모두가 BDS 압력을 강화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1. 인텔, 셰브론, 아마존, 구글, HP, 캐터필러, HD현대, 까르푸, 맥도날드, 화낙, 지멘스, AXA 등과 같은 연루 기업에 해당되는 경우, 계약&투자에서 제외하고 계약, 투자를 철회하십시오. 소속 기관(시의회, 대학 등) 또는 고용주에게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하십시오. 또한 전략적 정의 운동(학생 주도 단체 등)과 협력해 대학과 시의회와 같은 기관이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인종차별, 군사점령을 지원하거나 이를 가능하게 하는 군사, 테크 및 기타 기업과의 관계를 단절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십시오. 이는 컬럼비아대학교 산하 유니온 신학대학,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 리치몬드(캘리포니아), 리에주(벨기에), 오슬로(노르웨이), 벨렘(브라질) 시의회 등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된 바 있습니다. 2. 집단학살을 위한 무기 거래를 중단시키세요: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위한 군사 및 이중용도 품목의 제작, 취급, 운송을 거부하십시오. 시위, 피켓, 정부 로비, 법적 조치, '관료적' 조치, 미디어 캠페인을 통해, ‘편의치적 제공’ 중단을 포함해 이스라엘행 선박과 군용화물을 막으십시오. 3. 집단학살과 아파르트헤이트를 위한 기술은 안 됩니다! 테크산업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에 호소합니다: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가능하게 하거나 아파르트헤이트를 자동화하는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HP, 인텔, 팔란티어, 시스코와 같은 기업의 공모를 끝내기 위한 힘을 구축할 수 있게 테크산업 내에서 조직하세요. 4. 정부가 공모를 중단하고 군사 금수조치 및 제재를 부과하도록 압력을 가하십시오! 팔레스타인 시민사회의 정책 지침과 요구 사항을 여기에서 계속 확인하세요. 5. 아파르트헤이트 노동조합과의 관계 단절: 식민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의 한 축인 이스라엘(노동조합연맹) 히스타드루트와의 관계를 단절하십시오. 서명: Palestinian General Federation of Trade Unions (PGFTU) - Gaza (팔레스타인노동조합총연맹 - 가자지구) General Union of Palestinian Workers (GUPW) (팔레스타인노동자총연합) Palestinian Union of Postal, IT & Telecommunications Workers (팔레스타인우편, IT및통신노동자연합) Federation of Independent Trade Unions (팔레스타인독립노동조합연맹) General Union of Palestinian Teachers (GUPT) (팔레스타인교사총연합회) General Union of Palestinian Women (팔레스타인여성총연합) The Palestinian New Federation of Trade Unions (팔레스타인새노동조합연맹) Palestinian Bar Association (팔레스타인변호사협회) Palestinian Dental Association - Jerusalem Center (팔레스타인치과협회 - 예루살렘센터) Palestinian Pharmacists Association - Jerusalem Center (팔레스타인약사협회 - 예루살렘센터) Medical Association - Jerusalem Center (팔레스타인의학협회 - 예루살렘센터) Engineers Association - Jerusalem Center (엔지니어협회 - 예루살렘센터) Agricultural Engineers Association - Jerusalem Center (농업기술자협회 - 예루살렘센터) Veterinarians Syndicate - Jerusalem Center (수의사신디케이트 - 예루살렘센터) Palestinian Journalists’ Syndicate (PJS) (팔레스타인언론인노동조합) Union of Workers in Local Bodies - Hebron (지역단체노동자연합 - 헤브론) Southern Electricity Company Employees Union (남부전기회사직원노동조합) Association of the Financial Sector Employees (금융분야직원협회) Health Services Employees’ Association (의료서비스직원협회) Palestine Electricians Trade Union (팔레스타인전기공노동조합) Jawwal Employee Association (자왈직원협회) The National Trade Union for Banking and Insurance (은행및보험전국노동조합)2024-10-29 | 조회 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