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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지구·이란 참상 폐허 위에 선 우골탑, 한국 대학에서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은 더욱 강고해져야 한다.지난 3월 신학기를 맞아 여러 대학에서 취업박람회가 열렸다. 취업박람회에는 팔레스타인 집단학살과 불법점령 등 여러 전쟁범죄에 연루된 기업들도 참여했다. 이에 집단학살 연루 기업들이 취업박람회에 참여하는 것을 규탄하는 집회와 저항행동이 각 대학에서 펼쳐졌다. 본 기사는 집단학살 연루 기업의 취업박람회 참여 규탄 행동이 전개된 경과와 배경, 후기를 담은 프레시안 연속 기고 기사의 보강판이다. 프레시안 기사 ‘가자지구·이란 참상 폐허 위에 선 우골탑, 대한민국 대학교들(2026.04.11.)’의 내용 일부를 기고자가 직접 수정/보완하여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온라인 기사로 게재한다. 이란 미나브 초등학교에 벌어진 참극, 그리고 이스라엘의 ‘교육학살’ 2026년 2월 28일,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 침공을 개시했다. 침공 첫날 아침 10시경, 이란 남부 미나브 시 샤자라 타이예베 여자 초등학교에 세 차례의 토마호크 미사일이 떨어졌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미 해군 함정에서 발사되었다. 오차 범위가 고작 몇 미터에 불과한 미국산 토마호크 미사일이 정조준한 것은 수업이 한창인 학교였다. 이 폭격으로 170여명이 살해당했고,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제국주의자들이 마치 자유를 빼앗긴 인질처럼 묘사하던 사람들, 제국주의자들이 직접 해방시켜주겠노라 호언장담하던 사람들, 바로 이들을 제국주의자들이 직접 죽인 것이다. 이란 미나브 초등학교 학살 사망자를 위해 조성된 공동묘지 미나브 초등학교 학살이 고의라는 증거는 날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지난 3월 10일,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란의 민간 기반 시설을 가리키며 "우리는 이란이 다시는 국가로서 재건될 수 없도록 쉽게 파괴할 수 있는 목표물들을 제거할 것“이라며 위협했다. 대학 등 수많은 민간 시설이 포화에 뒤덮였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3월 28일 테헤란 과학기술대와 이스파한 공과대학을 폭격했다. 4월 6일에는 이란의 주요 과학기술 대학인 테헤란 샤리프 공과대학교에도 폭격이 이어졌다. 이란 과학기술부는 2월 28일 전쟁 발발 이후 최소 30개 대학이 공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참혹하다. 동시에 낯익은 광경이다. 이스라엘이 학교 등 민간 시설을 표적으로 삼으며 철저하게 파괴하고,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이를 외면하는 모습은 가자지구 집단학살이 이어지는 내내 셀 수 없이 반복되었다. 교육 클러스터 및 유노샛(UNOSAT) 자료에 따르면, 가자지구 학교의 97%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었다. 2023년 10월 7일 이후 가자지구 전체 학교 건물 중 432개(76.6%)가 “직격탄” 피해를 입어 약 469,222명의 학생과 17,564명의 교사가 영향을 받았다. 가자지구 학교 건물의 91.8%(564개 중 518개)는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선 완전한 재건 또는 대규모 복구 작업이 필요하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2023년 10월 27일 기준 가자지구 625,000명 이상의 학생과 22,500명 이상의 교사가 있다고 보고했다, 현재 이들은 교육받고 교육할 권리를 전적으로 박탈당했다. 2025년 9월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보고서는 팔레스타인 교육부 및 고등교육부 발표를 인용하여 2023년 10월 7일 이후 가자지구에서 17,237명 이상의 초중고등학생과 1,271명의 대학생, 그리고 967명의 교육 관계자가 살해되었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팔레스타인 통신사 와파에 따르면, 가자지구의 고등 교육 기관 12곳이 파손되거나 파괴되어 대학교육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학습의 터전을 전적으로 상실한 가자지구 학생들은 피난민 캠프와 천막을 거점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교육을 이어나가고 있다. 파괴된 학교와 교원을 포함한 교육 인프라를 재건하는 작업에는 최소 몇 달, 수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자지구 집단학살로 파괴된 알 아크사 대학 정문과 파괴 이전 모습 학교, 대학 등 교육기관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 폭격과 학살을 통틀어 교육학살(Scholasticide)이라 칭한다. 교육학살은 옥스퍼드 대학 카르마 나불시(Karma Nabulsi) 박사가 2008~09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당시, 학교, 교육부 등 교육과 관련된 건물이 표적이 된 상황을 묘사하고자 고안한 용어다. 교육학살은 교육 시스템, 즉 수 세대의 지적·사회적·문화적 역량을 기르고 재생산하는 체계에 대한 고의적 파괴다. 이는 이스라엘이 추구하는 인종청소-아파르트헤이트, 정착민 식민주의 정책의 연장선이다. 파괴된 교육 인프라는 현지 교육의 ‘열악하고’ ‘열등한’ 교육 여건으로 비추어진다. 이는 제국주의적 교육 제도와 인프라의 도입을 촉구하는 명분이 된다. 교육 시스템의 재건 과정에서, 독립적인 교육의 가능성은 서구와 이스라엘의 식민주의적 헤게모니로 대체된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전략을 이란 침략전쟁에도 동원하며, 중동 사회 전체로 확장하려 하고 있다. ‘대이스라엘(Greater Israel)’을 위한 전쟁기계에 한국 대학과 기업이 협력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집단학살과 침략전쟁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지탱될 수 있는가. 그 배경에는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정치적, 외교적 후원이 있다. 잠시 5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폭격과 함께 선제공격을 가했다. 6일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난 이 전쟁을 누군가는 6일 전쟁, 누군가는 제3차 중동전쟁으로 부른다. 팔레스타인과 아랍 민중은 이 전쟁을 나크사(Naksa)라고 부른다. ‘패배’ 혹은 ‘악화’를 뜻하는 아랍어 단어이다.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 이후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전역과 이집트 시나이반도, 그리고 시리아 골란고원을 군사점령했다. 군사점령의 결과, 1948년 나크바로 고향을 잃은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나크사 이후 또 다시 삶의 터전을 상실했다.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의 멍에는 더욱 무거워졌다. 이스라엘은 제국주의의 중동 거점으로써 설립된 정착민 식민주의 체제이자 프로젝트다. 제국주의의 중동 거점이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부터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까지 영향을 뻗는 것, 그 결과로 제국주의 패권이 중동 전역을 장악하는 것, 그것이 ‘유프라테스 강부터 이집트 강까지’라는 ‘대이스라엘(Greater Israel)’ 프로젝트의 실체다. 1967년 전쟁을 통해 시온주의자들의 꿈은 거의 실현될 뻔했다. 그리고 이번 집단학살과 이란 침략전쟁, 그리고 레바논 폭격을 통해 그 꿈을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공에 앞서 마이크 허커비 주이스라엘 미국대사는 이스라엘에 중동 전역에 대한 ‘성경적’ 권리가 있다는 망언을 남겼다. 1967년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외교적 뒷배로 남았던 미국은, 이제 이스라엘과 나란히 침략군의 선두에 서고 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폭격으로 민간인과 UN 평화유지군을 살해하고 있는 와중에도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를 방관하고 있다. 제국주의 첨단 무기 지원과 기술 협력 역시 이스라엘이 전쟁과 학살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전장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신무기 실험장이다. 1967년 전쟁 당시, 기습적 선제공격으로 이집트 공군을 궤멸시킨 것은 이스라엘 공군 소속 프랑스산 미라쥬 III 전투기였다. ‘채찍(שוט, sho’t)’이라는 이름의 영국산 센추리온 전차, ‘공성추(מגח, Magach)’라는 이름의 미국산 패튼 전차가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을 뒤덮었다. 2026년 이란 침략전쟁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상징을 달은 F-35 전투기와 정밀 유도 무기가 학교 등 민간 시설을 조준하며 무차별적인 폭격을 이어가고 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1967년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주력 전차였던 영국산 센추리온 전차 기반의 '숏(Sho't)' 전차,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을 진압하는데 동원된 이스라엘군의 미국산 패튼 전차 기반 '마가크(Magach)' 전차, 1967년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이 운용한 프랑스 다쏘(dassault)사의 미라쥬 III 전투기 이제는 그 군사기술의 전시장에 한국 기업들이 함께하고 있다. 2025년 10월 프란체스카 알바네제 유엔 특별보고관이 발표한 ‘가자 집단학살: 집단적 범죄’ 보고서는 F-35 스텔스 전투기에 부품을 공급한 19개국 중 하나로 한국을 명시하고 있다. HD현대, LIG넥스원, 한국항공우주산업, 한화시스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현대로템 등 한국 기업들이 항공, 전자전, 드론, 로봇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 기업은 취업박람회, 현장실습 등을 비롯한 다양한 방식으로 대학에 침투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이 운용중인 F-35 라이트닝 전투기 공모의 규모와 구체적 협력의 측면에 있어 취업박람회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업이 대학에 침투할 때, 취업박람회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취업박람회는 학생들의 이해관계를 명목으로 협력을 정당화한다. 집단학살 공모기업과 학생 사이의 접촉면이 늘어나고 친숙해지는 가운데, 집단학살 공모가 마치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일인 것처렴 여겨진다. 이것이 바로 집단학살을 ‘정상화(Normalization)’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공모가 대학에서 용납되어선 안된다. 모든 학살 공모자들을 대학에서 쫓아내는 것이 ‘실질적인 연대’의 실현이다 팔레스타인 민중들, 특히 대학의 학생들과 교직원, 학계 종사자들은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교육학살에 대해 ‘이 학살에 대한 모든 공모 행위를 종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2025년 7월 발표된 가자 대학 총장들의 공개 서한은 ‘상징적 연대의 시대는 지났으며. 이제 실질적이고 체계적이며 지속적인 협력’이 필요하다고, 이제는 단순한 선언을 넘는 연대가 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협력이란 팔레스타인 해방을 단호히 지지하고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멈춰 세우는 것이다. 대학에서는 이를 학술보이콧 운동을 통해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학술보이콧이란 이스라엘 국가기구와 집단학살에 공모하는 기업과의 관계를 끊어내고 퇴출시키는 운동을 의미한다. 전 세계 곳곳에서 팔레스타인 민중의 목소리에 부응하는 대학들의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2024년 4월 17일 미국 컬럼비아 대학을 시작으로 전 세계 대학에서 전개된 점거농성 물결 아래, 대학의 이스라엘과의 투자관계 철회, 집단학살 공모기업과의 협력을 중단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2023년 UC 버클리 대학 정문 아래를 지나는 팔레스타인 연대 대오 행렬 2024년 4월 28일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대학(PSU)에서는 학생들이 수개월간의 시위와 점거농성을 벌인 끝에 이스라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군수업체 보잉과의 관계를 잠정적으로 단절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2024년 5월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는 2주간의 학생 시위 끝에 무기 산업에 대한 투자를 철회하기로 결정하고, 그 과정에서 투자 철회 대상 기업 목록에 있는 캐터필러, 록히드 마틴, 레오나르도, 팔란티어의 보유 주식을 매각했다. 2024년 12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교(UvA) 교직원 다수를 대표하는 노동조합인 FNV는 4일간의 파업을 벌였다. 교직원 조합원의 84%가 참여한 이 파업은 이스라엘에 대한 학문적 보이콧을 위한 최초의 공식 노동조합 파업이다. 파업의 결과로 2025년 7월 암스테르담 대학교는 집단학살에 연루된 기업과의 관계 단절과 물품 조달 중단을 약속했다. 2024년 5월 전개된 암스테르담 대학 교직원노동자들의 파업 집회 2025년 6월 아일랜드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TCD)는 아일랜드에서 최초로 이스라엘 기업에 대한 지분을 완전히 매각하라는 권고를 수용하고 이스라엘에 본사를 둔 기업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정했다. 2025년 8월 27일,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UC 버클리) 전기공학 및 컴퓨터과학과 강사인 페이린 카오(Peyrin Kao)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에 기술이 이용되는 것에 항의하며 38일간 단식투쟁을 전개했다. 단식투쟁 기간 동안 집단학살에 과학기술이 동원되지 않길 바라는 이공계 학생과 교직원들을 중심으로 'STEM for Palestine‘이라는 이름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UC 캠퍼스들은 2005년부터 2022년까지 국방부, 록히드 마틴, 레이시온, 제너럴 아토믹스, 보잉, 그리고 이스라엘 국방부로부터 총 56억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2017년부터 2022년까지 UC 캠퍼스들은 총 1,428건의 군사 자금 지원 연구 보조금을 받았다. 대학 당국은 페이린 카오에게 2026년 봄 학기 동안 무급 정직 처분을 내리고, 팔레스타인 연대에 참여한 학생 및 교직원 160명의 명단을 트럼프 정권에 제출했다. 카오의 복직을 위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STEM for Palestine’은 4월 7일 버클리 캠퍼스에서 집단학살 공모기업을 배제한 "대안적 진로 박람회(CALternative Career Fair)"를 개최했다. 학술보이콧이 유효하게 관철된 대학의 사례를 살펴보면, 학부생 뿐만 아니라 대학원생, 강사, 교직원 등 학내 노동자를 포괄하는 대학구성원들의 연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대는 단순한 힘의 합력을 넘어 대학과 자본을 실질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힘을 창출할 수 있다. 대학의 연구와 강의를 전담하는 대학원생과 강사노동자, 학교를 유지보수하고 사무를 관리하는 시설, 교직원 노동자와의 연대는 대학의 학술적 보이콧 이행을 위한 압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한국 대학에서도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종식과 팔레스타인 해방을 촉구하는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2024년 10월 4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고려대학교와 이스라엘 대사관과 대학 등 기관, 집단학살 공모 기업의 협력 중단을 촉구하며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기에는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고려대분회 소속 청소/경비/주차 노동자들이 함께했다. 같은 자리에는 현대건설기계 하청업체에서 노조를 조직하다가 직장폐쇄와 함께 일터에서 쫒겨난 해고노동자가 함께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집회에 참여한 노동자와 학생들은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 가옥을 파괴하는 굴삭기를 수출하고, 대학에서 채용설명회, 산학협력 등을 매개로 대학기업화 행보를 가속하는 HD현대를 규탄했다. 대학 안팎의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에 대한 공통의 입장과 실천을 쌓아나가는 것이 절실한 과제다. 우리의 대학은 팔레스타인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교육학살에 맞서 당당히 말한다. ‘우리는 이 대학들을 텐트에서 세웠고. 우리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텐트에서 다시 한 번 대학을 재건할 것입니다’. 가자지구의 학생과 교사, 교직원들은 파괴된 학교 건물을 대신해 천막에서 교육을 이어가며 팔레스타인 민중의 굳건한 ‘수무드(저항)’ 정신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한편, 학교를 폭격하고 학생과 교사들을 천막으로 내몬 장본인이 누구인가를 반드시 직시해야 한다. 이스라엘과 그 배후에 놓인 제국주의의 타도 없이 재건은 요원한 일이다. 팔레스타인 교육계의 선언은 팔레스타인을 넘어 전 세계의 대학, 학문공동체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지 묻고 있다. 팔레스타인 대학의 구성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대학은 단순한 건물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우리는 학생, 교수진, 직원으로 구성된 학문공동체로 살아 숨 쉬며 우리의 사명을 이어가겠다는 결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4월 5일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연루 기업의 대학 취업박람회 참여를 규탄하며 연세대 정문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집단학살 연루 기업들과 협력하는 우리의 대학은 지금 진정으로 안녕한가. 우리는 대학에서 집단학살로 이윤을 거두는 기업들에 굴종하는 대신,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학술보이콧 운동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향한 연대인 동시에 우리의 대학과 학문공동체를 향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대학은 때때로 우골탑, 상아탑 등 타자의 희생 위에 세워진 공간으로 비유되곤 한다. 대학은 공동체의 헌신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산물인 동시에 공동체 그 자체이다. 집단학살 공모 기업과 한국 대학은 다른 공동체의 파괴를 대가로 번영을 도모하고 있진 않은가. 가자지구 대학의 폐허, 이란 미나브 초등학교의 잔해 앞에 대학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과연 떳떳한가. 그렇지 않다면, 집단학살을 지탱하고 있는 구체적인 공모의 탑을 지금 당장 무너뜨리자. 고려대학교에 걸린 취업박람회 보이콧 현수막 -
[번역] 총회란 무엇인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안내서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공허한 농담에 맞서서, 총회는 진정한 노동자 권력의 실질적 토대 역할을 수행한다. 총회는 노동자의 ‘의견 수렴’을 위한 전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극우와 대결하며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쟁취하는 데 필요한, 강력하고 민주적인 틀을 갖춘 전략 그 자체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인들과 주류 언론으로부터 “민주주의”에 관해 귀가 닳도록 듣는다. 불과 1년 전, 카멀라 해리스는 미국이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주장했다. 한편 트럼프는 두 번째 임기 취임 연설에서 자신이 복귀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자유가 회복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민주당은 트럼프가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외치면서, 자신들이 차악처럼 보이도록 트럼프를 이용하고 있다. 트럼프가 온갖 방식으로 민주적 권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트럼프 이전에는 노동자 계급과 피억압 민중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가 존재했다는 생각은 정말이지 가소롭다. 결국 우리 대다수에게 정치 권력과 진정한 민주주의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일터는 사실상 사장이 권력을 독점하는 독재 체제이며, 선거철마다 던지는 한 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의도된 설계다. 우리가 직장에서, 지역 사회에서, 국가 전체에서 경험하는 것은 실질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반민주주의이며, 블라디미르 레닌이 선언했듯이 “자본주의 하에서 언제나 제한적이고, 왜곡되고, 허위이며 위선일 수밖에 없는, 부자들에게는 천국이요 착취당하는 자들에게는 올가미이자 기만”인 체제인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헤게모니를 장악했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민주적 권리가 일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관대한 체제 덕분이 아니라 민권 운동 같은 계급 투쟁이 지배 계급의 손을 억지로 움직인 결과다. 바로 지금, 이 권리마저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극우 지도자들에게 공격받고 있다. 지배 계급에게 이익이 되기만 하면 이른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우리의 권리가 순식간에 위협받고, 공격당하고, 후퇴할 수 있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인민의 의지를 가장한 계급 지배 기구에 불과하며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대안은 무엇인가? 직접적이고 참여적이며 다수를 주체로 세우는 민주주의를 우리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 계급의 자기 조직화 형태, 바로 총회다. 총회라는 전통을 세움으로써 우리는 극우에 맞서서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정련하는 노동자 민주주의,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트럼프, 이민세관단속국(ICE),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 총회의 힘으로 우리는 개별 노조, 일터, 대학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요구를 쟁취하는 전투적 공동 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 총회란 무엇인가? 총회란 집단 토론, 의사 결정, 행동을 위한 열린 회의 공간이다. 대중 민주주의의 장이자 실질적 권력 기관인 총회는 대부분 투쟁 속에서 자생적으로 출현하며, 일터, 지역, 캠퍼스가 공동의 싸움으로 활성화될 때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폐쇄적 위원회나 의사 결정 기구와 달리, 총회는 해당 투쟁에 영향을 받는 공동체 전체에 열려 있어야 한다. 총회는 산업별·직종별·노조별로 노동자를 고립시키는 자본주의의 인위적 분할을 거부하며, 결과에 이해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을 한곳에 결집시킨다. 예를 들어 지역 총회는 주거, 치안, 상호 부조 문제 등을 다룰 수 있다. 학생들과 교육자들은 자신들의 구체적인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총회를 결성하곤 한다. 그리고 이 형태들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의료 투쟁에서 총회는 병원 노동자, 인근 지역 환자, 그들의 가족 구성원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의 문제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교사 총회에는 학부모와 학생이 당연히 포함될 수 있다. 교육을 위한 싸움은 곧 공동체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투쟁은 서로 중첩된다. 바로 이 점이 총회를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는데, 총회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인위적 분할을 허물고,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을 토론과 의사 결정의 장으로 초대하며, 모두가 각자 기여할 방법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총회는 지역 현안을 다루는 데 한정될 필요가 없다. 뉴욕시의 의료 노동자와 환자들의 총회가 푸드 스탬프 삭감에 항의하는 시위를 결의할 수도 있고, 파업 중인 스타벅스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를 결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층 총회들은 대의원 평의회, 즉 소비에트(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를 통해 힘을 연합해서 더 광범위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다. 여러 지역 총회에서 선출하고 즉시 소환 가능한 대의원들이 소비에트에 모여 시 단위, 지역 단위, 전국 단위로 사안을 조율한다. 이 구조는 기층의 직접적이고 민주적인 통제를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지역의 투쟁들을 결합할 수 있다. 모든 형태의 총회는 고립된 불만 사항들을 모아서 실질적 권력을 향한 집단 기획으로 전환하는 기제다. 총회는 그 밖에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 O 자유롭고 열린 토론 진정한 민주적 의사 결정을 촉진하기 위해, 총회는 보통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상 토론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다양한 정치적 입장, 경향, 분파들이 당면 주제를 둘러싼 토론 및 논쟁 과정에서 총회 전체에 생각과 견해를 제시할 수 있다. 토론의 목표는 단순한 다수결이 아니라, 설득과 논증을 통해 가장 효과적인 행동 방침에 집단적으로 도달하는 것이다. O 위임을 활용하는 직접 참여 자본주의 하의 일터는 물론 대부분의 노조마저 위계적 조직 구조를 가진 경우가 흔하지만, 총회에서 최고 수준의 의사 결정권과 지도력은 기층 구성원에게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발언하고, 의견을 나누고, 행동을 제안하고, 주요 결정에 투표할 권리가 모든 구성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다는 의미다. 작은 목표를 수립하는 결정이든 파업 여부처럼 큰 결정이든 마찬가지다. 특정 회의(예를 들면 공장에서 사측과의 회의)에 참석할 사람을 총회에서 투표로 선출할 경우 선출된 이들은 총회를 대표하며, 자신의 독자적 판단에 따라 표결하지 않고 총회로부터 부여받은 위임 사항을 수행한다. 이는 관료적 지도부가 흔히 저지르는 밀실 거래를 방지한다. O 소환 가능한 순환 대의원제 통제되지 않는 소수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떤 대의원이든 총회의 결정을 대변하지 못하거나 총회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경우 총회가 소환하고 교체할 수 있다. 이는 민주제 기층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시행하는 (사실상 과두제인) “대의 민주제”의 구조와 정확히 반대된다. 그리고 동일한 인물이 계속 지도부를 맡지 않도록 소환 가능한 대의원들은 순환 배치된다. O 다수결 규율 충분한 토론을 거친 후 구성원들이 투표하면 다수의 결정이 총회 전체의 방침이 된다. 반대 의견을 가진 구성원들도 피켓 라인이나 집단 행동 등 공개 행동 중에는 다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기대가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입장을 계속 주장하고 향후 회의에서 다수를 자기 입장으로 설득할 권리를 가진다. 이 원칙을 확장하면, 총회는 자신이 속한 구조에 유기적으로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이를테면 특정한 일터, 학교, 지역의 노동자들이 총회에 참여하기 때문에) 총회의 모든 구성원은 집단적 결정이 “실행”되도록 책임질 뿐 아니라 자신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더 넓은 노동자 대중을 추동하는 역할도 맡는다. 이 같은 제도가 빚어 내는 노동자 대중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만들어 내는 것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헌신적이다. 총회는 혁명 조직이나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될 수 있다. 총회는 전술이 아니라 전략이다. 총회 내부의 민주적 절차는 구성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이들이 직접 참여하도록 설계된, 급진적 민주주의가 생명력을 얻는 공간이다. 겉보기에는 민주적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의사 결정 권한 부여를 위한 민주적 구조가 없는 타운홀 미팅과는 다르다. 이처럼 실질적 권한 없는 대표성이라는 허울이야말로 관료적 지도부가 바라는 것이고, 노조 지도부가 자신들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전술로 타운홀 미팅을 자주 활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 관료적 지도부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총회를 전용하며, 세력 관계를 뒤흔드는 조직화라는 총회 본연의 잠재력은 가로막히고 만다. 총회 구조를 통한 건설과 조직화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즉 반민주주의)로부터 진정한 민주주의,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혹은 노동자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행하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총회는 노동자 계급의 자기 조직화를 발전시키고 우리의 투쟁 방법을 개발하는 수단이다. 총회는 투쟁에서 계급적 독립성을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며, 우리를 인위적으로 분열시키고 투쟁을 가로채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제도로 돌려보내려는 부르주아 지도부 및 노조 관료들의 포섭에 저항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현실 세계의 총회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직접적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소비에트 국가를 통해 보여 주었다. 작가 존 리드가 기록했듯이, “러시아 전역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고도로 복잡한 정치 구조”가 출현했으며, 그것은 “절대다수 인민의 지지를 받았고, 역사상 그 어떤 신생 인민 정부 못지않게 잘 작동”하고 있었다. 이 구조 안에서 노동자, 병사, 농민의 평의회(즉 총회)가 일터와 지방 자치 차원에서 모두 존재하며 노동과 생활에 관련된 결정을 내렸다. 이 과정은 민주적이었고, 소수의 자본가가 아닌 다수를 위해 무엇을 생산할지 결정했다. 동시에 “지역 소비에트들은 대표자를 선출해서 전국 소비에트에 보냈고, 이 전국 소비에트는 볼셰비키 지도부가 외교 정책 등 전 러시아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으로 고심할 때 방향을 제시하며 힘을 보탰다.” 리드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발전한 이 같은 구조가 역사상 가장 민주적이고 대응력 있는 체제 중 하나였다고 기록한다.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대규모로 실현된 총회의 진정한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좋다. 하지만 그건 1917년 이야기 아닌가? 오늘날의 총회는 어떤 사례가 있는가?” 좀 더 작은 규모의 사례를 보자면, 2001년 아르헨티나 금융 위기 직후 노동자들은 사논(Zanon)이라는 세라믹 타일 공장을 점거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곳을 직접 관리·운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총회는 의사 결정의 장이 되었고, 늘 그렇듯 전투적인 평조합원을 포섭하려는 노조 관료의 시도에 맞서 싸우기 위해 활용되었다. 2006년에는 멕시코 오아하카에서 총회가 생겨났다. 교원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 경찰은 평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노동자들이 반격에 나서 경찰을 도시 밖으로 몰아냈다. 수개월 동안 “노동자 계급과 교원 노조를 포함한 지역 공동체 단위들이 오아하카 민중 총회(APPO)라고 알려진 광범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대규모 민주적 총회를 통해 도시를 운영했다.” 좀 더 최근인 2024년에는 뉴욕시립대학교 교직원 노조(PSC-CUNY) 소속 평교원 노동자들이 시티칼리지(CCNY) 가자 연대 캠프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캠프를 조직한 학생들의 다섯 가지 요구 사항을 지지할 것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학생, 교원, 지역 주민 모두가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에 맞선 조직화를 어떻게 진전시킬 것인지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논의할 수 있었다. 같은 해에 미국 최초의 약물 과다 복용 예방 센터인 온포인트NYC(OnPoint NYC)의 조직된 노동자들이 사측의 직장 폐쇄에 대응하여 건물 밖에 자체 진료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한 것도 부분적으로는 총회의 힘이었다. 최근 디트로이트에서는 “민중 총회”가 결성되어 수백 명의 사람들이 ICE와 트럼프 행정부에 맞설 전략을 토론하고 행동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왜 지금 총회인가? 오늘날 세계 정세는 요약하면 군사주의, 제국주의, 위기다. 극우가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병원에서 파업을 조직하는 간호사들이든 이탈리아에서 전국 총파업을 촉발한 항만 노동자들이든, 노동자 계급은 반격에 나서고 있다.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이 저항을 조직할 때 이들의 노력은 자본주의 정당들과 연관된 관료 조직에 의해 포섭되거나 축소되거나 왜곡되곤 한다. 총회를 통한 조직화는 진정으로 개방적인 정치적 토론, 논쟁, 민주적 의사 결정을 가능하게 만들어서 이 같은 포섭에 맞서 싸우는 핵심 수단이다. 민주적 방법을 통해 노동자 계급은 우리 모두를 해치는 체제에 맞서야 한다는 필연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며, 계급 투쟁을 조직으로 결집시킬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위기도 목격하고 있다. 유권자들이 더 이상 자신의 대표에게 대표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지배 계급 정당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는 미국 정당과 유권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계급 탈정렬 현상과 민주당의 위기에서 드러난다.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유기적 위기라 부른 것과 같은 위기는 체제를 약화시키고 전통적 정당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치 현상에 대응하도록 압박한다. 대중은 전통적 정당과 제도에 대한 신뢰를 계속 잃어 가고, “민주적”인 것으로 알고 있던 반민주적 제도 하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신뢰 상실로도 이어질 수 있는데,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그것은 “피억압자들이 몇 년에 한 번씩 억압 계급의 어떤 대표자가 의회에서 자신들을 대표하고 억압할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허용되는” 체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총회는 혁명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좌파 관료들의 주장처럼 전통적인 부르주아 (반)민주주의 구조를 보완하거나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구조에 맞서 싸우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완전히 대체하기 위해서다. 총회 구조는 전 세계적으로 진정한 노동자 계급 정당을 건설하는 토대가 된다. 자본주의 정당들이 끊임없이 대중을 배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지금, 노동자 계급에게 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자신만의 전투적 정당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그 어느 때보다 명백하다. 진정한 노동자 계급 정당이 있었다면 과연 조란 맘다니 같은 “사회주의자” 정치인이 시온주의자를 정책 위원으로 앉혔을까? 보편적 의료 보장 약속을 철회했을까? 지금 맘다니의 여러 지지자들은 그의 최근 행보에 분노하면서도 여전히 희망을 걸고 있다. 그가 학살에 가담하는 민주당의 일원인데도 말이다. 총회와 같은 자기 조직화 도구가 있다면 우리는 이미 배신을 시작한 인물에게 희망을 걸 필요가 없다. 대신 동료 노동자, 학생, 지역 주민과 함께 일어나 우리의 요구를 토론하고 함께 싸워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총회를 통해서, 우리는 정치에 관해 토론하고 논쟁하는 다수의 목소리를 구체화할 진짜 사회주의 지도자를 선출할 것이다. 노동자 계급 정당 내부에서 총회는 “혁명의 학교”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구성원들은 그 안에서 전략을 토론하고 집단적 결정을 내리고 지도부에 책임을 묻는 법을 배우게 된다. 노동자가 세계를 움직인다. 생산 현장에서 우리가 지니는 힘은 우리를 전략적 혁명 계급으로 만들고, 우리가 없으면 지배 계급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 총회는 우리의 노동력을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 것인지 혹은 사용하지 않을 것인지 집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하며, 자본을 전복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이고 민주적인 힘을 부여할 것이다. 자본주의 위기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세계에서 총회는 단순한 비판이나 대안 전술 이상의 것을 제시한다. 총회는 실천이다. 총회는 수동적인 스포츠 관전에 불과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삶과 투쟁을 능동적으로 설계하는 수단이다. 일터, 학교, 지역에서 개방적 토론, 직접 위임, 책임성의 구조를 구축함으로써 우리는 오늘의 싸움을 능동적으로 조직한다. 그리고 그 이상을 해낸다. 우리는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의 틀을 만들기 시작하며, 투쟁 속에서 착취 없는 사회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도구를 창조하는 것이다. 총회는 단순히 회의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쇠퇴하는 시대에 쟁취할 가치가 있는 미래의 토대다. 2025년 12월 26일, Left Voice에 게재된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Mike Pappas and Pola Posen 번역: 강성윤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한노운사 연재 13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1996~97년의 역사적인 총파업으로도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나아가 1998년 이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가들의 파상적인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패배를 거듭한 결과,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민주노조운동 전반은 심각한 후퇴와 변질에 직면하게 됐다. IMF 외환위기 때 펼쳐진 신자유주의 공세로 비정규직 비율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비정규직은 1987년 이전 같은 열악한 임금·노동조건과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민주노조운동의 주력이 된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상위 20% 정도에 불과했다. 비정규직을 대대적으로 노조로 조직하면서 비정규직이 겪는 초과착취와 차별을 타파하고 나아가 비정규직 제도 자체의 철폐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 민주노조운동의 결정적인 과제가 됐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은 이 과제를 제대로 수행해 내지 못했다. 이는 다시 민주노조운동의 퇴행과 관료화를 급격히 가속시켰다. 이전 편 보기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1) 잇따른 패배가 야기한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변질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노협 건설로 나아갔던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을 실천하면서 어용 한국노총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노동조합운동을 거대한 대중적 흐름으로 만들어 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전노협으로 대표되는 민주노조운동은 자본의 착취와 탄압에 맞서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열어가는 모든 노동자들의 살아있는 희망이었고, 그 자체로 노동해방을 향한 노동자들의 힘찬 전진이었다. 그러나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주도권 아래 민주노총이 건설되고, 곧이어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패배를 거듭하면서,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운동 전반은 심각하게 후퇴했다. 전노협 운동의 특징이었던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은 이제 사실상 껍데기만 남게 됐다. 이처럼 민주노조운동 전반이 심각한 후퇴와 변질을 겪게 된 것은, 무엇보다 자본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패배를 거듭하면서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들의 구성과 지향이 사실상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대기업 정규직만의 운동으로 축소돼 버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지도부의 배신을 통해 투쟁이 패배하는 양상을 거듭 되풀이함으로써,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래 발전시켜 왔던 민주노조운동의 원칙과 기풍이 심각하게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 패배의 원인과 결과 맹렬한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 자본주의는 1990년대 중반을 분기점으로 위기와 쇠퇴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그만큼 자본가들의 공격이 더욱 집요하고 악랄해졌다. 물론 그 이전에도 한국의 자본가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끔찍하게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했으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래서 20세기 후반부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민주노조운동은 자본의 탄압을 상당 정도 무력화했으며 자본가들에게 적지 않은 양보를 강제해 냈다. 대략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자본가들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탄압을 계속 퍼부으면서도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력에 밀려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전노협 소속 노조가 있던 중소자본 가운데 상당수는 아예 공장을 폐업하거나 중국·동남아 등지로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막대한 이윤을 거둬들이던 대기업 자본가들은 민주노조의 전투성을 약화시킬 방편으로 상당한 경제적 양보를 하면서 이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 자본주의가 충격적으로 위기에 내몰리면서부터 자본가들의 태도는 완연히 바뀌었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가들의 공격은 그야말로 ‘대공세’였다. 한동안 자본가들의 경제적 양보에 익숙해 있던 노동자들은 갑자기 바뀐 자본가들의 태도에 크게 당황했다.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는 노동자들에게, 특히 그 지도부에게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시야, 대담한 전망과 자신감을 요구했다. 그러나 엄혹한 사태를 헤치고 나갈 역량을 갖추지 못한 지도부는 결국 노동자들의 열망을 책임지지 못하고 자본가들에게 투항하며 배신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태전개는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밀어내고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과 밀접히 관련돼 있었다. 만일 민주노조운동이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갔다면, 이후 자본가들의 대공세에 맞설 능력과 태세를 갖춘 지도자들을 상당한 규모로 준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이 타협·개량주의에 흠뻑 젖어 들어가는 대신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잘 견지했다면, 자본가들의 경제적 양보가 일시적인 후퇴에 불과한 것일 뿐 머지않아 노동자들에게 대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으면서 그에 걸맞은 준비태세를 갖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벌어진 일은 정반대였다.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타협·개량주의 노선은 자본가들의 일시적 양보를 확고한 성과이자 엄청난 변화인 것처럼 착각했다. 민주노조운동 지도부 대다수가 ‘이제 굳이 힘들게 싸우지 않아도 자본가들로부터 적당히 양보를 얻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빠져들며 정신상태가 해이해져 가는 것과 정확히 교차하면서 자본가들의 대공세가 시작됐다. 그래서 민주노조운동 지도부 대다수는 엄혹한 사태를 헤치고 나갈 역량과 태세를 더욱 갖출 수 없었다. 민주노총이 출범하던 1990년대 중반부터 대략 2000년대 초반까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의 무자비한 공격에 맞서 매우 치열하게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한 투쟁들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당면한 공세를 물리치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세상을 향한 거침없는 전진을 희망하고 노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투쟁들은 거의 하나같이 처참하게 패배했다. 노동자대중은 생존과 권리를 지키려는 강렬한 열망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지만 지도부의 투항과 배신을 이겨내지 못했고 결국 투쟁 전열이 무너지면서 패배하는 양상이 거듭해서 되풀이됐다. 운명적인 투쟁들이 지도부의 거듭된 투항과 배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처참한 패배로 귀결되자, 대기업 정규직의 가슴 속에는 민주노조운동의 대의와 가능성에 대한 극심한 회의와 실망이 깊이 아로새겨졌다. 민주노총 출범 이후 몇 년 동안 자본의 대공세를 둘러싸고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노동자들이 처참하게 패배한 결과, 특히 투쟁의 지도부가 대중의 열망을 배신하고 자본가들에게 투항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정당성과 기풍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형태로 패배한 결과, 대기업 정규직은 보수화와 개인주의화의 늪에 깊이 빠져들었다.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생존과 권리를 당당하게 지켜내고 나아가 착취와 억압을 타파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전진할 수 있다면, 그것을 마다할 노동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만 그럴싸할 뿐 실제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면, 더 이상 그 꿈에 노동자들은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이 불가능하다면, 현실을 살아가는 노동자로서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한복판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길을 찾아야 한다. 동료들을 제쳐서라도 자본가에게 자신의 존재가치와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며,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안한 미래를 지켜줄 것은 돈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돈에 집착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민주노조운동에 실었던 강렬한 열망과 기대가 처참한 회의와 실망으로 되돌아 온 뒤, 대기업 정규직의 마음속에서 펼쳐진 논리구조였다. 대기업 정규직의 보수화와 개인주의화는 단순히 확대된 개량 때문에 벌어진 일이 결코 아니었다. 만일 민주노조운동 지도부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대중의 투쟁 의지를 올곧게 받아 안고 제대로 발전시켜 나갔다면, 확대된 개량은 대기업 정규직의 보수화가 아니라 더욱 확장된 급진화로 또한 개인주의화가 아니라 계급적 단결의 고취로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었다. 대기업 정규직의 보수화와 개인주의화는 현장에 대한 유형·무형의 통제권이 노동자들로부터 자본가들에게 되돌아간 정도, 다시 말해서 노동자들의 가장 기초적인 단결력이 해체된 정도와 거의 정확하게 비례했다. 그러므로 대기업 정규직의 보수화와 개인주의화는 저항과 투쟁의 상상력마저 거세당한 채 주어진 현실에 무기력하게 적응하게 된 현실의 표현이었다. 한편으로 비정규직보다는 낫다는 안도감과 뒤틀린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정리해고를 당하거나 비정규직으로 전락할까봐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을 뿐, 자신의 처지와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의지도 열망도 자신감도 다 잃어버린 대기업 정규직의 초라한 자화상이었다. ◎ 자주성의 상실 ‘자주성’은 자본과 정권의 지배·개입을 철저히 배격함으로써 오로지 노동자들을 위하고 노동자들의 뜻대로 운영되는 노동조합을 가능케 함으로써 민주노조를 어용노조와 구분시키는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이른바 ‘민주노조’의 대다수는 자본과 정권의 영향력이 일상적으로 개입하고 작용하는 상태로 전락했다. 무엇보다 개별 단위노조에서부터 자본의 개입과 영향력 행사가 일상화 됐다.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이른바 ‘힘 있는 민주노조’가 있는 모든 사업장에는 노동조합 현직 간부들은 물론이요 전직 간부들에 대해서까지 경영진부터 말단 관리자가 총동원된 그물망 같은 담당관리 체계가 작동하게 됐다. 그러한 사업장들에서 자본의 노무관리 부서는 노동조합의 대의원대회·운영위원회 등 주요 논의 내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나아가 노동조합 논의 과정 자체에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은밀하게 ‘하지만 매우 깊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자본의 일상적인 지배·개입은 노조간부들에 대한 엄청난 특혜·향응·금품 제공으로 지탱됐다.[1] 2000년 현대차노조가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반대’를 내건 완성차 노조들의 공동파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겨레신문 광고비 3천만 원을 회사에게 받은 돈으로 납부한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면서 집행부가 중도 사퇴한 사건은 자본으로부터의 자주성이 얼마나 심각하게 무너져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2] 자본의 지배·개입 아래 놓인 노동조합은 당연히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얼핏 상당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던 대기업 정규직 민주노조들은 비정규직 문제나 지역적·전국적 연대처럼 자본이 쉽게 용납하지 않는 사안 앞에 서면 너무나 초라하고 비겁하게 꼬리를 내렸다. 대부분의 대기업 정규직 민주노조들은 자본이 설정해 준 한계 속에서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 돼 버렸다. 민주노총에 대한 정권의 개입과 영향력 행사 또한 일반화됐다. 노동운동 경력을 가진 정권 측 인사들이 민주노조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을 일상적으로 접촉하며 크고 작은 사안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민주노조운동 상층에서 공공연한 일이 됐다. 2001년 10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정부 보조금을 받기로 결정한 것은 자주성 상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정부 보조금을 받자는 주장은 ‘국민들이 낸 세금을 우리가 못 받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그러나 이는 반노동자적인 정부가 민주노총을 길들이기 위해 얼마든지 보조금 중단 여부를 갖고 장난칠 수 있다는 점을 도외시한 논리였다.[3] 정부 보조금을 받기 시작한 2002년 초, 민주노총은 2001년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에 대해 부끄러움도 없이 ‘과도한 결정’으로 스스로 평가했다. ◎ 민주성의 상실 ‘민주성’은 민주노조가 갖는 힘의 근원이었다. 모든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단결시키고 전체 조합원의 적극적인 참여로 사업과 투쟁을 전개하면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활짝 꽃피움으로써 민주노조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이른바 ‘민주노조’ 전반은 배제·차별·무관심·관료주의로 점철된 가운데 노동자 민주주의의 형식적인 잔재들만이 앙상하게 남은 상태로 전락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탄생시킨 민주노조는 일반적으로 직종과 지위를 떠나 사업장 안에 있는 모든 노동자들을 단결시켰다. 즉 노동조합이긴 하되, 일종의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노동조합이었다. 이를테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진원지 역할을 했던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탄생한 민주노조 조합원의 20% 남짓은 당시 사내하청업체에 소속된 이른바 도급 노동자들이었다.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도급 노동자들을 포괄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가장 열성적으로 투쟁에 앞장섰기 때문에 당시의 민주노조는 출발과 동시에 다른 많은 부분에서의 성과와 더불어 도급 노동자들을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이른바 ‘민주노조’들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둘러싼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한 결과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은 같은 사업장 안에서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공존하게 됐다. IMF 외환위기 이후 사회 전체적으로 비정규직이 급속히 확산된 가운데,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버티고 있는 제조업 대공장 안에서도 전체 노동자의 30~70%에 이르는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4] 그런데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은 같은 사업장 안에서 공존하게 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단지 고용형태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했다. 한 사업장 안에서 절반밖에 안 되는 임금으로 더 고되게 일하는 노동자들, 그것도 대체로 더 젊은 노동자들을 배제하는 노동조합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자본을 상대로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보편성을 구현했던 민주노조운동의 민주주의는, 신분과 재산이 일정 수준 이하에 있는 하층민에게는 선거권도 주지 않던 초기 부르주아 민주주의 같은 저급한 수준으로 후퇴해 버렸다. 더 열악한 노동자들을 구조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노동자의 정신을 저버린 이른바 ‘민주노조’는 노동조합으로 묶인 노동자들로부터도 더 이상 진정한 활력을 모아낼 수 없었다. 대공장 정규직 노조들은 대부분 조합원들의 차가운 무관심과 수동성에 직면함으로써 노동자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를 거의 상실했다. 임원·대의원 선거와 임금·단체협약 찬반투표 등 투표 형태로 이루어지는 조합원 총회에는 조합원 80~90%의 참여를 끌어낼 수 있었지만, 이를 넘어서서 노동조합의 일상적인 사업과 투쟁에 대한 조합원의 참여도는 심각한 수준으로 추락했다. 수백 명 또는 수천 명, 심지어 수만 명이 모이는 집회들을 일상적으로 치러낼 수 있게 했던 조합원의 적극성과 열정은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거의 사라졌다. 현장에서 이루어지던 수많은 토론과 대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비판과 제안으로 넘쳐대던 노동조합들은 이제 현장 조합원들의 무거운 침묵과 냉소에 짓눌리게 됐다. 민주노총과 산하 연맹의 대의원대회가 성원 미달로 유회되거나 간신히 성원을 채웠다가 도중에 성원 부족으로 유회되는 일은 너무나 흔한 일상사가 돼 버렸다.[5] 현장 조합원들의 차가운 무관심과 수동성은 노동자들의 보수화와 개인주의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창이었다. 그런데 ‘개량의 떡고물’을 일정하게 향유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보수화와 개인주의화의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는 노동자들의 보수화와 개인주의화가 (‘확대된 개량’이 아니라) 지도부의 잇따른 배신적 투항으로 패배를 거듭하는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극심한 회의와 실망에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노동자운동 전반이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실망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환멸과 회의를 일상적으로 재생산하고 그래서 노동자들의 무관심과 수동성을 더욱 부추긴 것은, 단위노조로부터 상급단체에 이르기까지 노조간부들 전반에 퍼져 나간 관료주의였다. 원래 민주노조운동에서 노조간부가 된다는 것은 구속과 해고를 당연지사로 감수하며 끝없는 헌신과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그런 일이었다. 당연히 상당한 결의가 된 이들만이 노조간부로 나설 수 있었고, 따라서 노조간부들을 바라보는 조합원들의 가장 일차적인 심정은 신뢰와 존경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투쟁을 회피하게 된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에서는 이제 노조간부가 되기 위해 구속과 해고를 각오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노조간부들 앞에는 일반 조합원들이 누릴 수 없는 온갖 특권이 펼쳐졌으며, 심지어 향응과 금품마저 제공됐다. 물론 그것은 조합원을 팔아먹고 비정규직을 팔아먹고 연대를 거부한 대가들로 주어지는 것이었지만, 민주노조의 세련된 외형은 그러한 본질을 적당히 은폐시켜 주었다. 관료주의에 물든 노조간부들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의 지위를 좌우하는 것은 노조 선거이므로 그들은 최대한 큰 세력을 형성하여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고 온갖 지저분한 파벌 싸움에 몰두했다. 한편으로는 국민파·중앙파·현장파로 대별되는 운동적 노선의 경계가 작동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적 노선보다 선거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이합집산이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 전투성의 상실 ‘전투성’은 민주노조가 자본에게 후퇴를 강제하는 위력의 원천이었다. 초창기 민주노조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마다않고 과감하게 도전했으며, 처절한 패배를 당할지언정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이른바 ‘민주노조’들은 수많은 ‘투쟁’으로 뒤덮인 겉포장과 달리 자본의 지배를 위협하는 실질적인 투쟁은 사실상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 2000년대 초반에도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들은 수많은 투쟁을 했다. 단위노조는 임금·단체협약 투쟁에서부터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으로 정신이 없었고, 민주노총과 각 연맹은 수많은 과제들을 내걸고 몇 달이 멀다 하며 총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그 무렵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들의 투쟁을 바라보면서 현장 노동자들이 느끼던 심정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두 가지 표현이 있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과 ‘뻥파업’이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이 임금·단체협약 투쟁에 돌입하면 집행부가 어느 즈음에 어떤 내용의 잠정합의를 들고 올 것인지 대다수 조합원들이 구구절절 예언을 했는데, 조합원들의 예언은 신기하게도 십중팔구 족집게처럼 들어맞았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을 알게 되면, 이 놀라운 예지능력은 전혀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자본의 지배를 위협하는 실질적인 도전은 없이 단지 투쟁했다는 생색을 낼 수 있는 적당한 지점까지 시늉을 내고 자본이 쉽게 양보할 수 있는 지점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게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의 임금·단체협약 투쟁에 깔려 있는 공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쟁’에서 구조조정, 실질 노동시간, 노동강도, 비정규직 등 자본의 본질적 이해관계들을 침해하는 진정한 쟁점들은 늘 뒤로 밀리다가 어느 순간 흐지부지 사라지기 마련이었고, 그저 몇 푼 더 얹은 돈이 그것들을 대신했다. 이것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이러한 투쟁들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에게서 어떤 신명이 날 리가 없었다. 집회에 참여한 노동자 수도 적거니와 참여한 노동자들이라고 해봐야 힘차게 팔 흔드는 것조차 곧장 짜증을 냈다.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라는 말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 파업을 해봐야 어떤 프로그램도 없고 그저 퇴근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수많은 투쟁으로 일상이 가득 차 있으나 실질적인 투쟁이 없기는 민주노총 또한 마찬가지였다. 몇 달이 멀다 하고 민주노총은 이러저러한 사안을 내걸고 총파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러한 총파업의 대부분은 진지하게 조직하고 준비한 투쟁이 아니었으며, 그저 당장의 필요에 따라 이리 붙이고 저리 붙여서 급조된 투쟁일 뿐이었다. 그러한 총파업은 당연히 힘차게 전개될 리가 없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아래로부터 진지하게 조직하고 준비했던 1996~97년 총파업을 지도부가 배신했던 경험이었다. 대부분의 현장활동가들은 민주노총의 총파업 계획이 발표돼도 또 배신당할 거라는 불신 때문에 그 준비에 진정으로 몰두하려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걸핏하면 유보되거나 실행돼도 실질적인 파괴력이 거의 없는 ‘무늬만 총파업’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서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가리켜 실질적인 투쟁은 없이 뻥만 치는 파업이라고 ‘뻥파업’이라 하였던 것이다. 실질적인 투쟁의 실종 때문에 민주노총 등이 주관하는 집회는 재미없고 맥 빠지는 분위기로 가득 찼다. 집회 순서는 대회사·투쟁사·연대사·결의문 등으로 천편일률적으로 이어지고, 이러저러한 직함을 가진 연사들이 다 아는 것 같은 얘기들만 한참 늘어놓다가 내려갔다. 중간 중간 끼어드는 노래와 율동은 잠시 지루함을 덜어줄 뿐이었다. 집회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연단에 서는 자들과 노동자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두터운 벽이 가로놓였다. 노동자들은 그저 연설을 듣고 구호를 따라 외치고 박수만 쳤다. 노동자들의 의견을 발표할 기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노동자들 또한 기대하지 않았다. 다 같이 일어서서 율동이라도 함께 하면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셈이었다. 집회에서 노동자들은 주체가 아니라 철저히 대상화된 존재일 뿐이었다. 물론 그 시절에도 비정규직 투쟁을 비롯하여 자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실질적인 투쟁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한 투쟁들 속에서 노동자들은 더없이 진지하고 열정에 가득 차 있었다. 최선의 단결력과 투쟁력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동자들은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한 투쟁들이야말로 비록 작은 규모라 하더라도 자본의 지배를 실질적으로 위협하며, 의미 있는 성과를 쟁취할 수 있게 했다. 설령 패배하더라도 더 큰 승리를 향한 자양분이 됐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이후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에 일반화된 가식적인 투쟁은 자본에게 전혀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었다. ‘투쟁’이라고 다 진짜 투쟁은 아니었다. ◎ 연대성의 상실 ‘연대성’은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노동자계급을 새로운 역사의 주인으로 형성하는 수단이었다. 민주노조들은 자본에 의해 강요된 분할을 단호히 거부하고 담장을 넘어 지역을 넘어 모든 노동자가 하나임을 살아 움직이는 실천으로 확인해 나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자들만의 운동으로 쪼그라든 대기업 정규직 노조운동은 담장 밖의 연대는 고사하고 담장 안의 비정규직과의 연대조차 거부하는 비참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운동의 연대성 상실은 이른바 ‘가장 강력한 민주노조’로 살아남았던 현대차노조에서 가장 극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1998년의 정리해고 사태로부터 1년이 조금 지난 1999년 하반기, 현대차는 전혀 새로운 국면 앞에 섰다. 내수와 수출이 모두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생산량이 판매량을 따라가지 못하자 현대차 자본은 다급해졌다. 1년 6개월 무급휴직을 받은 2천여 명이 1년여 만에 현장으로 조기 복귀했다. 2000년 3월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 같던 일반 정리해고자들의 복직마저 받아들일 정도로 현대차 자본은 다급했다.[6] 그러나 그것으로는 태부족이었다. IMF 외환위기 이전 수준 이상의 생산인력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으나, 1997년 말에 2천 7백여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쫓아내고 1998년에 희망퇴직으로 8천여 명을 쫓아낸 상태였다. 불과 2년여 만에 1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다시 충원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1998년에 회사가 했던 약속들에 따르면 희망퇴직자를 우선적으로 재고용해야 했다. 그러나 현대차 자본은 정규직을 재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값싸고 언제든 다시 정리할 수 있는 비정규직으로 자리를 채우고 싶었다. 현대차 자본에게는 사태가 거기까지 진행돼야 ‘정리해고-비정규직화’라는 1998년의 구상이 완성되는 셈이었다.[7] 그런데 회사가 급격한 생산 확대를 너무나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된 상황은,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보자면 1998년의 패배를 만회할 수 있는 호조건을 의미했다. 1998년에 정리해고를 강행한 것에 대해 자본으로부터 강도 높은 사과를 받아 내고, 향후 또다시 위기가 오더라도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에 입각한 고용보장’을 확약하도록 자본을 강제할 수도 있었다. 또한 부족한 인원은 희망퇴직자를 우선 복귀시키고 그래도 부족하면 정규직 신규채용을 하도록 관철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다. 노조 위원장은 전체 조합원 집회에서 핏대를 올리며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드시 사내하청을 들여 놓겠다”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뿜었다.[8] 아직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의 패배가 안겨준 정신적 충격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 조합원들은 ‘앞으로도 노동조합은 정리해고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현장 분위기 속에서 소수만이 반대 목소리를 냈을 뿐 다수 조합원들은 집행부의 기조를 수용했다. 결국 2000년 6월 현대차노조는 정규직 조합원의 고용을 보장받는 대신 부족한 생산인력은 사내하청 형태의 비정규직을 대거 투입하여 해결하기로 사측과 합의했다. 이른바 ‘완전고용보장 합의서’라는 어울리지 않은 제목을 단 이 합의서는 향후 고용위기가 발생할 경우 ‘비정규직을 정규직 고용의 방패막이로 사용한다’는 합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정규직의 완전고용 또한 그런 의미에서 보장한다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희망퇴직으로 밀려나간 옛 동료들의 재고용 가능성을 사실상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투입된 사내하청이 불과 몇 달 만에 전체 생산직의 30%를 넘는 1만여 명으로 급격히 확대됐다. 현대차노조와 회사의 합의는 명목상 IMF 외환위기 이전 사내하청 비율인 16.9%까지 투입을 허용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현장 대의원의 동의 아래 개별 선거구 단위로 물밀 듯이 사내하청이 투입됐다. 그런데 사내하청은 정규직과 같은 사업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도 철저히 차별받았다.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작업복이나 안전화는 정규직보다 훨씬 못한 품질로 지급받거나 또는 그마저도 지급받지 못했다. 일하다 다쳐도 산재를 신청할 엄두도 낼 수 없었고, 월차휴가 한 번 마음 놓고 쓸 수 없었다. 작업장에는 욕설과 반말이 서슴없이 날아다녔다. 정규직과 완전히 섞여 일하면서도 상대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공정을 떠맡아야 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강력한 민주노조가 있다는 현대차에서 비정규직은 온갖 차별과 비참한 노동조건을 겪어야 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결코 하나의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정규직 활동가들이 이러한 차별에 눈을 감았다. 아직 스스로 조직화하지 못했던 비정규직은 세상을 향해 자신들의 처지를 드러내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비정규직의 현실이 방치되고 은폐되는 상태가 비정규직 스스로 노조를 설립하는 2003년까지 3년 가까이 지속됐다. 하청노동자들은 대부분 6개월 단위로 재계약을 했고, 그때마다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대다수 하청업체가 동일한 양식의 근로계약서를 사용했는데, 거기에는 “관리자의 지시에 절대 따라야 하며 지시불이행 3회시 권고사직”, “퇴사시 7일전에 사직예고 통보의무, 양자 합의 후 결정”, “결근시 최소 전날까지 결근계 제출”, “근태불량, 지시불이행 등으로 시말서 2회 제출시는 스스로 사직”, “소급 1개월 내에 품질문제 3회 발생시는 어떠한 조치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 “입사 3개월 수습기간 중 근무태도 불량과 업무 달성도가 떨어질 경우 어떠한 조치에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 “작업불량 유발자는 징계 해고” 등 사실상 노예계약이라 할 만한 조항들이 버젓이 들어 있었다. 정규직과 사내하청의 임금격차 또한 심각했다. 하청노동자 임금은 비슷한 시기 입사한 정규직에 비해 60% 정도에 머물렀다. 기본시급에서도 차이가 있었지만, 연장·야간·휴일 등 시간외 근로에 적용되는 통상시급에서는 차이가 더 벌어졌다. 하청노동자들은 수당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상여금은 명목상 400~600%를 지급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입사 후 1년이 지나야 상여금을 온전히 지급하거나 작업실수를 빌미로 상여금을 삭감하곤 했기 때문이다. 복지 측면에서도 차별이 심각했다. 이를테면 정규직은 통근버스를 이용하고 작업복을 회사에서 세탁해 주었지만, 하청노동자들은 그런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1차 하청은 대부분 정규직과 뒤섞여서 작업을 했는데, 그러면서도 공공연한 차별에 시달렸다. 하청노동자는 대부분 더 어렵고 힘든 공정에서 작업해야 했는데, 정규직들은 반 단위로 작업 로테이션을 돌 때 하청노동자가 맡은 더 어렵고 힘든 공정은 빼고 돌았다. 반별로 써클룸·휴게실·탈의실 같은 공간이 배정돼 있었지만, 하청노동자는 이 공간을 쓰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2·3차 하청업체들은 대부분 작업공간이 독립돼 있었는데, 과거에 정규직이 일할 때보다 작업자 수가 줄어든 경우도 많았고, 발암물질을 사용하는데도 환풍기 하나 없이 작업을 하기도 했다. 2·3차 하청은 1차 하청에 비해서도 차별 받았다. 야간 근무 때 1차 하청은 정규직과 함께 야식 빵을 지급받았지만, 2·3차 하청은 받지 못했다. 추석 때 1차 하청은 상품권을 받았지만, 2·3차 하청은 소주 2병만 받았다. 하청노동자들에게 법정 최저기준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일부 하청업체들은 법정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지급하기도 했는데, 주로 여성 노동자들이 그 대상이었다. 4대 보험을 안 들어주는 경우도 꽤 많았다. 일요일 특근의 경우 노동시간의 70%, 토요일 특근의 경우 30%만을 인정해주는 업체도 있었다. 하기휴가를 무급으로 적용하는 업체도 있었고, 월차휴가·생리휴가를 사전에 신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근처리하기도 했다. 관리자들과 일부 정규직의 폭언과 폭력에도 시달려야 했다. 고3 실습생들은 허술한 기숙사에 모아놓고 수시로 철야근무를 강요했는데, 그 결과 36시간 내지 그 이상의 연속노동을 강제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청노동자는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일을 하면서도 안전보호구 하나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장공장에서 일하는 하청노동자는 허술한 방진마스크 때문에 공장 안의 모든 유해물질을 들이마셔야 했다. 작업복이나 안전화도 제때에 교체받지 못했다. 안전교육을 채용시 그리고 월 2시간씩 하게 돼 있었지만, 제대로 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하청업체에는 안전교육 담당자도 따로 없었고, 안전교육이 잔업시간에 배치될 경우 교육은 하지 않은 채 확인서명만 받고 퇴근시켜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안전교육을 한다 해도 대부분 품질향상이나 불량지적 같은 엉뚱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결국 하청노동자는 수시로 산업재해 위험 앞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2001년 한해에만 현대자동차에서 4명의 하청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했다.[9] 2000년 이후 UPH는 끊임없이 증가하여 2년이 지난 지금 시간당 생산대수가 30% 이상씩 증가한 상황이다. 그동안 사측은 … 일방적으로 UPH 상승을 밀어붙여 보고 현장의 문제제기가 있으면 M/H 협상을 통해 전환배치와 하청투입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 문제는 실질 노동강도가 증가되고 있음에도 현장 조합원들은 노동강도 강화를 몸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 정규직 노동자의 체감 노동강도 강화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로 이전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결국 … 조합원들은 … 노동강도 강화를 적당히 수용하면서 하청투입을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10] 사측은 하청의 필요성을 현장에서 유포하면서 68차 임시대대의 결정(추가투입 인원은 반드시 정규직으로)을 무력화하기 위한 공작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현장에서 하청 투입 문제와 관련하여 … 어떤 부서에서는 조합원 서명을 받아 노동조합에 하청 투입을 요구하는 작태가 있는가 하면 … 하청투입을 요구하는 조합원 투표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일부 대의원들은 하청투입에 반대하는 대의원은 고립시키면서 하청투입을 합의해내는 상황도 나타나고 있다. 사측이 … 현장여론을 조작하면서 하청투입을 요구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대의원까지 그런 요구에 함께 하도록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11] 현대차에서 벌어진 일들은 거의 모든 사업장에서 비슷한 형태로 되풀이됐다. 현대차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 고용의 방패막이로 쓰겠다며 노동조합이 대놓고 자본과 합의하는 일은 흔하지 않았지만,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2000년 말 한국통신계약직노조의 투쟁에 최소한의 연대 집회마저 거부했던 한국통신노조의 배신적 행태, 2001년 5월 캐리어사내하청노조의 조합원들을 직접 폭행하는 구사대 역할마저 서슴지 않았던 캐리어노조의 만행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쏟아지는 차별과 억압에 눈을 감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서슴없이 배신하면서도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2000년대 초반의 이른바 ‘민주노조’들은 추악하게 변질돼 있었다. ◎ 변혁성의 상실 ‘변혁성’은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전진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자 끝없는 헌신과 희생의 원천이었다. 초창기 민주노조들은 (비록 그 개념이 충분히 명료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노동해방’을 거침없이 꿈꾸고 노래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렀을 때 이른바 ‘민주노조’들은 노동해방과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더 이상 꿈꾸거나 노래하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출범 시점부터 전노협이 내걸었던 ‘노동해방’ 대신 ‘사회대개혁’을 내걸었다. 민주노동당이 출범하고 난 뒤에는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가 널리 사용됐다. ‘사회대개혁’과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 속에 담긴 것은 자본주의 모순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대담한 의지가 아니었다. ‘자본주의 틀 안에서 조금씩 세상을 바꿔가는 것만으로 충분하거나 또는 그것만이 가능하고 현실적인 것’이라는 개량주의적인 환상이었다. 1998년부터 한국 사회에 거세게 휘몰아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 최고의 자살률, 세계 최저의 출산율로 대표되는 것처럼 한국 사회를 세계 어느 곳보다 살기 힘든 곳으로 변모시켰다. 급격한 비정규직 확산과 심각한 사회 양극화 속에서 노동자·민중이 처해 있는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그 어느 곳보다 더욱 더 자본주의 모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절실히 요구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을 헤쳐 오면서도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 운동 전반은 그 출범부터 안고 있던 개량주의적 환상 속에 깊이 빠져든 채 좀처럼 헤어나지 못했다. 변혁성을 상실함으로써 자본주의 모순에 정면으로 도전할 의지와 능력을 갖추지 못한 ‘민주노조’ 운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 앞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의 공세에 숱한 패배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노조’ 운동 전반을 휘감게 된 개량주의적 환상, 즉 변혁성의 상실은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의 상실을 가져온 근본 원인이기도 했다. 또한 ‘민주노조’ 운동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만의 운동으로 쪼그라든 채 전체 노동자들을 대표하지 못하고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희망으로 서지 못하게 한 근본 원인이기도 했다. 2) 현장조직운동의 가능성과 퇴행 ◎ 노조간부와 현장활동가들의 노선 분화 1990년대를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 내 노조간부와 현장활동가들 사이에서 뚜렷한 노선 분화가 전개됐다. IMF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 공세가 본격화한 1990년대 후반까지, 노조간부와 현장활동가들은 크게 세 개의 경향으로 뚜렷이 분화됐다. 민족해방파를 모태로 한 원조 타협·개량주의 - ‘국민파’ 1980년대 중반 학생운동에서 다수를 장악한 민족해방파(NL)는 민주노조운동 안에서도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전노협이 건설되고 강력한 기세를 유지하는 동안 전노협 안에서 민족해방파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 전노협 건설 시기에 민족해방파의 상당수가 ‘한국노총 민주화’론을 주장하며 전노협에 결합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전노협을 중심으로 거침없이 성장하는 선진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민족해방파의 민족주의 노선으로는 감당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시기에 민족해방파는 전투성·급진성의 강도가 약했던 사무전문직과 일부 대공장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유지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족해방파는 ‘범민주후보 단일화’라는 명목으로 다시 한 번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하면서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의 많은 역량을 김대중 후보 선거운동으로 몰고 들어갔다.[12] 1992년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전국노동자선거대책본부’(노동자선대본)가 전노협, 업종회의, 현대자동차·대우자동차·풍산금속 등의 대공장 노조, 수도권 노동단체 연석회의 등 노동단체들의 참여로 구성됐다. 그러나 전노협의 다수는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라는 전국연합의 정치방침을 동의할 수 없었고, 따라서 노동자선대본은 전국연합의 결정을 앞장세워 전노협의 이름을 끌어넣긴 했지만, 실제로는 민족해방파의 영향력 아래 있던 노동자들만 모인 선거운동 기구가 됐다. 노동자선대본은 민족해방파의 영향력 아래 있던 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세력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 뒤 이들은 전노협 안팎에서 공동 대응을 펼치면서 전노협 한계론을 널리 확산시켜 나가는 주역으로 활약했다. 민족해방파의 영향력 아래 있던 노조간부·현장활동가들은 민주노조운동에서 원조 타협·개량주의 세력이었다. 전노협 안에서는 주도권을 잡아본 적이 없었지만,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민주노총 출범과 함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적극 주창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이른바 ‘국민파’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민주노총 1기 국민파 지도부는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이 초라한 결과만을 남기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스스로를 광범위한 민족주의 운동의 일부로 인식하면서 노동자계급의 단결된 투쟁력보다 국민 여론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을 계속 이끌던 국민파 지도부는 1998년 2월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 도입에 합의한 후 대의원대회에서 압도적으로 탄핵 당했다.[13] 청산주의에 휩쓸리며 새로 등장한 타협·개량주의 - ‘중앙파’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견지하던 노조간부와 현장활동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1991년 소련 붕괴와 1993년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권의 출범 이후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해 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사회주의 운동의 직간접적 영향력 아래서 한창 성장해 가던 선진노동자들에게 소련의 붕괴는 해명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더욱 심각한 혼란에 빠뜨린 것은 사회주의 운동을 휩쓴 청산주의 물결이었다. 특히 인민노련·삼민동맹·노동계급 세 정파의 통합으로 1991년 6월 출범한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창당준비위원회’(한사노창준위)가 8월에 소련 붕괴를 겪은 뒤 하반기 내부 논의를 통해 빠르게 청산주의로 전환한 사건은 가장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박노해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앞세워 시끌벅적하게 사회주의 운동을 주창하고 있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이 차츰 청산주의 흐름으로 돌아선 과정도 만만치 않은 악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1992년과 1993년을 거치며 한사노창준위와 사노맹 등 과거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다수가 청산주의에 빠져 개량주의 정치노선을 들고 나오자 그 영향력 아래 있던 선진노동자들도 다수가 그들을 따라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다. 사회주의 운동의 간접적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한동안 전노협의 전투적 노선을 대표했던 상층 노조간부들 또한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합류했다. 이 흐름은 전노협 초대 위원장 단병호와 걸출한 학생출신 활동가로서 마창노련과 서노협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문성현·심상정으로 대표됐다. 이들은 애초 전노협 강화론과 전노협 한계론이 공개적인 논쟁을 시작했을 때 전노협 강화론에 서 있었으나 이후 사실상 전노협 한계론으로 노선을 수정해 나갔다.[14] 이들이 전노협 시기에 선진노동자들 속에 쌓은 두터운 신망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은 그들의 타협·개량주의로의 전환을 몇 년 동안 명확히 판단하지 못했다. 이들은 민주노총 건설 이후 정리해고를 비롯한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서 대중의 투쟁의지를 배신하며 굴욕적인 타협을 주창하고 나섬으로써 자신들의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을 스스로 입증했다. 이처럼 사회주의 운동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다가 청산주의 흐름을 따라 타협·개량주의로 전환한 노조간부·현장활동가들은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노동조합 중앙의 상층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라는 뜻의 이른바 ‘중앙파’를 형성하게 됐다. 그런데 중앙파를 구성하게 된 여러 작은 흐름들이 중앙파라는 하나의 큰 흐름으로 결집한 것은 1998년에 이르러서였다. 이들은 이미 1993년 무렵에 각기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지만, 노동자운동의 핵심 전망으로 진보정당과 산별노조를 각기 배타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서로 대립하는 등 한동안 분열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결국 이들은 진보정당과 산별노조를 동시에 추진하자는 통합된 전망을 통해 하나로 결집할 수 있었다. 실천적으로 볼 때 중앙파를 하나로 묶어세운 결정적 계기는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에서 ‘최소화된 정리해고’라는 배신적 투항을 함께 옹호하고 합리화한 사건이었다. 전투적·변혁적 지향을 가진 선진노동자들 - ‘현장파’ 1993년 말에 이르렀을 때, 전노협에서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견지하는 세력은 상층 지도부에서는 소수파가 됐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전투적·변혁적 세력이 여전히 상당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또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힘차게 뻗어 나간 민간부문과 공공부문 대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거치면서, 이들 대기업 노동자운동 속에서 새롭게 상당한 기반을 구축하게 됐다. 특히 대공장의 전투적인 선진노동자들은 1995년부터 자본의 신경영전략에 맞선 현장투쟁 속에서 현장조직을 건설해 나갔다. 이러한 현장조직은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노동조합 상층부에서 뚜렷하게 주도권을 장악해 가는 데 맞서 ‘현장권력 쟁취! 계급적 연대!’를 기치로 아래로부터 전투적·변혁적 세력이 구축돼 나가는 데서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됐다. 이렇게 사회주의자들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견지했던 선진노동자들은 현장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투쟁을 조직해 나간다는 의미의 이른바 ‘현장파’를 형성하게 됐다. 현장파는 정리해고를 비롯한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서 국민파와 중앙파가 배신적 투항을 거듭하자 이를 강력하게 규탄하면서 역동적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획득했다. 특히 1998년 2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1기 지도부 탄핵을 주도했다. 그러나 현장파 또한 많은 한계를 드러내면서 얼마 못 가서 주도권을 잃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현장파의 다수는 국민파와 중앙파의 뒤를 이어 비슷한 관료적 타락과 변절의 길을 걸었다. ◎ 현장조직운동의 전개 1990년대 중반 이후 민주노조운동 전반이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패퇴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현장조직운동은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결집한 힘으로 타협·개량주의 지도부의 한계와 오류를 질타하고 전투적·변혁적 대안을 모색하던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며 등장했던 이 시기 현장조직운동은 오래지 않아 자기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며 추락과 변질의 길을 걸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선진노동자 조직 노동조합 공식 체계로부터 독립된, 선진노동자들의 독자적인 조직 운동은 일찍이 1980년대 말부터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다. 선봉대·소위원회 등이 노동조합 체계 안으로 포괄되어 존재했다면, 다양한 수준의 학습모임, 부서별 활동가 모임,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등은 노동조합 공식 체계 밖에 존재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이러한 선진노동자 조직들은 대체로 한 사업장 안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복수로 존재하였으며, 연대투쟁이 활성화된 지역에서는 지역 단위로 존재하기도 했다. 이 시기 선진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공식 체계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가와 상관없이) 자발적인 헌신과 실천을 통해 조합원들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실질적인 선봉 대오로 그 역할을 인정받았다. 선봉대와 소위원회 같은 일부 선진노동자 조직이 노동조합 공식 체계 속에 자리를 잡게 된 것도 그 반영이었다. 이 시기에는 노동조합 지도부가 전체 조합원의 뜻과 어긋나거나 배신할 경우 그 지도력이 상대적으로 쉽게 부정당했다. 그런 경우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조합원대중 속에서 실질적인 지도력을 인정받으면서 파업을 비롯한 격렬한 투쟁들을 직접 이끄는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15] 이 시기에 선진노동자 조직에 참여했던 현장활동가들은 대체로 전투적·변혁적 기세로 충만해 있었고, 학습과 실천을 결합시키며 노동자의식을 맹렬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주의 운동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은 스스로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국민파 타협·개량주의에 맞선 현장조직 운동의 본격화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한편에서 전투적·변혁적 노선이 일부 대기업 노동자운동 속으로 확산되기도 했지만, 민주노조운동 전반으로 보자면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빠르게 확산돼 민주노조운동 전체의 주도권을 거머쥐게 됐다. 특히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주도권 아래 민주노총이 출범해 나가는 과정은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기세를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민주노조운동 전반에서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반영하여, 현장활동가들 속에서도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제 현장활동가들의 조직은 더 이상 전투적·변혁적 기세만으로 충만하지 않았고, 전투적·변혁적 기세가 약화되는 것과 비례하여 노동조합 공식 체계를 능가했던 노동자들 속에서의 실질적인 지도력도 약화되거나 소멸돼 갔다. 하지만 여전히 현장활동가들 속에서는 전투적·변혁적 흐름들이 우세했다. 특히 울산을 중심으로 한 일부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운동에서 그러한 경향이 강하게 존재했다.[16] 이런 상황에서, 국민파로 대표되는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민주노총과 대다수 대공장 노조들의 집행부를 장악해 나가자,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현장활동가들은 사업장별로 단일조직을 건설하는 흐름으로 나아갔다. 대표적으로 울산에서는 1995년을 거치며 ‘현대자동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민투위), ‘현대중공업 전진하는 노동자회’(전노회), ‘현대정공 부서동지회연합’(동지회), ‘울산남부지역 노동자연합 추진위원회’(남연추) 등이 출현했다. 이른바 현장조직의 본격적인 등장이었다.[17] 현장조직들은 지역과 전국 차원에서 연대 기구 건설로 나아갔다. 가장 먼저 울산에서 1996년을 거치며 ‘울산지역 현장조직대표자회의’가 건설됐다.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이 민주노총 지도부의 배신적 행태로 허망하게 종결된 직후인 1997년 3월에는 전국의 10여개 현장조직들이 모여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전국회의)를 건설했다. 이 시기의 현장조직들은 대체로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주도했다. 현장조직들은 1996~97년 총파업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데서 헌신적으로 앞장섰다. 또한 민주노총 지도부와 현총련 등에 의해 적극적으로 주창되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기아자동차노조 집행부가 회사 부도사태에 직면하여 내세운 ‘회사 살리기’ 등의 투항적인 개량주의 노선을 강력히 비판했다. 위기를 노동자에 대한 공격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자본의 계급성에 대해 경제 살리기, 노사화합이라는 몰계급성으로 답하는 민주노총 상층의 태도에서 자본의 승리는 예정된 것이었다. 자본과의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건설되고 사수된 전노협에 대해 활동가들이 가졌던 ‘내가 곧 전노협이다’라는 일체감은 노사협조주의 세력들이 민주노총 상층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약화되고 있다. 기업별로 노조민주화 투쟁과 자본에 맞서는 투쟁을 하면서 활동의 고유영역을 찾았던 현장조직은 이제 전국적인 결집을 도모하면서 남한 노동운동의 계급적 발전을 고민해야 하는 운동의 무게를 하나 더 짊어지게 됐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러한 중차대한 임무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 하나, 우리는 자주성, 전투성, 계급성, 연대성으로 대변되는 자랑스러운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되살리고 발전시키기 위해 분투할 것을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현장조직운동 세력들의 지속적인 결합을 모색하여 현장조직운동을 확대, 강화,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을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노사협조주의의 다른 이름인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비판하고 민주노총을 올바르게 세워내기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현장에서의 끊임없는 실천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에 복무하는 아래로부터의 산별노조 건설에 박차를 가할 것을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제도권 진출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할 것을 결의한다.[18] 그러나 현장조직들 내부에도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이미 상당히 형성돼 있었다. 이로 인해 현장조직들은 일정한 내부 분란을 겪어야 했다. 가장 분란이 심했던 현대자동차 민투위의 경우 1997년 8월에 노조 선거를 앞두고 조직원의 절반가량이 이탈하여 국민파 노선의 새로운 현장조직 ‘실천하는 노동자회’(실노회)를 결성했다. 현장조직의 지역적·전국적 연대 사업 또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국회의의 경우 참석자가 적어 회의 진행조차 쉽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성명서 발표, 토론회 개최,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에서의 독자집회 정도가 1997년 전국회의 사업의 사실상 전부였다. 1998년 잠시 민주노총의 주도권을 획득한 전투적·변혁적 세력 그런데 IMF 외환위기를 향해 치달아가던 1997년 하반기에, 전국회의에 소속된 현장조직들이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 아시아자동차, 현대정공, 한라중공업, 캐리어, 기아정기 등 다수의 대공장에서 대거 노조 집행부를 장악하게 됐다. 대부분 현장조직의 실천력과 조직력을 앞세운 젊은 활동가들이 노사협조주의(타협·개량주의) 성향의 쟁쟁한 명망가들을 제치고 당선되는 양상이었다. 자본의 공격과 생존권 위기를 직감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대응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장 전투적인 세력을 선택한 결과였다. 이런 기세를 몰아 전국회의 소속 현장조직들은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해 준 데 맞서 1998년 2월 9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1기 지도부를 탄핵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앞세운 민주노총 지도부의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정리해고 도입 합의라는 참혹한 결과로 귀결된 상황에서, 이와 같은 전국회의 현장조직들의 부상은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1998년 3월말에 열린 민주노총 2기 임원 선거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선거권을 가진 대의원의 다수가 국민파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예상을 깨고 전국회의를 중심으로 전투적·변혁적 세력이 주도하여 내세운 이갑용-고영주 후보조가 당선됐다. 위기의 순간에 극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전투적·변혁적 세력은 작은 역량을 갖고도 민주노총 전체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전투적·변혁적 노선에 입각하여 민주노총의 총반격 투쟁을 주도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 것이었다. 중앙파의 배신적 이탈 그러나 민주노조운동 전반에 대한 전투적·변혁적 세력의 주도권은 형성될 때만큼이나 빠르게 소멸됐다. 먼저 단호한 기세로 5월말 총파업까지 이끌어 나가던 민주노총 2기 지도부가 금속연맹, 공공연맹, 현대차노조 등 주요 단위들을 이끌던 중앙파의 압력에 굴복해 노사정위원회로 복귀하면서 더 이상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일관되게 실천할 수 없게 됐다. 전국회의 소속 현장조직들도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전국회의 소속 현장조직들이 배출했던 대공장 노조 집행부들이 1998년을 경과하면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속에서 투항적인 배신을 거듭했다. 현장조직 출신 대공장 집행부들은 중앙파의 논리로 자기 입장을 정리해 나갔다. 이들은 “강력한 투쟁으로 생존권을 사수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조합원들의 지지를 얻어 집행부를 장악할 수 있었지만, 그러한 투쟁을 실제로 결행할 수 있는 전망과 태세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 따라서 자본의 공격이 점차 구체화되자 노동자의 생존권을 포기하는 투항적인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때 노동자의 생존권을 팔아먹는 굴욕적인 노사협조주의 노선을 그럴싸하게 합리화하는 논리구조가 바로 중앙파의 ‘정리해고 최소화’, ‘현실 가능한 것을 목표로’, ‘정리해고 저지 대신 산별협약 추진’ 노선이었다. 현장조직 출신 대공장 집행부들은 중앙파의 논리를 따라 투항적인 배신의 길을 함께 걸으면서 서로를 합리화해 주었다. 중앙파의 이탈은 현장조직의 분화로 이어졌다. 많은 현장조직에서 중앙파가 이탈해 별도의 현장조직을 만들었다. 한 사업장에서 국민파·중앙파·현장파의 현장조직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하나의 조직을 유지하는 경우에도 내부의 경계선이 뚜렷해졌다. 2001년 4월 국민파 경향의 현장조직들이 전국적으로 결집하여 ‘민주노동자 전국회의’를 결성했다. 중앙파 경향의 현장조직들도 자신들만의 전국적 네트워크를 가동해 나갔다. 전국회의는 현장파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조직이 됐다. 현장파의 추락 중앙파 세력과 분리된 현장파 현장조직은 중앙파가 떠나간 빈자리를 새로운 선진노동자들로 채워 넣으면서 빠르게 전열을 재구축했다. 2000년 하반기 현대차노조의 국민파 집행부가 ‘광고비 대납 사건’으로 사퇴한 이후 2001년 현장파 민투위 집행부가 등장한 것은 현장파의 세력 회복을 상징했다. 현장파가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실천함으로써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배신적 투항과 다른 길이 존재함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다시 한 번 왔다. 그러나 절호의 기회는 현장파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추락시키는 참사로 귀결됐다. 현장파의 가장 대표적인 현장조직이던 민투위가 배출한 현대차노조 집행부는 2001년 계급투쟁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던 7·5 총파업에 불참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건 전국적인 노동자투쟁 전선에 대한 노골적인 배신이었다. 현장파의 실천은 국민파·중앙파의 타협·개량주의와 구분되지 못했다. 현장파 또한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감당할 수 없는 세력으로 추락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현장조직운동의 한계 중앙파의 배신적 이탈이나 현장파의 추락은 무엇보다 이 시기 현장조직 운동이 가진 사상적·실천적 취약함에서 비롯됐다. 현장조직은 노사협조주의(타협·개량주의) 지도부가 저지르는 투항적 배신에 강하게 분노하고 규탄했다. 그러나 지도부의 투항적 배신에 대한 현장조직의 분노는 현장으로부터 올라오는 건강한 감성이긴 했지만, 그러한 분노가 계급적 본능을 넘어 체계적인 사상과 노선으로 나아가 계급적·변혁적 실천으로 정립되지는 못했다. 너무나 명백한 투항적 배신에는 분노하면서도 그러한 투항적 배신의 원인을 체계적으로 규명하고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실천적 노력에는 게을렀다. 현장조직은 (적어도 초기에는) 자기 조직 출신인가에 상관없이 집행부가 투항적인 배신으로 나아가는 것을 강력하게 질타하고 비판했다. 그런데 집행부에 대한 현장조직의 질타와 비판은, 현장조직 자신의 사상적·실천적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도전으로 이어져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현장조직은 현장으로부터 올라오는 노동자들의 계급적 본능에 따라 자본주의 위기와 자본가들의 공격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전투적·변혁적 지향으로 출발했지만, 집행부를 장악했을 때는 사상적·실천적 취약함으로 인해 자본주의 위기가 가하는 거대한 압력에 마찬가지로 굴복하면서 투항하고 말았던 것이다. 현장조직운동의 변질 현장파마저 전투적·변혁적 노선으로부터 사실상 이탈해 버리자, 현장조직 전반의 성격은 심각한 변화를 겪게 됐다. 이제 진지한 운동적 지향이 아니라 노조 집행부 장악을 향한 이전투구가 거의 대부분의 현장조직을 지배하게 됐다. 현장파가 보여준 말과 실천의 불일치를 토대로 어지간한 현장조직들마다 거침없이 그럴싸한 말들을 책임질 의사도 없이 내뱉을 수 있게 되면서, 전혀 실천되지 않는 말장난들로 치장한 현장조직들의 위선과 기만이 사업장마다 범람하게 됐다. 국민파·중앙파·현장파 안에서도 다시 두세 개로 현장조직들이 분화돼 나가고 어용 세력들마저 두세 개의 현장조직을 만들고 나오면서, 한 사업장에 10여 개에 가까운 현장조직이 난립하기도 했다. 수많은 말잔치와 달리 대다수 현장조직들은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실질적 굴종, 노사협조주의와 관료주의의 확산, 비정규직 등 투쟁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 방기 등에서 비슷한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선거를 둘러싼 파벌적 관계들을 전체 조합원 속으로 확장함으로써 대중을 끊임없이 분열시켜 나갔다. 대다수 현장조직들은 관료주의에 빠진 노조간부들의 근거지로 전락해 버렸고, 이러한 현실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조합원대중의 실망과 냉소를 더욱 부추겨 나갔다. 3)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 IMF 외환위기 이전에도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꽤 높았다. 1990년대 초중반에 비정규직은 대체로 전체 노동자의 4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전 비정규직의 주축은 업무 특성상 일일고용이 만연한 건설·항만 노동자들, 근로계약의 과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 상시지속업무를 하는 대규모 제조업체, 즉 대공장에도 비정규직이 존재했다. 특히 조선업과 철강업은 1970년대 초반 산업이 출발할 때부터 직영과 함께 사내하청·외주하청·일용공 등으로 통칭되는 사내 비정규직을 상당한 규모로 운영했다. 이를테면 현대중공업의 경우, 1972년 3월 현대건설 조선사업부 체제로 울산조선소 기공식이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73년 7월부터 ‘위임관리제’라는 이름으로 사내하청 제도가 도입됐다. 1973년 12월 ‘현대조선중공업’을 정식 설립하기도 전이었다. 사원 대우를 해주겠다며 모집한 직영 기능공의 대다수를 사내하청으로 전환하는 조치에 노동자들은 크게 분노했다. 1974년 9월 19일 현대조선 노동자 3천 명이 참여한 파업에서도 ‘도급제 폐지’가 핵심 요구였다. 그러나 위임관리제 전환은 강행됐고, 전환이 완료된 10월말 전체 기능직 가운데 직영공은 3,929명(26.6%), 사내하청은 10,852명(73.4%)이었다.[19]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은 1977년 12월 17,500명까지 늘었다가 경제위기를 거치며 1981년 12월 6,000명으로 줄었다. 1980년대 초반 해양부문 합병과 사업 확장으로 직영공이 6,000명에서 17,000명으로 급증했다가, 1985~86년 조선업 불황으로 다시 직영공 2,000명, 사내하청 2,000명이 감원됐다. 그래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터졌을 때 현대중공업에는 직영공 15,000명과 사내하청 4,000명 정도가 일하고 있었다.[20] 그런데 1987년 이전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임금, 노동조건, 작업장 내 지위 등에서 차이가 크지 않았다. 모든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장시간·고강도 노동, 폭력적인 현장통제에 시달리며 극히 열악한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의 고용이 상대적으로 더 불안정하긴 했지만, 정규직이라고 딱히 안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고용안정보다 지옥 같은 현장에서 탈출하기를 원했다. 일자리는 어디를 가나 열악했다. 대신 일자리를 새로 구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1987년 이전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서 서로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직영 노동자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건설에 동참했고, ‘하청 직영화’ 등의 요구를 함께 내걸고 관철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선도했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었다. 반면 자동차산업 등에서는 1987년 이전에 사내하청이 비생산 업무에서만 제한적으로 활용됐다. 따라서 1987년 노동조합을 설립할 때 비정규직 의제가 따로 등장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이 산업 전반으로 본격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노동자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이후 몇 년 간의 격렬한 파업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를 건설·강화했고, 임금을 획기적으로 인상시켰으며, 노동조건을 개선시켜 나갔다. 전국적으로 수천 명이 해고당하는 등 큰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위대한 전진의 시간이었다. 몇 년 동안 하염없이 밀리던 자본가들은 마침내 체제를 정비하고 이른바 ‘신경영전략’을 앞세워 1990년대 초반부터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이윤을 회복하기 위한 온갖 대책들이 버무려진 신경영전략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비정규직의 확산이었다. 1990년대 초반 비정규직은 먼저 사무전문직에서부터 크게 확산됐는데, 흔히 용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비정규직은 곧바로 제조업 전반으로 확대됐는데, 여기서는 소사장제와 사내하청이라는 이름이 함께 쓰였다. 사내하청은 불과 몇 년 만에 일정 규모 이상의 제조업체 전반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를테면 1994년 한국중공업에는 사내하청 업체가 500여 개에 이르렀고, 쌍용중공업에는 80여 개, 현대정공 창원공장에는 20여 개의 사내하청 업체가 있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의 노사합의에 따라 1989년 하청 직영화가 완료되고 하청업체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1990년대 들어 하청이 다시 생겨나더니 1996년에는 하청노동자 수가 직영의 31.7%로까지 늘어났다. 1990년대 제조업 사내하청의 확대는 주로 사측의 일방적 방침에 따라 또는 사측의 현장 생산관리 부서와 노조의 현장 대의원들 사이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사내하청 문제가 노사간의 단체교섭에서 다루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내하청에게 넘어간 자리는 대부분 노동자들이 꺼리는 위험하고 힘든 작업공정이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의식이 높아지고 안전에 대한 관심이 강화되면서 위험하고 힘든 작업에 대한 기피 현상이 크게 확대됐다. 그런데 자본은 위험하고 힘든 작업공정을 시설투자를 통한 공정개선으로 극복하지 않고 더 취약한 노동자들을 투입하여 해결하려 했다. 대기업의 경우 주로 하청이관을 통해 하청노동자들이 투입됐다면, 중소기업의 경우 주로 산업연수생 제도를 통해 이주노동자들이 투입됐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6~70% 선에 머물렀다. 이 시기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을 끌어내린 주역은 하청업자들의 중간착취였다. 1994년 <주간내일신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 제조업체의 사내 하청업자는 하청노동자 1인당 원청으로부터 48만 2,790원을 지급받았지만, 30만 4,170원만을 임금으로 지급함으로써 17만 8,620원을 중간착취하고 있었다. 원청으로부터 받은 금액의 63%만을 임금으로 지급하고 무려 37%를 중간착취한 셈이다.[21] 그 무렵 창원 현대정공의 한 하청 사장은 “하청노동자 한 사람당 10만원으로 보면 된다. 20명 정도면 내 수입이 한 달에 2백만원 되고, 30명 되면 3백만원 된다”고 말했다. 1990년대 제조업 전반으로 확대된 사내하청은 위험하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훨씬 더 적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됐다. 1987년 이전과 달리 정규직과 사내하청 사이에는 임금, 노동조건, 작업장 내 지위에서 뚜렷한 차이가 존재했다. 현대자동차는 1990년대 초반부터 생산부문에서도 하청화 및 외주화를 꾸준히 진행했다. 하청이관은 처음에는 서브라인 공정에서부터 시작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메인라인 공정 여기저기로 파고들었다. 상대적으로 위험하고 힘들어서 조합원들이 기피하는 작업공정이 하청이관의 우선 대상이었다. 장비 자동화를 명분으로 조합원들을 전출 보낸 뒤 그 자리에 하청을 투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회사는 1990년대 초반 이후 생산직 신규채용을 사실상 중단한 가운데, 현장에서 자연감소·산재·훈련·교육 등으로 결원이 발생해도 보충해 주지 않으면서 그 자리에 사내하청을 투입하도록 종용하고 유도했다. 1990년대 중반 급격히 증가한 사내하청 노동자는 1994년 말 기준으로 3,232명에 이르렀다. 이후 울산공장의 하청노동자 수는 1996년 3월 3,800여 명, 1997년 12월 3,486명으로 IMF 외환위기를 빌미로 대규모 정리해고가 단행될 때까지 비슷한 규모를 유지했다.[22] 노동조합은 사내하청 확대에 대처하는 데서 큰 한계를 드러냈다. 대체로 사내하청 확대가 기존 정규직 조합원들의 고용을 위협하고 노동조합을 약화시킬 거라는 점에서 반대하긴 했지만, 사측의 일방적인 하청이관이나 현장단위 노사담합을 중단시킬 정도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못했다. 기업별 노조의 의식과 형식에 갇힌 까닭에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대변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못했다. 결국 사내하청 확대는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더 적은 임금을 받지만 노동조합에서는 오히려 배제되고 있는 노동자들을 양산하는 과정이었다. 사내하청 확대는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자본의 이윤을 회복한다는 신경영전략의 목표에 아주 잘 부합하는 수단이었다. 김영삼 정권은 집권 초반인 1993년부터 용역·사내하청의 확대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정리해고 법제화와 근로자파견법 제정을 중심으로 노동법 개정을 추진했다. 1996년 12월 26일 신한국당의 날치기 노동법에 맞선 1996~97년 총파업의 핵심 이슈도 정리해고 법제화와 근로자파견법 제정 문제였다. 1997년 3월 여야합의 노동법 재개정 때 2년 유예됐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법은, 1998년 2월 IMF 외환위기가 시작되는 충격 속에서 김대중 당선자 주도로 노동법이 재개정될 때 결국 도입됐다. 근로자파견법은 1998년 7월 1일부터 발효됐다.[23] IMF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를 휘몰아친 몇 년 동안, 대규모 정리해고와 맞물려 비정규직이 사회 전반으로 급격하게 확산됐다.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서면서 일반적인 고용형태가 됐다. 특히 새롭게 사회에 뛰어드는 청년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인생을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됐고, 비정규직에서 벗어나는 게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 됐다. IMF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은 그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불과 몇년 사이에 전체 노동자의 15~20% 정도가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락하여 비정규직 비율이 55~60% 정도로 치솟았다. 또한 고용안정성·임금·노동조건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가 매우 크게 벌어졌다. IMF 외환위기 이후 모든 점에서 심각한 차별을 받는 비정규직의 보편화는 한국의 노동자계급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집단으로 뚜렷하게 분할시켰다. 비정규직이라는 단어 또한 ‘상당한 임금과 안정된 고용, 일정한 권리를 누리는 소수 노동자들’(정규직)과 달리 ‘구조적인 무권리와 고용불안 아래 신음하는 다수 노동자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회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은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을 망라하며 제조업·건설업·서비스업 등 전 산업에 걸쳐 등장했는데, 그 유형이 매우 다양하지만 크게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첫째, ‘직접고용’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주로 공공부문·금융업·사무전문직에서 나타났는데, 실제 사용자가 직접 고용 당사자로 나서긴 하지만, 계약직·임시직 등으로 고용 기간이 한시적이고 불안정했다. 비정규직 가운데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했다. 둘째,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주로 제조업과 건설업에서 나타났는데, 하청업체에 고용돼 있으나 실제 사용자인 원청으로부터 실질적인 업무지시와 노무관리를 받았다. 특히 제조업의 사내하청은 본질적으로 근로자파견제에 입각한 파견노동자들이지만,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에 파견근로가 금지된 관계로 도급의 외양으로 위장해서 나타났다. 셋째, ‘특수고용’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주로 건설·물류·민간서비스 등에서 일정한 자격을 요하는 업무에서 나타났는데. 외견상 자영업자로 돼 있으나 실제로는 특정 사용자와 실질적인 지배종속관계에 있었다. 특수고용 비정규직은 과거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이었으나 1990년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외견상 자영업자로 강제 전환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넷째, ‘일용고용’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주로 영세한 제조업·건설업·서비스업에서 나타났는데, 정상적인 고용계약을 생략한 채 그날그날 또는 단기간 고용이 이루어지는 형태였다. 비정규직의 임금은 동일한 노동을 하는 정규직에 비해 40~70% 정도였다. 비정규직 다수의 임금은 전체 노동자 임금 평균의 40% 수준인 법정 최저임금에 간신히 턱걸이하거나 심지어 미달했으며, 국민연금·의료보험·산재보험·고용보험 등 4대 사회보험에도 제대로 가입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휴일·휴가를 비롯해서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최소한의 법적 권리들마저 침해받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상용직 대비 임시직, 일용직, 파견용역직의 임금 수준은 2001년 53.9%, 42.9%, 69.4%에서 2005년 50.7%, 36.9%, 61.5%로 눈에 띄게 하락했다. 이것은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동안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양극화만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내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양극화가 함께 진행됐음을 뜻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가 점점 벌어진 것은 자본가들의 공격이 노동자계급 안에서 좀 더 취약한 계층에 집중된 까닭이었다. 자본가들은 노동조합 같은 저항의 무기를 가진 대기업 정규직에게는 고용과 임금을 보장하되 노동강도를 높이는 정도로 착취를 강화했지만, 저항의 무기를 갖지 못한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으로 몰아넣고서 극도의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을 강요하며 막대한 초과착취에 나섰다. IMF 외환위기 이후 노동자계급 안에서 일어난 양극화는 노동자계급을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분할시켰다.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분할은 자본가들의 분할통치 전략으로 가속됐다. 자본가들과 보수언론 그리고 정부는 비정규직의 열악한 처지가 마치 정규직 때문에 비롯된 것인 양 정규직 노조를 ‘집단이기주의’로 몰아붙이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노동자계급 내부의 양극화는 훨씬 더 근본적인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양극화를 은폐하거나 희석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됐다. 자본가들은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자본가 이윤이 노동자 임금의 수백수천 배에 이른다는 사실을 감추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자본가들의 분할통치 전략은 비정규직의 분노가 자본가가 아닌 정규직을 겨냥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정규직이 정규직에 대한 원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자본주의 본질을 꿰뚫는 계급의식과 자본가들에 맞선 계급투쟁으로 다가서지 못하게 하려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노동유연화 정책은 일자리와 소득 상실 위협으로 노동자의 집단성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법령상 보장된 노동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문제는, 1987년 이후 노동자 투쟁으로 현실적 의미를 얻은 노동기본권을 다시 부정하려는 전략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더욱이 이 과정은 ‘노동시장 양극화’라는 프레임으로 조직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집단 이기주의로 윤색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그 파괴적 효과가 증폭되었다.[24] 비정규직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매우 낮아서, 노무현 정권 출범 무렵 사실상 0% 수준이었다가, 노무현 정권 시절 상대적으로 활발히 조직화가 진척됐지만 겨우 1% 정도로밖에 올라서지 못했다.[25] 특히 법률적으로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특수고용 노동자들과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결성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교섭과 파업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 자체가 사실상 불법으로 취급돼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90년대 말부터 분출한 비정규직 조직화는 다음과 같은 공통의 어려움에 부딪쳤다. 우선, 노조를 결성하자마자 법제도를 활용한 정부와 사용자의 탄압에 시달렸다. 비정규직들은 대개 근로계약기간이 정해져 있고, 평상시에는 반복적 재계약을 통해 상시 사용하다가도 사용자가 원할 때에는 언제든지 재계약을 거절하는 방식으로 합법적으로 해고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하여, 노조에 가입하면 재계약을 거절하는 것이 사용자들의 대응공식이 되었다. 특수고용 노동자의 경우 노동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간접고용 노동자의 경우 실제 사용자인 원청이 노동법상 ‘사용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들은 노동3권을 보장받지 못했다. 자본은 근로자지위확인의 소·노조 부존재 확인의 소 등 각종 소송, 집회금지·업무방해 금지 가처분 등 각종 가처분 소송, 손해배상 청구·(가)압류 등 사법적 수단을 적극 활용하였다. 정부 역시 노조설립 신고제를 활용한 조직 결성 방해, 단체행동에 대한 공권력 투입, 법제도 개악(화물운송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제 도입 등)으로 노동기본권을 억압했다.[26]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 문제나 원청의 사용자성 인정 문제가 아예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 데에는, 노사정간의 불리한 역관계도 물론 작용하였겠으나 그보다는 아예 논의의 대상으로도 삼지 않겠다는 정부·자본의 완강한 태도가 자리잡고 있다. 비정규직 관련 법률의 시행과 함께, 비정규직은 주기적인 고용불안을 경험하게 되고 노동조합을 통한 집단적 문제해결보다는 개인적인 경쟁력 확보와 관리자에게 줄서기로 내몰리게 되었다.[27] 4) 현대중공업노조의 침몰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진원지였던 현대중공업노조는 1995년 민주노총을 건설할 무렵까지 이 땅 민주노조운동의, 아니 천만 노동자계급의 명실상부한 대표주자였다. 대공장 노조로서는 드물게 전노협의 전투적·변혁적 운동과 강력하게 흐름을 같이 했다. 특히 1990년 현대중공업노조의 골리앗 파업은 노동자들의 가슴속에 뜨거운 감동을 남겼다. 현대중공업노조는 노동자·민중에게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기까지 했다. 사랑한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동지들이여 우리들의 결사투쟁은 이다지도 끝이 없구나 사나이 한 평생 노동자로 태어나 투쟁과 투쟁으로 살아온 우리 이것이 나의 길 노동자의 길 아아아 골리앗이여 서러워 울지 말아라 아아아 골리앗이여 노동자의 깃발이여[28] 그러나 1990년대 중반을 거치며 운명의 저울추가 반대로 넘어갔다. 1987년 이후 매년 이어지던 파업이 1994년을 끝으로 멈췄다. 1995년 어용 세력이 대의원의 절반을 넘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 후반이 되자 90% 이상에 이르렀다. 2002년 마침내 집행부가 어용에게 넘어갔고, 2004년 박일수 열사투쟁에서 저지른 만행 때문에 금속연맹에서 제명당했다. 자신감과 활력으로 넘쳐나던 현장은 침묵과 한숨만이 가득했다. 일하다 다쳐도 산재신청조차 못할 정도로 얼어붙었다. 말 그대로 ‘절망의 공장’이었다. 어둠의 세월은 깊고도 길어 마치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한때 한국 노동자운동의 거침없는 전진을 대표했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이제 노동자운동의 패배와 좌절을 상징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다. 먼저 정권과 자본의 집요한 탄압이 있었다. 거듭되는 대규모 구속과 해고는 평범한 가족을 가진 노동자들에게 결코 적지 않은 상처와 피로감을 남겼다. 조폭에 다름없는 대규모 경비대가 현장 안팎에서 활동가들을 감시하고 걸핏하면 폭력을 휘둘렀다. 현중 경비대의 고삐 풀린 사설 폭력에 경찰은 대놓고 눈을 감았다. 어용 세력을 육성하려는 체계적인 시도가 있었다. 다물교육을 활용해서 조장·반장들을 극우 민족주의로 무장시켰다. 회사가 잘 돼야 나라가 잘 되는데, 노조가 회사를 방해하니 악의 무리라는 논리였다. 고된 노동을 하는 현장 활동가에게 편한 외곽 부서로 이동시켜 주겠다고 회유해서 무력화하거나 어용으로 돌려놓았다. 조합원대중과 가족들까지 체계적으로 포섭하고 관리했다. 부서 관리자들은 조합원의 경조사를 꼼꼼히 챙기며 정서적으로 파고들었다. 모든 조합원의 성향을 분석해 투표나 집회 같은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점검하고 압박했다. 지역에 문화센터를 건립해서 조합원 가족들의 문화적 욕구를 선점하면서 애사심과 중산층 허위의식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전망 상실’의 문제가 있었다. 1991년 소련 붕괴는 노동자운동 전반에 엄청난 사상적 혼란을 가져왔다. ‘노동해방’ 대신 ‘사회대개혁’을 부르짖는 타협·개량주의가 급격히 득세했다.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또 다른 반동체제로 전락해 온 소련의 역사와 본질을 직시해 내고, 그래서 노동자계급 해방투쟁의 깃발은 소련의 붕괴와 상관없이 더욱 드높이 휘날려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상적 힘이 그 시절 한국 노동자운동 속에는 매우 약했던 까닭이었다. 스스로를 “노동해방 선봉”으로 자부하던 현대중공업 선진노동자들도 대다수가 심각한 사상적 혼란에 휩싸였다. ‘노동해방’이라는, 너무나 뚜렷해 보였던 목표가 흐릿해지자 자신감·투지·규율·능동성·적극성 등등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다. 이전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자본의 탄압과 회유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으로 다가왔다. 선진노동자들이 능동성을 잃어가는 만큼 자본의 관리체계가 노동자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해 갔다. 투쟁의 거리에서 함께 했던 노동자의 문화가 생기를 잃어가는 만큼 가족들은 문화센터의 교양강좌로 눈을 돌려갔다. 주도권을 쥐기 시작한 자본이 결정적으로 완승을 거둘 수 있게 한 것은 비정규직, 즉 사내하청 문제였다. 사내하청의 광범한 재확산은 기세가 주춤해진 노동조합의 힘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카운터펀치였다. 현대중공업에서 사내하청 문제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다. 1973년 7월부터 ‘위임관리제’라는 이름으로 사내하청 제도가 도입됐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터졌을 때 현대중공업에는 직영공 15,000명과 사내하청 4,000명 정도가 일하고 있었다. 1987년, 56일간 파업을 벌인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사내하청을 직영으로 전환시켰다. 사내하청 노동자들 스스로가 노동자대투쟁에 ‘하도급 철폐, 하청의 직영화’를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파업지도부 ‘민주노조개편대책위’는 17개 요구조건 가운데 12번째로 ‘하도급 직영화’를 명시했다. 1973년 위임관리제 전환 이후 14년 만에 거둔 승리였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자본은 1989년 하반기부터 ‘외주업체’라는 이름으로 다시 스멀스멀 사내하청을 들이기 시작했다. 직영공 대비 사내하청 비율은 1991년 8.6%에서 1996년 31.7%, 2000년 50.5%, 2005년 80.3%, 2010년 127.4%로 계속 늘어났다. 1990년대 중반 현장권력을 둘러싸고 노동조합과 자본이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던 시기에, 노동조합은 사내하청 확산에 침묵하고 외면했다.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하다는 식의 태도였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정신으로부터 명백한 후퇴였다. 노동해방의 원대한 전망을 놓쳐버리고 조합주의의 좁은 시야에 갇힌 결과이기도 했다. 현장의 모든 노동자를 단결시키지 못하고서, 그것도 가장 열악한 노동자를 끌어안지 못하고서, 노동조합이 힘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욕심이었다. 현장권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2000년대 초반에 가서야 뒤늦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소극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내하청이 늘어나면서 파업의 파괴력도 크게 제한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규직 조합원의 위축된 심리상태였다. 바로 옆에서 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가 ‘정규직’ 되는 것을 소원으로 여기는데, 어찌 정규직 노동자가 자신이 겪는 착취와 억압을 온전히 직시하고 분노할 수 있을 것인가! 현대중공업노조가 노동해방의 전망을 확고하게 견지하지 못했던 것은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 시절 노동자운동 전반이 갇힌 한계로부터 현대중공업노조도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중공업노조가 노동자의 분할을 방치한 것은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스스로가 이미 1987년에 실현했던 바를 지켜내지 못하고 후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조합을 넉다운시킨 자본의 ‘신경영전략’ 공세는, 1990년대 후반 전체 자본가계급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위한 실용 교본이 되었다. 현대중공업에서 벌어진 자본 대 노동의 전투가,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전 사회적인 수준에서 자본가계급 대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벌어졌다. 현대중공업보다 더 잘 싸운 사업장도 있었다. 공공부문에서는 저항 과정에서 몇 개의 대규모 민주노조가 새로 등장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현대중공업처럼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벌어진 이 사회적 전투에서 노동자계급은 패배했다. 승리한 자본가계급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자유 사용권’을 획득했다. 노동자운동 전반이 패배하게 된 방정식은 현대중공업에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1996~97년 총파업과 이후 여러 사업장 투쟁에서, 노동자대중은 생존권을 위협하는 자본의 공세에 맞서 폭발적인 투쟁으로 떨쳐 일어섰다. 하지만 지도부 대다수는 타협·개량주의에 갇혀 ‘기업이 망하고 나라가 망하는 데 방법이 없다’는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자본의 공세를 사실상 수용하고 말았다. 현대중공업처럼 완전히 어용노조로 넘어간 사업장은 많지 않았지만, 대다수 민주노조에서 관료화가 심각하게 진행됐다. 개량주의에 갇힘으로써 전망을 상실한 지도부는 빠르게 관료적으로 타락해 갔다. 희망을 잃은 대중은 계급운동의 대의에 회의를 품고 조합주의·부문주의로 빠르게 퇴행했다. 현장 곳곳에서 그리고 사회 전반에서 비정규직이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는 가운데, 노동자운동은 사실상 상위 20% 대기업 정규직만의 운동으로 쪼그라들고 말았다. 정규직 운동의 후퇴와 교차하면서, 2000년대 초반부터 비정규직 노조들이 여러 곳에서 등장하여 처절한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비정규직은 대부분 조직화되기도 어렵고 자신감도 부족했다. 정규직의 연대와 엄호도 거의 받지 못했다. 위축된 비정규직 대중은 전망 자체가 ‘정규직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다음 편 보기 [1] 노조간부들이 입사청탁·금품수수로 저지른 각종 비리가 대대적으로 폭로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2005년 이후였다. 그러나 이미 2000년대 초반에 자본이 광범한 수준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 간부들을 특혜·향응·금품으로 포섭하고 있다는 양심고백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2] 당시 현대차노조는 국민파 집행부가 이끌고 있었다. 국민파 집행부는 광고비 대납 의혹이 제기되자 노조 대의원대회에 상집간부 가족의 전세금을 빌린 것이라는 허위 자료를 제출하기까지 했다. [3] 민주노총 차원의 결정이 있기 전에 이미 많은 지역본부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각종 명목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지원금을 받아썼고 지금도 받아쓰고 있는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받지 말자고 결정하면 어떻게 하냐’는 논리가 대의원대회를 압도했다. 2002년에 9억 7천만 원으로 시작된 정부 보조금은 2005년에 30억 원으로 늘어나 민주노총과 산하 연맹들이 사용하는 사무실의 전세 보증금으로 사용됐다. [4] 이 무렵 노동조합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현대모비스·동희오토 등을 필두로 생산직 100%가 사내하청 노동자들로 채워진 공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5] 상급단체 대의원은 대체로 단위노조 간부들이라는 점에서 상급단체 대의원대회의 무산 사태는 일차적으로 단위노조 간부들 전반의 관료화 때문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조합원들의 무관심이 놓여 있었다. [6] 현대차는 대다수가 여성인 식당 정리해고자들의 복직만큼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식당 정리해고자들은 노조의 어정쩡한 태도 또한 강력히 질타하는 처절한 투쟁 끝에 2000년 6월 ‘현장으로 이동시 정규직 복직, 노조식당 잔류시 정규직 수준으로 임금·노동조건 회복과 자녀 중 1명 정규직 추천권’ 등 원직복직에 준하는 성과를 얻었다. [7] 1998년 7월 1일 근로자파견법이 발효될 때부터 제16조 2항과 시행령 제4조에는 ‘정리해고를 한 후 2년 이내에는 해당 업무에 파견근로자를 사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조항이 존재했다. 또한 제5조 1항에는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에는 근로자파견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의 조항이 존재했다. 그러므로 현대차 자본이 2000년에 대규모 사내하청 투입을 추진한 것은 자본을 위해 만들어진 근로자파견법에 입각해 보더라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8] 1999~2000년 현대차노조는 ‘국민파’인 실노회 집행부가 이끌었다. 실노회 집행부는 몇 달 뒤 이른바 ‘광고비 대납 사건’으로 중도사퇴했다. [9]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10]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2/05/07, <노동자의길> 신문. [11]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2/11/20, <민투위 비정규직 사업팀> 유인물. [12] 1992년 대선에서 민족해방파의 ‘범민주후보 단일화’ 노선 반대편에는 1987년 민중후보 운동을 계승하는 (백기완을 후보로 내세운) ‘사퇴하지 않는 민중후보’ 노선이 있었다. 전노협은 그 둘을 절충한 ‘민족민주진영의 독자후보를 전제로 한 민주대연합 모색’을 다수 의견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민중운동 전반을 포괄하던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전국연합)에서 확고한 주도권을 갖고 있던 민족해방파는 전노협의 입장을 묵살하고 전국연합을 통해 ‘범민주후보 단일화’를 대통령 선거 방침으로 결정했다. [13] 2000년대 이후 ‘국민파’는 민족해방파의 친북적 이념에 대한 수용 여부와 노조 관료화에 대한 태도에 따라 일정한 분화를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민족해방파의 이념에 보다 충실한 현장활동가들은 ‘국민파’ 대신 ‘자주파’로 자신을 규정하고자 했다. [14] 이들이 전노협 한계론으로 넘어간 것은 1993년을 거치며 전노협 안에서 전노협 한계론이 다수파를 형성하게 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됐다. [15]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1988~89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노조 위원장의 직권조인에 굴복하지 않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128일 동안이나 파업을 이어 나갔던 ‘128일 파업’, 1989년 4월 마창노련 선봉대와 단위노조 정방대를 중심으로 구속노동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창원대로 전역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이어나갔던 ‘창원대로 투쟁’,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을 진압하러 가는 전경들에 맞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심야부터 오전까지 격렬한 가두투쟁을 벌이면서 자발적 비공인파업에 나섰던 ‘4·28 연대투쟁’ 등을 들 수 있다. [16] 1990년대 초반 이후 전노협의 근간이었던 중소사업장 노조의 다수가 산업 구조조정의 여파 속에서 폐업당하며 사라져 간 점, 전노협 상층의 다수가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한 점 등으로 인해 1990년대 중반에 이르렀을 때 전노협 사업장의 대부분은 침체 상태에 빠져 있었다. [17] 현장조직 건설은 자본의 신경영전략에 맞서 현장투쟁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도 현장조직은 노사협조주의로 치닫는 타협·개량주의 노조 지도부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8]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1997/09/27,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대중토론회 결의문」. [19] 신원철, 2003, 「사내하청공 제도의 형성과 전개: 현대중공업 사례」, 『산업노동연구』 제9권 제1호, 120쪽. [20] 정이환, 1992, 「제조업 내부 노동시장의 변화와 노사관계」, 112쪽. [21] 현자노동자신문, 1994/06/01, 「불법 파견노동자 대책은」. [22]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23] 근로자파견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끈질기게 저항한 덕분에 노동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조항이 일부 포함됐다. 대표적으로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에서는 원칙적으로 파견노동자를 쓸 수 없다’라든가 ‘2년 이상 근무한 파견노동자는 정규직으로 간주한다’(고용의제)는 조항이 있었다. 이러한 조항들은 2000년대 이후 제조업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불법파견 판정·판결을 이끌어내고 직접고용·정규직화를 주장하며 투쟁할 수 있는 법률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한편 한국의 근로자파견법 도입은 일본을 본뜬 것이었는데, 일본에서는 1985년에 근로자파견법이 도입됐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2004년에 파견법이 개정되면서 제조업 파견이 허용되고 파견기간이 최대 3년으로 연장된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근로자파견법 제정 직후부터 불법파견 투쟁이 광범하게 전개됨으로써 자본가들이 제조업 파견의 합법화를 추진할 동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24]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225쪽. [25] 같은 시기 전체 노동자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0%를 약간 넘었다. [26]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190~191쪽. [27]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224쪽. [28] 김호철 작사·작곡, 1990, <골리앗의 그림자> 1절.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연서명은 민주적 토론의 수단이며, 운동의 확대를 위해서도 필요하고 정당하다올해 사업계획에 대한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전체회의를 앞두고,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은 사업계획에 포함된 OSF 기금 수령의 건에 대해 반대 연서명을 받았다. 이는 논의를 보다 폭넓게 촉진하고, 나아가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을 더욱 폭넓게 조직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연서명과 같은 수단들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가질 수 밖에 없는 필연적 한계를 보완하는 장치이며,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매개다. '압박'과 '동원'은 민주주의의 불가분한 요소다 2024년 3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장, 대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일련의 대의원들, 그리고 이에 동참하는 대의원 자격이 없는 평조합원들과, 조합원도 아닌 ‘외부인’들이 모여 현수막을 펼치고 피켓팅을 하고 구호를 외치며 선동발언을 한다. “회계공시 거부하고 자주성을 지킵시다!” “국적과 인종을 넘어 노동자는 하나! 민주노조가 지켜야할 원칙입니다!” 한 대의원은 조합원 3명과 같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대의원들 바로 앞에서 피켓팅을 하며 말을 건넨다. 어떤 이들은 대의원대회 좌석 하나하나마다 준비한 유인물을 배치한다. 이는 당시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민주노총에서 벌어진 논쟁적인 사건들에 관한 행동이었다. 당시 윤석열 정부가 민주노총에게 회계공시를 강요하였는데, 민주노총 집행부 다수, 일부 산별노조는 이를 불가피하게 수용해야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이에 반대하는 동지들이 ‘회계공시를 받는 것은 민주노조의 자주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또 당시로부터 얼마 전인 2023년 12월, 건설노조 대구경북건설지부가 ‘불법고용 이주노동자 단속 촉구’를 내걸고 대구출입국외국인사무소 앞에서 집회를 했었다. ‘사람이왔다_이주노동자차별철폐네트워크’ 설립의 한 계기가 되기도 했던 해당 사안을 두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함께 조직하고 싸워야 할 단결의 대상이 아닌 추방의 대상으로 보는 이러한 시각에 반대하는 의견을 담아, 175개 단체와 894명의 개인이 1월 19일 공동성명을 발행했고, 그 연장선에서 대의원대회 앞에서 피켓팅을 진행했다. 이러한 피켓팅을 보면서 민주노총 집행부, 건설노조 집행부, 회계공시 수용이나 건설노조의 이주민 단속촉구 집회에 찬성하던 대의원들은 어떤 마음으로 지나갔을까? 아마도 적잖이 불편했을 것이다. 아무리 대인배라도 자신의 결정과 입장을 반대하는 이야기를 대놓고 하는 반대파들의 존재가 썩 편하기는 어렵다. ‘저 구호 하나에 담기지 않는 어려운 사정들이 얼마나 많은데…’ 회계공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미등록 이주노동자 추방을 촉구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나름의 이유도 있는 것인데, 그런 본인들의 입장을 헤아려주지 않아 억울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대의원대회장에서 선동하는 모습을 보고 대의원들의 생각이 바뀌어서, 추진하려던 안건이 부결될까봐 걱정이 되고 압박을 느낄 수도 있다. 다른 예를 보자. 지난 윤석열 탄핵 정국 이후 대선 시기, 민주노총 집행부는 "‘진보정당과 연대연합을 실현한 후보’를 지지한다"는, 즉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민주노총 지지후보로 결정하고자 하는 입장을 가졌었다. 이는 중집 내부에서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고, 이에 당시 민주노총 집행부는 민주노총 지지후보를 아예 내지 않는 방향으로 대응했다. 이에 민주노총 내 일부 단위에서는 ‘민주노총이 즉각 지지후보를 결정해야한다’는 취지의 연서명을 받았고, 349명의 민주노총 활동가들이 연서명을 모아 발표했다. 이 모든 행위는, 회의장(대의원대회, 중앙집행위원회 등)을 벗어나, 해당 사안에 대해 대중들의 참여를 촉구한다는 점에서 ‘대중동원(mobilization)’ 행위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상기하였듯 반대입장을 가진 단위들에게는 압박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닌가? 이것은 민주주의다. 정확히 이러한 동원과 압박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가질 수 밖에 없는 필연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수단들이며,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매개다. 노동자 민주주의 계급투쟁의 역사는 민주주의를 확대해온 역사였다. 운동 내부에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이를 체화하는 과정은 노동자계급이 스스로를 계급으로 조직하는 과정의 정수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 노동자계급은 늘 자본의 독재 아래 살아간다. 자본가가 통치하는 모든 작업장의 기본 원리는 상명하복이며, 이런 환경 속에 보통의 노동자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표현하는 법조차 잊어버린채로 살아간다. 노동자계급이 ‘쇠사슬에 묶인 노예’에서 ‘세상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시키는대로 일하고 주는대로 받고 살라’는 자본가의 독재에 맞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내린 결단에 따라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민주노조 운동은 바로 노동자계급을 그런 존재로 조직해가는 운동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단결의 기구인 노동조합은, 그것이 민주노조라면, 의사결정에 있어 자본가들의 방식과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해야한다. 그 핵심은 아래로부터의 자유로운 의견표현이 전면적으로 보장되고, 서로 다른 의견이 끊임없이 경합하는 가운데 총의를 모아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일상적 시기의 단위노조부터, 혁명적 시기에 등장하는 노동자평의회까지, 일정한 숫자 이상의 사람들이 모인 운동기구는 불가피하게 대의제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대의제 형식은 민주주의의 전면적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여러가지 필연적 약점을 가진다. 예컨대 간부(집행부, 대의원 등)와 평조합원 간에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간부들의 의견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평조합원의 의견이 토론에 반영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민주노조 운동은 대의제의 약점을 보완하고, 직접 민주주의에 근접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적 수단들을 발전시켜왔다. 그런 기술적 수단들의 핵심은 논의가 상층 대의제 기구에 머물지 않고, 각 단위현장으로 퍼져나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민주노총 중집을 구성하는 단위들 중 전국결집 정파에서는 매 중집 때마다 ‘중집 스케치’를 SNS 채널에 발행한다. 중집에서 어떤 안건이 다뤄졌으며, 그 중 특히 주목해서 봐야하는 안건이 무엇인지 소개한다. 예컨대 얼마 전 발행된 ‘0319 민주노총 중집 스케치’ 글에서는, 민주노총 정책실이 국회 사회적 대화기구에서 잠정합의해 온 합의안의 승인 여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을 소개한다. 앞면에서는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AI’와 관련한 협의 내용에 대해, 이것이 자본에게 원하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라며 격렬한 반대의견들이 제출되었음을 소개하고 있다. 뒷면에서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노총 선거방침을 둘러싼 양측의 의견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신문’은 논의가 중집으로만 축소되지 않도록 하는 훌륭한 대의제의 보완물이다. 중집에서 진행되는 논의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다수 조합원 대중으로 하여금 논쟁의 구도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한다. 피켓팅, 현수막, 연서명, 공동성명 발표, 안건발의 등도 그러한 기술적 수단의 일부이다. 심지어는 집행부를 상대로 항의농성을 하기도 한다. 이런 수단들은 특히 격렬한 논쟁이 벌어질 때 활용되곤 한다. 예컨대 2020년 당시 김명환 민주노총 집행부가 문재인 정부와의 사회적 대화를 통과시키려고 했을 때, 여러 단위가 민주노총 건물에서 농성을 진행하고, 중집 회의장에 들어가 피켓팅을 하며 사회적 합의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해당 사회적 합의는 “코로나19 위기로 인한 매출 급감 등 경영위기에 직면한 기업에서 근로시간 단축, 휴업·휴직 등 고용유지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경우 이에 적극 협력한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등, 계급의 이익을 저버리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현장 영상] 민주노총 강경파 ‘노사정 합의’ 반대…김명환 위원장 ‘사실상 감금’ - 한겨레 신문 결국 노사정 합의안은 대의원 과반의 반대로 부결되었고, 김명환 집행부는 사퇴했다. 당시 자본가 언론들은 ‘직선제로 뽑힌 위원장’의 결단을 ‘방해한다’며 민주주의가 유린되고 있다고 말했는데, 당시 논쟁은 자본가 언론들과 민주노조 운동 사이 노동자 민주주의에 대한 분명한 시각 차이를 드러낸다. 자본가 언론은 김명환 위원장의 말을 활용해, “지금 반대파들이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어제 오후까지 ‘노사정 합의안 폐기 및 대대 안건 부결’ 성명에 서명한 대의원은 전체 1,480명 중 과반인 810명에 달한다. 또 민주노총 부위원장 7명 중 6명, 16개 산별노조 중 9개, 16개 지역본부 전체가 반대하고 있다. 수많은 현장 간부들과 현장조직들이 여기에 합세하고 있다. 과연 누가 민주노총에서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있는가? 다수 간부들의 의지를 거역하고 대대를 강행해 야합안을 밀어붙이려 발악하고 있는 김명환 위원장인가, 아니면 다수의 의지를 모아서 민주노총을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인가? 자본가 언론들은 말한다. “김명환 위원장은 직선제로 뽑힌 사람이다. 그런데 ‘꼬리’들이 이 ‘몸통’을 뒤흔들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꼬리’에 불과한 김명환 집행부가, ‘몸통’인 민주노총 조합원 다수의 의지를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 공동성명 | 민주노총 임시대대, 압도적 부결로 민주노총을 바로 세워냅시다! 논쟁적인 안건에 따라오는 피켓팅, 연서명, 심지어 항의농성과 같은 행위들은 표면적으로는 상층 대의기구에 속한 이들을 향한 호소이나, 본질적으로는 운동을 구성하고 있는 대중들을 향한 호소이다. “우리는 이 안건이 이렇게나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동지들, 이 운동의 주인으로서 우리 운동이 이렇게 가도 되는지 판단해주십시오”라고, 대의기구에 속한 이들에게는 물론 전체 조합원 대중에게, 좀 더 넓게는 (노동조합 조직여부를 떠나) 계급 전체에 호소하는 행위이다. 민주노조 운동의 주인은 노동자계급이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이 너르고 단단해지려면 이번 차별금지법 제정연대에서 OSF재단 기금을 받아 수입의 77%를 충당하는 내용을 포함한 사업계획 건을 올렸을 때,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이 연서명을 추진한 것은 이런 운동의 민주주의 전통 위에서 택한 행동이다. OSF재단의 기금을 받자는 제안이 갖는 의미가 그만큼 중대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논쟁적인 안건이라면 그에 걸맞게 격렬하게 논쟁하는 게 민주주의다. 우리의 논쟁은 차별금지법 제정연대 전체회의로 축소될 수 없다. 우리의 관점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의 주체는 차별받고 억압받는 모든 피억압민중들이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은, 그리고 그 법이 미국에서처럼 트럼프의 집권을 막지 못하고 각 주의 트랜스젠더 성별정정을 불법화하는 걸 막지도 못하는 유명무실한 법이 아니라, 진정한 효력을 가진 법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은 차별금지법 운동을 향한 노동자민중들의 전면적 자기조직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논의가 집행위, 또는 전체회의 구성원들을 넘어 대중적으로 논의돼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 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에게 연서명이란 방식을 통해 이 논쟁에 입장을 정할 것을 호소한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진심으로 염원하는 여러 단위들, 특히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을 주도해온 집행위원회가, 전진이 연서명을 받아 제출한 것이, ‘전체회의에서 여러 맥락의 의견개진을 어렵게 했으며’ 차제연의 ‘의사소통 체계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유감의 입장을 발표했다. 우리는 차제연 집행위 단위들이 그간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 투쟁해온 헌신과 노고를 존중한다. 특히 여러 성소수자 운동 단위들은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의 선봉으로서 온갖 탄압을 앞서서 견디며 투쟁해왔다. 그 운동의 역사를 존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운동의 역사를 존중하기 때문에, 그 운동이 자본이 자신의 지배를 감출 도구로 쓰이도록 두지 말자고 호소하는 것이며, 이 논쟁을 차별금지법 제정을 염원하는 대중들과 함께 진행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연서명한 개인과 단위들, 그리고 연서명을 추진한 전진을 ‘운동의 외부’로 호명하는 여러 입장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할 수밖에 없다. 27개 연서명 공동발의단체들은 각자의 현장에서 차별에 맞서 헌신적으로 투쟁해왔다. 예컨대 27개 공동발의단위 중 하나인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는 바로 지금도 현장에서 이주노동자 차별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전진의 활동가를 포함해, 연서명에 참여한 많은 퀴어 당사자들도 있다. ‘OSF가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손을 잡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 또한 성소수자 운동의 일부다. 차별금지법이 '차별에 맞선 운동'이라면, 비록 그것이 직접적으로 법안을 제정하기 위한 투쟁의 형태를 띄지 않았을지라도, 차별에 맞선 투쟁을 해온 이들 모두 이 운동의 일부이다. 그래서 "지금은 점으로 흩어져있는, 차별에 맞서 싸운 노동자들의 레퍼런스를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라는 선으로 이어낼 선전과 선동. 전술이 필요하다." 혁명과 민주주의 1917년 러시아혁명의 과정을 생생히 묘사한 르포 ‘세계를 뒤흔든 열흘’의 작가 존 리드의 생애를 다룬 영화 ‘레즈’에서는 아래와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존 리드가 1920년 9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동방민중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갔는데, 존 리드의 동의 없이 지노비예프가 연설문을 감수하며 ‘계급전쟁(Class war)’을 ‘성전(Holy war)’로 고쳐쓴 것이다. 존 리드는 지노비예프에게 자기 글을 동의없이 고치지 말라고 요구하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이견이 없어지면 혁명은 죽는겁니다. 이견을 제기하는 게 혁명이니까! (when you purge the dissent, you kill the revolution. revolution is dissent!)” 지노비에프와 리드가 논쟁하는 이 장면은 영화적 재현일 뿐 실제 사실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이 기사에선 이 장면을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의도에 대해서만 얘기해보려 한다. 해당 장면에 뒤이어 곧바로 열차는 백군의 습격을 받아 탈선한다. 해당 장면은 나에겐 러시아혁명이 당과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후퇴와 함께 어떻게 좌절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메타포로 여겨진다. 이 시기 러시아혁명의 심장이던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가 점차 열리지 않게 되었고[1], 볼셰비키는 1921년 크론슈타트 반란을 겪은 뒤 당내 분파활동을 일시적으로 금지하는 조치를 통과시켰는데, 이는 이후 영구화되어 당내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무기가 됐다. 즉 혁명이 스탈린 관료체제로 변질되고 퇴보하는 과정은, 곧 반대의견이 자유롭게 개진될 자유가 완전히 사라지는 과정이었다. 노동자 민주주의의 전면적 개화는 어떤 모습일까? 상층 대의기구의 깔끔한 합의 아래, 대중들이 통일되고 절제된 요구를 내거는 모습일까? 나는 절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수백종류의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유인물이 광장에 휘날리고, 평의회와 같은 중요한 대의기구의 결정을 앞두고서는 대회장에서 오만가지 이견이 충돌하며, 그 혼란 속에서 모든 노동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정하고 스스로 살아 움직이며 판단을 내리는 것.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다수파의 의견이 결정되고, 그럼에도 소수파가 그에 반대할 선전선동의 자유를 잃지 않는 것. 그래서 경험과 실천 속에서 다수파는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입증하는 시험대에 오르고, 사태의 전개에 따라 소수파가 더 큰 동의를 얻으면 언제든 다시 다수파가 돼 집행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혁명의 모습이며,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노동자평의회 다당제의 모습이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그런 방식으로 운동을 조직하는 것. 그것만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가능케할 것이고, 나아가 착취와 차별, 억압을 철폐한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 [1] 초창기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는 1년에 1회 이상 개최되었다. 그러나 1922년부터 2년에 한번 꼴로 개최되다가, 1931년 이후에는 4년 뒤인 1935년에 한번 열리더니, 그 다음 특별대회를 통해 해산돼버렸다. 1920년대 말 이래 소비에트 대회는 모두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으며, 단 하나의 기권표도, 반대연설도 없었다. 스탈린이 주도하는 공산당이 경제 5개년 계획을 이미 집행하기 시작한 뒤, 소비에트는 이를 사후 승인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한노운사 연재 12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1998년 2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막지 못하면서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맞서는 전체 노동자계급의 총력 방어선이 일단 무너지자, 거대한 해일이 휘몰아치듯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가들의 대공세가 이후 몇 년 동안 전국의 수많은 사업장에서 파상적으로 전개됐다. 자본가들의 대공세에 맞서 노동자들은 처절한 저항을 거듭했다.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 노동자들도 무수히 많았지만, 가진 힘을 다 소진할 때까지 끈질기게 저항한 노동자들도 결코 적지 않았다. 이전 편 보기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1997년 2월 포항제철이 삼미특수강을 자산양도 방식으로 인수하면서 삼미특수강 노동자 2천 342명 가운데 587명이 고용승계에서 제외됐다. 포항제철은 영업양도가 아닌 자산양도 방식 인수이기 때문에 고용승계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고용승계에서 배제된 삼미특수강 노동자 182명이 1998년 5월부터 서울역 광장에서 노숙투쟁에 나섰고, 1999년 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전원 원직복직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2001년 7월 대법원은 ‘영업양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포항제철 손을 들어주었다. 1998년 7월초 정부로부터 퇴출대상으로 지목된 금융기관 노동자들이 한국노총 금융노련 깃발 아래 보름 동안 여러 차례 대규모 집회를 열며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금융노련은 연대파업 돌입을 유보하고 △퇴직위로금 3개월치 △25% 미만의 고용승계를 요지로 하는 정부 제시안을 수용했다. 1998년 7월 20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회사의 1만 명 정리해고에 맞서 무기한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8월 17일에는 만도기계 노동자들이 1천 160명 정리해고에 맞서 무기한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현대자동차 파업은 8월 24일 △정리해고 277명 △무급휴직 2천여 명 △희망퇴직 8천여 명 △임금동결 △상여금 반납 등을 골자로 하는 노사 잠정합의와 함께 마무리됐다. 현대자동차 노사의 잠정합의는 9월 1일 조합원 총회에서 부결됐지만, 실질적인 효력을 갖고 집행됐다. 만도기계 파업에는 9월 3일 전국 7개 사업장에 1만 4천 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됐다. 9월 11일 조업에 복귀한 만도기계노조는 10월 2일 △정리해고 철회 △임금동결 △상여금 반납 △무급휴직 실시 등을 사측과 합의했다. 1999년 4월 19일 서울지하철노조가 2천 78명 감원 등 구조조정에 맞서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조합원의 90%가 넘는 8천 917명으로 시작한 파업대오는 정권과 언론의 온갖 협박을 이겨내며 대부분의 대오를 유지한 채 무단결근 7일을 넘어섰다. 공권력 투입 위협으로 대오가 급격히 흔들리자 26일 조직적으로 복귀를 선언했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파업대오가 4천 78명을 유지했다. 그러나 파업 이후 노조 내부의 혼란 끝에 노사협조 집행부가 등장하면서 결국 1천 621명의 감원을 수용하고 말았다. 1999년 8월 18일 한라중공업 노동자들이 전체 인원의 50% 정리해고에 맞서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1997년 12월 부도처리된 한라중공업은 대규모 희망퇴직으로 4천 명이던 조합원이 1천 300명으로 줄었다. 사내하청 노동자도 4천 명에서 4백 명으로 줄었다. 노조는 임금 24% 삭감과 단체협약 후퇴까지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측이 공세를 멈추지 않고 대규모 정리해고에 나서자 단호한 점거파업으로 맞선 것이었다. 72일 동안 지속된 파업으로 노동자들은 ‘현대중공업 위탁경영 기간 동안 고용보장’을 쟁취했다. 그러나 빼앗긴 임금과 단체협약은 되돌리지 못했고, 해고자 복직도 이루지 못했다. 2000년 4월 6일부터 12일까지 완성차4사 노조(대우·쌍용·현대·기아)가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반대와 공기업화를 요구하며 공동파업을 전개했다. 2001년 2월 16일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1천 725명 정리해고에 맞서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2월 19일 부평공장에 경찰병력이 투입되면서 현장에서 밀려났지만 노동자들은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나갔다.[1] 2001년 5월 민주노총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와 김대중 정권 퇴진을 전면에 내걸었다. 그런 상황에서 5월 하순부터 울산지역 화섬3사(효성·고합·태광) 노조가 하청화와 정리해고에 맞서 연쇄적으로 파업에 들어갔다. 6월 5일 효성에 대한 공권력 투입에 맞서 울산지역의 연대투쟁이 강력하게 분출했다. 연일 전투적인 가두시위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6월 중순에는 다수의 중소규모 금속 사업장들까지 파업에 가세했다. 이제 대공장 노조들까지 파업에 가세함으로써 지역·전국 총파업을 실현하자는 흐름이 울산지역에서 강력하게 형성됐다. 이에 호응하여 민주노총에서도 7월 5일 전국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대공장 노조의 대표 격이던 현대차노조가 총파업 합류를 끝내 거부했다.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의 분수령이 될 수도 있었던 7·5 총파업은 그 위력이 크게 제한됐고, 투쟁 전선에는 찬물이 끼얹어졌다. 이후 고립된 투쟁을 이어가던 화섬3사 노조들은 치명적 패배를 당했고, 모두 민주노조가 파괴됐다. 2002년 2월 25일 철도·발전·가스 공공3사 노조가 국가기간산업 민영화(사유화)에 반대하며 공동파업에 돌입했다. 핵심 쟁점은 한국전력에서 분리된 5개 화력발전 자회사의 민영화 문제였다. 조기에 파업을 마무리한 철도노조·가스노조와 달리 발전노조는 완강한 조직력으로 36일 동안 산개파업을 전개하면서 민영화 반대 여론을 대세로 만들어냈다. 민주노총이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연대총파업까지 결의했다. 그러나 4월 2일 연대총파업 직전에 민주노총 지도부가 ‘민영화 추후 논의’를 골자로 정부와 합의하면서 뚜렷한 성과 없이 파업이 마무리됐다. 현장으로부터 민주노총 지도부에 강력한 비판이 쏟아졌고, 결국 총사퇴했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들은 사실상 모두 패배했다. 아니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가들의 공격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거대한 흐름을 등에 업고 총체적으로 펼쳐지는데, 개별 사업장 또는 그것을 조금 뛰어넘는 수준의 연대로는 기본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태를 반전시킬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절박한 생존권 위기에 내몰린 노동자들로부터 종종 놀랄 만한 잠재력이 튀어 올라왔고, 결사적인 기세와 생동하는 연대의 확장은 새로운 총력 방어선을 구축해 낼 수도 있는 가능성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 지도부가 드러낸 한계와 거듭된 배신은 투쟁을 참담한 패배로 내몰았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전체 노동자계급의 총력 방어선을 다시금 구축해 낼 수도 있었으나 결국 실패한 투쟁이 크게 세 번 있었다.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 2001년 울산총력투쟁과 민주노총 7월 총력투쟁, 2002년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 투쟁이 바로 그것이었다. 1) 1998년 현대차 정리해고 저지투쟁 1998년 봄 현대차 자본은 종업원 4만 6천명 (조합원 3만 4천명) 가운데 1만 명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나섰다. 그에 맞서 현대차노조는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에 입각한 고용보장’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한 투쟁 방침을 수립했다. 회사는 경영 악화에 따른 인건비 절감의 필요성을 정리해고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경영 악화는 철저히 자본의 경영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97년 자동차의 생산·판매로 8천억 원의 영업이익을 거뒀지만, 보유주식 평가하락으로 7천 500억 원을 까먹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경영진은 방송국과 백화점을 인수했고, 부도가 난 기아자동차 인수까지 추진했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발생한 경영악화에 대한 부담을 스스로는 전혀 감당하지 않으면서 노동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다. 회사가 정리해고를 강행한 또 다른 이유는 현장 노동력의 하청화(비정규직화)라는 전략적인 목표 때문이었다. 회사는 판매 부진으로 가동률이 40% 저하될 예정이어서 이에 비례해 40%의 ‘여유인력’을 고용조정해야 한다고 했다. 사람의 목숨 줄이 달려 있는 고용의 규모를, 마치 생산에 투입되는 부품 소요량처럼 다루었다. 이것은 앞으로 단순부품의 공급 수량을 조정하듯이 현장 생산인력의 고용 규모를 취급하려는 회사의 전략적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정리해고는 생산 수요에 따라 고용 규모를 고무줄처럼 변동시킬 수 있는 체제, 즉 현장 하청화를 추구하는 회사의 전략적 목표에 따라 강행됐다. 회사는 정리해고를 치밀한 계획에 입각해 단호하게 밀어붙였다. 애초부터 노동조합의 동의를 얻을 생각도, 설득하려는 의사도 없었다. 다만 정해진 수순에 따라 일방적인 계획을 밀어붙일 뿐이었다. 정리해고 관철에 장기적인 이익이 걸려 있다고 보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리해고를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 이에 맞서는 현대차노조의 정리해고 저지투쟁은 그야말로 조합원의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IMF 외환위기로 실직자가 수백만에 달하고 재취업이 사실상 불가능하던 상황에서, 아울러 실직자에 대한 사회보장이 너무나 보잘 것 없던 상황에서, 정리해고는 개인과 가정의 파탄을 의미할 뿐이었다. 정리해고를 당하지 않는 조합원의 삶 또한 추가 정리해고 위협과 하청 확대라는 조건 아래서 임금과 노동조건이 심각하게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정리해고 저지투쟁은 이전 시기의 일반적인 임단협 투쟁과 달리 조합원의 생존권을 사수하는 차원의 투쟁이었다. 또한 정리해고 저지투쟁은 민주노조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회사의 정리해고 시도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노동조합 무력화의 시도라고 할 수 있었다. 만일 노동조합이 생존권이 걸린 정리해고 위협으로부터 조합원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노동조합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불신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정리해고 대상자에는 주요 현장 활동가들 대다수가 포함돼 있었다. 1987년 이후 10년 동안 축적돼 온 노동조합 역량이 일거에 쓸려나갈 판이었다. 그러므로 정리해고 저지투쟁은 민주노조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정리해고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자, 현대차 노동자들은 어느 때보다 높은 긴장감과 집중력을 갖고 노조를 중심으로 단결해 나갔다. 연일 이어지는 집회에 역대 최대 규모로 조합원들이 집결하면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정리해고를 기필코 저지하자”는 희망을 만들어 나갔다. 한국 최대의 기업이면서 동시에 가장 강력한 민주노조가 버티고 있던 현대차에서의 정리해고는 자본가들에게나 노동자들에게나 단지 현대차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현대차의 정리해고는 1998년 2월 법제화된 정리해고가 공문구가 아니며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시금석이었다. 여전히 강력한 조직력과 전투성을 가진 민주노조들의 저항을 뚫고 개별 기업에서 실제로 정리해고를 관철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차 자본만이 아니라 김대중 정권 또한 초국적 자본의 높은 관심을 의식하며 현대차에서의 정리해고를 성공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한국 자본주의를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유기적인 구성 부분으로 재편해 나가는 데 있어서, 현대차의 정리해고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첫 관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2] 반면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현대차의 정리해고는 새로운 저지선이었다. 비록 정리해고 법제화를 저지하려던 방어선이 민주노총 지도부의 배신으로 무너지긴 했지만,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현대차노조를 중심으로 전국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정리해고의 실제 단행을 막아낸다면, 법제화된 정리해고는 공문구나 다름없게 만들 수 있다고 여겨졌다. 실제로 파업에 참여한 많은 현대차 노동자들은 단지 현대차에서 정리해고를 철회시키는 차원을 넘어서서 이 투쟁의 승리를 통해 정리해고제 자체를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 정리해고 추진에 맞선 총파업 한국사회 전체가 IMF 외환위기로 치닫던 1997년 말, 현대차 회사는 경영위기를 공론화하며 사내하청 노동자 2천 700여 명을 먼저 쫓아냈다. 1998년 들어와서는 연초부터 “경영위기에 따른 1만명 정리해고설”을 유포하면서 임원과 과장급 이상 관리자들에게 명예퇴직을 실시해 800명 이상을 정리했다. 현대차노조는 1998년 1월 1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단체협약 사수, 고용 안정, 민중생존권 사수를 위한 중앙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만장일치로 쟁의행위를 결의했다. 15일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83.8%의 찬성으로 쟁의행위를 결의했다. IMF 외환위기를 틈탄 정리해고제 조기 도입 시도[3]를 막기 위한 민주노총 총파업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정리해고제 조기 도입과 관련하여 큰 혼란을 겪었다. 2월 6일,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제를 조기 도입하는 노사정 합의안에 동의했다.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노사정 합의안을 부결시키고 지도부를 불신임한 뒤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10일, 비상대책위원회가 13~14일 총파업을 결정했으나, 이틀 뒤 8시간 회의 끝에 철회했다. 이날 대우조선 조합원 최대림은 “정리해고 반대 총파업투쟁에 전 조합원이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며 분신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철회로 전국적 투쟁전선이 무너진 가운데, 14일 임시국회에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조기 도입이 통과됐다. IMF 외환위기가 깊어지면서 극심한 내수불황으로 공장 가동률이 뚝 떨어졌다. 3월 23일 노조는 회사와 실무협의를 갖고 △가동률 저하에 따른 집단 순환휴가 실시 △집단휴가 시 통상임금 70% 지급 △‘고용안정 노사공동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4월 들어 승용2공장 아토스(경차) 라인을 제외한 모든 라인에서 야간작업이 없어졌다. 회사는 본격적으로 정리해고 추진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4월 9일자 <조선일보>에는 ‘현대자동차 생산직 9,200명, 과장급 이상 300명 감원’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현대차 회사 관계자} 금년도 생산이 90만 대 선을 밑돈다면 여유 인력이 1만 5천 명 이상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일거리가 없어서 집에서 쉬고 있는 직원들이 1만 명이 넘습니다. 이런 추세로 계속 진행이 된다면 회사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아주 심각한 국면이 초래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고용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말씀드립니다.[4] 조합원들 사이에서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이 극도로 높아져 갔다. {조합원1} 당장 나가며는 뭐 할 건데 할 게 없잖아요. 지금 노가다를 할라 해도 노가다도 할 수 없고 … {조합원2} 언제 우리가 뭐 허리띠를 안 졸라매고 그랬습니까? 우리가 뭐 과소비해가지고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건 아니잖소. 그렇다고 우리가 뭐 호화 사치 골프를 한번 쳐봤습니까? 백화점 가가지고 옷을 한번 사봤습니까? 만날 회사에서 주는 옷 이런 것만 입고 어쩌다가 명절 때 갈 때 넥타이 한 번 매지. 그러다 양주 한번 먹어봤습니까? 안 먹어봤거든. {조합원3} 옆에 마누라 누워 있는 것도 한번 쳐다보고 자식 누워 있는 것도 쳐다보고 그럴 때 과연 내가 실직했을 때 과연 저 사람들을 내가 책임질 수 있나 한번 그래 생각해 보면 참말로 잠도 안 오고[5] 노조는 4월 7일부터 매곡현대아파트를 시작으로 ‘조합원 밀집지역 순회간담회’에 들어갔다. {현대차노조 위원장} 정말 이 사회 대한민국 각 사업장에서 고용의 한파가 우리를 목 졸라 옵니다. 노동자가 정치에 참여를 했습니까?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를 했습니까? 노동자는 정치에 경영에 정말 아주 바늘만한 구멍이라도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 모든 책임을 노동자들한테 전담하고 있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라, 더욱 더 절약하자, 정말 분통 터지고 안타까운 일입니다.[6] 8일, 노조 주최로 현장조직들이 참여한 2차 현장토론회가 열렸다. 민투위, 실노회, 현노신, 노연투 등 현장조직들은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개선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에서부터 ‘현실적 양보교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입장을 제출했다. 10일 ‘고용안정 쟁취 결의대회’에 1만 2천여 명의 조합원들이 참여해 높은 투쟁 결의를 보여주었다. 17일, 노조가 기자회견을 열고 ‘고용안정’ 방안으로 △주당 38시간으로 근무시간 단축 △주간연속2교대제로 근무형태 변경 △배치전환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제안했다. {현대차노조 위원장} 우리가 주 38시간을 하면은 90만 대의 생산 능력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라도 일자리를 나눠 갖고 우리의 동지들과 함께 살겠다는 겁니다.[7] 그러나 회사는 노조의 제안을 무시하고 “4월 17일부터 1주일 동안 1차 희망퇴직 모집에 들어간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노조는 희망퇴직을 반대하며 “개별 서명을 거부하고 노조의 지침을 따르라”고 했다. 1차 희망퇴직자는 1천 119명이었다. 통상급 4~6개월 치가 위로금으로 주어졌다. 23일, 회사가 노조에 공문을 보내 ‘정리해고 회피 노력 방안 및 해고 규모와 기준에 대한 노사협의’를 의제로 노사협의회를 30일에 개최하자고 요구했다. 마침내 정리해고 방침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 여유인원 40% 초과 - 해고 회피 노력 방안 협의 요구: 근무시간 단축, 희망퇴직자 모집, 무급휴직, 기본급 및 상여금 지급률 조정, 제반 복리후생 제도의 축소, 연·월차휴가 적극 사용, 월급제 O/T 수당 조정, 기타 불합리한 수당 조정과 제도의 변경 - 정리해고 규모 협의 요구 - 정리해고 선정 기준 제시: 근속년수, 인사고과, 승진 누락정도, 판매실적, 상벌, 근태 등 근무성적, 기능보유도, 경쟁력 없는 주변업무 종사 등의 요소 노조는 회사의 제안을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대신 25일 ‘일자리 지키기 조합원 가족 한마당’을 열었다. 27일 휴가 조합원 3천여 명이 태화강 둔치에서 집회를 갖고 시청을 항의 방문했다. 같은 날 울산광역시 의원 17명이 ‘정리해고 반대’ 기자회견을 했다. 5월 1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3만여 명의 민주노총 조합원, 학생, 빈민, 사회단체 등이 참가한 가운데 세계노동절 기념대회가 열렸다. 이갑용 위원장이 이끄는 민주노총 2기 지도부는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 철폐 및 부당노동행위 근절 △고용안정과 생존권 보장, 고용·실업 대책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정경유착 근절과 재벌 해체 △노동3권 보장과 노동자 경영참가 △IMF 재협상 등 5대 요구를 내걸고 ‘5월말부터 6월초까지의 총력투쟁’을 선포했다. 집회 후 행진 과정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이 벌어졌다. 9일 노사협의회가 열렸다. 회사는 ‘경영위기 극복 및 여유인원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생산량 감소분 40.6%를 해결하기 위해 1만 5천 명의 인원을 정리하고 임금을 23% 삭감하자는 요지였다. 노조는 △인건비·인원 감축에 대해서는 노조가 제출한 ‘근로시간 단축, 근무시간 변경, 일자리 나누기’ 방안을 노사공동위원회에서 연구·검토 후 논의 △희망퇴직자 모집은 해고 회피 위한 갖가지 고용안정 정책 실시 후 최후 수단으로 검토 등의 입장을 제시했다. 논의는 아무런 접점을 찾지 못했다. 회사는 14일부터 1주일 동안 2차 희망퇴직을 강행했다. 회사는 조합원들에게 ‘지방선거 끝나면 정리해고 할 텐데 지금 나가는 게 이익이다’며 노골적으로 희망퇴직을 강요했다. 회사의 정리해고 협박에 위로금이라도 받아야겠다는 희망퇴직자가 속출했다. 다시 1천 430명이 공장을 떠났다. 18일, 6·4 지자체 선거에서 북구지역에 출마한 민주노총 추천후보 일동이 ‘현대자동차의 대량해고 방침을 철회하라’는 기자회견을 했다. 19일 노조가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쟁의발생을 결의했다. 20일 노조 집행부와 대의원들이 본관 건물 로비에서 ‘강제 희망퇴직 중단’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 자리에서 강제 희망퇴직 당한 52세의 한 여성 조합원이 “나 혼자서 4명 가족 먹여 살리는데 퇴직금 2천만 원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차라리 회사에서 죽고 말겠다”며 대성통곡하기도 했다. 20일 회사가 ‘경영위기 극복 및 여유인원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 수정안’을 제시했다. 총 여유인원이 1만 8천 730명(전체 종업원 4만 6천 132명의 40.6%)인데 지금까지 3천 699명이 퇴직해서 실제 여유인원이 1만 5천 31명이 됐으니, 여기서 8천 189명은 정리해고하고 6천 842명은 전 조합원 통상임금 23.8% 삭감으로 해결하자는 요지였다. 25일 노조가 조합원총회에서 89.4%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했다. 27일 민주노총의 1차 총파업이 시작됐다. 현대차노조를 비롯해 128개 노조 11만 3천 825명이 총파업에 참여했다. 현대차노조는 오후 1시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2만 명의 조합원들이 본관 앞에서 투쟁결의대회를 갖고 오토바이 수천 대를 앞세워 태화강 둔치까지 두 시간을 행진하며 지역 집회에 참석했다. 일자리를 지키겠다는 조합원들의 투쟁의지와 열기가 매우 강렬했다. 28일에도 총파업이 계속돼 109개 노조 11만 1천 632명이 참여했다. 현대차노조의 투쟁력을 핵심 동력으로 하여, 민주노총 총파업이 5월 27~28일 힘차게 전개된 것이었다. 바야흐로 현대차노조를 중심으로 ‘정리해고 저지’의 총력 방어선이 전국적으로 형성되어 나가는 순간이었다. 1차 총파업을 성공리에 마친 민주노총은 ‘6월 10일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 철회를 요구하는 2차 전면 총파업’을 선언했다. 6월 4일 지자체 선거에서 울산지역의 민주노총 추천후보 16명 가운데 구청장 2명, 광역의원 3명, 기초의원 5명 등 10명이 당선됐다. 시장 후보를 비롯한 나머지 6명도 근소한 차로 낙선했다. 울산지역에서는 과거에도 노동자들이 일정한 표 결집력을 보여주었지만, 이렇게 두드러진 결과는 처음이었다. 현대차노조를 중심으로 정리해고 저지투쟁이 강력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 추천후보들도 ‘정리해고 반대’를 핵심 이슈로 내건 게 결정적이었다. ◎ 회사의 정리해고 강행과 노조의 거듭된 양보 그런데 6월 5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가 ‘6·10 2차 총파업’을 철회하고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10일 열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이 결정을 추인했다. 민주노총이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기까지 주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현대차노조 김광식 위원장이었다. 이후 3개월 동안 김광식 위원장은 단호하게 투쟁을 발전시켜 나가는 대신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겠다며 수차례 양보에 양보를 거듭했다. 13일 회사가 3차 희망퇴직을 실시하겠다고 노조에 공문을 보냈다. 15일 노조가 대의원 비상간담회를 열었다. 주요 토론내용은 희망퇴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였다. 일부 대의원들은 조합원 정서를 거론하며 희망퇴직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다른 대의원들은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노조 집행부는 희망퇴직에 대한 현장 여론을 파악하겠다며 운영위원회, 현장제조직 대표자 간담회, 전 현직 위원장 간담회도 진행했다. 집행부에 따르면, 취합된 의견의 대다수는 ‘희망퇴직에 대한 협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노조는 상무집행위와 중앙비대위 회의를 거쳐 희망퇴직 관련 요구를 정리했다. 희망퇴직 자체를 반대하던 기존의 태도에서 크게 선회한 것이었다. 19일 현대차 노사는 임금과 고용조정 문제를 함께 교섭해 나가는 틀로서 ‘임금 및 고용조정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22일 대책위원회의 첫 실무협상에서 노사가 희망퇴직 문제를 협상하기 시작했다. 24일 대책위원회의 첫 공식 교섭에서 3차 희망퇴직에 대해 노사가 합의했다. ‘희망퇴직을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실시하되 희망퇴직을 진행하는 동안은 정리해고를 추진하지 않고, 위로금은 10년 이상 12개월, 5~10년 11개월, 5년 미만 10개월 치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노사가 합의한 3차 희망퇴직으로 다시 1천 361명이 회사를 떠났다. 노조는 “조합원의 여론을 수렴한 어려운 결단이었다”며, “혼란은 일체 중단돼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상당한 비판이 제기됐다. “희망퇴직은 위장된 정리해고로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정리해고 철회를 전제로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변동 등을 회사가 받아들일 때 (희망퇴직 협의를) 할 수 있었던 것”, “아무것도 쟁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희망퇴직을 합의한 것은 조합원들을 기만한 행동” 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부 조합원들은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희망퇴직을 진행하는 동안 정리해고를 추진하지 않는다’는 노사합의 사항은 6월 30일 이후에는 정리해고를 하겠다는 최후통첩이라고 주장했다. 26일 노조는 대책위원회 교섭에서 주 35시간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공식 제안했다. 1일 7시간씩 주간연속2교대로 주 5일 근무를 하자는 것이었다.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은 ‘기본급과 통상급을 기존대로 유지하되 연장근로수당 등 변동수당에 대한 문제는 노사간에 협상을 통해서 충분히 조정할 수 있다’고 했다. 정리해고 대신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변경으로 일자리를 나누어서 모든 조합원의 고용을 보장하자’는 노조의 대안은 당연하게도 조합원의 압도적인 동의와 지지가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이를 전혀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회사는 평균 실제 근로시간이 주 30시간 이하로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주 35시간제를 도입한다고 여유인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노조는 주 35시간제를 도입하고도 여유인원이 발생한다면 순환휴가제를 실시하자는 방안을 덧붙이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논리의 타당성이 아니었다. 회사는 무조건 정리해고를 강행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30일 오전 회사가 조합원 4천 830명의 정리해고 계획을 노동부에 신고했다. 신고서에는 ‘임금을 22% 삭감하지 않으면 6천 842명을 추가로 정리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분노한 노조는 ‘정리해고 철회’를 내걸고 곧바로 오후 3시부터 ‘26시간 1차 경고 파업’을 벌였다. 사측은 민주노총, 정부, 자본 등 3자 간에 맺은 약속 사항을 한순간에 위반하고 어제(6/30) 오전 11시 45분경 정리해고 신고서를 접수하는 파렴치한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했다. 이에 대해 현대차노조는 극도의 분노를 느끼며 어제 15시를 기해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26시간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 자리에서 김광식 위원장은 7월 4일까지 정리해고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전면투쟁에 돌입할 것을 밝혔다.[8] 7월 2일 노조는 임시대의원대회를 열고 정리해고가 현실화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들을 했다. 정리해고를 당하더라도 조합원 자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규약을 개정했다. 정리해고 당하는 조합원들의 투쟁기금을 조성하기 위한 특별모금을 결의했다. 노조는 6일 오전 10시부터 8일 오전 10시까지 ‘48시간 2차 경고파업’을 벌였다. 2차 경고파업이 끝난 뒤, 노조 지도부에게 더 확실한 결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현장에서 강하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번 6월 30일~7월 1일 26시간 파업, 7월 6일~7일 48시간 시한부 파업을 통해서 조합원의 투쟁의지를 확인했다. 조합원의 투쟁의지가 확인되고, 사측의 도발 책동이 분명하게 예상되는 현실에서 이제 더 이상 투쟁 전술을 시한부 파업으로 한정하거나 협상에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리해고 방침을 분명히 한 채 기만적인 협상을 하면서 시간 벌기 책동을 벌이고 있는 사측의 전술에 말려들고 있는 것이다. 조합원들은 강력한 투쟁을 원한다. 그 길만이 사측의 의도를 박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 이렇듯 사측의 의도는 전면적인 대결도 불사하면서 정리해고를 강행하겠다는 것이다. … 노조 지도부의 단호한 결단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9] 회사 측은 이미 정리해고 명단을 발표하는 날짜만을 남겨둔 지금 오판하고 있다. 사측의 협박으로 조합원은 분열할 것이고, 명단만 발표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것이 사측의 의도대로 진행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성된 명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강력하게 투쟁한다면 결코 쉽게 발표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곧 파국을 가져온다는 것을 사측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력한 총파업투쟁으로 노동자의 분노를 똑똑하게 보여줌으로써 사측이 오판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 7월말 정리해고 발표를 앞둔 지금, 7월 14일 전면적인 총파업투쟁은 100여 일 넘게 투쟁해온 정리해고 분쇄 투쟁의 가장 중요한 길목이다. 더 이상 협상용의 시한부 파업이나 정리해고 철회를 전제로 하지 않는 사측과의 협상은 온갖 유언비어만 유포시켜 조합원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7월 14일 돌입하는 전면적인 총파업투쟁은 정리해고 철회가 분명하게 발표되지 않는 한 어떤 이유로도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10] 노조가 무기한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설정한 14일을 앞두고 긴장이 매우 고조됐다. 회사는 10일, 11일, 13일에 1공장 의장부, 4공장, 2공장 차체부 등의 일부 부서에서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을 기습 발표했다. 이에 대항해 10일 1공장 의장부 야간조 조합원들이 생산라인을 중단시켰고, 13일 1공장, 2공장, 4공장에서 2시간씩 부분파업이 벌어졌다. 일부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 발표로 공포심을 극대화했다고 판단한 회사는 13일 4차 희망퇴직을 발표했다. 파업 동력을 흔들기 위한 입체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나 파업 동력에는 이상이 없었다. 노조는 14일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다. 15일에도 파업을 이어갔다. 현대차노조의 파업은 14일 금속산업연맹을 시작으로 16일까지 총 68개 노조 15만 명이 참여한 민주노총 총파업의 일부이기도 했다. {현대차노조 위원장 성명서} 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장렬한 싸움을 전개하겠습니다. 이번 싸움에서 패하게 되면 노동조합은 끝장나고 우리의 삶은 파탄에 빠질 것임은 물론 대폭적인 임금삭감과 노동강도 강화가 현실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투쟁대열에 적극적으로 합류합시다.[11] 노동조합은 정리해고 철회와 고용안정 쟁취를 위해 오늘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한다. 이제 앉아서 죽느냐, 싸움을 통해서 사느냐는 것만이 남았다.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투쟁에 돌입하자.[12] 우리들의 고용안정 쟁취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질기고도 긴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마지막 골목까지 몰린 것이다. 한 발만 더 밀리면 낭떠러지뿐이다. 즉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만이 우리들의 생존권을 지킬 수가 있다.[13] 그런데 15일 밤, 노조 중앙비대위가 6시간의 토론 끝에 전면파업을 유보하고 16일 오전 10시부터 정상조업에 임하기로 결정했다. 중앙비대위는 고용조정과 임금 관련 교섭 폭에 대한 권한을 위원장에게 위임하는 한편, 16일 오전 11시부터 협상 전술과 관련해 대의원 비상간담회를 열기로 했다. 16일 11시, 대의원 비상간담회에서 김광식 위원장은 회사에게 제시할 대폭적인 양보안을 설명했다. 대의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무시됐다. 12시,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마지막 협상에 임하는 노조 입장’이라는 이름으로 양보안을 발표했다. - 인건비 중 97년 성과금 미지급분, 휴가비, 선물비, 공정 O/T, 직책수당 등을 포함 1년간 약 2,500억 원 규모를 지급중단토록 고통분담안 제출 - 정리해고 규모인 4,830명 중 4차 희망퇴직자 500명을 제외한 4,300명에 대해서 △하도급 전환대상(식당, 출고, 시설 등)으로 포함된 938명은 직영으로 고용 유지 △1,800명에 대해서는 근로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로 일자리 유지 △나머지 1,500명에 대해서는 6개월 순환휴가제를 도입하며 휴가 임금은 회사측이 통상금의 50%를 지급하고 노동조합은 자체 기금으로 30%를 지원 그러나 회사는 노조의 대대적 양보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연휴 기간인 17일부터 19일까지 정리해고 대상자 전체에게 정리해고 통보서가 전달됐다. 최종 고용조정 대상자는 3천 578명이었다. 정리해고 대상자가 2천 678명, 무급휴직(2년) 대상자가 900명이었다.[14] 회사는 정리해고 효력이 발생하는 7월 31일까지 정리해고 대상자를 상대로 5차 희망퇴직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회사는 집행부의 유약한 모습과 그에 따른 노조의 혼란에 자신감을 가지며 17~19일의 연휴 동안 정리해고를 개별 통보함으로써 결정적인 승기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회사는 조합원 대중의 연대 정신과 자발적 투쟁 역량을 과소평가했다. 정리해고를 통보하면 정리해고 당하는 자와 살아남는 자 사이의 분열로 투쟁동력이 급격히 와해될 것이라는 자본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 17일부터 19일까지 연휴 동안 이어진 정리해고 통보는 조합원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현장 사무실이 수없이 박살났다. 정리해고를 통보하러 다니던 관리자들이 떼거리로 몰려온 부서 조합원들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르는 일들이 속출했다.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해졌는지 대부분의 관리자들이 가족을 데리고 울산에서 몰래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리해고 개별 통보에 대해 조합원들은 의리와 연대로 분노를 폭발시켰다. 회사는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조합원들의 거대한 자발적 투쟁을 바라보며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3일간의 연휴 동안 현장 곳곳에서는 자발적인 투쟁대오가 강력하게 형성됐고,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힘을 바탕으로 비로소 7월 20일 전면투쟁이 시작될 수 있었다. 명단 나와서 노란 봉투를 집으로 보냈고. 보내기 전에 대의원은 알았지요. 그래 식칼 들고 가 “도장1부 대의원이다. 나를 먼저 집어넣지 않으면 네가 죽을 줄 알아라” 하고 나왔죠. 분신한다는 거 말리느라고 힘들었어요. 내가 도장부라서 조합원들이 신나는 쉽게 구해요. 오히려 순했던 사람들이 더 그랬어요. 제 후배 하나가 그래서 모질게 팼지요. 그때 참 가슴이 아팠지요. 개인적으로는 집사람이 임신을 했었는데 애 떨어지고 그때 다섯 번째 유산을 한 것이었죠.[15] ◎ 완강하고 결사적인 점거파업 7월 20일, 예상치 못한 사태 전개에 당황한 회사가 임시휴업을 선언했지만, 많은 수의 조합원들이 출근해서 노조 건물 앞으로 모여들었다.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는가와 상관없이 민주노조로 단결하여 기필코 정리해고를 분쇄하겠다는 결의로 가득 찬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조합 사수대가 출근하는 조합원들에게 전면파업을 호소하며 선전물 <사생결단>을 배포했다. 노조는 그동안 협상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의지로 3차 희망퇴직을 합의해주고, 시한부 파업으로 협상의 여지를 갖고 임했다. 또한 최종적으로 무기한 총파업까지 유보하고 대폭적인 양보안을 내면서까지 교섭을 요구했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결국 회사 측이 일방적으로 정리해고를 통보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이것은 그동안 노조에서 어떻게 하든 협상을 통해서 해결해보겠다는 의지가 헛된 것이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다.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제 2,678명의 정리해고 명단이 통보되고, 900명이 2년간 무급휴가라는 실질적인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상황에서 노조는 죽음을 불사한 강력한 투쟁방침을 내려야 한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총력투쟁을 분명하게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즉각 총파업 투쟁에 돌입해야 한다. 만약 지금에 와서도 머뭇거린다면 노조를 불신하게 되고 정리해고에 대한 분노가 모두 노동조합으로 향할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16] 5천여 명의 조합원들이 노조 건물을 중심으로 4공장부터 2공장까지 각 선거구별로 수백 개의 천막을 설치했다. 오전 노사협상은 1시간 만에 결렬됐다. 노조는 무기한 점거파업을 선언했다. {현대차노조 사무국장} 오늘 협상에서 회사는 정리해고를 끝까지 하겠답니다. 노동조합은 끝까지 맞서서 정리해고를 단호히 분쇄하겠습니다.[17] 결사항전 결의대회에서 김광식 위원장은 삭발식을 가진 뒤 자른 머리를 관 속에 집어넣으면서 “이 관에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정리해고는 반드시 철회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중앙비대위원들과 대의원들도 삭발에 나섰다. 세 명의 전직 위원장들은 45m 굴뚝농성에 들어갔다. 울산 북구의회 의원 8명 전원이 ‘현대자동차의 대량 정리해고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다. 21일, 6·4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 추천후보로 나서 당선된 북구청장과 동구청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정리해고 중단을 요구했다. 역시 6·4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 추천후보로 나서 당선된 시의원과 구의원 전원이 울산시청 의원회관 4층에서 ‘정리해고 저지’를 위한 기자회견을 갖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오후 5시에는 민주노총 울산본부 산하 노조들이 현대차 본관정문 앞에서 ‘정리해고 결사저지, 민중생존권 사수 결의대회’를 열었다. 22일 금속산업연맹 15개 노조 6만 8천여 명이 총파업에 들어갔다. 현대차노조의 점거파업이 전국 노동자들의 공동투쟁으로 확산될 기회였다. 그러나 23일 민주노총 산별대표자회의가 총파업 방침 철회와 2기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결정했다. 전국 공동투쟁 전선은 형성되지 못했다. 24일 부산지방경찰청이 울산의 노조 상급단체 상근자들과 노동단체·사회단체 활동가 16명을 이른바 ‘영남위원회’ 조직 활동을 이유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며 전격 연행, 구속했다. 또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사무실을 압수 수색했다. 25일 민투위와 실노회 현장조직 의장단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26일 300명의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이 서울 상경투쟁에 들어갔다. 상경투쟁단은 오후 3시 서울역 광장에 모여 집회를 갖고 현대그룹 본사와 노사정위원회, 경총, 전경련 등을 항의 방문하며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했다. 27일 회사가 노조간부 12명을 고소고발하고 49명을 징계위에 회부했다. 28일 회사가 조업재개를 시도했지만 노조의 파업동력만 늘어나고 조업에는 실패했다. 회사는 정리해고 대상자 전원에게 해고수당을 입금했다. 경찰 병력 23개 중대가 울산공장 인근에 배치됐다. 29일 가족대책위원회가 시청에 행정자치부 장관 면담을 요구하러 갔다가 전경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져 가족 6명이 부상을 입는 사태가 발생했다. 31일 회사가 1천 538명에 대해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700명에겐 무급휴직을 통보했다.[18] 정리해고 대상에는 노조 상무집행위원 15명과 현직 대의원 89명 등 총 115명의 노동조합 간부가 포함돼 있었다. 민투위 120여 명, 실노회 70여 명 등 현장활동가 대다수도 포함돼 있었다.[19] 8월 2일부터 9일까지 휴가 기간 동안 3천여 조합원들이 휴가를 반납하고 농성투쟁을 계속 이어나갔다. 노조는 이 기간 동안 어린이 여름학교, 노동영화제, 특별강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가족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고, 매일 저녁 집회를 통해 투쟁 결의를 다져나갔다. 파업 중이던 태광산업에 구사대가 난입해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를 폭행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즉시 200명의 오토바이 기동대를 파견해 연대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3일, 의장1부에서 한 조합원이 분신을 시도하자 노조 위원장과 임원들이 달려가 간신히 설득했다. 4일 회사에서 고용한 용역 깡패들이 울산에 도착해 배치되기 시작했고, 가족대책위 회장과 부회장에게 긴급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5일 김광식 집행부가 또다시 추가 양보안을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 사회적 상식이 통하는 수준에서 추가 임금삭감 - 임원 5명에 대한 상징적 정리해고 수용 용의 - 노사 평화선언 및 2000년까지 정리해고를 유보하는 고용안정 협정서 체결 - 회사관리체계 회복을 위한 ‘노사화합 한마당’과 ‘재도약을 위한 원년 선포식’ 이에 대해 현장에서는 ‘상징적 정리해고 수용과 정리해고 유보는 정리해고를 인정하는 것이다’, ‘추가 임금삭감하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노사 평화선언은 이후 투쟁을 포기하는 항복 선언이다’ 등의 비판이 제기됐다. 휴가 마지막 날인 9일 저녁, 조합원들이 농성장으로 복귀하면서 오랜만에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휴가 이후 첫 출근인 10일 회사가 조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노조 동력만 증가했다. 이날 저녁 7시 집회 시작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서 끝날 즈음에는 마치 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심하게 내렸다. 집회장에 물이 흥건히 고일 정도로 비가 쏟아졌지만 조합원과 가족들은 대오를 흩트리지 않은 채 집회를 사수했다. 그날은 공연단이 와서 공연을 했어요. 비가 많이 왔었죠. … 비가 갑자기 와서 무릎 밑까지 차 있었어요. 그때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어깨동무하고 춤추고 했던 … 저는 그때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어요. … 결과야 어찌됐던 이길 수 있다는, 동지들과 함께 있으면서 외롭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면서 상당히 편했었죠.[20] 저녁에 집회를 하는 데 비가 억수로 쏟아졌어요. … 우리 사수대가 앞에 앉아서 의연한 의지를 보였고, 조합원들도 한 사람 움직이는 사람이 없는 거야. 비가 억수같이 내리붓는데 … 전 간부가 앉아 있는데 물이 위에까지 차더라고 … 사람들이 감동해서 이번 싸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면서, 그때 앉아 있던 사람들이 울고 했었죠.[21] 11일, 7월 20일 이후 중단 상태였던 임금 및 고용조정 협상이 재개됐다. 노사협상의 재개를 앞두고 노조 중앙비대위는 협상에 관한 전권을 위원장에게 위임했다. 회사는 새로운 안을 제시했다. - 정리해고 대상자 1,538명 중 923명(60%)은 2년간 무급휴직으로 전환하여, 정리해고 인원을 615명(40%)으로 축소 - 정리해고 대상자 중 식당 종사자 167명에 대해서는 고용 승계를 전제로 외주 하청화하고 나머지 인원은 희망퇴직을 모집해서 정리해고 최소화 - 노조의 2,500억 원 임금 삭감안은 수용 노조는 ‘정리해고 및 무급휴가 수용불가, 임금삭감 고통분담, 순환휴가제’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12일 오전 노조가 협상 중단을 선언하자 정세영(명예회장), 정몽규(회장), 김판곤(사장), 정달옥(공장장) 등 회사의 핵심 인물들이 예고도 없이 노조 사무실을 찾아 위원장과 면담했다. 회사의 ‘식당 여성조합원 하청화 방침’을 반대하는 여성조합원들이 노조 건물 앞에서 긴급 집회를 열었다. 여성조합원들은 본관으로 복귀하는 회사 핵심 인물들을 따라가며 강력히 항의했다. 김광식 위원장이 노조 건물 옥상 위에 지어놓은 철탑 위로 올라가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지난 7월 20일 우리는 세 사람의 전직 위원장을 고공으로 올려 보냈고, 노조 지도부는 삭발을 하면서 ‘정리해고가 철회되지 않는 한 살아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 이제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길은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목표는 정리해고 철회인 것입니다. 우리의 명분은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에 위원장인 저는 노동조합 위 철탑으로 올라가면서 투쟁의 대오를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22] 농성대오는 휴가 이후 다시 5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매일 저녁 집회에는 1만여 명의 조합원과 가족들이 결합하면서 열기가 더욱 높아져갔다. 정문 앞 육교와 맞은편 건물들에는 지역 주민들이 가득 모여들어 집회를 지켜보면서 호응을 보냈다. 13일 회사가 1공장과 3공장에서 관리자들을 투입해 조업을 시도했다. 정몽규 회장이 직접 현장에 나와 독려했다. 정몽규 면전에 항의하는 노조 대의원을 관리자들이 폭행하는 일도 발생했다. 사수대를 비롯한 조합원들의 저지로 조업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실제 조업이 목표라기보다는 공권력 투입의 명분을 쌓는 과정이었다. 노조는 회사가 용역깡패 수백 명을 모집해 사택과 경주 등지에 대기시켜 놓은 전모를 폭로했다. 회사의 조업 시도를 둘러싸고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저녁 촛불집회에 점거파업 중 최대 인원이 참여했다. 14일 민주노총이 ‘현대차 정리해고 반대’ 전국노동자대회를 사택 운동장에서 열었다. 회사가 2공장 아토스 라인에 조업을 시도했다가 노조의 저지로 실패한 뒤, 오후 3시를 기해 무기한 휴업을 선언했다. 대검찰청이 기다렸다는 듯이 현대차 울산공장에 공권력 투입 방침을 밝혔다. 15일 경찰병력 100여 개 중대 1만 2천여 명이 현대차 울산공장 주변에 배치됐다. 노조는 기자회견을 열어 ‘공권력 투입시 결사항전’을 선언했다. 회사의 식당 여성조합원 하청화 방침에 맞서 여성부장·여성대의원의 삭발식이 예정됐으나 중앙비대위의 반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6일 안영수 노동부차관이 노조를 방문했다. 언론은 경남경찰청이 공권력 투입 계획을 수립하고 도상 훈련을 실시했다고 보도했다. 17일 사수대 17명에 대해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이기호 노동부장관이 내려와 중재를 시도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회사는 관리자와 하청업체 직원 1만여 명을 동원해 공설운동장에서 ‘정상조업 촉구 결의대회’를 가졌다. 노조는 노조 건물을 중심으로 4공장부터 2공장까지 일렬로 죽 늘어져 있던 농성 천막들을 1공장을 빙 둘러싸는 형태로 재배치했다. 공권력 투입시 1공장을 배후 삼아 결사항전에 나서겠다는 진형이었다. 곳곳에 바리케이드도 쌓았다. 공권력 투입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에서, 저녁 집회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대오가 결집했다. 1만여 명의 조합원과 가족들이 공권력에 맞서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공권력이 임박했다는 소리를 듣고 오히려 바깥에서 조합원들이 들어왔죠. … 조합원들에게 감동받았어요.[23] 조합원들이 경찰들이 들어온다고 하니까 문을 봉쇄했으니까 오히려 담 넘어서 들어왔었어요. 사람들이 없는데 집회하면 모이는 거야. 선거구 반별로 조별로 조합원들이 안 나오는 사람 집에 찾아가요. 가서 데리고 오는 거죠.[24] 18일 새벽, 페퍼포그와 포크레인을 동원한 진압 병력이 정문 앞에 집결했다. 공장 안으로 곧 진입하려는 태세였다. 현장에 비상이 걸렸다. 순식간에 1천여 명이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구호를 외치며 출동해 정문을 마주보고 대치에 들어갔다. 어느새 나타난 가족대책위가 무장한 대오 앞으로 나가서 전경을 마주보며 진을 쳤다. {가족대책위 정문 앞 선동} 들어올 테면 들어오십시오. 국민의 정부, 누구의 정부인지, 우리가 여기서 죽으면, 우리 가족들이 여기서 죽으면 아무도 당신네들 정부 지지해 주지 않습니다.[25] 김대중 정권에게 정치적 치명상을 안길 상당수의 사상자 없이는 물리적 진압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사항전의 태세로 버티고 선 노동자와 가족의 기세에 눌려 경찰병력이 물러갔다. 민주노총과 금속연맹 중앙 간부들이 현대차노조를 긴급 방문했다. ‘고용·실업대책과 재벌개혁 및 IMF 대응을 위한 범국민 운동본부’의 각계 인사 40여명이 서울에서 현대차 공권력 투입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가진 후 오후에 노조를 방문했다. 울산의 시·구의원 26명이 “공권력 투입은 절대 안 된다”며 기자회견을 가졌다. 오후에 정문 앞에서 민주노총 울산본부 주최 지역 집회를 경찰이 봉쇄하려 했지만 몸싸움 끝에 공간을 확보하고 집회를 진행했다. 건물 위의 주민들도 경찰에 야유를 보내고 집회 대오에는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저녁 파업 집회에도 역시 1만여 명의 대오가 참가해 고조된 분위기가 계속됐다. 조합원 대중 회사의 예상과 달리 정리해고 대상자에 대한 개별 통보 이후, 오히려 조합원 대중은 폭발적인 투쟁으로 일어섰다. 수천 명의 조합원들이 희망퇴직으로 공장을 나가고 또 상당수 조합원들이 자포자기·두려움·이기심 등에 빠져 파업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지만, 공장점거 전면파업에 결합한 5천여 조합원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파업 노동자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정리해고 비대상자였다. 점거파업 기간 내내 대상자와 비대상자의 큰 구분 없이 정리해고를 저지하려는 하나된 마음으로 수천의 조합원이 함께 투쟁을 만들어 냈다. 자본이 강요하는 개인주의의 분열된 삶을 거부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노동자의 의리와 연대를 당당하게 실천해 냈다. 광범한 노동자들이, 자본이 강요하는 억압과 분열의 삶을 거부하고 인간다운 삶과 새로운 사회의 실현을 향해 전진해 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조합원 대중이 이렇듯 위대한 각성과 실천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1987년 이후 10여 년 동안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축적한 성과 때문이었다. 또한 정리해고 도입으로 시작되는 자본의 장기적인 전략과 음모가 눈앞의 대상자만이 아니라 대다수 조합원의 삶을 파괴해 나갈 것임을 조합원 대중이 널리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거파업 기간 내내 조합원 대중은 자발적이고 헌신적으로 투쟁에 참여하면서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고 단련시켜 나갔다. 일부 선거구에서는 조합원들이 스스로 파업 참석 출결 상황을 점검하고 비참여자를 조직하러 뛰어 다녔다. 사업부에 따라, 선거구에 따라, 대의원과 소위원 등 현장 활동가들의 노력 정도에 따라 일정한 차이들이 있었지만,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조합원 대중들은 투쟁의 일상에 익숙해져 갔고, 스스로의 투쟁이 연일 언론을 장식하며 전국의 관심을 집중시켜 내고 자본과 정권을 초조하게 몰아치고 있음을 당당하게 확인해 갔다. 회사는 파업불참 조합원들을 매일같이 울산 인근 피서지로 불러내 야유회를 가지면서 일당을 주었다. 파업에 불참하면서도 회사 지시 또한 따르지 않는 조합원도 많았다. 회사가 조직하는 야유회에 관한 제보가 수시로 대의원들이나 집행부에 접수됐다. 대의원들이나 사수대가 야유회 장소에 출동해 조합원들을 질책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파업불참 조합원들은 자신들을 질책하는 대의원이나 사수대원 앞에서 고개도 잘 들지 못했다. 조합원들을 회사가 불러서 임금까지 줘가면서 들로 산으로 데리고 다녔죠. 여름에 비가 엄청 왔죠. 조합원에게 전화가 왔는데, 비가 오는데 산에 간다고 조합원을 집결시켜놨다고 해요. 제가 그 비를 맞고 오토바이를 타고 갔죠. 자기들도 미안했겠죠. 제가 이야기를 했는데 갑자기 회사측이 호루라기를 불며 산행을 시작한다고 하니까 돌아서서 그 장대 같은 비를 맞으며 산에 올라갑디다. 타고 갔던 오토바이 헬멧을 집어 던지고 욕을 했더니 돌아온 사람이 7명이었어요. 그 7명하고 종일 술을 먹었어요.[26] 조합원들이 개 삶아 먹고 그런 거 타격 갔었거든요. 갔는데 참 슬프더라고요. 사람들이 참 불쌍하더라고요. 우리 사업부 조장 반장 등 가동시킬 수 있는 인원을 다 모아놨는데. 내가 기습해서 30분 정도 선동했는데 다 숨더라고. 그래서 ‘내일 집회는 꼭 오라’고 하니까 ‘미안하다’고 하면서 오데요. 이야기했던 것은 ‘도대체 이게 스스로 생각했을 때 이해가 되는 거냐, 한 번 자신을 돌아봐라. 이러고 있는 나와 거기 숨어 있는 당신들과 뭐가 다르겠느냐’고.[27] 전면투쟁 기간 내내, 투쟁에 참여한 조합원 대중의 자신감과 힘은 회사의 관리체계와 힘을 압도했다. 8월 중순경에는 회사의 지침과 비용을 받고 울산 근교에서 중간 관리자 중심으로 야유회 등이 열리고 있었는데, 그 동향이 속속 첩보로 각 선거구 대의원들에게 전달되었고, 이런 모임들을 해산시키려고 파견된 수명의 조합원에 의해 수십명의 중간 관리자들이 무기력하게 쫓겨가는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하였다. 만일 공권력의 개입 없이 회사와 노동조합만의 싸움이었다면 노동조합은 충분히 완승을 거두고도 남았을 것이다.[28] 5천여 조합원들은 자동차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는 그 넓은 현대차 울산공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생산직 남성조합원들이 주축을 이뤘지만, 전원 정리해고 대상자가 된 식당의 여성조합원들도 3백여 명 대오를 꾸려 가장 열성적으로 파업에 참여했다. 그해따라 장마철 폭우와 태풍이 유난히 심했지만, 파업대오를 흩트려 놓지 못했다. 1만 2천 전경병력이 울산을 새까맣게 물들였지만, 오히려 파업대오 전체가 쇠파이프와 온갖 비장의 무기들로 무장하게 하는 역효과를 낳을 뿐이었다. 수천의 조합원 대중은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조차 떨쳐 버리고 현장 사수를 위해 결사항전 하겠다는 단호한 결의 아래 실제 준비에 들어갔다.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방어용 장비들이 순식간에 준비되었다. 방진 마스크와 수경은 기본이었고, 쇠파이프도 농성 조합원 숫자에 맞먹을 만큼 준비되었다. 상당한 파괴력을 갖는 몇몇 무기들도 비밀리에 적지 않게 준비된 것으로 알려졌다. ‘공권력 투입 초읽기’라고 언론에서 정신없이 떠들어 대던 순간에 마스크와 수경을 쓰고 한손에 쇠파이프를 들고 대오를 지어 노동가를 부르며 규찰에 나가는 모습은 당시 현장을 지키던 수천 조합원의 가장 평범한 모습이었다.[29] 현대차라는 거대 자본에 맞서, 아니 총자본에 맞서 정리해고를 저지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조합원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파업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는 정리해고를 저지할 수 있다는 희망이 불타고 있었다. 그 희망의 중심에는 노동조합이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녹색 사수대 점거파업에 돌입하기 직전 노조 상무집행위원회는 정리해고 대상자를 중심으로 사수대를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파업 투쟁 시 회사와 경찰의 물리력으로부터 투쟁 대오와 지도부를 사수하기 위해서였다.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조합원들의 분노를 투쟁 대오로 모아 ‘통제’할 필요도 있었다. 당시 무급휴직과 정리해고자들의 분노는 대단했습니다. 그때 노동조합에서 지불했던 선물이 있었어요. 정리해고 시점에 노조에서 지급했던 선물이 주방 세트였어요. 수저, 칼. 이런 것이 들어갔었는데, 이때 지급했던 주방 기구를 무급휴직, 정리해고 대상자들이 집으로 안 가져가고 몸에 품고 있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분노가 극에 달했어요. 사실 그때 정리해고 대상자들은 현장에서 막무가내였죠. 반장 책상에 칼 꽂고, 그것을 시작으로 보이는 대로 기물 파손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만들어놓은 생산 차에 테러를 가하고 그런 기억들, 공구를 다 갖다 버리고. 어쨌든 통보를 받은 조합원들은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내가 왜 나가야 되냐? 왜 하필 나냐?’ 이런 것이지요. 그런 동지들은 사수대로 공장점거로 결합을 하는 거죠.[30] 정리해고 명단을 회사가 뿌리고 나서 통제가 안 될 정도로 현장이 혼란스러웠거든요. 집행부에서 봤을 때 정리해고 반대 투쟁을 준비해왔기 때문에 투쟁은 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 조합원들을 통제할 수단이 필요했던 거죠. 또 한편, 공권력에 대비하는 노동자 내부의 어떤 조직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시기였거든요. 예로 도끼 사건 같은 것도 있었거든요. 회사 앞에서 회사 관리자들 ‘다 때려죽이겠다!’ 이런 경우도 있었고, 칼도 들고 다녔고, 또 노조위원장한테 항의하러 오면서 기물 파손하는 경우도 허다했고. 그래 조직이라는 규율 속에다 넣어서 조합원 개인적으로 하는 행동을 막을 수가 있고. 그것을 집단화해서 그 힘으로 공권력을 상대로, 사측을 상대로 싸울 수 있도록 힘을 결집시키기 위한 것이었죠.[31] 사수대원은 공개적으로 모집했다. 다수의 정리해고·무급휴직 대상자들과 일반 조합원 그리고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규모는 대략 3~400명 선이었다. 사수대 총대장과 사수대장을 두고 대오를 3개 지단으로 나누어 세 명의 지단장을 두었다. 사수대는 점거파업의 선봉에 섰다. 정리해고나 무급휴직 통보받은 동지들이 흥분해서 대거 결합했죠. … 이 사람들은 내가 나가서 이 상황에서 어디 가서 어떻게 벌어먹고 살 것인가가 지배적이었죠. ‘그래 개새끼들! 내가 죽더라도 느그 한 놈은 더 죽이고 간다’ 이런 마음이었죠.[32] 참여하신 분들이 정리해고 받은 분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일반 조합원들이 많이 참여했어요. 그러니까 회사의 정리해고 통보에 대한 분노, 그 다음에 해고 명단을 받은 조합원들과 같이 함께 해야 한다는 그런 어떤 노동자적 의리, 이런 것들이 굉장히 강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사수대 할 사람 다 모여라’ 해서 옷 나눠주고, 모자 나눠주고, 그때 곤색 모자에 녹색 티! 노래도 ‘녹색 사수대’라고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천막농성 막 돌입하고 사수대 활동을 시작했어요.[33] 점거파업 과정 내내 사수대는 일상적 파업대오 사수의 역할을 맡으면서 자체 훈련을 받기도 했다. 공장 가동을 시도하는 회사에 맞서 일하는 관리자들을 끌어내거나 ‘공장타격투쟁’을 벌여 생산을 방해하기도 했다. 사수대의 선도적 투쟁은 조합원들의 투쟁 속으로 녹아들어가 36일간 일사불란한 투쟁을 전개하는 중요한 힘이 되었다. 일과가 아침에 조회를 하고 구보하고, 그렇게 해서 사측한테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 낮에는 해당 사업부 가서 활동을 했고요. 저녁에는 순찰 활동하고. 그 다음에는 중요한 집회라든지 협상이라든지 이런 게 있을 때 사수대가 소위 비대위나 집행부 호위대로 활동을 했어요. 거기에 훈련은 공권력이 들어올 때를 가정하고 스크럼 짜고 몸싸움하는 거, 그 다음에 화염병 투척하는 거까지 준비는 했었죠. 민주노총의 간부가 와서 직접 가르쳤죠.[34] 출동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 3공장에 사측 관리자들이 공장에 들어와 있다고 하면, 대의원들이 요청을 많이 했어요. 자기들이 직접 관리자를 못 몰아내니까. 부담스러우니까 노동조합에 전화해서 ‘사수대 좀 보내 달라’ 그러고 연락이 오는 거야. … 해당 공장에 지단장을 통해서, 지단장이 다시 밑에 지대장들을 소집해서 대의원들을 각 천막에 다 있으니까 해당 사업부 대의원들을 몇 십 명 오토바이에 쫙 태워 가지고 그 공장에 보냈어요. 몽둥이 가지고 가 휘저어버리고. 관리자들을 다 몰아내고. 거의 기동 타격대 역할을 했죠.[35] 사수대의 위상이 굉장히 높았어요. 공권력이 우리를 두려워했고 그러니까 언론에서 완전히 조직폭력 집단이라고 계속 매도를 했으니까. 우리 내부적으로도 조합원들 보기에 굉장히 믿음직하다 그래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거든. 공권력이 주변에 이제 배치되고 그랬는데도 우리 해방구에서 조합원들이 생기발랄할 수 있었죠.[36] 사수대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의지가 대단히 강했죠. 이 사람들의 의지가 현장에 녹아들어간 것이죠. 현장에서 조합원들은 참 미안한 거야. 전에 안 나왔던 사람은 미안하니까 와서 불러서 ‘먹고 해라’ 하기도 했어요. 또 ‘우리가 힘이 되지 않으면 우째 하노. 밥이라도 해서 주라’ 이러면서. 그렇게 사수대 활동이 조합원들에게 흘러 들어갔죠.[37] 정리해고 대상자를 위주로 구성된 노동조합 사수대는 이번 투쟁의 선봉 대오로서 기능했다. 비장한 긴장감과 규율잡힌 행동들은 이번 투쟁의 절박함을 늘 대중 속에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투쟁 전반을 놓고 볼 때, 사수대는 ‘지도부 사수’라는 형식에 지나치게 얽매이며 투쟁의 선봉대오로서의 독자적인 자기 역할을 별 달리 해내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여기에는 투쟁력에 의거하기보다 협상에 매달린 집행부의 기조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수대는 투쟁력을 극대화하는 뇌관과도 같은 존재였는데, 투쟁력 극대화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가 없었던 집행부는 사수대의 활동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나아가서는 사수대의 제한된 활동에 불만을 표출하는 일부 사수대원들과 집행부 구성원들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사수대가 이번 투쟁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헌신적이고 모범적으로 활동했던 선봉 단위였다는 사실은 분명히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38] 가족대책위원회 노조가 무기한 점거파업을 시작하자 가족대책위원회가 7월 23일부터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가대위는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 때 지원활동을 한 가족들이 가족모임 ‘두레’로 모여 있다가 정리해고 투쟁이 일어나자 앞장서서 조합원 가족들을 조직한 것이었다. 가족들은 대부분 임산부거나 어린 아이들이 있는 젊은 ‘새댁’들이었다. 지속적으로 참여한 인원은 100여 명 정도였고, 잠깐씩 오갔던 이들을 포함하면 200명이 넘었다. 천막농성을 하며 밤낮으로 상주한 이들은 20여 명이었다. 노개투 때 가족이 ‘두레’ 이름으로 지원을 좀 했었어요. 우리 두레 회원은 한 20명 정도. 그러다가 정리해고 들어오면서 ‘우리도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다’ 해서 우리가 집행부를 만났죠. 그래서 집행부에게 ‘우리가 같이 싸울 테니 가족들을 소개해 달라’ 해서 각 아파트의 동장을 한다거나 하는 사람들을 소개해 준 거죠. 그래서 모아서 … 집회하고 아줌마들이 많이 왔어요. 한 100여 명. 이후에 이름 올려놓고 오가고 한 사람들 하면 한 200~230명 정도 돼요. 무급 당한 사람들도 있고, 좀 열성적이고 그리고 남편들이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해오던 사람들이지. 가대위하면서 바로 정문 밖에 텐트를 쳤어요. 거기서 우리가 한 일주일 정도 있었나? 근데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야. 아이들이 어리니까 도로로 막 나가고 이러니까 집행부에서 ‘위험하다 안으로 들어와라’ 그래서 정문 안으로 가서 처음에는 입구 쪽에 있다가 또 안쪽으로 옮겼어요. 한 20명이 자면서, 가족들 텐트가 따로 있었어요.[39] 가대위는 회장, 부회장을 중심으로 조직, 선전, 홍보로 체계를 나누어서, 가족 동원과 조직, 선전물 작성, 지역 홍보 활동을 전개했다. 노조의 체계와는 독립된 ‘별동부대’로 지역을 돌아다니며 현대차 조합원 가족만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 고용안정투쟁의 필요성을 알리고 동참과 지지를 호소했다. 가대위는 회장이 있고, 부회장 있었고, 홍보, 선전, 조직 이렇게 있었어요. 아파트에 대부분 자동차 사람들이 밀집해서 사는 데는 동별로 책임자를 정하고, 선전물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고, 주로 현장 밖으로 나가서 지역에 알리는 팀이 있었고. 특히 우리가 차량 선전을 많이 했거든요. 노동조합에서 운전해주고, 우리는 마이크 잡고 다니고 그리고 선전물 나눠주고 그랬었죠. 차량을 각 구별로 쫙 나눠서 나가서 선전을 하는 거지. 가족대책위 이름으로 해서, ‘언제 몇 시에 무슨 일 있으면 나와라.’ 반응은 아파트별로 달랐어요. 자동차 가족들이 밀집해 사는 데는 굉장히 좋았지. 사람들이 나와서 음식 같은 것도 해서 주고, ‘나도 나가겠다’ 이런 게 많이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늘었죠. … 반대로 괜찮은 아파트들, 그 당시 평수 넓고 큰 데는 주로 다른 관리자들이 살거든. 여기 가면 ‘시끄럽다’고 시비 걸고 그래요. ‘조용히 좀 해라’ 이러고.[40] 아이를 데리고 자는 가족의 고통은 말할 수 없었다. 이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천막에서 자는 아이들이 아플 때였다. 또 가대위 성원들은 회사에게 사주받은 폭력배들에게 폭력을 당해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대위 성원들은 점거파업 기간 내내 조합원들과 같이 천막을 지키며 끝까지 투쟁을 벌여나갔다. 그해에 비가 엄청 많이 왔어요. 뭐 차가 둥둥 떠다닐 정도니까. 텐트에 애들 자고 있는데 막 빗물 새고, 한번은 한 애가 갑자기 아파 가지고. 그래 병원에 갔더니만 그 은박지 깔판에서 나오는 독성이 아이를 중독시켜요. 아이가 마비가 오고 막 틀어지고, 눈 까고, 아이 죽이는 줄 알았지. 한바탕 난리가 났어요.[41] 24일 오전 11시, 항의 집회 후 회사에 들어가려고 할 때 용역 깡패 경비 30여 명이 동원돼 폭력적으로 가족들을 몸으로 가로막기도 했다. 항의하는 가족들을 무자비하게 밀어붙여 가족 한 명이 안경이 부서지는 등 10여 명이 타박상과 팔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임산부가 충격을 받아 몸살을 앓기도 했다.[42] 우리 모두는 정리해고에 분통을 터뜨리며 남편들이 싸우고 있는 현대자동차 텐트농성장으로 달려갔다. 우리 모두는 새 생명을 잉태한 임산부(7~8명)와, 세상을 본지 2달도 안 된 아기를 데리고 온 엄마들을 포함하여 살림밖에 몰랐던 애 키우는 평범한 아줌마였다. 평소에는 남편이 집회라도 갈라치면 가지 말라고 말리고, 차 안에서 무시무시한(?) 노동가요 좀 틀면 못 틀게 바가지를 긁고, 갓 태어난 애기가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순한 아줌마였다. 하지만 일자리에서 쫓겨난다는 말에,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현대자동차 정리해고를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회사 안 농성장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늘도 없는 땡볕 아래서 아이들을 보채고 달래면서, 밤에는 모기에게 온몸이 뜯겨가면서, 새벽에는 애기에게 우유를 줘가면서, 임산부들이 잦은 소변욕에 시달리며 밤새도록 멀리 떨어진 화장실을 다니느라 밤잠을 설치면서도 우린 한마음으로 정리해고 반대를 외쳤었다. 이것뿐이었나...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일주일간 쏟아질 때도 텐트 안으로 몰아치는 빗줄기가 행여 아이를 깨울까 싶어, 청테이프를 찾아 찢어진 텐트를 이어 붙이고, 아이 얼굴에 빗물을 닦아주면서 밤을 지샌 날도 참으로 많았었다. 갑자기 바뀐 환경 때문에 아이들이 코피를 흘리고, 결혼 후 4년 만에 얻은 귀한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며 거품을 물고 쓰러져 혓바닥이 말려들어가는 것을 발을 동동 구르고 애를 태우며 지켜보기도 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농성장을 지키며 우리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남편들의 일자리 지키기 투쟁을 함께 하기 위해서 그 불편한 잠자리를 감수하며 한 달 넘게 그 자리를 지켰다. 처음에는 남편에 대한 지원자로 시작했지만 우리 모두는 남편들의 정리해고 투쟁에 당당한 주체로 나서게 되었다. 정리해고 대상자에는 식당아줌마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서 밥주걱투쟁에 지지를 표하며 실제 집안 가장인 고령의 식당아줌마들과도 동지가 되었다. 우리 모두 여기서 죽자고 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사람들도 한 달 가량 텐트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혈육 이상의 끈끈한 정을 나누게 되었다. 전 위원장 세 분은 정리해고가 철회될 때까지 투쟁하겠노라며 굴뚝으로 올라갔다. 사수대를 위시한 남성 조합원들은 부인들의 지칠 줄 모르는 투쟁에 더욱 감화되어 사측과 공권력에 맞서 더욱 눈빛을 반짝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운동사에 이토록 준비된 싸움이 있었던가? 우리 모두는 공권력에 대비한 준비를 완벽하게 끝냈다. 더군다나 주변 여건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조성되었다. 각계에서는 현대자동차 공권력 투입을 결사반대 한다는 성명도 발표했다. 그즈음 김대중 대통령도 제2의 건국을 천명하면서 신노사관계 정립을 운운하고, 보수정치인 김종필 총리서리까지도 나서서 “공권력 투입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까지 밝혔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더욱 분명히 밝혀 승리의 깃발을 꽂는 것이었다.[43] 정문 앞 집회, 천막 농성, 각 지역에의 선무방송, 가족투쟁 속보 발행 등 가족대책위원회의 눈물겨운 활동은 조합원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력한 자극과 힘을 주었다. 과거 투쟁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축적되어 온 가족들의 결합이 이번에는 100여 명의 기본 대오를 구축하는 수준에까지 올라섰다.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가장 무서운 조직’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가대위의 활동은 특히 공권력 투입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조합원들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결사항전의 의지와 태세로 임했던 대목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고개를 숙연해지게 만들었다.[44] ◎ ‘최소화된 정리해고’ 수용과 패배적 종결 그런데 18일 새벽 1만 2천 전경병력을 되돌려 세울 만큼 완강했던 파업이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처참한 모습으로 붕괴했다. 18일 밤 전경병력이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무현 부총재를 중심으로 한 국민회의 중재단이 울산에 급파됐다. 중재단은 밤 11시경 노조 임원들과 면담을 가졌다. 19일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이 현대차노조 사무실에 임시 상황실을 설치했다. 금속연맹 비상단위노조대표자회의가 “현대차 공권력 투입시 총파업”을 결의했다. 국제금속노련 동아시아 대표가 현대차 파업에 대한 ‘지지·연대’ 기자회견을 했다. 20일 국민회의 중재단과 현대차 노사의 합동회의에서 정부여당의 중재안이 나왔다. - 정리해고 대상자 1,538명 중 정리해고 인원을 식당 여성조합원을 포함해 250~300명으로 최소화 - 1,200여 명 무급휴직과 순환휴가 - 고용안정기금 설치와 운영 - 민형사상 고소고발과 손해배상·가압류 취하와 징계 철회 - 노사 평화 선언 21일 저녁 노조 집회에서 김광식 위원장이 정부 중재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어저께 3시부터 회사 측과 정부 중재단과 노조 측이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어저께 중재단이 중재안을 낸 것이 바로 이겁니다. 여기 제 손 안에 있습니다. 중재안이 배포가 됐고 그 순간은 만약에 회사 측이 이 안을 받지 않으면 회사 측이 몰리는 거고 노동조합 측이 이 안을 받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또 노동조합이 몰리는 그런 조건들로 취하고 있었습니다.[45] 김광식 위원장이 연설하는 동안 야유와 함성이 계속 터져 나와 제대로 말을 끝내지 못했다. 무대 뒤편에서는 식당 여성조합원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집회가 어수선하게 끝나고 대열이 반쯤 빠지고 있을 때 식당 여성대의원이 마이크를 잡고 오전에 위원장과 있었던 간담회 내용을 폭로했다. 식당 조합원들에게 정리해고를 수용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문선대가 마이크를 잡고 ‘우리 투쟁의 목표는 정리해고 철회다. 정리해고가 철회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자’고 선동했다. 집회가 끝난 뒤 가족대책위가 농성 천막들을 순회하며 선동과 함께 구호를 외쳤다. “정리해고가 철회되지 않는 한, 정리해고가 철회되지 않는 한, 절대로 못 나갑니다. 정리해고 철회 없이 절대로 못 나간다!”[46] 얼마 후 사수대를 중심으로 1천여 명의 조합원이 노조 건물 앞에 모여 김광식 위원장을 불러낸 가운데 항의집회를 열었다. 김광식 위원장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고민과 어려움을 설명했다. 분노한 조합원들의 즉석 발언이 이어졌다. “공권력이 무서웠으면 벌써 투쟁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우리는 공권력에 맞서 싸워 이길 자신이 있다”, “위원장이 투쟁할 자신이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양보안과 중재안을 철회하라. 만약 그럴 자신이 없으면 노동조합 위에 매달아놓은 관을 불태워버려라”, “지금 이렇게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과 회사가 시켜서 일당받고 놀러 다니는 사람들과 같은 투표권을 줘서 투표로 심판받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협상 때 회사는 당당한데 위원장은 왜 그렇게 힘이 없느냐? 힘내라. 표정 관리해라!”[47] 준비가 덜 됐습니까? 아니면 아이들 때문에 그렇다면 가족대책위 내 보내십시오. 저희들은 준비 다 됐습니다. 뭐 지도부에서 준비 덜 됐습니까? 저희들은 공권력에 대한 준비 다 돼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식으로 합니까? 저희들은 공권력에 의해 나가면 나갔지 지도부 이런 식으로 하면 저희는 못 나갑니다. 거기에 관해 확실하게 이야기 해 주십시오. 저희들은 준비가 다 돼 있습니다.[48] 조합원들이 김광식 위원장의 입장을 다시 요구하자 위원장은 “조합원들의 뜻을 충분히 알겠다”고 말했다. 김광식 위원장의 중재안 수용에 대해 민투위가 긴급 운영위원회를 열어 △기만적 중재안 반대 △전직 위원장들의 입장을 서면으로 확인 △현장조직들 간의 입장을 통일해 유인물 제작을 결정했다. 그러나 실노회가 조직원 총회에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면서 현장조직들 간의 입장을 통일하지 못했다. 전직 위원장들의 입장도 정리되지 않았다. 윤성근 전 위원장만이 ‘정리해고는 저지해야 하며 무급휴직도 수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서신을 내려 보내 22일 민투위 유인물에 실렸다. 1. 우리의 목표는 생존권 사수와 노조 사수입니다. 생존권 사수는 정리해고 철회를 통한 일자리를 지키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노동조합 사수는 생존권 사수투쟁에서 승리하는 결과물인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제2, 제3의 정리해고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며, 일방적인 배치전환과 각종 불법, 부당한 횡포를 막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정리해고 수용은 생존권과 노동조합 모두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6. 결론적으로 정리해고는 저지해야 하며 무급휴직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최고조에 달해 있는 조합원들의 동력과 투쟁의지, 그리고 외부적 조건 등은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 현실입니다.[49] 22일, 노사 협상이 진행 중인 본관 건물 앞에서 가족대책위, 식당 여성조합원, 민투위, 사수대가 합동으로 항의집회를 가졌다. 항의집회 대오는 저녁 무렵 500여 명으로까지 불어났다. 저녁 집회에는 점거파업 시작 이후 가장 적은 3천여 명이 참여했다. 김광식 위원장은 ‘앞으로 협상에 목매달지 않겠다. 지금까지 노조에서 밝혔던 임금삭감안을 철회한다. 더 이상 비굴하게 머리 숙여 협상에 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힘 있는 투쟁을 조직하자’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위원장의 입장 발표에도 언론에서는 계속 타결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23일, 정부여당이 회사의 완강한 입장을 반영해 새로 중재안을 제시했다. 오후 2시 태화강 둔치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정리해고 저지와 민주노조 사수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고, 집회 참가자 3천여 명이 현대차 울산공장까지 거리 행진을 벌였다. 이날 집회에서 권영길 민주노총 전 위원장이 ‘현대차 협상이 불만족스러운 내용으로 타결되더라도 인정해주자’고 얘기해 집회 참가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이틀째 문선대가 문화선동 활동을 거부하는 가운데 저녁 집회가 열렸다. 김광식 위원장은 ‘언론에 현혹되지 말라. 조합원이 수용할 수 있는 안이 나오면 도장을 찍기 전에 조합원들에게 먼저 의견을 묻겠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24일 새벽 2시 30분, 노사합의 소식이 TV 자막을 통해 발표됐다. 오전 6시, 잠정합의 기자회견문을 노사가 발표했다. ‘△277명 정리해고[50] △나머지 1,261명 1년 6개월 무급휴직[51] △정상조업을 위한 노력이 있을 때 재산가압류와 고소고발 등에 대한 부분 철회 △노사화합 및 무분규 선언’ 등이 주요 합의 내용이었다. <현대자동차 고용조정과 노사화합을 위한 잠정합의문> 1. 고용조정방안 (1) 노사는 회사 측이 통보한 1,538명의 고용조정 대상자 중 277명을 경영상 해고한다. (2) 경영상 해고 대상자에 대해서는 근속기간 5년 미만은 7개월, 5년 이상 10년 미만은 8개월, 10년 이상은 9개월의 위로금 지급을 원칙으로 한다. (2-1) 대상자 선정이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준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법적 절차에 의한 결정에 따른다. (2-2) 위로금 지급 계산방법은 5차 희망퇴직과 동일하며 기 지급된 평균임금 45일 분의 해고예고 수당은 차감 지급한다. (3) 경영상 해고 대상자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 1,261명에 대해서는 1년 6개월간의 무급휴직을 실시한다. 단 1년 경과 후 6개월 간 외부 기관 등에 의한 교육훈련을 실시한다. (4) 노사는 정부에 대하여 근로기준법 제31조에 의거해 경영상 해고된 근로자에 대해 생계안정, 재취업, 직업훈련 등 필요한 조치를 우선적으로 취할 것을 요청하고, 회사 측은 해당 근로자들이 계열사 등으로 재취업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4-1) 그리고 회사는 해고 등 퇴직자들이 원하는 경우 퇴직 전의 직책 등을 감안하여 2년 이내에 그 근로자를 우선적으로 고용하는 노력의무를 다하도록 한다. 2. 노사화합 조치 (1) 노사는 근로자의 후생증진, 교육훈련, 취업알선 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2) 회사는 노사 간의 원만한 합의와 조업재개가 이루어지고, 장기간의 노사분규 사태로 인한 회사의 손실을 조속히 만회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생산성 향상에 최선을 다하는 경우 손해배상소송과 재산가압류 조치를 취하토록 한다. (2-1) 아울러 노사분규 과정에서 생긴 불법행위의 처리는 사직당국에 맡기되, 노조의 조직적 활동으로부터 현저히 일탈하여 이루어진 심각한 인명, 재산상 피해를 제외하고는 회사는 노사화합과 조업정상화가 이루어질 때, 고소 고발과 징계를 선처토록 한다. (3) 노사 양측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노사관계 안정을 통한 산업평화와 생산성 향상, 관리체계 정상화 및 개선을 위해 노사합의를 통하여 앞으로 2년간 경영상 해고를 하지 않으며, 노동조합은 노사관계 평화유지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노사화합 및 무분규선언’을 추진한다.[52] <부속 합의서> 1. 고용조정 관련 (1) 경영상 해고되는 식당 근로자에 대해서는 하도급 전환시까지 회사에서 기존의 임금을 지급한다. (2) 회사는 생산부문의 전부 또는 일부를 외주처리, 하도급 또는 용역으로 전환하고자 할 때 경영상 해고자 등의 우선 재고용을 위하여 계약 이전에 노조와 협의하며, 노사 합의 없는 하도급 전출을 제한한다. (3) 회사는 식당의 경영상 해고자 또는 관련 배우자 등의 고용이 보장될 수 있도록 이를 흡수할 수 있는 규모의 식당 운영권을 노조로 이관한다. 단, 계약은 현행 규정에 따른다. 2. 기타 사항 (1) 노조는 1998년도 임금인상 요구를 철회하고 기 제시한 급여 및 제비용 삭감안의 유효를 확인하며, 노사는 이후 '98년 임금협약 기간 중의 임금을 동결한다. (2) 회사는 직업훈련 등 근로자 복지 향상을 위하여 합의일자 이후 3개월 이내에 85억 원을 지원한다. 이 자금은 노사협의로 공동운영한다.[53] 파업농성 천막을 지키고 있던 조합원들은 아침 뉴스를 통해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지자 망연자실했다. 조합원들은 황망한 모습으로 천막을 떠나기 시작했다. 몇몇 분노한 조합원들이 노조 건물 앞으로 몰려가 노동조합 유리창과 집기들을 부수었다. 사수대 조합원들이 사수대 티를 벗어 불태우고, 김광식 위원장이 죽을 각오로 투쟁하겠다며 노조 건물 위에 올려놓았던 관도 끌어내려 불태웠다. 여성노동자들과 가족대책위는 절규를 쏟아냈다. 문화회관에는 농성 천막을 철거하러 가기 위해 관리자들이 대기했다. 정문에서는 경비들이 물품 수색을 했다. 오후가 되자 거의 모든 조합원이 울산공장을 빠져나갔다. {현대차노조 대의원} 착잡한 심정입니다. 이게 한계인 모양입니다. 싸울 능력이 있었는데 집행부에서 접으니까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현장에서 아무리 일어나도 집행부에서 접으면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저 같은 경우는 그렇습니다. 일개 대의원이 이만큼 이렇게 하는데 위원장은 얼마나 참 힘들었겠나 한편으로는 이해도 가고, 한편으로는 이게 아닌데.[54] 그때 정리해고 받아들이고 난 뒤에 새벽에 현장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놨던 노동조합이 엄청난 혼란과 기반이 흔들렸죠. 집으로 가버린다고 가버리고. ‘더 이상 기댈 것도 믿을 것도 없다’하면서 많이 울었죠. 어쨌든 한 500 대오 정도 남아 있었는데, 이 조합원들이라도 추슬러야지. 제 개인적으로 만약에 조합원들이 실망감과 배신감, 상실감이 커서 그냥 흩어지고, 정리해고, 무급휴직이 현실로 다가왔는데 그대로 물러섰을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라, 의미조차 남길 수 없는 거잖아요? 집행부가 무너지더라도.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하고 또 다른 불씨를 만들어야 된다. 그래서 남아 있는 조합원들 마이크로 ‘식당에 다 모여라’ 하고 김광식 위원장을 제가 데리고 가서 ‘당신이 하고 싶은 말 솔직하게 다 해라’, 그때 분위기가 하도 험해서 다들 안 갈라 하더라고요. 김광식 위원장이 ‘죄송합니다’ 하면서 사과하고 하더라고요. 우리도 수배받고 있으니까 다 빠져나갔죠.[55] 26일, 회사가 식당 조합원 144명을 포함한 총 277명의 정리해고 명단을 일방적으로 작성해서 배포했다. 회사는 정리해고 대상자였다가 무급휴직자로 바뀐 조합원들에게 31일까지 무급휴직자 각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24일 잠정합의 이후 세부사항에 대한 실무협상이 열리지 않자, 노조는 29일로 예정된 조합원총회를 9월 1일로 연기했다. 잠정합의를 강력히 규탄하는 내용으로 27일 민투위 선전물, 28일 사수대 지도부 주축의 활동가들이 발행한 <다시 머리띠를 묶으며>가 현장에 배포됐다. 우리는 한 달이 넘는 기간을 ‘정리해고 철회’라는 확실한 목표를 갖고 싸워왔다. 그 거대하고 완강한 투쟁을 벌이면서 누구도 공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승리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노동조합이 정부 중재안을 받아들였다고 밝힌 21일에도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앞으로 몰려가 거세게 항의하면서도 위원장을 비롯한 집행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앞으로 제대로 투쟁할 것을 간절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24일 노동조합은 정리해고를 수용하고 말았다. 흥분한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앞으로 몰려가 사수대 옷을 벗어던지고, 관과 노동조합 깃발을 불태웠다. 조합원들은 이렇게 노동조합의 배신행위에 대해 항의한 것이다. 이번 잠정합의가 현장 안팎에 미칠 영향은 너무나 크다. 사측은 대규모 배치전환, 노동강도 강화, 활동가와 열성 조합원들에 대한 각종 탄압 등으로 현장을 무력화시킬 것이 뻔하다. 또한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대기업과 공공부문 구조조정에서 현대자동차의 합의는 선례가 되어 수많은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릴 수 있는 상황이다. … 집회 때마다 위원장은 “혼자서는 결정하지 않는다”며 조합원들의 총의를 모아서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위원장은 277명 정리해고에 합의하면서 조합원들을 기만하였다. … 집행부는 농성하는 조합원의 총의를 모아낸 것이 아니라 정부의 중재에 목을 매달았다. 중재안이 나왔을 때 각 사업부별 간담회나 토론회를 통해 의견을 수렴해 노동조합으로 집중하지 않고 정부 중재안에 일방적으로 동의했다.[56] 백 번을 양보해 다시 한 번 물어보자. 과연 실리라도 챙긴 것이 있는가? 지금까지 노조가 앞장서서 제시한 임금삭감액이 1인당 750만 원이 넘는다. 또한 긴급 체포영장 발부자 64명, 100명이 훨씬 넘는 고소고발자, 수십억 원의 재산가압류 조치, 어느 것 하나 해결된 것이 없다. … 가장 앞장서서 투쟁했던 수십 명의 동지들이 기약 없이 수배생활을 해야 하고, 가압류를 해제하고 징계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측에 싹싹 빌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폭력경찰에 짓밟히지 않았다고 어떻게 잘된 협상인가? … 사측, 정부 중재단, 기자들 모두가 협상과정을 훤히 알고 있는데, 노동조합은 조합원, 활동가, 심지어는 상무집행위원들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위원장의 얼굴과 입만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이렇듯 공개적이고 민주적이지 못했던 밀실협상으로 인해 투쟁동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모든 조합원들은 들러리로 전락하면서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믿고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일 수 있으며, 앞장서서 투쟁할 수 있겠는가? 이제 분명하다. 제2, 제3의 또 다른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김광식 위원장은 퇴진해야 한다.[57] 실노회, 현노신, 노연투 등 다른 현장조직들도 합의 결과에 반대하는 선전물을 발행했다. 2대 위원장만이 합의안에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는 선전물을 발행했다. 집행부는 선전물을 통해 ‘부결 투쟁을 선동하는 세력은 분열주의자’라고 주장했다. 9월 1일 ‘8·24 잠정합의안’이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찬성 34.7%(반대 63.6%)로 부결됐다. 노동부와 회사는 ‘이미 노사 대표가 합의한 사항이므로 법적 효력이 있어 재협상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파업이 처참하게 붕괴한 터라 조합원 총회 이후에도 투쟁은 재건되지 못했다. 재협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리해고를 수용한 8·24 잠정합의는 조합원 총회에서 압도적으로 부결됐지만, 실질적인 효력을 갖고 집행됐다. 결국 1998년 현대차에서는 과장급 이상 명예퇴직 1천 371명, 희망퇴직 6천 502명, 정리해고 277명, 무급휴직 1천 961명 등 모두 1만 111명이 ‘고용조정’됐다. 여기에 1997년 말 먼저 정리해고당한 하청노동자 2천 700여 명을 합하면 모두 1만 3천여 명이 ‘구조조정’됐다. 1998년 현대차 정리해고 저지투쟁은 그렇게 패배했다. 5천여 명의 현대차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인생을 걸고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고, 그래서 공권력으로도 사실상 무너뜨릴 수 없는 막강한 파업대오를 구축해 냈지만, 노조 지도부의 결정적 배신으로 허망하게 내부로부터 무너지며 패배했다.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던 현대차노조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중심으로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선 전국 노동자들의 총력 방어선을 구축해 낼 수 있었던 가능성은 그렇게 사라졌다. 정리해고를 수용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해 버린 노동조합에 대한 현대차 노동자들의 깊은 실망감은 쉽게 회복할 수 없는 회의와 환멸로 가슴 깊이 아로새겨졌다. 1998년의 패배와 배신으로 점철된 경험은 언젠가 다시 다가올 정리해고를 노동조합은 막지 못할 것이라는 뿌리 깊은 불신과 상처로 현대차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새겨지고 말았다.[58] 현대차노조 지도부가 정리해고 수용이라는 잘못된 길로 빠져든 것은 단순한 개인적 실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또 다른 주축으로 등장한 ‘중앙파’ 노선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현대차노조 위원장, 금속연맹 위원장 등 이 투쟁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중앙파 활동가들은 대중을 기만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집회장에서는 정리해고를 강력히 규탄하는 연설을 했지만, 자기들끼리는 ‘정리해고 최소화’ 수용이 현실적 대안이라는 생각을 공유하면서 투쟁을 그 방향으로 이끌고 갔다. 중앙파 활동가들은 한때 상당히 전투적이었지만 개량주의 전망에 갇혀 있거나 소련 붕괴 이후 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한 이들로서, 원래는 다양한 경향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 앞에서 공통적인 한계에 봉착하며 비슷한 노선을 취하게 되자 하나의 세력으로 결집하게 됐다. 당시 중앙파의 노선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어쩔 수 없는 대세이니 이를 수용하면서 노동자들의 피해를 줄일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하자’로 요약됐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은 ‘현대차노조의 투쟁을 중심으로 정리해고 저지를 위한 전국 노동자들의 총력 방어선을 재구축하자’ 같은 주장을 불가능하다고 치부하며 거부했다. 중앙파의 시각에서 볼 때, IMF 경제공황 국면에서는 ‘정리해고 최소화’만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안이었다. 이들은 또한 독일의 금속노조(IG Metall)를 신비화하면서 그와 같은 산별노조 건설로 나아가는 게 정리해고 문제의 진정한 해결방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정리해고를 당하더라도 산별협약을 통해 사회적 안전망과 직업훈련을 제공하여 해고된 조합원의 재취업을 지원하면 된다’, ‘구조조정 앞에 선 노조운동의 핵심과제는 정리해고 저지가 아니라 시급히 산별노조로 전환하고 이를 토대로 산별 교섭과 사회적 교섭에 나서는 것이다’, ‘산별 교섭과 사회적 교섭을 성사시키려면 정권·자본 측과 대립적 관계로만 갈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다’ 등의 정세판단과 노선을 갖고 있었다. 독일에서 금속노조가 노동자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열고 있는가는 정보의 불충분 때문에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였을 수 있다.[59] 하지만 당시 한국 상황에서 ‘산별협약을 통한 사회적 안전망’ 같은 것들이 노동자의 치열한 계급투쟁이 아니라 정권·자본과의 대화·타협으로 실현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은 명백한 오판이 아닐 수 없었다. ‘산별협약을 통한 사회적 안전망’ 역시 정리해고 최소화 수용을 통한 굴욕적 대화·타협이 아니라 정리해고 저지를 위한 전국 투쟁전선의 단호한 재구축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단 1명의 정리해고도 있을 수 없다”는 투쟁의지의 천명은 대단히 선동적이었다. 그리고 정리해고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질 것이란 두려움을 갖고 있던 많은 조합원들로 하여금 투쟁에 동참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선동이 초기 조합원들을 투쟁대열에 과감하게 참여케 하는 유효한 전술적 선택이었다는 측면은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술적 선동의 차원을 넘어 우리가 마침내 이루어야 할 전략적 목표인가 하는 점에서는 상반된 의견이 있다. … 첫 번째 흐름은 정리해고를 절대 수용하거나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핵심 사업장인 현대자동차노조의 정리해고 수용은 나머지 사업장에서 정리해고를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많은 노동자들의 생활의 파탄을 가져오고 노동운동의 심각한 후퇴를 초래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도저히 힘의 관계상 정리해고를 막지 못한다 하더라도 결사항전을 통해 자본측에 심각한 타격을 줌으로써 정리해고를 시행하려면 엄청난 피해를 당한다는 것이라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흐름은 노사간의 힘의 관계상 도저히 정리해고를 막아낼 수 없다면 정리해고의 규모를 최소화하고 정리해고 대상자의 선정기준에 대한 개입, 정리해고 대상자에 대한 생계 지원이나 리콜(재취업)에 대한 요구 등 자본과의 적극적인 교섭을 통해 정리해고 문제에 대한 노조의 개입력을 최대한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섣불리 공권력의 투입을 초래하는 것은 정리해고는 정리해고대로 당하고 노조간부와 대다수 활동가의 대량구속으로 이어져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동조합의 파괴와 현장조직력의 손실을 가져와 최악의 결과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 두 흐름의 차이에는 정세에 대한 인식과 노동운동의 노선에 대한 일정한 차이가 흐르고 있다. … 노조 집행부는 후자의 입장을 선택, 각계각층의 연대와 지원으로 공권력 투입을 저지해 나가면서 결정적으로 8월 19일 방문한 국민회의 중재단(단장 노무현 부총재)과의 간담회를 통해 정리해고의 규모를 최소화하고 정리해고 대상자들의 이후 생계와 고용승계 및 리콜(재취업)이 보장된다면 정리해고를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하였고, 이를 계기로 국면은 급속히 협상국면으로 전환되어 갔다. … 비록 ‘정리해고 철회’라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 규모를 1,538명에서 277명으로 줄였고, 이중 144명의 식당 조합원에 대해서는 식당을 노조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하여 고용을 승계하도록 하고 나머지 133명의 조합원에 대해서는 고용안정기금의 확보를 통해 어느 정도의 생계보장 장치를 했다는 점에서 집행부는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 막바지 교섭에 여유를 가지면서 집행부의 투쟁방향을 충분히 조합원들에게 알려주고 토론을 하게 했더라면 정리해고 수용이라는 같은 결과를 두고서도 조합원들은 다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급격한 반전에서 오는 상실감, 허탈감, 그리고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60] 현대차 정리해고 저지투쟁이 충격적으로 붕괴한 이후 중앙파는 ‘정리해고 수용 자체는 잘한 일이지만 그것을 민주적으로 토론하지 않은 게 문제’라는 식의 주장을 폈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다. 만일 현대차노조 위원장이 정리해고 수용 여부를 토론에 붙였다면 조합원들은 압도적으로 거부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수차례 ‘조합원의 동의 없는 결정은 하지 않겠다’고 공언해 놓고서도 위원장이 독단적으로 정리해고를 수용했던 이유였다. 우리의 투쟁대오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공권력 투입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언론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현대자동차노조가 정리해고 수용의 뜻을 비쳤다’라는 뉴스 때문이었다. 현대자동차노조 비상대책위원회는 김광식 노조위원장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노조 사무실에서 일하는 누구에게 물어봐도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뒤통수를 맞고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은 순간이었다. 아줌마들은 삼삼오오 흩어져서 자신들의 남편을 찾아 사실 확인을 하러 다녔고, 알 수 없는 안개정국에 대해 답답함을 느꼈다. 결사투쟁을 외치며 당당해 하던 우리는 조금씩 서로에 대해 불신하고, 자고 일어나면 비어있는 잠자리를 확인하면서 허탈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위원장이 참석한 집회에서 모든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렇지만 위원장은 애매모호한 말로 우리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우리는 또 그것을 해석하느라 서로 싸우는,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음을 부끄럽지만 털어놓는다. … 사수대는 자발적으로 집회를 열어 위원장님에게 ‘싸우겠노라고, 정리해고 한 명도 받아들이지 않겠노라’ 하는 강력한 답변을 요구했다. 평범한 조합원들이 위원장 앞에서 울며 호소를 했다. “우리는 싸울 준비가 다 됐습니다. 위원장님만 준비 되시면 됩니다.” “위원장님 결사항전 하겠다며 관까지 짜셨는데 그 관이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싸울 생각이 없으시다면 차라리 그 관을 불태우십시오.” 굴뚝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하고서 정리해고는 물론이고 (유급이 아닌) 무급휴직조차도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윤성근 전 위원장의 간곡한 서한도 내려왔다. 그렇지만 위원장은 분명한 대답도, 입장표명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 5시에 철회하겠다는 협상안도 없던 이야기로 접고, 노조는 회사의 강경한(?) 태도에 더욱 더 양보를 하면서 절대 해서는 안 될 협상을 늦게까지 계속했다. 정리해고 수용안이 거의 가시화되는 8월 23일(일) 저녁 8시 위원장님은 대오가 많이 빠져나간 썰렁한 집회에서 조합원들 앞에서 약속을 했다. “제가 어떠한 결정을 하더라도 저 혼자 결정하지 않겠습니다.” “조합원 여러분 앞에서 의견을 묻고 협상장에 들어가겠습니다. 조합원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는 것은 제가 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날 8월 24일 일요일 우리는 봐서는 안 될, 들어서도 안 될 것을 TV를 통하여 확인해야만 했다. 노조 대표자들은 우리가 그토록 우려했던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처절하게 우리의 투쟁을 끝내버렸다. 더군다나 노조위원장은 대국민 사과성명까지 함으로써 우리들의 목숨 건 투쟁을 가치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 주셨다. 투쟁에 동참하였던 조합원들은 김광식 위원장의 배신행위에 치를 떨면서 분노하였다. ‘더 이상 협상에 매몰되지 않고 조합원 뜻에 따라 투쟁하겠다’는 전체 집회 때의 위원장 발언은 강경(?) 조합원들을 무마시키고 속이기 위한 거짓이었다는 것을 확인해 준 것이다. 손을 잡고 초라한 뒷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조용히 농성장을 빠져나갔다. 노조 사무실 앞에서 성난 조합원들은 항의의 뜻으로 ‘고용안정 쟁취’라는 빨간색 머리띠와 초록색 사수대 옷을 불태웠다. 한 조합원은 위원장님께서 올라가서 투쟁하시려고 했던 노조 건물 위에 설치한 철탑 위로 올라가 눈물을 흘리며 관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불태웠다. 투쟁의 결과를 보여주듯 퀘퀘한 냄새와 검은 연기를 내며 노조 사무실 앞에서 불꽃이 치솟았던 것이다. 대국민사과성명을 마친 노조위원장은 본관에서 나와 자신의 관과 성난 조합원들의 머리띠가 불타고 있는 광경을 무표정하게 보고 지나치면서 사무실로 올라갔다. 굴뚝으로 올라갔던 전 위원장님 세 분께서는 남은 조합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어색하게 내려왔다. 그리고 우리의 투쟁은 이렇다 할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끝나고 말았다. 우리 가족들도 따뜻한 인사말 한 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긴급체포영장이 발부되어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버린 회장, 부회장에 대한 뾰족한 대책 하나 마련하지 못한 채 농성장을 떠나야 했다. … 농성장을 떠나던 날 우리의 가슴은 갈갈이 찢겨나갔다. … 우리도 공권력을 두려워했다. 세상에 경찰의 폭력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자식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어린 아이와 임산부를 볼모로 한다는 졸렬하고도 악의에 찬 언론의 비난 앞에서도 스스로 자식들의 손을 이끌고 부른 배를 부여안고 눈물을 흘리며 페퍼포그 앞에 당당히 맞섰다. 그것은 소위 강경파(?) 남편들의 사주도 아니었으며 노동조합의 요청도 아니었다. 남편과 가족의 생존권을 지키지 못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상황은 없다는 본능적인 믿음과 굳은 결의에서 이루어진 순수한 가족들의 결정이었다. 정작 우리가 두려웠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언제부터인가 교섭상황과 투쟁계획이 투명하게 전달되지 않으면서 우리 노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민주적 절차가 무시되고 위원장과 몇몇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이 절박한 투쟁이 회피되고 정리해고가 인정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고 우리는 공권력 몽둥이보다 더 아프고 참혹한 현실 앞에 마주서야 했다. 노조를 불신하고, 동지를 불신하고, 서로를 불신하도록 찢겨버린 동지애![61] 2) 2001년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과 울산총력투쟁 1998년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파상적으로 전개됐지만, 그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좀처럼 전국적인 총력전선으로 결집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2001년에 이르러 마침내 기회가 왔다. 2000년 중반부터 2001년 초반까지 롯데호텔노조, 이랜드노조, 한국통신계약직노조, 캐리어사내하청노조, 건설운송노조 등 비정규직 투쟁이 꼬리를 물고 터졌다. 여기에 2001년 초 대우차 정리해고 저지투쟁이 비록 대중적 동력은 크지 못했지만 그 기세만은 완강하게 펼쳐졌다. 한편으로 IMF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확산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고 다른 한편으로 자본의 구조조정 공세가 다시금 거세게 몰아치면서, 민주노조운동 전반에는 새로운 활력과 긴장이 감돌았다. 그런 가운데 대우차의 정리해고 명단 통보 직후 김대중 정권이 전격 공권력을 투입하고 인천 지역에 마치 위수령을 선포한 듯 광포한 탄압을 퍼붓자, 3월 6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 정권 퇴진’ 슬로건을 공식 채택했다. 민주노총이 정권 퇴진 슬로건을 공식화한 것은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노동자 탄압은 더욱 극렬하게 펼쳐졌다. 4월 10일 노조 사무실로 향하는 대우차 정리해고자들을 경찰이 잔인하게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10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앞에서 경찰들은 노조 사무실로 향하는 대우자동차 조합원 400여명을 법적 근거도 없이 가로막고 무차별 폭력만행을 저질렀다. 이날 경찰들은 맨손에 무방비 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을 방패로 찍고 곤봉으로 두들겨 팼다. 머리가 깨지거나 얼굴에 살점이 뜯겨져 나가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허리를 맞아 고통으로 울먹이는 모습. 손가락이 부러지고 허벅지가 부러지고 그 비참함은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날 대우자동차 조합원들이 노조사무실로 가고자 한 것은, 지난 6일 인천지방법원이 해고 효력을 다투고 있는 대우자동차 조합원의 노조 사무실 이용은 정당한 권리이므로 누구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판결을 내린 데서도 확인되듯이 지극히 정당한 합법적 권리행사였다. 그러나 법원의 판결로까지 확인된 합법적인 권리행사를 경찰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가로막았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무차별 폭력만행까지 저지른 것이다. 심지어 법원의 판결 집행을 위해 나섰던 박훈 변호사가 경찰의 위법행위를 지적하며 무슨 근거로 가로막느냐고 묻자 부평경찰서장은 “정권은 법에 우선한다”며 우겼다는 것이다. 박 변호사 또한 무차별 폭력을 당해 골반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 이날 경찰의 폭력만행이 담긴 동영상을 보면서 우리는 지난 시절 광주학살 비디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무참히 짓밟으면서도 인권과 민주주의를 운운하며 진실을 기만해 왔던 김대중 정권의 적나라한 참모습을 우리는 보았다.[62] 민주노총은 이 사건을 경찰폭력 차원을 넘어선 ‘김대중 정권의 살인적 폭력만행’으로 규정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목표로 단호한 반격에 나서자는 주장들이 민주노총 상층과 현장에서 동시에 강력하게 터져 나왔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하에 노동자 민중들에게 할퀴고 간 그 숱한 상처를 안고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분쇄를 모토로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의 길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63] 그러한 전국적 분위기 아래서, 울산에서부터 과감한 대중투쟁 물결이 솟구쳐 올라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998년 이래 지속적인 패배를 겪어야만 했던 노동자들이 이제 마침내 전국적인 총반격 전선을 형성해 낼 가능성이 하루가 다르게 구체화돼 나갔다. 2001년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총력투쟁, 즉 ‘2001년 울산총력투쟁’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투쟁은 울산지역 노동자들이 IMF 외환위기 이후 파상적으로 전개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 마침내 하나의 전선으로 떨쳐 일어선 투쟁이었다. 2001년 울산총력투쟁이 만들어진 계기는 화섬산업의 구조조정이었지만, 효성 파업에 대한 연대를 중심으로 10여년 만에 되살아 난 울산지역 노동자운동의 ‘살아 움직이는 연대’야말로 핵심 동력이었다. 또한 IMF 외환위기 이후 몇 년을 지나오면서 모든 노동자들이 사업장의 울타리를 과감하게 뛰어넘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총반격에 나서야 한다는 대중적 공감대가 현장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광범하게 형성된 결과이기도 했다. ◎ 암흑의 세월을 딛고 하청화에 맞선 효성노조 파업 2000년 말 효성노조에 민주집행부가 등장한 이후 탄압의 강도를 높이고 있던 효성 자본과 경찰은 2001년 5월 6일 위원장을 비롯한 핵심 간부 3명을 전격 구속함으로써 파업을 사전에 봉쇄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상대책위원회로 전환한 효성노조는 회사의 방해로 파업 찬반투표조차 제대로 되지 않자 25일 새벽에 전격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의 핵심 목표는 ‘하청화 저지와 노조탄압 분쇄’였다. 파업 노동자들은 25일 새벽과 28일 낮 두 차례에 걸쳐 효성 자본이 투입한 용역깡패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공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김대중 정권이 6월 5일 새벽 공권력을 투입하여 파업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몰아냈다. 1. 무쟁의 13년에 억눌린 암흑의 세월 - 하청화, 현장통제, 노조활동 탄압 효성노조는 지난 89년 파업투쟁을 전개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파업에 돌입하지 못했다. 13년 무쟁의. 사측의 극악한 조합원 총회(쟁의행위 찬반투표) 방해가 낳은 결과다. 사측은 총회가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조합원들에게 얼마간의 돈까지 쥐어주며 휴가를 보내주었다. 그것도 안심이 안되던지 아예 조합원을 한데 모아놓고 술과 고기를 대접하며 혹시나 있을 ‘이탈자’ 방지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총회를 무산시키고는 노조의 투쟁을 불법으로 몰아갔고 노조는 번번이 총회 무산이라는 암초에 걸려 좌초하고 말았다. 반복되는 무쟁의를 통해 노조의 힘은 약화돼 갈 수밖에 없었고 사측은 현장을 마음껏 유린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하청의 급속한 확대. 93년 효성 울산공장의 조합원 수는 1600여명에 이르렀지만, 현재 울산공장 조합원 수는 900여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하청 노동자로 채워진 것이다. 사측은 자연감원 인원과 기계 증설에 따른 필요인원을 보강하면서 정규직을 신규 채용하지 않고 철저히 하청 인원으로 대체해 왔다. 심지어는 조합원을 마음대로 배치전환시켜 코드3과(타이어에 들어가는 코드)의 경우 부서 전체가 하청 노동자로 메워진 상태다. 잦은 배치전환과 하청 확대는 조합원들의 고용불안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조합원 수의 감소를 통해 노조를 무력화시킬 수 있으며 저임금으로 기계를 돌릴 수 있어 사측으로선 필사적으로 이를 강행해 왔다. 무쟁의 13년의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여 노조는 무력화되고 현장에는 고용불안과 현장 통제만이 조합원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2. 마침내 투쟁이 시작되다 - 하청화 저지 투쟁, 반장교육 저지 투쟁 작년 11월 현장 내 민주세력이 총결집된 노조가 들어섰다. 이대로 가다가는 효성의 민주노조 역사가 끝장날 뿐만 아니라 조합원의 생존권도 말살되고 말 것이라는데 모든 현장 활동가들이 생각을 같이하면서 함께 노조 선거를 준비했고, 조합원들도 이러한 모습에 기대를 갖고 당선이란 선물을 안겨주었다. 노조는 출범과 동시에 하청화 반대 투쟁을 시작했다. 우선 작년 12월 노조는 사직 3명, 정년퇴직 7명으로 자연감원 된 인원에 대해 정규직으로 채용할 것을 요구했다. 사측은 비정규직으로의 대체를 완강하게 주장했고 노조는 즉시 점심시간 피켓팅과 항의 집회로 맞섰다. 하지만 사측은 물러서지 않았다. 2월에는 연신과 조합원 9명을 방사 3과로 배치전환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연신과는 이미 66%가 하청화된 상황이었다. 노조는 3월 1일부로 간부 비상대기에 돌입하며 연신과 하청화 반대 투쟁의 막을 올렸다. 평균 5일 간격으로 조합원 200여명과 함께 집회를 열어 배치전환 철회와 신규채용(비정규직 정규직화)을 강력히 요구했다. 또 지난 3월 노조는 회사의 논리를 주입하여 조합원간의 갈등과 분열을 획책하는 조·반장교육 저지 투쟁을 벌였다. 노조와의 사전협의를 거부한 조·반장 교육은 단협 위반임에도 회사가 강행한 것이다. 노조간부들은 교육장이 있는 경주와 창녕까지 달려가 조·반장들에게 교육 불참을 호소하며 교육진행을 저지하다 관리자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노조는 또 사측이 작년 임단협에서 이덕호 전 지부장에 대한 복직합의를 하고도 이를 이행치 않는 것에 항의해 울산공장과 언양공장을 번갈아가며 이덕호 해고자와 함께 출근투쟁을 진행해 왔다. 3. 온갖 탄압을 돌파하고 총파업으로 - 징계해고, 위원장 구속, 총회방해, 용역깡패 노조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조합원들 또한 적극적으로 이에 호응하는 양상을 띠자 당황한 사측은 광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연신과 하청화 반대 투쟁, 조·반장교육 저지 투쟁과 관련해 총 21명의 노조간부와 조합원에게 해고, 정직 등의 중징계를 단행했다. 또 17명을 고소·고발했으며, 조합비 임의적립금 쟁의기금과 6명의 개인임금까지 압류해 노조의 발목을 묶어버리려 했다. 급기야 5월 6일에는 철야농성이 진행되고 있던 노조사무실을 사측의 사주를 받은 형사 20여명이 급습하여 박현정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 부위원장을 연행·구속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예상치 못한 침탈에 노조는 잠시 혼란에 빠지기도 했으나 즉시 최만식 사무국장, 정기애 교선부장 공동 직무대행 체제를 꾸리고 총파업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구속자, 징계자 가족을 중심으로 가족대책위원회도 구성돼 출퇴근 피켓팅, 서울 본사 항의 방문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5월 12일 대의원대회를 열어 쟁의대책위원회로 전환하는 한편, 16일부터 22일까지 일주일간 쟁의행위 찬반을 묻는 조합원 총회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총회 돌입이 결정되자 사측은 또다시 총회무산을 통해 투쟁의 예봉을 꺾고자 달려들었다. 우선 노조임원 구속 사태 이후 급격히 달아오르고 있던 연대투쟁의 열기를 차단하기 위해 용역깡패와 구사대 3백여 명을 동원하는가 하면, 정문을 철구조물로 봉쇄하고 컨테이너로 공장 진입 도로를 막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측의 탄압은 오히려 연대투쟁의 불길을 지펴준 꼴이 되었다. 매일 평균 3백여 명의 울산지역 노동자들이 연대를 위해 효성으로 모여들었고 용역깡패와 구사대를 물리치고 공장내로 진입하여 효성 조합원들과 함께 연대집회를 가졌다. 사측은 총회 무산이 어렵게 되자 총회 부결로 전략을 수정했다. 반대를 찍겠다는 각서를 받거나 투표용지를 찢게 해 무효표가 되게 하는 등의 행위로 찬성이 과반수에 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결국 노조는 사측의 방해로 인해 더 이상의 총회 진행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총회 중단을 선언하고 5월 25일 0시부로 총파업에 돌입했다. 4. 뜨거운 연대 속에 강력한 총파업투쟁 - 식칼, 가스총, 용역깡패 분쇄, 투쟁열기 폭발 25일 0시부로 총파업 돌입이 선언된 후 효성 조합원들과 총파업 엄호를 위해 달려온 울산지역 노동자 500여명은 조합원들을 파업에 참여시키기 위해 새벽 2시 경부터 현장순회 투쟁에 돌입하려 했다. 그러나 구사대와 용역깡패가 이를 막아섰고 곧바로 충돌 사태가 빚어졌다. 용역깡패들은 최루가스를 뿌리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등 무자비한 공격을 해왔지만, 얼마가지 않아 파업대오의 가열찬 반격에 당황하며 사분오열 되었고 후퇴하고 말았다. 노조의 파업 선언 이후 사측은 작업장의 문을 용접한 채 조합원들을 퇴근시키지 않고 공장 안에서 숙식하게 하는 등 파업 참여를 막고 공장을 계속 가동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기세는 이미 파업 대오로 기울어진 상태였고, 파업 대오는 갈수록 확대되어 갔다. 28일 오전 용역깡패는 다시 한 번 도발을 감행했지만 완강하게 저항하는 파업 대오의 기세에 눌려 허망하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날 용역깡패들이 몸에 지니고 있던 식칼과 가스총, 사제총 등이 발각된 데다 서울역 등지에 있던 노숙자들이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일당 4만원을 약속받고 동원된 사실까지 밝혀져 사측의 타락한 도덕성이 다시 한 번 폭로됐다. 이날 용역깡패로는 어쩔 수 없음을 깨달은 사측은 깡패들을 철수시켰고 마침내 노동조합이 전 공장을 장악하면서 파업 참가 조합원이 7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총파업 중 사측과 여러 차례 교섭이 진행되기도 했으나 사측은 단지 폭력경찰 투입을 위한 명분 쌓기 용으로 교섭에 임할 뿐이어서 어떠한 진전도 없었다. 결국 총파업 돌입 13일 차인 6월 5일 새벽, 김대중 정권은 효성 사측과 전경련·경총 등의 요구를 받아 들여 6천여 명의 폭력경찰 투입을 강행했다.[64] 김대중 정권의 공권력 투입은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폭발시키는 뇌관이 됐다. 공권력 투입을 눈앞에 둔 4일 밤부터 울산지역 노동자 700여 명이 효성 공장 입구에서 밤을 새어 공권력 투입에 맞섰다. 공권력 투입 직후인 5일 새벽 7시부터는 2천여 명으로 불어난 노동자들이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며 가두투쟁에 나섰다. 노동자들은 울산 시내 곳곳에서 하루 종일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전투경찰과 맞섰다. 지난 4일 오후 6시 경, 폭력경찰 3천여 명이 효성 울산공장 각 문으로 통하는 진입로를 겹겹이 서서 봉쇄하기 시작했다. 공장 내부와 외부는 폭력 경찰에 의해 완전히 격리됐다. 폭력경찰 투입이 확실시되자 정기애 쟁대위 공동의장을 비롯한 6명은 주변전실을 점거했다. 또 최만식 공동의장을 비롯한 8명은 방사1과 옥탑으로 올라갔다. 전경들에 의해 효성 공장 정문으로 들어가는 도로부터 진입을 차단당한 울산 노동자 1천여 명은 “폭력경찰 물러가라”며 4일 오후 6시 30분경부터 5일 새벽 3시경까지 항의집회와 돌파 투쟁을 전개했다. 5일 오전 5시반, 마침내 폭력경찰의 '울산만 작전'이 시작됐다. 폭력경찰 3천여 명은 사측이 설치한 바리케이트를 중장비로 뜯어내고 공장 내로 진입해 조합원 전원을 토끼몰이식으로 진압하고 이 중 다수를 연행한 후 석방했다. 주변전실을 점거하고 있던 6명은 벽을 뚫고 진입한 폭력경찰에 의해 전원 연행됐다. 폭력경찰 투입이 단행되자 울산지역 노동자들은 즉각 이에 항의하는 가두투쟁에 돌입했다. 우선 효성 진입로에 모여 있던 울산 노동자들은 곧바로 야음 사거리로 이동해 도로를 점거했다. 오전 8시경에는 공장에서 밀려난 효성 조합원들이 가두투쟁에 합류했다. 오전 11시경 가두투쟁 대오는 공업탑 로터리로 이동해 도로를 점거하고 집회를 연 후 다시 시청으로 이동했다. 시청에 다다르자 마침내 수천명의 폭력경찰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후 1시경 가두 투쟁 대오는 시청 앞에서 규탄집회를 진행한 후 오후 5시 30분 현대백화점 삼산점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해산하려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폭력경찰들이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며 대오를 공격했다. 곧바로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시청 앞 사거리를 중심으로 골목 곳곳에서 공방전은 한시간 가량 치열하게 전개됐다. 당일 저녁 5시 30분 현대백화점 삼산점 앞에서 다시 울산 노동자 1천여 명이 모여 집회를 연 후 도로 전 차선을 점거하고 가두 투쟁에 나섰다. 이때도 경찰의 폭력은 어김없이 자행됐다. 5일 투쟁으로 총 86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연행됐고, 부상자도 뇌출혈이라는 중상을 입은 정은희 조합원을 비롯 효성 조합원만 21명에 달했다. 가두 투쟁은 6일과 7일에도 이어졌는데 이틀간은 폭력경찰이 첫 집회 장소만 원천봉쇄 했을 뿐 이동한 장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투석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효성 조합원들은 공장에서 나온 후 복산성당에 거점을 마련하고 파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옥탑 농성조 또한 헬기 진압 시도에도 흔들림 없이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최만식 쟁대위 공동의장은 조합원에게 보내는 글을 통해 “힘찬 장외 투쟁으로 빠른 시간 내에 공장을 탈환해 달라”면서 조합원들이 끝까지 투쟁해 줄 것을 촉구했다.[65] 5일부터 시작된 폭발적인 가두투쟁은 영남권 노동자대회가 열린 9일까지 이어져, 날마다 2천에서 5천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울산 시내 전역을 투쟁의 함성으로 채워 나갔다. 효성노조 파업에 대한 연대투쟁이 어느덧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총력투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9일 오후 3시, ‘효성 공권력 투입 규탄 김대중 정권 퇴진 영남노동자대회’가 1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태화강 둔치에 집결한 가운데 열렸다. 집회 참가자들은 30여 분간의 간략한 집회를 통해 효성 폭력경찰 투입을 강력히 규탄하고 사전에 예고했던 대로 곧장 효성공장 진격투쟁에 들어갔다. 5백여 대의 오토바이 부대를 앞세운 대오는 시청과 마그넷, 야음사거리를 거쳐 효성공장 입구 사거리까지 무려 2시간에 걸쳐 도로 전 차선을 가득 메운 채 거리행진을 전개했다. 오후 5시 40분, 효성공장 입구 사거리에 도착하자 마침내 5천명 이상의 폭력경찰과 맞닥뜨렸다. 사거리에서 효성공장 정문으로 가는 도로는 컨테이너에 의해 좁혀져 있고 그 뒤로 엄청난 병력이 길을 봉쇄하고 있었다. 오후 6시 30분, 5백여 명의 효성 조합원들이 먼저 공장 진입 투쟁을 시작했지만 이내 포위되고 말았고 다시 본대오로 합류했다. 오후 7시 10분, 효성 조합원들이 다시 진입을 시도하며 전경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하자 오후 7시 30분 마침내 전경들이 대오를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이때부터 사수대 6백여 명을 중심으로 폭력경찰과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고, 화염병 1백여 개가 투척되기도 했다. 화염병에 놀란 폭력경찰은 잠시 주춤하다 오후 8시 30분쯤부터 다시 전면 해산 작전에 돌입했고 곧이어 무차별 폭력과 연행사태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약 50여명이 연행됐으며 수십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흩어진 대오는 오후 9시쯤 야음 사거리에 집결한 후 정리집회를 갖고 오후 10시쯤 이날 투쟁을 모두 정리했다. 이날 수도권 노동자 1천여 명도 여의도 전경련 회관 앞에 모여 집회를 갖고 효성 폭력경찰투입을 강력히 규탄하며 건물 입구에 계란과 페인트를 투척했다.[66] 한편 12일 민주노총은 △정리해고 중심의 구조조정 저지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정규직화 △주5일 근무제 도입 △공공의료 확대 △모성보호법·사립학교법·언론개혁법 개정 △국가보안법 철폐 △김대중 정권 퇴진을 주요 요구로 내걸고 10만여 명이 참여하는 총파업을 전개했다. 12일 민주노총 총파업에 맞추어 울산의 태광노조와 고합노조가 구조조정 저지파업에 들어가면서 이미 파업 중인 효성노조와 함께 울산의 화섬3사 노조가 공동파업을 시작했다. 금속노조에 속한 중소규모 노조들도 파업에 돌입했다. 효성 폭력경찰 투입에 대한 울산 그리고 전국 연대투쟁의 불길이 치솟고 있고 화섬사 노조 또한 그 중심에 있다. 고합, 태광, 구미 코오롱, 한국합섬 등은 지금까지 효성 총파업 투쟁에 적극적으로 함께 해 온 것은 물론 조만간 줄줄이 총파업에 돌입할 예정이다. 화섬사의 연대투쟁이 전에 없이 활기차게 전개되는 원인은, 화섬사 전 사업장에 걸쳐 구조조정이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섬업계는 99년부터 수요부진과 가격하락으로 인해 대거 적자를 기록하면서 불황의 늪에 빠져 들기 시작했고 곧바로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화섬업계 구조조정 역시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노동자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 효성은 화섬업계 중 가장 빨리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98년 4개 계열사(효성생활산업, 효성TNC, 효성중공업, 효성물산)를 합병하여 1개 법인체로 단일화하고 자산매각 등을 통해 재무구조를 개선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생산직·관리직 노동자가 무려 2,300여명이나 잘려 나갔다. 사측은 구조개편 이후에도 잇따라 부서 통폐합, 설비 합리화, 공정 외주화, 설비 이전 등을 진행했고 이를 통해 정규직 감원과 비정규직 확대를 꾀해 왔다. 결국 현재 효성 울산공장의 비정규직 숫자는 정규직 숫자(9백여명)를 넘어서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고합 울산공장의 구조조정은 설비의 해외 이전 매각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부와 채권단은 지난 4월 30일 이미 원사 설비의 중국 매각을 통보한 상태이며, 궁극적으로는 울산공장 전체를 매각할 것이 예상되고 있다. IMF 이후 엄청난 흑자 행진을 자랑하고 있는 태광산업․대한화섬의 경우도 예외 없이 구조조정의 속도를 높여가고 있다. 태광에서는 주로 수익성이 떨어지는 부서의 정리와 기계가동 중단 등으로 휴직자를 대거 만들고 있다. 지난달 22일에는 대한화섬 조합원 232명에 대해 무기한 휴직 방침을 통고하기도 했다. 사측은 올해 임협에서 태광과 대한의 분리 교섭을 요구하며 교섭을 지연시킨 바 있는데, 이것은 수익이 감소하고 있는 대한을 정리하기 위한 작업이 수순밟기에 들어간 것으로 분석되었다. … 효성노조의 총파업 투쟁은 그래서 한 사업장의 투쟁을 넘어 화섬사 구조조정 저지, 신자유주의 반대 노동자 대투쟁으로 확산돼 가고 있는 것이다.[67] ◎ 효성 연대투쟁에서 울산지역 총파업으로의 발전 5일 공권력 투입 이후 솟구치던 가두투쟁 열기가 12일을 계기로 연쇄적인 파업 확산으로 발전하자, 14일 무렵부터 이제 남아 있는 대공장마저 파업에 돌입하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울산 노동자 총파업을 전개하자는 주장이 울산지역 현장 활동가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연일 열리는 지역 집회에서도 이 투쟁을 울산 노동자 총파업으로 발전시키자는 주장과 호소가 줄을 이었다. 총파업 확대, 위력적인 가두시위로써 투쟁을 전면전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1. 울산 노동운동의 새 역사를 만들어 왔다. 울산 노동자들은 이번 효성투쟁에서 노동자의 연대가 어떤 것인지를 실천으로 보여주며, 노동운동의 역사를 새로 써나가고 있다. 또한 울산 노동자들은 효성연대투쟁 속에서 이제 의연히 투쟁의 주체로 떨쳐 일어섰다. 이제 전선은 단지 효성을 둘러싸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현장하청화 저지와 비정규직 정규직화, 폭력탄압 분쇄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건 울산의 모든 노동자들과 이것을 무너뜨리려는 정권과 자본 간의 전선으로 확대되었다. 효성연대투쟁에서 출발한 전선이 이처럼 울산노동자 모두의 투쟁전선으로 확대되어 온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효성 노동자들이 투쟁해야 했던 이유가 바로 울산 노동자 모두의 자기 문제였기 때문이다. 효성 노동자들을 마침내 떨쳐 일어서게 만들었던 일방적 전환배치와 현장 하청화, 노조활동 탄압, 정리해고와 그것을 무기로 한 강제 희망퇴직 등 지난 몇 년간 거침없이 진행되어 온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모든 노동자들의 삶이 유린당하며 절망만을 강요당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효성 노동자들이 내건 요구들이 바로 울산 노동자 모두의 요구일 수밖에 없었고, 효성 투쟁의 승리가 바로 울산 노동자 모두의 승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급박한 사태전개와 상황의 심각성 그런데 울산을 중심으로 연일 가두와 공장에서 대중들의 자발적인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어 나가자 이미 그 폭력성이 극에 달해 있는 김대중 정권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노동운동을 전면적으로 탄압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12일 민주노총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열고 있는 시점에 옥탑의 효성 지도부를 폭력진압하였고, 여천 NCC에도 폭력경찰을 투입하였으며, 광주전남지역에서는 119명의 노동자들에게 구속영장, 체포영장, 출두요구서를 발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노총 중앙에서도 13일 밤 8시 비상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정권의 전면적 노동운동탄압이 눈앞에 있다고 판단하고 민주노총 산하 모든 조직의 전면적 파업 돌입을 포함한 비상대책을 수립하였다. 지금의 정세는 총파업을 확대하고 위력적인 가두시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전면전으로 발전시켜 가지 않는다면, 이제 정권과 자본의 전면적인 탄압으로 저항의 싹조차 뿌리뽑히게 될 상황임을 직시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노동자들이 당면 투쟁을 전면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때 96~97총파업 이상으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동시에 꿰뚫어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가두와 공장에서 터져 나오는 대중의 열기를 볼 때 전면적인 투쟁으로 이 투쟁을 확대 발전시키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며, 또한 김대중 정권이 비록 광적인 탄압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지만 심각한 민심이반과 내분으로 사실은 대단히 허약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3. 안일한 인식, 소극적인 투쟁자세를 혁파하자. 그러나 지금까지 숱한 문제제기와 동지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 정세와 투쟁의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이 일부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대단히 가슴아픈 일로 받아들이며, 다시 한 번 현 정세와 투쟁의 성격을 올바로 인식하고 실천에 옮겨낼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지금 우리는 당면 투쟁을 효성노조의 투쟁과 그에 대한 연대투쟁의 수준으로 좁혀서 바라보는 사고를 혁파해야 한다. 당면 투쟁은 이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현장 하청화 저지와 비정규직 정규직화, 폭력탄압 분쇄와 김대중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울산의 모든 노동자가 그간의 억눌린 분노를 폭발시키며 떨쳐 일어선 투쟁으로 발전해 있다. 효성노조의 투쟁과 그에 대한 연대투쟁은 울산 노동자 전체의 투쟁을 촉발시킨 계기였을 뿐이다. 그런데 만일 이 투쟁을 전면전으로 확대시키지 않고 굴욕적인 협상을 마다않으며 효성파업을 서둘러 마무리하는 것에 매달린다면, 효성투쟁도 패배할 뿐만 아니라 곧이어 울산 노동운동 전체가 정권의 전면적인 탄압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결과를 빚고 말 것이다. 또한 울산의 모든 노동운동 주체들이 이 투쟁을 전면전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가장 적극적인 의지로 달려들지 않는다면, 결국 이 투쟁이 패배로 귀결된 이후 조성될 엄혹한 역관계 속에서 당분간 어떤 주체도 자기 투쟁을 제대로 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본의 대공세 앞에 각개격파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 정세와 투쟁의 성격을 올바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겨낼 것을, 우리는 울산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다시 한 번 간곡히 호소한다. 4. 투쟁을 확대 발전시키기 위한 우리의 제안 - 총파업을 울산지역 모든 단위노조로 확대해 나가자! - 지금 당장 총파업에 돌입할 수 없는 단위노조는 잔업거부 이상의 투쟁에 돌입하자! - 위력적인 가두시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하자! - 당면 투쟁의 중요성과 현 정세의 심각성을 알리는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펼치자! - 울산의 모든 현장조직과 노동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실천단을 결성하여 투쟁의 선봉주체로 나서자! 2001년 6월 14일 노동자의 힘 울산준비모임, 울산노동자운동연대, 울산평등연대, 울산해고자협의회, 전태일을 따르는 노동자대학 울산모임, 청년진보당 울산시지부 (이상 가나다순)[68] 지난 16일 민중대회 정리집회에서 이영도 민주노총 울산투쟁본부 집행위원장은 “지금은 울산 전 노동자가 총파업으로 일어서야 할 때다. 혹 노조 집행부가 주저하더라도 현장에서 파업을 준비하고 조직해 달라”며 투쟁의 열기가 한껏 달아올라 있는 울산에서부터 민주노총 전면탄압에 맞서는 연대 총파업을 반드시 성사시키자고 힘주어 말했다.[69] 효성노조에 경찰력을 투입하던 그날부터 울산 노동운동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되었다. 그동안 울산은 현자, 현중 등 대공장 중심의 투쟁이 노동운동의 핵이었고, 대공장 경찰력 투입으로 울산 노동자 모두가 움직이는 투쟁이었다. 하지만 이번 효성투쟁에는 몇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울산에 존재하는 여러 운동단체 그리고 단위 노조의 각종 조직들이 노선과 지향점에 관계없이 효성 동지들 투쟁에 모두 모여들었다. 나아가 함께 고민했고 어떻게든 함께 투쟁하자고 결의를 다졌다. 또한 화학섬유 사업장이 울산 노동운동에서 미쳐왔던 지금까지의 영향력과 울산에서 차지한 비중 모두가 바뀌었다. 그것은 화섬 3사의 연대투쟁이 증명해 주었고, 화섬에 이어서 금속노조 파업과 대공장 잔업거부투쟁 돌입에서도 드러났다. 그리고 몇 년만에 일어난 경찰과의 충돌에서 누구할 것 없이 폭력경찰에 대한 두려움이 깨지고 있다.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싸우는 노동자, 구속을 두려워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본다. 누구나 알듯이 이 투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김대중 정권에 대한 저항이며, 생존권의 위기를 느낀 노동자의 분출구였다. 이제 효성 투쟁으로 울산이 변하고 있는데, 이 변화에 과거 투쟁의 모든 경험을 쏟아부어야 한다. … 수십만 노동자가 힘으로 밀어도 경찰 병력 수천을 뚫기는 힘들다. 그러나 격렬한 대중투쟁이 연일 계속되는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정권 또한 경찰병력을 몇 달이고 주둔시킬 수는 없기에 격렬한 투쟁을 지속할 때 그들은 스스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 투쟁하는 노동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자. 이것을 해내는 것이 2001년 투쟁의 완성을 보는 것이며 울산 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70]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열린 21일의 현대차노조 임시대의원대회는 ‘구조조정 분쇄, 김대중 정권 퇴진, 민주노조 공안탄압 분쇄’ 쟁의발생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현대차노조도 울산지역 총파업에 합류하겠다는 입장의 천명이었다. 현대자동차노조 임시대의원대회가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간 열렸다. … 이번 임대에서는 마지막 날 기타 안건 토론에서 ‘구조조정 분쇄, 김대중 정권 퇴진, 민주노조 공안탄압 분쇄’를 위한 쟁의발생결의가 상정되어 대의원들의 만장일치 박수로 통과되었다. 이번 쟁발결의는 파업사업장에 대한 경찰력 투입, 민주노총 지도부 구속·수배 등 강경으로 치닫는 정부의 무차별적인 탄압에 대한 강력한 연대투쟁 선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정권과 자본의 공세가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모는 현 정세에서 민주노총 차원의 총력투쟁에 현대자동차노조가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한다는 인식이 대의원들의 만장일치 쟁발결의를 이끌어 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23일 경총은 ‘현대자동차 파업가능성에 대한 분석자료’를 통해 “현대자동차 임시대의원대회의 결정사항인 연대파업 동참을 위한 쟁의발생 결의는 일부 강성 대의원들의 선동에 의한 것일 뿐이고, 조합원들의 정서와 유리된 것이기에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정권의 무차별 폭력진압과 경제단체들의 노동자는 안중에도 없는 돈의 이데올로기에 노동자의 분노는 단결을 선택할 것이다. “실제로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저들이 하는 방식으로 볼 때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고, 우리가 믿는 것은 조합원들 뿐입니다.” 임시대의원대회 장소를 떠나며 한 대의원이 남긴 말이다. 지금의 긴박한 정세 속에서 노동자의 태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함축해서 표현해주고 있다.[71] 5월 하순 효성노조 파업에 대한 연대로부터 시작된 투쟁이 6월 하순에 이르자 이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건 울산노동자 총파업을 향해 발전해 가고 있었다. 불과 한달전만 하더라도 꿈같은 얘기로만 여겨지던 '울산노동자 총파업'이 이제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 남구에서는 이미 5월 25일 파업에 돌입한 효성, 6월 12일 파업에 돌입한 태광, 고합, 경기화학 등 화섬4사 공동파업이 거센 기세로 진행되어 왔다. 여기에 세종공업, 대덕사, 태성공업, 트리메탈코리아 등 금속노조 울산지부 4사가 6월 12일부터 7일간 파업을 전개했다. … 그리고 이제 효성투쟁에서 촉발된 울산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이 정권의 전면적인 노동탄압으로 이어지고, 이에 대해 민주노총이 산하 조직의 전면 총파업으로 정면대결하기로 방침을 정하면서, 마침내 파업의 불길이 동구와 북구의 금속 대공장으로 옮겨붙고 있다. …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긴급동의안으로 상정된 ‘구조조정 분쇄, 김대중 정권 퇴진, 민주노조 공안탄압 분쇄’를 위한 쟁의발생 결의안을 대의원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그동안 8일, 12일, 20일 세차례 잔업거부를 조직하는 등 민주노총 집회와 가두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수준에서 이번 투쟁에 결합해 왔다. 그런데 막강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갖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이제 민주노총의 총파업 지침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나섬에 따라 이번 투쟁의 양상이 더욱 폭발적인 형태로 발전해 나갈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지게 되었다. …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19일 민주노총의 지침이 떨어지는 대로 총파업 투쟁에 적극 참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21일에는 사측의 불성실한 교섭태도로 인한 2001년 임금 교섭 결렬을 선언하고, 쟁의 절차를 진행하기 위한 수순을 밟아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지난날 128일 파업과 골리앗 파업 등을 거치며 전국 노동자 투쟁의 선봉에 서 왔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지난 몇 년 동안 현장조직력이 무너진 가운데 대단히 무기력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지난 8일의 산별노조 전환 총회에서 사측의 집요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60% 이상의 찬성표가 나오는 등, 최근 들어 현장이 다시 활력을 회복해 가는 기미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총파업을 적극 실천하겠다는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의지는 몇 년 동안 억눌리며 심각하게 누적되어 있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대투쟁의 계기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 현대미포조선 노동조합 또한 20일 대의원대회에서 위원장이 민주노총의 지침에 따라 총파업 투쟁을 적극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 한편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공히 노동조합 집행부뿐만 아니라 내부 현장조직들 또한 총파업을 성사시켜 내는 데 적극 나서기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번 총파업 투쟁의 성사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울산 노동자 총파업의 거대한 불기둥이 막 치솟으려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현장 하청화 저지와 비정규직 정규직화 쟁취, 노동탄압 분쇄와 김대중정권 퇴진의 목표를 향한 울산 노동자들의 2001년 6월 투쟁은 이제 새로이 중대한 고비를 넘고 있다. 효성 투쟁으로부터 터져 나온 이번 투쟁은 지난 몇 년간 절망만을 강요당해 온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과 희망을 되찾고자 떨쳐나선 처절한 몸부림이요, 투쟁 속에서 스스로의 힘과 전망을 만들어 나가는 노동자의 위대한 진군이다.[72] ◎ 반격의 기회를 만들지 못한 민주노총 7·5 총파업 울산지역의 투쟁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자 22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이를 전국적 투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7월 5일 ‘노동탄압 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건 정치총파업을 단행하고 이를 시작으로 ‘7월 총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지금 김대중 정권은 민주노조운동의 구심인 민주노총에 전면적인 탄압을 가해오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위해 생존권을 지키고 민주노조를 사수하고자 하는 모든 투쟁에 경찰병력을 앞세운 폭력적인 방법으로 일관되게 대응해 왔습니다. 특히 올해 들어 그 폭력성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탄압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으며, 또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되어 온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는 개혁과 경제정책의 실패를 노동자에게 떠넘기며 정권재창출을 위한 보수 기득권 세력과의 영합을 이루기 위한 시도로 분석됩니다. 김대중 정권은 국내 자본가와 미국의 초국적 자본에 완전히 굴복했습니다. 재계의 규제완화를 수용하였을 뿐 아니라 노동계에 대한 강력대응 요구를 전면적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하반기 공기업 구조조정을 강행할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철도 전기 통신 에너지 등 핵심적인 공기업의 민영화와 정리해고로 이어질 구조조정이 한국경제의 회복과 경쟁력 강화의 핵심이라는 잘못된 철학과 초국적 자본의 요구에 부응해 하반기에 반드시 구조조정을 완성하겠다는 것입니다. 김대중 정권은 하반기 정기국회를 통해서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정책을 제도적으로 완비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도 기본법과 구조조정 특별법 제정, 노동시간 단축과 연관시킨 노동관계법 개악(변형근로시간 확대, 초과근로 수당 인하, 휴일 휴가일수 축소 및 폐지 등), 비정규직 관련 보호법(가칭) 제정과 연관한 법 개악(연속근로에 따른 정규직화의 기간 연장, 파견근로 대상의 확대 등), 모성보호 관련 법 개정과 연관한 법 개악(여성 노동자의 야간, 휴일근로의 금지의 폐지 내지는 개악 등) 등을 통해 노동유연화를 확실하게 제도화하기 위한 전면적인 법 개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신노사문화 정착이라는 이름 아래 노동계 재편을 통한 지배적인 노정관계를 만들겠다는 음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3년은 국가권력에 의해 통제될 수 있었던 지배적인 노정관계의 파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노동조합,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 투쟁하는 노동조합이 아니면 권리를 지키기 어려울 뿐 아니라 생존자체도 어렵다는 것이 노동자들의 보편적인 인식입니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은 노동계 전반의 운동기조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민주노조운동의 구심인 민주노총의 확대강화로 연결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민주노총을 무력화시켜 체제내의 순응하는 노조 즉, 신노사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것이 폭력적인 탄압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현재 자행되고 있는 폭력적인 탄압은 여론을 의식한 일시적 대응이 아니라 국가권력과 자본 그리고 언론이 삼위일체가 된 준비된 반격, 조직적인 대반격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민주노조운동을 말살하기 위한 보수 기득권 세력의 대연합을 이룬 공격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정세를 민주노조운동의 사수와 수구보수세력 대 진보세력의 피할 수 없는 전면전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3년 동안 분명하게 확인한 것이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에 어떠한 타협의 지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항하고 투쟁하는 만큼, 갖고 있는 힘만큼 지켜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타협과 양보는 유지와 확보가 아니라 끝없는 양보와 후퇴를 강요받게 되고 민주노조운동의 포기와 투항을 예고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의 무력화를 통해서 만이 자신의 정책을 실현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상황을 함께 토론하고 공유하도록 합시다. 아래로부터 대중적 저항을 조직합시다. 오늘의 탄압을 돌파하고 힘찬 진전을 이루어 나갈 저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김대중 정권은 집권말기의 불안정한 권력유지를 위해 검찰, 경찰병력 등 공안 폭력집단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는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양심적이고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모든 세력으로부터 배척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노총이 확고히 중심에 서서 탄압에 맞서 나간다면 우리는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73] 민주노총 지도부 검거령과 잇단 파업현장 경찰투입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전면탄압이 자행되고 있는 가운데 22일 열린 민주노총 비상중앙위원회는 “7월 5일 하루 △노동운동탄압 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정권 퇴진을 내걸고 민주노총 60만 전 조합원이 참가하는 총파업을 벌인다”는 결정을 만장일치로 내렸다. 이날 회의는 경찰이 예정된 회의장소였던 한양대 동문회관에 압력을 넣어 장소대여가 취소되고 급히 이촌동 농업진흥회관으로 옮겼으나 수십명의 사복경찰들이 수배자를 찾기 위해 건물을 에워싸는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허영구 수석부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비상 중앙위원회는 김예준 부위원장의 정세보고와 투쟁현황보고를 듣고 바로 7월초 2차 총력투쟁 논의로 들어갔다. 첫 발언자로 문성현 금속산업연맹 위원장이 나섰다. “금속산업연맹은 6월 20일 중앙집행위원회와 22일 오전 주요사업장 회의를 통해 모든 문제에 대해 신중히 검토한 결과 7월 5일 민주노총은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안을 제시하기로 결정했다.” ‘전 조합원 총파업’이라는 유례없이 강도 높은 투쟁방안이 제시되었지만, 중앙위원 전원은 만장일치로 동의하였다. 후속토론에서 5일 파업의 성격은 ‘하루 정치 총파업’임을 분명히 한 중앙위원들은 5일과 7일 지역별 대규모 집회 개최도 결정하였다. 민주노총에 대한 탄압이 계속될 경우 ‘민주노총 조합원 10만명 상경 전국노동자대회’를 추진하며, 그 세부방안을 결정하기 위해 1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기로 했다. 또한 보수언론의 ‘민주노총 죽이기’에 대해서도 강력 대응하고, 국제사회에 김대중 정권의 노동운동탄압을 폭로하는 투쟁도 함께 벌여나가기로 했다.[74] 울산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온 대중투쟁의 열기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마침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전국 노동자들의 총반격 전선 형성을 눈앞에 두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 것이었다. 지난 23일 현대중공업 중전기 정문 앞 복개천에서는 울산지역 노동자 2천5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민주노총 탄압 분쇄 김대중 정권 퇴진 울산노동자대회’가 열렸다. … 이날 동구 집회는 울산노동자 총파업을 현실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울산 동구는 87년 노동자대투쟁의 발흥지요, 남한 노동운동의 거점지역이었다. 하지만 동구의 핵심노조인 현중노조가 지난 몇 년간 현장을 회사에 빼앗긴 채 침체에 빠져 들면서 동구지역 또한 함께 무기력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올해 현중노조는 지난 21일 교섭결렬을 선언한 후 23일에는 조정신청을 하면서 민주노총의 총파업 투쟁에 함께 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날 발언에 나선 현중노조 위원장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이곳 동구에서 시작됐지만 정권과 자본의 악랄한 탄압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많이 움츠려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제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투쟁 열기, 그리고 전국 노동자들의 투쟁 열기에 힘입어 다시 전국 총파업의 구심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하겠다”며 강력한 투쟁의지를 천명했다. … 집회를 마친 후 대오는 중전기 앞 복개천을 출발, 평강교회, 만세대 아파트, 현대백화점, 서부아파트, 한국프랜지를 거쳐 동부아파트까지 동구지역 구석구석을 누비며 5km에 이르는 가두행진을 진행했다. 가두행진을 진행하는 동안 힘찬 선동과 선전전을 함께 벌였는데, 이에 동구주민들도 아파트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박수를 치는 등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75] ‘노동운동 탄압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정권 퇴진!’을 내건 민주노총의 5일 총파업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울산 지역 단위노조들도 총파업 동참 결의를 다지고 있다. … 특히 현대자동차 노동조합과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공히 이번 총파업에 참여하겠다는 결의를 분명히 확인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지난달 29일 확대운영위원회(간담회)를 열고 5일 총파업 동참을 확인하고, 2일부터 6일까지 상집간부 철야농성, 대소위원 출근투쟁, 임원 현장순회, 사업부별 교육홍보 및 보고대회 등에 나서기로 했다. 5일 총파업의 세부 실천지침은 3일 확대운영위원회를 소집하여 결정할 계획이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2001년 임투와 총파업 투쟁을 결합시킨다는 방침이다. 지난달 27일부터 해복투, 전노회, 현노회 등의 현장활동가들이 5개 정문을 번갈아 가며 매일 아침 출근투쟁으로 집행부와 함께 총파업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2일부터 4일까지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앞두고 조합원총회 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한편 또다시 사측의 총회 방해가 있을 경우 강력히 대응할 태세다. … 30일 태화강 궁도장 옆에서는 민주노총 울산투쟁본부 총파업 결의대회가 2,500여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대회에서는 울산지역 단위노조 대표자들이 총파업 약속을 반드시 지키자는 뜻으로 대형 깃발에 혈서로 결의를 모으기도 했다. … 또한 사수대, 선동대, 정찰대, 기동대 등으로 구성된 울산투본 연대투쟁 실천단이 정식으로 발족식을 갖고 총파업 투쟁과 7월 대투쟁에 앞장설 것을 힘차게 결의했다.[76] 그런데 7·5 총파업을 눈앞에 두고 가장 강력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가진 현대차노조가 총파업 참여 결정을 전격 철회해 버렸다. 3일과 4일 잇달아 열린 운영위원회를 통해 현대차노조 집행부가 5일 총파업 지침을 ‘간부파업’으로 축소함으로써 사실상 총파업 불참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10여 개 이상의 항의 대자보와 유인물이 현장에 쏟아지고, 인터넷 게시판에 400개 이상의 항의 글이 올라왔지만, 노조 지도부가 철회해 버린 총파업을 되살리는 것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7․5 민주노총 총파업의 핵심 동력으로 주목받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4일 확대운영위원회 결정으로 총파업 참여를 철회했다. 민주노총 총파업에 막판 찬물을 끼얹는 효과를 내며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가져온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총파업 철회 결정. 그 배경과 반응을 긴급 점검해 본다. … 6월 22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노동탄압 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건 7월 5일 정치총파업을 결의했다. 이날 민주노총의 결정에는 전날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만장일치 쟁발결의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 6월 29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확대운영위를 열어 7월 5일 총파업 돌입을 확인하고 세부방침은 3일 확대운영위를 다시 열어 결정하기로 했다. … 그러나 이 시기 확대운영위에서 총파업 돌입이 확인되는 ‘공식적인’ 상황과 달리 과연 총파업 돌입이 결행될 수 있을지 우려를 갖게 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외주 모듈화로 인한 고용불안 때문에 합리화 공사 저지 투쟁을 전개하던 승용1공장 대의원회가 27일, 7월 1일부터 17일까지 물량조절 및 합리화공사를 위한 휴가를 가기로 회사와 전격 합의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27일과 30일에 있었던 지역 집회에 참여한 현대자동차 본조 조합원들의 수가 100명 이하로 급격히 떨어진 점도 예사롭지 않았다. … 7월 3일 열린 확대운영위원회는 한차례 정회를 거치며 격론을 벌인 끝에 총파업 결행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다음날 다시 회의를 갖게 되었다. 확대운영위 논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현장은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4일 아침에는 △4공장 소위원회 “대의원 만장일치 쟁발결의, 운영위는 번복할 수 없다” △자주노동자회 “확대운영위는 총파업을 결행하라” 등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4일 10시부터 시작된 확대운영위는 여전히 논란을 거듭하다가 오후 1시경 마침내 총파업을 철회하고 간부파업으로 전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 확대운영위 결정 직후 현자노조 인터넷 자유게시판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4일 자정까지 12시간 동안 무려 400개가 넘는 글이 쏟아져 올라왔다. 확대운영위 결정을 성토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5일 아침 상집간부들은 ‘위원장이 조합원 동지들께 드리는 글’을 배포했다. “이 투쟁을 우리가 전부 떠안고 가기에는 노동조합 공백기가 또다시 올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위원장의 결단이 있었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5일과 6일 확대운영위 결정을 성토하는 유인물과 대자보가 쏟아졌다. △민투위(5일) “7월 5일 총파업을 성사시키지 못한 결과와 조합원 대중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점에 대해 9대 집행부를 출범시킨 조직으로서 책임” △민주노동자투쟁연대(5일) “약속을 저버리면 신뢰는 없다” △다시 머리띠를 묶으며(5일) “운영위 결정 무효화하고 총력투쟁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새로운 투쟁지도부 구축을 위해 집행부 총사퇴를 충심으로 촉구” △2공장 대의원회(6일) “전국 노동형제에 대한 배신행위 … 7월 총력투쟁에 현자노조는 전면에 나서야” △현장 활동가들 기명(6일) “집행부 운영위원 총사퇴와 7월 민주노총 총력투쟁 책임질 비대위 구성”.[77] 7·5 총파업의 핵심 동력이었던 현대차노조가 전선에서 이탈해 버리자 총파업의 규모와 위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됐다. 7월 5일 민주노총은 ‘노동운동 탄압 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걸고 7만여 명이 참여한 총파업을 전개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예상밖 총파업 철회로 그 기세가 약화되긴 했지만, ‘노동운동 탄압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정권 퇴진!’을 내건 민주노총의 5일 총파업과 6~7일 집중투쟁이 전국에서 힘차게 치러졌다. 특히 5일에는 금속산업연맹에서 기아자동차, 한국중공업, 오리온전기, KEC, 대우정밀 등 44개 사업장, 화학섬유연맹에서 태광, 효성, 고합 등 12개 사업장, 기타 21개 사업장이 전면 혹은 부분파업으로 총파업에 참여했다. 또한 서울 종묘공원 1만 명을 비롯하여 부산, 창원, 광주, 대전, 원주, 제주, 울산 등 전국 20곳에서 열린 집회에 5만여 명이 참여했다. 6~7일 집회도 전국에서 예정대로 열렸으며, 대부분 5일 집회에 참여한 수가 유지되었다. … 그러나 정권과 자본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구조조정과 노동탄압에 나서고 있다. 5일 총파업의 기세가 예상보다 약화되면서 자신감을 얻은 듯한 태세다. … 민주노총은 5일 총파업이 예상보다 저조했지만 기세를 되살려 ‘22일 10만 명 상경투쟁’ 등 7월 투쟁을 계획대로 밀고 나간다는 방침이다. 더욱 거세지는 구조조정과 노동탄압 앞에 다른 길은 없기 때문이다.[78] 22일의 10만 조합원 상경투쟁, 28일의 시·군·구별 전 조합원 궐기대회 등 민주노총의 7월 총력투쟁 일정은 계속됐지만, 전국적인 총반격 전선의 출발점이었던 총파업이 큰 타격을 받은 뒤에 전개되는 투쟁은 날카로운 역동성을 전혀 갖지 못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결국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 전국적인 총반격 전선을 형성하려 했던 도전은 다시 한 번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7월 총력투쟁의 실패 이후에도 울산지역에서는 효성·태광·민주버스 등의 파업이 길게 이어졌지만, 한 번 무너진 연대투쟁의 전선은 끝내 복구되지 않았다. 결국 효성과 태광은 수백 명의 해고자가 수백억 원의 손배가압류를 얻어맞고 민주노조의 뿌리가 뽑히는 비참한 패배를 맞이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몇 년 만에 결정적인 기회로 다가왔던 ‘2001년 울산총력투쟁’은, 만일 성공했다면 울산 노동자운동, 나아가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동적인 전진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실패한 결과 효성·태광 등 주요한 노조들을 붕괴시키며 울산 노동자운동을 매우 위축시키고 말았다. 그런데 7·5 총파업을 철회한 현대차노조 집행부가 그때까지만 해도 이른바 ‘현장파’의 전국적 대표주자로 간주되던 ‘현대차 민투위’에서 배출한 집행부였다는 점은 또 다른 충격을 던졌다. 국민파와 중앙파를 비롯한 타협·개량주의 세력과 달리 현장파는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견지하면서 노동자 민주주의와 노동자계급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강조했다. 그런데 현장파의 대표주자인 민투위 집행부의 7·5 총파업 철회는 현장파의 행동이 그 주장에 미치지 못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7·5 총파업 철회를 계기로 현장파의 실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7·5 총파업 철회는 우발적 실수가 아니라 필연적 결과였음이 드러났다. 현장파의 다수는 참된 전투적·변혁적 세력으로 정립하지 못하고 그저 좌파적 수사를 즐겨 사용할 뿐 본질은 국민파나 중앙파와 별로 다르지 않은 또 다른 개량주의·관료주의 세력임이 드러났고, 더욱 더 그렇게 전락해 나갔다. 현장파 다수의 추락은 한때 건강했던 현장활동가들이 IMF 외환위기 이후 훨씬 더 복잡하고 심각해진 계급투쟁의 양상을 따라잡으며 사상적·실천적 전망을 치열하게 발전시켜 가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결과였다. 3) 2002년 발전 민영화 반대투쟁 국가기간산업 민영화(사유화)는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서 중요한 한 축이었다. 국가기간산업 민영화는 국가기간산업에 시장 원리를 전면화함으로써, 해당 노동자들에게는 대규모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를 가져오고, 전체 노동자·민중들에게는 요금인상과 공공서비스의 축소를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국가기간산업을 인수하게 될 자본가들에게는 거대한 이윤을 보장해 주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김대중 정권은 2000년 포항제철(현 포스코)과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2002년 한국통신(현 KT)과 한국담배인삼공사(현 KT&G) 등 총 8개 기업을 정부 지분 매각을 통해 완전 민영화했다. 한국중공업과 한국통신 등의 민영화 진행 과정에서 노조의 반대 투쟁이 있긴 했지만, 민영화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2001년 김대중 정권은 철도청, 한국전력공사, 한국가스공사에 대한 민영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나섰다. 철도는 시설관리와 운영을 분리해 시설관리는 공기업으로 전환하고 운영은 민영화하는 계획이 수립됐다. 전력은 발전자회사 분할·매각, 송전 민영화, 배전 민영화 순으로 3단계 민영화 계획이 수립됐다. 가스는 가스도입 업무를 3개사로 분할한 뒤 2개사를 매각할 계획이었다. ◎ 철도노조 민주화와 발전산업노조 건설 김대중 정권이 민영화를 밀어붙이자, 철도·발전·가스 노동자들의 위기의식이 민주노조에 대한 열망으로 표출됐다. 2001년 5월 21일 철도노조에 54년 만에 민주집행부가 들어섰다. 7월 19일에는 한국전력에서 분사된 화력발전 5개사에 속한 노동자들이 56년 어용 한전노조를 떠나 발전산업노조를 건설하면서 민주집행부를 수립했다.[79] 한국가스공사노조는 한국노총 소속이었지만 민영화 저지를 위해 민주노총과 긴밀히 협력하기 시작했다. 1946년 10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중심으로 전개된 전국 총파업의 시작은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47년 단정수립 반대 파업까지 두 번의 전국 총파업을 이끈 전평이 와해되면서 당시 중심축이었던 철도노조는 미군정, 우익청년단, 대한노총에 의해 장악됐다. 이 때부터 철도노조는 대한노총(현 한국노총)의 어용성을 대표하는 노조로 자리를 굳혔다. … 4·19 혁명이 일어났던 1960년에 설립된 기관사노조는 철도노조보다 훨씬 높은 현실적인 임금인상안을 주장하고 강력한 준법운행을 결행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해산당하고 말았다. 1988년 다시 기관사들에 의해 투쟁의 깃발이 나부꼈다. 월 250~300시간에 달하는 살인적인 노동시간과 폭염·혹한에 그대로 노출되는 비참한 노동조건에 맞서 올림픽을 50여일 앞둔 7월 26일 전면 총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노조는 파업을 불법으로 매도하고 진압 전경들에게 거액의 조합비를 지출하는 등 반노동자적 작태를 서슴지 않았다. 기관사들의 총파업 투쟁은 불과 10여시간만에 공권력이 투입되고 1,653명이 연행되면서 붕괴됐지만, 현장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올라온 최초의 대중투쟁으로서 철도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조건설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88년 기관사 파업투쟁은 패배했지만, 당시 노조집행부의 반노동자적 작태로 인해 노동자들은 새로운 조직적 대안을 모색하게 됐다. … 1989년 노조총선거에서 투쟁에 대한 배신자를 심판하고 분위기를 일신한 기관사들은 전국기관차분회장협의회(전기협)를 발족시키면서 본격적인 노조민주화 투쟁의 막을 올렸다. 분회장 모임에서 대중조직(지부협의회)으로 전환하며 조직을 강화한 전기협은 90년 순직조합원 장례투쟁, 93년 노동조건개선투쟁 등에서 성과를 올려 대중적 지도력을 확보했다. 1994년 6월 23일 마침내 전기협은 전체 철도노동자의 절박한 요구인 근로기준법 준수와 8시간 노동제를 내걸고 파업에 돌입했다. 이번엔 서울·부산 지하철노조와 함께 하는 공동투쟁이었다. 파업 투쟁 4일째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대오가 무너지고 일주일만에 눈물을 머금은 채 현장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의 파업 투쟁은 한층 강화된 조직력과 단결력을 보여주었다. … 94년 파업 투쟁의 패배로 인해 활동가들이 대거 중징계를 당하면서 현장은 한동안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한편 96년 철도 민영화 방침이 나오고 7,307명의 인원감축계획에 따른 조치로 인해 노동강도는 하루가 다르게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00년 1월 14일 대법원으로부터 “3중 간선제는 무효”라는 판결을 얻어내면서 현장에는 새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민주세력은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공투본)를 결성하고 규약개정 없이 대의원 선거를 진행하려던 본조방침에 항의하여 66일간 본조사무실 점거농성을 진행했다. 당시 노조 집행부는 대의원 불법선거 감행과 공투본 간부 44명 제명 처분으로 버텼지만, 결국 광범위한 대중적 요구에 밀려 직선제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2001년 2월 8일, 3월부터 진행될 노조총선거에 대응하기 위해 민주세력이 총망라된 ‘생존권 사수와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철도노동자 투쟁본부’(민주철도투본)가 결성됐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21일 민주철도투본 김재길 후보가 압도적 득표로 본조위원장에 당선됨으로써, 민주노조의 깃발을 꽂았다.[80] 한국발전산업노조 초대 위원장에 민주파 현장조직인 ‘현장에서 미래를 열어가는 전력노조민주화 투쟁연대(전민투련)’ 소속 이호동 후보가 당선되었다. 한국발전산업노조는 전력산업 구조개편 법률에 의해 지난 4월 1일 한전에서 분리돼 민영화를 앞두고 5개의 자회사(서부, 남동, 남부, 중부, 동서발전주식회사)로 편입된 화력발전 부문이 포괄된 산별노조다. 수력과 원자력 부문은 일단 민영화 대상에서 제외된 가운데 한국수력원자력주식회사로 편입되었는데, 여기에는 한국수력원자력노조(위원장 김병기)가 결성되었다. 한국발전산업노조가 출범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초기에는 특별지부 형태로 전력노조에 남아 있는 방안도 거론되었으나 민영화 반대투쟁을 앞두고 어용 전력노조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워낙 강해서 일단 ‘전력노조 탈퇴’는 쉽게 결론이 났다. 그런데 5개 자회사별로 기업별 노조를 설립할 것인지, 5개 모두를 포괄하는 산별노조를 설립할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격심했던 것이다. 기업별 노조를 주장한 측에서 실제 노조설립 신고서를 몇 차례 접수시켰다 반려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산별노조를 건설하기로 의견을 통일하고 6월 28일 조합원 투표로 규약을 확정하게 되었다. … 7월 19일 실시된 위원장 선거에는 세 팀이 나섰으나 이호동 후보팀이 1차 투표에 총 5,660명 투표자 5,459명(투표율 96.4%) 가운데 3,336명(61.1%)의 압도적 지지를 모아내면서 싱겁게 끝났다. 이호동 신임 위원장은 지난 해 12월 3일 전력노조 파업 철회 이후 오경호 위원장 불신임 투쟁을 전개했던 한전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한전노민추) 출신이다. 올해 초 전력노조의 분사 합의안과 전적조건 부결투쟁을 벌인 전력노조민주화투쟁연대(전민투련) 결성을 주도했다. 이호동 위원장은 △민영화 반대 △고용안정(노동조합이 감원을 인정한다는 조항 삭제, 배치전환은 조합원들의 고충처리 요구가 있고 본인이 합의할 때만 가능) △실질임금 쟁취 △조합활동으로 인해 해고·징계·부당전출된 조합원 원상복귀 △민주노총 가입 추진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선거결과가 나오자 이호동 위원장은 “이번 선거과정과 결과는 조합원들의 발전소 매각저지 투쟁명령”이라면서, 전민투련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준 것은 “민영화 저지투쟁을 위한 강력한 집행부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투쟁의지를 밝혔다.[81] ◎ 발전노조 조합원들의 영웅적인 투쟁 철도·발전·가스 산업을 민영화하려는 김대중 정권의 작업이 착착 진행돼 나가자, 이를 저지하려는 노동자들의 투쟁도 점차 강도를 높여 나갔다. 마침내 김대중 정권의 취임 4주년 기념일인 2002년 2월 25일,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를 위한 철도노조·발전노조·가스노조의 공동파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시작된 발전노조의 파업이 한 달 후에 한국 사회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 초유의 사태로 발전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공동파업 돌입 직후 가스노조가 파업을 중단하고 현장에 복귀했다. 가스노조는 25일 12시, 파업 돌입 8시간 만에 민영화 저지에 대해서는 아무 내용도 없이 파업 종결을 전격 선언했다. 서울대에 집결한 2천여 명의 조합원들로부터 “합의무효, 파업지속”을 요구하는 고함이 빗발치자, 결국 가스노조 집행부는 총사퇴를 선언했다. 26일 민주노총이 ‘중소·영세·비정규직 희생 없는 주5일 근무제 도입’과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를 핵심 요구로 해서 10만여 명이 참여하는 총파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2·26 민주노총 총파업은, 몇 년 동안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에서 줄줄이 패배한 탓에 이제 긴장과 열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된 ‘맥 빠진 총파업’의 한 전형이었다. 철도노조 또한 27일 새벽 파업을 종결했는데, 합의서에는 “노사가 철도산업의 공공적 발전에 대해 공동 노력한다”는 추상적 문구만 담겼다. 당장의 민영화 법안 상정은 유보시켰지만, 민영화 추진방침은 되돌리지 못했다. 철도노조 위원장은 건국대에 모인 수천 여 조합원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다. “발전노조만 남겨놓고 파업을 끝낼 수 없다”는 조합원들의 눈물어린 외침 속에 철도노조 파업이 끝났다. 이제 홀로 남은 발전노조 파업이 며칠이나 더 지속될 것인지 회의하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신생 노조인 발전노조 조합원들은 전력노조 시절을 포함해서 단 한 번도 파업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태였다. 26일 밤 조합원 5천여 명이 집결해 있던 서울대에 공권력 투입이 유력해지자, 발전노조는 파업 조합원을 500개조로 나눈 산개파업을 시작했다. 산개파업은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이 공권력 투입을 피하여 이전에도 몇 차례 시도해 본 적이 있었으나, 1주일을 넘겨본 적이 없었다. 10여 명 내외로 대오를 분산하여 벌이는 산개파업은 파업에 함께 나선 노동자들의 힘을 직접 느끼지 못함에 따라 오래지 않아 노동자들이 급격한 심리적 동요에 빠져들면서 한꺼번에 둑이 터지듯 무너지는 것이 대체적인 경험이었다. TV방송 등 언론을 총동원한 정권의 심리전은 산개파업을 무력화하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발전노조 파업 또한 며칠 가지 않아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거의 모든 사람들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파업돌입 1주일이 지나갔지만 전체 조합원 5,606명 가운데 5,270명(94.0%)이 여전히 산개파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파업돌입 2주일이 지나가자 파업 노동자 수가 5,392명(96.2%)으로 오히려 늘어났다. 파업 돌입 14일차인 3월 10일 오후 2시에 전국 6개 지역에서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번개집회에는 순식간에 4천여 명이 집결했다가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해산함으로써, 산개파업이 대단히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산개투쟁 중인 발전노조 조합원들은 10일 오후 2시 전국 6곳에서 번개집회를 열었다. 이날 번개집회는 11일 오전 9시로 설정한 회사의 업무복귀 시한에 맞서 조합원들의 자신감을 끌어올리기 위해 기획되었는데, 대단히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경찰의 엄중한 감시망을 따돌리며 휴대폰 문자메시지 등을 이용한 연락체계로 △동국대 1,300명 △연세대 1,200명 △서대전공원 700명 △청주서원대 400명 △인천대 200명 △조계사 200명 등 4천여 명이 집결한 것이다. 일부 조합원들이 미처 집결지에 도착하지 못한 가운데 경찰 도착 전에 서둘러 집회를 끝낸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산개파업 참여자 전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한 셈이다. … 발전노조 가족대책위도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활동에 나서고 있다. 6일 서울 훈련원공원에서는 전국의 발전 노조원 가족 700여명이 모여 집회를 가졌다. 울산에서도 가족대책위가 연일 발전노조 파업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지지를 호소하며 선전활동을 펴고 있다. … 발전노조 파업이 강고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민영화를 철회할 수 없다며 교섭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8일에는 중앙노동위원회가 직권중재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경찰 및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수배중인 노조간부 검거 및 산개파업 중인 발전노조 조합원들을 찾고 있다. 회사 또한 가족들에 대한 개별접촉과 면담을 시도하며 업무복귀를 종용하고 있다. 하지만 발전노조의 파업동력이 워낙 강고하여 정부와 회사의 온갖 탄압과 회유가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다. …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전력사고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 정부가 끝내 민영화만을 고집한다면 대형 전력사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잘못을 인정하고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중단과 발전소 민영화·해외매각 결사반대를 외치는 발전노조의 주장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82] 마치 대지를 뚫고 치솟은 용암처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발전노조 파업투쟁이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으로 벌써 2주를 넘어 가열차게 전개되고 있다. 이제 발전노조의 투쟁은 전국 노동자들에게 가슴 깊은 감동으로 다가서 있다. 2월 25일 공동파업이 시작된 직후 가스와 철도 파업이 무기력하게 끝나던 무렵만 해도, 이번 투쟁 또한 그렇게 사그라들고 마는구나 하는 게 대다수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노동운동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강력한 조직력으로 산개파업-번개집회-산개파업을 이어가는 모습은 오랜 패배감과 무기력에 지친 한국 노동운동에 새로운 자신감과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발전노조의 강고한 조직력 앞에 정부의 강경탄압 기조도, 회사의 업무복귀 지침도, 경찰의 그물망 검문검색도 모두 속수무책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늘어난 파업 참여자들은 파업 2주가 지나가도록 끄떡도 하지 않으며 명동성당에 농성중인 지도부의 지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파업이라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노동조합에서 어찌 이토록 강력한 투쟁이 가능하리라 생각이나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발전소의 특성상 시내에서 떨어진 오지 근무를 감수해야 했고, 발전기가 고장이라도 나는 날이면 쉬는 날도 마다않고 현장으로 뛰어가는 생활에 묵묵하게 임해 왔다. 국가기간산업을 지켜내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자신의 일터를 사랑하며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발전 노동자들이 이토록 강고한 투사들로 변신한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정부가 추진해 온 발전소 매각 정책이 너무나 잘못되었다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음에도 지금껏 그들의 주장을 조금도 펼칠 수 없었던 과정에서 맺힌 ‘한’ 때문이다. 그들이 그토록 반대하였건만 정부는 민영화에 대한 종교적 신념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왔다. 한전노조 시절 어용 위원장의 직권조인과 뒤이은 분사, 노조와 단협조차 승계해 주지 않은 노동탄압을 겪으며 그들의 가슴속엔 피멍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그토록 평범한 노동자였던 발전 노동자들이 이토록 거대한 분노를 표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바로 김대중 정부가 지난 4년 동안 지속해 온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인 것이다.[83] 파업돌입 3주일이 지나가도 파업 대오가 5,295명(94.5%)을 유지하자, 초조해진 정부는 초강수를 꺼내 들었다. 3월 19일 대통령 김대중은 국무회의에서 “불법 파업을 조속한 시일 내에 해결하라”고 다그쳤다. 이에 20일 5개 발전회사 사장단이 “25일 오전 9시까지 복귀하지 않는 자는 전원 해고”라는 최후통첩을 선언했다. 23일에는 국무총리 이한동이 “민영화 철회문제는 노조가 요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고, 법에 의해 이미 발전소 매각단계에까지 와 있으므로 이제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라며 “직무에 복귀하지 않는 노조원들은 그 수가 얼마일지라도 모두 해고조치 한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라고 밝혔다. 발전노조 이호동 위원장은 24일 오후 3시 반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합리적인 사태 해결을 위한 노력에 대해 오로지 공권력을 동원한 폭력 진압으로 일관할 경우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중대한 전술적 변화를 통해 결사적인 투쟁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또한 조합원에게 △사측의 복귀명령 단호히 거부 △투쟁승리 그날까지 결사항전 △단호한 투쟁의지 천명 위해 전 조합원 3월 25일자 사직서 작성을 투쟁지침으로 명했다. … 기자회견 후 3시간이 채 안된 오후 6시부터 수도권에 산개해 있던 조합원들이 연세대로 모여들었다. 처음 서울대에서 파업을 선언한 이후 신출귀몰 번개집회와 산개투쟁을 벌여온 조합원들은 이날도 멋지게 경찰 추적을 따돌리고 삽시간에 2천 5백여 조합원이 집결했다. 학생들이 진입을 돕기 위해 6시부터 30여분 동안 연세대 앞 삼거리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뒤늦게 출동한 경찰이 연세대 모든 정문을 틀어막아 진입하지 못한 조합원이 1천여 명. 결국 3천 5백여 조합원이 전원해고 협박에 굴하지 않고 위원장 지침에 따라 번개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단결력을 과시한 것이다. … 7시경 경찰이 정문 진입을 시도하자 사수대는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 2시간 전투 끝에 전투경찰을 물리치기도 했다. … 자정 무렵 김대중 정부는 전투경찰 4천 5백 명을 투입, 연세대 침탈을 강행했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 상급단체 간부, 학생, 노동단체 회원 등 300여명이 연행되기도 했으나, 침탈 직전 지도부의 산개 지침에 따라 나머지 조합원들 대다수는 안전한 장소로 피신, 다시 산개투쟁에 돌입했다. … 이번 투쟁의 또 다른 선봉장 가족대책위는 25일 09시 복귀시한에 맞추어 전국 각지에서 발전소 앞 복귀저지투쟁을 벌였다. 파업 분쇄에 혈안이 된 경찰들은 가대위의 합법 집회를 가로막으며 온갖 폭력만행을 저질렀다. 삼천포에서 200여 가족 전원을 연행했으며 폭력연행 과정에서 다친 가족들이 119 구조대에 실려 가기도 했다. 서인천에서는 집회 참여를 위해 대절한 버스 출입문을 봉쇄했으며 동해화력 앞 항의시위를 벌이던 상급단체 간부와 학생들을 전원 연행했다. 그러나 영동, 하동, 여수, 평택, 울산, 태안, 보령, 당진 등 전국 각지에서 가대위는 탄압을 뚫고 힘찬 투쟁을 전개하며 일부 복귀하는 조합원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김대중 정부에 맞서 한 치도 물러섬 없이 결사항전을 벌이는 발전노조와 가족대책위는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전원이 해고되는 한이 있어도 민영화 철회 없이는 절대로 복귀할 수 없다!”[84] 3월 24일 오후 6시 50분 즈음 연세대 정문 앞, 화염병이 날아다녔다. 6시 전후부터 조합원들이 연세대로 모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경찰은 상황을 전혀 모르다가 그때서야 연세대 정문 앞으로 집결했다. 학생들은 발전노동자가 무사히 들어올 수 있도록 정문 앞에서 화염병을 든 것이다. … 경찰이 백양로까지 들어왔다. 도서관 앞에서 학생들과 대치했다. … 경찰들은 뒷걸음질쳐 교문 밖으로 나갔다. 다시 진입하려 하자 학생들이 교문 앞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경찰은 밖으로 빠져나가 정문을 봉쇄했다. 조합원들이 연세대로 들어오기 시작한 지 1시간만인 7시 조금 넘어 정문을 봉쇄했다. 병원쪽 출입구도 막았다. 교문 앞은 학생들을 비롯한 사수대가 지키고 있었다. 7시 30분부터 사전대회를 시작했다. 노천극장은 투쟁가와 구호로 가득찼다. 조합원들은 계속 들어오고 있고, 연세대 주변에서는 아직 들어오지 못한 조합원들이 틈을 보고 있었다. 경찰은 병력을 늘리고, 물대포까지 배치했다. 8시 30분경이 되자 조합원들 수는 어느새 2,8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을 확인하며 투쟁의 함성을 질렀다. … 서울대에 집결했을 때 조직적 결의로 현장에 복귀한다는 ‘발전노동자와 위원장의 약속’을 한 적이 있다. 명동성당 지도부는 25일 복귀시한에 대해서도 조합원의 의사를 수렴하려 했다. 누군가 ‘복귀를 할 것인가, 계속 투쟁할 것인가’를 묻는 조합원 찬반투표를 진행하기 위해 투표용지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경찰의 침탈이 예상되는 긴급한 상황에서 투표를 진행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조합원들의 열기는 집단적 의사를 물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높았다. 현장지도부는 조합원들에게 25일을 돌파하자는 입장을 밝히며 조합원들의 의사를 물었다. “정부가 발표한 복귀시한 3월 25일 9시를 무시하고 끝까지 단결하여 투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는 조합원은 일어나 서로에게 각오를 밝힙시다!” 2,8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한꺼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투쟁!” 와~~ 와~~ 파업파도가 물결쳤다. 발전노동자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밤하늘이 쩌렁쩌렁 울렸다.[85] 25일 오전 11시 발전회사 사장단이 발표한 미복귀 조합원 수는 여전히 3,912명(69.8%)이나 됐다. 노조가 자체 집계한 파업 노동자 수는 4천 명이 훨씬 넘었다. “전원 해고”라는 압박 때문에 일부 노동자들이 파업에서 이탈하긴 했지만, 여전히 대다수 노동자들이 파업을 굳건히 지켜내고 있었다. ◎ 무산된 4·2 총파업과 굴욕적 합의 이런 상황에서 3월 26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긴급하게 열렸다. 이 날 대의원대회는 발전소 매각을 비롯한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중단과 발전노조 탄압을 비롯한 노동운동탄압 중단을 위해 4월 2일 연대총파업에 돌입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민주노총은 3월 26일 오후 2시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임시대의원 대회를 갖고 △발전소매각 등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중단 △발전노조탄압 등 노동운동탄압 중단을 위한 총파업 돌입을 참석대의원 535명 만장일치 찬성으로 결의했다. 이로써 발전노조 파업은 노동과 자본의 일대격돌로 확대되고, 김대중 정권은 김영상 정권의 임기 말과 같은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날 민주노총 대의원들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4월 2일 13시 총파업 돌입을 요지로 상정한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계획 원안을 힘차게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후, 이어 총파업 투쟁을 보다 힘차게 조직하기 위한 추가 투쟁계획을 논의했다. 대의원들은 원안에 덧붙여 △총연맹과 산별연맹 임원 5만원, 단위노조대표자 3만원의 발전 투쟁기금 모금 △28·29일 잔업과 30일 특근거부 및 지역별 총력 집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원모금 적극 전개 등의 방침을 정했다. 이날 대의원대회에 앞서 발전노조 가족대책위 한 분이 아이를 등에 업고 연단에 나서 대의원들에게 총파업 돌입을 눈물로 호소하여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또한 발전노조 소속 김광철 대의원은 “이 싸움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소수 복귀한 조합원들도 다시 파업현장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연대총파업을 호소했다. 민주노총이 이날 만장일치로 총파업을 결의하게 된 것은, 발전노조의 투쟁이 단지 그들만의 투쟁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민중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투쟁의 핵심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86] 한 달 전에 발전노조 등이 파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는 형식적인 2차적 과제일 뿐이었지만, 불과 한 달 만에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가 민주노총의 절대적인 최우선 과제로 등장하여 만장일치로 총파업 결의를 하게 된 것이었다. 민주노총의 방향이 한 달 만에 완전히 바뀐 것은 파업이라고는 생전 처음 해보는 발전노조 조합원들이 보여준 영웅적인 투쟁 때문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민주노총 조합원들, 특히 현장 활동가들의 가슴 속에 뜨거운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현장 활동가들에게 그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거침없이 전진하던 무렵의 자기 경험을 되돌아보게 하는 가슴 뭉클한 호소였다. 또한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밀려 몇 년 동안 패배만을 거듭해 왔지만, 이제 내면화된 패배주의를 떨쳐 버리고 발전노조 조합원들과 같은 기세로 전국의 노동자들이 반격에 나선다면 얼마든지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선 투쟁도 승리할 수 있다는 새로운 기대와 자신감을 갖게 만드는 자극제이기도 했다. 발전노조의 영웅적인 파업은 여론의 흐름도 완전히 바꿔 놓고 있었다. 강도 높은 파업을 계기로 발전소 매각이 야기할 공공성 상실의 위험이 널리 알려지자, 발전소 매각에 반대하는 입장이 모든 여론조사에서 80%를 넘기고 있었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의 국회의원들조차 발전소 매각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김대중 정권과 가깝게 지내던 사회원로나 시민단체들도 발전노조 파업을 지지하고 나섰다. 오직 김대중 정권만이 발전소 매각을 고집하는 것 같은 양상이 됐다. 스스로 받은 감동에 덧붙여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3월 하순에 이르자 정치적 입장을 떠나 모든 현장 활동가들이 발전노조 파업에 대한 연대를 절대적인 지상과제로 동의하게 됐던 것이다.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의 만장일치 총파업 결의는 이렇게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거대한 연대 흐름을 표현하고 있었다. 지난달 30일 여수화력 사택에서 32명의 여천산업단지 노동자들이 경찰에 의해 강제연행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여천산업단지 18개 노동조합이 4월 2일 민주노총 총파업에 결합하기로 선언했다. 30일 밤 전남동부지역 민중대회를 마친 여천산업단지 노동자들은 발전노조 가족들의 다급한 지원 요청을 받고 여수화력 사택으로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부녀자들과 아이들만이 남아 있는 사택에는 30여명의 건장한 용역깡패와 경찰들이 돌아다니며 파업 중인 남편의 행방을 대라고 가족들을 협박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노동자들이 몰려들자 용역깡패들은 부리나케 꽁무니를 뺐는데, 곧바로 전경 수개 중대가 사택으로 들이닥쳤다. 경찰병력 투입과 동시에 무차별 연행 사태가 벌어져 … 32명의 노동자들이 강제연행 되었다. 즉각 여천산업단지 노동자 300여 명이 여수경찰서로 달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항의투쟁을 벌였다. 일요일인 31일 오후에도 2천여 명이 모여 여수경찰서 앞에서 연행된 노동자 석방과 폭력경찰 규탄 집회를 가졌다.[87] 민주노총의 이번 총파업은 어느 때보다 높은 참여열기를 보여주고 있어 지난 96~97 총파업에 못지않은 위력을 보여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먼저 금속연맹은 현대·기아·쌍용 등 자동차 완성 3사 노조와 금속노조 등 100여개 사업장, 13만여 명이 파업에 돌입하여 이번 총파업의 주력 역할을 하게 된다. 공공연맹은 30개 노조, 2만여 명이 파업에 동참한다. 민주택시는 150개 사업장 1만 5천여 명, 보건의료노조는 50개 지부 1만여 명, 화학섬유연맹은 여수 등 20여개 노조 5천여 명이 파업에 돌입한다. 아직 법적으로 파업권을 갖고 있지 못한 전교조도 2일 13시에 전 조합원(최소 1만 명 이상)이 조퇴투쟁으로 파업 집회에 동참할 계획이다. 발전소 매각반대 공동수업도 병행한다. 나머지 연맹들도 사무금융노조가 조합원총회 형식으로 16시 파업집회에 결합하는 등 총파업 일정에 최대한 결합하려는 방침이다. 또한 철도노조와 가스노조가 31일 연대총파업 합류를 선언했다. … 민주노총은 정부가 여전히 발전소 매각 동의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교섭타결의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2일부터 4일까지 1단계 투쟁을 거친 후, 9일부터 총파업 2단계 투쟁을 벌일 방침이다. 이번 총파업 투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를 비롯해 향후 민주노조운동의 전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88]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선 전국 노동자들의 총력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던 또 한 번의 기회는 이렇게 발전노조 조합원들이 너무나도 영웅적인 한 달 간의 파업을 전개해 내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계기를 통해 만들어졌다. 지난 5년여 동안 민주노총이 수도 없이 많은 총파업을 시도해야 했던 것은 그만큼 파상적인 구조조정 속에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박탈과 고통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투쟁은 계속해서 수세적인 양상을 벗어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막아내지 못했다. 어느덧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는 우리의 노동 현실 전반을 강력하게 뒤흔들기에 이르렀다. 만성적인 고용불안으로 현장은 숨죽여 신음하고 있고, 비정규직이 절반을 훨씬 넘어 보편적인 고용형태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기까지 한편으로는 정권과 자본의 집요하고 무자비한 구조조정 공세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투쟁도 지금의 발전노조 파업투쟁처럼 강력하고 끈질긴 투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대공세는 이미 많은 부분에서 대세를 장악했다. 대표적으로 금융산업, 자동차산업, 화학산업 등에서는 통틀어 수십만의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의 이름 아래 길거리로 내몰려야 했다. 구조조정 이후 생산을 회복한 현장에는 비정규직이 넘실대고 있다.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 투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는 사실상 마지막 싸움이다. 만일 이 투쟁에서마저 패배한다면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된 새로운 조건 속에서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일어서기 위해 최소 몇 년 동안은 심각한 침체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노동자의 삶에는 암흑의 시기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총파업 투쟁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신자유주의 분쇄’ 대반격의 희망을 새롭게 되찾는 데 있는 것이다. 모두가 떨쳐 일어서자![89] 그러나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선 전국적인 총력 전선을 구축하는 데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었던 4·2 총파업마저 민주노총 지도부의 배신으로 너무나 참담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14만여 명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뜨거운 열기 속에 총파업에 돌입하고 있던 4월 2일,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부와 굴욕적 합의를 하며 총파업을 전격 철회했다. 총파업 돌입을 눈앞에 둔 1일 오후 7시부터 민주노총과 산하 공공연맹 지도부가 정부와 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 측이 “민영화를 인정하라”며 노조의 백기투항을 요구해 교섭이 결렬됐다. 그런데 2일 오전 11시부터 “노·정 간 의견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오더니, 급기야 오후 1시 20분경 민주노총이 단위노조에 “교섭이 진전되어 극적 타결 가능성 있으니 각 조직은 파업 돌입 시간을 늦추고 대기할 것”이라는 지침을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각 언론사는 “발전노조 극적 타결 임박” “노조 민영화 수용으로 파업 일단락”이란 속보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1시부터 이미 총파업에 돌입했던 단위노조들은 갑자기 대기명령이 떨어지자 큰 혼란에 빠졌다. 교섭 내용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단위노조 지도부들은 “정부가 총파업 열기에 놀라 마침내 발전노조가 승리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조합원들에게 사태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발전소 민영화 관련 교섭은 논의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한 민주노총과 정부의 합의 내용이 알려지자 전국 곳곳의 현장에서 엄청난 분노와 항의가 솟구쳐 올라왔다. 발전소 매각을 비롯한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야말로 4·2 총파업의 핵심 요구였는데, 발전소 매각 문제를 제외한 채 총파업을 철회한 민주노총 지도부의 결정은 말도 안 되는 굴욕적 투항이었고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노사는 이번 파업으로 인해 국민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드리며, 앞으로 이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법과 원칙을 준수하고, 노사화합을 바탕으로 발전산업의 미래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약속하며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1. 노조는 2002년 3월 8일자 중앙노동위원회 중재 재정을 존중하여, 발전소 민영화 관련 교섭은 논의대상에서 제외한다. 2. 회사는 조합원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과 징계가 적정한 수준에서 해결되도록 노력하며 필요한 경우 이를 관계당국에 건의한다. 3. 노조는 파업을 중단하고 즉각 회사에 복귀한다. 처음에 민주노총 지도부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총파업 철회 직후인 2일 오후 서울에서 열린 민주노총 집회에서 지도부는 “총파업 승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울분에 찬 항의가 빗발치고 언론에서 민주노총이 민영화를 수용했다는 보도가 이어지자 “합의문 해석을 왜곡하지 말라”며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3일 오전에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3일 오전 민주노총 지도부는 결국 4·2 합의를 폐기하고, 민주노총과 산하 공공연맹 지도부가 총사퇴하기로 결정했다. 현장으로부터 거세게 올라오는 반발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90] 지도부가 사퇴했지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허탈함과 분노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민주노총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그로부터 며칠 동안 수도 없는 항의 글이 끝없이 올라왔다. 금속노조 대구지부 동원지회 노동자들은 “조합원의 분노에 귀 기울이지 않고 관료주의와 노사협조주의에 찌든 지도부를 규탄한다”면서 민주노총 임원실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전북본부, 충남서부협의회 등 민주노총의 일부 지역조직들도 “민주노조운동의 대의와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한 사건”으로 규정하며 규탄 성명을 냈다. ‘파업으로 인해 국민에게 끼친 피해에 대한 사과라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파업이 일어나면 당연히 생산은 멈추고 손해는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가의 손해이며 파업권 행사로 인한 손해는 당연히 감수하도록 노조법 제3조는 명시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파업권을 노동자의 권리로 인정하는 국민들이라면 당연히 파업으로 인한 불편을 인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발전노조 파업으로 국민에게 끼친 피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발전노조 파업은 발전소 매각을 막아 국민에게 피해가 전가되는 것을 막고자 파업을 전개하였습니다. … 우리가 언제 우리 조합원들만 잘 먹고 잘 살자고 해서 파업을 하였습니까? 아니지요. 발전소 매각으로 인해 국민에게 돌아갈 뻔한 재앙을 막자고 죽자 살자 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송두리째 부정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법과 원칙을 준수한다니 이것은 또 무슨 이야기입니까!’ 발전이나 가스, 철도 등 이른바 필수공익사업장의 파업권을 현저히 제한하고 있는 악법을 준수하겠다는 것입니까? 악법은 결단코 스스로 깨지지 않습니다. 악법은 악법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동시에 그 악법을 깨기 위한 지난한 행동을 통해서만 악법이 깨진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동지들이 ‘제3자 개입금지’ 규정과 ‘노조의 정치활동금지’, ‘냉각기간 준수’ 등 파렴치한 악법규정에 걸려서 감옥에 가고 항거를 하였기 때문에 악법 규정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 악법은 준수하지 않아야 하지요. 원칙을 준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공기업 사유화 문제는 경영권 문제이므로 노동자들은 이에 간섭하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면 그냥 해본 소리입니까? 원래 합의안을 쓸 때는 전문은 중요하지 않으므로 그냥 무심결에 쓴 것입니까? 차라리 그렇다면 쓰지를 마십시오. 왜 괜히 열심히 파업하고 연대 파업을 했던 조합원들을 이상한 불법 집단으로 만들면서 쓸 필요는 없지요. ‘발전소 민영화 관련 교섭은 논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발전소 사유화 문제는 어느 정도 국민적 공감을 얻었으니 이를 기반으로 파업을 푼 뒤에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 즉 발전소 사유화 반대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발전소 매각의 부당성을 알리는 데 투쟁목표를 집중하였고 상당히 성공을 하였으므로 교섭 논의 대상에서 제외를 한다고 합의를 하더라도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강변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지만 전 전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 우리가 총파업을 전개하고 (2·26 파업) 조직하고 (4·2 파업) 발전노조 조합원들이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산개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은 발전소 사유화·매각을 ‘저지’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즉 그것을 현실적인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지 단순히 매각의 부당성을 ‘선전’하려고 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이런 투쟁의 과정에서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던 것이고 이를 기반으로 우리는 발전소 사유화를 저지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참으로 좋은 기회였다고 봅니다. 설사 우리가 총파업에서 그리고 발전노조 파업이 정권의 탄압으로 깨져 나갔다 하더라도 그것은 발전소 사유화 저지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지 결단코 조직의 약화나 국민적 공감대 약화로 나아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합의를 함으로써 공기업 사유화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는 약화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싸워도 얻을 것이 없다는 패배의식만 심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짚을 것이 있습니다. 2002년 4월 2일에 작성된 민주노총 교선실 명의의 ‘발전 파업이 남긴 것’이라는 제하의 인터넷 문서에 의하면 ‘타결 내용은 어차피 민영화 봉합-징계최소화로 일찍부터 정해져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민주노총과 발전노조 지도부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사기를 친 것입니다. ‘발전소 매각 저지’를 위해 총파업을 하여야 한다고, 발전소가 매각되면 우리 국민 다 죽고 공적 사업들 모두 재벌이나 외국에 넘겨져 나라 경제 망치니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하면서 파업을 독려하였습니다. 그런데 ‘민영화 봉합’(저지가 절대로 아닌!)이 목표였다니 이런 세상에! 조합원들이 지도부가 내심 가지고 있는 목표를 모르고 그런 멍청한 짓을 하였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조합원들이 아무 생각 없이 동원되는 군대 병력이나 된다는 것입니까? 아예 그러면 처음부터 말씀을 하셨어야 합니다. 발전소 매각 저지가 아니고 민영화 봉합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조합원들은 우리는 발전소 매각 저지를 하겠으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지도부는 나가라고 하였을 것이든지 아니면 그 정도 목표를 가지고 무슨 총파업을 할 것이 있냐고 하면서 다른 방도를 알려드렸을 것입니다. ‘민․형사상 책임과 징계가 적정한 수준에서 해결되도록 노력하며 필요한 경우 이를 관계당국에 건의한다.’ 참 이런 합의를 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민주노총 지도부가 조합원들의 징계를 합의하여 주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조합원들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악법이 우리 조합원들을 불법으로 내몰았을 뿐입니다. 따라서 무슨 책임이나 징계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본가나 정권이 책임이나 징계를 하려고 하면 싸워야 하는 것이지 … 어느 정도 선에서 책임을 지겠다고 자인을 하는 것은 동지들의 목을 지도부가 스스로 자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정한 수준’이 어떤 수준이 되어야 적정한지 알 수가 없고 관계당국에 ‘건의’가 무슨 효력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합의는 아예 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이런 합의를 해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4,000명 자를 것을 500명 아니면 1,000명으로 하고 손해배상액이 400억 되는 것을 100억 아니면 10억으로 막아보겠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징계나 손해배상, 형사 기소된 사람들이 ‘적정한 수준’에서 된 것이다고 판단하면 합의정신을 살려 지도부는 수수방관하겠다는 것입니까? 이것이 조합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최선책이었다고 강변하신다면 그만 지도부 자리에서 내려 오셔야 할 것입니다. ‘노조는 파업을 중단하고 즉각 회사에 복귀한다’ 복귀하면 그냥 조용히 우리끼리 하면 되지 이런 것을 문서화해서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무엇을 얻자고 이런 말도 안되는 문구를 써서 자본과 정권의 기를 살려주고 조합원들과 민중들에게 우리는 패배자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인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결론을 이야기하여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운동에너지’를 과소평가하고 이를 현실적 힘으로 전환시킬 의지와 능력도 없이 자본과 정권에 ‘항복’을 하였던 것입니다. 조합원들의 동력이 어땠으니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적 판단이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였으면 합니다. 제가 본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이번 파업에 임하는 자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열심이었으며 발전소 사유화는 반드시 저지하겠다는 의지가 강고하였습니다. 나아가 시민사회의 지지도 매우 높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적절한 지도만 있었다면 더욱 강력한 힘으로 한판 맞짱을 뜰 수가 있었다고 봅니다. 설사 이 싸움에서 노동자들이 처절하게 깨져 나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조직의 강화로 민중의 희망의 불씨로 강력히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기업 내의 자신들 문제만을 가지고 싸우지 않고 전체 노동자의 입장, 전 민중적 입장에서 연대파업을 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 중대한 역사적 진보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합의안을 도출하고 총파업을 스스로 무산시킨 지도부는 이에 대하여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 새롭고 강력한 투쟁을 다시 준비하여야 합니다!!!!![91] 민주노총 지도부는 사퇴했지만, 무너진 총파업을 다시 일으켜 세울 방법은 없었다. 굴욕적 합의와 총파업 무산으로 결정적 혼란에 빠진 발전노조는 파업대오가 붕괴할 조짐을 보이자 조직적 퇴각을 위해 현장 복귀를 선언해야 했다.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전국적인 총력 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마저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4) 2003년 주5일제 도입 한국의 법정 노동시간은 1953년 근로기준법 제정 이후 하루 8시간, 주 48시간을 유지하다가 1989년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주 44시간으로 단축됐다.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서 노동계가 주 40시간 단축을 주장했으나 경영계가 반대했다. 1998년 2월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합의할 때 합의내용 가운데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근로시간위원회’ 구성이 있었다. 2000년 5월 노사정위원회가 민주노총의 불참 속에 ‘근로시간 단축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92] 5월 31일, 민주노총은 주5일 근무제 도입, 자동차산업 매각 재검토,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내걸고 총파업을 단행했다. 7만 명이 참여했다. 민주노총이 주5일(주 40시간) 근무제를 내걸고 단행한 첫 번째 총파업이었다. 민주노총이 불참한 상태에서도 노사정 합의는 실패했다. 임금보전, 휴가·휴일제도 개편, 근로시간 단축일정 등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대중 정권이 2002년 10월 독자적으로 정부 안을 마련했다. 10월 15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김대중 정권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주5일제 도입을 빌미로 기존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개악안이었다. 월차휴가를 없애고 연차휴가에 통합함으로써 기존에 기본 12+10일에 근속 1년당 1일이 추가되던 것을 기본 15일에 근속 2년당 1일이 추가되는 것(최대 25일)으로 했다.[93] 생리휴가는 무급으로 전환하고, 초과노동 한도를 주당 12시간에서 16시간으로 확대하되 최초 4시간은 25%의 할증률만 적용하게 했다. 게다가 단체협약 및 취업규칙을 개정 법률에 맞추어 강제 개정하게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시행시기를 기업 규모별로 차등화한 것이었다. 공공부문, 금융·보험업, 1000인 이상 사업장은 2003년 7월 실시하고, 나머지 사업장은 기업 규모에 따라 2010년까지 단계적으로 확대 실시한다고 했다. 11월 5일, 정부가 제출한 근로기준법 개악안의 국회 처리를 막기 위해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단행했다. 12만 명이 참여했다. 국회는 근로기준법 개악안의 처리를 연기했다. 여기에는 전경련과 경총 등 자본가단체들이 주5일제 자체를 시기상조로 여기며 어떤 형태의 주5일제도 달가워하지 않았던 점도 작용했다. 2003년 노무현 정권이 출범했다. 7월 16일, 자동차 부품사를 비롯한 중소사업장으로 구성된 금속노조가 100개 업체를 상대로 한 중앙교섭에서 ‘기존 임금을 삭감하지 않는 주5일 40시간 근무제’를 10월부터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8월 8일, 현대차노조가 임단협에서 ‘기득권 저하 없는 주5일제’를 9월부터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개별 사업장에서 ‘노동조건 저하 없는 주5일제’가 합의되기 시작하자, 전경련과 경총은 마음이 급해졌다. 시기상조라는 기존 입장을 뒤집어서 김대중 정권이 제출했던 근로기준법 개악안을 빨리 처리해 달라고 노무현 정권과 여야 보수정당을 압박하고 나섰다. 한나라당이 이에 적극 동조하면서 법안 처리가 급물살을 탔다. 8월 2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김대중 정권이 제출했던 근로기준법 개악안을 시행시기만 1년씩 늦춰 통과시켰다. 한나라당이 재벌 ‘핫바지’를 자처하며 사실상 재계안인 주5일 정부안 강행처리에 앞장서고 있는 지금 집권당인 정부와 민주당은 뭘 하고 있나. 한마디로 정부와 민주당은 자신들이 불과 몇 달 전에 내세운 대통령 선거 공약도 팽개친 채 재벌 ‘거수기’로 전락해버렸다. 노무현 후보는 대선 당시 주5일제와 관련해 국회에 계류 중인 정부입법안을 수정하겠다, 임기 안에 시행 완료하겠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월평균 1.5일 휴일을 보장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됐다. 그러나 민주당과 정부는 정부입법안을 수정하기는커녕 시행시기를 정부안보다 더 늦췄으며, 비정규직 노동자 월평균 1.5일 휴일 보장 약속도 다 팽개쳤다. 재계가 찬성한 정부안도 모자라 시행시기를 더 늦춰 재벌 기분을 한껏 맞춰주는 ‘거사’에 한 패가 돼버린 것이다. … 국회가 개정하려는 주5일제 관련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바로 노조도 없어 법의 이름으로만 주5일 근무를 할 수 있는 영세업체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는 이미 주5일 시대로 접어들었고 노조가 있어 단체협약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이 법의 혜택을 받아야 할 전체 노동자의 56%에 해당하는 760만 20인 미만 영세업체 노동자들의 시행 시기는 2011년으로 미뤄버렸으며, 월차와 생리휴가밖에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휴가를 생리휴가 무급화로 사실상 줄이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임금을 삭감하는 등 피해만 고스란히 안기고 있다.[94] 23일, 민주노총이 전국 15개 도시에서 2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국회가 추진 중인 주5일제 관련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의 희생 없는 방향으로 대폭 수정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그러나 근로기준법 개악안은 25일 국회 법사위를 통과하고 29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민주노총은 28~29일 한국노총과 함께 국회 앞에서 집회와 노숙농성을 전개했다. 두 노총 합쳐 최대 1만 명이 참석했다. 2002년 11월에 개악안의 국회 처리를 막기 위해 12만 명이 참여한 총파업을 단행했던 것과 비교했을 때, 매우 소극적인 대응이었다. 주5일제 도입과 관련한 근로기준법 개정 과정에서 재계의 요구가 큰 폭으로 반영돼 중소영세업체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소외시키고 노동조건을 후퇴시키는 중대한 문제점을 남겼기 때문에 이 문제는 반드시 바로잡아 나가야 합니다. 특히 근로기준법이 노동자 보호를 위한 최소 노동기준이지만 노조도 없는 영세업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사실상 규정하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 주5일 관련 근로기준법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민주노총은 법 자체의 재개정을 추진함과 동시에 사업장별 단협을 통해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 근무제 도입을 실현하기 위해 힘쓰겠습니다. 이미 단협으로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한 현대·기아차, 금속노조 100개 사업장에 대해 재협상을 추진하라는 경총의 주장은 상식 이하이기에 검토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민주노총은 아직 주5일 근무제 관련해 단협을 체결하지 않은 사업장들도 금속노조와 현대·기아차를 본보기 삼아 반드시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하도록 힘써나갈 것입니다.[95] 근로기준법 개악안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 민주노총은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제’ 도입을 위해 “법 자체의 재개정”과 “사업장별 단협”이라는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후 민주노총의 대응에서 근로기준법 재개정을 위한 투쟁은 사실상 사라졌다. 민주노총에 속한 많은 단위노조들이 단체협약 투쟁을 통해 근로기준법보다 나은 조건에서 주5일제를 시행하게 된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주5일제 도입이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영세 비정규직 사이에 차별의 골을 더욱 깊게 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근로기준법 재개정 투쟁을 방기한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주5일제 시행이 법정 휴가·수당 축소와 병행되면서 중소영세 비정규직은 임금을 삭감당한 반면, 대기업 정규직은 단체협약을 통해 임금을 보전할 수 있었다. 주5일제 실시 시기에 기업 규모별로 차이를 둠으로써 주5일제 시행 자체가 차별의 온상지 역할을 했다.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 근로기준법 개악을 주도한 노무현 정권과 여야 보수정당 그리고 자본가들에게 있었다. 하지만 2003년의 근로기준법 개악 과정에 매우 형식적인 저항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이후 근로기준법 재개정 투쟁을 방기했던 민주노총도 결코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주5일제 도입을 둘러싼 민주노총의 대응 과정은 민주노총이 어떻게 해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서 살아남은 대기업 정규직만의 노동조합처럼 사회적으로 인식되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기능하게 됐는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5) 2003년 열사투쟁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에 자본은 가공할 탄압을 퍼부었다. 손배가압류는 그 핵심 수단이었다.[96] 삶의 근거를 빼앗긴 노동자들은 죽음으로 항거했다. 비정규직으로서의 처절한 삶을 견딜 수 없던 노동자들도 죽음으로 항거했다. 특히 2003년에는 이들 열사들의 죽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월 9일,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가 회사 안 민주광장에서 분신 자결했다. 2000년에 한국중공업을 헐값에 인수받은 두산 자본은 두산중공업으로 이름을 바꾼 뒤 1,124명을 명예퇴직으로 내쫓았다. 2002년 노조가 47일간 파업을 벌이자, 노조간부 89명을 징계해고하고 78억 원의 손배가압류를 제기했다. 소사장제를 대거 도입하고 단체협약도 해지했다. 배달호는 2002년 파업으로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모든 재산과 임금을 가압류당하고 있었다. 현장에서는 엄청난 감시 통제에 시달렸고, 노조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각서를 요구받았다. 몇 달 동안 집에 생활비 한 푼 가져가지 못한 절망적인 상황에 맞서 배달호는 죽음으로 항거했다. 출근을 해도 재미가 없다. 해고자 모습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해지고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두산이 해도 너무 한다. 해고자 19명, 징계자 90명 정도. 재산가압류, 급여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악랄한 정책에 우리가 여기서 밀려난다면 전 사원의 고용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두산이 사택매각, 식당 하도급화, 노동조합과 합의사항인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시행한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얼마 전 징계자들이 출근정지가 끝나고 현장에 복귀하였지만 무슨 재미로 생산에 열심히 하겠는가. 이제 이틀 후면 급여 받는 날이다. 약 6개월 이상 급여받은 적이 없지만 이틀 후 역시 나에게 들어오는 돈 없을 것이다. 두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인간들이 아닌가. 나는 매일같이 고민을 해본다. 두산의 노동조합 말살정책 분명히 드러나 있다. 얼마 전 구속자 선고재판 어처구니없이 실형 2년이라니, 두산은 사법부까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 두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인간들이 아닌가. 더러운 세상, 악랄한 두산. 동지들이여 끝까지 투쟁해서 승리해 주기 바란다. 나는 항상 우리 민주광장에서 지켜볼 것이다.[97] 배달호 열사 분신 이후 두산 자본을 상대로 열사투쟁이 전개됐다. 민주노총 주도로 두산제품 불매운동도 벌어졌다. 62일 만에 손배가압류를 철회시키면서 투쟁이 마무리됐다. 10월 17일,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지회장 김주익이 고공크레인 농성 129일 만에 85호 크레인에서 목을 매 자결했다. 동지들,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98] 한진중공업은 2002년 650명을 정리해고하면서 그에 맞서 투쟁한 노조에 손배가압류를 걸었다. 2002년도 임단협이 2003년으로 넘어가서도 전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김주익은 6월 11일 85호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7월 22일부터 전면파업이 시작돼 조합원 600여 명이 함께 투쟁했으나 회사가 손배가압류를 협박하자 2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노동조합을 지켜낼 일념으로 김주익은 최후의 선택을 했다. 30일에는 누구보다 김주익의 죽음에 가슴아파하고 자책감에 괴로워하던 곽재규가 김주익을 따라 투신 자결했다. 작년에 한진중공업에서 밀려난 아저씨를 우연히 길에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30년 일해 온 일터에서 명퇴란 이름으로 강제로 밀려난 아저씨는 술이 한 잔 들어가자 박창수 위원장 이야기를 하며,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는 아저씨가 자꾸 미안하다며 울었습니다. 50이 넘은 사내가 10년도 더 지난 일로 술잔에 눈물 콧물을 빠뜨리는 걸 보면서 우리 모두에게 박창수란 이름은 세월의 무게로도 덮을 수 없는 아픔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박창수 하나만으로도 우린 아프고 무겁습니다. 두번쨉니다. 대한조선공사를 한진중공업이 인수한 이후 여섯 명의 위원장 중 두 명은 구속 이후 해고되고, 한 명은 고성으로, 율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쫓겨나고, 두 명은 죽었습니다. 지난 번 위원장 선거가 끝나고 어떤 아저씨가 그러셨습니다. “내는 김주익이 안 찍었다. 똑똑하고 아까운 사람들, 위원장 뽑아놓으면 다 짤리고 감방가고 죽어삐는데,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김주익이를 우째 또 사지로 몰아넣겠노?”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뭘 그렇게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까? 조양호 회장님, 조남호 부회장님, 얼마나 더 하실 겁니까? 이 소름끼치는 살인게임이 몇 판이 더 남았습니까? 노동자의 목에 빨대를 꽂고 더운 피를 마시는 이 흡혈게임이 얼마나 더 남았습니까? LNG선상 파업으로 김주익 지회장이 구속됐을 때 인권 변호사의 이름을 팔아 그를 변호했던 노무현 대통령 각하! 노동자의 가련한 처지를 팔아 따낸 권력의 맛이 꿀맛입디까? 조중동 찌라시들의 꼬붕 노릇이 그렇게 안락하더이까? 대기업 노조가 나라를 망친다 했습니까? 21년차 노동자 기본급 105만원, 손에 쥐는 건 80만원, 그마저도 가압류로 12만원, 129일을 크레인에 매달려 절규를 해도 청와대 노동부 국회의원 누구하나 코빼기도 내미는 놈이 없었습니다. 동지 여러분 죄송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민주노조 하지 말걸 그랬습니다.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 그냥 물 말아 먹고, 불똥 맞아 타들어간 작업복 테이프 덕지덕지 넝마처럼 기워 입고, 한 겨울에도 찬물로 고양이 세수해가며, 쥐새끼가 버글거리던 생활관에서 그냥 쥐새끼들처럼 뒹굴며 살걸 그랬습니다. 한여름 감전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오는 날 족장에서 미끄러져 라면발같은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바다에 빠져 퉁퉁 불어 죽어도, 인명은 재천이라던데 그냥 못 본 척 못 들은 척 살걸 그랬습니다.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도, 내일에 대한 희망도, 새끼들에 대한 미래 따위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며, 조선소 짬밥 20년에 100만원을 받아도, ‘회장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감지덕지 살걸 그랬습니다. 노예가 품었던 인간의 꿈. 그 꿈을 포기해서 박창수 동지가, 김주익 동지가, 그 천금같은, 그 억만금 같은 사람들이 되돌아 올 수 있다면, 그 억센 어깨를, 그 순박하던 웃음을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용찬이, 예란이에게, 준엽이, 혜민이, 준하에게 아빠를 다시 되돌려 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습니다. 자본이 주인인 나라에서, 자본의 천국인 나라에서, 어쩌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감히 품었단 말입니까? 애비 잘 만난 조양호, 조남호, 조수호는 태어날 때부터 회장님, 부회장님으로 세자책봉 받는 나라. 이병철 회장님의 아들이 이건희 회장님으로 부자 1위가 되고, 또 그 아들 이재용 상무님이 부자 2위가 되는 나라. 정주영 회장님의 아들이 정몽구 회장님이 되고 또 그 아들 정의선 부회장님이 재계순위 4위가 되는 나라. 태어날 때부터 그 순서는 이미 다 점지되고, 골프나 치고 해외로 수백억씩 빼돌리고, 사교육비로 한 달 수천만 원을 써도 재산은 오히려 늘어나는 그들이 보기에는 한 달 100만원을 벌겠다고 숨도 쉴 수 없고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탱크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순이익 수백억이 나고 주식만 가지고 있으면 수십억이 배당금으로 저절로 굴러들어오는데, 2년치 임금 7만5천 원 올리겠다고 크레인까지 기어 올라간 사내가 얼마나 불가사의 했겠습니까? 비자금으로 탈세로 감방을 살고도, 징계는커녕 여전히 회장님인 그들이 보기에 동료들 정리해고 막겠다고 직장에게 맞서다 해고된 노동자가 징계철회를 주장하는 게 얼마나 가소로웠겠습니까? 100만원 주던 노동자 짤라내면 70만원만 줘도 하청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게 얼마나 신통했겠습니까? 철의 노동자를 외치며 수백 명이 달라 들어도 고작해야 석 달만 버티면 한결 순해져서 다시 그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게 또 얼마나 같잖았겠습니까? 조선강국을 위해 한 해 수십 명의 노동자가 골반압착으로, 두부협착으로, 추락사고, 감전사고로 죽어가는 나라. 물류강국을 위해 또 수십 명의 화물 노동자가 길바닥에 사자밥을 깔아야 하는 나라. 섬유도시 대구, 전자도시 구미, 자동차 도시 울산, 화학의 도시 여수 온산. 그 허황한 이름을 위해 노동자의 목숨들이 바쳐지고 그들의 뼈가 쌓여갈수록 자본의 아성이 점점 높아지는 나라. 50이 넘은 농민은 남의 나라에 가서 제 심장에 칼을 꽂고 마지막 유언마저 영어로 남겨야 하는 세계화된 나라. 전 자본주의가 정말 싫습니다. 이제 정말 소름이 끼칩니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하던 김주익의 죽음의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국경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이주노동자를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음으로 깨지는 겁니다. 맨날 우리만 죽고 천날 우리만 패배하는 겁니다. 아무리 통곡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버이날 요구르트 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아빠를 기다린 용찬이. 아빠 얼굴을 그려보며 일자리 구해줄 테니 사랑하는 아빠 빨리 오라던 혜민이. 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99] 10월 23일, 금속노조 세원테크지회 지회장 이해남이 분신했다. 2001년 10월 결성된 세원테크지회는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154일간 파업을 해야 했다. 2002년 8월 공장진입 투쟁을 하던 중 조합원 이현중이 구사대 폭력에 의해 두개골이 함몰되고 안면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는데, 결국 2003년 8월 26일 사망했다. 이후 두 달 동안 세원테크지회는 간부 세 명이 구속되고 수십억 원의 손배가압류를 당하면서 이현중의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했다. 한진중공업 김주익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세원테크지회가 겪어 온 노동탄압에 분노하며, 이해남은 분신을 결행했다. 10월 26일,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광주본부장 이용석이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분신했다. 계약직으로 일해 온 이용석은 주변 동료들이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하며 고통받는 모습을 무수히 지켜봐야 했다.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삶을 바꾸기 위해 비정규직노조를 건설하고 6개월 동안 열정을 쏟아 부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자본의 논리와 차별을 당연시하는 정부의 냉담한 반응이었다. 이용석은 파업을 앞두고 조합원들이 깨어나 함께 하길 바라며 분신을 결행했다. 이렇게 노동자들의 분신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대통령 노무현은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는 폭언을 퍼부었다. 노대통령의 노동자 분신 관련 발언을 듣고 1. 한겨레 11월 6일치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은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며,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대통령은 또 지난 29일 3부 장관 담화문이 자신의 이런 뜻을 담지 못했다며 장관들을 심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2. 만약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충격을 넘어 절망이다. 앞뒤좌우가 없는 짧은 보도내용을 가지고 지나치게 확대 해석할 생각은 없으나, 적어도 노동자들이 왜 이렇게 줄지어 분신하고 목매달아 항거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읽기는 어렵다. 심지어 듣기에 따라서는 영등포경찰서장의 기획분신 발언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까지 고개를 든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노대통령이 노동자들이 왜 죽음으로 내몰렸으며 죽음으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에 대해 귀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멀기만 한 거리감을 숨길 수 없다. 도대체 노동자들은 왜 하나 뿐인 목숨을 던졌는가. 그 이유는 그들 자신이 대통령에게 직접 유서를 남기며 설명하고 있다. 최근 자살한 노동자들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직접 보내는 유서를 남기거나 항변하는 글을 남겼다.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에 대통령에게 남긴 유서는 대통령의 노동문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항의하고 문제해결을 촉구하면서도 대통령 건강을 걱정하며 숨길 수 없는 기대를 담고 있다. “대통령께서 예전에 변호사 시절 우리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셨던 때도 있었지요? … 노무현 대통령님!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야 이 나라의 노동정책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제가 마지막 희생자가 돼야 합니다. 노동자들과 대화는 외면한 채 오로지 노동자 죽이기로 일관하고 있는 악질 기업주들에 대해서 반드시 정부 차원의 대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이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길이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10.23 분신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세원테크 이해남 지회장이 남긴 유서 ‘노무현 대통령께’ 중에서) “전 공부방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평등함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걸 가르쳐온 내가 이런 현실에 복종하여 참아왔습니다. 인간대접도 받지 못하는 처지에 어찌 학생들에게 인간답게 사는 것을 가르치겠습니까? 노무현 대통령님 제발 저의 고민을 들어주십시오. 현실을 참고 묵묵히 학생들에게 남아있어야 합니까? 아님 우리도 인간임을 외치며 우리의 얘기를 들어달라고 말해야 합니까?” (10.26 분신해 10.31 사망한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 이용석 씨가 노트북에 남긴 ‘노무현 대통령님께’)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 이 회사에 들어온 지 만 21년, 그런데 한 달 기본급 105만원. 그중 세금들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팔십 몇 만원. 근속 년수가 많아질수록 생활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야 할 텐데 햇수가 더할수록 더욱 더 쪼들리고 앞날이 막막한데, 이놈의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노동조합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니 노동자는 다 굶어죽어야 한단 말인가.” (10.17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 유서 중에서) 3. 그러나 죽어간 노동자들의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분신자살 사태 이후 노동문제에 대한 발언을 자제해오던 노무현 대통령이 첫 말문을 열고 쏟아낸 발언내용은 과연 이들이 죽어가면서 남긴 유서를 읽어보기나 했는지 의아스럽다. 우리는 이 마당에 그 동안 노무현 대통령이 쏟아냈던 노동자들의 노조활동을 매도하고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이는 모질고 가혹한 발언들을 다시 거론할 생각은 없다. 다만 분명히 하고픈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노동문제에 대한 인식과 그에 기초해 펼친 8개월 동안의 노동정책이 노동자들을 잇단 분신자살과 죽음의 행렬로 몰아간 원인 중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라고 절규하며 분신자살한 이용석 씨는 다름 아닌 정부 노동정책을 총괄하는 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이 고용한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비정규직 차별을 개선하겠다는 공약은 노무현 정권 노동정책의 처음이고 끝이다. 정부기관 내 비정규직 노동자가 분신자살하는 상황까지 이르도록 도대체 뭘 했는가 말이다. 산하기관장이 비정규직노조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 조사나 해봤는가 말이다. 8개월 동안 이틀에 한 명씩 144명의 노동자를 구속하고, 철도파업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 이름으로 75억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내고 씻을 수 없는 노동자 매도 발언 쏟아내고…. 4. 지금도 35m 크레인 위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있는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을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민정수석은 개인적으로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부산 한진중공업노조’라는 존재 자체가 노대통령이나 문수석의 이른바 ‘노동운동과 연관된 경력’에서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때 어쩌면 1991년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태우 군사독재 정권 시절 폭압에 맞서 잇단 분신과 죽음의 행렬로 아픈 기억이 돼 남아 있는 1991년 바로 그 해 말이다. 그 해에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 위원장이 노태우 정권의 전노협 탈퇴 공작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노대통령은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 자격으로 진상조사단 위원으로 활동했다. 1994년 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이 LNG선 위에서 선상파업을 벌였을 때 고인이 된 김주익 지회장은 당시 노조 사무국장으로 이 파업을 주도한 뒤 구속됐고 그 변호인이 바로 문재인 수석이었다. 왜 그 상황을 모르겠으며 한진재벌의 모진 탄압을 모르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당시 적어도 재벌과 독재정권의 노동탄압에 맞서 함께 발을 맞췄던 노무현 변호사가 대통령이 돼 ‘지금은 민주화됐는데 웬 분신자살이냐, 자살해도 요구를 들어줘선 안 된다’는 극단의 인식에 도달해 있다는 점이다. 그 때 그 김주익은 아직도 노동현장에 가해지는 손배가압류와 노동탄압을 못 견디다 하나 뿐인 목숨을 던지며 자살했는데 말이다. 노대통령과 문재인 수석의 정치적 고향 부산에서 한진중공업은 부산을 대표하는 대기업이다. 노대통령이 집권 초기 내세웠던 이른바 대화와 타협의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뒤집고 대기업 노동자가 문제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대기업 노동자고, 정치화돼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도 대기업노조이고, 외국투자가를 내쫓아 경제를 어렵게 하는 것도 대기업노조라 공격하기 시작하던 6월 11일, 김 지회장은 35m 크레인에 오른다. 한진재벌의 오기에 찬 노동탄압이 멈추지 않아 김 지회장이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못하던 129일 동안 노무현 대통령은 더 강하고 더 모질고 더 가혹하게 대기업노동자를 공격했고, ‘21년 근속에 기본급 105만원’ 받던 대기업 노동자 김주익 지회장은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고 절규하며 끝내 크레인에서 목을 매고 말았다. 인권변호사 노무현은 대통령이 됐으니 ‘민주화된 세상’에서 산다고 느낄지 모르나, 엄청난 당기 순이익을 내고도 임원들만 배당받고 직원들 임금은 동결한 것도 모자라 600여 명을 내쫓는 재벌, 이에 저항했다고 손배가압류를 비롯한 끝도 없는 노동탄압에 시달려야 하는 김주익에게 ‘민주화된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5. 노무현 대통령이 한겨레 보도대로 말하고 생각한다면 노동문제 인식의 문제를 넘어 심하게 말하면 노동자 주검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지난 29일 노동·법무·행자 3부장관의 노동자 분신 관련 담화문에 대해 우리는 당장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1천400억대 손배가압류와 비정규직 차별에 대한 가시적인 조치 없이 공허한 제도개선 추진만 되풀이 해 실망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3부 담화문조차 너무 노동자에게 온정을 베푼 것이라며 장관들을 질책했다니, 도대체 노동자가 사회적 타살로 내몰리는 노동현실과 대통령의 인식 사이에는 얼마나 넓고 넓은 구만리장천의 바다가 있는 것이란 말인가. 우리는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에 다시 한 번 절망하고 통탄한다. 그리고 분노한다.[100] 노동자들의 잇단 자결로 열사정국이 만들어졌다. 민주노총은 11월 6일 12만 명이 참여하는 총파업을 단행했다. 9일 10만 명이 참여한 전국노동자대회에서는 서울 한복판에서 전투경찰과 치열한 가두투쟁을 벌였다. 12일 다시 총파업을 단행해 15만 명이 참가했다. 14일 한진중공업 사측이 금속노조에게 손배가압류 철회와 해고자 복직을 약속했다. 12월 5일 근로복지공단이 비정규직노조에게 노조 인정과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약속했다. 10일 세원테크 사측이 노조파괴자 3인 퇴진과 금속노조 기본협약 수용을 약속했다. 다음 편 보기 [1] 대우자동차는 2002년 8월 GM에 매각됐다. 이후 대우차 정리해고자 1천 725명 가운데 복직을 희망한 1천 609명이 2002년 12월부터 2006년 5월까지 단계적으로 복직됐다. [2] 김대중 정권은 현대자동차에 정리해고를 관철하기 위한 최후 보루였다. 김대중은 ‘경제를 살리려면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는 여론 작업에 앞장섰다. 노동부는 ‘단체협약 상의 노사협의와 상관없이 법에 정해진 수순만 밟으면 정리해고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검찰은 ‘정리해고는 쟁의행위의 대상이 아닌 경영행위이므로 이에 맞선 파업은 불법’이라고 했다. [3] 1996~97년 총파업 이후 1997년 3월 10일 재개정된 노동법에 따르면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는 2년 동안 도입을 유보하도록 돼 있었다. 즉 1999년 3월까지는 도입하지 않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1997년 12월 한국에 긴급자금을 지원하게 된 IMF가 정리해고제 조기 도입을 요구했고,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도 조기 도입을 적극 추진하고 나섰다. [4]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5] 양봉수 열사 추모사업회 & Labor Art Network, 1998,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영상). [6]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7]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8] 현대차노조, 1998/07/01, <비대위 속보> 42호. [9] 현대차 승용1공장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1998/07/09, <승용1민투위>. [10] 현대차노조 공동소위원회, 1998/07/13, <공동소위원회>. [11] 현대차노조, 1998/07/13, <비대위 속보> 51호. [12] 현대차노조, 1998/07/14, <비대위 속보> 52호. [13] 현대차노조, 1998/07/15, <비대위 속보> 53호. [14] 3천 578명은 6월 30일 신고한 정리해고 계획 인원 4천 830명에서 4차 희망퇴직자 1천 252명을 뺀 수치였다. 이 시점에 회사는 과장급 이상 명예퇴직자 1천 371명에 1차부터 4차까지 희망퇴직자 5천 162명을 더한 6천 533명의 감원을 이미 실현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회사가 3천 578명의 추가 고용조정을 강행하겠다고 나선 것은 총 1만 111명을 ‘고용조정’함으로써 연초부터 추진한 ‘1만 명 감원’을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뜻이었다. [15]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293쪽. [16] 현대차노조 사수대, 1998/07/20, <사생결단> 제1호. [17]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18] 7월 17일 회사가 지정한 최종 고용조정 대상자 3천 578명 가운데 1천 340명이 31일까지 5차 희망퇴직을 신청하면서, 2천 238명이 고용조정 대상자로 남았는데, 그 가운데 1천 538명에게는 정리해고, 700명에게는 무급휴직을 통보한 것이었다. 1차부터 5차까지 희망퇴직자 수는 총 6천 502명이었다. [19] 7월 31일 2천 238명이 정리해고·무급휴직 대상자였지만, 파업농성에는 5천여 명이 계속 참여했다. 따라서 점거파업 조합원 가운데 60% 정도는 정리해고·무급휴직 대상자가 아니었다. 이들이 파업에 동참한 것은 고용조정 대상자가 된 동료들에 대한 의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리해고를 막지 못할 경우 민주노조가 무너지고 1987년 이전의 지옥 같은 현장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다. [20]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2쪽. [21]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2쪽. [22] 현대차노조, 1998/08/13, <비대위 속보> 76호. [23]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4쪽. [24]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4~305쪽. [25]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26]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4쪽. [27]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4쪽. [28] 양준석, 1998,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98 고용안정투쟁 평가」. [29] 양준석, 1998,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98 고용안정투쟁 평가」. [30]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293쪽. [31]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299쪽. [32]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299~300쪽. [33]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0쪽. [34]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0~301쪽. [35]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1쪽. [36]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1쪽. [37]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1쪽. [38] 양준석, 1998,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98 고용안정투쟁 평가」. [39]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294~295쪽. [40]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295~296쪽. [41]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296쪽. [42] 현대차노조 가족대책위원회, 1998/07/28, <가족투쟁속보> 5호. [43] 현대차노조 가족, 1998/09/18, 「현자가족투쟁참가기 - 우리의 투쟁을 왜곡시키지 마라!」, 민주노총 통신 게시판. [44] 양준석, 1998,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98 고용안정투쟁 평가」. [45]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46]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47]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7쪽. [48]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49]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1998/08/22, 「윤성근이 드립니다」, <민투위>. [50] 정리해고자 277명은 절대다수가 여성인 식당 정리해고자 144명, 일반 정리해고자 133명으로 구성됐다. ‘277명’이라는 숫자는 8월 11일 회사가 마지막으로 제시했던 정리해고 숫자 615명의 45%였다. [51] 정리해고 대상자였다가 이날 무급휴직으로 분류된 1천 261명과 별도로 7월 31일 이미 무급휴직을 통보받은 700명이 있었다. 따라서 무급휴직자는 총 1천 961명이었다. [52] 현대차 노사, 1998/08/24, 「현대자동차 고용조정과 노사화합을 위한 잠정합의문」 (현대자동차주식회사 대표이사 정몽규와 현대차노조 위원장 김광식 명의). [53] 현대차 노사, 1998/08/24, 「부속 합의서」 (현대자동차주식회사 대표이사 정몽규와 현대차노조 위원장 김광식 명의). [54]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55]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10~311쪽. [56]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1998/08/27, <민투위>. [57] 현대차노조 활동가들, 1998/08/28, <다시 머리띠를 묶으며> 제1호. [58] 이러한 불신과 상처는 이후 현대차노조가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저버리고 ‘고용의 방패막이’로 대규모 사내하청 투입을 동의하는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59] 1990년대 이후 독일에서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본격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독일 금속노조는 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신자유주의 공세를 수용했다. 그 결과 임금수준의 하락, 불안정노동의 확대, 사회적 안전망의 약화, 일부 사업장에서의 대규모 정리해고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삶이 지속적으로 악화됐다. 이는 오늘날 독일에서 극우세력이 강력하게 부상할 수 있게 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됐다. [60] 천창수, 1998/09/17,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이 남긴 과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 실천』 9월호. [61] 현대차노조 가족, 1998/09/18, 「현자가족투쟁참가기 - 우리의 투쟁을 왜곡시키지 마라!」, 민주노총 통신 게시판. [62] 울산노동자신문, 2001/04/16, 「용서 못할 정권의 폭력만행 - 노동자의 분노를 행동으로 보여줄 때다」. [63] 민주노총, 2001/05/01, 「세계노동절 제111주년 기념 민주노총 노동자대회 단병호 위원장 대회사」. [64] 울산노동자신문, 2001/06/08, 「굴종의 세월 깨뜨린 효성 파업 투쟁」. [65] 울산노동자신문, 2001/06/08, 「폭력경찰 투입에 효성투쟁 오히려 확산」. [66] 울산노동자신문, 2001/06/11, 「효성연대투쟁, 갈수록 강력하게 확산」. [67] 울산노동자신문, 2001/06/11, 「노동자 생존권 말살하는 화섬 구조조정」. [68] 울산노동단체연석회의, 2001/06/14, 「전면적인 노동운동탄압이 예고되는 긴박한 정세를 돌파하기 위한 우리의 제안」. [69] 울산노동자신문, 2001/06/18, 「민주노총 울산투본, 전면 총파업 선포」. [70] 울산노동자신문, 2001/06/18, 「울노신 초대석(이갑용 민주노총 지도위원) - 울산 노동운동의 새로운 기운이 시작된다!」. [71] 울산노동자신문, 2001/06/25, 「현자노조 임대, 통합임단협 요구안 확정」. [72] 울산노동자신문, 2001/06/22, 「울산노동자 총파업, 눈앞에 다가왔다」. [73] 민주노총, 2001/06/22, 비상 중앙위원회에 수배 상태의 단병호 위원장이 보낸 서신. [74] 울산노동자신문, 2001/06/25, 「민주노총, 7월 5일 60만 조합원 총파업 - 22일 긴급 중앙위원회서 만장일치로 결정」. [75] 울산노동자신문, 2001/06/25, 「움츠린 동구, 투쟁으로 다시 일어선다」. [76] 울산노동자신문, 2001/07/02, 「7·5 총파업, 7월 대투쟁의 포문을 연다」. [77] 울산노동자신문, 2001/07/09, 「긴급점검 - ‘현자 7·5 총파업 철회’ 배경과 반응」. [78] 울산노동자신문, 2001/07/09, 「“구조조정·노동탄압 분쇄” 당당히 간다」. [79] 앞서 7월 3일에는 민영화 대상에서 제외된 한국수력원자력노조에서도 민주노총 가입을 공약으로 내건 후보가 위원장에 당선됐다. [80] 울산노동자신문, 2001/05/28, 「오욕의 세월 마침내 끊어낸 철도노조」. [81] 울산노동자신문, 2001/08/06, 「발전산업노조 이호동 초대 위원장 당선 - ‘민영화 반대, 민주노총 가입’ 공약」. [82] 울산노동자신문, 2002/03/11, 「바위처럼 흔들림 없는 발전노조 파업투쟁」. [83] 울산노동자신문, 2002/03/11, 「가슴깊이 다가오는 발전 노동자들의 투쟁, 민주노총 3월 총력투쟁으로 결판내자!」. [84] 울산노동자신문, 2002/03/25, 「결사항전으로 나아가는 발전 노동자들」. [85]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투쟁백서발간위원회, 2003,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발전소매각 저지투쟁 - 가자! 총파업투쟁으로』, 191~194쪽. [86] 울산노동자신문, 2002/04/01, 「‘노동자라면 떨쳐 일어나자’ - 4·2 총파업 열기」. [87] 울산노동자신문, 2002/04/02, 「지역 연대투쟁이 지역 총파업으로!」. [88] 울산노동자신문, 2002/04/01, 「‘노동자라면 떨쳐 일어나자’ - 4·2 총파업 열기」. [89] 울산노동자신문, 2002/04/01, 「총파업 투쟁으로 모두 떨쳐 일어나 ‘신자유주의 분쇄’ 희망을 쟁취하자!」. [90] 당시 사퇴한 주요 지도부는 민주노총의 허영구 위원장 직무대행과 이홍우 사무총장, 공공연맹의 양경규 위원장이었다. 구속 중이던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사퇴하지 않았다. [91] 박훈(금속산업연맹 법률원 변호사), 2002/04/03, 「이것은 절대 아니다 - 발전노조 합의안을 보며」, 민주노총 홈페이지 게시판. [92] 1998년 6·5 노정합의와 6·10 대의원대회를 통해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하면서 제2기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교원노조 법제화 등 합의사항이 이행되지 않자 민주노총이 1999년 2월 24일 대의원대회를 통해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결정했다. 김대중 정권은 민주노총이 불참한 가운데 한국노총만을 포괄하여 제3기 노사정위원회를 운영했다. [93] 전체 노동자 평균 근속년수 5.6년을 기준으로 할 때 연간 10일의 휴가가 축소되는 안이었다. [94] 민주노총, 2003/08/21, 「[성명] 대선공약도 팽개치고 재벌 거수기 된 민주당 - 주5일제 환노위 전체회의도 통과」. [95] 민주노총, 2003/08/29, 「[성명] 주5일법 국회통과에 즈음하여」. [96] 2003년 1월, 민주노총 사업장 50곳에 2천 2백억 원, 비민주노총 사업장 2곳에 5억 4천만 원의 손배가압류가 걸려 있었다. [97] 배달호(두산중공업 노동자), 2003/01/09, 「유서」. [98] 김주익(한진중공업 지회장), 2003/10/17, 「유서」. [99] 김진숙, 2003/10/22,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부산역에서 열린 김주익 열사 추모집회 추모사. [100] 민주노총, 2003/11/06, 「[성명] 노대통령 ‘분신 투쟁수단 삼는 시대 지났다’ 발언에 대해」.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입장] 노동자 민중의 투쟁으로 차별금지법을 쟁취합시다차별금지법제정연대(이하 차제연)는 3월 26일 오후 전체회의를 열고 올해 활동 목표와 사업 계획, 예산을 다루며 <조지 소로스 오픈소사이어티재단(OSF) 기금 신청 추진 배경과 판단의 건>을 논의했습니다. 앞서 집행위는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볼 때 OSF가 차제연 차원의 최소 기준선을 위배하는 기금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판단"한다며 해당 안건을 제안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해당 안건은 4월 9일 전체회의로 결정이 유보되었습니다. 더불어 차제연 집행위는 전체회의 말미에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이하 전진)에 대한 유감을 표했습니다.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의 사전 연서명에 대한 집행위원회의 입장>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의 사전 연서명 방식에 집행위원회는 명확한 유감을 표합니다. 이는 차제연이나 차별금지법 운동에 대하여 누구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차원과 다른 문제입니다. 논의의 배경과 전체 안건에 대한 맥락은 삭제된 채, 또한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토론이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것이 사실상 결정된 것처럼 외부의 압박을 요청한 방식은 전체회의에서 찬성, 반대 혹은 이에 국한되지 않은 많은 맥락의 의견개진을 어렵게 했다고 평가합니다. 특히 집행위에서 안건을 성안했다는 사실만으로 내부에서 충분한 논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신 점은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의사소통 체계에 대한 불신이라고 받아들여집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차제연 집행위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첫째, 전진은 논의의 배경과 전체 안건의 맥락을 삭제하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안건의 맥락에 동의할 수 없기에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의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이때, 대중적 사업을 전개하여 법안 추진의 사회적 압력을 높이려는 차제연 집행위의 제안은 옳습니다. 그러나 예산안은 77%에 달하는 압도적인 액수를 OSF 기금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2025년 차제연이 지출한 전체 금액의 8.25배에 달하는 금액을 조지 소로스 재단으로부터 받아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을 확대한다는 구상은, 차별을 만들고 확대해 온 금융자본의 사회공헌 자금으로 차별철폐 운동을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는 글로벌 금융자본의 막대한 부가 대중에 대한 수탈로 쌓였음에 눈감는 행위이자, 자본주의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운동을 차별금지법제정운동 밖으로 내모는 행위이며, 차별금지법제정운동과 차별철폐운동을 자본주의 체제 내로 가두는 행위입니다. 차제연 집행위는 이토록 문제적인 안건을 집행위 단일 입장으로 상정하여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둘째, 연대체 내 신뢰를 저버린 것은 차제연 집행위입니다. 3월 20일, 전체회의를 6일 앞두고 안건지가 올라올 때까지도, 집행위 참가단체 이외 대부분의 단체는 OSF 기금 신청에 관한 논의를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연서명을 보고서야 해당 안건을 다룬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는 차제연 가입 단체들도 상당수 존재합니다. 차제연 집행위가 이토록 논쟁적인 안건에 관한 집행위 논의 경과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진은 해당 안건을 인지한 뒤, 집행위 11개 단체 중 4개 단체에 입장을 문의하고 전진의 우려를 밝혔습니다. 집행위에서 논의된 해당 안건지와 회의록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집행위는 안건지나 회의록을 공유하는 대신, 3월 20일 전체회의 안건지가 올라올 예정이니 이때 의견을 나누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지하듯, 집행위는 극히 논쟁적인 안건을 소수의견 병기나 이견 명기도 없이 'OSF 기금신청 찬성'이라는 단일 입장으로 제출했습니다. 이러한 안건 발의 과정이나 내용을 종합하면, 과연 누가 신뢰를 저버린 것일까요? 셋째,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의 계급적 방향에 대해 차제연에 가입하지 않은 단체와 개인도 얼마든지 발언할 권리가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은 차별에 맞선 모든 운동과 별개의 운동이 아니며, 더구나 차별금지법은 지난 광장을 경유하며 이미 사회적 의제로 대중화됐습니다. 그럼에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사회적 운동을 확장해야 할 이때, 차제연 집행위는 통과될 경우 여러 단위가 탈퇴할 수밖에 없는 안건을 상정했습니다. 조지 소로스가 만든 재단에 차제연이 기금을 신청하게 될 경우, 차제연을 떠나야하는 단체도 있습니다. 전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을 함께 하고자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이에 전진의 공개 연서명 조직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차제연 집행위는 마치 전진이 신뢰를 어기고 민주주의를 침해한 것처럼 유감 입장을 냈습니다. 차제연 집행위에 묻습니다. 해당 안건은 어떤 경로와 토론을 통해 단일 입장으로 전체회의에 제출되었습니까? 전진이 요청한 집행위 회의록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진은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의 계급적 방향과 재정원칙을 사회적으로 토론하고, 차별금지법을 지지해 온 동지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통로를 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차별에 맞서 싸운 많은 동지들,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의 주체들이 전진 연서명의 취지를 이해하고 지지했습니다. 차별과 억압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산물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투기자본의 후원으로 차별철폐운동을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차별금지법제정을 위해 필요한 것은 노동자 민중의 운동입니다. 더 큰 싸움의 디딤돌이 될 실효성 있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위해서라도, 아래로부터 노동자 민중의 투쟁을 조직해야 합니다. 차별금지법제정운동에 재정이 필요하다면, 차별철폐 투쟁에 재정이 필요하다면, 그 재정을 조달하는 방법 역시 운동이고 투쟁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별을 조장해 이윤을 쌓은 금융자본가가 세운 재단의 고액후원이 아닙니다. 예컨대 우리에게는 4만의 노동자 민중으로부터 1만원씩을 조직하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운동의 재정을 확보하는 사업이자, 그것 자체가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의 주체를 확대하는 투쟁입니다. 동지들에게 호소합니다. 노동자 민중운동 전체에 공동투쟁과 지원을 요구하며, 보다 단단하고 너른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을 열어갑시다. 2026년 4월 6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번역] 레닌주의 당 개념: 신화와 실제2019년 이후 국제 계급투쟁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혁명적 조직을 재건하기 위한 레닌주의 조직관은 엘리트주의 조직관이나 주변화된 편협한 집단을 육성하는 조직관과는 정반대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레닌주의 조직관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자각한 부문을 (혁명의 준비를 목표로 하며 투쟁하는 대중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중앙집권적인 당으로 결집시켜 내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투쟁으로 떨쳐 일어서는 노동자들에게 (수십 년간 지배계급과의 화해 정책과 “사회적 대화”에 얽매여 있는) 노동자운동의 관료적 지도부와는 다른 독립적인 정치적·조직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레닌주의 정당의 문제를 다시 논의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유형의 해석 체계를 살펴봐야 한다. 첫 번째는, 불행히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체계인데, 레닌주의를 권위주의와 동일시하고, ‘레닌주의 정당’을 전체주의적 집착의 씨앗을 품고 있으며 스탈린주의를 예고하는 ‘자칭 엘리트(또는 전위)’의 독재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국제적 반동의 맥락에서 이러한 해석이 지속되면서, 역사적으로 레닌주의와 연관된 세력들조차 레닌주의 정당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데 일조해 왔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반자본주의 신당’(NPA) 내 세력, 특히 과거 ‘제4인터내셔널 연합사무국’ 경향의 프랑스 지부였던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LCR) 출신과 그 국제적 동조자들에게 레닌주의 정당은 기껏해야 무력한 민속 설화의 일종이거나, 최악의 경우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극복해야 할 본질적으로 종파적인 개념으로 여겨진다. 최근 들어 레닌주의 정당에 대한 논쟁은 영어권 학계의 연구, 특히 라스 리(Lars Lih)의 연구 덕분에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레닌의 재발견: 맥락 속에서 본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훌륭한 저서를 출간했다.[1] 이 책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가 새로운 조직 개념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지침서’라고 오랫동안 여겨져 온 통념에 근본적으로 도전한다. 리의 연구는 많은 심도 있는 논의를 불러일으켰지만,[2] 레닌이 제2인터내셔널과 결별한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러시아판 사회민주주의자’였다고 주장하는 논지는 심각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리의 해석은 레닌의 공헌 중 가장 독창적이고 정치적으로 결정적인 특징들마저 간과하는 경향이 있으며, 심지어 ‘레닌주의 당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주장한다.[3] 21세기의 레닌과 ‘레닌주의’ 무엇이 레닌주의가 아닌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21세기에 레닌주의를 논하는 시작점일 수 있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던 2017년, 스테판 쿠르투아는 일부 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조장하는 편견을 드러내는 제목의 프랑스어 저서, <레닌: 전체주의의 창시자>를 출간했다.[4] 쿠르투아 편의 정치 진영에서 레닌을 악마화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트로츠키주의 활동가인 폴 르블랑은 그의 저서 <레닌과 혁명정당>에서 “볼셰비키 혁명의 승리부터 현재까지, 자본주의 현상 유지를 추구하는 자유주의·보수주의 이데올로그들은 레닌과 그의 저작들이 (특히 혁명정당 개념이) 법, 질서, 기본적인 인간 존엄성, 그리고 서구 문명을 끔찍하게 위협한다는 인식을 퍼뜨리기 위해 막대한 자원을 투입해 왔다”고 지적한다.[5] 레닌이 왜 세계 자본가계급에게 증오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가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본질적으로 그가 비난받는 이유는 10월 사회주의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럼으로써 모든 세대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그런데 ‘레닌에게 돌아가기’를 더 어렵게 하는 것은 공산주의 운동 내부에서 비롯된 강력한 왜곡들이다. 레닌 사후 노동자국가에서 관료적 반혁명을 주도했던 스탈린은 레닌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인용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려 했다. 스탈린주의는 맥락에서 벗어나 발췌한 레닌의 인용구들을 영원한 진리로 둔갑시켜 남용하면서 ‘레닌주의’라는 가면 아래 교조적이고 경직된 사상 체계를 구축했다.[6] 이러한 방대한 이론적·정치적 수정 작업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다니엘 벤사이드가 지적했듯이 “당의 개념에 대한 레닌의 구체적인 공헌을 (볼셰비키화[7] 및 획일주의와 동일시되는) 성문화된 ‘레닌주의’와 혼동하는 경향”[8]을 만들어냈다. 레닌주의 정당에 대한 자유주의와 스탈린주의의 묘사는 본질적으로 레닌을 권위주의적인 인물로, 즉 ‘위로부터 강요되는’, ‘철통같은 규율을 가진’,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당의 설계자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혁명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이런 게 레닌주의라면 레닌주의는 자신들을 위한 게 아니라고 결론지었다”라고 르블랑이 쓴 것은 타당성이 있다.[9] 하지만 레닌을 고정된 틀에 가두려 했던 많은 상투적인 문구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혁명 조직을 어떻게 건설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레닌은 여전히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피에르 브루에가 <볼셰비키당: 소련 공산당의 역사>에서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그 이유는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레닌이 이끈 당은 비할 데가 없는 역사적 수단이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수만 명의 지하 활동가들이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고, 8개월도 채 안 되어 광범한 노동자대중과 (그보다는 더 적은 정도의) 농민들이 그들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는 조직을 구축해 냈다. 이 당은 임시정부에 맞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한 투쟁을 이끌었다. 레닌과 그의 동지들은 분파투쟁과 탄압을 통과하며, 처음에는 더 유리한 조건에 있었던 다른 사회주의자들이 결국 실패했던 곳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사회주의 정당들이 존재한 이래 처음으로 그들 중 하나가 승리한 것이다.[10] 우리가 레닌에게 돌아갈 것을, 즉 그의 조직 이론과 실천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는 것은 현 시대를 대응할 그러한 ‘역사적 수단’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고 있고, 좌우 양측의 급진화와 많은 정부들의 권위주의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계급투쟁이 세계적으로 격화되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급진 좌파는 이러한 투쟁의 흐름을 부르주아 국가에 맞서고 자본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스의 시리자나 스페인의 포데모스 같은 ‘새로운’ 정치 프로젝트들은 순식간에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로 전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에게 돌아가기’는 (현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책으로서가 아니라) 현 상황이 제시하는 기회를 포착하고 이를 활용하여 (보수주의와 궁극적으로 파시즘으로 빠져들 위험을 극복하면서)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열어갈 수 있는 전투 조직을 어떻게 (재)구축할지에 대해 사유하는 데 자극이 될 수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부터 1917년 10월 혁명까지 레닌 생애 동안 일어난 볼셰비즘 역사 속 여러 사건과 논쟁들을 살펴보면서 레닌에게 다시 주목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벤사이드가 “혁명 속의 혁명”이라고 표현한) 당 문제에 대한 레닌의 공헌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볼 것이다. 레닌은 당 이론을 체계적으로 펼친 적은 없다. 하지만 조직에 대한 레닌의 이론적 개념과 볼셰비즘의 실천 사이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이러한 일관성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사회민주주의 전통을 넘어서는 새로운 전통을 예고했다. 레닌은 1914년까지 늘 사회민주주의를 (특히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언급했지만, 러시아 혁명의 특수한 발전조건과 그 자신의 이론적·정치적 궤적은 결국 계급·당·지도력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혁명의 역동성 속에서 당의 역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도록 이끌었다. 20세기 첫 10년 동안 레닌은 국제 사회민주주의 운동 안에서 19세기 말 이후 지배적이던 견해, 즉 진정한 대중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특히 독일에서) 단결을 우선시하는 노선을 옹호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하나의 경향으로, 그 다음에는 하나의 분파로, 그리고 1912년 이후에는 독자적인 정당으로 존재했던 볼셰비키 조류와 이를 이끈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 안에서 불가피하게 논쟁에 휩쓸렸다. 하지만 1914년 여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제2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이 자국 자본가계급의 편에 서서 전쟁에 가담하는 배신을 저지르자 레닌은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는 레닌이 1917년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해준 요인이기도 했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안에서 레닌주의 조직 개념과 볼셰비즘의 실천이 발전해 나간 주요 ‘단계’들을 살펴보자. 20대의 레닌: 러시아 전역을 위한 신문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레닌의 투쟁은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특수하고도 어려운 조건 위에서 전개되었다.[11] 차르 체제의 완강한 탄압 때문에, 러시아의 자유주의 정치운동은 취약했고,[12] 노동자운동과 민중운동은 혁명적 경로를 추구하게 되었다.[13] 19세기 후반 러시아 혁명운동을 주도한 (민중주의 조류인) 나로드니키는 농촌의 불만을 기반으로 삼으려 했으나 농민 대중의 무관심에 곧 낙담하여 테러적인 방법으로 전환했다. 이는 러시아에서의 정치적 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특히 나로드니키 활동가였던 형 알렉산드르 울랴노프가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시도 혐의로 정권에 의해 처형된 사건은 레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880년대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은 주로 이러한 민중주의 조류(그리고 나중에는 ‘합법적 마르크스주의’ 조류)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선구적인 노력을 했다. 1881년, 플레하노프는 러시아 최초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노동자해방단’을 창설했다. 레닌은 곧이어 이 단체에 합류하여 이를 진정한 정당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레닌의 역할은 처음부터 결정적이었다. 브루에는 이렇게 설명한다. 플레하노프가 이끈 눈부신 이론적 투쟁 이후, 그의 제자들과 동료들에게는 실천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다. 모든 조직, 심지어 초보적인 조직조차도 전제정치라는 엄청난 장애물에 부딪혔기 때문에,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따라) 세상을 단순히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더욱 매진해야 했다. 이러한 노력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은 바로 젊은 울랴노프, 즉 레닌이었다.[14] 결정적인 첫걸음은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립대회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은 통일된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고, 당을 구성하는 지역 조직들은 여전히 널리 흩어져 있었다.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는 이 엄청난 진전을 이루는 데 당장의 모든 힘을 소진한 듯하며, 이전의 고립된 지역 조직들의 활동으로 되돌아갔다”[15]고 썼다. 1895년부터 1903년까지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아마추어적인” 방법론과 싸우며 “단일한 당의 활동으로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레닌의 첫 번째 주요한 투쟁이었다.[16] 레닌에게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차르 전제정치라는 중앙집권적인 괴물에 맞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려면, 당은 반드시 고립되고 분산된 그룹들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집중시켜 내야 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단일 정당으로의 통합만이 우리가 분업과 역량 효율화의 원칙을 체계적으로 준수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이는 전제 정부의 억압과 광적인 탄압에 맞서 손실을 줄이고 최대한 견고한 방어벽을 구축하기 위해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이다.[17] 두 번째는 신생 노동자운동이 수행한 개별 투쟁들의 성과를 조율함으로써 (정당이 없다면 고립된 채로 남을) “모범적 의미”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계속해서 말한다. 이러한 아마추어적인 성격 때문에 러시아 노동자운동의 많은 투쟁들은 순전히 지역적인 사건으로 남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전체의 한 사례로서의 가치, 러시아 노동자운동 전체의 한 단계로서의 의미를 크게 잃어버린다. … 만일 이러한 형태의 혁명적 투쟁들이 당 전체의 기관을 통해 통합되지 않는다면, 그 의미의 90%를 잃게 될 것이고, 공통된 경험을 축적하며 전통과 연속성을 수립하는 당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18] 따라서 당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투쟁 경험을 집중시켜 내고 일관성과 연속성을 부여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파업 역시 마찬가지인데, 파업은 노동자계급과 혁명가들을 위한 전쟁 학교, 즉 “노동자들이 적과 싸우는 법을 배우는 학교”[19]로 여겨진다. 레닌의 야망과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의 어려움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거대한 영토와 당시 경제적·문화적 발전 수준이 매우 낮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통합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빠르게 떠오른 것은 신문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오직 당 기관지의 창설을 통해서만, 혁명의 대의를 위해 ‘특정 분야에서 활동하는 투사’에게 자신이 ‘전체 당원과 함께’ 행진하고 있다는 의식, 자신의 일이 당에게 직접적으로 필수적이라는 의식, 자신이 러시아 노동자계급과 전체 민중의 가장 악랄한 적을 목 졸라 죽일 올가미를 형성하는 사슬의 고리 가운데 하나라는 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20] 이처럼 20세기 초, 레닌은 당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처음으로 개략적으로 제시했다. 즉, 당의 기본 과제는 노동자계급 운동에 공통적이고 조직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당시 국제 사회민주주의, 특히 조직적인 측면에서 가장 앞서 있던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당 개념과 대체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통일을 위한 투쟁과 병행해서 당시 제2인터내셔널을 갈라놓고 있던 강령적 논쟁에도 개입했다. 당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로 대표되는 기회주의 경향에 맞서 첫 번째 공공연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러한 기회주의 경향은 불가피하게 러시아에도 일부 영향을 미쳤다. 1902~03년: <무엇을 할 것인가>와 당의 첫 번째 분열 1903년에 개최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는 “진정한” 통일을 이룰 대회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대회는 (소수파를 뜻하는) 멘셰비키와 (다수파를 뜻하며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가 처음으로 분열하는 대회가 되었다. 레닌은 이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21]를 집필했다. 근본적으로 이 저서는 레닌이 “경제주의자”라고 부른 알렉산드르 마르티노프가 이끈 집단과의 논쟁이지만, 당시 전개되는 상황에 대한 대응을 포함하고 있었다.[22] <무엇을 할 것인가>는 특히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통 안에서 레닌의 조직 개념에 대한 교조적이고 ‘신화화된’ 해석의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레닌의 조직 개념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 책이 불러일으킨 모든 논쟁을 다룰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레닌이 발전시킨 두 가지 주요 사상에 대해, 즉 첫째로는 의식성과 자발성의 상호관계에 대해, 둘째로는 노동자계급이 (그리고 그 선두에 선 사회민주주의가) 정치투쟁에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초점을 맞출 것이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전반에 걸쳐 노동자들이 혁명적 의식을 “자발적으로” (다시 말해 순전히 자본주의의 발전과 그 위기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그는 대중의 자발성이 전능하다는 믿음, 즉 “자발성에 대한 굴복”을 막다른 길이라고 규정하며, 이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조직적 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레닌에 따르면, 자발성은 계급의식의 변덕에 사로잡히게 한다. 계급의식은 직선적으로 발전(장기간의 점진적이고 끊임없는 발전)하는 게 아니라, 마치 진자처럼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이다. “자발성에 의한 정치적 의식성의 압도 역시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나아가 레닌은 계급의식이 어떤 중립적인 토대 위에서 발전하는 게 아니라,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보다 이데올로기적 수단을 천 배나 우월하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역사적으로 결정된 틀 안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상기한다. 그러나 독자는 왜 자발적인 운동, 즉 최소 저항의 경로를 따라가는 운동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로 이어지는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23]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기원이 훨씬 오래되었고, 더 완전한 형태로 발전했으며, 훨씬 더 많은 전파수단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24] 레닌은 자발성을 숭배하는 자들에 맞서 “막대를 구부리기 위해”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민주주의의 과제는 자발성과 싸우는 것이다.” 리가 지적했듯이, 레닌이 그런 주장을 편 이유는 (일부의 해석과는 달리)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불신이 아니었다. 반대로 노동자와 민중이 대규모 봉기에 나설 것이라는 확신이었고 그에 대해 혁명가들이 대비하지 못할 것에 대한 우려였다. 레닌을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혁명가들의 준비 부족과 조직된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후진성이었지,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불신이나 혐오가 아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마지막 장에서는 몇 가지 실천적인 결론을 제시한다. 여기서 레닌은 아마추어적인 방법에 맞선 자신의 생각을 급진적으로 전개하여 “중앙집권화”와 전업 활동가에 중심적 의미를 부여한다.[25] 또한 노동조합 같은 광범위한 노동자 조직과 당이라는 혁명가 조직이 어떻게 구분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측면은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강령적인 차원에서) 마르티노프와 벌이는 논쟁이다. 레닌은 마르티노프가 노동자계급을 향한 정치선동을 “노동력 판매조건(노동조건 및 생활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자들의 고용주에 맞선 집단적 투쟁”으로 축소함으로써 그 범위를 좁히고 빈곤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물론 레닌에게 있어 노동자계급의 경제투쟁과 일상투쟁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지만, 혁명적 관점에서 계급의식을 날카롭게 하는 데에는 불충분했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정치투쟁이 절대로 필수적이었다. 첫째,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양상을 이해하고 그 근본적인 반동적 성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노동자계급과 혁명가를 교육하기 위해서다. 둘째, 노동자혁명의 승리에 필수적인 동맹을 구축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계급적 정치의식은 오직 밖으로부터만, 즉 경제투쟁 밖으로부터만, 노동자와 고용주 간의 관계 영역 밖으로부터만 노동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은 모든 계급과 계층이 국가 및 정부와 맺는 관계의 영역, 모든 계급 간의 상호 관계의 영역이다.[26] 사회민주주의자의 이상은 노동조합 간부가 아니라 인민의 호민관이어야 한다. 즉 어디에서 나타나든, 어떤 계층이나 신분에 영향을 미치든, 모든 폭정과 억압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폭정과 억압의 양상을 종합하여 경찰 폭력과 자본주의 착취라는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는 사람,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도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과 민주적 요구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노동자계급 해방 투쟁의 세계사적 의미를 모든 이에게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27] 여기서 근본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헤게모니적 지위를 구축해야 한다는 확신, 다시 말해 경제적·조합주의적 입장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요구를 지지하는 동맹을 구축해야 한다는 확신이다.[28] 앞서 말했듯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를 준비하는 토론의 일부였다. 이 대회는 강령적인 관점에서 (특히 경제주의자들이 소수파로 전락하는 등) 진전을 이루었지만, 조직 문제에서 예상치 못한 의견 차이가 나타났다.[29] 논쟁은 특히 당 규약 제1조, 즉 당원 자격 요건을 명시한 조항을 둘러싸고 집중되었다. 레닌이 제시한 안은 마르토프가 제시한 안과 충돌했다. 레닌의 안이 당원들의 당 활동 ‘참여’를 강조한 것과 달리, 마르토프의 안은 단순히 ‘협력’만을 요구했다.[30] 레닌의 안은 통과되지 못했지만, 당 지도부와 당 기관지 이스크라의 편집부 선출에서는 레닌과 그 지지자들이 과반수를 차지했다.[31] 마르토프 안 지지자들은 나중에 지도부 선출 투표가 사고였다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고, 이를 구실로 레닌 지지자들과 결별했다.[32] 제2차 대회 이후 몇 달 동안 멘셰비키는 레닌에 대한 비난을 거세게 퍼부으며 분열의 원인을 그의 “관료적이고, 형식주의적이며, 전제적인 중앙집권적 개념”[33] 탓으로 돌렸다. 이듬해 레닌은 <일보 전진, 이보 후퇴>라는 장문의 글에서 대회의 사건들을 회고하면서, 두 분파와 그들의 조직 개념 사이의 일관성을 보여주었다. “[조직에 속하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당을 돕는 사람들”을 당원이라고 부르는 것을 찬성한다고 말한 멘셰비키와 악셀로드의 조직 개념에 반대하여,[34] 레닌은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그것으로 다음과 같은 나의 기대와 요구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즉, 계급의 전위로서 당은 가능한 한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 당은 적어도 최소의 조직에나마 복종할 용의가 있는 요소만을 가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나의 논적은 조직된 요소와 조직되지 않은 요소, 즉 지도에 따르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하나로 뭉뚱그려 버린다.[35] 레닌은 또한 자신의 입장을 본질적으로 음모론적이거나 종파적인 개념이라고 왜곡하는 풍자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노동자계급의 전위로서 당은 계급 전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 당 조직이 오직 전업 혁명가로만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극히 제한되고 비밀스러운 조직에서부터 매우 광범하고 자유로운 느슨한 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 모든 등급, 모든 색채의 다양한 조직이 필요하다.[36] 여기서 우리는 서로 다른 동심원들로 이루어진 조직체계를 발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레닌이 제안한 것은 ‘전위주의’ 당 개념(또는 그의 반대자들이 자주 비난했듯이 ‘블랑키주의’ 당 개념)이라기보다는, (계급 안에서 가장 의식적이고 단호한 부분인) 전위를 포괄하는 당과 대중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이 때 레닌이 명시적으로 국제 사회민주주의를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당 개념이 당시 국제 사회민주주의에서 유행하던 당 개념들과의 단절로 나아가는 간접적인 첫걸음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레닌의 당 개념은 국제적인 차원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비판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중에서도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이 가장 유명하다.[37] 마지막으로, 레닌은 당규를 둘러싼 논쟁의 쟁점을 설명하는 데 큰 중요성을 두었지만,[38] 그것이 당 분열의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분열을 주도한 것은 멘셰비키였다. 르블랑의 설명처럼, 레닌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간의 진정한 통합이라는 생각을 포기한 것은 1904년 가을이 되어서였다.[39] 이 일화는 당의 단결 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레닌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40] 하지만 또한 레닌은 기회주의 세력이 중요한 사안에 대한 정치적·강령적 양보를 획득하는 수단으로 당의 단결이 이용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역사가 할 드레이퍼는 이렇게 요약한다. 레닌의 접근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단결은 중요하지만, 다수의 승리를 좌절시키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단결해서는 안 된다. 단결은 중요하지만, 언제나처럼 민주적인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파는 다음 당 대회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지만, 분열하지 않는 대가로 정치적 양보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41] 1905년 혁명: 당과 대중 1905년은 레닌의 이론적·정치적 궤적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레닌 자신이 언급했듯이, 제1차 러시아 혁명은 다양한 사상을 실천적 경험 속에서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42] 이러한 측면에서, 1905년은 볼셰비키의 강령적 주장이 멘셰비키의 강령적 주장을 압도한 해였으며, 레닌이 혁명적 과정 속에서 전위와 대중의 관계를 재검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사회민주주의 진영 전반에서 다가오는 혁명에 관한 전략적 논쟁이 벌어졌다. 노동자운동 내 대부분의 흐름은 다가올 혁명의 내용이 (민주적 과제와 농업 과제를 가진) 부르주아적인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이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둘러싸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갈라졌다.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러시아에 기계적으로 적용한 멘셰비키는 자유주의자들(카데츠로 알려진 입헌민주당)이 주도하는 부르주아 혁명을 사회민주주의가 열심히 동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반대로, 멘셰비키와 트로츠키의 견해 사이에서 중간적인 입장을 취했던 레닌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가 주도권을 잡고 대중의 분노를 봉기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43] 거대한 대중 행동의 시기는 이러한 이론들이 실천 속에서 시험되게 하였고, 1905년의 경험은 이러한 논쟁들을 해결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제 멘셰비키의 사상을 표현하는) 새 <이스크라>는 사건들의 영향을 받아 실제로는 자기 반대파의 입장을 채택하고 있다. 다시 말해 멘셰비키 자신의 결의가 아니라 제3차 대회[44]의 결의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혁명적 사건의 흐름보다 잘못된 교리를 더 잘 비판하는 것은 없다.[45] 레닌이 당의 재통합, 특히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재통합을 다시 주장한 것은 혁명의 진행 과정이 필연적으로 멘셰비키를 왼쪽으로, 따라서 볼셰비키의 입장으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해서였다. 대중적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차르는 내무부 장관 불리긴에게 입법 의회인 두마를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선출 원칙이 매우 부적합했던 이 첫 번째 두마는 사회민주당원들 사이에서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볼셰비키는 적극적인 보이콧을 주장했고, 사회민주당 조직의 다수가 이에 찬동했다. 이들은 헌법적 허상에 맞서기 위한 선전·선동 캠페인을 펼쳤다.[46] 그러나 멘셰비키는 보이콧 결의안에 찬성하지 않았다.[47] 레닌은 당시 러시아 밖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파업과 거리 시위를 면밀히 주시했다.[48] 1905년 혁명의 가장 큰 혁신이자 (마르셀 리브만의 표현으로) “가장 독창적인 창조물”은 단연 소비에트의 등장이었다. 처음에는 공장 단위로, 나중에는 지구 단위로 선출된 이 대규모 노동자평의회는 혁명 기간 동안 등장하여 여름 동안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1905년 10월에 결성되었으며, 25만 명의 노동자들이 보낸 대표들을 모아냈다.[49] 이러한 평의회는 투쟁에 참여하는 대중의 다양한 활동을 광범위하게 조직하고 조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멘셰비키 활동가들과 달리, 볼셰비키 활동가들은 처음에는 이러한 새로운 조직체에 대해 크게 당황했다. 브루에가 지적했듯이, “실제로 볼셰비키 활동가들은 새로운 혁명적 환경에 느리게 적응했다. 비밀스럽게 활동하던 이들은 어떻게 웅변가가 되고 군중을 모아야 하는지 하루아침에 알지 못했다.” 많은 역사학적 자료들은 볼셰비키 활동가들 사이에 주저함 또는 거의 불신에 가까운 감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 조직은 소비에트가 노동자계급을 낮은 발전 수준에 머물게 할 위험이 있다는 결의안을 채택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관점은 레닌의 생각과 거리가 멀었다. 레닌은 해외에 있었지만 볼셰비키 활동가들의 소비에트에 대한 편견과 싸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라딘 동지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냐, 당이냐’라고 질문을 제기한 것은 잘못된 것 같다. 나는 질문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으며,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와 당 모두’라는 결정이 반드시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일한 질문이자 매우 중요한 질문은 소비에트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임무를 어떻게 나누고 어떻게 결합하느냐이다.[50] 레닌의 관점에서 볼 때, 소비에트는 혁명 과정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당과 연계되어야 했다.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는 총파업을 통해, 총파업과 연계하여, 그리고 총파업의 목적을 위해 탄생했다. … 정치투쟁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뒤에서 논의할 방향으로 재조직된) 소비에트와 당 모두가 동등한 수준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51] 소비에트의 출현은 레닌에게 조직(전위)과 대중의 자발성 사이의 변증법적 개념을 이론적으로 심화하는 진정한 계기가 되었다. 혁명 계급의 투쟁에서 탄생하고 그 안에서 형성된 이 조직들을 당의 결정에 종속시키려 했던 볼셰비키 간부들에게 레닌은 오히려 그 조직들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 생각에 정치적 지도력을 제공하는 혁명적 중심인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조직이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협소한 조직이다.”[52] 혁명 과정에 대한 이와 같은 새로운 개념은 레닌의 사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1917년 러시아혁명 때 레닌이 취하게 될 방향뿐만 아니라 코민테른 초기 노동자 공동전선 전술에 대한 논쟁까지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는 행동하는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위한 투쟁과 그 혁명적 지도력을 위한 정치적 투쟁이라는 혁명 방정식의 두 항 사이의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레닌의 관점을 보여준다. 1905년 혁명을 평가하면서 레닌은 당의 진정한 재조직을 주장했다. 레닌은 혁명이 쟁취한 민주적 진전을 주목했다. 이러한 진전은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합법 활동과 당의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53] 레닌은 “볼셰비키 위원들”[54]의 보수적 태도에 맞서 싸웠고, 그들에 대항하여 당의 “문호개방”[55]을 주장했다. 레닌은 지역 조직을 확대하고 선거 원칙을 적용하는 새로운 조직운영 방식이 당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리 당의 활동 조건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획득되었다. 물론 이러한 권리들은 매우 불안정하며, 지금의 자유가 마냥 계속되리라고 믿는 것은 범죄는 아닐지라도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결정적인 투쟁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이 투쟁을 위한 준비가 최우선 과제이다. 당의 비밀 조직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현재 상대적으로 넓어진 활동 범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 비밀 조직 외에도, 새롭게 합법적이거나 준합법적인 당 조직들을 (그리고 당과 연계된 조직들을) 많이 설립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새로운 조건에 맞춰 당의 활동을 조정하거나 새로운 문제에 대처하는 게 불가능하다.[56]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1905년은 당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전까지는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당내 민주주의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혁명은 이러한 상황을 바꾸었고, 볼셰비키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적 중앙집권제”라는 개념을 당에 도입했다. 이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시된 중앙집권제에 민주주의를 더한 것이었다. 이후 레닌은 당내 민주주의의 주요 옹호자가 되었다.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에 관한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결의에 날카롭게 반발[57]하며, 레닌은 민주적 중앙집권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민주적 중앙집권제와 지방 당 조직의 자율성 원칙은 구체적인 행동의 통일성을 해치지 않는 한, 보편적이고 완전한 비판의 자유를 포괄한다. 반대로, 당이 결정한 행동의 통일성을 방해하거나 어렵게 만드는 모든 비판은 배제된다.[58] 1905년 혁명과 소비에트의 출현은 레닌이 혁명적 역동성 속에서 당과 대중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03년 당 대회 이후 레닌은 “자발적 요소”를 과소평가한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1905년 혁명에서 레닌은 오히려 자발적 요소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했다. 자발성(대중)과 조직(전위)의 관계는 변증법적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때로는, 특히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에는 자발적 요소가 조직적 요소보다 앞서 나갈 수도 있다. 레닌은 “노동자대중은 지도자들보다 먼저 투쟁의 객관적 조건 변화와 파업에서 봉기로의 전환 필요성을 감지했다”[59]고 썼다. 그러나 레닌은 당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더욱 풍부하게 발전시켰지만, 1903년 멘셰비키와 분리하게 만든 지점에 대해서만큼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관점을 유지했다. 즉, 혁명의 시기에도 (어쩌면 특히 혁명의 시기에) 통일되고 중앙집권화된 당의 존재가 결정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레닌은 노동자계급 전위의 결집체라는 당의 개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정치 상황이 바뀐 만큼 볼셰비키 간부들이 언제 어디서나 대중과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계급/대중과 당/전위 사이의 기계적인 관계가 아니라, 벤사이드가 말했듯이 “당과, 계급이 축적한 경험 사이의 끊임없는 교류”를 보여준다. 이는 레닌의 당 개념에서 어떻게 당이 큰 유연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정치 상황의 변화를 포착하여 스스로를 갱신하면서 보수화를 피할 수 있는 당의 능력이다. 따라서 조직은 자발성을 가로막는 방벽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 규율 덕분에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하게 적응할 수 있게 된다. 헝가리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는 이렇게 설명했다. 당의 역할은 결코 추상적으로 고안된 전술을 대중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당은 대중의 투쟁으로부터 그리고 투쟁을 수행하는 방식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 이론에서의 모든 독단과 조직에서의 모든 경직성은 당에 치명적이다.[60] 이러한 관점은 대다수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관점과 명확한 대조를 이룬다. 그들은 대중의 자발성을 당이 때때로 동원할 수 있는 보조적인 힘으로 여겼지만,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미조직” 요소이자 “미성숙”의 표현으로 간주했다. 이는 특히 1910~13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안톤 판네코크가 1905년 러시아 혁명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대중파업’ 논쟁을 제기했을 때, 칼 카우츠키가 이들에 맞서면서 옹호한 입장이었다. 레닌은 당시 이 논쟁을 직접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옹호했던 입장이 카우츠키보다는 룩셈부르크의 입장에 훨씬 더 가까웠다는 것은 분명하다. 1905년 혁명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간의 화해를 확고히 하고 가속시켰다. 혁명은 두 세력 간의 정치적·강령적 차이점을 명확히 드러냈지만, 레닌은 멘셰비키가 상황적 압력에 굴복하여 볼셰비키의 정치노선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61] 1905년 혁명 과정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같은 편에 서서 투쟁했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투쟁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통일된 당의 틀 안에서 전개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레닌은 생각했다. 우리는 우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러한 경향에 맞서 가장 단호하고 공개적이며 무자비한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여야 한다. … 그러나 통일된 당 안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이데올로기 투쟁은 조직을 분열시켜서는 안 되며, 노동자계급의 행동 통일을 방해해서도 안 된다.[62] 1906년 4월 스톡홀름에서 통합 당 대회가 열렸다. 거기서도 레닌을 이끈 것은 (새로운 정치상황에 대한 분석과 함께) 다가오는 혁명을 단호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그의 확신이었다.[63] 내일이든 아니면 모레든 사건들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불가피하게 봉기하도록 불러낼 것임을 기억하자. 행동의 시기가 왔을 때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준비되고 통일된 상태에 있느냐 아니면 방심하고 분열된 상태에 있느냐일 것이다.[64] 1907~12년: 반동의 시대와 최종 분열 1906년 4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통합대회에서 다수파는 멘셰비키였다. 당원 3만 4천 명을 대표하는 멘셰비키 대의원 62명과 당원 1만 4천 명을 대표하는 볼셰비키 대의원 46명이 참석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분파를 유지했지만, 레닌은 그 목표가 새로운 정당 건설이 아니라 단호한 전술을 실행하기 위한 당내 블록이 되는 데 있다고 선언했다. 1907년 5월 런던 대회에서는 내부 세력관계가 뒤집혀 볼셰비키가 근소한 차이로 다수파가 되었다. 이는 멘셰비키가 1905년의 혁명적 행동들을 부인한 점과 볼셰비키 간부들의 결속력 및 조직적 노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곧 훨씬 더 불리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1907년 하반기부터, 그리고 특히 1908년에, 정권이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전개했다. 노동자운동과 파업 건수가 급감했고, 당 위원회들이 해체되었으며, 체포와 추방이 잇따랐다. 브루에는 러시아 사회민주당 당원 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907년 모스크바에는 당원 수가 수천 명에 달했으나 1908년 말에는 500명, 1909년 말에는 150명으로 줄어들었고, 1910년에는 조직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전국적으로도 당원 수가 약 10만 명에서 1만 명 미만으로 감소했다.”[65] 1905~06년의 혁명적 시기가 지나간 뒤, 반동이 가혹하게 밀어닥쳤고,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전국적으로 쇠퇴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당의 잔존 세력 내부에서 긴장과 의견 불일치를 심화시키는 데 특히 일조했다. 1905년 혁명의 성과와 새로운 상황에서 어떤 정책을 채택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의견 불일치는 주로 제3차 두마에 대한 정책과 당의 불법 활동 지속에 관한 정책을 둘러싸고 구체화되었다.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멘셰비키 내부에서도 의견 차이가 발생하여 새로운 세력 구도가 형성되었다. 볼셰비키 내부에서 레닌은 보그다노프가 이끄는 ‘소환파’에 맞서 소수파의 입장을 고수했다. 소환파는 오로지 불법 활동만을 고집하면서 두마를 보이콧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레닌은 당시 상황에서 혁명가들이 합법적이든 준합법적이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세력을 규합하고 강령을 널리 알릴 필요성을 주장했다. 따라서 레닌은 제3차 두마의 반동적 성격을 인정하고 헌법적 환상에 맞서 싸우면서도, 멘셰비키와 함께 선거 보이콧에 반대하는 표를 던지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보그다노프 지지자들은 볼셰비키 내에서 노동조합 가입을 포함한 모든 합법적 활동에 반대하는 경향인 ‘최후통첩파’와 합류했다. 멘셰비키 측에서는 비밀 활동 포기와 불법 행동에 대한 원칙적 거부를 주장하는 반대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청산파’ 경향에 맞서 레닌은 멘셰비키 내 플레하노프 파벌과 연합하여 내부 전선을 구축하려고 했다. 청산파들은 1908년 12월 당 대회에서 공세를 시작했다. {청산파들의 공세는} 일부 당 지식인들이 어떻게 해서든 기존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청산하고 형태가 모호한 합법 조직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합법 조직으로의 변화는 당의 강령, 전술, 전통을 명확하게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66] 이처럼 1908년부터 1912년까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양적으로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내부 갈등에 시달렸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과정들이 초래한 반동적인 상황은 당내 단결을 향한 압력으로 작용했다. 레닌은 “단결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관점”을 지적하면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양측에 존재했던 화해적 경향에 맞서 싸웠다. 단결에 대한 한 가지 관점은 ‘특정 개인들, 집단 및 기관들’의 ‘화해’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당 활동의 방향에 대한 그들의 견해 일치는 부차적이다. 의견 차이가 발생한 뿌리, 범위, 객관적 조건에 대해 밝히는 대신 의견 차이에 대해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 그러나 단결에 대한 또 하나의 관점은 오래전부터 여러 가지 심오한 객관적 원인들이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두 주요 분파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고, 지금도 꾸준히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변화는 때로는 일부 ‘특정 개인들, 집단 및 기관들’이 원치 않거나 심지어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단결을 위한 이념적·조직적 토대를 마련해 가고 있다.[67] 다시 말해, 레닌에게 있어 당의 단결과 결속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에 만연했던 강령적·정치적 논쟁에 대응하지 않고서는, 즉 청산파(기회주의)와 소환파(극좌주의)라는 상반된 위협에 맞서 “양면 투쟁”을 벌이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1910년 이후, 특히 1911년과 1912년에 계급투쟁이 부활하면서, 레닌은 새로운 혁명적 사건이 다가오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자신의 관점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었다. 혁명가들은 다음 혁명적 격변에 대비해야 했고, 이는 견고하게 구축된 조직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레닌은 1912년 1월 프라하 대회를 계기로 청산파의 배제를 선언하고, 최대한 광범위한 합법 노동자조직들의 네트워크로 둘러싸인 불법 사회민주주의 세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볼셰비키는 마침내 독자적인 정당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르블랑은 이렇게 지적한다. 이러한 분리 계획은 <무엇을 할 것인가>나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 제시되었던 어떤 정식보다도 더 심오한 수준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라는 고전적 모범에서 벗어난 것이었다.[68] 이 결정은 국제 사회민주주의 진영 안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카우츠키는 볼셰비키가 다른 성격의 정당을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1917년: 혁명의 당 볼셰비키는 형성 초기부터 상당히 다양한 조직 형태를 거치며 발전해 왔다. 특히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볼셰비키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8개월 동안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1917년 3월 초, 차르 체제 붕괴로 이어진 봉기 이후에도 투쟁은 가라앉지 않았다. 파업이 잇따랐고, 새로 지명된 임시정부는 상황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처음부터 임시정부는 1905년 모델을 따라 부활한 소비에트와 맞서야 했다. 소비에트는 개량주의자들(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주도했다. 여러 면에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등장한 모든 소비에트는) 잠재적으로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힘을 행사하기를 거부하고 부르주아 정부에 조언하고 압력을 가하는 데 그쳤다. 1905년 혁명과 마찬가지로 1917년 2월 혁명도 혁명가들을 놀라게 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 당은 금속 노동자 알렉산더 슐랴프니코프를 중심으로 조직된 “중앙위원회 산하 러시아국”이 이끌고 있었다. 이 지도부는 사건에 뒤처져 있었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3월 12일 시베리아 유배에서 돌아온 중앙위원 스탈린과 카메네프가 도착하자, 당은 조국 방위 및 임시정부에 대한 조건부 지지와 압력 행사 입장으로 나아갔다.[69] 이러한 입장은 1917년 3월 7일부터 12일까지 스위스에서 레닌이 써서 보낸 내용과 정반대였다.[70] 4월 3일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레닌은 멘셰비키 입장으로 기울어진 자신의 당에 맞서 곧바로 투쟁에 나섰다. ‘봉인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가진 첫 연설에서 레닌은 2월 혁명이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혁명이 중간에 멈출 수는 없으며, 노동자계급이 대다수 병사들과 연대하여 민주주의 혁명을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매 순간, 매일, 모든 유럽 제국주의의 붕괴를 기대할 수 있다. 우리가 성취한 러시아 혁명은 이러한 붕괴의 시작을 알렸고 새로운 시대의 토대를 마련했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 만세![71] 다음 날,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하여 당과 혁명이 나아갈 방향을 제안했다. 임시정부를 지지하지 않고 그에 맞서 단호히 투쟁한다. 어떠한 “혁명적 방위주의”(혁명의 방어를 내걸고 전쟁 지속)에도 반대한다. 멘셰비키와의 화해에 반대한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소비에트를 토대로 혁명 정부를 수립하여 러시아를 사회주의의 길로 이끈다.[72] 레닌의 이러한 입장은 중앙위원 다수의 입장과 상반되었지만, 간부들과 일선 당원 다수의 지지를 받았고 그 지지가 나날이 확대되었다. 레닌은 놀라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승리했다. 레닌의 입장은 제1차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협의회(4월 14일 또는 22일)에서 상당히 명확하게 채택되었고, 이어 4월 24일부터 29일까지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당의 급진적 기층에 의지했던 레닌은 그들을 억제하면서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정치적·사회적 위기가 계속 악화되면서, 시위가 폭동으로 발전했다(4월 20일과 21일 첫 폭동 발생). 노동자계급과 페트로그라드 주둔군 내부에는 임시정부를 가능한 한 빨리 전복시키고자 하는 세력이 상당수 존재했다. 7월 3일부터 5일까지 이어진 준봉기적 나날들은 이러한 열망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정권 장악에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 시기 볼셰비키 당은 ‘절대 권력을 가진 지도부가 이끄는 획일적인 집단’이라는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소비에트나 공장위원회처럼, 볼셰비키 당은 우파, 좌파, 중간파 경향들이 끊임없이 이동하고 재편성되는 초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실천적으로는 연방주의와 자율성의 요소도 강하게 드러났다. 지역조직 또는 부문조직들은 자신들의 권한과 선택을 옹호했고, 때로는 중앙위원회에 반기를 들었다. 수도에서 내려지는 주요 결정들은 종종 장시간의 토론 끝에 중앙 지도부와 이러한 반(半)자치조직들이 타협에 이른 결과였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두 조직이 핵심이었다. 당을 이끈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는 수도의 공장과 거주 지역에서 당의 일상 활동을 조직했다. 군사조직의 지도부는 (시기에 따라) 약 21만 5천 명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주둔군 내의 정치활동과 조직활동을 지휘했다. 이 두 조직은 (특히 군사조직은) 7월의 날들에 많은 책임이 있었다. 7월 봉기는 한편으로는 대중의 혁명적 자발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 세력, 주로 볼셰비키들이 내린 결정이 결합된 결과였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부분적으로 반대하는 의견을 냈지만, 결국 자신들이 조직하지도 않았고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았던 이 사건을 함께 감당했다.[73] 2월부터 10월까지 볼셰비키 당은 두 가지 동시적인 변혁을 겪었다. 첫째, 수만 명의 노동자 전위들을 끌어들였다. 2월 혁명 직전 2만 명으로 추산되었던 당원 수는 10월 혁명 직전 10만 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당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둘째, 통합 대회로 알려진 제6차 대회(1917년 7월 26일~8월 3일)를 통해, 당은 과거 볼셰비키 또는 멘셰비키로 활동했거나 독립적으로 활동했던 다양한 집단 및 개인들과 합병했다. 가장 중요한 세력은 트로츠키를 포함하여 4,000명의 회원을 보유한 ‘메즈라이온치’(구역연합)였다.[74] 이전에 레닌은 여러 차례 비꼬는 어조로 트로츠키를 언급하며 그와 함께라면 아무것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트로츠키는 당의 지도부, 혁명의 지도부, 신생 노동자국가의 지도부로서 거의 레닌의 분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레닌에게 결정적인 기준은 혁명 그 자체였다. 강령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혁명적 사건의 불길 속에서 실제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1917년을 거치면서 트로츠키가 당에 대한 레닌의 입장에 동의했고 레닌 또한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동성에 대한 트로츠키의 결론에 타당성을 인정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물론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트로츠키주의와 레닌주의의 혁명관이 종종 주장되는 것만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는 점도 강조되어야 한다. 레닌은 이미 1905년에 이렇게 역설했다. “민주주의 혁명이 일단 성취되었을 때, 우리는 바로 의식적이고 조직된 노동자계급의 역량을 갖고 사회주의 혁명의 길로 즉시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중단 없는 혁명을 추구한다. 우리는 도중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75] 7월의 날들 이후 반동과 탄압의 시기가 이어졌고, 볼셰비키들은 다시 은신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몇 주 만에 완화되었고, 코르닐로프가 쿠데타를 시도한 8월 말에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임시정부의 케렌스키 총리가 새로 총참모장으로 임명한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시도와 실패는 마침내 임시정부의 신뢰를 무너뜨렸고 진퇴양난 속에 빠뜨렸다. 임시정부를 계속 지지했던 개량주의자들도 마찬가지 상황에 빠졌다. 9월, 볼셰비키가 거침없이 부상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를 시작으로 모스크바와 다른 여러 지방에서 소비에트의 다수당이 되었다. 트로츠키는 1905년에 이어 다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레닌은 이러한 새로운 상황을 인식하고 환영하면서도 볼셰비키 지도자들에게 지체 없이 봉기 준비를 시작할 것을 계속해서 압박했다. 혁명의 승리로 가는 길이 열렸고, 10월 24~25일 전국 소비에트 대회가 공식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이렇게 매우 간략히 요약한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의 사건 전개는 훨씬 더 자세하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를 통해 우리는 혁명을 추구하고 준비하는 당·지도부와 대중의 자기조직화가 결합함으로써 사회 혁명의 과정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76] 레닌주의와 레닌주의 조직이 노동자계급 운동의 상당 부분에 지침이 되고 이상이 되고 모델이 되었다면, 이는 분명 1917년에 그들이 거둔 승리 때문이었다. 볼셰비즘의 승리는 증오이든 열광이든, 반감이든 헌신이든 모든 곳에서 레닌주의가 주목받게 만들었다.[77] 레닌의 당: "새로운 유형"의 당? 서두에서 제기했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레닌은 혁명적 조직의 개념을 새롭게 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을까? 이 글에서 우리는 “레닌주의 당”에 관한 체계적인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레닌주의 당”의 결정적인 성격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획일적인 형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우리는 레닌이 정치 상황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정립해 나간 과정을 강조했다. 스탈린주의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레닌주의 당”의 완성된 지침서로 해석하는 것과 달리, 레닌은 1914년 이전까지는 “새로운 유형”의 당을 건설하려 한다고 선언하지 않았으며, 최소한 이론적 수준에서는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가장 진보된 부분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레닌은 종종 (계급·당·지도부 간의 관계, 대중의 자발성, 당의 단결 문제 등에서) 당시 국제 노동자운동 내 대다수의 견해와 상충되는 독특한 입장을 발전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그럼으로써 제2인터내셔널 내부에서 룩셈부르크나 카우츠키 등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레닌은 이 시기에도 자신의 방향이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방향과 일치한다고 확신했으며, 조직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차르 러시아라는 틀을 넘어 일반화하려 하지 않았다. 1914년까지는 지배적인 정통 이론으로부터 부분적인 단절에 가까웠다. 레닌의 접근은 러시아의 특수성에 의존했으며, 보편적인 이론으로 발전되지 않았다. … 1914년 이후부터 더 체계적으로 되었다.[78]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제2인터내셔널의 뿌리 깊은 모순이 드러나면서 국제 노동자운동의 완전한 재편이 시작되었다. 1914년 여름, 유럽 주요 열강의 참전으로 노동자 정당들은 중대한 딜레마에 직면했다. 국가적 단결을 거부하고 불법 단체로 선포되어 비밀 조직으로 전락할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자국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에 동조할 것인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사회적 쇼비니즘’에 빠져 전쟁자금 조달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재확인했던 노동자 국제주의 원칙을 저버렸다. 레닌은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믿을 수 없었고, 혁명운동 내부에 분열을 조장하려는 중상모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 조직이 (특히 그 지도부가) 사회주의 혁명과 계급연대의 대의를 배신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레닌은 이 상황을 파악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 배신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고 실천적인 결론을 (특히 조직적인 측면에서) 도출하는 것이 시급하고 필수적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대부분의 사회민주당들, 특히 제2인터내셔널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독일 사회민주당은 총참모부, 정부, 그리고 자본가계급의 편에 서면서 노동자계급을 배신했다. 이는 세계사적 중요성을 가진 사건이며, 철저한 분석이 필요하다.[79] 이 비극은 레닌에게 심오한 정치적 재무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1914~15년, 레닌은 프로이센의 장군이자 군사 이론가인 카를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했으며, 헤겔을 주의 깊게 읽고 그의 변증법을 재검토했다.[80] 레닌이 도달한 핵심 사상 중 하나는 제국주의 전쟁이 이전의 "평화적 발전" 시기와 단절되는 전환점이 되었고 따라서 전반적인 역사적·전략적 틀에 대한 재개념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레닌은 이렇게 썼다. 유럽 전쟁은 매우 심오한 역사적 위기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뜻한다. 여느 위기와 마찬가지로, 이 전쟁은 뿌리 깊은 모순을 악화시키고 표면으로 드러냈다. … 제2인터내셔널은 (시작점을 1889년으로 또는 1870년으로 잡느냐에 따라) 25년 또는 45년 동안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사회주의 세력에 기초적인 조직을 제공하는 매우 중요하고 유익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소멸했다.[81] 제국주의 시대와 1914년에 시작된 위기 앞에서, 레닌은 노동자운동 내 기회주의의 역할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전쟁 이전에도 레닌은 국제 사회민주주의 내 기회주의에 맞선 투쟁을 이미 여러 차례 제기했다. 예를 들어, 1907년에 출간된 모음집 <12년간>의 서문에서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부터 시작된 당내 정치적 논쟁을 설명했다. 그가 사회민주노동당을 분리하여 독자적인 조직을 창설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기회주의와의 투쟁 때문이었다.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다양한 지부들에도 비슷한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14년의 비극으로 달라진 것은 노동자운동 내 이러한 기회주의 경향의 중요성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거대한 전쟁이 만들어 낸 위기는 모든 장막을 찢어버렸고, 관례를 쓸어버렸으며, 오랫동안 곪은 고름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본가계급의 동맹으로서 기회주의의 진정한 역할을 폭로했다.[82] 다시 말해, 레닌이 볼 때 기회주의는 반혁명적 역할을 역사적으로 입증했으며, 더 이상 그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한 정당 내의 ‘있을 법한 목소리’”[83]로 여겨질 수 없었다. 기회주의에 맞선 투쟁의 성격이 바뀌었고, 레닌은 이로부터 정치적·조직적 결론을 도출했다. 더 이상 같은 조직 내의 여러 경향 간의 싸움으로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노동자정당으로부터 기회주의를 완전히 조직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되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레닌은 일찍이 1914년 8월 제2인터내셔널과의 결별을 주장하고 기회주의(또는 ‘사회적 쇼비니즘’과 계급화해)에 맞서는 인터내셔널의 재조직에 착수했다. 이는 짐머발트 회의(1915), 키엔탈 회의(1916)를 거쳐 제3인터내셔널의 창설(1919)로 이어졌다. 1914년의 배신으로부터 레닌이 얻은 근본적인 교훈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정치적 분리선에 입각해 정치적·전략적으로 기회주의와 구별되는 조직을 국내적·국제적으로 건설해야 할 필요성이었다. 새로운 상황에 맞게 행동하기를 거부하고 사회적 쇼비니즘과의 투쟁을 하나의 당 안에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 즉 ‘중도파’(특히 가장 심각한 “배신자”였던 카우츠키)는 레닌이 볼 때 혁명조직 재건의 길에 놓인 장애물이었고, 따라서 그들과 싸워야 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기회주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사이에서 (독일 사회민주당 내 ‘중도파’처럼) 갈팡질팡하는 것과 제2인터내셔널의 파산을 은폐하거나 외교적 수사로 위장하려는 것은 노동자계급에게 최악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84] 이론적·실천적 차원에서 1914년의 단절은 “제2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85]와의 단절, 그 수장인 카우츠키와의 단절, 그리고 혁명을 점진적(“진화적”)이고 거의 “자연적”(“유기적”)인 과정으로 보는, 즉 카우츠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준비되는 게 아닌” 것으로 보는[86], 그래서 사회민주주의를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주의”(또는 “수동적 급진주의”)[87]로 이끈 카우츠키의 혁명 개념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카우츠키의 개념에 따르면, 조직은 소극적이고 끈질기게 힘을 축적한 결과로만 형성된다. 레닌은 (관료화되기 이전인) 초창기 제3인터내셔널이 이론적·정치적으로 재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그가 ‘제국주의 시대’라고 부른)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알리는 신호로 여겼다. 이 시대의 정치적 시간은 더 이상 “똑같고 공허한” 것이 아니라, 단절, 균열, 그리고 “위기”로 특징지어졌다. (1905년부터 성숙되어 온 레닌의 “혁명적 위기” 개념은 이 시기에 비로소 완전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당은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하고 대중의 에너지를 국가에 대항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88] 이러한 맥락에서 당은 더 이상 계급의식의 등기부나 수동적인 세력 축적체가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잊지 않고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다양한 전술을 개발하고 적용하면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진정한 전략적 주체가 되어야 했다. 리는 레닌이 1914년 이후에도 “1914년 이전의 카우츠키”를 계속 언급했다고 지적[89]하는데, 이는 1914년에 발생한 단절과 모순되지 않는다. 또한 에밀리오 알바몬테와 마티아스 마이에요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무엇을 할 것인가>만을 통해 레닌주의 당 개념을 “재발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단지 당의 “모델”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당의 과제를 실행하는 데 필요한 전략적 작업에 관한 문제이다. “사회적 쇼비니즘”에 맞선 그러한 투쟁들과 분리된 방식으로는 레닌의 당 개념의 기원을 이해할 수 없다.[90] * * *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신자유주의와의 결탁과 소련 붕괴의 결과로 크게 후퇴했다. 이들 노동자계급 조직들이 부르주아 국가에 점점 더 통합된 지도부의 영향력 아래로 노동자운동을 길들이는 도구로 변모한 것은 노동자운동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노동자운동은 연이은 패배를 겪었으며, 특히 1968년 국제적인 혁명운동의 실패, 신자유주의 시대의 제국주의 반격과 부르주아 복고 이후 혁명적 연속성의 단절로 이어졌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세계 노동자계급이 객관적 차원에서는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직력과 계급의식에 지속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여러 징후들이 노동자계급의 특정 부문과 대중 전반에서 주체적 재구성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설은 2019년 이후 국제 계급투쟁이 고조되는 맥락을 주목한다. 이 국제 계급투쟁은 때때로 대중파업으로 이어지는 봉기와 반란, 부르주아 법치주의의 한계에 도전하는 대중적 급진주의, 그리고 체계적 인종차별과 지구 파괴에 맞서 청년층의 상당한 부문이 폭넓게 정치화되는 현상을 결합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아직 단편적이지만 매우 중요하며, 혁명의 전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진정한 전투 조직이 출현할 수 있느냐는 이러한 전위 부문들과의 결합 능력에 크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적 조직을 재건하기 위한 레닌주의 조직관은 엘리트주의 조직관이나 주변화된 편협한 집단을 육성하는 조직관과는 정반대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레닌주의 조직관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자각한 부문을 (혁명의 준비를 목표로 하며 투쟁하는 대중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중앙집권적인 당으로 결집시켜 내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투쟁으로 떨쳐 일어서는 노동자들에게 (수십 년간 지배계급과의 화해 정책과 “사회적 대화”에 얽매여 있는) 노동자운동의 관료적 지도부와는 다른 독립적인 정치적·조직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원저자: 마리나 가리시 (프랑스 ‘연속혁명’ 활동가) 2021년 6월 12일에 프랑스 연속혁명(RP Dimanche)에 처음 게재됨 2021년 10월 3일 미국 레프트보이스(Left Voice)에 번역된 글을 재번역 [1] Lars Lih, Lenin Rediscovered: What Is to Be Done? in Context (Leiden: Brill, 2005). [2] 이를테면 다음을 보라: Historical Materialism 18, no. 3 (2010). [3] 1891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에르푸르트 대회에서 채택된 ‘에르푸르트 강령’은 제2인터내셔널 안에서 큰 권위를 가졌는데, 리는 레닌이 이 강령에 충실했다는 뜻에서 레닌을 ‘에르푸르트인’이라고 부른다. [4] Stéphane Courtois, Lénine, l’inventeur du totalitarisme (Paris: Perrin, 2017). [5] Paul Le Blanc, Lenin and the Revolutionary Party (Chicago: Haymarket Books, 2016). [6] 이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전형적인 예로, 스탈린의 저서 <레닌주의의 기초>가 있다. 이 책에서 스탈린은 당에 관해서 “당은 분파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는 의지의 통일체”라거나, “당은 기회주의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강해진다”고 말한다. [7] ‘볼셰비키화’는 1924년 이후 코민테른이 스탈린의 지시를 강요하고 공산당 내 비판의 권리를 극적으로 제한하는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내건 구호이다. [8] Daniel Bensaïd, Stratégie et parti (Paris: Les Prairies ordinaires, 1986). [9] Le Blanc, Lenin and the Revolutionary Party. [10] Pierre Broué, Le parti bolchevique, histoire du P.C. de l’U.R.S.S. (Paris: Editions de Minuit, 1963). [11] 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은 러시아 특유의 후진성과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선진적인 요소들이 불균등하게 결합되었다는 데, 그리고 차르 전제정치 아래서 최소한의 정치적 자유조차 누리지 못했다는 데 그 특징이 있었다.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이러한 특수성은 레닌주의의 전개과정을, 나아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내부의 논쟁 전반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다음을 보라. Broué, Le parti bolchevique; Leon Trotsky,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1930). [12] 러시아 자본가계급은 반자유주의적 전제정치, 대규모의 지주계급, 서구 자본가계급이라는 한 쪽의 압박과 가난한 농민 대중, 이미 상당히 집중된 신생 노동자운동이라는 다른 쪽의 압박 사이에 끼인 가운데 느리고 어렵게 발전했다. 노동자운동의 급진화를 두려워했던 자본가계급은 전제정치와 타협하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13] 브루에가 쓴 것처럼, 혁명가들은 “(알렉산드르 2세가 말했듯이) 오로지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피할 목적으로 위로부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체제, 비록 평화적일지라도 어떤 형태든 반대를 허용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여기는 체제에 맞닥뜨렸기 때문에, 폭력혁명 외에는 다른 길이 남아있지 않았다.” (Broué, Le parti bolchevique). [14] Broué, Le parti bolchevique. [15] 레닌, 1899, <우리의 당면 과제>. [16] 레닌은 이어서 “이러한 통일을 이루고, 적절한 형태를 발전시키며, 편협한 지역적 고립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 이것이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당면한 가장 긴급한 과제”라고 말하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지역적 활동을 단일한 당의 활동으로 통합하는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곳에서 레닌은 “그러므로 문제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활동을 ‘아마추어적’ 방식으로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당 활동으로 조직하여 그 모든 활동이 하나의 공통된 기관으로 온전히 반영되도록 할 것인지에 있다.”라고 썼다. (레닌, 1899, <하나의 긴급한 문제>) [17] 레닌, 1899, <우리의 당면 과제>. [18] 레닌, 1899, <우리의 당면 과제>. [19] 레닌, 1900, <파업에 대하여>. [20] 레닌, 1899, <우리의 당면 과제>. [21] 벨기에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마르셀 리브만은 이 책에 대해 “혁명적 계획을 실행할 수단을 건설하고자 노력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사상을 가장 일관성 있게 설명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Marcel Liebman, Leninism under Lenin (Chicago: Haymarket Books, 2016), 29; first published in French in 1973. [22] 리는 레닌이 “경제주의자”라는 꼬리표를 정치투쟁을 벌이는 담론적 장치로 사용했다고 썼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의 논쟁은 경제주의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이스크라 지도부 내 주요 경쟁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경제주의를 이용하는 논쟁이다. 레닌은 경쟁자들에게 ‘경제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 있다면 그들의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 (Lih, Lenin Rediscovered, 11). [23] 리브먼이 지적했듯이, “레닌의 비판은 노동자계급의 자발적인 행동보다는 그 의식, 즉 자연발생적이고 본능적이며 결과적으로 결함이 있는 의식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Liebman, Leninism under Lenin, 30.) [24] 레닌, 1902, <무엇을 할 것인가>, 제2장.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미 제시한 개념을 여기서 다시 발견한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시대에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즉, 사회에 대한 물질적 지배력을 가진 계급은 동시에 정신적 지배력을 가진 계급이다.” [25] 레닌이 말하는 전업 활동가의 개념은 당에서 급여를 지급하는 상근 활동가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레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혁명적 활동에 전념할 활동가들을 모집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26] 레닌, 1902, <무엇을 할 것인가>, 제3장. 레닌이 카우츠키로부터 빌려 온 “오직 밖으로부터만”이라는 이 표현은 수많은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지면 관계상 자세히 다루지는 않되, 레닌이 카우츠키의 표현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만 언급해 둔다. 레닌에게 있어 “오직 밖으로부터만”의 의미는 혁명운동 안에서 소부르주아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한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참조: Hal Draper, “The Myth of Lenin’s ‘Concept of the Party’ or What They Did to What Is to Be Done?”; Daniel Bensaïd, “Strategy and Politics: From Marx to the Third International,” Historical Materialism 28, no. 3 (2020): 230–66. [27] 레닌, 1902, <무엇을 할 것인가>, 제3장. [28] 노동자 헤게모니라는 이 개념은 나중에 그람시가 더욱 발전시켰다. [29] 아이러니하게도 두 의견 모두 같은 이스크라 경향의 성원들이 제안했다. [30] 레닌, 1904, <일보 전진, 이보 후퇴>. 마르토프가 정식화하고 대회에서 채택된 안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당원이란 당의 강령을 인정하고, 당을 재정적으로 지지하며, 당 조직 가운데 하나의 지도 아래 당을 정규적으로 직접 지원하는 사람이다.” 레닌의 안은 다음과 같다. “당원이란 당의 강령을 인정하고, 당을 재정적으로 지지하며, 당 조직 가운데 하나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이다.” [31] 미래의 볼셰비키들은 대회 초반에는 소수였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대회 말미에는 다수파(볼셰비키)가 되었다. 대회 종료 직전, 7명의 대의원이 대회를 떠났다. 그중에는 유대인 사회주의자 조직인 분트 소속 대의원 5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러시아 당의 다수(미래의 볼셰비키 대부분을 포함)가 “연방” 체제를 통해 분트에게 완전한 자율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 뒤를 이어 “경제주의자” 대표 2명도 다른 이유로 대회를 떠났다. 그래서 대회 초반의 다수가 소수파(멘셰비키)가 되고, 반대로 소수가 다수파(볼셰비키)가 되었다. [32] 제2차 당 대회 이후 몇 주 동안, 레닌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마르토프가 이끄는 멘셰비키는 편집부에 더 많은 멘셰비키 인사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이스크라와 협력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처음에는 레닌과 동맹 관계였던 플레하노프도 결국 마르토프 분파의 요구에 굴복하여 (멘셰비키에 우호적인) 기존 편집진을 다시 영입했다. 레닌은 이스크라 편집부에서 사임하기로 결정하고 ‘이스크라 편집부에 보내는 편지’와 ‘내가 이스크라 편집부에서 사임한 이유’를 포함한 여러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33] 레닌이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을 묘사한 내용이다. [34] 레닌의 인용에 따르면 악셀로드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우리는 가장 먼저 당의 가장 적극적인 요소의 조직, 즉 혁명가의 조직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급의 당이기 때문에, 비록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당에 의식적으로 동조하는 사람들을 당의 대열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계급의 정당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어떤 논리로 당에 소속하는 사람과 당에 동조하는 사람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정반대이다. 의식 수준과 활동 수준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당으로의 접근 정도 또한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는 계급의 당이므로, 계급의 거의 전체가 (그리고 전시나 내전 시에는 계급의 전체가) 우리 당의 지도 아래 행동해야 하고, 가능한 한 우리 당에 긴밀하게 동조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계급 전체 또는 계급의 거의 전체가 사회민주당과 전위의 의식 수준과 활동 수준까지 고양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추수주의’에 불과하다. 현명한 사회민주주의자라면 자본주의 아래서는 (미성숙한 층에게 더 수용되기 쉽고 더 초보적인) 노동조합 조직조차도 계급 전체 또는 계급의 거의 전체를 포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전위와 전위에게 이끌리는 대중 사이의 구분을 잊고, 전위가 끊임없이 더 넓은 대중을 선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의무를 잊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우리 과제의 거대함을 외면하고 그 과제를 축소하는 것이다. 당에 소속하는 자와 동조하는 자의 차이, 자각된 능동적인 자와 소극적으로 조력하는 자 사이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눈감기, 그러한 망각이다.” (레닌, 1904, <일보 전진, 이보 후퇴>) [35] 레닌, 1904, <일보 전진, 이보 후퇴>. [36] 레닌, 1904, <일보 전진, 이보 후퇴>. [37] 룩셈부르크가 자신의 논문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조직 문제>에서 제기한 유명한 논쟁은 레닌의 반박을 불러일으켰고, 카우츠키는 이 논문을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론지인 《새시대》에 게재하기를 거부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Daniel Guérin, Rosa Luxemburg and Revolutionary Spontaneity; Le Blanc, Lenin and the Revolutionary Party. [38] 레닌은 또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간의 이러한 논쟁을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맥락에서 위치지우고자 다음과 같이 썼다. “조직 문제에 있어서 기회주의의 이러한 근본적인 특징들(자율주의, 귀족적 또는 지식인적인 무정부주의, 추수주의, 지롱드주의)이 적절히 변형되어 전 세계 모든 사회민주주의 정당에서, 혁명적 진영과 기회주의 진영으로 분열되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그런 분열이 없는 곳이 있을까?), 관찰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39] Le Blanc, Lenin and the Revolutionary Party. [40] 그렇지 않다면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통일하려 한 그의 결심이나 스웨덴에서 열린 통합대회 직전 그의 입장(아래에서 논의될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41] Hal Draper, “The Myth of the Lenin’s ‘Concept of the Party’…” [42] “투쟁에서의 경험은 다른 상황에서 수년간의 선전 활동보다 더 빠르고 심오하게 깨달음을 준다.” (레닌, 1905, <정치파업과 모스크바의 가두투쟁>); “혁명적 시기는, 정치적 사태전개의 아찔한 속도와 정치적 충돌의 격화 덕분에, {사상을} 실천적으로 시험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레닌, 1905, <혁명은 가르친다>) [43] 1905년 혁명 이후에도, 레닌은 다가올 혁명이 “그 혁명이 가져오는 경제적·사회적 내용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레닌, 1907, <농업문제와 혁명세력>). 하지만 레닌은 자본가계급이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경우 자본가계급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을 것이라면서, 따라서 노동자계급이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적 독재”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이 1905년 여름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에서 제시한 이 정식은 멘셰비키와 트로츠키의 개념 사이에서 중간적인 입장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이미 1906년 <평가와 전망>에서 연속혁명 이론의 초기 버전을 제시했다. 레닌은 1917년 초, 특히 <4월 테제>를 계기로 이중권력이 혁명의 부르주아적인 첫 번째 단계와 “노동자와 빈농이 권력을 장악해야 할” 다가오는 두 번째 단계 사이의 “이행” 상황을 반영한다고 역설하면서 트로츠키가 이전부터 견지하던 견해와 수렴하게 되었다. [44] 1905년 4월에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3차 대회에는 볼셰비키만 참여했다. 멘셰비키도 같은 해에 모임을 가졌는데, 그것은 협의회로 불렸다. [45] 레닌, 1905, <혁명은 가르친다>. [46]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분트,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 폴란드 사회민주당, 그리고 우크라이나 혁명당이 참여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조직들의 협의회는 만장일치로 두마에 대한 적극적인 보이콧 전술을 채택했다.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가 채택하고 우리가 <프롤레타리아>에서 옹호했던 전술의 기본 원칙은 … 이제 하나의 유감스러운 예외를 제외하고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 전체의 전술적 근간을 이루고 있다. 독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예외는 <이스크라>와 멘셰비키이다.” (레닌, 1905, <정치적 조직화에 대한 첫 번째 평가>) [47] 이러한 정치적 우유부단함을 보면서, 레닌은 멘셰비키가 “사회민주주의 내부의 기회주의 진영”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다. [48]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슬로건을 채택한 급진적인 학생들은 두마에 들어간 ‘입헌민주주의’ 개량주의자들의 저열함을 혐오하는 모든 민주 세력의 선봉대이다.” (레닌, 1905, <정치파업과 모스크바의 가두투쟁>) [49] 1905년 혁명 당시 독립적인 멘셰비키 활동가였던 트로츠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50] 레닌, 1905, <우리의 과제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51] 레닌, 1905, <우리의 과제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대중운동이 확산될수록 각 계급의 진정한 본질이 더욱 명확히 드러날 것이며, 당은 사건을 뒤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계급을 이끌고 조직하는 역할을 더욱 절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 사회 운동의 새로운 흐름이 더욱 넓어질수록 이러한 흐름을 위해 새로운 통로를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사회민주주의 조직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레닌, 1905, <새로운 과제와 새로운 세력>) [52] 레닌, 1905, <우리의 과제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53] 합법 활동은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안에서 논쟁과 갈등의 대상이 되었다. [54] 레닌은 암기한 공식만을 거듭 되풀이하는 사람들을 조롱했다. [55] 당의 문호개방을 걱정하는 볼셰비키 간부들에게 레닌은 이렇게 답했다. “동지들, 위험을 과장하지 말자.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이름을 알렸고,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냈으며,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간부들을 양성해 냈다. 이제 영웅적인 노동자계급이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또한 명확한 목표를 가진 조직 안에서 순수한 사회민주주의 정신으로 일관되게 투쟁할 수 있는 능력을 행동으로 증명했다. 그러니, 우리 당에 속한 노동자들, 또는 내일 중앙위원회의 초청으로 입당할 노동자들 100명 중 99명이 사회민주주의자일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노동자계급은 본능적으로, 자발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이며, 사회민주주의가 10년 넘게 기울인 노력은 이러한 자발성을 의식으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동지들, 허상을 만들어내지 말라! 활력 있고 성장하는 모든 당에는 언제나 불안정, 동요, 흔들림의 요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확고하고 견고한 핵심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영향력에 굴복할 것이다.” (레닌, 1905, <당의 재조직>) [56] 레닌, 1905, <당의 재조직>. [57] 1906년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에 관해 이런 결의를 채택했다. (1) 당 기관지와 당 회의에서 모든 당원은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과 개별적인 관점을 자유롭게 표명할 완전한 권리가 있다. (2) 공개적인 정치 집회에서 당원들은 당 대회 결정에 반하는 선동을 삼가야 한다. (3) 어떠한 당원도 그러한 집회에서 당 대회 결의에 반하는 행동을 촉구하거나, 당 대회 결정과 부합하지 않는 결의안을 제안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 레닌은 “중앙위원회가 비판의 자유는 부적합하게도 너무 좁게, 행동의 통일은 부적합하게도 너무 넓게 규정했다”고 비판하면서 이렇게 제안한다. “당 강령의 원칙이라는 범위 안에서의 비판은 당 회의뿐만 아니라 공개 집회에서도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이러한 비판, 또는 그러한 ‘선동’(비판은 선동과 뗄 수 없기 때문)은 금지될 수 없다. 당의 정치적 행동은 통일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행동의 통일을 해치는 어떠한 ‘호소’도 공개 집회나 당 회의, 또는 당 간행물에서 용납될 수 없다. … 예를 들어보자. 당 대회는 당이 두마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구체적인 행동이다. 선거 기간 중에는 어느 곳의 당원도 기권을 촉구할 권리가 없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선거 참여 결정에 대한 ‘비판’은 용납될 수 없는데, 이는 사실상 선거 캠페인의 성공을 위태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거가 공고되기 전에는, 어디에 있든 당원들은 선거 참여 결정에 대해 비판할 완전한 권리를 가진다.” (레닌, 1906,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 [58] 레닌, 1906,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 [59] 레닌, 1906,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 [60] Georg Lukács, The Thought of Lenin: The Relevance of the Revolution, [1924], Gonthier, 1972. [61] “우리 당의 우파는 현재 러시아에서 진행 중인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완전한 승리를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승리를 두려워하며, 인민 앞에 그러한 승리의 슬로건을 단호하고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자본가계급만이 독자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거나, 오직 자본가계급만이 부르주아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를 저속하게 왜곡한 본질적으로 잘못된 생각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다. 부르주아 혁명의 완전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위한 전위 투사로서의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우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 따라서 우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봉기에 대해 (완곡하게 말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10월과 12월의 경험에 대해 그리고 당시 발전했던 투쟁의 형태들에 대해 무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그들은 헌법적 환상에 맞서는 투쟁, 즉 진정한 혁명적 시기로 나아가려면 늘 먼저 겪게 되는 투쟁에서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레닌, 1906, <통합 당 대회에 관한 보고>) [62] 레닌, 1906, <통합 당 대회에 관한 보고>. [63] 당이 혁명적 기회에 대비하도록 하기 위해 레닌이 진정으로 몰두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결정론적이고 자연주의적으로 해석했던 제2인터내셔널, 특히 카우츠키의 관점과 뚜렷이 대조된다. 카우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민주당은 혁명정당이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가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지도 않고, 우리의 적들이 그것을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혁명을 촉발하거나 준비하려는 어떤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대로 혁명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형태로 혁명이 일어날지 전혀 말할 수 없다.” (Jean Quétier, “The Question of Will in Karl Kautsky,” La Pensée, no. 380, 2014) [64] 레닌, 1905, <모스크바 사건들의 교훈>. [65] Broué, Le parti bolchevique [66] 레닌, 1910, <평론가의 노트>. [67] 레닌, 1910, <평론가의 노트>. [68] Le Blanc, Lenin and the Revolutionary Party. [69] 참조: Alexander Rabinowitch, Prelude to Revolution. The Petrograd Bolsheviks and the July 1917 Uprising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68, reprinted 1991); Broué, Le parti bolchevique; E. H. Carr, The Bolshevik Revolution, 1917–1923, vol. 1 (London: Pelican Books, 1966). [70] 레닌, 1917, <멀리서 보내는 편지>. [71] Nicolas Soukhanov, La Révolution russé (Paris: Éditions Stock, 1965) [72] 레닌, 1917, <4월 테제>. [73] 참조: Trotsky,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74] 여기에는 모이세이 우리츠키, 아돌프 요페,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다비드 랴자노프 등 다른 주요 볼셰비키 지도자들도 포함되었다. [75] 레닌, 1905, <농업문제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의 태도>. [76] 트로츠키는 당·지도부와 대중의 결합을 피스톤과 증기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한 바 있다. “대중 속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과정을 연구해야만, … 정당과 지도자들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독립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혁명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지도하는 조직이 없다면 대중의 에너지는 피스톤 상자 안에 갇히지 않은 증기처럼 흩어져 버릴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피스톤이나 상자가 아니라 증기이다.” (Trotsky,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77] Liebman, Leninism under Lenin, 147. [78] Bensaïd, Stratégie et parti. [79] 레닌, 1914, <제2인터내셔널의 실패>. [80] 이와 관련해 다음을 참조: Emilio Albamonte and Matias Maiello, Socialist Strategy and the Art of War; Stathis Kouvelakis, “Lenin as Reader of Hegel: Hypotheses for a Reading of Lenin’s Notebooks on Hegel’s The Science of Logic,” in Lenin Reloaded: Toward a Politics of Truth, ed. by Sebastian Budgen, Stathis Kouvelakis, and Slavoj Žižek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07), 164. [81] 레닌, 1914, <죽은 쇼비니즘과 살아 있는 사회주의>. [82] 레닌, 1915,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83] 레닌, 1915,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84] 레닌, 1914, <전쟁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85]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Karl Korsch, Anti-Kautsky; Georg Lukács, The Thought of Lenin; Georg Lukács,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Éditions de Minuit, 1960 [1923]; Collectif, “A New Conception of the World.” Gramsci and Marxism, Éditions sociales, 2021. [86] 이 글의 주63) 참조. [87] 안톤 판네코크가 대중파업을 둘러싸고 카우츠키와 논쟁을 벌일 때 사용했던 표현. 참조: Henri Weber, Socialism, the Western Way. [88] 덧붙여 말하자면, 국가 문제에 있어서도 레닌의 공헌은 결정적이었으며, 역시 카우츠키의 개념에 반대했다. 참조: 레닌, 1917, <국가와 혁명>; 레닌, 1918,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89] Lars Lih, “Kautsky as Marxist data base”, Historical Materialism, 2008-2011. [90] Albamonte and Maiello, Socialist Strategy and the Art of War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번역] 퀴어해방은 어디를 향하는가올해[2020년]는 스톤월 항쟁 50주년이 되는 해다. 기업들은 이때를 틈타 대대적인 핑크워싱에 나섰다. 무지개 운동화, 머그, 티셔츠가 쏟아졌다. 자긍심의 달 기간 동안 뉴욕 경찰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 웰스 파고를 비롯한 거대 기업들과 나란히 공식 프라이드 퍼레이드에서 행진했다. 바로 그 같은 달에, 레일린 폴란코(Layleen Polanco)는 라이커스 섬의 교도소 독방에서 사망했다. 오늘날 LGBTQ+ 운동이 품고 있는 모순을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무지개로 치장한 경찰이 행진하는 동안, 유색인 트랜스 여성 활동가는 경찰에게 구금된 채 목숨을 잃었다. 주변화로부터 자본주의와의 동화(Assimilation)로 이토록 빠르게 이행한 집단은 역사상 유례가 없다. 불과 50년 만에, 우리를 구타하고 강간하고 체포하던 경찰이 우리의 퍼레이드에서 함께 행진하게 되었다. LGBTQ+ 운동의 태동기부터 동화 문제는 분열의 중심이었다. 우리는 기존 체제에 편입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체제 자체를 바꾸기를 원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모든 형태의 억압에 맞서 싸우는 전략을 제시함으로써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동화주의와 호모파일 운동 동화주의 조직들은 “단일 이슈” 중심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그들은 LGBTQ+ 의제를 가장 협소한 틀에서 정의하고, 따라서 트랜스젠더, 유색 인종, 노동 계급을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단체들은 로비 같은 전술을 택하고, 퀴어니스의 여러 측면 가운데 성적으로 가장 전복적인 부분들을 순화하려 한다. 민주당 정치인들과 거액 후원자들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밑바탕에 깔린 이데올로기는 이렇다. 미국이 불완전하긴 하지만, 사법부와 의회 같은 기존 제도가 그것을 완성할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정의란 사다리와 같아서, 가로대를 하나씩 올라가듯 권리를 축적해 나가면 결국 평등에 도달할 수 있다는 논리다. 현대 퀴어 운동의 역사는 스톤월에서 시작된 것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고, 전체 운동이 오로지 급진적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은 LGBTQ+ 역사에 대한 오독이다. 게이 운동의 일부는 처음부터 심각하게 동화주의적이었다. 미국 최초의 퀴어 운동 단체 중 하나인 매터신 협회(Mattachine Society)는 1950년에 설립되었다. 이들은 섹스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기 위해 “호모파일(homophile) 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런 단체는 매터신만이 아니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례는 빌리티스의 딸들(Daughters of Bilitis)인데, 이들은 매터신 협회 창립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레즈비언 조직화에 나섰다. 호모파일 조직들은 사회의 끔찍한 억압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1953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성도착”을 공직 해임 사유로 규정하는 행정 명령을 발동했고, “자색 공포(Lavender Scare)”로 알려진 이 시기에 수백 명이 해고되었다. 단 한 개 주를 제외한 모든 주가 동성 간 성행위를 불법으로 명시했다. 클럽 단속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고, 경찰은 LGBTQ+ 당사자들을 구타하고 체포했으며 이들의 이름을 지역 신문에 공개하기도 했다. 1950년대의 초기 LGBTQ+ 조직화는 자색 공포에 더해 적색 공포라는 맥락 위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에 동성애와 공산주의는 빈번하게 동일시되었다. “성도착자”는 의지가 박약하고 쉽게 타락하며, 따라서 “공산주의의 위협”에 굴복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매터신 협회는 전직 공산당원이 설립했으며, 게이들에게 소속감을 부여하고 “규율 있고, 도덕적이며,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는 동성애 윤리를 발전”[1]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50년대 및 60년대 초의 억압적 환경 속에서 매터신 협회는 많은 게이 남성과 소수 레즈비언에게 생명줄 같은 존재였고, 정기 간행물 『매터신 리뷰』를 통해 전국적으로 수천 명에게 다가갔다. 낸 알라미야 보이드가 『무엇이든 허용되는 도시』에서 설명했듯, 매터신은 회원들을 선량하고 품행 바른 미국 시민으로 묘사하려고 애썼다. 매터신 지도부는 “매터신 구성원들이 젠더 경계 위반과 동성애를 뒤섞는 관행과는 거리가 멀다고 인식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유색 인종 커뮤니티의 행동주의 및 정치 투쟁과도 거리를 두었다.”[2] 그들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신뢰를 북돋았고, 『매터신 리뷰』에 실린 한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가 동성애자라고 해서 성조기가 늘어선 광경을 보고 느끼는 자부심과 명예가 남들보다 덜하지는 않습니다.”[3] 매터신은 1953년을 기점으로 뚜렷하게 우경화되었다. 창립자 중 다수가 전직 공산당원이었음에도 조직의 한 분파가 적극적인 반공주의 노선을 취하려 한 것이다. 결국 내부 투쟁을 거쳐 다섯 명의 창립자 중 세 명이 사임했으며, 이들 가운데는 단체의 지도자 해리 헤이(Harry Hay)도 있었다. 1956년에 이르러 매터신 협회는“공산주의자 및 공산주의 활동에 변함없이 반대하며, 그 어떤 공산주의 단체나 위장 조직도 자신들의 단체 명칭을 이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4]이라고 선언했다. 매터신 협회가 반공주의를 표방한 한편, 코민테른의 지령을 따르던 미국 공산당은 반LGBTQ+ 노선을 취했다. 1918년 볼셰비키는 “동성애”를 비범죄화했지만 1933년 스탈린은 이를 다시 범죄화했다. 이는 10월 혁명의 해방 이념에 대한 엄청난 배신이었으며, 전 세계 공산당들이 이 같은 배신을 저질렀다. 공산당의 동성애 혐오 및 트랜스 혐오 정책이야말로, 헤이가 한때 사회주의 조직 활동에 참여했지만 그 활동을 이후 자신이 구축한 게이 운동과 연결시키지 못한 이유였다. 스톤월과 급진적 퀴어들 “마치 댐이 무너지듯, 스톤월은 소수의 남녀가 의식적으로 조직화하여 20년간 조금씩 이룬 진전이 자발적 분노의 물결로 분출한 폭발이었다.” 셰리 울프는 『섹슈얼리티와 사회주의』에서 이렇게 적는다.[5] 스톤월은 블랙 파워, 반전, 페미니즘 운동으로 점철된 급진적 시대의 일부였다. 스톤월은 1968년의 전 지구적 폭발, 즉 프랑스의 5월, 멕시코 학생 운동, 구정 대공세, 스탈린주의 관료 체제에 맞선 대중 투쟁 이후 1년 만에 일어났다. 이런 종류의 항쟁이 스톤월 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1959년에는 로스앤젤레스의 쿠퍼 도넛에서 폭동이 있었고, 1966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컴프턴스 카페테리아 폭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스톤월이 새로운 점은 항쟁 이후에 이루어진 조직화의 성격이었다. 스톤월은 매터신 협회와 정반대였다. 스톤월은 분노했고, 유색 인종과 트랜스젠더의 것이었으며, 일탈적이었고, 폭동이었다. 스톤월 참전자 짐 포랫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호모파일 운동)에게 악몽이었다. 그들은 착하고 받아들일 만하고 현상 유지에 협조하는 미국인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아니었다. 우리는 받아들일 만한 존재가 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6] 실제로 스톤월 폭동 첫날 밤 이후 매터신 협외의 반응은 스톤월 인 앞에서 침착함과 차분함을 촉구하는 글을 써 붙이는 것이었다. 게이 해방 전선(Gay Liberation Front, GLF)은 스톤월 항쟁에서 탄생한 가장 중요한 단체였다. GLF의 신문 『더 랫(The Rat)』은 이 운동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응축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완전한 성적 해방은 기존 사회 제도가 폐지되지 않는 한 실현될 수 없다는 자각 속에서 결성된 혁명적 동성애자 남녀 집단이다. 우리는 성적 역할과 우리 본성에 대한 정의를 강요하려는 사회의 시도를 거부한다.”[7] 그러나 혁명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합의되지는 않았다. 앨런 시어스가 「퀴어 반자본주의」에서 주장하듯, 새로운 운동은 가시성, 전투성, 그리고 규범적 성 역할 및 젠더 역할에 대한 투쟁을 강조했다. 시어스에 따르면 이 시기는 “에로스의 영역을 해방의 장으로 상정한” “성적 유토피아주의”의 시대, 규범성 그 자체가 적수인 시대였다.[8] 새로운 퀴어 운동의 정치적 초점이 “면전에 들이대는” 섹슈얼리티의 급진성이었던 한편, 이 운동의 일부 요소들은 교차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이기도 했다. 베트남의 민족 해방 전선을 떠올리게 하는 게이 해방 전선의 이름 자체가 반제국주의를 향한 명백한 신호였다. GLF는 선언했다. “우리는 모든 피억압자와 우리를 동일시한다. 베트남의 투쟁, 제3세계, 흑인, 노동자… 이 썩어빠지고 더럽고 비열하고 망할 자본주의 음모에 억압받는 모든 이들과.”[9] 마찬가지로 GLF는 특히 흑표당과의 관계를 모색하여 지도부와 만남을 갖고 흑표당의 1970년 대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GLF의 전망에서 조직된 노동 계급은 대체로 부재했다. GLF에게 동화주의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자본의 상층부에서 이루어지는 대의 정치에 맞서 싸운다는 것을 의미했다. 『컴 아웃』 신문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담쟁이로 덮인 별장과 대기업 일자리라는 무익한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게이 부르주아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어떤 영역에서든 동성애자가 배제되는 것 또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10] 일부는 명시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기까지 했다. 시카고 GLF의 회원이었던 한 사람은 이 운동이 “미국 군산 복합체가 지배하는 세계 자본주의는 개혁하거나 개선할 대상이 아니라, 파괴한 다음 평등과 정의의 체제로 대체해야 할 대상이라는 정치적 관점을 갖고 있었다”[11]고 증언한다. 그러나 GLF는 오래가지 못했다. 모든 이에게 열려 있고 합의제로 운영된 회의는 통제 불가능했다. 퀴어라는 사실이 참석자들 간의 정치적 합의를 보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혁명이 목표라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적은 누구인가?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기 시작한 것처럼 남성이 적인가? 아니면 일부 급진적 퀴어들이 말하기 시작한 것처럼 이성애자가 적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국가인가? GLF는 이 질문들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한 단체들로 분열했는데, ‘급진적 레즈비언들(Radicalesbians)’, ‘거리의 복장 도착자 행동 혁명가들(Street Transvestites Action Revolutionaries), ‘게이 활동가 동맹(Gay Activist Alliance)’ 등이 그것이다. 이 단체들은 혁명적 수사를 표방했지만 정치적 사유의 상당 부분에서 자본주의 국가 개념을 결여했으며, 이들이 구상한 “혁명”은 주로 문화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게이 파워”나 레즈비언 분리주의를 유효한 전략으로 간주했다. 많은 이들이 “이성애적 가치”와 “이성애 사회”를 적으로 삼았는데, 이는 애초에 사회를 이성애 및 시스젠더 규범성 중심으로 조직한 자본가 계급과 국가로부터는 분리된 입장이었다. 호모파일 운동 태동기의 스탈린주의처럼 피델 카스트로 또한 사회주의와 새로운 퀴어 운동이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1965년 카스트로는 LGBTQ+ 당사자들을 “생산 증대 부대”로 알려진 강제 수용소에 수감했다. 미국 좌파의 상당수는 카스트로 정부에 무조건적 지지를 보냈는데, 그들은 공산당과 쿠바 연대 여단들처럼“동성애”가 부르주아적이라고 주장하거나, 쿠바에서 LGBTQ+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문화 제국주의”라고 주장했다. 물론 미국의 혁명가들은 미 제국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쿠바 혁명을 방어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LGBTQ+ 당사자들을 강제 수용소에 가둔 비민주적 관료제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LGBTQ+ 운동의 비영리 산업화 급진적 퀴어 조직 운동이 잠잠해지는 것처럼 보이던 바로 그때 에이즈 위기가 시작되었다. 정부가 위기를 인정하지 않는 동안 에이즈는 퀴어 커뮤니티를 초토화했고, 기독교 우파는 에이즈가 동성애자 죄인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찾아온 게이 질병이라고 떠들었다. 이 같은 맥락 위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막과 함께 급진적 퀴어 조직화가 다시 부상했다. 1980년대 후반 액트업(ACT UP)은 정부의 에이즈 무대응, 그리고 에이즈 위기로부터 이윤을 취하는 기업의 탐욕에 맞선 직접 행동에 집중했다. 이후 퀴어 운동은 “주변의 모든 것이 후퇴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전진했다.”[12] 신자유주의가 진군하는 가운데, LGBTQ+ 당사자들의 행동주의, 자본 앞의 형식적 평등이라는 이데올로기, 핑크워싱이 약속하는 이윤이 함께 작용하여 게이와 레즈비언에 대한 가장 차별적인 법률 일부가 폐지되었다. 2003년이 되어서야 연방 차원에서 폐지된 “남색” 금지법 같은 것들 말이다. 2015년 LGBTQ+ 당사자들은 미국 전역에서 결혼할 권리를 쟁취했다. 지금은 커밍아웃한 게이 남성이 민주당 대선 경선의 유력 후보다. 자본주의는 몇몇 게이와 레즈비언을 권력 상층부에 받아들이고 게이·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상품화할 만큼 유연한 체제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동시에 노동 계급 퀴어와 유색 인종 퀴어를 주변화했다. 실제로 LGBTQ+ 당사자들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며, 우리 중 일부가 더 많은 권리를 획득할수록 우리 사이의 인종적, 계급적 차이는 더욱 선명해진다. 지난 30년간 두 가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정부의 공공 복지가 대폭 삭감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게이와 레즈비언 정체성이 일정 정도 정상화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LGBTQ+ 운동은 거의 완전히 비영리 산업 복합체 안에 편입되었다. 이는 비영리 단체가 전반적으로 급증한 현상의 일부인데, 1965년 3천 개에 불과했던 비영리 단체는 오늘날 150만 개가 되었다. 비영리 산업 복합체는 오늘날 동화 논쟁이 벌어지는 아주 협소한 무대다. 특히 휴먼 라이츠 캠페인(Human Rights Campaign, HRC)이라는 비영리 단체가 호모파일 운동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다른 일부 비영리 단체는 스톤월의 유산을 이어가려 하지만, 가장 급진적인 단체들조차 끊임없는 보수적 압력 아래 놓여 있다. 휴먼 라이츠 캠페인 HRC는 매터신 협회가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만큼 훨씬 덜 적대적인 환경에서, 훨씬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조직 활동을 벌인다. 연간 수입이 4,500만 달러를 넘으며, 시티뱅크와 애플 같은 기업 후원자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HRC의 목표는 과거 호모파일 운동의 목표와 놀랄 만큼 유사하다. 바로 자본주의적·가부장적 체제로 동화되는 것이다. 매터신 협회처럼 HRC는 가장 협소한 의제에 집중한다. 그들은 동성혼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LGBTQ+ 군복무 금지에 반대한다. 트랜스젠더는 일관되게 논의에서 배제되는데, HRC가 트랜스젠더를 포함하지 않는 고용 비차별 법안을 지지한 것이 단적인 예다. HRC는 게이와 레즈비언도 존중받을 만한 애국자임을 보여 주려 한다. HRC는 민주당 선거 운동을 하고 미국에서 가장 사악한 자본가들과 밀착한다. 2017년에는 아마존 노동자들이 최저 수준의 임금을 받으면서 비인간적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데 제프 베이조스에게 “평등상”을 수여하기까지 했다. 호모파일 운동 시대의 자본가들과 달리 지금 미국 자본가 계급의 상당수는 정말로 게이 갈라에 참석하고 싶어 한다. 사비를 털어 조직 활동에 쏟아부었던 호모파일 운동 지도자들과 달리 HRC CEO는 연봉이 50만 달러에 달한다. HRC는 모든 권력과 자원을 동원하여 주류 LGBTQ+ 운동의 의제를 통제하며, 민주당 선거 운동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협소한 요구 사항들로 운동을 제한한다. 퀴어 해방 비영리 단체 LGBTQ+ 관련 비영리 단체가 모두 HRC 같은 유형은 아니다. 일부 단체는 훨씬 더 교차적이고 급진적인 정치를 표방한다. 예를 들면 실비아 리베라 법률 프로젝트(Sylvia Rivera Law Project), 오드리 로드 프로젝트(Audre Lorde Project), 경제 정의를 위한 퀴어들(Queers for Economic Justice) 같은 곳들이다. 어떤 이들은 이 단체들을 퀴어 해방 조직이라고 불렀다. 이 단체들은 스톤월의 꿈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발현된 것이다. 스톤월 시대의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는 해방을 위한 응집력 있는 전략이 부재하며, 무엇보다도 이들은 기금 확보를 위한 끝없는 경쟁 속에 갇혀 있다. 이 단체들도 교도소 산업 복합체, 이민 체제, 신자유주의 하에서 후퇴하는 공공 복지 문제 등을 포괄하는 퀴어 해방 전망을 내놓았다는 점에서는 공로가 있다. 스톤월 시대의 조직들처럼 일부는 자본주의 비판도 제시한다. 이들은 딘 스페이드(Dean Spade)가 “상향식 사회 정의”라고 부른 것, 말하자면 조직이 가장 주변화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가장 먼저 다루면 그 위의 모든 계층에도 이익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지향한다. 이 비영리 단체들은 사람들에게 해방된 미래를 상상해 보라고 하지만, 전략 측면에서 이들이 제시하는 것은 개혁을 위한 계획뿐이다. GLF 구성원들처럼 이 단체들에서 활동하는 진보적 퀴어들은 자신들의 목표에 대해서도, 목표를 달성할 전략에 대해서도 합의하지 못한다. 문화적 변화가 목표인가? 아니면 공공 복지의 확대인가? 명확한 정치적 합의가 결여된 상황에서 비영리 단체에 가해지는 보수적 압력을 견디기는 더욱 어렵다. 이 비영리 단체 중 상당수는 퀴어 커뮤니티에 중요하고 절실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게이 주식회사(Gay Inc.)』에서 멀 빔(Myrl Beam)이 주장하듯,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기금을 확보할 필요성 자체가 물질적·보수적 압력이 된다. 비영리 단체 활동가 로건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보조금을 받게 해 준 바로 그 제도를 전복하는 것이 곧 우리의 사명이 된다면, 문제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는 우리가 해체하려는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기 때문이다.”[13]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좌파적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비영리 단체는 자본주의를 끝내지 않은 채,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실제로 만들어 내지 않은 채, 영원히 서비스만 제공하면서 존속할 수 있다. 이것이 퀴어 해방 비영리 단체들의 문제다. 이들은 결코 퀴어 해방을 실현하지 못할 것이다. 소수의 이윤을 위해 다수를 착취하는 사회에서 퀴어 해방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우리의 권리가 사다리가 아닌 이유이며, 우리의 권리가 해방을 향해 축적될 수 없는 이유이며, 교차적 착취와 무지개 CEO가 우리를 해방시킬 수 없는 이유이다. 다수의 퀴어에게, 즉 노동 계급에 속하며 그중 상당수는 유색 인종인 퀴어에게, 게이 대통령이 탄생한들 생계 때문에 허덕이는 현실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퀴어 섹슈얼리티 전유와 상품화에서 명백히 드러나듯, 우리의 섹슈얼리티 그 자체가 해방의 장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하층을 위한 개혁 및 복지를 쟁취하는 투쟁과 교차성만으로는 퀴어 해방을 이루기에 충분하지 않다. 자본주의 비판만으로는 자본주의로부터 해방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퀴어 해방은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건설된 사회, 우리의 모든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는 사회, 더 나아가 자유 시간을 보장하며 우리의 창조적 잠재력을 해방하는 사회, 바로 공산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 우리의 억압과 착취는 문화만 바꾸어서는 끝낼 수 없다. 우리의 억압은 교도소, 경찰, 학교 같은 자본주의 국가의 제도들에, 그리고 국가 안에서 기독교가 수행하는 역할에 뿌리박고 있다. 그것은 주로 여성으로부터 무급 재생산 노동을 추출하는 데 필수적인 젠더 역할에, 그리고 직장 안팎의 총체적 소외에 뿌리박고 있다. 그것은 성적으로 비참한 사회에, 말하자면 직장에서 몸과 마음이 닳고 닳아 집에 돌아오면 그림자만 남는 그런 사회에 뿌리박고 있다. 개혁으로 이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다. 자본가 계급의 자산을 몰수하는 혁명,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와 인류 전체를 해방하는 대규모 문화적 변혁의 물질적 토대를 창출하는 혁명이 필요하다. 이것이 공산주의의 목표다. 자본주의 국가가 무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노동 계급은 강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생산하고 자본주의 전체를 작동시킨다. 그러므로 노동 계급은 혁명의 원동력이다. 전체 체제를 무릎 꿇리고, 집단적·민주적 통제 하에 체제를 다시 가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오늘날 노동 계급은 세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며, 유색 인종, 장애인, 퀴어, 여성, 그리고 물론 백인 시스젠더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대자적” 노동 계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동 계급이 혁명을 이끌기 위해서는 피트 부티지지 같은 자본주의의 토큰이 아니라 자신이야말로 LGBTQ+ 당사자들에 대한 억압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노동 계급과 모든 피억압 집단의 동맹이야말로 사회주의 혁명의 필수적 토대다. 다행히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주의자이거나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들은 지금의 체제가 우리에게 비참함만 안겨 준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가 사회주의라면, 그것도 스탈린이나 카스트로의 동성애 혐오적이고 트랜스 혐오적인 관료제와는 전혀 다른 사회주의라면, 우리는 누구로부터 혹은 어떤 사례로부터 배울 수 있는가? 잔혹한 동성애 혐오라는 스탈린주의의 유산에 맞서는 사회주의의 역사가 존재한다. 이미 1895년에 공산주의자들은 오스카 와일드를 옹호하고 동성애 합법화를 지지한 유일한 집단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볼셰비키는 1919년에 이를 실행했다. 그러나 소련이 관료화되면서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련된 성과를 포함하여 러시아 혁명의 승리들이 점점 더 많이 뒷걸음질했다. 이 시기에 레온 트로츠키와 좌익 반대파(Left Opposition)가 이 반혁명에 맞서 싸웠다. 그 결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모든 반대는 “트로츠키주의”로 알려지게 되었고, 세계 곳곳의 좌익 반대파는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다. 트로츠키도 1940년에 살해당했다. 트로츠키주의는 마르크스와 볼셰비키 혁명의 해방적 사상을 계승하며,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억압 없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이론과 전략을 제시한다. 물론 트로츠키주의의 기치를 내세운 모든 조직이 피억압 집단에 대해 올바른 정치를 견지한 것은 아니지만, 트로츠키주의라는 틀은 분명히 해방을 위한 이론과 전략을 조직할 수 있다. 트로츠키는 가장 억압받는 이들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행 강령』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회주의 조직들은 본성상 노동 계급의 상층부에 관심을 집중하며, 따라서 청년과 여성 노동자를 무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쇠퇴는 임금 노동자이자 가정주부인 여성에게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한다. 제4인터내셔널의 각 부문은 노동 계급의 가장 착취받는 층에게서, 즉 여성 노동자들에게서 지지 기반을 찾아야 한다.” 개혁만을 추구하거나 부스러기를 얻기 위해 자본가들과 협상한다면, 협상의 대가로서 가장 억압받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팔려 나가며, 국제주의가 필연적으로 팔려 나간다. 이것이 동화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정치의 결론이다. 공산주의라는 미래 공산주의가 정확히 어떤 모습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공산주의 사회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착취와 국경과 감옥을 종식시키는 사회, 레일린 폴란코가 잘 살 수 있었을 사회라는 것뿐이다. 공산주의 하에서 우리는 노동 착취와 직장에서의 소외를 끝내고 막대한 자유 시간을 얻게 될 것이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이런 미래를 구상했다. “필요 노동에 전용되어야 하는 본능적 에너지의 양은 (노동 자체가 완전히 기계화되고 합리화되어) 매우 적어질 것이므로, 외부적 힘에 의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광범위한 억압적 제약과 변형이 붕괴할 것이다. … 생의 본능인 에로스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해방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사회에서 가사 노동은 사회화될 것이다. 양육, 요리, 모든 재생산 노동을 공동체가 담당할 것이며, 개인이 수행하더라도 그것은 필요에 의한 노동이 아니라 사랑에 의한 노동이 될 것이다. 볼셰비키와 몇몇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구상했듯이 사회 구성 단위로서의 (이성애 가부장적) 가족은 사라질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젠더 역할의 물질적 토대는 사라질 것이며, 그 이후에 무엇이 올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주장하듯이 공산주의는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돌보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쓰지만, 사냥꾼이나 어부나 목동이나 비평가가 되지는 않는 것”이 가능한 사회를 약속한다. 이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자유와 유연성을 가지고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살아갈 자유를 줄 것이다. 글쓴이: Tatiana Cozzarelli 역자: 강성윤 2020년 4월 19일 Left Voice에 발행된 기사를 번역함 [1] Van Grosse, The Movement of the New Left 1950-1975 (New York: St. Martin’s Press, 2005), 40. [2] Nan Alamilla Boyd, Wide Open Tow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3), 179.︎ [3] “An Open Letter to Senator Dirksen,” Mattachine Review, no. 1 (January/February 1955). [4] “Aims and Principles,” Mattachine Review, no. 2, special issue (January 1956). [5] Sherry Wolf, Sexuality and Socialism (Chicago: Haymarket Books, 2009). [6] Martin Duberman, Stonewall (New York: Plume, 1994), 229. [7] Wolf, Sexuality and Socialism, 129. [8] Alan Sears, “Queer Anti-capitalism: What’s Left of Lesbian and Gay Liberation?,” Science & Society, vol. 69, no. 1 (January 2005), 91-112. [9] Wolf, Sexuality and Socialism, 129. [10] “Editorial 1.” Come Out! Selections from the Radial Gay Liberation Newspaper (New York: Times Change Press, 1970). [11] Fred Eggan, “Dykes and Fags Want Everything: Dreaming with the Gay Liberation Front” in That’s Revolting! Queer Strategies for Resisting Assimilation (Berkley: Publishers Group Press: 2004). [12] Elizabeth Wilson, “Is Transgression Transgressive?” in Activating Theory, ed. J. Bristow and A.R. Wilson (London: Lawrence and Wishart, 1993): 107-117. [13] Myrl Beam, Gay Inc: The Non-Profitization of Queer Politic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8).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노동절에 공무원 노동자가 쉬기까지... 모든 노동자가 노동기본권을 갖는 날까지...2026년 3월 31일, 노동절이 공휴일로 지정[1]되었다. 얼마 전까지 한국의 노동법 체계에 존재하는 법정 유급휴일은 ‘주휴일’과 ‘근로자의날’[2]이 유일했다. 이제 노동절은 모든 이가 쉬는 날, ‘공무원 노동자도 쉬는 날’이 되었다. 여기에는 이재명 정부의 위선과 노동자운동 포섭전략이 있지만, 무엇보다 공무원 사회에서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투쟁한 노동자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노동절 공휴일 지정에 많은 노동자가 공무원 노동자들이 피눈물로 쓴 민주노조의 역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가 투쟁한 역사와 의미를 반드시 새겨야 한다. ‘공무원도 노동자다!’ 공무원 노동자들은 2002년 3월 전국공무원노조 설립부터 국가통제와 공권력 침탈에 맞섰다. 2004년 총파업 대량해고, 이후 연금개악 저지투쟁, 공공성 강화 투쟁,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해고자(해직자) 복직 투쟁 등 500여 명이 해고되고, 수천 명이 징계받는 등 숱한 탄압을 뚫고 투쟁을 이어왔다. 사진: 매일노동뉴스 기사 캡처 17년 해고 투쟁한 공무원 노동자의 심경 공무원노조 해고자로 17년 투쟁 끝에 2021년 복직한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울산지역본부 동구지부장인 이수현 동지의 소감이 매우 궁금했다. “공무원도 노동자라는 요구를 드디어 정부 측에서 인정했다는 것과 5.1. 휴무를 할 수 없었던 교사, 특수고용직노동자 등 노동절 휴일을 함께 즐길 수 있어 기쁘다” “그동안은 ‘근로자의날’ 공무원 노동자 휴식은 단체교섭을 통해 5월 중에 하루를 쉴 수 있었지만, 노동조합이 없는 자치단체는 쉴 수 없었다. 이제는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모두 같은 날 휴식권이 보장되어 뿌듯하다” 간결한 문장 속에 얼마나 많은 투쟁과 의미가 서려 있을까. 이 순간 어떤 투쟁이 떠오르는지도 궁금했다. “2003년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 없는 공무원조합법을 연가투쟁으로 무력화 시켰던 투쟁과 공무원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2004년 총파업, 2차례의 연금개악저지 투쟁, 해고자 원직복직 투쟁이다” 2003년 공무원들의 노조결성을 허용하겠다고 공약한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지만, 돌아온 건 530명의 해고와 3천 명의 징계였다. 하지만 공무원 노동자는 탄압을 무릅쓰고 2004년 4만 5천 명의 총파업 투쟁을 벌이며 ‘노동자’로서 정권과 타협하지 않는 ‘민주노조’의 길을 갔다. 남은 136명의 해고자가 선두에서 오랜 투쟁을 펼친 끝에 해고자들은 문재인 정부 시절 복직했다. 약 20년 공무원노조 희생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회복투)로 투쟁하는 동안 해고노동자들은 공무원노조의 선봉에서 민주노조의 원칙을 지키고 실천했다. 수십 차례 농성장을 ‘폈다 접었다’를 반복했다. 전국을 뛰어다녔다. 지역과 민주노총 차원에서도 전투적 민주노조 운동의 일원으로서 계급적 단결과 연대를 실천하는 투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 시절, 아직 회복되지 않은 피해와 노동기본권 등을 위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해고자 복직 당시 해고 기간 중 법외노조 시절은 공무원 근무 경력에 포함되지 않아 해고자 대부분 십 년 이상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에 따라 임금 차이, 퇴직수당 미지급, 연금가입 기간이 짧아져 수령금액이 정상적인 복무기간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 금고형을 받았던 퇴직자는 연금을 절반 수준만 받고 있기도 하다. 이에 따라 근무 경력 인정으로 수당 및 연금을 정상화하고자 청와대 앞에서 회복투 성원들이 일인시위를 하고 있다” 노동기본권과 평등사회로 나아가는 날까지 이재명 정부는 누구보다 친기업 정권으로서 역할을 다하며 말로는 ‘친노동’을 치장한다. ‘근로자의날’ 이름을 ‘노동절’로 바꾸고, 노동절을 ‘공휴일’로 지정했지만, 헌법에 보장된 공무원과 교사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지 않고 있다. 특수고용과 플랫폼, 프리랜서, 가짜 3.3노동자에게 노동자의 이름조차 빼앗은 채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고 있다. 근로기준법을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하면 될 일을 자본의 편에서 줄곧 외면하고 있다. 자본가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 ‘일하는사람기본법’, ‘노동절 정부행사’ 등으로 ‘노동자를 위하는 대통령’인 척 사기 치며, 대화 테이블로 민주노조의 투쟁과 저항을 거세하려 든다. 노동절에 공무원이 쉬게 되었지만, 반쪽자리도 되지 못한다. 군무원, 근로감독관 등 아직 모든 공무원 노동자가 노조할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노동삼권 중 단체행동권은 아직도 금지되어 있다. 사회 공공성과 노동기본권이 강화되고 정권의 도구가 되지 않고 부정부패로부터 자유로운 투명한 공직사회는 정부가 자본의 이해와 멀어질 때 가능할 것이다. “공무원 노동조건이 OECD 평균 수준이하로 국제기관으로부터 공무원 교사 노동기본권 보장 권고를 정부가 받고 있지만, 큰 변화가 없는 게 현실이다. 노동조합은 자체적으로 조합원들에게 공무원 노동자성에 대한 교육과 인식을 높이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끊임없는 투쟁이 중요한데, 정부가 결단해야 한다.” 이수현 동지의 지적처럼 사용자인 정부의 결단은 대중적 노동자투쟁 없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공무원 노동자가 쉬는 노동절’에 만족하지 않았다. 노동자의 이름을 되찾지 못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사회적으로 노동권이란 인식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노동자 투쟁과 활동이 있어야 한다면서 “조그만 사업장이니까, 사장들이 힘드니까, 가족적 사업장이니까 등 어떤 조건이라서 안 된다”는 자본과 정부의 노동권 침해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무원 해고자 동지들의 투쟁을 상기하고자 이수현 동지가 해고 투쟁 당시 SNS에 올린 사진을 보았다.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 철폐! 2016년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자들이 넓게 펼쳐 든 ‘노동기본권 보장’ 현수막. 같은 해 울산노동자 총파업대회에서 해고노동자들이 공무원 노동자의 요구를 쓴 피켓을 들고 현장동지들과 파업집회에 참가한 사진. 최근 전국공무원노동조합 홈페이지에서 보았던 사진과 대비되는 느낌이었다. 노동절이 ‘공휴일’로 지정된 날, 노조 집행부는 국회 본회의를 방청하고 민주당 이용우 의원 등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정치기본권 쟁취를 위해 사용자단체인 민주당 TF단과 정책간담회를 연 사진도 있었다. 10년이란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모든 노동자를 위한 대의, 민주노조의 원칙, 계급적 연대의 정신을 회복하고 10년 전보다 더 크게 단결할 수는 있지 않을까. 법이 있다고 노동절에 유급으로 편히 쉴 수 있는 노동자는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어떤 조건이라서 안 된다는 저들의 금기를 넘어야 한다’는 이수현 동지의 이야기는 많은 숙제를 남긴다. 공무원 노동자가 쉬는 ‘노동절’ 쟁취를 기념해 고용형태, 젠더, 국적과 인종, 경력 등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일하고 평등하게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아가자. 모든 노동자가 노동자의 이름으로 권리를 누리는 다음 ‘노동절’까지!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 철폐! 2016년 전국노동자대회 사진: 이수현 [1] 2026년 3월 26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 노동절을 법정 공휴일로 지정을 내용으로 하는 공휴일에 관한 법률(공휴일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이후 노동절을 법정 공휴일로 지정하는 법안이 31일 오후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로써 노동절 휴무는 이번 노동절부터 시행된다. [2] 5인 이상 사업장은 법정공휴일(대체공휴일을 포함한 명절, 국경일 등)이 2020년부터 단계적으로 유급휴일이 되었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번역] 페미니즘, 교차성, 그리고 마르크스주의'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학계, 페미니스트 활동가, 그리고 사회운동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이 지적했듯이, "계급, 인종, 성별"은 "현대의 성 삼위일체"다.[1] 교차성에 대한 담론은 많지만, 그 용어의 정의는 종종 불분명하다. 그것은 이론인가, 아니면 경험적인 묘사인가? 그것은 개인적 주체성의 영역에서 작동하는가, 아니면 지배 시스템을 분석하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개념은 교차하는 억압의 원인에 대해 무엇이라 설명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해방을 향한 경로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젠더, 인종, 계급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마르크스주의 논쟁과 좌파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교차성이라는 개념이 오늘날의 개념으로 처음 정의된 것은 1989년 흑인 법률가이자 페미니스트인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2]의 기사에서였다. 그 기사에서 그녀는 미국의 차별금지법(anti-discrimination law)과 관련해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고자 했다. 이 시작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개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의 가장 중요한 전례는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Combahee River Collective)'와 같은 1970년대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에 있는데, 이들은 당대의 정치적 급진화와 제2차 페미니즘 물결 속에서 해방 운동에 대한 "교차적" 비판을 제기했다. 이 글에서 나는 교차성 개념의 역사적 배경, 초기의 정식화,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상과 함께 개념이 변화한 과정, 그리고 오늘날 이 개념을 둘러싸고 사회 운동 내에서 진행 중인 논쟁을 간략하게 요약할 것이다. 또한 교차성 이론을 마르크스주의와 비판적으로 대조할 것이다. 1.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와 흑인 페미니스트들 1977년에 발표된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 선언문'은 노예로 태어나 노예제 폐지론자로 살아온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이 1863년 적들의 포화 속에서 750명의 노예를 해방시키는 용맹한 군사 작전을 지휘한 것에 대한 헌사의 의미를 담은 명칭이다. 그녀는 미국 남북 전쟁 중 군사 작전을 지휘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1970년대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을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흑인 여성 투쟁의 역사적 일부라고 생각했다.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는 그녀의 저서 『여성, 인종, 계급』[3]에서 미국 노예제 폐지 운동 당시 흑인 여성 투쟁의 역할을 언급했다. 1851년 오하이오 여성 대회에서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운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의 연설은 역사의 한 장으로 남았다. 한 남자가 여성이 "약한 성별"이기 때문에 투표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소저너 트루스는 강렬한 답변을 내놓았다: 나는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리고, 곳간에 작물을 쌓아올릴 때 어떤 남자에게도 뒤지지 않았소! 그런데도 나는 여성이 아니오? 나는 남자만큼 일할 수 있었고, (먹을것이 있기만 하다면) 남자만큼 먹을 수 있었고, 채찍질도 똑같이 견뎌낼 수 있었소! 그런데도 나는 여성이 아니오? 나는 열세 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들 대부분이 노예로 팔려 나가는 것을 보았소... 그래도 나는 여성이 아니오? 그녀의 대답은 여성이 약하고, 정치적 시민권을 행사할 수 없는 "천성적으로" 열등한 존재라는 관념에 기초해 "여성성(femininity)"을 구축한 가부장적 서사에 대한 반박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흑인이고 노동자인 여성의 요구를 무시한 많은 백인 여성 참정권론자들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백인 페미니즘 운동과 흑인 해방 조직에서 부정적인 경험을 한 일단의 흑인 여성들은 이러한 전통을 되살려 자신들만의 투쟁 집단을 형성하기로 결정했다.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 선언문'의 발표와 함께,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백인 페미니즘, 흑인 운동, 그리고 '전국 흑인 페미니스트 기구(NBFO)'의 부르주아 흑인 페미니즘에 동시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의 출발점은 계급, 인종, 젠더라는 세 요소에 뿌리를 둔 '동시적인 억압'에 대한 공통된 경험이었다. 여기에 그들은 ‘성적 억압’(sexual oppression)을 추가했다. 이로부터 그들은 급진적 페미니즘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페미니즘 운동을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다. 이러한 페미니즘 조류는 사회적 모순을 "성적 계급(sexual classes)"[4] 간의 대립으로 해석하고, 다른 모든 구조보다[5] 가부장제(patriarchy)라는 지배 구조를 우선시했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인종과 계급보다 성적 억압 또는 젠더 억압을 우위에 두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성별 전쟁"을 조장하는 노골적인 분리주의 경향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였다. 이 분리주의 경향은 1970년대 후반 페미니즘 운동에서 힘을 얻었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유형의 페미니즘을 백인 중산층 여성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운동으로 정의했다. 그들은 또한 정체성에 대한 어떤 종류의 생물학적 결정론도 반동적인 입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페미니스트이자 레즈비언이지만, 진보적인 흑인 남성들과 연대감을 느끼며, 분리주의자인 백인 여성들이 요구하는 분열을 지지하지 않는다. 벨 훅스(bell hooks)는 저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 그 시절 "자매애의 유토피아적 비전"과 가부장제에 대한 비역사적 정의가 인종 및 계급에 관한 논쟁에 의해 도전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이 시기를 평가하며 "여성이 하나의 성적 계급/카스트를 구성한다는 개념을 불러일으키며 공통의 억압이라는 기치 아래 운동을 조직하려 했던 백인 여성들이,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가장 꺼려했다"고 단언한다. 그녀는 또한 운동 내 분리주의 조류와의 논쟁을 강조한다. 그들은 모든 여성을 피해자로 나타내기 위해 모든 남성을 적으로 묘사했다. 남성들에 대한 이러한 주목은 개별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계급적 특권과, 계급 권력을 증대시키려는 그들의 욕망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했다.[6]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 선언문'은 흑인 여성과 흑인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투쟁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특징지었다. 그렇기에 저자들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명시적으로 지지했다: 우리는 모든 억압받는 인민의 해방이 가부장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정치-경제 체제의 파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우리가 사회주의자인 이유는 노동이 노동을 수행하고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 조직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페미니즘 혁명과 반인종주의 혁명이 동반되지 않는 사회주의 혁명이 우리의 해방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와 관련하여 그들은 "특정한 경제적 관계"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에 근본적으로 동의한다고 주장했지만, "흑인 여성으로서의 우리의 구체적인 경제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분석이 더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그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집단으로서 제안한 실천적 과제는 주로 자기 인식 워크숍과 그들 지역사회 내 흑인 여성들의 구체적인 권리를 위한 투쟁에 국한되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정체성 정치'라는 개념은 흑인 여성들이 억압을 경험하는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대응으로서 선언문에 등장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은 이후 다른 해방 운동과 결합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로 간주된다. 경제적, 성적, 인종적 지배가 결합된 체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과 다른 억압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일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몇 년 후,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상으로 사회적, 정치적, 사상적 맥락이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다.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이 전망에서 사라지면서, 집단적 행동의 기회는 흩어지는 경향을 보였고, 대신 차별화된 '정체성'과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이를 인정받으려는 정책적 요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2. 차별의 범주로서의 교차성 킴벌리 크렌쇼는 1989년에 교차성 개념을 처음 정의했다. 그녀는 인종 차별과 성 차별을 '경험과 분석의 상호 배타적인 범주'로 분리해서 취급하는 것이 법리, 페미니즘 이론, 그리고 반인종주의 정치에 문제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녀는 "흑인 여성 경험의 다차원성과 이러한 경험을 왜곡하는 일차원적 분석”을 대비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녀는 (인종, 젠더, 성적 지향, 계급 중 무엇이든 간에) 단일한 차별 축에 기반한 개념화는 흑인 여성을 정체화와 차별 종식의 가능성으로부터 지워버리며, 분석을 각 집단의 특권적인 구성원들의 경험으로 제한한다고 지적했다. 인종 차별은 성별이나 계급적 특권을 가진 흑인들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경향이 있고, 반면 성 차별을 다룰 땐 경제적 자원을 가진 백인 여성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교차적 경험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합보다 크기 때문에, 교차성을 고려하지 않는 어떤 분석도 흑인 여성이 종속되는 특정한 방식을 충분히 다룰 수 없다." 그녀의 분석에서 크렌쇼는 흑인 여성들이 제기한 여러 소송이 사법부에 의해 어떻게 간단히 기각되었는지 검토한다. '드그라펜리드 대 제너럴 모터스(DeGraffenreid v. General Motors)' 사건에서 다섯 명의 여성은 다국적 기업인 GM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들은 흑인 여성으로서 더 나은 직책으로의 승진이 거부되었기 때문에 고용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그들이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음을 입증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기각했다. 그들이 특별한 차별을 받은 집단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법원은 인종적 혹은 성별적 차별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조사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두 요소의 결합"은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법원은 GM이 여성을 —백인 여성을— 고용했기 때문에 젠더 차별이 없다고 판단했고, 회사가 흑인을 —흑인 남성을— 고용했기 때문에 인종 차별도 없었다고 판단했다. 흑인 여성들의 소송은 실패했다. 법원은 이 소송을 인정하는 것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렌쇼는 교차성 개념의 목적이 흑인 여성들이 단일 축 개념 틀로는 다루지 못하는 복잡한 형태의 차별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1980년대 후반, 교차성 개념은 "차별" 경험의 복잡성을 다루기 위한 범주로 등장하였으며, 이는 국가가 "다양성 정책"을 규제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판례법 확립을 목적으로 했다. 나중에 미국 사회학자이자 흑인 페미니즘 학자인 패트리샤 힐 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는 교차성을 "교차하는 억압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지배 구조 내에서 구축되는 것"으로 정의했다.[7] 그녀의 견해에 따르면, 교차성은 다른 "사회 정의 프로젝트들”과의 결합(convergence)이나 연합(coalition)을 추구하는 사회 정의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교차성 개념은 이후 학계 내에서 "여성학"의 틀이 확장되는 과정 속에서, 많은 흑인, 라틴계, 아시아계 페미니스트 지식인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교차성은 컨퍼런스와 심포지엄, 연구 부서에서 유행어가 되었다. 경제, 법률, 사회, 문화 및 공공 정책 분야에서 교차성 연구를 발전시키기 위한 NGO(비정부기구)들이 만들어졌다. 젠더, 인종, 계급이라는 세 요소에 성적 취향, 국적, 연령, 기능적 다양성과 같은 다른 억압의 축이 추가되었다. 이는 여러 집단과 공동체가 직면한 구체적인 억압의 가시성을 높여주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 대한 체념의 분위기 속에서 발전했다. 자본주의 사회 구조는 도전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3. 교차성, 정체성 정치, 그리고 다중적 차이 학계에서 교차성 연구의 부상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지적, 정치적 기류를 완전히 뒤바꾼 새로운 역사적 단계의 시작과 함께 진행됐다. "부르주아 복고"[8] 또는 신자유주의 호황기로 불리는 이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들이 쟁취한 결실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격이 자행된 시기였다. 노동조합 및 노동계급 정치 지도부의 변절(이탈) 아래, 민영화와 규제 완화 정책이 맹렬하게 추진됐다. 이는 노동계급 내부의 파편화를 심화시켰고 계급 주체성의 거대한 상실로 이어졌다. 이 새로운 맥락 속에서,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의 흑인 페미니스트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견지했던 급진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 따라 주체의 분절화를 심화시키는 틀 속에서 교차성을 정식화하는 방향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교차성이라는 아이디어는 "다양성(diversity)" 및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더욱 유사해졌다. 이러한 정식화는 지배 관계를 "문화화"하는 과정 속에서, 초점을 집단에서 개인으로, 물질에서 주체로 이동시켰다. 그것은 억압받는 집단의 투쟁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 인식— "맥락적 지식" —을 획득하는 것 을 포함하며, 이를 통해 특권 집단(남성, 백인 여성, 이성애 여성 등)이 자신의 특권을 "해체"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도록 한다는 개념을 일반화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전환"의 틀 속에서, 정체성은 오직 담론 속에서만 구축되고, 저항의 가능성은 대항 서사를 확립하는 일에만 제한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계급 착취에는 적용될 수 없다.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들 —은행가와 자본가들— 이 자기 성찰을 통해 그들의 권력을 "해체"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실제로는 이 제안은 인종차별, 이성애 중심주의, 성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략으로서 무용하다. 이러한 "지배의 축"들은 자본주의의 물질적, 구조적 관계와 얽혀 있지 않은, 문화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영역에서만 작동하는 별개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러한 억압의 토대가 되는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억압받는 정체성들만을 끊임없이 늘려나가는 방식은 활동에서 "게토화"와 분열의 관행을 낳았다. 프라티바 파마르(Pratibha Parmar)는 그녀의 저작에서 이 문제를 경고했다: 억압받는 정체성들을 모아서 쌓아올리는데 치중한 결과, 이는 결국 억압의 위계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줄 세우기는 파괴적일 뿐만 아니라 분열적이었으며 운동을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 많은 여성이 게토화된 "라이프스타일 정치"로 후퇴했으며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9] 이러한 무력함의 상응물로서, 자본주의 체제는 '다양성'의 폭발적 증가를 정체성의 시장으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그 정체성들이 총체로서의 사회 구조에 도전하지 않는 한 그들을 동화시킬 수 있었다. 테리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일하고 가장 오래남을 성과— 성적 취향, 젠더, 민족성 문제를 정치적 의제에 확고히 자리매김시켜, 강력한 노력 없이는 이 문제들을 지워버리는 것을 상상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는, 계급, 국가, 이데올로기, 혁명, 물질적 생산양식을 다루는 더 고전적인 형태의 정치적 급진주의를 대체한 것에 불과했다.[10] 그러나 이글턴은 각주에서 이러한 이슈들을 정치적 의제에 올려놓은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지식인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1960년대와 70년대의 투쟁을 통해 전개된 사회 운동의 실천이었다고 분명히 했다. 이 정치적 급진화의 물결이 좌절되자,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담론은 전면에 등장한 반면, 계급은 점점 더 비가시화되었다(일부 저자들은 노동계급 그 자체의 소멸에 대해 쓸 정도였다). 4. 계급 정치로부터의 후퇴 계급/인종/젠더 세 요소에서 계급은 희석되거나, 마치 소득에 따른 사회적 계층이나 직업 유형처럼 단지 또 하나의 정체성이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마르타 E. 히메네스(Marta E. Giménez)[11]는 콜린스를 인용하며, '교차성 이론의 특징적인 요소 중 하나는 "이러한 연결 고리들을 이론화하기 위해서는 ‘억압들 사이의 동일함이라는 잠정적 가설을 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추정'인데, 이는 계급 관계의 특수성을 제거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견해에 반해, 인종, 젠더, 계급은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고통에 위계를 세워야 한다거나, 사람들의 주관적 경험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목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과 착취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계급, 인종, 젠더는 "평등"과 "차이"와 관련하여 매우 다르게 작동한다.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지는 계급의 "사회적 차이"를 "자유 계약"이라는 "평등주의" 이데올로기 뒤에 가능한 한 숨기려 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차이’를 확고히 하기 위해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이용한다. 이 “차이”는 생물학적 또는 '자연적'인 조건의 결과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논리는 자원 배분과 권리 접근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특정한 노동 분업의 지속, 또는 간단히 말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비인간화하여 노예화하는 것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된다. 해방적 관점에서, 목표는 피부색, 출생지, 생물학적 성별, 또는 성적 선택의 어떠한 차이도 억압, 모욕, 또는 불평등의 근거로 사용될 수 없도록 하고, 동시에 다양성을 인정하고 사회적 협력의 틀 안에서 모든 개인의 창조적 잠재력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 차이의 경우, 목표는 계급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사회 관계에 맞선 투쟁을 통해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자 하며, 이는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의 소멸, 그리고 모든 계급 사회를 종식시킬 가능성을 수반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구조화하는 것은, 이러한 모순을 보이지 않게 만들려는 시도 너머에 있는, 생산 수단의 소유자와 임금을 대가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자들 사이의 사회적 차이다. 가부장적 관계—자본주의보다 수천 년 전에 등장한—와 인종차별은 비역사적인 실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관계의 틀 안에서 새로운 형태와 특정한 사회적 내용을 갖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가부장적 편견을 활용하여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 즉 생산 영역과 가정 영역 사이의 전례 없는 차별화를 확립한다. 가정에서 여성은 보이지 않는 노동을 통해,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이란 과업의 큰 부분을 지속적으로 수행한다.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서 말이다. 새로운 사회 관계 아래 재편된 가족, 결혼, 이성애 규범성과 같은 제도들은 여성의 이러한 역할을 사회화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성별 억압의 다양한 양상과, 수백만 명의 여성이 겪는 폭력과 여성 살해 등의 고통스러운 현실은 단순히 계급 관계로만 “환원”될 수는 없다. 하지만 억압과 착취라는 범주를 연결하지 않고서는, 이를 제대로 설명해낼 수도 없다. 인종차별은 수백만 명의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계몽주의가 "인간의 권리"의 기초로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사상을 드높인 것과 같은 시기에 말이다. 인종차별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거대한 식민주의 사업, 그리고 미국에서 원주민들을 상대로 자행된 것과 같은 내부적 대량 학살을 동반하고 강화했다. 미국 남북 전쟁과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인종주의는 나라 인구의 상당수를 "2등 시민"이자 "2등 노동자"로 취급하여 배제하는 데 활용되어왔다. 이는 미국 노동계급 내부의 분열을 조장한다. 결과적으로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했듯이, 인종 억압과 성별 억압은 자본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절묘하게 결합된다. 미국 내 흑인 및 라틴계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 격차가 더 크다는 점이나, 흑인 청년들에 대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위의 제도적·경찰 폭력이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또한 유럽 내 이주민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이고 외국인 혐오적인 정책들을 옹호하는 데 이용된다. 유럽에서 이주민들은 2등 노동자로 취급받으며 기본적인 사회적, 민주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5. 마르크스주의와 교차성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검은 피부의 노동자에게 낙인을 찍고 있는 곳에서는 흰 피부의 노동자도 해방될 수 없다"고 썼다. 그 이전 작업에서 그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말을 살짝 바꾸어 "사회적 진보, 역사적 시기의 변화는 여성이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정도에 비례하여 일어나며, 사회 질서의 쇠퇴는 여성의 자유가 감소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일어난다"고 지적했다.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서 엥겔스는 대규모로 자본주의 생산 영역에 진입해 억압과 착취라는 이중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던 노동자 여성들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친구(마르크스)가 수행한 미완의 인류학 연구를 이어받아 역사 속의 가족 제도와 여성 억압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는 착취와 억압 사이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도 분석해 왔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리가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억압에 기초한다면 그들은 해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레닌은 다른 민중을 억압하는 민중은 해방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식민지 억압에 맞선 투쟁뿐만 아니라 민족자결권을 옹호했다. 교차성 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리즈 보걸은 '교차성'이라는 용어가 대중화되기 전부터 1960년대와 70년대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이미 가부장제, 인종차별, 그리고 자본주의 사이의 교차 지점을 강조해 왔다고 옳게 주장한다. 그러나 플로라 트리스탄, 엥겔스, 클라라 체트킨, 그리고 러시아 혁명가들과 다른 많은 이들에 이르기까지, 그 시기보다 훨씬 전부터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상의 오랜 전통이 발전해 왔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중요한 국제 사회주의 여성 회의와 농민 및 노동자 여성 조직과 강령으로 이어졌다. 1938년 레온 트로츠키가 작성하고 제4인터내셔널이 채택한 '이행 강령'의 구호에는 "여성 노동자와 청년에게 길을 열어야”하며, "노동계급의 가장 착취받는 층 사이에서 지지"를 구해야 한다는 과제가 포함되어 있다. 교차성 이론가들은 종종 마르크스주의를 "계급 환원주의"로 간주하며 비판한다. 그러나 "계급 분석"의 중심성을 옹호하는 것은, 단순히 노동조합의 임금 인상 투쟁 같은 활동에만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계급에 대한 조합주의적(corporatist), 경제주의적, 혹은 좁은 의미의 전투적 조합주의(syndicalism)적 관점이다. 20세기의 많은 스탈린화된 공산당들과 노동조합 관료들의 관행이 이러한 좁은 조합주의 정치에 기반하여, "계급 정치"와 억압에 맞선 운동 사이의 골을 깊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계급 착취와 성별 억압, 인종차별, 식민지 억압, 그리고 이성애 중심주의의 '교차'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스탈린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억지로 동일시할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계급 분석은 자본주의 사회를 구조화하는 관계들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이는 자본 축적을 위한 잉여 가치 추출(Extraccion)뿐만 아니라, 가정 내 여성 재생산 노동의 전유, 거대 독점 기업으로의 자본 집중, 금융 자본의 확장, 그리고 세계대전과 약탈로 이어지는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경쟁에도 기반한다. 또한 자본이 어떻게 착취를 극대화하고 노동계급 대열 내의 분열을 유발하기 위해 인종차별적, 여성혐오적, 외국인혐오적 이데올로기를 부추기면서, "차이"를 활용하고 확립하는지 분석한다. 이러한 계급 분석은 "경제 환원주의적" 관점을 표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정치적, 사회적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포함하며 계급 관계와 인종차별, 가부장제, 이성애 중심주의 사이의 연결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동시에 이 계급 분석은 21세기에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인종화되고, 여성화된 노동계급이 내부 분열과 파편화를 극복해낸다면,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새로운 사회를 조직하기 위한 기초로서 경제, 산업, 운송 및 통신 시스템 전체를 통제 아래 둘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계급 정치"로부터의 후퇴는 사실상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투쟁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 없이는 인종, 젠더, 또는 섹슈얼리티에 기초한 착취와 억압으로 인한 끔찍한 불의를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2008년 자본주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새로운 저항 운동의 출현과 함께, 페미니스트 활동가들, 반인종주의자들, 그리고 청년 운동의 일부 부문들은 다양한 억압받는 집단들 사이의 연합을 형성하기 위해 새로운 의미에서 "교차성" 개념을 옹호해 왔다. 예를 들어 2018년 3월 8일 스페인에서 파업을 조직한 여성 운동은 스스로를 "반자본주의, 반인종주의, 반식민주의, 그리고 반파시즘" 운동으로 규정했다. 이는 여러 갈래의 투쟁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된 중요한 진전이었으며, 노동자 민중을 뿔뿔이 흩어놓으려는 파편화의 논리에 정면으로 맞선 커다란 흐름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공통의 전략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저항 운동들의 합이나 "교차"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공통의 전략 없이는 인종차별이나 가부장적 억압을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다양한 "운동"이나 "정체성"을, 성별이 거세된 추상화된 노동계급과 서로 대치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상 노동계급이 젠더와 인종 측면에서 지금처럼 다양했던 적은 없었다. 여성은 이미 노동계급의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중 흑인, 라틴계, 아시아계 여성이 다수이다. 그렇다면 헤게모니 전략의 핵심은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에 기초한 모든 억압에 맞선 투쟁을 단호하게 통합하는 계급 정치의 중심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분열시킨 것들을 결합하고, 노동계급 내부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특정한 억압에 맞서 싸우는 운동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정책을 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은, 수탈자를 수탈하기 위한 투쟁과 함께, 비로소 진정한 해방사회로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019년 2월 24일, 스페인어판 콘트라푼토(Contrapunto)에 최초 게재. 2023년 7월 11일, 레프트보이스(Left Voice)에 번역된 글을 재번역. 원저자: 호세피나 마르티네즈(Josefina L. Martínez) 영어 번역: 마리셀라 트레빈(Marisela Trevin) 한국어 번역: 해인 [1] Terry Eagleton, Against the Grain: Essays 1975–1985 (London, UK: Verso, 1986). [2] Kimberlé Crenshaw, “Demarginalizing the Intersection of Race and Sex: A Black Feminist Critique of Antidiscrimination Doctrine, Feminist Theory, and Antiracist Politics,” in Feminist Legal Theory: Readings in Law and Gender, ed. by Katharine T. Bartlett and Rosanne Kennedy (New York, NY: Routledge, 1991). [3] 앤절라 Y.데이비스, 『여성, 인종, 계급』, (황성원 역, 아르테, 2016) [4] 1970년 수라미스 파이어스톤의 급진적 페미니즘이든, 1980년 크리스틴 델피의 물질주의적 페미니즘이든 마찬가지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1970, “성의 변증법”, (김민예숙, 유숙열 역, 꾸리에, 2016). 크리스틴 델피, 1980, “주적”, (이민경, 김다봄 역, 봄알람, 2022) [5] 케이트 밀렛이 『성 정치학』, 1970, (김유경 역, 쌤앤파커스, 2020)에서 제시한 개념. [6] 벨 훅스, 2000,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경아 역, 문학동네, 2017) [7] Patricia Hill Collins, Black Feminist Thought: Knowledge, Consciousness and the Politics of Empowerment (New York, NY: Routledge, 1990), 127. [8] Emilio Albamonte and Matías Maiello, “At the Limits of the ‘Bourgeois Restoration,’” Left Voice, December 24, 2019. First published in Spanish in 2011. [9] Pratibha Parmar, “Black Feminism: The Politics of Articulation,” in Identity: Community, Culture, Difference, ed. by Jonathan Rutherford (London, UK: Lawrence & Wishart, 1990), 107. [10] 테리 이글턴, 1996, 『포스트 모더니즘의 환상』, (김준환 역, 실천문학사, 2000) [11] Marta E. Giménez, Marx, Women, and Capitalist Social Reproduction: Marxist Feminist Essays: (Leiden, Netherlands: Brill Publishers, 2019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