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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기초학습#1]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기사입력 2025.08.04 17:52 | 조회 6,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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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착취와 차별, 억압을 일소하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사상이었다. 인간해방 세상을 꿈꾸며 투쟁하려는 이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도,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계급투쟁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오늘날 진짜 사회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역사의 굴절로 인해, 스스로가 '사회주의'라 주장하는 가짜 사회주의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반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된 소련을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 칭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중국특색 사회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등 다양한 스탈린주의의 변종은 억압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포장하면서, 사회주의를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자기해방 사상에서 계급지배를 정당화하는 수사적 도구로 바꿔버렸다.

     

    다른 한편에는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고 노동자혁명을 파괴한 개량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전통적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지배계급의 일부가 되었고, 새로운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의회주의와 관료주의를 '사회주의'와 뒤섞어버린다.

     

    자본주의는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다시 불러왔다. 위기와 전쟁에 맞선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있지만, 계급투쟁의 사상인 사회주의에 대한 정돈된 지식을 얻기는 너무나 어렵다.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뒤엎기 위해, 스탈린주의와 개량주의의 혼란을 걷어내고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진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함께 배우고, 함께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해 '사회주의 기초학습' 시리즈를 연재한다.

     

    [다른 시리즈 읽기]

    #2 자본주의 원리 파헤치기

    #3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

    #4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와 전략

     

    인간의 생존 방식과 계급의 발생

     

    2019년 인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야생 호랑이가 민가로 내려와 사람을 공격했다. 그러자 주민 십수 명이 대나무 장대를 들고 쫓아가 호랑이를 잡아 죽였다. 총이 아니라 고작 막대기로 말이다. 물론 이는 인도에서 현행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다. 법을 떠나 맹수가 인간을 공격한 까닭은 인간이 무분별한 개발로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뉴스는 사람이라는 생물 종(種)의 생존 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근력으로 따지면 사람은 범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등한 존재지만, 집단적 협력을 통해 다른 종(種)을 사냥하며 생존경쟁에서 우위에 선 것이다.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어느 강연에서 인류 문명의 진정한 증거는 ‘부러졌다 다시 붙은 대퇴골’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대퇴골은 골반과 무릎 사이의 넙다리뼈로, 대퇴골이 부러지면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즉 치유된 대퇴골은 누군가 부상을 입은 사람을 돌보고 협력했다는 증거다.

     

    인류 역사는 바로 이 집단적 협력으로부터 태동한다. 인류는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정한 사회조직을 형성해야 했다. 인류 최초의 사회조직은 혈족이다. 인류학, 고고학의 연구 성과들은 혈족에 기반한 사회가 평등한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인류가 유랑 생활 대신 정주 생활을 시작하고, 인구 증가로 사회집단의 규모가 커진 이후에도 평등한 사회체제는 한동안 지속됐다. 튀르키예의 차탈회위크는 중앙아나톨리아 지역에 있는 신석기시대 초기 도시 유적이다. 대략 기원전 7500년에서 기원전 5700년 사이에 존재했다. 인구 규모는 5,000~7,000명, 전성기에는 1만 명까지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사회적 혹은 경제적 서열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개별적 부의 축적, 사유재산의 증거도 없으며, 유물에도 성별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잉여생산물이 출현하고, 분배해야 하는 부의 규모가 증대하면서 인류 사회에는 계급이 발생하고 여성 차별이 시작된다. 잉여생산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군가는 직접 노동에 종사하지 않아도 타인의 노동에 의해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연구에 따르면 계급의 발생과 여성 차별의 시작은 일목요연하게 하나의 경로만을 보인 것은 아니다. 여성 억압의 기원에 대해 누군가는 정주 생활에서 아이를 더 많이 출산하는 집단의 생존 확률이 높았으므로 여성을 생산 업무에서 점차 배제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랑생활을 하던 수렵‧채집 경제의 시대에는 여성이 한 명의 유아기 아이만 양육하도록 출산을 억제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다른 학자는 주요 농업 도구가 쟁기로 대체되고 농사에 관개시설을 활용하는 등 근력이 요구되는 중농업이 발전하면서 남성이 주도적 지위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본다. 어쨌건 계급과 여성 차별의 발생을 동시대의 것으로 보는 것은 일반적이다. 처음에는 평등한 관계 위에 공동체의 집단노동을 이끌었던 지혜로운 지도자는, 이제 잉여생산물을 통제하고 세습하는 특권 계급으로 등장하게 된다.

     

    인류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정말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는 폴리네시아 [1] 사회를 톺아보며 인간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발전 형태를 보이는지를 설명한다. 폴리네시아 지역은 사회공동체 간에 교류가 드물고, 현격할 정도로 자연환경의 차이를 보이는 지역이다. 이에 따라 제국에서부터 단순한 촌락에까지 다양한 형태의 사회상을 보인다. 사회 간 발달 수준의 차이는 식량, 가축의 생산, 기후 등 자연환경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제래드 다이아몬드는 추장사회의 추장이 지배계급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추장사회에서 가장 뚜렷한 경제적 특징은 무리나 부족처럼 오로지 호혜적인 교환에만 의존하는 형태(A가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언젠가 B도 자신에게 가치가 비슷한 선물을 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B에게 어떤 선물을 주는 식)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 간단한 예를 들자면 어떤 추장이 수확기에 그 추장사회의 모든 농경민에게서 밀을 거둬들인 후 모두에게 잔치를 베풀어 빵을 먹이거나 그 밀을 저장해두었다가 수확기와 수확기 사이에 조금씩 다시 나눠주는 식이다. 평민들에게서 받은 물품 중 많은 양을 그들에게 재분배하지 않고 추장의 계보나 기능인들이 차지하고 소비한다면 그 같은 재분배는 공물이 되며 이것은 추장사회에서 처음 나타난 조세의 선행 형태였다. 추장들은 평민에게서 물품만 거둔 것이 아니라 공공 토목공사를 위한 노동력도 징발했다. … 폴리네시아의 작은 섬들에서는 추장의 지위가 세습적이라는 점 이외에는 추장사회가 실질적으로 대인이 있는 부족사회와 비슷했다. 추장의 오두막집도 다른 오두막집과 똑같았고 관료나 공공 토목공사도 없었다. 추장은 거둬들인 물품 대부분을 평민들에게 재분배했고 토지는 공동체 전체가 관리했다. 그러나 폴리네시아에서도 가장 큰 섬(하와이, 타히티, 퉁가 등)에서는 장식품만 보아도 추장을 금방 식별할 수 있었고 공공 토목공사는 노동력을 대량 동원해 진행되었다. 공물은 대부분 추장이 차지했고 토지도 모두 추장이 관리했다.”

    이처럼 잉여생산물의 규모가 커질수록, 과거 공동체의 재산을 관리할 뿐이던 추장은 이제 잉여생산물을 통제하고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지배계급으로 변신하게 된다.

     

    국가의 출현과 평등을 향한 투쟁

     

    2~300만 년에 이르는 인류의 장구한 역사를 선사(先史) 시대와 역사(歷史) 시대로 구분하는 기준점은 국가의 등장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5,500여 년 전에, 중국과 안데스에서 2,000여 년 전에 최초의 국가가 출현했다. 잉여생산물과 공동체의 집단노동을 통제하는 지배계급은 이제 훨씬 복잡한 사회조직인 국가에서 자신의 지배권을 유지해 나간다. 재래드 다이아몬드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의 생산물을 빼앗아 생활하는 정치를 ‘도둑정치’라 불렀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네 가지 공통 특징이 있다고 보았다. 첫째, 대중을 무장해제하고 엘리트 계급을 무장한다. 둘째, 거둬들인 공물을 대중이 좋아하는 곳에 재분배한다. 셋째, 공공질서를 유지하고 폭력을 억제함으로써 치안을 확보한다. 넷째, 도둑정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구성한다. 이런 식으로 지배 질서의 정당성을 확보해 나간 국가 체계에선 점차 기존의 평등주의적 사회관계가 소멸해 간다. 물론 초기 국가에선 아직도 평등했던 부족사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옛날 부여의 습속에 가뭄이 들어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리고, 혹 왕을 바꾸거나 죽이기도 하였다.”(『三國志』)는 기록은 과거 평등했던 농업공동체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왕이란 공동체의 농업경제를 지휘하는 지도자이므로, 지도력의 부족으로 농사에 실패했다면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진행될수록 이제 계급 질서는 확고해진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고대광실(高大廣室)에서 비단옷을 입고 이밥에 고깃국을 먹지만, 누군가는 오두막에서 태어나 헐벗은 채 주린 배를 채우자면 쉬지 않고 중노동에 종사해야 한다. 고대의 철학이나 종교는 바로 이 계급적 격차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고대 국가로 자리 잡던 한반도의 삼국이 앞다퉈 불교를 수용한 이유가 이것이다. 불교는 현세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불평등한 이유를 전세의 업(業)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윤회(輪廻) 사상을 통해 피지배계급도 현세의 괴로움을 내세에서 위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배계급의 입맛에 맞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종교와 이데올로기로도 계급 적대의 적나라한 모순을 감출 수 없는 국면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민중들 속에서 지배계급에 맞서 평등을 주창하며 사회를 뒤엎으려 했던 시도는 수없이 반복되었다. 기원전 209년 진(秦)나라에서 농민 반란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은 “왕후장상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라고 외쳤다. 신성한 혈통을 들먹이며 지배 질서를 정당화하려던 지배계급에 맞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던가?”라며 맞선 것이다. 1198년 고려에서 노비 반란을 주동했던 만적 또한 이 말을 그대로 반복했는데(“將相寧有種乎!”), 이는 동아시아 사회에서 위 구호가 민중들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기나긴 인류 역사에서 계급과 국가가 출현한 시기는 찰나에 불과하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계급사회는 결코 인류의 본성이 아니었기에, 계급사회의 역사 내내 인류는 평등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끈질긴 노력을 보여왔다. 미륵신앙과 같은 종교적 형태, 정감록과 같은 주술적 형태로 평등사회를 향한 열망을 드러내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복됐던 일이다.

     

    이중혁명(산업혁명, 부르주아혁명)과 자본주의

     

    역사 속 계급사회는 다양한 발전 형태를 취하게 된다. 우리가 이 학습 과정에서 다루는 계급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며, 우리가 주장하는 사회주의 역시 바로 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운동을 가리킨다. 망이‧망소이, 만적, 동학농민군의 운동은 평등주의의 기치를 내걸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운동을 사회주의 운동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로소 등장한 것이므로, 이제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지난했던 이 과정을 과감히 요약하자면 이른바 이중혁명이라 말할 수 있다. 산업혁명과 부르주아혁명이 그것이다.

     

    자본주의는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세계 GDP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던 중국이 아니라 유럽에서 최초로 출현했다. 이것은 우연이 결합한 역설적 현상이다. 청나라는 1741년 약 1억 4,300만 명이던 인구가 1851년 약 4억 3,200만 명으로 세 배나 증가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다스렸던 강건성세(康乾盛世, 1661~1795년)가 이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 증가는 역설적으로 부정적 효과를 초래했는데, 생산과정에서 생산기술의 혁신보다는 노동력의 추가 투입으로 생산량을 늘리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이다. 즉 생산량은 늘어났지만, 기술 발전과 혁신 없이 노동생산성이 정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반면 17~18세기 유럽에서는 대항해 시대 신대륙에서의 대규모 귀금속 유입 등이 불러온 상업의 거대한 발전, 토지 소유를 집중시키며 농민을 토지에서 쫓아냈던 인클로저 운동, 가내공업의 전국적 발전 등이 연달아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전근대 농업경제에서 근대 자본주의 경제로의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 =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를 지극히 파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G. D. H. 콜이 지적했듯이 “산업혁명이란 오랜 경제발전 과정의 결과”를 말한다.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넓은 시장이 새로 생기고 임금노동력이 이용 가능해졌을 때) 필연적으로 위대한 기술의 발명”이 이어졌다. 증기기관, 철도 등 “수많은 위대한 발명은 시장이 급속히 확대되고 높은 이윤을 올릴 수 있는 생산이 유망해지자 많은 사람이 상품 생산량을 늘리고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데 몰두했기에 탄생”한 것이었다.[3]

     

    다른 한편, 자본주의가 굴러가자면 자유롭게 자기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계급, 즉 노동자계급이 대규모로 존재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자유롭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에서다. 하나는 일체의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 질서로 묶인 노예나 농노와는 달리 자유롭게 자기 의사에 따라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다는 뜻이다. 노동자계급은 어느 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직접 생산자계급이던 농민층이 전화한 것인데, 이들이 노동자계급이 되자면 기존의 신분 질서가 타파되어야 했던 것이다. 민중을 봉건 체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 역사적 대사건은 바로 18세기의 프랑스대혁명이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자본가계급은 봉건제의 지배계급인 대토지 소유자들의 지배 질서를 분쇄했고, 이들에게 속박돼 있던 민중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이어진 일련의 부르주아혁명 과정에서, 자본가계급은 민중의 지지를 이끌기 위해 자신들이 만들 세상은 천부인권, 자유와 평등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세상일 것이라 약속했다.

     

    그러나 막상 자본가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세계의 실상은 그들의 약속과 달랐다. 그들이 얘기하던 인권의 핵심은 소유권이었으며, 자유와 평등은 철저하게 그들을 위한 자유와 평등이란 것이 곧바로 드러났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가 갈리는 세상이건만 ‘기회의 평등’은 누구에게나 동등하다고 떠들어대는 오늘날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중혁명 직후 노동자계급의 비참한 삶에 대해선 수많은 사료가 남아있다. 노동자의 생존 자체를 위협했던 악랄한 장시간 저임금 노동이 ‘계약의 자유’라는 허울 아래 거리낌 없이 행해졌다. 지금도 말을 못 잇게 하는 대목은 참혹했던 아동노동의 실태다. 다음은 영국 의회에 제출됐던 공장감독관의 보고서다.

    “그들 공장주 가운데 일부는 12~15세의 소년 5명을 금요일 오전 6시부터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 4시까지 식사시간과 심야에 1시간의 수면시간만 주고 하나도 쉬게 하지 않은 채 일을 시켰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넝마 구덩이’라고불러도 좋을 만한 굴 속에서 휴식 없이 30시간의 노동을해야 했는데, 그곳은 양모 헝겊 조각을 해체하는 곳이어서 공기 중에 양모 보푸라기와 먼지 등이 가득차있기 때문에 성인 노동자라도 자신의 폐를 보호하기 위해서 늘 수건을 입에 대고 있어야만 하는 곳이었다! … 자신들은 넓은 자비심으로 불쌍한 아이들에게 4시간의 수면을 허락했으나 아이들은 한사코 잠을 자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장감독관 보고서, 1860년 10월 31일
    “9세 소년 윌리엄 우드는 “노동을 시작한 것이 7세 10개월부터였다”고 말한다. 그는 처음에 “틀을 운반하는”(틀 속에 들어 있는 완성된 물건을 건조실까지 운반하고 빈 틀을 갖고 다시 돌아온다) 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평일에는 매일 아침 6시에 와서 밤 9시쯤 일을 마친다. “나는 평일에는 매일 밤 9시까지 노동을 합니다. 예를 들어 요즈음 7, 8주 동안은 그랬습니다.” 이처럼 7세 어린이에게 15시간의 노동이 부여되고 있다!”— 아동노동조사위원회 제1차 보고서, 1863년

    “이 산업(성냥 제조업)의 노동자 절반은 13세 미만의 어린이와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이었다. … 1863년 화이트 위원이 심문한 증인 가운데 270명은 18세 미만이었고, 40명은 10세 미만이었으며, 10명은 겨우 8세, 그리고 5명은 겨우 6세였다. … 만일 단테가 이러한 공장들을 보았더라면, 그가 상상한 참혹하기 짝이 없는 지옥의 모습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동노동조사위원회 제1차 보고서, 1863년

    자본주의 초기 공상적 사회주의의 조류들

     

    노동자들이 비참한 노동조건에 신음하는 동안 자본가계급은 이를 외면한 채 대공업이 창출한 막대한 부를 독점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어린 시절 그저 재미있게 읽었을 『셜록 홈즈』 시리즈나 『80일 간의 세계일주』 같은 19세기 소설을 다시 읽어보길 바란다. 한편에서 노동자들이 생명력을 소진하는 대가로, 부르주아 계급은 천연덕스럽게 근대 문명이 발전시킨 기술을 향유하며 인생을 만끽했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초기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분개했고 평등주의적 지향을 드러냈다. 자본주의의 끔찍한 불평등을 넘어서려는 운동을 통틀어 사회주의라 부를 수 있다. 엥겔스가 말했듯이 “현대 사회주의는 내용으로 보면 무엇보다도 먼저, 한편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유산자와 무산자, 임금 노동자와 부르주아의 계급 대립을,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에서 지배적인 무정부 상태를 목도한 산물”[4]이다. 이러한 사회주의자들 중 엥겔스가 높게 평가했던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의 생시몽, 푸리에, 영국의 오언이다. (푸리에는 “어떤 주어진 사회에서 여성해방의 정도가 전반적 해방의 자연적 척도”라는 역사적인 명제를 남긴 인물로 유명하다.) 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격렬한 사상투쟁을 벌였던 프랑스의 프루동 역시 초기 사회주의자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오언(Robert Owen)의 활동만 잠깐 소개하기로 하자. 오언은 1800년부터 1829년까지 뉴래너크 방적 공장을 통해 자본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던 인물이다. 뉴래너크는 하루에 10.5시간밖에 노동하지 않았으며(동시대 방적 공장의 노동시간은 13~14시간이었다), 휴업 기간에도 임금 전액이 지불됐다. 오언은 2천 명 남짓한 뉴래너크 노동자들에게 집을 싼값으로 빌려줬고, 질병과 사고로 고생하는 이들에게는 의료혜택이 가도록 배려했다. 저축은행을 설립해 노동자들의 저금을 관리했으며, 생활용품을 공동으로 구입하여 노동자들에게 염가에 판매했다. 그럼에도 이 기업은 가치가 배 이상 증가하며 투자자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뉴래너크의 성공에 고무된 오언은 미국으로 건너가 자기 전 재산을 들여 ‘커뮤니티(Community)’라고 부른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했으나 이 실험은 처참하게 실패하며 막을 내린다. 오언의 이러한 시도는 전태일이 구상했던 모범업체 ‘태일피복’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전태일 열사는 “정당한 세금을 물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 계통에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에게 입증”하는 모범업체를 운영해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언의 실패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개별 자본가의 자선 계획만으로는 구원될 수 없는 체제다. 개별 자본가들은 서로 간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역사 속으로 도태되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오언류의 초기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미성숙한 발전과 미성숙한 계급 상황을 반영한 머릿속 개똥철학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들에겐 “사회적 활동 대신에 그들의 개인적 발명 활동이, 해방의 역사적 조건들 대신에 환상적 조건들이,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으로의 조직화 대신에 [그들에 의해] 특별히 고안된 사회조직”이 해결책이다. 따라서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정치적 행동, 특히 모든 혁명적 행동을 거부”한 채 “부르주아의 박애적 심성과 돈 주머니에 호소”할 뿐이다.[5]

     

    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불평등이,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격하고 여기에 주목했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투쟁은 가혹한 탄압 앞에 패배로 귀결되기 일쑤였다. 지금은 자본가들도 헌법으로 보장하는 노동3권이 자본주의 초기에는 모조리 불법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의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파업이 ‘되지도 않을 일에 쓸데없이 피를 흘리는 일’이라며 노동자들을 훈계하려 들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비난하는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경제학자들과 사회주의자들(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 영국의 오웬주의자들)은 다음 한 가지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단결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 당신들의 노력은 헛된 것이다. 당신들의 임금은 언제나 요구된 일손들과 공급된 일손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당신들이 결국 단결을 한다고 해서 무엇을 얻게 될 것인가? … 당신들은 전과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역시 노동자들일 것이며 고용주들은 항상 고용주들일 것이다.”[6]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달랐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낼 가능성과 희망을 보았다.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며, 투쟁을 통해 단련되는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힘이야말로 미래를 향한 원동력이다.

    “사람들은 질문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노동자들은 그 수단이 전혀 무익하다는 것이 명약관화한 그러한 경우들에도 파업을 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간단히 말해서 노동자들은 임금 삭감에 맞서서 그리고 이러한 임금 삭감의 필연성에 맞서서 저항해야만 하기 때문이며, 인간으로서 노동자들은 상황에 자신들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자신들에게, 인간들에게 맞추어져야 한다고 선언해야 하기 때문이다.”[7]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 그리고 오늘 교육의 주제

     

    그렇다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러한 혁명적 사상은 어떻게 형성되었던 것일까? 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기존의 초기 사회주의 사상을 ‘공상적 사회주의’로, 자신들의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부를 만큼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일까? 위에서 말했듯이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를 넘어서려는 모든 운동을 가리키지만, 현재까지 정치적 실체를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는 사회주의 운동이라면 그 역사적 연원은 오로지 위대한 사상가 마르크스에게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함께 정립한 견해와 학설의 체계를 가리킨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가 19세기의 선진적인 3대 사상 조류를 계승하여 천재적으로 완성한 것이라 평가했다.[8] 이 3대 사상 조류란 독일 고전철학, 영국의 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 이론을 말한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철학 사상(세계관), 경제학(자본주의 경제 분석), 사회주의 정치 이론(노동자 계급투쟁의 정치)이라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가 진행하는 ‘세상을 변혁하는 사회주의 기초학습’ 12강은 위 세 영역을 짜임새 있게 살펴보게 된다. 먼저 오늘 1강에서는 마르크스의 철학을 살펴본다. 곧이어 2강 ‘자본주의의 원리 파헤치기’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다루게 되며, 3강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은 사회주의 정치 이론을 다루게 된다. 이어지는 강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기초 지식을 바탕으로 실제 역사와 현실의 복잡한 정세를 분석하고 대응해 나가는 과정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와 전략’, ‘한국노동자운동사 (1), (2)’, ‘사회주의 바로 알기: 중국,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 ‘기후위기와 민주적 계획경제’, ‘자본주의 역사 꿰뚫어보기 (1), (2)’, ‘오늘날 세계정세: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 ‘사회주의 정당의 기본 노선’이 그것이다.

     

    이제 오늘의 주제에 집중해 보자. 마르크스의 철학과 세계관을 학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철학과 세계관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분석하는 틀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철학과 세계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달라진다. 계급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지배계급의 사상들은 어떠한 시대에도 지배적 사상들”이기 때문이다. 즉 아직 자본주의가 망하지 않은 이유는 피지배계급의 대다수가 지배계급의 사상을 자신들을 위한 사상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 자본주의’라는 그릇된 인식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본을 위한 자유’가 자신들을 위한 자유라고 착각한다. 계급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사회의 지배적 물질적 힘인 계급은 동시에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힘”이기 때문이다. “물질적 생산수단을 제 마음대로 처분하는 계급은 이로써 동시에 정신적 생산수단도 제 마음대로 처분하며, 그 결과 정신적 생산수단이 박탈된 계급의 사상들은 이로써 동시에 대체로 지배계급에 종속”되기 마련이다.[9] 따라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철학을 학습함으로써 주어진 현실에 대해 지배계급의 관점으로 오염된 그릇된 해석을 넘어 올바른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란 마르크스의 철학적 방법론을 계승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마르크스가 천재적 사상가였다 하여,[10] 마르크스의 언술 하나하나가 금과옥조로서 불가침의 권위를 갖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것은 그의 방법론을 사용해 우리 시대에 주어진 현실을 과학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하여 창의적으로 올바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란 마르크스의 개별적 주장 하나하나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혁명적 방법론을 계승하는 것이라던 루카치의 다음 주장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해 마르크스의 개별적 진술들 전부가 사실적으로 부정확하다는 것이 이론의 여지없이 증명되었다고‒비록 인정할 수는 없지만‒가정하더라도, 진지한 ‘정통적’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누구나 이 모든 새로운 성과들을 거리낌 없이 인정하고 마르크스의 개별적 주장 모두를 거부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 정통성(Orthodoxie)을 한순간이라도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연구 결과를 무비판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이런저런 주장에 대한 ‘믿음’이나 어떤 ‘신성한’ 책의 해석을 뜻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에서의 정통성이란 오론지 방법에만 관련된다. 정통성은 변증법적 마르크스주의 속에서 올바른 연구 방법이 발견되었으며, 이 방법은 오직 그 창시자들[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신(Sinn)에 따라서만 확장‧확대‧심화될 수 있다는 과학적 확신이다. 또한 그것은 그 방법을 극복하거나 ‘개선’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천박화‧진부함‧절충주의로 귀착되어 왔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과학적 확신이다.[11]
     

    헤겔좌파 마르크스와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1818년에 태어났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독창적 견해를 정립한 시기는 1844년 무렵이다. 이전까지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에 속한 철학자였다. 마르크스는 1873년 집필된 『자본』 제1권 제2판의 후기에서 “독일의 식자층 사이에서 큰소리깨나 치는 돼먹지 않게 시건방지고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이 헤겔을 마치 ‘죽은 개’처럼 다루어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오히려 나는 공개적으로 이 위대한 사상가의 제자라고 천명하고 가치론에 관한 장에서는 고의적으로 여러 곳에서 그의 고유한 표현방식들을 따라 사용”했다고 썼다. 이처럼 헤겔 철학은 마르크스 사상의 연원이므로, 그의 사상을 올곧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독일의 상황과 헤겔 철학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에야 독일이 내로라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지만, 19세기 초중반만 하더라도 독일 자본주의는 영국과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한참 뒤떨어진 후발 국가였다. 1848년 3월 독일혁명의 패배는 당시 독일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의 깃발을 내걸었던 3월 혁명의 목표는 봉건주의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다. 그러나 당시 독일은 자본주의 발전이 더딘 상태였다. 3월 혁명 전야를 묘사하면서 엥겔스는 “독일 부르주아지의 부와 결집도는 프랑스나 영국의 부르주아지의 그것들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으며, “독일의 노동자 계급은 그 사회적, 정치적 발전으로 볼 때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자 계급에 비해 엄청나게 뒤처진 상태”에 있었다고 평가했다.[12] 이런 상태에서 독일의 부르주아 계급은 한편으로는 반동적 봉건 세력과 맞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혁명이 완성될 경우 노동자계급이 주도권을 잡으리라 경계했다. 이쪽도 저쪽도 선택하지 못한 부르주아지의 갈팡질팡이 1848년 혁명의 패배를 낳았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1844년 마르크스는 독일의 상태를 두고 “우리의 정치적 현재의 부정조차도 이미 현대 민족들의 역사적 헛간 속에서는 먼지투성이의 사실로서 발견된다”고 썼다. 남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이후의 역사를 모색하는 마당에 독일은 아직 봉건 체제도 청산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직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확립되지 못했던 탓에(정치적 비판의 자유가 제한돼 있으므로) 독일에서는 봉건 체제에 대한 비판이 철학적 투쟁의 형태로 전개된다. “선진 민족들의 경우에는 현대적 국가 상태와의 실천적 반목인 것이, 이 상태 자체가 부재한 독일에서는 무엇보다도 이 상태의 철학적 반영과의 비판적 반목이다.”[13] 당시 철학적 투쟁의 장(場)이 되었던 것은 프로이센 왕국에서 국가 철학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헤겔 철학이다.

     

    헤겔의 다음과 같은 명제는 헤겔 철학이 가장 보수적으로도, 가장 급진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적인 모든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모든 것은 현실적이다.” 먼저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므로, 현존하는 독일의 봉건 체제는 그 나름의 존립 근거와 합리성을 갖춘 게 된다. 정치적 보수주의의 근거인 셈이다. 헤겔 철학을 이렇게 해석했던 것이 헤겔 우파다. 반면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으로 지양(止揚, Aufhebung)되어야 하므로, 헤겔 철학은 공화주의라는 근대 이성의 실현을 위해 분투하는 급진 이념의 밑바탕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헤겔 좌파다. 엥겔스는 “인간의 머릿속에서 이성적인 모든 것은, 비록 현존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과 아무리 모순되더라도 현실적인 것이 되기로 정해져 있다. … 헤겔 철학의 진정한 의미와 혁명적 성격은, 인간의 사유와 행위의 모든 성과가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확실히 끝장내버린 데 있다”[14]고 썼다.

     

    독일에서의 철학 투쟁은 주요하게는 종교 비판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봉건 체제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종교였기 때문이다. 헤겔 좌파의 상당수는 종교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실천적 필요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의 유물론 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때 마르크스를 비롯한 헤겔 좌파에게 엄청난 열광을 불러일으켰던 저작이 출현한다. 1841년 포이에르바하가 쓴 『기독교의 본질』이 그것이다. 엥겔스는 “누구든 이 책의 해방 효과를 생각해 보려면 이 효과를 몸소 체험했어야 한다. 누구나 다 열광했다. 우리는 모든 한순간에 포이에르바하주의자가 되었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포에이르바하의 작업이 “종교적 세계를 그것의 세속적 기초로 해소한 데에 그 요체가 있다”고 평가했다. 성부(聖父), 성모(聖母), 성자(聖子)로 구성된 신성 가족이란 “세속적 기초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위로 올라가 구름 속에 하나의 자립적인 영역으로 스스로를 고정”시킨 것을 뜻한다.[15] 즉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다.

     

    유물론(唯物論, Materialism) 철학이란 무엇인가?

     

    엥겔스는 철학의 중대한 근본 문제가 “사유와 존재의 관계에 관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자연(외부 세계)에 대한 정신(의식)의 관계이다. 엥겔스는 자연에 대해 정신이 본원적이라고 주장한 철학자들을 관념론자, 반면 자연을 본원적인 것으로 여긴 철학자들을 유물론자라고 구별했다. 이것은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에서 주요한 논제인 인식론에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다. 즉 인간의 감각‧경험은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외부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점 말이다.

     

    예컨대 18세기 영국의 관념론자 버클리를 보자. 버클리는 외부 세계라는 것은 전혀 실재하지 않으며, 설령 실재한다 해도 인간은 그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보았다. “실존하는 모든 것‒우리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말 실존하는 모든 것‒은 오직 정신과 그 속의 관념들뿐이다.” 즉 버클리에게 감각 밖의 외부 사물은 “관념의 집합”에 불과하다. 존재하는 것이란 지각되는 것이므로, 감각과 경험이 사라지면 외부 사물의 실재도 사라진다. 그럼에도 인간의 감각 경험이 질서 정연하게,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은 신(神) 때문이다. (버클리는 영국 성공회의 주교였다.) 신은 당신의 경험 계열과 나의 경험 계열을 서로 상관관계가 있도록 함으로써 예측과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은 파국을 막기 위해 신으로 도피하게 된다.

     

    그러나 유물론자에게 감각과 경험, 사유의 형식은 그 자체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관념론자들은 인간의 ‘사유’와 ‘의식’이 외부 존재와 대립해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상정한다. 헤겔 역시 받아들였던, 칸트의 오성(悟性)이 가진 논리적 범주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사유와 의식은 인간의 두뇌의 생산물”이며 “인간 자체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이 환경과 함께 발전해 온 자연의 생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감각, 경험, 사유 등의 “원리들은 연구의 출발점이 아니라 그 최종적 결과이다 ; 원리들은 자연과 인간의 역사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추상되는 것이다 ; 자연과 인간계가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 및 역사와 일치하는 한에서만 원리들은 올바른 것으로 된다. 이것이 사태에 대한 단 하나의 유물론적 파악”이다.[16]

     

    좀 뜬구름 잡는 얘기 같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에서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축구는 세계 축구의 수준에 한참 뒤처져 있었다. 당시 축구 전문가랍시고 누군가 텔레비전에 나오면 매번 강조하는 말이 정신력이었다. 한국 선수들이 기술은 좀 달리지만 투지와 정신력으로 강팀과의 전력 차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2년 히딩크의 진단은 달랐다. 한국 선수들은 기술은 괜찮은데 체력이 떨어지고, 이 때문에 경기 고비마다 정신적으로 위축된다는 진단이었다. 이후 히딩크는 혹독한 체력 훈련을 통해 정신력이 물질적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불패의 명장 이순신의 연전연승(連戰連勝)은 오로지 그의 영용한 지도력 때문인가? 물론 이순신 개인의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빼놓고 연승의 비결을 말할 순 없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조선 해안에 최적화된 판옥선과 함포 사격술이 압도적 승리의 토대였다 보는 것이 유물론적 견해다.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한국의 드라마틱한 성장은 한국민들의 근면과 성실성 때문인가? 물론 입신양명을 향한 유교문화의 특성을 간과할 수 없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은 ‘쇼윈도 자본주의’로서 미국으로부터 받았던 막대한 경제원조가 토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유물론적 인식이다.[17]

     

    이 밖에도 비슷한 예는 무한히 열거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유물론적 세계관과 관념론적 세계관이 가장 격렬히 충돌하는 공간은 종교의 영역이다. 아무리 진보적 종교라 하더라도, 수미일관한 유물론적 세계관은 결코 종교와 양립할 수 없다.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는 세력의 태반이 반공 기독교 교인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18] 그러나 이 말이 곧바로 유물론자들은 종교를 탄압의 대상으로 본다는 뜻은 아니다. 유물론적 세계관에서 종교란 그 효용을 다 하는 순간(인간이 자기 소외를 극복하고 종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순간) 사멸할 수밖에 없는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유물론자는 종교를 낳은 물질적 토대를 변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으로 풀어보는 철학사

     

    더 나아가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적대적인 계급사회에서 철학의 발전은 불가피하게 철학의 두 근본 경향인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으로 나타난다는 것, 이 두 경향은 각각 당대의 진보적인 계급과 반동적인 계급의 이해를 표현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애당초 철학이 계급 적대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서양철학의 연원인 고대 그리스 사회, 동양철학의 연원인 춘추전국시대 모두 국가의 등장 이후 계급 모순을 정당화해야 하는 필요성이 대두한 시기였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에 관해, 여기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조선의 유학(儒學)을 살펴보자.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물질적 존재보다 정신적 존재가 근원적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긍정한 최초의 인물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다. 소크라테스와 대립했던 소피스트들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던 세력이다. 기원전 5세기 소피스트는 하층민을 교육하고 그 대가로 돈을 버는 직업적 교사 집단을 뜻했다. 이들은 체계적인 사상은 없었지만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견지했으며,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대중 교육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며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맞서 아테네 명문 귀족의 이익을 대변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진리란 소피스트들이 흔하게 얘기하는 현상적 진리가 아니라,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진리여야 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상을 완성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이 얘기했던 일반 민중의 의견을 ‘독사(doxa)’, 즉 불확실하고 거짓된 판단력으로 폄하했다. 플라톤은 현실에 존재하는 개별 사물은 이데아의 모방(미메시스, mimesis)이거나 이데아의 성질을 나눠 갖는 것(메텍시스, methexis)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인간의 정신은 원래 이데아를 알고 있었으나 신체와 결합하고 경험적인 사물을 접하면서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관념론은 특히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적 자연 철학과 대립했다. 데모크리토스에게 감각적 지각이란 외부 대상(원자들의 미세한 껍질들)이라는 물리적 근거에 의해 설명된다. 하층 민중들의 이해를 대변했던 소피스트나 자연 철학자들과 달리, 플라톤이 철인(哲人)정치라는 엘리트주의를 제창한 것은 그의 철학적 관념론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주자(朱子)의 교의를 받아들인 조선의 성리학 역시 기본적으로 관념론 철학에 해당한다. 성리학은 세계의 근원을 정신적 실체인 리(理)로 보았다. 이에 따라 모든 봉건적 계급 질서는 천리(天理)를 표현한 것이 된다. 이를테면 정도전은 “도(道)란 것은 이(理)이니 형이상(形而上)의 것이요, 기(器)란 것은 물(物)이니 형이하(形而下)의 것이다. 대개 도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와서 물(物)마다 있지 않음이 없고, 어느 때나 그에 해당되지 않음이 없다. 즉 심신(心身)에는 심신의 도가 있어서 가까이는 부자ㆍ군신ㆍ부부ㆍ장유(長幼)ㆍ붕우(朋友)에서부터 멀리는 천지만물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도가 있지 않음이 없다.”고 했다.[19] 이렇게 봉건 지배 질서를 옹호했던 관념론에 맞서, 유물론적 지향을 보였던 유학자로 특기할 만한 이들은 16세기의 서경덕과 19세기의 최한기다.

     

    서경덕은 “기(氣)를 떠나서는 리(理)가 없다. … 리는 기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가 시작이 없으면 리도 또한 진실로 시작이 없다. 만일 리가 기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하면 리는 기가 시초가 있는 것으로 된다.”[20] 성리학에서 기(氣)는 물질적 존재를 뜻하는데, 이와 같이 서경덕은 리(理)가 기(氣)의 운동 변화를 주재하지 않으며 기에 내재한 합법칙성에 따라 기의 운동이 이뤄진다고 보았다. 또 최한기는 “대개 천지와 인간 만물의 생성은 모두 기(氣)의 조화(造化)에 말미암는 것인데, 이러한 기에 대해서는 후세로 올수록 열력(閱歷)과 경험으로 점점 밝아졌다.”고 썼다.[21] 이 말에서 드러나듯이 최한기는 19세기 조선에 수용됐던 서양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경덕과 최한기가 조선 봉건사회에서 제한적이나마 진보적 태도를 보였던 것은 이들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기계적 유물론을 넘어선 마르크스

     

    그런데 마르크스 철학은 곧 유물론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이는 마르크스의 위대한 사상을 반토막 내는 일이다. 여기에 혁명적 사유 방식인 변증법을 추가해야 한다. 엥겔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두고 “세계를 하나의 과정으로서, 즉 역사적으로 계속 형성 중인 질료로서 파악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했다. 포이에르바하는 관념 대신 실재하는 자연에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하지만, 그에게 자연은 비역사적으로 파악된다. 이는 포이에르바하가 당대 자연과학의 최신 발견, 즉 세포, 에너지 전화, 다윈주의 등을 충실히 쫓을 수 없었던 형편 때문이다. 특히 포이에르바하에게 인간이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추상적 인간에 불과했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가 유물론자인 한 그에게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며, 그가 역사를 고찰하는 한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다”라고 썼다.[22]

     

    마르크스는 달랐다. 도식적으로 얘기해서, 마크르스 철학은 유물론에 헤겔 철학의 혁명적 요소인 변증법을 결합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흔히 정반합(正反合)으로 기억하는 헤겔의 변증법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 헤겔 변증법에서 어떤 개념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스스로 지양하며 고차원적인 존재로 발전해 나간다. 지양(止揚, Aufhebung)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보존한다, 유지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중단시킨다, 끝을 낸다는 뜻이다.

     

    운동이 진행되며 어떤 개념의 부정이 이뤄지면, 이는 하나의 새로운 개념이면서 동시에 앞선 개념보다 좀 더 고차적이며 풍부한 개념이 된다. 헤겔은 이렇게 표현한다. “이것은 마치 같은 내용의 격언을 정확하게 이해는 하면서도 그 의미나 함축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이의 말은 결코 이 격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의 생생한 힘을 알아차리고 있는 세상물정에 밝은 어른의 정신이 해독하는 정도의 의미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23] 예컨대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누구나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만, 아직 풋사랑을 겪었을 뿐인 젊은이와 수차례 찐사랑과 그 안티테제를 경험한 중년에게 이 말의 깊이는 달리 느껴지기 마련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르크스는 『자본』 제1권에서 헤겔의 서술 방식을 그대로 쫓아간다. 상품 속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대립하고(대립물의 통일), 이것이 외화된 ‘단순한 개별적 또는 우연적 가치형태’가 ‘전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로, 다시 ‘일반적 가치형태’와 ‘화폐형태’로 지양(止揚)해 가는 과정은, 헤겔의 『대논리학』에서 순수존재(純粹存在)와 순수무(純粹無)가 통일된 ‘존재’가 ‘현존재(現存在)’로, 다시 ‘대자적(對自的) 존재’로 전개되는 과정을 그대로 오마주(?)한 것이다.

     

    그런데 헤겔 철학에서 “변증법적 발전, 즉 모든 지그재그 운동과 일시적 퇴보를 거쳐 관철되는 더 낮은 것에서 더 높은 것으로의 진보의 인과적 연관은, 어딘지는 모르지만 어느 경우든 사유하는 각 인간의 뇌와 독립하여 영원히 진행되는 개념의 자기 운동을 복사한 것”[24]이다. 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증법의 운동 과정을 절대정신의 전개 과정이 아니라, 실재하는 외부 세계의 변화 과정으로 인식했다. 엥겔스가 머리로 선 변증법을 마르크스가 다시 발로 세웠다고 평가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마르크스는 “우리의 출발점이 되는 전제들은 결코 자의적인 전제들이 아니고, 독단들도 결코 아니며, 오직 상상 속에서만 도외시될 수 있을 현실적 전제들이다. 그것은 현실적 개인들, 그들의 행동 및 그들의 물질적 생활 조건들 ‒ 기존의 생활 조건들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 산출된 생활 조건들”이라고 말했다. 점차 고차원적인 단계로 발전해 나가는 현실 세계를 인식하는 틀이 변증법이었던 것이다.

     

    이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존재의 연원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이란, 외부 세계를 고정불변의 것으로 인식하는 낡은 사유 방법에 불과하다. 외부 세계를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으로 보는 변증법을 통해 근대철학의 중요 문제, 즉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인식주체는 실천을 통해 변화하는 외부 세계를 점진적으로 인식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 증명”한다.[25]

     

    레닌은 유물론 철학의 인식론을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사물은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독립하여 우리 밖에 존재한다. … (2) 현상과 사물 자체 사이에는 결코 어떤 원리적인 차이도 없으며 또 있을 수도 없다. 차이는 다만 인식된 것과 아직 인식되지 않은 것 사이에 있을 뿐이다. … (3) 과학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식론에서도 변증법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즉 우리의 인식을 어떤 기성의 불변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무지(無知)에서 지(知)가 생겨나며 또 어떻게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지식이 더 완전하고 더 정확한 지식으로 되는가를 연구해야 한다.”

     

    변증법은 왜 혁명의 철학인가?

     

    따라서 현재 우리의 인식은 완성된 진리이거나 절대적 진리일 수 없다. 이전 세대로부터 지식이 축적되고,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우리의 상대적 진리는 지속적으로 확장돼 나간다. 일례로 1940년 훈민정음해례본이 재발견되기 이전까지 사람들은 세종이 미닫이문의 격자를 보고 한글 자음을 고안했다고 여기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훈민정음해례본의 연구를 통해 한글 자음이 발음기관을 형상한 위대한 표음문자라는 진리를 알고 있다. 고대인들에게 신의 노여움을 뜻하던 낙뢰(落雷)는 그 발생 원리가 이미 과학적으로 해명되었으며, 미래 세대는 이를 조절‧통제하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가게 될지 모른다. 이처럼 변증법의 시야에서 보자면 ‘진리와 오류’란 제한된 영역과 특정한 단계에서만 통용력을 가진다. 출산이 여성 사망의 제1 원인이며 안전한 피임 방법이 없었던 전근대 사회에서 혼전 순결의 강제는 그 나름의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혼전 순결을 들먹이는 것은 반동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판단, 이것이 변증법이다. 레닌이 말한 대로, “추상적인 진리란 없다. 진리란 언제나 구체적인 것이다.”[26]

     

    세계를 끊임없는 변화와 상호 작용 등으로 인식하는 변증법의 시야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일반적인 운동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것들의 원조는 역시 헤겔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외부 세계의 운동을 머릿속에서 환상적으로 반영했을 뿐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하자.)

     

    첫째, 세계는 끊임없이 운동하는데, 그 원인은 내부적 모순, 즉 ‘대립물의 통일’에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존재’가 변화할 수 있는 이유는 동시에 그 대립물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 ‘존재’한다는 개념에는 그 자체로 ‘무(無)’라는 대립물이 내재하고 있다. 입시 철에는 “시험 잘 보세요”라는 말이 수백만 번 되풀이된다. 그런데 누군가 ‘시험을 잘 본다’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시험을 못 본다’는 대립물이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시험을 잘 본다’에 ‘시험을 못 본다’라는 대립물이 내재해 있다는 것은, ‘시험을 잘 본다’가 언제든지 ‘시험을 못 본다’로 변화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노동은 자본이 가진 생산수단과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이 결합해 이뤄진다. 자본은 노동력을 사용하는 대가로 임금을 적게 지급하려 하지만, 노동자는 노동력을 판매하는 대가로 생계비인 임금을 더 많이 받길 원한다. 이처럼 양자는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대립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필요로 한다. 노동자는 자본가가 없으면 임금을 받을 수 없으며, 자본가는 노동자가 없으면 이윤을 창출할 수 없다. 이 역시 “대립물의 통일(통일물의 상호 배제하는 대립물들로의 분열과 그것들 간의 상호관계)”이다.[27] 레닌은 “대립물의 통일은 조건적이며, 일시적이며, 덧없고, 상대적”이라고 썼다. 자본이 더 많은 축적을 위해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거나 정리해고로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순간, 노동과 자본의 공생관계는 곧바로 파탄이 난다. 평소 ‘기업이 잘 돼야 노동자도 잘 된다’고 생각하던 노동자들이 허위의식을 깨뜨리고 계급적 운동에 나서게 되는 원인이 바로 이러한 내부 모순, 즉 대립물의 통일에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양질전화다. 자연 세계에서 양질전화의 가장 간단한 예는 물의 상태 변화다. 물을 커피포트에 넣고 전원을 연결해도 바로 물이 끓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지만, 조금씩 물의 온도가 올라가 임계점(끓는점)을 지나게 되면 물(액체)은 끓어올라 수증기(기체)로 변하게 된다. 양적 변화(온도 상승)가 질적 변화(액체에서 기체로의 변화)로 바뀐 것이다. 양질전화는 인간 사회에서도 흔히 목격되는 현상이다. 마르크스의 『자본』 1권 제4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는 단순 협업이 매뉴팩쳐, 기계제 대공업으로 변화되면서 나타나는 양질전화의 과정이 상세히 묘사된다. 예컨대 1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자본가가 한 공간에 10명의 노동자를 불러 모은다 하자. 이때의 생산량은 처음에는 1명 노동자 생산량의 10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내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사용하며 생기는 절약분, 업무의 계획적 분업 등을 통해 생산량은 10배 수준을 훨씬 뛰어넘게 된다. 협업은 다시 매뉴팩쳐, 기계제 대공업으로 이행하며 기존 생산력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을 창조해 낸다.[28]

     

    또 하나의 운동 형태는 이른바 ‘부정의 부정’이다. 이는 사물이 지양을 거듭하면서 기존의 장점을 더 높은 수준에서 실현해 나가는 과정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자본』 1권 24장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서 생산방식의 ‘부정의 부정’이 이뤄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최초에는 분산된 노동자가 개별적 생산수단을 소유해 소경영에 나선다. 그러나 이런 협소한 생산 형태로는 분업과 협업, 자연에 대한 대규모 이용 등 사회적 생산력을 활용할 수 없다. 해마다 범람하는 황하의 거대한 물줄기를 조각난 땅뙈기를 부치는 몇 명이 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어느 단계에 이르면 개인적으로 분산됐던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집적된 생산수단으로 전화해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을 창출한다(첫 번째 부정). 물론 이 자본주의의 전사(前史)는 동시에 대다수 민중에게서 생산수단이 박탈되는 고통스러운 수탈의 과정이지만, 이전보다 생산력을 증대시켰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거대한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체제 역시 고유한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차 증대하는 노동자계급의 저항은 마침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弔鐘)을 울리게 한다. “이제는 수탈자가 수탈당하게 된다.”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가들의 사적 소유는 폐지되지만, 자본가들이 창출한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은 상실되지 않는다. “이 부정은 사적 소유를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획득물[즉 협업과 토지 공유 및 노동 자체에 의해 생산되는 생산수단의 공유]을 기초로 하는 개인적 소유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부정의 부정이다.

     

    이와 같이 세계를 끊임없이 변화‧발전하는 운동 상태로 보는 변증법의 시야에서는, 특정 단계에서 역사가 종착역에 다다랐다고 떠드는 것만큼 한심해 보이는 짓도 없다. 구소련의 붕괴 이후 ‘역사의 종말’을 운운하며 “자유민주주의보다 영속성 있는 정치 시스템은 없다”던 부르주아 정치학자의 시야는 혁명적 변증법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불과 몇십 년 전 ‘자유민주주의의 종국적 승리’를 자신했던 그는 과연 트럼프와 윤석열 일당의 반민주주의적 폭거를 설명해 낼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주장은 여전히 타당하다. “합리적인 형태의 변증법은 부르주아들과 그들의 교의를 대변하는 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성하는 모든 형태를 운동의 흐름으로 파악하며, 따라서 언제나 그것들을 일시적인 것으로만 파악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변증법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감화를 받지 않고 본질적으로 비판적이며 혁명적이기 때문이다.”[29]

     

    마르크스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마르크스 철학의 양대 기둥인 유물론과 변증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마르크스 사상의 위대함은 마르크스가 자신의 방법론을 인간의 역사와 사회,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분석하는 데 철두철미하게 적용했다는 점에 있다. 엥겔스가 평가했듯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은 ‘잉여가치를 매개로 한 자본주의 생산 비밀의 폭로’, 그리고 ‘유물론적 역사 파악’이다. ‘유물론적 역사 파악’이란 “정치적 갈등들을 경제적 발전에 의해 주어지는 현존하는 사회 계급들 및 계급 분파들의 이해 관계의 투쟁으로까지 소급하는 것, 그리고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개별 정당들이 이와 동일한 계급들 및 계급 분파들의 적절한 정치적 표현임을 확인하는 것”이다.[30]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한국 정치판의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역사적 연원을 살펴 이들이 대변하려 했던 계급 분파들이 무엇인지, 그들의 정치는 그들이 대변하는 계급 분파들의 이해관계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바로 ‘유물론적 역사 파악’이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적 역사 파악을 위해 정립한 개념이 바로 ‘생산력’과 ‘생산관계’다. 먼저 생산력이란 사회가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능력으로,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그 요소로 한다. 어떤 사회라 하더라도 물질적 생산을 위해서는 생산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의 능력(노동력)이 필요하며, 농지와 쟁기에서부터 공장과 조립로봇에 이르기까지 생산에 필요한 물질적 조건(생산수단)이 있어야 한다. 노동력과 생산수단은 당대의 기술 및 지식에 따라 상호 결합하는 형태가 정해진다.

     

    생산관계란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뜻한다. 이를테면 농지와 공장은 누가 소유하고 통제하는지(소유관계), 잉여생산물을 어떻게 분배하는지(분배관계), 직접 생산자의 노동을 누가 통제하는지(계급관계) 등을 종합한 개념이다. (다른 곳에서 마르크스는 ‘교류형태’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마르크스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개념을 이용해 가장 간결하게 자신의 유물론적 역사 파악을 정식화한 저작은 1859년 출판된 『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이다. 이곳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법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 법률관계나 국가 형태는 절대정신의 보편적 발전 때문이 아니라 물질적 생활 관계들의 변화에 기인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대목은 아주 유명하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 즉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력들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 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제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들은 그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지금까지 그것들이 그 내부에서 운동해 왔던 기존의 생산관계들 혹은 이 생산관계들의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관계들과의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관계들은 이러한 생산력들의 발전 형태들로부터 그것들의 족쇄로 변전한다. 그때 사회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서서히 혹은 급속히 변혁된다.”[31]

    우선 생산관계(생산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사회의 생산력 발전 단계에 조응한다. 오늘날 인간사는 돈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관계도 금전 관계를 매개로 이어지기 마련이며, 돈이 많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권능을 의미한다. 그러나 화폐 물신주의가 역사 내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역사에서 중국의 화폐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하기 일쑤였다. 먼저 고려시대에는 건원중보, 무문전, 은병 등의 유통이 시도됐다. 그러나 송나라 사신 서긍은 첩보 보고서 『고려도경』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대개 그 풍속이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고 오직 한낮에 시장을 벌여 남녀ㆍ노소ㆍ관리ㆍ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하고,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紵布)나 은병(銀鉼)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일용(日用)의 세미한 것으로 필(疋)이나 냥(兩)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쌀로 치수(錙銖)를 계산하여 상환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중간에 조정에서 전보(錢寶, 화폐)를 내려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부고(府庫)에 저장해 두고 때로 내다 관속(官屬)들에게 관람시킨다 한다.”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교역은 쌀이나 포목을 사용하고, 기껏 만들어 놓은 화폐는 창고에 처박아 뒀다가 관람용으로나 썼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의 세종 역시 조선통보(朝鮮通寶)란 동전을 만들어 유통을 시도했으나 마찬가지로 실패한다. (조선통보의 유통이 처참히 실패한 탓에, 조선 후기 사대부들 사이에서 조선통보가 기자(箕子) 조선의 유물이란 낭설이 떠돌 지경이었다.) 화폐 유통이 실패한 이유는 간단하다. 고려, 조선 전기까지 사회적 생산력은 상품유통 경제를 전면화시킬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시기에 ‘왜군(倭軍)은 얼레빗, 명군(明軍)은 참빗’이란 말이 떠돌았다. 조선 민중에 대한 수탈의 정도가 명군이 더했다는 뜻인데, 명군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중국은 이미 11세기 송나라 수도 개봉의 인구가 최대 100만을 헤아릴 만큼 상품유통 경제가 발전해 있었다. 임진왜란 시점에는 군인들에게 은자(銀子)를 지급하고 현지 시장에서 군량과 군수품을 조달하도록 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에 와 보니 시장이 있어야지! 은을 내밀어도 받질 않으니 닥치는 대로 약탈을 자행한 것이다.

     

    이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토대 위에 사회의 상부구조(법률적 및 정치적 구조)가 들어선다. 조선의 철저한 사농공상(士農工商) 위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직 상품유통 경제가 전면화하지 못한 사회, 즉 농업생산이 중심이 된 사회의 상부구조를 의미한다. 공상천예(工商賤隷)란 말에서 드러나듯이 상공인을 농민보다 천대하며, 동시에 농민들의 거주 이전을 제한하며 토지에 묶어뒀던 것은 당대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18세기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중국 사대부들이 시장에서 물건을 직접 흥정하는 장면을 보며 조선의 사신이 놀라는 장면이다. “우리나라에선 비록 선비가 궁핍하여 부릴 심부름꾼 하나 없는 처지라도 자신이 직접 시장판에 감히 나가는 일은 없다. 장터에 나가서 되잖은 장사치들과 물건값을 흥정하는 것을 비루하고 좀스러운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상품경제가 발달한 중국에선 사대부도 살아남자면 이재(理財)에 밝아야 했지만, 농업경제 사회의 안온한 질서에 머물렀던 조선의 선비들은 돈을 만지는 것을 금기시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발전 단계가 지배계급의 행동양식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조선 역시 후기에 들어서면 생산력의 발전으로 상품경제가 발전하면서(상평통보의 유통, 장시의 발달 등) 과거의 견고하던 사회 질서들이 조금씩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다. 금난전권(禁亂廛權)이 철폐되고, 족보 위조가 성행하며 신분제가 흔들렸던 것이 대표적이다.

     

    만약 구래(舊來)의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가로막는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예컨대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모든 신분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노동력이 대규모로 출현해야 한다. 또 상품의 전면적 유통을 위해서는 도량형, 화폐단위 등의 지역적 제한이 철폐돼야 한다. 유럽 각국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근본 동인은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았던 낡은 사회 질서를 타파할 실천적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유럽 곳곳에서 봉건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개화하던 시기를 직접 목격했다. 그에 따라 마르크스는 기존의 생산관계(또는 그것이 표현된 법률적 관계)가 생산력 발전의 족쇄가 되는 순간, 사회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고 썼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더 높은 단계로의 생산력 발전의 족쇄가 되는 순간을 수없이 목격한다. 예컨대 AI 기술, 플랫폼 공간에서의 수급 매개 등 각종 디지털 기술의 발전, 자동화 로봇 등을 통한 노동생산성의 향상 등은 물질적 풍요와 생태계 보호를 동시에 가능케 하는 물질적 토대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기술의 발전은 오히려 대규모 정리해고를 유발하거나 비정규직,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를 양산한다. 수요가 긴급한 필수 의약품은 지적재산권에 가로막혀 공급이 제약되며, 기후위기엔 아랑곳없이 환경을 파괴하는 무분별한 생산이 반복된다. 마르크스의 말대로라면, 기존의 생산관계가 생산력 발전의 족쇄가 된 현재는 분명하게 사회혁명의 시대다.

     

    스탈린주의적 역사 파악의 오류

     

    중요한 점은 마르크스가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인간의 실천 활동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어디에서도 생산력 발전에 따라 사회혁명이 자동적으로 이뤄진다고 쓰지 않았다. 『공산주의당 선언』의 첫머리에 명시돼 있듯이,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의 역사가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는 것으로, 혹은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도 끝났다고 썼다. 실제 역사를 돌이켜 보자면, 독점 자본주의가 출현한 20세기 초에 이르면 사회혁명의 토대는 이미 넘치게 무르익었다고 봐야 옳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살고 있다. 물질적 토대의 성숙과는 무관하게 사회혁명은 아직 달성되지 못한 것이다.

     

    인간은 물질적 토대를 떠나 자신이 선택한 조건에서 역사를 창조하지 못한다. 아무리 날고 기는 위인이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삶을 시작할 뿐이다. 거꾸로 역사 또한 인간의 주체적‧능동적 실천 없이 절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력의 부단한 증대가 자동적으로 체제의 질적 변화를 불러오지 않는단 얘기다. 중국공산당은 현재 중국이 ‘사회주의의 초급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 체제가 사회주의란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지만,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설명은 더 황당하다. 즉 앞으로 ‘사회주의 시장 경제’와 ‘중국식 현대화’를 통해 생산력이 발전하면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점진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산력이 발전하면 사회혁명이 절로 이뤄지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를 왜곡‧변용한 것인데, 그 원조는 스탈린이다.

     

    스탈린은 1938년 출간된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서 역사 발전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생산관계의 주요한 다섯 가지 유형은 역사에서 잘 알려져 있다 : 원시 공산 체제, 노예 체제, 봉건 체제, 자본 체제, 사회주의.” 좀 더 구체적으로 원시 공산 체제는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소유”된 사회이며, 노예 체제는 “노예 소유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회, 봉건 체제는 “봉건 영주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생산 노동자(봉건영주가 더 이상 죽일 수는 없지만 그가 사거나 팔 수 있는 농노)는 완전히 소유하지 못하는” 사회다.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생산 노동자들(개인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자본가가 죽이거나 팔 수 없지만 생산수단을 박탈당하고, 굶주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 팔고 착취의 멍에를 감내하지 않을 수 없는 임금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회다. 마지막으로 소련은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로서, 생산관계의 기초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이며 “사람들의 상호관계는 착취로부터 해방된 노동자들의 동지적 협력과 사회주의적 상호 지원”[32]이란 특징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때 스탈린은 역사가 5단계로 발전해 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생산력이라고 보았다. 즉 스탈린에게 새로운 사회의 도래는 생산력 발전에 따른 결과이며, 인류의 역사는 위의 5단계를 차례차례 밟아나가는 단선적(單線的) 발전 과정이다. 이러한 역사 파악에서는 계급투쟁이라는 인간의 주체적 노력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이데올로기, 문화적 차이 등 변화무쌍한 역사의 변수 또한 그렇다.

     

    스탈린의 단선적 역사관이 가장 기괴하게 영향을 미친 세력은 한국의 뉴라이트 논자들이다. 예컨대 뉴라이트 논자 이영훈은 전(前) 마르크스주의자(?) 안병직의 제자다. 요즈음 이영훈은 뜬금없이 조선을 노예제사회로 치부하고 있다. 16~17세기 조선 인구의 40%가 노비였다는 것이다. 서구의 자본주의 문명을 추앙하는 뉴라이트 논자들에게 조선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한 후진적 체제에 머물러야 하므로 이런 얘기를 꺼내든 것이다. 그러나 외거노비의 경우 별도의 호적을 가지고 있었던 점, 사노비가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기도 했던 점, 노비도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점, 주인과 사유재산 문제로 송사를 벌인 노비의 기록까지 있었던 점 등을 살피면, 조선의 노비를 그리스의 노예와 동일시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요점은 이것이다. 스탈린에 의해 정식화된 단선적 역사관과 생산력 중심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세계사를 돌아보면, 어느 발전된 문명이 외부 환경의 변화나 내부 모순을 이겨내지 못하고 소멸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마르크스에게 인류 역사의 ‘발전 법칙’은 결코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에게 추상적 수준의 법칙은 수많은 구체적 사실에 대한 연구로 도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법칙은 새로운 구체적 역사 사실에 대한 분석으로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다. (마르크스 역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정체를 말하는 등 적지 않은 오류를 범했다.) 마르크스의 진술 하나하나를 무오류의 교조적 이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가장 반(反)마르크스주의적인 행태다. 마르크스의 방법론인 유물론과 변증법은 새로운 지식과 발견을 향해 무한히 열려 있는 개방적 사유 방식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는 물질적 토대와 인간의 실천적 활동 사이의 관계를 항상 강조했던 혁명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마르크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엥겔스에 대한 오해

     

    그런데 이 대목에서 엥겔스에게 덧씌워진 부당한 혐의 하나를 반박해야 할 것 같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변증법을 자연으로까지 무리하게 확장해 기계적 유물론으로 만들었고, 그것이 스탈린 체제의 공식 이데올로기로 계승됐다는 혐의 말이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는 경제결정론이 아닌데도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논지를 왜곡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엥겔스의 저작을 읽어보면 이런 주장이 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하다는 걸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오히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생산방식의 ‘부정의 부정’ 법칙을 언급한 대목을 두고 독자들에게 오해를 피하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이 과정을 부정의 부정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렇게 부름으로써 이 과정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그 반대이다. 그는 이 과정이 일부는 이미 실제로 일어났고 일부는 이제 틀림없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다음, 여기에 덧붙여 이 과정을 일정한 변증법적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이 전부이다.”[33] 이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언제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로부터 법칙을 길어냈을 뿐, 선험적 법칙에 역사적 사실을 끼워 맞추려 들지 않았다.

     

    엥겔스가 경제결정론에 기울었다는 주장도 부당하다. 거꾸로 만년(晩年)의 엥겔스는 물질적 토대 외에 상부 구조의 다양한 영역, 심지어 우연마저도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사태를 유물론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당신의 시도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무엇보다도, 유물론적 방법을 역사 연구의 실마리로 다루지 않고 역사적 사실들을 재단하는 완성된 관습적인 방식으로 다룰 때 그것은 그 반대물로 전화하고 만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34]
    “물질적 존재 방식이 제1차적 동인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관념의 영역이 다시 물질적 존재 방식에 반작용을, 제2차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35]
    “유물론적 역사 파악에 따르면, 역사에서 종국적인 결정적 계기는 현실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입니다. 맑스도 나도 결코 이 이상의 것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명제를 경제적 계기가 유일한 결정적 계기라고 왜곡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명제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허무맹랑한 공문구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경제적 처지는 토대입니다. 그러나 상부 구조의 다양한 계기들―계급투쟁의 정치적 형태와 계급투쟁의 결과들―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계급이 확립한 헌법 등등―법 형태, 그리고 또 이 모든 현실적 투쟁이 거기에 참가한 사람들의 머리에 반영된 것으로서의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이론, 종교적 견해와 이 견해의 교의 체계로의 가일층의 발전 등도 역사적 투쟁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주며 많은 경우에 주로 이 투쟁의 형태를 결정합니다. 이 모든 계기들은 상호 작용을 하며, 이 상호 작용 속에서 결국 경제적 운동은 무한히 많은 우연들(즉 그 내적 상호 연관이 너무 멀거나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상호 연관이 없다고 간주하고 지나쳐 버릴 가능성이 있는 사물들과 사건들)을 통해서 필연적인 것으로서 자신을 관철해 갑니다.”[36]
    “우리가 역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영역들의 독자적인 역사적 발전을 부인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역사적 작용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원인과 결과를 영원히 상호 대립하는 두 극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의 상호 작용을 완전히 망각하는 조잡한 비변증법적 표상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 신사들은, 역사적 계기가 또 다른, 결국 경제적인 원인들에 의해 일단 생겨나자마자 그 주변 환경에 대해서, 심지어 그것을 낳은 원인들에 대해서까지도 반작용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거의 의도적으로 망각하고 있습니다.”[37]
    “정치, 법, 철학, 종교, 문학, 예술 등등의 발전은 경제적 발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는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경제적 토대에 대해서 반작용을 가합니다. 경제적 상태가 유일하게 능동적인 원인이고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수동적인 결과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종국적으로 언제나 관철되는 경제적 필연성에 기초한 상호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 일부의 사람들이 자기들 편한 대로 생각하듯이 경제적 상태가 자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되, 그들을 제약하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기존의 사실적 관계들에 기초하여 만듭니다. 비록 여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들에 영향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 사실적 관계들 중에서 경제적 관계들이 종국적인 결정적 관계들이며, 경제적 관계들을 추적해야만 이해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38]

    그렇다. 경제적 토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보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 정면으로 배치(背馳)되는 것이다. 판옥선과 함포 사격술이 조선 수군의 근본적 승리 비결이긴 하지만, 이순신 대신 원균이 지휘권을 장악했을 때의 처참한 결과를 반추해 보라. 때로 우리는 한 명의 위인이 역사의 물줄기를 송두리째 뒤바꿔놓는 장면도 목격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의 레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사회주의를 향한 변혁 주체, 노동자계급

     

    그런데 누군가 마르크스주의를 경제결정론이라 부당하게 비난한다면, 이것이 그들의 정치가 비유물론적인 것이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모든 사안에서 변증법적 상호 작용을 넘치게 강조했지만, 그렇다 하여 무제한적인 상대주의로 빠져들지는 않았다. 이들의 변증법은 유물론이라는 확고한 토대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라클라우와 무페를 보자.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제창자들인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계급성’과 ‘경제결정론’ 중심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혁명의 주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중심부 권력을 탈취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다양한 세력들을 ‘헤게모니적 접합’을 통해 아우를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자계급에 기반하지 않은 다원화된 정치적 실천의 강조란,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이 더 이상 혁명을 수행할 수 없다는 패배 의식을 뜻한다. 이들의 작업이 1980년대 노동자투쟁의 세계적 패배 국면, 즉 신자유주의의 전면화 속에서 등장했음을 상기하자. 하지만 계급이라는 물질적 토대에 기반하지 않은 ‘헤게모니적 접합’은 대체 어디서 출현할 수 있는 것일까? 계급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인데 말이다.[39]

     

    반면 유물론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를 향한 변혁 주체로서 오직 노동자계급이 전략적 지위를 가진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마르크스에게서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은 『공산주의당 선언』에 잘 묘사돼 있다. 마르크스는 “오늘날 부르주아지에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 중에서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다른 계급들은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쇠퇴하고 몰락한다. … 중간 신분들, 즉 소공업가, 소상인, 수공업자 및 농민, 이들 모두는 중간 신분으로서의 자기의 존립을 몰락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하여 부르주아지와 투쟁한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적이지 않고 보수적이다. …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즉 낡은 사회의 최하층의 이 수동적 부패물은 때때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운동에 끌려들어오는 일도 있으나, 그들의 생활 처지 전체로 말미암아 반동적 음모에 매수되는 것을 더 마음 내켜 한다”고 썼다.[40]

     

    프롤레타리아들은 “지금까지의 전유(專有) 양식 전체를 철폐”해야 하는 계급인데,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지켜야 할 자신의 것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이 주도할 사회혁명이 기존의 사회혁명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이다. 부르주아는 혁명을 통해 ‘봉건 지배계급에 의한 지배’를 ‘자본가 계급에 의한 지배’로 바꿔놓았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혁명을 통해 ‘계급에 의한 지배’ 자체를 끝장낼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여전히 중심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가?

     

    마르크스의 이 주장은 오늘날에도 타당할까? 19세기 초기 자본주의 시대,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생활 조건조차 보장되지 않았던 시대에나 걸맞은 얘기가 아닐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박근혜를 끌어내렸던 2017년 촛불 항쟁으로 돌아가 보자.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 직전까지 박근혜에 대한 탄핵 지지 여론은 80%를 오르내렸다. 이어진 대선에서 1,340여만 표를 얻은 문재인은 2위 홍준표의 785만 표의 거의 두 배를 득표했다. 정의당의 심상정은 201만 표를 얻어 6.1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촛불 항쟁의 성과를 독식한 민주당은 20년 집권을 운운할 정도로 자신감이 가득했다. 반면 윤석열의 파면 결정을 앞둔 지금의 상황을 보자. 탄핵 사유의 무게로 따지자면 박근혜의 잘못은 윤석열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현재 윤석열에 대한 탄핵 지지 여론은 60%를 오르내리는 정도이며, 이어질 조기 대선에서 윤석열 일당의 결집 양상은 상당할 것으로 예측된다.

     

    왜 이런 퇴보가 일어난 것일까? 2017년 광장의 민주주의가 일터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제아무리 대통령을 끌어내려도, 일터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 일상적 해고와 고용 불안, 비정규직 차별, 직장 내 괴롭힘과 성폭력 등이 반복되는 상황에선 ‘민주주의’가 가진 자들이 잘난 척하는 배부른 소리에 불과해 보이는 것이다. 방향이 무엇이든, 차라리 세상을 화끈하게 뒤엎자는 얘기에 끌리게 된다. 서부지법 난동을 벌인 청년 극우층의 정서는 바로 이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계급적 불평등의 본질은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할 때 벌어지는 자본과 임금노동 사이의 적대다. 이 사회의 어떠한 질서도, 그리고 이 체제를 뛰어넘겠다는 어떠한 사회운동도 결코 이 중심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가들은 대한민국 민주헌법 130개 조의 절반은 포기할 수 있겠지만, 이윤의 절반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새로운 사회운동도 임금노동이 아니라 무엇으로 사회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할 것인지를 답변하지 않고서는 지속성을 가질 수 없다. 생산 없이 유지될 수 있는 사회는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재화의 생산과 이윤 생산이 통합된 체제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직접 생산자계급인 동시에 자본의 이윤을 전적으로 생산하는 계급이란 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즉 노동자계급이 계급 적대 자체를 철폐할 수 있는 이유는 자본주의 착취 체제 속의 그들의 위치 때문이며,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다. 실제 사회에는 임금노동에서조차 배제된 수많은 약자들이 있으며, 이들의 처지는 임금 노동자보다 훨씬 열악하다. 그러나 이들은 생산과정에서 밀려난 탓에 자본의 이윤 생산을 중단시킬 물리적 힘을 가지기 힘들다.

     

    더욱이 노동자들은 집단적 노동을 통해 공동의 규율을 획득한다는 점도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날의 대규모 기업 내부에는 고도로 체계화된 부서 조직 등이 존재한다. 노동자들은 체계화된 기업 내부에서 타인과 협력하며 공동의 목표를 달성해 나간다. 이것이 기업 내부에서 가능하다면, 전체 사회 차원에서도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최초에 자본가들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노동자들을 집결시켰지만, 이제 노동자들은 공동노동 속에서 단결이라는 노동자계급의 정신을 배우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서로 연합하려는 노동자들의 최초의 시도들은 항상 단결이라는 형태를 취했다. 대공업은 서로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한 장소에 집결시킨다. 경쟁이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을 갈라 놓는다. 그러나 임금의 유지라는, 고용주에 대항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동의 이해가 그들을 저항, 곧 단결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사상으로 결집시킨다. 그리하여 단결은 항상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지양하고 그럼으로써 자본가들에 대해 전체로서 경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이중의 목적을 가진다. 저항의 최초의 목적이 단지 임금의 유지였을 뿐이라 해도 자본가쪽이 억압이라는 하나의 사상으로 결집함에 따라 처음에는 고립되어 있던 단결이 집단을 형성하게 되고, 끊임없이 결합하는 자본에 맞서 노동자들에게는 연합의 유지가 임금의 유지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된다.”

    노동자들은 자본에 맞선 투쟁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기업과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선 단결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확대되는 단결을 통해 성별, 고용형태, 업종의 차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민주적 원칙들을 체화해 나간다. 노동자계급의 이러한 거대한 잠재력은 그들의 존재 조건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얘기로도 조금 부족해 보인다. 특히 오늘날 한국처럼 노동자계급의 상층 부문과 하층 부분의 격차가 극심하고, 조직노동자 운동이 평온한 일상에 안주하는 형편에서는 더욱 그래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존재 조건도 자본축적에 따라 특정 산업의 발전과 쇠퇴가 반복되며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 노동자계급의 객관적 존재 조건의 변화, 그에 따른 의식의 변화에 대해서도 우리는 변증법을 사용해야 한다. 오늘날 노동자계급의 분절 상태가 유별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데,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이 압도적 다수인 피지배계급을 통치하는 비법은 언제나 분할통치(Divide and Rule)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시대에도 노동자계급이 단일한 하나의 계급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1885년 엥겔스도 영국 노동자들이 공업 독점으로 초과이윤을 얻고 있던 영국 자본가들의 이익을 나누면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썼을 정도다.

     

    현재 한국의 조직노동자 운동이 가지고 있는 보신주의, 비정규직 차별의 논리는 IMF 구조조정 시기 겪은 정리해고의 상흔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잘 묘사돼 있듯이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하고 평생 일터에서 내몰렸다는 트라우마는, 이후 경제 회복 국면에서 조직노동자 운동이 철저한 조합주의 행태를 보이도록 추동했다. 그러나 세상 만물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트럼프가 벌이는 황당한 짓거리들을 보라. 통상적 방식으로는 안정적 이윤 생산을 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위기 상태를 드러낸다.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계급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 지금, 한국의 조직노동자들만 안온한 상태에 남아있으리라 보기 어렵다. 더 나아가 한국의 국민경제에서 조직노동자 부문이 차지하는 결정적 역할을 고려하면, 이들을 빼놓고서 대안 사회를 얘기한다는 것도 허망한 얘기다.

     

    결국 중요한 것은 능동적 실천이다. 가장 억압받는 청년 노동자들, 미조직 노동자들의 힘으로 조직노동자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고 노동자계급 단결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과제다.

     

    사회주의 운동의 목표와 전술

     

    이는 다음 강좌의 주제가 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세 가지만 다뤄보도록 한다.

     

    첫째, 사회주의 운동은 국가권력 장악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계급지배 질서를 폐지하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사회주의자들은 부자 감세 대신 부자의 불로소득을 징발하자고 주장하며, 부동산을 투기의 대상으로 둘 게 아니라 토지 국유화를 실현하자고 주장한다. 기술이 발전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을 내쫓을 것이 아니라, 전 사회의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노동인구를 기술 발전에 따라 합리적으로 재배치하자고 주장한다. 문제는 공동체를 위한 이러한 요구 모두 자본의 이익에는 완전히 상충되며, 자본가들은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위 요구를 철저히 탄압한다는 것이다. 바로 국가권력을 통해서다. 윤석열의 내란 사태는 국가권력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도 했는데, 총칼로 지배계급의 질서를 피지배계급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계엄 포고령 1호에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하며, 포고령 위반 시 “처단”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었음을 상기하자.

     

    따라서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가계급의 지배 도구인 국가권력을 먼저 장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목적은 …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으로의 형성, 부르주아지 지배의 전복,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이라고 썼다.[41] 이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여기서 수준 낮은 오해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표현에서 소련, 중국, 북한의 일당독재를 연상하며 반민주적 체제를 떠올리는 것이다. 소련, 중국, 북한이 뭐라 떠들건 간에, 그들의 일당독재는 마르크스주의 본연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는 전혀 무관하다. 전광훈이 제아무리 목사라고 떠들어도, 반동적 장사꾼에 불과한 전광훈과 혁명가 예수 사이에 아무런 접점이 없듯이 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어디까지나 지금의 ‘부르주아 독재’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김대중 정도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을 정도로 상당한 지사(志士)적 풍모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민주투사로 자임하더라도,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지배 질서를 뒤엎는 것까지를 용인하는 민주투사는 없다. 레닌이 말했듯이, “‘공공질서의 교란’의 경우에, 그리고 실제로는 피착취계급이 자신의 노예신분을 ‘어기고’ 노예답지 않게 행동하려고 하는 경우에, 아무리 민주적인 국가라 할지라도 그 헌법에 노동자를 향해 군대를 출동시킬 가능성, 계엄령을 선포할 가능성 등을 부르주아지에게 보장하는 단서와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지 않은 국가는 단 하나도 없다.”[42]

     

    즉 계급사회에서 순수한 형태의 민주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냐,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자본가계급의 질서에 반대하는 절대다수의 피착취계급을 억압하는 독재라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반대하는 극소수의 착취계급을 억압하는 독재인 것이다.

     

    둘째, 노동자계급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자본주의 지배 질서를 폐지하는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일상적 투쟁을 중시한다. 마르크스 당대에 어떤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투쟁을 벌이는 것 자체를 백안시했다. 노동자들은 모름지기 임금 노예 신분을 거부하고 국가를 전복하는 혁명적 투쟁에 나서야지, 임금인상 투쟁을 벌이는 것은 자신이 임금 노예임을 인정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자계급이 혁명 투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정치적 계급으로 발전시키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모든 투쟁의 무기는 현실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며, 일련의 투쟁 과정을 거쳐 노동자계급은 정치적 계급으로 발전하게 된다. 즉 개량 투쟁(경제 투쟁)과 혁명 투쟁(정치 투쟁)을 결합시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노동자계급의 정치 운동은 당연히 자신을 위한 정치권력의 전취를 최종 목표로 삼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일정한 지점까지 발전한 노동자계급의 사전 조직이 필요하고, 이 조직은 그들의 경제 투쟁 자체에서 자라납니다. … 이와 같은 방법으로 도처에서 노동자들의 개별화된 경제 운동들로부터 정치 운동, 즉 자신의 이해관계를 일반적인 형태로 또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강제력을 보유하는 형태로 관철하기 위한 계급 운동이 싹트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동들이 일정한 사전 조직을 전제로 한다면, 그 운동들은 마찬가지로 다시 이러한 조직의 발전을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노동자계급이 그 조직으로 볼 때 지배계급의 집단 권력, 즉 정치권력에 맞서 결정적 출정을 감행할 정도로 충분히 전진하지 못한 곳에서는, 그들은 어쨌든 지배계급의 정책에 반대하는 끊임없는 선동(및 적대적인 지향)을 통해 그에 알맞게 훈련되어야 합니다.”[43]

    셋째,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철저히 견지한다. 이 말은 사회주의 운동이 노동자계급의 문제 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모든 계급, 계층, 부문에 대한 정치의식을 가진 ‘인민의 호민관’이 되어야 계급적 정치의식을 가질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가장 억압받는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의 투쟁에 가장 노동자계급다운 방식으로 연대하고 투쟁의 최선두에 나서야 한다. 이 시대의 여성 억압을 끝장내기 위해 여성파업을 조직하자는 주장처럼 말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어떠한 부르주아 정치세력에도 용해되지 않은 채,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목표를 견실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각 계급의 존재 조건 탓에 계급 질서 자체를 철폐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은 노동자계급이기 때문이며, 계급 질서 자체가 철폐돼야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모든 억압과 차별이 일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란 노동자계급이 협소한 조합주의, 일국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노동자계급 공동의 이익을 실현해 나가도록 추동하는 정치세력이다. 1887년 엥겔스는 『공산주의당 선언』의 다음 대목이 마르크스와 자신이 40년 넘게 지켜오고 곳곳에서 승리를 이끈 전술이라고 자평했다.

    “공산주의자들은 …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이해관계로부터 분리된 이해관계라고는 갖고 있지 않다. …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일국적 투쟁들에 있어서 국적에 상관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를 내세우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경과하는 다양한 발전 단계들에 있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당들과 구별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 정당들 중에서 가장 단호한 부분, 언제나 운동을 추동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부분이다 ;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들, 진행 및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여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 …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이 직접 당면한 목적들과 이익들의 달성을 위해서 투쟁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운동 속에서 운동의 미래를 대변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기본 원칙들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
    = 엥겔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 마르크스‧엥겔스, 「독일이데올로기」,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 마르크스‧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 알렉스 캘리니코스,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
    = 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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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세아니아의 하위 지역 중 하나다. 아오테아로아, 라파 누이, 하와이를 잇는 이른바 '폴리네시아 삼각형' 안에 1,000개 이상의 섬들이 존재한다.

    [2] 예를 들자면, 인류 역사 내내 가축화에 성공한 대형 포유류는 5,400여 종 가운데 14종에 불과하다. 이 14종의 13종이 유라시아 대륙에 존재한다. 아즈텍 제국군은 스페인 기병대를 통해 말이란 동물을 처음 목격했다. 오늘날 존속에 성공한 인류 문명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출현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3] G. D. H. 콜,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

    [4]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5] 마르크스‧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6] 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7] 엥겔스, 「잉글랜드 노동자계급의 처지」,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8] 레닌, 양효식 옮김, 「마르크스」, 『레닌 전집 58』.

    [9] 마르크스‧엥겔스, 「독일이데올로기」,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10] 마르크스 당대에도 그의 천재성은 유명했던 것 같다. 1852년 엥겔스는 “우리들 중에는 이상한 고정관념, 즉 모든 것을 아는 것을 소명으로 하는 마르크스라는 대부가 있는데도 우리가 억척스럽게 공부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썼다. 엥겔스, 「엥겔스가 뉴욕의 요제프 바이데마이어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2권.

    [11]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12] 엥겔스,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2권.

    [13]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14]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15]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16]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17] 1945년에서 1965년까지 20년간 한국은 약 120억 달러에 이르는 원조를 받았다. 1950년대에는 원조자금이 한국 정부 예산의 100%에 달할 정도였다. 또 다른 분석에 따르면, 1945년에서 1975년까지 한국이 받은 경제원조와 차관 60억 달러는 미국의 아프리카 대륙 원조 총액 68억 달러에 근접하며 소련의 제3세계 경제원조 총액 76억 달러에 약간 못 미치는 규모였다. 1950년에서 1975년까지 미국의 대한(對韓) 군사원조 65억 달러는 남미와 아프리카 두 대륙이 받은 원조 총액 32억 달러의 2배에 달하는 막대한 것이었다.

    [18] 한국 대형 교회 목사의 설교에서 유물론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마구 처먹는 일, 마구 들이키는 일, 눈요기, 정욕, 교만한 태도, 물욕, 인색, 탐욕, 부당한 이익 추구, 증권 거래소 사기 등 간단히 말해서 속물 자신이 암암리에 하고 있는 모든 추잡한 악덕으로 이해한다 ; 그리고 관념론을 미덕, 일반적 인류애, 대체로 ‘더 나은 세계’ 등에 대한 믿음으로 이해한다.”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19] 정도전, 「佛氏雜辨」, 『三峯集』. “道則理也。 形而上者也。 器則物也。 形而下者也。 蓋道之大原。 出於天。 而無物不有。 無時不然。 卽身心而有身心之道。 近而卽於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

    [20] 서경덕, 『花潭集』. “氣外無理。 理者氣之宰也。 所謂宰。 非自外來而宰之。 指其氣之用事。 能不失所以然之正者而謂之宰。 理不先於氣。 氣無始。 理固無始。 若曰。 理先於氣。 則是氣有始也。 老氏曰。 虛能生氣。 是則氣有始有限也。” 

    [21] 최한기, 『氣測體義』. “蓋天地人物之生。 皆由氣之造化。 而後世之閱歷經驗。 漸明乎氣。” 

    [22] 마르크스‧엥겔스, 「독일이데올로기」,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23] 헤겔, 임석진 역, 『대논리학(Ⅰ)』

    [24]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25]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26] 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

    [27] 레닌, 『철학노트』.

    [28] 이 과정은 동시에 노동 성격의 질적 변화도 이끌어낸다. 하나의 제품을 완결적으로 생산하던 1명의 자립적 노동자는 매뉴팩쳐와 기계제 대공업 체제에서 세분된 하나의 단순 업무를 담당하는 비자립적 노동자로 전락한다. 매뉴팩쳐 시대에 노동자들이 자기 기능 상실에 맞서 자본에 불복종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29] 마르크스, 『자본』1권 제2판 후기

    [30] 엥겔스, 「칼 맑스의 ‘1844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단행본 서설」,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1] 마르크스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사회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상호 행위의 산물입니다. 인간들은 이러저러한 사회 형태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산력들의 특정한 발전 상태를 상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에 상응하는 교류 형태 및 소비 형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생산, 교류, 소비의 특정한 발전 단계들을 상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에 상응하는 사회 질서, 그에 상응하는 가족, 신분들 혹은 계급들의 조직, 한마디로 그에 상응하는 시민 사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 인간이 생산하고 소비하고 교환을 수행하는 경제 형태들은 과도적이며 역사적입니다. 새로운 생산력들의 획득과 함께 인간은 그들의 생산 양식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생산 양식과 함께 그들은 오직 특정한 생산 양식의 필연적 관계들일 뿐이었던 모든 경제 관계들을 변화시킵니다. … 프루동씨가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성에 조응하여 사회적 관계들을 생산하는 바로 그 인간들이 또한 이념들, 범주들, 즉 바로 그러한 사회적 관계들의 추상적, 이념적 표현을 생산해 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주들은 그것들이 표현하는 관계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마르크스, 「맑스가 빠리의 파벨 바실리예비치 안넨코프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32] 이 글이 피의 대숙청이 진행되던 1938년에 발표된 걸 떠올리면 윤석열 뺨치는 망상이 아닐 수 없다.

    [33]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34] 엥겔스, 「15. 엥겔스가 베를린의 파울 에른스트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5] 엥겔스, 「16. 엥겔스가 베를린의 콘라트 슈미트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6] 엥겔스, 「19. 엥겔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제프 블로흐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7] 엥겔스, 「30. 엥겔스가 베를린의 프란쯔 메링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8] 엥겔스, 「32. 엥겔스가 브레슬라우의 W. 보르기우스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9] 레닌은 노동자투쟁에서조차 경제주의적 자생성에 굴종하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간단한 이유에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이며, 더 포괄적으로 발전해 왔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포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40] 당시 중간계급 또는 사회 최하층의 태도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 유별났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9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썼다. “혁명을 중도에서 저지하는 것은 누구인가? 중산계급이다. 왜? 중산계급은 만족에 도달한 이익이기 때문이다. 어제 그것은 욕망이었고, 오늘 그것은 충족이고, 내일 그것은 포만이다.” 다음으로 테나르디에 부부에 대한 묘사다. “이 인간들은 졸부가 된 속물과 타락한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저 잡종 계급에 속했는데, 이러한 계급은 소위 중류계급과 하류계급의 중간에 위치하여 후자의 결점을 약간 가지면서 동시에 전자의 거의 모든 결점을 가져, 노동자의 씩씩함과 억척스러움도 없고 부르주아의 공정한 질서도 없다.”

    [41] 마르크스‧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42]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43] 마르크스, 「맑스가 뉴욕의 프리드리히 볼테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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