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멈추면 세상도 멈춘다’, 3.8 여성파업 오픈마이크 든 여성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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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여성이 멈추면 세상도 멈춘다’, 3.8 여성파업 오픈마이크 든 여성 노동자들

  • 유지원
  • 등록 2024.01.19 00:35
  • 조회수 530

사진: 전병철

 

지난 1월 12일 명동 거리의 세종호텔 농성장 앞에 마이크가 하나 놓였다. 뒤편으로는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당신의 투쟁은 나의 투쟁, 세상을 바꿀 우리의 이야기’. 금요일 점심 무렵 명동을 바삐 지나가던 시민들의 시선이 흘끗 행사장으로 기울었다. 당신의 투쟁은 나의 투쟁, 이라는 문구를 소리 내 읽어보는 시민도 있었다.


가부장적 자본주의체제 아래 자본은 저임금, 고용불안, 가사·돌봄 노동의 전가 등으로 여성 노동자를 억압해 왔다. 이러한 억압은 물론 자본은 철저히 성별 이분법에 의해 노동자 대중을 갈라쳐왔다는 점에서 악질적이었지만, 구조적 문제를 여성 노동자 개개인의 것으로 치부하여 은폐해 왔다는 점에서 더 악질적이다. 따라서 3.8여성파업조직위가 고른 것은 열린 마이크였다. 각자 집과 일터에 깃들어있던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개인의 역사를 곧 여성 파업의 계기로 끌어내기 위해 창구를 열기로 한 것이다.

 

사회는 서비스연맹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의 허지희 조합원이 맡았다. 허지희란 이름 석 자를 빼놓을 수 없는 세종호텔지부의 조합원에서 여성 노동자 간의 이야기를 잇는 연결사로 잠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허지희 조합원은 “여성파업이란 단지 여성을 축하하기 위한 날이 아니라 여성 노동자가 여성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날”이라며 지금 싸우는 여성 노동자의 투쟁을 듣고 함께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이야기하자고 제안했다.


마이크를 잡은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이경화 경인지회장은 고객센터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야기했다. 12일을 기준으로 투쟁 72일 차를 맞은 이경화 지회장의 발언은 차분하면서도 사뭇 결연했다. 이 지회장은 “최저임금 받는 (국민건강보험센터) 노동자가 두 달 넘게 파업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더러 백칠십만 원이 아쉬워 그 고된 세월을 다 참아온 사람들이라 말하곤 한다. 회사가 말하지 않으니 보건휴가가 뭔지, 연차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 아파서 열이 37도가 넘어도 참고 전화를 받았다”라며 고객센터 현장의 열악함을 묘사했다. 이 지회장은 또 “우리는 집으로 출근한다는 말도 한다. 여성 노동자는 일터에서 퇴근하면 집으로 출근한다”라며 “그런 노동자들이 72일간 투쟁을 한 것이다. 윤석열 정부 아래 건보 투쟁이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방법이 없다. 11월 1일 파업 들어가며 내가 할 수 있는 게 나를 죽이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 적 있다. 지금도 그렇다”라며 노동현장에서의 노동과 가정에서의 무급가사·돌봄 노동, 정부의 젠더억압 정책으로 인해 겪은 어려움을 호소했다. 아울러 이 지회장은 “그래도 단 한 명도 포기할 수 없다는 이 마음은 바꿀 수 없다. 이미 내 옆에 2년 3년 같이 근무한 동료를 어떻게 버리나. 그래서 우리 투쟁은 계속되는 거다. 계속 투쟁 이어가겠다. 앞으로도 이 투쟁 계속될 거고 한 명도 안 버리고 전원 소속기관 전환되는 날까지 계속하겠다”라고 발언했다.


세종호텔지부의 고진수 지부장은 “세종호텔 안에도 많은 부분이 여성 노동자에게 할당되고 있다. 2000년대 호텔 파업 이후 가장 먼저 비정규직화된 계층이 여성 노동자”라며 성별에 따라 불평등한 호텔산업의 현실을 전했다. 그는 계속해서 “세종호텔지부는 마음만 먹으면 노동자들을 언제든지 비정규직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본에 맞서 싸워왔다”며 “한국 사회에서는 노동,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이 상시 대체될 수 있는 것으로 치부된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파업이 중요하고, 진짜 여성 총파업으로 가는 그 길에 저희도 최선을 다해 역량을 보태겠다”라고 연대의 말을 건넸다.

고공농성에 들어간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박정혜 수석부지회장과 소현숙 조직2부장도 이날 전화 연결을 통해 등장했다. 소현숙 동지는 추운 겨울 고공농성이라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투쟁의 인사를 전하고는 “위에서 투쟁을 한다는 것도 아래에서 하는 것과 똑같다”라며 “고용승계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라고 결의를 밝혔다. 계속해서 박정혜 동지는 정리해고 전 기억을 반추하며, “저희 사업장에서도 남성보다 여성 노동자 비율이 높았다. 돌이켜 보면 당시 힘쓰는 일은 남성 노동자가 하고, 청소 같은 잡다한 일들은 여성 노동자가 도맡아서 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여성 노동자들도 다 할 수 있는데 그걸 따지지 못하고 그냥 했다는 점에선 문제를 느낀다”라고 밝혔다. 이어 박 동지는 “이 높은 곳에 고립되는 한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싸우겠다”라며 “세상 모든 여성들이 차별받지 않고 일하는 그날까지 열심히 투쟁하고 연대하겠다”라고 밝혔다.


이어 박순향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지부장 역시 굳세고 힘찬 목소리로 마이크 앞에 섰다. 톨게이트지부는 구성원 절대다수가 여성으로 이루어진 조합이다. 노조 활동으로 인한 부당해고에 맞섰던 서산 톨게이트 투쟁, 그리고 이후 천여 명으로 확대되었던 도로공사 투쟁 승리의 기억을 되짚은 박순향 동지는 “그러나 직고용을 쟁취한 지금도 싸우고 있다. 도로공사 최초로 파업도 해봤고, 최초로 작업중지도 해 봤다. 이 작업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우리 스스로 작업 중지를 한 거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모든 힘은 투쟁에서 나왔다”라며 여전히 투쟁하고 있는 톨게이트지부의 소식을 전했다. 이어 박 지부장은 “우리는 직고용됐지만, 업무나 임금이 아직 완벽하지 않다. 도로공사는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는 중이다. 그러나 계속 이기고 쟁취해 나가고 있다. 정규직됐다고, 직접고용됐다고 끝난 거 아니다. 아직 자회사에 남은 오천 명은 무인기로 인력이 대체된다는 안타까운 현실에 부딪혀 있다. 이 노동자들과도 함께 싸울 필요성을 느낀다”라며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과 단결을 강조했다.


건강보험고객센터 서울지회 양명주 조합원은 “저는 그 유명한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 노동자)였다. 전업주부로 지내다 아무것도 모르고 입사한 지 만 13년이 지났다. 고객센터와 말 그대로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그러나 입사 초기랑 지금이랑 급여 변경이 없다”라며 노동가치가 평가절하된 여성 다수 사업장의 현실을 공유했다. 건강보험고객센터 서울지회 장원웅 조합원은 “제가 투쟁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엄마로서 내 아이에게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어서다”라며 “가장 중요한 주소, 이름 같은 개인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우리가 하청노동자라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공단은 지금 면접과 시험이라는 협박으로 우리를 흔들고 있다. 자식뿐 아니라 옆에 있는 동료도 잃을 수 없다. 공단은 계속 현실을 회피하지 말고 제대로 된 대화에 임하라. 이 세상 모든 여성 노동자의 노동가치를 인정받을 때까지 우리는 투쟁하겠다”라며 투쟁의 결의를 전했다.

 

사진: 전병철

 

마지막 발언은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가 맡았다. 그는 “인권이든 여성이든 다 뒤로 가고 있는 시대”라며 “아이슬란드에서 실시된 여성파업 당시 여성 노동자 90%가 참여했다. 파업의 위력은 신문조차 발행이 안 될 정도였다. 유치원, 학교는 물론이고 공장도 가동되지 않았다. 이후 5년 뒤 아이슬란드에서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나오게 된다. 그에 비해 한국은 어떤가. 구미 KEC 사례를 봐도 그렇지만 한국 자본주의 사회는 성별이분법을 착취의 도구, 노무 관리의 수단으로 쓴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운동 따로, 노동운동 따로인 경우가 너무 많았다”라며 “성별을 떠나 노동자는 페미니즘에 관심 없었고 페미니스트들은 노동에 관심 없었다. 여성파업이 이 같은 이분법의 틀을 깨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날 오픈마이크 행사는 발언 외에도 김지은 녹색당 대외협력국장과 정서영 변혁적여성운동네트워크 빵과장미 활동가가 진행한 3.8 여성파업조직위 5대 요구안 퀴즈, 서울여성회 페미니스트 대학생 연합동아리 활동가들로 이루어진 ‘꼴찌밴드’의 공연 등 다양한 기획으로 풍성하게 이어졌다.


성역할 고정관념에 기반한 노동현장에서의 분업, 가정에서의 가사·돌봄노동 전가로 인한 어려움, 저임금 등 여러 사업장에서 여성 노동자가 겪는 수많은 어려움이 생생한 발언으로 쏟아진 이날 오픈마이크 행사는 열띤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됐다. ‘당신의 투쟁’을 곧 ‘우리의 투쟁’으로 만들겠다는 3.8 여성파업의 마이크는 아직 꺼지지 않은 채 여성 노동자 앞에 놓여있다. 오는 3월, 이 마이크가 다시 한번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하는 창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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