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여성파업 5] 스위스 여성 노동자 파업: 천천히 전진하기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온라인신문

[세계의 여성파업 5] 스위스 여성 노동자 파업: 천천히 전진하기

  • 이소연
  • 등록 2024.01.17 16:33
  • 조회수 366

[편집자 주]

지난 12월 6일 열린 “여성파업 첫발떼기 토론회”를 비롯해, 2024년 3월 8일 여성파업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이 여성파업 조직위원회 주도 아래 진행되고 있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은 노동자계급의 여성해방 운동을 건설하기 위한 여성파업 시도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이 운동의 현황과 과제, 전망을 짚어 보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의 여성파업 사례를 돌아보고자 한다. 1975년 아이슬란드 여성파업에서 시작해 지난 십수 년 사이에 폴란드, 스페인, 아일랜드, 스위스, 아르헨티나 등 곳곳에서 여성파업이 일어났다. 각각의 사례는 그 자체로 세계 여성 노동자의 현실과 투쟁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넓혀 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여성파업의 양상과 결과, 다양한 쟁점을 훑어보면 우리의 과제에 대한 인식도 더 풍부하게 채워 갈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6월 14일에 스위스에서는 여성 노동자와 페미니스트들이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주된 요구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이었다. 이날 스위스 곳곳에서 동시다발로 이루어진 파업으로 스위스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스위스에서는 1972년이 되어서야 여성들의 참정권을 보장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급격한 발전이다.

 

다른 서구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늦게 여성 참정권이 도입된 이유는 스위스의 정치 체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위스는 지방 정부의 권한이 다른 중앙집권 국가보다 강하고, 직접 민주주의 제도로 인해 지역 주민의 정치적 결정권이 행사하는 영향력의 범위가 다른 대의 민주주의 제도 국가보다 훨씬 넓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결정권은 1972년까지만 해도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직접 민주주의 제도라는 진보적인 정치 형태를 가졌고, 세계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발달된 나라 중의 하나이며, 유럽 지역에서 중립적인 정치노선으로 금융 자본의 요충지로 활용되고 있는 스위스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1972년에 생겼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1971년, 여성 참정권을 얻다

 

그동안 스위스 여성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1868년, 취리히(Zurich)주에서 여성들이 주 헌법 개정 투표에 참여하기 위해 투표권을 요구했다. 그로부터 18년 뒤, 제네바(Geneva)주에 거주한 여권 운동가 마리 괴그-푸슐랭(Marie Goegg-Pouchoulin)의 주도로 여성들이 청원서를 연방의회에 제출했다. 이후 여성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다양한 조직이 등장했다. 1893년, 여성노동자협회(Working Women Association)와 여성권리보호협회(Women’s Rights Protection Association)와 같은 단체가 생겨났다. 1904년, 사회민주당이 최초로 당 강령에 여성 참정권에 대한 내용을 포함했으며 1909년, 몇 개의 단체들이 모여 스위스여성참정권협회(Swiss Association for Women’s Suffrage)를 조직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12일부터 14일 동안 스위스 총파업이 일어났다. 전쟁에 동원된 22만 명의 군인과 산업 노동자들이 전쟁으로 인해 치솟은 물가에 비해 낮은 임금으로 삶이 어려워지자 파업에 나섰다. 이 총파업의 요구안에는 여성의 참정권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1919년에 스위스 하원 의회가 연방평의회에 제출한 법안도, 1929년에 거의 25만 명이 제기한 청원도 모두 실패했다.

 

=1929년 여성 참정권 청원서 제출. 출처 sozialarchiv.ch

 

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에 사회 보장의 책임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남과 동시에 여성 참정권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여론이 나타났다. 1959년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려는 첫 번째 연방 국민투표에서 남성 유권자의 66.9%가 반대해 부결되었다. 제네바주, 뉴샤텔(Neuchâtel)주, 보(Vaud)주에서만 찬성이 나타났다. 1971년 2월 7일, 남성 유권자의 65.7%가 스위스 여성에게 남성과 동일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는 연방헌법 개정에 투표했다. 이렇듯 유럽 국가에서 보기 드물게 여성에게 참정권이 늦게 부여된 이유는 앞서 언급한 정치 체제에 기인한다. 스위스는 지역 행정 구역이 주(칸톤, 상급 자치단체), 코뮌(커뮤니티, 하급 자치단체)으로 나뉜다. 이런 체제에서 남성 유권자들의 과반이 찬성한 주가 과반이 되어야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주변 국가의 여성 참정권 인정(스위스와 비교했을 때, 독일은 53년 전, 오스트리아는 52년 전, 프랑스는 27년 전, 이탈리아는 26년 전에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이후 한참 뒤에 쟁취한 스위스 여성들의 참정권이었다.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스위스 민중과 노동자들이 투쟁해 온 여성 참정권은 이들의 정치적 참여에 대한 의식 수준을 기르는 자양분이 되었다.

 

1991년, 스위스 최초 대규모 여성파업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1981년 한 해 동안 스위스에서 4번의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이 해에 있었던 두 번째 투표가 6월 14일에 실시된 성평등에 대한 헌법 수정에 관한 투표다. 이 헌법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고자 했다. 특히, 4조에 있는 ‘일반적 평등 조항’ 안에 ‘남녀동권조항’에 관한 내용을 2항에 도입했다. 이 내용에는 남녀동등지위, 남녀의 실질적 평등의 실현, 동일 임금이 명시되었다[이 헌법 규정을 근거로 1995년 연방남녀동등지위법(Gleichstellungsgesetz, GlG. 영문으로는 Gender Equality Act)이 제정되고 1996년에 실행되면서 스위스 내에 남녀의 실질적 평등을 지향하는 법 정책이 확고해지기도 했다].1) 이 헌법이 도입된 지 정확히 10년 뒤인 1991년 6월 14일, 약 50만 명의 스위스 여성과 남성이 ‘Wenn Frau will, steht alles still(여성이 멈추면 모든 것이 멈춘다)’라는 슬로건 아래 파업에 돌입했다. 이 파업의 주요 요구 사항은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었다.

1) 신옥주(2009). <스위스의 남녀평등실현법제 고찰>, 《토지공법연구》 제44집, 2009.05.

 

=1991 파업 포스터(출처 : blog.nationalmuseum.ch)

 

스위스 최초 대규모 여성파업이 조직되기 위한 시작은 196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성파업 조직에 큰 기여를 했던 크리스티안 브루너(Christiane Brunner)가 공동으로 창립한 여성해방운동(Mouvement de libération des femmes, MLF)은 스위스 내에 프랑스어권 지역에서 만들어진 조직이며, 독일어권 지역(FBB), 이탈리아어권 지역(MFT) 조직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MLF는 여성 억압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의 해체 자체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근본적인 억압으로 보고 있었다. 1969년 2월 1일, 취리히 참정권 연합(Zurich Suffragette’s Union)은 1959년 여성 참정권을 위한 첫 번째 연방투표가 패배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촛불 집회를 열었다. 이에 MLF는 부르주아 질서에 맞서기 위해 성적인 도구와 가사 도구를 사용한 연극적인 효과로 이 ‘평화로운’ 집회에 소란을 더하며 강경한 입장을 표현했다.

 

이들이 1969년에 내건 구체적인 요구는 “가사 노동자에 대한 더 나은 직업적 대우, 여성 청소년에 동등한 기회 제공, 직장에서의 동등한 기회 제공,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어머니(돌봄제공자)를 위한 임금, 더 저렴하고 많은 어린이집, 어린이를 위한 주택 건설을 포함한 토지 이용 정책, 더 많은 유치원 설립, 결혼 및 이혼 법 개정, 파트타임 노동에 대한 더 나은 사회적 혜택”이다. MLF는 1971년 자발적인 임신중지 비범죄화에 대한 연방 대중 발의를 위한 서명 수집을 조직했고, 1975년에 있었던 4차 스위스 여성회의(Schweizerischer Frauenkongress)와 병행해 자발적인 임신중지 비범죄화, 여성의 동성애, 가사 노동 임금, 여성 수감자, 이주민 문제에 관한 행사를 개최했다. 이들은 창립 20주년을 맞아 1989년에 해산하게 되었다.

 

1991년은 앞서 언급했던 1981년에 있었던 성평등에 관한 헌법 수정 이후 10년이 지난 상황이었다. 또한 참정권을 얻은 지 20주년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헌법에 명시된 성평등에 관한 구체적인 법률은 마련되지 않았고 남성과 여성의 임금 격차는 여전히 뚜렷했다. 특히, 발레 드 주(Vallée de Joux) 지역의 시계 노동자들은 업계 내 지속되는 불평등한 임금에 분노했다. 지역 SMUV(Schweizerischer Metall- und Uhrenarbeiter Verband, 스위스금속및시계노동자연합) 소속 조합원이었던 크리스티안 브루너는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다른 조합원들과 함께 여성파업을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의 요구 사항은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사회보험법에 따른 평등, 차별과 성희롱 종식”이었다. 이 파업은 1918년 스위스 총파업 이후로 두 번째의 대규모 파업이었다.

 

=1991년 6월 14일, 스위스 여성파업의 날 베른(Bern) 주 (출처 : blog.nationalmuseum.ch)

 

전국에서 약 50만 명의 여성이 파업에 동참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파업보다 상상력과 결의를 통해 불만을 표출하고 연대를 나타내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자주색과 보라색으로 차려입고, 다양한 시위, 행진, 행사에 찾아갔다. 또한 빗자루, 대걸레, 세탁 바구니 등 가사 도구를 창문에 걸어 놓아 집 안의 여성이 파업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학교를 다니는 여성 청소년들도 교실에서 평등에 관해 토론하거나 미래를 위한 파업의 의미를 숙고했다. 이 날은 스위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연대와 인식의 날이 되었다. 사회보장제도에서 배제되는 어머니나 가사 노동자에 대한 연대, 파업의 참여에서 배제되는 취약한 위치의 외국인 여성 노동자에 대한 연대, 보복을 두려워하며 파업 참여에 주저하는 여성에 대한 연대가 이뤄졌다. 이러한 연대는 공적인 그리고 사적인 영역에서 여성들이 마주하는 불이익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증가시키고 여성 사이의 연대감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2)

2) Dan Gallin (1991), Women’s Strike in Switzerland. Agenda: Empowering Women for Gender Equity, 11, 28–29.

 

스위스의 젠더 역사학자 엘리자베스 조리스(Elisabeth Joris)는 1991년 여성파업이 처음에는 노동조합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제안이었다고 봤다. 그 이유로 파업이라는 개념 자체가 유급 노동과 연결되어 있는 반면에 여성들은 매우 다양한 환경에서 일했고, 급여를 받지 않고 일하는 경우도 있는 점을 꼽았다. 또한, 전통적인 파업과 달리 유급 노동 영역 밖의 노동자들도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분권적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1993년 3월 연방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 후보였던 크리스티안 브루너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우파 정치인들은 사회민주당의 남성 후보(프란시스 매티, Francis Matthey)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순식간에 국회 앞 광장에 많은 여성이 몰려들어 와 항의했고. 새로이 조직된 선거에서 루스 드레이퍼스(Ruth Dreifuss)와 크리스티안 브루너가 사회민주당의 후보로 등록했다. 두 명의 여성이 공식 선거에 오른 것이 처음이었고, 1993년에 루스 드레이퍼스가 연방의회의원으로 당선된다. 이후 그는 1999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연방 대통령으로 선출된 최초의 여성 정치인이 되었다. 여성 정치인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축하할 만한 일이었지만, 여성 노동자계급의 요구인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은 여전히 도입되지 못했다.

 

여성파업의 두 번째 영향으로 1995년에 연방남녀동등지위법(GIG)이 연방의회를 통과했다. 이 법은 1996년 7월 1일부로 발효되었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보장하며 고용 관계에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어떠한 형태의 차별도 금지하는 것이다. 이 법은 젠더평등국(Eidgenössische Büro für die Gleichstellung von Frau und Mann, EBG) 설립을 명시해, 스위스 연방 차원에서 법률, 직장생활, 가족, 교육, 정치 및 사회를 포함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장려하고 성평등과 가정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직장 내 성희롱도 금지되었고, 피해자의 입증 책임을 줄이는 것도 명시되었다.

 

2002년까지 유지되었던 현행법 상 합법적인 임신중지의 범위는 산모의 건강이 위험한 경우뿐이었다. 2002년 6월 2일, 유권자의 72% 이상이 임신 첫 12주 내 임신중지 비범죄화에 찬성했다. 낙태죄 폐지 국민투표가 발의되고 통과되기까지 3번의 고비가 있었다. 1977년 9월에 임신중지를 합법화하는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로 진행되었지만 거의 3%p 차이로 부결되었다. 1978년과 1985년에는 임신중지를 더 어렵게 만들기 위한 헌법 개정에 대한 국민투표를 했는데, 다행히 큰 차이로 부결되었다. 1991년 여성파업의 요구안에 정확히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파업을 통해 여성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부정의에 대해서 남성 노동자뿐만 아니라 다른 정체성을 공유하는 노동자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공감은 임신중지 합법화를 위한 국민투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019년, 스위스 여성파업 30주년과 현재

 

=2019년 6월 14일 바젤슈타트(Basel-Stadt) 주의 중심지 바젤(Basel)의 한 빌딩에 투사된 사진(출처 : X @angelacarlucci)

 

2019년 6월 14일은 1991년 첫 대규모 여성파업이 일어난 지 28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번 파업의 슬로건은 “임금, 시간, 존중(여성 노동에 대한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재평가, 돌봄제공자에게 더 많은 시간과 임금, 직장에서 성차별이 아닌 존중)”이었고, 50만 명 이상이 파업에 참여했다. 파업을 조직하고 참여한 여성들은 동일 임금, 무급 돌봄 노동에 대한 인정, 성적/육체적 괴롭힘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법, 정부 대표성을 국가의 주요 지방자치단체(주 정부)에 요구했다. 2019년 당시 스위스 여성 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해 요약한 글에 따르면, 세계경제포럼의 유사한 노동에 대한 임금 평등 부문에서 세계 44위를 차지했다.3) 2019년 6월, 유니세프 연구에서는 스위스의 ‘가족 친화적 정책(양육자의 유급휴가, 3세 미만 / 3세 이상 8세 미만 아동보호 등록률)’이 유럽에서 최악으로 나타났다.4) 이런 현실은 스위스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파업에 참여한 여성들은 독일어로 ‘여성파업’을 의미하는 #Frauenstreik, 프랑스어로 #GrèvedesFemmes 라는 해시태그를 사용하며 온라인으로도 조직되었다.

3) WEF(World Economic Forum), The Global Gender Gap Report 2018, p.261 

4) UNICEF Office of Research, Are the world’s richest countries family friendly?, 2019, p.6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서는 최대 4만 명의 참가자가 의회 건물 앞으로 모여들었다.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는 공식적으로 파업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오전 11시에 교회 종소리를 울렸다. 로잔[보(Vaud) 주의 주도]에서는 여성들이 밤에 모여 브래지어와 넥타이 같은 물건을 상징적으로 불태웠고, 취리히에서는 시위대가 시내 중심가에서 차량 이동을 막아섰다. 제네바에서는 약 1만 2,000명이 참여했다. 스위스 의회는 15분 동안 회의를 중단했고, 파업 참여자들은 남성 노동자들과의 20% 임금 격차를 반영하도록 오후 15시 24분에 일을 마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여성파업의 긍정적인 결과로 2019년 10월 20일에 치러진 연방선거(연방의회를 구성한 7명의 의원을 뽑는 선거는 같은 해 12월 11일에 치러짐)에서 여성이 하원의 42%를 차지했다. 이 총선에서 여성 후보자 수가 1,875명으로 전체 후보자의 40%였다. 이때 총선에서 녹색당, 녹색자유당이 가장 강세를 보였는데, 각각 55%, 40%가 여성 후보자였다. 여성파업을 통해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이 증가했음을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2023년,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맞서는 페미니스트 파업

 

<2023 페미니스트 파업 요구 사항>

 

업무 강화 없이 임금을 유지하며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노동조건 개선. 여성이 주로 고용되는 부문의 최저임금과 임금 인상 포함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 보장.

AHV(Alters- und Hinterlassenenversicherung, 연방 노령/유족 보험)의 강화와 민영화된 연금제도 폐지/공적연금 강화 : 퇴직연령 단축 및 돌봄 노동을 임금노동으로 인정

성, 가정 폭력에 맞서는 스위스 전역의 체계적인 조치

1인 자녀 당 최소 1년 동안 각 부모의 100% 유급 육아휴직

민간 건강보험 폐지, 재생산권 보장(생식 및 성 건강비용 포함)

인종, 국적, 성별 정체성 및 성적 지향, 장애, 몸매 조롱에 대한 차별 철폐

페미니스트 망명 및 거주 허가

기후 및 환경에 대한 국가 행동 계획 및 조치

교육 분야에서 교차성 페미니즘 도입

신분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헌법에 명시된 임신중지 권리 보장

 

=2023년 페미니스트 파업 (출처 : 14juni.ch)

 

30만 명이 넘는 여성 노동자가 거리로 나왔다. 2019년 대규모 여성 파업 이후로, 2021년 2주의 유급 출산휴가 도입과 동성혼 법제화(2007년 ‘동성간 시민결합’ 이후 혼인이 가능해짐) 등의 중요한 변화가 있었으나, 노동계급 여성, LGBTQ+ 등의 민중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2년 여성 노동자의 퇴직 연령을 64세에서 65세로 높이는 개혁이 채택되었고, 최저임금이 부족해 돌봄, 소매업 등 불안정하고 저평가된 노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더 어려워져 갔다. 식품, 에너지, 주거 비용, 민간 의료보험비의 상승도 그에 한 몫을 하고 있었다. 한편, 보수주의자들이 임신중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려고 하는 움직임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억압은 더해 갔다. 그들은 임신중지 전에 하루의 성찰 기간을 도입하고, 후기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조항을 만들려고 했다. 다른 한편, 보육에 대한 공공 서비스가 부족했으며, 젠더 기반 폭력(직장 내 성희롱, 비동의 강간죄 도입 등)의 변화는 지지부진했다.

 

=2023년 취리히에서의 페미니스트 파업 (출처 : feministischerstreikzuerich.ch)

 

이에 맞서기 위해 스위스 노동자계급은 ‘페미니스트 파업(여성, 남성, 논바이너리 등의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사용한 용어)’이라는 이름을 걸고 대규모 파업을 결의했다. 다음의 내용을 담은 행동은 스위스 일부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오전 10시 46분: 남성은 오전 8시부터 일하는 반면, 여성은 임금을 받지 못하고 출근 후 2시간 46분을 일한다.

오후 1시 33분: 이 시간부터 여성은 임금 불평등, 무급 돌봄 노동, 시간제 노동으로 인해 더 이상 소득이 없다.

오후 3시 24분: 이 시간부터 여성은 임금 불평등(남성 임금의 18%를 더 적게 받음) 때문에 무급으로 일한다.

 

이번 파업을 ‘페미니스트 파업’이라고 명명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몇 가지 더 주목할 부분이 있다. 하나는 각 주마다 요구 사항이나 투쟁에 집중하는 부분이 조금씩 달랐던 점이다. 아르가우(Aargau)주의 경우에는 남성으로만 이뤄진 정부 위원회가 있고, 대의원회에서는 31%만 여성이 차지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어린이 돌봄 시설, 난민 출신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 간호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열악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루체른(Lucerne)주에서는 주방용품 업체에서 일하는 25명의 여성 노동자가 동료들을 이끌고 고용주의 건물 출입을 막았다. 그들은 동일 임금, 무급 출장 시간, 연체 임금 지급, 현금 지급, 괴롭힘과 차별에 반대하며 항의했다. 그 결과, 회사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합의하고 노동조합과 협약을 체결했다. 베른(Bern)주의 한 개인 요양원의 여성 간병 노동자들은 점심시간을 연장시키고, 그들의 요구 사항을 고용주에게 제출했다. 이들은 더 많은 고용과 존중을 위해 투쟁했다. 또 다른 마을에서는 여성 간병 노동자 50명이 동시에 오후에 퇴근하여 파업에 참여했다.

 

소매업 여성 노동자들도 스위스 여러 도시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가장 큰 규모는 로잔(Lausanne)과 제네바의 주요 쇼핑 지역에서 나타났다. 이들은 소매업에서의 더 나은 임금, 정규직 고용, 일과 삶의 균형 개선을 위해 투쟁했다. 보주에서는 제약 노동자들이 더 나은 조건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로잔과 루트리(Lutry)의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과 불공정한 노동조건에 대한 단체 노동협약을 요구하기 위해 파업에 돌입했다. 그들의 직업에는 큰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우편 및 물류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조합과 함께 전국에서 성평등 및 동일 임금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또 다른 하나는 FLINTAQ5) 에 대한 차별과 요구를 직접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2023년 페미니스트 여성 파업 선언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파트너가 있든 없든, 자녀가 있든 없든, FLINTAQ다. 우리는 건강하거나 아프며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든 없든 살아간다. 우리는 젋고, 어른이고, 늙었다. 우리는 성노동자다. 우리는 학생이자 연금 수급자다. 우리는 스위스나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우리는 이민자이자 난민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의 일부이고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임금 노동자, 자영업자 또는 실업자이다. (중략) FLINTAQ는 전 세계적으로 권위주의 정권, 전쟁, 환경 파괴의 첫 번째 희생자이다. 또한 그들은 자주 저항 운동의 최전선에 선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투쟁에 연대하며, 모든 형태의 가부장제를 시급히 끝장내야 한다는 과제를 공유한다.”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다양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삶을 경유하는 여성/성소수자이자 노동자의 상황을 드러낸 것이다.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권력과 위계에서 벗어나 여성/성소수자 민중의 억압을 그들의 위치에서 드러냈다는 것은 페미니스트 파업의 위력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5) “Frauen, Lesben, intergeschlechtliche, non-binäre, trans, agender und genderqueere Personen”의 약어로 여성, 레즈비언, 인터섹스,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에이젠더, 젠더퀴어를 의미한다.

 

취리히 지역의 페미니스트 파업 선언문을 보면, 여/성소수자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차별과 억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중 일부를 살펴보면, “모든 차별의 공통점은 우리가 살고 있는 가부장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질서에서 비롯된다. 성장과 이윤 극대화는 자연 자원의 파괴 및 성차별적이고 인종적인 노동 분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수많은 FLINTAQ에 의한 무임금 및 낮은 임금의 돌봄 노동이 경제를 보조하는 것이다. 이 착취적인 노동 분업으로 남반구 국가의 FLINTAQ가 가장 고통받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불평등이 촉진되고 유지되는 것이다”고 밝힌다. 또한 기후 위기, 제도화되고 인종화된 성차별과 폭력, 퀴어/트랜스 폭력, 여성 신체에 대한 자본과 남성의 대상화, 성적 편견과 표준 등에 반대하는 입장도 담겼다. 파업을 통해 생산을 멈추고 노동자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투쟁에서 그 누구도 배제할 수 없다는 스위스 페미니스트 파업 조직, 참여자들의 의지를 볼 수 있다.

 

여성/성소수자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향하여

 

스위스 여성 참정권은 1972년에 도입되었고, 1981년에는 헌법상 성평등에 관한 조항을 만들었으며, 1991년 첫 대규모 여성파업이 나타났다. 오랜 시간을 들여 형성해 온 직접 민주주의 제도에 여성이 포함되고, 여성/성소수자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개진해 온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스위스와 한국의 여성/소수자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착취와 억압의 정도를 비교할 순 없으나, 여전히 견고한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기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조직하는 결의는 같다. 2019년과 2023년에 나타난 여성파업은 스위스 사회에 계속되는 임금 격차, 여성/성소수자에 대한 젠더 폭력, 차별과 낙인에 대해 투쟁해 왔다. 특히, 2023년 페미니스트 파업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사회에서는 2015년 이후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나타나면서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성별분리주의와 신자유주의 전략을 채택한 입장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모두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목적과 목표가 각각 달랐고 실천도 달랐다. 페미니스트가 무엇을 실천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이 달랐고, 조직적인 백래시와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상황 때문에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의 변혁적인 움직임이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변화의 가능성은 언제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미 영영 페미니스트(2015년, 온라인에 만연한 남성중심주의 문화를 비판하며 만들어진 여성 전용 사이트 ‘메갈리아’의 등장, 2017년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2018년 미투운동으로 페미니즘 대중화와 수많은 페미니스트가 등장했다. 이에 1990년대에 활동했던 ‘영페미’보다 더 젊은 페미니스트를 칭하는 단어다.)들은 4B운동6)이라는 일종의 파업을 선언했다.

6) 비연애·비섹스·비혼·비출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페미니즘 대중화로 나타난 분리주의 페미니스트의 실천 전략이었다. 여성에게만 강요되며, 이성애 중심의 가족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임신·출산·양육을 개별 실천을 통해 거부함으로써 가부장제에 대항했다.

 

작년 5월 9일에 발간된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31.1%로 38개 회원국 중 1위이다.7)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 이후,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하는 법안은 아직도 만들어지고 있지 않다. 여성가족부가 낸 ‘2021 여성폭력 실태조사’를 보면, 성인 여성 7,000명 중 과거 또는 현재의 배우자, 연인 등 친밀한 관계의 파트너로부터 신체적, 성적, 정서적, 경제적 폭력 및 통제 피해를 평생에 하나라도 경험한 비율은 약 16%다. 한국 성인 여성 10명 중 1명은 살면서 한 번 이상의 젠더 폭력 피해를 경험한 것이다. 성소수자 인권단체 다움이 2022년 5월 17일에 발간한 ‘청년 성소수자 사회적 욕구 및 실태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40%가 최근 1년 동안 극단적 선택을 생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트랜스젠더 가운데 차별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70%에 달한다.

7) OECD, “Joining Forces for Gender Equality : What is Holding Us Back?”, 2023.05.09.

 

여성/성소수자 노동자들이 살아가기에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는 시대다. 그럴수록,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를 규명하고 드러내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스위스의 여성/페미니스트 파업이 보여 주는 것은 ‘여성(소수자)이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는 것이다. 또한 말 그대로 100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여성/성소수자 노동자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이지 않고, 임금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여/성소수자가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서로를 붙들고 살리고 있다. 몇 차례의 대규모 파업을 조직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러한 파업을 통해 친구, 동료, 지인들을 설득하고 참여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변혁은 시작된다. 페미니즘의 전망은 이미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정치경제학적 위계를 타파하고 성에 기반한 수탈, 착취와 억압을 깨부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파업을 조직하고 진행하는 과정에 수많은 여성/성소수자이자 노동자계급이 참여할 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