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기후 레닌주의를 향하여!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온라인신문

[번역] 기후 레닌주의를 향하여!

  • 김요한
  • 등록 2024.01.09 12:24
  • 조회수 4,000

 

원문 기사 https://www.leftvoice.org/for-climate-leninism/

나다니엘 플라킨 2023년 10월 1일

 

안드레아스 말름은 기후 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생태적 레닌주의”를 요구한다. 좋다. 하지만 레닌주의란 무엇보다 자본가 국가를 분쇄하는 것을 뜻한다.

 

거대 재앙의 위험이 … 임박했다. 모든 신문이 이것을 되풀이해 쓰고 있다. … 결의안들은 … 재앙을 피할 수 없다는 점, 재앙이 아주 가까워졌다는 점, 재앙에 맞서기 위해 극단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 파멸을 피하려면 민중의 “영웅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을 인정한다.

 

모두가 재앙을 말하고 있으며, 모두가 재앙을 인정한다.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

 

누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생각하면, 재앙에 맞설 방법들이 있다는 것, 재앙에 맞서기 위한 조치들이 더없이 분명하고, 간단하며, 완벽하게 실현 가능하고, 민중의 힘이 온전히 닿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조치들이 실행되지 않는 것은, 전적(全的)으로 그 실현이 한 줌 자본가들의 막대한 이윤에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란 점도 알 수 있다.

 

- 레닌

 

레닌은 이 글을 1917년 10월에 썼다. 이 글에서 레닌은 러시아에서 다가오는 기근의 위험성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사소한 생략을 제외하고서 보면, 위 인용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묘사한다. 기후재앙이 진행 중이라는 걸 모든 사람이 안다. 지난 가을 COP27 기후 회의에서는 사실상 모든 부르주아 정치인들이 참여한 엄숙한 선언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실행되지 않는다. 필요한 조치들은 간단하지만, 자본가들의 이윤을 침해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실행되지 않는다.

 

‘멸종저항(Extinction Rebellion, XR)’은 여러 나라에서 도로를 막아섰다. 독일에서는 여러 활동가 단체가 정부의 행동을 강제하기 위해 시민 불복종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엔데 겔란데(Ende Gelände, 길이 없음)’는 석탄 광산을 점거했다. 최근에는 ‘레츠테 게네라치온(Letzte Generation, 마지막 세대)’ 회원들이 강력 접착제로 자기 몸을 도로에 붙여 교통을 방해했다. 두 단체 모두 끔찍한 탄압을 받고 있다. ‘레츠테 게네라치온’은 “범죄 음모”로 수사받고 있으며 심지어 “기후 테러”라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이들의 전술은 과격해 보이지만 놀랍게도 그 요구는 온건하다. 이들은 정치인들이 “과학에 귀를 기울이고”, 아우토반에 속도 제한을 도입하며, 그밖에 소소한 조치를 시행할 것을 요구한다.

 

정부의 행동을 강제하기 위한 시민 불복종 전략의 주요 이론가는 스웨덴 학자 안드레아스 말름이다. (1) 그의 책 <파이프라인을 폭파하는 방법>은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기사와 장편 영화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코로나 봉쇄 기간에 쓴 두 번째 책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에서 말름은 기후 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전시 공산주의”, “생태적 레닌주의”를 촉구했다.

 

레닌주의자로서, 우리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레닌주의란 말름이 제안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의미한다.

 

누구도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파이프라인을 폭파하는 방법>은 클릭을 유도하는 미끼에 불과하다. 사실 말름은 화석연료 기반 시설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말름은 왜 더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는지 의문을 가진다. 존 랭커스터의 질문처럼 말이다.

 

기후변화를 강력히 체감하는 사람들이 그런 종류의 일을 하기엔 너무 착하고 교육을 너무 많이 받은 것일까? 아니면 어느 정도의 기후변화를 가장 강력히 체감하는 사람들조차 기후변화라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기후운동의 많은 영역에서 평화주의는 절대적인 것으로 다뤄진다. 예를 들어 환경운동가 빌 맥키벤은 마틴 루터 킹, 간디, 넬슨 만델라의 정신과 같은 비폭력주의가 유일하게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빌 맥키벤은 지구를 구하고 싶어 한다. 다만 그 운동이 누군가의 재산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을 때만 그렇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은 역사상 가장 예의 바른 저항 운동으로 명성이 높다. ‘레츠테 게네라치온’은 주황색 안전조끼를 입고 도로를 막으며, 운전자들의 폭행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재미난 것은, 이런 극단적인 평화주의로도 우익 정치인들이 “폭력”, “테러리즘”이란 비난을 쏟아내는 것을 막지 못했단 것이다.

 

말름은 자기 책에서 부르주아 사회의 평화주의 신화를 해체한다. 자본가 정치인들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폭력”을 비난하지만, 경찰과 군대 같은 특별한 무장기관의 엄청난 폭력은 정당화한다. 진보적 변화를 향한 운동은 권력과의 폭력적 대결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예컨대 만델라는 수십 년의 옥살이를 금욕적으로 견딘 성자(聖者)로 기억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맞서 폭탄 테러를 감행한 무장조직 ‘움콘토 위 시즈웨’의 수장이었다. 지금은 만델라를 평화주의의 상징으로 떠받드는 전 세계의 정부들은 이전에는 만델라의 “테러리즘”을 비난했다. 만델라 자신도 “나는 비폭력 시위가 효과적인 한에서만 비폭력 시위를 호소했다”고 말했다. 마틴 루터 킹도 마찬가지로 항상 총을 휴대했다. 다수의 유명한 “평화주의자”에게, 비폭력이란 특정한 상황에서의 전술적 선택일 뿐이었다.

 

평화주의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말름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해하려고 산탄총을 들고 모스크에 들어갔던 노르웨이인 나치의 사례를 예로 든다. 세 명의 노인이 범인을 제압했는데, 꼼짝 못 하게 범인을 짓누르고 머리를 가격하면서 그렇게 했다. 진정한 평화주의자라면 나치의 두개골을 멍들게 하는 “폭력”을 거부했을 것이다. 물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량 학살을 막기 위한 작은 대가로써 그런 폭력을 사용하는 데 동의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평화주의에 예외를 두고 있는 셈이다. 말름이 말했듯이, “예외를 인정하는 평화주의자는 ‘정의로운 전쟁론자’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어떤 전쟁이 정당한가를 다루는 군사 윤리학이다. - 옮긴이)

 

마르크스주의자는 결코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폭력이 정치적으로 목표한 것이 무엇인지, 폭력을 압제자가 행한 것인지 피억압자가 행한 것인지에 따라, 모든 폭력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나치 경비병에 맞서 봉기한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이 사용한 폭력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말름이 설득력 있게 주장하듯이, 우리는 기후변화에 대해 달리 생각할 여유가 없다. 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인간을 살해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다. 그런 결과를 막기 위해 어느 정도의 폭력이 정당화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현실적 태도가 절망적 기후위기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다. 조나단 프랜즌 같은 부유한 자유주의자들은 지구의 파괴를 멈추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수용하라고 한다. 적절하게도 말름은 이런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

 

적어도 어떤 이들에게는 싸우는 법을 배우기보다 죽는 법을 배우는 게 더 쉽고, 전투적 저항을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의 종말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게 더 쉽다.

 

비록 상황이 “절망적”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투쟁이다. 냇 터너(1831년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흑인 노예 반란을 이끌었다 – 옮긴이)와 바르샤바 게토 투사 등의 행동도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썼듯이, “모든 것을 잃었다면, 당신은 투쟁해야만 한다!”

 

전시 공산주의

 

그러나 말름이 제안하는 시민 불복종과 태업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 전술이라면, 전략은 무엇인가?

 

<파이프라인을 폭파하는 방법>은 2단계, 즉 폭발물이 터진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로 나아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 출신인 말름은 자기 출신을 모호하게 만든다. 말름은 책에서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와 독일의 좌파 테러리스트 울리케 마인호프(1934~1976, 독일 적군파의 창설자 - 옮긴이)를 인용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후주(後註)로 처리된다. 책에서 그들은 각각 파시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 “서독 칼럼니스트(!)”로 축소된다. (2)

 

말름은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확실히 급진화 돼, 다음 책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붉은 깃발을 휘둘렀다. 책의 부제는 <21세기의 전시 공산주의>이며, 본문은 레닌, 트로츠키, 볼셰비키, 혁명에 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 말름은 특히 흥미로운 비유 하나를 제시한다. 기후재앙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전시(戰時) 동원을 상상하면 통상 우리는 2차 세계대전 때의 미국 전시생산국(WPB)을 떠올린다. (3) 그러나 더 나은 역사적 사례가 있다. 러시아혁명 이후 신생 소비에트연방은 21개 제국주의 국가 군대의 침략을 받았다. 볼셰비키는 노동자계급의 취약한 권력을 방어하기 위해 “전시 공산주의”를 필요로 했다. 볼셰비키는 농민들로부터 곡물을 징발하기 위해 가차 없는 무력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적군(붉은군대, 赤軍)과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반동과 파시즘을 억제하기 위해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향후 불타는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 투쟁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엄청난 희생이 요구될 것이다.

 

말름은 재미난 지적을 한다. ‘트로츠키는 장갑열차를 타고 전방 지역들을 이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열차는 나무 장작, 즉 재생에너지를 연료로 했다. 적군(赤軍)은 친환경적이었다!’ (4)

 

전시 공산주의는 진정한 민중 혁명이 가진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해방시켰다. 1789년 파리에서, 1791년 프르토프랭스에서(카리브해의 프랑스 식민지였던 생도맹그에서 노예제를 폐지하고 아이티 공화국을 세운 혁명을 가리킨다 – 옮긴이), 1917년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1936년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역사가 반복적으로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러시아에서 적군(赤軍)은 내전에서 승리했는데, 이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 농민이 그들 자신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기 때문이다. 노동자, 농민은 농장과 공장, 그리고 국가권력을 장악했으며, 자신들이 쟁취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했다. 이것이 전 세계 생산 시스템에 급진적이고 즉각적인 변화를 도입하는 데 필요한 혁명적 동원(動員)이다.

 

말름의 “전시 공산주의” 기획에는 삼림벌채 중단, 운송수단의 탄소 배출 감축, 석유 재벌에 대한 몰수와 같은 일련의 “매우 엄격한 제한과 중단”이 포함돼 있다. 화석연료 자본이 전체 사회의 통제를 받게 되면, 국가는 화석연료 추출을 중단시킬 뿐 아니라 대기 중 탄소를 제거하기 위해 새로 확보한 자원을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말름의 “생태적 레닌주의”는 한계적이다. 사실 말름의 “생태적 레닌주의”는 사민주의에 대한 향수로 잘 알려진 <자코뱅>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레닌주의다.

 

말름은 레닌주의란 용어를 규율 있는 정치적 운동이란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자면, 예수회, 사이언톨로지스트, 일본 제국주의 군대 등 수많은 운동이 하나의 대의를 위해 헌신해 왔다. 레닌주의란 노동자계급이 자본가 국가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 정부를 건설한다는 특정한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규율에 관한 것이다.

 

레닌주의와 국가

 

레닌 최고의 저작은 1917년 혁명 도중의 짧은 소강기에 쓰였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국가가 사회의 중립적 관리자가 아니라는 점을 해명했다. 국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다. 자본가 국가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수호하며, 노동자계급과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가장 민주적인 공화국조차 부르주아 독재 체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자계급이 처음으로 정치권력을 획득한 1871년 파리 코뮌의 사례를 연구했고, 노동자계급이 단순히 기존 국가 기구를 장악하는 데 그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대신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 국가를 분쇄하고, 이를 노동자 평의회와 같은 자주적 조직체에 기반한 프롤레타리아 국가로 대체해야만 한다. 레닌은 노동자 국가가 단지 반쪽의 국가라고 덧붙였다. 코뮌 유형의 국가는 사회의 절대 다수에 기반해 있으며, 그 목적이 이전의 자본가들에 맞서 노동자권력을 수호하는 데 있다. 따라서 관료 기구적 방식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노동자들은 점차 스스로 모든 행정업무를 처리하게 될 것이며, 모든 형태의 국가는 불필요해지고 사멸할 것이다. (5)

 

말름은 레닌의 주장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기후재앙을 멈추자면 인류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할 때 자본가 국가 스스로 “본질적 무능”을 드러냈다고 말름은 지적한다. 자본가 국가의 유일한 목표는 부르주아가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구와 모든 사람이 불타는 것을 뜻할지라도 말이다.

 

또한 말름은 특히 종말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 국가권력이 하루아침에 폐지될 수 있다고 보는 무정부주의자의 환상을 거부한다. 말름은 “실제적 전환에 어느 정도의 강압적 권력이 요구된다는 것은 언제나 진실로 드러난다.”고 썼다. 말름은 레닌의 주장을 동의하며 인용한다. “우리는 (특정한 이행기에) 국가가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를 무정부주의자와 구별하는 지점이다.”

 

이 정도는 진지한 사회주의자들 모두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 권력을, 경찰이나 감옥과 같이 자본가들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기구를 분쇄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폭력이며,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맞서 폭력을 체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노동자 국가다.

 

그러나 말름은 레닌을 인용하면서 자기 생각에 맞추기 위해 다음 문장을 누락한다.

 

우리는 국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부르주아가 필요로 하는 국가, 즉 경찰력, 군대, 관료제(관료집단)와 같은 정부 기구가 인민에게서 분리되어 인민을 억압하는 국가는 아니다. 모든 부르주아 혁명은 단지 그러한 국가 기구를 완성했을 뿐이며, 그것을 한 정당의 손에서 다른 정당의 손으로 옮겼을 뿐이다.

 

반면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재 혁명의 성과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평화, 빵,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가 기구,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성(旣成)”의 국가 기구를 분쇄하고, 경찰력, 군대, 관료제가 무장한 전체 인민과 통합된 새로운 국가로 대체해야만 한다.

 

그렇다. 지구 온난화 시대에 인류 생존을 위한 투쟁에는, 수십억 명이 자본가 권력의 마지막 흔적까지 파괴하기 위해 조직되는 이런 종류의 혁명적 동원이 필요하다. 불타오르는 세계에 적응해 나가고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구하기 위해, 인류의 전체 생산수단을 민주적 통제 아래 두어야만 한다.

 

그러나 말름의 “레닌주의”는 국가를 분쇄한다는 사상을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말름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방금 자본가 국가가 이런 조치들을 취해나가는 데서 본질적 무능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비에트에 기반한 노동자 국가는 하룻밤 새 기적적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민주적 기구라는 이중권력은 설령 실현되더라도 조만간 실현될 것 같지 않다.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망상이고 범죄적이므로, 우리가 함께할 것은 늘 자본의 순환에 결박(結縛)돼 있는 음울한 부르주아 국가다. 이를 견디자면 대중적 압력이 가해져야 한다. 이로써 국가 내에 응축된 힘의 균형이 바뀌고, (국가) 기구들이 결박을 풀고 움직이기 시작하도록 강제될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이 국가를 파괴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고전적 강령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그 강령은 레닌주의가 자신의 사망 기사를 쓰는 데 충분하게(혹은 너무도 충분하게) 보이는 여러 요소 중 하나다.

 

이것은 쓰리 카드 몬테(three-card monte, 세 장의 뒤집힌 카드 중에서 ‘머니 카드’를 찾기 위해 돈을 걸게 하는 속임수 게임 – 옮긴이)와 이치가 같다. 말름은 레닌의 급진적 이미지를 소환하는 걸 즐기지만, “국가의 파괴”는 거부한다. 말름은 자본가 국가에 “전시 공산주의” 수행을 요구하는 동시에, 바로 그 국가가 탄소 배출을 감축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조차 시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말름은 “소비에트에 기반한 노동자 국가”가 “하룻밤 만에 탄생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누구도 하룻밤 만에 노동자 국가를 탄생시키려 작정한 적은 없다. 정반대다. 레닌주의의 핵심 테제는 그러한 국가는 오로지 수많은 노동자의 의식적 노력에 의해서만 건설될 수 있으며, 노동자들의 에너지는 혁명 정당을 통해 집중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레닌주의자들이 투쟁하는 목적이다.

 

다른 한편 말름은 개량주의(“유로코뮤니스트”) 이론가 니코스 풀란차스에 대한 충성을 드러낸다. 비록 그 이름을 각주에서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가를 “전체 부르주아계급의 공동 업무를 관리하는 위원회”라고 주장한 반면, 풀란차스는 국가가 사실 “계급적 힘들의 응축체”라고 반박했다. (6) 다시 말해 풀란차스는 국가 기구가 여러 계급 사이 투쟁의 장이며, 노동자계급은 국가 내부에서 힘의 균형을 바꿀 수 있고 궁극적으로 국가를 장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결국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국가 내부에서 권력을 얻을 수 있다는 오래된 개량주의 이론을 쓸데없이 장황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국가에 대한 이런 관점은 “레닌주의” 이론가 말름을, ‘멸종저항’, ‘엔데 겔란데’, ‘레츠 제너레이션’ 같이 비(非) 사회주의자 활동가들의 운동과 확실하게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다. 이들 모두는 시민 불복종을 통해 국가가 기후재앙에 맞서 비상조치를 시행하도록 강제하려 든다. 말름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면서 대안은 없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걸 역사와 이론이 보여주었다. 결국에 이것은 프랜즌이 주장했던 기후 절망의 “사회주의자” 버전일 뿐이다.

 

폭탄을 든 자유주의자

 

트로츠키가 지적한 대로, 부르주아가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에게 필요한 에너지는, 노동자계급이 정치권력을 잡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크다. (7) 말름은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정반대로 주장한다. 소규모 태업, 자본가 정부가 어떻게든 우리 목표에 복무할 것이라는 환상적 희망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자본가 국가가 불에 기름을 끼얹도록 놔둘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전시 공산주의” 논의의 결말 무렵에서 말름은 레닌주의자보다는 사회민주주의자에게 커다란 지지를 표명한다.

 

2019년에 제레미 코빈이 영국 총리가 되고, 2020년에 버니 샌더스가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만큼 지구에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말름은 브라질 룰라 정부도 마찬가지로 칭찬한다. 말름이 그런 개량주의 정부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보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그보다 말름은 그런 정부가 민중의 압력을 받아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자본주의를 폐지하기를 희망한다. 룰라는 브라질 지도자로 이제 세 번째 임기 중에 있지만 아마존 파괴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한 부르주아 국가가 민중의 압력을 받아 갑자기 반자본주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보는 희망이 바로 말름과 제4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의 동료들이 시리자와 포데모스를 지지하게 된 이유다. 이로써 노동자계급이 얻은 것은 사회주의 대신, 배신과 사기 저하뿐이었다.

 

즉 “레닌주의자” 말름은 <자코뱅>이 지지하는 바로 그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 말름에게 직접 행동의 최종 목적은 탄소 배출 감축에 진지하게 임할 개량주의 정부를 선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백여 년 전에 레닌이 지적했던 것을 다시 확인해 준다. 말름과 같이 “행동에 의한 선전”(propaganda of the deed, 주로 19세기 말 20세기 초 무정부주의자들의 지배계급에 대한 테러를 뜻한다. 이 전술은 1881년 런던 국제 아나키스트 대회에서 승인되었다. - 옮긴이)을 촉구하는 “혁명가들”은 “폭탄을 든 자유주의자”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크리스 마이사노는 <자코뱅>에 기고한 글에서 말름에게 “파이프라인을 폭파하지 말라”는 신랄한 반응을 내놓는다. 부르주아 정부가 그린뉴딜 정책을 시행하도록 하는 게 목표라면, 부르주아적 전술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이를테면 예비선거에서 좌파 후보를 후원하고 의회 의원들에게 로비하는 것들이다. 사회민주주의적 목표는 사회민주주의적 수단을 요구하며, 화려해 보이는 태업 행위는 단지 방해가 될 뿐이다.

 

자본가 국가가 전시 공산주의를 시행하게 한다는 말름의 계획에는 못돼먹은 점도 있다. 1918~21년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은 그들이 쟁취한 권력을 방어하기 위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희생을 요구받았다. 말름은 비슷한 희생을 요구하지만, 권력 없이 희생을 요구한다.

 

말름이 자본가 국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매우 엄격한 제한과 중단”을 요구할 때, 이는 자본가들의 이윤을 보호하면서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을 공격하는 것을 뜻할 뿐이다. 사실 이것은 부르주아 정부가 이미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녹색” 긴축경제란, 부자들은 24시간 내내 개인 제트기를 띄워놓을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기후 보호”라는 명목으로 비행기 이용을 포기하라는 것을 뜻한다.

 

이런 종류의 긴축경제는 전시 공산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제대로 말하면 그건 1차 세계대전 기간 독일 제국의 정책에 더 가깝다. 크리스암트(전쟁청)의 독재 아래 정말 전 사회적 동원이 이뤄졌다. 대중은 전방의 참호에서 웅크려야만 했고, 군수 공장에서 장시간 노동했으며, 순무 배급을 받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했다. 전염병으로 아이들은 파리떼처럼 죽어갔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치인들이 국가적 희생을 분담할 것을 요구하는 동안, 투기꾼들은 샴페인을 마시며 기록적인 이윤을 얻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에서 가장 우파적인 목소리를 냈던 일부는 이러한 국가 경제 관리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단계라고 믿었다. 그들은 이것을 “전쟁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자본가 국가의 일시적 경제 통제는 더 큰 야만을 가능하게 했을 뿐이다.

 

자본가 국가를 옹호하는 말름은 사실 (러시아의) “전시 공산주의”보다는 (독일의) “전쟁 사회주의”에 훨씬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기후 레닌주의란 무엇인가?

 

말름이 정식화한 “생태적 레닌주의”는 놀라울 정도로 온건하다. 말름의 두 책에는 반자본주의적 전망이 빠져있다. 오히려 말름은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태업에 참여하면 기후 행동이 실현된다고 여긴다. 말름이 언급하는 구체적 사례는 SUV (8) 자동차 타이어 바람 빼기, 일시적으로 석탄발전소 점거하기 등이다. 최근에 활동가들이 월마트 상속자 한 명의 호화 요트에 주황색 페인트를 뿌린 것처럼, 의도적으로 거대 자본가를 표적으로 삼기도 한다. 그런 행동에 대해, 심지어 파이프라인을 폭파하는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설령 기후 운동이 파이프라인을 매일 폭파하더라도 화석연료 자본의 기계는 멈추지 않고 돌아갈 것이다.

 

<자코뱅>의 크리스 마이사노 같은 개량주의자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정치권력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옳다. 그러나 크리스 마이사노는 코빈, 샌더스, 룰라가 부르주아 국가를 맡는 것이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뜻한다고 본다. 비록 급진적 전술을 옹호하지만 말름도 여기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진정성 있는 개량주의자가 정부 수반이 되더라도 자본가 국가는 눈앞의 재앙을 다루는 데서 “본질적 무능”의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생태적 레닌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름은 세 가지 정의를 내린다. (1) “징후의 위기를 원인의 위기로 바꾸는 것”, 즉 자본주의가 일으킨 재앙을 변화의 기회로 삼는 것. (2) “속도를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여기는 것”. (3) “국가를 이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모든 기회를 붙잡고, 요구되는 만큼 급격하게 평소의 관행과 단절하며, 재앙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경제 영역을 공공의 직접적 통제 아래로 복속시키는 것.”

 

정확히 이 중 아무것도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말름의 레닌주의는 사회민주주의 개량주의와 거의 비슷하게 들리며, 단지 일정표가 훨씬 빠를 뿐이다. 이건 사실 “잘못된 방법이지만, 더 빠른” 최대출력(Max Power) 방식이다. 반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개량과 혁명이 서로 반대되는 강령이란 점을 지적했다.

 

정치권력 장악 및 사회혁명에 대비(對比)하여 입법 개혁의 방법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같은 목표를 향해 좀 더 평온하고, 고요하고, 느리게 나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목표가 다르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지지하는 대신, 낡은 사회의 표면적 변경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를 기억하고 진정한 기후 레닌주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견해를 추가로 살펴보자.

 

1. 노동자계급 중심성

 

우리는 세계 경제 전체를 급진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회적 주체가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개개의 파이프라인을 폭파하기 위해 몇 달 동안 지하에 숨어있는 활동가들은 절대 대중의 힘을 가질 수 없다. 레닌주의는 노동자계급, 즉 자기 노동력을 판매해 자본주의를 돌아가게 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회를 향한 투쟁을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이란 점을 인식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를 분쇄하기 위해 모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과 동맹으로 연합할 수 있다.

 

적지 않은 기후 활동가들은 노동자계급이 급진적 변혁의 주체라는 점을 거부할 것이다. (“그것은 150년 전 마르크스주의의 교리일 뿐이다!”) 그들은 석탄 광부들을 대표하는 노동조합이 최소한의 기후 행동에도 가장 악랄하게 반대했던 독일 기후운동의 구체적 경험을 지적한다. 이와 비슷하게, 금속노동조합은 문명 전체가 그렇듯이 자신들의 일자리 또한 기후변화로 파괴될 것이란 점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그저 자동차산업 조합원의 일자리만 방어해 왔다.

 

이것은 (제대로 된 - 옮긴이) 조직이 없으면 노동자계급이 자기 잠재력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금 대부분의 노동자조직은 돈 많은 관료들이 운영하고 있다. 이 관료들은 자본가들과 거래함으로써 특권을 누린다. 노동자들은 독립된 정치적 주체로서 투쟁할 때 비로소 세상을 뒤바꿀 자기 힘을 드러내게 된다. 프랑스 그랑퓌 토탈 정유공장 노동자들이 구체적 사례다. 토탈 노동자들은 다국적 기업의 “그린워싱” 행각의 일환으로 해고될 것이란 통보를 받았다. 그 대응으로 토탈 노동자들은 평조합원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들은 원유 정제를 계속하기 위해, 즉 지구를 계속 불태우기 위해 투쟁하지 않았으며, 또한 “녹색 자본주의”의 이름으로 거리로 내몰리는 것도 수용하지 않았다. 토탈 노동자들은 기후 활동가들과 연합하여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해, 그리고 노동자 통제 하의 에너지 산업전환을 위해 투쟁했다. 정유 노동자들이 청정에너지를 위해 투쟁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이것은 노동자 자기조직화의 “마법”과 사회주의 사상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그랑퓌 정유공장은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자기 작업장을 점거하고 자신들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생산을 재조직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노동자들의 사례는 수두룩하다. 그런 사례들은 세계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것, 즉 한 줌 억만장자 기생충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인민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레닌주의는 혁명 정당의 지도를 받는 노동자계급이 세계를 변혁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2. 부르주아 국가를 타도하는 혁명

 

말름은 자본가 국가가 기후 재앙을 해결하는 데서 “본질적 무능”을 드러낸다고 올바르게 주장한다. 위에서 주장했듯이, 레닌은 노동자들이 어떻게 자본가 국가를 파괴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이는 모든 혁명 과정에 등장하는 경향이 있는, 노동자 평의회와 같은 노동자계급 자기 조직화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 오늘날 혁명가들은 노조 관료와 사회운동에 맞서 싸우면서 노동자 자기조직화를 추진해 나가야만 한다.

 

3. 혁명 정당

 

또한 레닌주의는 노동자계급이 결정적 행동을 통해서만 역사적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이를 위해 가장 의식적이고 결연한 투사들로 구성된 정당, 즉 전위 전당이 필요하다. 이 정당은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겠지만, 무게중심은 계급투쟁에 있을 것이다. 레닌주의는 전투적 정당을 건설하고자 한다.

 

4. 비계(飛階)로서의 언론

 

레닌주의는 혁명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비계(飛階)가 혁명적 언론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노동자들은 투쟁의 경험을 공유하고 이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들만의 매체를 만들어야 한다. 한 세기 전에 이것은 신문을 의미했다. 오늘날 혁명적 매체는 모든 기술적 가능성을 활용해야 한다.

 

5. 국제주의

 

레닌주의는 사회주의 변혁이 일국(一國) 차원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기후재앙의 시대에 “일국 사회주의”라는 스탈린주의 사상은 그 어느 때보다 터무니없어졌다. 말름은 모든 자본주의 국민국가가 무기한 존속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반면 레닌은 러시아혁명을 사회주의 세계 공화국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걸음으로 보았을 뿐이다. 레닌주의가 국제적으로 조직돼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간단히 말해 기후 레닌주의란 모든 부르주아 국가의 완전한 파괴를 요구하는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후재앙을 멈추기 위해 유일하게 현실적인 선택이다. 우리가 사회주의를 향한 노동자계급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절망에 맞선 레닌주의

 

지난 몇 년간 기후 운동은 어느 정도 사기 저하를 겪고 있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 전 세계 수백만 젊은이들을 불러일으킨 지 수년이 지났다. 그들은 젊은이들의 절박한 외침에 감동한 자본가 정치인들이 마침내 과학에 귀 기울일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각 정부(政府)는 계속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정부가 민주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즉 절망에 빠지기 쉽다.

 

핵심은 그들이 자본가 국가의 지도자들임을 이해하는 데 있다. 그들의 유일한 임무는 자국 자본가들이 자본을 늘리고 다른 자본가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구가 불타오른다 해도, 이건 정말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자동차, 고속도로, 석탄 공장을 건설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들이 과학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다. 사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나은 과학적 보고를 받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기후재앙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긴급 조치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표현을 따르자면 “소유권의 전제적(專制的) 침해”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어떤 자본가 국가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많은 시민 불복종으로도 그것을 바꿀 수 없으며,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 국가가 적이란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노동자계급이 자본가 국가를 무너뜨릴 수 있고 무너뜨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세계에는 화석연료 자본의 기계를 갑자기 멈출 수 있는 수십억 명의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브레히트를 다시 인용하자면, “당신이 자신의 상황을 이해했다면, 누가 당신을 막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전략이 도출된다. 레닌주의는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를 제공한다.

 

서두에 인용한 1917년 책자에서, 레닌은 “자본가들과의 철저하고 일관된 단절”을 촉구하며 글을 맺는다. 레닌은 유일한 희망이 사회주의 혁명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멸망하느냐, 아니면 [혁명을 향해] 전력으로 나아가느냐. 이것이 역사가 제시한 선택지다.

 

자본가 국가를 타도하느냐, 아니면 우리 모두 불타버릴 것이냐. 이것이 선택지다.

 

후주(後註)

 

1. 말름은 가끔 트로츠키주의자로 언급된다. 말름이 오늘날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우익을 형성하며 개량주의 입장을 가진 제4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의 회원이기 때문이다.

 

2. 말름은 이렇게 썼다. “‘항의(protest)는 나는 이것이 싫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항(resistance)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끝장내는 것이다. 항의는 내가 더 이상 이것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것이다. 저항은 다른 누구도 동의하지 않도록 내가 확실히 하는 것이다.’ 1968년에 한 서독 칼럼니스트는 이렇게 썼다.” 사실 서독 칼럼니스트는 적군파의 창설자인 마인호프다. 말름은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쓴다. “1930년대 초반, 독일이 나치의 권력 장악으로 끝날 비탈길로 미끄러지고 있다는 것이 그 달에 이르러 점점 분명해졌다. ‘얼마나 귀중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잃어버렸는가! 사실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다.’ 가장 집요하게 위험을 경고하고 청중들에게 그 위험과 맞서 싸우는 데 노력을 아끼지 말라고 촉구했던 목소리 중 하나가 외쳤다.” 그 ‘목소리’는 바로 레온 트로츠키다.

 

3. 우리는 <레프트보이스>에서 이런 비유를 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미국 경제는 전시생산국(WPB)의 중앙 계획에 굴복했다. 예컨대 1942년 2월 22일, 미국에서는 모든 자동차 생산이 중단됐다. 대략 하룻밤 사이에 모든 자동차산업 역량은 탱크와 비행기 생산을 위해 전환됐다. 오늘날 민간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화석연료에서 전환하자면 수십 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는 수십 년이란 시간이 없다. 생산은 즉시 사회적 통제 아래 급진적으로 변화돼야 한다.” 로버트 벨라노·나다니엘 플라킨, ‘그린뉴딜은 우리를 구할 수 없다. 계획경제는 가능하다’, <레프트보이스> 4호.

 

4. 안타깝지만, 계속해서 인용될 법한 이 비유가 잘된 것은 아니다. 나무 장작을 태우는 것은 재생 가능하지 않으며, 새로운 나무를 키워 탄소를 회수하는 것은 수십, 수백 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학적 의미에서 이 비유가 여전히 맘에 든다.

 

5. <국가와 혁명>은 훌륭한 저작이다. 간결하고 읽기에 어렵지 않다. 아직 못 보았다면 꼭 읽어보라!

 

6. 풀란차스는 국가를 “계급과 계급 분파 사이 힘의 관계가 물질적으로 응축된 것”으로 보았다. 독일어로 된, 풀란차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비판은 스테판 슈나이더가 <계급 대 계급>에 쓴 ‘국가를 파괴할 것인가, 강화할 것인가?’를 보라.

 

7. 1848년 혁명에 대해 쓴 글에서 트로츠키는 부르주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이탈자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도록 강제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쪽에서 임시 노동자정부를 세우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와 성숙함이 필요했을 것이다.”

 

8. 이것은 SUV 자동차를 오로지 부유층만 보유했던 2007년 스웨덴에서 취했던 행동이다. SUV 자동차가 널리 보급된 오늘날 미국에서 이런 일을 벌이면, 주로 노동자계급에게 영향을 미친다.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