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여성파업 2] 스페인 - 2018년과 2019년, 여성파업이 스페인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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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세계의 여성파업 2] 스페인 - 2018년과 2019년, 여성파업이 스페인을 뒤흔들었다

  • 오연홍
  • 등록 2023.12.28 11:41
  • 조회수 516

[편집자 주]

지난 12월 6일 열린 “여성파업 첫발떼기 토론회”를 비롯해, 2024년 3월 8일 여성파업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이 여성파업 조직위원회 주도 아래 진행되고 있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은 노동자계급의 여성해방 운동을 건설하기 위한 여성파업 시도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이 운동의 현황과 과제, 전망을 짚어 보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의 여성파업 사례를 돌아보고자 한다. 1975년 아이슬란드 여성파업에서 시작해 지난 십수 년 사이에 폴란드, 스페인, 아일랜드, 스위스, 아르헨티나 등 곳곳에서 여성파업이 일어났다. 각각의 사례는 그 자체로 세계 여성 노동자의 현실과 투쟁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넓혀 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여성파업의 양상과 결과, 다양한 쟁점을 훑어보면 우리의 과제에 대한 인식도 더 풍부하게 채워 갈 수 있을 것이다.

 

거리를 가득 메운 2018년 여성파업 참가자들(사진_Lluis Gene)

 

누군가 주먹을 치켜들고 소리 높여 외친다. “우리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 이 함성을 들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떠올릴까? “허무맹랑한 소리!”, “농담이 심하군, 당신들이 그런다고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러나 여기, 그 농담 같은 얘기를 현실로 일궈 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2018년 3월 8일 스페인으로 간다.

 

스페인을 뒤흔든 2018년 3월 8일 여성파업

 

우리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 2018년 3월 8일 스페인 여성파업은 이 구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실상부하게 증명했다. 전국 120여 개 도시에서 무려 530만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다수 노동조합이 2시간 파업으로 여성파업에 동참했고, 조직 규모는 작지만 더 활력 있는 일부 노동조합은 24시간 파업을 벌였다.

 

이 파업으로 300여 편의 열차 운행이 취소됐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이날 출퇴근 피크타임에 교통 부문 전체 운행의 절반가량이 중단됐다. 교육 현장에서도 파업 참여가 두드러졌다. 카탈루냐에서는 사실상 모든 고등학교와 대학교 노동자들이 2시간 파업을 벌였고, 중학교 교사들의 20%가 24시간 파업을 했다. 발렌시아에서는 모든 교사 노동조합의 50%가 파업에 참여했다. 학생들도 동맹휴업에 나섰다. 안달루시아 대학생의 90%, 수도인 마드리드에서는 고등학교 여학생의 90%, 대학교 여학생의 65%가 파업에 동조하며 시위에 합류했다(이 글에서 소개한 스페인 여성파업 참가 규모와 양상은 주로 이 기사를 참조했다).

 

의료 부문의 경우, 카탈루냐와 발렌시아에서는 80%, 안달루시아에서는 대략 70%의 병원 노동자들이 여성파업에 함께했다. 언론사 노동자, 공장 노동자, 마트 노동자, 청소 노동자, 콜센터 노동자들도 거리로 나왔다.

 

여성파업 참가자들은 얌전하게 행사를 치르고 귀가하는 식으로 이날을 보내지 않았다. 평화적이고 쾌활하며 힘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도, 카탈루냐에서는 주요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도로봉쇄 시위가 벌어졌다.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시위는 거리와 광장을 점거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철도를 막아선 노동자들(사진_Left Voice)

 

곳곳에서 도로도 봉쇄됐다.(사진_X_Endavant València)

 

정부와 자본가들의 여성혐오, 노조혐오 공세가 판을 치는 지금 이곳 한국의 분위기와는 달리, 스페인 일간지 《엘파이스(El Pais)》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2%가 여성 차별을 깨부수기 위한 여성파업이 정당하다고 답변했다. 2018년 3월 8일 스페인 여성파업은 성별 임금 격차, 직장 내 성차별, 가정과 거리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을 규탄했다.

 

여성파업을 조직하는 데 앞장선 3.8위원회가 발표한 여성파업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우리의 목표는 고전적인 노동자 파업을 조직하는 게 아니라 그걸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여성이 수행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모든 업무와 활동을 다양한 모든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중단하려 한다. (중략) 오늘 우리는 성차별적 억압, 착취, 폭력이 없는 사회를 요구한다. (중략) 우리에게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하며 침묵할 것을 요구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동맹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투쟁하자고 호소한다. 우리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순응하지 않을 것이고, 남성과 똑같이 일하고 더 적게 받지도 않을 것이다.”

 

이렇게 530만 명이 일궈 낸 압도적인 여성파업 행진은 2018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2019년, 더 넓게 퍼진 물결

 

1년 뒤인 2019년 3월 8일에도 여성파업이 대규모로 조직됐다. 전국 수많은 도시에 걸쳐 조직된 시위가 1,400여 건에 이르렀다. 여성단체, 노동조합, 좌파 정당 등을 널리 아우르며, 2시간 파업에서 24시간 파업에 이르는 형태로 600만 명이 여성파업에 참여했다. 스페인 여성파업은 두말할 나위 없이 여성 노동자들이 직접 주도한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전체 노동자계급을 이끌고 전진하는 운동으로서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시위대는 “우리는 멈출 수 없다”, “거리는 두려운 곳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나는 남성이 아니라 복스(Vox: 스페인 극우정당) 패거리를 증오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위력적으로 전개된 2018년 여성파업 이후 스페인에서는 안티페미니즘을 내세운 복스 같은 극우세력이 힘을 키워 갔다. 이들은 성폭력을 금지하는 법안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식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는 세력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성파업 시위대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드리드에서 여성파업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런 구호를 외쳤다. “마드리드는 마초 근성의 무덤이 될 것이다!”

 

투쟁의 기본 목표는 2018년과 같았다. 3.8위원회는 “세계 질서와 도처에 만연한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적, 인종차별적, 신자유주의적 헛소리(rhetoric)를 뒤집어엎는 것”이 여성파업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밝혔다.

 

이러한 목표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에는 일정한 스펙트럼이 있다. 한편에서는 여성파업을 ‘소비 총파업’ 같은 것으로 해석할 정도로 자본주의에 대한 느슨한 시각이 묻어나기도 한다. 이와 달리 전국노동자연합(CNT)의 경우 “자본주의를 폐지하고자 한다면, 우리 투쟁을 세계로 확산해야 한다”며 반자본주의 계급투쟁 관점을 표출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페미니즘이 여성들만의 투쟁을 넘어 확대되면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차별받는 여성과 트랜스젠더를 엄호하고 가부장제와 모든 노동자의 불안정한 삶을 끝장내기 위한 계급투쟁이다.”

 

이런 색조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들이 대규모 파업과 시위의 중심에 서서 이 운동의 전체적인 성격을 결정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야말로 스페인 여성파업이 다른 나라 여성파업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다. 하지만 노동조합 운동 내에서도 역시 색조 차이가 감출 수 없이 드러났다.

 

노조 관료들의 수동성과 기층 분위기

 

스페인 양대 노총(CCOO, UGT)은 3.8 여성파업 당일 오전과 오후 근무조가 각각 2시간 파업을 벌이는 것으로 방침을 세웠다. 스페인 노동조합 중 이들의 규모가 가장 크기 때문에, 마치 2시간 파업이 스페인 여성파업의 기본 방침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여성파업을 오랫동안 준비하고 주도해 온 활동가들의 입장에서는 경멸할 만한 일이라고 한다.

 

노동조합 운동의 역사가 깊은 스페인에서는 노동조합 관료집단도 두텁게 자리를 잡고 있다. 노동자계급 상층부에 주요 관심사와 기반을 두면서, 상대적으로 취약하고 불안정한 처지에 있는 여성과 청년이 겪는 차별과 고통에 무관심한 게 노조 관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1) 이런 특성은 여성파업을 조직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노동조합 지도부들은 기본적으로 여성파업이 성공적이지 못할 거라는 분위기에 젖은 채 시큰둥한 태도를 취했다. 심지어 이들 지도부 안에 오랜 운동 경력을 지닌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있었는데도 그 모양이었다.

1) 트로츠키, “이행강령”, 1938. 여기서 트로츠키는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임금 노동자이자 주부인 여성에게 가장 큰 타격을 가한다고 말한다.

 

2018~2019년의 경험이 명백하게 보여 주듯이, 노조 관료들의 태도는 완전히 틀렸다. 그들은 단지 아래로부터 조직된 여성파업 운동의 열기에 떠밀려 수동적으로 2시간 파업이라는 면피용 방침을 내놨을 뿐이다. 2018년에 여성파업에 참가한 한 마드리드 노동자는 이런 평가를 내렸다. “노동총동맹(CGT), 전국노동자연합(CNT), 평조합원위원회(Co.Bas) 등이 쟁의권을 얻어 줘서 우리가 24시간 파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줬다. 양대 노총(UGT, CCOO)의 2시간 파업은 우리가 원한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작년보다는 나은 거라고 본다. 작년엔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이 발언은 노조 관료들의 수동성과 대조되는 기층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잘 보여 준다. 스페인 노동조합 운동 내의 전투적인 소수파 노조들은 적극적으로 24시간 파업을 제기했다. 24시간 파업 주장은 노동자계급 내의 다른 부위보다 여성이 다수인 사업장들에서 빠르게 확산됐다. 정부의 긴축 정책으로 예산 삭감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희생을 감내하며 공공의료와 교육을 지탱해 온 여성 노동자들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카탈루냐 교사 노조가 대표적이다. 경제위기와 함께 임시직이 늘어나면서 고용이 불안정해졌고, 이는 가장 열악한 임금을 받는 민간 부문 여성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주 여성 노동자가 다수인 호텔 청소 노동자들이 그 대표 사례다.

 

달리 말하면, 이 시기 스페인에서 여성파업이 대대적인 운동으로 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럴 만한 경제적, 사회적 배경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1,000유로 세대에서 700유로 세대로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전까지 스페인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당시 유럽 평균인 1~1.5%를 웃돌았다. 하지만 2007년에 3.6%였던 스페인의 성장률은 2008년에 0.8%로 추락했고, 2009년에는 –3.6%로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와 나란히 실업률은 2008년 11%, 2009년 18%, 이후 20~25% 이상으로 치솟았다.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듯이 스페인에서도 청년실업률은 훨씬 높게 나타난다.

 

2008년 이전의 호황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건설 산업을 중심으로 부동산 붐을 일으키면서 부동산 거품이 부풀어 올랐다. 그 이면에서 무역수지 적자는 누적되고 외채 의존도가 늘어났는데, 이는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같은 외부 충격 앞에 스페인 경제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위기 이전의 표면적인 호황기에도 젊은 세대는 주로 비정규직 일자리로 내몰렸고, 이미 전체 일자리의 3분의 1이 비정규직으로 채워졌다. 이들은 생활 조건의 하락을 피할 수 없었다. 2005년경부터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 남유럽 나라를 중심으로 ‘1,000유로 세대’라는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1,000유로는 원화로 환율에 따라 120~150만 원가량 되는데, 이는 그 정도의 저임금으로 한 달을 살아 내야 하는 젊은 세대 노동자의 열악한 처지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2008년 무렵이 되자 이를 대신해 ‘700유로 세대’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이들로서는 부동산 거품으로 조성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주택 가격을 보며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경제위기가 가시화하는 국면이 닥치자 비정규직부터 해고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경제위기에 대처한다는 명분으로 노동개악을 추진했고, 한층 더 불안정한 단시간 시간제 근무를 늘렸다. 이제 부동산 거품이 터지며 집값은 폭락하고, 대출 이자는 폭증하며, 해고는 더 늘어나고, 회사는 해고 비용마저 절감하기 위해 퇴직금을 삭감하면서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리고 질문이 이어진다. 이렇게 경제위기라는 바윗덩어리가 노동자계급 전체를 짓누를 때, 그 하중과 고통이 누구에게 더 크게 전가될까?

 

여성 노동자의 상태

 

노동자계급 내에서 여성의 상대적 저임금은 하나의 보편적 법칙처럼 자리 잡았다. 스페인에서도 이 점은 예외가 아니다. 스페인의 성별 임금 격차는 한국은 물론 OECD 평균보다도 현저히 작은 편인데(여성파업 당시인 2018년 기준 한국 34.1%, OECD 평균 13%, 스페인 8.6%), 그럼에도 전 연령대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다. 연간 성별 임금 격차가 3,000유로에서 10,000유로까지 발생한다. 이는 한화로 대략 400~1,400만 원에 이른다.

 

성별 임금 격차는 연금 격차로 이어진다. 남성은 은퇴 후 월평균 1,200유로의 연금을 받지만, 여성은 760유로를 받는 데 그친다.

 

가사와 돌봄 노동에도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이 종사한다. 육아, 요리, 청소, 그 밖의 집안일과 돌봄 등 무급 가사노동에 여성은 주당 평균 26.5시간을 사용하고, 남성은 14시간을 투여한다. 스페인국립통계청(INE)은 하루평균 남성은 2시간, 여성은 4시간을 무급 가사 노동에 사용한다는 통계를 내놨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래 임금 삭감, 해고 등의 타격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집중됐다. 그 비정규직의 다수가 여성이다. 임금을 비롯한 노동조건 격차가 뻔히 보이지만, 생계를 해결하려면 불이익을 감수하며 비정규직으로라도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여성이 겪는 성폭력과 그에 따른 사망 사건도 끊이지 않았다. 스페인 정부는 2018년 통계를 발표하면서, 2003년 이래 972명의 여성이 배우자 또는 전 배우자에게 살해됐다고 밝혔다. 2021년에 그 수치는 1,125명으로 늘어났다. 정부는 2022년 1월부터 모든 유형의 여성 살해 사건을 공식적으로 집계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 여성 살해 반대 시위에 나선 스페인 여성들(사진_AFP)

 

이와 같은 여성 살해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일어나는 폭력,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성적 괴롭힘, 여성의 빈곤화와 노동의 불안정화가 스페인 여성 노동자의 삶을 옥죄고 있었다. 이 현실에 더 이상 순응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여성 노동자들이 성별 임금 격차와 여성을 겨냥한 폭력에 맞서 파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준비 과정

 

40년 가까이 장기집권하며 독재체제를 유지해 온 프랑코가 사망한 뒤, 민주화를 거치면서 1978년 전국페미니스트단체연합이 결성됐다. 이 연합은 ‘페미니스트조정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고 한다.

 

이 연합이 스페인에서 3.8 여성파업을 주도적으로 조직했다. 지역마다 공동 활동을 위한 조정그룹들이 만들어져 함께 토론하며 여성파업 선언에 포함할 요구를 결정하고, 파업 참가자들을 조직했다. 3월 8일이 되기 전부터 다양한 전국 집회와 지역 집회, 총회, 실행위원회 구성, 집담회, 시위, 여러 시설, 현장, 지역에서 여성파업 계획을 알리는 피켓팅 등의 활동이 이어졌다.

 

아래로부터 자주적인 조직화 활동이 폭넓게 펼쳐지고 공감대를 넓혀가자, 마침내 노동조합들이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스페인 여성파업은 상징적으로 파업이라는 이름을 내건 시위나 ‘소비 총파업’을 넘어 생산에 직접 타격을 가하는, 다시 말해 착취 구조를 마비시키는 실질적인 파업으로 나아가게 됐다. 여성 노동자들을 옭아매는 ‘이중의 굴레’ 중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그 전체에 대항하는 운동으로 발돋움하는 순간이었다.

스페인 여성파업은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규탄하는 구호로 가득 채워졌다. “페미니즘 없이 혁명은 없다”, “가부장제와 자본에 맞서 다양성을 인정하며 단결하자”, “우리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파업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범죄 동맹”, “우리는 너희가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이다!”

 

2011년 광장점거 운동이 남긴 경험

 

스페인 여성파업이 대대적인 규모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경제적, 사회적 배경과 나란히, 대중운동 차원에서 축적된 정치적 경험도 여성파업의 폭발적 진출에 영향을 미쳤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투쟁을 낳았다. 스페인에서는 2011년에 인디그나도스(Indignados), 즉 ‘분노한 사람들’이라고 불린 광장점거 운동이 일어났다. 수도 마드리드의 푸에르테델솔 광장에 수만 명이 모여 천막을 치고, 경제위기의 대가를 노동자 민중에게 떠넘기는 긴축 정책에 대항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이 투쟁은 곧 수백만 명의 시위로 번져 나갔다.

 

경제가 호황이든 위기 상황이든 언제나 상대적인 차별과 박탈감과 폭력에 노출돼 온 여성들도 이 거대한 대중운동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때 수많은 여성의 뇌리에 각인될 수밖에 없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난다. 광장점거 운동에 참여한 일군의 여성들이 긴축 정책에 맞선 투쟁과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연결되기를 바라며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페미니즘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혁명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일부 농성 참가자들이 이 여성들을 비난하며 “나가라, 나가라!” 하고 야유했다. 급기야 수천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누군가 플래카드를 뜯어내 버렸다.

 

광장점거 운동에 등장한 페미니스트 플래카드(사진_IN THESE TIMES)

 

이 운동은 부패한 정치를 규탄하며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운동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이 운동 자체가 민주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뤄지기도 한 셈이다. 광장점거 운동 참가자들의 민주적 권리를 보장하는 핵심 장치인 대중총회에서는 페미니스트의 질문이나 제안을 거부하는 사례도 생겨났다. 예를 들어 “유럽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어떤 성차별 효과를 낳는지” 토론하자는 제안이 있었는데, 이는 “그런 사소한 문제를 토론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반응과 함께 기각됐다. 천막농성이 이뤄지고 있는 광장 안에서는 남성 우월주의적이거나 동성애 혐오적인 분위기도 간혹 보였다. 그래서 일부 여성들이 “밤에는 광장에 머무르기 어렵다”며 떠나는 사례도 있었다.

 

이런 모습 때문에 2011년 스페인 광장점거 운동이 지니는 중대한 진보적 의미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적인 규모의 운동, 이후 포데모스로 수렴되는 ‘좌파’적 흐름이 폭넓게 형성됐지만, 그런 흐름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자동으로 차별받는 여성의 목소리가 온전하게 운동에 반영되지는 않는다는 사실 또한 냉혹하게 드러났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지닌 여성들은 기존 운동에 안주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조직하고 직접 목소리를 내기 위한 전망을 갈구했다. 여성파업이 그 열망에 길을 터줬다. 길을 발견한 여성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이처럼 새롭게 생명력을 얻고 성장하는 운동은 새로운 쟁점과 토론 과제를 던져 준다. 2018년과 2019년에 스페인 사회를 뒤흔든 여성파업 역시 운동의 전진을 위해 해결해야 할 쟁점을 동반하며 추진됐다. 아래에서는 스페인 여성파업이 마주친 몇 가지 쟁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쟁점: 계급을 넘어선 모든 여성의 단결?

 

첫 번째로, 계급 경계선을 넘어 모든 여성의 단결을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쟁점이 있다. 생물학적 여성만의 결집과 운동을 지향하는 일부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여성파업에서도 노동자계급의 단결이라는 관점 대신 여성의 단결이라는 관점을 채택하려 했다. 이런 관점은 이미 적대적인 계급 대립으로 갈라진 냉혹한 현실을 자의적으로 외면한다는 점에서 가망 없는 태도였다. 현장에서 조직된 여성파업으로 이윤에 타격을 입게 될 자본자계급 여성들, 그리고 이들과 친화적인 부유한 중간계급 여성들이 노동자계급 여성과 동맹을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행히 이 쟁점은 빠르게 정리됐다. 인민당(Popular Party), 시민당(Ciudadanos), 복스(Vox) 같은 부르주아 우익 집단의 여성들이 여성파업을 맹비난하는 모습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현실은 계급 이해관계의 충돌을 등한시하는 느슨한 태도를 용납하지 않았다. 자본 친화적이거나 지배계급 정당에 기대려는 경향이 여성운동 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에서, 이 사안은 거듭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쟁점: 남성 노동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여성파업 운동에 남성 노동자들이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쟁점으로 남았다. 남성 노동자도 전면적으로 함께 파업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 여성이 파업하는 동안 필수적인 최소한의 업무를 남성 노동자가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드러내 보일 수 있도록 남성은 나서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 이날만큼은 그간 여성이 가정과 직장에서 해 왔던 업무를 전적으로 남성이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여성파업 운동 일각에서는 여성파업의 목적이 “사회의 작동에 여성이 얼마나 기여하는지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에 남성이 같이 파업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튀어나왔다. 가사, 돌봄 등 여성이 손을 놓은 일을 남성이 대신할 필요가 있으며, 현장에서 여성이 파업할 때 남성이 그 업무를 대신하라는 요구도 제기됐다.

 

여성의 기여를 가시적으로 보여 줘야 한다는 긍정적인 취지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같이 파업하면 안 되며 여성의 일을 남성이 대신 해야 한다는 주장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사실상 남성에게 파업파괴자 역할을 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업을 깨는 행위에 적대감을 느끼는 노동자들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투적으로 24시간 파업을 제기했던 노동조합들은 명시적으로 이런 요청을 거부했으며, 남성 노동자에게 여성파업을 지지하며 동참하자고 호소했다. 실제로 파업 집회와 시위가 벌어지는 곳에는 여성과 더불어 수많은 남성 노동자들이 어깨를 나란히 했다.

 

2019년 6월 14일 여성파업이 조직된 스위스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성별 임금 격차 해소, 노동시간 단축과 직장 내 성차별 폐지 등을 내걸고 여성파업에 돌입했다. “이날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음식을 준비하라고 했지만 남성들도 시위에 동참했다. ‘우리가 서로 지지하지 않으면 미래에 누가 남겠는가?’라고 시위에 참여한 한 남성이 BBC와 인터뷰를 했다.”

 

쟁점: 체제를 유지하는 운동과 그것을 넘어서는 운동

 

여성파업이 대규모 운동으로 조직되면서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과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의 결합이라는 과제가 전면화됐다. 하지만 그 결합이 어떤 정치 전망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가사 노동 임금제나 소비 총파업 같은 무력한 주장이 다시 모습을 내비치는가 하면, 좀 더 좌파적인 입장으로는 “새로운 여성운동은 99%를 위한 페미니즘이어야 한다”, “99%를 위한 기층의 반자본주의적 여성주의를 건설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그 ‘99% 페미니즘’이 내건 반자본주의는 실체가 모호했다. 전면적인 여성해방 정책을 실행할 노동자 정부 수립과 사회주의라는 전망을 명시적으로 제출하는 흐름은 소수에 그쳤다. 최근 몇 년간 크게 확산한 기후정의 운동에서 ‘체제 전환’ 같은 구호가 두드러졌지만, 아직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혁명적 사회주의 지향으로 발돋움하지는 못하는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혁명적, 계급투쟁적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스페인 빵과장미 시위대(사진_Izquierda Diario.es)

 

혁명적이고 사회주의적이며 계급투쟁적인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스페인 활동가들은 모든 억압을 끝장내기 위해 가부장제에 맞선 투쟁과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을 분리하지 않고 그 둘 모두에 도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파업 전망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여성들의 개인적인 라이프 스타일 변화, 문화의 변화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이 체제를 뒤흔들기 위해 자본가들의 이윤을 직접 침해하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남성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다투는 게 아니라 남성 노동자 다수를 여성파업 지지 세력으로 끌어당겨야 한다.

 

여성파업이 남긴 결과와 과제

 

2018년 3월 8일 열광적인 여성파업을 경험한 뒤, 산체스 총리는 성평등 문제에 관한 스페인의 역사는 2018년 여성파업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며, 자신이 이끄는 사회당 정부는 이 운동을 충실하게 반영한다고 말했다. 물론 이는 위선에 불과하다. 사회당 정부는 경제위기 앞에 긴축 정책을 강행하며 노동자 민중에게 고통을 전가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산체스 총리의 발언은 여성파업으로 표출된 계급투쟁의 압력을 어떤 세력도 함부로 거스를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 준다. 여성파업은 실제로 위력을 발휘했다.

 

이후 몇 년간 다양한 ‘개혁’ 조치들이 추진됐다.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강화하는 성 및 생식 건강과 자발적 임신 중지에 관한 법안, 성전환자 성별 정정 간소화 법안, 월 최대 3일의 유급 생리휴가 법안 등이 통과됐다. 2018년에 정부는 ‘페미니스트 내각’을 선포하며 17명의 장관 중 11명을 여성으로 채웠다. 2020년 초 사회당과 포데모스가 함께 구성한 연립정부 내각에서는 5명 더 늘어난 22명의 장관 중 11명이 여성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정부는 무엇보다도 다시 여성파업을 매개해 계급투쟁이 올라오는 것을 막으려 했다.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확산하자, 이를 빌미로 집회와 시위를 금지했다. 스페인 일간지 《엘파이스(El Pais)》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시장과 다수의 관중이 몰린 축구 경기장, 지하철 인파는 내버려 둔 채 오직 여성 집회만 통제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2020년에는 3.8 여성의 날 집회 때문에 코로나19 감염자가 폭증했다며 비난을 쏟아 낸 반면, 그보다 앞서 열린 우익 집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당시 한국의 문재인 정부가 ‘노동 존중 정부’를 자처하면서도 코로나19를 핑계로 노동자 투쟁만 콕 집어 억압했던 것을 빼닮았다. 내각에 다수의 여성이 기용된 것도 ‘페미니스트 정부’라는 포장지를 두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기층 노동자 민중 여성의 삶을 직접 개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CEO의 얼굴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더라도 착취는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한계에도, 수백만 대중이 참가한 여성파업이 스페인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고, 여전히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스페인 여성파업은 성차별을 깨기 위해 성별을 넘어 단결한 노동자계급의 힘과 가능성을 입증했다. 이제 스페인 여성 노동자들은 지난 여성파업의 성과를 지키고 더 많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더 나아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범죄 동맹’을 타도하기 위해 또다시 힘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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